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4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의 근황에 대한 정기 보고입니다."

이곳은 마젠타노 황실의 가장 깊은 곳. 오직 황제와 몇몇의 최측근만이 출입할 수 있는 장소. 은밀한 회의실에서 황제, 아스테리온 테스타로사 마젠타노는 찻잔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찻잔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새하얀 김. 그 사이로 황제의 직속 정보부 수장이 올리는 보고가 들려왔다.

"우선 황태자 전하가 별궁으로 들인 검투사들에 대한 보고입니다. 이틀 전, 검투사 14인 전원이 황태자 전하의 호위로 임명되었습니다."

"호위?"

"그렇습니다, 폐하."

정보부 수장의 보고가 이어졌다.

"황태자 전하는 검투사들에게 '특수 근위대', 이른바 특근대라는 별칭을 부여하였으며, 24시간 자신의 곁을 지키도록 명하였습니다."

"흐음. 검투사들이 충성을 맹세하였나?"

"예, 폐하."

"라키엘이 그들에게 내린 대가는?"

"봉급과 각종 혜택이 보장된 계약서였습니다."

"...계약서?"

"그렇습니다, 폐하."

"이름만 거창하지, 실상은 고작 돈으로 산 용병에 지나지 않는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황제 아스테리온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 신랄한 평가와는 달리, 그는 깊은 흥미를 느꼈다.

'요즘, 점점 더 흥미로워지는구나.'

언제나 병상을 지키던 황태자였다. 무력한 병자에 불과한 큰아들이었다. 그렇기에 열흘에 한 번, 라키엘에 대한 보고를 듣는 시간이 언제나 괴로웠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매번 올라오는 보고의 내용은 힘 빠지는 것투성이였다. 희망의 빛이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는 보고였다.

병상에 얼마간 누워 있었다는 둥. 어떠어떠한 음식을 간신히 먹었다는 둥. 산책을 몇 걸음 하다가 지쳐서 앉아 쉬었다는 둥. 하나같이 제국의 미래를 짊어질 황태자의 일상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한심하고, 나약하고, 처참한 내용밖에 없었다.

하여 오랜 시간 기대를 접었던 황제였다. 미래가 없다고. 나아질 기미조차도 없노라고. 더 걸어볼 희망을 찾는 것도 불가능하리라고. 그렇듯 포기하며 지켜보던 세월이 십수 년이었던가.

'한데....'

그랬던 황태자가 어느 순간부터 바뀌었다. 두 달쯤 전이었던가. 녀석이 자신의 몸을 바늘로 찌른다는 보고를 들었던 때부터였던 것 같다.

언제나 병상만 지키던 녀석이.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리는 것처럼만 보였던 녀석이. 자꾸 무언가를 하기 시작했다. 일을 벌이고. 시도를 하고. 법석을 떨어댔다.

그때부터였다. 열흘에 한 번, 라키엘에 대한 보고를 듣는 시간이 점점 흥미로워졌다. 2황자와의 대결을 앞두고 대장장이에게 방패를 주문했다는 둥. 더 많이 걸어야 한다며 기를 쓰고 그릇을 비웠다는 둥.

심지어... 황도에서 활동하던 지하조직의 검투장을 급습하여 토벌하였다는 보고까지.

'한데 이번에는 검투사로 구성된 사병 조직이라.'

혹시 지난번 보고에서 들었던 내용과 관련이 있는 걸까. 당시에 듣기론 라키엘이 검투사들의 등을 매일 지진다고 하였는데. 혹시 그것이 모종의 고문이었던 걸까. 검투사들이 그 고문에 굴복한 걸까.

'아니, 그것은 아닐 테지.'

분명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단순히 돈으로 매수한 것이 아닐 터다. 그 이상의 교류나 교감이 라키엘과 검투사들 사이에 있었을 것이다.

'좋구나.'

황제는 흡족함을 느꼈다.

미래가 없다고 여겼던 큰아들. 자신의 피를 받았음에도 실패작이라 여겼던 아이. 그 사실이 못내 아프고, 미안하고, 원통하였는데. 그랬던 녀석이 자꾸만 스스로 무언가를 해보려 일을 벌인다니, 그 사실만으로도 황제는 흐뭇해졌다.

정보부 수장을 향해 묻는 황제의 목소리도 은근히 푸근해졌다.

"하면, 추가로 보고할 것은 더 없는가?"

"그것이...."

역시 있구나.

한데 정보부 수장의 기색이 조금 이상했다. 혹시 라키엘 녀석이 또 무슨 기상천외한 짓을 벌인 것일까.

'아마도 그러할 테지.'

황제는 오히려 기뻤다.

큰아들이 이번에는 또 어떤 놀라움을 안겨줄 것인지. 궁금하고 기대되는 심정으로 정보부 수장을 채근하였다.

"괜찮으니 고하라."

"황송하옵니다. 하면, 고하겠습니다. 실은 어제부터 황태자 전하가...."

뭘까.

제국의 미래를 이끌 어떤 준비를 하는 것일까. 혹은 자신의 발전을 위한 공부를 시작했을까. 황제는 두근거리는 심정과 근엄한 표정으로 귀를 쫑긋거렸다.

그 순간, 정보부 수장의 마지못한 보고가 이어졌다.

"별궁의 시종과 시녀, 근위대원을 모조리 불러모아서... 모두의 전신을 바늘로 무참히, 피도 눈물도 자비도 없이 찔러대고 있습니다."

34화. 건강 현황 앙케트 (1)

푹!

가시가 움직였다.

아래로 가차 없이 내리꽂혔다. 한 인간의 연약한 살갗을 뚫고 들어갔다. 근엄한 근위대원이 저도 모르게 새하얀 시트를 꽉 움켜쥐었다.

"그흡!"

"...아파?"

"아니, 그건 아니고...."

"근데 왜 엄살이야? 고작 요만한 가시 하나 가지고."

"...."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근위대원이. 쯧쯧."

"그, 그래도...."

근위대원이 벌게진 낯빛으로 대꾸했다.

"하필이면, 얼굴에 가시가 꽂히는 것이다 보니...."

"그래서 무서워?"

"무섭다는 게 아니라...."

"아하. 두려운 거구나."

"...."

"괜찮아. 안 죽어. 코 막힌다며. 그럴 땐 여기를, 요렇게."

푹!

"...긥!"

또 하나의 가시가 근위대원의 콧망울 옆, 영향혈(迎香穴)에 꽂혔다. 라키엘의 입꼬리에 즐거운 미소가 걸렸다.

"이대로 잠깐만 있어. 가시 건드리지 말고. 자, 다음?"

옆 침상에 앉아서 대기하고 있던 다음 환자(?), 시종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가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저기, 황태자 전하?"

"응. 말해."

"예, 저기, 저도 찔려야 하는 겁니까?"

"아까 진맥할 때 본인이 그랬지 않나? 요즘 자꾸 장이 꿀렁거리면서 방귀가 많이 나온다고."

"그랬긴 했는데...."

"그럼 딱 좋은 방법이 있거든."

"찔리는 거 말고... 더 좋은 방법은 없을까요?"

"응, 없어."

"...."

"농담이고. 다른 진료법이 왜 없겠어. 근데 이게 제일 간단한 진료법이라서."

라키엘이 오른손을 자신의 어깨로 가져갔다. 어깨 위의 고슴도치, 꼬슴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외쳤다.

"꼬슴!"

외치며 궁디에 힘을 주었다.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표푯!

하얀 가시 하나가 발사되어 라키엘의 오른손에 살포시 착륙했다. 라키엘이 말했다.

"자, 신발 벗고 다리 뻗어봐."

"...예?"

"침 맞아야지."

"발에, 말입니까?"

"어."

"...."

시종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아랫배가 꿀렁거리고 자꾸 방귀가 나온다고 했는데. 그런데 어째서 배와 아무 상관도 없는 발에 침을 놓겠다는 걸까.

'역시 그냥 괴롭히시려는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우리 황태자 전하. 전엔 매일같이 히스테리를 부리시더니. 이제는 사람 괴롭힐 또 다른 기발한 방법을 창안하신 건가 싶었다.

하지만 이쪽에겐 힘이 없다. 기라면 기고, 구르라면 구를 뿐. 시종은 체념한 표정으로 신발을 벗고 발을 내밀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생각했다. 따로 발을 씻지 못했는데. 행여나 냄새가 나서 황태자를 화나게 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그런 걱정은 기우였다. 황태자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물에 적신 수건을 들었다. 이쪽의 발을 꼼꼼히 닦아주었다. 움찔하며 발을 빼려 했지만, 오히려 발목을 붙잡히고 말았다.

"힘 빼. 긴장하면 기혈 순환에도 안 좋아."

"...."

사람 괴롭히는 것치고는 너무 정성스럽다. 그래서 조금은, 헷갈린다. 시종은 순순히 힘을 뺐다. 라키엘의 손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톳!

하얀 가시가 시종의 발 옆면, 안쪽 복사뼈(medial malleolus) 앞쪽 아래, 살짝 우묵한 자리를 찔렀다. 그곳에 상구혈(商丘穴)이 있었다.

"장이 쉴 틈이 없고, 방귀가 자주 나오는 걸 일컬어 '무지근한 배'라고 하지. 그럴 때면 여기, 이 자리를 다스리면 장이 편해질 거야. 오늘 침을 맞고 나서도 속이 불편하다 싶으면 여길 엄지로 꾹꾹 지압해줘. 알겠어?"

"...."

"그리고 자기 전에 누워서는 반대편 엄지 발가락으로 5분씩만 눌러줘도 괜찮아. 양쪽을 번갈아서. 그러면 잠도 잘 올 거야."

"저, 정말입니까?"

"그럼 내가 거짓말을 할까."

라키엘은 피식 웃었다.

여전히 얼떨떨한 얼굴의 시종을 뒤로하고 홀을 둘러보았다. 전보다 더욱 늘린 침상. 그 위에 수많은 이들이 눕거나 앉아서 이쪽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가 별궁의 근위대원, 시종, 시녀들이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자니 문득, 며칠 전의 일이 떠올랐다.

"별궁에 병원을 차려야겠어."

"...예?"

검투사들과 고용 계약을 맺고 특근대를 창설한 날 점심이었다. 식사를 하던 와중에 앞으로의 계획을 말했다. 그 말에 가르딘 경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병원. 몰라?"

"물론 압니다."

"그렇지? 바로 그거. 병원을 차리겠다고."

"여기, 별궁에 말입니까?"

"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야 내가 살아."

"...예에?"

"뭐, 대강 말하자면, 여기에 병원을 차려서 많은 이들이 치유되고 행복해지면 나도 함께 행복해질 거 같아서."

사실이다.

정말로, 진짜로, 사실이다.

가능한 한 많은 환자를 돌보아야 한다. 수많은 이들의 병을 고쳐주고, 기대수명을 늘려주어야 한다. 그래야 이쪽이 보너스 수명을 빵빵하게 챙겨 받을 수 있다. 하면 당연히 행복지수 그래프가 떡상하지 않겠는가.

'그게 바로 환자와 나의 진정한 윈윈이지!'

그렇듯 진심을 담아 말했다.

덕분에 가르딘 경은?

격동의 심장을 제대로 부여잡았다.

"...즈어어언하아!"

"아 씨. 깜짝이야. 뭔데. 이번엔 또 왜 그러는데."

"저는 그동안! 전하를 오해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해? 무슨 오해?"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전하가 이기적인 분이라 생각했습니다!"

"어. 나 이기적인 거 맞는데."

"아닙니다! 이제 보니 아니었습니다!"

"...."

"저는 알 것 같습니다. 비로소 뒤늦게야 깨달았습니다. 이 별궁에 병원을 차려 많은 이들을 보살피면 행복해지실 것 같다는 말씀, 그 속에 담긴 크나큰 자애로움과 이 사회를 향한 봉사의 마음을 말입니다."

"어, 저기, 나는...."

"아닙니다. 굳이 부인하지 않으셔도 압니다.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전하께서 아직 불편한 몸이라는 사실을 세상 누구보다 전하의 주치의인 제가 제일 잘 알고 있습니다. 한데, 여전히 아픈 몸을 이끄시면서도... 다른 이들의 아픔을 먼저 생각하시다니... 저는 정말로, 감동받았습니다, 전흐아! 흐흡!"

"...."

그래, 마음대로 생각해라.

차라리 그게 나한테도 편하겠다.

'허허, 참.'

그저 웃고 말았다. 생각해보니 가르딘 경이 저렇게 오해를 해주는 게 이쪽에게도 괜찮겠구나 싶었다.

당연했다.

가르딘 경은 이쪽의 내막을 전혀 모르니까. 보너스 수명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짐작도 못 할 테니까.

'그걸 그대로 밝혀서 미친놈 취급받는 것보다는 뭐, 되도 않은 성자 코스프레나 하는 게 차라리 낫겠네.'

자신도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황태자. 썩 괜찮은 명분과 타이틀이구나 싶었다. 졸지에 받게 된 오해가 반가워졌다.

'그러면 여기 별궁에 병원, 아니, 한의원을 차리면서 주위의 제지나 반발을 사지 않을 거야. 나름 괜찮은 명분을 지닌 행위니까. 게다가... 그 정도 타이틀은 있어야 사람들이 보다 많이 찾아오겠지.'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 진료를 받기 위해 제 발로 알아서 오게 만드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일일이 찾아가선 안 돼.'

이쪽이 매번 환자를 찾아다닌다면?

일단 위험하다. 특히 환자가 많은 빈민굴 같은 곳은 위생 상태가 극도로 열악할 것이다. 한데 면역력이 처참한 이런 몸으로 그곳을 들락거리다간? 매독이며 결핵 등등의 온갖 병에 금방 당첨될 터다.

그랬다간 끝장이다.

'안 그래도 초 저질체력에 병약 피지컬인데 그런 거라도 걸리면... 손도 못 쓰고 가겠지. 염라대왕님 앞에 다소곳하게 앉아서 상냥하게 진로상담도 받고. 후우. 뻘생각은 그만하자.'

라키엘은 고개를 저었다.

문제는 비단 위험성뿐만이 아니었다. 이쪽이 환자를 일일이 찾아가는 건 피곤하다. 게다가 효율이 떨어진다. 한 번에 많은 환자를 받을 수가 없다. 쥐꼬리밖에 안 되는 보너스 수명으로 연명하는 신세를 벗어날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선 곤란하지. 보너스 수명 정산 비율이 은근히 낮으니까. 1950 대 1? 그걸론 환자 한 명의 기대수명을 100년을 늘려준다고 해도... 정산받는 보너스 수명은 고작 18.46일밖에 안 돼. 딱 18일 늘어나는 거지.'

무려 100년의 기대수명을 늘려줘야 겨우 18일 보너스. 한데 이쪽이 환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

수지가 안 맞는다. 최악의 경우엔 정산받는 보너스 수명보다, 환자를 진료하는 데에 들어가는 시간이 훨씬 길어질 판이다.

'그러니까 무조건이야. 환자들이 찾아오게 만들어야 해. 게다가 여기 별궁은 엄청나게 크고 넓으니까 입원 시설을 들이기에도 공간이 충분하고.'

작정하고 만든다면 종합병원급으로 키울 수도 있다. 대놓고 입원 병동까지 운영한다면? 한 번에 수십, 수백 명의 환자를 진료할 수 있게 된다. 효율 쩌는 보너스 수명 정산 수급 시스템(?)을 구축하게 되는 셈이다.

'역시 규모의 경제!'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낙관적인 전망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그걸 염두에 두며 말했다.

"으음, 뭐, 가르딘 경이 기뻐해 주니까 나도 좋네. 어쨌건, 여기 별궁에서 병원을 운영해볼 생각이고, 그래서 시범적으로 우리 별궁 식구들부터 진료해볼까 하는데."

"예? 별궁 사람들을 말입니까?"

"어. 그래야 홍보가 되니까."

"홍보요?"

"으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가르딘 경, 생각해봐. 별궁에 병원을 차리면서 환자를 받겠다고 소문을 낸다고 쳐. 한데, 그런다고 사람들이 진료를 받으러 막 몰려오겠어?"

"그건... 으음... 아."

"알겠지?"

"예, 전하. 아무래도 여긴 별궁이니까요."

"그렇지. 부담스러울 거야. 특히 평민들에게는."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여긴 엄연한 별궁이다. 무려 황태자가 기거하는 궁전이다. 첫인상부터가 휘황찬란 비주얼로 방문객을 압도하는, 그런 장소다. 한데 평민들이 이런 곳을 부담 없이 막 찾아올 수 있을까?

"아무래도 평민들에겐 힘들겠지. 아, 감기 걸렸는데 황태자 전하께 진료나 받아볼까? 이러면서 설렁설렁 방문하는 평민이 몇이나 되겠냐고."

"역시, 그렇겠군요."

"그렇지. 게다가 귀족들은 더할걸?"

"예에?"

"생각해봐. 여긴 황태자인 내가 머무는 궁전이잖아. 한데 귀족인 아무개가 진료를 받으러 여길 드나든다고 쳐. 과연 그걸, 주위의 귀족들이 순수한 눈으로 봐줄까?"

"그건... 아니겠지요. 그 아무개 귀족이 전하에게 끈을 대는 걸로 해석할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어떻게든 정치적 의도가 있는 행동으로 보겠지."

"귀족들은 그런 존재니까요."

"맞아. 사소한 행동에도 정치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족속들."

가만히 웃었다.

역시 윗분들의 행동양식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비슷하구나 싶었다. 이곳의 귀족들 또한 마찬가지일 터였다. 어쩌면 평민보다도 별궁 방문을 더 부담스러워할 터다.

"그래선 안 돼. 결국엔 여기로 진료받으러 오는 사람 하나 없이 파리만 날릴 거야."

하면 이쪽의 계획은 와장창.

수습도 못 하고 망할 거다. 보너스 수명 폭탄 정산도 없을 거다. 마치, 대한민국에서 알뜰살뜰 꾸렸던 부경 한의원이 환자 하나 없이 망했던 것처럼.

'...아, PTSD 올 거 같다.'

부정적인 상상을 얼른 접었다. 정신 바짝 차리자고 다짐하며 말했다.

"어쨌건, 그래서 효과적인 홍보가 필요해. 사람들의 귀를 솔깃하게 해줄 만한 진료 사례 같은 거. 그런 게 입소문으로 퍼지다 보면 차츰 여기로 진료를 받으러 오는 사람이 생겨날 거야."

그러면 실적이 고스란히 입소문이 된다. 입소문이 퍼지며 더 많은 환자를 물어오고. 더 많은 진료 사례가 더욱 많은 입소문으로 재생산될 것이다. 그게 바로 모범적인 자발적 바이럴 마케팅이 아니겠는가.

다행히 가르딘 경도 그런 이쪽의 의도를 잘 이해한 것 같았다.

"하면, 첫 입소문이 되어줄 진료 사례를 만들기 위해서 별궁 사람들을 진료하시겠다는 겁니까?"

"바로 그거지. 그러니까 지금 당장 별궁 식구들 집합시켜."

...라고 했던 것이 며칠 전이었다.

'후아. 그 뒤로 바빴네.'

어느 시녀의 손목을 진맥하던 라키엘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정말로 저 날 뒤로 제법 바빴다. 별궁에서 일하는 시종과 시녀들. 그 외의 잡일꾼들. 거기에 근위대원까지.

다 합친 숫자만 무려 500명에 가까웠다. 그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진맥했다. 일일이 맞춤형 진료를 해주었다.

누군가에겐 쑥뜸을. 또 누군가에겐 탕약을 지어주었다. 그 외의 대부분 인원에겐 침을 놓아주었다. 진심 체력이 쭉쭉 빠지는 바쁜 며칠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성과가 별로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크게 아픈 사람이 없네.'

무려 500명이나 되는 사람을 살폈는데도 그랬다.

'애초에 건강에 큰 이상이 있는 사람은 이런 궁전에서 근무할 자격이 없을 테니까. 내가 그 사실을 간과했어.'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한데 그 당연한 일 때문에, 지금은 계획에 차질이 생기게 됐다.

'쯧. 다들 너무 건강해서 탈이야.'

아파봤자 무좀이나 구내염, 혹은 변비나 가벼운 감기 정도가 다였다. 환자를 돌보는 한의사의 입장에서는 정말로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보너스 수명을 챙겨야 하는 이쪽의 입장에서는? 아쉬운 일이었다.

'500명을 돌봐서 챙긴 보너스 수명이 다 합쳐서 2일밖에 안 돼. 게다가 이래서는... 입소문이 될 만큼 성공적인 진료 사례가 만들어지지가 않잖아.'

입소문이 될 법한 굵직한 진료 사례.임팩트 충만한 치료 사례.

한 마디로 광고가 될 건덕지!

그게 만들어지지가 않고 있었다.

그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어디 크게 아픈 사람 없나...."

별궁 식구들에 대한 소소한 오전 진료를 마친 후, 점심을 먹다 보니 절로 한숨이 푹 나왔다. 차라리 빈민굴에서 몇 사람쯤 납치(?)를 해와야 할까. 여러 고민이 깊고 진한 에스프레소 사골 육수처럼 쑴펑쑴펑 솟구쳤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위기감. 뭔가 획기적으로 아픈 사람이 나타나 주면 좋겠다는 초조한 심정. 음차원으로 떡락하는 두 감정이 버무려진 샐러드를 와그작와그작 씹었다.

한데 그러다가 문득.

'...어라, 잠깐.'

라키엘은 멈칫했다. 뭔가가 번쩍,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에.

"가르딘 경."

고개를 들었다.

가르딘 경을 불렀다.

"지금 당장, 시종장한테 설문지 500장 만들라고 전달해."

"...예?"

고개를 갸웃거리는 가르딘 경. 그런 그를 돌아보는 라키엘의 입가엔 어느새 회심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

"별궁 식구 모두에게 돌릴 설문지. 설문 제목은 '별궁 근무자 가족 건강 현황 앙케트' 정도가 딱 좋겠네."

라키엘은 확신했다.

별궁 식구들이 너무 건강하다면? 그래도 가족들 중에는 중환자 하나쯤 있겠지! 라고.

35화. 건강 현황 앙케트 (2)

세상에는 아픈 사람들이 많다. 특히, 연령대가 올라갈수록 아픈 사람들의 비율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당장 주위만 봐도 그렇다.

세상 부모님 중에 어디 한 군데 아픈 곳 달지 않고 살아가는 분이 계시던가. 어딘가가 아프고 불편해도 다들 참아가며. 자식 뒷바라지에 매진하시는 진정한 영웅들. 그분들이 부모님이라는 이름의 가족이었다. 라키엘은 여기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별궁 근무자들이 너무 건강하고 쌩쌩해서 곤란하면? 그들의 가족을 살펴보면 되겠지!'

다들 부모님이 있을 테니까. 다른 가족들도 있을 거니까. 그 숫자만 합쳐도 최소한 천 명은 넘을 거니까.

'적어도 그중엔 중환자가 있을 거고.'

확신이 들었다.

가르딘 경을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설문조사, 앙케트 항목은 최대한 심플하게 정하자."

"어떻게 말입니까?"

"간단하잖아. 설문자 본인 이름, 설문자 가족 명단과 성별, 나이, 보유 질환, 증상. 딱 이 정도면 되겠네."

"더 추가하실 내용은 없습니까?"

"아, 설문 작성 내용이 거짓으로 밝혀질 시엔 별궁에서 해고될 거라는 살벌한 경고문도 하나 붙이자."

"경고문... 을요?"

"어."

라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난으로 하는 설문이 아니다. 이쪽에겐 정말로 필요한 일이다. 게다가 이게 별궁 근무자들을 해롭게 하는 일도 아니다. 그러니 최대한 투명하게, 정확하게 조사할 수 있도록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싶었다.

"기왕이면 설문지 상단에 엄청 크게. 폰트 크기... 아니, 글자 하나하나를 눈깔만 하도록 굵게. 가능하면 경고문만 빨간 잉크로 쓰라고 그래."

"눈에 확 띄겠군요."

"당연하지."

"예, 그럼 이 내용 그대로 시종장에게 전달하겠습니다."

이쪽의 주문(?)을 꼼꼼히 기록한 가르딘 경이 시종장을 찾아갔다. 그 뒤의 일은 일사천리였다.

시종장은 성실한 사내였다. 이쪽의 명령을 신속하고도 충실하게 실행했다. 덕분에 불과 반나절 뒤인 저녁 무렵엔 완성된 설문지 500장을 받아볼 수 있었다.

"흐음, 잘 뽑혔네."

팔랑!

설문지를 살펴보자니 마음에 들었다. 이쪽이 요구한 사항이 튼실(?)하게 반영되어 있었다.

'됐어. 내일 아침에 설문지를 돌리는 거야. 그러면 계획에도 탄력이 붙겠지.'

별궁 근무자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포착되면? 그대로 잡아와서 안 아프게 만들어 버릴 거다. 정성껏 별궁에 억류해서 건강하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그러면 성공적인 진료 사례가 입소문으로 퍼지겠지. 거기까지만 이뤄지면 돼. 그다음은 자동이야.'

최초의 입소문.

그걸 듣고 솔깃하는 소수가 있을 것이다. 아마 본인이나 가족이 아픈 사람일 거다. 특히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는 환자일수록? 소문에 더욱 솔깃함을 느낄 것이다.

'그중에 누군가는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별궁에 찾아올 거고. 난 그 사람을 진료해주고. 그 진료 사례가 또 미담이 되어서 퍼지고. 더 많은 입소문이 황금시간대 광고처럼 더 많은 환자를 불러오겠지.'

그거면 된다.

보너스 수명을 아주 쓸어담게 될 거다.

'그럼... 일찍 죽을 걱정 없이 평생 떵떵거리면서 사는 거지. 진정한 황족 라이프!'

생각만 해도 야물딱지게 두근거리는 미래였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난 자신이. 고등학교 때 아버지를 여의었던 자신이. 그래서 알바를 전전하며 겨우 대학을 졸업했던 자신이. 20대 초반부터 30대 전부를 연애마저 포기하고 학업과 일에만 몰두했던 자신이.

40대가 다 되어서야 약간이나마 모은 돈에 대출금 왕창 끼고 한의원 열었다가... 쫄딱 망했던, 그런 자신이.

마침내 여기서나마 처음으로 잘 먹고 잘살게 될 가능성을 선물 받았다. 수명만 늘어나면. 일찍 죽지만 않으면. 꿈같은 황족 라이프가 눈앞에 펼쳐지리라. 만수르 형(?) 부럽지 않은 백수 인생을 만끽하리라. 그 생각에 괜히 가슴이 쿵쿵 뛰고 설레었다.

한데 그렇듯 혼자만의 흐뭇함을 음미하고 있던 도중이었다.

"...실망입니다, 전하."

난데없는 서늘한 목소리가 고막을 푹, 찔러왔다. 설문지를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보았다.

그곳에 데미안이 있었다. 특유의 냉랭한 표정과 무감정한 눈빛. 그 속에 배어 있는, 약간은 언짢은 듯한 감정이 느껴졌다.

"실망이라니?"

되물었다.

대답은 금방 돌아왔다.

"외람되지만 감히 하나 묻겠습니다. 혹시 전하께서는... 환자를 도구로 보시는 것입니까?"

"음?"

"그냥, 아까 점심 무렵부터 그런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내가 환자를 도구로 보는 것 같다고?"

"예."

데미안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윽고 녀석의 신랄한 디스가 이어졌다.

"가르딘 경에게 밝히시길, 별궁에 병원을 차릴 거라 하셨지요. 그렇기에 많은 환자를 끌어들일 소문, 미담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응. 그랬지."

"그 취지는 훌륭하십니다. 분명 칭송받을 일입니다. 하지만 어쩐지, 지금 황태자 전하의 모습은...."

"모습은?"

"죽기 직전인 환자 하나만 제발 나타나 달라고 빌고 계신 것 같아서 말입니다."

"...."

뜨끔.

입이 닫혔다.

'어우야. 명치에 돌직구 꽂히네.'

너무 정확한 지적이라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때였다.

"이보게, 자네 감히 황태자 전하께 무슨 망언을!"

가르딘 경이 다급히 속삭였다. 그것도 모자라 팔꿈치로 데미안의 옆구리를 콕, 찔렀다.

"어찌 그렇게 무엄할 수 있는가. 전하께서는 따로 다 생각이 있으실 것이거늘. 자네의 생각만으로 전하의 의도를 짐작하여 함부로 실망해선 안 되는 법이야!"

...다 들린다, 다 들려.

가르딘 경도 나름 속삭인다고 목소리를 낮추긴 했는데. 그게 이쪽의 면전이라는 점과, 여기가 매우 조용한 침실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한데 웃기는 점은, 그런 가르딘 경의 다급한 훈계가 데미안에게 약간은 통했다는 것이었다.

"...그런 겁니까."

데미안이 시무룩(?)해졌다.

이쪽도 조금은 머쓱해졌다.

'나, 사실은 따로 생각해둔 거 없는데.'

따지고 보면 데미안의 지적 그대로였다. 조금은 반성하는 기분이 들었다. 데미안을 훈계하는 가르딘 경을 말렸다.

"어, 음, 가르딘 경?"

"예, 전하?"

"말은 고맙긴 한데. 데미안 카이엔, 저 친구가 나한테 한 지적이 틀린 말은 아닌 거 같아서."

"...예?"

"맞는 말 한 친구한테 너무 뭐라 하진 말고. 흠흠."

"어, 음, 알겠습니다, 전하."

이번엔 가르딘 경이 시무룩해졌다. 그러자 데미안의 눈길이 또 서늘해졌다.

"전하, 너무하시는군요. 방금 가르딘 경은 전하를 위해 일부러 나섰던 것입니다."

"헐."

"한데 그런 충실한 수하에게 무안을 주는 행위는 다시 생각해보심이 어떨까 합니다."

"이보게, 자네? 전하께 말이 심하지 않은가!"

또 참지 못하고 훈계하는 가르딘 경.

그 훈계에 시무룩해지는 데미안.

'...니네 뭐하냐.'

라키엘은 그만 쓴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원작 마검황의 주인공인 데미안. 그가 채찍 같은 존재가 되어 직언을 서슴지 않고 이쪽의 곁에 있어준다는 것이.

또한 원작 마검황에서는 일찍 죽었던 엑스트라인 가르딘 경. 그가 당근처럼 언제나 이쪽의 곁을 지켜준다는 사실이.

참으로 다행이고, 고맙게 느껴졌다. 라키엘은 그런 마음을 담아 실없이 웃었다.

"당근 경, 채찍이가 맞는 말 한 거 같은데?"

"어, 음, 죄송합니다, 전... 예에?"

"당근 경. 이렇게 부르니까 이상해?"

"...."

"마음에 드나 보네."

"그건 아니고...."

"전하. 가르딘 경 같은 충신을 그렇듯 만만하게 대하면 안 되는 법입니다."

"어허, 자네! 자꾸 전하께 그럴 생각인가!"

"...둘 다 나가."

결국, 당근 경과 채찍이 녀석, 가르딘 경과 데미안을 쫓아내고서야 라키엘은 편히 잘 수 있었다. 묘하게도 자꾸만 실없는 웃음이 나오는, 그런 꿈을 꾼 밤이었다.

다음 날 오전, 예정대로 앙케트를 실시했다. 라키엘은 별궁의 시종, 시녀, 잡일꾼, 근위대를 모조리 모았다. 설문지를 작성하게 했다. 덕분에 점심 무렵엔 500장의 따끈한 설문 결과를 받아볼 수 있게 되었다.

'...라지만 대체 왜, 다들 건강한 건데!'

팔랑! 팔랑!

설문지를 팍팍 넘기는 라키엘의 손길이 빨라졌다. 안쪽의 내용을 살피는 그의 눈길이 당혹감에 젖었다.

다들 건강했다.

별궁 근무자들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가족들도 대부분 건강했다. 어디가 아파봤자 사소한 질환이 대부분이었다. 진료를 했을 때 화제성이 될 만한, 목숨이 오락가락하거나 누가 봐도 큰 병을 앓고 있거나 하는 사람이 도통 없었다.

'이건 뭐 장수마을 가족 출신들만 별궁 근무자로 뽑아놓은 것도 아니고!'

라키엘은 절망(?)했다.

그래도 아직 설문지를 다 본 건 아니었다. 그의 손이 더욱 열심히 설문지를 넘겼다.

아직 200장 정도는 남았으니까 어쩌면, 팔랑팔랑. 그래도 아직 100장이나 남았으니까 아마도, 팔랑팔랑. 그나마 50장은 남아 있으니까 그래도 아직은, 팔랑팔랑. 이제 겨우 10장 남았는데 제발, 팔랑팔랑.

아직 살펴보지 않은 설문지의 양이 줄어들수록 그의 손이 떨려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초조하게 설문지를 넘겨 가던 그의 손이 딱 멈추었다.

"어?"

...찾았다.

그의 눈이 반짝였다.

설문지를 재빠르게 훑었다.

그곳에는....

[이게 설문에 써도 될 내용일지, 병을 앓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용기를 내어서 써봅니다. 제게는 8살 된 남동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한 달에 한두 번씩, 악마에 씐 듯이 거품을 물면서 온몸을 떨어댑니다. 의사를 불러봤지만 그 누구도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구요. 성직자님께서도 그저 기도를 열심히 하여 몸에 깃든 악령을 쫓아내는 것만이 최선이라고 하셨어요.]

...라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이거다.'

촉이 왔다.

그가 명했다.

"여기 이 설문지의 주인공, 당장 데려와."

명령이 신속하게 이행되었다.

두 시간 후, 라키엘은 설문지에 쓰인 사연의 주인공(?)과 대면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시녀의, 8살 먹은 남동생이었다.

"안녕? 네가 조르쥬구나?"

"...."

아이는 대답이 없었다.

라키엘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원래는 제법 개구쟁이일 듯한 빨간 머리 주근깨의 남자아이. 하지만 지금은 엄청나게 긴장한 모습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집에서 잘 있다가 난데없이 근위대의 방문을 받았겠지. 그렇듯 얼떨떨한 사이에 마차를 타고 별궁까지 왔을 테고.'

난생처음 와보는 궁전일 거다. 게다가 눈앞에선 황태자가 인사까지 건네고 있으니 무슨 일인가 싶을 거다. 호기심보다는 두려움을 더 많이 느끼고 있을 터다.

'일단 긴장부터 풀어줘야겠네.'

라키엘은 몸을 낮추었다.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사탕 좋아해?"

"...."

"아저씨, 아니, 형은 좋아하는데. 나 먼저 먹을까?"

대답을 듣기도 전에 사탕을 입에 쏙 넣었다. 달콤한 향이 입안에 퍼졌다.

"하. 맛있다. 그럼 네 차례?"

다른 사탕을 내밀었다. 그제야 아이가 주춤주춤, 눈치를 살피며 사탕을 받아들었다. 하지만 먹지는 않았다. 라키엘도 굳이 먹으라고 권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아이에게 말했다.

"사실 오늘 형이 조르쥬를 보자고 부른 건 네 누나가 부탁을 해서야. 너네 누나가 그러더라? 네 이야기를 좀 들어달라고."

"제... 이야기를요?"

"응. 누나가 그러는데 조르쥬가 요즘 고민이 많아 보였대. 그런데 너도 알다시피 누나는 별궁에서 일하느라 많이 바빴잖아? 그래서 조르쥬의 고민을 잘 들어주지 못해서 많이 미안해하더라고."

"그래서 형... 아니, 황태자 전하께서...."

"지금은 그냥 형이라고 불러도 돼. 진짜로."

"...진짜로요?"

"당연하지. 대신 조르쥬랑 나랑 둘만 아는 비밀로. 저어기 있는 아저씨들한테는 얘기하면 안 된다? 잘못 얘기하면 저 아저씨들한테 형이 이놈, 하고 혼나요."

"에이, 거짓말."

"진짠데. 정말인데."

"...진짜로요?"

"그렇다니깐?"

아이에게 살짝 다가가며 쉿,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몸을 더욱 낮추었다. 아이의 작은 어깨를 자연스럽게 한 팔로 감쌌다. 함께 몸을 낮추며 옆의 테이블 아래로 들어갔다. 더욱 은근한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사실은 여기가 비밀 장소거든.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건 밖에 있는 아저씨들은 못 들어요. 어때?"

"...그건 아닌 거 같은데."

"쯧. 들켰냐."

"네."

"우리 조르쥬, 똑똑하네. 하여간 요즘 애들은."

"그래도 다른 애들은 맨날 나 놀려요."

"놀려? 왜?"

"내가 이상하대요."

"아닌데. 조르쥬 안 이상한데."

"이상해요. 다른 애들이 맨날 그랬어요."

"그거 참 희한하다? 왜 그랬을까?"

조금씩.

자연스럽게.

아이의 표정이 풀렸다.

말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라키엘이 대한민국의 한의사였던 시절부터, 한의원에 본능적인 두려움을 보이는 수많은 어린이 환자들을 대하며 체득한 진료 스킬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덕분에 잠시 후.

마침내 그는 '악령이 씌어 발작을 한다'는 아이의 정확한 병명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36화. 아스라한 정밀 진단법 (1)

한의원.

어느 동네에나 하나씩은 있다. 하지만 가는 사람들만 찾아가는 그런 의료 시설이다. 그것이 대한민국 한의원의 현주소였다. 하지만 라키엘은, 과거의 이한은 그걸 바꿔보려 나름 노력을 했다.

'당연하지. 그래야 안 망하니까!'

한의학계의 발전을 위해서라든가. 한의원에 대한 인식을 바꿔보겠다든가. ...라는 등등의 숭고하고 거룩한 이상 따위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한의원의 수익 보전을 위해서였다. 매달 찾아오는, 2회 군입대만큼이나 무서운 임대료와 대출 이자 납부를 무사히 치러내기 위해서였다.

항상 노력했다.

환자들에 대한 배려는 필수였다. 조금이라도 더 친절하려고 애를 썼다. 말과 행동이 느린 어르신들이 오실 때면 언제나 귓구멍을 활짝 열었다. 단 한 번도 답답해하지 않고, 환자들의 말을 경청했다. 특히 어린이 환자가 올 때는 더욱 신경을 썼다.

한약은 쓰고 맛이 없는 것. 침을 맞는 건 아프고 무서운 것. 그러니까 한의원은 낯설고 두려운 장소. 그런 인식 때문인지 어린이 환자들은 잔뜩 긴장해 있기가 일쑤였다.

하여 친절하게. 친근하지만 부담스럽지 않게. 아이들의 눈높이를 맞추어주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고, 흥미를 끌어내곤 했다. 그러다 보면 아이들의 긴장도 자연스럽게 풀렸다.

그 또한 그런 기술(?)에 능숙해졌다.

지금 또한 그러했다.

"아이들이 맨날 저 놀려요. 저 흉내 내고 그래요 막."

"흉내까지 냈어? 너무했네."

"그래서 어제도 싸웠어요."

"에고. 많이 속상했구나?"

라키엘이 우쭈쭈를 시전했다. 어느새 긴장이 풀린 아이, 조르쥬가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치만... 졌어요. 또 막, 기분이 이상해지고 눈앞이 캄캄해져서...."

"캄캄해져? 기분이 이상해지고?"

"네."

"아픈 거였어?"

"그건 아니고...."

아이가 어깨를 움츠렸다. 라키엘이 아이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 온기에 기운을 얻은 걸까. 아이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그냥,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질 때가 있어요. 몸이 오싹해져요. 그러다가 온몸이 하늘에 붕 뜨는 기분이 들다가... 바닥으로 떨어져요. 그때부터 몸이 안 움직여요."

"안 움직여?"

"네. 그냥, 그래요. 막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저릿저릿하고, 하늘이 막 멀어지고, 그리고 이상한 소리도 들려요. 막 소리 지르다가, 웃다가, 울다가, 그러다 보면 다시 정신이 들어요.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구요."

"그거 무서웠겠네."

"응, 맞아요."

"그래도 그때마다 참아낸 거였구나? 우리 조르쥬, 용감하네?"

"용감하면 뭐해요. 악령 들려서 거품 물고 이상한 짓 했다면서 놀리고 때리는데."

"악령 아니야, 그거."

"...네?"

"진짜야. 형 말 믿어."

라키엘은 조르쥬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의 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었다. 진짜 사실이고, 팩트였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동안 은근슬쩍 잡은 아이의 손목. 그 손목을 통해 자연스럽고 은밀(?)하게 진맥 스킬을 사용한 덕분이었다.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종합 소견 : 대체로 건강한 신체입니다. 다만, 불규칙한 뇌파에 의한 뇌전증(epilepsy)의 징후가 감지됩니다. 이는 심각한 수준의 전신강직대발작(tonic-clonic seizure)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뇌전증.'

흔히 '간질'이라고 말하는 질환.

평소에는 아무 이상 없이 생활을 하다가, 원인 모를 뇌파의 폭주 때문에 전신에 경련을 일으키며 정신을 잃고는 하는 질환이었다.

'생각보다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증상이지. 사실은 뇌파의 이상 때문에 겪는 고통인데, 그걸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고약한 오해를 받기도 하고. 게다가 알고 보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질환이기도 해.'

라키엘은 예전에 봤던 통계를 떠올렸다. 거의 100명당 1명꼴로 뇌전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하였던가.

'심지어 유명인 중에도 뇌전증을 앓은 사람은 많았지. 소련을 건국한 레닌도, 화가 빈센트 반 고흐도,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도 뇌전증에 고통받았다고 했어.'

그걸 이 아이도 앓고 있는 거다.

'많이 괴로웠겠네.'

아이를 보자니 절로 안타까운 심정이 들었다. 현대 대한민국에서조차 뇌전증을 지닌 분들은 주위의 색안경 낀 편견에 시달리는 일이 많았다. 배려를 받아야 하는, 엄연한 질환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 안타까운 경우까지 있었다. 아니, 수두룩했다.

현대 사회인 한국에서도 그럴 정도인데. 여기서는 얼마나 주위의 손가락질을 받았을까.

'악령에 씌어서 그렇다'라며 얼마나 많은 배척과 따돌림, 시달림을 받았을까.

"아무튼, 악령 아니야. 네가 이상한 것도 아니야."

"...정말요?"

"그래. 형이 황태자잖아. 내 말이 맞아."

"어떻게요?"

"내 말에 토 달고 싶은 놈 있으면 별궁으로 오라 그래."

"그럼 황태... 형이 혼내주는 거예요?"

"황태 형이 뭐냐. 그냥 형."

"...."

"아무튼, 이상한 소리 하면서 놀리고 괴롭히는 사람 있으면 내가 혼내줄게."

"그럼 나 이제 안 아파도 되는 거예요?"

"...."

아이가 물어왔다.

가족 외의 사람이 편을 들어주는 것이 처음이라 그런 걸까. 은근한 기대감마저 보이는 그 물음에 라키엘은 입을 다물었다.

섣불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안타까웠다. 감히 확답할 수 없는 물음이기 때문이었다. 라키엘은 희미하게 미간을 찡그렸다.

'뇌전증을 밝혀낸 건 좋아. 다행이야. 나도 치료해주고 싶다. 그런데....'

하필이면 아이의 질환이 뇌전증인 게 문제였다. 뇌전증의 원인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한의원을 꾸리며 갈고 닦은 진맥? 그걸론 턱도 없었다. 혹은 이곳에서 얻은 진맥 스킬? 스킬로도 뇌전증의 원인까지는 밝혀낼 수가 없었다.

'진맥 스킬 레벨이 너무 낮아.'

이미 몇 번 시도해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떠오르는 것은 아까 보았던 [종합 소견] 항목이 전부였다. 그 이상의 정밀한 진단을 보려면 스킬 레벨을 한참은 더 올려야 할 것 같았다.

'뇌전증은 발생 원인이 매우 다양한 편이지. 그걸 제대로 밝혀내려면? 안타깝지만 한의학으론 안 돼. 병원에 입원해서 정밀진단을 받아야 해. CT, 뇌파 검사는 물론이고 혈액검사에 간수치, 콩팥기능검사, 소변검사에 요추천자(lumbar puncture)에 혈액배양도 해봐야 해. 그리고 뇌자기 공명영상(MRI) 촬영에 뇌파검사(EEG), 양전자방출단층촬영(PET-CT)도 시행해야 하고.'

그걸 전부 시행하고, 전문의의 검사결과 판독을 거쳐야 비로소 제대로 짚어낼 수 있는 게 뇌전증의 발생 원인이었다.

한데 여기서는?

'어림도 없어.'

한국에서도 뇌전증 환자가 한의원에 찾아오면?

여기선 안 된다고. 한의원은 면역력 증진, 체질개선과 건강 유지를 위해 주로 찾는 곳이라고. 그러니 이럴 때는 한의원이 아니라 큰 병원, 종합병원으로 가셔야 한다고. 어설프게 한의원만 전전하다가는 오히려 치료 시기를 놓치신다고. 양심적으로 말하며 환자를 돌려보내곤 했던 그였다.

솔직히, 조금 막막해졌다.

'검사 장비마저 없는데.'

어떻게 발생 원인을 찾을까. 발생 원인을 찾지 못한다면? 제대로 된 치료를 할 수 없음도 물론일 것이다.

'후우.'

생각하자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런 티를 아이 앞에서 내지 않으려니 더욱 막막해졌다.

한데 그때였다.

"...저기, 형?"

아이가 이쪽을 불렀다. 상념에서 깨어나 보니, 아이의 표정이 뭔가 이상했다.

"나, 이상해요...."

"어?"

어느새 이쪽의 소매를 꼭 쥐고 있는 아이. 아이의 입술 끄트머리가 움찔, 움찔, 떨리는 게 보였다. 입술뿐만이 아니었다. 눈꺼풀도 불규칙하게, 잘게 떨리고 있었다.

"추...워요."

뭔가에 잔뜩 질린 얼굴.

마치 무서운 꿈이라도 꾼 것처럼. 혹은 이제부터 시작되는 악몽에 빠져드는 것처럼. 아이의 전신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경련을 시작했다.

'설마?'

라키엘이 불길한 예감을 느끼는 순간.

"...으, 으으윽...."

아이의 표정이 무너졌다.

눈이 하얗게 뒤집혔다. 목이 뒤로 젖혀지고, 어깨가 오므라들었다. 온몸이 전류에 감전된 듯 덜덜 떨리며 굳어갔다. 뇌전증으로 유발되는 전신강직대발작이었다.

'이런.'

라키엘은 다급히 손을 뻗었다. 쓰러지려는 아이를 받아 안았다.

'하필이면 지금 발작이라니.'

당황스러웠다.

한편으로는 이해도 되었다.

'아마 갑자기 별궁으로 불려 오며 긴장한 탓이겠지.'

그런 심리 상태가 발작의 유발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닐까. 그렇게 짐작하며 아이를 조심스레 바닥에 눕혔다. 그동안 주위에선 난리가 났다.

"아, 아이가!"

"정말로 악령이다. 악령이 들렸어!"

"황태자 전하, 물러나십시오!"

특근대와 근위대원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가르딘 경이 기겁하며 물러나라고 외쳤다. 데미안은 말없이 검 자루를 쥐며 눈을 번득였다. 아이의 누이, 시녀가 울먹이며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위험합니다, 전하!"

"아이에게서 떨어지십시오!"

근위대원들이 달려왔다. 당장에라도 아이를 빼앗아 집어던질 기세였다. 마치, 이쪽에게서 불길한 존재를 떼어놓으려는 것 같았다.

"그만!"

절로 호통이 나왔다.

모두가 움찔.

딱 굳어 버린 주위를 향해 빠르게 말했다.

"악령이 아니다. 질환이고, 아픈 거야. 그러니 호들갑 떨지 말고. 조용히 하고."

"...."

"지금 가장 괴롭고 아픈 건 이 아이야. 환자는 배려와 보호를 받아야 하는 거고."

"...."

"누가 가서 베개부터 하나 가져와."

"아, 알겠습니다."

근위대원 하나가 뛰어갔다. 그동안 가르딘 경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전하, 아이가... 많이 괴로워 보입니다."

"그렇겠지. 이렇게 떨고 있으니."

아닌 게 아니라 바닥에 누운 조르쥬는 전신을 불규칙하게 떨고 있었다. 온몸에 힘을 꽉 주었다가, 다시 풀었다가를 반복하고 있기도 했다. 가르딘 경의 눈빛에 안타까움이 떠올랐다.

"거품을 물고 있는데, 손수건으로라도 닦아줘야 할까요?"

"아니, 절대로."

라키엘은 고개를 저었다.

뇌전증 발작 중에 수건 등을 입가에 놓으면 오히려 큰일이 난다. 전신의 근육, 턱 근육마저도 제멋대로 수축을 하는 중이다. 자칫 수건을 깨물고 삼켜서 기도가 막힐 수도 있다.

"그러니 이대로 둬. 거품이 기도로 안 넘어가도록 고개는 옆으로 돌려놨으니까."

"하면 좀... 팔다리라도 주무를까요?"

"아니, 그것도 안 돼."

전신의 신경이 제멋대로 폭주하는 상황이다. 어설프게 마사지를 시도하다간? 환자가 반사적으로 근육에 과도한 힘을 줄 수도 있다. 운이 나쁘면 근육이 파열될 정도로 힘을 주게 된다.

"그럼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어. 그냥 지켜봐 주고, 발작이 끝나면 기절한 듯이 축 늘어질 테니까 그때부터 보살펴주는 수밖에."

말해놓고 보니 안타까웠다. 해줄 수 있는 게 딱히 없음 또한 착잡했다. 라키엘은 발작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아이의 셔츠 단추를 풀어주었다. 벨트도 느슨하게 해주었다.

한데 그러던 도중이었다.

점차.

서서히.

아이에게서 뭔가 기이한 감각이 느껴졌다.

'...음?'

그것은 마나의 흐름이었다. 아이의 몸속을 흘러다니는 마나의 움직임이었다. 제멋대로 날뛰며 폭주하는 마나의 흐름과 경로가, 조금씩 느껴졌다. 마치 물속에 퍼져 가는 잉크의 움직임을 보는 기분이었다.

'이게 왜 느껴지는 거지?'

처음엔 잠깐 의아했다.

하지만 이내 깨달을 수 있었다.

'아스라한 심법.'

자신이 보유하게 된 황가의 비전 심법. 마나의 흡수, 가공, 증폭, 발출에 특화된 심법.

'부가적으로는 마나의 흐름을 매우 민감하게 포착하게 되는 특성이 있다고 했지.'

소설 마검황에서 자세히 언급된 적이 있었다. 그걸 떠올리자 이내.

'잠깐만.'

깨달음이 찾아왔다.

라키엘은 눈을 부릅떴다.

마나는 곧 기의 순환이다. 한데 지금 자신은? 아스라한 심법을 통해 아이의 몸속을 흐르는 마나를 느끼고 있다. 그 말은 즉, 아이의 전신에 흐르는 기의 순환을 정밀하게 진단할 수 있다는 뜻이다.

'어쩌면 이거... 뇌전증의 발생 원인을 파악할 수 있을지도.'

가능할지도 모른다.

아니, 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이 지닌 혈맥에 대한 지식. 그리고 아스라한 심법으로 파악할 수 있는 기의 순환. 둘을 결합한다면?

'어쩌면, MRI만큼 정확한 진단이 가능할지도 몰라.'

그렇게 진단할 수만 있다면, 아이의 뇌전증을 치료할 수도 있겠다. 실낱같은 희망의 빛이 엿보였다.

'해보자.'

각오를 다지는 순간.

라키엘은 아이의 어깨를 살며시 짚었다. 심장을 둘러싼 써클을 최대의 출력으로 회전시켰다. 아스라한 심법을 결합한, 그만의 독보적인, 아스라한 정밀 진단법이 최초로 시도되는 순간이었다.

37화. 아스라한 정밀 진단법 (2)

키이이잉-!

아스라한 심법이 발동되었다.

써클이 맹렬하게 회전했다.

신체의 감각이 예리해졌다.

쿵, 쿠웅, 뛰는 심장 소리.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침 소리. 들이마시는 호흡과 내쉬는 호흡 사이. 기관지의 미세한 떨림과 횡격막의 요동까지. 라키엘은 자신의 몸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조금씩, 또렷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내 몸에도 기가 순환하고 있으니까.'

살아 있으니 기혈이 순환한다. 순환하는 기가 곧 마나다. 마나가 깃들지 않은 신체 부위는 없다. 오장육부는 물론이고, 근육과 뼈, 모발, 세포 하나마다 모두 마나가 깃들어 있다. 생명이 작용하는 모든 곳에 드나들고, 머물고, 깃들고, 배어나며, 맥동하고, 숨 쉰다.

라키엘은 그 마나를 느꼈다. 아스라한 심법을 통하여 마나를 느끼고, 마나를 통해 신체를 살폈다. 처음에는 혹시나 싶었다. 한데 놀랍게도 어느 정도는 가능했다.

'이건 마치... 내가 X선 대신 마나를 사용하는 엑스레이가 된 기분이네.'

혹은, 자기공명 현상 대신 마나로 신체를 탐색하는 MRI가 된 느낌이었다.

'그럼 다른 사람의 몸도 똑같이 살펴볼 수 있을까.'

손을 움직였다. 아이, 조르쥬의 어깨를 짚었다. 조심스럽게, 천천히, 마나써클의 회전수를 올려갔다.

키이이이-!

심장을 둘러싼 써클이 더욱 거세게 회전했다. 마나에 대한 감지력이 한층 올라갔다. 그만큼 마음은 차분히 가라앉혔다.

서서히 눈을 감았다.

비로소 조금씩, 느껴졌다.

'보인다.'

눈을 감으니 다른 세상이 보였다. 아스라한 심법이 보여주는 또 다른 경지의 풍경이었다. 온통 새까만 세상. 그 속에 흐르는 빛들이 보였다. 아이, 조르쥬의 몸속을 순환하는 마나의 흐름이었다.

움직이는 마나의 줄기가 온통 빛나며 그 경로를 표시해주고 있었다. 마치, 한밤중의 대한민국 국토를 위성 사진으로 찍으면 나오는, 새까만 땅 위로 도시와 사람 사는 지역마다 전기가 밝혀진, 그런 풍경을 보는 것 같았다.

'한데 흐름이 역시... 난리가 났구나.'

라키엘은 침음을 삼켰다.

아이의 몸속을 순환하는 마나의 흐름이 이상했다. 아니, 이상하다 못해 궤멸적이었다. 제멋대로 흐르고 있었다.

원래 기혈의 순환이라는 것은 음과 양, 오행의 이치에 따라 정해진 길을 정해진 순서로 흘러야 하는 법이었다. 사람이 숨을 쉬면 공기가 기도를 통해 드나들듯이. 사람의 맥박이 뛰면 혈액이 심장에서 동맥으로, 신체 말단으로, 다시 정맥을 통해 심장으로 되돌아가듯이. 신체의 모든 흐름에는 엄연히 정해진 길이 있었다.

한데 지금 아이의 몸속에서는?

그 정해진 길이 보이지 않았다. 모든 마나가 제멋대로 날뛰고 있었다. 심지어 너무나 강력하게 흐르고 있었다. 엉망진창으로 뒤틀리고 꼬인 급류가 계곡과 둑을 무너뜨리는 것과 같은 형국이었다.

'뇌전증이... 이런 거였구나.'

기혈의 흐름을 실제로 보니 더 참담하다. 절로 안타까운 심정이 치솟았다. 하지만 라키엘은 그런 기분에 휩쓸리지 않았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냉정해야 할 순간이다. 자신이 언제까지 이렇듯 마나를 민감하게 감지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 이런 기회는 소중히 써야 한다.

'집중.'

라키엘의 눈이 빛났다.

폭주하는 아이의 마나 흐름을 주시했다. 하나하나를 추적하고, 되짚으며, 분석했다.

'뇌전증의 원인이 되는 흐름을 찾아야 해.'

뇌파의 폭주.

그 실마리가 될 법한 흐름을 더듬었다. 척수 신경을 거쳐, 수많은 신경의 줄기를 탐색했다. 뒤엉키고 꼬인 마나의 흐름을 관찰하고 분류하며 순서를 재분석했다. 추리했다. 추적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발견했다.

'찾았다.'

그의 눈이 아이의 목덜미 옆쪽을 주시했다. 그곳에 아이의 연수에서 목정맥구멍(jugular foramen)을 통해 두개골 밖으로 나오는 신경 줄기가 있었다. 뇌에서 뻗어나오는 12갈래의 뇌신경(cranial nerve) 중의 10번째 뇌신경.

바로, 미주신경(vagus nerve)이었다.

한데 그 신경을 따라 흐르는 마나의 신호가 매우 이상했다. 그냥 이상한 정도가 아니라, 끔찍할 정도로 난폭했다.

파츠즛! 파즛!

스파크가 튀듯이 신경 신호가 날뛰었다. 마치 운석이 떨어지듯. 주위를 초토화하듯. 어긋난 신경 신호에 얻어맞은 미주신경이 경련했다.

이내 신경질적인 기혈의 연쇄작용이 일어났다. 연못에 던진 조약돌 때문에 파문이 생겨나듯. 바다에 떨어진 운석 때문에 해일이 발생하듯. 미주신경에서 시작된 파멸적 기혈의 뒤틀림이 아이의 연수(medulla)를 휩쓸었다. 그곳의 미주신경핵(vagus nerve nucleus)을 뒤엎었다.

파장이 두뇌 전체로 확산되었다. 괴멸적 신경 신호의 폭주가 전신으로 몰아닥쳤다.

'이거였어.'

라키엘은 비로소 깨달았다.

마침내 원인을 찾아냈다.

'미주신경에서 발생하는 잘못된 신경 신호. 그게 연수를 거쳐 미주신경핵을 자극하고, 그 자극이 두뇌 전체의 신경 폭주를 유발하는 거였어.'

그는 더욱 집중력을 올렸다. 미주신경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그곳에서 발생하는 신경 신호의 패턴을 관찰했다. 기억했다. 새겼다.

그러는 사이, 아이의 몸속에서 날뛰던 마나의 흐름이 서서히 잠잠해졌다. 끝이 없을 것 같던 전신강직대발작 증상이 잦아들고 있었다.

'그럼 나도 여기까지.'

다행히 볼 것은 다 보았다.

라키엘은 집중력을 풀었다.

아스라한 심법의 발동을 중단했다. 거세게 몰아붙이던 써클의 회전도 멈추었다.

키이이이....

마나를 통해 엿보이던, 아이의 몸속 세상이 멀어졌다.

눈을 떴다.

눈꺼풀 밖의 익숙한 세상이 보였다. 한데 그 세상의 모습이 어쩐지 익숙하지가 않았다. 어쩐 일인지 모든 사물이 두세 개로 겹쳐 보였다.

"...으읏."

다리에 힘이 없었다.

저도 모르게 주저앉았다.

간신히 숨을 몰아쉬며 보니, 볼을 따라 식은땀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이의 어깨를 짚었던 손도, 팔뚝도 마찬가지였다.

'나, 탈진한 건가.'

무의식중에 아스라한 심법을 극한까지 발동했었나 보다. 그만큼 심법을 활용하는 진단이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인가 보다. 사실 이쪽도 아직 겔겔거리는 팔자니까.

어지러웠다.

속이 메슥거렸다.

"...전하!"

주위에서 외치는 소리.

하지만 라키엘은 괜찮다는 듯 손을 저어 보였다. 자신의 몸을 추스르기보다 아이의 상세부터 살폈다.

"...."

다행히 아이는 무사했다. 발작이 끝났는지 혼절하듯 잠들어 있었다. 그걸 확인하고 나서야 라키엘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겨우 서너 걸음 떨어져 있지만 엄청나게 멀리 있는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지는 가르딘 경, 데미안, 특근대와 근위대원들.

그들을 향해 짐짓 히죽 웃어 보였다.

"담요를 가져와. 아이한테 덮어줘. 이 아이, 탈진했어. 경련에 시달리느라 전신의 근육이 극도로 지쳤을 거야. 그러니 지금은 휴식이 가장 중요해. 깨우지 말고 이대로 재워. 침대로 옮기지도 마. 큰 소리 내지 말고. 소란 떨지도 말고."

"저, 전하?"

"그리고 나도 좀... 쉬어야겠네. 베개랑 담요, 하나 더 가져오도록."

"...전하!"

누군가의 외치는 소리.

그 소리와 함께 세상이 빙글, 돌았다. 조금은 거칠게, 머리가 바닥과 턱, 만나는 둔탁한 감각. 천장이 빙글빙글. 세상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어두워졌다.

잠이 쏟아졌다.

이내 모든 것이 어둠에 잠겼다.

'...어으, 머리야.'

푹 잠들어 버렸던 걸까.

라키엘은 천천히 눈을 떴다.

주위는 그리 밝지 않았다. 일렁이는 불빛 몇 줄기만이 밤에 물든 침대 근처를 밝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침대 곁에선....

"일어나셨습니까."

이쪽을 바라보는 데미안.

새까만 흑발 사이로 비치는 녀석의 얼굴이 유난히 매끈해 보였다. 새삼스럽게 신기했다.

"...."

소설로 접하고 상상하던 주인공을 실물로 보면 이런 기분인 거구나. 서로를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건 이런 느낌이구나.

그런 이쪽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던 탓일까. 데미안 녀석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다.

"반나절을 누워 계셨습니다."

"그런가. 자정이 지났겠군."

"예. 가르딘 경은 조금 전까지 곁을 지키다 잠깐 쉬러 들어갔습니다."

"쯧. 주치의 주제에 환자가 의식을 잃었는데 자기는 자러 들어가?"

"제가 안심시키고 들여보냈습니다."

"안심을 시켜?"

"예. 곧 깨어나실 걸 알았으니까요."

말해놓고 부연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데미안이 잠깐 멈칫했다가 재차 말했다.

"저도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뭐랄까요. 냄새가 느껴졌습니다."

"냄새?"

"예. 내쉬는 호흡의 냄새가 미묘하게 바뀌시더군요."

"그래서 내가 곧 깨어날 걸 알았다?"

"조금 이상하지만, 그렇습니다."

"이상하긴 뭘."

피식, 웃음이 나왔다.

듣기에 따라서 이상한 말이긴 하다. 호흡의 냄새가 미묘하게 바뀐 걸로 이쪽이 깨어날 걸 알았다니. 아니, 그 이전에, 그 정도로 미세한 냄새의 차이를 감지했다니. 보통의 사람이라면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데미안이라면?

'가능하지.'

아마도 소드 익스퍼트 상급으로 올라설 날이 머지않은 듯하다. 그날이 오면? 전신의 모든 감각이 지나치게 예민해지는, 이른바 '소드마스터 증후군'에 시달리게 되겠지.

'물론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할 테고.'

그러니 그 문제는 나중에. 녀석이 정말로 증후군에 시달릴 때쯤에.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라키엘은 화제를 돌렸다.

"아이는?"

"조르쥬는 아까 저녁 무렵에 먼저 깨어났습니다. 많이 피곤해하더군요."

"그렇겠지. 그렇게나 발작에 시달렸으니까."

"예. 저녁을 든든히 먹인 후에 다시 푹 재웠습니다."

"그래. 잘했어."

"한데 그 아이, 정말로 악령이 들린 게 아닌 겁니까?"

"어."

라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미신 같은 현상이 아니야. 뇌신경 질환이야."

"뇌신경... 말입니까?"

"으음. 다행히 원인도 찾아냈고."

그렇다.

찾아냈다.

라키엘은 아까 낮의 일을 떠올렸다. 처음으로 시도해본, 심법을 활용한 아스라한 정밀 진단법. 낯설고도 놀라운 경험이었다. 결과는 더욱 놀라웠다.

'혹시나 했는데, 진짜로 성공했어. 마치 내가 아이의 몸속을 그대로 들여다보는 그런 기분.... 어쨌건, 발작의 원인은 미주신경에 있었네.'

그렇다면 치료법은 하나다.

'미주신경 자극술.'

병원에서 시행하는 수술이었다.

왼쪽 목 부위의 미주신경에 전극선을 삽입하는 수술. 그렇게 삽입된 전극선이 미주신경에 미세한 전기 자극을 주면?

'그 자극이 뇌로 전달되고, 뇌전증 발작을 줄여주게 되지.'

작은 수술로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물론 모든 뇌전증 환자에게 효과가 있는 건 아니긴 했다. 하지만 시술 후에 지속적인 경과를 관찰하고, 전기 자극의 크기를 조절하여 맞춤 치료를 할 수 있다.

게다가 후유증도 매우 적다. 환자의 상황과 증상에만 맞는다면, 매우 이상적인 치료법이 될 수 있는 시술이었다.

'특히나 조르쥬 같은 경우엔 더욱 안성맞춤이야. 미주신경의 신경 폭주가 원인이 되어서 뇌전증이 발생하는 거니까.'

이런 경우엔 가바펜틴(gabapentin)이나 발프로에이트(valproate), 카르바마제핀(carbamazepine) 등의 약물치료가 필요 없다. 이곳에 없는 그 약물을 구해보려 애를 쓰지 않아도 된다.

그 외의 치료용 대마 오일(CBD)를 이용하거나, 케톤생성 식이요법 등의 대안치료를 탐색할 필요도 없다.

그냥 미주신경 자극술이면 된다.

그리고 라키엘은, 미주신경 자극술을 이곳에서 구현할 방법을 이미 구상해둔 상태였다.

'아까, 혼절하기 직전에 생각했지.'

생각했고, 궁리했다.

고민하고, 추리했다.

그리고 마침내 떠올렸다.

'시도해볼 가치가 있어.'

또한, 지금은 미적거릴 이유도 없다. 라키엘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자."

"...예?"

이쪽이 대뜸 건넨 말에 데미안이 고개를 갸웃. 셔츠와 겉옷을 쇽쇽 챙겨입는 이쪽의 모습에 눈썹을 찡그렸다.

"이 오밤중에, 어딜 가자는 겁니까?"

"황궁."

"...."

"시도해봐야 할 게 있거든. 일단 따라와."

"...알겠습니다."

녀석과 함께 침실을 나섰다. 별궁을 떠나, 자정이 지난 황도의 거리에 마차 덜컹거리는 소리를 남기며 이동했다.

황궁에 도착했다.

"밤중에 수고. 궁정마법사, 자네티스 경에게로 안내해줘."

"자네티스 경에게... 말입니까?"

깜깜한 밤에 황태자를 맞이하게 된 근위기사가 눈을 끔벅끔벅 떴다. 라키엘은 매우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아, 알겠습니다."

근위기사의 안내를 받았다. 정원과 복도, 계단과 모퉁이를 몇 개나 지나쳤을까.

"이곳입니다."

마침내 궁정마법사, 자네티스의 숙소에 도착했다. 라키엘은 그대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당연히 안쪽에서는 난리가 났다.

"누, 누구신가!"

갑작스럽게 문이 열리고 여러 사람이 우르르 들어가는 통에 화들짝 놀란 걸까. 영화 '반x의 제왕'에 나오면 어울릴 법한 하얀 수염의 할아버지가 잠옷 차림으로 기겁하는 모습이 보였다. 궁정 마법사 자네티스였다.

아마도 단잠을 자다가 깜짝 놀라 깨어난 것이리라. 그 모습에 라키엘은 인간적인 죄송함을 느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자신이 떠올린 시도를 하려면? 사람들 훤히 깨 있는 낮보다는 이런 오밤중이 제격이니까. 이런 때라야 해볼 수 있을 부탁을 가지고 왔으니까. 이렇게 해서라도, 아이의 뇌전증을 치료해야 하니까.

'그래야 성공적인 치료 사례가 미담으로 퍼져서 별궁 한의원에 손님들이 와글와글 몰려들고 내가 보너스 수명을 퍼받을 거니까!'

아이를 위한, 인도적인, 무슨 인간적인, 그런 이유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내가 잘 먹고 잘 자고 무병장수하기 위해서다.

그런 일념을 새삼 다졌다. 궁정 마법사에게 대뜸 다가갔다. 얼굴 가득 티타늄 철판을 깔았다.

"자네티스 경, 하나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왔는데, 혹시...."

"예?"

"내 등짝에 전격 마법 한 방만 지져줄 수 있나?"

"...제가요?"

꿀잠 잘 자다가 난데없는 부탁을 받은 궁정마법사, 자네티스. 그의 눈동자가 혼돈과 당황의 탭댄스를 추기 시작했다.

38화. 미주신경 자극술 (1)

궁정마법사 자네티스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바운스 바운스 흔들렸다.

"...제가요?"

"응."

"...왜요?"

자네티스는 당황스러웠다. 오밤중에 갑자기 황태자가 자신의 침소로 들이닥친 것도 황당했다. 한데 이렇듯 와서 하는 부탁이란 게....

'전격마법으로 등짝을 지져달라고?'

어째서?

왜?

아무리 생각해봐도 까닭조차 짐작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많은 의문부호만 머릿속에 쑴펑쑴펑 피어났다. 전날 낮에 황제와 나누었던 대화와 함께.

'라키엘, 요즘 그 녀석이 지나치게 달라졌어. 어찌나 기이한 짓을 벌여대는지.'

투덜거리던 황제의 목소리가 기억났다. 황제는 덧붙여 이렇게도 말했던가.

'참으로 별별 짓을 다 저지르고 있다지. 대관절 다음엔 또 무슨 해괴한 짓거리를 벌일는지 말이야.'

말끝에 따라나오던 황제의 탄식도 떠올랐다. 분명, 그 말들은 불평이자 한탄이었다. 한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렇듯 불평을 하고 탄식을 내뱉으면서도 어쩐지, 황제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 있었다는 점이었다.

물론 황제를 평생 모셨던 자네티스는 자신의 주군이 어떤 기분일 때 그런 식으로 말하는지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분명 흡족해하고 계셨지. 투덜거리던 말씀과는 다르게.'

황태자를 대견해하고 있었다, 황제는. 그런 아들을 자랑하고 있었다, 자신의 주군은.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라며 동네방네 사방팔방 떠들고 다니고 싶은 걸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던 것이다, 제국의 지배자는.

'그렇지요. 자식을 두면 다들 그렇게 팔불출이 되곤 하지요. 하지만 폐하. 황태자께서 달라졌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한데 그 달라졌다는 게... 이런 거였습니까?'

자네티스는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서 있는 황태자 라키엘. 그 모습을 보자 울고 싶어졌다.

"제가 왜, 전하를 해하여드려야 하는 겁니까?"

"음?"

"혹시 제 목숨이 필요하여 이 밤중에 걸음하신 것입니까?"

"...어, 그건 아닌데."

"하오면-"

"잠깐. 오해가 있었나 본데. 내 등짝에 전격마법을 쏴달라는 게 날 죽여달란 뜻은 아니다. 바삭하게 튀겨달란 뜻은 더더욱 아니고."

"하면 대체?"

자네티스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되물어 왔다. 라키엘은 생긋 웃었다.

"이상한 부탁을 하려는 게 아니니까 경은 안심해도 좋아. 그러니까 내 말뜻은, 사람이 절대로 죽지 않을, 정전기만큼이나 약한 전기 자극을 완벽히 일정하게, 최소 3시간 정도 일정하게 쏴달라는 뜻이야."

"...예에?"

"해낼 수 있겠어?"

"...."

자네티스는 입을 다물었다.

본디 전격마법은 굉장히 파괴적인 공격 계열의 마법이었다. 시전하는 것은 어렵지만, 성공하면 주위 일대를 초토화시키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특히, 자신과 같은 고위 마법사가 시전하는 전격마법은 그 자체로 소규모의 재해나 마찬가지였다.

한데 그걸, 고작 정전기 정도의 위력으로 축소해서 3시간이나 일정하게 유지해달라니.

"전하?"

"으음?"

"방금 전하께서 하신 말씀 말입니다. 그거, 엄청나게 어려운 부탁인 건 알고 계십니까?"

"어. 그러니까 경을 찾아온 거 아니겠어?"

라키엘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정말로 당연한 소리였다.

'어렵지. 엄청 어렵지. 원래는 파괴적인 계열의 마법인 것을 약하게, 오래, 일정하게 유지하며 쏘는 게 진짜로 어려운 거거든.'

극도의 정밀한 마나 컨트롤이 필요한 일이었다.

'예를 들자면 그런 거지. 섭씨 5천 도에 육박하는 헬파이어 마법. 그 헬파이어를 10연발로 발사하는 것과, 섭씨 40도로 따끈하게만 타오르는 불꽃으로 조절해서 1발을 쏘는 거. 둘 중에 어느 쪽이 어렵냐면 압도적으로 후자거든.'

일상생활로 비유하자면?

운전과 비슷할 수도 있으리라.

냅다 풀악셀을 밟는 건 쉽다. 하지만 악셀을 10단계, 20단계로 세심하게 나누며 RPM을 의도대로 유지하는 운전은 풀악셀보다 상대적으로 어렵다. 오늘 자신이 궁정마법사 자네티스를 찾아온 이유가 같은 원리 때문이었다.

"경은 이 제국에서 공인된 최고의 마법사지. 그러니 내가 경을 찾아온 거야. 그런 세심한 마나 컨트롤을 안정적으로 해낼 수 있는 이는 흔하지 않으니까. 경 정도나 되어야 믿고 맡길 수 있는 일이니까."

"...."

"어때? 이젠 두려움이 좀 가시나?"

"크흠, 예, 전하. 한데 대관절 어찌하여 제게 그런 부탁을 하시는 것인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아니."

"...."

"나쁜 일 하려는 건 아니야. 사람 살리려고 이러는 거야. 그러니까, 할 거야, 말 거야?"

라키엘이 물었다. 자네티스가 곤혹스러운 눈빛으로 새하얀 수염을 쓰다듬었다.

"크흐흠! 크흠!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도전 의식이 생겨나는 건 사실입니다, 전하. 하오나-"

"하오나?"

"혹시 만에 하나라도...."

"내가 잘못되면 어떡하느냐고?"

"예, 전하."

자네티스가 불안감을 내비쳤다.

라키엘은 피식 웃었다.

"괜찮아. 책임 안 물을게."

"...예?"

"내가 다치거나 해도 경에게 문책이 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야. 아, 내가 이렇게 말해도 미덥지 않다면 여기, 근위기사들을 증인으로 삼도록 하지."

"...!"

근위기사들의 눈이 똥그래졌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었다.

'제가요?'

라키엘의 알밤 같은 뒤통수를 쳐다보며 물음을 떠올렸다.

'왜요?'

하지만 그건 꺼낼 수 없는 반문이었다. 그 사이, 궁정마법사 자네티스가 고개를 끄덕여 버렸기 때문이었다.

"으음, 전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한번 해보겠습니다."

"좋아. 잘 생각했어."

"하면, 말씀하신 일은 언제 하면 될는지."

"지금."

"예?"

"미룰 필요 없잖아. 게다가 지금이 차라리 나아. 해 뜨면 참견할 사람이 많아질 테니까."

사실이었다.

날이 밝으면 일을 진행하기가 어려워진다. 위력을 낮추니 어쩌니 하지만, 결국엔 궁정마법사가 황태자를 전격마법으로 튀기는(?) 일이다. 매달리며 뜯어말릴 사람이 새벽 수산시장에 팔려나온 오징어보다도 더 많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 여기서."

"...아, 알겠습니다."

자네티스가 심호흡을 했다. 라키엘도 각오를 다지며 바닥에 앉았다.

'일단은 시험해보는 거야.'

어쨌거나 전기 자극을 직접 받는 일이었다. 그 자극을 가공해서 아이의 미주신경에 전달하는 일이었다.

하니 무턱대고 시도해볼 수는 없다. 일단 시험을 해봐야 한다. 최소한의 안정성은 확보해야 한다. 그렇게 각오를 다지며 자세를 잡았다. 아스라한 심법을 천천히 일깨웠다.

키이이잉....

써클이 서서히 회전했다. 외부의 마나와 자극을 받아들일 태세를 갖추었다. 그때 자네티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준비되셨습니까?"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티스의 표정이 비장해졌다.

"하오면 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자네티스가 두 손을 가슴 앞에 교차했다. 한 쌍의 손바닥과 열 가닥의 손가락이 얽혔다가 풀어졌다. 복잡한 수인이 맺히고, 마나의 흐름이 재배열되었다. 묶이고, 매듭이 생기고, 하나의 규칙을 이루었다.

이윽고.

...파칫!

작은 스파크가 허공에 탄생했다. 그리고 반응할 틈도 없이 이쪽을 향해 쏘아졌다.

파츠즛!

'...뜨그이읍!'

절로 어깨가 움찔.

따끔했다.

한겨울철 섬유유연제의 축복(?)을 받지 못한 스웨터로 생성된 풀파워 정전기의 다섯 배쯤 되는 따끔함이었다. 하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좋아. 딱 좋아. 역시 이럴 줄 알았어.'

자네티스 경은 제국의 궁정마법사다. 궁정마법사는 고스톱 쳐서 따는 자리가 아니다. 이 나라의 공식적인 최강의 마법사라는 증명이다.

'그 정도면 이런 부탁, 손쉽게 해낼 줄 알았지.'

소설 마검황에서도 자네티스 경의 마나 컨트롤 능력이 마스터급에 달해 있다는 언급이 있었다. 그 내용을 믿고 실험을 강행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그럼 이제 내 차례.'

자네티스 경이 기대에 부응을 해주었으니, 이제는 이쪽이 분발할 차례였다. 라키엘은 마나써클의 흡수력을 더욱 끌어올렸다.

키이이이잉-!

써클의 회전수가 올라갔다.

전격마법을 맞으며 느껴지는 찌릿찌릿함이 둔해졌다. 그만큼 더 많은 전류가 흡수되어 써클에 깃들었다.

'흡수만 해선 안 돼. 그다음은 가공.'

써클 중심에 작은 마나의 덩어리를 생성했다. 처음에는 좁쌀 크기로. 그 안에 전격마법의 기운을 담아갔다.

그냥 담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전기 신호를 새겼다. 마치 패턴처럼. 그래프를 그리듯. 프로그램을 짜 넣듯. 좁쌀 같은 마나의 덩어리가 일정한 패턴의 전기 자극을 주위로 방출하도록.

모양을 가다듬고, 기능을 재단했다.

그리고 지켜보았다.

파츳, 파츠츳!

마치 심장이 뛰듯, 완성된 마나의 덩어리가 미약한 전기 신호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의도한 대로의 패턴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었다.

'아스라한 심법 이거, 완전 사기네.'

라키엘은 스스로 해놓고도 놀랐다.

설마하니 한 방에 성공할 줄은 몰랐는데. 최소 며칠은 연습해야 될 줄 알았는데. 막상 해보니 생각보다 쉬웠다.

이쯤이면 됐다.

라키엘은 고개를 들었다. 찌릿찌릿 전격마법을 온몸으로 느끼며. 연신 상체를 움찔움찔 떨어대며 말했다.

"...그, 그르느끄... 그, 그믄...!"

궁정마법사 자네티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라는지 못 알아들은 걸까.

재차 외쳤다.

"그믄쓰르그!"

"혹시, 그만... 쏘라는 말씀이십니까?"

"등은흐즈! 므, 므믑!"

자네티스가 뒤늦게 화들짝 놀랐다. 마법 시전이 중단되었다. 성공적인 실험의 끝이었다.

이제는, 진짜 시술을 할 때가 왔다.

별궁에 돌아왔을 땐 어스름하니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좀 따끔할 거야."

"따끔이요?"

"응."

라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낯선 별궁에서 자다 깬 탓일까. 조르쥬의 표정에 약간의 긴장감이 떠올라 있었다.

"긴장하지 말라곤 안 할게. 원래 약은 쓰고, 시술은 따끔한 거니까. 안 속일게."

"많이... 따끔해요?"

"음, 아주 살짝?"

"얼만큼요?"

"장난으로 꼬집는 정도?"

"으, 꼬집는 거 싫은데."

"많이 꼬집혀봤어?"

"릴리한테요."

"친구?"

"아뇨."

"그럼?"

"여자친구요."

"...."

갑자기 서러워졌다.

"후우. 배신감."

"네?"

"어, 아니. 일단 누워볼까?"

아이를 눕혔다.

꼬슴이를 꺼냈다.

"꼬슴아, 아침부터 미안. 하얀 가시 하나만 줄래?"

"꼬슴!"

뾱!

새하얀 가시를 받아들었다. 가시를 본 아이, 조르쥬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거...."

"괜찮아. 겨우 이거 살짝 찔렸다고 울고 그럴 건 아니지?"

"아플 거 같은데...."

"울면 릴리한테 이를 거야."

"...."

"뭐. 왜. 뭐."

"...."

"그리고 너 벌써 찔렸거든."

"네?"

"방금 찔렀다고. 몰랐지?"

라키엘은 빙긋 웃었다. 아닌 게 아니라, 가시가 이미 아이의 목덜미에 꽂혀 있었다. 방금 잡담을 나누는 사이에 목덜미 옆쪽, 인영혈(人迎穴)에 시침을 한 덕분이었다.

"봐. 안 아프다고 했잖아."

처음엔 당황하다가, 비로소 안심하는 아이. 그 모습을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 궁정마법사 자네티스가 있었다.

'지금. 시작하지.'

신호를 보냈다.

자네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준비하고 있던 전격마법이 이쪽으로 쏘아졌다.

파츳!

등줄기가 따끔해지는 감각.

동시에 아스라한 심법을 끌어올렸다.

물론 이때만 해도 라키엘은 까맣게 몰랐다. 오늘, 아이에게 시술해주는 미주신경 자극술. 이 시술의 결과로 자신이 어떤 뜻밖의 업적을 얻게 될 것인지를.

39화. 미주신경 자극술 (2)

파츳!

등줄기가 따끔해졌다.

고도로 제어되고 약화된 전격마법이 등을 지지는 감각. 어깨가 절로 움찔거렸다. 라키엘은 이를 악물었다.

'참자. 아까처럼.'

자네티스를 찾아가 실험을 해봤던 새벽처럼. 지금도 참아내고, 받아들이고, 흡수하자. 다짐하며 써클을 회전시켰다.

키이이....

심장을 둘러싼 써클의 회전이 거세졌다. 주위의 마나를 흡수하려는 성질이 활성화되었다. 라키엘은 그 흡수력을 모두 등으로 돌렸다.

키이이잉-!

등을 자극하던 전격 마법의 마나가 모조리 써클의 흡인력에 걸려들었다. 그대로 흡수했다. 압축했다. 가공했다. 완두콩 크기의 마나 덩어리로 빚어냈다. 그 안에 전격마법의 힘을 꼭꼭 채워넣기 시작했다.

마치, 배터리를 충전하는 것처럼.

'이건 꼭 변압기 된 기분인데.'

혹은 충전기가 더 정확할까.

묘한 기분이 들어서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궁정마법사 자네티스가 쏴주는 전력(?)을 자신이 받아들이고 전압을 조절해서 마나 덩어리에 꼭꼭 충전하고 있으니, 정말로 충전기가 된 기분이었다.

'어쨌건 순조롭구나.'

아까 연습한 대로 되어가고 있었다. 이대로 30분? 그 정도만 꾸준히 충전을 한다면, 충분한 전력이 모일 것 같았다.

'한 번의 전기 자극만으로는 미주신경 자극술의 의미가 없으니까. 한 번 시술해서 평생 써야 하는 거야. 이 아이가 늙어 죽을 때까지, 꾸준하게 전기 자극을 주면서 뇌전증 유발을 막아낼 수 있어야 해.'

그러려면 평생, 능히 수십 년쯤 사용될 전기 에너지를 담아놓아야 한다. 결코 만만한 양이 아니었다.

'하지만 할 수 있어.'

이대로 계속 순조롭게만 가자. 라키엘은 기도하는 심정으로 마나 덩어리에 전격마법을 충전했다.

그 사이, 시간이 착착 흘렀다.

5분, 10분, 그리고 20분.

아이의 누이가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그 밖에도 많은 이들이 모여들었다. 데미안과 가르딘 경. 특근대 검투사들. 근위대원들과 몇몇 시종 시녀들. 모두가 두런두런 멀찍이 모였다.

그들이 감히 수군거리지도 못하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이쪽의 시술을 구경하는 게 보였다. 다행히(?) '궁정마법사가 황태자 전하를 전격마법으로 튀기고 있다!'라며 호들갑을 떠는 이는 없었다.

'뭘 하는 건지 궁금하겠지.'

저들의 눈에는 신기하긴 할 터다. 궁정마법사가 전격마법을 이쪽에게 쏘고 있다. 이쪽은 전격마법을 맞으며 아이의 목덜미에 가시를 찔러넣었다. 어느 모로 봐도 기이한 광경일 것이 뻔했다.

그래서 라키엘은?

만족했다.

'이래야지. 더 구경거리가 되어야지.'

이런 신기하고 신선하고 신박한 방법으로 아이가 치료된다면? 그래서 뇌전증 발작에서 해방된다면?

여기 있는 구경꾼들이 증인이 되어줄 것이다. 황태자 전하께서 기기묘묘한 방법으로 아이를 치료해주었노라고, 평생 술안줏거리로 삼을 것이다. 그렇게 사방팔방 사돈에 팔촌이며 이웃을 만날 때마다 떠들고 다닐 것이다.

그게 입소문이 되어주리라.

'자발적인 바이럴 마케팅이 따로 있겠어?'

히죽, 라키엘은 흐뭇하게 웃었다.

성공적인 바이럴 마케팅.

그 결과로 홍보 대박.

수많은 환자들이 별궁 한의원에 몰려들게 될 광경이 눈에 선했다. 그들을 착착 진료하고 보너스 수명을 왕창 챙겨댈 자신의 모습 또한 절로 상상되었다.

'아, 흐뭇하다.'

상상만 해도 배부른 이 기분. 순조로운 배터리(?) 충전을 하며, 라키엘은 입꼬리를 연신 말아 올렸다.

한데 그러던 도중이었다.

파즛...!

'...음?'

돌연, 기이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처음엔 자신이 마나 덩어리에 전기를 충전하다가 실수를 했나 싶었다. 그래서 잠깐 전압이 튄 건가 싶었다.

한데 아니었다.

기이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진 곳. 그곳은 자신의 몸속이 아니었다. 아이, 조르쥬의 목덜미였다.

파즛... 파즈즛...!

"...."

잠깐만.

설마 이거.

'쌔한데.'

라키엘은 얼른 정신을 집중했다. 아이의 몸속 마나 흐름을 관찰했다. 그러다가 깨닫고 말았다. 아이의 목덜미를 지나는 미주신경, 그곳에서 불길하고도 불안정한 마나의 꿈틀거림이 포착되었다.

그걸 포착한 순간.

라키엘의 미간이 콱 찡그려졌다.

'와 씨.'

ㅈ됐다.

아이의 미주신경.

그곳에서 불안정한 신경 신호가 생겨나고 있었다. 한데 그 신경 신호의 패턴이 어쩐지 낯설지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어제 목격했던 신경 신호다.

바로....

'뇌전증 발작을 유발하던, 바로 그 기폭 신호잖아.'

그런데 지금 그 신호가 느껴진다는 것은 곧?

'조만간 터진다. 발작이 시작될 거야.'

라키엘은 재빨리 아이의 상세를 살폈다. 호흡과 표정, 눈동자의 움직임까지.

"...나 얼마나 더 이러고 있어야 해요?"

이쪽의 불안감을 느낀 걸까. 혹은 스스로도 뭔가 이상한 예감을 느낀 걸까. 아이가 눈치를 보며 물어왔다. 라키엘은 짐짓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조금만 더. 이제 다 돼가니까 조금만 참자. 괜찮지?"

"네."

아니, 안 괜찮다. 아이는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제 곧, 뇌전증 발작이 시작될 거다.

'길어봐야 3분 이내.'

아이의 미주신경이 점점 더 활발해지고 있었다. 불안정한 신경 신호도 차츰 강해지고 있었다. 그 진행 상태로 보아, 최대 3분 안에는 발작이 시작될 것이 확실해 보였다.

'최악의 경우엔 1분.'

그 전에 마나 덩어리 내부의 충전을 마쳐야 한다. 충전이 완료된 마나 덩어리를 아이의 미주신경에 삽입해야 한다.

한데 그러자니?

'시간이 모자라.'

충전이 끝나려면 아직 10분은 걸릴 것 같았다. 그 사이에 뇌전증 발작이 시작될 거다. 발작이 시작되면? 시술이고 전극 설치고 전부 불가능해진다.

'그럼 지금 당장 중단해야 하나?'

라키엘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는 지금, 빠른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지금 중단하면 죽도 밥도 안 돼.'

그는 느낄 수 있었다. 시술을 받으며 아이가 느끼는 긴장과 불안감. 그 심리 상태가 미주신경을 자극하며 불안정한 신경 반응을 유발하고 있었다.

그 뜻은 명확했다.

'설령 지금 시술을 중단하더라도, 다음에 시술을 하려면 결국 또 비슷한 상황이 될 거야. 똑같이 발작의 전조를 보이겠지.'

하면 아이가 심리적으로 안정될 수 있도록, 천천히 시간을 주면서 익숙하게 한다면? 그건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이, 자신의 시간이 소모될 것이다.

'나한텐 시간이 없어.'

현재 자신의 예상 기대수명은 158일이 남아 있었다. 한데 아이를 어르고 달래고, 심리적으로 안정을 시키고, 시술을 성공하고, 입소문이 퍼지기를 기다리고, 그 끝에야 비로소 별궁에 환자들이 몰려들 텐데.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가늠이 안 돼.'

어쩌면 자신의 기대수명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면 안 된다. 수명이 다해서 죽을 테니까.

'그러니까, 무조건 지금 승부를 봐야 해.'

결론이 나왔다.

하면 방법은?

떠오르는 게 있었다.

라키엘은 각오를 다졌다. 궁정마법사 자네티스를 돌아보았다.

"자네티스 경, 내가 이런 부탁을 하게 돼서 미안한데."

"...예?"

"전격 마법, 지금보다 세 배만 강하게 해줘."

"전하?"

"어서. 이유는 나중에 설명할 테니."

"하오나 전하."

"그 정도로 죽진 않잖아. 경도 알 텐데."

"...많이 고통스러우실 겁니다."

"상관없어."

"...."

자네티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전하....'

그는 눈꼬리를 파르르 떨며 라키엘을 바라보았다. 제국의 황태자인 분이 아이를 치료하기 위해 고통을 감수하고 있어서? 그런 병자를 긍휼히 여기는 숭고한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아서? 바라보자니 절로 콧등이 시큰해져서?

아니었다.

결코, 아니었다.

'어휴, 까라면 까야지. 황족인데.'

솔직히 내키지 않았다. 행여나 황태자가 잘못되어서 독박이라도 쓰면 어쩌나 싶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자신은 을이니까. 자고로 남의 돈 벌어먹는 일이 쉬울 수가 없으니까. 심지어 명령하는 사람이 그냥 갑도 아닌, 이 제국에서 황제 다음으로 가는 갑이니까.

갑이 시키면 그저 네, 하고 따라야 하는 이 서러움! 새벽부터 끌려와 악덕업주의 시간 외 노동 강요에 고통받는 피고용인의 애환!

'어차피 전하의 명으로 시작한 거니까, 보는 눈도 많으니까, 별일 없겠지.'

없어야 한다.

자네티스는 모든 신경을 기울여 마력을 조절했다. 황태자가 죽지 않을 정도로만 출력을 끌어올렸다.

파츠즈즛!

세 배로 강해진 전격마법이 라키엘의 등을 때렸다.

"...그읍!"

테이저건을 맞으면 이런 기분이 되는 걸까. 절로 온몸이 경련했다. 순간적으로 눈앞이 캄캄해졌다. 시야 가득 스파크가 파직 튀었다. 다시 눈앞이 캄캄해졌다. 스파크가 튀었다. 몇 번이고, 몇 차례고, 반복되었다.

기절할 것 같았다.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이를 콱 깨물었다. 병자의 고통을 헤아리는 긍휼한 마음? 일개 평민 아이일지라도 살리겠다는 숭고한 다짐?

그런 건 없었다.

라키엘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비장한 각오는....

'...그, 그아악! 시술! 성공한다! 반드시! 꼭! 성공해서 입소문! 바이럴! 마케...팅! 한의원 대박! 보너스 수명 노다지! 무병장수 황족 라이프으으!'

반드시 성공하리라. 보란 듯이 아이를 완치시키리라. 그래서 이득이란 이득은 다 챙기리라.

'...부귀영화! 돈지랄! 플렉스으으-!'

소망을 담아 외쳤다.

스스로에게 무한 이기주의적 모티베이션을 한껏 불어넣었다. 펌프질했다. 용기를 끌어냈다. 부귀영화 돈지랄 플렉스를 향한 굳건한 의지를 불태웠다.

그렇게 버텨냈다.

아스라한 심법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키이이이이이잉-!

마나써클이 포효했다.

회전수가 한계를 돌파했다. 더욱 많은 마나를 거세게 끌어당겼다. 흡수하고, 압축하고, 증폭하고, 가공했다. 전격마법의 충전 속도가 극적으로 상승했다.

키아아아-! 파츠츳! 파즛!

완두콩만 한 마나의 덩어리가 백청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강력한 스파크를 사방으로 튀겨댔다.

충전이 완료된 것이었다.

'그렇다고... 아직 끝난 게 아니야!'

가장 어려운 단계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라키엘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고통으로 고통을 상쇄했다. 마지막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충전이 완료된 마나의 덩어리. 그 속의 전기 신호를 다시금 가공했다.

'이게 아이의 몸속에서 아무렇게나 전기 자극을 가하면 안 돼.'

어디까지나 목적은 뇌전증 발작의 억제다. 그러자면 미주신경에서 시작되는 불안정한 신경 신호를 제어해야 한다.

'그 불안정한 신경 신호. 그것도 생체적 전기 자극이니까. 그 신호와 완전히 대칭되는 반대 신호를 똑같은 강도와 타이밍으로... 전기 자극으로 가할 수 있다면....'

미주신경의 불안정한 신경 신호를 감쇄할 수 있을 것이다.

'할 수 있어. 해낼 수 있다.'

스스로를 독려했다.

기억에 새긴 아이의 미주신경 신호 패턴을 떠올리며, 그것과 대칭되는 전기 자극 신호를 가공했다. 마나의 덩어리 속에 새겨넣었다.

'됐다.'

고도로 설계된 마나 전극을 만들어냈다. 거기까지 걸린 시간이 약 40초. 라키엘은 아이의 상태를 살폈다.

"나... 기분이 이상해요."

아이가 이쪽의 옷깃을 꼭 쥐었다.

어느새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다.

라키엘은 직감했다.

'발작 시작까지 30초도 안 남았다.'

어제도 이러다가 발작이 시작됐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의 손길이 바빠졌다.

'어서.'

아이의 목덜미 인영혈에 꽂은 가시를 쥐었다. 충전된 마나 전극을 가시로 흘려보냈다.

파츠즛!

백청색으로 빛나는 작은 전극이 가시를 통해 아이의 목으로 들어갔다. 아스라한 심법으로 그 경로를 조절했다.

'전극을 심을 자리는... 경동맥.'

미주신경 바로 옆을 지나는 경동맥이 느껴졌다. 그 사이에도 미주신경의 불안정한 신호가 걷잡을 수 없이 강해지고 있었다.

'이제 15초.'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15초 후면 발작이 터진다.

그의 손길이 더욱 빨라졌다.

마나 전극을 길게 폈다.

경동맥에 한 바퀴 감았다.

조심스럽게, 세심하게, 그러나 신속하게. 마치, 시한폭탄을 해체하듯. 조금의 실수도 없이.

정밀하게. 옮기고, 늘리고, 감고, 조이고, 묶었다. 다듬고, 연결하고,

"나, 으, 으윽.... 으...?"

아이의 눈이, 서서히, 뒤집히기 시작했다. 팔과 다리에 힘이 왈칵 들어갔다.

'5초.'

파즈즈즛! 브즈즛!

미쳐 날뛰기 시작하는 미주신경. 그 옆에서 시술의 마무리에 스퍼트를 올렸다.

"...으으윽!"

아이의 등이 쭉 펴졌다.

경련이 시작되었다.

목덜미로 번져왔다.

피할 수 없는 지진처럼.

막을 수 없는 해일처럼.

그러나 라키엘은 피하지 않았다. 반드시 막아내겠다는 다짐으로 움직였다.

'3초.'

전극 설치를 완료했다.

"...그으읍."

아이의 입에 거품이 물리기 시작했다.

'2초.'

경동맥에 커다란 맥박이 한 차례 쿵.

"...으으으."

아이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1초.'

맥박이 뛰며 경동맥 벽면이 부풀었다. 그 움직임이 마나 전극을 자극했다. 자극을 받은 전극이 활성화되었다.

파츳!

첫 전기 신호가 발산되었다. 아이의 미주신경을 침공했다. 미주신경을 장악하고 있던 불안정한 신경 신호와 충돌했다.

라키엘은 그 광경을 고스란히 보았다.

파즈즈즛-!

신경 신호와 전기 자극.

두 힘이 충돌했다.

서로를 때리고.

후려치고.

뒤엎었다.

그리고 서로를 죽였다. 두 신호가 부딪치며 서로를 상쇄시켰다. 그렇게, 미주신경의 불안정하던 신경 신호가 말끔히 사라졌다.

'0초.'

라키엘이 마음속 마지막 카운트를 세는 순간.

"으윽, 윽, 음... 어어?"

왈칵 힘이 들어갔던 아이의 팔다리 긴장이 풀렸다. 뒤로 젖혀졌던 고개가 똑바로 들렸다. 뒤집혔던 눈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형?"

어느새 이쪽을 똑바로 올려다보는 아이의 까만 눈동자. 이윽고 피어나는, 믿기지 않는 듯한 미소.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많은 이들의 눈매에 놀라움과 경악이 떠오르는 순간.

라키엘의 눈앞에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딩동!

[당신은 신체에 가해진 강력한 자극에 저항하기 위하여, 아스라한 심법을 극한으로 운용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당신은 자신이 지닌 한계의 벽을 깨뜨리는 데에 성공하였습니다.]

[아스라한 심법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40화. 미주신경 자극술 (3)

[아스라한 심법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눈앞에 떠오르는 새로운 메시지.

아직껏 전신에 남은 저릿함.

라키엘은 통증을 가라앉히며 숨을 몰아쉬었다. 메시지가 계속해서 떠오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스킬명 : 아스라한 심법]

[단계 : 싱글 써클 Lv. 2]

[주위의 마나를 흡수합니다. 흡수한 마나를 심장 둘레에 써클로 가공/증폭하여 운용합니다. 써클의 숫자가 늘어날 때마다 증폭률이 대폭 상승합니다.]

[마나 증폭률 : 130%]

[다음 레벨업에 필요한 HP : 1,200]

[현재 보유 중인 HP : 200]

심법 레벨이 오르고 증폭률이 10% 상승했다. 하지만 메시지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딩동!

'설마 보상이? 또 있어?'

그 설마가 맞았다.

[당신은 단시간 내에 가해진 강력한 전기자극을 훌륭히 버텨냈습니다.]

[이 자극에 의해 폐와 대장의 금(金)기운이 활성화되어 목(木)을 극(剋)하였습니다.]

[금극목(金剋木)의 원리에 의하여, 목의 성질을 지닌 오장육부의 장기, 간장(肝臟)이 눈을 뜨고 있습니다.]

[당신의 간장이 깨어났습니다.]

[간장 : 신병 받아라!]

[심장 : 뭐여? 뉴비여?]

[허파 : 허... 파학... 파하학....]

[대장 : 나 이제 막내 아닌 거? 형님들 저 융털 떨리지 말입니다ㅋㅋ]

[간장이 당신에게 3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허파와 심장, 대장이 뉴비 영입을 기뻐하며 5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당신의 내부에서 간장의 생일 파티가 개최되었습니다. 이에 300 HP를 추가로 획득합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1,300]

"...."

졸지에 덜컥, 오장육부의 새 멤버를 얻게 됐다. 라키엘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굿. 진심으로 굿!'

HP를 왕창 후원받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스킬을 생성하거나 환상종을 뽑을 수 있게 해주는 귀한 자원인 HP. 그 HP를 후원해주는 소중한 존재가 바로 오장육부였다.

한데 그런 오장육부의 뉴페이스 멤버가 태어났다. 덕분에 앞으로 더 많은 HP를 후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노다지 수확이었다.

그때였다.

딩동!

'음?'

끝일 거라 생각했던 메시지가 또 이어졌다.

[당신은 과격하지만 과감하고 공격적인 치료법으로 환자 : 조르쥬를 성공적으로 진료하였습니다. 앞으로 그는 상습적인 뇌전증 발작에서 해방될 것이며, 보다 쾌적하고 안정적인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또한, 원래의 미래에서 그는 뇌전증 발작의 고통을 잊기 위해 술에 의지하며 지내다가 간질환을 얻고 56세에 사망할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시술 덕분에 미래가 바뀌어, 비교적 건강한 노년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진료비 청구 (Lv. 2) 스킬이 발동됩니다.]

'오옷?'

[환자 : 조르쥬는 당신만의 독창적인 미주신경 자극술 시술을 통해 14년 7개월의 기대수명 연장 혜택을 받았습니다. 이에 당신은 14년 7개월의 1/1950에 해당하는 보너스 수명을 정산받습니다.]

[2.69일의 보너스 수명이 계산되었습니다.]

[정산되는 수명의 최소 단위는 1일입니다.]

[정산되는 보너스 수명이 반올림 처리됩니다.]

[총 3일의 보너스 수명이 정산됩니다.]

[당신의 예상 기대수명 : 161일]

"...."

이번엔 보너스 수명까지 퍼받았다.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그는 심호흡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메시지에서 눈길을 거두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아이, 조르쥬의 얼굴이었다.

"...어? 어어?"

조르쥬는 얼떨떨해하고 있었다.

"저기, 나, 이상해요."

아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 했다. 라키엘은 아이의 인영혈에서 능숙하게 가시를 뽑았다. 아이를 바라보자니 절로 빙긋, 웃음이 나왔다.

"그래, 이상하지?"

이상할 거다. 뇌전증 발작이 오려다가 사라졌을 테니까. 과연 아이는 자신의 온몸을 주무르며 황당해했다.

"이런 거... 처음이라서요. 원래 소름 오소소 돋고 기분 이상해지면... 그때부터 막 눈에 불똥 튀고 식은땀 나다가... 마음대로 안 움직여지고, 막 그러는데."

"이번엔 안 그랬지?"

"네."

"앞으로 안 그럴 거야."

"네에?"

"이젠 그렇게 아플 일, 없을 거라고."

"...네에에?"

점점 똥그래지는 아이의 눈망울.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믿을 수 없는 말이라는 듯. 귀로 받아들인 말을 믿질 못하고 있었다. 하긴 그럴 법도 할 거다. 평생을 뇌전증에 고통받아왔으니까. 그 고통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는 말을 들으면 누가 선뜻 믿을까.

라키엘은 아이를 천천히 일으켜주었다.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렇게 아이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찬찬히 말해주었다.

"형이 알려줄게. 너, 이젠 다 나았어. 안 아플 거야.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지면서 정신을 잃는 일도, 난데없이 넘어져서 온몸을 떠는 일도, 그것 때문에 다른 아이들이 놀리거나 널 피하는 일도, 더 이상은 없을 거란 소리야."

"...정말요?"

"그럼."

"진짜로?"

"정말로 진짜로."

라키엘은 빙긋 웃었다.

"형 말이 거짓말이면 네가 내일부터 황태자 하는 거야."

"엣헴. 다들 명을 받들라."

"...어쭈."

조르쥬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온통 헝클어지는 아이의 머리칼. 그 아래로 꺄르륵 번지는 웃음.

라키엘의 입가에도 덩달아 웃음이 맺혔다. 어쩐지 그는, 지금 조르쥬의 기분을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나도 어릴 때 저런 적 있었으니까.'

문득, 9살 때의 일이 떠올랐다.

동네에서 친구들과 놀던 도중이었던가. 오른 발목을 심하게 접질린 적이 있었다. 발목이 온통 퉁퉁 부었다. 너무 아파서 걷지도 못했다. 엄마한테 업혀서 동네 한의원으로 갔더랬다.

정식 한의원인지, 침술원인지는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곰보 아저씨가 계셨다. 앞을 못 보는 분이셨다. 그분이 발목이며 여러 곳에 침을 놓아주셨다. 처음엔 무섭고, 불안하고, 미덥지 않았더랬다.

한데 침을 다 맞고 나니?

그렇게도 아팠던 발목이 멀쩡해졌다! 갈 때는 엄마한테 업혀서 갔었는데, 집에 올 때는 와다다 뛰어서 왔다. 정말로 신기한 일이었다. 어쩌면 그때의 기억 때문에 자신이 한의사로 진로를 정한 것일지도 모를 정도로.

'그때 거기, 그대로 남아 있으려나.'

한때 살았던 동네의 이름 모를 침술원. 부산 유엔묘지 근처 석포 초등학교 앞 육교 아래. 만약 할 수만 있다면, 그때의 그분에게 지금 자신의 침술을 보여 드리고 싶었다. 혹은 그분께 가르침을 받아보고 싶기도 했다.

'어쨌건, 그때 내 기분도 이랬는데.'

침을 다 맞고 집으로 뛰어오는 내내 얼마나 신기했던지. 조르쥬의 잔뜩 상기된 얼굴을 보니 그때의 기분이 어렴풋이 떠올라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게다가 기쁜 일은 더 있었다.

'그리고... 성공적이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궁정마법사 자네티스. 가르딘 경과 데미안. 특근대의 검투사들. 별궁의 근위대원들과 시종, 시녀들까지. 모두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이쪽과 조르쥬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조르쥬!"

어느 시녀가 사람들의 틈에서 뛰어나오며 외쳤다. 아이가 시녀를 보자마자 화답했다.

"누나아!"

남매가 서로를 얼싸안았다. 아이는 방긋 웃었고, 시녀는 기쁨의 울음을 터뜨렸다. 라키엘도 가슴 찡한 감동을 맛보았다.

'아, 이로써 한 발짝 가까워졌다. 부귀영화 돈지랄의 꿈.'

마침내 아이의 뇌전증을 성공적으로 치료했다. 그 과정을 별궁 식구 모두가 구경했다. 이쪽이 전격마법을 맞으며 버티는 모습도. 시작되려던 아이의 발작이 진정되는 모습도. 모두가 주먹을 꼭 쥐고서 응원하며 생생하게 목격했다.

그리고 앞으로 평생 안줏거리로 삼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입에 담을 것이다. 이 미담(?)이 소문으로 널리 번질 것이다.

'그럼 되는 거야. 별궁이라서, 황태자가 머무는 궁전이라서 사람들이 느낄 부담감을 지워줄 수 있게 되는 거지. 어이, 당신 그 소문 못 들었나? 별궁에 가면 아픈 거 나을 수 있대! 라고 말이야.'

그럼 그들을 치료해주고 보너스 수명을 펑펑 받으리라. 앞으로 펼쳐질 아름다운 무병장수의 미래. 그 행복한 예감에 라키엘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러다가 저도 모르게, 다리가 풀렸다.

털썩.

"...어?"

시술을 하는 내내 긴장했던 탓일까. 전격마법을 악으로 깡으로 버틴 까닭일까. 궁정마법사를 데려오느라 날밤을 꼬박 지새웠기 때문일까. 혹은, 그 모든 이유가 다 버무려진 결과인 걸까.

'힘이....'

전신에서 썰물처럼 쑥 빠져나갔다. 언제 자신이 주저앉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모두가 왜들 저리 놀라며 달려오는 건지도 궁금했다.

'설마 나, 기절하는 거야?'

정답.

오장육부가 속삭이는 소리와 함께, 의식이 급속도로 멀어졌다. 깊은 잠에 빠지듯. 그제야 깨달음이 몰려왔다.

...깜빡하고 있었네. 나, 허약체질 환자였지.

쓴웃음 서린 깨달음의 끝자락.

세상이 깜깜해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밤이 깊어 있었다. 잠깐 멍하니 천장을 보았다.

'온종일 잔 건가.'

그럴 법도 하다.

여러 방면으로 무리를 했으니까. 이쪽도 아직 허약체질의, 시한부 인생 환자인 신세니까.

"...전하?"

이쪽을 부르는 목소리. 반가움에 잠겨 있는 가르딘 경의 얼굴이 보였다.

"정신이 드십니까?"

가르딘 경의 옆에 있던 데미안도 벌떡 일어났다. 그 뒤로는 궁정마법사 자네티스의 모습도 보였다.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뭐야. 다들 모여서 남이 자는 모습이나 구경하고 있던 건가."

너무 대놓고 그러면 민망하잖아.

투덜거리려던 순간이었다.

"그 구경이 너무 지겨워져서, 제발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전하."

가르딘 경이 울먹이기 시작했다.

당황스러웠다.

"뭔데. 왜. 뭐. 대체 왜 그러는 건데."

"크흡, 흑, 이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전하께서 이틀이나 못 깨어나시다가 이제 겨우 눈을 뜨셨는데 말입니다."

"...뭐?"

내가 잠든 지 이틀이나 지났다고?

처음엔 믿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정말로 눈물을 보이는 가르딘 경과,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데미안의 모습을 보자니 그게 농담이 아닌 듯 보였다.

궁정마법사 자네티스가 한마디를 보탰다.

"저는 이 사태를 폐하께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전하."

"...쯧. 괜히 부담을 안겼네. 미안해."

"아닙니다, 전하. 이렇게 무사하시니 다행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자네티스의 얼굴은 그새 반쪽이 되어 있었다. 이쪽이 잠든 내내 쉬지도 못하고 곁을 지킨 모양이었다.

그럴 법도 했다.

자신의 전격마법을 받아내다가 혼절한 황태자. 그런 황태자가 이틀이나 깨어나지 못하였으니까. 아마도 그냥 초조한 정도가 아니었겠지. 한데 그러다 보니 퍼뜩 생각나는 게 있었다.

"조르쥬는?"

아이는 어떻게 됐을까. 지난 이틀 사이에 뇌전증 발작이 재발한 건 아닐까. 대답은 가르딘 경이나 데미안, 자네티스 대신 다른 이가 했다.

"나 말짱한데요?"

"어?"

가르딘 경과 데미안의 옆구리 사이에서 작달막한 얼굴이 고개를 쏙 내밀었다. 조르쥬였다. 그 모습을 보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뭐야. 넌 또 왜 여기 있는 건데."

"여기 이분께 졸랐는데요."

조르쥬가 슬쩍 가르딘 경을 쳐다보았다. 가르딘 경이 괜한 헛기침을 했다.

아이가 말했다.

"깨어나면 이거... 주고 싶어서요."

그러면서 조심스레 내미는 손길. 라키엘은 아이의 손에 들린 물건을 바라보았다. 보자마자 절로 실소가 흘러나왔다.

"...뭐냐, 이건."

아이가 내민 물건.

그건 목걸이였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노끈으로 엮은. 어떻게 깎았는지 모를, 비뚤비뚤한 하트가 새겨진, 나무토막을 엮어놓은, 조잡하기 이를 데 없는 초라한 목걸이였다.

화려함? 당연히 없었다. 진귀함? 찾아볼 수도 없는 물건이었다. 라키엘은 나오려는 쓴웃음을 참아내며 물었다.

"설마 네가 만든 거야? 나 자는 동안?"

...끄덕끄덕.

부끄러운 걸까. 어둑한 촛불 빛 사이에서도 아이는 새빨갛게 물든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라키엘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런 거 부담스러운데.'

솔직히 너무 조잡한 목걸이였다. 만드는 데 나름의 정성이야 쏟아부었겠지만, 그렇다고 목에 걸고 다니기엔 현실적으로 좀 민망한 수준이었다.

'그냥 받지 마?'

안 걸고 다닐 바엔 안 받는 게 낫다.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잘 만들었네."

훈훈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목걸이를 받았다.

"지금까지 내가 걸친 그 어떤 화려한 장신구보다도, 이게 더 멋지구나."

"...정말요?"

아이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래. 하지만 내가 받은 최고의 보상은 네 건강해진 모습이란다."

말하면서 슬쩍 주위를 살폈다.

"...흐흑!"

감동 받아서 코가 찡해진 듯한 가르딘 경. 데미안과 자네티스의 훈훈하게 웃는 모습이 보였다. 멀찍이서 문가를 지키고 있던 근위대원 둘도 휴먼 드라마를 보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들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후우, 좋아. 방금 멘트 잘했어.'

오글거리는 걸 간신히 참았다.

하지만 잘 해냈다.

자고로 모든 일은 마무리가 중요한 법. 아름다운 선행의 마무리는 오글거려도 감동적 연출로. 이래야 이번 진료 사례가 더욱 훈훈한 미담으로 퍼질 테니까. 더욱 파괴력 있는 입소문이 될 테니까. 그래서 일부러 기쁘게 목걸이를 받았고, 나름 감동적인 멘트도 날렸다.

성공적이었다.

"그러니 이제 다들 안심하도록. 한데 내가 좀 피곤해서, 좀 혼자 쉬고 싶은데."

짐짓 지친 표정으로 모두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모두를 침실 밖으로 내보냈다. 그제야 숨이 크게 흘러나왔다.

"...후우."

마음에 없는 연기를 한 탓일까. 조금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한참을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누운 채 손을 들어 올렸다.

아이가 준 목걸이. 너무나 조잡한. 걸고 다니기에도 민망할. 그런 초라하고 볼품없는 목걸이.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딴 걸 누가 걸고 다니냐...."

라키엘은 투덜거리며 돌아누웠다. 천천히 잠이 들었다. 그런 그의 목에는, 너무나 조잡한, 걸고 다니기에도 민망할, 그런 초라하고 볼품없는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41화. 별궁 한의원 오픈 (1)

하루가 지나고 아침이 밝았다.

"어머니, 저 왔어요!"

이곳은 황도 마젠타 시가지의 어느 평범한 가정집. 황태자가 기거하는 별궁의 시종이 기쁨의 미소를 머금고서 현관을 열었다. 그의 부름에 안쪽에서 아침을 준비하던 중년의 여인이 화들짝 놀랐다.

"...아들? 어머나? 네가 오늘 어쩐 일이니?"

"어쩐 일이긴요. 휴가 나왔죠."

"휴가?"

"네."

"지난번에 보낸 편지에서 휴가는 다음 달이라고 하지 않았었니?"

"아, 그 휴가는 따로 있구요."

"따로 있다고?"

"네. 황태자 전하께서 오늘 아침에 특별 휴가를 보내주셨거든요. 무려 닷새나!"

"어머나, 이게 무슨 일이니. 전하께서도 참 관대하셔라."

"그러게나 말이죠?"

시종이 씨익 웃었다.

이윽고 소리를 듣고 내려온 가족들이 그를 반겼다. 아침 식사 테이블 위로 이야기꽃이 가득 피었다.

"글쎄, 요즘 전하께서 별 이상한 일들을 자꾸 벌이신다니까요?"

"이상한 일이라니?"

"자꾸 사람들을 진료해주겠다고 하세요."

"진료? 의사처럼 말이더냐?"

"네, 아버지."

시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신 대로 의사처럼 말이죠. 저도 진료해주셨어요. 저 예전에 손목을 심하게 삔 적이 있었잖아요."

"그랬지. 한동안 고생했잖니."

"사실 그 뒤로도 계속 뻐근했거든요. 조금만 무리하거나 피곤해도 손목 여기가 막 저리고. 그런데 전하께서 제 손목을 이리저리 보시더니...."

"보시더니?"

"셔츠를 벗고 침상에 누워보라 하시더라구요."

"...뭐?"

"저도 이상했어요. 그래도 명을 따라야 하니 일단 누웠죠. 한데 전하께서...."

"전하께서?"

"고슴도치 가시를 뽑더니 제 손목이랑 손등이랑 어깻죽지에 푹푹 꽂았다, 이 말이지요."

"가시를? 안 아팠니?"

"네. 신기하게도요."

시종의 말이 이어졌다.

"더 신기한 건, 그렇게 몇 분쯤 있다가 가시를 뽑고 났더니 손목 저림이 싹 사라졌다는 거죠."

"그게 무슨.... 전하께선 마법이라도 부리신 거라니?"

"모르겠어요. 그런데 신기한 게 또 있었어요. 사흘 전 밤에요."

"사흘 전에?"

"네. 저번에 제가 말했던 시녀 기억나세요? 동생이 자꾸 악령에 씌어서 고생한다던 친구요."

"기억나다마다. 이 아비가 그 아이 삼촌과 안면이 좀 있지. 한데 그 아이는 왜?"

"사흘 전 밤에 전하께서 그 친구 동생을 진료하셨어요. 완전 싹. 말끔히요."

"허허?"

가족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들의 손목 저림을 가시로 치료했다는 말도 황당한데, 이번엔 악령이 들리던 아이를 치료했다니.

"혹시 악령을 내쫓는 성스러운 의식을 치르셨나?"

"아뇨. 궁정 마법사를 불러와서 자기 등에 전격마법을 쏘게 하셨어요."

"...."

"그 전격마법을 버티면서 아이 목에 가시를 찌르시더라구요. 푹 하고."

"...."

"그랬더니 또 악령에 씌려던 아이 눈이 똑바로 돌아오던 거 있죠."

"...그게 진짜니?"

"예. 제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걸요."

"허허허."

가족들이 혀를 내둘렀다. 설마 전격마법으로 악령을 내쫓은 걸까. 한데 더 놀라운 말이 아들의 입에서 나왔다.

"그래서 말씀인데, 저 이번에 휴가 끝나면 아버지도 별궁에 같이 가보시지 않으실래요?"

"나 말이더냐?"

"예. 허리 안 좋으시잖아요."

"그런데 왜?"

"전하께서 진료해주신다더라고요. 공짜로. 악령에 씐 사람이든, 아픈 사람이든, 신분이나 재산도 상관없이 다 봐주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게 진짜니?"

"예."

"감히 내가 별궁 같은 데를 함부로 가도 되겠니?"

"괜찮아요. 전하께서 저한테 직접 신신당부하셨어요. 주위에 널리 알리라고 말이죠."

"허허, 허허허."

가족들의 당혹스러운 웃음이 테이블 위로 번졌다. 그것은 이 평범한 집에서만의 일이 아니었다. 같은 시각, 황도의 수많은 장소에서 비슷한 내용의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여보! 나 특별 휴가 나왔소!"

"우리 딸! 엄마 왔다!"

"야, 넌 형이 휴가 나왔는데 퍼질러 자고 있냐? 어?"

...라는 식이었다.

별궁에서 근무하는 시종, 시녀, 근위대원까지. 수많은 이들이 '특별 휴가'라는 이름으로 가정의 품에 돌아갔다. 오랜만에 해후한 가족과 함께 아침을 맞이하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리고 황태자 라키엘이 최근 보인 기행을 널리 전파했다.

황태자가 의사처럼 굴기 시작했다고. 한데 진짜로 병을 치료할 줄 안다고. 별궁에서 환자를 받을 거라고. 아픈 이라면 다 받는다고. 신분도, 재산도 상관없을 거라고.

그 소식이 입소문을 타고 점점, 황도 구석구석까지 번져갔다. 차츰 과장되기 시작했다.

"자네, 들었나? 황태자 전하께서 다 죽어가던 아이를 살리셨다는데?"

"황태자 전하께서요? 어떻게 말입니까?"

"글쎄, 궁정마법사가 전력으로 내쏘는 전격마법을 자청해서 맞으셨다더구만."

"아니 어째서 말입니까?"

"그거야 나도 모르지. 어쨌건 대단하지 않나?"

"확실히 그렇습니다. 엄청나네요."

"그렇지? 역시 황태자 패왕설이 거짓이 아니었단 거지."

"궁정마법사의 전격 마법을 맞고도 멀쩡한 분이라니.... 후우, 끌린다...."

수많은 일터, 상점, 공사판, 식탁, 거리에서 갖가지 이야기가 오갔다.

일개 아이를 살리기 위해 위험을 무릅쓴 황태자. 평민 아이를 위해 전격마법을 맞은 황태자. 입소문이 입소문을 낳고. 더 커진 소문이 더욱 널리 번졌다.

그 모두가 라키엘이 의도했던 대로였다.

'후후, 후후후. 바로 이거지!'

별궁 서재에서 라키엘은 음흉하게 웃었다.

뇌전증 치료를 위한 미주신경 자극 시술. 그걸 목격한 별궁 식구들을 휴가라는 핑계로 황도 곳곳에 방생(?)했다.

과연 효과는 대단했다.

날로 입소문이 쭉쭉 퍼졌다. 바이럴 마케팅이 제대로 되고 있었다. 하니 이제는? 본격적인 개업을 준비해야 할 터다.

"그러니까 내가 일러둔 것들은? 잘되고 있나?"

"예, 전하."

황도의 소식을 가져온 가르딘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신 약재들을 전부 사들이고 있습니다."

"감초(甘草)도?"

"그건 특히 신경 써서 확보하고 있습니다."

"그래. 잘하고 있어. 생각보다 많이 필요하게 될 거니까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사재기를 해서라도 가득 비축해야 해."

"알겠습니다, 전하. 그런데...."

"음?"

"저기, 이런 물음이 외람된 건 알지만... 으음, 전하께서는 이런 것들을 대체 어떻게 익히신 건지...."

"이런 것들이라니?"

되물었더니 가르딘 경이 쭈뼛쭈뼛, 그러나 정말로 궁금해 죽겠다는 투로 대답했다.

"가시로 찔러서 아픈 관절을 낫게 하시던 거라든가, 아니면 생소한 레시피로 물약을 조제하신다든가... 그, 며칠 전에 전격마법으로 아이를 치료하신 거라든가... 전부 궁금해서 말입니다."

"의사로서?"

"예, 의사로서, 정말로 궁금합니다."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가르딘 경. 그의 눈동자 한구석에 숨기지 못한 순수한 열망이 엇비쳐 보이는 건, 이쪽의 기분 탓일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요즘 잠을 잘 못 이룹니다. 전하께서 갑자기 펼치기 시작하신 의술의 정체가 궁금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어떤 원리인지 잘 모르겠고, 그래서 조금은... 속상하기도 합니다."

"...."

속이 상한다라.

어떤 기분인지 알 것 같았다.

명색이 자신도 의사인데. 심지어 황태자의 주치의인데. 자신의 환자인 황태자가 연일 스스로 자신의 몸을 진료해오던 요즘이었다. 게다가 다른 이들을 진료하겠다며 소매를 걷고 나서기까지 했다.

한데 그걸 옆에서 지켜보는 자신이 얼마나 무력하게 느껴졌을까. 이쪽이 펼치는 의술의 원리를 짐작도 못하는 스스로가 얼마나 한심하게 느껴졌을까. 그런 가르딘 경의 기분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나 같아도 그런 생각을 하겠지.'

같은 의료인이니까.

공감이 되었다.

그래서였다.

"사실 내가 다른 세상 사람이거든."

"...예?"

"그곳 세상에서 쓰던 내 이름은 '이한'이야. 동네에서 작은 한의원을 꾸리던 한의사였는데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한의원이 망해서 여기로 왔어. 요즘 내가 펼치는 의술도 그때 익히고 써먹던 한의술을 응용한 거고."

"...전하?"

"어."

"저는 모처럼 진지하게 고민을 말씀드린 건데 말입니다."

"응. 그래서 나도 모처럼 사실 그대로를 말해준 건데 말이지."

"이러시면 저, 서운해질 거 같은데 말입니다."

"경이 날 안 믿어주면 나도 마음 아플 거 같은데 말이지."

"...즈어어언하아-!"

"어오 씨. 진짜. 놀래킬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지? 어?"

"그냥 솔직하게 알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래서 알려줬잖아?"

"놀리지 마시고 말입니다."

"안 놀려. 근데 알아서 뭐 하려고."

"그야 당연히... 더 나은 의사가 되고 싶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저도 더 많은 이들을 살리고... 전하도 더 잘 보살펴드리고... 그리고 또...."

"또?"

"보람을 느끼고 싶습니다."

"보람이라니?"

"며칠 전에 조르쥬를 진료해주셨을 때의 전하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요즘 그 아이의 상세를 살피실 때마다 전하께서 미소 지으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저도, 의사로서 그런 보람을 느끼고 싶습니다. 제가 보살피는 이가 건강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며 더 많이 웃어보고 싶습니다."

가르딘의 눈빛이 진중해졌다.

라키엘은 싱긋 웃었다.

"이미 그러고 있잖아?"

"예?"

"됐고. 일이나 하자, 일."

...경이 아니었다면 나도 지금처럼 건강하진 못했을 거라고. 경이 항상 곁에서 도움을 주었기에 여기까지 온 거라고.

그렇게 말해 주려다가 말았다.

'어우. 오글거려서 죽을 뻔했네.'

라키엘은 오장육부에 돋아나려는 닭살을 얼른 털어냈다. 별궁 한의원 개업 준비를 서둘렀다.

가르딘 경을 시켜 각종 한약재를 확보했다.

다행히 세상은 다르지만 있을 약초는 다 있었다. 부르는 이름만 다를 뿐이지, 대부분이 그대로였다. 물론 한국에서처럼 널리 활용되고 있진 않았지만 말이다.

감초, 계지(桂枝), 창출(蒼朮), 백출(白朮), 인삼(人蔘), 복령(茯苓), 당귀(當歸), 천궁(川芎), 생강(生薑), 진피(陳皮), 지실(枳實), 형개(荊芥), 황기(黃芪), 갈근(葛根), 작약(芍藥) 등등. 황도와 인근의 약재상을 싹쓸이하다시피 하며 충분한 수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 사이, 그는 전단지 알바(?)도 돌렸다. 몸놀림이 빠릿한 시종들을 선발했다. 그들에게 전단지를 맡겼다.

[(경) O P E N ! (축)]

[별궁 한의원 개업 기념 : 무료 진료 행사]

[척 | 추 | 교 | 체]

[추 | 나 | 정 | 형]

[관 | 봉 | 치 | 비]

[절 | 침 | 료 | 만]

[어떤 질환이라도 고쳐드립니다.]

[환자의 건강을 위한 명확한 진단, 환자별 1:1 맞춤 진료]

[원장 :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

[전문의 : 황궁 주치의 피에로 가르딘]

[진료 시간 : 연중무휴]

...라는 수백, 수천 장의 전단지가 황도 곳곳에 뿌려지고, 수많은 벽면에 붙었다. 그리고 마침내 대망의 별궁 한의원 개업일 아침이 밝았다.

"후우. 긴장되네."

라키엘은 아침 해가 뜨자마자 눈을 번쩍 떴다. 사실 밤새 제대로 잠을 못 잤다.

흥분되고.

기대되고.

한편으로는 걱정도 됐다.

'그렇게 열심히 홍보하고 준비했는데 아무도 안 오면 어떡하지?'

아무래도 이곳이 별궁이라서. 무려 황태자가 기거하는 궁전이라서. 사람들이 부담감을 느껴서 아무도 안 온다면? 그렇게 개업일부터 환자 하나 없이 파리만 날린다면?

'으으, PTSD 올 거 같다.'

한국에서 부경 한의원이 망하던 때가 잠시 떠올랐다. 라키엘은 후다닥 소름을 털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초조한 걸음을 옮겼다.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열어젖혔다.

촤악-!

저 멀리, 드넓은 정원 너머 별궁 입구가 보였다.

'제발. 제발.'

저곳에 소문을 듣거나 전단지를 보고 찾아온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면 좋겠다. 그는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며 정원과 별궁 입구를 계속 살폈다.

10분, 20분, 30분.

그러나 드넓은 정원도.

그 너머의 별궁 입구도.

여전히 한산하기만 했다.

"...."

평소처럼 순찰을 다니는 근위대원들. 그리고 정원 손질과 청소에 분주한 시종들만 오갈 뿐. 별궁을 방문하는 환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쯧."

홍보 효과가 적었나. 사람들의 부담감을 떨칠 정도까진 아니었던 건가.

실망스러웠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러면 나가린데.'

차라리 황도 시가지에 진료소를 따로 차리는 게 나을까. 아니면 감염의 큰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빈민가로 직접 가야 할까.

그는 깊어지는 고민을 안고서 창가에서 물러났다. 팔팔 끓인 에스프레소처럼 더욱 진해지는 고민을 안고서 옷을 갈아입었다.

머리나 식히자 싶었다.

'산책이나 하자.'

문제점을 파악하고 대응해야 한다. 실망하지 말고, 절망하지도 말고, 일단 걸으며 생각해보겠노라 다짐했다.

그렇게 침실을 나섰다.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왔다. 그리고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기대도 하지 않았던 계단 아래, 별궁 1층의 로비 홀. 그곳이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뭐야 이거.'

처음엔 멍했다.

그러다가 알았다.

화려하지 않은, 별궁에 어울리지 않는 평범한 옷차림들. 누군가는 어디가 아픈지 미간을 찡그리고 있고. 또 누군가는 자녀의 부축을 받고 있는. 각양각색의 수많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로비 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숫자만 줄잡아 2, 300명은 될 듯했다. 심지어 그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종이 번호표를 쥐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상황은....

'내가 창밖을 살펴보기도 전에, 해가 뜨기도 전에, 유명 맛집 찾아와서 줄 서듯이, 새벽부터 미리 찾아와 기다리고 있던 거라고? 이 사람들이?'

나한테 진료를 받으러?

'이 사람들이... 전부 내 환자인 거야?'

뒤늦은 깨달음.

라키엘의 입가에 한의원 오픈 대박의 미소가 한껏 맺혔다.

42화. 별궁 한의원 오픈 (2)

무진장 바빠졌다.

개업 대박 때문이었다.

별궁이 북적북적해졌다. 환자, 아니, 고객님들이 몰려온 덕분이었다.

'이래서 장사는 오픈빨(?)이지!'

라키엘은 쾌재를 불렀다.

뭐든지 오픈빨이 중요한 법이다. 싸움으로 치면 선빵필승. 가수로 치면 신곡 발표 첫날 음원 성적. 그런 첫 포문을 가늠하게 해주는 게 장사의 오픈빨이다.

이후에 뒷심이고 성적 유지고 뭐고. 일단 오픈빨을 최대한 크게 봐야 한다. 오픈빨이 작으면 뒷심도 함께 작아지는 법이니까.

한데 지금은?

'대박이야.'

절로 어깨가 뿌르르 떨렸다. 그런 탓이었을까. 진맥을 받느라 이쪽에게 손목을 잡혀 있던 환자가 움찔했다.

"아이그머니, 죄, 죄송... 황송, 아니, 송구... 죄송합니다, 전하!"

새치가 드문드문 난 아주머니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무리 무료로 진료를 해준다고 해도. 신분과 재산을 구분하지 않는다 해도.

그럼에도 여기가 별궁이라서. 이쪽이 황태자라서. 그 사실들이 전해주는 부담감과 압박은 여전히 떨치지 못했나 보다.

하지만 라키엘은 내색하지 않았다. 구태여 괜찮다 라거나, 그러지 말라는 살가운 당부 같은 것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반응이 더 부담스럽겠지.'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지는 게 사람 심리다. 부담스러워하지 말라는 말이 더 부담스러운 법이다.

대기업 회장님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부담스러워하지 말게나 허허허'라고 웃으면, 그 웃음과 마주한 사원의 부담감이 참으로 잘도 덜어지겠다.

그래서였다.

라키엘은 그저 빙긋 웃었다. 아주머니의 반응을 보지도 못한 것처럼 굴었다.

"다행히 맥은 정상이고. 요즘 아침저녁으로 재채기가 계속 나오고, 코가 뻐근하게 아프고, 눈물이 계속 줄줄 나온다고 했죠?"

"네, 네... 전하."

이쪽의 살가운 대화법에 아주머니가 더욱 긴장했다. 황태자에게 듣는 존칭이라니. 당황스러울 거다.

하지만 라키엘은 굳이 일부러 말투를 바꾸지 않았다. 자신에겐 이게 편했다. 제법 오랜 시간을 한의사로 살았던 자신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이곳에서 오픈한 한의원 진료실. 이 공간에서 환자와 마주하게 되니?

마치 직업병처럼, 자연스럽게 예전의 살가운 말투가 술술 나왔다. 한의사들에게 가히 필수 스킬이라 할 수 있는 친절과 경청의 상담 모드(?)였다.

"부담 없이 증상만 말하면 됩니다. 지금은 황태자가 아닌 의료인이니까. 그쪽 분은 환자니까. 어쨌건 그 증상, 지금처럼 봄철이 올 때와 가을철에 제일 심해지죠? 매년 그랬죠?"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저도 비슷했거든요. 비염입니다, 그거."

"비염...이요?"

"워낙 고질적인 질환이라 완치는 어려울 겁니다. 대신 증상을 가라앉힐 처방을 해드리죠."

슥슥슥, 삭삭!

진맥으로 느껴지는 아주머니의 체질. 그 체질에 상성이 잘 맞을 소청룡탕(小靑龍湯) 처방전을 썼다.

"평소에 수분 대사가 좋지 못할 겁니다. 위내정수(胃內停水)라 하여 위장에 물이 고여 있기도 하구요. 그렁그렁 가래 끓는 느낌이 자주 나죠? 특히 뜨거운 국물 음식을 드신 직후에. 맞습니까?"

"네? 네. 맞아요."

"받게 되실 탕약에는 여러 재료가 들어갑니다. 마황과 계피는 발산작용을 하고, 작약과 오미자가 수렴작용을 해줄 겁니다. 세신과 건강은 거한작용을 해줄 거고요. 마황과 오미자, 감초가 항알러지 작용을 도와줄 겁니다."

"아, 예...."

"자, 여기 처방에 쓰인 대로 복용하세요. 복용 횟수와 시간은 꼭 지켜주시고요."

"감사, 감사합니다, 전하."

"괜찮습니다. 일단 꾸준히 복용하시고 열흘 뒤에 다시 오세요. 다음 환자분!"

다음 환자가 들어왔다.

그렇게 진맥과 진단을 하고. 침을 맞을 환자에겐 침을 놓아주고. 때론 뜸을 뜨기도 하고. 대부분 탕약 처방을 내려주었다.

수많은 환자들이 오전 내내 그를 거쳐 갔다. 잠깐의 숨 돌릴 틈도 없는 진료의 연속이었다.

'후아. 어지럽다.'

아직은 저질 체력이라, 간혹 띵한 현기증이 몰려왔다. 하지만 라키엘은 힘껏 참아냈다. 한데 그러던 와중이었다.

딩동!

[당신은 일정 숫자 이상의 환자를 진료하며 충분한 경험을 쌓았습니다.]

[이 경험이 토대가 되어 <진맥> 스킬이 한층 개선됩니다.]

[진맥 스킬의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오옷.'

혹시나 하고 은근 기대했는데. 역시나 하고 진맥 스킬이 성장했다. 라키엘은 간식 먹자 소리를 들은 강아지처럼 눈을 반짝거렸다.

[스킬명 : 진맥 Lv. 2]

[대상의 맥을 짚어 건강 상태를 진단합니다. 진맥 결과는 <종합검진표>를 통해 일목요연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당신이 일깨운 오장육부가 환자의 같은 부위 오장육부와 상담을 하며 더욱 자세한 병증을 진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뭐?'

라키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쪽이 일깨운 오장육부가 환자의 같은 부위 오장육부와 상담을 한다고? 처음엔 뭔 씨나락 원샷으로 까먹는 소린가 싶었다.

한데 다음 순간이었다.

딩동!

[오장육부가 진맥에 참여합니다.]

[심장이 몸을 풉니다.]

[허파가 심호흡을 합니다.]

[대장이 칠성장어 승천댄스를 선보입니다.]

[간장이 피로회복제를 잔뜩 챙겨옵니다.]

"...."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한데 더 어처구니가 없는 건, 저렇게 나선 오장육부가 정말로 환자의 오장육부와 상담을 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심장 : 얘들아, 소개팅이다. 연장 챙겨라.]

[허파 : 설렌다... 허... 파학....]

[대장 : 소개팅은 못 참지 말입니다ㅋㅋ]

[간장 : ...형들 정신 차려! 상대는 할아버지야!]

"...."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황당함을 곱씹으며 기다렸다.

잠시 후.

딩동!

[오장육부 자체 상담 결과가 나왔습니다.]

[심장 : ...속았다. 심장 이상 무.]

[허파 : 후... 푸후.... 이상 무.]

[대장 : 경증 변비가 발견됐지 말입니다. 그 외 이상 무.]

[간장 : 이 할배 간염 기미 발견. 술 좀 끊어야겠는데?]

간염? 술?

라키엘은 간장에게 물었다.

'간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대답이 바로 돌아왔다.

[간장 : 어ㅋ 할배 간이 울던데. 10살 때부터 매일 들어오는 알콜 처리하느라 50년째 만성피로라고. 쟤 이대로 5년만 더 있으면 아작나는 거 확정임ㅋㅋ]

...그렇구나.

'이거 은근 엄청난데?'

라키엘은 새삼 흐뭇함을 느꼈다. 이쪽이 일깨운 오장육부가 직접 환자의 오장육부 상태와 히스토리까지 체크할 수 있게 되었다니. 설마하니 진맥 스킬에 이런 기능까지 생길 줄은 몰랐다.

'아직 잠자코 있는 다른 오장육부도 마저 깨워야겠어.'

물론 방법은 모른다.

열심히 진료를 하다 보면, 뭔가 계기가 생길 때마다 오장육부들이 깨어나지 않을까.

'그러면 HP도 더 많이 후원받을 수 있을 거고. 오장육부들이 상담으로 커버할 수 있는 범위도 늘어날 거고. 진맥과 진단도 더 정확하게 할 수 있겠지.'

정확한 진맥과 진단.

그것만큼 중요한 게 없다.

의료인에게 있어 가장 두려운 것이 바로 오진이니까. 잘못된 진단을 내려서 잘못된 처방과 진료를 하여 환자의 진짜 병을 치료할 시기를 놓치는 거니까.

"뭐 어쨌건, 어르신. 간이 상당히 망가져 있으시네요."

"예?"

"그래서 계속 피곤하고 얼굴빛이 누런 겁니다. 간이 지쳐 있으니까요. 일단 소시호탕(小柴胡湯)을 처방해드릴게요. 이렇게 열흘 드셔 보시고, 다음 경과를 봐서 계지복령환(桂枝茯苓丸)도 추가해보는 걸로 하죠. 그리고-"

할아버지 환자를 향한 라키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오늘부로 술은 무조건 끊으셔야 합니다."

"예에?"

"간이 망가져 있으니까요. 그런데 계속 그렇게 술 드시다간 5년도 못 삽니다."

"하지만 저는...."

"술이 없으면 밥이 안 넘어간다고요?"

끄덕끄덕.

할아버지 환자의 고개가 맹렬히 끄덕여졌다. 하지만 라키엘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건 의료인이 아니라 황태자로서 내리는 명령입니다. 어기면 감옥에 집어넣을 겁니다."

"...."

"아시겠죠?"

끄덕끄덕!

할아버지의 고갯짓이 아까보다 맹렬해졌다. 모처럼 권력을 남용(?)한 라키엘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다음 환자를 받았다.

사흘이 지났다.

그동안 라키엘은 수많은 환자를 받았다. 다행히 상세가 위중한 이는 아직까지 없었다. 대부분이 신경통이거나 관절통, 간이 안 좋거나 감기, 몸살 등으로 찾아온 환자들이었다.

'그래서 문제야.'

사흘째 진료를 마친 저녁.

라키엘은 그동안의 진료를 돌이켜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보너스 수명을 많이 안겨줄 위중한 환자가 도통 오질 않아서? 그건 아니었다.

'아직 내 의술에 대한 신뢰가 크지는 않을 테니까. 지금은 그저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오는 환자가 대부분이니까. 그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야. 내 의술에 대한 소문이 더 많이 퍼지고, 완치된 환자들의 사례들이 쌓여가면서 차츰 해결되겠지. 그때쯤엔 제법 위중한 환자들도 많이 찾아오게 될 거고. 문제는 그다음이야.'

진짜로 위중한 환자가 왔을 때.

그런 환자들이 많이 오게 될 때.

그들을 안정적으로 간호할 체계를 갖추어야 했다.

'지금 이대로는 곤란해.'

사흘간 별궁 한의원을 운영해보니 피부로 절감되었다. 가장 시급한 점은 바로 탕약 조제와 환자 간호였다.

'시녀들에게 탕약 조제를 맡겨봤지만... 으음....'

다들 낯선 분야라서 그런지 영 어설펐다.

약재를 다듬는 것도. 보관된 약재의 상태를 주기적으로 살피는 것도. 탕약을 달이며 불 조절을 하는 타이밍을 잡는 것도. 데우고 식히고, 짜내는 일련의 과정들도.

모두 경험과 감각이 필요한 일이었다.

'한데 그게 잘 안 되고 있어. 계속 시키면 차츰 나아질 거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오고 있는 환자들을 연습 대상으로 삼는 격이라서 찜찜해.'

자칫 잘못 조제된 탕약이 나갈 수도 있다. 그러면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가 입게 된다.

그건 싫었다.

'게다가 간병이 필요한 환자들이 병동에 잔뜩 입원한 상태가 되면... 지금 이대로면 그것도 문제야.'

지금이야 시종과 시녀들에게 한의원의 잡일을 맡겨둔 상태였다. 하지만 그들은 궁정의 잡무를 하는 시종 시녀일 뿐. 전문 간호 인력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24시간 환자를 케어할 수 있어야 해. 그걸 위해 교대로 병동에 상주할 전문 간호 인력이 필요해. 아, 이럴 때 김쌤이랑 이쌤 계셨으면 딱 좋았을 텐데.'

한국의 한의원에 계시던 분들이 떠올랐다. 그러나 여기선 그런 인력은 사치일 뿐이었다.

'여긴 간호사라는 개념 자체가 없으니까.'

그동안 알아보니 그랬다.

아직 이 세계엔 간호사라는 개념도, 직업도 없었다. 그저 전문 의사들만 있을 뿐. 그냥 의사들이 데리고 다니는 제자나 조수 정도만이 존재할 뿐. 오직 간호와 간병만을 위해 교육을 받은 이들은 아예 없었다.

그게 참 아쉬웠다.

'어쩔 수 없지. 시녀와 시종들 중에 소질이 있는 사람들을 뽑아서라도 쓸 수밖에.'

쓰려지는 입맛을 다셨다. 밥이나 먹자 싶어 식탁에 앉았다. 한데 첫술을 뜨려는 순간이었다.

"전하!"

덜컹!

갑자기 문이 확 열렸다. 가르딘 경이 다급한 표정으로 뛰어들어왔다. 이유를 묻기도 전에 외쳤다.

"위급환자입니다!"

이쪽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스푼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가르딘 경과 나란히 뛰듯 복도를 걸었다.

"환자는?"

"방금 진료실에 눕혔습니다. 58세의 여성이며, 고열이 엄청납니다."

"고열?"

"예."

"...."

무슨 병증인 걸까. 이야기만 들어선 짐작할 수가 없었다. 고열의 원인이 참으로 다양한 까닭이었다.

'제발 별일 아닌 거면 좋겠는데.'

내심 바라며 걸음을 재촉했다. 진료실에 도착해보니, 침상에 눕혀진 여인이 보였다.

"저...전하...를... 뵙습니다...."

60이 다 되어가는 여인. 나름 귀족가의 사람인 걸까. 원래는 정갈했을 머리칼이 진땀으로 온통 흐트러져 있었다.

"딘라이어 가문의 첫째가 전하를 뵙습니다. 전하, 어머니를 살려주십시오. 제발 부탁입니다."

딘라이어 영식이라 스스로를 밝힌 젊은 남자가 애원했다. 라키엘이 물었다.

"언제부터 이랬지?"

"오후부터였습니다. 그전엔 괜찮았는데, 해가 기울 무렵부터 오한이 난다고 하시더니 지금은 이렇게...."

"흐음."

딱 봐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호흡이 얕으며 거칠었고, 거의 인사불성으로 혼절하기 직전이었다.

라키엘은 딘라이어 부인의 맥부터 짚었다. 진맥 스킬을 사용했다. 오장육부 상담 기능까지 동원했다. 그러는 내내 진심으로 기원했다. 제발 심각한 질환이 아니길. 여기서 자신이 치료할 수 있는 병증이길.

그리고 곧 깨닫게 되었다. 이번만큼은 자신의 기원이 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진... 티푸스."

마침내 진단하게 된 부인의 병명. 그 앞에 라키엘은 입술을 와락 깨물고 말았다.

발진 티푸스(epidemic typhus).

리케치아(Rickettsia prowazekii) 세균에 감염되어 발생하는 질환. 또한 그것은, 러시아 원정에 나섰던 나폴레옹의 40만 대군을 궤멸시킨 바 있는, 치명적인 급성 열성 질환이었다.

43화. 비고를 털어라 (1)

"발진... 티푸스."

라키엘은 짓씹듯 중얼거렸다. 하고많은 열병 중에 하필이면 이거라니. 그는 제발 아니길 바라며 자신의 오장육부, 간에게 물었다.

'이봐, 진짜야? 확실해?'

[간장 : 진짜로 진심으로 확실한데?]

'어떻게?'

[간장 : 저 아줌마 간에 출입하는 혈액 속 리케치아 세균이랑 하이파이브 하고 왔는데?]

'....'

라키엘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오장육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환자의 혈액 속에 리케치아 세균이 있다면 확실하다. 발진 티푸스가 맞다.

'쯧.'

라키엘은 딘라이어 영식을 돌아보았다.

"하나 묻지. 환자가 마지막으로 목욕을 한 지 얼마나 됐나?"

"...예?"

딘라이어 영식이 멈칫했다. 무슨 그런 질문을 하느냐는 듯한 기색이었다. 만약 이쪽이 황태자가 아니었다면, 그런 질문이 모욕적이라며 따질 수도 있었으리라.

라키엘은 쓸데없는 오해를 짓뭉갰다.

"환자의 상태를 판단하기 위해 필요한 질문이야. 어서."

"아, 그건, 어제도 하셨습니다."

"어제도?"

"매일 빠뜨림 없이 데운 물로 목욕을 하는 편이시거든요."

"흐음...."

매일 목욕을 하는데 발진 티푸스라. 어지간하면 그럴 수는 없을 텐데. 이상했다. 영식에게 재차 물었다.

"그럼 집의 정리정돈 상태는? 특히 침구 상태는 어떻지?"

"깔끔하게 관리되는 편입니다."

"이나 벼룩은 없고?"

"네. 절대로."

"그럼 최근 환자분이 이나 벼룩이 있을 법한 환경에서 머무른 적은 없나?"

"음, 아... 있습니다."

"언제?"

"보름쯤 됐을 겁니다. 어머니가 친척댁에 다녀오시던 길에 마차가 진창에 빠져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가 되셨노라 했습니다. 그때 마침 근처에 농가가 있어서...."

"농가?"

"예. 그 농가에서 하룻밤을 머무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그곳의 부부가 자신들의 침대를 어머니에게 양보했다고 하더군요. 허름하기 짝이 없는 지푸라기를 깔고 그 위에 털가죽을 덮어둔 침대였노라고... 조금 내키진 않으셨지만 부부의 성의를 봐서 거절할 수 없으셨다고 했습니다."

딘라이어 영식이 떠듬떠듬 기억을 더듬듯 말했다. 라키엘은 혀를 찼다.

"쯧. 그거구나."

"예?"

"아마도 환자분은 그때 그곳에서 감염됐을 거야."

"감염...이라니요?"

단어 자체가 주는 불길함. 그걸 느낀 건지 영식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라키엘은 최대한 차분하게 설명했다.

"환자분의 질환은 발진 티푸스라는 거야. 흔히 장티푸스와 혼동하고는 하는데, 전혀 다른 질환이지. 어쨌건, 이건 사람의 피부에 달라붙어 피를 빨아먹는 이(louse)를 통해 감염되는 질병이랄까."

"이라니...."

"리케치아 균이라는 게 있어. 그걸 보유한 이가 사람의 몸에 기생 활동을 하며 피부에 배설물을 남기지. 그 배설물에 리케치아 균이 섞여 나와. 그러면...."

"그러면요?"

"사람은 간지러움을 느끼지. 이가 남긴 배설물 때문에 말이야. 그러면 무의식중에 그 부분을 긁겠지. 그때 손톱에 의해, 눈에도 보이지 않을 아주 미세한 상처가 피부에 생기고... 그 상처를 통해 리케치아 균이 몸으로 침투해. 감염되는 거지."

"그런...."

"때로는 리케치아 균이 들어 있는 이의 배설물이 먼지에 섞여 호흡기로 들어오기도 해. 그나마 다행인 건, 사람 사이의 전염은 되지 않는 것 정도겠군."

"...."

상상도 못했던 질환에, 생각지도 못했던 방법으로 걸렸다는 게 아득하게 느껴지는 걸까. 이제 영식은 대답마저 잃어버렸다. 하지만 라키엘은 문진(問診)을 멈추지 않았다.

"어쨌건, 열이 정확히 언제부터 나기 시작했다고?"

"그건... 점심까지는 괜찮으셨습니다. 한데 오후에 몸이 춥다고 하시더니 열이 펄펄 끓고...."

오늘부터 발열이 시작됐다, 라.

그럼 아귀가 딱 맞았다.

'농가에서 머물렀다는 게 보름 전. 그리고 오늘부터 증상이 발현. 그 사이의 보름이 잠복기였던 셈이네.'

발진 티푸스의 증상 발현 특성과 정확히 일치했다. 라키엘은 쓰려지는 입맛을 다셨다.

'큰일이다. 환자의 나이가 많아.'

발열이 심했다.

이런 경우엔 어린아이나 고령자가 특히 위험하다. 최악의 경우 폐렴이 발생하거나, 고열에 의한 중추신경의 손상, 혹은 신체 말단이 괴사하는 경우도 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정벌군이 시달렸던 것처럼.'

문득, 역사 속의 사례가 떠올랐다.

19세기 초, 유럽의 패왕으로 군림하던 나폴레옹. 그는 자신에게 거역한 러시아를 침공했다. 그가 동원한 정벌군의 규모는 엄청났다.

보병 38만.

기병 8만.

대포 1천 문.

예비병력마저 무려 10만.

도합 60만 대군이었다.

그중에서 예비병력과 일부를 제외한 40만이 러시아를 침공했다. 한데 폴란드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발진 티푸스가 그의 군단을 덮쳤다.

병사들이 고열에 시달렸다. 온몸에 붉은 발진이 돋아났다. 반쯤 정신이 나가 헛소리를 하다가 쓰러지고 죽어갔다. 그렇게 폴란드를 통과하며 병력의 1/5을 잃었다.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는? 고작 10만 명만 살아남은 상태가 되었다. 러시아 군대와의 전투에서 죽은 이보다, 발진 티푸스에 걸려 죽은 병사가 훨씬 많았던 셈이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지. 정벌에 실패했어. 아비규환 같은 철수작전을 펼쳐야 했지. 그때까지도 발진 티푸스는 계속해서 그의 군대를 괴롭히고 있었고. 그는 생살을 도려내듯 발진 티푸스에 걸린 병사 3만 명을 리투아니아 빌나(Vilna)에 버리고 도망쳐야 했지.'

그렇게 나폴레옹의 러시아 정벌군이 궤멸당했다. 발진 티푸스가 불세출의 패왕을 몰락시킨 셈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지. 비슷한 사례는 수도 없이 많았어.'

15세기 이슬람에 맞서 싸운 스페인의 '레콩키스타(Reconquista)' 전쟁에서도. 16세기 스페인과 프랑스의 전쟁에서도. 오스만 튀르크와 신성로마제국의 전쟁에서도. 독일을 폐허로 만든 30년 전쟁, 그리고 영국 내전에서도.

발진 티푸스는 인간을 학살하며 악명을 떨쳤다.

"후우. 그럼 일단 옷부터 갈아입혀야겠어."

시녀들을 불렀다.

꼼꼼하게 지시했다.

"환자분의 옷을 벗겨. 속옷까지 전부 다.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으로 온몸을 닦아줘. 머리칼과 체모에 이가 있는지 꼼꼼히 살피는 것도 잊지 말고. 그 후에 환자복을 입히도록."

"그럼, 벗긴 옷은 어찌하여야 합니까?"

"태워."

"태우...라고요?"

"음. 전부 빠짐없이. 이 환자가 지금 누운 여기 침상의 침구도 모조리 태워. 그리고 너희도 내가 시킨 일을 마치면 즉시 목욕부터 하고, 지금 입고 있는 옷도 태워 버려."

"...."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는 시녀들의 눈빛. 라키엘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라도 어긴다면, 즉시 해고하고 죄를 물을 거야."

"아, 알겠습니다."

시녀들이 사색이 되었다. 하지만 라키엘에겐 이게 당연한 일이었다. 혹시나 환자의 몸에 아직도 이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매일 데운 물로 목욕을 한다지만, 의복이나 침구에 이가 옮겨붙었을 가능성도 있다.

라키엘은 딘라이어 영식을 향해 말했다.

"그쪽도 마찬가지다. 지금 입고 있는 옷도 태워야 하니 당장 다 벗고 목욕부터 하도록. 새 옷은 준비해줄 테니까."

"예? 아... 예, 전하."

"그리고 또 하나. 집에서 쓰는 모든 침구와 카펫, 옷을 세탁하고 햇볕에 말려야 해. 그건 이쪽에서 사람을 보내 알리도록 하지."

"예, 알겠습니다, 전하."

"그럼 다들 실시."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라키엘도 곧바로 자리를 옮겨 옷을 갈아입고 목욕부터 했다. 그리고 환자를 위한 탕약을 준비했다.

'역시 갈근탕(葛根湯)이 좋겠지.'

갈근탕은 탕약 중의 기본에 해당하는 탕이었다. 그럼에도 열성질환에 탁월한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갈근의 발한, 해열작용이 뛰어나지. 동물실험에서 해열작용과 뇌혈관 혈류 증가 효과와 관상동맥 확장 효과가 있는 게 입증되기도 했고.'

거기에 함께 들어가는 마황에도 해열효과가 있다. 계지가 그 효과에 더욱 시너지를 불어넣는다. 함께 첨가되는 작약, 대추, 감초에는 자양강장 효과가 있으며, 과도한 발한을 제어하는 부가적인 효능이 있기도 하다.

'분량은 정확하게. 배합도 빠짐없이.'

1회 복용량을 정밀하게 조절했다. 갈근 8.0g, 마황 4.0g, 대추 3.0g, 계지 2.0g, 작약 2.0g, 감초 2.0g, 생강 2.0g.... 약재들을 정확히 분배하고, 손질했다. 직접 정성껏 달였다. 딘라이어 부인에게 먹였다.

"자, 환자분? 이 약을 마시면 조금 나아질 겁니다. 천천히, 조금 쓰겠지만 천천히 마셔보세요."

"전하...."

진땀으로 범벅이 된 부인이 울먹였다.

많이 아픈 탓일 거다.

달래가며 약을 먹였다.

그때부터였다.

하루, 이틀, 사흘. 무려 세 명의 시녀를 그녀에게 간병인으로 붙였다. 8시간씩 3교대. 24시간 빠짐없이 보살피게 했다.

라키엘 본인도 다른 환자들을 진료하는 틈틈이 부인을 살폈다. 수시로 맥을 재고, 열을 체크했다. 탕약에 더욱 신경을 쓰고, 차도를 살폈다.

하지만 부인의 열이 도통 가라앉질 않았다. 갈근탕을 매일 꾸준히 복용하고, 충분한 영양과 휴식을 취함에도 별다른 차도가 보이질 않았다. 아니, 상세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큰일이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약효가 없어. 아니, 약해. 이건 그냥 갈근탕으로 어떻게 될 수준이 아니야.'

입원 나흘째.

딘라이어 부인을 진맥한 라키엘은 탄식을 내뱉었다. 부인의 상태가 입원 당시보다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계속되는 고열에 오히려 체력이 소진되고 있었다. 라키엘은 그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음기가 너무 많이 상했어.'

진맥을 하니 느껴졌다. 아스라한 심법의 마나 진단법으로도 명확히 볼 수 있었다.

부인의 몸속 음기가 말라붙어 있었다. 그 반작용으로 양기가 지나치게 활성화되어 있었다. 뜨겁고 들뜨는 성질의 마나가 온몸의 혈맥 속에서 날뛰는 중이었다.

'음양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졌다. 아스라한 심법으로도 느낄 수 있어. 이 균형부터 바로잡아야 해. 그래야 환자의 몸이 갈근탕의 약효를 제대로 받아들이게 될 거야.'

요약하자면? 날뛰는 양기 때문에 약빨(?)이 하나도 들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럼 어떡하지?'

라키엘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이대로 둔다면 환자의 몸속 균형이 더욱 무너질 거다. 그러면 치료의 희망이 사라지게 된다. 죽는 것이다.

'그건 싫어.'

환자가 죽는 건 싫었다. 게다가 지금 이곳에서 환자가 죽으면? 기껏 한의원을 개업하며 누리게 된 오픈빨에 직격타로 찬물이 뿌려지게 될 것이다.

'그럼 망하는 거지. 내 한의원에 대한 신뢰도 깨질 거고. 여기 와서 낫는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사람 죽은 곳이니까. 누가 찾아오겠어.'

한의원을 찾는 발길이 뜸해질 것이다. 자신의 계획이 무너지는 셈이다.

환자에게도.

자신에게도.

최악의 결과가 될 것이다.

'그건 안 돼. 무조건 살린다.'

라키엘은 각오를 다졌다.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다고. 절대로 포기할 수도 없다고. 환자도 살리고, 한의원도 살리고. 그렇게 부귀영화의 희망찬 미래를 살려나가겠다고.

다짐하며 더욱 고민했다.

맹렬히 궁리했다.

'양기가 날뛰는 원인은 음기가 쇠락해서야. 한데 양기를 억누르는 방법으로는? 안 돼. 자칫 그랬다가 양기와 음기 양쪽이 전부 약해져서 신체의 기운 전체가 허해지는 결과가 올 수도 있어.'

체력이 떨어진 상태. 거기에 기혈마저 허해진다면? 순식간에 위중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

'그러니까 결론은... 음기를 끌어올려야 해.'

음기를 살려줄 방법.

그게 가능할 약재.

무엇이 있을까.

'지금 보유한 약재들로는 불가능해. 음기가 너무 많이 약해져 있어. 저걸 살리려면 보통의 약재로는 안 돼.'

라키엘의 미간에 더욱 깊은 주름이 파였다. 강력한 음기를 지닌 약재가 필요하다. 혹은 그런 특별한 물건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황궁 비고.'

자연스럽게 결론이 나왔다.

다수의 희귀한 물품, 아티팩트가 보관된 황궁의 보물고. 어쩌면 그곳에 자신이 찾는, 강력한 음기를 지닌 약재나 물건이 있지 않을까.

'확신할 수는 없어. 하지만 그나마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은 거기겠지.'

자신에겐 시간이 얼마 없다. 환자에겐 더더욱 없다. 며칠만 어영부영 지나고 나면? 금방 상세가 악화되어 위독한 상황이 닥칠 수도 있다.

한데 황궁 비고는?

'가깝지. 황궁에 있으니까. 게다가 나는 황태자야. 그러니 당장 찾아가도 어찌어찌 출입할 수 있을 거고.'

그는 바로 외출할 채비를 갖추었다.

"가르딘 경? 시종장에게 마차 준비하라고 전해줘."

"예? 마차라니요? 이 시간에 어딜 가시려고요?"

"황궁 비고."

"...예에?"

"거기서 찾아봐야 할 게 있거든."

"하지만 전하. 비고에 출입하려면 출입 절차를 밟아야 할 텐데요?"

"출입 절차?"

"예, 전하."

가르딘 경이 당연하다는 투로 말했다.

"제가 알기로는 황궁 비고엔 황제 폐하 외엔 아무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설령 황태자 전하라고 해도 말이지요."

"그래서, 출입 절차라는 걸 밟아야 한다는 거?"

"예, 전하."

"그거 복잡해?"

"복잡하지는 않고, 음, 신청 서류를 해당 관리 부서에 제출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비고를 방문하는 목적이라든가, 비고에 보관된 어떤 등급까지의 물품을 열람하겠다든가, 하는 항목들을 작성해서요."

"그럼 그걸 제출하고 나면?"

"까다로운 심사를 받게 된다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황가의 보물을 보관한 중요한 곳이라서... 어지간한 대귀족들도 심사에서 탈락하기 일쑤라고 합니다. 황족도 마찬가지이고 말이지요. 게다가 서류를 제출해도 심사 기간이 제법 길다고 들었습니다."

"얼마나 긴데?"

"최소 한 달은 기다려야 한다고...."

"...."

뜻밖의 변수가 생겼다. 까다로운 심사를 받아야 하는데 그게 무려 한 달이나 걸린다니.

'쩝.'

라키엘은 쓰려지는 입맛을 다셨다. 한 달을 기다릴 여유 따위는 당연히 없다. 그동안 발진 티푸스가 환자를 그냥 놔두지 않을 것이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라키엘은 고개를 들었다.

이런 치사한 방법까지 쓰긴 싫었는데.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가 없겠다. 라키엘의 입가에 미소 한 자락이 슬며시 피어났다.

"그거라면 걱정 마. 방법이 있으니까."

"방법이라니, 그게 뭡니까?"

"내가 황태자잖아."

"그래서요?"

"그러니까 써먹을 거야."

"어떤 걸 말입니까?"

가르딘 경이 의아한 듯 물어왔다. 라키엘의 입가에 서린 음흉한 미소가 상큼하게 빛났다.

"아빠 찬스."

44화. 비고를 털어라 (2)

"어찌하여 네가 이 시간에 짐을 찾아왔단 말이더냐."

넓고 호화로운 집무실이다. 제국 지배자의 공간답게 여유가 넘친다. 어지간한 7, 80평대 대형 아파트 거실? 그것조차 소박한 고시원 골방으로 여겨지게 할 만큼 광활한 집무실이다.

한데 그런 이곳이 좁게 느껴진다. 방금, 황제가 꺼낸 한마디 물음 때문이었다.

'역시 황제. 이 양반은 볼 때마다 압박감이... 어우야.'

라키엘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저 짧게 건네어 온 황제의 한마디가 너무나 묵직했다. 평범하게 내뱉는 물음의 포스가 장난이 아니었다. 과연 제국의 지배자다운 모습이랄까.

하지만 라키엘은 그 압박감에서 금방 벗어났다. 비결은 간단했다.

'한국에서 임대료 밀려서 눈치 보고 지낼 때... 화장실 앞 복도에서 마주친 건물주가 더 무서웠으니까!'

한창 한의원이 망해가고 있던 때가 떠올랐다. 임대료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던 시기였다. 당시 건물주와 마주쳐 버렸던 순간엔 어떠했던가.

독사 앞의 개구리.

군단장 앞의 훈련병.

혹은, 열흘 굶은 씨름선수 앞에 차려진 삼겹살이 된 기분이었다.

'어휴. 생각하지 말자.'

그는 쑴펑쑴펑 몰려오려던 PTSD를 얼른 털어냈다. 덕분에 눈앞의 황제가 주는 압박감도 함께 털어낼 수 있었다.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가 제국의 합당한 지배자를 뵙나이다."

적절하게 예를 표했다.

이쪽을 향한 황제의 눈길이 깐깐해졌다.

"짐의 물음은 그저 판에 박힌 인사를 받겠다는 뜻이 아니었다만."

"...."

"어찌하여 이 시간에, 예고도 없이 짐을 찾아왔는지를 먼저 물었지 않았더냐."

황제, 아스테리온의 목소리에 못마땅한 기색이 서렸다. 황태자를 보는 눈빛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사실은? 겉으로만 그런 표정과 눈빛을 보이고 있을 뿐. 라키엘을 바라보는 황제의 속마음은 예전과 조금 달라져 있었다.

'흥미롭구나.'

까탈스러움을 가장한 황제의 눈빛 깊은 곳. 그곳에서 희미한 호기심과 기대감의 감정이 꿈틀거렸다.

'네가 제 발로 먼저 짐을 찾아온 적이 있었던가? 아니, 없었다.'

한데 오늘, 그런 일이 벌어졌다.

예고도 없이 라키엘이 찾아왔다.

처음엔 믿지 않았다. 뭔가 착오가 있겠거니. 궁내부장이 착각을 하였겠거니 여겼더랬다. 한데 확인해보니 진짜였다. 라키엘이 알현을 청하고 있단다. 하여 녀석을 즉시 이곳, 집무실로 불러들였다.

'요즘 기이한 짓을 하도 벌이고 다니는 이 녀석이 이번에는 또 무슨 바람으로.'

황제는 문득, 최근 듣고 있던 소식을 떠올렸다.

발작을 일으키는 아이를 치료했다던가. 그걸 입소문을 내며 별궁에 한의원이라는 걸 차렸다던가. 심지어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환자를 받아 사람들을 진료하고 있다던가.

'대체 무슨 수로. 무슨 생각으로.'

보고를 받으면서도 잘 믿기지가 않았다. 대체 언제 그런 의술을 익혔는지 의문이었다. 큰아들의 의도를 선뜻 이해할 수도 없었다.

민심을 얻기 위한 수단인지. 혹은 다른 목적이 있는지. 파악해보려 해도 선뜻 짚이는 구석조차 없는, 실로 기이한 행보였다.

'하여 그렇잖아도 조만간 녀석을 불러 여러 가지를 물어보려 하였는데.'

마침 녀석이 이렇듯 제 발로 찾아왔다.

잘된 일이다.

흡족한 변화다.

하지만 황제는 새끼를 절벽에서 떨어뜨리는 사자 같은 사내였다. 그는 마음속에 차오르는 기쁨의 기색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근엄하고 위압적인 눈빛으로, 못마땅한 기색만 짐짓 내보였다.

"짐이 물었으니, 황태자는 고하라."

고할 것이 없다면 썩 물러가거라.

눈빛으로 압박했다.

황태자가 대답했다.

"한 가지 요청을 드리러 왔습니다."

"요청?"

"예, 폐하."

라키엘은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 황궁 비고를 열람하고 싶습니다."

"...황궁 비고를?"

"예, 폐하."

"어찌하여?"

황제의 물음 앞에 라키엘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제부터가 협상의 시작이다. 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최근 제가 별궁에서 한의원을 꾸리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제법 많은 환자들이 와서 진료를 받는 중입니다. 한데 사흘 전, 어떤 귀족가의 부인이 심각한 질환을 안고서 별궁을 찾아왔습니다."

"...심각한 질환?"

"예, 폐하. 발진 티푸스라는 질환이었습니다."

"처음 들어보는 질환이다만."

"설명을 드리기는 복잡하오나, 고열을 동반하며 환자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무서운 질환입니다."

"한데? 그 환자의 질환과 네가 황궁 비고를 열람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상관이 있습니다."

"있어?"

"예, 폐하."

"어떤 상관이 있지?"

"환자의 질환을 치료하는 데에 도움이 될 물건이 비고에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확실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면 황궁비고일 것이다. 라키엘은 확신을 담아 말했다.

그러나 황제는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제국 지배자의 입에서 곧바로 반론이 나왔다.

"흐음, 나는 네가 밝히는 이유의 진실성을 선뜻 믿을 수가 없겠구나."

뒤이어지는 황제의 목소리가 점점 까칠해졌다.

"아무리 들어도 의구심이 느껴진다는 뜻이다. 발진 티푸스? 들어본 적이 없도다. 과연 네가 내린 그 진단이 정확한 것인지도 잘 모르겠고. 아니, 그보다, 혹시 너는 애먼 환자를 핑계로 삼아 사사로이 황궁비고를 열람하려는 것이 아닌가?"

"...."

이쪽을 빤히 쳐다보는 황제의 시선.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는 것 같았다. 그 눈빛 앞에 라키엘은 내심 혀를 내둘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