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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3화. 용과 같이 (5)

콧잔등에 걸쳐진 고풍스러운 안경.

경건하게 곧추세운 허리.

손에 쥔 것은 화려한 만년필이다.

스슥─

무언가를 한참 동안 써내려 가던 스칼이 입을 열었다.

"아니야...."

이내, 로스차일드가(家) 저택을 가득 채울 정도의 절규가 이어졌다.

"이게 아니야!!"

무엇을 써내려 가던 것인가?

보고도 묻는 이는 없으리라.

이 순간, 플레이어들은 하나의 목적으로 글줄을 써내려 가고 있었으니까.

아르카나 대륙으로 진입할 수 있는 유일한 길. 호열에게 접속기의 사용 허가를 받기 위해서.

그 선언은 마탑의 원탁회의에서 발표되었으나, 그 대상은 마탑의 마법사들에게 한정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합당한 목적이지, 소속 같은 게 아니었으니까.

덕분에 플레이어는 물론이요.

아르카니인들까지.

모두가 때아닌 창작의 고초를 겪고 있었다.

머리를 쥐어뜯기도 잠깐.

스칼은 다시 만년필을 바로 쥐었다.

이 순간에도.

"...참자, 스카라."

경쟁자들은 손을 멈추지 않고 있을 터.

하지만 스칼은 장담할 수 있었다.

자신보다 간절한 목적을 가진 사람은 없을 거라고.

──────

존경하며 친애하며 숭배받아야 마땅한 호열 경에게.

──────

당사자가 읽는다면 기절할 인사말이었거늘.

스칼은 심각한 표정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고는 퀘스트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클래스 퀘스트 : 전룡소집(全龍召集)]

노룡이 외쳤다.

아르카나 대륙에 '위대한 가문'이 돌아왔노라고.

모든 드래곤은 사건의 진위를 파악하길 원한다.

─대륙으로 집결하는 드래곤을 목격하라. (실패)

─죽어가는 노룡과 조우하라. (진행 중)

다른 이도 아니고 드래곤이 죽어가고 있단다...!

아르카나에 어디 드래곤이 노룡 한 마리뿐이겠느냐마는.

스칼에게도 눈치라는 게 있었다.

머릿속에 클래스 퀘스트의 스토리가 그려졌다는 것이다.

'내가 위험에 처한 노룡을 구해내고, 덕분에 친밀도가 상승해서, 처음으로 드래곤을 타게 되는.... 딱 봐도 그런 퀘스트 전개잖아, 이건...!'

물론, 죽어가는 드래곤을 되살릴 방법 같은 건 알지 못했다.

허나, 당장 목표는 노룡과 그저 조우하는 것.

접속기를 통해 아르카나 대륙으로 진입할 수만 있다면.

클래스 퀘스트에도 크나큰 진척이.

용기사에도 한 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을 테니까.

"진짜 저보다 간절한 플레이어는 없을 겁니다, 호열 경...!"

틀린 말은 아니었다.

같은 시각, 스칼보다 광적인 기세로 접속기 사용 허가 신청서를 써내려 가는 사내가 한 명 있기는 했다만. 그는 마탑의 선임 마법사지, 플레이어가 아니었으니.

쉽게 끝나지 않는 고뇌.

이게 아니다.

이것도 아니다.

이것 역시...!

스칼은 양피지를 몇 장이나 더 찢어발기고 나서야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럴싸하게 포장한 목적 따위."

어차피 호열 경이라면 전부 간파해 내시겠지.

차라리 목적을 훤히 드러내는 편이 낫겠구나, 싶었다.

왜, 호열 경께서도 노룡에 관해 무언가를 알고 계시지 않았던가?

'유낙서스라는 이름까지 알고 계셨으니까.'

어쩌면 내가.

호열 경의 행보에 필요하게 될지도 모른다.

스칼은 부푼 기대감을 품고 신중하게 만년필을 끄적여 나갔다.

그때였다.

"...?"

눈앞이 점멸한 것은.

스칼은 흠칫했다.

그저 만년필을 끄적이던 중이었으니, 경험치나 레벨이 올랐다는 알림은 아니다. 스킬의 숙련도가 올랐을 리도 없다. 반짝거릴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퀘스트밖에 없었으니.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났다.

"...서, 설마?!"

죽어가던 노룡이 사망한 것인가?

순식간에 스칼의 얼굴에 드리운 먹구름.

스칼은 애써 마음을 추스르고 퀘스트를 확인했다.

그러고는 외마디 탄식을 뱉어냈다.

"...엥?"

─죽어가는 노룡과 조우하라. (실패)

일단 실패이기는 했다.

한데, 어째서 절규가 아닌 의문을 뱉어냈느냐고 묻는다면.

이어서 떠오르는 메시지에서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노룡이 죽어 실패한 게 아니라는 것을.

[월드 퀘스트 : 노룡의 마지막 비상]

죽어가는 노룡은 결단했다.

자신의 최후를 동족의 미래를 위해 불사르겠다고.

노룡의 꾸짖음에 대륙이 전율하리라.

─노룡의 최후를 목격하라. (진행 중)

"뭐, 뭐야!"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죽어가던 노룡이 아니었는가?

내가 만년필을 끄적거리고 있던 시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동족의 미래를 위해? 꾸짖음에 대륙이 전율...?"

새로운 퀘스트가 떠올랐다는 말인가!

혹시라도 알고 있는 이가 있을까, 싶어서.

스칼은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없어."

그런데 다를 게 없었다.

다들 접속기와 호열 경의 위대함에 대해 떡밥을 굴리고 있지.

노룡에 관한 이야기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내게만 떠오른 퀘스트다.'

용기사.

드래곤과 관련된 히든 클래스를 보유한 자신이기에.

영문을 모를지라도.

혹은 완전히 다른 세계인 현실에 있을지라도.

월드 퀘스트가 떠오른 게 확실했다.

그런 의미에서 스칼은 더욱더 의욕에 불타올랐다.

"낙담할 때가 아니야."

클래스 퀘스트에 실패했다면.

새로운 월드 퀘스트를 성공하면 되는 법.

스칼은 눈을 부릅뜨고 접속기 사용 허가 신청서를 적어나갔다.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었다....

*

유감이다, 스칼.

어떻게 하다 보니까 이렇게 됐어...!

나는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업적 : 만물의 왕, 드래곤에 올라타다.]

탈것.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플레이어들에겐 굉장히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아르카나 대륙은 광활했다.

상시로 포탈이 발현 중인 도시에서야 탈것이 불필요했지만, 도시를 벗어나면 마차나 말과 같은 탈것이 필수였다.

뛰어서 먼 거리를 이동하기에는 시간도, 스테미너도 남아나지 않았거든.

'나 때는 마차 값도 장난 아니었는데.'

기사 클래스가 무자본 플레이어들에게 각광을 받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기사로 전직하고, 어떤 기사단이 됐든 입단하기만 한다면 값비싼 말을 공짜로 습득할 수 있었으니까.

물론, 하나 마나 할 정도로 당연한 이야기지만.

악마 사냥꾼과 탈것은 쥐뿔도 관련이 없었으니.

악크샨의 일과만 봐도 짐작할 수 있잖아?

허구한 날 체력 단련만 하는 악마 사냥꾼이다.

튼튼해진 두 다리를 두고 탈것이 웬 말이겠냐고.

아니, 길게 설명할 것도 없이 스킬창만 봐도 알 수 있다.

달랑, [천적관계], [구마의식], [은 마스터리].

'승마 관련 스킬 같은 게 있을 리가 있냐.'

그래서 유낙서스가 제안했을 땐 약간 걱정했다.

괜히 올라탔다가 낙마....

아니, 낙룡(落龍)해서 소중한 한목숨을 날리는 게 아닐까 하고는. 그런데 스칼이 괜히 드래곤 위에 올라타는 데에 집착했던 게 아닌 것 같았다.

[효과 : 모든 탈것에 관한 숙련도가 최대치로 상승.]

[지속시간 : 영구지속]

이게 단순한 업적 달성 효과가 맞아?!

아무리 최초라고 하더라도.

모든 탈것에 관한 숙련도가 최대치로, 그것도 영구적으로 상승하다니.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도 모자라서 튀어나올 정도의 효과였거늘.

역시나 내색은 없었으니.

"이런 시야도 나쁘지 않군."

나는 언제나와 같았다.

업적의 효과 때문이 아니라는 것처럼.

원래부터 탈것에 익숙했다는 것처럼.

유낙서스의 등판 위에 꼿꼿하게 서 있다는 것이었다.

"두 번 다시 날지 못하리라 여겼습니다."

다시 활강하게 된 감회가 새로운 것인가.

유낙서스가 조금 벅찬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색은 하지 않고 있지만 나도 마찬가지다, 유낙서스.

'나도 이럴 줄은 몰랐거든.'

스칼의 말에 따르면.

드래곤에 탑승하는 건 히든 클래스, 용기사의 최종 목표라고 봐도 무방했다.

한 마디로 용기사 클래스 퀘스트를 끝까지 수행해야만 목격할 수 있는 경치가.

지금 내가 유낙서스의 등 위에서 목격하고 있는 경치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 대체 중간과정을 몇 개나 생략한 거지?

건너뛸 수 있었던 이유야 다른 게 아니었다.

'...클라우디.'

유낙서스의 고집은 보통이 아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천운이 따르던 '그날'만 봐도 알 수 있다.

막내, 하이엘이 만류를 했건만.

그저 걱정하지 말라는 말만 남기고서는.

진정으로 끝장을 보려고 했던 유낙서스였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선.

'세계수의 족보보다 클라우디의 후광이 더 크다는 건가...?'

...진짜 두렵다, 클라우디 가문!

속으로 탄식하던 와중.

호랑이 아니, 용도 제 말을 하면 찾아온다는 것인가.

유낙서스가 내게 정중하게 물어왔다.

"미천한 노룡이 클라우디의 이름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나의 이름을.

뭐, 이름을 알려주는 거야 어렵지 않은 일이지.

나는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이호열. 그것이 나의 이름이다."

끔찍한 풀네임으로 답할 줄 알았다면 오산이라고.

그나저나....

이제 와서 사람 잘못 봤다고 내리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그게 말하자면 복잡한데, 어쨌든 둘 다 나니까.'

다행스럽게도.

기우에 불과했다.

유낙서스는 흡족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으니까.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이호열 클라우디시여."

...잠깐만. 지금 뭐, 뭐라고?!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만큼이나 해괴망측한 그 퓨전식 이름은 또 뭔데?! 클라우디 가문의 이호열이 아니라, 이 씨 가문의 호열이라는 뜻이란 말이다...!

저쪽 세계.

대한민국에서는 성이 앞에 오고 이름이 뒤에 오거든.

그러니까 제발 이호열 클라우디 같은.

끔찍한 이름으로 나를 부르지 말아줄래?!

'근데 이걸 또 언제 설명하고 있냐...?'

심정 같아서는 말이야. 콩가루 같은 세계수 족보가 아니라 진짜 족보가 무엇인지, 본관이 무엇인지, 돌림자가 무엇인지까지.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싶었건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별안간.

눈앞이 점멸했으니까.

그건 출현 메시지였다.

[빙룡(氷龍), 프로즈낙스가 출현합니다.]

찰나.

휘이이이잉─!

어둠 말고는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던 차원의 틈에 걷잡을 수 없는 한기(寒氣)가 휘몰아쳤다. 아니, 기운만이 아니었다. 정말로 눈앞에 서릿발이 휘날리고 있었으니까.

[프로즈낙스의 냉기가 일대를 변화시킵니다.]

과연, 만물의 왕 드래곤이다.

차원의 틈조차 제집 안방처럼 바꾸다니.

걷혀가는 어둠 속에서 드러내는 얼음의 세계.

어느새 솟아난 드높은 빙산의 꼭대기에서.

얼음 조각상처럼 날개를 펼친 빙룡이 보였다.

[히든피스, 빙룡의 설산에 진입하셨습니다.]

히든피스라니.

기뻐해야 했건만.

마찬가지로 기뻐할 새 또한 없다.

유낙서스가 곧바로 흉포하게 울부짖었으니까.

"프로즈낙스!!"

그래도 구면에 동족이니까.

나보다는 유낙서스가 먼저 진입하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던 나의 안일함을 전격 철회하겠다.

"위선자가 나의 이름을 꺼내지 마라, 유낙서스!!"

진짜 피도 눈물도 없구나, 너희들!

유낙서스의 등에 올라탄 덕분에 느낄 수 있었다.

걷잡을 수 없이 거칠어져 가는 심장 박동.

두 드래곤은 정말로 끝장을 볼 생각이라는 것을.

쌔애애액─!

불어오는 눈발이 차디차구나.

서클을 개방하기 위해 섭취했던 영약, 만년설꽃의 효과가 아니었다면. 한기에 진작 얼어붙었을 정도로 말이야. 나는 애써 내색하지 않는 하이엘에게 말했다.

"이곳부터는 물러가 있거라, 하이엘."

"도움이 되지 못해 송구합니다. 주군."

"사과할 것 없다. 수고했다."

고유 정령, 하이엘조차 견딜 수 없는 한기라니.

그런 무지막지한 장소를 스스로 투영해내다니.

과연, 빙룡이란 거창한 수식어가 붙을만하다.

그러나 차디찬 공기 덕분인가.

나는 차가워진 머리로 상황을 바라볼 수 있었다.

일단, 차원의 틈에 악마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탓에 [천적관계]는 발동되지 않은 상태.

'전력은 반의반 토막 났다고 봐야 해.'

그런 상태에서 노룡과 빙룡의 집안싸움에 제대로 끼여버린 형국이라. 누가 봐도 용 싸움에 이호열 등이 터지는 상황이 아닐 수 없겠구나.

하지만.

"서늘하기보다는 시원하기 그지없군."

나는 태연하게도 지껄였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는.

그랑펠의 고고한 긍지 덕분에?

물론, 긍지도 무시할 수 없겠지.

"환영인사는 이것으로 끝인가, 빙룡이여."

그러나 얕보지 마라, 만물의 왕이여.

"그렇다면 이번엔 나의, 마탑의 순서다."

성질머리라면.

둘째가기 서러워하는 마탑, 마법사들의 뒤끝을...!

드래곤이 패배와 굴욕에 익숙하지 않은 족속이라고?

그건 마탑의 마법사들도 마찬가지거든.

마탑이 용마대전의 패배를 교훈으로 삼아서 무슨 짓을 했을 것 같아? 드래곤은 건드리면 안 되는 존재라고, 언제까지고 벌벌 떨기만 했을까?

그럴 리가 있겠냐!

특히 내가 아는 '그'는 이런 면에서 굉장히 광적이었다.

그런 양반에게 있어서 빙룡?

어쩌면,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을지도 몰랐겠지.

그런 의미에서.

빙룡, 네 약점은 그가 가장 잘 파악하고 있었을 거다.

마탑 서고에 남겨진 한 권의 마법 서적.

──────

빙룡을 추락시키는 서른 가지 방법

──────

그 저자의 이름은 만년설의 세니오스.

나는 빙룡.

프로즈낙스를 바라보며 읊조렸다.

"그대들이 한낱 유희라 여긴 용마대전에서 마탑은 교훈을 얻었다.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고뇌하고 발버둥 치며 바닥을 기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다시금 그대들 앞에 도달했다."

이내, 빙룡을 추락시킬 첫 번째 방법을 꺼내들었다.

"?!"

그러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빙룡, 프로즈낙스에게 '해빙'이 발생합니다.]

"지금도 우스운 유희로 느껴지는가?"

◈ 244화. 꼰대

『빙룡을 추락시키는 서른 가지 방법』

세니오스가 집필한 마법 서적.

거창한 제목과 다르게.

그 머리말에는 대뜸 적혀있었다.

──────

빙결마법은 쓰레기다.

──────

첫 문장에 놀라기는 이르다.

다음 문장부터는 더욱 가관이니까.

──────

혹시나 독자, 그대가 빙결마법사라면 지금이라도 빙결마법 같은 건 때려치우는 게 이롭다. 빙결마법사는 여름에 시원한 것 말고는 장점이 없다.

──────

읽으면서 생각한 거지만....

세니오스는 마법사 중에서도 별종이었다.

어떻게 그런 성질머리.

아니, 성품으로 원로 마법사라는 자리에 올랐는지 싶을 정도로.

물론,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가 남긴 서적을 읽으면서 알게 됐거든.

세니오스.

그는 불세출의 천재였다는 걸.

──────

나는 모든 속성마법에 능통했다. 그런 내가 확신하건대 빙결마법은 모든 속성마법 중에서 최악이다. 가장 아름다운 속성마법이라는 세간의 평가? 그것은 예쁜 쓰레기라는 뜻이다.

──────

빙결마법 쓰레기론!

설파는 페이지를 스무 장 남짓 넘길 때까지 계속됐다.

거기까지 독파했을 때의 소감?

세니오스에게 되묻고 싶을 뿐이었지.

그렇다면 대체 왜, 빙결마법을 선택한 거냐고.

다행히도 다음 페이지부터는 그에 관한 답이 있었다.

──────

내가 빙결마법을 택한 이유는 간단하다.

──────

진짜 삐뚤어져도 한껏 삐뚤어지셨다, 우리 세니오스 원로님.

──────

나는 최약으로 최강을 증명하고 싶다.

──────

속성마법에는 물고 물리는 상성이 존재하다.

허나, 그중 최고를 뽑는다면 단언컨대 화염마법이다.

카림제바가 화룡이라 불렸던 것처럼.

압도적인 겁화에는 상성조차 뒤집을 힘이 있었으니까.

이해하기 쉽게 과학으로 비유하자면....

'거센 불은 물조차도 증발시켜 버린다는 거지.'

그런 의미에서.

세니오스는 집필한 서적에서도 은근히 자신의 야욕을 드러냈다.

최약으로 최강을 증명하겠다니.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냥 멋진 말이겠구나, 하고 넘어가겠지만.

속사정을 알고 있는 내가 봤을 때는....

'그냥 카림제바를 이겨 먹겠단 거잖아.'

참 과거부터 한결같은 양반이구나, 싶었지.

그러나 세니오스와 카림제바의 전투를 목격했던 나였다.

그렇기에 알고 있었다.

세니오스는 정말로 최약으로 최강을 증명할 뻔했다는 사실을.

-"그대가 목숨을 걸었을 줄이야. 의외로군."

-"...!"

-"허나, 목숨을 건 건 나도 마찬가지다."

속성 상성의 한계를 극복하고 사실상 무승부.

카림제바가 자신의 심장을 불살라 위기를 타개하긴 했다만.

카림제바 또한 살아도 산 게 아닌 부상을 입었으니까.

그런 만년설의 세니오스가.

자조하듯.

써내려간 빙룡의 공략집이란 말이다.

──────

애당초 집필하고자 했던 것은 속성 상성 극복에 관한 가설이었다. 허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빙결마법은 쓰레기라는 결론이 서른 개나 나왔다. 그래서 나는 사고를 전환하여 빙룡을 추락시키는 방법을 서술하기로 했다.

──────

그렇다.

자신의 빙결마법을 쓰레기라 칭할 정도로.

빙결마법의 약점을 집요하게 들여다봤을 세니오스였으니까.

그에게 있어서 빙룡?

겉모습만 반짝거리는 쓰레기용(龍)에 불과했겠지.

덕분에 내 머릿속에는.

그가 남긴 빙룡의 공략법이 선명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뚝뚝─

빙룡, 프로즈낙스가 자신의 육체를 바라본다.

"네놈, 마탑의 마법사인가."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은 표정이신데?

하다못해 화염과 맞닿은 것도 아닌데, 얼음이 녹아내리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겠지. 근데, 그렇게 놀라면 쓰나. 이제부터 시작인데.

그리고 마법사라니,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나는 수석이지. 수석 마법사가 아니다."

그게 뭐가 다르냐는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엄밀하게 다르다.

악마 사냥꾼 같은 클래스로.

여기까지 발버둥 쳐온 나의 처절함을.

단순한 마법사 취급으로 과소평가하지 말라는 뜻이다.

'...물론, 마탑의 마도구를 들고 할 말은 아니지만.'

둥실─

공중에 부양시킨 건 다름 아닌 [소형 마력 태양].

화염마법학 선임.

벤쉬가 호시탐탐 눈독을 들이는 그 마도구가 맞다.

[소형 마력 태양]

[등급 : 에픽]

[제한 : Lv.1,000]

[효과 : 화염마법 사용 시, 그 마법을 흡수한다.]

[설명 : 해가 뜨지 않는 세계의 태양이었던 기계 구체. 화염을 집어삼키며 사용자의 뜻에 따라 축적했던 화염을 찬란하게 내뿜는다.]

레벨 제한 무려 일천(一千).

'사실 선임 마법사의 출탑쯤이야.'

크게 문제가 될 건 없다.

특히나 제로 산맥이 현실에 튀어나온 지금.

선임 마법사가 제로 산맥에 서있기만 하더라도, 인류에는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테지. 그 존재감만으로 플레이어들에게는 믿을 구석이 되고, 몬스터들의 기세는 크게 꺾일 테니까.

그런데.

'목적이 더없이 불순한 게 문제다.'

벤쉬 윌리엄.

그의 출탑 목적은 우선순위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됐다.

이유라도 성의있게 덧붙이든가.

밑도 끝도 없이 마도구를 사용하기 위한 출탑이라니.

그것도 보통 마도구라면 내가 말도 안 한다.

'이런 무지막지한 마도구를 어디에 쓰겠다는 건데?'

비범한 레벨 제한에서 알 수 있듯.

[소형 마력 태양]은 착용하거나 휘두르는 마도구가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살아있는 아군과도 같은 마도구라고나 할까.

'에픽 아이템답게 이질적인 효과다.'

화염마법 발현 시, 마법 소모량을 줄여주지도 위력을 증가시켜 주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사용자가 발현한 화염마법을 흡수했으니까. 그러나 그 진가는 이제부터 드러난다.

흡수한 화염마법을 연료로 삼아서.

"...거슬리는군, 마법사."

빙룡조차 흠칫하게 할.

이름 그대로.

태양과도 같은 열기를 뿜어내는 효과를 지니고 있었으니까.

나는 열기에 녹아내리는 빙산을 바라봤다.

──────

빙결마법은 환경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물이 얼어붙지 않는 장소에서는 빙결을 유지하는 데에만 하더라도 막대한 마력을 소모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빙룡을 추락시키기 위해서는 환경에서 우위를 점해야 한다.

──────

세니오스의 공략과 함께.

세니오스와 카림제바.

두 반신(半神)의 결투를 상기해 본다.

'전장은 북극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그때도....

-"강한 상대일수록 유리한 전장을 택하는 건 중요하다네."

세니오스는 전장의 중요성을 이야기해 줬었지.

최근 아는 만큼 보인다는 소리를 자주 하는 것 같은데....

정말, 그 말밖에 할 말이 없다.

'결국, 빙룡도 마찬가지라는 거야.'

단순하게 폼을 잡으려고 빙산을 솟게 한 게 아니구만?

설령 그것이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고 한들.

빙결 속성의 한계를 빙룡 또한 가지고 있다는 증거겠지.

자신의 약점이 훤히 드러난 상황이거늘.

만물의 왕이셔서 그런가.

조금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러나 헛된 노력이구나, 마법사여."

쩌저저적─!

다시금 얼어붙는 [히든피스, 빙룡의 설산].

환경을 유지하는 데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막대한 마력을 쏟아붓고 있다는 걸 말이야.

사실 드래곤의 마력이야 무한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

그러나 무한에 가깝다는 거지, 무한은 아니다.

뭣보다 그건 내가 잘 알고 있거든.

'같은 핏줄이니까.'

[첫 세계수의 축복]에도 한계가 있듯.

분명, 네 마력에도 한계가 있을 거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는 거야.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읊조렸다.

"여전히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군."

"상황파악?"

"그 모습이 용보다는 개구리에 가깝지 않은가."

"...!"

우물 안 개구리.

동시에 달아오르는 물에 서서히 익어가는 줄도 모르는 개구리 같다는 중의적인 표현이었거늘.... 생략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그랑펠.

오죽했으면.

"...개구리라."

잔뜩 성이 났던 유낙서스도 멈칫했겠냐고.

하지만 놀랄 때가 아니다, 유낙서스.

빙룡과의 전투는 장기전으로 몰고 가야 승산이 생긴다. 무한에 가까운 마력을 갉아먹을 때까지 빙룡의 공세를 버텨내야 한다는 뜻이다.

"배신자 유낙서스. 이제는 마법사 놈과 놀아나는 게냐!"

후두두둑!

서릿발이 더욱 거세진다.

아득하게 솟은 빙산도, 거대한 빙룡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마치 어두컴컴한 차원의 틈으로 되돌아온 것처럼.

세찬 서릿발이 모든 감각을 차단했다.

'이거라도 있어서 다행이지.'

나는 [소형 마력 태양]을 바라봤다.

기계 태양을 등불 삼아서 빙룡의 다음 수를 예상해 본다.

사실 뭐가 됐든 받아칠 자신은 있다.

세니오스의 가르침은 아직 스물아홉 가지나 남아있었으니까.

그런데....

쿠웅!

이건 예상 밖의 패턴인데?

파르르─

백색의 겉날개가 펄럭거리고.

유낙서스가 휘청거린다.

젠장, 시작부터 육탄전이라니.

진짜 성질머리 한번 대단하구나, 빙룡.

하지만 동시에 영리하다.

본능적으로 적의 취약점을 알아본 거겠지.

"프로즈낙스!"

유낙서스가 노쇠한 육체로 프로즈낙스의 공격을 되받아친다.

비바체(Vivace).

한계를 뛰어넘어 빠르게 뛰는 드래곤 하트의 영향.

덕분에 당장의 힘 싸움에선 밀리지 않고 있었지만.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차이가 극심하다.'

프로즈낙스가 전성기에 이른 드래곤이라면.

유낙서스는 언제 눈을 감아도 이상하지 않을 노룡이었으니까.

그 차이가 육체의 크기에서도 보였다.

"오만하구나, 유낙서스. 인간을 등에 얹은 채로 나와 맞서겠다는 것인가? 일만(一萬)의 세월을 살며 쌓아온 경험이 무색하구나. 그 꼴이 가련할 정도다."

쌔애애액!

둔탁한 충격이 나한테까지 전해진다.

보다시피 급박한 상황이건만.

나는 유낙서스에게 물었다.

"유낙서스."

"듣고 있습니다, 이호열 클라우디시여."

"그대와 비교하면 프로즈낙스가 살아온 세월은 얼마나 되는가."

"일천 년 남짓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괜히 저렇게 혈기왕성한 게 아니었구나.

사람의 나이로 치면.

질풍노도의 시기라는 거잖아, 저 빙룡.

그렇다면 모든 게 이해가 된다.

어른을 공경할 줄 모르는 저 태도도.

자신의 육체 능력을 믿고 섣부르게 들이대는 것도.

하지만.

인생은 길고, 실전이다.

중2 드래곤 녀석.

"아직 훈육의 시기를 넘기지 않았으니."

역시나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거겠지.

마법사를 상대하는 데엔 거리를 좁히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것을.

마법사는 근접전에 취약한 게 당연하니까.

하지만 분명히 말했을 텐데?

나는 마법사가 아니라고.

스릉─

허리춤에서 귀철을 뽑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귀철이 입을 연다.

-주인이여. 저 핏덩이 드래곤을 베면 되는가?

주눅이 들기는커녕 빙룡더러 핏덩이라니.

진짜 누굴 닮아서 이렇게 자신감이 넘치는 거냐, 귀철.

자신감이 넘쳐서 나쁠 건 없다만, 하나 확실하게 해야 한다.

"베는 것이 아니다, 귀철."

-베는 것이 아니라면...?

"체벌이다."

-그런 뜻이었군. 알아들었다, 주인이여.

사력을 다해도 쓰러트릴 수 있을까 말까 한 드래곤을.

체벌로써 훈육하겠다니.

누가 봐도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선언이 아닐 수 없겠지.

그러나 설령 패배해 눈을 감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죽지 않는다.

[최후의 모험가] 효과는 발동 중.

빙룡에게 패배한다고 한들 경험이 남는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실전경험이 말이야.

'그게 죽어도 잘 죽어야 한다고 말한 이유다.'

사실상 독학만으로 현재에 도달한 그랑펠의 찬란한 재능이다.

그런 그랑펠의 재능이, 죽음이라는 경험에서 어떤 성과를 얻을지는.

나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거기에다가.

세니오스가 남긴 지식.

귀철.

십여 개의 결전용 마도구.

그리고 유낙서스까지.

그러니까.

해볼 만하다.

나는 빙룡, 프로즈낙스에게 말했다.

"그럴 시기라는 것을 참작하여 처분하마."

"...?"

"친히 지도해주겠다는 의미다."

"...!"

쌔애애애액!

난데없는 선언에 눈발이 더욱 거세진다.

분노에 부글거리는 프로즈낙스의 음성이 이어진다.

"하찮은 미물이 무엇이라 떠드는 것이냐?"

하찮다.

뭐,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수천 년에서 만 년을 사는 드래곤들에게 인간의 삶은 하루살이도 되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그건 어느 쪽을 기준으로 두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거든.

그리고.

나의, 그랑펠의 기준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자신이다.

그러니까 뻔뻔하게도 읊조렸다는 것이다.

"이천(二千) 년."

"...이천 년?"

"인간의 삶과 드래곤의 삶을 동일시한다면."

"...뭐라고?"

"나와 그대 사이엔 대략 이천 년의 격차가 있다는 의미다."

프로즈낙스는 물론, 유낙서스도 혼란스러운 눈치였다.

인간, 이호열의 나이를.

드래곤 나이로 환산하면 대략 삼천 살이라는.

말도 안 되는 궤변이었으니까.

그러나 상관없다.

말했다시피 기준은 나 자신.

증명하는 것 또한 나 자신이니까.

서리 바람에 나부끼는 재킷.

나는 천천히 귀철을.

아니, 훈육의 회초리를 세워 들었다.

"이천 년의 격차를 보여주마, 해츨링."

.

.

.

용의 신전.

수십의 드래곤이 일제히 깨달았다.

노룡, 유낙서스는 거짓을 고하지 않았다는 것을.

드래곤 하트.

심장에 각인된 '맹약'이 드래곤의 육체를 죄어왔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드래곤의 정신세계에.

거스를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룡(全龍)에게 고한다.

"...!!!"

쿵!

그러자 드래곤의 머리가 떨어졌다.

쿵쿵!

하나둘.

...쿵!!

전룡이 머리를 바닥에 납작 붙인 채 조아렸다.

-내가, 클라우디의 후계자가 돌아왔음을.

위대한 가문의 귀환 앞에.

◈ 245화. 한마디

솔직하게 괜한 말을 한 건가, 싶다.

훈육도 상대를 봐가면서 해야 하는 건데.

드래곤이어서 문제라는 게 아니라.

애초에 대화의 여지조차 없는 상대라는 게 문제였다.

왜, 지금도 보다시피.

크롸롸롸─!

빙룡, 저거.

잔뜩 성이 나서는 피어를 내질러 대고 있었으니까.

절대 여유를 부릴 상황이 아니다.

나는 어지럽게 떠오르는 메시지를 바라봤다.

[첫 세계수의 축복이 '드래곤 피어'를 거절합니다.]

용마대전의 기록에서도 자세하게 적혀 있다.

드래곤의 울음소리.

드래곤 피어는 강대한 정신력을 자랑하는 마탑의 마법사들조차도 벌벌 떨게 하였었다고. 그런 의미에서 세계수의 축복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나였지만....

'그런 내 입으로 뱉은 말이 있다는 게 문제야.'

지껄인 말은 반드시 지켜내고야 마는 고집.

그리고 그런 주인을 닮은 귀철까지.

덕분에 귀철은 빙룡을 상대하면서도 형태를 바꾸지 않은 상태였다.

-주인이여, 힘 조절이라는 건 어렵군.

목적은 베는 것이 아닌 체벌이다.

입방정 때문에 나와 유낙서스만 개고생을 하고 있다는 거지.

그런 나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귀철이 말을 잇는다.

-그런 의미에서 주인이여, 그대는 존경스럽다.

존경스럽기는, 누구 놀리냐...!

이쪽은 말 그대로 혼신의 힘을 다해 맞서고 있구만.

그래도 다행인 건 프로즈낙스에게 젊음의 패기가 있다면.

유낙서스에겐 경험의 노련함이 있다는 것이었다.

"어딜 내빼는 것이냐!"

집요하게 몸싸움을 시도하는 프로즈낙스.

유낙서스는 상대적으로 작은 몸집을 도리어 이점으로 사용했다.

아슬아슬하게 빗겨 비행하며 내게 회초리를 휘두를 틈을 줬다.

'역시, 비바체의 효과겠지.'

그러나 나는 물론.

유낙서스 본인도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시간은 많지 않다는 걸.

당장 다음 활강에서 유낙서스의 심장이 멈추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겠지. 그런 의미에서 빌어먹게도 큰 목표였구나, 주제파악을 하게 된다.

'지금 내 수준으로 용의 신전에 도달하겠다는 게.'

유감스럽지만....

인정해야 한다.

빙룡은 시작에 불과하겠지.

유낙서스의 말에 따르자면 전룡 소집에 모인 드래곤은 수십이다.

막말로 프로즈낙스를 참교육해 내고 [히든피스, 빙룡의 설산]을 클리어한다고 치자. 곧바로 다음 드래곤이 튀어나와 우릴 맞이할 가능성은 차고도 넘친다.

펄럭─!

문득, 시야에 일렁거리는 백색의 겉날개.

유낙서스가 프로즈낙스와 거리를 벌렸다.

그러고는 내게 말했다.

"이리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알아차렸구나?

나한테 콩깍지가 씐 귀철과는 다르게.

유낙서스는 드래곤의 눈으로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봤겠지.

살아온 세월이 있으니까.

척 봐도 알아차리지 않았을까?

몇몇 꼼수를 빼면 내 수준이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그런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체벌이니, 뭐니, 오만하게 지껄이기나 하고.'

사람이 이래서 말조심을 해야 하는데...!

낯이 뜨거워져서 할 말이 없었거늘.

자기반성 같은 건 하지 못하는 나였으니.

나는 한결같은 목소리로 읊조리는 게 전부였다.

"그랬나."

유낙서스가 곧장 말을 잇는다.

"그렇기에 송구합니다. 아무리 클라우디께 은총을 받았다고 한들, 이 노쇠한 몸으로는 동족에게 제대로 맞서지 못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당신께서 베푼 자비를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용서를 구하겠습니다."

...뭐야, 그런 의미였어?

'그럼 다행이네.'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된다.

능력도 없으면서 자신을 끌어들였다고 날 원망하지는 않을까.

걱정하던 참이었거든.

그러니까 용서 따윈 구할 필요 없다, 유낙서스.

아니, 오히려 묻고 싶은 건 이쪽이다.

"유낙서스."

"듣고 있습니다, 이호열 클라우디시여."

"진정으로 후회하지 않겠나."

"무슨 의미이신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설령 다음 날갯짓에서 그대의 심장이 멈추어도. 이대로 그대가 끝없는 설산의 바닥으로 추락하더라도. 후회가 남지 않겠느냐고 묻는 것이다."

유낙서스는 클클 웃음을 흘렸다.

"송구하게도 후회할 것 같습니다."

그 눈빛이 더없이 강렬했다.

"되갚아 줄 것이 아직도 많은데. 고작 새파란 어린 용 하나에 밀리고 있다는, 자신의 나약함에 후회가 막심할 따름입니다. 노쇠한 육체가 원망스러울 따름입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노선을 바꾸지. 장기전은 전격 철회하겠다."

"철회하시겠다니...?"

"훈육이 필요한 이들이 가득하니, 신속히 가르치겠다."

그런 심정이라면.

조금 더 체벌의 강도를 올려도 되겠군.

그렇다면 '빙룡을 추락시키는 서른 가지'의 방법 중.

가장 간결하며 효율적인 방법으로 넘어가겠다.

다만, 그 전에.

"마지막으로 묻지."

"얼마든지 답하겠나이다, 클라우디시여."

"그대는 추위에 익숙한가."

"...?"

갑자기 뭔 썰렁한 소리인가, 싶겠지.

그러나 중요한 이야기다, 유낙서스.

떠올리는 세니오스의 공략집.

──────

허나 빙결마법의 진정한 천적은 화염마법이 아니다. 자신과 똑같은 빙결마법이다. 보다 강렬한 열기에 종속되는 화염마법과 다르게. 일정 수준에 다다른 냉기마법끼리는 그 우위를 점할 수 없다. 냉기마법만으로는 결착을 낼 수 없다는 의미다. 냉기에는 명확한 한계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

마지막에는 그런 말까지 덧붙였었지.

──────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쉽다. 용마대전이 발발했던 시절, 내가 마탑에 존재했더라면. 적어도 마탑은 빙룡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을 것이다. 장담하건대 나는 빙룡 따위에게 지지 않았을 테니.

──────

마치 미래를 예측이라도 한 것처럼.

정말로.

세니오스 원로답게.

──────

설령 만년설 아래에 영면한다고 할지라도.

──────

한계점이 존재하는 이상.

냉기와 냉기는 서로 승부를 낼 수 없다.

프로즈낙스.

너의 냉기가 한계점에 도달했을지는 맞부딪혀야 알겠지만.

이쪽은 확실하게 그 한계점에 도달해서 말이야.

그래, [『절대영도』]라는 한계에.

유낙서스가 거리를 벌리자 프로즈낙스 또한.

이전과는 다르게 창공으로 비행했다.

다음 페이즈로 돌입한 거겠지.

그 다음 공격이 예상이 간다.

'피어, 다음에는 당연히 브레스다.'

화르륵─!

갑작스러운 열감.

유낙서스의 입가에서 화염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빙룡의 냉기 브레스를 브레스로 되받아치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 없다, 유낙서스.

"괜찮다."

"...?"

"그대는 나설 것 없다."

"...!"

화륵...?

나의 말에도 유낙서스는 쉽게 브레스를 되삼키지 못했다.

같은 드래곤이니까.

드래곤 브레스가 어떤 위력을 가졌는지 잘 알고 있는 거겠지.

근데, 진짜로 괜찮다니까?

'나도 다른 브레스면 호들갑을 떨었을 텐데 말이야.'

냉기 브레스라면 기이, [『절대영도』]가 있는 이상.

설령 정통으로 얻어맞는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을 테니까.

그런 속사정이 있었건만.

이놈의 무게 잡기는 어디에서도 빠지지 않았으니.

나는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 명하겠다, 유낙서스."

"노룡이 클라우디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나의 허락 없이 눈을 감지 마라."

"...!"

"내가 돌아올 때까지 살아있거라."

절대영도.

많이 우려먹었던 기이인 만큼.

나는 그 정확한 효과가 무엇인지도 알고 있다.

단순하게 대상을 얼어붙게 하는 게 아니다.

절대영도라는 대상과 대상이 존재하는,

'시간'마저도 얼어붙게 하는 절대적인 냉기.

그렇다.

나는 그 시간의 흐름조차 얼어붙는 절대영도에서 빙룡, 프로즈낙스를 물고 늘어질 생각이었다...! 구질구질한 걸 넘어서 무모한 방법이다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것밖에 없었으니까.

쿵쿵쿵....

비바체의 약빨이 다하지 않는 사이에.

[히든피스, 빙룡의 설산]을 돌파하는 방법은.

이것이 유일하다는 의미였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내가 아니던가.

덕분에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했지만.

유낙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습니다."

좋아, 기다리고 있으라고.

나는 마력을 끌어올려 허공에 홀로 섰다.

멀어지는 유낙서스에서 프로즈낙스로.

시선을 옮겼다.

쩌저저저적─

가까워진다.

모든 것을 냉각시키는 빙룡의 냉기 프레스가.

나는 지체하지 않고 기이, 절대영도를 발현했다.

세니오스가 그랬던 것처럼.

내, 자신으로부터.

나의 심장으로부터.

심장을 감싼 서클로.

입김으로.

대기 중의 수분으로.

마지막으로 프로즈낙스까지.

절대영도의 발현 범위를 늘려나갔다.

눈앞에 어지럽게 메시지가 떠오른다.

[당신에게 '설명할 수 없는 냉기'가 발생합니다.]

['설명할 수 없는 냉기'가 냉기 브레스를 거절합니다.]

['설명할 수 없는 냉기'의 영향으로 시간의 흐름이 왜곡됩니다.]

[빙룡, 프로즈낙스에게 '설명할 수 없는 냉기'가 발생합니다.]

['설명할 수 없는 냉기'의 영향으로 빙룡, 프로즈낙스의 시간의 흐름이 왜곡됩니다.]....

시간조차 멈추는 절대영도 속.

존재하는 것은 나와 프로즈낙스뿐.

비유하자면 '의식'과 비슷한 공간이려나.

'구마의식부터 시공간의 사교장까지.'

나야 의식의 공간이 익숙하지만.

너도 마찬가지일까.

프로즈낙스?

"...내게 무슨 짓을 한 게냐, 미물."

프로즈낙스는 내가 아닌 유낙서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곡된 시간의 흐름 탓.

그림처럼 멈춰있는 유낙서스를 보고서는 위화감을 느낀 거겠지.

그러고는 다시 나를 노려본다.

걷혀가는 냉기 브레스 속에서도 멀쩡한 나를 보고.

적대적인 말을 씹어 뱉어낸다.

"감히 어쭙잖은 장난을 쳤구나."

환각이라고 생각한 건가.

프로즈낙스가 눈을 부릅뜬다.

과연, 그 모습 또한 만물의 왕답네.

왕처럼 고귀한 정신력을 지녔기에.

단순하게 눈을 부릅뜨는 것만으로.

환각마법을 비롯한 웬만한 상태이상은 우습게 떨쳐낼 수 있었겠지.

그런데, 이거 유감스러워서 어쩌나?

"장난이 아니다, 해츨링."

말했다시피 이건 네가 재밌으라고 하는 유희가 아니다.

네가 마음을 고쳐먹을 때까지 끝나지 않는.

영원한 훈육 시간이지.

"감히...!!"

그렇게 사방팔방 냉기 브레스를 뿜는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말했잖아?

네 냉기로는 절대영도를 둘러싼 내게 피해를 줄 수 없다고.

'육탄전도 마찬가지다.'

엄밀히 말하자면.

멈춰있는 건 유낙서스가 아니라 우리였으니까.

절대영도 속에서 벌어지는 일은 무의미하다고 봐도 무방한 거지.

뭐, 이해하기 쉽지 않을 만도 하다.

장담하는데, 일천 년을 살았다고 하더라도.

이런 경험은 프로즈낙스, 너도 처음일걸?

하지만 내게는 이 또한 익숙하다.

비슷한 경험이 있으니까.

그렇다.

무간(無間)이다.

마탑의 지하.

한때 원로 마법사로 추앙받던 악마 숭배자들조차.

정신줄을 놓게 한 그 장소에서도 태연스럽게.

찻잔을 기울이는 것도 모자라 독서까지 즐기던 내가 아니던가.

그런 나의 항상의 자세는.

절대영도로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도.

흐트러지지 않았으니.

나는 입을 열었다.

"스스로 깨닫게 될 때까지."

"...네놈!"

"얼마가 됐든 기다려 주마. 해츨링."

언제나처럼.

"이런 상황 또한 예상하고 안배해 두길 잘했군."

녹차 티백(찬물용)을 꺼내 들면서....

.

.

.

"...그런 뜻이셨습니까?"

유낙서스는 얼어붙은 두 형체를 바라봤다.

호열과 프로즈낙스를.

뒤늦게나마 말의 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추위에 익숙하다는 것이 그런 뜻이셨습니까...!"

당장이라도.

저 형언할 수 없는 한기를 쫓아내고 싶었다.

쫓아낼 수 없다면 뛰어들고 싶었다.

그러나 불가능했다.

호열과 프로즈낙스를 뒤덮은 한기는.

말 그대로 '차원'이 달랐다.

자신을 포함한 어느 누구의 접근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미련하구나, 유낙서스...."

무엇이 영겁의 세월을 살아온 노룡이라는 말이냐?

말에 담긴 뜻.

하나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면서 어찌...!

유낙서스는 얼어붙은 호열과 프로즈낙스 사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무너지는 심정을 추슬렀다. 그래, 호열이 남긴 말이 있었으니까.

-"내가 돌아올 때까지 살아있거라."

그렇기에 기다렸다.

"맹약에 따라 기다리겠나이다."

설령.

"그것이 영겁의 세월이라고 할지라도."

.

.

.

일만 년의 삶은.

하루를 하루처럼 느끼지 못하게 하였으니.

유낙서스는 기다린 시간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시간은 명백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 흐름이 왜곡된 절대영도 속에서도.

그 밖에서도.

어찌 확신할 수 있느냐, 묻는다면.

문득, 허공에 검은 형체가 나타났으니까.

그 검은 형체가 얼어붙은 호열에게 속삭였으니까.

"디엔드, 주군의 명을 수행하고 복귀하였습니다."

결과를 보고했으니까.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한마디는.

"클라우디 가문의 저택을."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쩌저저저적─

얼어붙어있던 '클라우디가 후계자'의 기억을.

.

.

.

쩌저저적─

걷혀가는 절대영도 속에서.

나는 경악했다.

디엔드의 한마디에.

망각하고 있던 클라우디 가문.

그 방대한 설정이 하나둘.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올랐으니까.

"전룡(全龍)에게 고한다."

그러니까....

"내가, 클라우디의 후계자가 돌아왔음을."

이 입방정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뜻이었다...!

◈ 246화. 오만한 게 아니다 겸손한 것이다

잊지 않는다, 주제 파악.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하기 전.

만반의 준비를 하고자 했던 나였다.

비약초 도핑부터 마도구 대여.

유낙서스를 비롯한 드래곤과 조우하게 될 가능성 또한 염두.

지피지기면 그래도 비명횡사는 면하지 않을까, 머리를 굴리며.

마탑에 남겨진 용마대전 관련 서적을 탐독하며 정보 수집까지.

'상대가 악마였다면 그걸로 충분했을 거야.'

거악이든, 상위 마왕이든, 상관없다.

악마 앞에서 꺾이기는커녕 더더욱 드높아지는 그랑펠의 긍지였다.

게다가 악마 사냥꾼의 유일한 강점.

고유 스킬, [천적관계]까지 우려먹을 수 있었을 테니까.

뭐, 그래도 여의치 않았다면.

'우리 악크샨 선배님들이 있다.'

탐험가 연맹장, 파비앙에게 빌렸던 [지옥의 횃불]도 아직 내 인벤토리 안에 고이 보관 중이니까. 상대가 악마였다면 만반의 준비라 자신했을 거란 말이다.

'하지만 그럴 확률은 낮았지.'

왜, 흐름을 생각해 봤을 때.

유낙서스에게 죽음이 드리운 건 '전룡소집'이 끝난 직후였다.

가장 확률이 높은 가능성은....

전룡소집이 끝난 뒤 동족에게 공격을 받았다는 거겠지.

그러니까 나는 마지막 남은 수단에 손을 뻗고야 말았다.

...진심으로 외면하고 싶었던 그 가능성에!

그렇다.

클라우디였다.

클라우디 가문이었다.

'실존한다면 언제까지 외면할 수 없다.'

레이먼 션과 접촉하면서 깨닫게 됐다.

나는 아직 아르카나에 관해 몰라도 한참을 모른다고.

의문투성이인 레이먼 션을 떼어놓고 봐도 마찬가지다.

상위 마왕과 거악을 비롯한 악마들은 물론.

우르스나 빗자루를 탄 여인처럼.

각자 모종의 뜻을 품고 있을 초월자들.

그리고 드래곤이나 엘프처럼.

아르카나 대륙을 뒤흔들 힘을 가진 세력들까지.

주제 파악이 특기인 덕분에 결심했다는 것이다.

'...마주하고 써먹어야 한다.'

실현된 그랑펠의 설정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나였다.

그렇기에 정말로 클라우디 가문 또한 실현되었다면.

그 설정마저도 활용해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객사나 수치사나....'

어차피 죽는 건 마찬가지니까.

그렇게 결심하고선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한 뒤 하이엘과 디엔드에게 각각 임무를 줬다. 알다시피 하이엘에게는 유낙서스의 기척을 쫓으라는 임무를.

디엔드에게는.

-"아르카나 대륙에서 가장 어두운 곳을 찾거라."

그랑펠식 화법으로 명했지.

-"그곳이 클라우디일 테니."

그리고 지금이었다.

쩌저저저적─

뇌리 속으로 파고드는 디엔드의 음성.

나는 [『절대영도』]의 발현을 해제했다.

눈앞에 메시지가 떠오른다.

[왜곡된 시간의 흐름이 되돌아옵니다.]

시간의 흐름조차 얼어붙게 하는 한기 속에서.

정확히 얼마나 긴 시간이 흐른 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장담하건대.

그렇게 호들갑을 떨 시간이 지나진 않았을 거다.

그건 나와 프로즈낙스의 상태만 봐도 알 수 있다.

찰랑찰랑─

나는 아직 녹차 한 잔을 채 비우지 못한 상태였거든.

냉녹차가 취향이 아니라서.

더디게 찻잔을 기울인 그랑펠의 까다로운 입맛 탓도 있겠지만.

여전히 반발심이 가득한 프로즈낙스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

"결국, 이리될 것을. 헛된 수고를 했구나, 미물."

저저, 곧장 반격하려는 꼴 좀 봐라.

그렇다면 누군가는 묻겠지.

어째서 다짜고짜 절대영도를 해제한 거냐고.

내가 해줄 말은 간단하다.

디엔드의 한마디.

클라우디 가문의 저택을 찾았다는 그 한마디가.

나의 기억을 되살리고 있었으니까.

십수 년의 세월 탓에 잊고 있던 방대한 흑역사를...!

『클라우디 가문의 상징은 눈부신 빛을 내뿜는 은빛 머리칼이다. 그 은빛은 아르카나 대륙에서도 귀하디귀한 마력의 백금보다도 찬란하였으니. 누군가는 말했다. 클라우디의 위대한 능력은 은빛 머리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느냐고....』

...이제야 알겠다.

유낙서스가 어째서.

나를 보고 그렇게 소스라치게 놀랐는지를.

'내 상태창을 꿰뚫어 본 게 아니었어.'

클라우디 가문의 상징, 은발.

눈이 시릴 정도로.

찬란한 은빛 머리칼을 보고 알아차린 거겠지.

그나저나 진짜 대단하다, 과거의 나야.

'뭔, 은발 하나에다가 이런 설정을 덕지덕지...!'

그러나 머리칼은 시작에 불과했다.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클라우디 가문의 설정.

그건 정말로.

한 가문의 역사를 기록한 것처럼.

방대하기 그지없었으니까.

'이러니까 중학교 때 성적이 그 모양이었지, 호열아.'

이쯤 되면 내, 스스로 놀랍다.

정말 질리지도 않고.

수치스러워하지도 않고.

아주 구체적으로 설정을 휘갈겨 댔구나.

'쥐구멍이 있으면 숨고 싶다, 진짜.'

그러나 방금도 말했다시피.

주제 파악을 마치고.

결심한 나였다.

'...그래, 얼어 죽든 수치사로 죽든 죽는 건 마찬가지.'

그리고 정말로 수치사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앞으로 조우하게 될 이들 앞에서 나는.

클라우디 가문의 후계자라는.

끔찍한 배경마저도 써먹어야 하는 처지라는 것을 인정하겠다.

그러니까 망설임은 없었다.

『드래곤. 아르카나 대륙에서 그들의 존재는 전설처럼 여겨졌다. 그들이 제로 산맥 최정상에서 울부짖으며 존재감을 스스로 알리기 전까지는. 그러나 그 사건에는 숨겨진 진실이 있었다.』

이건 또 언제 가져다가 붙인 설정일까.

그보다....

과거의 나란 자식.

취향 한번 한결같구나.

황제조차 조아리게 하는 위대한 가문으로 시작해서.

보이지 않는 실세.

베일에 가려진 진정한 대륙의 주인까지....

진짜 중증이었구나, 호열아.

자각하는 순간.

수치심이 솟구쳤지만, 내색하지 않는다.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내가, 클라우디의 후계자가 돌아왔음을."

클라우디의 후계자가 돌아왔다고 선포했다.

듣고 있던 누군가는 또 묻겠지.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고.

아니, 애초에 드래곤들도 알고 있지 않았느냐고 물을 것이다.

왜, 유낙서스에게도 그 소식을 들어서 알고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클라우디 가문을 과소평가하지 마라.

그 시절의 내가 위대하다는 수식어를 붙였단 말이다...!

『...드래곤은 클라우디에게 구원받았다. 전설이 돌아온 그날, 대륙에 울려 퍼졌던 울음소리는 클라우디를 향한 경외의 행동. 그날의 진실은 오직 클라우디와 드래곤 사이에서만 전해지고 있었다. 설령 영겁의 세월이 흐른다고 할지라도 유효한 맹약으로써.』

그렇다.

저게 바로 내가 절대영도를 해제한 이유였다.

그 뭐냐....

꽤 오랜 세월이 흘러서 너희도.

나도 기억을 하지 못했던 모양인데.

아무래도 우리 사이에 '맹약'이라는 게 있었던 것 같거든.

"...!"

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프로즈낙스의 머리가 꺾이기 시작한다.

마치 내게 고개를 조아리려는 것처럼 말이야.

영문을 모르는 눈치면서도.

필사적으로 저항하려고 하는 모습이다.

콰득─

빙룡, 프로즈낙스.

아직 해츨링이라서 상황이 파악이 잘 안 되는 모양인데.

그렇게 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반항해 봤자 소용없다.

맹약은 흔한 약속이 아니다.

설령 목숨을 내놓는 한이 생기더라도.

지켜내야만 하는 게 맹약이란 말이다.

그리고 유낙서스를 제외한 너희는 맹약을 어겼지.

그런 의미에서.

내게 더 이상의 자비는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냉랭하게 말했다.

"어린 날의 치기를 이해하는 것도 거기까지다, 해츨링."

"...?"

"나의 앞길을 가로막지 말거라."

"...!!"

꿈틀!

프로즈낙스가 거대한 육체를 움찔거린다.

나는 그런 프로즈낙스를 한결같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서로의 눈빛이 마주치는 일은 없다.

'뭐야, 쟤.'

프로즈낙스가 내 시선을 피했으니까.

그 반응은 내게는 더없이 익숙한 모습이었다.

내 앞에서 공포에 질린 악마와 똑같았거든.

그런 내 생각에 화답하듯 메시지가 떠오른다.

[빙룡, 프로즈낙스에게 '공포'가 발생합니다.]

결국, 프로즈낙스가 완전히 머리를 조아린다.

그와 동시에.

설산의 풍경이 허공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히든피스, 빙룡의 설산을 클리어하셨습니다.]

진입할 때만 하더라도.

이렇게 클리어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어쨌거나, 이 또한 흑역사....

아니, 만반의 준비 덕분이었다.

나는 디엔드에게 말했다.

"디엔드."

"말씀하십시오, 나의 주군이시여."

"임무에 관한 이야기는 후에 나누도록 하지. 절차에 따라 내게는 우선시해야 할 일이 있으니 말이다."

"디엔드가 주군의 명을 받들겠나이다."

이걸로 아르카나 대륙에서의 다음 목표가 정해졌군.

써먹겠다고 다짐한 지금.

더욱더 잘 써먹기 위해선 그 실체를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가봐야지. 클라우디 가문의 영지.'

몰락했다고 하더라도.

새록새록 떠오르는 설정에서 써먹을 요소들이 좀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디엔드에게 말했던 것처럼 모든 일엔 순서가 있는 법.

나는 유낙서스를 바라봤다가 흠칫했다.

'아니, 왜 또 머리를 숙이고 있어?'

새삼 부담스럽다, 진짜.

얼른 말을 이었다.

"고개를 들어라, 유낙서스."

"명에 따르겠습니다. 클라우디시여."

"그대에게 용의 신전까지 안내를 부탁해도 되겠는가."

"더없이 큰 영광이옵니다."

파앗─!

유낙서스가 백색의 겉날개를 펼치고는 내게 날아온다.

이게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타는 것도 그림이 좀 그렇긴 하다만....

어쩔 수 없다.

나는 유낙서스의 등에 다시금 꼿꼿하게 올라섰다.

'빌어먹을 체급 차.'

프로즈낙스를 절대영도로 붙잡아 두고 있는 데에.

소모된 마력이 워낙 극심했어야 말이지.

용의 신전을 앞에 둔 지금.

어떤 돌발상황이 일어날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때문에 최대한 마력을 회복해 둬야 했다.

공중부양으로 소비되는 마력조차 아껴야 한다는 의미다.

'그나저나....'

나는 뒤편에 프로즈낙스를 바라봤다.

지금이야 클라우디라는 공포에 질려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지만, 나중에 또 어떻게 돌변할지 알 수 없겠지.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까지 확실하게 각인시켜둬야 한다.

'더욱더 뻔뻔하게 말이야.'

나는 최대한 위엄있게 지껄였다.

"그대에게 죄를 묻지 않겠다, 해츨링."

"...?"

"허나 명심하거라."

그리고 언제나 기대 이상.

상상을 초월하는 그랑펠식 화법이 아니던가.

덕분에 나는 더없이 오만하게 선언하고 말았다.

"더없이 사나운 사냥개조차 주인을 물려고 들지 않는다는 것을."

"...!"

...꼭 입으로 매를 벌어야 직성이 풀리겠냐, 그랑펠?

드래곤을 사냥개로 비유하는 것도 눈치가 보이는 일이거늘.

이건 뭐, 개만도 못하다는 뜻이었으니까.

이거, 걱정이 앞서기 시작한다.

'두 눈으로 목격하지 못한 지금도 이런데.'

디엔드가 발견했다는 클라우디의 저택이라는 걸.

두 눈으로 목격하게 된다면.

그랑펠의 이 오만함은 대체 어디까지 치솟게 된다는 말인가...!

그런 나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낙서스가 말했다.

"당신께서는 한없이 겸손하시군요."

겸손하다고?

내가?

그거 반어법이지?

"누구에게도 자비를 베풀 위치가 아니시면서도 말입니다...."

이런 오만조차 겸손으로 보이게 할 정도의 후광이라니.

앞으로 그런 클라우디 가문의 후광에 시달리게 될 소시민.

가엾은 나, 이호열을 떠올리니까.

나는 벌써부터 머리가 어질어질해지기 시작했다....

.

.

.

용의 신전.

전룡(全龍)은 바닥에 고개를 조아린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빙룡, 프로즈낙스와 마찬가지로.

비교적 어린 드래곤들은 상황파악을 하지 못했다.

움찔!

바닥에 달라붙은 듯 고정된 머리를 제외한 육체를 이리저리 꿈틀거린다. 만물의 왕으로서 생전 처음 느껴보는 무력함을 필사적으로 부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클라우디와.

그에 얽힌 '맹약'에 관해 알고 있는 드래곤들은 아니었다.

점차 그가 다가오고 있었다.

가까워지는 거리만큼.

주제 파악이라는 걸 하게 되었다.

맹약이라는 것은 거스른다고 마음을 먹는다고.

거스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그런 맹약을.

어긴 대가를 치를 시간이 왔다는 것을.

"후후...."

대지룡(大地龍), 쿠드하낙스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더없이 심각한 상황.

난데없는 웃음은 드래곤들을 노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쿠드하낙스에게 날이 선 말이 쏟아졌다.

"무엇이 그리 우스운가, 노룡이여."

쿠드하낙스.

그는 유낙서스와 동시대를 살아온 노룡이었다.

그렇기에 단지 침묵을 지켰다.

유낙서스의 말에 반대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말을 섣불리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클라우디가 돌아왔다는 말은 그만큼 믿기 어려운 일이었으니.

허나 뒤늦게나마 알아차리고야 말았다.

그렇기에 웃음이 나왔다.

"아직도 주제 파악을 파악하지 못했나, 드래곤들이여."

빙룡.

뇌룡.

풍룡.

염룡.

그리고 자신마저도.

오만하게도 잊은 모양이었다.

"누가 그들 앞에서 만물의 왕을 자처한단 말인가?"

감히 자신들에 빗대어 비유하자면.

클라우디, 그들은 아르카나 대륙을.

그림자에서.

배후에서 관조하고 조율해 오던.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위대한 흑암룡(黑暗龍)과도 같았으니.

쿠드하낙스가 웅장한 피어를 내뱉었다.

"전룡(全龍)은 흑암룡의 입성에 경의를 표하라!"

.

.

.

...바, 방금 뭐라고 그랬어?!

흐, 흑암룡의 입성...?!

그 흑암룡이라는 거 설마 나 말하는 거냐?!

◈ 247화. 眞전룡소집

흑암룡.

그거 아무래도 나한테 한 말이 맞는 모양이다.

유낙서스의 입가에서 흡족한 음성이 흘러나왔거든.

"쿠드하낙스의 피어로군요."

쿠드하낙스?

걘 또 누군데.

초면인 나를, 흑암룡이라는 끔찍한 이름으로 부르는 거야!

할 수만 있다면 그 멱살을 잡고.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있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히든피스 : 용의 신전]

차원의 틈 너머로 신전의 풍경이 보였으니까.

드래곤들의 신전이니만큼 그 덩치에 맞는 스케일이다. 높게 치솟은 기둥은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웅장해지는군. 하지만 [히든피스]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누구나 진입할 순 없었다.

[적정 레벨 : 오직 드래곤만이 진입 가능]

레벨 대신 명시된 조건.

오직 드래곤들을 위한 장소.

드래곤이 아니면 진입조차 불가능하다는 의미겠지. 그리고 그게 바로, 내가 흑암룡이라는 끔찍한 이명(異名)에도 반발할 수 없는 이유였다...!

유낙서스가 말을 이었다.

"흑암룡. 그보다 클라우디를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이명도 없겠군요."

그렇다.

나는 그 흑암룡이라는 빌어먹을 이명 덕분에.

[히든피스 : 용의 신전]에 접근할 자격을 갖추게 됐으니까.

단순하게 말뿐이 아니라 메시지가 떠올랐다는 것이다.

[흑암룡(黑暗龍) : 드러나지 않은 그대의 명성은 어둠 속에서 유영하는 흑암룡에 비유해도 지나치지 않으니, 용의 이름을 거머쥐기에 마땅하다. - '히든피스, 용의 신전'에 출입 가능]

...언제나 긍정적인 마음가짐은 중요하지.

'그래, 덕분에 진입할 수 있게 됐으니까.'

빙룡의 설산을 돌파하고, 목적지 코앞까지 온 상황이었다. 그런데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서 진입할 수 없었다면, 수치사가 아니라 그대로 맥이 빠져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디엔드를 소환 해제한 것도 잘했다, 호열아.'

만약, 디엔드가 이 상황을 목격했다면 그 성격에 가만히 있었겠어?

사방팔방에다가 떠벌리고 다니겠지.

내가 드래곤들 사이에서 흑암룡으로 통하고 있다고.

'세상 사람들이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 거야.'

그 세상 사람 중에는 나의 웬수들도 포함이다.

지금도 3호, 이예림의 연락처엔 내가 '한없이 깊은 어둠'으로 저장되어 있었거늘.... 그것도 모자라서 흑암룡?! 사나이, 이호열도 그런 수치를 버틸 자신이 없다.

마지막으로.

'...그래도 흑염룡이 아닌 게 어디냐?'

그런 칭호였다면 변명의 여지조차 없었겠지.

좋아, 긍정적인 사고방식.

덕분에 마음을 추스른 나는 입을 열었다.

"클라우디에 걸맞은 이명이라."

그냥 스쳐 지나가듯 한 말이었는데.

유낙서스는 나의 말을 흘려듣지 않았으니.

굳이 또 부연 설명을 덧붙이고 계신다.

"이 노룡과 동시대를 살아온 쿠드하낙스라면 짐작하고 있었겠지요. 클라우디의 헤아릴 수 없이 거대한 진실을.... 그러니 제 말을 쉽게 신뢰할 수 없던 것입니다. 허나, 이제라도 깨닫게 되었으니, 이 노룡은 미련 하나를 덜었습니다."

제발, 클라우디 가문을 향한 금칠은 거기서 멈춰주면 안 될까?

여러 의미로 고통스럽다, 진짜....

하지만 써먹고자 다짐했기에.

악으로 깡으로 버텨내야 한다.

무엇보다 지금은 동요할 때가 아니니까.

'수십 마리의 드래곤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

그중 대다수의 드래곤이 나를 명백히 적대하는 상황.

맹약을 기억해 내지 못했으면 진입하는 순간.

쏟아지는 브레스에 산화가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구체적인 사연이 어찌 됐든.

결국.

맹약을 끄집어낸 나였다.

[히든피스, 용의 신전에 진입하셨습니다.]

그런 나의 시야에 들어온 건.

나와 유낙서스를 향해.

일제히 고개를 조아린 전룡(全龍).

말했다시피 대다수의 드래곤은 내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맹약 때문에 억지로 고개를 조아렸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불편한 심기가 그대로 전해져 온다.

빠득─!

오죽했으면 이빨을 가는 소리가 이렇게 크게 들려올까.

거대한 육체에서 흘러나오는 방대한 마력까지.

이거, 머리만 숙이고 있지.

'명백하게 협박하고 있구만.'

그러나 아무리 겁을 준다고 한들.

꺾일 그랑펠의 긍지가 아니시다.

나는 유낙서스의 등에서 내려와 발을 내디뎠다.

태연하게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물론, 나 이호열도 쫄지 않았다고.

'맹약이 존재하는 이상.'

드래곤들은 내게 적개심을 드러낼 수 없을 테니까.

드러내기 위해서는 마찬가지로 목숨을 내놓아야 할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는 내가 손해 볼 건 없었다.

그야 어차피 내놓았던 목숨이거든.

아르카나 대륙에선 죽어도 죽지 않는.

'이래 봬도 [최후의 모험가]니까, 나는.'

그러니까.

어디, 슬슬 자초지종을 들어볼까?

대체 전룡소집에서 어떠한 이야기가 오고 갔길래.

세계수의 뜻을 따르려던 유낙서스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심지어는 클라우디의 맹약까지 무시하려고 했는지. 어디 변명을 토해내 보라는 말이다.

또각─

나는 용의 신전, 정중앙에 멈춰 섰다.

곱지 않은 시선이 쏟아졌지만, 이 또한 익숙하다.

낙하산으로 마탑, 크리스탈 홀 강단에 처음 섰을 때.

그때 쏟아졌던 눈빛이 딱 이랬거든.

나는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시작하지, 유낙서스."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나를 마지막으로, 전룡이 모인 지금."

흑암룡이라는 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진정한 전룡회의를."

.

.

.

용의 신전.

오직 드래곤만이 출입할 수 있는 그 장소에 인간이 발을 들였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쿠드하낙스의 말대로.

저 사내는 '용'이라 불려도 무방한 존재라는 것.

인간 주제에 그런 자격을 갖춘 이들은 그들밖에 없었다.

클라우디.

정말로 클라우디가 돌아온 것이었다.

프로즈낙스와 비슷한 시대의 젊은 드래곤들은 상황의 심각성을 알지 못했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육신은 지나간 과거를 대수롭지 않게 망각하게 하니까.

그러나 해츨링 시기를 넘긴.

성체라고 봐도 무방한 드래곤들은 짐작하고 있었다.

아르카나 대륙에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클라우디.

그가 자신들에게 어떤 처분을 내릴지를.

유낙서스가 입을 연다.

"노룡의 죽음으로써 실현되는 어머니의 뜻. 그것은 제 몸속에 존재하는 어머니, 세계수의 씨앗을 싹 틔우는 것입니다. 그 씨앗을 싹 틔우기 위해서는 노룡의 미천한 육신이 양분이 되어야 하겠지요."

그렇다.

맹약을 앞세우며.

어머니, 세계수의 뜻을 이행하라 명령하겠지.

빠드득!

그러나 인정할 수 없었다.

거스를 수 없는 어머니의 뜻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유낙서스와 마찬가지로.

자신들 또한 세계수의 씨앗을 몸에 품고 있으면서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째서 우리인가!"

만물의 왕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마땅히 그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고 그랬는가?

웃기지도 않는 말이다, 유낙서스.

"무엇이 왕이란 말인가?"

영겁의 세월을 살아왔다.

그러나 그 영겁의 세월.

대부분을 무료한 잠으로 보내온 자신들이었다.

너무나도 강대한 힘을 가졌기에.

날개를 가졌음에도 뜻대로 아르카나 대륙 위를 날지도 못했으며, 대륙을 불안에 떨게 하지 않게 하려고 울음소리조차 내지 못했던 자신들이었다.

그런데.

"허울뿐인 만물의 왕 자리를 물려주고서는. 이제 와서 그에 관한 책임을 묻겠다는 것인가? 목숨을 바치라는 것인가? 우리는 용납할 수 없다. 그것이 설령 어머니의 뜻이라고 하더라도 받아들일 수 없다...!"

유낙서스는 답하지 않았다.

'그 말이 옳다.'

엘더 드래곤.

동족 중에서 가장 오랜 세월을 살아온 자신이었다.

모든 것을 겪어왔기에 저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저항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르지.'

자신 또한 어머니의 뜻에는 모순이 가득하다고.

은연 중에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어머니와 동족. 모두에게 크나큰 죄를 지었다.'

그래서.

죽음을 받아들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허나,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일이다.

유낙서스는 호열을 바라보았다.

'클라우디께서 나서신 이상.'

그가 맹약을 거론한 이상.

자신과 동족들에게 거부권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호열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과연, 예상했던 대로군."

역시나, 모든 것을 관조하고 계셨던 겁니까.

"그따위 뜻이라면 따르지 않는 것이 옳다."

그렇습니다.

그따위 뜻은 따르지 않는 것이 옳...?!

유낙서스는 흠칫했다.

호열의 입에서 생각지 못한 말이 튀어나왔으니까.

"...?"

정말로 눈을 감을 때가 되었나 싶어서.

가는 귀가 먹어버린 것인가, 주변을 둘러보는데....

쿠드하낙스를 비롯한 동족들의 표정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일동 경악.

적대적인 기색조차.

순간 옅어질 정도로.

의문이 가득한 얼굴들.

그러나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호열이 말을 이었기 때문이었다.

"세계수는 이 순간에도 살아 숨 쉬고 있으니."

"...!!!"

.

.

.

마탑의 원탁회의부터.

유스라 왕국의 황실 회의.

AAU의 지부장 회의까지.

회의라면 또 이골이 난 내가 아니겠는가.

때문에 나는 전룡회의의 안건을 경청했다.

그러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 정도면 천만다행이다, 싶다.'

일단, 갱생의 여지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엘프와는 다르군.

무엇보다 드래곤들에겐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만물의 왕으로 태어난 드래곤들이 어째서 자유롭지 못했는지.

그 이유를 나는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시스템 때문이다.'

대격변 이전.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밸런스는 더없이 중요한 요소였다.

'예를 들어서.'

플레이어들이 고작 100~200레벨에 불과한 시절.

대륙에 수천 레벨짜리 드래곤들이 날아다닌다고 가정해 보자.

당연히 아르카나 대륙은 지금처럼 발전할 수 없었을 거다. 드래곤 피어 한 방이면, 대륙 모든 생물체가 기절해 제대로 된 활동조차 불가능했을 테니까.

'엘프와 다르게 이유가 있는 반항이군.'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자고.

나라도 억울했을 것 같은데?

만물의 왕으로 태어나면 뭐 하냐고.

정작, 그 힘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드래곤들에게 용마대전은 정말로 순수하게 즐거운 유희였는지도 모른다.

왜, 평생 자신들과 놀아줄 이들이 하나도 없었는데. 마법사들이 찾아와서는 신기한 마법을 뿅뿅 쏴댔다고 생각해 봐라.

'얼마나 재밌었겠냐고.'

물론, 그건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다.

대(大)를 위한 소(小)의 희생 따위.

누구보다 혐오하는 게 그랑펠이었으니까.

설령 그게 세계수의 뜻이라고 할지라도 따를 리가 있겠냐?

게다가.

"세계수는 이 순간에도 살아 숨 쉬고 있으니."

내뱉은 것처럼.

아르카나 대륙엔 첫 세계수의 뒤를 잇는.

새로운 세계수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다들 믿을 수 없다는 표정들인데.

왜, 그 지명까지 정확하게 말해줄까?

구 [포식자의 늪지대].

현 [세계수의 비밀정원]이다.

그래도 믿지 못하겠다면 퀘스트창을 보여주마.

[월드 퀘스트 : 세계수의 씨앗]

도래한 아르카나 대륙 절멸의 위기.

거대한 위기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싹 틔워라.

─세계수의 씨앗을 발아하라. (진행 중)

●현재 발견한 세계수의 씨앗 1개 / 알 수 없음

●현재 싹 틔운 세계수의 씨앗 1개 / 알 수 없음

아르카나 대륙에 흩어진 세계수를 싹 틔워라.

그게 내가 수행 중인 월드 퀘스트의 목표였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괜한 말을 한 게 아니란 거지.

"말하지 않았나, 유낙서스."

"...무엇을?"

"자식이 죽기를 바라는 어미는 없다고."

"!"

그렇다.

세계수가 정말로 죽은 드래곤의 사체를 양분으로 삼아서 자신의 씨앗을 싹 틔우기 위했던 것이라면.

하이엘의 축복을 통해 세계수의 씨앗을 싹 틔운 나는 계획의 불청객이나 다름없었다.

불청객인 내게 세계수가 축복을 내려줄 이유는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유낙서스를 비롯한 전룡에게 물었다.

"전룡이여, 그대들은 진정으로 세계수의 씨앗을 삼켰는가?"

"...?"

"그대들이 목격한 세계수가 진정한 세계수냐고 묻는 것이다."

"...!!!"

그쯤에서 감이 왔다.

세계수와 드래곤 사이에서.

같잖은 계략을 펼칠 정도로.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는 족속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그렇다, 악마다.

악마 사냥꾼의 직감이 곤두선 순간.

눈앞이 점멸했다.

이거, 간만의 본업이로군.

[클래스 퀘스트 : 선악과]

◈ 248화. 아무 일이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