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금의위 부지휘사는 무뚝뚝한 얼굴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눈빛으로 잘했다고 치하하는 게 느껴졌다.
일지추혼 장악은 둘이 눈빛을 나누는 것도 모르고 으르렁댔다.
"탐혈광랑 놈이 미쳤구나. 개새끼가 방자하게 구는 걸 내버려뒀더니 기어코 주인을 물어?!"
광인과 구분되지 않을 만큼 괴팍한 마두들이 많은 혈교 내에서도 유독 난폭하고 제멋대로인 탐혈광랑이 아직까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건 그 무공 때문이었다.
절정 중입의 고수는 그리 흔히 구할 수 있는 인재가 아니었으니까.
때문에 장로들이 탐혈광랑을 치려고 했을 때도 대놓고 움직이지 않고 암계를 꾸민 것이었는데...
그런 놈이 이렇게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한경에서의 대계를 망가뜨려놨다니 살심이 솟구쳤다.
멋대로 무인들을 습격한 것도 모자라 적에게 기밀을 팔아먹다니!
연우혁은 마두가 격노하자 탐혈광랑에 대한 걸 물어보려고 했다. 생각치도 못한 행운이 굴러왔을 때는 쏠쏠하게 이용해야 하지 않겠는가.
'운이 좋군.'
탐혈광랑 입장에서는 조금 억울할 법도 했지만, 결국 평소에 저지른 행실이 발목을 잡은 거였다. 같은 문파 사람의 계획을 망치려고 날뛰었으니 적과 결탁한 첩자로 의심받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조굉은 다시 한 번 눈빛을 보냈다.
'?'
굳건한 암석 같은 금의위 부지휘사의 얼굴에는 가만히 있으라는 뜻이 역력했다. 연우혁은 의아했지만 행동을 멈췄다.
"지금 네놈이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닌 것 같군."
"사천혈창. 황궁의 개로 지내고 있다고 들었는데 용케 아직도 살아있었구나. 신수가 훤한 걸 보니 기쁘다! 이 어르신의 발도 한 번 핥아보거라!"
장악은 조굉의 얼굴을 알고 있었는지 젊었을 적의 별호를 부르며 이죽거렸다. 조굉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손가락을 들어 장악의 혈도를 푹 찔렀다.
순간 장악의 눈이 부릅떠지더니 악문 이에서 피가 주륵 흘렀다. 영안으로 보지 않아도 어마어마한 고통이 느껴졌다. 아마 조굉이 특수한 기공으로 고통을 준 게 분명했다.
"일지추혼 너는 강산이 몇 번 변해도 무공이 달라지지 않는군. 혈교의 비전을 이어받아 온갖 사술을 부렸을 텐데도 이 정도 수준이라면 들어갈 필요가 있었던 거냐?"
조굉의 말은 마두의 자존심을 제대로 자극한 모양이었다. 고통으로 말도 못하는 와중에도 장악은 발악하듯이 욕설을 내뱉었다.
무공의 벽이란 것은 냉정해서 아무리 시간과 정성을 갈아 넣어도 뛰어넘는 걸 허락해주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런 벽에 가로막힌 고수들은 세월과 함께 쓸쓸이 늙어갈 수밖에 없었다.
마공을 익힌 고수들은 온갖 사술과 대법을 사용해 억지로라도 그 벽에 구멍을 뚫어보려 했지만, 그것도 천운이 따르는 자만 가능한 것이지 대부분은 벽에 몸을 부딪쳐 부서졌다.
그런 점에서 황룡어창이란 별호를 받아 절정 말입에 선 조굉은 일지추혼 장악이 질시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젊었을 적에는 분명 본인이 앞섰는데 왜 하늘은 공평하지 않단 말인가?
"죽여라!"
"이번 용봉지회를 앞두고 혈교가 준비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말해라."
"죽여라. 어르신께서 먼저 저승에 가 네놈이 벼슬아치들에게 목이 잘리길 기다리고 있겠다!"
'금의위 부지휘사면 그럴 일은 가능성이 희박할 텐데.'
연우혁은 조정이 돌아가는 꼴에 대해 잘 모르는 일지추혼에게 설명을 해줘야 하나 살짝 고민했다.
금의위 부지휘사면 다른 벼슬아치들에게 목이 잘리기보다는 다른 벼슬아치들의 목을 자를 일이 훨씬 더 많았던 것이다.
게다가 조굉 정도의 고수면 쉽게 팽하기도 힘들 것이고.
조굉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살벌하게 마두를 고문했다. 장악은 어차피 잡힌 이상 자신이 죽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철통 같은 의지를 보였지만, 역시 조굉이 한 수 위였다.
계속되는 심문 끝에 마두의 정신이 혼미해지자 조굉은 향로에 불을 붙여서 근처에 둔 뒤 번뜩이는 안광을 폭사시켰다.
연우혁은 그 모습에 깜짝 놀랐다.
'섭혼술!'
패도적인 기운이 눈빛에서 흘러나와 장악의 심혼을 뒤흔드는 게 보였다. 지금 조굉이 보여주는 건 명백한 술법이었다.
금의위 무인들이 온갖 무공을 쓰는 만큼 부지휘사의 무공 또한 가늠하기 힘들 만큼 넓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런 섭혼술까지 쓸 수 있을 줄이야.
"금안섭혼술(金眼攝魂術)이다."
"예?"
"술법에 조예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관심있게 쳐다본 게 아니었느냐?"
부지휘사는 장악의 심령을 제압하는 사이 서책을 하나 던졌다. 금안섭혼술의 요체가 적혀 있는 비급이었다.
"이런 걸... 주셔도 되는 겁니까?"
"딱히 사악한 술법은 아니다. 불문의 술법에 가깝지. 관심 없으면 익히지 않아도 좋다. 섭혼술은 사실 술법 중에서도 가장 계륵이니."
상대의 심령을 제압해서 멋대로 조종하는 섭혼술은 사술 중의 사술이라고 생각하기 쉬웠지만, 사실 사술 중에서도 가장 쓰기 까다롭고 쓸모없는 축에 들어갔다.
일단 남의 심령을 제압하는 것이 그리 쉬울 리 없는 것이다.
평범한 양민도 어려운데 무공을 익혀 심령이 튼튼한 무림인이라면 그 난이도가 몇 배로 뛰었다. 대련 도중 제압하는 건 어불성설이었고 상대를 붙잡은 뒤 고통과 혼란을 줘 의지를 꺾고 나서야 간신히 시도할 수 있을 정도였다.
방금 일지추혼의 심령을 제압한 것도 조굉의 경지가 훨씬 더 위였고 상대를 부숴버릴 각오로 고문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불문, 그것도 서장무림의 무공인가?'
영안으로 비급을 빠르게 확인한 연우혁은 금안섭혼술이 어떤 술법인지 깨닫자 부지휘사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렇게 힘들고 까다롭게 제압해도 정작 상대에게 제대로 된 명령 한 번 하기가 힘들었다. 조금만 실수해도 제압이 풀리고 제정신으로 돌아오기 때문이었다.
"네놈의 역할은 무엇이더냐?"
"내... 내가 첩자... 첩자들을... 관리하고... 장로한테 보낸다..."
"장로는 어디에 있나?"
"모른다... 계속해서... 위치를... 혈교는... 끊임없이... 본거지랄 게 없다..."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마두의 정신을 유도한 조굉은 다음 질문을 던졌다.
"한경의 첩자들은?"
"탐혈광랑... 찢어 죽일 놈... 죽여버리겠다..."
"...네놈의 역할은?"
"탈주... 혈교에 들어와서... 새로이 장로가... 혈옥갑이 사라졌다... 찾아내야... 혈마께서 분노를..."
"장로는 어디에 있나?"
"장로... 흑점... 흑점에서... 기다리면..."
순간 일지추혼의 정신이 제압에서 벗어나자 조굉은 혀를 찼다.
"잠깐 쉬었다가 다시 해야겠군."
"섭혼술이란 게 참으로 까다롭습니다."
"술법이란 게 원래 그렇다. 술법 한 번으로 다 해결될 만큼 강호의 일이란 게 쉽지 않지."
"제가 해봐도 되겠습니까?"
"할 수 있겠나? 마음대로 해라."
조굉은 연우혁이 벌써 금안섭혼술을 익혔다는 말에 의아해했지만 별로 고민하지 않고 허락했다.
오성이 뛰어나고 술법에 조예가 있는 사람이라면 새로운 술법을 읽는 것만으로도 일성 정도의 성취는 가지고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연우혁이 저 마두 상대로 연습하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콱!
연우혁은 쓰러진 마두를 깨우고 비급에 적힌 대로 기운을 움직였다. 조굉은 내공을 억지로 영기로 바꿔야했지만 연우혁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눈빛에 황금색이 번쩍이더니 일지추혼의 심령이 안정적으로 제압됐다.
"한경의 첩자들은?"
"첩자... 첩자... 첩자는... 천지인(天地人)으로 나뉜다..."
"등급은 무슨 차이가 있나?"
"인(人)은 마부나... 하인... 짐꾼을 매수한다... 얼마든지 버리고... 죽일 수 있다..."
"지(地) 등급은?"
"크고 작은... 문파에... 들여보낸 후기지수... 이들은... 언제든지... 정파 놈들을 찌를 비수가 될... 것이다..."
"그 이름은?"
"정동의 백앙각... 이심... 강해의 유씨세가... 유적업... 놈은... 내가 직접... 죽이고 바꿔쳤다... 가흥 만하관의 도적호..."
"!!!"
조굉은 흘러나오는 이름들에 깜짝 놀랐다.
그 이름들에 놀란 건 아니었다. 사실 여기 나오는 이름들은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었다. 정파무림의 일원이긴 했지만 대부분 중소 문파였으니까. 저 중 가장 명성 높은 놈이 천문세가의 천담성이었다.
유씨세가의 차남 유적업이 사실 바꿔친 놈이었다는 건 좀 놀라웠지만 그것 또한 금의위 부지휘사로서 그렇게 충격적이진 않았다. 금의위에 있다 보면 저런 일보다 훨씬 기괴한 일들이 자주 들려오는 것이다.
조굉이 놀란 건 눈앞의 판관 놈이 처음 배운 술법을 쓰면서 한 치의 실수 없이 노련하게 심령을 제압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조정의 뛰어난 술사들을 데리고 와도 이런 결과를 만들어내지는 못할 것 같았다.
잔뜩 경계하고 있는 마두 놈의 입을 열고 첩자의 신분을 전부 토해내게 하다니?
'사술에 타고난 놈 아닌가?'
"천(天) 등급을 물어봐라. 어서!"
"천 등급은?"
"구파일방... 구파일방의 후기지수 중에... 첩자가 하나 있다..."
이번에는 연우혁도 조굉도 깜짝 놀랐다.
설마 했는데 구파일방에 저렇게 잠입한 첩자가 있단 말인가?
"그 이름은?"
"나는... 나는 모른다... 그 자는... 장로가 직접... 연락한다... 커헉!"
갑자기 마두가 피를 토하자 연우혁은 당황해서 물었다.
"왜 이러는 겁니까?"
"심력을 지나치게 소모시킨 거겠지. 안 그래도 약해진 상태니 이상할 것 없다."
"제가 술법을 펼칠 때 실수가 있었습니까?"
"아니. 그보다는 잘 펼쳐서 문제였지. 섭혼술을 잘 펼칠수록 상대의 심력은 빠르게 고갈되니까. 잘 했다. 생각치도 못한 소득이군."
중소 문파에 숨어 있는 첩자들을 찾아낸 조굉은 생각치도 못한 소득에 기꺼워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일이 훨씬 잘 풀렸던 것이다.
물론 이득만 있지는 않았다.
"천 등급의 첩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도 모른다. 혈뇌가 부하도 속였을 수 있고, 아니면 정말로 있을 수도 있지. 섣불리 고민해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다."
"그래도 대책을 세우셔야 하지 않습니까?"
"의기가 좋구나! 안 그래도 대책 하나를 떠올렸는데, 마침 재주가 뛰어나고 소문이 갸륵한 네게 부탁하고 싶었다. 태자 전하께서 높게 평가한 너라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다."
"..."
연우혁은 갑자기 불길함을 느꼈다.
보통 자신과 친분이 없던 상관이 저런 찬사를 내놓을 때는 그만큼 귀찮은 일을 시키기 위해서였다.
"자신이 없습니다만..."
"듣지도 않았는데?"
'아차. 듣고 거절했어야 했는데.'
"네가 직접 용봉지회에 나가라."
"...예?"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에 연우혁은 당황했다.
"용봉지회에 말입니까?"
"그래. 구파일방 후기지수에 첩자가 있다면 이야기가 심각해진다. 정말 진지하게 용봉의 별호가 첩자에게서 나올 수 있지. 향후 그 명성으로 무림의 중책을 맡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어지간해서는 무림인들끼리 서로 죽이게 내버려 둘 생각이었지만, 구파일방에 첩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부지휘사도 움직이게 만들었다.
내버려뒀다가 정말 정파의 걸물이라도 된다면 그 때부터는 금의위의 칼도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물론 연우혁에게는 여전히 당황스러운 소리였다.
"저는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의 후기지수들 상대로 이길 자신이 없습니다. 다른 무인들이 낫지 않겠습니까? 금의위 무인이나..."
"금의위 무인이 용봉지회에 나간다? 혹시 용봉지회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거냐?"
연우혁은 민망한 얼굴로 헛기침을 하며 말을 바꿨다.
"믿음직스러운 다른 무인들에게 부탁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럴 수 없다. 너야 그 무인을 믿을 수 있어도 나는 믿을 수 없기 때문이지. 부탁한 그 무인이 첩자라면 책임질 수 있겠느냐? 그리고 설령 첩자가 아니더라도 맡길 수 없다."
"어째서입니까?"
"너처럼 똑똑한 놈이 없지 않더냐. 이건 단순히 용봉지회에 참가해서 전부 이기는 문제가 아니다. 의심스러운 놈을 찾아봐야 하는 일이지."
'맞는 말이긴 하군.'
부지휘사의 말은 확실히 논리적이었다. 연우혁은 자기 말고 대신 맡을 사람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네 무공이라면 충분하다."
"...그렇습니까?"
"그리고 용봉지회에 나간다면 네가 이길 수 있도록 금의위가 도와줄 것이다."
"!"
금의위가 무공을 가르쳐준다는 말은 확실히 매력적이었다. 거기에 쐐기를 박듯이 조굉이 확언했다.
"내 이름과 태자 전하의 명예를 걸고 맹세컨대 네 공적 하나도 장계에 빠뜨리지 않으마. 생각해봐라. 용봉지회의 첩자를 잡아낸다면 아무리 조정의 썩은 관리들이 술수를 부린다 하더라도 명성이 천하에 진동할 터!"
"...한 번 해보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진충비도보다는 암룡이 낫지 않겠느냐?"
"음, 권룡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별호가 중요하진 않다. 중요한 건 첩자를 잡아내는 거다."
"..."
124화
금의위 부지휘사가 빈말로도 '너는 권룡의 별호를 받을 수 있을 거다'라는 말을 하지 않자 연우혁은 씁쓸해했다.
'내 권법이 그렇게 부족하단 말인가?'
물론 대부분의 적들과 편법과 암기, 비도술로 싸우긴 했지만 권법을 안 쓴 것도 아니었다. 접근하는 상대가 있다면 막기 위해...
'못 받을 만하긴 하군.'
범인을 찾아내는 것처럼 빠르게 원인을 알아낸 연우혁은 즉시 포기했다.
"그런데 조 대인. 어떤 명분으로 저를 용봉지회에 내보내실 겁니까?"
연우혁이 금의위 무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판관이란 관직을 갖고 있는 한경의 고관이었다. 반은 무림인이어도 반은 관인인 것이다.
나가겠다고 하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앞으로 무림에서의 명성을 생각해봤을 때 적당한 명분이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갑자기 한경에서 무림인들의 대소사를 돌보다가 흥분해서 용봉지회에 출전한 괴인처럼 보일 수 있었다.
"그냥 나가도 상관없긴 하다."
"조 대인! 제가 관리의 몸이지만, 무림에서의 명성 또한 쉬이 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냥 명분 없이 나가면 사람들이 저를 괴인이나 기인으로 여길 겁니다!"
"?"
조굉은 연우혁의 말에 의구심을 품었다.
무림인들 눈에 연우혁은 이미 충분히 괴인이었던 것이다. 신통한 재주는 물론이고 무림인이 판관 자리에 앉아 있는데 기이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렇... 그렇군. 하지만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명분 또한 준비했으니까."
하지만 금의위 부지휘사는 너그럽게 넘어갔다. 오늘 젊은 판관이 세운 공적이 뛰어난데다가 해야 할 일이 많은 만큼 사기를 꺾을 이유가 없었다.
"어떤 명분입니까?"
"태자 전하께서 곧 무림인들에게 전하께서 오셨다는 걸 알릴 것이다. 그 때 태자 전하가 네 실력을 보고 싶다고 하시겠지."
"..."
연우혁의 얼굴이 살짝 창백해졌다. 명분이 지나치게 살벌했던 것이다.
언제나 말로는 관을 비웃고, 무림을 마치 죽림칠현(竹林七賢)이 머물던 곳처럼 이야기하는 무림인들이었지만 실제로 무림에서 명성이 높을수록 관과 엮여 있지 않은 이들은 드물었다.
구파일방이 호족이나 세가처럼 장원을 관리하고 상업에 뛰어들지 않음에도 그 위세가 지역의 군왕과 맞먹는 것은 조정의 고관들과 황족들이 든든한 후원자와 시주로 있어준 덕분이었다.
마찬가지로 오대세가가 지역의 문파들을 철혈로 제압하고 흑도방파들을 멋대로 토벌해도 관아에서 죄를 묻지 않는 것은 이들이 조정의 고관과 황족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상납하며 친분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명백한 사파인 흑도칠문도 고관과 황족들하고 친분이 깊었다. 연우혁의 생각에는 고관이나 황족 중에 혈교의 뇌물을 받아먹는 놈도 분명히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만큼 관, 특히 황족과 관련된 일은 아무리 관과 불가근불가원하려는 무림인이라 하더라도 영예롭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태자 앞에서 자신의 무공을 선보이고 별호를 받는다는 건 평생 겪기 힘든 영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태자가 젊은 관리를 골라 내보낸다면...
'고수란 고수는 다 날 죽이려고 덤비는 것 아닌가?'
호승심 넘치는 무림인들은 모조리 다 연우혁을 꺾고 싶어서 달려들 게 분명했다.
"격장지계가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첩자를 잡아내기도 전에 고수들을 연달아 만나 진다면..."
"말했듯이 네 무공이라면 충분하다."
조굉은 냉혹한 금의위를 이끄는 무인답게 연우혁의 걱정을 무시했다. 연우혁은 속으로 조굉을 욕했다.
'금의위의 민심이 괜히 안 좋은 게 아니군. 저러니 욕을 먹는 것이다.'
옆에서 신음소리가 났다. 일지추혼 장악이 심력을 회복했는지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며 눈을 뜨려고 하고 있었다.
"조 대인. 그러고 보니 아까 저 자가 탐혈광랑에 대해 아는 걸 말하려고 했을 때 왜 말리신 겁니까?"
"보면 안다."
부지휘사는 마두가 깨어나자 무정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일지추혼 장악. 죽기 전에 할 말이라도 있나?"
"...있다!"
고통으로 정신이 혼미했지만 장악은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느끼고 있었다.
연우혁은 그 모습에 조굉이 왜 저런 기회를 주나 의아해했다. 어차피 모욕과 저주밖에 하지 않을 마두 아닌가.
"탐혈광랑 놈이 쓰는 안가에 대한 정보가 있다. 사천혈창. 놈을 죽여다오! 이 어르신의 저승길 선물로 말이다!"
탐혈광랑이 혈교 장로들의 일을 망치고 견제하고 싶어했던 만큼 혈교 장로들도 탐혈광랑을 의심하고 있었다. 당연히 장악도 탐혈광랑을 은밀히 조사했었다.
마두는 죽어도 원수를 두고 가지 않는 법. 장악은 같은 혈교의 무인이라 하더라도 탐혈광랑을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놈이 쓰는 여러 문파의 위치와 거길 지키고 있는 자들에 대해 줄줄이 내뱉었다.
"좋다. 대가로 편하게 죽여주지."
"크흐흐... 탐혈광랑 놈이 오길 기다리고 있겠다!"
단말마의 신음과 함께 장악의 숨통이 끊어졌다. 조굉은 연우혁을 보며 말했다.
"이런 마두 놈들은 말해보라고 하면 괜히 의심을 하지. 오히려 내버려두면 복수심에 차서 배신한다."
"...하나 배웠습니다!"
* * *
금의위의 안가를 빠져나오며 연우혁은 깊게 심호흡했다.
워낙 많은 일들이 있었던 데다가 새로 맡은 일이 또 중책이라 긴장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밤하늘에 총총한 별이 괜히 사람을 심란하게 만드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연우혁보다 더 심란한 사람도 있었다. 옆에서 천담성이 땅이 꺼질 듯한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
"하..."
그냥 마음 같아서는 저택으로 돌아가서 쉬고 싶었지만, 그래도 며칠 동안 같이 고생한 정이 있어 연우혁은 예의상 한 마디 던졌다.
"괜찮으십니까, 천 형?"
"괜찮지 않소. 어떻게 괜찮을 수가 있겠소? 연 판관. 나는 어떻게 해야 좋겠소?"
'괜히 물어봤군.'
용봉지회에서 맞서야 할 후기지수들을 확인해도 모자랄 판에 혹이 달릴 줄이야.
"천 형께서는 분명 잘 하실..."
"우리 술이나 합시다. 연 판관."
"장원에서 말입니까?"
"당연히 세가의 장원은 안 되고...! 연 판관의 저택으로 갑시다."
"지금 밤이 늦었는데 그냥 주무시는 게 어떤..."
그러거나 말거나 천담성은 근처 주루로 달려가 문을 두드린 뒤 점소이가 화난 얼굴로 뛰쳐나오자 세가의 패를 흔들어댔다. 그러자 점소이가 방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로..."
"제일 좋은 술을 갖고 따라와라!"
"공자님. 밤이 깊었는데 저희 번루에서 드시는 게 어떻습니까? 통금 타종이 울려도 저희 번루에서는 얼마든지 마실 수 있으십니다!"
"야, 이 자식아! 네놈이 뭘 안다고! 나는 여기 연 판관의 저택에서 마실 거란 말이다!"
평소 선량한 사람이 성질을 내면 더 난폭하기 마련.
점소이는 그 명성 자자한 천문세가의 공자가 화를 내자 당황하며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물론 연우혁이라고 설명해 줄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건 아니었다.
"저희 번루가 훨씬 더 마시기 좋을..."
"술 갖고 오라고!"
"알, 알겠습니다! 여봐라! 술을..."
안에서 허둥대며 하인들이 항아리를 들고 나오자 그제야 천담성은 화를 내는 걸 멈췄다. 번루 안에서 술을 마시던 무림인들은 천담성의 얼굴을 알아보고 수군거렸다.
"저 사람 천 공자 아니오?"
"안색이 왜 저러지? 마치 병에 걸린 것처럼..."
"혹시 연병(戀病)이라도 걸린 거 아닌가? 아무리 무림인이라 하더라도 상사(相思)에 빠지면 간장이 녹아버리잖는가."
"..."
연우혁은 나중에 천문세가에서 항의하는 것 아닌가 걱정이 됐다. 천문세가 입장에서는 천담성이 연우혁과 술잔을 부딪쳤더니 갑자기 사람이 폐인이 된 꼴 아닌가.
납치한 뒤 조굉이 뒷수습을 해주긴 했지만 천담성이 술독에 빠지는 것까지 해줄 것 같지는 않았다.
"숙수도 데리고 와야지! 술만 마시고 죽으란 거냐!"
"아이고. 고정하십쇼! 물론입니다."
"제일 뛰어난 사람으로 데리고 와라!"
"저희 숙수께서는 도지휘사의 축연에도 초대받아 불려 가신 적 있으십니다!"
"황자 전하의 축연에 불려간 숙수를 데리고 오란 말이다!"
"천 형. 벌써 취하셨습니까?"
연우혁의 질문에 천담성은 푹푹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안 취했소. 하지만 취하지라도 않으면 견디지 못할 것 같소!"
"뭘 그리 고민하시는 겁니까? 금의위에서 천 형을 조종할까 두려운 겁니까?"
조굉은 천담성의 정체를 밝히거나 별다른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용봉지회를 노리고 들어온 대부분의 첩자들은 정체를 확보한 상태였고 그들의 머리 역할을 할 일지추혼까지 붙잡았다. 천담성에게 굳이 무리한 명령을 내릴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천담성의 약점을 갖고 있는 게 금의위 부지휘사로서는 편했다. 나중에 천문세가의 힘이 필요할 때 얼마든지 쓸 수 있었으니.
"금의위가 두려운 건 아니오. 연 판관. 난... 난, 가주님께 진실을 말하려고 하오. 마두가 내게 전갈을 보냈을 때 생각했소. 이 위기를 넘기더라도 또 다른 혈교의 마두가 찾아올 거라고. 평생 속일 수는 없는 것 아니겠소? 그런데..."
여기까지 말한 천담성은 다시 한 번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경공을 펼쳐 멀리서 쫓아오는 하인의 술 항아리를 뺏더니 벌컥벌컥 들이켰다.
"가주님을 실망시키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오. 내가 말하는 게 맞는 것일까? 괜히 내 욕심으로 가주님을 괴롭히는 게 아닌가... 사실 이 또한 의문이오. 난 그저 총애를 잃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모르지! 형님들께서는 또 얼마나 실망하시겠소. 날 그렇게 아껴주셨는데!"
"과연."
연우혁은 이런 상황에서 딱히 해줄 말이 없었다. 천문세가의 가주가 호걸이고 명성 높은 무림인이긴 했지만, 양자로 키운 사람이 혈교 출신의 첩자라고 했을 때도 너그러운 반응을 보일 지는 짐작하기 불가능했다.
저택에 도착하자 하인들은 서둘러 술을 놓고 도망쳤다. 벌써 취한 천담성의 안광이 기괴하게 빛났기 때문이었다. 무림인들을 상대한 경험이 많은 만큼 하인들은 위험을 감지하는 감각이 기민했다.
"연 판관. 내가 어떻게 해야 하겠소?"
"음. 그러니까..."
"알고 있소.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고!"
"그게..."
"실망시키더라도 지금 말해야 하오."
'그냥 듣기만 해야겠군.'
연우혁은 천담성을 앞에 두고 술잔을 기울이며 산니백육(蒜泥白肉)을 끼적거렸다. 다행히 음식과 술은 맛있어서 취한 사람을 앞에 두고 혼자 생각에 잠길 수 있었다.
항아리를 세 개째 비우자 천담성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좋소! 지금 말하러 가겠소."
"지금 말입니까? 맨정신에 가시는 게 좋지 않겠..."
"아니오!"
천담성은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저택 밖을 빠져나갔다. 혹시 몰라서 별채에서 대기하고 있던 적조는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정인군자라고 소문난 놈인데 취하니 보통이 아니군요."
"그럴 만하지. 덕분에 밤중에 소란을 피웠군."
"그래서, 금의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결론만 말하자면 내가 용봉지회에 나가게 됐다."
"..."
한동안 말이 없던 적조는 옆의 빈 술 항아리를 보며 말했다.
"하. 제가 안 마셨는데 벌써 취한 모양입니다!"
"...다 이유가 있다."
* * *
이튿날부터 한경은 술렁거렸다. 너무 많은 일들이 한 번에 벌어졌던 것이다.
몇몇 무림인들이 혈교의 첩자로 붙잡혀 사라졌지만 놀랍게도 이건 잘 언급되지도 않았다. 그만큼 다른 일들이 더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태자 전하께서 오셨다니. 이건 한경 사람의 영광일세!"
"그 거친 자들이 도움이 될 때도 있군그래!"
황자가 한경에 방문해 용봉지회를 친람한다는 이야기에 무림인들은 물론이고 한경 사람들까지 흥분해서 떠들고 있었다.
"게다가 연 대인께서 용봉지회에 나간다고 하시더군! 태자 전하께서 친히 지목을 하셨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허! 연 대인께서 무림인들을 상대할 수 있나?"
"이 사람. 모르는 소리 말게. 다른 고관들과 달리 연 대인은 무공을 깊게 수련해 한 번 발을 박차서 저 성벽을 넘고 두 번 발을 박차면 땅을 주름잡을 수 있으시단 말일세."
"내가 무림인을 본 적 있는데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
"그야 무림인들은 신통력이 없지 않나! 무림인들이 연 대인처럼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천 리 밖의 일을 알아맞힐 수 있나? 자네, 뭐가 그리 불만이라 자꾸 투덜대는 건가? 연 대인이 지기라도 하면 좋겠나?"
"아, 아닐세. 당연히 아니지."
물론 한경 사람들처럼 좋게 반응하는 이들만 있지는 않았다. 무림인들 중에는 질투와 시기를 보내는 이들도 제법 있었다.
"운 좋게 황자 전하의 눈에 든 것 아닌가! 관리로서의 재주가 뛰어나면 장계나 작성할 것이지 무슨!"
"맞네, 맞아! 책상물림의 서생이 용봉지회에 나오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옆에서 듣고 있던 팽주성은 동생과 눈빛을 교환하고는 도(刀)를 꺼내들었다. 그러다가 낯익은 당문의 무인과 눈이 마주쳤다.
독혼수 당등은 암기를 꺼내들었다가 팽주성과 눈이 마주치고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할 테냐?"
"그, 그러겠습니다. 당 대협."
그러나 팽주성이 도를 휘두르기도 전에 와장창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천, 천문세가! 천문세가가 왜...!"
125화
"감히 어디서 그 건방진 혓바닥을 놀리느냐?"
천문세가 무인들은 싸늘한 표정으로 일갈했다. 객잔이나 주루에서의 싸움에 익숙한 무림인들은 재빨리 탁자를 옆으로 밀어버리고 공간을 만들었다. 연륜이 있는 무림인들은 이럴 때 휘말리지 않고 구경하는 법을 잘 알았다.
당사자만 아니라면 이런 싸움만큼 즐거운 눈요깃감도 없는 것이다. 그 어떤 경극도 이런 싸움의 박진감을 따라오기는 힘들었다.
"당, 당신들은 누구요?"
상대가 보통 세가 출신이 아니라는 걸 짐작한 무림인들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래도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는 만큼 쉽게 물러날 수는 없었는지 어떻게든 체면을 지키려는 게 보였다.
"우린 천문세가의 사람들이다."
"천문세가!"
이름을 듣고 놀란 무림인들이 다급하게 외쳤다.
"천문세가에서 왜 행패를 부리는 것이오? 우린 천문세가와 아무런 원한도 없소이다!"
"닥쳐라. 진충비도 연 판관의 명성을 모욕해놓고 어디서 발뺌이냐? 여기서 했던 말을 번복하고 사죄할지 천문세가의 검을 받을지 결정해라."
천문세가 무인들은 진득한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싸늘하게 쏘아보는 눈빛부터 시작해서, 객잔 주인에게 은자 주머니를 미리 던지고 도망치지 못하게 문을 막는 것까지 진심이 느껴졌다.
상대가 적당히 압박한다면 도망쳐도 굳이 잡지 않겠다는 뜻이었지만...
저렇게 행동한단 건 사죄를 받지 못하면 죽여 버리겠다는 뜻 아닌가. 방금 실언한 무림인들은 대체 판관과 천문세가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몰라 억울해했다.
"설령 진충비도 본인이면 모를까 천문세가가 이 일에 왜 끼어드는..."
마지막으로 조금이나마 체면을 지키기 위해 무림인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무림인은 불행히도 여기가 어디인지 잊고 있었다.
"닥쳐라, 이 마두 놈!"
"판관 나으리를 모욕하다니 사파 놈이 분명하구나!"
"?!"
다닥다닥 앉아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성난 소리가 튀어나오는 건 물론이고 주루 밖에서 소란을 듣고 구경하러 온 인파들 사이에서도 야유가 흘러나왔다.
"내가 왜 마두냐! 나는 서주의 오대검객 중 하나인..."
"오대혈마 놈아 닥쳐라!"
"오대혈마 중 하나라고? 어쩐지 눈빛이 흉악하더라!"
"..."
팽주성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무림인을 보고 동정심을 느꼈다.
원래 천문세가가 나서지 않았다면 자신이 직접 도를 휘두를 생각이었지만, 저렇게 모욕을 당하는 걸 보니 분노가 사라지고 동정심이 들 정도였다.
무림인은 눈앞의 천문세가 무인들 때문에 덤비지도 못하고 주루 안팎으로 한경 사람들에게 계속 욕을 얻어먹었다. 천문세가 무인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한 치의 자비 없이 윽박지를 뿐이었다.
"사죄할 테냐, 검을 받을 테냐?"
"...사죄하겠소."
결국 술에 취해 떠든 무림인들은 바닥에 엎드려 사죄를 해야 했다. 천문세가 무인들은 구경꾼들에게 '앞으로 진충비도에 대한 헛소문을 퍼뜨리는 자들은 천문세가의 검을 상대해야 할 것이다'하고 외치고 떠나갔다.
"허. 놀랍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인들이 달려와서 재빨리 안을 치우고, 점소이가 공짜 술을 돌리고 나서야 다시 주루 안이 시끄러워졌다. 팽주성의 말에 당등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문세가 놈들이 요즘 오대세가를 넘본다더니, 행동거지에 절도가 있고 빈틈이 없군!"
"그렇습니다. 그런데 저 자들이 왜 나선 걸까요? 희아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천문세가가 진충비도에게 은혜를 받은 것 아니겠습니까. 진충비도의 재주라면 천문세가 내부에 난제가 쌓였다 하더라도 사흘이면 다 풀겠지요."
평소 허물없이 이야기하던 두 남매였지만 아무래도 앞에 당문의 어른이 있다 보니 팽주희도 조금 더 신중한 태도로 대답했다.
팽주성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당등은 의외로 수긍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혹시 달리 생각하시는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래. 있다!"
"그렇다면 고견을 들려주십시오."
"원래 진충비도는 당문의 무인은 아니지만 사문(師門)으로 따진다면 당문과도 인연이 있는 녀석이지."
한경 강 노인의 출신을 떠올려보면 독혼수가 저렇게 말하는 것도 나름 일리가 있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천문세가는 삼 년 전에 나와 악연을 맺은 적이 있다."
당등은 과거 일을 떠올리며 불쾌하다는 듯이 미간에 주름을 깊게 만들었다.
삼 년 전 야산에서 발견된 영약을 두고 천문세가와 충돌했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결국 당등이 도착한 뒤 천문세가가 물러나게 됐지만, 그 원한은 사라지지 않고 앙금처럼 남아있었으리라.
"그렇습니다...?"
팽주성과 팽주희는 당등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지 감이 오지 않아서 의아해했다.
"놈들은 진충비도가 용봉지회에서 활약을 하면 당문의 명성이 같이 드높아지는 걸 꺼려해 미리 나서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저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팽가 남매는 독혼수라는 별호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들의 소신을 밝혔다. 당등은 못마땅하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 * *
스스로 태성 인근에서 명성을 쌓았다고 자부하는, 태성일검(台省一劍) 위상은 눈앞에 서있는 진충비도를 보고 긴장감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상대의 실력보다는 주변 관중들이 보내는 함성 때문이었다.
"들어본 적도 없는데 무슨 태성일검이냐!"
"아니. 판관 나으리께서는 맨손인데 왜 저 놈은 검을 들고 있는 거야?"
"사파 놈아 검 내려놔라!"
용봉지회의 비무를 감시하는 몇몇 고수들이 앞에 나선 뒤에야 야유가 조금 잦아들었다. 연우혁은 민망함을 참으며 사죄했다.
"사과드리겠소. 태성일검."
"...한경의 판관으로 백성의 사랑을 받았다니 어쩔 수 없는 일일 터. 신경 쓰지 않소."
사람인 이상 신경이 안 쓰일 수는 없었지만 보는 눈이 많은 여기서 뭐라고 해봤자 속 좁은 놈이 되는 건 위상이었다. 한경의 백성들은 냉혹하기 그지없어서 칼 든 무림인이라 하더라도 가차 없이 모욕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상관없다.'
어차피 위상도 진충비도의 명성을 노리고 있었다. 진충비도를 노리는 수많은 무림인들 중 한 명으로 뽑히는 행운을 붙잡은 만큼 이 정도 야유는 감당할 생각이었다.
황자가 손수 골라서 내보냈다고 하지만 위상은 진충비도의 무공을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제갈세가가 오대세가 내에서 무공으로 높게 평가받지 않듯이 보통 무림의 군사는 지략과 기책으로 명성을 쌓지 무공으로 명성을 쌓지 않는 것이다.
진충비도 또한 그 별호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암기술을 수련한 무인일 터. 소문에는 당문의 무인에게 무공을 전수받았다는 말이 있었지만 위상은 크게 믿지 않았다.
'아마 암기 몇 개를 받은 게 와전되었을 터.'
게다가 비무에서 암기란 무기는 그 효용성이 크게 줄어들었다.
낯설다는 장점이라도 갖고 있는 여러 기문병기들과 달리 암기는 상대가 예측하는 순간 위력이 절반으로 줄어들었으니까.
생각하는 사이 신호와 함께 비무가 시작되었다. 위상은 보법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오마지보(五馬之步)라고 불리는 이 보법은 기병의 편성(五馬)에서 그 움직임을 따온 보법이었다. 좌우로의 변화는 부족하지만 전진하는 힘이 뛰어나고 그 안에 강(强)과 패(覇)의 묘리가 숨어 있었다.
때문에 위상을 처음 상대하는 무인들은 예상보다 더 빠른 접근에 허를 찔려 허둥대곤 했다. 위상은 젊은 판관도 그런 모습을 보여주길 살짝 기대했다.
그러나 진충비도는 당황하지 않고 능숙하게 보법을 펼쳐 위상의 간격에서 벗어났다. 그 모습에 위상은 속으로 혀를 찼다.
'내 소문을 들었군.'
진충비도의 움직임은 능숙하다 못해 마치 위상의 움직임을 미리 예측이라도 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저건 위상에 대해 미리 탐문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다.
이런 비무대회에서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무인들에게 파훼법이 따라오는 것도 일종의 숙명 같은 것. 위상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날아올 암기를 각오했다. 암기술을 쓰는 무인이라면 슬슬 암기가 하나쯤 날아올 때가 됐다.
그러나 암기는 날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진충비도는 보법을 밟으며 접근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움직임에 위상은 경악했다.
지금 보여주는 보법만 봐도 상대는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니었다!
'이런...!'
당황스러움과 별개로 위상의 검은 물흐르듯 움직였다. 오랫동안 익힌 하산북두검(河山北斗劍)은 자연스럽게 상대의 요혈을 노리며 찔러 들어갔다.
오마지보가 처음 보는 무인들을 당혹하게 만든다면 하산북두검은 위상과 몇 번 검을 맞댄 무인들도 매번 놀라게 만드는 검법이었다.
특히 이 거익태산(去益泰山)이란 초법은 같은 초식이라도 언제 어느 초식과 같이 펼치느냐에 따라 위력과 변화가 달라져, 위상의 검법을 파악했다고 착각하는 상대를 쉽게 제압할 수 있게 만들었다.
'어디 한 번 막아봐라!'
그러나 위상의 기대와 달리 진충비도는 냉정하게 거익태산 초식도 가볍게 빗겨서 피했다. 권격이 휘둘러지자 검격의 궤도가 변했다.
위상은 적이 검 안으로 파고들려고 하자 재빨리 태산홍모(泰山鴻毛) 초식을 펼쳐서 막으려고 했다. 검법이지만 박투술의 묘리도 들어가 있어 상대와 가까이 밀접했을 때 쓸 수 있는 초식이었다.
둔탁한 소리가 나고 위상은 팔꿈치에서 통증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진충비도는 권법을 펼쳐 위상이 검을 든 팔을 마비시켰다. 요혈을 제대로 맞았는지 힘이 빠져 검이 툭 떨어졌다.
"크윽...!"
상대가 예상 외로 권법의 고수라는 걸 깨달았지만 위상은 포기하지 않고 발악하듯 남은 손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진충비도는 냉담한 얼굴로 그 주먹마저 파훼한 뒤 위상의 가슴을 타격했다. 울컥 올라오는 충격이 위상을 뒤흔들었다.
'커헉!'
상대가 손속에 사정을 뒀다는 게 느껴졌다. 비무가 아니었다면 이 일격에 가슴뼈가 뭉개졌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위상은 포기하지 않고 보법을 펼쳐 거리를 벌리려고 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
중재를 위해 있던 고수가 당혹스러운 시선으로 위상을 쳐다보았다. 방금 진충비도가 손속에 사정을 뒀는데 그걸 무시하고 저렇게 멋대로 행동하는 건 체면에 어긋나는 짓인 것이다.
하지만 도망치는 위상에게 그 시선이 닿을 리 없었다. 위상은 어떻게든 거리를 벌리고 내상을 회복한 뒤 다시 검을 붙잡아 승부를 보려고 했다.
팍!
섬광 같은 빛줄기가 날아오더니 위상의 바짓자락과 가죽신 끄트머리를 바닥에 꿰어버렸다. 그걸 본 한경 백성들이 함성을 질렀다.
"저게 그 비도술이군!"
"그렇지! 판관 어르신께서는 저걸로 악인 백 명을 잡으셨다네!"
"졌... 졌소."
그제야 싸움이 끝났다는 걸 인정한 위상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어찌나 자존심이 상했는지 위상은 비무 끝에 취해야 할 예도 무시하고 비무대에서 훌쩍 내려가 버렸다.
그걸 본 고수가 분노한 기색으로 소리치려고 하자 연우혁이 말렸다.
"진정하십시오. 졌는데 얼마나 분하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런... 진충비도. 비도술만 뛰어난 줄 알았는데 권법도 제법이군그래."
"감사합니다."
연우혁은 득의에 찬 미소를 지었다.
"물론 가장 뛰어난 일절은 비도술이지만!"
"..."
연우혁은 마지막에 비도를 괜히 던졌다고 후회했다.
* * *
패배한 무인들이 대개 그렇듯 태성일검 위상은 술과 골목길에서 퍼붓는 욕설로 스스로의 화를 달래려고 노력했다.
'비열한 진충비도 놈. 속임수를 쓰다니!'
딱히 상대가 속임수를 쓰진 않았지만 위상은 자신이 속임수에 넘어갔다고 생각했다.
권법의 고수인 걸 알았다면 분명 다른 수를 썼을 것이다. 게다가 상대는 자신에 대해 꿰고 있었지만 자신은 상대에 대해 거의 모르지 않았던가.
'은자를 써서 내 정보를 산 게 분명하다!'
성질 같아서는 진충비도의 저택에 뛰어 들어가 다시 한 번 겨뤄보고 싶었지만, 어쩐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위상은 자신이 압도되어서 그런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제기랄, 왜..."
숙소로 돌아오니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등을 켜고 모여 있었다. 위상은 무슨 일인가 싶어서 고개를 내밀었다.
"무슨 일이오?"
"혹시 당신이 위상이오?"
"맞소. 태성일검..."
"그건 모르겠고 위상이 맞소?"
"맞소만..."
"여기 위상이란 자가 왔답니다!"
"놈을 붙잡아라. 끌고 가서 추문하겠다!"
안에서 구파일방의 표식을 달고 있는 고수들이 나오며 차갑게 내뱉자, 위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무... 무슨,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네가 옆 객실의 무인을 죽였다는 증언이 있었다. 따라와라!"
"말도 안 되는 소리! 누명이오! 누명! 이, 이보게. 누명이야. 자네도 알지 않나?!"
사람들 사이에서 친구를 발견한 위상은 다급하게 외쳤다. 그러나 친구가 대답할 틈도 없이 위상은 고수들에게 끌려갔다.
"그, 그럴 친구가 아닌데... 그럴 친구가 아닌데!"
허망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위상의 친구를 본 몇몇 사람들이 딱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그 중 누군가가 말했다.
"정말 억울하다면 판관 나으리를 찾아가보시오."
"나는 그만한 재물이 없소. 저 친구도..."
"누가 뇌물 바치랬소? 하여간 외지인 놈들은!"
"!?"
126화
핀잔을 들은 위상의 친구, 임형은 당황한 와중에도 한경 사람들의 조언에 따랐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도 딱히 없었기에 일단 움직인 것이었다.
날이 밝자마자 형관 앞에 달려간 임형은 안도감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는 걸 보니 자신이 제일 먼저 온 모양이었다.
"판관 어르신을 뵙게 해주십시오! 이번 용봉지회에 참가한 무림인 중 억울하게 누명을 쓴 자가 있습..."
"??"
형관 앞을 지키고 있던 관졸들은 대뜸 엎드려서 외치는 무림인을 보고 황당하단 듯이 쳐다보았다.
"이보시오. 여기서 뭐하는 것이오?"
"여, 여기가 판관 어르신이 계시는 곳 아니오? 그렇다고 들었소만."
"맞소. 판관 어르신이 계시오. 그걸 아는 사람이 이렇게 소리를 지르고 있단 말이오? 알 만한 사람이 왜 이러는지 참..."
관졸이 허리춤에 차고 있는 전낭을 툭툭 치며 신호를 보내자 임형은 얼굴을 붉혔다.
판관을 만나서 억울한 일을 토로하는 것도 원래는 다 돈이 드는 일이었다.
문을 통과할 때 관졸들에게 얼마, 지나가면서 하인들에게 얼마, 판관한테 만난다고 얼마.
그리고 일의 해결을 원한다면 그건 또 사건의 경중에 따라 별도로 지급해야 한다. 형관에 달려온 임형 또한 고향에 판관이 있었으니 그걸 모를 리 없었다.
'내가 속았구나!'
비열한 한경의 잡놈들이 외지에서 왔다고 자신을 조롱한 게 분명했다. 강호 천지에 뇌물 안 받는 판관 놈이 어디 있단 말인가.
임형은 이를 뿌득 갈며 말했다.
"한경 놈들이 나를 속였구나! 뇌물을 바치지 않아도 억울한 일이 있다면 풀어준다고 꼬드기다니."
"뭐라고 그랬소?"
"한경 놈들이 나를 속였다고 그랬다!"
임형 눈에서 불똥을 튀기며 외쳤다. 아무리 관졸들이 하찮은 신분이라 하더라도 관아 근처에서 이렇게 소리를 높이는 사람은 드물었다. 무림인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관졸들도 상대가 외지에서 온 무림인이라는 걸 알고 있었는지 그 점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그제야 알았다는 듯 발을 굴렀다.
"그렇군! 이제야 알겠소. 당신은 지금 궁 어르신의 형관 앞에 있는 거요. 뇌물을 바치지 않고 억울한 일을 풀고 싶다면 연 대인의 형관 앞으로 가야 하오. 동쪽 문이지!"
"...???"
임형은 다시 한 번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을 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또 속는 게 아닌가 의심이 됐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어쩔 수 없었다.
"!!!"
형관 동문 앞에 길게 늘어선 행렬을 본 무림인의 입이 떡 벌어졌다. 서문과 달리 동문은 온갖 행색의 사람들이 줄을 선 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정말 급하단 말이오!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내 땅이 뺏길지도 모르는데! 비켜주시오!"
"당신은 땅 때문에 왔겠지만 나는 내 손주 때문에 왔소! 당신이 비켜줘야겠구려!"
"돈 있는 사람은 서쪽으로 가시오! 좀! 아니, 서 점주 당신은 포목점도 두 개나 갖고 있는 사람이 왜 여기에 있는 거요!"
"이 일은 난해하고 어려워서 궁 대인께 맡겼다가는 내 포목점 두 개를 바쳐도 모자랄 거요!"
"..."
임형은 조용히 줄 뒤에 섰다. 원래 마음 같아서는 담벼락이라도 넘고 싶었지만 인파의 숫자를 보니 압도되어서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오늘 안에 들어갈 수 있을까?'
초조하고 암울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임형은 깜짝 놀랐다.
줄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무슨 송사를 게 눈 감추듯 해치워도 이 정도 속도는 안 나올 것 같았다. 무림인은 혹시 사람을 쫓아내나 싶어서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형관을 나오는 사람들은 몇 번이고 허리를 굽혀가며 감사인사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연 대인 덕분에..."
"빨리 물러나게! 사람들이 기다리는 게 안 보이는가!"
"감사합니다! 연 대인!"
해가 머리 위로 올라오자 임형 앞의 줄이 모두 사라졌다. 임형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이대로라면 친우가 다치기 전에 구해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쿵-
관졸이 동문의 문을 닫으려고 하자 임형은 깜짝 놀라서 외쳤다.
"왜, 왜 닫는 거요!"
"판관 대인께서도 좀 쉬셔야 하지 않겠느냐."
"안, 안 되오!"
한경 사람들은 연 판관이 잠깐 점심으로 요기한 뒤 곧 다시 문을 열고 송사를 해결해준다는 걸 알았기에 담담했지만, 멀리서 온 임형은 그걸 알 수 없었다.
판관이 한 번 문을 닫으면 언제 열지는 완전히 자기 마음이라 며칠은커녕 보름도 넘을 수 있는 것이다.
"난 판관 어른을 봐야겠소!"
임형은 재빨리 내달렸다. 무림인인 만큼 임형은 관졸들이 문을 닫기 전에 몸을 날려 안으로 달릴 수 있었다.
뒤에 있던 한경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상욕을 퍼부어댔다.
"저 천박하고 못된 무림인 놈들 같으니!"
"자기밖에 알지 못하는 저런 놈들은 장을 쳐서 쫓아내야 해!"
* * *
'무공이 요즘 이상하다.'
연우혁은 하인이 밖에서 사 온 국수와 만두로 점심을 때우고 생각에 잠겼다. 어제 비무 이후 연우혁은 시간이 날 때마다 무공에 관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딱히 싸우면서 불리함을 느꼈기 때문은 아니었다.
위상은 연우혁보다 그 경지가 높지도 않았고 영안을 뛰어넘는 기발함을 보여주지도 못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연우혁은 위상을 자기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싸움을 주도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우혁은 기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육신과 무공이 일치하지 않는 것 같은 위화감이었다.
분명 지금보다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는데 그 앞에서 멈추는 듯한 답답함.
'설마 이게 벽인가?'
연우혁은 설마 싶었다. 이제까지 내공이 부족해서 몸이 깨달음을 따라오지 못한 적은 많았지만, 내공은 충만한데 깨달음이 따라오지 못한 적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지금 연우혁의 내공은 연우혁 본인도 믿기 힘들 정도로 급격하게 오른 상태였다. 동창의 내단은 말도 안 되는 힘으로 전신세맥에 내공을 순환시키고 있었다.
절정의 경지는 이제까지 배운 무공을 완벽하게 익히는 것에서 벗어나 자신에게 맞게 새로이 만들어내는 경지. 그렇다면 연우혁은 이제...
"이 자식. 어디서 감히!"
"놈을 잡아라!"
고심하던 연우혁은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놀라서 문을 열었다. 관졸들이 웬 무림인 하나를 붙잡아서 바닥에 처박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이 자가 감히 대인의 휴식을 방해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됐다. 어차피 다시 문을 열려고 했으니, 연 셈이라고 치자."
상대가 무림인으로 보이자 연우혁은 친절을 베풀었다.
용봉지회에서 뛰어난 활약을 하게 되면 아무래도 적이 생기기 마련인데, 그 때 어느 누가 연우혁을 도와줄지 모르는 것이다.
오대세가들과 인연을 맺었다지만 이런 소문은 많아서 나쁠 게 없었다.
"무슨 일이냐?"
"대인! 들어주십시오. 어제..."
임형은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아까는 절박함에 밀고 들어왔지만 정신이 돌아오니 걱정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안 그래도 친우가 불리한 상황인데, 나쁜 인상을 남겨서 도와주지도 않는다면...
그러나 다행히 젊은 판관은 임형을 쫓아내거나 호통을 치는 대신 묵묵히 들었다.
"이상한 점이 있군. 포두를 보내서 확인해보라고 하겠다."
"대인! 구파일방의 고수들이 이 친구를 데리고 갔는데, 목숨이 괜찮을지 걱정됩니다."
"어제 끌려갔으니 오늘까지는 괜찮을 터. 걱정할 것 없다."
"...?"
임형은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설마 오늘 안에 해결하겠단 소리인가?
* * *
용봉지회는 그 기치와 명성과는 달리 의외로 사상자가 많이 나오는 대회였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살초를 금하고 고수가 옆에서 지켜본다 하더라도 날카로운 병장기를 휘두르고 내공이 담긴 권격을 뻗어대는데 죽는 사람이 안 나올 리 없는 것이다.
비무대 위에서 죽는 사람은 물론이고, 안에 입은 내상을 치료하지 않고 무리했다가 병사하거나 홧김에 비무대 밖에서 생사투를 펼쳐 죽는 경우가 꽤 자주 일어났다.
이런 일들은 무림인들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사생유명(死生有命) 아니던가. 이런 일 하나하나 신경 쓸 사람이라면 무림에서 칼을 차고 다닐 수 없었다.
하지만 밤에 남몰래 상대를 기습해 죽이는 건 아무리 관대하더라도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하물며 혈교의 첩자들이 색출된 일 때문에 무림이 뒤숭숭한 지금에는 더더욱 그랬다.
소림 출신의 무승으로서, 불경과 학문의 수양보다는 마두의 머리통을 박살내는 걸로 철권이란 별호를 얻은 이대제자 정원도 그랬다.
"태성 출신 위상은 불손하고 위협적인 말들을 내뱉었소. 주루에서 진충비도는 물론이고 다른 무인들을 먼저 죽이겠다고 발언했고 이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소. 빈승은 이 무인을 의심할 수밖에 없소."
정원은 딱딱한 눈빛으로 말했다. 뇌옥에 갇힌 위상은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아혈을 점혈당해 반론을 할 수가 없었다.
물론 위상이 주루에서 술에 취해 험한 말을 하긴 했다. 진충비도를 비무대 밖에서 만나면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느니부터 시작해서 좀 더 얼큰하게 취한 뒤로부터는 만나면 죽여버리겠다까지.
-이런 얼간이 같은 비무로는... 뭘 할 수가 없단 말이다. 내 무공은 한 번 검을 뽑으면 피를 볼 수밖에 없는데, 살초라고 초식을 막아버리니! 차라리 나하고 싸울 놈들은 모조리... 모조리 먼저 죽여 버리는 게 낫겠군!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술에 취해서 내뱉은 허풍이었고 위상이 진심으로 다른 무인들을 습격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마두도 아니고 저런 짓을 무슨 배짱으로 한단 말인가.
그러나 때와 장소가 너무 좋지 않았다.
주루에서 듣고 있던 한경 사람들은 분개해서 바로 구파일방의 무림인들에게 '저 놈 말하는 꼬라지가 혈교 첩자요!'라고 밀고했고 동시에 위상의 옆 객실 무인이 피살당하기까지 한 것이다.
옆에 있던 개방의 삼결제자, 옥면개 종조일은 신중하게 대답했다.
"물론 저 자가 수상하긴 해! 하지만 이 거지는 좀 더 확인을 해봐야 할 것 같은데? 혈교의 첩자가 저렇게 어리숙하게 군다는 게 이상하잖나!"
"혈교의 첩자가 어리숙하게 굴면 풀어줄 생각이오? 이번에 색출된 첩자들만 봐도 그런 말은 할 수 없을 것이오."
소림철권의 말에 종조일은 반박할 수가 없어서 뺨을 긁적였다.
확실히 이번에 색출된 혈교 첩자들의 면모는 실로 놀라웠다. 무림의 명사들도 저렇게 오랜 기간 동안 기다려 온 혈교의 저력과 끈기에 전율할 정도였다.
수양이 깊은 이들이야 첩자들의 면모가 별 것 아니었다는 점에 주목해 허장성세라고 말했지만, 저런 충격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
"이 거지가 여기 한경의 정 분타주에게 들었는데, 여기 판관이 그렇게 지혜롭다고 하더군. 한 번 물어보는 게 어떨까 싶은데."
"판관을? 진심으로 하는 소리요? 옥면개. 빈승은 믿지 못하겠소. 저 자에게 뭐라도 받은 거요?"
정원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개방의 후기지수를 쳐다보았다.
혈교의 첩자일 수도 있는 자를 판관한테 넘기겠다니. 은자만 받으면 풀어주는 자가 판관 아닌가.
마두를 잡으면 계율에 따라 처벌하면 모를까 어느 멍청한 청맹과니도 판관에게 맡기진 않았다.
무례한 말에 종조일이 눈꼬리가 확 찢어졌다. 무림이 소림을 존중한다지만 개방은 소림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중놈이 못하는 말이 없구나! 오냐. 이 어르신이 뭐라도 받았다면 어쩔거냐? 판관한테 맡긴다는 게 아니다. 물어본다는 거지. 진충비도의 소문을 들어봤을 텐데!"
"!"
그제야 정원은 진충비도가 판관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다.
이번에 태자의 명을 받고 용봉지회에 나선 무인.
참으로 특이한 기인으로서 판관의 직위를 가진 무림인이었다.
비슷한 무인으로는 천기수사 제갈우를 뽑을 수 있으리라.
뛰어난 재주는 있되 방랑벽이 있어 세가의 일을 돕는 대신 천하를 주유하며 지혜를 빌려주는 사람. 심지어 진충비도는 천기수사와 친분까지 있었다. 더더욱 진충비도가 저런 사람이란 것에 확신이 섰다.
정원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뛰어나고 대단한 사람이란 건 알겠소만, 빈승은 진충비도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오. 진충비도는 당문과 친하고 천기수사와 친하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사견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소?"
하필 당문도 그렇고 천기수사도 그렇고 옳고 그름보다는 자신의 뜻과 생각을 더 중시하는 이들이었다. 종조일도 강하게 말하기 뭐해 머뭇거렸다.
"스님, 스님!"
"무슨 일이오?"
"연 판관 어르신께서 오셨습니다!"
정원은 홱 고개를 돌려 종조일을 쳐다보았다. 종조일은 놀라서 손을 내저었다.
"이 거지는 아무 짓도 안 했다!"
"..."
"그렇게 노려보지 말고 일단 들여보내서 의견이나 들어보자고! 좋든 싫든 천기수사의 명성에 버금가는 군사인데 허튼소리를 하진 않을 것 아니냐!"
"들어오라고 전해주시오."
소림과 개방의 제자는 뇌옥의 문을 열고 내려오는 연우혁을 보고 예를 갖춰 인사했다. 연우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위상이라는 무인이 여기에 있습니까?"
"저기에 있습니다만..."
"그 자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으니 풀어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제기랄! 내 생각보다 더 괴팍했구나!'
종조일은 옆의 소림철권이 노려보는 것을 느끼고 등줄기에 땀이 나는 걸 느꼈다. 진충비도는 역시 보통 괴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127화
아니나 다를까 정원의 눈꼬리가 위로 쭉 솟구쳤다. 상대가 판관이 아니었다면 대뜸 주먹부터 나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아. 설명이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연우혁은 한경에서 든 버릇을 뒤늦게 깨닫고 말했다. 상대방한테 충격을 줘서 설득해야 하는 만큼 결론부터 말하는 버릇이 생겼는데, 그 버릇이 이렇게 또 나온 것이다.
무림인들은 놀랍거나 받아들이기 힘들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게..."
"빈승은 받아들일 수 없소! 혈교의 첩자를 말 한 마디로 풀어주라고 하다니. 썩 물러나시오!"
"!"
옆에 있던 종조일은 눈을 질끈 감았다. 진충비도도 괴팍했지만 소림철권도 못지않게 외골수인 무인이었다.
용봉지회가 정파무림의 축연이라지만 어디까지나 한경의 대소신료들과 협력해서 진행하고 있는 일 아닌가. 심지어 황자까지 와서 존람하겠다고 하는 만큼 더더욱 관리들을 무시할 순 없었다.
무림맹이 혈교의 첩자를 붙잡아서 심문한다고 해서 한경의 관리들이 펄펄 날뛰진 않겠지만 한경의 판관이 찾아왔는데 꺼지라고 하는 건 그 의미가 달랐다. 저건 상대의 체면을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내주기 싫으면 적당한 핑계를 대거나 뇌물을 바쳐야지 저렇게 곧이곧대로 말하면 어떡한단 말인가.
'이 땡중 놈. 평지풍파란 평지풍파는 다 만드는구나!'
종조일은 소림철권과 같이 일을 맡게 된 걸 후회했다. 진충비도도 생각이 비슷했는지 황당하다는 듯이 소림승을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 뭐라고 했ㅅ..."
"무림인들이 지금 한경의 고관을 무시하는 것이오?!"
최근 포두 자리를 받아 사직과 한경에 대해 충성심이 한껏 솟구친 적 포두가 먼저 발끈했다.
다른 포두였다면 멀리 있는 국법보다 가까이 있는 무림인의 주먹이 두려워 입을 다물었을지도 몰랐지만, 적조 같은 살수가 아직 풋내기에 불과한 정파의 후기지수들을 겁내진 않았다.
"아이고. 오해다. 오해! 알 만한 포두가 왜 이러나! 이 거지가 대신 사과하지. 여기 스님이 융통성이 없어서그래!"
포두가 두렵기보다는 판관의 체면을 깎았다가 벌어질 뒷일이 두려웠기에 종조일이 끼어들었다. 여기서 끝내면 모를까 밖으로 끌고 나가면 일이 커지는 것이다.
"융통성? 혈교의 첩자를 풀어주라는 게 융통성이라면 빈승은 그런 것 따위는 필요 없소. 사숙께 말씀드리고 싶다면 마음대로 하시오. 하지만 빈승이 첩자를 맡은 이상 함부로 풀어주는 일은 없을 것이오!"
"감히...!"
"됐다. 됐어."
귀찮아진 연우혁이 손을 내저어 적조를 말렸다. 대충 눈앞의 소림 무인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한 것이다.
밖에 나가서 다른 판관이나 지부 어른한테 고자질하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상대가 소림의 무인인 만큼 굳이 일을 키우는 것보다는 설득하는 게 나았다.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군. 혈교의 첩자를 그냥 데려가겠다는 게 아니라, 혈교의 첩자가 아니라서 풀어주라는 거요."
아까보다 한결 퉁명스러워진 판관의 태도에 종조일은 정원을 쿡 찌르며 속삭였다.
"슬슬 양보해라."
"뭘 양보하란 거요. 조용히 하시오. 빈승은 분명..."
"스님의 이야기부터 한 번 들어봅시다. 왜 첩자란 거요? 혈교의 무공이라도 썼소?"
"저 자는 주루에서 진충비도 그대를 죽이겠다고 발언한 것도 모자라 다른 자들도 죽이겠다고 떠들어댔소."
소림철권은 흔들림 없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자신이 했던 낯 뜨거운 발언들이 하나하나 다 튀어나오자, 뒤에 갇혀 있던 위상은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연우혁도 위상이 자길 죽이겠다고 떠들고 다닌 건 몰랐기에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멍청한 놈 아닌가?'
외지인이 한경의 고수를 죽이겠다고 떠들고 다니면 잡혀가는 걸 떠나서 등에 칼 맞기 좋았다. 무림인들이 대체로 겁이 없고 생각이 없다지만 정말 멍청한 놈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오. 태북(台北) 출신의 탁기표가 객잔에서 죽었소."
소림철권 정원이 딱딱하고 융통성 없는 강경한 무승이라지만 그렇다고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다. 주루에서의 발언만으로 사람을 붙잡지는 않았다.
정원이 위상을 붙잡은 데에는 객잔에서의 살인이 더 컸다.
탁기표는 태북 출신의 활달한 무인으로서 교우관계가 넓고 원만했다. 죽은 날만 해도 세 명의 친우와 따로 술잔을 기울였으니 그 관계를 짐작할 만도 했다.
첫 번째로 술을 마신 친구는 이종일이라는 산음(山陰) 출신 무인이었다. 이 자는 금(琴)과 바둑에 능해서 종종 탁기표와 음률과 기보에 대해 떠들곤 했다는 증언이 올라왔다.
두 번째로 술을 마신 친구는 부녕(阜寧) 출신 곽궁이었다. 이 자는 시화(詩畫)에 관심이 많아 탁기표에게 희귀한 그림을 사거나 팔곤 했다. 사건이 벌어진 날에도 탁기표에게 그림을 구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마지막으로 술을 마신 친구가 바로 태성 출신 위상이었다. 태북과 그리 멀지 않은 만큼 원한이 평소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위상은 탁기표와 비무가 예정되어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런 한심한 놈.'
연우혁은 더더욱 위상을 경멸하듯이 쳐다보았다. 술에 취해도 적당히 취할 것이지 할 말 못할 말을 다 줄줄 흘리고 다니다니.
"탁기표는 아무런 소란 없이 일격에 죽었소. 이는 범인이 탁기표와 친분이 있어서 객실에 방문해도 이상할 것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오."
"동의하오."
"빈승은 곽궁에게 물어서 언제 자리에서 일어났는지 확인해봤소. 하인이 탁기표의 방에 들어갔는데 죽어있는 걸 발견한 건 그 후 두 시진 정도 지났을 때요. 저 자는 한 시진 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주장하지만, 빈승은 의심할 수밖에 없소."
연우혁 옆에서 듣고 있던 적조는 자신도 모르게 소림 무승의 논리에 동의해버렸다.
물론 저 주장도 얼마든지 트집을 잡거나 궤변을 늘어놓을 수 있었다.
사실 정말 위상이 일찍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한 시진 사이 이종일이나 곽궁이 다시 핑계를 대며 탁기표의 방에 방문했을지도 모른다, 위상이 죽인 걸 본 사람이 없지 않느냐...
하지만 그런 식으로 주장을 하나하나 다 받아주면 잡을 수 있는 죄인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식으로 한다면 직접 죽인 걸 본 죄인만 붙잡을 수 있을 것이다.
적조가 보기에 위상이란 무인은 죽어도 억울할 게 없는 놈이었다. 무림인들이 발에 채일 만큼 많은 곳에서 누굴 죽이겠다는 소리를 몇 번이고 외쳐대다니. 여기서 안 죽어도 언젠가 다른 곳에서 죽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적조의 상관은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연우혁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물었다.
"위상이 왜 일찍 일어났는지는 알고 있소?"
"바둑이 짧게 끝나서 일찍 일어났다고 했소."
"혹시 스님께서는 바둑을 둘 줄 아시오?"
"모르오."
정원은 불쾌한 질문이라는 듯이 입술을 오므렸다. 아직 한낱 무승인 정원이 자신을 수양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에 바둑을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객잔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여기 포두를 보내 객실 안을 낱낱이 조사해오라고 했소. 바둑판 위의 기보 또한 마찬가지요."
옆에 있던 적조는 민망한 듯이 헛기침을 했다. 처음 갔을 때는 별 생각 없이 '바둑판이 있습니다'라고만 보고했다가 다시 가야 했던 것이다.
여전히 연우혁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정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보가 있는 게 어떻다는 것이오?"
"그 기보는 완전히 엉터리요. 죽은 집에 몇 번이고 가일수를 하지 않나, 중요하지도 않은 곳에서 서로 패싸움을 하질 않나... 바둑을 조금만 둬본 사람이라면 기보가 이상하단 걸 알 수 있을 거요."
"..."
정원이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듣자 연우혁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소?"
"못, 못했소."
"저 위상이란 자는 탁기표와 바둑을 두러 방문한 사람이오. 혹여나 살심이 생겨서 기습했다고 하더라도, 바둑판이 흐트러졌으면 제대로 된 기보에 맞춰 바둑돌을 놨을 것이오. 빨리 끝났다는 핑계도 댈 만큼 단명국으로 놨겠지. 이종일이란 무인도 마찬가지요. 몰래 다시 방문해서 기습했다 하더라도 바둑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니 기습 도중 바둑판이 흐트러졌다 하더라도 다시 제대로 놨을 것이오. 위상에게 누명을 씌우려면 긴 대국이 좋을 테니 그렇게 했을 것이고."
연우혁의 말은 방금까지 고집을 세우던 소림의 무승도 그 고집을 꺾고 듣게 할 만큼 설득력이 있었다. 뇌옥 안에 갇힌 위상은 점혈당한 탓에 말도 하지 못하고 눈만 끔뻑이며 그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다면 탁기표를 죽인 사람은 곽궁이 되오. 아마 위상이 빨리 떠난 것을 보고 기회다 싶어서 문을 두드렸을 것이오. 저렇게 허술하고 입이 험한 만큼 저 자가 의심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겠지."
"그, 그렇다면 설마...!"
듣던 종조일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뱉었다. 연우혁은 한 번 말해보라는 듯이 손짓했다.
"한 번 말해보시오."
"곽궁 그 놈은 설마, 바둑판 위에 돌이 얼마 없는 걸 보고 위상이 빨리 떠났다고 사람들이 생각할까봐 돌을 더 놓은 것인가?"
"맞소. 그게 실수였지. 아무렇게나 돌을 놓는다고 다 되는 게 아니니 말이오."
"진충비도의 명성에 과연 헛됨이 하나도 없구나!"
옥면개란 별호를 가진 개방의 무인은 찬사를 늘어놓았다.
설마 바둑판의 돌 하나만을 보고 어느 누가 죽였는지를 알아차릴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것이다.
연우혁은 별 일 아니었다는 듯이 담담하게 반응하며 정원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이 자를 첩자라고 생각하시오?"
"...아니오. 빈승이 어리석었소."
정원은 짧은 사이 파리해진 안색으로 고개를 숙였다.
뇌옥 안의 무인이 다른 무인을 죽였다고 철썩 같이 확신했는데 그게 이렇게 무너졌으니 보통 충격이 아니었다.
'음. 너무 충격을 받은 것 같은데.'
연우혁은 소림 무인이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할 만큼 충격을 받은 것 같자 약간 걱정이 됐다.
연우혁이 원한 건 상대가 '진충비도의 지혜에 감읍했습니다! 앞으로 어떤 명령이든 따르겠습니다!'같은 반응을 보여주는 거였지, 충격으로 식음을 전폐하는 게 아니었다.
"소림철권. 아시다시피 죄인과 죄 짓지 않은 무고한 양민을 구분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오. 어느 사람이든 평생 옳은 선택만을 할 수는 없는 법이니, 틀렸다 하더라도 너무 개의치 마시오."
"..."
위로에도 불구하고 정원은 조용히 인사한 뒤 뇌옥을 걸어 나가 버렸다. 종조일은 머쓱해진 얼굴로 말했다.
"강직한 친구라서 쉽게 부러지는군. 원래 평소에는 더 영특한 사람이었는데 말이야."
"강직하고 영특하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뇌옥에서 나와 점혈까지 풀리자 위상은 원독에 찬 눈빛으로 정원이 나간 문을 노려보았다.
소림의 미친 무승 때문에 목이 날아갈 뻔했는데 분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적 포두가 혀를 차며 말했다.
"혀 때문에 죽을 뻔한 놈이 또 혀를 놀리는구나. 배운 게 하나도 없느냐? 여기 연 판관께서는 네놈이 건방지게 입을 놀려도 사사로운 원한을 신경 쓰지 않고 네놈을 구하려 여기까지 달려오셨다. 오로지 그게 옳은 일이기 때문이지!"
'사실 몰랐던 거다...'
연우혁은 적조한테 '위상이 한 말은 사실 몰랐다'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가 나오지 않았다.
위상은 적조의 말에 쿵 하고 머리가 내려앉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저 판관이 떠드는 이야기에만 집중했지, 생각해보니 저 판관이 왜 자신의 목숨을 구하러 왔는지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뇌물도 바치지 않는데다가 무례한 말까지 지껄인 사람을 구하러 무림맹의 뇌옥까지 달려오다니.
과연 자신이 백 번 죽었다 깨어난다 하더라도 그럴 수 있었을까?
"...절 받으십시오. 판관 어르신! 이 위 모가 구명지은을 입었으니, 평생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됐다. 판관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위상은 멈추지 않고 손가락을 깨물더니 피를 입술에 바르고 맹세했다.
"맹세컨대 어떤 일이든 시켜만주십시오.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소림 놈이 저러길 원했는데 다른 놈이 저러는군.'
연우혁은 착잡한 표정으로 위상을 쳐다보았다. 놀랍게도 적 포두 또한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넨 왜 그러나?"
"저 자가 포쾌로 들어올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
128화
물론 위상은 포쾌로 들어가 은혜를 갚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있었다.
적 포두는 슬쩍 물었다.
"정말로 관심이 없단 말인가?"
"아, 아니... 칼을 차고 강호를 돌아다니던 무림인이 어떻게 포쾌 노릇을 한단 말이오?"
"...이 놈이!"
"진정하게. 적 포두."
연우혁은 적조를 급히 말렸다. 위상은 얼빠진 얼굴로 적조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 화내는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하긴 살수로 구명지은 때문에 포두 노릇을 하고 있는 적조가 특이한 거였지 보통 무림인은 굶어 죽으면 죽었지 포쾌 노릇을 할 이유가 없었다. 포쾌란 게 일반적으로 선망 받는 직업이 아닌 것이다.
옥면개 종조일은 친근한 태도로 말을 걸었다.
"정말 감탄했네! 이 거지가 진충비도의 소문은 많이 들어봤어도 그 소문이 왜 생긴 건지는 짐작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보니 오히려 소문이 과소평가된 감이 있는 것 같아!"
방금 포두로서 자존심이 상한 적조가 종조일을 노려보았지만 연우혁은 작게 눈짓해서 말렸다.
물론 원래 한경의 판관이 가진 지위를 생각해보면 일개 후기지수가 대뜸 친한 척 행동하는 건 살짝 무례한 짓이었다.
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상대의 문파가 살짝 특수했다. 개방 출신 아닌가. 개방의 거지들이 가진 채신없음은 이미 유명했기에 괜히 화를 내봤자 연우혁만 속좁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자존심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게 내 특기지.'
판관의 자리에 올랐음에도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새 아버지를 둘 수 있는 연우혁은 사람 좋게 미소지으며 화답했다.
"나 또한 옥면개의 소문을 많이 들었지! 이번 일에서 자네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 무인이 어떻게 목숨을 부지했겠나?"
"아니. 이 거지가 뭘 했다고?"
"소림철권을 말리지 않았나?"
"하하하! 그렇긴 해!"
종조일은 웃음을 터뜨렸다. 진충비도에 대한 소문이 워낙 괴팍한 기인에 가까워서 어느 정도 긴장을 한 감이 없잖아 있었는데 실제로 만나보니 꽤 호인(好人)이었다.
소림철권에 대한 악감정도 없고 판관으로서 위세도 휘두르지 않는 게, 꽤 다루기 좋아보였던 것이다.
"진충비도! 이 거지한테 궁금한 건 없나?"
뇌옥 밖으로 나오며 종조일은 슬쩍 질문을 던졌다.
어느 문파의 후기지수든 개방이 가진 정보는 탐이 나기 마련이었다. 하물며 곧 비무를 여럿 앞둔 무인은 더더욱 그랬다.
상대에 관해 자세히 알수록 승산이 높아지는 법.
"사실 있네."
"말해보게."
"나는 사실 남은 혈교의 첩자를 찾고 있네."
"!"
젊은 판관의 말에 종조일은 깜짝 놀랐다.
"다 색출된 게 아니었단 말인가?!"
"그렇지! 내 생각에, 남은 혈교의 첩자는 오히려 명망 높은 후기지수 중에 있을 가능성이 높아. 그렇기에 색출될 때 걸리지 않은 것이지."
"으음... 이 거지가 너무 중요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미안하군. 난 자네를 처음 봤을 때부터 큰 일을 믿고 맡길 수 있겠다고 생각했네. 나처럼 강호에 교분이 적은 무인이 누굴 믿을 수 있겠는가?"
"좋아, 좋아! 이 거지가 그렇다면 힘을 써야겠지. 뭐가 궁금한가?"
"솔직히 말해서 소림철권이 수상하네."
"...!"
종조일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아, 아니야. 저 땡중이 고지식한 외골수긴 해도 수상한 사람은 아니야. 착각한 것 아닌가?"
"허허실실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지. 내가 이 뇌옥에 온 것 또한 소림철권을 한 번 떠보기 위해서였네. 소림의 무승이 왜 저렇게 잔혹하게 행동할까? 남들과 다른 모습을 할 때에는 이유가 있는 법!"
연우혁은 단호하게 소림철권의 수상한 점들을 늘어놓았다.
혈교의 첩자라면 얼마든지 다른 첩자들을 희생해서라도 자신의 안전을 지키려 할 수 있었다.
"아까 무인을 죽이려 한 이유도 뻔하지. 혈교의 첩자라면 오래 살려둘수록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
"이, 이 거지는 동의 못 하겠네."
"물론 나도 확정한 건 아니야. 수상하다고 생각할 뿐. 도와주게. 옥면개!"
창백해진 얼굴로 종조일은 잠깐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약속했으니. 하지만 오해하지 말게! 이 거지는 소림철권을 의심해서 도와주는 게 아니야! 소림철권의 오해를 풀어주려고 나서는 걸세!"
* * *
소림철권 정원은 불당 가운데에 앉아 법화경(法華經)을 읊고 있었다. 불경에 능통하진 않더라도 소림의 제자인 이상 이 정도는 충분히 암기하고 있었다.
"정원 스님. 이야기 좀 합시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까와 달리 소림 무승의 태도는 꽤 공손해진 상태였다. 그 모습에 적조는 속으로 생각했다.
'확실히 수상하군.'
연우혁의 말을 들으니 이 소림 무승의 행동거지는 하나하나 다 수상한 구석이 있었다. 지나치게 사나운 것은 물론이고 첩자로 의심가는 자를 바로 죽이려고 하는 것까지.
지금 자신이 불리한 걸 아니 이렇게 구는 것 아니겠는가?
연우혁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질문을 던졌다.
"뇌옥에서 만났을 때와는 태도가 많이 다르신 것 같소."
"뇌옥에서 만났을 때에는 혈교의 첩자를 감시하는 무인이었고, 지금 빈승은 불당의 일개 승려일 뿐이니 말입니다."
"저런 교활한 놈."
분개한 적조가 들리지 않게 중얼거렸다. 둘의 모습에 정원은 궁금했는지 물었다.
"여긴 어떻게 오셨습니까?"
"종 소협이 말해줬소."
"그렇습니까. 다른 분들은 이곳에 안 계십니다."
적조가 소림 무인들을 찾는 것 같자 정원이 말했다. 적조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러면 어디에 계십니까?"
"이 절은 작고 외진 곳에 있어 소림의 무승들이 모두 머무르기 힘듭니다. 빈승은 불경을 외우고 싶을 때 종종 방문하지요."
적조는 의미심장하게 눈짓했다. 인적 드문 절에 굳이 핑계를 대가면서 오다니.
그러나 연우혁은 여상한 태도로 말을 이어나갔다.
"아마 스님께서는 궁금하실 것 같으니 빨리 말해드리겠소. 내가 여기 온 이유는 무인을 멋대로 첩자로 몬 것에 대한 추궁이오. 스님께서는 정파무림의 기치 아래에서 행동하지만 이 판관은 태자 전하의 명 아래에서 행동하고 있소이다."
"..."
정원은 태자의 이름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지만 불만이 가득하다는 게 미간 사이에서 느껴졌다.
"이 빈승은 아무것도 거리낄 게 없습니다."
"그러면 더 물어보기 좋겠군!"
철권을 휘두르는 소림의 무승이라 하더라도 구파일방과 금의위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정치적 긴장감을 모를 리 없었다. 소림 제자가 금의위에 끌려가기라도 하는 순간 소림의 체면에는 커다란 먹칠이 칠해지는 것이다.
"왜 위상을 혈교의 첩자라고 생각했소?"
"사람을 죽였고, 사람을 죽일 거라고 떠들고 다니는 자를 혈교의 첩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생각해야 합니까?"
"글쎄. 그냥 포악한 자일수도."
연우혁의 말에 무승의 눈빛에서 안광이 타올랐다.
"판관이라면 죄인 될 자를 미리 찾아서 막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설령 첩자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저런 자는 언제든 마두가 되어 혈교에 투신해도 이상하지 않소!"
'극단적이기까지!'
적조는 정원의 태도가 더욱 수상하다고 생각했다. 저 정도로 극단적인 태도를 취하니 오히려 억지스럽게 느껴진 것이다.
"진충비도. 빈승이 어렸을 적 왜 소림사에 입문하게 된지 아십니까?"
"모르겠소."
"혈교의 마두들이 마을을 불태웠기 때문이오!"
정원은 이글거리는 목소리로 설명했다.
원래 근처 산에 도망친, 마을을 넘볼 엄두도 내지 못하던 비루한 산적 떼들도 혈교 밑으로 들어가자 포악한 마두로 돌변했다.
굳이 저런 자들까지 무엇하러 토벌하겠냐고 안일하게 행동하던 마을 사람들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룬 셈이었다.
'과거까지. 변명이 완벽하군.'
적조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살수들도 어딘가에 위장해서 잠입할 때 저런 극단적인 과거를 갖고 들어갈 때가 종종 있었다.
사람의 마음은 저런 과거를 들으면 쉽게 경계를 풀게 되어있는 것이다.
하지만 옆에 있는 판관은 저런 사탕발림에 넘어가지 않는 한경의 기재였다. 적조는 눈앞의 무승이 상대를 잘못 만났다고 비웃었다.
"과연."
"이 빈승이 잘못된 사람을 첩자로 몬 책임은 얼마든지 지겠소. 하지만 빈승에게 교각살우(矯角殺牛) 같은 말은 통하지 않소. 앞으로도 쇠뿔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소를 죽이겠소!"
소림 무승은 과연 그 별호만큼이나 꺾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혹여나 이 건으로 다른 무림인들에게 힐난을 받는다 하더라도 결심을 꺾을 생각은 조금도 없어보였다.
그리고 역으로 이런 태도가 좋은 전략이기도 했다. 이렇게 일관되게 마두에 대해 증오를 불태우는 이상, 무림인들도 소림철권에게 동정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끌고 가서 심문을 하더라도 역풍이 불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연우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알겠소. 스님의 생각은 잘 들었고... 혹시 금의위나 황자 전하에 대해 모욕적인 언사를 종종 하셨소?"
불같이 화를 내던 정원은 오늘 처음으로 당황했다.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땀을 흘리는 모습만 봐도 했는지 안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건... 그건..."
"대답하시오."
"..."
정원은 아무 말도 없이 꾹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그걸로도 대답이 충분했기에 적조는 눈짓했다.
'저 정도면 충분한 거 같습니다. 이걸 핑계로 보고해버리죠.'
다른 질문에는 철벽처럼 버텼지만 이건 보고 들은 자들이 많아 감히 부정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이거면 정원을 심문할 충분한 명분이 됐다.
"이거면 된 것 같군. 일어나지."
"예."
연우혁은 적조와 함께 불당을 걸어 나갔다.
"잠깐."
"무엇을 말입니까?"
"생각난 게 있다. 기다리고 있도록."
걸어 나가다 말고 불당 안에 다시 들어가서 뭐라고 말하는 연우혁을 기다리며, 적조는 살짝 걱정했다. 혹시 저 미친 스님이 이판사판으로 덤비는 게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림철권은 덤비는 대신 눈을 휘둥그레 뜨고 연우혁을 쳐다보기만 했다.
"다 됐다. 가자."
* * *
곧바로 금의위와 접촉하러 향하는 길을 따라가며 적조는 입을 열었다.
"옥면개 그 친구, 참 쓸모가 있습니다."
"왜 갑자기?"
물론 옥면개 종조일은 개방의 삼결 제자로서 주목 받는 후기지수 중 하나였다. 이번 용봉지회에서 활약할 무인을 꼽는다면 분명히 들어갈 무인인 것이다.
개방 내에서도 주목 받고 있는 만큼 개방의 정보도 쉽게 얻을 수 있었고, 발이 넓은 만큼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와도 접근하기 쉬웠다.
그러나 적조가 이런 당연한 이야기를 하려고 굳이 입을 열 사람은 아니었다.
"정원 그 승려가 고집을 피울 거라고 생각해서 말해준 거 아닙니까?"
정원이 평소 금의위나 황자에 대해서도 오만불손한 발언을 했다고 알려준 것은 종조일이었다. 당연히 연우혁처럼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출신이 아닌 무림인이 저런 정보를 바로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아마 종조일은 정원을 믿으면서도 어느 정도는 혹시 싶은 마음이 있어서 알려준 게 분명했다.
실제로 불당에서 본 소림철권은 박력이 있었다. 만약 억지로 끌고 가서 추문한다 하더라도 저런 식으로 발언하면 꽤 많은 무림인들이 소림철권의 편을 들 가능성이 있어보였다.
도드라져 보이는 걸 감수하더라도 그렇게 행동하는 건 그만한 이득이 있기 때문. 새삼 소림철권이 마두들한테 잔혹하게 군 이유가 그럴듯했다.
적조는 자신의 생각이 만족스러웠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뭘 말인가?"
"예? 금의위나 황자에 대해 말한 거 말입니다."
"아. 그거 말인가."
"증좌가 없더라도 그런 말을 했다면 얼마든지 끌고 가서 심문할 수 있을 겁니다. 세세한 조사는 금의위 놈들도 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음. 그게 말이야."
연우혁이 머뭇거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적조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처음에 판관 어른이 옥면개 그 자의 무례한 행동에도 친근하게 대하고, 또 기밀까지 말했을 때에는 무슨 생각인가 싶어 당황했었는데... 역시 진면목을 꿰어보신 모양이군요."
무례하게 군다 하더라도 발끈하는 대신 사람의 진면목을 알아보고 적합한 일을 맡기는 게 진정 벼슬아치가 해야 할 일 아니겠는가.
적조는 새삼 연우혁이 대단한 판관이라고 느꼈다.
"적 포두... 사실 옥면개가 혈교의 첩자다."
"..."
살수는 하늘이 무너진 표정을 지었다.
129화
"농, 농담하지 마라."
정말로 놀랐는지 적조는 평소 밖에서 보여주던 존대 대신 원래의 거친 말투로 말했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연우혁이 말을 바꿀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정말 옥면개가 첩자입니다만."
"도저히 모르겠군! 대체 왜? 옥면개 그 친구가 무슨 짓을 했다고?"
들어보니 옥면개 종조일은 소림철권이 무인을 처벌하려고 했을 때 말리면서 연우혁을 부른 사람이었다.
만약 정말 첩자라면 왜 연우혁을 불렀단 말인가?
"그야 위상 그 자가 첩자일 수도 있으니까 부른 것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내버려뒀다면 소림철권은 위상을 어떻게든 처벌했을 것이다.
만약 위상이 혈교의 첩자라면 저렇게 허술하게 사람을 죽일 일이 없을 테니 누명을 쓴 것일 테고, 그렇다면 같은 혈교 첩자 입장에서는 누명을 풀어주는 게 맞았다.
만약 누명이 아니라 정말로 살인을 저지른 거였다면 혈교의 첩자가 아닐 테니 아쉬울 것 없고.
"애초에 첩자가 강경한 척을 하는 건 병법에도 나올 만큼 당연한 방법이라지만 소림철권은 그 정도가 좀 심했습니다."
소림철권은 맹 내의 강경파 중에서도 극단적인 편에 들어갔다.
강경한 척을 하면서 의심의 예봉을 피해가는 건 흔한 수단이었지만 너무 극단적이면 오히려 적이 생겨나는 법. 연우혁은 소림철권이 날뛸 때부터 첩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영안으로 본 감정도 행동과 틀림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렇다고 쳐도 왜 옥면개가 첩자가 되는 거냐?"
"온건하게 행동하지 않았습니까."
연우혁은 오솔길 앞에 파인 구덩이를 가볍게 뛰어넘으며 설명했다.
"온건하게 행동한다는 것은 적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또, 개방의 삼결 제자에 발이 넓으니 어디든 접근하기 좋은 위치 아닙니까."
"그것만으로 첩자라고?"
"옥면개는 제가 뇌옥에 나타나서 답부터 말하자 크게 당황했습니다."
"...그건 다들 그러는데? 나도 맨날 당황한다. 얼마나 놀라는지 아냐?"
이번에는 적조의 말에 연우혁이 머쓱해했다.
"그 정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적응도 됐을 텐데."
"그게 적응이 되는 놈이 있다면 광증이지."
"여하튼 옥면개가 당황한 건 조금 달랐습니다. 원래라면 제가 소림철권을 잘 설득해주길 기대한 모양인데 노골적으로 실망하더군요."
물론 그것 하나만으로 옥면개를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연우혁이 옥면개를 의심하게 된 건 옥면개가 말 한 마디를 꺼낼 때마다 자꾸 다른 감정을 담아서 행동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침착하게 행동하거나 가만히 있었으면 모를까 매번 말을 할 때마다 다른 꿍꿍이를 풍겨대니 연우혁 입장에서는 수상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연우혁은 과감하게 미끼를 던져보았다. 혈교의 첩자 이야기를 꺼낸 다음 소림철권을 의심하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 전까지는 놀라거나, 두려워하거나, 경계심 정도만을 드러냈던 옥면개였지만 소림철권을 의심하고 있다고 말하자 노골적으로 안심을 드러냈다.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과, 과연... 잠깐. 그러면 증좌가 없는 거 아닙니까?"
침착을 되찾은 적조는 다시 당황했다.
금의위 무인들에게 찾아가고 있는 만큼 당연히 증좌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상 연우혁의 느낌밖에 없지 않은가.
만약 금의위 무인들에게 '옥면개는 친절하게 말할 때는 음흉하게 눈빛을 빛냈고, 도움을 요청할 때는 경계하며 떠보려 했으며, 소림철권을 믿는 척하면서 첩자로 몰려고 했기 때문에 혈교의 첩자입니다'라고 말하면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뻔했다.
"증좌야 없지만 그래도 수상한 놈을 말 안 할 수는 없지 않나.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데 우리가 계속 감시할 수도 없고. 이런 일은 금의위한테 맡겨야지."
"말이야 맞지만, 금의위 놈들이 그렇게 고분고분하게..."
* * *
"감히...!"
"좋다. 놈을 감시하도록 하지."
부지휘사 조굉은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시시콜콜 캐묻는 대신 바로 옥면개를 감시하겠다고 말하는 모습에 옆의 부관은 물론이고 뒤에 있던 적조까지 황당해했다.
'저 놈은 궁금하지도 않단 말인가?'
금의위에 지독한 놈들이 많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보니 과연 그 이야기가 왜 나온지 알 것 같았다.
만약 적조가 저 자리에 앉아 있었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캐물었을 터였다.
"감시해달라고 하는 걸 보니 아직 증좌가 없는 모양이군."
"예."
"아무리 금의위라 하더라도 용봉지회를 앞두고 개방의 삼결 제자를 멋대로 고문할 순 없다. 태자 전하부터 용납하지 않으실 테니까."
금의위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지만 정말로 주변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행동할 수는 없었다. 특히 지금처럼 주변의 이목이 쏠린 한경에서 그런 짓을 했다가는 대소신료들이 조굉을 파직시키라고 목숨을 던질 것이다.
그건 눈앞의 판관도 알고 있을 터. 지금 바로 붙잡자고 말하지 않는 모습에서 조굉은 연우혁이 증좌를 확보하지 못했다는 걸 짐작했다.
"알고 있습니다."
"증좌를 확보하는 대로 부르도록 해라. 더 할 말이 있느냐?"
"첩자를 방심시킬 수 있게 소림철권을 연금했으면 합니다. 소림철권이 잡혀갔다는 걸 알게 되면 한결 안심하지 않겠습니까."
방금 호통치려고 했던 부관은 다시 한 번 발끈해서 입을 열려고 했다.
이 오만방자한 놈이 소림의 무승을 연금하는 걸 무슨 어린아이 장난감 빼앗는 것처럼 편하게 말하고 있었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오히려 역공을 당해 금의위가 책임을 져야 할 수도 있는데...
"개방과 마찬가지로 소림의 중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지만... 뭐, 좋다. 불경한 발언을 몇 개 했으니 그걸 조사한다는 핑계로 불러보마. 더 있느냐?"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돌아가서 나머지 일에 전념해라. 비무도 치러야 할 테니."
연우혁은 가볍게 인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조는 자신의 상관을 경외의 눈빛으로 쳐다보며 그 뒤를 따랐다.
둘이 사라지자 부관이 불만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지나치게 방자한 것 아닙니까? 저 판관은 자신이 무림인인 줄 아는 모양입니다. 아무 근거도 없이 자신을 믿으라니요."
크든 작든 벼슬아치라면 어느 누구든 약점 잡힐 게 있는 만큼 금의위를 상대할 때 조심스러워지기 마련인데 저 판관 놈은 무슨 배짱인지 큰소리만 떵떵 치다가 훌쩍 떠나버렸다. 아주 괘씸한 놈이었다.
"그럴 자격이 있는 자지."
조굉의 말에 부관은 퍼뜩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엄격한 부지휘사가 저렇게 말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방금 자신이 너무 무례하게 말하지 않았나 다시 한 번 빠르게 되뇌어보며, 부관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정도입니까?"
"그렇다면 내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저 자의 말을 믿어줬다는 거냐?"
"아, 아닙니다! 오해십니다!"
부관은 혹시라도 부지휘사의 심기를 거스를까봐 납죽 엎드렸다. 특히나 방금 자신이 한 말들이 이미 어느 정도 심기를 거슬렀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증좌가 없다 하더라도 저렇게 확신을 가지고 말한 이상 옥면개는 첩자가 맞을 거다. 곧 적당한 증좌도 찾아내겠지. 생각해봐라. 증좌도 없이 먼저 와서 말하고 가려면 얼마나 자신이 있어야 가능하겠나?"
"대인의 말씀이 참으로 옳습니다! 저는, 금의위의 위세를 빌려서 소림의 중을 연금하란 게 화가 나서..."
"그 계책에도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첩자를 안심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비무에서 상대할 강적의 발목을 붙잡는 것이지. 소림철권은 그 익힌 무공의 특성상 진충비도를 파훼하기 쉬우니 그것도 계산한 것 아니겠나."
"!"
상관의 설명에 부관은 소름이 돋았다.
처음에는 그냥 증좌 하나 없이 와서 금의위의 힘을 멋대로 이용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판관 놈은 비무부터 시작해서 모든 걸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섭다. 실로 무서운 놈이다!'
* * *
"어. 그런데 소림철권이 연금되면 비무는 어떡합니까?"
"그건 생각하지 못했군. 소림철권의 다음 상대가 누구였지?"
"판관 어른이시죠."
적조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쳐다보며 말했다. 연우혁은 당황했다.
"나였다고?"
"용봉지회에 나가는 무인이 자기 다음 상대를 모르시면 어떡합니까?"
"하도 신경써야 할 일들이 많아서 잊고 있었지. 과연. 소림철권이었나. 아쉽게 됐군."
원래 강적과의 싸움을 즐기지 않았지만 지금 연우혁의 상태는 조금 특이했다. 저번부터 느끼고 있던 무공의 답답함 때문에 어느 누구든 간에 붙어서 손발을 움직여보고 싶었던 것이다.
"혹시 금의위에서 의심하는 거 아닙니까?"
"금의위가 그런 의심을 하겠나. 애초에 비무에서 이기는 걸 도와주겠다고 한 게 금의위였는데. 우연의 일치다."
연우혁은 가볍게 털어낸 뒤 생각에 잠겼다.
운 좋게 옥면개를 잡아낸 건 좋았지만 막상 증좌를 잡으려고 하니 꽤나 골치가 아팠다. 일단 옥면개가 무슨 일을 저질러야 증좌를 확보할 수 있지 않겠는가.
금의위 무인들이 옥면개를 은밀히 조사해서 첩자임을 증명하는 물건이라도 찾아내면 좋겠지만 상대가 그렇게 허술하기만을 바랄 수는 없었다.
'뭐라도 하나 저질러야 한다는 건데. 옥면개 같은 무인이 지금 상황에서 일으킬 수 있는 일들은... 변검 살인, 죽선(竹扇) 독살, 밀폐된 객잔, 음. 너무 많군.'
그리고 옥면개는 지금 과격한 일을 저지르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혈교의 첩자들이 줄줄이 색출되고 있고 본인의 목표 또한 용봉지회에서 명성을 날려 무림맹의 중추로 진입하는 것인 만큼 무리하게 행동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조심하면 조심했지...
"생각보다 만만치 않군."
"밤에 붙잡아서 고문해보면 안 됩니까? 저 놈 정도면 저희 둘이서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겁니다."
"솔깃하지만, 개방 쪽에 설명해야 하는데 고문해서 알아냈다고 할 수는 없겠지. 잠깐.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군."
연우혁의 말에 적조가 살짝 기대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언제나 지혜로 일을 해결했던 판관이 살수의 기예에 관심을 가지다니?
스스로의 경지에 자부심이 가득한 만큼 적조는 뭔가 보여줄 생각이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놈을 몰래 암습하려면 일단..."
"아. 암습한단 게 아니었다."
"..."
적조가 떨떠름해하는 동안 연우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문방사우를 꺼내 붓을 놀렸다. 원래 선비와는 거리가 먼 연우혁이었지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판관 노릇이 붓질도 제법 괜찮게 만들어 준 모양이었다.
"이 정도면 괜찮겠군."
놀랍게도 연우혁이 쓴 건 협박장이었다.
네 치명적인 비밀을 알고 있으니 그게 밝혀지는 걸 원치 않는다면 보물을 갖고 나와라!
이런 식의 협박장은 찔리는 게 많은 무인들에게 특히 잘 통하기 마련이었다.
"확실히. 수풀을 때리면 뱀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옥면개가 이걸 보고 반응을 해줬으면 좋겠군."
연우혁은 기대하며 옥면개의 숙소에 서신을 보낼 준비를 마쳤다.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몰라도 이 정도면 충분히 놈을 흔들어볼 수 있으리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