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12

그래, 나도 이미 봤어.

인간을 넘어서

지쳤지만 만족한 상태로, 나와 타이니 그리고 바이브와 크리니스는 모두 식사에 열중했다.

그 결과 나는 바이오매스를 무려 아홉 개나 얻었다!

뿐만 아니라 몬스터 코어를 여섯 개나 수확했다.

특히 두 마리의 뼈 도마뱀에게서 나온 코어들은 크고 아름다웠다.

전체적으로 아주 만족스러운 성과였다.

레벨과 바이오매스를 이렇게 쉽게 얻으니 기분이 좋았다.

이제 더 이상 웨이브로 인해 둥지가 멸망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니, 타이니와 함께 자주 이 아래로 내려와서 개인적인 성장을 도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동굴 벽에서는 이미 새로운 열기들이 느껴지고 있었다.

머지않아 또 한 차례 몬스터들이 생성될 모양이었다.

오늘은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생각으로, 나는 바이브와 크리니스를 태운 뒤 타이니에게 나가자고 말했다.

타이니는 바이오매스를 잔뜩 섭취해서 부상을 거의 회복했지만, 한 쪽 주먹의 상태가 여전히 좋지 않아 보였다.

그걸로 뭘 때렸는지 생각해 보면 신기한 일도 아니었다.

어쨌든 타이니는 지난 몇 주 동안 본 적이 없는 상쾌하고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천천히 다시 지상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올라가며, 우리가 지나간 뒤 새로 생성된 몬스터들을 처리했다.

아마 이번 사냥 여행에서 가장 많은 이득을 얻은 건 내 등에 타고 있는 두 꼬마 녀석들일 것 같았다.

더 진화한 몬스터의 바이오매스를 먹으면 성장이 더 빠를지 확실히는 모르지만···

아마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이 되면 크리니스가 얼마나 자라 있을지 기대되는군.

바이브는···

엄청나게 작긴 하지만 이미 성장을 마친 상태였다.

그래도 자기보다 두 단계나 더 진화한 몬스터의 바이오매스를 섭취해서 엄청나게 많은 바이오매스를 얻었을 터였다.

아마 열 다섯 개 정도?

녀석이 먹을 수 있는 양이 얼마나 적은지 고려하면, 한 번의 식사로 그렇게 많은 바이오매스를 얻는 건 대단한 행운이었다.

어쨌든 마침내 우리는 지상으로 돌아왔다.

내가 가장 먼저 밖으로 나가서 통로의 입구 근처에 인간이나 다른 몬스터가 있는지 살폈다.

인간의 마을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위치라, 입구를 드나들 때에는 조심해야 했다.

괜히 불필요한 소란을 일으킬 필요는 없으니까···

우리가 아래쪽 통로를 두 차례나 청소했으니, 교회로 나오는 몬스터가 그리 많지는 않을 터였다.

아마 내가 새로 판 굴과 연결된 지점보다 위쪽에서 스폰되는 약한 놈들만 기어 나오겠지.

인간들의 목숨을 구한 셈이지만 어떻게 보면 경험치를 훔치는 일이기도 하고···

뭐 그렇게 생각하면 똔똔인 셈이로군.

흐흐흐.

솔직히 몬스터인 내가 인간들을 전혀 해치지도 않았는데, 경험치를 독차지하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우리 넷은 숲 속을 가로질러 둥지로 향했다.

아니, 우리 둘이라고 해야겠군.

바이브는 어느새 내 머리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등 위에 있는 작은 공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규칙적인 간격으로 볼 때 크리니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얄미운 녀석들 같으니라고!

뭐, 지금은 봐주도록 하자.

녀석들이 더 빨리 바이오매스를 소화해서 자랄수록 내 등에서 내려와 둥지를 위해 열심히 일할 날도 가까워지는 셈이니까.

그때가 되면 두고 보자 이 녀석들···

개미 언덕까지 걸어가는 몇 시간 동안 주위는 완벽하게 평화로웠다.

하지만 거의 다 도착했을 때, 멀리서 싸우는 소리가 내 주의를 끌었다.

그 중에 인간의 고함 소리와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섞여 있는 걸 깨닫자 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둥지 근처에서 인간들이 싸우고 있었다!

나는 즉시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 서슬에 등에 타고 있던 두 꼬마가 잠에서 깨어났다.

타이니도 내가 당황한 걸 눈치챘는지, 길다란 팔로 땅을 짚어가며 열심히 달려서 따라왔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나는 머리 속으로 연신 비명을 질렀다.

내 가족들!

내 동료들!

그 고생을 하면서 웨이브를 피해 지상으로 왔는데···

또다시 개미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볼 수는 없어!

금속 무기가 갑각을 파고드는 끔찍한 소리를 듣자, 두 눈에 눈물이 맺히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눈물샘이 있었다면 그랬을 거라는 뜻이다.

둥지를 지켜야 돼!

몇 분이 마치 몇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우리는 드디어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에 도착했다.

내 오른쪽에는 공터 한가운데 개미 언덕이 작은 산처럼 솟아 있었다.

그 꼭대기에서는 일개미들이 몰려나와 분노로 턱을 딱딱거리고 더듬이를 흔드는 중이었다.

아마 지원 병력을 요청하는 페로몬의 냄새를 맡고 나온 모양이다.

그리고 내 왼쪽에는 열 명의 인간들이 보였다.

하나같이 번쩍이는 무기를 들었고, 갑옷에는 복잡하고 화려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 뒤에는 정교한 장식이 들어간 지팡이를 들고 어깨에 로브를 걸친 마법사 두 명도 보였다.

내가 여태까지 본 인간들 중 가장 훌륭한 장비를 갖춘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 인간들이 개미를 학살하고 있었다.

개미들은 둥지를 방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려들었지만, 마법사들이 만든 방어막에 뒤로 밀려날 뿐이었다.

덕분에 전사들은 자유롭게 검을 휘두르며, 개미들을 향해 빛나는 에너지 덩어리를 연신 날려댔다.

개미들이 발사한 산성 용액도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방어막에 가로막혀 무력하게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리고 나는 최고로 두려운 장면을 목격했다.

여왕이 둥지 밖에 나와 있었던 것이다!

여왕은 거대한 몸을 분노로 떨면서, 자신의 아이들을 치료하는 동시에 적들을 압박하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내 가족이 죽어가고 있었다!

[타이니! 죽여!]

나는 거의 생각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서 그렇게 외쳤다.

내 소중한 형제 자매들이 바로 내 눈 앞에서 무참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저들을 구해야 한다!

나는 거칠게 몸을 흔들어 두 꼬마 녀석들을 떨어뜨린 뒤, 적들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감히 내 가족을 공격해!

네놈들을 갈갈이 찢어주마!

분노에 눈이 먼 나머지, 나는 아무런 계획도 없이 막무가내로 달려들었다.

더 빨리, 더 빨리, 더 빨리!

놈들과 불과 몇 미터 거리까지 다가갔을 때, 마법사들 중 하나가 내 쪽을 돌아보더니 가볍게 손목을 흔들었다.

그러자 내 얼굴이 뭔가에 부딪히며, 보이지 않는 방어막이 나를 밀어냈다.

이대로 밀려날 순 없지!

나는 발톱을 휘두르고 턱을 박아 넣으며, 순수하게 물리적인 힘으로 방어막을 찢으려고 애썼다.

방어막에 머리를 부딪힌 덕분에 이성의 일부가 돌아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에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건 현명한 일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개미들을 구할 수만 있다면 그럴 가치가 있지!

나는 방어막과 씨름하는 동시에 보조 뇌를 동원해 중력 창의 패턴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적의 진형을 무너뜨리려면 이 주문이 가장 효과적일 터였다.

마법사는 내가 방어막과 부딪히고도 물러나지 않고 버티자 조금 놀란 것처럼 보였다.

나는 내 커다란 덩치와 변이를 거친 부위들을 마치 연구하듯 유심히 살피는 마법사를 사납게 노려봤다.

잠시 후 마법사가 씩 웃더니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나를 밀어내는 힘이 즉시 두 배로 커졌다.

어림없다!

나는 있는 힘껏 그 자리에서 버텼다.

이 멍청이를 상대하느라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전사들은 검을 휘둘러 무력한 개미들을 풀처럼 베어내며, 여왕에게 점점 더 가까이 접근하고 있었다!

[어디 있는 거야, 타이니?!]

그 순간 천둥 같은 포효 소리가 모두의 귀청을 때렸다.

음파가 너무 강력해서 마치 내 고막을 물리적으로 두드리는 느낌이었다.

돌아보니 맹렬한 기세로 달려온 타이니가 있는 두 팔을 들어올린 채 있는 힘껏 도약하고 있었다.

거대한 고릴라 몬스터가 숲 속에서 나타나더니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자, 나와 마주하고 있던 마법사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다.

놈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또다른 마법사를 향해 뭐라고 외쳤다.

그 소리를 듣고 여자인 두 번째 마법사가 재빨리 돌아섰다.

그리고 두 마법사는 동시에 지팡이를 들어 높이 도약한 타이니를 겨눴다.

덕분에 나를 밀어내던 힘이 순간적으로 줄어들었다.

내 절박한 분노에 전염된 타이니의 눈동자는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녀석은 거대한 몸의 체중을 모두 실어서 두 주먹을 망치처럼 휘둘렀다.

마침내 타이니의 주먹이 무시무시한 힘으로 방어막을 내리쳤다.

쾅!

타이니의 엄청난 힘에 방어막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깜박거렸다.

그 충격이 전해졌는지 두 마법사는 눈에 보이게 몸을 떨었고, 심지어 한 명은 무릎이 꺾여서 주저앉았다.

하지만 마법사들은 여전히 결연한 표정으로 지팡이를 치켜들고 있었다.

있는 힘을 다해 방어막을 강화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타이니가 전력을 다해 내리친 주먹을 막아낸 걸 보면 저 위쪽의 방어막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력한 듯했다.

하지만 대신 여기서 나를 막고 있는 방어막은···

나는 턱에 마나를 주입했다.

필사적으로 중력 창의 패턴을 형성하면서 턱에도 마나를 주입하자, 정신적인 부담이 너무 커서 금방이라도 코피가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다행히 나는 코가 없지!

나는 보조 뇌를 최대한 동원해서 마나의 흐름을 통제했다.

뇌 두 개가 모두 불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코어에서 끌어낸 마나를 주입하자 내 턱이 빛나기 시작했다.

마나가 계속 흘러 들어가면서, 그 빛은 점점 더 밝아졌다.

나는 이미 얼굴로 방어막이 밀어내는 힘을 버티고 있는 상태였다.

크게 벌린 내 턱의 양쪽 끝부분이 방어막을 파고들었지만 뚫지는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나의 흐름이 강해지고 턱의 빛이 밝아지면서, 턱 끝이 조금씩 전진하는 느낌이 들었다.

됐어!

타이니가 마법사들의 주의를 끌어준 덕분이었다.

마법사들이 위쪽의 방어막을 강화하면서 나를 밀어내는 힘은 눈에 띄게 약해졌다.

기회다!

나는 얼굴 근육을 총동원해서 턱을 다물었다.

빌어먹을, 뚫리라고!

방어막이 내 턱 안에서 서서히 구겨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뭔가를 느꼈는지, 나와 가까이 있던 마법사가 타이니로부터 눈을 떼고 다시 내 쪽을 쳐다봤다.

환하게 빛나는 내 턱을 본 마법사는 황급히 지팡이가 없는 쪽의 손을 들어올려 나를 막으려고 했다.

이미 늦었다!

마침내 방어막을 찢어낸 내 턱이 힘차게 맞물렸다.

나를 밀어내던 보이지 않는 힘이 그대로 사라지자, 여태까지 있는 힘을 다해 버티던 나는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방어막의 한 부분이 뚫리자, 내 가까이 있던 마법사가 충격을 받은 듯 비틀거렸다.

나는 아직 방어막 주문의 원리를 정확히 몰라서 어떤 식으로 놈에게 반동이 전해진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뭐가 어떻게 됐든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나는 재빨리 일어서며 모든 정신력을 중력 창의 패턴을 만드는 쪽에 투입했다.

턱으로 들어가는 마나의 흐름을 멈추자, 뇌의 부담이 한결 덜해져서 패턴이 형성되는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그리고 가까이 있는 마법사가 회복하기 전에 턱을 크게 벌린 채로 놈에게 돌진했다.

물어 깨뜨리기!

나는 있는 힘을 다해 턱을 다물었다.

에너지 턱에 의존하지 않고, 마법사에게 충분히 접근해서 실제 내 턱으로 놈을 물었다.

우직!

끔찍한 소리와 함께 내 턱이 마법사의 몸통을 물었다.

그리고 턱을 벌리자, 마법사는 바닥에 쓰러져서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레벨 43 인간 고위 마법사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레벨 11이 되었습니다. 1 스킬 포인트를 얻었습니다.]

[레벨 12가 되었습니다. 1 스킬 포인트를 얻었습니다.]

개미 대 인간

때마침 돌아선 두 번째 마법사는 동료가 내 턱에 쓰러지는 걸 보더니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미 타이니가 방어막을 다시 한 번 때릴 준비를 하고 있는 터라 나를 상대할 여유가 없었다.

마법사로서는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나를 상대하기 위해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던 방어막에서 정신력을 거두면 타이니가 난입해서 전사들의 뒤를 칠 테고, 그렇다고 나를 내버려 두면 자신이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마법사가 방어막을 유지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재빨리 지팡이를 내게 겨누더니 다른 쪽 손으로 허공에 복잡한 패턴을 그리며 주위의 마나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그건 곧 타이니가 아무런 방해 없이 주먹을 휘두를 수 있게 됐다는 의미였다.

내 겹눈의 가장자리에 거대한 고릴라가 팔을 뒤로 당기는 모습이 들어왔다.

타이니는 등이 방어막을 향할 정도로 몸을 잔뜩 틀었다가, 다음 순간 마치 대포처럼 주먹을 휘둘렀다.

천 장의 유리가 동시에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보이지 않는 돔이 무너지고, 부서진 마나의 파편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더 이상 누구의 정신력도 작용하지 않는 마나 파편들은 허공에서 그대로 사라졌다.

방어막이 부서지는 소리를 듣자 병사들은 놀라서 학살을 멈췄고, 몇몇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가 내 존재를 발견했다.

나는 더 이상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여자 마법사는 당장이라도 나를 향해 마법을 발사할 기세였다.

어째서 중력 창은 아직도 준비가 끝나지 않은 거지?!

그 순간 마침내 중력 에너지가 형성해 놓은 패턴을 모두 충전시켜, 주문이 발동할 준비를 마쳤다.

늦지 않아야 할 텐데!

나는 스스로의 안위를 챙길 겨를도 없이, 재빨리 몸을 돌려 개미들과 맞서고 있는 전사들을 향해 중력 창을 발사했다.

놈들이 더 이상 내 형제 자매들을 죽이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서였다.

내 주문이 전사들에게 명중했는지 확인하기도 전에, 마법사가 주문을 완성했다.

그러자 주위의 허공에서 십여 개의 얼음 칼날들이 나타났다.

마법사가 손짓하자, 그 칼날들은 엄청난 속도로 나를 향해 날아왔다.

맙소사!

이 정도 속도라면 피하기는 도저히 무리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재빨리 다리와 더듬이를 몸통 아래 숨기고 눈을 다치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인 다음, 머리로 주문을 받아내는 것 뿐이었다.

칼날이 나를 맞추기 직전,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내 열 감지 능력에 잡힌 얼음 칼날들은 엄청나게 차가웠고···

마법사의 주변 기온도 가파르게 떨어진 상태였다.

나를 향해 날아오는 얼음 칼날들이 남긴 냉기의 궤적이 내 열 감지 더듬이에 선명하게 잡혔다.

어쨌든 공기 중에 이렇게 냉기가 가득한 가운데···

내 왼쪽에서 느껴지는 열기는 뭐지?

거기는 아무 것도 없을 텐데?

내가 무슨 생각을 더 하기도 전에 얼음 칼날들이 나를 강타했다.

파박! 파박! 파박! 파박! 파박!

마법 칼날들이 내 다이아몬드 갑각들을 베어내자 어마어마한 통증이 엄습했다.

얼음 조각들은 내 옆구리와 등을 할퀴고, 다리 하나와 더듬이 한 쪽을 그대로 잘라내 버렸다.

이런 제기라아아알!

빌어먹게 아프잖아!

내 온몸이 고통으로 비명을 질렀다.

얼음 칼날들은 나를 그야말로 난도질했다.

다이아몬드 갑각은 물리 공격에는 강하지만, 마나가 실린 주문을 상대로는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재생 분비선 활성화!

빈사 상태가 되어 쓰러진 내 몸 속에 차가운 재생 용액이 흐르자, 상처가 아물고 찢어진 근육이 다시 붙기 시작했다.

다행히 코어를 다치게 할 정도로 깊이 파고든 칼날은 없었다.

코어에 이 정도 피해를 입었다면 즉사를 면하더라도 심각한 문제가 생겼을 터였다.

일단 형성된 뒤로는, 코어야말로 몬스터의 생명 그 자체나 다름없었다.

마법적인 존재로 거듭난 몬스터의 심장이자 신경 중추에 해당하는 기관이었다.

뇌가 생각을 주관하는 것처럼, 코어는 마나를 주관했기 때문에 일단 코어를 형성한 몬스터가 코어 없이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당연히 직접 시험해 보고 싶은 생각도 없고 말이다···

어쨌든 흥분 상태로 시도한 내 작전이 성공해서 방어막이 무너진 이상, 인간들은 내가 아닌 다른 위협에 먼저 대처해야 했다.

마법사가 내게서 시선을 떼고 지팡이를 다른 쪽으로 겨누는 모습을 본 나는 회복되고 있는 다리를 딛고 일어섰다.

저 마법사가 타이니를 공격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만약 타이니가 무력화되거나 크게 다치기라도 하면, 저 위험한 전사들을 막을 기회가 사라질 터였다.

타이니가 죽을 수도 있다는 끔찍한 가능성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나는 재빨리 몸을 돌려 꽁무니로 마법사를 겨냥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얼음 칼날에 유린당해 죽어가던 내가 갑자기 생생하게 움직이자 마법사는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승리는 언제나 더 빠르게 생각하는 사람의 차지지!

푸슝! 푸슝! 푸슝!

이만큼 가까운 거리에서는 조준에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나는 최대한 빠르게 세 차례를 연달아 발사했다.

산성 용액은 세 줄기가 바람을 가르고 날아가 마법사에게 세차게 부딪혔다.

워낙 가깝다 보니 물리적인 충격만으로도 마법사를 비틀거리게 만들었다.

마법사는 간신히 한쪽 무릎을 꿇고 지팡이를 짚으며 쓰러지지 않고 버텼지만, 이미 산성 용액이 구속력을 발휘해서 움직임을 방해하고 있었다.

눈 앞의 마법사가 저쪽 싸움에 관여하지 못하게 붙들기만 하면 내 목적은 달성되는 셈이었다.

당장 마법사를 처치하는 것보다 내 형제 자매들이 학살당하지 않도록 막는 일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전사들은 검을 휘둘러 에너지를 날리는 기술로 사나운 개미들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공격을 계속할 수 있었다.

방어막은 개미들을 밀어내면서 전사들이 검으로 내 물어 깨뜨리기와 유사한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다.

칼날 형태의 에너지는 매번 날아갈 때마다 세 마리 이상의 개미들을 다치게 만들었다!

내 가족들이 사방에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자 가슴이 고통으로 뒤틀렸다.

전사들에게 당한 대부분의 쓰러진 개미들은 이미 죽어서 여왕이 치료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다친 몸을 이끌고 전장에서 벗어날 기회조차 없었다.

전사들이 더 이상 둥지를 공격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일이 최우선 순위였다.

다행히 내 중력 창이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나는 중력 창의 패턴을 형성하면서, 주문의 적용 범위가 너무 커지지 않도록 신중하게 조절했다.

복부에 보랏빛 에너지 창이 날아와 꽂힌 전사는 본능적으로 비명을 질렀지만, 진정한 공포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몰랐다.

창에 맞은 당사자는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지만, 곧 개미들과 싸우던 주위의 다른 전사들이 뭔가 이상을 알아차렸다.

중력이 효과를 발휘하자 전사들은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리고 미지의 힘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다.

끌어당기는 힘이 워낙 강하다 보니, 전사들이 이변을 알아차리자 마자 개미들을 향한 공격은 즉시 멈췄다.

놀랍게도 전사들은 당황하지 않고 서로를 향해 지시와 보고를 주고받으며 점차 강해지는 중력에 저항했다.

저런 식으로 중력을 버티다니, 전사들은 엄청나게 높은 육체적 능력치를 가진 듯했다.

심지어 아무도 쓰러지지조차 않았다.

전사들이 침착하게 주문에 대처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엄청난 불안감을 느꼈다.

저 정도로 규율이 잡히고 강력한 전사들이 평범한 병사일 리 없었다.

게다가 내가 죽인 (지금은 그 부분을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자!) 마법사는 레벨이 무려 40도 넘었다!

하지만 어쨌든 놈들은 후퇴하며 서로를 향해 끌려가고 있었다.

[타이니! 놈들을 공격해!]

타이니는 조바심을 내며 자기가 부순 방어막이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내가 분노를 표출할 대상을 정해주자, 타이니는 사납게 눈을 빛내며 한 데 뭉친 전사들을 향해 돌진했다.

전사들 중 하나가 짧게 명령을 내리자, 나머지 인원이 한 손에 검을 그리고 다른 손에는 커다란 방패를 들고 개미들 쪽으로 전진했다.

아마 대장인 듯한 그 전사는 부하들이 개미들을 공격하게 시킨 다음, 타이니를 직접 상대할 의도로 보였다.

마법사 쪽을 흘끗 쳐다보니 아직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그녀를 내버려 두고 타이니를 돕는 도박을 하기로 했다.

나는 옆으로 자리를 옮긴 뒤 몸의 방향을 바꿔서, 다시 한 번 산성 용액을 발사했다.

푸슝! 푸슝!

빠르게 연달아 발사한 산성 용액 중 한 발은 대장으로 보이는 전사의 다리를 맞췄고 또 다른 한 발은 가슴 한쪽에 명중했다.

부디 산성 용액의 구속력과 피해가 타이니에게 도움이 되기를!

마침 거의 전속력으로 달려간 타이니가 전사 대장에게 돌진하며 주먹을 날렸다.

전사는 내 산성 용액을 맞고도 집중력을 잃지 않았고, 눈빛에서 두려움이나 당황이 드러나지도 않았다.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타이니의 거대한 주먹을 본 전사는 함성을 지르며 한 걸음 전진했다.

그리고 몸 전체를 회전시키며 방패로 타이니의 주먹을 쳐냈다.

세상에!

말도 안 돼!

타이니의 주먹을 막았다고?

주먹이 닿기만 하면 산산조각날 거라고 예상했는데 말이다.

게다가 내 산성 용액에도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은 게 분명했다.

나와 달리 타이니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상대가 주먹을 쳐내자, 곧바로 다른 손을 들어 날카로운 훅을 날렸다.

주먹이 너무 빨라서 바람을 가르는 휘파람 소리가 공터에 있는 모두의 귀에 들릴 정도였다.

나는 타이니가 전기 에너지를 끌어올리는 미묘한 신호도 포착할 수 있었다.

몸 여기저기서 작은 불꽃이 일어났고 팔의 털이 곤두서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전사 대장은 이번 공격도 막아냈다.

하지만 조금 전처럼 완벽한 방어는 아니었다.

몸을 잔뜩 낮추고 어깨로 방어를 받친 뒤 비스듬히 각도를 조절해서, 가까스로 타이니의 주먹을 버텼다.

방패가 찌그러지기는 했지만 어쨌든 타이니의 공격을 튕겨냈다.

문양이 새겨진 방패의 표면에 타이니의 주먹 모양대로 선명한 자국이 남았다.

그래도 전사가 완전히 멀쩡한 건 아니었다.

방패를 통해 전해진 충격이 적지 않은 듯 비틀거렸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재빨리 검을 휘둘러, 타이니의 가슴에 상처를 남겼다.

지금은 우선 이 둘의 싸움을 내버려두고 타이니가 잘해내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나머지 전사들이 어느새 몰려드는 개미들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안하게도 여왕 자신이 전면에 나선 상태였다.

여왕 개미는 분노한 눈빛으로 자신의 아이들을 살해한 인간들을 공격하기 위해 전진했다.

젠장!

어머니는 왜 저렇게 용감하신 거야!

저 인간들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막 그쪽으로 달려가서 전사들을 공격하려고 하는데, 겹눈 가장자리에 뭔가 움직임이 들어왔다.

여자 마법사가 전신에서 희미한 푸른빛을 발하며 일어서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마법사의 피부와 로브에 묻어 있던 내 구속성 산성 용액이 서서히 사라지는 중이었다.

아으!

내버려 두면 저 마법사는 다시 사방에 주문을 날릴 터였다.

나는 아까처럼 무시무시한 칼날에 다시 맞고 싶은 생각이 없었고, 당연하지만 다른 개미들이 그런 주문에 노출되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잠시 고민한 끝에 나는 마법사를 향해 돌아서서 최대한 빠르게 중력 화살을 준비했다.

그리고 앞으로 달려들며 턱으로 마법사를 위협했다.

주문을 사용할 기회를 주면 안돼!

내가 달려드는 모습을 본 마법사가 당황한 표정으로 옆쪽을 흘끗 쳐다봤다.

···뭐지?

나는 어쩐지 상대가 자기 자신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다.

여왕

마법사가 불안하게 눈을 돌리는 모습을 보자···

아까 느꼈던 알 수 없는 열기가 떠올랐다.

열기가 느껴졌던 위치에는 여전히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더듬이 하나가 아직 재생 중인 상황에서도···

수상한 열기는 계속 느껴졌다.

대체 뭐지?

엄청나게 궁금했지만 내게는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빨리 다음 행동을 결정해야 했다.

마법사가 언제 다시 주문을 사용할지 몰랐다.

나는 중력 화살을 준비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방향을 반대로 바꾼 중력 화살이었다.

수백 미터 위의 하늘로 솟아오른 뒤에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지 한 번 보자고!

나는 마법사의 주의를 끌기 위해 턱을 내밀고 앞으로 돌진했다.

그러면서 물어 깨뜨리기 스킬을 발동했다.

내 체력을 총동원해 만든 에너지 턱이 마법사를 공격했다.

전사들은 이 공격에 저항할 수 있을지 몰라도 마법사는 어렵겠지!

아직도 무슨 방어막 같은 게 남아 있지 않다면 말이야.

하지만 놀랍게도 마법사는 지팡이가 동작을 방해하지 않도록 배에 바짝 붙인 채, 민첩하게 몸을 굴려 내 턱을 피했다.

그리고 곧바로 다시 일어서서 나를 공격하기 위해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으악!

마법사의 지팡이 끝에서 만들어진 얼음 창들이 바람을 가르며 내게 날아왔다.

나는 서둘러 앞으로 몸을 날려 가까스로 주문을 피했다.

얼음 창들이 내가 조금 전까지 있던 자리에 부딪혀 산산이 조각났다.

큰일 날 뻔했네!

그나저나 마법사가 내 공격을 피하며 몸을 굴린 결과, 정확히 미지의 열기와 나 사이에 위치하게 됐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저 열기를 보호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내 주의를 끌었을 뿐이다.

마법사가 저 열기를 보호하기 위해 기꺼이 피해를 대신 감당할 작정이라면···

거기서 전투의 승패가 갈릴 수도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방금 내 주문이 완성됐거든!

중력 화살을 받아라, 마법사!

나는 금방이라도 앞으로 달려들 것처럼 자세를 낮췄다가···

마법사의 복부를 향해 역방향 중력 화살을 발사했다!

마법사는 깜짝 놀란 나머지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내 속임수에 넘어가서 돌진에 대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마법 화살이 날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순순히 당해주지는 않았다.

마법사는 재빨리 손목을 돌려, 자신의 지팡이 끝으로 중력 화살을 막았다.

그리고 한껏 집중하는 표정을 짓더니 지팡이와 다른 쪽 손을 이용해서 중력 화살을 밀어냈다.

저런 게 가능한 일이었어?

다행히 주문이 통하지 않을 경우도 미리 염두에 두고 있었던 나는 당황하지 않고 턱을 크게 벌린 채 마법사에게 달려들었다.

물어 깨뜨리기!

혹시라도 내가 날린 중력 화살을 내게 다시 되돌리거나 하는 어이없는 짓에 당하지 않기 위해, 나는 너무 가까이 접근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에너지 턱으로 마법사의 한 쪽 다리를 물었다.

그러자 마법사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쓰러졌다.

마법사가 막고 있던 내 중력 화살은 그대로 날아가 근처의 나무에 박혔다.

중력 화살에 맞은 나무가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갈 듯 뿌리째 뽑히기 시작했다.

지금이 기회다!

나는 재빨리 보이지 않는 열기를 향해 달려갔다.

열기가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움찔하며 뒤로 물러나는 느낌이 들었다.

뭐지?!

뭔가가 붙잡는 느낌에 뒤를 돌아보니, 마법사가 필사적으로 한 손을 내밀어 내 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마법사의 손에서 생겨난 얼음이 다리를 타고 올라와 내 온몸을 뒤덮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끈질겨!

물어 깨뜨리기!

[레벨 46 인간 고위 마법사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1 스킬 포인트를 얻었습니다]

마치 다리가 급속 냉동된 느낌이었다.

내가 계속 열기를 향해 나아가자, 마법사의 주문으로 얼어붙은 다리가 부서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계속 걸음을 옮겼다.

지금은 일분 일초가 중요했다!

내 뒤쪽에서는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타이니와 전사 대장은 여전히 서로를 치고 받는 중이었다.

다행히 타이니가 좀 더 유리해 보였다.

아직 에너지가 완전히 충전되지는 않은 듯했지만, 두 주먹에는 전기가 흐르고 있었다.

타이니는 전기가 흐르는 두 주먹으로 연신 적의 방패를 때렸다.

그때마다 전기 에너지가 방패를 타고 전사의 몸에 전해져 충격을 가했다.

여태까지 버티는 걸 보면 상대의 저항력도 엄청난 것 같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지쳐가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다고 전사 대장이 반격을 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타이니의 온몸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인간 전사는 방패로 공격을 막는 사이사이 날카롭게 검을 휘둘렀다.

칼날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마다 타이니의 몸에서 피가 철철 흘렀다.

하지만 아직 전사보다 타이니 쪽이 훨씬 더 힘이 넘쳤다.

타이니의 커다란 몸집은 이 정도 수준의 부상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아직은 말이다.

타이니가 재생 분비선을 꼭 갖추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의 힘 능력치는 틀림없이 어마어마하겠지만, 강인함 능력치도 마찬가지일지는 의심스러웠다.

방어력이 그렇게 높지 못하다면···

지금처럼 주먹 몇 방으로 적을 쓰러뜨릴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재생 분비선이 큰 도움이 될 터였다.

하지만 지금 가장 걱정되는 건 나머지 인간 전사들과 개미들의 전투였다.

그쪽은 상황이 너무 혼란스러워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부디 잘 싸우고 있어야 할 텐데···!

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눈 앞의 열기가 제발 이 상황을 해결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마법사가 자기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겼던 대상이라면···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더듬이가 계속 재생되면서, 열기가 점점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어렴풋이 인간의 윤곽을 감지할 수 있었다.

나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서둘러 땅을 기어가고 있는···?

그런데 내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투명화?

나는 재빨리 앞으로 몸을 날려 열기의 위에 올라탔다.

그러자 투명 인간이 내 다리 밑에서 무너졌다.

얼굴을 보호하기 위해 손으로 머리를 감싸는 동작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전투에 익숙한 인간은 아닌 것 같았다.

뭔가 의심스럽다는 생각이 내 머리 한 구석을 살살 간질였다.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지금도 내 가족들이 계속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더듬이로 여기 저기를 건드리며 투명 인간의 목 부분을 찾았다.

그리고 인간을 다치게 하지 않으면서 운반할 수 있을 정도로, 턱으로 목을 가볍게 잡았다.

나는 그대로 투명 인간을 바닥에서 들어올렸다.

누군지는 몰라도··· 꽤 가벼웠다.

전장의 소음이 계속 시끄럽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나는 전장을 등진 채 투명 인간을 가볍게 흔들었다.

다행히 투명 인간은 내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한 듯했다.

투명화가 풀리면서, 단순하지만 우아한 로브 차림을 한 노년의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에는 굉장히 값비싸 보이는 왕관을 쓰고 있었다.

몬스터 개미의 턱에 목을 붙잡힌 상황이지만, 여자의 얼굴 표정에서 공포나 분노의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오직 당당한 위엄만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타이니와 맞서 싸우던 전사가 여자를 들어올린 내 모습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그 전사가 절박한 목소리로 뭐라고 소리치자, 모든 인간들이 일제히 내 쪽을 쳐다봤다.

전사는 타이니를 내버려 두고 내 쪽으로 달려왔다.

나는 여자를 그쪽으로 향한 채 턱에 조금 더 힘을 줬다.

지성이 드러나는 내 행동에 당황한 듯, 전사가 동작을 멈추더니 뒤로 물러났다.

타이니가 달려와서 전사를 공격하려 했다.

"모두 물러서! 전투 중지!"

[타이니, 잠깐 물러나 있어!]

내가 페로몬과 펫 커뮤니케이션으로 그렇게 외치자, 개미들과 타이니가 모두 싸움을 멈추고 뒤로 물러섰다.

덕분에 양쪽 모두 숨 돌릴 틈이 생겼다.

인간 전사들은 충격과 공포가 가득한 얼굴로 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볼모로 잡고 있는 이 여자가 저들의 지도자 같았다.

하고 있는 걸 봐서는 아마···

여왕?

하지만 인간의 여왕과 그 부하들이 왜 이 숲에 나타난 거지?!

마침내 여유가 생긴 내가 주위를 둘러보자, 인간들에게 목숨을 잃어버린 수많은 개미들의 시체가 보였다.

형제 자매들의 주검을 보자 가슴 속에 분노가 들끓었다.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나는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여왕의 목을 잘라버릴 수 있었다.

인간들이 그걸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이제 권력은 내 손··· 아니 발톱 안에 있노라!

내 가족이 당한 피해를 목격하자 좀처럼 분노를 다스리기 힘들었다.

셀 수 없이 많은 개미들이 목숨을 잃었고···

여왕 개미도 전사들의 칼날에 적지 않은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복수하리라!

인간 전사들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놈들에게 서로 의논할 시간을 줄 수는 없었다.

자칫 인간들이 우리 여왕을 인질로 잡기라도 하면···

내 손에 들어온 승리의 패가 사라지고 교착 상태에 접어들게 될지도 몰랐다.

나는 공격적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내 턱에 물려 있는 여왕의 두 발이 바닥에 질질 끌렸다.

자신들의 여왕을 험하게 다루는 내 모습에 화가 났는지, 전사들이 무기를 들어올리며 알 수 없는 언어로 나를 향해 소리쳤다.

나는 그에 대한 대답으로 턱을 더 다물었다.

그리고 더듬이로 바닥을 몇 차례 가리키며 요구 사항을 전달했다.

무기를 버려라!

내 몸짓을 이해하지 못한 인간들이 자기들끼리 혼란스러운 눈빛을 교환했다.

몬스터와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해보지도 못했을 테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지능이 높은 몬스터가 가끔 존재하기는 했지만, 지상의 생물과 의사 소통을 하려고 노력하지는 않을 터였다.

그 높은 지능으로 어떻게 하면 상대를 죽일 수 있을까 고민하면 몰라도.

인간들은 현재 상황에 대해 전혀 감을 잡고 있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나는 다시 한 번 턱에 힘을 주며, 더듬이로 계속 바닥을 가리켰다.

무기를 버리라고!

내가 턱에 힘을 줄 때마다 인간들의 얼굴에는 진심 어린 공포가 떠올랐다.

내게 잡혀 있는 여왕이 어떻게 되기라도 할까 봐서 노심초사하는 모습이었다.

이제 이 상황을 긍정적으로 타개할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고 있는 듯했다.

인간들 사이에 몇 마디가 오가더니, 타이니와 싸우던 전사가 나머지에게 뭐라고 소리친 뒤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렸다.

다른 인간들도 주저하며 따라서 엎드렸다.

···

뭐 좋아.

그것도 괜찮지.

[타이니, 놈들의 무기와 방패를 수거해.]

이제 놈들이 엎드려 있으니, 안전하게 무장을 해제해서 위협을 줄이고 상황을 좀 더 통제 하에 놓을 수 있을 터였다.

완벽해.

나 자신의 판단에 감탄하고 있는데, 타이니가 내 명령을 듣고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 보였다.

타이니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그게 뭔데?]

타이니가 물었다.

···

정신 공격

맙소사.

···

아니, 모르는 게 당연한가.

[저놈이 너를 찌르는 데에 사용했던 뾰족한 물건이랑, 네 주먹을 막는 데에 썼던 커다랗고 넓적한 물건을 모두 가지고 와.]

나는 짜증을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차분히 설명했다.

타이니는 엄청 집중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 명령이 녀석의 머리에 제대로 입력되기까지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아, 좀!

마침내 타이니가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천천히 몸을 돌려, 자신과 싸웠던 전사에게 다가갔다.

아마 전사들의 대장 정도 되는 사람 같았다.

타이니는 천천히 몸을 굽혀 초조하게 엎드려 있는 전사의 검을 두꺼운 손가락으로 집어 들더니, 자기가 잘 하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어린아이처럼 내 쪽을 쳐다봤다.

[그래, 그게 무기라는 거야! 잘했어, 타이니!]

내가 칭찬했다.

타이니가 활짝 웃으며 검을 들고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뼈다귀를 물어온 강아지처럼 내 발치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내가 다시 한 번 칭찬하자, 이제 뭘 해야 하는지 알게 된 타이니가 전사들의 장비를 한 번에 하나씩 내 앞으로 가져왔다.

그렇게 무기와 방패를 모두 회수하는 데에만 거의 10분이 걸렸다.

[잘했어, 타이니!]

내가 다소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타이니는 자부심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녀석 영리함 수치가 몇이나 될까···?

인간들의 무장을 모두 해제하고 나자 한결 마음이 놓였다.

저 칼날 아래 얼마나 많은 개미들이 죽었는지···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나는 천천히 인간 여왕을 둥지로 데려갔다.

내 보폭에 맞춰서 여왕이 스스로 걸을 수 있도록 느리게 움직였다.

인간들은 여왕이 자신들로부터 멀어지자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전사 하나가 고개를 들고 내가 어디로 가는지 보려고 하길래, 나는 더듬이를 사납게 흔들어서 놈을 가리켰다.

그러자 놈이 다시 얼굴을 바닥으로 향했다.

둥지에 가까워지자 이 전투가 둥지에 얼마나 큰 피해를 입혔는지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거의 백 마리에 가까운 개미들이 죽었다.

하나같이 인간 전사들이 검에서 쏘아낸 빛의 칼날에 몸이 두 동강난 상태였다.

아직 개미들은 이렇게 레벨이 높은 적과 맞서 싸우기에는 너무 약했다.

전술을 사용할 정도로 영리하지도 않았고, 힘으로 밀어붙일 만큼 강하지도 못했다.

수가 더 많았다면, 그러니까 개미가 천 마리 정도 있었다면···

방어막을 뚫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대로 마법사들이 충분히 오래 버티는 사이 이 전사들이 천 마리를 모두 학살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이대로는 안되겠어!

이번 전투는 레벨이 높은 적을 상대하면, 설사 승리한다 해도 수많은 아군이 희생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줬다.

물론 일반적인 몬스터 개미 둥지라면 일개미들을 희생시켜 승리를 쟁취하는 방식이 전략의 일환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미 둥지의 개미들을 내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그런 이상 그렇게 허무하게 죽게 내버려둘 생각은 없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했다.

[타이니, 너와 싸우던 자를 둥지 안으로 데려와. 그리고 다시 밖으로 나와서 나머지를··· 다 죽여.]

내가 말하자 타이니가 행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그제야 나는 내가 전투에 뛰어들기 전 떨어뜨렸던 꼬마 친구들이 떠올랐다.

가엾은 크리니스!

앞도 못 보는 녀석인데!

[크리니스! 크리니스! 어디 있니?!]

내가 펫 커뮤니케이션 스킬로 미친듯이 외쳤다.

그렇게 인간 여왕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다 보니, 수풀 속에서 작은 움직임이 느껴졌다.

잽싸게 달려가자 풀 위로 삐죽이 나와 있는 촉수가 눈에 띄었다.

여기 있었구나!

나는 크리니스가 잡고 올라올 수 있도록 한쪽 다리를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나야! 타고 올라와!]

크리니스는 내 다리를 타고 올라와서 등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근처의 나무 뒤에서 나타난 바이브도 잽싸게 머리 위로 올라왔다.

꼬마들을 챙긴 나는 인간 여왕을 내리고 다시 대학살의 현장으로 이동했다.

자기 아이들의 시체에 둘러싸여 있는 여왕 개미는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일개미들이 그 주위로 서둘러 모여들었다.

어쩔 줄 모르며 앞뒤로 움직이는 개미들의 모습에서 걱정과 불안감이 느껴졌다.

인간 여왕은 여왕 개미처럼 거대한 몬스터 가까이 다가가자 눈에 띄게 불편해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문제를 일으킨 건 바로 이 여자의 부하들이니 동정의 여지가 없었다.

만약 이 여자가 '진짜' 여왕을 해치려 들기라도 하면, 곧바로 후회하게 만들어줄 작정이었다.

"어머니! 괜찮으세요?"

내가 외쳤다.

사실 나는 여왕 개미가 이렇게 심하게 다쳤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언제나 무적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칠지도 모른다고 걱정을 하기는 했지만,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토록 단단하던 여왕의 갑각 여기저기 인간들의 칼날에 맞아서 생긴 자국이 보였다.

온몸에 상처가 가득했고, 그 중 몇 군데는 상당히 위험해 보였다.

"나는··· 괜찮을 거란다."

여왕이 애써 평소처럼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스스로 치유가 가능하세요? 마법으로요!"

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여왕은 잠시 대답하지 않고, 커다란 몸을 들썩이며 숨을 쉬었다.

"힘이··· 없구나."

여왕이 대답했다.

힘이 없다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주문을 쓸 정도의 정신력도 남아있지 않다는 말씀인가?

아니면 마나가 부족한 건가?

정말 심각한 상황이잖아!

걱정스러운 마음이 점점 커졌다.

나는 더듬이로 여왕의 몸에 난 상처들을 살폈다.

개미의 본능이 이성을 앞서고 있었다.

이런 세상에!

상처들 중 하나가 너무 깊었다.

목 부분의 갑각을 뚫고 들어간 커다란 상처였다.

상처의 틈 사이로 뭔가 빛나는 게 보였다.

설마···

코어인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조금만 옆을 맞았다면··· 코어를 다쳤을 터였다.

코어를 다치는 건 치명적이었다.

몇 센티미터 차이로 여왕 개미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나는 충격에 휩싸인 채, 마나 감지를 활성화해서 여왕의 코어를 살폈다.

눈부시게 빛나야 할 코어가 침침한 색으로 변해 있었다.

왜 여왕의 코어가 이렇게 약한 거지?

마나와 에너지로 가득해야 하지 않나?

그래서 지금 이렇게 힘이 없으신 건가?

코어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야?

나는 어떻게든 도움이 되려고 내 코어에서 마나를 끌어내 여왕의 코어로 보냈다.

이렇게 하면 되는 건지 확신이 없는 상태로 남아 있는 마나를 모두 여왕의 코어에 보낸 뒤, 나는 다시 한 번 마나 감지를 활성화해 달라진 점이 있는지 살폈다.

···조금 나아졌나?

확실히 아까보다는 생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정도 마나로는 여왕의 커다란 코어를 채우기 역부족인 듯했다.

"여왕님을 농장으로 모시고 가!"

나는 근처에 있는 개미들이 모두 들을 수 있도록 크게 소리쳤다.

"먼저 가서 몬스터를 전부 처리한 다음, 어머니를 안으로 모시고 가서 보호해!"

마나가 더 필요한 거라면 마나 줄기가 있는 농장으로 모시고 가는 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충분히 많은 일개미들이 호위하면 스폰되는 몬스터들이 여왕을 해치는 일도 없을 터였다.

"최대한 빨리 스스로를 치유하셔야 해요! 지금 부상이 아주 심각해요!"

나는 여왕이 자기 자신보다 다친 아이들을 먼저 치료하려 할까봐 걱정이 돼서 그렇게 말했다.

언제나 가족이 우선인 분이었으니까 말이다.

여왕은 느린 속도로 힘겹게 농장을 향해 움직였다.

둥지의 거의 절반이 여왕을 따라갔다.

일부 개미들은 여왕의 아래에서 등으로 몸을 받치며 제대로 걸을 수 있도록 도왔다.

나는 그 모습을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나도 따라가고 싶지만, 다른 할 일이 있었다.

부디 형제 자매들이 어머니를 잘 보살피기를 바랄 수밖에···

타이니는 나머지 인간들을 전부 죽이라는 내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전장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자기와 싸웠던 전사는 이미 개미 언덕 위에 옮겨 놓은 뒤였다.

몇 마리의 일개미들이 둘러싸고 더듬이로 여기저기 두드리거나 턱으로 건드려도 전사는 움직이지 않고 엎드려 있었다.

"못 움직이게 잘 감시해."

나는 인간 여왕을 개미 언덕 꼭대기의 입구로 데려가면서 일개미들에게 단단히 일렀다.

이제 인간 여왕을 어떻게 둥지 안으로 데려갈지가 문제인데···

나는 고개를 살짝 들어서 여왕이 까치발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그러자 여왕은 두 손으로 내 턱을 잡았다.

이렇게 하면 목 대신 팔로 자기 몸무게를 지탱하게 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상태로 천천히 수직 통로를 내려갔다.

다행히 내 방은 입구 근처라 오래지 않아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턱을 벌려서 방 안에 인간 여왕을 내려놓았다.

그 순간, 머리 속에 엄청난 충격이 전해졌다.

마치 거대 악어가 내 뇌를 직접 후려치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턱을 악물고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방금 그건 뭐였지?

꽝!

또다시 뭔가가 내 머리 속을 강타했다.

마치 실제로 얻어맞은 것처럼 내 몸이 흔들렸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물리적인 공격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뭔가가 내 정신을 공격하고 있었다!

어둠이 내 머리 속에 드리웠지만, 나는 의식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이 정도로는 날 쓰러뜨릴 수 없어!

누구의 짓인지는 뻔했다.

인간 여왕이 바닥에 주저 앉은 채, 관자놀이에 손을 대고 나를 사납게 노려보고 있었다.

난 굴복하지 않는다!

어머니 여왕이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로 기어가던 모습을 봤을 때 느꼈던 분노가 내 가슴 속에서 폭발하며 어지러움을 태워버렸다.

빌어먹을 인간들은 오늘 수많은 형제 자매들을 죽였다.

그리고 이제 나까지 죽이겠다고?

나는 앞으로 나아가며 턱을 크게 벌리고 인간 여왕을 위협했다.

하지만 턱을 다물기도 전에 보이지 않는 힘이 머리 속을 다시 한 번 공격했다.

이번에는 망치가 아니라 드릴이었다!

날카롭고 지속적인 통증이 계속되며, 내 방어를 무너뜨리고 의식을 침범하려 드는 게 느껴졌다.

이게 어떤 종류의 공격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불쾌했다.

제기랄 여왕 개미에게 마나를 보내느라 코어가 완전히 비어 있는 상태만 아니라도, 마나를 이용해서 어떻게 막아낼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분노를 연료 삼아 고통을 견디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공격이 계속될수록 고통이 점점 심해졌고, 내 의식이 멀어져 갔다.

이제 눈 앞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너무 고통스럽다 보니 시야가 온통 하얗게 변했다.

나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마나 감지를 활성화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인간 여왕과 나 사이에 빛나는 마나의 끈이 이어져 있었다.

내 쪽을 향하는 마나의 끝은 바늘처럼 뾰족했다.

정신 마법이로군!

나는 여왕의 마법을 밀어내기 위해 애썼다.

여왕이 공격에 성공한다면 얼마나 무서운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나를 그냥 죽일 수도 있지만···

내 정신을 조종할지도 모르니까.

정신 마법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었다.

으아, 진짜 아프잖아!

내 머리 속에서는 계속해서 싸움이 벌어졌다.

이 고통이 영영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정신이 산산이 부서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나를 공격하던 모든 힘이 사라졌다.

시야가 돌아오자 놀란 얼굴로 쓰러져 있는 인간 여왕이 보였다.

작은 개미 한 마리가 여왕의 발목을 물고 있었다.

바이브였다!

불길

여왕은 나만큼이나 싸움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바이브에게 물리자, 집중력을 잃고 한 순간 공격을 멈췄다.

지금이 기회다!

나는 턱을 크게 벌리고 치명적인 일격을 날리기 위해 여왕에게 다가갔다.

원래는 인간의 여왕을 살려두려 했었다.

첫째로는 보복이 두려워서.

만약 우리가 인간들의 여왕을 죽인 무리로 낙인이 찍히거나, 사람들이 여왕의 흔적을 추적해서 우리를 발견하기라도 하면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최소한 다른 곳으로 도망쳐서 새로운 둥지를 만들어야 할 텐데,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둘째로는 정보가 필요해서였다.

이번 기회에 정신 마법 스킬의 레벨을 올린 뒤, 여왕을 안전하게 풀어주는 대가로 이 세계와 주변의 환경에 대한 정보를 얻을 계획이었다.

정보 획득은 나한테는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인간 하나를 포로로 삼아서 얻을 수 있는 지상 세계에 대한 지식은 내게 보물과도 같았다.

도시들의 위치, 문화, 던전, 마법, 무기를 이용한 스킬 등등···

알고 싶은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정보가 곧 힘이다!

운 좋게 심문할 수 있는 인간이 생겼는데 그 기회를 놓치기는 싫었다.

하지만 그 인간이 정신 마법을 사용한다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마법으로 다른 개체의 정신을 지배하면 어떤 일까지 가능할지 누가 알겠는가!

적어도 나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너무 위험했다.

일단 숨통을 끊어 놓고···

여파는 나중에 고민하는 편이 나았다.

정보는 위에 잡아 놓은 인간 전사로부터 캐낼 수도 있을 테니까.

물론 자기가 섬기는 여왕을 죽인 개미에게 순순히 정보를 내주지는 않을 것 같지만 말이다.

[잠깐, 몬스터!]

그때 절박한 목소리가 내 머리 속에 울렸다.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내 턱이 여왕의 목을 자르기 직전이었다.

여기서 턱만 다물면 끝이었다.

···좀 어색한 순간이로군.

인간 여왕과 나는 서로를 응시했다.

마나 감지를 통해, 여왕이 소포스 포르모가 나와 소통하기 위해 만들었던 것과 비슷한 연결 고리를 서둘러 만들고 있는 걸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포르모의 연결 고리가 금실로 정교하고 섬세하게 짠 느낌이라면···

여왕이 만들고 있는 고리는 마치 양말을 꿰매는 것처럼 조악한 솜씨였다.

하긴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서 사용하는 마법이니 당연할지도 몰랐다.

제대로 양방향 소통이 가능한 고리를 만들어 내기만 바랄 수밖에.

···하지만 내가 뭐라고 해야 하지?

이 인간은 경의와 존중에 익숙한 지배자였다.

그러니 제대로 의사 소통을 하려면 나 역시 예의를 차려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동시에 내 머리 속을 찌르려고 했던 적이기도 하니까, 지나치게 공손할 필요는 없겠지.

[말해라! 아니면 죽던가!]

좋아.

이 정도면 아주 균형 잡힌 대응인 듯했다.

무시무시한 던전 몬스터와 마주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여왕은 비교적 침착한 태도를 유지했다.

하지만 내 목소리가 머리 속에 울리자 깜짝 놀라더니 한동안 다음 말을 골랐다.

[어떻게 내 말을 이해하는 거지?]

마침내 여왕이 놀랍다는 듯 그렇게 물었다.

···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내가 과거에는 인간이었다고?

이 육체로 환생해서 최선을 다해 몬스터 개미의 삶을 살아가는 중이라고?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지도 모르면서 말을 걸었다는 건가?]

[네가 내 정신 칼날에 저항하는 걸 보고, 몬스터가 그렇게 강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다니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어차피 곧 목이 잘릴 상황이라 말을 한 번 걸어봤다.]

그럴 만도 하지.

아마 대부분의 몬스터들은 그런 정신 공격을 버티지 못할 터였다.

사실 나도 엄밀히 따지면 저항에 성공한 건 아니었다.

바이브가 나를 구해주기 전까지 겨우 버티고 있었을 뿐이지.

바이브는 여전히 여왕의 발목 근처를 지키고 앉아서 위협적으로 턱을 흔들고 있었다.

내가 곧장 여왕을 죽이지 않아서 불만인 듯했다.

흠···

어쨌든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 텐데.

오랜만에 인간과 대화를 하려니 어렵군.

어쨌든 최대한 예의를 지키도록 해보자.

[내가 왜 널 살려둬야 하지?]

잘했어.

여왕은 내 말에 또다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한참 지나서야 대답했다.

[너희가 원하는 게 뭐지?]

하!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을 하시겠다?

하기는 몬스터 개미 둥지가 살아 있는 인간 여왕에게 뭘 원하는지 궁금하기는 하겠지.

[너희들은 내 가족을 공격했고, 여왕님을 다치게 했다. 그리고 백 마리도 넘는 내 형제 자매들을 죽였지. 우선 이 침략 행위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다.]

너무 강압적으로 들리지는 않았겠지?

전생에서도 사람들과 대화하는 일은 늘 어려웠다.

그래도 어찌어찌 적당한 말투를 선택한 듯했다.

[나와 내 부하들은··· 도시를 탈출하는 길이었다.]

인간 여왕이 내가 교회 언덕에서 봤던 도시가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그러다가 네··· 형제 자매들과 우연히 마주쳤지. 처음에는 한 마리였지만 계속 나아가니 더 많은 수가 있더군.]

그리고 너희는 전투를 시작해서 수많은 개미들을 죽였지!

그냥 물러나서 다른 길로 갔다면 이런 상황도 없었을 것 아냐!

[개미들은 자신의 집과 가족을 지키려 했을 뿐이다. 너희가 저지른 죄의 대가로 두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처형했다. 하나 남아 있는 네 부하와 함께 살아서 인간들에게 돌아가고 싶다면 순순히 내 질문에 대답해야 할 거다.]

[···무슨 질문 말이지?]

오, 엄청나게 많은 질문들이 있지.

그렇게 기나긴 심문이 시작됐다.

+

마을에는 열광적인 분위기가 가득했다.

베인이 주민들을 이끌고 위협적인 몬스터 개미의 침략을 멋지게 물리친 뒤로 며칠이 지났다.

그 사이 마을 사람들의 가슴 속에는 전에 없던 불꽃이 뜨겁게 타올랐다.

이야기는 사람들의 입을 거칠수록 점점 과장돼서, 한 마리의 개미가 다섯 마리, 다시 쉰 마리로 늘었다.

주민들은 순수한 영혼으로 사악한 주문을 이겨냈다.

신실한 마음과 무기의 힘으로 승리를 쟁취한 것이다.

마치 대격변 당시의 전설적인 던전 탐험가들처럼 말이다!

다음날이 되자 소문은 말게이트 마을 인근의 다른 촌락과 농장들까지 퍼져 나갔다.

'길'의 교회에 던전이 열렸다.

그 안에서 나온 몬스터는 주민들을 해치지 않았다.

이는 분명 마을이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계시였다!

마을 주민들에게 던전은 특별한 장소였다.

도시 밖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던전 입구도 구경해본 적이 없었다.

퇴역 군인이나 은퇴한 용병이 아닌 이상 직접 던전에 들어가본 경우는 더욱 찾기 어려웠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던전 몬스터는 신화나 전설 속의 존재와도 같았다.

지상의 몬스터보다 훨씬 더 사납고, 강하고, 영리한 괴물들!

농부와 상인들에게 던전에서 나는 자원들은 금이나 다이아몬드만큼 귀했다.

평생 만져볼 일이 없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수도 인근의 작은 마을에서 던전이 열렸다고?

마을 주민들이 던전 몬스터와 싸워서 이겼다고?

경험치를 얻고 레벨이 오른 사람들은 삶이 바뀌었다.

그야말로 신의 선물이 확실했다!

시스템의 신 말이다!

개미들을 상대로 승리한 다음날 아침, 첫 번째 순례 행렬이 말게이트를 방문했다.

밤에는 더 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와 마을의 여관을 가득 채웠다.

더 이상 남는 방이 없자, 사람들은 마을 밖에 천막을 치거나 나무 아래 잠자리를 꾸렸다.

어린아이, 노인, 농부와 상인···

모두가 낡은 무기나 심지어 농기구를 한 쪽 어깨에 걸치고 속속 마을에 도착했다.

하나같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지친 모습이지만, 눈에는 믿음의 빛이 가득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중심에 베인이 있었다.

결코 포기를 모르는 사내였다.

이 사제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사람들에게 설교를 했다.

베인의 몸짓은 강렬했고, 걸음걸이는 단호했다.

목소리는 절대 흔들리는 일이 없었다.

사제는 군중에게 활기를 불어넣으며, 신의 뜻이 가진 정당성을 전달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베인을 보는 사람들의 눈빛은 더욱 깊고 열정적인 경의로 가득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던전 몬스터들과의 싸움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몬스터들은 마치 지옥에서 올라오는 악마처럼 하나 둘 성당의 구멍으로 기어 나왔다.

던전 몬스터를 상대로 한 전투는 마을 주민들에게 풍부한 경험치를 안겨줬다.

그들에게 구멍에서 나오는 몬스터들은 악마가 아니라 따끈따끈한 식사와도 같았다.

던전 몬스터들은 지상의 사냥감보다 훨씬 많은 경험치를 주기 때문에, 싸움에 나섰던 마을 주민은 전투 스킬을 올리고 클래스를 바꿀 수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꿈조차 꾸기 어려운 기회였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세요, 루서 부인.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으신가요?"

에니드 루서는 얼굴을 찌푸리며 어린 하녀를 돌아봤다.

일은 부지런히 잘 했지만, 그리 영리한 아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말게이트 같이 작은 마을에서 더 나은 하녀를 찾기도 어려웠다.

갑자기 어떤 생각이 에니드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릴리, 요즘 네가 어울리는 그 청년 이름이 뭐였지?"

하녀 릴리는 얼굴을 붉히며 한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건 왜요, 루서 부인? 버톤과 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둘이 무슨 사이건 에니드가 알 바는 아니었다.

"버톤도 요즘 그 교회 무리와 어울리니?"

그러자 릴리가 존경심으로 눈을 빛내며 말했다.

"'던전이 선택한 자들' 말씀이세요?"

"뭐라고?"

에니드가 다시 묻자, 릴리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모르셨어요? 베인 사제님이 오늘 아침 그 이름을 말씀하셨어요. 이제 마을 사람들 모두가 그렇게 부른답니다."

에니드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멍청한 하녀를 한참 쳐다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이제 마을 주민 몇 명이 전설적인 던전의 용사들이 되었다 이거지?

데리온이 살아 있었다면 이걸 보고 뭐라고 했을까?

죽은 남편을 떠올리자, 늘 그렇듯이 마음 속에 슬픔이 차올랐다.

에니드는 수다스럽게 떠드는 하녀를 뒤로 하고 서재 뒤쪽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갑옷과 낡아빠진 수련용 검이 보관대에 놓여 있었다.

데리온은 저 수련용 검을 던전을 탐험할 때 쓰는 값비싼 마법 무기보다 더욱 소중히 여겼다.

용병 일을 그만 두고 은퇴하던 날, 데리온은 전투용 마법 무기를 팔고 대신 저 훈련용 검을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진열했다.

에니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남편이 은퇴한 직후가 살면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에니드는 도시의 사업을 접고 데리온의 고향인 말게이트로 와서 가게를 열었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조용한 은퇴 생활을 즐겼다.

5년 뒤, 데리온은 세상을 떠났다.

"저 사람들이 내게 귀를 기울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데리온?"

에니드가 남편의 갑옷에 대고 속삭였다.

"나처럼 늙은 여자의 말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을 텐데."

한창 때의 데리온은 아주 우수한 용병이었다.

검술을 꾸준히 연마한 끝에 "전문 검객" 클래스에 올랐을 정도였다.

던전 탐험을 나설 때면 추가 수당까지 받았다.

그래서 데리온이 던전에 대해 말하면 누구도 감히 토를 달지 못했다.

오랜 세월 우수한 용병과 결혼 생활을 했던 에니드도 강력한 던전의 몬스터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데리온과 에니드는 늘 서로를 존중했기 때문에, 남편은 자신의 일에 대해서도 숨김없이 말했다.

덕분에 에니드는 데리온이 던전 안에서 겪었던 위험과 마주쳤던 무시무시한 몬스터들을 잘 알고 있었다.

반면에 이 마을의 농부들은 던전 안에 얼마나 끔찍한 세계가 펼쳐져 있는지 전혀 몰랐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겠지만···

에니드처럼 직접 경험한 사람에게 듣는 것과는 한참 달랐다.

교회에 개미들이 나타났을 때, 에니드는 이제 모두가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개미들은 사제의 부상을 치료하더니, 남아 있는 사람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숲 속으로 들어갔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던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에니드로서도 그런 행동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어리석은 마을 주민들이 그 개미들과 맞서 싸우려고 하거나, 던전 깊이 들어가려고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확실히 알았다.

전부 목숨을 잃고 말 터였다.

에니드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가능하면 이웃들을 돕고 싶었다.

하지만 주민들의 눈에 가득 어린 광기를 보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자신들의 믿음에 어긋나는 말을 하면, 과연 에니드에게 어떤 화살이 날아올까?

사람들은 에니드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터였다.

에니드는 용병의 아내였을 뿐인 상인에 불과했다.

비록 "번창한 상인" 클래스까지 오르기는 했어도···

그걸로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에니드는 단단한 가죽으로 만든 갑옷에 남아 있는 흠집들을 손으로 훑었다.

던전에서 벌어진 수많은 전투의 흔적이었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는···

불가능한 도전을 해야 했다.

대화

바이브는 아주 배가 고팠다.

바이브가 이상하게 생긴 분홍색 괴물의 발목을 깨문 뒤로···

선배 개미와 분홍색 괴물은 서로를 쳐다보면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뭔지는 잘 몰라도 둘 사이에 뭔가가 일어나고 있는 건 확실했다.

어쩐지 강한 선배 개미와 저 분홍색 괴물이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데, 바이브가 낄 자리는 없어 보였다.

그래서 바이브는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선배 개미의 갑각을 턱으로 물어봤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오히려 바이브의 얼굴 근육이 아플 뿐이었다.

이 선배는 어떻게 이렇게 강해진 걸까?

바이브는 애벌레일 때부터, 이 선배 개미가 뭔가 다르다는 걸··· 특별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따라다니며 배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쨌든 지금은 지겨웠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계속 이 상태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바이브는 다른 동료와 놀기 위해 선배 개미의 등 위로 기어 올라갔다.

촉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이 없는 크리니스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주위는 온통 고요해서 그녀가 감지할 수 있는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하지만 주인님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은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의 성장 단계에서 크리니스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크리니스는 주인님과 자신의 의식을 연결하는 빛나는 실을 장난스럽게 잡아당겼다.

이 실을 통해서 주인님의 위치나 거리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었다.

가끔씩 주인님이 말을 걸면, 그 내용도 이 실로 전해졌다.

크리니스도 실을 통해 대답을 할 수 있지만···

여태까지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몇 번은 망설이기도 했지만 그다지 중요한 말할 거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단계에서는 최대한 많이 먹고, 어서 주인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성체로 자라는 일이 가장 중요했다.

그런데 갑자기 뭔가가 그녀의 촉수를 잡아당기는 감각이 느껴졌다.

뭐지?

크리니스는 반사적으로 몸에서 촉수 두 개를 뻗어 앞으로 휘둘렀다.

하지만 지금 단계의 촉수는 약하고 부드러워서 거의 힘이 없었다.

상대가 촉수를 맞고도 끄덕 없자 크리니스는 조금 의기소침해졌다.

한편 바이브는 크리니스의 반응을 개의치 않았다.

오래 전부터 자기가 뭘 해도 이 공 모양 친구는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은 개미는 계속 다리로 크리니스를 쿡쿡 찌르며, 자신의 등에 달라붙기를 기다렸다.

왜냐고?

바이브의 생각에 자기와 이 공 친구는 늘 가까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계속 붙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몬스터들의 세계에 인간들이 말하는 '우정'의 개념은 없었다.

하지만 동료 의식이나 편안함은 다른 종족끼리도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다.

크리니스는 곧 뭐가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지 깨닫고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틈날 때마다 크리니스를 귀찮게 하는 생물이었다.

크리니스는 바이브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때까지 그만두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주인님이 대체 왜 이런 귀찮은 녀석을 태우고 다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짜증을 내서 무엇하랴?

몇 분 더 끈질기게 찔러 댄 끝에, 바이브란트는 마침내 원하던 바를 이뤘다.

크리니스가 촉수를 뻗어 천천히 자신의 등으로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어우!

바이브는 갑자기 짜증이 났다.

이 공 녀석은 언제 이렇게 커진 거지?

나는 아직 이렇게 작은데?

바이브는 지혜로운 선배 개미가 변이에 대해 해준 말을 떠올렸다.

식사를 할 때마다 들리는 '목소리' 덕분에 바이오매스와 변이의 개념에 대해서는 대충 감을 잡은 상태였다.

바이오매스를 아무렇게나 쓰고 싶은 본능이 수시로 느껴졌지만, 그때마다 선배 개미가 해준 이야기가 떠올라서 참았다.

그래서 여태까지 변이를 거의 하지 못한 상태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바이브는 선배 개미와 대화를 하고 싶어졌다.

물어보고 싶은 것도 너무 많았다.

아마 조금만 기다리면 모아 놓은 바이오매스로 페로몬 언어를 구입해서 그럴 수 있게 될 터였다.

어쨌든 바이브는 크리니스를 등에 태우고 출발했다.

둥지를 떠나서 숲 속으로!

바이브는 신이 났지만, 크리니스는 그 반대였다.

지금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자신과 비슷한 존재가 점점 더 가까워지는 감각이 어렴풋이 느껴지자 마음을 놓았다.

주인님 만큼은 아니지만, 어쩐지 동질감이 느껴지는 몬스터가 하나 있었다.

지금 그 몬스터가 바로 근처에 있는 게 느껴졌다.

바이브도 선배 개미를 따라다니던 그 커다란 몬스터를 한 눈에 알아봤다.

지금 그 몬스터는 방 안에 있던 분홍색 괴물과 비슷하게 생긴 놈을 깔고 앉아 있었다.

몸집이 훨씬 큰 몬스터에게 깔린 분홍색 괴물은 굉장히 불편해 보였지만, 바이브는 전혀 동정심을 느끼지 못했다.

바이브는 분홍색 괴물에게 다가가 턱으로 생물의 손을 깨물었다.

얍!

그러자 분홍색 괴물이 작은 개미를 손으로 휙 밀쳤다.

뒤로 넘어진 바이브는 화가 나서 턱을 앙 다물었다.

커다란 몬스터가 주먹을 휘둘러 분홍색 괴물을 때리자, 놈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냈다.

바이브란트는 신이 났다.

그것 봐라!

작은 개미는 턱을 다물고 더듬이를 사납게 흔들며 분홍색 괴물 앞에서 으스댔다.

이제 누가 더 위인지 확실히 알았겠지!

크리니스는 이런 갑작스러운 움직임이 아주 불편했다.

덩어리 괴물은 촉수 몇 개를 더 꺼내서 바이브의 등을 꽉 잡았다.

갑자기 왜 이렇게 날뛰는 거야?

하지만 다음 순간, 크리니스와 바이브는 둘 다 바이오매스의 향기에 정신을 빼앗겼다.

어디서 나는 거지?

피부를 통해 음식의 위치가 느껴졌다.

크리니스는 촉수 몇 개를 더 꺼내서 미친 듯이 흔들었다.

배고파!

바이브도 커다란 몬스터가 한 손에 뭔가를 들고 쩝쩝거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바이오매스다!

바이브는 잽싸게 몬스터의 몸을 타고 올라가 눈을 똑바로 마주 봤다.

그리고 더듬이로 열심히 몬스터의 손에 있는 음식을 가리켰다.

커다란 몬스터가 두 꼬마의 요구를 이해하는 데에는 시간이 한참 걸렸다.

마침내 이해한 커다란 몬스터는 손을 뻗어 한쪽 방향을 가리켰고, 바이브는 열심히 그쪽으로 달렸다.

도착한 곳에는 바이오매스가 잔뜩 쌓여 있었다.

일개미들 몇 마리가 바이오매스를 둥지 안으로 운반하는 중이었다.

먹을 거다!

바이브와 크리니스는 모두 엄청 신이 났다.

크리니스는 속으로 환호하며 개미의 등을 감싸고 있던 촉수를 풀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먹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바이브도 기쁘게 공 친구를 땅에 내려 놓고, 더듬이를 이용해서 먹이가 있는 방향으로 인도했다.

그런 다음 본인도 식사를 시작했다.

[새로운 바이오매스의 원천을 섭취했습니다: 인간. 1 바이오매스를 얻었습니다.]

[인간의 기초 정보가 잠금 해제되었습니다.]

맛있어!

두 몬스터는 배불리 바이오매스를 먹었다.

식사를 마친 바이브는 크리니스를 등에 업고 천천히 둥지로 돌아갔다.

+

나는 몇 시간 동안이나 여왕을 심문했다.

심문을 통해 알게 된 정보들은 정말이지 놀라웠다.

계속 정신 마법으로 의사소통을 하느라 머리가 아팠지만 나는 가능한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 늙은 여자가 언제 심장마비로 쓰러질지 모르기 때문에 일분 일초가 소중했다.

심문이 끝날 때쯤에는 나와 인간 여왕 둘 다 지칠 대로 지친 상태가 되었다.

이 살인··· 살충마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 같은 질문을 다양한 방식으로 반복하며 유도 심문을 하기도 했다.

이제 고작 두 번째지만, 정신 마법을 사용해서 소통을 할 때에는 어렴풋이 상대의 생각이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연결 고리의 수준이 얼마나 정교한지가 변수인 것 같기는 했다.

포르모의 정직한 마음은 그가 말하는 내내 청명한 종처럼 울렸다.

그 연결 고리에서는 어떤 속임수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 여왕이 만든 연결 고리는 그만큼 선명하거나 뚜렷하지 못했다.

단어나 의도가 뒤죽박죽이 되거나 제대로 해석되지 않는 경우이 많다 보니, 그만큼 집중해야 했다.

일단 여왕이 일부러 내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른 한 명의 인간도 심문해 보기 전까지는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기는 해도···

새롭게 알아낸 사실이 엄청나게 많았다.

먼저 인간 여왕의 상황부터.

여왕은 (자기 말로는) 백성들의 인정과 존경을 받으며 '리리아'라는 작은 왕국을 30년 동안이나 평화와 번영 속에 통치해 왔다.

그러다가 바로 얼마 전···

이익, 부패한 상인들, 외부 세력과 관련된 반역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사실 이 부분은 그렇게 열심히 듣지 않아서, 대충 그런 식이었다는 정도만 파악했다.

어쨌든 여왕은 상황을 알아차리고 일부러 역도들이 정체를 드러내도록 유인했지만, 상대의 세력을 과소평가한 것이 화근이었다.

결국 여왕에게 충성을 바치는 신하들은 패배했고, 여왕 본인은 몇 안되는 호위와 함께 야밤을 틈타 도시를 탈출해야 했다.

그러다 개미 둥지와 마주친 것이다.

아무래도 여왕은 자기가 생각하는 것만큼 현명하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운이 더럽게 나쁘거나···

어쨌든 본인의 사연을 들려준 여왕은 이어서 클래스를 기반으로 한 지상 종족들의 레벨 시스템을 설명했다.

..아쉽지만 여왕도 엘프를 직접 본 적은 없다고 했다.

그 다음으로는 왕국의 역사에 대해서 말해줬다.

리리아는 채 200년도 안 된 신생 왕국이었다.

이 지역에는 오랜 세월 몬스터가 창궐했는데, 비교적 최근에 들어서야 (여왕의 표현에 따르자면) 정화에 성공했다.

때문에 이 근처는 여전히 '개발 도상' 지역에 속했다.

여기서 남쪽으로 며칠 거리에는 지난 수천 년 동안 인간이 살지 않았던 땅이 나왔다.

지금까지도 리리아 왕국은 때때로 남쪽에서 넘어오는 몬스터들을 물리치기 위해 군사 작전을 벌인다고 했다.

그럼 지상에도 강한 몬스터가 있기는 한가 보군.

난 또 지상의 몬스터들은 하나같이 약해 빠진 줄 알았지···

심문을 마친 나는 여왕을 방에 두고 나와서, 새로 알게 된 사실들을 정리하려고 애썼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였다.

리리아 왕국의 백성들이 사랑하는 여왕 폐하께서는 내 방에 갇혀 있고, 그 분의 호위 대장은···

···내 펫의 엉덩이에 깔려 있으니 말이다.

타이니가 깔고 앉아 있는 대장은 한 눈에도 괴로워 보였다.

저건···

크리니스랑 바이브잖아?

두 꼬마가 대장의 얼굴 근처에서 장난을 치는 중이었다.

바이브는 턱으로 코를 깨물려 들었고, 크리니스는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촉수로 머리를 계속 때리고 있었다.

이 녀석들이 언제 여기까지 올라온 거지...

["너희 둘 당장 그만하지 못해!"]

내가 소리쳤다.

내가 나온 줄 몰랐던 두 어린 몬스터들이 깜짝 놀라서 몸을 움찔했다.

크리니스는 공처럼 생긴 주제에 마치 반성하는 자세를 보이는 것처럼 촉수를 몸통으로 쑥 집어넣었다.

하지만 바이브는 내가 화를 내거나 말거나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신나서 내 등 위로 올라왔다.

나는 크리니스를 등에 올리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타이니에게 이 인간을 죽이지 말라고 당부했다.

앞으로 한동안 포로로 필요할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왜?

포로로 뭘 하려고?

생각하자!

사로잡은 인간들을 어떻게 해야 가장 잘 활용할 수 있을까?

위험과 보상

그냥 여왕과 호위 대장을 모두 죽여버리고 그대로 잊어버릴 수도 있었다.

···

기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