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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7화. 서클

나는 사건의 전말을 깨달았다.

기어코 일을 내고 말았구나, 격식아...!!

서서 잠을 자는 것도 아니고, 기절한 채로 꼿꼿하게 서 있었다니!

정말로, 육체를 지배한 흑역사가 무엇인지 제대로 느끼게 된다.

수치스럽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자고.

'그래도 다행이야.'

만약, 기절해서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고 가정해 볼까.

달칵─

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태연하게 지껄였다.

"하마터면 의복을 버릴 뻔했군."

...그래요, 그놈의 옷매무새도 물론 흐트러졌겠지요.

하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역시나 가족들이었다.

'특종감이니까.'

뉴스 속보로 아들이 쓰러진 모습을 보게 됐다면, 부모님 특히 우리 최 여사님께선 내 걱정에 밤잠을 이루시지 못하셨을 거다. 누나들도 마찬가지다.

지금만 하더라도 티를 내지 않을 뿐이지.

내가 균열에 진입할 때마다 안부를 물어왔으니까.

'그런 면에선 한시름 놨는데....'

츠릉─

...문제는 이 쇳소리의 정체가 뭐냐는 거지!

혹시 심장에 문제가 생겼나.

그래서 인공심장으로 갈아 끼우기라도 한 건가, 싶었는데.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겠지.'

내가 정신을 잃고 침대에 누워있던 건 고작해야 몇 시간 정도였으니까. 게다가 뭔가 육체에 큰 문제가 생겼다기엔 지나치게 컨디션이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메시지가 보였다.

[시공간에 당신의 업적이 울려 퍼집니다.]

[시공간의 존재들이 당신의 자격을 이야기합니다.]

[칭호, '초월자'를 습득합니다.]

천천히 곱씹어서 읽어봤다.

그러고는 상태창을 확인했다.

일단, 레벨은 550으로 6레벨이 올랐다.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칭호 : 최후의 모험가, 숭고, 초월자]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550]

[능력치]

근력 : 110 / 민첩 : 120 / 마력 : 461 / 행운 : 12 / 심미 : 中

[보유 포인트 : 6]

어디서 획득한 경험치인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악크샨의 유지] 덕분에 획득한 경험치겠지.

900레벨대, 진명의 악마를 셋이나 사냥했던 지옥의 악마 사냥꾼들이었으니까. 나는 [악크샨의 유지]를 발동한 기여도만 치더라도, 6레벨 정도는 오를 법도 하지.

'내가 한 건 없지만, 일단 고맙다고 치고.'

그래서.

네 번째 왕좌의 마왕, 가미긴은 어떻게 된 거지?

확실한 건 한 가지다.

가미긴, 녀석은 분명 지옥에 떨어졌다는 것.

그래서 아르카나 대륙에든.

현실에든 다시는 모습을 드러낼 수 없다는 거겠지.

그러나 엄밀하게 따지자면 내가 가미긴을 사냥한 건 아니었으니까.

그 처치 경험치까진 획득하진 못한 건 납득할 수 있다.

씁, 신 포도라는 단어가 떠오른군.

'오히려 억울했을지도 몰라.'

아르카나의 시스템상 레벨 업의 한계치는 50레벨이다.

레벨조차 짐작할 수 없는 상위 마왕.

가미긴을 잡고 고작 50레벨 상승에 그쳤다면, 나는 억울해서 아직까지 침대에 누워 이불킥을 차며 허우적거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 빌어먹을 격식.'

물론, 내적으로만 말이지.

그런 이유로 경험치 대신 습득한 보상에 눈길이 갔다.

칭호도 이걸로 세 개째였으니, 슬슬 익숙해져야 했거늘.

...어째 낯설다?

업적이 울려 퍼진 곳이 아르카나 대륙이 아니라 '시공간'이라고?

거기가 어딘지도 모르겠는데, 그다음 메시지는 더 가관이다.

"시공간의 존재들이 나의 자격을 이야기한다...."

자격이라면 칭호, '초월자'의 자격을 말하는 건가?

시공간이 뭔지도 모르는데, 시공간의 존재들이 누군지 알 턱이 있나.

하지만 눈치로 짐작해 봤을 때.

'대충 봐도 대단한 사람들이겠지?'

그래도 초월자 칭호를 습득한 걸로 봐선 나에 관한 이야기는 좋게좋게 끝난 모양이다. 누군지는 몰라도 고마우신 분들일지도 모르겠군.

생각을 마치기도 잠깐, 나는 입을 열었다.

"나의 자격을 논한다? 용납할 수 없는 일이군."

물론, 내 생각과는 별개로.

그랑펠의 고고한 긍지가 남의 평가를 인정할 리 없었지만.

고집은 알겠다만, 이럴 땐 좋게 넘어가자 그랑펠.

무려 상위 마왕을 지옥에 처박아 넣고 습득한 칭호.

그래도 살짝 기대해볼 만하지 않나...?

나는 적당한 기대를 품고, 칭호의 효과를 확인했다.

그리고 경악했다.

[초월자 :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 효과가 봉인됩니다.]

...밑 빠진 독이 드디어 일을 냈구나 싶어서.

*

나는 다음 날까지 안정을 취하고 일상으로 복귀했다.

그런 내게 마르셀로는 축하인사를 건네왔다.

"서클의 경지에 오르시다니, 축하드립니다."

『서클』.

내가 마탑에서 탐독한 마법 서적이 몇 갠데. 그 개념을 모를 리가 있나. 쉽게 말해 서클은 모든 마법사가 도달하고자 하는 궁극의 경지였다.

『심장의 고리는 마력의 순환을 더욱더 빠르고 정순하게 흐를 수 있게 한다. 정순한 마력의 효율은 그렇지 못한 마력과 출력에서 상당한 격차가 존재하며....』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간단했다.

"경을 보며 제 부족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랬다.

마탑의 진짜 수석인 마르셀로조차도 형성하지 못한 게 바로 서클이란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자각할 수밖에 없었다.

츠릉─

심장박동 대신 들리는 쇳소리의 원인을 깨달았단 거지.

과정은 생략하고, 결과만 보자.

나는 상위 마왕 처치라는 어마어마한 업적을 세워, 초월자의 자격을 갖췄고, 그로 인해 서클을 개방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꼼수로 날로 먹을 수 없다는 거겠지.'

550레벨.

초월자라고 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그릇 때문에 심장의 고리를, 서클을 제대로 순환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츠릉거리는.

걸걸한 쇳소리도 그 때문에 들려오는 거였고!

"축하받을 일이 아니라네."

서클이란 걸, 써먹지도 못하는데 무슨 축하를 받겠다고.

나는 담담하게 말했거늘.

표정을 보아하니, 또 멋대로 착각하고 있구나 마르셀로.

"그렇습니다. 경에게는 서클조차도 그저 거쳐 가는 경지에 불과할 테니 말입니다."

아니, 그런 과대평가가 나를 이 악물고 발버둥 치게 한다니까?! 억울함에 가슴팍을 들이밀고, 츠릉거리는 심장 소리를 들려주고 싶었건만.

이놈의 주둥이가 진실을 말할 리가 있으랴?

"서클 이상의 경지라, 흥미가 생기는군."

...말 돌리려는 속셈이 뻔히 보이는구나, 그랑펠.

그나저나.

꼼수든 뭐든, 상위 마왕을 지옥에 처박아 넣었단 말이다.

그런데 효과 봉인이라니.

억울해서라도 안 되겠다.

'그 조건이라는 거 어떻게 해서든 충족시켜 봐야지.'

단순하게 레벨이 부족해서 그런 건 아닐 거다. 그런 거였으면 시스템 메시지로 떠올랐겠지. 그나저나, 그 조건을 어떻게 알아내야 한단 말인가....

마음 같아서는 시공간의 존재들을 붙잡고 물어보고 싶구나.

'일단, 마법 서적부터 들춰봐야 하나.'

벌써부터 머리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내가 꾸역꾸역 방법을 떠올리던 때였다.

마르셀로가 입을 열었다.

"역시, 경이시라면 보다 먼 미래를 내다보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또 뭔 소리야.

당장 서클부터 해결하지 못했는데, 뭔 미래?

그러나 내 얼굴에 의문은 드러나지 않았으니.

마르셀로가 말을 이었다.

"탑주께서 자리를 비우신 현시점에 마탑에서 서클. 그리고 그 이상의 경지에 관해 알고 있는 분은 유그위드 원로 마법사님뿐이십니다. 그에 관련해 대화를 나눠보신다면...."

...아차.

잠깐, 잊고 있었다.

악크샨처럼 마탑에도 선배님이 계셨지?

*

마탑의 원탁 회의.

특별하게도 마탑의 마법사만 참석한 게 아니었다.

원래는 유스라의 황금 궁전에서 모여야 할 인물들이 크리스탈 홀에 모여있었으니까.

사유는 간단했다.

"무리하시면 안 되지."

쓰러졌던 호열을 위해서였다.

히사기가 뱀눈으로 남태민을 흘겨봤다.

"그런 것치고는 들뜨셨군요."

"...."

참자.

남태민은 대꾸하지 않았다.

히사기의 클래스는 마창사로 육탄전만큼이나 마법에도 능숙했다.

마탑이 성전에 참전하며, 견습으로 받아들인 플레이어 중에는 히사기도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저는 제집처럼 편안한데 말입니다."

하르콘 밑에서 훈련은 훈련대로 받고, 마탑에선 마법까지 향상시키고 있다니. 반칙이잖아, 이건! 부럽다. 그게 바로 남태민이 이를 악물고 히사기를 무시한 이유였다.

"뭐, 처음이라면 눈이 부실 수도 있습니다. 확실히 아름다우니까요, 크리스탈 홀의 전경은. 그렇지 않습니까, 레오니 씨?"

쪽팔려서 떨어져서 앉았더니 왜 아는 척하고 지랄?

레오니는 엮이기 싫어서 입을 다물었지만.

이번엔 남태민이 고개를 돌려왔다.

"역시, 너도 나랑 같은 생각 하고 있었구나?"

넌 또 뭔데?

"뱀눈, 진짜 재수 없지 않냐?"

정말로 안 맞는다, 거대 연합.

레오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털어내자 키치는 슬쩍 말을 걸었다.

지은 죄가 많은 마탑에서 가만히 눈치만 보고 있자니 지루했거든.

"셋은 사이가 좋네요, 친구 사이?"

"...?"

찌릿─

'아, 괜히 건드렸다.'

삐죽거리는 머리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고슴도치가 따로 없잖아?

까칠한 반응에 키치는 본전도 건지지 못했구나, 탄식을 삼켰다.

'...아니다, 그래도 같은 편이니까.'

그러나 곧 레오니가 눈가에 힘을 풀었다.

그래, 죄는 저 두 덩어리한테 있는 거니까.

레오니가 성질을 죽이고 대꾸했다.

"그냥 비즈니스 관계예요."

"그럼, 나랑 똑같네!"

"그림자 용병단, 키치 단장님이시죠?"

"맞는데, 단장님이 뭐야. 그냥 편하게 불러요."

"그럴까?"

...아니, 그렇다고 바로 반말을 깐다고?

'누가 봐도 내 쪽이 연상인데?!'

키치는 그제야 레오니의 걸걸한 입버릇을 떠올렸다.

괜히 편하게 부르라고 했나.

살짝 후회됐지만,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그보다....

"원탁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의 말에 정적이 찾아왔다.

더 이상 재잘거리기엔 눈치가 보였거든.

키치는 크리스탈 홀의 분위기를 살폈다.

'뭐가 이렇게 빡세?'

마탑.

규율이 엄격하다는 건 소문으로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많은 인원이 모였는데.

숨소리말고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고?

'무서울 정도네, 진짜.'

이 또한 호열.

정확히는 호열의 격식이 가져온 변화라는 걸.

키치는 알아차릴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괜히 마탑이 아니라는 건가?'

키치가 새삼 마탑의 위엄에 감탄하던 순간.

마르셀로가 본론을 꺼냈다.

"마왕 쟁탈전에서 우리는 승리했습니다. 단순한 승리를 넘어서 계획했던 목적을 달성. 상위 마왕을 처치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담담한 승리 선언이 떨어지자 침묵은 깨져버렸다.

계획에 관해 알고 있던 건 극소수에 불과했으니까.

"잠깐. 상위 마왕이라고?"

"마왕 출현 메시지, 그게 진짜였던 거야?"

"역시 착각한 게 아니었어!"

"...근데 마왕을 벌써 처치했다고?"

웅성웅성─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았다.

출현 메시지는 분명, 균열이 클리어되고 무너지는 찰나에 떠올랐단 말이다.

대체 누가, 그런 찰나에, 적정 레벨 800~900짜리 균열에 출현 메시지를 띄우는 상위 마왕을 쓰러트릴 수 있단 말인가?

의문에 대답하듯 마르셀로가 말했다.

"계획대로 이호열 수석께서 해내신 겁니다."

"...!!!"

...이호열이라고?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가 혼자 [20번째 왕좌] 균열에 진입했다는 것까지는.

업데이트 내역을 통해 확인했단 말이다.

그 균열에 어떤 몬스터가 등장했는지도.

"각각 900레벨이 둘, 920레벨이 하나였어. 그걸 혼자서 처치한 것도 모자라서.... 균열이 클리어되는 순간에 상위 마왕까지 쓰러트렸다는 거야?"

말도 안 돼.

웅성거리는 마탑의 플레이어들.

그 반응에 지브릴은 코웃음을 쳤다.

"뭐가 말이 안 된단 건지."

"지브릴 양, 들리겠어요!"

"들으면 어쩔 건데요. 저는 숙련 마법사거든요? 다들 이렇게 믿음이 부족해서야."

발 없는 말이 날개를 달고 활강한 덕분인가?

플레이어를 제외한 마탑의 마법사들에게 동요는 없었다.

그러나 소란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런데, 어쩐 일로. 이 수석님께서 보이시질 않네요?"

"?"

지브릴의 말에 클레가 크리스탈 홀을 둘러봤다.

마르셀로 수석께서 단상에 오르실 때부터 짐작은 했지만.

정말 호열이 보이지 않았다.

회의에 불참하실 분이 아니신데...?

클레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소식이 있습니다."

마르셀로가 말을 이었다.

그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또한 당분간, 이호열 수석께서는 모든 수석의 업무에서 물러나 휴식기를 가지실 예정이십니다. 출탑을 비롯해 이호열 수석께서 담당하시던 모든 업무는 이제부터 제가 대행하겠습니다."

뭐라고?

"천하의 이호열이 휴식?"

"...호열 씨가?"

"!!!"

휴식을 가진다니.

분명 심상치 않은 일이었으니까.

.

.

.

마탑의 최상층.

츠릉─

유그위드와 대화를 나누고 나온 이 순간에도.

내 심장은 쇳소리를 내며 삐걱거리고 있었다.

덕분에 빌어먹게도 실감이 난다.

유그위드의 말을 한 줄 요약하자면 간단했다.

나는 이 초월자의 힘을, 소화해 내지 못하면 죽는다.

한 줄을, 한 단어로 줄이자면 주화입마(走火入魔).

그러므로 나는 결단을 넘어선, 특단을 내렸다.

스스슥─

양피지에 깃털펜을 휘갈겼다.

『휴직계

신청자 : 이호열

소속 : 수뇌부

직위 : 수석....』

"때론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도 필요한 법이지."

...다 좋은데. 사유에 혼잣말까진 적지 말아줄래, 그랑펠?

◈ 178화. 모든 것이 무르익는다 (1)

생각해 보면 정말 쉴틈 없는 나날이었다.

일단, 지긋지긋한 무한 반복 클래스 퀘스트부터 시작해서. 거악을 쓰러트리면 마왕이 튀어나오고. 마왕을 쓰러트리면 악마 숭배자가 튀어나오고. 그걸 쓰러트리면....

'결국엔 상위 마왕, 가미긴까지 달려왔으니까.'

적 앞에서 밑천을 드러낼 순 없는 법.

밑 빠진 독에, 파놓은 우물에서 퍼올린 물을 채워넣으면서 말이지.

하지만 경지부터는 구멍을 용납하지 않는 모양이다.

달칵─

"이른 오전의 차도 나쁘지 않군."

오전, 9시.

원래라면 마탑에서 한창 수석의 업무를 수행하던 시간이다. 보자, 지금쯤이면 벤쉬의 출탑 신청서에 가차없이 불합격을 휘갈길 타이밍인가?

짹짹─

지저귀는 새 소리.

그러나 나는 유스라 왕국의 집무실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찻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제출한 연차, 아니, 휴직계가 무리 없이 통과됐으니까.

막말로 얼마 만에 제대로 된 휴식이냐, 이게?

내가 티를 내지 않아서 그렇지.

티를 냈으면 말이야.

하루 종일이 뭐냐.

일주일 내내 징징거릴 자신도 있었다.

그동안 진짜 죽을만큼 힘들었으니까!

아니, 막바지엔 [첫 세계수의 축복]이 없었다면 과로사로 눈을 감았을지도 모른다.

현실도 모자라서.

[마안의 망원경]을 획득한 이후부터는 아르카나 대륙의 상황까지도 염두에 두고 머리를 굴려야 했으니까.

하지만 이 주둥이가 엄살을 용납할 리 있나.

"곧 그대들에게 돌아가겠다."

멋있게 말하지 마라, 그랑펠.

지금은 폼 잡을 때가 아니란 말이다.

이 순간에도 서클의 고리는 내 심장을 옥죄어 오고 있었으니까.

나는 유그위드의 말을 떠올렸다.

-"서클을 형성하시다니. 저 스스로가 부끄러워질 정도의 성취로군요, 이호열 수석. 이래서는 이 수석에게 원로 대접을 받지 못해도, 섭섭할 자격이 없겠습니다?"

서글서글한 얼굴로 뒤끝 가득한 말을 뱉었지, 유그위드.

역시 무섭다, 마법사란 족속...!

그래도 유그위드는 성심성의껏 서클에 대해 설명해 줬다.

-"쉽게 말해 서클은 말의 고삐와 같습니다. 이 수석께서 고리를 쥐고 거칠게 흔든다면, 마력은 성난 말처럼 날뛰겠지요."

서클을 형성한 마법사의 마법은,

그렇지 못한 마법사의 마법을 압도한다.

서클을 형성하기 전후의 마법 위력을 수치로 표현하면 최소 수에서 일십(一十)배의 격차가 난단다.

-"그러나 고삐와 마찬가지로 서클을 다루는 데에는 섬세한 통제가 필요하답니다. 이 수석께서도 알고 계시다시피 서클은 심장에 형성되니까요."

그렇다.

서클을 다루기 위해서는 그만한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말보다는 몸으로 느끼는 게 빠르려나.

나는 천천히 마력을 끌어올렸다.

둥실─

허공에 떠오른 마력의 구체, 라이트.

하도 우려먹은 기초 마법이기에 탐색, 간섭 과정은 가뿐하게 생략.

나는 라이트의 빛을 유심히 살폈다....

역시나, 출력의 변화랄 건 없다.

츠릉─

물론, 심장이 죄어오는 느낌도 아직은 없다.

[초월자 :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 효과가 봉인됩니다.]

그 메시지로 봤을 때, 서클은 형성만 됐지 작동하지 않는 모양이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는 칭호의 효과가 봉인된 것에 감사해야 되는 건가?

아직 능력을, 그릇을 만들지도 못했는데.

다짜고짜 서클의 고리를 쥐고 흔들었다면....

서서 기절이 뭐냐.

꼿꼿하게 서서 심장마비로 황천을 건넜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탑주님께서 기뻐하실 소식이군요. 종종 아쉬워 하셨거든요. 마탑에 자신과 마법적 식견을 나눌 마법사가 없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죠."

유그위드의 말에 나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르카나 대륙, 최강의 무력 집단 마탑.

그 천하의 마탑에도 서클을 형성한 마법사는 탑주 하나뿐이었다는 사실을. 그러니까 실감이 났다. 나 정말 말도 안 되게 중간 과정을 생략해 버렸구나...!

그러니까 주화입마에 걸린 것도 이해가 된다.

내 마력은 잘 쳐줘야 숙련 마법사와 엇비슷할 터.

그런 마력에 서클이라는 고리를 채워버린 셈이니까.

쥐고 흔들 수 있는 고삐가 되기는커녕 묵직한 족쇄가 될 수밖에.

츠릉─

"쉴 새 없이 날뛰는군."

하지만 이놈의 긍지가 어디 자신의 부족함을 쉽게 인정한단 말인가?

팟─

이내, 허공으로 흩어지는 마력 구체.

나는 태연하게 지껄였다.

"이토록 거친 야생마를 다루는 건 오랜만이군."

...그 발언은 서클이 야생마라는 거지?

이젠 비유까지 써먹는 거냐, 그랑펠.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진짜로!

경악하면서도 사실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였다.

만약, 내가 온전히 이호열이었다면.

지금쯤 나는 불치병에 걸렸다면서 온갖 처량을 떨고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우리 긍지 높으신 그랑펠 님 덕분에. 나는 일찌감치 준비하고 있었다.

"그 야성을, 내가 친히 굴복시켜 주마."

츠릉─

주화입마.

내 심장에 깃든 초월자의 힘.

서클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한 발버둥을!

*

스슥.

마르셀로의 집무실.

책상 위에는 수많은 서적과 서신이 쌓여있었다.

마르셀로는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나약해진 육체 때문에 알아차리지 못했었다니.

작게 웃음이 나왔다.

"저도 모르게 많은 신세를 지고 있었군요."

마법사란 족속이 어떤 이들인가?

진리를 갈구하듯 새로운 것을 보면 탐구하고 싶어하는 이들이다. 균열은 물론, 모험가들의 세계에 대해서도 궁금한 점이 많은 게 당연하겠지.

출탑 신청서만 하더라도 그 양이 상당했다.

"경의 말씀대로 모든 것은 절차에 따라...."

엄격하게 살피는 출탑의 목적.

그렇게 출탑 신청서를 결제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마르셀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래서야....

"...정말, 하루하루가 부족하셨겠군요."

마탑에 머물며, 오직 마탑만을 관리하는 자신과 호열은 달랐다.

유스라 왕국, 프로스트, 심지어는 이곳 모험가들의 세계에서까지.

호열이 떠맡은 짐의 무게는 감히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였으니까.

"중요한 시기에 잘 결정하셨습니다."

서클을 형성한 지금.

경에게도 서클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시겠지.

그런 의미에서 지금 같은 적기가 없었다.

무(無)로 돌아간 마왕 쟁탈전.

거기에 상위 마왕, 가미긴까지 지옥에 떨어진 지금.

아르카나 대륙에서 악마들의 활동은 잠잠해진 참이었으니까.

마왕성 균열 때처럼 착각이 아니었다.

그때와 다르게 [마안의 망원경]으로 아르카나 대륙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사기가 꺾일 대로 꺾인 악마들의 모습을 목격했다는 것이다.

"경의 빈자리를 채워보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렇게 중얼거린 마르셀로의 깃털펜이 사각거렸다.

"벤쉬 윌리엄 선임은 조금 더 분발하셔야겠군요."

『불합격』.

*

세계는 평화로웠다.

단, 한 명의 인명 피해도 없이 열두 개의 균열을 클리어한 영웅들이 있었으니까. 균열 곳곳에서 영웅담이 들려오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라이언 하트 기사단, 네임드 몬스터 격퇴!]

[선임 마법사, 그리고 마탑의 강함에 대하여.]

[최강의 방패, 여신교단의 성기사들.]

[소수 정예 끝판왕, 그림자 용병단의 맹활약.]

큰 관심을 받는 건 역시나 맹활약한 아르카나인들이었다. 수많은 플레이어들, 그리고 카메라 렌즈 앞에서 압도적인 무력을 증명한 셈이었으니까.

"크하하하!"

황금 송아지 주점.

조금도 그립지 않던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락키드가 대낮부터 두 번째 술통을 깠다.

"끝판왕.... 뭔 말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왕이면 좋은 거겠지? 빌어먹을 세상이 드디어 락키드 님의 진가를 알아보는구만!"

엘시도어에게 당했던 패배는 여전히 쓰라렸지만....

뭐, 그쪽은 우리 고용주님께서 처리하신다고 했으니까.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그보다는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싶었다.

"자, 뭐라고 떠들어 대는지 보자고."

락키드는 투박한 손가락으로 리모컨을 눌렀다.

삑─

곧장 그림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자, 악마를 도륙 내던 이 몸의 도끼가 나올 차례로군."

그런데....

아무리 기다리고 술을 몇 통씩이나 비울 때까지도 락키드의 모습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하루 종일 똑같은 인물에 대해 떠들어댈 뿐이었다.

고용주, 이호열!

"크흠."

엘시도어 때 받은 도움을 생각하면....

호열을 원망하기에는 얼마 남지 않은 양심이 찔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러려니 하고 넘기기는 또 억울했다.

결국, 락키드는 애꿏은 술만 연거푸 들이켰다.

쾅!

"뭔, 할 말이 그렇게 많아서 종일 떠드는 건데?!"

락키드는 이해할 수 없어도, 주점에서 숨 죽이고 있던 플레이어들은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 존재를 드러냈을 때부터 행보에 숨김이 없던 호열이었다.

"심할 땐 파파라치가 따라붙을 정도였죠?"

왜, 플파라치라고.

플레이어 사이에서도 악명 높은 놈들이 정보를 캐보려고 호열에게 따라붙은 적이 있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저건, 컨셉질이 분명하다. 반드시 실체를 밝혀내겠다고. 밝히기만 하면 돈방석에 앉을 거라고 군침을 삼켰었죠. 다들."

물론, 얼마 가지 않아 전부.

혀를 내두르고 사라지고 말았지만.

말 그대로 쳇바퀴였다.

마탑, 균열, 마탑, 유스라 왕국....

일탈은커녕.

욕구가 존재하는 인간이 맞기는 한 것인가?

의심이 될 정도로 규칙적인 일과를 반복하던 호열이었으니까.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던 건 신화의 길드 마스터, 백이설이 호열에게 접근했을 때였다.

"몇 연속이었죠? 10연속 퇴짜? 하여튼, 그 문전박대를 보고 플파라치들도 이호열 쪽으로는 카메라 들이댈 생각도 안 하더라고요."

그런 일과를 반복하면서도.

무수한 균열을 클리어해 온 이호열이었다.

그런 호열이 짐을 내려놓고는 휴식기를 가진단다.

세간의 관심이 그 첫 휴가에 집중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플레이어 커뮤니티에선 벌써 떡밥 굴러가고 난리도 아니더라고요! 뭔가 엄청난 퀘스트를 받은 거 아니냐는 추측도 있고...!!"

.

.

.

시간이 생기니 늘어나는 것은 인터넷 서핑 시간이었다.

긍지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냐고?

그럴 리가 있나.

"급하다고 한들, 기이에 소홀할 순 없겠지."

이쯤 되면 긍지를 초월한 합리화가 아닐까?

의문이 들었지만, 태클을 건다고 저항할 수 있는 긍지가 아니다.

그보다.

'내 휴가에 왜 이렇게 관심들이 많으신 거래?'

마르셀로를 통해 원탁 회의에 휴직계에 관한 소식을 발표했으니까.

플레이어들을 통해서 세상에 알려지는 것까지는 예상을 했다.

그래서 나름대로 각오는 했다만, 기대 이상으로.

상당히 부담스러운 관심이 아닐 수 없군.

-ㄹㅇ 월드 퀘스트 아님? 상위 마왕이 엮였는데?

-솔직히 월드 퀘스트만 되겠음? 메인 예상함

-메인 퀘스트가 뭔데 씹덕아

-애초에 메인퀘가 실존하긴 함?

-사실 나도 모름 ㅈㅅㅋㅋ

-떡밥이 떡밥이다 진짜 어그로 오지네;;

뭐냐, 무슨 착각을 하는 건데 다들?

내가 월드 퀘스트를 성공한 것보다 대단한 업적을 세우기는 했다만.

그러면 뭐 하냐?

그 보상을 제대로 소화시키지도 못하고 있는데!

거창한 게 아닌 폐관수련 비슷한 거란 말이다.

"상상력이 빈약하군."

...빈약한 건 너의 양심이다, 그랑펠.

제발, 말이 씨가 되는 소리는 그만하자.

특히나 지금 순간에는 더욱더 민망해지니까.

나는 간절하게 바라며 시선을 옮겼다.

내가 민망하다고 한 이유가 바로 눈앞에 있다.

휴직계를 제출한 첫날.

나는 월드 퀘스트, 메인 퀘스트의 장소도 아닌.

유스라 왕국에 있었다.

정확히는 유스라 왕국 별실의 텃밭에 꼿꼿하게 기립했다.

흔들리지 않는 자세.

정확한 팔의 각도.

격식 넘치는 모습으로 텃밭에 물뿌리개를 흩뿌렸다.

그럴싸하게 지껄였다.

"길들이는 데에도 여러 방법이 있는 법이지."

그렇다.

발버둥도 쳐본 놈이 쳐보는 거라고.

그동안 내가 파놓은 우물이 몇 개인데.

아까워서라도 할 수 있는 건 다해봐야지 않겠어?

『비약초의 육성법』.

주화입마.

비약초로 극복할 수 없다면.

비약초가 성장한 영약은 어떠냐.

◈ 179화. 모든 것이 무르익는다 (2)

영약(靈藥).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비약초를 영약이라 부른다.

당연하게도 영약의 가치는 상상 초월.

아니, 측정불가라고 하는 게 맞으려나.

애초에 영약은 아르카나, 어떤 경매장에도 출품된 적이 없었으니까.

옛날부터 높으신 분들께선 자기 몸 하나 보존하는 데에 열과 성을 다하는 법이다.

비약초 관련 서적에 따르면, 고대 왕국 시절부터 왕과 귀족들은 영약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다고 한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가장 많은 영약을 복용한 인간은 '철완의 우루스'이다. 타고나길 약골로 태어난 그는 살기 위해 영약을 복용했다가 영약의 진가를 깨닫게 됐다....』

나중에는 드넓은 백작령을 영약과 맞바꾸어.

결국엔 떠돌이 몰락 귀족이 되고 말았다는 옛날이야기....

모든 옛날이야기엔 교훈이 있는바.

그 구절을 읽으면서 나도 고개를 끄덕였었지.

이래서 약물 중독이 위험하구나, 하고 말이야.

그런데 내가 그런 영약을 탐하게 될 줄이야!

영약이 필요한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비약초의 효과를 떠올렸다.

'아무리 귀한 비약초라고 해도 스탯 상승이 끝이야.'

하이엘과 계약을 맺었던 [포식자의 늪지대]에서 습득했던 사색 겨우살이만 해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영약의 효과는 고작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스탯 몇 포인트 올랐다고 그런 변화는 일어나지 않아. 절대로.'

나는 불가능하다, 확신할 수 있었으니까.

확실한 증거가 있잖아?

스탯이 오르든, 말든.

매일같이 벅찬 육체 단련 클래스 퀘스트.

『우르스의 격변은 당시에도, 이 서적을 집필하는 지금도 설명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검을 제대로 쥘 악력조차 없던 사내가 주먹으로 수도성의 성문을 박살 내버린 것이었다....』

그 탓일까?

서적의 말미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영약이라 부를 정도로 오랜 기간 뿌리내리고 자란 비약초들의 대다수는, 이미 고대 왕국 시절 무렵, 아르카나 대륙에서 모습을 감췄다고 전해진다....』

하여튼 몸에 좋은 거라면.

사족을 못 쓰는 건 만국 공통이구나.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의 소유자.

아르카나 대륙 모든 식물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내가 아니던가? 그러니까 귀하디귀한 '영약'의 지식 또한 내 머릿속에는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랬다.

지금 내가 물을 주고 있는 건 전부 영약으로 자라날 가능성이 있는 비약초들이었다.

누군가는 묻겠지.

아니, 비약초만 해도 귀하신 몸 아니었냐고.

그런 비약초는 또 어디서 구해와 심은 거냐고.

나는 당당하게 대답해 주겠노라.

역시, 구질구질하길 잘했다고.

[만물과 통하는 지도]

[등급 : 에픽]

[제한 : 없음]

[효과 : 누군가 몰래 감춰둔, 누군가 잃어버린, 어딘가에 숨겨진 무언가의 위치를 알 수 있다. 또한 단 한 번, 무언가의 위치로 순간이동할 수 있다.

단, 순간이동 효과 발동 시 모든 효과를 그 즉시 상실한다.]

[설명 : 사용하기에 따라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진 마도구.]

마르셀로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아르카나 대륙으로 순간이동할 수밖에 없던 상황.

청렴결백, 물질에 연연하지 않는 그랑펠과 다르게.

나, 이호열은 물질에 대한 욕심을 포기할 수 없었으니.

[육망성 브로치]와 마찬가지로 나중에 써먹을 가능성이 있는 아이템의 위치를 미리미리 알아뒀단 말이지.

-"영약이라. 내겐 무의미하거늘."

그렇게 중얼거린 기억이 있지만....

그랑펠의 딴죽에도 잘 참았다, 호열아.

이 구질구질함이 나를 살릴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 덕분에 나는 내게 약 혹은 독이 될 영약을 구분할 수 있었다. 그렇게 추려낸 영약은 두 가지다.

만년설꽃.

작열하는 해바라기.

서클은 마법사의 경지였다.

당연하게도 서클을 활성화하려면, 내 비루한 마법적 능력을 끌어올려야만 했다.

그 방법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일단은, 그중에서도 가장 쉬운 지름길을 골랐단 거지.

'다른 길은 내게 너무 벅차다.'

마르셀로도 못하는 걸 내가 어떻게 해내겠어?

해낸다고 하더라도 투자되는 시간이 상당하겠지.

그때까지 이런 심장박동을 듣는 건 정중히 사양하고 싶다.

「빙결 마법 친화력을 증가시켜 주는 만년설꽃.

그와 정반대의 성질을 가진.

화염 마법 친화력을 증가시켜 주는 작열하는 해바라기.」

나는 귀중하다는 영약을 둘이나 섭취할 생각이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부작용으로 세상을 하직하고 말 테니까.

우르스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

영약에는 상당한 기운이 잠재되어 있다.

그런 영약을 다짜고짜 섭취하면?

당연하게도 몸이 받아들이지 못한다.

『우르스는 첫 영약을 복용하고 그대로 기절했다. 그로부터 꼬박 한 달 뒤에나 눈을 떴다. 그것마저도 선천적으로 약한 육체가 영약의 약효와 충돌하지 않은 덕분이었다.』

누군가는 의문이 들었겠지.

그렇게 효과가 좋은 영약이라면.

영약의 섭취자들은 전부 역사에 이름을 날렸어야 하지 않는가?

그렇지 못한 이유는 간단하다.

대다수가 영약을 먹고, 부작용으로 죽었으니까!

"추위도, 더위도 내게 영향을 줄 순 없다."

한겨울엔 패딩.

한여름에는 반팔조차 걸치지 못하게 하는 격식.

하지만 이건 고작 추위, 더위 수준이 아니란 말이다. 그랑펠.

'그냥 섭취해도 부작용으로 고생할 판에.'

츠릉─

나는 심장에 서클이란 족쇄마저 채운 상태였다.

그러니까 방법은 하나뿐이다.

만년설꽃과 작열하는 해바라기를 동시에 복용. 그 효과를 중화시키는 게 부작용 없이 마법적 능력을 끌어올리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쏴아아─

귀하디귀한 영약을 둘이나 섭취하겠다는 목표를 세웠거늘.

하는 짓은 고작 물뿌리개로 텃밭에 물이나 주고 있는 꼴이라니.

누가 보면 상추라도 키우는 거냐며 오해할 수도 있겠군.

근데, 이래 봬도 이게 단순한 텃밭이 아니거든.

-"여기 요청하신 연구 과제입니다!"

숙련 마법사, 클레.

과연, 그랑펠에게 합격을 받았던 만큼.

클레의 『비약초의 육성법』은 짧은 사이에 꽤 많은 발전을 이뤘다.

-"치유 마법으로 비약초가 성장하기에 최적의 환경을 유지한다.... 흥미로운 발상이군. 마력의 효율을 떠나서 칭찬받아 마땅하다."

비약초는 까다로운 환경에서 자란다.

아르카나 시스템적으로 말하자면....

특정 환경이 아니면 디버프가 걸린다고 설명하면 되려나?

클레의 육성법은 환경을 맞추는 게 아닌 디버프를 제거하는 데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

'물론, 마력이 말도 안 되게 들어가지만.'

가뜩이나 마력 소모량이 극심한 치유 마법이다.

그런 치유 마법을 고작 식물에 발현한다?

클레의 연구가 그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믿는 구석이....

아니, 믿는 것까지는 아니고.

'써먹을 구석'이 하나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텃밭에 만년설꽃.

그리고 작열하는 해바라기로 자라날 수 있는 비약초를 잔뜩 심었다.

여기에 하이엘의 축복을 담은 물까지 뿌린다면....

조금은 기대해 봐도 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하이엘과 만나기 위해서라도.

내일은 균열에 진입해야겠군.

나는 한가로이 지껄였다.

"싱그럽구나."

비약초 위에 맺힌 물방울.

텃밭을 가꾸는 게 타인의 시선에선 더없이 평화로워 보이겠지. 그러나 당사자인 나는 조금도 즐길 수 없는 휴가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과연, 자연보다 위대한 예술품은 없는 법이군."

...마찬가지로 이놈의 혼잣말도 즐길 수 없구나.

*

갑작스런 휴식의 이유가 무엇인가?

"분명 퀘스트 때문이라니까요?"

윤종진은 간만에 큰 목소리를 냈다.

이호열이 처음으로 세상에 존재감을 표출했던 [아스큐라 백작 성채] 균열.

그 호열의 첫 행보를 지켜봤던 윤종진이 아니던가?

"그 지독한 이호열이라고요! 시베리아 설산에서도 패딩 하나 안 걸치고 돌아다니던 이호열! 그렇게 독한 인간이 갑자기 모든 활동을 중지하고 휴식? 말이 안 되는 거거든!"

비켜라.

인내심의 한계다.

쌀쌀맞은 목소리는 아직까지 윤종진의 귓가에 선명했다.

윤종진의 강한 주장에 현용석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

"그래서, 네 말은 마탑 포탈에서 대기하고 있겠다고?"

"그렇죠. 퀘스트를 수행하려면 어쨌든 균열에 진입해야 하잖아요. 플레이어들이 그 모습을 포착할 거고, 저는 포탈을 타고 딱!"

"그래, 그러든가. 의욕적인 게 보기 좋네."

분명,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겠다....

윤종진은 현용석에게 한 방 먹여주고 싶었다.

투데이 아르카나.

메인 카메라 감독으로서의 감이란 게 있단 말이다.

윤종진이 세트로 달려온 김 작가에게 말했다.

"내가 관상 하나는 잘 보거든요. 우리 고모가 무당이신데, 그래서 그런가 내가 약간 신기 비슷한 게 있어요. 우리 호열 씨 관상은 절대 쉴 수 있는 관상이 아니야."

...그럼, 내 관상은 얼마나 사나워서 여기로 끌려온 거지?

김 작가는 할 말이 많았지만, 꾹 참았다.

그리고 대충 맞장구를 쳤다.

조잘조잘.

"그런 의미에서 용 피디님 관상은 아주 가관...."

윤종진이 수다를 이어가던 순간이었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김 작가가 흠칫했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독님, 카메라! 카메라 챙기세요!"

"떠, 떴구나! 내가 그럴 줄 알았지!"

윤종진은 서둘러 장비를 챙겼다.

삼각대를 접고, 부지런히 김 작가의 뒤를 따랐다.

러시아만 아니면 어디든 환영이었다.

"그래서 어디 쪽 균열이래요?"

"균열이요? 균열 아닌데요?"

"엥? 균열이 아니라고요?"

"유스라 왕국이에요."

...아, 그런가!

유스라 왕국에서 시작되는 퀘스트로구나.

가능성은 충분했다.

유스라 왕국부터가 고대 왕국이 아니던가?

얽힌 떡밥이면 퀘스트가 무궁무진할 테니까.

그러나 윤종진의 관상학개론은.

"뭐, 뭐야 이거? 합성 아니에요?!"

김 작가가 윤종진의 얼굴에 스마트폰을 들이댄 순간.

무참히 깨져버렸다.

액정에 떠오른 사진.

거기엔 언제나처럼 고고한 자세로.

웬, 꽃밭을 가꾸는 호열이 있었으니까.

윤종진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관상이 그런 관상이 아닌데?"

"감독님, 관상 타령 그만하시고 카메라!"

"카메라? 이걸 찍으러 가자고요?"

슥─

김 작가가 안경을 올려 쓰고는 눈을 빛냈다.

김 작가에게도 감이 있었으니까.

"꽃밭을 가꾸는 이호열. 그것도 분명 수요 시청자층이 있을 거라고요. 일단, 신선하잖아요! 뭣보다 용 피디님한테 쓴소리 듣기 싫으시면...."

...아뿔싸.

고뇌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큰소리를 땅땅 쳐놓지 않았던가?

윤종진이 곧장 삼각대를 들고 뛰기 시작했다.

"황금 궁전 별실 쪽 맞죠? 먼저 가 있을게요!"

.

.

.

결과론적으로 김 작가의 감은 옳았다.

[시청률 : 21.7%]

한가로이 화원을 가꾸는 호열의 모습.

그건 누구도 목격하지 못했던 광경이었으니까.

동시에 작게나마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동안 얼마나 지쳤으면 갑자기 꽃을 키우겠냐고

-ㄹㅇ그만 좀 건드려라

-근데 저거 무슨 꽃임???

-그것도 그만 궁금해하라고!!

이호열.

그는 정말, 단순하게, 쉬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런 여론이 주를 이루자 그동안의 호열의 행보가 재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살인적인 스케쥴이었음 그냥;;;

-거기에다가 이호열 레벨을 생각해보셈

-하긴 최소 900레벨이자너

-그런 레벨을 달성했다는 건 우리가 안 보이는 데에서도 끊임없이 뭔가를 했다는 거잖아? 나도 플레이어지만 진짜 존경스럽다....

물론, 세상에는 긍지를 품은 이들만 살아가는 게 아니었다.

누구의 말대로.

빛이 있다면 그림자도 있는 법이니까.

같은 걸 보고도 딴생각을 품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어둠이 깔린 유스라 왕국, 황금 궁전.

두 개의 그림자가 어둠 속에 파묻혔다.

스킬, [은신] 발동.

두 그림자는 은밀하게 귓속말을 나눴다.

"킨베르, 그 자식이 빠진다고 했다고? 정말?"

초신성, 킨베르.

몇 번이고 다른 플레이어들과 합을 맞춰봤지만, 그만큼 확실하며 잔혹한 플레이어가 또 없었다. 무엇보다 킨베르는 작업 앞에서 내빼지 않았다.

"얼굴이 하얗게 질렸더라고."

"...킨베르 얼굴이 질려? 설명 제대로 한 거 맞아?"

"내가 병신도 아니고, 작업을 잘못 설명했겠어? 확실하게 설명했어. 누구를 죽이거나, 습격하는 게 아니다. 그냥 슬쩍 해오는 거라고."

경비병들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 황금 궁전 안으로 잠입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냥 텃밭에 있는 꽃 몇 뿌리를 뽑아오자는 것뿐이었다.

누가 감히 엄두나 내겠는가?

천하의 이호열 화원을 털다니.

하지만 해내기만 한다면.

뒷세계에서 자신들의 담력을 의심할 플레이어들은 없을 터.

"몸값을 올릴 기회라는 거지."

두 플레이어는 그걸 노리고 황금 궁전 별실에 잠입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새낀 왜 빠진 거지?"

킨베르의 [은신] 스킬 숙련도를 생각하면, 이런 어둠 속에서는 누구도 그를 발견할 수 없을 터.

하지만 킨베르는 이호열 이름이 나오자마자 못 들을 걸 들었다는 것처럼 자리를 떠버렸다.

"뭐, 쫄보 새끼 얘기는 됐어."

어쨌거나, 이호열도 자신의 화원을 터는 놈들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군.

경비병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역시, 찾길 잘했어.

"그나저나 애지중지 가꾸는 것 같았지?"

"혹시 귀한 아이템은 아닐까?"

"...흠, 풀떼기가 귀하면 얼마나 귀하다고."

슥─

두 그림자가 화원에 접근하던 순간이었다.

오소소!

"!!"

순간, 전신에 소름이 돋아났다.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

두 사내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공포가 발생합니다.]

[스킬, '은신'이 해제됩니다.]

극도의 공포감이 은신을 강제 해제하는 것도 모자라서.

팅!

들고 있던 무기마저 바닥에 떨어트리게 하였다.

이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존재감.

그 정체를 알아차린 두 사내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대체 어째서?

드래곤과 비견되는 전설의 존재.

그림자 용병단원, 락키드를 초전박살 낸 괴물.

엘프가 이호열의 화원을 지키고 있단 말인가!!

◈ 180화. 모든 것이 무르익는다 (3)

엘프.

엘시도어는 움직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움직일 수 없었다.

[축복의 위계질서]를 거스를 수 없었으니까.

엘시도어가 분풀이를 하듯 살기를 발산했다.

"으, 으아아아아!!"

마음 같아서는 빌빌대는 벌레 두 마리를 도륙 내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울먹거리며 뒷걸음질 치는 꼴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 다시는 얼씬거리지 않겠습니다!!"

"하,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면...!!"

"...."

"히이이익!!"

한참 뒤에나 찾아온 정적.

눈물, 콧물을 쏟다가 결국에는 네 발로 기어서.

두 벌레가 꺼진 뒤에야 주위가 고요해졌다.

그럼에도 엘시도어는 쉽게 살기를 거두지 못했다.

어째서 엘프인 내가.

인간 따위에게 휘둘려 이런 수모를 당하고 있단 말인가?

'...내게 이따위 꽃을 키우라고?'

기필코 죽이겠다, 이호열.

엘시도어는 투덜투덜 수준을 넘어서 속으로 저주를 외웠다.

허나, 다짐과는 다르게 몸에서는 마력이 흘러나왔다.

인간이 아니기에 인간의 수준을 초월한 마력량.

반짝─

그런 엘시도어의 마력을 흡수한 비약초들은 어둠 속에서도 싱그러운 존재감을 뽐냈다.

엘시도어는 호열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이 세계에는 그런 말이 있다."

-"...?"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

엘시도어는 현실에 떨어진 그날 이후.

황금 궁전의 별실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다고 심한 푸대접을 받았는가?

누군가 묻는다면 또 마냥 고개를 끄덕일 순 없었다.

-"그대에게 한정적인 자유를 허락하겠다."

유스라 왕국, 어디를 돌아다녀도 좋다.

단,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한다.

당연하게도 엘시도어에게는 있으나 마나 한 자유였다.

밖을 돌아다녀 봤자, 보이는 것은 버러지 같은 인간들뿐이거늘.

죽일 수 없다는 사실에 가슴만 답답해졌으니까.

-"식사입니다."

엘시도어는 별실에 틀어박힌 채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축복의 위계질서]에서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내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의 빌어먹을 어머니시여."

자신들에게 영생의 힘을 가져다준 세계수의 축복이란, 그런 것이었으니까.

더군다나 엘시도어는 깨닫게 됐다.

"편애에도 정도가 있지 않습니까."

그 대단하신 어머니의 축복이 오직 한 명의 인간.

호열에게 깃들어 있다는 것까지도.

그런 놈에게 덜미를 잡힌 이상 도망친다는 선택지는 없어졌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나.

"...누가 도망친다는 말이냐."

축복을 되찾기 전까지.

엘시도어는 꼬리를 내릴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까 호열의 말을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분명, 그렇게 말했었지.

-"원한다면 가져가 보는 게 어떻겠나?"

가져갈 수 있다면 가져가 보라고.

-"그대들 또한 세계수 앞에서 긍지를 증명해 내란 뜻이다."

엘시도어의 고민은 '긍지'를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호열이 자신을 찾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이었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그랬다.

엘시도어는 지금 밥값을 하고 있었다.

황금 궁전의 어느 누구도 공짜로 밥을 먹지는 않았으니, 엘시도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엘시도어는 화원의 꽃들을 바라봤다.

이따위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꽃과 풀들이 엘프의 땅, 시슬리에는 가득했거늘.

고작 이따위 꽃을 애지중지 키워대다니.

"흥."

하찮고, 우스워서 코웃음이 나왔다.

호열에게 처음으로 이긴 기분이 들었다.

이내, 엘시도어가 비장하게 읊조렸다.

"허나, 이 수모도 내가 긍지란 걸 되찾으면 끝날 일이다."

비장한 선언.

덕분에 엘시도어는 가벼워진 마음으로 화원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빛나는 마법진, 회복 마법이 밤새도록 비약초의 화원을 비췄다....

*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는 법.

나는 엘시도어에게 화원 관리를 맡겼다.

사실 나, 이호열의 마음 같아서는.

엘시도어를 조금 더 격하게 부려 먹고 싶었다.

누구는 힘들어 죽겠는데, 놀고먹는 게 얄미웠거든.

확 그냥, 마왕 쟁탈전에 참전시켜 버릴까?

진지하게 고민까지 해봤다.

왜, [축복의 위계질서]가 존재하는 이상.

엘시도어는 허튼짓을 할 수 없었으니까.

'최강의 전력.'

나를 포함.

유스라 왕국부터 마탑을 통틀어도 엘시도어보다 강하다고 자신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뭐, 마력 구체 속에서 부유하고 있는 마탑주라면 모를까....

하지만 그랑펠의 긍지가 내 잔꾀에 찬성할 리가 있나.

"유감스럽게도."

마왕 쟁탈전 또한 성전(聖戰)의 일부.

성전에 참전하기 위해선 조건이 있었다.

바로 자신의 긍지를 증명하는 것.

"긍지를 깨닫지 못한 이에게 성전에 참전할 영광을 내어줄 생각은 없다."

...성전 같은 개고생만 가득한 퀘스트를 영광이라고 하다니!

정말이지.

내가 맨날 개고생을 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구나, 그랑펠.

[유리하라 사막의 오아시스]

[적정 레벨 : Lv.150]

[붕괴도 : 0.7%]

포탈에 진입.

순식간에 시야가 바뀌었다.

바닷가에 생성된 균열.

덕분에 바다 위에 모래사장이 둥둥 떠있는 듯한 모습이다.

장관이 따로 없구나.

솔직한 심정 같아서는 휴직계도 냈겠다.

이놈의 재킷도, 셔츠도 벗어버리고 일광욕이라도 즐기고 싶었거늘.

"하이엘."

휴가는 개뿔이 휴가다.

느긋해 보이는 겉과 달리.

내 속은 삐걱, 아니, 츠릉거리고 있단 말이다.

곧, 하이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이엘,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언제 봐도 과하게 우아하구나, 하이엘.

나는 옷자락을 양손에 쥐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하이엘과 이야기를 나눴다.

일단, 아르카나 대륙 상황부터 시작해야겠지.

"세력 단위의 움직임은 목격되지 않았습니다."

당연하다.

마왕 쟁탈전에 참가한 악마들은 왕좌를 넘볼만한 세력을 가진 녀석들이었으니까. 그런 강자들이 아르카나 대륙에서 말끔하게 사라진 지금.

남아있는 세력은 기존의 마왕들밖에 없겠지.

"비로소 주제를 깨달은 것인가."

그런 마왕들의 활동조차 잠잠한 이유?

같은 마왕이기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을까.

상위 마왕이 어떤 존재인지를 말이야.

언어조차 통하지 않을 정도로 격이 다른 악(惡).

그런 네 번째 왕좌의 가미긴이 지옥에 처박혔다.

가미긴의 눈은 마안(魔眼)과 똑같이 생겼었으니까.

어쩌면 마왕들도 그 시야를 공유했을지도 모르겠군.

그렇다면 확실하게 이해가 된다.

-"두려움에 떨도록 해라. 악크샨이 돌아왔다."

악크샨이 돌아왔다고.

나는 가미긴 앞에서 똑똑히 선포했으니까.

...잠깐만, 그때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까 잘했다, 내 주둥이야.

'아무래도 허세가 제대로 먹힌 것 같은데?'

지옥의 문이 닫힌 지금.

아르카나 대륙엔 악크샨도, 악마 사냥꾼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건 나밖에 없잖아?

게다가 마왕 정도 된다면 분명 기억하고 있을 거다.

내가 아르카나 대륙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볼까?

'악마들한테는 진짜 공포가 따로 없겠는데.'

시체도 남기지 않고 죽었던 내가.

성전에서 절멸한 악마 사냥꾼들을 이끌고 나타나서는.

악크샨이 돌아왔다고 선언한 꼴이잖아?

하이엘이 또 한 번 고개를 숙인다.

"저 하이엘, 그 여정에 함께하지 못해 송구합니다."

나를 언제나 과대평가하는 하이엘이 이런 반응을 보일 정도라.

아이언 캐슬 호.

드워프들의 반응은 굳이 묻지 않아도 짐작이 됐다.

주눅 든 악마들을 보고 거의 축제 분위기 아닐까?

물론, 벅찬 속내와 다르게 나는 평소처럼 말했다.

"그런 건 여정도, 고생도, 시련도 아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잔바람에 불과할 뿐. 그러니 고개를 들거라, 하이엘."

"!"

그냥 선배님들 덕을 봤다, 사실대로 말하면 될걸.

잔바람이 어쩌고저쩌고.

거창하게 포장하는 능력은 나날이 발전하는구나, 그랑펠.

너도 미안해할 거 없다, 하이엘.

"그대의 능력이 필요한 순간이니 말이다."

이름 없던 하위 정령 시절에도 하이엘의 {자연} 능력은 효과가 상당했다. 고유 정령으로 격이 상승한 지금의 효과는 나조차도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런던에서만 하더라도 그랬다.

그냥 겉만 화려한 아쿠아리우 떡갈나무인 줄 알았더니, 생명력 회복 효과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비약초를 영약으로 키워내겠다는 게....

'마냥 허황된 꿈이 아닐지 몰라.'

성공만 한다면.

돌덩이를 황금으로 바꾸는 것보다도 대단한 성과가 아닐까?

서적으로 전해지는 영약의 효과와 희귀도를 생각해 봤을 땐....

[유니크]가 뭐냐, [에픽] 등급 정도는 될 테니까.

'에픽 등급 아이템을 무한 재배하는 거지!'

순간, 황금빛 꿈에 부풀었거늘.

나는 주둥이가 초를 치기 전에 머릿속에서 생각을 지워버렸다.

오냐.

말 안 해도 알고 있다, 그랑펠.

그놈의 청렴결백 때문에 물질적인 삶을 추구할 수 없다는 걸.

"아직도 제 능력을 필요로 해주시다니 기쁩니다."

그렇게 기뻐할 필요 없다, 하이엘.

아마도 앞으로도 계속 필요로 해야 할 것 같으니까.

이내, 하이엘의 축복이 오아시스에 깃들었다.

'좋았어.'

축복받은 물을 균열 밖으로 옮기는 거야 어렵지 않다.

스킬이 아닌 마법이 있으니까.

보자, 지금처럼 적당한 물병에 『공간 확장』 마법을 걸면....

스스스─

보이는 것처럼 물병 속으로 끊임없이 물이 빨려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나저나, 이걸 적당한 물병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겠군.

'...하여튼, 티타임만큼은.'

티타임의 필수품, 찻주전자.

고풍스럽게 오아시스의 물을 퍼담기도 잠깐.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인벤토리에 찻주전자를 집어넣던 내게.

하이엘이 무언가를 건네왔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긍지를 되찾았습니다."

...긍지를 되찾았다고?

그게 뭔 듣기만 해도 피곤해지는 소리야!

나도 모르게 심장이 츠릉했는데.

자세히 보니까 퀴른베르크 기계탑의 잔해였다.

'그래, 레벨도 물론 중요하지.'

적정 레벨 150짜리 균열에 진입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현재 나는 일반적인 균열 공략을 통해 레벨을 올리기가 어려웠다.

'악마족 몬스터가 넘쳐나면 또 모를까.'

악마들의 활동이 둔해진 지금.

다음 정기 업데이트 균열에서도 레벨 업을 기대하기는 힘들겠지. 그런 의미에서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축적된 경험치는 가뭄에 단비, 그 이상이었다.

"부디 평안하시기를. 나의 주군이시여."

과하게 충직한 인사를 마지막으로 하이엘이 아르카나 대륙으로 복귀. 나도 곧장 균열을 빠져나와 유스라 왕국으로 통하는 포탈을 발현했다.

경험에서 교훈을 얻는 법.

반전 마법을 발현하는 것치고 마력을 꽤나 집어삼켰지, 기계탑의 잔해는. 서클이라는 족쇄 아닌 족쇄가 채워진 상태. 최대한 편한 상태에서 반전 마법을 발현할 필요가 있었다.

달칵─

"과연, 해가 저물었음을 실감하게 되는군."

...차가 맛있다는 말을 거창하게도 하는구나.

어쨌거나.

너에게는 티백 녹차만큼 심적 평안을 주는 것도 없겠구나, 그랑펠.

나는 그러려니 하고는 천천히 마력을 끌어올렸다.

고오오─

또 한 번 칭호 시스템에게 감사하게 된다.

[초월자]의 효과로 서클이 봉인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마법을 발현할 수도 없지 않았을까.

이래서 선행학습이 무용지물이라는 거겠지.

철커덕─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하는 톱니바퀴.

다시금 빛을 되찾아 가는 마력석.

방대한 기운이 기계 장치에서 뿜어져 나왔다.

벌써 두 번째였다.

그럼에도 쉽게 적응이 되지 않을 정도의 기세다...!

머리카락이 사정없이 흩날리고, 가지런히 정리된 책상이 흐트러질 정도의 박력.

그랑펠 식으로 표현하자면.

그래.

기계탑의 긍지가 몸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어지럽게 메시지가 떠올랐다.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축적된 경험치를 습득합니다.]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축적된 명성을 습득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이번에도 한계치, 50레벨까지 노려볼 수 있으려나.

상태창을 열어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겠지.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악크샨의 일원, 퀴른베르크 기계탑의 마지막을 목격해야 한다는 말이다.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축적된 기억을 습득합니다.]

이내, 눈앞에 펼쳐지는 기계탑의 기억.

"...!"

그런데 의아한 일이었다.

내게 존재하는 십 년 하고도 수년의 공백기.

지난번 기억에서 목격했던 드레드센 마을이 낯설었던 것처럼.

웬만한 아르카나의 도시와 마을은 내게 익숙할 수가 없었거늘.

이 순간, 눈앞에 떠오른 풍경은 묘하게 익숙했다.

웅장한 성벽.

흩날리는 깃발의 문양.

심지어는 성벽 위.

고독한 사내의 얼굴까지도.

기시감이 들 정도로 익숙했다.

나는 곧,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가, 그대들도 왕좌에 목이 말랐던 것인가?"

그랬다.

쟁탈전은 악마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제국.

수도성, 안토니움.

성벽 위 사내, 황제의 목을 겨눈 반역의 칼날.

그 순간,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메인 퀘스트 : 전국시대(戰國時代)]

"...!"

◈ 181화. 모조리 자격 미달이다

──────

[메인 퀘스트 : 전국시대(戰國時代)]

격변의 시기.

향하는 것은 단순한 권력인가.

황제의 무능함인가.

그것도 아니면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인가.

대륙의 강자들은 황좌를 탐한다.

그대의 선택이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내리라.

──────

수도성, 안토니움.

제국 최후의 보루는 무너지지 않았다. 전례가 없는 피해를 입었음에도 악마에게 굴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필사의 항전.

"막아라! 목숨을 걸어라!"

"성벽이 무너지면 모든 게 끝이다!"

"죽더라도 막아내고 죽는 거다!!"

그 처절한 사투를 하늘도 가엾이 여긴 것인가?

"...그게 정말인가? 악마들이 사라졌다니!"

제국 곳곳에 난립했던 악마들의 세력이 하루아침에 궤멸해 버렸다.

그뿐만 아니었다. 악마들의 왕, 마왕조차도. 이전과는 다르게 그 움직임이 움츠러든 것이었다.

다그닥─

안토니움 인근을 샅샅이 수색하는 정찰대.

그들은 직접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이게 무슨 조화랍니까?"

전해져 온 소식처럼 정말, 악마들이 사라졌다.

마치 '무언가'에게 겁을 먹은 것처럼.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채.

"...자네는 돌아가서 폐하께 이 소식을 전하게!"

황제를 비롯해 안토니움의 모두는 안도했다.

"식량이 떨어져 가던 참이었는데 천만다행이군."

"어떤 계략이 숨어있는지는 모르겠다만...."

"부정 타는 소리는 집어치우게. 우리에겐 선택지가 없지 않은가? 그저 방심하지 않고 이 기회를 살리는 수밖에 없네."

"그래, 자네 말이 맞아."

비로소 벅찬 숨을 돌릴 틈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간과하고 있었다.

부정적인 기운을 통해서 강성해지는 악마들.

그런 악마들이 어째서.

아르카나 대륙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에도.

나날이 강해졌는지를.

그 힘의 근원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우르르─

안토니움을 향해 병사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건 악마도, 그렇다고 지원군도 아니었다.

"폐하! 유미르 공작이 병사를 이끌고...!!"

"카사노 후작, 그가 제국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제국 동부 제후들이 연합을 선포했습니다...!"

제국을 무너트리려는 반군이었다.

황제는 안토니움의 성벽으로 나아갔다.

자신을 포위한 이들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드리웠다.

"...미련하게도 착각하고 있었군."

전서구에도, 황실 마법사의 텔레파시에도 응답이 없던 그대들이었다. 미련하게도 나는 그대들이 악마에게 대패했다고 여겼다.

그대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에 밤낮으로 자책했다.

그러나.

"그대들은 애초에 나를 노려보고 있던 거였군."

황제의 입가에서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누군가의 부러움을 살 자리가 아니거늘."

그 무게에 짓눌려 압사할 것만 같은 왕관을.

그대들은 나서서 짊어지기를 원하는 것인가?

황제의 자리가 넘겨줄 수 있는 거라면.

기꺼이 넘겨주고 싶은 심정이었거늘.

휘이이이잉─

황제는 불어오는 바람에 살며시 눈을 감았다.

바람에 실려오는 냄새가 달라졌다.

피비린내도, 탄내도 이제는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모든 게 끝난 거라면."

정말, 악마들이 대륙에서 사라진 거라면.

짐이 사라져도 제국의 백성이 고통에 신음하는 날이 없다면.

짐은 기꺼이 황제의 자리를 내어주리라.

황제는 다짐했다.

"그런 마지막도 나쁘지 않을 것 같으니."

더 이상은 버티기 힘들 정도로 지쳤단 뜻이네.

황제가 눈을 뜨며 읊조렸다.

"그러니 다시 만나도 나를 너무 책망하지는 말아주게나, 하르콘. 그대에게는 지금껏 진 빚만 하더라도 청산하기 벅찰 정도이니 말일세."

쿵─

황제의 허망한 말을 끝으로.

퀴른베르크 기계탑의 시야가 옮겨갔다.

안토니움을 포위한 수많은 세력에게로.

"우리들의 동맹은 안토니움을 무너트리고, 황제를 끌어내리는 순간까지입니다. 그 이후부터는 누구의 말도 믿지 마십시오, 공작님."

악마들이 하루아침에 증발하듯 사라지기 전까지.

고통으로 신음하던 아르카나 대륙이다.

그러나 모인 이들에겐 지친 기색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악마와 맞서지 않았으니까.

고통에 신음하는 백성들을 외면한 채.

쥐죽은 듯 성에 틀어박혀 오늘을 위해 힘을 비축해 왔으니까.

"대륙은 새로운 황제를 원한다!"

"황제여! 그대의 무능이 대륙을 이 꼴로 만들었다."

"이것은 반란이 아닌 혁명이다!"

쿠궁─

목적은 오직 악마 사냥뿐.

기계탑에 옳고 그름을 구분할 능력은 없다.

단지 안토니움의 풍경을 기억 장치에 담았을 뿐.

쿠궁─

퀴른베르크 기계탑이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이었다.

그 앞을 사내 하나가 가로막았다.

짙푸른 머리칼.

새파란 눈동자.

그리고 그보다도 서슬 퍼런 검강(劍罡).

청년으로 보이는 사내는 입을 열었다.

"이게 쓸데없는 짓을 하고 다닌다는 기계인가."

슥─

그러고는 망설이지 않고 기계탑을 향해 검을 겨눴다.

보는 것만으로도 찬 기운이 느껴질 정도로 푸른 검강이었다.

그 밝기가 눈이 시릴 정도로 선명했다. 대낮에도, 심지어는 검기(劍氣)를 깨우치지 못한 자들의 눈에도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강렬했다.

한마디로 검강, 그 이상의 검강이었다.

주위가 웅성거렸다.

"저분이 바로 셰그윈 경...!"

검성(劍聖), 셰그윈.

대륙 유일의 그랜드 소드 마스터.

그와 동시에 초월자.

"한데, 셰그윈 경께선 어찌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검을 겨누신 것이지?"

"...악마들의 활동이 뜸해져서?"

"그 가치가 빛이 바랬다는 것인가? 아니, 그러하더라도 검을 겨눌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아직도 마왕들이 아르카나 대륙에서 웅크리고 있다고...."

쏟아지는 우려 속에서.

셰그윈이 삐딱하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나는 소란스러운 게 질색이다."

스아아아악!

그러고는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다.

셰그윈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쿠구구구궁!

그러자 퀴른베르크 기계탑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일도양단.

무수한 톱니바퀴를 피처럼 쏟으며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비현실적인 광경.

꼴깍!

그 초월적인 무력은 셰그윈을 적으로 돌리게 된 안토니움.

심지어는 그와 연대하게 된 이들조차도 경악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러나 기계탑은 경악하지도, 동요하지도 않았다.

마지막 순간.

기계탑이 기억 장치 속에 담은 것은 그저 셰그윈의 한마디.

-"이게 그 쓸데없는 짓을 하고 다닌다는 기계인가."

악마의 천적.

꺼진 악마조차도 다시 보는 악마 사냥꾼.

악크샨의 긍지를 이은 결전병기였으니까.

악마 사냥을 쓸데없는 짓이라 말한 데에는 분명 그 이유가 있을 터.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여. 부디, 셰그윈의 속내를 간파하기를 바란다....

쿵!

.

.

.

나는 연달아 떠오르는 메시지를 바라봤다.

[퀘스트 : 쓸데없는 짓]

셰그윈은 악마 사냥을 쓸데없는 짓이라 여겼다.

셰그윈과 대화를 나누고,

행동의 진위를 파악하라.

─셰그윈과 조우하라. (진행 중)

좋아,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자.

내용은 둘째 치더라도 각오는 했던 바다.

말했다시피 나는 경험자잖아?

악크샨의 전통.

다른 악마 사냥꾼이 남긴 퀘스트를 이어받아 수행하는 것쯤은 예상했단 말이다.

...근데 뭔데, 이 스케일은?!

일단, 퀘스트부터가 하나가 아니었다.

[메인 퀘스트 : 전국시대(戰國時代)]

아니, 갑자기 메인 퀘스트라뇨.

나는 그랑펠을.

이놈의 입방정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진짜로 말이 씨가 됐잖아!'

백번 양보해서 내 상태가 멀쩡했다면 반겼을지도 모른다.

메인 퀘스트라니.

월드 퀘스트와 달리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도 존재 여부로 찬반이 나뉠 정도로 관련 정보가 전무.

심지어는.

"창조주의 편린을 탐구하는 자들조차도 알지 못하는 이야기인가."

...허세는 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하구나, 그랑펠.

담백하게 말하자면 AAU에도 메인 퀘스트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는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시스템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법이다.

거기에다가 굉장히 그럴싸하잖아, 이거?

'로망이지, 플레이어라면 한 번씩 품을 법한.'

제국의 황제가 될 수 있는 퀘스트라면.

과연, 메인 퀘스트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을 테니까.

하지만 말한 것처럼 문제는 내 상태다.

내 코가 석 자인데, 퀘스트가 뜨면 뭐 하냐고!!

메인 퀘스트?

악크샨 퀘스트?

전부 좋다, 이거다.

하지만 그 전에 츠릉거리는 서클, [초월자]의 효과를 해방하는 게 먼저였다. 그래, 그랑펠아. 네가 그토록 중시하는 '절차'를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그야 나는 똑똑히 들었으니까.

'악마 사냥이 쓸데없는 짓이라니.'

검성.

동시에 대륙 유일의 그랜드 소드 마스터, 셰그윈.

퀴른베르크 기계탑이 남겼던 셰그윈의 모습에서 나도 찝찝한 냄새를 맡았단 거지.

혹시 악마와 관련이 있는 건가, 하는.

'뭐, 그냥 노파심이면 좋겠다만.'

어쨌거나 악크샨의 퀘스트를 수행하기 위해선 셰그윈과 조우해야만 했다.

[만.통.지]가 효과를 상실한 현재, 셰그윈을 만날 방법이라곤 균열의 우연성에 기대는 것밖에 없겠지. 혹시라도 우연이 겹쳐 만나게 된다면....

'일단, 충돌을 피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천하의 그랑펠이 그냥 넘어갈 수 있겠냐고.

셰그윈은 멀쩡한 기계탑을 박살 내버렸다.

그랑펠에게 있어선 동료를 부숴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행동이거든.

그러니 나는 냉랭하게 읊조렸다.

"경솔한 행동에 대한 책임은 엄격히 따져 묻겠다."

그러니까 더더욱.

어떻게 해서든 서클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초월자로, 급이라도 맞춰야 말이라도 섞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이 순간.

무엇보다도 앞서는 생각은 따로 있었다.

안토니움.

성벽에서 씁쓸한 표정을 짓던 황제.

그런 황제의 오른팔이었던 하르콘이었다.

'하르콘이 이 소식을 알게 된다면....'

하르콘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황제를.

안토니움을 구원하기 위해 움직이겠지.

그렇다면 [메인 퀘스트]의 행방은 어떻게 될까?

나는 퀘스트 목표를 바라봤다.

─안토니움을 함락하라. (선택)

─안토니움을 수성하라. (선택)

[전장 퀘스트]처럼 세력을 선택하는 퀘스트 목표.

나는 냉정하게 양측의 전력을 가늠했다.

공성전은 기본적으로 수성측이 유리하다.

게다가 무수한 악마의 습격에도 무너지지 않은 안토니움이었거늘. 그런 안토니움도 슬슬 한계에 봉착했고, 포위한 세력의 숫자 또한 상당했다.

게다가 나는 두 눈으로 확인하고야 말았다.

검성, 셰그윈의 압도적인 무력을...!

뭐든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라지.

나 또한 검강의 경지에 올라서일까?

셰그윈의 검술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수준인지 알 수 있었다.

'퀴른베르크 기계탑의 내구도는 상당해.'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

덕분에 퀴른베르크 기계탑이 어떤 광물로 구성됐는지 전부 파악하고 있는 나다.

제아무리 수도성의 성벽이라고 해도, 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값진 광물로 만들어진 기계탑이다.

'그런 기계탑을 두부 자르듯 잘라냈으니까.'

하르콘 그 이상.

현재의 나로서는 넘볼 수 없는 경지라는 거다.

그러니 지극히 플레이어적인 관점으로 봤을 때.

제국, 황제에게 승산은 없었다.

분노에 찬 하르콘이 합류한다고 하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터.

그러니까 수성을 선택했다가는.

메인 퀘스트를 대차게 실패해 버리고 말겠지.

그런데 말이다.

"나로서는 그대의 심정을 짐작할 수 없군, 하르콘 경."

내가.

그랑펠이.

언제부터 이성적인 판단을 내렸다고.

그래, 모든 것은 긍지에 따라서.

내 가슴 속 무거운 긍지가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해 보이는군."

나는 곱씹듯 읊조렸다.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뭐, 황제를 몰아내고 새로운 황제가 되겠다고?

그런 자식들이 말이야.

악마가 대륙을 쑥대밭으로 만들 때까지 꼭꼭 숨어서 꼼짝도 하지 않았어?

백번 양보해서,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의 영향일지도 모르겠지.

너무 강대한 힘을 가져 묶여있던 마탑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그러나 이해하려고 생각해 봐도 이해할 수 없다.

결국, 마탑은 모순을 깨고 바뀌었으니까.

게다가 누구라고.

아니, 나라고 죽고 싶어서 거악에 마왕도 모자라서 상위 마왕하고 맞선 줄 알아?!

"모조리 자격 미달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또 한 번의 의기투합이었다.

"셰그윈, 그대도 다를 것 없다."

그랑펠의 긍지.

그리고 나, 이호열이 느낀 억울함의 합작.

망설임은 없었다.

그런 나의 눈앞이 점멸했다.

─안토니움을 함락하라. (실패)

─안토니움을 수성하라. (진행 중)

검성?

대륙 유일의 그랜드 소드 마스터?

확실히 거창하신 이명이시군.

하지만 이쪽도 이명이라면 지지 않아서 말이야.

한없이 깊은 어둠.

그런 어둠 속 한 줄기 빛.

악룡 사냥꾼까지!

'빌어먹을, 내 입으로 말하니까 수치심이 더욱 배가 되는구나.'

하지만 이명을 떠나서 나도 꿇릴 건 없잖아?

그래, 나도 셰그윈과 마찬가지로 [초월자]였으니까.

효과가 봉인된 반푼이라고 하더라도, 어쨌든.

그러니까 내가 할 일은 간단했다.

드륵─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 창밖을 바라봤다.

...반드시 키워내야지, 영약.

*

별실.

엘시도어는 별실의 문을 열고 황금 궁전을 거닐었다. 행선지는 당연하게도 화원이었다. 엘시도어를 보고 황금 궁전의 사용인들이 수군거렸다.

"...뭔가 기분이 좋아 보이죠?"

"쉿, 말조심하세요! 들을까 봐, 겁난다구요."

"저도 마찬가지긴 한데, 신기하지 않아요?"

황금 궁전 별실에 감금된 이후.

엘시도어의 얼굴은 언제나 죽상이었다.

조각과도 같은 엘프의 외모가 빛이 바랠 정도로.

언제나 살기등등한 눈빛만을 쏘아대던 엘시도어였으니까.

"근데 글쎄, 별실 안에서도 웃고 있었대요!"

그런 엘시도어의 얼굴이 달라졌다.

어째서일까?

생각할 수 있는 건 역시 하나밖에 없었다.

"...화원에 들른 다음부터죠?"

그랬다.

엘시도어가 달라진 건 호열의 화원을 관리하기 시작한 이후부터였다.

사용인들이 호들갑스럽게 맞장구를 쳤다.

"역시, 전설대로 엘프는 자연 친화적이네요!"

"...설마, 갑작스레 별실에 화원을 만드신 것도 엘프를 위해서였을까요? 아무래도 맞는 것 같지 않나요? 원래 그러실 분이 아니시잖아요!"

"무뚝뚝하신 것 같으면서도 사려가 깊으시다니까요?"

쫑긋─

엘프의 커다란 귀가 움찔거렸다.

뭐, 그 자식이 배려?

감히 나를 이 꼴로 만든 자식이 사려가 깊다?

엘시도어가 빠득 이를 갈았다.

"...기필코 죽이겠다."

허나, [축복의 위계질서]의 효과는 여전히 발동 중.

비장한 다짐과 다르게 엘시도어는 정성껏 화원을 돌볼 수밖에 없었지만.

"우습구나."

엘시도어가 웃음을 되찾은 이유?

간단했다.

엘시도어가 흘린 건 비웃음이었으니까.

"잘난 척은 있는 대로 다 하더니."

고작 이따위 꽃밭에 수고롭게 물이나 주고 있다니, 하찮구나. 벌레답게 하찮아. 엘시도어는 화원에서 호열을 곱씹으며 자존감을 되찾아 가던 것이었다.

"정말로 무의미한 수고로구나."

하루.

"물을 줘봤자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그리고 또 하루.

"건방진 녀석에게 시슬리의 꽃밭을 보여주고 싶군."

후후후.

엘시도어의 표정이 날이 갈수록 밝아져 가던 때였다.

정확하게 나흘 뒤.

화원에 들어선 엘시도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

비웃고, 악담을 퍼붓고, 뒷담화를 즐기느라 자세히 살피지 못한 며칠 사이. 화원의 꽃들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성장해 있었다.

엘시도어가 중얼거렸다.

"...대체 어떻게?"

고작 나흘 만에.

그 하찮던 꽃들이.

영겁을 살아온 시슬리의 꽃보다도.

크고 화려하고 그윽한 기운을 내뿜을 수 있단 말인가?

◈ 182화. 두근

엘프의 고향, 시슬리.

시슬리의 자연은 때가 묻지 않았다.

시슬리에 거주하는 것은 오직 엘프뿐. 세계수의 축복이 존재했던 시절의 엘프는 완전무결한 존재로, 무엇도 필요치 않았었으니까. 때문에 시슬리의 꽃과 나무, 과실은 늘 진한 향을 풍겼다.

'미개한 대륙에서는 구경조차 못 할 수준으로.'

괜히 시슬리를 들먹거리며 우쭐거리던 게 아니었다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엘시도어는 쉽게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고작 나흘.

보잘것없던 꽃들이 어떻게.

영겁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온 시슬리의 꽃과 비슷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단 말이냐?

엘시도어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무슨 짓을 한 거지?'

이호열.

건방진 인간의 짓이라고 하기에는.

그는 거만한 자세로 꽃들에 물을 뿌린 것밖에 없었다.

굳이 한 가지 이유를 더 꼽아보자면....

-"어떤 명화도 그대들의 색채에 비할 바는 못 되겠지."

꽃에게 말을 걸었었지, 그는.

그때는 뭔 개짓거리인가 싶었거늘.

엘시도어가 흠칫했다.

'...설마 그조차도 다 이유가 있었다는 건가?'

이유야 어찌 됐든.

엘시도어의 얼굴은 점차 일그러져 가고 있었다.

이래서야 더는 시슬리를 들먹이며 우쭐댈 수도 없었으니까.

간신히 이어붙인 자존심에 다시 금이 가던 그때였다.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시도어."

"...!"

건방진 인간, 호열의 목소리였다.

또각─

침묵.

엘시도어는 일단 입을 다물었다.

좋은 말은 나올 수 없었으니까, 차라리 닥치는 게 나았다.

네 혹은 아니오.

대답을 강요당하는 굴욕은 한 번으로도 치욕적이었으니까.

"그대가 보기에는 어떠한가."

"...."

대답하지 않자 호열은 꽃을 향해 말했다.

"다들 잘 자라주어서 고맙구나."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엘시도어를 바라봤다.

"그대의 보살핌 덕분에 결실을 맺었군."

"...?"

...방금 뭐라고 그런 거지?

이렇게 자라난 게 내 보살핌 덕분이라고?

엘시도어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축복도 모자라서.'

설마 청력까지 빼앗아 가신 겁니까, 어머니?

그러나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호열은 정확하게 말했으니까.

"그 노고를 내가 알고 있다, 엘시도어."

오늘 밤엔 내가 화원에 머물겠다.

이어지는 호열의 말에 엘시도어는 별실로 돌아왔다.

언제나처럼 신경질적으로 문을 닫아야 했거늘.

...쿵.

생각에 빠진 엘시도어는 그러지 못했다.

노고라니,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의아해진 엘시도어는 지난 나흘을 거슬러 올라가 봤다.

"우습다고 비웃고, 하찮다고 비웃고...."

시슬리와는 비교할 수 없이 형편없다고 우쭐대고.

내가 한 일이라고는 구시렁대는 것밖에....

고뇌하던 엘시도어가 흠칫했다.

"설마."

마법진을 말하는 건가?

마력과 마법은 별개.

엘프로서 방대한 마력을 타고난 엘시도어라고 하더라도. 마법, 그것도 인간이 만들어 낸 마법진을 해석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니 엘시도어는 착각할 수밖에 없었다.

"단순하게 화원을 밝게 비춘 것 때문에?"

막대한 마력을 소모하는 고위 치유 마법진이었거늘.

엘시도어에겐 기초 마법, 라이트와 마찬가지로.

마력에 기별도 가지 않았으니까.

"그런가."

내가 큰 역할을 했단 말인가?

하긴 귀찮은 벌레들을 내쫓긴 했지.

이내, 엘시도어의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콧대가 다시금 높아졌다는 뜻이었다.

"하긴 인간 따위는 해내지 못할 일이지."

어디 밤새도록 화원을 지키는 게 쉬운 일이란 말이냐?

나약한 인간과 다르게 엘프는 수면조차 필요로 하지 않았다.

졸음이나 피로에 한눈을 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엘시도어가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감사할 줄은 아는구나."

감사하다면.

다음에는 그 '긍지'라는 걸 건네도록 하라.

그렇다면 나는 어머니에게서 축복을 돌려받을 수 있을 테니.

두근두근─

엘시도어가 설렘과 함께 침대에 드러누웠다.

"명심하도록 해라, 화원을 지킬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는 걸."

그 성격이 삐딱해서일까.

어쩐지 심각하게 어긋난 다짐과 함께....

*

이른 오전.

유스라 왕국.

나는 여전히 깨어있었다.

새벽부터 비장한 목소리로 지껄였다.

"그대들의 희생은 잊지 않겠다."

...멋있는 척하며 대사를 뱉지 마라, 그랑펠.

비약초 몇 뿌리 꺾었다고 칠 대사가 아니잖아!

그랬다.

나는 엘시도어를 별실로 내쫓은 이후로 비약초밭을 샅샅이 살펴봤다. 풍성하게 자라난 비약초들 사이에서 '영약'을 골라내기 위해서였다.

영약(靈藥).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효과로 봤을 때.

[에픽] 등급 아이템일 수밖에 없는 귀하신 몸.

사실 보는 눈이 없다면 비약초에서 영약을 골라내기도 어렵겠지.

애초에 비약초부터가 플레이어들 사이에선 잡초 취급.

제대로 된 가치를 인정받고 있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아르카나 대륙 모든 식물에 관한 지식을 습득한 내게 해당하는 말이 아니었으니.

보다시피 영약이라 부를만한 비약초를 양손 가득 뽑아서 집무실로 돌아왔다는 말이다...!

'진짜 하이엘 없었으면 어쩔 뻔했냐?'

고유 정령 하이엘의 축복이 깃든 물.

꼿꼿한 자세로 물뿌리개를 흩뿌린 보람이 있었다.

아니, 보람이 있는 수준이 아니지.

이건 상상하지도 못한 수확이다.

'하나만 건져도 다행일 거라고 예상했는데.'

차디찬 기운을 내뿜는 만년설꽃이 세 송이.

그와 반대로 열감이 느껴지는 해바라기가 두 송이었다.

아르카나 대륙에서는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는 귀하디귀한 영약이 집무실 책상 위에 다섯 송이나 놓여있는 것이었다.

'그래도 개고생이 아니었구나.'

마냥 하이엘의 축복만 믿고 있었다면, 불가능한 수확이었다.

비약초의 육성법도 큰 역할을 했을 테니까.

역시, 끊임없이 발버둥을 친 보람이 있구나.

거기에 마지막으로.

"그대도 노동의 가치를 깨달았기를 바란다."

구르는 재주가 있던 엘시도어까지.

뭣보다 엘시도어를 부려 먹기를 잘했다.

들려오는 이야기로는 엘시도어도 웃음을 되찾았다고 했지?

그래, 인상을 피니까 얼마나 좋냐.

나도 겸사겸사 좋은 일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고 말이야.

'어째 과하게 친절을 베푸는 것 같긴 하다만.'

결과가 좋으니까, 이번만 너그럽게 넘어가 준다. 내가.

'뒤끝을 부릴 시간은 없으니까.'

아르카나 대륙의 시간은 현실보다 수배나 빠르다.

이 순간에도 안토니움은 공세에 시달리고 있을 터.

나는 곧장 영약을 집어 들었다.

영약을 섭취하는 데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건 효과를 받아들일 육체의 상태.

'솔직하게 부담스럽다.'

정반대의 효과를 가진 두 개의 영약.

동시에 섭취해 그 부작용을 중화시키겠노라.

당당하게 선언했거늘.

막상 영약이 수중에 들어오니 우려를 완전히 지우긴 무리였다.

'영약의 효과를 버텨낼 수 있겠냐는 거지.'

츠릉거리는 심장이.

그리고 내 빈약한 그릇이 말이야.

그런 의미에선 최선의 준비를 했다.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칭호 : 최후의 모험가, 숭고, 초월자]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595]

[능력치]

근력 : 112 / 민첩 : 124 / 마력 : 467 / 행운 : 12 / 심미 : 中

[보유 포인트 : 45]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축적된 경험치를 습득.

그 덕분에 상승한 레벨은 45레벨이었다.

아무래도 중간에 기계탑이 파괴된 탓이겠지.

'셰그윈에겐 또 하나 갚아줄 게 생겼다.'

내 소중한 경험치야...!

무엇보다 서클은 마법사로서의 초월 경지였다.

그 능력을 해방하기 위해선 당연히 마법사로서의 그릇을 넓혀야 한다. 약간이라도 도움이 될 테니까. 이번에는 습득한 레벨 업 포인트를 전부 마력에 투자했다.

[마력 : 512]

그걸로 현시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준비는 끝.

남은 건 영약을 섭취하고.

부디 부작용이 심하지 않기를 기도하는 것뿐.

말했다시피 영약을 섭취하는 데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건만.

고려할 가치는 없었다.

내가, 그랑펠이 선택할 방식이야 한결같았으니.

똑─

그렇다.

나는 꽃잎을 떼어 찻주전자에 띄웠다.

말하나 마나 티타임이라는 것이다.

*

슥─

용맹한 사자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땀에 젖은 머리칼.

단련된 육체조차 비명을 내지를 정도로.

스왁─

사자는 한시라도 육체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육체를 혹사시키는 이유야 간단했다.

그래야만 버틸 수 있었으니까.

꾸욱─

하르콘이 더욱더 세게 검을 붙잡았다.

'불순하게도 의심하고 말았습니다.'

수도성, 안토니움에 연기가 피어올랐다.

과거, 그 소식을 접했을 때 하르콘은 최악을 가정했다.

어쩌면, 안토니움은 이미 함락됐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오판이었다.

"성장하셨군요, 폐하."

슥─

어쩌면 나는, 나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없는 폐하는 버텨내시지 못할 것이라고.

불경하게도 주군을 과소평가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자신을 책망하듯 안토니움은 무너지지 않았다.

수많은 악마의 습격에도 굳건하게 버텨냈다.

그래, 마왕 쟁탈전이 무(無)로 돌아간 지금이야말로.

제국이 다시 일어서 반격할 기회였거늘.

하르콘의 눈빛이 이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대들이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기를 바라네.'

악마의 습격을 명분으로 삼아 반기를 들다니.

그들은 안토니움으로 진격하며 목격했을 것이다.

고통으로 신음하는 제국의 백성들을.

그럼에도 백성을 외면하고 기어코 안토니움으로.

오직 왕관만을 바라보고 고삐를 당겼단 뜻이었다.

그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온 것은 호열이었다.

"...나는 제국의 기사단장으로서 부끄럽기 그지없네."

모험가들의 세계와 아르카나는 다른 세계이거늘.

마치 자신의 세계가 마수에 떨어진 것처럼. 목숨을 걸고, 긍지를 불사르며, 정면으로 악마와 맞서 싸워온 호열 경이 저들의 추태를 지켜봤다는 뜻이었다.

스와아아악!

"수치스러워서 고개를 들 수 없다는 말이네!"

휘이이이익!

거세게 휘몰아치는 검풍이 하르콘의 심정을 말해주는 듯했다.

빠득─

저절로 이가 악물어졌다.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경."

나조차도 인간의 옹졸함에 질려버릴 것 같았거늘.

저들의 더없이 추한 꼴을 지켜봤음에도.

어째서 그대는.

-"나를 믿어주겠나?"

그리 말할 수 있단 말인가?

하르콘은 제국의 기사단장으로서 수많은 강자를 봐왔다.

『번개의 아이』, 『남쪽 바다의 마녀』, 『우르스』, 『일출의 무사』....

그리고 안토니움을 포위한 『검성, 셰그윈』도 빼놓을 수 없겠지.

그래.

그들의 무력은 자신의 식견으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호열과 그들의 우위를 직접 비교할 순 없었다.

그러나.

'경은 그들과 다르다.'

너무나도 높은 경지에 올라서인가?

대륙의 강자들은 모든 것을 업신여겼다.

하지만 호열은 달랐다.

하르콘의 기억 속에는 프로스트에서 호열이 보여줬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으니까.

마왕의 앞에서도 백성들의 시신을 수습하던 그 숭고한 모습이.

'경에게는 모두의 목숨이 똑같이 소중한 것이겠지.'

하르콘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주군과 제삼자의 목숨을 동일시할 수 있는가?'

답은 당연하게도 '그럴 수 없다.'였다.

그러나 호열에게 타협이란 없었다.

마왕 쟁탈전에서도 목격하지 않았던가?

-"우리에겐 단 하나의 희생도 없을 것이다."

뱉은 말을 실현해 낸 호열을.

그러나 하르콘은 알고 있었다.

결국, 불가능한 걸 실현해 낸 건 호열이었다.

홀로 균열에 진입해서, 홀로 상위 마왕과 맞선다는.

무모한 계획을 성공해 냈으니까.

하르콘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허나 그 모두에 언제나 경, 본인은 포함하지 않았지."

하르콘은 잊을 수 없었다.

그날, 선 채로 혼절한 호열의 모습을.

모험가 남태민의 말을 떠올렸다.

-"알고 계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희 세상에서 호열 씨는 평화의 상징이나 다름없습니다. 호열 씨가 흔들리면 세상이 흔들리게 되니까요."

세상을 위해서.

정신을 잃고서도 꼿꼿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던 것이겠지.

그러나 그날을 계기로 자신을 비롯한 모두가 알게 되었다.

경은 그저 내색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을.

"경은 알고 있는가?"

경이 휴식을 결정한 이후.

나를 비롯한 모든 이들은 단 한 순간도 쉬지 않았다네.

그대가 짊어진 긍지라는 무거운 짐을 나눠 들기 위해서 말일세.

그러니까 하르콘은 각오를 다졌다.

'그리 말해주었으니, 나는 언제나처럼 경을 믿겠네.'

나를 주군의 곁으로 데려가 주리라, 믿고 있겠네.

그런 내가 할 수 있는 건 검과 검을 맞부딪혀 셰그윈을 막아서는 것이겠지. 검성을 상대로 이 늙은이가 얼마나 활약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고오오─

하르콘의 검강이 은은하게 빛났다.

"이 생명을 불살라서라도 막아내겠네."

경도 알고 있지 않은가?

생사의 갈림길에서 검기는 짙어지는 법이라는 것을.

이 순간부터 나는 매 순간 심장을 걸겠네.

누구의 앞에서도 물러섬이 없는 사자의 심장을.

*

무엇 하나 숨기고 넘어가는 법이 없는 긍지였다.

하르콘에게 안토니움의 상황을 전달하고.

-"나를 믿어주겠나?"

마지막에 가서 그런 말까지 지껄였을 땐.

나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아니, 폼만 잡으면 다냐고 진짜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만.통.지]의 효과를 상실한 지금, 아르카나 대륙에 접근할 방법 따윈 알지 못한다는 소리였다.

그러니까 이쯤 되면 슬슬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랑펠에게 겸손이란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과소평가에는 증명을. 과대평가는 기어코 현실로 만들어 내고야 말았으니까.』

말이 씨가 되듯.

...스스로에 대한 과대평가가 현실이 됐다는 말이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얼마나, 눈을 감고 있던 거지?

바닥에 떨어져 깨진 찻잔만이 내가.

천하의 그랑펠이 어떤 격통에 시달렸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개고생이 아니었다.

눈앞에 떠오른 수많은 메시지 사이에서.

똑바로 들리고 있었으니까.

...두근!

나의 심장박동이.

[칭호, '초월자'의 효과가 발동됩니다.]

◈ 183화. 데뷔

차 한잔을 음미하는 시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시간에.

나,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격식이 힘들다, 진짜.'

나는 간과하고 만 것이다.

그랑펠의 티타임 사랑을...!

그랑펠의 사전에 섞어 마시는 폭탄차(茶)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 나는 만년설꽃과 작열하는 해바라기를 우려낸 차를 차례대로 한 잔씩 음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격통이 시작됐다.

[영약, '만년설꽃'의 효과가 발동됩니다.]

[빙결 속성 친화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빙결 마법 발현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상태이상, '오한'이 발생합니다.]....

각오는 했다만 상상 그 이상이었다.

시베리아의 찬바람?

북해도의 맹추위?

그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수준의 한기였다.

굳이 비교하려면 세니오스의 만년설 정도는 가져와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덜덜덜.

그러나 나는 뻔뻔스럽게 지껄였다.

"기분이 좋을 정도의 서늘함이구나."

누군 얼어 뒈지게 생겼는데, 뭔 개소리야!

그대로 얼어 죽을 순 없었다.

나는 곧장 작열하는 해바라기 잎을 우려내고, 홀짝였다.

그리고 또 한 번 후회했다.

[영약, '작열하는 해바라기'의 효과가 발동됩니다.]

[화염 속성 친화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화염 마법 발현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상태이상, '고열'이 발생합니다.]....

머리로는 완벽했거늘.

실전은 다르다는 건가.

정말로 몸이 부서질 것만 같은 통증이었다.

쨍그랑─

오죽했으면 그대로 정신을 잃고 찻잔을 바닥에 떨어트렸을까.

격식으로도 극복할 수 없을 정도의 후폭풍이었다니.

정말로 미친 짓을 했구나, 자각이 든다.

그러나 강해서 살아남는 게 아니다.

살아남는 게 강한 거지.

결국, 버텨내고 눈을 떴으니 그만이라는 거다.

"나답지 않게 소란스러웠군."

이 순간만큼은 입방정이 이리도 반가울 수 없구나.

그나저나, 또 한 번 실감하게 된다.

[첫 세계수의 축복]의 효과를...!

[첫 세계수의 축복이 '오한'을 거절합니다.]

[첫 세계수의 축복이 '고열'을 거절합니다.]....

오한과 고열도 그 나름이다.

만약, 세계수의 축복이 없었다면.

작열하는 해바라기까지 갈 것도 없겠지.

나는 찻잔을 입에 댄 그대로 꽁꽁 얼어붙어서는, 세계 최초로 차를 마시다가 얼어 죽은 인간으로 박물관에 박제됐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고작 온기 버프로 막을 수준이 아니었어.'

두 영약을 모두 음용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효과가 중화되는 건 맞는데.

문제는 내 몸속에서 중화가 된다는 거였지!

[첫 세계수의 축복이 '내상'을 거절합니다.]

...흐릿한 의식 속에서 분명 섬뜩한 메시지를 봤던 것 같은데.

어쨌거나, 내가 괜히 그랑펠의 허세를 반가워한 게 아니란 말이다.

[칭호, '초월자'의 효과가 발동됩니다.]....

그 아래로 떠오른 메시지.

두근─

그리고 무엇보다 반가운 심장박동까지.

무엇부터 확인해야 하나, 많은 생각이 들었거늘.

나는 가장 먼저 마력을 끌어올렸다.

흘러나온 마력이 깨진 찻잔을 휘감았다.

'하여튼, 뭐가 됐든 흐트러진 꼴은 두고 보질 못하는구나.'

쩌저적─

반전 마법 발현.

바닥에 떨어져 박살 났던 찻잔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 간다.

그런데, 잠깐만.

뭔가, 생김새가 비슷하면서도 이전과 다른 것 같다...?

왜인지 모르게 더 비싸 보인다고 해야 하나?

반전 마법은 말 그대로 반전이다.

단지 원상태로 되돌리는 것뿐.

간섭 과정에서 무언가를 더하지도 않았거늘.

마치, [심미]라도 발동한 것 같은 변화라고?

짐작이 가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서클의 효과다.'

원로 마법사, 유그위드 왈.

서클을 형성하기 전후, 마법 발현력은 수에서 십 배까지 차이가 난다고 했었다. 단순하게 위력을 말하는 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이러면, 범용성이 장난이 아니잖아.'

새삼스럽게 감탄하게 된다.

'괜히 초월자의 경지가 아니라는 건가.'

...좋다, 정확한 효과를 확인해 보자.

나는 이내, 상태창에서 칭호를 열었다.

해금된 [초월자]의 효과를 확인했다.

[초월자 : 그대의 초월적인 경지는 초월자라 불리기에 충분하다....]

어째 첫 문장부터 익숙했다.

어디에서 봤나, 싶었더니.

[숭고] 칭호랑 말투가 똑같잖아, 이거?

[숭고 : 숭고한 자여, 아르카나 대륙이 그대를 기억하고 있다.]

설마, 숭고처럼 직접 맞부딪혀 가면서 그 효과를 체감해야 되는 건가? 걱정이 앞섰거늘. 아니었다. 초월자의 칭호의 효과는 그렇게 짧지 않았으니까.

[초월자 : 그대의 초월적인 경지는 초월자라 불리기에 충분하다. - 현재 도달한 성취 : 서클 (모든 마법 발현력 1,000% 상승) / 없음 / 없음 / 없음....]

짧지가 않아서 오히려 문제였다.

'현재 도달한 성취? 서클만 있는 게 아니었다고?'

하긴 경지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 게 당연하다.

아르카나의 클래스만 하더라도 셀 수 없을 정도니까.

나부터도 검강과 서클이라는.

검술과 마법, 각각의 경지에 다다르지 않았던가.

하지만 눈으로, 시스템으로 확인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그건 내게, 그랑펠에게 의미하는 바가 컸으니까.

"과연, 나의 길이 옳았군."

나의 길.

최대한 많은 살 구멍.

최대한 많은 우물을 파왔던 것.

'헛된 게 아니었다는 거잖아.'

그랑펠의 성격이라면 저 공란을 채우기 위해서라도.

절대 게으름을 피우지 않겠지.

이제는 효율을 핑계로 요령을 부릴 수도 없겠구나.

덕분에 죽어가는 건 나라는 말이었다...!

'이호열 인생 정말로 기구하고, 가혹하구나.'

하지만 또 마냥 징징댈 생각은 없다.

보다시피 성취의 효과는 어마 무시했으니까.

나는 말을 이었다.

"확실히 아직은 성취라 부르기에 무리가 있겠군."

생사의 갈림길.

아니, 그냥 한 번 죽어버린 덕분에.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검강'의 성취를 이뤄내기는 했다만.

아직은 초월자의 수준이라 부르기엔 무리가 있겠지.

왜, 하르콘만 하더라도 나보다 선명한 검강을 발산했으니까.

'셰그윈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거야.'

앞으로 얼마나 많은 영약을 처먹어야.... 아니, 얼마나 다채로운 노력을 해야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인가. 지금으로선 가늠할 수도 없었거늘.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허나, 긍지가 깃들지 않은 검은 더없이 가벼운 법이다."

그래, 정말로 위로가 됩니다요.

자신감 하나는 대단하다, 그랑펠.

어쨌든, 나는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초월자 효과까지 확인했으니까.

더는 놀랄 것도 없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오늘따라 많이 간과하는구나, 호열아.

[초월자 고유 스킬, '시공간의 사교'를 습득하셨습니다.]

칭호에.

엄청난 효과에.

구체적인 목표 설정에.

이제는 고유 스킬까지.

너무 아낌없이 퍼줘서인가.

이제는 슬슬 의심이 될 정도였다.

나는 의심을 가득 품고 고유 스킬을 확인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나는 우연을 믿지 않는다."

정말이지, 뻔뻔하게도.

"우연을 기다릴 바엔 내가 나아가겠다는 말이다."

*

AAU 대한민국 지부.

타다닥!

윤수겸은 쉴 새 없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눈치를 보던 성현준은 슬그머니.

선배의 책상에 커피를 올려뒀다.

그래도 반응이 없자 성현준은 지나가던 이를 붙잡고 속삭였다.

"혹시 윤 선배, 왜 저러시는 건지 알고 계세요?"

"아, 현준이 너 연차 냈었지?"

"네, 오늘 복귀했는데.... 분위기가 평소랑 다르셔서요."

이호열의 휴직계.

그건 직장인들에게 둘도 없는 핑계였으니.

성현준도 호열을 따라서 밀린 연차를 소진한 것이었다.

쉬는 며칠 동안 별짓을 다 해봤다.

-"...씁, 이 자세가 아닌데?"

화원을 가꾸는 호열을 따라 화분에 물을 주기도 하고, 어머니께 선인장에 물을 그렇게 주는 놈이 어디 있느냐며 등짝까지 맞아봤으니까.

그렇게 이야깃거리를 잔뜩 들고 AAU로 복귀했건만.

윤수겸이 아침부터 저 상태였다.

말을 걸기 미안할 정도로 집중한 모습.

"왜, 간만에 연락이 닿은 모양이더라고."

"연락이 닿아요? 누구랑요?"

"코스모 시절 팀원들이랑."

"아아...!"

국가 간에 이해관계가 얽히게 되면서 지부 간 교류가 적어졌던 AAU였다.

하지만 유스라 지부가 출범하게 되면서 각 지부들 간의 교류가 대격변 초창기 때처럼 활발해졌다.

"나도 그렇고, 수겸이도 그렇고. 다들 바쁠 수밖에 없지. 다들 빚을 웬만큼 졌어야지. 우리 유스라 지부 총책임자님한테 말이야."

유스라 지부 총책임자.

AAU에서 호열의 직책이었다.

"AAU가 단절되면서 흩어진 정보를 모으면 그래도 뭔가 나오지 않을까, 싶었거든. 그렇지 않아도 우리 팀에서도 쓸만한 정보 하나 건졌어. 왜, 드래곤에 관한 건데...."

"드래곤이요?!"

"아니다. 이건 나중에 확실해지면 말해줄게."

"아아...."

"어쨌든, 현준이도 수고하고."

그렇게 말한 사내가 성현준을 스쳐 지나갔다.

"아, 넵! 고생하세요, 선배님!"

성현준은 얌전히 착석.

윤수겸이 키보드에서 손을 뗄 때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한 시간 뒤.

타닥!

마침내 기회가 오자 재빨리 입을 열었다.

"선배, 옆에 커피요!"

"커피? 아 땡큐."

"그나저나 뭔 회의를 그렇게 하신 거예요?"

초롱초롱.

성현준의 눈빛을 윤수겸은 피식 웃어넘겼다.

"기대하는 것처럼 대단한 건 아니고."

"...에이, 비밀이에요?"

"아니, 비밀이 아니라 진짜 별게 아니라서."

윤수겸은 손가락으로 모니터를 가리켰다.

깜빡─

작성 중인 텍스트가 눈에 들어왔다.

성현준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와씨, 왜 전 이 생각을 못 했을까요?!"

초고레벨 플레이어 콘텐츠.

그건 모든 게임 개발진의 숙명이었다.

새록새록 코스모 재직 시절이 떠올랐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목요일마다 전쟁이었죠?"

"그래, 매주 업데이트에 별거 없다고 난리가 났지."

"진짜로 뼈를 갈아야 했다니까요? 특히 우리 대한민국 게이머들 근성은 진짜.... 공략에 최소 한 달은 걸릴 콘텐츠를 어떻게 하루 만에 쌈 싸먹냐고요!"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플레이어들의 콘텐츠 소모 속도는 그야말로 상상 이상이었다.

덕분에 회의에선 초고레벨 콘텐츠에 관한 아이디어라면 닥치는 대로 기록해 뒀었지. 윤수겸이 각 지부의 팀원들에게 연락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때 아이디어 찾아보시려고요?"

"맞아, 파볼 만할 가치가 있을 것 같았거든."

"선배 말씀이 맞네요. 마왕도 그렇고, 드래곤도 그렇고. 전부 구상 단계에 머문 콘텐츠들이었으니까요. 그런 게 마치 원래부터 존재했던 것처럼 균열에 등장했으니까요."

마찬가지로 아이디어에만 머물렀던 초고레벨 콘텐츠들이 아르카나 대륙엔 이미, 예전부터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당장 그만한 정보가 필요할 건...."

순간, 성현준의 동공이 확장됐다.

"맞아, 이호열 총책임자 님에게 전달 드릴 거야."

"다른 플레이어들은 몰라도.... 확실히 총책임자 님께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아니지, 설마 이미 다 알고 계시는 건 아닐까요?"

"어느 쪽이든, 일단은 최대한 긁어모아 보려고."

역시, 선인장에 물을 줬다가 등짝을 맞은 이야기를 할 분위기가 아니었구나.

게다가 성현준 자신도 수다보다 궁금한 게 있었다.

"선배,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여쭤봐도 돼요?"

"뭔데. 말 거는 사람 없어서 심심했으니까 들어줄게."

"아싸."

드륵─

성현준이 의자를 끌고 오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긁어모으신 아이디어 중에서 총책임자 님한테 가장 도움이 될 게 어떤 정보예요? 방금까지 타이핑 중이셨던 심해도시? 그게 아니면, 제로 산맥의 십만(十萬) 동굴?"

어디 보자.

윤수겸이 턱을 쓰다듬었다.

"다 중요하지만 그런 콘텐츠는 당장은 도움이 안 되겠지? 뭐가 됐든, 그와 관련된 균열이 떠올라야지 관련 정보를 쓰든 말든 하실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존재만 한다면.

그리고 호열이 조건만 충족했다면.

당장 활용할 수 있는 콘텐츠는 역시....

"...[고인물 커뮤니티]려나?"

*

유스라 황금 궁전보다도 호화스럽고.

마탑보다도 비현실적인 구조의 공간.

적어도 아르카나 대륙에 이런 장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 이곳은 『시공간의 사교장』.

다른 세계의 언어로는 [고인물 커뮤니티].

오직 초월자들만이 입장할 수 있다는.

'의식'의 공간이었으니까.

극소수에게만 허락된 사교장.

"?"

그곳에 정말 오랜만에 낯선 기척이 느껴졌다.

모두의 관심이 기척이 느껴진 곳으로 향했다.

검성, 셰그윈의 시선도 마찬가지였다.

이내, 그 기척이 점차 가까워졌다.

더없이 또렷하고 청아한 소리와 함께.

또각─

◈ 184화. 차는 생략하도록 하지

───────

시공간의 사교 : 의식, 시공간의 사교장에 진입한다.

───────

내가 만약 평범한 클래스였으면.

무슨 스킬 효과가 뭐 이러냐고 투덜댔을 정도로.

불친절한 것도 모자라 난해한 효과였다.

'시공간의 사교장이라.'

그러나 나의 클래스가 무엇이던가?

불친절함의 끝판왕, 악마 사냥꾼.

게다가 경험으로 습득한 사전지식까지 있었으니.

단련된 나는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의식이라면, 구마의식이랑 비슷하려나.'

의식이라.

구마의식을 떠올려 보면 딱히 무리가 될 건 없었다.

구마의식 속에서는 시간의 흐름조차 별개로 흘러가니까.

'구마의식이 악마 사냥꾼과 악마만 진입할 수 있는 의식이라면.... 시공간의 사교장은 초월자만 진입할 수 있는 의식이라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뭔가 VIP가 된 것 같고, 그런 느낌?

그러면서도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여튼, 뱉은 말은 기어코 실현해 내고 마는구나.'

나는 하르콘에게 허세 가득하게 말했었다.

나를 믿어주겠나, 라고.

말했다시피 해결할 방법이라곤 쥐뿔도 없었으면서 말이야.

그러나 [시공간의 사교]를 습득한 지금.

나는 그 말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를 찾은 셈이었다.

시공간의 사교장.

그곳에서 나와 마찬가지로 초월자인 검성.

셰그윈과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퀘스트 : 쓸데없는 짓]

셰그윈은 악마 사냥을 쓸데없는 짓이라 여겼다.

셰그윈과 대화를 나누고,

행동의 진위를 파악하라.

─셰그윈과 조우하라. (진행 중)

퀴른베르크 기계탑이 남긴 퀘스트는 물론.

─안토니움을 수성하라. (진행 중)

어쩌면 메인 퀘스트 목표도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보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무엇보다 규칙이 있으리란 점을 알고 있어서 더더욱 섣부르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구마의식과 마찬가지로 규칙이 존재할 텐데.'

구마의식의 규칙이야 뭐, 간단하지.

보다 우월한 정신력이 의식의 모든 것을 지배한다.

하지만 초월자들만 진입할 수 있는 의식이다.

규칙이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겠지.

마음 같아서는 인터넷이라도 뒤져보고 싶었는데....

관련된 정보가 있을 리가 있나.

"업무보다 중요한 사교는 없다."

네네, 어련하시겠습니까.

휴직계를 제출한 건 마탑뿐.

유스라 왕국 집무실 책상 위에 올라온 서류는 또 별개라는 그랑펠 님의 말씀이시다.

나는 그렇게 서류를 살피다가 흠칫했다.

'AAU에서 보내온 자료인가....'

유달리 눈을 끄는 단어가 있었으니까.

[고인물 커뮤니티].

그 내용을 정독하고 나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거, 『시공간의 사교장』을 말하는 거잖아?!

덕분에 알게 됐다는 것이다.

시공간의 사교장.

의식의 규칙을.

그런 내게 망설임은 없었다.

해가 저문 저녁.

나는 거울 앞에 섰다.

[스왈린 공작의 애장품]을 착용.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브로치를 정렬했다. 사교장에 진입한다고 멋이라도 부리는 거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단호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니로군."

...간만에 떠오르는 낯뜨거운 설정.

『위대한 가문의 후계자. 과거 사교계에서 그랑펠의 존재는 사막의 오아시스 혹은 신기루와 같았다. 사교 자리를 즐기지 않았기에 모습을 드러내는 날은 많지 않았거늘. 홀연히 등장하는 날에는 모든 이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말았으니....』

진심으로.

손발이 오그라들다 못해서 잘라버리고 싶다...!

너그럽게 이해해 보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다.

그냥 인기가 많다고.

간단하게 끝낼 수도 있었던 거잖아?

뭐가 이렇게 구체적이고 디테일이 가득하냐고!

'자기 자신이 관심을 받는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있지만, 실상은 추종자가 다를 정도로 다수의 동경을 받고 있다....'

질풍노도 시기.

노골적인 욕망이 가득한 설정이 아닐 수 없구나.

나 진짜 거울을 보기도 힘들 정도로 수치스럽다.

물론.

그랑펠은 언제나와 같이 뻔뻔했으니.

이내, 나는 태연하게 지껄이고야 말았다.

"그러나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 하는 법."

제발 좀.

그러고는 간절하게 기도했다.

부디 나의 흑역사가 재현되지 않기를.

*

또각─

홀을 울리는 소리.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낯선 인기척이 누구의 것인지 다들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검성, 셰그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상위 마왕을 지옥에 떨어트린 자.'

상위 마왕.

자신조차도.

아니, 이 자리에 모인 초월자들조차 감히 대적할 수 규격 외의 존재. 그랬다. 이 기척의 주인은 그런 상위 마왕을 홀로 지옥에 떨어트린 자였다.

'보고도 믿을 수 없었지.'

새로운 초월자의 자격을 평가하는 이는 이 자리에 모인 기존의 초월자들이었다.

때문에 초월자들은 시공간의 사교장에 오래간만에 도착한 업적을 확인하고, 경악했다.

그리고 찬성표를 던졌다.

전례에 없던 만장일치 통과.

'그런 능력을 갖춘 이가 대륙에 남아있을 줄이야.'

과연, 방대한 아르카나 대륙이라는 것인가?

셰그윈은 엘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식보다도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런 초월자의 탄생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는데.

그가 곧바로 사교장을 찾아온 것도 예상 밖이었다.

그에 관해 누군가 입을 열었다.

"누군 진입하는 데만 수년이 걸렸는데 말이죠."

시공간의 사교장.

이곳은 실제로 존재하는 공간이 아니었다.

의식이 지배하는 공간으로 존재 여부를 알아차리는 것도, 접근하는 것도 스스로 깨달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사실을 알아차린다고 하더라도.

'쉽게 진입할 엄두를 낼 수 없지.'

자신과 비슷한 수준.

혹은 그 이상의 초월자들이 있는 공간에 발을 들이는 건 쉽지 않은 일일 테니까.

물론, 사교장에서 상호 간의 적대 행위는 금지되어 있다.

'사실 규칙을 떠나서.'

보다시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서로 말을 섞지 않는 초월자들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성격도, 능력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분쟁을 벌여서 좋을 게 없다는 걸 각자가 잘 안다.

'허나, 겪어보지 않고서는 그 사실을 알 순 없지.'

셰그윈, 자신도 그에 관한 규칙을 알게 된 건 경험 덕분이었다. 시비가 걸려 사교장에서 검을 뽑았다가 그대로 의식 밖으로 쫓겨났던 경험.

"자신감이 대단한 신입이군요."

그렇다.

섣부르게 느껴질 정도로 빠른 진입이야말로 자신감의 표현이겠지.

무엇보다 점차 가까워지는 당당한 발소리를 보면 알 수 있었다.

또각─

이내, 모두의 관심 속에서.

새로운 초월자가 사교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천장의 샹들리에.

그 아래에서 존재감을 잃기는커녕.

되려 은은하게 빛을 발하는 은빛 머리칼.

과연, 은발의 사내는 조금도 위축된 기세가 없었다.

'상황 파악이 빠르다. 과연, 그 업적이 사실이었나.'

'장비조차 착용하지 않았다니.'

'...그보다 저건 어느 지역의 복장이지?'

대륙에서는 본 적이 없는 복장이었거늘.

그럼에도 이질적이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적당하게 달라붙는 상·하의가 마치 피부처럼 사내에게 잘 어울렸다.

거기에 과하지 않을 정도로 존재감을 발산하는 장신구들까지. 사내는 외관만으로도 이미 모든 이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거늘.

상위 마왕 처치라는, 초월자 중에서도 압도적인 업적까지 보유하지 않았던가? 그 때문일까, 사내의 뒤에선 후광이 비치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놀라운 건.

"...!"

사내의 행동이 자연스럽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의식의 공간이라고 해도, 보이고 느껴지는 것은 현실과 다를 것이 없었다.

아르카나 대륙에선 볼 수 없는 호화스럽고 웅장한 사교장에 시선이 팔릴 법도 했거늘....

또각─

사내는 그 모든 것에 시선조차 제대로 주지 않았다.

마치 더없이 익숙하다는 것처럼.

사교장을 가로질러 걷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머리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장소를 익숙하게 느낄 정도라면 귀족 혹은 왕족일 터. 저 정도의 인물을 내가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는데...?'

'호기심을 자극하는 존재로구나. 얼마나 초월적인 무력을 가지고 있기에 상위 마왕을 혼자 처치할 수 있었던 거지?'

'아니, 저건 익숙한 걸 넘어서....'

...거침이 없지 않은가?

작은 웅성거림은.

점차 의아함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시공간의 사교장, 첫 방문이 분명하거늘.

모든 것을 꿰뚫고 있다는 듯.

목적이라도 있다는 듯.

사내는 머뭇거리지 않았으니까.

굴러가던 머리들이 멈칫했다.

'되도록 피하고 싶군.'

혹시라도 사내의 목적이 자신과 관련된 것이라면?

절대 엮이고 싶지 않았다.

이곳이 아르카나 대륙이었다면 모를까.

'격차를 가늠해 볼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거스를 수 없는 사교장의 규칙.

서로 간의 모든 적대적 행위는 금지된다.

그 탓에 이곳에선 상대방의 전력이나 무력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개념이 존재조차 하지 않아 느낄 수조차 없다는 게 맞는 표현이리라.

'느낄 수 없어도 업적이 있다.'

'어느 누구도 세우지 못한 수준의 업적.'

'최초의 만장일치 통과.'

또각─

사내의 행보에는.

관심에 더해 우려가 쏠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사내가 착석했다.

그래서 어떤 이유로 시공간의 사교장을 찾았단 말인가?

긴장 속에서.

모든 시선이 사내의 입술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

.

.

빌어먹게도.

흑역사는 나를 저버리는 일이 없었다.

자칭 사교계에 관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으시다는 그랑펠 님께선 아랑곳하지 않고 있으시다만.

나는 쏟아지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진짜 내가 못산다, 과거의 나야.'

뭐, 사교계의 오아시스이자 신기루?!

이 정도로 관심이 쏟아지는데.

자기는 그걸 모르는 게 말이 되냐고, 진짜!!

또각─

장담하건대.

나에게는 어떤 균열보다 이 사교장이 부담스럽다.

역대급으로 몸에 와닿는 흑역사는 물론.

이 자리에 있는 인물들께서 척 봐도 보통 인물들이 아니란 걸 알아차릴 수 있었거든.

'다들 장비부터가 고인물이라고 외치고 있어.'

[고인물 커뮤니티].

AAU에서 전달해 온 정보에는 그렇게 명시되어 있었다. 아이디어에 불과했기에 임시로 붙인 이름이라는데, 그 컨셉만 보고도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고인물 커뮤니티 : NPC를 포함. 특정 자격을 갖춘 초고레벨 플레이어들을 위한 특별한 장소. 규칙은 다음과 같다....]

특정 자격에 '초월자'만 끼워 넣으면?

'시공간의 사교장'과 다를 게 없었거든.

과연, AAU.

그랑펠의 말대로 괜히 창조주의 편린을 탐구하는 자들이 아니구나, 싶다가도....

'...왜 사교장인데, 하필.'

한편으로는 원망스러운 마음이 솟구쳐 올랐다.

어쨌거나, 될 수 있으면 걸음을 멈추지 말자.

그리고 괜히 두리번거리지도 말자.

'이럴 땐 도움이 되는구나.'

어디서나 꼿꼿한 자세.

덕분에 나는 쏟아지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호화스러운 의자에 착석했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메시지를 바라봤다.

[현재 주문 가능한 메뉴]

규칙에 따르면.

시공간의 사교장, 모든 시설은 무료였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면, 고인물들을 위한 서비스라고 생각하고 대충 넘어갔겠지.

하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고.

이젠 그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실체가 없으니까.'

의식.

결국, 존재하는 모든 게 실체가 아니다.

그래서 공짜로 제공하는 거겠지, 뭐.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있으랴. 나는, 그랑펠은 메시지를 살폈다. 공짜라는 건 청렴결백과 충돌하는 일도 없다는 말씀.

그나저나.

"으음."

노골적으로 시무룩하지 마라, 그랑펠.

이런 공간에 녹차가.

그것도 티백 녹차가 존재할 리가 있겠냐고.

[주문을 취소하셨습니다.]

...그래, 그리고 이런 상황에 무슨 차냐.

내겐 사교장을 찾은 명확한 목적이 있잖아.

나는 더는 뜸을 들이지 않았다.

드넓은 사교장.

짙푸른 머리칼.

새파란 눈동자.

검성, 셰그윈을 바라봤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셰그윈."

안토니움을 포위.

그것도 모자라 퀴른베르크 기계탑을 파괴.

그것은 긍지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행위.

당연하게도 내 입에서 상냥한 말이 튀어나올 순 없었으니.

"내가 그대에게 묻겠다."

"...?"

"그대는 그대의 죄를 알고 있는가?"

"...!"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돌직구를 던지다니.

메뉴에 녹차가 없어서 예민해진 게 확실하구나, 그랑펠.

그러나 뱉은 말을 주워담을 순 없었으니.

"이제부터는 현명하게 생각하고 답하도록."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답변에 따라 그대의 처분을 결정할 것이다."

"!!!"

◈ 185화. 절차에 감사하도록

순식간에 공기가 얼어붙었다.

마탑에서나, AAU 회의장에서도 느낀 거지만 내 주둥이엔 냉방 기능이 탑재된 게 확실하다.

어떻게 말을 꺼내기만 하면 분위기가 싸해지냐고!

그러나 내뱉은 이상.

물러서는 것도 그림이 영 아니다.

'뭣보다 꿇릴 게 없거든.'

시공간의 사교장 규칙 하나.

서로 간의 모든 적대적 행위는 금지된다.

물론, 사교장에서의 일이 사교장 안에서만 끝나리라는 법은 없다.

사교장 밖에서 입방정의 대가를 치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

하지만 그것도 나랑은 관계가 없는 일이다.

왜?

나는 다른 초월자들과 달리.

아르카나 대륙이 아닌 현실에 있으니까!

가고 싶어도 못 간다는 말이다, 아르카나 대륙엔.

'당장 뒷감당을 걱정할 필요는 없거든.'

그러니까 그렇게 노려봐도 하나도 안 무섭다는 거다, 셰그윈.

"...."

내게 호출당한 셰그윈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짜고짜 자신의 죄를 알고 있느냐니.

사실 뭔 개소린가 싶을 거야.

그러나 이미 저지른 마당에 이쪽도 물러섬은 없다.

나는 다짐한 참이었거든.

'이곳에서의 일은 이곳에서 확실하게 끝맺는다.'

그래,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입방정의 대가는 여기서 끝내야 한다.

단절된 아르카나 대륙과 현실이라고 해도, 균열이라는 변수가 있다.

혹시라도 앙금을 남긴 채로 셰그윈이 균열에서 모습을 드러낸다고 생각해 봐라.

'...상상하기도 싫다. 그냥.'

그런 복잡한 사정으로 나는 말을 이었다.

"나와 마주 앉는 것을 허락하겠다."

"...!"

말을 과하게 생략해서 하지 말아주라, 그랑펠.

그냥 친절하게 풀어서.

사교장이 워낙 크고 웅장해서 이렇게 먼 거리에서는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기 힘들 것 같다.

그러니 오순도순 마주 앉아서 대화를 나누면 어떻겠냐.

좋게좋게 말할 수도 있잖아, 진짜.

그러나 한탄해 봐도 이미 늦었다.

저벅─

셰그윈이 나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으니까.

새삼스럽게 느끼는 건데.

초월자쯤 되면 풍기는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셰그윈뿐만 아니라 사교장에 보이는 모든 이들이 그러했다.

일단, 외관부터 범상치 않았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의 단어로 표현하자면, 굉장히 신경 써서 만든 네임드 NPC 같다고나 할까.

물론, 그 행동도 마찬가지였다.

턱─

셰그윈이 테이블 위에 검을 내려놓았다.

이럴 땐 기가 막히게 명품을 알아보는.

그랑펠의 심미안이 원망스럽다.

'아무리 봐도 최소 유니크 이상이지?'

화려한 검집의 문양부터 '나는 보통 검이 아니요.' 말하고 있다.

하긴 검성이자 대륙 유일의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사용하는 검이니 대단한 게 당연하겠지.

물론, 자랑할 의도로 테이블 위에 검을 올려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심기가 불편하시다는 표현일 터. 그런데 심기가 불편한 건 이쪽도 마찬가지거든.

나는 검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이 검인가."

"...?"

"퀴른베르크 기계탑을 베어낸 것은."

움찔!

셰그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느냐는 눈치인데.

일단, 마저 듣기나 해.

"알고 있는가. 그대가 무너트린 퀴른베르크 기계탑은 직전까지 수만의 악마를 사냥해왔다는 사실을. 또한, 그 긍지가 다할 때까지 악마를 사냥했으리란 사실도."

그런 기계탑을 셰그윈, 그쪽이 박살 냈다는 말이다.

덕분에 아르카나 대륙 수만의 악마가 목숨을 부지했고.

나는 무려 5레벨이나 손해를 봤다는 거야.

그랬다.

안토니움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그에 관한 이야기부터 들어야 한다.

[퀘스트 : 쓸데없는 짓]

셰그윈은 악마 사냥을 쓸데없는 짓이라 여겼다.

셰그윈과 대화를 나누고,

행동의 진위를 파악하라.

─셰그윈과 조우하라. (진행 중)

말했다시피.

그 진위에 따라서.

나의, 그랑펠의 처분은 달라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

나는 셰그윈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대는 어째서."

"...?"

"내가 가동한 기계탑을 베어낸 것인가?"

"!!!"

.

.

.

턱─

셰그윈은 자신의 상징과도 검을 상대의 앞에 올려뒀다.

사내를 떠보기 위함이었다. 귀찮은 규칙이 존재하는 사교장에서 상대의 실력을 가늠하기 위해 자주 써먹었던 수법이었다. 자신이 당했던 수법이기도 하고.

'이빨을 드러내라.'

미끼를 던짐으로써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많다.

상대의 표정에서 적의가 드러난다면.

그건 곧 사교장의 규칙에 대해 무지하다는 뜻.

그러나 지금처럼 무표정 그대로라면....

'규칙에 대해선 알고 있는 모양이군.'

첫 진입이면서 어떻게 사교장의 규칙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놀랄 것까지는 없었다.

아직 자신은 미끼를 거두지 않았으니까.

이내, 검을 향하는 사내의 시선.

그 시선에서 셰그윈은 의아함을 느꼈다.

'...검으로 나를 알아본 게 아니다.'

쾌검, 아틀라스 소드.

셰그윈의 분신과도 같은 검.

그렇기에 아틀라스 소드를 들이밀었을 때.

상대방은 이런 반응을 보여야만 했다.

-"...그대는 누구지?"

-"셰그윈이 이런 애송이에게...?"

-"셰그윈에게 자식이 있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반로환동(返老還童).

셰그윈.

자신이 젊음을 되찾은 것을 알고 있는 이들은 초월자를 포함, 극소수에 불과했으니까. 그렇기에 검을 올려두고 면전을 맞댄 것이었다.

젊음을 되찾은 자신을 셰그윈이라 생각할 순 없을 테니.

그런데, 무엇인가. 이자는?

"이 검인가. 퀴른베르크 기계탑을 베어낸 것은."

...어떻게 그 사실까지 알고 있는 것이냐.

당시에 주변에 있었던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떨쳐냈다.

'아니, 내가 느끼지 못했을 리 없다.'

전성기의 육체를 되찾은 현재.

자신의 감각은 그 어느 때보다 예민했다.

더욱이 강자는 강자를 알아보는 법.

이런 수준의 초월자를 내가 알아보지 못했을 리가....

'...잠깐.'

기억을 곱씹던 셰그윈은 멈칫했다.

상위 마왕을 떠올린 것이었다.

격이 다르기에, 감히 헤아릴 수도 없는 존재.

그런 상위 마왕을 지옥에 떨어트린 사내였다.

상위 마왕과 같은 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설마, 내가 가늠하지 못할 정도의 힘이라는 것인가?'

이어지는 호열의 말.

그러나 셰그윈은 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머릿속에 또 다른 가능성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걸 지켜볼 장소는 하나뿐이다.'

드높게 솟은 수도성, 안토니움.

이자는 안토니움에서 모든 것을 내려다본 것이다...!

찰나의 순간, 셰그윈이 판단을 내렸다.

'실책이다.'

악마, 마왕들의 공세에도 안토니움이 무너지지 않은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이 사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조차 헤아릴 수 없는 격을 가진, 이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그 사실을 인정하듯.

사내는 태연하게 물어왔다.

"그대는 어째서. 내가 가동한 기계탑을 베어낸 것인가?"

"...?!"

현재 아르카나 대륙에서 가동 중인 퀴른베르크 기계탑.

그 존재는 초월자들 사이에서도 의문이었다.

퀴른베르크 기계탑을 세운 것은 드워프.

그런 기계탑을 움직이는 건 드워프 혹은 그들과 밀접한 관계를 구축한 이들만 가능한 일일 테니까.

그러나 인간을 혐오하여 아르카나 대륙에서 모습을 감춘 드워프들이 아니던가?

꼬리에 꼬리를 물던 의문에 대한 대답이 눈앞에 있었다.

'비로소 모든 게 납득이 되는군.'

'대륙을 쥐락펴락하고 있었단 거잖아.'

'히히. 잘못 걸렸네, 검성 할아범.'

셰그윈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때처럼 시끄러운 게 질색이라고 답했다가는.

-"답변에 따라 그대의 처분을 결정할 것이다."

마주 앉은 상대가 어떤 행동을 보일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사내는 이미 참을 만큼 참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장 안토니움 공성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만 봐도 그러했다.

'영문은 몰라도 나로서는 환영할 일이다.'

셰그윈은 이미 판단을 내렸다.

안토니움에서 퇴각하겠다고.

수많은 제후와의 신뢰?

단언컨대 그들을 적으로 돌리는 것보다.

이 사내를 적으로 돌리는 것이 더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셰그윈은 이를 악물었다.

'이자가 참았듯 나도 인내할 때다.'

셰그윈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알지 못했다. 나의 실책을 인정하겠다."

이런 말을 내뱉어 본 게 얼마 만이던가?

셰그윈, 자신도 아득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번 안토니움 공성에서는 자신도 많은 것을 걸었다. 특히나 황궁의 창고에 잠든 마도구, '은하수 숫돌'을 놓치게 되는 건 굉장히 뼈아픈 일이었다.

그러나.

"또한 나는 안토니움에서 물러나겠다."

마도구를 얻겠다고 목숨을 내놓을 순 없겠지.

무엇보다 이 육체로 무리하고 싶지 않았다.

셰그윈은 속으로 생각했다.

'인정하마. 지금은 네가 강하다.'

그러나 나는 젊음을 되찾았다.

설령, 추악하게 손에 넣은 젊음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시간은 나의 편이라는 것이다.

슥─

셰그윈이 자리를 뜨기 위해 검에 손을 뻗은 순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의 목적은 황좌가 아니었나."

흥, 셰그윈은 코웃음을 쳤다.

초월자.

그것도 격이 다른 초월자면서 그런 질문을 던지다니.

솔직한 목적을 뱉으라는 거겠지.

계획이 물 건너간 마당에 말해주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그깟 왕관을 누가 쓰든지 내 알 바가 아니다. 나는 마도구, 은하수 숫돌을 손에 넣기 위해 제후들에게 힘을 빌려줬을 뿐이다."

은하수 숫돌.

구체적인 목적까지 털어놓자 사내는 말했다.

"그대의 말을 믿겠다."

"고맙군."

"그럼 다음 질문이다."

"...?"

그러나 이어 들려온 말에 셰그윈은 주먹을 쥐었다.

'...이런 굴욕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거냐?'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셰그윈은 내색하지 않았다.

지금은 사내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안토니움에서 안전하게 퇴각하는 것이 최우선이었으니까.

셰그윈이 고개를 끄덕이자, 곧장 다음 질문이 이어졌다.

"셰그윈, 어째서 그대에게...."

그건 조금도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추악한 악마의 냄새가 나는 것인가?"

"?!"

.

.

.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악마 냄새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맡거든.

─셰그윈과 조우하라. (성공)

─셰그윈과 악마의 연결고리를 찾아내라. (진행 중)

확실해.

셰그윈에게서는 악마 냄새가 났다.

나는 올곧은 시선으로 셰그윈을 응시했다.

과연, 그 표정이 심히 볼만하구나.

검성이자 대륙 유일의 그랜드 소드 마스터.

셰그윈이 나를 노려보며 답한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그런 시치미가 악마 사냥꾼한테 통할 거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무엇보다 나는 알고 있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시간이 아르카나 대륙에선 더욱 빠르게 흐른다는 것을.

하르콘은 셰그윈에 대한 감상을 말했었다.

-"검성, 그에게는 전성기라는 말이 무의미했다네."

거기서 의문이 들었다.

내가 본 셰그윈은 새파란 청년이었는데.

어째서 전성기가 지난 사람처럼 말하는 건지 말이야.

내가 착각을 했나, 싶었는데.

직접 얼굴을 맞대보니까.

비로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그 젊음과 무엇을 맞바꾼 것인가."

악마 숭배자들은 꼴에 악마와 교류하는 걸 부끄럽게 여긴다.

카림제바부터가 그랬었다.

자신의 목적은 '진정한 진리'라고.

자신은 단지 악마를 이용했을 뿐이라고 지껄였었지.

만약, 내게 경험이 없었다면.

셰그윈과 악마의 연결고리라는 걸.

쉽게 알아차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아르카나 대륙에서 영생이란.

오직 [첫 세계수의 축복]을 받은 이만 거머쥘 수 있는 권능.

엘프가 그 사실을 대신 증명해 줬잖아? 나한테서 축복을 돌려받기 위해, 코빼기도 비추지 않던 대륙에 곧장 모습을 드러낸 게 그 증거다.

"...맞바꾼 게 아니다. 영약, 영약의 효과다."

기껏 떠올린 게 영약인 모양인데.

유감스럽게도.

아르카나 대륙에 그런 영약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각─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셰그윈, 그가 젊음과 무엇을 바꾸었는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상관없다.

"모든 인간은 하루를 살고, 하루를 죽어간다."

점멸하는 퀘스트 목표.

─셰그윈과 조우하라. (성공)

─셰그윈과 악마의 연결고리를 찾아내라. (성공)

스스로 자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말이야.

─진명의 악마, 셰그윈을 사냥하라. (진행 중)

셰그윈, 그쪽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거든.

그 사실을 증명하듯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스킬, '천적관계'가 발동됩니다.]

"그대는 사교장의 절차에 감사하는 게 좋겠군."

허세가 아니다.

초월의 경지, 서클을 개방한 현재.

[천적관계]의 효과라면 셰그윈과 맞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아니, 무리를 떠나서 그랑펠의 긍지는 오히려 강대한 악마의 앞에서 더더욱 드높아지는 법.

나는 차갑게 내뱉었다.

"나는 지금 필사적으로 인내하고 있으니까."

"!!!"

"검성. 아니, 악마보다 추악한 칼잡이여."

.

.

.

안토니움.

끝나지 않는 공성전.

지친 병사들은 밤하늘을 바라봤다.

빌어먹을 마안이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도 희망이 보였는데."

어떻게.

이런 상황에.

대륙 절멸의 위기에.

아군의 등에 칼을 꽂을 수 있단 말인가?

결국, 울분을 참지 못한 병사가 성벽 밖으로 소리쳤다.

"이 악마보다 더한 새끼들아!!"

저저 미친놈이!

곧장 화살 세례가 쏟아지리라.

병사들이 재빠르게 방패를 치켜든 순간이었다.

"...."

각오가 다르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방패 사이로 병사들이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다그닥─

어째서인가.

다그닥....

말발굽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이내, 믿지 못할 소리가 들려왔다.

악마보다 못한 새끼들이라고 소리쳤던.

정신 나간 사내로부터.

"후, 후퇴하고 있다!!"

"...?!"

"병력이 후퇴하고 있다아아아!!"

그 믿지 못할 소식은 성벽 위에 있던 황제에게도 전해졌다.

황제는 전장을 바라봤다.

정말로 적들이 물러가고 있었다.

함락을 앞둔 안토니움에서.

마치 꽁무니를 내빼듯 퇴각하고 있었다.

전략적 후퇴인가.

간교한 계략인가.

황제는 모든 수를 생각했다.

그러나 입가에서 흘러나온 말은....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문득, 올려다본 하늘에서.

사자가 보였으니까.

정확하게는.

"폐하! 저 문양은...!!"

라이언 하트 기사단의 상징.

사자 문양이 그려진 깃발.

그 깃발을 나부끼며 정령이 내려오고 있었으니까.

◈ 186화. 역사에 아로새겨지는 것은

제국.

수도성, 안토니움에는 수많은 인재가 모인다. 그러나 마법사만큼은 아니었다. 대륙에서 손꼽히는 재능을 가진 이들은 마탑으로 향했으니까.

세간에 흔히 떠도는 말로 마탑의 숙련 마법사쯤 되면, 마탑 밖에선 고위 마법사로 추앙받을 수 있다는 게 사실이라는 뜻이었다.

제국 최고위 마법사, 내쉬 윌리엄.

내쉬는 구석에서 손톱을 물어뜯었다.

하나뿐인 형님, 벤쉬 윌리엄을 떠올렸다.

'형님....'

어렸을 적.

화룡에 버금갈 재능을 가졌다 평가받던 형님이었다.

재능을 떠나 어디에 가서도 주눅이 들지 않던 형님.

나이답지 않게 언제나 의젓한 모습을 보여주셨던 벤쉬 형님.

비록 형님처럼 마탑에 입성할 정도의 재능은 아니었지만, 내쉬는 최선을 다했다.

밤낮으로 마법 서적을 탐독, 다양한 분야의 마법에 관한 지식을 쌓았다.

그리고 그 능력을 인정받아 제국 최고위 마법사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내쉬는 오늘.

자신의 한계를 실감하고 있었다.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형님...!'

오늘따라 형님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알현실 앞.

대신들이 구석으로 찾아와서는 속삭여 왔다.

"내쉬 경, 가늠할 수 있겠습니까?"

아뇨.

모르겠는데요.

내쉬는 무책임한 말이 목구멍으로 치밀어 올랐다.

대체!

폐하와 알현 중인 저 정령은 무엇이란 말인가?

우아함, 그 자체.

외관에서 흘러나오는 기품으로는 정령왕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

그래, 수십 번 양보해서 정령왕이 이례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고 생각해 보자.

문제는 그 모습이 자신을 비롯한.

모두에게 보인다는 것이었다!

정령마법의 기초 중의 기초.

정령마법은 선택받은 자들의 마법이라는 것.

자연 상태의 정령을 목격하기 위해선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해야만 했으니까.

'하지만 모두의 눈에 보인다는 건....'

계약 정령으로 누군가와 계약을 맺은 정령이란 것이었다.

내쉬는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정령왕과 계약을 맺다니!'

세상에 어떤 마법사가 그럴 수 있답니까?

혹 벤쉬 형님이라면 알고 계실까요?

이 못난 아우는 짐작조차 못 하겠습니다.

처량을 떨던 내쉬는 정신을 차렸다.

어쨌거나, 이건 희소식이었으니까.

내쉬가 큼큼 헛기침을 뱉고는 말했다.

"신께서 제국을 저버리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대신들이 속닥거렸다.

"...정령에 대해 물었는데, 뭐라시는 겁니까?"

벤쉬 형님!

형님과 달리 저는 아직 박력이 부족한가 봅니다아....

한숨을 삼킨 내쉬가 말을 덧붙였다.

"정령이 가져온 것은 북부 원정을 떠나기 전 하르콘 경이 폐하께 하사받은 깃발이었습니다. 아마도 저 정령은 하르콘 경과 라이언 하트 기사단의 소식을 가지고 폐하를 찾은 것 같습니다."

대신들의 얼굴은 그제야 밝아졌다.

"아니, 저 깃발이 그렇게 중요한 거였습니까?"

"그 말은 하르콘 경이 살아있다는 뜻입니까?"

"그럼 진작 말씀해 주셨야죠, 내쉬 경!"

귀를 찌르는 대신들의 목소리.

내쉬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벤쉬 형님, 마탑과 함께 어디로 사라지신 건가요? 아무래도 저는 관료 체질이 아닌 것 같습니다. 부디, 못난 동생 내쉬를 견습 마법사로라도 받아만 주신다면....'

내쉬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던 그때였다.

활짝─

알현실의 문이 열렸다.

황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모두 들어와도 좋네."

"...!!!"

장군, 대신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쉬가 알현실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여전히 우아한 자세로 허공을 부유하는 정령이 있었다.

황제가 입을 열었다.

"정령의 이름은 하이엘...."

...하이엘이라고?

분명, 서적에 그런 이름의 정령왕은 없었거늘.

내쉬가 생각하던 찰나에도 말은 이어지고 있었다.

"...크리시아드 포시즌 리프."

자, 잠시만요. 폐하?

불경하지만, 제대로 들으신 게 맞으십니까?

그게 정녕 정령의 이름이 맞단 말입니까?

이름으로 정령의 격을 판단할 수는 없었지만, 누가 보고 들어도 심상치 않은 외관과 이름이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다.

내쉬는 또 한 번 형님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형님, 정령왕 위에 정령 황제도 있는 걸까요?'

부족한 아우는 모르겠습니다.

내쉬는 고개를 떨궜지만, 황제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이어지는 말에 내쉬는 얼마 가지 않아 화들짝 놀라 고개를 치켜들고 말았다.

"마, 마탑?"

마탑이.

형님이 계신 마탑이 무사하단다.

그뿐만 아니었다.

"하르콘을 비롯한 라이언 하트 기사단도...?"

"프로스트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게 아니었다니!!"

"그럼 그렇지. 뮤온이, 여신의 성지가 무너질 리 없습니다!"

대륙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그들이 살아있단다.

아르카나 대륙이 아닌 다른 세계에서라고 한들.

살아서 숨 쉬고 있단다.

황제는 입을 열었다.

"그대들이 나를 어떻게 여길지는 모르겠군."

하이엘, 정령은 그리 말했다.

아르카나 대륙과 모험가들의 세계.

그 두 세계를 잇는 '균열'이 존재한다고.

곧바로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은 충분했다.

"부끄럽게도 나는 안도하고 말았네."

황제로서 그들을 지키지 못한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자책해야 했거늘.

벅찬 감정이 끓어올라 억누르기에 벅차다니.

그러나 황제는 할 일을 잊지 않았다.

"또한 믿지 못할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네."

그래.

하이엘이 전해온 영웅담을 전해야 했으니까.

그건 혼자만 알고 있기 아까울 정도였으니.

"들어라. 서기는 빠짐없이 적도록 하라."

스스슥─

이내, 황제의 말이 양피지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마왕의 손아귀에 빠진 프로스트를 구원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르카나 대륙에서 정체를 감춘 모험가들이 목숨을 걸고...?"

"마탑, 그 콧대 높은 마법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니요. 그들은 폐하의 말씀에도, 선대의 명령에도, 아니 어느 누구의 명도 따르지 않던...!!"

"드워프들이 제국을, 인류를 돕고 있다니...?"

그 믿지 못할 소식들이 전부 황제가 공인한 역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거기에는 불과 어제의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안토니움을 포위했던 유미르 대공 휘하 수십의 제후들. 그리고 검성이자 그랜드 소드 마스터인 셰그윈이 퇴각한 것 또한...."

스스스슥─

깃털펜이 거침없이 적어나가던 도중.

신하 중 누군가 말했다.

감히 황제의 말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폐하, 이건 쉽게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업적입니다."

"음."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구나.

그러나 이곳에 무엇보다 큰 보증이 있다.

펄럭!

황제가 깃발을 펼쳤다.

라이언 하트의 상징, 사자가 그려진 깃발.

그 뒤편엔 각기 다른 필체로 글자가 적혀있었다.

『예시카 브라이트.

에노크 로렌.

카제트 오너....』

마지막 기사단장, 하르콘.

라이언 하트 기사들의 이름이다.

의문을 제기했던 사내가 조심스럽게 그 이름들을 살폈다.

이내,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헛된 기대로 실망하지 않고 싶어서 의심했거늘.

분명했다.

이 필체는....

"...카제트, 나의 아들아. 무사했구나."

자신의 아들의 것이 확실했다.

"송구합니다, 폐하. 의심을 거두겠습니다."

황제는 마지막 문구를 다시금 살폈다.

『부디 무사하시길 기원합니다, 나의 주군이시여.』

내가 그대의 필적을 어찌 잊을 수 있겠나, 하르콘.

북부 원정에 나선 라이언 하트 기사단.

그들이 종적을 감춘 뒤 황제는 끊임없이 자책해 왔다.

'그대가 올린 출사표를 수도 없이 곱씹으며 후회했으니 말일세.'

그러나 그런 황제가.

'헛된 짓이 되었지만 그렇기에 기쁘군, 하르콘.'

이제는 미소 짓고 있었다.

그 입가에서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 모든 업적이 단 한 명의 사내에게서 비롯된 일이니, 서기는 그의 이름을 정확하게 적도록 하라."

"...!!!"

꿀꺽!

긴장감 속에서.

"제국의 구원자."

그 이름이.

"한없이 깊은 어둠 속 한 줄기 빛."

황제의 입으로 울려 퍼졌다.

"이호열."

*

과연, 아르카나 대륙의 시간이 현실보다 빠르다는 걸 체감하게 된다.

달칵─

티백이 담가진 찻잔을 내려놓는 순간, 시야가 점멸했다.

[수도성, 안토니움과의 관계도가 대폭 상승했습니다.]

[수도성, 안토니움에서의 영향력이 대폭 상승했습니다.]....

하르콘과 라이언 하트 기사단의 깃발.

하이엘이 무사히 황제에게 소식을 전달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하이엘....

너, 어떤 소식을 어떻게 전한 거니?

관계도, 영향력 상승까지는 예상했었다.

전후 사정을 제쳐놓더라도.

어쨌거나 나는 셰그윈을 비롯한 반란군을 내쫓는 데 성공했으니까.

그를 증명하듯 퀘스트 목표도 갱신됐고.

[메인 퀘스트 : 전국시대(戰國時代)]

격변의 시기.

향하는 것은 단순한 권력인가.

황제의 무능함인가.

그것도 아니면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인가.

대륙의 강자들은 황좌를 탐한다.

그대의 선택이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내리라.

─안토니움을 수성하라. (성공)

결과적으로 위기에서 제국을 구했으니까.

그 정도의 퀘스트 보상은 예상했다는 거지.

그런데, 이건 보상의 정도가 심하잖아?!

[제국과의 우호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벌써 최대치라고?!

불현듯 떠오르고야 마는 하이엘의 전과.

그랑펠을 쏙 빼닮은 하이엘의 입방정 때문에 드워프들 사이에서 있는 거품, 없는 거품이 잔뜩 생겨버린 내가 아니던가? 직감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엄청나게 양념을 쳤구나, 하이엘.'

...그래, 이미 엎질러진 마당에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단순하게.

디엔드가 나서지 않은 것만 해도 어디야?

"비로소 그 추악한 계획이 물거품으로 돌아갔군."

...거품이란 단어를 뱉으면서도 찔리지 않는다니.

과연, 철면피가 나날이 두꺼워지는구나. 그랑펠.

그러나 아직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갱신된 또 하나의 퀘스트.

[퀘스트 : 쓸데없는 짓]

셰그윈은 악마 사냥을 쓸데없는 짓이라 여겼다.

셰그윈과 대화를 나누고,

행동의 진위를 파악하라.

─셰그윈과 조우하라. (성공)

─셰그윈과 악마의 연결고리를 찾아내라. (성공)

─진명의 악마, 셰그윈을 사냥하라. (진행 중)

셰그윈은 악마에게 빙의된 게 아니었다.

스스로가 악마로 타락한 것이었다.

자신은 단순히 젊음을 되찾았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만, 그 새까만 동공은 악마의 그것이었거든. 무엇보다 [천적관계]가 발동했던 것처럼 확실한 증거도 없겠지.

시공간의 사교장.

그 규칙 때문에 퀘스트 성공까진 무리였다.

나는 지껄였다.

"합리적이지 못한 규율은 수정할 필요가 있겠군."

너는 몰라도 나는 결사반대다, 그랑펠.

셰그윈은 악마니까.

[천적관계]빨로 어떻게 비벼볼 수 있다고 치더라도.

다른 초월자들이 존재했으니까.

할 말, 못 할 말 다 내뱉는 이놈의 성격!

무엇보다 그랑펠이 초월자들을 좋게 볼 이유가 없었다.

사실 내 눈에도 졸렬하게 보이기는 하더라고.

그렇게 강하면서 말이야.

아르카나 대륙이 악마에게 당해 쑥대밭이 되도록.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니.

'마탑처럼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만.'

그랑펠이 그 사정이란 걸 고려할 리 있겠냐고!!

이번에야 셰그윈이 목적이었으니까.

넘어갔다고 치더라도 다음에는...?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초월자들한테 다짜고짜 긍지가 없다고.

면박을 주는 상상을 하면...!

또 한 번 사교장의 절차에 더없이 감사하게 된다.

'물론, 셰그윈 너는 예외다.'

빙의돼서 몸을 빼앗긴 것도 아니고 스스로 악마가 된다고?

게다가 뭐 대단한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고작 젊음을 되찾기 위해서어어?!

"더없이 어리석구나."

누구는 말이야.

영생 소리만 들어도.

평생을 흑역사에 시달릴까 봐 치를 떨고 있는데!!

셰그윈, 너는....

'...더없이 팔자가 좋구나.'

나조차도 용서하지 못할 정도니까.

그랑펠의 심정은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

셰그윈 정도 되는 강자가 누군가에게 목숨을 잃을 일은 없을 터.

언젠가는 맞부딪히게 된다는 말이었다.

'서클을 해방했다고 우쭐댈 게 아니야.'

마법 발현력을 1,000퍼센트 증폭시켜 주는 서클.

그러나 셰그윈도 마찬가지로 초월자였다.

검술과 검강으로 어떤 효과를 내뿜을지를, 나로서는 알 수 없다는 뜻. 확실한 건 서클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무지막지한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정도겠지.

'결국, 대비해야 한다는 거야.'

내 방식대로.

모든 방면으로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당연하게도 거기엔 검술도 포함이다.

문득, 떠오르는 셰그윈의 명검(名劍).

되게 좋아 보이긴 했는데.

뭐, 내 무기도 그에 뒤처질 것 같지는 않아서 말이야.

"재회할 날이 기다려지는구나, 귀철."

무려 드워프 최고의 대장장이, 월스와일이 제련하고 있을 에고 장비란 말이다! 그러니까 필요한 건 장비에 걸맞은 검술 실력과 육체의 그릇이다.

그리고 나는 그걸 전수해 줄 훌륭한 스승을 알고 있다.

아니, 스승이라고 할 정도로 친한 인간들은 아니지만....

나는 지체하지 않았다.

스스슥─

곧장 깃털펜을 휘갈겼다.

수신인은 탐험가 연맹 연맹장, 파비앙 들롱.

그 목적은 탐험가 연맹의 마도구, [지옥의 횃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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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크샨의 유지 : 지옥의 불에서 악크샨 악마 사냥꾼을 불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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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화. 한결같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