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하지만 하 교위는 반박하지 않았다.
원래 동창의 환관들은 괴팍하고 오만한 자들이 많은 만큼 괜히 심기를 거스를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오늘은 구명지은을 입지 않았던가.
다행히 상대는 그 이상으로 타박할 생각은 없었는지 더 비난하지 않고 말을 멈췄다.
"다친 자들이 많으니 쉬도록 하거라."
저 멀리 아래에서 지원 요청을 받은 동창의 무인들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멍청하거나 교만한 자였다면 금의위의 공을 뺏기는 게 싫어서 입을 열었겠지만 하 교위는 경거망동하는 대신 깊숙이 예를 표했다.
방금 있었던 싸움만 봐도 이번 일의 공은 동창이 가져가는 게 이치에 맞았다. 교위는 불만스러운 시선을 보내는 부하들을 눈짓으로 엄히 단속했다.
"대인.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무어냐?"
"저희 금의위의 흔적을 어떻게 알아내신 겁니까?"
하 교위는 동창 무인들이 혈견대 무인들의 시체를 조사하고 주변을 샅샅이 수색하는 동안 환단을 먹고 운기조식을 한 덕분에 안색이 한결 나아져 있었다.
아직도 괴로워하는 연우혁을 유심히 지켜보던 주 공공은 교위의 질문에 시선을 돌렸다.
"금의위의 흔적?"
"예."
동창의 무인들을 이끌던 영반(領班)이 건방진 질문에 일갈했다.
"하, 너희 금의위 놈들은 모르겠지만 공공께서는 앉은 자리에서도 천 리 밖을 보시는 재주가 있다. 아둔한 놈들에게 왜 공공께서..."
"저기 진충비도가 깨어나면 물어보거라."
"..."
동창 영반은 머쓱해하며 주 공공을 쳐다보았다. 주 공공은 아랑곳하지 않고 연우혁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판관의 증세를 좀 확인해 보거라."
"혈교의 무리들과 싸우면서 내공을 과하게 쓴 게 아닙니까?"
자리에 있던 무림인들에게 설명을 들은데다가 운기요상으로 내상을 회복하고 있는 줄 알았기에 영반은 의아함을 표했다.
"회복이 너무 느리구나. 대환단을 먹였는데도."
"과연. 대환단을 먹였는데도 저렇다면... 예?"
영반은 귀를 의심했다.
아무리 주 공공이 마음만 먹는다면 보물을 물 쓰듯이 쓸 수 있는 위치라지만 대환단은 이야기가 달랐다.
사실상 소림 연단 공부의 총화 아닌가!
속설에는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는 소림의 이 영약은 한 번 밖으로 나돌면 무림에 혈사가 벌어질 보물이었다.
소림이 만드는 데에 한계가 있는 만큼 주 공공도 그리 함부로 쓰면 다시 구할 수 없을 텐데...
"그걸 저 판관한테 쓰셨단 말입니까? 태감께서는 분명 공공께서 쓰실 줄 알고 내줬을 텐데..."
"난 이미 내공이 충천해서 더 먹는다고 달라지지 않지. 유능한 기재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대환단이 아쉽겠느냐."
"동창에서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분은 공공밖에 없으실 겁니다."
말이야 정론이었지만 영반은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 젊은 판관을 노려보았다. 동창의 다른 환관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저 판관을 얼마나 질시하겠는가.
젊은 판관의 재주가 뛰어나단 건 조정에도 몇 번 이야기가 나돌아서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원래 강호의 보물은 재주가 뛰어나다고 해서 받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천시와 지시와 인시가 맞아야 얻을 수 있는 게 보물이었다.
그런데 저 판관 놈은 재주 하나로 저런 보물을 하사받다니. 괘씸하기 그지없었다.
동창 영반은 창백해진 연우혁의 뒤로 다가가더니 등에 손을 대고 진기요상을 시작했다.
이 판관은 참으로 운이 좋았다. 하필 영반 본인이 동창 내에서도 특별히 의술과 독에 뛰어난 환관이었던 것이다.
'으음?'
속으로 불평하던 영반은 연우혁의 내상을 보고 크게 놀랐다.
상태가 심각해서가 아니었다. 대환단의 명성은 과연 명불허전이라 원래는 심각했을 내상을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치료하고 남은 내공으로는 십이경맥을 따라 돌며 판관을 보호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상이 얕진 않았다. 특히 기경팔맥부터 전신세맥까지 골고루 퍼져 있는 내상은 대체 어떤 무공을 익혔는지 의아하게 만들었다.
"정신이 드나?"
"...예."
연우혁은 고통을 참으며 대답했다. 환관의 진기가 안으로 흘러들어오며 몸의 내공을 유도하는 게 느껴졌다.
상대는 뛰어난 의술을 갖고 있었는지, 연우혁이 현청벽사신공이나 범망공을 운기하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내상을 치유시키고 있었다.
"독문무공에 대해 묻는 건 예의가 아니지만, 상태가 워낙 심각해서 안 물을 수가 없군. 특이한 무공을 익혔나?"
"아니오... 권법은 위국권법을, 암기술은 당문의, 심법은 무당의..."
"...그건 그거대로 신기하군."
동창 영반은 은침을 판관의 혈도에 몇 대 꽂으며 황당해했다. 금의위의 위국권법이야 그렇다 쳐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와 관련된 무공을 판관이 받았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아무리 무림의 인연이 묘하다지만 저게 가능하단 말인가?
"마공을 익혔나 했는데 저런 무공들이라니. 더더욱 모르겠군."
"내공이... 내공이 너무 많은데, 공공께서 제게 무슨 영약을 주신 겁니까?"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오자 연우혁은 위화감을 느끼고 물었다.
언제나 부족한 내공 때문에 영약에 크게 집착했던 연우혁인 만큼, 현재 자신의 내공이 이상하다는 걸 누구보다 크게 느끼고 있었다.
내상을 회복시키는 데에 소모된 걸 감안해도 내공의 양이 지나치게 늘어난 것이다. 이제까지 이런 영약은 먹어본 적이 없었다.
'거의 한 갑자 수준 아닌가?'
내공만 놓고 보면 절정의 경지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연우혁은 대체 무슨 영약을 먹은 건지 의아해했다.
"동창의 비약이다."
"동창은 이런 비약도 만들 수 있단 말입니까?!"
연우혁은 깜짝 놀랐다.
동창의 깊이는 도저히 가늠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아무리 황상의 총애를 받아도 그렇지 당두가 무림의 보물 여럿을 들고 다니고 이런 비약도 만들 수 있다니.
"조용히 해라. 치료에 방해된다."
"예..."
동창 영반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타박하자 연우혁은 입을 다물었다. 상대가 막대한 내공을 써가며 치료하고 있는 만큼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게 없었다.
"혹시 탐혈광랑의 무공 때문인가? 있었던 일을 말해봐라. 최대한 자세히."
영반은 혹시 마두의 무공이 흔적을 남긴 건가 의심했다. 탐혈광랑의 무공이 이런 내상을 입힌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었지만, 그 사이 새로운 무공을 익혔을지도 몰랐으니까.
강호의 기인이사와 독문무공들은 모래알처럼 많지 않던가.
연우혁은 오늘 탐혈광랑과 맞붙었던 싸움을 복기하듯이 차례대로 설명했다. 영반은 퉁명스러운 태도도 잊어버리고 자신도 모르게 감탄했다.
"놈의 팔에 비도를 꽂아 넣었단 말인가?"
"예."
"그건 대단하군! 놈 같은 고수 상대로 암기를 통하게 하다니."
암기술이란 쾌와 중, 강의 묘리도 중요했지만 던지는 사람의 오성(悟性)도 만만치 않게 중요했다. 그저 멧돼지처럼 들이받기만 하는 무인은 암기술과 어울리지 않았다.
이 판관은 원래 명석한 두뇌와 신통력으로 이름이 높았으니 암기술에 능한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했지만, 그걸 절정 중입의 고수에게 통하게 하는 건 다른 이야기였다.
"좀 더 자세히 말해보도록."
"그러니까..."
연우혁은 있었던 일을 다시 자세히 말하고, 그 뒤의 일까지 말했다. 자신이 느꼈던 위화감까지도.
뒤에서 계속해서 듣던 영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설마... 설마 의념을 쓴 건 아니겠지."
"의념 말입니까?"
"됐다. 신경 쓰지 마라."
영반은 젊은 판관이 관심을 보이자 매몰차게 대답했다.
원래 자신의 경지에 맞지 않는, 무공의 높은 절학은 굳이 먼저 알아서 머리를 복잡하게 할 필요가 없었다. 심지어 눈앞에 있는 자는 판관 아니던가. 굳이 의념이니 절정 너머의 경지니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절정의 벽을 깨고 상단전을 개발해야 볼 수 있는 경지를 말하시는 겁니까?"
"뭐? 어디서 들은 거냐?"
"태극검존께 들었습니다."
"...?!?!!"
영반은 깜짝 놀라 금침을 떨어뜨릴 뻔했다.
무당파 출신 최고수이자 현 무림에서 손꼽히는 초절정고수의 별호는 아무리 동창이라 하더라도 가볍게 취급할 수가 없었다.
판관의 자리에 앉아 있는 자가 오대세가나 구파일방과 친분을 깊이 유지하고 있는 것도 신기했는데, 대체 어떻게 태극검존에게 무공을 배웠단 말인가?
"태극검존께 무공을 사사받았단 말이냐?"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냥 한 수 정도..."
연우혁은 가볍게 말했지만 그 말에 담긴 뜻은 가볍지 않았다. 무인의 한계를 뛰어넘은 고수의 한 수는 어떤 비전절학보다 더 심오한 뜻을 담고 있을 수도 있었으니까.
영반은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입을 열었다.
"...좋다. 태극검존께 들었다면 말해도 되겠지. 내 생각에, 네 녀석은 탐혈광랑과 싸우면서 미약하게나마 의념을 쓴 게 아닌가 싶다."
"착각하신 것 아닙니까?"
젊은 판관이 대뜸 부정하자 영반의 이마에 힘줄이 불끈 올라왔다. 주 공공이 아끼는 부하만 아니었다면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연우혁의 황당함에도 근거가 있었다.
아직 절정의 경지에도 오르지 못했는데 의념을 사용했다고 하니 믿기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건 마치 연우혁이 던진 비도에 강기가 실려 있었다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차라리 선천진기를 끌어낸 게 더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저는 상단전이 열려 있어 종종 선천진기를 끌어내곤 했습니다. 이번 내상도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나도 선천진기가 뭔지 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이렇게 몸의 세맥들이 육편이 되진 않아."
선천진기를 끌어내는 경험은 노련한 무인이라면 한두번씩 해 볼 수밖에 없었다. 단전에 쌓은 내공이 바닥났지만 적과는 싸워야 할 때 사람은 결국 자신의 선천진기에 의존하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식으로 끌어낸다고 해서 판관처럼 내상을 입지는 않았다. 판관이 입은 내상은 훨씬 더 거대하고 강렬한 힘이 휩쓸고 지나가야 가능했다.
"그리고 내공이 부족한 상태에서 보법을 펼치는 것도 아니고, 보법을 펼치던 도중 다시 움직임을 보였다고 했지 않나. 그건 선천진기로 불가능하다. 의념을 끌어낸 거지. 네 녀석의 재주가 뛰어나고, 또 태극검존에게 가르침을 받았다면, 아주 희박하지만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
연우혁은 상대의 말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멋대로 무공을 사용했다 다친 줄 알았는데 그게 몇 차원 위의 절학의 편린을 붙잡아서였다니.
더 충격적인 건 스스로가 의식을 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자신이 펼친 무공을 자신이 의식하지 못했다니.
"하지만 처음에 비도를 던졌을 때는 멀쩡했습니다. 그 뒤에는 왜?"
"하수가 의념을 끌어냈다고 해서 무조건 죽는 건 아니다. 말했듯이 네가 펼친 의념은 완벽한 의념이 아니라 의념이라고 부르기도 부끄러운 수준의 경지. 당연히 부담도 그만큼 적겠지. 처음 비도를 던졌을 때 담긴 의념은 네 녀석의 내공이 완전했고 집중력이 높았던 만큼 스스로를 다치지 않게 할 수준이었을 거다. 나중에 보법을 펼쳤을 때 꺼낸 의념은 절박한 상황이라 스스로가 다치는 걸 신경 쓰지 못한 걸 테고."
"그...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연우혁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절박하면 스스로 의념을 먼저 꺼내게 된다니. 기쁘기보다는 두려운 이야기였다.
안 그래도 상단전이 열린 탓에 위험한데 이제는 거기에 의념까지 추가된 꼴 아닌가.
영반은 쉽게 대답했다.
"경지를 올려서 의념을 버틸 수 있도록 해라."
"...그것 말고는 없습니까?"
"없다. 처치는 다 했으니, 보름 정도는 쉬도록 해라."
동창 영반은 마지막 침을 꽂은 뒤 진기요상을 끝냈다. 지금 잡을 수 있는 내상은 전부 처리한 만큼 나머지는 요양만 하면 됐다.
"...감사드립니다."
'견제하는 건가?'
여유를 찾은 연우혁은 상대의 감정을 영안으로 확인했다. 연우혁을 꽤 못마땅하게 여기는 게 느껴졌다.
확실히 동창의 환관이라면 주 공공의 총애를 받는 판관이 못마땅할 수 있을 터였다. 권력이란 건 원래 비정한 법 아니던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러나는 건 하수지.'
이럴 때일수록 권력자 가까이서 권신 노릇을 해야 안전한 법. 연우혁은 그걸 몇 번이고 직접 체험한 만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연 판관."
"교위 어른."
"어른은 무슨. 이제 편하게 불러주게."
하 교위는 연우혁이 한 때 포쾌였다는 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관리에게 아버지라고 부르는 걸 전혀 개의치 않는 연우혁은 냉큼 외쳤다.
"하 형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러게나. 이번 일은 정말 고맙네. 어떻게 찾았는지 궁금하군. 하지만, 그 전에 자네에게 할 말이 있네."
"뭡니까?"
"태자 전하께서 자네를 한 번 보고 싶어하시더군."
"?!!"
116화
아무리 새 아버지를 추가하는 데에 능숙한 연우혁이라 하더라도 황자가 만나자고 하는데 태연하기는 힘들었다.
연우혁이 당황해하자 하 교위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달랬다.
"너무 놀라지 말게. 자네한테 나쁜 이야기는 아닐 테니. 무림인들은 모르겠지만, 실은 태자 전하께서 이번 용봉지회를 존람하러 오시네."
"!"
연우혁은 다시 한 번 놀랐다.
아무리 용봉지회가 정파무림의 기치를 널리 알리는 대회합이라지만 결국 무림의 일.
한경 인근의 호사가들이야 신나서 구경을 오겠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조정의 높은 사람이 방문해서 자리를 빛내주거나 하는 일 같은 건 없었다.
그런데 황자가 용봉지회를 구경하러 온다니.
정파 장로들이야 영예로운 일이라고 뛸듯이 기뻐하겠지만 연우혁은 걱정부터 됐다.
칼 찬 무림인들이 우글거리는 자리에 금지옥엽보다 더 귀한 사람이 방문하는 것 아닌가.
황자의 손끝에 생채기 하나라도 나는 순간 뒷감당을 어떻게 해야 할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잠깐, 하 형. 이거 제가 알아도 되는 겁니까?"
무림인들도 모른다면 아마 금의위들 중에서 몇몇만 은밀하게 알고 있는 기밀일 텐데 연우혁한테 말해주다니. 듣고 나서도 이래도 되는지 의문이었다.
"자네라면 충분히 비밀을 지켜주겠지."
"..."
차라리 말하지 말지, 말해놓고 당당하게 저러는 모습에 연우혁은 할 말을 잃었다.
다행히 하 교위가 그렇게 생각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다른 이유가 더 있었다.
"그리고 어차피 태자 전하를 뵙게 되면 자네도 알게 될 사실이지 않나."
"...그건 그렇군요."
"태자 전하께서는 자네 소문을 흥미롭게 들으셨네."
연우혁은 찻잔에 든 맹물을 쿨럭였다.
언제나 권력자 가까이서 권신을 꿈꾸는 연우혁이었지만 설마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사람에게 관심을 받았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 어떤 소문 말입니까?"
"당연히 좋은 소문이지. 자네가 해결한 일들이 몇 개인가? 그 중에는 자네가 아니었다면 해결하지 못했을 일들도 여럿이네. 조정에서도 자네의 이름을 기억하는 관리들이 있어."
"...과분한 말씀이군요."
하 교위의 말에 연우혁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신이 생각치도 못한 명성이 조정에서 돌고 있었을 줄이야.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가늠이 잡히지 않았다.
'이건 예상외로군. 뇌물을 바치기 전에는 소문이고 뭐고 돌지 않을 줄 알았는데...'
연우혁의 원래 계획은 한경에서 밑천을 단단히 확보한 뒤, 궁 판관이나 지부 어른의 도움을 받아 조정의 높은 분을 하나 소개받아 줄을 잡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아무리 한경에서 공을 세워도 조정에서 언급되기가 쉽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하 교위의 말을 들어보니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연우혁이 한경에서 해낸 일들이 꽤나 인상 깊었는지, 뇌물을 바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언급이 되고 소문으로 돌고 있었다.
"차라리 자네가 탐관오리였다면 훨씬 더 인정받았을 텐데!"
하 교위는 분하다는 듯이 내뱉었다.
금의위로 일하다보면 조정에서 칭송 받는 관리라는 게 사실은 얼마나 강한 연줄을 잡고 있는지, 혹은 많은 뇌물을 바치고 있는지로 결정된다는 게 느껴지기 마련이었다.
만약 연우혁이 다른 탐관오리들처럼 탐학질을 해서 뇌물을 바쳤다면 지금처럼 미적지근한 반응이 나오지 않았으리라.
지금은 아무도 연줄이 있는 자가 없어 소문이 나오더라도 별다른 호응 없이 메아리로 끝났다.
"괜찮습니다. 하 형."
물론 연우혁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벌써부터 소문이 돌고 있다는 것 자체가 예상 밖이었던 만큼 아쉽거나 그러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자리가 잡히는 대로 연우혁도 슬슬 재산을 모을 생각이었던 만큼 지나치게 청백리로 오해받는 것도 좀...
"괜찮을 리가 있나? 탐욕스러운 자들이 청빈한 관리를 밖으로 몰아내는데!"
"진짜 괜찮습니다. 그보다 태자 전하에 관해서 더 말씀해주십시오."
"아. 그렇지."
하 교위는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황자 입장에서야 흥미와 호기심으로 가볍게 만나고 싶어하는 거겠지만, 신하 된 입장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당연히 최대한 알고 가야 했다.
"전하께서는 선량하고 너그러운 분이지. 백성들을 아끼시고 사랑하시는."
'오.'
연우혁은 놀랐다. 물론 하 교위는 금의위의 일원으로서 충성스러운 사람인만큼 객관적인 평가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하 교위는 꽤나 진심으로 보였다.
그것만 봐도 저 평가에 어느 정도 진실이 섞여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높은 권력을 가진 지위에 올라갈수록 선량하단 말을 듣기 힘든 만큼 더더욱 놀라운 평가였다.
"훌륭하신 분이로군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주의할 건 딱히 없습니까?"
"으음."
하 교위는 망설였다. 이걸 말하는 게 과연 득이 될지 아닐지 고민이 되었던 것이다.
"필요하다면 태자 전하 앞에서도 마땅히 능력을 선보여야 하겠지만, 너무 과하게 하지는 말게."
"어째서입니까?"
"...자네라면 분명 이유를 깨달을 걸세."
'그냥 말해주시지.'
연우혁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하 교위가 능력을 믿어주는 건 고마웠지만, 스스로 깨닫지 못할까봐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나와 내 부하를 어떻게 찾은 건가?"
하 교위의 질문에 태자와 관련된 일로 머릿속이 복잡했던 연우혁은 대충 대답했다.
"조금 생각해보시지요. 하 형께서도 분명히 이유를 깨달으실 겁니다."
"음."
연우혁의 말에 골똘히 고민하던 하 교위는 속으로 난색을 표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혀 짐작가는 게 없었던 것이다.
"잘 모르겠네만..."
그러나 연우혁은 대답이 없었다. 하 교위는 야속하다는 듯이 아우를 쳐다보았다.
* * *
-공공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일이 있으시다. 꺼져라.
은혜를 입은 만큼 감사 인사를 전하려고 했지만, 동창 영반은 퉁명스럽게 축객령을 내렸다.
믿지 않고 영안을 열어 주변을 둘러봤지만 정말로 주 공공은 보이지 않았기에 연우혁은 순순히 물러났다.
'새삼 허 중관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느끼게 되는군.'
무림의 새파란 후배가 상관의 총애를 받는데도 너그럽게 도와주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젊은 시절에 타인의 양물들을 자르고 다녔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허 중관은 참 그릇이 큰 사람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연통이라도 넣을까 싶었지만 밀린 일들이 많아서 그럴 수 없었다. 연우혁은 의관을 단정히 하고 말했다.
"출발합시다."
"따라오시오."
금의위 무인들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저 연우혁을 안내하러 온 자들이 하 교위와 크게 차이 나지 않는 일류의 고수들이라는 점에서 새삼 지금 누구를 만나러 가는지가 느껴졌다.
"타시오."
마차에 타자 무인들이 연우혁의 눈을 검은 천으로 가렸다. 영안이 있는 만큼 별 의미는 없었지만 연우혁은 금의위 무인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조심했다.
복잡한 한경의 저잣거리를 지나, 권문세가들이 머무는 궁궐 같은 저택들을 지나...
다른 귀빈들과 달리 황자는 지부 어른의 저택에서 머무르지 않았다. 한경의 지부를 믿을 만큼 호위를 맡은 금의위 무인들은 무르지 않았다.
"내리시오."
몇 번 더 빙글빙글 돌고 나서야 연우혁은 처음 보는 저택 앞에서 내릴 수 있었다. 한경의 저택들 중에서 그리 크지도, 그리 작지도 않은 적당한 모양새의 저택이었다.
'분명 거상의 저택으로 알고 있었는데?'
연우혁은 이 저택이 사실 금의위가 예전부터 신분을 위조해 사놓은 안가라는 걸 깨달았다.
보통 안가라고 하면 작고 은밀한 가옥들을 예상하기 쉬웠지만, 혹시라도 귀한 신분이 올 때를 대비한 이런 안가도 있는 법.
"!"
저택 앞뜰에 창을 들고 있는, 오십쯤 되어 보이는 금의위 무인을 보자 연우혁은 깜짝 놀랐다.
'절정... 그것도 말입의 경지인가!?'
탐혈광견도 맞붙는다면 수십 초를 버티지 못하고 뼈가 으스러질 것 같은, 잘 갈무리 된 기세가 상대에게서 느껴졌다.
이 정도 되는 무인은 고수들이 즐비한 금의위에서도 손꼽혔다. 연우혁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황룡어창(黃龍御槍) 조 대인이십니까?"
"맞다."
황룡어창이란 별호와 함께, 금의위 부지휘사라는 관직을 갖고 있는 조굉은 젊은 판관을 의아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경지가 한창 낮은 무인이 본인의 무공 경지를 꿰뚫고 알아보는 건 꽤 드문 일이었다.
"어떻게 알았나?"
"창대가 몇 년은 쓴 것처럼 낡았지만 창날은 조금도 무디지 않았다는 점에서 보통 고수가 아니시라는 걸 짐작했습니다."
"금의위에 창술 고수가 나밖에 없나?"
"이런 중요한 곳에서 혼자 계신 만큼 그 지위가 비범하시지 않겠습니까."
사실 영안으로 본 것이었지만, 상황에 맞춰 설명을 해내자 조굉은 꽤나 인상 깊게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과연 그렇군. 내 무공에 몰두하느라 부하들을 치웠는데, 안일한 짓이었어. 재주가 제법이구나."
연우혁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 위로 조굉의 서늘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네 재주가 뛰어나고 소문이 갸륵하니, 방금 보여준 일에 대한 대가로 조언 하나를 해주마."
"귀 기울여 듣겠습니다."
"태자 전하 앞에서 받는 질문에 답하되, 감히 어심을 떠보거나 어지럽히려고 하지 말거라. 금의위 무인들 중 너를 의심하는 자가 많다."
"?!"
당황한 연우혁이었지만 하 교위의 말과 조굉의 감정을 읽자 상황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과연... 금의위는 꽤 배타적이군.'
기본적으로 금의위 무인들은 자신들을 제외한 나머지 관리들을 전부 다 탐관오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이들이 황자를 만나는데 기꺼워할 리 없었다.
연우혁이야 그런 소문이 없어서 망정이지만(있었다면 만나지도 못하게 했을 것 같았다), 하필이면 연우혁은 동창과 관계가 있지 않던가.
금의위 입장에서 교언영색으로 황자를 홀리지 않을지 의심이 가는 것도 당연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젊은 판관이 조심스럽게 대답하자 부지휘사는 만족한 것 같았다. 들어가 보라고 창끝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
안은 더욱 살벌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일류 이상 고수들이 몇이나 숨어 있었는지 머리가 아플 정도였다. 금의위의 최정예를 전부 끌고 온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은, 둥그렇고 온화한 인상을 가진 남자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황태자 주상(朱常)이었다.
"그대가 진충비도인가?"
"예. 전하."
옆에 있던 금의위 무인 한 명이 속삭였다.
"전하. 무림인의 하찮은 별호 따위를 굳이 언급하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판관이라고 불러주십시오."
"하지만 참으로 멋진 별호 아닌가?"
"집 지키는 개들 주제에 어딜 끼어드는 것이냐?"
날카로운 공주의 목소리가 안쪽에서 튀어나왔다. 금의위 무인들이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하오나 전하, 무림인들은..."
"오라버니가 너희의 가르침 없이는 부족한 천치라도 되느냐? 네놈들이 윗사람을 어떻게 업신여기는지 잘 알겠다!"
"진정하거라. 나쁜 뜻은 없었을 거다."
황자는 안쪽을 향해 말했다. 연우혁은 영안을 열고 안쪽을 훑어보려고 했지만 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통하지 않았다.
'과연 황족인가.'
황자도 보물을 갖고 있었는지 영안이 읽히지 않았다. 연우혁은 괜히 신통력을 썼다가 의심을 받지 않도록 조심했다.
분위기가 어색해졌음을 느꼈는지 황자는 연우혁에게 웃으며 말했다.
"내 동생일세. 같이 용봉지회를 구경하러 왔지."
"무림인들에게는 자손만대 길이 남을 영광일 것입니다!"
안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났다. 연우혁은 속으로 생각했다.
'황족답게 까다로운 사람인 모양이군.'
기본적으로 권력이 높은 사람 중에서 성격이 원만하고 너그러운 사람은 드물었다. 타고난 핏줄을 가진 황족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오라버니. 주의하는 게 좋을 겁니다. 금의위 무인들은 윗사람을 업신여기는 만큼, 자기들보다 뛰어난 재주를 보이는 관리는 트집을 잡을 테니까요."
"아닙니다! 전하. 말씀을 거두어주십시오!"
방금까지 철통같은 분위기를 풍기던 금의위 무인들은 쩔쩔매며 안쪽의 공주에게 간청했다.
용화공주가 괴벽한 성정을 갖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성마르게 구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들이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방금 무림인의 별호를 굳이 부를 필요 없다고 지적한 게 그리 큰 잘못이었단 말인가?
'...정말 까다로운 사람인 모양이군!'
연우혁은 금의위 무인들이 뻣뻣하게 얼어붙는 걸 영안으로 느끼고 같이 긴장했다. 언제 저 화살이 자신한테 날아올지 알 수 없었다.
117화
다행히 황자는 황족에 어울리지 않는 수더분한 성정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진정하라며 달래자 용화공주도 더 이상 날카롭게 금의위를 쏘아붙이지 않았다.
"이거 참. 진충비도 그대는 신경 쓰지 말게. 위사들이 너무 충성스럽다보니 동생이 화를 낼 때가 있지."
연우혁은 대답 대신 공손히 기다렸다. 괜히 공주 전하와 금의위 무인들의 다툼에 끼어들 필요가 없었다.
'조 대인과 하 교위의 말이 이런 뜻이었나.'
밖에서 들었던 조언 덕분에 연우혁은 방금 일어난 일을 조금 더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었다.
용화공주가 까다로운 사람인 건 당연한 것이었고(애초에 황족 중에 까다롭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걸 감안해도 금의위는 확실히 꼿꼿하고 배타적인 집단이었다.
얼핏 보면 신하가 꼿꼿한 게 좋게 보일 수 있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충신이야말로 꼿꼿한 허리를 갖고 있지 않던가.
그러나 사실 오만한 탐관오리도 꼿꼿한 태도를 가질 수 있었다.
고관들 중에도 자기 자신만이 국사(國事)를 돌볼 수 있다고 자부하며 젊은 관리들이 올라오려는 걸 멋대로 막는 이들이 많았다. 이들은 당연히 청빈하지도 않았다.
금의위가 얼마나 깨끗하고 더러운지는 연우혁이 알 수 없었으나 저런 조직의 특성상 완전히 깨끗할 수는 없을 터.
그런 주제에 무림인을 무시하고 관리들을 무시하면서 오직 자기들만이 황상을 수호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한다면 그것도 꽤나 오만하고 독선적인 행동일 터였다.
황자는 워낙 무던한 사람이라 금의위의 행동을 넘어가주더라도 안의 용화공주는 황족인 만큼 평소부터 그런 금의위의 건방짐을 거슬려했던 게 분명했다.
방금 같은 말에 저렇게 불호령이 나올 정도라면...
"이번에 그 마두... 누구였나?"
"탐혈광랑이라는 혈교의 마두였습니다."
"그래. 그 마두로부터 금의위 교위의 목숨을 구해줬다면서? 어떻게 구해줄 수 있었나?"
황자를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금의위 무인들의 얼굴에 순간 못마땅한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금의위 무인들 중에서 황자를 직접 모시고 수호하는 자들은 정예 중에서도 최정예인 만큼 무공의 경지가 높고 금의위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자들이었다.
그런 금의위 무인 입장에서 웬 판관 놈이, 그것도 동창과 어울린다는 소문이 도는 놈이 운 좋게 공을 세워서 황자의 관심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불쾌하게 느껴졌다.
만약 감언이설로 전하의 귀를 더럽히기라도 한다면...
"검을 보고 하 교위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걸 짐작했습니다."
"검을 보고?"
"예."
"위사들은 밖을 돌아다닐 때 평범한 검을 들고 다니지 않는가?"
황자의 질문에 옆에 있던 금의위 무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전하. 금의위의 무인들은 밖을 돌아다닐 때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신분을 들킬 좌증을 결코 소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는군. 그런데 진충비도 그대는 어떻게 알았다는 거지?"
"꼭 검에 수실이 달려 있고 보화로 된 장식이 달려 있어야 그 신분을 짐작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검을 발견했을 때 저는 그 검이 겉은 수수하지만 꽤 잘 만들어졌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검의 균형과 날의 예기를 보면 짐작할 수 있지요."
"오호."
황자는 흥미로워하며 연우혁의 말을 귀 기울여 들었다. 손끝은 어서 계속 말해보라는 듯이 까닥거렸다.
장검을 잘 만드는 건 생각보다 뛰어난 기술이 필요했다. 특히 그 안의 무게균형을 맞추는 건 장인의 경험 없이는 불가능했다.
"전하께서도 알고 계시겠지만, 지금 한경에는 용봉지회를 앞두고 무림인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가난한 무인에게 이 정도 되는 검은 감지덕지일 터. 그런데도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검을 잃어버린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군."
"무인이 검을 잃어버리는 건 드문 일입니다. 정말 다급한 일이 생겼다는 뜻인데, 주변에는 그런 흔적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검을 잃어버린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그렇다는 건 하나밖에 없지요. 누군가 흔적을 전문적으로 지운 것입니다. 그걸 깨닫고 나니 그 뒤는 비교적 쉬웠습니다. 아무리 흔적을 지운다 하더라도 완전히 발자취를 숨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금의위와 관련된 일이란 건? 또, 혈교가 습격했다는 건 어떻게 안 건가?"
"이런 검을 들고 다니는 무인이라면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에 버금가는 문파의 무인일 텐데, 그런 무인이 검에 아무런 표식을 남기지 않을 리 없지 않습니까. 또 그런 금의위를 습격할 이들이 흑도에 얼마나 되겠습니까?"
황자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옆에 있던 금의위 호위들도 자신도 모르게 놀라움의 소리를 낼 정도였다.
금의위 무인이 급히 이동하다 떨어뜨린 검 하나로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짐작하다니, 이건 사람이 아닌 천인(天人)의 지혜였다.
"정말 대단하군, 진충비도!"
"보잘것없는 재주일 뿐입니다. 전하."
"한 가지만 더 물어봐도 되겠나? 보고를 들으니 탐혈광랑..."
"탐혈광견입니다. 전하."
감히 황자의 말을 끊는 연우혁의 모습에 주변 금의위 무인들은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연우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영안으로 보지 못해도 황자한테 통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탐혈광견이라니?"
"이미 보고를 들으셨겠지만, 놈은 스스로의 별호에 '견'을 자처했습니다."
연우혁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간단하게 설명해줬다. 황자는 눈물을 흘릴 만큼 박장대소했다.
"과연! 그런 일이 있었나! 그렇다면 더더욱 탐혈광견이라고 불러야겠군그래. 이 어리석은 사람을 깨우쳐줘서 고맙네, 진충비도!"
금의위 무인들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재수 없는 놈이 재주는 실로 대단했다.
"그 탐혈광견이 혈교 장로들에게 습격을 받았다는 일 말일세. 금의위 무인들도 그 일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 그런데 어느 누가 습격했는지는 짐작하지 못하던데. 진충비도 그대는 어떻게 아는가?"
'이거...'
연우혁은 긴장했다.
몰라서 긴장한 게 아니라, 금의위와의 관계 때문에 긴장한 것이었다.
조 대인과 하 교위가 경고했듯이 금의위는 연우혁 같은 외인이 지나치게 재주를 세우는 걸 좋게 보지 않았다.
황자 앞에서 능력을 보여주긴 해야겠지만 금의위와의 관계가 완전히 틀어질 만큼 날뛰어선 안 됐다. 앞으로 금의위와 척을 질 것도 아니었으니까.
'이 정도는 괜찮겠지.'
"그 또한 이야기를 듣고서 짐작했을 뿐입니다."
"짐작했다? 듣기만 했는데?"
"예. 탐혈광견 본인은 밝히지 않았지만, 교의 장로, 그것도 무공으로 이름이 높은 마두를 습격하면서 혈교도들이 독을 쓰지 않을 리 없습니다. 당연히 독이 있었을 것이라 짐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대는 독의 이름까지 맞췄지 않나. 그것도 이야기만으로 가능한 일인가?"
"가능합니다. 전하. 먼저 몇몇 독, 그 냄새와 맛이 강하거나 즉시 효과를 발휘하는 혈교의 맹독들은 제외했습니다. 남은 독들 중에서 탐혈광견이 구한 해독제와 짝이 맞는 독을 골랐지요."
"술자리에서 탐혈광견이 의심하지 못하고 마셨으니, 냄새나 맛이 독하면 안 된단 건 알겠다. 즉시 효과를 발휘하는 것도 아닐 테고. 하지만 탐혈광견은 남몰래 해독제를 구했다지 않느냐? 어떻게 짝이 맞는 독을 골랐지?"
"탐혈광견 본인의 수가 얕았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탐혈광견은 재료를 구해 온 부하들을 모조리 살인멸구했습니다. 그걸로도 모자라 헛소문을 퍼뜨렸지요. 연공을 위해 재료를 모으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 헛소문에 들어가지 않은 재료만 뽑으니 진짜 해독제를 알 수 있었습니다."
"...!!!"
황자는 물론이고, 황자를 호위하고 있던 금의위의 최정예 무인들도 전율했다.
마두 놈의 수작도 놀라웠지만 그 수작을 손금 보듯이 읽어내는 판관의 재주는 그보다 더 놀라웠다.
"그러면! 진충비도 그대는 혈교의 어떤 자가 그 광견을 습격했다고 생각하는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황자가 연우혁을 재촉했다.
"다른 장로들 전원입니다."
"...뭐라고?"
"다른 장로들 전원입니다. 전하. 탐혈광견이 무도하고 포악한 자지만 결코 멍청하진 않습니다. 그런 자가 몇 년 동안 어느 장로든 범인을 찾아내지 못했다는 게 무슨 의미겠습니까? 다른 장로들이 모두 다 힘을 모아 증좌를 없앴다는 거겠지요."
"놀랍군!"
담벼락 너머서 부지휘사 조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래 황자를 호위하는 금의위 무인들을 총괄하는 입장에서 결코 끼어들 생각이 없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전하."
"아냐, 아닐세. 나도 감탄했네. 부지휘사 그대도 감탄했는가?"
"이 늙은 무인의 생각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물으십니까. 하지만 감히 대답해드리자면... 예. 실로 놀랐습니다."
조굉은 황자 앞으로 걸어 들어오며 공손히 예를 표했다.
"전하. 진충비도가 마음에 드신다면, 이 자를 금의위에 들이는 건 어떠십니까?"
"?!"
"!!!!"
연우혁도 놀랐지만, 자리에 있던 금의위 무인들이 받는 충격은 그보다 비교할 수 없이 컸다.
황자를 직접 수호하는 금의위 무인은 무공은 물론이고 그 신분이나 충성심에서도 남다른 기준을 갖고 있었다. 같은 금의위 무인이어도 아무나 들이지 않는데 하물며 동창과 어울리는 외인이라니.
"대인..."
금의위 무인의 항의가 나오기도 전에 무섭게 조굉이 살기를 쏘아냈다. 무인은 피를 울컥 토하며 무릎을 꿇었다.
"어느 안전이라고 입을 감히 놀리느냐? 전하께서 네놈을 귀하게 여기신다고 네놈이 뭐라도 된 줄 아느냐!"
"죽, 죽여주십시오!"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금의위 무인이 이마를 땅에 박으며 사죄했다.
너그러운 황자 전하 덕분에 감히 목이 잘려도 성치 않을 무례를 저지른 것이다.
조굉은 속으로 못마땅하다는 듯이 부하를 노려보았다.
'더 엄하게 가르쳤어야 했거늘.'
황자 전하를 모시기에 무공이나 충성심은 합격이었지만, 이 자리에 있는 위사들은 혹독하게 훈련받은 만큼 자만심 또한 크게 가지고 있었다. 명문가 출신으로서 몇 번의 시험을 통과했는데 자만심이 없다면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조굉은 자만심이란 게 얼마나 위험한 독인지 잘 알고서 경계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오랫동안 궐을 지켜오면서 자만심 때문에 몰락한 사람을 얼마나 많이 봐왔던가.
특히 용화공주 같은 경우에는 그 소문난 총명함으로 금의위 위사들이 가진 자만심을 꿰어보고 있었다. 그리고 용화공주는 자기 오라버니 머리 위에 올라보겠다고 건방을 떠는 신하를 내버려둘 만큼 호인이 아니었다.
더욱 조심하고 공손히 굴어도 모자랄 판에 말실수나 하다니. 조굉은 새삼 인재가 부족하다는 걸 느꼈다.
무공이나 충성심이 뛰어나면 식견이 좁고, 또 식견이 넓은 자는 무공이나 충성심이 부족하고...
"부지휘사. 너무 그러지 마세요."
"아닙니다. 전하. 전하께서 용서를 베푸시더라도 감히 제가 어떻게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조굉은 황자의 말에도 부하를 일으켜 세우지 않았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안쪽을 쳐다보았다. 다행히 용화공주는 아무 말이 없었다.
'싸울 거면 난 그냥 보내주고 싸울 것이지...'
말싸움을 구경하던 연우혁은 수십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걸 느꼈다.
그만큼 조굉의 제안이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예전에 하 교위한테 받았던 제안과는 질적으로 다른 제안이다.'
그 때는 금의위 교위를 돕는 말단 병졸 같은 제안이었다면, 지금은 부지휘사가 황자 앞에서 제안한 만큼 나름 그럴듯한 금의위 자리를 받을 수 있을 터.
군관 쪽이겠지만 금의위 소속이라면 보통 군관과는 차원이 다른 권세가 있을 터였다.
물론 판관 같은 정관으로서의 출세보다 훨씬 더 예측불허인, 아슬아슬한 출셋길이 되겠지만...
"그런데 진충비도는 동창과 인연이 깊다고 들었는데, 그건 괜찮은 건가? 괜히 진충비도를 괴롭히는 일 아닌가 걱정되는데."
"어리석은 자들이 괜한 헛소문으로 전하의 귀를 더럽힌 모양이군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전하. 저런 무불통지(無不通知)가 천하에 그리 흔하겠습니까. 동창이라 하더라도 손을 빌리고 싶은 건 당연할 겁니다."
부지휘사는 황자에게 말을 올리며 동시에 부하들에게 채찍처럼 휘둘렀다.
금의위 무인들은 아까까지만 해도 무관심한 태도로 방관하던 부지휘사의 돌변에 억울함을 느꼈지만,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고개만 조아렸다.
그들 입장에서는 조굉이 그 짧은 사이 진충비도에 대한 판단을 바꾸고, 황자의 마음 또한 기막히게 읽어냈다는 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
"전하께서 신경이 쓰이신다면 앞으로 동창과 접촉이 없도록 제가 태감께 말을 전하고 위사들에게도 단단히 못 박도록 하겠습니다. 추후 그 일을 꺼낸다면 혀를 뽑아버리지요."
"으음. 진충비도 자네 생각은 어떻지?"
황자는 살짝 마음이 당겨서 연우혁에게 물었다.
괜히 한경의 명관을 금의위로 데리고 가서 백성들에게 원망을 듣고 싶지 않았지만, 또 저런 인재가 금의위에 있다면 든든할 것 같았다.
"전하. 황송한 말씀이오나 저는 아직 백성들을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
각오를 다진 연우혁의 대답에, 다들 놀라기도 전에 안쪽에서 무언가 넘어지고 박살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
118화
"진정하거라. 백성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갸륵하지 않느냐? 꼭 금의위의 위사로 일해야 나랏일을 하는 게 아니다."
황자는 동생이 건방진 판관에게 분노를 터뜨린 줄 알고 급히 달랬다.
금의위 무인들도 비슷하게 생각했는지 긴장으로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판관이 용화공주의 진노를 받는 건 알 바 아니었지만, 공주의 성정을 생각해봤을 때 자신들에게까지 불이 번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들어보도록 하지요."
정작 안쪽의 용화공주는 보기 드물게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깨진 다기(茶器) 조각을 소매로 치우고 있었다.
밖의 오해와 달리 이번은 건방진 아랫사람의 태도에 분노를 터뜨린 게 아니었다. 그저 놀라서 찻잔을 떨어뜨린 거였다.
설마 저기서 제안을 거절할 줄이야.
황자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설령 부지휘사가 제안했어도 거절할 사람이 드물 텐데, 하물며 황자가 자신의 사람이 되라고 내민 제안을 저렇게 거절하다니.
'믿기 힘들군...'
실제로 이제까지 진충비도의 행적을 유심히 지켜봤던 용화공주는 '이 정도면 제안을 받겠군'하고 예상했었다.
총명하고 영리한 사람인만큼 더더욱 받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 * *
'차라리 마두를 상대하는 게 낫겠군.'
밖의 연우혁은 진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황자나 부지휘사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거절하기 위해 마음을 다졌는데 안의 공주까지 분노를 터뜨리자 간담이 서늘해졌다.
황자나 금의위와 척을 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괜히 건방지다고 용화공주의 원한을 사는 게 아닌가 걱정이었다.
'하지만 이미 어쩔 수 없다.'
이제 와서 말을 바꾸는 것이 더 최악의 선택. 연우혁은 자신이 선택한 대로 밀고 나갈 결심을 굳혔다.
연우혁이 황자의 제안을 거절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었다.
안정된 정관의 직위를 버리고 금의위에서 일하는 것의 위험성, 가문 없는 외인으로서 오만한 금의위 무인들을 상대하는 것의 어려움 등은 물론이고...
'동창에게 도움을 너무 많이 받았어.'
특히 주 공공에게 받은 게 너무 많았다. 인간적인 감사함을 떠나서 그렇게 받았는데 인연을 자르고 금의위로 가버리면 후환이 없을 수가 없었다.
연우혁은 부지휘사가 태감에게 못을 박아주겠다고 한 걸 믿지 않았다.
원래 사람의 원한이란 건 음습한 것이라 겉으로는 하지 못해도 언제든 암암리에 보복이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주 공공이 동창 내에서 황제의 총애를 받는 권신이 거의 확실한 상황에서는 더더욱 위험했다.
주 공공이 나름 청렴하고 강직한 관리긴 했지만 원래 한 길 사람의 속을 파악하기는 힘든 법. 영안으로 읽지 못한 만큼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솔직히 주 공공이 대승적으로 국사(國事)와 황자를 위해 도량 넓게 양보해줄 거란 기대는 너무 연우혁의 형편에만 좋게 생각하는 일이었으니까.
지금 연우혁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가장 그럴듯한 거절이었다. 거절하면서도 금의위와 황자의 호의를 살 수 있도록.
"금의위에 들어가게 되면 분명 전하의 덕을 천하에 밝히고,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터럭만큼이나마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옛 성인이 말하기를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아직 수양이 부족한데 어떻게 천하의 일을 관장할 수 있겠습니까. 부디 통촉해주십시오!"
'됐다!'
연우혁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좌중의 분위기가 느슨해지고 부드러워지자 안도의 한숨을 얕게 뱉어냈다.
부지휘사는 물론이고 다른 깐깐하고 오만한 금의위 무인들도 방금 말에는 꽤 호의적인 태도를 보내고 있었다. 황자가 인정할 정도의 관리가 겸양하는데 그걸 나쁘게 볼 사람은 드물었다.
"진충비도. 천하의 판관들이 다 그대와 같다면 요순시대가 어찌 옛말이겠나!"
황자도 꽤나 감명을 받았는지, 얼굴에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외쳤다.
"그래. 한경 백성들에게서 그대 같은 명관을 뺏어가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지."
"들어보니 전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한경의 백성들이 얼마나 아쉽겠습니까."
부지휘사는 황자가 결정하자 옆에서 말을 거들었다. 황자는 웃으며 연우혁에게 말했다.
"그래도 진충비도. 그대의 재주가 필요한 일이 분명 있을 텐데 아쉽긴 하군."
"언제든 불러주시면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동창의 중관들이 진충비도와 친하다고?"
마지막 말은 연우혁에게 물어본 게 아니라 부지휘사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부지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인연이 깊다고 들었습니다."
"금의위 위사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게 되면 그쪽에서 오해를 하진 않을까?"
"아닙니다. 전하."
부지휘사는 겁없이 나서는 연우혁을 보고 놀란 눈빛을 던졌다. 마치 눈빛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아까 용화공주 전하께서 노여워하시는 걸 보면서도 건방지게 끼어들다니, 겁이 없느냐?'
하지만 연우혁도 어쩔 수 없었다. 그대로 내버려뒀다가는 대화가 이상하게 흘러갈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제가 만난 동창의 중관들은 모두 다 국사와 관련된 일로 충성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결코 금의위 무인들을 만난 일로 쓸데없는 오해를 하진 않으실 겁니다."
금의위 무인들은 연우혁의 말에 비웃듯 입술을 비틀었다. 동창과 앙숙인 만큼, 금의위는 환관들을 탐욕스러운 돼지새끼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연우혁이 이렇게 말하는 건 이유가 있었다.
괜히 부지휘사가 나서서 '태감한테 말해서 금의위 사람이라고 언질만 남겨놓지요'라고 한다면 결과가 꼬였다.
차라리 금의위 안으로 들어가는 게 낫지...
"하하. 그렇지. 진충비도. 그대는 아는군? 동창 무인들이 오해를 받지만, 사실 그들만큼 충성스럽고 선량한 이들도 드물지."
"..."
"..."
부지휘사는 물론이고 연우혁까지 동시에 말문이 막혔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이다.
당연히 황자 앞에서는 태감도 간, 쓸개를 빼놓고 굴 테니 그렇겠지만...
"맞... 맞는 말씀이십니다."
다행히 연우혁이 먼저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부지휘사도 거기에 호응했다.
"분명 오해를 받는 면이 있지요. 관리들이 금의위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진충비도 그대가 다른 관리들처럼 동창을 두려워하지 않고 같이 국사에 힘쓰니 기쁘군그래."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연우혁이 동창과의 관계가 나쁘지 않다고 확인해주자 황자는 더 이상 걱정하는 걸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럼 정무로 바쁜 판관을 그만 성가시게 해야겠군."
'살았다.'
황자의 말이 떨어지자 연우혁은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호랑이 굴, 아니, 황태자의 굴에 들어가서 살아나온 것이다.
심지어 금의위나 동창, 황자 중 어느 누구의 심기도 거스르지 않고서!
어느 무림인도 이런 업적을 알 수 없겠지만, 연우혁은 오늘 스스로가 해낸 업적이 무림이 마교를 멸문시킨 업적보다 더 자랑스럽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이걸로 됐다. 황자에게 이름을 알렸으니, 판관으로서 공을 착실히 쌓아가면 충분히 더 출세할 수 있겠지.'
금의위나 동창 또한 연우혁을 쉬이 건드리진 않을 테니, 다른 관리들에게는 없는 특권이 하나 생긴 셈이라고 봐야 했다. 사실 관리로서 이 둘만 피해도 면사금패 부럽지 않았다.
"그런데 진충비도. 그대에게 마지막으로 물어볼 게 하나 있는데."
"!"
다 끝난 줄 안 상황에서 질문이 들어오자 연우혁은 고개를 들었다.
'뭐지?'
황자가 뭘 물어보려는 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혹시 황궁 내의 내밀한 일이나 음모를 물어보려는 것일까?
'그렇다면 바로 대답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연우혁은 정신을 집중하고 자신이 해결했던 일들을 떠올렸다.
"이번 용봉지회에서 누가 우승할 것 같은가? 동생한테 들리지 않도록 나한테만 말해주게."
"..."
* * *
비단과 금을 하사품으로 받고서 나오는 연우혁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가벼웠다.
과연 황자는 어진 인물이었다. 한 번 만남으로 이렇게 값을 지불할 줄이야.
'금의위로 갈 거 그랬나?'
마지막으로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받긴 했지만, 다행히 용화공주가 제재했다.
-다 들리고 있습니다.
-하... 하하, 농담 좀 해봤다.
황자는 이번 용봉지회에서 동생과 내기를 했는지 찔끔 말을 거뒀다.
"하사품은 바로 바꾸지 말고 반 년 정도는 창고에 두도록 하거라."
부지휘사, 조굉은 연우혁을 손수 배웅하며 말했다. 연우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자의 하사품은 그 질이 너무나도 뛰어난 게 문제였다. 궁궐에서 쓸 법한 비단이나 금이 돌면 눈치 빠른 이들은 괜한 의심을 할 수 있었다.
"예."
"네 총명함을 의심하지는 않지만, 무림인들에게 혹시라도 가볍게 말하는 것은 삼가라."
"여부가 있겠습니까?"
대답을 듣자 조굉은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혁이 총명하단 건 알고 있었지만, 언제나 스스로를 무림인으로 자처하는 자들은 예상 밖의 행동으로 일을 난처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괜한 의협심으로 다른 무림인들에게 황자 전하가 있다는 이야기라도 꺼낸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전하께서 용봉지회를 존람하신다는 사실은 언제 밝히실 겁니까?"
"지금도 알 필요가 있는 사람은 충분히 알고 있다."
조굉은 연우혁에게 필요 이상으로 정보를 알려주고 싶지 않았는지 화제를 돌렸다.
"금의위에 들어오지 않은 건 예상 밖이었다. 아주 겸손하더구나."
"스스로를 지킬 능력이 없는데 과분한 자리에 앉으면 위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맞는 말이다. 다른 젊은 놈들한테 들려주고 싶구나. 머리로는 알지만 실천하기는 쉽지 않은 법인데... 동창의 환관들과 사이가 돈독한가?"
"나랏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어찌 친하지 않겠습니까?"
"내 앞에서 돌려서 말할 필요 없다. 환관들과 사이가 좋은 것 같으니 더 이상 말하진 않으마. 대신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내 아랫놈들만큼 환관 놈들도 성가신 놈들이니."
'알고 있습니다.'
연우혁은 속으로 생각했다. 애초에 연우혁이 동창을 조심하지 않았다면 오늘 이렇게 피곤하게 외줄을 탈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용화공주께서 널 좋게 보신 모양이더군."
"?!"
의외의 말에 연우혁은 깜짝 놀랐다. 조굉은 왜 놀라냐는 듯이 쳐다보며 말했다.
"널 좋게 보지 않았다면 아까 불호령이 날아왔을 거다. 운이 좋아서 망정이지, 너는 목숨을 건진 거다."
"예. 알고 있습니다."
"만약 전하께서 널 부른다면 행동거지를 각별히 삼가도록 해라. 재주 있는 자는 좋아하시지만, 아랫사람이 실망시키는 일에 관대한 분 또한 아니시니."
"저를 부르신다면 무슨 일로...?"
"무불통지로 소문난 한경의 판관을 부른다면 무슨 일이겠나."
조굉은 더 이상은 알아서 생각하라는 듯이 대답해주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연우혁은 속으로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황자는 몰라도 용화공주는 걱정인데...'
실수 한 번 하면 어떻게 될지 짐작이 가지 않는 만큼 더더욱 무서웠다. 연우혁은 궁 판관을 만나 황족한테 아첨하는 법이라도 배워야 하나 고민했다.
"혈교 놈들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무림인 놈들이 찾을 수 있을 것 같나?"
조굉은 크게 기대하지 않고 물었다.
혈교의 첩자가 이번 용봉지회에 참가하는 문파들 중 있다는 건 금의위한테도 전달된 소식이었다. 용봉지회에 참가하는 귀빈의 신분을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첩자가 누군지 찾고 발본색원할 수 있다면 가장 좋은 일이겠으나, 조굉은 말도 안 되는 기대를 품을 만큼 애송이가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기대는 하지도 않고 있었다.
그렇게 쉽게 잡아낼 수 있었다면 혈교가 그리 끈질기게 성세를 이어나갈 수도 없었으리라.
이번 일에서 조굉이 기대하는 건 두 가지였다.
하나는 금의위 무인들이 철저하게 황자를 모시고 어떤 위험도 없이 용봉지회가 끝날 때까지 마무리짓는 것.
둘은 무림인들이 혈교도를 찾아내던, 찾아내지 못하던 계속해서 소란을 일으키고 서로 상잔하는 것.
무림인들 입장에서는 발끈할 기대였지만 조굉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무림인들끼리 서로 죽이는 게 낫지 혈교도가 황족을 보고 턱없는 음모라도 꾸민다면 괜히 일이 귀찮아졌다.
둘이 서로 이를 드러내고 싸울수록 금의위 입장에서는 일이 수월해지는 것이다.
그런 만큼 조굉은 이 유능한 판관이 의심스러운 자들을 어느 정도 골라주길 원했다.
판관의 총명함을 보면 사소한 단서만으로도 충분히 의심스러운 자들을 골라낼 수 있으리라.
물론 의심스럽다고 심문하려고 하면 꽤 큰 소란이 일어나겠지만 그건 조굉도 바라는 바였고...
"다른 무림인들은 잘 모르겠고, 저는 이틀 후에 첩자를 붙잡을 생각입니다. 다음 일은 첩자를 심문하고 진행해야겠지요."
"그렇군. 잠깐, 방금 뭐라고 했나?"
119화
부지휘사는 자신이 잘못 들었거나 판관이 허세를 부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틀 후에 첩자를 붙잡을 생각이라니. 마치 첩자를 확실하게 잡을 자신이 있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어느 누구도, 심지어 금의위의 부지휘사인 조굉 본인도 그런 자신은 없었다.
"무엇을 말하시는... 다른 무림인들은 잘 모르겠다고 했습니다만."
"그걸 말하는 게 아니다. 놈. 첩자를 붙잡을 계획을 말하는 거다!"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무인이었지만 조굉은 자신도 모르게 판관을 다그쳤다. 저런 말을 해놓고 태평하게 다른 소리를 하고 있는 게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연우혁은 머뭇거리며 조굉을 쳐다보았다.
"첩자를 붙잡을 계획이라면..."
"그렇군. 가능하다면 이틀 안에 잡아보겠다는 뜻이었겠지? 앞으로 만용을 부리는 건 피해라. 스스로의 명을 단축시킬 뿐이니."
연우혁이 꼬리를 내렸다고 생각하자 늙은 무인은 오랜만에 진심 어린 충고를 던졌다.
원래 금의위의 노회한 고수인 조굉은 이런 충고를 잘 던지지 않았다. 젊고 기백 강한 관리들이 많은 만큼 자신의 혀를 단속 못해 사라지는 관리들도 그만큼 많았으니까.
태자 전하가 관심을 보이지 않았거나 혹은 재주가 부족했다면 이런 충고를 던져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니,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뭐라?"
그러나 놀랍게도 젊은 판관은 부지휘사의 충고를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인 척을 하지 않고 예상 밖의 말을 꺼냈다.
"첩자는 이틀 후에 확실하게 잡을 겁니다. 계획이 있습니다. 다만 그게..."
"그게 뭐냐? 말해라!"
조굉은 본인이 이제까지 연우혁을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과 똑같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다그쳤다.
어딘가 초탈하고 심드렁해 보였던 금의위의 부지휘사로서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밖으로 알려질 경우 일이 실패할까봐 두렵습니다."
"..."
연우혁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조굉은 그제야 눈앞의 판관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놀랍게도 지금 진충비도는 금의위가 공을 몰래 가로챌까봐 의심하고 있었다!
'이런 미친 놈!'
처음에는 맥이 탁 풀릴 만큼 어이가 없었지만, 흥분을 가라앉히자 마땅히 할 의심이긴 했다. 어느 관리도 자신의 치적을 다른 관리에게 양보하고 싶지 않아했다. 그 상대가 금의위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부지휘사가 혈교의 첩자를 어떻게 잡을 것이냐 다그치며 캐물어댔으니 판관이 의심하는 것도 당연했다.
'나도 늙었군. 아무리 놀랐다지만 이런 실수를 하다니.'
조굉은 젊은 판관한테 자신을 믿으라고 하거나, 맹세하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건 괜히 더 의심만 사는 짓이었다.
대신 조용히 진충비도를 감시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젊은 판관이 어떻게 혈교의 첩자를 잡아내는지 직접 보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네 말이 맞군. 일의 은밀함은 중요하다. 특히 혈교처럼 어디에든 첩자가 있는 놈들을 상대할 때는 더더욱 그렇겠지. 좋다! 더 이상은 묻지 않으마. 대신 첩자를 붙잡고 심문하게 되면 이 늙은 부지휘사한테도 전갈을 보내줄 수 있겠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미행할 생각이면서 음흉하시군.'
물론 그런 조굉의 속마음은 연우혁에게도 느껴지고 있었다. 연우혁은 상대가 확인하겠다는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걸 영안으로 잡아냈다.
'호기심... 단순한 호기심인가?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심해야겠군.'
부지휘사 입장에서 어떻게 잡아내는 건지 순수하게 궁금해하는 거면 별 문제가 없었으나, 금의위 무인들을 시켜서 가로채려고 하면 골치가 아파졌다.
연우혁은 일단 조심하기로 마음먹었다.
'잡기 전까지 계획을 드러내지 않으면 그만이니.'
* * *
부지휘사가 멀리서 따라다닌다는 사실에 전 살수, 현 포쾌 적조는 기막히다는 듯이 연우혁에게 속삭였다.
"어쩐지 멀리서 기감이 흐릿하게 느껴진다 싶더니...!"
"쉿. 목소리 낮추게. 적 포쾌. 난 들켜도 괜찮지만 자넨 위험하잖나."
"..."
적 포쾌는 연우혁을 노려보았다.
원래 지위가 높았어도 나름 적조를 무림의 고수로서 두려워하며 공경하는 모습을 보여주던 연우혁이었는데, 무공이 성장하자 그런 기색이 은근슬쩍 사라진 것이다.
새삼스럽지만 이 판관은 정말로 빠르게 강해진 편이었다.
살막에서도 이만한 성취를 저렇게 빨리 보여준 무인은 없었다. 만약 명문정파에서 어렸을 때부터 배웠다면 지금쯤 어느 경지에 올랐을지 두려울 정도였다.
뛰어난 오성(悟性)은 물론이고, 인연이 닿았기에 얻을 수 있었던 귀중한 영약들, 생사를 오가는 고수들과의 싸움 등 하나라도 빠졌다면 이 정도의 성취는 힘들었으리라.
'경지 차이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이 정도면 언제 절정의 경지에 올라도...!'
절정 직전의 벽에 갇혀 있는 적조가 비슷하다고 느낄 정도면 연우혁 또한 일류 끝에서 절정을 바라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이런 경지의 벽은 사파의 마공을 익힌 무인보다 정종무공을 익힌 무인이 훨씬 더 뛰어넘기 수월한 법.
이제까지 무공의 성취를 쌓아올린 속도를 봤을 때 어쩌면 연우혁이 먼저 절정의 경지에 도달할지도 몰랐다.
채 이립(而立, 서른)이 되기 전에 절정이라니. 천하의 인재들이 구름처럼 모이는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에서도 극히 드문 일이었다.
'잠깐, 그런데 이 판관이 정종무공을 익혔다고 할 수 있나? 굳이 따지자면 살수와 비슷한 무공인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연우혁의 질문에 정신이 든 적 포쾌는 슬쩍 말을 돌렸다.
만약 젊은 판관이 절정의 경지에 도달한다면 그 때를 대비해서라도 무례하게 굴 수는 없었다.
절정의 경지에 올라서 술 한 잔 했더니 갑자기 예전에 자신을 죽이러 온 살수와의 구원(舊怨)이라도 떠오르면...
"그래. 조심하는 게 좋겠지. 그리고 적 포쾌, 하나 더 할 말이 있긴 한데."
연우혁이 신중한 표정을 짓자 적 포쾌는 긴장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 것일까?
'혹시 금의위 놈들이 이중으로 수작을 부렸나?'
"포두를 맡아볼 생각이 있나?"
"..."
적조는 방금 긴장한 것을 후회했다. 그리고는 들은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포두라고?'
자꾸 객잔에서 황주 값을 안 내려고 수작을 부리는 오 포쾌나 자신이 돌아다녀야 하는 구역을 은근슬쩍 빠뜨리는 막 포쾌 놈들에게 호통을 치고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생기는 것이다. 이런 포쾌들은 한경의 토박이 같은 자들이라 보통 요령을 피우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요패 또한 포쾌가 아닌 포두의 요패로 바꿔질 것이고, 들고 다니는 묵곤 또한 새로 만든 것 중 가장 좋은 것을 고를 수 있었다. 그렇게 한다면 시전의 상인들이 보는 눈 또한 한층 달라지리라.
적조는 순간 자신이 기대감으로 두근거린다는 걸 깨닫고 자괴감을 느꼈다.
살막에서 대주의 자리를 받았을 때도 이렇게 두근거리지는 않았던 것이다.
'염병, 내가 미쳤군...!'
대주 자리를 받았을 때도 냉혹하게 고개를 끄덕였었는데 포두 자리 하나 제안 받았다고 이렇게 두근거릴 줄이야.
적조는 다른 포쾌들에게 술을 뜯어내고 싶은 욕심을 떨쳐내고 물었다.
"무슨 이유라도 있습니까?"
"예전부터 궁 판관은 물론이고 다른 한경의 고관들 모두 포두를 더 뽑으라고 했었지. 원래 판관이 새로 오면 그러는 법이니."
괜히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었다. 판관이 새로 부임하게 되면 보통 그 판관의 심복 노릇을 할 포두도 새로 뽑았다.
오래 구른 포두는 그만큼 못된 요령을 많이 아는 만큼 얼마든지 판관의 눈을 가리고 탐학질을 해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연우혁은 굳이 그러지 않았다. 원래 있던 포두들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잡아낼 자신이 있었을 뿐더러, 포두들 또한 알아서 겁을 먹고 섣불리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한 명 정도는 더 뽑으라고 여기저기서 말을 하는 만큼 그럴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워낙 공사다망해서 오늘까지 오게 된 거지. 내 입장에서도 적 포쾌 같은 포두가 있으면 한층 더 편하긴 하네. 특히 용봉지회를 앞둔 지금에는 더더욱."
"사 포쾌 그 자는 안 됩니까?"
적조는 원래는 사 포두였던 사 포쾌를 입에 담았다.
예전에야 탐욕스럽고 난폭한 자였다지만 한 번 죽었다 살아난 뒤 사람이 바뀌었는지 지금은 충성스럽고 우직하게 일하고 있었다.
한 때 포두기도 했고 무공도 적조나 연우혁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름 수련하고 있는 만큼 포두로 지명하기 좋은 자였다.
"물어봤지. 자신은 아직 자격이 없다더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그럼 오 포쾌는?"
"오 포쾌는 포쾌의 백부가 절대 포두를 맡기지 말아달라고 빌어서 좀."
오 포쾌의 큰아버지, 오충 또한 한경의 다른 구역에서 일하고 있는 포두였다. 파리 목숨처럼 바뀌는 포두를 오랫동안 맡고 있는 만큼 나름 한경에서 존중 받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포두를 맡기지 말아달라고 빌 줄이야. 적조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하긴 술값 안 내려고 했을 때부터 짐작했다. 놈에게는 포두의 자질이 없지.'
"원래 적 포쾌는 사정이 있는 만큼 부담이 될까봐 피했는데..."
"어쩔 수 없군요.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나중에 물러나더라도 맡아주면... 아, 그런가?"
연우혁은 적조가 생각보다 너무 좋아하며 받자 살짝 당황했다.
살막의 대주가 포두 자리로 이렇게 좋아하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럼 판관 어른. 새로 포두를 맡게 되었으니 포쾌들을 이끌고 주변을 순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그러게."
* * *
'무슨 생각이냐?'
조굉은 커다란 느릅나무 위에서 기척을 감춘 채 저 멀리 형관에서 공무를 보고 있는 연우혁을 지켜보았다.
이틀 후에 혈교 첩자를 잡겠다고 선언한 진충비도는 놀랍게도 그 이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형관에 나와 한경의 대소사를 돌보고, 찾아온 정파의 후기지수들을 만나 혈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용봉지회를 찾아온 무림인들의 분쟁을 중재하긴 했다. 거기에 새로 포두가 된 자를 위한 조촐한 축연까지.
하지만 이건 모두 다 혈교의 첩자를 붙잡는 계획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혹시 남몰래 무림인들에게 연락을 보내 계획을 꾸미나 했는데 그런 것도 없었다.
정말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쯤 되자 보고 있는 부지휘사가 초조해질 정도였다. 무슨 자신으로 혈교의 첩자를 붙잡겠다고 한 건지 믿기지 않았다.
"판관 어르신!"
포쾌 하나가 다급히 뛰어 들어오자 조굉은 눈빛을 빛냈다.
이틀째 되는 날인만큼 무언가 준비한다면 오늘은 움직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혹시?
'포쾌들을 동원한 건가? 하지만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들이 많아서 도움이 되지 않을 텐데.'
"청서 출신의 왕무표국과 장동 출신의 구검문이 서로 싸우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중재가 통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쓰레기 같은 놈들이군.'
조굉 입장에서는 이름도 기억할 필요 없는 자잘한 군소문파들이었다. 용봉지회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와서 깃발을 흔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진정 강하고 명성 높은 자들은 용봉지회에서 그리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이미 충분한 이름을 갖고 있는 만큼 서두를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약하고 궁한 자들이 용봉지회에서 이빨을 드러내며 짖어댔다. 어떻게든 기회를 잡아서 입신양명해보겠다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구검문 쪽에서 왕무표국에게 원한을 품은 이유는 저번에 말한 그 이유인가?"
"예. 구검문이 머물기로 한 객잔을 왕무표국의 표사들이 가로챈 걸로도 모자라, 구검문 무인을 모욕하고 쫓아냈답니다."
"양측에 전갈을 보내라. 각각 세 명씩 형관으로 오라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정말 뭐하는 거냐!'
조굉은 자신도 모르게 크게 훈계할 뻔했다.
혈교 첩자를 잡을 계획을 준비하는 줄 알았더니 같잖은 두 문파의 문제에 끼어들고 있지 않은가!
얼마 지나지 않아 각 문파의 행렬을 책임지는 무인과 부관 둘이 관아를 방문했다. 양쪽 모두 권세가 그리 대단하지는 않은 만큼 한경에서 관리를 무시하고 행패를 부릴 정도는 아니었다.
양쪽은 연우혁 앞에 서자마자 서로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저 자들은 감히 구검문의 무인들을...
-판관 어른, 저 자들은 우리가 하지도 않은 일을 멋대로...!
"구검문의 무인들은 다시 한 번 확인해보도록 해라. 물론 객잔 주인이 은자를 탐내서 왕무표국에게 자리를 넘겼다지만, 밖으로 쫓겨난 너희 무인을 모욕한 건 왕무(王武) 표국이 아니라 무염공자(珷炎公子)다. 아마 무(珷)라는 자를 보고 왕무표국이라고 생각한 모양인데, 표사들은 표행으로 길을 지날 때가 아니면 표국의 이름을 굳이 드러내지 않는다."
-...!
-!!!
'!'
조굉은 생각치도 못한 진상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감탄하려다가 정신을 차렸다.
'...놀라운 재주긴 하지만, 이제 정말 혈교의 첩자를 잡아야 하지 않나!'
120화
그런 부지휘사의 외침이 닿지 않았는지 판관은 태연하게 설명을 계속해나갔다.
"이 일에서 가장 책임이 큰 것은 구검문과 선약을 맺고서 이득을 위해 말을 바꾼 객잔 주인이다. 본 판관의 체면을 봐서라도 두 문파는 서로 원한을 이 자리에서 청산하지 않겠는가?"
"무, 무염공자라고 하셨습니까?"
"그렇다."
구검문의 무인들을 이끌고 온 부문주, 탁익은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하필 왕무표국과 비슷한 자를 갖고 있는 무염공자(珷炎公子)는 정파 출신의 무인이었지만 기실은 정사지간의 무인이라고 봐도 될 만큼 성질 급하고 난폭한 사람이었다. 애초에 사십 넘은 무인이 스스로의 별호를 공자라고 부르고 다닌다는 점에서 멀쩡한 무인은 아닌 것이다.
위세가 드높은 명문정파의 무인에게는 감히 시비를 걸지 못하겠지만, 구검문이나 왕무표국에는 얼마든지 시비를 걸 수 있을 터. 판관의 설명에도 들어맞았다.
"무염공자란 무인은 술에 취하면 특히 난폭해지고 오만해지지. 객잔 앞에서 자신의 길을 막는 자가 있다면 출수해도 이상하지 않을 자다."
탁익은 귀신에 홀린 표정이었다.
머리로는 젊은 판관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가슴으로는 도저히 젊은 판관이 어떻게 맞힌 건지 알 수가 없어서 홀린 기분인 게 분명했다.
조굉은 자신도 모르게 깊이 공감했다.
'그래. 더 캐물어봐라.'
마음이 닿았는지 탁익은 눈치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판관 어른, 이 탁 모는 장동 출신으로서 평생 하늘에 부끄러운 짓은 하지 않았다고 자부합니다. 결코 판관 어른의 체면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오라..."
"어떻게 무염공자를 알아봤는지 궁금하단 거겠지?"
속마음을 들킨 탁익은 고개를 숙이며 낯빛을 붉혔다. 옆에 있던 왕무표국의 총표두, 백동개가 말을 거들었다.
"그렇습니다. 판관 어른. 저희 무식한 무부들을 위해 조금만 더 쉽게 말씀해주신다면 그만한 영광이 없을 겁니다!"
보아하니 왕무표국도 객잔 주인 때문에 구검문의 체면을 더럽힌 게 영 찜찜했던 모양이었다.
혹은 자기도 궁금했거나.
'아니?'
놀랍게도 형관의 다른 하급 관리들은 무림인들에게 '판관 나으리의 시간을 뺏다니!'라고 호통을 치는 대신 '저럴 수 있다'하는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심지어 판관도 너그럽게 대답해주었다.
"놀란 건 이해하지만 본관이 무염공자를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는 방금 말한 사실이 전부다. 너희들도 잘 생각해봤다면 알 수 있었을 거다."
"..."
탁익은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옆에 있던 총표두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이 어떻게 저 사실만을 갖고 알아차릴 수 있단 말인가.
"구검문은 장동의 문파로서 청명한 명성을 갖고 있고, 왕무표국 또한 청서의 일문으로 의롭지 않은 짓을 한 적이 없다는 명성이 한경까지 자자하다."
연우혁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말을 줄줄 이어나갔다.
상대를 납득시키는 건 지위가 낮을 때도 했던 일이었다. 지위가 높을 때는 훨씬 더 수월했다.
실제로 두 문파의 사람들은 연우혁이 자기 문파의 명성을 알고 있자 감격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들은 설마 눈앞의 판관이 그 자리에서 거짓말을 했다고는 꿈에도 상상치 못했다.
'구검문의 명성이 한경까지...?!'
'국주께서 들으시면 기뻐하실 것이다!'
"그런 두 문파가 이런 이유로 원한이 생겼다고 했으니, 나는 무언가 오해가 있음을 짐작했다. 그렇다면 어떤 오해인가? 두 문파는 거리가 멀고 친분이 없는 만큼 서로 반간계를 펼쳐서 이득을 볼 자도 없다. 그렇다면 사소하고 즉흥적인 오해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구검문 무인이 어떻게 모욕당했는지를 확인하기로 마음먹었다. 왕무표국이 객잔에서 쫓아냈다 하더라도 굳이 밖까지 쫓아나와 모욕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실... 실로 놀랍습니다!"
"물어보니 구검문 무인은 왕무표국의 자(字)를 보았다는데, 말했듯이 객잔에서 머무르는 표사들이 용봉지회를 앞두고 무림인들이 즐비한 한경에서 표국의 이름을 드러낼 이유가 없지. 원래 호랑이는 발톱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법."
기본적으로 문파가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 드러내고 다니는 것은 세를 과시하는 목적도 있었다.
표국이 스스로의 이름을 깃발에 달고 표행을 한다는 것은, 산적들에게 '이 표국에 덤빌 테면 덤벼봐라'하고 위세를 부리며 경고하는 것이다.
만약 자기들이 감당하기 힘든 산채나 문파의 구역을 지날 때에는 표행이라 하더라도 표국은 얌전히 깃발을 내리고 이름을 가렸다.
지금 한경은 용봉지회를 앞두고 정파무림의 명망 높은 문파들이 즐비한 상황.
이런 곳에서 왕무표국 같은 중소문파가 이름을 걸고 멋대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 그걸 좋게 표현해주는 판관의 말에 백동개는 깊이 감동받았다.
'실로 어지신 판관이다!'
청서에 저런 판관이 있었다면 왕무표국이 속을 썩일 일이 절반은 줄어들었을 터였다.
"자를 잘못 보았다면 그 뒤로는 의심가는 사람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무염공자는 자신의 별호를 옷에 새기고 다니는 사람이니 어렵지 않았지. 어떤가, 이제 좀 대답이 되었는가?"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판관 어른!"
"하마터면 아무 죄도 없는 왕무표국에 원한을 품을 뻔했습니다. 이 탁 모, 진심으로 부끄럽습니다!"
"아니오, 탁 대협. 나 또한 객잔 주인에게 속았소!"
'속긴 뭘...'
연우혁은 뜨뜻미지근한 시선을 총표두에게 보냈다.
아마 백동개도 객잔 주인이 먼저 약속한 걸 어기고 객잔을 넘겼다는 걸 알아차렸을 것이다. 노련한 표두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거기서 따져봤자 자기들만 손해니 모르는 척 하고 받은 것이리라.
지금처럼 일이 커진 상황에서 '사실 알고 있었다'라고 말하면 말종 취급을 받을 테니, 객잔 주인한테 책임을 돌리는 게 분명했다.
"두 문파가 원한을 씻었다면 됐다. 물러가도록 해라."
"예!"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일을 끝낸 연우혁은 밖에서 들리는 종소리로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고 적조를 불렀다.
"적 포쾌."
"..."
"적 포쾌? 혹시 귀가 먹었나?"
적조가 모르는 척 무시하자 연우혁은 살짝 당황했다. 저 살수가 왜 저러나 싶었던 것이다.
다른 포쾌들은 기겁해서 적조한테 속삭였다.
"적 포두. 아무리 포두가 된 게 기뻐도 그렇지 판관 어르신한테 그러면 안 되네! 곤장 맞고 싶나?"
"빨리 대답하게!"
"...아니. 이건 내가 실수했군. 윗사람이라 하더라도 틀린 게 있다면 마땅히 말할 수 있어야지. 적 포두."
"예!"
적 포두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연우혁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혹시 포두가 된 게 기쁜가?"
"포두든 포쾌든 나랏일하는 건 같은데,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 말에 뒤에서 포쾌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구시렁댔다. 적 포두가 자리에 오른 뒤 밑의 포쾌들에게 얼마나 난리를 쳤던가.
"그래... 알겠네. 따라오게. 들를 곳이 있으니."
"예!"
평소보다 한층 더 높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적조는 연우혁의 뒤를 쫓았다.
그 느긋한 모습에 조굉은 내려가서 개입하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하는 짓을 보아하니 저 젊은 판관은 이번에도 혈교의 첩자를 잡으러 가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어보였던 것이다.
첩자를 잡으러 가는데 적어도 포두 한 명 달랑 데리고 돌아다니진 않을 터.
'놈, 설마 관의 일을 핑계대려는 건가?'
오죽하면 이런 의심까지 들 정도였다.
확실히 대단한 재주를 가진 판관이긴 했으니, 그걸 핑계로 용봉지회를 앞두고 한경의 정무가 바빴다고 우기려는 게 아닌가 의심이 갔다.
만약 그런 얕은 수를 쓴 거라면 결코 넘어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조굉은 앞을 주시했다.
어느새 저녁놀이 하늘을 물들이고, 한경의 사람들은 날이 저물기 전에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손이 빨라졌다. 저잣거리의 상인들이 목청 크게 소리를 질러댔다.
진충비도는 포두 한 명만 데리고 허랑하게 걸어갔다. 상인들이 얼굴을 알아보고 술잔과 요깃거리를 바치는데도 한사코 사양했다.
객잔 문이 열리더니 점소이가 뛰쳐나왔다. 진충비도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술병을 들고 밖으로 걸어나왔다. 같이 온 포두가 조심스럽게 나무 궤짝에 술병을 담았다.
이틀 내내 지켜봤는데 그 끝이 설마 술판으로 맺어지나 싶어 금의위 부지휘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밖으로 나온 진충비도는 한경에 온 무림인들이 머무르는 장원으로 향했다.
객잔이나, 혹은 노숙을 해야 하는 무림인들과 달리 명문세가나 무림명사는 따로 초대를 받아서 머무르는 곳이 있기 마련.
보통 한경의 권문세족들이 사는 저택이나 장원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
'저긴... 천문세가 놈들이 머무는 곳이군.'
천문세가.
구검문이나 왕무표국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성세를 자랑하는 문파였다. 특히 근 오년 사이 몇몇 흑도 문파를 꺾고 지역의 패자가 된 이후부터는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도 무시하지 못하는 강자가 되었다.
방(幫)이나 회(會)도 아니고 검문이나 무관도 아닌 세가인 만큼 천문세가는 관에 많은 은자를 바치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경과는 거리가 있다지만, 한경의 다른 가문들과 친분을 맺기에는 일반적인 무림 문파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였다.
이번 천문세가는 용봉지회에서 후기지수들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꽤 많은 숫자가 한경으로 올라온 상태.
그런 천문세가의 무림인들이 머무는 장원에 젊은 판관이자 무림인인 진충비도가 좋은 술을 들고 방문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놈이 진짜...'
천문세가와 안면을 트고 인맥을 쌓으려는 것.
조굉은 혹시 천문세가의 무림인들을 좀 빌리려는 건가 고민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말이 안 됐다. 많고 많은 무림인들 중 왜 한경에 인연도 없는 천문세가란 말인가.
'염탐을 해볼까.'
이제까지 거리를 두고 감시해왔던 조굉이었지만 진충비도가 장원 안으로 들어가자 더 이상 참지 않고 움직였다.
술자리에서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지 들어볼 생각이었다.
-저는 천 대협의 명성을 언제나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그, 그런... 나 또한 진충비도의 명성을 듣고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소.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천 형! 천 형이라고 부르게 해주십시오!
-아, 아니... 너무 갑작스러운 게 아닌지...
-대장부는 의와 협만 알면 충분합니다. 시간이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천 형! 이 아우가 한경에서 도움이 안 되진 않을 겁니다. 위로는 지부 어르신이 저를 아들처럼 아끼시고 아래로는 한경의 관리들이 저를 두려워하는데, 천 형이 용봉지회에서 명성을 날리는데 어찌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천 형의 무재, 천문세가의 위엄, 제 조력만 있다면 천하에 적수가 없을 겁니다!
'이런 미친 간신배 놈 같으니.'
대화를 듣고 조굉은 혀를 내둘렀다.
금의위 무인으로서 청빈해보이던 관리가 탐관오리라는 것에 놀라면 안 됐지만, 진충비도는 조굉을 놀라게 만들었다.
'나도 늙었군. 놈을 믿다니. 관리를 믿으면 안 되는데 말이야.'
조굉은 팔짱을 끼고 대화를 엿들었다.
천문세가 가주의 직계 중 하나, 천담성은 간신배 연우혁의 거침없는 밀어붙임에 당황해서 쩔쩔매고 있었다.
그리 사교적이지는 않았지만 상대가 한경의 판관이라서 쫓아내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무공만 수련한 것 같은 샌님이라 연우혁에게 계속 휘둘렸다.
-아우가 술 한 잔 올리겠습니다! 이 술은 사천의 고죽엽정공분노주(告竹葉井貢汾老曲)로, 사천당문도 쉽게 구하지 못하는 명주입니다!
-그, 그런 술이 있었...? 처음 들어보는데...
술잔이 몇 번 오가더니 천담성이 비틀거렸다. 그리고는 쿵 하고 탁자에 이마를 박고 쓰러졌다.
"?!"
조굉은 깜짝 놀랐다. 아무리 술이 약해도 그렇지 내공을 쌓은 무림인이 저 정도 마시고 쓰러질 수는 없었다.
-빨리 데리고 빠져나가자. 세가 사람들이 본다면 귀찮아진다.
-예!
놀랍게도 진충비도는 천문세가의 직계를 납치해서 장원 안을 유유히 빠져나왔다!
설마 인사를 드리러 온 판관한테 공자가 납치당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세가 무인들은 여전히 태평했다.
담벼락을 훌쩍 뛰어넘은 연우혁과 포두는 공자를 업고서 안가로 달려나가려했다. 조굉은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서 나갈 각오를 굳혔다.
"조 대인. 조 대인 계십니까?"
"..."
조굉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자기보다 한참 약한 무림인한테 이런 감각을 느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조 대인. 빨리 나와주십시오. 급합니다."
"..."
조굉은 나서지 않았다. 놈이 떠보는 걸 수도 있었다.
"지금 나무 두 번째 가지 위에 계신 조 대인...!"
"놈!"
금의위 부지휘사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착지했다. 그 귀 끝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121화
"어떻게 알아차린 거냐?"
흔히 금의위의 무인이라고 하면 강맹한 무공에만 재주가 있다고 생각하기 쉬웠지만, 이들은 역용술이나 은잠술에도 뛰어난 편이었다.
강호에 돌아다니는 무공이라면 사파의 무공이라도 가리지 않고 수집한 뒤 한림원의 협조를 받아 분석하는 만큼 금의위의 무공에는 기존 무림의 무공에서 볼 수 없는 비범함이 있었다.
당연히 조굉 또한 은잠술을 수준 이상으로 익혔고 어지간한 살수도 그 기척을 알아내기 힘들 정도였다.
술법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뛰어난 고수의 은잠술은 술수로 쉬이 깰 수 있는 게 아닌 것이다.
창날처럼 정제된 압박감에도 불구하고 연우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대인께서는 제가 혈교의 첩자를 잡을 수 있다고 말한 것을 믿지 않으셨습니다. 당연히 감시하러 오실 거라 생각했지요."
"!"
조굉은 젊은 판관의 말에 속으로 깜짝 놀랐다.
얌전해보이던 놈이 사실은 조굉 본인의 속마음을 읽고 있었을 줄이야.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태자 전하께서 너를 높게 평가하셨는데, 무슨 이유가 있어서 너를 의심하겠나?"
부지휘사가 시치미를 뗐음에도 불구하고 연우혁은 그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정말 저를 믿으셨다면 오히려 대인께서 그리 순순히 물러나시지 않으셨을 겁니다. 혈교의 첩자를 정말 잡을 수 있다면 어찌 젊은 관리 한 명에게만 일을 맡기겠습니까. 아무리 믿음직스럽다 하더라도 대책을 세워두겠지요."
"..."
정곡을 찔린 조굉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어떻게 혈교의 첩자를 잡을지 캐묻지 않은 것에서 자신의 속마음을 알아차릴 줄이야.
'무시무시한 놈이다!'
사실 영안으로 알아차리고 둘러대는 것이었지만 그 내막을 모르는 조굉의 눈에는 연우혁이 순전히 통찰력으로만 상황을 꿰뚫은 것처럼 보였다.
그저 젊고 재주 있지만 아직 만성하지는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오판이었다. 녀석의 재주는 충분히 복마전 같은 조정에서도 통할 명도(名刀)였다.
"인정하마. 네 재주가 내 예상을 뛰어넘었구나. 하지만 널 감시하고 있는 게 나라는 건 어떻게 알아차렸느냐? 부지휘사가 직접 감시하고 있다는 건 생각하기 힘들 텐데?"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만... 대인께서는 부하들의 능력을 그리 신뢰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게다가 황룡어창(黃龍御槍)이란 별호를 가지신 분께서 고작 지위 때문에 직접 움직이지 않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대인께서는 언제든 필요하면 직접 움직이실 분 아닙니까."
옆에 있던 적 포두는 연우혁이 지금 상황에서 아첨을 하는 걸 보고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살수 출신인 자신도 지금 천문세가의 무인들이 쫓아올까봐 간담이 서늘한데 이 판관 놈은 무슨 배짱인지 알 수가 없었다.
"숨어 있었던 장소는? 은잠술에 실수가 있었나?"
"실은 어제 포쾌들을 시켜 은잠술을 펼칠 만한 다른 나무 가지들은 부러뜨리거나 꺾어놓았습니다."
"하!"
조굉은 탄성을 내뱉었다. 새파란 놈에게 유도당해서 앞에 서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쾌하다기보다는 경외심이 들 정도였다.
"네가 조정의 썩은 관리가 아니라 다행이군. 좋다. 놀아난 김에 끝까지 놀아나주마. 뭘 도와줘야 하느냐?"
"천문세가 사람들이 물어보면 대인께서 절 불렀다고 해주십시오."
"..."
"..."
조굉은 물론이고 적 포두도 연우혁을 질색하며 쳐다보았다.
천문세가 사람들이 천치가 아닌 이상 공자가 사라지면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을 찾을 텐데, 당연히 연우혁에게 찾아가 '무슨 일이 있어서 도둑놈처럼 세가를 빠져나간 거냐'하고 압박하게 되어 있었다.
그 때 연우혁이 '사실 금의위 부지휘사가 절 불러냈습니다. 금의위 놈들은 하여간 무례하고 거친 자들이군요!'라고 변명한다면 아무리 천문세가 사람들이 거친 무림인이라 하더라도 더 따져묻기는 힘들었다.
효과적이긴 한데...
'여기서 창에 꿰뚫리는 거 아니냐?'
적 포두는 부지휘사의 등에 걸린 창을 보고 침을 삼켰다.
살수는 자신보다 경지가 높은 무인과 싸우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살수가 준비를 끝내고 암습할 때의 이야기.
지금처럼 각오를 단단히 다진 절정 말입의 고수와 정면으로 맞붙는다면 연우혁과 적조가 힘을 합친다 하더라도 둘 다 열 초식 안에 육편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무인한테 세가 공자 납치하는 일에 한몫 거들어달라고 당당하게 말하다니.
'포두가 된 지 보름도 안 됐는데...'
"좋다. 앞장서라!"
"감사합니다."
"!"
놀랍게도 부지휘사는 연우혁의 부탁을 군말 없이 수락했다. 적조는 달려가는 연우혁의 뒷모습을 귀신에 홀린 것처럼 쳐다보았다.
'정말 사술이라도 쓰는 것 아닌가?'
* * *
안가에 도착하자 조굉은 그제야 늦은 질문을 던졌다. 사실 천문세가 앞에서 먼저 했어야 하는 질문이었다.
"왜 천문세가의 공자를 혈교의 첩자로 의심한 거지? 이유가 부족하다면 널 잡아서 넘길 수밖에 없다."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사실 연우혁이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건 탐혈광랑 덕분이었다. 탐혈광랑이 금의위를 습격하는 사건과 천문세가 내에서 터지는 사건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원래 천문세가의 공자, 천담성은 가주에게 주워져 양자로 입적한 사람이었다.
천문세가의 가주는 양자의 자질을 아껴 친자식처럼 여겼지만 사실 이 뒤에는 훨씬 더 복잡한 음모가 도사렸다. 천담성의 정체는 사실 사악한 비밀조직이 천문세가를 노리고 보낸 첩자였던 것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어린아이를 세뇌시키고 훈련시킨 뒤 무가나 문파에 양자로 보내 그 세력을 교묘하게 잠식해나가는 대계!
원래 이 비밀조직은 탐혈광랑의 난동 이후 '마두 놈의 광란으로 계획이 바뀌었으니 지금부터 명에 따라라'하는 암어를 천담성에게 보냈다.
하지만 천담성은 천문세가에서 오랫동안 은혜를 입은 만큼 의리를 저버릴 수 없어 전갈을 무시했고, 비밀조직은 첩자가 감히 주인을 저버리자 경고의 뜻으로 천문세가 사람 몇을 장원 안에서 살해한 뒤 천담성에게 혐의를 돌렸다. 계속 무시한다면 비밀을 공포하겠다는 협박이었다.
이런 다툼은 결국 천담성이 자결하고 사건이 난제가 되고 나서야 연우혁에게 오게 되었는데...
'그 비밀조직이 혈교였고, 탐혈광랑 때문에 초조해진 거지.'
혈교가 용봉지회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뒷이야기를 알게 되자 연우혁은 해결했던 사건의 앞뒤를 깨닫게 됐다.
천담성의 자결은 탐혈광랑이 멋대로 난동을 부리자 초조해진 혈교 장로 녹귀혈뇌가 첩자 중 하나를 사용해 무림인들의 시선을 잡아끌려고 준비한 게 분명했다.
'무림에 비밀조직은 왜 이렇게 많은 건지 모르겠군. 혈교 하나면 짐작하기 참 편할 텐데.'
"그래서 그 몇 가지 이유가 뭐지?"
"아."
부지휘사의 질문에 연우혁은 정신을 차렸다.
일단 앞의 사람부터 설득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물론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힘들었다.
사실 이 사람이 혈교 첩자인데 비교적 정의로운 사람이라 협조하기 쉽고 내버려두면 협박 받아서 천문세가 사람 몇 죽어나가고 본인도 자결하는 혈사가 벌어져 용봉지회고 뭐고 초상집 꼴이 된다고 하면 광인 취급을 받을 테고...
"먼저 제가 녹귀혈뇌라고 생각해봤습니다."
"...?"
"음험하고, 들키지 않기 위해서는 뭐든지 할 수 있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계략을 꾸미는 사람. 그런 사람이라면 어떻게 첩자를 들여보냈을까? 그러자 답이 나오더군요. 무림의 문파는 뛰어난 무골을 가진 제자를 언제나 찾고 있으니, 거기에 첩자를 섞어 들여보내면 어떨까?"
"뭔 미친 소리를... 아니. 계속해라."
조굉은 무심코 눈앞의 판관을 광인 취급할 뻔했지만 참았다.
하지만 속으로 의심스러운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자신이 녹귀혈뇌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혈교의 음모가 떠올랐다?
이게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그 논리면 조굉은 자신이 혈마라고 생각해보면 혈교의 숨겨진 안가와 분타 위치들이 떠올라야 했다.
무슨 사이비 도사들이 보여주는 잡술도 아니고...
"그래서 무림의 유명 문파들 중 양자로 들어온 사람들을 조금 찾아보았습니다."
"한둘이 아니잖나."
조굉은 한결 심드렁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 구파일방만 해도 혈연과 상관없이 제자를 데리고 오는 이들이었다. 불문이나 도문의 진전을 잇는데 핏줄은 별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부지휘사의 노골적인 의심에도 불구하고 연우혁은 유들유들한 태도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세가 위주로 찾았습니다. 구파일방의 무공은 불문이나 도문의 영향을 받은 게 많아 첩자가 숨어들기 힘드니 말입니다. 오대세가도 제외했습니다. 이들은 양자를 받지 않습니다. 남은 양자들 중 이번 용봉지회에 후기지수가 참가하는 문파들을 추려보니..."
"저 공자가 나왔다는 거냐?"
"예."
"분명 더 있었을 텐데..."
"재주가 뛰어나지 못한 자나 명성이 보잘것없는 자는 의심에서 제외했습니다. 가장 의심가는 건 천 공자였고, 당문의 몽혼약을 빌려 이렇게 데려왔습니다."
"당문? 당문의 몽혼약은 어떻게 구했지?"
"당문 무인들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러니까 당문 무인들이 독을 빌려줄... 됐다, 중요한 게 아니니. 당문의 몽혼약이든 오독문의 맹독이든 뭐가 그리 중요하겠느냐. 중요한 건 다른 거다. 나름 근거가 있긴 하지만 너무 부족한데, 설마 이게 전부는 아니겠지?"
"아직 부족합니까?"
연우혁의 질문에 조굉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금의위의 늙은 고수는 창대로 바닥을 찍으며 말했다.
"놈! 그럼 이게 충분하다는 거냐? 설마 금의위의 이름으로 놈을 심문하게 해달라는 건 아니겠지. 감히 태자 전하의 총애를 믿고 그런 방자한 부탁을 했다가는 목이 남아나지 못할 줄 알아라."
금의위는 마음만 먹으면 살면서 피 한 방울 본 적 없는 농부도 혈교 첩자로 만들 수 있었지만 그걸 아무한테나 할 수는 없었다.
천문세가 정도 되는 문파의 공자를 데려다가 반병신으로 만들어놓으면 조정의 관리들부터 동창까지 기뻐서 발을 구를 것이다. 눈엣가시로 여기던 금의위를 길들일 기회였으니까.
그러나 부지휘사의 노기에도 연우혁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조 대인. 심문은 애초에 제가 할 생각이었습니다. 금의위의 이름을 빌리다니, 그럴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네가 고문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내가 엮인 이상 허락하지 않겠다."
"고문이 아니라 심문입니다. 그저 질문 몇 개 할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저 놈이 혈교의 첩자라고 의심하는데, 아무런 고문도 하지 않고 질문 몇 개 하면 그걸 인정한다는 거냐?"
"예! 바로 그겁니다!"
연우혁은 그제야 조굉이 이해했다고 생각했는지 얼굴이 밝아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굉은 지금 이 젊은 판관이 죽고 싶은 건지 살짝 의심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인데, 그냥 자신을 조롱하는 것인가?
"...그래. 해봐라."
"알겠습니다."
연우혁은 천담성의 입에 해독약을 흘려넣었다.
독혼수 당등은 몽혼약을 제조하는 만큼 해독약을 제조하는 실력도 뛰어났지만, 그걸 다루는 게 연우혁인 만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별로 어렵지 않다. 그런데 내가 직접 가서 쓰는 게 가장 나을 텐데?
-다른 세가에 들어가서 공자를 납치하는 일인데 독혼수 대협을 끌어들이는 건 조금...
-그러니까 내가 가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 일은 원래 여러 번 해본 사람이 해야지,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이 하면 안 되는 법이다!
-...금의위 무인도 있어서 안 될 거 같습니다.
-그 금의위 무인도 같이...
쓸데없는 기억을 흔들어서 치운 뒤 연우혁은 정확히 투약을 끝냈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천담성이 정신을 차린 뒤 깜짝 놀라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연, 연 판관... 뭡니까? 여긴 어딥니까? 잠깐, 왜 내가... 이게 무슨 짓이오! 미친 것이오?!"
발작하듯 펄쩍 뛰는 천담성을 본 조굉은 속으로 혀를 찼다.
천문세가의 공자답게 이런 상황에서도 기개가 꺾이지 않고 노기를 드러내는 걸 보니 심문이 쉽지 않은 놈이었다.
"당장 이것 푸시오. 진충비도가 이런 광인일 줄은 전혀 몰랐소. 천 형, 천 형 하며 간교하게 접근하더니...!"
"천 공자. 저는 천 공자가 혈교의 명령을 받은 첩자인 걸 알고 있습니다."
"..."
천담성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짓더니 잠시 후 체념한 목소리로 말했다.
"...결국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소. 죽이시오."
"아, 아니!"
조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맹세코 저 놈은 평생 본 혈교 첩자 중 가장 맥아리 없는 놈이었다!
122화
"천담성, 네놈은 대체 뭐하는 놈이냐? 기껏 천문세가에서 신뢰를 얻은 놈이 거짓말 한 번 하지 않고 순순히 인정을 한다고?"
금의위 부지휘사는 혈교 장로가 해야 할 말을 대신해서 꺼냈다. 그만큼 황당했기 때문이었다.
부지휘사가 혈교 장로 대신 말하자 이번에는 천담성 대신 연우혁이 친절하게 대답해줬다.
"대인. 천 형께서는 타고난 정인군자라 혈교의 세뇌가 통하지 않았던 겁니다. 짐승도 은혜를 아는데 사람이 어떻게 키워준 은혜를 저버리겠습니까."
"...?"
체념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천담성은 당혹스러운 시선으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오늘 처음 본 판관이 자신의 생각을 대신해서 말해주고 있는데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단 말인가?'
"이, 이보시오. 지금 대체 무슨 상황인 거요? 내 생각은 어떻게 아는 거고?"
"틀린 부분이라도 있습니까?"
"맞긴 하오만..."
혈교 출신으로 어렸을 때 세뇌를 받은 후 천문세가에 보내진 천담성이었다.
그 후로 연락이 없었기에 혈교 쪽에서 자신을 잊어버린 게 아닐까 내심 기대했었지만, 그런 기대는 허망하게도 물거품이 되었다. 최근 용봉지회를 앞두고 혈교의 연락이 다시 날아온 것이다.
자신의 안위를 생각한다면 혈교의 명령을 따라야 하겠지만 천문세가의 은혜를 생각하면 천담성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차라리 자진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연우혁의 질문이 천담성의 폐부를 찌르고 들어와 모든 걸 포기하게 만든 거였다.
"이 분은 누구시오?"
"금의위 무인입니다."
"...과연."
천담성은 다시 정신을 차렸다. 잠깐 놀랐었지만, 눈앞의 판관은 방금 생각했던 대로 혈교의 첩자를 색출해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용봉지회를 앞두고 소란이 일어나면서 명문정파는 물론이고 금의위나 동창도 주의를 기울이고 있을 테니 금의위 무인이 여기 있는 게 그리 이상하진 않았다. 더군다나 진충비도는 판관으로서 일하고 있는 특이한 무림인 아니던가.
아마 연 판관이 천담성의 속마음을 읽어낼 수 있었던 건 치밀하고 끈질긴 뒷조사와 감시, 분석 덕분이리라. 천담성은 나름 비밀을 잘 지켰다고 생각했지만 금의위가 한 수 위였던 것이다.
저 금의위 무인이 왜 저렇게 놀라워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죽이시오. 혹시 괜찮다면, 가주님에게는 이 천 모가 뵐 면목이 없다고만 전해주시오."
"천 형. 저는 천 형을 죽일 생각이 없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난 혈교의 첩자인데?"
천담성은 젊은 판관의 말에 어이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혈교의 명령을 받아 누굴 죽이셨습니까?"
"...그러진 않았소."
"혈교의 명령을 받아 소란을 일으키실 생각이었습니까?"
"그건... 앞으로 그랬을지도 모르겠군."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천 형께서는 그러시지 않았을 겁니다."
"네놈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자꾸 헛소리를 하는 거냐!"
천담성은 연우혁이 자꾸 속마음을 읽어내자 분노하며 외쳤다.
자괴심과 수치심에 조용히 죽음을 각오하고 있는데 옆에서 자꾸 속마음을 들춰내니 분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참으로 희한한 대화를 조굉은 옆에서 지켜보다가 끼어들었다.
"두 놈 다 조용히 해라. 한심하기 그지없는 대화군. 천담성. 혈교의 첩자라고 했겠다? 여기 진충비도와 달리 난 네놈의 선함을 믿지 않는다."
"이해합니다."
금의위 무인은 조금 말이 통하는 편이었다. 천담성은 담담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죽음을 각오했다.
"내가 믿는 건 네놈이 혈교의 첩자라는 것 하나뿐이지. 그건 확실하니까. 혈교에 대해서 아는 걸 말해봐라."
"저도 정말 그러고 싶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는 게 없습니다."
천담성은 자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대가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연우혁이 옆에서 거들었다.
"어렸을 때 길러낸 혈교의 첩자에게 정보를 많이 알려줄 리 없습니다. 혹시라도 발각되어서 붙잡힌다면 손해 아니겠습니까."
"나도 알고 있다."
조굉도 그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던 만큼 천담성의 대답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놀란 건 천담성이었다. 아까부터 저 판관 놈이 대체 왜 자길 챙겨주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혈교에서 비밀리에 전갈을 보낼 때는 어떤 방식으로 보내지?"
"다른 서신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평범하게 보냅니다. 아시다시피 천문세가에는 매일 수많은 선물과 서신이 들어오니 그 사이에 숨기는 게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천문세가, 그것도 가주의 아들인 만큼 잘 보이기 위해서 뇌물을 보내는 지역의 부호들도 많았다. 거기에 끼워 넣는 것 자체는 별로 어렵지 않았다.
"그렇겠지. 하지만 내용까지 안 숨길 수는 없을 텐데."
"아마 불을 쬐면 글자가 드러나는 방식이었을 겁니다. 다른 비표는 너무 어렵고, 의심 받는 상황도 아닌 만큼 저 정도면 충분하겠지요."
"..."
"..."
조굉과 천담성이 동시에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연우혁은 왜 그러느냐는 듯이 물었다.
"제 말에 틀린 거라도 있습니까?"
"다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이 첩자한테 물어봐야 할 이유라도 있단 말이냐?"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그저 예측했을 뿐."
"맞나?"
부지휘사의 질문에 천담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불에 갖다 대면 숨겨진 글자가 드러났습니다. 교를 떠나기 전에 배웠었지요."
"받은 명령은?"
"남궁세가의 장원에 방문해 몇 가지 물건을 놓고 나오는 거였습니다."
"누명인가."
평소라면 오대세가의 으뜸이자 그 자신도 막강한 위엄을 휘두르는 남궁세가의 장원에 방문해 물건을 뒤지지는 못하겠지만, 지금처럼 용봉지회를 앞둔 특수한 상황에서는 어떤 핑계든 쉽게 대고 들어갈 수 있었다.
만약 혈교와 관련된 물건이 안에서 발견된다면?
남궁세가가 무림공적이 되거나 처벌을 받거나 하진 않겠지만 한동안 사람들의 의심은 피할 수 없으리라. 실로 교활한 계책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했나?"
"하지 않았습니다."
조굉은 왜 하지 않았는지는 묻지 않았다. 천담성이 정인군자든 아니든 조굉의 일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연우혁이야 천담성을 좋게 평가해준 것 같았지만 조굉은 그리 순진하지 않았다.
"혈교 놈들에게 만나자고 서신을 보내라."
"불가능합니다. 대번에 절 의심할 겁니다."
"남궁세가에 물건을 놓고 나왔다고 하란 말이다. 그러면 그놈들도 거절은 못할 거다."
"교가 얼마나 교활한지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제가 먼저 만나자고 연락했을 때 순순히 나와 줄 만큼 순진하지 않습니다."
"그건 네놈이 알아서 해야 할 일이지."
'음. 맡겨두면 안 되겠군.'
금의위 부지휘사의 뛰어난 용인술에, 연우혁은 자신이 설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보아하니 저 밑의 금의위 무인들이 꽤 고생일 것 같았다.
"조 대인. 제가 계책을 준비해도 되겠습니까?"
"상관없다. 원래 네 계획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첩자에게 지나치게 유약한 모습은 보이지 마라."
"딱히 유약한 게 아니라 사실만을 말한..."
조굉은 더 듣지 않고 턱끝으로 빨리 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연우혁이 앞에 서자 천담성은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이 젊은 판관은 자꾸 속마음을 읽는 것 같았다.
"천 형. 혈교가 원망스럽지 않습니까? 천문세가에게 받은 은혜를 갚고 싶지 않단 말입니까?"
"그건... 맞소. 갚고 싶소."
"맞습니다. 천 형 같은 정인군자는."
"그 놈의 정인군자 소리는 그만 하라니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천담성이 분노해서 소리쳤다. 천문세가의 사람들을 속인 자괴감이 정인군자 소리를 듣자 다시 한 번 분노로 폭발한 것이다.
'생각보다 성격이 난폭하군.'
"알겠습니다. 하여간 복수하면서 은혜도 갚고 싶지 않습니까?"
"...죽기 전에 협조해줄 수는 있소. 다만 크게 도움은 되지 않을 거요. 나는 아는 것도 부족한데다가 어렸을 적 교의 고(蠱)를 먹었소. 언제 죽을지 모르지. 최악의 경우에는 마인이 될지도..."
배교의 진전을 일부 이은 만큼 혈교에는 고독(蠱毒)에 뛰어난 술사들이 있었다. 이런 사악한 술법은 혈교의 무인들이 배신할 마음을 먹지 못하게 하고, 두려움 섞인 충성을 바치게 하는 데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그 고는 가짜입니다."
"...뭐요?"
"뭘 먹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짜입니다. 아무리 혈교의 고라 하더라도 이십 년 가까이 내버려 둔 이상 멀쩡히 남아있을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천 형처럼 시도한 혈교의 어린 첩자들이 한둘이 아닐 텐데 그들 모두에게 고를 먹일 수 있었겠습니까. 만드는 것도 꽤 어렵고 비쌀 텐데 말입니다."
물론 천담성에게 실제로 혈교의 고독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이치를 따져도 틀린 구석은 없었다.
그 정도로 효과 좋고 강한 고독을 쓸 수 있다면 훨씬 더 귀한 인재한테 써야지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는 어린아이한테 먹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조굉도 연우혁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진충비도의 말이 맞다. 혈교의 술법이 사이하고 독랄하다지만 모든 첩자들한테 고를 먹여서 보낼 정도는 아니지."
"그, 그런... 하지만 저번에 혈교의 첩자가 마지막으로 찾아왔을 때 두통을 느꼈소. 그게 고가 아니라면 뭐란 말이오?"
"혹시 차를 대접했습니까? 아마 하인을 매수해서 차에 약한 독을 타놨을 겁니다. 목숨에 지장이 가는 독도 아니니 하인을 매수하기도 쉬웠겠지요."
"!!"
천담성은 장사치로 위장해서 찾아온 혈교의 첩자가 차를 마시고 싶다고 한 걸 떠올리고 등골에 소름이 쭈뼛 돋는 걸 느꼈다.
'진충비도의 지혜가 한경에서 따라올 사람이 없다더니 정말이로군...!'
낯선 곳의 소문이란 건 대체로 과장되기 쉬운 법이라 적당히 흘려들었는데, 눈앞에서 직접 보니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고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 그러면 혈교의 첩자를 어떻게 부르느냐인데."
"...설마, 그것도 부를 수 있소?"
천담성은 자신도 모르게 기대하며 물었다.
혈교의 첩자를 쉽게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방금 진충비도가 보여준 재주라면 무언가 비책이 있을지도 몰랐다.
"음. 잠깐 생각해보겠습니다. 혈교 첩자가 방문할 만할 일이라면..."
"고가 가짜라는 걸 안 이상, 내가 목숨을 걸고 나서보겠소."
연우혁이 고민하자 천담성은 살짝 아쉬움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고독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성과였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상대를 협박해 볼 생각이었다.
"교의 고가 가짜라는 걸 알고 있다고 보낸다면 놈들도 애가 타서 찾아올..."
"아. 그거면 될 거 같습니다. 탐혈광랑이 습격의 범인을 알아낸 것 같다고 보내시죠."
"...!"
천담성보다 조굉이 더 놀랐다. 조굉은 보기 드물게 감탄한 목소리로 외쳤다.
"훌륭한 계책이다. 어떤 놈들이든 궁금해서 찾아오지 않을 수 없겠군!"
"감사합니다. 이번 책략을 준비하고 있는 게 혈교의 혈뇌들인 만큼, 연락을 주도하고 있는 자도 꽤 심복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분명 습격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겁니다."
"해볼 만하다. 천담성이 야심에 가득 차서 협박을 하는 것처럼 보내면 더욱 그럴듯하겠지."
"혈교 내에서 지위를 보장해달라고 하지요."
연우혁과 조굉이 자기들만 아는 이야기를 나누자 천담성은 당혹 가득한 눈빛으로 둘을 쳐다보았다.
저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 * *
일지추혼(一指追魂) 장악은 최근 십 년 사이 강호에 출도한 무림인이라면 그 별호를 알기 힘든 마두였다.
이십오 년 전 문파 두 개와 마을 하나를 피로 물들이는 혈사를 일으킨 장악이었지만 하늘은 장악을 저버리는 대신 천운을 쥐어주었다.
장악이 추적대의 포위망을 간신히 빠져나와 혈교 고수들의 손을 잡게 해준 것이다. 천운이 없었다면 실로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그 후 교에 투신한 장악은 여러 일들을 훌륭하게 해내며 지금은 녹귀혈뇌의 심복으로 대우받고 있었다. 외부에서 흘러 온 마두치고는 꽤 대단한 출세였다.
그런 장악이 이번 용봉지회를 앞두고 녹귀혈뇌의 대계를 조율하기 위해 한경에 방문한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혈교의 첩자들이 어린 시절에 세뇌를 받았다지만 꽤 시간이 지난 만큼 반항심도 생겨났을 터.
그런 자들에게 채찍을 휘두르기 위해서는 노회한 전대의 마두가 적합했다.
원래 그럴 터였는데...
"탐혈광랑 놈이 설마 배신한 거냐!!"
조굉에게 일격에 제압당한 장악은 핏발선 눈으로 외쳤다. 연우혁은 무심코 대답했다.
"그렇다. 놈은 장로들에게 원한이 심하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