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7

77화. 포섭(2)

[…뭐?]

러쉘이 깜짝 놀랐다.

"아직 제가 사용할 수 없는 겁니까?"

루시온은 방금 베델의 충성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어둠이 커진 걸 느꼈다.

원래 양의 1.5배 정도가 늘어났기에 자신감 있게 꺼낸 말이었는데.

[아니, 사용할 수는 있는데 괜찮겠어?]

"괜찮겠냐뇨?"

루시온의 물음에 러쉘은 턱을 매만졌다.

[베델의 능력을 빌리는 건 좋은데, 빙의된 상황에는 정신 상태도, 생각도 공유하게 되거든. 그게 썩 기분 좋은 건 아니잖아?]

"괜찮습니다. 그것 때문에 좋은 마법을 사용하지 않을 건 아니잖습니까."

[그렇긴 하지. 그만큼 매력 있는 마법이니까.]

루시온은 베델을 바라보았다.

"너는 괜찮아?"

[솔직히 말하면 설레.]

"설렌다고?"

루시온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물었다.

하지만 베델은 정말 설렌 얼굴로 주먹을 꽉 쥐었다.

[죽으면 뭐가 가장 가지고 싶은 줄 아는가?]

"몸이겠지."

[맞아. 그게 굳이 내 몸이 아니더라도 살아 있는 육체를 가지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여.]

베델은 그때를 떠올리는 듯 눈빛이 흔들렸다.

[불가능한 걸 알기에 일찌감치 포기하는 유령이 있지만, 미련을 버리지 못한 유령들이 대부분이야. 유령이 사람 근처에 있는 이유가 이 미련 때문이고.]

―안 돼. 루시온 몸을 뺏는 건 라타가 용서 못 해.

라타가 루시온의 다리에 매달려 베델을 향해 이빨을 내보였다.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지만, 루시온은 라타를 달랬다.

"마법을 사용하려는 것뿐이니까, 이빨 집어넣어."

라타는 금세 입을 다물었다.

[뭐, 베델이 루시온의 몸을 뺏는 건 마냥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러쉘이 라타를 힐끔 보며 말하자 라타는 다시 이빨을 내보였다.

"걱정하지 마. 누구든 간에 내 몸을 뺏기는 일은 없으니까."

―정말로?

[라타. 약속할게. 내가 루시온 공의 몸을 뺏는 일은 없을 거야.]

―정말?

베델까지 라타를 달래자 그제야 라타는 앞발에 힘을 빼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라타와 약속이다. 라타는 루시온이 없으면 안 돼.

[그래. 약속할게.]

베델이 무릎을 굽히고는 라타에게 손을 뻗었다.

라타의 앞발이 베델의 손가락을 꽉 쥐자 자연스럽게 그녀의 미소가 피어났다.

"스승님."

루시온이 턱을 매만졌다.

"주변이 한산하면서도 사람한테 들키지도 않고, 적당히 넓은 곳이 지금 이 저택에서 어디가 제일 적당할까요?"

자연스러운 부탁에 러쉘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젠 아주 자연스럽네.]

"예?"

아무것도 모른다는, 루시온의 순진한 표정에 러쉘은 또 속아줬다.

제자를 위해 이거 하나도 못 해줘서 쓰겠나.

* * *

[연무장, 후원, 정원 등 싹 다 사람들이 있더라고. 유일하게 없는 곳이 지하창고인데, 그중에서 먼지가 제일 적은 곳으로....]

"콜록, 콜록!"

루시온은 지하창고로 들어가자마자 연신 기침을 하기 바빴다.

러쉘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나름 고르고 고른 곳이었다.

투구 덮개가 생긴 베델은 슬쩍 의심하는 눈초리로 러쉘을 바라보았다.

[아니, 정말로 여기밖에 없었어. 내가 내 제자가 기관지가 약한 것도 모를까?]

러쉘은 루시온 주변에 먼지를 살살 털며 말했다.

―라타도 쫓아줄게.

라타가 루시온의 다리, 배, 어깨 위로 올라와서는 앞발을 휘둘렀다.

"콜록. 내 기관지가 좀 예민해서 그래."

루시온은 입을 막으며 말했다.

탁.

러쉘이 베델의 투구 덮개를 내렸다.

[봤지?]

[그래. 내가 오해했어. 미안해.]

베델은 다시 투구 덮개를 올렸다.

'지하창고로 향하는 문도, 지하창고 문도 잠갔고.'

루시온은 놀고 있는 어둠을 꺼내 마스크처럼 입을 가렸다.

'한결 났네.'

그제야 루시온은 숨을 내쉬며 헤인트에게 받았던 수련용 검을 꺼냈다.

[팔이 불편할 텐데 괜찮겠나?]

베델은 루시온의 부러진 팔을 바라보았다.

"괜찮아. 나는 양손잡이라서. 게다가 요새 많이 좋아졌어."

루시온은 붕대로 칭칭 감긴 자신의 손을 살짝 흔들어 보였다.

[아니. 내가 보기에 루시온 네 회복 속도는 무척 더뎌.]

러쉘은 아직도 부기가 빠지지 않은 루시온의 팔을 보았기에 걱정스레 말을 꺼냈다.

[네가 하멜로 활동하다 상처라도 입으면 걱정될 정도로.]

그 점은 루시온 역시 인지하고 있었다.

자신은 원래 상처 회복 속도가 느린 편이고, 빛이 가진 재생 능력도 받을 수 없었다.

이 세계에서 재생과 관련된 힘은 오직 빛만이 가지고 있었지만, 재생의 힘의 크기는 각자 달랐다.

즉, 빛의 축복을 받은 이들 모두가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 만큼 재생의 힘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다.

'역시 그 아이템이 필요한데....'

악역 중 빛을 흡수해, 빛이 가진 재생력만 저장하는 아이템을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름만 나온 그 악역은 걸작이 완성되기 전에 헤인트의 손에 죽고 말았다.

'아직 악으로 각성하기 전이면 좋으련만. 이름이 '미엘라'고, 서부와 북부 사이에 있다고 했는데.'

[뭐, 이제 준비됐으면 해보자고.]

"예. 전 준비됐습니다."

러쉘의 재촉에 루시온은 생각을 멈추고 러쉘을 바라보았다.

[나도 준비됐어.]

베델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루시온 너하고 베델의 어둠이 공유되어야 해. 거의 비슷한 양으로.]

"비슷한 양이요?"

루시온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걱정하지 마. 여기 전문가가 있으니까.]

러쉘이 씩 웃으며 라타를 가리켰다.

모두의 시선을 받자 라타의 얼굴이 활짝 피어났다.

―에헴. 라타는 똑똑해서 할 수 있어. 이제는 베델의 어둠도 조절할 수 있다고.

[내 어둠도…?]

베델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루시온하고 베델이 계약해서 베델의 어둠 속에 루시온의 어둠이 있잖아? 라타는 그 어둠을 조절할 수 있어.

[신수의 힘인 거야?]

―어, 음, 라타의 힘이야. 이히히.

라타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럼, 시작하자 라타. 어둠을 움직일 테니까, 조절해줘."

―응! 라타한테 맡겨줘.

[그럼 나도 부탁해.]

베델 역시 라타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어둠을 움직였다.

루시온과 베델의 어둠이 단번에 같은 양으로 맞춰지자 러쉘이 입을 열었다.

[베델의 이름을 세 번 부르고, 아, 성이 있으면 성까지 다 불러. 그 뒤에 '내 몸에 머물길 허락하노라.'라고 루시온 네가 베델을 허락해야 해.]

루시온은 베델을 바라보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베델 레비스티."

평소에 부르는 것처럼 아무런 낌새도 없었다.

"베델 레비스티."

두 번째부터는 달랐다.

얌전했던 어둠이 거센 파도처럼 요동을 치며 무언가를 만드는 듯했다.

[…문?]

순간, 베델이 의문을 드러냈다.

[맞아, 베델. 네가 들어야 하는 곳이야.]

러쉘이 확신을 주었다.

[죽은 자는 원래 산자를 건드릴 수 없지만, 흑마법사는 어둠의 축복을 받은 자들이야. 잠시나마 집이 되어 줄 수 있지. 저 문은 그곳으로 향하는 입구라고 할 수 있겠네.]

"베델 레비스티."

끼이익.

루시온이 세 번째로 이름을 부르자 베델의 눈에 문이 열리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마치 거대한 벽이 존재하는 것처럼 그 문으로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었다.

"내 몸에 머물길 허락하노라."

루시온의 허락이 떨어져야 비로소 베델은 그 문 속으로 들어갔다.

―홉!

라타의 눈이 커졌다.

베델이 루시온의 몸에 겹쳐지더니 베델이 보이지 않았다.

루시온의 두 눈이 감겼고, 눈을 떴을 때 새카만 안광이 어린 게 보였다.

―러쉘. 저게 빙의야?

라타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맞아. 다른 흑마법사들도 볼 수 없는, 빙의에 성공했을 때 나타나는 모습이지.]

러쉘은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숨기지 못했다.

제자 하나는 잘 뒀다 싶었다.

무슨 마법을 가르치든지 물을 흡수한 종이처럼 금방금방 익히는 게 가능하다니.

"…기분이 이상한데요?"

루시온은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분명 자신의 손이나, 뭔가가 달랐다.

[이… 감촉은....]

순간, 베델의 말과 함께 자신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원하지 않았는데 멋대로 손가락이 움직이는 건 참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래. 이 온기야. 이토록 따뜻한 감촉이라고.]

기쁨과 슬픔이 머릿속에서 밀려오자 루시온은 미간을 찌푸렸다.

썩 유쾌하지 않았다.

[루시온, 주도권은 너한테 있어. 베델을 내보내고 싶으면 어둠을 끊어버리면 되니까, 천천히 적응해봐.]

러쉘은 마치 텔레비전을 바라보듯 팔을 괘서는 허공에 둥둥 떠다녔다.

빙의는 한 몸에 여러 개의 영혼을 들일 수 있는 마법이었다.

베델 역시 루시온의 몸을 움직일 수 있으나, 주도권은 루시온이 가지고 있고, 베델이 루시온의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좋아, 베델. 한 번 내 몸을 움직여봐. 아, 왼쪽 팔은 안 돼."

[…고마워, 루시온 공. 왼쪽 팔은 꼭 조심할게.]

베델은 그저 고마움으로 가득했다.

스겅.

베델은 루시온의 몸을 움직여 검을 검집에서 빼내었다.

손끝이 살짝 떨리는 이 기분 좋은 느낌에 루시온의 입꼬리가 높이 올라갔다.

쉭.

가볍게 한 번.

두 번.

검을 휘둘러 보니 손끝에 와닿는 바람이, 칼의 떨림이.

금방이라도 중독될 것처럼 짜릿했다.

하지만 베델은 그 쾌락에 빠지지 않았다.

이번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루시온이 검을 배우기 위해 체력을 단련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몸의 문제점을 찾아갔다.

'근력이 부족해.'

서로 정신이 이어졌기에 베델의 생각이 고스란히 들려왔다.

하지만 루시온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가만히 들었다.

'몸이… 망가진 흔적이 보이는데?'

베델은 잠깐 행동을 멈췄다.

자신이 보았던 루시온의 기억은 새카맣고 커다란 형상들의 손에 으깨지고, 부서지고, 베이고, 짓밟히고, 내던져지는,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섬뜩해지는 기억이었다.

'이게 그 기억의 흔적이야?'

베델은 놀란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숨을 크게 들이 마셔보았다.

'그런 거야, 루시온 공…?'

'베델. 지금은 그냥 마음껏 즐겨.'

루시온은 검을 움직이며 베델을 재촉했다.

적국의 기사에게 잡혀 고문에 가까운 일을 당했는데 몸이 멀쩡할 리가 있겠는가.

'내가 실수한 것인가.'

베델의 감정이 쏟아졌다.

안쓰러움과 미안함이 뒤섞여 있었다.

'아니. 실수하지 않았어. 나는 검을 배우고 싶고, 너 역시 지금 검을 휘둘러보고 싶잖아? 지금은 자연스럽게 휘두르면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줘.'

루시온은 피식 웃었다.

베델이 그게 참 속상했다.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그가 왜 그런 일을 당해야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루시온의 가족들이 왜 루시온을 안쓰럽고 대견하게 바라보았는지를 이해할 뿐이었다.

'베델.'

루시온은 눈치 빠른 러쉘을 힐끔 바라보며 그녀를 재촉했다.

'…그래.'

베델은 지금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알았다.

엉망인 루시온의 몸으로도 검을 휘두를 수 있도록.

루시온이 원하는 걸 이룰 수 있도록.

'고마워, 베델.'

베델은 루시온의 고마움에 마치 맹세를 하듯 가슴팍 앞으로 검을 가져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베델.]

러쉘이 베델을 불렀다.

[너라면 할 수 있지?]

원래는 러쉘 자신이 루시온에게 알려주고 싶었지만, 적임자가 떡하니 나타났다.

자신은 루시온에게 빙의를 할 수 없었다.

[그래. 할 수 있어.]

베델이 대답하며 눈에 힘을 강하게 주었다.

그녀는 죽음의 기사였고, 살아 있을 적에 정말로 기사였다.

베델이라면 루시온이 바랐던, 어둠을 오러로 둔갑시키는 행동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자이기도 했다.

[루시온 공.]

베델의 말과 함께 루시온의 어둠이 움직였다.

[지금 공이 가진 몸으로는 아주 잠깐일 테니, 잘 봐둬.]

어둠이 갑자기 차가워졌다.

루시온의 입술이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릴 정도였다.

하지만 베델은 멈추질 않았다.

겨울바람에 꽁꽁 얼어버린 듯 어둠이 굳히고, 뭉쳐 온몸에 퍼져 손으로, 손에서 검으로 이동했다.

[루시온 공이 기억해야 하는 건 하나야.]

검에 검은빛이 날을 타고 올라왔다.

루시온의 눈이 커졌다.

'이게....'

자신의 손이 파르르 떨리는 것과 별개로 검에 휘감긴 검은빛은 분명히 오러라고 할 수 있었다.

툭.

베델은 오러가 서린 검으로 창고에 세워진 동상을 가볍게 건드렸다.

쩌억.

무언가 쪼개진 소리부터.

그리고 반으로 쪼개진 동상이 스르르 벌려 땅으로 떨어졌다.

쿵!

[어둠은 공의 모든 것이자.]

'...?'

순간, 루시온의 눈이 커졌다.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베델의 목소리에 알 수 없는 이물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 이물감을 느끼는 건 루시온 자신뿐인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이 말을 기억해.

그때, 어둠이 키득거렸다.

[공의 유일한 것이라는 걸.]

반드시.

싸악.

한순간에 검에 서린 어둠이 꺼졌다.

챙.

루시온이 검을 놓쳤고, 멍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주르륵.

갑자기 코피가 흘러내렸다.

루시온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로 눈동자를 굴리기 급급했다.

'방금… 뭐지?'

78화. 포섭(3)

[괘, 괜찮은가, 루시온 공?]

코피가 흐르고 흐리멍덩해진 루시온의 눈동자에 베델은 당황했다.

[혹시 빙의 도중 뭔가 잘못되기라고 했는가, 러쉘?]

[잠깐만.]

러쉘은 눈살을 찌푸리며 차분히 루시온의 상태를 살폈다.

루시온이 코피를 흘렸다는 건 마법을 사용하는 데 있어 과부하가 걸렸다는 뜻이었다.

'…그럴 일이 없을 텐데?'

루시온과 베델을 연결한 어둠과 베델이 안전하게 루시온의 몸에 깃들 수 있게 만들어진 문.

이 모든 것들은 정상으로 작동했다.

[루시온 공. 어서, 어둠을 끊어.]

베델은 루시온에게 흘러나오는 복잡하디 복잡한 감정에 빙의 상태를 푸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루시온은 우선 베델 말대로 어둠을 끊어서 빙의부터 풀었다.

루시온의 몸에서 하얀 실타래가 흘러나왔고, 실타래가 엮이듯 베델이 원래 유령의 모습을 되찾았다.

'분명. 분명히 어둠이 말을 걸어왔어....'

루시온은 코피를 닦으며 생각했다.

자신이 저주를 사용했을 때 들려왔던 목소리와 똑같았다.

하지만 저번에 저주를 사용할 때와 달리 어떤 대가도 없었던 상황이었다.

'라타라면....'

루시온은 천천히 눈동자를 굴리며 라타를 바라보았다.

라타의 눈동자가 요동치며 앞발을 동동 굴렸다.

무언가 알고 있는 표정이었다.

[아니. 빙의에는 아무런 문제 없어. 루시온의 어둠도 멀쩡하고.]

러쉘은 결론을 내렸다.

마치 외부적인 요소가 간섭한 것 같지 않은가.

자신이 눈치채지 못한 외부적인 요소가?

러쉘은 잠깐 헛웃음을 내뱉었다.

"스승님."

루시온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러쉘을 불렀다.

[그래, 루시온. 말해 봐.]

러쉘은 자신도 모르게 입가를 핥았다.

"저주를 사용할 때 말입니다. 그때, 어둠이 제게 말을 걸었습니다. 원래 그런 겁니까?"

[...?]

러쉘은 순간, 잠깐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대답을 간절히 원하는 루시온의 표정에 러쉘은 어깨에 힘을 빼며 물었다.

[그러니까, 너의 어둠이?]

"아뇨. 제 어둠이 아니었습니다. 제 어둠이 내는 목소리를 어떻게 구분하지 못하겠습니까?"

[혹시 이번에도 그랬어?]

"예."

[걱정하지 마, 루시온.]

러쉘은 일단 루시온의 감정부터 가라앉히도록 했다.

[자연에 떠도는 어둠이 너에게 반응한 거니까.]

"자연에 떠도는 어둠이요?"

[그래. 자연에 제일 많은 건 마나고, 그다음으로 빛, 어둠 순인데 뭔가 흥미로운 걸 발견하면 가끔 말을 걸어오기도 해. 지금도, 쥐쟁이가 있던 곳도 빛이 들지 않는 지하였으니까 들릴 수 있어.]

러쉘은 그제야 긴장을 푸는 루시온을 확인했다.

덩달아 러쉘 역시 한숨 놓았다.

자연에 떠도는 어둠이 루시온에게 말을 걸어왔다면 빙의 도중에 잠깐 과부하가 걸릴 수 있었다.

'…하지만 자연에 떠도는 어둠은 제아무리 어둠의 축복을 받은 자라도 관심을 가지는 일이 거의 드문데.'

러쉘은 표정이 드러나지 않게 고개를 살짝 돌렸다.

"베델. 네가 마지막으로 내게 한 말, 기억하고 있어?"

루시온이 혹시 몰라 물었다.

[어둠을 끊으라는 소리를 말인가?]

"아니. 네가 어둠은 내 모든 것이자 유일한 거라고 말한 거, 혹시 기억하고 있어."

[기억해. 사실이기도 하고.]

베델의 표정이 살짝 미묘했으나, 루시온은 어깨에 힘을 빼내었다.

"아무래도 제가 예민했나 봅니다, 스승님."

[아니야. 자연에 떠도는 어둠이 말을 걸어오는 게 흔한 일은 아니라서 놀랄 만하지.]

"그렇습니까?"

루시온은 떨어진 검을 주워서는 한 번 휘둘러보았다.

조금 전 베델이 휘둘렀을 때와 달리 조잡해 보이는 모습에 피식 웃었다.

확실히 빙의 전과 후의 차이가 너무 컸다.

"어땠어, 베델? 나는 좀 낯설었지만, 생각보다 괜찮았어."

갑작스러운 어둠의 목소리에 놀라 중단되기는 했으나, 베델과 빙의가 성공했다.

성공 자체도 기쁘거늘, 막 눈인 자신이 보아도 베델의 실력이 장난 아니었다.

루시온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걸 안 뒤에야 베델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렸다.

[나는, 행복했어. 아주 잠깐이었지만, 살아 있는 기분을 느꼈어.]

번져가는 베델의 미소와 달리 러쉘은 그녀를 빤히 주목했다.

그 시선을 느낀 베델이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러쉘. 그대의 걱정처럼 살아 있는 자를 탐하는 일은 없을 테니. 죽었던 기억이 너무도 강렬해서 도무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까.]

[그럼 됐어. 이건 루시온이 때문이 아니라....]

러쉘은 말을 하다 멈췄다.

단번에 목이 간질거리는 기분에 휩싸였다.

* * *

루시온은 지하창고에서 나와 방으로 돌아가려고 정원을 가로지르다 자신을 부르는 흄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도련님."

지친 기색이 없는 흄의 옆에는 다음 무기를 고르는 듯 쭈그려 앉아 있는 헤인트가 보였다.

루시온은 주변부터 살폈다.

이상하게도 두 사람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 루시온."

헤인트가 뒤늦게 루시온을 발견하고는 그에게 인사했다.

곧 헤인트는 주변을 살피는 루시온의 시선에 목소리를 냈다.

"조금 전까지 있었는데, 황실 기사단하고 크로니아 기사단하고 대련이 시작되자마자 싹 몰려갔어. 다들 연무장에 있을 거야."

"다행이네요. 혹시 괜찮다면 잠깐 구경해도 되겠습니까?"

루시온은 흄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부서진 무기들을 보며 물었다.

"물론이지. 너도 괜찮지, 흄?"

"예. 당연히 괜찮습니다."

흄은 무척 기쁜 듯이 대답했다.

루시온이 나무에 기대앉자 러쉘은 근질거리는 입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그럼 나는 잠깐 싸움, 아니, 대련 좀 구경하고 올게.]

[나도 러쉘을 따라갔다 오겠다. 괜찮겠나?]

'스승님은 진짜 대련이 보고 싶을 테고, 베델은 스승님에게 할 말이 있어 보이네.'

루시온은 적당히 눈치를 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자신도 라타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라타는 여기 있을래.

라타의 시선이 벌써 날아가 버린 러쉘과 베델에게 향하다 루시온 옆으로 걸어와 웅크렸다.

"너도 들었지?"

루시온이 물었다.

―응. 하지만 비밀이라고 했어.

'스승님은 듣질 못했고, 나하고 라타만 들었다?'

루시온은 그게 참 이상했다.

분명 러쉘이 만든 독자적인 계약으로 자신의 몸 지분 20%를 러쉘이 가지고 있었다.

루시온은 일단 당장 답을 낼 수 없는 건 뒤로 미루기로 했다.

"왜 비밀이라고 그래?"

―라타도 몰라. 그냥 루시온을 위해서 말하면 안 된다고 했어. 라타는 루시온이 제일 좋으니까, 루시온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간식을 챙겨주는 건 흄인데?"

―…홉!

라타가 다급히 자신의 입을 가렸다.

지금 흄이 있질 않은가.

―라, 라타는 흄도 좋아. 정말이야!

라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농담이야."

루시온은 라타의 이마를 가볍게 쿡쿡 누르다 머리부터 꼬리 전까지 길게 쓰다듬었다.

'왜 어둠은 어둠이 내 모든 것이자, 유일한 것이라는 말을 기억하라고 한 거지?'

루시온은 심드렁한 표정을 짓다 곧 크게 웃었다.

흄이 휘두른 검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뚝 하고 부러져버렸다.

"…자, 잠깐만! 이게 부러진다고? 이거 빌린 건데!"

당황한 헤인트의 목소리에 루시온은 언제 웃었냐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흄한테는 맞춤 무기가 필요하겠네.'

루시온은 흄을 위해, 그리고 조직을 위해 일명 '장인'이라 불리는 이들을 포섭할 생각이었다.

연회 때 텔라에게 얻은 정보와 자신이 가진 지식을 써먹을 시간이었다.

* * *

'속이 다 후련하네.'

루시온은 떠나는 황실 기사단을 배웅해준 뒤에 부리나케 외출을 준비를 위해 노비오를 찾았다.

"그래. 나갔다 오거라."

노비오는 이상할 정도로 흔쾌히 허락했다.

루시온은 그 모습에 미리 준비했던 17가지의 변명 거리를 머릿속에서 싹 지워버려야 했다.

'아직 풀리지 않은 내 여독과 루미노스의 습격을 생각해서 외출은 안 된다고 하실 줄 알았는데.'

루미노스에 습격을 받았다는 사실을 듣자마자 노비오는 바로 변경으로 들어올 수 있는 모든 입구를 봉쇄하다시피 했다.

혹시 모를 테러에 대비해 각 도시에 바로 마나 탐지기를 작동하도록 지시하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루시온은 노비오의 방을 나서면서 아버지가 무슨 생각이신지 추측하다 곧 고개를 살짝 끄덕거렸다.

'…아. 오늘은 그날로 지정하셨구나.'

정보를 팔아먹은 12명의 시종.

그들을 뽑은 인사 관리자들.

이들 모두 뿌리 뽑을 차례였다.

'그럼, 그 집사도 잠깐 숨죽였다가 조만간 움직이겠네.'

살려면 움직이는 방법뿐이었다.

자신이 유령 2번을 붙여놨으니 루시온은 안심하고 오랜만에 자신의 말, 샨드라에 흄과 함께 올라타 외출했다.

루시온은 조직 자체가 자급자족이 가능한 형태로 흘러가게 할 셈이라 오늘은 도시가 아니라 자신이 회유할 장인들이 있는 북부 쪽으로 향했다.

"흄."

저택에서 어느 정도 멀어지자 루시온이 흄을 불렀다.

"예, 도련님."

"어제 무기를 이것저것 잡아봤잖아? 그중에 어떤 게 제일 재미있었어?"

소설에서 부주인공에 가깝던 카슨과 주인공인 헤인트의 말을 들어보면 흄이 가진 재능이 워낙 좋아 뭐든 잘할 거라고 했다.

그럼 흄이 즐겁다 생각하는 무기를 사용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다.

흄은 곰곰이 생각하다 이내 눈썹을 안쪽으로 모았다.

"무기란 무기는 제가 휘두르면 죄다 부서집니다. 애초에 제힘을 견딜 수 있는 무기가 있을까요?"

지금 흄에게 무기는 몸을 새끼손톱만큼 튼튼하게 해주는 방어구 수준이었다.

하지만 만약 흄의 힘을 버티는 무기가 있다면 말이 달랐다.

"그걸 해결하려고 지금 움직이는 거니까 말해봐."

"단도, 아, 물론 던지는 용도요. 대검하고, 양날 도끼, 메이스같이 좀 묵직한 게 좋았습니다."

흄은 잠깐이지만, 색달랐던 어제 경험을 떠올리며 싱긋 웃었다.

"좋아. 어차피 앉아서 할 것도 없으니 계속 생각하고 있어."

루시온의 지시에 흄은 한참을 갈등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도련님. 말은 제가 몰겠습니다. 팔이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괜찮아. 내가 힘들지도 않고. 샨드라가 내 팔이 불편하다는 걸 알고 속도도 조절해주며 달리고 있으니까."

푸르릉!

루시온의 칭찬에 샨드라가 기분 좋게 울었다.

"…도련님. 그런데 지금 어딜 가고 있는 겁니까?"

흄의 물음에 편안하게 누워 날아가던 러쉘도 투구를 닦으며 날아가던 베델도 뒤늦게 깜짝 놀랐다.

루시온의 외출이 워낙 자연스러워서 아무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루시온은 이상한 반응에 미간을 찌푸렸다.

"방금 말했는데?"

"죄송합니다. 제가 제대로 듣질 못했습니다. 다시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장인들을 포섭하러 가는 중이야. 오늘 포섭할 사람은 2명. 일단은 무기 장인, 다음은 아이템 제작 장인 순으로 포섭할 생각이야."

[장인들을 네 조직에 포섭하게?]

러쉘이 물었다.

"맞습니다. 원래는 마석이 자라는 광석이나, 비옥한 땅 등 장소를 알아봐야 하지만, 일단 사람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보자....]

러쉘은 루시온의 설계를 하나씩 들으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독립적인 세력으로 키울 생각인가 보네?]

"예. 그게 가장 어울리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흑마법사인 네가 자유롭게 움직이려면 독립적이면서 강한 세력이 되어야지.]

루시온이 그리는 미래를 러쉘 역시 머릿속에서 그렸다.

"상상만으로 무척 멋지네요."

흄이 눈웃음을 그렸고.

[너무 어려운 길이지 않은가?]

베델은 살짝 회의적으로 바라보았다.

모두를 만족하게 할 수는 없으니 루시온은 바로 다음 상황으로 넘어갔다.

"그래서 말입니다, 스승님."

러쉘을 바라보는 루시온의 미소가 무척이나 맑았다.

[…나 지금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네.]

대체 무슨 부탁을 하려고 저러는지.

러쉘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79화. 장인들을 회유하다

"바위지대 근처에 괜찮은 장소가 없습니까?"

루시온이 일단 간을 보며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러쉘이 있었던 장소가 변경에서 가까워 아지트로 제격이었다.

사람들이 왜 역세권, 역세권 하겠는가.

덤으로 헤인트의 동료가 될 흑마법사가 러쉘이 미처 태우지 못한 수첩을 갖는 것도 막으면 좋고.

하지만 루시온은 러쉘의 표정을 살피는 베델의 눈짓에 자신이 무언가 실수를 했음을 눈치챘다.

"아닙니다. 못 들은 척해주셨으면 합니다."

[아니야. 너도 이제 슬슬 조직의 아지트를 생각할 때가 왔지.]

러쉘의 표정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그리운 듯이 생각하다 그는 다시 입을 움직였다.

[일단 다른 곳부터 살펴보고 있어. 내가 있던 장소는 네 맘에 들지 않을 수도 있으니 부차적으로 생각하고 나중에 같이 찾아가서 확인해보자. 그편이 더 빠를 테니까.]

"죄송합니다, 스승님."

루시온이 조심스레 사과했다.

지금 자신에게 익숙한 장소가 죽어서도 익숙할까 생각하니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과할 필요 없어, 루시온. 바위지대 근처가 변경하고 가까우니 아지트로 삼기에는 딱 좋은 위치니까.]

러쉘이 싱긋 웃었지만, 루시온은 여전히 미안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시끄러운 말발굽 소리가 유난히 더 크게 들려왔다.

'…기억이 비어 있어.'

러쉘은 방금 자신의 아지트를 떠올리다 자신의 기억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타락의 징후도 없는 자신에게 기억이 비어 있다는 건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 * *

루시온이 고르고 고른 무기 장인은 자마드라는 이름을 가진 대장장이였다.

황실에 물건을 바칠 만큼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나, 물건을 만드는 것 이외에 욕심이 없었다.

이를 답답해 여긴 자식들이 자마드가 가진 대장장이 기술을 뺏고자 했고, 자마드는 자식에게 배신당했다는 회의감에 변경 근처로 와 마지막 검을 완성시킨 후에 자신이 사용했던 용광로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하는 비극적인 결말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 마지막 검을 당연하게도 헤인트가 손에 넣게 되면서 자마드의 사연이 밝혀지는 게 원래 소설 속 내용이었다.

'어쨌든, 텔라에게서 정보를 들었으니, 스승님도 의심하지 않겠지.'

루시온이 텔라에게 들은 정보는, '대장장이 자마드가 변경 지대 어딘가에 있다'라는 다소 모호한 정보였다.

러쉘도 어떻게 찾아갈 거냐고 걱정했지만, 루시온은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소설 속에 드러나 있던 자마드가 있을 법한 위치와 유령들을 이용하면 충분했으니.

[루시온 네가 감이 좋네? 진짜 어떻게든 찾아왔잖아?]

러쉘이 한 집을 가리키는 유령들의 손가락을 보며 놀람을 금치 못했다.

분명 출발 전에 루시온이 대충 '이쯤일 것 같습니다'라며 방향을 찍지 않았던가.

루시온은 알아서 멈춘 샨드라에게 잘했다며 쓰다듬어주었다.

푸르릉.

샨드라가 기분 좋게 울었다.

"여기서 잠깐 놀고 있어."

푸르릉!

알았다며 대답하는 샨드라를 두고 루시온은 가면을 꺼내 들었다.

"스승님. 한 가지 여쭤볼 게 있습니다."

물어볼 게 있다는 말에 러쉘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제 시야를 넓히고, 그림자 이동에 쓰일 축을 위해 유령들을 지배하고 있긴 한데 만약 다른 흑마법사에게 제 유령을 들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루시온은 가면을 쓰며 자신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 걱정거리 하나를 털어놓았다.

소설은 어디까지나 헤인트의 관점에서 흘러갔다.

유령을 볼 수 있는 건 어둠의 축복을 받은 자들뿐.

당연하게도 유령은 별로 등장하지 않았다.

지배된 유령을 통해 역추적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으니, 슬슬 늘어나고 있는 자신의 유령들도 다른 흑마법사에게 역추적을 당하면 어쩌나 싶었다.

[흑마법사 사이에도 나름의 상도덕이 있어서 원칙으로는 지배된 유령을 건드리지 않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어.]

"그저 규칙일 뿐이잖습니까."

[그렇지. 하지만 나름 지켜지는 규칙이기도 해. 뭐, 어쨌든, 만약 지배된 유령을 발견해 건드린다면 보통은 두 가지 정도지.]

러쉘은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하나는 역추적으로 사용하거나, 지배된 유령을 다시 지배하거나. 대부분 전자를 위해서야. 재지배는 어렵거든. 아니다. 애초에 흑마법사는 지배된 유령은 건들지 않는다고 보면 되겠네.]

루시온은 잠깐 고민했다.

지배된 유령을 건들면 그 유령을 지배한 흑마법사와 관련된 매력적인 정보를 털 수 있을 텐데, 굳이 하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다.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지배된 유령이 바보도 아니고 가만히 있겠어? 알람 같은 게 유령을 지배한 흑마법사에게 흘러 들어가지. 굳이 적을 둘 이유가 있나? 그리고 참고로 말하는데, 네가 빠른 거야.]

"뭐가 말입니까?"

[유령 지배 말이야. 너처럼 이렇게 쉽고, 빠르게 지배하는 흑마법사는 아마 없다고 생각하면 돼.]

러쉘은 혹여 루시온이 자만할까, 알려주고 싶지 않은 사실을 하나 털어놓았다.

"…예?"

그 말에 루시온이 도리어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슬쩍 라타를 바라보았다.

'라타 덕분인가?'

[보통 지배 마법을 위해 다른 유령에게 어둠을 집어넣으면 어둠이 어떻게 반응하는 줄 알아?]

"모르겠습니다."

루시온은 가면을 쓰면서 대답했다.

[더러워! 이 끔찍한 곳에서 한 발자국도 딛고 싶지 않아! 라고 소리를 지른다고.]

―진짜? 루시온의 어둠은 그런 소리를 한 적이 없는데? 다들 착하게 루시온의 말을 따라줬어.

라타가 귀를 쫑긋 세우며 물었다.

[그러니까 특이하다는 거지. 유령은 어둠의 존재이지만, 결국 타락하게 되어있어. 그만큼 어둠이 탁해졌다는 거야. 어둠의 시점에서 본다면 오물로 범벅이 된 곳이겠지? 너 같으면 발을 딛고 싶어?]

러쉘의 물음에 루시온의 가면이 갈색으로 물들었다.

"끔찍하네요. 죽어도 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 원래 그게 정상적인 반응인데, 네 어둠은… 아무리 봐도 특이해.]

[나도 러쉘의 말에 동의해. 벌써 내가 본 루시온 공이 지배한 유령만 해도 오늘까지 6명이었으니까.]

―아닌데, 루시온이 지배한 유령은 보자 열....

"17번까지 있습니다."

흄이 말했다.

루시온이 가면을 들자마자 흄은 루시온이 하멜로서 활동할 걸 알고 바로 소녀로 모습을 바꾼 뒤였다.

[17명… 자, 잠깐만.]

17명이라는 숫자에 놀라던 베델이 태연하게 서 있는 흄을 보며 기겁했다.

베델의 눈동자가 좌우로 바쁘게 움직였다.

흄이 사라지고 웬 소녀가 서 있었다.

흄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얼굴이 달랐다.

[설마 네가 흄이라는 건… 아니겠지?]

"맞습니다. 지금은 렌탈이라 불러주셨으면 합니다."

"아, 말하는 걸 잊었네."

루시온이 태평하게 망토를 두르며 말했다.

"렌탈은 몬스터고, 변신 능력을 갖추고 있어. 그 외에도 여러 능력이 있지만."

짧은 말로는 베델을 이해시킬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애초에 흄이 몬스터라는 것 자체부터 진입 장벽이 컸다.

[…죽은 이후로 이렇게 충격적인 상황은 처음이야.]

베델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루시온 일행을 바라보았다.

흑마법사이자 성자인 루시온.

어둠의 신수인 라타.

죽음의 기사도 아닌데 이상하게 강한 유령인 러쉘.

그리고 몬스터인 흄이라니.

일부러라도 모으기 힘든 조합이지 않을까 싶었다.

[뭐, 반쯤은 동감해.]

러쉘은 베델이 받을 충격을 알기에 낄낄 웃었다.

자신의 제자가 너무 잘난 걸 어쩌겠나.

[어쨌든, 루시온. 유령은 늘려갈수록 너한테 좋고. 흑마법사가 네 유령을 건드려도 너의 스승인 나한테 다 방법이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럼 걱정 없겠네요."

루시온은 그제야 안심하며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

굴뚝에 새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집으로 다가갔다.

용광로가 돌아가는지, 가까이 가기만 해도 열기가 후끈후끈했다.

'벌써 더운데 여름일 때는 장난 아니겠네.'

루시온은 열기를 느끼자마자 진짜 여름이 몰려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렇지 않아도 이제 초여름으로 접어들고, 곧 여름이 찾아올 테지.

'역시, 얼음 마법사도 한 명 필요하겠어.'

―따뜻하다.

내내 말에서 바람만 맞았던 탓인지 라타는 열기가 새어 나오는 용광로로 힘차게 뛰어갔다.

깡!

한창 망치질에 빠져 있던 자마드는 불청객에 가까운 손님이 찾아오는 것도 모르는 듯했다.

―우오오오!

라타는 난생처음 보는 모습에 눈이 반짝거렸다.

자마드가 모루에 망치질할 때마다 불똥이 튀었고, 용광로는 괴물의 입속처럼 끊임없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 열기에 덩달아 라타의 눈동자마저 붉게 물들 정도였다.

루시온은 라타가 용광로에 더 가까이 가기 전에 말했다.

"라타. 용광로에 뛰어들면 녹으니까, 더는 가까이 가지 마."

만약 말하지 않았다면 워낙 호기심이 많은 타라가 저 용광로에 앞발이라도 넣을지도 몰랐다.

막 용광로를 향해 한 발자국 내딛던 라타가 그대로 멈춰서는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정말? 정말 라타가 녹아?

라타가 울먹이며 물었다.

―라타는 손하고 발이 사라지는 게 싫은데.

"이리와."

루시온의 손짓에 라타는 다급히 루시온에게 뛰어갔다.

루시온은 라타를 쓰다듬으며 자마드를 바라보았다.

마치 말을 걸지 말라는 듯 망치질만 하는 모습에 루시온은 제대로 찾아왔음을 느꼈다.

벌써 장인의 냄새가 나지 않은가.

[…예술인데?]

실패작처럼 대충 바닥에 던져진 검을 보던 러쉘이 침을 꼴깍 삼켰다.

[검들이 하나같이 장난이 아니야.]

러쉘은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 검을 살피기 바빴다.

[…하.]

베델마저 두 무릎을 바닥에 꿇으며 검을 향해 침을 삼켰다.

[마음을 홀린다는 게 이런 의미인가. 이 칼날을 봐봐.]

마치 금방이라도 칼날이 살아날 것이 생생함 마저 느껴졌다.

베델은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검을 쓸어보았다.

[…다르다.]

유령이 느낄 수 있는 건 거의 없지만, 그 작은 차이로도 확실히 달랐다.

[이건 진짜 명검이야.]

"실례합니다."

루시온은 자마드가 듣든 말든 일단 인사부터 했다.

"땅에 있는 게 실패작이라면 한 번 휘둘러봐도 되겠습니까?"

러쉘과 베델이 이렇게 반응할 정도라면 자마드의 실패작 역시 상당하다는 의미였다.

루시온은 과연 실패작이 흄의 힘을 이겨낼 수 있을지가 궁금했다.

"말씀하시기 싫으시다면 고갯짓이라도 하셔도 괜찮습니다."

깡!

여전히 자마드는 망치질 이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뭐, 좋습니다. 그럼 저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주웠다 생각하겠습니다. 혹시 제 발언이 언짢으시거나, 행동에 문제가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루시온은 잠깐 기다렸다.

하지만 자마드는 반응하지 않았다.

침묵은 긍정이 아닌가.

가면 색이 노랗게 물들었다.

루시온은 검 중 아무거나 들고는 흄에게 넘겼다.

"그럼, 마음껏 휘둘러 봐. 네 힘을 버틸 수 있는지 궁금하네."

흄이 머뭇거렸다.

"괜찮겠습니까? 또 부러지는 게 아닐지 걱정입니다."

"뭐 어때, 어차피 돌멩이에 불과한데."

[루시온! 그건 아니지. 이 검이 돌멩이라니?]

러쉘이 경악하며 말했다.

대체 루시온은 어떤 막 눈을 가졌기에 검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는 건가.

[이거라면 흄의 힘을 버틸 수 있을 거다.]

베델은 확신하며 말했다.

'과연 그럴까.'

루시온은 두 사람과 생각이 달랐다.

장인이 실패라고 생각하는데 이유가 있을 터.

"이건 길가에 널려 있는 돌멩이라고 생각하고, 편안하게 휘둘러. 그렇지 않으면 여기까지 온 보람이 없으니."

흄은 이어지는 루시온의 재촉에 더는 망설이지 않고 검을 쥐었다.

"…와."

흄이 깜짝 놀랐다.

후하고 불면 날아갈 것처럼 가벼웠다.

흄은 검을 든 상태로 뒤로 쭈욱 물러섰다.

적당할 만큼 물러섰다 싶을 때, 검을 휘둘러 보았다.

쉬익!

마치 바람을 가르는 듯한 소리에 루시온과 라타가 동시에 깜짝 놀랐다.

'뭐야. 검이 아니라 몽둥이를 휘두르는 것 같잖아.'

"도련님!"

흄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부러지지 않았다.

흄은 신이 난 얼굴로 다시 한 번, 두 번, 세 번을 휘두르다 그만 바닥을 내리쳤다.

뚝.

불안한 소리에 흄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놓아버렸다.

"…도련님."

흄은 세 동강이 나버린 검을 보며 루시온을 불렀다.

탁.

그때, 자마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흄이 깜짝 놀라며 키가 2m가 될 것 같은 자마드를 올려다보았다.

80화. 장인들을 회유하다(2)

[부, 부러졌어?]

러쉘이 눈을 깜빡거렸다.

저 정도나 되는 검이 흄의 손에 부서질 줄은 몰랐다.

탁.

베델은 다급히 투구 덮개를 내렸다.

―라타는 알고 있었어. 흄은 힘이 아주 강하거든!

라타는 흄에게 다가가 세 동강이 난 검을 툭 하고 건드렸다.

"저 아이에게 시킨 건 저입니다. 그러니 저한테 말씀하십시오."

루시온이 말을 꺼냈다.

"…내 검이 돌멩이라고 했나?"

자마드가 무표정한 얼굴로 루시온을 내려다보았다.

머리카락이 드문드문 새하얀 모습만 보면 60대라고 생각하겠지만, 곰과 같은 덩치에 누가 자마드 앞에 서 있든 무서움에 발발 떨지도 몰랐다.

"다 듣고 있었으면서 못 들은 척하고 있었습니까?"

하지만 루시온은 가면을 노랗게 물들이며 키득거렸다.

"맞습니다.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튼튼한 물건이 돌멩이가 아니면 뭐겠습니까? 정말 이 물건을 검이라 취급했으면 잘 보관해뒀어야지 않았을까요?"

루시온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과정을 떠나 무기를 부서트린 건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실컷 빈정거려놓고 사과는 우스웠지만, 자마드는 별 반응을 하지 않았다.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왔지?"

자마드 손에는 아직 망치가 들려 있어 무뚝뚝한 그의 표정과 맞물려 금방이라도 휘두를 것만 같았다.

"저는 자마드 씨, 당신을 모시러 왔습니다."

"...."

자마드는 눈살을 일그러트렸다.

"그래. 네놈도 내 기술이 필요한 거겠지."

루시온이 그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합니까? 기술요? 자마드 씨가 아니면 할 수 없을 텐데요."

루시온은 자마드의 비참한 결말을 알고 있었다.

자마드가 죽고 나서 그 기술은 맥이 끊어지고 말았다.

가장 중요한 핵심 기술을 자마드 혼자만 알고 죽은 건지, 기술이 유출됐는데 자마드가 아니면 할 수 없었는지.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루시온의 목적은 처음부터 자마드의 기술이 아닌, 자마드였다.

"자마드 씨가 아니라면 애초에 완성할 수 없는 검을 두고 기술만 빼가는 멍청한 놈이 있습니까? 저는 자마드 씨가 필요합니다. 허울뿐인 기술이 아니라요."

"입에 줄줄 버터를 발라 넣었으면 내가 속을 줄 알았나? 지금 네가 그 가면 속에서 나를 비웃고 있을지 누가 알겠어?"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싸늘했다.

자마드는 불신에 가까울 정도로 루시온을 쳐다보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버터가 아니라 기름이라도 입가에 바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마드 씨. 생각보다 실망입니다."

루시온의 가면 색이 다시 검게 물들었다.

"자마드 씨의 검은 다른 검과 다를 줄 알았는데, 결국 부서졌습니다. 혹시 저 검이 자마드 씨가 만들 수 있는 최고의 검입니까?"

루시온이 손가락으로 흄이 조각낸 검을 가리켰다.

흄이 입술을 꽉 다물며 자마드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면 그냥 실패작이라서 부러진 겁니까?"

자마드 자신의 신경을 살살 긁는 남자의 말투에 자마드는 손가락으로 매섭게 밖을 가리켰다.

"나가."

[어쩐지 너무 긁는가 싶더라니.]

러쉘은 화가 난 자마드의 표정에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지만 루시온이 생각 없이 그런 일을 벌일 리가 없었다.

"화가 나셨다면 사과하겠습니다. 제 의도와 다르게 자마드 씨의 기분을 나쁘게 해드린 점 역시 거듭 사과드리겠습니다. 부서진 검의 값도 제대로 치르겠습니다."

루시온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하, 그놈의 고개가 가벼운지, 너의 입이 가벼운지 모르겠지만, 사과 하나는 빌어먹을 정도로 완벽하네."

자마드는 일그러진 얼굴로 헛웃음을 내뱉었다.

"제 부하의 힘이 워낙 강해 사용할 수 있는 무기가 없습니다. 자마드 씨라면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그게 두 번째 목적입니다."

루시온은 일단 두 번째 목표로 빠질 생각이었다.

그 순간, 푸른 실이 모습을 드러내 루시온과 자마드를 엮었다.

'그래. 자마드하고, 나하고 관련이 없진 않지.'

루시온은 푸른 실을 바라보며 콧바람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잘못 찾아왔어. 나는 이제 누구를 위해 검을 만들지 않으니까."

"혹시 기사가 되실 생각이십니까?"

루시온의 생뚱맞은 질문에 러쉘은 기어코 웃음을 토해냈다.

[푸하하핫!]

"…뭐, 뭐라고?"

자마드마저 당황하며 물었다.

"그럼 남이 아닌 본인을 위해 검을 만드신다는 뜻인데, 검을 쥘 일이 보통 뭐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기왕 검을 쥘 거 기사가 되어 보는 꿈을 가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한 대 크게 쥐어 박고 싶을 정도로 저 남자가 얄미웠다.

"대장장이도 아니시고, 기사가 될 것도 아니라면 대체 검을 만드시는 이유가 뭡니까? 검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자마드 씨가 설마 장식품으로 둘 리도 없을 테고요."

팍!

순간, 자마드는 손에 쥐고 있던 망치를 떨어트렸다.

"방금… 뭐라고 했나?"

자마드에 충격에 빠진 얼굴로 물었다.

동시에 푸른 실이 팽팽해졌다.

"설마, 검을 장식품으로 두실 생각이셨습니까?"

저 남자가 쓴 가면 색이 재수 없는 노란색으로 물들어갔음에도 자마드는 모루를 바라보았다.

이제 조금만 더하면 완성이었다.

며칠만 더 하면 자신의 마지막 걸작이 완성될 수 있었다.

"허허...."

자마드는 삐딱한 남자의 말에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알아차렸다.

검은 본디 쓰여야 했다.

어떤 형태든 쓰여야 검이었다.

장식품이 될 검이라면, 과연 자신의 마지막 혼이 담겼다고 할 수 있을까.

쓰이지도 않고 누군가의 손에 부드럽게 어루만져져 모두의 구경거리로 전락해버리는 게 자신이 바라던 마지막이었을까.

막아놓았던 벽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지니, 밀려드는 의문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자마드 씨. 저 검 말입니다."

그때, 재수 없는 남자가 목소리를 냈다.

"거의 완성됐으면 한 번만 휘둘러봐도 됩니까?"

남은 혼란스러움에 죽어갈 듯한데 저렇게 태평한 물음이라니.

자마드는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 멋대로 입이 움직였다.

"해 봐."

"예, 감사합니다."

루시온의 가면 색이 푸르게 물들었다.

이건 확실히 허락을 받은 셈이었다.

"렌탈."

"예, 도련님."

흄이 루시온에게 다가갔다.

이번에는 눈치 볼 이유가 없었기에 흄은 검을 잡고 조금 전까지 서 있었던 그 자리로 돌아갔다.

"바닥에 내리쳐봐도 되겠습니까?"

흄은 자신의 검이 사람이 아닌, 튼튼한 곳에도 쓰일 거라 생각해 한번 확인하고 싶었다.

"해."

루시온이 허락하자 흄은 더는 망설이지 않고 바닥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콰앙!

마치 거대한 도끼로 바닥을 내리찍는 소리였다.

쫘악!

바닥에 깊은 균열이 나버렸다.

흄의 눈이 커졌다.

검이 부서지진 않았지만, 구부러지고 말았다.

흄이 검을 슬쩍 뒤로 숨기며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푸하하하!"

그때, 자마드가 크게 웃었다.

마치 자기 자신을 비웃는 듯한 웃음 같았다.

"그렇게 자신만만하더니! 이 검이 완벽하다고 그렇게 생각하더니!"

'그러게. 완벽해야 했을 텐데.'

루시온은 이 상황이 참 의문스러웠다.

뭐가 바뀐 걸까.

[굳이 문제를 찾자면 광석이야. 암, 검 자체는 완벽했어. 정말이야.]

러쉘은 충격에 빠진 얼굴로 자마드를 감싸듯 말했다.

'그럴 리가. 마지막에 만든 만큼 최고의 광석을 썼을 텐데?'

자마드가 마지막에 쓸 광석은 흑석보다 더 단단하다는 라이티석이었다.

"고맙다."

자마드가 웃음을 멈추고 루시온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자마드의 낯간지러운 말에 루시온은 자신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라이티석을 얻지 못하고, 별수 없이 다른 광석을 구해다 썼거든. 내 실력이라면 광석에 상관없이 뛰어날 거라는, 아주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말았지."

자마드의 눈동자는 처음 그를 봤을 때보다 맑았다.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눈빛이었다.

하지만 루시온은 자마드의 변화보다 그가 왜 라이티석을 얻지 못했는지가 중요했다.

"…문제가 생겼습니까?"

"글쎄. 갑자기 모든 거래를 중지한다는 소식이 들려와서. 어찌어찌 돈은 받았는데, 물건만 받지 못했어. …그, 주변에서 듣자 하니, 로베리오 백작하고 거래하던 곳이었다는데?"

'로베리오 백작하고?'

루시온은 귀가 번뜩 뜨이는 기분을 느꼈다.

로베리오가 흑마법사와 엮었다는 사실 때문에 광산을 소유하고 있던 이들 중 하나가 재빨리 문을 닫은 모양이었다.

'흐름이… 바뀌었다.'

만약 자신이 자마드를 설득하지 못했다면 그의 마지막 검은 어떻게 해서든 헤인트가 손에 넣었겠지.

라이티석이 아닌, 광석으로 만든 검이.

"그래, 나한테 얼마 주련?"

자마드가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제 와서?

루시온은 기가 찬다는 듯이 말했다.

"남을 위해 검을 만드는 건 이제 그만뒀다면서요?"

"으레 늙으면 기억력이 감퇴하는 법이지."

자마드가 능글맞게 대응했다.

"무엇보다 자네의 그 재수 없는 말이 마음에 들어. 정말 그냥 내가 만든 검이 필요하다는 게 느껴질 정도거든. 여우 짓 하는 것들보다 훨씬 낫지."

"예, 감사합니다. 더 재수 없도록 노력해보죠."

삐딱한 말에 자마드는 크게 웃었다.

"무엇보다, 이번 일로 내 자존심이 크게 구겨졌어. 이대로 눈을 감을 순 없지."

"방금까지 인생의 마지막에 도달하신 것처럼 굴지 않으셨습니까?"

"방금 다시 태어났어. 다 부질없다고 생각했는데, 열 받았지 뭐야. 그 망할 녀석들 때문에 내 노년을 이렇게 내버릴 수 없지. 자네 덕에 죽기 전까지 검을 만들고 말겠다는 악이 생겨났을 정도라니까."

자마드가 손을 내밀었다.

"내 이름을 들어봤으면 얼마나 유명했는지 알고 있겠지?"

"다시 태어났으니 자마드 씨는 그냥 대장장이 자마드 씨일 뿐입니다."

루시온은 자마드의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자마드가 황당한 표정을 짓든 말든 루시온은 자신의 말을 꺼냈다.

"우선 렌탈이 쓸 수 있는 무기부터 보고 몸값을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첫 무기로는 대검이 좋겠습니다."

"이봐...."

착.

루시온은 자마드 입에서 다른 소리가 나올까 봐 돈주머니를 꺼내 자마드에게 건넸다.

자마드는 슬쩍 돈주머니를 열었다.

금세 '억' 하고 소리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광석은 지금 제가 직접 구해드리지는 못하고 자마드 씨가 아는 거래처를 통해 구하셔야 할 듯해 드리는 돈입니다. 그럼, 대검을 만드시는 즉시 연락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루시온은 이어 연락용 아이템도 추가로 건넸다.

"최대한 빨리 광산을 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참고로 저는 흑마법사입니다."

"갓 대장장이가 된 자마드일세."

자마드는 루시온이 건넸던 물건들을 잠시 땅에 내려놓고 루시온에게 손을 내밀었다.

'말을 못 들으셨나?'

루시온은 다시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흑마법사입니다."

"갓 대장장이가 된 자마드라니까."

하지만 자마드의 태도는 바뀐 게 없었다.

루시온은 몇 초간 말이 없다가 가면이 푸른색으로 물들어갔다.

"예, 잘 부탁합니다. 하멜이라고 합니다."

"하멜? 뭔가 너하고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지만, 어쨌든 잘 부탁합세."

자마드가 이빨을 내보이며 크게 웃었다.

호탕한 웃음과 함께 푸른 실이 잘려나갔다.

서걱.

'자, 헤인트가 손에 넣은 자마드의 마지막 유품이자 소설에서 날 찔러 죽였던 그 검이 사라졌다.'

루시온은 푸른 실이 잘려나간 의미를 알기에 무척 기뻤다.

* * *

다그닥.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루시온은 멍하니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저런 사람도 있네요."

자마드는 크라언 때와는 달랐다.

굳이 자신이 아니라도 자마드의 실력이라면 누구라도 그를 데려갔을 테지.

[그러게. 저런 사람은 처음이네.]

러쉘마저 반쯤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좋은 사람에게 좋은 검이 탄생하는 법이지. 기대되겠네, 흄?]

베델이 흐뭇하게 웃었다.

"예. 기대됩니다. 부러지지 않은 검은 자마드 님이 만든 검이 처음이니까요."

흄은 검을 휘둘렀던 감각을 떠올리니 속이 막 간질거렸다.

자신의 몸을 통제할 수 있게 된 후로 매 순간이 즐거웠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이 감정은 기쁨이겠지.

[그나저나 진짜 하루 만에 두 장인을 데리고 올 수 있겠는데?]

러쉘은 아직 해가 떠 있는 하늘을 바라보며 묻자 루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죠. 해가 지기 전에 집에 들어가야 하니까요."

장담컨대 오늘 두 번째 장인까지 꼬드길 수 있었다.

다음 장인은 자마드에 비하면 무척 쉬웠으니.

81화. 장인들을 회유하다(3)

[루시온 공은 아직 성인이 되지 않았다고 알고 있는데. 혹시 통금시간이라도 있는 건가?]

베델이 묻자 러쉘이 키득거렸다.

[통금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무서운 형님이 쫓아오는 게 문제지.]

"스승님 말이 맞아. 통금시간은 없지만, 너무 늦게 들어가면 형님이 날 찾으러 올 테니까."

[루시온 공이 있는 위치는 어떻게 알고 온다는 건가?]

"나한테 형님만 계시는 게 아니라, 누님도 한 분 계셔."

샤엘라를 떠올리자마자 루시온은 괜스레 몸을 부르르 떨었다.

―추워?

라타가 루시온을 꽉 끌어안으며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루시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서운 분이신가?]

베델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아니. 무서운 분이라기보다는… 형님보다 아니, 어쨌든, 누님께서 나를 위해서 마법을 만드셨거든."

루시온이 자신을 가리켰다.

"내가 형님이나 누님, 그리고 아버지 이름을 세 번 말하면 그 마법이 발동돼."

[왠지 미아 방지 마법이랑 비슷하네?]

러쉘이 턱을 매만졌다.

설마하니 그런 마법을 걸었을까.

"맞습니다. 제 감시가 좀 소홀해진 것도 누님의 마법 덕분이기도 합니다."

루시온은 살짝 놀라는 러쉘의 표정에 뒷말을 아꼈다.

샤엘라가 자신에게 걸어준 마법은 특별했으니까.

* * *

[이번에는 아이템 제작 장인이라 이거지?]

"그렇습니다."

루시온은 러쉘의 말에 대답하며 샨드라에서 내렸다.

이름은 미엘라로, 그녀가 바로 빛을 흡수해 빛이 가진 재생력만 저장하는 아이템을 만든 악역이었다.

미엘라는 아이템을 만드는 재능이 뛰어나지만, 귀족 영애로서 자라다 쫓겨난 사람처럼 세상 물정을 몰랐다.

그녀의 재능을 알아본 사기꾼들에게 크게 속아 자신이 만든 아이템의 소유권도 잃고, 있던 돈도 날리며 모든 걸 뺏긴 그녀는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다.

그 사건이 그녀가 악의 세계에 발을 내딛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 중 하나였다.

'흐음....'

루시온은 미엘라가 운영하는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마치 마법이 가게를 한 번 휩쓸고 간 것 같지 않은가.

―다 부서졌어. 우오오.

라타의 눈이 초롱초롱 빛이 났다.

뭐든 부서진 모습은 처음이기에 신기한 모양이었다.

"…당장 꺼지라고! 꺼져!"

미엘라는 루시온의 발소리를 듣자마자 악에 받친 소리와 함께 물건을 쥐었다.

"뭘 또 가져가려고 온 거야? 너희가 다 가져가 놓고!"

미엘라가 부서진 물건을 아무렇게나 던져보지만, 죄다 자신이나 흄에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무래도 사기꾼들에게 당한 뒤에 찾아온 것 같네. 타이밍 하나 끝내준다.'

루시온은 미엘라의 상태에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분명 자마드보다 쉬웠어야 했는데.

지금쯤 미엘라는 몇 번째 사기를 당한 걸까.

[우리가 최악의 타이밍에 여길 찾아왔어.]

러쉘이 슬쩍 꺼내는 말에 베델도 주변을 살피다 눈살을 찌푸렸다.

[빚쟁이라도 들이닥친 모양이지. 그렇지 않고서야 가게가 이렇게 될 리가 없으니까. 나중에 다시 찾아오는 게 어떤가, 루시온 공? 지금은 때가 좋지 않아 보여.]

베델의 제안에 루시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히려 지금이 딱 좋은 순간이었다.

"실례합니다."

루시온의 차분한 목소리에 미엘라는 웅크렸던 몸을 풀고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손… 님이신가요?"

미엘라는 루시온과 흄을 보며 금세 미안한 감정을 내비쳤다.

아직은 멀쩡한 미엘라의 상태에 루시온은 안도했다.

'좋아. 아직 악역으로 각성하기 전이야. 그럼, 각성을 시켜볼까.'

"갑자기 소리쳐서 죄송합니다."

미엘라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치며 루시온에게 고개를 숙였다.

가면을 써 수상할 법하나, 미엘라는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가게가 엉망이라 당분간은 장사가 어려울 듯하네요."

"아이템을 보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저는 미엘라 씨를 찾아왔습니다."

자신을 찾아왔다는 말에 미엘라가 바로 얼굴을 구기며 소리쳤다.

"이제 안 속아요! 당신들도 내 뒤통수나 칠 거잖아요…!"

[저 상태로는 베델 말대로 대화조차 불가능하겠는데?]

인간을 불신하는 미엘라의 눈빛을 보자마자 러쉘이 팔짱을 꼈다.

"저는 미엘라 씨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건 약소하나 미엘라 씨에게 드리는 선물입니다."

루시온이 미엘라에게 한 발자국 다가가자 미엘라는 두 발자국 물러서며 루시온을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제가 상황이 좋지 않을 때 왔다는 건 인정합니다."

루시온은 더는 다가가지 않고 물었다.

"그러니까, 누구입니까?"

"…누구냐뇨?"

"가게를 이렇게 만든 놈이 누구입니까? 제가 미엘라 씨를 대신해서 처리해드리겠습니다."

"처, 처리요?"

미엘라가 크게 당황했다.

"예. 죽여달라고 하시면 죽여드리고, 다리를 자르라고 하면 잘라드리겠습니다."

루시온의 가면이 노란색으로 물들었다.

마치 개구쟁이 같았다.

"그럴 필요...."

"아뇨. 이렇게 당했는데 가만히 계실 생각입니까? 미엘라 씨에게 애꿎은 오해를 받았고, 제 목적도 이루지 못할 것 같아서 성질이 나는데 미엘라 씨는 정말 괜찮다는 겁니까?"

루시온이 미엘라를 살살 건드렸다.

분노는 정당하다.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아 미엘라가 마른 침을 삼켰다.

루시온이 손을 뻗었다.

"왜 망설이십니까? 제가 대신 처리해드린다니까요."

"그러면… 저도 놈들하고 똑같은 사람이 되는 거잖아요. 그건 싫어요. 그러니까, 잠깐만 앉아 계세요. 세수하고 정신 차리고 올게요. 절 찾아오신...."

"싫습니다."

루시온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미엘라의 어중간한 착함은 앞으로 도움이 되질 않을 테지.

만약 미엘라가 자신의 조직에 들어온다고 해서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기꺼이 미엘라를 보호하겠지만, 그녀를 가르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루시온 자신은 미엘라의 보호자가 아니었으니.

"…네?"

"제가 짜증 나서 싫습니다. 놈들은 제 성질을 건드렸습니다. 전 누가 절 건드리면 몇 배는 더 갚아줘야 속이 후련하거든요. 누구입니까?"

묘한 압박에 미엘라는 입이 가벼워졌다.

"바, 방금 나갔을 거예요."

"렌탈. 잡아 와. 찾을 수 있지?"

루시온은 일부러 미엘라가 공범이 되길 기다렸다가 흄을 불렀다.

흄이 가진 추적 능력으로 빨리 붙잡을 수 있을 테니까.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흄이 밖으로 나갔고, 본의 아니게 공범이 되었다는 사실에 미엘라의 표정이 굳어졌다.

"저, 저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미엘라 씨가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조직에 들어와달라고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미엘라는 루시온의 말이 귀에 닿질 않는지 떠나버린 흄의 모습을 좇고 있었다.

"미엘라 씨. 뭐가 필요합니까? 최대한 맞춰보겠습니다."

"…네?"

"미엘라 씨가 조직에 들어오면 이것저것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조직에 들어올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남자의 뻔뻔함에 미엘라는 허탈하게 웃었다.

[아무리 내 제자라도 진짜 뻔뻔하네.]

보다 못해 러쉘이 목소리를 냈다.

"제가 언제 들어가겠다고 했죠?"

미엘라의 얼굴이 바로 일그러졌다.

"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어요. 대체 왜 이래요, 다들!"

방금 일마저 겹쳐 서러움까지 폭발한 듯 보였다.

"대체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예요! 제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요? 그런 거냐고요!"

"예. 나중에 그렇게 성을 내시면 됩니다."

이상한 소리에 미엘라는 얼굴을 일그러트린 그 모습 그대로 루시온을 쳐다보았다.

"당신의 모든 걸 앗아간 그들에게 그렇게 소리치고, 때리고, 욕이나 퍼부으면 됩니다. 간단하지 않습니까? 제안은 그 뒤에 드리죠."

이게 무슨 개소리인지.

미엘라가 황당함에 말을 잇지 못할 때쯤, 가게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나까지 깜빡 속았네.]

루시온의 시선이 러쉘에게 향하자 그는 머쓱한 듯이 고개를 돌렸다.

"데려왔습니다."

흄은 자신의 덩치에 두 배나 되는 사람을 양손에 들고 가게 바닥에 내리쳤다.

"어이쿠!"

이미 한차례 흄에게 맞았는지 놈들의 팔이 뒤틀려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이대로 죽일까요?"

흄의 물음에 놈들이 다급해졌다.

"자, 잠깐만요! 살려주십시오! 제발, 살려주십시오!"

"결정은 내가 아니라 미엘라 씨가 할 거야."

루시온이 미엘라에게 모든 결정권을 넘겼다.

천천히 내쉬는 미엘라의 숨소리와 함께 어깨에 힘이 빠지는 게 보였다.

방금까지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동업자라고 생각했던 이들이 가게를 부수고, 자신을 비난하고, 자신의 전부인 아이템을 들고 당당히 가게 밖으로 나갔으니.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부서진 가게를 보며 처량하게 울고, 멍청한 자신에게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는 게 전부였다.

순간, 미엘라는 손이 떨려왔다.

정말 죽이고 싶었지만, 막상 저놈들과 눈이 마주치니 죽일 기회가 왔음에도 망설여졌다.

"결정하십시오."

루시온이 재촉했다.

"사, 살려줘. 내가 잘못했어. 아이템. 그, 그래 아이템 전부 돌려줄게."

"맞습니다. 가게도 전부 다시 수리해드리겠습니다. 다시는 배신하지 않을 거고요!"

자신들의 목숨이 미엘라에게 있다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놈들은 미엘라에게 매달렸다.

미엘라는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다 기어코 그들을 혐오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저는 저런 덜떨어진 놈이랑 다릅니다. 아이템을 훔쳐봤자 뭐 합니까? 결국, 미엘라 씨 손에 탄생됐으니 더 좋고, 더 완벽한 걸 만들면 그뿐이잖습니까. 고작 풋돈을 벌고자 미엘라 씨를 배신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루시온은 놈들을 향해 비웃음을 터트리며 산산조각이 난 미엘라의 자존심을 높이 세워주었다.

"저놈들의 손을 잘라줄 수 있나요?"

미엘라의 여렸던 눈동자에 서서히 날카로움이 차올랐다.

뒤에서 누군가가 지켜주고 있다는 안도감.

힘이 있고 없음의 차이.

무엇보다 주도권을 미엘라가 쥐어버린 상황.

이 몇 가지의 사실이 미엘라를 변화하게 했다.

좋은 흐름이었다.

아마도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힘이기에 더 크게 반응했겠지.

"물론이죠."

루시온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며 베델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받은 베델이 놀라며 물었다.

[나야 저놈들의 목이라도 자를 수 있지만, 지금… 빙의를 해도 괜찮은 건가?]

[딱 좋은데? 아무리 빙의 상태라도 부정이 쌓이는 걸 피할 수 없으니 일찌감치 손목을 잘 자르는 법이라도 배워두면 무척 쓸 만하잖아?]

오히려 러쉘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 라타는 자신의 앞발을 보며 심각한 표정으로 제자리에 웅크려 앞발을 숨겼다.

'베델과 어둠을 맞추고.'

루시온은 베델과 이어진 어둠을 느꼈다.

"베델 레비스티."

베델의 이름을 작게 세 번 부르고.

"내 몸에 머물길 허락하노라."

마지막 허락까지 잊지 않았다.

순간, 루시온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고, 검은 안광이 어렸다.

베델이 루시온의 몸을 이용해 손에 쥔 건 주변에 널브러진 파편 조각이었다.

[그럼, 루시온 공. 저들을 베겠다.]

분명 제대로 베어지지 않았을 텐데도, 그녀는 충분하다는 듯 놈들을 향해 휘둘렀다.

쉬익!

"자, 잠깐만… 아악!"

비명과 함께 피가 튀었다.

파편에 피가 묻고, 놈들의 손이 바닥에 떨어졌다.

단순한 행동으로 나온 결과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꼭 검으로만 벨 수 있는 건 아니야. 날카로운 물건만 있어도 적당한 힘으로 적당한 속도로만 유지할 수 있다면 충분하지.]

'그게 어려운 게 아닐까 싶은데.'

루시온이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금은 이렇게 벨 수 있구나, 하는 정도의 감각만 익혀도 괜찮으니 충분해]

베델이 웃었고, 루시온은 어둠을 끊어내 빙의를 풀었다.

"…하하."

미엘라 역시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웃다 두 손이 잘린 놈들을 보며 손가락질을 했다.

"꼴 좋다! 꼴 좋아! 그 역겹던 두 손이 잘려나갔네?"

미엘라는 악역.

피가 그녀의 본성을 깨운 건지 몰라도 눈매가 이전보다 날카로워졌다.

"만족하십니까?"

루시온이 물었다.

"지금은요. 지금은 이걸로 만족스럽네요. 이제 저놈들을 보내주세요. 손이 잘렸으니 평생 괴로움에 몸부림칠 걸 생각하니 너무 기분이 좋아요."

순수했던 그녀의 눈에 탁함이 깃든 듯했다.

'잘됐네.'

루시온은 어중간하게 착한 것보다 차라리 이쪽 노선을 타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제가 필요하다고 했나요?"

놈들이 가게 밖으로 나선 후에야 미엘라가 자신을 가리켰다.

"지금은 미엘라 씨 역시 제가 필요해 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맞아요. 이렇게 후련한 건 평생 처음이에요. 그래요. 이렇게 계속 빼앗기는 인생을 살 수 없지 않겠어요?"

미엘라의 눈이 휘었다.

"혹시 부탁 하나만 더 들어줄 수 있나요? 제가 당신의 조직에 들어가는 건 물론, 좋은 장소도 하나 줄게요."

"장소요?"

루시온은 귀가 솔깃했다.

"예. 자작가 저택을 통째로 가지고 싶지 않으신가요?"

"자작가라뇨…?"

"혹시 체프란 자작가라고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루시온이 대답했다.

무기와 아이템 제작 실력으로 몇 년 전까지 크로니아와 거래를 하던 가문이 아닌가.

하지만 가주가 죽고 나서 제품의 질이 하락하는 바람에 크로니아에서는 단호히 거래를 중단했다.

듣자 하니 다음 가주 자리 때문에 내부가 시끄러웠다고 하는데, 꾸준히 애걸복걸하며 찾아와서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는 찾아온 적이 없네?'

"제가 쫓겨난, 체프란 자작가의 진짜 후계자예요."

부릅뜬 눈으로 자신을 가리키는 미엘라의 손짓과 함께 푸른 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82화. 충성을 당신께

'…뭐?'

루시온은 잠깐 말을 잇지 못했다.

미엘라가 자작가의 여식이라는 건 소설에서 나온 적 없는 정보였다.

'하지만 푸른 실이 나타났다는 건 저 말이 진짜든 가짜든 간에 내 운명이 조금이나마 바뀔 수 있는 사건이 벌어진다는 건데.'

루시온은 푸른 실의 등장에 고민했다.

'그걸 떠나서 정말로 저택을 통째로 내어준다고?'

여전히 루시온의 마음속에 러쉘의 아지트가 1등이었으나, 그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억지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지 않았다.

'확실히 지금 있는 장소보다 훨씬 낫긴 한데....'

루시온은 조직원들을 자작가의 시종으로 둔갑시켜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그편이 더 자유로울 테니까.

―루시온이 집을 가지는 거야? 흄이 라타한테 읽어준 책 중에 집을 가지면 성공한 거라고 하던데? 그럼 루시온은 성공한 거야?

라타의 말에 루시온은 웃음을 꾹 참았다.

'흄은 대체 라타한테 무슨 책을 읽어준 거야?'

[흠....]

러쉘이 침음을 흘렸다.

무슨 사람이 튀김 뒤집듯 급하게 변하는지.

[너무 변하니까, 신뢰가 가지 않는데?]

[내가 보기에 루시온 공의 행동이 저 사람이 평소 눌러왔던 무언가를 폭발시킨 거라 봐.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변할 리가 없을 테니까.]

[베델 네 말도 일리가 있는데, 저 사람 눈 좀 봐봐. 악이 꼈어. 회까닥 뒤집혔다고.]

[그건… 동감이야.]

베델이 말을 아꼈다.

미엘라의 눈이 미친 사람처럼 뒤바뀌었으니.

"그러니까 본인이 체프란 자작가의 후계자란 말씀입니까?"

"증명할 수 있어요. 쫓겨나기 전에 가주의 상징인 반지를 모조품과 바꿔 가져왔죠. 제 솜씨가 좋다는 건 이미 알고 있을 테고요."

미엘라가 소매를 걷어 팔찌를 보여주었다.

팔찌에 반지 장식으로 된 것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어 참 요란하다 싶었다.

미엘라는 그중 생각보다 무난한 반지 하나를 보여주었다.

"당장 가게에 가서 확인받을 수 있어요. 가주에게 물려주는 반지는 어느 귀족이든 특별하니까요. 제가 쫓겨나기 전에 다졌던 인맥을 동원해서 체프란 자작가의 영애라는 것도 증명할 자신이 있어요."

"그러니까, 어쨌든 저한테 체프란 자작가 저택을 주겠다는 말입니까?"

"예. 저는 그 저택이 필요가 없으니까요."

미엘라가 입꼬리를 올렸다.

제법 사악한 미소였다.

"아마 당황스러우실 거예요. 하지만 그만큼 저 역시 당신의 제안에 당황스러웠어요."

"인정합니다."

루시온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어쨌든, 해볼 만하지 않아요?"

미엘라가 묻자 루시온은 생각하듯 팔짱을 꼈다.

"추가로 미엘라 씨가 체프란이라는 이름 역시 빌려준다면 생각해보겠습니다."

"네. 가져가세요. 서로를 향한 신뢰라고 생각하면 편하겠네요. 저는 체프란이라는 이름에 미련이 없으니까요."

"정말입니까?"

루시온은 혹시 몰라 물었다.

"보세요. 귀족 아가씨인 제가 이런 조그만 가게에서 아이템을 만들고 있잖아요? 이제 와서 귀족 노릇은 싫어요. 하지만 귀족 아가씨인 척은 해 볼게요. 그게 저한테 도움이 될 테니까요."

"좋습니다. 일단 계약서부터 적읍시다."

루시온이 흄에게 손을 뻗자 그는 종이를 하나 가져다주었다.

미엘라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루시온은 얼른 그녀가 내던진 체프란이라는 이름과 권한을 가질 생각이었다.

"좋아요. 그럼 가면을 벗어주세요."

"아뇨. 저는 보석을 담보로 삼을 겁니다. 가지십시오."

루시온이 미엘라에게 돈주머니를 건넸다.

미엘라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돈주머니를 열다 말고 그대로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이, 이건...."

"예, 제가 돈이 많습니다. 앞으로 더 많을 예정이고요."

루시온은 종이를 흔들어 보였다.

"미엘라 씨는 체프란 저택 소유자가 당신이 아니라 나라는 걸 증명하는 내용과 체프란의 모든 권리를 양도한다는 내용에 서명해야 할 겁니다."

루시온이 종이에 글자를 적어갈 사이에 베델이 러쉘을 불렀다.

[러쉘.]

[왜?]

[그대가 루시온 공에게 처세술도 가르쳤나?]

[내가? 아니. 루시온 혼자 터득한 일이야.]

러쉘이 으쓱거리며 말했다.

목구멍까지 치솟는 루시온의 자랑을 애써 참아냈다.

하나를 가리키면 열 가지를 응용할 줄 아는 제자이니, 뭐든 가르쳐주고 싶었다.

[어쨌든, 베델. 네가 와서 다행이야. 빙의 덕에 루시온이 빨리 성장할 수 있을 테니까.]

[그대도 빙의를 당연히 사용할 수 있을 텐데?]

[세상에 당연한 게 어디 있어? 할 수 있었으면 벌써 했지.]

러쉘은 쓴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루시온이 원하는 건 어둠을 오러로 둔갑해 당당히 흑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루시온은 체력도, 기초도 부족한 상황이라 기사 기준으로 오러를 사용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려면 얼마나 걸릴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 상황을 기사였던 베델 덕에 루시온은 시간을 엄청 당길 수 있게 되었고, 아마 조만간 루시온이 원하던 상황을 이루리라고 보았다.

"서명하시면 됩니다."

루시온은 종이를 미엘라에게 넘겼다.

"이름이 뭐죠?"

미엘라가 물었다.

"하멜."

"제게 정확히 어떤 걸 바라시나요?"

"질 좋은 아이템을 만들면 됩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그럼, 미엘라 씨는 뭘 원하십니까?"

"사기 치지 마세요. 제 아이템을 함부로 가져가지도 말고요."

"손목 잘릴까 봐, 무서워서 하지도 못합니다."

루시온의 가면 색이 노랗게 물들었다.

미엘라 역시 키득거리며 서명했다.

"어쨌든 저도 손해는 아니에요. 이 돈주머니만 있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까요."

"예. 그러라고 드린 거니, 미엘라 씨 역시 제 뒤통수를 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뒤통수요? 전 죽고 싶지 않아요. 도망쳐봤자 붙잡힐 것 같고요. 무엇보다 저는 안착이 필요하던 상황이었어요. 힘없이 휩쓸리는 건 이제 지긋지긋하거든요."

미엘라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다 내심 섭섭한 눈으로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물어보지 않으세요?"

"꼭 물어봐야 합니까?"

"그렇죠."

루시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인하는 동안만 들어드리겠습니다."

"너무 짧잖아요."

"예. 듣고 싶지 않아서 그럽니다."

"알았어요. 제가 멋대로 말하는 거니까요."

미엘라가 퉁명스럽게 반응하며 느리게 펜을 놀렸다.

"별거 없어요. 어디서 굴러온 개 같은 년이 어머니를 자리를 차지하고, 절 모함해서 쫓아냈거든요. 아버지라는 놈도 같이 동조했으니 쫓겨났겠죠? 그래서 체프란이라는 이름에 미련이 없어요."

딱.

미엘라가 책상을 두드리며 펜을 놓았다.

"당한 걸 다 갚기 전까지는요."

"좋은 마음가짐입니다."

"맞아요. 방금 하멜 씨께서 가르쳐주셨거든요."

"제가 말입니까?"

루시온이 모르는 척 자신을 가리켰다.

"그럼, 그렇다고 할게요. 자, 받으세요. 오늘이 제 평생에서 가장 후련하고 즐거운 날이네요."

루시온은 미엘라가 건넨 종이를 받았다.

"어디입니까?"

제대로 사인이 된 걸 확인한 후에 루시온이 물었다.

미엘라가 손가락으로 뒤쪽을 가리켰다.

"여기 오면서 높은 언덕에 혼자 있는 저택 못 보셨어요?"

"거기가 체프란 저택이었습니까?"

루시온이 놀라며 물었다.

미엘라가 있는 곳으로 오면서 언덕 위에 혼자 고고하게 서 있는 저택을 발견했다.

정확히는 루시온은 나무에 가려져 보지 못했고, 러쉘이 발견했다.

베델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근처까지 갔다 왔다.

[아. 거기?]

베델은 저택을 떠올렸다.

[경치도 좋았고, 주변 숲 덕에 눈에 띄지 않아서 나름 괜찮았어. 지대도 튼튼해서 마법 몇 방을 맞더라도 버틸 거라고 생각해.]

'베델의 평이 나쁘지 않네?'

루시온은 자신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지대가 튼튼하다면 굴을 파기에도 적합하다는 의미가 아닌가.

쥐쟁이들도 불러올 수 있었다.

"짐을 싸두십시오."

루시온은 계약서를 주머니에서 넣으며 미엘라에게 말했다.

[뭐? 지금 바로 간다고?]

러쉘이 기겁했다.

"짐이라뇨…?"

미엘라 역시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두 사람의 반응에 오히려 루시온은 잠깐 할 말을 잃었다.

저택이 옆집 이웃집도 아니고 어떻게 바로 쳐들어가겠는가.

자신은 그렇게 무모한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루시온은 헛웃음을 내뱉으며 말했다.

"임시 아지트에 가야 하니까요."

"지금 바로요?"

"혹시 챙겨야 할 게 많습니까?"

"아뇨, 그게 아니라.... 하루만 시간을 주시면 안 될까요? 정들었던 곳이라."

"조금 전 팔이 잘린 놈들이 복수하러 올 텐데요?"

"챙길게요."

미엘라는 더는 주저하지 않았다.

그녀가 짐을 챙길 사이에 루시온은 가게 밖으로 나가 연락용 아이템을 사용했다.

"크라언."

[예, 하멜 님.]

"사람 좀 보내야겠어."

[사람이요?]

"여기가 어디냐면...."

* * *

[바글바글하네.]

러쉘이 임시 아지트를 보자마자 입을 열었다.

[그때는 고작 3명이었는데 벌써 30명은 넘어 보이네.]

"그러게 말입니다. 너무 좁아 보이질 않습니까?"

루시온은 천천히 임시 아지트를 향해 걸으며 말했다.

저들과 쥐쟁이, 그리고 앞으로 포섭할 이들을 생각하면 저택 크기 정도는 되어야 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확실히 숫자에 비하면 좁긴 좁지. 네가 아지트를 구한다고 해서 크라언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했을 테니까. 그간 얼마나 답답했겠어?]

러쉘의 말에 루시온은 멋쩍게 대답했다.

"솔직히 이렇게 빨리 인원이 늘어날 거라 생각하진 못했습니다."

루시온은 길게 두 달을 보았다.

하지만 고작 2주.

돈이 두둑할 때 나오는 크라언의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유령에게 들은 사실과 눈으로 보았을 때 역시 달랐고.

가슴이 기쁘게 뛰었다.

[그래서 이 조직의 우두머리가 루시온 공이란 말인가…?]

베델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살짝 넋을 잃고 말았다.

머릿수만 맞추기 위해서 억지로 채워 넣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여관 크기만 한 집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는 이들 모두 병사 이상의 수준을 하고 있었다.

[맞아. 크라언이라고 불리는 바지사장하고만 아는 사실이지.]

러쉘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거기 잠깐 멈춰주십시오."

루시온의 모습에 주변을 돌아다니며 경계하던 이들 중 한 명이 루시온을 불러세웠다.

그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크라언이 어떻게 교육했는지 알고 싶었기에 루시온은 일단 멈췄다.

"하멜 님. 제가...."

흄이 목소리를 내자 루시온은 가만히 있으라며 손짓을 했다.

흄은 고개를 끄덕이며 경비들을 노려보았다.

그 눈빛이 너무도 매서워 경비들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여기를 지나가면 안 됩니까?"

루시온이 물었다.

경비들은 흄을 슬쩍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곳 주변은 사유지입니다. 허락을 받지 않으면 지나갈 수 없으니, 둘러 돌아가시길 바라겠습니다."

"여기를 지나가는 게 더 빠릅니다. 조금만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그건 안 됩니다."

"그럼, 제가 허락을 구할 테니 이곳 주인을 불러주셨으면 합니다."

"저희는 조직에서 정한 규칙에 따라 행동할 뿐이니,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짜증 날 법하나, 경비로 추정되는 이들은 차분히 대응했다.

'좋은 태도네.'

루시온은 괜히 흐뭇했다.

"그럼 저는 조직원 사람이니 비켜주십시오."

가면에 후드까지.

수상하기 그지없는 행색에 경비는 동료를 바라보며 작게 속삭였다.

"혹시 아는 사람이야?"

"아니. 처음 보는데?"

경비들은 곤란한 표정을 드러내다 마지못해 물었다.

"혹시 이름이 뭡니까?"

"하멜."

소리는 경비 뒤쪽에서 들려왔다.

슈트라가 천천히 걸어오면서 경비들을 향해 눈짓을 줬다.

"다른 건 몰라도 그 이름은 숙지하라고 크라언 님께서 말씀하셨잖아."

"…아! 누님이 말씀하시니 이제 기억이 납니다. 그러니까, 개...."

"쉬, 쉿!"

슈트라가 당황하며 소리쳤다.

"개 뭐? 개새끼라고?"

루시온이 어이없다는 듯이 반응하자 슈트라를 슬쩍 눈길을 흘렸다.

"아니. 개인으로 많이 돌아다닌다고. 그, 어, 크라언 님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빨리 들어와. 아, 렌탈 씨 어서 와요."

루시온을 쳐다보는 시선과 달리 흄을 바라보는 슈트라의 시선이 참 상냥했다.

"여전히 입이 험하네."

루시온은 그냥 넘어가지 않고 꼬투리를 잡았다.

"잘못 말한 거라니까."

슈트라가 쩔쩔매는 모습을 지켜본 경비는 그제야 크라언의 말을 떠올리며 속닥였다.

"그러니까 우리 조직에 있다는, 유일한 흑마법사가 맞지?"

"맞아. 크라언 님이 몇 번이고 말씀하시고, 외부로 언급조차 하지 말라고 언급하셨던 분이 맞아."

"사실 조건이 좋아서 들어오긴 했는데. 흑마법사라는 말에 속으로, 어유 스벌하며 외쳤다니까."

"야, 나도."

맞장구치며 잠깐 낄낄 웃었다.

"그런데 생각한 거랑 다르네."

"그러게. 생각보다 평범하잖아? 나는 흑마법사가 괴물처럼 생겼다고 알고 있었거든."

"저 가면 속에 뭐가 있을지 누가 알아?"

"하긴 그렇네."

* * *

"오셨습니까, 하멜 님."

크라언은 루시온이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인사했다.

"가면이 바뀌셨네요. 좋은 가면처럼 보입니다. 아, 렌탈 씨도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크라언은 미소를 지으며 흄에게도 인사하는 걸 잊지 않았다.

"크라언."

크라언을 부르는 루시온의 목소리가 살짝 무거웠다.

"예, 하멜 님."

"조직 내에 죽여야 할 사람부터 말해주지."

다짜고짜 내뱉은 루시온의 말에 크라언이 멈칫거렸다.

83화. 충성을 당신께(2)

"죽… 여야 할 사람이요?"

"그래. 모든 조직이 완벽할 수 없지. 여기도 마찬가지야. 네 사람이 있어."

네 사람이라는 말에 크라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두 명은 누구보다 입이 무거워야 할 경비들, 나머지 두 명은 슬슬 뒤통수를 칠 준비하고 있더라고."

루시온은 네 사람의 이름을 언급하며 말을 이었다.

"조직이 제대로 굴러가려면 본보기로 죽여야 할 거다."

유령 CCTV가 작동하고 있는 걸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죄송합니다. 제 잘못이 큽니다."

크라언은 우선 사과했다.

조직을 관리하는 건 자신의 몫이 컸다.

더군다나 눈앞의 흑마법사는 이유 없는 행동을 하지 않았으니.

"지금 바로 조직원을 모아서...."

"아니야. 죽이는 것도 때가 있어. 지금 조직원들을 모아서 죽인다고? 재롱잔치도 아니고 그 죽음이 의미가 없잖아. 지금보다 더 큰 무대에서 조직원의 성취감이 고조했을 때, 그때가 최적의 시기야."

조직이 저택을 손에 넣어 힘을 과시할 수 있을 때, 그때 죽음은 가장 빛나겠지.

조직은 언제든 너를 죽일 수 있다.

이러한 공포가 심어져야 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하멜 님께서 적당한 시기를 알려주십시오. 언제든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분명 가면에 가려 표정이 보이지 않거늘, 크라언은 살벌한 미소가 머릿속에 상상되어 오싹했다.

"그래. 어쨌든, 아까 연락용 아이템으로 미처 말하지 못한 사실이 있어서 찾아왔어."

"예, 일단 앉으시는 게 어떻습니까?"

크라언은 자리를 권했다.

루시온은 자리에 앉았고, 흄은 그의 뒤에 서 있었다.

"방금 네 사람을 빼면 조직을 잘 관리하고 있던데, 크라언? 네 덕에 내가 마음이 놓이네."

조금 전까지 무거웠던 분위기와 달리 루시온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칭찬이었다.

"아닙니다. 당연한 걸 했을 뿐입니다."

크라언은 진심으로 당황하며 손을 가로저었다.

하멜이라는 남자가 칭찬도 할 줄 아는 사람 줄이야.

"아까 연락용 아이템으로 언급했던 사람은 아이템 제작장인인 미엘라야. 혹시 들어봤어?"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제가 찾아가 조직에 들어오길 권유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분명 동업자가 있다고 해서 제의를 거절하셨는데...."

그런데 넌 어떻게 했냐라는 눈빛이 너무 노골적이라 루시온은 웃고 말았다.

"미엘라는 미엘라 체프란으로 체프란 자작가의 정통성 있는 후계자야. 지금 체프란 자작가의 가주를 죽이는 조건으로 저택을 받기로 했어."

"...?"

현실성 없는 말에 크라언은 눈만 깜박거렸다.

"그래서 크라언 너는 지금부터 조직원들을 준비시켜. 행동은 저녁. 정보는 내가 다 알려주지."

"자, 잠시만요."

크라언은 뒤늦게서야 정신을 차렸다.

"왜?"

"무리입니다."

"이유는?"

"너무 무모합니다. 상대는 귀족이 아닙니까? 아직 조직이 그만큼 성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자작가가 누구 집 개도 아니고. 어떻게 쉽게 들락날락할 수 있겠어? 그런데 크라언."

루시온의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걸 크라언은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크라언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계획을 듣지도 않고 단정 지으니 기분이 좀 별로인데? 내가 아무 생각 없이 그런 제안을 했을까? 널, 아니, 내 조직을 사지로 몰아넣어서 얻는 이득이 뭘까."

루시온의 손가락이 책상을 두드렸다.

"그게 아니라, 하멜 님...."

"두렵나?"

"...."

"네 손으로 거두고, 잠시나마 네가 키운 이들이 죽을까 봐 두렵나?"

"…예. 두렵습니다."

크라언이 민망한 듯이 고개를 숙였다.

조직의 실제 우두머리는 루시온이라고 해도 대외적인 우두머리는 크라언 자신이었다.

나라를 한순간에 잃어버렸고, 부하들을 잃고.

살아남은 이들이 슈트라와 헬론이었다.

모든 걸 잃어봤기에 겨우 손에 넣은 이 작은 조직이 소중했다.

크라언은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잃는 게 두렵습니다."

"그래도 각오는 하고 있지?"

"모르겠습니다."

루시온은 자신감 없는 크라언의 말에 책상을 두드리던 손가락을 멈췄다.

소설 속에서 크라언은 이미 제3세력을 크게 키운 상태라 어떻게 조직을 성장시켰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실패는 반드시 했을 것이며 이런 경험 역시 극복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나는… 저 마음을 이해한다.]

베델이 말했다.

[아마도 무력감과 죄책감 역시 같이 마음에 품고 있겠지.]

루시온은 베델의 말을 들으며 머릿속에 세워두었던 계획을 전면 수정할 필요가 있다는 걸 느꼈다.

조직의 첫 승리에 꼭 피를 볼 필요가 없지 않을까.

"좋아, 크라언."

"예…?"

"피를 흘릴 사람은 딱 한 사람이야. 뭐, 혹시 몰라 3명까지. 이 계획이라면 할래?"

"하겠습니다."

크라언이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일단 알겠어."

루시온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자마드를 알고 있나?"

"다,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대장장이로서 최고가 아닙니까. 그분을 모실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영광이죠!"

조금 전 일은 이미 떨쳐버렸다는 듯 크라언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그래. 우리 조직에 오기로 했으니까. 어, 아니. 자마드가 만든 물건을 보고 판단하기로 했어."

"누가… 누굴 판단한다고요?"

크라언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

현재 제국에서 자마드를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감히 있겠는가.

"내가. 자마드를."

하지만 루시온은 떳떳하게 자신을 가리켰다.

남들이 최고라고 말하지만, 흄의 힘을 이겨내지 못할 검을 만드는 대장장이는 필요 없었다.

"허...."

크라언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내뱉고 말았다.

정말 이게 현실인가 싶은지 자신의 손등을 꼬집어 보았다.

"왜? 꿈일까 봐?"

루시온이 키득거리며 물었다.

"대, 대체 하멜 님의 정체가 뭡니까? 저는 이제… 모르겠습니다."

"내 정체를 알려고도, 설령 알았어도 모른 척하라는 계약을 잊었어?"

"잊을 리가 있겠습니다. 그냥 그만큼, 정말, 정말로 놀랄 뿐입니다."

"어쨌든 임시 거처를 일단 저택으로 옮기자고. 그리고...."

루시온은 주머니에서 종이 뭉치를 꺼냈다.

일단 넓게 말고 변경 주변부터 정리하고자, 나름대로 계획을 세워봤다.

처리해야 할 것들.

포섭해야 할 것들.

차지해야 할 것들.

크로니아의 눈에 띄지 않게 주변만 건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를 더 자세하고 꼼꼼하게 바꾸는 건 크라언의 몫이었고.

일단 종이를 보자마자 크라언은 군침을 삼켰다.

또 어떤 맛난 정보를 들고 왔는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내가 쥐쟁이라고 정보도 잘 캐고, 남의 비밀도 잘 캐는 놈들을 하나 구해왔거든? 이제 내일 얻을 저택을 기점으로 하나씩 늘려나가야지."

"하멜 님...."

"말해."

"대체 얼마나 멀리 보시는 겁니까?"

"흑마법사인 날 지킬 수 있을 만큼."

루시온의 가면 색이 노랗게 물들어갔다.

마치 개구쟁이 색처럼 보이나 크라언 눈에는 왜인지 씁쓸하게 느껴졌다.

흑마법사 하나를 지킬 수 있을 만큼이라면 과연 누가 가능할까.

너무도 어려운 문제였다.

탁.

"그리고 이건 추가로 쓸 돈이야. 비기 전에 얼른얼른 채워놔야지."

루시온은 이어 돈주머니를 꺼내 놓았다.

크라언은 돈주머니를 쳐다보지 않고 조용히 말을 꺼냈다.

"하멜 님. 걱정되는 게 하나 있습니다."

"말해."

"조직의 세력이 커지면 크로니아의 눈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크로니아 가문이야말로 변경의 지배자가 아닙니까."

[그렇지. 크로니아가 바보도 아니고, 커지는 세력을 가만히 둘 리가 있나?]

러쉘은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루시온 네가 중간에서 잘 조절해야겠는데?]

[루시온 공이 생각 없이 말할 사람도 아니니 차분히 기다려보는 게 어떻겠나?]

베델이 미소를 보였다.

그녀의 눈동자에 믿음이 가득했다.

"그래서 반드시 저택에 들어가야 해."

루시온의 손가락이 강하게 책상을 가리켰고, 크라언이 입술을 핥았다.

"그러니까 하멜 님께서 말씀하시는 건… 귀족의 일원이 되자는 겁니까?"

"정확히는 귀족의 시종으로 위장하자는 소리야. 귀족이 가지는 위치상의 편리함을 이용하자는 거지. 그 외에 크로니아의 시선을 피할 방법이 있을까?"

"그래서 귀족의 지위를 가진 미엘라 씨를 끌어들인 겁니까?"

"아니. 그건 우연이었어."

루시온은 크라언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꺼냈던 종이 뭉치 중 가장 밑에 넣어두었던 종이를 꺼내 넘겼다.

"자."

일단 종이를 건네받은 크라언은 루시온의 다음 말을 차분히 기다렸다.

"체프란 자작가라는 귀족 지위는 이제부터 네 거야. 잘 써먹어."

종이를 쥐기도 전에 크라언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이제 무슨....'

하멜이 아낌없이 주는 나무도 아니고.

자유도.

돈도.

사람도.

힘도.

심지어 귀족의 지위까지.

"왜...."

크라언이 깊은 의구심을 가지며 목소리를 냈다.

"대체 절 어떻게 믿고, 이렇게 퍼주시는 겁니까?"

"그럼 날 배신할 생각이었어?"

"절대로, 단 한 번도 그런 마음을 먹은 적이 없습니다!"

크라언이 목소리를 높였다.

어느 날 찾아온, 자신에게 있어 신의 기적과도 같은 루시온을 어떻게 배신하겠는가.

인간이라면, 절대로 그럴 수 없었다.

"그럼 됐네."

루시온이 피식거렸다.

하지만 크라언은 여전히 루시온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말씀해주십시오. 고작 목에 노예라는 증표를 달았던 제가 대체 뭐길래, 이렇게 중요한 일을 맡길 수 있는 겁니까?"

"원래 이러신 분입니다."

흄이 무겁던 입술을 떼었다.

"길거리에 떠돌던, 부랑자나 다름없던 저 역시 하멜 님께 거둬졌습니다. 과분할 만큼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고작 그걸로?"

루시온은 자신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자신이 흄에게 준 건 의식주 해결과 집사로서 받는 월급 이외에 용돈이 고작이었다.

그 흔한 무기 하나 사주지 못했는데 과분하다니.

'흄이 생각보다 더 소박한 편이네.'

루시온은 흄이 받는 월급의 80% 정도를 먹거리에 쏟아 넣는 걸 알고 있었다.

거기에 라타 몫도 있을 테지.

돈을 어떻게 쓰든 흄의 마음이었지만, 이대로 단벌 신사가 될 기세라 이참에 흄의 옷이나 왕창 맞춰줄 셈이었다.

"예. 하멜 님이 고작 그거라고 여기는 것조차 제게 있어 무척 과분합니다."

흄이 미소를 짓자 크라언은 어깨에 힘을 빼냈다.

저 미소 하나로 하멜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기쁨.

그 미소는 쉽게 나타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멜 님."

크라언이 부드럽게 목소리를 냈다.

어쩌면 흑마법사라는 사실에 가장 깊게 색안경을 착용한 건 자신이 아니었을까.

세상에 어떤 사람이 담보도 없이 돈도, 조직의 자리도, 귀족의 지위까지 건넬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세상에 흑마법사보다 더한 놈들도 있는데.'

크라언은 색안경을 뺀 눈으로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하멜은 자신의 자유를 빼앗은 적도, 명령만 들으라고 강요한 적도, 무엇보다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위협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걱정스럽네. 내가 배신하면 어쩌려고.'

바보같이 다 퍼주고, 조직을 위해서 저렇게나 움직이고 있는데.

이만큼 많은 정보를 모으기 위해서 얼마나 움직이고, 돌아다녀야 할지 상상할 수 없었다.

자신이 왕자였던 시절에 이런 신하를 '충신'이라 불렀고, 이런 부하를 '오른팔'이라 지칭했다.

"그래, 말해."

루시온이 대답했다.

만약 모셔야 할 분이라면.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크라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약 모셔야 할 분이라면, 이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내가 설명한 것 중에 이해가 가지 않았던 부분이 있었어?"

루시온이 묻자 크라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제가 지금까지 하멜 님을 잘못 보았습니다."

"그런 건 별로 신경 안 써. 너한테 바라는 건 나를 배신하지 않고 조직을 잘 굴리는 것뿐이야."

"하멜 님. 그건 하멜 님께서 너무 손해입니다."

"손해? 아니. 나한테 있어 조직이 제대로 굴러가는 것만큼 기쁜 소식은 없어."

'…역시.'

크라언은 숨을 짧게 내쉬었다.

자신의 평판이 어떻든 말든 조직을 위하는 하멜을 더는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상 하멜은 자신에게 조직의 권력을 거의 맡기고 있었다.

몇 번을 생각해도 '자신이 배신한다면' 이라는 전제가 없는 사람 같아 도리어 걱정스러웠다.

"하멜 님. 절… 믿으십니까?"

크라언의 물음에 루시온은 코웃음을 쳤다.

"나도 우물 바닥이라는 게 있어. 돈이 무한히 나오지는 않아."

루시온은 말을 흐렸다.

루시온이 믿은 건 크라언이 가진 양심이 아니라, 미래에 크라언이 펼쳐나갈 미래였다.

그 미래에 자신은 숟가락 하나만 얹을 예정이었고.

"제가 지금까지 색안경을 끼고 있었습니다. 저희를 도와주신 은혜와 별개로 흑마법사라는 사실이 부담스러웠죠."

"그 부분은 나도 인정해. 쌓인 이미지가 워낙 거지 같으니 어쩌겠어?"

루시온은 크라언이 자신을 뭐라고 생각하든 조직만 제대로 굴린다면 바랄 게 없었다.

사람 마음을 어떻게 쉽게 얻을 수 있을까.

루시온은 그것까지 바란 적이 없었다.

크라언이 갑자기 루시온에게 고개를 숙였다.

루시온은 엉덩이를 들썩일 정도로 놀랐다.

'갑자기 왜 이래?'

84화. 충성을 당신께(3)

뜬금없는 크라언의 심경 변화에 루시온은 가만히 그를 지켜보았다.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크라언은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살아갈 장소도, 자유도, 새로운 삶도 전부 하멜 님에게 받았으니 은혜를 갚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멜 님이 바라시는 대로 이 조직은 하멜 님을 지키기 위해 성장시키겠습니다."

실제로 루시온 자신이 한 거라고는 크라언의 성장에 비료를 뿌린 것뿐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크라언의 구원자가 된 듯한 분위기에 루시온은 당장 자리를 뜨고 싶었다.

"나는 네가 생각한 것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야."

"아뇨. 저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것들을 아무 의심 없이 주는 사람은 처음 봅니다. 아마 누구도 쉽게 하지 못하는 행동이겠지요."

크라언은 루시온의 말에 반박하자 흄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너희에게 10만 델을 준 것도 변덕일 뿐이었고."

"하멜 님께서 정말로 단순한 변덕으로 저희에게 거금인 10만 델을 주셨을지 모르겠지만, 그 돈이 저희의 모든 걸 바꿔놓았습니다."

'틀렸다.'

루시온은 크라언의 눈빛을 보자마자 변명하길 그만뒀다.

아무래도 뭔가 단단히 오해한 모양이었다.

'뭐, 이러면 어쩔 수 없지.'

애초에 루시온 자신이 강요하지도 않았고, 크라언도 생각을 할 줄 아는 사람이니 오해를 하든 어쨌든 생각하고 결정을 내렸을 게 아닌가.

루시온은 그냥 편안하게 크라언이 넘긴 걸 주워 먹기로 했다.

"나를 지키겠다고?"

"그렇습니다. 이 조직은 하멜 님을 지키기 위해 성장시키겠습니다."

단 한 명의 흑마법사를 지키기 위해 성장하는 조직.

루시온은 그게 참 우습다 싶었다.

그렇다고 루시온은 분위기에 휩쓸려 자신의 정체를 밝힐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좋아. 해봐."

"맡겨주십시오."

"일단 이 계획서는 초기 단계고, 어디까지나 뼈대니까, 살을 붙이는 건 크라언 네가 해야 할 거야."

루시온은 바로 일로 넘어갔다.

크라언이 조직의 목표를 잡았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크라언 역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예. 제가 검토 후에 보고드리겠습니다."

"혹시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나?"

루시온이 물었다.

"하멜 님께서도 조직원과 교류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다못해 이 조직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고...."

"안 돼."

루시온이 크라언의 말을 칼같이 끊어내며 목소리를 무겁게 가라앉혔다.

"내가 왜 널 우두머리로 내세웠는지 몰라서 그러나?"

"죄송합니다. 이유는 알고 있습니다."

루시온이 흑마법사이기에 조직이 완전히 성장하기 전까지 그 사실을 들킨다면 와해될 가능성이 컸다.

조직 내부에서 흑마법사의 존재를 알리는 것도 무척 위험했지만, 훗날 조직원이 받을 충격을 흡수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조직원들과 교류를 나눠보시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합니다."

교류라는 말에 루시온은 주먹을 꽉 쥐었다.

참 싫은 말이라 생각했다.

"나중에."

"낯가림이 있을 거라 생각은 못 했습니다. 의외네요."

충성의 맹세 이후 마음이 편안해졌는지 루시온을 대하는 크라언의 태도가 부드러워졌다.

"시끄럽고, 그 외에 내가 할 건 없지?"

"피터가 내내 하멜 님을 기다렸습니다."

피터.

루시온이 데려온 마방사이자, 로베리오 백작 밑에서 일을 하던 악역.

"그래. 만나야지."

"아, 하멜 님."

루시온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쯤 크라언이 그를 불렀다.

"이제 슬슬 조직의 이름을 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에일."

"어감이 괜찮네요. 뜻은 있습니까?"

"없어."

"조직의 상징 문양은...."

"슈트라하고 헬론하고 어쨌든 아무나 머리를 맞대서 잘 생각해 봐."

"알겠습니다."

크라언이 키득거렸다.

말투에서 귀찮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피터는 건물 뒤쪽에 있을 겁니다."

"그래. 나중에 연락하지."

"예. 하멜 님의 연락을 기다리겠습니다."

크라언은 루시온에게 고개를 숙였다.

'…에일이라.'

루시온이 떠나고 크라언은 루시온이 지은 조직 이름을 생각했다.

확실하진 않아도 에일과 관련해서 자신이 아는 뜻이 있긴 했다.

술.

그리고 자유를 뜻하는 고대어.

'후자라고 생각하는 게 낫겠지?'

크라언은 한결 편안한 얼굴로 실소를 내뱉었다.

* * *

루시온이 크라언의 방을 나오자마자 라타가 참았던 말을 쫑알거렸다.

―라타 눈에는 있지. 크라언의 말이 너무 멋졌어. 흄이 읽어주는, 책에서 나오는 기사 같았어.

루시온의 그림자 속에서 라타의 얼굴이 살짝 튀어나왔다.

배시시 웃고 있었다.

―있지, 루시온. 베델도 그랬고, 흄도 그랬고, 방금 크라언도 그랬어. 이제 라타 차례야. 라타가 루시온한테 충성을 맹세하면 받아줄 거야?

루시온은 조심스러운 라타의 물음에 잠깐 피식 웃었다.

초롱초롱한 라타의 눈빛에 잠깐 걸음을 멈춰 손가락으로 라타의 이마를 꾹 눌렀다.

이미 러쉘은 등을 보이며 어깨를 씰룩거리고 있었다.

신수가 충성의 맹세라니.

그래도 러쉘은 라타를 생각해 필사적으로 참고 있었다.

―혹시 라타가 가장 약해서 받아주지 않을 거야? 라타는 아, 앞으로 트로에 아저씨처럼 쑥쑥 자랄 거야! 그래서 루시온도 태워줄 건데!

"아니. 라타 넌 특별하니까 그럴 필요 없어."

루시온이 작게 속삭였다.

―라타가 특별해?

라타의 입꼬리가 높이 올라갔다.

귀가 꼬리처럼 접혔다 펴지기를 반복했다.

"그래."

루시온은 대답하며 라타를 그림자 속으로 살짝 밀어 넣었다.

사람이 없어서 망정이지.

―홉! 라타가 특별하다니…! 믿을 수가 없어!

좋아서 방방 뛸 라타를 생각하니 루시온의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루시온은 잠깐 걸음을 멈춰 흄을 바라보았다.

흄 역시 그림자를 보며 실소를 내뱉고 있었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흄."

"…저도 그렇습니까?"

갑작스러운 루시온의 말에 흄의 눈동자에 금세 빛이 어린 것처럼 반짝거렸다.

"그래."

"처음… 입니다."

흄의 입가에 천천히 해맑은 미소가 번져갔다.

"감사합니다, 하멜 님."

[기특하다, 루시온.]

러쉘은 참았던 손뼉을 마주쳤다.

루시온이 누군가를 챙길 사람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스승으로서 감격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루시온 공이 원래 이러지 않았다는 건가?]

베델이 호기심이 어린 눈동자로 묻자 러쉘은 이때다 싶어 루시온을 쪼아댔다.

[대단했지. 아니, 어마어마했지.]

'스승님....'

루시온은 입을 꽉 다물며 피터가 있는 건물 뒤편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자신을 힐끔힐끔 바라보는 조직원들의 시선에 루시온은 아예 걸음을 멈춰 그들을 바라보았다.

호기심, 언짢음, 신기함 등등 여러 가지 감정이 섞인 시선에 루시온은 옷자락을 꽉 잡았다.

나아지긴 했어도 거북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무시하고 가는 게 어떻겠나, 루시온 공?]

베델이 루시온의 손에서 일어나는 떨림을 보자 제안했다.

아직도 베델은 루시온에 대해 잘 모르지만, 저 떨림은 정상적인 떨림이 아니었다.

[그래. 크라언하고 자마드가 좀 특이했지. 원래는 저 시선이 보통 반응이니까 크게 신경 쓸 필요 없어.]

"혹시 당신이 조직에 있는 유일한 흑마법사입니까?"

그때, 조직원 중 한 명이 루시온에게 다가왔다.

"맞습니다."

순간, 주변이 웅성거렸다.

"그럼, 조직을 위해 나가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루시온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말에 잠깐 멈칫거렸다.

"너 지금 뭐라고 지껄였어?"

누군가 분개하며 다가왔다.

헬론이었다.

마침 짐을 옮기고 있던 모양인지 무언가 우르르 떨어지는 소리도 덩달아 들렸다.

"헤, 헬론 씨."

다짜고짜 헬론에게 멱살을 잡히자 남자는 당황했다.

[그대로 후려쳐! 저딴 놈들은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러쉘이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아니.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으니 목을 베어내야지.]

베델이 검 손잡이를 꽉 쥐며 기세를 높였다.

주변이 덩달아 차가워지는지, 이유 모를 한기에 몸을 떠는 사람도 나타났다.

헬론은 멱살을 잡은 상태로 남자를 흔들었다.

"나가야 할 건 하멜 씨가 아니라 너야! 크라언 님이 뭐라고 했어? 조직 내에 분란은 무조건 금지라고 했지?"

"하지만 흑마법사잖습니까! 솔직히 이렇게 같이 있는 것도 무섭다고요!"

"그럼 여길 오지 말았어야지. 사전에 분명 말했고, 동의까지 해놓고 딴소리야?"

"그러니까...."

"네가 쓰고 먹는 그 돈이 누구 손에서 나오는 줄 알아?"

"나다, 개새끼야."

루시온이 헬론의 뒷말을 이으며 피식거렸다.

"돈을 받았으면 그 돈이 누구 주머니에서 나왔는지는 알아야지. 내가 나가면 조직 운영비는 네가 감당할 수 있고? 자신 있나 보네."

이미 피이자트 가문 놈의 재산이 손에 들어온 상태였다.

조만간 로베리오 백작 놈이 가졌던 돈도 들어올 테고, 노비오가 주는 용돈에 크라언을 시켜서 넣은 투자금까지.

그뿐만 아니라 루시온은 돈을 벌 방법을 많이 알고 있었다.

루시온은 아무 말도 못 하는 남자에게 다가가 머리를 기분 나쁘게 툭툭 치며 때렸다.

"그러게 감당하지도 못할 거면서 왜 건드려? 난 건들지 않으면 안 물어. 알겠어?"

루시온의 경고는 남자에게만 향하지 않았다.

자신이 흑마법사라는 이유로 적의를 품는 이들에게도 하는 소리였다.

흑마법사의 돈을 받은 멍청한 놈들.

루시온은 그렇게 지껄이고 놈의 머리를 붙잡아 바닥에 들이박게 하고 싶었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하기로 했다.

애초부터 저들이 흑마법사인 자신을 이해하리라 생각하지 않았고, 분란을 일으키지 말자는 조항을 자신이 깨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저 남자는 조직의 기강을 위해서 필요했다.

입을 잘못 놀리면 어떻게 되는지.

자신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로 보여줘야 하지 않겠나.

[여기서 멈추게?]

러쉘의 물음에 루시온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여기서 저놈을 죽여봤자 반발심만 생길 뿐.

곧 자신이 손에 넣을 체프란 자작가라는 좋은 무대를 내버려 두고 왜 여기서 반발심만 부추기겠는가?

[조금 더 해도 될 듯한데. 뭐어, 그게 네 선택이라면.]

러쉘이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고맙습니다, 헬론 씨."

루시온의 가면 색이 푸르게 물들었다.

"아닙니다. 아마 슈트라가 있었어도 이랬을걸요?"

헬론은 놈을 놓아주며 말했다.

"슈트라가요? …설마요."

헬론에게도 눈이 있다면 슈트라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을 텐데.

"슈트라가 말이 좀 삐딱해서 그렇지 생각보다 엄청 착합니다."

"예.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루시온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피터를 만나고자 건물 뒤로 향했다.

'파도가 벌어지네.'

자신의 걸음을 따라 사람들이 주변으로 물러났다.

루시온은 그 모습이 참 웃겼으나, 제법 괜찮은 첫인상이라 생각했다.

차라리 아무도 자신을 건들지 못하는 쪽에 서 있는 편이 나았다.

"하멜 님."

흄이 무겁게 루시온을 불렀다.

그녀의 사나운 시선은 조직원들에게 가 있었다.

"말해."

"어떻게 화를 참을 수 있습니까? 저는 참기가 힘듭니다. 당장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습니다."

"나도 그래. 하지만 내 아량은 여기까지야. 나도 조직의 일원이니 이 정도는 베풀 수 있잖아?"

두 번째는 없다는 소리에 흄은 그제야 숨을 크게 내쉬었다.

"인내심이 대단하십니다."

"참는 건 자신 있거든."

루시온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저기 혼자만 고독을 씹고 있는 사람이 피터 아니야?]

러쉘이 나무 근처에 앉아 무언가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맞습니다. 피터네요."

루시온은 노랗게 물든 가면으로 피터에게 다가갔다.

한결 밝아 보이는 피터의 모습에 아무래도 하던 일이 잘 풀렸다는 걸 알았다.

'피터와 연결됐던 푸른 실도 저번에 기절했을 때 잘려나간 모양이고.'

루시온은 피터와 연결됐던 푸른 실이 사라진 모습도 확인했다.

피터는 루시온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넙죽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하멜 님."

"동생은 괜찮고?"

"예. 덕분에 저주에 풀려 지금 회복하고 있습니다."

피터가 어색하게 미소를 짓자 덩달아 그의 눈가에 짙은 그림자가 보였다.

"지낼 곳은 있어?"

루시온이 물었다.

"크라언 님이 마련해주셨습니다."

"잘됐네. 로베리오가 죽었으니 당분간 널 쫓을 놈도 없을 테고."

"소식이 빠르십니다."

"빠를 수밖에. 어쨌든, 조직에 온 걸 보니, 여기에 머물 생각은 있나 보네."

"저는 하멜 님만 보고 이곳으로 왔습니다. 제 동생을 살려주신 은혜. 절 그놈에게서 해방해준 그 은혜. 모두 갚으러 왔습니다."

피터의 목소리는 깊었고, 그의 눈동자에 비치는 루시온은 말 그대로 성자와 같았다.

"그럼 지금 바로 갚으면 되겠어."

루시온이 손을 내밀었다.

피터는 흑마법사가 그의 동생에게 저주를 걸어 로베리오 백작에게 붙잡혀 살았다.

원하지 않았던 일일지라도 누구보다 로베리오 백작과 가까이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럼 피터의 손에는 뭐가 있겠는가.

"잠깐 자리를 옮겨도 되겠습니까?"

"그래."

루시온은 피터의 제안에 흔쾌히 허락했다.

피터가 앞장섰고, 루시온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렇지 않아도 하멜 님을 만나면 제가 지금까지 보았던 것들을 알려드릴 셈이었습니다. 저도 같은 놈을 쫓고 있으니까요."

동생에게 저주를 건 놈들.

자신의 인생을 엉망으로 만든 그놈들.

피터의 목소리에는 깊은 분노가 가득했다.

"로베리오는 그저 일개 감독관, 아니, 꼭두각시였습니다."

이미 루시온이 아는 이야기였다.

"제국에 놈들의 지부가 6개가 있습니다. 로베리오 역시 그 지부를 맡은 자밖에 되질 않습니다."

"…지부라니?"

"로베리오를 조종했던 놈의 뒤에는 뉴브라 왕국이 있습니다. 그 뉴브라 왕국이 제국을 차지하기 위해 정보를 모으는 장소를 지부라고 합니다."

[뉴브라 왕국이…? 그놈들이 대체 언제 제국에 뿌리를 잡았다는 거지?]

베델이 크게 반응했다.

그녀가 기사였던 만큼 제국의 충성심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듯 보였다.

"각 지부에서 제국의 정보를 모아 뉴브라 왕국으로 가져가는 장소가 있습니다. 겉모습은 여관이나 그 지하 밑에는...."

'…잠깐만.'

루시온이 피터의 이야기 도중에 눈이 번뜩 뜨였다.

여관 밑 장소라면 이미 자신이 갔던 곳이 아닌가.

85화. 체프란 자작가

[저기잖아.]

―개미굴!

라타가 러쉘의 뒷말을 이었다.

[알고 있는 장소인가?]

베델이 물었다.

[알다마다, 루시온이 정보도 조작하고 왔는데?]

러쉘은 놀란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장소라 생각했지만, 설마하니 뉴브라 왕국이 만든 곳이라니.

"그리고 크로니아 만큼은 유일하게 지부가 없어 다른 방법을 사용해서...."

"잠깐만. 크로니아에는 지부가 없다고?"

소설과 다른 흐름으로 흐르는 상황을 생각하다 루시온은 피터가 꺼내는 크로니아라는 말에 반응하며 물었다.

"변경은 흑마법사가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니까요. 그렇지 않아도 제가 오히려 묻고 싶었습니다."

순간, 러쉘과 베델이 최대한 표정을 관리했다.

크로니아 저택을 거점으로 삼아 흑마법사를 죽이는 죽음의 기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루시온에게 비밀이었으니.

'흑마법사가 들어올 수 없는 곳이라고…?'

루시온은 어리둥절했다.

'내가 흑마법사인데?'

"제가 흑마법사가 아니라서 모르지만, 무언가 흑마법사를 죽이는 자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냥 헛소문에 불과한 모양입니다."

피터는 당장 눈앞에서 살아 있는 흑마법사를 보며 말했다.

얼마나 크로니아의 지배자인 노비오가 무서운 존재였으면 그런 말이 떠돌았을까.

"그래서 그 지부의 위치는 알고 있어?"

루시온은 헛소문을 뒤로 넘겼다.

자신도 흑마법사이니 소문이 진짜라면 뭐가 일어나도 진작 일어나지 않았겠나.

"지부의 위치는 알고 있지만, 6개의 지부 모두를 관리하는 그놈을 아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자신의 정체가 들키면 죽는다는 건 놈도 알고 있으니 언제나 늘 꼭꼭 숨기고 있었죠."

십자 흉터, 검은 새끼손톱.

지금까지 놈과 관련된 정보였다.

'대체 얼마나 꼭꼭 숨겼길래 아무도 몰라?'

루시온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목소리도 변조했고, 로베리오와 만났을 때 얇은 벽을 이용하거나, 천으로 모습을 가리는 등 어쩌면 로베리오가 만났던 놈마저 진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주로 밤에 놈을 만나 부엉이라 부르곤 했습니다."

[이렇게 정체를 숨기려는 걸 보면 얼굴이 알려지면 그 피해가 상당한 사람, 대중적으로 얼굴이 알려진 자일 가능성이 큰 높은 관직 혹은 고위 귀족이 유력하겠어.]

베델이 목소리를 내며 눈동자를 굴렸다.

기사로서 활동하면서 높은 관직에 고위 귀족들을 자주 보곤 했다.

[추가로 손등에 십자 흉터, 새끼손톱이 검다는 사실도 나왔어.]

러쉘은 베델에게 추가로 나온 사실을 알려주었다.

[십자 흉터…?]

베델의 눈이 순간 요동치자 러쉘이 물었다.

[뭐야. 혹시 아는 사람이 있어?]

[…있어. 내가 한때 모셨던, 날 배신했던 쓰레기 자식. 놈의 손등에 십자 흉터가 있는 걸 알아.]

베델은 이를 빠드득 갈며 주먹을 꽉 쥐었다.

루시온이 베델을 바라볼 때쯤에 피터가 걸음을 멈췄다.

"그래도 방법이 있긴 합니다. 다만, 누구라도 이용하기 어렵지요."

"일단 말해봐."

루시온은 피터를 재촉했다.

"크로니아에 지부가 없는 대신 놈들은 사람을 심어뒀습니다. 그놈을 쫓고, 연결된 놈들을 쫓다 보면 부엉이에게 도달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문제는 크로니아에 쉽게 들어갈 수 없다는 겁니다."

크로니아라는 말이 나오자 러쉘은 입가를 씰룩거렸다.

그 크로니아의 막내아들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피터가 해결책으로 내놓았던 방법은 이미 루시온이 사용하고 있었고.

"가장 경계심이 많고, 폐쇄적이며 겪어야 하는 시험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얼마나 들어가기가 어려우면 황실보다 크로니아에 들어가기가 힘들다는 말이 나오겠습니까?"

'많긴 많지.'

루시온도 그 시험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7번에 걸친 시험.

시험은 기사든, 집사든, 시녀든 직업을 따지지 않았다.

하지만 대우만큼은 어느 가문보다 좋으며 제 잘못으로 잘린 놈은 있어도 스스로 크로니아에서 나간 이들은 단 한 명도 없을 정도였다.

순간, 흄이 흠칫거렸다.

자신은 그 크로니아에 그냥 들어오지 않았던가.

"로베리오 놈도 시도하지 않은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했죠."

"그래도 네가 알고 있는, 놈들이 크로니아에 심어둔 리스트를 내놔봐."

루시온이 손을 내밀자 피터는 미안한 얼굴로 서류를 넘겼다.

"큰 도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아니, 엄청 도움이 됐지. 루시온이 하는 일에 확신을 얻은 셈이니까.]

피터에게 목소리가 닿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러쉘은 피터를 보며 잘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 이쯤 되면 세력 관계를 정리할 필요가 있겠네.'

루시온은 로베리오 뒤에 부엉이가 있고, 부엉이의 뒤에 뉴브라 왕국이 있다는 걸 피터를 통해 확인했다.

"그럼 흑마법사, 아니, 공허의 손 놈들은 뭔데? 단지 로베리오하고 계약한 놈들인지 아니면 뉴브라 왕국이 손이라도 잡았다는 건지. 알고 있는 대로 말해."

"…그 흑마법사들이 공허의 손이라는 걸 어떻게 아신 겁니까?"

루시온이 묻자 피터가 당황하며 물었다.

"어쩌다 보니. 그래서? 공허의 손은 누구와 손을 잡은 건데?"

"뉴브라 왕국에서 로베리오에게 써먹으라고 내어준 흑마법사입니다."

피터의 대답에 루시온은 잠깐 말을 잇지 못했다.

'미친....'

로베리오가 뉴브라 왕국에 공허의 손이 있다고 말했을 때, 당연히 아지트가 공허의 손에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한 왕국과 흑마법사가 손을 잡았다?

'아니, 뉴브라 왕국에서 흑마법사를 포섭했다는 사실이 더 어울리겠지.'

흑마법사를 세계의 적으로 판단하는 이 세계에서 어떻게 흑마법사와 손을 잡는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그것도 하나의 단체가 아닌 왕국이.

[이 무슨....]

러쉘도 황당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헛웃음을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모든 나라에서 어떤 철퇴를 맞을지도 모르는데 흑마법사와 넙죽 손을 잡을 만큼 뉴브라 왕국이 간이 큰 나라였다고?]

'그러게. 그 뉴브라가?'

루시온은 러쉘의 말에 덩달아 의문을 드러냈다.

제국이 왜 제국이겠는가.

뉴브라 왕국이 아무리 2인자이나, 테슬라 제국이 가진 힘에 반도 따라잡지 못한 상태였다.

특히, 십여 년 전에 뉴브라 왕국이 노비오에게 짓밟힌 이유로 변경에서 깝죽거리는 뉴브라 왕국의 행동은 가끔 돌발 행동을 하나, 거의 보여주기식에 가깝게 변하기까지 했다.

만약 전쟁이 일어나도 신성 국가 네바스트가 어느 쪽에 설지 뻔하니 누가 보아도 결과는 분명했다.

'…그나저나 공허의 손이 단지 악역들을 흡수해서 커진 게 아니었다니.'

이제야 루시온은 공허의 손의 성장 비결을 알아차렸다.

'제국을 삼키려는 뉴브라 왕국. 흑마법사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힘이 필요한 공허의 손. 둘 다 손을 잡기에는 제격이네.'

루시온의 가면 색이 주황색으로 변했다.

살짝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라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놈들의 목적이 뭐야? 뉴브라 왕국은 제국이 목적일 테고, 흑마법사들의 목적이 뭐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국의 멸망을 바라는 건 뉴브라와 똑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 뉴브라와 공허의 손이 가진 초점은 결국, 제국의 방패이자 창인 크로니아로 맞춰지게 되겠네?"

루시온이 한번 피터를 떠봤다.

아무리 자신이 피터에게 있어 은혜를 갚아야 할 사람이나 모든 정보를 알려주지 않을 테니까.

"제국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무조건 크로니아를 거쳐야 하니 목적 안에 당연히 있겠지요."

"하지만 크로니아는 너무 커. 노련한 방패이니 뚫을 틈이 없지. 딱 한 가지 약점만 빼면 말이야."

순간, 피터가 동요했다.

[정답이긴 한데....]

러쉘이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 이름을 직접 올려야 하는 루시온의 기분이 어떻겠나.

루시온은 다시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 막내아들인 루시온 크로니아. 괴물들만 이루어진 크로니아에서 유일한 일반인이지."

피터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차피 숨길 수 없는 이야기라는 걸 인지했다.

"저도 정확하다고 말씀드릴 순 없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변경의 지배자인 노비오를 흔들리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카드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루시온의 몸값이 무척 올라간 상태니까요."

베델이 루시온을 살폈다.

하지만 가면에 가려져 그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알기 어려웠다.

피터가 자신을 가리켰다.

"하멜 님.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지 아십니까?"

"조직이 저 6개의 지부를 박살 내야 하기 때문이겠지."

"예. 저는 요 며칠 조직을 지켜봤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조직의 주인은 크라언이 아닌 하멜 님으로 보이십니다."

'예리한데?'

루시온이 웃음을 꾹 참았다.

"조직이 설립된 지 2주 정도 지났다고 들었습니다. 누구도 이만큼 빠른 성장세를 보일 수가 없습니다. 저는 하멜 님이 가지신 힘을 감히 높이 보았습니다."

"그래서?"

"6개의 지부를 부순 후, 테슬라 제국을 방패로 삼아 크게 성장하십시오."

피터가 종이를 건넸다.

루시온은 일단 종이를 받았다.

그 순간, 푸른 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푸른 실이 6개라고?'

마치 지부 6개를 의미하는 것처럼 처음으로 많은 숫자의 푸른 실이 자신을 휘감았다.

루시온은 금방이라도 새어 나올 것 같은 욕지거리를 꾹 눌렀다.

저 중에 몇 개의 푸른 실이 붉은 실로 변할지 알 수 없었다.

"네 복수를 도우라고?"

루시온은 피터에게 물으며 자신의 몸에 연결된 푸른 실들을 보았다.

복수는 자신의 길이 아니라는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예. 거짓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분명 조직을 위해 도움이 될 겁니다."

피터 말대로 6개의 지부를 부수고, 뒷배가 뉴브라 왕국임을 밝힌 그 대가로 테슬라 제국의 보호를 받을 수 있고, 조직은 안전하게 쑥쑥 성장할 테지.

"아니. 내 조직은 제국과 협력은 하되, 밑에 들어가지 않아."

하지만 루시온이 바라는 길이 아니었다.

"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해야 할 테니까."

"...?"

"그래도 좋다면 들어와. 복수는 네가 만족할 만큼 확실히 해주지. 약속해."

공허의 손을 부수는 일은 곧 자신의 미래를 바꾸는 일이기도 했다.

자신은 6개의 지부를 부수지 않고, 오히려 이용할 셈이었다.

그때, 6개의 푸른 실이 팽팽해졌다.

피터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눈빛이 너무도 굳건했다.

"무얼 망설이겠습니까? 어차피 미래가 없던 저에게 미래를 쥐여준 건 하멜 님입니다. 이 두 번째 목숨과 제 마법은 지금부터 오로지 하멜 님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래."

루시온이 기쁘게 대답했다.

복수라는 목적이 있지만, 루시온 자신은 최고의 방술사를 손에 넣었다.

* * *

루시온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샨드라에게 다가가 가면을 벗었다.

"…하."

막 답답한 건 아니었지만, 역시 바람이 피부에 닿는 이 느낌이 무척 좋았다.

막 망토도 벗으려던 차에 라타가 목소리를 냈다.

―왜 루시온을 노리는 거야?

라타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루시온이 피식 웃었다.

"내가 크로니아의 약점이니까."

―아니야. 루시온은 약점이 아니야. 라타가 알아.

"불과 3주 전만 해도 그랬어. 아니, 스승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지."

3주라는 말에 베델은 깜짝 놀란 표정을 숨기기 어려웠다.

고작 3주 만에 마법을 이만큼 쓸 수 있다고?

―그럼 왜 인간들은 흑마법사를 싫어하는데? 어둠은 나쁘지 않아. 어둠은 착해. 이것도 라타가 알고 있어.

[망자를 일으키고, 유령이라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존재와 소통할 수 있으니까. 그들 눈에는 보이지 않으니 무서울 수밖에.]

러쉘이 루시온 대신 대답했다.

―라타는 모르겠어. 라타가 보기에 그냥 힘을 사용하는 모습이 다를 뿐이라고 생각해.

열심히 생각하려는 라타가 참 기특해 루시온은 쭈그려 앉아 라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도련님."

"그래, 흄."

"혹시 또 다른 곳에 들리실 예정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오늘 이만하고 저택으로 돌아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도련님께서 무척 피곤해 보이십니다."

"그래. 저택으로 돌아가야지. 온종일 돌아다녔더니 좀 지치네."

루시온은 가면과 망토 등 옷가지를 마법 주머니에서 넣고는 샨드라에 올라탔다.

흄과 라타마저 올라타자 샨드라가 움직였다.

루시온은 바람을 맞으며 생각에 빠졌다.

자신이 상대해야 할 적이 단체가 아니라 왕국이라는 사실이 충격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가 갈렸다.

'또 뉴브라 왕국인가. 또 그놈들이야?'

자신을 납치했던 적국이 바로 뉴브라였다.

86화. 체프란 자작가(2)

그놈들이 또 자신에게 손을 뻗으려 하고 있었다.

갑자기 솟구치는 소름에 루시온은 고삐를 세게 쥐었다.

'이번에는 달라.'

아무런 힘도 없이 당해야 했던 어렸을 때 자신과 지금은 달랐다.

'가만히 당하고 있지 않을 거다.'

적을 알았다.

이제 자신이 준비해야 할 것들은 뻔했다.

'두 번은 없다, 뉴브라.'

* * *

'…편지가 꽂혀 있다고?'

헤인트는 자신의 집에 꽂힌 편지를 바라보며 잠깐 서 있었다.

집을 산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카슨도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편지라니.

헤인트는 참 찝찝했다.

황제에게 직접 보고를 마친 후, 가게에 들러서 산, 시원한 술과 뜨끈뜨끈한 닭볶음 요리에 한참 기분이 좋았는데.

헤인트는 발을 통해 빛을 집 안으로 내보냈다.

안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편지를 손에 쥐었다.

일단 집으로 들어와 에일과 닭볶음을 내려놓은 뒤에 편지를 뜯었다.

―루미노스가 있는 위치가 필요할 것 같아 보내오.

'뭐...?'

헤인트는 미간을 찌푸렸다.

편지봉투 안에는 첫 줄에 적힌 대로 장소가 적힌 추가 종이가 있었다.

―믿든 안 믿든 자유지만, 한 달, 석 달, 아니 어쩌면 3년이 넘는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소?

'누가… 내 뒷조사를 한 거지?'

외부인의 등장에 헤인트는 달갑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황실 기사단 내부에 자신을 좋게 보지 않는 이들이 많았다.

짐작 가는 사람이 머릿속에 한가득했다.

'그중에서도 가르티오 녀석이 신경 쓰이는데.'

가르티오 뭰.

뭰 자작의 둘째 아들이었다.

같은 황실 기사이지만, 다른 기사단에 속해 있었다.

며칠 전 야간 근무 때 가르티오가 주변을 살피다 성벽을 넘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 새벽이 밝아왔고 옷은 달라져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수상해 순찰이라는 명목으로 가르티오 근처를 다가가니 자신의 빛이 반응했었다.

빛이 반응하는 건 크게 두 가지였다.

어둠.

그리고 빛이 깃든 물건을 소유하고 있을 때.

'…하.'

헤인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좀 쉬어보나 했는데 다시 또 보고하러 가야겠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술과 닭볶음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딱 한 입만 먹고 갈까?'

군침을 삼켰다.

* * *

루시온은 편지를 한가득 들고서 자신의 방 앞에 서 있는 안토니를 보았다.

"도련님."

안토니가 루시온을 보며 방긋 웃었다.

"가문 문장과 도장이 정확한 것들만 거르고 가져왔습니다."

"…이게 다 내 편지란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안토니의 대답에 루시온이 눈살을 찌푸렸다.

편지라면 보기만 해도 불쾌해졌다.

"제일 위에 있는 편지는 텔라 루테온 영애께서 보내신 편지입니다."

[오! 바로 뜯어봐야지!]

러쉘이 크게 반겼다.

[왜 그렇게 기뻐하나, 러쉘?]

[루시온의 첫 친우니까. 스승으로서 기쁠 수밖에.]

[아. 과연 그럴 수밖에 없겠어. 내 스승님도 참 기뻐하셨으니까.]

베델이 과거를 떠올리는지 눈가에 애틋함이 맴돌았다.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흄이 안토니에게 두 손을 내밀었다.

"고맙구나."

안토니가 활짝 웃으며 편지를 흄에게 건넸다.

"그럼, 조금 있다가 저녁 시간에 맞춰 부르겠습니다. 목욕부터 먼저 하시겠습니까? 어딜 다녀오셨는지 몰라도 무척 즐거우셨던 모양입니다."

안토니가 흙먼지가 덕지덕지 묻은 루시온의 옷을 보며 사람 좋게 웃었다.

여전히 안토니 눈에 비치는 루시온은 아이 같았다.

"흄한테 말할 테니 이만 돌아가보게."

루시온은 손을 휘휘 젓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예.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도련님."

"들어가십시오."

안토니가 루시온에게, 흄이 안토니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무 곳에나 올려놔."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루시온이 대충 손짓했다.

"보고해."

소파에 앉은 루시온은 겉옷을 벗으며 유령 2번을 바라보았다.

[예, 예! 12명 모두 지하 감옥에 가둬져 심문을 받고 있습니다. 현재 혼자만 붙잡히지 않은 그 집사는 불안함에 떨다 짐을 싸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아니고, 내일도 너무 일러. 한 이틀, 사흘 안에 도망하겠네.'

루시온은 조용히 생각하며 피터가 넘겼던 서류를 꺼내 크로니아에 심어놓은 사람 숫자를 세어봤다.

13명.

정확했다.

오차도 없이 자신의 유령이 고르고 골랐던 놈들과 이름이 모두 똑같았다.

이제 남은 건 그 집사 놈 혼자였다.

"2번."

루시온의 말에 유령은 바짝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예, 루시온 님.]

"잘해. 하늘로 올라가기 싫으면 말이야."

[잘하겠습니다!]

어떻게 루시온에게 용서해달라는 말을 하겠는가.

아무리 죽었어도 그 말만큼은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 나가서 계속 확인 감시해."

루시온은 한없이 차가운 눈길로 유령 2번을 바라보았다.

유령이 물러가고 루시온은 텔라가 보낸 편지를 옆에 놔두고 다른 것들을 읽어나갔다.

―루시온 크로니아 님. 저는 그날 보았던 크로니아 님의 위상을 도무지 잊을 수가....

찌익.

―달이 참 아름다운 밤이 아닙....

찌익.

'다 개소리만 지껄이고 있네.'

루시온은 답장을 보낼 마음도 들지 않아 개소리를 지껄인다 싶으면 그냥 찢어버렸다.

이따금 편지로 욕질을 퍼붓는 것보다 나았지만, 기분이 좋진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황실 기사단 가르티오 뭰이라고 합니다.

몇 번을 찢었는지 몰라도 드디어 제대로 된 편지가 나오자 루시온은 옆으로 치웠다.

'일단 분류만. 나중에 읽어야겠어. 피곤하네.'

"차를 가져올까요?"

흄이 물었다.

"아니. 따뜻한 우유로. 초콜릿도 몇 개만."

루시온은 편지를 선별하며 말했다.

―라타 것도 가져다줄 수 있어?

"예. 괜찮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흄은 라타를 쓰다듬었다.

―그럼 라타도 초콜릿 몇 개만 가져다주면 좋겠어.

"알겠습니다. 금방 가져다드리겠습니다."

흄이 싱긋 웃다 밖으로 나갔다.

[도와줄까, 루시온 공?]

베델이 물었다.

"아니. 그냥 적당히 사람같이 쓴 것만 고르는 중이라서 도와줄 건 없어."

지금 편지를 보낸 이들은 무조건 성자라는 자신의 칭호를 노리고 온 게 틀림없었다.

그런 것들이랑 교류할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저놈들이 아니꼬워봤자, 다음에 열리는 연회 때 방긋 웃으며 올 게 뻔하고.'

황제에게 관심을 받고, 크로니아 막내아들이라는 자신의 위치를 알기에 저지를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물론, 자신이 소설 속에 보았던 이름이 나오면 말이 달라졌지만.

[루시온 공.]

베델이 편지를 선별하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다 루시온을 불렀다.

"그래, 베델."

[머리가 복잡한가?]

"맞아. 촉각을 곤두세울 일이 늘어나네?"

루시온은 손을 멈추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솔직히 공허의 손만 빨리 치워버리면 끝날 줄 알았다.

갑자기 소설 속에 드러나 있지 않은 상황이 자신의 발목을 잡지만 않았다면 공허의 손의 우두머리를 잡으면 끝나는, 어떻게 보면 간단한 일이었던 것도 사실이었고.

'…뉴브라 왕국. 변수가 없었다면.'

[그런데 바뀌는 건 없어. 뉴브라 왕국이 루시온 너를 노린다고 해도, 너는 계속 흑마법을 배워서 강해질 거고, 조직도 키워나갈 거잖아?]

러쉘의 말에 루시온은 미소를 지었다.

"맞습니다, 스승님. 변하는 건 없습니다. 걸림돌이 조금 더 커졌고, 제가 하고자 하는 일이 더 중요해졌을 뿐이지요."

베델은 루시온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피어났다.

꿋꿋이 무언가를 하는 루시온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대견했다.

살았을 때, 만나서 저 등을 밀어줄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을.

"아마 더 바빠질 것 같습니다."

루시온이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아지트를 구하면 본격적으로 크게 키워봐야죠. 모두가 탐이 날 만큼요."

[루시온 네가 아마도 6개의 지부를 이용해 몸집을 불려 나갈 것 같은데, 나머지는 모르겠네.]

러쉘이라고 루시온의 생각을 다 아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루시온의 머릿속에 대체 뭐가 들었는지 들여다보고 싶을 정도였다.

"스승님. 제국이 강한 건 사실이나, 이 세계의 모든 것은 아닙니다. 조금 더 세상을 넓게 봐도 되지 않을까 합니다."

루시온이 꺼내는 말에 러쉘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반응했다.

[세계를 돌려고?]

"일단 시도는 해 봐야죠. 조직이 지금보다 더 커지면 자연스레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조직이 제대로 성장할 수 있겠습니까?"

루시온은 소설 속 헤인트가 떠돌면서 보았던 작고 큰 세력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일 생각이었다.

"그리고 저에게는 라타가 있습니다."

루시온이 라타를 가리키자 공을 깨물고 있던 라타가 눈동자를 반짝였다.

―라타가 가진 슝을 말하는 거야?

"그래."

루시온은 미소를 그렸다.

"제가 강해지면 라타가 강해집니다. 반대로 라타가 성장하면 저 역시 강해집니다. 라타는 아직 신수로서 힘을 깨우치지 못했고, 그림자 이동은 아마 더 성장하겠지요."

그림자 이동을 응용할 수만 있다면 포탈처럼 가능하지 않을까.

―맞아! 라타도 열심히 할 거야! 잘 먹고, 잘 놀고, 잘 자서 쑥쑥 클게!

라타의 꼬리가 크게 흔들렸다.

루시온은 일단 안전하게 제국에서 자리를 잡고 점점 넓게 세력을 벌려갈 생각이었다.

'이미 쥐쟁이들한테도 말해두었고.'

쥐쟁이를 체프란 저택이 있는 곳으로 불렀다.

그들을 손에 넣은 조직은 날개를 달아 더 성장하겠지.

자신의 비밀을 외부로 발설시키는 이들을 처단할, 조직의 검도 필요했다.

'그리고 나도… 강해져야 하고.'

루시온은 주먹을 꽉 쥐었다.

죽지 않고 행복해지는, 자신의 바람은 왜 이렇게 까마득한지.

루시온은 아예 소파에 드러누워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루시온 공.]

베델은 소파에 누운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당장 잠에 휩쓸릴 듯 눈이 풀려 있었다.

"듣고 있어."

[그럼, 당장 처리해야 할 체프란 저택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 피를 단 한 명만, 아니 몇 명만 흘린다는 게 애초에 가능한 일인가?]

"나는 가능해. 흑마법사니까."

루시온이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단 한 명만 잡으면 되거든."

[좋은 생각인데?]

러쉘은 루시온이 하려는 계획을 눈치챘다.

같은 흑마법사였기에 척하면 척 알아들었지만, 베델은 여전히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흄이 오면 같이 알려줄게."

루시온은 지친 얼굴을 드러내며 대답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이어 흄이 방으로 들어왔다.

루시온은 소파 앞 탁자에 놓인 우유가 든 컵과 그릇을 보며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옮기며 상체를 일으켰다.

"도련님."

"그래."

루시온은 우유를 든 컵을 들어 후후 불며 대답했다.

"도련님이 표적이 된 상황에서 제가 뭘 하면 되는지 알려주십시오."

"평상시대로 계속해."

"그러면 도련님께선 표적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아니. 그거랑 이거랑 달라."

"제가 강해지면… 도련님께서는 표적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까?"

흄의 거듭된 질문에 루시온은 우유를 한 모금 마신 후에 흄을 바라보았다.

간절한 그 모습에 루시온도 진지하게 대답했다.

"아니. 내가 크로니아라서 불가능해. 심각해지지 않아도 돼, 흄. 힘을 가진 자들에게 똑같이 벌어지고 있는 일이니까. 특히, 제일 많이 노려지는 건 황제지."

"…그렇습니까?"

"네가 강해지면 나는 죽을 확률이 줄어들겠지. 내가 강해져도 똑같이 죽을 확률이 줄어들 뿐이야. 강함이란 그런 거니까."

"누구도. 그 누구도 도련님을 건드리지 못할 만큼 강해지면. 그때는 도련님이 표적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참 흄답게 순수한 질문이라 생각했다.

"그렇겠지. 그때는 네 덕에 나도 자유롭겠지."

루시온의 대답에 흄의 눈동자에 깊은 의지가 보였다.

"저는 매 순간이 즐겁습니다. 이 즐거움을 주신 도련님께서 행복해지시는 것. 그게 제 바람입니다."

순간, 루시온은 놀란 눈을 하며 흄을 바라보았다.

흄은 누가 봐도 진심일 정도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상하게 코끝이 시큰거렸다.

"그래. 그게 네가 바라는 거라면."

루시온은 시선을 돌려 괜히 초콜릿을 삼켰다.

설탕이 덜 들어갔는지, 입 안에 쌉쌀한 맛이 감돌았다.

* * *

루시온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만 눈 좀 감아. 내일 움직이려면 일찍 자야지.]

러쉘은 눈이 말똥말똥한 루시온을 보며 콧바람을 세게 내쉬었다.

입만 다물고 있으면 참 순둥하게 생겼는데, 어떻게 저 머리에서 그토록 무모한 계획이 나왔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확실히 피를 몇 명만 흘리며 자작가 저택을 가질 수 있는 계획이기도 했다.

당장 내일이 기대될 만큼.

87화. 체프란 자작가(3)

'물론, 루시온이 세운 계획대로 흘러가야겠지만.'

러쉘은 계속 눈을 뜨고 있는 루시온의 눈을 아예 감겨주려고 손을 뻗자 루시온이 눈을 감아버렸다.

"이제 잘 겁니다."

[그래. 잘 때는 아무 생각하지 말고 자. 적도 당장 널 노리러 오진 않을 테니.]

왠지 얄미웠지만, 러쉘은 제자의 잠을 방해하지 않으러 밖으로 나갔다.

그래도 유령 동지가 생겨 밤에는 심심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싶었다.

루시온은 잠시 후 다시 눈을 떴다.

새근새근 울리는 라타의 숨소리를 들으며 달빛이 감도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피터의 말을 곱씹다 보니 의문 하나가 머릿속에 계속 맴돌아 잠을 이루기가 힘들었다.

'소설 속 루시온이 어떻게 공허의 손, 중간 보스가 된 거지?'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뉴브라 왕국이 자신을 노린다면 같이 손을 잡은 공허의 손 역시 목적이 비슷할 터.

표적을 조직원으로 두는 멍청한 집단이 어디 있단 말인가.

루시온의 눈 사이 간격이 좁혀졌다.

'설마....'

순간, 속이 뜨겁게 타올랐다.

만약 표적인 루시온을 공허의 손이 일부러 중간 보스 자리에 두었다면 왜 그랬겠는가.

'일부러 크로니아를 죽이려고 루시온을 이용한 거겠지.'

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소설 속 루시온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신관에게 흑마법사라고 내몰리게 되어 러쉘을 잃고 말았다.

그 결과 소설 속 루시온이 타락했고.

'아무리 소설 속에서 지금처럼 스승님과 사이가 좋지 않았더라도 스승님이 분명 신관을 경고했을 텐데. 아니, 스승님이 소멸할 정도의 빛이라는 게 과연 어느 정도인지 상상도 가지 않아.'

루시온은 조심스레 침대 밖으로 나왔다.

발소리를 죽이며 창문으로 걸어가 살짝 기댔다.

'소설 속 루시온이 반항심으로 스승님 말씀을 듣지 않은 거라 할 수 있는데, 스승님의 소멸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네.'

두 번째가 성립되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하나는 이미 루시온이 흑마법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하며.

두 번째는 러쉘의 존재 역시 알고 있어야 했다.

그래야 신관들을 준비할 수 있을 테니까.

'이걸 두 가지 조건을 한 번에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걸까?'

러쉘은 흑마법사로부터 자신을 숨길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흑마법사가 지배한 유령으로부터 자신을 숨길 수 있었고.

루시온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이유를 떠나, 자신의 가설이 옳다면 소설 속 루시온은 평생 남에게 이용당하다 죽은, 멍청한 놈이 아닌가.

'…그게 바로 나고.'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일그러진 게 보였다.

* * *

푸르릉.

루시온은 샨드라를 쓰다듬고는 체프란 저택이 있는 근처 마을에서 내렸다.

연이은 외출에 노비오가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루시온은 오늘도 당당히 허락을 받고 밖으로 나왔다.

'지금쯤 루미노스가 있는 장소가 황제의 귀에 닿았겠지.'

부지런한 헤인트가 편지를 받고도 그 사실을 황제에게 보고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아버지의 귀에도 들어갔을 거고.'

루미노스의 아지트를 알아냈다는 사실만큼 지금 노비오에게 기쁜 소식은 없었다.

오늘도 외출을 허락해준 건 아마 그 이유 때문이지 않을까 싶었다.

루시온은 샨드라를 여관에 잠깐 맡겨둔 뒤, 어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배한 유령 18, 19번을 통해 그림자 이동을 사용해 체프란 저택 근처 숲속으로 이동했다.

거리가 먼 만큼 어둠이 쫘악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썩 좋진 않았지만, 아직 한 번 더 사용해야 했기에 호흡을 하며 어둠이 차오르길 기다렸다.

'집으로 돌아가면 피터가 준 서류도 살피고.'

루시온은 복장을 꺼내며 생각했다.

저녁을 먹은 후 노비오가 산책을 권했고, 편지 분류와 낮에 돌아다니느라 몰려온 피곤함으로 서류를 볼 상태가 되지 않았다.

막상 침대에 누웠을 때 잠이 오지 않았지만.

루시온은 복장을 싹 갈아입고는 주변을 바라보았다.

베델과 계약한 뒤, 덩달아 늘어난 어둠 덕에 이제는 자신의 유령, 19번이 어디에 있는지 확실히 느껴졌다.

'저택 안에 잘 있네.'

―라타는 준비됐어! 루시온이 말하면 빨리 슝을 사용할 수 있어!

라타가 촐랑촐랑하며 루시온 주변을 뛰어다녔다.

털을 잔뜩 올린 뚱뚱한 여우가 되어 꼭 찹쌀떡이 걸어 다니는 것만 같았다.

"잠깐만 기다려봐, 라타."

루시온은 아예 자리에 앉아 차분히 심호흡하며 어둠이 빨리 모이길 기다렸다.

[천천히 해.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러쉘은 루시온을 진정시켰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긴장할 수밖에.

러쉘은 흄을 바라보았다.

눈을 말똥말똥 뜨며 루시온이 움직이길 기다리고 있었다.

'긴장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네.'

이어 러쉘은 고개를 돌려 베델을 쳐다보았다.

눈이 딱 하고 맞자 러쉘은 깜짝 놀랐고, 베델이 미소를 지었다.

[러쉘 그대는 루시온 공 일로 걱정이 참 많아.]

[걱정이 많을 수밖에.]

하나밖에 없는 제자가 간신히 이은 인연에 직접 만든 조직이니 뭔들 걱정이 되지 않을까.

[불과 한 달 반 전만 해도 손이 참 많이 가는 아이였거든.]

아련한 표정이 러쉘의 얼굴에 걸렸다.

"스승님. 그런 이야기는 제가 없는 곳에서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루시온이 기가 차 하며 말했다.

[너 들으라고 한 말인데 뒤에서 하면 이상하잖아.]

러쉘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키득거렸다.

제자를 놀려 먹는 재미가 없었으면 쓰겠나.

[루시온 공이…?]

베델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반응하자 루시온은 반쯤 포기하며 입을 움직였다.

"맞아. 사실이야. 스승님이 말씀하신 게 다, 전부 맞아."

[아마 나밖에 모를 거다.]

러쉘이 자랑스럽게 자신을 가리켰다.

―아니야. 라타도 알아!

라타가 앞발을 흔들어 보였다.

―라타는 루시온의 어둠이었으니까, 라타는 루시온이 러쉘한테 어떻게 했는지 알고 있어. 루시온이 러쉘한테 어떻게 했냐면....

루시온이 다급히 라타의 입을 잡았다.

"마음속에 묻어."

―마음에 어떻게 묻는데? 라타는 어떻게 하는지 몰라.

라타가 묻자 루시온은 아차 싶었다.

라타의 목소리는 귀가 아닌 머릿속에 울렸으니까.

[그렇네. 라타도 알고 있네. 이야, 반갑다!]

러쉘은 신이 난 얼굴로 라타의 앞발을 꽉 잡았다.

라타는 뭐가 뭔지 몰라도 러쉘이 즐거워하니 같이 해맑은 얼굴로 꼬리를 흔들었다.

"출발하자."

루시온은 베델을 바라보았다.

한참 같이 웃고 있던 베델이 루시온의 시선에 다급히 웃음기를 지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준비 됐어, 루시온 공.]

루시온은 혹시 모를 위협을 걱정해 베델과 빙의를 사용한 후에 저택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 * *

"…그 계집이 어디 있는지 아직도 못 찾았다는 게 말이 돼? 아니, 애초에 그 반지가 모조품이라는 걸 이제야 안다는 사실이...."

중년 여성은 화를 내다 말고 갑자기 열린 문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가 움직였다.

"지금 이게 무슨...."

"가주님…!"

그녀가 움직이기 전에 기사가 그녀의 앞에 다급히 섰다.

침입자였다.

쉭!

바람 소리와 함께 무언가 반짝거리자 기사의 두 손이 땅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어느새 가면 쓴 남자가 쥔 검에 피가 묻어 있었다.

기사가 고통을 호소하기도 전에 남자의 뒤에서 튀어나온 한 소녀가 단숨에 기사의 목을 움켜쥐었다.

콰직.

가냘파 보이는 소녀의 손에 기사의 뼈가 종이처럼 으스러지는 모습은 너무도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중년 여성은 어떤 말도 내뱉지 못했다.

"아.... 한 명이어야 했는데, 한 마리가 더 있을 줄이야."

가면을 쓴 남자는 아쉬움으로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또각.

발소리가 크게 났다.

소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문을 닫았고, 남자의 뒤에 섰다.

"아… 아...."

중년 여성이 비명을 내지를 무렵, 무언가가 자신의 입을 막았다.

마치 어둠처럼 검게 물들어 있어 그녀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자신의 방에 깔아놓은 빛의 물건만 해도 4개나 되는데 흑마법사가 찾아왔다고?

'…와.'

루시온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감추느라 힘겨웠다.

아침에 라트초를 먹고 팔찌에 담긴 빛도 쐤지만, 이건 더 강했다.

속이 울렁거렸다.

자신이 꺼낸 어둠과 빙의가 풀어질 것처럼 불안하게 느껴졌다.

[괜찮은가, 루시온 공?]

베델이 망설이다 물었다.

[흄. 이거랑 저거. 그리고....]

러쉘이 서둘러 빛이 깃든 물건을 가리켰다.

그 손짓에 루시온을 러쉘을 바라보았다.

'…나는 죽을 것 같은데, 스승님은 아무렇지도 않잖아? 스승님을 소멸시킨 빛이라는 게 대체 뭐야?'

빠악!

흄의 손에 빛이 깃든 물건들이 줄줄이 산산조각이 나자 루시온은 겨우 한숨을 내쉬었다.

덩달아 베델 역시 깊게 숨을 내쉬었다.

[나는 루시온 공 덕분에 빛의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공은 괜찮은가?]

"참을 만해."

루시온이 대답했다.

하지만 속도 속이지만, 숨이 조금 가빠졌다.

'치워야 할 게 많아.'

루시온은 죽어버린 기사와 조각난 빛이 깃든 물건을 바라보았다.

유령 19번이 앓는 소리를 낼 때부터 빛이 깃든 물건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기사까지는 알지 못했다.

[타이밍이 살짝 어긋났네.]

러쉘이 아쉬움을 토로했다.

"괜찮습니다. 제 목적은 변하질 않았으니까요."

루시온의 계획은 간단명료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현재 체프란 가주가 미엘라에게 가주 자리를 넘기겠다고 선언하는 것.

그걸 가능하게 하는 흑마법은 바로 현혹이었다.

누구도 피를 흘리는 일 없이 저택은 고스란히 미엘라의 손에 들어올 터.

'때마침 체프란 가주를 상징하는 진짜 반지도 미엘라 손에 있고.'

루시온은 방에 놓인 시계를 확인한 뒤, 죽은 기사를 바라보았다.

"벗겨."

"알겠습니다."

이제 체프란의 저택은 진짜 주인을 맞이할 순간이었다.

루시온은 흄이 벗긴 기사의 복장을 하고서 체프란 가주의 머리를 잡았다.

어둠을 이전처럼 배배 꼬아 체프란 가주의 머리로 보냈다.

찌릿!

루시온은 순간, 목구멍에 왈칵 올라오는 뜨거운 걸 느꼈다.

방금 빛 때문에 속이 뒤집혀 조그마한 충격도 크게 다가왔다.

"…퉷!"

가면을 살짝 벗어 목구멍에서 올라온 피를 내뱉었다.

―루시온?

라타가 깜짝 놀랐다.

"계속해."

루시온은 고개를 가로젓고는 계속 체프란 가주의 머리를 향해 어둠을 들이밀었다.

한 번은 어려웠지만, 두 번은 첫 번째보다 수월했다.

푹!

단번에 어둠을 머리에 넣자 그녀의 눈동자에 어둠으로 된 불꽃이 타올랐다.

"정문으로 가."

루시온의 지시에 체프란 가주가 움직였다.

자연스러운 걸음걸이에 루시온은 만족하며 흄에게 명령을 내렸다.

"정리하고 있어."

"알겠습니다."

루시온이 빙의한 상태였기에 흄은 베델을 믿고 시체와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

단 한 발자국만 내디뎠을 뿐임에도 루시온은 갑옷의 묵직한 무게에 다리가 바르르 떨릴 지경이었다.

더불어 가면 위에 투구까지 써 시야 확보까지 무척 어려웠다.

[걱정하지 마, 루시온 공. 내가 걸을 테니.]

처음 감당해본 무게에 루시온이 계속 휘청거리자 베델이 루시온 대신 걸었다.

어깨를 짓누르는 묵직한 그 느낌에 베델은 익숙한 듯이 루시온의 발을 움직였다.

"스승님. 제 모습이 이상해 보이지 않습니까?"

루시온이 물었다.

기사가 자신보다 체격이 커 옷 위에 입긴 했으나, 이상해 보일까 걱정이었다.

[갑옷 자체에 기본 뽕이 있기에 자세히 보지 않으면 이상하다는 것도 모르니까 걱정하지 마.]

러쉘이 웃음을 참는 듯이 말해 루시온은 미심쩍었다.

[괜찮아, 루시온 공. 전혀 어색하지 않으니까.]

베델은 중요한 일을 앞둔 루시온이 신경 쓰지 않게 그를 다독였다.

―음. 라타가 보기에 조금 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 보면 큰데, 저렇게 보면 괜찮아.

라타가 루시온 주변에 알짱거리며 돌아다녔다.

"잠깐 들어가 있어."

루시온은 자신이 아닌, 베델이 눈치챈 기척에 그림자를 가리켰다.

라타가 고개를 끄덕이며 루시온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고, 잠시 후 요란한 발소리가 들렸다.

"가, 가주님! 큰일 났습니다! 지금 밖에 미, 미엘라 아가씨께서 병사들을 이끌고 저택을 찾아왔습니다."

집사의 다급한 말에도 체프란 가주는 무표정한 그 표정 그대로 루시온이 지시한 임무를 따를 뿐이었다.

"가주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신다."

루시온이 체프란 가주를 보호하던 기사처럼 되도록 짙게 목소리를 냈다.

상황 자체가 급했기에 집사는 눈치채지 못했는지 굳은 얼굴로 체프란 가주의 뒤를 따랐다.

가주의 발걸음에 자연스레 기사들도 붙다 보니 어느덧 누가 봐도 당당한 가주의 행렬이 되었다.

루시온은 체프란 가주와 바짝 붙어 현혹 마법이 끊어지지 않게 최대한 얇게 어둠을 이어 불어넣고 있었다.

"가주님. 지금 밖으로 나가시면 안 됩니다. 밖에 미엘라 아가씨가 가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집사가 정문을 앞두고 체프란 가주를 말렸다.

하지만 현혹의 마법이 유지되는 체프란 가주는 발걸음을 멈추질 않았다.

가주의 걸음을 막을 수 없는 노릇.

기어코 굳게 닫혔던 정문이 열렸다.

88화. 조직, 에일의 시작

루시온은 때맞춰 도착한 자신의 조직, 에일을 바라보며 슬그머니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시간 하나 기가 막히게 잘 지키네. 하지만....'

크라언이 기특한 것과 별개로 루시온은 아직 시선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조직원들의 모습에 기껏 올라갔던 입꼬리가 도리어 비틀어지고 있었다.

어설퍼도 너무 어설펐다.

조직원들의 눈빛에 벌써 오합지졸이라는 걸 알아버린 체프란 기사들도 보였다.

피터가 이 모습을 보지 않아서 다행이다 싶었다.

'저걸 어떻게 한담.'

루시온은 잠깐 크게 고민했다.

[지금 기회야, 루시온. 어둠을 더 불어 넣어.]

미엘라의 등장에 시선이 그녀에게 쏠리는 틈을 타 러쉘이 루시온에게 알렸다.

이번 연극을 위해서는 현혹 마법이 조금 더 길게 유지되어야 했다.

"안녕하셨습니까, 어머니?"

미엘라가 치맛자락을 잡고 체프란 가주에게 인사했다.

"제게 꼭 하셔야 할 말씀이 있다고 하셨기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험하지 않습니까?"

미엘라는 차분히 자신의 역할을 이어나갔다.

그녀의 도발 같은 소리에 체프란 기사들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뒤로 물러서십시오, 아가씨."

크라언이 목소리를 내며 당장 검을 뽑을 듯이 으르렁거렸다.

이 모든 건 루시온이 지시한 대로 꾸며졌다.

조직 에일은 병사인 척 위장.

체프란 가주의 중대한 부탁을 받고 찾아온 미엘라.

누구도 이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당장이라도 작은 전쟁이 벌어질 것처럼 살벌할 뿐이었다.

"말씀해 보시지요, 어머니. 설마 여기가 제 무덤은 아니겠지요?"

비아냥거리는 미엘라의 말에도 체프란 가주는 차분했다.

'가주의 상징인 반지를 내밀어.'

루시온의 지시에 체프란 가주는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반지를 내밀었다.

그녀의 눈에 어린 어둠의 불꽃이 차차 꺼져가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체프란 가주의 행동에 체프란 기사는 물론 시종들까지 동요했다.

"가, 가주님!"

집사가 참다못해 목소리를 냈다.

그가 체프란 가주를 말리기 전에 루시온은 이어 짧게 명령했다.

'무릎을 꿇고.'

체프란 가주가 무릎을 꿇었다.

"가주님!"

집사뿐만 아니라 체프란의 기사들마저 경악했다.

하지만 가주가 무릎을 꿇었으니, 체프란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이들 역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새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체프란의 기사들과 시종들은 가주의 다음 결정을 기다렸다.

―루시온. 이제 곧 현혹 마법이 풀릴 거야.

라타의 경고와 함께 루시온의 지시가 다시 이어졌다.

'미안하다고 말해.'

"미안하구나."

체프란 가주가 목소리를 냈다.

체프란 가주와 미엘라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체프란 기사들과 시종들에게 있어 충격적인 말이 아닐 수가 없었다.

체프란 가주가 가주를 상징하는 반지를 내밀고, 미엘라에게 사과까지.

이 두 가지의 의미를 모르는 이는 여기에 없었다.

사실상 체프란 가문의 진정한 후계자인 미엘라를 인정하고 가주의 자리를 도로 주겠다는 선언이 아닌가.

"하하하하!"

미엘라가 크게 웃었다.

하멜 말대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사과라니.

저년의 입에서 사과라니!

"제게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셨습니까?"

미엘라의 물음에도 체프란 가주는 가만히 있었다.

"아버지에게 독을 먹인 네년이나, 사랑에 눈이 멀어 자신이 죽는 줄도 모르고 저년의 실체를 알려주었던 나를 내쫓은 아버지나 똑같은 놈들이지."

미엘라가 반지를 빼앗듯이 가져가 버렸다.

"그래. 그토록 추웠던 겨울날 옷 한 벌만 걸치고 날 쫓아냈던 네놈들도, 내 손에 떨어졌던 몇 푼의 돈마저 빼앗아간 네놈들도 똑같은 놈들이지! 검을 가져오거라!"

크라언이 미엘라에게 검을 넘기자 무릎을 꿇었던 체프란 기사들이 반응했다.

"가만히 있거라!"

미엘라가 사납게 소리치며 반지를 내보였다.

전 가주가 직접 넘긴 반지였기에 체프란 가주는 미엘라였다.

미엘라가 어설픈 실력으로 체프란 가주의 가슴에 검을 박아 넣었다.

"커… 헉!"

힘에 밀려 체프란 가주가 쓰러지고 미엘라도 덩달아 그녀의 위에 올라탔다.

체프란 가주의 눈에 깃든 어둠의 불꽃이 꺼지자 도무지 영문을 모른다는 눈으로 미엘라를 바라보았다.

미엘라는 피식 웃었다.

"잘 가라, 쓰레기 같은 년."

자리에서 일어난 미엘라가 가주의 반지를 손에 끼고 손을 하늘로 뻗었다.

비록 가짜지만, 이 순간만큼 진짜보다 더 아름답고 반짝거렸다.

"이제부터 내가, 체프란이다!"

크라언은 지금 가장 빛날 미엘라보다 갑옷을 벗어 던지고 모습을 드러낸 하멜에게 시선이 갔다.

정말로 피를 단 한 사람만 흘리고 저택을 차지했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온몸에 일어나는 소름과 함께 크라언의 눈동자에 짙은 존경심이 짙게 묻어났다.

자신이 앞으로도 계속 모실 분.

그 사실에 가슴이 높이 벅차올랐다.

* * *

비록 미엘라가 대외적으로 가주가 되었지만, 숫자는 그들이 많았기에 체프란 기사들과 시종들을 바로 자르거나 죽일 수 없었다.

하지만 후계자의 위치와 귀족으로서의 자리마저 빼앗겼던 미엘라였다.

그녀가 당당히 원래 자리를 차지한 상황에서 숙청은 당연했다.

"요, 용서해주십시오, 가주님!"

미엘라는 자신을 비웃고, 업신여겼던 이들을 고르고, 죽이고.

또 고르고 죽이며 정원을 피로 물들였다.

"여기까지."

미엘라가 손을 들었다.

"내 지시가 떨어지기 전까지 다들 제자리로 돌아가도록."

미엘라는 기존 체프란의 기사들과 시종들을 물렸다.

이제 정원에 남은 건 조직, 에일뿐이었다.

"소리를 막는 결계는 임시지만, 완벽해요."

슈트라가 붓처럼 생긴 마법 도구를 들고 걸어왔다.

"다른 이들이 전부 물러가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헬론이 옆쪽에서 튀어나와서는 슈트라와 합류했다.

'준비는 됐다.'

루시온은 두 사람의 보고에 죽여야 할 조직원 5명을 위한 무대가 만들어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고마워요, 하멜 님."

그때, 미엘라가 루시온에게 고개를 숙였다.

―에헴. 루시온이 대단하지! 라타는 엄청, 엄청 오래전부터 알고 있어!

그림자 속에 있던 라타가 우쭐거렸다.

당황해하는 조직원들과 비교가 될 정도였다.

조직원들이 크라언에게 들은 건 체프란 자작가 저택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과 전투가 없을 거라는 이상한 소리였다.

일단 따라오긴 했으나, 체프란 가주가 흑마법사에게 고개를 숙인 상황까지 볼 줄은 몰랐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하멜 님 덕분에 제가 소원하던, 아니, 평생의 응어리가 풀어졌네요. 약속대로 가지세요. 이 저택은 하멜 님 거예요."

미엘라가 너무도 행복하게 웃었다.

자신의 손으로 그년을 죽였다.

아직도 손에 묻어 있는 그 피 맛이 도무지 잊히질 않았다.

솔직히 체프란의 기사들과 시종들 앞에서 이 기쁨을 참느라 죽는 줄 알았다.

"예. 만족하셨다면 다행입니다. 저택, 잘 받겠습니다."

루시온은 크로니아의 별장 크기만 한 저택에 별 감흥 없이 반응했다.

하지만 조직원들은 달랐다.

저택이 조직의 우두머리인 크라언이 아닌, 하멜이라는 흑마법사가 가져가질 않았는가.

돈도 흑마법사가.

저택도 흑마법사가.

점점 하멜의 그림자가 커졌다.

"저는 이제 제가 하고 싶은 걸 할거예요. 지원은 확실하게 해주는 거죠? 하멜 님을 보고 조직에 들어온 거란 말이에요."

"물론입니다. 필요하실 때 말씀하십시오. 돈은 제 주머니에서 나오는 거니까요."

루시온은 일부러 조직원들이 잘 들을 수 있게 '돈'을 다시금 강조했다.

경제권.

이 얼마나 절대적인 힘인가.

[돈도 네 주머니에서 나오고 이 저택도 네 거라는 소리에 저놈들 눈 돌아간 거 봐라.]

러쉘은 조직원들을 가리키며 혀를 찼다.

'아직 계획은 끝나지 않았어.'

루시온은 크라언을 바라보았다.

미엘라 역시 자연스럽게 크라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 크라언 님 감사해요. 저번에 제의를 주셨을 때 거절해서 미안하고요. 어쨌든, 조직원으로서 앞으로 잘 부탁할게요."

크라언에게 말하는 미엘라의 말은 루시온에 비하면 너무도 가벼웠다.

자연스레 조직원들의 시선과 힘의 무게 중심이 루시온에게 쏠릴 때, 그가 크라언을 불렀다.

"크라언 님."

"말하게."

크라언이 답을 하자 알 수 없는 기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일단 조직에서 루시온의 힘을 확인했다.

자신들이 무시해도 될 존재가 아니라는 걸 미엘라를 통해 알아버렸다.

"이제 시작해도 되지 않습니까?"

뜻밖의 말이 루시온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조직원들은 크라언을 바라보았다.

"크라언 님. 대체 무얼 시작하자는 겁니까? 이미 계획은 다 끝난 게 아닙니까?"

조직원 중 누군가 목소리를 냈다.

루시온에게 대놓고 시비를 걸었던 바로 그 남자였다.

"시작하게."

크라언은 남자가 아닌, 루시온의 말에 대답했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루시온이 어둠을 내보내 5명을 단숨에 붙잡았다.

"지,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크라언 님!"

붙잡힌 이들이 소리쳤다.

"멈추게!"

루시온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조직원들이 움직이려고 하자 크라언이 묵직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분명 경고했네. 하나. 흑마법사 하멜의 존재를 알되, 숨길 것. 하나. 조직의 분란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나. 조직의 배신을 허락하지 않는다."

스겅.

크라언이 검을 뽑았다.

"그리고 그 대가는 죽음으로 받을 거라는 것 역시."

루시온은 크라언이 잘 벨 수 있게 놈들을 그의 앞에 데려놓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비로소 조직의 구조가 확실해졌다.

조직의 우두머리는 크라언이라는 걸.

"편안하게 베십시오, 크라언 님."

루시온의 말과 함께 크라언은 놈들에게 걸어왔다.

'이런 건 크라언이 처리해야 확실하지.'

루시온은 죄가 가벼운 순서대로 배치했다.

우선, 경비 둘부터.

크라언의 검이 경비에게 향하자 두 사람은 벌벌 떨었다.

"하멜의 존재를 알되, 숨겨야 한다고 명시했음에도 너희는 입 밖으로 꺼냈다. 특히, 외부와 접촉이 많은 경비 업무를 하는 너희가."

"사, 살려주십시오! 저희가 다시는 어, 언급조차 하지 않겠습니다!"

"맞습니다! 정말입니다."

하지만 크라언의 검은 사선으로 올라가 두 사람을 한 번에 베어냈다.

바닥에 피가 뿌려지자 조직원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일반 검에는 어둠이 베여도 아무렇지도 않네?'

어둠이 검에 베였음에도 살짝 따끔하고 마는 정도라 루시온은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검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겠는데?'

[러쉘. 루시온 공의 어둠이 베였는데 괜찮은가?]

베델은 크라언이 휘두른 검이 루시온의 어둠에 살짝 닿은 걸 보았다.

[일반 검으로 어둠을 벨 수 없어. 뭐, 베인 느낌은 아주 살짝 있긴 해.]

러쉘이 대답하며 입을 가볍게 놀린 놈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루시온. 체프란 가주도 그렇고 저놈들도 그렇고 확실히 하늘로 보내주는 거 잊으면 안 된다.]

러쉘의 당부에 루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잊지 않았다.

마무리까지 확실해야 했다.

두 사람을 죽인 크라언의 검이 분란을 일으킨 그 남자에게 향했다.

"나는 분명 이 조직은 특별하며 조직에 이득이 되는 어떤 존재든 받아들이겠다고 말했고, 너는 동의했다. 하지만, 너는 조직에 분란을 일으키려고 했지."

목구멍에 검이 파고듦에도 남자는 오히려 크라언을 노려보았다.

"분란? 정신 차려야 할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야! 아무리 조직에 이득이 되어도 저놈은 흑마법사라고! 저주를 뿌리고, 죽은 자를 모독하고! 왕국 하나까지 통째로 날린, 놈들과 같다니까!"

'저럴 줄 알았다.'

루시온은 저놈이 다시 자신의 발목을 잡으며 분란을 일으킬 줄 알았기에 이 자리에 세웠다.

승리에 도취해 있는 지금, 인간의 본성이 튀어나오기 좋은 순간이었고, 조직에게 있어 사람을 고를 좋은 타이밍이기도 했다.

"그래서 네놈은 저주에 걸렸나? 하멜이 너에게 무슨 짓을 했지?"

크라언이 묻자 남자는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무언가 했을지도 모르지. 내 눈에는 보여. 네가 저놈에게 조종당하고, 저놈이 뒤에서 널 움직이고 있다는 게!"

―루시온은 나쁜 인간 외에 그런 짓은 안 해!

라타가 으르렁거리고, 베델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무시해라, 루시온 공.]

애초에 들어줄 가치가 없는 말이었다.

어떤 대가도 없이 사람을 조종할 수 있다면 세상은 이미 흑마법사의 손에 들어갔겠지.

하지만 조직원들은 남자의 말에 흔들렸다.

그간 퍼졌던 흑마법사의 소문이 사실일까, 불안한 것일 테지.

"오늘."

크라언이 얼굴을 구겼다.

조직원들의 눈빛을 보자 화가 났다.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도 피를 흘리지 않고 이 저택을 차지한 건 모두 하멜 덕이다! 나는 그대들을 잃는 게 두려웠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하멜 혼자 이 넓은 저택에 들어가 흑마법을 사용했다. 바로 그대들을 위해서!"

크라언은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조직원들을 바라보았다.

"그대들은 할 수 있는가?"

호소했다.

"그대들은 단지 조직원이라는 이유로 이 넓은 저택에 혼자 들어갈 수 있냔 말이다."

크라언은 또 호소했다.

"대체 뭐가 흑마법사인가. 정말로 입만 놀리는 저놈이 조직원이라 생각하는가? 아니면 제 몸을 희생한 하멜은 흑마법사라는 이유로 조직에서 내쫓겨야 옳다고 생각하는가?"

크라언의 호소에 조직원들의 눈빛이 차차 흔들렸다.

"나는!"

크라언의 눈동자마저 핏대가 섰다.

"오늘 어떤 이유를 떠나 조직을 위해 헌신한 하멜을 버리지 않을 것이며 에일의 대장으로서 하멜을 끝까지 보호하겠다!"

크라언은 이 자리를 빌려 확실히 말했다.

조직은 루시온을 보호하겠노라고.

89화. 조직, 에일의 시작(2)

하지만 크라언 자신의 호소에도 조직원 모두의 눈빛이 변한 건 아니었다.

자신의 과거를 보는 듯해 크라언은 더 분했다.

"그래도 불안한가? 그래도 하멜이 끔찍한가?"

왜 하멜의 노력을 보지 않는 건지.

비록 자신이 조직의 진짜 우두머리는 아니지만, 이 자리에 선 이상 그 시선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하멜과 개인적인 친분을 제외해도 조직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누구인지 너무도 명확했으니.

"동료가 누구인지, 분란을 일으키는 게 누구인지 분간도 하지 못하는 놈은 나 역시 필요 없다. 꺼져라. 단, 지금까지 지원받았던 모든 걸 토해놓고 가야 할 거다."

크라언은 하멜이 주었던 돈들을 그런 놈들의 뱃속에 들어가게 하고 싶지 않았다.

흑마법사가 무얼 해서 돈을 벌 수 있을까.

피와 땀이 섞인 돈이 아니겠나.

"확실해서 좋네요."

그때, 미엘라가 목소리를 냈다.

"당연히 내놓아야죠. 설마, 하멜 님은 흑마법사라서 더럽고, 그 돈은 탐이 난다는 이중적인 태도를 내보이겠다는 건 아니겠죠?"

미엘라는 조직원들을 대놓고 비웃었다.

조직원 중 유일한 귀족이기에 뒤늦게 들어왔어도 발언권이 상당히 강했다.

"설마. 그런 뻔뻔한 놈이 있겠어요?"

슈트라마저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하멜이 썩 반갑진 않아도 그가 일궈놓은 일들을 인정하고 있었다.

"정신 차리십시오! 지금 크라언은...."

푸욱.

참다못해 헬론이 놈의 머리를 꿰뚫었다.

진작 죽여버려야 했다.

이런 놈은 살려봤자 또 분란만 일으킬 테니.

"잘 들어. 이건 강요가 아니야. 이미 다들 동의하고 들어왔고 크라언 님은 작성한 계약서대로 이행하고 있을 뿐이라고."

헬론은 조직원들을 쏘아본 뒤, 곧 크라언에게 머리를 숙였다.

"멋대로 나서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어차피 나도 베어버리려고 했거든."

크라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남은 자들은 조직의 뒤통수를 치려고 했던 배신자였다.

이미 한 명은 기절했고, 다른 한 명은 '살려주세요'라며 입조차 벙긋하지 못하고 눈을 빌고 있었다.

크라언은 헬론을 보내 놈들의 발자취를 쫓게 했다.

놈들이 가려던 곳은 다름 아닌 신전이었다.

크라언은 놈들을 베어버리기 전에 루시온을 잠깐 바라보았다.

가면 속에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몰라도 속이 속이 아닐 터.

"괜찮습니다. 계속하시죠."

루시온이 말했다.

덤덤한 목소리에 크라언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배신자들의 가슴을 날카로운 검으로 꿰뚫었다.

푸욱!

피로 덕지덕지 묻은 검을 그대로 바닥에 꽂으며 크라언이 소리쳤다.

"선택했나?"

이들처럼 처단당하는 게 무섭든, 돈을 다시 돌려주는 게 싫든 조직원들은 지금 이 자리를 통해 선택해야 했다.

같이 갈지.

아니면 남을지.

"선택했습니다. 저는 조직에 남겠습니다."

한 명을 이어 조직원들의 대답이 우르르 들려왔다.

"저도 조직에 남겠습니다."

"하멜 님, 감사합니다! 저 역시 조직에 남겠습니다!"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입술을 깨물며 각자의 선택을 이어나갔다.

[드디어 망설임이 사라졌네.]

러쉘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분위기를 떠나서 남겠다고 선택한 이상, 루시온을 받아들이겠다는 뜻과 같았다.

'잘 골라졌네.'

루시온은 기틀이 잡힌 조직원들을 보며 생각했다.

특히, 저 5명의 죽음이 제대로 먹혀 무척 만족스러웠다.

"이유를 불문하고 배신은 용서하지 않겠네. 조직이 싫으면 떠나도 상관없지만, 조직의 특수성을 생각해 발설은 조직을 떠난 뒤에도 금지하지."

크라언은 조직원들과 눈을 마주하며 다시금 주의사항을 언급했다.

"우리 조직의 이름은 '에일'로서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독립 세력으로 성장시킬 것이며 평화와 자유를 위해 싸울 거라네!"

크라언의 목에 핏대가 섰다.

'평화와 자유라니.'

루시온은 순간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조직 에일은 자신을 위해 만들어졌고, 자신을 지키기 위한 조직이었다.

하지만 대외적으로 조직의 목적이 필요했고, 루시온은 그 목표를 크라언에게 알아서 정하도록 지시했다.

수많은 목표가 있었음에도 크라언은 가장 뻔한 목표를 정했다.

'…아니지. 이 세계에서는 저런 목표가 아주 드물지.'

루시온은 곧 자기 생각을 부정했다.

평화와 자유.

뻔하지만, 어렵고 어려운 목표였다.

"앞으로도 조직의 도움이 되는 자가 있다면 설령 상대가 흑마법사라고 한들, 나는 받을 것이며 조직원인 그대들을 지키겠노라 맹세하겠네!"

시체와 피가 범벅된 정원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크라언의 손짓이, 목소리가 그를 주목하게 했다.

'상대의 마음을 이렇게 빨리 사로잡는 기술은, 마치 마법 같네.'

루시온도 참 신기하다 싶었다.

별거 아닌 말인 걸 알면서도 이상하게 신뢰감과 기대가 생겨나게 했다.

"그대들 역시 같은 조직원을 지키리라 맹세하는가?"

크라언이 조직원들을 보며 물었다.

"맹세합니다!"

누구 먼저 할 것 없이 대답했다.

크라언이 조직을 나갈 기회를 주었고, 무서웠든 쫄았든, 이미 기회는 떠나갔다.

크라언은 조직원들이 외치는 와중에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여러 말을 꺼냈지만, 결국, 루시온이 원하는 목표를 슬쩍 끼워 넣는 데 성공했다.

루시온은 잘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조직이 한 발자국 내디뎠네.'

* * *

―루시온.

"그래."

루시온은 체프란 저택 정원 근처에 앉아 자신을 빤히 보는 라타를 쓰다듬었다.

시체에서 유령들이 나타나길 기다리며 빛 때문에 좋지 않은 몸도 회복할 겸 쉬고 있었다.

농담이 아니라 누가 툭 하고 건드리면 다시금 목구멍에서 피가 울컥 올라올 것만 같았다.

―방금 라타는 엄청 기뻤다? 루시온한테 뭐라고 하는 나쁜 인간은 싫었지만, 그래도 루시온을 향한 날카로움이 사라져서 기뻤어!

"저도 기뻤습니다. 도련, 아니, 하멜 님께 '편'이라는 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라타와 함께 흄이 미소를 그렸다.

크라언의 말이 너무도 절절해 흄은 자신도 모르게 손바닥에서 땀이 날 정도였다.

―루시온도 막 라타처럼 가슴이 쿵쿵거리고 기뻤어?

"글쎄."

루시온은 라타의 물음에 모호하게 대답했다.

자신이 기억하는 건 살짝 낯간지러웠던 그 느낌이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그냥 계획이 성공했고, 이 저택을 얻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려고."

[지금은 안심하고 기뻐해도 된다고 생각해.]

베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누가 들었어도 크라언은 진심이었고, 그만큼 루시온을 지키려는 마음이 강했다.

[나도 루시온 네가 기뻐해도 되지 않을까 싶네. 어쨌든 조직이 첫 발자국을 내디뎠잖아?]

러쉘이 루시온의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리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스승님. 언제가 됐든 이 저택에 조직원들로 꽉 차겠죠?"

[그렇겠지.]

"사람이 많으면 통제하기 어렵습니다. 아마 지금처럼 이런 식으로 해결하는 것도 힘들겠지요."

루시온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모르겠습니다. 저는 조금 더 지켜보려고 합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게 편하다는 걸 배웠다.

조직은 자신의 가족이 아니었기에 루시온은 섣불리 아무것도 판단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속을 가라앉히며 바람을 맞았다.

* * *

쾅!

"…말도 안 돼요!"

미엘라가 크라언을 보며 소리쳤다.

"뭐가 말이 안 되는데?"

슈트라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말했다.

"누가 봐도 이 조직의 우두머리는 하멜 님이잖아요!"

"뭐라고? 이 조직의 우두머리는 크라언 님이야!"

미엘라의 말에 덩달아 슈트라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미엘라는 불쑥 손가락을 내밀었고, 말을 할 때마다 손가락을 접었다.

"돈, 아지트, 힘, 정보력, 계속해요?"

마침 방으로 들어온 루시온을 향해 미엘라가 목소리를 냈다.

"마침 잘됐어요. 말해봐요, 하멜 님."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루시온은 막 체프란 가주는 물론, 죽었던 5명의 유령을 포함한 체프란의 기사들까지 싹 하늘로 보내주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사실 우두머리는 하멜 님인데 대외적으로 나설 수 없어서 크라언 님이 대신하는 게 맞죠?"

미엘라가 물었다.

참 예리한 질문이 아닐 수가 없었다.

[미엘라가 눈치가 빨라.]

베델이 넌지시 목소리를 내자 러쉘이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이야. 그것 때문에 루시온이 일부러 크라언에게 복종하는 듯한 행동도 취했는데.]

"이유를 떠나 저는 우두머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크라언 님을 그만 괴롭히는 게 어떻습니까?"

루시온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불공평해요. 하멜 님이 전부 다 뺏긴 것 같잖아요."

빼앗기면 되찾아라.

그걸 가르쳐줬던 하멜이 정작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 그것보다 괜찮으세요?"

미엘라는 곧 중요한 사실을 떠올렸다.

이곳에 빛이 깃든 물건이 꽤 있었다.

특히 가주의 방에는 더.

"그렇지 않아도 렌탈이 부숴줬습니다."

루시온이 흄을 가리켰다.

고개를 끄덕이는 흄의 모습에 미엘라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요. 그년을 죽인다고 생각해서 들떴나 봐요. 제가 미리 경고했어야 했는데."

"…빛이 깃든 물건이 있었습니까?"

크라언이 놀라며 반응했다.

당장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루시온에게 다가갔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제가...."

"아닙니다."

루시온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크라언을 말렸다.

지금 크라언이 자신에게 고개를 숙일 때가 아니었다.

"그것보다 앞으로 어떻게 조직원들을 배치할지 결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존 체프란 기사들과 시종 처리도 함께 말입니다."

루시온은 당장 의논해야 할 문제를 꺼냈다.

일단, 조직 에일의 등장과 체프란 가주가 미엘라에게 가주의 자리를 넘김으로써 잠깐 불씨를 꺼트렸지만,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체프란 가주가 바뀌었기에 외부 세력이 냄새를 맡고 찾아올지도 몰랐다.

내부도 신경 쓰일 테지만, 얼른 미엘라가 체프란 가문에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는 게 먼저였다.

"일단 이걸로 포섭할게요. 이번 일은 제가 마무리 짓고 싶어서요."

미엘라가 돈주머니를 꺼냈다.

익숙하게 생긴 돈주머니에 루시온은 자신이 줬던 돈주머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가장 좋은 건 미엘라 씨가 생각하는 대로 저들 역시 포섭하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저들은 결코, 조직원이 될 수 없습니다."

루시온은 미엘라의 의견에 동조했지만, 확실히 언급해야 할 점을 짚었다.

"알고 있어요. 그 점은 제가 조율할게요. 조직원이 되었고, 체프란이란 이름과 관련된 건 제가 다 감당하고 싶어요. 그래도 괜찮겠어요?"

미엘라는 루시온을 보고 이어 크라언을 바라보았다.

"맡기겠습니다."

루시온이 대답했다.

그 문제를 미엘라가 알아서 처리해준다면야 그것보다 편안한 게 없었다.

"그럼, 저 역시 동의하겠습니다."

크라언도 고개를 끄덕였다.

크라언의 동의로 슈트라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헬론은 미소를 살짝 지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하멜 씨."

크라언이 루시온을 불렀다.

"말씀하십시오."

"쥐쟁이는 언제 옵니까?"

"아마 곧 있으면 도착할 겁니다."

거리도 거리지만, 쥐쟁이의 숫자가 지금 조직원보다 더 많았다.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쪼개서 올 테니 시간이 걸릴 수밖에.

"우선, 조직원들을 미엘라 씨 근처로 배치하겠습니다. 그 후에 쥐쟁이가 도착하면 병사로 위장해서 숫자를 늘리도록 하죠."

체프란이 소유한 기사와 병사들을 합치면 얼추 150명 정도였다.

하지만 에일의 조직원은 30명 남짓.

만약 체프란의 기사와 병사들이 힘으로 밀어붙이면 밀릴 가능성이 컸다.

루시온은 크라언이 무얼 고민하는지 눈치챘다.

'크라언이 감을 잃었네. 그런 일은 없을 텐데.'

귀족은 귀족이라는 특별한 신분에 자부심을 느끼는 이들이었다.

설령 원수 가문일지라도 귀족이 아닌 존재가 그 가문을 건드리면 용서하지 않는 이상한 족속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귀족을 누구보다 알고 있는 체프란의 기사와 병사들은 미엘라에게 어떤 짓도 하지 않을 테지.

'체프란에 눈독들이 다른 귀족들을 뺀다면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아무래도 조직에 사람이 부족하다는 거겠지?'

체프란 기사들과 병사들을 물갈이하려고 해도 조직에서는 이를 대신할 인원이 없었다.

힘이 강한 이들이 조직에 있으면 좋지만, 이들을 조절하고 억압할 존재가 없는 이상 가지고 있어봤자 분수에 맞지 않았다.

'…그리고 암살자들.'

유령이 자신의 눈을 대신한다고 치면 이제는 손발이 되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조직에 해가 되는 이들을 처리할 그런 사람이.

'누가 좋을까?'

90화. 조직, 에일의 시작(3)

루시온은 잠깐 변경 근처 암살자 중 돈이 없어 허덕이거나, 피치 못할 이유로 쫓겨나는 등 약점이 있는 이들을 떠올려보았다.

하지만 금방 떠오르진 않았다.

소설 '어둠의 손'은 모험물이었지, 정치물이 아니었으니.

루시온은 생각을 멈추고 아직도 체프란 기사와 병사들에게 밀려 저택을 빼앗기면 어쩌나 고민하는 크라언을 보며 말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가주 취임식이 있을 거라고 소문을 내든, 본보기로 전 체프란 가주와 엮어 몇 놈 보내면 알아서 입을 다물 테니까요."

그제야 크라언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네요. 좋은 생각입니다, 하멜 씨."

"그럼, 제가 사람들 좀 구해보겠습니다. 지금 조직에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루시온이 조직이 해결해야 할 문제를 자연스럽게 꺼내 놓았다.

자작가 저택은 많은 인원을 포용할 수 있었고, 지반 자체가 좋아서 땅굴을 파서 비밀 장소를 만들어도 끄떡없었다.

물론, 이곳도 앞으로 만들어갈 아지트 중 일부에 불과했지만.

"맞습니다. 지금 조직에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것도 꽤 절실하게 말입니다."

크라언 역시 그 부분을 인지하고 있었는지 꽤 진지하게 대답했다.

"하멜… 씨."

슈트라가 살짝 머뭇거리며 루시온을 불렀다.

아무래도 '하멜 씨'라는 호칭이 붙은 말이 어색한 듯 보였다.

"말해."

"나, 나도 도와줄까?"

슈트라가 말을 더듬으며 시선을 살짝 피했다.

"그러니까, 자꾸 하멜 씨만 돌아다니게 하는 것 같아서. 나랑 헬론이 도와줄 수 있어. 돌아다니는 데 자신도 있고."

비밀이 많은 루시온에게 같이 움직이는 동료가 늘어나면 오히려 거추장스러웠다.

"마음은 고맙게 받을게."

하지만 루시온은 고마움을 표하는 걸 잊지 않았다.

아무래도 슈트라와 헬론이 크라언의 측근이니 자주 볼 테고, 기왕 지내는 거 서로 나쁘지 않은 관계로 지내는 편이 좋지 않겠는가.

"아쉽지만, 두 사람은 해야 할 일이 있어."

크라언이 목소리를 냈다.

"슈트라 너는 결계부터 설치해야 해. 특히, 미엘라 씨 방에 신경을 더 써주고. 헬론 너는 주변을 염탐하며 배신의 낌새가 없는지 확인하고 있어."

"알겠습니다."

헬론은 바로 대답했고, 슈트라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있잖아요, 크라언 님."

"그래, 슈트라."

"예전부터 생각하는 건데, 크라언 님께서 하멜 씨를 너무 부려먹는 게 아닌가 싶어요. 보고 있으면 크라언 님이 제일 독해."

"...?"

느닷없는 슈트라의 발언에 루시온이 살짝 놀랐다.

"딱히 하멜 씨를 감싼 건 아니야. 조직이 커 오는 과정을 보면서 나 나름대로 불합리하다고 생각한 거지. 이 말을 하멜 씨가 없는 앞에서 할 순 없잖아."

"저도 동의합니다. 대체 편지가 몇 통이나 왔습니까? 올 때마다 두께도 장난 아니었습니다. 그걸 다 조사하려면… 어우."

헬론까지 질색하자 크라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한 번도 루시온에게 강요한 적도 없기에 크라언의 얼굴에 억울한 표정이 자연스레 드러났다.

"제가 좋아서 한 일이니까, 다들 크라언 님한테 뭐라고 할 필요 없습니다."

루시온은 계속 내버려 둘까 싶다가, 크라언이 억울한 눈빛으로 살려달라고 비는 터라 할 수 없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일단 당장 뭐부터 해야 할지 말해보죠."

루시온이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우선, 조직 배치부터 해야 하는 게 먼저입니다."

마치 누군가에 묻듯 말하다 말고 다짜고짜 자기주장부터 펼치자, 모두가 황당한 표정으로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조직의 규모가 크지 않으니 우선 5가지로 분류해도 괜찮을 듯합니다. 전투 담당, 저택 순찰 및 보호 담당, 조직의 비밀과 질서 담당, 무기나 방어구 같이 조직의 전반적인 보조 담당.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보 담당."

루시온이 손가락을 5개 접었고 그중 첫 번째와 두 번째를 가리켰다.

"이 둘은 합쳐도 되지만, 따로 분류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은 쥐쟁이가 있으니 안심하셔도 되고요. 지금은 이 정도만 분류하고자 하는데, 따로 할 말이 있으신 분 있습니까?"

루시온은 한 명씩 바라보았다.

그들 모두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하나같이 다 맞는 말일뿐더러 의견을 나눠도 꼭 이렇게 결론이 날 것만 같았다.

"좋습니다. 그럼, 전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사람을 골라보도록 하겠습니다."

루시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머지는 크라언이 알아서 할 테니, 사람을 구하는 편이 빨랐다.

"아, 크라언 님."

루시온은 나가려다 갑자기 떠오른 사실에 혹시 몰라 크라언을 불렀다.

"예."

"혹시 쥐쟁이의 우두머리였던 헤로안이 말을 듣지 않거든, 몇 장 남았는지 궁금하다면 그렇게 계속 버티라는 식으로 말씀하십시오."

루시온의 가면이 노랗게 물들었다.

"그럼, 이만."

루시온은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하멜 님은 원래 저런 분이세요?"

미엘라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아, 헐뜯는 게 아니라 저한테 제안했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거든요. 뭐라고 해야 하나. 급하고, 용건만 간단히?"

"그렇습니다."

크라언이 루시온이 떠나간 자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조직원들과 잠깐 말도 섞으면서 있어도 될 텐데, 뭐가 그리도 급한지.

"조금 더 있어도 될 텐데. 아쉽네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