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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한편, 이곳은 나마란 시내의 공회당(public hall).

원래는 시민들의 공공 모임이나 집회, 강연 등을 위해 개방되어 자유롭게 쓰이는 백작가 소유의 공공 건축물이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공회당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북적였더랬다.

지역 미술가들의 다양한 작품이 전시되었다.

많은 시민들이 전시회를 즐기기 위해 모였다.

그들의 웃음과 감탄, 훈훈한 양보와 일상의 담소가 오가고 있었다.

불과 30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의 광경은 분명 그러했다.

"그래서 인생이 아이러니하다는 것이지. 사람 사는 거, 한 치 앞도 모르는 거니까. 그렇지 않나?"

칸나바로가 싱긋 웃었다.

나마란의 유명인사이자 자상한 자선사업가.

덕분에 모든 시민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인물.

평소 그는 언제나 웃음 띤 얼굴인 걸로 유명했다.

어떠한 나쁜 일이 있어도 결코 미소를 잃지 않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웃음.

사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소탈한 미소.

그런 웃음은 그의 상징과도 같았다.

오늘 또한 그러했다.

약 30분 전에 그가 공회당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대부분의 시민들이 그를 향해 활짝 웃었다.

바쁘신 와중에도 전시회에 와 주셨다고.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고 기쁘다고.

시민들의 활짝 밝아진 얼굴 앞에 그도 흐뭇한 미소로 응수했더랬다.

그리고 나마란의 장벽이 발동되었다.

"사람 인생이 아니라 속마음도 그래. 다들 날 자선사업가로 여겨왔지. 존경한다고 말해왔지. 한데 모두가 그랬을까? 아닐걸. 재수 없는 놈이 제 잘난 맛에 돈 뿌리고 다니는 거라며 욕하는 놈도 있었겠지. 속마음으론 그러면서도 눈앞에선 살금살금 웃었겠지. 혹시나 떡고물이 떨어지지 않을까. 뭐, 이해해. 원래 사람이라는 게 다 그런 거니까."

칸나바로의 인자하던 미소가 비틀렸다.

한쪽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갔다.

그런 그의 시선은 전시회장 바닥에 쓰러진 어느 사내를 향하고 있었다.

삼십 대 초반의 건장한 사내.

나마란 백작 휘하의 어느 기사였다.

"끄으... 읍...!"

주위의 다른 시민들과는 달리 기사는 아직 기절하지 않은 채였다.

몸에서 대량으로 빠져나가는 마나 때문에 경련하면서도, 흐려지는 의식을 붙잡고서 악착같이 버티고 있었다.

이유는 단 하나.

품에 안은 어린 딸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 때문이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요!"

기사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쥐어짜듯 물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생긴 건지.

자신의 몸에서 마나가 급속도로 빠져나가는 이유가 뭔지.

주위의 사람들도, 자신도, 품속의 딸도 이렇게 허망하게 죽게 되는 건지.

자신은 휴일을 즐기고 있었을 뿐인데.

모처럼 딸과 함께 나들이를 나왔을 뿐인데.

어째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 건지.

정녕 딸을 지켜낼 방법이 없는 건지.

이해 불가의 상황 앞에 억울함과 두려움이 몰려왔다.

게다가 눈앞의 칸나바로 씨는 어떠한가.

이 미증유의 사태 속에서도 혼자 멀쩡한 모습이었다.

아니, 주위 사람들을 도와줄 생각은커녕 이 상황을 즐기는 듯했다.

그 모습이 더욱 소름 끼치고 두려웠다.

"왜 이러는 거긴."

칸나바로의 얇은 입술이 피식.

"제물은 제물답게 조용히 사라지면 되는 거야."

"무슨...."

 

쿠작!

 

칸나바로의 발이 기사의 머리를 걷어찼다.

간신히 버티던 기사가 단박에 혼절했다.

한때는 자선사업가.

그러나 이제는 검은 속내를 드러낸 흑마법사.

칸나바로가 콧노래를 부르며 걸음을 옮겼다.

쓰러진 사람들을 밟거나 쓰레기 치우듯 발로 슥 밀어대며 걸어갔다. 공회당 전시회장 한쪽, 가장 큰 조각상이 세워진 단상을 향해서였다.

"하."

조각상을 본 칸나바로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천사의 추락이라."

날개 잃고 추락한 천사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런데 고개만은 빳빳하게 하늘을 향해 치켜들고 있었다.

눈빛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날개를 앗아간 이를 원망하듯.

혹은 응어리진 가슴 속 복수를 다짐하듯.

음울하고도 독기 서린 눈길로 하늘을 쏘아보는 타락 천사의 모습이라니.

"오늘의 거사에 참으로 어울리는 작품이로구나."

더욱 흐뭇해진 웃음이 나왔다.

그 입가로 손을 가져갔다.

으득, 깨물었다.

찢겨 선혈이 흘러나오는 손가락.

그 손으로 타락천사의 전신을 매만졌다.

온갖 기묘한 문양을 곳곳에 새겨넣었다.

그동안 칸나바로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이제 헬나이트를 불러내기 위한 준비가 다 끝났다.

남은 것은 기다림뿐.

'자정까지만 기다리면 돼.'

그 정도면 마나가 충분히 모일 것이다.

마침내 지옥의 기사가 이 땅에 강림할 것이다.

이 왕국을 생지옥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그렇듯 칸나바로가 감개무량함을 느끼던 무렵이었다.

"으으윽...!"

뒤쪽에서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칸나바로는 저도 모르게 그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뜻밖의 광경을 눈에 담아야 했다.

"칸나바로... 당신, 미친 거요?"

아까 기절했던 기사가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여전히 온몸으로 딸을 지키려 부둥켜안은 채, 힘겹게 눈을 뜨고서 이쪽을 원망스레 쏘아보고 있었다.

"허."

칸나바로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어떻게 된 일이지?'

한 번 기절시킨 놈이 다시 정신을 차리다니.

평소였다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지금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장벽이 발동된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저놈, 아까야 마나하트를 이용해서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기절한 후에는 그러지 못했을 텐데. 그대로 대책 없이 마나를 흡수당해 영영 못 깨어나야 할 텐데. 그런데 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칸나바로는 망설이거나 머뭇거리지 않았다.

다시 깨어났다면 또다시 짓밟아 기절시키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가 기사를 향해 걸음을 돌릴 때였다.

"끄으윽...!"

"엄마... 엄마...."

사방에서 신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공회당 곳곳에 쓰러져 있던 시민들이었다.

힘겹게 중얼거리며, 간신히 꿈틀거리며, 제각각 눈을 뜨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혼란과 고통에 휩싸인 눈길로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들고 있었다.

'무슨 이런?'

칸나바로의 미소가 흔들렸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제는 마나하트를 지닌 기사가 아닌 일반인들까지 하나씩 정신을 차리다니?

'이게 가능한 건가?'

아니면, 장벽에 뭔가 문제가 생긴 건가.

칸나바로는 철렁하는 기분으로 몸을 돌렸다.

이건 뭔가 잘못됐다.

마나를 흡수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정신을 차린다니.

장벽 안에서 멀쩡할 수 있는 이는 오직 자신뿐이다.

자신은 녹타니움의 가호를 받았으니까.

장벽의 저주로부터 예외를 약속받았으니까.

'그런데 왜? 어째서?'

저 버러지 같은 평범한 놈들이 하나씩 정신을 차리고 있다는 말인가.

감히 자신을 향해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낸단 말인가.

'확인을!'

다급해졌다.

공회당 밖으로 달려나갔다. 장벽부터 확인했다. 그 순간 두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장벽이...."

바뀌어 있었다.

검은빛에 가까운 보라색이어야 할 텐데.

한데 지금은 아니었다.

오색으로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공회당 주변 대로에 쓰러져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정신을 차리는 게 보였다.

"...."

이젠 분명해졌다.

장벽에 확실히 문제가 생겼다.

시민들을 향한 마나 흡수가 중단되었다.

절망적인 깨달음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곳곳에서 힘겹게 눈을 뜨는 사람들 사이로.

이쪽을 향해 곧은 걸음으로 걸어오는 은발의 남자가 보였다.

 

스르릉.

 

이쪽의 얼굴을 보자마자 말없이 검을 뽑아드는 은발의 사내, 하비엘 아스라한.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칸나바로는 까닭 모를 얼음장 같은 공포를 느꼈다.

처음으로, 그의 웃음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73화. 철혈 대 지옥 (1)

 

 

로이드 님은 대체 어디에 있을까.

오늘 하루, 하비엘이 가장 많이 떠올린 의문이었다.

정확히는 지난 20분가량의 시간 동안 가장 간절하게 되뇐 의문이기도 했다.

로이드를 찾고 싶었다.

한데 찾을 수 없었다.

나마란 백작의 저택에서부터였다.

귀빈용 숙소를 나와 광장을, 대로를 내달렸다.

살피지 않은 골목이 없었고 열어보지 않은 문이 없었다.

목이 쉬도록 외쳤다.

그러나 로이드의 대답은 없었다.

돌아오는 것이라고는 쓰러진 시민들의 절박한 신음뿐.

그럴수록 마음이 점점 급해졌던가.

눈앞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지나쳐야 하는 상황 때문에.

조금이라도 빨리 로이드를 찾아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바빠지는 발길만큼 심장도 절박하게 내달렸더랬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이었다.

마나가 모이는 곳이 느껴졌다.

불길하게 도시를 에워싼 장벽.

그 장벽으로 흡수된 마나가 한 장소로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다.

내달렸다.

어쩌면 이곳에 로이드가 있을 거라고.

희망을 품고서 달려왔다.

도착했고, 마주쳤다.

"...."

칸나바로.

이 사태의 원흉.

그를 먼발치에서 발견한 순간, 하비엘이 검을 뽑았다.

 

스릉!

 

소드마스터의 손에 들린 검이 시리게 번득였다.

그 순간 칸나바로의 눈동자에도 경악이 서렸다.

'저놈은 어떻게 멀쩡한 거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 먼발치에 나타난 은발의 기사.

그와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부터였다.

심장이 불길하게 요동쳤다.

본능이 외쳤다.

위험하다고.

'지금이야 장벽이 뭔가 이상해졌다지만, 그래서 마나 흡수가 중단되었다지만... 그래도 조금 전까지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는데. 그럼 저놈도 장벽에 마나를 모조리 빼앗겼을 텐데?'

그런데 멀쩡히 서 있었다.

바쁘게 달려온 듯 숨을 살짝 가쁘게 내쉬며.

형형하게 빛나는 눈으로 그보다 더욱 빛나는 검을 뽑아들고 있었다.

저거, 위험한 놈이다.

그걸 깨달은 순간.

하비엘과 눈이 마주치고 약 1초가 지난 순간.

칸나바로의 손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흡!"

손가락과 손바닥이 교차했다.

빠르게 얽히고 풀어졌다.

일정한 규칙과 배열에 따라 마나를 엮고, 조립하고, 비틀었다가, 떨쳐냈다.

그리고 열어젖혔다.

 

후우우욱!

 

그가 뻗은 두 손 앞에서 공간의 문이 열렸다.

어둠 속의 어둠.

어쩌면 다른 차원의 끝자락.

혹은 지옥의 한 자락일지도 모를 공간 속에서 문을 넘어 무언가가 쏘아져 나왔다.

 

촤라라락!

 

열세 가닥의 쇠사슬이 쏘아졌다.

하나하나의 굵기가 아름드리나무 밑동 같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콰드드드드드!

 

사슬이 휩쓸고 지나가는 모든 공간이 부스러졌다.

힘에 의해서?

아니었다.

순식간에 썩고, 부패했다.

마치 시간을 수천 배 빠르게 돌린 듯한 광경이었다.

사슬이 닿기만 해도 모든 것이 순식간에 낡았다. 부식되었다. 부스러졌다. 허물어졌다.

바닥의 포석도, 흙과 마차도, 어느 것 하나 예외가 없었다.

그러나 하비엘은 눈꺼풀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

별것 아니다.

쇄도해 오는 사슬을 보며 하비엘이 떠올린 생각이었다.

다음 순간, 하비엘의 검이 움직였다.

 

...!

 

소리도 없었다.

섬광도 없었다.

그저 평범한 가로 베기.

그 한 번의 동작에 그를 향해 달려들던 모든 것이 갈라졌다.

그를 향하던 사슬도.

사슬이 담던 적의도.

일 검에 잘려나갔다.

검광이 훑고 지나간 공간에서 찬란한 광휘가 피어났다.

 

츠즈즈즈!

 

어느새 피어난 오러가 사슬을 모조리 끊어냈다. 공간을 휩쓸고, 더욱 기세를 피워올렸다.

그걸 목격한 순간이었다.

칸나바로가 몸을 돌렸다.

뛰었다.

공회당을 향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꾸물거리다간 죽을 테니까.

그 사실을 명확하게 깨달았으니까.

'미친! 저거, 혹시 드래곤인가?'

다급하게 공회당 문을 박차듯 열었다.

그 사이로 그런 생각이 절로 떠올랐다.

소드마스터?

아니다.

아무리 소드마스터라도 저런 짓은 못한다.

그러니까, 장벽이 지배하는 범위 속에서 수십 분간 마나를 흡수당한 직후에 오러를 피워올려 자신의 가장 강력한 흑마법을 일 검에 잘라내 버리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말이다.

'저거, 누군지는 몰라도 그냥 소드마스터가 아니야.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사실 그런 칸나바로의 오해도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하비엘이 이 도시에 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애초부터 로이드가 비공식적으로 나마란에 왔기 때문이었다.

자신과 일행을 드러내지 않고서. 나마란 영애의 수행원 일행에 섞여서. 전혀 떠들썩하지 않게. 그렇게 나마란 백작을 만나고 공사 발주를 진행한 덕분이 컸다.

따라서 칸나바로는 이름난 은발의 소드마스터가 이 도시에 머물고 있었다는 사실도, 자신의 무료배급소에서 일하고 있었다는 진실도, 마침내 자신의 목을 베러 이곳에 왔다는 현실도 모르고 있었다.

다만 그는 위기감만은 확실하게 느꼈다.

'이대론 당한다.'

확신이 들었다.

자신이 구사할 수 있는 최고의 마법이었다.

한데 그게 일 검에 잘려나갔다.

자신이 어떤 수를 쓰더라도 저 은발의 남자에겐 당해낼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칸나바로의 시선이 초조하게 움직였다.

공회당 메인 전시실의 중앙.

그곳에 놓인 타락천사 조각상을 향했다.

조각상은 앞서 그가 피로 새긴 주술적 문양으로 빼곡하게 뒤덮여 있었다.

"...."

헬나이트.

지금 소환해야 할까.

장벽이 어그러졌는데.

모인 마나가 모자랄 텐데.

소환을 하더라도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지금 당장 소환하지 않으면....'

죽는다.

고민은 짧았고, 결정은 순식간이었다.

칸나바로의 손이 조각상을 짚었다.

이미 모든 주술적 준비가 끝나 있던 조각상이었다.

소환 의식의 최종적인 발동만을 남겨두고 있던 터였다.

발동은 쉬웠다.

조각상을 짚은 칸나바로의 손.

그가 불어넣는 약간의 마나.

그것이면 충분했다.

 

키아아아아아-!

 

조각상 전체에 새겨져 있던 핏빛 문양이 섬뜩한 빛을 토해냈다.

동시에 기이한 수십 가지 환영이 조각상 주위로 떠올랐다. 번득였다. 꿈틀거렸다. 솟구치고, 일어나며, 고함치고, 경련했다.

그리고 조각상이 짓눌려 터졌다.

 

콰드각-!

 

"크읏!"

터지는 조각상.

사방으로 튄 파편.

파편 조각에 얻어맞은 칸나바로가 고꾸라졌다.

그의 터진 이마에서 피가 철철 흘렀다.

하지만 그는 피를 닦아낼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는 곧바로 고개를 들었다.

자신이 소환한 존재의 모습부터 확인했다.

"헬나이트...."

 

푸스스스...!

 

조각상이 짓눌려 터지고 박살 난 자리.

대리석 전시대 위로 검은 안개가 흘렀다.

그 속에서 붉은 안광이 번득였다.

한 번의 호흡에 사방을 돌아보고.

두 번의 호흡에 안개를 걷어내며.

마침내 지옥의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데 그 모습이 조금 이상했다.

"무슨...."

칸나바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의 눈길이 다급하게 헬나이트의 전신을 훑었다.

검은 안갯속에서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헬나이트.

그런데 하자(?)가 있어 보였다.

지옥의 군마에 타고 있지 않았다.

팔 하나가 없었다.

다리도 하나 없었다.

즉, 말에 타고 있지도 않았고 외팔이에 외다리였다.

"그으으읏! 이게 무슨!"

칸나바로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망했다.

역시나 장벽의 마나 흡수에 문제가 생긴 게 원인이었다.

그래서 충분한 마나를 모으지 못했다.

제대로 된 헬나이트를 소환하기에 마나가 너무 모자랐다.

'아무리 그렇다지만!'

지난 긴 시간 동안 기울인 노력과 자금.

앞으로 이루어내리라 다짐했던 대업.

그걸 더듬거리듯 떠올리며 칸나바로가 절망했다. 무릎을 꿇었다. 멀쩡하지 못한 헬나이트의 모습을 망연자실한 눈길로 올려다보았다.

그때였다.

"설마 그걸 소환하기 위해 이런 일을 벌인 것인지."

공회당 내부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

이미 하비엘은 공회당에 들어와 있었다.

경계심 가득한 걸음으로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런 그의 시선은 헬나이트를 향해 꽂힌 채였다.

"...."

그가 헬나이트를 바라보자, 헬나이트도 그를 돌아보았다.

푸른 눈동자와 붉은 안광.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다음 순간.

은발의 기사와 지옥의 기사는 이미 검을 부딪치고 있었다.

눈빛과 눈빛이 마주치는 순간부터 서로가 적임을 깨달은 까닭이었다.

 

투콰앙-!

 

은빛 롱소드와 흑색 투핸디드 소드가 격돌했다.

찬란한 오러와 타락한 저주의 기운이 충돌했다.

상반되는 적수의 양보 없는 힘 싸움이 벌어졌다.

두 검이 격돌하는 순간.

후폭풍이 사방을 휩쓸었다.

하비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상상 이상의 힘이다.

하마터면 검이 뒤로 밀릴 뻔했다.

놀라운 것은 힘뿐만이 아니었다.

'손부터 어깨까지. 뼛속이 시려.'

은발 기사의 미간에 사나운 주름이 생겨났다.

그는 방금 겪었던 충돌의 순간을 떠올렸다.

검과 검이 부딪치는 찰나였던가.

서늘한 기운이 검신을 타고 침투해 들어왔다.

순식간에 피부를 뚫고, 근육 조직과 골수에까지 스며들었다.

혈관을 따라 팔뚝을 타고 침범했다.

만약 그걸 깨달은 즉시 마나써클을 회전시키지 않았더라면, 강한 마나의 압력으로 서늘한 기운을 몰아내지 않았더라면, 아차 하는 사이에 심장에 타격을 입었을 것이었다.

'강적이다.'

그냥 강력한 언데드나 해골 병사 정도가 아니었다.

팔과 다리 하나씩이 없다고 얕볼 상대는 더더욱 아니었다.

단 한 번의 격돌.

그걸 통해 하비엘은 헬나이트의 전력을 거의 정확하게 파악했다.

'나와 동급.'

일반적인 소드마스터 이상의 존재다.

국왕 알리시아 같은 소드마스터라면 두세 명은 달라붙어야 대적이 가능할 터다.

한데 만약 저 해골 기사의 팔다리가 멀쩡했다면?

현재의 자신조차 감당할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아니야.'

할 수 있다.

자신이라면 가능하다.

그 확신을 품은 순간부터였다.

하비엘의 푸른 눈동자에 사나운 결의가 떠올랐다.

그의 검이 한층 정교해지고, 동시에 난폭해졌다.

 

콰터터터터텅-!

 

폭풍처럼 쏟아지는 철혈의 연격.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벤다 싶으면 반대쪽으로 후렸다.

후리는가 했더니 올려치고, 그걸 막아내려 반응하면 어느새 찔러 들어갔다.

- ...!

헬나이트의 두개골이 급격히 흔들렸다.

설마 지상 세계의 인간은 모두 이런 건가.

지옥의 기사는 혼란을 느꼈다.

이 지상에 강림하여 처음으로 검을 맞댄 상대가 하필이면 하비엘이었기 때문이었다.

- 무슨....

인간은 약하다고 들었는데.

자신이 아무리 불완전한 모습으로 강림하였다 해도.

그래서 원래 힘의 반의반도 발휘 못 하는 상태라 해도.

이 지상에서 자신을 막아설 인간은 없으리라 여겼는데.

안타깝게도 그 믿음이 불과 1분도 되지 않아 산산조각으로 부스러지고 있었다.

검에 맞아 석둘 잘려나가는 갈빗대와 함께.

 

콰삭!

 

은빛 롱소드가 헬나이트의 가슴을 저며냈다.

잘려나간 갑옷과 갈빗대가 무참히 바닥으로 흩어졌다.

물론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헬나이트가 아니었다.

- ...!

지옥의 언어를 외치며 검을 뿌렸다.

흑색의 저주 스민 충격파가 전방의 공간 전체를 휩쓸었다.

그러나 하비엘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면으로 맞불을 놓았다.

 

투콰앙-!

 

하비엘의 롱소드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찌르기를 시전했다.

그다음 순간.

송곳과도 같은 발파가 쏘아졌다.

헬나이트가 흩뿌린 충격파를 단숨에 꿰뚫었다. 더 뻗었다. 쇄도했다. 헬나이트의 두개골을 향해. 침투했다. 관통했다.

 

퍼컥!

 

헬나이트의 투구 전면이 발파에 뚫렸다.

두개골이 앞뒤로 관통되었다.

마침내 통째로 박살 났다.

- ...!

삽시간에 머리를 잃은 헬나이트의 전신이 경련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철그렁!

 

헬나이트가 검을 놓쳤다.

전신의 뼈마디가 분리되었다. 아니, 분해되었다. 모래성이 무너지듯 허물어졌다.

소드마스터조차 능가하는 지옥의 기사.

헬나이트가 한낱 뼛조각 더미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무슨...."

칸나바로는 눈조차 깜빡이지 못하고서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하비엘과 헬나이트의 격돌.

엄청나게 복잡한 수 싸움이 오갔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불과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구경하던 칸나바로의 입장에서는, 그토록 개고생을 하며 소환한 헬나이트가 불과 몇 초도 버티지 못하고서 패배하여 한낱 뼈 무더기로 전락하고만 셈이었다.

'내가... 악몽을 꾸고 있는 건가.'

칸나바로는 저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렸다. 털썩 주저앉았다. 망연자실 고개를 들었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은발의 기사를 허망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어지간한 중죄였다면 즉결처형이 바람직할 터. 하지만 당신은 지은 죄가 너무 많아. 이런 곳이 아닌 왕실에서 제대로 심문을 받아야 하겠지."

"...."

어느새 이쪽으로 겨누어진 롱소드.

그걸 보며 칸나바로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대체 어디서....'

이런 괴물이 나타난 걸까.

그는 눈앞의 하비엘을 보면서도 현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럴 법도 했다.

녹타니움의 장벽 안에서 멀쩡한 모습도.

하자가 있었다지만 헬나이트를 단숨에 제거한 광경도.

모두 두 눈으로 보면서도 쉽게 믿을 수 없을 만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설마 진짜 인간인 척하는 드래곤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드래곤이 아무런 이유 없이 인간의 일에 개입할 리가 없잖나. 그렇다면... 그렇다면... 잠깐, 설마?'

칸나바로는 멈칫했다.

필사적으로 차분함을 되찾고자.

결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고자.

노력한 끝에 한 가지 기억을 떠올린 덕분이었다.

'하비엘 아스라한.'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있다.

신성처럼 나타난 젊은 소드마스터.

소문으로는 국왕 이상의 실력자라고 했던가.

그놈의 외모가 지극히 아름답다고 했다.

은하수 같은 은발을 지녔다고 했다.

눈앞에서 검을 겨누며 다가오는 괴물.

저놈의 외모가 딱 그러했다.

'한데 저놈이 왜 여기 있는 거지?'

그 하비엘 아스라한이 이 도시에 왔다면 자신이 모를 리가 없을 텐데.

혹시 저놈, 비공식적으로 이곳에 와 있었던 걸까.

설마 자신들의 거사를 미리 간파했던 걸까.

알 수 없었다.

다만, 절망감은 들지 않았다.

마침 절망하려는 그의 시야에, 하비엘의 등 뒤쪽 광경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하, 하하하."

칸나바로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 그의 시선이 닿은 곳.

하비엘의 등 뒤편.

어느새 그곳에서 검은 뼈 무더기가 스스로 재생하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쿠드드득... 쿠드득...!

 

순식간에 복원된 헬나이트의 검은 두개골 투구.

그 사이로 한층 흉포해진 안광이 번득이기 시작했다.

174화. 철혈 대 지옥 (2)

 

 

쿠드드득! 쿠드득...!

 

불길한 소리가 공회당에 번졌다.

헬나이트의 뼈마디가 일어섰다.

검은 마력의 물결에 휩싸였다.

마치 불사의 가호라도 받은 것처럼.

부서지고 허물어졌던 일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다리와 골반, 척추와 갈빗대, 견갑골과 경추, 두개골이 차례로 조립되었다. 검은 광택의 갑옷이 전신을 둘러쌌다. 투구가 씌워졌다.

 

콰드득!

 

투구 속에서 빛나는 붉은 안광.

동시에 헬나이트가 하나뿐인 팔을 앞으로 뻗었다.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던 거대한 투핸디드 소드가 허공으로 떠올라 손에 잡혔다.

거대한 검에서 흉험한 기세의 마나가 타올랐다.

동시에 칸나바로의 입에서도 웃음이 터졌다.

"하, 하하! 하하하!"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칸나바로였다.

그가 재빨리 뒤로 기어 하비엘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지옥의 기사시여! 적에게 처단을! 어서!"

칸나바로의 카랑카랑한 외침이 공회당을 쩌렁쩌렁 흔들었다.

그 외침에 공회당 안에 있던 모든 이가 반응했다.

쓰러져 있던 시민들이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지독한 현기증 속에서 칸나바로를 쳐다보았다.

그런 시민들의 눈길에는 짙은 실망감과 배신감, 혐오의 감정이 실려 있었다.

한때 도시의 자랑거리였던 인자한 자선사업가.

이제는 그 가면을 벗어던진 배덕자.

그러나 칸나바로는 그러한 모두의 시선을 태연하게 받아넘겼다. 아니,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눈앞에서 부활한 헬나이트만을 열망 어린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지옥의 기사시여!"

다시 터진 그의 토하는 듯한 외침.

그 소리에 헬나이트가 검을 당겼다.

하비엘도 이미 헬나이트를 향해 검을 겨누고 있었다.

그러기를 잠시.

격돌은 소리도 없이 시작되었다.

 

...!

 

쩌컹!

 

충격파가 소리에 앞서 터졌다.

공회당 내부를 휩쓸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모두가 충격파에 휩쓸려 낙엽처럼 뒹굴었다.

그 사이로 하비엘과 헬나이트가 얽혔다가 떨어졌다.

떨어졌다가 다시 격돌했다.

 

터컹! 투확!

 

하비엘의 두 팔이 롱소드를 치켜들었다.

검신을 머리 위에서 옆으로 눕혔다.

두 손목이 교묘한 각도로 움직였다.

롱소드의 앞날이 재빠르게 수평의 반원을 그렸다.

그 섬광이 헬나이트의 옆머리를 노리고 쇄도했다.

 

쯔컹!

 

헬나이트의 대검이 롱소드를 막았다.

하지만 그 순간, 하비엘이 검격이 막히며 생긴 반탄력을 역이용했다.

방어에 막혀 튕겨 나오는 힘을 롱소드에 그대로 실었다.

머리 위로 치켜든 그의 두 손목이 다시금 교묘한 각도로 움직였다.

두 손으로 손잡이를 쥔 채.

왼쪽 손등을 축으로 오른손이 수평의 시계 방향으로 회전했다.

롱소드가 머리 위에서 수평으로 호선을 그리며 회전했다.

그리고 뒷날을 번득이며 날아들었다.

헬나이트의 반대편 옆머리를 향해서였다.

"...!"

헬나이트가 황급히 머리를 뒤로 젖혔다.

투구 일부가 은빛 오러에 잘려나갔다.

동시에 헬나이트가 반격을 감행했다.

흑색 대검이 기교와 기술을 압도하는 힘으로 공간을 휩쓸었다.

 

투그걱!

 

강렬한 내리치기에 공회당 바닥이 갈라졌다.

기둥이 흔들리고 대들보에 금이 갔다.

수많은 파편이 치명적인 속도로 날아갔다.

대부분이 하비엘을 덮쳤다.

일부는 시민들을 향해 날아갔다.

하비엘의 눈이 번득였다.

"...!"

 

츠카카칵!

 

은빛 롱소드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공간을 가르고, 나누고, 베어냈다.

수십 조각의 파편이 허공에서 가루가 되었다.

그 가루를 헤치며 하비엘이 돌진했다.

은빛 롱소드가 그대로 송곳니가 되었다.

그때부터였다.

 

콰터터터터터텅!

 

롱소드가 치명적인 송곳니라면, 헬나이트의 흑색 대검은 문자 그대로의 흉기였다.

소드마스터와 지옥의 기사가 서로를 향해 모든 살의를 터뜨렸다.

희고 검은 두 짐승이 서로를 물어뜯듯.

빛과 어둠이 서로의 심장을 찔러가듯.

하비엘과 헬나이트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격돌했다.

하비엘이 찌르면 헬나이트가 베었다.

헬나이트가 베면 하비엘이 후려쳤다.

후려치면 달려들고.

달려들면 흘려내고.

흘려내면 내리찍고.

내리찍으면 올려치며 응수했다.

 

콰아앙-!

 

내리찍은 흑색 대검.

올려친 은빛 롱소드.

두 치명적인 무기가 허공에서 다시금 충돌했다. 서로의 쇄도를 차단했다. 대치했다. 서슴없이 터지는 충격파. 그 속에서도 물러나지 않았다. 정지한 채 서로의 힘을 겨루었다.

 

카가가가각-!

 

흑색 대검이 내리눌렀다.

은빛 롱소드가 버텨냈다.

마주친 채로 일어나는 격렬한 마찰.

검날 위에서 튀는 불똥 사이로 하비엘과 헬나이트의 시선이 얽혔다.

헬나이트의 투구 속 안광이 더욱 붉게 일렁였다.

- 강하구나, 인간.

"...."

- 나는 지옥의 지배자를 보필하는 제1군단장 지오렉시우스. 내 몸이 온전한 채로 소환이 이루어졌더라면 더욱 좋았을 것을. 그럼에도 실로 기대 이상의 가슴 뛰는 승부로다. 하여 그대, 인간 기사의 이름을 알고 싶군.

"하비엘 아스라한."

- 반갑다 아스라한 경, 더욱 분발해서 싸워주길 바란다.

"후. 이런 승부는 달갑지 않다만."

서로의 전력을 실은 힘겨루기.

그 검날을 사이에 두고서 하비엘이 툭 내뱉듯 대꾸했다.

헬나이트가 두개골을 갸웃거렸다.

- 어째서?

"짊어진 것투성이인 싸움을 누가 선뜻 반길까."

하비엘의 입술 끄트머리에 실소가 내걸렸다.

스스로 말해놓고도 웃기는 소리다.

하지만 솔직한 진심이었다.

책임질 것이 많은 싸움이 반가운 사람은 세상에 없다.

피할 수 있다면 그냥 피하고 싶다.

하지만 해야 하는 상황이니까.

피할 수 없는 이유가 있으니까.

그러니까 싸우는 거다.

다만 버거웠다.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도 헬나이트가 대검으로 짓눌러오는 힘이 점점 강력해지고 있었다.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이대로 사람들을 지킬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다.

쓰러진 시민들이 보였다.

연이은 충격파에 떠밀려 공회당 구석구석, 벽면에 기대듯 널브러져 있었다.

그들 중에 온전히 몸을 일으킬 수 있는 이는 없어 보였다. 즉, 이곳에서 자력으로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였다.

싸우는 것.

이기는 것.

오직 그것만이 사람들을 지켜낼 방법이리라.

'이렇게!'

 

카가각!

 

롱소드 끄트머리를 순간적으로 낮게 기울였다.

낮아진 검 끝을 따라 경사가 생겨났다.

위에서부터 내리눌러 오던 대검이 미끄러졌다.

갑자기 생겨난 경사를 따라 거친 불똥을 튀기며 내려갔다.

- ...!

헬나이트의 안광이 흔들렸다.

전력으로 내리누르던 상황.

미처 힘을 회수하기도 전에 대검이 옆으로 흘러내려 버렸다.

그렇게 만들어진 빈틈으로 하비엘의 오른손이 불쑥 올라왔다.

어느새 그 손엔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투확!

 

단검에서 발파가 쏘아졌다.

헬나이트의 턱을 노리고 쇄도했다.

- ...그읏!

헬나이트가 황급히 고개를 뒤로 젖혔다.

물론 헬나이트라고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콰앙!

 

어깨로 하비엘을 들이받았다.

바위로 후려치는 듯한 타격이 들어갔다.

그때부터였다.

하비엘과 헬나이트가 다시 한 번 투견장의 짐승처럼 얽혔다.

아니, 사납게 얽히려는 순간이었다.

"거기! 이쪽을 봐라!"

날카로운 외침이 싸움 사이로 끼어들었다.

칸나바로의 목소리였다.

 

콰앙-!

 

허공에서 부딪치는 롱소드와 흑색 대검.

그 사이로 하비엘의 눈동자가 힐끗 움직였다.

외침이 들려온 쪽을 빠르게 훑었다.

그리고 놀람으로 작게 흔들렸다.

칸나바로.

한때 자선사업가로 도시에서 존경받던 인물.

하비엘조차도 저런 인격자는 처음 본다며 혀를 내둘렀던 사람.

그자가 벌이고 있는 인질극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그 싸움을 계속 이어갈 거라면 생각을 다시 해보는 게 좋을 거다. 검을 버려! 그러지 않으면 여기 있는 버러지들의 목을 하나씩 차례로 따줄 테니!"

칸나바로가 이죽거리고 있었다.

그 한 손은 어느 사내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있었다.

나머지 한 손은 단검을 쥐고 있었다.

날 시퍼런 단검이 사내의 목을 살짝 파고들었다. 시뻘건 피가 목덜미를 따라 주르륵 흘러내렸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어린 여자아이가 울먹이며 외쳤다.

"아빠아!"

"크으... 읏! 괘, 괜찮아. 아빠는 괜찮아."

사내가 목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어린 딸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칸나바로의 입가에 비웃음이 피어났다.

"괜찮기는 무슨. 입 닥치고 있어. 산 채로 목이 썰리기 싫으면."

"그으으... 으읏!"

단검이 옆으로 살짝 움직였다.

사내의 목덜미 피부가 찢기며 더 많은 피가 흘렀다.

칸나바로의 눈동자가 하비엘을 향했다.

"봤겠지? 셋을 세어주지. 생각할 시간을 주는 거야. 그 뒤에도 검을 버리지 않으면 이 버러지의 목이 딸 앞에서 썰리는 꼴을 구경하게 될 거다."

"...."

하비엘은 대답이 없었다.

말없이 헬나이트와의 격렬한 공방을 이어갔다.

다만 그러는 동안에도 눈동자는 수시로 칸나바로와 인질이 된 사내를 살폈다.

고민을 하는 걸까.

괴로운 심정이겠지.

칸나바로의 입가에 비틀린 웃음이 내걸렸다.

'그러니까 검을 버려! 어서!'

그는 나름 확신했다.

저놈은 검을 버릴 거다.

어째서?

왕국에 이름난 기사니까.

한창 떠오르며 촉망받는 소드마스터니까.

'그렇겠지? 하비엘 아스라한 경.'

저토록 이름난 기사라면 명예를 중시할 터.

좀처럼 인질을 포기하지 못할 것이다.

인질극에 굴복하여 검을 버릴 것이다.

그게 중요하다.

'그 즉시 놈을 제거하고 장벽을 복구하는 거야.'

장벽을 복구하면 된다.

그러면 다시 마나를 모을 수 있다.

시민들의 마지막 생명력 한 줌까지 긁어모은다면.

헬나이트의 하자를 모두 고쳐 완벽한 존재로 탈바꿈시킬 수 있다.

그러면 헬나이트의 소환이 유지되는 한 달의 시간 동안 이 왕국의 거의 모든 영토를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토벌군이 온다면?

역시 뭉개 버리면 된다.

온전한 전력을 갖춘 헬나이트라면 가능하다.

소드 마스터인 국왕의 목을 베는 것도 가능하다.

위선에 가득 찬 왕실을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여는 것.

그 오랜 숙원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검을 버려. 어서!'

칸나바로가 열기로 들뜬 눈에 힘을 주었다.

하비엘이 보여줄 다음 행동에 대비했다.

검을 버리기만 한다면.

곧바로 손에 잡힌 버러지의 목을 긋고.

놈이 당황하는 틈에 흑마법을 구사하여 헬나이트의 싸움을 도울 것이다.

그러면 검마저 버린 놈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겠....

그때였다.

 

투확-!

 

발파가 날아왔다.

"...!"

칸나바로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비로소 그는 상황을 깨달았다.

'저 미친놈이!'

검을 버리지 않았다.

대신 일언반구도 없이 무지막지한 공격을 날려왔다.

'그으읏!'

칸나바로의 심장이 다급하게 뛰었다.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동시에 손을 내밀었다.

방어 마법을 발동했다.

 

쩌컹-!

 

미처 마법이 절반도 채 발동되기 전에 발파가 그를 덮쳐왔다. 방어 마법을 깨부수고 그의 검지와 중지 끝 마디를 날려 버렸다.

그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공회당 벽면을 때렸다. 관통했다.

"...끄, 크아아악!"

졸지에 손가락 마디를 잃은 칸나바로가 손을 부여잡고 나뒹굴었다.

하비엘의 눈꼬리가 찡그려졌다.

"쯧."

실패다.

단숨에 심장을 꿰뚫으려 했는데.

한데 빗나갔다.

헬나이트와 숨 가쁜 공방을 이어가던 도중이라서.

그 와중에 순간적으로 발파를 내쏜 것이라서.

조준이 부정확했다.

놈을 죽이지 못했다.

가까스로 손가락만 날린 게 다였다.

아쉬웠다. 초조해졌다.

'방금 한 번에 놈을 끝장냈어야 했는데.'

두 가지 측면에서 엄청난 손실을 보았다.

하나는 놈이 발파를 경계하게 되리라는 것.

따라서 같은 수법으로는 놈의 인질극을 중단시킬 수 없으리란 것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투콰아앙-!

 

"...큿!"

하비엘은 후려치듯 날아온 대검을 힘겹게 막아냈다.

그의 입가에 쓴웃음이 내걸렸다.

'그냥 전력을 다해서 싸워도 될까 말까 한 상대인데.'

그 숨 가쁜 공방의 틈바구니에서 발파를 다른 곳으로 쏘았다. 칸나바로를 제압하기 위해. 잠깐이었지만 눈앞의 헬나이트를 무시해야 했다.

그 대가로 두 번째 손실을 얻었다.

팽팽하던 공방의 균형이 깨어진 것이었다.

 

콰앙-! 콰콱! 콰직-!

 

딱 한 번 다른 곳으로 쏜 발파.

그만큼 낭비하게 된 동작.

그 한 번의 낭비 때문에 공세의 주도권이 헬나이트에게로 완전히 넘어갔다.

움직임의 선제권을 빼앗겼다.

호흡과 흐름.

공방의 방향.

그걸 이끌어갈 반 박자의 타이밍을 모두 내주었다.

다시 찾아오기도 어려워졌다.

흐름이 자신에게로 넘어온 것을 직감한 헬나이트가 파상공세를 퍼부어 왔기 때문이었다.

 

투쾅! 터컹! 쿠콰콱!

 

내리찍고, 부수고, 파고들며, 후려치고, 분쇄한다.

자잘한 기교 대신에 압도적인 힘과 기세로 밀고 들어온다.

그 파괴적인 파상공세 앞에 하비엘은 시시각각 공회당 구석으로 내몰렸다.

좀처럼 반격의 틈을 찾기도 어려웠다.

함부로 반격을 하려다간?

자칫 뼈를 내주고 살을 취하는 결과만 생겨날 것이 분명했다.

그만큼 헬나이트의 공세는 파괴적이면서도 철저하도록 틈이 없었다.

게다가 상황은 점점 더 나빠졌다.

"크... 그하하하! 그흐흣! 네놈! 그런 수가 통할 줄 알았나!"

나동그라졌던 칸나바로가 비척비척 일어났다.

끝 마디가 잘린 손가락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놓쳤던 단검을 주워들었다.

인질의 머리채도 움켜쥐었다.

다시금 사내의 목덜미에 단검을 겨누었다.

이번에는 사내의 몸으로 자신을 철저하게 가린 채였다.

"자, 다시 명령한다. 검을 버려!"

악에 받친 외침이 공회당에 쩌렁쩌렁 울렸다.

수세에 몰려 간신히 버티던 하비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지금 상태에서는 아까와 같은 발파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렇다고 검을 버린다면?

헬나이트의 대검이 자신의 몸을 쪼갤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하비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계속 싸우기 위해 인질이 죽는 모습을 봐야 하는 걸까.

저 인질을 일단 살리기 위해 검을 버려야 하는 걸까.

혼란스러웠다.

어느 쪽이 옳은 판단일지.

물론 계속 싸우는 것이 이득이리란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걸 선뜻 선택하려니 마음의 부담감이 엄청났다.

붙잡힌 채 목에서 피를 흘리는 사내.

그런 아빠를 보며 울고 있는 어린 딸.

그 모습 앞에 계속 싸울까를 고민하는 이기적인 자신.

'나는 어떻게 해야....'

하비엘의 입술이 창백하게 변했다.

칸나바로의 웃음에 승리의 예감이 깃들었다.

"다시 셋을 센다!"

하비엘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다급한 눈으로 칸나바로를 보았다.

잠깐만.

"셋!"

제발.

"둘!"

그만.

"하...!"

 

터엉-!

 

갑작스럽게.

칸나바로의 뒤통수에서.

온 세상에 울리는 맑고 고운 소리가 퍼졌다.

동시에 칸나바로의 외침이 중단되었다.

"...끄윽?"

그의 눈이 하얗게 뒤집혔다.

몸이 비틀.

다리가 흐느적.

그대로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그 뒤에서 로이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풀스윙으로 휘두른 강철삽을 야물딱지게 움켜쥐고서.

하비엘을 향해 피식 어깨를 으쓱거렸다.

"레이디 엘라 양, 혹시 일손 필요해?"

175화. 어깨를 나란히 (1)

터엉-!

 

온 세상에 울리는 맑고 고운 소리.

동시에 칸나바로의 눈이 회까닥 뒤집혔다.

'...끄윽?'

머리가 띵했다.

바닥과 천장이 울렁거렸다.

어느새 세상이 확 낮아졌다.

아니, 자신의 몸이 쓰러진 걸까.

차가운 바닥이 얼굴을 때려오는 감각마저도 아득하게 느껴졌다.

'무슨....'

칸나바로는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필사적으로 몸을 꿈틀거렸다.

손으로 땅을 짚었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거기까지였다.

 

터어엉-!

 

또 한 번.

온 세상에 맑고 고운 소리가 울렸다.

'꺽.'

그게 정신을 잃기 전, 칸나바로의 마지막 외침이었다.

그렇듯 쓰러진 그의 몸뚱이 위로 피식거리는 미소가 흘렀다.

"거 참. 보기보다 질긴 양반이네."

로이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칸나바로를 내려다보았다.

독한 인간이다.

설마 강철삽 풀스윙에 뒤통수를 맞고도 꿈틀거리며 일어나려 할 줄은 몰랐다.

"뭐, 그럼 한 대 더 때려주면 되는 거지. 어쨌건."

로이드가 고개를 들었다.

하비엘이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도와줄까, 엘라 양?"

하비엘은 대답이 없었다.

아니, 대답할 수가 없었다.

여전히 헬나이트의 파상공세를 아슬아슬하게 버텨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 와중에도 로이드를 향해 반가움 담긴 눈빛을 보내기는 했다.

로이드도 그 뜻을 알아차렸다.

"알았어. 여기만 처리하고 갈게. 조금만 버텨."

일단은 후환을 없애는 것이 우선이다.

그러자면 음흉한 흑마법사부터 완전히 제압해야 한다.

그걸 염두에 두며 로이드가 뒤를 돌아보았다.

"꼬밍아?"

"꼬밍!"

그의 부름에 공회당 복층 위쪽에서 대답이 날아왔다.

커다란 뱁새가 날개를 펼치며 내려섰다.

이곳까지 그를 태우고 온 꼬밍이였다.

"알지?"

"꼬밍!"

일일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로이드가 쓰러진 칸나바로를 가리켰다.

그러자 꼬밍이가 등에 멘 가방을 한 차례 흔들었다.

 

푸슈슷!

 

강철보다 질기고 튼튼한 거미줄이 분사되었다.

칸나바로의 두 손을 묶고, 다리를 봉쇄하고, 몸까지 칭칭 감아 버렸다.

야생의 거미가 먹잇감을 묶어 버리듯.

30겹 뽁뽁이 포장보다 꼼꼼하게 칸나바로를 동여맸다.

그렇게 흑마법사가 완전히 제압되었다.

로이드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어이, 이봐요."

칸나바로의 곁에 쓰러져 숨만 내쉬는 사내를 부축했다.

사내의 목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주며 물었다.

"움직일 수 있겠어요?"

"조, 조금은...."

사내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프론테라 공자님이십니까? 반갑... 습니다."

"역시. 내가 잘못 알아본 게 아니었네. 나마란 영애랑 같이 우리 영지에 왔던 기사, 맞죠?"

"맞습니다."

"그럼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보단 조금 회복이 빠르겠네요?"

"물론... 으읏?"

대답하던 기사가 헛숨을 들이켰다.

그의 어깨를 짚은 로이드의 손.

그 손바닥에서 약간의 마나가 예고도 없이 흘러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워워. 놀라지 마시고. 내가 넣어주는 겁니다. 몸보신 좀 하라고 말이죠."

"대체 왜...."

"왜겠습니까."

로이드가 눈짓으로 사방을 가리켰다.

"쓰러진 사람들 보이죠?"

"예."

"좀 밖으로 옮겨 주세요. 여기 더 난장판이 될 것 같으니까."

"알겠습니다."

복잡한 설명은 필요 없었다.

이미 현장의 상황을 처음부터 온몸으로 겪은 기사였다.

지금까지는 다행스럽게도 파편이나 충격파에 크게 다친 시민이 없기는 했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런 행운이 따르리란 보장이 없을 터.

기사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로이드의 아스라한 심법 덕분에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한 모습이었다.

그가 자신의 딸과 근처의 노파, 그리고 중년의 사내를 한꺼번에 업고 짊어지며 말했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곧 저도 함께 싸우겠습니다."

"기대 안 해요. 사람들부터 옮겨주세요. 그러라고 마나 넣어줬지, 싸우라고 넣어줬나."

"...알겠습니다."

"좀 얼른."

"예, 옙."

기사가 황급히 움직이며 사람들을 공회당 밖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꼬밍이도 토실토실한 궁둥이를 씰룩거리고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기사를 도와 함께 시민들을 피신시켰다.

그제야 로이드는 숨을 몰아쉬었다.

"후우."

이제 주위 정리는 어느 정도 됐다.

사람들 다칠 걱정 없이 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안심하고서 강철삽을 고쳐잡았다.

다른 손으로는 기절한 채 거미줄로 포장된(?) 칸나바로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자, 시작해보자."

한 손으로 칸나바로를 질질 끌며.

드넓은 공회당 중앙을 향해 걸어갔다.

하비엘과 헬나이트.

두 초월적인 존재의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을 향해서였다.

그동안 로이드의 표정이 조금은 복잡해졌다.

'와. 내가 어쩌다가 이런 곳까지 와 버렸냐.'

그야말로 용호상박.

충격파를 연이어 터뜨리며 싸우는 하비엘과 헬나이트를 보며 로이드는 짐짓 어깨를 움츠렸다.

싸움이 싫다.

즐겨본 적도 없다.

그렇듯 원래의 자신은 그저 평범한 대한민국 국민 김수호일 뿐이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왜 이런 싸움판에 끼게 된 걸까.

'이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 거지, 뭐.'

이제 평범한 옛날로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아니, 굳이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딱히 없다.

그렇게 마음을 갈무리했다.

강철삽을 움켜쥐었다.

속으로 격전의 타이밍을 쟀다.

그리고 헬나이트가 하비엘을 향해 강력한 일격을 날리려는 찰나.

강철삽을 들어 올렸다.

칸나바로의 머리통을 겨누었다.

작정하고 크게 외쳤다.

"거기! 헬나이트! 동작 그만! 안 멈추면 이놈 내 손에 죽는다!"

마나가 담겨 더욱 또렷하게 울려 퍼진 로이드의 외침이 헬나이트의 두개골 속으로 알차게 쏙쏙 스며들었다.

어쩌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 ...!

강맹한 힘을 싣고서 뿌려지던 헬나이트의 대검에 일말의 빈틈이 생겨났다.

물론 그런 빈틈을 놓칠 하비엘이 아니었다.

 

투콱! 카캉!

 

은빛 롱소드가 서늘한 빛을 저며냈다.

흑색 대검을 단숨에 쳐냈다.

덕분에 하비엘은 헬나이트의 공세 범위에서 무사히 몸을 빼낼 수 있었다.

아까 싸움의 주도권을 내어준 이후.

처음으로 거리를 벌리고서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헬나이트의 시선은 그런 하비엘을 향하고 있지 않았다. 다 잡아가던 적을 놓친 아쉬움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대신 황당함을 드러내며 로이드를 돌아보았다.

- 뭐?

믿기지 않는다는 듯, 헬나이트가 로이드를 쏘아보았다.

그 살벌한 지옥의 눈길에 일순간 본능적으로 움찔. 하지만 로이드는 금방 정신을 수습하며 태연하게 받아쳤다.

"잘 안 들렸나? 그렇게 크게 외쳤는데? 혹시 뼈다귀만 남아서 귀가 어두우신가?"

- ...뭘 말하고 싶은 것인가.

"뭘 말하긴. 아까 말했잖아. 공격 멈추지 않으면 이놈 죽일 거라고."

- 설마 인질극인가? 날 상대로?

"응."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

넌 이제 끝났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이놈이 댁을 소환했지? 그런데 내 손에 이놈이 죽으면 당신, 지옥으로 역소환 될 거잖아. 설마 내가 그걸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사실이었다.

칸나바로가 헬나이트를 소환한 당사자였다.

그가 자신의 피를 조각상에 새겼다. 그 주술적 표식을 매개로 헬나이트가 이 세상에 강림했다.

그러니 칸나바로가 죽으면?

칸나바로의 피를 매개로 이루어진 헬나이트의 소환도 취소된다.

"간단해. 금융권 대출 절차랑 똑같은 거야. 여기 칸나바로가 보증을 서주고 자신의 피로 증명서류를 떼줬어. 그래서 세상이 당신의 소환을 허락했단 말이지. 그런데 어라? 보증을 서준 칸나바로가 죽었다? 그럼 댁의 소환은 어떻게 처리될까."

정말로 간단하다.

보증인이 없어졌고.

보증 서류도 휴짓조각이 됐고.

그럼 진행하던 대출 절차가 취소되는 것이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그 살벌한 검 버리고 항복해. 지옥이랑 다르게 미세먼지도 없는 이 좋은 세상 공기 조금이라도 더 마셔보고 싶으면."

로이드의 자신만만한 협박이 울려 퍼졌다.

헬나이트의 대꾸에 황당함이 배어났다.

- 허. 감히. 혹시 인간, 그대는 이곳 사람이 아닌가?

"뭐?"

- 아무리 봐도 우리 지옥에 더 어울릴 법한 언행이라서. 혹시 지옥에서 쫓겨나 인간의 껍데기만 덮어쓴 존재인 건 아니겠지?

"전혀 아닌데. 사람 잘못 보셨는데."

- 그런가. 하지만 어쨌건, 그대가 말하는 요점은 알겠다. 하지만 그대가 놓치고 있는 사실도 있는 것 같군.

"내가 놓치고 있는 게 있다고?"

- 그렇다.

"그게 뭔데."

- 그 인간이 죽어도 내 소환은 한 시간이 지나야 취소될 것이다.

"뭐?"

그 순간이었다.

헬나이트가 대검을 치켜들었다.

너무나 빠르고 갑작스러운 동작.

그 검격의 끝에서 죽음의 기운이 해일처럼 뿜어져 나왔다.

공기를 휩쓸며 이쪽을 덮쳐왔다.

"...!"

로이드가 땅을 박찼다.

거미줄에 휘감긴 칸나바로를 끌어당기며 몸을 날렸다.

해일 같은 기세를 간신히 피해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자신을 향해 떨어져 내려오는 흑색 대검을 목격해야 했다.

- 날 소환한 그 인간과 함께 두 조각을 내주지.

"어?"

 

쐐애애애액-!

 

대검이 공기를 가르며 뚝 떨어져 왔다.

너무나 빨랐다.

강맹했다.

감히 삽을 들어 막을 엄두도 나지 않았다.

엄두 이전에 반응할 타이밍도 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만약, 그때 은빛 롱소드가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로이드는 그대로 두 쪽이 났을지도 몰랐을 일이었다.

 

콰콰각-!

 

"...!"

눈앞을 불쑥 가로지르듯 뻗어온 롱소드.

공간을 수직으로 올려 베듯 대검을 막아냈다. 쳐냈다. 터컹! 고막이 통째로 터지는 건 아닐까. 머리 위에서 터진 굉음에 로이드가 뒤로 넘어졌다.

"크읏!"

"일어나십시오. 죽기 싫으면."

귓가로 날아드는 하비엘의 냉랭한 목소리.

더 생각할 틈도 없이 몸을 일으켰다.

반사적으로 삽을 치켜들었다.

재빨리 물러나며 자세를 잡았다.

하비엘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서 삽을 겨누었다.

정면에 우뚝 버티고 선 헬나이트를 향하여.

 

고오오오....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을까.

비로소 로이드는 헬나이트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존재인지를 실감했다.

가까운 정면에서 맞서고 보니 포스가 장난이 아니었다.

심지어 죽음의 말에 올라타지도 않았고, 팔과 다리가 하나씩 없는 상태인데도 그랬다.

'이거, 얼결에 고렙 싸움판에 끼어든 쪼렙 뉴비가 된 기분인데.'

온몸에 소름이 쫘악.

전신이 긴장되었다.

강철삽을 움켜쥔 손바닥이 순식간에 축축해졌다.

이렇게 싸움 깊숙이 직접 끼어들 생각은 없었는데.

그저 멀리서 야바위와 발파로 하비엘을 도우려고만 했는데.

"아마 로이드 님을 이쪽의 약점으로 간주한 것 같습니다."

들려오는 하비엘의 목소리.

로이드는 딱딱하게 웃었다.

"알아. 그런 것 같네."

아마 날 집중적으로 공격하겠지.

그러면 하비엘이 날 보호하려고 무리를 하겠지.

'그렇게 이쪽의 빈틈을 만들겠다는 거네. 댐에 생겨난 균열만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것처럼. 작은 구멍 하나 때문에 댐 전체가 무너지듯이. 우리 둘을 한꺼번에 처리하겠다는 거 아냐.'

헬나이트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발을 빼기엔 늦은 듯했다.

"섣불리 물러나지 마십시오. 이미 저쪽의 공격 범위에 들어와 계십니다. 싸움에서 빠지기 위해 어설프게 물러나느라 저와 멀어지시면 순식간에 당할 겁니다."

"알아. 나도 안다고."

"그럼 사과하십시오."

"사과라니, 뭘."

"아까 절 엘라 양이라고 부른 거 말입니다."

"알았어. 미안해. 사과한다. 우리 하비엘 착하지."

"...."

"자, 그럼 이제 내가 어쩌면 되는 건데."

"버티십시오."

"뭐?"

"옵니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후아아아앙-!

 

만약 태풍을 정면으로 맞으면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다리 한 짝으로 펄쩍 뛰며 헬나이트가 돌진해 왔다.

거대한 대검을 횡으로 휘둘러 왔다.

아니, 휩쓸어 왔다.

'그읏!'

이건 정면으로 맞서면 안 된다.

그러다간 삽과 함께 두 동강이 난다.

그걸 직감한 로이드는 오히려 앞으로 달려나갔다.

자신을 휩쓸어 오는 대검을 향해 삽을 마주 뻗었다.

그리고 잴 것도 없이 자신의 가장 강력한 한 방을 분출했다.

삼중발파였다.

 

투콰학-!

 

- ...!

한순간의 위력만은 실로 어마어마한 삼중발파였다.

그 돌발적인 분출이 대검에 정면으로 충돌했다.

그러나 대검이 밀려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삼중발파의 기세를 횡으로 가르며 파고들어 왔다.

 

스컥!

 

대검이 삼중발파를 완전히 두 쪽으로 갈랐다.

하지만 로이드의 몸을 가르진 못했다.

삼중발파의 압력을 가르느라 아주 약간 무뎌진 대검의 휘두르기.

그 틈을 이용해 로이드가 몸을 낮게 굴렸기 때문이었다.

"지금!"

휘둘러지는 대검 아래를 구르며 로이드가 외쳤다.

동시에 그가 두 손을 뻗었다.

헬나이트의 골반과 다리를 끌어안았다.

지옥 기사의 균형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순간, 하비엘의 롱소드가 서늘하게 번득였다.

 

터커엉-!

 

오러 담긴 롱소드가 대검을 절반 가까이 파고들었다.

헬나이트가 다리를 끌어안은 로이드를 털어내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하비엘의 연속 공격이 숨 쉴 틈도 없이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콰터터터터터텅!

 

- ...!

아래쪽에선 거머리 같은 인간이 달라붙었다.

위쪽에선 소드마스터를 능가하는 기사가 작정하고 달려들어 왔다.

헬나이트의 안광이 살짝 흔들렸다.

상황은 지옥 기사에게 더 나빠졌다.

아래쪽에서 다리를 꽉 끌어안은 로이드.

그가 별안간 기이한 주술적 외침을 끝도 없는 메들리로 쏟아냈기 때문이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 ...!

헬나이트의 안광이 더 크게 흔들렸다.

앞에서는 폭격처럼 쏟아지는 하비엘의 검격이.

아래에서는 세뇌처럼 청각을 휘감아 오는 기이한 노래가.

불협화음의 바이브를 타고 헬나이트에게 이중고를 선사했다.

심지어 두 상반된 성격의 공격은 끝도 없었다.

 

투콰콰콰콰콰!

 

기회를 잡은 하비엘이 작정하고 총공세에 나섰다.

로이드의 퇴마송(?) 메들리도 더욱 구성지게 간드러졌다.

"마하반야! 바라밀다! 심경!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 오온개공! 도일체고애애애애-액!"

- ...그으읏!

이건 또 무슨 기괴한 주술일까.

헬나이트는 더욱 큰 혼란에 빠졌다.

물론 저 노래로부터 받는 실질적인 타격은 전혀 없었다.

다만 정신이 매우 산만하고 어지러워졌다.

그렇잖아도 하비엘의 파상공세를 받는 판국이었다.

그걸 막아내는 데만도 전력을 기울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한데 하나뿐인 다리를 거머리처럼 끌어안은 놈이 기괴한 주술을 제멋대로 불러대니 그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주술을 부르는 저 인간 놈의 음정마저 최악이었다.

손톱으로 철판을 긁는 소리가 이럴까.

혹은 귓바퀴에 달라붙은 매미 소리가 이럴까.

시끄러운 것은 둘째치고 그야말로 불협화음이 따로 없었다.

그렇다.

로이드는 지옥의 기사마저 진심으로 학을 뗄 수준의 음치였던 것이었다.

- ...그만!

결국, 더 견디지 못한 헬나이트가 거칠게 고개를 흔들었다.

로이드에게 붙잡힌 다리로 땅을 박찼다.

그렇게 해서라도 로이드를 털어내려 했다.

그게 헬나이트의 실수였다.

 

스컥!

 

- ...!

아주 잠깐 헬나이트의 주의가 흐트러진 틈새로.

오러를 담은 은빛 롱소드가 헬나이트의 두개골을 파고들었다.

176화. 어깨를 나란히 (2)

 

 

스컥!

 

오러를 담은 은빛 롱소드가 번득였다.

섬전 같은 기세로 헬나이트의 두개골을 파고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 ...!

허공으로 도약하고 있던 헬나이트.

지옥 기사의 대검이 움직였다.

 

콰우우-!

 

자신의 위쪽 공간을 휩쓸었다.

하비엘의 검이 찔러져 내려오는 방향이었다.

그러나 헬나이트의 대검 궤적은 롱소드의 궤적과 겹치지 않았다.

빗나가서?

아니었다.

'하비엘을 노리고 있어.'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눈을 부릅떴다.

헬나이트의 다리에 찰싹 달라붙어 온몸으로 매달려 있던 그였다. 고개만 들면 위쪽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두 지켜볼 수 있었다.

덕분에 보였다.

깨달을 수 있었다.

헬나이트의 의도를.

'이놈, 하비엘과 같이 죽으려는 거야.'

두개골이 찔리는 걸 방어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그걸 기회 삼아 하비엘의 몸통을 통째로 갈라 버리려 들고 있었다.

짧은 시간.

로이드의 두뇌가 핑핑 돌아갔다.

이제부터 펼쳐질 싸움의 향방, 각을 쟀다.

'이거 쌔한 느낌이 드는데.'

헬나이트와 하비엘.

서로에게 치명타를 입힌다면?

하비엘만 쓰러질 것이다.

헬나이트는 상대적으로 멀쩡할 것이다.

그러면 혼자 남은 자신도 헬나이트에게 디저트 거리가 되는 것은 당연지사.

'막아야 해!'

하비엘의 롱소드와 헬나이트의 대검.

이미 엇갈린 채 서로를 지나치고 있었다.

각자의 목표를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하비엘은 헬나이트의 두개골을.

헬나이트는 하비엘의 몸통을.

찌르고 가르려 하는 순간.

로이드가 냅다 두 손을 위로 뻗었다.

헬나이트의 흉갑 아래로 드러난 갈빗대를 철봉 잡듯 움켜쥐었다.

아스라한 심법과 마나하트, 팔뚝과 등짝 근육까지.

지닌 모든 힘을 동원해서 턱걸이하듯 힘차게 당겼다.

'그아압!'

 

뽀각!

 

헬나이트의 상체가 살짝 당겨졌다.

지옥 기사의 움직임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순간적으로 흔들린 균형.

단 1밀리미터의 주춤거림.

그 작은 차이가 대검의 궤도를 비틀었다.

 

후우웅!

 

대검이 아슬아슬하게 허공을 갈랐다.

그 틈새로 하비엘이 몸을 비틀었다.

롱소드를 내뻗었다.

끝까지.

 

스컥!

 

- ...!

 

롱소드에 꿰뚫린 두개골.

헬나이트의 전신이 크게 떨렸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라는 듯, 마치 발악하듯, 더욱 흉맹한 기세로 온몸을 회전시켰다. 대검을 휘둘렀다. 위로, 아래로, 옆으로. 범위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부술 기세로 날뛰었다.

하비엘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맞불을 놓았다.

그의 롱소드가 현란한 움직임을 선보이며 헬나이트의 빈틈을 착실하게 찌르고, 갈랐다.

그때마다 헬나이트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놈의 골반과 다리를 끌어안은 로이드도 잠자코 있지 않았다.

두 팔과 다리로 매미처럼 헬나이트의 움직임을 봉쇄한 채, 그 상태에서도 자유롭게 놀릴 수 있는 무기를 십분 활용했다.

바로 입이었다.

"내게 강 같은 평화! 내게 강 같은 펴엉화! 내게 가강강강가강강! 강 같은! 펴어엉화! 넘치네에에엑!"

로이드가 힘껏 노래했다.

군대 시절의 기억을 되살리며.

혹은 어릴 적 엄마 따라 절에 갔던 추억을 떠올리며.

자신이 아는 교회 노래와 불경을 모조리 동원했다.

퇴마송을 발사하는 그의 성대가 힘껏 요동쳤다.

혓바닥 위로 온갖 불협화음이 물결쳤다.

"색즉시고오옹! 공즉시색! 수상행시이익! 역부여시 사리자! 시제법공사아아앙!"

온 힘을 기울여 외치고 노래했다.

음정 이탈과 삑사리가 수시로 일어났다.

물론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었다.

그는 진심 제대로 노래하려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매몰찬 하늘은 그에게 공부의 재능은 주었으되 음악적 재능은 1그램도 주지 않았다.

그렇다.

그는 음치였다.

그것도 매우 심각한 음치였다.

'젠장. 나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거든!'

혼신의 힘을 다해 노래하며.

로이드는 문득 옛 기억을 떠올렸다.

군대에서 이등병 시절이었던가.

그때도 노래 때문에 엄청나게 고생했었다.

아침 알통 구보 때 군가를 부를 때마다 선임들에게 갈굼을 당했다.

음정이 중요하지 않은 군가마저 초월적 불협화음으로 전락시키는 어마어마한 음정 감각이 원인이었다.

그때뿐만이 아니었다.

군대에서의 매주 일요일 오전.

살면서 처음이자 유일하게 열심히 교회를 다녔더랬다.

교회에서 초코파이를 줬기 때문이었다.

한데 거기서도 자신은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처음 교회에 가서 찬송가를 부르던 날이었던가.

이놈의 노래 때문에 또 눈총을 받아야 했다.

나름 자신은 열심히 따라 불렀던 건데.

군종 목사가 어찌나 기겁하던지.

'완전 지상에 강림한 마귀 새끼 보듯이 날 쳐다봤지. 아직도 그 눈빛이 잊히지가 않아!'

그뿐이었던가.

그 후에도 서러운 일이 또 있었다.

복학 직후였던가.

그때 딱 한 번 학교에서 썸을 탔던 적이 있었다.

하루는 썸녀와 같이 코인 노래방을 갔다.

덕분에 그날부로 썸이 끝났다.

'....'

울적해지니까 더 생각하지 말자.

대신 인정하자.

그래, 난 음치다.

하지만 그게 부끄럽진 않다.

가끔은 이걸 무기로 활용할 수 있는 거니까.

'지금처럼! 이번엔 천수경으로 간다!'

어릴 적 부처님 오신 날.

엄마 손잡고 갔던 절이 떠올랐다.

그때 들었던 스님의 독경 소리도 떠올랐다.

로이드의 눈동자에 굳은 결의가 배어났다.

그때부터였다.

"정구업진언!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불심 가득한 바이브를 담고서 로이드의 목소리가 더욱 결연하게 뒤집어졌다.

그럴수록 헬나이트의 정신이 더욱 산만해졌다.

- ...그만!

제발 그만 해 미친놈아!

헬나이트는 진심으로 빌고 싶어졌다.

눈앞의 은발 기사 하나만으로도 버거운데.

아래쪽에 매미처럼 찰싹 달라붙은 이상한 놈이 지옥 마귀들도 학을 뗄 기이한 노래를 불러대고 있었다.

심지어 그 목청은 또 얼마나 뻔뻔하게 우렁찬지.

아까 검에 찔린 두개골 균열이 벌어질 지경이었다.

아니, 실제로 헬나이트의 두개골은 두 쪽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아까 하비엘에게 찔린 타격 때문에.

그걸 회복할 시간을 벌지 못해서.

그 뒤로도 연달아 타격을 받아서.

헬나이트의 전신이 실시간으로 무너지고, 부스러지고, 허물어져 갔다.

그리고 마침내.

"로이드 님, 지금!"

하비엘이 외쳤다.

외침과 동시에 오러를 담은 발파가 터졌다.

그 순간 로이드가 노래를 멈추었다.

헬나이트의 골반과 다리를 놓았다.

옆으로 몸을 날렸다.

발파가 순식간에 덮쳐왔다.

헬나이트의 상반신을 휩쓸었다.

- ...!

 

투확-!

 

헬나이트의 갑옷이 녹아내렸다.

방어를 위해 앞으로 내밀었던 대검도, 그걸 쥐고 있던 뼈마디도, 상반신 전체가, 오러 담긴 발파의 기세에 휩쓸렸다. 녹아내렸다. 끊어지고, 부스러지고, 가루가 되어, 흩어지고 날아갔다.

 

달칵!

 

간신히 남은 헬나이트의 하체가 흔들렸다.

하나뿐인 다리가 무릎을 꿇었다.

그러더니 옆으로 기우뚱.

이내 뼈마디가 모조리 끊어지며 허물어졌다.

 

와그닥....

 

가루가 되어 흩어진 상반신.

무너져 버려 쌓인 하반신.

기묘한 침묵이 공회당 내부를 사로잡았다.

옆으로 몸을 던졌던 로이드는 숨을 몰아쉬며 상체를 일으켰다.

'자, 잡았다.'

헬나이트를 잡았다.

자신과 하비엘.

둘이서 저 엄청난 놈을 끝장내 버렸다.

한데 그때였다.

"아직 안심하기에 이릅니다. 저놈, 되살아날 겁니다."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하비엘이 말했다.

심지어 녀석은 무너져 내린 헬나이트의 뼈 무더기를 향해 계속해서 검을 겨누고 있었다.

"되살아난다니? 설마 부활?"

"그건 모르겠습니다. 다만-"

되물은 이쪽을 향해 하비엘이 재빨리 대꾸했다.

"아까도 이랬습니다. 로이드 님이 오시기 전, 이미 놈을 제압했었습니다. 한데 되살아났습니다. 아무런 타격도 안 받았다는 듯이 말입니다."

"잠깐. 그렇다는 말은...."

"네, 놈의 마나가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

듣고 보니 사실이었다.

아스라한 심법을 통해 아스라이 느껴졌다.

무너져 쌓인 헬나이트의 하반신 뼈 무더기에 대량의 마나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조금도 흩어지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허공에도 수없이 마나가 뭉쳐져 있어.'

조금 전 하비엘의 발파를 정통으로 맞아서 가루가 되어 버린 상반신.

그 가루가 공기 중에 떠다니고 있었다.

한데 거기서도 엄청난 마나가 느껴졌다.

'뭐 이런.'

소름이 죽 돋았다.

마나가 흩어지지 않았다는 것.

그건 곧 놈이 소멸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이러면 에런데. 맞아. 그러고 보니 철혈의 기사에서도 이것과 비슷한 언급이 있었어.'

로이드는 문득, 소설 철혈의 기사 속의 내용을 떠올렸다.

나마란의 장벽 사태가 터지기 직전.

소설 속의 칸나바로가 지껄였던 대사였던가.

'칸나바로는 헬나이트만 소환하면 모든 게 이루어질 거라고 자신했었지. 맞아. 엄청나게 강한 데다, 죽여도 끝없이 부활한다고 했어. 지옥의 존재이기 때문에. 설령 전신의 뼈가 가루가 되어도 부활할 수 있다고 했지, 아마.'

그만큼 지독한 존재가 헬나이트였다.

동시에 헬나이트를 소멸시킬 유일한 방법도 잠깐이나마 언급되었었다.

'헬나이트의 마나를 완전히 고갈시키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했어. 그래서 칸나바로는 자신만만했지. 그럴 법도 해. 마나를 고갈시키려면 엄청나게 굴리고 때리고 혹사시켜서 힘을 빼거나, 혹은 특수한 마법이나 도구로 마나를 흡수해야 하니까.'

한데 세상 누가 헬나이트를 녹초가 되도록 두들길 수 있을까.

혹은 어떤 도구나 마법이 헬나이트의 강대한 마나를 흡수할 수 있을까.

둘 다 이론상으로만 가능한 이야기다.

그걸 실제로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이나 도구, 마법은 거의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소설 속 칸나바로는 헬나이트를 거의 무적의 존재일 것이라 확신했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겠지.'

소설 속 칸나바로가 확신한 헬나이트의 무시무시한 부활 능력.

아까 하비엘이 했던 이야기로 미루어보면 사실인 듯했다.

그 말은 즉....

"그럼 내가 처리할게."

"예?"

이쪽을 돌아보는 하비엘.

녀석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져 있었다.

그 모습에 절로 미소가 나왔다.

항상 툴툴거리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엔 이쪽을 걱정하고 지켜주려는 녀석의 마음이 잘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내가 한다고. 너도 알잖아.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그 무차별적인 마나 흡수 말씀이십니까."

"어."

급속 충전.

지금은 그게 필요한 때다.

헬나이트의 마나를 고갈시켜야 하니까.

그러지 못하면 끝없이 부활하는 놈을 감당해야 할 테니까.

그 부활의 고리를 끊기엔 급속충전만 한 것이 없으리라.

"그러니까 물러서. 아무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고."

"로이드 님."

"알아. 나도 걱정돼. 겁도 나고."

사실이다.

염려 담긴 녀석의 표정.

녀석을 마주하며 피식 웃어 보였다.

"너도 알 거야. 내가 원래 과식을 즐기는 스타일은 아니잖아."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야지. 사실 나도 안 내켜. 그런데 이거 아니면 방법이 없어 보여서. 배탈이 조금 걱정되긴 하는데, 일단 할 수 있는 만큼은 해보려고."

짐짓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솔직히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다.

무려 헬나이트의 마나다.

그걸 무차별적으로 흡수하고도 멀쩡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떠올리면 지금 이게 미친 짓이 아닌가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정말로 솔직하게 말해서 안 내키고, 겁도 났다.

'하지만 안 하면 어차피 죽어. 아무리 하비엘이라도 끝없이 부활하는 헬나이트를 감당할 순 없을 테니까.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 이 도시의 모두가 똑같아.'

그러니 헬나이트를 잠깐이마나 제압한 지금이 기회다.

지금 이걸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지 모른다.

이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모두가 당한다.

물론 자신도 당할 것이다.

'그러니까 어차피 이판사판이야.'

안 하면 죽음.

실패해도 죽음.

성공해야 생존.

그렇다면 선택지가 없다.

일단 해보는 거다.

그렇게 입술 깨물며 헬나이트의 허물어진 하반신 앞으로 다가섰다.

심호흡을 하며 마음의 준비를 갖추었다.

"물러서."

하비엘을 뒤로 물렸다.

더 이상의 망설임 없이.

강철삽을 들었다.

 

투화학-!

 

전력을 담아 쏘아낸 삼중발파가 공회당 천장을 날렸다.

급속도로 마나가 고갈되며 어지러움이 몰려왔다.

약간의 구역질을 참아내며 스킬창을 열었다.

옵션 발동을 선택했다.

 

[아스라한 심법 스킬 옵션 ⑤ : 급속충전이 발동됩니다.]

[주위의 무작위한 대상으로부터 대량의 마나를 흡수합니다.]

 

그때부터였다.

세 갈래 마나써클이 포효했다.

옵션 범위 내의 모든 마나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어떤 것도 그냥 놔두지 않았다.

바닥의 대리석도.

굴러다니던 파편도.

허물어진 헬나이트의 하체도.

공기 중에 흩어진 뼛가루와 마나도.

모조리 게걸스럽게 흡수했다. 포식했다.

흡수하기 쉬운 것과 버거운 것.

순수한 것과 혼탁한 것.

그 어떤 것도 가리지 않았다.

빼앗고, 갈취하고, 강탈하여, 내 것으로 삼았다.

만약 헬나이트가 정상적인 힘을 지닌 채 소환되었다면.

혹은 지금처럼 제압당해 허물어진 상태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당하진 않았을 것이었다.

급속 충전에 저항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완전하지 못한 모습으로 소환되었다.

제압당해 허물어져 빈틈이 생겨났다.

- ...!

난폭한 흡수의 메아리 속에서 지옥의 군단장, 헬나이트 지오렉시우스 경의 비명이 아스라이 울렸다.

단말마의 외침.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아스라한 심법 스킬 옵션 ⑤ : 급속충전의 발동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광포한 마나 흡수가 종료되었다.

날뛰던 마나써클이 잠잠해졌다.

로이드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런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

그곳 허공에는 이미 수많은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당신은 지옥왕 휘하의 군단장, 헬나이트 지오렉시우스 경을 소멸시켰습니다.]

[당신이 보여준 이 엄청난 위업에 지옥의 왕이 감탄하고 있습니다. 휘하 군단장을 잃은 지옥의 지배자가 당신의 재능과 기지, 발전 가능성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당신은 헬나이트의 마나를 대량으로 흡수하여 그 일부를 자신의 것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이 희귀한 경험이 당신의 보유 스킬과 옵션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마나하트 스킬 옵션, '④ 언데드 지배'가 스킬 하위 옵션에서 독립스킬로 승격되었습니다.]

 

[언데드 지배 스킬이 개화되었습니다.]

[언데드 지배 스킬이 강화되었습니다.]

[언데드 지배 스킬 사용의 각종 제한과 조건이 대폭 완화, 삭제되었습니다.]

177화. 은혜 갚는 해골 (1)

 

 

[마나하트 스킬 옵션, '④ 언데드 지배'가 스킬 하위 옵션에서 독립스킬로 승격되었습니다.]

 

'뭐?'

로이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급속 충전을 사용한 직후였다.

무한한 부활의 권능을 사용하는 헬나이트를 완전히 끝장내기 위해서, 외통수의 위험을 없애기 위해서 감행한 급속 충전이었다.

모 아니면 도.

그 시도의 끝에 처음 눈을 뜨며 로이드는 생각했다.

'살았구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내용보다도 일단 메시지가 보인다는 게 반가웠다.

자신이 최소한 죽지는 않았다는 뜻일 테니까.

'헬나이트는?'

눈동자를 재빨리 샤브작 굴렸다.

엄마 몰래 가스레인지 위 미역국 냄비에서 고기만 쇽쇽 빼먹을 때처럼 주위 상황을 살폈다.

'없다.'

헬나이트의 마나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 난폭하고도 사악한 기운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 뜻은 명확했다.

헬나이트가 소멸했다.

자신의 시도가 성공적으로 먹혀들었다.

그제야 안심한 로이드의 눈동자가 눈앞의 메시지를 향했다.

위기를 넘겼다.

그러니 이제는 풍요로운 수확(?)의 시간이다.

그렇듯 빵빵해진 그물을 바라보는 어부의 흐뭇한 눈길처럼, 로이드의 시선이 메시지를 읽어내렸다.

 

[언데드 지배 스킬이 개화되었습니다.]

[언데드 지배 스킬이 강화되었습니다.]

[언데드 지배 스킬 사용의 각종 제한과 조건이 대폭 완화, 삭제되었습니다.]

 

'오.'

시작이 좋다.

조짐도 괜찮다.

기대감이 콩닥콩닥.

눈동자도 더 빨리 데구르르.

 

[당신의 마나하트는 헬나이트의 마나를 흡수, 처리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살아 있는 인간이기에, 그 마나를 모두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는 없었습니다. 대신 마나하트의 일부가 언데드의 마나와 공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특성이 당신의 마나하트 스킬 옵션, 언데드 지배를 독립 스킬로 승격시켰습니다.]

 

[스킬명 : 언데드 지배]

[단계 : 초급 Lv. 1]

[일정 규모의 하급 언데드 병사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지배를 받아들인 언데드 병사들은 죽음마저 넘어선 충성심과 대가 없는 성실함을 제공할 것입니다.]

[지배 가능한 언데드 병사의 종류 : 좀비, 스켈레톤]

[지배 가능한 언데드 병사의 숫자 : 200]

[현재 지배 중인 언데드 병사의 숫자 : 0]

 

'와우.'

스킬 내용을 다 읽은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이건 장난이 아니었다.

그저 언데드 병사를 지배할 수 있게 되어서?

'아니, 공짜 일꾼을 부릴 수 있게 되어서지!'

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고효율의 노동자를 200명이나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무임금.

무한 노동.

무자비한 노 복지.

스켈레톤들이라면 그러한 3무(無)의 환경에서도 묵묵히 삽질을 이어갈 것이다.

게다가 밥값도 안 든다.

새참 챙겨줄 필요도 없다.

숙소?

그냥 사이즈 맞는 관짝 200개만 놔주면 된다.

그렇게만 해주면 쉴 땐 알아서들(?) 관뚜껑 덮고 조용히 쉴 것이다.

말 그대로 밥값 안 들고 일당 안 드는 작업 로봇 200대가 생기는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좋아. 안 그래도 줄줄이 나가는 인건비 감당하는 것도 장난이 아니었는데.'

생각하자니 절로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지금까지 수많은 공사를 치러낸 로이드였다.

동시에 그동안 한 번도 인건비를 떼먹은 적 없는 로이드였다.

아무리 사소한 공사라도.

혹은 엄청난 시공을 벌이더라도.

설령 자신의 지갑이 텅텅 비게 된다 해도.

작업자들의 인건비만은 무조건, 반드시, 성실하게 챙겨준 그였다.

자신이 대한민국에서 겪었던 수많은 설움을 생각하면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같은 쓰레기가 되긴 싫었으니까.'

임금 미지급.

생각만 해도 쓰라렸다.

열심히 일했는데 일당을 못 받는 것.

그런데 그걸 따지면 돌아오던 비웃음과 무시.

이거 왜 이러냐고.

작업 하루 이틀 하냐고.

각자 사정이 있는 거니까 좀 좋게 가자고.

뻔뻔하게 자신들도 어렵다는 식으로 말하던 고용주들이 얼마나 얄밉던지.

그래서였다.

당시의 기억을 가슴에 박힌 비수처럼 지니고 있던 로이드는 그들과 같은 짓거리를 하고 싶지 않았다. 닮고 싶지도 않았다.

해서 항상 작업자들의 임금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성실하게 챙겨줬다. 아니, 때로는 무리를 해서라도 무조건 챙겨줬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나마란에 온 목적도 작업자들에게 지급할 보너스 정산 금액을 감당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나마란의 장벽 사태를 막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그동안 벌였던 아파트 단지 시공.

대하수로 공사.

영지 전체를 아우르는 굵직한 공사를 연이어 치르면서 연말에 엄청난 임금을 지급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목돈이 필요해졌다.

그래서 나마란에 왔고, 사면 안정 시공을 따내게 되었다.

한데 이번 임금 지급만 제대로 해내면?

다음부턴 전과 같은 고민에 얽매일 일이 적어질 듯했다.

'어지간한 공사는 언데드 병사로 치르는 거지. 거기에 기존의 공병대를 함께 투입하면 돼. 그 정도면 인건비를 엄청나게 아낄 수 있어.'

공병대는 현장을 지휘하며 중심을 잡아주고.

언데드 병사들은 잡일꾼의 역할을 도맡고.

그러한 청사진이 로이드의 머릿속에 주르륵 그려졌다.

한데 헬나이트 퇴치의 보상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추가적인 메시지가 또 떠올랐다.

 

딩동.

 

[당신은 지상에 강림한 지옥의 군단장, 헬나이트를 제거하는 영웅적인 전투에 참여하였습니다.]

[당신은 이 과정에서 헬나이트의 청각에 심대한 손상을 입힘으로써, 희망이 없던 전투를 유리하게 이끄는 큰 공훈을 세웠습니다.]

[나마란 시의 일부 시민들이 당신의 이러한 기지와 용기, 상상 초월 음정 이탈의 현장을 모두 목격하고, 귀에 담았습니다.]

[이에 나마란 시의 시민들 사이에 당신에 대한 독특한 찬사가 널리 퍼지게 될 것입니다.]

 

[당신을 향한 새로운 찬사가 생성되었습니다.]

[새로운 찬사, <저세상 고음불가>가 생성되었습니다.]

 

[저세상 고음불가]

[찬사 등급 : 지역 영웅담, 지옥 괴담]

 

드높게 솟은 나마란의 장벽.

사람들은 울부짖으며 쓰러지고.

모두가 구원을 바라는 그 순간.

은발의 기사 떨쳐 일어났네.

지옥의 기사에 맞서 싸웠네.

그러나 중과부적이었다네.

쓰러뜨려도 일어나는 지옥의 힘.

그 미지의 힘 앞에 은발의 기사는 염원하였네.

누군가 어깨 나란히 함께 싸울 자.

모두를 위해 분연히 나서 줄 사람.

하나라도 있다면 좋으련만.

그러자 누군가 화답하였다네.

내게 강물 같은 평화.

마하반야 수리수리 사바하.

지옥 기사의 다리 거머리처럼 부여잡고서.

힘껏 노래하사 지옥의 기사가 흔들렸다네.

제발 그만.

노래하지 마, 제발.

고성방가는 자제해 주세요.

오직 그 외침만이 지옥 기사의 유언이 되었다네.

 

[찬사 효과 : 당신은 언데드를 포함한 모든 존재들 사이에서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지상과 지옥에서 당신은 '악마적 음정의 소유자'로 널리 악명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지상과 지옥의 모든 존재들은 당신의 노래를 두려워하거나 때로는 존경하게 될 것입니다.]

[찬사 지역 : 나마란 백작령, 지옥]

[찬사 유지 기간 : 80년(나마란 백작령) / 3만 년(지옥)]

[찬사의 효력은 찬사를 받는 지역과 기간 내에서 24시간 적용됩니다. 또한, 추후 당신의 행적에 따라 찬사를 받는 지역과 기간이 확장 및 연장, 축소 및 단축될 수 있습니다.]

[찬사가 매달 제공하는 CP : 4]

 

[현재 보유 중인 CP : 254]

 

"...."

아예 전국구 음치가 된 건가.

아니, 이 경우는 지옥구까지 포함하게 됐으니 그야말로 글로벌, 디멘셔널 레벨의 음치로 명성을 떨치게 됐다고 해야 하나.

'음치라는 이유로 노래방에서 썸녀랑 깨진 것도 서러웠는데. 그렇지, 은향아?'

오랜만에 스쳐 간 옛 썸녀의 이름을 쓸쓸히 되뇌어 본다.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대신 이쪽의 속마음도 모르는 하비엘 녀석의 손짓만이 눈앞에서 어른거릴 뿐.

"...습니까?"

"어?"

눈과 메시지창 사이를 휘휘 저으며 끼어든 손짓.

그 손짓에 로이드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하비엘이 이쪽의 눈앞에 손을 휘휘 저어 보이고 있었다.

"괜찮습니까?"

이쪽을 유심히 살펴보는 눈초리.

그 눈빛이 평소보다 신중해 보인다.

딱 반 발짝 정도쯤.

"너 혹시 내 걱정해주는 거냐?"

절로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한데 녀석이 어쩐 일인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걱정하고 있습니다."

"헐. 미쳤어?"

걱정해주는 게 맞다고 대놓고 말하다니.

로이드는 뜨악하는 기분으로 물었다.

"너, 누구야."

"...."

"아무리 봐도 하비엘이 이럴 놈이 아닌데. 솔직히 말해. 우리 하비엘 어디다 숨겨놨어. 납치한 거냐? 가둬놨냐? 묶었어? 살아는 있어?"

"...전 납치당하지도, 감금당하지도 않았습니다만."

"그럼?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네가 날 걱정한다고 말하는 건데. 혹시 나한테 받아낼 빚이라도 있어?"

"물론 아닙니다. 다만-"

하비엘이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조금 전에 로이드 님의 노래를 들으며 없던 걱정이 생겼습니다."

"내 노래를 들으면서?"

"예."

"노래가 어땠길래."

"지상에 존재할 수 없는 음색과 음정이었습니다. 듣는 것만으로도 괴로웠습니다. 하마터면 아까 그 해골 기사가 아니라 로이드 님께 발파를 날릴 뻔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욱해서 말입니다."

"...어이."

"그래서 걱정하며 묻는 겁니다. 혹시 정신에 이상이 생기신 건 아닌지. 본인도 모르게 흑마법사에게 나쁜 세뇌를 당하신 건 아닌지 말입니다."

"이봐, 나는...."

"정말로 괜찮으신 겁니까?"

"...."

너무나 진지한 녀석의 눈초리.

그걸 보고 있자니 절로 비애감이 쑴펑쑴펑 솟구쳐 올라왔다.

로이드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대꾸했다.

"나 완전 멀쩡하거든?"

"정말이십니까."

"어."

"그럼 아까 그 기괴한 노래는 대체...."

"나름 최선을 다해서 부른 거거든."

"그럼 로이드 님, 설마...."

"얘기하지 마."

"음치...."

"얘기하지 말라고."

"...."

이쪽을 걱정하던 하비엘의 눈빛이 싹 사라졌다.

대신 녀석의 눈빛에 안쓰러움이 잔뜩 장전되었다.

하아.

대체 뭔 일로 녀석이 순순히 날 걱정해주나 싶었는데.

로이드는 짜게 식어가는 감동을 가슴속 한쪽에 와락 접어놓으며 대꾸했다.

"쯧. 이럴 때가 아니야. 일단 움직이자. 사람들도 수습하고. 그나저나 넌 괜찮냐."

"예. 괜찮습니다."

"그럼 가자고."

"예."

승리의 기쁨도 잠시.

엉망이 된 공회당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두 사람의 의식을 현실로 되돌렸다.

마나를 대량으로 빼앗겨 쓰러진 이들의 앓는 소리였다.

그 소리의 정체를 깨달은 순간 두 사람은 숨을 골랐다.

아스라한 심법을 천천히 일깨웠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공회당 밖으로 걸음을 돌렸다.

아직 사태는 끝나지 않았으니까.

갑작스러운 마나 고갈을 겪는 수많은 시민들.

그들에 대한 응급처치가 필요할 테니까.

"역시 이런 일에는 아스라한 심법이 유용하겠지요."

"어. 공기 중의 마나를 흡수해서 넣어주면 되겠지?"

"길고 바쁜 하루가 될 것 같습니다."

"동감이야."

희미한 쓴웃음과 함께.

두 사람이 공회당을 나섰다.

 

 

사태 수습은 무사히 끝났다.

다행스럽게도 나마란의 시민들 중에는 사망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시민들의 마나를 게걸스럽게 흡수했던 나마란의 장벽.

그 장벽이 이른 시간에 무력화된 덕분이었다.

대부분 시민들이 죽을 정도로까지는 마나를 빼앗기지 않았다.

다만 기력이 크게 상한 이들이 제법 있었다.

그런 이들은 로이드와 하비엘의 응급처치를 받았다.

마나 흡수와 배출에 특화된 아스라한 심법.

그 특성이 여지없이 진가를 발휘했다.

마나 고갈로 위독하던 사람을 살렸다.

쓰러져 있던 사람을 일으켰다.

버티던 사람에게 활력을 돌려주었다.

그 외에 흑마법사 칸나바로는 왕도로 압송되었다.

완벽하게 무력화된 채로 짐짝처럼 옮겨졌다.

'아마도 왕도에서 열렬한 심문을 받게 되겠지. 왕국 최고 수준의 궁정마법사들이 세뇌와 자백 작업에 모조리 투입되겠지. 국왕 알리시아는 그런 쪽으로는 진짜 얄짤없는 사람이니까. 그 누님, 대놓고 완전 단호박이라서.'

이틀 내내 시민들에 대한 응급처치를 마친 날 저녁.

녹초가 된 로이드는 여러 잡념을 접으며 숙소에 널브러졌다.

한데 이상한 일이었다.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걸까.

막상 침대에 몸을 던졌는데도 잠이 오지가 않았다.

몸은 푹 젖은 빨래처럼 늘어졌는데, 머리는 계속해서 여러 잡념을 떠올려댔다.

'차라리 이럴 땐 네가 부럽네.'

로이드는 옆 침대에서 푹 잠든 하비엘을 쳐다보았다.

녀석은 자장가(?) 한 방에 잠들었다.

부러웠다.

피곤해서 자고 싶은데.

어쩐지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대신 갖가지 생각과 고민만 자꾸 떠올랐다.

'다행히 나마란 사태는 막아냈고. 나마란 백작도 요양이 필요할 정도로 원기가 상하긴 했지만 목숨엔 지장이 없고. 이제 걱정거리가 사라진 건가. 아니, 그건 아닐 거 같은데.'

엄청난 과정을 거친 끝에 나마란의 파국을 막아냈다.

한데도 로이드의 미간 주름은 펴질 줄을 몰랐다.

이유는 간단했다.

'사태를 막아낸 건 좋은데, 공사에 큰 차질이 생기게 됐네.'

정말이었다.

시민들이 다들 마나를 왕창 빼앗겨서.

덕분에 원기가 팍 상해 버렸다.

그나마 다들 거동은 가능하다곤 하지만, 큰 힘을 쓰는 일을 하기엔 조금 시간이 필요할 듯했다.

'예를 들자면 공사 같은 거.'

현장 일은 힘들다.

무거운 자재를 옮겨야 하고.

종일 덥고 추운 곳에서 삽질, 곡괭이질, 망치질을 해야 한다.

그런데 그 일을 해야 할 일꾼들도 이 도시의 사람들이다.

즉, 이번 사태 때문에 원기가 팍 상했다.

당분간 현장에 투입시키기가 어려워져 버렸다.

'적어도 다들 보름은 쉬어야겠지. 기운들을 차리려면. 아, 공사 일정 늘어지는 거 완전 싫은데.'

이곳에서 따낸 사면 안정 시공.

설계를 대부분 끝내놓은 상황이었다.

슬슬 인력 구성을 마치고 기초 시공을 시작하면 딱 좋을 타이밍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인력 수급에 차질이 생기니 짜증이 팍 났다.

'빨리 공사 마치고 싶다. 공사 대금 빵빵하게 챙겨서 집에 돌아가고 싶다. 더 이상의 돈 걱정 없이 프론테라 영지에서 꿀만 빨면서 지내고 싶다.'

차라리 이럴 때쯤 언데드 병사들이 짠 하고 생기면 좋으련만. 그럼 새로 얻은 언데드 지배 스킬을 통해 현장 인력으로 당장 부려 먹을 수 있으련만.

'그렇다고 멀쩡한 무덤들을 파헤칠 수도 없고.'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답답했다.

언데드 지배 스킬.

다 좋은데, 언데드 병사를 구할 방법이 막막하다는 게 좀 아쉬웠다.

'흑마술이라도 배워야 하나. 그건 또 귀찮아서 싫고. 엄두도 안 나고. 아, 잠이나 자자.'

로이드는 침대에서 몸을 뒤척였다.

생각과 고민은 여기까지만.

피곤하니까 이제 자자.

그렇게 다짐하며 눈을 감았다.

슬며시 온몸이 노곤해지기 시작했다.

정신이 몽롱하게 떠오르며 졸음이 다가왔다.

'....'

딱 좋아.

이대로만.

이렇게만.

그럼 다들 굿나....

그때였다.

 

똑똑똑.

 

누군가가 숙소 문을 노크했다.

"...."

로이드의 미간에 다시금 주름이 생겨났다.

아.

겨우 잠이 들려던 참이었는데.

'무시하자.'

그는 아예 베개로 머리를 덮으며 엎드렸다.

하지만 문밖의 불청객은 얌전히 떠나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똑똑똑똑똑!

 

안 돼.

돌아가.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로이드는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으으, 빨리 보내 버리자.'

대체 누굴까.

누구이기에 이렇게 극성인 걸까.

혹시 백작가에서 보낸 사람인 걸까.

또 무슨 다급한 일이 생겨난 걸까.

로이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미치겠네.'

경험상 이럴 땐 빨리 용건을 해결해주는 게 차라리 낫다.

그래야 저쪽도 빨리 꺼져줄 거고, 자신도 다시 평화롭게 잘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이런 오밤중에 대체 무슨 용건이 있어서 자려던 사람 방문을 두드립니까."

결국, 그는 툴툴거리며 숙소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게 멈칫.

방문자들의 모습을 보고는 굳어 버리고 말았다.

해골.

머리 없는 해골들이 방문 앞에 있었다.

그 숫자는 대략 200구쯤 되어 보였다.

"무슨...."

이 오밤중에 머리 없는 해골들의 방문이라니.

한데 그렇듯 로이드가 사라진 어처구니를 찾으려는 순간이었다.

머리 없는 해골들이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상반신을 정중하게 숙였다.

뼈마디 삐그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제일 앞의 해골이 스케치북 크기의 종이를 불쑥 내밀었다.

종이를 한 장씩 천천히 넘기며 보여주기 시작했다.

사라락, 그때마다 종이에 미리 써둔 글귀가 차례로 드러났다.

그 내용은 바로....

 

- 당신은 우리의 두개골을 함부로 버리지 않았다.

- 당신, 우리의 은인이다.

- 우리, 은혜를 갚고 싶다.

- 우리, 뭐든지 하겠다.

- 당신, 갈 곳 없는 우리를 거두어주면 안 될까?

 

"...."

오밤중에 은혜 갚으러 온 제비, 아니, 스켈레톤 무리.

그들의 난데없는 고백(?)을 접한 로이드의 눈동자에서 잠이 확 달아났다.

178화. 은혜 갚는 해골 (2)

 

 

"그래서, 두개골을 안 버리고 챙겨준 나한테 감개무량한 고마움들을 느끼셨다?"

 

삐그닥!

 

자정을 살짝 넘긴 시각.

그때껏 숙소의 촛불을 끄지 못한 로이드는 두 손으로 눈두덩을 꽉 눌렀다.

노곤했다.

종일 뛰어다닌 그였다.

헬나이트와 격렬한 살풀이를 치렀다.

시민들에게 응급처치를 해주느라 종일 아스라한 심법을 사용해야 했다.

그런 끝에 이제야 겨우 좀 쉬나 했더니.

생각지도 못한 손님을 맞이하게 되었다.

무려 200구나 되는 스켈레톤들을 말이다.

- 고마운 정도가 아닙니다.

로이드의 물음에 해골 병사 하나가 두개골을 끄덕였다.

그리고는 종이에 재빨리 대답을 써서 보여주었다.

이 녀석, 나름 스켈레톤 무리의 리더 격인 녀석이라던가.

자신을 '거북목'이라고 불러주면 된다고 했던가.

해골 병사, 거북목이 숯 조각을 쥐고서 제 할 말을 썼다.

- 막막하던 저희였습니다. 억울하게 죽은 것도 모자라, 두개골만 따로 차가운 땅속에 아무렇게나 묻힌 신세였습니다. 몸뚱이는 머리 없는 좀비로 이용당했고 말입니다.

"아, 어제 흑마법사들을 호위하던 그 좀비가 너희였어?"

- 그렇습니다.

"그럼 지금은?"

- 흑마법사들이 대부분 죽었습니다. 칸나바로의 힘도 구속되었고요. 덕분에 저주에서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썩은 살갗이 모두 사라지고 순수한 뼈만 남았습니다.

"으음, 그럼 내가 박살 낸 좀비들은?"

- 저기 있습니다.

거북목이 한쪽을 가리켰다.

그쪽에서 해골 병사 둘이 손을 들어 보였다.

- 왼쪽부터 순서대로 사각턱과 오십견이라고 합니다.

"...."

- 저 친구들, 어제 당신이 흑마법사를 처음 습격할 때 제대로 당했습니다. 몸통이 사라졌지요.

"어, 그랬지."

- 하지만 흑마법사들의 저주가 풀리면서 박살 나고 가루가 됐던 뼈가 모두 복구되었습니다. 저희도 자세한 이유나 원리는 모르긴 합니다만.

"그래도 어쨌건 다행인 거구만?"

- 그렇습니다.

거북목이 두개골을 재차 끄덕였다.

빼곡하게 채워진 종이를 치우고는 새 종이에 숯덩이를 놀렸다.

하얀 종이 위에 까만 글씨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 저주가 풀린 후에 우리는 한곳으로 모였습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까를 의논했습니다. 사실 의논은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느끼다니, 뭘?"

로이드가 물었다.

거북목이 한 손으로 자신의 두개골을 통통, 두드려 보였다.

- 우리들의 머리 말입니다.

"두개골?"

- 예. 우리는 이미 느끼고 있었습니다. 아무렇게나 파묻힌 우리의 두개골을 누군가가 발굴했다는 걸 말입니다. 아울러 그걸 버리지 않고 정중히 보관해주고 있다는 사실도요.

"설마 두개골로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들은 거야?"

- 예.

거북목이 다시금 두개골을 끄덕.

- 모두 들었습니다. 보석을 챙길 때마다 우리의 머리뼈를 향해 정중히 예를 표하셨지요. 무슨 험한 일을 겪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명복을 빈다고. 부디 영면하라고 말씀하시면서 말입니다.

"...."

로이드는 입을 다물었다.

분명 자신이 두개골을 캐낼 때마다 혼잣말처럼 꺼낸 말이었다.

그때는 그저 망자에 대한 예의라고 여겼던 건데.

흑마법사에게 이용당한 이들이 안타까워서.

나중에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려고.

그저 마음속의 이야기를 꺼냈던 것뿐인데.

'설마 그걸 듣고 있었을 줄은 몰랐네.'

약간은 뿌듯해졌다.

한편으로는 쑥스럽기도 했다.

문득, 떠올랐다.

한창 대한민국의 고시원에서 지내던 어느 겨울이었던가.

현장에서 일당을 받아오던 날이었다.

그러다가 길에서 보았다.

칼바람 싸락눈이 내리는 도롯가에서 채소를 파시는 어떤 할머니의 모습을.

내놓으신 채소라고는 나물 서너 소쿠리가 다였다.

한데 그걸 하나도 팔지 못하고 계셨다.

흔한 털모자나 장갑조차 없이.

채소 위에 쌓이는 눈을 온통 부르튼 손으로 치우느라 애쓰고 계셨다.

그런 모습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그 채소, 전부 얼마냐고.

일당 담긴 봉투를 꺼냈던가.

'그땐 내가 미친 짓을 한 거라고 생각했었지.'

물론 좋은 일을 한 건 맞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썩 괜찮은 선행이었다.

대신 그날 저녁 이후로 얼마나 후회를 했던지.

호구.

바보.

멍청이.

그런 머저리가 따로 없었다고 자책했다.

그 몇만 원이 모자라서 겪어야 했던 배고픔에 얼마나 후회를 곱씹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때부터였다.

그 이후로 과한 오지랖은 부리지 않게 되었다.

한 번 선심을 쓴 대가로 배고픔을 겪어보니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선행은 좋아도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지는 말자고.

그렇게 다짐하며 살아왔다.

최근까지도 그랬다.

아니, 지금도 그랬다.

200개에 달하는 보석을 챙기느라 발굴한 두개골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자신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일이라서.

그래서 버리지 않았을 뿐이었다.

정중히 챙겼을 뿐이었다.

한데 그게 이런 방식의 보답으로 돌아오게 될 줄은 몰랐다.

"으음, 그래서 결론을 말하자면, 너흴 모두 거두어달라고?"

- 그렇습니다.

해골 병사 리더, 거북목이 두개골을 끄덕이며 대답을 썼다.

- 당신이 아니었다면 우린 여전히 머리를 되찾지 못했을 겁니다. 두개골이 마법에 걸린 채 묻혀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런가."

- 예.

"날 따르게 되면 일을 굉장히 많이 하게 될 텐데. 무덤에서 편히 쉬지 못하게 되어도 상관없는 거야?"

- 어차피 죽음 이후의 삶을 부여받은 우리입니다.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광야를 배회하다가 모험가나 군대의 토벌을 받게 될 신세지요. 차라리 당신처럼 믿을 수 있는 분의 휘하에서 합법적으로 보호받으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쩝. 그건 말이 되네. 그렇지?"

로이드가 싱긋 웃었다.

옆을 돌아보았다.

그곳에선 하비엘이 졸린 눈을 하고서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이건 대체 무슨 일인지.'

하비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원래는 잘 자고 있던 그였다.

평소처럼 로이드의 자장가를 듣고서.

완벽한 꿈나라에서 뒹굴거리던 은발의 기사였다.

한데 별안간 침실이 어수선해졌다.

로이드의 말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뭔가 달각거리는 소리가 엄청나게 많아졌다.

설마 적일까.

절로 눈이 뜨였다.

침실 광경을 보고는 경악하고 말았다.

스켈레톤 200구가 숙소를 꽉 채울 기세로 들어찬 모습을 자다 깨서 본다면, 누구나 경악하고 기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약 때마침 로이드가 상황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즉시 달려들어 스켈레톤 무리를 모조리 박살 낼 뻔했던 순간이었다.

'살다 살다 해골 병사들을 인부로 부려 먹으려는 사람을 보게 될 줄이야.'

그 사람이 자신이 모시는 도련님이다.

한숨이 또 절로 나왔다.

그렇게 소리 없이 번지는 하비엘의 한숨 소리 너머로, 로이드와 해골 병사들 사이로 고용 계약서가 오갔다.

- 이건 뭡니까?

해골 병사 거북목이 두개골을 갸웃거렸다.

로이드가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고용 계약서."

그의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갔다.

그렇잖아도 인력 수급 문제 때문에 고민이 많았는데.

언데드 지배 스킬이 생겼어도 정작 언데드 병사를 구할 곳이 없어서 아쉬웠는데.

 

[지배 가능한 언데드 병사의 숫자 : 200]

[현재 지배 중인 언데드 병사의 숫자 : 200]

 

'이렇게 무임금 무한 일꾼 확보, 성공.'

눈앞에 알차게 떠오르는 보람찬 메시지.

그걸 보며 로이드는 흐뭇하게 웃었다.

 

 

다음 날, 로이드는 아침이 밝자마자 숙소를 나섰다.

그가 향한 곳은 나마란 백작의 집무실.

그런 그의 손에는 돌돌 말린 서류 뭉치가 들려 있었다.

'나마란 사면 안정 시공 계획서'와 설계도면이었다.

'룰루루, 룰루.'

지난밤, 해골 병사들과의 계약 덕분에 인력 수급 문제가 해결되었다. 장벽 사태가 벌어지기 전부터 꾸준히 측량과 설계를 해둔 덕에 공사 일정도 윤곽을 뽑았다.

그럼 이제는 시일을 미룰 필요가 없다.

나마란 백작에게 시공 계획서를 내밀기만 하면 된다. 실제 시공에 필요한 자재 등등의 협력을 요청하면 된다.

'그럼 공사를 뚝딱 해내고. 공사 대금 두둑하게 받고. 프론테라 영지로 돌아가는 거지. 아파트와 대하수로가 빛나는 걱정 없는 꿀벌 인생이 기다리는 거야.'

이 공사가 마지막이다.

이것만 제대로 해내면 된다.

그러면 두고두고 나마란 영지에서 시설 관리비를 받을 수 있다.

그 자금이면 앞으로 먹고 살 충분한 보험이 되어줄 것이다.

'룰루랄라난나나.'

절로 어깨가 으쓱으쓱.

음적 박자 엉망의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그는 시공 시행을 위한 빨대를 꽂으러 즐거운 탭댄스를 밟으며 백작의 집무실로 올라갔다.

그리고 곧, 집무실에서 예상치 못한 상황과 맞닥뜨려야 했다.

"자네, 내 사위가 되어주지 않겠나?"

"...."

이건 또 무슨 말일까요.

로이드는 짜게 식는 자신의 숨소리를 느끼며 나마란 백작을 쳐다보았다.

백작은 두꺼운 담요를 몸에 걸치고서 연신 기침을 하고 있었다.

"크흠, 쿨럭! 콜록! 혹시 내 요청이 너무 갑작스러운 건가?"

"아, 예. 조금...."

"실은 나도 이런 요청을 하게 될 줄은 몰랐네."

백작이 초췌한 얼굴로 쓴웃음을 머금었다.

"로이드 프론테라, 자네도 지금 내 몰골이 보이겠지? 내가 어때 보이는가."

"흠, 조금 편찮아 보이시긴 합니다."

"그렇지? 그래서일세."

백작의 한숨.

그의 말이 이어졌다.

"이번 사태 때문일세. 너무 힘들어. 내 몸이 내 것 같지가 않아. 의사의 말로는 일 년쯤 요양하면 나아질 거라곤 하지만... 글쎄. 사악한 흑마법사의 술수에 걸려 너무 많은 기력을 빼앗겼어. 그래서 솔직히 말하자면, 이젠 쉬고 싶네."

"예?"

"그렇게나 놀라운가? 허허. 쉬고 싶다는 말일세. 은퇴 말이야."

나마란 백작이 소탈하게 웃었다.

"내가 그저 평범한 노인네였다면 이러진 않았겠지. 지금 자리를 놓지 않으려 들었겠지. 하지만 내가 누군가. 이 도시를 통치하는 사람일세. 한데 자신의 건강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이런 상태로 내가 도시를 제대로 꾸려갈 수 있겠는가? 아닐세. 아니야. 그건 아니지. 그건 모두에게 민폐가 될 걸세."

"하지만 백작님."

"나는 이 도시를 사랑하네. 나마란을 위해 내 평생을 바쳤지. 그래서일세. 당장 요양에만 힘을 써야 하는 나 같은 늙은이가 이런 높은 자리만 붙들고 있다가는 통치에 문제가 생길 것이야. 해서 생각했네. 훨씬 튼튼하고, 건강하며, 영민하고, 우리 도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 그런 자에게 도시의 통치를 넘겨주고 싶다고 말일세."

"흠흠, 백작님? 아까 솔직하게 대답을 못 해드렸던 것 같은데...."

"음?"

"지금 엄청나게 정정해 보이십니다."

"...."

"당장 벌떡 일어나 달려가서 저쪽 성벽 짚고 돌아오셔도 무리가 없으실 듯합니다만."

"어허, 이 사람이."

백작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에서 로이드는 쌔한 위기감을 느꼈다.

넌더리가 안 먹혔다.

나마란 백작, 오늘 은근히 완고하게 보인다.

뭔가 나름대로 굳은 결심을 품은 게 아닐까.

그런 로이드의 예감은 곧 현실로 드러났다.

나마란 백작이 집무실 안쪽을 향해 꺼낸 부름과 함께였다.

"오래 기다렸을 텐데 이만 나오려무나."

백작의 말이 끝난 직후였다.

집무실 안쪽 방문이 열렸다.

나마란 영애가 모습을 드러냈다.

살짝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서, 백작의 곁에 차분하게 앉았다.

백작이 흐뭇한 눈길로 자신의 딸을 응시했다.

그러더니 이쪽으로 그 눈길을 던져 왔다.

"어떤가. 이 아이와 연을 맺어줄 수 있겠는가? 아울러 내 도시의 통치권을 함께 받아주게나."

"...."

"이 늙은이의 부탁일세."

"...."

나마란 백작의 목소리가 간곡해졌다.

그래서 로이드는 더욱 난감함을 느꼈다.

'와, 미치겠네.'

나마란 장벽 사태를 무사히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안심하고 공사만 완벽히 치러내면 된다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지도 못한 비상사태를 맞이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거, 공적을 너무 크고 거창하게 세워 버렸나.'

로이드는 손바닥 가득 배어나는 진땀을 느꼈다.

정말로 너무 큰 공적을 세워 버린 듯하다.

나마란 시를 통째로 구해냈으니까.

그 와중에 헬나이트마저 꺾었으니까.

보통이 아닌 보답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설마 백작이 자신의 딸과 도시를 통째로 안겨주겠다는 제안을 해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실로 엄청난 제안이었다.

고개를 끄덕이기만 한다면?

당장 나마란이라는 도시를 통치하는 백작이 될 수 있다.

거기에 나중에 프론테라 영지까지 물려받게 된다면, 무려 두 개의 백작령을 아울러 통치하는 엄청난 위치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어쩐지 싫었다.

별로 내키지가 않았다.

권력에 욕심이 없어서?

혹은 자신에게 과분하다 여겨서?

아니었다.

'부담스러워.'

그것이 로이드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나마란 영애와의 애정 없는 결혼도 싫었다.

게다가 두 개의 백작령을 다스려봤자 그만큼 머리만 더 아파질 것이다.

'프론테라 영지 꾸려가는 것만으로도 빡쎄. 복잡하고 힘들어. 난 그저 자그마한 영지에서 조용히 풍족한 여생을 보내면서 꿀만 빨고 싶다니깐. 그런데 왜 다들 날 못 키워줘서 난리인 거냐고.'

만약 자신의 인생 장르를 선택할 수 있다면?

로이드는 주저 없이 평온한 일상물을 선택할 것이다.

혹은 탱자탱자 놀면서 일상을 누리는 건물주를 주인공으로 삼은 장르를 선택할 것이다.

권력 추구도.

위기일발의 모험도.

숨 가쁜 재난 극복도.

모두 그의 취향에 맞지 않았다.

피곤했다.

대한민국에서부터 너무 개고생만 하면서 살아왔기에 더욱 그러했다.

정말로 그저 평온하고 소소하게 살아가고만 싶었다.

그래서였다.

'이 제안, 거절해야 해.'

로이드는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궁리했다.

나마란 백작의 제안을 자연스럽게 거절할 방법.

동시에 다시는 이런 제안을 못 하도록 원천봉쇄를 감행할 적절한 명분.

어떤 게 좋을까.

어떤 핑계를 대야 다시는 이런 제안을 못 할까.

고민하던 로이드의 눈길이 문득, 나마란 영애의 모습에 닿았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소설 철혈의 기사.

그 이야기 속에서 나마란 영애가 맞이한 처절하고 장렬했던 최후가. 도시를 위해 스스로 감행했던 그녀의 숭고한 희생이.

어쩌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백작님의 제안이 무슨 뜻인지, 어떤 대의를 품은 것인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죄송합니다. 백작님의 사위가 되어 도시를 통치해달라는 그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뭐?"

흔들리는 나마란 백작의 눈길.

백작이 물어왔다.

"자네, 이렇게 좋은 제안을 거절하다니. 내 뜻을 정녕 모르는 것인가? 대체 이유가 뭔가."

많이 당황스러운 듯했다.

충분히 그럴 법도 하리라.

딸과 도시를 모두 주겠다는 제안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서 제발 그렇게 해달라고 매달릴 법한 엄청난 제안이기도 했다.

하지만 로이드에겐 아니었다.

그는 백작을 차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진중한 얼굴과 목소리로 정중히 답했다.

"바로 이 자리에, 저보다 훨씬 이 도시에 어울리는 훌륭한 통치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의 손길은 어느새 나마란 영애를 가리키고 있었다.

179화. 든든한 후원자 (1)

 

 

로이드의 손길이 움직였다.

건너편에 있는 백작의 옆자리.

그의 딸인 나마란 영애를 가리켰다.

백작의 하얀 수염이 꿈틀거렸다.

"내 딸이? 훌륭한 통치자라고?"

"예, 그렇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

수염에 이어 눈썹도 꿈틀.

백작은 로이드의 말을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늙은데다 건강마저 크게 상하여 요양이 필요해진 자신.

그런 자신을 대신하여 도시를 꾸려갈 통치자가 필요해진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런 자신에겐 안타깝게도 아들이 없었다.

슬하에는 오직 외동딸 하나만 있을 뿐.

그렇기에 며칠간 고민했다.

누구에게 이 도시의 통치권을 넘겨줌이 옳을까.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자신이 더 버텨야 함이 좋을까.

그런 고민 끝에 백작이 떠올린 인물이 로이드였다.

그가 생각하기에 로이드는 실리적으로도, 명분적으로도 썩 괜찮은 후보자였다.

'젊고 능력 있지. 영민하고 성실할 뿐만 아니라 이 도시를 위한 큰 공훈도 세웠어. 그뿐일까. 국왕 전하의 아낌까지 두루 받는 인재이니, 그보다 더 이 도시를 잘 꾸려갈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것이 나마란 백작의 결론이었다.

그래서였다.

로이드에게 제안했다.

자신의 딸과 혼인해달라고.

이 도시를 물려받아 통치해달라고.

그리고 기대했다.

로이드가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보았다.

백작의 입장에선, 아니, 보편적인 시각에선 당연한 예상이었다.

젊은 나이에 무려 백작위에 올라 대도시를 통치할 엄청난 기회가 아닌가.

한데....

'그걸 거절하는 것도 모자라서, 내 딸이 통치자로 더 어울릴 재목이라고?'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딸은 그저 딸일 뿐.

좋은 집안 청년에게 시집가서 가문의 미래에 도움이 되어주길 바랄 뿐.

나름 딸을 아끼고 사랑하는 백작이었지만, 그런 딸에게 백작위를 물려주겠다는 생각은 상상으로도 해본 적 없던 그였다.

금이야 옥이야 곱게 키운 외동딸.

험한 꼴이라곤 당해본 적도 없는 금지옥엽.

그런 온실 속 화초 같은 딸이 백작위에 오른 모습 자체가 상상이 되지 않았으니까.

"혹시 자네는 지금 이 늙은이를 희롱하려는 건가?"

나마란 백작의 눈가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주름 사이사이 불편한 심기가 깃들었다.

비록 늙고 병들었지만 평생 통치자로 살아온 이다운 압박감이 피어났다.

하지만 그러한 백작의 눈빛과 목소리 앞에서도 로이드는 주눅들지 않았다.

싱긋 웃거나 어깨를 으쓱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더욱 진중한 눈빛으로 백작의 눈빛을 받아냈다.

"백작님, 이건 제 진심입니다."

"진심?"

"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과 영애를 번갈아 눈에 담으며,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제가 감히 백작님을 희롱하여 얻을 것이 대체 무엇이 있겠습니까. 제겐 그런 의도가 조금도 없습니다. 이런 제 마음을 헤아려주시길 바랍니다."

"그럼 아까 그 말은 대체 무슨 뜻인가. 내 딸이 이 도시의 통치자로 어울릴 것이라니."

"그 말 또한 조금의 과장도 없는 제 진심이었습니다."

"진심?"

"예."

"무엇을 근거로?"

"제가 직접 보았기 때문입니다. 흑마법사들의 저주가 깃든 장벽이 세워지던 날, 백작님의 따님께서 망설임 없이 행하신 헌신과 희생을 말입니다."

"헌신과 희생이라니...?"

"저택의 늙은 하녀와 하인들을 그늘로 옮기다가 탈진하셨더군요."

로이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배어났다.

나마란 영애.

떠올릴수록 미소가 배어났다.

그녀가 소설 철혈의 기사와 이곳에서 연거푸 보여준 모습들 때문이었다.

'어쩌면 사람이 저렇게 한결같은지.'

소설 속과 여기.

두 곳 모두에서 나마란 영애는 펜던트 하나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녀가 소녀 시절, 아버지에게 받았던 생일선물이었다.

단순한 펜던트가 아니었다.

각종 사악한 주술과 저주를 조금이나마 막아주는 희귀하고 값비싼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덕분에 그녀는 나마란의 장벽이 세워진 상황에서도 금방 기절하지 않았다.

힘겹게나마 기어서라도 움직일 수가 있었다.

'그렇게 기어서 흑마법사 칸나바로의 발목을 잡았지. 헬나이트 소환 의식을 진행하려던 칸나바로를 온몸으로 방해하다가 죽임을 당했어. 그렇게 벌어준 몇 초의 시간 덕분에 하비엘이 헬나이트 소환을 저지할 수 있었고.'

그것이 소설 철혈의 기사 속 그녀의 최후였다.

그럼 이곳에서는?

최후를 맞이하진 않았다.

대신 펜던트의 힘으로 간신히 움직이며 선행을 베풀었다.

저택의 늙은 하녀와 하인들을 보살피려 애썼다.

그들을 그늘로 옮기고, 팔다리를 주물러주었다.

자신도 까무러칠 만큼 힘든 상황에서도 간호와 보살핌을 이어갔다.

그러다가 마침내 본인도 혼절하고 말았다.

"응급처치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다가 우연히 보았습니다. 또한 들었습니다. 저택의 하녀와 하인들이 입을 모아 칭송하고 있더군요. 의식을 잃어가던 와중에 보았다고. 영애께서 하찮은 아랫것에 불과한 자신들을 지켜주려 애쓰셨다고. 그 모습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거라고 말입니다."

로이드는 흐뭇한 눈길을 영애에게 보냈다.

자신의 선행이 탄로 났다(?)고 여기는 걸까.

이미 영애의 얼굴은 완전히 새빨개져 있었다.

로이드의 눈웃음이 더욱 흐뭇해졌다.

"그런 분이십니다, 백작님의 따님께서는. 이 도시와 이곳 사람들을 위해 언제든 스스로를 희생하고 제 살을 깎아낼 준비가 되어 있는 분이시죠."

"하지만 이 아이는 통치라는 것을...."

"예, 압니다. 경험은 부족하실 겁니다."

반론을 펼치려는 백작.

그를 향해 로이드가 천천히 말했다.

"당연히 처음에는 실수도 많겠죠. 시행착오를 거듭하겠죠. 그렇지만 저라고 다르겠습니까. 백작님의 젊었던 시절도 크게 다를 바는 없었을 테고 말입니다."

"...커험! 험! 왜 갑자기 날 예시로 드는 건가?"

"누구나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은 게 당연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던 겁니다. 특히 도시를 통치하고 많은 사람의 삶을 책임지는 자리를 떠맡게 되는 거라면 말이지요. 그래서입니다."

로이드가 다시 한 번 영애를 가리켰다.

"누가 맡아도 처음엔 어설플 거라면, 기왕이면 도시를 위해 진심으로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통치를 맡게 되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자네는?"

"전 그럴 그릇이 아닙니다. 아니, 못 됩니다."

"어째서 그러한가."

"욕심이 많거든요. 당장 세금을 열 배쯤 올려 버릴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제 고향도 아니고, 딱히 애착이 있는 것도 아니고. 뭐, 냉정하게 말씀드리자면 시민들이 굶건 말건 저 알 바도 아니지 않겠습니까."

"일부러 그렇게 말하는 건 티가 난다네."

"최소한 따님께서는 절대로 그러시지 않을 거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

"게다가 현지인이시니까. 이곳이 고향이니까. 외부인인 저 같은 놈보다 훨씬 이곳의 사정에 해박하실 테고 말입니다."

"...."

"어떻습니까."

할 말을 마친 로이드가 빙긋 웃었다.

그런 그를 향해 나마란 백작이 의미심장한 눈초리를 던졌다.

"자네, 이러는 이유가 뭔가?"

"예?"

"누가 보아도 탐낼 감투를 내밀었네. 내 딸까지 얹어서 정통성까지 보장되는 감투였지. 그런데 어째서 그걸 거절하면서도 이렇게 태연할 수 있단 말인가."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욕심이 많아서요."

"뭐?"

나마란 백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로이드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전 돈 욕심도 많지만 놀고 싶은 욕심도 많습니다. 그래서입니다. 매일 밤 남몰래 하늘에 기도를 올리곤 합니다. 우리 프론테라 백작님께서 백 살이 넘도록 만수무강하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효심과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네만."

"맞습니다. 그분께서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면서 자리를 지키셔야 제가 편하게 지낼 수 있을 테니까요."

솔직한 진심이었다.

물론 그는 프론테라 백작이 좋았다.

인간적으로 존경스러운 호인이었다.

그런 만큼 프론테라 백작이 무병장수하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백작보다는 백작 아들이 책임질 것이 훨씬 적을 테니까.

책임은 적으면서 풍족하게 누릴 것은 충분할 테니까.

그렇게 편히 꿀만 빨 수 있을 테니까.

"제가 그런 놈입니다. 나름 몸고생 마음고생을 좀 하다 보니 이제는 지쳤달까요. 좀 쉬고 싶습니다. 너무 많은 책임은 떠맡기 싫고 부담스럽습니다. 그저 제게 주어진 것들만 편하게 누리면서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사내로 태어나 품어봄 직한 원대한 야심이나 포부도 없는 건가?"

"야심이나 포부가 밥 먹여주는 건 아니지 않겠습니까."

정말이다.

그냥 소소하게.

그저 평범하게.

부족함은 없게.

내 한 몸 편히 살다 가고 싶다.

그런 백수 스타일 건물주형 라이프가 로이드의 최종적 장래희망이자 바람이었다.

"...알겠네.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내가 제안을 강요할 수만은 없겠군."

"감사합니다, 제 뜻을 알아주셔서."

"하지만 내 딸을 후계자로 추천하는 자네의 급진적인 조언을 무턱대고 받아들일 생각은 없다네. 긍정적으로 고려해보긴 하겠네만."

"다행입니다. 저도 주제넘은 조언을 드린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던 참이던지라."

"허허, 이 친구 뻔뻔한 것 보게나."

"기왕이면 요령이 좋다고 칭찬해주시면 더 감사할 듯합니다."

"쯧. 이런 친구가 내 도시를 맡아주면 참 좋으련만."

"따님이 저보다 훨씬 잘 해내실 겁니다."

"방금까지 주제넘은 조언을 하였나를 염려하던 친구는 어디로 갔는가?"

"그런 친구가 있었습니까?"

"허허허. 신기해. 이러는데도 이상하게 밉지가 않아."

"제가 뭐 잘난 것이 있겠습니까. 이게 다 어르신, 아니, 백작님께서 너그럽게 보아주시는 덕분이지요."

"허허허허! 이 친구 보게!"

기어코 백작이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전보다 깊어진 눈길로 로이드를 바라보았다.

"...알겠네. 내 자네의 조언, 정말로 깊이 생각해봄세."

"감사합니다."

"아닐세. 오히려 감사는 내가 해야지. 자네와 아스라한 경이 아니었다면 나도, 내 딸도, 우리 도시의 모두가 몰살을 면치 못하였을 터이니 말일세.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이렇게 말하겠네. 정말 고마우이. 내 자네의 공훈은 반드시 국왕 전하께 소상히 고하여드리도록 하겠네."

"...어엄, 그건."

"왜, 안 하면 좋겠나?"

"너무 공적이 많아져도 자꾸 곤란해져서 말입니다."

로이드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를 보는 백작의 눈길이 흐뭇해졌다.

"허허허? 그런가? 그럼 알겠네. 내 글재주가 특출한 이를 고용하여서라도 자네의 공훈을 더욱 소상하고 극적으로 포장하여 전하께 고하여드려야겠군."

"좀 봐주시죠."

"싫다네. 이건 늙은이의 요청을 매몰차게 거절한 것에 대한 궁색한 보답이자 복수일세."

"...."

"뭐 어쨌건 그 이야기는 이쯤 하기로 하고, 그건 뭔가?"

뒤끝 있게 웃던 백작이 이쪽의 옆구리를 가리켜 왔다.

로이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 이번에 시행할 사면 안정화 시공과 관련된 도면과 계획서입니다."

마침 화제를 바꾸고 싶던 참인데 잘됐다.

로이드는 재빨리 서류를 꺼내 좌라락 펼쳤다.

"일단은 나마란 시를 떠받치는 절벽 사면의 성질과 상태를 분석해보았습니다. 그 결과 사면의 파괴가 이미 상당히 진행되어... 어쩌고저쩌고... 측방토압이 생각보다 높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으며... 이러쿵저러쿵... 따라서 지반 속에 말뚝을 일렬로 설치하고 앵커로 마찰 저항을 높여... 블라블라...."

그는 백작이 무어라 말을 꺼낼 틈도 없이 도면 이곳저곳을 딱딱 짚었다.

그러는 동안 그의 입가에는 보람찬 미소가 배어났다.

생각 없던 청혼을 무사히 거절했다.

도시를 떠맡을 위기(?)를 넘겼다.

그러니 이젠 되었다.

이 공사만 끝내면.

그렇게 돈을 벌고 프론테라 영지로 돌아가면.

이제는 소소하게 꿀만 빨겠다는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기대하며 로이드는 백작에게 실무적인 설명을 이어갔다. 필요한 자재 등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그동안 나마란 백작은 더없이 흐뭇한 눈길로 로이드를 바라보았다.

그런 백작의 눈빛은 흡사 전교 1등 성적표를 받아온 손주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따스한 눈길 같았다.

로이드가 유창하게 제시하는 설명이 감탄스러워서?

혹은 그가 이루어낸 업적이 너무나 대단해서?

모두 아니었다.

'참으로 탐나는 인재로다.'

로이드 프론테라.

젊은 데다 능력이 있다.

하지만 백작이 주목하는 점은 따로 있었다.

능력이 있는데 교만하지 않고 선을 지킬 줄 안다.

스스로를 냉정하게 평가하며 한계를 넘지 않는다.

그건 보통의 젊은이가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 아니라고 백작은 판단했다.

'보통은 능력이 있으면 그만큼의 자신감도 지니게 되지. 그러다가 점점 자만하고 교만하게 변하며 선을 넘곤 해. 스스로를 냉정하게 판단하는 눈을 잃고, 마침내는 착각에 빠져. 그렇게 사고를 치지. 스스로를 해치고 주위 모두를 다치게 만들어. 한데 저 친구는? 아니야. 저런 능력을 지녔는데도 벌써부터 절제할 줄을 알아.'

지닌바 능력을 초월하는 절제력.

그건 뛰어난 능력을 지닌 것보다도 훨씬 엄청나고 희귀한 재주였다.

적어도 백작이 평가하기에는 그러했다.

'그런 인재를 내가 너무 쉽게 얻으려 들었구나.'

자신과 이 도시가 함부로 담거나 품을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나마란 백작은 로이드를 보며 그 사실을 실감했다.

한편으로는 반성하고, 다짐했다.

'날카로운 송곳은 아무리 감추려 해도 그 끄트머리가 주머니를 뚫고 튀어나오는 법이지. 인재도 마찬가지야. 아무리 평온하게 살고자 해도 결국엔 저 재주를 누군가는 탐낼 터. 살면서 한 번쯤은 반드시 그러한 풍파에 휩쓸릴 터.'

그럴 때는 이 늙은이가 나서서 지켜주리라.

자신의 딸과 도시를 구해준 은인인 저 청년.

로이드 프론테라가 세상의 풍파에 휩쓸리는 날이 오는 순간.

자신은 저 청년의 평온한 앞길을 지켜주기 위해 노력하리라.

지닌바 모든 물자와 능력을 다 동원하여서라도.

한 번쯤은 기필코 은혜를 갚으리라.

내심 굳게 다짐하며, 나마란 백작이 더없이 인자한 눈길로 로이드를 바라보았다.

앞으로의 로이드의 인생에 두고두고 큰 도움이 되어줄 든든한 후원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80화. 든든한 후원자 (2)

 

 

본격적인 시공이 시작되었다.

'마침 주문해놓은 앵커도 제대로 뽑혔고 말이지.'

나마란 백작의 제안을 거절한 다음 날이었던가.

성내의 대장장이들이 아침 일찍부터 이쪽을 찾아왔더랬다.

약 7미터 길이에 달하는 강철 앵커 하나를 낑낑대며 들고 온 것이었다.

'시제품치고는 굉장히 품질이 좋았어.'

과연 나마란 백작이 적극 추천한 대장장이다웠다.

앵커의 규격과 성능이 대부분 만족스러웠다.

특히 웨지락볼트를 참고하여 설계했던 끝머리 쐐기 부분의 완성도는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이쪽의 요구 사항이 거의 정확하게 반영되어 제작되어 있었다.

'끝머리 쐐기의 나선 홈이 제대로 파였어.'

덕분에 시공 일정에 탄력이 붙었다.

시제품을 기초로 같은 앵커를 대량으로 만들어줄 것을 주문했다.

그때부터였다.

로이드는 본격적인 공사의 첫 삽을 떴다.

"자, 다들 나와 함께 하는 공사는 처음이라 좀 어색할 거야. 그래서 미리 물어볼 점이 있는데, 혹시 공사가 처음인 해골?"

"...."

"어차피 말 못하는 거 아니까 손 드는 걸로 대답하자. 이런 공사가 처음인 해골은 손 들어봐."

 

달각!

 

200구의 공병대, 아니, 골병대원 모두가 손을 들었다.

로이드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뭐야. 전부 모조리 다 초짜라고?"

 

달각!

 

"어째서?"

설마 했더니 모두가 공사 초보라니.

살짝 곤혹스러워하는 로이드의 모습에 골병대의 리더, 거북목이 나섰다. 종이와 숯덩이를 들었다.

- 너무 걱정하진 마시죠. 다들 생전의 기억을 잃어서 그런 겁니다.

"뭐? 기억을 못 한다고?"

- 예. 저도 마찬가집니다. 인간이던 시절에 무슨 일을 하며 살았는지,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아하. 그래서 다들 이름을 거북목이니 오십견이니 그렇게 부르고 있던 거였어?"

- 예. 예전 이름도 다 잊어버렸으니까요.

"쯧. 백지상태라는 거로구만."

- 그래도 공사를 해본 친구들이 제법 있을 겁니다. 하다 보면 몸에 익은 경험이 떠오를 수도 있겠지요.

"뭐, 그러면 좋겠네. 흠흠! 어쨌건."

로이드의 시선이 다시 골병대원들을 향했다.

"누군가는 공사가 처음일 거고, 또 어떤 이는 예전의 경험을 떠올릴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다들 나와 하는 공사는 처음이겠지."

 

달그락!

 

또 해맑게 아래턱을 달각거리며 손을 드는 200구의 골병대원들.

로이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 이제 손 안 들어도 돼. 아무튼, 다들 이제부터 공사를 치르면서 이것 하나만 뼈에 새겨주면 좋겠어. 안전제일. 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건 안전이야. 그러니까 서두르거나 허덕이면서 움직이지 마. 그거 관절에 안 좋아. 조금 천천히 하더라도 안전하고 정확하게. 안 그러면 골병들고 고생하게 되는 건 다치는 당사자일 테니까. 알겠지?"

 

까가각!

 

"...그렇다고 진짜로 뼈에 새겨 버리는 거냐."

'안전제일'이라는 네 글자를 갈빗대에 깨알 같이 새겨 버린 골병대가 삽을 들었다.

옆에서 로이드의 훈시를 지켜보던 하비엘도 검을 들었다.

이제부터 시작할 사면 안정 시공.

그 시공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비엘이 맡았기 때문이었다.

"알지? 뚫어."

로이드가 큰 붓을 들었다.

촵촵, 절벽 사면 곳곳에 붉은 물감을 큼직하게 발랐다.

아무렇게나 바르는 것 같았지만, 사실 그가 바른 물감은 철저하게 계산되고 설계된 자리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물론 하비엘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로이드와 함께하는 공사에 잔뼈가 굵은 덕분이었다.

"방향과 각도, 깊이와 지름을 말씀해주시죠."

"수직으로. 깊이 12미터, 지름은 1미터로."

"알겠습니다."

수직공 굴착에 필요한 데이터값(?)을 입력받은 오거크레인 장비, 아니, 은발의 기사가 검을 들었다.

로이드가 물감을 칠한 바닥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검을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그런 그의 눈빛에는 희미한 분노가 배어 있었다.

언제나 이렇듯 공사 장비 취급이나 받아서?

아니었다.

반대였다.

'부끄럽다.'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공사만 시킨다고 불평할 자격이 없다.

제대로 해내는 일이라는 게 이런 공사밖에 없으니까.

정작 맞닥뜨린 강력한 적은 혼자서 처리하기도 버거워했으니까.

설령 그 상대가 헬나이트라고 해도.

혼자 상대하지 못했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보호해야 할 대상인 로이드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 또한 바뀌지 않는다.

그 사실이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자신의 본분.

자신의 의무.

자신의 사명.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그래, 난 자만하고 있던 거였어.'

소드마스터가 된 이후부터였을 것이다.

어느샌가 자신도 모르게 만족하고 있었던 듯했다.

이쯤 하면 됐다고.

이만큼 경지에 올랐으면 충분하다고.

저도 모르는 사이에 안주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렇게 발전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부정할 수가 없다. 아니, 그랬던 나 자신을 부정하는 순간 난 앞으로도 발전은 꿈도 못 꾸게 되겠지.'

헬나이트와 맞서며 쩔쩔맸던 자신.

로이드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이기지 못했을 대결.

그 순간들을 되새기며 하비엘은 가슴 깊이 반성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더 발전하리라고.

다시는 주인과 영지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겠노라고.

그러니 이런 공사를 하는 순간에도 결코 소홀하지 말자고.

아니, 이 순간마저도 훈련으로 받아들이자고.

가슴에 새기며 비장한 눈빛을 번득였다.

다음 순간.

그의 검이 빛을 발했다.

 

스파파팟!

 

바람처럼 움직였다.

섬광처럼 내찔렀다.

우레처럼 터뜨렸다.

 

투콰쾅-! 투확-!

 

그가 움직이며 지면에 검을 찔러넣을 때마다 어김없이 발파가 터졌다.

한데 그 발파로 일어나는 폭발이 예전과 사뭇 달랐다.

예전의 발파가 그저 땅속에서 거친 폭발을 일으키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로이드가 당부한 규격 이상의 범위엔 실로폰 연주하는 만큼의 충격조차도 가하지 않았다.

하비엘이 모든 기량을 동원하여 충격의 범위까지 밀리미터 단위로 조절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건 어려운 일이었다.

엄청나게 피곤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하비엘은 계속해서 그걸 해냈다.

'힘의 완급. 범위의 조절. 더 정밀하게. 부술 곳은 더욱 확실하게!'

하나하나의 검격이 모두 훈련이 된다.

공사에 동원되어 검을 휘두를지라도 그러하다.

매일의 일상적인 호흡.

그저 평범한 걸음걸이.

이제부터는 그 모든 과정을 훈련으로 삼으리라.

자신을 더욱 갈고 닦는 발판으로 만들리라.

그렇듯 굳은 결의를 새기는 동안 하비엘의 검이 계속해서 사납고도 정교하게 춤을 추었다.

나마란 절벽 사면 곳곳에 지름 1미터, 깊이 12미터의 매끈한 수직공 수십 개가 줄지어 생겨났다.

그다음은 드디어 골병대의 차례였다.

"자! 옮겨!"

 

삐그닥!

 

로이드의 구호와 함께 골병대가 일어났다.

그런 그들의 어깨에는 길이 13미터, 지름 1미터짜리 통나무가 얹혀 있었다.

"집중해! 그리고 명심해! 구령에 따라 걸음을 함께 움직여야 서로 다리가 꼬이지 않아! 내가 넘어져서 균형을 잃으면 앞뒤의 동료들이 함께 다치고, 통나무를 짊어진 모두가 다 같이 깔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겨!"

 

삐그다닥!

 

골병대원들이 두개골을 끄덕였다.

구령에 맞추어 차근차근 걸음을 떼었다.

크고 무거운 통나무를 옮겼다.

앞서 하비엘이 굴착해놓은 수직공.

그 속에 꽂아넣어 지반을 단단하게 잡아줄 원형 억지말뚝이었다.

'수제 햄버거 가게에 가면 햄버거에 꽂아주는 이쑤시개랑 비슷한 거지. 제대로 딱 꽂아두면 패티랑 빵이랑 양상추가 옆으로 안 흘러내리는 것처럼. 지반도 똑같아. 깊은 곳의 단단한 기반암과 연약한 표면을 이렇게 한데 꽂아서 잡아두는 거지.'

그것도 하나의 말뚝이 아니라 여러 개로.

줄지어 꽂음으로써 효과를 더욱 극적으로.

게다가 로이드는 원형 억지말뚝으로 쓰이는 나무에도 대만족이었다.

이곳 나마란 지방의 기후 특성 덕분이었다.

'해발고도가 높아서 사시사철 건조하고 서늘하지. 덕분에 목질이 강철만큼 단단하면서도 좀처럼 삭지 않는 철송이 광범위하게 자생하는 편이고.'

지름 1미터의 단단한 철송.

그 정도면 원형 억지말뚝 역할을 해주기에 충분하고도 넘쳤다.

이미 시뮬레이션 옵션으로도 수십 번은 그 사실을 확인한 로이드였다.

"자아, 다음은 꼬밍이!"

"꼬밍!"

골병대가 억지말뚝을 수직공 앞까지 옮겨왔을 무렵, 로이드가 하늘을 향해 외쳤다.

그 외침에 상공에서 대기하던 꼬밍이가 화답했다.

아담한 날개 파닥이며 내려왔다.

밧줄을 야물딱지게 물었다.

그 밧줄의 반대편은 말뚝 한쪽 끄트머리에 묶여 있었다.

그렇듯 밧줄을 문 채로 꼬밍이가 날아올랐다.

밧줄이 당겨졌다.

말뚝이 세워졌다.

"골병대! 말뚝 맞춰!"

 

삐그닥!

 

수직으로 세워진 말뚝에 골병대가 달라붙었다.

말뚝 아래쪽을 움직여 수직공에 맞추었다.

그걸 확인한 로이드가 외쳤다.

"꼬밍아! 아래로!"

"꼬미밍!"

꼬밍이가 파닥이며 천천히 내려왔다.

억지말뚝이 수직공 속으로 조금씩 들어갔다.

그리고 몇 분 후, 말뚝이 수직공을 완전히 채웠다.

'좋아. 딱 좋아.'

로이드는 말뚝의 들어간 모양새를 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애초부터 지름 1미터, 길이 13미터로 정확하게 재단해둔 말뚝이었다.

그게 한 치의 오차나 남김도 없이 딱 맞게 구멍에 채워졌다.

즉, 수직공의 굴착부터 말뚝 삽입까지의 모든 과정이 완벽하게 시공되었다는 뜻이었다.

"좋아! 계속 이대로만 가즈아!"

"꼬밍!"

 

삐그닥!

 

로이드의 외침과 꼬밍이의 대답, 골병대의 뼈다귀 박수와 함께 계속해서 시공이 이루어졌다.

장장 보름에 걸쳐 2미터 간격으로 말뚝 수십 개를 박아넣었다. 말뚝 상부를 이어주며 서로 힘을 지탱하게 해줄 띠장도 설치했다.

그다음은 사면에 대한 앵커 시공이었다.

우선 앵커가 설치될 사면의 터를 반듯하게 정리했다.

그리고 하비엘이 구멍을 뚫으면 앵커를 밀어 넣었다.

 

끼리릭! 콰꽈각!

 

45도 경사로 굴착된 구멍에 앵커를 넣었다.

끝까지 삽입한 상태에서 앵커 중앙의 봉을 돌렸다.

봉에 연결된 앵커 끝의 머리가 돌아갔다.

나사처럼 파인 홈을 따라 앵커 머리가 회전했다. 앵커 몸체로 들어갔다. 머리가 속으로 들어가는 만큼 앵커 끝단의 지름이 커졌다. 구멍 속을 꽉 채우며 단단히 고정되었다.

그 후에 로이드는 그라우트 용액을 구멍 속에 주입했다.

슬라임을 중탕해서 만든 특급 아교와 석회를 배합하여 만든 경화제였다.

그렇게 투입한 그라우트 용액의 양생에 맞추어 앵커에 달린 밧줄을 팽팽하게 당겼다. 밧줄 반대편을 지면에 설치한 납작한 수압판에 연결했다.

수압판은 화강암을 깎아서 만들었다. 열십자(十)로 생긴 수압판의 크기는 가로와 세로 2미터에 달했다.

땅속에 꽂은 앵커.

지면에 설치된 수압판.

그 사이에서 밧줄이 팽팽한 힘으로 수압판을 당겼다.

크고 납작한 수압판이 절벽 비탈면을 꾹 눌렀다.

앞서 시공했던 억지말뚝이 햄버거에 꽂은 이쑤시개였다면?

이번 앵커는 실 달린 바늘로 햄버거를 관통하고 실 반대편 끝에 플라스틱판을 연결하여 햄버거 위에 올려둔 것과 같았다.

앵커가 바늘.

밧줄이 실.

수압판이 플라스틱판.

그 상태에서 실이 팽팽해지면?

실이 팽팽해지는 만큼 플라스틱판이 햄버거를 꽉 누르게 될 것이다.

강력한 고정 효과가 생겨나는 셈이다.

그렇게 모두는 설계에 따라 수많은 억지말뚝과 앵커를 시공했다.

흐르는 땀방울과 골병대의 삐그닥거림.

꼬밍이의 날갯짓과 로이드의 구령이 매일같이 이어졌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흘러.

열흘이 흐르고 한 달, 두 달이 지나.

늦여름에 피어나던 코스모스가 지고.

고원지대 전체가 단풍에 물드는가 했더니.

마침내 첫눈 내리는 날.

길고 길었던 공사가 끝났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매일 조금씩 부스러지고 흘러내리던 절벽 사면이 달라졌다.

이제 더는 무너지지 않게 되었다.

그걸 두 눈으로 확인한 나마란 백작이 환호했음은 물론이었다.

"자, 약속한 공사 대금은 여기 있네."

"이건... 마차 아닙니까?"

"맞다네."

"설마 이 마차가 공사대금인 건 아니겠지요?"

"허허허, 설마 그러려고. 마차 안쪽을 보게."

나마란 백작이 인자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 로이드는 혹시나 하는 기분을 느꼈다.

'이거 뭔가.'

대박의 예감이 무럭무럭 피어난다.

어느새 쿵덕쿵덕 뛰는 가슴으로 로이드는 마차 문을 열었다.

그리고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내 작은 성의일세."

"...."

마차 가득 실려 있는 상자.

살짝 열린 상자 속으로 엇비치는 금화.

이거, 실화일까.

로이드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물었다.

"...이거, 다 받아도 되는 겁니까."

"안 믿기는가? 허허허! 모처럼 선심 좀 썼다네. 사실 내 딸과 도시를 구해준 공적을 생각하면 더 챙겨줄까 했는데, 이 늙은이의 요청을 거절한 점이 조금 괘씸해서 선심을 살짝 깎았지 뭔가."

"하하. 그런 건 굳이 안 깎으셔도 되는데."

투덜거려본다.

한데 그런 투덜거림과 달리 입꼬리는 절로 귀에 걸린다.

'만세!'

로이드는 몰래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무려 금화와 은화로 가득 채워진 상자가 다섯 개였다.

이 정도면 당분간 왕실의 지원이 없어도 영지와 피난민 집단을 모두 꾸려가기에 부족함이 없으리라.

'나이스. 초필살 나이스.'

역시 돈보다 좋은 게 없다.

세상에 돈이 최고다.

이 돈만 가지고 가면 이제 남은 인생 내내 꿀단지에서 헤엄칠 수 있다.

확신한 로이드는 프론테라 영지로의 귀환길에 올랐다.

금화 가득 실린 마차를 몰고서.

200구 골병대와 함께.

백작과 영애의 배웅을 받으며 보무도 당당하게 나마란을 출발했다.

그리고 마침내 여정 12일째.

프론테라 영지로의 도착을 반나절 앞둔 아침.

로이드는 야영지의 모닥불을 정리하고 있던 하비엘을 넌지시 불렀다.

"어이, 하비엘?"

"예. 무슨 일이신지."

"있잖아, 너어. 이렇게 시치미 떼기 있기, 없기?"

"...대뜸 뜬금없이 시치미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내기. 레이디 엘라. 그 복장으로 영지에 귀환하기로 했잖아?"

"...."

"설마 까먹고 있었던 건 아니지?"

"...."

솔직히 잊고 있었다.

철혈의 기사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걸 보는 로이드의 입가에 짓궂고도 사악한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미리 챙겨둔 레이디 엘라의 드레스와 가발이 야물딱지게 들려 있었다.

181화. 아버지의 기다림 (1)

 

 

"비벙-!"

언제나처럼 울려 퍼지는 비벙이의 힘찬 외침.

그 친환경적 알람과 함께 프론테라 백작령의 아침이 밝았다.

아침을 맞이하는 프론테라 백작의 가슴도 평소보다 조금 더 두근거렸다.

마침내 기다리던 날이 밝았기 때문이었다.

'오늘인가.'

백작은 하녀가 가져온 따스한 찻잔을 들었다.

싸락눈 내리는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침실 창가에서는 아담한 정원뿐 아니라 저택으로 올라오는 언덕길이 저 아래까지 훤히 보였다.

나뭇가지 앙상한 계절이기에 더욱 잘 보였다.

백작은 그 사실이 반가웠다.

집으로 돌아올 아들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일찍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

'아마도 오늘 돌아오겠지.'

문득, 며칠 전에 저택으로 날아왔던 전서구가 떠올랐다.

나마란 백작이 보낸 서신이 담겨 있었다.

서신이 말해 주었다.

로이드와 하비엘이 나마란 시를 출발했다고.

언제언제쯤 귀측 영지에 도착할 것 같다고.

그리고 진심으로 깊이 감사드린다고.

'설마 거기서 그런 일을 겪었을 줄이야.'

서신의 내용을 떠올린 백작의 눈빛이 침중해졌다.

그저 공사를 따낸 거라고.

공사만 치르면 금방 돌아올 거라고.

그렇게 말하며 나마란 시로 떠났던 아들이었다.

그랬기에 아들이 그곳에서 흑마법사 무리를 일망타진하고 지옥의 기사와 맞서는 따위의 험한 일을 겪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하비엘마저도 감당하기 어려워했다는 적의 다리를 끌어안고... 후우.'

만약 그러다 애가 잘못됐으면?

생각만 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일로 아들이 공훈을 세웠다지만 그런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공훈 따위 없어도.

잘난 구석 없어도.

자신의 아들이니까.

그저 탈 없이 지내 주길 바라니까.

자신은 다만 그것만으로도 이미 족하니까.

'일단 녀석이 오면 따끔하게 혼을 내야겠군.'

다음부터는 절대 그런 일에 나서지 말라고.

위험할 것 같으면 우선 도망부터 치라고.

이참에 준엄하게 꾸짖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프론테라 백작은 침실 창가를 지켰다.

싱숭생숭 설레는 마음으로 아침 식사를 걸렀다.

대신 차 한 잔을 더 마셨다.

그래도 어쩐지 목이 탔다.

차를 또 마셨다.

마시고 더 마셨다.

그때마다 하녀가 들락날락.

새 차를 끓여 오고, 빈 찻잔을 치웠다.

그러는 사이에 오전이 가고, 점심마저 훌쩍 지나, 초겨울의 짧은 해가 서쪽으로 기울었다.

그때까지도 프론테라 백작은 창가를 서성였다.

설마 오늘은 안 오는 걸까.

내일 오는 건가.

아니면 혹시 오다가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그렇듯 창가를 거니는 프론테라 백작의 걸음이 초조해졌을 무렵.

한순간 그가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그리고 냉큼 달려갔다.

침실을 나섰다.

저택 계단을 두 칸씩 뛰어 내려갔다.

1층 주실을 지나, 문을 벌컥 열고 밖으로 나섰다.

황급히 따라온 하녀가 권하는 외투조차도 마다하고 정원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저택으로 올라오는 언덕길을 내려다보았다.

"아."

마차가 올라오고 있었다.

어느새 제법 굵어진 눈발을 헤치고.

하얗게 뒤덮인 언덕길에 기다란 자국을 남기며.

차근차근, 착실하게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다.

마침내 저택 대문 앞에 섰다.

그 순간, 프론테라 백작은 저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냈다.

"어?"

그의 시선이 마차의 마부석을 향했다.

그러자 그곳에 앉아 있던 마부가 인사했다.

 

달그락!

 

뼈다귀만 남은 손을 반갑게 흔들며, 아래턱뼈를 달각거리며 웃었다.

그러니까 그건, 해골 병사였다.

"으으아아악?"

아니, 아들이 온다고 그랬는데.

로이드가 올 거라고 했는데.

어째서 돌아온 마차의 마부석에 해골 병사가 타고 있는 건지.

프론테라 백작은 기겁한 나머지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만약, 그때 마차 문이 열리지 않았더라면 꼴사납게 바지에 진흙 섞인 눈을 잔뜩 묻히게 되었을 것이었다.

 

달칵!

 

"어라? 언제 나오셨어요?"

경쾌하게 열린 마차 문 틈새로 로이드가 얼굴을 내밀었다.

기겁하고 있던 이쪽을 향해 반가운 미소를 보냈다.

백작은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며 대꾸했다.

"그, 그러게 말이다. 방금 나왔지 뭐니."

"많이 놀라셨어요? 추운데 외투도 안 입으시고."

"어. 그게."

어느새 마차에서 내려 다가온 로이드.

제 외투를 벗어서 선뜻 어깨에 덮어 주었다.

그 온기가 백작의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솔직히 말하마. 네가 온 줄 알고 반갑게 마중 나왔다가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구나. 저 해골들은 대체 무엇이더냐?"

백작의 손길이 마부석의 해골을 가리켰다.

게다가 해골은 마부 하나만이 아니었다.

곧이어 마차가 올라온 길을 따라 나머지 해골 병사들이 2열 종대 행군대열로 줄줄이 소시지처럼 올라왔다.

로이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으음, 나마란 백작께서 전서구로 그간의 사정을 알려 주실 거라 하셨는데. 골병대 이야기는 언급이 없었나 보네요?"

"고, 골병대?"

"예."

"그게 무엇이더냐."

"새로 생긴 일꾼들요."

"저 해골들이?"

"예."

"...."

"보기보단 순합니다. 처음엔 좀 으스스한데 계속 꾸준히 부대끼다 보면 은근 생각보다 금방 적응도 되구요. 특히나 다들 게으름 안 부리고 일을 잘해서 말이죠. 아, 소개할게요. 마부석에 앉은 친구가 거북목. 골병대의 리더입니다."

 

달그락!

 

마부석에 앉은 골병대 리더, 거북목이 백작을 향해 해맑게 손을 흔들었다.

로이드가 나머지 해골들을 가리켰다.

"저기 대열 맨 앞에 있는 둘은 골병대의 1조장인 사각턱이랑 2조장인 오십견이구요. 나머지는, 으음, 다들 이름이 헷갈려서 저도 아직은 못 외우고 있습니다."

"...."

"어쨌건 안 무서워하셔도 됩니다. 쟤들 안 물어요."

"...."

물진 않아도 까딱 실수하면 묻어 버릴 거 같은데.

백작은 으스스해지려는 기분을 애써 털어냈다.

한데 그때였다.

로이드의 표정이 짓궂어졌다.

그러더니 마차를 돌아보았다.

설마 또 보여 줄 것이 남은 걸까.

백작이 그런 의문을 품는 사이, 로이드가 히죽 웃으며 마차 안쪽을 향해 말했다.

"어이, 이제 슬슬 나올 때도 안 됐냐."

하지만 안쪽에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로이드의 미소가 더욱 짓궂어졌다.

"이보세요? 혹시 부끄러워?"

안에 또 누가 있는 걸까.

그러고 보니 하비엘이 보이질 않는데.

구름 가득 눈 내리는 날이라 마차 안쪽이 어두웠다.

누가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백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순간, 마차 안쪽에서 냉랭한 대꾸가 날아왔다.

"부끄러워한다니, 오해이십니다."

"그럼?"

"치맛단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예뻐 보이려고?"

"천만의 말씀을. 오랜만에 뵙는 주군께 대한 최소한의 예를 지키기 위함입니다. 차마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 드릴 수는 없어서."

그 말과 함께 하비엘이 마차 밖으로 나왔다.

프론테라 백작의 입이 쩍 벌어졌다.

백작뿐만이 아니었다.

그를 따라 나왔던 하녀와 하인들도.

먼발치에서 아들의 귀환을 기뻐하던 백작 부인도.

모두들 하비엘의 모습을 보는 순간 눈앞이 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아.

세상이 이렇게 밝고 아름다웠구나.

오늘 날씨가 이토록 화사했던 건가.

그만큼 아름다웠다.

수수한 드레스 끝단을 살짝 정리하며 마차에서 내리는 하비엘의 모습이.

백작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서 기사의 예를 표하는 자태마저도.

가발을 썼건.

앞치마를 둘렀건.

낡은 단화를 신었건.

그 복장이 수수하기 짝이 없지만.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그저 아름답고 또 아름다웠다.

백작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표정마저도 빛이 났다.

불현듯 그 살짝 찡그린 미간에 압사당하고 싶은 충동이 쑴펑쑴펑 피어날 정도였다.

즉, 저택 앞에 나와 있던 모두는 예고도 없이 공개된 레이디 엘라의 자태에 모두 말을 잃어버렸다.

"기사 아스라한, 주군을 뵙습니다."

"...어, 으음. 쿨럭! 콜록!"

당황한 백작이 사레가 들렸다.

예를 마친 레이디 엘라, 아니, 하비엘이 일어섰다.

모두의 당황과 침묵 사이를 총총총 가로질렀다.

누군가가 붙잡기 전에.

혹은 질문을 던져오기 전에.

황급히 자리를 피하듯 대문으로 들어갔다. 정원을 가로질렀다. 저택 별채에 있는 자신의 숙소로 쏙 들어갔다.

그리고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1초 만에 가발과 드레스를 벗어 버렸다. 아니, 다시는 입을 수도 없도록 쓰레기 바구니에 구겨 넣어 버렸다.

"후."

한숨이 나온다.

내가 어쩌다 이런 짓을 하게 된 걸까.

문득, 아침의 일이 떠올랐다.

나마란 백작령에서 이곳까지의 여정 마지막 아침이었다.

지금까지 늘 그랬던 것처럼 야영지를 정리하던 자신이었다.

한데 로이드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능청스러운 눈빛으로 뭐 잊은 거 없냐고 물어왔다.

그러더니 저 가증스러운 가발과 드레스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 앞에서 자신은 저항할 수 없었다.

내기를 했으니까.

약속은 지켜야 하니까.

'이제 다시는 저 옷을 입을 일이 없겠지.'

절대 그런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아니, 없도록 할 것이다.

하비엘은 쓰레기 바구니에 구겨 넣어진 가발과 드레스를 쳐다보며 굳게 다짐했다. 그리고 그날 온종일 쀼루퉁해진 표정으로 숙소에 틀어박혀 문밖으로 발가락 하나 내밀지 않았다.

 

 

다음 날이 밝았다.

"어이, 엘라 양."

"...."

"엘라 양?"

"...."

"아스라한 경?"

"예, 말씀하시죠."

아침부터 싸늘하게 돌아오는 하비엘의 대꾸.

그 냉랭함에 로이드가 생긋 웃었다.

"어젠 많이 화났었어?"

"전혀. 안 났습니다."

"그런데 문도 안 열어 주고. 저녁엔 모처럼 자장가 불러 주러 갔었는데."

"자고 있었습니다."

"정말?"

"예."

"그런데 안에서 한숨 쉬는 소리는 들리던데."

"잠꼬대를 하고 있었나 봅니다."

"아닌데. 뭔가 울분을 삭이느라 콧구멍 부르르 떨면서 내쉬는 한숨 소리 같았는데."

"기분 나쁜 꿈을 꾸고 있었나 보죠."

"예를 들자면?"

"로이드 님을 꿈에서 만났다거나. 로이드 님과 꿈에서 이야기를 나눴다거나. 로이드 님과 식사를 했다거나. 로이드 님과 같이 있었다거나. 저 먼발치에서 로이드 님을 얼핏 봤다거나. 혹은 우연히 로이드 님의 소식을 들었다거나. 그도 아니라면 로이드 님을 닮은 소똥 덩어리를 목격했다거나 하는 식의 꿈 말입니다."

"...."

"더 말씀해드릴까요?"

"어, 흥미진진하네. 내가 숨 쉬는 소리만 들어도 기분 나빴을 거 같은 기세라서."

"잘 아시는군요."

"응. 그래서 이렇게 너 놀려먹는 게 재밌다는 거지."

"그런가요. 로이드 님은 참 좋으시겠습니다."

"어째서?"

"이제 곧 27년 솔로 신세에서 탈출하게 되실 테니까 말입니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로이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은 여전히 솔로인데.

여자친구는커녕 썸 타는 여자도 없는데.

그런데 곧 솔로 신세에서 탈출이라니?

하비엘의 냉랭한 대꾸가 이어졌다.

"조만간 새해가 밝을 테고, 그럼 로이드 님은 28년 솔로 신세가 되시겠지요."

"...."

"미리 축하드립니다."

"어, 그래. 눈물 나게 고맙다야."

"별말씀을."

"...."

뭔가 되로 주고 말로 받은 느낌이다.

탱탱볼 하나 던졌다가 투포환을 명치에 맞았다거나.

로이드는 쓰라려 오는 미소를 억지로 부여잡으며 말했다.

"그래, 이젠 좀 기분 나아졌냐."

"예. 덕분에 조금."

"그래? 그럼 가자."

"어디로 가시렵니까."

"시공 현장."

차가운 겨울바람에 목깃을 세우며 로이드가 말했다.

여독을 풀며 쉰 건 어제 하루로 충분하다.

이제는 그간 미루었던 일을 해야 할 때다.

"아파트 단지랑 대하수로. 일단 어제저녁에 바이에른 경에게서 보고를 받긴 했는데. 그래도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지."

이쪽이 나마란에 다녀온 사이.

바이에른 경이 많은 일을 해 두었다.

아파트 단지와 대하수로 시공.

그 마무리를 훌륭하게 해냈다고 했다.

"그러니까 직접 가서 보자."

그날부터였다.

로이드는 총 닷새에 걸쳐 아파트 단지와 대하수로 곳곳을 점검했다.

혹여 원래의 설계와 어긋나게 시공된 곳은 없는지.

시공상의 하자나 결함은 없는지.

측량 스킬까지 동원하며 철저하게 체크했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좋아. 이 정도면 100점 만점에 90점은 충분히 줄 수 있겠어.'

특히 꿀벌 아파트 단지가 마음에 들었다.

높은 층이야 직접 오르내리며 살려면 조금 불편하겠지만, 이만하면 피난민들이 비바람을 피하며 따뜻하게 살아가기엔 무리가 없을 터였다.

그렇게 피난민들의 아파트 단지 입주가 시작되었다.

연세가 많거나 몸이 불편한 이들은 저층 위주로.

비교적 젊고 튼튼한 이들은 고층으로 집을 배정받았다.

딱히 호화롭거나 넓은 집은 아니었다.

아니, 정말로 잠만 잘 수 있는 단순한 구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대부분의 피난민들이 기뻐했다.

예고도 없이 몬스터 도미노 사태에 휩쓸려 삶의 터전을 잃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피난민이 되어 1년이 넘도록 난민 캠프에서 열악한 생활을 이어 왔던 이들이었다.

그랬던 이들에게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든든한 집이 생긴 셈이었다.

'뭐, 계단 오르내리는 게 좀 불편하겠지만 일단은 이렇게라도 지내게 해야지. 그러다가 다들 형편이 조금 나아지면? 따로 나가서 집 짓고 살면 되는 거고.'

그렇게 아파트가 조금씩 비게 되면?

그때부터는 동 하나씩을 통째로 공병대와 경비대의 숙소로 쓰면 된다.

'어쨌건 그건 나중의 일이고. 일단은 큰 산 하나를 넘은 셈이야.'

수많은 피난민들의 입주를 마무리한 날.

로이드는 녹초가 되어 침대에 몸을 던졌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흐뭇했다.

새 삶의 터전을 얻어 기뻐하던 피난민들.

지난 며칠 동안 그들에게 받은 감사의 인사만 수천 번은 되는 것 같았다.

살면서 이렇게 칭찬과 감사를 많이 들어본 적은 처음이었다.

'하긴 그럴 법도 해.'

만약 자신이 고시원에서 살던 시절에.

누군가가 선뜻 공짜 원룸을 안겨줬다면?

그랬다면 자신도 저렇게 감격하며 고마워하지 않았을까.

'좋은 일 한 거야. 나중에 이득이 되는 일이기도 하고.'

이제 아파트 입주를 마친 피난민들은 더는 피난민이 아니다.

프론테라 백작령의 어엿한 주민으로 거듭날 것이다.

'그게 다 세금으로 돌아오는 거지.'

자신의 평생 연금이 되어줄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입꼬리가 절로 귀에 걸렸다.

'아아. 좋다. 피난민 문제도 해결했고. 나마란에서 얻어온 돈이랑 보석 덕분에 당분간은 영지 자금도 부족할 일이 없고. 이젠 진짜 꿀 빠는 인생만 남았네.'

크게 공사를 벌일 일도 없으리라.

큰 풍파를 겪지도 않으리라.

오직 평온하고도 풍족한 여생만 즐기리라.

그렇게 다짐하며 로이드는 꿀잠을 청했다.

행복한 꿈을 꾸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국왕 알리시아 테르미나 마젠타노가 파견한 술탄국행 특사단을 맞이하게 되었다.

182화. 아버지의 기다림 (2)

 

 

사라락.

 

서신이 펼쳐졌다.

펼쳐진 종이 위로 다부진 눈동자가 거닐었다.

"흐음."

국왕 알리시아 테르미나 마젠타노의 미간에 주름이 생겨났다.

"헬나이트라."

그녀는 기억을 더듬었다.

옛 문헌에서 언급된 걸 본 적이 있다.

지옥의 군단을 이끄는 기사라 했던가.

물론 태고의 시대를 제외하고는 헬나이트가 지상에 강림한 적은 없었다.

만약 그 존재가 강림한다면?

지상의 모든 피조물은 그날로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옛 문헌이 경고하고 있던가.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그런 존재가 불완전한 모습으로 소환되었다는 게.'

자칫 왕국이 쑥대밭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나마란의 용맹한 기사들과 시민들 덕분이라고.

그들이 흑마법사들의 계획을 좌절시켰다고.

강림한 헬나이트를 가까스로 제압했다고.

나마란 백작의 보고서가 알려 주고 있었다.

'한데 과연 이 보고서, 진짜일까.'

일렁이는 촛불 아래 보고서를 읽는 국왕 알리시아의 눈동자에 희미한 미소가 배어났다.

아무래도 석연치가 않다.

'나마란의 기사들이 흑마법사 무리를 척살하고 체포한 것까지는 믿을 수 있겠지만 글쎄, 헬나이트를? 아무리 불완전한 모습으로 강림했다고는 하지만 그 지옥의 기사를 제압했다고?'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게다가 뒤에 덧붙인 보고는 더 수상해.'

국왕의 눈길이 보고서 아래쪽을 향했다.

그곳에는 헬나이트가 제압되던 상황에 대한 조금 더 자세한 보고가 덧붙여져 있었다.

'마침 나마란 시에 체류 중이던 프론테라 가문의 장남 로이드 프론테라가 기이한 노래를 불렀고, 그 노래 때문에 헬나이트가 큰 혼란에 빠졌으며, 덕분에 로이드의 호위인 하비엘 아스라한 경과 다른 기사들이 분전하여 헬나이트를 제압해냈다니. 흐음. 지옥의 기사를 뒤흔들려면 대체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는 건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다만 국왕 알리시아는 보고서를 통해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나마란 백작이 프론테라 가문 장남의 공훈을 일부러 줄여서 보고했군.'

그런 냄새가 났다.

물론 직접 사건을 목격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보고서를 통해 여러 정황을 살펴보자면 충분히 그런 추측이 가능했다.

'애초에 나마란의 기사들이 아무리 분전한들 대적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겠지, 헬나이트는. 그런데 아스라한 경과 기사들이 협력하여? 아니야. 실제로는 로이드 프론테라와 하비엘 아스라한, 두 사람이 헬나이트를 제압한 것일 터.'

그녀는 문득 지난 일을 떠올렸다.

자신에 대한 시해 시도가 있었던 밤.

그날 로이드와 하비엘이 보여 주었던 능력을 돌이켜보았다.

소드마스터 체르니 경을 제압한 하비엘.

소드마스터는 아니지만 기기묘묘한 재주를 보여 주었던 로이드.

그 둘의 협력이라면 불완전한 헬나이트와 충분히 자웅을 겨룰 수 있었으리라.

'한데 나마란 백작은 어째서 그런 두 사람의 공훈을 축소하여 보고한 걸까. 흠, 프론테라 가문 장남의 평온한 삶을 지켜주려는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는 순간.

국왕 알리시아는 한쪽 입술로 미소 지었다.

그녀는 로이드의 소박한 성향을 잘 알고 있었다.

야심이 별로 없다는 것도.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어 한다는 사실도.

여러 경로를 통해 보고를 받으며 매우 자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마란 백작에게 부탁한 거겠지. 내게 보고를 할 때 자신의 공훈을 줄여달라고. 하지만 어떡하지. 로이드 프론테라, 어차피 그대의 공훈은 어제 압송되어 온 칸나바로, 저 흑마법사의 자백을 통해 모두 드러나게 될 거야. 게다가 짐은 당분간 그대를 유용하게 부려 먹을 생각이거늘.'

능력이 있는 자는 써야 한다.

능력을 썩히는 것은 낭비다.

아니, 죄악이다.

능력 있는 자들이 피곤해질수록 왕국은 번영하고 백성은 편안해질 것이다.

특히나 지금처럼 이웃한 강국과 외교적 갈등을 겪고 있는 중요한 시기엔 더더욱 그렇다.

"그렇기에 로이드 프론테라, 그자를 특사단에 합류시킨 것이지. 그렇지 않은가."

"합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전하."

그녀의 물음이 서재에 나직하게 울렸다.

서재 한쪽에 공손히 서 있던 외무대신이 답했다.

국왕 알리시아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합당한 말이라. 특사단을 출발시키기 전까지는 짐의 복안에 고개를 갸웃거렸던 그대가 아니던가. 혹시 그 사이에 생각이 바뀐 것인가."

"아니옵니다, 전하."

"그렇다는 말은?"

"소신은 그저 사안이 결정되기 전까지 의문을 표하고 의견을 제시할 수 있을 뿐이옵니다."

"그럼 짐이 결정한 사안에 대해서는 독자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겠다는 뜻이로군?"

"그러하옵니다, 전하. 다만...."

"다만?"

"...."

"말하여보도록. 짐은 그대의 생각을 책망하지 않겠노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다만 소신의 생각을 밝히자면 로이드 프론테라, 그자를 특사단에 합류시켜 얻을 이득이 무엇이 있을까가 궁금할 뿐이옵니다."

외무대신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국왕 알리시아의 쓴웃음이 짙어졌다.

"흐음, 그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군. 전문적인 외교관도 아닌 프론테라 가문의 장남이, 특사단과 함께 술탄국에 가서 어떤 보탬이 될까 의문이 든다는 뜻이겠지?"

"그러하옵니다, 전하."

"사실은 짐도 크게 기대를 하지는 않아."

"예?"

외무대신이 고개를 들었다.

의아한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국왕 알리시아가 살풋 웃었다.

"로이드 프론테라는 어차피 특사단의 간판이 될 뿐이겠지. 몬스터 도미노 사태에 휩쓸린 수많은 영지의 피해자들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역할이랄까."

"단지 그것뿐이옵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러해. 내심 추가로 기대하는 바가 아주 없지는 않지만."

"그 말씀은...?"

"난 그자만큼 쪼잔한 인간을 보지 못했거든."

"예?"

외무대신이 고개를 갸웃.

알리시아가 코웃음을 피식.

"태어나던 순간부터 왕궁의 정치판에서 자라난 짐이다. 왕위를 승계하기 위한 수많은 경쟁과 암투를 모두 이겨냈지. 그만큼 별별 인간들을 다 보았어. 음흉한 자, 사나운 자, 어리석은 자, 비열한 자, 영리한 자까지. 하지만 로이드 프론테라, 그자는 달랐어."

"그자에게서 남다른 면을 엿보셨다는 뜻이시옵니까?"

"그러해. 그자만큼 철저하게 쪼잔하고 뒤끝 더러우면서 노골적으로 땅강아지처럼 부지런하게 치사한 인간은 처음 봤거든."

"...."

"그래서일 것이야. 짐이 기대하는 것은. 어쩌면 그가 뜻밖의 성과를 가져올지도 모른다고 말이지."

"...."

국왕 알리시아의 독백 같은 차분한 목소리가 서재에 울렸다.

어쩌면 그런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외무대신은 감히 대답을 못 하고 고개만 숙였다.

그리고 국왕 몰래 가만히 생각했다.

'저 말씀은 대체 욕인지, 칭찬인지....'

알쏭달쏭하기만 했다.

다만 외무대신은 내심 바랄 뿐이었다.

이번에 술탄국으로 파견한 특사단.

그들이 부디 성공적인 협상을 치러내기를.

그리하여 술탄국과의 전쟁을 치르지 않게 되기를.

 

 

"예? 저기, 그러니까, 술탄국과의 전쟁을 막으려면 제가 특사단에 합류해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자네도 모르진 않을 텐데?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전하의 칙명이라네."

 

좌르륵, 탁!

 

칙서 두루마리가 돌돌 말렸다.

방금 칙령 낭독을 마친 국왕의 특사, 벤투라 백작이 말했다.

"프론테라 가문의 장남 로이드 프론테라여, 자네도 익히 알고 있을 터. 국왕 전하의 칙령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지켜져야 한다는 사실을 말일세."

"아, 예, 저도 알고 있습니다만...."

"출발은 내일 아침이라네. 그때까지 준비를 마쳐놓게나."

 

휘이잉.

 

특사 벤투라 백작이 몸을 돌렸다.

그 빈자리로 초겨울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이 로이드의 가슴을 옴팡지게 때려 왔다.

'하아.'

절로 한숨이 나온다.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어젯밤까지만 해도 난 행복했는데.

아파트와 대하수로를 건설함으로써 피난민 문제도 해결했고.

나마란에서 제법 큰 목돈도 벌어왔고.

덕분에 당분간은 걱정거리가 없었는데.

풍파를 겪을 건덕지도 보이지 않았는데.

그래서 이제 꿀만 빨며 살아갈 줄 알았는데.

'국왕 누님, 저한테 왜 이러시는 겁니까.'

머나먼 왕도에 있을 국왕을 원망해 본다.

동시에 그는 오늘 아침의 일을 떠올렸다.

이른 아침 식사를 마친 직후였던가.

평소보다 잠이 약간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또 자려고 했다.

기분 좋게 침대에 몸을 던졌다.

한데 그때쯤 저택 1층이 떠들썩해졌다.

하인들과 하녀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더랬다.

무슨 일인가 싶어 복도로 나와 보았다.

그리고 목격했다.

1층 계단으로 서둘러 내려가고 있던 프론테라 백작 부부의 모습을.

그때 백작이 이쪽을 돌아보더니 말했던가.

국왕 전하의 특사가 왔다고.

어서 의복을 갖춰서 내려오라고.

뭔 일인가 싶었다.

쌔한 느낌도 들었다.

백작의 말대로 의복을 갈아입고 내려왔다. 한쪽 무릎을 꿇었다. 특사가 낭독하는 국왕의 칙령을 귀에 쏙쏙 담았다.

국왕의 칙령은 심플했고 파괴적이었다.

이쪽 더러 특사단에 합류하란다.

특사단이랑 오순도순 손잡고 술탄국에 가란다.

그래서 술탄과 외교적 협상을 벌일 특사를 도우란다.

'내가? 특사를? 도와? 어떻게?'

이건 뭐 짐작도 가지 않았다.

아니, 살포시 짚이는 역할이 있긴 했다.

'얼굴마담인 건가.'

로이드의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지금 시기에 국왕이 동쪽 술탄에게 특사를 보낸다?

그 이유는 보지 않아도 뻔할 것이다.

'몬스터 도미노.'

그 사태의 책임을 물으려는 것이리라.

외교적인 보상을 받아내고 재발 방지 협정을 맺으려는 거겠지.

그래서 자신을 특사단에 합류시키는 거다.

프론테라 영지.

이곳도 몬스터 도미노 현상에 피해를 입었으니까.

아니, 피해를 입은 영지 중에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았으니까.

재건의 중심지가 되어 있으니까.

'나한테 피해자들을 대표하는 역할을 떠맡긴 거야. 그러네. 딱 그거네. 이곳 지방이 어떻게 해서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를 증언하고 호소하는 거.'

정말로 딱 그거다.

그래서 날 보내는 거다.

'하아. 저번에 내가 너무 징징거렸나.'

지난번 국왕에게 지원금을 타내던 때가 떠올랐다.

당시에 서신을 통해 국왕에게 대놓고 징징거리고 떼를 썼던 자신이었다.

아무래도 국왕 누님은 그때 이쪽에게서 굉장히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날 보내는 거겠지. 술탄 앞에서 그때처럼 징징거리라고. 그래서 특사의 외교 협상에 양념을 치라고. 하아, 이거 참.'

로이드는 쓰라려 오는 입맛을 다셨다.

이미 칙령은 발표되었다.

그걸 무를 수도, 거역할 수도 없다.

즉, 자신은 내일 얄짤없이 특사단에 합류해야 한다. 술탄국에 가야 한다.

'이렇게 팔자에도 없던 술탄국 관광을 다 하게 생겼네.'

하지만 마음 편한 관광은 아니다.

만약 특사의 협상이 실패한다면?

술탄이 끝까지 뻔뻔하게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쪽 왕국과 술탄국 사이의 외교적 갈등의 골이 한층 깊어질 것이다.

자칫 전쟁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면 프론테라 영지는 말 그대로 큰일이 난다.

'두 세력이 벌이는 전쟁의 틈바구니에 휩쓸리게 될 테니까.'

이쪽이 술탄국을 침공하는 경우엔?

프론테라 영지가 침공의 교두보가 될 것이다.

반대로 술탄국에게 침략을 당한다면?

졸지에 침략을 막아내는 최전선으로 전락할 것이다.

즉, 여기가 전쟁터가 된다.

어느 쪽이건 간에 절대로 사양하고 싶은 전개였다.

"괜찮겠느냐?"

"아, 네."

어느샌가 어깨를 짚어오는 프론테라 백작.

백작을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솔직히 갑자기 이렇게 영지를 또 떠나야 하는 상황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꿀맛 같은 나날을 누리려던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까라면 까야지.

기왕 가는 거, 후딱 해치우고 와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로이드는 출발 준비를 했다.

사실 준비라고는 해도 딱히 챙길 것도 별로 없었다.

'어차피 특사단에 묻어가는 거니까, 뭐.'

식량이고 잠자리고 전부 특사단에서 제공해줄 것이다.

모닥불을 피우거나 텐트를 마련하는 등의 잡일도 모두 특사단의 수행 종자들이 해결해줄 것이다.

즉, 이쪽은 그냥 입을 옷만 챙겨가면 되었다.

그리고 여정이 이어질 동안의 심심함을 줄일 방법만 챙기면 되었다.

"그 방법이 저인 겁니까."

"어. 당연하지."

"저는 로이드 님께 심심풀이 같은 존재인 겁니까."

"응. 당연하지."

하비엘의 물음에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

태연한 낯빛으로 대꾸했다.

"그럼 내가 저 머나먼 술탄국까지 끌려가게 된 이 판국에, 넌 같이 안 갈 생각이었던 거냐?"

"예."

"헐. 1초도 고민 안 하고 대답하는 거 봐."

"저는 그저 주군의 명에 따르는 사람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백작님께서 너한테 날 호위하라는 명을 따로 안 내리셨다?"

"그렇습니다."

"쯧. 아무래도 깜빡하신 거 같은데."

"깜빡하셨다니요?"

"네가 날 따라다니는 게 너무 당연해서. 굳이 따로 명을 내리지도 않으신 거지. 안 그래?"

"안 그럴 거 같습니다."

"그건 네 희망 사항인 거고. 어쨌건 이러면 되겠네. 내가 가서 말씀드릴게. 너 데려가게 해달라고."

"...."

"아, 고마워라. 아아, 눈물 나라. 그렇지? 생각해봐. 너 나 안 따라오면, 어? 잠은 어떻게 잘 건데?"

"잠 같은 건...."

"소중하지. 숙면이 사람의 육체와 정신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 건데. 그런데 그걸 한동안 포기하며 지내겠다고?"

"로이드 님께 시달리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듯해서 말입니다."

"그러다가 만약 내가 술탄국에서 잘못되면? 그래도 괜찮은 거야?"

"예, 당연히."

"...."

"어째서 그런 눈으로 보시는 겁니까."

"어, 반드시 널 데려가겠다고 결심하는 중이거든. 이젠 진짜로 나만 가긴 억울해져서."

"...."

"그럼 잠깐만 기다려. 백작님께 너 데려가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와서 자장가 불러줄게."

로이드는 하비엘의 숙소를 나섰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백작의 서재로 향했다.

프론테라 백작의 서재는 환히 밝혀져 있었다.

다만 로이드를 맞이하는 백작의 표정엔 어딘가 희미한 그늘이 져 있었다.

나마란에서 고생을 하고 돌아온 아들을 또다시 멀리 보내게 되어서? 아들이 재차 고초를 겪을까 염려가 되어서?

모두 맞았다.

하지만 더 큰 이유가 있었다.

"다행히 안 주무시고 계셨네요. 실은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서 말이죠."

싱긋 웃으며 서재로 들어오는 자신의 아들, 로이드 프론테라.

녀석이 자신을 아버지라 불러준 마지막이 언제였던가.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래, 어떤 부탁이더냐."

그럼에도 다그치지는 말자.

녀석이 마음을 열어줄 때까지 시간을 주자.

그렇게 다짐하며 프론테라 백작은 애써 푸근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