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이 밝았다.
그는 눈을 뜨자마자 가르딘 경을 불렀다.
"탕약 달일 거야. 알지? 지난번처럼 주방 비워줘."
역시 황족의 지위는 편리했다.
명령만 내리니 척척척.
탕약을 달일 세팅이 착착 완료되었다. 그렇게 비워진 주방에서 지난번처럼 마황부자세신탕을 달였다. 한데 이번엔 지난번보다 그 양이 조금 많았다.
조금 많이.
딱 10리터를 달였다.
그렇게 달여서 커다란 물병에 나눠 담은 마황부자세신탕이 식기를 기다리길 한참. 가르딘 경에게 말했다.
"가르딘 경? 잠깐 나가 있어줄래?"
"예? 전하?"
"잠깐 주방 밖으로 나가 있어달라고."
"저기, 하오나 전하?"
이쪽이 마황부자세신탕을 달이던 내내 옆에서 불안감과 초조함을 내보이며 꼼질거리던 가르딘 경이었다.
마치 물가에 어린애 내놓은 부모 같았다. 혹은 미용실에서 머리 하던 도중에 집에 가스불 켜놨다는 걸 뒤늦게 떠올린 사람 같았다.
"전하. 제가 감히 이런 말씀을 드리긴 송구하오나...."
"송구하면 하지 마."
"하오나...."
"잠깐이면 돼. 나 혼자 할 일 있어."
이제부터 10리터나 되는 마황부자세신탕을 원샷할 거다. 한데 그걸 가르딘 경이 봤다간 놀라 까무러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전하. 저는 심히 염려가 됩니다."
"흐음, 혹시 이거?"
마황부자세신탕이 담긴 병을 가리켰다.
가르딘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에도 그걸 달여서 드셨다가 고생하셨지 않습니까."
"그땐 사레들렸던 거고."
"하지만 이번엔 지난번보다 너무 많이 달이셔서 좀...."
"그래서 걱정이 되는 거야?"
"예, 전하."
"괜찮아. 시험해볼 게 있어서 많이 달인 거야. 조금만 마시고 나머지는 버릴 거거든."
주방 한쪽에 놓인 수챗구멍을 가리켰다. 그제야 가르딘 경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 그렇습니까?"
"당연하지. 설마 내가 이 많은 걸 다 마실까."
"역시.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상식적으로 봐도 사람이 저걸 다 마시는 건...."
"그렇지. 말이 안 되는 거지."
"예. 머리가 텅텅 빈 멍청이나 그런 무식한 짓을 하겠지요."
"...."
"전하?"
"나가!"
기겁한 가르딘 경을 반강제로 쫓아냈다.
주방 문을 닫아걸고 병을 들었다.
마황부자세신탕이 찰랑거렸다.
그대로 쭈욱 들이켰다.
꿀꺽꿀꺽, 1리터, 2리터, 5리터, 마침내 10리터 전부.
"...크어어. 꺼윽."
마황부자세신탕이 써클 슬롯을 가득 채웠다.
그때부터였다.
아주 조금씩.
온종일 찔끔찔끔.
시시때때로 써클 슬롯을 개방했다. 정확한 양을 맞추어 몸속에 마황부자세신탕을 투약했다. 마치 24시간 내내 맞는 특제 링거 같았다.
그 효과는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딩동!
[심장이 환호합니다.]
[허파가 춤을 춥니다.]
[대장이 괄약근으로 줄넘기를 합니다.]
[심장이 1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허파가 2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대장이 1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500]
활성화된 오장육부들이 일제히 환호하며 HP를 후원해주었다. 하지만 라키엘은 만족하지 않았다.
'기대수명이 늘어나야 해.'
그래야 확실한 효과를 봤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써클 슬롯을 돌렸다.
조금도 모자라지 않도록.
결코 지나치지 않도록.
마황부자세신탕을 투약했다.
그러는 동안 오장육부가 때아닌 수난(?)을 겪어야 했다.
[심장이 투덜거립니다.]
[허파가 투덜거립니다.]
[대장이 투덜거립니다.]
[오장육부가 마황부자세신탕에 질려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그런 메시지가 가끔.
나중엔 대놓고 투덜거리는 녀석들의 대화가 메시지로 떠오르기까지 했다.
[심장 : 막내야 오늘 반찬은 뭐냐.]
[대장 : 마황부자세신탕이지 말입니다, 형님.]
[심장 : 막내야 그럼 내일 아침 반찬은 뭐냐.]
[대장 : 마황부자세신탕이지 말입니다, 형님.]
[심장 : ....]
[대장 : 내일 저녁도 마황부자세신탕인 것 같지 말입니다.]
[심장 : 그래서 좋냐?]
[대장 : 헤헷.]
[심장 : ...대가리 박어.]
하지만 라키엘은 오장육부의 반찬 투정에도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꼼꼼하고 야물딱지게 써클 슬롯을 돌렸다. 그렇게 닷새, 열흘, 보름이 지나고 마침내 기다렸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딩동!
[당신의 예상 기대수명이 (+) 50일 증가하였습니다.]
[예상 기대수명 : 133일]
"...됐다!"
마침 저녁 식사 후의 디저트를 먹으려던 참이었다. 그러다 예고 없이 떠오른 반가운 메시지를 접했다.
라키엘은 기쁨을 참지 못하고 만세를 불렀다. 한데 그 외침이 너무 갑작스러운 탓이었을까. 옆에서 식사 시중을 들던 시녀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앗?"
시녀의 다급한 소리.
화들짝 놀란 시녀가 식탁에 올리려던 잔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챙그랑!
잔이 깨졌다.
꿀물이 쏟아졌다.
"아...."
라키엘은 굳어 버렸다. 이쪽이 갑자기 소리치는 바람에 시녀가 놀라 실수를 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시녀에게 괜찮으냐 물어보려 했다.
한데 물어보기도 전에 시녀가 먼저 반응했다.
"...소, 송구하옵니다, 전하!"
시녀가 사색이 되어 하얗게 얼어붙은 얼굴로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한데 그 어깨가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뭐야. 그냥 잔 하나 깨진 건데. 그게 저렇게나 죽을죄를 지은 듯이 사죄할 일인 건가?'
혹시 황족에 대한 존중과 두려움 때문인 걸까. 하지만 그렇게만 보기엔 시녀가 내비치는 두려움이 지나쳐 보였다.
그는 의아함을 느끼며 손을 뻗었다.
괜찮다고.
별일 아니라고.
시녀를 안심시키려 했다.
한데 어쩐 일인지, 이쪽의 위로에 시녀가 더욱 사색이 되어 창백해졌다. 아예 식은땀까지 뻘뻘 흘리며.
"제가,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전하. 하오니 지난번 같은 회초리질만은 제발...."
마치 최악의 갑질러에게 간청하듯.
거의 울먹이며 꺼내는 애원.
그걸 들은 라키엘은 흠칫했다.
10화. 프로 갑질러의 다짐 (2)
'회초리질?'
시녀가 꺼낸 뜻밖의 애원.
라키엘은 뜨악하고 말았다.
'뭐야. 회초리질이라니. 고작 잔 하나 떨어뜨려서 깨진 것뿐인데. 꿀물 조금 쏟은 것뿐인데.'
그 정도 잘못에 회초리질을 걱정하며 납작 엎드린 시녀라니.
그의 표정이 굳었다.
'설마.'
이 몸의 주인인 황태자 라키엘. 그가 시녀들을 회초리질한 적이 있었단 말인 걸까. 시녀의 겁에 질린 태도나 반응을 보면 정말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는 확인차 물었다.
"혹시 내가 너를 회초리질한 적이 있나?"
제발 없다고 해줘.
그런 쓰레기는 아니라고 해줘.
속으로 맹렬히 염원했다.
그 염원이 통한 것일까.
"어, 없사옵니다, 전하."
시녀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전하께서 직접 회초리를 든 적은 없사옵니다."
"...음?"
라키엘이 '직접' 회초리를 든 적은 없다고?
잠깐만, 설마.
"그럼 혹시... 다른 이를 시켜서?"
"...."
"정말로?"
"어, 어디까지나 소녀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었습니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이쪽에게 추궁받는다고 느낀 걸까.
시녀가 더욱 사색이 되었다.
라키엘의 표정도 더욱 굳었다.
"정말이었구나."
설마 했더니 진짜였다. 다른 이들을 시켜서 시녀를 회초리질한 적이 있단다.
황태자 라키엘.
그저 병약한 놈인 줄로만 알았는데.
넌 무슨 짓을 했던 거냐.
오만가지 의문이 다 들었다.
그는 다시 시녀를 바라보았다.
"그럼 하나 더 묻자. 당시에 네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회초리질을 당했던 거지?"
"그, 그것이...."
"괜찮아. 말해 봐."
"물방울을 튀겨서...."
"뭐?"
"전하의 소매에... 물방울을 튀겨서... 소매가 젖어서...."
"잠깐만."
"...."
"설마, 소매에 물방울 조금 튀었다고 그랬던 거야?"
"소, 송구하옵니다."
"허, 참."
아무래도 시녀의 태도를 보아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듣고 보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기도 차지 않았다.
'뭐냐. 황태자 라키엘. 그런 놈이었어?'
문득, 소설 '마검황'이 떠올랐다.
그 소설 속에서 황태자 라키엘은 초반에 잠깐 등장하는 조연에 불과했다. 그러다 보니 등장하거나 언급되는 분량도 적었다.
평소에 어떻게 생활했는지. 주변인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런 면들이 세세하게 묘사된 적이 없었다. 그저 허약해서 각종 지병에 시달리며 골골대다가 요절했다, 정도로 요약되는 캐릭터였으니까.
그래서였다.
그저 병약가련.
딱 그 정도의 캐릭터를 상상하고, 예상했었다. 한데 그 껍데기를 한 꺼풀 들춰서 디테일한 면모를 살짝 엿보자니?
'이거, 생각보다 쓰레기 같은 놈이었던 건가.'
저렇듯 사소한 실수에도 벌벌 떠는 시녀. 그 모습을 보자니 황태자 라키엘 이놈이 평소에 어땠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는 씁쓸함을 느끼며 혀를 찼다.
"쯧. 됐으니까 그만 빌고 일어나. 회초리질 안 할 거니까."
"네?"
"못 들었어? 일어나라고."
시녀가 빛의 속도로 일어났다. 하지만 여전히 겁을 먹은 건지, 쭈뼛쭈뼛 이쪽의 눈치를 보는 기색이었다.
"나는 괜찮으니까 깨진 잔만 치우고 가."
"아, 알겠습니다, 전하."
시녀가 허둥지둥. 의외로(?) 쉽게 용서받은 듯한 상황에 살짝 당황하며 움직였다. 그걸 지켜보던 라키엘은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성급하게 치우다가 손 다친다."
움찔!
깨진 유리를 급하게 집으려던 시녀의 손이 움찔했다.
"빗자루 쓰면 되잖아. 급하다고 손으로 치우다가 다치면 어쩌려고."
"...송구하옵니다, 전하. 하마터면 누추한 피로 귀한 바닥을 더럽힐 뻔했습니다."
"아니, 내 말뜻은 그게 아니고...."
"피, 피가 나도 절대로 바닥에 흘리진 않겠습니다, 전하."
"그게 아니라니깐...."
"하오니 회초리질만은 제발...."
"그 뜻이... 아닌데...."
깊어가는 오해 속에 다급한 빗자루질만 바삐 이어졌다.
그렇게 깨진 잔과 쏟아진 꿀물을 치운 시녀가 허둥지둥 바람처럼 물러났다. 아니, 도주했다. 꿀물을 다시 가져올 필요 없다는 이쪽의 말에 울먹이며 감사를 표하기까지 하면서였다.
"...."
저 도망치는 모습.
꼭 미치광이 성격파탄자한테 감금되어 있다가 탈출하는 사람 같은 표정인데.
'황태자 라키엘, 이놈, 대체 뭐지.'
상황이 이쯤 되니 궁금해졌다. 다행히도 마침 이쪽의 질문을 받아줄 사람이 곁에 남아 있었다.
"가르딘 경."
"예, 전하. 부르셨습니다."
"어. 불렀지. 그런데 말이야."
"예, 전하."
"경은 왜 그런 묘한 눈빛으로 날 보고 있어?"
아닌 게 아니라, 조금 전부터 이쪽을 보는 가르딘 경의 눈빛이 참으로 오묘했다. 마치 뜻밖의 훈훈한 광경을 목격한 사람의 눈빛 같달까.
그게 어쩐지 더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질문 하나 더. 방금 저 시녀, 왜 저래?"
"으음, 그야 전하의 너그러움에 감격하며 물러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쯧. 입에 발린 소리는 하지 말고."
"예?"
"아까 저 시녀도 그랬잖아. 내가 다른 이를 시켜서 회초리질을 한 적이 있다고."
"예, 그랬습니다."
"사실은 요즘 내가 많이 아팠던 바람에 기억이 좀 뒤죽박죽이거든. 그래서 묻는 거야. 엄청나게 큰 잘못도 아니고, 고작 소매에 물방울 조금 튀겼다는 이유로 그랬다며."
"...예, 그랬습니다."
"그래서 재차 묻는 건데, 혹시 다른 시녀들이나 시종들도 비슷한 일을 겪었어?"
"전하."
"내 물음에 대답부터."
"...예, 겪었습니다."
"서로 회초리질을 하게 했다고? 내가?"
"예, 전하.... 하지만, 저희는 전하를 믿습니다."
"믿는다니, 뭘."
"어린 시절의 전하는 너그럽고 인자하기로 소문이 자자하셨으니까 말입니다."
"크면서는 안 그랬다는 말로 들리는데?"
"아닙니다. 그것은 전하의 잘못이 아니십니다."
"그럼?"
"고약한 병마가 전하를 괴롭히고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 탓입니다."
"쯧. 그건 핑계잖아."
"아닙니다, 전하."
가르딘 경이 이쪽의 말을 극구 부인하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저거, 말만 그럴싸하게 포장한 면피용 멘트 같다.
라키엘은 정색했다.
"솔직히 내가 요즘 몸이 안 좋다 보니까 기억력이 확 떨어진 거 같아서. 지나간 일들이 잘 떠오르지가 않거든. 그래서 좀 자세히 듣고 싶은데."
"예, 전하."
"난 어떤 사람이었지? 경이나 이곳의 시녀, 시종들에게 말이야."
"전하께서는 물론...."
"객관적으로 말해. 거짓말하지 마. 다른 사람한테도 확인해볼 거야. 만약 조금이라도 거짓이 있으면 그땐 확, 이상한 약 보글보글 끓여서 경이 보는 앞에서 벌컥벌컥 마셔 버린다?"
"예?"
"약에 뭘 넣을지는 내 기분에 따라서 달라질 거고."
"전하?"
"자, 그럼 말해 봐. 난 어떤 사람이었지?"
"그, 그것은....
셀프 인질 협박(?)의 효과는 대단했다.
가르딘 경의 입이 술술 열렸다.
♣
반 시간가량의 이야기가 끝났다.
수많은 증언과 목격담.
객관적인 평가와 회고.
그걸 들으며 라키엘은 냉정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황태자 라키엘 그놈, 초 예민보스 갑질러였네.'
근본이 나쁜 놈까지는 아니었다.
어린 시절엔 나름 썩 괜찮았단다.
한데 병마에 시달리며 점점 예민해졌다나.
'처음엔 조금씩 예민해지나 싶었는데, 나중엔 수시로 선을 넘은 것 같고.'
가르딘 경의 증언.
그걸 통해 엿본 황태자 라키엘은 히스테리의 화신이었다. 아주 조금만 신경이 거슬리는 일이 있으면 벌컥 화를 냈단다.
소리를 버럭 지르고.
물건을 집어 던지고.
짜증이란 짜증은 다 내며.
심지어 시녀와 시종들을 회초리질하기도 했단다. 물론 본인의 기력이 달리니까 다른 시종이나 시녀를 시켜서.
덕분에 이곳 별궁의 시종 시녀들은 근처에 황태자만 지나가면 숨도 제대로 못 쉬었단다. 행여나 신경 거스르게 해서 날벼락을 맞을까 봐.
그만큼 황태자 라키엘의 히스테리와 갑질은 엄청났다.
'숨 크게 쉬는 게 거슬린다고 회초리질하고. 자는데 재채기 소리 들렸다고 이틀간 안 재우고. 식사하는데 소스 한 종류가 빠졌다고 요리사와 시종 시녀 모두를 나흘이나 굶기고. 옷자락 움직이는 소리 듣기 싫다고 뺨까지 때리고. 어휴. 사람 새끼냐, 그게.'
갑질도 그런 갑질이 없었다.
당하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따질 수도, 대들 수도 없는 황족 레벨의 갑질이기에 더욱 그랬다.
'최악이었네.'
이제야 아까 시녀가 보였던 반응이 이해가 됐다. 얼마 전, 써클 슬롯을 시험하다가 물폭탄을 터뜨린 밤, 이쪽의 조악한 변명을 쉽게 믿어주던 근위병들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때 난 화가 나서 병을 깨뜨렸다고 핑계를 댔지. 그런데 황태자 라키엘은 실제로도 평소부터 그런 짓을 벌였던 거야. 덕분에 근위병들이 내 핑계를 자연스럽게 믿었던 거고.'
하필이면 이쪽이 댔던 핑계가 평소 황태자의 행실이었다니. 우연치고도 묘한 우연에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한데 한편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있었다.
"그런데 가르딘 경."
"예, 전하."
"경의 말은 잘 들었어. 솔직하게 얘기해줘서 고맙고. 그런데 말이야. 아직 궁금한 부분이 있는데."
"하문하십시오, 전하."
"어. 다른 시종이나 시녀들이 날 두려워하는 이유는 알겠거든. 그런데 경은 왜 그래?"
"...예?"
"아니, 가만 생각해보니까 그렇더라고. 내가 그렇게 심하게 굴었다며. 한데 지금까지 경은 내 앞에서도 위축되거나 날 두려워한 적이 딱히 없었던 듯해서."
"저야 전하를 믿으니까요."
"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돌아온 가르딘 경의 대답.
듣자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믿는다니? 내 뭘?"
"그야, 으음, 원래는 착하셨던 분이셔서...."
"그래서?"
"제가 병을 낫게 해드리면, 다시 예전의 품성으로 돌아가실 거라고 믿었습니다. 최근엔 그 믿음에 보답을 받기 시작했고 말입니다."
"보답이라니?"
"최근의 전하 말입니다."
"...."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어찌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지만, 바뀌셨습니다. 바뀌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그날, 일기를 쓰다가 피를 토하며 혼절하셨던 날 이후부터 말입니다."
"아, 그날?"
그날이라면 이쪽이 라키엘의 몸에 들어온 날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가르딘 경은 조금은 감격한 투로 말했다.
"그날부터 전하께서 바뀌셨습니다. 말투와 행동이 조금... 거칠어지시고 예법을 벗어나게 되셨지만, 그래도 저나 시종 시녀들에게 짜증을 내지 않으셨거든요. 한 번도."
"흐음. 그래서 좋았어?"
"뭉클했습니다."
"감동적이었어?"
"지금도 하늘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아니라 나한테 감사해야지?"
"감사합니다, 전하."
"그렇지. 그거지."
"...."
"아무튼, 내가 바뀌어서 좋아?"
"물론입니다, 전하."
"바늘로 막 자해도 하고. 그치?"
"어, 그건...."
"막 독초 뿌리도 펄펄 끓여서 원샷하고. 그치?"
"...."
"참 좋겠다, 우리 가르딘 경은."
"...."
가르딘 경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한데 가만히 보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이 와중에도 경의 입꼬리엔 훈훈한 미소가 희미하게 걸려 있었다.
'그건 나도 비슷하려나.'
아무래도 그런 거 같다.
말로는 이렇게 놀리고 있지만, 고마우니까. 이렇듯 충실한 사람이 내보인 진심 앞에서 고맙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 라키엘은 그런 본심을 애써 갈무리하며 짐짓 짓궂게 웃었다.
"어휴. 그나저나 식사 중에 이게 무슨 난리인지. 빵이나 마저 먹자. 그런데 가르딘 경은 저녁 먹었어?"
"아직 안 먹었습니다, 전하."
"같이 먹을래?"
"...예?"
"여기, 빵이 좀 남을 거 같은데."
"전하, 저는...."
"받어 그냥."
"...."
반으로 뚝 잘라서 건넨 빵조각. 그걸 들고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가르딘 경.
그 모습에 다시금 미소가 나왔다.
그리고 남몰래 다짐했다.
충성심 하나로 이쪽의 곁에 남았다가 처형되는 최후를 맞이한 소설 속 가르딘 경. 여기선 그런 불운을 겪지 않게 해주겠다고.
이쪽이 죽는 일도, 그쪽이 책임을 덮어쓰고 죽는 일도, 결코 없게 하겠다고. 살아남겠노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리고 다음 날.
황제의 부름이 별궁에 전해졌다.
11화. 자격을 증명하라 (1)
"전하, 황제 폐하께서 전하를 호출하셨습니다."
뜻밖의 기별이 전해져 온 것은 아침 무렵의 일이었다. 평소처럼 셀프 진맥으로 하루를 시작하려는데 가르딘 경이 소식을 전해 온 것이었다.
"음? 어째서?"
"저기, 그게...."
가르딘 경이 우물쭈물하다가 말했다.
"아무래도 전하의 기행이 폐하의 귀에 닿은 듯합니다."
"내 기행?"
기행이라면, 설마.
"예, 생각하시는 게 맞을 겁니다."
"...경이 내 행동을 알린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닙니다."
가르딘 경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별궁에는 눈과 귀가 많으니까요. 누군가의 입을 통해 전하의 기행... 아니, 몸에 스스로 침을 꽂은 행동이나 약재를 스스로 달여서 드신 행동이 황궁에 전해진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쯧."
라키엘은 혀를 찼다.
기행이라니.
'그런데... 그것 때문에만 날 부르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어쩐지 느낌이 그랬다.
뭔가 있다.
단순히 얼굴이나 보자고. 혹은 요즘 이상한 짓을 벌이는 거냐며 걱정이 되어서. 그래서 황궁까지 오라는 건 아닐 것이다.
'가보면 알겠지.'
문득 소설 마검황의 초반 전개와 설정이 떠올랐다. 초반에 등장했던 황제의 모습도 되새겨보았다.
'황제는 사자처럼 엄격한 사람이었지. 자신에게도, 주변에게도.'
물론 자신의 아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끊임없이 아들들을 시험했다. 특히 장남이자 후계자인 황태자를 가장 많이 시험했다.
황위를 이어받을 자격이 있는지.
과연 그 지위를 누릴 수 있을지.
수시로 심사하고, 판단하고, 평가했다. 말 그대로 절벽에서 새끼를 떨어뜨리는 사자 같은 자였다.
한데 원작 소설 속의 황태자 라키엘은?
'그 기대를 완벽히 저버렸지.'
나약한 육체와 정신을 지닌 황태자였다. 너무나 나약해서 그 약한 면을 가리고자, 주위에 행패마저 부렸던 인물이었다.
'그 나약함에 황제가 실망했다던 언급이 있었어. 그리고 황태자가 죽기 두 달쯤 전이었나. 황제가 마지막으로 황태자를 호출했지. 그게 아마 이때 무렵이었을 텐데.'
소설 속의 황태자 라키엘은 그 마지막 호출에 응하지 못했다. 이미 병세가 너무나 악화되어 있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지도 못했다.
억지로 업히다시피 해서 마차를 탔지만, 결국 황궁까지 반도 못 가서 피를 토하며 별궁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 결과로 라키엘은... 실질적인 황태자의 권한을 모두 박탈당했지.'
그날부터였다.
황제가 라키엘을 포기했다. 절벽을 기어 올라온 다른 아들에게 황태자위를 넘겨주었다.
냉정한 심사와, 판단과, 평가의 결과였다.
한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어. 꽤 많이.'
소설에서처럼 침대 신세가 아니다. 황궁에 다녀오는 일 정도는 거뜬하다.
라키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가야지. 마차 준비해."
"알겠습니다, 전하."
그 뒤의 과정은 일사천리였다.
롤x로이스급 황족 마차를 타고 다그닥다그닥. 호위들과 함께 별궁을 출발했다. 한 시간가량의 여정 끝에 황궁에 도착했다. 광대한 정원과 수많은 층계, 복도와 모퉁이를 지났다. 마침내 황제, '아스테리온 테스타로사 마젠타노'를 알현하게 되었다.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가 이 땅의 합당한 지배자이신 황제 폐하를 뵈옵나이다."
나름 소설 속 대사를 떠올리며 자연스러운 예를 올렸다.
그런 태도 때문이었을까.
언제나 유약하고 나약했던 맏아들, 라키엘을 내려다보는 황제의 눈동자에 희미한 이채가 서렸다.
'...아스라한 심법?'
황제, 아스테리온은 저도 모르게 되뇌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스라한 심법.
오직 황가의 직계에게만 전수되는 비전.
황태자가 갓난아기였던 시절, 자신이 직접 황태자의 작은 심장에 정성껏 심어주었던 심법이엇다. 하지만 타고난 허약체질 때문에 황태자가 한 번도 사용하지 못했던 심법이었다.
'한데 어찌하여 방금은 심법의 공명이 느껴진 것인지.'
아스라한 심법을 지닌 이는 다른 이의 심법이 지닌 공명을 감지할 수 있다. 그리고 황제는 더블 써클을 보유한 실력자였다. 방금, 그가 맏아들에게서 느낀 공명은 분명 아스라한 심법의 것이었다.
'설마.'
황태자 라키엘을 굽어보는 황제의 눈길이 깊어졌다. 맏아들의 창백한 안색을 면밀히 살폈다. 그 내면의 공명을 다시금 파악하려 하였다.
하지만 황제는 허약한 맏아들에게서 어떠한 긍정적인 징조도 느낄 수 없었다.
'...착각이었던가.'
황제의 눈가에 실망의 기색이 스쳤다. 잠깐 느껴졌다 여겼던 공명이 더는 감지되지 않았다. 그가 본 황태자의 신색은 여전히 초라했다.
비쩍 마른 몸은 잘못 건드리면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걸음걸이며 몸짓 어디에서도 튼튼한 정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안색은 창백하다 못해 파리했다. 입술의 혈색 또한 초라했다.
즉, 황태자의 모습은 전형적인 병자의 그것이었다. 그것도, 어찌 손 쓸 수도 없을 중환자의 것이었다.
'쯧쯧.'
아무래도 자신이 잠시 착각을 하였던 것인가 보다. 끝내 놓지 못하고 있던 일말의 기대가 혼동을 불러왔던 것이었나 보다.
황제는 안타까움과 실망감에 내심 혀를 찼다. 저토록 나약하게 병든 육신으로 아스라한 심법을 일깨웠을 리 없다. 아스라한 심법은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어찌하여 하필이면.'
황제는 탄식했다.
하필이면 맏아들이 저런 지경이다. 기껏 제국을 이끌어갈 후계자로 삼았건만. 제국은커녕 제 한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꼴사나운 모습만 보이고 있었다.
수많은 치유 마법도 소용이 없었다. 성직자의 축복과 가호도 마찬가지였다. 곁에 붙여준 무수한 명의들도 손을 털고 떠났다.
그 의미는 자명했다.
손 쓸 방법이 없다.
답이 없다.
아마도 황태자는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수많은 명의들조차 침몰선에서 탈출하는 쥐떼처럼 떠난 것이겠지.
'너에게는 미래가 없는 것인가.'
처음부터 둘째를 후계로 삼았어야 했던가.
황태자를 굽어보는 황제의 눈길이 딱딱해졌다. 그는 아버지가 아닌 황제로서, 아들이 아닌 황태자를 향해 물었다.
"그래, 별궁에서는 지낼 만하였느냐."
"예, 폐하."
돌아오는 대답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황제의 눈길이 더욱 굳었다.
"짐이 듣기로는 조금 달랐던 것 같다만."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황태자. 그 정수리를 향해 나직하지만 준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최근 들어 별궁에서 기이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지?"
"...."
"왜 대답이 없느냐."
"그것은...."
"자해를 한다고 들었다."
"...."
역시 뜨끔한 걸까.
입을 다물어 버린 황태자를 향한 황제의 시선이 딱딱하다 못해 위압적으로 변했다.
"바늘을 제 몸에 꽂아두는 짓을 벌였다지. 독초를 달여 마시기까지 하였다지. 실로 구차하고 또 구차하다. 네가 그러고도 황가의 후예라 할 수 있겠는가."
"...."
"평소 아랫것들을 혹독하게 대한다고는 들었다. 힘들어서였겠지. 나약해서였겠지. 한데 이제는 그 나약함의 화살로 자신을 겨누기까지 하는가. 어찌하여 고작, 육신의 고단함을 견디지 못하고 마음까지 무너져 그런 작태를 보였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릴 적부터 한 번도 든든한 모습을 보이지 못한 자신의 후계자가. 그런 후계자의 나약함이 차차 치유될 것이라 여긴 자신의 어리석었던 믿음도. 지금 이 순간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또 다른 어리석음마저.
갈 곳 없는 원망과 후회가 되었다.
시리디시린 목소리에 배어들었다.
"그래서는 아니 된다. 너는 자랑스러운 황가의 적통이며, 또한 황가의 일원이다. 하니 그 어떠한 순간에라도, 설령 몸과 마음이 무너지는 순간에라도."
속이 곯고 썩어 문드러지는 한이 있어도.
적어도 겉으로는.
"위엄과 품격을 잃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러니 너는 죽는 순간까지도.
"적어도 추태는 부리지 말도록 하거라. 알겠느냐."
"...."
황태자 라키엘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이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대답 대신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허. 저 아저씨 말하는 거 보소.'
듣고 있자니 조금 어처구니가 없었다.
말은 엄청 위엄있게 하는데.
황가의 품격을 거론하는데.
그 말을 살짝만 곱씹어 보니까?
'그냥 집안 이미지에 먹칠하지 말고 조용히 지내다가 죽으라는 거잖아.'
과연 저게 아들에게 할 소리일까. 만약 자신이 아닌, 원래의 라키엘이 저 말을 들었다면?
'엄청나게 상처받았겠네.'
다른 이도 아닌 아버지의 입으로 저런 말을 듣는다면 그랬을 터다. 하지만 이한은 아니었다.
'대강 따져 봐도 내 아버지 아니니까.'
황제는 라키엘의 아버지일지언정 자신에겐 아니었다. 아버지는커녕, 오늘 처음 본 초면인 아저씨일 뿐이었다.
어쩌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황제의 가혹한 발언이 쏟아졌지만, 그의 멘탈엔 스크래치도 나지 않았다.
"또한, 일신의 건강이 문제가 되어 황위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현명한 판단을 내려야 하지 않겠느냐."
'현명한 판단?'
라키엘은 눈살을 살짝 찡그렸다.
'쌔한데. 지금까지 나 갈군 건 그냥 인사치레고, 이제부터 꺼낼 이야기를 위해서 날 부른 거였구만.'
어쩐지 감이 왔다.
결국, 그 감이 정확히 맞았다.
"둘러 말하지 않겠다. 황위의 무게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그것을 보다 적합한 다른 이에게 양보하는 것 또한 미덕이 아니겠느냐."
"...예?"
"네 아우, 2황자에게 황태자위를 넘기라는 뜻이다."
황제의 일방적인 말이 이어졌다.
"생각해 보거라. 그것이 너에게도, 모두에게도 도움이 되는 결정일 터. 또한, 이것은 짐의 배려이기도 하다."
"...."
배려라.
이걸 거절하면, 황명으로 황태자위를 몰수하고 2황자에게 주겠다는 뜻인가.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이쪽을 엄하게 바라보던 황제의 눈빛이 딱 라면스프 한 톨만큼 너그러워졌다.
"어떠한가?"
"...."
라키엘은 입을 다물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제안, 아니, 압박이었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당황하지 않은 비결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한의사로 살았던 경험 덕분이었다.
'환자들 중에도 뜬금포로 훅 치고 들어오는 말씀을 던지는 어르신들이 종종 있었거든.'
이 세상엔 별별 사람이 많았다.
애인은 있느냐는 둥.
그러다가 언제 결혼할 거냐는 둥.
사소한 오지랖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특히, 한의원을 찾아오는 어르신들 중에는 정신이 깜빡깜빡하는 분들이 은근히 계셨다.
뜬금없이 이쪽을 아들로 대하는 어르신. 옛날에 헤어진 애인으로 보는 어르신. 심지어 아흔 먹은 어르신께 아빠라는 소리까지 들어봤다. 침 놓다가 팔자에도 없던 성인용 기저귀를 갈아드린 적도 있었다.
그런 상황들을 하도 겪다 보니 멘탈 단련은 자동이었다. 아마 별별 다양한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는 대한민국 자영업자 출신(?)이라면 다들 비슷하지 않을까.
지금 같은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뭐. 조금 놀랍기는 한데, 그렇다고 판단력까지 깨질 정도는 아니고.'
그는 황제를 힐끗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엄한 눈빛의 황제. 그 눈빛 속의 의도가 어쩐지 훤히 보였다. 그것이 그가 당황하지 않은 두 번째 비결이었다.
'그냥 황태자 라키엘이었다면 당황했겠지. 예상 밖의 상황에 충격을 받아 허우적거렸겠지. 하지만 난 아니야. 그쪽의 의도, 알겠어. 소설을 읽었으니까. 이런 상황, 소설 마검황 속엔 없었으니까. 한데 그래서 더 잘 알겠어.'
소설과 달라진 상황.
황제가 내비친 의도.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든 것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예측되고, 그려지고, 파악되었다.
그 순간, 라키엘은 확신을 담아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황제를 움찔하게 만드는 한마디를 꺼냈다.
12화. 자격을 증명하라 (2)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송구하오나, 거절하겠습니다."
드넓은 대전에 황태자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렸다. 언제나 병약하고 허약했던 황태자. 그렇기에 제 아비인 황제 앞에서도 단 한 번도 당당하지 못했던 황태자였다.
한데 오늘만은 어쩐 일인지 달랐다.
다른 것은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뭣?"
황제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아무런 겸양이나 미련조차 보이지 않는 거절이라니. 거절치고도 너무나 직설적이었다.
자신의 아들, 그중에서도 특히 나약했던 황태자에게서 이런 거절을 들을 줄이야. 오늘 황태자를 부르면서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반응이었다.
아니, 평생 겪어보지 못했던 반응이었다.
"방금, 무어라 하였느냐."
확인차 거듭 물어보았다.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폐하께서 내리신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씀이옵니다."
"...."
황태자가 내보인 뜻밖의 당당함에 놀란 것도 잠시. 황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눈길에 노기가 서렸다.
"거절? 짐의 제안을?"
"예, 그렇습니다."
사자 같은 황제의 은은한 진노.
그 목소리 속에 깃든 압박감.
라키엘은 그걸 생생하게 느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의 의사를 무르지 않았다. 아니, 무를 수가 없었다.
그러면 안 된다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하지. 지금 황제의 저 제안, 원작에는 없던 거야. 이런 상황, 소설 마검황 속엔 없었지. 하지만 그렇다고 쫄 이유는 없잖아. 왜 저러는지 이유가 훤히 보이니까.'
그랬다.
2황자에게 황태자위를 넘기라는 황제의 제안. 그에게는 저 제안의 이유와 의도가 훤히 보였다.
'간단해. 2황자에게 보다 적법한 명분을 주려는 거지.'
사실 황태자위를 넘기는 일이야 어렵지 않다. 솔직히 이쪽의 동의를 얻을 필요도 없다. 그저 황제의 명령이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다.
'하지만 그런 편한 절차를 놔두고 굳이 내게 양보를 권유하는 건... 황가의 체면을 살리는 것과 동시에, 이후 2황자에게 더 큰 권한과 명분을 주기 위함인 거겠지.'
이쪽이 양보를 해줘야 한다.
그렇게 '좋은' 그림으로 황태자위를 넘겨줘야 한다.
'국내외에 일종의 선전 효과를 주겠다는 거지. 보다 능력 있는 아우의 존재를 인정하고서 선의와 미덕으로 흔쾌히 자리를 양보한 장자와, 그런 장자에게서 황태자위를 물려받은 자격 있는 아우... 라는 그럴듯한 그림 말이야.'
그렇게 일이 진행된다면?
황태자를 갈아치우는 일을 벌이면서도 황가의 체면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2황자에게 능력 있는 존재라는 이미지가 붙게 된다. 근본과 정통성 타이틀도 붙일 수 있게 된다.
썩 괜찮은 정치적 광고, 프로파간다가 되는 셈이다.
'게다가 나한테서 강제로 황태자위를 떼어내서 2황자에게 붙여주는 것보다 모양새도 좋게 나올 거고 말이지.'
만약 이쪽의 '양보' 없이 황태자위를 떼어내 버리면? 그렇게 2황자가 황태자가 된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라키엘에겐 그게 훤히 보였다.
'이쪽이나 2황자의 이미지가 아까의 양보 시나리오와는 완전히 달라지겠지. 건강 문제로 황태자위를 빼앗긴 장자와, 그것을 강탈한 2황자... 라는 이미지.'
말 그대로 2황자에게 '찬탈자'적 이미지가 붙게 된다. 아마도 그건 황제가 바라는 바가 아닐 터다. 2황자의 정통성이 훼손될 터다.
평생 2황자를 따라다닐 부담스러운 꼬리표가 되겠지.
'황제는 그걸 피하고 싶은 거고.'
라키엘은 눈길을 들었다.
황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짐짓 진노한 것처럼 보이는 황제.
하지만 그 눈길 속에는 희미한 초조함도 함께 엿보였다.
'초조하겠지. 내가 여전히 허약해서 미덥지가 못한데, 자격이 없어 보이는데, 애매하게 버티면서 죽을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어서.'
문득, 소설 마검황 초반의 전개가 떠올랐다.
이 시기의 황태자 라키엘은 지금의 이쪽보다 훨씬 위독한 상태였다. 일기를 쓰다가 심한 각혈을 했던 날 이후 병세가 악화되었다. 아예 병상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누가 봐도 오래 살지 못할 신세였다.
덕분에 원작에서는 황제가 오늘과 같은 제안을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오늘내일하는 라키엘에게서 황태자위를 거두어 자연스럽게 2황자에게 넘길 수 있었으니까.
한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나 때문인 거네.'
라키엘은 내심 어깨를 으쓱였다.
이쪽이 죽지 않으려 나름 애쓰고 있어서. 몸에 좋다는 음식과 약을 알차게 챙겨 먹고 있어서. 심지어 꾸준한 셀프 침술도 야물딱지게 펼치고 있어서. 덕분에 원작 속 황태자 라키엘보다 훨씬 쌩쌩한 상태가 되었다.
'물론 아직 시한부 인생 신세를 벗어나진 못했지만, 저질 체력이지만, 그래도 최소한 두 발로 걸어 다니면서 사람 구실을 하고 있으니까.'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황제가 엿보이는 저 일말의 초조한 기색은. 이쪽을 향해 끝내 내비치는 실망의 기색 또한.
"너는, 정녕 짐의 배려를 모르겠느냐?"
황제의 음성이 묵직해졌다.
진노와 실망.
안타까움과 책망이 뒤섞인 눈빛이 이쪽을 훑어왔다.
"비록 네가 허약하고 병약하다 하나, 짐은 그래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적어도 그 정신만은 끝내 무너지진 않았을 것이라고, 최소한의 현명함과 총기만은 잃지 않았으리라고 말이다. 한데 그러했던 내 기대가 틀렸구나."
서릿발처럼 서늘해지는 목소리.
마치 절벽 아래로 제 자식을 던지듯.
냉엄한 말들이 이어졌다.
"실망이다. 실로 실망이야. 그래, 고작 허울뿐인 황태자위가 그리도 중하더냐? 쥐고 있어보았자 평생 쓸 일도 없을 그 자리가 그렇게나 탐나는 것이었더냐? 하여 너는, 짐과 황가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끝내 많은 이들을 번거롭게 만들어야 성이 차겠단 말이더냐?"
"...."
"어째서 대답이 없는가. 정녕 네가 원하는 바가 그러한 것이더냐?"
이제 황제의 눈길은 아예 얼음장 같았다. 자신의 제안이 나름의 배려라고 여겼는데, 그걸 이렇게 거절당하니 실망감이 이만저만이 아닌 듯했다.
라키엘은 쓴웃음을 삼켰다.
'쯧. 거절 한 번 했다고 아주 뼈를 부술 기세로 디스하네.'
그냥, 솔직한 심정으로는 황제의 제안을 넙죽 따르고 싶었다. 사실은 그게 제일 편한 길이었다.
'당연하지. 내가 황제 같은 거 해서 뭐해. 잘할 자신도 없는데.'
어디까지나 자신은 대한민국에서 한의원을 하다가 망한, 그저 그렇고 평범한 모솔 한의사 이한일 뿐이다. 그저 남는 시간에 소설이나 영화 보며 낄낄거리고, 게임 좀 하는 게 여가의 전부였던 그런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한데 황제라니.
택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뭔 황제를 해. 자신 없어. 나라 말아먹기 딱 좋을걸.'
그래서였다.
황제 같은 거, 되기 싫었다.
가능하다면 황태자위도 넙죽 넘기고 싶었다. 그저 황족의 지위와 부유함만 누리며 평생 백수 건물주처럼 살고 싶었다. 당연히 지금 황제가 건네는 제안이 너무나 매혹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저 제안을 받으면?
망한다.
자신도.
황가도.
제국도.
전부.
'2황자 때문에.'
황태자위를 물려받게 될 2황자가 문제였다.
멍청하거나 악한 놈이라서?
아니었다.
2황자는 나름 명민하고, 성실하고, 유능했다. 그건 소설 마검황에서도 여러 번 대놓고 언급된 내용이었다.
하지만 2황자의 그러한 명민함도, 성실함도, 유능함도, 모두 평화의 시대에 어울리는 특성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소설 속에서 묘사된 2황자는... 나름 괜찮은 놈이었어. 썩 훌륭한 군주가 될 재목이었지. 만약 평화의 시대가 계속 이어졌다면 분명 그랬을 거야. 최소한 평타 이상은 친 황제로 역사서에 새겨졌겠지. 하지만....'
곧 전란의 시대가 온다.
소설을 읽은 그는 알고 있었다.
어떠한 혼란과 참화가 제국을 덮쳐오는지. 그 앞에서 제국이 얼마나 처참한 몰락을 맞이하는지. 2황자 또한 얼마나 비참한 최후를 겪게 되는지 또한.
모두 알고 있었다.
'2황자는 전란의 시대에 어울리는 인물은 아니었지. 아니, 최악이었어.'
평화의 시대에 통했던 2황자의 명민함과 유능함, 성실함은 전란의 시대엔 통하지 않았다.
'대놓고 고구마 군주였으니까.'
빠른 결정이 필요한 때에 망설이고. 결단의 시기와 기회를 놓쳐 버리고. 끝내 수습할 수 없는 지경을 맞이하고야 마는, 우유부단한 고구마 군주. 그것이 소설 속 2황자의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라키엘은 그렇게 제국이 무너지게 두기 싫었다.
'제국과 황가가 무너지면... 내가 비빌 언덕도 사라지는 거잖아.'
어디까지나 황족으로 떵떵거려야 한다.
그게 최고의 인생 계획이다.
그러자면 제국이 멀쩡해야 한다.
한데 2황자는 전란의 시대에서 제국을 지켜낼 능력이 없다. 그런 녀석에게 황태자위를 넘겨줄 수는 없다. 이쪽이 모처럼 얻은 크고 아름다운 금수저, 아니, 황족 수저를 지켜내기 위해서라도, 절대로 2황자에게 황태자위를 양보해선 안 된다.
라키엘은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까.'
황제를 힐끔 쳐다보았다.
여전히 서릿발 같은 기세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황제. 솔직히 좀, 많이 부담스러웠다.
'하. 초면부터 진짜.'
라키엘은 황제의 아들이겠지만, 이쪽은 가짜다. 자칫 너무 많은 말을 하는 와중에 이쪽의 정체를 들킬까 살짝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이대로 입만 다물고 있다간?
황제가 원하는 대로 상황이 흘러갈 것이다. 결국 2황자에게 황태자위가 넘어갈 것이다.
'쯥. 어쩔 수가 없구만.'
라키엘은 슬쩍 안면 근육을 움직였다.
긴장감으로 굳었던 볼을 풀고. 입술을 우물거리며 말랑하게 만들고. 혓바닥에 촵촵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저는 억울합니다."
"억울?"
"예, 폐하."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과 표정에 확신을 담아 말했다.
"물론 저는 폐하의 말씀처럼 병약합니다. 하지만 정신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현명함과 총기 또한 잃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폐하의 제안을 거절한 것입니다."
"뭣이?"
"사실 제겐 황태자위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자리에 욕심과 미련을 지닌 것도 아닙니다. 대신 저는 다른 것에 욕심과 미련을 품고 있습니다."
"다른 것?"
"예. 이 제국의 번영과 황가의 안녕입니다."
어디까지나 이 몸의 탱자탱자 라이프를 위해서.
"...그것들을 소중히 여기기에 황태자위를 넘기지 않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허. 나약한 그 몸으로 황태자위를 붙들고 있으면, 이 제국이 번영하고 황가에 안녕이 찾아온단 말이더냐?"
"물론, 그렇습니다."
"허. 허허."
황제가 처음으로 웃었다.
하지만 그것은 호의를 품은 웃음이 아니었다.
"가당찮구나. 실로 가당찮고 구차해. 그렇게까지 황태자위가 소중하단 말이더냐, 네게는?"
"말씀드렸다시피, 황태자위가 아니라 황가의 번영과 안녕이 소중합니다."
"끝까지 말은 그럴싸하구나."
"말만 그럴싸하진 않을 겁니다."
"...그건 또 무슨 뜻이더냐."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안?"
"예."
"말해보라."
황제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제국의 지배자다운 무시무시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라키엘은 그러한 압박감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한참 쪼들리던 시절, 한의원이 있던 상가 빌딩의 건물주가 저 황제보다 훨씬 무섭고 부담스러웠으니까.
그는 얼굴 가득 철판을 깔았다. 아까 처음, 황제의 제안을 거절하던 때부터 내심 준비하고 있던 제안을 꺼냈다.
"저와 2황자, 둘 중에 누가 더 황태자위의 무게를 잘 버텨낼 수 있을지, 자격을 증명할 기회를 주시지요."
13화. 자격을 증명하라 (3)
"흐음."
황제의 손이 턱을 짚었다.
모두가 물러나 홀로 남은 권좌. 그곳에 군림하듯 앉은 황제는 조용히 웃고 있었다.
"자신과 2황자... 둘 중에 누구에게 자격이 있을지 증명할 기회를 달라니. 허허. 허."
황제는 조금 전에 물러난 자신의 맏아들, 라키엘을 떠올렸다.
맏아들이 자신을 향해 했던 말을 되짚었다. 떠올리고 되짚을수록 놀라웠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아이에게 그런 면모가 있었던가."
감히 자신을 향해 강단 있게 대들던 모습. 지배자의 권위와 압박에도 굽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꼿꼿하게 서서 이쪽의 눈빛을 받아냈다.
한데 더욱 놀라운 점은, 라키엘이 그 과정에서 송곳니를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보통은 권위와 압박에 저항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지. 그 과정에서 반항적으로 선을 넘기도 하고. 그것이 보통이라면 응당 내보일 반응일 터인데."
라키엘은 그러지 않았다.
반항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했다.
일말의 흔들림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렇듯 선을 지키며, 시종일관 침착하고 이성적인 태도로 이쪽의 압박을 받아냈다. 즉, 이쪽의 기세에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는 뜻이다.
"거기에 역제안까지."
애초에 녀석이 쉽게 무릎 꿇으리라고. 이쪽의 제안 앞에 금방 허물어지리라고. 그렇게 여기며 꺼낸 제안이었다.
한데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역제안을 제시하기까지 하였다.
"자격을 증명할 기회라."
라키엘 녀석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했다. 전혀 들뜨지 않은 차분한 기색으로 이쪽을 보던 눈동자. 마치, 자신의 역제안이 반드시 통하리라 확신하듯.
'...허락만 해주신다면 보름 후, 2황자와 검술로 대결을 치르겠습니다.'
녀석의 말에 차분함을 잃은 것은 이쪽이었던가.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서였다.
'검술?'
되묻자마자 라키엘이 대답하였다.
'예, 폐하. 저는 지금 병약한 몸과 나약한 체력 때문에 자격에 대한 의혹의 시선을 받고 있습니다. 황태자위를 지켜낼 수 없을 것이라고, 무게를 감당할 수 없으리라고 말입니다. 하여 저는 그 시선이 틀렸음을, 제게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고 싶습니다.'
'너의 건강과 건재함을 알리고 싶다는 말인가?'
'네, 폐하. 하여 2황자와 검을 맞대고 싶습니다.'
'2황자와 검을 맞대면, 네가 이길 성싶더냐?'
'길고 짧은 것은 대어봐야 아는 법이라 하였습니다.'
'가당찮구나. 너는 2황자가 아스라한 심법 싱글 써클의 보유자이며, 유명한 기사에게 어린 시절부터 검술을 지도받았음을 알고 있을 터인데.'
'예,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럼 네가 어린 시절부터 병약하여 검술은커녕 제대로 뛰어보지도 못하였다는 사실 또한 자각하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한데도 2황자와 겨루어 자격을 증명하겠다고?'
'예, 폐하.'
'이기는 것은 고사하고 5분을 버티는 것도 버거울 것 같다만.'
'역시나 승부는 뚜껑을 열어봐야 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그렇게나 자신이 있느냐?'
'예.'
'짐에겐 만용으로 보인다만.'
'제게 나름의 생각이 있으니 너그러이 보아주소서.'
'그러한가?'
'예, 폐하.'
맏아들이 그렇게 대답하는 순간, 자신은 직감했다. 이 녀석, 일부러 이러는 것이라고. 처음부터 질 것을 염두에 둔 제안을 하는 것이라고.
그리하여 자신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더랬다.
'좋다. 너의 제안을 수락하마. 대결 장소는 짐이 정하여 통지할 터이니, 너는 소원대로 보름 후, 2황자와 검술을 겨루어 스스로의 건강함을 증명토록 하여라. 단, 승부의 조건은 승리가 아닌 5분 동안 쓰러지지 않고 버텨내는 것이다.'
'...어째서입니까?'
'너를 향한 짐의 작은 배려라고 여기거라.'
그것은 정말로 배려였다.
사실 첫째가 2황자를 이길 수 없음은 필연이니까. 아니, 이기는 것은 고사하고 5분을 버텨내는 것도 기적일 테니까.
"실제로 대결이 시작되면 1분... 아니, 30초라도 버틸 수 있을까."
생각에 잠겨 있던 황제가 중얼거렸다.
이내 그가 고개를 무겁게 가로저었다.
이 대결은 무조건 2황자의 승리다. 그것이 기정사실이다. 그리고 아마 라키엘 또한, 그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을 것이다.
황제는 그렇게 생각했다.
"허어. 내가 너를 잘못 보았구나. 너의 총기는 여태 흐트러지지 않았구나."
어쩐지 라키엘의 속내를 알 것 같았다.
맏아들은 이쪽이 제시한 말랑한 '양보'가 아닌, 정당한 대결을 통한 '계승'을 선택한 것이리라. 아무런 간섭도 없는 대결에서 패배하고, 2황자에게 황태자위를 넘겨줄 생각인 것이리라.
그럼으로써 2황자에게 더욱 큰 상징성과 정통성을 안겨주려는....
"희생을 택한 것이로구나, 너는."
황제 아스테리온은 뭉클한 마음에 권좌를 꽉 움켜쥐었다. 그런 그의 입가에는 복잡한 미소가 내걸려 있었다.
대견했다.
언제나 실망만 안겨주었던 첫째가. 그리하여 어느새 포기하고 있던 맏이가. 이런 훌륭한 선택을 스스로 했다는 사실이 한없이 기쁘고 대견했다.
동시에 한편으로는 서글펐다.
저토록 영민한 첫째가 황위를 물려받아야 할 터인데. 현실적으로 그러할 수 없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또한, 녀석이 스스로를 희생할 마음을 품었다는 사실 자체가 안타까웠다. 황제가 아닌 아비의 입장에선 더욱 그러하였다.
하지만 황제는 꿈에도 몰랐다.
지금 자신이 라키엘의 의도를 제대로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러니까 라키엘은 지금....
♣
'희생은 개뿔. 내가 왜 져줘? 이겨야지, 무조건.'
달그락 달그락 별궁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
라키엘은 헛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는 조금 전에 대면했던 황제를 떠올렸다. 황제가 자신을 향해 했던 말을 되짚었다. 떠올리고 되짚을수록 웃음이 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양반, 내 제안을 제대로 오해한 것 같던데.'
2황자와 검술 대결을 하겠다는 제안을 꺼냈다. 한데 처음엔 가당찮다던 반응을 보이던 황제가, 점점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이쪽을 향해 보내주던 대견하다는 눈빛은 덤이었다.
설마하니 이쪽의 제안을 통 큰 셀프 희생쯤으로 생각한 걸까.
'아마도 그런 거겠지.'
차라리 잘됐다.
그런 오해를 받는 게 편하다.
덕분에 황제가 이쪽의 제안을 냉큼 물었으니까.
한데 오해를 한 이는 비단 황제만이 아닌 듯했다. 황제를 만나고 돌아온 날 저녁, 뜻밖의 방문객이 별궁으로 찾아왔다.
2황자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형님. 아니, 황태자 전하."
"...."
"실은 오늘 믿기지 않는 소식을 들어서... 염려되는 마음에 곧장 찾아온 길입니다."
"...."
"전하?"
"쯧."
라키엘은 혀를 차고 말았다.
이유는 달리 없었다.
다짜고짜 별궁으로 찾아와 눈앞에 나타난 녀석. 2황자가 분명하다. 소설 마검황의 일러스트로 본 모습과 똑같으니까. 한데 어쩐지 이놈도 이쪽의 제안을 제멋대로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듯했다.
"염려라니, 뭘."
라키엘의 대꾸가 자연 퉁명스러워졌다. 2황자가 간곡한 표정으로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지나치게 무리하시는 것이 아닌가 해서 말입니다."
"무리? 내가?"
"예."
"무리라니, 대체 뭘."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검술 대결이라니요. 저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두려운 마음부터 생겨났습니다."
"뭐가 두려운 건데."
"이미 지병 때문에 힘드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가 검술 대결을 준비하다가 픽 하고 쓰러질까 봐 걱정이란 뜻인가?"
"전하. 아니, 형님."
"왜."
"이런 말씀 드리긴 죄송하지만, 어차피... 결과는 형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결과?"
"예."
"네가 이길 거다?"
"정말로 대결이 시작된다면 그럴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뭐 그건 그렇겠지."
라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려 황태자위를 놓고 벌이게 될 대결이다. 어설픈 배려나 양보 따윈 씨알 하나 들어갈 틈이 없으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2황자의 말이 이어졌다.
"형님도 아시다시피 결과에 이변은 없을 겁니다. 그런 결과를 위해 형님이 건강을 희생하는 건... 저는 못 참겠습니다. 굳이 그러시지 않아도 되십니다. 저를 위해 일부러 그런 희생을 자처하지 않으셔도 되십니다."
"...."
"사실 알고 있습니다. 조금 전 폐하를 뵙고 왔습니다. 폐하께서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계시더군요. 형님께서 일부러 무리한 대결을 벌이고, 그 대결을 통해 제게 더 큰 정통성을 안겨주려 하신다고 말입니다."
"...."
"저는 그런 희생, 원치 않습니다. 전혀 기쁘지 않습니다."
"...."
"형님?"
"어. 왜."
"혹시 저를 못 미더워하시는 겁니까?"
"못 미더워한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인데."
"제게 황태자위를 넘긴 후에 말입니다. 혹여나 제가 형님을 해할까, 숙청할까 걱정이 되어 미리 제게 정치적인 빚을 안기시려는 거라면... 그런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
"맹세코 절대로 형님께 다른 마음을 품지 않겠습니다. 형님을 견제할 생각도 품지 않겠습니다. 그저 형님이 물려주신 권좌에 더욱 큰 책임감을 품고서 제 의무에만 매진하겠습니다. 그러니 형님, 만약 저를 의심하신다면...."
"의심한 적 없는데."
라키엘은 2황자의 말을 잘랐다.
계속 듣고 있자니, 녀석이 한도 끝도 없는 오해의 바다로 셀프 다이빙을 풍덩 하고 있는 듯해서였다.
'후아. 다들 오해를 단단히 하셨구만 아주.'
황제도, 2황자도.
이쪽의 검술 대결 제안을 아주 멋대로 해석하고 있다.
'난 져줄 생각 전혀 없는데, 쯧.'
워낙 평소 라키엘의 이미지가 병약해서. 아니, 실제로도 오늘내일할 정도로 허약해서. 2황자와의 검술 대결에 기대를 거는 이가 아무도 없을 터다.
그게 정상인 거다.
라키엘은 그저 피식 웃었다.
"네 마음은 알겠다."
정말로 알겠다.
소설 속 2황자, '테오도르 팔레르모 마젠타노'는 정말로 좋은 녀석이었다. 나름 성실하고, 명민하고, 책임감 있는 인물이었다. 황태자 라키엘이 죽었을 때도 진심으로 슬퍼한 몇 안 되는 등장인물이었다.
'대전쟁, 그 전란에 제대로 대응만 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제일 중요했던 그 역할을 못 해내서 안습으로 끝나는 캐릭터.
그게 눈앞의 2황자 테오도르였다.
그런 녀석을 보며 말했다.
"됐고. 네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든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난 폐하께 제안을 올렸고, 폐하는 그걸 수락하셨어. 한데 이제 와서 그걸 무르겠다고? 천만의 소리."
"형님...."
"돌아가라. 쉬고 싶다."
"정말 그렇게 덧없는 희생을 선택하실 겁니까?"
"됐고. 대결하는 날 보자."
손을 휘휘 저었다.
근위대가 2황자를 정중히 밖으로 모셨다. 2황자는 침실에서 물러나면서도 이쪽을 향해 안타까운 시선을 보냈다. 그 눈빛에 절로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런 쓴웃음은 침실 구석에서 꿈지럭대고 있던 가르딘 경 때문에 한결 짙어졌다.
"가르딘 경?"
"예, 전하?"
"뭐 하고 있어?"
"아, 보시다시피 짐을 싸두고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가르딘 경은 뜬금없이 제 쪽방의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다. 라키엘은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짐을?"
"예."
"무슨 짐?"
"이삿짐이요."
"...이삿짐?"
"예, 전하."
"설명."
"아, 그게... 전하께서 보름 후에 2황자님과 검술 대결을 벌이실 것 아니십니까."
"그렇지."
"예, 그래서 검술 대결이 끝나면 황태자위가 2황자님께 넘어갈 테고, 그땐 황태자 전하께서 더는 황태자가 아니시게 될 거니까...."
"황태자가 머무르게 되어 있는 이 별궁에서 짐 싸고 나가 다른 궁으로 옮기게 될 거다?"
"예, 전하."
"아하. 그래서 미리 짐 싸두는 거다?"
"옙, 전하."
가르딘 경이 뿌듯한 표정을 했다.
마치, 나 잘했죠? 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이야. 우리 가르딘 경, 알뜰살뜰 준비성 철저하네? 아주 야물딱져, 응?"
"감사합니다, 전하."
"응, 그래. 그런데 어떡하지."
"예?"
"나 대결에서 이기면 우리 가르딘 경, 잘라야겠네."
"...예?"
"자른다고."
"...예에?"
"골라봐. 직업을 잘라줄까, 모가지를 잘라줄까?"
"하지만 전하?"
"어. 왜."
"제 뭘 자르시든 괜찮은데 말입니다. 다만-"
"다만?"
"전하의 몸 상태로 검술 대결이라니, 너무 무리하는 게 아니신지...."
"...쯧."
오늘은 아주 오해가 풍년이다.
가르딘 경마저 똑같은 소리라니.
라키엘은 울상이 된 가르딘 경을 향해 혀를 찼다.
"무리는 무슨. 이길 거야."
"예?"
"이길 방법이 있다고."
라키엘은 싱긋 웃었다.
2황자와 대결해서 5분 버텨내기.
그 승부에서 모두의 예상을 깰 방법.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있던 비결을 말했다.
14화. 혼자만의 비책 (1)
"안 알려줄 거야."
"...예?"
"말 안 해줄 거라고."
"...."
가르딘 경은 입을 다물었다.
그렇잖아도 덜컥 2황자와 대결을 치르게 되어 버린 자신의 황태자님이었다. 덕분에 이쪽만 걱정이 넘쳐나다 못해 저 푸른 초원 위에 넘실대는 알찬 곡식처럼 풍년일 지경이었다.
당연한 걱정이었다.
2황자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니까. 아니, 보통 사람의 기준으로 봐도 넘보는 것조차 버거운 엘리트니까. 한데 평생을 병마에 시달린 깡마른 황태자님께서 그런 2황자에게 이길 비결이 있으시다고 했다.
잠깐이나마 희망을 품었다.
그래도 황태자 전하니까.
분명 뭔가 있으니까.
그런 말씀을 하셨을 거라고.
작은 희망의 빛이나마 엿보여 주시길 바랐다. 한데 이어지는 황태자님의 말씀은 너무나 잔혹한 것이었다.
"안 가르쳐줄 거야. 내가 그걸 왜 말해줘."
"전하?"
"어, 왜."
"괜찮으십니다. 그냥, 이길 자신이 없다고 말씀하셔도 괜찮습니다. 아무도 전하를 탓하지 않을 겁니다. 감히 어찌 탓하겠습니까. 이 별궁, 아니, 더 나아가 황도에서 전하의 사정을 모르는 이가 누가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나름 열심히 황태자님을 위로했다.
그러려고 애썼다.
말도 안 되는 불합리하고 불리한 대결. 그걸 앞둔 황태자 본인은 얼마나 절망하고 있을까. 그러니 자신이 감싸주고 위로해주어야 한다. 자신은 황태자님의 주치의니까. 자신이 해주어야 한다.
주먹 꾹 쥐어 다짐하며 가르딘 경은 나름 정성껏 열변을 토했다. 한데 돌아오는 황태자님의 반응은 어이가 없다는 웃음뿐이었다.
"그렇지 않습니까는 무슨. 전혀 안 그런데?"
"예에?"
"괜찮아. 안 져. 이겨. 물론 아직 장담할 수는 없지만, 여전히 질 확률이 살짝 더 높긴 하겠지만, 그래도 한 번쯤 비벼볼 가능성은 있어. 작으나마 이길 가능성이 있다고. 그럼 됐지? 조금은 안심이 되지?"
"아뇨, 전혀."
"쯧."
"전하께서 2황자님께 이길 비결을 말씀해주실 것처럼 구시더니, 안 그러셔서."
"안 그러셔서?"
"예, 허세를 부리신 게 아닐까 하고."
"쯧쯧. 그럼 영업비밀을 덜컥 밝히기라도 할까."
"예?"
가르딘 경은 움찔했다.
영업비밀?
황태자의 말이 이어졌다.
"생각을 해보라고. 누가 봐도 내가 2황자에게 질 것 같지. 내가 남이 되어서 봐도 그렇게 생각할 거야. 그런데 나한텐 이 대결에서 시도해볼 비책이 있어. 특별한 방법이지. 한데 그런 방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미리 발언할까?"
"아...."
"이제 감이 오지?"
"예, 전하."
"그렇지. 일찍 새어나간 비책은 더 이상 비책이 아니게 되는 거지. 2황자가 그 소식을 듣고 대비하면 나만 망하는 거잖나. 안 그래?"
"역시 그렇습니다. 그런데 다만-"
"다만?"
"서운합니다."
"뭐?"
이쪽을 향해 눈썹을 치켜올리는 황태자 전하. 가르딘 경은 풀죽은 모습으로 대꾸했다.
"마치 꼭, 전하께서 지금 비책을 밝히시면 제가 그걸 떠벌리고 다닐 것처럼 말씀을 하시니까 말입니다. 저, 그렇게 입 가벼운 사람 아닙니다."
"허허. 우리 가르딘 경, 그랬어?"
"예, 전하."
"그래서 서운했나?"
"솔직히 좀 그렇지 말입니다, 전하."
"두 번 솔직하면 막 대들겠다?"
"물론이지 말입... 아, 아닙니다, 전하."
"쯧. 됐고. 나 잘 거야. 눕기 전에 진찰 좀 해줘."
"...알겠습니다, 전하."
가르딘 경은 가까스로 표정을 숨겼다.
걱정으로 굳은 표정이었다.
'전하께선 허세를 부리고 계시는구나.'
누가 봐도 2황자가 이길 수밖에 없는 대결이다. 한데 이길 비결이 있다고 저렇듯 호언장담을 하신다.
과연 그 비결... 존재하는 걸까.
'아마도, 아니.'
가르딘 경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머리를 써봐도, 그 어떤 희망적인 색안경을 쓰고 상황을 살펴보아도, 황태자가 이길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그 어떤 비결도 찾을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답이 없어 보였다.
'2황자님은 체격도 헌앙하고, 어린 시절부터 훌륭한 스승 밑에서 검술을 지도받은 분이니까. 들리는 소문으로는 이미 기사 후보생의 수준을 뛰어넘으셨다던데.'
그 정도면 이미 일반인은 감히 대적하지 못할 수준이다. 한데 황태자 전하는? 일반인에게도 미치지 못하는 체력을 지닌 분이시다.
'그걸 어떻게 이겨....'
여전히 태연한 표정의 황태자.
그 모습에 가르딘 경은 내심 흘러나오는 한숨을 삼켜야 했다. 마음속 가득 먹구름이 드리우는 기분이었다.
♣
이른 아침이 밝았다.
일어나 보니 어느새 하늘 가득 자신의 기분 같은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한데 황태자는 조금 다른 것처럼 보였다.
"어, 가르딘 경, 깼어? 일어났으면 잠시만 좀 나가 있어줘."
"...예?"
"여기, 지금 손님이 와 있어서."
아닌 게 아니라 황태자의 침실엔 웬 낯선 자가 방문해 있었다. 가르딘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문객? 이 새벽에? 벌써?'
이제 겨우 동쪽 하늘이 희미하게 밝아진 시간이다. 한데 시장바닥도 아닌 황태자의 별궁을 이 시간에 찾아오는 이가 있다니.
게다가 방문객의 외양과 차림새도 이상했다. 지나치게 평범하고 수수했다. 귀족으론 보이지 않았다. 표현하자면, 마치 온종일 땀 흘리며 일하는....
"황궁 대장장이야. 내가 불렀거든."
"예에?"
"아직 잠이 덜 깼나 보네. 일단 자릴 좀 비켜줘. 이자에게 의뢰할 것이 있으니까."
"아, 예, 전하."
얼결에 떠밀리듯 침실 문밖으로 나왔다.
문을 지키는 근위병에게 눈짓으로 물었다.
근위병이 어깨를 으쓱이며 짧게 답했다.
"황궁 대장장이가 맞습니다."
"...."
대체, 전하께서는 이렇게나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로 황궁 대장장이를 부르신 걸까. 가르딘 경은 치솟는 호기심과 의아함을 느꼈다.
굳게 닫힌 침실 문에 귀를 찰싹 붙였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니, 들릴락 말락.
뭔가가 들리는 것 같은데.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달팽이관에 살랑살랑 닿을락 말락.
뭔가 은근히 핵심적인 말들만 깻잎 한 장 차이로 안 들리는 듯한 기분은 착각인 걸까, 아니면 의도적인 걸까.
한데 그렇게 발을 동동거리길 잠시.
뭔가 이상한 기분을 느낀 가르딘 경은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이쪽을 쳐다보는 근위병과 시선이 마주쳤다.
"...."
"...흠! 커흠!"
머쓱함을 참으며 문에서 귀를 뗐다.
그리고 한편으로 다짐했다.
'궁금해서 안 되겠구나. 조금 있다가 대장장이가 나오면 넌지시 물어봐야겠어.'
아무래도 오늘 아침에 대장장이를 부른 것. 그리고 뭔가 제작을 의뢰하는 듯한 지금 상황. 이게 지난밤 황태자 전하가 말씀하신 '2황자를 이길 비책'이라는 걸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그래서 걱정이 들었다.
'대체 제작 의뢰를 왜 하시는 걸까.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한 시도를 하거나 괜한 일을 벌여서 건강이 더 상하시면 안 되는데.'
제발 그런 것이 아니길 바랐다. 혹여나 무모하거나 위험한 시도를 하시는 거라면 말리겠노라 결심했다.
그러니 확인해보리라. 다짐하며 대장장이가 나오길 기다렸다.
한데 그때였다.
복도 저편에서 누군가가 바쁜 걸음으로 다가왔다. 별궁의 시종장이었다.
"시종장님?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로 그리 바쁘십니까?"
아닌 게 아니라 시종장의 표정이 어쩐지 다급해 보였다. 돌아오는 대답의 내용 또한 그랬다.
"무슨 일이긴. 큰일이오, 가르딘 경. 방금 폐하께서... 믿기지 않는 내용을 공표하셨소."
"믿기지 않는 내용이라니요?"
"그게 글쎄, 하아. 황태자 전하와 2황자 전하께서 치르신다는 대결 말이오. 폐하께서 그 대결을 치를 장소를 공표하셨지 뭐요."
"장소라니, 그게 어디길래 그러십니까?"
"로이-하비교외다. 믿기시오? 황도 시가지의 중심에 있는, 시민 수천 명이 지켜볼 다리 위에서 대결을 치르게 하실 거라 하더이다."
"...예에?"
시종장의 대답을 들은 가르딘은 경악하고 말았다.
♣
"로이-하비교 중앙에서 대결을 벌이라는 명은... 너무 잔혹한 처사이십니다."
이곳은 황궁 가장 깊은 곳.
2황자, 테오도르는 이른 아침부터 황제를 뵙기를 청하였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아버지이자 제국의 지배자인 황제 앞에 조아려 주먹을 불끈 말아쥐고 있었다.
분노 때문이었다.
"저와 대결을 원한다는 형님의 제안을 수락하신 것은... 그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형님이 원한 것이었으니까, 스스로 희생을 자처한 것이었으니까, 큰 뜻을 위해서라고... 그렇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닙니다."
"무엇이 아니라는 뜻이더냐."
황제의 묵직한 물음.
2황자 테오도르는 고개를 들었다.
"정녕 모르시겠습니까? 로이-하비교에서 대결을 벌이라니.... 그 다리는 황도 시가지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다리입니다."
"알고 있다."
"하면, 황도 시민들의 수많은 눈과 귀가 대결이 벌어지는 다리 위로 향하게 될 것임도 알고 계신 것입니까?"
"물론이다."
황제의 대답은 거침이 없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을 왜 물어보느냐는 듯, 성가신 듯 말했다.
"게다가 로이-하비교는 황도에서 가장 큰 다리지. 자리가 넓으니 대결을 벌이기에도 썩 편리하지 않겠느냐."
"폐하."
"방금 네가 말한 그 모든 것을 고려하여 내린 결정이다. 아니, 짐은 제발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구나. 되도록 최대한 많은 이들이 이번 대결을 목격하고, 가슴에 담길 바란다. 그것이 짐의 뜻이다."
"하지만 도가 지나치십니다. 아무리 형님이 희생을 자처했다지만, 그렇게까지 하셔야 하겠습니까? 굳이 그렇게까지 형님을 만인의 눈앞에서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으셔야 하겠습니까?"
"그것이 너에게 더욱 굳건한 정통성을 안겨줄 길이기에 그리 결정하였다."
"그런 방식으로 얻게 될 정통성, 필요 없습니다."
"너에게는 필요가 없겠지만, 이 제국에는 필요할 것이다."
"아바마마!"
"나는 아비이기에 앞서 이 제국의 통치자다. 두 아들의 아비이기에 앞서 제국에 몸담은 수백, 수천만의 목숨을 책임지는 사람이다. 한데 너는 지금, 사사롭고 작은 혈육의 정에 이끌려 대의를 그르치려 하고 있구나."
"하오나...."
"됐다. 더 들을 필요도 없다. 사사로운 혈육의 정보다 제국의 안정이 더 중요한 법이다. 이번 대결을 통해 너의 마음에는 몇 년간 응어리가 생길 것이나, 대신 더욱 탄탄해진 후계자 구도를 확립함으로써 이 제국은 수십 년간 안정과 번영을 누릴 것이다."
"...."
"그 정도면 라키엘, 그 아이가 만인 앞에서 수모를 겪는다 한들 대수로울 것이 있겠느냐?"
"...."
테오도르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을 굽어보는 아버지, 아니, 황제의 눈길. 그 단단한 눈길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자신의 어떠한 호소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 어떤 애원과 원망에도 황제는 아랑곳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내린 결정에 의해 만인 앞에서 무너지는 형님의 모습을 태연히 감상하겠지.
그것이 정치니까.
'형님.'
문득, 어젯밤 만났던 황태자가 떠올랐다. 인간적으로 딱히 존경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단지 같은 아버지를 두었을 뿐인, 배가 다른 반쪽짜리 형제에 불과했다. 게다가 어린 시절부터 병약하여 제 권세에 맞는 구실을 한 번도 해내지 못한 자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런 식으로 형제의 자리를 강탈하게 될 줄은 몰랐다.
'조금 더 온건한 방법이길 바랐어. 이런 식은 아니었어.'
하다못해 대결을 하더라도 몇몇 귀족들 앞에서라면 괜찮았을 텐데. 그것도 아닌 수천수만 명의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라니. 그 앞에서 무너져야 할 형이라니.
새삼 자신의 형제가 너무나 불쌍해졌다.
'죄송합니다. 저도...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폐하께서 결정을 무를 생각이 없으시니, 저는....'
꽈드득!
황제의 어전에서 물러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형님, 대결이 시작되면... 형님이 괴롭지 않도록, 형님의 명예가 최대한 지켜질 수 있도록... 최대한 빠르고 깔끔하게 끝내드리겠습니다.'
2황자는 굳게 다짐했다.
물론 그는 꿈에조차 몰랐다. 그가 비장한 다짐을 품는 이 순간, 라키엘은 황제의 결정을 오히려 반기고 있었다.
'하필이면 그 다리 위에서? 수천, 수만 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대결하라고?'
그러면... 오히려 좋아.
흐뭇한 미소가 라키엘의 입가에 걸렸다.
15화. 혼자만의 비책 (2)
'그 다리 위에서 싸우리고? 오히려 좋아.'
라키엘은 피식 웃었다.
황제가 이렇게 나온다면?
더더욱 이기고 싶어진다.
하지만 가르딘 경의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전하. 이건 정말 너무합니다. 아무리 폐하의 결정이라곤 하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잔인하지 않습니까아...."
가르딘 경은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이쪽의 소매까지 덥석 잡았다.
"전하. 이러실 게 아닙니다. 지금 당장 입궁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입궁? 왜?"
"왜라니요. 폐하를 뵈어야지요."
"뵈고 나면?"
"오늘 결정, 취소해달라고 청하십시오. 아니, 최소한 재고해달라고는 말씀해보십시오.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폐하께서도 생각을 달리 하실 수도 있는 거고 말입니다."
"과연 그럴 것 같아?"
"...예?"
"아쉽게도 난 아닐 거라고 봐서."
"그게 무슨 뜻이신지...."
"황도의 시민 수천수만 명이 구경할 수 있을 로이-하비교 위에서의 대결 말이야. 폐하께서 그걸 그냥 즉흥적으로 결정하신 걸까? 아니. 절대로 아닐 걸."
"하면...."
"정치적인 의도와 목적이 있는 결정이란 뜻이야."
물론 이쪽의 패배하는 모습을 황도 전체에 생중계하겠다는 뜻일 터다. 그렇게 2황자가 후대의 지도자에 보다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주입하겠다는 뜻일 터다.
그 결과로 2황자에겐 더욱 탄탄한 정통성이 생기겠지.
'사람들은 패배자에게 연민을 보낼지언정, 그 패배자가 자신을 통치하게 되는 건 주저할 테니까.'
사람 마음이 다 그런 거다.
대결의 과정이 어떠하든 상관없다. 지는 쪽이 아무리 동정과 연민을 산다 해도 그렇다.
패배자는 결국 패배자일 뿐이다. 패배자가 지도자가 된다는 걸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을 터다. 그 반대급부로, 대결에서 승리한 자에게 막강한 정통성이 주어질 것이다.
'문제는 나 빼고 모두가 2황자를 승리자로 예상하고 있다는 점이지만.'
생각하자니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황제도, 귀족들도, 시민들도, 2황자도, 심지어 곁에 있는 가르딘 경조차도. 그 어떤 누구도 이쪽의 승리 가능성을 발톱의 때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뭐, 부담은 없어서 좋네.'
오히려 홀가분했다.
이쪽의 패배를 예상하고 바라는 모두의 기대(?)를 개박살 내겠다는 다짐도 생겨났다.
그날부터였다.
14일 앞으로 예정된 대결의 날. 라키엘은 그날을 위한 준비에 매진했다.
'세 번. 딱 세 번만 2황자의 공격을 막아내면, 그땐 내가 이긴다.'
나름 준비한 비책.
나름의 계산과 예상.
그걸 토대로 세 번의 방어를 위한 기초 체력을 만들었다. 딱히 거창한 수준의 체력도 아니었다.
정말로 딱 세 번.
세 번의 방어를 하며 풀썩 주저앉지 않을 만큼의 체력이었다.
"후, 후욱."
처음엔 별궁 복도를 걸었다.
천천히, 조급하지 않게, 느리더라도 멈추지 않고. 20분을 걸었다. 성공했다. 5분을 쉬고 또 걸었다. 25분, 30분, 걸을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만큼 허약한 다리엔 온통 알이 배겼다.
"...그아악."
다음 날 아침부터 지옥의 근육통이 시작되었다. 허벅다리 앞뒤는 물론이고 오금 안쪽, 엉덩이까지 근육이 비명을 질러댔다. 앉거나 일어날 때마다 절로 신음이 새어나오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계단을 내려갈 때였다. 안타깝게도(?) 그의 침실은 2층이었다.
'크어오, 미친. 이 저질 체력! 고작 하루 복도 좀 많이 걸었다고 이 모양이야?'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염두에 둔 2황자의 공격을 방어하는 방법. 그걸 위해서는 하체의 힘이 필수였다.
'하체가 힘이 없거나 굳어 있으면 끝장이야. 어떤 충격도 흘려내거나 버텨낼 수 없게 되니까.'
그러자면 지금 최대한 하체의 힘을 길러야 했다.
'최소한 일반인 레벨에는 근접하는 정도로.'
만들 수 있도록, 걷고 또 걸었다.
별궁 1층으로 내려와.
정원으로 나섰다.
아름답고 화사한 정원의 맑은 공기 속에서 노인네처럼 끙끙대며 걸었다.
'어오, 끄윽, 빌어먹을!'
물론 그 와중에 음식을 잘 챙겨 먹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심각한 건강 상태 때문에 고기를 무작정 먹을 수는 없었다. 그러기엔 소화력마저도 저질이었다.
별궁의 요리사에게 지시하여 모든 음식을 갈아서 수프로 끓이도록 했다. 끼니마다 배가 터지기 직전까지 먹었다. 영양 수프로 써클 슬롯을 꽉꽉 채웠다. 그리고 또 걸었다. 걷고, 쉬고, 비틀거리면서도 또 걷고, 쉬었다.
그 와중에 비명을 질러대는 건 하체 근육만이 아니었다.
딩동!
[당신은 과도할 정도의 활동을 이어가며 몸을 혹사하고 있습니다. 지나친 혹사는 자칫 병세의 악화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오장육부가 갑작스러운 업무 과다에 불만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들은 정시 퇴근을 바랍니다. 저녁이 있는 아름다운 생활을 바랍니다. 건강을 위해 오장육부의 워라밸을 지켜주세요.]
'시끄러.'
딩동!
[오장육부가 당신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심장 : 야! 인마! 여기 다 죽는다!]
[허파 : 허... 파... 허... 파학....]
[대장 : 괄약근 확 풀어 버리면 좋겠지 말입니다?]
'...닥쳐!'
연달아 날아오는 불만 메시지를 모조리 뭉갰다. 이쪽도 필사적인 판국이었다. 2황자는 절대로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아니, 이쪽이 비책이니 뭐니를 아무리 잘 준비해도 보장된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그냥 포기하고 싶다.'
당장 몸이 힘드니 그런 생각이 수시로 들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안 돼. 여기서 지면 2황자가 황위를 물려받게 되고... 이 나라를 말아먹을 거야.'
그러면 이쪽도 전란에 휩쓸려 죽거나, 살아남아도 알거지가 된다. 병상에서 죽는 것보다도 끔찍한 최후일 것이다.
그건 싫었다.
'절대로 사양이지.'
포기하고 싶어질 때마다 그 생각으로 버텼다. 스스로를 한계까지 몰아붙이며 걷고, 쉬고, 먹었다. 마나 슬롯의 영양 수프를 시시때때로 전신에 공급했다. 저녁엔 침술로 하체 근육의 피로를 다스렸다. 그리고 푹 잤다.
하루, 이틀, 닷새....
시간이 흐르며 내딛는 걸음에 힘이 붙었다. 걸음이 안정적으로 바뀌니 체력 소모가 줄었다. 그만큼 한 번에 걸을 수 있는 시간도 늘어났다. 늘어난 시간만큼 근육을 더 많이 쓰고, 그만큼 힘줄과 근육이 단단해졌다.
그리하여 마침내 13일차가 되었을 무렵.
"...후! 후욱!"
그는 조금씩 뛸 수 있게 되었다.
덤으로 뜻밖의 메시지도 접하게 되었다.
딩동!
[당신은 신체의 한계선을 아슬아슬하게 지키는 강도의 운동을 지속적으로 수행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당신은 이상적인 형태의 휴식과 영양섭취를 꾸준히 실행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이 당신의 건강 상태를 조금씩 호전시켰습니다.]
[그 결과, 당신의 심폐 지구력이 소폭 향상되었습니다.]
[심장의 등급이 상승하였습니다.]
[심장 등급 : F -> D]
[당신의 심장은 신체활동의 한계를 뛰어넘은 상황에서도 10초간 일정한 심박수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허파의 등급이 상승하였습니다.]
[허파 등급 : F -> D]
[당신의 허파는 흉부, 복부에 가해지는 강한 충격에도 2회까지는 숨이 콱 막히지 않고 버텨내며 호흡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심장이 100HP를 후원하였습니다.]
[허파가 매우 기뻐하며 200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800]
'허?'
라키엘은 뛰다 말고 눈이 동그래졌다.
심장과 허파의 등급 상승에 HP 후원까지. 전혀 생각지 못했던, 깜짝 선물 같은 메시지였다.
'이런 선물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지.'
그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몸을 혹사시킨 보람이 있었다.
달라진 것은 심장과 허파의 등급뿐만이 아니었다.
'진맥.'
그는 뜀박질을 멈추고 진맥 스킬을 사용했다. 거칠게 뛰는 맥박 사이로 반가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딩동!
[초급 종합검진표]
[검진 대상 :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
[종족 : 인간]
[성별 : 남자]
[연령 : 21세]
[신장 : 176.3 Cm]
[체중 : 58.9 Kg]
[혈액형 : Rh+ O]
'후우, 체중 또 늘었네.'
여전히 볼품없는 수치의 향연이었다.
하지만 확실히 전보다 나아졌다. 키는 0.1센티 자랐고, 체중은 무려 5킬로그램 이상 늘었다.
'살이 붙어가고 있어. 근육도 약간은 붙었고.'
전보다 조금은 더 사람다운(?) 모습이 되어가고 있었다. 예전이 돋보기로도 안 보일 미세먼지 멸치였다면? 지금은 핵멸치라고 놀림 받을 정도로는 레벨업이 된 셈이었다.
'이제 내일이면 대결이니까. 최소한의 요건은 갖춰졌어.'
승리를 위한 세 번의 방어.
세 번의 방어를 위한 준비.
나름 열심히 땀 흘렸다.
그러니 이제는 준비의 화룡정점을 찍어야 할 때였다.
"가르딘 경?"
마무리 운동을 마친 그는 가르딘 경을 불렀다.
"술을 가져와 줘. 제일 독한 것들로만."
"...예?"
"예는 무슨. 별궁에 술 없어?"
"물론, 있긴 합니다만-"
"그런데?"
"술은 대관절 왜 찾으시는 건지."
"당연히 마시려고 찾지."
"...예에에?"
가르딘 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황급히 대꾸해 왔다.
"수, 술을 드시겠다는 겁니까?"
"어. 그러니까 잘 골라서 가져와 줘. 제일 독한 것들로만 엄선해서."
"...."
"뭐. 왜. 뭐. 또 무슨 잔소리를 하려고."
"황태자 전하."
"어."
"사람은 그 어떠한 고난과 역경 앞에서도 언제나 가슴속 한구석에 희망이라는 꽃 한 떨기를 품고서 살아가야 한다고, 저는 그렇게 배웠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런 건 누구한테 배웠는데."
"제 아버지한테서요."
"음, 훌륭한 가르침을 남겨주셨네. 그런데 꽃엔 별로 흥미가 없어서. 미안."
"꽃이 아니라 희망을 품고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 충분히 희망적이고 낙관적이거든."
"...즈어어언하아!"
"어오 씨. 깜짝이야."
"아무리 내일의 대결이 걱정이 되신다고 해도, 두렵다고 해도, 그 몸으로 술을! 그것도 제일 독한 것들로만 드시겠다니요!"
"귀 아파. 살살 얘기 좀 해."
"아니, 그러니까 말입니다. 전하, 저는 알고 있습니다."
"알긴 뭘 아는데."
"지난 며칠 내내 전하께서 보이셨던 필사적인 몸부림 말입니다."
"어, 하체랑 체력 운동. 그게 어때서."
"분명... 그렇게라도 애쓰고 땀을 흘리시며 두려움을 떨쳐내려 노력하신 거였겠지요. 그 몸부림치는 심정,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엿보려 발악하는 그 절박한 마음, 충분히 보고 느꼈습니다."
"...그렇게 발악까지 한 건 아닐 텐데."
"제겐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어, 그래서?"
"전하를 아주 조금이나마,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
"항거할 수 없는 미래를 앞두고서도! 예정된 패배를 향해 다가가면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으려 애쓰시는 그 모습이 얼마나 숭고해 보였는지! 전하는 알고 계십니까!"
"으음, 잘 모르겠는데."
"하지만 저는 알고 있습니다!"
"어오, 귀 아프다니깐."
"그러니까 전하! 이제 와서 무너지지 마십시오. 그 몸으로 독한 술이라니요. 아니 되십니다. 비록 내일의 대결이 두렵더라도, 지금껏 보여온 전하의 의지를 끝까지 지켜나가며 떳떳한 패배를 맞이하십시오, 전흐아!"
"떳떳한 패배? 싫은데."
"하지만 전하, 패배하더라도 떳떳한 모습이야말로...."
"안 질 거라고."
"...예?"
"이긴다고, 내가."
"...."
애원하던 가르딘 경은 멈칫, 자신의 황태자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그의 눈에 비친 황태자의 표정.
"이겨야 하니까, 그래서 필요한 거니까. 가장 독한 술, 전부 가져와."
그것은 떳떳한 패배가 아닌, 사기적인 야비한 승리를 준비하는 자의 얼굴이었다.
16화. 예상을 부수다 (1)
아침이 밝았다.
아니, 밝기 직전에 가르딘 경은 눈을 번쩍 떴다.
"...으음."
자다 깼는데도 온몸이 피곤했다. 머리는 무겁고 눈꺼풀도 뻑뻑했다.
'밤새 무슨 꿈자리가....'
그렇게 사납던지.
무척 어지럽고 불안한 꿈을 많이 꾼 밤이었다. 덕분에 잠을 잤는데도 잔 것 같지가 않았다. 오히려 어젯밤보다 더 피곤해진 기분이었다.
'후우, 오늘 어떡하나.'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는데 한숨부터 흘러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늘이 바로 자신이 모시는 황태자가 2황자와 대결을 벌이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황태자위를 내어주시겠지.'
아마 패배하실 거다.
거의 정해진 결과다.
아니, 그냥 필연이다.
생각하니 우울해졌다.
한편으로는 화도 났다.
어찌 이런 불합리한 경우가 다 있을까. 아무리 황태자 라키엘의 건강이 조금 안 좋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환자를 이렇게 잔혹하게 다루어도 되는가 싶었다.
한 인간으로서.
사람을 치료하는 의사로서.
이런 처사가 옳은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감이 들었다. 덕분에 밤새 사나운 꿈에 시달리며 잠을 설치고 말았다.
'아니야. 이렇게 힘 빠진 모습으로 전하께 아침 인사를 드릴 수는 없어. 나라도 정신 차리자. 힘! 힘!'
짝! 짜악!
손바닥으로 양쪽 뺨을 찰지게 촵촵 때렸다.
없던 기운이 조금은 솟아났다.
지난 저녁의 일도 떠올랐다.
'전하께서도 결국엔 술을 참으셨잖아!'
그랬더랬다.
대결을 앞둔 지난 저녁.
황태자 라키엘이 뜬금없는 명령을 내렸더랬다. 술을 가져오란다. 그것도, 가장 독한 술을 모조리 다 가져오란다.
자신은 기겁했었다.
환자가 술이라니.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그러시면 안 되신다고.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지만, 그렇게 스스로 무너지시면 안 된다고. 간절히 매달리는 마음으로 호소했다.
하지만 황태자 전하는 막무가내이셨다. 끝끝내 고집을 꺾지 않으셨다. 명령이라고. 안 들을 거면 별궁에서 나가라고. 지금껏 보인 적 없는 단호한 모습까지 드러내셨다.
결국, 자신은 오열하는 기분으로 그 명령을 수행해야 했다. 별궁에 보관된 술 중에서 가장 독한 것들을 골라 황태자의 침실로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침실 밖으로 쫓겨났던가.
'그때까지만 해도 전하께서 기어이 무너지시는구나 싶었는데.'
안타까웠다.
슬펐다.
그렇게 얼마나 침실 문 앞을 서성였을까. 들어오라는 황태자 전하의 명이 들려왔을 때. 자신은 그야말로 빛의 속도로 침실 문을 박차듯 열어젖혔더랬다.
덕분에 발견할 수 있었다.
'술병의 밀봉이 전부 풀려 있었지. 그리고 딱 한 모금씩이 사라져 있었어. 모든 술이 전부 다.'
그걸 목격했을 땐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명령에 떠밀려 가져다준 술. 그건 그냥 술이 아니었다. 내로라하는 술고래들도 한 모금에 인사불성이 되고야 마는, 지독하기로 소문난 종류의 술들이었다.
한데 그것들을 모조리 한 모금씩 마셨다니. 황태자 전하의 건강 상태를 생각하면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기겁해서 전하의 상태부터 살폈더랬다.
한데 뜻밖에도....
'전하는 전혀 취한 기색이 없으셨지. 아니, 술 냄새도 풍기지 않으셨어.'
처음엔 믿기지가 않았다.
그토록 독한 술을 한 모금씩 돌아가며 섞어서 마셨는데도 취기 없이 멀쩡하다니.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여 전하께 물었더랬다.
'전하?'
'어. 왜.'
'괜찮으십니까?'
'보고 있잖아. 나 멀쩡한 거.'
'...참으신 겁니까?'
'뭐. 그렇다고 해야 하나.'
어깨를 으쓱이며 웃던 전하의 모습. 그건 아무리 봐도 술을 마신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다.
그제야 자신은 안도할 수 있었다.
'안 마시셨어. 마실 뻔하다가 그냥 버리셨구나.'
혹시 창밖으로 주르륵 버리신 걸까. 그것 말고는 이 상황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괜스레 안쓰럽고도 대견한 기분이 들었다.
'많이 번민하셨던 거야. 중압감에 술을 마시고 싶으셨는데, 그래서 술병을 열고서 창밖의 달빛을 보시며 한참을 고민하시다가, 마침내 고개를 젓고는 창밖으로 술을 주르륵.'
아마도 그걸 여러 차례 반복하셨겠지.
그만큼 많이 번민하신 거겠지.
그럼에도 끝까지 참아내신 거겠지.
'역시 우리 황태자 전하. 저는 믿고 있었습니다.'
가르딘 경은 새삼스러운 자랑스러움과 흡족함을 느끼며 문고리를 잡았다. 황태자의 침실로 통하는 쪽문을 열었다. 그리고 얼빠진 표정이 되고 말았다.
"...어?"
"일어났어? 뭘 그렇게 놀라?"
활짝 열어젖힌 쪽문.
그 너머에 황태자 전하가 있었다. 한데 지금까지 보았던 것과 다른 모습이셨다.
그러니까 황태자 전하는....
"이런 거 들고 있는 모습은 처음 보지?"
황태자 라키엘이 '이런 거'라고 말하며 팔을 들어 올렸다. 그 팔에 들린 커다란 방패가 번쩍거리며 위용을 자랑했다.
"왜... 방패를 들고 계십니까?"
"왜냐니. 오늘 대결에서 쓸 물건인데."
"그걸요?"
"어. 그래서 대장장이한테 미리 주문했던 거고. 마침 때맞춰 완성품이 와서. 시험해보는 중이야."
휙휙, 라키엘이 팔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였다. 그 움직임에 따라 다양한 각도로 번득이는 방패의 모습이 다소 특이했다.
일단 컸다.
모양은 직사각형.
가로는 50센티 정도.
세로는 무려 120센티에 달했다.
그리고 상단에 가로 한 뼘, 세로 3센티쯤 되어 보이는 기다란 직사각형 구멍이 있었다. 방패로 몸을 가렸을 때, 방패 너머를 슬쩍 쳐다보며 시야를 유지하기에 딱 좋은 높이와 위치였다.
특이한 점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방패 안쪽 상단에 커다란 손잡이가 하나 더 있었다. 처음 보는 위치의 손잡이였다.
"이거 좋은데. 생각보다 착용감도 좋고. 내 주문사항을 거의 정확하게 지켰어."
황태자 전하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보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안 무거우십니까?"
딱 보기에도 무식하게 큰 방패였다.
당연히 무거울 텐데. 일반인보다도 병약한 전하가 어쩐 일인지 저 커다란 방패를 들고서도 부담 없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막상 들어보니 그닥. 단순한 철제가 아니라서. 대장장이한테 신신당부했거든."
"신신당부라 하심은...."
"튼튼하면서도 최대한 가볍게 만들어달라고."
"가볍게 말입니까?"
"어. 그래서 갖가지 희귀 금속을 제법 쏟아부었나 봐."
"아...."
그제야 가르딘 경은 상황을 이해했다.
단순한 철제 방패로 저 사이즈라면?
최소 7~8킬로그램은 됐을 것이다. 황태자 전하가 제대로 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희귀 금속을 듬뿍 넣어 경량화를 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대략 느낌으로는, 음, 2킬로그램이 조금 안 되는 거 같네."
저런 사이즈로 그 무게라니.
엄청난 경량화였다.
한데 그 순간, 가르딘 경은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방패가 보기보다 너무 가벼워서? 혹은 방패가 굉장히 멋들어져서?
아니었다.
그는 황태자의 방패를 든 모습에서 뭔가 굉장히 기이한 위화감을 느꼈다.
'어째서? 왜... 저걸 든 전하의 모습이 엄청나게 자연스러워 보이지?'
생각해보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자신이 아는 황태자 라키엘은 평생을 병마에 시달린 사람이었다. 검술은 물론이고, 방패 등의 무구를 들어본 일이 거의 없었다.
한데 지금 눈앞의 황태자 전하는 어떠한가.
저런 커다란 방패는 생전 처음일 텐데. 너무나 자연스럽게 들고 있었다. 그걸 들고서 움직이는 동작들도 그랬다.
마치 요리사가 국자를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혹은 목수가 톱과 망치를 다루는 것 같았다. 한마디로 너무나 편하고 익숙해 보였다.
들고 있는 자세도.
사소한 동작들과 분위기까지도.
'꼭... 1, 2년쯤 방패를 끼고 살았던 사람 같은데.'
그래서 더 이해가 안 되었다.
하지만 의문을 풀 틈은 없었다.
"그럼 가자."
상념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전하의 목소리.
"...예?"
얼결에 반문했다.
그러자 전하가 피식 웃었다.
"대결하러 가야지."
"아직... 많이 이른 시간인데 말입니다?"
"준비할 것들이 있으니까."
전하가 다시금 빙긋.
"대결할 로이-하비교가 어떤 환경인지 살펴봐야지. 자리가 얼마나 넓은지. 바닥은 평탄한지. 햇볕이 어느 방향에서 비치며 눈을 부시게 하는지. 구경꾼들이 어느 장소에 많이 모여 소리를 지를 것인지도."
"...."
"그런 것들을 미리 살펴놔야 실전에서 뜻밖의 변수에 허둥거리는 일이 줄어들 거니까. 조금이라도 이길 확률이 생길 거니까. 그렇지 않겠어?"
"전하?"
"어. 왜."
"아, 아닙니다."
가르딘 경은 허둥대며 말꼬리를 흐렸다. 방금, 저도 모르게, '정말로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으신 겁니까?'라고 물을 뻔했다.
'후우, 무례를 저지를 뻔했군.'
아마 오늘 대결의 결과를 전하도 예상하고 있을 거다. 이건 어떻게 해도 절대로 이기지 못할 승부니까. 자신이 패배할 거라는 사실도 알고 계실 거다.
한데 그럼에도 저렇게 최선을 다하는 전하였다. 그런 분에게 '희망을 버리지 않았느니 어쩌니' 하는 질문을 함부로 던지는 건 굉장히 무례한 일이 아니겠는가.
가르딘 경은 얼른 표정을 가다듬었다.
"알겠습니다, 전하. 그럼 저도 서둘러 짐을 꾸리겠습니다."
"짐이라니?"
"응급처치 도구와 붕대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건 좋네. 대신 좀 서둘러주고."
그렇게 짐을 챙기고 별궁을 나섰다.
대결 장소인 로이-하비교에 도착했다.
약 300년 전, 전설적인 토목공학자 로이드 프론테라가 국왕 알리시아의 의뢰를 받들어 건설했다는 로이-하비교는 예상보다 엄청난 위용을 자랑했다.
'이거, 완전 광안대교 스타일인데?'
라키엘은 솔직하게 조금 놀랐다.
생각보다 다리의 규모가 컸다.
심지어 무려 현수교였다.
게다가 인근엔 이미 엄청나게 많은 인파가 몰려 북적대고 있었다. 어림잡아 봐도 그 숫자가 천 단위는 훌쩍 넘어 보였다.
'동네 구경났구만.'
기대감 가득한 시선의 시민들.
남자들은 흥분한 기색으로 떠들어댔다. 아낙들도 흥미진진한 눈빛을 나누고 있었다. 뭣도 모르는 아이들은 그 사이를 신나게 뛰어다녔다.
저들 모두가 이쪽의 패배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리라. 황태자가 패배하여 2황자에게 황태자위를 넘기는 역사적인 구경거리를 눈에 담으러 온 것이리라.
'모두가 내가 질 거라 생각하겠지.'
라키엘은 마음을 다잡으며 대결 장소를 살폈다. 그 사이, 시간이 흐르며 귀족들이 단상에 착석했다. 2황자 테오도르도 다리 건너편에 자리를 잡았다.
잠시 후, 황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사위가 엄숙해졌다.
수천, 수만에 달하는 시민들이 모조리 침묵하며 머리를 조아리는 광경은 라키엘에게도 경이로워 보였다.
그 침묵 사이로 황제의 연설이 이어졌다.
내용이야 뻔했다.
오늘, 황태자 라키엘의 청에 의해 이 대결이 펼쳐지게 되었다고, 제국과 황가의 미래를 위한 이 대결을 통해 황좌에 적합한 이를 가려낼 것이라고 등등.
"...하여, 대결이 시작되고 5분을 버텨내면 황태자 라키엘의 승리, 그렇지 못하다면 2황자에게 승리가 돌아갈 것이니."
두 황자는 공정한 승부를 벌일 것이며. 이 자리에 모인 만인이 그 증인이 될 것이라고.
황제의 엄숙한 선포가 내려졌다.
그동안 모두가 침묵을 지켰다.
동시에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떠올렸다.
사실상 이 대결은 황태자 라키엘의 폐위식이 될 거라고. 황제의 저 연설 또한 황태자 폐위 선언문이나 다름없다고.
수천, 수만의 시민들이.
수십, 수백의 귀족들이.
연설을 하는 황제도.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라키엘이 겪을 패배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라키엘이 겪어야 할 쓰라림과 수치심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모두의 관심은 오직 하나였다.
2황자가 얼마나 멋진 모습으로 자격을 증명할 것인가. 그리하여 얼마나 명예롭고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남길 것인가.
다들 기대하고, 기다렸다.
그렇기에 이때까지만 해도, 이 대결의 결말이 가져다줄 충격을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대결을 시작하라."
마침내 선언이 내려졌다.
두 황자가 다리 중앙에서 만났다.
격돌했다.
그때부터였다.
수천, 수만의 시민들이.
수십, 수백의 귀족들이.
대결을 지켜보던 황제도.
검을 휘두른 2황자조차도.
곧,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건 뭔가 잘못됐다고.
17화. 예상을 부수다 (2)
대결이 시작되었다.
황제의 엄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수십 수백 귀족과 수천 시민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몰렸다.
그곳에 황태자와 2황자가 있었다.
누가 먼저 달려들까.
아마도 당연히 2황자겠지.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드넓은 다리 위에 난데없는 쇳소리가 울렸다.
철그렁!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황태자 라키엘이 들고 있던 대련용 철검이었다. 2황자의 검격을 막아내다가 놓쳐서? 아니었다. 철검은 황태자가 스스로 놓은 것이었다.
아니, 버린 것이었다.
"설마... 대결을 포기하시는 겁니까?"
2황자, 테오도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안도감과 실망감을 동시에 느꼈다.
'역시, 형님은 무리하지 않는 쪽을 선택한 건가.'
자신의 배다른 형제인 황태자는 어디까지나 환자였다. 그런 형제에게 검을 휘둘러야 하는 이 상황이 내심 부담스럽던 터였다.
그렇기에 안도감이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실망감도 들었다.
'여기까지 와서 저런 모습을 보이다니, 그것도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형제도 그런 상황이 많이 무서웠을 테지. 중압감이 상당했을 테지.
이해가 되긴 했다.
하지만 이건 별로 좋은 상황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국의 혈통이 대결을 앞두고서 포기하고 물러나는 모습을 보였으니까. 황가의 명예가 실추될 터다.
'그럼 나는 어떡해야 할까.'
모두에게 들리지 않도록 형제를 설득하고 달래야 할까. 다시 검을 집어들게 하고, 형식적으로나마 대결을 이어가서 황가의 명예를 지켜야 하는 걸까.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다.
판단을 내린 테오도르는 형제를 쳐다보았다. 나직한 설득의 말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뜻밖의 광경을 목격해야 했다.
...스윽.
검을 놓은 형제, 라키엘의 오른손이 움직였다. 방패 안쪽의 상단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왼팔은 내부 팔걸이에 걸어 방패 중앙부를 지지했다. 오른발을 한 걸음 뒤로 빼며 강하게 땅을 디뎠다.
그것은 굳건한 전투 자세였다. 동시에, 어쩐지 능숙해 보이는 방어 자세였다.
그 모습을 본 순간 2황자 테오도르는 깨달았다. 자신의 형제가 대결을 전혀 포기하지 않고 있음을. 방금 검을 버렸던 행위 또한 일종의 선택과 집중이었음을.
'어설픈 공격은 포기. 대신 적극적인 방어에 모든 역량을 쏟아붓겠다는 건가.'
생각해보니 현명한 선택이었다.
형님은 검술을 익힌 적이 없으니까.
그런 어설픈 검술로 이쪽에 대항해봤자 승산이 없으리라 여겼을 터다. 하니 큼지막한 방패로 이쪽의 공격을 버텨내는 쪽을 선택한 거겠지.
'이 대결은 이기고 지고의 여부로 끝나는 게 아니니까. 형님이 나와의 대결에서 쓰러지지 않고 5분을 버티느냐로 승부가 판가름나는, 그런 조건의 대결이니까.'
어설픈 공격 대신 확실한 방어. 배다른 형제의 선택에 2황자는 내심 찬사를 보냈다.
'훌륭한 판단입니다. 그러니... 최대한 빠르게 이 대결을 마무리하여 편하게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스릉!
테오도르의 대련용 철검이 뽑혔다.
동시에 그의 기세가 변했다.
키이이이잉-!
2황자의 심장이 포효했다.
심장을 둘러싼 한 줄기 써클이 날뛰었다.
황가의 비전, 아스라한 심법이 사나운 기세의 짐승이 되어 2황자의 전신 혈맥을 일깨웠다. 부추겼다. 모든 방어를 부수고, 씹어먹으라고.
그 순간, 2황자의 발이 땅을 박찼다.
투확!
돌진과 검격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2황자의 몸이 검이었고, 검이 몸을 이끌었다. 온전한 체중이 실린 부드럽고도 강맹한 내리치기였다.
'이걸로 끝내드리겠습니다.'
2황자는 확신했다.
끝이라고.
이걸 막을 수는 없으리라고.
자신의 형제가 제아무리 크고 튼튼한 방패를 앞세웠다고 해도, 이걸 막지 못함은 필연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굳건히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건 정직하게 막는다고 해서 막아질 일격이 아니니까.'
솔직한 사실이었다.
자신의 체격이 형제의 것을 압도한다. 병약하고 왜소한 형제에 비해 자신은 더없이 건장하다. 그렇듯 압도적인 체중과 근력, 속도를 모두 실었다. 마나까지 실었다. 한데 이런 공격을 정직하게 방패로 막으면?
무조건 무너진다.
방패로 검은 막을 것이되, 방패 뒤의 몸이 무너질 것이다. 충돌을 버티지 못한 팔뚝이 부러질 것이며. 충격을 감당치 못한 무릎이 꿇릴 것이다.
뒤로 나동그라지지만 않아도 다행일 터.
2황자는 간절히 빌었다.
'제발, 뒤로만 넘어지지 마십시오. 그냥, 무릎만 꿇으십시오!'
자신의 형제가, 황가의 혈통이 사람들 앞에서 꼴사납게 뒤로 넘어져 구르는 것은 그도 원치 않았다. 그렇기에 찍어누르는 내리치기를 선택했다.
패배하더라도 격조 있게. 제자리에서 조용히 꿇을 수 있도록. 나름으로 형제를 배려하는 일격이었다.
한데 그의 배려는 뜻밖의 배신(?)을 당하고 말았다.
스륵.
검이 방패를 내리치기 직전.
방패의 각도가 묘하게 틀어졌다.
'...음?'
2황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검의 궤도를 수정할 여유는 없었다. 그의 검이 그대로 방패를 내리쳤다. 방패를 긁으며 옆으로 흘러나왔다.
콰카가각-!
"...!"
검에 실었던 체중과 근력, 속도, 마나까지. 전부 제대로 방패에 전달되지 못했다. 자신의 검은 그저 비스듬히 내밀어진 방패의 면을 긁어내듯 흘러내려 갔을 뿐.
'...비껴냈어? 내리치기를?'
2황자는 경악했다.
'어떻게?'
비껴막기는 쉬운 기술이 아니었다.
각도와 타이밍이 모두 완벽해야 했다. 비껴막는 순간의 충격을 감당하는 팔꿈치와 어깨, 견갑의 관절 컨트롤도 필요한, 나름의 중급 기술이었다.
한데 그걸 자신의 배다른 형제, 황태자가 해냈다. 방패 너머에서 이쪽을 쳐다보는 눈빛. 생생하게 살아서 이글거리는 황태자의 눈빛이 그 사실을 너무나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우연이 아니야.'
깨달았다.
믿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2황자는 잠시 떠오른 놀라움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승부의 결과가 바뀌진 않을 겁니다.'
꽈드득!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비껴막기에 흘러내린 그의 검이 다시금 사나운 궤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황태자 라키엘은 어금니를 까득 깨물었다.
'어욱, 생각보다 빡쎄구나.'
그는 방패 손잡이를 쥔 두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한데 힘을 주는 감각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손아귀가 온통 얼얼했다.
얼얼한 것은 손아귀뿐만이 아니었다. 상단 손잡이를 움켜쥔 오른손 손목과 팔뚝도. 방패를 지지하는 왼팔과 왼쪽 어깨도. 심지어 허리와 허벅다리마저도 저릿저릿했다.
단 한 번.
내리치기를 비껴냈을 뿐인데도 그랬다.
'생각보다 훨씬 강하고 빠르다. 예상보다 더해.'
아니면 이쪽의 육체가 상대적으로 나약한 탓인 걸까. 어쩌면 둘 다인 건지도.
'하지만 할 수 있어. 못 막을 정도는 아니다.'
까드득!
다시금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불현듯, 십수 년 전 시절이 떠올랐다.
자신은 한의대생이었다. 하지만 동기들처럼 졸업 후에 공보의가 되지 못했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한의대 입학 전에 군 복무를 마쳤기 때문이었다.
'나도 그러긴 싫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가정 형편 때문에 그렇게 됐다.
어쨌건 힘이 넘쳤던 이십 대 초반 시기, 나라의 부름에 끌려가 복무하던 때가 떠올랐다. 당시의 자신은 전경, 전투경찰이었다. 체격이 괜찮다는 이유로 방패를 잡게 되었다.
덕분에 당시 사용하던 알루미늄 방패와 얼마나 친해져야 했던지. 거의 7킬로그램이나 나가는 방패를 들고서 그 얼마나 많은 땀을 단내나도록 흘려야 했던지.
'지긋지긋했지.'
빡쎄던 훈련들.
방패 검열.
종종 출동했던 시위 현장들.
방패로 정말 온갖 물건을 다 막아봤다. 각목이나 파이프는 물론이고, 죽창이나 야구 배트는 기본이었다. 도리깨, 쌍절곤, 유리병, 벽돌, 액자, 쇠사슬, 빠루, 죽도, 강아지똥 봉투 등등, 그 밖에도 온갖 인간의 창의력을 새삼 돌아보게 하는 다양한 도구와 물건들을 죄다 막아본 경험이 있었다.
'심지어 내가, 어! 러버덕이랑 까나리 액젓도 방패로 막아본 놈이란 말이다!'
그는 외치며 한 걸음 물러났다.
방패로 바닥을 찍었다.
무게중심을 한껏 낮추었다.
오른손으로 상단 손잡이를 잡고서. 왼손으로 중앙 손잡이를 잡고서. 왼쪽 어깨로 방패 안쪽 면을 지지했다. 모든 체중을 싣고서 방패를 지면을 향해 짓눌렀다.
그 직후, 막강한 충격이 방패 하단을 때려왔다.
쐐애액!
최초의 내려치기가 비껴막힌 직후, 하단을 횡으로 쓸며 날아온 2황자의 검이 방패 하단을 직격했다.
하지만 그 순간, 라키엘은 체중으로 방패를 지지하면서도 절묘하게 각도를 틀었다. 마치 튕겨내며 뿌리치듯이 온몸을 이용해서.
콰텅!
방패와 라키엘의 몸이 옆으로 반걸음 주르륵 밀려 나갔다.
하지만 단지 그뿐.
그는 비틀거리지 않고 자세를 유지해냈다. 검격으로 받는 충격을 절반 이상 측면으로 흘려낸 덕분이었다.
"...!"
2황자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하지만 라키엘이라고 해서 완전히 멀쩡한 건 아니었다. 같은 순간, 라키엘의 눈도 고통으로 찡그려져 있었다.
'그윽, 흘려내긴 했는데... 어우야.'
온몸이 저릿했다.
비명을 지르는 근육이나 관절과는 별개로, 기가 쭉쭉 빨려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단지 기분 탓은 아니었다.
'이게 아스라한 심법의 위력인 거구나.'
아까 처음 내리치기를 비껴냈을 때도.
방금 하단치기를 막아냈을 때도.
충격이 생겨나는 순간 이쪽의 마나가 쑥 빨려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자신은 이게 무슨 느낌인지 알고 있었다. 소설 '마검황'에서 자주 언급된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아스라한 심법의 특징, 마나 흡수.'
황가의 비전, 아스라한 심법.
이 심법은 마나의 흡수와 증폭, 발출에 특화된 심법이었다. 그러한 특징은 대결을 할 때도 잘 드러나는데, 검격을 나눌 때마다 상대의 마나를 흐트러뜨리고 흡수를 하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우욱. 이건 무슨 흡성대법도 아니고.'
속이 울렁거렸다.
무협지에서 종종 봤던 기술이 떠올랐다.
한데 이건 무기를 부딪치면서도 마나를 강탈해 버리니, 더 지독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기에, 가슴속 한쪽에서 희망이 고개를 들었다.
'내 예상보다 마나를 흡수해가는 기세가 훨씬 강렬해. 그렇다면... 할 수 있다. 해낼 수 있어.'
라키엘은 의지를 다졌다. 울렁거리는 속을 누르며 2황자의 세 번째 공격을 주시했다.
이미 2황자는 지척까지 돌진해 오고 있었다.
타아앗!
막을 테면 막아보라는 듯.
이것도 흘려낼 수 있으면 해보라는 듯.
2황자의 사선 베기가 강렬한 기세로 짓쳐들어왔다.
예상대로였다.
소설에서 공명정대하고 성실한 모습으로 묘사되었던 2황자. 그랬던 녀석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쪽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지 않았다. 방패를 걷어내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오직 정면승부로 당당하게 이쪽을 누르겠다는 의지만을 보였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보였다.
느껴졌다.
방어를 하며 충격을 흘려낼 타이밍도. 격돌의 순간 마나를 흡수당할 타이밍 또한.
'이게 마지막 기회야.'
세 번째가 끝이다.
더는 못 버틴다.
이 나약한 육체는 이미 한계다.
그러니까, 지금 이 세 번째 방어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지난 시간 동안 나름 단련해온 체력과 하체. 공들여 꼼꼼하게 준비한 방패. 거기에 어젯밤 마무리한 마지막 준비까지.
이 순간에 다 쏟아부어야 한다.
'바로... 지금!'
터컹-!
2황자의 사선 베기가 방패를 내리쳐 왔다.
그 순간 방패를 튕기듯 꺾었다.
앞선 두 번의 방어처럼.
충격을 흘려냈다.
그 순간이었다.
2황자의 아스라한 심법이 이쪽의 체내를 헤집고 들어왔다. 이쪽의 마나를 인정사정없이 강탈하고 흡수했다. 무자비한 침략자의 약탈 같았다.
하지만 그 앞에 저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문을 활짝 열었다.
써클 슬롯을 발동했다.
[1번 슬롯의 방출 기능을 활성화합니다.]
[방출량을 설정해주십시오.]
'0.2리터!'
힘껏 외쳤다.
동시에 이쪽의 써클 슬롯이 개방되었다. 슬롯에 저장해두었던 물질을 왕창 방출했다.
키이이이잉!
내로라하는 술고래도 한 모금만 마시면 인사불성이 되는 독주. 그래서 지난밤, 가르딘 경이 가져오길 주저했던 독주. 그러한 독주 스무 가지를 무자비하게 섞은 폭탄주를 활짝 방출했다. 건네주었다.
2황자의 아스라한 심법이 폭탄주를 낼름 흡수했다. 무방비하게 가져가 버렸다.
그 순간.
"...커... 헉, 딸꾹?"
2황자의 오장육부가 제멋대로 폭탄주 아모르 파티를 개시했다.
18화. 예상을 부수다 (3)
모범생.
소설 마검황에서 묘사된 2황자의 모습은 그러했다. 매사에 성실하고, 열성을 다하고, 반듯하여 비뚤어짐이 없었다. 심지어 술도 거의 입에 대질 않았다. 아니, 술을 거의 못했다.
라키엘은 기억하고 있었다.
'원작 마검황에서 네가 술에 취한 건 딱 한 번. 죽음을 앞두고서였지.'
마검황 속 어느 장면이 떠올랐다.
제국이 몰락하던 때였다.
눈앞의 2황자 녀석이 황제가 되어 있었다. 불길에 휩싸인 황도 마젠타의 모습을 지켜보며 권좌에 앉아 있었다. 소리 없는 비탄에 잠겨 술잔을 들었다.
별로 독하지도 않은.
평범한 와인이었다.
한데 그 와인 한 잔에 취해 버렸다. 그렇게 취한 채로 침략자들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 소설 속 마젠타노 황가가 완전히 몰락하는 장면이었다.
'어쨌건, 거기서 내가 얻은 교훈은 하나였지. 넌 술이 약하다! 무지막지하게!'
"...쿨룩! 콜록! 어째서... 딸꾹?"
이쪽이 속으로 외치는 것과 동시에.
2황자의 얼굴이 삽시간에 벌게졌다.
녀석의 눈빛은 완전히 당혹감에 절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리는 벌써부터 비틀비틀.
현란한 영덕대게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됐다!'
라키엘은 방패 손잡이를 불끈 쥐었다. 노림수가 제대로 적중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써클 슬롯, 폭탄주 방출 타이밍 좋았고.'
마침 2황자의 아스라한 심법이 침범해 들어오는 타이밍을 딱 노렸다. 2황자가 이쪽의 마나를 흡수하는 순간에 절묘하게 맞췄다.
딱 그때.
써클 슬롯을 개방했다. 슬롯에 담아두고 있던 '독주 20종 폭탄주' 0.2리터를 방출했다. 즉, 2황자는 아스라한 심법의 흡수력으로 폭탄주 한 잔을 졸지에 원샷하게 된 셈이었다.
'이러려고 준비한 거지. 어젯밤에. 가르딘 경이 기겁하는 것도 무시하고.'
문득, 지난밤의 일이 떠올랐다.
독한 술을 가져오라 명하니 가르딘 경이 어찌나 기겁하던지. 하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자신에겐 독주가 무조건 필요했다.
그렇게 강짜를 부려 독주를 가져오게 했고, 약 스무 병의 독주를 한 모금 분량씩 섞어서 폭탄주를 제조했다. 그리고 한 방에 들이켜서 써클 슬롯에 저장했다.
덕분에?
'성능 확실하고.'
비틀!
"...크흡?"
2황자, 테오도르의 다리가 꼬였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하다가 겨우 균형을 잡았다. 테오도르는 말 그대로 당혹스러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뭐...지? 이거 대체 뭐지?'
이 상황이 뭔지.
왜 자신이 이토록 어지러운 건지.
다리는 물론이고 온몸이 말을 듣질 않고. 어째서 또 세상은 하늘이며 땅이며 빙글빙글 도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해할 수도 없었다.
이대로 있다간 정신마저 잃을 것만 같았다.
'대체... 왜?'
자신은 그저 형님과 대결을 벌이고 있었을 뿐인데. 방패 뒤에 숨은 형님을 몰아치고 있었을 뿐인데. 승리를 거의 목전에 두고 있던 참인데.
'방금... 방패를 쳤을 때... 뭔가....'
들어왔다.
이쪽의 아스라한 심법.
그 흡수력에 실려 뭔가가 들어왔다.
평범한 마나가 아니었다.
이질적인 뭔가를 품고 있었다.
그 뒤로 마치 폭탄이 몸속에서 터지듯, 뭔가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버렸다.
'나... 왜 이런 거야?'
당혹스럽고,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웠다. 그럼에도 2황자는 검을 움켜쥐었다.
'쓰러지면 안 돼.'
뭔지는 몰라도 당했다.
불의의 일격을 먹은 거다.
그래서 내가 어지러운 거다.
2황자는 필사적으로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어차피 이건 대결인 거라고. 그러니 이쪽이 형님에게 당할 수도 있는 거고. 그 과정에서 한 방쯤 먹을 수도 있는 거라고. 그게 대결인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자 혼란스러운 감정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잠시 흐릿해졌던 목표가 다시금 보였다.
'이긴다.'
오늘 자신은 형님과의 대결에서 승리할 것이다. 5분 이내로 형님을 쓰러뜨릴 것이다. 그리하여 아바마마의 인정을 받고. 황도의 수천수만 시민들 앞에서 환호를 받고. 정통성을 거머쥔 당당한 황태자로 거듭날 것이다.
그것이 자신과 황실, 제국, 더 나아가 병마에 시달리는 형님을 위한 길일 테니까.
'그러니까... 제가 이길 겁니다.'
콰앙!
2황자는 필름이 끊길 것 같은 취기를 가까스로 억눌렀다. 강한 발길질로 바닥을 박차 균형을 찾았다.
다소 흔들릴지언정.
묵직한 걸음을 옮겼다.
그 끝에 황태자 라키엘이 있었다.
"후읍!"
심호흡과 함께 검을 치켜들었다. 둔해지고 둔탁해진 검격이 라키엘을 향해 날아갔다.
카앙!
검과 방패가 충돌했다.
라키엘이 비틀거렸다.
2황자가 아스라한 심법을 발동했다. 심법으로 라키엘의 마나를 흡수했다. 한데 그렇게 흡수한 마나 속에 또 폭탄주가 들어 있었다.
'자아, 또 원샷! 빼지 마시고?'
라키엘이 방패 뒤에서 사악한 미소를 짓는 순간.
[써클 슬롯에 저장된 폭탄주 0.1리터를 방출합니다.]
메시지와 함께 폭탄주가 방출되었다. 2황자 테오도르는 또 무방비 상태에서 폭탄주 0.1리터를 흡입하게 되었다.
"...쿨럭! 딸꾹!"
테오도르의 얼굴이 더욱 시뻘게졌다. 눈동자가 거의 풀렸다. 저도 모르게 동네방네 갈지자 스텝을 밟으며 뒷걸음질쳤다.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했다.
"무... 무슨... 딸꾹! 흐끅!"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젠 몸이 거의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마치 지독한 독에 당하기라도 한 것만 같았다.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구경하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2황자님께서 왜 저러시지?"
"나, 나도 모르겠는데."
"꼭 술에 취하신 것 같잖아?"
"그렇긴 한데... 아무래도 그러려고. 아까까진 멀쩡하셨잖나. 도중에 술을 드시지도 않았고."
"그 말도 맞긴 한데...."
시민들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숙덕거렸다. 당혹감을 느끼는 건 귀족들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째서, 2황자 전하께서 저러시는 건가?"
"그, 글쎄 말입니다."
"설마 우리가 보지 못하는 사이에 불의의 일격을 당하신 건가?"
"아니, 그건 아닌 듯합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오직 방어만 하셨을 뿐, 어떤 반격도 가하지 않으셨습니다."
"혹시 그럼...."
"짚이는 구석이 있으십니까?"
"방패술 말일세."
"예?"
"내가 듣기로는, 방패술에 극도로 능한 이는 방어 시에 발생하는 충돌의 충격을 고스란히 공격자에게 돌려주는 기예를 쓴다고 하더군. 전장에서 평생을 구른 최상급의 용병들이 그런 기예를 쓴다고 말일세."
"그럼 설마... 황태자 전하께서 그런 기예를 쓰고 계시단 말씀이십니까?"
"아니, 그건 아니겠지. 불가능한 일이겠지. 그래서 나도 혼란스럽다네."
"...예, 저도 같은 심정입니다."
귀족들은 혼란을 느꼈다.
시민들도 마찬가지였다.
대결이 시작되고 몇 번 충돌하지도 않았다. 한데 벌써부터 2황자가 형편없이 비틀거리고 있었다.
너무나 낯선 모습이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광경이었다. 그렇기에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이건 뭔가 잘못됐다고.
그중에서 오직 단 한 명. 황제 아스테리온만이 나머지와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뭔가 이상하다.'
다리 위의 대결을 바라보는 황제.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 사이로 엇비친 눈동자에는 의혹과 경악이 떠올라 있었다.
'라키엘, 아스라한 심법, 정말이었더냐?'
황제의 시선이 라키엘을 향했다.
정확히는 라키엘의 가슴 어름을 주목했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래서 지극히 희미하지만.
분명 아스라한 심법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것은 써클이 회전하며 내뿜는, 아스라한 심법의 보유자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을 공명이었다.
'분명하구나. 확실하구나. 너는....'
그걸 여태껏 숨기고 있었단 말이더냐.
황제는 침음을 삼켰다.
문득, 보름 전의 일이 떠올랐다. 라키엘을 황궁으로 불러 제안을 했던 날이었다.
황태자위를 내려놓으라고. 동생에게 양보하고 물러나라고. 그렇게 억누르려던 날, 그때도 라키엘에게서 잠시나마 아스라한 심법의 기운을 느낀 바 있었더랬다.
'그저... 착각이었다 여겼거늘.'
어려서부터 내내 병약했던 맏아들.
그런 맏아들이 강대한 심법을 일깨웠을 리 없다고 여겼다. 자신의 헛된 희망이 신기루처럼 건네준 잠깐의 착각일 것이리라 치부했다.
한데 지금 보니 아니었다.
틀린 것은 자신이었다.
'이토록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이토록 수많은 이들의 기운이 뒤섞인 장소임에도....'
이토록이나 선명하게 포효하는 써클의 공명이라니. 황제는 저도 모르게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다리 위의 대결은 더욱 고조되고 있었다. 이제는 전세가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
후웅! 후우웅!
커다란 방패가 휘둘러지고 있었다.
누가 봐도 깡마르고 왜소한 황태자 라키엘이 전진하고 있었다. 끈질기게 전진하며 방패로 밀고, 후리고, 찍고, 쳤다.
그때마다 2황자가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2황자의 손에 검이 들려 있건만. 그 검은 공격에 전혀 쓰이질 못하고 있었다. 그저 황태자가 더 접근하지 못하도록 위협하듯 휘두르는 모습이 다였다.
방패를 든 이가 공격하며 몰아붙이고. 검을 든 이가 수세에 몰려 물러나는. 이 기묘한 광경에 황도의 시민과 귀족들 모두가 거대한 침묵에 휩싸였다.
수천수만이 모인 군중 속의 고요.
이 기묘한 고요의 바다를 헤쳐나가듯, 라키엘의 거칠어진 숨소리만이 다리 위에 울려 퍼졌다.
"후! 후웁!"
호흡이 끊어질 것 같다.
방패가 점점 무거워진다.
문득문득 하늘이 노랗게 변한다.
너무나 빠르게 찾아온 체력의 한계가 다리를 붙잡았다. 하지만 라키엘은 멈추지 않았다.
'이 저질 체력! 그렇다고 내가 그만둘 줄 알고!'
그는 끈질기게 전진했다.
방패 상단손잡이를 더욱 거칠게 움켜쥐었다.
후우웅-!
원래 방패는 방어를 위한 무구였다. 인류가 처음 방패라는 물건을 발명한 때부터 쭈욱 그러했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방패는 궁극의 발전 형태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방패의 상단손잡이였다.
한번 직접 잡아보면 알게 될 것이다.
원래 있는 중앙의 손잡이에 왼팔과 왼손을 고정시키고 방패의 상단손잡이를 오른손으로 쥐는 순간. 그렇게 양손으로 방패를 온전히 컨트롤할 수 있게 되는 그 순간.
방패가 자신의 마음대로 밀고, 찍고, 치고, 후리고, 걷어내고, 휘두르며, 때로는 찌를 수도 있는 도구로 변모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건 거의... 기마병으로 치면 등자와 비슷한 거지!'
혹은 컴퓨터의 마우스라거나.
자동차의 오토매틱 기어처럼.
그 물건의 활용도 자체를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그런 옵션이었다.
물론 라키엘은 그 상단손잡이 활용의 숙련자였다. 대한민국에서 의무복무를 했기에. 원치 않게 전경으로 굴렀기에. 수없이 땀 흘렸던 날들 덕분이었다.
"쓰흡! 후! 후욱!"
터질 듯 숨을 들이마시며.
비틀거리려는 다리를 독려하며.
계속해서 전진하고, 또 전진하고, 압박했다.
방패로 밀고, 쳤다.
2황자가 검으로 저항하면 걷어냈다. 걷어내어 만든 빈틈으로 방패로 찍었다. 크게 허둥거리는 2황자를 더욱 압박하고 내몰았다.
마침내 2황자의 등이 다리 난간에 닿았다. 막다른 곳에 내몰렸다. 그 쇳덩이 난간의 차가운 감촉이 등에 닿는 순간, 2황자의 흐려졌던 눈동자가 아주 잠깐 제정신을 찾았다.
"...딸꾹! 크으읍!"
거의 필름이 끊기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2황자는 자신이 대결 중이라는 사실을 가까스로 떠올렸다. 놓칠 뻔했던 승부욕의 끈을 다시금 부여잡았다. 검 손잡이를 더욱 거세게 그러쥐었다. 방패를 앞세워 압박하는 형제에게 전력으로 저항했다.
"...크하압!"
비록 만취하여 비틀거릴지언정.
거의 정신을 잃기 직전일지언정.
이 순간, 모범생인 2황자는 지금껏 성실히 쌓아왔던 고된 훈련의 성과를 온전히 드러냈다.
쐐애액!
일순간 날카로움을 되찾은 2황자의 검격이 공간을 갈랐다. 짐승의 발톱처럼 번득이며 라키엘의 머리를 향해 쇄도했다.
하지만 그 순간.
이미 라키엘은 그곳에 없었다. 앞으로 몸을 날리며 2황자의 품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후욱.
검격이 스치듯 라키엘의 머리칼을 건드렸다.
라키엘이 2황자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어느새 방패도 버렸다.
한 손은 2황자의 허리를 붙들었다.
한 손은 2황자의 명치를 짚었다.
그 순간.
키이이잉-!
2황자의 명치를 짚은 라키엘의 손바닥에서.
격전이 이어지는 내내.
격렬한 호흡을 통해.
써클 슬롯에 저장했던 10리터의 공기가 발사되었다. 공기 폭탄이 터지며 2황자의 명치를 강타했다.
19화. 진료비 청구 (1)
키이이잉-!
심장이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
귓가에 울리는 선명한 메시지.
써클이 역회전을 시작했다.
써클에 담긴 마나가 눈을 떴다.
슬롯에 담긴 10리터의 공기가 마나와 공명했다. 공명하고, 발사되었다.
[써클 슬롯에 저장된 물질이 발사됩니다.]
증폭되고, 응축되었다.
응축되고, 써클에 담겼다.
심장에서 뿜어져 나왔다.
혈맥을 따라 내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퍼어어엉-!
도합 10리터의 응축된 공기가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확장하며 폭발했다. 손바닥이 짚고 있던 2황자 테오도르의 명치를 강타했다.
"...커웁!"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테오도르의 눈이 경악으로 벌어졌다. 하지만 이미 대처하기에는 늦었다.
'...아.'
커다란 망치로 명치를 얻어맞으면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팔다리에서 힘이 쑥 빠져나갔다. 허리가 제멋대로 접혔다. 심지어 두 발은 허공에 떴다.
'반격...해야....'
하는데 불가능했다.
흐려지는 시야 너머로 자신이 놓친 검이 보였다. 언제나 사용하던 연습용 철검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다시 줍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생각을 끝으로 2황자 테오도르의 의식이 끊겼다. 뜻밖의 공기 폭탄에 강타당한 그의 몸이 다섯 걸음이나 날아가서 나뒹굴었다.
콰당탕! 철그렁!
쓰러지는 2황자와 떨어뜨린 철검. 그 요란한 소리만이 커다란 다리 위를 가득 채웠다. 그 외의 어떤 목소리도 흘러나오지 못했다. 모두가 저마다의 경악을 머금은 채 거대한 침묵에 휩싸였다.
수십 수백의 귀족들도.
수천을 넘길 시민들도.
단 한 명의 황제조차도.
누구 하나 입을 벙긋하지 못했다.
'이게... 무슨.'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이건 뭔가 잘못됐다고. 병약한 황태자가 아닌 2황자가 쓰러진 이 상황이 너무나 거짓말 같다고. 아니, 어쩌면 이건 2황자의 의도된 연출일 수도 있을 거라고.
그런 얼토당토않은 생각마저 떠올렸다.
'그, 그래. 아무래도 그렇겠지. 2황자 전하는 성실하고 배려심이 많은 분이라 들었으니까. 분명 형제에게 분투 끝에 졌다는 명예를 선물하려고 일부러 잠깐 저러시는 거겠지. 그게 당연하지 않겠어?'
'오, 그거 그럴듯한 말씀이십니다? 그럼 이제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훌훌 털고 일어나 황태자 전하를 제압하시겠군요?'
'그렇겠지?'
'아무렴요. 생각해보니까 그렇지 말입니다. 너무 싱겁게, 일방적으로, 쉽게 이겨 버리면 자신의 형제인 황태자 전하가 불쌍해진다고 여기신 거겠지요, 아마?'
'그래. 바로 그거지. 우리 2황자 전하께서는 역시....'
'참 진중하고 생각이 깊은 분이시군요.'
'우리 같은 놈들과는 다르달까.'
'역시! 배우신 분.'
대다수가 이 믿기지 않는 초유의 사태 앞에 나름의 논리력을 뽐내며 속닥거렸다.
이 상황이 진짜는 아닐 거라고. 뭔가 더 거창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그래야 이런 황당한 상황이 설명이 되는 것이라고. 다들 짐작했고, 추론했고, 각자의 방식으로 납득했다.
그중에서 유일한 예외인 황제만이 경악으로 두 눈을 부릅뜨고 있을 뿐이었다.
'방금 그것은... 대관절 무엇이었던가.'
황제 아스테리온은 눈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눈으로 목격한 것뿐만이 아닌, 아스라한 심법으로 마나의 공명까지 느꼈기에 더더욱 믿기지가 않았다.
마나의 분출을 느꼈다.
분명 라키엘에게서 쏟아져 나온 분출이었다. 한데 보통의 마나를 쏟아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기세를 지니고 있었다.
'저런 건... 들어본 적도 없다. 아니, 그나마 비슷한 것이라면 발파 정도가 있을까.'
발파.
그것은 아스라한 심법의 매우 위력적인 상급 기술이었다. 다수의 써클을 충돌시켜 폭발적인 마나의 증폭을 이끌어내고, 그것을 한 점에 집중하여 쏘아내는 궁극의 기술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 그 발파와 비슷했다. 하지만 라키엘이?'
황제의 미간이 깊은 주름이 잡혔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발파를 사용하려면 최소한 세 개의 써클을 보유해야 하지. 둘은 충돌시키고, 나머지 하나는 충돌의 반발력으로부터 심장을 보호하여야 할 터이니까. 한데 라키엘이 트리플 써클의 보유자라고?'
아니, 그건 불가능하다.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아는 마지막 트리플 써클의 능력자는 전전대의 황제뿐이었다. 한데 20년이 넘도록 지병에 시달려온 라키엘이 그런 초월적인 능력을 갖추었다니.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방금 라키엘이 쓴 것이 정말로 발파였더라면, 아마도 둘째의 몸이 날려가진 않았겠지.'
날려가지 않는 대신 그 자리에서 꿰뚫렸을 것이다. 갑옷이고 뭐고 통째로 관통당하여 주먹만 한 구멍이 몸통에 생겨났을 것이다. 그러니 방금 라키엘이 쓴 것은, 발파가 아니다.
'하면, 너는 대체 무엇을 한 것이더냐.'
라키엘을 보는 황제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떨렸다. 그 시선 속의 라키엘은 천천히 걷고 있었다.
저벅, 저벅,
지친 몸을 이끌고 한 걸음, 한 걸음.
라키엘이 쓰러진 2황자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을 보는 귀족과 시민들의 눈이 빛났다. 그것은 착각으로 빛나는 눈이었다. 불의의 일격에 당한 척 쓰러져 형님의 체면을 세워준 2황자. 그런 2황자에게 천천히 다가가는, 배려받은 형.
둘 사이에 어떤 훈훈하고 감동적인 모습이 나올까. 아마도 형은 일부러 잠깐 쓰려져 준 동생을 일으켜주고. 동생은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형제 사이의 비정하지만 엄격하고도 장엄한 승부를 이어가겠지.
...라고 다들 생각하는 순간.
찰싹!
라키엘의 손바닥이 쓰러진 2황자의 뺨을 찰지게 후려갈겼다.
"야, 인마? 야. 정신 차려, 정신."
찰싹! 찰싸닥!
두 대, 세 대, 찰진 소리가 다리 위에 울려 퍼졌다. 덕분에 커다란 현수교와 그 주위가 지독한 고요에 점령되었다.
"아, 힘 조절 잘못했네. 야, 야. 정신 좀 차려보라고."
철썩, 철써덕!
"...푸헉!"
"그래, 착하지, 인마. 어휴, 이놈 이거 보기보다 약해가지고."
격한 기침과 함께 실눈을 뜨는 2황자.
그 모습에 라키엘은 겨우 마음을 놓았다.
나름 회심의 일격을 날린 것까진 좋았다.
한데 그게 너무 제대로 먹혀들어가서 문제가 됐다.
'설마하니 그거 한 방에 혼절할 줄은 몰랐네.'
압축된 공기 10리터의 폭발적 분출.
별거 아닌 것 같았지만 막상 초근접 상황에서 써보니 위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조금만 더 강했으면 2황자의 애꿎은 갈빗대를 죄다 가출시킬 뻔했다.
라키엘은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자신의 외투를 벗었다. 돌돌 말아서 2황자의 머릿밑에 베개처럼 받쳐주었다. 그 사이, 기침을 가라앉힌 2황자는 천천히 눈을 뜨고 있었다.
'나는....'
어지러웠다.
속이 온통 울렁거렸다.
한데 온몸이 뜨거웠다.
맥박이 연신 둥둥, 귓가를 때려왔다.
마치, 어린 시절 물인 줄 알고 술 한 모금을 잘못 마셨던 그날과 비슷한 기분이었다. 온몸이 허공에 부웅 떠 있는 것만 같은 그러한.
"하하... 하하하...."
"웃음이 나오냐? 허, 참. 진짜 제대로 취했네. 잠깐만 기다려봐."
라키엘은 손을 뻗었다.
2황자의 부츠를 벗겼다.
양쪽 발의 태충혈(太衝穴)을 짚었다.
그 위치는 발등의 제1중족골과 제2중족골(The 1st and 2nd metatarsal bones)의 뿌리가 만나는 지점. 즉, 엄지발가락뼈와 둘째발가락뼈의 근원이 맞닿는 곳의 발등 부분이었다.
'여기가 숙취 해소에는 직빵이지.'
태충혈은 12경맥의 마지막인 족궐음간경(足厥陰肝經)의 원혈이었다. 그만큼 간 기능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자, 이렇게.'
라키엘은 2황자의 태충혈을 힘껏 눌렀다.
비록 침을 가져오진 못했지만.
온 힘을 다해서 지압을 시작했다.
꽈아악!
그러자 2황자가 즉각적이고도 극적인 리액션을 선보였다.
"...끄어아억!"
2황자가 자지러지듯 허리를 뒤틀었다.
하지만 라키엘은 지압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굳어 있는 태충혈을 더욱 힘껏 풀어주었다. 동시에 진맥 스킬을 사용했다.
[진맥을 시작합니다.]
[스캔 중.]
[3... 2... 1...]
[진맥 결과가 나왔습니다.]
[아래의 <종합검진표>를 확인해주세요.]
딩동!
[초급 종합검진표]
[검진 대상 : 테오도르 팔레르모 마젠타노]
[종족 : 인간]
[성별 : 남자]
[연령 : 19세]
[신장 : 184.1 Cm]
[체중 : 71.3 Kg]
[혈액형 : Rh+ A]
딱 숫자로만 봐도 건장함이 느껴지는 2황자의 신체 스펙이 주르륵 떠올랐다. 그 아래의 심장기능이나 폐기능, 간기능 등도 마찬가지로 건강 그 자체였다.
하지만 라키엘이 보고자 하는 건 2황자의 스펙이 아니었다. 그는 아래쪽에 뜨는 종합소견에 눈길을 던졌다.
[종합 소견 : 모든 항목에서 지극히 건강하고 균형 잡힌 신체입니다. 다만, 현재 지나친 폭음으로 인한 높은 혈중알콜농도가 감지되고 있습니다. 다량의 수분 섭취와 적절한 휴식이 권장됩니다.]
'역시.'
그는 종합소견 항목을 노려보며 계속해서 태충혈을 지압했다. 그렇게 얼마나 손가락이 얼얼해지도록 눌러댔을까. 2황자의 발등에 멍이 들어갈 무렵. 마침내 종합소견 항목에 두 줄의 문구가 추가되었다.
딩동!
[현재 진료대상이 태충혈을 지압 받아 혈액순환이 개선되고 있습니다. 진료대상의 혈액에 충만한 술기운이 태충혈로 모여듭니다.]
라키엘의 눈이 빛났다.
'좋아.'
이 순간을 기다린 그였다.
그는 즉시 아스라한 심법을 발동했다.
키이이잉-!
써클이 회전을 시작했다.
마나의 흐름이 생겨났다. 태충혈을 더욱 자극했다. 그 직후 명치 어름의 불용혈(不容穴)을 강하게 내리눌렀다.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크업!"
왈칵!
2황자가 위액 한 모금을 왕창 게워냈다. 지독한 술냄새가 나는 액체, 폭탄주 엑기스였다. 2황자의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던 얼굴색이 삽시간에 맑아졌다. 술기운이 싹 걷힌 덕분이었다.
'...어?'
2황자, 테오도르는 눈을 끔벅거렸다. 양쪽 발등과 명치가 미친 듯이 욱신거리는 가운데,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뭐지? 나는....'
분명 조금 전까지 비몽사몽한 기분이었는데. 마치 술에 잔뜩 취한 것처럼 어지러웠는데. 속이 뒤집힐 것처럼 고통스럽기까지 했는데.
한데 그런 불쾌하던 감각이 싹 사라지고 있었다. 정신마저 맑아지고 있었다. 그저 황태자가 발등을 주물러주고 있을 뿐인데, 구토를 한 번 했을 뿐인데 그랬다.
테오도르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저기, 저는...."
"쉿."
황태자가 묘한 웃음과 함께 이쪽을 돌아보았다.
"기다려. 숙취 제대로 깨고 싶으면."
"...."
숙취라니.
무슨 말일까.
당연하게도 난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는데. 한데 어째서, 조금 전까지 나는 술에 만취한 것처럼 비틀거렸던 걸까. 그리고 대체 어찌하여, 자신의 발을 주무르는 황태자의 손길이 아프면서도 시원하게 느껴지는 걸까. 그 속에서 마나의 흐름이 감지되는 걸까.
그 순간, 테오도르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저기, 지금 이거 설마 아스라한...."
"어. 맞아."
"대체 어떻게...."
"어떻게긴. 이제야 뒤늦게 활용하기 시작한 거지."
"...."
그제야 테오도르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저만치에 나뒹구는 대련용 철검이었다. 손때로 가득한 손잡이. 익숙한 자신의 검이었다.
그 너머로 이쪽을 향해 황급히 달려오는 근위대원들이 보였다. 근위대원들 뒤편으로 이쪽을 지켜보는 수많은 군중의 모습도 보였다. 팔걸이를 움켜쥐고 있는 황제의 모습 또한 있었다.
모두가 비현실적일 정도로 조용했다.
마치,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는다는 듯이. 그렇듯 모두가 거대한 침묵과 고요에 푹 잠겨 있었다.
그제야 불현듯 깨달음이 찾아왔다.
"혹시 제가, 정신을 잃었던 겁니까?"
"왜? 안 믿겨?"
"...."
"괜찮아. 솔직히 나도 안 믿겨."
"저기...."
"응?"
"저, 그런데 형님, 이마에 피가."
"이거? 아. 방패 안쪽이랑 부딪쳐서. 아까 네가 나 검으로 후려칠 때."
"괜찮으십니까?"
"어, 너보단 괜찮을걸."
제 이마에 흐르던 핏자국을 소매로 스윽 닦으며 피식 웃어 보이는 황태자. 그 미소 이면에 깃든 엄청난 피로감이 잠깐, 엿보였다.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바로 눈앞에서 그 미소를 마주한 자신만은 알아볼 수 있었다.
'형님은 정말로 사력을 다해서 싸운 거였구나.'
비로소 부끄러워졌다.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황태자에게 졌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황태자가 저렇듯 허약한 몸으로도 모든 것을 바치며, 오직 승리를 위해 전력을 다 쏟아부어서 싸우는 동안... 자신은 어떤 태도로 이 대결에 임하였던가.
'나는 교만했구나.'
모두가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이 이번 대결에서 이길 것을 추호도 의심치 않았다. 마지 승리가 자신의 것으로 정해진 것인 양 굴었다.
모두의 눈앞에서 자신의 형제가 굴욕을 겪지 않도록. 최소한의 체면과 명예를 지킬 수 있도록. 승부를 빨리 끝내주겠다며. 오만하고 건방진 생각을 품었더랬다.
당연하게도 자신의 패배를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진 거구나. 오늘의 나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돌이켜볼수록 부끄러워졌다.
자신의 형제는 허약한 몸으로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싸웠다. 심지어 승리한 후에도 우쭐거리지 않았다.
승자의 환희를 맛보는 것보다 패자의 아픔을 어루만졌다. 환호하며 승리를 선포하기 이전에, 쓰러져 혼절한 자신을 돌봐주는 것을 선택했다.
이쪽의 발을 손수 주물러주었다.
아랫것들에게 시켜도 될 일이었을 텐데.
아무런 거리낌 없이 선의를 베풀어주었다.
'나는....'
황태자, 아니, 형님에게 한참 미치지 못하는 놈이었구나. 한데 그것도 모르고 나는 그동안 형님을 은연중에 무시하고 있었던 거구나.
2황자 테오도르는 진심으로 반성하며 부끄러움을 느꼈다. 황태자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그는 마음으로 승복하며 몸을 일으켰다.
승자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하여.
패배자다운 품격을 갖추기 위하여.
아직 어질거리는 몸을 일으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모두의 앞에서 황태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저, 2황자 테오도르 팔레르모 마젠타노는 오늘, 황제 폐하와 만인의 앞에서,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와의 대결에서 패배하였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바입니다."
그것은 존경스러운 경의와 감사의 진심이 담긴 선언이었다. 그 선명한 선언이 라키엘을 향하는 순간. 라키엘의 눈앞에 뜻밖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딩동!
[당신의 숙취 해소 치료를 받은 환자, '테오도르 팔레르모 마젠타노'가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자신 외의 타인을 성공적으로 진료하였습니다.]
[이 작고도 커다란 첫 업적의 경험이 당신에게 새로운 스킬을 선사합니다.]
['진료비 청구' 스킬이 개방되었습니다.]
[스킬명 : 진료비 청구 Lv.1]
[당신이 환자에 대한 진료행위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였을 때 자동으로 발동됩니다. 당신의 진료 행위로 늘어난 환자의 기대수명만큼, 일정 비율의 수명을 정산받아 당신의 기대수명을 연장할 수 있습니다. 이 정산 비율은 스킬 레벨이 상승할 때마다 늘어날 것입니다. (정산되는 수명은 환자의 기대수명에서 차감되는 것이 아닌, 별도의 보너스 수명입니다.)]
[현재 정산 비율 = 2000 : 1]
20화. 진료비 청구 (2)
[스킬명 : 진료비 청구 Lv.1]
[당신이 환자에 대한 진료행위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였을 때 자동으로 발동됩니다. 당신의 진료행위로 늘어날 환자의 기대수명만큼, 일정 비율의 수명을 정산받아 당신의 기대수명을 연장할 수 있습니다. 이 정산 비율은 스킬 레벨이 상승할 때마다 늘어날 것입니다. (정산되는 수명은 환자의 기대수명에서 차감되는 것이 아닌, 별도의 보너스 수명입니다.)]
[현재 정산 비율 = 2000 : 1]
'허어?'
라키엘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난데없이 눈앞에 잔뜩 떠오른 메시지. 상상해본 적이 없던, 너무나 뜻밖의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뭐야, 이거.'
메시지의 내용을 파악하는 사이, 추가적인 메시지가 계속해서 떠올랐다.
[진료비 청구 (Lv. 1) 스킬이 발동됩니다.]
[환자 '테오도르 팔레르모 마젠타노'는 당신의 숙취 치료를 통해 0.5일의 기대수명 연장 혜택을 받았습니다. 이에 당신은 0.5일의 1/2000에 해당하는 보너스 수명을 정산받습니다.]
[정산된 수명의 단위가 너무 작습니다.]
[정산 가능한 수명의 최소 단위는 1일입니다.]
"...."
보고 있자니 대강 알겠다.
여전히 멍한 기분이지만.
이 메시지들이 뭘 알려주는 건지 라키엘은 불현듯 알 수 있었다.
'수명을 정산받는다고? 환자를 진료해주면? 내 진료를 통해 늘어난 환자의 기대수명만큼, 내 수명도 일정 비율로 같이 늘어나는 거야?'
게다가 그 수명이 환자의 기대수명을 차감하는, 깎아 먹는 게 아니라고 했다. 보너스 개념으로, 별도로 이쪽에게 정산되는 거라고 했다.
'그럼... 이제부터 셀프치료하려고 바둥거릴 필요가 없어진 거네?'
서서히 찾아오는 깨달음.
깨달음 속에 담긴 엄청난 의미.
라키엘의 입술이 저도 모르게 부르르 떨렸다.
'나이스. 진심으로 나이스. 안 그래도 요즘엔 마황부자세신탕 약빨도 많이 떨어졌었는데. 다른 처방을 어떻게 짜야 하나 계속 고민 중이었는데. 아니, 기대수명을 더 연장할 수 있을지도 의심스럽던 판국이었는데.'
사실은 조금, 많이 두려웠다.
황태자 라키엘의 이 몸뚱이는 정말로 저주받은 육체 같았다. 기대수명이 몇 달도 남지 않았는데. 매일 기력이 없고 전신이 만신창이인데. 아무리 진맥을 해봐도 원인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냥, 오장육부 전체가 답이 없는 폐급인 느낌이었다. 대놓고 아예 요절하라고 만들어진 몸뚱이 같았다.
'치료를 거듭해도... 마이너스 통장에 돈 때려붓는 기분이었지.'
아무리 마황부자세신탕을 써클슬롯에 넣고 몸에 공급해도, 주기적인 침술로 몸을 다스려도, 그건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아니, 시간이 지나며 몸이 탕약 성분에 적응해 버린 건지 점점 효과가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하여 고민이었다.
정말로 계속 수명을 연장할 수 있을지.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정녕, 소설 내용과 다르게 살아남을 수는 있는 건지.
의구심이 커졌고, 불안감이 덩치를 키웠더랬다. 어쩌면 그런 의구심과 불안감이 주는 공포를 잊고자 이번 대결 준비에 더욱 몰입했던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데... 그 고민이 풀린 거지, 이건.'
더는 약빨 안 드는 이 저질체력 몸뚱이를 치료하느라 매달릴 필요가 없어졌다.
남을 진료해주면 된다.
병 걸린 사람을 돕고.
다친 사람을 보살피고.
그렇게 환자들을 진료해주면?
'그들의 늘어나는 수명만큼 나도 보너스 수명을 받는 거야.'
라키엘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새로운 길이 보였다. 전에 없던 희망의 불꽃이 쑴펑쑴펑 피어났다. 게다가 희망적인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진료비 청구... 전에 처음 스킬 개방 선택 목록에서 본 기억이 나.'
분명 그랬었다.
첫 스킬 개방 때였던가. 당시 개방 가능한 스킬 목록에 '진료비 청구 스킬'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엔 진맥 스킬을 선택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진료비 청구라고 해봤자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거든.'
솔직히 진료비로 돈이나 받는 스킬일 거라고 여겼다. 그래서 눈길도 안 줬다.
자신은 황태자니까.
돈은 썩어날 정도로 많으니까.
굳이 남한테 진료비로 푼돈이나 챙겨 받는 스킬 같은 건 필요 없다고, 그렇게만 생각했더랬다.
'그런데 진료비가 돈이 아니었던 거지.'
설마하니 보너스 수명을 정산받는 스킬인 줄은 몰랐다. 이렇게 꿀맛 같은 스킬일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가히, 이쪽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을 넝쿨째 안겨주는 복덩이 스킬인 셈이었다.
'그럼 다른 스킬들은?'
라키엘은 당시에 목록에서 보았던 다른 개방 가능 스킬들을 떠올렸다.
'그때 봤던 것들이... 진맥, 침술, 부항, 뜸, 탕약 조제, 약재 감별, 약초 탐색, 약술 주조, 진료비 청구, 아스라한 심법... 같은 것들이었지, 아마.'
그중에 진맥과 진료비 청구, 아스라한 심법은 손에 넣었다.
하면 나머지 것들은?
'그저 내가 알고 있는 평범한 침술이나 부항, 뜸이 아닐 거야. 진료비 청구만 봐도 그래. 아직 개방 안 한 나머지 스킬들에도 지금 내가 상상 못하는 꿀 같은 기능들이 붙어 있을 거 같은데.'
아무래도 그럴 거 같았다.
'기회가 될 때마다 하나씩 개방해보자.'
라키엘은 내심 앞으로의 계획을 갈무리했다. 앞으로 더 잘해보자는 다짐도 새삼 되새겼다.
그때였다.
"...찌하여 대답이 없는가."
묵직하고도 위엄 있는 목소리가 고막을 푹, 찔러 왔다. 그 목소리에 라키엘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상념에서 벗어나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보이는 얼굴.
권좌 위의 황제가 그곳에 있었다.
살짝 치켜든 턱, 아래로 내리깐 근엄하고 날카로운 눈빛. 그 눈빛이 이쪽을 향해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짐이 다시금 묻겠도다. 너는 방금 대결에서 아스라한 심법을 사용한 것이었더냐?"
"...예, 그렇습니다."
라키엘은 황제의 질문을 재빨리 받아냈다. 이쪽의 대답에 황제의 표정이 더욱 굳었다.
"어떻게?"
"그것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고?"
"예, 폐하."
대강 둘러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때로 지나친 솔직함은 독이 된다.
차마, '셀프 침술로 몸 푹푹 찌르고 탕약 원샷했더니 오장육부가 포인트 주고 스킬 개방해주던데요' 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라키엘은 주위를 슬쩍 둘러보았다.
'그새 사람들 싹 다 흩어놨네.'
아까 대결이 벌어지던 때에는 그렇게나 북적였던 로이-하비교였다.
커다란 다리를 둘러싸고서 강 양쪽의 대로에 사람들이 빼곡하게 모여 있었다. 대로뿐만이 아니었다. 강변 대로를 따라 늘어선 수많은 건물의 창문들, 옥상 난간마다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한데 지금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로이-하비교 인근은 물론이었다. 강변 대로에도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대로변 건물들의 창문은 모조리 닫혀 있었고, 옥상도 텅텅 비어 있었다.
'역시 황제 권한은 막강하구만. 그렇게나 많이 모여 있던 사람들을 그새 싹 물러가게 했네.'
결과적으로 이곳, 로이-하비교 위에는 자신과 황제만이 남아 있었다.
근위대와 수행원들도 저만치 물러나 있었다.
'나한테 뭔가 말할 게 있어서 이러는 건가.'
꿀꺽, 저도 모르게 마른침이 넘어갔다.
다행히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잠깐 닫혔던 황제의 입이 열렸다.
"...그래. 네가 태어나던 날, 짐이 손수 너의 심장에 아스라한 심법을 새겼지."
이쪽을 보는 황제의 눈동자.
그 속에 묘한 감정이 엿보였다.
그것은 후회일까, 혹은 기쁨일까.
워낙 무표정한 사람이라 파악할 수가 없었다.
황제의 말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활용조차 못하고 있던 그것을, 이제야 꺼내어 짐의 계획과 심기를 흐트러뜨리는 데에 사용하고야 말았구나, 너는."
"...."
호의적이지가 않은데.
라키엘은 잠자코 황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나 약속은 약속이며, 대결은 대결인 터이니. 오늘은 네가 짐에게 이겼도다. 일찍이 네가 제안하였고 짐이 받아들였던 대로, 네가 오늘 대결에서의 승리를 거두었으니, 짐은 너에게 주어진 황태자위를 빼앗지 않겠다. 단-"
황제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앞으로도 짐은 너를 지켜볼 것이다. 권좌는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자에게 주어짐이 마땅할 터이니, 짐은 너에게 권좌를 감당할 역량이 있을 것인지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시험할 것이다. 알겠느냐?"
"...."
라키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황제를 쳐다보았다.
솔직히, 인간적으로, 조금, 배알이 뒤틀렸다.
'이 아저씨 말하는 거 보소.'
2황자에게 이겼으니 황태자위를 지키는 건 당연한 건데. 앞으로도 계속 이쪽의 자격을 의심하고 시험하겠단다. 한데 그걸 굳이 이 자리에서 저렇게 대놓고 말하는 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라키엘은 그런 기분에 휘둘리지 않았다. 오히려 냉정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소설 '마검황'의 스토리를 떠올렸다.
소설 마검황의 초반.
그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그중에서도 황제에게 벌어지는 일이 떠올랐다.
'저 아저씨, 쓰러지지. 뇌졸중으로.'
아무런 징조도, 징후도 없던 변고였다.
자신의 맏아들과는 달리 워낙 튼튼하고 강건했던 황제였다. 하지만 갑작스레 찾아온 뇌혈관 질환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황실의 여흥을 위한 사냥. 내달리는 사슴을 향해 화살을 겨누던 도중.
황제가 쓰러졌다.
그리고 두 번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반신불수가 되었다. 뇌혈관이 막히며 생긴 뇌졸중이 원인이었다. 그렇게 황태자 라키엘이 죽은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황제마저 쓰러졌다.
거대한 제국이 몰락하게 된 시발점이었다.
'그건 안 되지.'
라키엘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황제가 쓰러지는 건 자신에게도 곤란한 일이다.
'난 이제부터 할 일이 많아. 아까 얻은 진료비 청구 스킬. 그걸 제대로 써먹어야 하니까. 한데 그 일에 집중하려면? 황제가 튼튼하고 건강하게 자리를 지켜줘야 해.'
한데 만약 황제가 쓰러지면?
자신이 황제를 대신하여 국정을 운영해야 한다. 신경 쓸 일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날 것이다.
'그만큼 환자들 진료해줄 시간이 줄어들겠지. 기껏 얻은 진료비 청구 스킬도 제대로 못 써먹을 거고. 그건 절대로 안 되지.'
기껏 꿀맛 스킬을 얻었는데.
그걸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고 수명 종료. 혹은 갑작스러운 황궁 업무에 떠밀려 과로사.
그딴 엔딩은 절대로 사양이었다.
그러자면 황제가 튼튼해야 한다.
나름 결론을 내린 라키엘이 입을 열었다.
"폐하, 검의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으셔야 합니다."
"...뭣?"
황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게 무슨 소리일까.
방금 자신은 맏아들에게 앞으로 더욱 긴장하라는 엄중한 조언을 하였건만. 한데 그걸 들은 맏아들은? 되레 갑작스럽고 뜬금없는 당부를 보내어 오고 있었다.
"제가 근래에 듣자하니, 국사에 집중하시느라 검을 놓기 시작하셨다 들었습니다. 그러면 아니 되십니다. 오히려 더욱 몸을 움직여 체력을 유지하고, 굳은 근육을 풀어주셔야 합니다."
"무슨...."
"그리고 채소 섭취를 늘리셔야 합니다."
"...."
"가급적이면 연초도 끊어주시옵소서."
"혹시 지금, 짐에게 하는 소리인가?"
"제 작은 염려와 진심입니다."
"허."
황제는 그만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여전히 원인도 모를 지병을 앓고 있는 주제에. 황위를 물려받을 희망조차 한없이 불투명한 주제에. 앞으로 얼마나 사람 구실을 하며 살지도 모를 주제에.
감히, 황제인 자신의 건강을 염려하듯 건네는 당부가 하찮게만 여겨졌다. 또한, 얕고도 알량하게 느껴졌다.
"지금, 그런 속없는 당부로 짐의 조언을 회피하려 드는가?"
황제의 헛웃음이 싹 걷혔다. 그 빈자리에 희미한 진노와 실망감이 배어났다.
그때부터였다.
황제의 꾸짖음이 길게 이어졌다. 그 앞에 라키엘은 그저 고개만 숙이고서 예, 예, 대답만 했다. 그렇게 얼마나 훈계의 시간이 이어졌을까.
"...하니 황태자는 짐의 경고와 당부를 잊지 않도록 하라."
"그리하겠습니다, 폐하."
이쪽의 훈계에 잔뜩 시달린 황태자가 물러났다.
"...쯧."
황태자가 물러난 자리.
홀로 남은 황제는 혀를 찼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오늘 대결에서 라키엘이 보인 아스라한 심법이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다.
'준비되지 않은 허약한 몸으로 섣불리 사용하면 큰 탈이 날 수도 있거늘. 쯧쯧!'
자신의 맏아들은 어찌하여 그렇게나 필사적이었던지. 게다가 상식 밖의 그 마나 분출은 대체 뭐였던 건지.
'설마하니 잘못된 방법으로 심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자꾸만 걱정이 들어서 아니 되겠다.
조만간 별궁으로 찾아가보아야겠다. 녀석의 상세를 직접 자세히 살펴보아야겠다.
그래야... 조금은 마음이 놓일 것 같으니까.
'하여간. 약해빠진 녀석 같으니라고.'
한데 그 나약한 몸으로 나름 뭘 해보겠다고, 살아보겠다고 버둥거리는 모습이라니. 황제는 그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맏이의 필사적이던 모습이 지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감은 눈꺼풀 속으로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 모습이 자꾸만 작은 기대의 조약돌을 던져왔다. 작은 조약돌이 황제의 철벽같은 가슴을 아프게 했다.
태어남과 동시에 어미를 잃었던 아이.
자라면서 내내 아팠던 아이.
'이런 희망, 부질없는 것은 아닐는지.'
옥좌에 앉아 고개를 젓는 황제.
황제가 아닌 아버지의 한숨이 깊어졌다.
♣
'아버지도 뇌졸중이셨는데.'
다그닥, 다그닥, 별궁으로 돌아가는 마차 소리. 자신을 싣고 움직이는 마차의 진동을 느끼며, 라키엘은 말없이 창밖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창밖은 보이지 않았다. 화려한 장식의 에메랄드 유리 가득, 자신의 낯선 얼굴만 엇비쳐 보였다. 그 얼굴 너머로 서슴없는 기억의 편린이 떠올랐다. 편린 속에 고등학생 시절의 자신이 있었다.
야자를 제끼고 친구들과 놀다가.
엄마의 급한 연락을 받고서.
병원으로 허겁지겁 뛰어가던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러게 왜 담배는 못 끊으셔가지고....'
라키엘은 한숨 속에 편린의 조각을 흩어냈다. 한편으로는 앞으로의 계획을 가다듬었다. 그러는 사이 마차가 별궁에 도착했다.
"즈어어어언하아-!"
"...아, 씨. 깜짝이야."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이쪽을 가장 열렬히(?) 맞이해준 이는 가르딘 경이었다. 라키엘은 짐짓 인상을 팍 썼다.
"대놓고 일부러 이러는 거지? 응? 나 놀래키려고. 맞지?"
"아닙니다, 전하! 제가 그럴 리가요. 이건 진심으로 감격해서 흘리는 눈물입니다!"
"...."
"아니, 세상에, 2황자님을 그렇게... 설마 그렇게 이기실 거라고는 정말이지... 흐흑!"
"...."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얼마나 고단하셨습니까. 정말로 장하십니다, 전하."
"...."
"전하?"
"됐고. 피곤해. 쉴 거야. 내일부터 할 일 많아."
"예? 할 일이 많다니요?"
"진료비를 두둑하게 걷을 거거든."
"...예?"
가르딘 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무슨 소린지 도통 모르겠지.
이제부터 진료비 청구 스킬로 보너스 수명을 두둑하게 얻어낼 계획이니까. 마침 소설 '마검황'의 지금 시점에서, 가장 확실하게 이쪽이 진료해줄 수 있는 환자가 있으니까. 게다가 그 환자, 나이마저 창창해서 늘려줄 수 있는 기대수명도 어마어마할 테니까.
"경은 혹시, 데미안이라고, 알아?"
"데미안.... 그거, 사람 이름입니까?"
"어."
"모르겠습니다. 처음 듣는 이름인데요."
가르딘 경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런 듣보잡, 전혀 모르겠다는 투였다.
'당연히 그렇겠지.'
희미한 웃음이 나왔다.
가르딘도, 이 세상의 다른 이들도 잘 모를 터다. 하지만 나는 안다. 소설 마검황을 읽으며 수백, 수천 번은 접한 이름이니까.
데미안 카이엔.
그가 바로, 이 소설의 원래 주인공이니까.
21화. 데미안 카이엔 (1)
데미안 카이엔.
그 이름을 수백, 수천 번은 읽었다. 그의 일러스트 수십 장을 보았다. 당연했다. 그가 바로 이 소설, '마검황'의 진짜 주인공이니까.
'수많은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고 핵사이다를 선사하며 마지막엔 황제까지 되는 녀석이지.'
라키엘은 소설 속 내용을 떠올렸다.
코로나 때문에 한의원이 한창 망해가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꿈도 미래도 희망도 답도 없던 시기였다.
그 당시 자신의 유일한 낙이 소설을 읽는 것이었다. 안 그러곤 견딜 수가 없었다. 사람 발길 뚝 끊긴 진료실의 적적함을 털어낼 수가 없었다. 하여 시간이라도 때우려고 원래는 별로 즐기지도 않았던 소설들을 찾아서 읽기 시작했더랬다.
막상 읽어보니 생각보다 괜찮았다. 가끔 취향이 안 맞는 작품들도 있었지만, 소위 인생작이라고 부를 만한 작품도 있었다.
그게 바로 마검황이었다.
덕분에 마검황만 몇 번이고 정주행을 했다. 심지어 팬카페에도 가입했다. 나름 정리한 설정집을 올리기도 했다. 소설 내의 중의적 전개와 설정의 숨은 뜻을 해석하며 다른 회원과 밤샘 키배도 떠봤다.
그런 덕분이었다.
'데미안, 난 지금 네가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 모두 알고 있어.'
그는 황도에 있다.
엄청난 재능을 품고서.
그럼에도 빛을 보지 못하고서.
지하 세계에 붙들려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했다.
'금단현상을 부르는 중독 때문이지.'
지독한 마약성 진통제가 그를 묶어두고 있다. 매일 밤 치러지는 살벌한 전투 때문에. 그 전투의 후유증을 버텨내느라. 언제나 달고 살아야 하는 진통제가 그를 지하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그게 데미안 카이엔이 지금 시기에 겪고 있는 상황일 것이다.
'분명 그렇겠지. 앞으로 2, 3개월 뒤까진 계속 그 상태일 거야. 원래 소설의 전개대로라면.'
라키엘은 소설 마검황의 초반 전개를 떠올렸다. 초반 데미안의 상황은 암울,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 곧 변화가 찾아왔다.
변화의 불씨는 바로 황태자 라키엘의 죽음이었다. 황태자 라키엘이 죽으며 황도의 상황이 급변했다. 2황자가 황태자위를 받으며 자신의 입지를 다지려 노력했다. 불법시설과 범죄조직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였다.
그 영향이 지하세계에도 미쳤다.
소위, 나비효과라고 부를 만한 변화였다.
덕분에 데미안에게 우연한 기회가 생겨났다. 자신을 얽어매던 지하조직을 탈출할 기회였다. 그렇게 그는 암울했던 중독에서 벗어났다. 황태자 라키엘의 죽음이 그에겐 행운이 된 셈이었다.
한데 지금은?
'미안. 내가 죽어줄 생각까진 없어서.'
설정을 되짚던 라키엘은 쓴웃음을 머금어 버렸다. 사실 이 시기의 소설 속 라키엘은 스스로 걷지도 못했다. 병세가 너무나 악화되어 오늘내일하는 처지가 되어 있었다.
반면, 지금 자신은 훨씬 쌩쌩하다.
멀쩡히 걷는 것은 물론이고, 가볍게 뛸 수도 있다. 아침저녁으로 피를 토하지도 않는다. 물론 여전히 시한부 인생 신세이기는 하지만, 앞으로 기대수명을 연장할 방법도, 자신도 있었다.
'그러니 이미 소설 초반의 전개와는 많이 달라져 버린 셈이지.'
자신이 죽지 않는다면?
소설 초반 황도에 생겨난 변화도 없을 것이다. 그로 인해 생겨난 나비효과가 지하세계에 번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야말로 '우연히' 데미안이 겪었던 행운도 없을 것이다.
즉, 데미안이 암울한 지하세계를 탈출할 계기도 마련되지 않을 것이란 뜻이었다.
'아마도 거기서 못 벗어나겠지. 중독자 신세의 굴레를 떨쳐내지도 못할 거고. 아마 그 상태로 계속 망가지다가 죽지 않을까.'
확실히 그럴 터다.
어처구니가 없고 황당한 결과지만, 인생이란 게 따지고 보면 그런 우연한 나비효과의 연속이 아니겠는가.
'뭐, 그런 셈이지. 누군가는 생각 없이 10년 전에 샀다가 까먹고 있던 비트코인 덕분에 수백억 갑부가 되고. 또 누구는 회사 신입 갈궈서 눈물 흘리게 했다가 달래주느라 퇴근 후에 술 사줬더니... 3년 뒤에 정신 차리고 보니까 그 신입 엄마를 장모님이라 부르고 있고.'
그리고 자신은?
소설 사이트에서 우연히 접했던 추천글 때문에 마검황 팬이 되어서 이렇게 소설 속 설정들을 이용해먹고 있지 않은가.
'어쨌건, 지금 굴러가는 상황대로라면 데미안은 지하세계에서 못 벗어나. 눈부신 재능이고 뭐고, 거기 묶여서 중독자 신세로 몇 년 안에 죽겠지. 창창한 미래도 다 날아가는 거고. 한데 그런 녀석을 내가 구해주면? 중독증을 치료해주면?'
몇 년도 못 살 녀석을.
편안하게 늙어 죽게 해줄 수 있다.
말 그대로 기대수명이 수십 년은 확 늘어나는 거다.
'그럼 나도 진료비 청구 스킬을 써먹는 거지. 녀석의 늘어나는 기대수명만큼 2000 대 1 비율로 보너스 수명을 받을 수 있는 거야.'
예를 들어 만약?
이쪽의 진료를 통해 데미안의 기대수명이 50년 늘어난다면?
'총 600개월. 어림잡아 18,000일. 그 2000분의 1이면? 9일의 보너스 수명을 받을 수 있는 거야.'
9일.
누군가는 '겨우?'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건 엄청난 시간이다. 이쪽이 한 사람만 치료하며 지내겠는가.
아니다.
'한 번에 수십 명씩 진료할 수도 있잖아. 예를 들자면 그곳에 있는 데미안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까지.'
그러면 계산이 달라진다.
모두 합쳐 수십 일의 보너스 수명을 퍼 받을 수도 있다.
'게다가 난 소설을 읽은 덕분에 데미안이 어떤 중독을 겪고 있는지, 그걸 어떻게 치료해줄 수 있는지도 모두 알고 있으니까. 이건 거의 공짜로 거저먹는 진료인 거지.'
라키엘은 흐뭇하게 웃었다.
진료방법이 딱 나와 있다.
확실하게 치료해줄 수 있다.
이건 대놓고 남는 장사다.
확신한 라키엘은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준비할 게 조금 있어."
"...예?"
여전히 얼떨떨한 기색이던 가르딘 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준비라고 하심은...?"
"쑥."
"...예에?"
"3일 안에 쑥을 준비해줘. 수량은 한 부대 가득 정도? 그렇다고 아무 쑥이나 가져오면 안 되고. 바닷가에서 해풍을 맞으면서 자란 쑥을 구해오면 딱 좋겠네."
"대관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사흘 줄 테니 구해오라고."
"...."
"사흘은 너무 긴가. 이틀로 할까?"
"아닙니다!"
"그래. 믿을게."
진심이다.
이쪽이 믿을 사람은 가르딘에 없다. 하지만 그걸 대놓고 말해주긴 싫었다. 너무 오글거리니까.
"무조건이야. 해풍을 맞고 자란 쑥이어야 돼. 사흘 안에 별궁 창고에 입고되도록 해줘."
충실한 가르딘 경이라면 충분히 해낼 것이다. 신신당부한 라키엘은 그제야 길었던 하루를 끝내고 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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