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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9화. 역시 총대장님

월스와일.

자존심 높은 드워프들이 하나같이 최고로 꼽는 대장장이.

그의 실력에 대해서라면, 말보다는 보여주는 게 나았다.

악크샨의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의 설계는 물론.

아이언 캐슬 호, 심지어는 드워프들의 은신처 관문까지.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으니까.

"젠장."

"저저, 괜히 쓸데없는 말을 해서는...!"

"아뿔싸."

쩌렁쩌렁한 귀철의 호통에 드워프들은 탄식을 뱉었다.

체인워커가 중얼거렸다.

"일 났군."

드레드센 마을의 생존자들.

란샤를 비롯한 생존자들은 눈치껏 드워프들의 일손을 도왔다. 옛날이야기에서나 듣던 드워프들이 하늘을 나는 배를 타고 나타날 줄이야.

상상도 못 하던 일이었지만 꿈이 아니었다.

'어쨌든, 쫓겨나기 싫으면 밥값을 해야 해.'

그러나 듣고 넘어가기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게다가 말하는 돌덩이라니!

결국, 란샤가 체인워커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무슨 심각한 일이라도 있는 걸까요?"

"아, 그대들이 우려할 건 없네. 그와의 맹약에 따라 우리 드워프가 그대들을 끝까지 보호할 테니까. 혹시 누가 싫은 소리를 한 건가? 내 텃세 같은 건 부리지 말라고...!"

"그라면...."

검은 형체, 디엔드가 말했던 주군이시겠지?

맹약이 어떤 맹약을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란샤는 은인의 얼굴이라도 뵙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하지만 그전에.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고민이 있으신 것 같아서요!"

오해부터 해결해야겠지.

"대단하신 분이신가 봐요, 월스와일이라 불리시는 분이요!"

"그 이야기였나? 이거, 소란스러워서 면목이 없군."

"아니에요. 간만에 활기차고 좋은걸요!"

빈말은 아니었다.

정말로.

간만에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으니까.

"그렇다면 다행이군."

체인워커가 푹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월스와일, 저 고집에 시달릴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지끈해서 그러네."

실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으나, 무언가를 제련할 때의 월스와일은 그야말로 괴물.

괴팍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말하지 못하는 철광석을 두들길 때도 충분히 까칠한 그였거늘.

"귀철에게 저런 소리를 들었으니, 가만히 있지 않겠지."

과연, 체인워커의 예상은 적중했다.

쩌렁쩌렁했던 귀철의 고함.

그에 질 새라 월스와일이 입을 열었다.

란샤는 그제야 깨닫고 말았다.

"배려해 줬더니만 건방지구나, 귀철 녀석!"

저래서 걱정한 거였어?!

"의, 의외시네요? 굉장히?"

엄격, 근엄, 진지하기 그지없는 얼굴에서 저런 말이 튀어나올 줄이야. 란샤가 놀라움을 숨기지 못하자, 체인워커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악크샨의 생존자여."

그대의 귀철이 저 영감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말았구려.

이제부터는 체인워커도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월스와일, 드워프 최고의 대장장이와 귀철이 만나 과연 어떤 장비가 벼려지게 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당연히 우려될 수밖에.

"오냐, 더 이상의 배려는 없다!"

화르륵!

출력을 높이자 더욱더 붉게 타오르는 초고열 용광로.

월스와일의 말에 귀철이 화답했다.

"미지근하다. 더욱더 뜨겁게!"

자고로 장비라는 건 사용자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오른손잡이, 왼손잡이, 그에 따른 손잡이의 설계부터 사용자의 능력을 섬세하게 고려하는 것까지. 그러나 귀철이 월스와일을 부채질한 이상.

"무엇이 됐든 감당할 수 있다는 거겠지, 그대의 주인은?"

배려가 없는 오직 성능만을 위한 장비가 탄생하리라.

그것이 체인워커가 얼굴을 감싸 쥔 것도 모자라 마른세수를 한 이유였다.

그런 무지막지한 장비를 호열 경이 다룰 수 있을까? 그러나 걱정이 무색하게도.

"물론이다. 계속해서 말하지 않았던가?"

누구보다 그를 가까이서 지켜봐 온 귀철이 말하고 있었다.

"그의 그릇은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을 만큼 방대하다!"

그랬다.

그 목소리엔 확신이 있었다.

"더 이상의 걱정은 그대에 대한 의심이 되겠지."

덕분에 체인워커는 물론.

"진정 그렇단 말인가?"

망치를 들고 있던 월스와일도 걱정을 떨쳐낼 수 있었다.

월스와일은 다짐했다.

"좋다!"

단 한 번도 내지 않았던 진심을 쏟아내어 보리라.

"그렇다면, 월스와일이 그대를 전력으로 벼려내 주마!"

"좋다! 바라던 바다!"

파앗!

*

좋긴 개뿔이 좋을까!

하이엘, 디엔드, 귀철까지.

다들 의도는 알겠다.

전부 나를 위해서 그런 거겠지.

하지만 과한 충성심이 때론 나를 벅차게 만드는구나....

귀철이 월스와일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을 줄이야.

월스와일이 명품을 넘어선 역사에 남을 장비를 만들겠다고.

밤낮으로 귀철을 두들기기 시작했다니.

'결과물이 걱정된다.'

퀴른베르크 기계탑을 시작으로.

수백만 악마를 쓸어버렸던 아이언 캐슬 호의 광선포까지.

드워프들의 기술력을 말 그대로 온몸으로 실감했던 나였다. 그런 드워프들 중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월스와일이 진심을 다하겠다 선언했다니.

'...나 착용할 순 있는 걸까.'

막말로 레벨 제한 1,000짜리 아이템이 탄생하면?

정말이지, 그림의 떡이 따로 없겠구나.

물론, 그런 속내와는 상관없이 나는 지껄였다.

"나의 무기로서 훌륭한 자세로군."

그랑펠에게 레벨 제한 따위야 숫자, 수치에 불과하니 문제가 되진 않겠지.

결국, 이 또한 나답게.

뻔뻔하게 꼼수로 해결하는 수밖에.

그렇지 않아도 [사악한 지룡의 송곳니]로 연습 중이다.

여러 가지 사용법들을 말이야.

이내, 디엔드의 감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과연, 주군이십니다."

...헛소리를 당연하게 여기지 말아줘라. 제발.

진심이 느껴지지만, 마냥 기뻐할 수 없다.

그렇지만 청승맞게 불쌍한 척을 할 여유도 없다.

움직이기 시작한 아르카나 대륙의 악마들.

[마왕 쟁탈전]이 코앞으로 다가왔으니까.

나는 입을 열었다.

"하이엘, 디엔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거라."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존명."

"그리고 전하거라."

드워프와 드레드센 생존자들에게 당부를 덧붙일 필요는 없겠지.

그들을 포함해 아르카나의 생존자들은 생지옥에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발버둥 쳐왔으니까.

그들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것은 나의, 그랑펠의 긍지가 허락하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이쪽, 우리 차례라는 말이다.

"그대들의 긍지가 우리에게 닿았노라고."

*

유스라 왕국, 황금 궁전.

그림자 용병단의 단장으로서 수많은 금은보화를 만져본 키치였지만, 황금 궁전의 화려함에는 도무지 적응되지 않았다.

사뿐사뿐─

그러나 황금 궁전을 가로지르는 키치의 발걸음은 오늘따라 유난히 가벼웠다.

표정도, 분위기도 오늘 아침까지와는 정반대였다.

"저기, 단장."

2석, 울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술 마셨어?"

"안 마셨는데? 왜? 한잔 땡겨? 울프가 웬일?"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기분이 좋아 보여서 말이지."

아까만 하더라도 키치의 얼굴은 '죽.상'이었다.

정말이지, 누구 하나 '죽일 것 같은 상'.

그 이유야 뻔했다.

어쨌거나 같은 배를 탄 단원.

말석, 락키드가 엘프에게 중상을 입었으니까.

그런 상황에 자신은 술에 취해 단잠에 빠져있었으니까.

여러모로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게 당연한 거겠지.

황금 궁전 별실.

키치가 들어서자 제각각 딴청을 피우던 단원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거기엔 이제 막 정신을 차린 락키드도 포함이었다.

락키드가 반쯤 잠겨 더욱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 단장."

"뭐야? 일어났어? 팔다리가 덜렁거리더니!"

"씁, 말하는 꼬라지하고는 정나미 떨어지게."

그에 대한 설명은 7석, 알카리가 대신했다.

"마탑의 마법사가 이곳에 들렀었네."

"그랬구나.... 가 아니라 마, 마탑의 마법사가?! 왜?! 혹시 누구 뭐 잘못한 사람 있어? 너희 마왕성 균열 때 헛소리한 거 들켰지?"

"큰일 날 소리를 하는군, 단장."

"엥? 아냐?"

"락키드가 멀쩡히 깨어난 이유가 뭐겠는가?"

"그야 오우거처럼 무식하게 튼튼해서...."

아니지, 락키드의 상처는 중상이었다.

알카리가 제작한 포션조차도 별 효과가 없을 정도로.

그런데 저렇게 멀쩡하게 깨어났다는 건....

"설마, 그 마탑 마법사가 락키드를?!"

"맞네. 그중에서도 선임 마법사께서 직접 행차하셨었지."

"...걔네들이 왜?"

키치는 마법사란 족속을 잘 알고 있었다.

암살 의뢰 명단에 숱하게 오르는 게 바로 마법사들의 이름.

더러운 성질머리에 대한 증거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겠지.

마탑의 마법사라면 더하면 더하지, 절대 덜하지 않을 터.

'애초에 접점이랄 게 없는데...?'

마왕성 균열 말고 다른 접점이 있었나?

생각하던 키치의 머릿속에 순간.

스쳐 지나가는 인물이 있었다.

"...이호열 총대장?"

알카리가 클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요청으로 부상자를 치료하러 왔다고 하더군. 황홀할 정도의 마법이었네, 그건. 방대한 마력이 락키드의 몸을 감싸더니...!"

알카리의 생생한 표현이 무색하게도.

키치의 귀엔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머릿속에 맴도는 목소리 때문에.

-"그대들을 책임지는 것은 나다."

키치가 피식 웃었다.

'책임 한번 제대로 지시네, 이번 고용주님께선.'

물론, 그 사연을 알 턱이 없는 락키드였다.

스륵─

락키드가 천천히 자신의 거구를 일으켜 세웠다.

"그래서 그 새낀 어디에 있는 거야?"

"그 새끼?"

"그 귀 큰 새끼 말이야. 당했으니까 갚아줘야지. 이 빚을."

고용주님께서 간신히 숨을 붙여놨더니만.

뭐?

빚을 갚아?

키치의 눈매가 다시금 가늘어졌다가.

"이게 아직도 정신을...! 후우, 아니다. 락키드."

다시금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직 뭘 모르고 있으니까, 저런 반응을 보일만도 하지.

울프가 화를 억누르라 바쁜 키치를 대변했다.

"일단 진정하라고, 락키드. 그런 상태로 가능하겠어?"

"활쟁이가 뭘 안다고 떠들지? 다시 붙으면 내가 이긴다."

"그래? 뭐, 그렇다면야."

울프는 어깨를 으쓱이고 키치를 바라봤다.

그를 따라 모든 단원의 시선이 키치를 향했다.

말했다시피 그림자 용병단에겐 규율이 있었으니까.

빠득─!

락키드가 이를 갈았다.

"반드시 당한 만큼 갚아준다."

드디어 본론을 꺼낼 차례네.

키치가 입을 열었다.

"아침에 얘기했던 것처럼. 이호열 총대장, 그와 대화를 나눴어. 엘프의 처리에 대해서."

"우리에겐 명분이 있으니까. 이야기는 잘 끝났겠지? 그래서 귀 큰 새끼는 지금 어디에...!!"

"우선 진정하고 들어, 락키드. 엘프, 그 엘시도어라는 녀석은 지금 황금 궁전에 있어. 우리처럼 별실에 머물고 있다고 하더라고."

"...뭐?"

락키드는 흠칫했다.

기절하는 바람에 끊긴 기억.

남아있는 기억 속에서 엘프는 미친놈과 다를 바 없었다.

강함을 떠나서 알아듣지 못할 말만 지껄이지 않나, 다짜고짜 덤벼오질 않나. 누구의 말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으니까. 그러니까 이야기를 듣고서도 믿을 수 없었다.

"그, 그 새끼를 무릎 꿇렸다고?!"

그것도 입 몇 번 뻐금거린 것만으로?

"...."

락키드는 믿을 수 없어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증거가 있었다.

다름 아닌 귀 큰 녀석이 황금 궁전에 얌전히 처박혀 있다는 거겠지.

마법은 물론, 자신조차 알아볼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한 검기도 모자라서.

이번에는 말로 엘프를 복종시켰다는 건가?

"터무니없구만."

락키드는 슬쩍 키치를 바라봤다.

'...어쩌면 단장보다도 큰 목표를 찾은 건지도.'

기뻐할 일이었지만, 확실하게 해야겠지.

"그래서 그게 빚을 갚아주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단장?"

락키드의 말엔 오류가 없었다.

울프와 알카리를 비롯해서 모든 그림자 용병단원들의 이목이 다시금 키치를 향했다.

키치가 머리를 쓸어올리며 우쭐거렸다.

"원하는 건 녀석의 목숨이잖아?"

"역시, 단장이군. 잘 알고 있잖아?"

"그에 관해서 우리 고용주, 총대장님께서 말씀하셨거든."

"...?"

기대감을 고조시키듯.

단원들을 둘러본다.

충분히 뜸을 들인 키치가 말을 이었다.

"목숨보다도 값진 걸 뱉어내겠다고 만들겠다고."

"...!!!"

키치의 말에 모두가 흠칫했다.

목숨보다 갚진 걸 뱉어내겠다고 만들겠다니.

그거 아무리 봐도....

"우리가 잘하는 '그거'잖아?"

목숨을 담보로 한 고문, 심문, 협박!

락키드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이거 우리 총대장님에 대한 호감도가 올라가는데?"

빡빡한 줄 알았는데.

의외로 통하는 구석이 있었잖아?

키치가 허리춤에 손을 얹고 호탕하게 웃었다.

"봐봐, 내가 왜 웃으면서 돌아왔는지 알겠지?"

락키드가 넙죽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단장. 다 계획이 있구나!"

"그러니까 성질 좀 죽이라고, 락키드. 영겁의 세월을 산다는 엘프들이야. 조금만 캐도 엄청난 정보가 쏟아져 나올지 모르는 일 아니겠어?"

"그렇지! 빚이야, 그다음에 갚으면 되니까. 하하하!"

"물론, 넌 그 전에 주점 외상부터 갚아야겠지만."

"아."

오가는 만담 속에서 울프는 어깨를 으쓱였다.

'다들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데요?'

이호열.

그는 아무리 봐도 우리와 같은 족속처럼 보이지 않았으니까.

분명, 단장이 멋대로 착각하고 있는 거겠지. 언제나처럼.

물론, 굳이 정정할 생각 따윈 없었다.

키치가 이내,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우리 할 일은 간단해."

"...!"

"엄청난 정보를 위해서. 엄청난 보물을 위해서. 안락한 노후를 위해서. 고용주님에게 눈도장을 찍는 거지."

때마침 판이 벌어져 있지 않던가?

"최선을 다해보자는 거야, 성전(聖戰)에서!"

*

전원 집결.

장소는 유스라 왕국 황금 궁전.

약속 시각은 정오.

하르콘은 프로스트에서 오전 훈련을 마치자마자 황금 궁전을 찾았다.

정오까지는 아직 몇 시간이나 남았지만, 임무를 수행 중인 예시카와 에노크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어라? 늦으셨네요. 저는 아까아까아까 도착했는데."

"...?"

그런데.

자신보다 일찍 약속 장소에 도착한 이가 있었다.

전혀 상상하지 못한 인물, 키치였다.

하르콘은 흠칫했다.

제국조차 통제할 수 없었던 그림자.

아르카나 대륙의 흑막.

그림자 용병단.

저들에게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단 말인가?

◈ 170화. 내가 있기에 가능하다 (1)

"그럼, 고생하게."

예시카, 에노크와 대화를 나누고 대회의장으로 돌아온 하르콘.

꽤 시간이 흘렀지만, 키치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황제의 검.

라이언 하트 기사단장의 눈매가 서늘하게 빛났다.

'과거의 나였다면.'

쉽게 의심을 거둘 수 없었겠지.

그림자 용병단의 악명은 황궁에서도 자자했다.

의뢰를 핑계로 그들이 벌인 범죄는 예로부터 극악무도한 수준이었으니까.

그러나 하르콘은 알고 있었다.

'모든 게 바뀌었다.'

대격변.

아르카나 대륙에서 모험가들의 세계로 떨어진 지금.

과거에 얽매여 있는 건 미련한 짓이겠지.

게다가 호열 경을 통해 알게 되지 않았던가?

'악마가 아닌 인간은 바뀔 수 있다.'

하르콘, 자신만 하더라도 그랬다.

명성은커녕 기본 검술 실력조차 갖추지 못한 모험가들과 대화를 나누고, 심지어 훈련시키게 될 줄이야. 과거엔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그러니까 하르콘의 눈빛은 달라졌다.

"먼저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네, 키치 단장."

"에이, 술 마시는 것밖에 하는 게 없는데 빨리 와야죠."

"소식은 전해 들었네. 락키드의 상태는 어떤가?"

"이제 멀쩡해요. 더러운 성질머리도 여전하고요."

"하긴, 그렇게 쉽게 쓰러질 사내가 아니지. 그는."

평범한 대화.

의심을 거두자고 생각했거늘.

그럼에도 키치의 변화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결국, 하르콘은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말았다.

"달려졌군, 키치 단장."

"네, 달라지다니요?"

"그림자 용병단이 성전에 참전하는 것도 모자라서. 단장인 그대가 회의 자리까지 참석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네. 어떠한 계기라도 있었던 모양이군."

"계기라면...."

키치는 일단 말꼬리를 흐렸다.

'쳇. 이래서 제국 높으신 양반들과는 엮이기 싫은 건데.'

그림자 용병단의 명성은 오히려 높으신 분들 사이에서 더욱 자자했다.

그럴 수밖에. 그림자 용병단의 의뢰비는 서민은 물론, 웬만한 귀족의 상식도 초월한 수준.

애초부터 고객층이 가진 게 많은 높으신 분들뿐이었으니까.

'하필 기사단장이 제일 먼저 나타나서는...!'

일찍 약속 장소에 나타난 이유?

당연히 점수를 따기 위해서였다.

우리 이호열 총대장님에게 잘 보여야 엘시도어인가.

뭔가 하는 개자식에게 얻어낸 정보를.

귀띔으로라도 엿들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얘들아, 내가 이렇게 골 아프게 산다.'

저 사자 같은 눈빛을 보라.

조금만 대답을 잘못했다간.

이 속물적인 속내를 금방이라도 들키고 말겠지.

일단, 키치는 얼버무렸다.

"...다 이호열 총대장님 덕분이죠? 하하."

유스라 왕국에 거주하며 깨닫게 된 사실 하나.

일단, 이호열 그 이름을 대면 뭐든 해결이 된다.

왜, 아르카나 대륙에서 여신교인 척을 하면 웬만한 의심을 피할 수 있던 것처럼 말이지.

솔직히 유스라 왕국에서 호열의 영향력은 여신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다.

'뭐, 납득할 수 있어.'

모험가들의 세계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하던 아르카나인들.

그들이 어렵지 않게 정착할 수 있을 유스라 왕국, 프로스트, 뮤온을 정상화시킨 그였으니까. 과연, 그 이름값은 이번에도 키치를 져버리지 않았다.

이호열.

이름 석 자가 나오는 순간.

밝아지는 하르콘의 얼굴.

"그랬군! 그대 또한 긍지를 깨닫게 된 거군!"

"예, 예?!"

아니, 근데 왜 갑자기 긍지로 넘어가는 건데?!

"...그게 아닌가?"

싸늘하게 냉각되는 하르콘의 얼굴.

결국, 키치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대체 그놈의 긍지가 뭔지 알 순 없었지만.

"아니요, 맞아요! 긍지, 하하하! 히끅─"

...일단은, 깨달았다고 치자.

긍지라는 거.

그림자 용병단, 전원.

우리들의 안락한 노후를 위해서라도.

.

.

.

거대 연합.

남태민이 입가에 미소를 흘렸다.

"이제야 실감이 나네."

호열 씨가 우리를, 나를 부르셨다!

성전에 뛰어들었을 때부터 같은 배를 탄 거나 다름없었지만.

회의까지 참석하는 건 감회가 새로웠다.

간만에 난 흥을 깬 건 나란히 걷던 히사기였다.

"설마 설레시는 겁니까, 남태민 군?"

"...또 뭐냐? 뭔 시비를 걸려고."

"저는 걱정에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히사기가 가련한 표정을 지었다.

뱀눈이 처연함을 더욱 돋보이게 해 꼴 보기도 싫었다.

남태민이 인상을 구겼지만, 히사기는 능글맞았다.

"저희가 이런 회의에 참석할 자격이 있을지 밤새워 고민했습니다. 라이언 하트 기사들부터 마탑의 마법사들까지. 그들과 비교하면 저흰 아직 한참 부족하니까요."

"...야,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되냐?"

"뭐가 되긴요. 감정에 충실한 게 딱 바바리안답습니다."

두꺼운 덩치.

얄쌍한 덩치.

두 사내가 티격태격 대는 모습은 시선을 끌기 충분했다.

"하씨, 쪽팔리게."

레오니는 걸걸하게 내뱉고는 두 사람과 몇 발자국 떨어져 걸었다.

하지만 거리 두기가 무색하게도.

두 사내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생각하냐?"

"레오니 씨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둘 다 닥쳐, 그냥."

매일같이 왜 싸우는지 모를 정도로.

레오니의 눈에는 둘 다 똑같아 보였다.

쨌든, 결판을 내야 싸움도 끝날 거고.

시선도 덜 집중되겠지?

그래야 나도 덜 쪽팔릴 거고.

결국, 레오니가 이를 갈며 입을 열었다.

"애초에 다투는 원인이 뭔데?"

"내가 기뻐하는 게 싫다잖아, 저 뱀눈이."

"저의 이성으로는 야성을 이해할 수 없나 봅니다."

"또 또 비꼬네?"

"...그만."

말싸움이 근본적인 원인이 아니잖아, 이 덩치들아!

"자, 잘 들어."

스윽─

고개를 숙이는 것도 모자라 허리까지 숙이는 두 사람.

...지금 내가 작다고, 짧다고 멕이는 건가?

순간, 속이 울컥했지만, 꾹 참아냈다.

"거슬러 올라가면 원인은 전원소집, 회의 때문이지?"

"그렇지."

"맞습니다. 거기에서 오는 현대인과 야만인의 감성...."

하여튼 한마디도 가만히 듣질 않는다.

남태민이 발끈하기 전.

레오니는 얼른 말을 덧붙였다.

"결국, 둘 다 똑같은 심정이잖아."

"...엥? 내가? 이거랑?"

"둘 다 도움이 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야?"

"!!"

뿌듯함이 앞서든, 걱정이 앞서든.

결국, 마음이 향하는 곳은 같겠지.

그러니까 거대 연합이 지금까지 굴러갈 수 있던 거고.

그런데 왜 맨날 치고받고 싸우는 거야, 대체?

"이제 와서 깨닫는 표정을 짓는 거. 진심 열 받는다."

하르콘 단장님, 이것 좀 보세요.

이것들은 체력 훈련 이전에 머리부터 어떻게 해야 될걸요.

그제야 만족할 만한 대답을 들은 걸까.

남태민이 허리를 펴고 고개를 세웠다.

"알아들었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순간, 마주치는 시선.

동시에 여는 입.

"긍지라는 거지."

"긍지군요."

"...?!"

아니, 그거 맞아?

왜 갑자기 핸들을 꺾고 긍지로 들이받는 건데?!

레오니가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었다.

"좋아, 오늘은 휴전이다."

"찬성입니다, 남태민 군."

"...미친놈들."

이호열 씨, 이것 좀 보세요.

당신이 얘네들을 이렇게 만들었어.

우다다.

레오니는 두 사내를 뒤로 한 채 황금 궁전으로 향했다.

저 긍지라는 게 옮을 것 같아서 한시라도 빠르게.

.

.

.

그러나 대회의실에 들어선 레오니는 경악하고 말았다.

광전사인 자신이 할 말은 아니었지마는....

감히 확신할 수 있었다.

"...쟤네만 미친 게 아니었어."

이건 광기다.

남태민과 히사기만 뭐라고 할 게 아니었다.

들려오는 심상치 않은 대화.

"탐험가 연맹이 참전할 줄은 몰랐네만."

"성전에선 저희 탐험가들이 활약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니까요. 물론, 연맹장인 저도 놀랐습니다. 저부터가 탐험가지만, 탐험가처럼 단합이 안 되는 족속도 드문데.... 대부분 연맹 탐험가들이 뜻을 함께해 줄 줄이야."

"탐험가의 긍지라는 말이군!"

기승전긍지.

저 광신도와 같은 대화를 나누는 이들이 누구던가?

플레이어도, 랭커도 아니고, 무려 라이언 하트 기사단장 하르콘과 탐험가 연맹장 파비앙이었다.

이번에는 왼쪽 고막을 파고드는 대화.

"교단의 성물을 내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벨리에 선임이 감사 인사를 전해달라고 부탁해 왔습니다. 물론, 저 또한 큰 신세를 졌습니다."

"아닙니다. 그 성물은 더 이상 저희의 것이 아니니까요. 어떻게 사용하시든 교단에게 감사하실 것은 없습니다. 성물보다 값진 긍지를 깨닫게 되었으니까요."

"과연, 그 말씀엔 공감됩니다."

아르카나 대륙 최대의 종교, 여신교.

수만에 이르는 여신교단 성기사들을 이끄는 탈림.

수식어조차 필요 없는 마탑의 수석, 마르셀로.

역시나, 저쪽 이상으로 대단하신 분들이시다.

그쯤 되니 레오니는 진지하게 걱정이 들었다.

'...잠깐, 이쯤 되면 내가 잘못된 건가?'

설마, 나만 깨닫지 못한 건가?

심정 같아서는 속 시원하게 물어보고 싶었다.

대체 긍지라는 게 뭐냐고!

하지만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떠도는 말이 떠올랐다.

-"긍지가 뭐냐고 묻는 것부터 긍지가 없는 행동이지."

데구르르─

결국, 레오니는 입을 다물고 눈알만 굴렸다.

그러던 도중 맞은편에 앉은 키치와 눈이 마주쳤다.

긍지가 긍지를 알아보듯, 레오니와 키치도 서로를 알아봤다.

"!!"

...그쪽도 긍지가 뭔지 모르는구나?

물론, 반가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약속 시각 정각.

들려오는 구두 소리.

또각─

호열이 대회의실에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

.

.

모두가 시간을 엄수해 줘서 고맙다.

뭐, 나머지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기대하지 않아서인가.

키치에게 특히나 고맙군.

'...아니었으면 끔찍하거든.'

긍지가 부족하다.

격식과 예절이 없다.

하마터면 잔소리로 회의를 시작할 뻔했으니까.

덕분에 나는 지체하지 않았다.

착석하자마자 본론을 꺼냈다.

"오늘, 그대들을 소집한 이유는 간단하다."

몇 번씩이나 말하지만, 설명보다는 직접 보는 게 낫다.

나는 [마안의 망원경]을 대회의실 원탁 위에 올려뒀다.

효과를 발동하며 말을 이었다.

"마왕 쟁탈전이 시작됐다."

"...!!!"

이내, 허공에 떠오르는 아르카나 대륙의 전경.

황폐화된 대륙의 모습도 이젠 다들 익숙해졌겠지.

그러나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르다.

지각 변동, 아르카나 대륙이 갈라져 있었다.

마르셀로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건 마법이 아닙니다."

"마법이 아니라면...?"

"악마, 그들의 짓이겠지요."

갈라진 틈에서 솟아오르는 녹색 불길.

...잠깐만.

중얼거린 파비앙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입을 연다.

"지옥의 횃불과 같은 빛...? 그렇다면 설마?"

맞다. 그 설마가 설마다, 파비앙.

"그렇다. 지옥의 불길이다."

"지옥의 횃불이라니. 파비앙, 무슨 소리인가?"

"...이럴 수가. 일단, 보여드리겠습니다."

파비앙이 곧 [지옥의 횃불]을 꺼내 들었다.

아르카나 대륙에 피어오른 녹색 불과 같은 빛으로 타오르는 횃불이었다.

나야 [텟퍼른 미궁] 균열에서 봐서 놀랄 건 없었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겠지.

"과거, 지옥의 문을 목격했다는 연맹 탐험가가 남긴 게 바로 이 지옥의 횃불입니다. 직접 확인하진 못했지만, 악마를 태우는 효과가 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꼬던 키치가 물었다.

"말씀 중에 죄송한데요. 마계랑 지옥은 다르잖아요?"

좋은 질문이다, 키치.

마계와 지옥은 엄연히 다르다.

마계는 악마들의 고향이지만, 지옥은 그랑펠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악마들이 처박히는 공간.

정확하게는 악마 사냥꾼에게 사냥당한 악마들이 떨어지는 사후세계였으니까.

"뭐, 아르카나 대륙에 악마가 판치는 걸로 봐선 마계와의 통로야 열린 지 오래전인 것 같은데.... 악마들이 굳이 지옥의 문이란 걸 열 이유가 있을까요?"

어째서 악마들은 자신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장소.

지옥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는가?

마왕 쟁탈전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도 알지 못하는데.

다들 짐작할 수 없는 게 당연하겠지.

나도 마찬가지였다.

눈앞이 점멸하기 전까지는 말이야.

[클래스 퀘스트 : 지옥의 문]

그러나 모든 것을 알게 된 지금.

나는 언제나처럼 꼿꼿할 수 있었다.

예상 밖의 상황에 동요하는 이들 앞에서.

평소처럼 태연하게 지껄일 수 있었다.

"의문을 가질 필요도, 우려할 것도 없다."

"...?"

"내가 있으니."

"!!!"

내가 무슨 광신도를 이끄는 사이비 교주도 아니고.

이번엔 단순한 허세가 아니다.

정말로 내가 생존해 있기에 가능한 '계획'이 있거든.

◈ 171화. 내가 있기에 가능하다 (2)

클래스 퀘스트는 간만이었다.

마왕 쟁탈전이 대형 이벤트라는 게 또 한 번 체감이 된다.

나는 다시금 퀘스트창을 살폈다.

[클래스 퀘스트 : 지옥의 문]

절멸의 아르카나 대륙.

새로운 악은 지옥에 떨어진 왕좌를 거머쥐기 원한다.

그러나 저들은 그대의 존재를 간과하고 있다.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여.

지옥의 불길로 오만한 악마를 불태워라.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지옥에 떨어진 왕좌를 목격하라. (진행 중)

내용을 보는 순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째서 악마들이 자신들에게 백해무익한 지옥의 문을 열어 재꼈는지 말이야.

그랬다.

악마들은, 악마 사냥꾼 손에 지옥으로 떨어진 마왕.

즉, 그들과 함께 지옥에 떨어진 왕좌를 노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왕좌가 뭔데?

과거의 나였다면 10년의 공백을 탓하며 울분을 터트렸겠지. 하지만 말했다시피 긍지에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을 멈추지 않았던 나였다.

이 아이템이 바로 그 증거고.

[마안의 망원경].

마안의 시야가 서서히 옮겨간다.

솟구치는 지옥의 불꽃.

불길 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왕좌를 향해서.

잠자코 지켜보던 남태민이 입을 열었다.

"...저건 의자인가요?"

그렇다.

"보다 정확하게는 악마들의 왕좌다."

"왕좌...!"

"마왕 쟁탈전이라는 게 저 왕좌를 차지하는 싸움이었군!"

하르콘의 상황판단은 정확했다.

하쿠나가 우려스런 표정을 지었다.

"지옥의 불길을 감수하면서까지 왕좌를 차지하려고 하다니. 왕좌에 담긴 힘이 방대한 모양입니다. 하긴 저조차도 괴물 같은 힘을 내게 했던 거악이니까...."

칠죄종 탐욕에게 빙의됐던 하쿠나였다.

고대 유스라 왕국에는 전투도 다툼도 없었다.

유스라의 국왕인 하쿠나에게 전투 능력은 전무한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런 하쿠나의 육체로도 거악의 위용을 드러냈던 칠죄종 탐욕이 아니던가.

'아르카나 시스템적으로 표현하자면.'

저 왕좌를 차지하는 악마는 보스 몬스터로 격이 상승한다는 거겠지. 과연, 이런 면에선 플레이어들이 눈치가 빨랐다. 히사기가 낮게 중얼거렸다.

"좋지 않군요."

"무슨 소리인가, 히사기?"

"지옥의 불길을 감수하고 왕좌를 차지할 악마는 그 자체로도 강한 녀석일 게 분명합니다. 그런 녀석이 왕좌까지 차지한다면...."

"...!!!"

맞는 말이다.

마계 서부의 패자, 락시오로스를 마지막으로 끌고 와볼까.

만약, 녀석이 멀쩡히 살아있어서 왕좌를 차지하게 된다면.

1,000레벨짜리 네임드 몬스터가 보스 몬스터로 탈바꿈한다는 뜻이지.

"악마들 또한 위험을 감수할 만하군요."

마르셀로가 객관적인 판단을 내렸다.

"아, 그래서 그랬구나. 이제 이해가 됐어요."

의문을 제기했던 키치도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뭐, 의문은 해결됐지만, 분위기는 축 가라앉았군.

그럴 만도 하다.

"핵심은 악마가 왕좌를 차지하는 것을 저지하는 것이겠군."

"과정은 순탄치 않겠죠. 쟁탈전에 끼어드는 순간, 저희는 모든 악마의 공공의 적이 될 겁니다. 배신을 일삼는 악마의 천성에 기대하는 건...."

전쟁에 익숙한 하르콘과 탈림.

두 기사는 빠르게 요지를 파악했다. 왕좌를 두고 다툴 악마들 사이에서 전략적 이득을 취할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는 거겠지.

물론, 나는 초를 쳤지만.

"긍지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어련하겠냐, 그랑펠.

악마에게 기대할 바엔.

그냥 가라앉고 마는 게 그랑펠의 긍지였으니까.

하지만 말했다시피 말만 거창한 게 아니다.

내가 살아있다.

내가 살아있기에 활로가 있었으니까.

애초에 마왕 쟁탈전이 본격적으로 개시된 이유가 뭔데?

'악크샨이 절멸했으니까.'

그래, 마왕 쟁탈전은 악마들에게도 양날의 검과도 같았다.

사지(死地)나 다름없는 지옥의 문을 제 손으로 열어버리는 것.

그게 바로 마왕 쟁탈전이 오랫동안 개전되지 않은 이유였다.

'천적인 악마 사냥꾼이 새파랗게 눈을 뜨고 있는데.'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것도 아니고.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있겠어?

그러나 성전에서 악크샨은 절멸.

거기에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이자 칠죄종 탐욕과 마왕 몇몇을 지옥으로 보내버린 나 또한, 수백만 악마의 희생으로 처치했다고 판단.

마왕 쟁탈전에 방해물은 없다고 결론을 내린 거겠지.

[최후의 모험가] 효과에 대해 알 턱이 없으니까!

"어리석은 족속은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그게 바로 내가 뻔뻔하게 내뱉은 이유였다.

"나라는 존재를."

...아니, 잠깐만.

틀린 말은 아니지마는 꼭 그렇게 거창하게 해야겠냐고!!

나의 절규가 무색하게도.

"!!!"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됐다.

살 구멍 팔 시간에 쥐구멍도 하나 파놓을걸.

...진짜 내가 이렇게 힘겹게 산다.

*

AAU엔 또 한 번 폭탄이 떨어졌다.

신규 AAU 지부.

AAU 유스라 지부에서 온 협조 공문 때문에.

"마왕 쟁탈전?! 그게 뭔데?!"

타다다다닥!

곳곳에서 끊이지 않는 타자 소리.

성현준과 윤수겸은 서둘러 데이터베이스를 뒤졌다.

성현준이 다급하게 외쳤다.

"아니, 선배. 마계에 관한 정보는 있어도 지옥에 관한 정보가 있을까요? 뭔가 착각하신 거 아닐까요? 왜, 마계랑 지옥. 어감이 비슷하잖아요!"

"지옥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일단 찾는 데까지 찾아봐."

"...선배, 방금 발음이? 욕하신 거 아니죠?"

[지옥].

데이터베이스에 그 단어를 검색하자 튀어나오는 건 케케묵은 정보나 설정들뿐이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성현준이 입을 열었다.

"에픽 아이템 설정, 지옥의 횃불. 낭만 탐험가, 로렌츠크가 지옥의 입구를 발견한 기념으로 설정된 아이템. 구체적인 스토리 라인은 개발 중."

구체적인 설정이 있는 게 이상한 일이겠지.

낭만 탐험가, 로렌츠크부터가 간단한 설정만 몇 가지 잡은 미구현 NPC였으니까.

"그리고 하나 더 있네요. 악마 사냥꾼에게 사냥당한 악마들은 지옥에 떨어져 두 번 다시 부활하지 못한다. 그 어떤 악마라고 하더라도."

나머지 정보들도 그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지옥이라니, 그나마 기본적인 설정이라도 존재하던 마계와는 다르게 지옥은 정말 언급만 되는 수준에 불과했으니까.

성현준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쓸데없는 정보가 도움이 될까요?"

타닥!

윤수겸이 자판에서 손을 떼고 의자를 돌려 앉았다.

"판단하는 건 우리가 아니라 이호열 플레이어...."

아니지, 이젠 호칭부터 제대로 해야 한다.

"AAU 유스라 지부, 총책임자님이시겠지."

AAU 유스라 지부.

특별 지부이니만큼 지부장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책임을 지는 총책임자만이 존재할 뿐.

세상이 호열에게 거는 기대만 하더라도 충분히 무겁거늘.

호열은 또 하나의 짐을 짊어진 것이었다.

"참, 직책 한번 막중해 보이네."

이제는 AAU조차도 호열에게 기대는 꼴이 돼버렸다.

일개 사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겠지.

그럼에도 성현준과 윤수겸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렇겠죠? 그러면 싹싹 긁어서 넘겨드려야겠네."

물론.

"후후─"

AAU 대한민국 지부장.

박민재의 마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박민재는 서랍 속에서 서류 한 뭉치를 꺼냈다.

먼지 쌓인 서류.

"이걸 다시 꺼내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쓱─

먼지를 닦아내자 그 문서의 정체가 드러났다.

[레이먼 션, 대화록].

"진짜 간만이군."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고, 자신도 코스모 사원으로 재직하던 시절. 박민재는 하늘 같은 CEO 레이먼 션에게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했었다.

그때 동료의 반응?

"뭔 개지랄이냐고 난리가 났지."

많은 월급.

낮은 노동 강도.

칼퇴.

개발자들에겐 신의 직장이라 불리던 코스모였다.

당장만 하더라도 바랄 게 없었는데, 괜한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는 눈치들이었지. 하지만 이놈의 반골 기질이 가만히 있으랴.

"그땐 특히나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었거든 내가."

그때나 지금이나 가장 큰 의문은 같았다.

레이먼은 어째서 사원, 간부들에게도 아르카나 대륙 전기의 로드맵을 공개하지 않은 걸까? 정확하게는 플레이 목적과 스토리의 큰 틀조차 제시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다시 와서 생각해 보니까 나도 제정신이 아니긴 했어?

"당근만 흔드는 주인을 싫다고 물 생각을 했으니까."

뭐, 그러니까 반골이라는 거겠지만.

박민재는 레이먼 션에게 직통으로 메일을 퍼부었다.

자신의 의문점을 성심성의껏 포장해서 말이야.

그 결과, 박민재는 레이먼 션과 단독으로 면담을 했다.

그 면담의 대화가 서류에 적혀있었다.

"퉷. 서랍에 넣어놨는데 뭔 먼지가."

박민재는 입가를 훑고는 서류를 펼쳤다.

쭉 살펴보고 있자니 그때의 기록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문득, 한 구절이 시선을 끌었다.

──────

션 : 그게 본론인 것 같군요.

──────

"눈치 하나만큼은 기가 막혔지. 그거."

어째서 우리에게 아르카나의 목적과 틀을 공유하지 않는가?

나름대로 은근슬쩍 물어봤다고 생각했는데.

내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지, 그 자식.

──────

션 :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

정말이지, 다시 봐도 재수 없는 말이 아닐 수 없다.

──────

션 : 이미 완성된 것에 간섭할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

그때는 뭔 개소리를 하는 건지 몰랐었다.

단순하게 레이먼 션, 능구렁이에게 말려서 본전도 찾지 못했다고 생각했을 뿐.

녹음기를 되돌려보고, 은밀하게 대화록을 작성할 때만 하더라도 열불이 났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니 저절로 이해가 되더라.

나이를 먹고 머리가 커져서 그러냐고?

아니, 대격변이 터졌거든.

"...완성된 것에 간섭할 필요가 없다."

대격변 이후로 지금까지.

세월이 조금 더 흐르고 다시 그 말을 보니까.

비로소 그 말뜻이 잡힐 것 같기도 하다. 왜, 코스모 데이터베이스엔 한 줄짜리 설정만 존재하는 몬스터나 NPC들이 맹활약하는 걸 보면 말이야.

"우리의 개발 여부랑은 상관없었다는 건가."

박민재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이제 와서 열 내봤자 뭐 하겠어."

레이먼 션은 진작 행방불명.

그때처럼 면담도 불가능한데 말이다.

하지만 이 정도면, 작은 엿 정도는 먹여줄 수 있지 않을까.

"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있잖아?"

대화록을 다시 보니 새롭게 보이는 게 있는 것처럼 말이다.

때로는 아르카나 대륙을 실시간으로 살펴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게 하는 이호열이라면. 이 대화록에서 레이먼 션의 진짜 의도를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박민재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지 않습니까, 잘나신 레이먼 션 CEO님?"

*

유스라 왕국의 집무실.

아르카나 대륙에서 마왕 쟁탈전이 발발한 현재.

나는 언제든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게 대기 중이었다.

달칵─

물론, 이 드높으신 긍지가 고작 악마 때문에 티타임을 생략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그래도 그랑펠의 입맛과는 합의를 봤다.

입에 달고 살았던 티백 녹차를 잠깐 끊고, 비약초를 우려낸 차를 마신다는 것이다.

"과연, 숫자는 숫자에 불과하군."

...수십만 원짜리 비약초보다 300원짜리 녹차 티백이 낫다고 돌려 말하지 마라, 그랑펠. 짧은 투정도 잠깐, 나는 AAU에서 도착한 서류를 확인했다.

책상에 쌓인 서류량이 제법 된다, 이거.

'철민 씨가 고생했겠는데.'

남태민의 형제, 남철민.

나는 AAU 유스라 지부, 중책을 남철민에게 맡겼다.

나는 뭐, 바지사장이니까.

어째서 바지사장을 자처했느냐고?

AAU까지 신경 썼다가는 진짜 몸이 남아나질 않을 테니까.

현재 일과만 하더라도 세계수의 축복이 없었다면 진작 골로 갔을 지옥의 일정이란 말이다.

그것도 모자라 AAU 유스라 지부장으로, 날마다 AAU 회의까지 참석해야 한다면?

진심으로 끔찍하다...!

그래서 총책임자라는 새로운 직급까지 요구했다, 내가.

'그래도 맡길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네.'

남철민은 가온, 이제는 거대 연합의 브레인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 능력을 의심할 필요는 없겠지.

뭐가 됐든, 나보다는 여러모로 나을 거야.

지부장 회의에서 잔소리를 쏟아내는 그랑펠을 상상을 해보자.

벌써부터 피곤해진다고....

각설하고.

나는 AAU가 전달해 온 자료를 살폈다.

솔직하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AAU의 밑천이야, 그동안 봐서 잘 알고 있었으니까.

"AAU, 창조의 편린을 탐구하는 자들이여."

그러니까 제발 거창하게 포장 좀 하지 마라, 그랑펠.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

AAU는 과거 아르카나의 개발진들이었으니까.

근데, 애초에 남아있는 정보랄 게 별로 없다잖아...?

'...잠깐만.'

들은 바로는 분명 그래야 하는데.

뭐지, 내 눈에는 보이고 있었다.

『아르카나 대륙』.

[아르카나 대륙 전기].

두 세계를 모두 경험한 내게.

쓸데없어 보이는 정보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가.

"그대들의 탐구가 [『기이』]를 이끌어냈군."

.

.

.

──────

새로운 월드 이벤트, '마왕 쟁탈전'이 시작됩니다.

──────

◈ 172화. 유치한 놀이에 불과하다

목요일.

떠오른 정기 업데이트 내역.

──────

새로운 월드 이벤트, '마왕 쟁탈전'이 시작됩니다.

──────

그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이전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

신규 균열, '69번째 왕좌'가 추가됩니다.

신규 네임드 몬스터가 추가됩니다.

마계의 괴인, 파돈돈 : Lv.777

적발의 마인, 쥬르발 : Lv.800....

──────

새로운 균열과 새로운 네임드 몬스터.

그들의 레벨 때문에 놀란 건 아니었다.

800레벨 언저리.

물론, 그 자체만으로도 높은 레벨이었지만. [깨진 차원의 틈], [마왕성] 균열에선 그보다 높은 레벨의 보스 몬스터가 등장하기도 했었으니까.

이전과 비교할 수 없다는 건 그 숫자였다.

──────

신규 균열, '64번째 왕좌'가 추가됩니다.

신규 네임드 몬스터가 추가됩니다....

──────

신규 균열, '72번째 왕좌'가 추가됩니다.

신규 네임드 몬스터가 추가됩니다....

──────

신규 균열, '45번째 왕좌'가 추가됩니다.

신규 네임드 몬스터가 추가됩니다....

──────

신규 균열, '24번째 왕좌'가 추가됩니다.

신규 네임드 몬스터가 추가됩니다....

──────

총 12개의 균열.

균열에 따라 등장하는 네임드 몬스터의 숫자는 그 몇 배.

네임드 몬스터 아래에 등장하는 일반 몬스터는 그 몇백 배.

그렇기에 장담할 수 있었다.

"마왕성 균열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대재앙입니다."

정기 업데이트 내역이 떠오른 순간.

세상은 공황에 빠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플레이어들의 수준을 아득하게 뛰어넘는 균열이 동시에 12개나 생성됐으니까.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뭣하지만.... 만약 균열이 붕괴한다면 인류는 대격변 초창기, 그 이상의 피해를 보게 될지도 모르겠죠."

그 정도로 충격적인 업데이트 내역이란 말이다.

그러니 위화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지나치게 고요하지 않은가?

다르게 표현하자면 세상은 지나치게 평화로웠다.

심지어는 진작 비상사태가 걸렸어야 할 AAU조차도.

영국, AAU 런던 지부.

베이커는 창밖을 내다봤다.

런던의 기적.

그 상징인 아쿠아리우 떡갈나무들이 햇빛에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출렁거리는 금빛 나뭇잎의 물결엔 눈이 부실 정도였다.

베이커는 입을 열었다.

"저희가 즐겨도 된다는 겁니까? 이 평화로움을."

대격변 초창기 때부터 지금까지.

AAU의 방침은 한결같았다.

언제나 최악을 가정한다.

누군가에게는 냉정한 말이겠지만.

그래야만 예상보다 작은 피해를 위안으로 삼아서.

인류는 다시금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으니까.

"...나약하니까요. 인간이란 동물은."

우려가 되는 게 당연했다.

이호열.

당신은 이 평화를 감당할 수 있으시다는 말씀입니까?

잔잔한 물결에는 작은 파동조차 커지는 법이다.

평화로울수록 약간의 피해에도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조금도 휘청거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것입니까?

베이커의 상식으로써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저로서는 감히 짐작조차 되지 않는군요."

그가 짊어지고 있을 무게감과 부담감이.

그러나 베이커는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대신 지부장실 모니터에 떠오른 화면을 바라봤다.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유스라 왕국의 전경.

베이커가 읊조렸다.

"부디 그의 짐을 덜어주길 바랍니다, 슈레이그."

*

균열의 위치는 아직 포착되지 않았다.

하지만 남아있는 자료가 있었으니.

그동안의 정기 업데이트 업로드 시간과 균열 생성 시간을 비교해 고려해 보면....

"아무리 늦어도 몇십 분 안에 생성되겠는데?"

유스라 왕국은 플레이어들로 가득했다.

모두가 [끝나지 않은 성전(聖戰)]에 참전한 플레이어들이었다.

월드 이벤트, [마왕 쟁탈전]이라.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순 없었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업데이트 내역에 악마들이 가득하잖아?"

"맞아. 보나 마나 성전의 연장선이라는 거지."

"그래서, 다들 어떻게 하실 건데요?"

갑자기 대화에 끼어든 사내.

그에게 따가운 눈초리가 쏟아졌다.

사내는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니, 시비 거는 게 아니라 순수하게 궁금해서요! 솔직히 저희 수준으로는 무리잖아요. 이런 말도 안 되는 네임드 몬스터를 상대하는 거는요!"

열렬한 시선을 돌리려는 걸까.

사내가 내민 건 스마트폰.

정기 업데이트 내역이었다.

최소 700레벨부터 최대 850레벨까지.

사내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이곳에 모인 플레이어 대다수가 베테랑이라고는 하나, 언제까지나 플레이어들 기준이었다.

기껏해야 300레벨 중후반에 불과했고, 400레벨부터는 랭커로 불릴 정도였으니까.

"심지어 악마족 몬스터잖아요. 아무리 버프로 떡칠한다고 하더라도 정신력이 남아나겠어요? 네임드 몬스터를 잡기는커녕 잡몹한테도 쩔쩔맬걸요?"

최상위 플레이어들조차.

저런 균열에 진입하기엔 위험부담이 상당하단 뜻이다.

하지만 돌아온 건 대답도, 반박도 아닌 웃음이었다.

팽!

여자는 코웃음을 걸고, 사내를 향해 활시위를 튕겼다.

"그런 고민은 애초에 다 끝내지 않았나?"

"...네?"

"아니, 그따위 자아 성찰은 성전에 참전하기 전에 다 끝낸 거 아니었냐고. 그래서야 긍지를 증명했다고 할 수 있으려나. 아니지, 잠깐. 그쪽 애초에 퀘스트 목표를 달성하기나 했어?"

...아니, 궁수는 남 퀘스트창도 볼 수 있나?

어떻게 알았지?

사내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럼요! 참 보여드릴 수도 없고...."

변명하는 도중에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긍지가 뭐길래, 목숨까지 걸 수 있단 말인가?

결국, 사내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근데 다른 것도 아니고 목숨이 걸렸잖아요, 내 목숨! 이호열 씨부터 말은 거창하게 했지만. 막말로 균열도 12개고, 한쪽 균열에 진입한 사이에 다른 균열에서 참사가 날 수도 있잖...!"

쾅!

"아욧!! 깜짝이야!!"

커다란 방패가 땅바닥을 내리찍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 사내.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목숨보다 소중한 게 여기 현실에 있으니까."

"...네?"

"내 아내가, 자식들이 현실에서 평화롭길 원하니까."

"!"

"토끼 같은 처자식에게 흉측한 꼴을 보여줄 생각은 죽어도 없으니까. 이유는 그걸로 충분한 거 아닌가? 아니면 뭐, 다른 이유가 필요한 건가?"

플레이어로 각성했다고 사고방식이 달라지진 않는다.

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두렵다고 피하면 계속해서 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피한다면 균열은 더욱더 큰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리라는 것도.

그리고 자신들이 그 간단한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던 시절.

유일하게 나섰던 인물, 호열을.

철컥─

중년 사내가 방패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징징거리던 플레이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두렵다면 한 발짝 물러서서 지켜보면 되는 일이지."

"...?"

"왜, 그쪽 눈앞에 떠오른 퀘스트창에도 적혀있지 않았었나? 보상도, 전리품도 없다. 남은 건 오직 가슴 속 긍지뿐일 거라고. 그러니까...."

중년 사내는 말을 이었다.

"누구도 그쪽한테, 우리한테 강요하지 않았단 말이지. 그러니 그쪽을 비판할 사람은 아무도 없네."

모든 건 개인의 선택이었다.

그러니까 그에 관한 책임도 스스로 지는 거겠지.

플레이어들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탑에서 받은 도움만 하더라도 얼만데."

"내 팔자에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랑 같이 훈련을 받게 될 줄은 또 몰랐다. 물론, 우리 때문에 기사들이 좀 고생을 했지만...."

"민폐야, 훈련에서 끝내면 되는 거 아니겠어?"

성전을 준비하며 아르카나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균열 안에서까지 그들의 도움을 바라는 것?

양심이 있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겠지.

"우리보다 큰일을 하실 분들인데 말이야."

객관적으로 아르카나인들의 수준은 플레이어보다 높았다.

그것도 훨씬.

왜, 수만에 이르는 뮤온의 성기사들만 하더라도 웬만한 랭커들과 비교해도 그 수준이 높거나 엇비슷했으니까.

라이언 하트 기사단, 그림자 용병단, 마탑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

"그 아까운 전력을 우리 지키는 데 쓰는 건 말도 안 되지."

"맞지. 그 시간에 악마 하나를 더 잡는 게 이득이야."

"우리끼리 알아서 잘 싸워보자고. 다들."

그렇게 생각한 플레이어들이 마지막 준비를 다할 때였다.

반짝─

퀘스트창이 점멸했다.

새로운 퀘스트 목표가 갱신된 것이었다.

[퀘스트 : 끝나지 않은 성전(聖戰)]

아르카나 대륙에서 현실로.

악마와의 성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전쟁의 끝엔 보상도, 전리품도 존재하지 않는다.

남는 것은 오직 긍지뿐.

스스로의 긍지를 증명하라.

─해당 지역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라. (성공)

─해당 지역에서 자신의 본대에 합류하라. (진행 중)

"...엥?"

해당 지역은 유스라, 프로스트, 뮤온, 마탑으로 플레이어마다 서로 달랐다.

그보다 본대라니?

그 단어가 뜻하는 말은 간단했다.

"...우리한테 소속이 있다고?"

스스로 판단했기에.

자신의 목숨을 책임지는 것도 자신들이다.

그렇기에 각오를 다지던 플레이어들이었다.

본대에 합류하라는 퀘스트 목표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마탑의 포탈을 경유.

각자의 목적지로 향한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건.

"하르콘 단장.... 라이언 하트 기사단?"

"마르셀로 수석 마법사님?"

"탈림, 그리고 사제님들?"

성전에 참전, 마왕 쟁탈전이 시작될 때까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함께했던 아르카나인들이었다.

"모험가들이여. 그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르콘의 목소리에 플레이어들은 흠칫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니, 어째서?

누군가 중얼거렸다.

"...우리는 짐밖에 안 될 텐데."

비관적인 말이지만 누구도 반박할 수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레벨 차이 최소 두 배였다.

그런 악마족 네임드 몬스터들이 날뛰는 균열에서 자신들이 활약을 해봐야 미비한 수준이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 사실을 꼬집듯 하르콘이 말을 이었다.

"그대들의 수준은 누구보다 그대들을 훈련시킨 우리가 잘 알고 있네. 그대들이 아르카나 대륙을 파멸로 몰고 간 악마들과 대등하게 맞서는 건 불가능한 일이겠지."

하르콘은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비웃음이 아니었다.

어느 때보다 인자한 미소였다.

"그러니, 이번 전투에서는 우리들에게 기대게나."

"...!!!"

"우리를 믿고 의존하게나."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듣고 있는 거지?

그것은 멀쩡한 청각을 의심할 정도의 선언이었다.

기대라니, 의존하라니, 객관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게 대체 무슨 소리십니까?"

무능력한 우리를 짊어지고 가겠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그러나 하르콘뿐만 아니었다.

마탑, 마르셀로가 말을 잇는다.

"첫걸음을 내딛는 그대들은 단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마왕 쟁탈전에서의 경험이 그대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양분이 될 테니까요."

뮤온, 탈림이 외친다.

"여신의 가호가, 성기사의 방패가 그대들을 보호할 것이다."

그 말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는 듯.

메시지까지 떠올랐다.

─해당 지역에서 자신의 본대에 합류하라. (성공)

조금도 상상하지 못한.

예상 밖의 전개에 플레이어, 모두가 얼어붙었다.

거기엔 산전수전 다 겪은 랭커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샤이닝.

카밀라가 생긋 입꼬리를 올렸다.

"저런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아르카나인들이 원래 저런 캐릭터였어? 아니, 백번 양보해서 다른 쪽은 그럴 수 있다고 치더라도. 마탑은 왜 저러는 거야?!"

"왜~ 마음이 바뀔 수도 있지. 제시를 보면 알잖아, 마법사들 변덕 장난 아닌 거~ 안 그래, 록스?"

록스는 침묵했다.

자신의 아르카나 경험, 지식을 전부 뒤져보았다.

하지만 아르카나인들이 플레이어들을 위해서.

희생을 자처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 또한 새로운 변화란 건가?'

이호열.

최소 900레벨.

상상을 초월하는 명성.

수많은 세력과 쌓은 관계도, 영향력이 맞물려서 찾아온 변화란 뜻인가? 아니, 이건 그런 것들로도 불가능했다.

이건 말 그대로 아르카나의 시스템을 초월한 변화였으니까.

결국, 록스는 너털웃음을 뱉었다.

"글쎄.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

.

.

.

간단하다.

플레이어들이 긍지를 깨달았듯.

아르카인들의 가슴 속에도 긍지가 존재했으니까.

그래, 모든 것은 긍지에 따라서.

나 또한.

가슴 속 무거운 긍지에 휘둘려서 입을 열었단 것이다.

"유치한 왕 놀음에 우리가 짊어질 희생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그랑펠의 긍지에 마왕 쟁탈전?

악마들의 소꿉놀이 따위, 성전 축에도 끼지 못하겠지.

그깟 소꿉놀이에 아군의 희생 또한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르카나인이 됐든, 플레이어가 됐든.

단 한 명의 희생도.

그게 가능한 일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대답해 주겠다.

"마왕 쟁탈전은 우리에게 그저 양분이 될 뿐이다."

나는 몰라도.

우리 그랑펠 님께서는 내뱉은 말은.

반드시 실현하게 하는 '설정'이라서 말이야.

"오만의 대가를 치를 시간이다. 어리석은 악마들이여."

◈ 173화. 우리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1)

[69번째 왕좌]

[적정 레벨 : Lv.700~750]

[붕괴 진행도 : 24.8%]

뉴욕.

도심 한복판에 생성된 균열.

균열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얼마나 격한지는 붕괴 진행도가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망설임은 없었다. 선두에 나선 건 여신교단의 성기사들이었다.

탈림이 외쳤다.

"전군, 방패를 들어라!"

철컥!

"진입하는 순간, 표적은 우리는 공공의 적이 된다!"

파돈돈과 쥬르발.

무려 800레벨에 육박하는 두 네임드 몬스터의 협공이 쏟아질 건 뻔히 예상되는 일. 플레이어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균열 내부의 압력이 피부로 와닿았다.

"...이거, 그냥 비명횡사했겠는데?"

의욕만 앞세워 진입했더라면.

클리어는커녕 저항 한 번 제대로 못하고 끝났겠지.

그러나 여신의 방패가 자신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후후, 이런 발현은 새롭네요!"

"자중하세요, 지브릴 숙련 마법사."

"앗, 네. 마이아 선임님."

마탑의 선임, 숙련 마법사들.

그들의 방대한 마력이 방패를 더욱더 견고하게 만들었다. 메시지로 확인하고, 눈으로 목격하고, 피부로 체감하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

"슈레이그,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

세컨드 썬.

동료의 말에 슈레이그는 감상에서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미소를 흘렸다.

"잠깐, 쓸데없는 생각 좀 했어."

"이런 상황에서 쓸데없는 생각? 너답지 않은걸."

"그러게 말이야."

내가, 세컨드 썬이, 플레이어들이 저들 수준으로 강해지는 게 가능한 일일까. 하는 생각을 말이야. 슈레이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만약, 호열이 자신의 모습을 봤다면.

'긍지가 무뎌졌다며 역정을 내셨겠지.'

검기의 존재 여부조차 알지 못하던.

지금보다 훨씬 나약했던 던전 균열 때의 자신.

하지만 호열은 그런 자신에게 확신을 줬다.

그 결과가 플뢰레에 깃들어 있지 않던가.

곧 슈레이그의 눈빛이 결연하게 빛났다.

"다들 똑똑히 지켜보도록 해. 우리에게 배려에 놀라거나 기뻐할 자격은 없어. 언제까지고 아르카나 대륙에게 의존할 수도 없는 일이니까."

끄덕─

각오와 함께 모두가 균열에 진입했다.

그와 동시에 시야가 뒤바뀌었다.

균열.

아르카나 대륙과 현실이 절반씩 섞인 공간.

복잡한 뉴욕의 도심이 어느샌가 피 칠갑이 되어버렸다.

갈라진 아스팔트 바닥에서 솟구치는 녹색의 불꽃.

곳곳에서 들려오는 악마의 울음소리.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었다.

"...균열이 붕괴하면 이게 현실이 된다는 거지?"

대다수의 플레이어들은 이 정도 적정 레벨의 균열에 진입하는 게 처음이었다.

저런 고레벨의 악마족 몬스터 앞에 선 것도 처음이었고.

"대체 어떤 생각으로...."

진심으로 존경심이 솟아날 수밖에 없었다.

믿을 수 있는 동료.

그것도 모자라 여신교단의 성기사단, 심지어는 마탑의 마법사들과 함께 진입한 지금조차도 공포에 몸과 정신이 압도되는 기분이 들었거늘.

이런 균열을 혼자 클리어해오다니.

하지만 감탄은 오래가지 않았다.

탈림의 경고대로 균열에 진입하는 순간.

악마들의 시선이 침입자에게 집중된 것이다.

탈림이 소리쳤다.

"모험가들이여, 보이는가?"

챙!

탈림의 검이 하늘을 향했다.

정확하게는 하늘에 떠오른 왕좌를 가리켰다.

"저것이 바로 마왕 쟁탈전의 목적이다. 저 왕좌를 차지하는 악마가 바로 악마들의 왕, 마왕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

그래서 균열 내부가 피로 가득했던 건가?

악마들이 서로서로 싸우느라?

플레이어 중 누군가 중얼거렸다.

"...그럼 나중에 습격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요?"

적의 적은 아군.

왜, 이이제이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그러나 탈림은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악마들의 왕 놀음에 놀아나지 않는다. 왕좌에 앉기를 바라는 악마든, 그걸 방해하는 악마든. 우리에게는 모조리 불살라야 하는 악마에 불과하다!"

악마를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그것이 놈들에게 짓밟힌 아르카나 대륙, 우리 아르카나인들의 각오니까. 그까짓 왕 놀음 따위와는 짊어진 무게가 다르다는 것이다. 전진하라, 여신의 기사들이여!"

.

.

.

[58번째 왕좌]

[적정 레벨 : Lv.800]

[붕괴 진행도 : 26%]

벤쉬와 뱅그릿.

두 선임 마법사는 악마를 바라봤다.

벤쉬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뱅그릿 선임?"

"뭘요?"

"마탑에 입성하고 나서 이런 일이 벌어질 거로 생각했느냐는 말입니다. 나는 상상도 해보지 않았거든요. 이런 상황까지는."

"그런 거라면 저도 마찬가지예요."

보자, 뱅그릿이 마탑에 입성한 이유는 단순하게 굶고 싶지 않아서였으니까. 밥도 주고, 재워주고, 심지어는 마법까지 공부하게 해준다니.

어린 뱅그릿에게 마탑은 천국과 다름없는 곳이었다.

"정말로요."

그러나 뱅그릿에게 마탑은 지나치게 냉혹했다.

어린 뱅그릿이 삐뚤어져 자라게 됐을 만큼.

그 냉혹함은 선임 마법사가 돼서도 마찬가지였지.

특히 원로 마법사에게 뒤통수를 맞았을 때의 기분이란!

뱅그릿이 되물었다.

"그래서 기분이 나쁘신가요, 벤쉬 선임님?"

"아뇨. 그럴 리가."

씨익─

벤쉬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손에는 최상급 마도구, [소형 마력 태양]이 들려있었다.

벤쉬의 동공이 태양처럼 번뜩였다.

얼마 만이던가, 이 감각!

"저는 오히려 흡족합니다."

벤쉬는 지나치게 솔직했다.

그 솔직함이 어디가랴.

출탑 신청서에 있는 그대로 자신의 목적을 적어왔다.

출탑의 목적이야 보다시피 뻔했다.

상급 마도구의 합리적인 반출을 위한 출탑.

"이런 식으로 허가를 받게 될 줄은 몰랐지만, 뭐."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중얼거린 벤쉬의 시선이 다시금 악마들에게로 옮겨갔다.

흘러나오는 벤쉬의 마력에 감응.

[소형 마력 태양]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뱅그릿 선임, 나는 종종 생각했습니다."

"?"

"어째서 마탑의 마법사는 마탑에 묶여 있어야만 하는가. 규율 때문에? 대체 그놈의 말도 안 되는 규율은 어떤 놈이 만들었단 말인가?"

마법의 경지와 진리를 탐구하는 것까지는 좋다.

그런데 마탑에 입성하는 순간, 속세와의 인연을 완전히 끊어야 한다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논리란 말인가? 그런 의미에서 벤쉬는 마탑의 변화가 마음에 들었다.

"이 수석께는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호열 수석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르카나 대륙이 이 지경이 됐어도 마탑에 틀어박혀 마법 서적을 들춰대기나 했었겠지.

그러나 이 수석 덕분에 외면해 왔던 현실을 직시하게 됐다. 어긋난 현실을 바로 잡을 수 있게 됐다.

또 거기에다가....

벤쉬의 시선이 뒤로 물러선 플레이어들을 향했다.

"제대로 지켜보도록 하세요. 그대들도 나처럼 될 수 있습니다. 아르카나 대륙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그대들은 반드시 성장해야만 합니다."

...방금 대사, 약간 이 수석님 같지 않았나?

보다시피, 선임으로서 기를 세울 기회까지 얻었다.

벤쉬가 자신도 모르게 어깨에 힘을 주자 뱅그릿은 혀를 찼다.

"그렇다고 너무 신 내시지는 마시구요."

가다듬는 호흡.

뱅그랫은 계획을 잊지 않고 있었다.

뱅그릿 또한 마력을 끌어올렸다.

표적은 역시나 왕좌를 노리는 악마였다.

"이번 출탑이 마지막이 되고 싶지 않으시다면요."

"예? 아니, 뱅그릿 선임. 무슨 말을 그렇게 서운하게 합니까? 나도 알고 있습니다, 이 수석님의 계획! 근데 누가 보면 뱅그릿 선임은 뭐, 출탑 신청서라도 통과되신 줄 알겠습니다?"

"전 통과됐는데요."

"...예?! 뭐요, 그게 정말입니까? 왜 나만?!"

.

.

.

나, 그리고 악크샨의 악마 사냥꾼들에게 사냥당한 마왕의 숫자는 열하고 둘.

떠오른 왕좌와 균열 또한 열 하고 둘이었다.

나는 이제 막 생성된 균열을 바라봤다.

[20번째 왕좌]

[적정 레벨 : Lv.1,000]

[붕괴 진행도 : 33.3%]

다시 생각할수록 대단하다, 악크샨 선배님들.

성전에서 그렇게 크게 뒤통수를 맞고도 마왕을 열이나 지옥에 보내버리시다니.

그중에 서열 20위 마왕도 섞여있다니!

십 년이 훌쩍 넘는 공백기가 무색할 정도로 선배님들을 향한 존경심이 샘솟는다. 특히 네 자릿수에 육박한 적정 레벨을 보니까 더욱더.

'진짜 어느 정도였다는 거야?'

괜히 악마들이 악크샨이 절멸할 때까지 쭈그려 지내온 게 아니구나, 싶다. 물론, 그 기다려온 세월이 무색하게도. 너희는 한 가지 실수했지만 말이야.

나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생사를 떠나 긍지는 이어지는 법이다."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인 내가 멀쩡하게 살아있으니까.

아르카나 대륙에서도 손꼽히던 무력 집단들이 나와 함께였으니까.

그러니까 내게 우려는 없었다.

사실 걱정하는 게 이상한 거 아닐까.

왜, 경험을 통해서 대충 견적이 나왔거든.

세 개의 [마왕성] 균열을.

고작 몇 분 만에 짓밟아 줬던 경험이 있었으니까.

균열의 숫자가 늘어나고, 등장하는 악마의 머릿수가 늘어났다고 한들. 녀석들은 마왕이 아니었다. 아직까진 네임드 몬스터, 보스몹이 아니란 뜻이었다.

물론, 이번 [마왕 쟁탈전]엔 그보다 중요한 계획이 있었다.

[마왕성] 균열 때 확실하게 깨달았거든.

악마들은 정말이지, 무식한 족속이란 걸.

마왕이 셋이나 죽어나갔는데, 교훈으로 삼지는 못할망정.

왕좌를 차지할 생각이나 하다니!

그랑펠이 괜히 열등한 족속.

말끝마다 열등이라는 수식어를 괜히 붙이는 게 아니라니까?

지금도 봐라.

"...?"

나와 눈이 마주치고도 상황파악을 못 하고 있잖아.

[아홉 머리 지옥견 : Lv.900]

[대악마를 삼킨 아나콘다 : Lv.920]

[마계 전설종, 비명조 : Lv.900]

뒤엉켜 싸우던 네임드 몬스터, 진명의 악마 셋.

업데이트 내역대로 레벨들 한 번 살벌하시다.

무엇보다 녀석들은 자신들의 강함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무려 서열 20위 왕좌에 도전한 거겠지.

물론, 의문이 들 법도 하다.

"그대는 무엇이냐?"

그나저나 존댓말을 하는 뱀이라.

집어삼킨 대악마가 누군지는 몰라도 격식은 갖췄군.

확실히 레벨값을 한다는 건가?

여태까지 봐온 악마들과는 느껴지는 위압감부터 다르다.

뭐, 싸움을 멈추고 질문을 던질 법도 해.

나는 단신으로 균열에 진입한 참이었으니까.

그 의문은.

"오, 그대는 악마 사냥꾼이 아닌가?"

내가 자신들의 천적.

악마 사냥꾼이란 걸 알아차려도 크게 달라지지 않겠지.

뱀의 눈이 하얗게 뒤집어지더니 말을 잇는다.

"내가 마안의 시야를 통해 그대의 최후를 똑똑히 지켜봤거늘. 이상한 일이구나, 그대여. 어째서 살아있는 것인가? 가련한 악마 사냥꾼이여."

물론, 격식을 갖췄다고 하더라도.

악마는 악마.

그랑펠 성격에 말을 섞어줄 리가 있나.

"그런가. 그 서늘한 눈빛을 보니 더욱더 확신이 드는구나. 역시, 그대는 수백만 악마와 함께 장렬하게 산화한 악마 사낭꾼이 맞다. 어떻게 부활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즐거운 일이로군!"

뱀의 말에는 개와 새도 귀를 기울이는 듯했다.

스스스─

덩치 때문인가, 혀를 날름거리는 소리가 웅장하게 들려온다.

셋 중에서도 가장 높은 레벨답게 뱀이 거만하게 말했다.

"왕좌에 앉아 맛보기에 걸맞은 만찬이군!"

캬악!

순간, 벌어지는 뱀의 주둥이.

그때까지도 나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균열에야 나 혼자뿐이었지만.

만약, 지켜보는 눈이 있었더라면 정말 미친놈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겠지.

나를 최소 900레벨로 알고 있는 남철민조차도 진입을 만류할 정도였으니까.

-"호열 씨, 아무리 계획의 일부라고 해도 위험 부담이 너무 큽니다. 호열 씨의 레벨을 고려하더라도, 혼자서 저런 네임드 몬스터를 셋이나 상대하는 건...."

과연, 남철민에게 AAU 유스라 지부를 맡긴 건 잘한 일이었다.

분석관답게 아르카나 네임드 몬스터의 패턴을 예로 들어가며 나를 설득하려고 했었거든.

물론, 내 고집을 꺾을 순 없었지만.

'나'라고 말했으니, 이건 그랑펠의 긍지 때문만이 아니었다.

나, 이호열도 원하던 바였기에.

단신으로 균열에 진입한 거란 말이다.

[천적관계].

[첫 세계수의 축복].

[육망성 브로치].

만반의 준비 덕분에 자신감이 넘쳐서?

아니, 그럴 리가 있나.

세상 두려울 게 없는 그랑펠은 몰라도 나는 아니다.

아무리 버프와 템빨로 떡칠했다고 하더라도 적정 레벨 일천(一千)의 균열을 혼자서 클리어한다?

불가능하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그랬다.

합당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균열에 진입하고, 왕좌를 목격했던 순간부터.

점멸하던 퀘스트창.

─지옥에 떨어진 왕좌를 목격하라. (성공)

그 아래로 새로운 퀘스트 목표가 떠오른다.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게는 [『기이』]로 획득한 정보가 있었으니까.

고오오오─

이 순간에도 바닥에서 일렁이고 있는 지옥의 불.

처음 왕좌를 목격했던 순간, 의문이 들었다.

왕좌도 지옥에서 빠져나오는데.

어째서 악마는 지옥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인가?

그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AAU에서 전해온 아르카나 대륙 전기의 정보.

나는 그 서류에서 목격했으니까.

아르카나, 지옥의 설정을.

[지옥 : 악마 사냥꾼에게 사냥당한 악마가 떨어지는 사후세계. 지옥에 떨어진 악마는 두 번 다시는 부활할 수 없다. 설령, 지옥의 문이 열린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결코 지옥을 빠져나올 수 없다.]

떠올렸으니까.

악크샨 악마 사냥꾼의 말을.

『심연을 들여다볼 때 심연도 나를 들여다본다? 설령 악에 빠져 악마가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악마를 사냥할 뿐이다. 그것이 악마 사냥꾼의 길이니까.』

악마가 된 악마 사냥꾼을 사냥하는 것 또한 악마 샤냥꾼이다.

그렇다면 악마가 된 악마 사냥꾼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당연하게도 악마와 다를 바 없이 지옥에 떨어지겠지.

그런데 말이야.

내가, 그랑펠이 옛날부터 누누이 지껄이던 말이 있잖아?

"죽음조차도 긍지를 꺾을 순 없다."

그래, 그 말을 증명하듯.

퀘스트 목표가 떠올랐다.

─지옥의 악마 사냥꾼과 조우하라. (진행 중)

고오오오─

그와 동시에 지옥의 불이 더욱더 거세게 치솟았다.

─지옥의 악마 사냥꾼과 조우하라. (성공)

메시지가 떠올랐다.

[조건을 충족했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클래스 고유 스킬, '악크샨의 유지'를 습득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은가? 악크샨이여."

나의 물음에 화답하듯.

지옥의 불길 속에서.

석궁의 장전 소리가 들려왔다.

철컥!

◈ 174화. 우리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2)

──────

악크샨의 유지 : 지옥의 불에서 악크샨 악마 사냥꾼을 불러낸다.

──────

악크샨.

정말이지, 다시 생각해 봐도 어처구니가 없다.

죽어서도 은퇴할 수 없다니.

뭐, 이딴 클래스가 다 있냐 진짜?

그러나 비로소 이해가 된다.

지옥의 문이 활짝 열렸거늘.

악마들이 지옥에서 뛰쳐나올 수 없던 이유가.

철컥─

천적이 지옥의 문을 지키고 있었으니까.

지옥의 불이 점차 사람의 형체로 변해갔다.

이글거리는 불꽃 탓에 구체적인 얼굴 생김새까지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확실하다.

양손에 쥔 검과 석궁.

저것보다 선명한 악마 사냥꾼의 상징이 또 없거든.

이내,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악크샨과의 관계도, 영향력이 효과에 적용됩니다.]

[시무아르드 가문의 의뢰] 퀘스트를 성공한 순간, 떠올랐던 보상.

악크샨과의 관계도, 영향력 상승.

역시, 버그 같은 게 아니었구나.

다 쓸모가 있다는 거였어.

그땐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악크샨은 절멸했는데, 뭔 소리를 하는 거냐고.

오히려 역정을 내기도 했었지.

'하긴 악크샨이 지옥에 있을 거라고는....'

AAU의 정보가 없었다면 발상조차 하지 못했을 거다.

[악크샨 악마 사냥꾼이 당신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악크샨에서의 내 영향력이야, 뻔하지.

악크샨이 아르카나 대륙에 존재하던 시절, 나는 쪼렙이었으니까.

한 명이라도 응답했다는 거에 감사해야 할 수준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말이다.

악마 사냥꾼들이 제멋대로인 것쯤이야.

누구 때문에,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거든.

[악크샨 악마 사냥꾼이 당신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악크샨 악마 사냥꾼이 당신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악크샨 악마 사냥꾼이 당신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정말 제멋대로다, 다들.

지옥의 문이 열린 지금.

지옥의 악마 사냥꾼들도 균열의 광경을 지켜보고 있을 터.

그 말인즉, 내가 아는 악마 사냥꾼들이라면.

관계도나 영향력을 떠나서.

눈앞에 악마를 절대 두고 보고 있을 수 없다는 거겠지.

철컥!

철컥!

철컥!

장전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어느샌가 내 곁엔 수십의 악마 사냥꾼이 서 있었다.

"!!!"

시종일관 오만하던 뱀.

그리고 개와 새의 기세까지 순식간에 누그러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천적이 어째서 천적인지는 누구보다 너희가 잘 알고 있을 테니.

나는 입을 열었다.

"그대들의 노고를 알고 있다."

메시지가 떠오르기 전까지.

짐작은 했어도 확신하지 못했거늘.

역시나 뻔뻔하구나, 그랑펠.

그러나 이번만큼은 나도 말꼬리를 잡지 않겠다.

악마 사냥꾼.

한 명, 한 명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짐작할 수는 있다.

그 말도 안 되는 악크샨의 훈련을 버틴 데에는.

각자 사연과 배경이 있다는 거겠지.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인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이하 그랑펠은 그 악마에게 복수하기 위해 악마 사냥꾼의 길을 걷게 됐다.』

그랑펠처럼.

그러니까 진지할 수밖에 없다.

설령 악마를 사냥하다가 악마가 되었다고 한들.

그로 인해 동료의 손에 죽어 지옥에 떨어졌다고 한들.

이들의 가슴 속 긍지는 꺾이지 않았다는 것이었으니까.

드레드센 마을, 이름 모를 청년이 그랬던 것처럼.

"그 고독을 나 또한 알고 있다."

그리고 긍지는 유지가 되어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 나에게 이어졌다. 유지라는 거, 절대 가볍지 않겠지. 하지만 내가 원래부터 품고 있는 긍지가 워낙 무거워서 말이야.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

꾸준하게 발버둥 쳐왔다는 것이다.

철컥─

지옥의 악마 사냥꾼들 사이에서.

나 또한 검과 석궁을 꺼내 들었다.

왜, 입으로 분명히 말했잖아?

-"마왕 쟁탈전은 우리에게 그저 양분이 될 뿐이다."

플레이어의 수준이 성전에서 활약할 수 없을 정도로 부족하다는 건 잘 알고 있다.

[천적관계]나 [첫 세계수의 축복] 효과가 없다면, 나도 그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도 잘 안다.

허나, 부족함을 깨달았다면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마왕 쟁탈전뿐만 아니다.

성전의 모든 것을 양분으로 삼아 발전하면 되는 것이다.

아니, 발전해야만 한다.

-"우리가 모험가들의 방패가 되겠네."

아르카나, 그들의 희생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나도 집중해야겠지.

진짜 악마 사냥꾼의 전투를 목격하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무엇 하나 놓치지 않아야 한다.

'어떻게 성전에서 그런 활약을 펼쳤던 건지.'

악크샨, 악마 사냥꾼의 비기를 목격하고야 말겠노라.

왜, 보고 따라 하는 거 하나만큼은 그래도 자신이 있으니까.

과연, 집중하길 잘했다.

악마 사냥꾼이 괜히 악마 사냥꾼이겠냐고.

악마를 보면 참지 못하니까 악마 사냥꾼이지.

슈슉!

순식간에 뻗어져 가는 석궁 볼트.

[아홉 머리 지옥견 : Lv.900]

[대악마를 삼킨 아나콘다 : Lv.920]

[마계 전설종, 비명조 : Lv.900]

'시작은 원거리 견제인가.'

내가 악마 사냥꾼들을 따라 석궁을 발사하려던 순간이었다.

쿵!

소리가 들려왔다.

쿵! 쿵!

그것도 세 번씩이나.

잠깐만....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그런가."

그런가는 뭐가 태연하게 그런가냐, 그랑펠.

900레벨짜리 진명의 악마들이 고작 석궁에 쓰러지고 있잖아?

그냥 휘청거리는 것도 아니었다.

정말, 치명상을 입은 것처럼 꼬꾸라지고 있었다!

"...비로소 왕좌에 가까워졌거늘."

그러고는 유언과 함께 희번뜩한 눈을 감아버렸다.

잠깐만.

악마 사냥꾼의 전투는, 비기는 어디 갔는데?

뭘 보여줘야 따라 할 거 아니야.

고작 석궁 몇 발로 저런 괴물들을 쓰러트렸다고?

"악크샨의 긍지는 조금도 무뎌지지 않았군."

태연하게 지껄이는 주둥이와 무관하게 나는 머리를 굴렸다.

석궁 볼트 몇 발로 900레벨 몬스터를 쓰러트렸다.

그랑펠의 눈이 있었기에 알아볼 수 있었다.

'단순하게 방아쇠를 당겼을 뿐.'

그 과정에서 스킬이나 특별한 기술을 사용한 것도 아니다.

방금 그건 평범한 사격에 불과했다.

속된 말로 '평타'라는 것.

평타로 900레벨 네임드 몬스터를 사냥했다는 것이었다.

'...순수하게 스탯으로 찍어눌렀다는 거잖아.'

그게 가능하다고?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라고 생각하던 순간.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단어가 있었다.

클래스 퀘스트.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말 그대로 체력 단련 퀘스트를 무한 반복한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잠깐. 넘어가지 마라, 이호열...! 당장의 일과를 생각해 보란 말이다.

'지금만 하더라도 훈련량이 감당이 안 되잖아!'

반복하면 반복할수록.

스탯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퀘스트 목표가 증가할 거란 게 훤히 보였다.

악마 사냥꾼, 하여튼 이 빌어먹을 노다가 직업!

하지만 나의 절규가 무색하게도.

나는 입을 열었다.

"과연, 그대들은 여전히 오롯이 악크샨이다."

...악크샨의 비기를 흡수해서 조금 쉽게 가나 싶었거늘.

결국, 나는 여전히 오롯이 고통을 받게 생겼구나.

이내, 시야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20번째 왕좌 균열을 클리어하셨습니다.]

쿠구궁!!

그와 동시에 균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평소 같았으면 오늘도 어찌어찌 가라앉지 않았구나, 안도했었겠지.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그야 아직 '계획'이 끝나지 않았으니까.

무너져 가는 균열 속에서.

나는 꼿꼿하게 허리를 세웠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

.

.

[45번째 왕좌 균열을 클리어하셨습니다.]

[57번째 왕좌 균열을 클리어하셨습니다.]

[24번째 왕좌 균열을 클리어하셨습니다.]....

떠오르는 클리어 메시지.

플레이어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게 바로 아르카나인들의 전력이란 말인가?

경외의 눈빛 속에서 하르콘이 입을 열었다.

"보았는가, 모험가들이여. 그대들이 믿었든, 믿지 않았든. 우리는 약속을 지켜냈다."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발생하지 않게 하겠다.

우리의 고향, 아르카나 대륙을 쑥대밭으로 만든 악마에게.

더 이상은 그 무엇하나도 빼앗기지 않겠다.

아르카나인들은 긍지를 걸고 다짐을 지켜냈다.

하르콘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믿어주겠나, 모험가들이여? 그대들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그대들은 우리들, 그 이상으로 강해질 수 있다."

플레이어고, 스탯이고, 스킬이고.

하르콘에게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개념들이었다.

그러나 사기진작을 위한 빈말이 아니었다.

왜, 대격변 이전에도 모험가들을 지켜보지 않았던가?

하르콘이 미소를 지었다.

"과거를 잊지 말게나."

"...?"

"아르카나에서 그대들의 존재는 기적, 그 자체였다는 걸."

"!!!"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플레이어들은 당연하게도 부활할 수 있었다.

사망 페널티가 존재하긴 했다만, 아르카나인들이 시스템을 이해할 순 없었으니까. 아르카나인들에게 플레이어들은 존재 자체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하르콘이 말을 이었다.

"물론, 나는 아직도 그 기적을 믿고 있다네."

쿠구구궁!!

무너져 가는 균열.

하르콘이 속으로 되뇌었다.

'...아니, 믿기지 않더라도 믿을 수밖에 없다네.'

황금 궁전에서의 회의가 떠올랐다.

-"못해도 수백만의 악마가 몰려들겠군."

-"그대들은 생각해 보았는가?"

-"무엇을 말인가, 호열 경?"

-"수백만 악마 중 왕좌에 오르는 것은 고작 몇십에 불과하다. 왕좌에 오르지 못한 이들은 그 과정에서 모조리 전사한다는 뜻이다."

호열이 던진 건 조금도 생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그렇다면 수백만 악마의 시체는 어떻게 되는가."

-"...시체?"

-"기억하고 있는가, 하르콘. 그리고 거대 연합이여."

거대 연합.

남태민, 레오니, 히사기.

세 사람이 언급되는 순간.

하르콘은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프로스트에서의 기억을.

모험가들의 세계에 프로스트가 떠오른 그날, 프로스트는 백성의 시신과 피로 가득했었다. 시신과 피야말로 마왕의 부활을 위한 제물이었으니까.

-"...호열 경, 설마 그 말은?"

뒤늦게 마왕 쟁탈전의 이면(異面)을 깨달은 자신에게 호열은 말했었다.

-"마왕 쟁탈전은 새로운 마왕을 선출하는 데에서 끝나지 않겠지. 왕좌에 앉아 한껏 오만해진 새로운 마왕들에게 서열이라는 규율을 각인시켜야 할 테니까."

그래, 그러기 위해서는.

-"상위 마왕, 그들이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터."

상위 마왕.

너무나도 방대한 힘을 가졌기에.

단순히 모습을 드러내는 데에만도 막대한 제물을 필요로 하는 존재들.

그러나 마왕 쟁탈전에 제물은 충분했다.

히사기가 확인하듯 말했었다.

-"프로스트에서 마왕 소환 의식이 방해를 받자, 데카라비아는 자신의 수하들을 제물로 삼아 부활했었습니다. 제물이 꼭 인간일 필요는 없다는 거겠죠. 그렇다는 건...."

호열은 결론을 내렸다.

-"설령 우리가 모든 악마를 사냥하고, 새로운 마왕의 즉위를 막아낸다고 하더라도. 상위 마왕이 모습을 드러낸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네."

언제나처럼 말을 이었다.

-"그러나, 악마를 사냥한다는 목적에도 변함은 없겠지."

뒤늦게 나타날 상위 마왕까지 사냥하겠노라.

하지만 원대한 목표와 반대로 계획은 단순하며 명료했다.

호열의 말 한마디로 설명을 대신할 수 있을 만큼.

-"그렇다. 내가 상위 마왕을 사냥하겠다."

그것이 바로 호열이 혼자서 균열에 진입한 이유였다.

"...무너져가는 균열 속에서 어떻게 마왕을, 그것도 상위 마왕을 사냥하겠다는 것인가? 경, 나로서는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다네."

그러나 단지 믿을 뿐이었다.

모험가, 이호열.

그가 언제나처럼 기적을 이뤄내기를.

하르콘이 간절히 바라던 순간.

무너지는 균열의 하늘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웅성거리는 플레이어들.

"...저게 뭐야?"

다그닥!

이내, 섬뜩할 정도로 거대한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플레이어들의 시야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마왕, □□□이 출현합니다.]

...잠깐만, 출현 메시지라고?

.

.

.

균열이 클리어되면 플레이어는 현실로 복귀한다.

그건 거스를 수 없는 아르카나의 시스템이다.

하지만 즉시 현실로 쫓겨나는 건 아니다.

왜, 지금처럼 균열이 완전히 무너질 때까지.

약간의 시간적 여유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지켜볼 수 있다는 거겠지.

허공에 떠오르는 무수한 악마의 시체들.

균열이 무너지면서, 각 균열 사이의 거리도 무너졌다는 건가.

사방에서 시체가 모여들기 시작한다.

그나저나, 겁나게 많잖아.

'뭐, 이상한 일도 아닌가.'

다른 것도 아니고 상위 마왕을 위한 제물들이었으니까.

이내, 거대한 그림자가 균열에 드리웠다.

그런데, 그림자의 형체가 어째 익숙했다.

말(馬)이다.

카림제바가 불러냈던 [깨진 차원의 틈] 균열.

그 균열의 배치와 똑같이 생긴 말의 형상이었다.

"끈질긴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그때부터 포기하지 않았던 거구나, 너?

"짐승이기에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 것인가?"

나의 말에 대답하듯.

다그닥!

말발굽 소리가 울린다.

눈앞에 메시지가 떠오른다.

[마왕, 가미긴이 출현합니다.]

마법 서적도 달달 외우는 그랑펠의 두뇌가 있는데.

일흔 남짓한 마왕들의 서열을 외우지 못할 리가 있겠냐.

가미긴, 나는 그 이름 석 자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마왕 서열 4위.

가미긴이 극최상위 마왕이라는 것까지 말이야.

농담 아니고, 평상시 같았으면 바로 현실로 튀었을 거다.

'적정 레벨 천짜리 균열에서 출현 메시지면....'

대체 얼마나 강하다는 건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너희가 착각해 준 덕분에.

오만하게도 지옥의 문을 열어준 덕분에.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랑펠과 마찬가지로.

상위 마왕 앞에서 위축되기는커녕.

고오오오─

오히려 긍지를 불사르는 지옥의 악마 사냥꾼들이 곁에 있었다. 그 불리했던 성전에서 탐욕을 자결하게 하고, 열 명의 마왕을 지옥에 떨어트린 악마 사냥꾼들이 나와 함께였다.

그러니까 모든 것은 나의 계획대로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악마의 아이템을 꺼내 들었다.

균열이 붕괴하는 것도.

덕분에 내게 허락된 시간도 찰나지만.

'의식' 속에서의 시간 흐름은 나의 권한 아래에 있는 것.

['악에 물든 일각의 지휘봉'이 제물로 선택되었습니다.]

[스킬, '구마의식'이 발동됩니다.]

[마왕, 가미긴을 '의식'으로 초대합니다.]

"두려움에 떨도록 해라."

그러니까 오너라, 가미긴.

네 번째 왕좌의 마왕이여.

나는 언제나처럼 당당하게 읊조렸다.

"악크샨이 돌아왔다."

◈ 175화. 우리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3)

찬란하게 부서져 가는 균열의 풍경.

마탑의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에겐 갈망하던 광경이다.

균열이야말로 기이의 공간.

연구의 대상이자 아르카나 대륙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단서나 다름없었으니까.

"...."

그러나 마르셀로의 머릿속에 연구는 없었다.

떠오르는 것은 오로지 호열의 계획뿐.

마르셀로가 작게 중얼거렸다.

"진정으로 가능하단 말씀이십니까?"

상위 마왕의 현현.

마르셀로는 그들의 강함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그러나 비교 대상을 통해 가늠해 볼 수는 있었다.

비교 대상은 반신(半神), 카림제바, 원로 마법사이자 악마 숭배자.

마법사란 족속?

자신 또한 마법사이기에 잘 알고 있다.

마법사는 대체로 본성이 오만하다.

길게 설명할 것도 없겠지.

그동안 마탑의 행보를 보면 알 수 있었으니.

진리, 의외의 것은 모조리 업신여겨 왔던 자신들이 아니던가.

그런 면에서 카림제바는 악명이 자자했다.

마탑에 입성하기 전, 화룡(火龍)이라 불리던 그는 온갖 범죄에 연루되어 있었으니까.

마탑에 입성한 이유도 마탑의 그늘에서 제국과 세간의 추적을 피하기 위함이란 소리가 소문으로 나돌 정도.

그 정도로 오만했던 카림제바가 자신의 본성을 억눌러 가면서까지 추진했던 게 상위 마왕의 소환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겐 경이 있었다.'

카림제바와 두 악마 숭배자의 계획은 호열 덕분에 첫걸음에서부터 삐걱거렸었다. 그럼에도 카림제바는 억지로 상위 마왕의 부활을 추진했다.

'누구보다 스스로 잘 알고 있었겠지.'

마탑을 적으로 돌린 이상.

설령, 자신이라고 하더라도 목숨을 부지하기는 어려울 거라는 걸.

그럼에도 카림제바는 실행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상위 마왕의 소환을 추진했다는 것이다.

'마법사가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

나 또한 그와 같은 마법사이기 때문일까?

마르셀로는 알 수 있었다.

아니, 적어도 마탑의 마법사라면.

다들 짐작할 수 있겠지.

그렇다.

카림제바는 상위 마왕이 자신이 추구하는 진리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은 거겠지.

마르셀로는 말을 이었다.

어리석게도.

"당신은 틀렸습니다."

자신을 비롯한 마탑은 깨달았다.

주변을 업신여겨서 도달하는 진리에 의미는 없다는 것을.

그렇기에.

그동안의 행보를 속죄하기 위해 성전에 뛰어들지 않았던가?

허나, 우려는 그와 별개였다.

'당신은 그들에게서 무엇을 본 것입니까?'

마르셀로는 호열과 함께하며 악마를, 마왕을 목격해 왔다.

지금만 하더라도 새롭게 마왕의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달려든 악마들과 맞서 싸우지 않았던가?

허나, 그들에게서 진리는커녕 말을 섞을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다.

화룡, 그의 성격이라면 자신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을 터.

분명, 목격한 것이리라.

상위 마왕에게서.

다른 악마들과는 다른 특별한 무언가를.

그러니까 마르셀로는 안도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계획이셨군요."

만약, 자신이 호열과 함께 균열에 진입했다면.

그래서 상위 마왕을 목격했다면.

나는 머리를 굴리느라 제 역할을 해내지 못했겠지.

'결점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했거늘.'

아마, 호열 경께서는 제 부족함을 꿰뚫어 보신 거겠지요?

마르셀로는 애써 미소 지었다.

뒤바뀌어 가는 시야 속에서 말을 이었다.

"현실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부디 무사하시기를.

.

.

.

네 번째 왕좌의 마왕, 가미긴.

목격하는 순간, 솔직하게 슬퍼졌다.

흑역사도, 세상도 모자라서, 이젠 균열마저도 내게 너무 가혹하구나 싶었거든.

'쉬운 게 없구나, 진짜.'

원로 마법사, 카림제바가 마탑을 배신하게 한 상위 마왕의 능력이다. 그런 상위 마왕 중에서도 무려 서열 4위, 가미긴을 눈앞에 뒀거늘.

'주어진 시간이 찰나뿐이라니.'

클리어된 균열은 각각 현실로, 아르카나 대륙으로 나뉜다.

가미긴의 출현과 상관없이 현실에 있던 나는.

균열 밖 현실로 튕겨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까부터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다.

[마왕, 가미긴을 '의식'으로 초대합니다.]

구마의식 발동 타이밍을...!

구마의식이 뭐, 대단한 스킬도 아니고 시간을 느리게 하거나 거스를 순 없다.

하지만 시간 감각을 속일 수는 있지.

의식 속은 정신력이 모든 걸 지배하는 공간이니까.

스릉─

나는 검을 치켜들었다.

급하다고 흐트러지면 격식이 아닌 법이다.

절도있게 굽혀지는 팔의 각도.

유려하게 움직이는 손목.

그럼에도 모든 풍경이 찰나의 상태, 그대로다.

진짜 듬직한 아군이 있으면 뭐하냐고!

구마의식.

의식 속에는 오직 악마 사냥꾼과 초대당한 악마만 존재할 수 있었으니까.

만약, 누군가 곁에 있었다면 눈 깜짝할 사이에 모든 게 끝났다고 착각할 수밖에 없겠지.

당연히 협력할 틈도 없다고 느꼈을 테고.

그러나.

철컥!

지금,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말했다시피 의식 속에서 존재할 수 있는 건 오직 악마 혹은 악마 사냥꾼뿐. 내 곁에는 선배님, 악크샨의 악마 사냥꾼들이 있었으니까.

나는 가미긴을 바라봤다.

괜히 상위 마왕이 아니군.

의식에 초대됐어도 동요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감정변화를 알아차릴 수 없었다.

크다, 수준을 넘어서 거대하다.

네 개의 다리가 각각 퀴른베르크 기계탑 크기라고 하면 표현이 가능할까. 말 대가리는 무너지는 균열과 겹쳐져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군.

하지만 무엇보다.

"□□□."

어째서인가,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거대한 울림이었거늘.

나는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뭔데.'

플레이어는 자신들끼리는 물론, 아르카나인과도 어렵지 않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심지어는 아르카나 대륙 언어로 쓰인 마법 서적까지 읽을 수 있었으니까.

'갑자기?'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줄이야.

당연히 이유를 알 순 없었다.

물론, 이유 따위는 중요하지 않겠지.

슈슈슉─!

악마와 불필요한 대화는 하지 않는 법이니까.

역시, 선배님이시라는 건가.

문답무용.

악마 사냥꾼들은 가미긴을 향해 석궁 볼트를 쏟아냈다. 보잘것없어 보여도 900레벨에 육박하는 네임드 몬스터를 일격에 처치한 공격이다.

'...!'

거대한 표적.

빗나가지 않고 확실하게 적중했단 말이다.

그러나 가미긴에게 변화는 없었다.

젠장, 내 아르카나 상식으로는 따라가기 벅찬 광경이다.

대체 레벨이 몇이길래.

900레벨 네임드 몬스터를 단번에 보낸 공격이 수십 발씩 쏟아져도 멀쩡할 수 있다는 거냐.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카림제바.'

순간, 녀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를 풀어준다면 모든 것을 말해주겠네. 성전에 대해서도 진정한 진리에 대해서도! 악마 사냥꾼인 그대라면 내 뜻을 분명 헤아릴 수 있을 거야. 화룡, 카림제바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네!!"

카림제바는 진정한 진리에 다다르기 위해서 상위 마왕을 부활시키고자 했었지....

그런가, 슬슬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한 줄 요약하자면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반신(半神)으로 불리던 원로 마법사, 카림제바가 추구하던 '진정한 진리'. 그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바로 '상위 마왕'이라는 것이다.

그걸 다르게 말하자면....

'상위 마왕은, 신(神)에 가까운 존재라는 건가.'

다시금 고막에 울리는 거대한 소리.

"□□□ □, □□□ □□□□."

그렇게 생각하니까.

말이 통하지 않는 것도 대충 이해가 되는데.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격이 다르다는 거겠지.

젠장, 진심으로 마음이 꺾이려고 한다.

거악이라는 산을 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거악은 갓 태어난 어린 악마에 불과했단다.

마왕이라는 산을 넘어섰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상 최약체나 다름없던 마왕들이었단다.

그럼에도, 산을 넘기 위해서 발버둥을 쳐왔더니.

이젠 산을 넘어서, 신에 닿아야 한단다.

진심으로 의문이 든다.

정말로, 플레이어에 불과한 내가.

저런 신격(神格)에 도달할 수 있단 말인가?

다그닥─

말발굽이 움직일 때마다 균열이 진동한다.

하늘이 놀라고 땅이 흔들린다는 게 이런 것인가.

몸으로 깨닫게 된다.

정말로 나, 이호열의 대가리로는.

정신력으로는 버텨낼 수 없을 정도의 광경이다.

그러나.

『그 어떤 악마의 유혹과 기만, 시련도 그랑펠의 고고한 긍지에는 흠집조차 낼 수 없다.』

그랑펠은 굴하지 않았다.

항상.

평소와 같았으니.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의식의 주도권은 내게 있다는 뜻이다.

그 순간, 들려오는 소리.

스릉─

물론, 잊지 않고 있었다.

내가, 그랑펠이 과거를 숨겼듯.

나 또한 저들의 사연까지는 알 수 없다만.

악크샨의 악마 사냥꾼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죽음조차 꺾을 수 없었던 긍지다."

또각─

흔들리는 땅 위에서 나는 몸을 바로 세웠다.

"고작 악마 따위가."

검을 치켜들었다.

"쥐고 흔들려 들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그런 나의 선언은 신호탄이 되었다.

지옥불에 휩싸인 악마 사냥꾼들이 가미긴을 향해 쇄도했다.

'빠르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했다고 느껴질 만큼.

뒤따라잡기 위해서는.

나 또한 엘프의 몸놀림을 따라 할 수밖에 없게끔.

새삼스럽게 느끼는 거지만, 역시나 단순하다.

비장의 기술은커녕 정직할 정도로 올곧다.

그러나 우습지는 않았다.

때론 단순할 정도로 올곧고 굳세기에, 꺾이지 않는 것도 있는 법이니까.

그렇다, 악크샨의 악마 사냥꾼은 꺾이지 않았다.

꺾이지 않는 걸 넘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자신의 몸을 휘감은 지옥불조차 공격 수단으로 사용하겠다는 건가. 악마 사냥꾼 하나가 가미긴에 바짝 달라붙었다.

"□□□."

다그닥─

신격에 가까운 상위 마왕님이시라고 해도, 악마는 악마구나?

지옥불을 참아낼 순 없는 거겠지.

나만큼이나.

아니, 나보다도 악마를 잘 알고 있는 악크샨의 악마 사냥꾼 선배님들이시다.

말하지 않아도 낌새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스릉─

그들은 석궁 대신 양손에 날붙이를 쥐었다.

누군가는 양손에 단검을.

누군가는 검 대신 석궁 볼트를 쥐었다.

'정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구나.'

마찬가지로 지옥불을 가미긴에게 옮겨 붙이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도 보고만 있을 순 없겠지.

혹시라도 다리를 자르고 도망치려는 생각 같은 건 하지 마라, 가미긴.

콰드드득!

허공에 떠오르는 암석.

나는 무너진 지반에 탐색, 간섭, 발현해 계단을 수놓았다.

하늘에 닿을 듯한 계단이라.

어쩌면 수만 개로도 부족할지 모르겠지.

일반적인 마법사는 마력 탈진을 호소했을지도 모르겠다만, 나는 아니거든.

'이런 게 주특기라서 말이야.'

탐색을 생략할 정도의 광물 관련 지식.

그것도 모자라 비약초 도핑.

[천적관계]에 [첫 세계수의 축복]까지 발동 중이었으니까.

콰드드득!

수만 개의 계단을 발현해도 마력에는 기별도 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탓!

악마를 사냥하기 위해 뭉친 악마 사냥꾼들 사이에.

대화는 물론, 눈빛 교환도 필요하지 않았다.

타다닥!

이내, 계단을 타고 쇄도하는 지옥의 악마 사냥꾼들.

그 순간, 가미긴의 몸에서 거대한 기운이 일렁거렸다.

지각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 □□ □□□."

갈라졌던 땅이 서로 엉겨 붙기 시작했다.

직감할 수 있었다.

가미긴, 목적을 달성한 녀석이.

열었던 [지옥의 문]을 다시 닫으려는 것이었다.

'...지옥의 문이 닫히면.'

지옥의 불길도 사그라질 터.

──────

악크샨의 유지 : 지옥의 불에서 악크샨 악마 사냥꾼을 불러낸다.

──────

악마 사냥꾼들도 다시 지옥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지옥의 문]에 마법을 발현하고 싶었거늘. 나는 [지옥의 문], 그 실체를 목격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탐색조차 불가능했다.

"실로 악마답구나."

부활이라는 자신의 목적을 이뤘으니.

굳이 천적과 맞설 이유는 없다는 거냐.

비겁하게 아르카나 대륙으로 내빼려는 거냐.

나는 고개를 들어 가미긴을 바라봤다.

"왕을 자칭하는 어리석은 악마여."

그랑펠의 심정에 나도 모르게 공감하고 있었거든.

"목숨이 아까운 것인가?"

아르카나 대륙에서 그렇게 많은 생명을 짓밟아 놓고서는.

네 목숨이 아까운지는 안다는 말이잖아.

그것도 모자라 목숨을 잃고도, 증오하는 악마가 되어 지옥에 떨어져서도, 긍지를 잃지 않은 채 악마를 사냥해 온 악크샨이 여기에 있다.

"우리에게서 도망치는 것인가?"

그들의 처절한 긍지를 외면하지 마라.

"왕을 자칭한다면 오롯이 맞서란 말이다."

내가 읊조리는 순간.

다그닥!

가미긴의 말발굽이 뒷걸음질 쳤다.

정말, 내빼려는 거구나.

악크샨이 무서워서 피하는 건지.

더러울 정도로 끈질겨서 피하는 건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건 내가 용납하지 않겠다."

이대로 가미긴을 놓친다면.

녀석은 아르카나 대륙에서 날뛰게 된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아르카나 대륙이다.

게다가 나는 입으로 내뱉지 않았던가?

그들의 할 일은 우리들에게 긍지를 전해온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그러니까 나는 뱉은 말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너를 놓칠 수 없다는 말이다.

끌어올리는 것은 마력.

그것도 방대한 마력. 물론, 내 마력으론 어떠한 마법을 발현해도 녀석에게 생채기조차 낼 수 없겠지. 하지만 상관없다. 너를 불태우는 건 내가 아니니까.

말 그대로.

나는 단지 지옥의 문이 닫히려는 이 순간에.

가미긴을 '지옥'에 처박을 생각이었으니까.

'너는 실수한 거야.'

지옥불이 아무리 뜨겁더라도 참았어야지.

약점이 아닌 것처럼 필사적으로 버텨냈어야지.

천적이 어째서 천적인데.

약점을 끝까지 놓지 않으니까 천적인 법이거든.

탐색.

나는 가미긴의 거대한 몸을 짓눌렀다.

일순간 빠져나가는 거대한 마력.

그러나 나는 탐색을 멈추지 않았다.

『마법』만으로 역부족이라면.

간섭 과정에 [중력]을 더해주마.

이것이 바로 [『기이』]다.

쿵─!

순간, 가미긴의 몸이 무언가로 내려친 듯 주저앉았다.

"□□...!!"

우드득.

가미긴, 녀석의 다리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그리고.

"엎드린 자세야말로 네게 어울리는 모습이다."

넷.

쿠구구궁─!

◈ 176화. 아무 일도 없었다...?

상위 마왕.

정말로 빌어먹을 체급이다.

그동안 마력에 투자한 스탯 포인트, 거기에다가 [천적관계]까지 발동된 지금. 내 마력이 웬만한 마법으로 밑천을 드러낼 정도는 아닐 텐데.

끝없이 메시지가 떠올랐다.

[첫 세계수의 축복이 '마력 탈진'을 거절합니다.]

[첫 세계수의 축복이 '마력 탈진'을 거절합니다.]

[첫 세계수의 축복이 '마력 탈진'을 거절합니다.]....

세계수의 축복이 없었다면. 다리가 풀리는 걸 넘어서 바닥에 꼬꾸라졌어도 진작 꼬꾸라졌을 거다. 무지막지한 마력 소모량이구나, 진심으로.

'그보다.'

나를 흠칫하게 한 건 가미긴, 녀석이 [『기이』]에 조금이나마 저항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단순하게 체급만으로 기이를 버텨내고 있었다.

기이의 위력이야 설명할 필요가 있나.

'깨진 차원의 틈에서 만난 녀석도 그렇고.'

심지어는 카림제바도 그렇고, 완벽히 다른 두 개념이 합쳐진 기이에는 제대로 된 저항을 하지 못했었으니까.

쿠구구궁!

나는 냉정하게 머리를 굴렸다.

...만약, [첫 세계수의 축복]이 없었다면 나는 가미긴을 무너트릴 수 있었을까? 아니, 필사적으로 마력을 쥐어짜 내봤자 휘청거리게 하는 데에 그쳤겠지.

하지만 그따위 생각은 관뒀다.

"엎드린 자세야말로 네게 어울리는 모습이다."

버프의 효과든.

긍지 덕분이든.

처절한 발버둥에 대한 보답이든.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고야 마는 그랑펠의 설정 때문이든.

나는 네 번째 왕좌의 마왕, 가미긴.

녀석을 무릎 꿇게 만들었으니까.

비로소 녀석의 눈이 보였다.

보는 순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르카나 대륙을 내려다보던 하늘의 마안(魔眼).

가미긴에 눈가에 마안과 똑같이 생긴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끔찍하다.'

마안의 시야를 공유하는 [마안의 망원경]은 아르카나 대륙 전체를 비춘다.

그동안 아르카나 대륙이 버텨온 데에는 마안이 밤에만 눈을 뜨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였겠지.

만약, 이대로 가미긴을 놓쳤더라면.

'아르카나 대륙에 더 이상 안전한 시간대는 없었을 거야.'

그렇다면 퀴른베르크 기계탑은 물론, 아이언 캐슬 호까지 무사하지 못했겠지.

그런 의미에서는 장하다, 그랑펠.

질풍노도.

천상천하 유아독존.

누구의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

나의 흑역사가 오늘도 한 건을 해냈구나.

그리고.

"악크샨이여."

사실, 나는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

가미긴을 납작 엎드리게 한 시점에선 더 이상의 마법 발현도, 손가락을 까딱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

그러나 가미긴은 착실히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정확히는 끌려가고 있었다.

악마라면 모조리 태워버리고야 마는 지옥의 불길이 가미긴을 휘감고, 지옥으로 끌어당기기 시작했으니까.

고오오오─

그 지옥불 가운데 악마 사냥꾼들이 있었다.

나와는 다르게 지옥에서도 끝없는 사냥을 이어나갈 악크샨의 악마 사냥꾼들이 있었다.

'근데, 사람이 불렀으면 쳐다보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쳐다봐 주지도 않는 게 살짝 서운했지만, 저래야 악크샨이지.

과연, 10년 하고도 수년 전의 기억이 되살아 날만큼의 불친절함이시다들.

그러나.

"뒤를 부탁하겠다."

그렇기에 믿을 수 있다.

악크샨, 저들이 꺾일 바엔 부러지리라는 것을.

긍지를 버릴 바엔 긍지를 안고서 익사할 거라는 것을 아니까.

콰드드득!

갈라진 틈 사이로 가라앉는 가미긴.

천천히 사그라지는 지옥불.

닫혀가는 지옥의 문.

구마의식이 끝나자 비로소 멈춰있던 시간이 흘러간다.

멈춰있던 균열이 제대로 부서지기 시작한다.

'피곤하다.'

세계수의 축복으로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마력을 쏟아낸 반동이겠지.

제길, 금방이라도 몸이 고꾸라질 것 같다.

그러나 지옥불에 엄살을 떨었던 가미긴과는 다르게.

나는 쥐뿔도 없을 시절부터 멀쩡한 척, 태연한 척.

그거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해서 말이야.

아직도 격식을 챙길 정신력이 남아있단 뜻이다....

툭툭.

가볍게 털어내는 옷가지의 먼지들.

옷매무새를 정돈한 나는 꼿꼿하게 허리를 세웠다.

이내, 시야가 뒤바뀌었다....

*

균열 클리어.

플레이어들에게 남은 건 막대한 경험치도, 전리품도 아닌 경험이었다.

경험치, 전리품보다도 소중할지 모르는 경험.

"...말씀드리는 순간, 균열에서 플레이어, 아르카나인들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모두가 무사해 보입니다!"

몰려드는 인파 속에서 플레이어들은 다시금 실감했다.

우리가 저 무지막지한 균열에서 무사히 살아 돌아온 게 맞구나.

그러나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 자꾸만 마음에 걸렸으니까.

"...저기,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

"혹시 메시지 보셨을까요? 마지막에 떠오른 거요."

"그거라면 저도 목격했습니다."

"역시, 그래서 표정이 그러셨군요."

균열이 클리어됨과 동시에 떠올랐던 메시지.

[마왕, □□□이 출현합니다.]

균열의 빛 속에서도 선명했던 출현 메시지.

플레이어들은 누구보다 출현 메시지를 잘 알고 있었다.

아르카나가 게임이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출현 메시지엔 목숨이 달려있었으니까.

"웬만하면 도망쳐야 하잖아요?"

한마디로 경고였다.

해당 지역에 적정 레벨보다 높은 몬스터가 등장하니, 서둘러 도망치라는 신호. 덕분에 몇몇 플레이어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그러니까요! 딱 균열이 클리어돼서 망정이지."

하지만 안도는 곧 의문으로 바뀌었다.

아르카나인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아르카나인들뿐만이 아니었다.

거대 연합.

세 명의 길드 마스터는 계획에 대해서 알고 있었으니까.

남태민이 입을 열었다.

"호열 씨 말이 전부 맞았어. 출현 메시지가 떠오른 걸 보면 상위 마왕이 부활한 게 확실해. 우리가 쓰러트린 악마를 제물로 삼아서 말이야."

"...그다음엔 어떻게 되는 건데?"

"계획대로겠지."

"씹, 그놈의 계획."

레오니는 그 계획에 반대하지 않았었다.

혼자만 반대하다니, 그건 눈치가 보이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각오는 하고 있었다.

만약, 상위 마왕이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다면.

절대로 가만히 있지만은 않겠다고.

꾹─

히사기가 창대를 붙잡았다.

"그러나 기회조차 없었군요, 저희에겐."

비단 레오니와 히사기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남태민과 하르콘을 비롯해 모두가 내색하지만 않았지 같은 심정이었다.

심지어는 천하의 그림자 용병단조차도.

"젠장맞을."

빠득.

락키드는 이를 갈았다.

계획에 관해선 키치에게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혼자서 균열에 진입하는 것도 모자라서는, 혼자서 상위 마왕인가 하는 괴물까지 사냥하겠다고?

쉽게 말해 잘나신 고용주님께서 또 혼자만 멋진 척을 하겠단 소리가 아니겠는가?

"빚을 갚으려면 이걸로 부족한데."

움직이는 액자, TV의 애청자인 락키드였다.

그 덕에 락키드는 자신이 엘시도어에게 쓰러진 그날의 전말을 전부 목격했다.

몇 번이나 되돌려보고 깨달았다.

수천 번을 싸워도 귀 큰 놈을 이길 순 없었다는 걸.

그리고.

"이 락키드 님의 몸값을 생각하면 한참 부족해!"

고용주, 호열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자신은 죽거나 평생 불구가 됐으리라는 사실까지도. 그러니까 빠르게 주어진 몫을 해치우고, 호열에게 합류하려고 했다.

계획?

그런 건 어차피 살면서도 지켜본 적이 없었거든.

"분명 말발굽 소리가 들렸는데...."

그러나 본격적으로 무언가 시작되려던 찰나.

균열 밖으로 쫓겨나 버렸다.

락키드는 자신의 파트너, 알카리에게 물었다.

"영감, 하나만 물읍시다."

"뭘?"

"우리 총대장은 나랑은 다른 존재요?"

"...생긴 걸 말하는 겐가?"

영감탱이가 노망났나, 다짜고짜 개소리를....

내가 포션만 얻어먹지 않았어도...!

락키드는 화를 억누르고 다시 물었다.

"...그게 아니라 총대장쯤 되면 균열 밖으로 튕겨 나오지 않는 능력이라도 생기느냐고 묻는 거요."

"글쎄, 호열 경과 그런 대화는 나눈 적은 없어서 모르겠네. 그래서 이건 노친네의 짐작이지만.... 호열 경은 물론이고, 누구도 균열에는 저항할 수 없겠지."

"뭣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거요?"

"클클, 자네는 저런 것에 저항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저런 것...?

락키드는 균열을 떠올렸다.

그러고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변덕이 죽을 끓지 저건. 우리를 이딴 세계로 내쫓지를 않나, 프로스트만 한 대도시를 순식간에 옮겨 놓지를 않나!"

그래, 그런 건 아무리 마법에 능통하고 마력이 넘쳐난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일 거야.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여도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락키드가 복잡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우리 총대장은 어떻게 잡겠다는 거야. 상위 마왕이란 놈을?"

"쯧."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궁금한 건 지나치게 많다.

심지어는 눈치도 없다.

'내가 그걸 알면 여기서 이렇게 가슴을 졸이고 있겠느냔 말이다.'

알카리가 미간을 구기던 순간이었다.

모험가 쪽에서 새로운 소식이 들려왔다.

"잠깐, 마지막 균열까지 클리어라는데?"

"뭐, 마지막 균열이 어딘데?"

"20번째 왕좌!"

"...!!"

20번째 왕좌라면 호열 경이 진입한 균열이다...!

계획에 대해 알고 있는 이들은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균열이 클리어됐다, 뜻하는 바는 둘 중 하나였으니까.

계획 성공 혹은 실패.

.

.

.

포탈 발현.

[20번째 왕좌].

균열이 생성된 위치로 집결한 이들은 목격했다.

언제나와 다를 것 없이 꼿꼿하게 선 호열을.

역시나 외관과 표정에서는 무엇도 짐작할 수 없다.

마르셀로와 하르콘이 눈빛을 교환했다.

끄덕─

고개를 끄덕이고는 호열에게 나아갔다.

그리고 여전히 등을 돌리고 있는 호열에게 물었다.

그러나.

"경, 계획은...?"

정중하게 말을 걸어도 대답이 없었다.

격식을 중요시하는 호열의 성격상 있을 수 없는 일이거늘.

그러니까 이내,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르셀로!"

하르콘의 부름에 마르셀로는 지체하지 않았다.

일렁이는 거대한 마력.

마르셀로가 포탈을 발현했다.

.

.

.

마탑.

벨리에가 입을 열었다.

"단순하게 정신을 잃으신 것 같아요."

곳곳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호열이 정신을 잃고 기절하리라고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으니까.

뱅그릿이 먹먹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지막까지 꼿꼿하게 서 계셨다니."

그랬다.

호열은 꼿꼿하게 선 채로 기절했던 것이었다.

푹─

벤쉬가 팔꿈치로 뱅그릿의 옆구리를 찔렀다.

옆구리를 붙잡은 뱅그릿에게 작게 속삭였다.

"뱅그릿, 꼭 그렇게 평민티를 내야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소리를 들으려고 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보는 눈들을 생각하세요. 우리는 마탑의 선임 마법사. 언제나 품격을 잃지 말아야 한단 말입니다."

훌쩍─

물론, 그렇게 핀잔을 주는 벤쉬의 목소리도 평소와 다르게 떨리고 있었다.

정말이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으니까.

마르셀로가 상황을 정리했다.

"경께서 정신을 잃으실 정도로 무리하셨다는 건, 분명 계획에 착수하셨다는 증거겠지요. 물론, 그 결과는 경께서 깨어나기 전까지는 알 수 없겠지만 말입니다."

하르콘은 쓰게 말했다.

"정말로 경답군."

침묵하고 있던 남태민이 입을 열었다.

"알고 계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희 세상에서 호열 씨는 평화의 상징이나 다름없습니다. 호열 씨가 흔들리면 세상이 흔들리게 되니까요."

남태민이 주먹을 쥐었다.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실 테니까. 정신을 잃고서도 쓰러지실 수 없으셨던 거겠죠. 억지로, 멀쩡한 척, 꼿꼿하게 서 계실 수밖에 없으셨던 거겠죠."

그런 호열의 배려 덕분일까.

호열이 쓰러졌다는 걸 아는 건 이곳에 모인 이들뿐이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호열이 쓰러진 이 순간.

세상은 달콤한 승전보에 취해 있다는 것이었다.

키치는 긴 생머리를 쓸어올렸다.

'걱정이나 시키시고 죄가 많으시네요. 고용주님.'

그림자 용병단.

그것들이 누구 병문안을 올 위인들은 못 됐으니까.

단장인 키치는 대표로 마탑을 찾았다.

'...그나저나 마탑에는 나도 죄가 많아서.'

역시나, 마탑은 숨이 막히는 공간이었다.

친한 사람도 없고, 아는 사람은....

그나마 회의에서 마음이 통했던 레오니뿐인가.

키치는 옆에 선 레오니를 슬쩍 흘겨봤다.

'근데, 우리 귀여운 언니도....'

상태가 영 별로네.

키가 작아서 정수리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축 처진 어깨에서 감정이 전해져 왔다.

솔직하게 키치는 이해가 안 됐다.

'아니, 기뻐해야 되는 거 아니야? 저 인간.... 아니, 우리 총대장님 살아 돌아오신 것만 해도 대단한 거잖아? 기절이 뭐, 대수라고. 난 맨날 술이나 퍼마시고 기절하는데.'

결과가 어떻든, 싸게 먹힌 거지, 이건.

키치가 무거운 분위기를 환기하려 입을 열었다.

"그보다 안정을 취하시는 게 중요하지 않으실까요? 옆에서 걱정하는 것도 좋은데, 슬슬 자리를 비켜드리는 게 어떨까 싶네요."

호열의 상태를 주시하던 벨리에가 말했다.

"맞아요, 깨어나시면 다들 한 소리씩 들으실지도 몰라요."

"...전, 마도구 반납하러 먼저 가보겠습니다."

후다닥─

벤쉬가 빠르게 별실을 빠져나가고, 다른 이들이 그 뒤를 따랐다.

마지막으로 마르셀로가 걸음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벨리에가 그를 불러 세웠다.

"마르셀로 수석."

"듣고 있습니다, 벨리에 선임."

"확실하진 않지만,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

스스스─

그제야 벨리에의 마력이 호열의 몸에서 흩어졌다.

이내, 벨리에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수석께서 계획에 성공하신 것 같아요."

"...벨리에 선임이 어떻게 그걸?"

"아무래도 이 수석님이 쓰러지신 이유가 그것과 관련된 것 같거든요."

"그것이라면.... 이 수석께서는 단순하게 무리를 해서 쓰러지신 게 아니시란 뜻입니까?"

치유 마법 발현.

덕분에 마력으로 호열의 육체를 살피던 벨리에는 느낄 수 있었다.

호열의 심장 부근에서 일렁이고 있는 강대한 기운을...!

마법사의 심장에 깃든 강대한 기운이라면 역시.

벨리에의 녹안이 반짝였다.

"아무래도 이 수석님께서는 계획대로 상위 마왕을 처치하시고 한 단계, 마법사로서 성장하신 것 같아요...!"

그랬다.

저건 경지에 오른 마법사.

그들만이 품을 수 있다는 『서클』이 분명했다.

*

...나는 눈을 떴다.

그런 내 시야에 들어온 건 메시지였다.

뭐냐, 이 낯선 메시지는?

[시공간에 당신의 업적이 울려 퍼집니다.]

[시공간의 존재들이 당신의 자격을 이야기합니다.]

[칭호, '초월자'를 습득합니다.]

...아르카나 대륙도 아니고, 시공간?

뭐, 초워워어어얼자?!

뭐라고 반응할 새도 없는 찰나의 순간이었다.

별안간,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츠릉!

...잠깐, 왜 내 심장에서 쇠 부딪히는 소리가 나지?

◈ 177화. 서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