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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7화. 직면하다

총대장 호열의 합세.

마지막 민간인까지 안전하게 구출.

그리고 진격.

극도로 사기가 치솟은 성전 연합군에게 물러섬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능수능란하게 전장을 휘젓는 라이언 하트 기사단과 여신교단 성기사들. 그들이 선봉에서 길을 열자 플레이어들이 가세했다.

"쉴 새 없이 몰아붙이는 거다!"

"자식들이 어디를 넘보려고!"

"얌전하게 마왕성 안에 처박혀 있으라고!!"

울프는 맹렬한 돌진에 혀를 내둘렀다.

"대단하시네, 우리 총대장님."

그림자 용병단이야 워낙 제멋대로니까 예외라고 치더라도.

누군가를 통솔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 나아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전장?

충성심의 약효는 오래가지 않는다.

그러나 성전은 달랐다.

"이건 통솔력 수준이 아니신데요."

통솔, 그 이상의 단계.

모든 이들이 자발적으로 전의를 불사르고 있었다.

아무리 압도적인 전력이라고 한들.

부상자는 발생할 수밖에 없는 전장이다.

그러나 상처를 입은 이들조차 물러나지 않았다.

누군가는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칫, 이제야 빚을 덜어낸 기분인데."

항상 말씀하시는 긍지라는 거겠지.

울프는 쓰게 웃었다.

긍지라, 영 자신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 같았으니.

그러나 말석, 락키드에겐 아닌 모양이었다.

"비켜. 비켜. 그 새끼는 내가 맡는다!"

언뜻 보면 공적에 미쳐서는 막무가내로 날뛰는 것처럼 보였지만.

울프의 예리한 눈은 락키드가 밀쳐낸 모험가를 살폈다.

락키드가 나서지 않았다면 치명상으로 이어졌을 정도의 부상이었다.

'꽤 물렁해졌는데, 락키드.'

락키드, 자신도 호되게 상처를 입어봤기에 부상자를 배려하는 건지.

말석이라 때가 덜 묻은 건지.

그게 아니라면 정말 긍지라는 걸 가슴에 품게 된 건지.

알 방법도, 알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냥 믿을 수 없는 일이군, 하고 넘어가면 되는 거겠지?"

울프의 사색은 오래가지 않았다.

철컥─

푸슉─

쏟아지는 적만큼 쏟아내는 석궁의 볼트.

설령 긍지를 깨닫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용병이다.

이유 불문, 고용주의 뜻에 따라 밥값은 제대로 해내야 한다는 뜻.

"돌격!"

이윽고 성전 연합군이 마왕성에 진입한 순간이었다.

진격을 막기 위해 악마들 또한 결사항전을 해오리라.

각오했던 바와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갑자기 뭔데?"

고함이 가득하던 마왕성에 정적이 찾아온 것.

선두에서 지휘하던 하르콘이 입을 열었다.

"전원 정지!"

악마가 자취를 감춘 건 아니었다.

연합군은 코앞에서 마왕의 대군과 마주하고 있었으니까.

이상한 건 저들의 반응이었다.

하르콘이 다시금 확인하듯 외쳤다.

"아군에 마법사가 없는 게 확실한가?"

"그렇습니다."

"절 빼면 없는 게 맞는 것 같은데요...."

슬그머니.

스태프를 들어 올린 핌비를 제외하면 마법사는 없었다.

그렇다면 무엇이란 말인가.

무엇이....

"저들이 제 손으로 자신의 목을 죄고 있게 한 것인가."

"!!!"

하르콘의 말대로였다.

단순한 침묵이 아니었다.

툭─

투둑─

덜덜덜─

악마들은 들고 있던 무기도 방패도 떨어트리고는 양손으로 자신의 목을 부여잡았다. 고함은커녕 캑캑거리는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하나둘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단장님...?"

예시카가 하르콘의 의견을 구했다.

상대가 악마이니만큼 방심은 금물이다.

원칙대로라면 저들이 무너진 틈을 타서 신속하게 승부를 내야 했다.

"전원 대기."

그러나 이건 하르콘조차 경험하지 못한 이질적인 전장이었다.

아르카나인의 상식은 물론.

플레이어의 상식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레오니가 입을 열었다.

"고, 고작 한둘이 아니잖아?!"

수만.

정확하게는 칠만(七萬)이었다.

네임드 몬스터, 악마 군단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모든 악마가 패닉에 빠져서는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자신들의 칼날보다도 두려운 '무언가'에 파랗게 질려서는.

히사기가 치솟은 성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 또한 호열 님의 능력일까요...."

짐작할 가능성은 그뿐이었다.

히사기의 지식 속에서.

칠만의 악마를 두려움에 떨게 할 존재는 단 한 명.

호열밖에 없었으니까.

허나, 그렇다면....

"느끼고 계신 감정이 전해져 오는 듯합니다."

평상시의 호열이 언제나 한결같았다면.

지금의 호열에게선 고요한 분노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있었다.

악마들이 행한 행동을 되짚어본다면.

정기 학회를 방해한 것도 모자라서.

민간인들을 위험에 빠트린 것.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이유를 덧붙이자면....

격식에 어긋나게 고성방가.

클라우디라는 뜻 모를 단어를 외친 것도 빼놓을 수 없겠지.

히사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심정을 저 또한 이해했습니다."

그러니까 저 또한 망설이지 않겠습니다.

츠릉─

히사기가 창을 끌며 나아갔다.

"연합군이 자비를 베풀 대상은 악마가 아닙니다."

실눈을 뜬 채 망설임 없이 휘두르는 창.

그런 히사기를 시작으로.

멈췄던 이들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호열 씨....'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경...!.'

'한눈팔지 마, 눈앞의 전투에 집중해.'

호열과 마왕이 마주했을 성채를 애써 외면한 채로.

.

.

.

마탑.

크리스탈 홀.

역시나 벤쉬가 호들갑을 떨었다.

"저, 저건 또 뭐죠?! 나스로우, 당신 분야 아닙니까?"

악마들이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목을 죄고 있다!

생각할 수 있는 건 환각마법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스로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얼핏 보면 환각마법으로 착각할 수도 있겠지.

"결코 환각마법이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어째섭니까? 나스로우 선임 정도면 저런 환각마법 발현 정도야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습니까? 환각마법의 신동이었잖아요, 당신!"

"벤쉬 선임, 그대가 했던 말을 되새겨 보십시오."

"...엥, 내가 했던 말이요?"

"그대가 내뱉었던 환각마법에 관한 평가 말입니다."

워낙 지껄인 말이 많은 벤쉬였다.

환각마법에 관한 평가라....

분명, 뭔가 정곡을 찌르는 평가를 한 것 같기는 한데.

벤쉬가 고심하자 나스로우가 제 입으로 말했다.

"쓸데없이 마력 소모가 극심하다."

"...아니, 제가 그런 말을 했다고요?"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스로우의 말엔 뼈가 있었다.

속성마법 중에서도 최악의 마력 효율을 자랑하는 화염마법학. 그런 화염마법학 선임, 벤쉬에게 그런 말을 들었던 게 적잖이 어이가 없던 덕분이었다.

벤쉬가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

"그게 그때는 제가 철이 조금 없어서...."

"사과를 받고자 한 말이 아닙니다. 사실이니까요."

"그렇다면 그 말씀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탓.

본의 아니게 눈치가 빨라진 마법부여학 선임 마법사.

키코 아르민이 말을 이었다.

"정말 환각마법이 아니라는...?"

나스로우가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그렇습니다. 저건 환각마법이 아닙니다. 마력량이나 발현력을 떠나서, 마법적으로 불가능하단 말입니다. 장담하건대 제아무리 이호열 수석님이시라고 하더라도...."

나스로우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반짝이는 뱅그릿의 동공.

마력 감응력만큼 마력을 포착하는 시야 또한 뛰어난 그였다.

"일대에 눈에 띄는 마력은 보이지 않습니다."

정말로 수만의 악마를 속이는 환각마법이었다면.

마왕성 일대에는 걷잡을 수 없는 마력이 흐르고 있었을 테니까.

마르셀로가 고양이를, 탑주를 바라봤다.

'탑주님의 육체가 발현했던 환각마법처럼.'

그렇다면 대체 무엇 때문이란 말인가.

마르셀로.

심지어는 뒷발로 머리를 긁어대는 탑주조차도.

저 기현상의 원인을 짐작하지 못하던 순간이었다.

오직 마티스만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흑마법이다.'

마티스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이질적인 마력에 감응하는 마도구.

반지는 검게 물들다 못해 금이 간 상태였다.

마티스는 다시금 실감했다.

'직접 마주하고 있는 게 아님에도.'

단순하게 마법으로 투영된 허상을 보고 있는 것뿐이었거늘.

측정불가 수준의 이질적인 마력이 마도구를 망가트린 것.

마티스는 침음을 삼켰다.

'경, 당신께서는 도대체....'

과거와 배경에서 비롯되는 이질적인 마력이다.

'어떤 과거를 겪으신 것입니까?'

마티스는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아니, 짐작하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흑마도학을 정립한 창시자이니만큼 이질적인 마력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마티스였으니까. 그러니까 단지 우려할 뿐이었다.

'만약, 그 과거가 역류한다면.'

그로 인해 경께서 『흑화』하신다면.

그 후폭풍은 예상할 수 없을 정도의 결과를 초래할 터.

그렇기에....

'실례가 되는 생각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과거를.

경이 아니었다면 누구도 감당할 수 없었을 과거를.

다른 누구도 아닌 경께서 겪으셔서 다행이라고.

'감히 저, 마티스는 생각하고 말았습니다.'

.

.

.

무엇보다 입을 닥치게 하는 게 시급했다.

다짜고짜 클라우디, 클라우디...!

이미 전 세계도 모자라 마탑에까지 그 이름이 울려 퍼졌을 테지만.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잖아?

혹시라도 더 나아가서 풀네임을 읊기라도 해봐라.

'내가 다른 건 다 참아도 그놈의 로미오만큼은...!'

TV에서도 뉴스에서도 커뮤니티에서도.

온종일 떡밥이 굴러가겠지.

긍지고 나발이고, 정말 수치심에 얼굴을 들고 다닐 자신이 없단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흑마법, 『흑관』을 발현했다. 마왕, 안드라스를 비롯한 악마들의 감각 활동을 불허했다.

그리고 지금이었다.

눈치가 빠르다면 내 말에서 알아차렸겠지.

내가 그쪽이 애타게 찾던 클라우디라는 사실을.

그래서 이렇게 나타나 줬다.

그래서 그 이름을 들먹이면서 나를 찾은 이유가 뭔데?

당연한 말이지만 답하는 건 내가 아니다.

───────

구마의식 : 악마를 의식으로 초대한다.

───────

의식의 공간이라면 감각과 무관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나는 두려움에 떠는 안드라스를 향해 물었다.

아니, 추궁했다.

"분수조차 모르는 잡종이 알 수 있는 이름이 아닐 터."

"...."

"그 이름을 어디에서 들었는지 말하라."

내 말이 좀 까칠했나?

근데, 솔직히 화낼 만하잖아.

그그그륵─

안드라스가 부리에 거품을 물었다.

제대로 된 추궁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놀란 건가?

이래서야 원하는 답을 들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상태가 별로다.

그래도 안드라스는 꾸역꾸역 말을 전해왔다.

"거악.... 거악에게.... 들었다...."

거악?

그래, 그 이름이 괜히 네 귀에 들어간 게 아니겠지.

하여튼 입이 가볍다, 악마들.

끼리끼리 잘하는 짓이다, 진짜.

역시 말문부터 막아버린 건 잘한 짓이었다, 호열아.

자화자찬도 잠깐, 나는 이어서 캐물었다.

"여섯 중 누구인가."

칠죄종.

그중 탐욕은 내 손으로 직접 지옥에 처넣었으니 여섯이 맞다.

안드라스 입장에선 반드시 숨겨야 하는 이야기겠지.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봐도 부리를 다물고 있는 건 불가능할 거다.

구마의식이 어떤 공간인데.

의식의 주도권은 내게 있었으니.

내가 물으면 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시, 시, 식타아암...!!"

울컥─

안드라스가 입에서 피를 뿜어낸다.

비밀을 지켜야 하는 계약이라도 맺은 모양이군.

'하여튼, 거악이나 마왕이나.'

있는 놈들이 더 하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그래서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나마 안면이 있는 칠죄종 식탐이었다.

왜, 사이렌의 축복으로 천운이 찾아왔던 그날.

나는 [마안(魔眼)의 망원경]으로 식탐을 목격했다.

뭐, 빙의가 일상인 악마에게 외관이 무슨 상관이겠느냐만.

이래 봬도 악마 사냥꾼이거든.

우연히 마주치면 감으로 알아차릴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나저나.'

자연스럽게 의문이 따랐다.

그래서 식탐, 그 자식은 내 이름....

아니, 클라우디란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건데?

'어째 의문이 끊이지 않는구나.'

신세 한탄을 삼키고 기억을 되짚어보던 순간이었다.

'...잠깐만.'

나는 떠올리고 말았다.

천운이 따랐던 그날.

내게 남았던 단 하나의 의문을.

그랬다.

엘더 드래곤, 유낙서스.

아젠트레스가 이끄는 엘프 일족.

초월자, 우르스.

거악 칠죄종, 식탐.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던 일촉즉발.

그 상황을 정리했던 빗자루를 탄 초월자를 떠올렸다.

그러자 의문이 맞물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

스칼의 용기사 클래스 퀘스트.

그곳에 명시되어 있던 '위대한 가문'.

그리고 이 순간.

그 자리에 있던 식탐에게.

'클라우디'라는 이름을 들었다는 안드라스.

이내, 나는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다.

...그 난장판이 클라우디 이름으로 정리된 거였다고?!

◈ 228화. 말하지 않았던가

[클래스 퀘스트 : 전룡소집(全龍召集)]

노룡이 외쳤다.

아르카나 대륙에 '위대한 가문'이 돌아왔노라고.

모든 드래곤은 사건의 진위를 파악하길 원한다.

─대륙으로 집결하는 드래곤을 목격하라. (선택)

스칼의 용기사 클래스 퀘스트.

거기엔 분명 '위대한 가문'이라는.

굉장히 찝찝한 단어가 적혀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나는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어디 아르카나 대륙에 위대한 가문이 하나뿐이겠냐고. 클라우디 가문이 실존할 리가 없다면서. 지금 생각해 봐도 지극히 상식적인 반응이었다.

그런데.

'미친.'

필사적으로 부정했던 일말의 가능성이.

아무래도 현실인 것 같았다.

짚이는 순간은 그때밖에 없었으니까.

바로 그날.

'빗자루를 탄 초월자.'

그녀가 클라우디란 이름을 꺼냈다고 가정하면.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된다.

유낙서스가 난데없이 위대한 가문을 언급한 이유도.

식탐이 클라우디라는 이름을 들먹인 이유도.

마지막으로.

'그 난장판이 정리된 것도.'

...존경스럽다, 중2병 시절의 호열아.

너는 대체 어떤 상상을 하고 산 거니?

대체 어떤 설정을 가져다가 붙였길래.

'클라우디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드래곤이 전원소집 해서 회의를 하고, 마왕도 모자라서 거악이 움직이게 하고, 엘프랑 초월자도 발길을 돌리게 한 건데...!!'

흔한 드라마 스토리가 떠오른다.

재벌가의 숨겨진 자식으로 밝혀져 상속자가 되었다는 스토리.

넓게 보면 나도 그런 꼴이 아닐까?

그런데, 진심으로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진땀을 흘리기에 바빴으니까.

'그랑펠 하나만으로도 벅찬데....'

클라우디 가문이 실존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냐?

지금만 하더라도 악크샨 최후 생존자의 긍지, 마탑 수석의 긍지, 유스라 지부 총책임자의 긍지, 딸부잣집 막내아들의 긍지.... 하여튼 온갖 긍지에 시달리는 나란 말이다.

거기에다가.

몰락한 클라우디 가주의 긍지까지 더해진다고?

진짜 적당히 좀 짊어지자, 그랑펠!

'흑역사는 제발 그만....'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거기에선 그랑펠과 마음이 통하는 것 같았다.

"과연, 어리석구나."

그건 마왕, 안드라스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마왕을 쥐고 흔든 식탐에게 하는 말이었다.

나는 냉랭하게 말을 이었다.

"얄팍한 수로 과거를 엿보려고 한 것인가."

식탐, 거악답게 영악했다.

하지만 악마 사냥꾼이기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악마의 본성이다.

식탐, 녀석은 누구도 신뢰하지 못했을 거다.

태생적으로 타인을 신뢰할 수 없는 족속이니까, 악마는.

'클라우디가 돌아왔다는 말도 믿지 않았겠지.'

그래서 마왕을 앞세운 것이다.

클라우디라는 이름을 떠들게 해서는.

쉽게 말해서 미끼를 던졌단 뜻이다.

그러나.

"열등한 족속이 엿볼 수 있는 과거가 아니다."

내가 과거를, 흑역사를 순순히 인정할 거 같냐?

조금이라도 보여줄 것 같아?

게다가 한번 내뱉은 말은 무조건 지키는 그랑펠이다.

그런 그랑펠의 입으로 선언했었단 말이다.

-"내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 믿지 않겠다."

두 눈으로.

클라우디 가문이 실존했다는 증거를 목격할 때까지.

설령 드래곤이 호들갑을 떤다고 하더라도.

엘프에 초월자에 거악까지 난리를 친다고 하더라도.

절대 믿지 않겠노라고.

안드라스가 부리를 연다.

"본좌는, 나는, 저는 그저...."

구마의식 속에서 악마의 감각은 온전하지 않다.

하찮은 마법도 아주 거창하게 본다는 거지.

그런 의미에서 안드라스는 지금 나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참고로 나는 적잖이 화가 난 상태다.'

이번만큼은 그랑펠의 항상심(恒常心)도 더더욱 칼 같을 수밖에 없겠지. 당연한 이야기다. 클라우디 가문, 그건 진위와 실존 여부를 떠나서.

『위대한 가문의 후계자였으나 악마에게 그 가문이 몰락.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인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이하 그랑펠은....』

결코, 가볍게 들먹여서는 안 될 이야기였으니까.

"다물어라."

외관으로는 드러나지 않을지언정.

평소보다 거칠게 넘실거리는 이질적인 마력을 보면.

그랑펠의 심정을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유감이다, 안드라스.

마왕.

무려 888레벨의 악마족 보스 몬스터.

그러나 귀철에 피를 묻힐 필요도.

거창한 마법을 발현할 수고도 없다.

이질적인 마력만으로 안드라스를 질식시킬 만큼.

나는 성장했으니까.

간만의 재회라 잊고 있었나 본데.

천적관계는 그런 거거든.

[마왕, 안드라스에게 '절명'이 발생합니다.]

나는 냉랭히 말했다.

"용서는 지옥에서 빌어라."

물론, 나한테 빌라는 게 아니다.

네가 짓밟아온 아르카나 대륙의 생명에게 빌라는 거다.

뭐, 우리 악크샨 선배님들께서 널 얌전히 놔둘진 모르겠다만.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마왕, 안드라스는 일찌감치 처치된 상황.

성전 연합군이 마지막 마왕군 잔당을 처리하는 순간.

플레이어들의 시야에도 메시지가 떠올랐다.

[갈등의 마왕성을 클리어하셨습니다.]

클리어 메시지.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광폭화 해제, 이성을 되찾은 남태민이 말했다.

"역시, 먼저 끝내셨구나."

놀랄 일은 아니었다.

호열이 그동안 쓰러트린 몬스터, 클리어한 균열의 적정 레벨을 생각하면 안드라스는 난적에 속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섬뜩해질 수밖에 없었다.

'...호열 씨, 기척이 평소와 달랐어.'

짐승이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야성.

덕분에 남태민은 알아차린 것이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이 없던 호열의 감정이 미세하게나마 거칠어졌다고.

물론, 거칠어졌다는 게 나쁘다는 뜻은 아니었다.

긁적거리는 머리.

"우리 바바리안 사이에선 칭찬이니까...."

어쨌든 의문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필이면 이런 전투에서?'

앞서 말했던 대로.

안드라스보다 더한 적과 상황을 직면했던 호열이었다.

프로스트 탈환전만 하더라도 목숨을 잃은 프로스트의 주민들을 셀 수 없이 목격했다. 심지어 그 시신들을 수습하기까지 했었지.

고심하던 남태민이 중얼거렸다.

"...클라우디라고 했나?"

결국, 평소와 달랐던 것은 그것 하나밖에 없었다.

악마들이 외치던 뜻 모를 단어.

아마도 호열 씨는 그 단어의 뜻을 알고 있으신 거겠지.

그 단어에 민감하실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으신 건지도 모른다.

남태민이 이를 악물었다.

"젠장."

호열에게 동료로 인정받아 기뻐했거늘.

매번 신세만 지고 있지.

정작 호열에게 도움을 준 적이 없었다.

"뭐가 주고받음이냐, 진짜."

이래서야 뭐가 동료냐.

짐짝이지.

축 처진 남태민의 어깨.

그런 남태민에게 히사기가 입을 열었다.

"처량한 척할 때는 아닌 것 같습니다."

"...뭐라고?"

"그 말씀을 잊으신 겁니까?"

히사기는 뺨의 상처를 지혈하며 말을 이었다.

"부족함을 깨달았다면 극복하면 되는 일이다."

"...!"

"저희에겐 극복할 시간도 급급하지 않았던가요?"

"대찬성."

레오니가 광전사답게 피를 뒤집어쓴 채로 끼어들었다.

그러고는 못마땅한 시선으로 남태민을 훑다가 말을 이었다.

"쯧, 내가 그 덩치였으면 벌써 700렙은 찍었다."

"뭔 소리야, 뜬금없이?"

"벌써부터 어깨 늘어트리고 있지 말란 말이야."

척─

레오니가 고개를 치켜든다.

그 시선을 따라 치켜든 곳엔 헬리콥터가, 카메라가 자신들을 비추고 있었다. 그제야 자각한 남태민이 서둘러 몸을 추슬렀다. 그리고 복화술로 말했다.

"너, 언제 철들었냐?"

"뭐래. 닥쳐."

"그나저나 갈수록 대단하게 느껴진다, 호열 씨는."

고작 자신만 하더라도.

쏟아지는 관심에 가끔씩 부담감이 들 정도였으니까.

호열에게 쏟아지는 부담감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새삼스럽게 깨달았기에 중얼거렸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제야 좀 인간적이시네."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그런 게 있어."

"아씨, 이거 또 혼자 똥폼 잡고."

"후우. 호열 씨 말하는 거다. 됐냐?"

"아...."

복잡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호열이 휩쓸고 간 마왕성을 둘러보며 침묵에 빠진 세 사람.

그들에게 조심스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저, 감동적인 대화를 방해해서 미안한데 말이야.

거대 연합의 분석관, 남철민의 목소리였다.

"어, 형. 듣고 있어. 무슨 일인데?"

-그게 호열 씨 이야기인데....

"호열 씨?! 그래서 호열 씨 지금 어디 계셔?!"

직접적인 도움을 드리긴 아직 부족하더라도.

고민을 나눌 수 있는 말동무 역할은 얼마든지 자처할 수 있었다.

클라우디에 어떤 사연이 얽혀있다고 한들.

얼마든지 경청하고 공감할 자신이 있다는 뜻.

물론, 그런 각오가 무색하게도.

-호열 씨, 그냥 마탑에 복귀하셨다는데?

"뭐, 뭐어어어?!"

-그, 언제나처럼 꼿꼿하게 학회 마무리 중이시래.

'...나, 괜히 오버한 건가?'

'하씨, 나 진짜 똥촉인가?'

'전부 주제넘은 착각이었단 말입니까?'

순간.

할 말은 잃은 세 사람.

남철민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인간적이시라는 말은 취소."

그저 호멘이었다....

*

역시, 백번 설명하는 것보다 한 번 보여주는 게 낫군.

점멸하는 메시지.

[퀘스트 : 학파 창시]

고고한 마법적 성취를 이룩한 그대여.

정기 학회에서 그대의 성취를 증명하고.

새로운 마법의 창시를 알려라.

─정기 학회에서 '반전 마법'을 발표하라. (성공)

나는 정기 학회를 성공적으로 끝마치고 집무실로 돌아왔다.

마탑으로는 언제 복귀한 거냐고?

놀랍게도 안드라스를 처치한 직후다.

그래, 강박적인 일 중독이라는 거지.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마탑과의 관계도가 상승했습니다.]

[마탑에서의 영향력이 상승했습니다.]

"그대들이라면 이해할 줄 알았다."

역시나, 호락호락하지 않구나 마탑.

마탑에서의 [권한] 기능 활성화는 아직인가보군.

탑주의 자리엔 관심이 없는 나였지만.

'이번 발표로 탑주 자격은 갖췄을 텐데.'

탑주라도 해도 마탑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없다는 뜻이겠지.

하긴 그 고양이도 마탑의 규율에서 자유롭진 않으니까.

말이 나온 김에 또 한 번 다짐하겠다.

훗날.

마탑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게 되더라도.

나는 탑주 자리는 절대 떠맡을 생각 없다고.

'진짜 벅차다. 이젠.'

여태까지는 그래도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런데 클라우디를 직면하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내가 다른 건 다 긍지로 참아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그 빌어먹을 이름이...!

세상에 떠벌려지는 현실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그런 의미에선 부디 그날이 오지 않기를 바란다.

'내 두 눈으로.'

클라우디의 증거를 확인하는 그날이 오지 않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그래, 그날이 온다면.

그랑펠의 입방정을 막을 명분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을 테니까.

'...그래도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왜, 지금쯤 아르카나 대륙에선 클라우디에 관한 소문이 떠돌고 있겠지.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이 단절된 상황에 감사하게 되는 건 또 처음이구나.

'현실로 넘어오는 소식 정도야.'

마왕, 안드라스를 처치한 것처럼.

필사적으로 차단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물론, 드래곤들이 클라우디 때문에 전원 집결했다는 게 신경이 쓰이기는 했다. 그들이 내게 호의적일지, 적대적일지 알 순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드래곤하고 충돌하는 건 좀 그렇지...?'

혹시라도 드래곤과 마주할 일이 생긴다면, 세계수 족보의 막내라는 걸 들먹여서라도 잘 설득해 보자.

내가 또 막내짓엔 익숙하거든.

나는 기왕 상태창을 띄운 김에 마왕성 클리어의 성과도 확인했다.

[레벨: 621]

[능력치]

근력 : 142 / 민첩 : 139 / 마력 : 517 /  행운 : 12 / 심미 : 上 / 집념 : 2

[보유 포인트 : 20]

그래도 보스 몬스터 레벨값은 하네.

내 앞에서도 똑바로 말하던 게 괜한 이유가 아닌 것 같았다.

600레벨의 벽을 고려하고도 20레벨이 단번에 상승했을 줄이야.

"한낱 수치에 기뻐할 필요는 없다."

네네, 어련하시겠습니까.

'너는 수치사하지 않은 것에나 기뻐하고 있어라, 그랑펠.'

근본적인 능력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한들.

레벨이 중요하지 않다는 건 또 아니니까.

뭣보다 700레벨은 찍어야지.

'이놈의 재킷.'

어깨에 걸쳐서 펄럭거리는 이거.

암만 그래도 팔은 끼워봐야 하지 않겠냐?

그래야 호화스러운 여명 세트의 효과도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그나저나.

『기어코 현실로 만들어 내고야 말았으니까.』

설정대로.

지껄인 말은 빠짐없이 주워 담는구나.

왜, 사이렌의 축복으로 천운이 따르던 그날.

나는 그렇게 지껄였었다.

-"나는 행운 따위 믿지 않는다."

상승한 행운 덕분에 영문도 모른 채.

위기를 넘겼으면서 뻔뻔하기 그지없다고.

그랑펠에게 태클을 걸던 나였다.

그런데.

클라우디의 이름으로.

그 난장판을 정리한 게 사실이라면....

-"행운도 운명도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것이다."

그건 더 이상 헛소리가 아니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는 말조심 좀 하는 게 좋겠군.

나는 녹차 티백이 잠긴 찻잔으로 손을 뻗었다.

달칵─

적잖은 정신적 충격을 입어서 그런가.

오늘따라 티타임의 소중함이 와닿는다.

그런데, 녹차를 한 모금 넘기기 무섭게.

이놈의 주둥이가 말을 내뱉는다.

"허나, 간과해서는 안 되는 일이겠지."

...아니, 간과하고 말고.

생각을 좀 하고 내뱉자니까?!

그것도 싫다면 숨이라도 돌리고 말을 하든가!

그러나 애원이 무색하게도 나는 지껄이고 말았으니.

"다들, 기다리고 있거라."

진짜로.

"내가 대륙으로 돌아가겠다."

내가 제 명에 못 산다...!

◈ 229화. 파멸의 주둥아리 (1)

깃털펜을 내려놓은 마르셀로는 한숨을 돌렸다.

"진심으로 쉽지 않습니다, 경."

이론마법학.

현존하는 모든 마법을 이론으로 정리할 수 있는 개념. 그러나 호열이 창시한 『반전마법』만큼은 이론의 틀에 쉽사리 잡혀 들지 않았다.

"어제부터 꼬박 붙잡고 있는데 말입니다."

마르셀로는 수석의 업무를 잠시 내려놓은 상태였다.

아무리 반전마법의 정리에 매료됐다고 하더라도.

수석의 업무를 외면하는 건 마르셀로에겐 있을 수 없는 일.

합당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역시 깨어나신 모습이 보기 좋군요."

그래, 마탑엔 탑주가 돌아왔으니까.

마르셀로는 자신의 빈자리를 탑주에게 맡겼다.

누군가는 하극상이 아니냐고 묻겠지.

정작, 탑주부터가 업무는 뒤로 미뤄둔 채.

농땡이를 피우고 있었으니까.

"나는 너를 이렇게 가르친 적이 없다, 꼬마 수석."

탑주는 고양이 몸을 축 늘어트린 채.

혓바닥으로 털을 핥았다.

그 행색이 게으르기 짝이 없었다.

"무엇보다 나는 부상자다. 아직도 폭주했던 날 입었던 내상이 치유되지 않았단 말이다. 으윽, 지금도 관절 곳곳이 쑤신다. 동물 학대를 삼가라, 수석 꼬마."

내뱉는 말과 다르게.

숨길 수 없는 꼬리의 살랑거림.

누워서 꼬리만 흔드는 탑주에겐 정말로 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쩔 수 없나.'

마르셀로는 결국, 최후의 수단을 썼다.

"호열 경의 말씀에 따르면."

"...?"

"모험가들의 세계에는 그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

바로 호열의 말을 인용하는 것.

바짝!

탑주의 꼬리가 곧 뻣뻣하게 굳더니 말했다.

"뭐라? 나를 굶기겠단 말이냐?"

"그럴 리가요. 제가 어찌 탑주님을 굶길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경께서 제게 기이의 발현을 지도해 주신 지금. 저 또한 기이의 사용에 능숙해졌다는 겁니다."

"그, 그건...!"

마르셀로가 꺼내 든 건 다름 아닌 스마트폰이었다.

『마탑』에서 [과학]의 산물을 사용하면 그것이 바로 기이다.

호열의 궤변에 전염된 마르셀로가 말을 이었다.

"알고 계십니까?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집무실 앞으로 물건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마력을 소모하지 않고 원하는 물건을 소환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게 사실이냐?"

탑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시와 함께하면서도 본 적이 없던 사용법이기 때문이었다.

뭐, 신기하긴 하다만.

"그게 밥을 굶는 것과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뾰족─

탑주가 귀를 세운 순간.

마르셀로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인기 고양이 간식."

"...간식?"

"혹시, 츄릅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드륵─

고위 변신마법일수록 변신한 대상의 성질을 온전히 띠는 법.

탑주는 본능에 따라서.

풍겨오는 냄새에 콧잔등을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엇이냐?"

그렇다.

마르셀로가 서랍에서 꺼내 든 건 길쭉한 막대.

기이, 로켓 배송으로 주문한 가다랑어 맛 츄릅이었다.

호다닥!

본능에 이끌린 탑주가 마르셀로에게 달려들었지만 어림도 없었다.

시한부의 저주 해금.

덕분에 쌩쌩한 체력을 되찾은 마르셀로가 한낱 고양이에게 츄릅을 빼앗길 리 있으랴.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주면 일하겠다."

"탑주께선 아직 일하지 않은 자이십니다."

"...냐아."

본능을 이길 순 없는 법.

꾸욱─

꾹─

꾸욱─

결국, 탑주는 양피지에 고양이 발바닥을 찍을 수밖에 없었으니.

마르셀로는 다시금 깃털펜을 쥐고선 반전마법을 정리해 나갔다.

'보다시피 마탑은 우려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경.'

짧디짧은.

일주일의 휴식.

부디, 원하시는 바를 찾으시길 기원하겠습니다.

.

.

.

유스라.

황금 궁전.

유스라의 국왕, 하쿠나는 구슬땀을 훔쳤다.

늦게 붙잡은 검이지만, 자신도 소질이 있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하루에 하나씩, 주고받는 합의 수가 늘어났으니까.

하쿠나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더 정진하면 제 몫을 해낼 수 있겠지.'

나 또한 은인께 도움이 되어야 한다.

하쿠나는 다짐하며 휴식하던 도중.

수련을 돕던 하르콘의 말에 놀라고 말았다.

"은인께서 마탑에서도 자리를 비우셨다고요?"

"그렇습니다."

"분명, 마탑의 업무로 분주하실 거라 생각했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호열은 유스라 왕국, 자신에게도 휴식의 뜻을 전해왔었으니까.

물론, 그 기간은 일주일로 극히 짧았다.

그러나 전례가 없던 일이라는 게 의미가 컸다.

하르콘은 검을 손질하며 생각했다.

'역시, 무언가가 있는 거겠군. 경.'

마왕성에서 느꼈던 호열의 성난 기백.

그건 하르콘에게도 낯설 정도였다.

그렇기에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경과 클라우디에 얽힌 무언가가.'

하르콘은 이곳에 떨어진 상황이 안타까웠다.

만약, 이곳이 아르카나 대륙이었다면.

제국의 수도, 안토니움으로 달려가 폐하께 전황의 서고.

그 출입의 허가를 받아냈을 터였다.

『전황의 서고』.

제국을 지탱해 온 지식의 성소(聖所).

그곳엔 가히 아르카나 대륙의 역사가 그대로 잠들어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당연하게도 클라우디의 의미가 무엇인지부터. 호열이 클라우디에 품은 의문이 있다면, 그 의문에 대한 해답까지 들을 수 있었을거늘.

탄식을 삼키던 때 하쿠나가 말을 이었다.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건 역시나 괴로운 일이군요."

"저 또한 그리 생각합니다."

"강해져야겠지요."

하쿠나는 주먹을 쥐었다.

이제야 과거를 극복하고 검을 바로 쥐기 시작한 자신이다.

당장 악마들과 맞서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원정에 함께할 수 있었다면.'

은인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지.

나 또한 알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안타까워할 시간조차 아껴야 했다.

하쿠나가 검을 쥐었다.

"하르콘, 계속해서 단련을 부탁하겠습니다."

"의욕이 넘치시는군요."

"언제까지 신세만 지고 있을 순 없지 않습니까?"

"이런, 제가 할 말을 하시는군요."

챙─

같은 뜻을 품은 검이 맞부딪혔다.

*

마탑도 모자라 유스라 왕국에도 휴직계 제출.

뜬금없이 휴직계를 쓴 이유가 있냐고?

뭐긴 뭐야, 업무보다 중요한 일이 생겨서지.

그랬다.

스칼이 나를 찾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용기사 클래스 퀘스트가 반짝거린다면서!

드래곤과 클라우디가 관련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된 지금.

스칼의 퀘스트는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었다.

벤쉬의 출탑 신청서에 불합격을 휘갈기는 것도, 유스라 왕국의 면면을 살피는 것도 물론 중요한 일이지만. 이건 긴급상황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나저나....'

걷혀가는 포탈의 빛 무리.

나는 드러나는 스칼의 저택을 보고 기절할 뻔했다.

첫 만남 때부터 과한 귀족 말투를 사용한다 싶었는데....

어울리지 않게 취향이 상당히 고상한 거 아니야?

'큰 건 둘째 치고 지나치게 고풍스러운데?'

마당에서부터 웬 조각상이 이렇게 많아?

그것도 보통 조각상이 아니었다.

그랑펠의 입에서 독설이 튀어나오지 않은 것만 봐도 그렇다.

"훌륭하군."

그걸 넘어서 칭찬이 나왔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조각상 하나하나가 전부 인류 역사에 남을 걸작이라는 뜻.

랭킹 1위로 벌어들인 돈을 전부 이런 데에다가 쓴 건가.

속물적인 생각에 빠져있기도 잠시, 소리가 들려왔다.

다그닥─

웬 말발굽 소린가 싶었는데, 스칼이었다.

"제가 가면 되는 일인데 송구하옵니다, 호열 경!"

저저, 사극보다 더한 말투.

역시나, 플레이어에게 경 소리를 듣는 건 쉽게 적응이 되지 않는다.

허나, 이 철면피에 감정 변화가 나타날 리가 있나.

나는 태연하게 답했다.

"우려할 것 없다. 나쁘지 않은 감상이었다."

다짜고짜 조각상을 평가하기도 잠깐.

스칼이 곧장 말에서 내려 나를 안내했다.

저택의 안은 더욱 웅장했다.

무엇보다 초상화들이 잔뜩 걸려있는 게.

진짜 귀족의 저택이 따로 없었으니까.

'당연히 낯설고 불편하게 느껴야 하는데....'

이놈의 격식이 참 대단하긴 하군.

이런 대저택을 편안한 것도 모자라서.

익숙하게 느낀다는 것부터가 여러 생각을 들게 한다, 진짜.

어쨌거나 잡생각은 거기까지였다.

말했다시피 일주일짜리 휴직계를 내면서.

심지어는 스칼의 저택을 방문하면서까지.

달려온 이유는 따로 있었으니까.

"호열 경께서는 믿지 않으시겠다 말씀하셨는데, 송구합니다."

"그 점에 관해선 사과할 것 없네."

"이해해 주셔서 망극합니다. 그럼 용건을 전하겠습니다."

...나야말로.

그 말투에 망극해서 혼절할 것 같았거늘.

스칼은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노룡이 주도했다던 전룡소집이 끝났습니다."

아르카나 대륙의 시간은 현실보다 4배가량 빠르다.

아무리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고 한들.

지금쯤이면 대충 이야기가 끝났겠거니 싶었다.

그런데....

"그게... 우선, 퀘스트 목표부터 공유하겠습니다!"

나는 갱신된 퀘스트 목표를 보고 흠칫했다.

드래곤.

그 양반들 대체 모여서 무슨 짓을 했길래....

[클래스 퀘스트 : 전룡소집(全龍召集)]

노룡이 외쳤다.

아르카나 대륙에 '위대한 가문'이 돌아왔노라고.

모든 드래곤은 사건의 진위를 파악하길 원한다.

─대륙으로 집결하는 드래곤을 목격하라. (실패)

─죽어가는 노룡, 유낙서스와 조우하라. (진행 중)

'갑자기 유낙서스가 죽어가고 있다는 건데...?'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만큼은 장담할 수 있었다.

유낙서스는 하이엘에게 적대적이지 않았다.

자신의 콧잔등에 올라탄 하이엘에게 화를 내기는커녕.

지켜보던 나에게까지 텔레파시를 전해왔었으니까.

-"걱정할 것 없다. 모든 건 어머니의 뜻이니까. 설령 내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슬퍼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여명이여."

형보다 나은 아우가 없다고.

유낙서스, 그쪽도 뱉은 말을 지키겠다는 거야?

그게 아니라면.

전룡소집에서 예기치 못한 일이라도 생긴 거야?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대는 기어코 뜻을 굽히지 않았군."

나도 뱉은 말은 지키다 못해서.

기어코 실현하는 주의라 말이야.

유낙서스가 전해 온 텔레파시를 들었을 때.

나는 그렇게 읊조렸었다.

-"세계수의 뜻이라니. 착각이 지나치군."

-"자식의 죽음을 바라는 부모는 없는 법이다."

-"대화가 필요하겠군, 유낙서스."

그러니까 내가 할 일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나는 스칼을 바라봤다.

스칼은 안절부절못하고 덜덜 다리를 떨고 있다.

"안 되는데. 내가 탈 드래곤이 한 마리 줄어드는 건데...."

...걱정의 방향성이 잘못된 것 같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나는 스칼에게 선언했다.

[악룡(惡龍) 사냥꾼] 퀘스트부터 시작해서.

어째 내가 퀘스트를 가로채는 꼴이 되는 것 같은데 말이야.

"스칼, 그대에게는 양해를 구하겠다."

"경께서 제게 양해라니 무슨 말씀이신지...?"

"나는 유낙서스와 나눠야 할 이야기가 있다."

"유낙서스.... 혹시 그게 노룡의 이름입니까?"

"그렇다."

"!"

놀랐구나?

내가 퀘스트에 명시된 노룡의 이름을 알고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야. 나도 사실 [마안의 망원경]으로 대륙을 엿보다가 알게 된 것뿐인데....

과대평가는 굳이 정정하지 않는 그랑펠이었으니.

"역시, 아득하게 앞서나가고 계셨군요."

스칼이 한껏 울적해진 목소리로 말해도 그저 듣고 있을 수밖에.

하지만 내가 무어라 위로할 새도 없이 스칼은 입을 열었다.

"사실 각오는 하고 있었습니다."

...눈물이 글썽글썽하는데, 각오한 거 맞아?

"역시, 긍지에 관련된 일이시겠지요. 그렇다면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용기사 이름값을 하지 못하게 된다면 저는 굉장히 슬프겠지만...."

뭘 그렇게 걱정 하나 했더니만.

드래곤에 탑승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거였어?

사고방식 한번 직선적이다, 스칼.

"사실 드래곤과 마주하긴 한참 이르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억지를 부려서 호열 경을 따라나선다고 하더라도 방해만 되겠죠. 제 클래스 퀘스트가 갑작스럽게 진행된 것도 호열 경 덕분이었으니 말입니다."

스칼이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부족한 저를 대신해서 유낙서스와 조우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호열 경이라면 믿고 드래곤을 맡길 수.... 있습니다."

늘어진 말꼬리에서 고뇌가 전해져 오는군.

그럼에도 이해해 줘서 고맙다, 스칼.

고마우니까 질문에 답변 정도는 해줄 수 있겠지.

"그런데, 유낙서스를 비롯한 드래곤들은 아르카나 대륙에 있는 게 아니었습니까? 제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는 아르카나 대륙에 접근할 방법은 없는데...."

고마워서라도 시원하게 답해주고 싶었는데.

사실 나도 아직 잘 모르거든.

하지만 내뱉은 말은 반드시 실현하고야 마는.

우리 그랑펠 님께서 선언하지 않으셨던가?

아르카나 대륙으로 돌아가겠다고.

"그대가 우려할 것은 없다."

누구는 걱정이 앞서는데, 말은 참 잘한다.

'나로서는 가도 문제, 안 가도 문제니까.'

가자니 클라우디 가문이 걸리고.

안 가자니 유낙서스가 걸리고.

결국, 결과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겠지.

'방법을 찾아내면 가는 걸로.'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하는 방법.

그 방법을 탐색하는 것 또한 휴직계를 제출한 이유 중 하나였으니.

나는 이제부터 전력을 다해 수단과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안드라스가 드롭한 마왕의 전리품을 정화하는 것부터 시작할까?

'[만.통.지] 같은 효과가 또 있을지 누가 알아?'

악마의 아이템을 정화하기 위해선.

악마가 필요한 법.

간만에 악마 사냥꾼 본업에 집중해야겠군.

"이런, 마음이 급해 격식을 간과했습니다. 어떻게 홍차라도...?"

"거절하지."

"헉."

오해는 하지 마라, 스칼.

특별한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다.

단순하게 홍차가 싫어서다.

'녹차라면 넙죽 받아 마셨을걸.'

내가 스칼을 뒤로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던 순간이었다.

위잉─

별안간 진동이 느껴졌다.

AAU 대한민국 지부장, 박민재의 메시지.

어떻게 보면 직장 동료의 문자려나.

그러고 생각해 보니까 AAU엔 휴직계를 제출하지 않았군.

'하도 젊어진 게 많아야지.'

규율에는 누구보다 엄격한 그랑펠이 아니던가?

아무리 바쁘다고 하더라도.

유스라 지부 총책임자의 역할은 또 수행해야겠지.

문자를 확인한 나는 우두커니 멈춰서고 말았다.

...진심으로 파멸의 주둥아리가 따로 없구나.

그랑펠 가라사대.

아르카나 대륙에 돌아가겠다 말하니.

-레이먼 션이 이호열 총책임자님께 메시지를...!

...행방불명되었던 레이먼 션이 돌아왔도다.

◈ 230화. 파멸의 주둥아리 (2)

이상한 일이었다.

"...뭐야?"

코스모 재직 시절의 업무용 계정이었다.

박민재조차도 알림이 떠오르기 전까지는 까맣게 잊고 있었을 정도로. 코스모가 AAU로 개편된 현재는 흔한 스팸 메일조차도 도착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답장? 누가?"

그러나 그 발신인을 확인하는 순간.

"!"

박민재는 떠올렸다.

과거의 기억을.

이 계정이었다.

바로 이 계정으로 CEO였던 레이먼 션에게 아르카나와 코스모의 운영 구조에 관한 지적을 잔뜩 적어서 전송했을 터. 이건 그 메일에 관한 답장이었다.

저절로 이가 갈렸다.

"이런 미친 새끼가."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

레이먼 션.

그가 행방불명된 이후, 대격변이 시작되었다.

대격변과 균열에 휘말려 사망한 이들을 떠올리면 아직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거기엔 개인적인 감정도 포함이었다.

"우리가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

지금은 지난 일이 되었다고 해도.

대격변 초창기.

코스모의 직원들은 레이먼 션과 공범으로 취급되어 온갖 조사를 받았었다.

오해라고 하더라도 그때의 기분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죄책감은, 아직도 덜어내지 못했단 말이다.

그래서 박민재는 이를 악물었다.

"당신, 실수한 거야."

현재, 레이먼 션은 전 세계 모든 국가에 수배령이 내려진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범이었다.

플레이어들의 초인적인 능력을 생각해 보면, 레이먼 션 그 또한 평범한 인물은 아니겠지.

하지만 과학을 무시하지 마라.

답장을 보내온 신호를 역추적하면 발신 위치를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일 터. 대격변 이후 처음으로 레이먼 션의 행적을 뒤쫓을 기회였다.

그러나.

"...!"

메일의 내용을 확인한 박민재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목적은 자신이 아니었으니까.

박민재가 중얼거렸다.

"예나 지금이나 빌어먹게 능글맞으시네."

그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간단했다.

──────

나는 이호열 플레이어와 만나고 싶습니다.

──────

정말로 능구렁이 같다.

"제길."

박민재는 고뇌했다.

만약, 자신이 레이먼 션에게 휘둘리지 않고 곧장 AAU에 이 사실을 보고한다면? 전 세계는 곧바로 레이먼 션의 위치를 추적하려고 들겠지.

'...그걸 레이먼이 보고만 있을까?'

지금만 하더라도 레이먼 션의 행적을 좇으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성과가 없었을 뿐이었다.

그런 레이먼에게 다시금 모습을 감추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일지도 모르는 일.

"하하. 빌어 처먹을 새끼."

박민재는 웃음을 뱉었다.

괜히 나한테 메시지를 보낸 게 아니구만?

이 자식은.

"내 반골 기질을 건드리고 있어."

상대가 자신의 보스라고 하더라도.

설령 AAU의 규율이라고 하더라도.

스스로 옳다고 생각한 쪽으로 들이받는 성질머리를.

박민재는 곧장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그래, 이번에도 들이받아 주지."

곧장 전화를 걸려다가....

"역시, 갑작스러운 통화는 격식에 어긋나겠지?"

중얼거리곤 허겁지겁 문자를 작성했다.

당연하게도.

수신인은 AAU가 아닌 호열이었다.

"후우─"

전송완료.

긴장감이 풀린 박민재가 한숨을 뱉던 순간이었다.

띠링!

곧바로 호열에게서 답장이 도착했다.

"버, 벌써?"

호열의 일과에 대해 얼추 알고 있는 박민재였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숨돌릴 시간도 부족하실 텐데....

이 정도면 칼답이 아닌가?

화들짝 놀라 답장을 확인하는 박민재.

"...엥?"

이내, 그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도착한 답장은 고작 네 글자였지만.

-짐작했다.

"지, 짐작하셨다고요? 이걸 어떻게?"

더없이 충격적이었으니까.

*

확실히 마음의 준비를 하니까 충격이 덜하다.

미리미리 입방정을 떨어둔 덕분에.

실로 충격적인 소식에도 머리는 팽팽하게 돌아갔다.

"레이먼 션."

아마도 대격변의 원흉.

지구상에 레이먼 션을 달가워할 이가 누가 있겠느냐만.

나는 레이먼 션, 그쪽을 증오하고 있거든!

왜냐니, 당신만 아니었어도 내가....

'흑역사를, 수치사를 걱정할 일은 없을 거 아냐!'

물론, 그랑펠에게도 마찬가지겠지.

"말했다시피."

왜, 검성 셰그윈과의 결투가 끝난 뒤.

나와 셰그윈의 콜로세움 결투가 아르카나 공식 홈페이지에 동영상으로 박제된 순간. 말로 설명하기도 복잡한 사정이 얽힌 결투를, 단순한 구경거리로 만든 그 순간부터.

"그대의 행보에선 긍지가 보이지 않는군."

그쪽은 그랑펠에게 미운털이 제대로 박힌 상태였으니까.

또 그렇게 생각하니까.

내가 지껄였던 말이 떠오르는군.

-"언젠가 우리가 만나게 될 날을 기대하겠다."

분명, 그렇게 말했었지.

'어쨌든, 여러모로 이번 만남이 기대되는데.'

뱉은 말은 실현하고야 마는 그랑펠이라면, 만남을 실현하는 것도 모자라서. 아르카나 대륙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낼 수도 있을지 모를 테니까.

"부디 나를 실망하게 하지 말도록."

서늘하게 읊조리기도 잠깐.

나는 포탈을 발현했다.

좌표는 AAU 대한민국 지부다.

레이먼 션의 소식을 전해온 게 대한민국 지부장, 박민재였으니까.

그와 먼저 구체적인 대화를 나눠볼 필요가 있었다.

고오오─

걷혀가는 포탈의 빛 무리 속에서.

박민재의 뒷모습이 보였다.

누군가를 붙잡고 한창 이야기 중인 것 같은데.

대화 중 한 단어가 유달리 선명히 내 귀에 박혀왔다.

"...그래서 '꼰대'냐고 아니냐고."

잠깐만, 꼰대...?

혹시 내 이야기 하고 있던 건가?

도둑이 제 발 저리는 뭐, 그런 상황인가?

그러나 그랑펠은 도둑보다는.

제 말 하면 나타나는 호랑이에 가까웠으니.

나는 박민재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또각─

"어, 어어어어?!"

박민재와 대화를 나누던 사내가 눈만 깜빡인다.

"...갑자기 왜 그래애애애액?!"

뒤늦게 뒤를 돌아본 박민재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정말로 호랑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이로군.

아무래도 진짜 내 뒷담화를 하던 게 맞는 것 같은데.

그러나 이해한다.

'꼰대라, 사실 그렇게 보이고도 남겠지.'

그동안의 전적을 생각해 봐라.

-"격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군."

-"그러므로."

-"질문은 받지 않겠다."

과거, 기자들은 물론이요.

-"순서가 잘못되었군."

아르카나의 랭커들에게도 격식을 주입하던 나였다. 뭐, 그렇다고 해서 그랑펠이 뒷담화를 했다고 누군가를 추궁할 정도로 치졸한 성격은 아니다.

...다만, 여러 의미로 상상을 초월하는 성격의 소유자라는 게 문제겠지. 그렇다. 나는 이번에도 파멸의 주둥아리를 놀리고 말았으니.

다짜고짜 냉랭하게 말했다는 것이다.

"서류는 육하원칙에 따라 작성하길 바란다."

"...네, 네? 어떤 서류를?"

"...박 지부장님이 총책임자님께 서류를?"

박민재는 되물었고, 사내는 눈알을 굴렸다.

유스라 총책임자인 내가.

AAU 대한민국 지부의 비선 실세라도 되는 것처럼 오해하는 표정이군. 그러나 서류란, 방금 주고받은 문자 메시지를 뜻하는 그랑펠의 고상한 표현일뿐.

'이젠 하다 하다가.'

문자에서도 격식을 따지는구나, 그랑펠.

그러나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융통성을 발휘하는 것도 필요한 법이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상황이니 참작하겠다."

박민재가 넙죽 답했다.

"감사합니다! 다음부터 시정하겠습니다!"

그랑펠의 똥고집이니 시정할 필요 없습니다, 박 지부장님.

그것보다 다음부터 시정하겠다니.

다음이 없기를 바라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럼, 육하원칙에 따라 경위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부장실.

나는 그곳에서 박민재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듣다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째, 내 주변에는....

'죄다 심상치 않은 사람들밖에 없는 거 같냐?'

CEO를 들이받았어?

간이 얼마나 큰 거야!

사회인 시절, 이호열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아니지, 상상은 해봤구나.'

왜, 플레이어로 각성한 직후.

이대로 출근하면 우리 부장님 얼굴에 커피를 끼얹는 건 아닐까, 상상하다가 일찌감치 사직서를 제출했던 나였으니까. 그런 공감대가 있어서인가.

"그대의 긍지를 내가 이해했다."

소시민인 나만 빼고 두 사람 말이 잘 통하는군.

"감사합니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레이먼 션을 못마땅해하는 그랑펠이다.

그런 레이먼 션이 본색을 드러내기도 전에 들이받았다니.

너그러운 말이 나오는 것도 이해가 되네.

'그나저나.'

유스라 지부 총책임자이자 AAU의 일원.

무엇을 떠맡으면 설령 가라앉더라도 대충 짊어지지 않는 나였다.

덕분에 AAU의 규율은 하나도 빠짐없이 숙지하고 있다는 것.

'규율을 어기면서까지 내게 먼저 알린 거야.'

박민재 또한 그에 관한 설명을 잊지 않았다.

"레이먼, 그가 이호열 총책임자님과 만나고 싶어하는 데엔 분명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짐작하셨다는 총책임자님의 문자를 받고 실수하지 않았구나, 안도했습니다."

...사실 그 짐작이 이 짐작이 아니기는 한데.

어쨌거나 맞부딪혀서라도 알아낼 거.

굳이 정정할 필요는 없겠지.

"끝으로 레이먼은 사전에 만남을 약속하고 싶다고 덧붙였습니다."

약속을 잡고 만나겠다라.

레이먼, 그쪽도 내 소문을 들었나 보구만.

하긴 모르면 간첩이지.

특히 백이설.

아니, 서큐버스를 십고초려하게 만들었을 때는.

정말 갖가지 기사가 끊이지 않았었으니까.

'오죽했으면 큰누나가 전화를 다 했겠냐고.'

그런 의미에서 나름대로 격식을 갖추려고 노력했구나, 레이먼 션.

나는 현재 마탑과 유스라 왕국에 휴직계를 제출한 상황이 아니던가.

약속을 잡기에 시간적 여유는 충분했다.

'평상시 같았으면 그냥 잡았겠지.'

시간도 심지어는 장소도 문제가 되진 않는다.

포탈을 발현하는 내게 거리 같은 건 문제가 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약속 상대가 레이먼 션이란 거겠지.

나는 입을 열었다.

"그대의 배려는 이해했다."

"배려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허나, 지금부터는 규율을 준수하기를 바란다."

"...네, 규율이라시면?"

레이먼 션,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야.

내가 순순히 당신 요청에 따라 움직일 것 같냐.

누누이 말하지만.

나와 그랑펠은 무엇 하나도 포기하지 않는다.

긍지라곤 찾아볼 수 없는.

당신과의 약속을 위해서.

정해진 규율과 타협하는 일 따윈 없다는 것이다.

나는 말을 이었다.

"이 시간부로 AAU의 규율에 따라서."

"...듣고 있습니다."

"레이먼 션의 위치를 특정하도록."

"!"

박민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건 저도 고려를 해봤습니다만.... 혹시라도 레이먼 션이 도주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위치를 특정한다고 하더라도 레이먼 또한 역추적을 파악하는 건 시간문제라.... 현실적으로 레이먼을 붙잡기엔 무리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가?"

"...!"

박민재의 눈이 더욱 휘둥그레졌다.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은 표정.

그런 박민재가 간신히 헛웃음을 뱉었다.

"바보 같았습니다. 뭘 고민하고 있던 건지...!"

그래, 이제야 생각이 닿은 모양이다.

또각─

존재감 하나만큼은 어떤 소리보다 큰 나의 구두 소리다.

그런 구두 소리를 멀리서부터가 아닌.

등 바로 뒤에서 들렸던 이유가 뭐겠어?

비현실적인 등장.

포탈 발현.

『마법』때문이라는 거지.

꾸벅─

별안간 박민재가 내게 고개를 숙였다.

"절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미 속으로 충분히 잘난 체를 하고 있었거늘.

대놓고 이런 인사를 받으니 굉장히 민망하구만.

그러나 양심 없게도 내색하지 않는다.

"말씀대로 규율에 따라 행동하겠습니다."

그보다 어째 신이 난 기색이 역력하잖아?

고민이 해결된 탓이려나.

지부장으로서 규율을 어겼다고 여러모로 고뇌했었을 테니까.

'역시, 직장은 관두길 잘했다.'

사회인의 무게란 막중하다.

연민을 느끼던 도중.

작디작은 혼잣말이 들려왔다.

"드디어 제대로 한 방 먹여줄 수 있겠어."

...아니, 그냥 레이먼 션한테 갚아주는 게 신난 거였구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끼리끼리라 그런가.

어떻게 이런 인물들만 주변에 모여드는지 모르겠다, 정말.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고 있다.

'레이먼 션, 너는 잘못 건드렸어.'

인류를, 아르카나 대륙을, 내 과거를.

건드린 대가는 더없이 막중하리라는 것.

어떻게 숨을 자신이 있어서 연락해 온 것 같은데.

"발신지, 포착했습니다!"

나를 우습게 보면 곤란하지.

메시지의 발신지를 추적하는 [과학].

그리고 그 발신지를 좌표로 발현하는 『마법, 포탈』.

고오오─

[『기이』]에서 도망칠 생각은 관두란 말이다.

흩날리는 빛 무리.

밝아지는 시야 속에서 나는 입을 열었다.

"그 어떠한 형태의 환대도 거절하겠다."

설령 개당 300원짜리 티백 녹차를 대접한다고 하더라도.

단호하게 거절할 기세로.

나는 포탈 너머로 나아갔다.

아, '거기'였구나.

◈ 231화. 거듭 말하게 하지 마라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고.

그동안 레이먼 션의 행적을 캐낼 수 있는 단서는 많았다.

일단, 레이먼 션은 완전히 인류에게서 모습을 감춘 게 아니다.

대격변 이후에도 변함없이 운영되는 아르카나 공식 홈페이지부터.

플레이어들에게 지급되는 천문학적인 보상금.

결정적으로 박민재에게 답장을 보내온 것까지.

커뮤니티엔 그런 말이 나돌기도 했다.

-이쯤 되면 걍 짜고 치는 거 아님??

-iq 추적하면 다 나오는 거 아닌가 ㄹㅇ

-iq가 아니라 ip겠지ㅋㅋㅋ 음모론자 수준ㅋㅋ

거기에 혹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레이먼 션의 위치를 특정하지 못하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펼쳐진 광경을 보는 순간 납득하고 말았다.

"그런 누추한 곳에 웅크리고 있었군."

오직 플레이어의 눈에만 보이는.

현실도 아르카나 대륙도 아닌 기이의 공간.

균열이 보였으니까.

균열 속에 숨어서 여태껏 꼬리 잡히지 않았던 거였어.

왜, 인류의 기술력으로도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균열을 포착할 순 없다. 아직도 업데이트 내역에 의존하는 플레이어들만 봐도 알 수 있잖아?

게다가 레이먼 션이 자신이 몸을 숨긴 균열 정보를 홈페이지에 업로드할 리도 없었다.

수많은 단서에도 그를 찾지 못했던 게 단번에 이해되는 풍경이군.

'근데, 그걸로도 모자라서.'

땅밑으로, 지하로 숨은 거야?

여러모로 치밀하구만.

바닥에 납작 붙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균열은 또 처음이다.

물론, 고작 균열을 보기 위해서.

나의 꼿꼿한 고개가 굽혀지는 일은 없다.

정보야 메시지로 눈앞에 떠오를 테니까.

과연, 균열을 향해 다가가기 무섭게 눈앞이 점멸했다.

[던전 : CODE-009]

던전 균열인가.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지금 내가 밟고 있는 땅 아래에 어떤 복잡한 공간이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다. 던전 균열이야 조건만 충족하면 출현할 수 있다. 게다가 처음도 아니니까 놀랄 이유는 없겠지.

내가 흠칫한 건 균열의 이름 때문이었다.

'코드?'

확실히 이름부터 평범한 균열과 달랐다. 새파란 뉴비 플레이어가 보더라도 단번에 심상치 않은 낌새를 알아채고 뒷걸음질을 칠 정도로 말이야. 거기서 끝이 아니다.

이어서 떠오르는 균열의 정보.

[적정 레벨 : 조건 충족 시 진입 가능]

[붕괴도 : 존재하지 않음]

이름만큼이나 범상치 않다고 소리치고 있군.

그나마 [적정 레벨]은 이해할 수 있었다.

특정 조건을 갖춰야지만 진입할 수 있는 지역이야.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엔 꽤 흔했으니까.

그런데.

'붕괴도, 이거 뭔데.'

붕괴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상식 중의 상식이다.

균열의 붕괴도가 100퍼센트에 가까워질수록 그 내부는 불안정해진다. 100퍼센트에 도달하면 그대로 붕괴, 내부의 풍경이 현실이 된다는 건.

'균열의 위치를 특정하는 것도 거기서 시작해.'

현실에 생성되는 모든 균열을 포착할 순 없다고 하더라도.

붕괴가 임박한 균열이 내뿜는 존재감은 상당하니까.

대격변 초창기 이후부터 지금까지.

큰 피해 없이 붕괴 직전의 균열을 공략할 수 있었던 것 또한.

그런 특성으로 균열의 위치를 알아낸 덕분이었는데....

"명백한 절차 위반이군."

여태껏 들키지 않은 이유가 또 있었구나?

붕괴도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동안 어디에도 포착되지 않았던 거야.

뭐, 이딴 게 다 있느냐 싶으면서도 이해가 된다.

'다른 누구도 아닌 레이먼 션이니까.'

솔직하게 레이먼 션, 그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는 알지 못하는 나였다. 다만, 평범한 플레이어로서는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전지전능하리란 건 분명하겠지.

이딴 현실에 균열을 생성한 것만 봐도 짐작이 된다.

'나도 참 겁대가리 없어졌다.'

이런 무지막지한 레이먼 션의 아지트를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꼴이라니! 하지만 뭐, 이런 적이 한두 번인가? 정말로 아무것도 없이 설치던 과거에 비하면 지금 처지는 그나마 낫겠지.

"이 절차 위반 또한 그대의 처분에 반영하겠다."

...이쯤 되면 나도 슬슬 걱정된다.

레이먼 션이 연락해 온 목적은 나와 대화를 하고 싶어서였거늘.

그랑펠에게 레이먼 션과 말을 섞을 생각이 있을까.

철칙 하나, 사냥감과는 대화를 하지 않는다.

혹시라도 입을 다물어 버리면 어떻게 해야 하나, 벌써부터 걱정이 앞섰다. 아무리 겁을 상실했다고 하더라도, 내 목숨 귀한 건 여전히 잘 알고 있거든.

'진짜로 쉽게 가는 법이 없구나.'

속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가 없다면.

부디 가라앉지 않기를 바라야겠구나.

하여튼, 내 팔자가 이렇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부터라도 잘 생각하길 바란다.

레이먼 션.

[조건을 확인 중입니다.]

당신 말이야.

벤쉬 윌리엄 선임보다 감점을 많이 당했다고.

그게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 줄 알아?!

*

벌컥!

지부장실 문이 열리자 두 사내가 후다닥 물러났다.

슥─

박민재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는 입을 열었다.

"윤수겸, 성현준. 너희 어디서부터 들었냐?"

"...그 엿들으려고 한 게 아니라."

"알아, 나도. 지부장실 방음 안 되는 거. 들어와."

두 사내가 쭈뼛거리며 지부장실로 들어섰다.

박민재가 너스레를 떨었다.

"내가 이래서 지부장실에 안 붙어있는 거잖냐? 혹시라도 코 고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갈까 봐. 아무리 투명성이 중요하다고 해도 유리창 외벽이 웬 말이냐, 웬 말이."

사회생활 첫걸음.

하늘 같은 상사의 말에는 일단, 맞장구치기.

하지만 지금은 걷는 법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머릿속에 궁금증이 가득했다.

윤수겸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지부장님, 사실입니까? 레이먼 션이 먼저 연락을 해왔다는 거요! 전 세계 모든 지부에 벌써 소문이 쫙 퍼졌습니다. 인공위성 사진도 떴고요."

"그래? 사진에 뭐가 찍혔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사막이었어요."

성현준이 태블릿을 내밀어 사진을 띄웠다.

정말로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 사막이었다.

박민재가 침묵하자 성현준이 입맛을 다셨다.

"...저희 낚인 걸까요?"

박민재는 태블릿에서 눈을 돌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는 낚였을지언정 총책임자님은 아니시지."

"...총책임자님이요?"

"너희 둘, 입단속 잘할 수 있겠냐?"

"네?"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는 걸까.

윤수겸과 성현준은 눈빛을 교환했다.

그러고는 대꾸했다.

"입단속 안 하면 그게 미친놈이죠, 지부장님."

다른 이야기도 아니고 호열에 관한 이야기였다.

만약, 입단속을 하지 못한 대가로.

호열의 냉랭한 시선과 마주하게 될 상상을 하면....

성현준이 넙죽 말을 이어받았다.

"진짜 입을 꿰매서라도 함구하겠습니다."

그제야 박민재는 본론을 꺼냈다.

"사실 맘 같아서는 누구한테도, 너희한테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데.... 당부를 하셨거든. 규율에 충실하라고. 그러니까 너희한테 털어놔서 규율을 지키겠단 거야. 너흰 내 공범이 되는 거고."

호열과 레이먼 션의 만남.

그 만남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

박민재는 감히 예측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AAU에 그 사실을 떠벌리지 않았다.

덕분에 세상은 레이먼 션의 목적을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이 순간, 호열이 레이먼 션을 찾아 나섰다는 소식까지는 알지 못했다.

박민재가 입꼬리를 올렸다.

중년, 나이를 적잖게 먹어서 그런가.

세상이 돌아갈 꼴이 얼추 보인 덕분이었다.

'또 멋대로 기대하겠지.'

자기네들은 하는 것도 없으면서 말이야.

세상이 호열을 멋대로 평가하는.

그런 꼴은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이것도 반골이라면 반골이겠지.

박민재가 말을 이었다.

"사실 이호열 유스라 총책임자님께선 이미 레이먼, 그 자식을 만나러 가셨다. 어쩌면 지금쯤 레이먼과 대화를 나누고 계실지도 모르겠지."

"...네?!"

"그, 그런 말씀은 안 하셨잖아요?"

"너희라면 그걸 세상에 떠벌리고 싶겠냐?"

"그건...."

성현준이 말꼬리를 흐렸다.

마찬가지로 앞날이 선명하게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세상 모두가 호열에게 의존하는 모습이.

윤수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겉과 속이 다른 그 꼬라지, 신물이 나죠."

"오, 답지 않게 말이 좀 세다. 윤수겸?"

"잘하셨습니다, 지부장님."

윤수겸은 알고 있었다.

사회는 꿈과 희망이 넘쳐나는 곳이 아니라는 걸.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호열을 물어뜯는, 배은망덕한 세력이 아직까지 존재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너희는 뭐 때문인 것 같냐?"

레이먼 션은 무엇 때문에 호열을 찾은 것일까.

고작 AAU 사원이 답하기엔 너무 어려운 질문이었다.

다만, 한 가지는 장담할 수 있었다.

"이야기만 오가진 않을 겁니다."

"저도 선배님 말씀에 동감입니다."

"그래? 왜?"

"지부장님도 짐작하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뭐, 나도 사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박민재의 심장은 여전히 거칠게 뛰었다.

가슴속에서 긍지가 꿈틀대고 있었다.

레이먼 션, 그 자식을 가만둘 수 없는.

아르카나 대륙 전기 개발자로서의 긍지가.

하물며, 호열은 어떻겠는가?

성현준이 작게 말했다.

"어쩌면.... 악마보다 더한 존재일 수도 있으니까요."

호열과 레이먼 션.

둘 사이엔 분명 충돌이 발생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세 사내는 손에 땀을 쥐었다.

"쉽게 예측할 수 없네요."

"호랑이 굴로 들어가신 셈이니까."

"그런데, 애초에 승산이 있긴 한 걸까요?"

호열이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상대는 레이먼 션이었다.

대격변에 얽힌 모든 비밀을 알고 있을.

어찌 보면 아르카나의 창조주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성현준의 말에 두 사람은 침묵했다.

혹시, 나 초를 친 건가?

뒤늦게 자각한 성현준이 황급히 말했다.

"저기, 반박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아니야. 훌륭하다, 현준아. 반박할 여지가 없어."

"그러게. 정확히 맞는 말이야."

"으으, 제발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레이먼 션, 그와 마주한 경험이 있어서일까.

박민재는 레이먼의 행동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런데 레이먼, 그 새끼 보통 능구렁이가 아니거든. 충돌하기 이전에 어떤 수를 써서라도 총책임자님과 대화를 나눌 거야. 왜, 나도 당해봤거든."

"당해보셨다는 건 혹시 코스모 때 그거요?"

"맞아."

박민재는 레이먼 션을 들이받았던 과거를 떠올렸다.

시종일관 올라간 입꼬리.

속내를 내비치지 않는 표정.

명쾌한 답변 대신 돌아오는 건 수수께끼.

다시 떠올려도 불쾌한 기억이었다.

겉과 속이 다른 이들이 넘쳐나는 사회라지만.

레이먼 션만큼 겉과 속이 다른 존재는 없었으니까.

"외부에선 최고의 CEO다, 뭐다. 칭찬만 가득하던 거 기억해? 그런데 사내에서는 어땠는데? 아르카나 대륙 전기 운영에 우리 의견이 제대로 반영된 적이 있었나?"

"그.... 없었죠?"

"하다못해 어긋난 밸런스 하나도 건드리지 못하게 했었지. 아르카나는 완벽하다고 지랄을 떨면서. 내가 꼰대라고? 아니. 이미 정해진 틀에 우릴 가두려고 했던 레이먼 션, 그 자식이 진짜 꼰대지."

꼰대에 맺힌 게 많아서일까?

꼰대 소리가 나올 때 목소리에 유달리 힘이 들어가는 박민재.

그가 마음을 추스르고 말을 이었다.

"뻔하지. 그때처럼 기 싸움을 하려고 들 거야. 어떤 식으로든, 충분히 기를 꺾어놓은 다음에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대화를 이끌어 가려고 하겠지."

"그런 인간이었군요, 레이먼 션은."

"맞아, 그런 의미에서 기대하고 있다고."

"...네?"

박민재가 피식 웃었다.

"너흰 상상이 되냐?"

"뭐가요?"

"우리 총책임자님이 기 싸움에서 지시는 모습이."

.

.

.

나는 점멸하는 메시지를 바라봤다.

[조건을 확인 중입니다.]

그 조건이 무엇인가 했더니만, 고작 이거였나?

[퀘스트 : 무장해제]

던전 균열의 진입 조건을 충족하라.

─무기의 착용을 해제하라. (진행 중)

무기라.

허리춤의 귀철을 제외하면 인벤토리에 있는 석궁 두 자루가 전부였다. 귀철이야, 인벤토리에 넣어둔다고 하더라도 전력에 큰 차이는 없었다.

'혹시라도 내가 위험에 처하면.'

에고 소드.

자아를 가진 귀철이 인벤토리에서 뛰쳐나와 나를 지키려고 들 테니까. 그러니까 장단을 맞춰줘도 별문제가 되지 않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말했었잖아?

"접객의 의미로 옷가지를 맡아두려는 것인가."

차갑게 잇는 말.

"허나, 그대의 환대는 사양하겠다."

내가 아쉬워서 레이먼 션을 찾은 게 아니었다.

레이먼 션이 먼저 나를 찾은 것이었으니까.

타협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상대방이 레이먼 션이잖아?'

내게도, 그랑펠에게도.

잔뜩 밉보인 레이먼 션.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나는 입을 열었다.

긍지를 들먹이면서.

속을 박박 긁는 게.

또 그랑펠 전문이거든.

"나는 그대의 제안에 응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

나는 레이먼 션, 그쪽을.

긍지 유무에 따라 처분하러 온 거거든.

그러니까 퀘스트 따위로 나를 통제할 생각은 마라.

─무기의 착용을 해제하라. (실패)

균열.

[『기이』]의 공간.

다르게 말하자면 기이의 영역에 진입한 나라면, 기이의 공간인 균열에도 어느 정도 간섭할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

드래곤처럼 차원을 찢고 아르카나 대륙으로 넘어갈 정도는 아닐지라도, 이미 생성된 균열에 간섭하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문을 열고 마는 것은 그대의 자유다."

이제부터 어떻게든 열리게 할 테니까.

이내, 진심으로 끌어올리는 마력.

그러기 무섭게 눈앞이 점멸했다.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이제라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것 같은데.

유감스럽게도.

늦었어.

기선제압했으면 된 거 아니냐고?

아니, 중요한 건 기 싸움의 승패가 아니다.

감히 기 싸움을 하려고 든 것부터가 잘못됐다는 것.

"나를 재단하려고 든 것."

지금부터라도 변명을 준비하는 게 좋을 거다.

"이 또한 처분에 반영하겠다."

그랑펠이 변명 따윌 들어줄지는 나도 모르겠다만.

그나저나 레이먼 션 앞에서도 한결같구나, 그랑펠.

그와 반대로 나는 쉴 새 없이 머리를 굴렸지만.

그런 머리가 견적을 내놓았다.

'해볼 만하다.'

레이먼 션의 호랑이 굴에서 무엇이 튀어나오든.

내겐 '믿을 구석'이 하나 더 생긴 참이었거든.

생각지도 못한 든든한 아군이.

◈ 232화. 업보 (1)

[던전, 'CODE-009'에 진입하셨습니다.]

레이먼 션의 은신처.

첫인상은 낯설지 않았다.

딱히 플레이어가 아니더라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콘셉트가 명확했거든.

'그냥 연구실이잖아, 여기?'

균열이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이 절반씩 섞인 공간이라는 걸 생각하면.... 사막 지하에 이런 연구실이 있었다는 건가? 정말, 돈만 많으면 세상에 불가능한 게 없구나.

'보자.'

일단, 곳곳에 CCTV가 가득하다.

스마트폰도 제대로 작동하는 균열 내부다. CCTV도 제대로 내 모습을 비추고 있겠고, 레이먼 션도 어딘가에 숨어서 날 지켜보고 있겠지.

'사실 심정 같아서는....'

CCTV부터 당장 어떻게 하고 싶었다.

그도 그럴 게 나는 당당하게도 선포하지 않았던가?

초대에 응한 게 아니라 처분하러 온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서는.

반협박으로 조건을 충족시키고 균열에 진입한 상황.

'영 찝찝하단 거지.'

그러나 그랑펠의 긍지가.

나, 이호열의 소시민적인 사고방식을 용납할 리 없었으니.

CCTV 따윈 무심하게 패스.

"살펴본다고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래도 조금은 달라지면 안 되겠냐 그랑펠?

어떻게 그 시절, 그 감성에 머물러 있는 거냐고!

애원도 잠깐, 역시나 익숙한 광경이 나를 반겼다.

'저건 아무리 봐도 엘리베이터고.'

친절하게도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B1-로비]

[B2-실험실]

[B3-연구실]

[B4-심층실험실]

[B5-심층연구실]

[B6-관제실]....

실험실에 연구실이라.

확실히 레이먼 션의 은신처답다.

공대생답다는 뜻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의문이 든다.

'대체 뭘 실험하고 연구한 거지.'

다행히도 그런 나의 궁금증은 오래가지 않았다.

말보다는 행동.

직접 확인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배려인가?"

엘리베이터도 배려라면 배려였다.

방문자를 위한 섬세함에 감탄해야 했거늘.

역시나 문제는 상대방이었다.

분명 내뱉지 않았던가.

레이먼 션, 그쪽의 환대는 모조리 거절하겠다고.

"그렇다면 역시나 거절하겠다."

콰드드득!

망설일 것 없이 마법 발현.

순식간에 뒤바뀌는 풍경.

발아래로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떠오른다.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의 효과.

광물에 관한 모든 지식으로 탐색 과정은 생략.

이번만큼은 간섭 과정도 더없이 익숙했기에 신속한 발현이 가능했다.

'하도 많이 써먹었어야지, 계단도.'

새록새록 떠오르는 지난날.

왜, 겉만 그럴싸했던 내가 아니던가.

최대한 많은 경험치를 얻기 위해선 처치 기여도가 필요했었으니까.

계단으로 적잖은 처치 기여도를 습득했었지.

'하르콘 덕분에 쏠쏠했지.'

역시 옛말에 틀린 게 없다.

고생은 젊을 때 해야 한다고.

그때의 구질구질함이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던전의 구조를 멋대로 뜯어고치며 떠오르는 계단.

'이젠 아찔한 풍경도 익숙하고.'

발아래로 보이는 풍경은 아득했지만.

마탑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아직도 마탑 최상층에서 내려올 땐 오금이 저릴 정도라니까?

'그나저나 저런 게 있을 줄은 몰랐는데.'

떠올랐던 메시지와 마찬가지로.

내가 도달한 곳은 [B1-로비]였다.

아지트라고 해서 살풍경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로비를 지키는 직원이 보였거든.

"이호열 플레이어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계단으로 내려온 나를 보고도 놀라는 기색이 없다.

아니, 그럴 만도 한가.

어쨌든, 나는 곧장 용건을 전달했다.

"나는 레이먼 션과 만나길 원한다."

의외로 곧장 답이 돌아왔다.

"그렇지 않아도 로비로 이동하시는 중이십니다."

제 발로 마중을 나온다라.

찾아 나설 수고는 덜었네.

그럼 기다리면서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이라도 돌려볼까.

확실한 건 레이먼 션과는 말을 섞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전부 변명에 불과하겠지만.'

그 변명에서도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어쩌면 아르카나로 돌아갈 수 있는 정보까지도.'

물론, 순순히 정보를 내뱉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고.

균열 입구에서부터 장난질하던 거 보면 알 수 있잖아?

띵─

이내, 도착한 엘리베이터.

나는 천천히 열리는 문을 응시했다.

그래도 긍정적으로 마음을 먹자.

그쪽도 함께 건설적인 대화를 나눠보자고, 레이먼 션.

물론, 그랑펠의 인내심이 허락하는 선에서 말이야.

*

흘러가는 시간.

성현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그런데 한 가지만 더 여쭤봐도 될까요?"

박민재와 윤수겸, 두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실물을 본 적이 없어서 그런데.... 레이먼 션, 실제로 봐도 사진과 똑같이 생겼나요? 그 뭐랄까, 이미지만 생각하면 의외라고 해야 하나?"

"그러니까 어울리지 않는단 거지?"

"아, 넵."

"그래, 행보에 비하면 지나치게 무난한 페이스니까."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범.

동시에 대격변의 진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

그런 것치고 레이먼 션은 지나치게 인상이 좋았다.

박민재가 썩은 미소를 흘렸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야 사회에서 흔하지. 물론, 그게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적당한 내숭과 연기는 각박한 사회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법이니까. 다만."

박민재는 혀를 내둘렀다.

"그 자식은 그런 수준이 아니야."

사회에서 악착같이 구르며 별별 인간군상을 봐왔다고 자신하는 박민재였지만, 그런 자신조차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레이먼 션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게 아니라 말이 섞이지 않는 느낌이랄까? 분명 같은 주제로 대화를 주고받고 있긴 한데. 뭔가 불쾌할 정도로 이질적이었거든."

...잠깐만.

그땐 그 이유를 알지 못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까 알 것 같았다.

박민재가 탁! 하고 무릎을 쳤다.

"그래! 그 자식, 인간처럼 느껴지지 않았거든!"

*

데구르르─

레이먼 션의 머리통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아니다, 그렇게 말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겠구나.

친절하게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자면.

변신마법.

폴리모프를 덧씌운 마네킹의 머리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로비를 목격한 순간, 짐작하고 있던 가능성이었다.

왜, 내게 인사를 건네왔던 직원을 보고 알아차렸거든.

가짜라는 것을.

이 개수작을 간파하게 된 데에는 아무래도 탑주의 영향이 컸다.

'그 고양이가 도움이 되는 날도 있네.'

한번이라도 목격한 마법은 완벽하게 이해한다.

그랑펠의 천재적인 재능이 탑주의 변신마법을 어디 감상만 하고 넘어갔으랴. 탐색, 간섭, 발현. 구조 또한 완벽하게 파악했으니, 간파하는 것 또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사실 꼭 그게 아니었어도.'

직원의 반응만 봐도 낌새가 느껴지긴 했다.

천장을 부수는 것도 모자라서 멀쩡한 엘리베이터를 놔두고, 굳이 마법으로 계단을 발현하며 내려오는 인간을 보고 경악하지 않는 게 말이나 된단 말인가?

왜, 지금도 마찬가지다.

자칭 레이먼 션의 머리통이 바닥을 굴렀는데.

직원에게 놀라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하다.

저것도 레이먼 션처럼 폴리모프를 뒤집어쓴 가짜라는 거지.

나는 읊조렸다.

"허나, 그것이 긍지를 품지 못한 이유는 되지 못한다."

그랑펠의 긍지론은 보기보다 훨씬 복잡하거든.

하다못해 녹차 티백에서도 긍지의 유무를 따지는 그랑펠이란 말이다. 단순하게 인형이라서, 가짜라서 긍지가 없다고 무시하는 게 아니란 뜻이다.

태연하게 이어서 내뱉는 독설.

"그저 그대에게서 배우지 못한 것뿐이겠지."

쉽게 말해 가정 교육 잘못시켰단 뜻이다, 레이먼 션.

그보다 이런 걸로 날 속일 수 있을 거로 생각했으면 오산이다.

어디에 숨어서 가짜를 내세운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쪽이 어디 있는지는.

이제부터 천천히 찾으면 되는 거거든.

진짜 던전을 공략하듯 말이야.

콰드드득─

귀찮지 않느냐고?

아니, 오히려 바라던 바다.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참이었거든.

대격변이라는.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

두 세계에서 용서받지 못할 짓을 저질러 놓고서는.

대체 이런 곳에 처박혀서 무엇을 하고 있던 건지.

이 두 눈으로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으니까.

또각─

내려가는 계단.

뒤바뀌는 시야.

떠오르는 메시지.

[B2-실험실에 진입하셨습니다.]

그와 동시에 시끄럽게 울리는 경고음.

그래, 괜히 던전 균열이란 수식어가 붙었을까.

몬스터가 등장하니까 던전 균열이었겠지.

[프로토타입 모델 E-89 : Lv.1,000]....

아지트의 경비병들답게 레벨 한번 화려하시다. 일반 몬스터라고 하더라도 일천(一千) 레벨이라, 여태껏 마주친 몬스터 중 최고 수준이다.

그런 마네킹들이 무려 수백 개.

'옛날 같았으면 바짝 쫄았겠지.'

하지만 경험은 어디로 사라지는 게 아니라 축적된다.

레벨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지금.

나는 객관적으로 상대의 전력을 파악할 수 있었다.

'마법만으로도 상대할 수 있겠는데.'

아지트라고 진짜 제집 안방처럼 생각하면 착각이지.

지하(地下).

광물에 광범위하게 탐색할 수 있는 내게도.

이런 땅속은 홈그라운드나 다름없다.

프로토타입.

이름에 걸맞게 만들다가 만 기계인형들이 삐걱거리며 다가온다.

[첫 세계수의 축복]이 존재하는 이상.

마력의 효율 따위엔 개의치 않는다.

육체에서 일렁이는 마력.

"이제는 단체 환영인사인가."

으드득─!

그러자 곳곳에서 무너지는 마네킹들.

저것들이 현실에서 만들어진 건지.

아르카나 대륙에서 만들어진 건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쨌거나 광물이라는 것이 핵심이니까.

"그러나 이 또한."

또각─

나는 변함없는 속도로 계단을 거닐며 마법을 발현했다.

그런 내게 달려드는 순서대로.

프로토타입들이 무너져 간다.

"거절하마."

털썩!

마치 나의 출입을 숭배하는 것처럼 무릎을 꿇었다.

물론, 이게 끝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애초에 내가 어떤 수준인지는.

아르카나를 지금껏 운영한 그쪽이 잘 알고 있을 거 아냐?

고작해야 몬스터 따위로.

날 막을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을 터.

나의 물음에 답하듯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퀘스트 : 루트 선택]

침입자여.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두 개의 갈림길 중 하나를 선택하라.

─B401-심층실험실 (선택)

─B402-심층실험실 (선택)

심층이라는 수식어가 괜히 붙은 게 아니라는 건가.

내려갈수록 더욱 복잡한 구조로 이뤄진 모양이다.

그나저나 퀘스트를 들이밀다니.

'어울리는 방법이네.'

현시점에서 아르카나의 유일한 운영자.

그런 레이먼 션의 가장 큰 무기는 시스템이겠지.

어쩌면 레이먼 션과 플레이어는 극상성의 천적 관계일지도 모른다. 왜,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플레이어가 운영자에겐 꼼짝 못 했던 것처럼 말이지.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말이야.

나도 그런 플레이어 중 하나지만.

예전부터 입에 달고 산 말이 하나 있었거든.

레벨도 스탯도 모든 건 숫자에 불과하다고.

나는 몰라도, 그랑펠은 처음부터 계속 시스템 불신론자나 다름없었으니까. 레이먼 션, 그쪽이 시스템을 들이민다고 하더라도 대답은 언제나 같다는 것이다.

"숫자가 글자가 되면 무언가 바뀌리라 여긴 것인가."

물론, 쏟아내는 독설도 한결같았으니.

"실로 어리석구나."

이로써 확실해졌다.

아무래도 레이먼 션.

그쪽과 나는 사이좋게 대화를 나눌 수 없을 것 같다고. 어떤 사정이 있었든 간에 일단 한 방을 먹여주고 대화를 나눠야 할 것 같다고.

당연하게도 선택지 따윈 고르지 않는다.

"길은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다."

그보다 그쪽의 패를 구경했으니.

나도 나의 패를, '믿을 구석'을 보여줘야겠지.

나는 인벤토리에 손을 뻗었다.

꺼내 든 것은 [지옥의 횃불].

레이먼 션, 그가 어떤 의도로 대격변을 일으킨 건지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 그러니 확실한 죄목으로만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그랑펠의 복잡하고도 무거운 긍지였으니까.

그러니 발뺌할 생각은 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은가?"

내 물음에 화답하듯.

거칠게 타오르는 지옥의 횃불.

나는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는 그대를 위한 전장이다."

──────

악크샨의 유지 : 지옥의 불에서 악크샨 악마 사냥꾼을 불러낸다.

──────

레이먼 션.

그쪽이 구경거리로 만들었던.

걸출한 경력직 신입 나가신다.

"셰그윈."

[검성, 셰그윈이 당신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 233화. 업보 (2)

치솟는 지옥의 불길을 응시한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 업 메시지보다도 반갑게 느껴지는군.

악마로 타락.

이후 내게 패배해 지옥으로 떨어졌던 검성.

셰그윈.

저벅─

일렁이는 불길 속에서 그가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악크샨과 무관한 셰그윈을.

어떻게 [악크샨의 유지]로 불러낼 수 있었냐고 묻는다면.

-"죽음조차 꺾을 수 없는 긍지다."

...이것도 기승전긍지라고 해야 하나?

.

.

.

언제나처럼 일과에 시달리던 때였다.

정확하게는 빌어먹을 노가다 클래스.

악마 사냥꾼의 단련 퀘스트를 수행하는 도중이었지.

"선의의 경쟁은 언제든 환영이다."

혼자 개고생하는 건 억울한 법.

슬픔을 나누면 절반이 된다는 말은 잘 모르겠지만.

고생은 나누면 확실히 반이 된다는 걸 알고 있는 나였다.

'노가다도 맞들면 낫다.'

사실 악크샨 악마 사냥꾼들을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악마 사냥 말고 잘하는 게 있긴 한가?

의구심이 드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도 선배님들이 아닌가?

하다못해 [집념]을 보다 효율적으로 성장시킬 방법이라든가. 훈련을 땡땡이칠 요령이라든가. 뭐라도 알려주지 않을까 싶은 기대 때문에 [지옥의 횃불]을 꺼냈단 뜻이었다.

화르륵!

그런데, 지옥의 불길에서 등장한 건.

다름 아닌 셰그윈이었으니.

나, 내색은 안 했어도 진심 기절할 뻔했다...!

악크샨의 악마 사냥꾼을 불러냈는데.

어째서 불길 속에서 셰그윈이 튀어나온 건지.

구체적인 상황을 파악하기 이전에.

찌릿!

나를 바라보는 셰그윈의 눈빛에 살기가 가득했으니까.

처음엔 생전의 원한 때문인 줄만 알았다.

내게 완패한 셰그윈이었으니까.

'뭐, 정확하게는 귀철에게 졌던 거긴 한데....'

허나 아무리 째려본다고 한들.

기가 죽을 내가 아니었으니.

태연하게 단련 퀘스트를 수행하며 말했다는 거다.

"이전과 다르게 긍지로워졌군."

...긍지로워졌다니.

이젠 사전에 없는 신조어까지 만들어서 쓰는 거냐, 그랑펠.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몰라 눈치를 보는데.

다행히도 셰그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지옥의 규율.

악크샨 악마 사냥꾼들이 그랬던 것처럼 셰그윈 또한 살아있는 나와는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지옥의 규율 같은 건 또 언제 알게 됐느냐고 묻는다면, 허리춤의 귀철을 내밀어 보이리라.

-그렇게 된 일이었군, 아틀라스.

나의 귀철과 셰그윈의 애검(愛劍), 아틀라스.

규율과 무관하게 검끼리는 자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모양이었으니까.

덕분에 나는 귀철을 통해 셰그윈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건지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납득했다.

'날 원망할 만하네!'

[숭고]의 효과 발동.

작은 변화가 일어난 덕분에.

셰그윈은 완전한 악마가 아닌, 가슴속에 긍지를 품은 악마가 되어 지옥에 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지옥에는 셰그윈과 같은 처지인 이들이 존재했으니.

그렇다.

악마를 사냥하다가 악마로 타락했을지언정.

긍지를 져버리지 않은 우리 악크샨 선배님들이 계셨단 뜻이다.

동병상련.

그게 바로 셰그윈이 악마 사냥꾼으로 거듭나게 된 계기였다.

그렇다면 원망의 눈초리는 뭐였냐고?

뭐긴 뭐겠어.

노가다에 가까운 악크샨의 훈련량엔 검성조차 치를 떤 거지.

그러나 그랑펠이 누구인가.

어찌 보면 악크샨 선배님들보다 더한 독종.

뜻하지 않게 재회한 셰그윈조차 그냥 보내지 않았단 것이다....

"그럼, 각설하고 단련을 시작하지."

"...?"

"이번엔 선의의 경쟁이다, 셰그윈."

"...!"

.

.

.

철컥!

셰그윈의 합세.

셰그윈의 전력은 나로서도 짐작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아마 그때보다 더 강해졌겠지...?'

선후배 관계를 떼어놓고.

냉정하게 비교해본다.

악크샨 악마 사냥꾼들과 셰그윈의 수준을.

무엇보다 나부터가 악마 사냥꾼이잖아?

덕분에 악마 사냥꾼은 악마를 사냥할 때가 아니면 나사가 빠져도 몇 개는 빠진 클래스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런 악마 사냥꾼을 셰그윈과 비교한다고?

초월자.

그것도 모자라 검의 정점.

검성이라 불린 존재였다.

'셰그윈에게 미안할 일이지.'

나부터도 셰그윈이 악마로 타락해서.

[천적관계]가 발동된 덕분에 승리할 수 있었던 거니까.

만약, 셰그윈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회춘하지 않았다고 해도 만만치 않았을 거야.'

그런 셰그윈이 지독한 단련을 반복하며 강해진다고 생각해 본다. 그것도 모자라 지옥에 떨어진 악마들을 사냥한다면 그 실전감각이 녹슬 일도 없을 터.

과연, 나의 예상은 정확했다.

귀철이 입을 열었다.

-셰그윈의 검강이 보다 예리해졌군.

스와아아악!

셰그윈이 아틀라스를 휘두를 때마다 달려드는 기계인형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간다. 일합(一合)에 수십씩 처참하게 잘려나가는 기계 조각들.

-물론, 우리에게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자신감은 여전하구나, 도플갱어 3호 귀철.

'정작, 나는 감탄하기 바쁜데 말이지.'

쾌검술.

뜻 그대로 속도에 중점을 두는 셰그윈의 검술이다.

내 미완성 쾌검술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군.

콰득!

격동하는 셰그윈의 근육.

신체능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저런 속도를 낼 순 없겠지.

플레이어로 각성했던 순간부터.

체력 단련을 하루도 빼먹지 않았던 나였거늘.

'셰그윈과 맞먹을 순 없겠지.'

간단하게는 살아온 세월의 차이도 있고.

나는 레벨 업으로 획득한 포인트조차 대부분 [마력]에 투자했으니까. 훗날 [집념]을 수백 포인트까지 성장시킬 수 있으면 또 모르는 일이지만, 그게 워낙 훗날이어야지.

그러나.

"그것이 그대의 검로(劍路)인가, 셰그윈."

귀철보다 더한 이놈의 자신감!

나는 저런 셰그윈 앞에서 기어코 귀철을 치켜들었다.

그런 내게 메시지가 떠오른다.

[B402-심층실험실에 진입하셨습니다.]

그와 동시에.

시야에 들어오는 거대한 기계인형.

이전 층에서 봤던 프로토타입들이 인간 크기였다면.

저건 웬만한 건물 크기는 되는 것 같았다.

보나 마나 네임드 몬스터겠지.

하지만 그 정보는 확인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았나. 숫자도 글자도 무의미하다고."

그랑펠에겐 멋진 이유가 있을지 몰라도.

나는 그저 그럴 여유가 없는 것뿐이었다.

이 잘난 재능을 썩히면 아까운 일이잖아.

『그랑펠의 재능은 한 가지에 국한되지 않았다.』

눈앞에 미완성이 아닌 완성형 쾌검술이 있었다.

게다가 이전과는 상황이 달라졌다.

적으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아군으로서 협력한다.

덕분에 다른 각도로 셰그윈의 쾌검술을 목격할 수 있다는 뜻.

한 줄로 요약하자면.

'날로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단 거지!'

어쩌면 이번 전투에서 쾌검술을 완성.

서클에 이어 두 번째 성취를 해금하는 건 아닐까?

내가 김칫국을 들이켜려던 순간이었다.

단호하게 읊조리는 말.

"따라 걷는 길은 의미가 없는 법이지."

진짜, 내가 이럴 줄 알았다...!

그랑펠의 긍지가.

남의 검술을 그대로 모방하는 걸 용납할 리가 있으랴.

귀철도 이에 질 새라 한마디를 덧붙였다.

-옳은 말이다, 주인이여!

그랑펠 혼자라면 어떻게든 합리화해서 고집을 꺾어보려고 하겠는데.... 귀철까지 맞장구를 쳐버린 지금, 그럴 생각은 말끔하게 포기했다.

그래, 내 팔자가 이렇지 뭐.

'더더욱 눈을 부릅뜨는 수밖에.'

나만의 빌어먹을 검로를 찾기 위해서 말이야!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사실 어떻게 보면.

지금 선택한 가시밭길이 정답일 수도 있었다.

말했다시피 셰그윈의 검로는 아무나 걷는 길이 아니었으니까.

'앞으로 신체능력에 모든 걸 쏟아부어도 모자랄지 몰라.'

애초에 셰그윈이 타락한 이유가 뭔데?

그 찬란한 재능으로.

쾌검술, 하나만을 보고 매달렸어도.

검로의 끝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노쇠한 육체가 쾌검술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근데, 나는 노쇠한 셰그윈보다 형편없지.'

혹시라도 그랑펠이 호통을 칠라.

슬그머니.

확인하는 상태창.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칭호 : 최후의 모험가, 숭고, 초월자]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630]

[능력치]

근력 : 150 / 민첩 : 145 / 마력 : 537 / 행운 : 12 / 심미 : 上 / 집념 : 2

[보유 포인트 : 9]

숫자가 전부는 아니라고는 하지만....

'근력과 민첩이 한참 부족해.'

그랑펠은 몰라도, 내겐 셰그윈을 쫓아갈 자신이 없었으니까. 결국, 미완성 쾌검술을 내 방식대로 완성해서 써먹는 게 최선의 선택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각오하거라, 귀철."

내게 실망하지 않게 마음 단단히 먹으란 소리다.

있는 거 없는 거 죄다 끌어오는 나의 전력은.

네 생각보다 훨씬 구질구질할 테니까.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인이여!

끼긱─

쇳소리를 내며 가동하는 거대 프로토타입.

기계지만 그 형태는 네 발로 걷는 짐승에 가까웠다. 앞다리가 유독 짧은 게 얼핏 보면 장난감 같아서 귀엽기도 했는데.... 전투력은 절대 귀엽지 않겠지.

'인간형도 레벨이 1,000이었는데.'

쟨 최소 네임드 몹, 크기도 비교할 수 없이 커다랗다.

마법과 비교하면 형편없는 검술 실력.

귀철에게 몸을 맡기지 않은 상태로 저런 것과 맞선다?

심지어는 [천적관계]도 발동되지 않은 상태에서?

'죽고 싶어 환장한 거라고 할 수 있지.'

그러나 보다시피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내 옆에 아틀라스를 치켜든 셰그윈이 있었으니까.

그런 셰그윈이 나를 바라본다.

...뭐냐, 미묘하게 입꼬리가 올라갔는데?

귀철이 말했다.

-누가 먼저 쓰러트리는지 자웅을 겨뤄보자는군!

뭔데.

너도 선의의 경쟁 타령이냐, 셰그윈?

그나저나 몬스터가 한 마리인데 무슨 놈의 경쟁을...?

나는 셰그윈 쪽을 바라봤다가 흠칫했다.

아뿔싸.

잊고 있었다.

레이먼 션이 내놓은 퀘스트를.

[퀘스트 : 루트 선택]

침입자여.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두 개의 갈림길 중 하나를 선택하라.

─B401-심층실험실 (선택)

─B402-심층실험실 (선택)

심층실험실.

확실히 두 개였지?

등장하는 네임드 몹도 두 마리인 게 더 자연스럽긴 하긴 한데....

불길한 예상은 잘도 들어맞는 법이었다.

끼기긱─

똑같이 생긴 거대 프로토타입이 한 마리 추가.

사이좋게 때려잡을 생각을 했더니만.

누가 먼저 쓰러트리는지 자웅을 겨루자니.

긴박한 상황에 우리 그랑펠이 어울려줄 것 같....

"그대가 원한다면 그리하겠다."

아니, 이런 요청은 왜 또 승낙하는 건데?

"온전하게 빚을 되갚아 주겠다는 그대의 긍지를 존중하겠다."

하여튼, 이놈의 숭고하신 긍지가 또 말썽이구나.

'쩝, 흔한 기회가 아닌데.'

사실 셰그윈이야말로 아군 중에서도 치트키 수준으로 강한 아군이었다.

앞으로 지옥에서 노가다. 아니, 단련과 사냥을 반복하며 무한하게 강해질 것까지 고려하면....

든든한 걸 넘어서 나중엔 셰그윈에게 내 경험치를 빼앗기는 건 아닌가 걱정할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아무 때나 불러낼 수 없다.'

[악크샨의 유지].

이름 그대로 악크샨의 긍지를 잇는 스킬이었다.

그런 스킬을 사리사욕에 사용한다는 건 그랑펠의 청렴결백에도, 악마 사냥꾼의 규율에도 어긋나는 일이 분명하다. 합당한 이유가 있지 않고서야 남용할 수 없다는 뜻이다.

'셰그윈도 마찬가지야.'

단지 상대가 레이먼 션이기에.

셰그윈을 불러낼 수 있었을 뿐.

사회생활에 찌든 누군가는 묻겠지.

아무리 그래도 신입이면 마음대로 부려 먹을 수 있는 거 아니냐고.

그랑펠에게 독설을 들어도 싼 발언이 아닐 수 없다.

긍지가 잘도 그런 짓을 용납하겠다.

이런 흔치 않은 기회를, 위태로운 내기에 써야 한다니.

내 타는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귀철이 말한다.

-패배에도 굴하지 않고 정진하는 모습이 기특하구나, 검성!

...내가 앓느니 죽지 진짜.

승낙이 떨어진 순간.

벌써 행동에 돌입한 셰그윈이었다.

스와아아악─

휘몰아치는 푸른 검강.

빠르고 화려하다.

저것이 바로 아틀라스와 신검합일(身劍合一)한 검성.

셰그윈의 진가였다.

아르카나 대륙, 한 시대를 대표하는 검이었다.

물론, 나도 넋 놓고 구경할 때가 아니다.

땅을 박찬다.

셰그윈보다 신속할 순 없다.

그러나 셰그윈보다 절박하고 처절하다고 자신한다.

셰그윈이 오직 쾌검술 하나만을 바라보고 자신의 검로를 걸어왔다면.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 고난과 역경이 가득한 길을 발버둥 쳐서라도 지나쳐온 나였으니까.

이제 와서 그 초심을 저버릴 순 없다는 것이다.

고오오오─

흑색으로 물드는 귀철.

그 위를 타고 휘감는 은빛의 검강.

그와 동시에 나의 몸에서 일렁이는 마력.

-...이건?

슬슬.

알아차렸느냐, 귀철?

그렇다, 이것이 너의 주인이 살아온 방법이다.

하찮게 말하자면 잡캐.

그럴싸하게 말하자면 마검술.

더욱 거창하게 말하자면 이 또한 기이.

슥─

검을 휘두를 때마다 검강에 섞여드는 마법.

베어낼 때는 그에 적합한 마법이, 막아낼 때는 또 막아낼 때에 적합한 마법이 발현한다. 검술과 고도의 마법을 동시에 운용하고 있다는 것.

문무겸비.

검과 마법에 낯부끄러울 정도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오직 그랑펠만이 수행할 수 있는 전투법.

문득, 귀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천적관계]가 발동되지 않은 내 실체에 놀랐나, 싶었거늘.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오른손에서 귀철의 고동이 전해져 왔으니까.

-비로소 깨달았다, 주인이여.

갑자기 뭘 깨달았다는 거지.

...나의 실체를?

실망스러워도 어쩌겠냐, 이게 나란 놈인데 이해해라.

-내게만 '이름'을 붙여주지 않았던 이유를...!!

...잠깐만 뭐라고?

귀철아, 너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갑자기 이름이 왜 튀어나오는 건데?!

'나도 모르는 이유를 네가 어떻게 알아?'

두근─

나의 의문과는 무관하게 귀철의 고동은 더욱 커져갔다.

그 고동은 귀철을 쥐고 있는 나는 물론.

"!"

검을 휘두르던 셰그윈에게도 전해질 정도로 우렁찼다.

-착각이었다. 그대의 검로를 함께 걷기 위해서는, 나는 하나의 이름에 만족할 수 없었거늘. 미련하게도 하이엘과 디엔드를 시기하고 말았다.

...뭐야, 이름을 안 붙여줘서 삐졌어?

아니, 말을 하지 그랬어.

그럼 둘에 뒤지지 않는.

여러 의미로 기가 막히는 이름을 붙여줬을 텐데.

-그러나 오늘로서 깨달았다.

그러니까 뭘 깨달았다는 건데?

불안하게.

정말로.

이내, 비장한 귀철의 음성이 이어졌다.

-나는 하나의 이름에 종속될 수 없는 존재였다는 것을!

...뭐?

-그렇다, 주인이여.

-나는 그대가 원하는 대로.

-이 순간만큼은 '허상을 베는 검'으로 거듭나겠다.

허, 허상을.... 뭐?

왠지 그랑펠이 흡족한 미소를 흘릴 것 같은.

그 이름은 대체 뭐냐니까?!

내 질문에 관한 답은 점멸하는 메시지가 내놓았다.

[?]

[등급 : 전설]

[제한 : 알려지지 않음]

[효과 : 알려지지 않음]

[설명 : 고귀한 자아를 가진 에고 소드.]

[허상을 베는 검 : 일루젼 브레이커(Illusion Breaker)]

[등급 : 전설]....

...허상을 베는 검, 일루젼 브레이커어어어?

그보다 이 화상.

아니, 허상아.

너, 이런 사기적인 효과는 어디서 난 거야!

◈ 234화. 기상천외

물음표에서 변화한 귀철의 이름.

[허상을 베는 검 : 일루젼 브레이커(Illusion Breaker)]

[등급 : 전설]

전설급 아이템이라 이명(異名)이 존재한다고 치자.

그런데, 일루젼 브레이커라니.

너, 이런 작명 센스 누구한테 배운 건데.

"그 또한 나쁘지 않은 울림이구나."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더니.

누구긴 누구겠어.

나를, 그랑펠을 보고 배운 거겠지.

그나마 다행인 점은, 내가 지어준 이름이 아니라 자괴감이 덜 든다는 것 정도일까. 뭐, 전후 사정을 알지 못하고 들었을 땐 또 그럴싸한 이름 같기도 하고.

그러니까 내가 경악한 이유는 따로 있단 뜻이다.

[제한 : 알려지지 않음]

[효과 : '프로토타입'과 전투 시, 파괴력이 대폭 상승한다.]

[설명 : 고귀한 자아를 가진 에고 소드.]

변화한 건 오직 효과뿐이거늘.

그 효과가 심상치 않았다.

아르카나에서 특정 대상에게만 유효한 효과는 드물지 않았다.

왜, 가깝게는 악마 사냥꾼의 고유 스킬 [천적관계]도 그렇잖아.

문제는....

'프로토타입과 전투 시.'

바로 그 부분이었다.

아르카나 대륙에 존재하는 놈들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이질적인 외관.

프로토타입 형태의 몬스터는 흔하지 않았다.

흔한 게 아니라 나도 여기서 처음 봤다.

-이 순간만큼은 '허상을 베는 검'으로 거듭나겠다.

그럼에도 귀철은 뱉은 말처럼 상황에 맞게 변화한 것이다.

그것도 보통 변화한 게 아니다.

무려 파괴력 대폭 상승이라는 어마어마한 효과를 달고 있었으니까.

귀철을 바라본다.

이쯤 되니까 슬슬 무서워진다.

'...이게 전설급 아이템.'

내가 귀철을 손에 넣었던 순간.

플레이어들에게도 업적이 갱신됐다고 했겠다.

처음에는 그저 주인처럼 관종이구나, 하고 가볍게 여겼는데....

'진짜로 전설이 괜히 전설이 아닌가 봐.'

그런 의미에선 감사하자.

-비로소 느껴진다, 주인이여.

그런 대단하신 에고 소드가 나를.

꼬박꼬박 주인이라고 불러주는 것만 하더라도.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혹시라도 친밀도가 부족했어 봐.

'이런 효과를 확인도 못 했을 거 아냐.'

그러니 이 순간만큼은.

귀철.

네 입방정을 너그럽게 받아들여 주마.

-이것이 바로 허상을 베기 위한 형태로군.

슥─

내 검술에 바뀐 것은 없었다.

바뀐 건 내 육체가 아닌 귀철의 효과였으니, 휘두르는 팔뚝의 근력은 물론이요. 움직임 또한 이전과 다를 바 없는 속도였다는 것이다. 그랑펠 특유의 우아한 동작이 또 빠트릴 수 없지.

그런데.

살랑.

재킷이 반 박자 늦게 흐드러진 순간.

덜컥!

프로토타입의 어깻죽지가 그대로 잘려나갔다.

실화냐.

저렇게 두꺼운 고철덩이를 잘라냈는데. 손끝에 느껴지는 감각이 없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예리한 식칼로 두부를 자르는 듯한 감각에 불과했다...!

오죽했으면.

"!"

셰그윈조차 흠칫 놀라서 나를 바라본다.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지 말아 주라.

내색을 안 하는 것뿐이지, 나도 적잖이 놀랐거든.

-완벽하게 베어냈군. 일루젼(Illusion).

...다 좋은데, 지나치게 혀를 굴리는 거 아닐까?

귀철의 발음에 재차 놀라기도 잠깐.

나는 의문이 들었다.

아까부터 허상, 허상 하는데....

'그 말은 프로토타입이 허상이라는 거겠지?'

프로토타입과 허상.

거기에 얽힌 사연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겠지.

육체 일부가 잘려나간 상황.

거대 프로토타입이 당하고만 있을 리 없었으니까.

예상대로.

지이이잉─

패턴이 바뀌었다.

패턴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최소 네임드 몹이라는 뜻.

과연, 머리 부근에서 모여드는 빛의 세기가 범상치 않았다.

머릿속에서 얼추 휘갈겨보는 견적서.

'마력 방어막으로 막아내기는 무리야.'

순수마법, 마력 방어막.

말 그대로 마력으로 방어막을 발현하는 마법이다.

간섭 과정에 별다른 수고로움이 필요치 않기에.

긴급한 상황에 웬만한 마법사들이 꺼내 드는 방어 마법이다.

다만, 효과를 떠나서.

'마력 소모량이 극심하다는 게 문제지만.'

물론, 마력 소모량에 허덕거릴 이유는 없다.

다만, 언제까지 [첫 세계수의 축복] 효과로 날로 먹을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겠지. 뭣보다 우리 긍지 높으신 그랑펠 님께서 축복의 효과를 영 탐탁지 않아 했으니까.

그래서 읊조렸다.

"각오는 되었나."

귀철의 새로운 이름을.

"일루젼 브레이커."

훗날 누가 알게 된다면 참 가관이겠다.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의 애검.

일루젼 브레이커라니.

'...셰그윈의 아틀라스랑은 어감이 달라도 너무 달라.'

이 꼴을 지켜보는 이가 셰그윈밖에 없다는 것에 감사하자.

나는 귀철.

아니, 일루젼 브레이커를 꼿꼿하게 치켜세웠다.

[효과 : '프로토타입'과 전투 시, 파괴력이 대폭 상승한다.]

대폭 상승의 효과는 아주 잘 파악하고 있는 나였다. 사이렌의 축복으로 대폭 상승한 행운이 어떤 후폭풍을 가지고 왔는지를, 몸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체감한 덕분이다.

그러니까 나는 똑바로 바라봤다.

거대 프로토타입.

녀석이 쏟아내는 광선을.

"!"

정면돌파.

낌새를 알아차리고 프로토타입의 머리부터 무력화한 셰그윈과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는 대처법이었다.

그러나 내겐 확신이 있었다.

-물론이다, 주인이여.

일루젼 브레이커도 마찬가지.

슥─

그러니까 쏟아지는 광선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검의 궤적으로 가로 선을 그었다.

그러자 빛의 광선이 선을 따라 절반으로 갈라졌다.

샤라라─

비산하며 사라졌다.

정말로.

한순간의 허상처럼.

눈앞에 점멸만을 남긴 채.

[초월자 : 그대의 초월적인 경지는 초월자라 불리기에 충분하다. - 현재 도달한 성취 : 서클 (모든 마법 발현력 1,000% 상승) / 미완성 쾌검술 / 없음 / 없음....]

"내가 걸어온 길, 무엇 하나 외면하지 않겠다."

화답하듯 반짝거리는 [미완성 쾌검술].

이내, 글자가 뒤틀리더니 새롭게 변화한다.

나는 말을 이었다.

"그것이 나의 검로니까."

[긍지의 검로 (현재 해방된 길 : 제1길)]

쿠구구궁─!

그와 동시에 거대 프로토타입이 무너졌다.

나는 시선을 거두고 셰그윈을 바라봤다.

셰그윈의 넋이 나간 얼굴에 말을 이었다.

"좋은 승부였다, 셰그윈."

이거, 이번에도 내가 이겨버렸네.

*

거대 연합.

세 사람은 오늘도 티격태격이다.

이유는 나름대로 진지했다.

"당연히 이 정도는 우리 선에서 해결해야지!"

"자신 있으신 겁니까?"

"뱀눈 씨, 우리가 언제부터 자신감을 따졌는데?"

남태민이 비장한 음성으로 말을 잇는다.

"긍지에 살고 긍지에 죽는다."

레오니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미친놈."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호열의 일주일 휴가 소식을 전해 듣고, 언제나처럼 제로 산맥에서 몬스터를 사냥하며 레벨 업에 열을 올리던 도중.

발견했다는 것이다.

[던전 : 호쾌한 트롤의 은신처]

[적정 레벨 : Lv.700]

[붕괴 진행도 : 0%]

제로 산맥에 존재하는 십만 동굴.

그중 하나를.

호열을 제외한 플레이어 중에서는 다섯 번째였다.

그 적정 레벨은 무려 700레벨.

과거였다면 지금처럼 분쟁을 벌이는 일도 없을 정도로.

500레벨 대의 세 사람에게는 과분한 던전 동굴이었다.

그러나.

"고작 700레벨짜리 던전 하나를 클리어하지 못해서 호열 씨가 움직이셔야 한다고 상상해 봐. 비효율적이지 않아? 심지어 휴가 중이신데?"

언제까지 호열에게 신세를 질 순 없는 노릇.

제대로 주제 파악을 끝내고 꺼낸 말이었다.

거대 연합을 구축하기 이전에도.

가온, 이나즈마, 버서커.

각자의 길드를 랭킹 최상위권에 올려놨던 세 사람이었다.

"자만하는 게 아니야. 그동안 우리가 마주한 적을 생각해 보라고. 마왕부터 악마 군단장까지. 난이도만 따지면 700레벨 던전, 그 몇 배는 될 테니까."

"간만에 일리가 있는 발언입니다."

"아니, 누가 네가 틀린 말 했대?"

"뭐야, 아니었어? 그럼 뭐라고 중얼거렸던 건데?"

그야 말끝마다 긍지를 덧붙이는 게....

'나까지 긍지에 전염될 것 같아서 그랬다!'

남태민 혼자라면 무시하면 그만이었는데.

히사기조차도 긍지 앞에서 남태민과 죽이 척척 맞은 탓이었다.

순수하게 의견에 관해선 레오니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됐다. 별거 아냐."

"뭔데, 싱겁게."

"신경 끄셔."

무엇보다 동굴을 발견한 건 자신들만이 아니었다.

사전 정보가 없었다면 고민해 봤겠지만....

동굴이 균열과 별 차이가 없다는 걸 알게 된 지금.

"그럼, 준비하고 진입하는 걸로 결정이다."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무엇보다 동굴은 균열보다 진입과 퇴각이 자유로웠다.

위급상황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다는 것도 큰 이점이었다.

히사기가 뱀눈으로 동굴을 흘기며 읊조렸다.

"물론, 그런 일은 없어야 하겠거늘."

레오니는 그런 히사기를 흘겨봤다.

"...저저, 이젠 말투도 옮았어."

도리도리─

고개를 내저으며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동맹이라고 할 수 있는 세컨드 썬.

슈레이그에게도 이 소식을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거기에다가.

"아차, 스칼. 걔도."

긍지 감염자, 한 명이 더 추가됐었지.

레오니가 추가로 메시지를 전송하려던 순간이었다.

띠링─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었다.

세 사람의 알림이 동시에 울렸다.

"...!!!"

아르카나 공식 홈페이지 알림이.

"오늘 무슨 요일이지?"

"일단, 목요일은 아닙니다."

"하씨."

목요일이 아니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예정에 없는 긴급 소식이라는 것.

"하필이면 호열 씨 휴가 첫날부터...!!"

이번에는 마탑과 유스라 왕국.

두 곳에 휴가를 제출하셨길래.

드디어 휴식다운 휴식을 취하실 수 있겠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었는데.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긴급상황이 터지는 건 또 무슨 경우란 말인가?

"하여튼 격식이 없어, 격식이!"

바득바득.

남태민이 이를 갈며 아르카나 공식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역시, 정보에 빠른 분석관.

남철민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형! 무슨 일이래? 뭔데 알림이 뜬 거야?"

-마, 말로 설명하기가 좀 그런데...!

"엥? 뭔데? 긴급 업데이트 아니야?"

아르카나 홈페이지에 업로드되는 게시글이라고 해봤자 목요일에 올라오는 정기 업데이트, 아니면 긴급 업데이트 내역밖에 없지 않던가?

남태민의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게 업데이트가 아니라 동영상이야!

"...!"

잊고 있었다.

대격변 이후.

아르카나 공식 홈페이지에 업로드된 유일한 동영상.

호열과 검성, 셰그윈의 콜로세움 결투를.

덕분에 남태민은 곧장 물었다.

"설마, 이번에도 호열 씨야?"

-그래, 맞아.

"하."

하긴, 괜히 휴직계를 제출하셨을 리가 없지.

남태민은 곧장 아르카나 홈페이지에 접속.

동영상을 재생했다.

그런 남태민 곁으로 두 사람이 몰려들었다.

"...뭔데?"

"배터리가 없습니다."

"난 데이터 다 썼어."

"...돈도 많이 벌면서 좀 써라."

좋으나 싫으나.

어쩔 수 없이 머리를 맞대고 액정을 들여다보는 셋.

그들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아니, 호열 씨...?

"...저긴 또 뭐하는 곳이야?"

.

.

.

아르카나 공식 홈페이지.

업로드된 동영상의 정체는 CCTV 녹화 영상이었다.

호열이 등장하는 영상이라고 해서 검성, 셰그윈과의 결투와 맞먹는 영상이 올라오지 않았을까. 기대를 품고 영상을 재생한 이들은 의문에 빠졌다.

-심지어 균열도 아니고 그냥 건물 같은디???

-ㄹㅇㅋㅋ

-근데 약간 연구실 분위기 나지 않음? 죄다 하얀 게

-듣고 보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ㅇㅇ

그러나 같은 시각.

AAU엔 긴급상황이 발령됐다.

다급해진 분위기.

"...왜 이렇게 심각해요?"

박민재의 수다에서 벗어나 자리로 복귀했던 성현준은 어안이 벙벙했다.

총책임자님의 모습이 담긴 CCTV 영상이 공식 홈페이지에 업로드되다니. 확실히 예상치 못한 일이기는 했다.

"근데 그게 난리를 피울 정도는 아니지 않아요, 선배?"

맞장구를 바랐건만.

윤수겸의 표정 또한 심각하기 그지없었다.

윤수겸이 성현준을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현준이, 넌 모를 수밖에 없겠구나."

"네? 무슨 말씀이세요, 선배?"

"일단, 목소리부터 낮춰."

워낙 소란스러운 사무실이다.

웬만한 대화는 묻히고 말 텐데.

그럼에도 윤수겸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모니터에 떠오른 영상을 가리키면서.

"구조가 똑같아."

"...네?"

"총책임자님이 계신 저 건물."

온통 하얀 저 연구실 같은 건물을 말하는 건가?

꿀꺽─

윤수겸이 마른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본사랑 구조가 똑같다고."

"본사요? 어떤 본사요?"

"대격변 이전, 멀쩡하던 시절의 코스모 본사."

"...네? 네, 네에?!"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성현준이 알아차림과 동시에.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아우성.

"아니, 아직 한 시간도 안 됐잖아요?"

"그 찰나에 레이먼 션 위치를 파악하고 찾아가신 거야!"

"진짜, 저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이젠."

소란 속에서 나지막이 들려오는 목소리.

"이래서야 우리끼리 속닥거린 이유가 없어졌는데."

"지부장님...!"

"괜찮아."

지부장실에서 달려온 박민재였다.

거칠게 풀어헤치는 넥타이.

박민재는 모니터에 떠오른 호열의 영상을 바라봤다.

해내실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빠르게 해내실 거라고는 또 생각 못 했는데.

박민재가 작게 중얼거렸다.

"...근데, 저 자식은."

저 자식, 레이먼 션.

구린 게 많은 놈이기에 호열과의 만남을 숨겨도 이상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CCTV에 녹화된 호열의 모습을 아르카나 홈페이지에 올릴 줄이야.

"대체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정말, 그 속셈을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가늠할 수 없는 건 그뿐이 아니었다.

계속해서 재생되는 영상.

"...잠깐만요, 지부장님?"

뒤틀리는 건물의 바닥.

허공에 떠오르는 계단.

그런 계단을 태연하게도 내려가는 호열.

"뭐죠, 저 몬스터들은?"

이내, 주변을 포위하는 수백 개의 프로토타입.

허나, 포위진이 무색하게도.

곧.

"무, 무릎을 꿇었어요!"

호열을 숭배하듯 무릎 꿇은 프로토타입들.

놀랄 법도 하건만.

흔들림 없이 꼿꼿하게 뻗어 가는 보폭.

얼마나 더 계단을 내려갔을까.

호열이 횃불 한 자루를 치켜들었다.

점차 거세지는 횃불의 불길 속에서.

"저, 저거!! 그때, 그 검성 맞죠?!"

모습을 드러낸 검성, 셰그윈까지.

"선배, 제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건지...?"

그렇다.

레이먼 션의 속셈조차 잊게 하는.

기상천외한 광경의 연속.

코스모 때부터 먹어온 짬밥이 있으니까.

누구보다 동요하지 않아야 할 박민재였거늘.

이 순간, 박민재는 사무실 누구보다 경악하고 말았다.

"...거대 프로토타입."

박민재는 그 정체를 알고 있었으니까.

아르카나 대륙 전기.

정식 오픈 이전.

베타 테스트 시절의 임시 몬스터로.

정확한 이름은 [프로토타입 모델 : D].

모델명의 D는 'Dragon'의 약자.

박민재가 말을 더듬었다.

"어, 어떻게 드래곤 브레스를 검 한 자루로...!"

긍지의 검로, 더없이 화려한 데뷔 순간이었다.

◈ 235화. 넘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