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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 *

"…깜짝 놀랐지?"

헤인트가 민망해하며 카슨을 바라보았다.

같은 마차를 타고 별장으로 돌아가던 길이었기에 더 민망했다.

"누가 지시했지?"

카슨이 턱을 괸 상태로 물었다.

"세틸 저하의 생각이셨어. 물론 나도 동의했고."

"휩쓸리지 않게 잘 처신해."

황제의 자리는 하나지만, 황자와 황녀는 6명이었다.

헤인트가 황실 기사가 된 이상 황제의 자리를 두고 벌어지는 싸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야지."

헤인트가 애써 웃었다.

"게다가 나는 지금 굴러온 돌이라서 신경 쓸 것도 많고."

헤인트의 시선이 루시온을 향했다.

끙끙 앓으며 잠이 들어 있었다.

"다 네 동생 덕이야. 네가 동생 하나는 잘 뒀어."

"혼자서 잘 자랐으니 당연하겠지."

카슨의 목소리에는 씁쓸함이 담겨 있었다.

"그나저나 그, 에올인가 하는 신관은 흑마법사를 찾았다며?"

"그래. 시종이 흑마법사에게 매료된 걸 확인했지. 그대로 폐하께서 목을 베셨어야 했는데."

"이상하지 않아? 결국, 홀에는 어둠을 따르는 자들이 없었다는 뜻이잖아. 대신관이 그런 실수를 하다니."

헤인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실수는 누구든 할 수 있다."

"카슨."

"왜?"

"오해하지 말고 들어."

"말이나 해."

"루시온은 진짜 일반인이 맞아?"

"그래."

카슨은 헤인트의 물음이 거슬렸으나 일단 참았다.

"지금 네가 내 동생을 의심하는 건가?"

"아니, 아니. 그건 절대 아니야."

헤인트는 크게 당황하며 손을 가로저었다.

대신관이 검증까지 해줬으니 루시온은 절대로 흑마법사가 아니었다.

단지, 미심쩍은 게 하나 있었다.

"헤인트."

"그래."

헤인트는 날이 선 카슨의 물음에 시선을 살짝 흘리며 대답했다.

"앞으로 네가 루시온을 위해 귀가 되어야겠다."

"어느 정도야 해줄 수 있지만, 나도 지켜야 할 선이 있다는 건 잊지 마. 내 충성심은 이미 황실에 바쳤거든."

"나도 거기까지 강요할 생각은 없다. 다만, 기사로서 신의를 지키리라 믿는다."

신의라는 말로 포장된 강요에 헤인트는 자신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참 어렵네. 신의와 충성심이라는 게."

"대답해."

"내 대답은 뻔하잖아."

"사람 마음은 모르는 법이지."

헤인트는 혀를 차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알았어. 여기서 맹세할게."

굳은 얼굴로 헤인트는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나 헤인트는 신의를 다해서 황실에서 루시온을 불합리한 상황에 빠트리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즉시 카슨에게 알린다. 됐냐?"

"그래."

그제야 카슨은 얼굴을 폈다.

"꽉 막힌 놈."

헤인트는 친우답지 않은 친우를 언짢게 바라보았다.

마차는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나저나 참 이상하네.'

헤인트는 손을 만지작거렸다.

루시온을 처음 볼 때는 몰랐지만, 계속 보면 볼수록 자신의 빛이 반응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루시온은 분명 일반인이라고 했는데.'

* * *

며칠 뒤.

"오늘 새벽에 피이자트라는 성을 가진 놈들은 죄다 목이 베어졌다더구나."

카슨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전부요?"

루시온은 요리장이 싸준 마카롱을 먹다 말고 눈을 크게 떴다.

―라타도. 라타도 아.

그새 마카롱 하나를 몽땅 해치운 라타가 앞발로 루시온을 흔들었다.

"솔직히 이례적이긴 일이지. 아무래도 폐하께서 화가 많이 나신 모양이구나."

카슨 자신도 그토록 일방적인 재판은 처음 보았다.

'벌써 성자의 힘을 느끼네.'

루시온은 우물거리며 물었다.

"그럼 놈들이 가진 재산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1은 나라가. 9는 네가 소유하기로 했단다. 너의 명성이 더럽혀진, 위로금이지."

[…뭐?]

갑자기 내지르는 러쉘의 소리에 루시온은 깜짝 놀랐다.

제아무리 자작가이나, 그 재산을 합치면 얼마나 되겠는가.

무려 9의 비율을 루시온이 소유하다니.

"형님."

"그래."

"제가 받을 금액의 2 정도는 피해자들을 위해 써도 됩니까?"

"아직 서류가 오지 않았지만, 앞으로 네 재산이니 네 마음대로 하거라."

카슨은 기특한 얼굴로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그, 음, 올바른 행동이긴 하지만, 루시온 너 진짜 성자가 되기로 한 건 아니겠지?]

루시온은 러쉘의 말에 고개를 가볍게 가로저었다.

딱히 성자라는 칭호 때문에 하는 건 아니었다.

2를 떼어주어도 괜찮을 만큼 여유가 되기에 하는 행동일 뿐이었다.

그때, 마차가 멈췄다.

"도착한 모양이니, 내리거라."

카슨은 먼저 마차에서 내려 주변을 살핀 뒤에 말했다.

이전에 루시온이 피이자트 가문의 사업장을 들리다 마차 사고가 난 적이 있었다.

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으니 별수 없이 기사들을 데리고 왔다.

대신 루시온의 눈에 띄지 않게 주변으로 퍼트렸다.

루시온은 마차에서 내려 따갑게 내리쬐는 햇살을 바라보았다.

참 오랜만이다 싶었다.

요 며칠 러쉘 말대로 정말 끙끙 앓아 죽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와....'

루시온은 저택 크기만 한 부지를 가진 사업장을 바라보았다.

'사업장이라기보다는 공장단지 같은 느낌인데?'

부지 넓이만 보아도 루시온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카슨은 피이자트 가문이 가짜 물건을 진짜 물건처럼 만들어 단기간에 수익을 챙겼다고 말했다.

주로 귀족들이 좋아하는 귀금속과 액세서리 종류였다.

그뿐만 아니라 품질 좋은 마석을 불량 마석으로 바꿔치기해서 팔아넘겼다는 흔적 역시 찾아냈다고 했다.

'잠깐 먼지를 털었다고 이만큼이나 나왔다는 건 아직 더 털게 남아 있다는 말이지?'

사기 행각이 드러난 이상, 사업장은 가치를 잃어버렸다.

카슨에게 조사를 유도하지 않고 사업장을 덥석 받았다면 덤터기만 쓸 뻔했다.

이제 여기에서 쓸 만한 건 이 부지와 사업장 어딘가에 숨겨진 비밀 금고였다.

자신에게는 스승님이라 불리는 훌륭한 탐지기가.

그리고 굴착기 겸 땅도 잘 파는 흄까지 있었고.

'비밀 금고를 털기엔 완벽한 날이지.'

루시온은 자꾸만 새어 나오는 웃음을 삼켰다.

[…잠깐만 루시온.]

러쉘이 갑자기 심각한 표정으로 부지를 바라보았다.

[저기에 죽음의 기사가 돌아다니고 있는데?]

57화. 죽음의 기사가 따라온다(3)

'죽음의 기사? …그러니까 데스 나이트?'

루시온은 황당한 표정을 숨기려 애를 썼다.

다른 건 몰라도 특별한 유령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죽음의 기사가 뭔데?

라타가 꼬리를 흔들며 물었다.

덩달아 흄이 관심을 드러냈다.

탁!

러쉘이 손가락을 튕기자 부지 근처에서 검을 질질 끌고 다니는 검은 기사가 보였다.

보기만 해도 불길한 모습에 루시온은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보이지? 저렇게 몸에 새카만 어둠으로 된 갑옷을 두른 존재를 죽음의 기사라고 하는데, 정말로 죽기 전에 기사였던 존재들이 있고, 아닌 존재들도 있어.]

루시온은 카슨의 뒤를 따르며 러쉘의 설명을 들었다.

보지 않으려고 해도 시선이 자꾸만 죽음의 기사를 향해 자석처럼 이끌렸다.

[죽음의 기사가 되는 방법은 보통 2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깊은 원한을 가지고 죽을 것. 다른 하나는 타락할 것. 내가 보기에 쟤는 두 가지가 다 중복된 경우로 보여.]

―유령도 타락해?

라타가 묻자 러쉘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당연하지. 원래 유령은 하늘로 가야 해. 하지만 순환을 거부하고 땅에 머무르는 자들이 있어. 물이 고이면 썩듯 그들은 순환을 거부했기에 서서히 타락할 수밖에 없지.]

루시온은 그 말에 바로 걸음을 멈추고 러쉘을 바라보았다.

'그럼 스승님도 앞으로 타락하는 길만 남았다는 건가…?'

[나는 타락하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 너와 계약을 맺을 때, 네 몸의 지분 20%를 요구한 건 다 그걸 해결하기 위해서였으니까.]

러쉘의 입꼬리가 높이 올라갔다.

―천재다! 러쉘은 천재야!

라타가 방긋 웃으며 말하자 러쉘의 어깨가 한껏 치솟았다.

[그렇지. 한 번 더 말해봐.]

―러쉘은 천재야!

한 번 더 요구하는 러쉘이나, 그걸 또 말하는 라타나 똑같아 보였다.

"루시온…?"

루시온의 발걸음 소리가 멈추자 카슨이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도 몸이 좋지 않더냐."

"아닙니다. 오랜만에 햇살이 반가워서 그럽니다."

루시온은 놀랐던 표정을 숨기며 말했다.

"그래. 반가울 만하지."

카슨은 멈췄던 발을 움직였다.

[여기서 궁금한 게 하나 생기겠지. 그간 루시온 네가 왜 타락한 유령을 보지 못했는지.]

러쉘은 다시 목소리를 냈다.

[이유는 간단해. 우선 '정화'라는 이름으로 신관들이 때때로 벌이는 작업 때문이야. 그들은 유령을 볼 수 없지만, 완전히 제거할 수는 있지.]

러쉘의 손가락이 다시 죽음의 기사를 가리켰다.

[그리고 타락한 유령은 저 녀석처럼 죽음의 기사가 되든, 소멸하든 둘 중 하나를 택하는데 보통 대부분 소멸하고 말아.]

―그럼 저 죽음의 기사도 루시온이 '내게 복종하겠는가!' 하면서 지배할 수 있어?

라타가 제법 근엄한 목소리를 내며 물었다.

[그게 좀 어려워. 그러니까, 루시온이 지금 볼 수 있는 유령은 급으로 따지자면 E. 정보를 수집하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지금까지 지배했던 유령이 고작 E등급이라고?'

루시온은 기가 찼다.

잠깐 우쭐했던 자신이 부끄러웠고, 저택에 있는 E급에게 그간 시달려왔다는 게 허탈할 정도였다.

[하지만 죽음의 기사는 다르지. 자발적으로 너한테 복종을 맹세하지 않는 이상은 B~A급이라서 지금 루시온이 지배하기에는 어둠이 턱없이 모자라.]

'어쨌든 지배를 할 수 있다는 말이네?'

루시온은 입술만 움직여 물었다.

죽음의 기사는 정확히 어떤 존재입니까.

[타락했지만, 이를 견딜 수 있는 정신력을 가진 존재라서 보통 유령과는 달리 여러 가지를 할 수 있지.]

러쉘은 턱을 매만졌다.

[일단 장소에 속박되지 않아. 또 걔가 너에게 복종한다는 전제하에, 네 어둠을 이용해서 유령 지배, 유령 통솔 등 여러 가지와 함께 빙의까지 가능하겠네.]

―빙의가 뭔데?

라타는 총총 걸으며 눈을 깜박거렸다.

[죽음의 기사가 가진 능력을 잠깐 빌리는 행동을 말해. 좋은 마법이지만, 빙의하는 사이 정신까지도 공유해서....]

러쉘이 갑자기 말을 멈췄다.

루시온은 역시 온몸에 털이 쭈뼛 서는 기분을 느꼈다.

"형님."

루시온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래."

"주변을 돌아다녀도 됩니까?"

"그러거라."

카슨은 흔쾌히 허락했다.

주변에 뭐가 없다는 건 이미 조금 전에 보고를 통해 들었다.

루시온이 어디론가 다급히 움직이자마자 카슨은 기사들에게 물러나라는 신호를 보냈다.

요새 루시온이 궁금한 것도, 호기심도 늘어났다는 걸 알기에 자유롭게 둘 생각이었다.

이 부지에 사람이라고는 자신들이 전부였으니까.

"…스승님?"

루시온은 다급히 러쉘을 불렀다.

조금 전 러쉘이 말을 멈췄을 때, 루시온은 죽음의 기사와 눈을 마주하고 말았다.

그 순간 갑자기 죽음의 기사가 자신에게 다가왔다.

검을 질질 끌며 다가오는 모습이 퍽 공포 영화에 나오는 귀신이나 마찬가지였다.

―이히히! 술래잡기다! 라타는 술래잡기 좋아하는데!

꺄르르 거리며 웃는 건 라타밖에 없었다.

"아. 이게 술래잡기입니까?"

루시온을 따라 빠르게 걷던 흄이 흥미롭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니야."

루시온은 사실을 정정했고, 다시 러쉘을 보았다.

러쉘은 대체 뭘 생각하는지 죽음의 기사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잠깐만 멈춰봐, 루시온.]

"저 모습을 보고 어떻게 멈춥니까?"

[죽음의 기사가 지금 너한테 말을 걸고 있어.]

러쉘이 귀를 쫑긋 세웠다.

'말이고 뭐고. 적어도 검은 내려놔야 할 거 아니야.'

루시온은 목이 탔다.

무식하게 검을 들고 쫓아오는데 멈출 사람이 어디 있는가.

"지금 도련님을 죽일지 말지를 고민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흄이 죽음의 기사가 하는 말을 알려주었다.

곧 그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유령과 싸워본 적이 없습니다. 제 주먹이 닿을까요?"

[그러게. 나도 궁금한데?]

루시온은 두 사람의 말이 귀에 닿지 않았다.

빠르게 걷다 달려봤지만, 죽음의 기사를 따돌리는 무리였다.

그대로 멈춰서 숨을 골랐다.

'미친....'

루시온은 바짝 마른 입술을 핥았다.

이곳 부지가 중부 지역의 외곽에 존재한다 한들 저 죽음의 기사를 본 흑마법사가 없겠는가.

왜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지배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었다.

저놈이 강한 것이다.

그것도 엄청.

'오싹하네....'

죽음의 기사가 갑자기 멈췄다.

[안녕.]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상하게 삐딱해진 고개가 루시온은 무척 신경 쓰였다.

[역시 내가 보이는구나. 내가 보여.]

질질 끌던 검이 천천히 앞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다는 건… 흑마법사라는 소리네?]

그녀는 무척 기뻐하며 검날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흑마법사야. 흑마법사야. 흑마법사가 왔다고. 흑마법사가! 너흴 증오해. 아니야. 나는 흑마법사가 필요해. 필요한데 죽이고 싶어. 아니야. 죽이면 안 돼.]

정신을 놓은 듯 그녀는 낄낄 웃으며 흑마법사를 두고 필요하니 마니 혼자 실랑이를 펼쳤다.

―정신 차려라, 얍!

대체 언제 거기까지 간 건지.

라타는 앞발을 들어 아침마다 루시온을 깨우듯 죽음의 기사의 발을 찰싹 때렸다.

"라타!"

루시온은 기겁했다.

그대로 라타를 구하려 놈에게 달려가는 그때, 죽음의 기사가 검을 떨어트렸다.

챙.

[…크흑.]

러쉘의 눈이 커졌다.

[으어어억!]

죽음의 기사는 괴로움에 자신의 투구를 붙잡고 포효하듯 비명을 내질렀다.

타락으로 더러워진 어둠이 맑은 어둠으로 뒤바뀌고 있었다.

'신수의 힘이다….'

러쉘의 주먹이 저절로 쥐어졌다.

빛의 신수가 재생의 힘을 가졌다면 어둠의 신수인 라타는 정화의 힘을 가진 것이다.

재생과 정화.

완벽한 조화가 아닌가.

"...?"

루시온 역시 죽음의 기사가 일으키는 갑작스러운 변화를 발견했다.

동시에 자신의 어둠이 빠르게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제가 데려오겠습니다."

흄은 말과 함께 라타를 품에 쥐고 뒤로 물러섰다.

―이히히. 라타가 했어. 라타, 잘했어?

라타가 배시시 웃었지만, 루시온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어떻게 한 거야?"

―그냥. 라타가 해낼 수 있… 홉! 루시온의 어둠이 반이나 사라졌어! 라타가, 라타가 실수했어!

라타는 흄의 품에서 바둥거리며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어둠이야 다시 차오를 테니, 반이나 사라져도 아쉽지 않았다.

"라타. 내 어둠은 신경 쓰지 말고 네가 뭘 했는지 말해줘."

―라타는 그냥 저 어둠이 가여워 보여서 정신 차리라고 루시온처럼 주먹을 내밀었어. 정말 그게 전부야.

'신수의 힘인가…?'

루시온은 눈치를 살피는 라타의 이마를 눌러주고는 죽음의 기사를 살폈다.

그녀의 주변으로 일렁거리던 어둠이 가라앉았다.

검은 갑옷은 여전했지만, 녹슬어버린 검도 깨끗하게 변하며 그녀의 분위기마저 차분해졌다.

[실례.]

그녀는 한쪽 팔로 자신의 가슴을 치며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차마 기사로서 보여주지 못할 꼴을 보였어.]

태연하게 쑥스러움을 표현하는 그녀는 떨어진 검을 주웠다.

[공은 흑마법사인가?]

죽음의 기사는 러쉘을 살펴보는 듯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다시 루시온을 향했다.

"그렇다면?"

루시온이 대답했다.

[공 역시 가여운 저들을 이용하려고 이곳에 왔나?]

말투가 마냥 곱진 않았다.

루시온은 다짜고짜 쫓겼던 사실에 얼굴을 구겼다.

"네놈이 먼저 날 쫓아왔으면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것도 실례. 그렇다면 공은 무슨 일로 여기에 왔지?]

그녀의 물음에 루시온은 땅을 가리켰다.

"여긴 내 땅이거든."

[…그럴 리가. 피이자트 놈들이 데리고 온 흑마법사는 내가 다 죽였는데? 너는 남은 자였나?]

"그런 개쓰레기랑 같은 취급하지 마. 난 크로니아다."

[크로니아…?]

죽음의 기사는 기억을 되짚어보는 것처럼 천천히 생각했다.

'놈은 지금 피이자트 가문에 원한을 가지고 있는 상태다.'

루시온은 러쉘이 말했던, 죽음의 기사가 되는 방법을 떠올려보았다.

'분명 스승님께서 저 죽음의 기사가 원한과 타락. 이 둘을 다 가진 것처럼 보인다고 했지?'

[그래서 내 제자에게 무슨 볼일이지?]

러쉘이 팔짱을 끼며 죽음의 기사에게 다가갔다.

[...?]

죽음의 기사는 러쉘을 빤히 바라보는 듯하다가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그대는… 이상한 자다.]

[용건을 말해. 볼일이 없으면 이제 여기를 떠나고. 너는 다른 유령처럼 얽매일 필요가 없을 텐데?]

[용건이라면 있어.]

"내가 피이자트 가문을 무너트렸어."

루시온은 죽음의 기사가 말을 꺼내기 전에 자신을 가리켰다.

'지배를 꼭 마법으로 할 필요가 있나.'

조금 전 죽음의 기사는 자신의 입으로 기사임을 자청했다.

무릇 기사라면 유령이 되어서도 몇 가지 습성을 버리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같잖은 정의로움.

꼴에 높은 자존심.

그래서 은혜를 입으면 꼭 갚아야 하는 이상한 습성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모든 기사에게 해당하는 건 아니었지만, 한 번 주사위를 던질 만했다.

"너도 귀가 있다면 피이자트 가문이 망했다는 소문은 들어봤을 테지?"

루시온은 입을 열었다.

원래 좋지 않은 소문은 그 어떤 소문보다 더 빨리 퍼지기 마련.

[그래. 나도 귀가 있으니 듣지 않을 수 없지.]

순간, 검을 잡은 죽음의 기사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공이 누구인지 이제야 알겠어.]

'준비 동작이다.'

흄은 계속 죽음의 기사를 주시하고 있었고, 그 움직임을 읽었다.

―적의 준비 동작을 읽을 수만 있다면 적보다 한 발 더 앞서갈 수 있다. 너는 동체 시력이 좋으니 쉽게 알 수 있겠지. 그러니 보고 기억하거라.

카슨의 명령으로 틈틈이 기사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지켜보았기에 칼을 휘두르기 전에 누구나 하는 준비 동작을 기억했다.

[성자 루시온 크로니아!]

죽음의 기사가 내지르는 검이 재빠르게 루시온을 향했다.

하지만 그 검의 끝은 흄에게 잡혔다.

루시온은 입꼬리를 올렸다.

자신이 몰라서 가만히 있던 게 아니었다.

기사가 움직이자마자 어둠이 멋대로 나오려고 했지만, 일부러 억눌렀다.

'기사들의 훈련을 보기만 했는데 반응 속도가 빨라지다니. 훌륭하네.'

자신이 기대한 이상으로 흄이 움직여주었다.

"…와. 제가 유령을 만질 수 있었네요."

흄은 신기한 듯 자신이 잡은 검을 바라보았다.

58화. 비밀 금고, 타락한 유령

"쳐."

루시온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흄은 검을 잡지 않은 손으로 주먹을 내밀었다.

붕!

바람을 때리는 거센소리에 죽음의 기사는 우선, 뒤로 물러섰다.

어떻게 흄이 유령을 만질 수 있는지 몰라도 루시온은 언짢은 목소리를 냈다.

"이봐, 죽음의 기사."

대화라는 건 상대가 동등할 때 할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 죽음의 기사의 눈에 비치는 자신은 고작 먹이었겠지만, 흄이 일격을 막은 지금 그 위치는 완전히 달라졌다.

"신관이 유령을 볼 수 있었던가?"

루시온이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신관들은 유령을 볼 수 없었다.

그 당연한 사실을 뒤늦게 떠올린 죽음의 기사는 곧 검을 내리며 혼란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한데 공은 성자이질 않은가. 흑마법사가 성자라니. 그런 일은 지금까지 없었어. 공은… 대체 정체가 뭐지?]

"내 정체보다 사과부터 해야지. 나한테 볼일이 있는 것 같은데."

루시온은 이참에 대화의 주도권을 빼앗을 생각이었다.

사업장 주변의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맴도는 이유.

흑마법사를 증오하는 이유.

이 둘을 대충 맞춰보면 흑마법사가 이곳에서 어떤 실험을 한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실험체를 제공해준 사람은 다름 아닌 피이자트 가문이 되겠네.'

혹은 피이자트 가문을 이용하는 또 다른 놈이 있을 수도 있었다.

무엇이 됐든 뒷걸음질하다 쥐를 잡은 격이라 루시온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이쯤 되면 죽음의 기사가 자신에게 할 부탁이라는 건 뻔했다.

'유령을 하늘로 보내 달라는 거겠지.'

유령은 어둠의 속한 자들이었다.

그들을 온전히 죽음과 삶이라는, 순환의 고리에 보낼 수 있는 자는 오직 흑마법사뿐이었다.

'자, 죽음의 기사를 주워볼까?'

루시온은 죽음의 기사를 바라보았다.

[나는… 흑마법사를 믿지 않아.]

죽음의 기사가 내는 차가운 목소리에 러쉘이 코웃음을 쳤다.

[그럼 이러고 있지 말고 서로 갈 길 가자고. 됐지?]

[그대는 저 흑마법사에게 속박당했나?]

"속박? 내가 썩 착하진 않아도 스승님을 속박하는 못된 제자는 아니라서."

루시온은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지, 지금 공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내 스승님이라니까."

조금 전과 달라지지 않은 대답에 죽음의 기사는 당황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왜? 유령인 스승은 처음 봤어? 내가 루시온의 스승이다.]

러쉘은 당당히 자신을 가리켰다.

"이제 용건이 없으면 스승님 말대로 서로 갈 길 가자고. 내가 지금 좀 바쁘니까."

루시온은 죽음의 기사가 내는 침묵을 허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안달 나도록 미끼를 살살 흔들어 보였다.

[내가 너희들이 '죽음의 기사'라고 부르는 존재라는 걸 알고 있지 않나?]

급한 건 죽음의 기사였지, 자신이 아니었다.

"스승님께서 설명해주셔서 방금 알았어."

[그럼, 공 역시 내가 탐이 날 터.]

"탐이야 나지만, 지금은 저 안에 잠들어 있는 돈들이 더 가지고 싶은데?"

이는 사실이라 루시온은 군침이 자꾸만 돌았다.

[공은 날 공격하지 않을 텐가.]

죽음의 기사의 목소리가 조금 다급해졌다.

"공격? 무식하게 검부터 휘두른 널 따라 하라는 말은 아니겠지?"

루시온은 앞으로 걸었다.

무심한 척하며.

[죽음의 기사인 나의 복종을 받으면 너희는 더 강해질 수 있다고 말했어. 그런데도 날 강제로 지배하지 않겠다는 말인가.]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루시온은 자신을 졸졸 따라오는 죽음의 기사를 쳐다보지 않았다.

오히려 구름이 동동 흐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날씨 한 번 좋았다.

[나는 죽음의 기사다.]

하고 싶은 말을 두고 자꾸만 빙빙 돌리자 러쉘은 더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저기 밑에 타락한 유령들이 제법 많네. 하나같이 당장 소멸할 것처럼.]

그때, 죽음의 기사가 걸음을 멈췄다.

[…공의 도움이 필요해.]

읊조리듯 죽음의 기사는 자신 없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런가?'

루시온은 죽음의 기사가 왜 사업장 주변을 맴돌았는지를 알았다.

그녀는 사업장 안에 있는 유령들이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막고 있었던 듯했다.

"나는 그냥 도와주지 않아."

―아닌데?

루시온의 말에 라타는 바로 부정했다.

흄 역시 똑같은 말을 꺼내고 싶었지만, 루시온의 의도를 망칠 수 없었기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렇지. 너도 날 지배하고 싶겠지. 내 힘이 탐이 날 테니.]

죽음의 기사는 그제야 본색을 드러낸 루시온의 모습에 치를 떨었다.

그럼에도 루시온은 무덤덤하게 부지를 가리켰다.

"내가 저곳을 정리하면 이제 갈 데가 없어지겠지?"

[…뭐?]

"날 따라와. 거기서 날 도우면서 은혜를 갚아. 그 뒤에 떠나든지 말든지 네 마음대로 하고."

[날… 지배하지 않는 건가?]

'지금 내 실력으로 지배는 무리지.'

루시온은 점점 자신이 우물 속 개구리라는 걸 깨우치고 있었다.

변경으로 돌아가면 할 게 많았다.

루시온은 뒤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죽음의 기사는 장소에 속박되지 않는다고 스승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내가 널 지배해야 이곳에 빠져나올 수 있는 건가?"

[그건 아니야.]

"그럼 됐네."

마치 거래가 성사된 것처럼 루시온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너한테도 꽤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너희처럼 저들을 하늘로 보내줄 수 없어. 내가 베어버리면 사라져버리니까.]

죽음의 기사는 자신이 손에 쥔 검을 바라보았다.

"그럼 넌 내게 덤벼드는 유령을 베어버리면 되겠네. 마침 저택에 마음에 안 드는 놈들 투성이거든."

장난기가 살짝 섞인 그 목소리에 죽음의 기사는 잠깐 걸음을 멈춰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이상했다.

참 이상한 흑마법사라고 생각했다.

* * *

급하게 쫓겨났는지 사업장 내부는 엉망이었다.

쫓겨나더라도 마석을 훔치기 바빴는지 자동화 기계처럼 생긴 마법 도구에 마석 자리만 비어 있었다.

도중에 뜯겨나간 마법 도구도 보였고, 눈에 보이는 서랍이란 죄다 열려 있는 상태였다.

'난장판이네.'

루시온은 신이 난 채로 뛰어다니는 라타를 말리려다 말았다.

라타를 씻기는 건 자기 일이 아니었다.

"스승님."

지금 내부로 들어온 건 자신뿐이라 마음껏 목소리를 냈다.

살짝 능글맞은 목소리에 러쉘은 대충 눈치를 챘다.

[뭘 알려달라고?]

"아시잖습니까."

[돈도 많으면서.]

"앞으로 돈이 많이 필요합니다. 다른 한쪽을 신경 쓰지 못했거든요."

소설 속에서 그랬듯이 크라언이 알아서 조직을 관리하리라 생각했지만, 마냥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조직 내에 자신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동시에 조직이 성장해야 했다.

"아."

루시온은 곧 무언가를 떠올리듯 죽음의 기사를 바라보았다.

"너라면 잘 알겠네."

[공은 귀족이 아닌가.]

"돈 앞에 귀족이 어디 있어?"

[비밀 금고가 있는 장소는 나중에 알려줄 테니....]

"아니. 밖에 있는 내 형님이 귀가 밝으셔서 난리를 피우면 금세 이쪽으로 들어오실 거야. 그럼, 나는 그대로 별장으로 끌려가는 거지."

[캬. 벌써 미래를 보고 왔네.]

러쉘은 키득거렸다.

"그러니까 돈이 먼저야."

루시온은 못을 박았다.

일에도 순서가 있는 법이었다.

[…좋아.]

죽음의 기사는 숨을 깊게 내쉬었다.

자신이 도움을 받는 처지이니 어쩌겠나.

[이쪽으로 와.]

루시온은 자신을 안내하는 죽음의 기사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도련님께서 돈을 좋아하실지 몰랐습니다."

흄이 조용히 목소리를 냈다.

용돈이라며, 잘했다며, 굶고 다니지 말라고 돈주머니를 틈틈이 자신에게 건네지 않던가.

이미 집사로서 받는 봉급으로도 충분했는데.

―아니야. 루시온은 돈보다 라트초를 더 좋아해.

라타가 루시온의 말을 가로챘다.

"아. 맞습니다. 제가 그걸 잠깐 잊었습니다."

흄은 그제야 의문을 해결한 얼굴로 루시온의 뒤를 따랐다.

'내가 라트초를 좋아한다고?'

루시온은 어처구니없었지만, 딱히 대답하고 싶진 않았다.

죽음의 기사는 앞서가다 말고 땅을 가리켰다.

[비밀 금고는 이 밑에 있어. 하지만 어떤 장치로 작동하는 건지 몰라. 공이 창고에 도달하려면 시간이 꽤나....]

"흄."

루시온은 죽음의 기사가 하는 말을 자르며 흄을 불렀다.

굴착기가 작동할 시간이었다.

"예, 도련님."

흄은 죽음의 기사가 서 있는 땅 아래를 향해 발로 크게 굴렸다.

콰앙!

바닥이 단숨에 쪼개져 흄까지 아래로 내려갔다.

[…순수한 힘이라고?]

죽음의 기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비밀 장소가 있는 만큼 바닥이 다른 곳보다 훨씬 튼튼했다.

그런데 저걸 단숨에 쪼개버리다니.

라타가 구멍이 난 바닥을 향해 고개를 내밀었다.

흄이 괜찮은지 잠깐 멈췄던 라타의 꼬리가 흔들렸다.

[이 정도 소리라면 카슨이 오겠는데?]

러쉘이 꺼내는 말에 루시온은 미간을 찌푸렸다.

탐험은 이제 막 시작되었기에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흄. 형님께 가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하고 와."

"알겠습니다."

"혼자서 나올 수 없… 있네."

분명 흄의 동작은 가벼웠지만, 그는 약 한 층을 뛰어올랐다.

루시온은 당황하며 흄을 바라보자 러쉘은 덩달아 당황해했다.

[너도 할 수 있는데 왜 놀라?]

"순수한 육체로 저렇게 움직이는 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루시온은 태연하게 어둠을 꺼내 다리에 둘렀다.

그대로 아래로 떨어지자 어둠이 쿠션 역할을 해주어 충격이 전혀 닿지 않았다.

[뭐, 확실히 신기하긴 하지.]

러쉘은 어느새 멀어진 흄을 바라보았다.

흄을 보면 볼수록 대체 왜 몬스터라고 불렸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딜 봐서 괴물인가.

그냥 힘과 신체 능력이 좋은 평범한 소년에 불과한데.

―라타는 혼자서 뛸 수 있어.

루시온이 팔을 벌리자 라타는 '에헴'하고 소리를 냈다.

폴짝.

라타는 가볍게 땅으로 착지했다.

라타까지 내려온 걸 확인 후에야 루시온은 죽음의 기사를 재촉했다.

"이제 됐지? 계속 가."

[진짜 흑마법사였어....]

이미 아래층에 가 있던 죽음의 기사는 얼이 빠진 목소리를 냈다.

[진짜 성자가 흑마법사라니.]

"신기하긴 할 텐데, 꼭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말하네."

루시온은 비웃음을 입가에 그렸다.

[공은 그 무거운 짐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 자리를 받은 거지?]

"나는 비밀 금고가 있는 장소를 알려달라고 했지, 세상을 걱정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는데."

루시온은 손가락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조용히 길만 안내하라는 신호였다.

[나는.... 아니야. 그래, 이번에 내 무례는 사과하지.]

죽음의 기사는 고개를 가볍게 숙인 후에 다시 앞장섰다.

피이자트 가문이 어지간히도 커다란 걸 숨긴 건지, 지하는 미로처럼 이곳저곳 얽혀 있었다.

'대체 어떤 대단한 걸 숨겼기에 이래?'

걸으면 걸을수록 루시온은 기대감에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저기 앞이야.]

죽음의 기사는 문 하나를 가리키고는 조용히 물러섰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모습에 러쉘이 얼굴을 구기며 입술을 뗐다.

[루시온.]

"예."

루시온은 대답과 함께 어둠을 꺼냈다.

아무리 자신이 요새 유령과의 접촉이 뜸했다 한들, 마치 모기가 귓가에 맴돌 때와 같은 그 불쾌감은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다.

"알고 있습니다."

[금고는 내 거야! 아무도 이 금고에 발을 들일 수 없어! 내 거야! 내 거라고!]

갈라진 목소리와 함께 시뻘건 눈을 가진 유령 하나가 문을 통과해 루시온에게 돌진했다.

루시온은 기다렸다는 듯이 유령을 향해 어둠을 낚싯대처럼 길게 빼 휘둘렀다.

찰싹!

[크아아악!]

어둠에 닿자마자 유령은 비명을 토했다.

마치 포효에 가까운 소리였다.

보통 유령이라면 겁에 질려 당장 빌기 바빴지만, 저 유령은 달랐다.

'저거 타락한 유령인가?'

아무래도 새빨갛게 변한 눈이 타락한 유령임을 나타내는 흔적인 듯했다.

[내 금고야! 내 금고!]

유령의 괴성은 아직 전투가 끝이 나지 않았음을 알려주었다.

그건 루시온 역시 마찬가지였다.

휘둘렀던 어둠을 거둬들이지 않고 그대로 커다란 입처럼 모습을 키웠다.

'타락했다고 해도 별거 없네.'

타락한 유령이 날카로운 손톱으로 루시온을 찌르기 전에 커다란 입의 형상을 한 어둠이 놈을 삼켜버렸다.

"꺼져."

콰직.

놈을 삼킨 어둠에서 뾰족한 가시가 튀어나왔다.

루시온이 어둠을 거뒀을 때, 그 자리에 남은 건 검은 가루밖에 없었다.

루시온은 바로 죽음의 기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죽음의 기사."

그 눈빛이 무척 사나웠다.

59화. 비밀 금고, 타락한 유령(2)

죽음의 기사는 분명히 금고 근처에 타락한 유령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을 터.

알고 있었음에도 내버려 두었다.

마치 자신을 시험하듯.

루시온은 그 사실이 참 불쾌했다.

"그렇게도 내 실력이 궁금했나?"

[맞아. 그래서 일부러 타락한 유령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공에게 알리지 않았어.]

죽음의 기사는 빠르게 인정했다.

"왜?"

루시온이 물었다.

싸늘한 목소리였다.

[공이 정말로 저들을 구원할 수 있는지, 죽지 않을지 알고 싶었거든.]

루시온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몇 번을 생각해도 참 기분 나빴다.

[내 행동이 옳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저들은 저 꼴로 만든 것도 흑마법사고, 나를 이 꼴로 만든 것도 흑마법사야. 널 쉽게 믿었을 거라 생각했나?]

"뭐, 좋아. 네가 돌발 행동을 할 거라는 건 예상했으니까. 하지만 이따위 저급한 행동일 줄이야."

루시온의 말이 곱지 않았음에도 죽음의 기사는 담담했다.

[공의 말을 받아들이지.]

"아니, 네가 나한테 꺼낼 말이 하나 더 남았을 텐데."

루시온은 죽음의 기사가 쓴 투구를 가리켰다.

"고개를 숙여야지."

그 손가락은 이내 바닥을 향했다.

죽음의 기사는 화가 난 듯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이건 거래였어. 나보고 도와달라고 한 것도 너고. 내 제의를 허락한 것도 너야."

루시온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동의하에 여기까지 와 놓고 나를 시험하겠느니 뭐니 하면서 위험에 빠트려 놓고 입을 싹 닦으려고? 처음부터 내가 싫었으면 다른 놈한테 부탁했어야지. 유령이 되면 염치라는 것도 없어지나?"

[아니.]

러쉘은 빠르게 대답하다 눈동자를 굴린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쟤만 저러는 거야. 아무리 유령이 되어도 염치는 남아 있지.]

죽음의 기사는 러쉘을 바라보았다.

투구에 가려져 있어도 당황함이 투구 너머로 느껴지는 듯했다.

[황당해? 설마 루시온이 내 제자라는 걸 잊은 건 아니겠지?]

러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주변이 재빨리 싸늘해지면서 죽음의 기사는 원인 모를 압박을 느껴 잠깐 몸이 무너져내렸다.

하지만 죽음의 기사는 버텼다.

"같잖은 자존심은 그만 내세우지 그래?"

루시온은 팔짱을 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앞서 무례는 넘어간다 치지만, 이번 일은 장난이 아니었다.

어둠의 축복을 받은 이들은 유령의 공격에 물리적 타격을 입을 수 있었다.

[아니. 이건 같잖은 자존심이 아니야. 사과는… 공이 정말로 그들을 보내준다면 그때, 할 생각이었어. 공에게 저지른 내 무례가 얼마나 큰지 알고 있으니까.]

죽음의 기사는 절박함에 사로잡힌 듯 목소리를 냈다.

[나를 이해해달라 말하지 않아. 그저, 나는 공이 두려울 뿐이야. 공의 어둠이 언제든 나를 가둬 강제로 지배할 수 있으니. 저들을 보내지 못하고 이곳을 떠날까 봐, 나는 그게 너무 두려워.]

루시온은 처음으로 죽음의 기사가 내보이는 간절함을 보았다.

곧 러쉘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운이 좋은 줄 알아, 죽음의 기사.]

러쉘이 힘을 풀자 죽음의 기사는 주춤거렸다.

러쉘이 말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었다.

"아무것도 안 해."

루시온이 말했다.

정확히는 할 수 없었다.

지배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 어둠을 들이부어야 하는데, 자신이 보아도 죽음의 기사를 지배하기에는 지금의 어둠으로 무리였다.

[…위층에서 기다리지.]

죽음의 기사는 그대로 천장을 통과해 위로 올라갔다.

―씨이. 라타는 저 유령이 마음에 안 들어. 다시 보면 다리를 물어버릴 거야.

라타는 언제든 물기 위해 입을 쩍 벌리며 딱딱 소리를 냈다.

[마음 쓰지 마. 보통 죽음의 기사가 저래. 쌓인 원한이 많거든.]

러쉘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예. 그렇게 보이네요."

루시온은 무덤덤하게 대답하고는 문을 활짝 열었다.

[잠깐만....]

러쉘은 준비라도 하고 들어가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이미 루시온이 문을 연 뒤였다.

사무실 두세 개는 합친, 제법 커다란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구는 없었고, 벽면에서 새빨간 눈을 한 유령들이 천천히 기어 나왔다.

'세 놈이네.'

루시온은 입꼬리를 올렸다.

지금까지 어둠을 1:1 개념으로만 사용했기에 슬슬 다른 방법을 사용할 때가 왔다.

자신이 느낀 결과 흑마법은 자유도가 빵빵한 오픈 월드 게임과 비슷했다.

정형화된 몇 개의 마법을 제외하면 어둠으로 무얼 만들든, 어떤 형태든 거의 다 소화할 수 있었다.

이제야 어둠을 통제할 수 있는 정신력이 중요하다고 말하던 러쉘의 말이 이해가 갔다.

'나는 둘 다 가지고 있네?'

자신의 정신력.

그리고 어둠을 통제할 수 있는 라타.

'파도가 좋겠어.'

루시온은 선언식 때 느꼈던, 파도 같았던 사람들의 소리를 떠올리며 몸 안에 있는 어둠을 손바닥을 통해 흘려보냈다.

형체가 없는 어둠은 바닥을 찍고 먼지처럼 풀풀 휘날려 천장까지 날아오를 기세였다.

그때, 루시온은 넘실거리는 파도를 떠올리며 천천히 어둠을 흔들어보았다.

마치 허공에 자신의 손이 생긴 것처럼 모래를 두드리는 느낌으로 어둠을 꽉 잡는 걸 잊지 않았다.

꺄르르.

어둠이 모처럼 즐거워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

라타가 귀를 쫑긋 세웠다.

―루시온이 뭘 하려는지 라타는 알겠어.

러쉘은 기대감을 숨긴 채로 루시온과 라타의 모습을 차분히 바라보았다.

늘 루시온은 기대한 것 이상의 결과를 가져다줬으니 제자의 성장을 즐겁게 지켜볼 수 있었다.

[금고는… 아무도 가질 수 없어.]

[내 피가 섞인 돈. 내 아이를 위한 돈이야.]

[가질 수 없어. 네가 가질 수 없다고!]

몸을 삐거덕거리던 유령들은 빛에 달려드는 나방처럼 우르르 움직였다.

'파도는 순식간에, 한 번에 덮쳐버리지.'

루시온은 어둠을 평평하게 바닥에 깔고 유령 놈들이 어둠을 밟았을 때 천장까지 높이 올렸다.

팍!

'그리고 뒤이어 여러 개가 더 오는 법이고.'

아래에서 치고 들어온 타격에 놈들이 비틀거리자 위로 이동시켰던 어둠을 다시 아래로 내렸다.

퍽!

루시온은 박자를 맞춰 파도가 한자리에서 몰아치듯 어둠을 이용해 위아래로 사정없이 어둠을 움직여 강제로 춤을 추게 했다.

'마지막에는 무엇이든 물속으로 가둬 버리는 거지.'

이번에는 단순한 타격이 아니라 정말 파도가 유령을 삼키듯 어둠으로 놈들을 가둬버렸다.

어둠이 유령의 온몸에 침투하길 기다렸다 어둠을 거두자 그 자리에는 이미 가루밖에 남질 않았다.

[그래! 바로 이거지!]

러쉘은 참았던 목소리를 냈다.

보완해야 할 점이 있었지만, 단순히 어둠을 이용해 휘두르고 내리찍는 행동이 아니었다.

어둠을 이용해 '마법 A'같이 하나의 마법으로 만든 셈이었다.

"응용이 나쁘지 않았습니까?"

루시온은 슬쩍 코밑을 문질렀다.

[아주 좋았어! 이 마법을 잘 다듬으면 정형화시켜도 나쁘지 않겠어.]

"정형화라뇨?"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루시온은 눈을 깜박거렸다.

[쉽게 말하면 어둠에게 그 마법을 기억하라고 하는 행동이야. 어쨌든, 이제야 흑마법의 의미를 이해한 모양이네.]

러쉘의 목소리는 너무도 들떠 있었다.

[흑마법은 마나와 빛을 사용하는 이들 중 정형화된 마법이 거의 없을 정도로 자유롭고, 다양하지. 대신, 그만큼 어둠을 통제하는 게 어려울 뿐이지만.]

"그렇습니까?"

['그렇습니까'가 아니야. 넌 라타 덕에 그런 조건에 구애받지 않잖아. 당장 너한테 흑마법을 정형화시키는 방법을 알려주고 싶을 정도라니까.]

이렇게까지 러쉘이 흥분한 건 처음이라 루시온도 덩달아 들떴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루시온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럼 지금 바로 가르쳐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이 제자, 열심히 배워보겠습니다."

[그게 가능했으면 나도 당장 알려줬지.]

러쉘은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루시온.]

"예, 스승님."

[그 마법, 어떻게 사용했는지, 어떻게 어둠을 통제했는지를 꼭 기억하고 있어. 잊으면 안 돼.]

"알겠습니다. 라타도 있으니 기억하기 쉽죠."

루시온은 잠깐 쪼그려 앉아 라타를 쓰다듬었다.

라타는 어둠을 통제하고, 어둠의 양을 조절해주고, 이제는 방향까지도 맞춰주고 있었다.

"잘했어, 라타."

자신에게 있어 라타만큼 훌륭한 보조 역할을 할 수 있는 이는 없을 터.

―이히히. 라타는 원래 잘해.

[…그렇네. 라타가 있으니, 너한테 그 방법을 사용하면 되겠네.]

"그 방법이라뇨?"

루시온은 주변에 유령이 있나 없나를 확인하며 물었다.

[그런 게 있어. 미리 가르쳐주면 내가 재미없으니까. 기대나 하고 있어.]

러쉘이 씩 웃었다.

자신의 마지막 제자일 테니.

"예.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루시온은 재촉하지 않고 활짝 웃었다.

―루시온! 루시온!

그새 쪼르르 달려갔는지 라타가 작은 구멍 틈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

―여기에 루시온이 찾는 게 있어! 금고! 금고야!

라타의 꼬리가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문이 없는데?'

루시온은 라타가 있는 곳 주변을 살피다 문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또 비밀 장치인가.'

비밀 장치고 뭐고, 결국 저 벽만 부수면 그뿐이었다.

루시온이 오른손에 어둠을 두르려고 준비하던 사이 뒤쪽에서 발소리와 함께 흄의 목소리가 들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첫째 도련님께서 당장 이쪽으로 들어올 기세라 설득하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뭐라고 설득했는데?]

러쉘이 물었다.

"도련님께서 비밀 장소를 탐험하시는 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흄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을 믿었다고?]

러쉘은 웃음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예. 믿으신 것도 모자라 혹시 탐험에 필요한 물건이 없냐고 물으셨습니다."

쾅!

루시온은 어둠을 두른 손으로 벽을 있는 힘껏 때렸다.

―홉!

뒤로 몸을 빼던 라타가 깜짝 놀란 것도 잠시 두 눈을 반짝거렸다.

―우오오오!

벽돌이 무너져 내리자 벽으로 위장했던 쇠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곳 전체가 하나의 금고였다.

'완전 튼튼하네.'

루시온은 방금 자신이 휘둘렀던 곳을 바라보았다.

쇠판이 움푹 패 있었지만, 부서지진 않았다.

'나름 세게 휘둘러봤는데 위력이 이것밖에 나오지 않는 건가?'

루시온은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보았다.

분명 사람 여럿을 잡을 만큼 힘이 있었는데 생각만큼 위력이 나오질 않았다.

"제가 하겠습니다."

흄이 주먹을 쥐었다.

"아니야. 잠깐만 기다려봐."

루시온은 무언가 알 듯 말 듯했다.

[네가 휘두를 건 네 손이 아니잖아.]

러쉘이 슬쩍 힌트를 주었다.

방금 루시온이 어둠을 손에 두른 건 손을 보호하기 위해 장갑을 끼는 행동과 비슷했다.

어둠이 가진 힘을 끌어내려면 루시온이 주먹을 휘두를 게 아니라 어둠을 휘둘렀어야 했다.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개념이었다.

'아....'

루시온은 다시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내가 휘둘러야 하는 건 내 손이 아니라 어둠이었지 참.'

부러진 팔 때문에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었던 모양이었다.

루시온은 어둠을 대충 동그랗게 만들었다.

방금 쇠판을 향해 주먹을 내지른 느낌을 대로 어둠을 움직였다.

콰앙!

소리마저 달렸다.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그대로 쇠판을 으스러트렸다.

'아하. 무슨 느낌인지 알겠네.'

루시온은 입술을 핥았다.

그간 어둠을 움직일 때는 몰랐지만, 뭐든 때려보니 마법이라는 건 꽤 재미있는 힘이었다.

생각하는 대로, 원하는 대로 딱딱 흘러가니 재미가 더 가중되는 기분이었다.

[감을 잡은 모양이네.]

러쉘이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예. 스승님께서 왜 어둠이 손과 발처럼 움직여야 한다는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어둠은 마나와 빛처럼 단지 빌려 쓰는 도구가 아니라 정말로 자신의 새로운 팔다리나 마찬가지였다.

'다들 어디 가지 말고, 이쪽으로 모여.'

루시온은 다시 주변으로 퍼지기 시작하는 어둠을 한곳으로 억지로 모이게 했다.

유치원 선생님도 아니고 눈만 뗐다 하면 어둠은 벌써 흩어져 있었다.

어둠을 모아 검을 만들어볼까 했지만, 굵기는 자신의 팔뚝만 해 몽둥이나 다름없었다.

지금으로서는 이 굵기가 최선이었다.

―라타도 최선을 다했는데, 이보다 얇게는 안 돼.

라타가 시무룩한 목소리를 냈다.

"괜찮아. 이걸로 충분하니까."

루시온은 날을 세우듯 어둠의 끝부분 날카롭게 세웠다.

끼기긱.

쇠판을 향해 어둠으로 베어보자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천천히 잘려나갔다.

라타가 어둠을 조절해주면 루시온은 문 모양으로 어둠을 움직여 쇠판을 잘라냈다.

탕.

안쪽으로 쇠판이 떨어지자 보기만 해도 반짝거리는 보석들이 루시온을 반겼다.

"…하하."

루시온은 어처구니가 없어 웃었고.

―우오오오!

라타는 보석의 반짝임에.

[미친. 어지간히도 많이 처먹었네.]

러쉘은 불쾌감에 오만상을 찌푸렸다.

"다 줍겠습니다."

흄만이 빠르게 일을 시작했다.

루시온이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보석을 주워 담았다.

"역시. 구린 놈들이 가진 게 많네요."

그간 비싸고 좋은 것만 취급했던 루시온의 눈을 통해 보아도 보석들의 가치는 장난 아니었다.

[더 살펴볼까? 보통 이중, 삼중으로 만들어 놓는 놈도 있잖아.]

러쉘은 보석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예. 그럼 저야 좋죠.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요."

루시온은 흡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러쉘이 재빨리 자리를 떠나자 루시온은 금고 속에 있는 또 다른 금고를 뒤졌다.

'이 보석을 모을 수 있게 된 이유가 적힌 장부가 있을 텐데....'

일단 죽음의 기사를 통해 이 돈이 더러운 짓을 통해 얻었다는 건 확증이 난 상태였다.

무슨 짓을 했는지는 곧 밝혀질 테니, 이제 남은 건 피이자트 가문이 누구에게 이 돈을 받았느냐였다.

"도련님."

라타와 함께 주섬주섬 보석을 쓸어 담던 흄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쪽 금고입니다."

"내가 찾는 게 뭔지 알고 말하는 거야?"

"예. 로베리오 백작과 관련된 정보가 아닙니까? 저 금고에서 조금 전부터 냄새가 흘러나왔습니다."

루시온은 잠깐 눈을 깜박거렸다.

단지 돈만 찾으려고 했는데 뜻밖의 연결을 확인하고 말았다.

설마, 피이자트 가문 뒤에 로베리오 백작이 있을 줄이야.

60화. 비밀 금고, 타락한 유령(3)

'로베리오 백작이 있다는 건....'

루시온은 곧바로 생각했다.

'그의 뒤에 공허의 손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건가?'

"도련님?"

루시온이 잠깐 행동을 멈추자 흄이 그를 불렀다.

"흄."

"예, 도련님."

"그밖에 또 냄새 중에 익숙한 건 없나?"

"없습니다."

루시온은 흄의 대답을 들으며 그가 가리켰던 금고의 문을 어둠으로 잘라내었다.

슥.

안에는 역시나 서류 뭉치가 가득했다.

루시온은 서류를 쥐어흔들어 보였다.

"이 서류에서 난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일단 악역 한 놈의 모가지는 잘라낸 셈이고.'

루시온은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이 서류가 결정타라는 걸 팽팽해진 푸른 실이 증명해주었다.

'깔끔하네.'

루시온은 흄이 보석을 챙길 동안 서류를 차분히 살펴보았다.

사락.

서류를 넘길수록 점점 루시온의 표정이 굳어져 갔다.

[타락한 유령이 있을 때부터 알아봤는데! 이 개새끼들!]

덩달아 서류를 살피던 러쉘이 입에 침을 튀길 정도로 소리쳤다.

루시온은 깜짝 놀랐다.

"언제 오셨습니까…?"

[방금.]

"그새 보셨습니까?"

루시온은 서류를 가볍게 흔들었다.

이 장소는 사업장이라는 겉모습과 달리 흑마법사들이 어떤 저주를 실험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었다.

로베리오 백작이 흑마법사를 위해 장소를 마련했고, 피이자트 가문이 불법 노예를 사들이며 중간 다리 역할을 담당해 로베리오 백작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흔적.

허울뿐인 사업장이나, 이를 놀게 할 수 없어 로베리오 백작으로부터 허락을 받은 증명서까지도 끼워져 있었다.

다만, 중요한 하나가 없었다.

'…그 흑마법사가 어떤 놈인지는 나와 있는 게 없네. 공허의 손에서 벌인 일인지 아니면 다른 흑마법사가?'

공허의 손 이외에도 흑마법사가 악역이 되어버린 세계에서 자잘한 무리들도 꽤 많았다.

루시온이 지금 주목하는 '저주'라는 글자였다.

"스승님. 저주는 사용하기 어려운 마법입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사용해서는 안 될 마법이지.]

러쉘은 콧바람을 세게 내쉬었다.

"보통 어떻게 사용하는 겁니까?"

루시온의 물음에 러쉘은 알려주기 싫은지 입술을 꽉 다물며 눈살을 찌푸렸다.

"스승님. 제가 배우겠다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러쉘이 숨을 크게 내쉬었다.

루시온 말이 맞았다.

최소한 무엇인지는 알고 있어야 했다.

[저주는 마법을 사용하는 데 바쳐지는 대가만큼 힘을 발휘하지. 대가가 클수록 저주의 힘도, 거리도, 범위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커져.]

러쉘은 여전히 인상을 구겼다.

[원래는 흑마법사 죽기 전에 동반 자살 같은 느낌으로 사용하던 마법인데 타인의 목숨을 바쳐도 저주를 사용할 수 있다는 걸 알아버렸지.]

"그럼 흑마법사는 그 대가로 부정 수치가 쌓이는 겁니까?"

[대가가 부정 수치만은 아니야. 시전자의 수명도 어느 정도 필요하거든. 그런데 웃기게도 여러 명이 같은 저주를 사용했을 경우, 그 시전자의 숫자로 나눈 값만큼만 부정 수치가 쌓이고, 수명을 가져가거든.]

러쉘이 땅을 가리켰다.

[그래서 이따위 행위가 계속 벌어지는 거고.]

"대가가 있어도 바로 성공하는 건 아니겠죠? 그렇다면 이미 여기서 벌어진 저주가 중부를 덮쳤을 테니까요."

루시온이 바짝 마른 입술을 핥으며 물었다.

만약 여기가 공허의 손이 사용하던 곳이라면.

저주는, 중부 절반을 덮칠 만큼 큰 저주뿐이었다.

소설 속 루시온이 사용한 그 저주.

[맞아. 저주는 꽤 어려운 흑마법이야. 대가가 아무리 많아도 성공률은 고작 20%밖에 되지 않아.]

루시온은 러쉘의 말에 잠깐 안도했다.

[하지만 저주를 사용할 때, 누가 리더를 하느냐에 따라 성공률이 달라져. 어둠을 얼마나 잘 다루냐에 따라 성공률을 높일 수 있거든.]

"…소름 돋네요."

[물론, 여기서 내가 말하는 저주는 대가를 바칠 만큼 크나큰 힘이 필요한 저주를 말해. 주로 목숨과 관련된 저주겠지. 그게 아니라 가벼운 저주는 몇 가지 배울 만해.]

"가볍다는 게 어느 정도입니까?"

[양말 짝을 바꿔 신게 한다든지. 소금과 설탕을 혼동하게 한다든지. 옷을 거꾸로 입게 한다든지.]

그제야 러쉘은 표정을 풀며 신나게 떠들었다.

'저주라기보다는… 장난 수준으로 보이는데?'

루시온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웃기겠지만, 나름 쓸 만한 저주야. 이건 조금 다른 류의 저주라서 정신 계열이랑 엮어서 말해야 하거든.]

딱.

러쉘은 문을 가리켰다.

[일단 설명은 여기까지. 눈앞에 있는 것부터 치우자고.]

그제야 루시온은 주변을 살폈다.

흄은 벌써 절반이나 보석을 쓸어 담고 있었다.

보석이 담긴 강화 유리 위가 마음에 드는지 라타는 웅크린 상태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아, 도련님께서는 가만히 계셔도 됩니다. 저 혼자 다 할 수 있습니다."

흄은 루시온의 시선에 가볍게 미소를 내보였다.

"그래."

루시온은 적당한 자리에 앉아 하품을 내뱉었다.

꾸벅꾸벅 조는 라타를 보니 자신도 졸렸다.

* * *

[조금 전 일은 내가… 잘못....]

위층에서 기다리고 있던 죽음의 기사는 한참 머뭇거리다 모기 기어가는 목소리를 냈다.

"뭐?"

루시온은 그녀의 사과를 들었지만, 못 들은 척 물었다.

[보, 보석은 다 담고 왔냐고 물었어.]

"그럼. 덕분에 아주 즐겁게 쓸어 담았지."

루시온은 기분이 좋았다.

자신의 주머니가 묵직해지는 이 느낌은 언제든 환영이었다.

[이제 공의 목적은 달성된 셈인가?]

죽음의 기사가 물었다.

"일단 그렇지. 금고는 더는 없으니까."

[내 부탁을 들어줄 준비가 되었는지 다시 물어봐도 되겠나?]

"앞장서."

루시온은 죽음의 기사를 재촉했다.

크로니아가 있는 서부와 중부 사이는 거리도 있겠다, 이곳에 건물을 재건축해서 임대료나 받으면서 돈을 굴리는 게 낫겠다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 이 땅에 타락한 유령들이 우글거리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결국, 죽음의 기사의 부탁뿐만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라도 타락한 유령들은 사라져야 했다.

[좋아.]

루시온이 더는 질질 끌지 않자 죽음의 기사의 목소리가 살짝 밝아졌다.

죽음의 기사는 바로 옆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으로 들어가.]

끼이익.

루시온이 문을 열자 기름칠이 제대로 되지 않았는지 문소리가 제법 거칠었다.

[저쪽 책장에 보이는 책을 순서대로 이거랑 이거. 그리고 이거를 뽑으면 돼.]

죽음의 기사는 책장에 있는 책을 가리켰다.

순간, 루시온은 기분이 팍 나빠졌다.

"비밀 금고가 있는 장소로 향하는 문을 여는 방법을 모른다는 건 거짓말이었나?"

루시온은 빈정거리며 말했다.

[아니. 맹세코 공을 시험한 적은 있지만, 거짓말은 한 적 없어. 유령이 돈을 가져봤자 쓸 곳도 없어 살펴보지 않았을 뿐이지.]

죽음의 기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의문이 해결됐으면 책을 뽑아 비밀 장소로 향하는 문을 열고 내려가지 않겠나?]

비밀 금고를 털 동안 대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자신을 대하는 죽음의 기사의 태도가 조금은 달라져 있었다.

조심스럽고, 한껏 날이 죽어 있었다.

드르륵.

루시온이 죽음의 기사가 알려준 대로 책을 뽑자 한쪽 벽이 열렸다.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보였다.

―우오오오! 비밀 장소다!

라타는 연이은 비밀 장소에 어떤 낭만이라도 품은 듯 무척 신이 나 보였다.

―이히히. 라타는 이런 장소가 너무 좋아! 너무 신나!

'흑마법사란 놈들은 지하가 없으면 못 살겠네.'

루시온은 이미 예상했지만, 막상 또 지하로 들어가려니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도련님."

흄이 루시온을 불렀다.

"왜?"

"가지 않는 게 어떠십니까?"

흄의 만류에 루시온은 깜짝 놀랐다.

"죄송합니다. 주제넘었습니다."

흄은 곧바로 사과했지만, 더 조심히 말을 꺼냈다.

"…밑에서 오래된 피 냄새가 가득 고여 있습니다. 도련님께 그다지 좋은 광경이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도 알아."

"타인의 죽음이라도 사람은 정신적 충격을 받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걱정해줘서 고맙지만, 흄. 나는 크로니아이자 흑마법사야. 죽음은 생각보다 내게 가까웠고, 앞으로 가깝겠지."

"제가 괜한 말씀을 올렸습니다. 심기를 불편하게 해서...."

"아니. 집사로서 훌륭한 판단이었어."

루시온은 흄을 칭찬하며 아래로 내려갔다.

흄은 잠깐 방긋 웃다 그를 따라 아래로 향했다.

밑에 지하가 얼마나 깊은 건지 몰라도 계단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기분상 10층 가까이 내려왔다고 생각했을 무렵, 루시온은 유령들이 내는 중얼거림을 들었다.

―홉! 라타의 오른발이 다다다 떨려.

라타는 오른발을 들며 떨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타락한 유령에 반응인 건지, 단지 떨리는 건지 알 수는 없었다.

'그것보다 숫자가… 꽤 많은데?'

루시온은 발걸음을 멈췄다.

내려가면 갈수록 아래에서 그들의 존재가 확실히 느껴졌다.

과연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네가 유령들을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막았나?"

루시온은 무언가에 막힌 듯 일정 자리만 맴도는 유령들을 바라보고는 물었다.

[맞아. 내 힘으로 최대한 위로 올라오지 못하게 붙잡고 있는 상태야. 하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에 도달했어.]

[검을 매개체로 결계라도 만든 모양인데. 방금 말한 대로 깨지기 전이지.]

러쉘이 말을 덧붙이며 루시온을 보았다.

살짝 굳은 루시온의 표정에 러쉘은 보다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겁먹지 마, 루시온. 숫자가 많아도 지금의 너라면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겁나지 않습니다. 조금 부담스러울 뿐이죠."

자신이 할 수 없었다면 애초에 러쉘이 자신을 말렸을 테지.

[네 어둠으로 벨 수 없는 유령은 저기에는 없어.]

러쉘은 차분히 목소리를 냈다.

루시온에게 싸우는 방법을 가르쳐줄 순 있어도 싸워야 하는 건 루시온이었다.

한 번 흑마법사가 된 이상, 두 번 다시 이 세계에 발을 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지배자가 되어야 했다.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하게 유령과 망자, 그리고 어둠이라는 존재 자체의 지배자.

"허락하겠습니다."

루시온은 일단 보험을 들어놓았다.

[좋은 생각이야.]

러쉘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령을 잡을 수 있는 건 확인했습니다. 도련님께서 방해받지 않게 지원하겠습니다."

유령은 흑마법사의 영역이었다.

그래도 흄은 루시온을 지원하고 싶었다.

"아니. 휘말리지 않게 여기에 있어. 죽음의 기사 너도."

루시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둠으로 쇠판도 베는 마당에 사람이라고 벨 수 없는 건 아니었다.

[공.]

죽음의 기사는 루시온이 다시 움직이기 전에 머뭇거리며 입술을 뗐다.

"말해."

[…나는, 여기에서 죽었다.]

죽음의 기사는 아래를 가리켰다.

[흑마법사에게 온몸에 저주를 뒤집어써 피를 토하고, 말라비틀어지고, 썩어갔지.]

그녀를 보는 루시온의 눈빛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꺼내는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고마워.]

마치 그녀가 웃는 것만 같았다.

"그 말은 아껴둬. 나중에 다시 한번 더 해야 할 테니까."

루시온은 씩 웃으며 아래로 내려갔다.

[그대도 흑마법사인가?]

루시온이 한참이나 내려가는 걸 바라보다 죽음의 기사가 같이 남겨진 흄에게 물었다.

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그저 집사입니다."

[공의 주변에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공처럼 특이해.]

이상한 유령 하나.

흑마법사가 아님에도 유령을 보고 만질 수 있는 소년.

귀여운 까만 여우 한 마리.

이 묘한 조합은 일부러 맞추지 않는 이상 나올 수 없는 조합이라 생각했다.

* * *

그림자 이동은 일부러 사용하지 않았다.

루시온은 내려오는 동안 제법 많은 어둠이 차오른 걸 확인했다.

빛을 맞은 게 아니었기에 어둠의 회복 속도는 빨랐고, 라타 덕에 바로 어둠을 사용할 수 있게 준비까지 완벽했다.

'이제 마지막 계단 하나.'

탁.

마지막 계단을 내려왔을 때, 새빨간 눈을 한 유령이 일제히 루시온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요새 무덤덤해졌어도 수십 명이 동시에 자신을 쳐다보면 보통 사람도 놀라기 마련이었다.

[곧 뽑힌다.]

러쉘은 타락한 유령이 나가지 못하게 막은 검을 가리켰다.

검은 점점 뽑혀나갔고, 타락한 유령들은 루시온을 찢어버리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었다.

루시온은 그 광경을 보고도 차분했다.

이제 저들은 자신에게 있어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 준비 됐으니까요."

루시온은 타락한 유령들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길게 올렸다.

마치 먹이를 포착한 사냥꾼의 미소였다.

61화. 시간이 멈췄다?

[그래. 이 정도나 깊숙이 내려왔으니 카슨도 신경 쓸 필요 없어. 루시온 너는 지금 할 수 있는 모든 걸 내보여도 돼.]

러쉘은 루시온이 날뛸 무대가 준비됐다고 알렸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소리였다.

'그렇다면야, 거리낄 게 없지.'

루시온은 자신이 보유한 어둠의 20% 정도를 내버려 두고 죄다 주변으로 뿌렸다.

'이 과정을 좀 더 빨리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어둠을 사용하려면 자신의 몸에 있는 어둠을 밖으로 내보내야 했다.

아직 그 과정이 느렸다.

루시온은 보완해야 할 점을 파악하면서 어둠을 천장으로 올렸다.

그리고 죽음의 기사가 만든 결계가 깨지길 기다렸다.

쩍쩍.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에 덩달아 루시온은 입꼬리를 올렸다.

"라타. 준비됐어?"

―응! 라타는 준비됐어.

라타는 앞발을 땅에 쓸며 눈에 힘을 가득 주었다.

이번에 자신이 사용할 마법은 특히나 라타의 자동 조준이 필요했다.

콰드득!

꽤 커다란 소리와 함께 검이 뽑혀나갔다.

그 순간, 수십 명이나 되는 타락한 유령들이 동시에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아빠. 어디 갔어요? 내가 미워서 버린 거야?]

[제발 살려주세요.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요. 숨을 쉴 수 없어요. 집에 5살밖에 안 된 아들이 있어요. 제발, 제발 보내주세요!]

[아아아악! 너희들 모두 죽여버리겠어! 아아악!]

그 소리에 루시온은 마치 머리를 잡고 흔드는 듯 어지러웠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저들이 떠드는 소리는 기계가 꺼내는 말처럼 하나같이 반복될 뿐이었고, 이미 이성은 티끌만큼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루시온은 손을 살짝 들었고 자신에게 가장 먼저 다가오는 이들을 향해 어둠과 자신만 느낄 수 있는, 조준점을 찍었다.

'떨어져라!'

루시온은 그대로 손을 내렸다.

'쾅'하는 소리는 없었지만, 천장에 유지시켰던 어둠이 낙뢰처럼 유령의 머리로 떨어졌다.

푹!

[아악!]

어둠은 정말로 번개가 아니었기에 하늘에서 꼬챙이처럼 유령들의 머리를 꿰뚫을 뿐이었다.

어둠이 빠지지 않게 루시온은 한 번 더 명령을 내렸다.

'붙잡아.'

유령의 가슴팍까지 내려온 어둠을 왼쪽으로 이동시켜 마치 낚싯바늘과도 같은 형태를 만들었다.

줄줄이 하늘에서 내려온 낚싯바늘 때문에 한 번 낚인 타락한 유령들은 그대로 매달려 자신에게 다가오지도, 그렇다고 빠져나올 수도 없는 상태로 고정되었다.

하나.

스물넷.

마흔여섯.

일흔둘.

숫자가 늘어날수록 루시온의 눈가에 핏발이 섰다.

푹!

모든 유령을 꿰어버린 루시온은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린 그들을 바라보았다.

자신은 하나였고, 통제해야 할 어둠은 백에 가까웠다.

누군가 자신의 머리를 밟는 듯 거센 두통이 몰아쳤다.

주르륵.

코피가 흘러내렸다.

'…두통이 장난 아니네.'

통증을 떠나 이제 마무리를 지을 차례였다.

루시온은 입가를 핥았다.

타락한 유령을 꿰면서 그들 모두에게 낙인을 찍은 상태였다.

"라타. 한 번에 간다."

―응. 라타는 준비됐어.

라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온은 백에 가까운 유령 속 어둠을 느끼며 명령했다.

'터져라!'

낚싯바늘의 형상을 했던 어둠이 일제히 부풀어 올랐다.

조용한 폭발이 타락한 유령들 내부에서 일어났다.

어둠이 퍼지자 그들은 검게 물들었고, 발끝에서부터 빠르게 부서져 내렸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들이 사라질 때마다 잔잔한 목소리가 하나씩 루시온의 귓가에 울렸다.

고요함이 방에 내려왔다.

방을 가득 메웠던 유령들이 사라지자 검붉은 핏자국이 모습을 드러냈다.

흔적을 없애기 위해 기구들이 뜯겨나간 모습이 그제야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벽에 긁힌 수많은 손톱자국, 바닥에 뿌려지듯 흩어진 머리카락들, 썩어버린 살점들.

그 모든 것이 참 씁쓸히 보였다.

삭.

루시온이 어둠을 거둬들이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하."

마치 바닷속에서 숨을 참고, 또 참다가 겨우 바다 위로 올라간 기분이었다.

'몸이 완전 무거워.'

자신이 난생처음 펼친 광범위 마법이었다.

이토록 많은 숫자는 처음이었고, 이렇게 넓게 어둠을 뿌린 것도 처음이었다.

지쳤지만, 이만큼 자유로이 어둠을 사용한 게 얼마 만인지.

속이 후련했다.

탁.

흄이 아래로 내려왔다.

"고생하셨습니다, 도련님. 정말…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하셨습니다."

흄이 루시온을 부축하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멀리서 지켜봤음에도 루시온이 펼친 어둠에 압도되는 기분을 느꼈다.

루시온은 지휘자였고, 어둠은 이를 따라 움직이는 악단과도 같았다.

[잘했다.]

러쉘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정말 잘했다.]

러쉘은 무척 기뻤다.

갈고 닦을수록 보석이 되어가는 과정을 바라보는 게 이토록 행복할 줄이야.

"부지런히 어둠을 움직인 보람이 있네요."

루시온은 코피를 닦으며 미소를 지었다.

훈련은 절대 헛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절실히 느껴졌다.

앞으로 이런 큰 마법을 사용해도 지치지 않고, 바로 다음 마법을 준비할 수 있어야 했다.

'그래도 전진한 게 느껴진다.'

고작 몇 주 전에 열 명도 안 되는 사람을 묶는 것도 힘들었으니 자신은 성장했다.

[공.]

죽음의 기사가 루시온을 불렀다.

살짝 먹먹한 소리였다.

타락한 유령들은 소멸이 아니라, 순환의 고리에 발을 디뎠다.

드디어 그들은 고통에서 해방되었다.

[고마워.]

죽음의 기사는 아래로 내려와 루시온에게 고개를 숙이며 묵직한 말을 꺼냈다.

[정말… 고마워.]

몇 번을 말해도 전혀 아깝지 않았다.

루시온은 약속을 지켰고, 가엾은 저들을 해방해주었으니.

"이름이 뭐지?"

루시온이 물었다.

[베델 레비스티.]

베델이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자마자 붉은 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루시온은 갑자기 나타난 붉은 실에 의문을 느낄 때쯤 그녀의 이름이 낯설지 않다는 걸 알아차렸다.

'저 이름을 어디서 봤는데…?'

루시온은 우선 올라가면서 생각하기로 했다.

베델을 위해 자리를 비켜줘야 할 테니까.

"먼저 올라갈 테니, 내 몫까지 명복을 빌어줘."

루시온은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기다 말고 움찔거렸다.

내려올 때는 몰랐지만, 다시 올라가려니 가슴이 턱 하니 막히는 기분이었다.

"…하."

루시온은 한숨을 내쉬었다.

'남은 어둠으로 그림자 이동을 사용하면 중반까지는 갈 수 있으려나?'

"제가...."

"아니."

루시온은 흄이 제안하기 전에 말을 끊었다.

그냥 훈련이라고 생각하며 계단에 발을 디뎠다.

'…아!'

그때, 그녀가 누구인지 생각이 났다.

베델 레비스티.

최종 보스가 지배했던 죽음의 기사 중 하나이자 그들의 우두머리였다.

'좋네. 붉은 실이 나타날 만하지.'

잠깐 루시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최종 보스가 가졌던 무기 하나를 빼앗을 셈이었다.

[훈련이라고 생각하고 계단에 오르는 것도 나쁘지 않지.]

러쉘은 키득거렸다.

―라타가 밀어줄까?

"됐어."

루시온은 묵묵히 지상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디뎠다.

* * *

루시온 일행이 떠난 자리에 베델은 투구를 벗어 겨드랑이에 끼웠다.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이 어깨로 내려왔다.

[…하.]

그녀는 겨우 숨을 내쉬었다.

이미 죽어버린 이 몸으로 숨을 내쉴 필요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직 살아 있을 적 습관이 남아 있었다.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왼쪽 구석에 자신이 있던 자리였다.

죽은 후에 썩어버린 자신의 시체를 보았을 때, 아무렇지도 않았다.

가슴 속에 꽉 차 있던 원한에 다른 감정이 들어올 자리가 없었는데.

무심하던 베델의 두 눈에 천천히 눈물이 고여왔다.

[이제는....]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기사로서 모시게 될 주인에게 검을 바쳤건만, 그 결과는 배신이었다.

저주를 위한 실험체가 되었고, 자신은 죽어버렸다.

[아프지 말고.]

하지만 자신은 죽음의 기사로 다시 태어나 복수의 칼날을 쥘 힘을 얻었다.

그 힘으로 닥치는 대로 흑마법사를 베어냈다.

[고통받을 일 없이.]

그 힘으로 유령들을 흑마법사로부터 지켰다.

유령들이 타락하기 전까지는.

[부디, 행복하길.]

베델은 담담하게 숙였다.

눈물이 땅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자신의 눈물은 땅에 젖지 않고 그저 사라질 뿐이었다.

[부디, 행복하길....]

베델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문 뒤에 다시 투구를 눌러썼다.

이제 지켜야 할 존재는 더는 없었다.

머물 이유마저 사라진 죽음의 기사는 지상을 향해 올라갔다.

루시온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공은 왜… 명복을 빌어주었나?]

베델이 루시온을 보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입이 움직였다.

"누구라도 빌었을 텐데?"

루시온은 대수롭지도 않게 대답했다.

자신이 유령을 증오하는 것과 별개로 저들은 불쌍한 자들이었다.

원해서 죽은 게 아니었고, 원해서 타락한 유령이 된 게 아니었다.

그 정도는 구분할 줄 알았다.

[그런가.]

베델 역시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으나, 목소리는 처음과 달리 매우 부드러워졌다.

[공은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래."

[루시온 공.]

"말해."

베델은 다시 투구를 벗었다.

그녀는 아주 환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왼쪽 가슴을 두드리며 고개를 숙였다.

기사로서의 인사였다.

* * *

"크라언 님."

헬론이 그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 정보는 찾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도 허탕이야?"

문틈 사이로 그들을 살짝 엿보던 슈트라가 목소리를 냈다.

"슈트라. 헬론에게 압박 주지 마."

크라언은 그녀를 살짝 쏘아보았다.

지금까지 헬론이 다른 곳에 잠입하느라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압박이 아니라. 아쉬움이죠. 아쉬움."

슈트라는 멋쩍은 듯이 살살 웃었다.

"고생 많았어, 헬론. 정보를 얻지 못한 일은 신경 쓸 필요 없어."

크라언은 헬론을 다독거렸다.

애초에 오래 걸릴 일이라는 걸 이미 각오하지 않았던가.

케오르티아 왕국.

자신의 나라는 그냥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그게 가능한 일인지.

다시금 떠올려도 아찔한 광경이었다.

"죄송합니다. 이번에는 확실한 정보인 줄 알았는데."

헬론은 죄책감이 묻어 난 표정을 지었다.

"아니야, 헬론. 자책할 필요 없어. 이제 겨우 노예에서 자유를 얻었고, 이제 겨우 한 발짝 내디뎠으니까."

크라언은 자신의 목을 매만졌다.

얼추 10년이라는 세월 간 착용하던 검은 목걸이의 감촉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듯했다.

"그래, 슈트라. 무슨 일로 왔지?"

헬론만 불렀지, 슈트라를 부른 적은 없었다.

슈트라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꽤 두툼한 편지 봉투를 내밀었다.

"그놈이 보냈어요."

하멜.

슈트라가 그놈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

"슈트라."

크라언은 편지를 받으며 그녀를 불렀다.

"알아요, 알아. 하멜이라고 부르라는 거 맞죠? 하멜이 제 눈앞에 있으면 그럴게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은혜는 잊으면 안 돼."

크라언은 단호하게 말했다.

몇 번을 강조해도 아깝지 않았다.

자신들을 구렁텅이에서 구해준 건 하멜이라는 이름을 가진 흑마법사였다.

그 사실만큼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이었다.

"알고 있어요. 그냥, 그냥 찝찝해서 그래요."

슈트라는 팔을 꽉 쥐었다.

흑마법사.

그 단어가 의미하는 불쾌함은 어떻게 해서든 떨쳐내기 어려웠다.

"둘 다 나가봐."

크라언은 헬론과 슈트라를 내보내고 나서야 편지를 뜯었다.

―내가 이번에 돈 좀 크게 벌었거든? 그래서 크라언 네가 해야 할 일이 더 있어.

'요즘 돈을 벌 일이 뭐가 있지?'

지금 가장 뜨거운 사건은 성자 루시온 크로니아의 탄생이었다.

이곳 변경까지 소문이 휩쓸 정도면 중부에는 오죽할지.

'한번 만나보고 싶네.'

크라언은 잠깐 생각하다 다시 편지를 읽어나갔다.

이전에 하멜이 알려준 정보들은 하나같이 알짜배기였다.

편지에는 또 자신이 투자해야 할 곳이 적혀 있었다.

크라언은 이번에도 하멜이 알짜배기들로 구성된 정보를 알려준 건지.

아니면 저번에는 단순히 우연이었는지.

그의 능력이 무척 궁금했다.

―아 참, 손님이 곧 올 테니 받아. 이름은 피터고, 마방사지. 쓸 만할 거야.

'마방사…?'

방어 전문 마법사는 보기도 힘들고, 구하기도 어려웠다.

똑똑.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크라언 님. 손님이 왔습니다. 이름은 피터라는데요?"

헬론이 조심스레 말했다.

"하멜 씨의 이름을 말하기에 일단 잠깐만 기다리라고 말씀드렸어요."

"안으로 들여보네."

크라언은 편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 * *

"…그러니까 이걸 탐험하다가 발견했다?"

카슨은 마차 안에서 살펴보던 자료를 내려놓았다.

로베리오 백작을 쳐죽일 자료였다.

"예. 탐험하다가 발견했습니다."

루시온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믿지 못하신다면 지금 기사들을 보내셔도 됩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지 않습니까."

루시온의 손가락이 자료를 가리켰다.

"형님. 저는 이놈같이 더러운 놈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게 끔찍합니다. 어서 폐하께 알려야 하지 않습니까?"

흑마법사가 엮여있으니 황제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 내가 폐하께 알릴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서걱.

카슨의 말과 함께 푸른 실이 경쾌하게 잘려나갔다.

자.

일단 한 놈, 보내고.

62화. 시간이 멈췄다?(2)

루시온은 웃음을 삼켰다.

이제 남은 놈은 셋이었다.

테렘 메일 자작.

도르토르 소프란 백작.

오리온 지트란 후작.

[저, 정말인가?]

베델의 목소리가 떨렸다.

두 주먹을 꽉 쥐고서는 다시 물었다.

[정말 이번 일을 폐하께서 처리해주신단 말인가?]

[아마 그렇게 되겠지.]

러쉘이 루시온 대신 대답했다.

[여기까지 바란 적이 없었거늘. 공이 저들을 하늘로 보내준 것만 해도 고맙고, 고마운데 조금 더 욕심을 부려도 되겠나?]

꽉 쥔 베델의 주먹이 달달 떨렸다.

[그럼, 루시온한테 잘해. 은혜 갚는 건 잊지 말고.]

러쉘은 루시온을 쳐다보았다.

모든 이유를 떠나 유령이라면 끔찍이 생각하던 루시온이 베델을 도왔다.

러쉘은 그 사실만으로 만족스러웠다.

[물론이야. 처음 루시온 공에게 검을 휘둘렀던 것도, 공을 시험한 것도, 전부 다 없던 일이었으면 할 정도니까.]

베델은 고개를 끄덕이고, 또 끄덕였다.

'시끄러워.'

루시온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다 좋지만, 시끄러웠다.

귀가 아닌, 머리에 목소리가 울리는 터라 라타까지 저 대화에 참전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참 다행이다 싶었다.

[그나저나 러쉘 그대는 참 신기한 유령이야.]

베델은 러쉘을 빤히 보았다.

[신기할 것도 많다.]

러쉘은 코웃음을 쳤다.

[죽음의 기사가 아닌데도 자유롭게 움직이는 유령은 그대가 처음이야.]

[난 천재니까.]

베델이 민망함을 느낄 정도로 러쉘은 자화자찬하며 씩 웃었다.

* * *

지금 중부는 루시온 자신을 기념하기 위해 축제가 열리는 중이었다.

축제가 열린다는 말은 곧 일을 벌이기 좋을 때라는 뜻이었다.

이제 이틀 후면 중부를 떠나야 했다.

테렘 메일 자작.

도르토르 소프란 백작.

오리온 지트란 후작.

이 세 놈을 한꺼번에 잡을 기회는 지금뿐이라는 뜻이기도 했고.

사업장에서 돌아온 루시온은 잠깐 쉴 틈도 없이 곧바로 카슨의 방을 들렀다.

"놀다 오겠습니다."

"...?"

이제 막 차를 마시려던 카슨은 눈을 크게 뜬 채로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놀다 오겠다니…?"

루시온은 어제 막 병상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 몸으로 방금까지 마차를 타고 사업장에 들리지 않았던가.

"축제잖습니까."

루시온은 살짝 창문을 바라보았다.

컵을 잡던 카슨의 손에 힘이 들어가 살짝 금이 일어났다.

루시온과 축제는 지금까지 거리가 먼 존재였다.

변경에서 축제가 열리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억지로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이상, 루시온은 방 밖을 벗어난 적이 거의 없었으니.

카슨은 숨을 깊게 내쉬었다.

축제이기에 위험했다.

암살자가 사람들 속에 뒤섞여 루시온의 목숨을 노릴 수도 있었다.

"얼굴을 잘 가리고 다니겠습니다. 그건 자신 있습니다."

루시온은 카슨의 고민이 길어지자 서둘러 목소리를 냈다.

"네가 축제를 본다고 한들,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곳으로 갈 것 같지 않구나."

뜨끔.

"얼굴을 가렸기에 시비에 휘말릴 일도 잦을 테고. 네가 상대방의 시비를 그냥 넘기지도 않을 테니."

[아주 널 꿰고 있네.]

러쉘은 키득거리며 루시온 주변을 빙그르르 돌았다.

"개인적으로라도, 객관적으로라도 너를 보내는 건...."

"기사와 함께 움직이겠습니다."

루시온의 말에 카슨은 잠깐 멍청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면 형님께서도 안심이 되질 않으십니까?"

루시온은 적당한 틈을 봐서 기사를 따돌릴 생각이었다.

그림자 이동.

이미 얻은 기술을 내버려 둬서 뭘 하겠나.

―라타는 얼른 '슝'을 사용하고 싶어.

라타는 벌써 그림자 이동을 사용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갑자기 라타가 이렇게 즐거워하는 건가?]

베델은 라타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에헴, 비밀이야.

배시시 웃는 라타의 모습에 루시온은 헛웃음을 내뱉을 뻔했다.

'…베델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할 땐 언제고 몇 번 쓰다듬어줬다고 꼬리를 흔들다니.'

아직 베델에게 어떤 맹세도 받지 않아 라타의 목소리는 베델에게 닿질 않았기에 베델은 러쉘을 빤히 바라보았다.

[정 라타의 목소리가 궁금하면 루시온한테 맹세하든지.]

러쉘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루시온. 그렇게… 축제가 보고 싶더냐."

카슨은 머뭇거리며 물었다.

무리하면서까지 밖으로 나가려는 루시온의 모습에 카슨은 마음이 약해졌다.

"보고 싶습니다."

반쯤은 진심이었기에 루시온은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카슨은 찻잔에 손을 놓았다.

찻잔 손잡이가 '툭'하고 떨어지자 루시온은 순간 움찔거렸다.

루시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카슨을 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루시온 공의 형은 공에게 몹시 협조적인데 왜 놀라는 것인가?]

베델의 고개가 갸웃거려지자 투구에 달린 솔이 덩달아 흔들렸다.

[이 협조가 언제 바뀔지 모르니까. 지금 별장의 권력자는 카슨이라서....]

러쉘이 대답하다 말고 미간을 찌푸렸다.

[루시온이 흑마법사라서 싫다고 할 때는 언제고 왜 자꾸 캐물어?]

[내가 공에게 저지른 무례는 깊이 반성하고 있어. 무엇보다 앞으로 은혜를 갚을 때까지 공과 있을 테니 기본적인 사항을 알아둬야 하지 않겠나.]

베델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러쉘은 팔짱을 끼며 베델을 빤히 바라보다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래. 기본 사항은 알려줄게.]

[고마워.]

카슨이 침묵을 유지할 동안 루시온은 러쉘과 베델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웠다.

"괜찮겠느냐…?"

침묵을 깨고 카슨이 물었다.

예상 밖의 물음에 루시온은 그제야 어깨에 힘을 뺐다.

"예. 괜찮습니다. 이제 제 위치를 자각해야죠."

본의 아니게 성자라는 위치에 올랐다.

자리가 높아진 만큼 위험성 역시 덩달아 커졌다.

지금 자신을 아니꼽게 보는 놈들이 반드시 있을 테니.

'나도 그리고 흄도 얼른 성장해야 할 텐데.'

자유롭게 돌아다니려면 힘이 필요했다.

이러나저러나 힘이 필수란 생각이 요새 부쩍 들었다.

"몇 명이 가능하겠더냐."

카슨의 물음에 루시온은 손가락 하나만 들었다.

카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데려온 기사 중 가장 실력이 있는 자로 골라주마."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루시온은 눈동자를 굴리다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 * *

"오늘 성심성의껏 도련님을 모시겠습니다."

기사는 루시온과 1m 정도 떨어져 힘껏 외쳤다.

[쟤는 떨쳐내기 좀 버거워 보이네.]

러쉘이 말했다.

루시온 역시 동의하며 카슨과 더 멀리 떨어진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하나같이 루시온과 동행하는 기사를 부러워하는 눈초리였다.

[…흠.]

베델은 닦지 않아도 될 검날을 닦으며 주변 상황을 눈에 담기 바빴다.

뭔가 사연이 있는 집의 비밀을 파헤치는 기분이라 묘한 긴장감이 있었다.

당연히 그 중심에는 루시온이 있었다.

"원래는 내가 같이 가야 하나, 지금 네가 가져온 이 증거들을 가지고 황실에 가야 하니 같이 가줄 수가 없구나."

카슨의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

루시온이 넘긴 자료에는 흑마법사의 활동과 이를 도와준 로베리오 백작, 그리고 그 실험으로 희생당한 이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는 탐험하다 발견했다는 가벼운 사실과 달리 아주 큰 사건이었다.

얼추 십여 년 만에 흑마법사의 움직임이 제대로 포착되었으니 루시온은 이번에 아주 큰 공을 세운 셈이었다.

'이 사실은 나중에 말해줘도 되겠지.'

카슨은 흐뭇함을 잠재우며 루시온과 동행할 기사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루시온에게 시선을 떼지 말고, 루시온이 어딜 가든 따라가야 한다는 걸 잊지 말거라."

[캬. 카슨이 너를 아주 잘 알고 있네.]

러쉘은 키득거렸다.

[하긴. 크로니아에 있을 때도 호위를 떼고 도망가기 일쑤였는데 지금이라고 다르겠어?]

루시온은 속으로 신음을 내뱉었다.

설마 자신의 과거가 발목을 잡을 줄이야.

"예! 무조건 막내 도련님에게 시선을 떼지 않겠습니다!"

기사는 목에 핏줄이 설 만큼 힘차게 대답했다.

아주 잠깐, 루시온을 지켜야 하는 사명감보다는 카슨이 너무도 무서워 내지른 소리였다.

"이제 그만 가거라."

카슨은 만족했다는 듯 돌아섰다.

자신도 황실에 가야 했고, 이 사실을 노비오에게도 알려야 했다.

흑마법사가 등장하면 가장 곤란한 곳은 다름 아닌 변경이었다.

내부가 소란스러워진 틈을 타 적국이 변경을 침입하는 일들이 많아지기 때문이었다.

루시온은 돌아서는 카슨을 쳐다보다 흄에게 시선을 뒀다.

"흄. 너도 오늘은 한눈팔지 마."

"닭꼬치는 안됩니까?"

"안 돼."

"…알겠습니다."

흄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라, 라타도?

흄이 거절당하자 방금까지 눈을 반짝이던 라타마저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루시온은 고개를 끄덕이자 라타의 눈망울이 촉촉해졌다.

[공은 축제가 목적이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는 건가?]

베델의 물음에 루시온은 답을 할 수 없었다.

"잠깐만 여기에 기다리게. 방에 가서 가져와야 할 게 있으니."

루시온은 일단 기사를 문 앞에 세워뒀다.

자신을 따라오려는 기사를 향해 루시온은 다시 입을 열었다.

"문은 저기 한곳 뿐이니 걱정하지 말고 여기에 서 있게."

"안 됩...."

"진짜로 도망가고 싶게 만들지 말게."

루시온은 기사에게 마지막 경고를 한 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잘 들어, 베델."

[듣고 있어.]

베델은 정자세로 서서는 루시온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지금 내 정보를 적에게 팔아넘긴 놈들 쫓다 개미굴을 발견했어. 그 개미굴에는 이 나라 테슬라 제국의 정보가 가득 담겨 있었지. 그중 나는 크로니아의 정보를 팔아넘긴 놈들을 쫓고 있어."

루시온은 간단명료하게 현재 상황을 말했다.

"이제 상황을 알았으니 여기에 머물지 말지는 선택해."

굳이 베델이 오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만약 온다면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게 좋을 거다.]

러쉘은 베델이 대답하기 전에 한 가지 사실을 알렸다.

[내가 네 모습을 흑마법사나 유령에게 가려줄 수는 있지만, 루시온에게 어둠을 받지 않는 이상은 완전히 숨기는 건 어려워. 그렇다고 네가 라타처럼 그림자 속에 숨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닐 테고.]

[그럼, 나는 이번에 빠지겠어.]

베델은 검 손잡이를 매만졌다.

[숨는 능력이 없는 게 아니라 아직 흑마법사를 보면 죽이지 않을 자신이 없어. 공에게 괜한 폐를 끼치고 싶진 않고.]

베델의 눈빛에 잠깐 살의가 끓어올랐다.

"그럼 그렇게 해."

루시온은 베델의 의사를 존중했다.

자신이 잡아야 할 놈들은 어차피 아무 능력도 없는 일반인이었다.

게다가 지금 그녀가 꼭 와야 할 상황도 아니었고, 그녀가 가진 능력을 확인할 상황도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공은 내 능력이 궁금하지 않나?]

베델은 넌지시 말을 꺼냈다.

"네가 흑마법사를 잘 잡는다는 사실만 알아도 충분해."

일단 죽음의 기사가 자신 곁에 왔다는 사실로 충분하니 뭘 더 바라겠는가.

루시온은 베델을 향해 가볍게 웃고는 방을 나섰다.

* * *

"도련님…!"

기사는 안절부절못하다 루시온이 계단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보고는 환하게 웃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저렇게 기뻐하는 거봐라.]

진심으로 기뻐하는 기사의 모습에 러쉘은 곧 일어날 일을 생각하니 괜스레 안쓰러워졌다.

"그리도 내가 미덥지 못했나?"

루시온의 물음에 기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닙니다, 도련님."

"안도의 한숨, 잘 봤네."

루시온은 스치듯 기사에게 말하고는 문턱을 넘었다.

"그, 그런 적 없습니다, 도련님. 정말로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기사는 카슨이 말한 거리를 유지하며 사실을 부정했다.

루시온은 한 발짝 더 나가기 전에 후드부터 눌러 썼다.

에올 때문에 앓아누웠을 때, 루시온은 침대에 누워 열심히 움직였다.

우선, 크라언에게 다음 투자자와 로베리오 백작에게서 해방된 방술사인 피터를 소개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자신이 지배한 9~14번까지의 유령들을 통해 귀족들끼리 즐기는 가벼운 파티가 어디에서 열리는지를 파악했다.

"라타."

루시온은 목소리를 죽이며 걸었다.

―응!

"9~14번한테 연락해서 놈들이 아직도 거기 있는지 확인해봐."

―알았어! 아아, 여기는 라타. 여기는 라타야.

루시온은 라타가 유령들에게 연락할 동안 여기저기 화려한 종이나 장식들을 부착한 거리를 바라보았다.

'성자 루시온 크로니아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대놓고 현수막이 걸려 있자 루시온은 후드를 꽉 눌렀다.

'빌어먹을.'

이전에 사람들 앞에 나설 때 루시온은 확실히 느꼈다.

아무리 자신이 트라우마를 조금 극복했더라고 해도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건 맞지 않는다는 걸.

―루시온!

라타가 힘차게 목소리를 냈다.

―아직 거기에 있대.

[왔다. 30초 전이야.]

러쉘이 말했다.

'좋아.'

루시온은 일부러 기사를 떨쳐내기 위해 큰길을 선택했다.

마침 토끼나 곰, 신화 속 인물 등 각양각색의 모습을 한 동상을 세운 마차 행진 이벤트를 위해 길 정리가 시작될 시간이었으니.

기사를 따돌리기에 딱 좋을 때였다.

63화. 시간이 멈췄다?(3)

루시온은 큰길에서 잠깐 멈춰 뒤를 돌아보았다.

기사가 자신과 눈을 마주하자 자연스레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숨었다.

아무래도 카슨에게 눈에 떼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모양이었다.

[24초 전.]

[19초 전.]

점점 줄어드는 초에 맞춰서 루시온은 기사를 향해 슬쩍 웃어 보이다 다시 큰길을 따라 움직였다.

흄도 자연스레 속도를 높여 루시온에게 보다 가까이 붙었다.

[달려!]

러쉘의 말에 맞춰 루시온은 앞으로 달렸다.

기사가 순간 움찔거릴 사이, 길을 정리하기 위해서 골목에서부터 마차 하나, 둘, 세 대가 동시에 들어왔다.

"4시부터 진행되는 행진 이벤트를 위해 다들 길을 비켜주십시오!"

소리를 내지르는 이를 뒤로 또 다른 마차가 들어오더니 병사들이 내려 길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거기, 안 됩니다. 이제 이 길을 이벤트가 끝날 때까지 출입금지입니다."

병사들이 루시온을 뒤쫓으려던 기사를 막아섰다.

"비켜주십시오. 지금 호위 중입니다."

기사는 당황하지 않고 검에 새겨진 크로니아 문양을 내보였다.

병사는 크로니아 문양을 보자마자 다급히 물었다.

"혹시… 성자님을 호위 중이셨습니까?"

기사가 조용히 손가락을 올리자 병사는 깜짝 놀라며 다른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딱 기사 혼자만 갈 수 있게 길이 만들어졌다.

"이거 실례했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감사합니다."

기사가 병사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재빨리 큰길을 넘어갔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루시온이 보이질 않았다.

기사는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어 발자국을 살폈다.

조금 깊게 파인 발자국이 왼쪽으로 이어졌다.

'냄새가 난다.'

부러진 팔 때문에 루시온에게 특유의 약 냄새가 감돌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루시온에게 시선을 떼지 말거라.

기사는 카슨의 말을 번뜩 떠올리며 골목으로 들어섰다.

냄새가 여기에 사라졌다.

마치 이곳에서 하늘로 사라져버린 것처럼.

기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 * *

[여기는 괜찮아.]

그림자 이동으로 네 블록 떨어진 장소로 이동한 루시온은 러쉘의 말에 안도했다.

'일단 떨쳐냈다.'

루시온은 사람이 없는 골목을 골라 그곳에서 후드도, 신발도 죄다 갈아 신고는 마지막으로 가면을 썼다.

"흄. 너는...."

"저는 준비 됐습니다."

흄은 이미 소녀로 변해 있는 상태였다.

'나도 버튼만 누르면 바로 모습을 바꿀 수 있는 뭔가가 있었으면 좋겠네.'

루시온은 흄이 참 부러웠다.

옷도, 가면도 죄다 거추장스러웠고, 바꿔 입는 것도 힘들었다.

하지만 이제 얼마 안 남았다.

이번 일만 끝내면 이제 편안하게 조직을 성장시켜서 앞으로 자신의 앞길을 막는 놈들을 잘근잘근 밟아주면 됐다.

'붉은 실은....'

루시온은 헤인트를 떠올리다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붉은 실은 일단 생각을 미루기로 했다.

지금 자신이 해야 하는 건 그 세 놈을 죽여버리는 일이었다.

―루시온. 이번에는 라타가 잘했지? 이번에는 어둠도 많이 안 썼다?

라타는 어서 칭찬해 달라고 루시온의 다리에 바짝 붙어 앞발을 동동 굴렀다.

자신이 앓아누웠을 때 라타는 공을 가지고 놀거나 그림자 이동을 사용하며 라타 나름대로 알차게 시간을 보냈다.

놀이 훈련의 일종인지, 라타 말대로 어둠 소비량이 확실히 조금 줄어들었다.

"잘했어."

루시온이 쓰다듬자 라타는 배시시 웃으며 루시온의 그림자로 손을 가져댔다.

―슝을 한 번 더 해야 하잖아? 라타는 이번에 그림자에 들어가서 슝을 사용해 볼 거야.

"좋은 생각이네."

루시온도 마침 궁금하던 터라 라타를 말리지 않았다.

―이히히. 그렇지?

라타가 루시온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간 뒤에 목표 장소로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세 놈이 포함된 파티는 어느 백작가의 별장에서 열렸다.

귀족들이 모인 자리인 만큼 기사와 마법사가 있을 것이며 어쩌면 결계 술사나 마방사까지도 곁에 붙어 있을 수 있었다.

'자. 일단....'

루시온이 그 별장 근처에서 걸음을 멈춰 러쉘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러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스승을 이렇게 잘 부려먹는 제자는 루시온뿐일 테지.

[그래, 그래. 내 제자의 부탁이니 어쩌겠어. 내가 가야지.]

"감사합니다."

러쉘은 루시온의 인사를 들으며 마치 몸이 무거운 듯 천천히 저택으로 다가갔다.

'어서 해치우고 다시 돌아가지.'

지금쯤 자신을 찾아 헤맬 기사가 안쓰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원래는 그 세 놈이 어떻게 크로니아의 정보를 알고 있는지를 뒤져야 하나, 지금이 아니라면 테슬라 제국 각지를 돌아야 할지도 몰랐다.

테렘 메일 자작이 있는 자작가는 북부에.

도르토르 소프란 백작가 있는 백작가는 동부에.

오리온 지트란 후작이 있는 후작가는 남부에.

'끔찍하네....'

언제가 라타가 배운 그림자 이동이 더 성장한다면 테슬라 제국 전역을 하루 만에 돌 수 있지 않을까.

루시온은 생각을 접고 흄을 불렀다.

"흄."

"예, 도련님."

흄이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오늘따라 무겁게 느껴졌다.

"오늘은 3명을 죽여야 해."

"도련님.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몬스터라서 인간이 가진 죄책감이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거의 없습니다."

흄은 조용히 단검을 꺼내 들었다.

"오늘은 이걸로 죽이겠습니다. 아마 이편이 더 나을 거라 생각합니다."

차분한 그녀의 목소리에 루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한테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면 좋긴 한데, 일단 그건 나중에 보고."

"그것보다 이렇게 3명을 한 번에 죽이셔도 괜찮겠습니까? 혹여 도련님이라는 게 티가 나지 않을까요? 그게 아니라면 그 개미굴에서 정보가 털린 걸 알아챈다든지...."

"아니. 어느 쪽도 생각하지 못할 거야."

루시온은 손가락 두 개를 들었다.

"오늘 형님이 황실에 갔어. 이는 크로니아에서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야."

손가락 하나가 접혔다.

"그 개미굴은 쉽게 옮길 수 없어. 게다가 증거도 없는 상황이고."

루시온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였다.

적들이 혼란스러운 건 참 재미있었다.

'개미굴은 계속 남아 있어야 해.'

매달 공짜 정보를 꼬박꼬박 넣어주는데 이곳은 사라지면 안 될 곳이었다.

다만, 그 정보 속에 자신과 크로니아는 있어서는 안 되기에 변경으로 돌아가면 저택에 있는 것들을 싹 처리할 생각이었다.

[루시온.]

잠시 뒤, 러쉘이 돌아왔다.

[저택이 크기만 컸지, 경비는 생각보다 허술해. 네가 찾던 그 세 놈은 마침 발코니 쪽에 모여 있어.]

"원래 알던 놈인 겁니까?"

[그래 보였어. 아니다. 아직 대화가 덜 끝났을 테니, 네가 직접 들어보면 되겠네.]

러쉘은 말을 길게 하려다 멈췄다.

자신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대화 초반 부분이라 지금 가도 늦지 않겠다 싶었다.

[빛이 담긴 물건이 몇 개 있긴 한데, 너한테 크게 지장을 주는 건 없으니 편하게 와. 신호를 보내지.]

러쉘은 조금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저택으로 향했다.

―후후, 라타는 언제든 준비가 되어있지!

라타의 목소리가 밝았지만, 흄은 반대로 표정이 굳어 있었다.

"소리 내지 않고 걷는 법은 아직 배우질 못했습니다. 제가 소리를 내면 어떻게 합니까?"

"만약 누가 널 눈치채면 우선 입부터 틀어막아. 그리고 목을 팍 돌려버려."

루시온은 텔레비전에서 자주 보았던 해결 방법을 제시해주었다.

흄이라면 아주 잘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생각보다 손쉬운 방법입니다. 그럼 제가 이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제야 흄이 미소를 지었다.

띡.

루시온은 순간 머리카락이 삐쭉 서는 느낌을 받았다.

'…이건 스승님의 신호가 아닌데?'

"왜 그러십니까?"

흄이 물었다.

"아니야. 방금 이상한 기분이 들… 왔다."

어둠이 꿈틀거리는 느낌에 루시온은 러쉘이 보내는 신호를 눈치챘다.

―간다!

라타가 즐겁게 목소리를 냈다.

* * *

"…그래서 그자가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림자 이동으로 저택에 오자마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 테렘 메일 자작의 목소리였다.

소리는 위쪽 발코니에서 났다.

루시온은 라타가 기뻐하는 목소리를 들을 틈도 없이 흄에게 손으로 문을 잠그라는 지시를 내렸다.

흄은 애초부터 잠가졌던 문을 확인하고 루시온에게 돌아왔다.

[문은 원래 잠가져 있었어. 봐, 진짜 허술하다니까.]

러쉘이 씩 웃었다.

'아무래도 이곳 문을 잠근 건 저 세 명의 짓이겠지? 자신들의 말을 듣지 못하게.'

루시온은 차분히 귀를 쫑긋 세웠다.

"뭐라고 하긴. 데비아 그년이 걸려버려서 당분간은 크로니아를 자극하지 않게 입조심, 행동도 조심하라고 하지. 재수 없는 자식."

여성의 목소리로 보아 오리온 지트란 후작인 듯했다.

"솔직히… 이쯤 되면 발을 빼고 싶다는 생각 들지 않으십니까?"

남자의 목소리였지만, 테렘 자작가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남은 건 도르토르 소프란 백작밖에 없어.'

"이제와서?"

오리온이 코웃음을 살짝 쳤다.

"그자가 입만 열면 우린 끝이야. 데비아 제븐, 그년 때문에 제븐 가문이 한순간에 폭삭 망한 거 다들 잊었나?"

툭 쏘아붙이는 오리온의 말에 테렘이 목소리를 냈다.

"그렇습니다, 부인. 크로니아가 가진 힘이라면 충분하죠."

"그러니 도르토르 자네는 특히나 더 조심하게. 크로니아와 직거래를 하는 거래처를 가지고 있으니."

"…하. 부인. 놈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겠습니까?"

도르토르는 마치 애원하듯 오리온에게 말했다.

탁!

테이블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놈의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데 나도 어쩔 도리가 있겠나. 내 놈의 정체를 알았다면 벌써 쥐도 새도 모르게 죽였을 것이야. 제일 답답한 건 나란 말일세."

오리온의 언성이 높아졌다.

"부인."

그때, 테렘이 조용히 목소리를 냈다.

"말하게."

"그... 전에 아주 잠깐이지만, 놈의 손등에 난 십자 흉터를 보았습니다."

"십자 흉터?"

'십자 흉터…?'

오리온의 목소리를 이어 루시온은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벌써 정보 하나를 손에 넣었다.

"예. 저번 만남에서 그자가 물러날 때, 그때 잠깐 가림막 밖으로 나온 손을 보았습니다."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는가?"

오리온은 테렘을 질책했다.

탁.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이어 들렸다.

"더 빨리 말했다면 내 진작 알아봤을 것을. 십자 흉터… 십자 흉터라."

무언가에 집중하는 말에 루시온은 절로 집중되었다.

혹시 그녀라면 십자 흉터에 대해 알지도 몰랐다.

"혹시 알고 계신 자가 있습니까?"

도르토르가 물었다.

"범위가 너무 넓구나, 귀족 중에 기사 출신이라면 흉터가 없는 자를 보기 드물 테고. 내가 아는...."

갑자기 오리온의 말이 멈췄다.

아무리 기다려도 말이 들리지 않자 루시온은 이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누가 온 건가?'

루시온의 눈이 빠르게 커졌다.

'뭐야....'

루시온은 자신 근처를 날아가던 나비가 멈춘 모습을 보고는 곧이어 러쉘도, 라타도, 흄까지 죄다 쳐다보았다.

'멈췄어?'

죄다 시간이 멈춘 듯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처음 자신이 운명이 보이는 실을 얻었을 때처럼 세상이 멈춰버렸다.

'이게 대체 무슨....'

루시온은 순간 생각을 멈췄다.

달랐다.

그때와 다른, 불길하고 어둑한 무언가를 느꼈다.

치칙.

그때, 실을 얻었을 때처럼 글자가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졌다.

―놈이 오고 있어.

치치칙.

―가만히 있어.

곧 죽어버릴 모습처럼 구불구불한 글자의 모양마저 너무 불안해 보였다.

끼이익.

어디선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루시온의 전신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바로 위에서 들렸다.

64화. 움직인다

탁.

탁.

누군가 문에서 걸어 나왔고, 주변이 죄다 멈췄기에 들려오는 발소리는 제법 컸다.

"여기가 맞는데."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지?'

루시온이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였다.

"분명 이곳이어야 하는데."

'설마 나를 찾는 건가…?'

루시온은 숨을 죽였다.

저놈은 자신이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자신은 현재 고양이를 앞에 둔 쥐나 다름없었다.

두근두근.

멋대로 세차게 뛰는 심장 소리가 혹여나 놈에게 들릴까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이상하네."

목소리에 담긴 의문은 정말로 순수했다.

하지만 놈의 주변에 자연스럽게 흐르는 살기와 압박에 루시온은 온몸이 떨려왔다.

숨소리도 함부로 낼 수 없었다.

"이상하네. 정말로 이상하네. 또 그게 발생한 건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발생한 거야?"

점점 목소리가 빨라지더니 놈은 기어코 웃음소리를 냈다.

"재미있네. 역시 세상은 재미있어. 내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너무 재미있다고!"

갑자기 춤이라도 추는 건지 위에서 쿵쾅거리는 발소리를 따라 공간 자체가 크게 흔들리는 듯했다.

루시온은 눈을 질끈 감았다.

놈이 발을 굴릴 때마다 알 수 없는 압박이 밀려와 속이 뒤집히는 것만 같았다.

그때, 놈이 발을 굴리는 걸 멈췄다.

"…어? 이놈들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잠시 뒤에 조용히 들려오는 의문에 루시온은 원인 모를 한기까지 느꼈다.

"여기에 있어야 하는 놈들이 아닌데? 지금쯤 각지에 흩어져 있어야 할 텐데."

'...!'

마치 미래를 아는 것처럼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말에 루시온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뭐 어때. 이런 놈들이 여기에 있든 저기에 있든 사라지든 앞으로 아무 영향이 없으니까."

콰드드득.

무언가 뽑히는 소리가 들렸다.

하나.

둘.

셋.

그 소리는 세 번을 걸쳐 들려왔고 사방으로 퍼지는 건 분명 피였다.

"불필요한 것들은 사라져야지. 어차피 이곳은 타오르고, 부서지고, 망가질 테니."

놈은 웃었다.

소름 끼치도록 웃고 또 웃었다.

루시온은 괴상하고, 머리를 울리는 소리에 당장 귀를 틀어막고 싶을 정도였다.

스스스스.

갑자기 음산한 느낌과 함께 검은 실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마치 오류에 걸린 것처럼 버벅거렸다.

"…뭐지?"

놈이 웃음을 '뚝'하고 멈췄다.

루시온은 검은 실의 등장에도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천천히 발코니 밑으로 무언가가 내려오고 있었다.

머리카락부터 슬금슬금 내려오는 모습에 루시온은 필사적으로 입을 가렸다.

"아니. 또 환각이겠지. 이런 일로 시간 낭비할 순 없고. 슬슬 시간도 다 됐네."

놈은 처음 걸어 나왔을 때처럼 '탁'하는 발소리를 내며 걸어갔다.

끼이익.

문이 열리고, 문이 닫혔다.

주르륵.

시간이 돌아오자마자 위쪽 발코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커억!"

동시에 루시온 역시 다급히 가면을 벗어 피를 토했다.

조금 전 그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몸에 부담이 온 건지 몰라도 루시온의 몸에서 일어난 떨림이 멈추질 않았다.

[루시온, 너 갑자기 왜 그래?]

러쉘이 기겁했다.

―홉! 루시온!

"도련님!"

라타와 흄의 목소리가 우르르 들렸다.

[피는 대체 왜....]

러쉘의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

발코니에서 왜 갑자기 피가 흘러내리는 것이며 루시온이 갑자기 피를 토한 이유가 무엇인지.

누구 하나 이 상황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루시온은 몇 번이나 피를 토한 뒤에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입가를 닦았다.

"전… 괜찮습니다."

자신의 목소리가 살짝 갈라진 게 느껴졌다.

주변을 살피던 러쉘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주변에 빛은 없는데.... 분명 아무도 오질 않았고.]

하다못해 이 저택에 침투한 흑마법사도 없었다.

하지만 이유가 있으니 루시온에게 문제가 생겼을 터.

[…라트초 부작용은 아니겠지?]

이유를 찾던 러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제 와서 생기겠습니까?"

루시온은 애써 웃었다.

갑자기 세상이 정지해서 웬 미친놈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할 수도 없고.

"정말 괜찮으십니까?"

흄은 손수건을 건넸다.

"문제없어. 그것보다...."

루시온은 위를 가리켰다.

[보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갑자기 목이 죄다 뽑혔으니까.]

'진짜구나....'

루시온은 조금 전 일이 현실임을 제대로 자각했다.

만약 그 남자가 자신을 보았다면 똑같이 목이 뽑혔을까.

뒤늦게 무서움이 몰려와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그 남자는 대체 뭐고, 내가 봤던 그 검은 실은 대체 뭐지?'

소설 속에 나왔던 상황이 아니었다.

뭔가 뒤틀려버린 게 느껴졌다.

'게다가 제대로 된 실도 아니었어.'

마치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던 모습이 잊히질 않았다.

하지만 루시온은 티를 내지 않았다.

다시 가면을 쓰고 침착하게 목소리를 냈다.

"일단 물러날 때네요."

[그래. 지금 물러날 때야.]

러쉘의 시선이 조금 더 멀리 눈을 찌푸렸다.

[어서 이동해. 마법 하나 날아온다.]

"라타."

루시온이 라타를 부르자마자 라타가 힘차게 말했다.

―간다!

* * *

콰앙!

저택과 분명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 왔음에도 그 굉음이 너무도 컸다.

루시온은 가면을 벗어 한 번 더 피를 토했다.

'…빌어먹을.'

그 남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몰라도 속이 완전히 뒤집혀버려 그림자 이동도 버티기 어려웠다.

'대체 뭐가 지나갔다 온 거지? 뭘까.'

러쉘은 필사적으로 추측해보려 했으나,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 속에 이번 일은 없었다.

마치 모습도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가 나타났다 사라진 기분이었다.

'잠깐 친숙한 느낌이… 아니야. 내가 착각한 거겠지.'

러쉘은 생각을 멈추고 공중으로 떠올라 저택을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저 저택을 노렸는지, 소환된 바위 더미로 부서지고, 불 마법으로 타오르고, 하늘에서 갑자기 내려치는 낙뢰로 망가져 버렸다.

'뭔가 시작되려나 보네.'

러쉘은 숨을 가볍게 내쉬었다.

마법사들이 어떤 단체를 만들어 조금씩 과격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들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귀족을 건든 건 이번이 처음이라 괜히 루시온이 신경 쓰였다.

성자라는 이름이 가진 무게는 제법 무거웠으니.

[마법사가 움직였어.]

러쉘이 입을 열었다.

"마법사가 움직이다뇨?"

루시온은 흄이 건넨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으며 물었다.

[흑마법사의 대우가 개차반이라는 건 알고 있을 테고.]

"세계의 적이죠."

[마법사도 대우가 좋지 않았던 건 알고 있지?]

"그건 지극히 일부가 아닙니까? 흑마법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대우가 좋을 텐데요?"

루시온은 하나씩 바꿔 갈아입기 시작했다.

[그렇지. 배가 부른 줄도 모르고 설치는 놈들이 꼭 하나씩은 있잖아? 그놈들이 드디어 일을 저질렀어. 아마도 본격적인 시위의 시작을 알리는 일이겠지.]

러쉘이 혀를 찼다.

"시위라면… 혹시 모든 마법사를 귀족으로 대접해달라는 개소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루시온의 물음에 러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비슷한 게 맞아.]

'여기가 거기였어?'

루시온은 소설 속 내용을 떠올렸다.

메인 악역은 공허의 손이라는 단체였지만, 부수적인 악역 중 하나가 바로 마법사들로 이루어진 집단 '루미노스'였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권력을 내어주지 않는 귀족들을 처단하고 모든 마법사가 귀족이 되는 그날까지 투쟁한다는 목표를 둔 집단이었다.

루미노스의 시작이자 상징적인 사건이 된 게 바로 파티가 열리는 귀족의 저택을 무너트리는 일이었다.

'루미노스가 이미 만들어졌어? 예상보다 1년 더 빠른데....'

루시온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들이 골치 아픈 건 공허의 손과 목적이 비슷하다는 점이었다.

공허의 손이 설립된 목적 자체도 탄압받는 흑마법사의 권리와 자유를 되찾자는 정말 좋은 목적이나, 결과는 달랐다.

'망할.'

루시온은 후드를 눌러쓰다 말고 꽉 쥐었다.

루미노스가 만들어지고, 그들이 공허의 손과 손을 잡는다는 사실을 아는데 지금으로서는 막을 길이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마법사가 일반인도 아니었고, 게다가 유령도 아니었으니.

'…아니지.'

루시온은 순간 눈동자가 반짝였다.

'왜 나 혼자 하려고 하지?'

혼자 움직이고, 혼자 행동하는 사실에 익숙해졌지만, 이제부터 달라져야 했다.

'놈들이 어디 있는지 아니까 일단 덫부터 깔고,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것들은 죄다 움직여야지. 할 게 많아졌어.'

루시온은 입가를 핥았다.

[루시온. 이유야 어쨌든 세 놈이 죽었어. 이제 널 기다리는 기사한테 가야지.]

"예. 기사에게 돌아가야죠. 절 애타게 찾고 있을 테니까요."

십자 흉터.

아예 정보를 얻지 못한 건 아니었기에 루시온은 하늘로 높이 치솟는 까만 연기를 바라보았다.

* * *

"도, 도, 도련님!"

기사는 루시온을 보자마자 다급히 뛰어와서는 상태를 확인하기 바빴다.

"대체 어디를 가셨습니까? 저쪽에서 문제가 터졌고, 도련님께서 사라지셔서 정말 한참을 찾아다녔습니다."

거의 하소연하듯 기사는 울먹거렸다.

정말로 루시온을 열심히 찾아다녔는지, 기사의 온몸이 땀으로 젖다 못해 땀 냄새가 제법 짙게 풍겼다.

"그냥 이곳저곳 돌아다녔네. 그대도 하나 먹겠는가?"

루시온은 미안한 마음에 오면서 사 온 간식거리들을 하나씩 기사에게 넘겼다.

기사는 음식을 하나씩 받으면서도 황당한 눈빛을 띠었지만, 곧 없던 식욕도 돌아왔는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맛있게 먹겠습니다."

어느새 기사의 양손에는 푸짐한 먹거리들로 가득 찼다.

제법 많이 사 왔다고 생각했지만, 그중 절반 이상이 흄과 라타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한눈을 판 내 잘못이네. 이번 일은 형님께 보고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게."

루시온은 기사가 안심할 수 있게 말했다.

"저는 결코, 그런 불순한 의도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도련님께 혹여 무슨 일이 생기셨을까 봐 정말로 조마조마했습니다."

기사는 티끌 하나 없는 것처럼 맑은 눈동자로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눈동자가 참 맑네.]

넌지시 꺼내는 러쉘의 말에 루시온은 괜히 한 번 더 가슴이 찔렸다.

"자, 이유가 어찌 되었든. 이번에는 한눈팔지 않을 테니 안심하고 먹게."

루시온은 슬쩍 흄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열심히 닭꼬치를 먹는 모습은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여 기사는 그제야 음료수로 목을 축였다.

"한데, 도련님."

기사가 조심스레 루시온을 불렀다.

다른 건 넘어가더라도 루시온에게서 옅은 피 냄새가 났다.

"저건, 도련님이 아니십니까?"

그때, 흄이 우물거리며 목소리를 냈다.

"나라니?"

루시온은 흄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택 하나가 터졌어도 행진 이벤트가 멈추지 않았는지, 루시온의 시선은 한 동상에서 멈췄다.

'…빌어먹을. 더럽게도 빠르네.'

호랑이 모습을 한 이는 빛의 신수인 트로에였고, 트로에와 이마를 맞대고 있는 이는 당연히 루시온이었다.

라타가 다급히 루시온의 머리로 올라왔다.

―어! 정말이다. 루시온이다, 루시온!

라타의 꼬리가 크게 흔들리는 만큼 루시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야, 인기 좋은데.]

러쉘은 키득거리며 손가락을 펼쳤다.

[오는 길에 조잡했지만, 네 얼굴을 최대한 비슷하게 따라 한 것처럼 보이는 인형, 네 얼굴이라고 그려놓았던 그림. 캬, 그건 걸작이었어. 어쨌든, 이마에 신수의 축복을 그리는 곳도 있고, 네가 먹는다는 음식에 그리고....]

루시온의 날카로운 시선이 러쉘을 향했다.

당장 입 닥치십쇼, 라고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축제가 괜히 축제가 아니야. 아차, 널 위한 축제이니 당연하겠네.]

―맞아. 루시온을 위한 날이야.

루시온은 치솟는 낯간지러움에 부르르 떨다 말고 어깨에 힘을 뺐다.

사람들의 얼굴이 모처럼 즐거워 보였다.

'…뭐, 됐다.'

모두가 즐거운 날에 자신도 즐겁길 바라지 않았던가.

루시온은 조금 전 만났던 정체 모를 이를 떨쳐내려는 듯 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 나도 닭꼬치 하나만 줘보게."

줬다 뺏는 건 해서는 안 될 행동이었지만, 모두가 우물거리니 자신도 하나 먹고 싶었다.

"여기 있습니다."

하지만 기사는 전혀 그런 생각도 하지 않는지 미소를 지으며 건넸다.

루시온은 육즙이 촉촉한 닭꼬치를 한입 베어 먹으며 생각했다.

'마카롱이 당기네.'

하지만 닭꼬치도 나쁘지 않았다.

65화. 움직인다(2)

* * *

쾅!

황제가 의자 팔걸이를 세게 내려치다 이내 꽉 쥐었다.

"지금 이게 사실이라는 말인가."

카슨이 들고 온 서류는 도무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습니다, 폐하."

카슨이 담담하게 대답하자 황제는 기어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어찌 이런 일이… 이런 일이 벌어졌음에도 짐이 모르고 있었다니."

황제는 이마를 꾹 눌렀다.

흑마법사가 자신의 백성을 죽였음에도 모르고 있었다.

저주를 완성시키기 위해 대체 몇이나 죽었는지.

또 이 저주가 퍼져나갔다면 얼마나 끔찍했을지.

황제는 깊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

"이는 음지에서, 그것도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렇다 한들, 짐이 먼저 알아차렸어야 했다. 흑마법사가 짐의 나라에 설치고 있는 것도 모르고. 짐이 어리석었노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폐하. 신속히 로베리오 백작을 구속하시고, 그 식솔들 전부 잡아들여야 합니다."

"그대 말이 맞도다. 여봐라."

황제는 밖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예, 폐하."

황실 시종장이 안으로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지금 제3, 4 기사 단장을 부르고, 대신전에 연락해 신관들을 소집하게."

"알겠습니다, 폐하."

진노한 황제의 목소리에 시종장 역시 덩달아 마음이 급해졌다.

"그럼, 소신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폐하."

카슨은 황제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제 이 문제는 자신의 손을 떠났다.

피이자트 가문도 무너진 마당에 로베리오가 있는 토트렌 백작가 역시 무사할 리가 있겠는가.

"카슨 공. 노비오 공에게 연락을 해두었는가?"

황제는 카슨이 물러가기 전에 물었다.

"물론입니다, 폐하. 변경은 언제든 적과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내 이번 공을 절대 잊지 않겠네."

"소신의 공이 아니라 제 동생 루시온의 공입니다."

"…성자가 이 일을 캐냈단 말인가?"

황제의 얼굴에 놀란 감정이 드러났다.

카슨은 루시온이 탐험을 하다 발견했다는, 그 사실을 숨기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하하! 우리의 성자가 벌써 큰일을 해낼 줄이야!"

황제는 흡족하게 웃었다.

성자가 된 지 고작 하루도 되지 않아 흑마법사들의 꼬리를 잡은 것도 모자라 그들과 결탁한 무리까지 뽑을 기회를 손에 쥐여주다니.

25년 전, 한 흑마법사가 펼친 흑마법으로 왕국 전체가 사라지는 일이 발생했다.

그리고 10년 전, 흑마법인지 아닌지 아직도 알 수 없으나, 그와 비슷한 일이 케오르티아라고 작은 왕국에서 벌어지지 않았던가.

아무리 제국일지라도, 흑마법의 무서움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성자 루시온 크로니아는 우리 제국의 꺼지지 않는 불꽃이 되리라.'

황제는 미소를 지었다.

* * *

"에취!"

루시온은 갑자기 코가 간지러워 재채기를 하고 말았다.

"감기에 걸리신 게 아닙니까?"

색색 별로 담긴 마카롱을 내려놓던 흄이 걱정스레 물었다.

"아니. 먼지가 있어서 그러나."

루시온은 코 밑을 문지르며 마카롱을 날름 집어 먹었다.

―라타도 아.

라타가 입을 쩍 벌리자 루시온은 하나 던져주었다.

우물우물.

완벽하게 마카롱을 받아먹은 라타의 눈동자가 점점 초롱초롱하게 빛이 났다.

―라타는 행복해.

'…보자.'

루시온은 생각에 빠지려다 말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베델의 시선에 우물거리며 물었다.

"왜? 할 말 있어?"

[공의 하루는 참 바빠.]

"네가 봐도 그렇지?"

루시온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방구석에 벗어났더니 이놈의 방구석에 궁둥이를 붙인 적이 몇 없었다.

'하지만 이것도 이제 곧 끝이지.'

우선 자신의 가장 큰 목적이었던 빛의 내성을 얻어 '신수의 축복을 받은 자', '성자'라는 칭호 얻지 않았는가.

소설처럼 무작정 흑마법사로 몰리는 상황은 사라진 셈이었다.

두 번째로 자신의 정보가 밖으로 노출되는 상황도 이제 거의 수습이 됐다.

특히, 크로니아의 정보를 팔던 놈들은 거의 다 죽었고, 변경으로 돌아가면 저택에 있던 것들도 정리할 셈이니 이제 적들이 자신의 정보를 알 방법도 희박해진 셈이었다.

그리고 자신과 공허의 손의 정보를 조작한 일이 있어 이제 이 정보들이 어떻게 바뀔지도 차차 두고 봐야 했다.

'이제 남은 건… 내 세력을 키우는 일 하고, 헤인트와 이어진 붉은 실을 자르는 건가?'

얼마 전, 잠깐 나타났다 사라졌던 검은 실이 신경 쓰였으나, 지금 뭘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단순한 버그였으면 좋겠네.'

[…그러니까 새벽에 일어나 달리고, 아침을 먹은 뒤에 흑마법을 훈련하고, 점심을 먹은 뒤에 또 달리고, 훈련하고, 저녁 먹고 잠깐 산책갔다가 훈련이라니.]

베델이 손가락을 접을 때마다 갑옷이 서로 맞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아무리 내 제자라지만, 참 훌륭하지.]

러쉘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아서 하는 것.

제자로서 이보다 더 완벽할 순 없었다.

[그대 말에 동의하지. 내가 봤던 귀족 중에 부지런함으로 손가락에 꼽을 정도야.]

베델은 러쉘의 말에 동감해준 뒤 잠깐 숨을 깊게 내쉬었다.

[나도 저주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공 같은 제자를 두었을 테지.]

[내 제자니까 넘볼 생각도 하지 마.]

러쉘이 서둘러 베델을 견제했다.

굴러온 돌에게 제자를 가로채일 마음은 전혀 없었다.

[나는 그럴 마음이....]

[그래. 그 자세 그대로 침도 묻히지 말라고.]

러쉘은 황당한 목소리를 내는 베델의 말을 끊어냈다.

루시온은 마카롱 하나 더 우물거리며 둘이서 벌이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바라보았다.

이미 카슨이 자신의 검술 스승님이지 않은가.

아직 검을 들어보지도 못해서 그렇지.

'나는 스승이 몇 명이라도 상관 없… 어?'

갑자기 떠오른 사실 하나에 루시온은 눈을 곧 크게 떴다.

'분명 중부에 악역 조직이 하나가 있었는데....'

메인 악역 집단 '공허의 손'.

마법사로 이루어진 집단 '루미노스'.

그리고 자신한테는 신관들.

저 셋을 제외하더라도 2년 후에는 흑마법사들이 설쳐 나라가 불안해지는 만큼 크고 작은 악역 집단들이 우르르 나타날 때였다.

그들을 통합하고, 받아들인 게 소설 속 루시온이었다.

많은 악역을 받아들인 만큼 공허의 손이 가진 세력이 빨리 성장했고.

'돌이켜 생각해 보니 소설 속 루시온이 참 유능했네.'

하지만 자신은 공허의 손에 들어가기는커녕 놈들과 얽히고 싶지 않았다.

'변경으로 가기 전에 청소 한 번 할까?'

생각해 보면 아직 그 악역들이 성장하기 전이지 않은가.

'완전히 밟지는 못해도 최소한 공허의 손과 손을 잡지 않게 해줘야지. 암. 그게 맞는 거지.'

루시온은 넌지시 밖을 바라보았다.

'축제는 끝났고, 텔라 영애에게 안부도 전해줄 겸 한 번 쳐들어가자고.'

중부에 터를 잡은 악역, 일명 음지에 활동하는 '쥐쟁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훗날, 공허의 손과 한편이 되어 제국을 포함한 온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드는데 큰 지분을 차지한 곳이라 내버려 순 없었다.

'놈들의 힘은 공허의 손에서 나왔으니, 아직 공허의 손과 손을 잡기 전인 지금은 숫자만 많은 호구지. 털어먹기 딱 좋네.'

루시온은 마카롱을 마저 털어낸 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시온.]

러쉘이 뭔가 신나 하는 루시온의 표정에 미간을 꽉 눌러 잡았다.

[또 뭘 하려고 그러는데?]

"스승님께서는 왜 이렇게 눈치가 빠르십니까?"

루시온은 부정하지 않았다.

부정해봤자 들킬 게 뻔했으니.

[그래서 어디로 갈 건데? 아니, 지금 갈 수 있나? 곧 변경으로 출발할 거잖아.]

러쉘은 시계를 바라보았다.

"예. 이틀간 집에만 있었더니 몸도 쌩쌩하고, 어둠도 가득 차 있습니다."

루시온이 입가에 묻은 마카롱 부스러기를 털어내자 흄이 서둘러 그릇으로 바쳤다.

―오오오.

흄의 민첩함에 라타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루시온 공. 이번에는 동행해도 되겠나?]

베델이 묻자 루시온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대답했다.

"너한테 별로 재미없을 텐데?"

빙의를 사용하고 싶어도 베델과 자신 사이에 연결 고리가 없기에 이를 확인할 순 없었다.

[혹시 흑마법사 때문에 걱정이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공이 허락해준다면 공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멀리서 바라볼 테니까.]

"그래. 알아서 따라와. 아까도 말했듯이 별로 재미없을 거라고 했어."

루시온은 베델이 최종 보스가 가졌던 죽음의 기사 중 하나라는 사실만 알 뿐이었다.

특히나 그때는 '예, 알겠습니다.'라는 대사밖에 하질 않는 인형에 불과했으니 그녀에 대해 아는 건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차차 알아가면 되는 문제라 급할 건 없었다.

만약 자신이 이번 연회에 가지 않았더라면.

빛의 내성을 기르지 않았더라면.

피이자트 가문을 박살 내지 않았더라면.

결코, 바뀌지 않았을 운명이 바뀐 게 눈으로 보여 기쁘기 그지없었다.

'내가 한 일은 헛되지 않았어.'

루시온은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나갔다.

* * *

'…푸른 실이?'

루시온이 살짝 멈칫거렸다.

텔라를 보자마자 갑자기 푸른 실이 자신과 그녀를 연결하고 말았다.

'뭐지? 무슨 사건이 터졌나? 아니면 터질 예정인가?'

"들어오셔서 차라도 한 잔 마실래요?"

텔라는 살짝 불안한 미소를 지으며 루시온에게 제안했다.

"너도 그럴래?"

그녀는 곧 불안함을 지우려는 듯 자신의 주변에서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드는 라타를 쓰다듬었다.

―응! 라타는 좋아!

[그게 좋겠네. 여기까지 왔는데 차 정도는 마셔줘야지.]

러쉘이 고개를 격렬하게 끄덕였다.

어차피 마차를 타고 왔겠다, 변경에 돌아갈 때까지 시간도 아직 남아 있었다.

"괜찮습니다. 잠깐 얼굴만 보러 온 거니까요."

루시온은 텔라의 제안을 둘러 거절했다.

자신은 '쥐쟁이'가 더 크기 전에 짓누르러 가야 했다.

쥐쟁이의 주된 일은 정보 교란과 수집이었고, 정말 쥐처럼 땅 구멍을 파고 살아서 지금이 아니라면 그들을 없애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루시온은 본 거점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다.

소설 중후반쯤 헤인트가 어둠을 추적하는 능력을 얻고 테슬라 제국의 수도가 있는 중부에 쥐쟁이의 본 거점이 있음이 밝혀졌다.

"그럼, 건강하신 걸 봤으니 다음에 또 만나러 오겠습니다."

루시온은 미소를 지었다.

굳이 핑계가 아니라더라도 정말로 텔라에게 마지막 인사는 할 셈이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있어 첫 친우였으니까.

하지만 텔라는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정문에 서 있는 기사들을 힐끔 쳐다보기 바빴다.

곧 그녀가 목소리를 낮췄다.

"공자."

"예, 영애."

"혹시 잠깐 시간이 되나요?"

"시간은...."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게만 도와주세요."

텔라가 간절히 부탁했다.

그녀의 첫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었기에 루시온은 대화를 하는 척하며 물었다.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그냥 저와 잠깐 산책하겠다고 제안만 해주셔도 괜찮아요."

텔라는 다급했고, 루시온은 전보다 목소리를 높여 그녀를 불렀다.

"텔라 영애."

"예, 공자."

"혹시 시간이 되시면 가볍게 산책하실 수 있겠습니까?"

"네, 좋아요. 근처라면 괜찮겠죠."

텔라가 움직이자, 정문에 서 있던 기사 중 몇 명이 덩달아 움직였다.

루시온은 그제야 텔라가 부탁한 이유를 알아차렸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녀는 지금 감시에 가까운 보호를 받는 중이었다.

텔라와 마지막 만남은 신수 탄생 연회였다.

'그때, 은행에 문제가 생겼단 이야기를 들었는데....'

"고마워요, 공자. 이 뒤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텔라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설마, 이대로 달리시려고요?"

"어, 어떻게 아셨어요?"

텔라가 깜짝 놀랐다.

"제가 이유 정도는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음...."

텔라는 말꼬리를 늘이며 치맛자락을 잡았다.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저희 은행에 문제가 생겼어요. 그간 이 문제 때문에 연락을 드리지 못했어요."

"큰 문제입니까?"

"예. 누군가 저희 고객의 정보를 빼돌렸어요."

텔라는 우울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아. 진짜 큰일이네.]

러쉘이 안타까움에 주먹을 꽉 쥐었다.

러쉘을 보고 있자니, 루시온은 기가 찼다.

자신이 검은 실을 본 뒤에 피를 토해도 저렇게 걱정하지 않았는데.

'그나저나 원래 이런 일이 있었던 건가?'

텔라는 이름만 나오는 엑스트라였기에 루테온 은행에서 벌어진 일은 소설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 저희 은행은 끝이에요."

"영애께서는... 이렇게 무모한 행동을 하실 분이 아닙니다. 혹시 아시는 게 있으십니까?"

"예. 누가 정보를 빼돌렸는지를 알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 목숨을 위협받고 있죠."

"대체 놈들이 누구입니까?"

루시온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텔라가 가주가 되는 길을 대체 누가 방해한단 말인가.

텔라의 입에서 루시온이 아는 이름이 튀어나왔다.

"쥐쟁이."

"…예?"

"그들이 자신을 그렇게 불렀어요."

66화. 움직인다(3)

"쥐… 쟁이요?"

루시온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말았다.

그야 그럴 것이, 텔라 입에서 그 말이 튀어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예, 쥐쟁이요. 놈들이 절 위협할 때, 자신들을 그렇게 말했어요."

"그럼 영애께서는 놈들을 잡으러 가실 생각이셨습니까?"

텔라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어머니도 언니들도 그 문제 때문에 급하게 자리를 비워 저택에는 저밖에 없어요. 아마 공자께서 오시지 않으셨더라면 저는 발만 동동 굴리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제게는 기사를 움직일 힘이 아직 없거든요."

"혹시 쥐쟁이가 있는 장소를 알고 있습니까?"

루시온이 물었다.

자신은 이미 장소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보다 자연스럽게 쥐쟁이를 박멸할 방법을 찾았다.

"안 돼요."

텔라가 루시온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저는 자유롭습니다. 지금 별장으로 가서 기사들을 부를 수도 있고요."

"이미 공자께 받은 은혜가 큽니다. 저는 염치를 아는 인간입니다."

"전 영애의 친우입니다. 제가 직접 싸울 것도 아니니 위험할 일은 없습니다."

루시온은 부드럽게 웃으며 텔라를 설득했다.

[역시, 공은 내가 알던 흑마법사와 달라. 친우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다니.]

물끄러미 루시온을 바라보던 베델이 입을 열자 러쉘이 괜히 으쓱거렸다.

"하지만 저는...."

"괜찮습니다. 다음에 제가 텔라 영애와 같은 입장이 된다면, 그때 도와주십시오. 그럼 됩니다."

텔라는 몇 번이고 망설이다 마지못해 루시온의 제의에 허락했다.

"…53번지 1에 지하로 통하는 문이 있어요."

서걱.

텔라가 사실을 알려주자마자 푸른 실이 잘려나가며 붉은 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녀와 연결된 건 아니었다.

아마도 쥐쟁이일 터.

'제대로 잡았네.'

루시온은 새어 나올 뻔한 웃음을 삼켰다.

"제가 용병을 통해서 몇 번이고 확인했으니 그 위치는 변하지 않았을 거예요."

신중하게 말을 꺼낸 텔라는 여전히 미안한 얼굴로 루시온을 보았다.

루시온이 그녀를 다독이며 말했다.

"절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계속 도움만 받아서 고맙다는 말씀도 드리기가 민망할 정도입니다."

텔라의 눈동자가 살짝 일렁거렸다.

"영애께서는 제 첫 부탁을 그새 잊으셨습니까? 친우가 되어 달라는, 그 부끄러웠던 부탁에도 영애께서 감사히 받아주셨습니다."

루시온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감돌았다.

"감사… 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공자."

텔라의 목소리가 바르르 떨렸다.

"언제가 되었든, 꼭 공자를 위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루시온은 텔라에게 슬쩍 손수건을 건넸다.

힘이 없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분통함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 조그만 위로라도 해주고 싶었다.

* * *

"뚫어."

루시온은 소녀가 된 흄에게 아래를 가리키며 지시했다.

"예."

흄이 짧고 굵게 대답하며 바닥을 향해 발을 굴렀다.

콰앙!

아래로 시원하게 뚫자 루시온은 다리에 어둠을 둘러 안전하게 내려갔다.

하필 마차를 타고 와서 어떻게 몰래 빠져나가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별장으로 향하는 길에 마차 사고가 벌어져 마차들이 가지도 못하고 물러서지도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루시온은 그 상황을 이용해 별장으로 뛰어간다는 핑계를 대서 도주했다.

어떻게 해서든 마부가 별장으로 가서 카슨이 자신을 찾기 전에 일을 처리해야 했다.

―비밀 장소다! 라타가 좋아하는 비밀 장소!

라타의 꼬리가 흔들렸다.

밑에는 굴로 들어가는 입구가 여러 개 보였다.

루시온은 고민할 것도 없이 주변을 알짱거리던 유령 중 한 놈의 뒷덜미를 잡았다.

"입구가 어디야?"

[흐, 흑마법사!]

기겁하며 소리치는 말에 주변에 있던 유령들이 달아나버렸다.

"입구가 어디냐니까. 또 말하고 싶진 않은데."

루시온의 손아귀에서 어둠이 흘러나오자 유령은 비명을 질렀다.

[외, 왼쪽입니다! 왼쪽이요!]

"어디 왼쪽?"

[제일 왼쪽입니다! 거기가 입구예요.]

[맞아, 제일 왼쪽이네.]

러쉘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럼 이제, 노, 놓아주시는 겁니까?]

간절한 유령의 부탁에 루시온의 가면이 노랗게 변했다.

"아니."

루시온은 오히려 어둠을 더 집어넣고서는 유령의 무릎을 꿇렸다.

CCTV 겸 그림자 이동에 필요한 말판으로 쓰일 유령 하나쯤은 필요했다.

"내게 복종하겠느냐."

―복종하겠느냐!

라타 흥겹게 루시온의 말을 따라 했다.

[보, 복종하겠습니다!]

속을 찌르는 어둠에 버틸 수 없던 유령은 단번에 루시온에게 복종을 맹세했다.

"좋아. 넌 15번이다."

루시온은 유령에게 번호를 매긴 후에 라타를 바라보았다.

―에헴.

라타는 도도한 발걸음으로 유령에게 다가갔다.

―잘 들어, 15번. 나는 라타야. 앞으로 라타가 우리 15번한테도 연락을 할 텐데....

으쓱거리면서 앞으로의 일을 설명하는 라타의 모습이 참 즐거워 보였다.

"왜?"

루시온은 천천히 유령이 알려주었던 입구로 걸어가다 말고 베델의 시선에 물었다.

[아, 난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공이 흑마법을 쓰더라도 다른 흑마법사와 다르다는 걸 인지하고 있으니.]

베델은 신경 쓰지 말라며 몇 걸음 더 물러섰다.

그 모습이 묘하게 더 신경 쓰였지만, 루시온은 먼저 입구로 들어간 흄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세 사람 정도 서 있을 수 있는 만큼의 넓이를 가졌다.

타타탁!

방금 흄이 바닥을 뚫으면서 일어난 소리 때문인지 밑에서 적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그나저나 가면 색이 바뀌는 기능은 영영 사용하지 않을 듯하더니. 잘 쓰네?]

역시 사용할 줄 알았다며 러쉘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제 표정이 보이질 않으니 어쩌겠습니까. 이렇게라도 해야 제법 그럴듯하지 않겠습니까?"

[꽤 쓸 만하다 말했잖아?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을 거다. …아.]

러쉘은 키득거리다 곧 무언가를 떠올린 것처럼 루시온 주변으로 맴돌았다.

덩달아 루시온의 기대감이 커져 가면의 색이 분홍색으로 물들었다.

"저주를 알려주실 생각이시죠?"

[저거 봐. 너도 한 눈치 하네.]

"스승님께서 전에 힌트를 주셨잖습니까."

[뭐, 그렇긴 하지.]

러쉘의 시선이 잠깐 앞으로 향했다.

[그래서 배울래, 말래?]

"당연히 배우겠습니다."

[그럼, 일단 현혹이라는 마법부터 배워야 해.]

"이름부터 부정이 마구 쌓일 것만 같은 마법인데요?"

루시온의 가면 색이 다시 검게 물들었다.

러쉘이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를 냈다.

[사용하는 방법에 따라 다른 거지.]

"현혹하고 매료하고 다른 마법입니까?"

루시온은 저번에 에올 대신관이 황실에서 찾아낸, 매료에 걸린 시종을 떠올리며 물었다.

[현혹이나 매료나 비슷해 보이지만, 조금씩 달라. 어쨌든 둘 다 정신 계열의 마법으로 상대방과 접촉해야 하고, 어둠을 머리에 침투시켜야 하지. 상대방의 정신력에 따라 성공 확률이 달라지는 것도 똑같고.]

"어둠을 머릿속에 침투시킨다고요? 좀 위험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래서 위험부담이 높은 매료보다 현혹을 택한 거야. 현혹은 지속 시간이 짧은 대신 들킬 확률도 낮고, 머리에 침투한 어둠만 살아 있다면 다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으니까.]

"정신을 공격하는 것도 부정이 쌓일 것 같은데. 아닙니까?"

[혹시 부정이 쌓이는 조건을 기억해?]

러쉘이 물었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여기는 그중에 두 번째, 어둠을 사용한 이유 없는 폭력에 해당해. 하지만 상대가 너한테 부정적인 감정이 있으면 상관없다고 말했던 것도 기억나지?]

"어떤 의미로 말씀하셨는지 알겠습니다. 저한테 원한이 있는 놈들은 어둠으로 쥐어패든, 현혹을 사용하든 상관없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맞아. 반병신으로 만들어도 죽이지만 않는다면야 상관없지.]

'그렇다면 노선을 살짝 바꿔도 되지 않을까?'

쥐쟁이를 박멸시키는 것과 현혹과 저주를 배워서 이를 사용해 자신이 포섭하는 것.

둘 중 무엇이 이득일까.

루시온은 자신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당연히 후자 쪽이지.'

쥐쟁이가 사라진다고 그 자리가 비어 있는 건 아니었다.

반드시 누군가 대처할 놈이 튀어나올 테니 자신이 쥐쟁이를 가져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스승님."

루시온은 가까워지는 놈들의 발소리를 들으며 목소리를 냈다.

적들의 아지트에 들어가서 한가롭게 마법을 배우려는 이 상황이 기가 찬다는 걸 알지만, 루시온은 이미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금 바로 시범을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미리 스승님께서 제 어둠을 사용하실 수 있게 허락하겠습니다."

[그래. 그게 제일 효과적이지. 네 어둠이 어디로 흐르는지, 내가 어떻게 하는지 잘 봐.]

러쉘은 루시온의 제의에 수긍했다.

가장 효과적이면서 가장 빠르게 알려줄 방법이었다.

그걸 위해 루시온과 계약을 했으니.

"렌탈."

루시온이 흄을 불렀다.

"예. 알고 있습니다. 요란하고, 압도적으로 처리하겠습니다."

루시온은 흄의 대답을 흡족하게 들으며 장갑을 낀 손을 매만졌다.

자고로 습격이라고 하는 건 요란해야 하며 압도적이어야 했다.

"한 놈만 남겨봐."

"알겠습니다."

루시온을 향해 미소를 짓던 흄이 당장 앞으로 튀어나갔다.

요란하고 압도적으로.

이를 위해 난투전이 제격이었고, 흄 자신은 그 난투전에서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적이 나타났다!"

제일 먼저 튀어와 흄을 발견한 남자는 목이 터지라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 순간뿐이었다.

언제 루시온이 알려주었던 것처럼 단숨에 남자의 입을 틀어막고 목을 꺾어버렸다.

빠각!

남자의 목이 360도 넘게 회전하다 못해 덜렁거렸다.

그 모습에 흄은 깜짝 놀랐다.

"…아. 이만큼의 힘을 주면 목이 저렇게 되네요. 힘을 조금 덜 줘야겠습니다."

흄은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도 단순 무식하게 때리는 것보다 훨씬 깔끔했다.

'역시 도련님이야.'

흄은 미소를 그리다 말고 갑자기 날아오른 불덩이에 시선을 올렸다.

탁!

하지만 자신이 그 불덩이를 쳐내지 않아도 괜찮았다.

어둠이 불덩이를 쳐냈으니.

루시온이 목소리를 냈다.

"마법은 신경 쓰지 말고 무식하게 싸워도 돼."

"흐, 흑마...."

흄은 다른 놈 한 명이 흑마법사라는 사실을 외치기 전에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꺾어버렸다.

빡!

'완벽해.'

흄은 목이 반쯤 꺾인 남자를 보곤 뿌듯함에 눈웃음을 지었다.

굴은 좁고 구불구불해 활을 쏘기도 불리했고, 구불거리는 길 특성상 한 곳에 몰리는 구간이 존재했다.

조금 전 마법사가 공격에 성공했으나, 다음 공격은 없었다.

같은 편이 시야를 가리는 바람에 마법을 사용하기에 적절하지 않았다.

'이런 습격은 처음인가 보네.'

루시온은 삼류가 된 것처럼 허둥거리는 적들의 모습에 비웃음을 흘렸다.

놈들이 주춤거릴 때마다 흄이 주먹을, 팔꿈치를, 발을 골고루 사용하며 전진하고, 또 전진했다.

길은 굳이 몰라도 상관없었다.

놈들이 있는 곳이 곧 길이었고, 루시온은 때때로 날아오는 화살과 마법을 쳐내며 느긋하게 마지막 하나가 남을 때까지 기다렸다.

"하멜 님."

흄이 루시온을 불렀다.

루시온이 말한 대로 한 놈을 남겨두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제발, 살려주세요!"

놈은 몸을 웅크리며 간절하게 빌었다.

자신들이 자랑하던 굴을 들킨 것도 모자라 겨우 두 명에게 당해버렸다.

특히 저 여자의 힘은 무엇인가.

그녀의 주먹에 방패가 단 일격에 부서지고, 검이 깨져버렸다.

오러를 주먹에 둘렀다면 주먹에 감도는 빛을 확인 못 할 리가 없을 텐데.

"제발, 살려주십시오! 뭐든 하겠습니다!"

생각도 잠시, 남자는 루시온이 걸어오는 소리에 아예 엎드려 두 손을 비비고, 또 비볐다.

루시온은 남자에게 다가갔다.

발발 떠는 모습에도 루시온은 별 감흥이 없었다.

저자는 범죄 조직에 가담했고, 백작가 여식을 협박할 정도로 오만함이 하늘을 찔렀으니.

"왜 살려달라고 빌어?"

루시온이 웃었다.

"이렇게 될 날을 예상했었어야지."

루시온 자신도 늘 최악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운명을 바꾸지 못해 헤인트에게 죽는 상황.

성자와 신수의 축복을 받았음에도 결국, 흑마법사로 내몰리게 되는 상황.

죽음을 선고받았기에 닥쳐오는 불안함은 아무리 떨쳐내려고 해도 어려웠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루시온은 머리가 깨끗한 남자를 보니 참 기분이 더러워졌다.

"전 준비됐습니다."

알 수 없는 소리에 남자는 불안함에 손을 달달 떨었다.

[놈과 접촉해.]

루시온은 러쉘의 말을 따라 남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둠이 순간 멋대로 움직였다.

―우오오. 러쉘이 움직인다. 라타도 움직여?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러쉘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온전히 루시온이 알아야 했다.

어둠을 어떻게 움직이며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지.

러쉘이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수업을 시작해볼까.]

67화. 쥐를 잡자!

루시온의 어둠이 움직였다.

자신이 움직일 때와 달리 징징거리는 말도 들리지 않았다.

'대체 무슨 차이길래?'

루시온은 러쉘의 움직임에 주목했다.

어둠을 움직이는 건 러쉘이지만, 루시온은 러쉘이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어둠을 통제하는지가 보였다.

'부드럽다.'

러쉘이 사용하는 방식은 내비게이션처럼 선을 그어 어둠을 안내했다.

어둠 중에서도 명령을 따르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을 빠르게 구분해 명령을 따르는 이들에게 나머지 어둠도 강제로 끌고 가게 시켰다.

'…내가 할 때는 이렇게 안 움직여 놓고. 못된 것들.'

루시온은 입술을 꽉 다물었다.

[우선, 어둠을 상대의 머리로 흘려보내. 머리로 도착하면 되니까 어느 방향으로 보내든 상관없어.]

어둠을 남자의 머리로 보냈음에도 그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저 조금 전과 같이 놀라고, 무서워했다.

찌릿.

루시온은 순간 깜짝 놀랐다.

어둠이 남자의 머리로 들어가자마자 전기가 몸에 오르는 것처럼 찌릿찌릿한 감각에 솟아올랐다.

[지금 손 떼도 상관없어. 어둠은 이미 남자의 몸에 들어갔으니까.]

루시온은 얼른 손을 내렸다.

"방금 이 감각은 무엇입니까?"

[사람은 누구나 정신력을 가지고 있어. 어둠을 막기 위해 보호막이 작동된 셈이지. 그걸 뚫으려면.]

남자의 머리로 침투한 어둠은 날을 세우고, 또 세우며 그대로 뇌를 향해 침투했다.

'...!'

루시온은 빠르고, 자연스럽게 형상을 바꾼 어둠을 보고 깜짝 놀랐다.

마치 직접 손으로 모양을 만든 것 같지 않은가.

[지금 봐봐. 남자의 눈동자에 너만이 볼 수 있게 어둠이 피어올랐을 거야.]

러쉘이 남자의 눈동자를 가리켰다.

남자는 여전히 혼란스러워했고, 몸을 웅크려 부디 이 지옥이 끝나길 기원하는 듯했다.

잠깐 루시온과 눈이 마주했을 때, 러쉘 말대로 남자의 눈에 어둠으로 된 불꽃처럼 피어올랐다.

[겉보기에 현혹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 상태가 현혹에 걸린 상태야.]

―라타 눈에도 보여. 뭔가 막 라타가 대단해진 것 같아. 이상한 느낌이야.

라타는 이상한 느낌에 꺄르르 웃었다.

"마법에 걸린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루시온이 말했다.

"저도 그렇게 보입니다. 마법에 걸린 게 맞습니까?"

흄마저 물어볼 정도로 남자에게 무언가 변했다는 느낌은 받지 않았다.

[그래서 현혹이 들킬 확률이 낮다는 거야. 본인이 인지하지 못하거든. 어쨌든, 여기까지가 힘든 거지, 이 뒤는 간단해.]

"그냥 제가 명령을 하면 되는 겁니까?"

[맞아. 단, 지금 이 상태에서 네가 사용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어. 손을 들어라, 문을 열어라, 뭘 들고 오라 같이 많으면 세 동작, 보통 한두 동작으로 명령을 내리는 게 한계야.]

"제 어둠이 부족하기 때문입니까?"

[아니. 어둠을 넣은 대상이 유령이 아니라 사람이라서 그래. 머릿속에 머무는 어둠은 꽤 빠르게 사라지고, 동작이 많아지면 유지시간도 짧아져서 도중에 들킬 확률이 높거든.]

러쉘은 남자의 눈에서 서서히 꺼져가는 불꽃을 확인하며 저주로 넘어가기로 했다.

[이제 저주를 사용할 수 있는 상태가 완성됐어.]

"저주를 사용하려면 여기까지 도달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루시온의 목소리에 당황함이 뒤섞여 있었다. 가면의 색도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맞아. 상대의 머릿속에 침투한 어둠을 대가로 저주를 사용하는 거지. 이 정도가 저주를 사용할 수 있는, 희생 없는 가장 기본적인 대가이지.]

"지금 제가 사용할 수 있는 저주는 어느 정도입니까?"

[돌멩이만 보이면 걸려 넘어진다, 빛만 보면 닭처럼 울부짖는다, 같이 조금 불행해지는 수준 정도? 그 이상은 대가가 부족해서 안 돼.]

"그 정도 수준이라도 생각보다 괜찮네요."

[맞아. 우습게 볼 게 아니지. 그런 상황이 매일, 매일 반복 된다면 어떻겠어?]

루시온의 가면 색이 노랗게 물들었다.

"장난 아니겠죠."

[대신 이 저주는 오래가지 않아. 길면 한 달. 짧으면 2주일 정도거든. 그래도 꽤 쓸 만해.]

루시온은 현혹에 걸린 남자를 보았다.

'일단 저주는 아껴두고.'

저주는 쥐쟁이의 우두머리에게 사용해볼 생각이었다.

"네 주인의 가장 소중한 걸 가져와."

루시온은 자신의 명령에 남자의 머리에 침투한 어둠이 장막처럼 머릿속을 덮는 모습을 보았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초점이 풀리는 모습도 없고, 굳어진 표정도 아니었으며 그냥 평소와 같이 행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게 현혹인가.'

루시온은 제법 괜찮은 마법을 익혔다고 생각했다.

"라타."

―응.

"15번에게 연락해서 이곳 우두머리가 어디 있는지 그곳에 서 있으라고 해. 단숨에 갈 테니까."

―알았어! 라타가 말해둘게.

굴은 제법 복잡했고, 선발대로 보낸 이들이 돌아오지 않으면 적들은 후발대도 보낼 터.

불필요한 소모전 없이 그림자 이동으로 단번에 쥐쟁이의 우두머리에게 갈 생각이었다.

"저 남자가 돌아오면 바로 여기 우두머리한테 갈 테니까, 우두머리만 빼고 다 때려눕혀."

"알겠습니다. 이제 주먹질에 조금은 자신이 붙었습니다."

흄이 미소를 보였다.

잠시 뒤, 남자가 다리를 절뚝거리며 걸어왔다.

누군가와 싸웠는지 몸에도 피가 묻어 있었다.

남자가 루시온에게 건넨 건 서류 뭉치였다.

루시온은 서류 뭉치를 받았음에도 꺼지지 않은 현혹 상태를 확인했다.

작지만 어둠의 불꽃이 눈동자에 남아 있었다.

'저게 다 사라져야 마법이 끝난다는 거네.'

서류를 빼돌린 범인은 살아 있어야 하니, 루시온은 남자를 살려둘 생각이었다.

"가서 치료해."

루시온의 명령에 남자는 다시 돌아가다 말고 움찔거렸다.

"사, 살려주십시오!"

기억이 끊어진 것처럼 다시 웅크리며 발발 떨었다.

'…아. 이런 식인가?'

루시온은 현혹이 끝나면 어떻게 되는지를 확인한 뒤 조용히 일렀다.

"가."

"가, 가, 감사합니다!"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달렸다.

이제 볼일은 없었다.

"렌탈. 이거 기억해."

루시온은 서류를 흄에게 건넸다.

이런 중요한 정보는 기억하고 있어야지.

"예. 나중에 베껴 적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루시온은 대답과 함께 라타를 보았다.

마치 전화기 다이얼처럼 '뚜뚜뚜'하며 중얼거리다 잠시 뒤, 귀를 쫑긋 세웠다.

―라타한테 연락이 왔어!

"다 기억했어?"

루시온은 그림자 이동을 사용하기 전에 흄에게 물었다.

"예. 다 기억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흄은 받았던 서류를 루시온에게 내밀었다.

러쉘은 루시온이 손에 넣은 서류에 주목하며 슬쩍 웃음을 참았다.

루시온이 어떤 종류의 저주를 사용하나 싶더니, 어쩌면 세상에서 제일 잔인한 저주를 걸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럼 이제 출발해, 라타."

루시온의 가면이 노랗게 물들었다.

* * *

탁.

흄은 주변 풍경이 바뀐 걸 확인하자마자 서둘러 주변으로 시선을 뒀다.

적은 한 명.

다른 적들은 방 너머에 있는지 그놈들과 거리가 제법 멀었다.

놈이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놈의 동공이 커지고 눈 떨림이 심해졌다.

이는 공포라는 감정이었다.

놈의 입이 재빠르게 벌어지며 목젖이 떨려왔다.

흄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빠르게 발을 뻗어 남자의 복부를 걷어찼다.

"…커헉."

놈은 고통을 호소했으나, 제대로 숨조차 내쉬지 못해 소리는 작았다.

흄은 조금 전 싸움을 통해 이 간단한 사실을 알았다.

고통을 어떻게 주느냐에 따라 사람이 내는 비명이 달랐다.

흄은 놈이 소리를 낼 수 없게 목을 쥐고 루시온 앞에 꿇렸다.

"이놈이 맞습니까?"

"맞아."

붉은 실이 저 녀석과 연결된 걸 보고 확실해졌다.

루시온은 놈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일부러 거리가 짧은 머리를 선택했다.

현재 자신의 실력으로는 직접 어둠을 만지는 것처럼 어둠의 형태를 자유자재로 바꾸기가 어려웠다.

마치 제2의 손을 이용해 모양을 다잡는 것 같아서 그 손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손가락을 움직여야 하는 건지 등 작업을 거쳐야지 어둠의 모양을 잡을 수 있었다.

'나는 아직 스승님처럼 할 수 없으니까.'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루시온은 어둠을 배배 꼬았다.

[응용이 좋은데?]

러쉘이 입꼬리를 올렸다.

자신을 따라 하려고 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법을 사용하려는 모습이 무척 대견했다.

"하멜 님께서는 원래 다 잘하십니다."

흄이 상황과 맞지 않는,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루시온은 잠깐 혀로 입가를 핥았다.

첫 시도라 굉장히 떨리면서도 상당히 들뜬 기분을 느꼈다.

루시온은 몇 번이고, 어둠을 꼬고, 또 꼬며 나사 끝부분과 같이 뾰족하게 만들었다.

기껏 날카롭게 모습을 잡은 어둠이 지루하다며 흩어지기 전에, 머리를 보호하는 정신력을 향해 찔렀다.

찌릿!

순간 손끝에서부터 전기에 닿은 듯 루시온의 손이 파르르 떨려왔지만, 그는 여전히 어둠을 통제하며 집중했다.

―라타가 잡고 있어. 루시온은 걱정하지 마.

라타가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역시 정신력 하나는 좋아.]

러쉘은 집중력이 흩어지지 않은 루시온의 상태에 만족했다.

푹.

루시온은 자신의 손은 신경 쓰지 않고 놈의 정신력을 뚫기 위해 어둠을 계속 밀었다.

푸욱!

몇 번의 시도 끝에 어둠이 놈의 머리에 닿았고, 눈동자에 어둠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와. 이거 장난 아닌데요?"

루시온은 자신의 코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걸 느꼈다.

욱신욱신.

타인의 정신에 간섭하는 행동은 자신의 정신에도 영향을 주는지 머리에서 두통이 일어났다.

[늘 처음에는 힘들지만, 정신 계열 마법은 특히 더 힘들지. 그 두통은 어쩔 수 없어.]

"이제 저주를 알려주십시오."

루시온은 통증을 참으며 말했다.

저주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주문이 필요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흑마법사 모두가 똑같이 쓰이는 주문이 있었다.

소설 속에 나왔기에 루시온은 그 주문을 알고 있었다.

[저주는 정형화된 마법이야. 모든 흑마법사가 저주를 사용하려면 똑같은 주문을 외워야 하지. 날 따라 해.]

루시온은 러쉘이 말하길 기다렸다.

[저는 어둠께서 굽어살피는 하나의 종입니다.]

"저는 어둠께서 굽어살피는 하나의 종입니다."

[부디 미천한 저의 자그마한 부탁 하나를 들어주시옵고, 어둠께서 지니신 힘을 이용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부디 미천한 저의 자그마한 부탁 하나를 들어주시옵고, 어둠께서 지니신 힘을 이용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당신께 이것을 바치나이다.]

"…당신께 이것을 바치나이다."

마지막 주문을 따라 하던 그때, 루시온은 알 수 없는 전율을 느꼈다.

동시에 처음 어둠을 느꼈을 때처럼 격렬한 추위가 몰려와 이가 딱딱 맞물렷다.

사랑스러운 아이여, 무얼 원하지?

누군가 귓가에 속삭였다.

어둠이었다.

하지만 저건 자신의 어둠이 아니었다.

안타깝지만, 너라고 예외가 될 순 없어. 네가 바친 대가만큼. 딱 그만큼만 들어줄 수밖에 없어.

하나의 목소리가 아닌 여러 명의 목소리가 합쳐진 소리였다.

자, 말해봐.

어둠이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는 듯했다.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침대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편안했다.

'저놈이 가장 소중한 걸 스스로 부서트리길 바랍니다.'

좋아, 좋아. 이루어주지. 얼마든지, 얼마든지.

지지직.

놈의 머릿속에 박혔던 어둠이 글자가 되었다.

가장 소중한 걸 스스로 부서트린다.

글자는 낙인이 되었고, 낙인은 저주로서 남았다.

놈의 왼쪽 눈 밑에 검은 별이 찍혔다.

[저주가 발동됐다.]

러쉘이 말했다.

"놔줘."

루시온의 지시에 흄은 남자의 목을 움켜쥐었던 손을 놓았다.

"콜록, 콜록!"

놈은 땅에 쓰러져 연신 기침을 내뱉었다.

루시온은 그에게 걸어가 놈이 아끼는 서류를 흔들어 보였다.

"나는 네놈이 내게 복종하길 바라고 있어. 원한다면 고개를 끄덕여."

"빌어먹을 새끼! 내가...."

찍.

루시온은 서류 한 장을 뜯어 놈에게 던졌다.

순간, 놈의 검은 별에 어둠이 일렁거렸다.

찌익!

놈은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종이를 찢어버렸다.

[그래. 이거일 줄 알았다.]

러쉘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에게 베풀어줄 자비는 없어야 했다.

결국, 그 자비가 자신의 등을 베이는 칼날이 될 테니.

"...?"

뒤늦게 그 종이가 자신이 아끼던, 목숨 바쳐 하나씩 모았던 정보라는 걸 알게 되자 참을 수 없는 암담함이 몰렸다.

자신이 왜 저걸 찢었는지 생각할 틈도 없이 새어 나오는 비명을 막지 못했다.

"쉿."

하지만 루시온이 어둠으로 놈의 입을 막았다.

순간, 놈의 눈이 커졌다.

흑마법사였다.

흑마법사…!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네가 내게 복종했으면 하거든."

루시온은 놈 앞에서 서류를 흔들어 보였다.

"이게 뭔지 알지? 아, 방금 네 손으로 찢었으니 잘 알겠지."

루시온의 가면 색이 장난기 가득한, 노란색으로 물들었다.

68화. 쥐를 잡자!(2)

쥐쟁이들이 공허의 손과 손을 잡은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은 관심 종자들이었다.

선보다 악이 관심을 더 받을 수 있기에 공허의 손을 선택했다.

소설 속에서는 나라가 악으로 지정한 공식 집단이 되어 목적도 이뤘고.

루시온이 입을 열었다.

"너희는 너희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관심 종자들이잖아. 그래서 귀족들을 건드는 거고. 내가 무대를 마련해주지. 좀 더 깊고, 넓고, 복잡한 굴을 만들 수 있게 지원도 해줄게."

악역이 악역이 아니게 된다면 이보다 더 큰 전환점은 없었다.

마치 정답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붉은 실이 팽팽해졌다.

하지만 놈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싫어?"

찍.

루시온은 거리낌 없이 서류를 찢어 놈 앞에 두었다.

놈은 또 미친 사람마냥 서류를 향해 달려들며 손으로 찢고, 입으로 씹으며 갈기갈기 조각냈다.

놈의 눈이 뒤늦게 커졌다.

"이 정보를 몇 년간 모았는지 몰라도 두툼해서 찢을 건 많아. 하지만 언제가 됐든 마지막은 오잖아? 얼마나 버틸 수 있나 볼까?"

루시온이 다시 서류에 손을 대자 놈이 다급히 자신의 입을 막은 어둠을 가리켰다.

붉은 실이 팽팽해지는 모습을 확인하며 루시온이 물었다.

"떼달라고?"

그 말에 놈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를 지를 거잖아. 내가 바보인지 알아?"

놈의 고개가 격렬하게 좌우로 움직였다.

"안 할 거라고?"

루시온은 서류를 크게 쥐었다.

얼핏 보아도 반 정도 되는 양이었다.

"이 정도 양을 담보로 믿어볼게. 어때, 동의해?"

주도권을 잡은 건 온전히 루시온이었다.

싫으면 찢어버리면 그뿐이었다.

놈은 그걸 알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눈앞의 흑마법사가 어떻게 여길 알고 온 건지, 그 이유를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루시온은 흄에게 눈짓했다.

흄이 놈의 뒷덜미를 붙잡았고, 그 뒤에야 루시온은 어둠을 거뒀다.

"누… 구십니까?"

놈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네 복종을 받고 싶은 사람. 지금은 그것만 생각해."

"그 이유를 말해주시면 안 됩니까?"

"아, 이유를 말해달라고? 좋지."

루시온의 가면 색이 푸르게 물들었다.

"없어."

"…예?"

"이유가 왜 필요해? 그냥 하고 싶은 건데."

놈이 황당한 눈빛으로 물어갔다.

그는 정말로 아무 이유 없이 남의 영업장에 들어와 행패를 부렸냐고 묻고 있었다.

"참 웃겨. 떳떳한 게 없는 놈들이 더 소리를 치더라."

루시온은 놈의 모습에 실소를 내뱉었다.

"그럼 너희는 왜 이러고 있는 건데? 나라에서 공식으로 인정하는 악이 되고 싶어서? 아니면 너의 우수함에 취해서?"

[…잠깐. 나 진짜로 소름 돋은 것 같아.]

루시온이 꺼낸 저 이유가 진짜라고 생각하니 러쉘은 참을 수 없는 오그라듦을 느꼈다.

"받아들일 건 받아들여야지. 네 위에 내가 있는 거. 너는 실패했어. 미로로 된 굴속에 잠깐 왕이라도 되는 듯 생각했겠지만, 너는 나한테 잡혔어. 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아니, 네 목숨과도 같은 이 서류와 함께."

루시온은 서류를 흔들었다.

놈이 그렇게 아끼는 서류.

쥐쟁이의 힘은 남이 가진 약점이 적힌 정보였고, 모든 걸 지탱해주는 지반이기도 했다.

개미굴에도 정보가 있으나, 유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고 자신이 온전히 소유할 수 있는 집단이 훨씬 더 효율적이었다.

그걸 위해서 쥐쟁이들은 쓸 만했다.

"그러니 내가 너희를 써먹어 줄게. 약점? 잡아. 누가 됐든 원하는 대로 건드려. 필요한 돈은 내가 지급해주지."

꿀꺽.

놈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정말… 정말로 저희에게 관심이 있으신 겁니까?"

"없으면 여기까지 왔겠어? 너 보라고 이렇게 왔잖아."

루시온이 양팔을 벌렸다.

"그럼 정말로 저, 저희를 거둬주시겠다는 겁니까?"

놈의 물음에 루시온은 놈을 빤히 보았다.

갑자기 태도가 바뀌는 게 너무 수상했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습니다."

놈은 정말로 감격한 것처럼 환하게 웃었다.

"누군가 저희의 가치를 알아줄 그 날이 말입니다! 저희는 위대하니까요!"

[저건… 진심인데?]

러쉘이 슬쩍 손가락을 올려 머리 주변에 빙그르르 돌렸다.

[나도 동감해.]

베델까지 고개를 끄덕이며 격하게 동의했다.

"하지만 제힘으로 조직을 키우는 건 한계가 있습니다. 요즘 그 한계를 계속 느끼고 있었고 그래서 마지막으로 한탕 크게 놀아볼 겸 급 상승세를 타고 있는 루테온 은행을 건드렸습니다."

'…뭐야. 죽기 전에 그냥 건드려본 거였어?'

루시온은 그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결과는 만족스러웠습니다. 루테온 은행의 고객 명단을 손에 넣었고, 이제 루테온 은행이 저희 '쥐쟁이'에게 털렸다는 사실을 발표하면 완벽했거든요!"

한마디, 한마디 자신을 향한 자랑스러움과 즐거움이 묻어난 말이 도무지 거짓말이라고 들리지 않았다.

루시온은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자신의 계획을 줄줄이 늘어놓는 바보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이 흐름은 좋지 않아.'

하지만 그 사실을 떠나 팽팽하던 붉은 실이 가라앉았다.

루시온은 이 흐름을 가만히 내려둘 생각이 없었다.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한 번밖에 없는 목숨. 즐겁고, 긴장감 있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놈은 입가를 핥았다.

"긴장감. 예, 저는 이 긴장감이 필요했습니다. 모처럼 오싹하니 살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활짝 웃는 놈의 모습에 루시온은 서류를 흔들었다.

"그럼 원하는 대로 해줄게. 전부 다 네 손으로 찢으면 긴장감이 넘치겠지?"

"…네?"

한껏 상기됐던 놈의 표정이 단숨에 식어버렸다.

이야기가 갑자기 왜 그렇게 흘러가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에 루시온은 놈을 비웃었다.

"내가 너한테 준 선택지는 하나야. 나한테 복종하는 거."

찍.

루시온은 서류를 찢어 놈에게 던졌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놈은 말을 하다 말고 서류를 보자마자 미친놈처럼 찢고, 찢기 바빴다.

찍.

루시온은 놈이 정신을 차릴 무렵에 맞춰 서류를 찢었다.

"긴장감? 나는 지금 놀이를 하는 게 아니야. 내 인생을 건 큰 도박을 하고 있지."

루시온은 서류를 찢고, 던졌다.

그 뒤, 놈이 자신이 한 행동을 빤히 지켜보게 했다.

서류의 양이 눈에 보일 만큼 줄어들 때까지 계속, 계속 반복했다.

묘한 긴장감에 반짝이던 놈의 눈동자에 점점 공포가 어렸다.

"잠깐만요."

찍.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찌익.

"자, 잠깐만요."

찌익!

"자, 자, 잠깐...."

찌이익!

놈이 찢겨나간 서류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긴장감?

지금 그딴 게 무슨 상관인가.

목숨과 세월을 바쳐 만든, 목숨과도 같은 서류가 사라질 판인데.

"잠깐만. 제발,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놈이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목소리가 갈라져서 들릴 정도였다.

"왜? 이제 와서 두려워?"

루시온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살짝 섞여 있었다.

마치 놈을 조롱하듯 루시온이 착용한 가면의 색이 노랗게 물었다.

"제가… 제가 병신이었습니다."

놈은 부들부들 떨며 패배를 인정했다.

아마도 처음 맛보는 공포에서 고개를 숙인 모양이었다.

살면서 자신의 인생을 통째로 빼앗길 수 있다는 공포만큼 무서운 게 어디 있겠는가.

루시온은 놈에게 일부러 그 공포를 심어주었다.

"이 서류. 내가 다시 복원할 수 있어."

그때, 루시온은 동아줄을 던졌다.

지금 느낀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동아줄.

"자, 내게 복종할 텐가? 아니면 네 손으로 네 미래와 모든 걸 찢어버릴 셈이야?"

"제게 저… 주를 걸었습니까?"

놈은 그제야 이 알 수 없는 행동을 인지했다.

저 사람은 흑마법사였고, 저주라고 익히 알려진 흑마법 역시 사용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

루시온은 대답했다.

목소리에 섞인 웃음기가 놈에게는 괴물이 내지르는 포효처럼 들려왔다.

"복종… 복종하겠습니다."

놈은 개처럼 납작 엎드렸다.

서걱.

저 복종이 진실이었는지 붉은 실이 잘려나가면서 확실해졌다.

'됐다.'

루시온은 웃음을 꾹 눌렀다.

쥐쟁이는 이제 자신의 것이었다.

"이름."

"헤… 헤로안입니다."

툭.

루시온은 연락용 아이템을 넘겼다.

"그럼, 이거 들고 당장 네 부하 전부와 함께 여길 떠나."

"저는 여기를...."

"헤로안."

루시온이 묵직한 소리를 꺼냈다.

"다시 혼자 시작하고 싶어?"

전부 다 죽이겠다는 말에 헤로안은 숨을 삼켰다.

저 흑마법사라면 가능할 테지.

"헤로안."

"…예."

헤로안은 루시온을 바라보지 못했다.

"두 번 말하지 않을 테니, 잘 들어."

루시온의 가면이 붉게 물들었다.

"나는 하멜."

루시온 주변으로 피어오르는 어둠에 헤로안은 압도되는 기분을 느꼈다.

그냥 저 존재가 이제는 무서웠다.

"배신은 죽음뿐이야."

"며… 명심하겠습니다."

헤로안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냈다.

"너무 긴장하지 마. 날 배신하지 않고, 쓸데없는 장난만 치지 않으면 되니깐. 쥐쟁이는 쥐답게 땅속에 얌전히 있어야지, 그렇지 않아?"

붉었던 루시온의 가면이 다시 노랗게 변했다.

툭.

루시온이 주머니 하나를 던졌다.

"지금 당장 중부를 떠나고, 임시로 자리 하나 잡고 있어. 내가 연락할 때까지 숨죽여 있는 거 잊지 말고."

"열어봐도 됩니까?"

헤로안이 돈주머니라는 걸 알아보자 눈빛이 달라졌다.

돈에 욕망이 확실하다는 걸 알자 루시온은 기뻤다.

가장 솔직한 욕망이 아닌가.

"저 돈은 이제 네 거야."

헤로안은 속삭이는 듯한 루시온의 말에 조심스레 돈주머니를 열었다.

보석이 반짝거리자 덩달아 헤로안의 눈빛이 달라졌다.

재력이 있다는 걸 단번에 증명한 셈이 아닌가.

조직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그 사실은 어느 조직이든 똑같았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사실은 이 돈주머니가 저 흑마법사가 자신에게 건넸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곧 신뢰의 증거인 셈이었다.

대체 저 하멜이라는 자는 얼마나 마음이 넓은 건가.

"뭘 원하지?"

루시온이 물었다.

"사람들의 음습한 비밀을 캐고 싶습니다. 캐서 그놈들에게 비밀을 알려주었을 때, 일그러진 그 표정이 정말로 참을 수 없습니다."

"뭐가 필요하지?"

"힘이 필요합니다. 비밀을 캐낼 수 있게, 저희를 지켜줄 힘 말입니다."

"그래. 내가 주마."

루시온의 말에 그를 보는 헤로안의 눈빛이 바뀌었다.

자신들이 가진 이 경험을 이용해 귀족에게 들어가고자 노력했다.

개인적인 욕망과 별개로 그편이 조직을 안전하고 튼튼하게 유지할 수 있을 테니까.

"제가 징그럽지 않으십니까?"

헤로안이 물었다.

"그게 네 장점이잖아. 해. 원하는 대로 비밀을 찾아다녀. 하지만 그 비밀을 퍼트리고 싶을 때는 나한테 허락을 받아.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에 헤로안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

자신이 찾아갔던 귀족들을 하나 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쓸데없는 짓 말고 얌전히 정보나 찾고 다니라고.

자신은 개가 아니었다.

더럽고, 더러운 곳을 기어 다니는 쥐였다.

하멜은 자신에게 개가 되라고 하지 않았다.

쥐인 채로, 살아가도 된다고 말했다.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습니다. 긴장감. 예. 긴장감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네요."

헤로안은 입가를 핥았다.

생각만 해도 오싹했다.

"가자."

루시온의 지시에 흄은 헤로안을 잡은 손을 놓았다.

―라타가 이제 이동하면 돼?

라타가 묻자 루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간다!

"하멜 님이 말씀하신 대로 얌전히 연락을 기다리겠습니다."

헤로안은 어둠에 먹혀 사라지는 루시온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오싹한 순간이었다.

* * *

"형님."

"그래, 루시온."

카슨은 별장으로 돌아온 루시온을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부의 연락을 듣고 그렇지 않아도 너를 찾으려던 참이었다."

"텔라 영애가 위험합니다. 저와 함께 가주셔야 할 곳이 있습니다."

"그래. 마차에 오르거라."

카슨은 이유도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를 타고 일부러 길을 돌아 중앙 광장 쪽으로 가던 중 러쉘이 입을 열었다.

[저거 로베리오 놈 아니야?]

―어디? 어디? 라타도 볼래.

그 말에 라타가 반응했고, 루시온이 마차 창문을 바라보았다.

"오늘이구나."

그때, 카슨이 목소리를 냈다.

"오늘이라뇨?"

"로베리오 백작이 어제 붙잡혔고, 오늘 광장에 그 식솔들까지 처형당할 예정이었는데 아무래도 식이 이미 끝난 듯하구나."

순간, 루시온의 눈빛에 꿍꿍이가 서렸다.

"비위만 역해질 뿐이라 너에게 알려주지 않았으니 섭섭해하지 말거라."

"그런 생각 한 적 없습니다."

사람이 죽고 유령이 되려면 짧으면 1시간, 길면 하루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러쉘이 말한 적이 있었다.

'지금쯤 유령이 되어있겠네?'

루시온은 마카롱 하나를 넣어 입속에 우물거렸다.

69화. 쥐를 잡자!(3)

[좋은 생각이네. 살아있을 때라면 입이 무거웠을지 몰라도 이미 죽었으니 어둠만 이용해도 알아서 술술 잘 불지.]

러쉘은 루시온의 꿍꿍이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사람이 죽으면 누구나 유령이 되기 마련.

바로 하늘로 떠나는 사람이 있지만, 대부분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전까지 머물러 있었다.

무얼 묻기에는 딱 좋은 시기였다.

"형님. 죄송하지만, 저는 지금 여기에서 내려도 되겠습니까? 로베리오 놈의 얼굴 정도는 보고 싶고, 제가 그곳에 가도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이 됩니다."

루시온이 카슨에게 허락을 구했다.

지금쯤 쥐쟁이가 쓰던 굴은 비어 있을 테고, 일단 마차에 타긴 했지만, 카슨은 자신이 그곳으로 가는 걸 꺼렸다.

텔라 영애의 부탁이라 굳이 말을 하지 않았을 뿐, 카슨의 표정에서 이미 티가 났다.

"그게 좋겠구나."

카슨은 고민도 없이 루시온의 제안을 허락했다.

'너무 덥석 무시는데?'

루시온은 살짝 기분이 이상했다.

탁탁.

카슨은 망설이지 않고 마부에게 마차를 멈추라는 신호로 벽을 두드렸다.

카슨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마차는 여기에 두고 가마. 로베리오 놈의 얼굴을 깊게 보려고 하지 말고 딴 길로도 새지 말고 곧장 별장으로 돌아오거라."

카슨은 걱정을 담아 이야기를 했다.

크로니아에서도 도망과 탈주를 밥 먹듯이 한 전적이 있는 터라, 카슨은 루시온에게 다시 한번 신신당부했다.

"딴 길로 새지 말고 별장으로 가야 한다."

"알겠습니다. 곧장 별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루시온은 연이은 당부에 속이 살짝 쓰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정말로 도마뱀 꼬리처럼 도망만 쳤으니.

"죄송합니다, 형님. 제가 형님께 부탁을 드렸는데...."

"아니."

카슨이 루시온의 말을 잘랐다.

"그런 생각할 정도로 큰일도 아니니 아무 생각하지 말거라."

카슨은 마차에서 내렸고, 덩달아 루시온까지 땅을 밟았다.

"저번에 네 호위를 담당했던 기사만 남겨두마."

"예. 알겠습니다."

루시온이 고개를 돌리자 그 기사와 눈이 맞았다.

['이번에는 제발 도망치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눈에 쓰여 있네.]

러쉘이 본 것처럼 루시온도 기사의 눈빛에 깃든 말을 알아차렸다.

―그럼, 그때처럼 저 기사 아저씨를 따돌리고, 나중에 맛있는 닭꼬치를 먹을 수 있는 거야? 라타는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

라타가 혀를 날름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오늘은 아닐 거야.]

러쉘은 슬쩍 루시온을 보며 말을 꺼냈다.

설마 이번에도 도망치진 않겠지.

"먼저 가마."

카슨은 더 강조하려다 주변에 몰리는 시선을 의식하며 기사들을 데리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

흄과 마차, 그리고 기사만 남았다.

흄은 주저 없이 루시온에게 걸어왔다.

분명 마차를 타기 전에 조금 전에 들렸던 쥐쟁이가 있는 굴로 간다고 말했었는데.

"도련님. 지금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흄의 눈이 반짝거렸다.

아무래도 가게를 들리거나, 어떤 기대를 하는 모양이었다.

"로베리오 백작의 얼굴을 보러 가는 중이야."

"벌써 붙잡혔습니까?"

"그런가 봐. 생각보다 빨리 붙잡혔네."

루시온의 목소리에는 어떤 감흥도 느껴지질 않았다.

"도련님."

기사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말하게."

"오늘은 조금 더 붙어서 따라가도 되겠습니까?"

저번 일 때문인지 기사는 어떻게든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로 가득했다.

이번에는 따로 도망갈 일도 없고, 굳이 자신이 아니더라도 러쉘이 자신을 대신해 물어볼 수 있으니 루시온은 기꺼이 허락했다.

"그래."

"감사합니다!"

기사는 기뻐하며 두 발자국 정도 다가오다 잠깐 망설여 반 발자국 물러섰다.

루시온은 후드를 더 눌러 쓰고는 신랄한 욕이 들려오는 곳으로 걸어갔다.

"25년 전에 일어난 사태도 아물지 않았거늘! 이 천하의 빌어먹을 놈 같으니라고! 어디 붙어먹을 게 없어서 개 같은 흑마법사에게 붙어?"

남자는 중앙 광장에 떡하니 걸린 목들을 향해 돌멩이를 던지기 바빴다.

탁!

타탁!

돌멩이를 던지는 건 그뿐만 아니었다.

중앙 광장에 모여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입에 욕을 퍼 담으며 목밖에 남지 않은 시신을 훼손했다.

"흑마법사를 옹호하는 놈은 죽어서도 지옥에 떨어질 거다!"

"로베리오 네놈이 빛의 신께 자비를 받을 생각을 하니 토가 나오는구나! 빌어먹을 놈!"

[그, 그만! 다들 그만하라고!]

사람들이 로베리오 식솔들을 향해 퍼붓는 저주 와중에 울부짖고, 당황하는 목소리도 뒤섞여 있었다.

루시온은 시선을 살짝 아래로 두었다.

괜히 눈을 마주쳐봤자, 자신이 유령을 볼 수 있다는 사실만 들키는 셈이니.

[저기 가운데에 있네. 지금 목소리 들리지?]

러쉘이 손가락으로 가리켰고, 루시온은 으깨지고, 쪼개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머리를 보며 로베리오를 찾았다.

로베리오는 사람들에게 손을 뻗으며 무언가를 막기 위해 손을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그의 손은 너무도 허망하게 사람에게 통과될 뿐이었다.

그때마다 로베리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몇 번을 손을 뻗어봐도, 몇 번이나 불러봐도 누구 하나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내가 죽었다니.]

로베리오는 주먹을 꽉 쥐었다.

부정해도 자꾸만 펼쳐지는 사실에 머리카락을 쥐며 괴로워했다.

[그럴 리가! 빛의 신께서 죽으면 나를 인도해주실 거라고 하셨다고!]

[흔한 개소리지. 죽으면 모두가 유령이 되고, 죽음과 삶이라는 순환 고리에 발을 디딜지, 말지. 선택은 그것밖에 없는데.]

러쉘의 말에 루시온은 웃음이 나와 슬쩍 입을 가렸다.

정말 우습게도 대부분이 믿는 사실이었다.

죽고 나면 빛의 신이 인도할 테고, 그곳에는 괴로움도 슬픔도 없는 세계라고.

루시온 역시 한때는 그 사실을 믿은 적이 있었다.

'자, 틈을 한 번 살펴볼까.'

루시온은 유령이 된 로베리오가 이 자리를 박차고 떠나길 기다렸다.

사람이 무언가를 부정할 때, 종종 일어나는 상황 중 하나가 바로 도피였으니.

[잠깐만, 루시온.]

러쉘이 루시온을 말렸고.

[흑마법사다…!]

베델이 입을 열었다.

검을 꽉 쥔 그녀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꿈틀거렸다.

딱!

러쉘이 손가락을 튕기자 베델 주변에 일렁거리던 어둠이 가라앉았다.

[참아, 베델. 루시온에게 은혜를 갚는다며.]

[최대한 참아 보겠다. 최대한....]

베델은 불안한 소리를 내며 자리를 떠났다.

이곳에서 있다가는 흑마법사를 향해 검을 휘두를지도 몰랐다.

[티 내지 마. 곧 네 옆을 스쳐 지나간다. 제법 강한 놈이다.]

러쉘이 조용히 알렸고, 루시온은 시선을 움직이지 않았다.

후드를 뒤집어쓴 누군가가 루시온 바로 앞을 지나갔다.

'…쇠 냄새가 난다.'

루시온은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며 진하게 풍기는 쇠 냄새를 맡았다.

그때, 흑마법사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걸음을 멈췄다.

고개가 정확히 루시온을 향했다.

루시온은 마치 이쪽을 쳐다보라는, 그 노골적인 시선이 느꼈다.

―홉.

라타가 깜짝 놀랐다.

―지금 루시온을 보고 있어. 왜?

두근두근.

루시온의 심장이 거세게 뛸 때쯤에 흄이 목소리를 냈다.

"혹시 도련님께 용건이 있습니까?"

흄의 목소리에 기사가 가까이 다가와 여자에게 적의를 드러냈다.

"아닙니다, 실례했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자리를 피했다.

루시온은 그녀가 짓는 웃음을 보았다.

[아니야. 들키지 않았어.]

러쉘이 루시온의 불안함을 잠재웠다.

[그것보다 지금 흑마법사가 나타났다는 건 둘 중 하나인데.]

러쉘의 눈이 반쯤 감겼다.

'로베리오를 없애러 왔거나, 포섭하러 왔거나.'

루시온은 러쉘이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루시온은 흑마법사가 무얼 하든 손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잃을 게 많았으니.

'…젠장.'

루시온은 조용히 물러섰다.

[아무래도 로베리오를 처리하러 온 모양이야.]

러쉘이 잠깐 루시온의 눈이 되어주기로 했다.

'공허의 손인가…?'

그 말에 루시온은 후드를 꽉 쥐었다.

로베리오 백작이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가진 모양이었다.

'아깝다. 진짜 아까워.'

루시온은 눈살을 찌푸리며 가만히 로베리오의 비명을 들었다.

[으아아악!]

―홉!

라타가 깜짝 놀랐다.

'여기서 흑마법을 사용한다고? 이 중앙 광장에서?'

루시온 역시 깜짝 놀랐지만, 애써 입술을 꽉 다물었다.

[놀랄 필요 없어, 루시온. 너도 나중에 저렇게 할 수 있으니까. 어둠만 안 날리게 잘 유지할 수 있다면 마법을 사용해도 웬만큼 소리도 없으니 대부분 눈치를 못 채.]

러쉘이 루시온의 미래를 살짝 알려주었다.

아직 루시온은 걸음마도 다 떼지 못한 상황이니 엄두도 내지 못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티가 나지 않는다는 건 아니야. 뭔가 어색한 티를 감추기 위해서는 오러의 형식을 빌리는 편이 좋거든. 오러는 신체 강화 용도나, 도구 강화 용도로 주로 쓰이니 전혀 어색하지 않지.]

러쉘이 로베리오와 흑마법사를 계속 바라보며 상황을 주목했다.

"도련님? 혹시 몸이 좋질 않으십니까?"

루시온이 가만히 서 있자 마지못해 기사가 물었다.

"아닐세. 그냥 잠깐 현기증이 날 뿐이야."

루시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으십니까? 일단 땀을 닦으시지요."

흄이 눈치껏 목소리를 내며 손수건을 건넸다.

'좋은 대처인데?'

루시온이 손수건을 받으며 살짝 미소지었다.

―어! 저 유령이 도망친다!

라타가 목소리를 냈다.

그렇지 않아도 손수건으로 땀을 닦는 도중에 반투명한 유령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던 참이었다.

[이 빌어먹을 흑마법사!]

로베리오가 크게 소리쳤다.

[이렇게 내 뒤통수를 쳐? 이대로 사라질 수 없지! 이대로!]

로베리오는 다급해졌다.

방금 까맣고, 까만 뭔가에 닿은 후로 몸이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게 느껴졌다.

죽는 느낌과 다른, 정말로 이대로 끝이라고 느껴질 만큼 알 수 없는 공포가 밀려왔다.

[여기에 흑마법사가 있다면 내 말을 들어! 나는 이용당해서 이렇게 비참히 죽었다!]

로베리오는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았다.

[공허의 손에 들어가면 안 돼! 거긴 미쳤어! 미쳤다고! 지금 저주를 만들어서 중부에 뿌려버리려는 것도 모자라서 시체를 하나씩 모으고 있어! 너희도 사람이라면 이게 무슨 말인지 알고 있겠지?]

'…시체를 모은다고?'

루시온은 흄이 내미는 물을 태연하게 받았다.

짐작 가는 일이 많았다.

전염병, 저주, 망자를 일으켜 전쟁 준비 등.

공허의 손이 저지를 일이 워낙 많기 때문이었다.

[저 개새끼들의 두목은 지금 뉴브라 왕국에 있다!]

'...!'

루시온은 한 박자 늦게 물을 마셨다.

'…미친. 저놈이 진짜 꿀이었잖아?'

지금 로베리오는 공허의 손의 본거지가 뉴브라 왕국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뉴브라 왕국.

제국의 자리를 노리는, 제국 다음으로 큰 왕국이자 변경의 영원한 적과 같은 놈이었다.

[십자 흉터.]

저번 오리온이 꺼냈던 그 십자 흉터가 로베리오의 입에서도 튀어나왔다.

[손등에 십자 흉터가 있고, 새끼손톱이 까맣게 되어있는 놈. 이놈이 공허의 손과 손을 잡은 진짜야. 나는 그저 허수아비… 으아아악!]

흑마법사가 기어코 도망가던 로베리오를 잡아버렸다.

[하늘로 갔어.]

러쉘이 로베리오의 최후를 알렸다.

이제 볼일은 끝났다.

루시온 자신에게 있어 로베리오의 최후는 생각 이상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

"볼 건 다 봤으니, 이제 마차로 돌아가지."

루시온은 흄에게 물을 건네며 돌아섰다.

* * *

"그럼, 다시 뵐 그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별장을 관리하던 집사가 카슨과 루시온에게 고개를 숙였다.

루시온은 성자가 되었고, 신수의 축복과 죽음의 기사인 베델, 원래는 악역이었을 쥐쟁이까지 손에 넣었다.

"그래. 지금까지 고생이 많았네."

카슨은 집사와 시종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평소 무뚝뚝한 카슨을 생각하면 이보다 더 큰 칭찬은 없었다.

"그동안 고마웠네."

루시온 역시 그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며 카슨을 따라 문밖으로 향했다.

착!

황제의 명령에 따라 황실 기사들이 별장을 찾아왔다.

루시온은 그들의 모습에 살짝 거북함을 느꼈지만, 꾹 참아냈다.

'자, 다음 차례는 루미노스지?'

악역 집단 중 마법사 집단인 루미노스.

오늘 놈들이 최악의 선택을 하도록 놈들을 위해 미리 덫을 설치했다.

황실 기사단과 크로니아의 기사단.

이보다 완벽한 준비는 없었다.

70화. 변경으로 돌아가는 길

루시온은 쥐쟁이와 마찬가지로 루미노스의 본거지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설펐던 쥐쟁이들과 달리 그들은 마법사였다.

그런 놈들을 잡기 위해서 루시온은 황실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우선 자신이 '공허의 손'인 척 까마귀 문양이 찍힌 편지를 놈들에게 보내 자신이 탄 마차가 어디로 향할지 동선을 알려주었다.

'최소한 이번 일로 오해가 쌓여 루미노스가 공허의 손과 손을 잡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루시온은 천천히 바닥에 깔린 레드카펫을 밟고 걸어갔다.

'공허의 손이 앞으로 가질 것들을 뺏고, 놈들이 벌일 일들을 사전에 막고. 그러면 내 운명은 바뀌겠지.'

루시온은 하나씩 알아갔다.

자신이 원치 않아도 이 빌어먹을 운명이 악역과 자신을 엮고, 어떻게든 만날 상황을 만든다는 것을.

루시온은 마차 옆에 서 있는 헤인트를 보았다.

'헤인트가 대표적인 예시지.'

저 붉은 실은 과연 주인공과 자신 사이에 얽힐 인연만큼이나 질겼다.

분명 붉은 실이 끊어질 상황을 만들었음에도 끊어지질 않았고, 헤인트는 더 악착같이 자신 근처에 머물렀다.

착.

"황실 제8 기사단, 저 헤인트 트리아는 폐하의 명령에 따라 성자 루시온 크로니아를 모시고 크로니아까지 무사히 호위할 것을 이 자리를 빌려 맹세합니다."

헤인트는 황실 기사로서 루시온에게 깔끔히 인사했다.

인사를 마친 헤인트는 작은 소감도 꺼내는 걸 잊지 않았다.

"성자를 호위할 수 있게 되어 더할 나위 없이 기쁩니다."

"저도 영광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공적인 자리였기에 루시온 역시 헤인트에게 귀족으로서 인사했다.

헤인트가 마차 문을 열었다.

루시온은 카슨이 먼저 올라타도록 길을 비켜섰다.

카슨이 올라타고, 루시온마저 마차에 오른 뒤에야 문이 닫혔다.

"형님."

루시온은 슬슬 시동을 걸 작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 시작하는 건가?]

러쉘도 차분히 손깍지를 껴 다리를 꼰 그 자세로 루시온 주변에 둥둥 떠다녔다.

[무엇을 말하는 건가?]

베델이 자신의 투구를 닦으며 물었다.

[루시온의 사기… 아니, 그, 음, 적의 허를 찌르는 공격 말이야.]

'하!'

루시온은 속으로 기가 찬 소리를 내뱉었다.

사기라니.

맹세코 자신은 사기를 친 적이 없었다.

어디까지나 사실을 바탕으로 말에 양념을 좀 두를 뿐이었다.

[그, 뭐냐. 그냥 봐봐. 대충 뭔지 감이 올 테니까.]

러쉘이 루시온의 눈빛을 슬쩍 피하며 베델에게 속닥거리듯 말했다.

라타는 자신의 발바닥을 핥다 귀를 쫑긋 세웠다.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루시온 공은 보면 볼수록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 같아서 지켜보는 맛이 있어.]

베델의 눈이 부드럽게 감겼다.

원하지 않아도 흑마법사와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 온몸에 두드러기처럼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루시온은 달랐다.

같이 있으면 무척 편했다.

[그렇지? 하지만 보다 보면 조마조마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야. 뭘 자꾸 돌아다니는지.]

이때다 싶어 부리처럼 쪼아대는 러쉘의 말에도 루시온은 표정을 관리해야만 했다.

―라타는 루시온이 돌아다녀서 너무 좋은데? 라타는 아직도 발이 생겨서 너무 좋아!

라타가 루시온의 품을 파고들자 루시온은 라타를 쓰다듬으며 마음을 달랬다.

"…중요한 말이더냐?"

카슨은 루시온이 자신을 부르고 말이 없자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아닙니다. 그저 한 가지 걱정 때문에 이걸 말씀드려야 할지 말지 고민하던 참입니다."

루시온은 옆에 바짝 붙어서 자신을 지켜보는 러쉘과 베델의 시선을 떨쳐냈다.

"걱정이라니?"

카슨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황실 기사단과 크로니아의 기사단이 함께 하는 자리였다.

걱정하려야 할 수가 없지 않은가.

"혹시 습격을 말하는 것이더냐?"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를 습격한다는 건 황실과 변경에 척을 질 자신이 있는 존재들이겠지. 지금 그런 존재가 과연 몇이나 있겠더냐."

'한 놈 있습니다.'

루시온은 속으로 말을 삼켰다.

루미노스는 스스로를 개혁파라고 부르나, 정확히는 과격파 중 하나였다.

그들은 무력을 가진 마법사야말로 귀족이 될 존재들이고, 세습제로 이어지는 귀족들의 부당함을 주장했다.

잘만 하면 성자인 자신을 죽이고, 동시에 황실의 이미지를 떨어트리는 이 좋은 기회를 마다할 리가 없었다.

'아니, 반드시 해야 할 테지. 자신들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할 수 있을 테니까.'

이번 일을 성공하지 못해도 '성자를 공격했다.'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으니 루미노스 입장에서는 그리 큰 손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다.

자신이 루미노스의 아지트를 몰랐다면.

"세상은 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예상하기 어려웠습니다."

루시온은 잠깐 창문을 바라보며 소감을 이야기하듯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형님께서 '설마'라고 생각하시겠지만, 그 설마를 이용하려는 자들이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불안하더냐?"

카슨은 루시온의 불안함을 이해했다.

과거도 지금도 루시온은 적이 보기에 아주 좋은 먹잇감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황실도, 변경이라는 방패도 루시온의 불안함을 막지 못한다면 무엇으로 저 불안함을 달래야 할지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