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3

사흘이 지났다.

가르딘 경은 이쪽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전하! 구해왔습니다! 이거, 해풍 맞고 자란 쑥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가져온 커다란 자루. 과연 그 안엔 쑥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내심 반가웠다.

'다행이다. 이 세계에도 쑥이 있어서. 마침 상태도 이 정도면 충분히 좋고.'

덕분에 데미안을 진료할 준비를 착착 갖출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이틀이 지난 저녁.

행동을 개시했다.

"나가자."

"...예?"

황태자의 갑작스러운 외출 선언에 가르딘 경은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시간이 너무 야심했기 때문이었다.

"밖은 캄캄하고 이제 곧 잠자리에 드셔야 할 텐데, 어디로 나가시겠다는 겁니까?"

혹시 정원에서 밤 산책이라도 하겠다는 걸까. 가르딘 경의 그 온건한 예상은 황태자의 빙긋한 미소와 함께 한 큐에 박살 났다.

"만나러. 데미안."

"예?"

"내가 며칠 전에 물었지? 데미안을 아느냐고."

"예, 분명 그러셨습니다만...."

"지금 만나러 갈 거야."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한 대꾸. 가르딘 경은 의문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저기, 전하께 이런 질문을 드리는 것이 외람되지만, 대체 그 데미안이라는 자가 누구인 겁니까?"

"보면 알아."

장차 이 세계관의 최강자가 될 인물이다. 이쪽이 반드시 얻어야 할 사람이다. 그래야 앞으로의 인생이 편해진다.

그 사실을 염두에 두며 라키엘이 말했다.

"일단 이것부터 입지."

가르딘 경에게 옷가지를 건넸다. 옷가지의 정체를 알아본 경의 표정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이건... 정복 아닙니까?"

"맞아. 내 것도 있어."

가르딘 경은 그제야 뒤늦게 깨달았다. 아닌 게 아니라, 이미 황태자도 턱시도와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암갈색 가발까지 썼다.

마치, 자신의 정체를 감추려는 사람처럼.

"대체 데미안이라는 자를 만나러 어딜 가려 하시는 겁니까."

"그런 데가 있어. 나쁜 곳."

그게 대답의 끝이었다.

가르딘 경은 얼결에 황태자에게 이끌려 별궁을 나서야 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잘 아는 장소였다.

"여긴... 소렌티노 가든이 아닙니까?"

"맞아. 황도에서 가장 유명한 10대 레스토랑 중의 하나. 경도 잘 알지?"

"예, 제가 여기 단골이기도 합니다."

"잘됐군. 들어가지."

대체 이 레스토랑에서 뭘 하겠다는 걸까. 아니, 이 레스토랑의 어디가 나쁜 곳이라는 걸까. 가르딘 경은 황태자를 따라 테이블에 착석했다. 평소 종종 즐겨 찾던 레스토랑이었다.

한데 황태자와 함께하니?

어쩐지 낯선 곳처럼 느껴졌다. 점원에게 주문하는 황태자의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소스 없는 파스타, 피를 빼지 않은 등심, 원 없이 마셔도 취하지 않는 포도주를 곁들여서. 달이 뜨기 전까지. 가능한가?"

"...물론 가능합니다."

"언제쯤?"

"지금 드시겠습니까?"

"그쪽이 대신 먹어줄 순 없겠지?"

"그럼 일어나시죠.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점원의 조심스러운 대답.

태연하리만치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황태자.

그 알 수 없는 분위기에 이끌리듯 가르딘 경도 주섬주섬 일어섰다. 황태자 뒤를 황급히 졸졸졸 따라갔다.

"방금 주문, 대체 뭐였습니까?"

"은밀한 장소로의 입장 절차."

"...."

꿀꺽.

가르딘 경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거, 뭔가 있다.

기분 탓이 아니다.

조금 전 황태자와 점원이 나눈 요상한 대화도. 그 대화 직후에 보인 점원의 조심스러운 태도도. 그리고 어딘가로 안내받고 있는 이 기이한 상황 또한.

'이 레스토랑에... 이런 게 있었어?'

은밀한 장소라니.

단골이라 자부하고 있었는데 전혀 몰랐다. 한데 황태자는 이걸 이미 알고 있던 사람처럼 너무나 자연스럽게 굴고 있었다. 아니, 사실 라키엘은 이 레스토랑의 비밀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다행이다. 소설 내용 그대로야.'

점원을 따라 걸으며 라키엘은 내심 안도했다.

혹시나 소설과 실제가 다르면 어쩌나 싶었는데. 소설에서 나오던 암호와 절차를 따르니 예상외로 프리패스였다.

그렇게 점원을 따라 레스토랑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점원들만 출입하는 문을 지나쳐 몇 개의 복도와 계단을 거쳤다. 그곳에 지하로 내려가는 문이 있었다.

두 번째 입장 절차가 이쪽을 맞이했다.

"이 안쪽은 우리 레스토랑만의 특제 소스가 만들어지는 곳입니다. 죄송하지만 레시피의 공개는 절대로 불가능하고, 외부인의 출입 또한 금지되어 있으니 이만 돌아가시지요."

건장한 사내 다섯이 문 앞을 가로막았다. 그들을 향해 라키엘은 빙긋 웃었다.

"허어, 이런. 그럼 나랑 같이 고기 먹으러 갈까?"

"죄송합니다. 제가 채식주의자라서."

"그럼 목장에 같이 풀 뜯으러 가는 건?"

"...통과."

철컹, 묵직한 문이 열렸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펼쳐졌다. 그곳부터는 안내 없이 가르딘 경과 둘이서만 내려갔다. 벽에 걸려 일렁이는 횃불, 저 아래에서 올라오는 기이한 열기, 그리고 아스라이 들려오기 시작하는 함성.

"이 아래는... 뭐 하는 곳인 겁니까?"

뒤에서 들려오는 가르딘 경의 물음.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솔직히 이쪽도 조금 떨리긴 마찬가지였다. 소설에서만 읽어봤지, 이렇게 직접 와본 건 처음이니까.

하지만 짐짓 태연한 척.

이곳을 잘 아는 척.

어깨를 으쓱이며 너스레를 떨어 보였다.

"말했잖아. 나쁜 곳이라고."

그 말과 함께 계단 아래쪽 끝의 문을 열었다. 문 너머로 드넓은 공간이 활짝 열렸다.

수많은 이들로 북적이는 공간의 중앙. 높다랗게 마련된 철창. 얼룩진 핏자국과 투쟁의 열기로 가득한 무대 위. 도박사들의 함성과 탄식이 한데 얽혀 들끓는 바로 그 검투장에. 한 자루 검을 송곳니처럼 품은 남자가 있었다.

바로 이쪽이 찾던 그 남자.

이 소설의 진정한 주인공.

지하 검투장의 폭군.

데미안 카이엔이었다.

22화. 데미안 카이엔 (2)

그곳에 그가 있었다.

피로 얼룩진 철창. 투쟁의 열기로 가득한 그 공간에. 한 자루 검을 송곳니처럼 품은 데미안이 있었다.

'똑같다.'

소설에서 보던 일러스트와 똑같았다. 그를 보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훤칠한 키와 균형 잡힌 체격도, 치렁한 검은 머리칼도, 굳게 다물린 입매도, 좌중을 쓸어보는 무감정한 눈빛도 모두.

'다행히 검투가 시작되기 전이구나.'

그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이었다.

철컹! 카르르륵!

철창이 크게 요동쳤다.

이윽고 반대편의 바닥이 천천히 열렸다.

끼이이익....

도박사들과 좌중이 숨을 죽인 가운데, 동굴처럼 비스듬하게 파인 지하 통로가 드러났다. 통로 안에서 정체불명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 그르륵...!

짐승?

아니었다.

일개 짐승이라면 으르렁거리는 소리만으로 오싹 소름 돋는 느낌을 선사할 순 없으리라. 철창 너머 수많은 좌중의 안색을 창백하게 만들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듯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침묵 속에서.

쿵, 쿠웅.

"...트, 트롤."

누군가의 나직한 신음과 함께, 위압적인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다. 키는 약 3미터 정도. 철갑처럼 단단한 암회색 가죽 아래, 근육과 힘줄이 불끈거렸다. 길게 찢어진 입매 사이로는 누런 송곳니가 번들거렸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가장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시뻘건 눈동자였다. 맹목적인 야성과 살기. 파괴적 광기를 유감없이 드러내며 트롤이 포효했다.

- 쿼어어어억!

철창이 진동했다.

고막이 떨어져 나갈 듯이 아팠다.

'저런 거랑 싸운다고?'

검투장의 데미안.

소설로 이미 읽었던 장면이었다. 지금 이것과 비슷한 검투 경기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그걸 소설로 접하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엔, 연애를 인터넷으로 배우는 것과 진짜 해보는 것만큼의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었다.

'장난 아니네.'

어떤 맹수도 이런 위압감을 사방에 뿌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만큼 트롤의 살기와 위용은 엄청났다.

실제로 덩치도 어마어마했다. 키는 충분히 3미터는 되어 보였다. 그 커다란 골격이 모조리 근육으로 채워져 있었다. 가히 마x 영화의 녹색 근육맨 헐x 같은 체형이랄까.

그때였다.

툭툭.

옆에서 누군가가 이쪽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돌아보니 새하얗게 질린 얼굴의 가르딘 경이 있었다.

"저, 전하?"

가르딘 경이 입술을 파르르 떨며 물어왔다.

"저거, 뭡니까? 여기, 뭐 하는 곳입니까?"

"보면 알 거잖아."

"그럼... 저 불쌍한 사람을...."

가르딘 경의 울먹이는 시선이 철창 속의 데미안을 향했다.

"저 사람의 트롤의 먹이로 던져주고 그걸 구경하는 곳이란 말입니까? 이게 대체, 무슨...."

"...."

아무래도 가르딘 경이 오해를 단단히 했나 보다. 하지만 라키엘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경이 불쌍하게 쳐다보는 쟤가 죽으면 소설도 여기서 끝났을걸.'이라는 따위의 말을 해줄 틈도 없었다. 트롤이 포효하며 돌진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 쿼어어억!

쿵쿵쿵! 쿠쿵!

엄청나게 빠른 돌진이었다.

후와악-!

순식간에 5미터를 뛰어든 트롤이 기둥처럼 굵은 팔을 휘둘렀다. 그 끝에 데미안이 있었다.

콰우웅-!

트롤의 손톱이 공기를 찢어발기며 쇄도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움찔하는 반응조차 못 할 가공할 속도였다. 그러나 물론, 데미안은 보통의 사람이 아니었다.

스윽.

걸음을 옮기지도 않았다.

단지 반 뼘.

상체를 뒤로 젖히며 고개를 트는 간단한 동작만으로 트롤의 후려치기를 피해냈다. 고작 종이 한 장의 아슬아슬한 차이만을 남겨두고서.

- 쿼억?

트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일격에 나약한 인간의 머리통을 뜯어내 버릴 줄 알았는데. 자신의 공격이 허공만 휘저었다는 사실에 트롤이 분노했다.

- 쿠워어어억!

그때부터였다.

트롤의 맹공이 쏟아졌다.

- 쿼어억! 쿼억!

두 팔을 마구 휘둘렀다.

때리고, 치고, 긁고, 후렸다. 올려치고, 휘젓고, 내리치고, 찍었다. 차고, 찌르고, 몰아치고, 또 몰아쳤다.

그러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데미안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단 한 걸음도, 서 있던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사람이... 저게 가능해?'

라키엘은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어째서 데미안이 소설 속 동시대 인류 최강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인지.

'이때부터... 떡잎부터 달랐구나.'

악마적 재능.

아니, 감히 재능이라 표현하는 것이 실례가 될 전투 능력. 그리고 그 재능과 능력을 여과 없이 살려주는, 가공할 감각까지.

가히 역사상 최강의 검사라 불리는 그랜드마스터 하비엘 아스라한에 비견되는, 악마의 재능이라 일컬어진 검술의 천재, 데미안 카이엔.

그러고 보니 떠올랐다.

소설 속에서의 언급이었던가.

'그래, 데미안은 17살에 처음 지하 검투장에 발을 들였지. 그리고 단 3개월 만에 기존의 검투사들을 모조리 꺾고 챔피언이 되었어.'

그야말로 무적.

가공할 무패의 행진이었다.

1년 정도의 시간 동안 무수한 도전자들이 그의 검에 목숨을 잃거나, 불구가 되었다. 그 후로는 도전자 자체가 씨가 말랐다.

당연한 일이었다.

'덤벼봤자 요단강 프리패스 확정이니까.'

아무도 그에게 도전하려 들지 않았다. 도박사들의 배당률도 무의미해졌다.

그때쯤부터였다.

'데미안의 상대는... 사람이 아니게 됐지. 맹수, 고블린 무리, 혹은 오늘처럼 트롤까지. 온갖 흉악한 짐승이나 몬스터를 상대하게 됐어.'

심지어 그가 치르는 검투를 두고 벌어지는 도박 내용도 바뀌었다. 예를 들자면, '데미안이 트롤을 상대로 몇 군데의 상처를 입을 것인가'라는 식이었다.

그때였다.

- 쿠워억!

초조해진 트롤의 포효가 이쪽의 상념을 깨뜨렸다.

고개를 들었다.

데미안을 온몸으로 짓누르듯 달려드는 트롤이 보였다. 트롤이 거대한 덩치를 이용해서 데미안을 붙잡으려 두 팔을 뻗었다.

붙잡고 물어뜯으려는 걸까.

하지만 그 순간.

스핏.

그것은 아주 순간적인 일이었다.

선명하고 서늘한 섬광이 데미안과 트롤 사이를 단 한 차례, 오갔다.

그걸로 끝이었다.

- ...쿠륵?

데미안을 붙잡으려던 트롤이 움찔. 기이한 소리를 내며 동작을 멈추었다. 불신과 불안이 반씩 섞인 눈빛을 떠올렸다. 그것이 트롤이 생전 마지막으로 보인 몸짓이 되었다.

투확-!

솟구치는 핏줄기.

트롤의 머리가 날아갔다. 그 옆으로 깔끔하게 잘린 두 팔도 함께 허공을 날았다.

...쿠웅!

목과 두 팔을 잃은 트롤의 몸뚱이가 무릎을 꿇었다. 트롤 특유의 강력한 육체 재생? 꿈도 꿀 수 없었다. 어느새 심장까지 깔끔하게 관통당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털썩....

마침내 트롤의 거대한 육신이 허물어지듯 무너졌을 때, 장내의 그 누구도 환호하지 않았다. 아니, 환호할 생각을 떠올리지도 못했다.

너무나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 앞에 누군가는 쩍 벌린 입을 가리고, 또 누군가는 휘둥그레진 눈동자만 데룩데룩 굴렸을 뿐.

함성은 두 박자 늦게 터져 나왔다.

"...우와아아아아-!"

솟구치는 피와 흥분.

열광의 도가니.

관객들의 살벌한 환호가 장내를 뒤덮었다. 도박사들의 엇갈린 희비가 갖가지 웃음과 외침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때 이미 데미안은 철창 밖으로 퇴장하고 있었다.

자신을 향한 환호와 함성도.

그 어떤 욕설이나 찬양과 관심에도.

아무런 흥미가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단지 쿨한 성격이라서?

'그건 물론 아니지.'

라키엘은 내심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자신은 안다.

이 시기의 데미안이 무엇에 시달렸는지, 무엇을 절실히 필요로 했는지, 자신은 모두 알고 있다.

그러니 이제는 움직일 때였다.

"정신 단단히 챙기고 따라와."

가르딘 경을 툭 쳤다.

"...헉? 예? 예!"

창백하게 질려 있던 가르딘 경이 황급히 뒤를 따라왔다. 라키엘은 북적거리는 사람들을 헤치며 걸었다. 그동안 수많은 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귓가를 푹푹 찔러왔다.

"하아. 오늘은 그래도 한 군데쯤은 다칠 줄 알았는데."

"데미안 말입니까?"

"당연하지. 무려 트롤이 상대였잖나."

"하긴. 사실은 저도 데미안이 두 군데 상처를 입는다에 배팅했습니다."

"허허. 자네나 나나 오늘은 털렸구만."

"그래도 상대가 트롤이라기에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지 말입니다."

도박사들의 푸념이 들려왔다.

그걸 들으며 라키엘은 내심 웃었다.

'저 사람들은 데미안이 이 세계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겠지.'

한낱 이런 지하 검투장에서 썩을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도. 훗날 이 세계를 전란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낼 인물이라는 사실도. 더 훗날엔 거대한 제국의 황제로 등극할 것이라는 미래 또한.

저들은 꿈에조차 모르고 있을 터다.

'데미안은 댁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엄청난 놈이라고.'

그걸 이쪽 혼자만 알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뿌듯했다. 아무도 모르는 맛집을 혼자만 알고 있는 기분. 혹은 세계 최고의 스타가 될 신인의 1호 팬이 된 느낌이 이럴까.

한데 그렇듯 혼자 뿌듯해하고 있던 도중, 뜻밖의 대화가 도박사들에게서 흘러나왔다.

"그런데 말일세. 자네, 혹시 요즘 소문이 자자한 '황태자 패왕설'이라고, 들어봤나?"

"...푸읍!"

저도 모르게 뿜을 뻔했다.

라키엘은 시치미를 떼며 도박사들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거렸다. 그들의 대화가 두런두런 이어졌다.

"황태자 패왕설이라니요? 금시초문입니다만."

"쯧쯧. 자네는 소식이 이렇게 느려서야 도박사짓 해먹을 수나 있겠는가."

"타박보다는 그 소식부터 좀 알려주시지요. 오늘 술은 제가 사겠습니다."

"좋군. 황태자 패왕설이 뭐냐면... 자네도 며칠 전에 로이-하비교에서 벌어진 황태자 전하와 2황자 전하의 대결을 구경했겠지?"

"예. 너무나 뜻밖의 결과로 끝난 대결이었지요."

"그래, 인상적이었지. 특히 패배한 직후에 보였던 2황자 전하의 태도가 말일세."

"2황자 전하의... 태도라니요?"

"기절했잖나."

"예."

"그리고 황태자 전하가... 기절한 2황자 전하의 발을 살짝 어루만졌을 뿐인데... 2황자 전하가 비명을 질렀지. 자네도 보았을 텐데?"

"아, 예. 분명 그랬습니다."

"그 뒤에 2황자 전하가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기억하나?"

"...아."

"기억하나 보군. 맞아. 벌떡 일어나더니 황태자 전하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서 패배를 선언했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말일세."

"그, 그럼 설마...."

"짐작했나 보군. 맞네. 잠깐 발을 어루만졌던 황태자 전하의... 악력이 상상을 초월했던 걸세."

"아, 역시."

...역시는 무슨 역시!

라키엘은 당장 저들의 대화에 끼어들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런 이쪽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박사들의 쑥덕거림은 잘도 이어졌다.

"그 엄청난 악력에, 2황자 전하는 지옥 같은 고통을 느꼈던 것이지. 어쩌면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것인지도 몰라. 이대로 더 계속 덤비다간 정말로 죽을 수도 있겠구나, 라고. 그런 위기감을 느꼈기에 곧장 무릎을 꿇고 패배를 시인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거, 일리가 있습니다. 그냥 패배가 아니었지요, 그건. 무려 황태자위를 포기하겠다는, 황제가 되는 길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이었으니까 말입니다."

"바로 그거지. 황제가 되기를 냉큼 포기할 만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악력을 지니신 것이야, 황태자 전하는."

"허어. 항상 지병에 시달리는 비실비실한 모습이라는 평을 듣던 분인데 어찌 그런.... 혹시 그럼, 황태자 전하께서 지금까지 엄청난 힘을 숨기고 계셨다는 겁니까?"

"그렇지. 바로 그거지. 그 추론이 바로 황태자 패왕설의 핵심일세."

...쯧. 그냥 가자.

어차피 바쁜 와중이다.

저런 헛소문이나 들어줄 시간은 없다.

라키엘은 발길을 서둘러 인파를 헤치고 지나갔다. 검투장 한쪽 구석의 복도로 다가갔다. 검투사들의 대기실로 향하는 복도였다.

물론 그곳엔 출입을 통제하는 경비가 있었다. 하지만 라키엘에겐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이쪽을 막으려는 그들에게 말없이 금덩이 하나씩을 쥐여주었다.

경비들이 굳은 눈길로 이쪽을 보았다. 감히 우리를 돈으로 매수하려는 건가? 라고 묻는 듯한 성난 눈빛.

...을 유지하기에는 너무나 비싼 금덩이였다.

그렇게 프리패스로 복도에 진입했다.

'복도 가장 안쪽.'

사람들의 발길이 가장 닿지 않는 끄트머리의 대기실. 그곳에 데미안이 있다. 소설 속 내용을 떠올리며 라키엘은 심호흡을 했다.

'이제부터가 중요해.'

소설 속의 주인공이었던 그와 만난다. 묘하게 가슴이 뛰는 가운데, 라키엘은 계획을 정리했다. 소설을 통해 읽고 기억하는 내용들을 되새겼다.

지금 이 순간 데미안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 지금 데미안에게 가장 절실한 것. 그것을 이쪽이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자면 데미안의 관심을 단번에 끌어내야 한다.

그걸 100퍼센트의 성공률로 해내자면....

"실례합니다."

끼이익.

거리낌 없이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너머에 데미안 카이엔이 있었다.

얼굴에 튄 트롤의 피를 닦아내고 있던 걸까. 그가 얼굴을 덮은 수건 사이로 무심한 눈길을 던져 왔다.

누구냐고.

무슨 일이냐고.

하지만 그 눈빛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성큼성큼 걸었다.

날뛰려는 심장을 억눌렀다.

손을 뻗어 테이블 위의 약병을 집었다. 그를 돌아보며 의미심장한 썩소를 지어주었다. 정교한 계산으로 준비한 찰진 극딜성 멘트와 함께였다.

"쯧쯧. 안타깝네. 이런 싸구려 진통제를 왜 먹지? 이런 거 먹고 잠이 오나?"

"...뭐?"

데미안의 눈썹이 꿈틀. 그의 서늘한 눈동자에 희미한 빡침의 열기가 엇비쳤다.

라키엘은 내심 만족했다.

됐다.

이만하면 초면 치고 매우 상큼한 시작이다.

23화. 지지면 낫는 질환 (1)

아프다.

피를 본 후에는 언제나 극심한 고통이 몰려온다.

이유는 모르겠다.

지금껏 내 검에 당한 이들의 원혼 때문에? 혹은, 휴식을 사치라 여기며 거듭했던 훈련의 후유증 때문에? 그도 아니라면, 이토록 애를 쓰며 싸우고 있음에도 여전히 밑바닥만 보이는 돈주머니 때문에?

다만 확실한 것은, 이 고통이 몰려올 때는 반드시 약이 필요하단 사실이다. 누군가는 진통제라 부르고, 또 누군가는 몹쓸 마약이라 부르는 저것.

'그런데 왜 저걸....'

난데없이 대기실에 들어온, 처음 보는 놈이 들고 있는 걸까. 게다가 왜 저놈은 내 약을 살펴보며 헛소리를 내뱉는 걸까.

"쯧쯧. 안타깝네. 이런 싸구려 진통제를 왜 먹지? 이런 거 먹고 잠이 오나?"

"...뭐?"

데미안 카이엔은 벙찌는 기분을 느꼈다.

낯선 놈이다.

어떻게 여길 들어온 걸까.

검투장 관계자?

아닌 듯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비리비리한 놈이었다.

그래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누구냐, 넌."

데미안의 눈길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돌아오는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그쪽이 필요로 할 사람."

"혹시 약 팔러 온 놈인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검투사들은 대부분 통증을 달고 산다. 진통제 또한 달고 살기 일쑤다. 그렇기에 가끔 이런 놈들이 있었다. 검투사들을 상대로 좋은 약이 있다며 사기를 치려는 부류였다.

과연, 눈앞의 미친놈도 대뜸 고개를 끄덕였다.

"어, 비슷해. 촉이 나쁘진 않은데."

역시나다.

데미안은 흥미를 잃었다.

이런 놈들이라면 이미 지긋지긋하게 겪었으니까. 더 말을 들어볼 필요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 손목 잘라 버리기 전에 약병 내려놓고 꺼져. 이미 약이라면...."

"충분히 있다고? 그렇게 생각해? 이런 싸구려 약으로 만족이 되는 건가? 정말로?"

"지금 무슨 헛소...."

"리가 아니라 할 말이 있어서 온 건데."

"죽인다."

"그러면 뒤통수 찌릿찌릿한 고통, 평생 못 없앨 거야."

"...."

"보통 증상은 후두부에서 시작되지. 뒷목과 뒤통수가 굳으면서 저릿저릿. 방사통이 뒤통수 전체와 어깨까지 번지지 않나?"

"...."

"심할 때는 관자놀이를 거쳐서 이마, 눈 어름까지 통증이 번지지. 그럴 때면 소름이 돋고 식은땀이 마구 흘러. 눈알이 빠져나올 듯이 아프지. 웃긴 건, 그 통증이 파도처럼 몰아쳤다가 잠잠해지길 반복한다는 점이야. 그게 또 사람을 미치게 만들거든. 이젠 끝났나 싶은 희망고문이 계속 이어지는 지옥이라고나 할까."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느냐고?"

라키엘이 빙긋 웃었다.

어떻게 알긴.

소설을 읽었으니까 알지.

'그래서 방금 마검황에서 증상을 표현하던 지문 거의 그대로를 읊어준 거고.'

그랬더니?

시종일관 까칠하던 데미안이 처음으로 흠칫하는 반응을 보였다. 매우 바람직한(?) 대화의 진척이었다.

그러니까 이럴 때일수록?

더욱 뻔뻔해져야 한다.

라키엘은 얼굴 가득 삼중 엠보싱 철판을 깔았다.

"그런 증상, 뻔해. 외상, 어혈, 신허가 뒷목을 지나는 경맥 순환에 장애를 일으키는 거거든, 그거."

"...."

"그런데 통증의 원인을 제거할 생각은 안 하고. 이런 마약성 진통제에만 의존하니까 그 모양으로 계속 아픈 거지. 진통제가 약인가? 아니지. 절대로 아니거든."

"...."

"항상 이래. 댁 같은 사람들이 은근 있다니까."

라키엘은 진심으로 배어나는 안타까움에 혀를 찼다.

아픈데 진통제만 찾는 어리석음. 데미안만 탓할 일이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한국에서도 이런 경우를 많이 봤다.

우리네 아버님들, 어머님들, 참 끈질기고 근면하신데 안타까웠다. 자식들 먹여 살리느라 일만 하면서 어디 아프면 진통제만 찾기 일쑤였다. 큰 병원 가면 돈 든다면서 진통제만 찾고, 파스만 붙이며 버티시다가 오히려 병을 키우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러니까 말이야. 바닥에 국물을 온통 쏟았는데 이불만 덮어두면 끝인가? 아니지. 아픈데 그걸 해결할 생각은 안 하고 이런 마약성 진통제 따위에나 의존하면 고생길만 늘어나는 거지. 안 그런가?"

"...."

"입이 있으면 대답을 좀 해보라고 이 안타깝고 멍청한 사람아."

"...."

데미안은 저도 모르게 울컥했다. 아니, 발끈할 뻔했다. 심히 억울했다. 자신은 그저 평소처럼 있었을 뿐인데. 트롤 한 마리 잡고서 쉬고 있었을 뿐인 건데. 평소처럼 검투 후의 통증이 올 것 같아서 슬슬 약을 먹을까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그런데 웬 듣도 보도 못한, 생판 모르는 놈이 대기실에 들어온 것도 모자라 자신을 무려 혼내고 있었다.

'내가 왜?'

이런 놈한테 훈계를 듣고 있어야 하는 걸까. 데미안은 깊은 산 속 옹달샘에서 퐁퐁 치솟는 의구심과 황당함, 억울함을 한껏 야무지게 버무려 딱 한마디의 의문사로 내놓았다.

"...그런 말을 하는 너는 대체 누구지?"

대체 누구기에.

여기까지 와서.

이러는 거냐고.

이번에도 어물쩍 제대로 대답을 하지 않으면 정말로 베어 버리리라. 데미안은 다짐하며 검 손잡이를 끌어당겼다.

이내 미친놈이 대답했다.

"황태자."

"...."

"진짠데."

"...."

아무래도 죽여야겠다.

검 손잡이를 쥔 데미안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그때, 다행히 미친놈이 빙그레 웃었다.

"농담이고. 사실은 쿠스만 씨가 보낸 사람."

"쿠스만?"

"그래. 그쪽 프로모터."

"...."

"이젠 좀 믿음이 생기겠지."

"...."

검자루를 쥔 데미안의 손아귀가 살짝 풀렸다. 라키엘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유, 다행히 통했구나.'

쿠스만.

그건 데미안의 프로모터의 이름이었다. 동시에, 이곳 검투장과 밀접하게 관련된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로 알 수 없는 이름이기도 했다.

'당연하지. 프로모터가 있어야 검투장이 돌아가니까.'

쉽게 말하자면 프로모터는 지하 검투장의 중개인이었다. 부동산 업자가 임차인과 임대인을 연결해주듯, 출판사 매니지먼트가 작가와 연재 플랫폼을 연결해주듯, 프로모터는 검투사와 검투장을 연결해주고, 시합 일정을 조율했다.

그 대신 검투사가 받는 대전료의 30%를 수수료로 받았다. 그 외에도 프로모터는 검투사에게 숙식을 제공했다. 훈련 장소와 각종 편의 또한 유상으로 제공했다.

'그게 문제인 거지. 프로모터가 부동산업자나 출판사와 다르게 악랄한 점은, 유상으로 제공하는 편의사항에 마약성 진통제가 있다는 거거든.'

마약성 진통제.

그게 제일 문제였다.

검투사는 언제나 진통제를 필요로 했다. 프로모터는 독점 공급이라는 구실을 통해 마약성 진통제를 엄청나게 비싼 가격에 팔곤 했다.

'덕분에 대부분의 검투사들은 아무리 싸워도 돈을 저축하질 못하지. 비싼 마약성 진통제를 사느라고 수입의 대부분을 탕진해 버려. 아니, 빚을 지지만 않아도 감지덕지한 형편이 대다수랄까.'

싸움은 검투사가 하고.

피도 검투사가 흘리고.

돈은 전부 프로모터가 꿀꺽.

하지만 그 악순환을 벗어날 수 있는 검투사는 없었다. 자신을 얽어맨 부조리를 알아차릴 무렵엔? 이미 마약성 진통제 중독자가 된 상황인 까닭이었다.

라키엘은 기억을 더욱 상세하게 되짚었다. 특히 소설 마검황 속 데미안의 전속 프로모터 쿠스만이 나오던 장면들을 떠올렸다.

그 속의 대사들, 지문들.

데미안이 겪었던 상황들.

그 모든 정보를 떠올리고, 조합했다. 이리저리 뒤섞고, 그럴듯한 거짓말로 가공했다. 준비운동이 끝난 혓바닥 위에 야물딱지게 촵촵 장전했다.

그리고 발사했다.

"아까 쿠스만 씨가 그러던데. 그쪽이 불평을 했다고. 요즘 이 약, 잘 안 들기 시작했다며."

"...."

"그래서 쿠스만 씨도 골치를 썩는 것 같더라고. 관리하고 있는 다른 검투사들에게도 공급해야 하는 진통제라서 수량을 더 빼기가 빠듯하다고. 계절이 계절이라 양귀비 수확철도 아니고 여유분을 빼돌리기도 어렵다고. 댁도 쿠스만 씨한테 들어서 알고 있겠지?"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이런 진통제 말고도 그쪽의 고통을 덜어줄 방법이 있다는 거지."

"새로운 방법? 댁이 해줄 수 있는 건가?"

"그러니까 내가 왔지."

"쿠스만 씨가 보냈다고? 정말로?"

"어."

"비용은?"

"나중에 쿠스만 씨 만나서 따로 얘기해. 내 몫의 보수는 이미 받았으니까."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정말로 데미안의 프로모터 쿠스만이 보낸 것처럼 굴었다. 그런 라키엘을 쳐다보는 데미안의 눈초리가 깊어졌다.

"...."

뭔가 이상하다.

말하는 투도 그렇고, 이쪽 바닥 사람 같지가 않다. 한데 더 이상한 점은, 자신과 프로모터 쿠스만의 관계를 저놈이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게 제일 이상했다.

'쿠스만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계약을 맺은 검투사나 검투장 핵심 관계자 외엔 없을 텐데.'

한데 태연히 쿠스만의 이름을 입에 올린다. 저놈은 그것도 모자라 자신과 쿠스만 사이에 있었던 일들까지 언급했다.

문득, 며칠 전의 저녁이 떠올랐다. 검투장에서 고블린 스무 마리를 베어 넘긴 밤이었다. 쿠스만에게 더 많은 진통제를 요구했다.

요즘 약 기운이 잘 듣질 않는다고.

잠을 이룰 수가 없다고.

한데 쿠스만이 난색을 표했다.

요즘 물량을 따로 빼기가 곤란하다고. 관리하는 다른 검투사들 몫도 간당간당하다고. 계절이 계절이라 양귀비 수확철도 아니고 여유분을 빼돌리기도 어렵다고.

'한데 그 말을... 저놈이 정확하게 읊었다.'

그 의미는 자명했다.

저놈이 진짜로 쿠스만이 보낸 사람이라는 뜻이다. 비로소 데미안은 검자루를 옆에 내려놓았다.

"그럼 하나 묻지. 진통제가 아닌 새로운 약을 가져온 건가?"

"아니."

라키엘이 빙긋 웃었다.

넘어왔다. 나름 야심 차게 준비한 야바위가 통하고 있다. 그 확신을 담고서 말했다.

"그쪽이 겪고 있는 통증은 약으로는 안 돼. 말했잖아.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고."

"원인이라.... 그걸 제거하면 통증이 재발하지 않는다는 건가?"

"어."

"너무 쉽게 장담하는 것 같은데."

"장담인지 아닌지는 직접 확인해보시든가."

"대체 어떤 방법이기에?"

데미안이 물었다.

라키엘의 빙글거리는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일단 상의 벗고 엎드려."

"...뭐?"

"진료받아야지. 안 죽어. 혹시 무섭나?"

"물론 그건...."

"그럼 일단 벗으라니까."

"...."

데미안이 불신 가득한 눈초리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 눈빛을 태연하게 받아냈다. 녀석이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상의 셔츠를 벗었다. 날렵하면서도 탄탄하게 발달한 근육질 상체가 드러났다.

지하 검투장에서 얼마나 굴렀던 걸까. 온통 상처투성이 몸이었다. 하지만 라키엘의 시선은 데미안의 근육이나 상처 자국을 향해 있지 않았다. 대신 데미안의 왼쪽 등을 주목했다. 그곳에 선명한 낙인이 있었다.

검투장에서 새긴 낙인.

검투사의 표식이었다.

'역시 있구나.'

소설 일러스트에서 봤던 그대로였다.

저 낙인이 원인이다.

저게 바로 소설 마검황의 초반에 데미안을 그토록 괴롭혔던 지옥 같은 통증의 원인이었다. 그가 시달렸던 후두신경통은 그저 결과로 나타나는 병증이었을 뿐. 라키엘은 재빨리 표정과 눈빛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뭘 멀뚱히 있어. 침상에 엎드려. 편안하게 힘 빼고. 그래야 치료 시작할 수 있으니까."

"...혹시 마사지 따위라도 하려는 건가."

"그건 아니고."

"그럼?"

엎드리며 의구심 가득한 눈빛을 보내오는 데미안. 라키엘은 그 시선을 받으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데미안의 등에 새겨진 낙인.

저걸 제거해야 한다.

한데 저 낙인은 그냥은 안 지워진다. 칼로 베어도, 가죽을 벗겨 내도 소용없다. 저 안에 저주가 깃들어 있으니까.

그 저주를 걷어내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뜨거운 열로 새긴 거라서, 똑같이 열로 지져야 하거든, 저런 건.'

라키엘은 품속에 손을 넣었다.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해온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주먹 절반 크기로 버무려진 정체불명의 암녹색 덩어리. 그걸 내보이며, 침상을 손바닥으로 팡팡 치며, 라키엘이 상큼하게 웃었다.

"어서 와, 쑥뜸은 처음이지?"

24화. 지지면 낫는 질환 (2)

쑥뜸.

뜸봉을 신체의 특정 부위에 올리고 태워서 온열 자극을 가하는 치료법.

뜸에는 여러 효과가 있다. 1차적으로는 체온을 상승시킨다. 혈액순환을 촉진시키고, 뜸을 뜨는 부위에 대응하는 혈관, 기관, 내분비선을 자극하여 면역력을 증진시킬 수 있다.

또한 과민해진 신경을 누그러뜨려 통증, 마비, 경련 증상을 완화할 수 있다. 말하자면, 흔히 근육통이 오거나 할 때 즐기는 온열 찜질을 좁은 부위에 집중시킨, 몰빵 일점사의 개념이 바로 뜸이라 할 수 있었다.

특히 데미안이 겪는 후두신경통 같은 증상에는?

'뜸이 직빵이지.'

라키엘은 빙긋 웃었다.

자신이 오늘 쑥뜸봉을 준비해온 것. 그것은 비단 후두신경통 때문만은 아니었다.

'저 낙인 속에 깃든 저주를 깨뜨려야 해.'

데미안의 등에 새겨진 낙인이 눈에 들어왔다. 소설 마검황의 일러스트로 봤던 것과 똑같은 모양이었다.

문득, 소설 속의 내용이 떠올랐다.

'낙인은 검투사가 프로모터와 계약할 때 찍히지. 계약의 증표로. 특정 프로모터에 소속되어 있다는 표시로. 하지만 사실은 저게 바로 검투사를 속박하는 가장 악랄한 수단이었어.'

저 낙인은 그저 단순히 검투사의 소속을 알려주는 표식이 아니었다. 사실은 일종의 소형 마법진이었다.

마법진 속에 저주가 깃들어 있었다. 낙인이 새겨진 자의 혈액 순환이 활발해지면 1시간 후에 저주가 발동했다. 극심한 고통을 가하는 지독한 저주였다.

즉, 격렬한 전투를 치르고 나면? 거의 반드시 극통에 시달리게 되는 셈이었다.

'데미안뿐만이 아니었어. 다른 검투사들도 마찬가지였지.'

하지만 낙인이 고통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전투의 후유증 때문이리라고. 그렇게 여기며 진통제를 달고 살았다.

속으며 살다가.

속으며 죽었다.

다들 그걸 까맣게 몰랐다.

애꿎은 돈만 진통제 구입비로 탕진했다. 아니, 프로모터에게 고스란히 갖다 바쳤다. 심지어 그러는 과정에서 빚이 늘기까지 했다.

매일 싸우고 또 싸우는데.

돈을 벌긴 버는데.

수중에 남는 돈은커녕 빚만 쌓이는 셈이었다.

'쓰읍. 생각해보니까 일하고 또 일해도 대출에 마이너스 통장만 쌓이던 거랑 똑같네.'

잠깐 치미는 대한민국 시절의 자괴감. 라키엘은 쑴펑쑴펑 치솟는 쓰라린 기억을 접어두고 소설의 설정을 더욱 상세히 되짚었다.

'어쨌건, 저 낙인이 문제야.'

소설 내용에 따르자면 낙인에 상처를 내도 소용이 없다고 했다. 심지어 낙인이 새겨진 부위의 가죽을 벗겨 내도 마찬가지라고 했던가.

'그럴 법도 하지. 검투사들이니까. 몸에 상처를 입는 일이 다반사인 직업군이니까. 한데 칼에 긁히는 것만으로도 기능을 잃는 낙인이라면? 한 달도 못 써먹을걸.'

생각해볼수록 악랄했다.

그야말로 검투사가 죽을 때까지 뽕을 뽑겠다는 프로모터의 의지가 엿보이는 낙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거할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고열로 지지는 것.'

열로 새긴 낙인과 저주였다.

그렇기에 똑같이 열로 지져 버리면 없애는 것이 가능했다. 아니, 사실상 그게 유일한 수단이었다.

한데 자신은?

사람의 몸을 열로 지지는 데엔 익숙했다. 아니, 그냥 익숙한 정도가 아니었다.

'매일 했던 짓이니까.'

그것이 바로 쑥뜸이었다.

"자아, 겁먹지 말고. 힘 빼시고오."

엎드린 데미안의 등짝.

왼쪽 견갑 부위에 새겨진 낙인.

그 중앙에 쑥뜸봉을 올렸다. 무려 일반적인 사이즈를 가볍게 압도하는, 밑면이 둥근 원뿔 모양의 뜸봉이었다.

데미안이 등을 움찔했다.

"뭐지, 이건?"

"괜찮아. 안 죽어."

"...."

"혹시 무섭나?"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하지만?"

"이런 괴상한 치료가 효과가 있을지에 대해 여전히 의문이 드는군."

"혹시 내가 야매나 돌팔이 같아서?"

"당연하지."

데미안이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내 등에 올려놓은 물건. 잘게 다져 말린 풀을 뭉쳐서 만든 것 같은데. 고작 이런 걸 등에 올린다고 해서 내 통증이 가라앉을지 의문이 드는데."

"아. 예. 궁금증은 직접 몸으로 풀어보시구요."

라키엘은 피식 웃으며 테이블 위의 양초를 들었다. 일렁이는 불길을 뜸봉 꼭대기에 갖다 댔다.

"자아, 갑니다. 갑니다. 갑니다."

"어?"

치이이익-!

뜸봉 꼭대기에 불길이 옮겨붙었다. 이쪽을 보는 데미안의 눈길이 사나워졌다.

"이거, 무슨 짓이야."

"원래 이러는 건데."

"당장 치워."

"그럼 치료가 안 되는데."

"...."

"힘 빼라고 했잖아. 고개 들지 말고. 징징거리지도 말고. 좀 편하게 뚝. 그래, 이렇게. 어깨에 힘 주지 말고."

"이봐, 나는...."

"일말의 인류애라도 가슴 한구석에 품고 살아간다면 이럴 때는 사람 좀 믿읍시다, 어? 슬슬 뜨거워질 거야. 참어."

"뭐?"

그때였다.

푸취이이익-!

뜸봉의 열기가 점점 아래로 번져갔다. 그 아래 데미안의 등짝에도 산불처럼 번졌다.

"...그읍?"

엎드린 채 이쪽을 보고 있던 데미안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 그그급."

"엄청 뜨겁지?"

"...이, 이게 무슨."

"괜찮아. 치료의 과정이야."

"이따위 괴상한 짓이 무슨 치료라고...."

"나 살던 곳에서는 어린애도 받는 건데?"

"...뭐?"

"쯧쯧. 지하 검투장의 절대강자니 뭐니 하더니만. 어린애도 꿋꿋하게 받는 치료를 못 참아서 이렇게 난리인 걸 사람들이 알까 모르겠네."

"...."

"괜찮아. 이제부터라도 잘 참으면 소문은 안 낼게."

"...."

이쪽을 노려보는 데미안의 눈초리가 살벌해졌다. 라키엘은 쓴웃음을 삼켰다. 사실 어린애도 참는다는 말,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쑥뜸 이거, 진짜로 많이 뜨거우니까. 게다가 그냥 다짜고짜 직접구 방식으로 지져 버려서 더 뜨겁겠지.'

사실 뜸을 뜨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간접구와 직접구 방식이었다.

간접구는 링이나 받침대 등등의 기구를 피부에 놓고, 그 위에 뜸봉을 올려서 태우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하면 덜 아프다. 덜 뜨겁다. 뜸봉에서 나오는 살벌한 열기를 중간에 놓인 기구가 걸러주니까.

그래서 더 대중적이고, 접하기 쉬운 방식이었다.

'게임으로 치면 초심자용 이지(easy) 모드랄까.'

반면 지금 데미안이 받고 있는 직접구 방식은?

중간에 놓는 기구 따위 없다.

대놓고 피부에 뜸봉을 바로 촵 올려놓고선 피부고 가죽이고 아주 그냥 생 열기로 지져 버리는, 상남자의 하드코어한 뜸이 직접구 방식이었다.

'당연히 엄청 뜨겁지. 잠깐도 아니고 계속 타는 물건으로, 지속적으로 생살을 지지는 거니까.'

특히 데미안은?

더 뜨겁게 느낄 것이다.

사실 그럴 이유가 충분했다.

뜸을 받을 때 특별히 더 뜨겁게 느끼는 조건들을 데미안이 거의 다 갖추고 있기 때문이었다.

'보통은 신경질이 많은 사람이 더 뜨거워하는 편이지. 데미안? 매일 검투장에서 생사를 넘나들며 피를 보고 살아왔잖아. 까보면 PTSD 환자일걸. 당연히 24시간 신경이 곤두서 있지. 그래서 엄청 뜨겁게 느낄 거고.'

그뿐만이 아니었다.

라키엘은 약간의 동정심(?)을 담아 말을 걸었다.

"그래도 제법 참기 어려울 정도로 뜨겁긴 할 거야. 그런데 어쩌겠어. 원래 신체가 튼튼한 사람이 더 뜨거워하는 법이거든."

"...그욱."

"보통은 남자가 여자보다 더 뜨거워하는 편이고."

"...후우."

"게다가 젊을수록 더 뜨거워한다? 특히 스무 살 언저리. 이쪽 연령대가 제일 심해."

"...후, 후욱."

"그런데 그쪽, 조금 전에 검투를 치른 직후라서 살짝 피곤하지? 안타깝네. 일반적으로는 약간의 피로감이 있을 때 제일 많이 뜨거워하는 법이라서."

"...."

"게다가 날씨마저 그쪽을 돕질 않아. 구름 많이 낀 저기압인 날씨에 뜸이 제일 뜨겁게 느껴지곤 하거든. 딱 오늘처럼."

"...젠장."

"아, 참! 게다가 아침보다 오후가 뜨겁고, 오후보다 밤에 시술받을 때가 더 뜨거워. 그런데 어떡하나. 마침 지금이 한밤중이네?"

"...제발."

"거기에다가 미안하게도, 정확한 혈자리에 뜸을 두면 좀 덜 뜨겁거든. 그런데 오늘은 혈자리와 별로 상관없는 곳이라서 더 뜨거울 거야. 미안."

"...제발 좀. 닥쳐, 이 미친놈아."

"그래도 내가 말이라도 걸어주니까 좀 덜 아프지 않나?"

"...퍼, 퍽이나."

"그래? 알았어, 그럼."

"...."

라키엘은 입을 닫아 버렸다.

그저 빙글빙글 웃으며 잘도 타는 뜸봉을 구경했다. 그동안 데미안의 얼굴이 점점 더 일그러졌다. 그러다가 마침내.

"...마, 말... 정말로 아무 말도 안 하는 건가?"

"...."

"이봐."

"...."

"어이?"

"...."

"뭐라고 말이라도...."

"해달라고? 거 봐. 입 닫고 있으니까 더 아프잖아."

"...쯧."

"고맙지?"

"...제기랄."

"그래도 이건 알아주면 좋겠네. 그 뜸봉, 쉽게 만든 건 아니야."

"뭐?"

"쑥으로 만들었지. 아무 쑥이나 쓴 것도 아니고. 바닷가에서 해풍을 맞으면서 자란 걸로만 구했어. 뭐, 원래는 3년 이상 묵힌 걸로 만들어야 하는데 그럴 시간까지는 없었고."

"...."

"절구로 엄청 찧었어. 체로 치면서 찌꺼기도 걸러냈고. 그걸 한 열 번쯤 반복했나. 흰 털만 남을 때까지 계속했거든. 덕분에 수분, 단백질 질소유기물, 섬유소, 지방, 회분, 거기에 플라보놀 화합물과 세스퀴테르펜, 알코올 등등이 황금비율로 버무려진 좋은 뜸봉이 나왔지."

"무슨...."

"그만큼 좋은 걸로 정성껏 만들어서 효과도 괜찮은 놈이라고, 지금 지지고 있는 거."

"...."

"다 됐다. 잠깐만 더 엎드려 있어."

마침 뜸봉이 다 탔다.

라키엘은 재가 된 뜸봉을 조심스럽게 치웠다. 뜸봉이 놓였던 자리. 낙인 한가운데가 온통 붉게 익어 있었다.

뜸으로 만들어진 화상 자국이었다.

'좋아. 제대로 지졌다.'

그의 입가에 일류 스테이크 요리사 같은 미소가 훈훈하게 걸렸다. 살갗이 아주 적절하게(?) 익어 있었다.

특별히 단단하게 뭉친 왕뜸을 썼다. 그만큼 일반 뜸보다 더 뜨겁게 오래 타는 물건이었다. 아마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그 열기를 참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데미안은 해낼 거라고 믿었다.

'여윽시 소설 주인공.'

주인공다운 인내력과 남다른 의지. 그걸 믿고서 밀어붙였고, 데미안은 그 기대에 정확히 부응해주었다. 덕분에 성공적인 결과가 나왔다.

뜸자리를 정돈해준 라키엘이 말했다.

"끝났으니까 일어나 봐."

"...."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데미안.

다행히(?) 녀석은 이쪽의 죽빵을 갈기진 않았다. 대신 침상에 걸터앉은 채 미간을 크게 찡그렸다.

"으음?"

이내 이쪽을 쳐다보는 녀석의 눈빛.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놀람의 기색이 가득했다.

"...어떻게 한 거지? 뒷골이... 머리가...."

"안 아프지? 싹 맑아졌지?"

끄덕.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믿기지가 않았다.

정말로 통증이 말끔히 사라졌다. 더는 뒷골이 당기지가 않았다. 관자놀이를 온통 저릿저릿하게 만들던 느낌도. 눈알이 빠져나올 것만 같던 끔찍한 고통도.

더는 느껴지지가 않았다.

머릿속이 맑아졌다.

아무리 진통제를 먹어도 이렇게 상쾌한 적은 없었는데, 지난 몇 년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체 어떻게?'

데미안은 라키엘을 쳐다보았다.

그저 돌팔이인 줄로만 알았다.

엎드리라며, 이상한 풀을 뭉친 덩어리로 등을 지질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이쪽은 뒷골과 머리, 얼굴이 아픈 건데, 어째서 상관도 없는 등을 지지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애꿎은 생살만 지지는 것 같았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까 수없이 고민했더랬다.

'그래도 쿠스만이 보낸 사람이니까, 결과만 확인해보자 싶었는데.'

치료 효과가 없으면 두 팔을 부러뜨려 버리리라고. 당분간 걷지도 못하는 꼴로 만들어주겠노라고.

이를 갈며 다짐했더랬다.

한데 뜻밖의 결과가 나왔다.

이럴 줄은 정말로 몰랐다.

더는 아프지 않았다.

솔직히, 경이로웠다.

"...당신은 대체, 누굽니까?"

소설 속의 어느 세계에서는 검 한 자루로 대륙을 평정한 마검황. 그러나 이곳에서는 쑥뜸의 신세계에 눈을 뜬 데미안.

그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처음으로, 존댓말이 흘러나왔다.

25화. 참교육 (1)

"...당신은 대체, 누굽니까?"

돌팔이인 줄로만 알았다. 혹은 입담이 더러운 야매 의사인 줄 알았다. 그저 프로모터인 쿠스만이 면피용으로 보낸 사람일 거라고 보았다.

진통제를 공급해주지 못하니까. 이쪽의 불만이 커질까 상황을 수습하려고. 그저 '이렇게 너에게 신경을 쓰고, 성의를 보이고 있다'는 생색을 내기 위해 보낸, 그런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뜸인지 뭔지, 효과가 없으면 제대로 뜨거운 맛을 보여주려고 했는데.'

두 팔을 부러뜨려 버리리라고.

그렇게 다짐하고 있었더랬다.

한데 뜸을 다 받고 보니?

경악할 일이 벌어졌다.

통증이 사라졌다. 지긋지긋하던 후두부의 고통이 정말로 없어졌다. 이런 상쾌하고 맑은 기분은 처음이었다.

"당신, 돌팔이는 아니었군요."

데미안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라키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당연하지. 사람을 뭘로 보고."

라키엘은 내심 안도했다.

데미안의 표정이 아까와 달라졌다. 이쪽을 보는 눈빛도 180도 바뀌었다.

'10년 만에 대기업 면접 통과한 사람 같은 표정이네.'

아마도 쑥뜸이 제대로 효능을 발휘한 모양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쑥뜸의 열기가 낙인을 제대로 훼손한 것이겠지만.

'사실 오늘 해준 쑥뜸은 그저 수단이었을 뿐이지. 진짜 목적은 뜨거운 열기로 낙인을 지져서 그 형체를 훼손하는 것이었고.'

그것이 오늘 치료의 비결이었다.

화상을 입혀서 낙인의 모양을 뭉개는 것. 열기로 낙인 속에 마법진의 형태로 깃든 저주를 파괴하는 것. 그 의도가 제대로 먹힌 셈이었다.

'물론 아직 완전하진 않지만.'

데미안의 등에 새겨진 낙인은 컸다. 거의 활짝 펼친 손바닥 크기만 했다. 한데 쑥뜸은 지름이 고작 3센티에 불과했다.

그러니 앞으로 최소 열 번은 넘게 뜸으로 지져야 한다. 그래야 저 낙인을 완전히 훼손할 수 있다. 그 사실을 염두에 두며 라키엘이 말했다.

"그나저나, 아프던 곳은 어때?"

"괜찮군요. 말끔하고 상쾌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기분을 느꼈던 것이 언제였나 싶을 정도로."

"흠, 그래도 아직 완치된 건 아니야. 앞으로 몇 번은 더 치료받아야 해."

"그렇습니까."

"어. 뜸 받은 자리에 물집이 생길 거야. 그거 터뜨리지 마. 등짝이라 잘 때는 좀 따갑고 불편하겠지만 조금만 참아. 물집이 가라앉을 때까진 무리하거나 너무 기름진 건 먹지 말고."

"무리하지 말라니요?"

"과격한 육체 활동을 자제하란 거지."

"하면 검투는...."

"안 해도 될 거야. 내가 그렇게 되도록 해줄게."

정말이다.

진심이다.

곧, 그렇게 될 거다.

물론 이쪽의 계획을 모르는 데미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합이 잡히지 않도록 일정을 조율해주겠단 겁니까?"

"뭐, 대강은."

"제 프로모터인 쿠스만 씨가 그것까지 허락을...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데미안이 감탄한 기색을 보였다.

그가 진심 어린 눈초리로 물어왔다.

"하면, 당신은 누굽니까. 부디 이름을 알려주십시오."

"아까 말했잖아, 황태자라고."

"...네?"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

"...."

"쩝. 진짠데."

라키엘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데미안이 다 이해한다는 웃음을 지었다.

"괜찮습니다. 이름을 숨길 사정이 거겠지요. 드문 일은 아닙니다, 이쪽 바닥에서는."

"혼자 뭐래는 거야."

"지금은 이렇게 헤어지더라도 다음에 또 만날 때, 그때라도 이름을 알려달라는 뜻입니다."

"벌써 알려줬는데."

"그거 말고 진짜 이름 말입니다."

"쯧, 은근 대놓고 답정너네."

"예?"

"됐고. 어쨌거나."

라키엘은 데미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처음으로 웃음기를 지우고서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똑바로 듣고 꼭 지켜. 오늘 밤, 이곳 검투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도망치거나 잠적하지 말고 여기 잠자코 있어. 그래야 안전할 거야."

"...무슨 말입니까."

"의문도 품지 마. 그냥 여기 있어. 그러면 조만간 나와 다시 만나게 될 거야. 내 진짜 이름도 알 수 있을 거고. 방금 받은 치료도 계속 받을 수 있겠지."

"뭔가... 여기서 무슨 일이 생기는 겁니까."

"신경 쓰지 말고 이 방에만 잠자코 있으면 돼."

"만약 제가 그 말을 어기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쑥뜸 치료도 끝이겠지. 지금 잠깐 사라진 고통이 다시 몰려올 거고. 평생 그 고통에서 못 벗어나게 될 거야."

"정말입니까?"

"내 모든 걸 걸고 사실임을 맹세하지."

진심으로 말했다.

데미안이 이쪽의 눈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당신, 아무래도 단순히 쿠스만 씨의 명령만 받고 온 사람은 아닌 것 같군요."

"뭐, 대강은."

라키엘은 빙긋 웃었다.

내심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다. 성공!'

다행히 계획의 가장 중요한 퍼즐이 성공적으로 맞춰졌다. 방금 데미안에게 해주었던 당부.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도망치지 말라고. 잠적하지도 말고 얌전히 있어달라고.

그 당부를 하는 것이 오늘 계획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사실은 그 당부를 하기 위해 여기까지 직접 왔다. 위험을 감수하고 데미안을 만났고, 쑥뜸 치료를 해주었다. 그렇게 데미안에게 최소한의 신뢰를 얻었다.

'그래야 오늘 밤의 계획이 성공리에 진행됐을 때, 내가 원하는 것들을 전부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지금 자신이 품고 있는 계획. 진료비 청구 스킬을 얻은 직후에 그렸던 큰 그림. 그걸 통해 일방적인 이득을 얻으려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다. 그리고 방금 자신은 그 과정을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됐다. 이제 다음 단계로.'

라키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미안에게 눈짓으로 인사하곤 쿨하게 대기실을 떠났다.

"저기, 전하?"

대기실을 나서자마자 가르딘 경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걸어왔다. 그동안 입을 꾹 닫고 눈치만 보았던 보상이라도 받겠다는 듯, 속사포 같은 질문을 퍼부어 왔다.

"전하? 방금 생살을 지지던 치료법, 그건 뭐였습니까? 게다가 어째서 저자를 찾아가 거짓말까지 섞어가며 치료를 해준 건지.... 여긴 안전한 곳도, 합법적인 장소도 아닌 듯한데... 저는 오늘 밤의 이 상황을 도통 모르겠습니다."

"음, 그럴 거야. 그럴 수밖에 없을 거고."

"...예?"

"조금 있으면 자연히 다 알게 될 거라서. 일단 지금은 할 일부터. 날 좀 도와줘."

"어떻게 말입니까?"

"검정색 말총머리를 한 남자가 있는지 살펴봐. 제법 큰 덩치에 가늘게 찢어진 눈매를 지니고 있을 거야."

"아, 알겠습니다."

가르딘 경은 황태자의 말을 따랐다. 한편으로는 수많은 의문을 되삼켜야 했다. 오늘 밤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황태자의 태도였다. 분명 평생을 황궁에서만 살아왔을 텐데. 그마저도 그 시간의 절반은 병상에 누워서 지내왔을 텐데. 당연히 이런 불법적인 지하 검투장 같은 곳과는 일말의 인연조차 없을 텐데.

'그런데... 마치 이곳을 너무나 잘 아는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있었다.

그게 이상했다.

조금은 미심쩍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의문은 의문이고, 지시는 지시였다. 가르딘 경은 황태자가 말해준 인상착의를 염두에 두며 검투장을 훑어보았다.

철창 속 싸움을 구경하기 좋도록 배치된 테이블들. 누군가는 술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누군가는 담배 연기를 뿜어대고. 또 어떤 이는 도박판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테이블을 홀로 독차지하고 있는 어떤 사내가 보였다.

"저기, 전하? 찾은 것 같습니다."

"어디?"

"저쪽...."

가르딘 경은 티 나지 않도록 사내가 앉은 테이블을 가리켰다. 라키엘의 눈동자가 그쪽을 향했다.

"흐음."

아무래도 제대로 찾은 것 같다.

소설 마검황에 있던 수많은 일러스트. 그중에 딱 한 장, 데미안과 쿠스만의 모습이 함께 그려진 일러스트가 있었다. 그 일러스트의 모습이 저 말총머리 사내의 외모와 거의 흡사했다.

'하지만 확신하기는 이르지.'

일단은 확인부터.

라키엘은 성큼 움직였다. 놀라는 가르딘 경을 뒤에 두고 말총머리 사내의 테이블로 다가갔다. 누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사내의 맞은편 자리에 털썩, 태연히 앉았다.

"...."

말총머리 사내의 서늘한 눈길이 날아왔다. 그 눈길을 마주하자 소름이 오싹 돋았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이곳은 눈이 많은 장소였다. 다짜고짜 공격받는 일은 없을 거다. 그 사실을 마음속 보험으로 삼았다.

사내에게 물었다.

"쿠스만 씨?"

"난 그런 사람 모르는데."

"그럼 데미안은 알겠군요. 하나 물어봅시다. 내가 데미안 카이엔을 사고 싶은데."

"...."

"그가 댁한테 빚진 진통제 약값, 거기에 계약파기금, 전부 더해서 얼마를 주면 될까 해서."

"9백억 마젠."

"...."

"그 이하로는 턱도 없지."

"9백억이면 그쪽이 평생 벌 돈보다 훨씬 많은 금액일 텐데. 진심인가?"

"안 낼 거면 꺼지시고."

"...."

이쪽을 노려보는 쿠스만의 눈빛.

라키엘은 싱긋 웃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목적을 이루었다.

이 자가 쿠스만이 맞다.

확인을 마친 라키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르딘과 함께 지하 검투장을 떠났다.

그동안 쿠스만의 눈길은 라키엘의 뒷모습을 줄곧 쏘아보았다. 이내 라키엘의 모습이 출구 밖으로 사라진 직후.

"저놈, 이곳에선 처음 보는 놈인데."

쿠스만이 중얼거렸다. 손을 까딱, 움직였다. 옆 테이블에 있던 그의 수하가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음. 방금 내게 수작질을 걸던 비쩍 마른 놈, 뒤를 캐봐."

"어디까지 캐면 되겠습니까."

"뭐 하는 놈인지. 혹여 검투장에 고용된 몰이꾼인지. 아니면 다른 프로모터에게 붙어먹은 놈인지. 여차하면 고문을 해도 좋다."

"그 후에는 어떻게...."

"항상 그랬던 것처럼. 잘게 쪼개서 강물에 버려."

"알겠습니다."

수하가 자리를 떴다.

그때부터였다.

쿠스만은 라키엘에 대한 신경을 완전히 껐다. 자신이 보낸 수하는 그만큼 유능한 자였으니까. 한번 찍은 대상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납치하는 자였으니까. 그 후엔 실로 예술에 이른 경지의 고문기술을 선보이며 모든 정보를 캐내는 자였으니까.

'사흘? 이르면 이틀 안엔 알 수 있겠지.'

건방지게 수작질을 걸던 놈.

누구의 똘마니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의 수하에게 찍혔으니 이미 죽은 목숨이라 보아야 할 터였다.

'그보다는, 흐음. 데미안, 그놈을 어떻게 굴려먹어야 더 돈이 될까.'

요즘 마약성 진통제 공급이 들쑥날쑥해졌다. 참으로 골치였다.

'차라리 검투사 숫자를 줄여야 하나. 실력 없는 몇 놈은 못 이길 경기에 내보내야겠군. 그러면 약을 필요로 하는 입이 줄어들 테고. 남는 약은 데미안한테 팔면 되겠지. 놈은 대전료를 많이 받으니까. 그만큼 약값으로 더 많이 뜯어낼 수 있겠지.'

스스로 생각해봐도 훌륭한 계산이다. 쿠스만은 흐뭇한 기분으로 술잔을 들었다. 기울였다.

그때였다.

콰앙-!

갑작스러운 굉음.

검투장 출입문이 박살 났다.

실내의 소음 유출을 막기 위해 특별히 세 겹으로 두껍게 만들어진 출입문이었다. 한데 그런 튼튼한 문이, 마치 폭발이라도 하듯 흔적도 남지 않았다.

검투장에 있던 모두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쿠스만도 예외가 아니었다.

'뭐지?'

그는 긴장된 눈초리로 출입문이 있던 자리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조금씩, 자욱한 먼지 사이로 흐릿한 형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내의 실루엣이었다.

특히, 쿠스만에게 어쩐지 익숙한.

"...끄으... 윽...."

자욱한 먼지 속에서 한 발짝, 두 발짝. 비틀비틀 걸어나온 피투성이 사내가 풀썩 쓰러졌다. 그 순간, 쿠스만은 벼락을 맞는 것 같은 오싹함을 느꼈다.

저 피투성이 사내가 바로....

"델릭?"

방금 내보낸 자신의 수하였다.

대체 어째서? 왜? 저놈이 저런 꼴이 된 걸까. 누가 저런 짓을 한 걸까.

그때였다.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의 이름으로 명한다."

찬물을 뒤집어쓴 듯 고요해진 검투장에 울려 퍼진 낭랑한 목소리.

이윽고 흙먼지가 걷혔다.

중장갑 병력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들의 갑옷에 새겨진 화려한 문양.

그것은 마젠타노 황가를 나타내는 표식이었다.

즉, 저들의 정체는....

'황실 근위대?'

쿠스만은 두 눈을 부릅떴다.

저들이 어째서 여기에?

소름 돋는 의문과 경악이 치미는 순간. 중장갑 병력 사이에서 비리비리한 은발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은발의 사내, 라키엘의 입에서 항거불능의 명령이 떨어졌다.

"전부 밀어 버려."

스릉!

근위대가 검을 뽑았다.

라키엘이 쿠스만을 딱 가리켰다.

"특히. 저놈은 절대로 놓치지 말고."

"...!"

쿠스만의 심장이 16비트 자진모리장단으로 철렁, 내려앉았다.

26화. 참교육 (2)

스릉!

근위대가 검을 뽑았다.

지하 검투장에 모여 있던 도박사들. 몇몇 프로모터와 검투장을 소유한 조직원들. 그 밖의 수많은 이들이 어찌 반응도 해보기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전원! 현장에 있는 모든 자를 체포하고, 저항하는 자는 즉결처단하라!"

지휘관의 단호한 외침.

철컥거리는 갑옷 소리.

150인의 근위대가 전진했다.

타협 없는 토벌이 시작되었다.

테이블이 뒤집어졌다. 사람들이 넘어지고, 뛰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근위대원들의 눈과 귀는 그들보다 앞서 있었다. 뽑아든 검에는 자비가 없었고, 발길질과 노호성은 철벽같았다.

수많은 이들이 제압되어 체포되었다. 빈틈없는 진압작전 앞에 도박사, 프로모터, 조직원들 모두가 한낱 사냥감으로 전락했다.

그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대체 왜, 지금껏 은밀하게 잘 운영되던 지하 검투장에 무려 근위대가 들이닥친 것인지. 이해할 수도 없었고, 알 방법도 없었다.

'당연하지. 댁들이 그걸 어떻게 알겠어.'

순조롭게 진행되는 진압작전.

그 모습을 바라보며 라키엘은 빙긋 웃었다. 문득, 아까 별궁에서 출발하기 전의 일이 떠올랐다. 아직 해가 지기 전인 오후였던가.

'오늘 밤, 별궁에 배치된 근위대 전병력을 동원해야겠어.'

'예?'

눈을 휘둥그레 뜨던 별궁 근위대 지휘관. 이내 그가 안색을 살짝 굳혔던가.

'전하, 이곳에 배치된 근위대의 임무는 황명에 의해 별궁을 경비하여 전하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병처럼 아무 곳에나 동원될 수는 없다? 설령 그것이 내 지시일지라도?'

'송구하오나 정확한 말씀이십니다.'

'그럼 오늘 밤에 내 지시대로 움직여야겠네.'

'예?'

'날 지켜줄 일이 생길 거거든.'

그 이상의 자세한 이유나 목적은 말해주지 않았다. 시키는 대로 하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라고. 그렇게만 일러두었다.

지휘관은 여전히 의아해했지만 결국, 이쪽의 명령을 받아들였다. 이쪽이 가르딘 경과 함께 별궁을 나설 때부터 멀찍이 뒤를 따라왔다. 그리고 지하검투장이 있는 레스토랑 인근을 은밀히 봉쇄했다.

덕분에 이쪽의 예언(?)도 사실이 되었다.

'프로모터 쿠스만. 역시나 그 인간이 나한테 미행을 붙여준 덕분이지.'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사실은 예상했던 바였다. 소설 마검황의 프로모터 쿠스만이 항상 그런 식으로 행동했기 때문이었다.

'의심이 가는 사람,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위협이 될 것 같은 상대가 생기면 바로 미행을 붙였지. 납치와 고문에 능한 심복을 활용했어. 그렇게 상대의 약점을 잡거나 살인을 서슴없이 저지르며 자신의 위치를 지켰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보았다. 그래서 일부러 쿠스만과 접촉했다.

데미안을 사겠다고.

얼마면 되겠냐고.

상대가 응할 리 없는 거래를 제안하며 확인을 겸하여 이쪽의 존재를 노출했다.

그랬더니 그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미행이 즉각적으로 따라붙었다. 덕분에 그걸 본 근위대 지휘관은....

'극대노했지.'

감히 황족, 그것도 황태자를 미행했다. 심지어 놈은 수중에 흉기까지 지니고 있었다.

그 결말은 뻔했다.

이쪽에게 접근하자마자 근위대에게 제압되었다. 근위대장은 미행으로 붙었던 쿠스만의 심복에게 다음과 같은 죄명을 선물했다.

'황족 시해 미수.'

그걸로 끝이었다.

이쪽이 따로 시킬 필요도 없었다.

뚜껑이 제대로 열린 지휘관이 근위대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레스토랑을 전면 봉쇄하고, 지하 검투장으로 향하는 통로를 장악했다. 숨 쉴 틈도 없이 진격했다.

그리고 지금, 검투장의 모든 이를 무차별로 체포하고 일망타진하는 기염을 토해내고 있는 것이었다.

'후우, 장난 아니네.'

라키엘은 근위대의 토벌작전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과연 정예 중의 정예구나 싶었다. 전경으로 근무했던 경험 덕분에 그런 부분이 더욱 잘 보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흐뭇해졌다.

오늘, 이렇게 지하 조직을 상대로 정의구현을 해서? 혹은, 검투사들의 피를 빨아먹던 놈들을 혼내줘서?

전혀 아니었다.

애초에 정의구현 따위엔 관심도 없었다. 예전부터, 한국에서부터도 그랬다. 나 하나 먹고 살기에도 바빴다. 부모님 없이 대학을 다녀야 했다. 해보지 않은 아르바이트가 없었다. 그 와중에 공부까지 해냈다.

말 그대로 바득바득 기어 올라오며 살아온 삶이었다. 남을 살갑게 챙겨줄 여유 같은 건 느껴본 적도 없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목숨이 몇 달 남지 않은 자신이었다. 그걸 늘리기에도 빠듯한 처지였다. 한데 정의구현이니 뭐니 따위에 시간 낭비할 틈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 흐뭇함이 느껴지는 이유는 단 하나.

'이제 됐어. 이걸로 거의 다 됐다. 나한테 보너스 수명을 듬뿍 안겨줄 알짜배기 환자들을 풀코스 종합선물세트로 확보할 수 있게 된 거야.'

라키엘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대로 순조롭게 진행만 된다면.

자신만 정신을 똑바로 차린다면.

분명 그렇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안심하지 않았다.

아직 일은 끝나지 않았으니까.

"이봐, 다들."

그는 근접해서 자신을 호위하던 근위대원 셋을 불렀다.

"따라와."

근위대원들을 이끌고 검투장 안쪽, 으슥한 통로로 들어갔다. 오늘 밤, 반드시 잡아야 할 놈이 저곳에 있을 테니까.

"...헉! 허억!"

가쁘게 내뱉는 호흡.

쿠스만은 숨 가쁘게 뛰고 있었다. 온몸에서 땀을 비처럼 흘렸다. 한편으로 내심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그는 지금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다.

아무런 징조도, 징후도 없었다. 한데 이렇듯 근위대가 들이닥쳤다. 전혀 상상해본 적도, 예상한 바도 없던 일이었다.

'어떻게 그놈이?'

아까 자신을 향해 건방진 거래를 제안했던 놈이 떠올랐다.

데미안을 사겠다고.

얼마면 되겠느냐고.

시건방을 떨던 꼬락서니가 어찌나 가당찮던지. 바로 미행을 붙여주었다. 아마 다른 조직의 끄나풀이겠거니. 이쪽의 반응을 떠보려는 미끼겠거니. 그렇게만 여겼었다.

그래서 본보기로 삼으려 했다.

납치하여 고문하고, 처참하게 죽여서, 고깃덩이처럼 토막 낸 놈의 시체를 강물에 뿌리려 했다. 그놈을 보낸 배후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고 싶었다.

한데 지금 보니?

'어떻게... 그놈이 황태자일 수가 있는 거지?'

믿기지가 않았다.

처음엔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한데 그놈을 따르는 근위대가 진짜였다. 도저히 믿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대체 왜? 황태자가 왜 데미안을 사겠다는 거지? 나한테 왜? 어째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토벌작전은 너무나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저 뒤편에서 근위대원들이 자비도 없이 움직여댔다. 도망치려던 누군가는 강철 건틀렛을 낀 주먹에 맞아 턱이 박살 났다. 저항하던 누군가는 단숨에 손목이 부러졌다.

그 비명이 소름을 쭉 일으켰다.

'잡히면... 끝장이다!'

다행히 그는 몸놀림이 매우 빨랐다. 또한, 이곳 지하 검투장의 구조에 누구보다도 밝았다.

그는 주위의 모든 지형지물을 활용했다. 넘어진 테이블, 조명이 꺼지며 생겨난 그림자, 철창이 세워진 무투대, 때론 도망치는 누군가의 실루엣까지 철저하게 이용했다.

덕분에 근위대원들의 시야가 닿지 않는 사각지대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움직일 수 있었다. 그렇게 검투장의 메인홀을 빠져나왔다.

으슥한 통로를 통해 주류 저장고로 뛰었다. 그곳에 그를 구원해줄 비밀통로가 있었다.

'훅, 허억, 조금만 더!'

그곳으로 나가기만 하면 된다. 제아무리 근위대라도 그 통로는 모를 것이다. 애초에 검투장을 운영하는 조직의 핵심 간부, 그리고 몇몇 프로모터만 아는 탈출로니까.

'됐다! 다 왔어!'

조금씩 희망의 빛이 보였다.

쿠스만은 더욱 힘껏 뛰었다.

주류 저장고의 문이 바로 앞에 있었다. 그의 입가에도 환한 미소가 한껏 걸렸다. 그리고 저장고 문을 열어젖히는 순간.

"...어?"

그의 미소에 쩌적, 금이 갔다.

"무, 무슨?"

그가 믿기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과 동시에.

스릉!

검 세 자루가 그를 겨누었다.

쿠스만이 뒷걸음질쳤다.

검을 겨눈 이들도 그만큼 전진했다. 열린 창고 문을 통해 스며 들어간 희미한 빛이 검을 쥔 이들을 비추었다.

쿠스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근위대원? 이놈들이 여기에 어떻게?'

미리 와 있던 걸까.

마치, 이쪽을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그때였다.

"역시 여기로 올 줄 알았지. 뻔해. 안 그런가?"

"...!"

창고의 어둠 속에서 네 번째 인물이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그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쿠스만은 두 눈을 부릅떴다. 아까 자신에게 거래하자며 도발을 했던 놈. 한데 사실은 황태자였던 놈.

라키엘이 싱긋 웃었다.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되지? 어째서 내가 여기서 댁을 기다린 건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지?"

"...."

쿠스만은 할 말을 잃었다.

라키엘의 미소가 흐뭇하게 변했다.

'혼란스럽겠지.'

쿠스만은 이쪽이 소설 마검황을 읽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렇기에 이쪽이 소설을 통해 이 통로의 존재를 알았다는 사실 또한 모른다.

'원작에서 황태자 라키엘이 죽고 난 이후, 이곳에서 큰 화재가 일어났지.'

문득, 소설 마검황의 내용이 떠올랐다.

지하 검투장에 불이 났다. 2황자의 지하조직 토벌 작전 때문이었다. 그 사건 덕분에 데미안이 자유를 얻었다. 화재의 혼란을 틈타 이 통로를 이용해 도망쳤다.

그 와중에 등에 큰 화상을 입었다. 공교롭게도 낙인이 새겨진 자리였다. 덕분에 낙인의 저주까지 깨졌다. 진정한 자유의 몸이 된 것이었다.

라키엘은 소설 속 전개를 기억의 서랍 한구석에 접어 넣었다. 그리고 쿠스만을 향해 말했다.

"내가 어째서 여기 있는지는 그쪽이 알 바 아니고. 어쨌건 실망이야."

"...."

"사실 난 약값을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거든."

"...뭐?"

"약값 말이다. 약값. 세상에 다른 건 몰라도 약값 떼먹는 건 정말로 싫어서. 남이 나한테 그러는 것도 싫은 만큼, 내가 남한테 그러는 것도 싫어서."

"그게 무슨...."

"그래서 아까 내가 물어본 거였거든. 데미안 앞으로 달린 진통제 약값, 얼마나 쌓였느냐고. 얼마를 치르면 되겠느냐고. 기억 안 나나?"

"...."

"어쨌건, 난 호의로 거래를 제안했던 거다. 알겠어? 그 호의를 걷어찬 건 그쪽이고."

"무슨... 헛소리냐!"

쿠스만은 발끈했다.

이대로 시간을 끌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미적거리다간 다른 근위대원들까지 몰려올 것이다. 판단을 내린 쿠스만은 허리춤의 단검 두 자루를 뽑았다. 근위대원 셋을 향해 재빠르게 돌진했다.

그리고 한 방에 털렸다.

콰작!

"...!"

근위대원의 건틀렛 주먹이 쿠스만의 코를 뭉갰다. 쿠스만의 단검은 근위대원에게 닿지도 못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커억!"

콰당탕!

쿠스만이 피투성이 얼굴로 쓰러졌다. 근위대원 둘이 그에게 검을 겨누었다.

"...그, 끄흐으!"

쿠스만이 벌레처럼 버둥거렸다.

하지만 좀처럼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일어나 저항하는 대신, 잽싸게 무릎을 꿇었다. 애원 섞인 눈으로 근위대원들을 올려다보았다.

"제,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대로 맞아 쓰러지니 참교육이 된 걸까. 쿠스만이 얼굴이 피떡이 된 채로 애원하기 시작했다. 근위대원들을 향해 고개를 조아리고, 애원조로 두 손을 내밀었다.

"제가, 어리석은 생각으로 감히 저항을 했던 것 같습니다. 반성합니다. 그러니 제발, 더 때리지만 말아 주십시오. 그저 얌전히 있을 테니 제 손을... 묶는 걸로만 끝내주십시오."

"...."

근위대원들이 경멸의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겨우 한 대 맞았다고 이런 엄살이라니.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싶었다.

대원 하나가 포박용 포승줄을 꺼냈다. 그 모습에 쿠스만은 내심 미소를 감추었다. 그의 눈동자에 잔혹한 환희의 빛이 스쳐 갔다.

'됐다. 걸렸구나.'

그는 자신의 주특기를 떠올렸다.

단검을 활용한 전투?

아니었다.

그건 그저 호신용 수단일 뿐. 자신의 진정한 특기는 독을 이용한 암습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끄극!

그의 혀가 아랫어금니 하나를 바깥쪽으로 밀어냈다. 어금니가 손쉽게 밀려 잇몸에서 빠져나왔다. 아니, 그것은 어금니가 아니었다. 어금니 모양을 지닌 캡슐이었다.

그 캡슐이 잇몸을 벗어나는 순간.

까득!

그가 캡슐을 힘껏 깨물었다.

캡슐 속 장치가 작동을 개시했다.

'5초. 5초가 지나면 이 캡슐은 터진다.'

그리고 맹독성 폭발을 일으키며 주위의 인명에 큰 타격을 입힐 것이다. 독에 노출되는 즉시 안면이 마비될 것이다. 운이 나쁘면 실명될 것이고. 더 운이 나쁘면? 호흡 곤란을 일으키며 죽음에 이를 것이다.

'그러면 나는 유유히 도망치는 거고!'

이제 캡슐을 강하게 뱉으리라. 그 직후, 바닥을 굴러 거리를 띄우리라. 그러면 된다. 영문도 모르고서 맹독성 폭발에 노출되는 근위병 셋쯤은 손쉽게 무력화될 것이다.

그 후에는?

황태자 놈의 목을 그어 버리고 통로 밖으로 도망치면 되리라.

'그러니까... 네놈들은 끝이다!'

쿠스만은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5초.

깨문 캡슐을 입안에서 굴려 혓바닥 위에 올렸다.

4초.

숨을 들이마시며 혀를 둥글게 말았다.

3초.

대롱처럼 만 혀로 캡슐을 조준....

텁!

난데없는 손아귀가 뻗어왔다.

이쪽의 입을 틀어막아 버렸다.

"...!"

쿠스만은 경악했다.

다급한 눈길을 들어 올렸다. 손아귀로 이쪽의 입을 틀어막은 놈을 발견할 수 있었다.

황태자 라키엘.

놈이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었다.

더욱 의미심장한 말을 툭, 꺼냈다.

"어허. 어디서 함부로 뭘 뱉으려고. 사회적 거리 두기 몰라?"

"...읍?"

쿠스만은 경악했다.

문득, 소름 끼치는 깨달음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이놈... 설마... 내 비장의 수법까지... 전부 알고 있어?'

그 순간.

퍼석!

쿠스만의 입안에서 맹독 캡슐이 터졌다.

27화. 참교육 (3)

퍼석!

입안에서 맹독 캡슐이 터졌다.

쿠스만의 눈이 경악으로 홉떠졌다.

'...커헉!'

이럴 수는 없다.

이래서는 안 된다.

그의 다급한 눈길이 위쪽을 향했다. 그곳에 라키엘의 얼굴이 있었다. 쿠스만의 눈동자가 물었다.

'어떻게? 설마?'

진짜로 이쪽의 비장의 수단을 미리 간파한 걸까. 그래서 이쪽의 계획을 모두 알았다는 듯이 손을 뻗어 입을 틀어막은 걸까.

"...쿠! 쿠흡!"

혓바닥이 얼얼해졌다. 불에 지진 듯이 화끈거렸다. 화끈거림은 이내 망치로 두드리는 듯한 묵직한 통증으로 변했다.

혀가 굳어갔다. 입 안쪽의 감각이 사라졌다. 입술이 경직되고, 침이 뚝뚝 흘렀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안면 근육마저 경련했다.

'젠장! 제기랄!'

소름이 오싹 돋았다.

맹독탄은 자신의 주특기였다. 그 누구보다도 맹독탄의 위력을 잘 알고 있는 자신이었다.

쿠스만은 상황을 인정했다.

그토록 끔찍한 맹독탄이 입안에서 터졌다. 이대로 손 놓고 멍하니 있다간? 3분 안에 정신을 잃게 될 것이다. 그리고 30분 안에 숨이 끊어지겠지. 즉,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뭔가를 할 수 있는 시간이 3분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자신에겐 다행스럽게도 비상용으로 지니고 다니는 맹독탄 해독제가 있었다.

'빨리... 빨리...!'

떨리는 손을 움직였다.

조끼 안주머니로 손을 집어넣었다. 자신의 유일한 생명줄, 해독제를 꺼내려 했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텁!

난데없는 손아귀가 뻗어왔다. 이쪽의 손목을 움켜쥐어 가로막았다.

'...큭?'

해독제를 꺼내야 하는데!

쿠스만은 손아귀를 뿌리치려 했다. 하지만 팔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상황은 더 나빠졌다. 또 다른 손아귀가 뻗어왔다. 이번엔 자신의 조끼 안주머니로 쑥 들어왔다. 그리고... 마치 본인 물건 챙겨가듯 해독제 병을 꺼내 갔다!

'어?'

쿠스만의 가슴이 철렁.

그의 시선이 하염없이 해독제를 향했다. 해독제가 타인의 손아귀에 붙들려 이쪽에서 멀어졌다. 올라가고. 멀어지고. 대각선으로 쭈욱. 올라가다가.

누군가의 얼굴 앞에서 멈췄다.

라키엘의 얼굴이었다.

한데 라키엘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어? 어어?'

쿠스만이 어어 하는 사이.

라키엘이 벌린 입으로 해독제 병을 가져갔다. 이쪽의 눈을 빤히 똑바로 쳐다보며. 마치 보란 듯이.

뽕!

해독제 병을 따더니.

그대로 입에 털어 넣었다.

말려볼 틈도 없이 꿀꺽, 삼켜 버렸다!

'안 돼애애애애애!'

쿠스만은 비명을 질렀다. 굳어 버린 입술로 버둥버둥 욕을 하려 애썼다.

'이 개x끼! 악마 x끼야!'

유일한 희망이.

생명의 동아줄이.

저놈의 뱃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더는 살아날 희망이 없다.

쿠스만은 절망 속에서 몸부림쳤다. 안면과 목이 마비되는 걸 느끼며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절망감 가득한 게거품을 물며 입만 간신히 뻐끔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라키엘은 인상을 찌푸렸다.

'으으, 이거 엄청 쓰네.'

해독제가 상상했던 것보다 정말 심각하게 썼다. 전직 한의사로서 어지간한 쓴맛은 다 느껴봤다고 자부하는 편인데도, 삼킨 직후부터 얼굴이 펴지지가 않았다. 이건 마치 혓바닥이 발바닥으로 변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해독제를 뱉지는 않았다.

정신을 잃어가는 쿠스만을 더 농락하기 위해서? 혹은 쿠스만에게 더 큰 절망감을 심어주기 위해?

모두 아니었다.

그가 일부러 해독제를 빼앗아 먹은 데에는 이유와 목적이 있었다.

'병 주고 약 줘서 진료비 청구 스킬 써먹어야지.'

그래야 보너스 수명을 알뜰살뜰 획득할 수 있다. 그렇기에 해독제를 빼앗아 먹었다. 애초부터 쿠스만의 암습 방식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쿠스만 이 작자, 소설에서도 서너 번 저 기술을 써먹었지.'

어금니처럼 입속에 끼우고 다니는 맹독탄. 그걸 기습적으로 뱉어서 터뜨리는 암습법.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쿠스만이 근위대원에게 덤벼들다가 일부러 맞고 쓰러졌다는 사실도. 그렇게 상대를 안심시키고는 맹독탄을 뱉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덕분에 타이밍 좋게 놈의 입을 막았다. 입안에서 맹독탄이 터지게 했다.

'그리고 해독제를 빼앗았고.'

쿠스만이 스스로 해독제를 먹게 두면 안 된다. 그러면 쿠스만이 셀프로 치료를 하게 된 셈이라, 이쪽이 진료비 청구를 할 수가 없게 된다.

당연히 보너스 수명도 못 얻는다.

그렇다고 해서 쿠스만에게서 해독제를 빼앗아 먹여준다면?

'그것도 셈법이 애매해지지.'

라키엘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그 방법 또한 자신이 쿠스만에게 '진료행위'를 해준 걸로 인정받기 어려울 것이다.

'해독제를 만든 사람이 쿠스만이니까. 쿠스만이 만든 해독제를 내가 단순히 먹여주기만 하는 행위가 되는 거니까. 즉, 내가 해준 진료행위로 인정될 확률이 낮다는 거지.'

아마도 진료비 청구를 사용할 수 없을 거다.

보너스 수명도?

당연히 못 얻는다.

그건 너무 아쉬웠다.

그래서 쿠스만의 해독제를 빼앗았고, 먹어 버렸다. 그리고 미리 비워두었던 써클 슬롯에 저장했다.

[1번 슬롯의 저장이 완료되었습니다.]

[1번 슬롯 현황]

[최대 용량 : 10 리터]

[현재 저장 용량 : 0.01 리터]

쓰디쓴 해독제가 알차게 담긴 써클 슬롯. 그걸 보자 절로 든든함이 느껴졌다.

'자, 그럼 해보자.'

라키엘은 쓰러진 쿠스만을 살폈다. 게거품을 잔뜩 문데다 눈이 허옇게 뒤집어져 있었다. 아마 이대로 둔다면 반 시간도 못 버틸 것 같았다.

'할 수 있어.'

밥상은 차려졌다. 이젠 이놈을 살려서 보너스 수명을 얻을 때다. 라키엘은 쓰러진 쿠스만의 몸을 딱지 뒤집듯 홱 뒤집었다.

그의 손이 신속하게 움직였다.

엎드린 놈의 등짝을 살폈다.

양쪽 견갑골 사이. 제5흉추극돌기(spinous process of the 5th thoracic vertebra) 아래. 척추 양쪽으로 1.5촌 지점을 짚었다.

심수혈(心兪穴)이 그곳에 있었다. 강하게, 온 힘을 실어서 엄지 끝으로 눌렀다.

"...뿌그아아아아아악!"

혼절해 있던 쿠스만의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 입안 가득 머금고 있던 게거품을 브레스처럼 푸확 뱉으며 웅장한 비명을 내질렀다.

라키엘은 흐뭇하게 웃었다.

'제대로 짚었네.'

심수혈을 짚었더니 아주 제대로 난리가 났다. 즉, 심장으로부터 몰려온 사기(邪氣)가 심수혈에 뭉쳤다는 뜻이다.

'소설 내용 그대로다. 쿠스만이 쓰는 독은 안면과 신경을 마비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심장에 큰 타격을 준다고 했지. 심장박동이 점차 불규칙해지다가 멈추게 된다고 말이야.'

즉, 그의 맹독탄은 심장을 해하는 성분일 것이라 보았다. 하여 심장의 탁한 기운이 주로 쌓이는 심수혈을 짚었다.

진단은 성공적이었다.

'그럼 이제 해독제 투입.'

[써클 슬롯에 저장된 물질이 방출됩니다.]

키이이이잉-!

써클이 힘찬 회전을 시작했다.

슬롯에 저장된 해독제를 압축했다. 증폭된 해독제 성분을 마나에 실었다. 심장으로부터 어깨로, 팔뚝으로, 손끝으로. 쿠스만의 심수혈로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밀어 보냈다.

"...그! 뿌그흑!"

쿠스만이 온몸을 떨어댔다.

이쪽이 밀어 보낸 해독제 성분이 그의 심수혈로 착실하게 들어갔다. 그때부터였다. 라키엘은 해독제가 그의 몸속 어떤 경로로 퍼지는지, 아스라한 심법을 통해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엔 해독제 성분이 심수혈을 우물로 삼아 뭉쳤다. 이내 이쪽의 강한 지압에 밀려 이동을 시작했다.

심수혈을 출발하여 몸통의 중심부로 번졌다. 그곳의 횡경막을 어루만지며 소장(小腸)으로. 다시 가지가 갈라지듯 위로 이어졌다. 목구멍과 양쪽 눈으로 스몄다. 나머지는 폐부(肺腑)를 지났다. 겨드랑이의 가장 우묵한 곳으로 흘러갔다.

그곳에 수소음심경(手少陰心經)의 가장 윗혈이라 불리는 극천혈(極泉穴)이 있었다.

해독제가 극천혈에 스몄다.

수소음심경을 따라 번졌다.

팔꿈치의 소해혈(少海穴)을 지나. 손목의 음극혈(陰郄穴)과 신문혈(神門穴)을 거치더니. 손바닥 안쪽의 소부혈(少府穴)을 강하게 때렸다.

그 충격이 쿠스만의 몸속으로 널리 확장되었다. 메아리처럼. 소리치고 되돌아왔다. 마침내 심장에 깃들어 전신의 혈관을 따라 퍼져갔다.

동시에 쿠스만의 몸부림이 잦아들었다. 얼굴이 지극히 평온해졌다.

'죽은 건 아니지?'

재빨리 놈의 호흡을 체크했다. 다행히 편안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마침내, 기다리고 기대했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딩동!

[당신은 적절한 해독제의 사용으로 환자 : 쿠스만을 성공적으로 진료하였습니다. 그는 심각한 중독 증상에서 벗어났으며, 적절한 안정을 취할시 별다른 후유증 없이 완치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진료비 청구 (Lv.1) 스킬이 발동됩니다.]

'됐다!'

라키엘은 환호했다.

계획이 제대로 들어맞았다. 그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후속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환자 : 쿠스만은 당신의 해독 진료를 통해 21년 2개월의 기대수명 연장 혜택을 받았습니다. 이에 당신은 21년 2개월의 1/2000에 해당하는 보너스 수명을 정산받습니다.]

[3.81일의 보너스 수명이 계산되었습니다.]

[정산되는 수명의 최소 단위는 1일입니다.]

[정산되는 보너스 수명이 반올림 처리됩니다.]

[총 4일의 보너스 수명이 정산됩니다.]

...찰랑!

일순간, 뭔가 청량한 기분이 전신을 감쌌다. 그리고 그 기분을 증명해주는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예상 기대수명 : 118일]

"...."

늘어났다.

정말로 기대수명이 4일이나 팍 늘어났다.

'...이거지!'

남을 진료해준 대가로 보너스 수명을 획득했다. 게다가 나쁜 놈한테 병 주고 약 주며 얻어냈다. 이보다 바람직할 수가 없었다.

'후환을 제대로 제거한 셈이기도 하고.'

소설 속 쿠스만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그는 굉장히 집요한 자였다. 자신에게 해가 될 인물은 죽을 때까지 물고 늘어지는 타입이었다.

한데 만약 오늘 놈을 놓쳤다면?

두고두고 성가신 존재가 됐을 것이다.

"연행해."

축 늘어진 쿠스만이 근위대원들에게 끌려갔다. 검투장으로 돌아와 보니, 그곳의 토벌작전도 대강 마무리가 되고 있었다. 포박된 수많은 이들을 지나쳤다.

그때였다.

"저기, 전하?"

지금껏 묵묵히 뒤를 따르던 가르딘 경이 말을 걸어왔다.

"저기, 제가 정말로 궁금해서 이러는 건데 말입니다."

"응. 괜찮으니 물어봐."

"예, 전하. 혹시... 오늘 밤의 이 일들, 전부 계획하셨던 겁니까?"

"어."

"...."

"왜?"

"아, 아닙니다."

가르딘 경은 대답을 얼버무렸다. 무의식중에 감탄사를 내뱉을 뻔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전하가... 이런 분이셨나.'

항상 병치레만 하던 분이셨다. 그래서 보살피고 보호해야 할 분이라고면 여겼더랬다. 한데 오늘 밤의 모습을 보니 아니었다.

'레스토랑 지하에 이런 곳이 있는 줄은 어떻게 아신 걸까.'

자신은 단골이면서도 몰랐다.

한데 황태자는 어떻게?

섣불리 짐작이 가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다른 수단이 있으신 건가. 황족이니까.'

아마도 접하는 정보의 양과 깊이가 다르긴 할 터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름 수긍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감탄도 들었다.

'우리 전하께서... 이런 면도 있으셨구나.'

어느 순간부터 강단이라는 것을 지니게 되셨다. 종종 사람을 깜짝깜짝 놀래주며 감탄하게 하신다. 게다가 오늘 밤에 벌인 일의 결과를 생각하면 더욱 감탄이 나왔다.

'사람들이 모르는 사이에 황도 한복판에서 이런 지하조직이 크고 있었던 거로구나. 치안을 해치고 황도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일종의 썩은 살이었던 거지. 한데 전하께서 그걸 일거에 잘라내신 셈이고.'

덕분에 황도의 안녕과 공공의 질서를 지킬 수 있게 됐다. 정의로운 사회를 조금 더 이룩하게 됐다.

그걸 위해 전하께서 용략을 발휘하신 거로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새삼 가슴이 벅찼다. 괜히 자신이 뿌듯해지기까지 했다. 그렇듯 가르딘 경은 초롱초롱해진 눈망울로 라키엘의 뒤를 따랐다.

덕분에 라키엘은 뻘쭘(?)해졌다.

'후우. 가르딘 경, 무슨 생각으로 나 쳐다보는지 대강 알겠네.'

눈치로 느껴졌다.

저 아재가 뭔가 오해를 하고 있구나. 오늘 밤 내 의도를 굉장히 숭고하고 거룩한 뭔가로 여기고 있구나.

'그런 거 아닌데.'

쓴웃음이 몰려왔다.

그는 검투사 대기실로 걸음을 옮겼다. 대기실 앞은 어수선했다. 근위대원 서넛이 쓰러져 기절해 있었다. 나머지 근위대원 수십 명이 통로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맞은편에 데미안이 보였다.

데미안의 뒤편으로 검투사들도 보였다. 한 마디로, 근위대원들과 데미안이 대치하고 있었다.

"쯧. 얌전히 기다리면 된다고 그렇게 일렀더니."

일부러 목소리를 키웠다.

그 목소리가 닿은 것일까.

데미안이 흠칫하는 게 보였다. 이내 녀석의 눈길이 이쪽을 향했다. 그 눈동자가 다시금 흠칫. 이내 경악으로 부릅뜨는 두 눈.

그 모습에 절로 웃음이 빙긋 나왔다.

"이제 믿겠어? 내가 황태자라고 밝혔던 거."

"...."

고개를 끄덕인 걸까.

아마도 그런 것 같다.

근위대원들을 겨누고 있던 데미안의 검이 스르륵 내려갔다. 사납던 기세도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 모습에 다시금, 미소가 나왔다.

'공공의 이익? 정의로운 사회?'

아마도 가르딘 경이 품고 있을 오해. 그걸 생각하니 조금은 민망해졌다. 사실 이쪽은 그런 숭고한 의도 같은 거, 전혀 없다. 남을 위해 헌신하는 삶 같은 것을 추구해본 적도 없다.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 못 된다.

그럴 거라는 기대도 감히 하지 않는다.

'난 그저 더 오래 살아남기 위해 오늘 밤의 일을 추진했을 뿐이니까.'

소설 속 주인공인 데미안 카이엔.

그의 뒤로 늘어선 검투사들.

그들을 향해, 라키엘은 첫 환자를 맞이하는 영업력(?) 충만한 미소를 활짝 떠올렸다.

28화. 쑥뜸 클리닉 (1)

데미안은 눈을 떴다.

이내 보이는 것은 비현실적인 광경. 자신의 몸이 작아져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려져 있었다.

여섯 살? 일곱 살?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것은, 방금 숨진 여인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

어머니다.

기억 속의, 임종을 맞이한 직후의 어머니의 모습 그대로다. 비로소 데미안은 깨달았다. 자신이 그날의 꿈을 꾸고 있음을. 이 빌어먹을 꿈이 자신의 가슴 속 불길을 다시금 일깨우고 있음 또한.

이날이 바로 세상에 홀로 남겨진 날이었다. 아니, 버려진 날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뭐든지 다 했다.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굴러 왔다. 하지만 단 하나, 가슴에 품은 목적만은 잃지 않았다.

그건 바로....

"...."

데미안은 다시 눈을 떴다.

이번에는 현실의 광경이 그를 맞이했다.

짹, 째잭....

잠에서 깨어나며 새 지저귀는 소리를 들어보는 것이 얼마 만일까. 적어도 최근 몇 년의 기억 속엔 없던 일이었다. 침대 옆쪽, 커다란 창가로 스며오는 아침 햇살도 낯설었다.

살결에 스치듯 보드라운 베개와 침구도. 신경통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아침도. 모두 낯설기는 매한가지였다.

사락.

몸을 일으켰다.

등가죽 일부가 쓰라리고 따끔거렸다. 어젯밤, 쑥뜸에 지져졌던 자리였다. 그 생생한 자극이 그를 완전한 현실로 돌려놓았다.

지난밤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

그래, 여긴 별궁이지.

황태자가 머무른다는 궁전.

그리고 나는....

'황태자를 따라 여기로 왔지.'

지난밤에 황태자에게 받았던 쑥뜸 치료가 떠올랐다. 뜨거웠다. 마치 인두로 지지는 듯한 통증이었다. 한데 그걸 참아내고 나니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거의 몇 년째 자신을 괴롭혔던 지옥 같던 신경통이 사라졌다. 변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젯밤, 황태자는 근위대를 동원하여 지하 검투장과 프로모터를....

그때였다.

똑똑.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이윽고 들려오는 점잖은 목소리.

"깨어났는가? 전하께서 찾고 계시니 의복을 갖춰서 나오도록 하게."

"...."

마침 궁금한 게 많던 참이었다.

왜 황태자가 직접 나서서 지하 검투장을 토벌했는지. 어째서 지난밤 자신을 찾아와 치료를 해준 건지. 무엇을 위해 나머지 검투사들까지 별궁으로 데려온 건지.

'대체 왜, 이런 호의를 베푸는 건지.'

궁금했다.

미심쩍었다.

지난밤, 잠들기 전까지 짐작을 거듭해봤지만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물어보고 싶었다. 데미안은 침대 옆에 놓인 새 셔츠를 걸치고는 밖으로 나갔다. 복도에선 신사적으로 잘생긴 중년인이 이쪽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젯밤에 본 기억이 있는 얼굴이었다.

"반갑네. 황태자 전하의 주치의인 피에로 가르딘일세."

"...데미안 카이엔입니다."

데미안은 가르딘 경의 모습을 힐끗 확인했다. 분명 어젯밤 황태자의 곁에 묵묵히 착 붙어 다니던 인물이다. 호위로 붙은 사람치고는 자세나 움직임이 다소 어설프다고 느꼈는데, 역시나 의사였구나 싶었다.

"안내할 테니 따라오게."

가르딘이라는 사람을 따라 복도를 걸었다. 어디 하나 정돈되지 않은 구석이 없는 정갈한 바닥. 치장한 듯, 치장하지 않은 듯, 화려함을 억제한 와중에 화려함이 엿보이는 실내.

"...."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퀴퀴한 곰팡내 가득하던 지하검투장과는 너무나 달랐다. 그런 복도와 계단, 모퉁이를 수없이 오르내리고 건넜다. 그 사이에 지나치는 근위병들의 숙덕거림도 어렴풋이 들려왔다.

"저 사람입니까? 어젯밤에 3분대를 애먹였다는 검투사가?"

"어, 맞아. 분명해."

"혼자서 근위대원 다섯을 상대하고 셋을 때려눕혔다던데... 그거 혹시 과장 아닙니까?"

"절대로 아닐세. 내가 봤거든."

"직접 보셨단 말입니까?"

"으음. 엄청나더군."

"얼마나 엄청났길래...."

"뭐랄까. 그런 식으로 검을 다루는 건 처음 봤다네. 우리가 익힌 정규 검술? 그런 것과는 결부터가 달랐다고 해야겠지. 검술이라면 당연히 지니고 있어야 할 규칙과 법칙, 이를테면 틀 같은 게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그럼 그거, 근본도 없는 마구잡이 검술 아닙니까?"

"마구잡이 검술이라. 어쩌면 맞겠지. 하지만 그 마구잡이 검술로, 제국에서 가장 정교하게 다듬어진 검술을 익힌 근위대원 셋을 죽이지도 않고 때려눕혀 제압했다면 말일세.... 과연 그걸 단순한 마구잡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건...."

"인간의 형상을 한 맹수가 검술을 익히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나는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네."

"그거, 칭찬이겠지요?"

"당연하지. 듣기로는 저자가 지하 검투장의 챔피언이었다던데."

"저자가요?"

"으음, 최근 2, 3년째 적수를 찾을 수 없었다더군. 싸울 상대가 없어서 트롤 따위와 싸웠다던가."

"...트롤이요?"

"음."

"그거, 사람이 혼자서 잡을 수 있는 겁니까?"

"나도 모르지. 해본 사람이 별로 없을 테니까. 중대장님이면 가능하려나."

"힘들 것 같은데요."

"그렇겠지?"

"예. 그나저나, 전하는 저자를 왜 데려온 거랍니까?"

"나라고 그 속을 알겠나. 다른 검투사들도 모조리 데려온 걸 보면 뭔가 생각이 있으신 거겠지?"

"한데 그 생각이 뭔지 도통 모르겠지 말입니다."

"하하. 동감일세."

어느새 저만치 멀어진 근위대원들.

그들이 흘리는 너털웃음.

그 끝자락에 데미안도 한마디를 덧붙여주고 싶었다. 자신과 검투사들을 왜 별궁으로 데려온 건지, 이쪽도 모르겠노라고. 아니, 댁들보다 내가 더 궁금하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얼마나 더 걸었을까.

"다 왔네. 이곳일세."

앞서 가던 가르딘 경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가리키는 커다란 문. 안쪽에 널따란 홀이 있었다. 원래는 연회 등의 용도로 쓰이는 장소인 듯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이건...."

데미안은 홀에 놓인 열네 개의 침상을 둘러보았다. 새하얀 시트로 정리된 깔끔한 침상이었다. 그리고 먼저 온 검투사들이 어색한 표정으로 각각의 침상에 걸터앉아 있었다.

"뭡니까, 여긴."

"뭐긴. 진료실이지."

대답은 곁의 가르딘 경이 아닌, 다른 이가 돌려주었다. 데미안은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보았다.

그곳에 황태자가 있었다.

이쪽을 향해 어깨를 슬쩍 으쓱이며.

"왔으면 대강 자리 잡아. 다 모이는 대로 진료 시작할 거니까."

"...."

데미안은 황태자와 가장 가까운 침상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황태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째서, 왜 우리에게 이렇게 잘해주시는 겁니까."

내내 궁금했다.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젯밤에 왜 굳이 신분까지 숨기며 자신을 몰래 찾아와 호의를 베풀었던 건지. 프로모터와 검투장을 싹 쓸어버리며 자신과 검투사들을 그 구렁텅이에서 건져준 건지. 어째서 자신들을 별궁에 머무르게 해주는 건지도.

하나같이 이해가 되지 않는 점들 투성이였다. 한데 황태자는 여전히 의미심장한 웃음만 싱긋 머금었다.

"내가 많이 아프거든."

"...예?"

"그래서 그쪽들이 필요한 거라고."

탁탁, 미리 준비한 쑥뜸봉을 정리하며 라키엘이 고개를 들었다. 데미안과 검투사들을 주욱 둘러보았다.

이쪽을 보는 데미안의 시선.

나머지 검투사들의 눈빛.

하나같이 의아해하고, 한편으로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마치 치과 대기실에 앉혀둔 초등학생들 같았다.

사실 라키엘도 알고 있었다.

저들이 이쪽의 호의에 마냥 안도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오히려 이쪽이 베푸는 호의를 의심하고, 불안해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당연하지. 내가 잘해주는 게 맥락 없게 느껴지겠지. 이건 뭐 봉사활동 하듯이 퍼주는 것도 아니고. 그 이유가 짐작도 안 되겠지, 저들 입장에선.'

사실 자신의 목적은 보너스 수명이었다.

데미안을 비롯한 수많은 검투사들. 저들이 겪고 있을 낙인의 저주. 저주 때문에 생겨나는 신경통. 그걸 치료해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보너스 수명을 퍼 받을 계산이었다.

물론 더 쉽고 빠른, 다른 방법이 있긴 했다. 사실은 굳이 검투사들을 구해올 필요도 없었다.

'그냥 빈민굴에 가기만 하면 되지.'

그곳엔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들을 치료해주면 훨씬 많은 보너스 수명을 쉽게, 많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라키엘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너무 위험해. 리스크가 너무 커.'

빈민굴의 위생 상태를 생각해보면 그랬다. 매독, 결핵, 그 밖의 수많은 이름도 모를 전염병이 암암리에 퍼져 있을 것이다. 한데 치료를 하겠답시고 그런 곳을 들락거린다면? 그냥 있어도 골골거리는 이런 몸으로?

'그러다간 온갖 전염병에 당첨되겠지. 약해빠진 몸인 만큼 면역력도 밑바닥 수준일 거니까.'

그러면 안 된다.

이런 약한 몸으로 전염병에 덜컥 걸리면 끝장이다. 손도 써보지 못하고 죽어서 염라대왕과 진로상담을 하게 될 거다.

라키엘은 그런 결과는 사양이었다. 보너스 수명을 조금 더 빠르게 챙기겠답시고 목숨까지 거는 리스크를 짊어지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였다.

데미안과 검투사들의 신경통. 저걸 고쳐주는 안전한 방법으로 보너스 수명을 차근차근 챙기리라 다짐했다. 마침 다행(?)스럽게도, 저들의 신경통이 단순한 통증으로만 끝나는 질환이 아니기도 했다.

'조금씩 신체를 좀먹지. 마치 기생충처럼. 몇 년간 몸을 피폐하게 만들고 마나의 순환을 엉망으로 부순다고 소설에 나와 있었어. 그걸 그대로 방치하면?'

낙인이 새겨지고 10년쯤 지나면 폐인이 된다고 했다.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다고도 했다.

그런 저들을 구해준다면?

이득이 쏠쏠할 것이다.

'저들 대부분이 이십 대 초중반, 많아 봐야 삼십 대 초반이니까. 낙인의 저주를 풀어주면 팍팍 늘어날 기대수명이 제법 넉넉할 거란 말이지. 그러면 내가 덩달아 얻을 보너스 수명도 짭짤할 거고.'

자연스레 그런 계산이 가능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줄 수는 없었다. 남을 진료해주면 보너스 수명을 얻는다는 사실도, 그런 메시지가 자신에게만 보인다는 것도, 말해줘 봐야 누가 믿겠는가. 오히려 미친놈 취급만 받을 것이다.

'그러면 곤란하지.'

검투사들은 이쪽의 진료를 받을 환자다. 우선 저들의 불안감을 지워줘야 한다.

의술을 제공하는 자.

진료를 받는 환자.

둘 사이에 신뢰감과 유대감이 있어야 긍정적인 진료의 효과가 뿜뿜 샘솟는 법이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지금은 적당한 거짓을 섞어서.'

이쪽이 베푸는 호의의 이유와 목적을 알려주는 것이 나으리라. 계산을 마친 라키엘은 입술을 촵촵 적셨다. 적당한(?) 거짓말을 혓바닥에 착착 올렸다. 야물딱지고 뻔뻔하게 발사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딨나. 생각해보도록. 내가 그쪽들을 그저 단순한 호의로 구해주고, 은혜라도 베풀듯이 별궁으로 데려온 줄 아는가? 착각하지들 않았으면 좋겠군."

검투사들이 귀를 쫑긋거렸다.

좋은 반응이다.

내심 미소를 머금고서 말을 이어갔다.

"하여 방금 밝혔듯이, 내가 조금 아프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병이 많지. 이 사실은 다들 익히 들어 알고 있겠지?"

"...."

몇몇 검투사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건강 최악의 골골거리는 약골 황태자. 이 제국에서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까.

라키엘이 계속 말했다.

"한데 기존의 황궁 의사들은 그런 내 병을 다스리질 못하더군. 아무리 다양한 치료를 받아도 내 지병은 나날이 악화될 뿐이었다. 하여 내가, 독자적으로 대안이 될 치료법을 찾는 중이기도 하고."

"...."

"이쯤 이야기를 했으니 몇몇은 알아차렸을 것이다. 맞아. 데미안 카이엔? 그쪽도 내 뜻을 짐작하게 된 것 같군."

"...예, 전하."

"짐작한 걸 들어볼까?"

"혹시 저희를, 그 새로운 치료법의 테스트를 위해 데려온 겁니까?"

"정답이다."

물론 잘못 짚은 정답이지만.

라키엘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자신이 의도한 대로 저들이 오해를 해주고 있다. 바라던 바였다. 그는 검투사들을 둘러보았다.

"방금 데미안이 말한 대로다. 나는 그쪽들을 새로운 치료법을 시험하기 위한 대상으로 삼을 생각이야. 그래서 검투장을 쓸어버린 거고, 모두를 이곳으로 데려와 좋은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하게 된 거지. 앞으로 온몸을 바쳐 새 치료법의 개발에 힘써줄 모두를 위해 내가 제공하는 보상이라고 보면 되겠군."

"...."

검투사들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실험용 대상으로 자신들을 데려온 거였다니. 하지만 라키엘은 개의치 않고 준비한 말을 덧붙였다.

"아, 그리고 또 하나. 이미 그 테스트를 가장 먼저 받은 사람이 있다. 바로 여기, 데미안 카이엔이 어젯밤 내게 첫 치료를 받았고 효과를 느꼈지. 그렇지 않나?"

"...맞습니다."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검투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첫 치료를 받았고, 신경통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

검투사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개중에 몇몇은 고개를 끄덕였다. 챔피언인 데미안이 증인이라면, 조금은 믿을 수 있겠다는 듯이. 그 분위기를 읽은 라키엘이 쐐기를 박았다.

"그래서 혹시, 이제부터 시작할 치료가 불안한 사람?"

"...."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라키엘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샘솟았다.

'됐다. 성공이야.'

검투사들의 반응을 보며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저들이 환자로서 이쪽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를 품게 되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걱정 없이 마음껏 지져줄 수 있겠네.'

새삼 말하는 거지만, 쑥뜸은 뜨겁고 아프다. 그걸 불평 없이 견뎌내려면 한의사에 대한 신뢰감은 필수다.

이렇게 아파도 참고 받으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 설령 피부에 화상이 생겨도. 그것 때문에 고생을 하더라도. 더 아픈 곳을 낫게 해주는 치료라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딱 입병 났을 때 바르는 전설의 명약 알보-세븐 같은 거거든, 쑥뜸이.'

단기간의 고통.

치료를 위한 불가피한 통증.

그걸 넘어서면 찾아올 치유의 파라다이스.

쑥뜸을 통해 저들을 얽어매는 고통의 사슬을 끊어주리라. 그렇게 보너스 수명을 알차게 획득하리라.

라키엘은 다짐하며 손뼉을 쳤다.

"자아, 주목. 그럼 바로 치료를 시작하지. 다들 셔츠 탈의하고 침상에 엎드립시다!"

그때부터였다.

라키엘의 낙인 제거 쑥뜸 클리닉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훗날, 이곳에 황태자의 '별궁 한의원'이 본격 오픈되는 미래로의 웅장한 첫걸음이기도 했다.

29화. 쑥뜸 클리닉 (2)

"마음의 준비는 되셨나?"

"예, 옙."

"긴장 풀어요. 안 죽어."

"옙."

"자아, 갑니다."

"흐읍!"

치이이이익-!

뜸봉이 맹렬하게 타올랐다. 쑥내가 삽시간에 확 번졌다. 잔뜩 긴장한 검투사가 등을 꼼지락거렸다. 라키엘은 검투사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좀 뜨거울 거야."

"...그흐읍."

"그래도 매일 찾아오던 통증에 시달리는 것보단 이게 나을 거니까 조금만 참아. 고통은 짧고 기쁨은 긴 법이야."

"아, 알겠... 습니다."

침상에 엎드린 채 부르르 떨며 인내력을 풀가동하는 검투사. 라키엘은 그런 검투사를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홀을 둘러보았다.

원래는 연회 등의 행사를 위해 사용하는 드넓은 공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새하얀 침상 열세 개가 가지런히 놓인, 임시 진료실로 변신해 있었다. 그런 이곳이 온통 쑥 타는 향기로 가득했다.

'아, 옛날 생각난다.'

엎드린 채 쑥뜸을 받는 열세 명의 검투사, 아니, 환자들. 그 모습을 보니 불현듯, 대한민국에서의 시절이 떠올랐다.

빚을 내가며 어렵사리 개업했던 '부경 한의원'. 동네 커뮤니티에선 일명, 부킹 한의원이라 불렸던 자신만의 공간. 나름 괜찮게 꾸려가던 한의원이었다. 꾸준히 찾는 단골 환자들도 제법 있었다.

그 빌어먹을 코로나 사태가 터지기 전까진, 확진자가 방문하기 전까진, 그 사실이 동네 커뮤니티에 입소문으로 쫙 퍼지기 전까진, 분명 그랬더랬다.

"...."

따지고 보면 나, 양화대교에서 떨어졌는데. 아마도 한강에 빠졌을 텐데. 난 거기서 실종 처리된 걸까. 그럼 남겨진 한의원은 어떻게 됐을까. 우리 간호사님들 김쌤, 이쌤, 퇴직금도 챙겨드려야 하는데.

'쯧, 생각하지 말자.'

괜히 우울해질 뻔한 라키엘은 고개를 흔들어 끈적대는 상념을 털어냈다. 이젠 그곳으로 돌아갈 방법을 모르겠다. 솔직히, 딱히 돌아가고 싶지도 않다. 돌아간다고 해서 딱히 나아질 건덕지도 없을 거다.

그러니 생각하지 말자.

신경 쓰지 말자.

여기서 맞닥뜨린 지금의 현실에 충실하자.

'그러면... 꿀맛 인생을 평생 즐길 수 있을 거니까.'

황족 라이프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 건강과 수명 문제만 해결하면 된다. 그러면 황족의 지위를 누리며 평생 원 없이 탱자탱자 만수르급 백수 라이프를 만끽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집중하자.

라키엘은 다짐하며 검투사들의 등짝에 올려진 뜸봉을 살폈다. 다 탄 뜸봉을 치우고, 재를 털어주었다. 뜸봉으로 생긴 화상 물집에 연고를 발라주었다. 가르딘 경의 레시피로 만든 화상 전용 연고였다.

그는 첫 쑥뜸을 마친 검투사들의 반응을 살폈다.

"자, 어때, 기분이?"

"...."

"아픈 곳은?"

"으음, 등이 따갑습니다."

"그건 화상을 입어서 그런 거고. 그 외엔?"

"머리가... 어?"

쑥뜸의 화끈함에 치를 떨던 검투사였다. 처음에 일어났을 때엔 자신이 왜 이런 고문 같은 일을 당해야 하나, 싶은 기색을 못내 어렴풋이 내비치던 자였다.

한데 이쪽의 질문을 받다가 어느 순간, 멈칫했다. 비로소 자신에게 찾아온 변화를 깨달은 것이리라.

절로 미소가 나왔다.

"어때?"

"...머리가, 그, 시원합니다?"

"그렇지?"

"어? 어! 정말로 그렇습니다! 이거 뭐지? 허허? 하하하!"

검투사가 벌떡 일어났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신기한지 목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두 손으로 연신 턱과 볼, 눈가를 어루만졌다. 마약성 진통제를 먹지 않으면 반드시 찾아왔던 끔찍한 후두신경통. 아까 쑥뜸을 받기 위해 누웠을 때까지만 해도 슬금슬금 찾아오던 바로 그 신경통.

한데 뜸을 받고 나니 말끔히 사라졌을 터다. 그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더없이 반가울 터다.

"아프지 않습니다. 이렇게 개운한 기분이 몇 년 만인지...."

검투사가 감격에 겨워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자 흐뭇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쪽의 진료를 받은 사람이 병마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거, 솔직히 기분이 좋으니까.

게다가....

'그렇게 나아야지, 더 확실하게 나아야지. 그래야 나한테 보너스 수명도 안겨줄 거고!'

라키엘은 므흣한 기분으로 기대했다.

나름 두근거리며 기다렸다.

혹시나 눈앞에 메시지가 뜨지 않을까. 검투사의 기대 수명이 늘어나고 어쩌고 블라블라, 하면서 이쪽에게 보너스 수명을 팍팍 안겨주진 않을까. 한데 기다려 봐도 그런 메시지는 뜨지 않았다.

'...쯧. 첫 뜸으론 모자란 건가.'

데미안도 그렇더니.

다른 검투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진료 첫날 1회차 뜸을 마쳤음에도 완치가 되었다는 메시지는 일절 뜨지 않았다.

다음 날 뜸을 떴을 때도 똑같았다.

검투사들이 사라진 신경통에 기뻐했지만, 완치 메시지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역시. 넘어야 할 산이 있는 거로구나. 그것까지 무사히 넘겨야 저들을 완치했다고 볼 수 있겠지.'

완치를 위해 앞으로 넘어야 할 산. 그게 무엇일지 그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금단현상이었다.

'데미안도, 나머지 검투사들도 낙인의 저주가 안겨주는 통증을 잊기 위해 마약성 진통제에 의존하고 있었으니까.'

현재 진료를 받고 있는 검투사들은 데미안을 포함하여 총 14명. 대부분이 1년 이상 마약성 진통제를 복용했다. 오래 복용한 자는 거의 7년에 달하는 자도 있었다.

'그만큼 심하게 중독된 상태일 거고. 금단현상도 심하게 오겠지.'

라키엘은 내심 각오를 다졌다.

지금은 사라진 통증 때문에 기뻐하는 검투사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이 달라질 것이라고. 모두가 금단현상에 고통받게 되리라고.

며칠이 지났다.

쑥뜸 치료 6일째.

라키엘의 예상은 현실이 되었다.

"...우우우욱!"

아침부터 검투사들이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들 안색이 장난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새하얗고, 또 누군가는 시퍼렇고. 온몸으로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건 예사였다. 걷는 걸음걸이도 영 맥이 없었다. 본격적인 금단현상이 찾아온 것이었다.

'역시.'

예상대로다.

소설에 나온 내용과도 똑같다.

'데미안도 저런 과정을 겪었으니까.'

소설 속의 데미안이 대화재 사건을 통해 검투장을 탈출한 후였던가. 자유를 얻었다는 기쁨도 잠시, 그는 엄청난 고통에 휩싸였다. 마약성 진통제를 끊으면서 찾아온 금단현상이었다.

'며칠을 시달렸지. 심지어 도망자의 입장이라 제대로 된 치료를 받거나 휴식을 취할 수 없었고. 말 그대로 최악의 상황 속에서 홀로 금단현상을 이겨냈어. 어떻게? 초인적인 의지력 하나로.'

생각해볼수록 기도 차지 않았다.

초인적인 의지력이라니. 그야말로 소설 주인공 보정이 아니고 뭐겠는가. 하지만 라키엘은 그런 소설 속 설정에 태클을 걸 수가 없었다.

바로 옆에서, 실제로 데미안이, 다른 검투사들보다 훨씬 멀쩡한 모습을 선보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봐, 데미안?"

"예, 전하."

"그쪽은 안 어지러워?"

"어지럽습니다."

"다른 검투사들처럼 속이 메슥거리진 않아?"

"메슥거립니다."

"근데 구토를 안 해?"

"참고 있습니다."

"...."

라키엘은 할 말을 잃었다.

말로는 어지럽고, 속이 메슥거려서 구토를 참고 있다는 데미안이었다. 한데 정작 옆에서 보니까 그 안색이 너무나 멀쩡했다. 말하지 않으면 그냥 쌩쌩한 사람 같이만 보였다.

"어떻게?"

라키엘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데 역시나 돌아오는 데미안의 대답은....

"그냥, 열심히 참고 있습니다."

"...."

사기다. 역시 소설 주인공이란 놈들은 매번 이딴 식이다. 라키엘은 쓴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데미안의 경우는 금단현상 극복에 좋은 참고자료로 삼을 수 없겠구나 싶었다.

'그럼 생각했던 치료법을 쓰는 수밖에 없겠네.'

이미 금단현상은 예상했던 바였다. 그에 맞춘 금단현상 완화 치료법도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

"데미안?"

"예, 전하."

"세르지오를 좀 데려와 봐. 나머지 검투사들에겐... 오늘 뜸 치료는 없을 테니 숙소에서 쉬라고 해. 물 많이 마시라는 당부도 잊지 말고."

"알겠습니다."

잠시 후, 데미안이 세르지오라는 사내를 데려왔다. 검투사 무리 중에서도 가장 경력이 길고 나이가 많은, 나름 정신적인 리더 같은 자였다.

하지만 그의 상태도 별로 좋진 못했다.

"...부, 부르셨습니까."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초봄이 오며 날씨가 제법 따뜻해졌는데. 그렇다고 얇은 옷을 입고 있는 것도 아닌데. 저 근육질에 흉터투성이인 터프한 사내가 마치 혹한의 설산에 팬티 한 장 달랑 걸치고서 조난당한 사람처럼 너무나 가련하게 떨어대고 있었다. 서 있는 것마저 힘겨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라키엘은 재빨리 그를 진료용 침상에 눕혔다.

"그래, 불렀어. 금단현상, 많이 힘들지?"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전혀 안 괜찮게 보이는데. 그래도 괜찮게 만들어줄게."

"저, 절... 치료해주시는... 겁니까...."

"그래. 이걸로."

라키엘이 바늘을 꺼냈다.

항상 셀프 침술을 펼칠 때 사용했던 바늘이었다. 바늘을 본 세르지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걸로 어떻게...."

"이걸로 발을 좀 찔러줄 거야. 힘 빼고 편히 누워 있어."

세르지오가 긴장한 얼굴이 되었다.

라키엘도 덩달아 긴장했다.

'잘 될까.'

모르겠다.

하지만 이게 자신이 아는 최선이다. 그렇기에 그 최선이 잘 통할지를 확인하기 위해, 세르지오를 불렀다.

'세르지오, 이자가 검투사들 중에 가장 오래 마약성 진통제를 복용했으니까. 그만큼 금단현상도 심하니까. 이 방법이 통할지 확인하기 위해선 가장 적합한 대상이야.'

침술이 이자에게 통한다면? 그래서 금단현상을 완화할 수 있다면? 다른 검투사들에게도 효험이 있을 것이다.

라키엘은 심호흡을 했다.

세르지오의 오른발을 쓸어보았다.

'족양명위경(足陽明胃經)으로 가자.'

검투사들은 신경이 과민해지는 금단현상을 겪고 있다. 하여 식은땀이 나고, 위경련이 동반되는 증상을 보이고 있다. 위장, 특히 위신경증을 누그러뜨리는 데에는 족양명위경의 경혈을 다스림이 옳을 듯하였다.

'첫 경혈은 여태(厲兌).'

톳!

둘째 발가락 끝마디뼈(distal phalanx) 바깥쪽. 발톱 뿌리를 찔렀다. 그곳에 여태혈이 있었다. 신경성 위장병과 구역질을 다스리는 데에 특히나 효험이 있는 혈자리였다.

여태혈에 꽂은 바늘을 톡톡, 두드렸다.

적절한 자극을 주었다.

한데 그때였다.

"...쿠워어어어억!"

난데없이, 세르지오가 괴성을 지르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의 우악스러운 손아귀가 뻗어왔다. 이쪽의 목을 움켜쥐었다.

"크읍?"

어떻게 막아볼 틈도 없었다.

콰당탕!

뒤로 넘어졌다. 뒤통수에 아득한 충격이 왔다. 그때까지도 세르지오의 손아귀는 이쪽의 목을 쥐고 있었다. 아니, 졸라왔다. 위에 올라타고서. 희번덕거리는 눈동자로. 침까지 질질 흘리며.

"크어어어억! 우워억!"

"...!"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버둥거려봤지만, 완력의 차이가 너무나 컸다. 뿌리칠 수가 없었다.

'미, 미친!'

다급해졌다.

그 순간이었다.

뻐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세르지오의 얼굴이 홱 돌아갔다. 이쪽의 목을 쥐고 있던 그의 손아귀가 풀렸다.

그가 그대로 쓰러졌다.

털썩!

"...헉! 허억!"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자니, 누군가의 손이 뻗어왔다.

"괜찮으십니까."

데미안이었다.

방금 세르지오를 한 방에 기절시킨 것도 데미안이었을까. 데미안이 건네는 손을 잡고 일어났다. 졸렸던 목이 엄청나게 얼얼했다. 피멍이 든 것 같았다. 살펴보니 세르지오는 완전히 기절해 있었다.

'금단현상 때문에... 작은 자극에도 발작을 일으켜 버린 건가.'

어쩌면 과도한 자극에 의해 혈맥이 타격을 받은 걸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그랬던 것 같다.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고작 바늘에 살짝 찔렸다고 이 정도의 발작이라니.

'아니, 이런 경우엔 고작이 아니겠지. 금단현상 때문에 신경계가 예민해져 있는 거야. 평소엔 작은 자극이었더라도 지금은 칼에 푹 찔리는 것처럼 크게 느껴지는 거겠지.'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까.

'라운드 니들이면 그나마 괜찮을 것 같은데.'

문득, 한의원에서 쓰던 침술 전용 침이 떠올랐다. 일명 라운드 니들이라고 불리는 침이었다. 지금 쓰고 있는 바늘보다 훨씬 얇았다. 끄트머리도 둥글었다.

그렇기에 통증이 훨씬 적었다.

'라운드 니들이 필요해.'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답일 듯했다. 라운드 니들로 찌르면 통증이 훨씬 적을 것이다. 아무래도 난리를 덜 부릴 것이다.

보다 안전하게.

보다 덜 아프게.

혈맥에 과도한 자극이나 타격을 주지 않을 수 있으리라.

'그럼 대장간에 의뢰해야 하나. 아니, 그걸 여기서 만들 수는 있을까.'

라키엘은 고민했다.

대장장이를 불렀다. 지난번, 방패 제작을 맡겼던 대장장이였다. 한데 당시엔 자신만만했던 대장장이도 이번만큼은 난감한 기색을 드러냈다.

"저기, 송구하오나 전하, 이렇게 실처럼 가는 바늘을 제작하는 것까지는 가능하지만...."

"가능하지만?"

"전하의 당부처럼 여러 바늘의 두께를 완벽히 일정하게 뽑아낼 자신은 없습니다."

대장장이가 곤혹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 조금씩은 두께가 다를 것입니다. 심지어 바늘 끄트머리와 뒤쪽의 두께가 차이가 날 수도 있고, 중간중간이 미세하게 울룩불룩할 수도 있습니다."

"완벽히 매끈하게는 안 되는 건가?"

"송구하옵니다, 전하. 그건... 제가 드워프 장인이 되기 전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대장장이가 고개를 숙였다.

라키엘은 쓴 입맛을 다셨다. 아무리 실력 있는 대장장이라 해도 공장에서 기계로 뽑아내는 라운드 니들의 품질을 따라잡을 수는 없는 모양이다.

'두께가 일정하지 않으면 곤란한데.'

그러면 환자에게 가해지는 자극 또한 일정하지 못하게 된다. 어떤 침은 덜 아픈데, 또 어떤 침은 확 따끔거리면?

'아까 같은 발작을 일으키기 딱 좋지. 그건 안 돼.'

그럼 대장장이가 말한 드워프 장인이라도 수소문해서 찾아봐야 하는 걸까. 한데 그러려면 시간이 또 얼마나 많이 걸리게 될까.

'미치겠네.'

시간이 없었다.

금단현상은 점점 심해질 것이다. 급기야 신경과민이 심해지며 검투사들이 죽어나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럼 어떻게 해야....'

라키엘은 고민에 휩싸였다.

한데 그때였다.

딩동.

[오장육부가 당신의 스트레스를 감지하였습니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며 건강의 적입니다.]

[오장육부가 스트레스 해결을 위한 조언을 보내고 있습니다.]

'으음?'

난데없이 떠오른 메시지.

라키엘은 인상을 찡그리며 메시지를 쳐다보았다. 하필이면 이런 때에 오장육부의 조언이라니.

'쓸데없는 잔소리라도 하려는 건가.'

그는 아무런 기대도 없이 메시지를 열었다. 한데 그 내용이 조금, 이상했다.

[심장 : 라운드 니들이 필요해? 난감해? 그럼 우리한테 물어봐야지. 모아둔 HP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지.]

[허파 : 드디어... 후... 설렌다... 허... 파하....]

[대장 : 어쨌건, 우리한테 좋은 방법이 있는데, 괄약근 풀어 버리기 전에 한번 들어보면 좋겠지 말입니다?]

'...뭐?'

그것은,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돌파구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30화. 환상종 선택 뽑기 (1)

'...뭐?'

라키엘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뜻밖이었다.

라운드 니들을 구할 방법 때문에 고민하던 차였다. 한데 모아둔 HP를 사용하면 그 고민이 해결될 거라니.

'좋은 방법이라니, 그게 대체 뭐길래?'

속으로 되물었다.

곧 대답이 돌아왔다.

[심장 : 기억 안 나나? HP를 어디에 사용할 수 있는지 안내문 받은 적 있잖아.]

[허파 : 후우... 기억의 책을 펴보자... 푸후우... 어지럽자너... 니들은 이런 거 피지 마라....]

[대장 : 3초 안에 기억 못하면 괄약근 활짝 오픈해드리지 말입니다ㅋ]

'...스킬, 아니면 환상종?'

오장육부가 떠드는 말을 듣다 보니 떠올랐다. 처음 이 세계에서 눈을 뜬 날이었을 것이다. 당시 귓가에 울리던 메시지가 있었다.

당시엔 워낙 잠이 덜 깨었고 얼떨떨했던 터라 그냥 넘어갔었는데, 역시나 그게 HP의 사용처를 안내하는 메시지였던 듯했다.

라키엘은 당시의 메시지 내용을 되짚었다.

'획득한 HP를 투자해서 각종 스킬을 개발하거나 환상종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였던가?'

[심장 : 정답ㅋ]

[허파 : 짝짝짝.]

[대장 : ...아깝다.]

"...."

오장육부의 메시지는 거기까지였다. 그걸로 전할 말이 끝났는지, 말을 걸어봐도 더는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라키엘은 시스템 창을 열어보았다.

'어디 보자. 스킬 개발 아니면 환상종 뽑기에 답이 있다는 소리인데. 혹시 침술 스킬을 개발하면 문제가 해결될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료비 청구도 그랬으니까.'

스킬은 예상보다 위대(?)했다. 사실은 엄청난 기능이 숨겨져 있었다. 단순히 진료비를 돈으로만 받는 게 아니었다.

'덕분에 보너스 수명을 받을 수 있게 됐지. 어쩌면 침술도 그럴 거야. 지금 내가 짐작도 못하는 강력한 기능이 문제 해결에 결정적인 도움을 줄지도.'

그는 스킬 목록을 검색했다.

딩동!

<개방 가능한 스킬 목록>

[1. 침술]

[2. 부항]

[3. 뜸]

[4. 탕약 조제]

[5. 약재 감별]

[6. 약초 탐색]

[7. 약술 주조]

이미 개방된 진맥, 진료비 청구, 아스라한 심법은 목록에서 빠져 있었다. 그는 생각할 것도 없이 결정을 내렸다.

'침술 스킬.'

딩동!

[목록 1번. 침술을 선택하셨습니다.]

[스킬 개방 (2회차) 비용 : 1,500 HP]

[현재 보유 중인 HP : 500]

[당신은 스킬 개방 요건을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보유 중인 HP가 모자랍니다.]

"...."

요청이 단호박으로 잘렸다.

라키엘은 흔들리려는 멘탈을 부여잡았다. 대뇌피질을 더욱 채찍질하며 돌파구를 궁리했다.

'HP, 그동안 나름 모았다고 모았는데 턱도 없네. 그럼 어떡하지?'

어떤 스킬이건 개방에 1,500 HP가 들어가는 상황. 그렇다고 지금 당장 HP를 퍼받을 획기적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 혹시, 환상종 선택 뽑기는 답이 될 수 있을까.'

혹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스킬창 옆에 놓인 '환상종' 항목으로 눈길을 던졌다. 반응은 곧바로 왔다.

딩동!

[당신은 환상종 선택 뽑기 항목을 선택하셨습니다.]

[당신은 소정의 HP를 투자하여 환상종을 뽑을 수 있습니다.]

[강력하고 개성 넘치는 환상종은 자신을 소환한 주인에게 절대적 충성을 바치며, 다양한 능력을 제공할 것입니다.]

[선택 뽑기 (1회차) 비용 = 300 HP]

[현재 보유 중인 HP : 500]

[환상종 선택 뽑기를 실행하시겠습니까?]

[YES / NO]

'흐음.'

라키엘은 메시지를 노려보았다.

확실히 비용이 저렴하다.

1회차 뽑기라서 그런 걸까. 고작 300 HP로 강력한 환상종을 뽑아서 소유할 수 있다고 하니 구미가 당겼다.

'게다가 아까 오장육부, 심장이 그랬지. HP를 '당장'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한데 스킬 개방은 보유한 HP가 모자라서 불가능한 상황이니까, 아마도 녀석들이 내게 추천한 해법은 바로 환상종 뽑기가 아니었을까.'

자연스레 그런 추론이 가능했다.

라키엘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르딘 경, 잠들었겠지?'

아까 낮에 세르지오에게 침을 놓아주다가 목을 졸렸던 소동 이후, 온종일 고민에 휩싸여 오후와 저녁을 보낸 터였다.

그 사이 이미 밤이 깊어 있었다. 가르딘 경은 일찌감치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나마 근처에 깨어 있는 이는 침실 문 앞을 지키는 근위대원 정도가 다일 것이다.

'큰 소리만 안 내면 괜찮겠지.'

라키엘은 메시지창을 쳐다보았다.

결심하듯 'YES'를 선택했다.

[환상종 선택 뽑기를 실행합니다.]

안내문과 함께 300 HP가 소모되었다. 동시에 허공에 홀로그램 같은 안내문이 떠올랐다.

파아앗...!

[선택 뽑기에 앞서, 당신이 환상종에게 원하는 기능을 밝혀주세요.]

[선택 뽑기에서 제시되는 환상종 후보군은 당신이 원하는 기능에 맞추어 세팅될 것입니다.]

'기능?'

그건 더 고민할 것도 없었다.

'많은 수량의 라운드 니들을 안정적으로,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공급해줄 수 있는 환상종.'

그 생각을 떠올린 직후.

[당신의 요구 사항이 등록되었습니다.]

-화아악!

안내문이 광채에 휩싸였다. 광채가 세 갈래 카드로 변했다. 좌측, 중앙, 우측에 차례대로 놓였다. 이내 각각의 카드에 짤막한 문구가 떠올랐다.

<후보 1 : 꿀꿀한 게 행복한 아이>

<후보 2 : 강철끙까 방출기>

<후보 3 : 똥 싸는 선인장>

"...."

뭘까 저건.

각각의 카드에 쓰인 글귀를 보며 라키엘은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

'아무래도 수수께끼 같은데.'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이었다.

[당신은 환상종 선택 뽑기 시스템으로부터 3마리의 후보를 제시받았습니다.]

[세 후보는 당신의 요구 사항을 각각 100%, 50%, 0% 반영하고 있습니다.]

[선택은 당신의 몫입니다.]

[한번 선택한 환상종은 교환, 반품, 환불이 불가능하니 신중하게 선택해주세요.]

주르륵 떠오르는 메시지.

그 뜻은 명확했다.

'후우. 셋 중의 하나는 대박, 하나는 중박, 나머지 하나는 쪽박이란 소리구나.'

한데 그 선택을 무를 수가 없단다.

자칫 운이 나쁘면? 그래서 쪽박을 뽑으면? 이쪽의 요구사항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생뚱맞은 환상종만 떠맡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으리라.

"...."

그럼 뭘 선택해야 할까. 라키엘은 팔짱을 끼고서 세 장의 카드를 노려보았다.

'꿀꿀한 게 행복한 아이, 강철끙까 방출기, 똥 싸는 선인장... 이라.'

대체 뭘까.

저 문구들이 뜻하는 환상종이 어떤 걸까.

추론하고, 짐작하고, 알아내려 애썼다. 단 한 번만 가능한 선택. 그 선택을 최선으로 해내기 위하여 최대한 침착하고 냉정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덕분에 서서히 아이디어의 문이 열렸다. 조금씩, 저 수수께끼 같은 글귀의 뜻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일단 제일 먼저 짐작이 되는 건, 꿀꿀한 게 행복한 아이. 저건 둘 중의 하나일 거야. 꿀을 좋아하는 꿀벌, 아니면 돼지.'

만약 꿀벌이라면?

독침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걸 침술에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봉침(蜂針)을 놓는다면 더없이 좋겠지.'

하지만 라키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꿀벌이면 곤란해. 아무리 벌침을 제공해준다 해도 그럴 거야. 꿀벌이 쏘는 침은 1회용이니까. 게다가 독침이면 아플 거잖아.'

한데 자신은 일정한 규격을 지닌, 덜 아픈, 많은 수의 라운드 니들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탈락. 만약 저게 꿀벌이 아니라 돼지라 해도 더 탈락.'

라키엘은 첫 번째 후보인 '꿀꿀한 게 행복한 아이' 카드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의 눈길이 두 번째 후보, '강철끙까 방출기'로 향했다.

'저건 뭔지 모르겠다, 진짜.'

끙까 대신 강철을 생산한다는 걸까. 만약 저 강철이 엄청나게 가느다랗다면? 그 강철이 일정한 굵기로 유지되며 뽑혀 나온다면? 그렇다면 라운드 니들을 왕창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나 라키엘은 고개를 저었다.

'확실하지가 않아. 저걸 뽑는 건 도박이야.'

마지막으로 그의 시선이 세 번째 카드로 향했다.

'똥 싸는 선인장.'

혹시 식물인 걸까. 글귀 그대로 선인장인데 똥을 싼다는 걸까. 혹은 선인장을 떠올리게 하는 동물이라는 걸까.

'어쨌건, 두 경우 모두 내가 원하는 조건을 채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선인장은 가시가 많다. 그걸 활용하면 라운드 니들로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혹여나 선인장을 연상케 하는 동물이라도 비슷하리라.

'좋아.'

라키엘은 마음을 굳혔다.

세 번째 카드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내 선택은 이것.'

딩동!

[당신은 후보 3 : <똥 싸는 선인장>을 선택하셨습니다.]

메시지가 떠올랐다.

동시에 세 번째 카드가 광채로 물들었다.

화아악-!

나머지 두 카드가 허공으로 사라졌다. 세 번째 카드의 광채가 더욱 찬란해졌다. 마침내 카드가 뒤집혔다. 그 뒷면에 검은 실루엣이 새겨져 있었다.

온통 동글동글한 덩어리 같은 형상이었다. 자세히 보니 바늘 같은 가시가 수도 없이 삐죽삐죽 돋아나 있었다. 한데 아래쪽엔 자그마한 다리 넷이 보였다. 이윽고 카드의 광채가 실루엣으로 번졌다.

파지직! 파짓!

카드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실루엣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마법진이 발동하듯. 혹은 새로운 존재의 탄생을 알리듯. 마침내, 무언가가 카드를 박차고 튀어나왔다.

파칫!

강렬한 충격파.

이쪽의 품으로 날아오는 덩어리.

"꼬슴!"

"...엇?"

테니스공보다 조금 큰 크기의 덩어리였다. 정면으로 날아오는 그 덩어리를 얼결에 두 손으로 받았다.

그 순간, 라키엘은 기겁했다.

"앗뜨!"

두 손바닥이 따끔했다. 마치, 수십 개의 바늘에 콕콕 찔린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라키엘은 덩어리를 놓치지 않았다. 더욱 꼭 움켜쥐었다.

'환상종일 거니까!'

무려 300 HP를 투자해서 뽑아낸 놈이었다. 한데 녀석을 제대로 받아내지 않고 내동댕이친다면? 녀석의 입장에서 그리 유쾌하지 못한 첫 만남이 될 수도 있으리라.

'그럼 곤란하지! 앞으로 주구장창 부려먹어야 할 놈인데!'

첫인상은 중요하다. 시작부터 좋은 인상을 심어줘야 한다. 그래야 부려먹기가 편해진다.

라키엘은 인생의 진리(?)를 떠올리며 두 손을 움츠렸다. 뜨거운 군고구마 잡듯이 손바닥을 조심스레 놀리며 덩어리의 모습을 확인했다.

밤송이처럼 뾰족뾰족한 가시.

짧은 팔다리의 2등신 몸매.

뽕실 빵빵한 궁둥이.

그러니까 이건....

"고슴도치?"

"꼬슴!"

이쪽의 중얼거림에 녀석이 까만 눈을 반짝거리며 대답했다. 그리고 제 뽕뽕한 뱃살 주름을 뒤적거렸다. 이내 녀석이 뱃살 주름에서 꺼낸 것은 우표보다 자그마한 쪽지였다.

"꼬슴! 꼬스슴!"

"...이거, 나 주는 거야?"

"꼬슴!"

녀석이 자그마한 머리를 끄덕였다.

쪽지를 받아 펼쳐보았다.

일렁이는 촛불 아래.

쪽지에 새겨진 깨알 같은 글씨가 보였다.

'이거, 너무 작아서 읽을 수가....'

눈가를 찡그리는 순간이었다.

딩동!

쪽지에 쓰인 내용이 메시지가 되어 눈앞에 떠올랐다. 그것은 방금 뽑은 환상종의 상세한 스펙과 스킬이 쓰여 있는 안내서였다. 그 내용을 보면서 라키엘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기쁨 가득한 확신이 들었다.

오늘 자신이 내린 선택.

그렇게 뽑은 환상종.

이건, 대박이라고.

31화. 환상종 선택 뽑기 (2)

'미친. 이건 대박이네. 맞네.'

눈앞에 숑숑 떠올라 있는 메시지. 라키엘은 그 내용을 꼼꼼히 읽었다.

[꼬슴이 사용설명서]

[꼬슴이는 귀여운 고슴도치입니다. 사랑으로 보살펴 주세요.]

[꼬슴이는 소환자인 당신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칩니다. 환상종은 평생의 반려동물이자 또 하나의 가족입니다. 함부로 유기하지 말아 주세요.]

[꼬슴이는 함께 동봉된 두 가지 종류의 해바라기씨를 먹음으로써 덩치를 바꿀 수 있습니다.]

[빨간 해바라기씨 : 꼬슴이를 거대하게 만들어줍니다. 거대화 최대 유지 시간 = 12시간]

[파란 해바라기씨 : 꼬슴이를 아담하게 만들어줍니다. 거대화 최대 유지 시간을 초과하기 전에 먹여 주세요. 거대화 상태에서 파란 해바라기씨를 먹지 않고 12시간을 넘기면 꼬슴이는 자동으로 아담한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대신, 탈진 상태에 빠져 24시간 내에는 다시 거대화가 불가능해집니다.]

[2색 해바라기씨 세트 구매 비용은 1 HP입니다.]

[꼬슴이는 소형화 / 거대화 상태에서 다양한 스킬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꼬슴이 보유 스킬 목록>

[무한의 가시 (Lv. 1)]

[밤송이 돌격 (Lv. 1)]

[삼색 가시 발사 (Lv. 1)]

'역시 고슴도치. 가시 활용에 특화된 녀석인 거구나.'

침술에 쓸 라운드 니들을 원했던 자신이었다.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라, 다다익선을 원했던 바였다. 한데 이 녀석의 스킬 목록을 보니?

'무한의 가시. 이것부터 딱 마음에 드네.'

절로 만족스러운 웃음이 나왔다.

대놓고 무한이란다.

한도 없이 팍팍 쓸 수 있단다.

라키엘은 설명서 내용을 숙지했다. 그 사이, 설명서가 서서히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 작은 복주머니가 생겨났다. 이쪽의 손바닥 위로 톡, 떨어졌다.

주머니 안쪽을 살펴보니 설명서에서 언급되어 있던 붉고 푸른 해바라기씨가 들어 있었다.

'설명서 그대로다. 이거, 빨간 걸 먹이면 거대하게 변신한단 말이지?'

라키엘은 품속의 고슴도치, 꼬슴이를 내려다보았다. 거대화 변신이 가능하다는 이 녀석. 얼마나 커질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이봐."

"꼬슴!"

"쉿. 대답 조용히. 한밤중이잖아."

"...꼬슴."

"그래, 착하지. 딱 좋아. 아무튼 하나 물어볼게. 너 이거, 먹으면 커지는 거야?"

"꼬슴."

"그래? 얼마나?"

통통한 꼬슴이가 이쪽의 손바닥 위에 두 발로 섰다.

이내 작고 하찮은 두 팔을 최대한 뽀잇 펼쳤다.

"꼬스슴?"

"그만큼?"

"꼬슴!"

"아무튼, 엄청 커진다는 소리네?"

"꼬스슴, 꼬슴."

"흐음."

대체 얼마나 커진다는 건지.

가늠이 잘 안 되었다.

'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빨간 해바라기씨를 실제로 먹여보는 건 다음으로 하자. 라키엘은 생각을 정리했다.

'혹여나 진짜 몇 미터씩, 코끼리처럼 커지고 그러면 여기 다 박살 날 거니까.'

익숙해진 침실을 졸지에 잃고 싶진 않았다. 대신 라키엘은 보다 중요하고 시급한 것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그럼 하나 더 물어볼게. 네가 가진 가시 말이야. 혹시 뽑아서 써도 되는 거야?"

"꼬슴!"

"괜찮아?"

"꼬스슴."

"정말로? 안 아파? 하나도?"

"꼬슴!"

"오오. 혹시 그럼, 가시를 뽑으면 그 자리에 새 가시가 바로 돋아나는 거고?"

"꼬슴."

"좋네. 그게 무한의 가시 스킬이라고?"

"꼬스슴!"

꼬슴이가 고개를 야물딱지게 끄덕였다.

라키엘이 재차 물었다.

"그럼 삼색 가시 발사 스킬은 뭐야?"

"꼬슴? 꼬스슴, 꼬슴. 꼬슴슴, 꼬스슴, 꼬슴!"

"네가 가진 가시는 세 가지 색깔인데, 색깔별로 찔렸을 때 자극의 강도가 다르다고?"

"꼬슴! 꼬스슴, 꼬슴."

"흰색 가시가 순한맛?"

"꼬스슴!"

"갈색은 매운맛이라고?"

"꼬슴!"

"그럼 검정색 가시는?"

"꼬스슴!"

"...K맛?"

"꼬슴!"

"그게 뭐야?"

"꼬스슴, 꼬슴."

"너도 잘 모른다고?"

"꼬슴!"

해맑게 웃으며 대답하는 꼬슴이. 그 모습으로 보아 본인(?)도 검정색 가시의 'K맛'이 뭔지 잘 모르는 듯했다.

'뭐, 시험해보면 알겠지.'

어차피 직접 시험해보려던 참이었다. 가뜩이나 금단현상에 시달리며 신경과민에 고통받는 검투사들을 대상으로 정체불명의 가시를 푹푹 찌를 수는 없는 일이니까.

"좋아. 그럼-"

라키엘은 꼬슴이를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왼쪽 팔뚝 소매를 걷었다. 꼬슴이에게 정겹게 요구했다.

"가시, 흰색이랑 갈색, 검정색 하나씩 줄 수 있겠어?"

"꼬슴!"

꼬슴이가 네 발로 야물딱지게 테이블을 디뎠다. 통통한 궁둥이를 뽀잇 치켜들었다. 온몸을 뿌르르 떨었다.

"꼬스스슴!"

그러더니 이윽고.

뾱! 뿋! 뾱!

가시 세 개가 발사되었다.

한데 사정거리(?)가 불과 10센티 남짓이었다.

톡, 토독.

라키엘은 테이블 위에 떨어진 흰색과 갈색, 검정색 가시를 보며 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게 가시 발사 스킬인가.'

10센티 발사라니.

그는 꼬슴이의 등을 살펴보았다. 방금 가시를 발사하며 비었던 곳에서 새 가시가 순식간에 올라오는 게 보였다.

'진짜로 무한 생성 가시네.'

다행이다.

그렇다면 가시를 수십, 수백 개씩 써도 꼬슴이에겐 아무 문제가 없을 듯했다. 안심한 라키엘은 테이블 위에 놓인 가시로 눈길을 던졌다.

'처음은 흰색, 순한맛부터.'

집어들었다.

소매를 걷은 왼쪽 팔뚝을 조준했다. 그가 겨눈 곳은 팔뚝 바깥쪽의 중간 자리, 자뼈(ulna)와 노뼈(radius) 사이의 공간, 아랫팔뚝의 두 근육 줄기의 경계에 해당되는 지점이었다.

그곳에 사독혈(四瀆穴)이 있었다.

바로, 안면과 어깨, 팔 바깥쪽의 신경을 아우르는 수소양삼초경(手少陽三焦經)에 소속된 혈자리였다.

'해볼까.'

만약 자극이 너무 강하면?

곧바로 눈가, 뺨, 귀 뒤편, 어금니, 목덜미 쪽으로 신경 자극이 느껴질 터다. 라키엘은 심호흡을 하며 흰색 가시를 사독혈에 가져갔다.

찔렀다.

톳!

깊이는 평소보다 아주 약간 깊은 0.8치. 들이마시는 호흡에 맞춘 보사법으로.

'...찔렀는데 느낌이 없네?'

정말이었다.

아무런 느낌도, 자극도 없었다. 가시가 바늘보다 제법 굵은데도 그러했다. 혹시나 해서 가시를 살살 돌려보았다. 역시나 자극이 없었다. 아예 꽂아둔 가시 끄트머리를 딱밤으로 톡톡 쳐보았다.

그래도 안 아팠다!

'대박!'

이거다.

이거면 검투사들이 느낄 자극도 극히 적을 것이다. 라키엘은 하마터면 감격의 눈물을 쏟을 뻔했다.

'그럼 갈색 가시는? 매운맛이랬으니 좀 따갑겠지?'

흰색 가시를 뽑고 갈색 가시를 집었다. 똑같이 사독혈을 겨누었다. 이번엔 아플 것 같으니까 아까보다 얕게 0.5치로.

찔렀다.

톳!

"...읍."

역시나 제법 따끔했다.

얼른 가시를 뽑아냈다.

"...."

이번엔 검정색 가시로 눈길이 갔다.

K맛이라는 거, 대체 뭘까.

궁금한데 한편으론 불안해졌다.

'나중에 딴 놈한테 시험해보자.'

괜히 불안한데 내 몸 축나는 모험은 사양이다.

나중에 미운 놈 생기면 그놈한테 시험해보자고 라키엘은 다짐했다. 그리고 흐뭇한 눈길로 꼬슴이를 돌아보았다. 거의 무자극에 가까운 흰색 가시. 그걸 무한으로 공급받게 됐다.

그거면 됐다.

"그러니까 꼬슴아?"

"꼬슴?"

"우리 오래 가자?"

"...꼬스슴?"

까만 눈을 깜빡거리며 고개를 갸웃대는 꼬슴이. 그 모습이 그렇게 복덩이처럼 보일 수가 없었다. 동시에 확신이 들었다. 계획한 일들을 진행할 수 있겠다고.

이젠, 해낼 수 있겠다고.

아침이 밝았다.

"저기, 전하? 그건 대체... 뭡니까?"

식사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는데 가르딘 경이 물어왔다. 이쪽의 눈치를 살피며 쭈뼛쭈뼛.

"그... 아까부터 계속 데리고 다니시는 그거... 고슴도치 말입니다."

"아, 꼬슴이?"

"...예?"

"인사해. 꼬슴 경이라고 해."

"꼬슴!"

라키엘은 꼬슴이를 자랑스레 들어 보였다.

꼬슴이가 반갑게 손을 들었다.

가르딘 경은 당황하고 말았다.

"아니, 어젯밤까지만 해도 그런 고슴도치는...."

"없었지. 그런데 오늘은 있네."

"...."

"자려고 누웠는데 창가에서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라. 뭔가 싶어서 살펴봤지. 그런데 창틀 바깥에 얘가 매달려 있더라고."

"침실... 창틀 바깥에 말입니까?"

"어. 대체 어떻게 거기까지 기어 올라온 건지 모르겠는데, 정원에서 살다가 길을 잃었나 봐."

"그게 가능한 겁니까?"

"안 믿겨져?"

"예, 솔직히...."

"안 믿기면 본인한테 물어봐서 확인해보든가."

"꼬슴!"

"...."

가르딘 경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저런 소리로 우는 고슴도치는, 사람 말을 다 알아듣듯이 행동하는 고슴도치는, 결코 본 적이 없었다.

'뭐지. 설마 저거, 환상종인가.'

가르딘 경은 문득, 제국의 역사에 남겨진 환상종에 대한 기록을 떠올렸다. 환상종. 현실에는 존재할 수 없는 신비한 생명체들. 아주 가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고 들었다. 자신들이 선택한 인간에게 찾아와 평생을 봉사한다고 했던가.

마치, 먼 과거의 천재 건설자 로이드 프론테라를 도왔다는 거대한 햄스터나 화산폭발을 일으키는 방울뱀처럼. 혹은 마젠타노 왕국을 제국으로 발전시킨 전설적인 성군, 샤를로트 대제의 캥거루처럼. 지금 저 고슴도치도 환상종처럼 보였다.

'한데, 대체 어떻게? 전하께서 환상종을 얻으신 거지.'

알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참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런 징조도 없이 하룻밤 사이에 환상종을 얻은 황태자 전하. 그게 당연한 듯이 태연한 모습인 황태자 전하. 그렇듯, 예전과는 너무나 달라진 황태자 전하.

'혹시 제가 모르는 또 다른 게 있는 겁니까.'

가르딘 경은 복잡해진 눈길을 애써 감추었다. 그 사이, 라키엘은 검투사들을 진료실로 불러들였다.

"다들 금단현상 때문에 힘들 거야. 알아. 얼마나 괴로울지. 그래서다. 오늘은 금단현상을 누그러뜨려 줄 진료를 해볼까 한다. 다들 침상에 앉아서 발 내밀어."

검투사들이 움직였다.

누군가는 비틀거리며. 누군가는 속이 메슥거리는 걸 참아내며. 또 누군가는 데미안의 부축을 받아서 간신히 침상에 눕거나 걸터앉았다.

'후우.'

라키엘은 심호흡을 하며 첫 번째 검투사에게 다가갔다. 바로 어제, 바늘로 침술을 받다가 발작을 일으키며 이쪽의 목을 졸랐던 세르지오였다. 그가 이쪽을 보자마자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어젠...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전하."

"그래? 어제 일들이 기억이 나?"

"아주, 조금은...."

"괜찮아. 아파서 그런 거니까. 마음에 두지 마."

"하지만...."

"됐고. 진료나 시작하지."

지난밤 미리 수백 개씩 뽑아둔 흰색 가시를 꺼내 들었다. 그걸 보는 세르지오의 눈길이 해쓱해졌다.

"어제 바늘보다... 굵은 것 같은데...."

"안 죽어. 또 아프면 내 목 조르든가."

"...."

가시를 들었다.

어제 찔렀던 바로 그 자리. 여태혈에 0.1지촌 깊이로 재빠르게 시침했다.

톳!

둘째 발가락 발톱 뿌리에 하얀 가시가 꽂혔다. 라키엘은 세르지오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다행이다.

아무 반응이 없었다.

"거 봐. 안 아프지?"

"...예?"

"찔렀는데 멀쩡하잖아?"

"벌써... 찌르셨습니까?"

"느낌도 없나 보구만. 좋아. 계속 힘 빼고 있어봐."

...역시.

라키엘은 내심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는 신들린 듯 족양명위경의 경혈들을 차례로 시침해나갔다.

톳! 토톳!

내정(內庭穴), 함곡(陷谷穴), 충양(衝陽穴), 해계(解谿穴)를 찌르며 발가락에서부터 발등을 거쳐 갔다.

토토톳! 톳!

종아리의 풍륭(豊隆穴), 하거허(下巨虛穴), 조구(條口穴), 상거허(上巨虛穴)를 지났다. 그리고 마침내 종아리 위쪽, 앞정강근(tibialis anterior muscle)의 최상단부를 찔렀다.

톳!

그곳에 족삼리(足三里)가 있었다.

여태혈에서부터 족삼리까지. 신경과민과 노이로제, 위 신경증을 지닌 이라면 하나같이 딱딱한 줄 모양의 응어리가 지는 경혈들이었다.

검투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여 이곳 경혈들을 집중적으로 다스렸다. 그리고 잠시 기다렸다.

"후우우...."

세르지오의 호흡이 눈에 띄게 편해졌다.

안색 또한 마찬가지였다.

'좋아. 효과가 있어.'

더욱 큰 확신이 들었다.

그는 나머지 검투사들에게도 똑같은 시침을 해주었다. 역시나 모두가 세르지오와 비슷한 효과를 보았다. 호흡이 편해졌고, 과도하게 민감해졌던 신경이 누그러졌다. 신경과민 때문에 생겨나던 위통과 소화장애도 한결 가라앉았다.

그때부터였다.

그는 사흘에 걸쳐 똑같은 시술을 반복했다. 그때마다 검투사들의 금단현상이 확연히 가라앉았다. 한결 편하게 걸어 다니고, 부담 없이 음식을 먹었다. 상했던 원기가 조금씩 회복되었다. 회복되는 상태에 맞추어 다시 쑥뜸 치료를 시작했다.

하루, 이틀, 닷새, 열흘.

진료실이 쑥뜸 타는 향으로 가득 찼다. 그만큼 검투사들의 등에서 낙인이 지워져 갔다. 낙인에 기생하고 있던 저주도 함께 사라져 갔다.

그리고 마침내 보름째 되는 날. 마지막 검투사의 등에서 쑥뜸봉을 치우는 순간.

딩동!

[당신은 적절한 침술과 쑥뜸의 활용으로 검투사 데미안 카이엔 외 13명의 만성 통증을 완벽하게 제거하였습니다. 검투사들은 오랜 고통에서 해방되었으며, 낙인의 저주로 인한 조기 사망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진료비 청구 (Lv. 1) 스킬이 발동됩니다.]

...기다렸던, 단체 진료비 청구의 시간이 왔다.

32화. 특근대 결성 (1)

아프다.

데미안은 눈을 감은 채 생각했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타는 쑥으로 등을 지지는데 안 아플 리가 있을까.

하지만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이 아픔이 기꺼웠다. 그리 싫지가 않았다. 처음 느껴보는 생경한 감정이었다.

아픔은 일상이었다. 어려서는 가난해서 아팠다. 조금 커서는 혼자여서 아팠다. 더욱 자라 세상을 간신히 알아갈 무렵이 되었을 땐 타인에 의해 아팠다.

아픔을 모면하고자 검을 쥐었고, 타인을 아프게 했다. 그럴 때면 잠시나마 아픔을 잊을 수 있었다. 아니, 잊었노라 안도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유예되었노라 착각한 아픔은 언제나 곱절로 돌아왔다. 등에 새겨진 낙인을 지울 수 없었던 것처럼. 미루었던 아픔은 매일 밤 어김없이 찾아왔다. 착각 속에 안주하기 위한 값을 치르듯. 영혼을 갉아 먹히는 나날이었다.

그러다 만나고 말았다.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

어째서 황태자가 자신을 찾아왔던 건지 모르겠다. 무얼 위해 선뜻 손을 내밀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 순간도 그렇다.

'자신을 위해, 스스로를 치료할 방법을 연구하기 위해, 그래서 우리에게 시험해보는 치료법이라고 했지.'

어째서 우리들에게 이런 치료를 해주려는 것인가를 물었던 때였더랬다. 당시 황태자가 돌려주었던 대답이 떠올랐다.

분명 저렇게 말했었다. 너희를 위한 게 아니라고. 자기 자신을 위한 거라고. 세상에 공짜란 없는 법이라고. 그러니 부담스러워하지도 말라고. 심지어 고마워하지도 말라는 식으로 말했던가.

'하지만 황태자, 당신은....'

그렇게까지 말해놓고선 정작 스스로에게 한 번도 뜸을 뜨지 않았다. 지난 보름이 넘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단 한 번도, 황태자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았다.

황태자의 모든 관심은 이쪽과 검투사들을 향해 있었다. 행여나 금단현상이 심해지진 않았는지. 잠은 잘 잤고 식사는 잘 했는지. 뜸 자리가 덧나진 않았는지. 몸살기가 있진 않은지.

새벽부터 잠들기 전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찾아와 자신과 열세 명 검투사들의 상태를 일일이 살폈다. 그러곤 모두에게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뒤에야 만족스러운 웃음을 보였다.

자신의 실험이 성공적이라서 짓는 웃음?

아니었다.

'정말로 기뻐서 짓는 웃음이었지, 그건.'

순수한 보람과 기쁨.

황금빛으로 물든 논밭을 바라보는 농부 같은. 혹은 자신이 돌보는 환자가 건강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는 간병인 같은. 그런 종류의 미소였다.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이쪽의 등에 남은 뜸을 털어주면서도 똑같은 미소를 짓고 있으니까 말이다.

'황태자씩이나 되는 당신은 대체, 고작 우리의 무엇이 그리도 기쁜 겁니까.'

데미안은 묻고 싶었다.

하지만 물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 행복해 보이는 저 미소. 커다란 보람을 만끽하는 저 웃음. 자신에게 돌아갈 이득이 없음에도 내보이는 순수한 기쁨. 황태자의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생경한 감정이었다.

같은 순간, 라키엘도 생경한 감정을 맛보고 있었다.

'...왔다!'

수확을 앞두고 넘실거리는 황금빛 들판을 바라보는 농부의 흐뭇한 기분이 이런 걸까. 혹은, 기대 없이 사두고 묻어뒀던 주식이 미친 떡상을 하다못해 천장 뚫고 우주 돌파 고점까지 찍는 모습을 바라보는 기분이 이런 걸까.

그는 찐텐 가득한 행복과 보람을 느끼며 눈길을 들었다. 그의 눈길이 향하는 곳. 그곳에 수확의 기쁨이 넘실거리는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딩동!

[당신은 적절한 침술과 쑥뜸의 활용으로 검투사 데미안 카이엔 외 13명의 만성 통증을 완벽하게 제거하였습니다. 검투사들은 오랜 고통에서 해방되었으며, 낙인의 저주로 인한 조기 사망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진료비 청구 (Lv. 1) 스킬이 발동됩니다.]

'이거지!'

절로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기대감으로 콩닥거리는 사이, 추가 메시지가 주르륵 떠올랐다.

[환자 : 데미안 카이엔이 당신의 진료를 통해 71년 9개월의 기대수명 연장 혜택을 받았습니다. 이에 당신은 71년 9개월의 1/2000에 해당하는 보너스 수명을 정산받습니다.]

메시지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니, 겨우 시작일 뿐이었다.

[환자 : 세르지오가 당신의 진료를 통해 27년 1개월의 기대수명 연장 혜택을 받았습니다. 이에 당신은....]

[환자 : 몬테로가 당신의 진료를 통해 23년 4개월의 기대수명 연장 혜택을....]

[환자 : 페드로가 당신의 진료를 통해 31년 6개월의....]

[환자 : 훌리안이....]

딩동! 딩동동! 댕도로댕동딩!

쉴 새 없이 울리는 메시지의 홍수. 보너스 수명이 미친 듯이 정산되었다.

그 결과는....

[데미안 카이엔 외 13명에게서 총 79.875일의 보너스 수명이 계산되었습니다.]

[정산되는 수명의 최소 단위는 1일입니다.]

[정산되는 보너스 수명이 반올림 처리됩니다.]

[총 80일의 보너스 수명이 정산됩니다.]

[당신의 예상 기대수명 : 171일]

"...."

미쳤다.

이건 진심 미쳤다.

'후아. 성능 확실하구만.'

기대수명이 한 큐에 3개월 가까이 늘어났다. 게다가 뜻밖의 보상이 더 있었다.

딩동!

[당신은 일정 숫자 이상의 환자를 진료하며 대량의 보너스 기대수명을 정산받았습니다.]

[이 경험이 토대가 되어 <진료비 청구> 스킬이 한층 개선됩니다.]

[진료비 청구 스킬의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스킬명 : 진료비 청구 Lv.2]

[당신이 환자에 대한 진료 행위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였을 때 자동으로 발동됩니다. 당신의 진료 행위로 늘어난 환자의 기대수명만큼, 일정 비율의 수명을 정산받아 당신의 기대수명을 연장할 수 있습니다. 이 정산 비율은 스킬 레벨이 상승할 때마다 늘어날 것입니다. (정산되는 수명은 환자의 기대수명에서 차감되는 것이 아닌, 별도 보너스 정산분입니다.)]

[현재 정산 비율 = 1950 : 1]

'좋아. 아주 좋아.'

절로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넉넉한 보너스 수명을 받은 것에 더해 진료비 청구 스킬도 성장했다. 다음부터는 1/1950의 비율로 수명을 정산받을 수 있게 됐다.

그러니 이제는?

'검투사들과 볼일도 끝났네.'

라키엘은 검투사들을 둘러보았다. 낙인의 저주를 제거해서 돌연사의 위험을 없애주었다. 덤으로 금단현상까지 해결해주었다. 덕분에 이쪽이 얻을 것은 다 얻었다. 그것이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당연하지. 이 친구들을 어디다 쓰겠어. 다들 검은 좀 쓴다지만, 어떤 사람들인지도 잘 모르는데.'

그는 마검황 속 내용을 돌이켜보았다. 하지만 그 소설 어디에도 이 검투사들이 등장하는 장면이 없었다. 등장하더라도 아주 잠깐,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는 엑스트라들일 뿐이었다.

당연히 이들이 어떤 인물인지, 어떤 성격을 지녔는지, 무엇을 추구하는 사람인지 전혀 묘사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미지의 인물들이라는 뜻이다. 그렇기에 무작정 신뢰할 수만은 없었다.

'물론 이렇게 실전으로 단련된 실력자들을 호위로 둘 수 있으면 참 좋겠지만.'

그럴 수는 없다.

어디서 어떻게 구르던 사람인지 모른다. 그런 이에게 이쪽의 목숨을 맡기는 건 어불성설이다.

'어쨌건 저쪽은 건강을 얻었고, 나는 보너스 수명을 얻었고. 딱 여기까지만 서로 이득을 남기고 찢어지는 게 아름다운 거겠지. 물론 데미안만 남기고.'

다른 이들은 몰라도 데미안은 보내기 싫었다.

현존 최고의 잠재력을 지닌 검사. 당대 최강의 반열에 올라설 남자. 역사 속 그랜드 마스터였다는 전설의 하비엘 아스라한에게 비견될 재능러. 삼국지로 치면 관우와 장비, 조자룡을 찰지게 얍얍촵촵 섞으면 나올 만한, 그런 어마어마한 존재랄까.

'이런 놈을 보내면 안 되지!'

무조건 옆에 남겨놔야 한다. 설령 백수로 놀게 두더라도 딴 곳으로 보내면 안 된다. 그런 일념으로 라키엘은 마음의 준비를 다졌다. 데미안을 정원으로 따로 불렀다. 은근슬쩍 물었다.

"어때? 쑥뜸 다 받은 기분이."

"뜸을 받은 자리가... 역시나 따갑습니다."

"그래도 이젠 익숙하지?"

"예."

"잘됐네. 아쉽기도 하고. 이젠 뜸 받을 일이 없을 거라서."

"...예?"

"뜸, 끝났다고. 이젠 더 받을 필요 없거든. 완치됐고, 치료 효과가 검증됐고, 실험도 끝났으니까."

"그 말씀이 정말입니까?"

"그래. 그동안은 뜸을 받고 있음에도 자정쯤엔 신경통이 조금씩 느껴졌을 거야. 통증 때문에 잠에서 깼을 테고. 맞지?"

"맞습니다."

"하지만 이젠 그것도 끝이야. 더 아플 일 없어. 축하해."

"...."

데미안이 묘한 눈길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감사의 인사를 하려는 걸까.

그 전에 재빨리 선수를 쳤다.

"잠깐. 감사의 인사를 하기 전에 내 제안부터."

"...."

"결론부터 말할게. 나는 그쪽의 검술이 탐나. 이대로 다른 곳에 보내기 싫어. 그렇게 재능을 썩히게 두고 싶지도 않고. 그러니까, 그쪽에게 내 근접 호위를 맡기고 싶은데."

직구 승부를 던졌다. 어떠한 편법도 쓰지 않았다. 이게 나을 거란 판단이 들어서였다.

사실 데미안을 낚아낼 수많은 방법들이 있긴 했다. 그는 곧 소드 익스퍼트 상급의 경지에 올라설 것이다. 동시에 소드마스터 증후군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모든 감각이 지나치게 예민해지는 단계. 그 감각을 제어할 수가 없어지는 단계. 덕분에 찾아오게 될 지옥 같은 불면증.

그걸 극복하게 해주겠노라고. 불면증 치료를 해주겠다고. 솔깃한 제안을 할 수도 있다. 솔직히 그 제안이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 아니, 반드시 그럴 것이다.

'데미안은 스스로도 자신의 경지를 잘 알고 있으니까. 자신이 조만간 소드 익스퍼트 상급에 올라 소드마스터 증후군에 시달리게 될 거란 사실도 모두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 불면증 치료 제안을 하면?

그는 십중팔구 남는 쪽을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제안을 하지 않았다. 이유는 하나였다.

'그렇게 필요를 어필하며 곁에 남으라고 했다간, 나중에 필요가 없어지는 순간 내 곁을 떠날 거니까.'

최악의 경우엔?

소드마스터 증후군을 극복한 후에, 이쪽의 치료가 필요 없어졌다며 떠나게 될 수도 있다. 사람 일이 그렇다. 관계의 첫 단추를 그렇게 끼우면 안 된다. 이후로도 계속해서 필요를 양분으로 삼는 관계가 되어 버린다.

"물론 감사의 마음이나 우정, 의리, 그딴 소름 돋는 걸 요구하면서 남아달라는 건 아니고. 기본적으로 현실적인 기브 앤 테이크를 깔고 가자고. 보수 넉넉하게 줄게. 근위대와 별도로 내 곁을 호위하는 최정예 특수 보직인 셈이니까. 근위대원보다 더 많은 보수와 수당에 월차, 연차 휴가 등의 각종 복지는 물론이고 연금 혜택까지 빵빵하게."

"...."

"당연히 고용 계약서도 써줄 거고."

"...."

"재직 중에 결혼을 하면 주택 지원은 물론이고, 아이 하나씩 낳을 때마다 출산보너스가 지급될 거야. 아, 육아휴가도 보장해줄게."

"...."

"그리고 퇴직은 원하는 때라면 언제든지."

"...."

"뭐, 조건은 이 정도니까. 잘 생각해 봐. 그럼."

그는 침묵에 잠긴 데미안을 남기고 먼저 돌아섰다.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기다렸다.

데미안이 긍정적인 답을 주기를. 소설의 주인공이었던 존재가 자신의 곁에 남아주기를. 그리하여 데미안과 동등한 계약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게 되기를.

그렇게 쿨하게 돌아선 뒤부터였다.

남몰래 초조한 시간을 보냈다. 잠 못 이루며 뒤척이는 밤을 보냈다.

그리고 밝아온 다음 날 아침.

뜻밖의 상황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황태자 전하! 저희도 전하의 곁을 지켜드리고 싶습니다!"

"전하! 제가 더 잘 지켜드릴 수 있습니다!"

"전하아! 저희도 좀!"

"근위대원보다 많은 보수와 수당을 주신다면서요!"

"빵빵한 복지와 연금 혜택에서 저희는 빼시려는 겁니까!"

"주택 지원, 출산보너스에 육아휴직은 못 참지요!"

"저희도 좀 챙겨주십쇼!"

...그러니까, 데미안을 통해 이쪽의 고용 조건을 들어 버린 나머지 검투사들이 앞다투어 달려와 충성 맹세 폭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33화. 특근대 결성 (2)

"황태자 전하아!"

"아, 저희도 좀!"

"챙겨주십쇼!"

"저희 데려다가 써먹으려고 치료해주신 거 아니셨습니까!"

"보수 두둑하게 챙... 아니, 은혜 좀 갚아보겠다는데 이러시면 서운하지 말입니다!"

"여기까지 데려왔으면 끝까지 책임지셔야지요!"

"키운다며! 키우신다며!"

...어처구니가 없다.

진심으로 어이가 탈출할 지경이다.

라키엘은 침실 문 앞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는 검투사들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툭, 반문했다.

"아니, 키우긴 뭘 키워. 댁들이 감자야? 말티즈야?"

"아, 감자보다 제가 더 든든하지 말입니다!"

"말티즈보다 집도 잘 지킵니다!"

"저는 전하를 더 잘 지켜드릴 수 있습니다!"

"비켜! 전하는 내가 지켜드린다!"

흡사 이대로 뒀다간 천하제일 호위대회 경연이라도 벌일 기세였다. 라키엘은 가출한 어처구니를 향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러니까 잠깐 진정들 하고. 요약하자면, 다들 내 호위가 되고 싶다?"

"예, 그렇습니다!"

"데려다가 치료해준 의리, 은혜, 뭐 이런 것들 말고, 빵빵한 보수와 복지 혜택이 탐나서다?"

"예, 그렇...."

"맞지?"

"...."

검투사들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이쪽의 눈치를 살피며 눈알만 데룩데룩. 그 모습에 라키엘은 빙긋 웃었다.

"하하. 이 친구들 보게."

황당했다.

평소처럼 아침을 먹고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건강을 위한 소소한 산책. 건강을 위한 셀프 찜질. 건강을 위한 멍때리다 낮잠 자기 등등. 나름 보람찬 황족 백수의 하루를 앞둔 참이었는데.

한데 난데없이 침실 문밖이 웅성웅성, 어수선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나와 보니 이 법석이다. 저마다 자기가 최고의 호위란다. 세상 누구보다 더 열심히 이쪽을 지켜줄 수 있단다.

'어휴. 이거 참. 어쩌다가.'

라키엘은 한쪽을 째릿, 가자미눈으로 쳐다보았다.

검투사들이 북적대는 한쪽.

그곳에 데미안이 있었다.

"잠깐 나 좀 볼까."

그를 침실 안쪽으로 들였다. 들이자마자 콕, 찌르듯 물었다.

"흐음. 그쪽 짓이지?"

"...무슨 말씀이신지."

"무슨 말씀은, 쯧. 내 호위로 임명되어 일하는 근무조건. 그쪽이 저들한테 떠들어댄 거지?"

"떠들어댄 적은 없고, 그저 들은 사실 그대로를 전달했을 뿐입니다."

"아, 그게 그거잖아."

"그 조건, 비밀이었습니까?"

"뭐?"

"어제 전하께서 말씀하셨지요. 근무조건이 이러이러하고, 이런 혜택이 있으니 잘 생각해보라고 말입니다."

"으음, 그랬지?"

"예. 그래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열심히 생각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쉽게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설마."

라키엘의 머릿속으로 쌔한 예감이 콰칭 스쳐 갔다. 그리고 역시나. 쌔한 예감은 언제나처럼 적중했다.

"예, 맞습니다. 저들과 의논을 했습니다."

"...."

"근무조건을 따로 비밀에 부치신 적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뭔데."

"전하께서 제게 제시하셨던 근무조건 중에 휴가에 대한 것 말입니다."

"어. 그건 왜."

"가만 생각해보니 조금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월차, 연차를 챙겨주신다고 하셨지요. 육아휴가도 보장해준다고 하셨습니다. 한데 만약, 저 혼자 전하의 근접호위가 된다면 말입니다. 제가 휴가 혜택을 누릴 땐 누가 가장 가까이에서 전하를 지킵니까?"

"...."

"물론 기존의 근위대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들과 별개로 저를 뽑으신 거니까. 24시간 곁에 붙어 있을 특수한 호위를 원하시는 거니까.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아, 굳이 휴가를 언급하신 건 전하의 깊은 뜻이 있는 거로구나, 하고 말입니다."

"어이."

"혼자가 아닌 여럿이, 돌아가면서 전하를 지키면 더욱 효율적인 호위가 가능하겠구나, 라는 깊은 뜻을 말이지요."

"...그냥 너 없을 땐 근위대 시키려고 그랬는데."

"예?"

"아니. 됐고. 어쨌건, 그래서 검투사들한테 근무조건을 전부 밝혔고, 덕분에 다들 저렇게 눈이 홱 뒤집혀가지고 아침 댓바람부터 달려와 난리를 부리고 있는 거다, 이 말이지?"

"정확한 요약이십니다."

"그래, 정확해서 참 난감하네."

라키엘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원래는 계획에 없던 검투사들이었다.

'그냥 치료만 마치면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보너스 수명만 챙기면 얻을 건 다 얻은 거라 여겼다. 저들이 곁에 남아줄 거란 기대 자체를 하지도 않았다. 한데 저들이 이렇듯 적극적으로 나올 줄은 정말로 몰랐다.

'뭐, 그래도 마음에 들기는 하네.'

뜻밖이긴 한데.

조금 황당한 상황이긴 한데.

그래도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래. 차라리 저렇게 돈이랑 복지 혜택이 좋다고 솔직하게 밝히는 놈들이 백 배 낫지.'

우정이니 의리니.

은혜를 갚아야 한다느니.

그런 눈에 보이지도 않는 이유를 들먹이며 곁에 남으려 들었다면? 오히려 찜찜했을 것 같았다.

'어차피 인생살이 인간관계, 불알친구 서넛 빼면 전부 비즈니스인 거니까.'

사실 그는 정, 의리, 은혜 같은 걸 믿지 않았다. 특히 가족이나 친구도 아닌데 그런 걸 들먹이는 놈들은 절대로 안 믿었다. 경험상 그런 부류일수록 사람 뒤통수를 잘 친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도 그랬지. 특히 대학생 시절에 알바할 때. 정이니 의리니, 가족 같은 분위기 강조하는 사장들이 뒤끝이 영 별로더라고.'

보통 그랬다.

이쪽은 정에 굶주려 알바를 한 게 아니었다. 의리 타령이나 하려고 일하러 다닌 건 더더욱 아니었다.

그런 곳에서 가족 찾을 생각도 없었다. 자신은 그저 돈을 벌려고 간 거였다. 약속한 돈만 잘 챙겨주면 그걸로 만족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검투사들의 저런 태도가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나는 저들한테 보수 잘 챙겨주고. 저들은 나 야물딱지게 지켜주고. 서로 그거에만 충실하면 돼. 그게 윈윈인 거지. 뭐, 나쁘지 않네.'

게다가 저들을 자신의 호위로 삼게 된다면? 또 다른 이득도 있을 터였다.

'나만을 따르는 병력이 생기는 거지.'

사실 근위대는 자신만의 것이 아니었다. 따져보자면 엄연히 황제의 명을 따르는, 황실의 병력이었다. 평소엔 이쪽의 편의를 위해 각종 봉사를 하지만, 유사시에 황제와 이쪽의 명령이 엇갈릴 때면?

황제의 명령만을 따를 자들이었다.

'그러니 완벽하게 믿을 수는 없어.'

반면, 검투사들은 다르다.

자신만의 사병으로 키울 수 있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지켜진다면 언제까지고 함께할 수 있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자연스레 결론이 나왔다.

"다 들어오라고 해."

침실 문이 열렸다.

검투사들이 후다닥 들어왔다.

"제가 제일 먼저 들어왔습니다, 전하!"

"저는 침실 안쪽의 위험요소를 파악하느라 한 발짝 늦었습니다, 전하!"

"저는 세 번 우느라 두 발짝 늦었습니다, 전하아!"

어느 검투사의 뚱딴지같은 소리. 라키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또 뭔데. 어째서 세 번 울었다는 건데."

"전하께 진료를 받고 기뻐서 한 번!"

"...."

"오늘 아침 전하의 얼굴을 뵈어서 또 한 번!"

"허허허."

"만약 오늘 전하께서 저흴 받아주지 않으시면 앞으로 전하의 얼굴을 뵙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마지막 한 번!"

"그럼 내가 죽었을 땐 안 울겠네?"

"그땐... 저도 죽을 거니깐!"

"허허, 저놈 끌어내."

라키엘은 그저 웃고 말았다.

황태자만을 위한 특수 근위대.

통칭, '특근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