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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5화. 넘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나

박민재만이 아니었다.

각 지부, 지부장들을 비롯.

아르카나의 베타 테스트를 기억하고 있는 이들은 얼어붙고 말았다.

갑자기 넋이 빠진 지부장들의 얼굴.

"베이커 지부장님, 괜찮으십니까?"

"음, 아무것도 아닐세."

"괜찮으시다면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이거 또 총책임자님이시군요!"

AAU 런던 지부장.

베이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놀라운 일이다.'

[프로토타입 모델 : D].

베타 테스트 시절의 프로토타입.

가짜라고는 하나 엄연한 드래곤이었다.

그 브레스의 위력만큼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일 터.

'드래곤 브레스를 검으로 무력화했으니.'

검과 브레스가 맞닿는 순간.

브레스는 가루가 되어 허공을 비산했다.

직접 지켜봤어도 두 눈을 의심했을 만한 광경이 아르카나 공식 홈페이지에 버젓이 올라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납득할 수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이호열 총책임자님이시다.'

그러니까 이렇게까지 넋이 빠진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건 바로 프로토타입 몬스터의 존재, 그 자체였다.

AAU 대한민국 지부.

박민재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분명 그렇게 말했었어."

머릿속에 떠오르는 레이먼 션과의 대화.

-"이미 완성된 것에 간섭할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그 시절에는 이미 서비스 중인 아르카나에는 손을 댈 수 없다는 의미로 알아들었다.

그러나 아는 만큼 보이는 법. 대격변 이후, 개발 단계에 불과하던 설정들이 실현되어 균열로 튀어나왔을 때.

박민재는 비로소 숨겨진 뜻을 알아차렸다.

"이미 완성된 세계였다고...."

코스모가 아르카나 대륙을 개발한 게 아니다.

아르카나 대륙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는 의미를.

하지만 믿을 수 없었다.

그 추측을 끝까지 반박하던 건 베타 테스트 시절의 경험이었다. 베타 테스트 시절, 불완전하던 아르카나 대륙의 모습을 자신을 비롯한 모두가 지켜봤었으니까.

마냥 레이먼 션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프로토타입이 왜 갑자기...?"

그런데, 증거였던 프로토타입들이 균열에서 튀어나왔다.

'설마...?'

박민재의 동공이 흔들렸다.

'베타 테스트가 전부 가짜였다는 건가?'

가짜 다른 말로는 허상.

아르카나 대륙이 정말 원래부터 존재했던 세계라면. 베타 테스트는 단순히 우리를 속이기 위한 연극에 불과했다는 것. 코스모는, AAU는 지금까지 레이먼 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다는 뜻이었다.

"이 개새끼가."

빠득!

박민재는 이가 갈릴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그 속내를 알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정말로 완벽하게 패배한 기분이 들었다.

"...지부장님?"

"잠깐만. 뒤집힌 속 좀 추스르는 중이다."

"아, 넵!"

가뜩이나 지랄맞은 반골 기질이다.

그 기질이 용납하지 못한 작자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꼴이었으니까.

부하 직원들 앞에서 이렇게나 동요하고 있는 거겠지.

그러나 박민재는 기어코 낯빛을 바꿔냈다.

"후우, 됐어."

이것 또한 사회생활의 연륜이라서?

그럴 리가 있나.

납득할 수 없다면 냅다 들이받기만 하며 살아온 자신이었다. 막말로 성현준이보다 사회생활엔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화를 억눌렀다는 말인가?

누군가 묻는다면 박민재는 모니터를 가리키리라.

"...이번에도 덕분에 살았습니다, 이호열 총책임자님."

그랬다.

레이먼 션에게 얻어맞은 뒤통수의 쓰라림을.

다른 누구도 아닌 호열이 되갚아주기 직전이었으니까.

누군가 외쳤다.

"이걸로 마지막 층. 그러니까 관제실입니다!"

박민재가 입꼬리를 올렸다.

"어디 얻어맞는 기분이 어떤지 느껴봐라, 개자식아."

*

선의의 경쟁.

승부는 간발의 차이였다.

체력 단련에 이어서 연패는 용납할 수 없다는 모양인지, 쾌검으로 거대 프로토타입을 난도질해 나가던 셰그윈이었거늘. 내게 시선을 빼앗긴 게 패착이었다.

'그래도 이해는 한다.'

일루젼 브레이커 소리를 들었는데.

안 돌아보고 배길 수 있겠냐고.

쿠구궁─!

거대 프로토타입이 굉음을 내며 무너지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뭔가 어지러울 정도로 많다.

애초에 레이먼 션을 만나기 위해 진입했던 던전이다. 레벨 업이나 전리품 같은 건 기대하지 않았는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들어올 때 마음과는 다르구나.

'경험치 안 줬으면 섭섭할 뻔했어.'

프로토타입은 전리품을 드롭하는 대신 상당한 경험치를 뱉어냈다.

거대 프로토타입을 쓰러트리기 전에도 무려 9레벨이 상승한 거만 봐도 알 수 있듯 말이다. 그래서 나름 기대하고 상태창을 확인했는데....

기대 이상이었다.

[레벨: 680]

...680레벨이라고?

[보유 포인트 : 59]

잠깐만, 저거 한 마리로 50레벨?!

경험치를 시스템 한계치까지 습득했다는 뜻이잖아.

단번에 50레벨이라니.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쌓인 경험치 이상으로 호화스러운 경험치다.

자연스럽게 의문이 들었다.

'저게 기계 덩어리가 대체 뭐길래...?'

물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의심할 필요는 없겠지.

전리품은 뱉어내지 않았지만, 이 정도면 진심으로 만족이다.

레벨도 레벨이지만 그보다 중요한 수확이 있었으니까.

두 번째 초월자 성취를 개방했으니 말이야.

[초월자 : 그대의 초월적인 경지는 초월자라 불리기에 충분하다. - 현재 도달한 성취 : 서클 (모든 마법 발현력 1,000% 상승) / 긍지의 검로 (현재 해방된 길 : 제1길) / 없음 / 없음....]

이름하여 긍지의 검로.

'...누구답게 거창하다, 진짜.'

이름부터 그랑펠다운 성취가 아닐 수 없구나.

그러나 그 효과는 실로 나, 이호열다웠다.

수도 없이 많은 살 구멍을 파둔 덕분에.

어떤 적을 상대로도 상성 상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된 셈이니까.

'그런 내 검로를 따라서.'

동반자, 귀철 또한 이름을 바꾸겠지.

...아니지,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라.

형태와 효과를 바꾸겠지.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다는 거야.'

현재 해방된 길은 '제1길, 일루젼 브레이커'뿐.

그러나 다른 길도 발버둥 치다 보면 자연스럽게 발길이 닿겠지.

여태껏 그래 왔던 것처럼 말이야.

내가 생각을 정리하는 순간이었다.

일루젼 브레이커가 말했다.

-아틀라스가 패배를 인정하겠다는군.

그래?

그 말에 셰그윈을 바라보니, 어째 아직도 놀란 눈치였다.

할 말이 아주 많아 보이는 게 여러 의미로 착각한 모양이다.

그러나 긍지의 검로에 얼마나 처절한 사연이 있는지.

구구절절하게 설명할 그랑펠이 아니었으니.

태연하게 말했다는 것이다.

"비로소 방해꾼이 사라졌군."

[B5-심층연구실]

"나아가지, 셰그윈."

그전에 심층연구실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계단 아래로 보이는 모습을 봤을 때 프로토타입은 보이지 않았다. 연구실이란 이름에 맞게 무수한 모니터만 늘어져 있을뿐.

그냥 지나쳐 내려가면 심층부의 끝, [B6-관제실]이 있다.

거기서 CCTV로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겠다, 레이먼 션.

뭐, 나랑 대화를 나누고 싶어?

'안 될 것도 없어.'

나도 진심으로 묻고 싶은 게 많거든.

하지만 그전에 일단, 계산은 확실하게 하자는 것뿐이다.

나도 그렇고 셰그윈도 그렇고.

그쪽에겐 받아내야 할 빚이 조금 있잖아?

의욕을 되살리며 계단을 내려간다.

지지직─

문득 고막을 파고드는 소음.

"!"

철컥!

셰그윈이 반사적으로 아틀라스를 치켜든다.

던전, 어떤 상황이 발생하리라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공간.

그러나 나는 언제나와 같은 음성으로 읊조렸다.

"경계할 필요 없다."

그게 방금 지지직 소리가 내겐 굉장히 익숙했으니까.

노이즈였다.

주파수를 잘못 맞추면 나오는 화이트 노이즈를 말하는 게 맞다.

"?"

그러나 셰그윈은 곧장 경계를 풀지 않았다.

그럴 만도 하려나.

아르카나인에겐 이보다 낯선 소리도 없을 테니까.

그나저나 나도 의문인걸.

'갑자기 라디오라도 틀었냐?'

레이먼 션에게 구시렁거리며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본다.

[B5-심층연구실].

...잠깐만, 수많은 모니터들이 지직거리기 시작했다.

탑주의 고양이 수작에 익숙한 나다.

덕분에 알아차렸다.

또 개수작 시작이군.

'내가 눈이라도 줄 것 같냐?'

플레이어라면 환장할 수밖에 없는 퀘스트도 가볍게 무시했던 나다.

이깟 지직거리는 모니터로.

내 구둣발을 멈출 순 없다는....

'...어라?'

그러나 속마음과 무관하게 나는 자리에 멈춰 섰다.

지직거리던 모니터에 떠오른 화면이 시선을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익숙한 화면이었다.

매일은 아니더라도.

매주 한 번 이상은 접속하니까 익숙할 수밖에 없겠지.

화면에 떠오른 저건 확실하게 아르카나 공식 홈페이지였다.

그냥 홈페이지만 떠올랐다면 멈추지 않았을 거다.

허나, 그 홈페이지에서 웬 동영상 하나 재생되고 있었다.

관찰자의 시점으로 비추는.

은빛의 머리카락.

지나치게 화려한 재킷과 의복.

그리고 손에 들고 있는, 외관부터 범상찮은 검까지.

저건, 나였다.

"...!"

멀리서 내 모습을 비추는 앵글이었기에 셰그윈 또한 화면에 떠올라 있었다. 실시간 스트리밍, 역시나 셰그윈에겐 이해할 수 없는 경험일 터.

파박!

셰그윈이 고개를 돌리며 주위를 살핀다.

그런 셰그윈이 모습이 실시간으로 화면에 떠오른다.

나는 역시나 태연하게 말한다.

"놀랄 필요 또한 없다."

물론, 겉과 속이 다른 말이다.

왜냐니.

지금 나는 속으로 식은땀을 한 바가지 흘리고 있었으니까!

불현 듯 떠오르는 기억.

균열에 진입하자마자 마주쳤던 CCTV.

'저거 CCTV 시점인가?'

애써 차분하게 상황을 정리해본다.

현재 CCTV에 포착된 내 모습이 아르카나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있다. 저런 CCTV는 균열에 입장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셀 수 없이 많이 봐왔다.

'...그럼 그동안 전부 지켜봤다는 거잖아.'

프로토타입을 무릎 꿇게 하는 것도.

방금 거대 프로토타입을 상대로 귀철을 치켜든 것도.

그리고 내가 쥐고 있는 일루젼 브레이커도...?!

그렇게 생각하자 내뱉은 말이 떠오른다.

-"각오는 되었나. 일루젼 브레이커."

그, 그게 아르카나 공식 홈페이지에 박제됐다고?

이런 빌어먹을 세상아!!

검에게 말을 거는 것부터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일 텐데. 심지어 검 이름이 일루젼 브레이커라니. 나는 뚫어져라 모니터를 바라봤다.

레이먼 션.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내 일거수일투족을 생중계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만.

나는 셰그윈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이로써 나 또한 그대와 같은 입장이 됐군."

감히 나를 구경거리로 만들었겠다?

받아내야 할 빚이 '조금' 있다고 한 건 취소하겠다.

수치사를 통해 나의 목숨을 위협한 죄는.

더더욱 엄중히 따져 묻도록 하겠다.

모니터에서 옮겨가는 시야.

지하를 향해 떠오른 계단을 향한다.

더 이상 망설임은 없다.

또각─

[B6-관제실에 진입하셨습니다.]

관제실.

나는 던전의 심장부.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을 레이먼 션이 있을 그곳에 발을 들였다.

나의 구두 소리가 관제실에 울리기도 잠깐.

눈앞이 점멸했다.

뭐냐, 설마 또 퀘스트를 들이미는 건 아니겠지?

말했다시피 속물인 나는 개수작에 넘어갈지언정.

그랑펠에게 흔들림은 없었으니.

"웃기지도 않는군."

일단, 싸늘하게 내뱉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잠깐만....

이거 퀘스트 메시지가 아니다.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조건이라니?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퀘스트 목표였다. 그런데, [B6-관제실]에 진입한다고 충족될 퀘스트 목표는 없었다. 이내, 연달아 떠오르는 메시지.

그건....

[보상이 지급되었습니다.]

난데없는 보상 메시지였다.

[균열, '던전 : CODE-009'를 클리어하셨습니다.]

...알겠다.

'날 이렇게 내보내시겠다?'

속셈이 뭔지는 몰라도.

잔뜩 약이 오른 나와 셰그윈을.

균열 밖으로 내쫓아 버리겠다는 거구나?

근데, 내가 분명히 말했잖아.

'그쪽에겐 되갚아줘야 할 빚이 있다고.'

내 목숨 값은 확실하게 받아내야겠다고.

그러니까 마음대로 균열을 폐쇄하고 내뺄 순 없지, 레이먼 션.

나는 전력으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고오오!

[첫 세계수의 축복]조차 재생하기 벅찰 정도로 방대한 마력을!

그 마력의 사용처는 기이의 공간, 균열.

나는 이 순간 균열의 클리어를 반전시키겠다.

그런 게 가능하냐고?

'해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법이다.'

그리고 가능, 불가능을 떠나서.

레이먼 션.

그 면상에 한 방 제대로 먹여주기 전까지는.

절대로 균열 밖으로 나갈 생각은 없다는 뜻이다.

[마력이 너무 낮습니다.]

순식간에 마력 탈진을 예고하는 메시지가 떠오른다.

그러나 멈추지 않는다.

쩌저저적─!

깨져가는 균열의 풍경을 또렷하게 응시한다.

머릿속에서 이뤄지는.

현학적인 탐색, 과정, 발현의 과정.

!─적저저쩌

무너지던 균열이 다시금 반전되어갔다.

눈앞이 점멸했다.

[B6-관제실에 진입하셨습니다.]

"보상 따위로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나."

나의 목소리가 다시금 고요해진 관제실에 울린다.

"그렇다면 유감이군."

더없이 냉랭하게.

"뇌물을 내민 것 또한 처분에 포함하겠다."

그러니 낯짝을 보여라, 레이먼 션.

-오너라. 허상의 주인이여.

나의 애검, 일루젼 브레이커가.

수치심에 젖은 내 주먹이.

긍지 펀치가 울고 있으니까!

◈ 236화. 이 시간부로 사냥감이다

철컥─

쇳소리가 들려왔다.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알아차렸다.

셰그윈이 검집에 아틀라스를 집어넣는 소리였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검성의 직감.

이곳에 더 이상 위협적인 기척은 없다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거 괜한 짓을 했구나, 싶어진다.

레이먼 션, 그 자식 면상에 한 방 먹여주겠다고.

클리어된 균열에다가 [「반전의 기이」]를 발현했거늘.

'실체는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단 건가?'

억울해서라도 관제실을 뒤져봐야겠다.

[첫 세계수의 축복] 효과는 여전히 발동 중이다.

그러나 마력은 여의치 않다. 이 순간에도 폐쇄되려는 균열을 억지로 붙잡고 있었으니까. 다만, 라이트 하나 정도를 발현하는 데엔 무리가 없겠지.

두둥실─

빛의 구체, 라이트가 관제실을 밝힌다.

설마했는데 이거 진짜로 없네?

물론, 약속을 잡은 것도 아니고 반강제로 아지트에 진입한 나였다.

그래서 딱히 할 말이 있는 건 아닌데....

'애초에 만날 생각도 없었던 거 아냐?'

하긴 폴리모프를 덧씌운 마네킹을 앞세웠던 그였다. 그동안 그랬던 것처럼 나도 속여넘기려고 했던 모양이군. 그런 의미에선 놀아나지 않은 데에 감사해야 하나.

물론, 어찌 됐든.

"그대는 끝까지 긍지롭지 못하군."

나는 몰라도.

그랑펠에게 레이먼 션, 그쪽의 평가는 바닥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뭐, 거의 악마와 다를 바 없는 수준이라는 뜻이다.

들려오는 일루젼 브레이커의 목소리.

-검강은 예리해졌거늘. 어쩔 수 없는 애송이인가.

내가 아닌 셰그윈에게 하는 말이었다.

나야 뭐 속으론 부들거리고 있어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니까.

그런 나와는 다르게 셰그윈은 감정을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쳇.

놓쳤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모습이다.

사실 나도 내색은 하지 못하지만 같은 심정이다, 셰그윈.

그러니까 뭐라도 단서를 찾아봐야지.

'관제실.'

어떤 식으로든 정보가 남아있을 터.

균열이 클리어되면 이곳이 어떤 형태로 남아있을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반전의 기이로 균열의 클리어를 막고 있는 지금이. 레이먼 션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그래서 주변을 살피는데....

'!'

낯익은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사실 먼저 발견한 건 셰그윈이었다.

툭툭─

셰그윈은 검집으로 그 무언가를 건드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조심스럽게 귀를 가져다가 댔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애송이가 짐승의 알이냐고 묻는군.

짐승의 알이라.

아르카나인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네.

그러나 내게는 아니었다.

보자, 마지막으로 봤던 게 십 년 하고도 수년 전이거늘.

나는 잊을 수 없었다.

저 무언가에 붙어있던.

빨간 딱지가 뇌리에 선명히 남아있었기 때문에라도 말이야.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했던 시절.

아르카나 대륙 전기의 전용 접속기.

코스모의 VR 캡슐이었다.

하나에 천만 원을 호가하던 그 접속기 말이다.

라이트로 비춘 관제실에는 접속기를 제외한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다. 흔적도, 보상이라 불릴 만한 아이템도 없었다. 그럼 그 말인즉슨.

저 접속기가 바로.

레이먼 션이 나를 초대한 목적이자.

던전의 클리어 보상이라는 것.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등잔 밑이 빌어먹게도 어두웠잖아.'

출시 직후.

인류의 기술력을 수십 년이나 앞질렀다는 평가를 받은 가상현실 게임, 아르카나 대륙 전기였다. 그래, 모든 건 아는 만큼 보인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건 확실히 [『기이』]에 가까운 기술력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읊조렸다.

"그랬군."

저 알처럼 생긴 전용 접속기가 바로.

아르카나 대륙으로 향하는 길이였구나.

깨닫는 순간,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월드 퀘스트 : 10인의 모험가]

코드 균열에 숨겨진 10개의 프로토타입 접속기.

그것이야말로 아르카나 대륙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모험가들이여, 아르카나인들이여.

혼돈에 빠진 대륙에서 모든 것을 거머쥘 기회를 손에 넣어라.

─CODE 균열을 발견하라. (성공)

─균열을 클리어하고 접속기를 습득하라. (성공)

─접속기를 통해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하라. (진행 중)

정말로 마지막까지 개수작이구나, 레이먼 션.

.

.

.

퀘스트 내용에서 알 수 있듯.

퀘스트는 호열에게만 떠오른 게 아니었다.

동영상을 지켜보던 플레이어들은 흠칫했다.

"!!!"

접속기라는 걸 알아차리는 순간.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으니까.

그것도 무려 월드 퀘스트가.

"갑자기 뭔데, 이 분위기?"

유스라 왕국.

황금 송아지 주점.

락키드는 정적이 찾아온 주점을 바라봤다.

모험가 녀석들,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맥주를 통으로 들이켜며 눈치를 살핀다.

'눈알만 굴리는 게 꼭....'

서로 뒤통수칠 생각만 하는 눈빛들이잖아?

산전수전을 다 겪어온 락키드였기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모험가들 사이에서 흐르는 묘한 긴장감을.

플레이어들에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접속기라니.'

'저 프로토타입 접속기라는 것만 있으면 아르카나 대륙으로 진입할 수 있다는 건가?'

'그냥 아르카나 대륙으로 진입하는 건 미친 짓일지도 모르겠지만... 퀘스트가 있어. 그것도 월드 퀘스트가.'

클래스 퀘스트만 하더라도 막대한 보상을 준다.

단지 클래스 퀘스트를 수행하는 것만으로 남들보다 수십 걸음은 앞서나가는 랭커들이 널려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클래스 퀘스트보다도 희귀한 월드 퀘스트를 수행할 수 있다면?

'이건 기회야!'

그 보상은 감히 상상할 수 없으리라.

플레이어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호열이 한 개의 접속기를 발견했으니, 남은 건 단 아홉 개.

당연하게도 호열의 접속기를 가로챌 생각을 하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미쳤다고 이호열을 건드려?'

'제정신이면 상상도 못 할 짓이다.'

'그리고 아무리 그래도 사람 새끼라면....'

그동안 호열에게 받은 게 얼마였던가?

게다가 이번 월드 퀘스트를 발견한 것 또한 호열이었다. 그러니까 플레이어들은 남은 아홉 자리를 두고 눈치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소식은 AAU에도 전해졌다.

"하하...."

박민재는 너털웃음을 뱉었다.

그동안 얼마나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 왔지?

마탑이 대한민국 수도 서울 한복판에 솟아났을 때부터.

정말로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생각해 왔다는 말이다.

어떻게 해야 아르카나인들을.

그들의 아르카나 대륙으로 되돌려 보낼 수 있을지를.

비단, 인류만의 고민이 아니었다.

마탑 또한 분명하게 선언했었으니까.

-"마탑의 목적은 아르카나 대륙으로의 귀환입니다."

인류도 아르카나인들도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대격변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그런데 마치 그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넌, 정말로 끝까지 사람을 우습게 만드는구나."

레이먼 션은 그 해답을 달랑 내놨다.

그것도 아르카나 대륙 전기 접속기라는.

박민재에게는 더없이 익숙한 VR 캡슐로.

윤수겸이 박민재에게 물었다.

"지부장님, 혹시 알고 계십니까?"

"뭘?"

"접속기 형태가 제가 아는 것과 살짝 달라서요."

"그거라면 별거 아니야."

박민재는 필사적으로 화를 억누르고 말을 이었다.

"베타 테스트 시절. 프로토타입 접속기니까. 저건."

"...!"

"정말 우리를 등신으로 봤구나, 레이먼. 애초에 아르카나 대륙 전기는 녀석에게 수단에 불과했어. 모든 게 대격변을 위한 빌드업에 불과했다는 거야."

그랬다.

모든 게 대격변을 위한 가짜였다.

베타 테스트도, 아르카나 대륙 전기 전용 접속기도, 아르카나 서비스도 전부 대격변을 위한 사전작업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빌어먹을 무력감이 몸을 짓눌렀다.

'그럼, 대체 우린 그동안 무얼 위해서?'

처음부터 녀석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었다.

'니 새낀 우릴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뭐라도 아는 것처럼 AAU를 창설하고 대격변에 대응하겠다고 설쳐대는 꼴이 네겐 얼마나 같잖게 느껴졌을까. 박민재는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참아낼 수 있다.'

속은 새끼가 잘못이라고.

반골 기질을 앞세워서 인내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아직도 레이먼 션의 기만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비록 모든 게 연기이자 허상이었다고 하더라도 아르카나 대륙 전기를 서비스하던 경험이 있었다.

충격에 빠진 AAU 대한민국 지부.

박민재가 입을 열었다.

"다들 주목하길 바란다."

웅성거리던 소란이 잦아든다.

그나저나 얼굴들이 정말로 가관이다.

말했다시피 경험이 있었기에 앞날이 선명하게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상황을 정리하자면 단 열 명의 플레이어에게.... 아니, 이호열 총책임자님은 제외해야지. 총 아홉 명의 플레이어에게만 막대한 보상이 주어지는 상황이다."

당연하게도 엄청난 경쟁이 뒤따르게 될 터.

그러나 플레이어들만의 경쟁이 아니란 것이 문제였다. 누구보다 아르카나 대륙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건 현실에 떨어진 아르카나인들일 테니.

누군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총책임자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박민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총책임자님이 계시는 이상. 마탑이나 라이언 하트 기사단, 뮤온. 심지어는 그림자 용병단 같은 거대 세력들이 움직이는 일은 없겠지. 하지만 그들이 전부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잖아?"

언급한 세력들처럼.

현실과 융화된 이들이 있는가 하면.

"카르펜 반란군이나 레드 윙 전사들만 해도 그렇지."

그렇지 못한 이들도 있는 법이었다.

만약, 그들이 이 소식을 접하게 된다면....

"그들은 기꺼이 경쟁에 뛰어들 거다."

박민재는 장담할 수 있었다.

"레이먼, 엿을 던져도 아주 커다란 엿을 던졌어."

인류와 아르카나의 화합.

호열의 희생으로 세운 새로운 규율을 깨트리기 위해서.

레이먼 션은 보상을 내세운 것이었다.

플레이어도 아르카나인들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보상을.

박민재는 마른침을 삼켰다.

"앞으로 어떤 추악한 꼴이 벌어질지 모른다."

경쟁 앞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최근 제로 산맥에서 확인할 수 있지 않았던가?

자국의 항공모함을 앞세워 진격.

제로 산맥을 공략해 가는 천하통일을 예로 들 수 있다.

"함포의 사격 대상이 몬스터에서 플레이어 혹은 아르카나인에게 옮겨갈 수도 있다는 뜻이다. 뭐든 시작이 어렵지, 한 번이라도 사건이 터지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다들 알고 있을 거라 믿는다."

게다가.

"류오쥔춘이라면 그 시작을 망설이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그 악명, 자자했잖아?"

클래스, 군주.

압도적인 폭력.

폭군으로서 지금의 자리로 올라선 류오쥔춘이었다.

대격변 이후에도 마찬가지.

아니, 오히려 더하면 더하겠지.

아르카나 데이터베이스에 남아있는 천하통일.

길드원들의 비정상적인 레벨 분포도만 봐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는 목적을 위해서 타인의 희생을 강요한다."

천하통일에는 레벨 성장이 완전히 멈춰버린 플레이어들의 숫자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대격변 이후라고 그 상황이 달라졌을까?

"군주는 엄청난 포텐을 가진 클래스인 만큼 수월하게 레벨 업할 수 없다는 크나큰 단점이 있다. 근데, 류오쥔춘은 어떻지? 오히려 대격변 이후에 가파르게 랭킹을 치고 올라와서는. 스칼, 록스와 함께 삼파전을 구축했다."

박민재가 썩은 미소를 흘렸다.

"류오쥔춘뿐만 아니야. 초신성을 비롯한 악명 높은 몇몇 플레이어들. 그리고 아르카나인들까지. 레이먼 션은 그런 위험한 녀석들에게 판을 깔아준 거야."

싸움을 부추기는 꼴이 악마와 다름없는 자식이다.

그러니 속셈을 알아차린 이상, 망설일 새는 없었다.

박민재가 말했다.

"천하통일을 막아 세울 수 있는 건 역시 국가밖에 없겠지."

"...중국 정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전 세계가 나서서 회유해 보는 수밖에."

류오쥔춘이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혼란은 시작된다. 그런 류오쥔춘을 당분간만이라도 억제할 수 있다면 당장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테니까.

"그걸 위한 지부장 회의가 지금부터 시작될 거다."

박민재는 모니터를.

정확하게는 화면에 떠오른 호열을 바라봤다.

호열은 그저 우두커니 접속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박민재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번에야말로 짊어지신 짐을 저희가 나눠 들겠습니다.'

.

.

.

레이먼 션.

개수작의 수준이 악마와 다를 바 없다.

남들보다 퀘스트를 많이 수행한 덕분인가.

퀘스트에 담긴 속뜻이 훤히 보였다.

한마디로 열 개의 접속기를 두고 싸우라는 거군.

그랑펠 말대로 긍지로 똘똘 뭉쳐도 대응하기 어려워질 대격변이었다. 그런데 돕지는 못할망정 이런 식으로 훼방을 놓겠다고?

나는 냉랭하게 읊조렸다.

"이는 마왕 쟁탈전의 모방인가."

접속기만 왕좌로 바꾼다면 그 꼴이 영락없이 마왕 쟁탈전이겠다, 안 그래? 그런 의미에서 레이먼 션, 그쪽과 남겨뒀던 대화의 여지는 이 시간부로 사라졌다.

나는 선언했다.

"그렇다면 나 또한 그대를 사냥감으로 간주하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쪽 개수작에.

─접속기로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하라. (진행 중)

퀘스트 목표에.

글자 따위에.

놀아날 거로 생각하면 착각이야.

그야 기이의 영역에 진입한 내 눈에는.

보이고 있었거든.

프로토타입 접속기의 구조가.

그 말이 뜻하는 바?

간단하다.

나 또한 드래곤들처럼 차원을 찢게 됐다는 뜻이다.

고오오오─!

◈ 237화. 진정한 규율

AAU 유스라 지부의 총책임자.

짊어진 무게엔 누구보다 충실한 나다.

덕분에 드래곤, 유낙서스가 차원을 찢고 아르카나 대륙으로 넘어갔던 그날.

AAU의 기록 또한 꼼꼼하게 정독했었지.

'현대 장비로는 측정불가능한 수준의 에너지 반응.'

과연 그럴 만도 했겠구나 싶다.

마력을 끌어올린 순간, 직감했거든.

이거, 지금 당장 발현하기엔 무리라고!

접속기의 역할은 사실상 포탈과 다름없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포탈은 목적지의 좌표가 현재 위치와 멀어질수록 마력 소모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는 것.

현실에서 아르카나 대륙으로 목적지 좌표를 설정하니, 막대한 마력이 소모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멀쩡할 때도 나 혼자 진입하는 게 고작일 것 같은데.'

현재 나는 균열을 반전의 기이로 붙들고 있는 상태였다.

[첫 세계수의 축복]으로 재생되는 마나를 균열에 전부 쏟아붓고 있다는 거지. 그런 상황에서 아르카나 대륙까지 통하는 포탈을 발현할 수 있겠냐!

스스스─

거둬들이는 마력.

그런 속사정이 있었건만.

주둥이는 뻔뻔하게도 내뱉는다.

"아무리 급하다고 한들."

아르카나 대륙으로 돌아가겠다.

내뱉었던 나였다.

거기에다가 퀘스트도 있었지.

[클래스 퀘스트 : 전룡소집(全龍召集)]

노룡이 외쳤다.

아르카나 대륙에 '위대한 가문'이 돌아왔노라고.

모든 드래곤은 사건의 진위를 파악하길 원한다.

─대륙으로 집결하는 드래곤을 목격하라. (실패)

─죽어가는 노룡, 유낙서스와 조우하라. (진행 중)

내 퀘스트가 아니라 용기사, 스칼의 클래스 퀘스트였지만.

나도 유낙서스와는 대화가 필요했다.

대체 어머니, 세계수의 뜻이 무엇인지부터.

'그걸 내 입으로 꺼내기는 싫다만....'

클라우디 가문에 관한 이야기까지.

확실하게 들어둘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조금만 더 기다려 주라, 유낙서스.'

아무래도 이곳.

현실의 일을 수습하고 가야 할 것 같았으니까.

갑자기 수습이라니.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기꺼이 대답해 주겠다.

"규율이 흔들리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말했다시피.

레이먼 션을 사냥감이라 간주한 상황.

덕분에 악마 사냥꾼인 나의 눈에는 훤히 보였거든.

월드 퀘스트를 내세운 레이먼 션이 속셈이!

그걸 알게 된 지금.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냐?

나는 붙잡고 있던 균열에서 마력을 거둬들였다.

그러자 다시금 떠오르는 메시지.

[균열, 던전 : CODE-009를 클리어하셨습니다.]

파아앗!

깨져가는 풍경 속에서.

나는 읊조렸다.

"주제 파악을 하도록."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발버둥 치고 개고생 해서 세운 규율이었다.

그런 규율이 무너지는 꼴을 내가 보고만 있을 것 같냐?

"사냥감 주제에 규율을 거스르려 들지 마라."

*

AAU 각 지부는 해당 국가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구축한다.

대격변이라는 초현실적인 재난에 대응하는 기관이 바로 AAU였으니까.

국민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국가와 AAU는 협력 관계를 구축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였다.

AAU 지부장 회의.

프로토타입 몬스터부터.

프토로타입 접속기의 등장까지.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지부장들은 긴밀하게 움직였다.

박민재가 언급했던 대로 천하통일, 그들이 방아쇠를 당기지 않도록. 각 국가 정부 인사들은 AAU의 요청에 따라 중국 정부에 협력을 요청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북아메리카 지부장, 짐 조슈아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우리 미합중국까지 전멸이군요."

어떤 국가에도 중국 측의 회신은 없었다.

도쿄 지부장, 오카자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AAU에 가입하지 않았던 중국이라고 한들.

"...이건 전례에 없던 일이지 않습니까?"

대격변 앞에서 이토록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인 적은 없었다. 국민들의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 서로 최소한의 협력 관계는 이어왔다는 뜻이었다.

박민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여태껏 류오쥔춘을 비롯한 천하통일 길드원들이 자유롭게 타국을 방문할 수 있었던 이유였죠. 설령 국제 협약에 가입되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천하통일의 전력은 명백히 인류에 도움이 됐으니까요."

그런데, 어째서일까.

"점점 불안해지는군요."

런던 지부장, 베이커는 침음을 삼켰다.

"접속기를 발견하신 총책임자님의 행보가 플레이어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줄 겁니다. 제가 아는 총책임자님이시라면 망설이지 않고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하실 테니 말입니다."

악마에 의해 쑥대밭이 된 아르카나 대륙.

그러나 다르게 말하면 월드 퀘스트의 내용처럼 기회의 땅이라는 말도 됐다. 박민재는 호열에게서 전달받았던 아르카나 대륙의 현황 기록을 훑었다.

'수도성 안토니움조차 위태로운 상태....'

대륙을 지배하던 제국조차 그런 꼴이었거늘.

변방 지역의 상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겠지.

박민재는 냉철하게 판단했다.

'하지만 영웅은 난세에서 태어나는 법이다.'

더군다나 아르카나의 시스템을 생각하면....

'정말로 퀘스트와 보상이 끊이질 않겠지.'

호열을 포함한 10인의 모험가는 지금까지의 랭킹 따윈 무의미해질 엄청난 보상을 거머쥘 수도 있을 터. 플레이어들이 괜히 군침을 흘리는 게 아니었다.

물론, 그들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인간은 그런 동물이니까.'

그렇기에 막막해졌다.

침묵 속에서.

조슈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그렇다면 가정해 봅시다."

"무엇을 말입니까, 조슈아 지부장?"

"이대로 중국 정부와 연락이 닿지 않는다, 생각해 보자는 겁니다. 이유를 불문하고, 천하통일은 분명 어떤 식으로든 행동을 취할 겁니다. 지금 당장 제로 산맥에서 철수, 코드 균열을 찾기 위해 전력을 투입할지도 모르는 일이죠."

조슈아의 눈빛이 진지하게 가라앉았다.

"우리에겐 그들을 막아설 명분이 없습니다. 협약을 어기는 게 아닌 이상, 플레이어가 균열을 클리어하기 위해 움직이는 걸 통제할 수 없으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오카자키 지부장님?"

"맞습니다."

프로스트가 홋카이도에 나타났을 당시.

일본 정부는 협약을 어기고 플레이어들을 통제했다.

그 결과, 국제 협약 위반으로 막대한 대가를 치렀다.

누군가 헛웃음을 뱉었다.

"그것참 빌어먹을 규율이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대체 누구를 위한 규율이란 말입니까?"

지키지 않는 자들에게만 더없이 유리한 규율이었다.

더 큰 문제는 자신들만 그 사실을 알아차린 게 아니란 것이다.

"그러나 정부나 AAU와 다르게 플레이어들은 두고 보고만 있지 않을 겁니다. 그들도 천하통일과 마찬가지로 행동에 제약을 받지 않으니까요."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어쩌면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대규모 무력 충돌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거기에 카르펜 반란군 같은 아르카나 세력들이 끼어들 가능성도 간과할 수 없겠죠."

비약 따윈 조금도 없는 객관적인 사태파악.

꾸욱─

박민재는 주먹을 쥐었다.

'이놈의 성질머리 같아서는 말이야.'

규율이든 뭐든 죄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젠장."

답답했다.

호열에게 작은 힘이라도 보탤 수 있겠다 생각했거늘. 보다시피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박민재는 필사적으로 감정을 억눌렀다.

'규율만 아니었어도 내가....'

그렇다.

누구보다 규율에 엄격한 호열이었으니까.

자신을 위해서 규율을 어겼다는 사실을 호열이 알게 된다면.

오히려 그에게 짐을 얹어주는 꼴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유달리 심각한 표정이시군요, 미스터 박."

"...그럴 일이 조금 있습니다."

"짐작됩니다."

"...?"

...당신이 내 심정을 어떻게 아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는 반골 기질.

이내, 고개를 들어 올린 박민재의 눈에 들어온 건.

"!"

자신만큼이나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베이커였다.

아니, 베이커뿐만 아니었다.

베이커가 입을 열었다.

"적어도 여기 모인 모두는 미스터 박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요."

"...제가 잠깐이나마 긍지를 간과했군요."

박민재는 작게 웃었다.

그래, 과거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머리를 싸매도 여럿이서 같이 싸맬 수 있을 테니까.

"함께 고뇌하다 보면 뭐라도 방법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박민재가 의욕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오늘은 다 같이 야근하시죠!"

"미스터 박, 결론이 왜 그런 식으로...?"

"갑자기 야근이라뇨. 그런 막말을."

조슈아를 비롯해서 흠칫한 몇몇이 보였지만.

불과 조금 전 멋지게 내뱉은 말이 있었다.

게다가 타 지부의 직원들까지 괜히 박민재, 이름 석 자에 몸서리를 치는 게 아니었으니. 박민재의 집요함에 결국, 지부장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후우."

중국 측과의 연락망이 단절된 지금.

차선책을 찾아야 한다.

박민재가 한숨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띠링!

문득, 화상 채팅룸에 알림이 도착했다.

이내, 지부장들에게 공유되는 소식.

그 소식에 지부장들의 입이 벌어졌다.

"자, 잠깐만요."

"이 소식이 사실이라면...?"

"이거, 저희가 야근할 필요가 없어질지도...?!"

박민재가 소름을 쓸어내렸다.

"...그 규율을 진심으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총책임자님!"

.

.

.

마탑.

예정에 없던 갑작스러운 원탁회의였다.

그 때문에 참가엔 의무가 없었거늘.

크리스탈 홀은 이미 만석이었다.

숙련 마법사, 린느는 외마디 감탄사를 뱉었다.

"오호! 선임들께서 전원 출석? 마르셀로 수석님은 물론이고, 유그위드 원로님마저요? 그나저나 저 고양이는 대체 뭡니까? 얼마 전부터 계속 보이는데.... 저거 쫓아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털 날리는데."

린느의 수다를 잠재운 건 지브릴이었다.

"당신부터 쫓겨나기 전에 좀 앉는 게 어떤가요, 린느."

"...네?"

"당신이 감탄사를 내뱉는 순간, 찰나지만 따가운 시선이 당신에게 쏟아졌거든요. 클레도 보았죠? 특히나 못마땅하게 쳐다보시던 벤쉬 윌리엄 선임님의 눈빛을요."

"허걱."

화염마법학 선임, 벤쉬 윌리엄.

그는 선임 중에서도 까칠하기로 명성이 자자했다.

물론, 그 실체를 알고 있는 이들에게는 의아한 명성일 테지만.

"하, 하필이면 벤쉬 선임님이라뇨!"

입을 다물고 있을 때만큼은 귀족적이며 날카로운 외모를 가진 벤쉬였으니까. 물론, 벤쉬에게 숙련 마법사를 신경 쓸 정신적 여유는 없었다.

벤쉬가 뱅그릿에게 속닥거렸다.

"분명, 무언가 큰일이 생긴 겁니다. 뱅그릿 선임!"

"...어딘가 기뻐 보이시네요."

"아니, 기쁜 게 아니라...! 뱅그릿 선임, 당신도 제 입장이 되어봐야 이해할 겁니다. 진짜 제가 얼마나 답답한 줄 알고 계십니까?"

무한 반려.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출탑 신청서.

벤쉬가 마탑을 벗어나 콧바람을 쐰 적은 마왕성 압살이나 제로 산맥 출현과 같은 굵직한 사건이 터질 때밖에 없었다. 벤쉬가 호소력 넘치는 목소리로 토로했다.

"저라고 이렇게 구질구질해지고 싶겠습니까! 네?"

그런 의미에서 벤쉬는 기대하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호열의 긴급 원탁 회의 소집이었으니까.

"이 수석님, 여간해서는 규율을 어기시지 않는 분이시니까요."

다르게 말하면.

이번 일이 여간 일이 아닌 일이라는 뜻이 되겠지.

떨어지는 출탑 콩고물이라도 주워 먹을 수 있을까.

벤쉬가 두근거리며 가슴 졸이던 순간이었다.

또각─

예정된 시간에 맞춰 호열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차례.

크리스탈 홀을 둘러보고는 곧장 입을 열었다.

"긴급하게 원탁회의를 소집한 목적은 간단하며 명확하다. 그러나 시간이 여의치 않은 만큼. 그대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말 대신 보여주도록 하겠다."

그러자 허공에 일렁이는 마력.

아공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무언가'.

벤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저건...."

...동물의 알인가?

생각하는 순간.

호열이 말을 이었다.

"이것이 바로 아르카나 대륙으로 통하는 길이다."

"...!!!"

견습, 숙련, 선임, 수석, 심지어는 고양이 탑주까지.

누구 하나도 예외는 없었다.

크리스탈 홀, 전원의 동공이 휘둥그레졌다.

.

.

.

긍지란 무엇인가?

이 가슴속의 긍지가 워낙 무거워야 말이지.

말로 설명하려면 아마 밤새 재잘거려도 끝나질 않을 거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런 접속기를 혼자 꿀꺽하는 건.

그랑펠의 긍지가 용납할 수 없는 짓이라는 것.

'사실, 난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는데 말이지.'

청렴결백.

물질적 욕구를 초월한 그랑펠은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속물인 나, 이호열은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이렇게 태연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말했다시피.

기이의 영역에 진입한 나는 접속기의 구조를 완벽하게 파악했으니까.

'굳이 접속기가 없어도 마력만 있으면.'

차원을 찢고 아르카나 대륙으로 진입할 수 있었거든.

그러니까 이렇게 당당히 자초지종을 밝힐 수 있는 거지.

평소처럼 가슴을 쫙 펴고 꼿꼿할 수 있다는 거다.

나는 읊조렸다.

"그대들은 물론, 모두에게 아르카나 대륙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목적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누구도 그 목적의 무게를 저울질 할 순 없겠지. 그러나 기회가 한정된 이상, 누군가는 그 역할을 짊어져야만 한다."

감히 긍지로 세운 규율을 깨려고 했겠다, 레이먼 션.

어째 사기를 치는 데에 소질이 있는 것 같기는 하다만.

이쪽도 규율을 지키는 데에는 이골이 나서 말이야.

"그 역할과 역할에 뒤따르는 모든 책임 또한."

또 짊어지는 데에도 요령이 생긴 사람이라서 말이야.

"...!"

말을 끝마치려던 순간, 마르셀로와 눈이 마주쳤다.

놀라움과 우려가 반반씩 섞인 눈빛이구나, 마르셀로.

그러나 걱정할 것 없다.

말했다시피 요령이 생겼다고 했잖아?

이게 처음도 아니었으니까.

나는 태연하게 선언했다.

"오롯이 내가 감당하겠다."

왜, 그 과정은 출탑 심사랑 다를 바가 없을 거거든.

그러니까....

그대는 지금처럼 기뻐할 이유가 없을걸, 벤쉬 윌리엄 선임?

◈ 238화. 내겐 익숙한 일이다

크리스탈 홀.

호열은 접속기를 덩그러니 남겨둔 채 크리스탈 홀을 빠져나갔다.

그럼에도 충격의 잔향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플레이어들이 먼저 속닥거린다.

"...엄청난 기회를 공유하시겠단 거잖아?"

"심지어 먼저 사용해 보지도 않으시고!"

"젠장, 나 새끼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건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호열의 긍지는 쫓는다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겁다는 것을.

무거운 만큼 많은 뜻을 품고 있다는 것 또한.

몇몇 플레이어들은 주변을 돌아봤다.

"아르카나 대륙으로 돌아갈 수 있다니."

"어머니, 아버지...."

"단지, 그저 무사하다는 것만 확인하고 싶어."

호열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누구도 그 목적의 무게를 평가할 순 없겠지."

그렇다.

누가 감히 저 사연의 무거움과 가벼움을 평가할 수 있겠는가?

마탑에 입성한 이상.

그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고 한들.

저들에게 아르카나 대륙은 고향이며, 고향에는 혈육들이 있었다.

치유학 선임, 벨리에가 작게 웃음을 지었다.

"무엇 하나 간과하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이시군요."

벨리에는 알고 있다.

이호열 수석께서는 출탑 신청서 하나조차 훑어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반려된 신청서엔 언제나 합당한 사유와 보완점이 덧붙여서 돌아왔으니까.

비단 출탑 신청서뿐만일까?

정기 학회의 사전 검증도 마찬가지였다.

클레의 『비약초의 육성법』 연구를 비롯.

미숙한 숙련 마법사들의 연구조차도.

자신의 연구처럼 고민하는 호열이 아니던가.

'한데, 그것보다도 막중한 짐을. 이번에도 혼자서 짊어지시겠다뇨.'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나눠 들고 싶었지만....

벨리에는 자신이 없었다.

출탑이나 사전 검증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뒤따르는 책임이 막중했으니까.

'경....'

그건 마르셀로가 좀처럼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원로 마법사, 유그위드가 그런 마르셀로에게 말을 건넸다.

"대단하지 않나요, 마르셀로 수석? 솔직히 말해 제가 이 수석이었다면, 저런 걸 손에 넣었다는 사실 같은 건 당분간 숨겼을 겁니다."

"솔직하시군요, 유그위드 원로님."

"후후. 그야 긁어 부스럼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호열은 어떠한가?

저 부스럼을 긁는 것도 모자라 마탑에.

아니, 세상에 훤히 드러내놓았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자신에게 화살을 돌렸다.

"저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그릇의 크기군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야옹."

"...?"

털이 바짝 선 고양이.

탑주가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며 옹알거렸다.

탑주는 비로소 머릿속 저울질을 끝마친 상태였다.

'모든 면에서 나보다 그대가 탑주의 자리에 어울리겠지.'

당사자가 알게 된다면 기겁할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마르셀로는 호열이 빠져나간 크리스탈 홀, 출구를 바라봤다.

'분명 여유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경께서 어딜 그리 급하게 향하신 것일까?

저 문으로 나가셨다는 것은 아직 마탑에 계시다는 뜻일 터.

마르셀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아르카나 대륙으로 돌아가기 위해 기이에 관한 공동 연구를 추진하던 호열과 마르셀로였다.

그러나 호열의 말이 사실이라면 더 이상, 연구를 진행할 필요는 없게 된 셈이었다.

'제게 알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쩔 수 없는 마법사의 본성.

호열과 대화를 나눠야만 허탈한 심정이 진정될 것 같았다.

마르셀로를 필두로 웅성거리며 크리스탈 홀을 빠져나가는 마법사들.

그 사이에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두 사람이 있었다.

벤쉬와 뱅그릿이었다.

"역시, 이호열 수석님은 절 버리시지 않으셨습니다!"

출탑이 하찮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르카나 대륙으로 돌아가는 것과 출탑을 비교한다면? 당연히 아르카나 대륙으로 돌아가는 게 훨씬 값진 기회이지 않은가!

"그동안의 반려가 바로 오늘을 위한 안배였던 겁니다!"

뱅그릿의 눈빛이 우쭐대는 벤쉬를 훑는다.

'...대체 저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평민으로 마탑의 선임까지 올라선 뱅그릿에게 눈치를 살피는 것은 일상과도 같은 일이었다. 덕분에 곧장 알아차렸다는 것이다. 짊어지겠다는 말에 담긴 속뜻을.

'그 과정이 출탑 심사와 다를 바 없을 것 같은데....'

출탑도 못 하는 벤쉬 선임.

당신이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잔혹한 진실이 턱 끝까지 차올랐건만.

뱅그릿은 멋쩍게 웃었다.

"음하하. 기다리고 있어라, 아우야. 형님이 간다."

...그래요, 제가 말하지 않아도 곧 깨닫게 되실 테니까요.

당분간은 마음껏 기뻐하시길.

벤쉬 선임.

*

원탁회의 종료.

크리스탈 홀에서 빠져나온 내가 향한 곳은 가넷 홀이었다.

가넷 홀에 들르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가야지, 아르카나 대륙.'

그러니까 빌려야지, 마도구.

그랑펠에게 또 한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까.

슬그머니 레벨을 흘겨본다.

[레벨 : 680]

레이먼 션에게 뒤통수를 맞은 것치곤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보상이었다. 600레벨 대에 진입한 뒤로 어디 레벨 올리기가 수월했어야 말이지.

펄럭─

이제 걸을 때마다 펄럭거리는 재킷을.

제대로 착용하기까지도 20레벨밖에 남지 않았다.

그것만 하더라도 레벨을 올려야 하는 중대한 이유 중 하나지만.

'레벨이 높으면 선택의 폭을 넓히는 데도 도움이 되니까.'

과거, 낙하산으로 가넷 홀을 방문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땐 기껏해야 100레벨 언저리였던 나였다.

그탓에 그림의 떡처럼 느껴졌던 마탑의 마도구들도.

이제는 마음껏 골라볼 수 있겠구나.

"앗, 이호열 수석님...?"

가넷 홀을 지키고 있던 숙련 마법사가 흠칫한다.

갑작스레 원탁회의를 소집해 놓고서는.

가넷 홀엔 어쩐 일인가, 싶은 거겠지.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원탁회의는 끝났다."

"아앗, 그렇군요! 한데, 가넷 홀엔 무슨 일로...?"

"수석의 권한으로 마도구를 대여하고 싶군."

"앗, 그러셨군요! 찾으시는 마도구가 있으실까요!"

사실 기본적으로 마탑의 마법사는 마도구에 의존하지 않는다.

왜, 마탑에 입성할 재능을 타고난 마법사들의 본성이라는 게 그랬거든.

연구든, 진리든, 뭐든, 끊임없이 뒤쫓아 스스로를 향상하려고 하는 존재들.

그렇기에 단순하게 발현력을 증폭시키는 마도구는 '특수한 목적'이 아니고서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발현력 관련 마도구가 필요하다."

"...!"

내 말에 놀랄 법도 하다.

그건 내게 특수한 목적이 있다는 말과 같았으니까.

물론, 숙련 마법사가 내 목적을 캐물을 리는 없었다.

"그, 그러시다면 이쪽으로...."

나는 안내에 따라 가넷 홀 내부로 진입했다.

'오호.'

낙하산 시절 봤던 마도구 몇몇 개가 눈에 들어왔다.

레벨이 낮은 게 얼마나 억울했으면.

그 이름까지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저 목걸이처럼 마도구, [빙결된 지식] 맞지?

[빙결된 지식]

[등급 : 유니크]

[제한 : Lv.550]

[효과 : 빙결 마법 사용 시, 소모한 마력 50퍼센트 회복.]

[설명 : 위대한 빙결 마법사의 유품이다. 생전 그가 이룩했던 마법적 지식이 목걸이에 그대로 빙결되어 보존되어 있다.]

다시 봐도 빙결 마법사라면 누구라도 탐낼 수밖에 없는 효과를 가진 마도구다.

소모한 마력의 50퍼센트 회복이라니.

막말로 이런 효과가 순수마력 관련 마도구에 달려있다고 생각해 봐.

'에픽 등급은 될걸?'

식견이 좁았던 그때는 몰랐는데, 이젠 알겠다.

이런 효과를 가진 아이템이 유니크 등급에 레벨 제한도 그다지 높지 않은 이유를. 그건 빙결마법이 비주류 마법 중 하나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딱히 강점이랄 게 없지.'

특수한 상황에서의 파괴력은 걸출했지만, 가장 큰 단점은 약점이 뚜렷하다는 것. 뭣보다 주류마법 중 하나인 화염마법과 치명적인 상성관계라는 게 문제였다.

'그런 빙결마법으로 원로 마법사 자리에 오르다니.'

다시 생각해도 대단한 양반이셨다, 세니오스.

그리고 그런 세니오스에게 인정받은 내가 아니던가?

겉모습만 그럴싸하던 낙하산 시절의 내가 아니다.

실컷 구경하고 고작 [육망성 브로치] 하나를 대여하는 데 그쳤던.

이호열은 더 이상 없다는 것이다.

나는 자신감 넘치게 [빙결된 지식]을 손에 쥐었다.

"!"

...너무나도 당당하게 집어서일까?

숙련 마법사의 동공이 움찔거린다.

하지만 놀라기엔 이르다.

나는 뻔뻔하게 말했다.

"다음으로 대여할 마도구를 선택하지."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하는 것도 모자라서는.

죽어가는 엘더 드래곤, 유낙서스와 마주해야 하는 나였다.

어쩌면 천하의 엘더 드래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적과 마주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는 거지. 근데, 만반의 준비를 달랑 마도구 하나로 끝낼 수 있겠냐고.

'...굉장히 치렁치렁하겠는데.'

사실 지금만 하더라도.

목걸이에 브로치에 펄럭거리는 재킷이 지나치게 화려했거늘.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라면 아르카나 대륙에 보는 눈은 없다는 거겠지. 그러니까 부담스러울 정도로 화려한 복장도 조금만 참아보자, 호열아.

"나쁘지 않군."

"대여하겠다."

"마찬가지다."

가넷 홀에는 한동안 나의 목소리만이 메아리쳤다....

.

.

.

가넷 홀의 실질적인 책임자는 마법부여학 선임, 키코 아르민이다.

가넷 홀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그녀에게 전해진다.

오늘 있었던 일도 예외는 아니다.

"...뭐라고요, 라란?"

가넷 홀을 지키고 있던 숙련 마법사, 라란.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되풀이했다.

가능한 또박또박.

"이호열 수석님께서 총 열두 점의 마도구를 대여하셨다고요...?"

열두 점이라.

확실히 많기는 하다만 그 수량에 놀란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수석 마법사에겐 마도구를 자유롭게 대여할 권한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대여한 마도구의 종류가 문제였다.

키코가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양피지를 살폈다.

"빙결된 지식, 해마의 심장, 운명의 주사위...?!"

열두 점의 마도구 전부.

발현력을 증폭시켜 주는 '결전용' 마도구였다.

이어서 다음 글줄을 읽어나가던 키코.

그녀는 그제야 눈치챌 수 있었다.

라란이 그토록 심란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이유를.

"...키코 선임 마법사님!"

"섣부른 추측은 좋지 않은 법이죠, 라란."

"그건 그렇지만...!"

다른 마도구와 달리 결전용 마도구는 그 대여기간을 명시해야만 했다. 마탑의 마법사가 결전용 마도구를 기약 없이 다루게 되는 순간,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마탑의 규율에 호열도 예외는 아니었다.

라란이 울먹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호열 수석께서 작성하신 대여기간이...!!"

말하지 않아도 보고 있다.

키코는 다시금 초점을 붙잡고 양피지를 바라봤다.

거기엔 호열의 필체로 담담하게 적혀있었다.

──────

대여기간 : 사망하는 순간까지.

──────

.

.

.

...아니, 이게 또 틀린 말은 아닌데.

꼭 그렇게 직설적으로 적어놔야겠냐고.

그냥 아르카나 대륙에서 귀환할 때까지.

친절하게 써넣으면 좀 좋아?

사망하는 순간까지!

대여기간에 그렇게 휘갈겨 놓은 이유야 간단했다.

나에겐 칭호, [최후의 모험가] 효과가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든든한 그 효과를 다시 한번 확인해 본다.

[최후의 모험가 : 아르카나 대륙에서 사망하지 않습니다. 사망 시, 즉시 현실로 귀환하며 일정 시간 동안 아르카나 대륙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 쿨타임 : 24시간]

한마디로 그랑펠식 표현.

지옥과도 같은 아르카나 대륙에서.

사망하는 순간까지.

절대 숙이거나 굽히지 않겠다는 다짐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걸 확인한 숙련 마법사는 경악을 금치 못했었지.

날, 마탑 마도구로 죽을 때까지 본전을 뽑으려는.

염치도 없는 놈이라 생각한 게 분명하다...!

'차라리 진짜 욕심을 부려서 욕을 먹는 거면 또 몰라.'

청렴결백 때문에.

정작 제대로 된 욕심은 부리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죽을 때까지 마탑의 마도구를, 무려 열 하고도 두 점이나 빌려 간 염치 없는 놈 취급을 받게 되다니.

'억울하기 그지없구나. 진짜.'

...그러나 오해를 풀기에는.

늘어놓아야 할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구나.

나의 이 억울한 마음을 달래주는 건 역시 티타임밖에 없었다.

"으음."

그러니 녹차가 아니라고 못마땅한 기색은 마라, 그랑펠.

자고로 입에 쓴 게 몸에 좋은 법이다.

무엇보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녹차의 카페인이 아닌 비약초 도핑이었으니까.

[6시간 동안 생명력 재생력이 소폭 상승합니다.]

[1시간 동안 마력 재생력이 소폭 상승합니다.]

[12시간 동안 스테미너 재생력이 소폭 상승합니다.]....

...엘프인 엘시도어가 가꿔서 그런가.

그게 아니라면 유기농 비약초라서 그런가.

그 효과가 나쁘지 않다.

'소폭 증가 같은 효과들이 쌓이고 쌓여 큰 차이를 만드는 거지.'

그럼, 슬슬 넘어갈 준비를 해볼까.

달칵─

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르카나로 통하는 기이의 포탈을 열었을 때 느낀 점?

발현 과정에 발생하는 막대한 마력 에너지를 견딜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 목적에 적합한 공간이 바로 마탑 최상층이었다.

최상층으로 향하기 위해 활짝 문을 여는데....

깜짝이야!

다들 내 집무실 문 앞에서 뭐 하고 있는 건데?

그 심각한 표정들은 또 뭐고?

...잠깐만, 그럼 내 녹차 투정도 들은 거 아냐?!

◈ 239화. 용과 같이 (1)

집무실 앞에는 선임 마법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키코 아르민, 벨리에 유시아, 뱅그릿 톰, 마티스 딘 카를, 나스로우.... 심지어는 접점이 없는 몇몇 선임들까지.

'갑자기 뭔데.'

한데, 그 표정이 하나같이 어둡다.

짚이는 바는 하나밖에 없었다.

일단, 아르카나 대륙에 관한 건은 아닐 거야?

규율에 따라 처분할 거라는 걸.

조금 전 크리스탈 홀에서 발표하고 왔던 참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역시 그건가?'

죽을 때까지 마도구를 대여하겠다는 그거?!

특히나 다크써클이 턱까지 내려온 것 같은.

키코 선임을 보면 추측에 더욱 신빙성이 생긴다.

이렇게 많은 선임이 찾아온 것도 이해가 간다.

'내가 당신네들 학파 마도구를 왕창 빌려 와서 그런 거지?'

빙결마법학 선임, 커튼 레블까지 온 걸 보아하니 아무래도 맞는 것 같군. 그래서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머리를 굴리던 순간이었다.

키코가 먼저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이호열 수석님."

아니, 죄송할 게 뭐 있어.

조율도 안 하고 결전용 마도구를 열 하고도 두 점이나 더 대여한 내가 더 잘못했지.

찔리는 구석이 있으면서도 뻔뻔하게 입을 연다.

"내게 사죄할 것 없다."

"...아닙니다."

"용건이 있어 나를 찾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이야기해 볼까.

어차피 최상층까지.

혼자 계단을 올라가기 적적하던 참이었다....

...또각─

마탑 최상층 목전.

나는 걸음을 멈췄다.

...무슨 용건이 있나 했더니만, 뭐야.

'내가 죽어? 죽긴, 왜 죽어 내가?!'

문제의 근원은 지나치게 직설적인 이놈의 화법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키코를 비롯한 선임 마법사들은 완벽하게 오해한 것이었다...!

"이렇게 수석님을 떠나보낼 순 없습니다...!"

내가 죽음을 각오하고 아르카나 대륙으로 진입한다고!

내 행적을 되돌아본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런 과잉반응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일단, 덩그러니 접속기를 내놓은 것부터가.

뭐랄까, 유산을 남겨놓는 느낌 같기는 했지?

'내가 없어도 잘 부탁한다는, 그런 뉘앙스.'

결전용 마도구를 바리바리 대여해가는 것도 그렇다.

거기다가 한술 더 떠서는.

비장한 출사표라고 오해하기 딱 좋은 대여기간을 명시한 것까지.

'결국, 이것도 스스로 불러온 일이었구나.'

당연하게도 오해는 바로잡아야겠지.

사실 [최후의 모험가] 효과를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고 싶은데. 플레이어들이 마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선임 마법사들도 시스템이란 개념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터.

결국, 나답게 말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대들의 우려를 받는 것도 나쁘지 않군."

"...!"

"허나 이 역시도 걱정할 것 없다."

그야 나는 멀쩡하게 살아 돌아올 거니까.

아니, 엄밀히 말하면 한 번 죽을 것 같기도 하다만....

어쨌거나 다시 마탑으로 돌아올 거다.

"그대들도 알고 있지 않은가."

"무엇을...?"

"나는 내뱉은 말을 반드시 지킨다는 것을."

"...!"

"믿어라. 돌아오겠다."

굳이 안 붙여도 될 사족까지 덧붙인다.

"그대들의 서류를 심사하기 위해서라도."

하여튼, 과할 정도로 업무에 충실하다니까?

"!!!"

선임들의 얼굴이 그제야 조금이나마 밝아졌지만.

마티스만큼은 여전히 우려스러운 눈빛이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걱정할 것 없다, 마티스.

이게 설명하기는 뭣해도 진짜로 안심해도 된다니까?

그런 눈빛을 보내자 마티스가 고개를 숙였다.

"이 수석님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렇다고 고개를 숙일 필요까진 없는데....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탑 최상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보자.

규율도 오해도 바로잡았겠다.

드디어 아르카나 대륙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

.

.

쿵!

마티스는 집무실의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알고 있었다.

'수석님께서는 말씀하신 바를 반드시 지켜내셨습니다.'

여태껏 봐온 게 있었기에 이번에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경께서는 분명 마탑으로 돌아오시겠지.

그러나 내뱉은 말을 반드시 지켜내는 경이기에.

가슴을 찌르는 말이 있었다.

"...사망하는 순간까지."

최상층으로 향하는 계단 담화에서 마티스는 호열과 타 선임 마법사들의 대화를 경청했다. 그 대화 속에서도 호열은 끝까지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마티스가 나지막이 말했다.

"경께서는 늘 죽음을 곁에 두고 계신 겁니까?"

불현듯 호열의 이질적인 마력이 떠오른다.

갈등의 마왕성에 넘실거리던.

헤아릴 수 없는 이질적인 마력이.

'죽음을 두려워하시지 않는 것 또한 경의 과거와 관련된 것입니까....'

흑마도학의 창시자로서 대륙을 떠돌며 수많은 흑마법을 지켜봤던 마티스였다. 자연스럽게 다른 이들보다 아르카나의 음지(陰地)에 익숙할 수밖에 없었다.

죽음이 즐비한 음지 말이다. 허나, 죽음이 가까운 것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마티스는 장담할 수 있었다.

'경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죽음 앞에서 저리도 꼿꼿할 순 없으리라고.

그러니까 더더욱 가늠할 수 없었다.

경께서 어떤 과거를 품고 계시는지를.

다만, 한 가지만 어림짐작할 뿐이었다.

"클라우디...."

그 뜻 모를 단어와 관련이 있으리라는 것만.

*

어나더 스페이스 호.

"아차, 소식 들으셨어요?"

"소식? 한눈팔 새가 있어야지."

"쓰읍, 그렇게 말씀하시면 할 말이 있다가도 사라지는데요? 제가 한눈파는 사람 같잖아요."

제로 산맥.

최정상에서 드래곤이 포착됐던 그날 이후.

사내는 제로 산맥에서 관심을 떼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차원을 찢고 어디론가 사라졌던 드래곤이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진짜 안 궁금하세요?"

"무슨 소식인데, 호들갑이야?"

"이거 진짜 빅뉴스라고요, 선배!"

빅뉴스 아니기만 해봐라.

"나 대신 이 자리에 앉혀버릴 테니까."

사내는 그제야 산맥에서 눈을 뗐다.

그러고는 후배가 들고 있던 태블릿을 받아 들었다.

액정에는 AAU 측에서 전해온 지구의 소식이 떠올라 있었다.

"...뭐야, 이거?"

"어때요, 제 말이 맞죠?"

"오늘 만우절 아니지?"

"아니, 선배. 지구랑 여기가 시차가 아무리 심해도 그렇지. 만우절은 너무 앞서가셨어요. 그보다 이제 제가 왜 그렇게 질척댔는지 아시겠죠?"

빅뉴스.

레이먼 션이 월드 퀘스트의 방아쇠를 당겼고.

그로 인해 아르카나 대륙으로 통하는 길이 열렸단다.

그 매개체는 다름 아닌 아르카나 대륙 전기의 접속기였고.

사내는 마른침을 삼켰다.

"마냥 기뻐할 소식이 아니잖아, 이거."

분명, 크나큰 파장을 가져올 터.

젠장,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머릿속이 더욱 어지러워졌다.

그러나 사내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방금 말했던 것처럼 지구와 우주의 시차 덕분이었다.

"서, 선배?"

"...!"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묘한 기시감.

사내는 반사적으로 계기판을 바라봤다.

그러자 드래곤이 차원을 찢고 활강하던 그때처럼.

"!!"

계기판이 최대치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제로 산맥에 드래곤이 돌아왔다는 것.

타다닥!

레버를 조작하자 어나더 스페이스 호의 렌즈가 이동한다.

이내, 모니터에 떠오르는 제로 산맥의 풍경.

그런데 이상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안개 말고는 보이는 게 없었다.

그때처럼 블랙홀이 포착되지 않았다.

뜻하지 않던 상황.

당황한 사내에게 들려오는 목소리.

"선배, 그쪽이 아니라 위쪽이요...!!"

"위쪽이라고?"

사내는 인상을 구기며 되물었다.

지구상에 제로 산맥 최상층보다 높은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위쪽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태평양에 위치한 제로 산맥.

그 위도상의 위쪽.

정확하게는 북위 37도 동경 126도.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서울의 상공에 블랙홀이 일렁이고 있었다.

"저, 저게 왜 서울에...!!"

경악도 잠깐.

다급하게 전환되는 렌즈의 시야.

어나더 스페이스는 곧, 그 정확한 위치를 특정해 냈다.

사내가 말을 입을 열었다.

"마탑...."

말꼬리를 흐렸다.

"설마, 이호열 총책임자님께서...?"

.

.

.

잘했다, 이호열.

아무리 생각해도.

마탑 최상층에서 기이의 포탈을 발현한 건 잘한 짓이었다.

그냥 포탈과는 다르다.

정말로 차원을 찢는다는 표현이 이보다 적절할 수 없었다.

콰지지지직!

균열이 나타나듯.

허공이 찢어지고.

찢어진 차원의 틈으로 마력이 빨려 들어간다.

그 박력이 오죽했으면.

잠자코 지켜보던 두 사람과 고양이 한 마리도 흠칫했을까.

꼬리를 바짝 세운 탑주가 내게 말한다.

"이 수석, 혹시라도 생각이 달라졌으면 언제든 말만 하도록."

하여튼, 저저 고양이 수작 봐라.

틈만 나면 탑주 자리를 떠넘기려고...!

당연하게도 가뿐하게 무시한다.

"수뇌부의 찬성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 수석."

이젠 유그위드까지 거드는 게 정말로 환장할 노릇이구나.

그래도 마르셀로만큼은 확실하게 내 편이었다.

말보다는 그저 우려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사실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데 말이야.'

[퀘스트 : 마르셀로의 연구]

마법사의 탑,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

그가 한 차원 진보한 마법에 도달하기 위해.

당신과 함께하기를 원합니다.

악마 사냥꾼 클래스 퀘스트를 제외하고, 처음으로 시작한 대형 퀘스트라고 할 수 있었다. 수많은 퀘스트를 성공하고, 수행 중인 나였지만.

마르셀로의 연구 퀘스트는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이었다.

'그야 목표가 말도 안 되니까.'

기이를 탐구해 아르카나 대륙으로 되돌아가겠노라!

그 창대한 목표가 무색하게도.

레이먼 션이 접속기라는 답안을 내놓지 않았더라면.

먼 훗날에서야 지금과 비슷한 경지에 도달했을 테니까.

마르셀로도 그 점을 알고 있는 거다.

그러니까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거고.

그러나 그랑펠의 긍지를 간과하지 마라, 마르셀로.

'당장은 몰라도.'

남이, 그것도 레이먼 션이, 사냥감이 떠먹여 준 답에 그랑펠이 만족하겠어? 왜, 지금만 하더라도 훨씬 편리한 접속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잖아?

게다가.

'접속기는 고작해야 10개다.'

그런 접속기의 구조를 모방한 기이로는 나 혼자 대륙을 오갈 수 있는 포탈을 발현하는 게 고작이다. 그러니 지금 발현한 포탈을 그랑펠 식으로 평가하자면....

"그대가 보기에도 비효율적이지 않나, 마르셀로?"

더없이 형편없는 구조라는 거겠지.

"...!"

놀란 마르셀로에게 태연하게 말을 잇는다.

머릿속 생각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싶었는데 말이야.

아까 말했던 것처럼.

실시간으로 잡아먹는 마력량이 장난이 아니었으니...!

'이러다가 진입하기도 전에 마력 탈진이다.'

역시나 한마디로 함축해서 전달하는 게 최선이었다.

"복귀 후에 기이에 관한 연구를 속행하지."

과연, 마르셀로였다.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내 속뜻을 알아차린 건지.

곧장 얼굴에 화색이 돌아왔다.

마르셀로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왔다.

"그 말씀을 명심하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경."

그 배웅을 받으며 나는 기이의 포탈로 나아갔다.

그냥 포탈에선 빛이 쏟아졌다면.

기이의 포탈에선 짙은 어둠이 쏟아졌다.

그러나 내 이명(異名)이 무엇이던가.

'내 입으로는 언급하기도 싫지만....'

'한없이 깊은 어둠'이라는 말이다.

이깟 어둠에 지레 겁을 먹기에는.

내 흑역사가 더 어둡고, 두렵다는 것이다....

.

.

.

어둠 속에서 눈을 떠본다.

왔구나.

아르카나 대륙.

낯설지 않은 메시지가 나를 반겨준다.

[멸망을 향해가는,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하셨습니다.]

아르카나 대륙으로 돌아가겠노라.

이번에도 역시나 내뱉은 말은 지키고 말았구나, 그랑펠.

그런 의미에서 [만물과 통하는 지도]를 통해 아르카나 대륙을 밟았던 때가 떠오르는군.

빈사 상태에서.

아이언 캐슬 호의 마력포와 함께 수백만 악마와 산화하기 직전.

나는 분명 그렇게 지껄였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나는 악마 사냥꾼."

-"내가 바로 너희의 천적이자 공포다."

그렇다.

그 말도 빠짐없이 지켜야 하지 않겠어?

지금의 이호열을.

그때의 이호열과 같다고 생각하지는 마라.

나는 냉랭하게 읊조렸다.

"말하지 않았나. 수백만은 시작에 불과했다고."

[스킬, '천적관계'가 발동됩니다.]

그러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마계의 현자, 샤힌파쿰에게 '공포'가 발생합니다.]

[잔혹한 사기꾼, 러셀에게 '공포'가 발생합니다.]

[시체 청소부, 데몬 웜에게 '공포'가 발생합니다.]

[살가죽 갑옷의 카피스크림에게 '공포'가 발생합니다.]....

수천만 개의 메시지가.

◈ 240화. 용과 같이 (2)

'그것'은 벼락처럼 찾아왔다.

"...!!!"

언제나처럼 대륙을 유린하던 악마에게도.

호시탐탐 재기를 노리던 악마에게도.

심지어는 자신의 성에서 웅크리고 있던 악마에게까지도.

두근─

마치 벼락에 감전된 것처럼.

그것은 일대의 모든 악마를 얼어붙게 하였다.

모두라는 것은 이름 없는 악마들은 물론이요.

진명(眞名)의 악마.

더 나아가서 마왕조차도 예외가 아니었다는 의미였다.

눈물의 마왕성.

서열 56위 마왕, 그레모리.

왕좌에 앉아 웅크린 사내를 발판으로 삼아서.

휴식을 취하던 그레모리는 알아차렸다.

아르카나 대륙, 아득히 멀리 떨어진 곳.

그곳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기척을!

오싹!

그 살기에 사지가 뻣뻣하게 굳어왔다.

오죽했으면 발판조차 심상치 않은 낌새를 알아차리고는.

우려스러운 낯짝으로 말을 걸어왔을까?

"...왜 그러십니까, 여왕이시여."

그러나 그레모리는 답할 수 없었다.

'자칫했다가는 내 목소리가 전해질지도 몰라...!'

방금 말했듯.

기척은 아득히 먼 곳에서 느껴졌다.

숨소리는커녕 진짜 뇌우가 내리쳤다고 하더라도 들리지 않을 정도의 거리였다. 그러나 공포 앞에서 그레모리는 정상적으로 사고할 수 없었다.

후다닥!

마왕의 체면?

그딴 건 아무래도 좋다!

그레모리가 다급하게 왕좌 뒤에 몸을 숨겼다.

"여왕님?"

자신을 부르는 발판의 목소리.

그레모리가 사내를 흉신악살의 눈빛으로 노려봤다.

멍청한 발싸개라서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것인가?

'저 걷잡을 수 없는 살기를...!'

잔뜩, 숨을 죽이고 있던 그때.

불현듯 떠오른 생각.

...그래, 마안(魔眼)이라면!

아르카나 대륙 곳곳을 비추는 마안이라면.

이 기척의 근원지가 어디인지 알아낼 수 있으리라.

이내, 그레모리의 눈이 하얗게 뒤덮였다.

마안의 시야를 공유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런데....

'...말도 안 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밤하늘에 뜬 무수한 마안이 일제히 사라졌을 리는 없을 터.

그레모리가 엉금엉금 기어서 창가 쪽으로 나아갔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나서야 이유를 알아차렸다.

"!"

마안이 눈을 감았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공포에 질려서는.

차마 눈을 뜰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대체...?'

후다닥!

그레모리는 다시금 몸을 웅크렸다.

그러고는 몸에 느껴지는 감각을 애써 곱씹어 봤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분명 이것과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다.

다름 아닌 마계(魔界)에서.

정확하게는.

'바알(Bael).'

상위 십좌(十座)의 마왕 중에서도 첫 번째.

바알의 소환 의식에서 말이다.

바알을 올려다봤던 자신은 지금과 비슷한 공포에 떨었었다.

'...본좌는 두렵다.'

상위 마왕.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우둔하다고 한들.

그 힘까지 우둔한 것은 아니다.

그레모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바알께서 어떤 업적을 이뤄내셨는지를.

전지전능을 그대로 뒤집어 놓았다고 무방할 정도로.

그는 한 세계를 완전한 파멸로 이끌었었다.

'내가 그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단지...!'

바알.

첫 왕좌의 왕께서 아군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의 그것은 아군이 아니었다.

그레모리가 힐끗 발판 사내를 바라본다.

'인간 녀석들은 떨지 않고 있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이 순간, 그것이 내뿜는 살기는.

오롯이 자신과 같은 악마를 향한 것이라는 것.

'나, 나는 죽고 싶지 않다!'

태어나 두 번째로 느껴보는 공포였다.

그레모리는 살굿빛 머리카락을 이불로 삼아 자신의 몸을 감쌌다.

두려움에 떨었다.

그저 그것이 자신을 알아차리지 못하기를.

간절하게 빌며....

*

끝없이 떠오르는 상태이상 공포 관련 메시지.

뭐가 이렇게 많아?

순간, 스팸 메시지인 줄 알았다.

딱히 뭔 짓을 하지도 않았으니까.

'아직 마나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어.'

클리어된 균열을 붙들고 있는다거나 아르카나 대륙까지 통하는 포탈을 여는 기이는, 복잡한 과정만큼이나 마력을 엄청나게 잡아먹었다.

'세계수의 축복이 없으면 며칠은 앓아누웠겠지.'

물론.

[스킬, '천적관계'가 발동됩니다.]

천적관계가 발동된 지금이야 크게 문제가 될 건 없었지만.

'그나저나.'

수백만은 시작에 불과하다.

내가 너희들의 천적이자 공포다.

엄포를 놓았던 나였다.

'...어째 잠잠하다?'

아르카나 대륙 땅을 밟는 순간.

악마들이 떼로 달려들지는 않을까.

악마떼의 포위진을 뚫고 유낙서스를 찾아내야 하는 건 아닐까.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만반의 준비를 했던 나였다.

'이러면 나야 고맙긴 한데.'

달랑 유낙서스를 만난다고 끝이 아니잖아?

재수가 없으면 유낙서스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세력과 충돌하게 될 가능성도 있었으니. 악마들이 이렇게 협조적이면 나야 나쁠 게 없지. 전력을 아껴둘 수 있을 테니까.

"비로소 엎드린 모습이 어울린다는 것을 깨달았나. 칭찬해 주마."

...이게 칭찬이 맞나?

싶은 말을 내뱉기도 잠깐.

나는 하이엘과 디엔드를 불러냈다.

"하이엘, 디엔드."

"하이엘, 주군의 부름에 응답했습니다."

"이곳에서 만나 뵈오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주군."

그래, 극진한 인사말에는 나도 언제나 감회가 새롭구나....

그러나 유난을 떨 시간은 없다.

유낙서스와 조우하기에 앞서서 사전작업이 필요했거든.

'유낙서스는 그냥 드래곤이 아니야.'

엘더 드래곤이라 불리는 드래곤들의 지도자.

노룡과 조우하기 위한 준비는 아직 끝난 게 아니었으니.

나는 하이엘과 디엔드에게 각각 명했다.

"저 하이엘, 주군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하이엘이 먼저 허공으로 사라지고.

"명을 받들겠나이다."

...어째, 갈수록 부담스러워지는 디엔드도 명령을 수행하러 사라졌다. 홀로 남은 내게 말을 걸어오는 이가 있었으니, 분신 3호를 또 빼놓을 수 없겠지.

-다시 봐도 씁쓸한 풍경이군, 주인이여.

일루젼 브레이커에서 원상태로 돌아온 귀철.

'이것도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지.'

코드 균열을 클리어한 순간.

더는 허상을 베어낼 필요가 없어졌으니.

과연, 자아를 가진 에고 소드답게.

일루젼 브레이커가 본래 귀철의 형태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일루젼 브레이커보다는 귀철 쪽이 이름으로 부르기에는 낫지 싶다가도.... 이게 또 마냥 안도할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됐다.

-그래서 나는 무엇을 베면 되는가, 주인이여.

귀철, 이거.

아주 그냥 새 이름으로 불리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 같았거든!

이 순간 사방에서 느껴지는 공포에 질린 악마의 기척들.

곰곰이 머리를 굴려본다.

고작 프로토타입을 벨 때에도.

일루젼 브레이커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각성한 귀철이 아니던가.

'만약, 악마를 베기 위해서 각성한다면....'

...데몬 슬레이어.

아마도, 그런 느낌의 이름이 붙진 않을까.

그 이름을 내 입으로 읊는 상상을 하니까.

나의 수치심이 심히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간절히 빌었다.

'악마들아, 제발 그렇게 엎드려 있어주라.'

부디, 계속 납작 엎드려 있어서.

그랑펠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아주라.

나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둥이가 입방정을 떤다.

"귀철."

왜, 분신은 진짜를 따라갈 수 없다고.

"베지 않을 것부터 헤아리는 편이 빠를 것이다."

귀철보다 한술 더 떠서 말이지...!

'이러다가 나중엔 귀철 이름만 몇십 개씩 외워야 하는 거 아니야?'

일루젼 브레이커에 버금가는 이름을.

수십 개씩 읊조린다고 생각하니까.

벌써부터 손발이 오그라들기 시작하는구나....

*

심호흡을 할 때마다 의식이 흐려진다.

희미하게 뜬 눈에 보이는 건.

황폐한 아르카나 대륙의 풍경.

죽어가는 노룡(老龍), 유낙서스는 웃었다.

영생의 삶 따위는.

언제든지 내던질 수 있다고 생각했거늘.

죽음의 그림자가 엄습한 이 순간.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군.'

스스로가 얼마나 오만했던지를 깨달았다.

유낙서스의 미소에 씁쓸함이 깃들었다.

아우, 아젠트레스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

-"완벽한 너는 열등감이 무엇인지도 모를 테니."

-"축복은 미완한 우리에게 구원과도 같았다!"

설령 다른 이들이 너를 손가락질했을지라도.

나는, 네 심정을 헤아렸어야 했거늘.

결국, 죽음에 이르러서야 네 심정을 헤아리게 됐구나.

유낙서스의 음성이 일대에 깔렸다.

"어머니여.... 제가 당신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자신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될 어머니의 계획.

그러나 이대로 눈을 감아도.

유낙서스는 어머니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야 보다시피 자신은 설득에 실패하지 않았는가?

전룡소집(全龍召集).

유낙서스는 그날.

잠들어 있던 동족들에게 미뤄뒀던 이야기를 전했다.

그 결과가 지금이었다.

처참하게 찢겨나간 날개.

근육이 드러날 정도로 깊게 팬 전신의 상처들.

잦아드는 숨결.

그랬다.

아르카나 대륙에서 엘더 드래곤에게 이런 상처를 남길 수 있는 건.

마찬가지로 동족 드래곤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모든 것이 제 불찰입니다."

모든 건 자신의 부족함이 초래한 결과였다.

유낙서스가 다시금 쓰게 웃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동족을 과대평가한 결과겠지.

아우, 아젠트레스가 이 꼴을 보면 무어라 말할까?

'인정하마. 나는 아우보다 못난 형이었구나.'

옳은 길이든, 옳지 않은 길이든.

동족을 하나로 이끄는 너라면....

적어도 나와 같은 최후를 맞이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나 유낙서스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았다.

죽음이 가까워진 순간에도.

흔들림 없이 빛나는 안광.

그 눈빛이 바로 그 증거였다.

유낙서스의 음성에 물기가 깃들었다.

"클라우디여...."

부디, 어리석은 나의 동족들을 굽어살펴 주소서.

용서를 바라지는 않겠다.

바라는 것은 단지 일말의 자비.

그러나 베풀지 않겠다 하더라도 이해하리라.

"...감히 당신의 뜻을 거스를 자격은 없으니."

이걸로 정말 끝이구나.

세상의 만물보다 불변하다는 드래곤 하트가 점차 느려지고 있었다.

영생을 살아온 육신에 비로소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유낙서스는 마지막으로 대륙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그대들은 이런 고통 속에서 신음했던 것이군.'

허나, 시야에 들어온 건 아르카나 대륙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네놈들은 이런 고통을 타인에게 선사한 것인가.'

아르카나 대륙을 이 꼴로 만든 악마들이 보였다.

녀석들은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속닥거리고 있었다.

"드래곤 하트는 나의 것이다."

"키킥! 가죽으로 장비를 만들어야지."

"드래곤의 송곳니로 만든 무기라니...!!"

어머니의 계획을 위해서라도.

거슬리는 악마들을 모조리 불태우고 싶었거늘.

그조차도 여의치 않았다.

이런 일이 생길 것 같아 동족들에게 부디 날개를.

하나만이라도 온전히 남겨달라 부탁했거늘.

"나, 하나조차도 어머니의 뜻에 따를 수 없다는 것인가."

나, 유낙서스는.

이대로.

누구에게도 면목을 들 수 없이 눈을 감아야만 하는 것인가.

실로 원통하구나.

"크ㄹ...."

혼신의 힘을 쥐어짜 내서.

최후로 내뱉은 드래곤 피어였거늘.

주변의 악마들조차 쫓아내지 못하는 꼴이라니.

'...나는 한없이 나약한 존재였다.'

스르르─

결국, 천근처럼 감겨오는 눈꺼풀을 이겨내지 못한 채.

유낙서스가 눈을 감은 순간이었다.

어째서인가, 낯설지 않은 촉감이 와 닿았다.

사뿐─

다름 아닌.

콧잔등에서부터.

흐려져 가는 귓가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유낙서스."

유낙서스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느껴지는 어머니의 기운.

여명의 정령이로구나.

그러나 미안하구나, 가냘픈 정령이여.

어머니의 뜻을 아는 형제로서.

어떤 식으로든 그대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도.

몸 상태가 여의치 않구나.

한데, 돌아온 대답이 의외였다.

"우려하실 것 없습니다."

...우려할 것 없다니?

"나는 홀로 그대를 찾아온 게 아닙니다."

그 말에 유낙서스는 온 힘을 기울여 눈을 떴다.

그러자 보였다.

무릎을 꿇고.

거품을 문 채.

절명한 악마들의 모습이.

그리고 들려왔다.

또각─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소리가 들려온 곳에선 빛이 일렁거렸다.

그 후광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올곧은 자태.

"!"

유낙서스는 곧장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 사내가 바로 여명.

어머니가 선택한 존재라는 것을.

그런데.

"...?"

유낙서스의 동공이 이례 없이 휘둥그레졌다.

어째서...?

어째서...!

'그대의 머리칼이....'

클라우디 가문의 상징.

시릴 정도로 찬란한.

은빛으로 빛나고 있단 말인가...?

◈ 241화. 용과 같이 (3)

나부터가 막내라서 잘 알고 있다.

원래 첫째는 막내에 약하다는 걸.

그래서 하이엘에게 명했다.

유낙서스의 위치를 찾아보라고 말이야.

마력흔을 추적한다면야 어렵지 않게 위치를 특정할 수 있긴 하다.

근데, 나는 유낙서스가 마법을 발현하는 모습을 직접 본 적이 없거든. 게다가 드래곤이 발현하는 게 마법이라 확신할 수도 없다.

그 탓에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지간히 넓어야 말이지.'

아르카나 대륙은 광활하다.

유낙서스의 몸집이 아무리 커다랗다고 해도 사막의 모래알조차 되지 못할 정도로. 그러니까 하이엘이 유낙서스를 찾는 건 사막에서 바늘 찾기보다 어려운 게 아닌가, 하고는.

그런데 기우였다.

텔레파시처럼.

머릿속을 파고드는 울음소리가 있었으니까.

-"크ㄹ...."

드래곤 피어.

유낙서스와 직접 마주했던 하이엘이라 그런가.

나보다도 먼저 유낙서르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하이엘이 곧 유낙서스의 울음이 들려온 위치를 전해왔다.

머뭇거릴 이유는 없겠지.

나는 곧바로 포탈을 발현하고 빛 무리 속으로 나아갔다.

그랬더니 보였다.

'어쭈?'

악마 무리가.

진짜 주제 파악이라고는 조금도 못 하는 게.

더없이 악마다운 모습들이구나.

'겁도 없다. 진짜로.'

죽어가는 노룡.

유낙서스가 숨이 멎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악마들이었다.

이유야 뻔했다.

유낙서스의 시체에서 뭐라도 얻어가려는 속셈인 거겠지.

그런데.

내가 그 꼴을 가만히 보고 있을 것 같냐?

아니, 내가 발끈해서 나설 필요도 없었다.

유낙서스.

어쨌거나 세계수를 통해 연결된 인연이거늘.

그런 유낙서스가 죽어가는 걸 애타게 바라고 있는 꼬라지를.

그랑펠이 용납할 것 같아?

심지어 그런 만행을 저지른 게 악마?

'청렴결백과 긍지를 동시에 자극한 짓이지, 이건.'

사냥감과는 대화하지 않는다.

당연히 입을 열 필요는 없다.

마력을 끌어올리거나 귀철을 치켜들 필요 또한 없다.

또각─

그저 한 걸음.

발을 내디디자.

악마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조금 전 떠오른 메시지를 읽어보면 의아한 일도 아니겠지.

수천만의 악마들에게.

상태이상, '공포'를 발생시켰던 나였다.

그런 나와 악마가 마주하고도.

"...!!!"

[상급 악마, 플라임프에게 '압살'이 발생합니다.]

[중급 악마, 인큐버스에게 '압살'이 발생합니다.]

[모독의 일곱 손가락, 세브나위에게 '압살'이 발생합니다.]....

멀쩡한 게 더 의아한 일일 테니까.

그 광경을 그랑펠식 표현으로 설명하자면....

벌레를 짓밟는 수고조차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손가락 까딱하지 않고 악마 무리를 사냥했다고 한들.

우쭐대는 일은 없다.

이 정도는 해줘야 천적관계라고 할 수 있지 않겠어?

'그리고 경험치가 미동도 없는 걸로 봐선.'

기껏해야 400~500레벨 언저리의 악마들이었을 테니까.

그런 의미에선.

정말로 유낙서스가 죽음을 향해가고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저런 하찮은 악마조차 쫓아내지 못한 거야.'

유낙서스와 마주하기 전까지는....

어쩌면 치유마법으로 유낙서스의 상태를 호전시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해봤었다. 내가 파둔 살 구멍, 우물에는 치유마법도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그게 벨리에 수준까지는 아니더라고 하더라도.'

웬만한 힐러 클래스 플레이어들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단 것이다. 그러나 오만이었다. 아니, 오만이라기보다는 대상을 과소평가했다.

드래곤.

만물의 왕.

엘프조차 열등감에 시달리게 했던 무결점의 생물.

엘프의 지도자, 아젠트레스의 말에 따르면.

드래곤은 [첫 세계수의 축복]이 없어도 완벽한 존재였다. 그 말인즉슨, 세계수의 축복 효과를 드래곤들은 기본적으로 갖고 있다는 거겠지.

'그런 생명력 재생력 효과로도 상쇄할 수 없는 상처.'

용마대전(龍魔大戰).

더군다나 마탑이 서적으로 남긴 기록에서 나는 목격했었다.

그 어떤 초고위마법으로도 드래곤의 가죽에는 상처 하나 낼 수 없었다고.

한데, 그런 드래곤의 살갗이 갈가리 찢겨져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주군...."

차원을 자유롭게 활강하던 날개 또한 보이지 않았다.

과연, 하이엘이 말꼬리를 흐릴 만도 했다.

나는 그런 유낙서스에게 흔들림 없이 나아갔다.

...정말, 머릿속으론 오만가지 생각이 든다.

대체 누가 유낙서스를 이런 꼴로 만들었는지부터.

이래서야 유낙서스와 대화를 나눌 수나 있을까.

아니, 그 전에 이미 숨을 거둔 건 아닌가, 하는.

해서는 안 될 생각까지 말이야.

그 순간이었다.

유낙서스가 힘겹게 눈을 떴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

영락없이 임종 직전 눈을 뜨는 것처럼 보인다.

그 시선과 마주하면서도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본다.

'...기이로도 무리인가.'

『치유마법』의 간섭 과정에 더할 [무언가]가 있기는 한 건가?

그렇게 발버둥을 쳐왔건만....

드래곤의 죽음을 거스르기에는 아직 나의 수준이 한참 미달이었다.

그런데.

간신히 뜬 유낙서스의 동공이 어째서인가.

휘둥그레져 있었다.

마치 못 볼 거라도 본 것처럼.

확실히 나를 보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날 보고 그렇게 놀랄 이유가 있나?

'왜, 우리 텔레파시까지 나눈 사이잖아.'

얼굴을 맞대는 건 처음이지만.

유낙서스는 나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왜, 내 아이템 정보를 꿰뚫어 본 것처럼.

'나더러 여명이라고 불렀었잖아?'

하이엘이 또한 나에 관한 이야기를 전했을 터.

그러니까.

저렇게 놀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ㅋ...."

눈을 뜨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다는 것처럼.

유낙서스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새어나온 소리가 워낙 작아서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겠다만, 혹시라도 감사를 표하려고 하는 건가? 내가 알짱거리는 악마를 처치해 준 것 때문에?

아니, 그런 거라면 애써 말할 필요 없다.

'구하려고 했던 것도 있다만.'

그저 악마라면 두고 볼 수 없을 뿐이니까.

찾아온 것 또한 고마워할 필요도 없다.

피를 나눈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같은 세계수 족보 아니겠어?

내가 또 이런 규율에는 철저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좀 있거든.

그러니까 나는 너그럽게 입을 열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그런데 아무래도.

...나, 뭔가 단단히 잘못 생각한 것 같다.

나의 말에도 힘겹게 말을 잇는 유낙서스.

이어진 건 고맙다는 인사가 아니었으니까.

"...클라우디."

크으을라우우우디라고?!

얼굴을 보자마자?!

진짜 내 상태창이라도 꿰뚫어 본 거야, 뭔데!!

.

.

.

유낙서스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저 은발은 틀림없이 과거.

자신과 동족을 구원했던 클라우디가(家)의 은발이라고.

그렇기에 감히 입을 열 수 없었다.

'...어머니, 어째서입니까?'

클라우디.

아르카나를 가장 미워해야 할 존재에게.

어찌하여.

'아르카나를 굽어살펴야만 하는, 축복을 내려주신 것입니까?'

영겁의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세계수의 뜻을 의심하지 않았던 유낙서스였거늘.

노룡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세계수의 뜻 따위는.

클라우디에게는 빌어먹을 농담조차 되지 못할 테니까.

그렇기에 유낙서스는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동시에 죽음을 눈앞에 둔 자신의 처지를 다행이라 여겼다.

'저는 이런 운명의 장난과 마주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귓가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군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유낙서스."

유감스럽게도.

의심이 아니다, 정령이여.

그저 모든 것을 체념하고 숨을 거둘 때를 기다리는 것뿐.

유낙서스가 생각하는 순간.

클라우디의 입이 열렸다.

'자비를 구하지 않겠습니다.'

더없이 냉랭하리라 생각했다.

윽박질러도 마땅하리라 여겼다.

클라우디의 최후를 회상하면, 그리고 그 최후를 외면했던 자신과 동족들을 고려하면.... 곧장 '맹약'을 이행하라 명해도 거절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런데, 어째서란 말인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들려온 것은 더없이 인자한 음성이었다.

정말로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그럼에도 이해한다는 것처럼.

자애로운 목소리였다.

유낙서스는 자신도 모르게 읊조리고 말았다.

"...클라우디."

죽어가는 자신이 표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경의를 담아서.

다시금 힘겹게 입을 열었다.

"노룡, 유낙서스가 클라우디를 뵙습니다...."

가냘픈 숨이 지금껏 붙어있던 것은 이 순간을 위해서였을까.

유낙서스는 정말로 심장이.

드래곤 하트가 멎어가는 것을 느꼈다.

쿵....

쿠웅....

쿠우웅....

걷잡을 수 없이 느려지는 박동.

정말로 비겁한 일이거늘.

유낙서스는 쓴웃음을 삼켰다.

'용서하십시오. 말씀에 담긴 뜻을 멋대로 해석했습니다.'

클라우디의 한마디.

그것만으로도 자신은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모든 것을 외면한 채 영원한 안식에 빠질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유낙서스가 영겁의 삶을 체념한 순간이었다.

"유낙서스."

"...?"

"내게는 아직 그대와 나눌 이야기가 있다."

"...!"

...제가 멋대로 곡해한 게 아니란 말씀이십니까?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나눌 이야기가 있다.

그건 변명 아닌 변명을 듣겠다는 뜻이었으니까.

유낙서스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동족에게 찢겨나간 날개가 있었다면.

그 날개를 활짝 펴서 화답했을 정도로.

그러나 그럴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쿵....

정말로 심장이 멈춰가고 있었....

...쿵!

...쿵쿵?!

쿵쿵쿵쿵쿵!!

움찔!

유낙서스의 육체가 크게 튀어 올랐다.

무엇이란 말인가?

멈춰가던 드래곤 하트가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생명력이 되돌아온 것인가, 누군가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오직 심장만이 다시 빠르게 뛰고 있을 뿐.'

그러나 그것으로도 족했다.

드래곤으로서의 모든 힘은 그 심장, 드래곤 하트에서 비롯되니.

일시적이라고 하더라도.

바람 앞의 촛불이라고 하더라도.

심장이 빠르게 뛰는 동안에는.

그 어떤 일이든 능히 해낼 수 있을 테니까.

그렇기에 의문이었다.

"그러니 이해하거라."

클라우디, 그가 내뱉은 '단어'에 대체 무슨 힘이 담겨있길래.

느릿하던 심장을 다시 빠르게 뛰게 한단 말인가?

유낙서스는 그 단어를 눈을 감는 순간까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비바체(Vivace)."

.

.

.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

[만물과 통하는 지도].

[마안(魔眼)의 망원경]....

마왕의 전리품은 이질적인 효과를 지니고 있다.

일반적인 아르카나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효과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도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운율의 지휘봉]

[등급 : 에픽]

[제한 : 없음]

[효과 : 착용 시, 방대한 음악적 지식을 습득하며 그 음악적 지식과 동일한 효과의 버프를 착용자의 통제 아래 있는 모든 것에게 부여한다.]

[설명 : 고상한 외관만큼이나 고상한 효과를 지니고 있다.]

점차 꺼져가는 유낙서스의 심장 박동을.

임시방편이지만 빠르게 뛰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거지.

내가 생각해도 구질구질한 방법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조금만 더 그럴싸했어도.'

회복의 기이를 발현해서 멋지게 유낙서스를 구해낼 수 있었겠지.

꼭 회복마법을 들먹이는 게 아니더라도 반전마법에 조금 더 능숙했더라면. 어쩌면 유낙서스를 상처 입기 전으로 반전시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특기는 주제 파악이다.

덕분에 나는 그게 얼마나 아득한 경지인지를 알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손가락만 빨고 있을 생각은 더더욱 없다.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실천할 뿐.'

다르게 말하자면.

항상의 자세로 발버둥 치겠다는 거다.

그러니까 이해해라, 유낙서스.

그런 나의 방식은....

지나치게 오글거릴지도 모르니까.

내가 이 단어를 또 내뱉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나는 지휘봉을 간결하게 휘저었다.

"비바체(Vivace)."

예상대로 효과는 유효했다.

아무리 황당하다고 해도 눈치는 잊지 않았거든.

덕분에 유낙서스의 말에서 짐작했다.

-"노룡, 유낙서스가 클라우디를 뵙습니다...."

진짜 이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다만.

클라우디와 유낙서스는 관련이 있다는 걸.

그것도 천하의 유낙서스가 극존칭을 쓸 정도로.

굉장히 진하게 엮여있다는 걸 말이야...!

쿠구궁!

유낙서스가 쓰러져 있던 몸을 일으켜 세운다. 어떻게 반갑게 인사라도 나누고 싶은데, 그럴 여유가 없다는 건 서로가 잘 알고 있다.

'말 그대로 임시방편이니까.'

그 심장이 언제 멈출지는 나도, 유낙서스도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곧바로 본론을 꺼낸다.

그래, 자식을 죽음으로 몰고 간 세계수의 뜻이 대체 무엇인지부터.

'사실 제일 궁금한 건 이쪽이다...!'

클라우디.

그 빌어먹을 이름이 아르카나 대륙에 존재하는 이유까지.

그러나 모든 일엔 절차가 있는 법.

무엇보다 우선시해야 할 것은 감히 누가 엘더 드래곤.

유낙서스.

그대를 이런 꼴로 만들었는지다.

나는 유낙서스에게 물었다.

"전룡소집의 경과를 알고 싶군."

"...!"

흠칫하는 게.

내가 어떻게 전룡소집에 관해 알고 있는지 놀란 모양이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거야 어렵지 않은 일이다만.

이렇게 촉박한 때에 스칼이 누구이며.

클래스 퀘스트는 또 무엇인지까지 설명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니까 언제나처럼 철면피를 유지한 채 입을 다물었다.

덕분에 나는 전룡소집의 전말을 듣게 되었다.

그러니까....

...동족, 드래곤들에게 뒤통수를 맞았단 거잖아?!

'괜히 죽음에 내몰린 게 아니었어.'

진짜 이놈의 세계수 족보.

콩가루도 이런 콩가루가 또 없구나.

나는 진심으로 지껄였다.

"오만하기 그지없군."

뭐가 만물의 왕이냐 이놈들.

엄마 말을 안 듣는 것도 모자라서.

하나뿐인 효자인 맏형, 유낙서스의 뒤통수를 쳤겠다?

그 집안 꼬라지를.

그랑펠의 꼰대 정신이 용납할 수 있을 리가 있나!

그런 의미에서 묻겠다.

"유낙서스."

그래서 뒤통수의 얼얼함은 어떠한가?

정말로 이대로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겠냐고 묻는 거다.

왜, 아무리 [최후의 모험가] 효과가 있다고 해도.

나 혼자 드래곤 패거리에 달려드는 건.

계란으로 바위 치기조차 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나는 그런 속뜻을 그랑펠식 화법으로 전달했다.

"그대는 훈육에 대해 어찌 생각하는가? 참고로 말하자면."

더없이 뻔뻔하게도.

"나는 체벌에 찬성하는 주의다."

◈ 242화. 용과 같이 (4)

용(龍).

만물의 왕으로 태어났기에 모든 것을 내려다본다.

허나 용의 오만을 탓하는 이는 없다.

용, 드래곤에겐 오만조차 겸손으로 보이게 할 전능한 능력이 있으니까. 그런 드래곤에게 있어서 패배와 굴욕이란 익숙지 않은 것이었다.

영겁의 세월을 살아온 노룡.

유낙서스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의 계획이 자신의 죽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한들.

자신을 배반한 동족의 손에 맞게 되는 최후는 결코 달갑지 않았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원통했다.

그러나 필사적으로 외면했을 뿐이다.

감히 제까짓 게 원통해할 자격은 있는가.

끊임없이 자신을 비관하며.

그러나 드래곤 하트가 멈춰가던 순간.

절규하듯 내뱉었던 마지막 드래곤 피어.

그 울음소리에는 틀림없이 분함이 담겨있었을 터.

'부끄럽구나....'

클라우디께서는 분명 그 분함을 알아차리신 것이리라.

유낙서스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호열의 말에 담긴 뜻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훈육과 체벌이라는 목적을 내세워....'

늙은 노룡의 최후에 함께 해주시려는 것입니까?

진정으로 분에 넘치는 일이었거늘.

유낙서스는 쉽사리 승낙할 수 없었다.

'...분명 위험에 빠지실 겁니다.'

말했다시피 자신은 동족을 설득하는 데에 실패했다.

그들은 어머니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도 모자라, 클라우디와의 '맹약'조차 외면해 버렸으니.... 클라우디의 귀환을 알린 자신을 이런 꼴로 만든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유낙서스는 거칠게 뛰는 심장을 느꼈다.

'또한 저는 죽어 마땅한 존재이지만....'

자신의 심장이기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것은 회광반조.

드래곤 하트는 언제 멈춰도.

자신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그러니까 자신 따윈 어찌 죽어도 문제가 없겠지만....

'클라우디, 당신께서는 아니시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였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려운가, 유낙서스?"

"...!"

"다가오는 죽음이."

담담한 말이 정곡을 찔러왔다.

영겁의 세월을 살아왔기에.

죽음 따윈 언제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고 생각했거늘.

닥친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자신은 두려움에 떨지 않았던가.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두렵다.'

언제 멈출지 모르는 나의 심장이.

행여라도 클라우디, 당신을 위험에 빠트리지 않을까 두려웠기에.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그렇기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두렵다면 내가 그대와 함께하겠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대가 눈을 감는 순간을, 내가 목격하겠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그 목적이 훈육이든, 체벌이든, 자신의 분함을 갚기 위함이든.

진정으로 함께 나아가겠다는 것이었다.

설령 위기에 처한다고 하더라도.

유낙서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제게 그렇게까지...."

그러자 당연하다는 듯한 말이 돌아왔다.

"그래야 그대가 잊히지 않을 테니까."

"...!"

"그래야만 전설 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쉴 테니까."

그대는 죽어도 죽는 게 아니다.

전설이 되어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

클라우디는 이 순간.

무엇보다 따뜻한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있는 것이었다.

정말로 분에 넘치는 일이었다.

유낙서스가 고개를 숙였다.

"노룡이 클라우디의 뜻을 알아들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게 해둬야만 했다.

자신에겐 그 제안을 받아들일 자격이 없다는 것을.

유낙서스가 말을 이었다.

"그러나 노쇠한 제게는 당신을 호위할 능력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제가 향하는 길이 클라우디, 당신을 위험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습니다."

뜻을 헤아린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위로 덕분에 진정으로 죽음에 두려움 따위는 남지 않았으니.

당신께서 사지(死地)로 함께 비행할 필요는 없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이내, 돌아온 대답에 유낙서스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것은 수십 마리의 드래곤과 마주할 이가 뱉을 말이 아니었으니까.

"우려할 것 없다."

"...?"

"수십, 수백, 수천 마리의 용이 나를 적대한다고 한들."

"...!"

"나는 죽지 않는다."

.

.

.

[최후의 모험가 : 아르카나 대륙에서 사망하지 않습니다. 사망 시, 즉시 현실로 귀환하며 일정 시간 동안 아르카나 대륙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 쿨타임 : 24시간]

죽지 않는다.

적어도 아르카나 대륙에서만큼은...!

그 사기적인 효과를, 나는 효율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아르카나 대륙을 오갈 수 있게 된 이제부터는 더더욱.

그런 의미에서.

'이번 죽음도 절대 헛되이 여겨선 안 된다.'

말 하나 마나 나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각오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드래곤,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니라 수십 마리 앞에서 격식을 운운하러 가는데. 나도 양심이 있지. 목숨이 온전하리란 기대는 티끌만큼도 하지 않는다.

그나저나.

'진짜 [최후의 모험가]라도 있어서 망정이지.'

진짜 고집 장난 아니구나, 그랑펠.

꼰대 기질이 지나칠 수 없어서 드래곤을 체벌로써 훈육하겠다니.

만약, 현실의 제로 산맥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어 봐라.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그러니까 일단은 다행이라 여기자.

이런 상황이 아르카나 대륙에서 벌어진 것에 대해서 말이야.

물론, 그렇다고 또 마냥 기뻐할 순 없다.

유낙서스와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서서히 실감하고 있었거든.

점점 나를 옥죄어오는 클라우디의 존재감을...!

내가 진짜 설마 설마 했다.

그 '위대한 가문'이 '클라우디'라는 걸 짐작했으면서도.

끝까지 부정했다는 말이다.

그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질 않았으니까.

그랑펠의 설정이 실현된 것도 충분히 말이 안 되는 일인데. 클라우디 가문까지 실현되는 건 스케일, 그 자체가 다른 이야기였으니까.

'...진짜 현실을, 흑역사를 진심으로 부정하고 싶다.'

분명, 그랑펠은 말했었지.

-"내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 믿지 않겠다."

남의 말만 듣고 단정 짓는 것?

설령 그게 유낙서스의 말이라고 해도.

그랑펠의 고고한 성질머리에 있을 수 없는 일.

덕분에 클라우디 가문의 저택이라도 발견하지 않는 이상.

그랑펠은 클라우디에 관한.

그 어떤 이야기도 섣부르게 인정하지 않을 거다.

다만.

'나는 상황이 조금 다르지만....'

젠장, 여러모로 생각이 많아진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간결하게 생각해야겠지.

우선 직면한 문제부터 하나씩 해결하는 거다, 호열아.

나는 메시지를 바라봤다.

[월드 퀘스트 : 노룡의 마지막 비상]

죽어가는 노룡은 결단했다.

자신의 최후를 동족의 미래를 위해 불사르겠다고.

노룡의 꾸짖음에 대륙이 전율하리라.

─노룡의 최후를 목격하라. (진행 중)

─노룡을 도와 [용의 신전]에 도달하라. (진행 중)

떠오른 퀘스트 목표는 두 개.

첫 번째는 기본 목표겠고, 두 번째 목표가 내 입방정이 불러온 추가 퀘스트 목표겠지. 그나저나 [용의 신전]이라. 척 봐도 범상치 않은 장소라는 게 느껴진다.

"전룡소집은 [용의 신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유낙서스의 말에 따르면.

[용의 신전]은 제로 산맥 최상층을 통해 진입할 수 있는.

특수한 공간이라고 했겠다.

그걸 아르카나 시스템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제로 산맥을 클리어해야 열리는 최종 콘텐츠란 뜻이겠지.'

말 그대로 산 넘어 산이구나.

하지만 충분히 납득이 된다.

엘프에게도 엘프들의 고향, 시슬리가 있었으니.

드래곤들에게도 그들의 공간.

용의 신전이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닐 테니까.

단지 그냥 걱정된다는 이야기다.

'이거 계란으로 바위를 치기도 전에....'

나라는 계란이 먼저 깨져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왜, 지구에 나타난 제로 산맥의 정보를 생각해 봐라.

그 적정 레벨이 무려 [누구에게도 권장되지 않음]이다.

그런데, 제로 산맥보다 한술 더 뜬 장소라니.

진짜 혼자였으면 진입할 엄두도.

아니, 엄두를 냈어도 진입하지 못했겠지.

'아르카나 대륙에 제로 산맥은 더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유낙서스와 함께인 지금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 말했잖아?

드래곤은 차원을 찢는다고.

이내, 유낙서스가 내게 양해를 구했다.

"소란스러워도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기를."

그러고는 울부짖었다.

콰지지지직─!

그러자 허공이 찢겨 나갔다.

그 광경을 나는 묵묵히 지켜봤다.

시종일관 거만한 철면피엔 드러나지 않겠지만.

나는 지금 적잖이 어이가 없었다.

'누구는 전력을 다해서 찢었는데...!'

유낙서스는 쓰러져가는 몸으로도 어렵지 않게 차원의 틈을 열어버렸으니까. 이게 바로 핏줄의 차이구나. 금수저를 넘어선 다이아 혈통이 바로 저런 거구나.

내가 티를 내지 않고 탄식을 삼키던 순간이었다.

유낙서스가 내게 고개를 조아렸다.

"클라우디시여, 먼저 진입하시지요."

...아니, 내가 먼저?

잠깐, 잠깐만.

저기, 꼭 그래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 이야기를 들어봤을 때.

[용의 신전]에 있다는 드래곤들이 내게 호의적일 리가 없을 것 같아서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나보다는 안면이 있는 유낙서스, 그대가 먼저 얼굴을 들이미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유낙서스가 말을 이었다.

자신의 어깻죽지를 바라보면서.

"제 꼴에 면목이 없습니다."

아, 다른 게 아니라 그런 이유 때문이었나.

동족에게 양 날개를 뜯긴 유낙서스였다.

그 탓에 앞서 나아가며 활로를 열 수 없다는 뜻이겠지.

그런데 그런 거라면 우려할 것 없다, 유낙서스.

완전무결한 그대는 모르는 게 당연하겠지만.

결점을 보완하는 방법이야, 이 세상엔 무궁무진하거든.

'크흠. 이걸 자랑이라 하기는 뭣하지만 내가 또.'

악마 사냥꾼이라는.

나사 빠진 클래스로 여기까지 발버둥 쳐온 나잖아?

나보다 꼼수에 능통한 사람이 또 없을걸?

"고개를 들게, 유낙서스."

나는 하이엘에게 말을 이었다.

"하이엘, 이 날개를 유낙서스에게 걸쳐주거라."

갑자기 무슨 날개라고 묻는다면.

무슨 날개겠는가.

당연하게도.

마탑에서 대여한 열두 점의 마도구 중 하나.

내게는 더없이 익숙한 백 가지 빛을 뿜어내는.

[백색(百色)의 겉날개]다.

유낙서스, 알고 있을지 모르겠는데 말이야.

대다수의 마도구엔 레벨 말고는 제한 같은 게 존재하지 않거든.

딱히 종족을 가리지 않고 착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이엘이 주군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사뿐─

하이엘이 유낙서스의 광활한 등에 겉날개를 얹었다.

파아아앗─!

그러자 겉날개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유낙서스의 잘려나간 날개를 대신해서.

아니, 그보다도 훨씬 찬란하고 화려하게.

유낙서스의 덩치에 맞는 날개로 변해갔다.

그 광경을 보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키코 선임, 성의는 알겠는데.'

마탑에서 백색의 겉날개를 대여하는 이는 나뿐이었다.

마르셀로의 말에 따르면, 다른 마법사들은 겉날개의 성능을 1할도 사용하기 어렵다나 뭐라나.

마법부여학 선임, 키코는 그런 나를 위해서.

또 마법부여학의 연구를 위해서. 백색의 겉날개에 새로운 효과를 부여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전해왔었다. 그 새로운 효과가 바로 [비행] 효과였고.

'정말 고마워해야 하는 일인데....'

저걸 내가 착용한 모습을 생각하니, 진심으로 끔찍했다.

재킷이 펄럭거리는 것도 모자라서는.

겉날개까지 진짜 날개처럼 펄럭이는 꼴이라니.

벌써부터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 같았거든.

나는 얼른 입을 열었다.

"새로운 날개는 마음에 드는가."

그러니 혹시라도 거절할 생각은 말아주라, 유낙서스.

"...."

유낙서스는 제 뜻대로 한두 차례.

날개를 펄럭거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가 더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길을 열겠습니다."

화려한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말수가 적어진 건가...?

그런 우려가 들었지만 어쩔 수 없다, 유낙서스.

취향까지 배려할 정도로 여유가 있는 상황이 아니잖아, 우리.

'자, 그럼 나도.'

마법을 발현.

앞서서 활강하는 유낙서스의 뒤를 쫓아야겠지.

어디 보자.

마력이 얼마나 재생됐으려나.

내가 마력의 잔량을 확인하려던 순간이었다.

쿠궁!

유낙서스가 고개를 조아리는 것도 모자라.

내 앞에 엎드렸다...?

그러더니 말을 내뱉었다.

"클라우디시여, 이 미천한 노룡 유낙서스에게 부디. 당신께서 하사하신 날개로, 당신과 함께 날아오를 영광을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용기사, 스칼이 들었으면 기절할 소리를...!

◈ 243화. 용과 같이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