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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화. 한결같구나

시끄러운 고성이 오간다.

"대체 무엇을 위한 결정이랍니까!"

"다들 목격하시지 않았습니까? 안토니움은 한계에 봉착했었단 말입니다. 함락을 눈앞에 둔 순간에 퇴각이라니요!!"

"셰그윈 경, 결정에 책임을 지셔야 할 겁니다."

쏠리는 시선에 셰그윈은 침묵했다.

제후들의 성화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머릿속에서.

은발의 사내, 호열의 잔상이 떠나질 않았으니까.

'무엇 하나 짐작할 수 없었다.'

시공간의 사교장.

규율 탓에 상대의 외관에서 정보를 유추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 호열의 외관은 어땠는가?

무기를 포함해 그럴싸한 장비는커녕.

그 복장조차도 생전 처음 보는 형태였다.

'가장 높은 가능성은 마법사겠군.'

마력은 곧 마법사의 무기다.

마도구로 마법의 위력을 증폭시킬 수 있기는 하다만, 그런 마도구는 흔치 않다.

그것조차 마탑에서 독점하다시피 보유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육체는....'

마법사의 육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단련됐다.

셰그윈, 자신 또한 무인(武人)이기에 알아볼 수 있었다.

드넓은 어깨부터 팔뚝까지.

발달한 근육은 분명 무기를 쥐고 휘둘러 왔다는 흔적이었다.

'...마검사라면?'

마검사에 놀랄 이유는 없었다.

마검사부터 마창사까지.

예로부터 마법과 무예를 함께 다루는 이들은 존재해 왔었으니까.

셰그윈이 흠칫한 이유는 정도(正道)가 아닌 사도(私道)를 택해 '초월자'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하나를 파도 다다를 수 없는 게 경지다.'

보통은 전부를 잡으려다 전부를 놓쳐버린단 말이다.

아르카나 대륙에 널리 이름을 알린 마검사나 마창사가 존재하지 않는 것만 봐도 그것은 분명한 사실. 그렇기에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호열과 사교장에서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그쯤에서 생각을 정리하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듣고 있습니까, 셰그윈 경!"

감히, 누가 누구더러 소리를 지른단 말이냐?

셰그윈은 순간, 살기를 자제하지 못했다.

그러자 즉시, 소란스럽던 자리가 조용해졌다.

"...컥!!"

제후들 중에서도 검이라고는 잡아본 적이 없는 몇몇. 그 탓에 단련되지 못한 육체를 가지고 있던 이들이 거품을 물고 졸도해 버렸다.

남은 이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셰그윈 경. 이게 무, 무슨 짓입니까?"

간신히 정신을 붙잡고 있지만 그게 고작이었다.

셰그윈은 말없이 쾌검, 아틀라스 소드를 만지작거렸다.

웅우웅─

그러자 자리에 울리는 진동.

식은땀을 흘리던 이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젠 제대로 된 말조차 내뱉지 못하고 있었다.

"억으억."

이것이 바로 초월자, 자신의 존재감이거늘.

이것이 정상적인 반응이거늘.

이내, 초토화가 된 자리를 보고 셰그윈은 정신을 차렸다.

'이런....'

나는 무슨 짓을 한 거지?

"허억허억."

수많은 제후들 중.

오직 유미르 공작만이 정신을 붙잡고 있었다.

셰그윈이 그에게 말했다.

"유미르, 나를 노여워하지 말게."

"그게 무슨...?"

"그대들도 훗날 이해하게 될 날이 올 테니까."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호열의 무력에 대해 설명을 해봤자 이해하지 못하고, 억지를 부릴 게 뻔할 터. 셰그윈은 말을 아꼈다.

모두 기절한 마당에 자리를 지키고 있을 필요는 없겠지.

셰그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 안토니움 원정은 없던 일로 하지."

"...!"

유미르 공작이 눈을 부릅떴다.

셰그윈의 뒤통수에 소리쳤다.

"마스터 셰그윈!"

"?"

"누구 마음대로 없던 일로 하겠다는 것인가!"

안토니움 원정을 위해서 많은 것을 포기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없던 일로 하겠다고?

유미르가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섰다.

"셰그윈, 나는 그대의 말만 믿고 영지의 백성조차 외면했네. 대를 위해선 소를 희생할 수밖에 없다며, 스스로 끊임없이 되뇌며 이곳까지 버텨왔다는 말이야!"

"그래서."

"그래서라니? 내가 묻지 않았는가? 도대체 이유가 무엇이냐고! 많은 것이 필요하지도 않지 않았나? 그대가 나섰다면, 아니 퇴각하지만 않았어도 안토니움은 진작...!"

그대가 나섰다면.

그 말대로 내가 나섰다면.

뭐가 달라졌을까.

셰그윈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아니, 달라지는 건 없다.

누구보다 셰그윈, 스스로 자각하고 있었다.

호열과 마주쳤던 그 순간.

-"어째서 그대에게 추악한 악마의 냄새가 나는 것인가?"

두근두근두근.

지금 이 순간, 유미르의 심장처럼.

자신의 심장은 격하게 뛰고 있었으니까.

그것은 검성의 재능을 갖고 태어난 셰그윈으로서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 공포였다.

셰그윈의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유미르. 부디 닥쳐줬으면 좋겠군."

"닥치라니, 그런 언동은 삼가...!"

슥─

말이 끝나기도 전에 쾌검이 발도했다.

주륵─

유미르의 목덜미에 실선이 그어졌다.

"으, 으아아아악!!"

유미르가 다급히 자신의 목을 매만졌다.

아, 아직 살아있다?

목이 베였는데, 어떻게?

휙─

셰그윈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말했다.

"나의 오판을 고려해 상처 하나로 넘어가겠네."

"...!"

유미르는 그제야 목에 그어진 상처가 얼마나 얕은지 알아차렸다.

기껏해야 쓰라릴 정도.

그렇기에 더더욱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실력을 갖췄으면서 어찌!"

유미르는 울먹거렸다.

그가 피 묻은 양손을 모으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 입에서 간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스터 셰그윈. 아니, 검성이시여! 부디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 저는 이대로 영지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대로는 악마에 짓밟힌 백성과 마주할 면목이 없습니다!"

감정에 호소하는 애원이었다.

그러나 셰그윈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아니, 그의 얼굴은 더욱더 차갑게 굳어갔다.

"웃기지도 않잖아, 유미르."

"어찌 그런 말씀을!"

"빌어먹을 가식은 집어치워."

콱!

"컥."

셰그윈이 유미르의 머리채를 쥐고 들어 올렸다.

"외면한 시점에서 너는 악마와 다를 것 없다. 알고 있잖아? 그렇게 소중한 너의 백성이 어떻게 죽어나갔는지를."

"...마스터 셰그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너는 나와 공범이다."

그랬다.

-"그 젊음과 무엇을 맞바꾼 것인가?"

타인의 목숨을.

백성의 목숨을.

나의 목숨과 맞바꾸었다.

-"검성. 아니, 악마보다 추악한 칼잡이여."

그 말이 더없이 옳구나.

인간으로 태어나 그런 만행을 저지른 시점에서 나는 악마보다 추악하다 불려도 반박할 수 없겠지.

그러나 착각하지 마라.

셰그윈의 동공이 검게 물들었다.

"위선자 유미르, 너도 나와 다를 것 없다는 말이다."

퍽!

셰그윈이 유미르를 내동댕이쳤다.

그러고는 고요한 장내를 바라봤다.

소란에 진작 정신을 차렸을 터.

그럼에도 쥐새끼들 마냥 숨죽이고 있는 이들을 향해 선언했다.

"마음이 바뀌었다."

"...?"

"후환은 남기지 않는 편이 좋겠지."

"...!!!"

무어라 반응할 새도 없었다.

쾌검이 난무했다.

한 박자 늦게 피 분수가 솟구쳤다.

철컥─

이내, 검을 거둔 셰그윈은 참상을 바라봤다.

자신의 잔혹함에 경악해야만 했거늘.

어째서인가.

조금의 가책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도 모자라서.

"!"

육체에선 활력이 들끓고 있었다.

마치 자리에 가득한 피와 공포가 전설 속의 영약이 된 것처럼.

셰그윈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역시, 피 냄새가 비리지 않았다.

마치 잘익은 포도주처럼 향긋하게 느껴졌다.

셰그윈이 입을 열었다.

"다시 생각해도 그대의 말이 옳다."

나는 악마.

그보다 더 추한 존재가 되었는지도 모르겠군.

그러나 후회하지 않겠다.

강해질 수 있다면.

이보다 추한 존재가 되어도 상관없으니까.

나는 틀린 길을 선택한 게 아니다.

그러나 셰그윈의 황홀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환골탈태를 겪고도 나는 공포를 느꼈단 말인가.'

그저 사내와 눈을 마주친 것만으로.

정말로 가늠조차 되지 않는 격의 차이다.

빠득, 셰그윈은 이를 악물었다.

"나는 더욱 강해지겠다. 네 녀석을 베기 위해서라도."

*

으으, 더없이 나약하다.

더없이 하찮다, 호열아.

이래서 셰그윈을 쓰러트릴 수 있겠냐고!!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

●45KM 달리기 (성공)

●팔굽혀펴기 3,700회 (진행 중)

●턱걸이 2,200회 (성공)

●버피 테스트 1,400회 (성공)

유스라 왕국 집무실.

툭─

나는 번쩍거리는 금철봉에서 내려왔다.

젠장, 팔뚝에 감각이 없다.

허나 엄살을 떨 새도 없이 나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아무래도 미관을 심히 해치는군."

이내, 『반전 마법』 발현.

철봉이 원래의 금제 장식품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유스라 왕국에 흔한 게 금덩이라고 하더라도.

순금으로 만든 철봉에서 턱걸이라니.

'난 진짜 떨려서 엄두도 못 낸다.'

청렴결백을 떠나서 간이 얼마나 큰 거냐, 그랑펠.

그나마 다행인 건.

[첫 세계수의 축복]이 발동 중이라는 것이었다.

무감각하던 팔뚝이 빠르게 활력을 되찾아 갔다.

"역시나 가뿐하다."

생명력 재생 효과가 아니었으면 진작 몸살로 앓아누웠을 거면서 큰소리는 잘 치는구나, 그랑펠. 서클의 족쇄를 풀어냈건만, 나의 일과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클래스 퀘스트에 시달리다가.

영약 밭에 물을 줬다가.

유스라 왕국 업무를 살폈다가.

마지막으로 성전 회의에 참석.

'그냥 수석 업무만 빠진 거지.'

게다가 그랑펠의 긍지가 땡땡이를 용납할 리 있나. 곧 마르셀로에게 떠맡긴 수석의 업무를 되찾으러 마탑에 성실하게 복귀하고 말겠지.

그런 의미에서 남은 며칠이 내겐 더없이 소중했다!

그래서 서둘러 탐험가 연맹장 파비앙에게 편지를 보내 [지옥의 횃불]의 대여를 요청했던 거고, 탐험가 연맹이 흔쾌히 요청을 받아들여 이렇게 인벤토리에 [지옥의 횃불]을 챙겼단 것이다.

[지옥의 횃불]

[등급 : 유니크]

[제한 : 없음]

[효과 : 지옥의 불의 효과와 동일하다.]

[설명 : 지옥의 불로 타오르는 횃불. 아득히 먼 옛날 낭만을 좇던 탐험가, 로렌츠크가 남겼다는 탐험가 연맹의 보물이다.]

파비앙은 횃불을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연맹의 마도구가 총대장님께 도움이 될 수 있다니 기쁘군요."

그놈의 총대장님 호칭은 진짜....

하여튼, 기쁘기는 빌리는 내가 더 기쁘고 고맙지.

막말로 [지옥의 횃불]이 없었다고 생각해 보자.

지옥의 문이 닫힌 순간, 악크샨과의 교류는 끊긴 것이나 다름없었겠지. 나는 지옥의 문을 여는 법은커녕 그 위치도 알지 못했으니까.

간신히 획득했던 클래스 고유 스킬.

[악크샨의 유지]가 계륵이 될 뻔했다는 소리다.

나는 횃불의 설명을 읽다가 읊조렸다.

"로렌츠크, 그대의 긍지가 횃불로 이어졌군."

...그냥 감사하다고 하면 될걸.

왜 결론이 항상 긍지로 귀결되는 거냐, 그랑펠.

어쨌거나 나는 지체하지 않았다.

곧장 인벤토리에서 횃불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입을 [악크샨의 유지]를 발동했다.

"응답하라, 악크샨이여."

스킬이나 마법을 사용할 때 입으로 지껄일 필요는 없었거늘....

그냥 선배님들에 향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하자.

[악크샨과의 관계도, 영향력이 효과에 적용됩니다.]

[악크샨 악마 사냥꾼이 당신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화르륵!

떠오르는 메시지.

그와 동시에 거세게 일렁이는 지옥의 횃불.

그나저나 과연 악크샨이었다.

'그때보다 관계도, 영향력은 상승했을 텐데.'

상위 마왕, 가미긴 앞에서는 관계도고 나발이고 우르르─ 나타났던 악마 사냥꾼들이었거늘.

지금은 달랑 한 명이었다.

그래도 한 명이 어디냐?

그 불친절한 성격들을 떠올리면.

이것조차 감사해야 한다.

그나저나....

신체에 달라붙는 검은 복장.

깊게 눌러쓴 후드.

거기에 전신에 주렁주렁 매달린 무기들까지.

그래, 내가 저 모습에 혹해서 넘어갔었지!

근데, 다 크고 나서 보니까 저것만큼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복장도 없다.

아니, 격식에 죽고 못 사는 내가 할 말은 아닌데. 저건 나와는 다른 의미로 과하잖아?

'움직이다가 자기 무기에 자기가 찔리겠는데?!'

허나, 그건 언제까지나 나의 속마음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악크샨 선배님의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게 없었다.

나는 알아내고, 배워야만 하는 처지였으니까.

그 방대한 그릇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감히 장담할 수 있었다.

아르카나에 수많은 클래스가 있다고 해도 평타로 900레벨 네임드 몬스터를 일격에 처치할 수 있는 클래스? 악마 사냥꾼 말고는 존재하지 않으리라고.

처음엔 마냥 스탯이 높아서 그런 거겠거니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게 말이 되냐고.

왜, 지금만 하더라도 체력 단련 클래스 퀘스트의 목표는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고 있었다. 나의 비루한 스탯까지 고려했을 때는....

[능력치]

근력 : 112 / 민첩 : 124 / 마력 : 512 / 행운 : 12 / 심미 : 中

지금도 얼마나 벅찬 목표인지 알 수 있다. 900레벨 네임드 몬스터를 평타로 잡으려면 적어도 근력과 민첩이 900 언저리는 되어야 할 테니까.

그걸 훈련량으로 환산하면....

도저히 소화 가능한 목표가 아니라니까?

하루가 뭐냐.

일주일 전부를 체력 단련 퀘스트에 투자해도.

목표 하나조차 달성하기 힘들겠지.

그러니까 나는 당사자들에게 물을 생각이었다.

그 스탯의, 거대한 그릇의 비결이 대체 무엇인지를!

"...."

그런데 어째 시작부터 쉽지 않아 보인다....

슥─

집무실을 둘러보던 악마 사냥꾼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도 악마 사냥꾼이라서 짐작할 수 있었다.

저 양반, 저거 악마가 없어서 실망한 게 분명했다.

'진짜 한결같다, 악크샨.'

악마 사냥꾼끼리 과한 친목 금지.

과연, 지옥에 떨어져서도 규율을 지키려는 건가.

"유감스럽게도 이곳에 악마는 없다."

나의 말에도.

"...."

대답은커녕 듣는 기색조차 없다.

아니, 그것도 모자라서 갑자기 뭐 하는 건데?

다짜고짜 바닥에 엎드려서는.

잠깐, 팔굽혀펴기를 한다고?!

"그런가, 대화는 필요 없다는 말이로군."

남의 집무실에서 체력 단련이라니.

저런 무례를 납득하지 마라, 그랑펠.

나는 이런 걸 원한 게 아니란 말이다...!

그러나 나의 외침이 무색하게도.

"후우─"

나는 애써 불러낸 악마 사냥꾼과 함께 체력 단련 퀘스트를 수행하고 말았으니. 육체가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도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

'설마, 진짜로, 에이, 정말로?'

그냥 무작정 단련으로 스탯을 키운 게 맞아?!

진짜 뭐, 이딴 클래스가 다 있어!!

억울해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거늘.

그랑펠의 경쟁심에 불이 붙고 말았다.

나는 쉴 새 없이 팔굽혀펴기를 실시했다.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목표는 진작 달성했거늘.

나는 멈출 수 없었다.

어째서냐고?

선배....

아니, 선배도 아니다.

저 무례한 악마 사냥꾼이 멈추지 않았으니까.

꾸역꾸역 입을 열어 본다.

"...비로소 무언가를 해내는 것 같군."

말도 제대로 못 하면서 허세 부리지 마라, 그랑펠.

말 그대로 악으로 깡으로 팔을 굽히던 때였다.

순간, 눈앞이 핑그르르─ 돌았다.

그렇게 육체를 혹사하더니.

나, 드디어 기절하는구나.

그래도 기절한 덕분에 쉴 수 있겠구나, 기대했는데.

아니었다.

떠오른 건 메시지였으니까.

[한계를 초월한 단련으로 추가 보상이 지급됩니다.]

잠깐...?

찾았다.

악마 사냥꾼, 그 초월적인 스탯의 비밀!

◈ 188화. 빚은 잊지 않겠다

쉽게 말하자면 간단하다.

"...이제야 단련답군."

[첫 세계수의 축복] 효과로도 상쇄하지 못하고.

천하의 그랑펠조차 허세를 부리지 못할 정도로 몸을 혹사시키면.

그게 바로 한계를 초월한 단련이라는 것이었다!

나 진짜 여러 의미로 경악스럽다.

한계를 초월한 단련이다, 뭐다 포장을 해도 악마 사냥꾼 강함의 비결은 결국 노가다라는 거잖아? 경악스러울 정도의 한결같음이구나, 진짜.

그랑펠, 너도 마찬가지야.

세계수 버프로도 회복하지 못할 정도로 육체를 혹사해 놓고서는.

뭐?

이제야 단련 같아?

그럼 내가 여태까지 해온 거는 대체 뭔데?!

'서운하다, 너 정말.'

그러나 무엇보다 경악스러운 건 메시지였다.

[한계를 초월한 단련으로 추가 보상이 지급됩니다.]

이것과 비슷한 메시지를 본 적이 있긴 했다.

스탯 포인트가 추가로 한두 포인트쯤 상승했었지?

사실 그것만 하더라도 엄청난 추가 보상이었다.

스탯 포인트 하나엔 1레벨의 가치가 있으니까.

그런데.

[능력치, '집념'을 습득하셨습니다.]

이번엔 다르다.

무려 스탯이 개방됐으니까.

[심미]가 그랬던 것처럼 습득하는 순간.

시야와 머릿속에 각인되는 '집념'의 효과.

[집념 : 정신력을 능력치로 환산한다. 집념이 상승할 때마다 환산되는 능력치가 추가로 상승.]

보자마자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이거, 악마 사냥꾼 고유 스탯 수준이잖아?!

어째, 오늘따라 장담을 많이 하는데....

단언컨대 아르카나에서 악마 사냥꾼보다 정신력이 강한 이들은 없을 거다. 그게 정신력이 약한 사람들은 악크샨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구조였거든.

'옛날에도 그랬었지.'

끊임없는 노가다 퀘스트도 모자라서.

RPG보다는 공포 게임에 가까웠던 악마 사냥꾼의 육성법. 수많은 아르카나의 콘텐츠를 놔두고 악마 사냥꾼 클래스를 고집할 이유는 없었다.

'막말로 나라도 때려치웠을걸?'

아르카나를 강제적으로 접지 않았다면 말이야.

그랬다면 자연스럽게 중2병이 치유되면서 그랑펠과는 이별하고.

새로운 계정을 생성해 육성하지 않았을까?

'엄밀하게 따지자면....'

이번에도 중간 과정을 생략해 버린 셈이려나.

정상적인 방법으로 [집념]을 습득하기 위해선.

엄청난 훈련이 필요할 것 같았으니까.

지옥에서도 육체를 단련할 정도로 말이지.

하지만 이 뻔뻔함이 어디 가겠는가?

나는 이 순간에도.

팔굽혀펴기를 멈추지 않는 악마 사냥꾼에게 말했다.

"비로소 동등한 조건에 섰군."

그러고는 다시금 팔굽혀펴기를 실시했다.

과연, 새로운 스탯 [집념]의 효과가 체감됐다.

"나는 아직 가뿐하다."

악마 사냥꾼, 그 이상의 정신력.

그랑펠의 정신력이 육체를 지탱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나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라 메시지로 떠올랐으니까.

[집념의 효과로 일시적으로 '근력'이 상승합니다.]

근육을 쥐어짜면서 그 수치를 확인해 봤다.

[근력 : 112 → 162]

...아니, 근데 뭔데 이거.

일시적이라고 해도 근력이 50포인트 상승했다고?!

놀라서 근육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의 수치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랑펠의 정신력이 평범한 인간 수준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집념 : 1]

이제 막 습득한 내 [집념] 포인트는 고작 1이란 말이다.

그 설명에도 나와 있듯.

환산되는 능력치는 [집념] 수치에 영향을 받았으니까.

'그럼 나중엔 얼마나 상승한다는 건데?'

경악할 수밖에.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효율이지?

[집념]의 효과가 사기적인 건지.

그게 아니면 그랑펠의 정신력이 사기적인 건지.

당장으로서는 알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당분간 레벨 업 포인트는 집념에 올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랑펠의 정신력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스탯의 격차는 극복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속살이 비칠 정도로 셔츠를 땀으로 적시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좋은 승부였다."

좋은 승부우우우?

세상에 이것보다 미련한 승부도 없을 거다, 그랑펠.

그쪽도 유일한 후배를 이겨 먹으셔서 좋으시겠수다, 아주.

"...."

악마 사냥꾼은 그제야 팔굽혀펴기를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르륵─

그러자 지옥의 불길이 그의 육체를 휘감기 시작했다.

"...."

친목 금지.

끝까지 규율 한번 잘 지키시네.

처음과 마찬가지로 인사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똑똑히 목격하고 말았다.

'?'

후드 아래로 언뜻 보이는 입가.

그 입꼬리가 분명히 위를 향해 있었다.

분명히 웃고 있었다.

'...저거 지금 비웃은 거지?'

이겼다고 우쭐대는 거 맞지?!

그래, [집념]을 깨닫게 해준 건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다짜고짜 팔굽혀펴기를 하지 않나.

마지막에는 비웃음을 남기고 사라지지 않나.

우리 악크샨 선배님들, 캐릭터 한번 대단하시네!

허나, 그랑펠 또한 절대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으니.

"때론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게 있는 법이지."

...아니, 한술을 더 떴으니.

나는 지옥의 불길 속으로 되돌아가는 악마 사냥꾼.

그의 뒤통수를 향해 선언하고야 말았다.

"다음에는 이 빚을 갚아주겠다, 악마 사냥꾼이여."

...진심으로 나는 너한테 졌다, 그랑펠.

*

눈물의 마왕성.

서열 56위.

마왕, 그레모리는 눈가를 훔쳤다.

아련한 듯한 목소리가 좌중에 깔렸다.

"위아래로 벗들이 없으니, 저는 쓸쓸합니다."

위, 서열 55위.

아래, 서열 57위의 왕좌.

마왕 쟁탈전으로 그들의 공석이 채워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가 생겨버렸다.

악크샨의 부활.

그리고 상위 마왕, 가미긴의 죽음.

그레모리가 입을 열었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네, 넷?"

마왕의 질문을 받은 건 인간이었다.

타락하지도, 악마 숭배자도 아닌 그냥 평범한 인간.

단지 과거, 이 작은 성의 주인이었던 자작이었다.

사내는 식은땀을 흘렸다.

'...대답, 대답을 잘해야 한다.'

다짐하는 와중에 그레모리가 속삭이듯 말했다.

"내 눈을 똑바로 보도록 해요."

"...!"

사내는 고개를 들어 그레모리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절망했다.

'어찌 제게 이리 가혹하실 수 있습니까...!'

마치 여신이 내린 시련처럼 느껴졌다.

어찌하여 나의 영지를 박살 내고, 나의 백성을, 신하를, 혈육을 처참하게 살해한 저 악랄한 악마가 더없이 아름다운 여인으로 보인단 말입니까?

사내는 애써 정신을 붙잡고 대답했다.

"...말씀드리기 송구합니다만, 악크샨이 정말 부활한 게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으음, 역시 그렇겠죠."

그레모리는 뺨을 부풀렸다.

늘어진 살굿빛 머리카락과 화사한 피부.

그리고 생기 넘치는 표정은.

누구도 그녀를 마왕이라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이해가 안 되네요."

그레모리의 시선이 사내를 향했다.

"알고 있나요? 가미긴 님을 위한 제물은 본의 아니게 평소보다 훨씬 풍족했다는 사실을요. 마왕 쟁탈전에 참가한 악마들이 모조리 죽어서 제물이 된 덕분이었답니다."

따져보자면 가미긴은 예정된 제물에 더해서.

마왕급 진명의 악마를 열하고 둘을 더 제물로 삼아서 현현했다.

그런 가미긴의 위용은 그레모리도 확인했던 바.

"미련하고, 우둔하신 우리 가미긴 님."

사내는 귀를 의심했다.

'...미련하고, 우둔하다?'

마왕 사이에 서열이 존재한다는 건.

최근 그레모리의 말 상대를 하며 알게 된 사실이다.

그중에서도 상위 마왕의 힘은 격이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레모리가 슬그머니 한쪽 눈을 떴다.

"분명 불경한 호칭이라고 생각했겠죠, 그대는?"

"아, 아닙니다!"

"괜찮아요. 미천한 인간은 이해할 수 없겠죠."

"...네, 넵."

서열 10위까지를 상위 마왕으로 분류한다.

마왕들 사이에서도 그들에 대한 취급은 특이했다. 그레모리는 그나마 나은 편이지, 대다수의 마왕들은 상위 마왕들을 도구처럼 취급했으니까.

그야 말조차 통하지 않는 이들이 아니던가?

"마지막까지 이용만 당하시다가 결국, 지옥에 처박히고 마시다니.... 저는 그 가여운 최후에 괜히 울적해진 것뿐이니까요."

"...그러시군요."

꿀꺽.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악마에게 홀린다는 게 이런 기분인가?

저 악마의 모든 게 가식이며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가련함을 연기하는 그레모리를 바라보자 정말로 가슴속에 연민이 싹 텄다.

그레모리가 손가락으로 눈가를 훔쳐내고는 말했다.

"그러나 마냥 슬픈 일만 있는 건 아니랍니다. 이렇게 벼랑 끝에 내몰린 우리를 위해 움직여 줄 이들이 있으니까요."

그중 하나가 바로 검성 셰그윈이었다.

그레모리는 얼마 전 마안을 통해 엿봤던 셰그윈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노쇠한 인간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기세는 상상을 초월한 수준이었다.

"정말로 고마우면서도 가여운 존재들."

그럼에도 결국 인간이었다.

자신과 다르게 하루하루 죽어가는 미천한 인간.

그런 의미에서 셰그윈은 영리한 편에 속했다.

나서서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타락의 길을 걷다니.

그레모리는 입꼬리를 올렸다.

'몇몇 마왕들은 아쉬워했겠지.'

노쇠했다고 해도 셰그윈의 육체는 빙의하기엔 최상품이었으니까.

물론, 그레모리는 인간의 육체 따위에 관심이 없었다.

...꼴깍.

보아라.

원수를 보고 군침을 삼키게 할 정도로.

자신의 육신은 지금 이대로도 완벽했으니까.

"저, 그레모리는 슬프답니다."

그레모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마안이 뜬 밤하늘.

이내, 그레모리의 눈이 검게 물들었다.

그러자 마안의 시야가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속을 알 수 없군요, 셰그윈.'

제국의 수도, 안토니움에서 퇴각하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판단이었다.

전쟁에 익숙하지 않은 그레모리, 자신조차 그렇게 생각할 정도인데.

다른 마왕들의 반응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뻔했다.

'모두가 당신의 행보를 지켜보고 있답니다.'

그런 의미에서 셰그윈의 행선지는 의외였다.

쓸모없는 귀족들을 죽이고, 악마의 힘을 다루는 데에 깨달음을 얻었을 텐데. 인간들이 득실거리는 제국을 떠나서 산맥으로 향할 줄이야.

그레모리의 입가가 비틀어졌다.

"...설마, 인간 흉내를 내려는 건 아니겠죠?"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무의미한 짓이겠지만.

딱히 상관은 없었다.

타락했다고 하더라도 근본은 하찮은 인간.

"그대는 단지 앞을 밝혀주기만 하면 되니까요."

가미긴의 마안을 통해 목격했던 광경.

-"악크샨이 돌아왔다."

그때의 소름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악크샨의 절멸 이후 잊고 있던 공포가 되살아나는 듯했다.

악크샨의 부활.

그 원흉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은발의 악마 사냥꾼.

난데없이 아르카나 대륙에 모습을 드러냈던 사내는 그날, 수백만의 악마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찬가지로 마안을 통해 분명히 확인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부활했다는 거겠지요.'

그 가미긴 님을 지옥에 처박아 넣을 줄이야.

그보다 확실한 부활의 증거도 없겠지.

그레모리가 창가에서 돌아섰다.

"그러니 이리도 가엾게 숨죽이고 있을 수밖에."

가미긴이 지옥에 처박힌 직후.

마왕들은 악크샨을 찾아 나섰다.

가미긴과 혈전을 펼친 지금이야말로.

부활한 악크샨을 짓밟을 기회라고 판단했으니까.

그러나 도저히 알아낼 수 없었다.

'그 장소는 대체 어딜까요?'

더없이 이질적인 풍경.

아르카나 대륙 어디를 뒤져도 같은 장소와 악크샨, 은발의 악마 사냥꾼은 발견할 수 없었다.

마안의 시야를 빌렸는데도 말이다.

과연, 악크샨이었다.

"등장만으로도 저를 소름 돋게 만들다뇨?"

그러나 시간은 어차피 자신들의 편이었다.

가미긴이 지옥에 처박혔다고는 해도, 상위 마왕은 아직 아홉이나 남아있었으니까. 뭐, 재수 없기는 해도 거악들의 존재도 무시할 수 없겠지.

그 가운데 셰그윈의 역할은 딱 정찰병 수준이었다.

악크샨 혹은 은발의 악마 사냥꾼.

그들의 존재를 다시금 드러나게 할 미끼라는 것이다.

왜, 악마라면 사리분별을 못 하고 달려드는 악크샨이 아니던가?

대놓고 던진 미끼를 그들이 물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선 제로 산맥도 나쁘지 않겠군요, 셰그윈."

*

목요일.

정기 업데이트.

AAU엔 간만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제발 좀 적당한 걸로 떠라."

성현준은 경건하게 두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우리 총책임자 님, 휴가 좀 제대로 즐기시게!"

"아주 그냥 요샌 나보다 더해?"

"선배도 빨리 기도해요. 간절히 바라면 이뤄진다."

"얼씨구."

"그저 호멘...."

딸깍─

윤수겸은 피식 웃고는 새로고침을 연타했다.

그러다가 중얼거리는 성현준에게 말을 건넸다.

"적어도 악마에 관한 업데이트는 아닐 거야."

"그럴까요?"

"놈들도 악마 쟁탈전으로 큰 피해를 입었을 테니까. 무엇보다 완승이 있으면 완패도 있는 거 아니겠어? 적어도 쟁탈전처럼 대대적으로 설칠 수는 없겠지."

급이 다른 레벨을 자랑하는 악마족 몬스터만 아니라면, 굳이 호열이 나설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 말에 성현준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럼 제발 악마족 몬스터만 아니기를...!"

"근데 누구한테 하는 건데, 그 기도?"

"...하느님, 아니면 부처님이겠죠?"

"그런가? 근데, 따지고 보면 레이먼 션이 기도를 들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잠깐, 그럼 취소! 제가 미쳤다고 그딴 놈한테 기도를!!"

그러나 기도가 벌써 레이먼 션에게 닿은 걸까?

딸깍─

아르카나 공식 홈페이지가 새로고침된 순간.

정기 업데이트 내역이 떠올랐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AAU 대한민국 지부.

아니, 모든 지부에서 같은 단어가 튀어나왔다.

"제, 제로 산맥!!"

아르카나 대륙 전기의 상징.

그 제로 산맥이 신규 지역으로 추가된다고?

성현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서, 선배. 이거 잘된 거 아니에요? 제로 산맥이 지역으로 추가되는 거면 플레이어들이 적어도 사냥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잖아요!"

광활한 제로 산맥엔 저레벨부터 고레벨.

모든 플레이어를 위한 콘텐츠가 존재했다.

특히나 십만(十萬) 동굴에는 상당한 아이템들이 잠들어 있었다.

"...그래서 문제야."

"네? 뭐가 문제라고요?"

문제라니.

예상치 못한 답에 성현준이 어리둥절해하기도 잠깐.

윤수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커도 너무 커서 문제라고 이건!"

타다닥!

그와 동시에 들려오는 다급한 발소리.

지부장, 박민재였다.

박민재가 다짜고짜 소리쳤다.

"다들 계산 시작해!"

"계산이라뇨, 갑자기 무슨 말씀을...?"

"뭐야, 성현준이 아직도 상황파악 안 됐어?"

윤수겸이 박민재를 대신해 입을 열었다.

"현준아, 제로 산맥 크기 기억하니?"

"물론이죠. 꼭대기에 드래곤이 살 정도로 거대...?!"

...잠깐만.

그런 제로 산맥이 현실에 나타난다면.

그 후폭풍 어떻게 되는 거지?

지구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던 지각 변동일 터.

만약, 특정 국가에 제로 산맥이 솟아난다면.

그 국가는 지도상에서 영영 사라질지도 모른다.

설령 바다에서 솟아난다고 하더라도....

윤수겸이 말했다.

"맞아, 차원이 다른 자연재해가 뒤따를 거야."

"...!!!"

대체 어떻게 대비해야 한단 말인가?

이건 균열과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지구 멸망급의 자연재해를 막아내야 한다니.

누군가 중얼거렸다.

"진짜로 마법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

...잠깐, 마법이라고?

그 말에 모두가 떠올리고 말았다.

대재앙의 자연재해를 막아낼 수 있는 존재들을.

.

.

.

"말씀하셨지요. 모든 것엔 주고받음이 있다고."

마르셀로가 깃털펜을 집어 들었다.

스스슥─

양피지에 정갈하게 적어나갔다.

"그 말씀을 실천하겠습니다. 경."

──────

이 시간부로 출탑을 전면 허가하겠습니다.

──────

목적은 구원에 대한 구원.

──────

마탑 전원 집결.

──────

이호열 수석 대행, 마르셀로 시무아르드.

──────

◈ 189화. 확실하게 주고받았군

제로 산맥의 등장.

인류가 쌓아온 모든 것을 제로(Zero)로 되돌릴 만큼 파멸적인 피해가 예상됐다. 전 세계의 석학들이 제로 산맥의 설정을 두고 머리를 맞댔다.

"꼭대기에 용이 산다고요?"

"...이런 말도 안 되는 게 지구에 솟아나요?!"

"코스모는 뭐 이런 비현실적인 산을 만들었답니까!"

"당장 바다에서부터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산맥이 높게 솟아오르면서 해수면에는 엄청난 파장이 일어나리라.

그 탓에 발생할 지진과 쓰나미의 파괴력은?

이건 특정 몇몇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쓰나미 앞에 방파제 역할을 해줄 나라는 없을 겁니다. 말 그대로 모든 나라가, 모든 문명이 바다에 뒤덮일 겁니다!"

절망적인 소식은 세계 각국 지도자들에게도 전해졌다.

"...피해를 최소화할 방법은?"

물음에 대답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그럴 수밖에.

대격변 이전에도.

이후에도 인류의 과학은 무서운 속도로 발전해 왔다.

그러나 그 방향성은 어디까지나 파괴하는 방향에 그치지 않았던가?

그것이 대답이 없다고 닦달할 수 없는 이유였다.

그랬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인류는 간과하고 있었다.

과학과는 전혀 다른 개념.

다른 세계의 [마법]이 현실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

.

.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마탑.

세계에 마탑에 관한 소식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마탑의 로비.

윤종진은 어딘가로 다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그 수신인은 당연하게도 PD 현용석이었다.

"...선배, 제가 반드시 만회할 거라고 했죠?"

-바빠 뒈지겠는데,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아니, 호열 씨 꽃밭 사건 말이에요!!"

투데이 아르카나.

메인 카메라 감독의 촉.

그게 똥촉이라는 건 호열의 화원을 취재하면서 모두에게 탄로 났다. 화원을 가꾸는 호열의 모습이 시청자들에게 많은 화제가 됐건만.

정작 가능성을 알아본 건 동행했던 김 작가였으니까.

그 실수를 만회하겠노라.

달랑 카메라 하나를 챙겨 들고.

마탑 로비에 잠복하듯 대기하던 윤종진.

"며칠 동안 죽치고 있었던 보람이 있었어요."

그가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

-화면 전송할 테니까. 알아서 편집해서 써봐요.

뚜뚜─

윤종진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현용석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지 않아도 방송국은 마비 상태였다.

"제로 산맥에 잠깐이나마 설렜던 내가 병신이다."

아무리 직업병이 무섭다고 하더라도.

지구의 멸망보다 방송 소재가 끊이지 않겠다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었다니.

물론, 걱정한다고 한들.

한낱 방송국 PD가 자연재해 앞에서 할 수 있는 일 따윈 없겠지.

그나저나 이놈의 직업병이 또 도졌다.

"...뭣 때문에 호들갑을 떨었는지나 볼까?"

딸깍─

클릭과 동시에 완료.

이내, 실시간으로 떠오르는 윤종진의 앵글.

그걸 확인한 현용석의 동공이 휘둥그레졌다.

"뭐, 뭐야."

기이한 마탑의 계단에서.

기이할 정도로 많은 마법사가 내려오고 있었다.

과거와 다르게 외부 활동을 시작한 마탑이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건 한정적인 수준에 불과했다.

외부에 모습을 드러낸 이들은 마르셀로를 비롯한 몇몇에 불과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를 필두로.

스무 명의 선임 마법사, 전원이 그 뒤를 따랐다.

그 뒤로도 수백의 숙련, 견습 마법사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 일이었거늘.

이내, 윤종진의 앵글이 누군가를 클로즈업했다.

중년보다 노년에 가까운 온화한 인상의 여인.

유달리 장식과 문양이 화려한 로브.

그녀의 복장만 봐도 지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현용석이 중얼거렸다.

"...설마 원로 마법사인가?"

반신(半神)이라 불린다는 그 원로 마법사?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탑주를 제외한 마탑의 마법사 전원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 이건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에도 듣도 보도 못한 광경이었다...!

"대체 무슨 이유로...?"

불현듯 떠오르는 가능성.

그랬다.

이 순간 저들이 움직일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제로 산맥...!"

현용석은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천하의 마탑이 단지 그 이유 하나 때문에?'

투데이 아르카나 PD.

현용석은 직책에 걸맞은 아르카나 지식을 겸비했다.

아르카나에서 마법사들이 어떤 족속인지도 잘 알고 있단 말이다.

'마법사들은 오만하다.'

솔직하게 오만에 빠질만하다.

레벨에 걸맞은 장비가 필수인 다른 클래스와 다르게 마법사들에겐 육체를 흐르는 [마력]이 곧 무기이자 방어구였으니까.

'마탑은 그런 마법사 중에서도 정점....'

더군다나 고인 물은 썩는 법이지.

그동안 외부와 교류하지 않은 마탑이기에.

지금의 행동은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현용석은 빠르게 판단했다.

"뭐가 됐든, 특종은 특종이네."

망설이지 않고 투데이 아르카나 특별 방송 준비에 돌입했다.

그런 현용석의 판단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채널 VBC.

특집 투데이 아르카나.

화면 속에서 마르셀로가 입을 열었다.

-구원을 받았으니, 구원을 드리겠습니다.

...천하의 마탑이 구원을 받았다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수십 억 인구 중에서.

그 말뜻을 바로 알아차린 이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단 한 명, 호열이 화면을 응시했다.

.

.

.

내가, 그랑펠이 입에 달고 살다시피 했던 말.

"모든 일에는 주고받음이 있다."

마르셀로.

그 뒤끝 가득한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었구나!

그렇지 않아도 마탑에 복귀해야 하나 싶었던 참이었다. 왜, 업데이트 내역이 떠오르자마자 난리도 여간 난리가 아니었으니까.

'갑자기 제로 산맥이라니.'

등장의 여파로 초대형 자연재해가 뒤따를 거라고.

몬스터가 아니라 자연재해에 인류가 멸망하게 생겼다고.

뉴스의 전문가들이 워낙 심각하게 말씀들을 하셨으니까.

그런데, 내가 텔레파시를 보낸 것도 아닌데.

마르셀로가 먼저 움직일 줄이야.

솔직히 말해서 나, 마탑에게 조금 감동했다....

"절차는 지켜야 하는 것."

...감동하는 와중에도 뻔뻔하구나, 그랑펠.

휴직계를 제출했으니 알아서들 처리하는 게 기본이라는 거겠지.

그러나 발언과는 다르게.

나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었으니.

낙하산이라고 하더라도 나도 마탑의 일원이었으니까.

나는 창밖의 영약 밭을 바라봤다.

"과도한 수분은 오히려 뿌리를 썩게 하더군."

...초대형 쓰나미를 물뿌리개에 담긴 물에 비유하지 마라, 그랑펠.

어쨌거나, 이런 자연재해 앞에서 가만히 손을 놓고 있을 순 없다는 것이다.

"또한 시련 뒤엔 보상이 따르는 법이지."

게다가 다른 지역도 아니고, 무려 [제로 산맥]이었다.

꼭대기에 드래곤이 산다는.

사실상 아르카나 대륙 전기 최후반까지.

활동 무대가 될 수 있는 지역이라는 말이다.

500레벨 대에 진입한 뒤.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축적된 경험치를 날로 먹고....

아니, 습득하고 상승한 레벨은 95레벨이었다.

'덕분에 늘어난 경험치 요구량을 체감하진 못했지만.'

당연하게도 균열만 클리어해서는 그 정도의 레벨을 올리는 건 불가능했다.

클리어하면 사라지는 균열이 아닌 몬스터가 끊이지 않는 사냥터라면 모를까.

'확실히 경험치 걱정을 덜 수 있을지도 몰라.'

지나치게 요란한 업데이트만 무사히 넘긴다면 말이지.

그런 내게 지구 멸망급의 자연재해를 막아낼 자신이 있느냐고 물어본다면, 당연하게도 자신 있다고 대답해 주리라.

예전처럼 마탑 뒤에서 호가호위하던 이호열은 더 이상 없다.

왜냐고?

중간과정을 뛰어넘었든 어쨌든.

나는 심장에 서클을 품고 있었으니까.

[현재 도달한 성취 : 서클 (모든 마법 발현력 1,000% 상승)]

속성에 친화력이 있다면, 마법에는 발현력이 있다.

나는 그런 서클의 위력을 확인할 생각이었다.

머뭇거릴 새는 없었다.

마력을 끌어올리자 확실히 평소와 느낌이 달랐다.

고오오─

...이게 서클의 위력인가?

곧장 허공에 발현된 고위 마법, 포탈.

마르셀로조차 간섭 과정에 공을 들여야 하는 포탈이었거늘.

즉시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신속하게 발현하게 될 줄이야.

스스로도 놀랄만할 성장이었거늘.

항상.

나는, 그랑펠은 언제나처럼 동요하지 않았으니.

"자연의 섭리와 맞서는 것은 처음이군."

그저 읊조리며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섭리를 거스르기 위해 힘 조절은 하지 않겠다."

정말로.

"오너라, 자연이여."

여러 의미로 심각하게...!

*

제로 산맥의 위치가 특정됐다.

태평양.

인류는 고민에 빠졌다.

"백 전문가님, 이걸 기뻐해야 하는 걸까요?"

"그래도 최악은 피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의견은 조금 다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황 전문가님?"

"피해가 없이 넘어가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차라리 대륙 어딘가에 생성됐다면 그 일대는 초토화가 됐을지라도, 인류는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건...!"

"어허, 대를 위해 소가 희생해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누군가에겐 냉정한 말일 수도 있었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다들 아시지 않습니까? 이건 나눈다고 나눠서 질 수 있는 피해가 아니라는 걸요!"

그러나 이제 와서 열을 내봤자 바뀌는 건 없었다.

제로 산맥이 태평양 한가운데에 생성된다.

전인류가 그 생성의 후폭풍을 그대로 감당할 상황에 직면했다. 재난영화에서나 봤던 수백 미터짜리 쓰나미의 위협이 현실로 다가온다.

전부가 예정된 사실이 됐으니까.

그때였다.

"마,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속보입니다...!!"

"...?"

스튜디오에 새로운 소식이 전해진 건.

앵커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마탑의 마법사 전원이 외부 활동을 시작했다는 소식입니다. AAU 측에 따르면 대격변 이전에도 전례가 없던 일이라고 하는데요, 자세한 소식은 현장에 나와 있는...!!"

마탑이 움직이기 시작했단다.

수석, 선임, 숙련, 견습, 그리고 원로 마법사까지.

마탑의 전력(全力)이 포탈 너머로 걸음을 옮겼단다.

단, 한 마디 말만을 남기고서는.

-구원을 받았으니, 구원을 드리겠습니다.

그런 마탑의 마법사들이 포착된 건.

제로 산맥을 촬영하기 위해 비행하던 헬리콥터.

카메라의 앵글 속에서였다.

콰드드득─!

굉음과 함께 솟구치는 제로 산맥.

그 크기와 생성 속도는 실시간으로 새로운 대륙이 생성된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와 동시에 출렁이는 파도 또한 재난 영화에서 CG로만 봤던 그것이었다.

스오오오─!

그러나 카메라가 향한 곳은 제로 산맥이 아니었다.

하늘을 부유 중인 마탑의 마법사들 방향이었다.

화염마법학 선임, 벤쉬는 어깨를 으쓱였다.

"과학이란 건 비효율적이네요. 그렇지 않습니까, 뱅그릿 선임?"

투두두두─

하늘을 날기 위해서는.

저 요란한 소리를 내는 기계 장치에 탑승해야만 한다니.

순수마법학 선임, 뱅그릿은 멋쩍게 대답했다.

"다 장단이 있는 거겠죠."

"장단이 있다니. 뱅그릿 선임, 지금 마법을 뭐로 보는 겁니까? 세상에 마법처럼 위대한 건 없습니다. 자, 지금처럼. 저 거친 파도도 이렇게 잔잔하게 잠재울 수 있지 않습니까?"

"그게.... 제 생각이 아니라 이호열 수석님께서 하신 말씀이신데요? 모든 것엔 장단점이 있다. [『기이』]에 대한 탐구는 바로 그 인정에서 시작하셨다고."

"...헉."

언제 나 모르게 그런 소리를 하셨단 말인가?

설마, 원탁 회의에서 마티스 선임에게 잔소리를 듣고.

웅크리고 있다가 잠깐 졸고 말았을 때 그때인가?!

당황한 벤쉬에게 뱅그릿이 되물었다.

"설마, 이 수석님 말씀에 동의하시지 않는다는...?"

"아, 아뇨! 그럴 리가 있습니까?"

고오오오─

벤쉬는 다급하게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게 이 발현에 집중하느라 잠깐 말이 헛나왔을 뿐입니다. 제가 또 태우는 마법이 아니면 서투르지 않습니까? 하하.... 제 마음 아시죠, 뱅그릿 선임?"

태평양을 즈려밟는 마법.

바다를 잠잠하게 하는 데엔 복잡한 간섭 과정은 필요치 않았다.

한 명, 한 명이 선택받은 이라 불리는 마탑의 마법사들.

그들의 방대한 마력이 파도를 가뿐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보, 보고도 믿기 힘든 광경입니다!"

실시간으로 세계에 퍼져 나가는 광경.

거짓말처럼.

아니, 『마법』처럼.

인류를 멸망으로 끌고 갈 뻔한 파도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원로 마법사, 유그위드는 웃음을 흘렸다.

"이런 협력은 또 새롭네요, 마르셀로."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에 섭섭해지는 것 또한 새롭네요."

"아...."

"농입니다. 농."

유그위드는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제로 산맥을 바라봤다.

과연, 마탑 전원을 움직이게 할만한 거산(巨山)이었다.

왜, 그 최정상 둥지에는....

"슬슬 오래된 악연의 냄새가 풍기는군요."

용마대전의 승자, 드래곤이 웅크리고 있었으니까.

마탑 전원이 움직인 건 바로 그들 때문이었다.

소란에 혹시라도 둥지에 잠든 드래곤.

그들 중 하나라도 잠에서 깨어나기라도 한다면....

"진짜 재앙이 찾아올 테니까요."

그런 불상사에 대처하기 위한 전원 출탑이었다.

그렇기에 제로 산맥을 유심히 주시하던 유그위드는 이내.

심상치 않은 낌새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르셀로 수석."

용마대전의 패배자, 마탑.

그런 마탑이 얻었던 교훈.

어느 누구도 드래곤의 잠을 깨워선 안 된다.

교훈을 잊지 않기 위해서.

최정상 언저리에 발현해 뒀던 마법진들.

그 마법진 중 하나가 파괴된 상태였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아무래도 변수가 생긴 것 같군요."

누구의 짓인지, 당장은 알아낼 수 없겠지.

보는 것만으로도 광활한 제로 산맥이거늘.

그 안에는 십만 동굴이라는 더욱더 깊은 심연이 존재했으니까.

그러니까 우선시해야 할 목적은 역시나.

"마법진을 복구하는 데 집중하겠습니다."

파괴된 마법진의 복구였다.

이론마법학의 창시자, 마르셀로.

그의 능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유그위드였지만.

쉽지 않으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용마대전은 아득히 먼 과거의 일이 아니던가?

고대 마법진의 구조를 파악한다고 하더라도 탐색, 간섭하여 발현까지 해내는 것은 다른 문제였으니까. 유그위드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 날개 달린 도마뱀들 인내심이 썩 좋진 않을 텐데."

그러나 유그위드 또한 간과하고 있었다.

드래곤만큼이나 인내심이 없는.

그런 자는 마탑에도 존재했으니까.

문득,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고생이 많군."

"...!!!"

"나 또한 이 시간부로 수석의 업무로 복귀하겠다."

흩날리는 은발.

한결같은 차림새.

한결같은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마법진의 복구부터는 내가 맡도록 하지."

그리고.

"...이, 이호열 수석?!"

한결같이 해내고야 말았다.

.

.

.

고대의 마법진인 게 무슨 상관이냐.

『반전 마법』.

한 방이면 원상복구란 말이다.

◈ 190화. 끝맺음이 중요한 법이지

무지막지하게 거대하시다, 제로 산맥.

이렇게 높은 곳에서 내려다봐도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의 크기라니.

그런 의미에서는 역시 마탑이다.

'잔잔하다, 잔잔해.'

마력 소모량은 간섭 과정에 얼마나 복잡한 과정이 더해지느냐에 달려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심미]에 괜히 호들갑을 떨었던 게 아니란 거지.'

만약 [심미]를 발동하지 않고, 그와 비슷한 효과를 내기 위한 간섭을 더한다면?

발현에 소모되는 마력은 적게는 몇 배, 많게는 몇십 배까지 늘어날 테니까.

바다를 잔잔하게 하는 데에 복잡한 간섭 과정은 필요하지 않았으니.

타고나길 천재로 태어난 마탑 마법사들의 마력이 더없이 효율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말이었다.

'이거, 내가 올 필요까지도 없었던 거 같은데.'

그러나 모든 일엔 절차가 있는 법.

얼굴을 비춘 이상, 안부라도 나눠야겠지.

나는 하늘을 걸어 유그위드와 마르셀로에게 접근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허공을 걷는데.

또각─

소리가 날 리가 있나.

내가 입을 열고 나서야 두 사람은 나를 알아차렸다.

"경?"

...왜 거기서 나와?

마르셀로, 얼굴이 딱 그렇게 말하는 표정이다.

일단, 따뜻한 말부터 건네자고.

"다들 고생이 많군."

평소 입방정치고는 따뜻한 인사를 건네기도 잠깐.

마르셀로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경께서는 휴직 기간이시지 않습니까? 그동안 무리하셨던 만큼, 이번에는 경께서 나서실 필요가 없도록 처리하려고 했는데...."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 마르셀로.

그냥 내 팔자가 이렇게 생긴 걸 어쩌겠어?

그리고 내심 수석의 무게가 조금 그리웠거든.

옛말이 틀린 게 없더라고.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더니.

'악크샨보다는 마탑이 낫다.'

마지막엔 진짜 한계를 초월한 체력 단련이다, 뭐다.

진짜로 긍지에 가라앉을 뻔했으니까.

벤쉬의 출탑 신청서에 불합격을 휘갈기던 때가 아른거릴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 뭐.

그러니까.

"우려할 것 없네, 마르셀로."

제로 산맥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나 또한 이 시간부로 수석의 업무로 복귀하겠다."

마탑에 복귀했을 거란 뜻이었다.

그나저나 원로 마법사, 유그위드의 표정이 심각했다.

대충 이야기를 듣자하니, 심각한 표정을 지을만한 상황이었다.

"용마대전 시대의 마법진인가."

드래곤과 마탑의 전쟁.

어쩌다 싸우게 됐는지 나로서는 그 이유를 알 순 없다만.

마탑은 그 패배에서 쫄아도 제대로 쫀 게 확실했다.

'천하의 마탑이 마법진까지 남긴 걸 보면 말이야.'

단지 드래곤의 단잠을 깨우지 않기 위한 마법진이라니.

그 당시 마탑 체면이 말이 아니었을 것 같군.

하지만 그런 굴욕을 감수하더라도.

드래곤은 건드려선 안 될 존재라고 판단한 거겠지.

'근데 그걸 대체 누가 건드린 거래?!'

나.

사실 속으로는 이미 식은땀을 한 바가지 흘렸다.

제로 산맥이 현실에 업데이트된 이상.

드래곤은 더는 남 이야기가 아니었으니까.

막말로 텟퍼른의 [깨워선 안 될 존재]처럼 깨어나기라도 해봐라.

'상상하기도 싫다, 진짜.'

그런 의미에서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제로 산맥이 만들어 낸 지진과 쓰나미야, 마탑의 마법사들이 충분히 잠재우고 있었으니까.

내가 할 일은 그보다 더한 재앙, 드래곤이 잠에서 깨어나지 않도록.

저 고대의 마법진을 복구하는 것이다.

"마법진의 복구부터는 내가 맡도록 하지."

설령 고대의 마법진이라고 한들.

그랑펠의 천부적인 재능.

거기에다가 『반전 마법』이라는 꼼수.

발현력까지 증폭시켜 줄 서클의 경지에 도달한 지금.

내게 머뭇거릴 이유는 없었다.

"따라서 발현하는 것이 아니네."

"...?"

"그저 되돌리기만 하면 되는 일이니까."

"...!!"

"마치 긍지를 되살리듯."

...부디 반전 마법을 휘황찬란하게 포장하지 마라, 그랑펠.

유그위드와 마르셀로가 오글거려서 움찔거린 게 아니기를.

바라던 와중에 마법진이 원래의 형태로 돌아왔다.

스스스─

그러더니 드러났던 제로 산맥 최정상에 다시금 짙은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드래곤들이 잠들었다는 둥지를 감추려는 듯이.

콰드드득─

그 와중에도 제로 산맥은 빠른 속도로 업데이트되고 있었다.

그랑펠 사전에 무언가를 우러러보는 일은 없었으니.

나는 산맥이 눈높이보다 높이 솟아오른 순간부터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유그위드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근데, 어째 신이 난 얼굴이시다.

"일주일. 아니지, 며칠이나 됐나요? 그 짧은 휴식기 동안 서클을 자유자재로 다룰 정도로 익숙해지다니요! 심장에서 울리는 마력의 박동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청명하군요!"

마력의 박동이라면....

그 츠릉─ 거리던 심장 소리를 말하는 건가?

지금은 영약 덕분에 서클도, 박동도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그땐 [초월자]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었으니까. 서클의 효과 또한 봉인된 상태였다.

"탑주님께서도 서클을 온전히 다루기 위해 숱한 위기를 겪으셨다고 들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 수석은 정말 대단하시네요!"

그저 효과가 봉인되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뿐이거늘.

나는, 그랑펠은 침묵했다.

사실 뭐, 틀린 말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위기를 겪기는 했으니까.

그놈의 티티임을 고집하다가.

얼어 죽을 뻔했다가, 기절했다가, 하여튼....

'...지난 일이니까 말이라도 나오지.'

천하의 그랑펠이 찻잔을 놓쳐 깨버릴 정도였으니.

탑주가 겪었다는 숱한 위기를.

나는 단기간에, 한꺼번에 겪었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고개를 끄덕이려던 찰나에 기척이 느껴졌다.

"흡!"

벤쉬 윌리엄.

그가 나를 보더니 서둘러 입을 막았다.

곁에 있는 뱅그릿의 멋쩍은 표정을 보아하니, 내 이야기를 하고 있던 게 분명하군. 형편없는 출탑 신청서조차 그리웠다고, 한마디를 건네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는 없었다.

슥─

마티스가 나를 보고 가볍게 묵례했으니까.

벨리에도 가볍게 손을 흔들었고, 페이얀은 무언가를 우물거리다가 다급하게 씹어 삼키곤 고개를 숙였다. 보자, 키코 선임의 다크써클도 여전한 게 다들 그대로구나.

마탑 전원 출탑.

타인의 시선에서 봤을 때야.

이 순간만큼 위엄 넘치는 모습이 또 없겠지.

하지만 내게는 언제나와 같은 풍경이었다.

새삼스럽게 나, 이호열.

참 많이 컸다는 생각이 든다.

그와 동시에 책임감이 느껴졌다.

제로 산맥이 현실에 모습을 드러낸 지금.

내게는 외면할 수 없는 퀘스트가 하나 있었으니까.

[월드 퀘스트 : 악룡(惡龍) 사냥꾼]

사악한 용의 일족을 사냥한 자여.

산맥의 전설이 그대를 부르고 있다.

─제로 산맥 최정상에 도달하라. (진행 중)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제로 산맥.

그 높이는 하늘의 태양을 가릴 정도.

떠오르는 메시지는 누구라도 섬칫하게 할 정도였다.

[제로 산맥]

[적정 레벨 : 누구에게도 권장되지 않음]

[붕괴도 : 100%]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적정 레벨에 적힌 문구만큼은 똑같군.

그렇다.

나는 누구에게도 권장되지 않는, 제로 산맥 최정상에 도달해야 했다.

월드 퀘스트를 떠나서. 최정상에 도달할 정도의 능력을 갖춰야만 그랑펠의 무거운 긍지에 가라앉지 않을 테니까.

나는 산맥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산맥과 긍지. 비로소 무엇이 더 드높은지 겨룰 수 있겠군."

...제발, 누구도 듣지 못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

마탑이 나설 때만 하더라도 세상은 반신반의했다.

-아무리 마탑이라고 해도 가능함?

-일단 닥치고 지켜보자

-아니;;; 행복회로만 돌릴 순 없자너

-왤케 부정적이냐?? 악마임??

-ㄹㅇ긍지 없는 놈

누구의 말대로.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클 수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마음가짐이 무색하게도.

마탑은 보란 듯이 대재앙을 진압했다.

아니, 진압이라 하기도 뭐했다.

-아니, 잔물결 하나 안 보이는데?!

-이과 나와보셈 저게 물리적으로 가능한 거임???

-ㅁㅊ놈아 마법인데 이과가 불러서 뭐하게

-그럼 플레이어, 마법사라도 나와봐!!

과연, 아르카나 대륙 최강의 무력 집단이라는 것인가?

잔잔해진 바다를 당연하다는 듯 내려다볼 뿐.

카메라에 비친 그들의 얼굴에선 긴장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총출동이라는데 플레이어들은 안 보이네?

-저기 껴서 마법 발현할 수 있는 플레이어는 아직 없지

-ㄹㅇ 마법 개념만 이해한 상태일 걸 다들

-아니, 잠깐만 있는 것 같은데?!!

그 가운데 유일한 플레이어.

호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선임 마법사 중 몇몇의 표정이 급격하게 변했다.

그중에서도 벤쉬 윌리엄, 그는 경악에 가까운 표정을 지었다.

-선임들 표정 보니까 마탑도 예상하지 못한 것 같은디?

-설마 휴가가 남았는데 출근한 거임???

-아니, 휴가 중에 출근이라고??

-ㅁㅊ 그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잖아!!

-인류를 위해서 휴가 반납을... 그저 호멘

그러나 무엇보다 주목을 받은 건 호열과 마르셀로.

그리고 원로 마법사로 추정되는 이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었다.

스튜디오의 전문가들은 그 장면을 뜯어보듯 분석하기도 했다.

일시정지─

"자, 여기 보시면 이호열 플레이어가 마법을 발현한단 말입니다? 제로 산맥 정상을 향해서요. 어떤 마법을 발현했는지 알 순 없지만...."

그러나 마법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고대의 마법진과 반전 마법을 알아볼 수가 있으랴.

그럼에도 추측은 가능했다.

"두 사람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표정이요?"

"확대해 보면 아시겠지만, 둘 다 굉장히 놀란 표정들 아닙니까? 이호열 플레이어가 발현한 마법의 수준이 굉장히 수준 높은 마법일 것이다. 저는 그렇게 예상합니다."

그 대단한 마탑의 원로, 수석이 놀랄 정도의 마법이라고?

먹음직스런 떡밥을 넷튜버들이 놓칠 리 없었다.

[이호열, 제로 산맥에 발현한 마법의 정체는?!]

[마법 발현 이후, 최정상의 안개가 짙어졌다!!]

[뭐, 제로 산맥 꼭대기에 드래곤이 산다고?!]

꼬리에 꼬리를 물던 추측.

모든 정보를 종합해 보자면 이러했다.

"...정리하자면, 호열 님께서 현실에 풀려나면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르는 드래곤을 제로 산맥 최정상에 봉인하신 게 분명해 보입니다!"

이호열.

그가 제로 산맥 최정상에 드래곤들을 봉인했다고.

플레이어들은 또 한 번 경악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드래곤의 위엄은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자자했었으니까.

"사실상 최종 보스잖아, 드래곤이면?"

"그런 드래곤을 봉인할 정도로 강하단 말이야?"

"그, 그렇겠지? 반신이라는 원로 마법사가 저렇게 놀라는 표정을 짓는 걸 보면.... 마냥 뇌피셜이 아니라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 같은데?"

유스라 왕국.

황금 송아지 주점에서 오가는 대화.

락키드가 웬일로 주정 없이 술만 들이켰다.

"이번 건 시원하게 인정하지, 총대장 씨."

꿀꺽─

드래곤을 봉인하다니.

젠장, 나는 절대 못 해낼 일을 해내셨군.

자고로 발 없는 말은 진짜 말보다도 빠른 법.

황금 궁전의 화원.

"감히 나의 관심과 보살핌을 받고도 이 정도밖에 자라지 못한단 말이냐? 뿌리부터 뽑히기 싫다면 더욱더 크고 화려하게 자라도록 하거라."

쫑긋─

비약초를 향해 협박을 쏟아내던 엘시도어의 커다란 귀에도.

호열의 소문이 들려왔다.

이호열, 그 건방진 인간 놈이 드래곤을 봉인했다고?

엘시도어는 코웃음을 쳤다.

"흥, 웃기지도 않는군."

그건 다른 의미의 코웃음이었다.

"어머니의 축복을 독식했으니 당연한 일이지."

엘프.

드래곤과 동격이라 봐도 무방하며 그들을 도마뱀이라 부를 자격이 있는 유일한 존재.

엘프, 엘시도어의 입장에서는 고작 이런 일로 호들갑을 떠는 인간들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녀석은 애초에 이 몸조차 굴복시켰다."

제로 산맥에 드래곤을 봉인하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은 일이겠지. 만약, 봉인하지 못했다면 오히려 내가 녀석을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이 몸께서 한낱 도마뱀보다 못하단 말이 되니까."

커뮤니티를 달구는 뜨거운 반응.

창밖에서 들려오는 엘시도어의 혼잣말까지.

호열은 그 모든 걸.

유스라 왕국의 집무실에 앉아서 감상하고 있었다.

달칵─

언제나처럼 느긋하게 찻잔을 기울이며.

.

.

.

도대체, 나는 언제쯤 과대평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그냥 용마대전부터 전해 내려온 마법진을 반전 마법으로 복구한 것뿐인데. 마치 전설 속 드래곤을 봉인한 용사가 된 것 같은 취급이다...!

"칭송이 지나치군."

말은 그렇게 하면서 너, 어깨에 힘은 왜 주는 건데?

어쨌거나, 진짜 휴가 마지막 날까지 다이나믹하구나.

사실 그랑펠의 긍지께서는.

당장에라도 마탑에 복귀하려고 했거늘.

마르셀로의 만류가 있었다.

-"부디 오늘만큼은. 저희 마탑과 아르카나 대륙이 경과 모험가들에게 받은 구원을. 돌려드릴 수 있도록 양보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그랑펠도 고집을 부릴 순 없었다.

물론, 쉬는 게 쉬는 게 아니었다.

온 세상이 나에 대한 과대평가를 늘어놓는데.

어떻게 마음이 편할 수 있겠냐고!!

게다가 나는 알고 있었으니까.

그 어떤 과대평가라고 해도.

그랑펠은 그걸 기어코 현실로 만들고 말리라는 것을.

'...내일부터는 고생길이 시작되겠구나.'

달칵─

그래서일까.

티타임을 소중하게 여기는.

그랑펠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과연, 흠잡을 곳 없는 맛과 향기다."

물론, 티백 녹차를 향한 극찬에는.

여전히 공감할 수 없지만.

그래도 마지막 여유를 즐기자.

위이잉─

위잉─

윙─

"?"

다짐하는 와중에 스마트폰이 연달아 진동했다.

도착한 건 메시지.

그 내용을 확인한 나는 곧, 생각을 고쳐먹고 말았다.

아무래도 그 고생길이 지금부터 시작된 것 같다고.

-야

-야야

-야야야

-이호열

-너는 어떻게 된 애가 휴가라면서

-엄마 아빠 누나

-아니지

-누ㅋ이ㅋ들한테 얼굴 한 번을 안 비추냐???

...부디 진정해라, 나의 웬수여!

◈ 191화. 선물 (1)

침대에 누울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예림의 입가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았었다.

하나뿐인 동생.

호열이를 놀려먹을 생각에 싱글벙글했으니까.

"이호열, 너는 진짜 제대로 걸렸어."

매일매일 장문의 안부 편지를 보내는 건 잘하는 짓이라고 치자. 평소엔 바쁘니까 그렇다 해도 휴가를 냈으면, 본가에 얼굴 한번 비치는 게 자식된 도리 아니냐?

"짜식이 안 그래도 걱정하시는데."

물론, 엄마 아빠는 그런 소리를 하면.

-"저 가시나 또또 동생 괴롭히려고."

-"예림아, 누가 들으면 효녀 난 줄 알겠다."

-"우리 셋째 딸. 따님이나 엄마한테 잘하세요."

어째선지, 화살을 나한테 돌렸지만.

그래도 이예림은 할 말이 있었다.

키득키득, 웃으면서 내뱉는 말.

"격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군, 내 동생."

집 밖에서 호열이의 위치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인류의 영웅이다, 평화의 상징이다, 뭐다.

TV에서 워낙 떠들어 댔어야 말이지.

그러나 언니들과도 말했다시피.

집에서 호열이는 여전히 동생이었다.

클 호에 기쁠 열.

그 이름의 뜻대로.

존재 자체만으로도 기쁨이 되는 우리 막내.

이예림의 입꼬리가 더욱더 위로 올라갔다.

"...이 누나는 상상만 해도 즐겁구나."

간만에 괴롭힐....

아니, 얼굴을 마주할 생각을 하니까.

왜, 호열이가 철이 들고 나서부터는 느낄 수 없던 즐거움이라고 해야 할까? 최근 호열이를 보다 보면 문득, 옛 생각이 나곤 했으니까.

이예림이 미간을 찌푸리며 골똘히 생각했다.

"분명, 저런 말투를 들어본 적이 있는데...."

십 년도 훌쩍 지난 일이라 기억은 잘 나지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저런 호열이가 낯설지 않았다. 옛 기억을 되짚어 가던 이예림이 문득, 중얼거렸다.

"긴 이름이 같은 걸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뭔 로미오였던가?

그 이름이 하도 길고, 어려웠어야 말이지.

좋아, 그것도 내일 호열이가 오면 물어보자.

다음 날.

그런 이예림이 잠에선 깬 시각은 오전 여덟 시였다.

하지만 이예림은 거실로 나간 순간, 경악하고 말았다.

"...뭐, 뭐?!"

귀청 떨어지는 비명에 최 여사가 노하셨다.

"어휴, 시끄러워. 호열이 아까 왔다가 갔다고!"

"며, 몇 시에?!"

"새벽 다섯 시!"

"다, 다섯 시?! 미친 거 아니야 걔?"

와장창!

이예림의 원대한 계획이 무너진 순간이었다.

*

누나만 셋.

딸 부잣집 막내아들.

나, 이호열.

예전에도 말했지만, 누나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의 잔머리는 발전할 수밖에 없었으니. 나는 긍지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알찬 휴가를 마무리했다는 것이다.

왜, 내일 찾아뵙겠다고 했으니까.

새벽 다섯 시에 찾아가도 거짓말은 아니잖아?

또한 긍지 없게 웬수와의 조우를 피하려고 일찍 움직인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첫 세계수의 축복]의 효과 덕분에 잠자는 시간이 많이 줄어든 나였으니까.

항상.

언제나 새벽부터 발버둥 쳐온 나를.

이예림, 그 웬수가 잡을 수 있겠냐고.

-"얼굴이 반쪽이 됐네, 우리 아들."

어머니, 최강희 여사께서는 나를 보자마자 와락 껴안으셨다.

따로 내색은 하지 않으셨겠지만, 아들 걱정에 잠 못 이루셨다는 것쯤이야. 누나들한테 전해 들어서 알고 있다.

-"이제 좀 듬직하구나, 호열아."

아버지, 이준욱 사장님께선 내가 나온 신문이라면 전부 잘라서 스크랩해 두신다고 했나. 하여튼, 필사적으로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시는 게 아버지다웠다.

"조금 더 일찍 찾아뵈어야 했거늘."

매일 아침마다 편지를 써서 그런가.

얼굴을 맞댄 지 오래됐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게다가 무엇보다 본가엔 웬수가 있었으니까.

'내가 1, 2호까지는.'

큰누나나 둘째 누나를 누이라고 부르고 존댓말을 하는 건....

그래, 참을 수 있다.

하지만 이예림한테 존댓말이라니.

격식이고 뭐고,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선 잘 넘겼다, 호열아.'

평일에도 늦잠을 자는 그 생활 패턴.

예전부터 한결같구나, 나의 웬수여.

어쨌거나, 나는 곧장 마탑으로 향했다.

벌써 아침 일곱 시인가.

새벽 다섯 시에 본가를 찾았거늘.

밀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금방 시간이 흘러갔다.

그나저나, 부모님 앞에서 이런 말투로 말을 내뱉으려니.

진심으로 민망해서 죽을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말이야.

우리 이 사장님께서 참 좋은 말씀을 해주셨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말투도 진중해졌구나. 그래, 그런 위치에 있으면 그 정도 무게감은 가지고 있어야지."

아버지.

정말, 오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흑역사 때문이란 건 절대 들키고 싶지 않다.'

가족 앞에서 수치사만큼은 전적으로 피하고 싶단 말이다.

이내, 발현된 포탈으로 진입.

시야가 돌아오자 마탑의 집무실이 보였다.

슥─

나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훑었다.

그러고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먼지를 털어낼 필요는 없겠군."

하여튼 옷매무새부터 깔끔한 척은 다 떠는구나, 그랑펠.

최 여사님이 껴안았을 때도 옷이 잔뜩 구겨졌는데.

그땐 어떻게 가만히 있었나 싶을 정도다.

그것보다 도착하자마자 물은 왜 끓이는 건데?!

"식사를 거를 순 없는 법."

탁─

책상에 내려놓는 건 보자기에 쌓인 무언가.

"그중에서도 아침은 오후의 티타임과 견줄만하다."

그냥 배가 고팠다고 말하면 될 걸 꼭...!

어쨌든, 나는 보자기를 풀었다.

내가 보자기에 도시락을 싸올 리는 없었으니.

우리 최 여사님께서 아들을 위해 챙겨주신 아침이었다.

그나저나 보자기는 왜 또 그렇게 뚫어지라 보는데?

"규칙과 불규칙이 공존하는 비단이라. 훌륭하군."

흔한 조각보에 의미부여 하지 말아주라, 그랑펠.

내가 언제나처럼 태클을 걸기도 잠깐.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들겨 왔다.

사전에 약속되지 않는 만남은 가지지 않는 나다.

그러나 복귀 첫날에는 융통성을 발휘할 필요도 있겠지.

뭐, 벤쉬도 아닌 것 같으니까.

나는 입을 열었다.

"들어와도 좋네, 마르셀로."

"좋은 아침입니다, 경...."

마르셀로가 나를 바라보더니 멈칫했다.

"이런, 혹시 식사 중이셨습니까?"

"그렇다네."

"사전에 말씀을 드렸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나는 부재중이지 않았던가? 개의치 말도록."

"아뇨. 식사를 방해할 정도로 급한 일은 아닙니다."

시무아르드 가문, 시한부의 저주.

악마와의 계약에서 해방된 마르셀로.

덕분에 이전과는 다르게 연구에 집중할 체력이 생긴 모양이었다.

양손에 수북하게 가져온 서류를 보면 말이지.

'저건 분명 기이에 관한 자료들이겠지.'

돌아오자마자 업무 폭탄이라니!

잊고 있던 직장인 시절이 떠올랐건만.

긍지가 수석의 업무를 외면할 수 있을 리가 있나.

게다가 기이에 관한 연구라면 절대 간과할 수 없다.

'상위 마왕, 가미긴에게도 통했던 기이다.'

그때는 가미긴에 기이에 저항한 것에 놀랐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까.

기이가 가미긴에 통한 것에 놀라야 하는 게 맞았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우물들보다 더욱 깊게 파볼 가치가 있다는 거겠지, 기이는.

'그나저나....'

양손 가득 서류를 든 마르셀로가 위태로워 보인다.

아니, 시한부의 저주도 사라졌는데.

왜, 아직도 뼈밖에 없는 건데. 마르셀로.

밥은 먹고 다니는 건지 의심스럽다.

"식사는 들었는가."

"경황이 없어서 먹지 못했습니다."

그래?

또 우리 최 여사님 손맛 한번 보여줘야겠네.

나는 마르셀로에게 말했다.

"괜찮다면 함께 드는 게 어떤가."

"...네?"

"아침을 거르는 것은 좋지 않은 습관이라네."

마르셀로는 멈칫하며 책상에 놓인 반찬통을 바라봤다.

어째, 이게 뭔지 궁금해하는 눈치군.

아르카나에 이렇게 생긴 음식은 없을 테니까.

호기심을 가질 법도 하다.

설명이야 어렵지 않은 일이지.

"이것은 밭에서 나는 곡식, 육류, 채소를 한데 모아 조리한 음식으로 그 재료의 준비부터 상당한 정성이 요구되네. 또한 그 조리방식에 따라 맛 또한 현격하게 달라지니, 마법으로 비유하자면 간섭 과정에 무엇을 더하느냐에 따라 완벽히 다른 음식이 발현된다고...."

세상에.

'군만두, 찐만두 맛이 완전 다르긴 해도...!!'

만두 설명을 그렇게 거창하게 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 그랑펠!

하지만 최 여사님의 정성이 들어갔다는 건 틀린 말이 아니다.

그 맛 또한 사남매를 키워낸 맛이다.

그러니까 아무한테나 권하는 만두가 아니다, 마르셀로.

"...그런 귀한 음식을 제가 들어도 되겠습니까?"

"그대는 그럴 자격이 있네, 마르셀로."

"그럼, 염치를 무릅쓰고 동석하겠습니다."

"어떠한가?"

"오오...!"

"과연, 말이 필요치 않겠지."

"그보다 경...."

"?"

"저도 한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아니, 안 될 건 없는데.

하나에 300원짜리라서 뭐가 다른가.

왜, 마르셀로까지 티백 녹차를 찾는 거람?

*

아이언 캐슬 호.

대륙을 내려다보던 드워프들은 경악했다.

"세, 세상에!"

아르카나 대륙.

심지어는 자신들의 은신처에서도 존재감을 발하던 제로 산맥이 사라졌다. 그것도 하루아침 사이에. 지도자, 체인워커가 심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이자 모험가.

호열과의 교류.

덕분에 체인워커는 균열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균열은 아르카나 대륙과 모험가들의 세계를 잇는 통로.

그런 제로 산맥이 아르카나 대륙에서 사라졌다는 건....

"그렇다면, 경의 세계에 제로 산맥이 나타났다는 건가?"

체인워커의 말에 드워프들이 웅성거렸다.

"무사하겠지?"

"글쎄. 제로 산맥이 워낙 거대하지 않은가?"

"그런 게 난데없이 떨어진다면.... 마력사출포 수만 방을 갈긴 충격과 맞먹겠군."

복잡한 기계 장치들의 창조주, 드워프.

그래서일까.

제로 산맥이 난데없이 등장했을 때의 피해가 머릿속에 선명히 그려졌다.

물론, 그건 드워프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잠자코 듣고 있던 드레드센의 주민들이 속삭였다.

"...가드너 아저씨. 믿어지세요?"

"그럴 리가 있겠니, 란샤."

"정말 무언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아요."

제로 산맥이 있던 자리.

그곳은 더없이 평평해 언덕조차 보이지 않았다.

"...여러모로 걱정이 되네요."

하늘을 나는 배.

아이언 캐슬 호는 제국의 수도성, 안토니움으로 향하고 있었다.

드레드센 주민들을 안토니움에 정착시키기 위함이었다.

'한없이 깊으신 어둠 속 한 줄기 빛님....'

이명이 아닌 그 이름은 호열 경이라고 들었다.

란샤는 아이언 캐슬 호에서 머물며 호열의 업적에 대해 알게 됐다.

최근에는 악마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셔서 그들이 움츠러들게 하셨다고 하셨지. 란샤, 자신의 눈으로 봐도 정말 악마들의 활동이 눈에 띄게 줄어든 것 같았다.

'악마에 관한 걱정은 덜었지만....'

우리가 수도성, 안토니움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서는 게 사실이었다.

드레드센은 누구에게나 외면받았던 작고, 가난한 마을이었으니까.

그러나 란샤는 주먹을 쥐었다.

'그런 우리도 살아남았으니까.'

어둠의 정령, 디엔드.

디엔드가 말했던 긍지라는 걸 잊지 않았으니까.

란샤에겐 오히려 호열을 걱정할 여유가 생겼다.

드워프들의 표정이 워낙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무사하시겠죠?"

란샤는 충격량 같은 건 잘 알지 못했지만....

그냥 생각해 봐도 보통 일이 아닐 것 같았다.

강물에 사람이 뛰어들어도 수면이 출렁거리는 걸 생각해 보면.

제로 산맥이 떨어진다면 수면은 얼마나 거칠게 일렁인다는 걸까?

가드너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저 무사하시기를 비는 수밖에 없겠구나."

드레드센의 구원자, 호열.

가진 것 없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구원자가 무사하기를 기도하는 것.

그리고 안토니움에 그 영웅담을 널리 퍼트리는 것 정도에 불과했다.

체인워커가 란샤와 가드너를 바라봤다.

"그대들의 말대로 호열 경의 세계, 그 안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겠군. 제로 산맥 등장의 충격이야, 경이 어찌어찌 막아낼 수 있다고 치더라도."

꿀꺽─

체인워커가 마른침을 삼켰다.

"제로 산맥은 그 자체만으로도 위험하니 말일세."

수많은 강자가 태어나고, 살아온 아르카나 대륙.

그럼에도 여태껏 제로 산맥 최정상에 다다른 이는 없었다.

제로 산맥의 최정상을 지키고 있는 드래곤의 존재 때문이었다.

'...경의 능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경도 인간이 아니던가?

인간과 드래곤.

그 체급은 땅과 하늘의 차이라 봐도 무방했으니까.

"후후."

그러나 드워프들은 알고 있었다.

타고난 체급.

그 누구보다 짧고 두터운 체구를 가진 자신들이기에.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 또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체인워커의 눈이 번뜩였다.

"비로소 경에게도 장비가 필요할 시기가 왔군!"

그렇지 않아도 호열을 위한 장비가 드워프들의 손으로 제련 중이었다. 특히나 방어구는 하이엘의 주문 아래 더없이 우아하게 담금질되고 있었다.

마력의 백금.

고순도 마력석.

남색 나비 실타래....

드워프의 보물창고에서 희귀하다고 손꼽는 재료들로 만들어지는 방어구였으니, 그 성능은 드워프의 최선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기대할 만할 것이네, 경."

문득, 체인워커의 시선이 굳게 닫힌 철문을 향했다.

"...크흠, 무기는 빼고 말일세."

드워프 최고의 대장장이, 월스와일.

그가 봉문(封門)하고 귀철의 제련에 매달린 지도 벌써 수십 일째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철문, 사이로 들려오는 목소리.

"부족하다. 턱없이 무디구나!"

"닥쳐라. 아직 제련은 끝나지 않았다."

"드워프여, 그가 베어야 할 적들을 떠올려라!"

...경, 하필 찾아도 저런 귀철을 찾았단 말인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귀철의 음성.

체인워커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나는 더욱더 예리해져야 한다. 하늘의 별, 마안을 베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대륙의 숫돌로는 부족하다. 말 그대로 하늘에서 떨어진 숫돌, '은하수 숫돌'로 나를 벼려내라는 말이다!"

광물 주제에.

아는 것도 많고.

요구는 더 많구나.

"나 원 참, 은하수 숫돌이라니."

천하의 드워프들 사이에서도 전설로만 전해 내려오던 마도구를.

대체 어떻게 찾아내서 벼려내라는 말인가?

.

.

.

...잠깐만.

은하수 숫돌?

순간, 떠오르는 셰그윈의 목소리.

-"그깟 왕관을 누가 쓰든지 내 알 바가 아니다. 나는 마도구, 은하수 숫돌을 손에 넣기 위해 제후들에게 힘을 빌려줬을 뿐이다."

그거 안토니움 황궁 창고에 있다고 하지 않았나?

◈ 192화. 선물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