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어. 그런데 소림철권이 연금되면 비무는 어떡합니까?"
"그건 생각하지 못했군. 소림철권의 다음 상대가 누구였지?"
"판관 어른이시죠."
적조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쳐다보며 말했다. 연우혁은 당황했다.
"나였다고?"
"용봉지회에 나가는 무인이 자기 다음 상대를 모르시면 어떡합니까?"
"하도 신경써야 할 일들이 많아서 잊고 있었지. 과연. 소림철권이었나. 아쉽게 됐군."
원래 강적과의 싸움을 즐기지 않았지만 지금 연우혁의 상태는 조금 특이했다. 저번부터 느끼고 있던 무공의 답답함 때문에 어느 누구든 간에 붙어서 손발을 움직여보고 싶었던 것이다.
"혹시 금의위에서 의심하는 거 아닙니까?"
"금의위가 그런 의심을 하겠나. 애초에 비무에서 이기는 걸 도와주겠다고 한 게 금의위였는데. 우연의 일치다."
연우혁은 가볍게 털어낸 뒤 생각에 잠겼다.
운 좋게 옥면개를 잡아낸 건 좋았지만 막상 증좌를 잡으려고 하니 꽤나 골치가 아팠다. 일단 옥면개가 무슨 일을 저질러야 증좌를 확보할 수 있지 않겠는가.
금의위 무인들이 옥면개를 은밀히 조사해서 첩자임을 증명하는 물건이라도 찾아내면 좋겠지만 상대가 그렇게 허술하기만을 바랄 수는 없었다.
'뭐라도 하나 저질러야 한다는 건데. 옥면개 같은 무인이 지금 상황에서 일으킬 수 있는 일들은... 변검 살인, 죽선(竹扇) 독살, 밀폐된 객잔, 음. 너무 많군.'
그리고 옥면개는 지금 과격한 일을 저지르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혈교의 첩자들이 줄줄이 색출되고 있고 본인의 목표 또한 용봉지회에서 명성을 날려 무림맹의 중추로 진입하는 것인 만큼 무리하게 행동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조심하면 조심했지...
"생각보다 만만치 않군."
"밤에 붙잡아서 고문해보면 안 됩니까? 저 놈 정도면 저희 둘이서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겁니다."
"솔깃하지만, 개방 쪽에 설명해야 하는데 고문해서 알아냈다고 할 수는 없겠지. 잠깐.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군."
연우혁의 말에 적조가 살짝 기대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언제나 지혜로 일을 해결했던 판관이 살수의 기예에 관심을 가지다니?
스스로의 경지에 자부심이 가득한 만큼 적조는 뭔가 보여줄 생각이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놈을 몰래 암습하려면 일단..."
"아. 암습한단 게 아니었다."
"..."
적조가 떨떠름해하는 동안 연우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문방사우를 꺼내 붓을 놀렸다. 원래 선비와는 거리가 먼 연우혁이었지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판관 노릇이 붓질도 제법 괜찮게 만들어 준 모양이었다.
"이 정도면 괜찮겠군."
놀랍게도 연우혁이 쓴 건 협박장이었다.
네 치명적인 비밀을 알고 있으니 그게 밝혀지는 걸 원치 않는다면 보물을 갖고 나와라!
이런 식의 협박장은 찔리는 게 많은 무인들에게 특히 잘 통하기 마련이었다.
"확실히. 수풀을 때리면 뱀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옥면개가 이걸 보고 반응을 해줬으면 좋겠군."
연우혁은 기대하며 옥면개의 숙소에 서신을 보낼 준비를 마쳤다.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몰라도 이 정도면 충분히 놈을 흔들어볼 수 있으리라!
* * *
"놈이 나옵니다."
적조도 살짝 흥분한 것 같았다. 대문 밖으로 나온 옥면개가 한경의 저잣거리로 걸어가는 대신 으슥한 바깥으로 향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좋은 징조군."
"절 속인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
"...그, 그렇군."
사실 옥면개가 딱히 적조를 속이진 않았지만, 적조는 꽤나 굴욕으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살막의 살수가 혈교의 첩자가 한 위장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넘어가다니.
"숲으로 들어가는군요. 이건..."
"진법이다. 진법도 있었나?"
숲에 미혼진이 설치되어 있는 걸 보고 연우혁은 놀랐다. 그리고는 금의위를 욕했다.
'이 자식들은 한경 인근을 뒤져서 황자 전하의 안전을 확보했다고 한 놈들이 진법 하나 남아 있는 걸 못 찾아?'
연우혁이야 영안이 있어서 진법의 생문을 통해 쉽게 들어갈 수 있었지만 뒤에서 따라올 금의위 놈들도 그럴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우리끼리 간다. 금의위 놈들도 곧 오겠지."
둘은 천천히 따라서 접근했다. 옥면개는 설마 뒤에 연우혁부터 시작해서 금의위 무인들까지 주렁주렁 있다고는 생각도 못한 채 진을 돌파했다.
뚝-
옥면개의 움직임이 멈췄다. 언제나 반반한 표정을 짓고 있던 옥면개가 보기 드물게 초조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목을 가다듬고 외쳤다.
"계십니까?"
"?"
"...계십니까?"
'뭐지?'
옥면개가 누구를 찾고 있는 것 같았는데, 상대가 나오지 않았다. 옥면개의 표정이 더욱 더 초조해졌다.
"!"
순간 연우혁의 머리에 번개가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 옥면개가 누굴 찾고 있는지 깨달은 것이다. 연우혁이 목소리를 바꿔 외쳤다.
"...나다!"
"!?"
같이 바위 뒤에 숨어 있던 적조는 순간 옆에 있는 판관이 미친 줄 알았다.
130화
'뭐하는 거야?'
적조의 당황에도 불구하고 연우혁은 준엄한 목소리로 외쳤다.
"네놈이 지금 누구의 영역에 발을 들이밀었는지 아느냐? 이 일지추혼(一指追魂) 장악의 이름을 듣고서 살아나간 자가 없다!"
"사정이 있었습니다."
연우혁이 으르렁댔지만 옥면개는 오히려 안도한 기색이었다. 그제야 적조는 옥면개가 누구를 찾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일지추혼 장악!
녹귀혈뇌의 심복으로 한경에 찾아와 다른 혈교 첩자들을 관리하던 무인.
물론 옥면개는 혈교의 첩자들 중 천(天) 등급의 첩자라 일지추혼과 직접적인 접촉을 하지 않았다. 치밀하고 심계가 깊은 녹귀혈뇌는 자신을 제외한 어느 누구에게도 옥면개의 정체를 알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옥면개를 몰랐던 일지추혼과 달리, 옥면개는 일지추혼이 대충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옥면개도 어지간해서는 접촉을 피하려고 했겠지만, 혈교의 첩자들이 줄줄이 색출되는데다가 정체불명의 협박 서신까지 날아오자 옥면개도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일지추혼과 접촉해 암계를 꾸미려고 했던 거였군.'
적조는 새삼 놀랐다. 옥면개가 마두와 접촉하려고 했다는 사실에 놀란 게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일지추혼을 떠올리고 마두인 척 행동한 젊은 판관에게 놀란 것이었다.
'무서운 놈 같으니...!'
"나는 네놈을 믿을 수 없다."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지 맙시다. 당신도 내가 교의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공격하지 않는 것 아닙니까. 교의 인물이 아니라면 어떻게 여기로 찾아왔을 것이며, 또 어떻게 당신의 정체를 알겠습니까. 지금 한시가 급합니다. 금의위 놈들도 성가신데 웬 잡놈이 나를 협박하고 있단 말입니다."
"정체를 들킨 것인가?!"
"그건 모르겠습니다. 아마 아닐 테지만 혹시 모르지요. 그래서 당신이 힘을 써줘야 합니다! 서신을 보낸 놈을 찾아서 없애버리십시오."
연우혁은 짐짓 화를 내며 말했다.
"나는 녹귀혈뇌 님을 섬기지 네놈을 섬기는 게 아니다. 감히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라!"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고 했잖습니까. 지금 뭐가 중요한지 모르겠습니까?"
옥면개는 답답하다는 듯이 외쳤다.
이 늙은 마두 놈은 지금 옥면개 자신이 정파 내에서 명성을 높이는 게 얼마나 중요한 대계인지도 모르고 자존심을 내세우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녹귀혈뇌에게 있었던 일들을 보고하고 싶었지만 지금 한경의 상황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있던 첩자들도 잡혀간 만큼 일지추혼 같은 고수는 그냥 버릴 수가 없었다.
"닥쳐라. 말했듯이 네놈은 내게 명령할 자격 같은 게 없다. 애초에 네놈이 정말 녹귀혈뇌 님의 심복이 맞는지도 의문이군. 별 것 아닌 첩자가 날 이용하려는 걸지도 모르지."
'옛날에 죽었어야 할 노물 놈이!'
옥면개는 이를 갈았다.
개방의 삼결 제자로 있는 첩자가 심복이 아닐 리가 없지 않은가. 일지추혼은 대놓고 억지를 부리며 버티고 있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따라오십시오."
"!"
연우혁은 순간 멈칫했다. 들킨 건가 싶었던 것이다.
"녹귀혈뇌 님이 제게 주신 혈교의 보물이 있습니다. 하지만 맹세하십시오. 그걸 보여주면 더 이상 다른 소리는 하시면 안 됩니다."
"네놈에게 보물이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이 말에는 살짝 진심이 담겨 있었다.
아무리 가장 중요한 첩자라 하더라도 정파무림의 한복판에 있는 자한테 저런 물건을 주다니.
'그 정도로 숨길 자신이 있다는 건가?'
하긴 연우혁이 훔친 혈교의 신병이기, 혈옥갑도 무림의 보물들 중에서 손꼽힐 만큼 은밀한 보물이긴 했다. 차고서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는 한 다른 사람들이 알아보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웠다.
"따라오기나 하십시오. 어서!"
"...좋다. 안내해라!"
연우혁은 적조에게 속삭였다.
"뒤에 따라오는 금의위 놈들에게 이야기를 전해서 쫓아오게 해라."
"알겠습니다."
적조는 고개를 끄덕인 뒤 둘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런 다음 들어온 방향을 되짚어 진법을 빠져나갔다.
'금의위 놈들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내 기감을 속일 만큼 은밀한 은잠술인가? 놀랍군. 과연...'
"계십니까?"
적조는 금의위의 무공에 감탄하며 불렀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뭐야?'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적조는 좀 더 진법 밖으로 빠져나간 뒤 다시 불렀다. 그래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계십... 아니."
적조는 황당하다는 듯이 앞을 쳐다보았다. 놀랍게도 저 멀리서 기감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금의위 무인들은 아직도 초입에서 신중하게 진법을 해제하고 있었다!
"아직도 거기 계시면 어떡합니까!"
"뭐, 무슨... 포두, 네놈은 무슨 수로 이렇게 빠르게?"
"그러실 때가 아닙니다. 빨리 따라오십시오. 판관 어른께서는 먼저 쫓아갔단 말입니다."
감히 포두가 호통을 치는데도 금의위의 무인들은 발끈하거나 화를 내지 못했다. 그만큼 당황했기 때문이었다.
"이쪽으로!"
"...!"
금의위 무인들은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는 포두 놈의 배짱에 혀를 내둘렀다.
물론 진법의 생문을 파악하고 움직이는 건 진충비도가 먼저 가르쳐준 길을 암기했기에 가능한 일일 테지만, 외웠다 하더라도 저렇게 과감하게 발을 들이미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용맹한 장수 밑에 약졸이 없다더니, 한경은 일개 포두 하나도 대담하구나!'
* * *
연우혁은 멀리서 거리를 두고 옥면개를 쫓아갔다.
혹시라도 옥면개가 얼굴을 보고 대화하자고 할까봐 걱정했지만, 다행히 옥면개도 초조했는지 그런 소리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림맹의 후기지수들이 머무는 장원 외곽에 도착하자 슬슬 옥면개도 생각이 달라진 모양이었다.
"이보시오. 언제까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을 셈이오? 차라리 가까이 붙읍시다."
"헛소리하지 마라."
"헛소리가 아닙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여긴 정파무림의 후기지수들이 머무르는 장원이란 말입니다. 아무리 넓다지만 실수로라도 발각되면 어떡할 겁니까? 차라리 가까이 와서 지인인 척 행동하십시오. 역용술을 쓰면 될 거 아닙니까."
구파일방의 무인은 마음만 먹으면 문파의 이름을 빌려서 호화로운 잠자리를 구할 수 있다지만, 그 중에는 그저 검소하게 이슬만 피하면 되니 다른 무림동도들과 어울리고 싶어하는 이들도 있었다.
옥면개도 소탈한 거지를 연기하고 있는 만큼 이 곳을 자주 방문했다.
덕분에 이 장원에 머무는 후기지수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괜히 소동을 일으켰다가는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도륙당하리라.
"흥. 이 어르신을 우습게 보지 마라. 네놈이 날 팔아넘기려는 수작인지 아닌지 어떻게 안단 말이냐?"
"내가 당신을 왜 팔아넘깁니까?! 같은 교의 사람인데!"
"어르신을 팔아넘기면 너는 그 공으로 더 출세할 수 있으니까. 극마의 길이란 건 그런 법이지."
"!"
극악한 마두의 말에 옥면개는 순간 질려버렸다. 자기 자신도 꽤나 악독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전대부터 살아온 마두는 그 격이 달랐던 것이다.
'미친 늙은이 같으니...'
속으로 투덜거리던 옥면개는 멈칫했다. 갑자기 다른 생각이 하나 들었던 것이다.
만약 앞에 있는 자가 일지추혼이 아니라 다른 혈교의 마두라면?
탐혈광랑처럼 녹귀혈뇌에게 반감을 품은 혈교의 다른 마두가 옥면개를 속이고 있는 거라면 보물을 꺼내는 게 치명적인 실수일 수도 있었다.
'첩자도 탐혈광랑 그 자가 밀고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지추혼도 공격했을지도...'
"뭐냐? 왜 안 움직이지?"
"당신 정말 일지추혼 맞습니까?"
"!"
이번에는 연우혁이 깜짝 놀랐다. 그러나 연우혁은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바로 받아쳤다.
"네놈이 슬슬 헛소리가 하고 싶은 모양이로구나. 도움이 필요 없다면 그걸로 됐다. 이 어르신은 여기서 그만둬도 아무 상관이 없으니."
"제가 대인을 어떻게 붙잡겠습니까. 하지만 떠나시더라도 대답은 하고 가주십시오. 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이 자식. 괜히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게 아니군.'
연우혁이 혀를 차는 사이 옥면개는 바로 질문했다.
"탐혈광랑 그 자를 습격한 장로가 누구입니까?"
"전원이다."
"적면혈뇌의 보법은 뭡니까?"
"혈원보(血怨步)."
"...!"
옥면개는 자신이 과민했나 싶었다. 방금 던진 건 녹귀혈뇌의 심복이 아니라면 알 수 없는 질문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연우혁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상대가 아는 질문만 던진 게 천운이었다.
'내가 정말 혈교와 많이 엮이긴 했군.'
이쯤 되면 혈교 장로들로 위장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제 끝났냐? 그만 귀찮게 굴고, 보여줄 거면 보여주고 꺼질 거면 꺼져라. 어린놈아."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육년 전에 녹귀혈뇌 님의 명령을 받아 개방 무인을 죽이셨을 겁니다. 그 때 바위에 부딪친 것처럼 위장했지만 사실 진짜 수법은 따로 있었지요."
"장골독을 썼지. 배를 갈라보면 안의 뼈가 꽤나 흐물흐물해졌을 거다."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마지막 질문까지 대답하자 옥면개는 의심을 버렸다.
상대는 괴팍하고 짜증나는 노괴였지만 일단 일지추혼은 확실해보였다.
"한 번만 더 귀찮게 굴면 네놈부터 죽여 버리겠다."
"죄송합니다. 따라오십시오."
연우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뒤를 쫓았다. 방금 순발력 있게 떠올리지 못했다면 계획이 완전히 어그러질 뻔했다.
개방 무인들이 머무는 별채에 들어간 옥면개는 잠시 후에 웬 두꺼운 허리띠를 하나 들고 나왔다. 개방의 제자들이 신분을 구분하기 위해 매듭을 짓는 그 허리띠였다.
"보고 계십니까?"
"보고 있다."
"흡!"
"!"
옥면개가 허리띠를 찢자 그 안에서 비단처럼 얇은 비수가 튀어나왔다. 어찌나 얇았는지 날이 마치 연검처럼 휘어졌다.
그러나 비수의 날에서 흐르는 예기는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옥면개는 비수를 단단히 쥐더니 내공을 내뿜었다. 그러자 비수가 살기 넘치는 붉은 기운을 내뿜었다. 마치 검기(劍氣) 같았다.
연우혁은 영안을 열고 그 보물을 확인했다.
혈옥비(血玉匕). 혈교의 신병이기. 원래는 귀령비(鬼靈匕)라고 불리는 배교의 보물이었지만 혈교로 넘어간 뒤에는 새로운 대법으로 혈교 심법에 어울리는 무기가 되었다.
특유의 심법과 같이 공명하면 철판도 잘라내는 검기를 뿜어내는 것이다.
'실로 무시무시하군.'
"이 정도면 증명이 된 것 같습니다."
"그렇군!"
연우혁은 날이 밝자마자 옥면개의 짐을 다 뒤진 뒤 허리띠란 허리띠는 모조리 찢어발겨야겠다고 생각하며 물러서려고 했다.
그 때 갑자기 혈옥비가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섬뜩한 살기가 담긴 울음소리였다. 연우혁은 본능적으로 상대의 살기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무슨...?!'
팟!
혈옥비가 주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더니 날아들었다. 마치 연우혁의 혈옥갑을 손목에서 잘라내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연우혁은 아차 싶었다. 혈교의 다른 신병이 도둑놈을 알아차리고 공격할 줄이야.
"뭐, 뭡니까? 왜 이러시는 겁니까?"
"나도 모르겠군. 말려라!"
"저도 처음 봅니다. 대체 왜 이러는..."
옥면개는 당황한 얼굴로 담벼락 위에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연우혁을 공격하는 혈옥비를 붙잡으려고 달려들었다.
서걱
그 순간 혈옥비가 뿜어내는 검기가 급조한 복면을 잘라냈다.
"..."
"..."
연우혁과 눈빛이 마주친 옥면개는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격렬한 감정을 눈동자에서 뿜어냈다.
"놀라지 마라. 역용술로 진충비도의 얼굴을 위장한 거다."
"...죽여 버리겠다!!!!!"
'아쉽군.'
잘하면 속여 넘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혈옥비가 덤비는 모습이 옥면개에게 확신을 준 모양이었다.
연우혁은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까다롭게 덤비는 혈교의 보물과 옥면개의 합공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
"무슨 일이야?"
"한밤중에 왜 이리 시끄럽게..."
널찍하게 떨어진 건물들 사이에서 후기지수들이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한밤의 소란이 그들을 깨운 것이다.
옥면개의 눈동자가 다급하게 떨렸다. 피가 나올 만큼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옥면개가 외쳤다.
"개방의 제자들은 저 자를 제압해라. 혈교의 하수인이 날 습격했다!"
연우혁은 한 방 먹은 와중에도 냉정하게 판단했다.
여기 있는 무인들 중에서 연우혁의 편을 들어줄 자들은?
"팽 형! 도와주십시오! 혈교의 첩자가 절 죽이려고 합니다!"
"...자네들은 모두 날 따라오게!"
안에서 대작하던 오대세가 무인들이 일사불란하게 달려오자, 옥면개는 상황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꼬이기 시작했다는 걸 느꼈다.
131화
'...빨리 죽여야 한다!'
마치 대낮처럼 장원 곳곳이 환해지고 일어난 사람들이 외치는 고함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자 옥면개는 두려움과 동시에 살심을 굳혔다.
진충비도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하고 분통이 터졌지만, 지금 상황의 급박함은 그 분노를 되새길 여유도 없었다.
눈앞의 저 놈에게 너무 많은 일들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은 것이다.
오늘 죽이지 않는다면 옥면개는 무조건 궁지에 몰렸다. 물론 진충비도를 죽인다 하더라도 의심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억지라도 부려보려면 저 입을 반드시 막아야 했다.
"타구진(打狗陣)을 펼쳐서 놈을 포위해라!"
다행히 옥면개가 데리고 온 개방의 제자들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의심 하나 없이 옥면개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
이들도 진충비도의 명성을 알고 있는 만큼 지금처럼 갑작스러운 상황에 분명 의문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과연 개방의 제자답게 의문이 든다 하더라도 내색하지 않고 충실하게 움직였다. 순식간에 진법이 형태를 갖추었다.
개방이 자랑하는 진법, 타구진은 그 수련과 개진(開陳)이 별로 어렵지 않고 진법을 펼치는 인원도 유연하게 바꿀 수 있었다.
거지들을 모아다가 한두달만 연습해도 대충 꼴은 갖출 수 있는 게 타구진이었고 그 중 몇 명이 빠지면 또 모양을 바꿔서 펼칠 수 있는 게 타구진이었으니 실로 개방과 잘 맞는 진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타구진을 얕볼 순 없었다. 익히기는 쉬우나 그 심오한 위력을 제대로 펼치기 위해서는 길고 긴 정진이 필요한 게 타구진이었다.
지금 옥면개와 같이 한경에 온 개방의 제자들은 오 년 이상 손발을 맞춰가며 타구진을 수련한 무인들.
그만큼 진법의 개진도 빠르고 위력도 강력했다. 즉시 진충비도를 포위해서 고깃덩어리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진충비도는 타구진이 완성되기 직전에 생문으로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개방의 거지들은 놀란 눈으로 진충비도를 쳐다보았다.
이런 다급한 상황에서 정확히 생문의 방위를 찾아 빠져나간 것도 놀라웠지만, 방금 진충비도가 보여준 보법이 예상 외로 신묘했던 것이다.
다른 개방 무인들이 견제할 여유도 주지 않고 뒤로 빠져나가는 표홀함은 보법만으로도 무림의 명성을 얻을 만했다.
'놈...!'
옥면개도 개방 무인들과 똑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오히려 경지가 더 높은 만큼 더욱 가슴이 싸늘했다.
'결코 하수가 아니다!'
방금 보여준 보법으로 접근한다고 생각하니 뒷목이 쭈뼛거리는 기분이었다. 연우혁의 보법이 사실 뒤로 물러날 때 가장 쾌속하다는 걸 모르는 옥면개로서는 더더욱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명성이야 높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판관으로서, 독특한 기책으로 쌓았다고 생각했지 무공은 분명 자신 아래라고 생각했었는데...
'무공을 숨기고 있었나!'
혈옥비를 상대하며 피하는 모습에 옥면개는 확신했다. 보법뿐만 아니라 저 초식 하나하나는 내기(內氣)가 충만하지 않다면 보여줄 수 없는 동작이었다.
연우혁이 짧은 기간 동안 무공을 성취한 걸 몰랐기에 옥면개는 진충비도가 일부러 무공의 경지를 어느 정도 숨겼다고 판단했다.
'심계가 무시무시한 놈이다. 죽여야 해!'
타구진을 빠져나가는 진충비도 뒤로 오대세가 무인들이 하나둘씩 도착했다. 옥면개는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팽 형! 진충비도가 혈교와 결탁했습니다! 금의위에게 뇌물을 바쳐 무림을 짓밟으려는 흉계를 꾸미고 있단 말입니다! 지금은 소림철권만 잡혀갔지만 앞으로는 누가 더 잡혀갈지 모릅니다. 저 자를 죽여야 합니다! 흉악한 마공을 펼치기 전에!"
'이 자식. 제법이군.'
연우혁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살기와 정보로 영안을 어지럽기 직전까지 사용하는 와중에도 살짝 감탄했다.
혈교의 첩자란 걸 들킨 만큼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일 텐데, 그 상황에서도 나름 최선을 다해 책략을 짜내고 있지 않은가.
연우혁의 장점이 판관이라면 단점도 판관이었다. 무림인은 기본적으로 관료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하물며 소림철권이 잡혀간 지금 저런 말은 더욱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팽 형은 나도 설득할 수 있다.'
옥면개는 오대세가 무인들, 그 중에서도 팽주성을 똑바로 쳐다보며 다시 외쳤다.
여기 있는 무인들 모두와 친분이 있는데다가 팽주성은 특히 잘 아는 만큼 충분히 조종할 자신이 있었다.
팽주성만 조종하면 다른 오대세가 무인들도 따라오리라.
"팽 형! 저번 용봉지회 때 얻은 별호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팽 형이 아니라면 누구도 하지 못할 겁니다. 혈교의 첩자가 빠져나가기 전에 잡아야 합니다!"
"그래. 알고 있네! 기다리게!"
팽주성이 긍정적으로 화답하자 옥면개의 얼굴이 환해졌다. 하북팽가의 직계가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
옥면개는 순간 섬뜩함을 느꼈다. 분명 자신의 조종이 통했으면 진충비도한테 달려들어야 하는데 팽주성이 자신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도광(刀光)이 번쩍이며 옥면개를 일도양단하려고 들었다. 새삼 저번 용봉지회에서 도룡이란 별호를 받은 팽주성의 저력이 느껴지는 일격이었다.
"쯧!"
"그거 하나 속이지 못하다니!"
"어쩔 수 없었다!"
뒤에서 팽주희가 팽주성을 힐난하자, 팽주성은 동생의 비난에 억울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사이에 개방도들이 많아서 허점을 완전히 노출할 수도 없었고, 다가가는 사이 옥면개의 의심을 피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팽, 팽 형! 나를 못 믿는 겁니까!? 이 옥면개 종조일을?!"
옥면개는 방금 죽을 뻔한 분노로 가슴이 타들어가는 기분이었지만 꾹 눌러 참고 얼굴 표정을 유지했다. 한시가 바쁜 상황에 오대세가 무인들까지 상대할 수는 없었다.
"못 믿네!"
팽주성은 냉정하게 대꾸했다. 평소 저만한 호인이 없다고 회자될 정도로 사람 좋은 팽가의 무인이 예상 밖으로 행동하자 옥면개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개방의 일을 방해하지 마시오!"
타구진을 펼친 개방의 제자들이 옥면개를 지키기 위해 오대세가 무인들에게 경고했다.
하북팽가의 무인은 몰라도 다른 세가의 무인들까지 싸움에 끼어들 것 같자 강경하게 나선 것이다. 개방의 이름으로 강하게 막아선다면 아무리 오대세가의 무인이라도 달려들기 쉽지 않았다.
"너야말로 당문의 일을 방해하지 마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암기가 날아왔다. 당령이 암기를 날리자 모용소가 검을 휘두르며 개방도를 공격했다.
설마 오대세가의 자제들이 이렇게 다짜고짜 공격할 줄은 몰랐던 개방 무인들은 당황해서 펼친 진법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정말 해보자는 거요?!"
"저 놈을 잡아라! 모용세가의 공적을 세워야겠다!"
"형님께서는 멋대로 명령하지 마시오!"
모용세가의 공자들은 서로 싸늘하게 내뱉으면서도 한 가지 목표는 흔들림 없이 공유하고 있었다. 바로 옥면개의 목을 확보한다는 목표였다.
세가의 자제들이 보여주는 흔들림 없는 확신은 그 옆에 있던 무인들에게도 전염되었다. 마음속에 의문이 남아 있는 개방도들과 달리 이들은 소가주들을 확실하게 믿었다.
'이 정도쯤 되면 무언가 있는 게 분명하다!'
설마 공자들이 아무 근거 하나 없이 진충비도의 말 하나만 듣고 덤비는 거라고는 상상치도 못한 채 세가 무인들은 병장기를 휘둘렀다.
'...좋지 않다!'
옥면개는 안에 철을 채운 죽봉을 꽉 쥔 채 상황을 둘러보았다.
다른 오대세가 무인들은 타구진에 막혀있다지만 팽주성, 팽주희 이 두 강견한 직계 두 명이 넘어온 것만으로도 계산 밖이었다.
'혈교의 무공을 꺼낸다면 바로 죽여야 하는데 시간이... 저 놈이 도망이라도 가면...!'
옥면개는 초조한 눈빛으로 혈옥비를 제압하는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보아하니 거의 제압이 끝나 가는데, 연우혁이 도망치는 순간 옥면개는 팽가 남매 둘을 제압한다 하더라도 끝장이었다.
'하늘이시여, 제발!'
다행히 하늘이 이번에는 마두의 편을 들어주었다. 옥면개와 친분이 있는 구파일방의 후기지수들이 뒤쪽에서 나타난 것이다.
"진충비도가 혈교와 결탁했네! 소림철권을 잡아갔듯이 금의위를 꼬드겨 다른 자들을 더 잡아가게 하려고 하고 있어! 오대세가 무인들은 진충비도의 교언에 넘어갔으니 자네들밖에 없어!"
구파일방의 후기지수들은 일제히 발검했다. 연우혁은 간신히 혈옥비를 제압하고서 쓴웃음을 지었다.
여기 있는 후기지수들과 비무할 일을 대비해서 여러모로 준비를 했는데, 이걸 이렇게 쓰게 될 줄이야.
"진충비도. 움직이지 마시오. 점혈하겠소!"
"그럴 순 없다."
"흥!"
무당파의 제자 운령이 장력을 뿜어냈다. 추혼장(追魂掌)이라는 별호는 얼핏 들으면 무당파의 도사와는 어울리지 않는 살벌함이 있었지만, 운령이 펼치는 무당면장을 한 번 보면 그 별호를 납득하게 됐다.
쾌속함으로 상대의 혼을 쫓는 것이 아니라 그 부드러움으로 끈질기게 상대의 혼을 쫓는 장법.
이번 용봉지회에서 용의 별호를 받을 것이라 기대되는 후기지수다운 무공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연우혁은 그런 도사와 맞상대하면서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한손으로는 날뛰는 혈옥비를 단단히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권법을 펼치는데도 오히려 운령이 밀려났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운령의 일장이 권격에 튕겨나가는 소리였다. 운령은 경악의 눈빛으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절정의 경지를 엿보고 있다고!?'
진충비도란 별호를 들은 게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일류 말입을 넘어 절정을 엿보고 있다니.
구파일방의 일대제자 중에서도 이 정도면 손에 꼽혔다. 운령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나도 돕겠다!"
화산파의 제자, 단수평이 연달아 암기를 날렸다. 장강에서 펼친 협행으로 장강일지(長江一指)란 별호를 얻은 단수평은 화산의 무공 자양지(紫陽指)를 막힘없이 사용했다.
이 지법은 화산 특유의 암기인 매화표와 어우러지면 암기술이 되고, 암기가 사라지면 단단한 돌벽에도 상처를 남기는 양강의 무공이었다.
이 또한 이번 용봉지회에서 용의 별호를 노리는 후기지수인 만큼 연우혁이 느끼는 압박은 한층 더 가중되었다. 연우혁은 한손으로 권격을 날려 운령을 밀어내고 영안으로 매화표를 피한 뒤 재빨리 비도를 날렸다.
연우혁의 별호인 만큼 단수평은 비도가 날아오자마자 화들짝 놀라 물러났지만 그건 속임수였다. 비도의 기세는 그리 강하지 않았던 것이다.
"큭! 남익. 뭐하나!"
"지금 가세하지."
마지막으로 점창파에서 온 석화검(石火劍) 남익이 달려들었다. 이 자리에 있는 무인들 중 가장 쾌속하고 표홀한 검법을 자랑하는 남익은 숨도 내쉬지 않고 연달아 살벌한 검초를 내찔렀다.
연우혁은 쌍사보를 펼치며 뒤로 거리를 벌렸다. 하나씩 상대하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상대였지만 동시에 달려드니 영안이 타들어갈 것처럼 숨이 막혔다.
'최소한 손이라도 두 개였다면...!'
연우혁은 날뛰는 혈옥비를 단단히 움켜쥔 채 나머지 한 손으로 권법을 펼치고 비도를 날렸다. 오대세가 무인들이 개방의 무인들을 상대하고 있고 팽주성과 팽주희가 옥면개를 잡고 있으니 시간은 연우혁의 편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을 버티는 게 쉽지 않았다. 한 초식 초식을 펼칠 때마다 영안이 경고를 보냈다. 알면서도 적들이 공간을 좁히는 걸 막는 게 불가능했다.
"진충비도. 당신이 이 정도의 고수인 줄은 몰랐소. 용봉지회에서 만났다면 분명 졌을 것이오. 항복하시오! 억울함이 있다면 이후에 풀 수 있지 않겠소!"
"이 멍청한 도사 놈아. 저기 옥면개가 날 죽이려고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점혈당하란 거냐?"
연우혁도 마음이 급한 만큼 험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여기 후기지수들이야 옥면개를 믿고 있는 만큼 설마 멋대로 행동하겠냐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지금 옥면개는 죽느냐 사느냐 직전이었다. 일단 연우혁이 점혈당하면 무조건 달려와서 죽이고 생각할 것이다.
"그럴 리 없지 않소!"
"운령. 떠들 시간에 집중해라! 놈을 제압하고 떠들어도 늦지 않다!"
단수평이 고함을 질렀다. 화산의 도사는 심계가 독한 만큼 일단 상대를 제압하고 나서 들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수십 초가 찰나의 사이에 오가고 마침내 자양지가 처음으로 연우혁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화끈한 고통이 올라왔다.
점창의 사일검법이 옆구리를 덮은 천을 찢어발겼다. 한 치만 옆으로 들어갔어도 치명상이었다.
마지막으로 전력을 다한 무당면장이 정면에서 뻗어져 나왔다. 연우혁의 영안이 더 이상 피할 수 없다고 전력으로 경고했다.
극한의 순간 연우혁의 집중력이 절정에 달하며 시간이 느려졌다. 연우혁은 비도를 꺼내들어 가볍게 던졌다. 내공을 전부 쏟아 붓는 탈혼비도가 아닌, 그저 초식만 같고 내공은 적게 담긴 허초였다.
그러나 그 비도는 무당면장을 꿰뚫고 도사의 어깻죽지까지 꿰뚫어버렸다. 좌중의 후기지수들이 경악에 물든 눈으로 비도를 쳐다보았다.
132화
전력을 다한 장법이 파훼된 탓에 운령은 내상을 입고 피를 한 움큼 토했다. 무당 도사는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원래라면 기민하게 반응해서 그 빈틈을 타고 합격진을 빠져나갔을 연우혁이었지만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방금 날린 일초가 연우혁을 무아지경에 빠뜨린 것이다.
'내공을 전부 쏟아내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관없다!'
무아지경에 빠진 연우혁에게 화산파의 제자 단수평이 재차 공격을 날렸다. 방금 암기술을 쓴 탓에 드러난 빈틈을 노리는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그러나 젊은 판관은 돌아보지도 않고 빈손을 휘둘러 주먹을 뻗었다. 단수평은 구파일방의 제자답게 그 권법이 금의위의 권법이라는 걸 깨닫고 긴장했다.
"!"
하지만 날아드는 권격은 단수평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몇 차례 초식을 교환하고 손을 섞었기에 어느 정도 진충비도의 강함을 파악했다고 생각했었지만, 지금 날아드는 권격은 완전히 예상을 뛰어넘은 강맹함을 가지고 있었다.
'무슨...!'
단수평은 경악해서 연우혁을 쳐다보았지만 막상 권격을 날리는 판관은 단수평을 쳐다보지도 않고 자신만의 생각에 깊이 잠겨들었다.
'견정혈에서 중부혈로, 중부혈에서 곡지혈로.'
연우혁의 위국권법은 몸통에서 나오는 힘을 주먹으로 전달해 상대를 타격한다는 목표에 충실한 권법이었다. 그 안의 내가기공적인 이치도 균형이 제대로 잡혀 있었기에 흠잡을 곳이 딱히 없었다.
그러나 방금 연우혁은 자신이 완벽하게 익혔다고 생각한 위국권법의 초식을 멋대로 바꾸고 생략해서 펼쳤다. 서책에 쓰여진 초식을 제대로 이해하고 한 치의 틀림도 없이 펼쳤다면 바꿀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혹시 스스로의 깨달음에 문제라도 있었단 말인가?
'아니다. 그게 아니었다!'
연우혁은 자신이 이제까지 봐왔던 무공의 초식들을 떠올렸다. 영안을 타고난 만큼 연우혁이 떠올리는 초식들은 그만큼 다양하고 이해도가 높았다.
그러나 지금 연우혁이 그 초식들을 펼친다면 분명히 다르게 펼칠 것 같았다.
그 때는 맞다고 생각했었고 실제로 맞았었지만 지금은 틀린 것이다.
무공을 익히는 사람은 한 뼘만 키가 자라도 그 초식의 형태가 달라지고 한 근만 살이 붙어도 그 초식의 위력이 달라지는데, 수많은 깨달음과 내공을 쌓은 지금에야 어떻겠는가.
그제야 연우혁은 방금 자신이 펼친 탈혼비도와 위국권법이 틀리게 펼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생사를 오가는 무림에서의 싸움 끝에, 연우혁이 자신의 필요에 맞춰 초식을 마침내 재해석한 것이다.
"억!"
고통스러운 소리와 함께 화산파의 도사가 물러났다. 연우혁은 형형한 눈빛을 던지며 상대를 마침내 쳐다보았다. 단수평은 방금 일합에 오른팔이 이상한 방향으로 비틀렸음에도 불구하고 물러서지 않고 왼팔로 공격을 펼쳤다.
'친다.'
받아치겠다고 생각한 순간 연우혁의 권격은 이미 단수평을 치고 있었다. 내공이 단전에서 기경팔맥에서, 기경팔맥에서 각 세맥으로 뻗어나가는 대신 즉시 상대의 혼백을 빼앗을 기세로 권격과 함께 내달렸다.
단수평은 충격과 함께 뒤로 날아갔다. 통증과 함께 머릿속에는 상대가 날린 일격의 쾌속함만이 남았다.
혼자 남은 점창의 제자, 남익도 그 일격을 보았기에 눈동자가 두려움으로 흔들렸다. 석화검(石火劍)이라는 별호를 가진 만큼 평소부터 빠르기에는 자신감이 있었으나 눈앞의 무인은 그 자신감을 흐려지게 만들었다.
기세로 압도된 남익이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연우혁은 혼자 남은 후기지수를 확실하게 제압하기 위해 몸을 던지듯이 보법을 펼쳤다.
마치 비도가 날아가는 것처럼 달려드는 자신의 모습에, 연우혁은 자신의 보법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 깨달았다.
연우혁은 이제까지 흘러가는 대로 무공을 배워왔었다.
포두와 금의위로부터는 위국권법과 위국심법.
냉수사 고송으로부터는 백사편법과 백사보법.
하오문으로부터는 하해불택신공을, 백면신투가 남긴 비급으로부터는 흑사보와 사심불구경공을. 무당으로부터는 현청벽사신공을...
이렇게 무공을 잡다하게 익혔던 것은 사문이 없고 다급한 위기가 계속해서 찾아왔던 연우혁의 상황 탓도 있었지만 연우혁이 적을 피하고 손쉽게 제압하기 위해서 꾀를 부린 탓도 있었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해보면 연우혁이 위급할 때 언제나 목숨을 구해준 것은 탈혼비도였다. 가장 기괴하고 위태롭다고 생각한 무공이 사실 가장 연우혁의 목숨을 많이 구해준 무공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연우혁도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무림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목숨을 던질 각오가 있어야 한다!
그게 바로 연우혁이 벽을 깨고 절정의 경지로 올라오면서 희미하게나마 깨달은 자신만의 의념이었다. 비록 아직 그 의념이 흐릿하고 선명하지 못하더라도 제대로 된 깨달음의 밧줄을 잡은 것이다.
그렇기에 방금 연우혁이 펼친 쌍사보는 뒤로 물러날 때 그 묘용이 가장 강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탈혼비도처럼 살벌한 기세로 상대에게 달려들 수 있었다. 이미 이건 더 이상 쌍사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점창파의 제자가 든 검이 그대로 부러지며 옆으로 날아갔다. 탈혼의 깨달음이 담긴 권격이 남익을 일격에 고꾸라뜨렸다.
뒤에 있던 구파일방의 제자들은 가장 촉망받는 후기지수들이 일제히 쓰러지자 황망한 얼굴로 쳐다만 볼 뿐 감히 덤벼들지 못했다.
연우혁은 거센 한숨을 토해냈다. 저들을 설득하거나 협박해야 했지만 그보다는 방금 치른 싸움으로 인해 고갈된 내공을 회복시키는 게 먼저였다.
툭-
한손으로 붙잡고 있던 혈옥비가 그 빛을 잃고 툭 떨어졌다. 마찬가지로 혈옥갑도 연우혁의 손에서 마치 허물 벗겨지듯이 떨어졌다. 원래 보여주던 핏빛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이게 무슨 일이냐!"
새로 도착한 무리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연우혁은 방금 했던 싸움을 다시 해야 하나 싶어 지긋지긋함을 느꼈다.
그러나 다행히 이번에 온 자들은 말이 통하는 이들이었다. 곤륜파의 제자 선도광이었다.
"진충비도를 멋대로 공격하다니, 이게 무슨 짓이오!? 다들 미쳤소?!"
선도광은 모여 있는 다른 문파의 제자들을 힐난했다.
평범한 문파의 무인이어도 터무니없는 짓이었는데 한경의 판관 관직을 갖고 있는 사람을 이렇게 멋대로 공격하다니!
선도광이 당장이라도 칼을 뽑을 것 같은 기세로 흉흉하게 외치자 당황한 무인들도 급히 항변했다.
"종 형이 비사(祕事)를 알아냈단 말이오! 혈교의 첩자라 마공을 쓰기 전에 막아야 하오!"
"맞네! 옥면개가 허튼소리를 하겠나?! 자네야말로 우릴 돕게!"
"무슨..."
개방의 명성 높은 후기지수가 나오자 아무리 선도광이라 하더라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선도광은 곤륜삼절이란 별호답게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아무리 종 형의 말을 믿는다 하더라도 일을 그렇게 서투르게 처리할 순 없소. 진충비도는 작게는 한경의 판관이고 크게는 태자 전하의 명을 받아 용봉지회에 출전한 무인! 제대로 된 확인도 없이, 마공을 쓸지도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섣불리 제압하려고 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득보다 실이 훨씬 큰 일이오!"
"...!"
옥면개의 말을 철썩 같이 믿고 있던 무인들은 선도광의 외침에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는지 멈칫했다. 황자의 체면까지 나오자 이래도 되나 급격히 두려움이 솟구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물러나지는 않고 머뭇거리자 선도광은 이를 갈았다.
자기 문파의 명성만 알고 금의위나 황실의 무서움은 모르는 얼간이들이 무림의 대사를 망치려고 하고 있었다!
"비연선자. 도와주십시오!"
"마땅히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막으면 베겠다! 비켜라!"
선도광은 같이 온 아미파의 제자에게 부탁해 과감히 덤벼들었다. 여기서 말싸움만 해봤자 사태가 달라질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곤륜파와 아미파의 이름 높은 후기지수가 싸울 각오를 하고 달려들자 남은 무인들은 맥없이 흩어졌다. 선도광은 연우혁을 보고 외쳤다.
"괜찮으십니까!?"
"괜찮네."
선도광은 옷이 찢어지고 피가 묻은 진충비도의 모습에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지만, 다행히 연우혁은 크게 다치지 않은 것 같았다.
"옥면개는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그 자가 혈교의 첩자였지. 쉽게 낚으려고 했는데 이렇게 인망이 좋을 줄은..."
연우혁은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구파일방 출신이었다면 훨씬 더 편하게 상황을 풀어나갈 수 있었을 텐데, 아무래도 한경 출신 판관이라는 관직 때문에 크게 손해를 본 것이다.
절정의 벽을 깨고 올라와서 망정이었지 아니었다면 정말로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옥면개의 명성은 저도 들어본 적 있습니다. 의협심이 대단한 무인이라고 들었... 어어!"
"?"
연우혁은 선도광이 호들갑을 떨며 뒤를 가리키자 고개를 돌렸다.
뒤편에서는 팽가 남매가 옥면개를 도륙하기 직전이었다.
* * *
사람들은 잘 몰랐지만, 하북팽가의 가주가 팽주성을 가장 높게 평가하는 이유는 근골이나 무재가 아닌 그 타고난 뚝심이었다.
한 번 결심하고 믿으면 밖에서 어떤 말이 들려오더라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우직함이 팽주성 안에는 있는 것이다.
이런 우직함까지는 몰랐던 옥면개는 진땀을 뻘뻘 흘리며 죽을맛을 느끼고 있었다.
'미친 놈!'
죽봉으로 간신히 도(刀)의 옆면을 밀어낸 뒤 빠져나온 옥면개는 팽주성의 동생, 팽주희가 날리는 각법에 어깨를 스치듯 맞고 이를 악물었다. 가볍게 스쳤는데도 그 충격이 보통이 아니었다.
"팽 형! 이 옥면개를 못 믿으시는 겁니까!"
"믿네!"
"믿는다니까!"
"이 빌어먹을 연놈들이!"
믿는다면서 바로 살초를 펼치는 남매의 모습에 옥면개는 고함을 내질렀다. 평소 칭송 받던 반반한 낯짝이 일그러지며 살기로 번뜩였다.
지금 팽가의 남매는 단 하나만 생각하고 있었다.
옥면개를 죽인 뒤, 뒤의 개방도들을 쓰러뜨리고, 마지막으로는 그 뒤의 구파일방의 무인들까지 막는다.
그렇기에 옆에서 옥면개가 뭐라고 떠들던, 타구진을 펼친 개방 무인이 뭐라고 호소하던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제기랄!'
차라리 다른 오대세가 무인들을 상대하는 개방도가 더 나을 것 같았다. 다른 오대세가 무인들은 개방의 무인들을 상대하는 만큼 손속에 사정을 두고 제압을 하고 있었지 무자비하게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 실제로 타구진에서 끌려 나와 제압된 무인들도 목숨은 붙어 있었다.
하지만 하북팽가의 두 남매는 살초만을 펼치며 무조건 빨리 죽이겠다는 의지만 드러낼 뿐이었다. 뒤에 구파일방의 후기지수들이 도착한 게 오히려 이 둘을 자극한 것이다.
옥면개는 이 두 남매의 행동으로 핍박받는 자신을 호소하고 싶었지만 워낙 압박이 거세서 그럴 여유도 없었다.
우직!
옥면개가 휘두르는 철로 채워진 죽봉이 그대로 쪼개졌다. 아무리 옥면개가 개방의 용음봉법을 제대로 익힌 고수라지만 팽가의 도법을 정면에서 막을 정도로 강맹한 초식을 펼치지는 못했는데, 다급한 탓에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죽어라!"
팽주희가 옥면개의 허리를 일도양단할 기세로 도법을 펼쳤다. 순간 옥면개는 죽음이 자기 앞까지 다가왔다는 걸 느꼈다.
"...너나 죽어라, 이 개새끼들아!"
옥면개는 죽봉을 던져버리고 조법(爪法)을 펼쳤다. 혈교의 독문무공, 음천조(陰天爪)였다.
방금까지 펼치던 양강의 무공이 아닌 음산한 기운이 손가락 끝에서 뻗어져 나오며 도를 칭칭 휘감았다.
옥면개의 손가락이 비정상적으로 길어지고 두꺼워졌다. 동시에 사람의 손가락인데도 철로 된 도의 날을 상하게 만들 정도로 단단해지는 그 모습에 팽가 남매는 즉시 외쳤다.
"음천조!"
"혈교의 첩자가 본색을 드러냈다! 저걸 봐라!"
"?!"
얼마 남지 않은 개방의 제자들은 타구진을 펼치던 도중 옥면개의 무공을 보고 기겁했다. 저건 누가 봐도 부정할 수 없는 혈교의 마공이었다.
"종... 종 형!"
"옥면개, 이게 무슨?!"
"입 닥쳐라, 머저리 새끼들아!"
옥면개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팽가 남매들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이제 상황을 덮는 건 무리였고 이 자리를 빠져나가는 게 우선순위가 됐다.
목숨이라도 건지기 위해서는 한시라도 빨리 장원을 벗어나야 했다.
그러나 팽가 남매는 방금까지 살초를 연신 날렸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슬슬 뒤로 피하며 시간을 끌었다. 그러면서 옥면개가 빠져나가려고 하면 바로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네놈부터 죽여버린다!!"
"와서 돕게! 빨리! 혈교의 첩자가 도망친다!"
"기다리시오. 팽 형!"
그렇게 시간을 끈 사이 오대세가 무인들이 우르르 달려와서 포위망을 만들기 시작하자 옥면개의 눈에 핏발이 섰다. 이 와중에도 팽가 남매는 죽이고 가겠다는 살심이 들 만큼 분노한 것이다.
133화
악귀 같은 형상으로, 옥면개는 팽주성에게 덤벼들었다.
아까와는 달리 사생결단을 내려는 기세였다. 음천조를 꺼낸 만큼 더 이상 숨길 게 없어진 옥면개는 연달아 혈교의 독문무공 녹귀미리보(綠鬼迷離步)를 꺼냈다.
녹귀혈뇌에게 직접 전수받은 보법인 만큼 그 위력은 팽주성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귀기가 흘러나와서 적을 압박하는 이 보법은 특유의 심법과 같이 펼쳐지면 몇 배로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피할 수 없게 되자 팽주성은 오히려 도를 적극적으로 휘두르며 맞서나갔다. 옥면개는 한손으로 조법을 펼쳐 팽주성의 도를 얽매고 다른 손으로는 팽주성의 요혈을 노렸다.
"종 아우. 안타깝군. 자네를 믿었는데!"
"닥쳐라!"
팽주성은 진심으로 하는 소리였지만 옥면개에게는 복장 뒤집는 소리에 불과했다.
"네놈은 반드시 찢어죽이고 가주마!"
옥면개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안개처럼 일렁거리며 뿜어져 나왔다. 그 기괴한 광경에 팽주성은 경계심의 눈빛을 보냈다.
'혈향(血香)!'
놀랍게도 옥면개가 땀처럼 전신에서 뿜어내고 있는 건 피였다!
팽주성은 몰랐지만 지금 옥면개가 펼치는 것은 혈령대법(血靈大法)이었다.
혈교의 사악한 기공으로서 익히기 위해서는 동남동녀의 막대한 정혈을 필요로 했지만 한 번 쌓으면 선천진기나 심맥에 손상을 주지 않고 쌓은 피를 소모하는 것만으로 몇 배의 힘을 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과정 도중 남은 피가 밖으로 증발되는 탓에 저런 흉흉한 모습을 숨길 수 없었고, 때문에 한 번 펼치면 무조건 목격자를 죽여야 했다.
뒤에 수많은 무림인들이 있는 걸 알면서도 이걸 펼쳤다는 건 그만큼 옥면개가 궁지에 몰리고 절박하다는 뜻이었다.
금속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도(刀) 일부분이 깨져나갔다. 팽주성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종조일, 개만도 못한 자식아! 네놈을 믿은 형제들에게 부끄럽지도 않느냐!"
그 순간 남은 개방의 무인들이 분노를 토해내며 죽봉을 휘두르고 비황석을 던져댔다. 오대세가의 후기지수들을 상대하느라 너덜너덜했지만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극노한 것이다.
형제를 믿고 목숨을 걸었는데 이렇게 배반당하다니.
"믿을 거면 끝까지 믿어주지 그랬나!"
단단히 독기가 오른 옥면개는 오히려 비아냥대며 달려드는 개방 무인 한 명의 청봉을 부숴버리고 가슴팍을 박살냈다. 평소 옥면개의 무공보다 훨씬 강맹한 초식 위력에 개방 무인들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공격이 멈추지는 않았다. 배반당했다는 분노에 개방 무인들은 목숨을 걸고 차륜전을 펼쳤다.
거기에 팽가 남매와 나머지 오대세가 후기지수들이 모조리 가세하자 옥면개는 대법을 끌어내고도 목이 조여드는 기분을 느꼈다. 공포가 분노를 몰아내자 머리가 차가워진 것이다.
이러다가는 이 자리의 무인 몇 명만 잡고 죽게 생겼다!
"하!"
옥면개는 고함을 지르며 포위망의 가장 약한 곳을 쳤다. 다행히 모여 있는 후기지수들은 서로 손발을 맞춰본 적도 없는데다가 급하게 포위망을 만든 탓에 빈틈이 곳곳에 있었다.
기묘한 보법을 펼치며 옥면개가 장원의 담벼락으로 향하자 곳곳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옥면개는 아랑곳하지 않고 담벼락 위로 경공을 펼쳐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담벼락 위에 발을 디딘 옥면개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장원 바깥에 횃불이 어찌나 많았는지 대낮처럼 밝았던 것이다.
"저 자가 혈교의 첩자다! 잡아라!"
진충비도 놈이 언제 나갔는지 밖에서 금의위들을 지휘해 물 샐 틈 하나 없이 장원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 * *
금의위의 정 교위는 이번 한경에서 벌어지는 용봉지회를 앞두고 기분이 좋았다 나빴다를 반복했다.
처음에 판관 놈과 협상해서 공적을 추가한 건 좋았지만, 포쾌 노릇을 하며 왔다갔다 뛰어다닌 건 별로였다.
부지휘사께서 태자 전하와 함께 한경에 방문한 건 정말로 좋았지만, 그 때문에 다른 교위가 수십 넘게 온 탓에 공을 세울 기회가 적어진 건 별로였다.
심지어 근처에 있었던 혈교의 마두나 첩자를 색출해내는 일에도 거의 공을 세우지 못하지 않았던가. 정 교위는 혹시 포쾌로 심부름꾼만 하다가 용봉지회가 끝나는 게 아닌가 초조해졌다.
'젠장! 이 판관 놈. 설마 하 교위 놈만 일부러 챙겨주는 건 아니겠지.'
물론 하 교위는 자기 나름대로 목숨을 걸고 혈교 마두와 싸웠다가 운 좋게 목숨을 건진 거였지만, 정 교위 입장에서는 그런 공적도 부럽기 그지없었다.
"무슨 일인가?"
정 교위는 멀리서 달려오는 금의위 위사들을 보며 의아해했다. 한밤중에 이렇게 다급히 달려오다니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조 대인의 명을 받아 감시하고 있는 무림인이 있는데, 그것이..."
옥면개의 뒤를 쫓다가 진법에 빠져 시간을 낭비했던 금의위 무인들을 구해준 건 한경의 일개 포두였다.
한경의 포두는 배짱이 보통이 아니었는지 금의위 무인들을 구한 것도 모자라 빨리 더 많은 무인들을 데리고 와달라고 성화를 냈다. 무림인들이 머무는 장원 쪽으로 갔으니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말이다.
최대한 빨리 무인들을 동원하려면 부지휘사가 아닌 가까운 교위들에게 말을 해야 했지만, 교위들은 난색을 표했다.
무림인들이 머무는 장원에 금의위 무인들을 멋대로 보내는 건 뒷감당이 꽤 까다로웠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부지휘사가 교위들에게 옥면개의 정체를 알려주지 않았기에 이들은 이번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모르고 있었다.
덕분에 금의위 위사들도 괜히 설득하는 대신 부지휘사에게 달려가 제대로 된 보고를 하려는 중이었다.
"조 대인께 보고하러 가보겠습니다!"
"...진충비도의 일이라고?"
"예? 예."
정 교위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위사들은 교위가 왜 이러나 싶어 당황스러워했다.
"너희들은 보고하러 가라! 나라도 휘하의 병력을 이끌고 먼저 출발하겠다."
"예!? 감, 감사합니다."
위사들은 시간이 없어 이유를 묻지는 못했지만 '저 교위가 왜 저러나'싶은 표정을 지었다.
다른 교위들은 뒷감당이 조심스러워서 발을 빼는데 무슨 배짱으로 저렇게 나선단 말인가?
심지어 정 교위의 휘하 무인들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잔뼈가 굵은 군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뒷배가 든든한 무림인들과 괜히 문제를 일으키실 필요가 있으십니까?"
"...날 따라와라. 내 생각에, 이건 분명히 먼저 나설 보람이 있는 일이다!"
정 교위는 자신도 조금 불안했기에 그렇게 외치며 내달렸다. 아무리 불안하더라도 욕심을 참을 수가 없었다.
'진충비도 그 놈은 건방진 놈이지만 일에 관해서는 실수가 없었다. 이 일도 분명 가장 먼저 도착하면 남는 장사일 거다!'
정 교위는 달리면서 다른 금의위 무인들도 따라오라고 명령했다. 무림인들이 괜한 시비를 걸지 못하도록 병력을 늘릴 생각이었다.
다른 교위들이 황당해하며 따졌지만 정 교위는 못 들은 척 무시했다.
-아니, 아직 명령도 떨어지지 않았는데...
-장수는 군을 이끌 때에는 왕의 명령도 받지 않는 법!
-그 말을 지금 하는 게 맞는가? 하여튼 자네가 책임지게!
정 교위가 다급하게 달려간 뒤 채 일각도 지나지 않아 부지휘사가 흉흉한 기세로 뛰쳐나왔다.
한경의 심처로 이어지는 길 곳곳을 지키고 있던 교위들은 부지휘사를 발견하고 충성스럽게 인사했다.
"대인어른! 무슨 일로..."
조굉은 인사를 올리는 교위를 발로 걷어차고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손속에 사정을 뒀다지만 그렇게 맞았는데 아프지 않을 리 없었다. 쓰러진 교위는 당황해서 외쳤다.
"대, 대인! 제가 무슨 잘못을..."
"이 조굉이 무슨 잘못을 저질러서 휘하에 이런 머저리들만 모여 있단 말이냐. 네놈들은 스스로 판단을 할 줄 모르는 놈들이다! 따라와라!"
부지휘사는 아둔하고 눈치 없는 부하들의 모습에 이를 갈았다.
감시를 맡긴 놈은 이상함을 알아차렸으면 알아서 교위를 설득해야 하는데 그걸 하지 못하고, 교위 자리에 앉아 있는 놈들은 위사의 보고를 듣고 기민하게 대응해야 하는데 그걸 하지 못했다.
일 다경도 채 안 되는 사소한 차이겠지만 이 차이로 마두 놈을 놓칠 수도 있었다.
조굉은 가는 길에 보이는 교위들에게 족족 주먹을 날렸다. 교위들은 두들겨 맞고 날아가면서도 감히 변명 한 마디 하지 못했다.
"정 교위께서는 먼저 무인들을 이끌고 출발하셨답니다!"
"그래? 적어도 사람 같이 생각하는 놈이 하나는 있구나. 가자! 오늘 혈교의 잔당을 뿌리 뽑아야겠다. 태자 전하 앞에서 드디어 체면이 서겠구나!"
설마 무림인들이 판관을 공격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조굉은 화를 조금 가라앉히고 호탕하게 외쳤다.
* * *
앞에는 금의위, 뒤에는 무림인.
옥면개가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연우혁이 비도를 날렸다. 그 별호에 걸맞는 막강한 위력에 옥면개는 전율했다.
'무슨 위력이?!'
마치 절정 고수가 날린 것마냥 살벌하고 강력했다. 옥면개는 피하기 위해 앞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정 교위는 믿기 힘들다는 듯이 연우혁에게 속삭였다.
"개방의 옥면개가 첩자란 말이냐?"
"...믿기 싫으면 저리 꺼져라. 내가 지휘할 테니까."
오늘 하도 생사투를 많이 치른 탓에 성정이 거칠어진 연우혁이 으르렁댔다.
아무리 품계로는 판관이 더 높다지만 천하의 금의위 교위 앞에서 이렇게 무례하게 굴 줄은 몰랐기에 정 교위는 말문이 턱 막혔다.
"감히...!"
화를 내려고 했지만 정 교위는 연우혁의 눈동자를 대면하자 몸이 굳는 걸 느꼈다. 놈의 경지가 심상치 않았다.
'...설마!?'
상대의 경지가 자기보다 크게 높다는 걸 직감한 정 교위의 눈이 충격으로 흔들렸다. 저번에 만난지 얼마나 됐다고 그 사이 경지가 이렇게 달라졌단 말인가?
"쳐라!"
"...!"
옥면개는 더 이상 대꾸도 하지 않고 금의위 무인들에게 달려들었다. 이미 진형을 갖추고 있던 병사들은 쇠뇌를 쏘고 창을 찔러 옥면개의 접근을 막았다.
옥면개가 조법을 펼쳐 창대를 잘라내고 병사들의 목을 날리려 하자 이번에는 사이에 있던 위사들과 군관들이 튀어나와 공격을 막았다. 잘 훈련된 정병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군진(戰陣)이었다.
"합!"
구령과 함께 병사들이 우르르 움직이며 포위망을 만들었다. 연우혁이 정 교위를 푹 찌르더니 말했다.
"건(乾) 쪽으로 더 배치해라."
"뭐? 네놈이 군진에 대해 뭘 안다는 거냐?!"
정 교위는 지휘에 참견하는 연우혁의 모습에 분개했다.
아무리 이 판관이 재주가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병사들을 지휘하는 건 엄연히 금의위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병사 한 번 지휘해본 적 없는 서생이 어떻게 병사들을 지휘할 수 있겠는가.
"해라. 좋게 말할 때."
"...건(乾), 건 쪽으로!"
교위의 말을 들은 부천호가 재빨리 신호를 보내자 진법이 두터워졌다. 성동격서의 수법으로 그 쪽으로 빠져나가려던 옥면개가 순식간에 갇혔다.
정 교위는 믿기 힘들다는 듯이 연우혁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정작 판관은 연달은 싸움으로 지친 얼굴이었다.
"감(坎)으로."
"감으로!"
옥면개가 점점 궁지에 몰리고 퇴로가 사라지자 군관들은 감탄한 표정으로 정 교위를 쳐다보았다. 금의위 교위가 판관을 무시한 것처럼 군관들도 교위를 경험 없다고 무시했는데, 이렇게 보니 그들이 터무니없는 착각을 한 모양이었다.
"옥면개!"
유심히 옥면개를 관찰하던 연우혁이 외치더니 비도를 꺼내 날렸다. 병사들과 무인들을 상대하던 옥면개도 연우혁의 비도술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잘 알았기에 다급히 운신할 공간을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공간을 찢듯이 날아드는 비도는 아까 옥면개가 경험했던 것보다 몇 배는 빨랐다. 옥면개는 그제야 아까 비도가 사실은 그를 안심시키기 위한 허초였다는 걸 깨달았다.
'이것까지 당하다니...!'
순간 피했다고 생각한 비도가 일순 흐릿해지더니 궤도를 바꿔 옥면개의 가슴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쓰러지는 와중에도 옥면개의 머릿속을 채운 것은 의문이었다.
그 녹귀혈뇌도 옥면개 본인의 심계를 완전히 꿰뚫지 못했는데, 대체 어떻게 진충비도 저 놈은 옥면개의 모든 행적을 알아맞혔단 말인가?
'녹귀혈뇌... 당신도 곧 당하시겠구려...!'
쓰러진 옥면개를 확인한 군관이 숨통이 끊어졌다고 신호를 보냈다. 정 교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난폭한 자여서 걱정했다. 진충비도. 다행히 무림인들이 도와준 모양이군."
"교위 어른. 무림인들이 공격했답니다."
그 사이 장원 안의 하인들에게 말을 들은 군관들이 심각한 얼굴로 보고하자 정 교위의 얼굴이 당황으로 굳었다.
"뭐라고?"
"같은 문파라고 공격한 모양입니다. 위험한 거 아닙니까?"
"...일단 놈의 사체를 확보해라. 그리고 한경 안으로 물러난다!"
안의 상황을 모르는 정 교위는 일단 꼬리를 내리고 물러서려고 했다. 분노한 무림인들과 정면으로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곧바로 뒤에서 부지휘사 조굉이 이끄는 일련의 고수들이 나타났다. 정 교위는 그 깃발을 확인하고 즉시 외쳤다.
"감히 천박한 무부들이 관의 일을 방해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 전부 붙잡아라!"
"..."
"..."
군관들과 병사들은 황당하단 표정을 지었다. 아까 그런 지휘를 한 명장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치졸한 모습이었다.
134화
"주변이 시끄럽군."
조굉의 말에 소란을 피우던 정 교위가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부지휘사 어른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죄송합니다. 대인!"
"뭘 말하는 거지?"
"예?"
"뭐가 죄송하냐는 거다."
'제기랄.'
정 교위는 잘못 걸렸다는 걸 깨달았다. 오늘따라 조굉의 심기가 매우 불편한 모양이었다. 찔리는 구석이 많은 만큼 정 교위는 움츠러들었다.
"보고를 올리지 않고 멋대로 다른 교위들의 병사들을 지휘해 움직인 것이..."
뻑!
조굉은 무표정한 얼굴로 주먹을 날렸다. 정 교위는 날아오는 권격을 느꼈음에도 피하지 않고 그대로 얻어맞았다. 괜히 피했다가는 더 커다란 처벌이 날아올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건 잘 한 일이다. 장수가 군을 끌고 나가면 명령을 받지 않는 법. 뭐가 중요한지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일 수 있어야지."
"감, 감사합니다."
뜻밖의 칭찬을 들은 정 교위는 기뻐하다가 문득 의아함을 느꼈다.
그렇다면 방금 왜 주먹이 날아온 것인가?
"제가 어리석어서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가르침을 주십시오."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면서 일단 사죄부터 하는 아첨이 교활하더구나."
"..."
정 교위는 속으로 괴팍한 상관을 욕했지만 겉으로는 웃는 낯을 유지했다. 무공이든 권력이든 부지휘사를 적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
"오늘 교위들 중 유일하게 공을 세웠으니, 내 너의 이름을 기억하겠다."
"감, 감사합니다! 대인! 영광입니다!"
정 교위는 얼얼한 얼굴의 통증도 잊어버리고 감격스러워했다. 조굉은 병사들이 유지하고 있는 군진을 보자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네가 짠 군진이더냐?"
"그... 그게..."
원래라면 냉큼 훔쳐먹고 싶었지만 정 교위도 눈치가 있었다. 공적을 도둑질당했는데 가만히 있을 만큼 연우혁이 만만한 사람이 아닌 것이다.
힐끔거리는 시선을 눈치챘는지 부지휘사가 피식 웃었다. 조굉은 군진을 누가 지휘했는지 알아차리고 연우혁에게 다가갔다.
혈교의 첩자와 싸우느라 꽤나 고생이 많았는지 판관은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을 취하고 있었다. 저번과 다른 비범한 기도에 부지휘사는 깜짝 놀랐다.
'벽을 깼나?!'
물론 일류의 끝에 도착한 무인이 강적과의 싸움을 통해 벽을 깨고 절정의 경지로 올라오는 일이 불가능하진 않았지만, 그 시기가 너무나도 빨랐다.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에서 키운 제자도 아닌데 아무리 기연을 여럿 만났다 하더라도 사문 없이 혼자서 익힌 무공으로 이렇게 빠른 성취라니.
조굉이 감탄해하는 사이 다른 게 눈에 들어왔다. 판관의 행색이 꽤 길고 치열하게 싸운 것처럼 엉망이었다.
그것 자체는 이상할 게 없었는데 반쯤 누더기가 된 옷에 남은 흔적이 이상했다.
'무당면장에 화산의 자양지. 저건 점창의 사일검법 아닌가?'
분명 혈교의 첩자와 생사투를 벌인 줄 알았는데 옷에 남은 흔적이 기묘했다.
당연히 무림인들이 도와서 혈교의 첩자를 잡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대인!"
얼굴에 주먹으로 맞은 흔적을 하나씩 달고 있는 교위들이 급히 달려와서 고개를 숙였다. 지은 죄가 있는 만큼 도착해서 뭐라도 하기 위해 부지런하게 움직였던 것이다.
"무림인들이 감히 판관을 공격한 모양입니다!"
"뭐라고?"
교위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앞다퉈 장원 안에서 일어난 일을 고변했다. 그 말을 들은 조굉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뻑!
부지휘사가 다시 주먹을 날렸다. 정 교위는 옆에서 가만히 있다가 맞고 넘어졌다.
"네놈은 기민하게 행동해놓고 중요한 사실을 보고해야 한다는 건 잊어버린 거냐!"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보고 하나를 빼먹었다가 다시 눈총을 받게 된 정 교위는 울상을 지었다. 그러는 사이 조굉이 추상같은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장원을 포위해라! 그리고 일에 참여한 무림인 놈들은 모조리 끌어내라. 단 한 놈도 빼놓지 마라. 혹시라도 세가나 문파의 이름에 현혹되어 보내주는 자가 있다면 그 자도 목을 치겠다!"
"!!"
부지휘사의 명령에 금의위 교위들은 흠칫 몸가짐을 바로잡았다. 지금 조 대인이 얼마나 진노한지 피부로 느껴졌던 것이다.
옆에서 부지휘사를 호위하던 심복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용봉지회를 앞두고 모인 무림인들이 크게 반발할 수 있습니다."
"그렇겠지! 당연히 반발하겠지. 하라고 해라. 놈들은 선을 넘었다! 도술과 신통력으로 고관대작들을 꼬드기고 총애를 받으니 자기들이 황족이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지!"
조굉은 냉소 가득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세간의 평가는 사파나 마도의 무인들보다 훨씬 나았지만, 금의위를 이끄는 조굉이 보기에 정파의 무인들도 큰 차이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느슨하게 풀어주면 자기들이 뭐라도 된 것마냥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어오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개방과 몇몇 문파들의 행동은 명백히 선을 넘었다.
아무리 옥면개와 친분이 있다 하더라도 태자 전하의 명을 받고 온 진충비도를 멋대로 제압하려 하다니. 중립을 지켜도 괘씸해했을 텐데 이건 용납할 수가 없었다.
"다른 곳에 머무르는 무림인 놈들에게 서신을 보내라. 어디 한 번 반발해보고 싶으면 반발해보라고!"
* * *
"종, 종 형이 혈교의 첩자였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장원 안은 아직도 충격에 휩싸인 무림인들이 많았다.
옥면개 종조일은 개방의 삼결 제자로서 예전부터 쌓은 이름과 협행이 부족하지 않았는데, 그 자가 사실 혈교의 첩자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실제로 종조일과 친분이 깊었던 무림인 몇몇은 아직도 현실을 부정하며 오해가 있었던 것 아니냐고 떠들 정도였다.
그 모습에 아까 무림인들을 흩어버리느라 가볍게 부상을 입은 곤륜의 제자 선도광이 이를 갈며 외쳤다.
"비키라고 하면 비킬 것이지 거기서도 시간을 끌고 머뭇거리니. 형장들이 사리를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자들이 맞소?"
"어... 어쩔 수 없었소. 옥면개를 누가 의심할 수 있었겠소?"
"맞소. 말이 심하시오!"
멍청한 짓을 해놓고 오히려 목소리를 높이는 몇몇 후기지수들의 모습에 선도광은 짜증이 울컥 치솟았다.
옆에서 아까 싸움을 도와준 아미파의 비연선자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아까 선 소협이 말했듯이 진충비도는 작게는 한경의 판관이고 크게는 태자 전하의 명을 받아 용봉지회에 출전한 무인인데 뒷일이 걱정되지도 않으십니까?"
"오해였다고 하지 않았소!"
"오해는 네놈들이 정파의 후기지수라는 게 오해겠지."
오대세가의 후기지수들이 절뚝거리며 돌아왔다. 개방의 무인들을 죽이지 않고 제압하느라 꽤 피로해보였지만 기세만큼은 가장 흉흉하고 사나웠다.
당령은 과연 사천당문의 사람답게 사납게 쏘아붙였다.
"여기 있는 자들은 멀쩡히 판단해서 혈교의 첩자를 잡는 걸 도왔는데 너희들은 뭐냐? 혈교의 첩자냐?"
"당 소저. 말씀이 과하십니다!"
"과한 건 네놈들의 방해겠지! 아까 뒤를 보니 우리까지 같이 공격하려고 하던 것 아니냐? 잘못을 했으면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해도 모자랄 판에 아주 뻔뻔하기 그지없군!"
평소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던 데다가 이번 싸움에서 후방까지 위협당한 만큼 오대세가 무인들은 짜증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이번 일에 가장 책임이 큰 개방도들은 감히 나서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하다가 밖에서 들리는 함성에 깜짝 놀랐다.
"확인해보거라!"
"예, 예!"
밖을 확인하고 온 개방 무인은 기겁해서 속삭였다.
"밖, 밖에 금의위와 병사들이...!"
"아까 오지 않았느냐? 왜 갑자기?"
"열, 열 배는 더 많은 것 같습니다!"
"?!"
개방도는 재빨리 장원의 누각 위로 올라가서 상황을 확인했다. 말 그대로 아까 온 병사들보다 훨씬 많은 숫자가 장원을 포위하고 있었다.
무림인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건 아무리 봐도 혈교 첩자 하나 잡으려고 온 병력이 아니었던 것이다.
"남은 첩자가 있더냐?"
"그, 그럴 리 없습니다."
"무슨 일이오?"
서로 책임을 피하려고 다투던 후기지수들도 밖의 소란을 들었는지 의아해했다. 그 설명을 해주려는 듯 누군가 장원의 대문을 쿵쿵 두드리기 시작했다.
"무슨..."
쾅!
열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밖에서 장원의 대문을 박살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무례한 행동에 장원 안의 무림인들이 깜짝 놀랐다.
"이게 무슨 짓..."
"쉿. 가만히 있어라!"
혈기를 억누르지 못하고 평소처럼 따지려고 하는 몇몇 무림인들을, 비교적 경험이 많은 다른 후기지수들이 말렸다. 분위기가 이상했던 것이다.
대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온 금의위 교위들은 무림인들의 질문이나 말을 받아줄 생각이 없다는 듯 서늘한 표정으로 교서를 펼쳤다.
"무림인들은 들어라! 너희들은 감히 한경에 모여 멋대로 회(會)를 열었음에도 불구하고 본 태자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 이거."
"무슨..."
가문의 일을 도맡아서 처리하는 만큼 비교적 조정의 일에 훤하고 세상 물정에 밝은 오대세가 무인들이 먼저 당황하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를 공격한 자는 물론이고 그것을 방조한 자, 한패인 자들은 모조리 부복하고 나올지어다! 일각(一刻) 동안 나오지 않는 자들은 모조리 혈교를 섬기는 역도들로 판단하겠다!"
방금까지 구파일방의 후기지수들을 죽일 듯 노려봤던 오대세가 무인들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옥면개의 교우관계가 넓어 아까 옥면개의 편을 든 후기지수들이 삼분지일은 족히 넘을 텐데 이 인원들을 전부 붙잡아서 데리고 간다고?
이들로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과격한 대응이었다.
"말, 말도 안 됩니다!"
쓰러진 단수평을 돌보고 있던 화산파의 제자 하나가 외쳤다. 평소 심산유곡에서 무공을 수련하는 데에만 집중하던 만큼, 이 젊은 도사는 금의위들이 이러는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여기 온 이들은 산문 아래에서 '도사님, 도사님'하며 아첨하던 관리들과는 전혀 다른 이들인 것이다.
"역도다. 죽여라!"
금의위 교위들은 이미 부지휘사에게 살기 넘치는 명령을 받았기에 즉시 검을 뽑았다. 만약 누군가 건방지게 군다면 반드시 본보기를 보여주라고 명령받았던 것이다.
그 순간 팽주희가 도(刀)를 반대로 휘둘러 화산파의 제자를 쓰러뜨렸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목숨을 구해줬으니 감사해해라! 지금 여기가 화산파인 줄 아느냐!"
팽주희는 그렇게 일갈하고 뒤로 물러났다. 화산파 제자를 기절시켜준 것만으로도 팽주희는 꽤나 호의를 베풀어 준 셈이었다.
상황을 파악한 오대세가 무인들은 슬슬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 일에서 발을 뺄 수 없는 후기지수들이 당황한 얼굴로 사정했다.
"제갈 형! 도와주십시오!"
"내가 지금 어떻게 도와주겠나?"
"관병들이 동도들을 잡아가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겁니까?"
"그러게 누가 막으라고 했나?"
"이런 무례한...!"
몇몇 멍청한 무인들은 당문 사람들에게 부탁하려고 했다가 얼굴만 붉혔다.
밖에서 반 각 남았다는 외침이 나왔다. 어떻게든 버티려던 후기지수들이 상황을 파악하고 밖으로 걸어나왔다. 금의위 무인들은 가차없이 점혈하고 포박했다.
그 중 성질이 드센 후기지수 한둘이 사문의 이름을 꺼내 항의하려고 했지만,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부지휘사가 내뱉은 말이 똑똑히 귀를 후려친 것이다.
"사문을 꺼내서 협박하려는 자가 있다면 곧바로 목을 베어라. 중죄를 지은 죄인이 협박하는 걸 가만히 내버려두는 자가 있다면 그 자 또한 목을 베겠다!"
"예!"
* * *
혈교 첩자와 치열한 싸움을 벌인 뒤에 연우혁은 자택에 틀어박혀 이틀 동안 두문불출했다.
옥면개에게 내상을 입어서가 아니라, 절정의 경지에 오른 뒤 깨달은 것들을 스스로 되새겨보기 위해서였다.
그 날 장원에서 벽을 깼을 때는 너무나도 급박했기에 스스로가 무엇을 얻었는지 몰랐지만 돌아와서 깊게 생각에 잠기자 얻은 게 무엇인지 천천히 떠올랐다.
상대방과 거리를 벌리면서 편하게 이기려고 했던 게 오히려 길을 돌아가게 만들었을 줄이야.
'...내가 그렇게 마두처럼 싸웠나?'
연우혁은 조금 인정하기 힘들었다.
135화
하지만 절정의 경지에 오를 때 느꼈던 깨달음들을 다시 떠올리자 연우혁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마두처럼 싸우지 않았다면 저런 깨달음을 얻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나마 탈혼비도가 있었기에 벽을 넘을 수 있었다. 결국 이기기 위해서는 모든 걸 쏟아 부어서 결단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는 것이다.
연우혁은 가볍게 허공에 주먹을 뻗었다. 분명 위국권법의 초식이었지만 그 위력이나 움직임은 전혀 다른 권법이었다. 연우혁의 깨달음이 들어간 탓이었다.
'이 정도면 탈혼권법이라고 해도 되겠군.'
권법이나 보법들이 모두 다 깨달음에 맞춰 변화했다. 연우혁은 익힌 심법들을 점검했다.
가장 놀라운 건 하해불택신공이나 현청벽사신공, 범망공 이 세 심법이 어느 정도 같이 운기된다는 점이었다. 권법이나 보법과 달리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그렇다면 이 심법들도 언젠가 모조리 합칠 수 있단 말인가?'
"판관 어르신! 판관 어르신, 계십니까!"
"무슨 일이냐?"
연우혁은 관졸의 다급한 외침에 의아해했다.
"관부로 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오시지 않는다면 소인이 크게 혼쭐이 날 테니, 제발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그 정도라고?'
이틀 동안 연우혁이 저택에 틀어박힌 건 무공을 점검하기 위해서였기도 했지만, 급한 일을 다 처리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마지막 남은 혈교의 첩자도 잡아냈으니 판관인 본인이 해야 하는 일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금의위 무인들이 구파일방의 후기지수들을 대거 붙잡아 뇌옥으로 끌고 간 건 연우혁도 당연히 앞에서 봤으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연우혁은 그 문제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구파일방이 왜 구파일방이겠는가?
각 지역에서 토호로 군림하던 세가들과 달리 은인자중하며 황족이나 고관들의 존경을 받아오던 명문이(개방을 제외하고) 바로 구파일방이었다.
황실의 사람들이 도사가 필요하면 어디를 가고 고관대작이 고승이 필요하면 어디를 가겠는가.
그 동안 쌓은 인연이 있고 명성이 있으니 알아서 잘 하리라 생각한 것이다.
부지휘사가 분노하긴 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체면을 신경 쓴 일일 것이고, 분노가 가라앉으면 타협을 안 할 만큼 완고한 사람도 아니었으니 적당히 협상하리라 생각했는데...
지금 관졸의 분위기는 전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알겠다. 지금 가보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얼추 깨달음도 정리되었으니 연우혁은 저택을 나섰다. 그러자 바로 기다렸다는 듯이 무인 한 명이 훌쩍 앞에 착지했다. 익숙한 얼굴에 연우혁은 웃으며 말했다.
"당 대협 아니십니까!"
"반갑습니다. 연 대협!"
"예?"
"농담한 거다. 네가 절정의 경지에 올랐다는 말을 들었는데 어떻게 편하게 대하겠느냐?"
독혼수 당등의 말에 연우혁은 손사래쳤다.
"당 대협께서 제게 베푼 은혜가 얼마인데, 저를 그런 배은망덕한 놈으로 보셨단 말입니까? 크윽. 정말 분합니다! 벽에 머리를 박아서라도 억울함을..."
"야. 관둬라, 관둬!"
당등은 허겁지겁 연우혁을 말렸다. 그러나 썩 기분 나쁜 표정은 아니었다.
강호에 무공의 경지가 올라가면 과거를 잊고 무례하게 구는 자들이 수두룩했는데, 젊은 판관이 저렇게 말해주자 으쓱해지는 기분이었다.
연우혁은 벽에 머리를 박으려는 시늉을 두 번 정도 더 하고 나서야 멈췄다.
"지금 한경에 일이 있어서 급히 관부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혹시 짐작가시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당연히 있지. 그리고 네 재주라면 분명 짐작하고 있는 게 있을 텐데?"
"이번 금의위들이 후기지수들을 붙잡아 간 일입니까? 저는 당연히 해결될 줄 알았습니다만."
연우혁의 말에 당등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사실 소식을 듣고 그럴 줄 알았다. 후기지수 놈들이 뒤질 짓을 하긴 했지만..."
"...당 대협... 대로변에서 이러지 마십시오."
당등이야 친구가 없고 당문이 있어서 길거리에서 '구파일방 후기지수 놈들이 뒤질 짓을 했구나!'해도 됐지만 연우혁은 그런 짓을 했다가는 '한경귀마'나 '한경혈마'같은 별호가 붙을 수 있었다.
"내가 틀린 말 했냐? 여하튼, 뒤질 짓을 하긴 했지만 금세 풀려날 줄 알았다. 구파일방의 장로들까지 왔었으니까."
"!"
이틀 사이 구파일방의 장로들이 왔다갔다는 이야기에 연우혁은 크게 놀랐다.
물론 모든 장로들이 오진 않고 비교적 한경에 가까운 문파의 장로들이 우선적으로 달려온 거였지만, 그 짧은 사이 장로들까지 달려왔다니.
구파일방 쪽에서도 이번 일에 꽤 놀란 게 분명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건...
'그랬는데도 해결이 안 됐다고?'
"네 표정을 보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 장로들이 왔는데 왜 해결이 안 됐냐고 생각하고 있겠지. 나도 놀랐다!"
당등도 연우혁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실제로 한경의 무림인들은 장로들이 허겁지겁 달려와서 사죄를 했을 때 이번 일이 끝날 줄 알았다.
그러나 금의위를 이끄는 부지휘사는 예상 밖으로 완강했다. 역도들은 국법에 따라 처분할 것이고, 감히 일에 끼어드는 자들이 있으면 마찬가지로 취급하겠다고 얼굴도 보지 않고 축객령을 내린 것이다.
말로만 끝이 아니었다. 엄포라도 놓듯이 조정에서 보낸 고수들이 계속해서 한경에 도착했다. 누가 보면 한경에서 정말 반역이라도 일어난 줄 알 것 같았다.
"내 생각에... 이건 황자 전하의 역린을 건드린 거다. 그렇게 안 봤는데 황자가 생각보다 음흉하군!"
연우혁은 당등의 추측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쯤 되면 평소 무림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조정의 고관이 기다렸다는 듯이 괘씸죄로 엮고 있다고 봐야 했다.
금의위 부지휘사가 나는 새도 떨어뜨릴 권력을 갖고 있다지만 구파일방을 상대로 이 정도 일을 벌이려면 혼자서는 안 됐다. 당연히 뒷배가 있을 것이고, 가장 수상한 건 태자였다.
"꽤 호인처럼 보였는데, 심계가 실로 무섭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불비불명(不飛不鳴)이라! 이제 어느 누가 황자를 두려워하지 않겠느냐?"
독혼수란 별호를 가진 당등도 이번 일을 벌인 태자의 독심에는 질린 모습이었다.
순진무구한 척 용봉지회를 구경하러 왔다고 무림인들을 방심시킨 뒤, 기다리고 기다렸다가 후기지수들이 실수하자마자 번개처럼 행동해 무림을 뒤집어놓다니.
모두 다 자신의 위엄을 제대로 각인시키기 위한 교묘한 계략이었던 것이다.
이야기를 듣던 연우혁은 문득 의아한 점이 있어서 물었다.
"그런데 이 계략이 성립하려면 후기지수들이 크게 실수해야 하는데, 이게 예측이 가능합니까?"
"흠. 글쎄. 이번 일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누구를 매수하거나 선동했을지도 모르겠군..."
"정말 무서운 사람이군요."
"그래. 너 또한 상대할 때 조심해야 할 것이다."
두 무림인은 황자의 깊은 심계를 두려워했다. 연우혁은 특히 더욱 그랬다. 나름 몇 번 대면을 했는데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믿기지 않는군. 그럴 사람 같진 않았는데.'
"한경의 고관들이 저를 부르는 건, 아마 구파일방 때문이겠지요."
"맞다. 반대라면 굳이 부를 필요가 없으니."
축객령을 당한 구파일방 측이 부탁을 할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당연히 한경의 관리들에게도 연락이 들어갔을 것이다.
한경에서 닳고 닳은 지부 어른이라 하더라도 금의위들이 구름처럼 몰려온 지금 함부로 행동할 수 없는 만큼, 지낭(智囊)인 연우혁의 조언이 꼭 필요할 터였다.
"조언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있지!"
당등의 시원시원한 대답에 연우혁은 흐뭇함을 느꼈다. 역시 괴팍하다 하더라도 당문의 고수인 만큼 연우혁이 모르는 무언가가 보이는 게 분명했다.
"모르는 척 하는 것이다!"
"..."
저걸 조언이라고 하나 싶었지만 당등은 진지했다.
"독이 골수에 깊게 스며들면 때로는 오른팔이라 하더라도 잘라내야 하는 법."
"조언 감사합니다."
"하. 나라고 정파의 동량들이 죽는 게 좋겠느냐?"
"정말 괴로우십니까?"
"아니. 사실 별로 괴롭지 않다. 오대세가는 이번에 엮이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포상을 받으면 받았지."
"..."
일이 끝나고 첩자를 잡는데 공을 세운 이들은 오히려 상을 받았다. 무림인들이 하나로 뭉치지 못하게 갈라치는 계략을 쓴 것이었지만 이건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 속물이라고 은근히 경원시된 오대세가 입장에서는 아쉬운 게 없는 만큼 더더욱 나설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잘 생각해봐라!"
"예... 조언 감사합니다."
* * *
'확실히 나쁜 조언은 아니긴 하군.'
관부로 들어서서 지부 어른이 머무는 후당(後堂)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연우혁은 당등의 조언을 새삼 되새겼다.
들었을 때는 한심했지만 막상 되새겨보니 중책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괜히 고래 싸움에 끼어들 이유가 무엇 있겠는가.
"연 판관께서 오셨습니다."
"오, 들어오게! 들어와!"
지부를 비롯해 안에 있던 몇몇 고관들이 연우혁의 도착을 환영했다. 이런 상황에서 연우혁만큼 든든한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구파일방에서 나온 사람들은 없습니까?"
"하! 그럴 리가 있나. 아무리 고명해도 그렇지, 이런 일에 같이 상의해 줄 의리까지는 없네!"
고관 중 한 명이 비웃듯이 말했다.
아무리 뇌물을 받는다 하더라도 이런 일에 자기 관직과 목숨을 걸 만큼 한경의 관료들은 멍청하지 않았다.
이들이 연우혁을 부른 건 구파일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를 위해서였다.
지부 어른이 평소와 달리 신중한 얼굴로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번 일은 태자 전하의 체면과도 관련된 일이니, 평소처럼 함부로 대했다가는 큰 화를 입을 수 있네. 연 판관! 자네의 재주가 뛰어나고 식견이 높으니 한 번 의견을 들어보고 싶어. 본관이 어떻게 행동해야 가장 좋겠나?"
자신의 안위와 관련된 일이 되자 지부 어른은 흐리멍텅한 평소와 달리 총명하게 번쩍이는 눈빛으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지부는 현재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구파일방의 부탁을 받아 함부로 말을 전달했다가는 본인도 같이 엮일 수 있었고, 그렇다고 구파일방의 부탁을 완전히 무시했다가는 괜히 원수가 생기는 셈이라 찜찜했다.
지금이야 궁지에 몰렸다지만 구파일방이 가진 저력을 생각해보면 언제 다시 성세를 회복할지 모르는 것이다.
"지부 어르신. 거절한다 하더라도 금의위가 원한을 사지, 여기 한경의 관리들에게까지 원한을 품겠습니까?"
"연 판관이 아직 소문을 못 들었나보군."
"?"
"소문에 금의위가 후기지수들을 전부 처형하겠다는 말이 있네."
"!"
어지간한 연우혁도 이건 정말 놀랐기에 눈을 크게 떴다.
붙잡힌 후기지수들이 몇 명이고 그 중 문파에서 기대하는 제자들이 몇 명인데 이들을 다 죽이겠다니?
"말도 안 됩니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이 가끔씩 일어나는 게 세상사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나면 원한은..."
지부가 말을 흐렸지만 연우혁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알 수 있었다. 원래 사람이 눈이 뒤집히면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 어려운 법 아닌가.
고민하던 연우혁은 각오를 하고 말했다.
"어차피 안 그래도 부지휘사를 한 번 뵙고 인사를 드려야 했는데, 제가 뵙고 속을 떠보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판단을 하도록 하지요!"
어차피 자신도 엮여 있는 일인데다가 부지휘사를 만나봐야 하는 만큼 연우혁은 시원하게 자청했다.
나중에 더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지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선심을 써서 나쁠 게 없는 것이다.
'설마 도와준 게 얼마인데 나까지 쫓아내진 않을 것이다.'
"오오!"
"역시 연 판관. 자네밖에 없네!"
감탄한 한경의 고관들은 재빨리 하인들을 불러 궤짝을 쌓기 시작했다.
연우혁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이게 뭡니까?"
"자네가 방문할 때 바칠 성의지. 자네는 재산이 별로 없지 않나!"
"...감사합니다."
선배 관리들의 우정에 연우혁은 기뻐해야 하나 싶어 떨떠름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