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13

아직은 전생의 인간성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는지, 두 사람을 죽이는 일이 그리 내키지 않았다.

둥지를 지키기 위해 싸울 때, 그리고 전투 직후에는 본능적인 분노에 사로잡혀 복수로 인간들을 죽였지만···

시간이 지나고 머리가 식자 어쩐지 거리낌이 느껴졌다.

게다가 우리가 여왕을 죽인 일을 인간들이 알게 되면 보복하려 들 수도 있었다.

여왕과 호위 대장을 인근 마을로 보내주는 방안도 있었다.

사실 이 선택지는 꽤 마음에 들었다.

마음의 부담 없이 인간들로부터 손을 털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인간 여왕이 지금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 협조적으로 나올지 몰라도, 차후 병력을 모아서 우리를 제거하러 올지도 모른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런 사태를 예방하려면 둥지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다.

어쩌면 다시 던전으로 내려가야 할지도 몰랐다.

아무래도 최선의 선택지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럼 세 번째 선택지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왕과 호위 대장을 당분간 포로로 데리고 있는 방안이었다.

죽이지도, 놓아주지도 않고 말이다.

···이건 너무 위험했다.

여왕은 언제든 정신 마법으로 나를 공격할 수 있었다.

게다가 교활한 인간 둘이 둥지 안에서 무슨 짓을 꾸밀지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여왕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 말을 들을 때에는 무시하고 말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고려해볼 만한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심문을 마치면서, 나는 인간 여왕에게 그렇게 물었다.

여왕은 잠시 생각하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내 도시를 되찾아야지. 탐욕과 자만으로 움직이는 자들에게 왕위를 넘겨줄 수는 없어. 내 깃발 아래 사람들을 모아서 역도들을 몰아내기 위한 싸움에 나설 생각이다.]

굉장히 적극적인 계획이로군.

[그건 내가 당신을 산 채로 풀어줘야 가능한 일일 텐데.]

내가 지적했다.

[그렇지.]

여왕이 킬킬대며 웃었다.

[하지만 나를 죽인다고 해서 네가 얻는 건 없지 않나? 오히려 나를 살려 두면 무슨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넌 뭘 원하지? 아마 뭔가 내가 줄 수 있는 게 있을 텐데?]

흐으음.

그럼 너희가 죽인 일개미 2백 마리를 다시 살려내는 건 어때, 응?

하지만 그런 말은 분풀이에 불과하겠지.

[바이오매스, 경험치, 몬스터 코어. 둥지가 필요로 하는 건 그 세 가지 뿐이야.]

내가 대답하자 여왕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글쎄, 내 백성의 피와 살을 내어줄 수는 없다. 그 점은 너도 이해하겠지. 경험치를 줄 수 있는 방법도 마찬가지로 우리를 죽이도록 하는 것 뿐인데··· 역시 불가능하지. 하지만 몬스터 코어는 줄 수 있다.]

그 말을 듣자 갑자기 흥미가 동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코어를 요구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얼마가 적당할까?

여왕이 먼저 숫자를 제시하도록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당신 목숨 값으로 몇 개의 코어를 줄 수 있지?]

내가 그렇게 묻자 여왕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내 생각에는, 몬스터, 네가 해야 하는 질문은 내 왕국의 값으로 몇 개의 코어를 줄 수 있냐 같은데. 내가 왕위를 되찾을 수 있도록 돕지 않겠나? 물론 대가를 받고 말이야.]

인간 여왕은 내게 몬스터 코어가 인간 사회에서 가지는 가치에 대해 설명했다.

코어는 마법 부여, 마법 공학, 강력한 무기와 갑옷 제작, 마법사 훈련, 장신구 제작 등 여러 방면으로 쓸모가 많았다.

대기로부터 마나를 흡수하고 저장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만큼, 지상의 각종 산업에 필수불가결한 자원이기도 했다.

또 부유한 자들 사이에서는 코어가 마치 고액 화폐처럼 사용되기도 했다.

세계 모든 지역에서 가치를 인정받았고, 충분히 문명화된 도시라면 어디서나 코어를 지불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왕으로부터 몬스터의 신체 부위를 거래하는 시장이 있다는 사실도 들었다.

인간들이 몬스터의 가죽, 갑각, 발톱, 심지어는 내장을 사용해서 장비나 포션, 건축 자재를 만든다는 이야기는 꽤 충격적이었다.

심지어 여왕의 알현실은 한때 이 지역을 지배했던 거대 몬스터들의 등뼈로 만든 기둥들로 장식되어 있다고 했다.

내 신체 부위가 인간들에게 엄청난 값어치를 가질 수 있다는 말을 듣자, 왠지 마음이 불편했다.

하긴 다이아몬드 갑각으로 방어구를 만들면 성능이 정말 좋겠지···

...

아니, 그런 생각은 하지 말자!

내가 몬스터라고 해서 꼭 머리는 벽에 장식되고, 코어가 어떤 귀부인의 목에 걸리고, 다이아몬드 갑각이 방어구 세트가 되는 비참한 결말을 맞으라는 법은 없었다.

인간들이 안자나스는 잡을 수 있을지 몰라도, 이 개미는 잡을 수 없을 거다!

나는, 그리고 우리 둥지는 그런 결말을 맞지 않을 테다!

여왕과의 대화는 지상의 인간들이 나와 우리 가족에게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인지 상기시켜줬다.

우리 입장에서는 인류야말로 진정한 몬스터였다.

때문에 왕국과 어떤 식으로든 거래를 하기가 엄청나게 꺼려졌다.

서둘러 둥지를 남쪽이 있다는 몬스터들의 영역으로 옮기는 편이 더 현명하고 안전한 선택 같았다.

하지만··· 여왕이 제시한 대가!

그··· 많은··· 코어들.

여왕이 제시한 건 코어 두세 개가 아니었다.

무려 수백 개의 코어가 손에 들어올 수도 있었다.

그만한 코어가 있다면, 나와 펫들의 코어를 최대치까지 성장시킨 다음 특별 코어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왕 개미의 코어도 특별 코어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코어 공학 스킬도 쉽게 성장시킬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물론 이 제안이 인간 여왕의 속임수일 가능성은 차고 넘쳤다.

지금이야 인간 여왕에게 다른 선택지가 없겠지만···

왕위를 되찾고 나서 정말로 몬스터에게 국가의 재산을 순순히 넘겨줄까?

그럴 리가.

뻔히 벌어질 거라고 예상되는 일을 과연 배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여왕이 어느 시점에 나를 배신할 거라고 해서, 내가 그 전까지 이득을 얻을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위험할까?

물론이다.

하지만 그 대가는···

달콤한 보상을 떠올리자 내 턱이 움찔거렸다.

일단은 침착하자.

일단 진짜 여왕님의 상태부터 확인해야지.

나는 타이니가 새로운 의자를 더 즐기도록 내버려 두고 농장으로 내려갔다.

공동 안에는 개미 떼가 마치 언덕처럼 높게 쌓여서 요동치고 있었다.

무더기의 바깥쪽에 있는 개미들은 더듬이를 흔들며 주위의 벽을 향해 연신 턱을 벌렸다.

몬스터가 튀어나오면 언제든 공격할 태세였다.

여기저기 소규모로 흩어져 있는 개미들도 보였다.

저 친구들은 뭘 하는 건지 의아해서 지켜보니, 소규모 무리 중 하나가 신선한 바이오매스 덩어리를 턱에 물고 공동 가운데의 개미 언덕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보아하니 벽에서 몬스터가 스폰되자 마자 달려들어 해치우는 모양이었다.

혹시라도 여왕에게 위협이 될 만한 요소를 없애려는 필사적인 노력의 일환이었다.

문제는···

말그대로 개미의 벽에 둘러싸여 있는 여왕에게 어떻게 다가가서 말을 걸지?

내가 여왕을 안전하게 지키라고 했지만, 맙소사!

너무 지나치잖아!

더 가까이 다가가자 심지어 마치 살아 있는 카펫처럼 여왕의 몸 아래에 들어가서 부지런히 바닥을 살피는 개미들도 있었다.

바닥에서 몬스터가 튀어나오면 그 발톱 앞에 몸을 들이밀어 여왕을 지키려는 개미들이었다.

나는 일개미들을 이리저리 밀쳐내며 한참 나아간 뒤에야 여왕과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어머니 앞에 이르자 바이브도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바이브는 내 머리 위에서 더듬이로 여왕의 상태를 살피려고 애썼다.

"좀 어떠세요, 어머니?"

내가 걱정스럽게 묻자, 여왕은 더듬이를 흔들며 주위를 둘러싼 개미들 사이에서 나를 찾았다.

"많이 나아졌단다."

여왕이 대답했다.

확실히 아까보다는 힘 있는 목소리였고, 내가 기억하는 온기와 활력이 느껴졌다.

나는 마나 감지 스킬로 여왕의 코어를 살폈다.

더 이상 곧 꺼질 촛불처럼 깜빡이지 않고, 훨씬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혹시 던전에서 더 많은 마나를 흡수하셔야 하나요?"

내가 잠시 망설이다 물었다.

여왕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잘 모르겠구나, 아이야."

하지만 나는 내 생각이 맞을 거라는 느낌이 들어서 마음이 무거웠다.

여왕처럼 강력한 코어를 가진 몬스터들은 살아남기 위해 밀도가 높은 마나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럼 우리가 지상에 나온 뒤로 여왕은 계속 힘을 잃고 있었던 걸까?

매일매일 조금씩 약해지면서?

하지만 여왕 개미는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는 분이니까!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게 진짜 여왕의 모습이었다.

아무런 책략도 없이, 왕국이 아닌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모습 말이다!

"스스로에게 치유 마법을 쓰실 수 있던가요?"

내가 묻자 여왕이 더듬이를 흔들어 인간으로 치면 고개를 끄덕이는 동작에 해당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부상이 좀 나아졌단다."

"다시 치유 마법이 가능해지면 바로 사용하셔서 빨리 회복하셔야 돼요. 그리고 많이 드시고요! 그럼 회복 속도가 빨라질 거예요."

여왕은 다시 한번 더듬이를 움직여서 알겠다는 뜻을 표했다.

많이 피곤할 텐 데도, 그 동작에서 어쩐지 웃음기가 느껴졌다.

자기가 낳은 아이에게 잔소리를 하는 대신 잔소리를 듣는 상황이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여왕이 순조롭게 회복 중이라는 사실에 만족하며 농장 밖으로 나왔다.

온갖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했다.

이 상황에는 어느 정도 내 책임이 있었다.

물론 여왕이 지상으로 나오면 그런 고통을 겪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우리가 여기 있는 건 나 때문이었다.

또 나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내 성장에 주력하는 대신 여왕에게 좀 더 신경을 썼다면, 점점 약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더 빨리 알아차렸을 텐데···

논리적으로는 내 잘못이 아니라고 해도 죄책감을 떨치기 어려웠다.

생각에 잠긴 채 개미 언덕으로 돌아가는 내 눈에 일개미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지?

고개를 돌리자 믿을 수 없게도,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올린 나이든 인간 여자가 굳은 표정으로 개미 언덕이 위치한 공터 안으로 천천히 하지만 단호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니···

무슨?!

무슨 자살 의식이라도 치르는 건가?

자기 자신을 몬스터들에게 바이오매스로 바치는 거야?

아니면 인간들이 강력한 개미 왕국에 노인을 제물로 바치기라도 한 건가?

하지만 노인은 먹을 게 없잖아!

바이오매스를 바치려면 적어도 좀 뚱뚱한 사람을 보내던가!

아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는 일개미들이 여자에게 접근하기 전에 재빨리 언덕을 달려 내려갔다.

이 여자에게는 뭔가 범상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일부러 우리 둥지를 찾아온 건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우리를 보자 마자 달아났을 테니까 말이다.

두 손을 들어올린 건 해칠 의도가 없다는 의미겠지만···

왜 몬스터들이 인간들끼리 통하는 신호를 이해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궁금한 건···

대체 이 인간이 우리에게 접근하는 이유가 뭘까 하는 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내가 일개미들을 물리고 다가가자 여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흥분한 것 같기도 했다.

나를 찾고 있었던 건가?

나를 알아본다고?

어쩌면 교회에 있었던 신도들 중 하나일지도 몰랐다.

물론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자세히 봤던 건 아니라서, 기억이 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얼굴이 어쩐지 익숙한 느낌인데···

내가 걸음을 멈추자, 여자도 손을 들어올린 채로 멈춰 섰다.

나는 가만히 서서 여자를 응시했다.

그러자 여자가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나를 향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협동 작전

···

······.

저기, 난 인간 말 하나도 모르거든!

여왕처럼 정신 마법이라도 써서 말을 걸든가!

여자는 몇 분 동안이나 계속 떠들었다.

열심히 우리 둥지를 가리켰다가, 다시 마을을 가리키며 뭔가를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었다.

···

이 여자는 진심으로 몬스터 무리와 대화를 하려고 여기 온 건가?

정신 마법도 없이 그냥 인간의 언어로?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개미로 환생한 인간이 아니었다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온몸이 조각 나서 개미 먹이가 되었을 터였다.

하지만 다행히 내게는 해결책이 있었다.

나는 열심히 떠드는 여자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러자 내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놀랐는지, 여자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곧바로 두 손을 다시 들어올렸다.

···

안 잡아먹어!

좀!

요즘 인간들이란···

나는 여자의 옆으로 이동해서 더듬이로 내 등을 두드렸다.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듯해서 같은 동작을 한 번 더 반복했다.

그러자 여자의 얼굴에 이해의 빛이 떠오르더니 단호하게 두 손을 흔들었다.

"아뇨, 사양할게요!"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미안하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어요, 아주머니.

나는 조금 더 고집스럽게 더듬이를 내밀어 여자의 옆구리를 찌르고, 다시 내 등을 두드렸다.

그래도 여자가 움직이지 않아서 같은 동작을 또 되풀이했다.

여자는 그제야 내 의도를 이해한 듯했다.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나 싶었는데 다행이네.

여자가 주저하는 표정으로 다가오자, 나는 몸을 낮춰서 그녀가 내 등에 탈 수 있게 했다.

문득 등에 크리니스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 나는 더듬이를 움직여 조그만 공 모양의 괴물을 머리 위, 그러니까 바이브의 옆자리로 옮겼다.

바이브는 자리가 좁아져서 불만인지 턱을 딱딱거렸다.

하지만 크리니스는 아랑곳 않고 촉수 몇 개를 뻗더니 내 머리 위에 자리를 잡았다.

새로운 포로, 아니, 승객을 등에 태운 나는 개미 언덕으로 올라가서 수직 통로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수직 통로를 내려가는 중에 나이든 여자가 떨어지지 않도록 몸을 최대한 기울이고 더듬이 하나를 손잡이처럼 잡을 수 있도록 내밀어 주기까지 했다.

인간 여왕에게는 베풀지 않았던 호의였다.

방 앞에 도착한 나는 등에 타고 있는 여자를 더듬이로 쿡쿡 찔렀다.

여자는 내 등에서 내려와 방 안으로 들어갔고, 나도 그 뒤를 따랐다.

이제 어떻게 될지 나도 궁금했다.

방 안에 들어선 나이든 여인은 인간 여왕을 보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 그럴 만도 하지.

보통은 거대 개미의 둥지 안에서 자기가 섬기는 여왕과 마주칠 거라고 예상하기 어려울 테니까.

나이든 여자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뭐라고 말하며 떨리는 손을 여왕에게 내밀었다.

여왕은 온화하게 대답하며 여자의 손을 마주잡았다.

여왕이 손을 잡아줬다는 사실에 감격한 듯, 나이든 여자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자 여왕이 여자를 일으켜 세웠다.

흠···

어쩌면 자기 말대로 정말 존경과 사랑을 받는 여왕이었나?

아니면 그저 이 원시적인 사회에서는 다들 왕족을 두려워하는 걸지도 모르고.

나는 여왕의 주의를 끌기 위해 더듬이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늙은 여자와 나를 번갈아서 가리켰다.

이번에도 여왕이 내 의도를 이해할 때까지 같은 몸짓을 반복했다.

정신 마법으로 이 사람과 나를 연결해 줘.

우리가 대화할 수 있게.

여왕은 알아들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가, 이내 다시 고개를 저었다.

뭐라는 거야···

여왕은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

곧 여왕이 만든 의사 소통의 연결고리가 내 머리 속으로 이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런 식으로 다른 두 개체 사이에 의사 소통을 위한 고리를 만들 만큼 정신 마법에 능하지 않다. 그건 나와 직접 연결하는 일에 비해 열 배는 더 어려운 기술이기 때문이지. 괜찮다면 내가 이 백성과 말로 소통한 다음 그 내용을 네게 전달하마.]

나는 여왕의 제안을 잠시 고민했다.

그렇게 하면 저 여자가 하려는 말을 전해들을 수는 있겠지만···

여왕이 중간에서 내용을 어떻게 왜곡할지 알 수 없었다.

인간과 몬스터 사이에 그렇게 쉽게 신뢰가 쌓이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그럼 저 여자에게 말하게 하고 실시간으로 통역해. 하지만 뭔가 정보를 숨기거나 속이는 것 같으면 둘 다 잡아먹을 거야.]

인간 여왕은 내 말에 화가 난 모양이었다.

[난 그런 식으로 내 명예를 의심받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 몬스터.]

···그래?

하지만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상관없어. 내 의도를 저 여자에게 전하기나 해.]

당신이 인간의 여왕일지 몰라도, 내가 섬기는 여왕은 거대한 개미라고.

우리 여왕은 말그대로 자기가 거느리는 백성의 어머니이기도 하고 말이야.

지금 어디서 여왕 대우를 받으려고 하는 거야?

나는 속으로 고개를 흔들며 새로운 손님이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여왕이 내 요구 사항을 전달하자, 나이든 여자는 놀랄 만큼 기품 있는 동작으로 절을 한 뒤 여왕에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여왕이 통역한 내용이 내 머리 속으로 전해졌다.

[이 백성의 이름은 에니드 루서, 말게이트 마을의 상인이라는군. 일주일 전 네가 마을 교회에 개미들을 이끌고 도착했을 때 널 처음 목격했고··· 그 뒤로 마을 주민들의 생각과 행동에 일어난 변화가 심히 걱정된다고 한다. 마을의 사제가 주민들을 광기로 몰아넣어 던전 몬스터와 싸우게 만들고 심지어는··· 맙소사 그건 자살 행위잖아!]

여왕이 통역 중간에 내 머리 속에서 소리를 질렀다.

여왕은 통역을 멈추고 에니드에게 뭔가를 물었다.

그리고 에니드가 대답하자 질린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더듬이로 여왕의 머리를 두드렸다.

이봐, 통역.

[미안하군, 너무 놀라서··· 어제는 그 사제가 마을 주민들에게 던전으로 내려가 그 안에서 몬스터를 사냥하라고 선동했다고 한다. 그 결과 몇 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순교자로 칭송을 받고 있다고 하는군.]

여왕의 말투에는 어리석은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노가 묻어났다.

에니드는 계속 말을 이어갔고, 여왕이 그 내용을 내게 통역했다.

[에니드는 마을 주민들이 곧 숲으로 쳐들어와 개미 둥지를 공격하려 들까 봐서 걱정하고 있다. 그들은 너희가 마을의 번영과 영광을 위해 던전이 내린 제물이라고 믿고 있다는군.]

···

인간 여왕조차 그 어리석음에 할 말을 잃은 듯했다.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제물?

이 인간들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닌가?

차라리 내가 처음 생각한 대로 자기네 할아버지나 바치는 편이 낫겠군!

[에니드의 남편은 유능한 던전 탐험가였다고 한다. 그래서 에니드는 던전 깊은 곳에 지능적인 소통이 가능한 몬스터들이 서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 네가 사제를 살려주고 팔을 치유해 주는 모습을 보고, 평범한 몬스터가 아니라는 걸 짐작했다는군.

그래서 네게 마을 주민들을 해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려고 왔다고 한다. 가능성도 희박하고, 본인이 죽을 수도 있지만··· 주민들이 무의미하게 몰살당하는 일을 막기 위해서는 이 방법 밖에 없었다고 말이다.]

여왕은 어쩐지 목이 메인 듯한 말투로 그 말을 전달했다.

나로서는 무엇보다 우리를 제물로 여긴다는 부분이 충격적이었다···

아주 개미 밥이 되고 싶어서 환장들을 했구만?!

나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지만, 그래도 전생 덕분에 생명의 존엄성을 이해하고 있었다.

타이니가 죽인 전사들을 생각하면···

비록 내 가족을 학살한 복수라고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처형 명령을 내리기는 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불편했다.

그 전사들 또한 누군가의 가족일 테니까 말이다.

무차별적인 살생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마을 주민들이 세뇌라도 당했는지, 아니면 그저 믿을 수 없을 만큼 멍청할 뿐인지 몰라도 굳이 대학살을 벌이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둥지에 정말로 위협이 되는 존재들도 아니니까 말이다.

아마 나 혼자서 그 농부들을 전부 해치울 수도 있겠지···

마치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에니드와 여왕이 동시에 나를 돌아보며 간청하는 태도를 취했다.

[이 마을 주민들은 그저 선동을 당했을 뿐이다, 몬스터. 그들을 죽인다고 너희가 얻을 것도 없지 않나?]

뭐, 죽일 생각은 아니지만···

그 말은 틀렸어, 인간 여왕.

[인간들을 죽이면 경험치와 바이오매스를 얻을 수 있지. 최근 백 마리도 넘는 형제 자매를 잃었기 때문에, 우리는 전력 보충이 필요해.]

그러니까 얻을 게 없다는 말은 틀렸다고.

그러자 여왕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내 말을 전해 들은 에니드도 마찬가지였다.

에니드는 여왕에게 무언가를 질문했고, 여왕의 대답을 듣더니 더욱 낙담한 눈치였다.

아마 왜 최근 개미들이 그렇게 많이 죽었는지 물어본 듯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내가 왜 백 마리도 넘는 형제 자매를 잃었는지 말이다.

으음···

나이든 여인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내게 빌기 시작했다.

여왕도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움직였는지 함께 애원했다.

[에니드는 마을 주민들을 죽이지 말아 달라고 빌고 있다. 무지하지만 악한 사람들은 아니라고 말이다. 그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하는군. 원한다면 나도 내 목숨을 내어주지. 어쨌든 그들 또한 내 백성이고, 지금 내가 통치자의 의무를 다할 방법이 달리 없어 보이니.]

맙소사, 이 둘은 정말로 그 머저리들을 구하고 싶은 모양이네.

이 여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내놓건 말건 내가 마음만 먹으면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은 그렇다치고···

인간들이 내게 애원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신선했다.

왕족이 내게 애원하다니.

전생에서는 상상도 못해본 일이었다.

이 벅차는 기분은 뭘까?

우월감?

권력?

그래, 이 하찮은 인간들아!

내게 빌어라!

이 위대한 개미 님이 너희의 한심한 동족들을 죽이지 않기를 바란다면···

더 애원해 보라고!

음하하하하!

···

일단 진정하자.

나는 갑자기 찾아온 다크사이드의 유혹을 황급히 떨쳐버렸다.

어린이 만화에서 자기가 가진 힘에 심취해 세계 정복이나 뭐 그런 터무니 없는 걸 노리다가 죽어버리는 악당 꼴이 나기는 싫으니까 말이다.

어차피 나는 처음부터 마을 주민들을 학살할 의도는 없었다.

하지만 이걸 기회로 여왕에게서 최대한 많은 걸 얻어내고 둥지의 안위도 확보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겠지.

[무지도 죄악이야. 이 사람들을 살리고 도시도 되찾고 싶다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제안해야 할 거야.]

그래, 나는 거래를 할 생각이었다.

둥지 전체가 아니라 나 하나라면···

코어를 얻기 위해 다소 위험을 무릅쓸 의향도 있었다.

코어 수백 개를 손에··· 턱에 넣어서 나와 동료들을 강화하면 던전의 상층부에서는 감히 맞설 상대가 없을 터였다.

그러면 장기간 둥지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내 야심찬 코어 공학 프로젝트에도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인간 여왕은 내가 거래를 하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는 사실을 파악한 듯했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뜬 채 생각에 잠겼다.

마을 주민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열정을 좀 덜 자살 행위에 가까운 형태로 진정시켜야 했다.

지금 주민들은 종교적인 광기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였다.

그런 사람들에게 그저 멈추라는 말을 한다고 통할 리는 없었다.

더불어 어떻게든 도시로 돌아가서 왕좌를 되찾을 필요도 있었다.

나와 여왕, 에니드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논의를 시작했고···

곧 결론에 도달했다.

썩 마음에 드는 계획은 아니지만 그래도 효과는 있을 것 같았다.

다만···

내 위엄이 다소 훼손될 우려가 있을 뿐.

도미노

던전에서 가장 큰 몬스터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저로서는 왜 그렇게 많은 학자들이 몬스터들에게 별명을 붙이고 목록을 만들면서 이런 논의에 집착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던전의 가장 위험한 몬스터", "던전에서 가장 큰 몬스터", "던전에서 가장 무서운 언데드 상위 5 종" 같은 제목을 달고 나온 출판물들은 심각한 학술자료에 비해 사람들의 이목을 쉽게 끌고는 합니다.

저는 이런 행태가 몬스터 연구의 학술적인 전문성을 심각하게 훼손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몬스터 연구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대중의 관심을 얻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아직 답이 나오지 않은 분야라서 최소한 흥미로운 연구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룰루스 님께서 대격변 시대에 대한 전문가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몇 가지 시사점에 대해 상의를 드리고자 이 편지를 썼습니다.

던전 탐험 중 처음 두 스트라타에서 발견된 몬스터에 대해서는 신뢰할 수 있는 수치를 어렵지 않게 확보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제가 확인한 가장 큰 몬스터는 "거대 죽음의 뱀 황제"입니다.

길이 250미터, 지름은 무려 6미터나 됩니다.

이 몬스터는 지난 세기 동안 무려 여섯 차례나 발견되어 문서상에 기록으로 남았습니다.

"가장 큰" 몬스터를 몸길이 대신 높이로 따진다면 "석양의 외눈박이 거인 왕"을 꼽을 수도 있습니다.

두 번째 스트라타에서 100년, 50년 간격으로 총 세 차례 발견되어 기록에 남은 몬스터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이 몬스터의 키는 적어도 50미터를 넘습니다.

하지만 저도, 그리고 오를루스님도 알고 있습니다.

이 몬스터들이 아무리 크다 해도 대격변 당시 지상을 거닐었다고 전해 내려오는 몬스터들에 비할 바는 못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극동 지방의 전설에 따르면, 한 몬스터가 땅에서 고개를 내미는 것만으로 산맥이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몬스터들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근 수천 년 동안 이런 거대한 몬스터가 인류 앞에 나타난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 주제에 대해서는 오를루스 님께서 저보다 훨씬 많은 연구를 하셨겠지요.

제 연구의 방향성을 제시해 주신다면 굉장히 감사하겠습니다.

- 제국 대학 교수 스키피오가 오를루스에게 보낸 몬스터 크기에 대한 서신 중에서 발췌

-----

준비를 마치는 데에는 이틀 정도가 걸렸다.

이제 상처를 거의 회복한 여왕 개미는 충성스러운 일개미들의 보호를 받으며 농장 안에서 요양을 계속하고 있었다.

일개미들 중 몇 마리는 나와 함께 계획을 준비했고, 타이니는 인간 여왕의 근위대장을 깔고 앉은 채 신나게 배를 채웠다.

인간 여왕은 에니드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마을에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그리고 그 이후에는 어떻게 할지를 상의했다.

모든 준비를 마친 후 나는 바이브와 크리니스를 타이니 옆에 내려 놓은 뒤, 내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얌전히 있으라고 단단히 일렀다.

그리고 나서 인간의 여왕과 에니드를 데리고 말게이트 마을로 향했다.

마침내 마을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놀라운 광경과 마주쳤다.

마을에는 성난 얼굴의 농부들이 넘쳐났고, 교회가 세워진 작은 언덕에는 지난 번에 내가 봤던 것보다 열 배는 더 많은 군중이 줄지어 서 있었다.

인간의 수가 수백 명··· 아니 천 명은 되는 것 같았다.

이렇게 많은 멍청이들을 어디서 찾아낸 거야?

이미 아침 해가 떠오르는 중인데도 장작불은 여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커다란 불꽃 아래로 잿더미가 되어버린 다양한 몬스터들의 잔해가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신음했다.

아까운 바이오매스를 저렇게 태워 버리다니!

지난 번에 봤던 사제가 군중 앞에 서서 열정적으로 설교를 하는 중이었다.

무슨 확성기라도 쓰는 듯, 이렇게 멀리서도 목소리고 똑똑히 들릴 정도였다.

어쨌든 내심 한쪽 팔이 없어도 쓸 수 있는 재주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알잖아.

나는 마음을 다잡고 숨어 있던 숲에서 나와 마을 쪽을 향해 들판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숨어서 몰래 접근하지 않고 당당히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 계획대로 된다면 인간들이 나를 공격하는 일은 없을 터였다.

설사 공격한다고 해도 곧바로 도망치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마을에 다가갈수록 긴장감이 가슴을 조여왔다.

이렇게 많은 인간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엄청난 담력을 요구했다.

우리를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군중의 맨 뒤쪽에서 쇠스랑을 들고 서 있던 수염 난 남자였다.

남자가 우리를 돌아봤을 때, 나도 모르게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남자도 놀라운 장면에 입을 떡 벌렸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남자는 우리를 가리키며 주위 사람들에게 뭐라고 소리쳤다.

점점 많은 인간들이 우리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귀청을 찌르는 사제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뒤로 돌아서 들판을 천천히 가로지르는 우리의 모습을 놀란 표정으로 지켜봤다.

마치 연못에 조약돌을 던졌을 때 물결이 퍼지는 것처럼, 군중이 차례차례 우리를 향해 돌아섰다.

내가 수염 난 남자와 10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까지 다가갔을 때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심지어 군중의 가장 안쪽에 있던 사람들도 놀라운 장면을 직접 목격하기 위해 바위 위에 올라가서 까치발을 들었다.

쉴 새 없이 열변을 토하던 사제도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챘는지 목소리를 줄였다.

이윽고 우리를 발견한 사제가 두 눈을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크게 떴다.

심장이 거세게 두방망이질을 쳤다.

겹눈 덕분에 나는 군중을 한꺼번에 살필 수 있었다.

놀랍게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도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사람들이 주로 쳐다보는 대상은 나도, 내 옆에서 걷고 있는 에니드도 아니었다.

바로 내 등 위에 앉아 있는 여왕이었다.

인간의 여왕은 충격을 받아서 굳어 있는 군중들 앞에서 나의 빛나는 다이아몬드 갑각을 밟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사람들을 향해 두 팔을 펼치고 낭랑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충직하고 축복받은 리리아의 백성들이여! 지금 악의 무리가 우리의 국가를 전복하려 들고 있다. 놈들은 우리의 평화를 위협하고 던전 안에서 끔찍한 짓을 저지른 뒤, 이제 우리를 공격하려 한다. 우리, 그대들과 나는 시스템에 의해 선택되었다! 시스템은 지상과 던전의 균형을 되찾기 위해 신성한 사자를 보내 우리를 축복했다!"]

여왕의 힘 있는 음성과 위엄 넘치는 태도는 그 시끄럽던 사제까지도 얌전히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군중은 완전히 압도당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나는 도망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이 방법이 잘 통해야 할 텐데···!

여왕의 클래스는 [왕족]이었다.

어떤 조건을 충족해야 획득할 수 있는 클래스였고, 그 조건은 퍽 자명했다.

왕족이어야 한다.

끝.

인간을 비롯한 지상의 지적 종족들은 몬스터처름 진화를 하는 대신, 클래스에 기반한 시스템을 통해 성장했다.

클래스를 획득하면 특별한 능력치 보너스를 받고 특정 스킬들의 잠금을 해제할 수 있으며, 정해진 방법으로 레벨 업이 가능했다.

예를 들어 [상인]은 거래로 돈을 벌어 레벨 업을 했고, [농부]는 작물을 길러서 레벨 업이 가능했다.

조건만 충족하면 언제든지 클래스를 바꿀 수도 있었다.

다만 좋은 클래스일수록 전직을 위한 조건을 충족하기 어려웠다.

가령 [검객]이 되려면 그에 해당하는 육체적 능력치의 하한선을 맞추고, 무기 사용 스킬의 레벨을 어느 정도 올려야 했다.

즉 [마을 주민]에서 기본 전투 클래스인 [검객]이 되려면, 꾸준한 체력 단련과 검술 연습 그리고 몬스터와의 전투 경험이 필요했다.

그러니 더 강력한 클래스인 [견습 마법사]나 [병사]로 전직하려면 얼마나 어렵겠는가?

여왕은 [왕족]이 가진 클래스 보너스 덕분에 엄청나게 높은 레벨의 웅변 스킬과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

여왕이 레벨업을 하려면 백성들에게 감명을 주고 왕국을 번영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2년마다 4개월에 걸쳐 왕국 전역의 모든 마을을 순회하며 백성들을 상대로 연설을 한다고 했다.

여왕이 그 점을 들어 마을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했을 때에는 솔직히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 보니 과연 거짓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런 강행군으로 인해 여왕의 클래스 레벨은 굉장히 높은 편이었다.

여왕은 자신이 직접적인 전투에는 그리 쓸모가 없지만, 통치와 연설에는 뛰어난 재주를 지녔다고 말했다.

군중의 표정 변화를 보니 그 말이 사실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여왕의 몇 마디에 이미 우리 편이 된 듯한 사람들도 보였다.

사제는 우리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며칠 동안 지치지 않고 설교를 계속한 끝에, 사람들의 마음 속에 정신적인 지주로 자리잡았다.

그런데 갑자기 지난 수십 년 동안 백성들을 통치했던 진짜 지도자가 나타나서 자신의 말과 다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몬스터 개미들을 죽이지 말라고?

개미와 함께 다른 적을 무찔러야 한다고?

너무 혼란스러웠다!

이번에는 에니드가 나서서 여왕을 거들었다.

다행히 여왕이 만들어 놓은 연결 고리가 아직 살아 있어서, 나도 에니드의 말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여왕 폐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전 며칠 전 숲 속으로 들어가서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이 몬스터들은 왕국을 보호하기 위해 여왕 폐하를 보좌했고, 여왕 폐하께서는 개미들과 함께 생활하고 계셨습니다."]

여왕이 다시 한 번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이 몬스터들은 평화를 위협하고 있는 악의 세력에서 왕국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에게 보내진 아군들이다. 그리고 그대들은 이 위대한 원정에 함께하기 위해 선택된 자들이다. 부름에 응하겠는가? 우리와 함께 하겠는가?"]

여왕은 마지막 말에 강력한 존재감을 실어 사람들을 압도했다.

여왕 가까이 있던 사람들은 스스로 깨닫기도 전에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했다.

마치 도미노가 무너지는 것처럼, 처음에는 한 두 명이 무릎을 꿇었지만 곧 모든 군중이 일제히 바닥으로 무너졌다.

마지막까지 두 발로 서 있는 사람은 사제였다.

사제는 열에 들뜬 것처럼 멍한 두 눈을 내게 고정한 채 군중을 헤치고 걸어왔다.

그 모습을 보니 당장 도망쳐야 할지 살짝 고민스러웠다.

물론 그러면 여왕이 바닥에 떨어지고 이 감격스러운 순간을 망치는 결과가 되겠지만···

저 미친놈은 이미 내 머리를 철퇴로 내리친 전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나한테 이상한 짓을 하려고 하면 어쩌지?

마침내 미치광이 사제가 잘린 팔을 멀쩡한 손으로 붙든 채 내 앞에 섰다.

이대로 뛰어들어 나를 물어뜯거나 하는 건 아닌지 걱정하고 있는데, 사제가 몸을 떨며 바닥에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왕이 다소 당황한 기색을 비치며 사제의 말을 내게 전했다.

[오, 위대한 분이시여. 시스템의 사자께 제가 크나큰 죄를 저질렀나이다! 당신이 가지고 온 구원의 전갈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석게도 공격했던 이 죄인을 용서해 주소서!]

어···

그, 그래 뭐···

군중이 어느 정도 진정한 뒤, 나는 여왕이 몰래 사람들을 꾀어서 나를 공격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미리 합의했던 대로 여왕과 나는 서로에게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채 계획의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마을 주민들을 아군으로 만든 여왕은, 다음으로 자신이 던전 안에 배치했던 강하고 충성스러운 병사들에게 관심을 돌렸다.

원래는 던전 내부의 다른 군단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호위 병력을 일부러 줄여서, 반역을 꾀하던 무리가 정체를 드러내도록 유인하는 게 여왕의 "영리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역도들의 세력은 여왕의 예상보다 훨씬 강대했고, 그래서 병력을 분산시킨 여왕은 대패하고 말았다.

여왕은 심지어 자신의 근위대에게 이런 의도를 알리지 않았다고 했다.

근위병들이 여왕 스스로 미끼가 되는 위험한 계획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 불쌍한 병사들은 자신들이 지키기로 맹세한 여왕이 도시 밖으로 쫓겨난 줄도 모르는 채로 던전 최상위 층에 처박혀서 지네나 잡고 있을 터였다.

솔직히 인간들이 하나같이 너무 멍청해서 듣기만 해도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참자.

소중한 몬스터 코어가 걸려 있으니까.

약속한 코어만 받고 나면, 이 머저리들이 자기들끼리 알아서 놀도록 내버려 두고 둥지로 돌아가는 거야.

말게이트 마을의 주민들이 나를 대하는 방식은 조금 불편했다.

내가 지나갈 때마다 주민들이 뒤로 물러서서 길을 비켜줬다.

몇몇은 심지어 공손한 태도로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인간들이 내게 복종하는 모습을 보자 내 안에서 다크사이드가 또다시 스물스물 기어 나오려고 했다.

나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제발 나를 무시해 줘, 인간들아!

솔직히 그냥 배경에 묻히는 쪽이 더 편하다고!

물론 그런 일이 가능할 리 없었다.

일단 내 몸집부터가 너무 눈에 띄었다.

개미 주제에 크기가 책상만 하니까 말이다.

이대로 계속 진화하면 나중에는 자동차만큼 커질까?

아니면 버스만큼···?

으악.

어쨌든···

내가 여왕과 함께 마을 안을 돌아다닐 때마다 사람들은 내게 경의를 표했다.

여왕은 작은 무리의 주민들과 마주치면 한 사람 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눴고, 다수의 군중 앞에서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모두가 여왕에게 호의적이었다.

여왕을 따라가서 싸울 사람들은 빠르게 준비를 마쳤다.

조잡한 무기를 챙기고, 3대 전의 조상이 전투에 입고 나갔을 법한 낡은 가죽 갑옷의 끈을 조였다.

심지어 사제도 완전히 흥분한 상태였다.

사제는 하루종일 나를 따라다니며 쉬지 않고 신성한 사자를 칭송했다.

대체 뭐라고 하는 건지 궁금해서 여왕에게 통역을 부탁했다가···

두 문장도 듣기 전에 멈춰달라고 해야 했다.

얼굴이 화끈거려서 도저히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코어 벌기 쉽지 않군!

언제나 땅굴이 답이다

하루 뒤, 준비를 마친 주민들을 데리고 마을을 나와 숲 쪽으로 향했다.

사기충천한 인간들과 함께 한 시간 정도 행군하자 숲의 경계 부근에 미리 준비해 놓은 입구가 나왔다.

나와 일개미들이 꼬박 이틀 동안 노동한 결과물이었다.

여왕이 어떻게 도시 정문을 통과하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던전 안의 병력과 합류할 수 있을까?

인간들과 달리 우리 개미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그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바로 땅굴이었다!

성벽에서 보이지 않도록 일부러 여기저기 흩어서 버린 흙더미가 주위에 가득했다.

바닥에는 개미들의 발자국이 잔뜩 나 있지만, 형제 자매들은 모두 둥지로 돌아간 뒤였다.

여왕은 굴 입구에 사람들을 모아 놓고 우리가 뭘 준비했는지 설명했다.

여왕이 말을 마치자, 사람들이 새삼스럽게 존경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숙여 절했다.

···

진정해, 다크사이드!

인간들을 노예로 삼은 게 아니야!

하지만 굴을 파느라 고생한 건 사실이니, 감사 인사 정도는 받아도 괜찮겠지.

개미보다 키가 큰 인간들이 편하게 오갈 수 있도록 훨씬 신경을 써서 파기도 했고···

타이니조차 움직일 때에는 인간들보다 키가 작았다.

완전히 직립 보행을 하는 게 아니라 몸을 앞으로 숙이고 걷기 때문이다.

타이니가 두 발로 일어서서 그 거대한 몸집을 완전히 펴는 건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땅굴은 굉장히 길었고, 중간에 무너지면 안되기 때문에 꽤 깊게 판 상태였다.

이 세상의 물리 법칙이 정확히 어떻게 작용하는지 몰라도···

땅굴은 항상 내 생각보다 훨씬 더 튼튼하게 만들어졌다.

채굴 스킬이 무너지기 쉬운 지형을 본능적으로 피하게 해주는 걸지도 몰랐고, 어쩌면 이 세계 자체가 지하 공간에 호의적으로 설계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어쨌든 던전이 존재하는 곳이니까···

원래 둥지가 있던 숲 공동도 지구 같으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공간이었다.

우리는 열심히 걸어서 땅굴의 끝 부분에 도착했다.

나는 터널 지도를 활용해서 이 세계에 처음 태어나자 마자 탐험했던, 마나 웅덩이가 있는 공동 근처까지 굴을 파 놓았다.

그러면서 일개미들이 땅굴을 공동과 완전히 연결하지 않도록 주의시켰다.

그랬다가 인간 병사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바로 공격을 받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몇 미터는 내가 직접 판 다음, 인간 여왕을 먼저 들여보내서 상황을 설명하게 할 생각이었다.

내가 턱으로 흙더미를 몇 차례 옮기자, 벽이 무너지며 땅굴이 던전과 이어졌다.

나는 잽싸게 물러나 여왕의 뒤쪽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눈에 띄지 않기 위해 굴 왼쪽으로 최대한 몸을 붙였다.

여왕은 얼굴을 찌푸린 채 손으로 흙을 치워서 자기 몸이 통과할 수 있을 만큼 구멍을 넓힌 다음 그 안으로 들어갔다.

반대편에서 놀란 고함 소리와, 상황을 설명하며 소란을 잠재우는 여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여왕이 구멍으로 고개를 내밀고 넘어와도 좋다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함께 온 마을 사람들이 먼저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길을 비켜줬다.

다행히 땅굴은 사람들이 내 옆으로 충분히 지나갈 수 있을 만큼 넓었다.

마지막 주민이 구멍을 통과하자, 마침내 내가 나갈 차례였다.

나는 주저하며 구멍으로 다가가서 한 쪽 다리를 먼저 내밀었다.

조금 기다려 봐도 아무 일이 없길래, 나는 다리를 뺀 다음 천천히 머리부터 안으로 들이밀었다.

어두운 땅굴 속에 있다가 갑자기 마나 줄기로 가득한 던전 안에 들어오니 눈이 빛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푸르고 따스한 마나의 빛이 온몸을 편안하게 감쌌다.

내가 드디어 미쳐버린 건지···

던전에 돌아오니, 특히 처음 태어났던 곳 근처에 돌아오니 마치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하긴, 여기서 태어났으니 고향이 맞긴 하지.

나는 구멍 근처에 모여 있는 주민들 사이로 서서히 몸을 드러냈다.

내가 나가자 주민들이 서둘러 옆으로 비키며 공간을 만들었다.

바로 곁에는 베인이라는 이름의 사제가 있었다.

이 양반은 내가 어디를 가든 옆에 붙어서 졸졸 따라다니는 바람에 귀찮을 지경이었다.

마을 주민들 너머로 사나운 인상에 지친 기색이 역력한 군인들이 보였다.

병사들은 둥지를 공격했던 자들이 입고 있던 것과 비슷한 갑옷 차림이었다.

아마 이들이 여왕의 근위대인 모양이었다.

여왕은 병사들 가운데에 서서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열심히 귀를 기울이는 병사들의 얼굴에 분노가 가득했다.

이들이 던전으로 파견된 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설명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병사들을 경계의 눈초리로 훑으며, 조심스럽게 여왕 쪽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근위대는 내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다만 지상의 반란 세력에 대한 분노로 가득해 보였다.

사실 대부분은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좋아··· 아직까지는 괜찮군.

병사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어떻게 반란 세력을 공격할지 계획을 짜도록 지시하고 나서, 여왕이 내게 말을 걸었다.

[내 병사들이 상황을 파악하고 계획을 준비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다. 그동안 주민들은 휴식을 취하게 하는 편이 좋겠군. 호수 근처에 모여서 식사를 한 다음, 다섯 시간 정도 지나서 다시 움직일 예정이다.]

[좋아. 나는 그럼 이 근처에 있을게. 준비가 끝나면 알려줘.]

여왕과 거래한 조건들 중 하나는 지상의 반란 세력을 공격할 때 내가 지원하는 거였다.

어차피 성 안에 보관되어 있는 코어를 받으려면 먼저 반란군을 몰아내야 하는 건 맞았다.

지난 번 전투에서 내 활약을 눈 여겨 본 여왕은 공격에 참여해 달라고 나를 설득했다.

그러면서 타이니도 데려오기를 원했지만, 그건 내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타이니는 따로 할 일이 있었다.

나는 구멍 쪽으로 돌아와서 열광적인 추종자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휴식 시간이 꽤 길었지만, 그렇다고 잠을 잘 수는 없었다.

여왕이 근위대를 데리고 있는 상황에서 무방비 상태를 보일 수는 없으니까.

네 시간쯤 지나자, 여왕이 내 쪽으로 와서 다시 의사소통을 위한 마법의 연결 고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정신 속성 마법은 외교관이나 정치가, 지도자들이 주로 익힌다고 했다.

이렇게 작은 왕국에서는 난해한 정신 계열 마법에 충분한 재능을 지닌 사람을 찾기가 어려웠지만, 다행히 여왕 본인에게 어느 정도 소질이 있었다.

종족과 무관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여왕의 능력은 리리아와 같은 소왕국에 있어서는 중요한 자산이었다.

정신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사실은 그리 놀랍지 않았다.

마나를 형성하고 조작하는 과정이 다른 마법들에 비해 말도 안되게 어려웠기 때문이다.

나도 연습을 계속 하고 있지만, 진도가 좀처럼 나가지 않았다.

포르모처럼 자기 본거지까지 수천 미터나 이어져 있는 연결 고리를 형성하려면 갈 길이 까마득해 보였다.

어쨌든 연결 고리를 완성한 여왕은 병사들이 출발할 준비를 마쳤고, 곧 지상을 공격하기 위해 출발할 거라고 알렸다.

[던전 입구 바로 밖에는 레기온의 요새가 있지만, 그 원래 주인이 자리를 비워서 거의 텅 빈 상태다. 그 주위를 내 병사들이 지키는 중이고, 방금 교대를 했으니 우리가 곧 나갈 줄 알고 있을 거야. 관문에 소수의 용병들이 주둔해 있다고 하는데 아마 이쪽 병사들의 동향을 감시하는 중이겠지. 우리가 위치를 벗어나는 즉시 역도들에게 소식이 전해질 거다.]

둥지에서 심문할 때부터, 여왕은 레기온이라는 집단에 대해서 말을 아꼈다.

그래서 내가 알아낸 바는 별로 없지만···

어쩐지 거기 속한 몇몇을 전에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럼 빠르고 공격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겠군. 던전 입구에서 성까지는 얼마나 멀지?]

[2 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다. 성은 방어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경사면에 자리잡고 있지. 성문들을 빠르게 돌파하지 못하면 금세 포위되고 말 거야. 주민들이 나서준 덕분에 병력이 늘었다고는 해도 정면 대결로는 반란군을 당해내지 못한다. 하지만 빠르게 안으로 침투해서 문을 봉쇄하면 우선 성 내부에 있는 용병들만 상대할 수 있겠지.]

[문을 뚫을 방법은 있고?]

여왕이 잠시 망설였다.

[아직 고민 중이다.]

[내가 해결하지.]

중력 폭탄으로 예의 바르게 두드리면 바로 열릴 테니까.

후후후.

그렇게 계획을 논의한 뒤, 나는 여왕과 함께 행군 준비를 마친 병력의 선두로 자리를 옮겼다.

주위 벽에서 계속 몬스터들이 스폰되고 있었지만 레벨이 훨씬 더 높은 병사들이 수월하게 처리하곤 했다.

내가 선봉에 서서 전진을 시작하자, 베인 사제가 마치 시종처럼 내 뒤를 따랐다.

아, 그때 봤던 그 계단이네.

아, 내가 죽어라 달아날 때 옆에 있던 횃불이 이거로군.

내가 화살을 피하기 위해 뛰어들었던 샛길도 보였다.

애꿎은 지네들이 나 대신 화살을 맞고 죽었더랬지···

추억이 많은 동네였다.

난 왜 그렇게 인간과 접촉하고 싶어했던 거지?

아주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제 나는 가족도 있고, 나 자신의 펫들도 있었다.

더 이상 그때처럼 외롭지 않았다.

게다가 그토록 원했던 인간과의 접촉도 실컷 하는 중이었다.

머리가 아플 만큼···

오르막길을 지나자 내가 처음 인간들을 발견했던 벽 안쪽의 초소가 나타났다.

위로 올라갈수록 초소의 규모가 커졌고, 등장하는 빈도도 높아졌다.

발 아래의 계단도 아래쪽보다 훨씬 잘 관리된 상태였다.

곧 계단이 양 옆으로 갑자기 넓어지더니, 바깥 세상이 눈 앞에 펼쳐졌다.

지상으로 나온 것이다.

갑자기 밝아지는 바람에 시야가 흐렸지만, 나는 눈이 적응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대신 여섯 개의 다리를 부지런히 놀려서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갔다.

시야가 다시 돌아오자 던전의 입구 주위를 둥글게 둘러싼 벽이 보였다.

다행히 벽 한쪽의 쇠창살 문은 열려 있는 상태였다.

내가 문을 향해 돌진하자 벽 위쪽에서 놀란 고함 소리들이 들렸다.

잠시 후 여왕의 병사들과 주민들도 우렁찬 함성을 지르며 던전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문 위로 올라가 있던 쇠창살이 조금씩 움직였다.

누군가 문을 닫기 위해 서둘러 도르래에 감긴 밧줄을 푸는 모양이었다.

어림없지!

반중력 화살!

미리 준비해 놓았던 마법이 날아가 쇠창살에 명중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쇠창살은 내려오는 대신 계속 위로 올라갔다.

오히려 문을 고정하는 장치까지 들썩이며 같이 하늘로 날아가려고 했다.

나는 과감하게 쇠창살 아래의 문을 통과했다.

그러자 주위에서 열기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앞쪽 그리고 양 옆에 위치한 올라가는 계단에서 여러 개의 열기가 동시에 접근하고 있었다.

그래, 이리 와라!

검을 치켜들고 용감하게 계단을 달려 내려오던 첫 번째 병사가 갑자기 엄청난 힘이 자신을 잡아당기는 걸 느끼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휙!

나는 중력 에너지를 주입한 턱으로 병사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공중에 떠 있는 적을 그대로 공격했다.

물어 깨뜨리기!

우직!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에 놀란 나머지, 병사는 방어 자세를 취할 새도 없이 내 공격을 허용했다.

얇은 갑옷이 내 턱 아래에서 무참히 찢어졌다.

아직 살아 있다고?

그럼 한 방 더!

사실, 대부분의 인간들이 물기를 한두 차례는 버틸 수 있을 터였다.

몬스터 부산물로 만든 갑옷을 입고 있는 데다가 레벨도 좀 올렸을 테니까 말이다.

나는 이번 기회에 깨물어 뚫기 스킬을 연마하기로 했다.

깨물기!

깨물기!

[레벨 23 정찰병을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좋아.

레벨이 그리 높은 친구는 아니었군.

인간들도 몇몇 특별한 클래스로 전직할 때에는 레벨이 초기화되지만, 대부분의 일반 클래스는 평생에 걸쳐 레벨이 오른다고 들었다.

여왕이 말해준 기준에 비추어볼 때 레벨 23은 꽤 낮은 숫자였다.

아마 최근에 징집한 병사인 것 같았다.

뒤따라 내려온 병사들은 거대한 개미에게 물려 죽은 동료를 발견했다.

저 사람들 관점에서 보면 꽤 끔찍한 장면일 것 같았다.

갑자기 동료가 공중으로 날아가서 서둘러 쫓아와 보니, 거대한 몸집에 반짝이는 갑각, 유난히 커다란 눈을 한 개미가 길고 들쭉날쭉한 턱으로 그 시체를 물고 있는 상황이니까 말이다.

섬뜩하겠지.

병사들은 겁에 질린 얼굴로 걸음을 멈췄고, 덕분에 나는 다시 한 번···

휙!

이리 와!

물어 깨뜨리기!

우직!

나는 다시 한 번 턱에 주입한 중력 에너지로 무방비 상태의 병사를 끌고 왔다.

나머지 병사들은 겁에 질린 얼굴로 동료가 보이지 않는 힘에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나는 두 번째 병사의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재차 스킬을 사용했다.

이번에도 깨물기다!

깨물기!

깨물기!

[레벨 31 정찰병을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깨물어 뚫기 스킬이 레벨 7이 되었습니다.]

하하, 좋았어!

하나 더 잡아볼까?

하지만 나머지 정찰병들이 모두 줄행랑을 치는 바람에 그럴 수는 없게 됐다.

놈들이 내 무시무시한 위용에 겁을 먹고 도망쳤다는 생각으로 우쭐하는 순간, 여왕의 병사들이 무기를 휘두르며 내 옆을 지나쳐 달려갔다.

아하···

어쨌든 계획을 성공시키려면 최대한 빠르게 성까지 가야 했다.

우리는 관문의 적들을 소탕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 전부 밖으로 나와서 리리아의 넓은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우리 뒤쪽의 관문에서 불기둥이 한 번, 두 번, 세 번 솟아올랐다.

아마 용병들이 성으로 경고를 보내는 것 같았다.

어쨌든···

내가 새로운 세계에 오고 나서 처음 보는 판타지 도시였다!

지붕이 뾰족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길가는 사람들로 붐볐다.

저마다 수레를 밀거나, 상점에서 물건을 사거나 아니면 마차를 타고 오가는 중이었다.

아무리 허름해 보이는 집에도 굴뚝이나 연통은 없었다.

마을에서 본 바로, 이 세계의 사람들은 주로 마법이 부여된 금속판을 사용했다.

공기 중의 마나로 금속판을 가열해서 요리나 난방에 쓰는 방식이었다.

어쨌든 내가 도시를 가로질러 달리자, 갑자기 나타난 몬스터를 보고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거 손님한테 너무한 거 아니오?

시가전

나는 여왕의 근위대와 함께 시가지를 질주했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병사들이 내게 방향을 알려줬다.

우리와 마주친 시민들은 모두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솔직히 몬스터가 없었다고 해도 아마 병사와 마주치면 같은 반응을 보였을 터였다.

이미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경험한 뒤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직도 불에 탄 건물과 무너진 벽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상당히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던 모양이다.

나는 스스로가 영리하다고 주장하는 (난 아직 그리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왕이 적을 너무 과소평가한 건 아닌지 궁금했다.

여왕은 반란군을 순식간에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미 일주일 동안이나 이어진 내전 끝에 성이 함락되고, 여왕은 도시 밖으로 도망쳐야 했다.

적이 정말 여왕이 폄하하는 대로 던전의 용병 무리에 불과하다면, 실로 놀라운 전과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내가 듣기로 주기적으로 던전을 탐험하는 자들은 일반적인 병사들에 비해 레벨이 더 높고, 장비나 실력도 훌륭한 편이었다.

그 중 무엇 하나라도 부족한 던전 탐험가들은 아주 빠르게 죽어 버리니까 말이다.

하지만 군대는 보다 규율과 조직력이 강하고 훈련도도 높은 집단이었다.

특히 국가가 많은 자원을 투입한 정예 부대의 경우, 대다수 던전 탐험가들은 꿈도 꾸지 못할 장비와 특권을 누리기도 했다.

그게 바로 여왕의 근위대였다.

여왕의 근위병들에게는 마법 무기와 몬스터 부산물로 만든 갑옷이 지급되었고, 던전 원정을 통해 레벨을 올릴 기회도 주어졌다.

그런 만큼 여왕은 이들의 전투력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근위대의 수가 도시 전체를 장악할 만큼 많지는 않았다.

열심히 달려가는 우리 앞쪽의 샛길에서 스무 명의 혼성 부대가 나타났다.

그 중에는 지팡이를 들고 있는 마법사도 둘이나 섞여 있었다.

이 전사들은 내 모습을 보고도 전혀 겁먹은 기색이 없었다.

그저 조금 놀란 표정을 드러낼 뿐이었다.

이 자들이 바로 던전의 용병들이로군!

당연히 개미 몬스터 한 마리에 겁을 먹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잠시 뒤에는 생각이 달라지겠지···

중력 창!

언제 적이 나타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몇 분 전에 이미 주문을 완성하고 충전까지 마쳐서 언제든지 발사할 수 있는 상태로 준비해 두고 있었다.

완성한 주문을 계속 유지하는 일은 쉽지 않았고 정신력을 꽤 소모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던 셈이다.

적이 흩어져서 우리를 공격할 준비를 하기도 전에, 내가 발사한 중력 창이 놈들 한복판에 서 있는 덩치 큰 전사에게 날아가 명중했다.

적대적인 주문이 갑자기 날아오는 상황에도 노련한 전사들은 당황하지 않았고, 침착하게 방어 태세를 취하며 서로 거리를 벌리려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들의 움직임이 제한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뿐이었다.

그냥 뭉쳐 있으라고, 친구들.

굳이 흩어질 필요는 없잖아, 흐흐.

용병 부대를 발견한 근위병들의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여태까지 계속 벼르고 있던 적이 마침내 나타났기 때문이다.

병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돌진했다.

적을 향해 강력한 스킬을 사용한 몇몇은 빛줄기처럼 흐릿하게 변하거나 아예 사라지기도 했다.

젠장 내 경험치를 가로채지 마!

갑작스러운 돌진을 마주한 용병들은 무기를 제대로 들고 맞서려 했지만, 강한 중력이 잡아당기는 힘에 저항하느라 주의와 에너지가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병들 또한 방어를 위한 스킬들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얼굴에 흉터가 가득한 근육질의 용병이 잔뜩 집중한 얼굴로 한쪽 발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그 발로 땅을 구르자,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용병이 발을 구른 지점부터 지면이 파도처럼 솟구쳤다.

그 파도가 우리에게 닿을 무렵에는 높이가 무려 1미터에 달했다!

지면의 파도는 주위 건물에 닿으면 순식간에 감쪽같이 사라졌다.

용병들을 향해 달려들던 병사들 중 몇몇은 발판이 불안정해진 탓에 발동했던 돌진 스킬을 취소해야 했다.

그런 병사들은 파도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길 옆의 건물로 피해서, 지면이 다시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이어서 가슴에 내 중력창이 꽂힌 덩치 큰 용병이 등에 지고 있던 대검을 뽑았다.

용병은 두 손으로 대검의 손잡이를 움켜쥐더니···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아래를 향해 휘둘렀다.

그러자 대검 끝에서 족히 십 미터는 될 법한 빛의 칼날이 생겨나, 대지를 마치 종잇장처럼 가르며 나를 향해 날아왔다.

이크!

나는 여섯 개의 다리로 지면을 힘껏 박차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빛의 칼날은 내 옆을 지나쳐 뒤쪽에 있던 집에 부딪혔다.

먼지가 가라앉자 건물 벽에 깊이 패인 자국이 생겨나 있었다.

맙소사!

더듬이가 잘릴 뻔 했잖아!

진정하라고 친구!

좀 띄워줄까?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막 완성된 주문을 발사했다.

반중력 화살!

즐거운 비행 되세요!

추락할 때는 그리 즐겁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내 기대와 달리 두 명의 마법사들이 앞으로 나서더니, 마나로 빛나는 지팡이들을 나란히 앞으로 내밀었다.

내가 발사한 중력 화살은 한 데 모인 지팡이들의 머리 부분에 부딪혀 빠르게 추진력을 잃어버렸다.

또 저 기술이로군!

젠장, 나도 정말 배우고 싶은데...

이무래도 저 숙련된 몬스터 사냥꾼들 한복판으로 돌진하는 건 자살 행위 같았다.

나는 거리를 유지한 채로 또다른 주문의 패턴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지금 타이니가 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타이니라면 망설임 없이 용병들 한복판에 뛰어들어 큰 소란을 피우고, 내가 안전하게 주문을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줬을 터였다.

혹은 크리니스가 성체로 자라났다면, 저렇게 뭉쳐 있는 적들에게 큰 혼란을 선사할 수도 있을 테고···

아니!

쓸 데 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내가 타이니를 데리고 오지 않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녀석에게는 따로 할 일이 있었다.

어쨌든 나는 용병들이 선보인 강력한 스킬에 내심 놀랐다.

여왕에게 들어서 인간이나 다른 지상 종족들이 강력한 스킬을 사용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내 눈으로 직접 보니 느낌이 달랐다.

놀랍게도 쇼는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내 주문을 완전히 사라지게 만든 두 명의 마법사가 반격을 개시했다.

둘 중 하나가 사납게 몇 마디를 외치자 주위에 불꽃으로 이루어진 구형의 방어막이 생겨났다.

그 뜨거운 열기에 내 더듬이가 얼얼할 정도였다.

또다른 마법사가 만들어낸 방어막은 빠르게 회전하는 돌개바람이었다.

공기 방패라니!

방어 수단을 마련한 마법사들은 즉시 다음 주문을 사용했다.

잠깐 정신을 집중한 두 마법사는 각각 손을 들어 동시에 나를 가리켰다.

왜 난데?!

한쪽에서는 불꽃 줄기가, 또 다른 쪽에서는 강력한 돌풍이 일어났다.

두 주문은 중간에서 뒤섞여 거대한 불꽃의 폭풍으로 변했다.

이게 무슨···

마법 콤보라니!

제기랄 멋지잖아!

30미터가 넘는 거대한 불길이 쏟아져 나와 순식간에 거리를 뒤덮었다.

재빨리 바닥을 오른쪽으로 구르는 내 바로 곁을 불길이 휩쓸고 지나갔다.

뜨거워!

엄청 뜨겁다!

몸 왼쪽에 불길이 닿자 격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갑각이 달아오르고 몸 안쪽의 온도가 불편할 정도로 높아졌다.

다행히 곤충인 나는 말하자면 뼈가 몸을 둘러싼 셈이라, 피부가 드러나 있는 인간보다 불에 강했다.

물론 그런 나조차 방금 공격에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순간 재생 분비선을 사용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직 전투 초반에 불과했다.

재생 분비선은 더 위급한 상황을 위해 아껴 놓아야 했다.

바이오매스를 좀 먹으면 회복이 될 것 같은데···

불길이 사라지자, 우리편이 반격에 나설 태세를 취했다.

도로 양쪽으로 몸을 피했던 여왕의 근위대가 다시 한 군데로 모였다.

나란히 늘어선 병사들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일제히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열 가닥의 빛줄기가 용병들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빛줄기에 맞은 몇몇 용병들이 그대로 넘어졌다.

중력 창이 끌어당기는 힘에 계속 저항하고 있다가, 갑작스러운 충격을 받으니 버티지 못하고 쓰러진 것이다.

넘어진 용병들은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우두머리인 대검을 든 전사 쪽으로 '떨어졌다'.

기회다!

적들의 전열이 어지러워지자 나는 즉시 턱에 중력 에너지를 주입했다.

앞쪽의 전사들과 달리 뒤쪽의 마법사들은 아직 두 다리로 버티고 서 있었다.

나는 마법사들이 근위병들의 공격과 자기편 전사들이 벌이는 소란에 정신이 팔린 틈을 놓치지 않고 행동에 나섰다.

저 마법사들이 어떻게 내 주문을 막는지 모르지만, 나도 꼭 배우고 싶었다.

그러니까, 적대적인 마법을 막는 방법이 분명히 있을 터였다.

그렇지 않으면 마법 대결은 무조건 먼저 주문을 시전하는 쪽이 이길 테니까 말이다.

그 기술이 꼭 지팡이를 필요로 하지는 않아야 할 텐데···

어쩌면 내가 외부 마나 조작 스킬을 소홀히 한 탓에 단서를 얻지 못한 걸까?

아무도 내게 신경 쓰지 않는 사이, 나는 적들로부터 20미터 거리를 유지한 채 왼쪽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곧 두 마법사와 나란한 위치에 도착했다.

화염 마법사가 앞쪽에, 바람 마법사가 뒤쪽에 보였다.

각각 불꽃과 바람의 방패를 두르고 있었다.

그때 화염 마법사가 바닥에 나뒹구는 동료들로부터 시선을 돌려 내 쪽을 쳐다봤다.

내가 옆으로 돌아와서 턱을 보라색으로 빛내고 있는 걸 본 화염 마법사는 경고의 말을 외치며 지팡이를 내 쪽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지!

휙!

내가 턱을 치켜들자 화염 마법사는 본능적으로 몸을 낮추며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아주 기민한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등 뒤에서 자기 쪽으로 날아오는 바람 마법사를 피하는 데에는 별 소용이 없었다.

쾅!

각각 불꽃과 바람으로 이루어진 두 개의 방어막이 서로 부딪혔다.

그러자 바람이 흩어지고 불꽃이 위로 솟구쳤다.

완전히 허를 찔린 두 마법사는 서로의 방어막이 흩어지는 동안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했다.

거센 바람에 실린 불길이 바닥에 나뒹구는 같은 편을 덮쳤다.

쓰러져서 한 데 뭉친 용병들은 갑자기 뜨거운 불길과 날카로운 바람 세례를 맞자 당황해서 비명을 질렀다.

용병들로서는 상황이 점점 더 통제를 벗어나고 있었다.

지금이다!

나는 허우적대는 용병들을 향해 돌진했다.

경험치를 내놔!

싸움에 나선 이상, 보상을 조금이라도 더 챙겨야 했다.

여왕의 근위대가 이 용병들을 살려 둘 리는 없으니···

어차피 죽어야 할 인간들이라면 내가 이득을 좀 봐도 되겠지.

겨우 정신을 차린 마법사들이 방어막을 내리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하지만 이미 내가 마나로 빛나는 턱을 크게 벌린 채 달려드는 중이었다.

물어 깨뜨리기!

우직! 우직! 우직!

나는 마법사들에게 반격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빠르게 세 차례를 연달아 물었다.

커다란 에너지 턱은 두 마법사를 동시에 물어서 쓰러뜨렸다.

[물어 깨뜨리기 스킬이 레벨 3이 되었습니다.]

마무리를 하자!

마법사들은 쓰러진 채로 힘없이 지팡이를 들어 나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마법사가 근접 전투에 약하다는 상식은 이 세계에서도 통하는 듯 무의미한 저항에 불과했다.

나는 깨물어 뚫기 스킬을 사용해서 두 마법사의 숨통을 차례로 끊었다.

[레벨 36 인간 견습 화염 마법사를 처치했습니다.]

[레벨 34 인간 견습 바람 마법사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레벨이 14가 되었습니다.]

좋아!

무슨 성문?

이런!

내가 위협적인 마법사 둘을 한꺼번에 처리한 걸 자축하고 있는데, 용병들의 우두머리가 대검을 치켜들고 나를 향해 달려드는 모습이 보였다.

피하자!

아무리 다이아몬드 갑각이 있어도 저 커다란 검에 머리를 맞고 싶지는 않았다.

콰직!

아슬아슬하게 빗나간 대검이 엄청난 힘으로 바닥을 내리치자, 돌 파편이 사방으로 날리며 내 갑각을 때렸다.

휴!

나는 포위를 당하지 않기 위해 그대로 돌아서서 용병들과 거리를 벌렸다.

여왕의 근위대는 계속 공격 스킬을 날리며 돌진하는 중이었다.

마침 내 꽁무니가 용병들 쪽을 향하고 있으니···

푸슝! 푸슝! 푸슝! 푸슝!

나는 고개를 살짝 돌려서 시야를 확보한 뒤 구속 산성 용액을 퍼부었다.

그 중 두 발은 특히 기세가 사나운 우두머리를 향해 발사했다.

그리고 보조 뇌가 준비하고 있던 중력장 주문을 중단했다.

굳이 사용하지 않아도 여왕의 병사들이 충분히 승리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도로 저편에 안쪽 요새로 통하는 길을 막고 있는 성벽과 거대한 문이 보였다.

나야 얼마든지 벽을 타고 오를 수 있지만···

병사들이 안으로 들어가려면 저 문을 뚫어야 했다.

나는 성문을 바라보며 중력 분비선에서 에너지를 끌어내 무시무시한 중력 폭탄으로 압축하기 시작했다.

중력 폭탄을 압축하려면 1, 2분 정도 걸리니까 지금부터 준비해야 할 것 같았다.

한편 정면에서 병사들이 달려드는 가운데 산성 용액까지 뒤집어쓴 용병들은 이제 패색이 완연했다.

지원을 맡았던 두 명의 마법사들이 죽어버린 이상, 용병들이 성난 여왕의 근위대를 당해낼 가능성은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살아날 길이 없다고 판단한 용병들은 한층 더 저돌적으로 싸우기 시작했다.

마침내 중력 창의 효과가 끝나 움직임이 자유로워진 용병들은 스킬을 있는 대로 난사하며, 죽기 전에 한 명의 병사라도 더 쓰러뜨리려고 애썼다.

나는 몇 명이라도 항복하지 않을까 했지만 그런 용병은 없었다.

양측이 사력을 다해 싸우는 와중에, 나는 근처 골목에 몸을 숨기고 계속 중력 폭탄을 압축하며 기회를 엿봤다.

안전하게 경험치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마다하지 않겠지만···

나는 이미 다른 병사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한 뒤였다.

굳이 더 이상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었다.

마침내 여왕의 병사들이 승기를 잡자, 몇몇 용병들이 포기하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용병들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 가까운 건물 안으로 들어가거나 좁은 골목을 통해 도망치려 했다.

그 와중에 불쌍한 녀석 하나가 하필 내가 몸을 숨기고 있던 골목으로 들어왔다.

안녕!

물어 깨뜨리기!

[레벨 38 인간 검객을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나는 골목 안에 쓰러진 시체를 보고 잠시 고민했다.

회복을 돕기 위해···

먹을까 하고 말이다.

그러니까···

내가 전에 인간이기는 했지만···

시간이 꽤 지났고···

난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니까, 식인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아니, 식인은 맞지만···

적어도 동족을 잡아먹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흐으으음.

HP를 확인하니 그리 많이 줄지는 않았다.

그리고 재생 분비선도 아직 가득 찬 상태였다.

굳이 억지로 인간을 먹을 필요는 없을 듯했다.

소포스처럼 몬스터를 부리는 용병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럼 별다른 거리낌 없이 바이오매스를 섭취할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얼마 전 여왕에게 몬스터를 부리는 기술이 얼마나 흔하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나는 포르모를 만났을 때 너무 깊은 인상을 받아서, 가능하면 누구라도 강력한 몬스터를 펫으로 삼아 자기 대신 싸우게 할 거라고 생각했다.

여왕의 말에 따르면 몬스터를 부리는 기술은 인간들 사이에도 잘 알려져 있었다.

몇몇 용병들이 몬스터를 펫으로 삼았고, 일부는 아예 그쪽에 전념해서 [조련사] 클래스를 택하기도 했다.

하지만 몇 가지 이유 때문에 몬스터 조련사가 흔하지는 않았다.

우선 몬스터를 재구성할 때는 물론 전투가 가능할 만큼 성장시키려면 코어가 필요한데, 돈이나 다름없는 코어를 그렇게 낭비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또 몬스터를 제대로 기르려면 바이오매스를 계속 먹여야 하는데, 돈을 주고 사려면 너무 비쌌고 던전에서 직접 구하려면 너무 위험했다.

게다가 효율적인 진화를 위해서는 심지어 더 많은 코어가 필요했다.

몬스터 펫은 그야말로 돈 잡아먹는 괴물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마법 부여에 코어를 주로 사용하는 지상 종족들은 아무 부유한 소수나 전략적으로 몬스터 병력을 양성하는 일부 국가를 제외하면 그럴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소포스 종족의 경우에는 정신 마법에 아주 능해서 몬스터를 쉽게 부릴 수 있을 뿐 아니라, 던전 안에 거주하기 때문에 바이오매스를 구하기도 용이했다.

또 신체 구조상 직접 싸울 일이 없다 보니 마법 장비에 대한 수요도 적었고, 그래서 코어가 그리 부족하지 않을 터였다.

용병들이 모두 쓰러지자, 여왕이 마을 주민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마을 사람들은 전투의 여파로 가까운 건물들이 부서진 모습을 보자 조금 놀란 눈치였다.

말게이트 주민들 중에도 전투 스킬의 레벨을 좀 올린 경우가 있었지만, 무기를 휘둘러 건물을 쪼갠다는 건 이들의 상상을 넘어선 일인 듯했다.

하지만 내 모습을 보자 마을 사람들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도대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존재에서 위안을 얻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젠장맞을 사제도 다시 나타났다.

사제는 서둘러 내 곁으로 달려오더니 다른 마을 사람들에게 뭐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내 위대한 힘을 칭송하거나, 시스템이 내게 내린 은총을 찬양하거나 뭐 그런 헛소리를 떠들어대고 있을 터였다.

여왕은 근위병들에게 둘러싸인 채 내게 다가와서 정신 마법으로 연결 고리를 만들었다.

[성문에는 도달했지만 빨리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시간을 끌면 역도들이 도시 전역에서 병력을 모아 달려올 테니까! 네게 성문을 뚫을 방법이 있다고 했지, 몬스터?]

나는 몸 속에 압축해 놓은 중력 폭탄을 확인했다.

딱 알맞게 숙성된 상태였다.

굳이 여왕에게 대답하지 않고, 나는 성문 쪽으로 다가가서 중력 에너지를 최대한 강하게 압축했다.

잠시 후 작은 블랙홀처럼 생긴 구체가 만들어졌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입을 벌려 중력 폭탄을 내보냈다.

검은 구체가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성벽을 향해 날아갔다.

중력 폭탄이 주위 공기를 빨아들이며 내는 날카로운 소리에 사람들이 모두 귀를 감쌌다.

심지어 가까이 있는 건물들의 유리창도 깨져 나갔다.

목표 지점에 도달한 검은 구체는 점점 커지며 성문을 부수고 집어삼켰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경첩에서 뜯겨져 나온 성문은 오래지 않아 중력 폭탄 안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마침내 중력 폭탄이 깜빡이다 사라졌을 때에는, 위풍 당당하던 금속 성문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부서진 성벽과 반쯤 부서진 채 흔들리는 경첩만 남았을 뿐이다.

나는 여왕을 돌아봤다.

[무슨 성문?]

중력 폭탄이 사라진 뒤에도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다 어디선가 털썩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사제가 나를 향해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나머지 마을 주민들이 일제히 그 뒤를 따랐다.

병사들도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투구에 가려진 얼굴들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나는 여왕을 쳐다봤다.

[왜?]

여왕이 이채를 띤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저 성문에는 마나 반사 처리가 되어 있다. 원래는 주문이 통하지 않았어야 해.]

마나 반사 처리라고?

그리 효과가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한 겹 더 입히거나 뭐 그래야 하는 거 아냐?

어쨌든, 여기서 이렇게 감탄하고 서 있을 때가 아닐 텐데?

[이제 들어가야 하지 않나?]

내가 여왕을 재촉했다.

여왕은 살짝 몸을 떨더니 다시 위엄 있는 태도로 돌아와 병사들에게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근위대가 함성을 지른 뒤 성문 안으로 돌진했다.

몇몇 병사들은 스킬을 사용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적에게 달려들었다.

성 안의 방어 병력이 부서진 성문을 막기 위해 나서자, 주위는 순식간에 무기가 서로 부딪히는 금속성으로 가득 찼다.

마을 주민들은 여왕을 둘러싼 채 좀 더 천천히 전진했다.

개중 용감한 자들은 소규모로 무리를 지어서 이미 전투를 시작한 병사들을 지원했지만, 나머지는 방어 태세를 유지하며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내 곁에 머물러라, 몬스터. 우리는 궁전의 알현실로 가야 한다. 아마 반란의 수괴들이 거기 있을 테니까.]

[흐음.]

나는 애매한 신음 소리를 냈다.

과연 악당 두목이 왕좌에 앉아서 우리를 맞이한 다음 마지막 전투가 시작될까?

솔직히 그건 너무 뻔한 전개인데···

우리가 성 안으로 들어가자 한 무리의 마을 주민들이 주변의 잔해며 버려진 수레 따위를 가져다가 부서진 문을 막았다.

그리고 길다란 창이나 쇠스랑을 가진 사람들이 나란히 서서 성문을 지켰다.

···근위대의 병력으로 보강할 때까지 잘 버티면 좋겠군.

궁전의 정문으로 이어진 넓은 길 좌우로는 멋진 정원이 펼쳐졌고, 일정한 간격으로 커다란 석상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야말로 왕궁다운 화려한 모습이었다.

나는 다소 어이없어 하며 여왕을 흘끗 쳐다봤다.

도시 한복판에 이렇게 넓은 면적의 정원을 만들었다고···?

지나친 낭비잖아···

어쩌면 내가 개미 둥지에 익숙해서 선입견을 가지고 보는지도 몰랐다.

개미 기준으로는 나와 타이니, 바이브, 크리시스가 따로 작은 방을 차지하는 것만 해도 이상한 사치였으니까 말이다.

맙소사, 우리 여왕님은 자는 동안 일개미들이 그 위를 넘어다닌다고!

내가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리고 있는데 궁전 문이 열리더니 무기를 든 병사들이 밀집 대형으로 쏟아져 나왔다.

아까 마주친 용병들과 비슷한 장비를 착용하고 있었지만, 전혀 용병처럼 보이지 않는 무리였다.

단호한 표정, 절도 있는 동작, 질서 정연한 대형···

저건 용병이 아니라 군대인데?

나보다 앞서 가던 마을 주민들은 갑자기 나타난 병력을 보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이 무지렁이들이 저런 정예 병력에 상대가 될 리 없었다.

나는 사람들이 도망치기로 결정할 시간을 주지 않고 앞으로 나서서 적을 향해 돌진했다.

내가 미친 걸까?

그래서 자살 공격을 하는 걸까?

아니면 내가 방금 중력장 주문을 완성했을까?

후후후.

나는 성문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곧 근접 전투가 벌어질 거라고 예상했다.

마치 던전 내부로 들어갈 때처럼 말이다.

그래서 내가 아는 가장 강력한 근거리 주문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병사들은 검과 방패를 들고 나를 향해 마주 달려왔다.

검이 서서히 빛나는 걸로 볼 때 스킬을 사용하려고 준비하는 것 같았다.

나는 두 개의 뇌를 총동원해서 중력장 패턴에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좀 더 가까이···

좀 더 가까이···

중력장!

병사들이 가까이 다가와서 스킬을 사용하기 바로 직전, 내가 중력장을 발동했다.

어두운 보라색의 반구가 점점 커지며 내 앞에 있는 병사들을 집어삼켰다.

쿵.

거의 귀에 들릴 정도의 충격과 함께 무거운 중력이 마치 천상의 망치처럼 병사들을 내리쳤다.

그 직전에 쏘아진 몇몇 빛의 칼날들이 내 다이아몬드 갑각을 두드렸지만, 대단치 않은 피해를 입힐 뿐이었다.

나를 중심으로 한 10미터 반경의 모든 병사들이 보이지도 않고 저항할 수도 없는 힘에 짓눌리고 있었다.

병사들의 움직임이 일제히 느려졌고, 몇몇은 무릎을 꿇고 주저앉기도 했다.

관절이 안 좋은 친구들인가 보군.

물어 깨뜨리기!

나는 중력장 안에서 신음하는 병사들을 향해 에너지 턱을 휘둘렀다.

내가 주문을 유지하는 한 싸움은 일방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힘에 팔과 다리를 짓눌리고 검과 방패가 열 배는 무거워진 병사들은 느리고 고통스럽게 움직였다.

있는 힘을 다해 스킬을 사용해 보려고 애써도 쉽지 않았다.

개중에는 검이나 방패를 치켜드는 병사들도 있었지만, 둘 다 들어올리는 경우는 없었다.

나는 그 사이를 누비며 빈틈이 드러날 때마다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그리고 병사들이 가까스로 반격하면 어렵지 않게 피했다.

[레벨 39 인간 검객을 처치했습니다.]

[레벨 36 인간 정찰병을 처치했습니다.]

[레벨 37 인간 병사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레벨 15가 되었습니다.]

[깨물어 뚫기 스킬의 레벨이 8이 되었습니다.]

음하하하!

그렇게 일방적으로 병사들을 학살하고 있는데...

갑자기 용기가 솟기라도 했는지, 말게이트 주민들이 갑자기 함성을 지르며 내가 있는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왜 저러는 거지?

아마 내가 병사들을 손쉽게 제압하는 모습을 본 사제가, 어서 가서 신성한 전령을 돕자고 선동을 한 모양이었다.

당연하지만 마을 주민들은 내 중력장의 범위 안에 들어오자 마자 바닥에 엎어져서,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이런 멍청이들!

왕좌

이제 마을 주민들은 아직 무기를 휘두를 수 있는 병사들의 표적이 되어버렸다.

나는 이 바보들을 그냥 죽게 내버려둘까 하다가, 속으로 한숨을 내쉰 뒤 중력장을 해제했다.

정말이지 성가신 작자들 같으니라고···

내가 마법을 거두자 어두운 보라색의 중력장이 잠시 깜빡거리다 사라졌다.

더불어 중력 분비선에서 빠져나가던 에너지의 흐름도 멈췄다.

전투가 길어질수록 분비선 업그레이드의 진가가 드러나고 있었다.

여태까지 중력 화살과 창을 날리고, 턱에 중력을 주입해서 적들을 끌어당기고, 중력 포탄과 중력장까지 썼지만 아직 내 분비선에는 에너지가 절반 이상 남아 있는 상태였다.

코어에 마나가 가득 차 있는 건 물론이고 말이다.

중력장이 사라지자, 병사들과 마을 주민들이 모두 일어나서 무기를 휘둘렀다.

병사들에 비해 마을 주민들의 수가 훨씬 많았지만···

개개인이 너무 약했다.

만약 내가 중력장을 사용해서 병사들의 수를 상당히 줄이지 않았다면 마을 주민들에게는 아무런 승산도 없었을 터였다.

주민들 중 사제가 가장 먼저 벌떡 일어나서, 우렁차게 포효하며 하나밖에 없는 팔로 무거워 보이는 철퇴를 미친듯이 휘둘렀다.

나는 사제가 지르는 소리를 내가 알아듣지 못한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아무래도 이 사제는 나에 대해서··· 이상한 집착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만약 내가 어디다 응가라도 하면 그 장소를 성소로 지정한 다음 천 년 동안 숭배할 기세였다.

내가 여태까지 엉덩이에서 산성 용액만 뿜어내서 다행이지···

싸움은 빠르게 난전으로 접어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병사 하나마다 여럿이 달려들어 믿을 수 없는 열정과 무모한 용기를 발휘하며 연신 무기를 휘둘렀다.

무장도 형편없고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 못한 농부들은 종교적인 열정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의 상처도 돌보지 않고 피로도 무시한 채 막무가내로 적에게 달려들었다.

···거의 둥지를 위해 싸우는 개미들이 떠오를 정도였다.

그래서 나도 예전에 개미들과 함께 싸울 때처럼 전장 곳곳을 누비며 사람들을 도왔다.

병사들의 다리와 팔을 물고, 무기를 손에서 낚아채고, 몸통 박치기를 해서 넘어뜨리며 서로 뭉치지 못하게 막았다.

때때로 중력 화살을 발사해서 병사를 공중에 띄웠다가 엄청난 속도로 추락하게 만들기도 했다.

놀랍게도 몇몇은 그러고도 즉사하지 않았는데, 아마 충격을 흡수하거나 생명력을 늘리는 스킬을 사용한 덕분인 것 같았다.

하지만 공중에서 떨어진 병사들 대부분은 목숨을 잃었고 나머지도 중상을 입었다.

물론 우리편의 머리 위로 떨어지지 않도록 가능하면 가장 바깥쪽에 있는 병사들만 띄웠다.

나는 스킬 레벨도 올릴 겸, 그리고 실수로 마을 주민들을 다치게 하지 않기 위해 깨물어 뚫기만 주로 사용했다.

너무 근접한 상태로 전투가 벌어지고 있어서 물어 깨뜨리기 같은 범위 공격을 사용하면 아군까지 말려들 위험이 있었다.

기나긴 20분이 지나고 마침내 전투가 끝났다.

마을 주민들이 승리를 쟁취했다!

사람들은 온몸이 땀과 상처투성이가 된 채로 무기를 들고 환호성을 질렀다.

몇몇은 목숨을 잃었지만 그 사실이 주민들을 의기소침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오히려 순교자들의 희생은 주민들을 더욱 흥분하게 만들었다.

이 사람들 진지하게 정신과 치료가 필요해 보이는데···

나도 적들을 추락시켜 죽이는 과정에서 레벨이 하나 더 올랐고, 깨물어 뚫기 스킬의 레벨도 올랐다.

이제 깨물어 뚫기 스킬은 한 단계만 더 성장하면 레벨 10이었다.

그러면 내가 턱으로 사용하는 두 가지 주력 스킬 모두 고급 스킬로 업그레이드하는 셈이었다.

스킬에 대해 여왕이 제공한 정보에 따르면, 사용자의 체력을 외부로 투사할 수 있는 스킬은 모두 고급 스킬로 취급된다고 했다.

클래스에 기반한 시스템으로 성장하는 지상 종족들은 목숨을 건 싸움이 아니라 훈련을 통해서도 자기 클래스에 해당하는 스킬을 연마할 수 있었다.

보통 훈련병이나 용병들은 최소한 이 단계까지 스킬을 익혀야 실제로 전장에 나서는 일이 허락됐다.

10미터 밖에서 빛의 칼날을 날리는 적에 맞서서 그저 검이나 창을 휘두를 줄만 아는 병사를 내보내 봤자 의미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나도 터널 지도처럼 지속적인 사용만으로 성장하는 스킬이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몬스터가 돌이나 나무를 상대로 연습을 한다고 공격 스킬의 레벨이 오를 것 같지는 않았다.

시스템이 몬스터를 차별하는 또 하나의 사례였다.

대신 몬스터들은 지상 족족에 비해 더 빠르게 성장했다.

훈련을 통한 성장은 속도가 느린 반면, 몬스터들은 오직 지속적인 전투로 레벨과 스킬 그리고 바이오매스를 모두 얻어서 강해졌기 때문이다.

어리지만 강한 몬스터는 며칠이면 진화를 할 수도 있는 데 비해 인간들은 하나의 스킬을 올리기 위해서도 최소한 몇 달에서 길게는 몇 년까지 훈련을 거듭해야 했다.

반대로 인간 마법사들의 경우에는 성장이 나보다 훨씬 빠를 터였다.

인간들은 마나를 소모하지 않고 학습과 명상을 통해 마법 관련 스킬을 익힌 다음 실제로 사용하면서 스킬 레벨을 올리지만, 내게는 반복적으로 연습하고 또 연습하는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간들이 마법사 스킬의 레벨을 더 빨리 올릴 수 있는 대신, 몬스터들에게는 마법 속성 분비선이라는 혜택이 있었다.

속성 분비선은 기본적으로 특정한 마법을 배우는 지름길이나 마찬가지였다.

여왕의 설명을 듣자 나는 내가 선택한 마법 수련 방식이 본질적으로 지적인 고등 생물들이 사용하는 지상의 방식에 가깝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기초적인 스킬들을 바닥부터 쌓아 올리는 방식 말이다.

여왕에 따르면, 인간처럼 주문을 사용하는 몬스터들이 있기는 하지만 아주 드물 뿐 아니라 던전 깊은 층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고 했다.

5분 정도 숨을 돌리자 여왕이 소수의 근위병들을 대동한 채 우리를 궁전 안으로 이끌었다.

커다란 문이 알리자 안쪽의 홀에서 따스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거의 지구의 인공 조명처럼 느껴지는 빛에 나는 잠깐 혼란을 겪었다.

마을 주민들과 함께 안으로 들어가자, 그 빛이 벽에 일정 간격으로 설치되어 있는 램프에서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놀라운 점은 그 램프들에 내가 감지할 수 있는 어떤 에너지원도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불꽃이나 가스는 물론 전선조차 없었다.

뭘로 불을 밝히는 거지?

호기심에 사로잡힌 나는 여왕과 함께 전진하는 전사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벽을 기어 올라갔다.

그리고 높이 매달려 있는 램프를 자세히 들여다보자···

[호환 가능한 몬스터 코어를 발견했습니다. 코어를 강화하거나 몬스터를 재구성하겠습니까?]

···

맙소사···

자세히 보자 벽에 붙어 있는 황금빛 램프의 안쪽에는 작은 보석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코어였다!

이게 이 세계에서 부를 과시하는 방식인 듯했다.

용병들이 코어를 얻기 위해 온갖 고생을 하는 반면, 왕족은 이렇게 조명으로 쓰고 있으니 말이다.

여태까지 내가 이 세계에서 살아온 과정을 생각하면···

이런 자원의 낭비는 내게 거의 모욕처럼 느껴졌다.

재빨리 주위를 살펴서 아무도 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한 나는 재빨리 속으로 생각했다.

[강화!]

입구 홀에는 여섯 개의 램프가 있었고 나는 빠르게 벽을 타며 모든 코어를 남김없이 흡수했다.

그리고 왕좌를 향해 나아가는 군세에 자연스럽게 합류했다.

후후후.

완전 범죄다!

아무도 못 봤겠지?

하지만 일행의 후미에 다시 합류하자 마자,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구냐?!

고개를 살짝 돌려서 뒤쪽을 바라보자 사제가 경건한 표정으로 나를 따라 걷고 있었다.

···

그동안 계속 내 뒤에 있었던 건가!

어떻게 내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조용히 움직일 수가 있지?

소름 끼쳐!

에효.

아무래도 내가 코어를 흡수한 일을 비밀로 하는 건 불가능하겠군.

저 녀석은 기회가 생기자 마자 그걸 가지고 뭔가 설교할 거리를 만들어낼 테니···

나는 더 이상 숨기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램프가 나타날 때마다 벽을 타고 올라가서 코어를 흡수했다.

결국 알현실에 이르기 전에 네 개의 코어를 더 흡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알현실에 들어서자, 나는 눈부신 조명에 거의 침을 흘릴 뻔했다.

이렇게 많은 코어라니!

이제 몇 개만 더 흡수하면 내 코어를 최대치인 100MP까지 성장시킬 수 있었다.

그런 다음 특별 코어로 융합하면 필요 레벨을 충족하자 마자 진화할 수 있을 터였다.

지금 내 레벨이 16이니 다음 진화까지 절반 이상 온 셈이다!

오직 몬스터만 가질 수 있는 진화에 대한 기대감이 내 가슴을 부풀게 만들었다.

대열이 정지하자,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기 위해 사람들을 뚫고 맨 앞으로 나갔다.

당연하게도 왕좌 위에는 검은 가죽 갑옷 차림의 여자 용병이 방만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 주위로는 아첨꾼처럼 보이는 부하들이 늘어섰고, 병사들이 우리와 왕자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

너무 뻔한 연출이잖아!

+

리리아 왕국의 존경받는 여왕이자 전선의 수호자,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사자 영지의 주인인 베리타는 분노하고 있었다.

대체 적이 어떻게 자신의 예상보다 그렇게 많은 병력을 확보할 수 있었는지, 여왕은 그 점을 계속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여왕은 가장 신뢰하는 조언자와 함께 오랜 기간 이번 작전을 논의했다.

하지만 끊임없이 정보를 수집하며 신중하게 세운 계획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유인책에 걸려 모습을 드러낸 적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 여왕의 군대가 대패했기 때문이다.

이 많은 병력이 다 어디서 왔단 말인가?

정문 앞에서 마주친 부대의 조직적인 움직임은 물론, 이제 용병 차림에 어울리지 않는 절도 있는 기세로 알현실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을 보자 모든 일이 분명해졌다.

이들은 용병이나 수를 불리기 위해 고용한 어중이 떠중이가 아니었다.

인근 왕국에서 온 정예 부대였다!

그리고 그 수는 아마 수백 명도 넘을 터였다.

그건 어떤 기준으로 봐도 적은 규모가 아니었다.

이렇게 많은 병력을 보내서 반란을 지원하는 걸 보면 누군가가 리리아의 정세에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추잡한 용병 조합의 지도자 코린이 앉아 있는 왕좌 곁에 시립한 레직스의 대사를 보자, 베리타는 그게 누군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위대한 베리타 여왕 폐하, 다시 뵙게 되어 반갑군요."

한쪽 다리를 왕좌 옆으로 늘어뜨린 채 흔들며, 코린이 조롱하듯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제 대관식을 어디서 열어야 좋을지 의논하던 중이거든요. 혹시 그 점에 대해 좋은 의견 있으신가요?"

베리타는 코린을 무시하고 레직스의 대사인 안드론을 향해 말했다.

"안드론, 그대를 여기서 보다니 흥미롭군. 레직스 왕국이 리리아의 정세 변화에 이처럼 기만하게 대응하다니 정말 놀라워. 귀하가 이 모든 일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고 생각해도 좋을까?"

대사는 미소를 짓더니 아무 말없이 용병 조합의 지도자인 코린을 쳐다봤다.

코린은 자신의 권위를 존중하는 대사의 행동에 만족하며 전 여왕에게 말했다.

"너무 화내지 마시죠, 베리타. 나 외에도 당신이 얼마나 무능한지 알아차린 사람이 더 있었을 뿐이니까. 국경 너머에서 온 우리 친구들은 리리아가 처음으로 훌륭한 정부를 가질 수 있도록 돕고 싶어해요."

베리타는 그 말에 눈을 부라렸다.

"코린, 넌 태어난 이후 지금까지 오직 부와 권력에만 관심이 있었지. 뭔가 다른 이유로 날 배신한 척은 그만둬."

그러자 용병 대장의 미소가 더욱 커졌다.

"하지만 개돼지들 앞에서는 그런 척이 중요하죠."

코린은 여왕의 뒤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무기를 고쳐 잡는 마을 주민들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런 자들 앞에서 내가 당신을 몰아내고 이 나라의 지배권을 넘기는 대가로 산더미 같은 황금을 받기로 했다고 공공연히 말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 말을 듣자 베리타의 안에서 분노가 폭발했다.

베리타의 선조가 이 왕국을 세웠고, 베리타의 친족들이 몬스터로부터 이 땅을 해방시키기 위해 피 흘리며 죽었다.

그리고 그 뒤로 수백 년에 걸쳐, 베리타의 가문은 허허벌판에 세워진 이 나라를 번영으로 이끌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여왕은 레직스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깨달았다.

두려움 때문이었다.

리리아가 너무나 급속히 성장하자, 북쪽의 이웃 나라는 자신들이 언젠가 압도당하고 결국에는 흡수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리리아는 남쪽으로 뻗어 나갈 여지가 있지만, 레직스는 리리아를 공격하지 않는 한 더 이상의 영토 확장도 불가능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열세에 처할 수밖에 없다면 선수를 치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만약 성공하면, 리리아의 빛나는 미래가 레직스의 것이 될 테니까 말이다.

베리타는 레직스의 선택이 합리적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레직스의 여왕이라도 이런 식으로 조국의 미래를 확보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을 터였다.

하지만 베리타는 레직스가 아니라 리리아의 여왕이었다.

리리아는 자신의 왕국이고, 절대로 이런 쓰레기들에게 빼앗길 수 없었다.

여왕은 허리를 곧게 펴고 위엄 있게 선언했다.

"코린, 내게 항복하고 자비를 청해라. 안드론, 부하들을 데리고 즉시 물러가면 목숨은 살려주지."

안드론이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고, 코린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전혀 달라진 게 없군, 베리타. 아직도 자기가 이 왕좌에 앉아 있는 줄 아는 모양이야! 대체 어떻게 도시 안으로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사냥할 수고를 덜었어. 지금 열세에 처한 건 당신이야, 베리타. 순순히 항복하면 빠른 죽음을 약속하지."

베리타는 코린의 눈에 떠오른 가학적인 즐거움으로 볼 때, 결코 자신에게 빠른 죽음을 선사할 의도가 없다는 점을 확신했다.

그때 뭔가가 베리타 바로 뒤에 서 있는 근위병들 사이를 뚫고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왕좌 앞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은 물론 코린의 눈도 놀라움으로 커졌다.

베리타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무엇이 자신의 옆에 와서 섰는지 알 수 있었다.

베리타는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고 정신을 집중해서 몬스터와 대화할 수 있는 연결 고리를 만들었다.

연결 고리가 자리잡자 마자 아직도 익숙해지기 어려운, 차갑고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가 머리 속에 울렸다.

[이 떨거지들은 뭐지?]

목소리가 묻자 여왕의 입매가 팽팽해졌다.

평생을 왕족으로 살아온 베리타는 누가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거칠고 무례하게 말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해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몬스터에게 예의를 기대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나를 배신한 반란의 수괴와 이웃 왕국에서 보낸 병사들이다.]

몬스터로부터 짜증 섞인 무관심의 파장이 전해지자, 여왕은 혼란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이 개미는 대체 왜 이 상황을 지루하다고 느끼는 거지?

코린이 왕좌에서 일어서더니 입가에 조소를 머금었다.

"왕좌를 되찾기 위해 심지어 몬스터와도 동맹을 맺었나, 베리타? 네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레기온이 이 사실을 알면 뭐라고 할까? 혹은 길의 교회는? 이 소문이 퍼지면 넌 끝장이야!"

"글쎄, 네 목이 어깨에서 떨어지면 어디 가서 소문을 내지 못할 것 같군."

베리타가 그렇게 쏘아붙인 다음 몬스터를 돌아봤다.

[여기서 승리할 수만 있다면 반란군은 뿔뿔이 흩어질 거다. 그럼 우리의 거래도 완료되는 거야, 몬스터. 저 사람들이 모두 죽고 나면 약속한 보상을 주지. 할 수 있겠나?]

개미 한 마리

베리타는 몬스터에게 그렇게 묻는 자신이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개미는 던전의 몬스터치고 특별히 크지도 강하지도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계속해서 불가능한 일들을 해내고 있었다.

개미가 사용하는 불가사의한 마법들은 베리타를 끊임없이 놀라게 만들었고, 심지어 두려움을 안기기도 했다.

특히 성문을 날려버린 주문은 베리타의 뇌리에 깊이 새겨졌다.

어떤 성벽도, 설사 방어 마법이 걸린 성벽이라고 해도, 그처럼 놀라운 위력을 견딜 수는 없을 터였다.

그 기억을 떠올리며 베리타는 속으로 결심을 굳혔다.

[···그럼 내가 이 자들을 모두 죽이거나 제압하기만 하면, 당신으로부터 보상을 받아서 여기를 떠날 수 있는 건가?]

몬스터가 물었다.

베리타는 몬스터의 말투에서 뭔가 기이한 느낌을 받았지만, 그 이유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웠다.

베리타가 머리를 흔들어 잡생각을 떨쳐버리며 말했다.

[물론이지.]

[그럼 당신 부하들에게 함부로 끼어들지 말고 얌전히 물러나 있으라고 해. 빠르게 끝낼 테니까.]

몬스터 개미가 여유로운 걸음으로 전진하자, 왕좌 앞을 지키고 있던 백 명의 병사들이 무기를 들었다.

"개미? 고작 개미 한 마리라고? 이게 당신이 찾아낼 수 있었던 최선인가, 베리타? 이따위 미물이 뭘 할 수 있다는 거지? 정신이 나갔군!"

코린이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실제로 위풍 당당한 병사들을 향해 천천히 나아가는 개미 몬스터는 약하고 초라해 보였다.

제대로 정신이 박힌 그 누구라도 개미 한 마리가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터였다.

지상 종족에게 개미 몬스터가 두려움의 대상인 이유는 그 어마어마한 숫자 때문이지, 한 마리 한 마리의 힘 때문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개미는 달랐다.

베리타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정확히 왜 그리고 어떻게 다른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 개미는 달랐다.

개미 몬스터는 계속해서 천천히 적을 향해 나아갔다.

개미가 가까이 다가가자, 병사들이 전투 태세를 취했다.

그리고 개미와 병사들의 거리가 몇 미터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몬스터의 몸 주위로 보라색의 에너지가 깜빡이기 시작했다.

개미가 예의 그 무시무시한 마법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며, 베리타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베리타는 여태까지 그 마법처럼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뭔가를 본 적이 없었다.

그 소리, 그 파괴력.

그 마법에 닿는 모든 것이 그대로···

사라졌다.

마치 거대한 괴물이 집어삼킨 것처럼 한 순간에 무로 돌아갔다.

설사 그 공포스러운 주문의 대상이 자신의 적이라고 해도, 여왕은 동정심을 그리고 심지어 두려움을 느꼈다.

그 끔찍한 주문에 먹힌 자들이 어떤 지옥에 떨어질지 누가 알겠는가?

마침내 개미가 입을 벌렸다.

그러자 죽음의 소용돌이가 사납게 울부짖었다.

개미의 입에서 나온 보라색 구체가 알현실 안의 공기를 빨아들이며, 멀리 떨어진 여왕의 몸까지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이윽고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구체가 선두에 서 있는 병사의 방패에 부딪혔다.

마치 바람이 비명을 지르는 듯한 끔찍한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방패를 든 병사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자신의 방어 스킬을 사용했다.

병사들은 작은 개미 몬스터 한 마리가 자신들을 위협할 만큼 강력한 주문을 사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던전 내부에서 훈련할 때 자신들이 얼마나 많은 몬스터를 죽였던가?

얼마나 많은 거대하고 강력한 괴물들을 쓰러뜨렸던가?

레직스의 병사들은 이렇게 작고 약한 몬스터가 자신들의 적수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방심의 대가는 빠른 죽음이었다.

방패에 닿자 마자, 거의 검은색에 가까울 정도로 짙은 보랏빛의 구체가 확장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위의 병사들이 순식간에 완전히 사라졌다.

조금 떨어져 있던 병사들의 얼굴이 공포와 충격으로 일그러졌다.

그리고 곧 그들도 모두 구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다시 한 번 바람이 찢어지는 소리가 울리자 알현실 안의 모든 병사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병사들은 달아나거나 동료가 죽음의 구체 쪽으로 끌려가지 않게 붙잡으려 했지만···

그 누구도 구체가 끌어당기는 무시무시한 힘에 저항하지 못했다.

심지어 주문을 사용한 개미조차 조금 뒤로 물러서서 자신의 마법이 적을 모조리 집어삼키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여왕은 눈 앞에 펼쳐진 소름 끼치는 장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몬스터의 마법이 성문을 부쉈을 때에도 놀라웠지만···

정예 병사들을 순식간에 사라지게 만드는 장면을 보는 느낌은 또 달랐다.

저런 마법을 방어하려면 대체 레벨이 얼마나 높은 마법사가 필요할까?

엄청나게 긴 시간처럼 느껴졌지만 실제로는 불과 몇 초 뒤, 구체가 사라졌다.

작고 무거운··· 뭔가가 뭉쳐서 만들어진··· 여왕은 그게 뭔지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공이 철퍽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져서 몇 바퀴를 구르더니 멈췄다.

심지어 바닥조차 마법의 위력에 움푹 파여 있었다.

단단한 석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사라져 있었다.

너무나 정교한 곡선으로 파인 바닥은 마치 신의 손길이 닿은 작품처럼 보일 정도였다.

병사들이 충격과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전에, 몬스터는 곧바로 다음 행동에 나섰다.

자기 주위에 반투명한 보랏빛 반구를 만들어 낸 몬스터는 남아 있는 병사들을 향해 돌진했다.

베리타는 이미 저 마법을 본 적이 있었다.

강력한 힘으로 적들의 무릎을 꿇게 만드는 주문이었다.

저 보라색 마나는 정체가 뭘까?

저건 대체 어떤 종류의 마법일까?

베리타는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하늘 높이 날리거나 땅에 추락시키는 종류의 마법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몬스터, 그것도 어느 모로 보나 아직 어린 몬스터가 저렇게 마법을 이해하고 사용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인간 마법사라면 배우기 위해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다양한 주문들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몬스터의 존재는 그야말로 공포스러웠다.

이 한 마리의 개미가 정확히 얼마나 강한 걸까?

베리타 여왕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궁금해했다.

그리고 그 답을 알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병사들은 더 이상 개미의 마법을 우습게 여기지 않았다.

사기가 땅에 떨어진 병사들은 겁에 질린 얼굴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자부심 높은 레직스의 정예 부대가 개미 한 마리가 두려워 도망치다니!

베리타는 자기가 직접 보지 않았다면 누가 말해도 절대 믿지 못했을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보고 있는 지금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몬스터는 도망치는 병사들을 순순히 보내주지 않았다.

베리타는 개미의 주문이 발동하는 순간 이미 병사들이 달아나지 못하고 학살당할 거라는 사실을 예상하고 있었다.

주문이 효력을 발휘한 뒤에도 눈에 띄는 변화는 없었다.

하지만 병사들이 마치 무거운 바위에 눌린 것처럼 바닥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아직 버티고 서 있는 병사들도 안간힘을 다하는 듯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다.

병사들의 눈이 경악과 공포로 커졌다.

이런 마법에 어떻게 대처해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이어질 공격에는 저항할 방법이 더더욱 없었다.

여왕은 화들짝 정신을 차리며 자신과 마찬가지로 놀라서 굳어 있는 근위병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스킬로 적을 공격하되 거리를 유지해라! 절대 저 주문의 범위 안으로 들어가선 안된다!"

충성스럽고 유능한 여왕의 근위대는 즉시 명령에 따라서 무기를 겨눴다.

그리고 개미의 주문이 닿는 범위를 벗어나려고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는 적들을 항해 공격 스킬을 날렸다.

말게이트 마을의 주민들은 놀라움에 넋이 나간 채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하나같이 열기로 가득했다.

멀리서 공격할 수 있는 고급 스킬을 익힌 사람이 없다 보니 전투에 참여하지는 못했다.

그저 열심히 지켜보며 조용히 찬탄할 뿐이었다.

한편 같은 편 병사들이 연이어 날아드는 공격 스킬에 차례로 쓰러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코린의 표정은 점점 더 일그러졌다.

코린은 자신의 두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고작 개미 한 마리가···

단일 개체로서는 던전에서 가장 약한 몬스터로 알려진 개미 한 마리가 자신이 갖은 노력 끝에 겨우 끌어들인, 고도의 훈련을 거친 정예 병사들을 유린할 수가 있을까?

용병 조합의 지도자인 코린은 이 계획을 준비하기 위해 긴 시간을 투자했다.

몇 달에 걸쳐 준비를 갖추고, 레직스 왕국이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이게 만들기 위해 엄청난 공을 들였다.

그 모든 게 지금 바로 눈 앞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코린이 레직스의 대사를 돌아봤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안드론?"

코린이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당신이 데려온 병사들이 아무 쓸모도 없잖아요! 이번 일에는 최정예 부대를 투입하기로 하지 않았나요?"

하지만 대사는 창백한 얼굴로 몸을 떠느라 코린의 말에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대사는 외교관이지 전사가 아니었다.

이렇게 피가 난무하는 폭력적인 광경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안드론은 자신이 데려온 병사들이 몰살당하는 모습을 보자 거의 정신이 나가서, 말을 하기는커녕 제대로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레직스의 대사가 벌벌 떨며 입만 뻐끔거리는 모습을 보자, 코린이 좌절감을 드러내며 비명을 질렀다.

이렇게 완벽했는데!

거의 성공한 거나 다름없는데!

자신이 차지할 수 있었던 부!

어마어마한 부!

코린은 손가락 사이로 황금이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자 분노가 머리 끝까지 차올랐다.

저 빌어먹을 몬스터 때문이야!

여왕을 완벽하게 몰아 넣었는데, 저 망할 몬스터가 모든 일을 망쳤어!

갑자기 코린의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공포심이 그녀의 몸을 차가운 담요처럼 감쌌고,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천천히 몸을 돌려 아래를 내려다본 그녀는 개미 몬스터가 똑바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걸 발견했다.

검은색으로 반짝이는 매끄러운 갑각, 눈꺼풀 없는 차가운 두 눈, 그리고 보라색으로 빛나는 날카로운 턱···

괴물은 그 어떤 감정이나 느낌도 내비치지 않았다.

코린의 눈에는 개미 몬스터가 아무런 감정도 없는 살인 기계로만 보였다.

코린은 마치 물 속에 잠겨 있는 듯한 멍한 기분으로 생각했다.

저 턱이 언제부터 빛나기 시작했지?

개미의 턱에서 보랏빛 불꽃이 일자 코린은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그 느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코린이 딛고 선 바닥은 더 이상 바닥이 아니었다.

마치 바닥이 갑자기 벽으로 변한 것처럼, 코린의 두 발이 미끄러졌다.

코린은 몬스터를 향해 똑바로 날아가고 있었다.

공포로 이성이 마비된 코린이 비명을 질렀다.

코린의 시야에서 주위 풍경이 완전히 사라지고 개미의 커다란 턱만 남았다.

크게 벌린 턱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잠시 후 개미의 턱이 닫혔다.

코린이 기억하는 마지막 장면이었다.

뻔한 수작

베리타 여왕은 자신의 알현실, 그러니까 역겨운 학살의 현장을 돌아봤다.

그야말로 처참한 광경이었다.

이웃 왕국의 병사들이 리리아의 가장 존엄하고 역사적인 자리인 왕좌 앞을 차지하고 있다가, 던전 몬스터에게 도륙을 당했다.

만약 여왕의 선조들이 이 어이없는 상황을 본다면 고개를 흔들며 탄식할 터였다.

여왕은 침통한 표정으로 근위병들에게 명령을 내려 알현실을 청소하고 시체들을 치우게 한 다음, 마을 주민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근위병 둘에게 레직스의 대사를 잡아서 자기 앞으로 데려오게 시켰다.

레직스의 외교관은 여전히 공포로 얼어붙어 있었고, 자기가 데려온 남녀 병사들의 끔찍한 시체를 두려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몸을 떨었다.

코린이 하늘을 날아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 안드론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안드론의 양쪽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일으켜 세우던 근위병들은 대사의 바지 앞쪽이 젖어 있는 걸 알아차리고 경멸감으로 코웃음을 쳤다.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또다른 근위병을 불렀다.

근위병은 여왕에게 다가와서 절도 있게 경례를 붙였다.

"코린의 목을 벤 다음 장대에 꽂아서 성문에 내걸도록. 그래야 아직 반란군에 속해 있는 용병들이 형세가 뒤집어졌다는 사실을 알 테니까."

근위병이 다시 한 번 경례했다.

"네, 폐하."

근위병은 엉망이 된 알현실을 가로질러 용병 조합 지도자의 시체로 다가간 다음 여왕이 시킨 일에 착수했다.

그리고 잠시 후 둥근 물체를 감싼 붉게 얼룩진 천을 들고 경쾌한 걸음으로 알현실을 나갔다.

성문을 뚫고 안으로 진입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우던 용병들은 창 끝에 높이 걸린 머리를 알아보고 분노와 절망을 동시에 느꼈다.

코린이 반란에 동참하는 대가로 자신들에게 약속했던 보상이 영영 날아가 버렸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용병들 중 많은 수는 전장을 이탈해서 즉시 이 나라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빠르게 행동하면 체포를 피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어차피 던전이 있는 도시라면 어디서든 용병 노릇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던전은 어디에나 있었다.

여왕이 성을 되찾았다는 소문은 들불처럼 도시 안에 퍼져 나갔다.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환호했다.

많은 시민들은 자신들의 자비로운 여왕이 다시 왕좌에 복귀한 걸 기뻐했다.

물론 그저 내전이 끝나고 평화로운 일상이 돌아왔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시민들도 많았다.

몇 주 동안 전투와 죽음 그리고 파괴를 경험한 시민들은 하루빨리 이 모든 일을 잊어버리고 도시를 재건하는 일에 전념하고 싶어했다.

한편 성 앞에서는 레직스의 대사인 안드론이 근위병들에게 붙잡혀서 베리타 여왕 앞으로 끌려왔다.

대사가 여왕의 말에 대답하지 않자, 근위병 하나가 다가가서 정신을 차릴 때까지 거칠게 뺨을 후려쳤다.

"이런 상황에서 대화를 나누게 되어 유감이군, 대사."

베리타가 조롱했다.

안드론은 비틀거리며 똑바로 서서 조금이라도 체통을 차리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그런 노력은 별 성과가 없었고, 두 명의 근위병이 억지로 안드론을 일으켜 세워야 했다.

대사는 내일이면 근위병들에게 붙잡힌 자리에 멍이 들 거라고 확신했다.

"날 이렇게 취급할 수는 없소!"

대사가 여왕을 향해 외쳤다.

"레직스가 이런 일을 좌시할 거라고 생각하시오?"

안드론의 어이없는 말에 베리타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

"미안하지만 난 레직스가 어떻게 생각하든 전혀 상관하지 않아. 난 너희 쓰레기 같은 왕국의 쥐새끼들을 던전 안으로 몰아넣어서 동족과 함께 살게 해 줄 생각이니까."

그러자 안드론이 입을 벌리고 여왕을 쳐다봤다.

"감히···?!"

베리타가 근위병들 중 하나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근위병이 안드론에게 다가가 다시 한 번 뺨을 후려쳤다.

안드론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가며 피가 튀었다.

여왕은 대사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목숨을 살려줄 테니 네놈의 소굴로 도망쳐라, 쥐새끼. 그리고 도착하거든 내가 간다고 전해. 네놈들이 저지른 짓의 대가로 레직스는 잿더미가 될 거라고."

대사는 베리타의 분노 앞에 몸을 떨며 고개를 숙였다.

근위병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는 안드론을 성 밖으로 끌고 나갔다.

말 한 필을 내어주면 한 시간 내에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 여왕의 말을 전할 수 있을 터였다.

여왕은 잠시 홀로 서서 생각에 잠겼다.

이제야 비로소 안도감이 느껴졌다.

한때는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어둠 속에서 비밀 통로로 성을 몰래 탈출하던 밤에 남몰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자신의 실정으로 조상들이 이룩한 업적, 그리고 몬스터에게 점령당했던 지역에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리리의 백성들이 흘린 피와 땀까지 모두 허사로 돌아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잠시 잃어버렸던 것들 모두가 다시 자신의 손에 돌아왔다.

그리고 배신자들의 정체도 만천하에 드러났다.

여왕은 코린과 용병들을 지원한 상인들에게 검을 들이대고, 배신자들의 피로 반란의 악취를 씻어낼 생각이었다.

국력을 축내던 거머리 같은 자들을 모조리 몰아내면 리리아는 다시 한 번 전성기를 맞이할 터였다.

오늘, 정의의 빛이 자신의 왕국을 밝히고 있었다.

잠깐···

왕국이 빛을 되찾았건만, 왜 궁전 안은 이렇게 어두운 거지?

어리둥절해서 주위를 둘러보자 알현실 안의 램프들이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단 하나 남아서 불을 밝히고 있는 램프 옆의 벽면에 거미처럼 붙어 있던 개미 몬스터가, 마치 과자 상자에 손을 넣은 채로 들킨 어린아이처럼 동작을 멈추고 얼어붙었다.

여왕은 자신에게 왕좌를 되찾아 준 기이한 생물을 응시했다.

그리고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던 연결 고리를 더듬어 찾았다.

[몬스터, 내 램프들에 무슨 짓을 한 거지?]

···

갑자기 마지막 불빛도 사라졌다.

[보수의 일부를 미리 챙겼을 뿐이야.]

여왕은 할 말을 잃었다.

이렇게 뻔뻔하게 나오다니?

그때 몬스터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여왕의 머리 속에 다시 울렸다.

[당신이 원하는 걸 얻은 것처럼 보이는데, 여왕.]

몬스터는 어째서인지 베리타를 "여왕"이라고 부를 때마다 미묘하게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다.

[난 내가 약속한 바를 다했어.]

몬스터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문명했다.

약속한 바를 다했으니 보상을 달라는 이야기였다.

베리타는 알현실 벽에 붙어 있는 개미 몬스터를 신중하게 살폈다.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지만, 여왕은 상대방 또한 자신을 살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을 듣지 못했군, 몬스터.]

이미 몇 차례나 돌려서 물어봤지만, 개미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저 "몬스터"로 족하다고 말했다.

[그랬지.]

이번에도 거절의 뜻을 분명히 드러내며, 몬스터가 대답했다.

베리타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며 알현실 안의 근위병들에게 은밀한 신호를 보냈다.

몬스터는 여전히 여왕을 지켜보고 있었다.

문득 베리타의 머리 속에 개미의 목소리가 울렸다.

["팃포탯"이라는 말을 알아?]

[아니.]

여왕이 인상을 찌푸렸다.

[먼저 선의를 베풀고 나서 상대방도 선의로 보답할 걸 기대하지만, 만약 상대가 배신할 경우에는 곧바로 응징해야 한다는 뜻이지.]

베리타는 자기도 모르게 긴장했다.

시야 가장자리에 근위병들이 천천히 위치를 이동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건가, 몬스터?]

[그래.]

잠시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쪽은 몬스터였다.

[다음 번에 할 행동을 신중하게 선택하는 게 좋을 거야.]

여왕의 등줄기를 타고 차가운 소름이 돋았다.

개미 몬스터는 자신의 의도를 파악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 몬스터는 지금도 이미 엄청나게 강력했다.

그리고 앞으로 점점 더 강해지고, 영리해지고, 위험해질 터였다.

그런 괴물을 어떻게 내버려둘 수 있겠는가?

자신이 던전 몬스터와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 바깥에 알려지면 곤란하다는 점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몬스터를 증오하고 경멸했으며, 문명 사회의 적으로 여겼다.

만약 베리타가 몬스터의 힘을 기꺼이 빌렸다는 사실을 그런 사람들이 알게 되면···

여왕의 권위에 대한 신뢰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근위병들은 입을 다물 테고, 마을 사람들은 설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리리아의 시민들은 사실을 들어도 믿지 못할 터였다.

원래 전장의 열기 속에서는 온갖 헛것이 보이곤 하니까.

어쨌든 이 문제를 조용히 처리하려면 몬스터를 놓치지 않는 것이 열쇠였다.

베리타는 내심 몬스터가 왕좌를 되찾은 자신을 어찌할 수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이 알현실에는 여왕만이 사용할 수 있는 수많은 비밀 장치가 숨겨져 있었고, 주위에는 강력한 근위병들이 자신을 호위하고 있었다.

여태까지 개미가 반란군을 상대로 승승장구했던 건 근위병들이 뒤를 받쳐줬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놀라운 힘을 가진 몬스터라도 단신으로 이 자리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제 이 모든 일을 끝낼 때였다.

여왕은 모든 가식을 걷어내고 콧방귀를 뀌었다.

[너무 쉽게 날 믿었던 자신을 원망해라, 몬스터!]

여왕이 신호를 보내자 수십 명의 근위병들이 동시에 검을 뽑았다.

쾅!

그 순간 몬스터 바로 아래의 벽이 마치 공성 망치로 두드린 것처럼 안쪽으로 무너졌다.

돌과 흙먼지가 사방으로 날렸고, 가까이 있던 근위병들이 황급히 방패를 들어 여왕을 보호했다.

잠시 후 커다란 형상 하나가 알현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처음에는 자욱한 흙먼지 때문에 그 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근위병들은 예상치 못한 난입에 긴장하며 무기와 방패를 들어올렸다.

먼지가 천천히 가라앉자, 온몸이 근육으로 뒤덮인 거대한 유인원의 모습이 드러났다.

놈은 커다란 주먹으로 땅을 짚은 채 사나운 눈빛으로 인간들을 노려봤다.

자신이 방금 만든 구멍 안으로 들어온 유인원이 허리를 펴고 서서 인간들을 내려다보는 동안, 개미 몬스터도 벽을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여왕은 충격을 받아서 굳은 채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상황이 너무 빠르게 변하는 바람에 제대로 생각을 하기가 어려웠다.

근위병들 또한 눈 앞에 나타난 적을 공격해야 할지 아니면 여왕의 명령을 기다려야 할지 확신하지 못한 채 망설이고 있었다.

여왕이 근위병들에게 뭐라고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유인원이 한 손을 들어 뭔가를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온 물체는 커다란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지더니 몇 바퀴를 구르다가 멈췄다.

그 물체가 신음하며 작게 꿈틀거리고 나서야 여왕이 놀라서 외쳤다.

"펜들렌 경!"

자신과 함께 사로잡혔던 근위대장이었다.

유인원이 다시 손을 들어올리자 여왕과 근위병들은 또다시 뭔가가 날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인원은 바닥에 놓여 있던 커다란 자루를 집어서 어깨에 걸칠 뿐이었다.

알현실 건너편에 있던 여왕은 유인원이 든 자루가 안에 둥근 물체가 가득 들어 있는 듯한 모양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자루의 천이 울룩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코어였다.

보물 창고!

여왕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자신의 펫 옆에 내려서는 개미 몬스터를 쳐다봤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지?

처음부터 보물 창고를 털 계획이었나?

[당신은 날 실망시켰어, 여왕.]

몬스터의 차가운 목소리가 여왕의 머리 속에 울렸다.

[처음부터 지금 이 배신까지··· 너무 뻔한 전개잖아.]

여왕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느끼며 손을 들어 두 마리의 몬스터를 가리켰다.

"놈들을 죽여!"

근위병들이 즉시 돌격을 개시했지만 유인원이 더 빨랐다.

유인원 몬스터는 자루를 들고 있지 않은 쪽의 손을 높이 치켜들더니 무시무시한 힘으로 발 아래의 바닥을 내리쳤다.

알현실 안에 다시 한 번 흙먼지가 자욱하게 날렸다.

흙먼지가 가라앉자, 놀랍게도 두 몬스터의 모습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방패를 높이 들고 주위를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접근한 근위병들은 바닥에 뚫린 수직 통로를 발견했다.

통로의 벽에는 푸른 마나 줄기가 눈부시게 빛났고, 그 안쪽에서 수천 마리도 넘는 몬스터들이 포효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수다쟁이

타이니가 딱 맞는 타이밍에 도착해서 정말 다행이었다!

내 가장 큰 걱정은 녀석이 계획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길을 잃어버리는 거였다.

[날 찾기가 어렵지 않았나 보지, 타이니?]

[아니.]

[어려웠다고? 무슨 일이 있었길래?]

[벽들···]

[내가 있는 곳으로 오다가 벽에 가로막혔다는 말이야?]

[맞아.]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부수고 왔어.]

···

여왕이 얼마나 많은 벽을 수리해야 할지 모르겠군···

나는 여왕을 떠올리며 속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이 세계의 인간들은 영리함 능력치에 무슨 페널티라도 받는 건가?

여왕은 내게 사로잡힌 직후부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몬스터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냈다.

그런 사람이 몬스터와 한 약속을 지킨다?

나는 처음부터 여왕을 믿지 않았다.

물론 어떻게 생각하면 여왕을 꼭 멍청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지도 몰랐다.

내가 그저 지능이 좀 높은 몬스터가 아니라, 개미로 환생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 리는 없으니까 말이다.

내가 전생에 인간이 아니었다면 보물 창고의 존재를 짐작하거나 배신을 예상하지도 못했을 테고, 인간의 전형적인 사고 방식이나 표정 변화를 알아차릴 수도 없었겠지...

여왕은 나와 개미들이 근위대가 있는 던전으로 통하는 굴만 판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성 아래까지 통로를 만든 다음 마나 감지로 보물 창고를 찾아냈다.

하지만 고결하고 정직한 개미로서, 나는 가능하면 약속을 먼저 깨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인간들의 도시나 전투 방식에 대한 정보에 굶주려 있기도 했고 말이다.

그래서 여왕이 왕좌를 되찾을 때까지 열심히 싸우며 도왔다.

솔직히···

여왕이 끝까지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면 꽤 민망할 뻔했다.

그 시점에 우리는 이미 몇 군데의 던전 통로를 성까지 연결한 다음 보물 창고를 싹 털고 난 뒤였으니까!

다행히 여왕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서 그런 어색한 상황은 피했지만···

타이니와 나는 지금 미리 준비해 놓은 샛길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던전 자체와는 연결되어 있지 않아서 몬스터의 방해를 받지 않고 달아날 수 있는 통로였다.

들어오자 마자 입구를 무너뜨렸기 때문에, 인간들이 이 통로로 우리를 쫓아오기는 어려울 터였다.

지금쯤 아마 던전에서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들을 상대하느라 바쁠 테니까!

구헤헤헤헤!

훌륭한 완전 범죄다.

천재적이야!

그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알현실에서 병사들을 처치하고 나서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들이었다.

[레벨 20이 되었습니다. 1 스킬 포인트를 얻었습니다.]

[현재 진화 단계의 한계 레벨에 도달했습니다. 진화 메뉴에 접속하겠습니까?]

[몬스터 코어가 현재 진화 단계의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깨물어 뚫기 스킬이 레벨 10이 되었습니다. 업그레이드가 가능합니다.]

[고급 외골격 숙련 스킬이 레벨 5가 되었습니다.]

[펫 커뮤니케이션 스킬이 레벨 3이 되었습니다.]

[물어 깨뜨리기 스킬이 레벨 4가 되었습니다.]

···

정말 대박이다!

마지막 전투 도중에는 시스템 메시지 때문에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한계 레벨까지 오르다니!

램프의 코어를 모조리 흡수한 덕분에 코어도 최대치까지 올릴 수 있었다.

이제 특별 코어만 만들고 나면 진화를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나는 셈이다.

나는 더 강해질 것이다!

타이니가 들고 있는 코어로 가득한 자루까지 고려하면, 우리의 미래는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

내가 훈련할 수 있는 스킬들, 그리고 나는 물론 펫과 둥지의 다른 개미들까지 특별 진화를 시키고도 남을 만한 코어까지!

그야말로 잭팟이 터졌다!

다만 둥지를 옮겨야 한다는 점은 안타까웠다.

그것도 빠르게 옮겨야 했다.

여왕이 둥지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보복을 피하려면 그녀의 영향력이 닿는 범위 밖으로 이주해야 했다.

다행히 그런 장소가 멀지는 않았다.

여왕을 통해 이 땅의 바로 남쪽에 야생 몬스터가 득실거리는 광활한 대지가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거기라면 우리 둥지가 인간들의 눈에 띄는 일 없이 여유롭게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을 터였다.

까다로운 부분은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던전과 이어지는 통로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는 것뿐이었다.

여왕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마나를 지상에서 충당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계획대로 되기만 하면, 지상에 우리만의 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개미 왕국을!

···

워워.

너무 앞서가지는 말자.

일단은 이 나라에서 탈출하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아직은 도망자니까!

지금 당장 진화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긴 하지만···

진화는 중독적인 구석이 있었다.

잠들었다가 일어나면 더 강한 내가 되어 있다니···

정말이지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었다.

나는 그 유혹에 저항하기 위해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죽고 나면 진화도 못한다고!

타이니와 함께 비상 탈출용 통로를 따라 달리는 내내 나는 속으로 낄낄거렸다.

아무리 자만하지 않으려고 애써도, 오늘의 성공을 자축하지 않기는 어려웠다.

마침내 통로 밖으로 나오자 숲의 무성한 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나는 신선하고 서늘한 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달콤한 자유의 냄새여!

나는 앞다리를 한껏 벌려 옆에 있는 나무를 끌어안았다.

이게 바로 자유, 해방, 성공 그리고 죄책감 없는 도둑질의 느낌이로군!

타이니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흥!

이 순간의 미묘한 뉘앙스를 즐길 만한 지성도 없는 주제에···

지금 코어 자루를 들고 있는 네 모습이 사악한 돌연변이 산타처럼 보인다는 것도 모르잖아!

구헤헤.

우리는 이십 분 정도 걸려서 개미 언덕으로 돌아왔다.

언제나처럼 일개미들이 보초를 서고 있는 둥지 입구를 보자 마음이 푸근해졌다.

마침내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다시 뿌리째 뽑아서 옮겨야 하지만···

나는 언덕을 우회해서 곧장 농장으로 향했다.

오늘 고생한 타이니는 먼저 들어가서 쉬라고 보냈다.

타이니는 무시무시한 힘을 자랑했지만, 체력은 약한 편이었다.

농장 안으로 기어 내려가자 익숙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일개미들이 마치 살아 있는 갑옷처럼 여왕을 둘러싸고 있었다.

···사실 여왕이 일개미들에게 파묻혀 있는 쪽에 더 가까워 보였다.

일개미들 사이를 한참 헤치고 올라가자 겨우 여왕의 얼굴이 보였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몸은 좀 어떠세요?"

내가 외쳤다.

그러자 여왕이 웃으며 더듬이를 흔들어 겨우 한쪽을 개미들 틈에서 빼낸 다음, 내 더듬이에 마주쳤다.

개미 버전의 하이 파이브였다.

"아주 좋단다, 아이야. 부상을 모두 치유했거든."

"코어는요?"

마나 감지를 잠깐 활성화하자, 여왕의 코어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코어 안의 마나 밀도가 다시 최대치까지 회복된 상태였다.

"괜찮은 것 같구나."

여왕이 대답했다.

여왕이 완전히 회복된 건 좋은 소식이었다.

둥지의 가장 중요한 분을 위험에 처하게 만드는 일 없이 바로 이사할 수 있다는 의미니까 말이다.

그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안녕!"

···

내가 어리둥절해서 여왕을 쳐다보자, 여왕이 차분한 눈빛으로 나를 마주봤다.

방금···

뭐였지?

"어디 갔었어요, 선배?! 엄청 오래 걸렸네요!"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거의 찍찍거리는 것처럼 들릴 만큼 높고 가느다란 목소리였다.

여왕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지?!

이리저리 더듬이를 흔들며 고개를 돌린 끝에, 나는 등에 커다란 혹이 달린 작은 개미와 눈이 마주쳤다.

"바이브?!"

"안녕-안녕!"

바이브가 말했다.

"말하는 법을 배웠어요, 선배! 물어보고 싶은 게 너어어어무 많아요!"

···

...

그리고 다음 두 시간 동안, 이 작은 일개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선배 갑각은 왜 그렇게 반짝거려요?"

"선배는 어떻게 그렇게 커진 거예요?"

"나도 마법을 배울 수 있을까요?"

"말하는 건 너무 재밌어요!"

"선배, 뭐해요?"

"선배, 지금은 뭐해요?"

"선배도 먹는 게 좋아요? 난 너무 좋아요!"

"같이 땅 팔래요? 땅 파는 건 너무 좋아요!"

···

알고 보니 바이브의 등에 달린 혹은 크리니스였다.

크리니스는 기쁜 듯이 촉수를 뻗어서 내 더듬이를 붙잡았다.

그리고 내 등으로 자리를 옮기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인사까지 했다.

[돌아오셔서 기뻐요, 주인님.]

예의도 바르지!

머리 속에 전해지는 크리니스의 목소리는 어쩐지 수줍어 하는 느낌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성체 핵파리의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다.

코어를 조작해서 지능을 높인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펫이 생기니 좋군!

타이니는 물론 듬직하지만 그리 좋은 대화 상대는 아니었다.

다만 크리니스는 극도로 과묵해서, 내가 이리저리 노력해도 좀처럼 말을 시키기가 어려웠다.

부끄러움을 타는 건가···

반면 바이브는···

도무지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내 머리 위로 기어올라온 바이브는 말 그대로 기쁨의 춤을 추더니, 내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거나 온갖 쓸 데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두통이 느껴질 정도였다.

처음에는 최선을 다해 모든 질문에 대답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 대답은 점점 더 짧아졌다.

그러다 결국에는 "여왕님이랑 얘기 좀 하자!"라고 소리쳐서 바이브가 입을 다물게 했다.

말이 왜 이렇게 많아!

여왕은 내가 처한 곤경을 보며 조금 재미있어하는 듯했다.

나 말고 둥지에 대화가 가능한 개미는 여왕밖에 없으니···

내가 없는 동안 아마 여왕이 바이브의 끝없는 수다를 상대해준 모양이었다.

그 생각을 하자 여왕에 대한 내 존경심이 한층 더 커졌다.

가히 성자와 같은 인내심을 지니셨군!

당신의 아이들에게는 정말 관대한 분이셔!

나는 그런 감상을 뒤로 하고 여왕에게 말했다.

"어머니, 둥지를 한 번 더 옮겨야 할 것 같아요. 여기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아요. 인간들이 곧 들이닥칠 거예요."

둥지의 수많은 개미들을 죽이고 자신에게도 부상을 입힌 생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여왕이 희미한 분노를 내비쳤다.

"제가 놈들이 따라올 수 없는 장소를 알아요. 문제는 빨리 탈출하려면 어머니가 지상으로 이동하셔야 한다는 건데··· 가능하실까요?"

어머니가 잠시 진지하게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동안은 지상에 머물러도 괜찮을 것 같구나. 다시 약해진 느낌이 들면 네게 말하도록 하마."

"좋아요! 꼭 제게 말씀하셔야 돼요, 알겠죠? 이번에도 혼자 참고 계시다가는 정말 큰일날지도 몰라요!"

내가 애원하다시피 말하자, 여왕은 다시 고개를 끄덕인 뒤 일개미들에게 지상으로 나가자고 말했다.

그리고 처음 여왕을 옮길 때 일개미들이 넓혀 놓은 구멍을 통해 위로 올라갔다.

여왕이 움직이는 내내, 일개미들은 그 주변을 떠나지 않고 방어 태세를 유지했다.

내가 여왕과 대화하는 동안 용케 입을 다물고 있던 바이브가 더듬이를 흔들며 내게 물었다.

"우리 어디로 가는 거예요?"

"남쪽으로. 인간들을 피해야 돼."

그러자 바이브가 분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들! 난 둥지를 지키다 죽을 거예요!"

왜 다짜고짜 죽는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냥 이사하는 거니까 죽을 필요는 없어! 남쪽으로 충분히 멀리 가면 놈들이 따라오지 못할 거야."

바이브가 조금 안심한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알겠어요, 그럼. 하지만 제가 둥지를 위해 목숨을 버려야 하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아무도 너한테 죽으라고 하지 않아, 알겠어?!"

바이브는 내 말을 듣고도 확신이 없는 듯 내 머리 위에서 꼬물거리더니,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럼 우리는 뭘 해야 하는데요?"

으으···

"이사할 준비를 해야 돼. 일개미들이 모두 모이는 대로 출발할 거야."

"네!"

···

···

"근데 선배 더듬이는 왜 그렇게 희한하게 생긴 거예요?"

···

돌겠네.

내려가는 이들, 올라오는 것

나는 바이브의 수다를 견디며 타이니에게 돌아갔다.

타이니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코어가 든 자루를 운반하는 일이었다.

자세히 보니 자루의 재질이 아주 고급스러웠다.

벨벳인가?

원래 태피스트리나 뭐 그런 거였나?

타이니는 이걸 대체 어디서 난 거야?

뭐, 상관없지.

십 분도 지나지 않아 둥지는 이주할 준비를 마쳤고, 수백 마리의 일개미들이 알과 유충을 챙겨서 나왔다.

나머지 개미들은 여왕을 둘러싼 채 호위하고 있었다.

나와 타이니가 선두에 서서 개미들을 이끌었다.

그렇게 둥지 전체가 행군을 시작했다.

우리는 이틀 동안 휴식을 취하거나 한 눈 팔지 않고 미리 정해 놓은 경로를 따라 나아갔다.

한 눈을 팔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내 머리 위에 올라탄 녀석은 주위에 보이는 모든 것을 궁금해했다.

나는 계속 걸으면서 농장이 뭔지, 그게 왜 필요한지, 인간의 소화 기관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장내세균이 뭔지, 애초에 세균이 뭔지, 사람들이 왜 우리를 보자 마자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지 녀석에게 설명해야 했다.

숲의 반대쪽 경계까지 하루가 걸렸고, 그 이후로는 주로 작은 농촌 마을들을 지나 남쪽으로 향했다.

우리는 건물들을 우회하고 사람들은 무시하며 계속해서 전진했다.

한 번은 밤이라 그냥 마을 한복판을 가로지른 적도 있었다.

기겁하며 도망치는 사람들을 본 바이브는 흥분해서 내게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그렇게 48시간을 이동한 뒤 우리는 임시 둥지를 파고 휴식을 취했다.

거의 모든 개미들이 가수면 상태에 들어갔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연달아 전투를 거치고 강행군까지 했더니 몹시 피곤했다.

하지만 그렇게 지친 상태로도 잠깐 시간을 내서 당면한 미래의 계획을 세웠다.

먼저, 나는 진화하기 전에 바이오매스를 좀 더 모아야 했다.

진화하고 나서 바이오매스를 얻으려면 더 깊은 던전까지 들어가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진화 전에 높은 층에서 최대한 바이오매스를 얻어 두는 편이 효과적이었다.

또 그동안 쌓인 스킬 포인트도 있었다.

나는 약한 몬스터들과 싸우면서 새로운 스킬들을 연마할 생각이었다.

인간 병사들의 전투를 지켜보며 질주 계열의 업그레이드 스킬들에 깊은 인상을 받아서, 나도 하나 얻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새로 얻은 코어들을 가지고 코어 공학 스킬의 레벨도 최대한 올려야 했다.

진화를 제대로 하면 정신력을 강화해서 코어를 더 효율적으로 조작하고, 스킬 레벨이 오르는 속도를 높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내가 꿈꾸는 프로젝트를 실현할 수 있는 날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펫들에게도 신경을 써서, 타이니가 성공적으로 진화할 수 있도록 인도하고 크리니스도 잘 먹여서 전투와 레벨업이 가능할 때까지 키워야 했다.

앞으로 정말 바빠질 터였다!

물론 그 전에 무사히 탈출부터 해야 하겠지만.

다음날, 우리는 다시 대열을 짜고 이동을 시작했다.

도중에 발견한 몇 안되는 사냥감으로는 아이들을 먹이기도 부족했기 때문에 우리는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타이니는 그새 허리 사이즈가 몇 단계는 줄어든 듯했다.

저렇게 날씬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사흘이 더 지난 뒤 우리는 마침내 경계에 도착했다.

내 눈 앞에는 몬스터로 가득한 황야가···

우리의 미래가 펼쳐져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