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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황실에서도, 형님도 예상하지 않았던 미친놈이 있다면 어쩌실 셈입니까?"

"미친놈이라."

카슨은 턱을 매만졌다.

천천히 그의 눈동자가 커졌다.

"설마… 몇 달 전에 일어났던 자폭 사건을 말하는 것이더냐?"

"맞습니다. 현재 그 부분까지 준비가 된 상태입니까?"

루시온이 대답했다.

변경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다.

테슬라 제국의 변경에는 두껍고 커다란 성벽이 존재했다.

그 벽을 뚫기 위해 뉴브라 왕국에서 자폭병을 보낸 적이 있었다.

결과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폭발을 막을 두꺼운 성벽도 없었고, 수도권을 벗어날 때까지 사람들이 모이는 상황을 막을 수도 없었다.

카슨의 표정이 굳었다.

"그 부분을 고려하지 않은 건 아니나, 다시 보니 무척 미흡하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가장 안전한 상황이 도리어 가장 위험한 상황이 될 수 있으니 적으로서는 허를 찌르기 가장 쉬운 상태가 아닌가.

"잠깐만 기다리거라."

카슨은 마차에 내렸다.

[봤지?]

러쉘이 카슨을 가리키며 베델을 바라보았다.

베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러쉘 그대가 왜 루시온 공을 보고 사기꾼이라고 말하려다 말았는지 이해했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루시온 공이 사람의 속을 살살 긁는데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

―루시온은 사기꾼이 아니야. 루시온이 얼마나 착한데. 라타는 루시온만큼 착한 인간은 보지 못했어.

라타가 눈살을 찌푸리며 루시온의 팔을 붙잡았다.

"그래. 라타, 너밖에 없네."

―흄은? 흄도 라타처럼 생각하는데?

"그렇지. 흄도 있네."

루시온은 러쉘과 베델을 째려보듯 번갈아 쳐다보았다.

[시, 실례했다. 루시온 공의 말이 그만큼 특별하다는 의미였으니 부디, 오해하지 말아줬으면 해.]

베델은 당황하며 입을 열었다.

은인에게 무슨 말을 한 건지.

베델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투구에 달린 솔을 만지작거렸다.

* * *

"…왜 그러십니까?"

막 마지막 점검을 하고 돌아온 헤인트가 카슨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며 물었다.

"몇 가지 보강해야 할 게 있습니다."

카슨은 슬쩍 마차를 가리켰다.

"마차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예. 와서 보셨으면 합니다."

헤인트는 카슨의 제의에 못 이기는 척 마차에 올랐다.

지금 마차만큼 외부에 말이 새어 나가지 않는 장소는 없었다.

"무슨 일이길래 그래? 지금 바로 출발해야 해."

헤인트가 시각을 확인하며 카슨을 재촉했다.

"오늘 우리가 변경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은 대부분 알고 있는 사실이지."

카슨이 입을 열자 헤인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서 변경으로 돌아갈 때, 발표한 길과 다른 길로 둘러서 가기로 합의 봤잖아."

"출발하기 전에 몇 가지 보강할 게 있다."

"보강이라니?"

헤인트는 슬쩍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혹시 이번에도 루시온이 무언가를 발견한 게 아닐까 하는 기대를 해 보았다.

"우리가 깊게 생각하지 못한 일이 하나 있어. 적의 자폭."

"그래서 마방사를 준비했는데?"

"그 자폭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면? 작정하고 마나를 폭주시켜 자폭하는 거라면 어쩔 텐가? 막을 수 있나?"

헤인트가 그제야 자신의 머리를 치고 말았다.

"…막을 수는 있겠지만, 피해가 엄청나겠지?"

마법사가 마나를 폭주시키는 행동은 마지막 수단이자, 가장 좋은 테러 수단이기도 했다.

정말 큰일이 날 뻔했다.

감히 황실을 건드릴 자가 없다는 안일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는 걸 알자, 둔기가 머리를 강타한 느낌에 잠깐 멍했다.

"카슨 네 말대로 다시 보강해야겠는데?"

헤인트가 그제야 카슨의 말에 동의했다.

한 번 바퀴가 굴러가니 그 뒤에는 카슨과 헤인트가 필요한 인력들을 술술 꺼내 놓았다.

루시온과 기사들을 자폭으로부터 보호할, 더 많은 마방사.

마차를 보호할 결계 술사.

마나를 추격하는 사냥꾼들 등.

'준비는 완벽하네.'

루시온은 속으로 웃었다.

원래도 하나의 작은 성에 견줄 만큼 무력을 자랑했지만, 앞으로 더 튼튼해질 예정이니 이제 걱정 없었다.

제아무리 루미노스가 날뛰어봤자, 아직 갓 만들어진 조직이었다.

황실의 힘 앞에 가뿐히 눌러질 하찮은 나뭇가지 하나.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오만한 마법사들.

"네 의견은 어때, 루시온?"

헤인트가 물었다.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합니다."

루시온은 미소를 지었다.

이쪽 전문가는 두 사람이었고, 둘이 나누는 이야기만 들어도 흡족했다.

"준비 시간은 얼마나 걸리겠나?"

카슨이 물었다.

헤인트는 다리를 떨며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30분. 아니, 25분."

"더 줄여."

"안 돼. 결계 술사가 결계를 만들 시간은 줘야지."

"옆에 말을 태워서 움직이면서 진행해. 15분. 혹시 적이 우리를 주목하고 있을 테니, 더는 안 돼."

카슨이 아예 못을 박아버리자 헤인트는 부글부글 끓는 마음이 주체하지 못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이, 이 썩을 놈 같으니라고! 이번 호위 임무의 대장이 나인 거 잊었어?"

"나는 지금 크로니아를 대표해서 왔다. 알았으면 고개 숙이게나."

하지만 카슨은 한쪽 입꼬리를 뒤틀며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당연하게도 한 가문의 대표가 신분상 높았다.

"빌어먹을 새끼."

헤인트는 습관적으로 욕지거리를 내뱉다 자신을 빤히 보는 루시온에 놀라 말을 더듬었다.

"…어, 어. 아니야. 화가 난 거 아니야."

"화가 나면 욕 정도는 할 수 있죠. 괜찮습니다."

루시온이 미소를 짓자 헤인트는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눈빛으로 카슨을 째려본 헤인트는 루시온을 향해 어색하게 웃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보았느냐? 너도 크로니아라는 이름을 팔아먹거라. 웬만한 것들은 저렇게 해결이 될 테니."

"예. 효과가 아주 좋네요."

루시온은 어느 때보다 활짝 미소를 지었다.

* * *

마차는 빠르게 수도권을 벗어났고, 그 틈에도 결계 술사들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달리는 말에서 결계를 보강했다.

[…하. 저건 진짜 아니지. 정말 죽을 맛일 거다.]

―왜?

러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자신의 꼬리를 잡으려 빙글빙글 돌던 라타가 물었다.

[음, 보자. 비유하자면 지금 저 상태는 거꾸로 매달려서 밥도 먹고, 움직여서 생활하는 것과 같지.]

루시온은 그 말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래? 라타도 해 볼래.

라타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앞발로 물구나무를 서서는 혀를 날름거려보았다.

조용히 책을 읽던 카슨은 라타의 행동에 시선을 두었다.

도무지 책에 집중할 수 없었다.

"네 여우가 갑자기 왜 저러는 것이더냐?"

"저도 모르겠습니다."

루시온은 그저 낄낄 웃었다.

그걸 경험해보려고 물구나무서는 모습에 러쉘도, 베델도 웃음이 터져 마차 안에 웃는 소리로 가득했다.

순간, 마차가 덜컹거렸다.

―아이코!

라타가 넘어지면서 땅에 닿기 전에 루시온이 잡았다.

[마법이다. 추격용 마법인 것 같은데?]

러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하늘에서 들렸다.

팡!

마치 불꽃놀이가 시작된 듯 빛이 하늘에서 퍼졌다.

카슨이 책을 접고 태연하게 말했다.

"적이다. 아무래도 우리의 동선이 적에게 노출된 모양이다."

그 동선을 노출한 게 루시온이라 그는 씰룩거리는 입가를 가리며 최대한 눈썹에 힘을 주었다.

71화. 변경으로 돌아가는 길(2)

'물었구나!'

루시온은 당장 손에서 당장 낚싯대가 파르르 떨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적이 왔는데 왜 이렇게 신나 보이지?]

러쉘이 의아해하며 입을 열었다.

적이 왔다는 건 황실과 변경을 건드는 웬 미친놈이 정말로 있다는 게 아닌가.

자고로 예부터 미친놈은 건드는 게 아니라고 했다.

라타가 루시온을 빤히 쳐다보자 루시온은 라타를 눈을 가리듯 쓰다듬었다.

[준비를 열심히 했는데 손님이 찾아오지 않으면 소용이 없지. 아마 루시온 공은 그 사실을 생각해서 기쁜 거겠지.]

베델이 마차 밖으로 나와 주변을 살폈다.

[흑마법사는 없다.]

[대신 마법사들의 준비가 철저하네.]

러쉘 역시 베델을 따라 마차 밖으로 나와 주변에서 느껴지는 마나의 파동을 느꼈다.

미리 이곳을 알고 있었다는 듯 마차를 중심으로 거대한 마법이 준비되고 있었다.

[마법은 이제 거의 다 완성됐어. …루시온 공의 말대로 준비를 하지 않았으면 큰일이 날 뻔할 정도로.]

베델은 거대한 막처럼 느껴지는 마나에 근질거리는 손을 다잡았다.

[그럼, 그럼. 누구 제자인데?]

러쉘이 뿌듯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베델 말대로 루시온의 발언에 마법을 대비해 더 깊이 준비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황실 기사단일지라도 아주 큰 피해를 보았을 터.

하지만 이미 호위 부대는 그 어떤 튼튼한 방패를 두르고 있었다.

[이 방패는 절대 못 뚫어.]

러쉘은 확실히 말했다.

"걱정하지 말거라. 사냥꾼들이 이미 움직였으니."

카슨은 루시온이 당황하지 않게 차분히 말을 꺼냈다.

마법사는 강했다.

하지만 한 번씩 자신의 힘에 취한 이들이 나오기 마련이었다.

이를 마법사의 폭주라고 불렀다.

마법사의 폭주가 시작되면 멈출지 말지, 확률은 반반이라 폭주하는 마법사들을 죽이기 위해 사냥꾼이 생겨났고, 현재 그 사냥꾼들은 마법사를 죽이기 위해 검을 들었다.

마차가 출발하기 전에 사냥꾼들을 먼저 출발시켰다.

루시온은 그 사냥꾼들이 아마도 지금쯤 마법사 근처에서 몸을 숨기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적의 습격을 받은 게 한두 번도 아니라 긴장되지 않습니다. 다만, 이렇게 마차 안에 가만히 있어 죄송할 뿐이죠"

"이 호위는 너를 위한 호위이니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된다."

"예. 적들이 도륙 나기 전까지 얌전히 기다리겠습니다."

루시온은 마차에 타기 전에 흄이 건넸던 마카롱을 입에 넣었다.

자신도 달라고 입을 벌리는 라타의 입속으로 마카롱 하나를 넣어주었다.

―라타는 다 맛있어.

루시온은 라타처럼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러쉘이 알려주고 있어 루시온은 라디오를 듣는 기분으로 루미노스가 철저하게 짓밟히길 기다렸다.

러쉘은 멈춘 마차를 중심으로 위로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기사들이 진형을 유지해 마차를 지키고 있고. 결계도 잘 작동하고 있어.]

이어 러쉘이 조금 더 먼 곳을 향했다.

[마법사는 총 20명. 그중 10명이 거대한 마법을 발동 중이고, 4명은 자폭 준비, 6명은… 음, 주변 경계를 하는 듯하네. 그런데 이거 어쩌나.]

러쉘은 슬쩍 비웃음을 그렸다.

카슨이 말했던 것처럼 사냥꾼들은 이미 움직였고, 마법사들 대부분이 사냥꾼들의 범위 안에 있었다.

언제든지 죽일 수 있다는 사냥꾼들의 자신감이 보일 정도였다.

[마법이 발동되는 것보다 사냥꾼들이 마법사들을 죽이는 게 더 빠르겠는데?]

러쉘은 흥미롭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애초에 숲속임을 알면서도 이 장소를 선택한 마법사들이 바보짓을 한 거지. 은밀한 사냥꾼만큼 숲의 지배자는 없을 텐데.]

베델이 역시 비웃음이 섞인 목소리를 냈다.

마법사들은 은밀한 일에 맞지 않았다.

마법이 거대한 만큼 주변에 일렁거리는 마나의 파동 역시 커져 쉽게 들키기 마련이었다.

[사냥꾼들이 움직인다.]

러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법사가 가장 취약한 순간은 바로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주문을 외울 때였다.

러쉘 자신도 알고 있는 사실이니, 마법사를 사냥하는 사냥꾼들은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겠지.

사냥꾼들은 주변을 정찰하는 마법사부터 처리했다.

2인 1조가 되어 한 명이 입을 틀어막고, 다른 한 명이 철사 같은 얇은 실로 목을 죄어 단숨에 끝내버렸다.

조용하고, 신속하게.

과연 사냥꾼다웠다.

[정찰대 6명 모두 죽었어.]

러쉘의 보고에 루시온은 입에 살살 녹는 마카롱이 너무도 맛있게 느껴졌다.

'이제 남은 마법사는 14명이네.'

루시온은 마차 안에 내려앉은 침묵을 느끼며 러쉘의 보고에 귀를 기울였다.

[마법을 준비하던 2명이 죽었어.]

[1명 죽었네.]

[5명 남았어.]

점점 마법사의 숫자와 함께 루시온은 주변을 답답하게 덮은 무언가가 걷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마법이 무너졌다.]

러쉘의 말에 루시온은 웃음을 삼키느라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기어코 마법사에게 있어 최악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 벌어졌다.

마법이 무너지면 마법에 사용되었던 마나 일부가 역류해 시전자를 덮치기 마련.

이토록 거대한 마법이라면 아마도 죽거나 반병신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역시 권력이 최고야.'

성자라는 칭호 하나에 저렇게 많은 기사가 마차를 둘러싸고, 결계 술사에 이어 마방사까지 움직이는 게 아니겠나.

루시온은 라타를 쓰다듬으며 카슨을 바라보았다.

카슨의 표정이 아직 굳어 있었다.

단 한 번의 실수가 크나큰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과거 루시온이 적국에 끌려갔을 때 뼈저리게 느낀 터라 긴장을 놓치지 않았다.

루시온도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기사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적들도 동료 마법사가 죽었다는 사실을 눈치챈 모양이야. 이제 남은 건 자폭밖에 없겠지.]

러쉘이 마차로 내려왔다.

"지금이다! 방어막을 펼쳐라!"

그때, 헤인트가 사방에서 몰려오는 거대한 마나 덩어리를 느끼며 소리쳤다.

자폭을 처리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튼튼한 벽 뒤에 숨는 방법이었다.

이를 위해 마방사를 데리고 오지 않았던가.

네 방향으로 흩어져 기사들 사이에 숨어 있었던 마방사들이 헤인트의 목소리에 맞춰 준비했던 방어막을 펼쳤다.

웅웅웅.

잔잔한 빛이 마방사 근처에서 퍼져나갔다.

달려오던 마법사들의 눈에 당황함이 깃들었다.

완벽히 당해버렸다.

마법도, 자폭까지도.

하지만 한 번 마나를 들끓어 자폭을 시도한 이상 다시 돌이킬 수 없었다.

"죽어라아아!"

마법사는 억울함을 담아 소리쳤다.

콰아아아앙!

마방사의 방어막과 맞부딪혔으나, 커다란 소리가 전부였다.

방어막에는 가벼운 흠집밖에 나질 않았다.

'역시 방어는 마방사지.'

루시온은 그런 마방사 중에서도 살아 있었다면 가장 뛰어날 마방사가 되었을 피터를 살려 자신의 조직에 보낸 상태였다.

'피터가 있으면 자폭 공격에도 안심할 수 있다, 이거겠지?'

[아직 한 명 살아 있어.]

러쉘이 유일하게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곳을 주목하자 마법사 한 명이 마나 폭주를 억누르며 서 있었다.

"잘 들어라, 성자 루시온 크로니아! 너는 이 부조리한 세상의 상징이다! 우리 루미노스는 너를 죽이고, 너의 시체를 밟아 당당히 이 부조리함을 뒤바꿀 것이다!"

마법사는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소리치다 '펑'하고 터져버렸다.

살점과 피가 사방으로 튀었지만, 무엇하나 루시온이 있는 마차를 더럽히지 못했다.

그야말로 완벽에 가까운 승리.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마법사의 목을 들고 온 사냥꾼들이 마차로 돌아와서야 마방사들이 마법을 멈추고, 기사들이 주변을 수색했다.

"혹시… 들었느냐?"

카슨이 불쾌감을 드러내며 물었다.

"무얼 말입니까?"

마법사가 뭐라 뭐라 소리를 지른 것 같았지만, 카슨만큼 귀가 좋지 못했기에 루시온은 정말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대신 마법사의 말과 함께 거지 같은 붉은 실을 보았다.

하지만 당연히 붉은 실이 나타나야 할 상황이었다.

소설 속 루미노스는 공허의 손과 한편이었고, 자신은 원래 중간 보스였을 테니.

"아무것도 아니니 신경 쓰지 말거라."

카슨은 말을 아꼈다.

[루미노스라는 마법사 집단이 너를 표적으로 삼겠다고 선전포고했어. 건방지게.]

러쉘이 이를 갈며 알려주었다.

순간, 베델이 깜짝 놀랐다.

누군가의 표적이 된다는 사실 자체가 심적 부담감으로 작용할 수 있기에 자신이 살아 있을 때도 조심했던 일이었다.

[이, 이래도 괜찮은가?]

베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바보가 되는 것보다 낫지.]

러쉘의 말에 동의하듯 루시온은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로써 루미노스가 나하고, 헤인트하고 같이 얽혀버렸네.'

루시온은 이미 황실 기사단을 이용할 때부터 예상하던 일이었다.

하지만 예상이 맞아떨어져도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소설 속에서 루미노스 집단이 루시온과 헤인트하고 얽혀 있었으니.

'하지만 뭐, 저놈들도 이제 끝이지.'

루시온은 라타를 다시 쓰다듬었다.

과정이 어떻든 루미노스는 황실과 자신을 건드렸다.

황제의 분노를 피할 수 없을 터.

어차피 루미노스의 마법사는 대나무와 비슷해서 회유할 마음도 없었고.

'나는 정보를 흘리고. 황제가 단숨에 본거지만 박살 내면 완벽하네.'

루시온의 미소와 멈췄던 마차가 다시 움직였다.

악역들을 회유할 수 있으면 회유해서 개과천선할 수 있게 도와주고.

회유할 수 없으면 지금처럼 자신이 가진 힘을 끌어모아 밟아버리면 그뿐이었다.

* * *

루미노스가 사라진 후에는 변경으로 돌아가는 모든 길이 순탄했다.

마차의 덜컹거림만 뺀다면 낮잠 자기에 날씨도 좋았고, 조금 전 루미노스의 공격에 부상자는커녕, 사상자도 없어 분위기마저 밝았다.

헤인트가 이번 일에 가장 큰 공은 루시온이라며 자랑하는 소리에 러쉘이 한껏 들떴고, 루시온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굴었다.

―그런데 있지, 루시온.

라타가 눈을 깜박거리며 루시온을 올려다보았다.

루시온의 눈에 반쯤은 풀려 있었다.

―마법사 유령은 달라? 라타는 그게 너무 궁금한데.

지금까지 자신이 만나봤던 유령 중 특별한 유령은 러쉘과 베델뿐이었다.

'그러게. 마법사 유령은 뭐가 다르나? 망자가 아닌 이상, 죽음의 기사나 몇몇 유령을 제외하고는 살아 있을 때 능력을 갖출 수 없다고 알고 있는데.'

루시온은 슬쩍 러쉘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에 가진 지식이 많을 뿐이지. 몇몇 유령을 제외하고는 살아 있을 때 사용하던 힘을 쓸 순 없어. 그럼 완전 사기잖아.]

―그럼 러쉘이 그 몇몇 유령이라는 거야?

[그렇지. 내가 누구라고?]

―천재 흑마법사! 비운의 천재 흑마법사!

라타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그런데 비운이 뭐야?

[불행하다는 건데....]

순간, 러쉘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젊은 나이에 유령이 되어서 그래.]

'왜 당황하신 거지?'

루시온은 러쉘이 오만상을 찌푸렸을 때, 눈에 깃든 당황함을 확인했다.

하지만 루시온은 긴장감이 탁 풀려 밀려드는 졸음에 스르르 눈을 감았다.

때늦은 점심은 게이트가 있는 마을에서 해결했다.

저번에 타락한 흑마법사가 나타났고, 헤인트를 처음 만났던 그곳이었다.

―욤욤.

라타는 즐겁게 고기를 먹으며 꼬리를 흔들었고, 흄은 차분히 루시온의 시중을 들었다.

"입맛이 없더냐?"

카슨이 물었다.

"아닙니다. 바람이 시원해서 가만히 있었을 뿐입니다."

창문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는 아직 봄을 알리는 냄새가 섞여 있었다.

"네 판단이 무척 좋았다. 네 덕에 많은 사람을 구했구나."

카슨은 간지러웠던 입을 그제야 풀어내며 루시온을 칭찬했다.

"제 판단이라기보다는 형님께서 제 말씀을 들어주셨기에 가능했습니다. 다 형님 덕분입니다."

루시온은 오히려 그 공을 카슨에게 돌렸다.

이는 사실이었다.

카슨 덕에 출발 전에 루미노스를 막을 준비를 할 수 있었으니.

"루시온."

카슨이 무겁게 그를 불렀다.

"원치 않았겠지만, 어쨌든 네 어깨가 무거워질 거다. 네 말 한마디가 큰 파문을 일으킬 테고, 네가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일들은 모두 주목을 받겠지."

루시온은 잘라놓은 고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포크를 내렸다.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 그 존재가 받을 관심과 질투, 그리고 적의는 네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크단다."

"예.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카슨은 루시온의 대답에 그 부분을 더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물음을 꺼냈다.

"루시온, 너는 앞으로 무엇이 되고 싶더냐?"

과거에 묶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던 루시온이 직접 과거를 끊어내고 여기 이 자리까지 올랐다.

이제는 과거가 아닌 미래를 물어봐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72화. 변경으로 돌아가는 길(3)

"저는 지금 무엇도 되고 싶지 않습니다."

루시온이 대답했다.

"하고 싶은 게 없다는 말이더냐?"

"아뇨. 제가 되고 싶었던 건 지금도 계속 이루고 있습니다."

루시온의 대답에 카슨의 눈이 커졌다가 급히 표정을 관리했다.

"저 스스로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용기를 가졌으면 했고, 가족과 함께 식사할 수 있었으면 했고, 멀리는 아니더라도 여행같이 그냥 남들이 다 하는, 평범한 일생을 누리고 싶었습니다."

물론, 자신은 귀족이기에 평범함의 기준이 달랐다.

남들이 평생 꿈꾸던 부유하고, 평온한 일상이겠지.

어떻게 본다면 이미 손에 넣은 것 같지만, 이건 모래로 만든 집이라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게 뻔했다.

더 튼튼하게.

더 단단하게.

그렇게 쌓아가야 했다.

"그래도 굳이 무엇이 되고 싶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행복해지고 싶습니다."

루시온은 자신의 바람을 말했다.

몹시 주관적이고, 광범위했다.

그래도 자신이 바라는 것이었다.

과거에는 꿈도 못 꿀만큼 너무도 멀리 있었기에 감히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벌써 입 밖으로 그 말을 꺼낼 수 있으니 과거보다 얼마나 행복을 향해 다가간 건지 자신도 직접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은… 행복하지 않더냐."

카슨의 안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아닙니다. 지금도 행복합니다."

죽는다는 사형 선고 같은 빌어먹을 운명만 아니었다면.

루시온은 카슨에게 미소를 보였다.

카슨은 그 미소에 안심하며 다시 포크를 쥐었다.

"그래. 가장 좋은 목표지. 행복. 나중에라도 무언가 하고 싶다면 언제든지 말하거라. 내 힘이 닿는 데까지 널 도와주마."

"감사합니다, 형님."

* * *

모두가 식사를 마치고 포탈이 가동되기 전까지 루시온은 주변을 돌아다녔다.

헤인트와 함께.

'…생각 좀 하려고 했는데.'

로베리오가 사라지기 전에 외쳤던 말이 있었다.

최종 보스가 뉴브라 왕국에 있다는 사실을 들었다.

이 말이 어떤 의미인지.

로베리오는 허수아비였고, 그 위에 십자 흉터와 새끼손톱이 까맣게 물든 자가 누구인지.

이 사실에 대해 생각하고 싶었는데.

루시온은 뒤를 힐끔 바라보았다.

자신을 뒤따라 오는 헤인트가 무척 신경 쓰였다.

"아, 나는 없는 사람처럼 취급해. 그래도 괜찮아."

헤인트는 루시온의 시선에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다.

루시온이 혼자 있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을 카슨에게 들었지만, 루미노스라는 집단이 루시온에게 선포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언제 또 습격이 올지 몰랐다.

'어떻게 신경을 쓰지 않아? 차라리 형님이 나은데.'

카슨과 헤인트가 자신의 호위를 두고 가위바위보를 했고, 헤인트가 당당하게 승리를 거뒀다.

'빌어먹을, 운명.'

루시온은 두 사람이 가위바위보를 했을 때부터 헤인트가 이길 거라고 예상했다.

[루시온 공. 잠깐 개별적으로 움직여도 되겠나?]

베델의 목소리가 살짝 가라앉아 있었다.

[이런 모습으로 이곳에 다시 돌아올 줄은 몰랐지만, 지금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

[보지 않은 게 좋을 텐데?]

러쉘이 베델을 말렸다.

[널 보지도 못하고, 나는 죽어도 세상은 잘만 굴러간다는, 당연하지만 기분 나쁜 사실 하나도 덤으로 깨닫게 되거든.]

[그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안다. 그래도 꼭 만나보고 싶어.]

[만약, 소중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만나지 말아야지.]

[안다. 내 목소리도, 모습도 스승님에게 닿지 않겠지. 그래도 좋으니 말을 전하고 싶어.]

루시온은 베델의 간절함에 슬쩍 헤인트를 보았다.

아주 큰 혹 하나가 달려 베델과 동행할 순 없었다.

[마음은 고마워, 루시온 공.]

베델은 무언가를 고민하는 루시온의 모습에 살짝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를 냈다.

[그냥 나 혼자 가서, 마음을 다잡고 싶어. 금방 돌아올게.]

루시온이 고개를 끄덕이자 베델은 곧바로 앞으로 나아갔다.

"누가 있어?"

헤인트가 주변을 기웃거리며 물었다.

마치 루시온이 누군가에게 대답하듯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던가.

호위 중이라 헤인트는 작은 것 하나도 놓칠 생각이 없었다.

"그냥 아직 떨쳐내지 못한 버릇입니다. 제 소문을 알고 계시잖습니까."

루시온이 헤인트에게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아니. 나는 그런 걸 물으려는 게 아니었는데."

"오해는 빨리 풀어야 좋죠. 형님도 제 과거를 알고 계시잖습니까."

"알고는… 있지."

헤인트가 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했다.

뭔가 잘못된 버튼을 누른 듯했다.

"그냥 농담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루시온이 웃자 그제야 헤인트가 덩달아 힘겹게 웃었다.

"형님. 잠깐 시장에 들러도 괜찮겠습니까?"

흄과 라타를 생각해서 한 말이었다.

그들에게 금세 반응이 왔다.

흄의 눈동자가 요동쳤고, 라타의 꼬리는 이미 헬리콥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내 루시온의 시선이 황실 기사단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만큼 휘황찬란 갑옷에 꽂혀버렸다.

"시장에 가기엔 좀 과하다는 건 나도 인정하는데, 원래 복장이 이렇더라고."

그 시선에 헤인트가 미간을 찌푸리며 양팔을 살짝 벌렸다.

"나도 어쩔 수 없어."

[시선 하나는 엄청 받겠네.]

러쉘이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를 냈다.

"혹시 몰라 망토도 가져왔는데, 가릴까?"

헤인트가 조용히 물었다.

"예. 그래 주셔야겠습니다."

"그래. 그럴 줄 알았어."

헤인트는 체념한 듯 주머니에서 망토를 꺼내 둘렀다.

갑옷 자체가 두껍고 컸기에 망토를 가리니 얼굴은 작고, 몸이 큰, 다른 의미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최악이네."

헤인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킁킁.

시장 쪽으로 들어가자마자 라타의 코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몽글몽글한 냄새는 솜사탕이고, 또 코를 살짝 간질이는 냄새는, 음, 어, 닭꼬치다!

라타가 입가를 할짝댔다.

시장 입구에 보이는 동물 모양 솜사탕에 라타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역시 솜사탕이다. 솜사탕이야. 이히히. 라타는 시장이 제일 좋아.

"도련님. 잠깐 솜사탕을 사러 갔다 와도 되겠습니까?"

흄이 진지하게 물었다.

"그래. 마음껏 사 먹어."

"감사합니다."

흄은 고개를 숙인 뒤에 라타와 함께 시장에 줄지어 서 있는 점포로 걸어갔다.

[그렇게도 좋은가?]

러쉘이 그들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루시온."

헤인트가 넌지시 루시온을 불렀다.

"예. 말씀하십시오."

"혹시 카슨한테 들었어?"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까 마법사들의 습격이 있었잖아."

"아, 제가 인사를 잊어버렸네요. 고맙습니다. 형님 덕분에 제가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루시온의 인사에 헤인트는 당황한 얼굴로 손을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 호위를 맡은 이상 널 보호하는 건 당연한 거고, 애초에 인사를 받을 행동도 아니었어. 네가 말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부상자나 사망자가 생겼을 테니 인사는 오히려 내가 해야겠지."

헤인트는 손을 내리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올렸다.

"고마워."

"제게 고개를 숙이실 필요가 없습니다."

"네가 진짜 카슨의 동생이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네."

헤인트는 겸손하고, 온순한 루시온을 볼 때마다 카슨과 너무 대비되어 간혹 깜짝 놀랄 때가 있었다.

"그, 어쨌든, 아직 카슨한테 못 들은 거지?"

"예. 중요한 말은 아직 듣질 못했습니다."

루시온은 의미심장한 헤인트의 말에 괜스레 입가가 메말랐다.

'루미노스가 나한테 선전포고를 한 사실을 말하는 건가?'

"그럼 됐어.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 나하고 카슨이 알아서 할 테니까."

헤인트가 급히 뒷수습하며 입을 다물었다.

지금 상황에서 카슨과 헤인트가 신경 쓸 일은 루미노스의 선전포고밖에 없었다.

루시온은 그제야 카슨과 헤인트가 적국에게 납치당했던 그때를 떠올릴까 봐 숨긴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럼, 모른 척해줘야지.'

루시온은 솜사탕을 받고 해맑게 웃는 흄과 라타를 바라보았다.

무구점에도 잠깐 들릴 생각이었다.

흄이 계속 맨손을 사용할 수 없으니, 하다못해 너클이라도 사줄 셈이었다.

"루시온. 내가 곰곰이 생각해봤어."

갑자기 말문을 여는 헤인트의 말이 예사롭지 않았다.

"무얼 말입니까?"

"이상하게 너한테 내 빛이 반응하더라고.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계속 걷다 보니 '쿵쿵' 뛰는 느낌과 함께 너한테 빛이 반응해."

"빛이… 반응을 하다뇨?"

빛은 어둠을 만나면 반응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루시온이 물었다.

[…뭐라고?]

러쉘이 느닷없는 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그건 말도 안 돼. 어둠이 움직이지 않는 한, 빛은 어둠을 눈치챌 수 없어.]

'이게 다 저 빌어먹을 붉은 실 때문인가?'

루시온은 헤인트가 다음 말을 잇길 기다리며 조용히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혹시 빛과 관련된 아이템이라도 가지고 있어?"

이어지는 헤인트의 물음에 루시온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키며 대답했다.

"예.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루시온이 텔라에게 받은 팔찌를 내밀었다.

"제 친우인, 텔라 영애에게 받은 팔찌입니다."

혹시 원래 주인에게 돌아갈까, 루시온은 선물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헤인트는 팔찌를 빤히 보더니 그제야 속이 후련하다는 듯이 웃었다.

"그래. 어쩐지 이상하더라. 성물이나 빛의 물건을 발견했을 때도 빛이 반응하거든. 네가 흑마법사일 리가 없고, 혹시 네가 빛으로 발현했나 하고 생각했거든."

[…쟤 좀 이상한데? 성물이나 빛의 물건이 있다고 해도 그렇게 세게 반응할 리가 없을 텐데?]

러쉘이 의아함을 드러냈다.

그 말에 루시온은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섬뜩함에 저절로 뒷덜미에 식은땀이 맺혔다.

"이제 됐으니까 빨리 집어넣어."

루시온의 안색이 새하얗게 변하자 헤인트는 팔찌를 집어넣으라며 재촉했다.

'설마 벌써 어둠을 추격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게 아니겠지?'

루시온은 살짝 저리는 손을 매만졌다.

어둠을 추격하는 빛.

헤인트가 가진 세상에서 유일한 빛의 힘이었다.

'소설 중후반쯤에 가야 그 능력을 얻을 텐데.'

루시온은 차분히 말을 돌렸다.

"혹시 뒤늦게 발현할 수도 있습니까?"

"내가 바로 그 경우거든. 보자, 15살 때쯤에 그랬어."

헤인트는 자신을 가리키고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자신도 그랬으니 루시온 역시 늦게나마 발현할 수 있을 거라는 어설픈 희망을 주지 않으려는 듯 보였다.

'뒤늦게 발현이 됐다…? 헤인트도 그랬는데 나라고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있나?'

루시온은 잠깐 눈동자를 반짝거리다 입술을 뗐다.

"무구점에 잠깐 들릴까 합니다."

"혹시 내가 줬던 검이 부족해?"

"아뇨. 제 집사 흄에게도 하나 사주려고 합니다."

"좋은 주인이네."

헤인트가 입꼬리를 올리며 흡족하게 웃었다.

"흄. 이제 따라와."

"알겠습니다."

흄은 루시온의 목소리에 반응해 그에게 다가갔다.

그 잠깐 사이에 흄의 손에 쌓인 먹거리가 제법 많았다.

라타 입가에 묻은 음식의 흔적은 또 어떤가.

'행복해 보이니 됐다.'

루시온은 미소를 지으며 무구점으로 향했다.

* * *

"네가 쓰고 싶은 무기를 마음대로 골라봐."

루시온이 흄에게 말했다.

"제가 쓰고 싶은 무기요?"

흄이 자신의 주먹을 슬쩍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무기는 주먹 외엔 없었기에 당장 뭐부터 골라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보자. 흄이 쓸 만한 거라.... 얼마나 단단해야 하는 거지?]

러쉘은 무구점을 돌아다니며 흄에게 쓸 만한 적당한 무기를 찾아다녔다.

주로 대검 쪽을 보는 듯했다.

"흄 너는 힘이 세다고 했지?"

헤인트가 물었다.

"예. 저는 힘이 셉니다."

흄이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타고난 근력이 좋은가 봐? 그럼 한 번 내 손을 잡아봐."

헤인트가 손을 내밀었다.

흄이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얼마만큼 힘을 주어야 합니까?"

"네가 할 수 있는 만큼."

루시온의 대답에 흄은 어쩔 줄 몰랐다.

헤인트는 적이 아니었기에 그의 손을 박살 낼 이유가 없었다.

"정말입니까…? 으스러질지도 모릅니다."

"오. 자신 있나 본데?"

헤인트는 흄의 패기에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런 패기는 마음에 들었다.

"자, 한 번 해봐."

헤인트가 내민 손을 흔들었다.

73화. 집안일부터

"알겠습니다. 더는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흄은 차분히 대답했다.

루시온도 허락했고, 헤인트 역시 원하지 않는가.

[루시온. 뒤로 좀 떨어져. 라타 너도.]

러쉘은 갑자기 시작된 힘겨루기의 승자가 누구든 간에 과정이 어떻게 진행될지 눈에 훤히 보였다.

흄이 가진 힘은 오러를 두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루시온은 라타를 품에 안고 구석으로 물러났다.

―라타가, 라타가 맞춰볼게.

라타가 귀를 접었다 올리기를 반복하며 눈을 반짝였다.

―후후후, 흄이 이겨! 흄이 라타한테 간식을 제일 많이 챙겨주거든!

'그게 무슨 기준이야?'

루시온은 황당했으나, 말없이 라타를 쓰다듬었다.

"그럼 힘을 주겠습니다."

흄이 헤인트의 손을 잡고 말했다.

"그래. 내 손은 내가 알아서 보호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힘을 줄 수 있는 만큼 줘봐."

힘이 세면 얼마나 세겠는가.

그런 안일한 생각에 미소를 짓던 헤인트는 순간 밀려드는 힘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빡!

'미, 미친!'

인간이 가질 힘이 아니란 생각부터 들었다.

흄이 손을 으스러트릴 수 있다는 사실이 거짓이 아니었다.

헤인트는 다급히 빛으로 자신의 손을 둘러 부서지는 걸 막았다.

파아아!

빛을 두르자 헤인트 주변으로 바람이 세게 일어났다.

무기가 진열된 진열장이 크게 흔들렸고, 루시온은 숨을 참으며 울렁거리는 속을 달랬다.

"그만!"

헤인트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서 당황한 감정이 생생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루시온이 씩 웃다 다급히 입꼬리를 내렸다.

―이야아아! 루시온, 봤지? 봤지? 라타가 맞췄어! 라타는 천재야!

라타의 꼬리가 좌우로 쉴 새 없이 흔들렸다.

"고생하셨습니다."

흄이 헤인트에게 고개를 숙였다.

[역시 이전에도 느낀 거지만, 흄한테는 빛이 통하질 않네.]

러쉘은 당장 기록을 하고 싶다는 듯이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너, 너 검을 배울 생각 없어?"

잠깐 멍해 있던 헤인트가 말을 더듬거리며 물었다.

"배울 생각은 있습니다."

"그럼 혹시 말이야. 스승 하나 구할 생각은 없고?"

이만한 힘으로 앞으로 오러까지 구현한다고 예상했을 때, 얼마나 강해질지 상상이 가질 않을 정도로 흄은 엄청난 인재였다.

흄은 헤인트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를 어떻게 선택해야 할지 난감했다.

'안 돼! 절대 안 돼!'

루시온이 필사적으로 흄에게 신호를 보냈다.

[으음, 나도 개인적으로는 반대야. 네가 헤인트를 스승으로 삼으면 루시온도 너도 곤란해질 테니까.]

흄은 주기적으로 루시온에게 어둠을 받아야 했다.

사람으로 따지자면 밥이나 다름없고, 흄에게 있어 육체의 통제권을 쥐는 데 필요한 수단이기도 했다.

흄은 가만히 생각하다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을 담아 헤인트에게 말을 꺼냈다.

"저는 도련님을 모시는 집사입니다. 집사로서 도련님 곁을 떠날 수 없으니, 긍정적인 답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무척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아니야, 아니야. 내가 무례했어. 미안해, 흄. 미안해, 루시온."

헤인트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흄에 이어 루시온에게도 사과했다.

헤인트 자신의 충동적인 제의는 루시온에게 있어 눈앞에서 집사를 빼앗는 짓거리나 마찬가지였겠지.

"예. 살짝 섭섭할 뻔했습니다."

루시온은 다시는 흄을 넘보지도 못하게 섭섭함을 내비쳤다.

"대신 흄이 살 건 내가 계산할게."

헤인트는 미안한 얼굴로 돈주머니를 꺼냈다.

"그렇다면 이참에 형님의 지갑을 텅텅 비워보도록 하겠습니다."

루시온은 이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지 않았다.

"그래. 내 지갑을 거덜 내도 좋으니, 부담 갖지 않고 마음껏 골라도 돼."

헤인트는 돈주머니를 가볍게 흔들었다.

"들었지, 흄? 원하는 대로 골라. 이것저것 쓸 수 있게 다양한 것들로 골라도 괜찮고."

[아, 저번처럼 몬스터의 뼈로 만든 검이 있는지 살피는 것도 잊지 말고. 아마 루시온이 원하는 게 이런 게 아닌가 싶다.]

러쉘이 루시온의 말을 이어 목소리를 내자 루시온의 입꼬리가 잠깐 씰룩거렸다.

'역시 스승님이셔.'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도 잘 아는지.

[정답이네.]

러쉘은 씰룩거린 루시온의 입꼬리에 코밑을 쓱 하고 문질렀다.

"그럼, 눈치 보지 않고 고르겠습니다."

흄은 미소를 지었고, 덩달아 무구점 주인의 눈동자가 깊게 반짝거렸다.

돈도 많고, 살 것도 많은 손님만큼 최고의 손님은 없었다.

무구점 주인은 두 손을 꽉 쥐며 계산대에 쌓일 무기들을 얌전히 기다렸다.

"형님."

루시온은 흄과 러쉘, 그리고 라타까지 무기를 고르느라 정신이 없을 때, 헤인트를 불렀다.

"흄도 저처럼 사람을 낯설어합니다. 그러니 스승이라는 형식에 굳이 얽매일 것 없이 이따금 가르쳐주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합니다."

"...?"

"흄에게 재능이 있질 않습니까?"

흄이 강해지는 건 루시온 자신에게도 좋았다.

특히 스승이라는 형식에 얽매일 것 없이 헤인트의 기술만 쏙 빼올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맞아. 흄의 저 힘은 축복받았지. 활을 들면 명사수가 될 거고, 도끼를 들었으면 최고의 나무꾼이 될 정도야. 굳이 검이 아니더라도 몸으로 하는 무엇이든 괜찮고."

흄의 칭찬에 루시온 역시 기뻤다.

누가 뭐라고 해도 흄을 데려온 건 자신이었다.

'헤인트도 형님도 죄다 흄의 재능을 알아보시네.'

탁.

흄이 부지런히 카운터에 각종 무기를 놓을 때마다 무구점 주인의 손이 다급히 움직였다.

하나같이 가격이 나가는 고급품이었다.

"흄이… 보는 눈도 좋고, 손이 크네."

"예. 저의 집사이니 당연하지 않습니까?"

루시온은 비싼 것만 잘 고르는 러쉘을 보며 키득거렸다.

역시 자신의 스승다웠다.

'이대로라면 정말로 헤인트의 지갑을 털어버릴 수 있겠는데?'

* * *

[…스승님.]

베델은 자신의 스승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이곳을 떠나왔을 때 이후로 스승도, 이 집도 무엇 하나 변한 게 없었다.

마당에 규칙적으로 쓸리는 빗자루 소리.

단정하게 묶은 스승의 머리카락.

지저귀는 새소리.

그 무엇도 변하지 않았기에 베델은 혼자만 달라진 자신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먼저 세상을 떠난, 못난 제자가 스승께 인사를 드립니다.]

베델이 고개를 숙였다.

짹짹.

새의 지저귐에 스승은 잠깐 빗자루를 멈추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눈빛에 베델은 마음이 쓰라렸다.

혹시나 자신을 찾는 게 아닐까 싶었다.

[스승님.]

베델이 투구를 벗고, 무겁게 그녀를 불렀다.

[스승님께서 옳으셨고,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그놈이.... 그놈이 저를 배신했습니다.]

자신이 놈의 검이 되겠다고 결심한 날, 스승에게 찾아가 그 사실을 알렸다.

하지만 스승은 축복은커녕 그놈만큼은 안 된다며 말렸고, 어리석었던 자신은 그대로 이곳을 떠나버렸다.

그게 스승님과 자신의 마지막이었다.

[스승님. 저는… 복수를 택해야 할까요. 아니면 모든 걸 털고 새롭게 출발해야 할까요? 제자가 아둔해 무엇도 결정하기 쉽지 않습니다.]

베델의 입술이 떨렸다.

[하지만 은혜를 갚아야 할 사람이 생겼습니다. 그 은혜를 다 갚고, 그때 다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베델은 애써 힘겹게 웃으며 스승을 바라보았다.

[제자가 여전히 눈이 어둡지만, 이번만큼은 제게 있어 빛을 발견했습니다. 제 귀를 막고, 눈을 가렸던 분노에서 일깨워준 사람이거든요.]

아주 잠깐 스승과 눈이 맞았다.

아닌 걸 알면서도 마치 자신을 보고 웃어주는 모습에 베델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아둔한 이 제자.]

베델의 목소리가 눈물과 뒤섞였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스승님을 다시 안아보고 싶었다.

그 포근한 품을 느껴보고 싶었다.

[다시.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베델은 스승에게 고개를 숙였다.

* * *

"얼마나 골랐습니까?"

루시온은 포탈을 타기 위해 마차에 오르며 물었다.

마차 안에는 아직 자신뿐이었다.

[하나.]

"하나라도 있었습니까?"

루시온이 깜짝 놀랐다.

[뭐, 저번처럼 100% 몬스터 뼈로 이루어졌다고 할 순 없지만, 어쨌든 섞여 있었어.]

"이럴 줄 알았다면 중부에 있는 무구점도 둘러볼 걸 그랬습니다."

루시온은 아쉬움을 쏟아냈다.

[루시온.]

자신을 부르는 러쉘의 목소리가 조금 무거웠다.

루시온은 러쉘을 바라보았다.

[저번에 로베리오 놈이 하늘로 가기 전에 했던 말, 기억하고 있어?]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특히 루시온 자신에게 있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말이었다.

공허의 손의 아지트가 현재 뉴브라 왕국에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공허의 손 말이야. 나도 들어본 단체거든.]

'스승님도 알고 계신 단체라고?'

루시온은 마침 잘됐다 싶었다.

앞으로 숨길 이유 없이 자연스럽게 말을 섞어도 되지 않겠는가.

"어떤 단체입니까?"

[좀 좋게 말하면 흑마법사의 권리와 자유를 되찾는 개혁파라고 하는데 사실 루미노스랑 다를 게 없지. 지금 판도를 힘으로 엎어서 권리와 자유를 되찾자는 거니까.]

러쉘이 불쾌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뭐, 어쨌든, 네가 로베리오가 말한 십자 흉터에 새끼손톱이 까맣게 된 사람을 찾으려는 걸 알고 있어.]

"당연히 찾아야죠."

루시온은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스승님께서도 아시다시피 팔과 다리를 잘라냈다 한들, 머리를 자르지 않으면 다시 제 심장을 찌르러 올 게 뻔하지 않습니까?"

[그래. 너다운 일인데, 엮인 놈이 하필 공허의 손 놈들이라서 좀 그래. 걔들은 독사야. 웬만큼 세상에 담을 쌓던 내 귀에까지 들릴 지경이었다니까.]

"조심하겠습니다."

[단지 조심해서 해결됐으면 내가 너한테 이런 말도 하지도 않았겠지.]

"놈들의 독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저를 물기 전에 단숨에 밟겠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러쉘이 걱정을 담아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네가 키우려는 세력 말이야.]

"예."

[진심으로 더 키워볼 생각이 있어?]

러쉘의 물음에 루시온은 말없이 눈을 깜박거렸다.

곧 루시온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저는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진심이 아닌 적이 없었습니다."

루시온은 괜히 울컥해 뒷말을 힘겹게 삼켰다.

[그러면 다행이네.]

러쉘이 미소를 지었다.

[루미노스가 너를 노리겠다고 선전포고를 날렸고, 공허의 손도 괜히 찝찝하니 널 지켜줄 뭔가가 있었으면 해서.]

크로니아는 루시온에게 좋은 방패가 되어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방패에는 흑마법사 루시온을 지켜줄 수는 없었다.

루시온이 흑마법사라는 사실을 들켰을 때, 크로니아조차도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었다.

[알잖아? 참 씁쓸하지만, 흑마법사를 지켜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

러쉘의 눈동자에 미안함이 어렸다.

―러쉘하고 루시온하고 싸우는 거 아니지?

라타가 사탕을 할짝거리며 묻자 루시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스승님."

[그래.]

"저는 흑마법사가 된 걸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래.]

러쉘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무겁게 대답했다.

* * *

카슨은 갑자기 책을 접으며 마차 창문을 바라보았다.

놀란 모습에 루시온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또 적이 나타났습니까?"

"아니. …아버지께서 마중을 나오실 줄이야."

아버지라는 말에 루시온은 마차 창문에 매달리다시피 해서는 밖을 바라보았다.

[오. 정말이네? 저기 멀리에 크로니아의 깃발이 보인다.]

―어! 진짜 고향 깃발이다! 라타가 고향에 돌아왔어!

러쉘에 이어 라타까지 꼬리를 흔들며 말했지만, 루시온 눈에는 그저 점처럼 작은 뭔가가 보일 뿐이었다.

"저는 보이질 않습니다."

"좀 더 가까이 가면 보일 거다. 그나저나 아버지께서 마중을 오신 걸 보면 널 어지간히도 보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카슨이 쿡쿡거리며 웃었다.

하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이니 어쩌겠는가.

"아버지께서 자리를 비우셔도 괜찮은 겁니까?"

그 막내는 또 걱정을 담아 물었다.

걱정이 왜 이렇게 많은지.

"이 정도는 괜찮다. 우리는 크로니아니까."

카슨은 자랑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마차가 크로니아가 있는 변경으로 가까워지자 비로소 루시온은 크로니아의 기사들을 이끌고 당당하게 말을 탄 노비오를 발견했다.

자신의 체면을 살려줄 겸 황실에 강한 압박을 하려는 노비오의 작은 속셈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루시온은 그저 노비오를 보자마자 속에서 들끓는 반가움에 저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마차가 멈추자마자 루시온은 다급히 문을 열어 노비오를 향해 달렸다.

"아버지!"

노비오 역시 다급할 정도로 말에서 내려 양팔을 벌렸다.

꿈에서까지 그리워하던 그 모습 그대로 루시온이 달려왔다.

너무도 사랑스럽지 않은가.

"그래, 루시온."

노비오는 자신의 품에 파고드는 막내아들을 꽉 끌어안았다.

이 얼마나 느껴보고 싶었던 체온인가.

"무사히 돌아와서 고맙구나."

노비오의 목소리가 먹먹했다.

74화. 집안일부터(2)

* * *

루시온이 저택으로 돌아와 가장 먼저 확인한 일은 저택에서 지배한 2번에서 7번까지의 유령들을 불러 그간 모은 정보들을 듣는 일이었다.

그간 죽을 둥 살 둥 정보를 모았는지, 유령들의 입이 쉬지 않고 움직였다.

[이놈하고, 또 이놈하고. 그리고… 저놈도 무언가를 빼돌리는 걸 봤습니다.]

루시온은 유령의 정보를 듣고 나서 저택을 돌아다녔고, 그때마다 유령들이 한 명씩 누군가를 지목했다.

그렇게 지목된 놈만 해도 13명이었다.

'…하. 진짜 장난 아니네.'

루시온은 기가 차서 헛웃음을 멈추질 않았고, 그 웃음에 유령들은 발발 떨어야 했다.

[그중 누가 대장인데?]

러쉘이 물었다.

셴이 사라진 지금, 그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누군가 중심이 되었을 터.

[저놈입니다!]

그때, 유령들이 한목소리로 복도에서 걸어오고 있는 집사를 가리켰다.

주로 잡다한 업무를 관리하는 집사인지, 흄과 달리 옷에 배지가 달리지 않았다.

'그래. 저 정도는 되어야 정보를 수집하는데 편리하지.'

"도련님을 뵙습니다."

집사는 루시온을 보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그래."

루시온은 적당히 대답하는 척하며 두 박자 늦게 그 집사를 불렀다.

"잠깐만."

마침 흄이 없었다.

그는 지금쯤 사 왔던 무기를 정리하며 몬스터의 뼈가 포함된 검을 흡수하고 있을 터.

"예, 도련님."

"내 방으로 간단한 간식들을 챙겨오게."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루시온은 집사의 대답을 들으며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내가 조작한 정보를 믿었을까 믿지 않았을까.'

개미 굴에서 자신과 관련된 정보를 조작한 일이 있었다.

사과에 심각한 알레르기가 있다는 등 거짓 정보를 흘렸기에 루시온은 저 집사를 통해 확인할 생각이었다.

"2번."

루시온은 많고 많은 유령 중 2번을 콕 찍었다.

자신을 괴롭혔던 유령 중 한 놈이니 굴려도 저놈을 굴려야 하지 않겠는가?

[예, 예!]

"지금 바로 따라붙어서 보고해."

[알겠습니다.]

2번은 경직된 표정으로 바로 움직여 그 집사에게 달라붙다시피 했다.

루시온은 복도에서 잠깐 멈춰 창문을 바라보았다.

열린 창문 너머로 익숙한 냄새가 감돌자 그제야 집에 돌아왔음을 실감했다.

루시온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주변을 둘러보다 어느새 다 저버린 꽃나무가 눈에 띄었다.

이제 슬슬 초여름이 시작될 날씨였다.

'더운 건 싫은데.'

―베델이다!

라타가 부지런히 루시온의 머리로 올라와 아래를 내려다보다 활짝 웃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검을 휘두르는 모습은 영락없이 검술을 훈련하는 것만 같았다.

'유령도 훈련을 하던가…?'

[베델. 걔들은 내버려 두고 저택이나 구경해.]

루시온이 의문을 가질 그때, 러쉘이 베델을 향해 목소리를 냈다.

"훈련이 아니라 유령을 없애고 있던 겁니까?"

[아니. 없애는 건 아니고, 협박하던 중이었어. 저 유령들이 네 욕을 엄청 하거든. 그 소리에 짜증이 났겠지.]

'어쩐지 베델이 저택에 오자마자 '잡초를 뽑아야겠어'라고 말을 하더라니.'

루시온은 그제야 콧바람을 크게 내쉬었다.

[러쉘.]

베델이 검을 든 상태로 루시온 쪽으로 날아와 불만이 섞인 목소리를 냈다.

[왜 저놈들을 그냥 내버려 두는가? 그대라면 이곳에 있는 유령들을 싹 없애버릴 수 있지 않은가.]

[그렇지. 없앨 수는 있지만, 루시온이 써먹어야 해서 하지 않았을 뿐이야.]

[훈련에 쓰일 존재라는 말인가?]

[맞아. 자세한 건 다음에 설명하지. 너도 괜히 소란 피우지 말고 적당히 모습을 감춰.]

[러쉘. 나는 이곳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아. 이렇게 많은 유령은....]

[베델. 유령은 어디에서나 있어. 그게 뭐가 이상하다고 그래?]

루시온은 러쉘과 베델의 대화가 너무도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특히 러쉘이 무얼 숨기는 듯 보였다.

"뭘 본 거야, 베델?"

루시온이 물었다.

[유령을 보았다. 너를 헐뜯고,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퍼붓는 이들을.]

베델이 차분히 목소리를 냈다.

"놈들이 무어라 지껄이든, 신경 쓰지 마. 귀족에 대한 원망밖에 남지 않는 놈이니까."

루시온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졌다.

무척 날카롭고, 사나운 분노에 베델은 살짝 당황했다.

"스승님. 부탁합니다. 저는 베델에게 잘 말해줄 자신이 없습니다."

하지만 루시온은 마음을 달랬다.

저놈들 때문에 화를 내는 것조차 아까웠다.

[그래. 내가 잘 말할 테니까, 먼저 가 있어.]

루시온이 복도에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졌을 때 러쉘이 입술을 떼었다.

[베델.]

[듣고 있어.]

[자세히 말해줄 수 없지만, 루시온은 이곳에 있는 유령들을 증오해.]

[하지만 러쉘. 이 부자연스러움은… 너무도 당황스러워. 이토록 많은 유령이 있는데, 타락한 유령은 없어. 심지어 주변에 흑마법사도 없었지.]

베델이 주먹을 꽉 쥐었다.

흑마법사가 이런 곳을 몰랐을 리가 없었다.

이렇게나 유령들이 많은데?

[흑마법사 잘 차려진 밥을 보고 그냥 지나친다고? 말도 안 되지. 말도 안 돼. 아무리 이곳이 크로니아일지라도 놈들은 좋은 유령을 얻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그 이유가 뭔지 알면서 왜 물어?]

러쉘이 피식 웃자 베델은 의문이 섞인 목소리를 냈다.

[단 한 명의 죽음의 기사 때문에 이런 상황이 가능하다고?]

[강하니 당연히 가능하지. 너보다 더.]

러쉘의 손가락이 베델에게 향했다.

[그 녀석은 너처럼 흑마법사를 증오하지 않아. 하지만 크로니아에 오는 흑마법사들을 죄다 죽여버리는 걸 사명으로 여기고 있었어.]

[사명...?]

베델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반응했다.

[어쨌든, 나는 녀석의 자리를 누군가 대체할 수 없다고 판단했어. 흑마법사를 사명으로 죽이는 일이 흔치 않잖아? 그래서 거래를 했지.]

[거래라니?]

[내가 녀석을 건들지 않는 대신, 녀석도 루시온을 건들지 않기로. 서로 건들지만 않으면 각자에게 이득인 상황이니까.]

베델은 그 말에 잠깐 생각했다.

일방적으로 루시온이 유리한 조건이지 않은가.

흑마법사를 죽이는 걸 사명으로 하는 죽음의 기사가 흑마법사인 루시온을 건들지 않는다니.

다른 일도 아니고 무려 사명이지 않은가.

[루시온은 크로니아에서 흑마법사를 만나지 않아서 좋고, 녀석은 나한테 죽지 않아서 좋고.]

러쉘은 자랑이라고 할 만큼 높이 입꼬리를 올렸다.

이는 오만함이 아닌 사실이라는 것 역시 베델은 알고 있었다.

[그대는… 역시, 알 수 없는 존재야.]

[같은 유령끼리 이상한 게 어디 있어?]

러쉘은 키득거리다 천천히 뒷걸음질하며 말했다.

[어쨌든, 루시온에게 알려봤자 별로 좋을 거 없으니까. 너만 알아둬.]

[혹시… 아니야. 그대 말대로 모습을 감추고 저택을 구경하지.]

[좋은 생각이야. 크로니아의 저택에는 크고, 볼 것도 많으니까 천천히 둘러 봐.]

러쉘은 루시온에게 향했고, 베델은 검을 도로 집어넣었다.

'그건… 분명 적의였지.'

베델은 창문 밖을 바라보며 루시온의 눈빛을 재차 떠올렸다.

저택 밖에서 루시온이 유령들을 쳐다볼 때와 다른, 깊고 깊은 적의가 가득했다.

베델은 내쉬는 숨과 함께 생각을 멈추고 그제야 풍경을 눈에 담았다.

'여기가 당분간 내가 있을 곳인가.'

조금 전 보지 못했던 풍경이 베델의 눈에 하나씩 들어왔다.

'예쁘네. 아름다운 곳이야.'

베델은 아예 창틀에 기대 자신의 양팔을 붙잡았다.

보기만 해도 따뜻함이 그려지는 곳이라 손에 막 끓인 차라도 있길 바랄 정도였다.

* * *

"…쓰읍."

루시온은 펜을 휘두르며 의자에 기대 목을 살짝 뒤로 꺾었다.

긴 머리카락이 의자 아래로 흐르자 라타는 후다닥 뛰어와 루시온의 머리카락을 앞발로 꽉 쥐었다.

루시온의 시선이 라타로 향했다.

루시온과 눈이 맞은 라타는 배시시 웃으며 앞발로 머리카락을 후려쳤다.

라타의 생김새는 여우인데 하는 짓은 고양이 같기도 하고, 개인 것 같기도 하고 하여튼 짬뽕이었다.

"재밌어?"

―응! 라타는 공도 좋아하고, 루시온의 머리카락을 치는 것도 재미있어!

"그래. 재미있으면 됐다."

루시온은 눈을 깜빡거리며 계속 펜을 돌렸다.

이제 변경에 돌아왔으니 자신의 세력을 늘려야 하지만, 여독으로 쌓인 피로가 만만찮았다.

당장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몸이 늘어질 정도이니.

'원래 상태로 돌아가려면 이틀은 쉬어야겠는데?'

루시온은 펜을 입에 물며 우물거렸다.

'그럼, 훈련은 1주일 뒤에 시작하는 걸로 하고, 황실 기사단이 이틀 후에 크로니아를 떠날 테니, 그 후에 여독을 푼다는 핑계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조직을 관리하면 되겠네.'

솔직히 황실 기사단이 이틀간 크로니아에 머물 이유는 없었다.

포탈도 있는 마당에 반나절이면 중부에 도착할 거리임에도 기간을 이틀이나 잡았다는 건, 황실이 그만큼 자신에게 신경 쓴다는 일종의 보여주기식에 불과했다.

'아버지께서 환영회를 준비하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하지만 내심 환영회를 치르고 싶었던 눈치였다.

'그래도 저녁에 맛있는 걸 많이 해달라고 했으니 기분이 풀리셨겠지.'

[간식 속에 사과랑 사과 젤리 등등 살짝 섞여 있네.]

벽에서 머리를 내밀며 러쉘이 말했다.

―홉!

라타가 튕기듯 뒤로 물러서자 러쉘은 키득거리기 바빴다.

루시온은 뒤로 젖혔던 고개를 바로 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아무래도 정보가 제대로 전달된 모양입니다."

루시온 자신은 사과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좋아하지 않기에 먹지 않았을 뿐이지만, 시종들 입장에서는 다르게 보일지도 몰랐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루시온은 목소리를 냈다.

"들어오게."

문이 열리기 전에 라타는 후다닥 침대로 뛰어가 이불 속에 숨어버렸다.

방 안으로 들어온 집사는 고개를 살짝 숙인 후에 안으로 들어왔다.

"실례하겠습니다."

"여기에 내려놓게."

루시온은 자신의 책상을 가리켰다.

"고생했네."

루시온의 말에 집사는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인 후 뚜껑을 열었다.

움찔.

라타가 숨은 이불이 살짝 움직이는 게 보였다.

루시온과 잠깐 눈이 맞자 라타는 다시 이불 속으로 후다닥 들어갔다.

루시온은 피식 웃으며 간식이 담긴 그릇을 쳐다보았다.

쿠키나 마카롱, 젤리, 과일 등 간식들이 고루고루 분포된 와중에 예쁘게 잘린 사과가 눈에 들어왔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집사가 자연스럽게 인사하며 물러갈 때, 루시온 역시 그 순간을 노렸다.

"잠깐만 기다리게."

[저 녀석 웃고 있네.]

러쉘이 고개를 돌린 집사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집사를 흉내 내듯 러쉘 역시 음흉한 웃음을 지어냈다.

[좋은 건수를 얻은 표정이야.]

"예, 도련님."

하지만 집사가 고개를 돌렸을 때, 어떤 표정의 변화도 볼 수 없었다.

"사과와 관련된 걸 전부 뺀 뒤에 들고 오게. 보고만 있어도 역겨우니."

루시온은 오만상을 찌푸리자 집사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아니야. 그냥 내가 싫어할 뿐이니까 조용히 들고 가."

"알겠습니다, 도련님. 얼른 치우도록 하겠습니다."

집사는 다시 책상으로 다가와 그릇에 뚜껑을 덮고 그대로 들고 나갔다.

[아직 안 갔어. 문에 귀를 대고 있네.]

러쉘이 배꼽을 잡으며 낄낄 웃었다.

정말 어설픈 연극 하나 보는 기분을 느끼며 루시온은 일부러 헛구역질했다.

자신이 조작한 정보가 진실이라 믿도록.

"…우웩!"

루시온이 몇 번이고 헛구역질을 흉내 냈는지 몰라도 러쉘의 말에 '뚝'하고 멈췄다.

[갔다.]

'참 오래도 확인한다. 목 아파 죽는 줄 알았네.'

루시온은 한쪽 턱을 괴며 눈살을 찌푸렸다.

곧 그는 벽에 붙어 있다시피 한 2번을 쳐다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뭐 해, 2번? 계속 쫓아. 누구와 연락하는지, 뭘 하는지 계속 감시하라고."

[알겠습니다.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2번은 진땀을 흘리는 듯 바짝 굳은 표정과 함께 벽 너머로 사라졌다.

'자, 저놈을 제외한 나머지 12명을 잡아볼까?'

루시온은 펜을 돌리며 흄이 들어오길 기다렸다.

그때, 얼마가 가지 않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흄이네.'

흄만이 낼 수 있는 묵직한 소리에 루시온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참 좋은 타이밍이었다.

75화. 집안일부터(3)

"들어와, 흄."

루시온의 말이 들리자마자 흄이 방으로 들어왔다.

'조금 자랐나? 이번에는 티가 나질 않네.'

루시온이 흄을 쳐다봤지만, 자라났는지 알기 어려워 흄에게 물었다.

"힘은 흡수했어?"

"예. 갑자기 길어진 머리카락을 손질하느라 늦어졌습니다. 죄송합니다."

흄이 고개를 숙이다 말고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누가 왔다 갔습니까? 간식… 냄새도 나네요."

―못된 인간이 왔다 갔어! 라타는 유혹에 이겨냈고. 못된 인간이 주는 간식은 라타는 쳐다보지 않을 거야.

라타는 이불에서 꾸물꾸물 기어 나오며 눈에 힘을 가득 주었다.

곧 루시온을 보자마자 힘을 가득 주었던 눈동자가 풀리며 어서 칭찬해달라며 눈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잘했어, 라타. 앞으로도 남이 주는 건 함부로 먹으면 안 돼."

―응! 흄이 라타한테 알려줬다? 라타는 잘 지켰어. 그렇지, 흄?

"예. 잘하셨습니다."

흄마저 라타를 칭찬하자 라타의 통통한 볼살이 높이 올라갔다.

[잘했어.]

러쉘은 라타가 자신을 보기 전에 재빨리 말을 꺼내 놓았다.

―이히히.

기분이 한껏 좋아진 라타는 꼬리가 좀처럼 멈출 줄 몰랐다.

"흄."

"예, 도련님. 듣고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이 있어."

"언제든 준비됐습니다. 말씀하십시오."

* * *

똑똑.

"안토니 님."

흄이 목소리를 냈다.

문이 열리자마자 안토니가 활짝 웃으며 흄을 맞이했다.

"흄. 어서 오렴. 건강히 잘 다녀왔니?"

"예. 보시다시피 잘 다녀왔습니다."

"네가 왔다는 말에 얼른 너를 반기러 가고 싶었지만, 가주님께서 자리를 비우셔서 마중 나가지 못했어. 미안하구나."

안토니가 흄의 손을 꽉 쥐었다.

"말씀이라도 정말 감사합니다."

흄은 자신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안토니의 시선에 평온함을 느꼈다.

아버지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 이렇게 나를 찾아와줘서 고맙구나."

"안토니 님.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상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미 막내 도련님께도 허락을 구했습니다."

안토니는 아예 밖으로 나왔다.

자신이 있는 곳은 다름 아닌 노비오의 집무실이었으니까.

"이제 무엇이든 말해도 된단다."

안토니가 살짝 걱정스레 흄을 바라보았다.

그럴 일이 없었으면 하지만, 루시온에게 어떤 문제라도 생긴 건지.

흄이 안토니의 걱정과 달리 조심스레 종이를 건넸다.

안토니는 흄이 건넨 종이를 받자마자 내용을 읽어나갔다.

종이에는 12명의 시종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필체를 들키지 않으려 뒤죽박죽 쓰인 글씨에 이어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이들을 주목하시오. 크로니아의 정보를 팔아먹는 이들이니. 믿든 안 믿든 그대들의 자유이나, 몰래 뒷조사라도 해 본다면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오.

"흄."

안토니가 다급히 흄을 불렀다.

"말씀하십시오."

"이걸 어디에서 주웠지?"

―흄 너는 거짓말을 못 하니까, 말하지 말고 그냥 안토니가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손가락으로 가리켜.

흄은 루시온이 꺼낸 말을 기억하며 손가락으로 복도를 가리켰다.

"혹시 누가 흘렸는지 보았고?"

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막내 도련님께… 알렸니?"

흄은 그 물음에 또 고개를 가로저었다.

"잘했다."

안토니는 그제야 숨을 한 번 돌렸다.

루시온이 이 종이를 봤으면 얼마나 분노에 치밀어 오를지 상상을 할 수 없었다.

"흄."

"예."

"어느 복도에서 주웠는지 기억하고 있니?"

"기억하고 있습니다."

흄은 손가락 3개를 펼쳤다.

3층 복도라는 말이었다.

루시온의 방이 있는 3층.

"고맙구나."

안토니는 흄에게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이 건은 내가 가주님께 잘 말씀드릴 테니,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도련님께 돌아가렴."

"도련님을 속였는데, 제가 잘한 겁니까?"

흄은 루시온이 시킨 일과 별개로 궁금해졌다.

무언가를 속이면 배신이 되는 셈인데, 배신하지 말라는 루시온의 뒤통수를 치는 일이 왜 잘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막내 도련님께서는… 이 부분에 좋지 않은 기억을 가지고 계시단다. 나는 도련님이 괴로워하시는 것보다 모르고 있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단다."

안토니는 쓰린 마음을 애써 눌렀다.

"하지만 내 판단이 무조건 옳다고 할 수 없으니 너는 네 마음이 가는 대로 판단하렴."

"어렵습니다. 여전히 어렵네요, 안토니 님."

흄은 미간을 찌푸린 상태로 눈동자를 또르르 굴렸다.

답이 나오지 않아 흄은 안토니에게 머리를 숙였다.

"그럼,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그래. 도련님을 잘 부탁한다."

안토니는 흄이 복도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곧 웃음기를 싹 빼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황실과 변경만큼은 쥐새끼들에게 놀아나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황실이 무너지면 나라가 망하고, 변경이 무너지면 제국은 가장 노련하면서도 튼튼한 방패와 창을 잃는 셈이었다.

"가주님."

안토니가 노비오를 향해 흄에게 받았던 종이를 건넸다.

"흄이 발견한 종이입니다. 누가 이 종이를 흘렸는지 보지 못한 모양입니다."

종이를 읽던 노비오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갔다.

분명 셴과 얽힌 놈들의 목을 죄다 베어버린 후였다.

다시는 크로니아의 정보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기 위해서 단속하고 조사하질 않았던가.

한데 아직도 살아남은 놈들이 있었다니.

"…만약 이 정보가 사실이라면 어디에서 문제가 생겼는지 뻔하지 않은가?"

"예. 인사관리 쪽에서 적들과 손을 잡은 놈들이 있는 모양입니다."

비록 안토니 자신이 집사장이나, 이토록 큰 저택을 혼자서 관리할 수는 없었다.

부서마다 집사와 시녀를 배정했고, 그중에서도 특히 채용 문제에 신경을 써 가장 믿음직한 이를 앉혀놨더니 아무래도 뒤통수를 때린 모양이었다.

"가주님. 제가 책임지고 조사하겠습니다. 조금만 시간을 주셨으면 합니다."

늘 생글거리던 안토니의 표정이 단호할 정도로 싸늘하게 바뀌었다.

배신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으로.

노비오는 화낼 타이밍을 놓쳐 조용히 종이를 구겼다.

30년.

자그마치 안토니가 크로니아를 위해 일해온 시간이었기에 그의 분노는 타당했다.

"내 앞에 꿇려놓게."

"예. 반드시 그럴 생각입니다."

"이 종이를 쓴 사람을 찾을 수 있겠는가?"

노비오가 종이를 흔들어 보였다.

왜 자신을 돕는지 몰라도 수상했다.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저녁 후에 움직이도록 하게나. 루시온이 눈치가 빨라서 아마도 자네가 움직이면 이번 사건을 알아차릴지도 모르니."

"물론입니다. 오늘은 막내 도련님을 위해 환영회가 열리는 날이 아닙니까."

안토니는 언제 화를 냈냐는 듯이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안토니."

"예, 가주님."

"내 아들이지만, 참 자랑스럽지 않은가?"

노비오가 목에 힘을 가득 주었다.

중부에 벌어진 일들 모두 루시온이 해냈다.

그냥 걷는 것도 불안했던 루시온이 성자라는 이름으로 환호를 받다니.

"물론입니다, 가주님."

가장 가까이서 노비오를 보필했던 안토니였기에 누구보다 그 마음을 이해했다.

"그런데 가끔 이 모든 게 꿈이면 어쩌나 하고 무서워질 때가 있네. 예전처럼 그 아이가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 울부짖고 소리치면서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그때는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어."

노비오는 조용히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내가 마지막으로 남긴 소중한 보물이거늘, 부서지고 말았다.

겨우 꿰매고, 붙여 누더기처럼 상처만 가득했지만, 다시 반짝거리며 빛이 났다.

노비오는 그게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 * *

[그 집사 놈은 왜 뺐어? 가지고 놀려고?]

러쉘이 물었다.

"예, 맞습니다. 도망갈 구멍 정도는 마련해두었습니다. 안심하고 움직일 때 가장 많은 것들을 흘리는 법이니까요."

루시온은 하품을 하며 저녁을 먹으러 부지런히 복도를 거닐었다.

라타의 신난 걸음에 맞춰 루시온 역시 맛있는 걸 먹을 생각에 벌써 들떴다.

'좋아. 좋네. 헤인트를 안 봐서 더 좋고.'

자신이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헤인트가 자신을 쫓아다닐 이유가 없었다.

순간, 루시온은 발걸음이 느려졌다.

뒤를 따르던 흄이 다급히 걸음을 멈췄다 다시 걸었다.

느닷없는 떠오른 의문 하나 때문에 루시온은 저절로 느려지는 걸음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런데… 헤인트가 돌아다니지 않으면 악역들은 누가 없애는 거지?'

당장 눈앞의 일을 해결하기 바빠 생각해본 적 없는 생각이었다.

자신은 죽어도 악역이 될 생각이 없으니 헤인트가 각성하는 계기가 되는 사건 역시 벌어지질 않을 테고.

이미 황실 기사단이 되었겠다, 떠돌아다닐 이유도 없었다.

'그럼 주인공이… 주인공 노릇을 못 하면 누가 주인공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건데?'

[거봐. 내가 그 팔찌 착용하지 말라고 했지.]

루시온의 얼굴이 굳어지자 러쉘은 조금 전 빛의 내성을 높이겠다고 착용했던 텔라에게 받은 팔찌를 떠올렸다.

루시온은 길게 새어 나올 한숨을 억지로 삼키며 다시 걸었다.

'모든 정황상… 내가 앞으로 처리해야 할 것 같은데....'

[루시온?]

"듣고 있습니다."

[헤인트 때문에 고민이라도 있어?]

순간, 루시온은 움찔거렸다.

[어떻게 알았냐고? 티가 좀 나서. 물론, 나같이 예리한 눈을 가져야 알 수 있는 정도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

러쉘은 콧바람을 내쉬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슬쩍 건드렸다.

[헤인트가 빛의 속성을 지녀서 꺼려지는 건 아는데, 이틀 후면 가잖아?]

'…이틀 후?'

루시온의 눈이 곧 반짝거렸다.

'황실 기사단으로 루미노스를 쫓을 테고, 루미노스 다음에 또 다른 악역들을 처리하게 던져주면 되잖아?'

그제야 묵은 체증이 싹 날아간 느낌에 루시온은 미소를 지으려다 말고 걸음을 멈췄다.

[타이밍 하나 기가 막히네.]

러쉘이 앞을 가리켰고, 라타가 빠르게 뛰어갔다.

―헤인트다!

포탈이 있는 마을에서 헤인트에게 음식 좀 몇 번 받았다고 그새 좋다고 흔들리는 꼬리를 보니 루시온은 기가 찼다.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헤인트 형님?"

"아. 카슨한테 부탁을 받아서."

헤인트가 어색하게 말을 꺼냈다.

루시온은 그 어색함에 '환영회'라는 단어가 바로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에이. 설마 아버지께서?'

루시온이 슬쩍 러쉘을 바라보자 그는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숨기는 듯 보였다.

이어 베델을 보자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버렸다.

루시온은 긴가민가하며 물었다.

"형님께서요?"

"어. 이번 저녁은 밖에서 먹는다고 하네?"

'진짜 환영회가 열리는 건가?'

루시온은 어리둥절하며 헤인트를 따라갔다.

* * *

'…이래서 후원 쪽으로 부르셨구나.'

루시온이 후원에 발을 딛자마자 밀려오는 박수에 깜짝 놀랐다.

자신의 방은 3층.

정원이란 정원은 죄다 보이는 높이였다.

유일하게 보이지 않는 게 바로 후원이었다.

'하루 이틀 준비하신 것도 아니고.'

기사들은 죄다 평복을 입은 채로 시종과 함께 손에 꽃을 든 채로 양쪽으로 줄지어 길을 만들고 있었다.

[아까 보니 열심히 준비하고 있더라고.]

러쉘이 루시온보다 더 기뻐하며 말했다.

'억지로 이런 행사에 참여하게 된 건 아닌지 모르겠네.'

순간, 루시온과 눈을 마주하자 바짝 긴장한 얼굴로 애써 웃었다.

"저희는 절대로 억지로 이 자리에 서 있는 게 아닙니다."

마치 루시온이 오해라도 할까, 눈을 마주친 기사가 목소리를 내며 루시온에게 꽃을 넘겼다.

"맞습니다!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가주님께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도련님. 정말 잘 돌아오셨습니다."

이어 시녀가 흐뭇하게 웃으며 기사처럼 꽃을 넘겼다.

"막내 도련님. 저는 도련님께서 무사히 돌아오길 매일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도련님을 모실 수 있어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더할 나위 없이 기쁩니다."

루시온이 걸을 때마다 꽃이 하나씩 쌓여갔다.

참 이상하게도 그들의 목소리는 따뜻했고, 그들의 눈빛 역시 따스했다.

[네가 라트초를 자주 사 오니까, 꽃을 좋아한다고 소문이라도 난 모양이지.]

러쉘이 키득거렸고, 라타도 입에 꽃 한 송이를 물며 흥겹게 앞으로 걸었다.

―맞아, 맞아. 루시온이랑 함께해서 라타도 엄청 기뻐!

"…진짜 낯간지럽다."

본의 아니게 함께 길을 걷게 된 헤인트마저 꽃을 몇 송이 받자 쑥스러움에 입가를 핥았다.

'왜?'

루시온은 정신도 없이 꽃을 한 다발 쥐며 그저 길을 걸었다.

'날… 싫어하던 게 아니었나?'

의문이 채 풀리기도 전에 노비오가 서 있었다.

"미안하구나."

노비오는 루시온을 보자마자 사과부터 했다.

주목을 받는 걸 싫어하는 아이였기에 이 상황이 얼마나 당황스럽겠는가.

"네가 이런 걸 싫어한다는 걸 알아서 소박하게 하려고 했는데, 일이 이렇게 커지고 말았단다."

노비오는 조심, 또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제일 처음 들켰던 건 카슨과 요리장이었다.

요리장에서 시녀로, 시녀에서 집사로 그렇게 퍼져 이런 자리가 되고 말았다.

루시온은 여전히 이해가 가질 않는 표정을 짓자 노비오가 안심할 수 있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아니라 네가 저들을 바꾸고, 변화시킨 거란다."

"…제가요?"

"그래. 네가 자랑스럽구나, 루시온."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말에 루시온은 황급히 입술을 깨물었다.

"집에 돌아온 걸 환영한단다."

카슨 역시 웃으며 꽃을 건넸다.

'환영회… 라면서?'

루시온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마치 꽃이 활짝 핀 봄에 발을 디딘 것 같지 않은가.

'…와.'

루시온은 말없이 꽃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꽃향기가 한 번에 올라왔다.

'최고의 환영회네.'

루시온은 십여 년 만에 비로소 집으로 돌아온 기분을 느꼈다.

76화. 포섭

* * *

"…그게 말이야. 조금 곤란하긴 해."

헤인트가 루시온을 슬쩍 보며 차를 홀짝였다.

당장 몸을 뺄 조짐이 보이자 루시온이 생글거리며 오히려 헤인트를 붙잡았다.

"형님. 설마 이번 일을 비밀이라는 말씀으로 넘어가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아니, 넘어가는 게 아니라 외부인에게 황실 기사단의 일을 알리는 금지야."

"잘됐네요. 저는 외부인이 아니라 그 당사자니까요. 마법사들이 절 공격하지 않았습니까."

루시온은 찻잔을 가볍게 흔들었다.

무려 하루라는 시간이 있었으니 헤인트가 황실과 연락하지 않았겠는가.

지금 황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고 싶었다.

황실이 움직이는 속도에 맞춰 회유할 수 없는 악역들을 갖다 줄 생각이니.

"마차 안에 있어 자세히는 들리지 않아도 제 이름만큼은 똑똑히 들었습니다."

루시온은 이참에 확실히 못을 박았다.

"제가 아무리 몰라도 적이 제 이름을 불렀다는 의미를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하아."

헤인트는 집요하게 이어지는 루시온의 추궁에 기어코 한숨을 내뱉었다.

"아직 루미노스라는 적들의 이름만 폐하께 전달했을 뿐이야. 그 외에는 이렇다고 할 무언가도 찾지 못했고. 하지만 저번에 중부에서 백작가 저택이 테러를 받은 사건이 있었잖아?"

"예. 기억합니다."

"그 사건도 루미노스가 저지른 일이야. 거기에서 증거들이 몇몇 나왔다고 하니까 그 증거를 바탕으로 쫓을 생각이긴 한데 아무래도 그것만으로 놈들을 잡기 힘들지 않을까 싶어."

"잡기 힘들다니...."

루시온은 말을 하다 입을 다물었다.

누가 보아도 걱정에 빠진 사람처럼 보였다.

헤인트가 당황하며 얼른 목소리를 내뱉었다.

"폐하께서 무척 신경 쓰고 계시니까 그, 금방 잡힐 거야. 나도 반드시 놈들을 잡을 생각이라고."

"그렇다면 안심입니다. 형님께서 반드시 잡아주실 거라 생각하며 기다리겠습니다."

루시온은 차분히 차를 홀짝였다.

'루미노스의 위치는 헤인트가 새로 마련한 집으로 보냈으니, 도착하면 딱 받겠지?'

현재 헤인트가 황실과 가까운 곳으로 이사했다는 사실은 아직 카슨조차 모르고 있었다.

당연히 자신도 현재 모르는 상태니 헤인트의 의심을 피할 수 있었다.

'유령이 참 쓸 만해.'

"그나저나 루시온."

"예, 형님."

"그 팔찌 언제까지 가지고 다닐 거야? 네가 받은 선물이라서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너한테 위험하잖아."

"형님."

"그래. 듣고 있어."

헤인트가 진지한 눈빛으로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제가 빛을 가까이하면 언젠가 저도 빛을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요?"

루시온이 아련한 눈빛을 짓자 러쉘이 베델에게 자신의 입을 가리키며 또박또박 속닥거렸다.

봐봐, 이제 시작한다.

라타가 귀를 쫑긋 세우며 해맑게 물었다.

―러쉘. 루시온이 뭘 시작한다는 거야?

[아, 아무것도 아니야.]

러쉘이 다급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 러니까. 음."

헤인트가 자신의 목덜미를 문질렀다.

빛을 가까이한다고 신력 알레르기가 낫는다는 사실은 들어보지 못해 다음 말을 잇기가 참 어려웠다.

"압니다."

루시온이 씁쓸하게 목소리를 냈다.

"저도 제 말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다는 걸 알지만, 저 때문에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까 무서워서 부적처럼 가지고 있는 거니 형님께서는 아무 말도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카슨한테 입도 벙긋하지 않았어. 걔가 알았다면 바로 뺏겼을 거잖아."

헤인트가 그제야 미소를 내보였다.

"맞습니다. 카슨 형님이라면 그러시고도 남을 분이죠."

"루시온."

"예, 형님."

"언제가 될지 모르는데, 대신전에서 정화라는 이름으로 이곳 변경으로 내려올 것 같아."

[뭐라고? 그놈들이 여길 온다고? 왜?]

러쉘이 목소리를 높였다.

루시온의 표정도 덩달아 굳어지자 헤인트는 머뭇거리며 뒷말도 이었다.

"그… 좋지 않은 소식이 또 하나 있거든? 들을래?"

"듣겠습니다."

"신성 국가 네바스트에서 제국에 연락을 보냈어. 에올 대신관이 저지른 일을 사과하러 온다는데, 그건 핑계로 널 보러 올지도 모르겠는데...."

"예?"

루시온의 목소리가 기어코 튀어나왔다.

듣자 하니 아주 기가 막혔다.

'날 보러 온다면서 내 의견은 묻지도 않아?'

"…그래서 우리 쪽 대신전에서 널 보호하고자 그 비슷한 시기에 변경으로 갈 예정이야."

헤인트는 루시온의 반응을 살피며 끝까지 말을 마쳤다.

"기가 찹니다."

"그래, 기가 차겠지. 여기에서 네 의견은 하나도 없으니까."

"지금 제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 확실히 알았습니다. 저는 그저 잘 장식된 동상일 뿐이네요."

루시온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성자가 상징적인 위치라는 걸 황실도, 자신도, 그리고 신전 쪽에서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렇다고 상징을 무시할 순 없었다.

심지어 신성 국가 네바스트에서.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 폐하께서도, 5황자 저하께서도 열심히 머리를 맞대고 있으니까."

왜 그 속에 자신은 없는 거냐고 물어봤자 루시온은 소용없는 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실제로 자신은 아무런 힘이 없으니까.

'그래. 네바스트. 네놈들 눈에 내가 눈엣가시라 이거지?'

신성 국가라는 이름을 붙인 놈이 성자인 자신의 의견을 묻지 않은 건 명백한 적의가 보였다.

그렇다고 루시온은 순순히 당해줄 마음은 전혀 없었다.

"아, 이거 받아. 어제 주려고 했는데 기회가 나지 않아서."

헤인트가 건넨 건 패였다.

태양과 나란히 서 있는 독수리.

'황실의 문양이다.'

루시온은 패를 보자마자 황제에게 병사를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을 달라는 자신의 부탁을 위해 특별히 제작되었음을 알아차렸다.

'병사는 손에 들어왔고.'

"폐하께서 전해달라고 하신 물건이야."

루시온은 패를 받으며 비어 있는 손을 바라보았다.

'이제 남은 건 내 업적인가.'

아직 로베리오 백작의 일이 자신의 공으로 밝혀진 일이라는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다.

'아....'

루시온의 입꼬리가 잠깐 씰룩거렸다.

아마 황제도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을까 싶었다.

어쩌면 생각보다 좋은 순간에 자신의 공로를 인정받을지도 몰랐다.

"폐하께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다고 전해주십시오."

"당연하지. 책임지고 반드시 전할게."

헤인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루시온."

"말씀하십시오."

"흄한테 가벼운 동작이라도 가르쳐주고 싶은데 허락해주겠어?"

"예. 괜찮습니다. 짧은 시간이나 마음껏 가르쳐주셔도 됩니다."

흄과 헤인트가 스승이라는 관계로 얽매이지 않은 상태라면 뭔들 허락하지 않을까.

* * *

루시온은 헤인트가 자신의 방에서 돌아간 뒤에 침대에 몸을 던지다시피 했다.

'소설에서는 신성 국가 네바스트가 제국을 찾아오는 일은 없었는데.'

신성 국가 네바스트는 그 목적을 떠나 중립국이어야 했다.

말이 중립국이지 사실상 국제 관계에 어떤 간섭도 해서는 안 된다는 불합리한 조항으로 묶인 상태였다.

'이번 일도 나를 핑계 삼아 제국으로 발을 디뎌보려고 하는 듯한데, 안 되지. 절대 안 되지.'

루시온 역시 신전의 세력이 커지길 바라지 않는 이들 중 하나였다.

신전의 세력이 커지면 자연스레 지금 세력의 균형이 무너지기 마련.

균형이 무너진다는 건 으레 좋지 않은 사건들을 일으킬 뿐이었다.

제국의 대신전도 원래는 폭파 사건 이후 세력이 커져야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지.'

애초에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고, 이번 소행 역시 흑마법사가 벌인 일이라고 결론이 나긴 했지만, 사건 자체가 완전히 묻혀 버렸다.

심지어 제국의 대신전은 황실에 머리를 조아려 신성 국가 네바스트와 다른 노선을 선택하기까지 했다.

'뭐, 결국, 나 때문에 대신전의 세력이 커지겠지만, 이미 황실 밑에 들어갔으니 헤인트가 활약하는 2년 후보다는 왕성해지진 않겠지.'

루시온은 정신 사납게 돌아다니는 라타의 공놀이를 쳐다보다 러쉘에게 눈길을 돌렸다.

"스승님."

[왜 네바스트에서 움직이는 것 같냐고?]

"예. 맞습니다."

루시온이 키득거리며 대답했다.

[중립국이라는 저 거지 같은 말 좀 떼보려고 그러는 게 아니겠어?]

"역시 스승님께선 저랑 생각이 비슷하시네요. 베델 너는?"

루시온은 이어 베델에게 물었다.

[루시온 공을 가늠하러 오는 것 같아. 공이 네바스트에 도움이 될지 아닐지를 보기 위해서. 사람을 판단하려면 직접 확인해야 하잖아?]

"둘 다 일리가 있네."

상대가 꼭 한 가지 목표로 온다고 확신할 수도 없었다.

루시온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잠깐 생각에 빠졌다.

하지만 생각은 엉뚱하게도 네바스트 문제보다 당장 조직을 키우고, 포섭해야 할 이들로 넘어가고 말았다.

때론 너무 많이 아는 것도 참 골치 아프다 싶었다.

"아, 그나저나 어때, 베델?"

루시온은 생각을 멈추고 베델에게 물었다.

[무엇이 말인가?]

"이곳 크로니아 말이야. 당분간 지낼 곳이잖아. 당분간이라도 마음에 든 편이 더 좋고."

루시온은 베델에게 충성을 강요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려 '당분간'이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그간 루시온은 베델이 무얼 하든 내버려 두었다.

마치 그게 정답이라도 알려주는 듯 점점 팽팽해진 붉은 실 때문이었다.

베델이 미소를 짓는지 실소가 살짝 새어 나왔다.

어젯밤 루시온이 잠이 들었을 때, 베델은 크로니아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바위지대와 이어지는 변경의 자랑이라 부를 수 있는 굵고 커다란 성벽.

수도와 달리 한적하고 느긋한 생활.

하지만 동시에 어느 집이든 무기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모습이 대비되어 무척 색달랐다.

베델은 아침 해가 떠오를 때까지 지켜보았던 폭포수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크로니아는 변경이라는 쓸쓸한 이름에 맞지 않게 튼튼하고 아름다웠어. 가만히만 있어도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이었고. 살아 있을 때 왔으면 더 좋았을 거야.]

"그렇지. 수도가 있는 중부랑은 다른 느낌이지."

[또, 루시온 공만큼 편안한 흑마법사는 없었어.]

베델은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다.

"아니, 나는 그걸 물으려던 게 아니니 애써 말하지 않아도 돼."

루시온은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자 상체를 벌떡 일으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말하고 싶어서 그래. 말하게 해줄 수 있겠나, 루시온 공?]

베델이 투구를 벗었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루시온 공도 알다시피 나는 배신당해 죽었어.]

―라, 라타는 배신하지 않아. 절대로.

공을 물고 막 침대로 올라오려던 라타가 깜짝 놀라며 허둥지둥거렸다.

"네 이야기 아니야, 라타."

루시온은 라타를 들어 침대에 내려놓았다.

금세 루시온의 무릎으로 와 꼬리를 흔들었다.

[아직 흑마법사가 증오스러워. 내 모든 걸 앗아간 그들을 용서할 수 없어.]

베델이 얼굴을 살짝 일그러트렸다.

루시온은 그녀의 말을 그저 듣기만 했다.

[하지만 루시온 공 덕에 내 시야가 크게 트였어. 모든 흑마법사가 나쁘지 않다고, 그렇게 믿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니까.]

베델이 검을 천천히 꺼내며 무릎을 꿇었다.

[루시온 공.]

"그래."

[내 검을 받아주겠나?]

검을 내민 베델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어렸다.

이 말이 얼마나 어렵게 꺼낸 말인지 루시온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사람한테 미움받고, 배신당하는 그 마음은 말 그대로 자기 자신이 반으로 찢어지는 고통이었으니까.

[내 믿음 역시… 받아줄 수 있겠나?]

베델은 목소리를 떨었다.

나를 배신하지 말아줘.

루시온은 베델의 말을 그렇게 받아들였다.

"베델."

[듣고 있어.]

"나는 배신하지 않아. 한순간 나락으로 떨어지는 게 무슨 기분인지 알고 있거든."

루시온은 베델의 검을 쥐고 지배의 마법을 위해 어둠을 베델에게 불어넣었다.

베델은 루시온의 어둠을 거부하지 않았다.

루시온의 어둠이 그녀에게 퍼져나가자 흠집이 가득했던, 낡고 낡았던 갑옷이 새로운 갑옷으로 바뀌었고, 루시온이 쥔 그녀의 검도, 그녀의 투구마저 싹 다 갈아엎어졌다.

밋밋했던 갑옷에 용무늬가 생겨났고, 펄럭거리는 붉은 망토까지 생겨났다.

―나는 네놈을 지키기 위해 내 심장과 목숨을 걸고 맹세했다! 그런데 네놈이, 네놈이 나를 배신했어? 나를? …오냐! 내 언젠가 너를 죽이러 가마! 네 심장에 내 칼을 박고, 저주하고, 또 저주하며 네놈을 향해 마음껏 비웃어주지!

악에 받친 목소리가 루시온에게 흘러나왔다.

이건 베델의 기억이었다.

자신이 그렇듯 그녀 역시 자신의 기억 일부분을 보고 있겠지.

[루시온 공은 대체....]

루시온을 바라보는 베델의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갔다.

루시온은 자신의 기억 중 무얼 봤는지 묻지 않았다.

자신 역시 그럴 셈이었으니까.

서걱.

붉은 실이 잘려나갔다.

최종 보스가 손에 넣었던 죽음의 기사는 이제 자신의 손에 들어왔다.

―우오오오.

라타의 목소리에 순간 베델은 움찔거렸다.

[…라타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계약이 맺어졌으니까.]

러쉘이 손뼉을 마주치며 활짝 웃었다.

드디어 루시온이 베델과 계약을 했다.

[축하해, 루시온, 베델.]

"베델, 고마워."

루시온은 베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등에 계약이 체결됐음을 알리는 검은 별이 나타나 있었다.

[부디,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줬으면 해.]

"물론이지. 그럴 자신이 없었으면 애초에 검을 쥐지도 않았을 거야."

[그나저나… 라타는 대체 뭐지? 뭔가, 이상한데?]

베델은 계약을 맺고 나니 라타에게 알 수 없는 친근감을 느꼈다.

"라타는 신수야."

어차피 속일 생각도 없었기에 루시온은 라타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베델은 눈을 깜빡거렸다.

"진짜 신수야."

다시 이어지는 루시온의 말에 베델은 작고 귀여운 까만 여우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어둠의 신수지.]

러쉘까지 고개를 끄덕거리자 베델은 손가락을 들어 라타를 가리켰다.

[지, 진짜 신수라고? 어둠에도 신수가 존재한다는 말인가?]

"놀라는 건 뒤로 하고, 한 번 해 봐야지."

[뭘 말하는 건가?]

베델의 말에 루시온은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빙의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