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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황제, 폐하, 만세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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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스-제-라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은 내 이해를 넘어섰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역시 그러했다.

정말 놀라운 건 구덩이 안쪽의 모습이었다.

오우거의 뼈.

트롤의 뼈.

오크의 뼈.

인간의 뼈.

수천의 해골들이 달그락거리는 파도가 되어 황제의 수레와 근위대를 향해 돌진했다. 포위 섬멸이라고 말하기에도 부족한 것 같은 숫자.

거대한 구덩이는 백색으로 가득 차있었고, 황제의 행렬은 거기에서 한줌에 불과했다.

네크로멘서의 군단은 그녀를 따라오지 않았다.

이미 한참 전에 도착해서, 애타게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압권은.

검은 안개로 몸을 감싸고-

새까만 기운을 줄기줄기 뿌려 대는, 목 없는 기사들이었다.

얼굴 없는 그들은 휘두르는 검으로 자신의 표정을 증거했다.

"서 (ser) 길라우트의 검을 받으라!"

검은 기사가 외쳤다. 외침은 목구멍에서 나왔다.

잘려 나간 텅 빈 목구멍에서 목소리와 함께 검은 마기가 풀풀 뿜어져 나와 전신을 뒤덮고 있었다.

그들은 서 (sir) 가 아닌 서 (ser) 라고 스스로를 불렀다. 적어도 이백년 전에 기사들이 자신을 칭하던 방식이었다.

목 없는 검은 기사들은 하얀 뼈 사이를 빠르게 움직였다. 기세를 폭발시키며 곧 최전선에 서서 근위대에게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근위대라고 가만히 당하고 있지는 않았다. 근위대는 하나하나가 절정의 무인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황제를 보호하게 되어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푸른 기운이 서린 칼을 휘둘렀다. 아쥬라의 마법사까지 둘이나 대동했다.

그러나-

첫 번째.

땅이 꺼진 충격이 있다.

몸이 아래로 흑 꺼지는 충격.

단련된 기사라도 감당하기 어렵다.

두 번째.

기사들이 떨어지며, 수많은 무기들이 그들에게 꽂혔다.

세 번째.

듀라한과 스켈레톤 나이트들에 게이 순간은, 애타게 고대하던 순간.

반면 근위대들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순간이다.

네 번째.

바닥에는 거대한 만다라가 그려져있다. 만다라의 뜻을 물어보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기스-제-라이가 구덩이 아래로 걸어 내려가고 있다.

- 파앗!

구덩이 안쪽에서, 그녀를 향해 창이 날아왔다. 해골들을 부수고 다시 부숴도 그들은 끝없이 생성되고 있었다. 따라서 네크로멘서를 향한 투창은 기능적인 판단이다.

창대까지 철로 만든 강력한 투창.

파르스름한 기운이 맺힌 창날이 날카롭다.

"잘 던진 창이네."

네크로멘서는 살짝 뺨을 올리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기스-제-라이는 당장이라도 머리를 날려 버릴 것처럼 날아오는 창을 피하지 않았다.

날아오는 창을 손을 뻗어 잡아챘다. 잡힌 창이 그녀의 손에서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창을 떨리는 채로 거꾸로 돌려 잡아들었다. 파르르 떨리는 창끝이 반대편을 향했다.

"맞아 줄 거라고 생각한 거 o竹"

기스-제-라이는 한 발을 뒤로 디뎠다. 다시 내디디며, 날아온 곳을향해 창을 투척했다. 창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날아갔다. 폭발하는 듯한 속도였다.

- 쌔애애앵!

'저자가 던진 건가.

반격의 창은 단장을 향했다.

미스릴 갑옷을 입은 자.

그의 주위에는 부서진 해골 수십 구와 산산조각 난 방패들이 널려 있었다.

그는 다른 기사들에서 떨어져, 홀로 하얀 뼈의 파도를 타 넘으며 이쪽으로 달려오던 중이었다.

- 쩌엉!

미스릴 갑옷의 단장은 칼로 간신히 창을 쳐냈다.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단장은 강한 충격에 비틀거리다 결국 한쪽 무릎을 꿇었다. 투구가 흔들렸다. 무릎 꿇은 단장을 향해 다시 수십 구의 해골들과 네 기의 듀라한이 몰려들었다.

네크로멘서는 이제 기사들은 무시했다. 그녀는 두 마법사를 향해 걸어갔다. 나는 마법사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비교적 멀쩡해 보였다.

추락할 때 주문을 사용해 부드럽게 내려앉은 듯했다. 다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황하기는 마찬가지.

애써 태연해 보이려는 모습이 무척 어색해 보였다.

아쥬라의 마법사들.

그들은 지팡이에 주문 몇 개쯤은 중첩해서 다닌다. 내밀기만 하면 곧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언제든 위엄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주문을 마음껏 쓰기 곤란했다. 두 노인이 자신 있는 것은 냉기와 전격 계열.

둘 모두 광역이다.

근위대가 해골들과 백백 하게 엉켜있는 상황. 프로스트 노바나 라이트닝 체인을 쓰면 누구의 피해가 더 클지는 명백했다.

"이 이익!"

마법사들이 혀를 찼다.

몸이 구부정한 마법사가 신성 주문을 끌어 올리려 했다. 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일단 주로 익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이런. 신성 마법이 억제되고 있네! 힘이 모아지지 않아!"

구부정한 마법사가 한탄했다.

"안티 디바인(Anti-Divine)의 만다라라니. 이런 저주받을 잡년이!"

걸어오는 네크로멘서를 보며, 그의눈동자에 공포가 조수潮水처럼 들어차기 시작했다.

기스-제-라이는 바닥에서 검을 하나 주워들었다. 딱히 골라 든 것은 아니다. 그러나 품질은 나쁘지 않다.

죽은 근위대가 떨어트린 검이다.

그녀는 칼을 들고, 마력을 응축한마법사들에게 다가갔다.

"감히. 검 따위를 들고 마법사에도 전하는 거냐?"

흰 수염의 마법사, 에라포르가 애써 살기를 뿜어냈다. 그의 지팡이가 떨리고 있었다.

"까불지 마라!"

그가 앞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스태프를 세차게 휘둘렀다. 저장되어 있던 압축 불꽃이 기스-제-라이를 향해 터져 나갔다. 그녀는 주워든 검을 앞으로 휘둘렀다.

- 마법 추방.

아무렇지 않게 위에서 아래로 내리긋는 음직임에, 강렬하게 압축되어있던 불꽃이 반으로 갈라졌다. 기스-제-라이는 그을음 하나 없이 다시걸음을 내디뎠다.

"이. 무슨!"

에레포르의 눈동자가 떨렸다.

분노와 부정이 그 혼탁한 수정체에 비쳤다.

- 얼어라.

마법사는 주문을 외우며 힘을 전력으로 개방했다. 아무런 제약을 두지 않고 그대로 광역 기를 펼쳐 냈다.

- 아사사삭!

공기와 땅이 부채가 펼쳐지듯 새하얗게 얼어붙었다. 마법사와 네크로멘서 사이에 있던 기사와 해골들이 전부 움직임을 멈췄다. 한순간에 생명을 잃고 얼음이 되어 버렸다.

줄잡아 다섯이 넘는 근위대가 목숨을 잃었다.

기사들이 일제히 멈칫했다.

단장이 마땅히 제지해야 할 계제였으나, 그는 이미 네 명의 듀라한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어휴, 과격해라."

기스-제-라이는 훌쩍 뒤로 뛰어 피했다. 구부정한 마법사는 냉기의에레포르를 말리지도 않았다.

그도 스태프에 응축해 놓았던 또다른 주문을 내뿜었다.

"불타라."

- 화르르록!

스태프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붉은 불길이 살아 있는 것처럼 혀를 날름거렸다. 직접 닫지도 않는 잔디를 새하얗게 태워 버리며, 허공을 타고 날아 네크로멘서를 쫓았다.

네크로멘서가 다시 칼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그녀의 칼에도 화염처럼 이글거리는 기운이 보였다.

눈으로 보일 것 같은 푸른 검기가,

칼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른 것처럼 선명하게 일렁였다.

근위 기사들이 보여 준 검기보다 훨씬 강렬하게 유형화된 느낌이었다.

'저건 대체.'

- 펑!

일렁이는 검기가 살아 꿈틀거리며 날아온 커다란 불꽃 채찍을 쳐냈다.

불꽃은 거세게 터져 나갔다. 얼어붙었던 해골과 기사들은 그 압력에 산산이 몸이 터져 죽었다. 기사들 은제 동료가 갑옷째로 터져 나가는 모습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마법사를 탓할 여유는 없었다.

동료의 죽음 따위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 새하얀 해골들이, 그들에게 한 명당 수십 마리씩 붙어서 몰려들고 있었다. 해골들은 부서져도금세 다시 조립되었고, 또다시 조립되고 있었다.

나는 이 비현실적인 광경을 그저 조금 뒤에 떨어져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들은 교대로 스태프를 휘둘렸다. 땅이 얼고 하늘이 불탔다.

그 사이에 끼어 있는 기사들과 해골들이 희생되었다.

네크로멘서는 교묘하게 피하며 계속 디스펠을 시전했다. 시간을 끄는 것 같기도 했고, 마법사들을 어디로 몰아가는 것 같기도 했다.

두 마법사도 바보는 아니다.

아쥬라의 마법사라는 이름이 그저 허명은 아니었다.

그들 역시 기스-제-라이의 패턴을 읽고 있었다. 스태프에 아케인 의 용량을 꾸역꾸역 축적해 놓고 있었다.

더 이상 통제하기 힘들 정도의 힘이 두 노인의 스태프에 모아졌다.

이번에도 건방지게 디스펠을 시도한다면, 마법이 가진 용량을 견디지못하고 분명히 한 줌 잿더미로 변해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두 노인은 상기된 얼굴로 기스-제-라이를 향해 지팡이를 겨눴다. 하지만 기스-제-라이는 이제 어울려줄 의사가 없는 것 같았다. 그녀가 눈썹을 찡그리며, 비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주변도 좀 보고 살지, 그래?"

마법사들은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같은 편이 아무도 없었다.

두 마법사가 스스로의 권능에 취해얼음과 불꽃의 노래를 부를 때 근위대는 이미 전멸해 있었다.

"이, 이렇게 터무니없이 죽다니.!"

"터무니없다니 좀 너무한데? 3개월이나 준비한 거야. 허무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이제 마법사들은 주문을 어디에 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수많은 스켈레톤이, 검은 마기를 줄기줄기 뿜어내는 듀라한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 일을 전해주기 위해 도망가는 데 써야 할까?

어디로? 황실로 가야 하나? 탑으로 가야 하나? 아니면 눈앞의 건방진네크로멘서를 처리해야 하나.

그들이 지팡이에 모은 기운을 어디로 향해야 할지 잠시 혼란에 빠져있을 때, 기스-제-라이는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제 인형들을 확인했다.

실에 매인 커다란 인형들, 뒤쪽에빠져 있던 오우거 해골 몇몇은 이미황제의 수레를 슬쩍 들고 있었다.

타고 있던 남자는 바닥에 떨어진 채 듀라한들에게 제압당해 있었다.

네크로멘서가 보이지 않는 실을 잡아당겼다.

- 쿠궁!

수레를 그대로 두 마법사를 향해 뒤집어씌워 버렸다.

엉겁결에 위에서 벼락을 맞은 마법사들이 당황하며 응축해 놓았던 힘을 터트렸다. 하지만 떨어진 것은 힘으로 부서질 새장이 아니다.

마법모순의 만다라受Pt羅.

자기부정의 주식況式.

중폭반사의 결계結界.

그 외에도 기스-제-라이 자신조차전부 해독할 수 없는, 고대의 룬들이 수레 안쪽에 빼곡하다.

호화 현란한 최상위 대마법 문양이 빼곡하게 새겨진 수레.

두 마법사의 힘은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못하고 안에서 폭주했다.

공격 마법을 행하는 자에게 그 힘이 반사되는 수레 안에서, 두 노인의 단말마가 메아리쳤다.

수레는 타오르고, 얼어붙었다.

힘이 새어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안에서 자기 마법에 휘말려서 죽어버렸다. 바닥에 그려진 거대한 만다라가 뭔가를 흡수하듯 꿀렁거렸다.

"일어나라."

기스-제-라이가 손을 들었다.

마법에 휘말려 죽은 기사들이 천천히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편.

전장에서 활약한 검은 점點.

목 없는 듀라한들이 그녀의 곁으로다가 오기 시작했다.

이미 그녀의 곁에 시립한 자들도 있다. 기스-제-라이의 손짓에 따라, 육이 검은 안개에 뒤덮여 천천히 재생되는 자도 있었다.

모두 살아서 이름을 떨치던 용맹한전사들.

망자에게 남은 것은 옛 명예와 싸울 기회를 주는 주군. 그 두 가지밖에 없기에, 그들은 스스로를 호칭한다.

"동방의 길라우트, 동료를 늘렸다."

"아, 길라우트! 수고가 많았어."

기스-제-라이는 손을 들어 인사를 받는다.

"견고한 오웨인. 몸은 죽었어도 검술은 죽지 않았다."

"역시 오웨인! 믿고 있지. 살아 있을 때도 토너먼트 우승은 싹 다 쓸었잖아?"

"심장을 부수는 안드레이."

"그래, 오늘은 몇 개의 심장을 부쉈지?"

"일곱 개다, 주군. 용맹한 자들의 것이라 보람찼다."

"민첩한 펜리르. 오늘은 충분히 민첩하지 못했다."

"괜찮아, 괜찮아. 상대가 나빴어.

단장이었다고."

"창백한 하멜라인. 적의 핏기를 빼주는 데는 그럭저럭 성공이군."

"훌륭해. 고기 맛이 좋으려면, 피를잘 빼는 게 제일 중요하지."

다섯 명의 듀라한이 검은 살기를 피워 올렸다.

나는 경악했다.

이것이 진정한 네크로멘서인가? 기스-제-라이와 내가 보아 왔던 다른네크로멘서들 사이에는 날벌레와 드래곤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기스-제-라이는 수레 안쪽을 확인했다. 까닿게 타고 얼어 버린 두 구의 시체가 있었다. 마지막에 그들스스로조차 제어하지 못하는 마법을사용한 탓이었다.

"쯧쯧. 좀 더 넉넉하게 이겼다면.

이 녀석들을 갖고 좀 연구해 보았을 텐데."

"연구. 라니?"

"리치로 쓴다는 거야."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곧깨달았다. 마법사들을 부활시킨다.

그리고 자신의 군단에 편입한다.

'아쥬라의 마법사들을.

그런 것까지 가능하다는 말인가.

기괴한 추론이었으나, 눈앞의 네크로멘서는 상식이 통하거나 예측이 가능한 상대는 아니었다.

- 터벅터벅.

"자, 그럼. 마무리를 해야지. 확인작업도 해 주고.

기스-제-라이는 수레에서 떨어져,

바닥에 쓰러진 남자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황제인가?'

화려한 황금빛 복장을 한 남자는 본인을 중거하듯 작은 옥관3E冠을쓰고 있었다.

인장으로 쓰일 법한 커다란 미스릴반지가 눈을 끌었다.

기스-제-라이는 남자의 목에 작은 관을 꽂았다.

남자는 압도적인 상황 앞에서 그저 무력했다. 제법 선이 고운, 은발적안의 미남자였으나 이 상황에서 그게 아무런 도움은 되지 않았다.

목에 연결된 투명한 관에 붉은 피가 손가락 한 마디 정도 차올랐다.

곧이어 관이 보랏빛으로 반짝였다.

"유전자 검식 완료. 본인 맞고-."

'본인. 확인?' 의아했다. 자유 연합이나 엠버에서는 제국이 도달하지 못한 기술이 존재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저런 것까지 될 줄은.,

기스-제-라이는 은발의 미남자를 향해 마지막 선고를 했다.

"이만 죽어 주렴."

남자는 텅 빈 눈으로 기스-제-라이를 바라봤다. 기스-제-라이가 황제의 목을 손톱으로 그었다.

- 화악!

피가 뿜어졌다.

장치로 본인이 확인된 황제가, 죽어 가며 홀린 둣 중얼거렸다.

"황제, 페하, 만세.

88화 가면 쓴 축복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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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스-제-라이가 눈을 치떴다.

"응? 얘, 방금 뭐라고 했지?"

못 들었을 리가 없다.

똑똑히 들었기에 묻는 것이다.

황제 폐하 만세. 그 외침이 황제본인에게서 나왔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스스로 가리켜 황제 폐하 만세라고외치는 녀석은 없다. 덜떨어진 광대나 그런 짓을 한다.

엘튼 클레멘스는 짧은 시간에 황위를 계승받고 제국을 휘어잡았다.

자유 연합의 의원들은 입버릇처럼,

세습 군주의 9할은 구멍가게도 운영못 할 위인이라 비아냥거린다.

하지만 그런 비난은 엘튼 클레멘스에게 유효하지 않다.

그는 뛰어난 수완가다.

정박아나 광대와는 거리가 멀다.

나는 머릿속으로 몇 가지 가정을 세웠다.

"가짜. 황제인 거요?"

기스-제-라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맞는데.

그녀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나보다도 놀란 표정이었다. 그녀는이 남자가 황제라고 확신하고 있다.

"혈액 반응이 동일인으로 나왔어.

외모도 내가 알고 있는 것과 같아.

가짜 따위가 아니야."

- 덥석.

그녀는 황제의 시체를 손으로 들었다. 그리고 손에서 인장을 빼냈다.

옥관을 벗겼다.

30대 중반 정도의 서늘한 인상의 은발 미남자가 그녀의 손에 잡혔다.

그때 였다.

_ ? ? ? ? ? O-t기 I~I I Io ?

허공이 나팔꽃처럼 입을 벌렸다.

그 안쪽에 무언가가 새까맣게 뭉쳐있다. 질척한 반죽 같은 것이 마구 뒤섞여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벌어지는 공간은 점점 커졌다.

"뭐야?"

기스-제-라이가 움직임을 멈췄다.

눈을 가늘게 뜨고 힘을 끌어 모았다.

그녀가 바짝 긴장할 정도의 기운이주위에 깔리기 시작했다. 본능적인거부감이 휘몰아쳤다.

기스-제-라이는 안쪽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명령을 내렸다.

"모두, 도망쳐라."

그녀는 자신의 몸에서 촉수처럼 수십 가닥의 뼈를 생성하더니 벌어지는 공간을 구속했다. 공간이 잠시 구겨지는 것 같았다.

- 지이이이이잉!

하지만 곧 다시 공간이 활짝 벌어지기 시작했다.

- 뚜둑! 뚜두둑!

촉수처럼 수십 갈래로 뻗어 나가,

공간을 구속하던 네크로멘서의 뼈가 연달아 부러지기 시작했다.

"도망쳐라! 마지막 명령이다."

네크로멘서는 자신의 군단에게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누군가를 특정해 부르거나,

볼 정신도 없는 둣했다. 명령을 강제할 힘이나 집중력조차, 벌어지는 공간을 억제하는 데 쓰고 있었다.

- 달그락.

심상치 않은 상황.

나는 무심코 한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한 걸음 물러선 뒤, 몸이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끝까지 보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니, 실은.

공포로 몸이 굳어서 도망가지 못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때.

- 저벅! 저벅!

새까만 기운을 텅 빈 목에서 뿜어내는, 기스-제-라이의 듀라한들이앞으로 뛰어나와 그녀를 감쌌다.

"주군!"

"주군!"

길라우트, 오웨인, 안드레이, 펜리르, 하멜라인이 그녀를 둘러쌌다.

그들 역시 무시무시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망인t:人의 넋이 어디로 도망간단 말씀이오."

다섯 듀라한이 그녀를 오망성처럼둘러쌌다.

그때 였다.

- 쨍그랑!

허공이 박살났다. 공간이 파편처럼 깨졌다. 날카로운 파편이 다시허공을 찢었다. 응고되다 뭉개진 핏덩어리 같은 색으로 세계가 칠해졌다.

- 파삭!

기괴하게 깨진 허공에서 무언가가 뛰쳐나왔다. 2m는 훌쩍 넘을 것 같은 칠흑의 대검이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탓에 제대로 인식할 수 없는 '무언가'가 대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 서걱!

위에서 아래로 내리쳐진 칠흑의 대검에〈민첩한 펜리르〉가 반으로 갈려 죽었다.

아래로 떨어진 대검은 땅을 치지 않고, 270도로 아래에서 비스듬히 위로 휘둘러졌다.

- 퍼걱!

〈견고한 오웨인〉이 사선으로 갈려죽었다. 살아 있을 때 토너먼트 우승을 함께 독점하던 그의 애마와 함께 통째로 두 동강 났다.

〈동방의 길라우트〉는 평행하게 베여 죽었다.

〈심장을 부수는 안드레이〉는 단칼이 몸이 터져 죽었다.

〈창백한 하멜라인〉은 검면으로 내리쳐져 몸이 터져 버렸다.

'뭐, 뭐가 어떻게 된.!'

대체 무슨 일인지, 아무것도 알 수없었다.

공간이 벌어질 때, 만들어 낸 뼈촉수가 대부분 부서진 기스-제-라이가 분노로 두 눈을 번뜩이며 다시몇 가닥의 촉수를 만들었다.

- 쳐라.

수십 가닥의 뼈가 바닥에서 솟구쳐회오리처럼 '무언가'를 공격했다.

- 퍽!

촉수 가운데 한 가닥은 길게 뻗어 나와 나를 멀리 쳐냈다. 나는 촉수에 얻어맞아 허공을 날아갔다.

'도망. 치라는 건가?'

하지만 쳐낼 힘도 부족했던 둣, 나는 기스-제-라이로부터 고작 십여 미터를 날아가는 데 그쳤다. 그리고 주저앉아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 광!

칠흑의 대검과 수십 가닥의 촉수가한차례 격돌했다.

수십 톤의 화약이 한 번에 폭발하는 소리가 나며 땅이 흔들렸다.

닿는 건 모조리 두 동강 내던 마검이 허공에서 떨렸다. 나는 그제야'그것'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균열에서 뛰쳐나온 '그것'은, 세상을 검붉은 개펄로 만들어 버릴 듯한 기운을 갈기갈기 뿜어냈다.

그 모습은 그리 특이하지 않았다.

- 터벅. 터벅.

두 발로 걸었다. 갑옷을 입은 인간의 형태에 가까웠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방식으로 세공한, 진회색 갑주를 입고 있었다.

갑옷 전반에 걸쳐 기하학적인 회로가 번쩍였다. 그가 붉은 망토를 펄럭이며 걸어왔다.

칠흑의 대검이 아래에서 위로 쳐내려졌다.

? 쨍!

기스-제-라이의 남은 몇 가닥 뼈촉수가 모두 바스러졌다.

"끈질기다."

그는 투핸디드 소드를 당겼다.

그리고 기스-제-라이의 아래에서위로 거대한 마검을 다시 쳐올렸다.

쨍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막지 못했다.

- 팍!

처참한 소리와 함께. 기스-제-라이는 정확히 양분雨分되었다. 낭자하게 찢겼다.

- 달그락.

- 달그락.

- 달그락.

주위의 다른 해골들도 부서졌다.

마검의 기사는 그들에게 손도 대지 않았다. 그저, 기사가 쁨어내는 마기에 짓눌려 부서져 버렸다.

'이럴 수가.'

흡입적 정적.

경악이 소음을 빨아들인다.

검을 거둔 기사가 차갑게 나를 내려다본다. 투구 저편에 검붉은 빛이 이글거린다.

[? f 公 rt // 7r ? pco v a tc公v(? air r) a rj]

기스-제-라이를 양분했던 마검이다시 한 번 허공에 들린다.

- 광!

'죽은. 건가?' 나는 앞을 바라봤다. 하지만 풍경은 그대로다.

무덤도 동굴도 아니었다.

대신 눈앞에 푸른 창이 떴다.

[양손검술 Lv. 1을 습득했습니다!]

[양손검술 Lv. 2를 습득했습니다!]

[양손검술 Lv. 3을 습득했습니다!]

陷? 격 Lv. 1을 습득했습니다!]

[일도양단 Lv. 1을 습득했습니다!]

'무슨.?' 나를 의미를 알 수 없는 상태창 너머를 바라봤다.

잿빛 기사의 투구에 붉은 회로가 반짝인다. 얼굴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회로가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분노? 경악?

어찐지 그런 감정이 읽혔다.

- 촤르륵!

그의 뒤쪽.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날개처럼 수십 자루의 칼이 떠올랐다.

- 우우우응!

칼이 울었다.

허공에 뜬 수십 자루의 칼이 나를 향해 폭사됐다. 잔상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날아온 칼들은, - 쌩!

그대로 나를 통과했다.

그 순社- 뜻뚜루?!

[동화율: 84.68%] 라는 글자와 함께, 허공에 텅 빈 무언가가 떠올랐다.

길이 2미터, 폭 1미터 정도 되는 투명한 창이었다.

어떤 글자도 쓰여 있지 않았다.

잿빛 기사의 전신 회로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허공 전체가 이유 모를 분노로 물드는 것 같았다.

\. A Z V U ndp X 8 L 公 /Of 公 rs pa x p61/ o !!]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

- 지이이이이잉!

허공이 입을 벌렸다. 질척한 반죽 같은 세계의 이면程面이 열렸다.

활짝 벌린 공간으로, 기사가 발을 디뎠다. 공간이 찌그러지며 다시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멍하니 굳어 있었다.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무언가에 단단히 씐 기분이었다.

환각이라고 믿고 싶을 정도로.

- 달그락.

한참이 걸렸다.

가까스로 몸을 움직이기까지.

폭력이 지나간 자리를 둘러봤다.

마법으로 얼어붙은 땅 위에.

황실 근위대가 단체로 시신이 되어 쓰러져 있다. 명망 높은 아쥬라의두 마법사는 핏자국이 되어 터졌다.

사인死因은 간단하다.

기스-제-라이.

그리고 그녀의 군단.

완벽한 매복이었다.

아래로부터의 공습은 성공적.

'하지만.'

군단 역시 전멸했다. 허공을 찢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이 나타났다.

'단 한 명에게.

스켈레톤 나이트들이 가루처럼 으스러졌다. 명예롭게 제 이름을 대던, 다섯 듀라한은 단번에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군단의 주인.

기스-제-라이의 몸 역시 깔끔하게 절반으로 찢어졌다.

혼란스럽다.

머릿속에서 의문들이 주절거렸다.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찢긴 네크로멘서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부끄러움이 울컥 솟구쳐 올랐다.

처음에는.

황제의 행렬이 두려웠다.

아쥬라의 마법사와, 황제를 호위할 근위대를 두렵게 생각했다.

하지만 기스-제-라이는 네크로멘서가 어떤 건지 내게 보여 주었다.

두려음의 대상이던 마법사와 황실근위대를 몰살시켰다.

발끝에서 일어난 전율은 두개골로 올라왔다. 내심 생각했다.

곁에 있고 싶다고.

그리고 그녀는,

어디선가 뛰쳐나온 정체불명의 존재에게 농담처럼 찢겨 죽었다.

정신을 차릴 틈도 없었다.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그녀가 만든 거대한 구덩이 안에 가만히 서 있다. 그런 채 그녀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이루 말하기 힘든 혐오감을 느꼈다. 혐오감의 유일한 대상은 나 자신이었다.

무력감에 한참 굳어 있던 머릿속에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난 살았지?'

마검의 기사는 나 역시 공격했다.

칠흑의 대검으로, 허공에서 소환한 수십 자루의 검으로.

주변의 수많은 스켈레톤 나이트들이 일제히 부서진 마기魔氣에도 나는 상하지 않았다.

분노로 갑옷에 새겨진 회로를 번쩍이더니 사라져 버렸다.

'도무지. 알 수가 없군.'

- 달그락!

고개를 흔들었다. 어차피 당장 해결할 수는 없는 의문이다.

눈앞에 닥친 다른 문제가 있다.

'곧 인간들이 들이닥치겠지.'

황제의 행차. 대로를 비워 놓아 목격자는 없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황제가 오지 않는다면, 기다리던영주는 군대를 파견하리라.

당연한 순서.

영주 본인이 직접 병력을 이끌고 올 확률이 높다.

'일단. 음직이자.'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제야 깨닫는다.

주변이 온통 은은히 빛나고 있다.

구덩이 안은 초록의 일색-色.

모든 시체가 팔다리, 가슴, 머리에서. 반투명한 옥빛을 내고 있다.

"아.

가볍게 탄식을 뱉었다.

여기 있는 존재들은 강하다.

'아니, 강했지.' 가장 말단의 기사조차도.

어쨌거나 근위대다.

말 그대로 상위의 존재들.

본신의 능력이 나보다 뛰어나다.

곳곳의 초록색 불빛들을 다시 바라본다. 마치, 먹어 달라고 아우성치는 것 같은 수많은 불빛.

산처럼 쌓인 시체 중에서도.

눈이 아플 정도로 빛나는 게 있다.

'기스-제-라이.!'

네크로멘서의 시신이다.

- 저벅. 저벅.

그녀에게 다가갔다.

반으로 갈라진 그녀를 하나씩 안아든다. 갈라진 몸을 가져다 댔다.

한쪽은 뼈로 뒤덮여 있고,

한쪽은 피와 살이 흐르는 인간.

아름다웠던 그녀를 생각한다.

물론, 갈라진 틈은 붙지 않는다.

_ ? ? ? ?기 I? _Iu ?

그 틈에서 뿜어져 나오는 환한 빛.

나는 그곳에 손을 가져다 댄다.

예상한 메시지가 뜬다.

[흡수하시겠습니까? Y/N]

89화 가면 쓴 축복 (2)

***************************************************

흡수해야 한다.

'다음이 안 되면 그다음. 언젠가는. 살려 내려면.' 하지만.

다시 만났을 때, 그녀를 살려 낼수 있을까? 지켜 줄 수 있을까?

약속은 어렵다.

암살을 말려 볼까? 그런다고 내 말을 듣는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안 듣는다는 게 확인됐지.

네크로멘서, 기스-제-라이.

그녀는 내 말을 광기로 취급했다.

루프를 믿지 않았다. 미친 해골이 좋다며 흥에 겨웠다.

호감도가 을라갔다.

믿기 어려운 이 상황을 전달하면네크로멘서는 뭐라고 대답할까?

허공을 열고 나온 의문의 기사가,

그녀를 살해한다고 하면 어떨까.

뭐가 나오는지, 내 눈으로 꼭 한번 봐야겠다며 웃겠지. 깔깔거리며 한참 즐거워할 게 분명하다.

호감도나 한 번 더 올라갈 터.

미친 해골 취급이 더 심해지겠지.

경험하지 않아도 뻔하다.

어떻게든 기스-제-라이를 말리는데 성공한다면? 아니, 황제의 행렬을 방해한다면 어떨까.

'아니, 뭘 해도 불확실해.'

황제 살해를 시도하지 않더라도,

잿빛 기사는 정해진 시간에 그녀를 죽일지 모른다.

동굴에 가만히 머물러 있을 때, 허공을 열고 나타나 네크로멘서를 살해할지도 모른다. 그 어디라도 안전할 거라는 보장이 없다.

'하지만, 지금 머뭇거리면.

약간의 가능성마저 사라진다.

기스-제-라이 하나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정해진 죽음들.

정해진 기록들.

이 고정된 루프 속에서, 오직 나하나만이 변수로 기능하고 있다.

바꾸려면, 충분히 강해져야 한다.

잿빛 기사를 상대할 정도로.

그녀의 정수를 얻어야 한다.

유지를 이어받는다.

다시 되뇌었다.

'다음이 안 되면 그다음.

언젠가는 반드시 지켜 준다.

몰염치한 핑계를 대고, 그녀를 빨아들인다.

- 우우우우응!

그녀에게서 빨아들이는 초록빛 정수는 다른 시체들의 것과 비교할 수없을 정도로 눈부셨다.

- 띠링!

[에픽 등급 스킬: 정수 흡수 Lv. 1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에픽 스킬 보유자의 숫자가 정상범위 (1) 로 확인되었습니다.]

[조정 프로세스 완료.]

[흡수를 허가합니다.]

_ O O O Q 0 0-1기 I-"I I I ? ?

빛이 온몸으로 서서히 흩어진다.

[전승 완료까지: 23:59:59.]

소화의 다른 이름일까? 전승이라.

스킬을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지 남은 시간이 뜬다.

이제 상태창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이건 뭘까.

잿빛 기사가 공격해 올 때 생긴 투명한 창이 신경 쓰였다.

'으음.

아까부터 계속 가만히 떠 있다.

움직이지 않는다. 다른 상태창과달리, 어떤 메시지도 없다.

기스-제-라이의 유해를 흡수하며투명한 창에 손을 가져갔다.

스윽, 하고 슬쩍 만져 보는 순간.

- 쑥!

!"

- 달그락!

나는 깜짝 놀라.

순간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창을 만지던 손가락이, 투명한 창안으로 쑥 들어가 버린 것이다.

글자가 적혀 있어야 할 투명한 창에, 아무것도 안 뜬 것 같아 만져보았다.

그러나 전혀 다른 공간.

글자가 적힌 상태창과는 달랐다.

부피감을 가진 공간이다.

나는 손을 내려다봤다.

'사라지지는. 않았는데.'

다행히 공간 안으로 쑥 들어갔던 손가락뼈는 멀쩡히 붙어 있다.

'다시 확인해 봐야겠군.'

좀 더 조심스럽게 '공간'을 향해 다가갔다.

가만히 보고 있었다.

대충 윤곽이 잡혔다.

- 스윽.

천천히 손가락 끝을 공간 안으로 밀어 넣어 보았다.

'정말 놀랍군.'

들어간 손가락은 창 안에서 아주 작게 표시됐다.

1/10 정도의 크기로 흑 줄어든 것같았다.

물 안에 무언가를 넣었을 때, 굴절되어 보이는 게 몇 배는 부풀려진 느낌이었다.

나는 천천히 '창'의 모서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그 윤곽이 더욱 더뚜렷하게 느껴졌다.

'실체가 있다.'

손으로 천천히 늘러 보기도 했고,

살짝 잡은 채 늘여 보기도 했다.

'공간. 마법인가?'

고블린 부락의 직스키세스 붐텅에게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머드캐시가 만들었다던, 금화가 끝없이 들어가는 주머니.

'이건. 비슷한 공간 주술인가?'

- 쨍그랑.

바닥에서 칼을 한 자루 주웠다. 근위대가 쓰는 무기답게, 서늘할 정도로 잘 벼려진 멋진 보검.

칼끝부터 안으로 넣어 보았다.

- 스육!

칼 역시 1/10 정도로 줄어들며 놀람게도 안으로 쑥 들어갔다.

'대단한 마법이군.'

이 공간을 움직일 수 있다면,

널려 있는 다른 보물들을 상당수 쓸어 갈 수 있을 것 같다.

다 버리고 가기에는 몹시 아까운 물건들이 사방에 널려 있다. 하지만 직접 옮기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곳은 황제가 암살된 장소.

한가롭게 왕복하며, 어딘가에 이것들을 차곡차곡 쌓아 두는 식은 불가능하다. 인간의 군대가 언제 도착할지 모르니까.

'꽤 들어갈 것 같은데?'

나는 이 기이한 공간을 다루려고잠시 끙끙거리며 생각했다.

'근데. 언제 이런 게 생겼지?'

떠올리기 어렵지 않았다.

잿빛 기사의 등 뒤.

허공에 수많은 칼날이 소환될 때.

그 칼들이 나를 꿰뚫고 지나갈 때쯤 생긴 것 같다.

스윽.

- 쑥!

손가락이나 칼을 넣었다 했다 하며, 안에서 아래위로 꼼지락거려도 보았다.

공간은 고정된 채 그대로였다.

통제할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음. 역시 안 되나.

윤곽을 느끼는 데는 성공했어도, 다른 곳으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만두자.'

포기하기로 했다. 전혀 짐작이 안되는 현상. 계속 여기에 집착해서 붙어 있을 수는 없다.

게다가 지금은 한시가 급하다.

빨리 움직여야 한다.

언제 황제를 찾는 군대가 나타날지 모르니까.

허공에 떠 있는 '공간' 너머.

바닥에 놓인 기스-제-라이의 유해가 비친다.

'일단 흡수부터.'

그녀의 유해에 손을 뻗었다.

- 우우우우웅.!

- 띠링!

[두개골을 이식한 대상입니다.]

[특수 조건을 충족합니다.]

[유니크 스킬: 뼈의 군주 Lv. 1을흡수합니다!]

[패시브 스킬입니다.]

[스킬 레벨 상승에 따라, 다음 효과가 단계적으로 부여됩니다.]

- 뼈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력이 높아집니다.

- 전투 중 상대의 뼈를 강탈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강탈 범위 및 확률이 증가합니다.

- 점점 더 복잡한 구조의 뼈를 조립할 수 있게 됩니다.

-〈종족: 해골〉의 당신에 대한 기본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현재 부여되는 기본 호감도: 5그 아래로 몇 개의 메시지가 추가로 더 떴다.

레벨이 올라갈수록 해골을 훈련시킬 수도 있고, 통제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들.

머릿속에 한 단어가 떠올랐다.

군단.

'내 부대를 만들 수 있는 건가?'

물론 기스-제-라이처럼 거대한 군단을 만들 욕심은 없다.

그렇게 행동하는 게 성격에 맞지도 않는다.

쓰러지면 나 혼자 쓰러진다. 다른 망자들을 끌어들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은근한 기대와 놀라음이 솟는 건 사실이다.

시간을 들여 발전시키고 이모저모로 천천히 연구해 본다면, 분명 굉장히 강력하게 활용될 것 같은 능력이었다.

아직은 막연했지만.

기스-제-라이의 유해는 계속해서빛을 뿜어냈다.

반으로 갈라진 그녀에게 나오는 초록빛이, 온몸의 뼈로 끊임없이 스며들고 있었다.

나는 집중했다.

정수 흡수를 계속했다.

- 띠링!

[뼈를 공유하는 대상입니다!]

[흡수 효율이 대폭 상승합니다!]

[흡수 스탯 제한이 50% 상승합니다.]

[스탯 제한: 75]

[민첩 1을 흡수합니다!]

[체력 1을.]

[지혜 1을 흡수합니다!]

[힘 1을.]

[흡수한 능력을 소화하는 중.]

[소화까지 23:59:59.]

정수 흡수 Lv. 1로 스탯은 50까지밖에 가져가지 못한다. 하지만 기스-제-라이는 특수한 규칙이 적용되는 모양이었다.

'뼈를 공유하는 대상이라는 건가.'

십여 분이 지났다. 총합 10이 넘는스탯을 뽑아내고서야, 그녀에게 더이상 빛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주위를 다시 돌아봤다.

아직.

초록빛은 수도 없이 많다.

'서두르자.'

시간이 제법 지체됐지만, 여기 있는 건 어떻게든 다 먹어야 한다.

영주의 군대가 오더라도.

심지어 지나가던 누군가에게 공격받아서 소멸한다고 해도.

지금 이곳을 놓칠 수는 없다.

어떻게든 더 흡수해야 한다.

'이런 상황을 만날 수는 없어.'

갓 죽은 수많은 시체가, 모두 나보다 강한 존재들.

주위에 손만 뻗으면 뭐가 오르든 일단 룰렛이 돌아간다는 것.

그런 현장의 한가운데에 있다.

기스-제-라이의 정수를 흡수하고나자 상황이 더 객관적으로 보였다.

머리가 깨끗해지는 느낌이었다.

지혜가 올라간 덕분일지도, 혹은 거리낄 게 없어져서인지도 모른다.

'모조리 빨아들이자.'

나는 곧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했던 자들은.

먼저 두 마법사.

이 세계에서, 고작 백 명도 되지않는다는 아쥬라의 마법사.

그들의 정수를 흡수한다면, 내가마법을 쓸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아쉽게도 마법사들은, 형체도 없이 핏자국으로만 남아 있다.

혹시나 해서 다가갔다. 하지만.

'없군.'

주의 깊게 한차례 살폈다. 남아 있는 핏자국에 초록빛은 없다.

흡수는 불가능하다.

유해가 남아 있다 해도, 흡수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른다.

만약 가능하다면, 마법의 비의를 한 조각이라도 흡수한다면. 차원이 다른 힘을 가지게 됐을 텐데.

'음.

그들의 핏자국에서 눈을 뗐다.

대신 조금 멸어진 곳으로 날아간 , 마법사들의 지팡이를 바라봤다. 정수 흡수는 못 했어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이거라도 챙겨야겠군.'

고위 마법사의 스태프.

가치가 없을 리 없다. 서큐버스님의 서재에서 읽은 책이 기억난다.

마법사의 스태프.

아케인 을 응축할 수 있어야 한다.

당연히 보통 나무로 안 된다.

묘목 때부터 특별히 거듭거듭 축성된 ^무.

특별한 지역에서 자라는 종種을 쓴다. 원소의 힘을 모아 주는 오망 성을 그린다.

자라는 동안.

끊임없이 마력이 부여된다.

그렇게 자란 묘목은, 나무라고 부르기 어려운 특별한 물질.

강도剛度부터 예사롭지 않다.

전설의 명검 정도는 되어야 베어볼 만하다.

그를 중명하듯.

스태프는 마법 폭발에서도 살아남아서 형체를 보존하고 있다.

두 자루의 스태프를 바라봤다.

- 스으으으, 하나는 끝에 푸르스름한 냉기가 맺혀 있다.

북쪽 끝의 냉기를 수백 차례 압축한 듯한, 서늘한 블루 다이아몬드를 박아 넣은 스태프. 흰 수염의 마법사가 쓰던 물건이다.

'에레포르라고 했나?'

다른 하나는.

에레포르의 지팡이와 달리, 이곳저곳이 구불구불한 스태프였다.

끝에는 커다란 삼각의 화염석이 박혔다.

전설의 피닉스라도 뛰쳐나올 것처럼, 멋들어진 스태프다.

'한눈에 봐도. 보물.'

정 사용 방법을 모르겠다면, 곤봉으로 써도 훌륭할 것 같았다. 냉기와 열기가 은은히 감도는 곤봉.

'가볍기까지 하군.'

마법사의 지팡이를 전부 챙겼다.

- 붕! 부응!

나는 스태프를 들고 허공에 이리저리 몇 번 휘둘렀다.

'기분 괜찮은데.'

내가 마법사가 된 것 같은 기분이들었다. 군대가 몰려와도 쓸어버릴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나에게는 그냥 엄청 단단한 나무 지팡이에 불과하겠지만.

다행히 주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만지면 폭발한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스태프를 양손에 들고 근위기사단장에게 다가갔다.

빛.

기스-제-라이 다음으로 강렬한 빛이 그녀에게서 일어나고 있었다.

초반에 듀라한들에게 합공을 당해 사망한 단장.

투구는 이미 벗겨져 있었다.

긴 금발이 검은 마검에 잘려 주변에 흩뿌려져 있었다.

마검에 베인 그녀의 목은, 시체에서 몇 걸음 곁에 떨어져 있었다.

잘린 수급의 표정은 딱딱하다.

경악이나 고통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비바람을, 혹은 사막의 모래폭풍을 거쳐 가는 것처럼 살짝 찡그린 채로 날카롭게 굳어 있다.

수십 년에 걸쳐 굳어 온 표정.

삶을 모두, 저런 표정을 짓고 보냈을 것 같은 여자였다.

그녀가 세계를 대하는 방식을.

혹은 대해야 했던 방식을 알 것 같았다. 얼굴에서 고개를 돌렸다.

'일단 갑옷.'

그녀에게 다가간 건, 일단 갑옷을 챙기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 투툭!

흉갑, 완갑, 각반까지.

미스릴 갑옷의 한 부분 한 부분을목 없는 몸에서 전부 벗겨 냈다.

'아름답군.'

처음에 봤을 때부터 눈길을 사로잡던 갑옷이었다. 투구까지 갖춘 풀 플레이트 세트는 아름다웠다.

90화 가면 쓴 축복 (3)

***************************************************

빛나는 미스릴 풀 세트.

신화에 나오는 기사가 악롱을 무찌를 때 입을 법한 아름다운 갑옷이었다.

황실 근위기사대에 대대로 이어져내려오는 갑옷이라고 해도 믿을 법한 느낌.

석궁은커녕, 풀 차지로 박히는 랜스나 최대의 힘으로 휘둘러진 스파이크에도 뚫리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이런 걸. 입어도 되나?'

그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으니까.

〈빼앗아 줄게. 〉

문득 네크로멘서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가슴 안쪽에서 알 수 없는 느낌이 뼈를 타고 올라온다.

잿빛 기사가 나타났을 때.

〈도망쳐라. 〉

그녀가 뼈로 된 촉수 하나를 뻗어 나를 멀리 쳐내던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 달그락.

루비아가 준 갑옷을 네크로멘서가 어디 놔뒀는지 알 수 없다.

일단 여기서는 이 갑옷을 입어야할 것 같다. 두 자루의 마법 지팡이를 잠시 옆에 내려놓았다.

- 철컥.

조심스럽게 플레이트 갑옷을 몸에 걸쳤다.

장갑과 신발까지 장착했다. 역시,

주인이 아닌 자가 입었다고 몸이 불타 버리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다행인가.'

미스릴 재질에, 대對마법 문양이 빼곡하게 그려진 갑옷.

이 정도로 좋은 갑옷이라면, 정체를 가려 주는 건 그저 부수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마지막으로 투구를 썼다.

잘려서 굴러다니는 단장의 목을 바라봤다. 그녀의 부릅뜬 눈을 손으로슥 내려서 감겨 주었다.

'당신도. 잘 싸웠다. 쉬어라.'

특이하게도 단장은, 몸이 아니라 잘려진 머리에서 빛이 반짝였다.

환한 초록색 불빛을 흡수했다.

- 띠링!

빛히 흡수되며 효과음이 울렸다.

[전술(지상) Lv. 1을 흡수했습니다!]

- 우회기동을 익혔습니다.

- 포위섬멸을 익혔습니다.

- 기마 돌격을 익혔습니다.

- 사선 대형을 익혔습니다.

[익힌 전술의 레벨에 따라 효과가 달라집니다.]

[전술 레벨: 1]

[기초적인 효과를 발휘합니다.]

'음?' 특이한 스킬이다. 대단한 활약을 벌이던 여자였다. 검술이나 창술 같은 걸 얻게 될 거라 예상했는데, 정작 흡수를 시작하자, 전술 지식이 머릿속에 조금씩 홀러 들어온다.

마법사 같은 초월적인 존재들이 전장을 지배한다.

그 탓에 오밀조밀한 전술을 천시하는 게 인간의 풍조였다. 하지만 여자는 꽤 깊이 공부한 것 같았다.

〈모든 전쟁은 기만에 바탕을 두고 있다. 〉

〈방어 회전의 양상에 대해서 고찰해 보자. 〉

〈병력의 은폐와 엄폐는. 〉

〈후퇴 기동을 지연시키기 위해서 .〉

〈요새의 이점을 향유하는 적의 전역을 고립시킬 때. 〉처음 접하는 개념들이 하나하나 머릿속에 새겨졌다.

그녀가 즐겨 읽었던 책들, 연구한 전투들이 머릿속에 스며들었다.

흡수 레벨이 1이기 때문일까?

들어오는 지식은 대부분 기초적인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써먹어 보고 싶었다.

첫 번째 생에서는 전쟁을 오래 경험하긴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약한 해골병사였다. 아주 좁은 시야만을 가졌다. 내가 대체 어디로 움직이는 건지, 전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전혀 듣지도 못했고 감도잡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지식을 계속 흡수한다면, 굳이 군대를 통솔하지 않아도분명 전장에서 도움이 될 거다.

'언젠가 써먹을 수 있겠지.'

기스-제-라이에게서 얻은 뼈 지배스킬과 결합한다면.

나만의 군대를, 전술 스킬로 효과적으로 통솔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럴 기회가 을지는 모르겠지만.

- 툭.

빛을 다 뿜어낸 단장의 머리를 몸곁에 고이 놓았다.

단장에게서 떨어져 다른 자들을 연달아 흡수해 갔다.

이미 죽은 지 오래된 듀라한이나기스-제-라이의 다른 해골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초록빛을 쁨고 있었다. 나는 환한 빛에 어지러음을느낄 정도로 계속 녀석들을 흡수해갔다.

[경갑 착용 Lv. 1을 흡수.]

[중갑 착용 Lv. 1을.]

[제국 예법 Lv. 1을.]

[참회의 여신, 예메라의 교리 Lv. 1을 흡수했습니다!]

[불의 여신, 비르폰의 교리 Lv. 1을 흡수했습니다!]

[기사도 Lv. 1을 흡수했습니다!]

[승마 Lv. 1을 흡수했습니다!]

[창술 Lv. 2를 흡수했습니다!]

[회계 Lv. 1을 흡수했습니다!]

갑옷을 어떻게 착용해야 하는지, 어떤 식으로 예를 취해야 하는지가머릿속으로 조금씩 흘러들어 왔다.

다양한 종교의 기초 교리가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말을 타는 방법도, 창을 쓰는 방법도, 심지어 영지에서 돈을 걷고 관리하는 방법까지도 머릿속에 느릿느릿하게 쌓여 가고 있었다.

[소화 완료까지 23:57:32.]

쌓여 가는 스킬들은, 큰 그림의 안개가 서서히 걷히는 듯한 기분으로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완료된 뒤에 다시 한 번 점검해봐야겠군.'

스킬 레벨이 올라간다. 높은 레벨이 될수록, 한 단계를 올리기까지 많은 이들을 흡수해야 했다.

스킬은 점점 더 느리게 올랐다.

- 띠링!

[질주 Lv. 4를 흡수했습니다!]

근위대 전투마 수십 마리를 흡수한뒤에야, 비로소.

질주 스킬 Lv. 2에서 3을 거쳐, 4를흡수하게 되었다.

반짝이는 질주 Lv. 4라는 글자를 건드렸다.

그러자 추가 상태창이 떴다.

[15분 동안 350%의 속도를 낼 수있습니다!]

[다음 사용까지 50 : 00]

[24시간 내 사용 가능 횟수 3/3]

E급 던전, 〈피 묻은 승마자의 쿼터〉에서 얻은 스킬을 두 단계나 업그레이드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황실 근위대의 명마들이기에 가능한 일이겠지.

웬만한 말들은 아예 흡수할 빛 자체가 보이지 않을 거다.

'15분 동안 350%.,

쿨타임 동안도 몸이 느려지는 건아니다. 이제 웬만한 상대에게는 따라잡힐 일이 없을 것 같았다.

흡수를 거듭한 지 두어 시간이 지녹색 머리칼의 기사에게 손을 뻗었다. 그녀의 머리칼과 같은 초록색기운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 띠링!

[용량을 초과했습니다.]

[소화 중인 능력이 50개 이상입니다.]

[더 이상 흡수할 수 없습니다.]

'끝인가.' 조금 아쉬웠다.

더 아까운 건.

기스-제-라이에게 빨아들인 스킬을 제외하고는, 흡수한 스킬들이 모두 일반 스킬이라는 점.

마법도, 오러 능력도 흡수할 수 없었다. 상태창을 열고 정수 흡수Lv. 1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50 이하의 스탯.]

[Lv.5 이하의 스킬.]

[흡수 레벨(1)에 의해, 일반 스킬로 흡수가 제한됩니다.]

[죽은 지 48시간 내.]

'이 제약 때문인가.' 터무니없는 능력이긴 하지만.

아예 제약이 없는 건 아니다.

〈소화 중〉으로 표시되는 50개의능력을 쭉 훑어봤다.

근위대에게 흡수한 다양한 스킬과,

기스-제-라이에게서 흡수한 스탯이주르륵 보였다.

'24시간만 지나면.'

이걸 다 흡수한다면.

지금까지와는 한 단계 다른 세계에발을 디디게 될 것 같았다.

빼곡한 목록을 보고 있자니 있지도 않은 심장이 뛰는 것 같았다.

공기가 새롭게 느껴졌다. 아직 쓸 수 있는 능력들도 아니지만, 이미 강해진 듯한 기분이었다.

스킬과 스탯을 흡수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비슷한 레벨의 상대들에 비해 훨씬 높은 스탯이 있다.

갈 길은 멀어도 희망은 충분하다.

- 우드득!

몸을 이리저리 돌렸다.

'가야겠군.'

아쉬운 마음도 있다.

몇 시간이 더 지나면.

능력을 흡수할 자리가 조금 빈다.

불운한 그라스미어의 공자와, 외곽수색대 녀석들에게서 얻은 능력이 소화된다.

좀 아쉽기는 하다. 아직 초록빛을 내는 자들은 많으니까.

하지만 그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다. 이미 자리를 벗어나야 할 시점을 한참 넘어섰다.

지금도 충분히 오래 있었다.

- 달그락.

위를 바라보았다.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고 있다. 마법사의 지팡이 두 자루를 다시 챙겨 들었다.

황제의 시체에 다가가 한 번 슬쩍보고는, 반지도 빼냈다.

무려 제국 황제의 인장印章이다.

쓸모가 없을 리 없다. 기스-제-라이가 죽었는데 이거라도 받아 가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주위를 살폈다.

'이런 것도 있군.'

수레를 들 때 떨어졌는지, 네모난 작은 금괴와 금화들이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돈이 필요하면 환전해서 쓰는 용도인 것 같았다. 금괴는 손가락 한 마디만 했다. 들기 부담스러운 크기는 아니었다. 금괴에는 황제의 인장과 일련번호가 찍혀 있었다.

일단 보이는 다섯 개를 주머니에 넣었다. 금화도 쓸어 넣었다.

이제 떠날 생각으로 근위대의 시체들, 그 수배가 되는 해골 사 이를지나 올라갔다.

하지만.

여전히 아까웠다.

지팡이에 인장, 금괴에 금화까지 챙겼다. 그래도 더 가져갈 게 많다.

널려 있는 칼 하나하나가 명검.

전설의 보물 정도는 아니라도, 무력의 한 정점이라고 말할 수 있는 황실 근위대가 쓰는 무기들.

듀라한들이 쓴 마검들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게 많다. 자루에 알알이보석이 박힌 칼도 있었고, 스스로 은은하게 빛나는 문양이 그려진 방패도 있었다. 다 버리고 가기엔 역시 아깝다.

'레나한테 옮은 건가.'

확실히 그녀라면 목숨을 걸고라도 어떻게든 이것들을 챙길 방법을 찾았겠지.

어쨌건 이대로 가는 건.

좀 아니다.

'음.

나는 곧 방법을 떠올렸다.

가까이 있는 칼을 들었다.

기스-제-라이 근처에 떠 있는 '공간'에 그걸 집어넣어 보았다.

된다.

들어간다.

역시나 칼은 아무런 저항 없이 공간 안으로 쑥 들어갔다.

공간이 칼을 빨아들이는 게 아닌가싶을 정도. 자루까지 완전히 들어간검은, 바깥에서 보기에 10cm도 되지 않았다. 1/10 정도로 크기가 축소된 것이다.

'마흔 자루는 넉넉히 넣겠군.'

나는 다른 칼도 안에 하나씩 집어넣었다.

특별히 검을 보는 안목은 없다.

하지만 자루에 박힌 보석만 슬쩍봐도, 한 자루면 인간 하나가 평생 먹고살 명검들이 널려 있다.

일단 다섯 듀라한의 마검과, 기하학적인 문양이 새겨진 방패를 주워 넣었다.

미스릴 갑옷에 새겨진 것과 비슷한 문양이 있는 방패였다.

'대마법對魔法 문양인가.'

처음 기스-제-라이를 공격하려던 두 기사의 랜스도 안에 넣었다.

- 쪽!

길이 4미터가 넘는 굵고 거대한랜스였지만 문제없이 안으로 쑥 들어갔다.

그래도 이건 밖에서 보니, 다른 칼보다 크다는 게 티는 났다.

검은 망토가 달린 갑옷도 하나 벗겨서 안에 집어넣었다.

특이하게 어깨 부분에, 작게 사슴쁠 같은 게 솟아 있는 갑옷이라 눈에 띄었다.

그 외에 칼 스무 자루를 안에 더집어넣었다.

단장이 쓰던 칼은 아무런 장식이 없이 매끈한 은색의 칼이었는데, 이건 내가 쓰기로 하고 따로 옆에 내려놓았다.

'음.

슬슬 공간이 거의 찬 것 같다.

오밀조밀하게 들어간 작은 무기들을 가만히 바라봤다.

'다른 자의 눈에 보이려나?'

사실 이 공간이 나에게만 보인다는 보장은 당연히 없다.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인다면 기껏 넣은 게 쓸모가 없다.

하지만 이제 와 누굴 붙잡고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다. 일단 이렇게 해 놓고, 여기를 벗어날 뿐.

나는 마지막으로 기스-제-라이를 가만히 바라봤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결론은 금방 났다.

그녀를 군단 가운데에 내버려 뒀다.

'흙 속에 묻는 관습 따위, 한심하게 생각하겠지.'

고개를 다시 돌리려 할 때, 문득무언가가 눈에 밟혔다.

반으로 갈라진 기스-제-라이의 손이 무언가를 쥐고 있다.

'저것도. 가져가야 하나?'

황제에게서 뽑은 혈액.

투명한 관 안에 담겨져 있는 피.

재질을 알 수 없는 관은, 손가락 뼈마디 하나 정도의 크기다.

'쓸모가 있을까? 저걸로 본인이 증명됐다고 했는데.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다시 기스-제-라이에게 걸어갔다.

손에서 엠플을 꺼내 들었다.

가지고 있으면 어딘가는 쓸모가 있을 거 같았다. 의외로 중요한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

본인을 확인했다는 혈액 샘플을 챙기는 순간.

연달아 의문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황제가 죽었다.

전쟁을 일으켰던 엘튼 클레멘스 2세가 내 눈앞에 죽어 있다.

'미래가 바뀐 건가?'

내 존재 때문은 아니다.

이 시점까지, 나는 사실 아무것도한 게 없다.

기스-제-라이가 계획대로, 자기하고 싶은 대로 다 했을 뿐.

'어떻게 되는 거지.,

전쟁은 안 일어나는 걸까? 다른 후계자가 전쟁을 일으킬까? T&T의간부들은 암살에 실패했다고 했는데. 앞으로의 일을 도무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지켜보면 알게 되겠지.'

91화 가면 쓴 축복 (4)

***************************************************

몸에는 기사단장의 미스릴 갑옷.

허리에는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다고 외치는 명검들이 매달려 있다.

_ ^.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칼집들이서로 부딪혀 맑은 소리를 낸다.

바닥에 떨어진 수십 자루의 명검 중에서도 골라잡은 물건들.

칼만 가져가면 서운하다. 창날과 창대에서 장인의 솜씨가 느껴지는 흑창 한 자루도 등에 맨다.

유사시 몽둥이로 휘두를 수 있는 지팡이도 양손에 하나씩.

- 쿵.

지팡이로 바닥을 짚는다. 지팡이 끝이 둔탁한 소리를 냈다.

- 저벅.

발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가는 길에 놓인 수많은 유해遺核.

부서진 뼈의 바다. 그 위에 갓 죽은 시체들이 굴러다닌다.

기스-제-라이.

그녀라면 어느 쪽을 선호할까?

오래된 시체와 갓 죽은 시체 중에.

답은 없었다.

그녀는 반으로 찢겼다.

나에게 정수가 흡수된 채, 유해의바다에 쓰러져 남아 있다. 감금하고 뼈를 뜯고 세계는 시체가 되어야 한다던 그녀는 죽었다.

하지만 내 두개골에 그녀의 파편이 이식되어 있다.

정수 흡수를 사용할 때마다 그녀에게 진 빚이 생각날 것 같았다.

계속 구덩이를 을라갔다.

경사는 가팔랐다.

그건 힘들지 않다.

이미 민첩과 힘은 60을 넘었다.

이 정도는.

경사로도 느껴지지 않는다.

고민은 따로 있다.

'어디로. 가야 하지?'

- 터벅터벅.

보물을 잔뜩 손에 쥔 채, 땅 위를 걸으며 생각했다.

'상황을 정리해 보자.'

나에겐 중요한 물건이 많다.

기사단장의 보검과 갑옷.

두 마법사의 지팡이.

무엇보다, 제국 황제의 인장.

하나같이 놀라운 가치의 보물들.

그러나.

보검과 갑옷을 제외하면, 내가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물건은 아니다.

'처분하기도 어렵겠지;

문득 떠오르는 여자가 있었다.

'레나에게 전해 줄까?'

동굴에 들어오는 모험가들을 모두살해한 뒤, 그 물건들을 전부 레나에게 맡겼던 게 생각났다.

- 달그락.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미친 짓이다.

나는 아직까지, 심정적으로 레나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

인간이 아편에 중독된 것처럼, 일이 막히자 곧바로 그녀를 떠올린다.

인간은 아편에 의존하며 스스로 망가지지만, 나는 그녀에게 의존하며 그녀를 망가뜨려 왔다.

황제가 암살당했다.

이런 위험한 일에 절대 그녀를 엮을 수 없다.

나 때문에 세 번이나 죽게 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이번 생에서는 반드시 멀리 떨어져있을 생각이다.

'레나는 기각. 그다음은.

두 번째 선택지는, 길고 좁은 카브롤타 지협地缺을 건너 자유연합으로 가는 것이다.

자유연합에 사실을 알린다.

기스-제-라이의 죽음과 황제 암살에 대해 말한다. 혈액 샘플과 황제의 인장은 중거로 충분하다.

반못제국적인 성격을 가진, 이 암살의 배후에 있는 자유연합.

소식을 전해 준 내게 감사를 표하고 상당한 보답을 할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야.'

나는 별 고민 없이 두 번째 선택지를 기각했다.

일단 거리가 멀다. 엄중한 국경은 어떻게 건널 것인가?

어떻게든 국경을 건너고, 이 비밀스러운 일에 연루된 자들을 만나는데 성공한다고 치자.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기스-제-라이와 자유 연합 의회사이의 거래.

나는 그 거래 내용을 안다.

의회는 영웅들이 잠든 두 묘역을 기스-제-라이에게 팔아넘겼다.

그걸 대가로 암살을 사주했다.

'어떻게든 숨기고 싶겠지.'

의회 입장에서는, 관련된 자들을 모조리 저 깊은 땅 아래에 파묻고 싶을 것이다.

해골 하나가 가서 자세한 사정을 털어놓는다?

온갖 기적적인 확률을 뚫고 '진실'을 전달하더라도, 그들은 나를 어둡고 깊숙한 곳에 폐기할 것이다.

가진 보물을 몽땅 빼앗는 건 덤.

'어쩐다.'

세 번째 선택지로 잠깐 엠버 메어를 생각했지만, 기스-제-라이가 죽은 이상 엠버에 갈 이유가 없다.

슬라임을 통해 T&T의 이너 서클에 의탁하는 것도 가능은 하다.

내 능력을 본다면 고개를 끄덕이며 키우고 싶어 하겠지.

물론, 서클에 온 걸 환영한다며 푸르손의 각인부터 새기려 들 테고.

'갈 곳이 없어.'

나는 이 세계에서 갈 곳이 없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간단하다.

'아무 데도 안 가면 되잖아?'

그렇다.

혼자 가만히 틀어박혀서 세상을 관찰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

은자隱者가 된다.

이번 삶의 단기 목표를 정했다.

아무도 못 찾을 곳에 꽁꽁 숨어 있자.

습득한 아이템을 숨겨 놓고, 흡수한 스킬을 소화하자.

활용 방법을 연구해 보자.

기스-제-라이에게 받은 스킬을 잘 연구하면 큰 성과가 있을 거다.

에픽 등급인〈정수 흡수〉야 두말할 것도 없다.

〈뼈의 군주〉도 세상에 하나밖에 없다는 유니크 등급 스킬.

전쟁이 벌어질 때가 되면 활동을 시작한다. 그때가 되면 '흡수'할 만한 죽음은 수도 없이 많으리라.

그것만 성실하게 해도, 이번 삶이큰 손해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좋아.'

결심을 굳혔다.

숨을 장소로 가기 전에, 먼저〈메마른 지하 묘지〉로 향했다.

- 쏴아 아아아.

방울방울 몸에 튀는 폭포를 지나.

- 쿠구구구궁.

철문을 밀고 동굴로 들어갔다.

'역시 비었군.'

동굴은 조용했다.

하루 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전체가 뼈로 뒤덮여 압도적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던 곳이지만, 지금은평범한 E급 던전도 아니다.

그저 텅 빈 동굴. 타일 위를 터덜터덜 걸었다. 뼈다귀도 함정도 없다.

철창도 다 열려 있다.

저번 생에서, 레나와 함께 왔을 때모습 그대로.

- 철컹. 철컹.

통로에 늘어뜨려진 쇠사슬을 칼로 툭툭 쳤다. 내 물건을 찾기 위해 곳곳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동굴 안에 쇠사슬 소리만 메아리칠 뿐이다.

전혀 눈에 띄는 게 없다.

루비아가 남기고 간 갑옷도, 캐빈애슈턴의 책도 없었다.

'비밀 공간이 있나?'

깊숙이 숨겨 놓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꼼꼼히 찾을 시간은 없다.

여기도 곧 수색 대상이 될 거다.

오래 머무르는 건 위험하다.

- 쏴아아아아.

동굴을 나와 폭포를 지났다.

물건들은 일단 포기하기로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은신처로 떠오르는 장소가 있었다.

- 똑- 또종유석 끝에서 물방울 멸어지는 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 퍼진다.

차분하다. 그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며 어둠에 잠겼다.

아무 소리도 없는 것보다, 한 번씩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동굴을 더고요하게 느끼게 했다.

'여기 있으면 안전하겠지.'

이곳은 내가 잘 아는 동굴.

직경 1미터도 되지 않는 입구가 빼곡히 수풀로 가려져 있지만, 누구보다 쉽게 여기를 찾을 수 있다.

삼 년을 살았다.

처음 일어난 묘지 근처의 동굴.

평범한 동굴은 아니다.

들어와서 처음 출구를 찾는 데만도1년이 넘게 걸린 미로. 천장의 미묘한 기울어짐, 종유석의 모양과 벽의 결은 나만 알고 있다.

루비아와 함께 지났던 통로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걸어가던 걸루비아는 무척 신기하게 생각했다.

한 번 들어오면 길을 못 찾고 죽을걸 알고, 박쥐 한 마리 들어오지 않는 죽음의 미로.

동굴 안을 터덜터덜 걸어갔다.

'이 즈음인가?'

처음 루비아를 데리고 왔을 때, 그녀가 쓰러졌던 장소다.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몸을 받쳐 줬었지.

동굴 속 작은 공터.

입구에서 두 시간 거리.

동굴 가운데라 봐도 무리는 없다.

어쩐지 루비아의 온기가 느껴지는 듯하다. 멈춰 섰다.

짐을 놓았다.

- 철컥. 철컥.

미스릴 갑옷을 풀어 벗었다.

두 마법사의 지팡이와, 황제의 인장과 혈액을 한쪽에 내려놓았다.

챙긴 칼과 창도 모두 가지런히 정리했다. 동굴 바닥에 누웠다. 멍하니 물방울이 맺힌 종유석을 바라봤다.

- 똑- 똑피곤했다. 줄곧 긴장 상태였다.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며 의식을 희미하게 풀어 보려고 했다.

생각이 멍하니 표류한다.

궁금증이 끝없이 떠오른다.

'왜. 나만 안 죽었을까?'

허공을 열고 나타난 잿빛 기사.

그는 칼질 한 번에 듀라한들을 젖은 종이처럼 찢어 놓았다.

황제의 행렬을 오시하던 기스-제-

라이마저 간단히 찢겨졌다.

다른 해골들은 이미 마기에 짓눌려 부서져 있었다.

그런데도 나만 멀쩡했다.

공격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칠흑의 마검을 휘둘렀는데도, 그가휘두른 칼은 그대로 나를 통과해서 지나가 버렸다.

이유는 짐작도 안 된다. 그 어디에 물어봐도 답이 안 나올 질문이다.

대신 다른 질문이 꼬리를 잇는다.

'대체 누굴까?'

기사의 정체가 궁금했다.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갑주가 몹시 특이했다. 한 번도 본적 없는 방식의 세공이었다. 진회색색감도 몹시 낯설었다.

제국의 기사들은커녕, 멀리서 본 마계의 대공들도 그런 갑옷은 입지 않았다.

진회색 갑주 전반에 걸쳐, 기묘한회로가 살아 있는 것처럼 번쩍였다.

'황제가 죽은 뒤 바로 나타났어.'

황제와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대체 목적이 뭘까?

그런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아예 암살을 저지하지는 않은 걸까.

'음.

지금 여기서 당장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다.

강해지는 것. 더 많은 것들을 접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조사를 해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강해지는 것.

궁금한 거야 끝없이 많다.

허공에 떠 있던 텅 빈 공간의 정체는 뭔지, 어떻게 다룰 수 있는지, 황제는 살해당하면서 무슨 생각으로 폐하 만세를 외친 건지.

무엇보다.

'나는 어떻게 계속 삶을 반복하고 있는 거지?'

그게 가장 궁금하다. 하지만 그 질문은 잠시 보류했다.

아쥬라의 마법사를 둘이나 꺾은 기스-제-라이.

그녀마저, 회귀를 반복한다고 하자 완전히 미친 해골 취급을 했다.

어딜 가서 물어본다고 답이 나올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일단 루프는 현실로 받아들인다. 거기에 맞춰서계획을 짤 수밖에 없다.

'후.'

질문들을 대충 머리 한곳으로 밀어 넣어 정리했다.

생각을 치워 내자 감정이 올라왔다.

루비아와의 추억이 얽혀 있던 장소라 그런지, 가만히 있자 포근하면서도 어쩐지 울적한 기분이 든다.

'언제 또 볼 수 있으려나.

감상에 젖어 있을 때.

- 띠링!

[투창 Lv.1.]

[추적 Lv.1.]

[창술 Lv. 1의 소화가 완료되었습니다.]

'아.' 슬슬 시간이 되었다. 가엾은 수색대원 셋을 죽이고 흡수한 능력들의 소화가 완료되었다.

_ ? ? ? ?.

-I ?기? .

그들을 찔렀던 칠흑 단검은 아직 도내 손안에 있다.

날은 흑탄처럼 검다. 짧은 검신에 불길한 문양과 글자가 떠다닌다.

'스치기만 해도 죽었지.'

날에 살갗이 스쳤을 때, 떠다니던글자가 베인 상처로 스며들었다.

글자는 혈관을 찢었다.

피를 새하얗게 만들었다.

베인 남자는, 채 두 번을 구르지못하고 숨이 끊겼다.

'무시무시한 칼이야.'

가져온 그 어떤 명검보다도 훨씬 귀중한 무기일 확률이 높다.

칼날을 내려다봤다.

검은 날 위에, 글자 하나가 빠진 자국이 그대로다.

'보충은 안 되나.'

남은 글자 수를 살폈다.

다섯 번 정도 더 쓸 수 있을 것 같다. 웬만한 위기가 아니라면, 이 단검은 꺼내지 말아야 할 것 같다.

'그나저나.

[창술 Lv. 1의 소화가 완료되었습니다!]

허공에 뜬 메시지를 바라본다.

창槍은 낯설다.

거리를 두는 무기.

목숨을 취할 날을 긴 막대 끝에 단다. 접근하기 전에 적을 찌른다. 창이라는 무기의 본성.

자신은 공격받지 않는다. 안전하게타자를 찌른다. 창에 담긴 의지다.

해골들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경계나 공포를, 우리는함부로 박탈당해 버렸다.

우리는 걸어 다니는 죽음이고, 짓밟히고 부서지기 위해 존재한다. 사용하는 무기는 직검과 도끼 정도.

아무도 우리의 거리와 간격, 안전따위를 조금도 생각해 주지 않는다.

우리 자신조차도 그렇다.

가져온 창 하나를 잡았다.

- 싁!

허공에 찔러 보았다.

바람 가르는 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 퍼진다.

92화 가면 쓴 축복 (5)

***************************************************

반나절을 창술 수련에 몰두했다.

교본을 볼 필요는 없다. 스승을 청할 필요도 없다.

머릿속에 창술 Lv. 1이 완전히 소화되어 있다. 몸도 머리도 안다.

어떻게 창을 휘두르고 찌르는지.

기초 창술은 세 동작.

첫 번째, 돌려 밀어내기.

한 손은 창대 끝에서 한 마디 떨어진 위치.

한 손은 창대 가운데.

창을 한 바퀴 돌리며, 끝을 45도아래로 떨쳐 민다.

두 번째, 돌려 누르기.

다시 창을 돌리며 탄력을 얻어 발을 내디딘다. 아래로 창을 누른다.

창과 바닥은 평행.

충분한 힘을 줬다면, 창대가 탄성으로 파르르 떨린다.

세 번째, 찌르기.

창대 끝을 잡고 빠르게 민다. 다른 손으로 아래를 받친다. 창을 쏘아내듯 허공의 한 점을 타격!

- 싁!

'음.

허공에 창을 들고 휘두르고 찔러보니 금세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몇 번을 움직여도, 수련 퀘스트는 뜨지 않았다.

'창술 재능이 없어서 그런가?'

근위대 정도 되면, 분명 [창술 재능]을 가지고 있을 거다. 그러나 누구에게서도 흡수하지 못했다.

재능은 일반 스킬로 취급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정수 흡수 레벨을 올리거나.

'용사 포인트로 구입하면 되겠지.'

던전을 공략하면 된다.

떨리는 창끝을 보고 있을 때.

- 띠링!

[동방어 Lv. 1의 소화가 완료되었습니다!]

[발도拔刀 Lv. 1의 소화가 완료되었습니다!]

'벌써 된 건가?' 동방어.

머릿속에 처음 접하는 언어 체계가 흘러들어 왔다.

- 툭.

휘두르던 창을 내려놓고, 새로 습득한 언어를 사용해서 말해 봤다.

〈안녕하세요? 저는 해골병사예요. 〉

허공에 낯선 언어가 울렸다.

'신기한데.'

처음 접하는 언어였다 동방 세계에 관해서 들은 이야기가 있다. 배를 타고 수십 일을 가면, 여기와는 또 다른 대륙이 나타난다.

자라는 식물도, 사람들의 생김새도이 대륙과는 전혀 다른 곳.

그래서일까. 동방 어에는 신기한 언어 규칙들이 있었다. 다 이해하긴 어려웠다. 그냥 기초적인 문장들을 발음해 보았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

- 지이이잉.

[동화율이 내려갑니다.]

[84.68% -> 84.37%]

'음?' 문득 머리가 아팠다.

언어 연습 대신 다른 걸 하고 싶어졌다. 할 수 있는 회화는 고작100문장 정도인 데다, 어차피 동방대륙에 갈 일도 없다.

쓸 일도 없는 언어 대신, 다른 스킬인〈발도拔刀 Lv. 1〉이나 시연해보기로 했다.

- 달그락.

단장의 칼을 잡았다.

아무 장식도 없다. 자루도 칼집도은은한 백색.

머릿속엔 발도의 기본 지식이 심어진 상태다. 몸도 꾸준히 수련한 것처럼 기억하고 있다.

발도拔刀.

칼을 휘두른다면, 제대로 뺀 상태에서 위에서 아래로 강하게 휘두르는 게 강하다.

칼집에서 빼며 휘두르는 기술.

전장에서라면 아무 쓸모도 없다.

이 기술의 가치는 의외성이다.

칼집에 칼이 들어간 상태에서, 빠르게 빼내 기습하거나 기습을 막아내는 것.

앉은 채, 장검을 허리에 찼다.

'이걸로 될까.'

발도 술은 챔들러 남작이 사용한 것같은 카타나를 기본으로 한다. 지금 그런 무기는 없지만, 아쉬운 대로단장의 장검을 사용해 본다.

검면이 그리 넓지 않다.

감은 잡을 수 있을 거다.

왼손은 가드 위, 오른손은 가드 바로 아래에 걸친다.

- 스롱.

검집을 평행하게 돌리며, 그대로 검을 쭉 빼어 횡으로 일격.

'2초.,

느리다. 바람 가르는 소리도 나지^는다.

'안 되겠어.'

이어지는 동작.

칼을 머리 위로 든다. 양손으로 칼자루를 쥐고 강하게 내리쳤다.

- 휙.

다시 1초.

칼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약하다.

칼을 머리 위로 돌려, 오른쪽으로 내려치며 일어났다.

이어 천천히 납검納劍까지 마친다.

자세가 이미 망가졌다.

발도는 정확한 동작이 필요하다.

칼날과 자루, 검집의 각도가 모두조화를 이뤄야 한다.

'쉽지 않군.'

- 저벅.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

- 띠링!

[검술 재능 Lv. 1을 보유 중입니다!]

[〈퀘스트: 수련〉이 개방됩니다.]

[1 만 번의 발도를 수련하세요.]

[0/10, 000]

[보상: 발도 Lv.2]

발도 술도 수련으로 올릴 수 있다는 걸까?

이 퀘스트.

마다할 이유가 없다.

동굴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그랬다.

이틀이 지났다. 나흘이 지났다.

조금씩 마음이 놓였다.

'추적은 없는 건가?'

아니면, 미로가 막아 주는 거겠지.

- 똑물방울 멸어지는 소리가 한층 차분하게 느껴진다.

천장에 매달린 종유석.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방울 소리는 인간의 심장 박동을 닮았다.

닷새.

이레가 지났다.

고요하다. 아무도 오지 않는다.

2주가 지났다.

- 부응!

평온한 날들.

대부분의 시간은 발도拔刀 수련에 집중했다.

- 스르릉.

납검納劍 완료.

- 띠링!

[퀘스트 클리어!]

[수련이 완료되었습니다!]

[보상: 발도 Lv.5 습득!]

체력이 높이 올라간 덕분에, 이제 수련하는 도중에 지칠 일도 없었다.

지겨워질 만하면 다른 스킬들을 하나씩 실험해 보았다.

이를테면, 중갑 착용 Lv.2.

스킬을 소화한 뒤 갑옷을 입었다.

무거운 풀 플레이트 메일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 띠링!

[중갑 착용 Lv. 2가 적용됩니다!]

- 사격 패널 티가 40% 감소합니다.

- 속도 패널 티가 40% 감소합니다.

불의 여신이나, 참회의 여신 예매 라의 교리를 정리해 보기도 했다.

〈나는 참회자요 뜨겁게 달궈진 쇳물을 일곱 구멍에 붓길 원하며. 〉〈고통 받고 으깨져야 참회는 완성되어, 영혼은 순백이 되리라. 〉두 종교의 교리는 조금 기괴했다.

상류층으로 잘 먹고 잘사는, 황실근위대 기사들이 섬기는 종교라기엔 살짝 갸웃한 면이 있었다.

어쨌건, 2주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발도 수련으로 보냈다.

뒤에서 기습하는 상대도.

옆에서 다가오는 상대도, 발도로베어 버릴 수 있다고 느꼈다.

'이 정도면 쓸 만한가.'

칼날에 속도와 힘이 붙었다.

- 붕!

단장의 검을 한차례 시험하듯 내리치고, 다시 조용히 칼집에 넣었다.

그 순간이었다.

- 저벅.

'응?'

멀리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주 작은 소리였다.

'누구지?'

박쥐도 못 들어오는 미로.

이런 미로를 아는 자가, 나 말고또 있을 리 없다.

실수로라도 들어온다면.

길을 잃고 헤매다 곧 죽어야 한다.

하지만.

- 저벅.

멀리서 들려오는 작은 발소리는, 규칙적으로 꾸준히 울리고 있다.

정신을 집중하고 들었다. 소리는 조금씩 크고 또렷해져 왔다.

- 저벅.

'가까워진다.'

그 사실을 깨닫자, 온몸의 뼈가 꽉쥐어드는 기분이었다.

적어도 입구 근처에서 헤매고 있는 소리는 아니다.

입구에서 이곳까지는 갈림길이 수십 갈래지만 발자국 소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다. 계속 커져 갔다.

- 똑천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진다. 2주 동안 평온하게만 들렸던 소리가 이제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 달그락.

나는 긴장한 채 칼자루를 그러쥐었다. 내가 3년이나 헤맨 미로를 꿰뚫고 있는 상대다.

- 저벅.

정체를 고민해 본다.

이런 미로를 단번에 풀 만한 터무니없는 강자가, 하필 내가 머무르는 시기에 이 미로를 지나는 이유?

나를 쫓아오는 거다.

누가 날 쫓아오는지는, 내가 누구로부터 도망쳤는지 생각해 보면 된다.

황실의 추적대다.

황제 암살 사건을 조사하는 자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일 게 분명하다. 싸우는 건 미친 짓이다.

'도망쳐야 해.,

- 저벅.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다시 미스릴 갑옷을 입고, 황제의혈액과 인장을 들었다. 두 마법사의지팡이도 챙겼다.

칠흑의 단검도 허리에 찼다. 다른 보검들도 묶어서 들었다.

- 저벅.

점점 가까워져 오는 발자국 소리는 무척 불쾌했다. 상대와 마주치면 안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 저벅.

발소리는 동굴 벽을 타고 두개 골속에 울려오는 것 같았다.

점점 더 차갑고 무거워졌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정확히 이쪽을 향해 다가온다.

'질주.'

[스킬〈질주(Lv.4)〉를 사용!]

[15분 동안 350%의 속도를 낼 수있습니다!]

[다음 사용까지 50 : 00]

[24시간 내 사용 가능 횟수 2/3]

가진 물품이 너무 많습니다.

효과가 50% 감소합니다.

'뭐?' 이런 패널티가 있을 줄은 생각 못했다. 단장의 검과 기스-제-라이의 칠흑 단검, 마법사의 지팡이를 제외하고 다른 무기들은 버렸다.

- 쨍그랑!

아깝지만 어쩔 수 없다.

[물품이 정리되었습니다!]

[질주!]

- 팟!

나는 몸을 솟구쳐 동굴 반대편으로 도망갔다.

칼 한 번 휘둘러보지 않고 몸을 빼낸다. 버린 무기들도 아깝다.

썩 좋은 기분은 아니다.

하지만 상대는, 내가 1년을 헤맨 미로를 간단히 돌파하는 존재.

만나면 허무하게 죽을 게 뻔하다.

이게 현명한 판단이다.

- 팟!

최대한의 속도와 정확성으로 미로를 주파했다. 10분 정도 지났을 때였다.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여길 나가면?'

똑바로 걸어도, 왕복 4시간 정도 걸리는 긴 미로.

그나마 내가 이점을 살릴 수 있는 공간일지도 모른다.

바깥은 이미 빼곡히 포위되어 있는게 아닐까?

문득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다.

레나와 납골당을 탈출했을 때.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기다리고 있던 푸른 갑옷의 기사가 생각났다.

뭉툭한 칼집으로, 날 천천히 갈라놓던 자.

반대편엔 그런 녀석이 씩 웃으며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운에 걸어 보기로 했다.

'쫓아오는' 녀석의 의도가 좋지 못한 것임은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느낄 수 있다.

미로 안에서 그런 녀석과 장난을,

술래잡기를 한다? 도망가는 것보다 그게 훨씬 꺼림칙하다.

'도망가자.'

93화 가면 쓴 축복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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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팟!

[질주 Lv. 4를 사용 중 - 350%의속 도를 내고 있습니다.]

[잔여 시간 9 : 14]

[다음 사용까지 44 : 14]

[24시간 내 사용 가능 횟수 1/3]

질주 스킬을 두 번이나 써서 동굴을 벗어났다. 잔뜩 긴장한 채 첫 발을 내디뎠지만, - 휘이이잉~동굴 밖에는 시원한 바람만 분다.

칼도 화살도 날아오지 않았다.

긴장이 탁 풀어졌다.

'없다.' 한껏 긴장했지만, 다행히 반대편동굴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초가을 낮.

하늘은 맑고 바람은 시원하다.

주위 곳곳을 둘러보았다. 역시나 매복 같은 건 없다.

도망친 건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냥 운이 좋은 걸지도.'

뒤에서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나를 쫓아오고 있다.

오래 머뭇거릴 틈은 없다.

하지만.

'어디로 도망간다는 거냐.'

갈 곳이 마땅치 않지만, 움직여야한다. 정처 없이 산길을 지났다.

'두 번째로군.'

미로 동굴의 출구에서 유블람으로내려가는 길.

첫 번째는 루비아와 함께였다.

겨울에 눈 날리는 길을 걸었다.

하얗게 덮여 있던 바닥은 이제 누런 흙과 잡초, 돌부리를 그대로 드러낸다.

소복이 눈이 쌓였던 나뭇가지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연녹색 잎에 조금씩 물감을 칠하고 있었다.

산길을 걸을수록 기억도 다시 칠해진다. 감정도 따라 칠해졌다.

'여긴가.'

루비아가 내게 눈을 뭉쳐 던진 장소를 지났다.

'아니요! 쓸모없는 꽃은 없어요. 이렇게 하면 어울릴 것 같은데.

날짜가 지난 붉은 사르디아가 있던장소에는, 대신 연보랏빛 가을꽃이 피어 있었다.

가는 꽃대가 바람에 살랑인다.

루비아의 웃음소리가 바람에 섞여오는 것 같았다.

시끄럽게 웃는 여자였지.

- 우드득.

손목을 한 바퀴 돌렸다.

트롤이 나왔던 고산지대로 도망칠까 했다. 인적이 드문 곳. 산세가 깊어 숨기도 쉬울 거다.

하지만 이 길을 그냥 지나려니 마음이 답답해졌다.

그녀가 어떻게 죽었는지, 어떻게 버려졌는지 떠올랐다.

경비대에게 살해당했다. 덜그럭거리는 수레에 실려 쓰레기처럼 버려진 데다, 시체마저 범해지려 했다.

그 당시에 한 놈을 찔러 죽였고, 저번 생에는 무리를 거미굴에서 산채로 활활 태워 죽이긴 했다.

하지만 이 도시를, 경비병들을 그냥 지나치기는 여전히 어려웠다.

쓰레기처럼 버려지던 루비아의 시체가 생생하다. 그 모습은 내 기억속 한 자리 폐허로 자리 잡고 있다.

떨쳐 내기 쉽지 않았다.

그때.

'한번 해 볼까.

머릿속에 계획 하나가 떠올랐다.

전혀 치밀하거나 구체적인 계획은 아니다.

스쳐 가는 한 가지 충동이 있었다.

그냥 뭘 좀 던지고 가 볼 생각.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짐작하기 어렵다. 아무 효과가 없을 수도 있고, 엉뚱하게 작용할지도 모른다.

- 팟!

바닥을 힘껏 박찬다. 계속 질주를 유지한 채 달려갔다.

천천히 물들어 가는 나뭇잎 사이,

다시 한 번 회색 성벽이 보였다.

성으로 가는 길 좌우로, 맑은 하늘아래 넓게 밀밭이 펼쳐져 있다.

아직 밀밭 전체가 황금빛으로 물들지는 않았다.

위는 노랗게 변했지만 아래쪽은 푸른 기가 남아 있다.

루비아와 왔을 때와 달리, 곳곳에 경비들이 밀밭을 지키고 서 있다.

감시의 눈초리로 지나가는 농민들을 지켜보고 있다. 말을 타고 순찰하는 녀석도 보였다.

'밀을. 못 빼돌리게 하는 건가?'

제국 전체가 전쟁 준비로 수탈이 극심해질 시기.

농민들이 수확하며 밀단을 빼돌리거나, 타작할 때 낱알을 빼돌릴 거라는 짐작은 쉽다.

그래야 살아남으니까.

상황은 점점 심각해질 거다.

'먹을 게 없으니까 사람이라도 잡아먹어야 할 거 아니야.'

나를 함정에 빠뜨렸던, 손가락 잘린 여자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질주 Lv.4: 사용이 종료되었습니다. 정상 속도로 이동합니다.]

적절한 시점에 스킬이 끝났다.

속도가 흑 줄었다. 밀밭 사이의 도로를 천천히 걸어갈 때였다.

- 히히힘!

"멈추시오!"

도개교에 가까이 가기도 전, 말을타고 순찰하던 경비 녀석이 나를 불러 세웠다.

'됐군.'

녀석뿐만이 아니다. 이미 주위에 있는 경비들은 일제히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말을 탄 경비가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소?"

멈춰 세워졌다. 계획대로다. 여기오래 있을 생각은 전혀 없다. 시선만 끌면 된다.

단호한 어조로 경비에게 말했다.

"너희 대장과 약속이 되어 있다.

전해 주기로 한 물건이 있지."

물론 약속 따위는 없다.

하지만 이 도시의 경비들은 대장을 매우 두려워한다. 일단 놈의 이름을 팔면 얼어붙는다.

"어.

경비병들이 흠칫했다. 물론 양념을 좀 더 쳐야 한다. 녀석들에게 확신을 불어넣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며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며칠 뒤면 거미 잡으러 갈 텐데?

그 전까지 전해 주기로 한 물건이다."

역사가 변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경비대장은 화염병을 잔뜩 모으고 있을 거다.

함께 거미굴로 가는 심복들이 아니라도 그 정도는 알겠지.

"으, 으흠.!"

놈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나는 쐐기를 박았다.

"필요 없나? 나야 상관없다. 대신네 이름 좀 알려 주지 그래. 대머리가 그걸 꼭 알고 싶어 할 거다."

말에 탄 녀석이 몸을 흠칫 떨었다.

"아, 아니오. 정말 대장을 아는 분이구려! 지금 당장 모시겠소."

나는 손을 내저었다.

"아니. 나도 지금 갈 길이 바빠서.

물건만 전해라."

- 번쩍!

품에서 작은 금괴 한 덩이를 꺼냈다. 황제의 수레에서 주운 물건이다.

일련번호까지 찍혀서 번쩍거린다.

슬쩍 들어서 다른 경비들에게도 보여 주었다. 밭에 나온 농민들도 곁눈질로 금괴를 흘끗거렸다. 모두 그 광채에 멍하니 사로잡혔다.

말에 탄 녀석이 입을 떡 벌리고 멍청히 있다가 말을 이었다.

"이게. 대장께 전해 드리면 되는. 물건이오?"

"아니."

금괴는 그냥 시선을 끄는 용도다.

정작 전해 주어야 할 물건은 따로 있다. 일단 주워 오기는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쓰기엔 곤란할 것 같은 물건이 하나 있다.

레나도 없고, T&T에 접촉할 생각도 없는 지금은 더욱 그렇다.

"그, 그렇다면. r

"이걸 전하도록."

나는 황제의 손가락에서 빼 온 인장을 꺼내 들었다.

"부탁한 물건은 잘 가져왔다고 전해 드려라. 협조에 감사한다고도."

주위의 경비들이 모두 여기를 보고 있었다. 의도대로다. 놈들 전체가 다들 으라고 하는 이야기다.

황제 암살을 조사하는 자들에게,

이 밀밭에 있는 인간들 모두 중인이 되어 주기를 바라고 있다.

"아, 알겠소.!"

녀석이 얼빠진 표정으로 대답한다.

한 가지 더 할 일이 있었다.

"그리고, 말 좀 빌리지."

"어. 그게.

"대머리한테 말해. 좋은 걸로 줄거야. 물건, 꼭 잘 전달하도록."

- 덥석.

나는 억지로 말고삐를 쥐었다. 타고 있던 경비가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모든 능력치에서 내가 녀석을 압도한다.

- 훌쩍!

수수깡 인형을 집듯 녀석을 간단히한 손으로 들어 내려놓았다.

일단 힘에서 압도당하면 말수가 줄어든다.

"엇, 어엇.

뭐라 말하려는 듯한 녀석을 간단히 치워 버리고, 말에 올라탔다.

질주도 두 번이나 썼는데, 딱 맞는 시기에 말을 구했다.

"이랴!"

[승마 Lv. 2가 작동합니다!]

[자연스러운 자세로 말을 달릴 수있습니다.]

[승마 중 근거리 무기 사용 패널티가 20% 감소합니다.]

[승마 중 투사 무기 사용 패널티가15% 감소합니다.]

뒤통수로, 경비들이 멍하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저 금괴와 인장은 대머리 놈에게 안전하게 전해질 거다. 그 뒤에 놈이 '안전'할지는 별개의 일이지만.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을 타고그곳에서 멀어져 갔다.

- 다그닥! 다그닥!

황제의 인장.

어차피 가지고 있어도 활용할 수없는 물건. 하지만 시선을 끌기에는끝내주게 적합하다.

금괴나 보검 따위와 비교되지 않는 상징성이 있다.

날 쫓아서 동굴로 들어온 발자국소리는, 유블람 경비대장에게 상당한 관심을 가져 줄 게 틀림없다.

유블람 경비대장 따위가 왜 황제의 인장을 넘겨받았는가.

그 황당한 괴리감도, 추격자들이 상상력으로 충분히 메꿔 줄 거라고 생각했다.

- 다그닥! 다그닥!

빼앗은 말을 몰아 쭉 뻗은 가도를 달렸다. 뚫고 가는 바람이 갑옷 안으로 스며들어 시원했다.

승마 스킬의 첫 시연이었다. 말 위에서도 발도가 될지 궁금했다.

- 부응!

칼을 빼내어 휘둘렀다. 흩날리는 꽃잎 하나가 칼끝에 감겨 반으로 갈라졌다.

'정확도는 제법.'

그럭저럭 쓸 만한 것 같았다.

반으로 갈린 꽃잎을 뒤로하고, 고개를 높이 들어 앞을 바라봤다.

은은히 가을 색을 띠어 가는 높은 산이 보인다.

경비대장에게 주의를 약간 분산시켰다고 생각했지만, 나를 쫓아오던 발소리가 거기서 얼마나 시간을 지체해 줄지 알 수 없다.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먼 곳으로 도망쳐야 한다. 혹은 깊은 곳으로숨어서, 조심스럽게 정수 흡수를 반복해 강해져야 한다.

말은 금세 산의 초입에 도착했다.

근방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일단이 위로 올라가 보기로 결정했다.

설원 트롤이 나타날 만큼 높고 깊은 산이다. 잠깐의 도피처로 나쁘지 않을 거다.

무엇보다 위에서 아래를 살펴보며, 추격이 어떻게 오고 있는지 확인할 용도로 적당하게 느껴진다.

- 다그닥! 다그닥!

산의 초입은 구불구불했지만 험난하지는 않았다. 충분히 말을 타고 갈 만큼 바닥이 잘 다져져 있었다.

널따란 길을 어렵지 않게 달려갔다.

숨기에는 너무 길이 평탄한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지만, 잘 깔린 길은 금방 끝을 보였다.

유블람에서 그라스미어로 넘어가는 길만 잘 닦여 있었던 것이다.

앞을 내다봤다.

산 정상과 깊은 계곡으로 향하는 길들은 길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험했다.

곳곳에 수풀이 깊게 우거졌고 바닥의 돌부리들은 전혀 정리되지 않은 채였다. 숙련된 사냥꾼 정도는 되어야 쉽게 갈 만한 길이었다.

한쪽에는 아찔한 낭떠러지가 안전대도 없이 깊게 파여 있었다.

"히히힘!"

중간의 널따란 공터에서, 고삐를 살짝 잡아 말을 세웠다.

바닥에 작게 먼지가 피어올랐다.

말은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칫하면 절벽 아래로 떨어지거나,

나타나는 트롤의 먹이가 될 뿐이다.

이쯤에서 돌려보내야 했다.

"고맙다."

태워 준 말에게 가볍게 감사 인사를 보낸 뒤 안장에서 내려왔다.

말을 혀를 길게 빼어 내두르고 있었다. 혀가 파랬다.

'재갈이. 너무 깊은데.'

나는〈승마 Lv. 2〉가 전해 준 지식을 떠올렸다. 재갈은 잇몸 위에 놓인다. 고삐를 당기면 단단한 재갈이 잇몸 신경을 꽉 짓누른다.

위치상 자연스럽게 혀를 끊임없이 압박한다. 하지만 녀석의 재갈 고리는 특히 낮게 채워져 있었다. 혀가 파랗게 부을 정도였다.

- 툭.

충동적으로 단검을 휘둘렀다. 재갈에 연결된 끈을 끊어 냈다.

"히히 힘!"

재갈이 옆으로 날아갔다. 채 전부풀기도 전에 말이 혀를 빼서 마구 움직였다. 갑작스런 해방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머리를 마구 움직이며 온몸을 비틀었다.

"히힝! 히히힘!"

녀석은 허공에 발길질을 하며 이리저리 날뛰더니, 산길 아래로 다그닥 거리며 달려갔다.

'으음,

묻지도 않고 멋대로 녀석의 고삐를 끊었다.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녀석이 유블람의 마굿간으로 돌아간다면, 다시 재갈이 채워질 때 한층 더 고통스러울지도 모른다. 어떤 해방은 폭력적이고 무책임하다.

변명할 생각은 없다. 망가진 시간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 이 정도는 내키는 대로 하고 살 생각이다.

94화 가면 쓴 축복 (7)

***************************************************

- 철컥.

나는 두 발로 산을 올라갔다.

지금까지는 널따란 길이었다. 공격해 오는 짐승도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는 야생의 구역이다.

혹은 사냥꾼의 구역이다.

어느 쪽이건 내 편은 아니다. 정신을 집중했다. 숨을 장소를 찾기 전까지는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탐지 Lv.2]

[활성 상태로 전환합니다.]

[스킬 효율 400% 증가.]

[현재 체력 기준, 초당 0.0014%의 체력이 소모됩니다.]

훈련된 감각을 발휘합니다.

은신하지 않고 움직이는 대상을 감지합니다.

뚜렷하게 남겨진 흔적을 대부분 잡아낼 수 있습니다.

땅과 공기의 진동을 예민하게 감지합니다.

탐지 스킬은 딱히 쓰지 않아도 발동되는 능력이다.

하지만 활성화할 경우 약간의 체력소모에 더해 효과가 크게 상승한다.

'훈련된 감각.'

물론 훈련은 받지 않았다. 근위대기사들에게서 흡수했을 뿐이다.

점점 험해지는 길을 올라갔다.

산속은 점점 고요해진다. 내 발소리만 철컥거리며 울렸다. 소리를 죽여 디뎠다.

그러자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마른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 작은산새 파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점점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숲 사이에 갇혀 맴도는 지친 바람소리가 들렸다. 작은 꽃씨 흩날리는소리, 심지어 풀 자라는 소리까지 들리는 듯했다. 가만히 서 있는 나무도 온도가 있고 기척이 있었다.

'땅에도 소리가 있는 걸까?.'

달리는 땅 깊은 곳에서, 무언가 큰 하나의 덩어리가 돌아가는 감각 이전해져 왔다.

'환각인가?'

하지만 그와 동시에, 감지 범위가확 넓어지는 느낌이었다.

- 띠링!

[몰입 상태로 전환합니다!]

[스킬 효율 1, 600% 증가.]

[현재 체력 기준, 초당 0.273%의체력이 소모됩니다.]

[숙련도가 초당 0.5% 상승합니다!]

순간 직감했다. 이 느낌을 놓지 않고 꽉 잡아야 한다!

하지만 우연히 접어든 이 상태는,

고작 일 분을 유지하지 못하고 바로 깨져 버렸다.

[몰입이 종료됩니다.]

[숙련도 상승: 19.5%]

[체력 소모: 10.647%]

의도적으로 만들 수 있는 상태는 아닌 것 같았다.

무엇보다 체력 소모가 극심했다.

일 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10%나체력이 깎여 버렸다.

'으음.

잠깐 맛본 감각을 기억하려 애쓰며 바위와 바위 사이사이를 뛰어갔다.

하지만 그 감각 대신,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 잊기 힘든 장소가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여긴가.'

트롤에게서 도망치다 결국 잡혀 두개골이 반으로 뜯겼던 장소다. 무성한 수풀 맞은편은 낭떠러지다.

까마득한 저 아래로 몸을 던져 자살하던 루비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트롤에게 찢겨 죽느니 그 편이 낫다고 판단했겠지.

'후우.'

가볍게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던 때였다.

- 후IO"卜 후1이이히- 휘? ㅇ1?]멀리서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산의 소리가 아니었다.

꽤 멀리서 나는 소리였지만, 탐지스킬을 활성화시킨 덕분에 쉽게 잡아낼 수 있었다.

'휘파람이다.'

인간이 부는 휘파람 소리가 분명했다. 가만히 있자니 바닥에서 걸어오는 진동도 느껴졌다.

동굴 안에서 나를 쫓던 그 발자국소리는 아니었다. 그렇게 위험하고소름 끼치는 감각은 아니다.

'그냥 행인인가?'

까만 망토로 갑옷을 덮었다. 근처수풀로 들어갔다. 그 안에 들어가가만히 기다렸다.

날 발견할 감각이 없다면, 상대가누구든 그냥 보내 주는 편이 낫다.

괜히 시체가 생기거나 돌아와야 할인간이 나타나지 않으면, 이 근처로 추적이 붙을 거다.

"휘이이익~ 후j이이인기척은 점점 커졌다.

몇 분 지나지 않아 그들의 모습이보였다. 사냥꾼들이었다.

두어 녀석이 즐거운 둣 휘파람을 불며 내려오고 있었다.

모두 발걸음이 몹시 경쾌했다.

살짝 고개를 들었다. 놈들의 면면을 확인했다.

'저 녀석들은.!,

처음 보는 얼굴이 아니었다.

루비아와 가는 길에 만났던 트롤사냥꾼들. 하지만 그때와 복장이 제법 달랐다.

여섯 놈 모두가 징 박힌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두 놈만 저런 옷을입었고, 나머지는 털옷이었다.

가진 무기도 향상됐다. 다들 끝이 특이하게 생긴 개량 투창을 넉넉히 가졌다. 커다란 통에서 화살이 연속 발사되는 쇠뇌를 든 녀석도 있다.

'흐음.

- 찰랑?

한 놈이 메고 있는 밀봉된 나무통에서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놈들의 정체. 그리고 이 장소를 생각한다면 답은 간단하다.

트롤의 피.

트롤의 피는 그 자체로도 무척 뛰어난 강장제나 해독제다.

연금술사의 손에 들어가면 시약을 만드는 고급 재료가 된다.

'저놈들이 왜 살아 있지?'

엎드린 채, 현재 날짜를 생각했다.

계산은 어렵지 않았다.

지금은 루비아와 처음 여기 왔을 때와 비교해 8개월 정도 지난 시점.

당시에 나보다 먼저 트롤에게 찢겨죽었던 사냥꾼들이, 멀쩡히 살아서내 눈앞을 걸어가고 있다.

심지어 더 좋은 갑옷, 더 좋은 무기를 가지고 휘파람을 불며 유유자적 걸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곧 상황을 이해했다.

이 세계는, 나와 저놈들이 트롤에게 살해당한 세계가 아니다.

나는 트롤에게 살해당한 뒤 고산지대를 한 번 포기했다. 다시 회귀한 뒤 루비아를 유블람에 들여보냈다.

그 시간선이다.

눈앞의 광경이 말해 준다.

이번 시간선에서, 눈앞의 사냥꾼들은 8개월 전의 사건에서 모두 살아남았다고.

트롤 살해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다.

'성공할 사냥이었나.'

결국 저놈들은 나 때문에 다 죽었던 거다.

'내가 덫만 안 풀었어도.'

엎드린 채 회상에 잠겼다.

〈크릉! 크르르롱! 〉

〈응? 이 아이가 왜 이러죠? 〉

〈글세. 육포를 더 달라고 그러나. 〉

덫에서 풀어 준 새끼 늑대는 계속 경고하듯 짖었었다. 덕분에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조심스럽게 걷다 거대한 덫을 발견했다.

〈커다란 덫이다. 걸리면 꼼짝없이 당했겠군. 〉

보이지 않게 설치된 철사를 전부 끊고 풀어냈다. 위험을 회피했다고 뿌듯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늑대가 경고한 건 덫이 아니었다. 트롤이었다. 성난 트롤에 나와 사냥꾼들은 찢기고 쪼개졌었다.

'후우.,

나는 회상을 마치고 속으로 한숨을쉬었다.

사냥꾼들이 멀어지길 기다렸다. 굳이 부딪칠 이유가 없다. 놈들의 뒷모습을 계속 바라봤다.

가만히 보다 보니, 검은 나무통에 담겨 있을 액체가 좀 신경 쓰였다.

'한 마리에게서 빼낸 거라기엔.

좀 부족한 양 아닌가.'

트롤은 키가 2미터가 훌쩍 넘는다.

온몸에 거대한 근육이 덮여, 부피로치면 인간의 세 배는 넉넉하다.

피를 다 뽑았다면, 적어도 둘이 드는 거대한 통이 필요할 터.

'저 통은 너무 작아.'

내 의문을 뒤로하고 놈들은 곧 멀리 사라졌다. 사냥꾼이라고 해도, 기척을 죽이고 엎드린 날 발견할 깜냥은 안 되는 녀석들이었다.

- 바스락.

숨어 있던 수풀에서 일어났다.

계속 탐지 스킬을 활성화한 채로한 시간 정도를 더 올라갔을 때.

'저건.

길 한쪽 구석에 바닥 깊이 박힌 시커먼 쇠말뚝과 연결된 D자 덫이 보였다. 처음 보는 덫이 아니었다.

내 두 손으로 직접 벌렸던 덫이다.

덫은 작은 유해 하나와 연결되어있었다.

'못 벗어난 건가.'

뼈는 작은 네 발 짐승의 것이다.

형태도, 크기도 누구의 것인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내가 구해줬던 새끼 늑대였다.

눈처럼 하얀 털의 아이.

덫을 풀어 주려 다가가자 심하게으르렁거리고, 육포를 던져 줘도 자존심 때문에 먹지 않던 녀석이었다.

녀석은 풍화되어 있었다. 덫을 놓은 사냥꾼들이 늑대를 무시했거나, 깜빡하고 가 버린 것 같았다.

'가죽도 고기도 별로 안 나온다는 건가.'

생각해 보면.

녀석이 덫에 걸린 날, 방금 지나간 인간들은 트롤 사냥에 성공했다.

거대한 사냥의 성공에 고취된 채,

돈 되는 방식으로 빠르게 트롤 사체를 처리하느라 바빴을 거다. 녀석을 잡을 여유는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방치라니.'

나는 멍하니, 덫에 묶인 늑대 해골을 바라봤다.

가엾다고 생각했다.

이 작은 늑대는 내가 몇 번이고 삶을 반복할 동안, 쇠 몇에 매여서 고통스럽게 죽어 갔던 거다.

함정에서 풀어 주자, 열정적으로짖으며 경고해 주던 녀석.

책임감이 느껴졌다.

다가갔다.

시커먼 덫을 손으로 잡았다.

- 투둑!

꽉 오므린 덫이었지만, 두 손으로 잡고 힘을 주자 간단히 벌어졌다.

'고작 이 정도의 덫인데.

- 스륵.

녀석의 두개골을 살짝 쓰다듬었다.

뼈를 추슬러 모아 품에 안아 들었다.

어딘가 넓고, 덫 따위는 결코 없을 곳에 유해를 놓아줄 생각이다.

눈처럼 하얀 털. 새파랗게 빛나던 예쁜 눈이 떠올랐다.

다음에는 그때의 모습으로 풀어 줄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레나의 곁에서 깨어날 때녀석은 이미 죽어 있겠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 달그락!

내 품에 안긴 유해가, 작은 소리를내며 조금씩 떨려 오기 시작했다.

[스킬: 뼈의 군주 Lv. 1을 사용하시겠습니까?]

[통제력을 사용해서 대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필요 통제력: 5]

[전체 통제력: 10]

뼈의 군주.

기스-제-라이에게서 흡수한 유니크 스킬. 해골을 대상으로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다. 실제로 일으키라는 메시지를 보는 건 처음이다.

- 사르록.

어디서 뜯겼는지 모를 꽃잎 하나가 허공에 흩날렸다. 꽃잎은 새끼 늑대의 작은 갈비뼈 사이로 들어와, 내손바닥에 내려앉았다.

나는 고민했다.

깨워야 할까.

괜한 방해일지도 모른다. 녀석의 안식을 침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였다.

- 달그락!

['작은 새끼 늑대' 해골이 달리고 싶어 합니다.]

[당신은 상대를 진심으로 생각해주고 있습니다.]

[교감하시겠습니까?]

[교감은 두 배의 통제력이 필요합니다.]

[필요 통제력: 10]

죽은 유해의 기분. 그런 것까지 알수 있는 스킬이었나.

대단한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허공에 뜨는 메시지가 거짓이 아니라면, 녀석의 욕망을 기꺼이 이행해주고 싶었다.

'그래. 일어나라.' 의지를 발휘했다.

그것만으로도〈뼈의 군주〉스킬이 사용되었다.

[통제력을 사용합니다!]

[대상과 교감합니다!]

[사용 통제력: 10]

- 달그락!

품 안에서 굶어 죽은 새끼 늑대의 뼈가 일어났다. 뼈들이 유기적으로 붙은 채 살아 움직였다.

녀석이 내 손가락을 가볍게 깨물었다. 할는 동작과 비슷했다. 혀가 없어서 깨무는 걸로 표현을 대신하는 것 같았다.

- 띠링!

[교감에 의해 호감도가 추가로 5상승합니다.]

[현재 호감도: 10]

[〈뼈의 군주〉의 숙련도가 극미하게을라갑니다.]

가만히 녀석을 살폈다.

이는 모두 남아 있다. 열 개가 조금 넘는 갈비뼈는 아직 다 여물지 않은 듯 부드럽다.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녀석은 어렵지 않게네 발로 선다.

- 달각! 달각!

땅에 선 녀석이 얇은 꼬리뼈를 귀엽게 흔들었다. 다가와 앞발로 나를 몇 대 툭툭 쳤다.

a ?. 99.5".?

해골이 되고 나더니 붙임성이 좀올라간 걸까. 뼈의 군주 스킬 덕분인지도 모른다.

전과는 다른 행동에 살짝 놀랐다.

- 달각! 달각!

자꾸 앞발로 내 다리를 누른다.

작은 골격 때문에 무게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앞으로 가자는 이야기인 걸 알아들을 수 있었다.

95화 가면 쓴 축복 (8)

***************************************************

"그래, 가자."

나도 녀석의 기분을 알 수 있었고,

녀석도 내 기분을 아는 것 같았다.

작은 몸으로 덫에 묶여 죽은 새끼늑대. 달리고 싶다는 욕망이 강하게 남은 것 같다.

어차피 도망치려면 위로 계속 올라가야 했다.

- 달그락! 달그락!

- 철컥! 철컥!

산 위로 달렸다.

탐지는 계속 활성화한 채였다. 일행이 늘어나니 산 곳곳에 자리 잡고 있을 위험이 한층 더 신경 쓰였다.

그렇게 삼십 분 정도 지났을 때.

- 띠링!

[새끼 늑대 해골의 호감도가 증가합니다!]

[10 -> 11]

함께 달려 준 덕분인지 호감도가추가로 을라갔다.

세 시간? 네 시간?

얼마나 위로 달렸을까.

[호감도가 증가합니다!]

[13 -> 14]

어느새 녀석의 호감도는 14까지 올라가 있었다.

- 달그락.

실컷 달렸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체력이 부족한 건지 녀석이 잠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주저앉은 녀석을 안아 들었다.

녀석이 마치 핵핵거리듯 이를 딱딱거린다.

가슴속에 무언가 맺히는 것 같은,

혹은 단단하게 얼어붙은 게 조금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묘한 감정의 경계에 선 채 가만히 주위를 둘러봤다.

'어디쯤인지 모르겠군.' 처음 오는 장소였다. 확실히 아래와 달라진 온도가 느껴졌다. 주변을 차분히 돌아보며 걸었다.

십 분 정도 걷자, 몇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 커다란 건물이 보였다.

단순한 오두막은 아니었다.

다듬은 돌로 경사진 땅에 축대를 쌓아 올렸다. 그 높이만 해도 일증.

평평하게 만든 축대 위, 단단해 보이는 이층집이 지어져 있다.

'산장. 인가?'

숨을 만한 장소인지도 모른다.

규모로 보아, 아까 내려간 여섯 사냥꾼이 쓰는 장소 같았다.

놈들이 쓰는 장소라면 며칠은 비어있을 거다. 최소한 오늘은, 여기 숨어 있어도 괜찮을 것 같다.

트롤 사냥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아니다. 마주쳤다간 웬만한 사냥꾼들은 갈가리 찢기는 게 보통이다.

꽤 오랜 기간 준비해야 한다.

다니는 루트를 파악하고 유인한다.

단단히 뿌리를 박은 두꺼운 나무 몇 그루에 연결한 함정이 필요하다.

산 하나에 사는 개체 수가 많은 것도 아니다. 오늘 한 마리를 사냥했다면 피를 팔아서 며칠은 놀고먹을 거다.

- 딱딱! 딱딱!

산장으로 다가가는 나를 보고 늑대해골이 이를 부딪쳤다. 경고를 보내는 것 같았다.

'위험한가?'

- 스릉.

녀석의 경고를 받아들였다.

허리에서 칼을 빼 들었다. 지키고 있는 인간이 있을지도 모른다.

칼을 빼 들고 산장에 다가가니 늑대 해골도 별수 없다는 듯 따라왔다.

'함정은 없고.'

탐지 스킬로 천천히, 꼼꼼하게 바닥과 주위를 살피며 걸어갔다.

예전처럼 트롤 잡는 함정이 있어도지금 내 민첩과 스킬이라면 걸리지않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하지만 바닥에 별다른 함정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매복하고 있는 녀석도 없는 듯했다. 어딘가에 죽은둣 누워 있는 거라면, 그 기척까지야 알아차리긴 힘들겠지만.

산장에 가까이 갈수록 묘한 냄새가 났다. 곧 그 정체를 알아차렸다. 피비린내 였다.

'이것 때문인가.'

늑대가 경고를 보내던 게 생각났다. 하지만 위험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직감은 여전히, 산장으로 들어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사냥꾼들의 은신처라면 쓸 만한 물건이 많을 거다.

자잘한 휴대용 함정이나 무기 정도는 있을 가능성이 높다.

운 좋게 사냥 일지 같은 게 있다면 정말 트롤을 사냥했는지, 어떻게처리했는지 알 수 있을 거다.

사다리를 타고 돌로 쌓은 축대 위로 올라갔다.

몹시 두꺼워 보이는 문에는 강철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잠시 앞에 서서 집중했다. 여전히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단장의 칼을 위로 들었다.

두 발자국 떨어진 위치에서, 칼을사선으로 세차게 내려 그었다.

- 쌩!

- 캉!

불꽃이 튀며 쇠가 잘려 나갔다. 두 동강 난 자물쇠가 바닥에 떨어졌다.

두껍고 크긴 하만, 고작 시골 산장의 자물쇠다. 황실 근위단장의 보검으로 잘리지 않을 턱이 없었다.

땅에 떨어진 조각난 자물쇠를 슬쩍 바라봤다. 알람 마법 같은 건 걸려있지 않았다.

'하긴, 마법이 흔한 건 아니지.'

2주 전, 터무니없는 존재들을 연달아 접했다. 두 아쥬라의 마법사와, 수천 군단을 일으키는 네크로멘서.

허공을 찢고 나타난 잿빛 기사.

덕분에 현실감각이 상당히 망가져있는 것 같았다.

정신 차리자고 생각하며, 커다란문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 끼이이이익.

두꺼운 문이 제법 기괴한 소리를내며 열렸다. 안으로 한 발 디뎠다.

산장 안은 깜깜했다.

온통 두꺼운 벽으로 둘러싸여 창문하나 없는 구조.

밖은 가을 햇살이 따가운 낮인데,

산장 안은 차갑고 어두웠다.

칼을 빼 든 채 안으로 들어갔지만 여전히 인기척은 없었다. 확실히 텅 빈 것 같았다.

- 달각! 달각!

따라 들어온 늑대 해골이 으르렁거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뼈밖에 남지 않아 소리는 제대로 나지 않았다.

녀석을 바라봤다. 머리 위에 반짝이는 작은 창이 떴다.

[새끼 늑대 해골: 술사의 교감에의해, 일부 특성이 보존되었습니다.

예민한 후각을 발휘합니다.]

안내하는 듯한 메시지가 나타났다.

하지만 예민하지 않아도 냄새를 맡기는 어렵지 않았다.

비릿한 피 냄새에, 끈적거리는 알수 없는 냄새가 더해졌다.

냄새는 2층에서 났다.

주위를 더듬었다. 문에서 몇 발자국 떨어진 테이블에 등불이 있었다.

등불 옆에는 작은 통이 있다. 불길은 꺼졌지만 불씨는 남아 있었다.

- 화르륵!

등불을 켰다. 불이 켜지자 어두웠던 방 안이 흐릿하게 밝아졌다.

방은 생각보다 넓었다.

가운데 놓인 테이블 만 하더라도,

대여섯 명이 여유롭게 대화를 즐길 수 있을 크기였다.

벽에는 주르륵 동물 머리의 박제가 매달려 있었다. 곰, 늑대, 사슴은 머리만 박제되어 있다.

안쪽을 바라봤다. 장작이 쌓인 벽난로를 사이에 두고, 거대한 트롤두 마리가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잠시 흠칫했다.

하지만 놈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어색하고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한 쌍의 트롤은 유리로 만든 의안義眼을 번쩍이며 서로를 노려본다.

'저 녀석이다.'

왼쪽에 있는 녀석이 익숙했다. 잊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안이 모조리 긁어내진 채 방부액에젖은 솜이 빈 공간을 가득 채워졌지만, 두꺼운 양팔과 흉악한 모습은 여전했다. 여섯 사냥꾼과 나를 찢고 뜯어 놓은 녀석이었다.

오른쪽에 있는 녀석은 몸 크기가더 작았다. 트롤의 생태로 보아 왼쪽이 암컷, 오른쪽이 수컷이었다.

트롤 암컷과 수컷은 평생 지속될 결합을 이룬다. 하나의 상대만을 선택해 서로를 신뢰하고 보호한다.

결합을 맺은 상대가 죽어도 연인을 바꾸지 않는다. 살해당한 경우라면, 복수에 한평생을 바친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수컷 트롤이 먼저 잡혀 박제되었을 것이다.

함께 몸을 나눈 자를 위해, 원수의몸을 몇 조각으로 나누는 일은 그럭저럭 적절하다.

그 복수에, 나와 루비아까지 휘말린 건 좀 항의하고 싶었지만.

어쨌거나 이번 시간선에서 그녀의 복수는 실패했다.

- 화르륵!

등불 하나로는 조금 어두웠다.

벽난로 불씨를 피웠다. 작은 바람이 일며 티끌이 튀었다. 방 안은 한층 더 밝아졌다.

벽에 걸린〈트롤 가족〉이라고 휘갈겨 쓴 글씨가 눈길을 끌었다.

'가족?'

날 부쉈던 트롤 암컷을 좀 더 살펴봤다. 철사로 누덕누덕 기운 몸이 자세히 보였다. 허공에 매달린 채창에 찔린 자국인 것 같았다.

둘 모두 박제된 지 오랜 시간이지 난 듯했다. 궁금증이 일었다.

'그럼 피 냄새는 왜 나는 거지?'

- 달각! 달각!

늑대 해골이 계단 앞에서 뼈로 된 꼬리를 빠르게 흔들었다. 2층으로 가자는 이야기인 것 같았다.

아직 자세히 보지 못한 게 많았지만 일단 1층을 잠시 내버려 두었다.

계단을 딛고 2층으로 올라갔다.

어슴푸레한 둥불 빛에 2층의 광경이 비춰졌다. 냄새의 근원지는 커다란 통이었다. 방부 액으로 꽉 찬 통안에는 작은 트롤이 들어 있었다.

'새끼인가?'

주위를 더 살폈다. 1층보다 조금 좁았다. 대신 밖으로 나가는 테라스가 있었다.

문을 열고 나갔다. 피 빼는 작업은 여기서 한 것 같았다. 미처 못 담고 홀린 초록색 피가 떨어져 있었다.

기억을 더듬었다. 몇 시간 전에 본 광경을 떠올렸다.

새끼 트롤 한 마리에서 나온 분량의피라면, 사냥꾼들이 들고 가던 통의 크기에 딱 맞다.

아래에서 본 〈트롤 가족〉이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방부액 냄새 때문인지 머리가 조금 지끈거렸다.

테라스로 통하는 2층 문을 열어놓았다. 열린 문으로 건조한 가을바람이 불었다. 산장이 조금 밝아졌다.

조금 맑아졌다.

문을 열기 전에는 알지 못했는데,

방부액 통에 담긴 새끼 트롤에게 서약한 초록색 불빛이 나오고 있었다.

'방금 사냥당한 건가?'

초록색 불빛.

죽은 지 48시간이 지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인간들이 휘파람을 불던 까닭은 아무래도 이 녀석을 사냥하는 데 성공해서인 것 같다.

굳기 전에 피만 빼 놓고, 가치가 덜한 시체는 방부 액에 담궈 놓은 채산 장에 버려두고 내려갔다.

- 철퍽.

새끼 트롤을 통에서 건졌다. 젖은 시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직 내장과 눈, 뇌는 빼지 않은 상태였다. 칼자국은 나 있지 않았다.

어줍잖은 동정은 보내지 않았다.

대신 손을 뻗었다. 이젠 익숙한 메시지가 뜬다.

[흡수하시겠습니까? Y/N]

고개를 끄덕였다.

희미한 빛은 곧 몸을 타고 들어와다리에 스며들었다. 끝이었다. 빛은 금방 꺼져 버렸다.

[산악 적응 Lv. 1을 흡수했습니다!]

산을 편안하게 느껍니다.

산악 지형에서 전투력이 1.5% 올라갑니다.

산악 지형에서 이동력이 3% 올라갑니다.

[흡수하신 능력은 소화를 마친 후적용됩니다.]

[소화까지 23:59:59?".]

아무 빛도 내지 않는 트롤을 잠시 내려다봤다. 새끼 트롤이라고 해도성인 남성 정도는 순식간에 찢을 것처럼 건장하다.

하지만 근위대 기사들을 흡수했던것과 달리 힘이나 민첩은 오르지 않는다. 희미한 초록빛은 산악 적응만 흡수한 뒤 사라져 버렸다.

내 능력치는 이미, 녀석보다 한참위에 있기 때문일 거다.

'일으킬 수는 없는 건가.'

시체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하지만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일으킨다."

반응은 없었다.

잠시 더 집중해 보았다. 늑대를 일으켰던 감각을 다시 사용했다.

아무 반응이 없었다. 대신 허공에 작은 메시지가 떴다.

[통제력이 부족합니다.]

[필요 통제력: 35]

[보유 통제력: 0/10]

통제력이 한참 부족했다.

새끼 트롤이 이 정도라면, 날 죽였던 암컷 트롤은 적어도 100 정도가필요할 것 같았다.

트롤 해골을 포함해, 수천의 군단을 부리던 기스-제-라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대체 어느 정도의 통제력을 갖고 있었다는 거지?' 새삼 그녀의 권능이 터무니없이 느껴졌다. 2층을 좀 더 살피자 침대 곁에 놓인 작은 책 한 권이 보였다.

보란 듯이 '놓인' 책에 작은 위화감을 느꼈다.

〈당신이 트롤을 죽이고 싶다면〉

활짝 열린 문으로 따가운 가을 햇볕이 들어온다. 햇볕이 제목 아래의 글쓴이를 비췄다.

〈캐빈 애슈턴〉

'이것도 그자가?'

기묘하게도, 캐빈 애슈턴이란 자의 책이 조금씩 눈앞에 던져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산장에 끌린 것도 그런 이유에서인지 모른다.

'마법사 아니었나?'

마법사가 왜 트롤에 대한 책을 썼는지, 그렇다고 쳐도 이 책이 어떻게 여기 있는지 궁금했다.

나는 홀린 듯 책을 펼쳤다.

첫 페이지는 몹시 엉뚱한 문장으로 시작했다.

〈트롤은 사랑이라는 개념을 배우지 않는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트롤을 사냥하려는 당신은 이 사실을 정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한 쌍 중 약한 쪽을 살해하면, 나머지 하나를 살해하는 일은 몹시 쉬워진다. 트롤은 복수를 차갑게 식혀먹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책은 분명 트롤을 살해하는 방법에 대해 자세히 기술해 놓았다.

하지만 행간을 읽다 보면 줄곧 읽는 자를 비난하고 매도하고 있다.

그 모순을 내심 우습게 여겼지만,

집중하며 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었다. 주어질 보상이 있으니까.

지혜가 올라갔다는 메시지를 기대하며 책을 덮으려 할 때였다.

손으로 쓴 것 같은 하나의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뜻을 다 읽어 낼 수는 없었다.

〈@# $%들과 & § 할 것〉

일부만 알아볼 수 있는 글자였다.

나에게 이런 글자는 하나밖에 없다.

'동방어?'

글씨는 '일그러져' 있었다. 아니,

적힌 글자 자체는 몹시 수려했다.

다만 글자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나스스로가 조금씩 비틀리고 일그러지는 기분이었다.

[동화율이 떨어집니다.]

어지러웠다. 손으로 내밀었다. 테이블을 짚었다.

[83.94%]

내 동방어 레벨은 1에 불과하다.

하지만 읽어 낼 수 없던 글자들이,

갑자기 의미를 전해 오기 시작했다.

96화 가면 쓴 축복 (9)

***************************************************

〈@# $%들과 & § 할 것〉

책 마지막에 필기체로 쓰여 있는,

알아볼 수 없던 글자들을 앞에서부터 천천히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깨진 $%들과 & § 할 것〉

〈깨진 조각들과 & § 할 것〉

〈깨진 조각들과 접촉할 것〉

그러나 그 글자들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깨진. 조각? 접촉?' 어떤 조각을 말하는 건지, 접촉하라는 건 뭔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책을 덮지 않고 계속 페이지를 앞으로 넘기며 끙끙댔다.

계속 신경 쓰이던 '동화율'이 떨어진 문장이다. 분명히 내게 중요한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과거로 계속 되돌아가는 능력과 관련이 있는 문장일지도 모른다.

다른 페이지를 쭉 뒤지며 '깨진 조각'에 대한 기록을 찾았다.

실마리가 잡히지 않았다. 다시 읽어도 책에는 트롤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조각 운운하는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책을 덮었다.

- 띠링!

[지혜가 1 올랐습니다!]

캐빈 애슈턴의 다른 책을 읽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에 상태창을 띄웠다.

[해골병사 Lv.16(135)]

[체력: 61]

[힘: 61]

[민첩: 62]

[지혜: 33(new!)]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든지, '죽음'을 한 번 경험하면 레벨은 1로 초기화된다.

레나에게서 도망친 뒤.

기스-제-라이와 함께 있으며 레벨이 15까지 다시 올랐다.

황제 암살의 현장에서 기사들의 유해를 흡수해 스탯도 추가로 올랐다.

다시 창을 닫았다.

마지막 페이지를 보고 있던 책을덮고,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조각'이 무슨 이야기인지는 궁금했지만, 먼저 할 일이 있었다.

산장 곳곳을 샅샅이 뒤졌다.

캐빈 애슈턴의 다른 책이 있을지도 모른다.

'없군.'

난잡한 인간의 교미를 생생하게 묘사한 춘 화집만 가독할 뿐, 글자로빼곡한 책은 없었다. 사냥일지조차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대신 지도를 몇 장 발견했다. 산을 자세하게 그려 놓은 지도였다.

지도에는 주변 계곡의 깊이와 물의흐름까지 세세하게 그려져 있다.

한 장에 전체가 있는 지도도 있었지만, 몇 장에 나눠서 세세하게 그려 놓은 게 마음에 들었다.

붉은 선으로 구불구불하게 트롤의 동선까지 그린 지도였다.

그 외에는 사냥꾼의 산장답게, 휴대용 덫이 가득했다.

나는 캐빈 애슈턴의 책과, 지도를모조리 챙겨 테이블 위에 놓았다.

덫 가운데 쓸 수 있을 것 같은 것도 챙겨 한쪽에 정리했다.

'어쩔까?'

고민이다.

지도에는 숨을 만한 동굴이 몇 군데 표시되어 있었다. 여기서 어서 벗어나 그곳으로 갈까?

하지만 산장의 이점을 버리기는 아까웠다. 여기는 산의 정상 근처.

사방이 탁 트인 곳에 지어져 있다.

어느 방향에서 산으로 올라와도 관찰이 가능하다.

누가 오는지도 모르고 동굴 안에 박혀 있는 것보다는, 시야가 확보된 장소에 있는 게 낫다.

결심을 굳혔다.

'산장에 있자.'

정리되어 있는 덫을 모아서 들고밖으로 나갔다.

레나가 함정을 설치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내가 직접 놓은 적은 없다.

하지만 곁에서 수십 차례 본 적이 있다.

그 기억을 되살려 산장으로 올라오는 길목에 덫을 하나하나 설치했다.

스무 개 정도의 덫을 설치하는 데세 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다.

- 털썩.

2층 베란다 의자에 앉았다.

망루처럼 올라오는 길목이 쭉 다보 이는 곳이다. 누가 오든지 내가먼저 발견한다. 조금 안심이 되었다.

상쾌한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아까 덮어 두었던 책을 펼쳤다. 더 꼼꼼히 들여다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역시, 〈깨진 조각〉이나〈접촉〉에 관한 내용은 전혀 없었다.

중간중간 고개를 들어 산장으로 올라오는 길을 훑어보았다.

덫을 설치해 둔 곳이다. 사실 그런 초보적인 덫에 걸릴 정도라면 칼을 부딪쳐도 이긴다.

하지만 높은 곳에서 덫을 놓고, 지켜보고 있다는 심리적 안정감은 꽤 중요했다.

- 달각! 달각!

새끼 늑대 해골은 지루한 둣 내 무릎 위로 올라왔다.

['작은 새끼 늑대' 해골이 정찰을 가고 싶어 합니다.]

[허용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계속 의사를 무시할 경우]

- 호감도가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 '눈치 보고 기죽는 성격'으로 변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계속 의사를 받아 줄 경우]

- 호감도가 오를 가능성이 큽니다.

- '제멋대로인 성격'으로 변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현재 호감도: 14]

- 당신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가고 싶으면 그래라."

정찰을 허가했다. 묶여서 죽은 늑대다. 해골이 된 상태에서까지 구속하고 싶지는 않았다.

산장으로 오는 길목에 덫을 놓았지만, 모두 인간이나 올 만한 길이다.

게다가 녀석은 날 따라오며 덫을 전부 확인했다. 위치를 알고 있다.

- 달각! 달각!

작은 늑대 해골은 달각거리며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아, 문을 열어 줘야 하나.'

1층의 문은 내가 열어 줘야 한다.

두껍고 무겁다.

저 작은 몸으로 밀기에는 힘이 벅찰 거다. 캐빈 애슈턴의 책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려 할 때였다.

- 달각!

- 우드득! 우득!

작은 뼈가 움직이더니, 곧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는 아주 짧았다.

- 띠링!

[교감 중이던 '새끼 늑대 해골'과의 연결이 강제로 끊어졌습니다.]

'뭐라고?' 곧이어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 저벅.

동굴에서 꾸준히 나를 향해 다가오던 발소리였다. 그 소리가 첫 번째 계단을 밟았다.

- 저벅.

발소리는 나무 계단을 통해 위를 향해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동굴 안에서부터 들렸던 이 발소리는 명백히 이상했다.

누군가 발을 디디며 어쩔 수 없이 내는 소리처럼 들리지 않았다.

차가운 손가락이 짚는 건반의 한음音 같았다.

- 저벅.

일어나야 했다. 누군지 묻고 소리를 치거나, 칼을 뽑아 들어야 했다.

하지만 지척에서 들리는 발소리에 몸을 음직일 수가 없었다. 공포가 척추를 타고 차갑게 치솟았다. 머릿속에 축축한 의문이 차올랐다.

'어떻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책을 보면서도 길목 길목을 계속체크하고 있었다.

게으르지 않았다.

오히려 과도할 정도로 자주, 산장으로 오는 길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누가 왔다면 반드시 내 눈에 띄어야했다. 철저히 감시하고 있었다.

심지어 산장 문을 여는 소리조차나지 않았다. 끼이익 하고 육중한소리를 내야 할 1층 산장 문이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 저벅.

발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렸다. 마지막 계단을 밟는 소리였다. 나는 돌아서며 칼을, _ 스, 빼들어야 했다.

- 턱.

칼이 뽑히지 않았다. 가로막혔다.

나는 다시 칼을 빼 들었다.

- 턱.

이번에도 칼은 손가락 하나 길이도 뽑히지 못한 채 가로막혔다.

손가락 하나.

푸른 건틀렛을 낀 손가락 하나가,

칼이 뽑히려 할 때마다 칼자루 끝을톡, 건드려 칼집 안으로 쳐냈다.

힘의 분배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정확했다. 칼이 칼집 안으로 딱 들어갈 만큼만 손가락이 튕겨졌다.

힘이 과해서 칼집이 밑으로 옴직일만큼도 아니었고, 모자라서 칼을 막지 못할 정도도 아니었다.

완전히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마치 의지대로 칼을 살짝 뽑았다가,

다시 안으로 집어넣는 것 같았다.

나는 검을 왼쪽 허리에 찬 상태로 앉아 있었다.

고개를 돌려 상대의 얼굴을 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가락'은 내 왼쪽 뒤에서 뻗어 왔다.

본체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벤다.'

생각이 많으면 검이 느려진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자. 그저 집중해서 베어 버리자.

이 자세에서 공격을 가하려면.

나는 수만 번 연습한 자세 그대로,

왼발을 축으로 오른발을 박찼다. 팽이처럼 뒤로 돌며 일어나 검을 그대로 휘둘렀다.

〈발도拔刀〉

동굴에서 수만 번 연습했던 동작이다.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한 마음가짐으로 은백색 검을 뽑아 휘둘렀다.

칼은 고맙게도 마음을 따라 주었다.

그 어느 때보다 빠르고, 정확하고,

강하게 칼이 휘둘러졌다. 무아지경으로 이루어진 완벽한 발도였다.

- 서걱!

검은 그대로 상대가 있는 자리를 치고 지나갔다. 날카로운 파육음이들렸다. 손끝이 묵직했다.

'걸려들었다.'

성공이었다. 뒤에 서 있던 상대는 반으로 갈라져 쓰러졌다.

- 철픽!

두 동강 난 고깃덩어리가 눈앞에서좌우로 쓰러졌다.

피보라는 없었다.

내장도 바닥으로 쏟아지지 않았다.

갈라진 고깃덩이에서, 방부액 젖은 축축한 솜들만 힘없이 뱉어졌다.

나는 바닥을 바라봤다.

누덕누덕 철사로 꿰어져 있던 암컷트롤 박제는 깔끔하게 절반으로 갈라져 그 속을 보이고 있었다.

칼로 벤 것은 1층에 있던 암컷 트롤이었다. 이미 9개월 전에 죽은 그녀의 박제였다.

'발자국'은 2층으로 트롤 박제를 들고 온 것이다. 의도는 명백했다.

무거운 조롱이 뼈 위로 내려앉았다.

갑자기 세상이 몹시 좁게 느껴졌다.

딛고 선 바닥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다른 건 없나?"

목소리는 차가운 물방울처럼 떨어졌다. 떨어진 물방울이 머릿속에 그대로 고여서 흩어지지 않았다.

말소리는 등 뒤에서 들려왔다.

돌아보는 순간, 머리 위로 칼이 천천히 떨어졌다.

검집째 휘둘러지는 공격은 궤적이보일 만큼 느렸다. 흐느적거리며 질질 끌고 오는 것처럼 느렸다.

기억에 남을 만큼 느렸다.

같은 환경.

같은 상대였다.

같은 식으로 죽는다.

바닥에는 부서진 늑대 해골이 떨어져 있었다. 갑옷째 반으로 갈라지려는 순간이었다.

- 우우우응!

'죽여라.'

허리에서 강한 진동이 느껴졌다.

꽉 조였던 공간에, 칠흑 단검의 떨림으로 미세한 균열이 생겨났다.

새까만 균열을 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를 악물었다. 허리에 찬 단검을 빼 들고, 내려쳐지는 새하얀검집을 향해 맞받아쳤다.

"호오?"

푸른 갑옷 기사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커졌다. 나를 향한 반응은 아니었다. 단검을 향한 반응이었다.

- 파지지직.!

검집 주위를 감싸고 있던 투명한 막이 보이기 시작했다.

허공에 파직거리며 하얗게 균열이 일었다. 있는지도 몰랐던 막이 칠흑단검의 힘에 의해 드러났다.

단검이 울었다. 흑탄처럼 검은 날에 떠돌던 글자 하나가 살아 있는 것처럼 꼿꼿이 일어났다. 한 번 도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글자는 꿈틀거리며 투명한 꺼풀 안으로 파고들려 했다. 몸을 곧추세워 뚫으려 했다.

마구 할퀴어진 것처럼, 허공에 새하얀 균열이 생겼다.

- 사각! 사각!

칼날에 살고 있던 다른 글자들이 움직였다. 만들어진 하얀 균열 사이로 달라붙었다.

투명한 막에 접착하듯 몸을 붙인 채 갉아먹기 시작했다.

97화 가면 쓴 축복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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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열이 손바닥 한 렘 정도로 넓어졌을 때였다.

"그래, 이 정도 재미는 있어야지."

- 스릉.

푸른 갑옷의 기사가 칼을 손가락한 마디 정도 뽑았다. 그 순간 그의 몸이 새하얗게 빛났다.

- 슈아아아악!

강한 바람이 남자 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드러난 칼날이 측정할 수없는 온도로 눈부시게 타올랐다.

고작 손끝에서부터 한 마디 정도의 길이에 불과했지만, 뿜어지는 빛은 산장을 전부 덮어 버릴 정도였다.

- 치지직! 치지지직!

기세 좋게 균열을 만들어 가던 글자들이 주춤거렸다. 흩어져 있던 글자들이 연결되기 시작했다.

순간, 글자들이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나는 줄 게 아무것도 없었다.

단검을 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힘과 집중력을 사용하고 있었다.

연결된 하얀 글자들은 빛에 대항해차갑게 주위를 얼려 가기 시작했다.

힘 싸움을 벌이며, 투명한 막에 균열을 만들어 내려는 것 같았다.

파고들려는 차가운 백색과 밀어내려는 뜨거운 백색이 부딪혀 기괴한 파장을 만들었다.

하지만 균형은 오래가지 못했다.

상대의 새하얀 칼날은 끊이지 않고계속 빛을 뿜어냈지만, 칠흑 단검에서 나온 글자들은 스스로를 소모하기만 하는 것 같았다.

'빨리 끝내야 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런 생각을 하는 것뿐이었다.

찢는다.

깨뜨린다.

한 번에 힘을 집중시킨다.

그렇지 않으면 희망이 없었다.

- 우우우!

글자들은 내 의견에 동의하는 것처럼 울었다.

앞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갑옷 안쪽의 뼈가 타닥타닥 타들어 갔다.

무형의 기운에 압도당한 상태에서,

무리한 움직임으로 곳곳에 실금이 죽죽 그어졌다. 하지만 당장 승부수를 던져야 했다.

뒤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검을 억지로 휘둘렀다. 몸 곳곳이 부서지고 깨지는 것 같았다.

세상이 아찔해졌다.

- 파파파팟!

강렬한 바람이 폭발했다. 바람에 휩쓸린 늑대의 뼈와 트롤 사체가 베란다 밖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첫 번째 글자가 터지듯 타올랐고,

침몰하듯 부서져 허공에 흩어졌다.

두 번째 글자, 세 번째 글자가 버티며 잠시 균형을 이뤘지만 곧 흐트러졌다.

- 치직! 치직!

글자들은 끝부분부터 타들어 가며 힘을 잃었다. 재가 되어 사라졌다.

- 끼기기긱! 파직!

네 번째 글자가 기괴한 단말마를 냈다. 투명한 막을 잠시 갉아먹고, 하얀 검집에 조그만 균열을 냈다.

새까만 불꽃이 폭발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파삭, 하는소리를 내며 네 번째 글자도 부서져바닥에 떨어졌다.

- 저벅.

푸른 갑옷의 기사가 내게 한 발자국 다가왔다.

힘이 빠진 단검을 억지로 잡았다.

하지만 그건 저항이라기보다, 놓을힘이 없어 잡고 있는 쪽이었다.

갈라지고 라들어 간 뼈는 아무 힘도 낼 수 없었다.

- 쓰윽.

다가온 기사는 버릇처럼 제 머리를 뒤로 넘겼다. 시들어 있는 회청색머리칼이 었다.

두 번째 만남.

동굴 밖에서 만났을 때와 다르다.

이번에 녀석은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다. 대신 한쪽 입꼬리를 비뚜름히 올리며 웃었다.

"오랜만에 힘 좀 썼더니 시원하군.

고맙다고 해야 되나?"

나는 대꾸하지 못했다.

단검을 허공에 박은 것처럼 억지로 잡고 있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주변에서 파직거리는 파장을 확인하며 느꼈다. 투명한 막은 검집만을두르고 있는 게 아니었다.

푸른 갑옷의 기사는 공간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가 칠흑의 단검을 무시하고 검을 내리치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방금 전의 균형은 이 남자가 일부러 만들어 냈다. 일부러 단검의 힘을 끌어내어 장난을 친 것이다.

기사는 나를 쓰러트렸다. 발로 배를 짓밟았다. 발버둥 칠 힘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글자가 모두 빠져나간 단검만 허무하게 잡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는 내 배를 발로 밟았다.

- 투둑. 투독.

차분히 미스릴 갑옷을 벗겨 냈다.

갑옷이 다 벗겨지자 그는 내 손목을 뒤로 교차해서 강철 수갑을 채우고, 발에는 족갑까지 채웠다. 그리고 그둘을 연결했다.

어느새 저녁이었다.

차가운 가을바람이 뼈에 난 실금사이사이로 지나갔다.

기사는 단장의 갑옷과 검, 마법사의 지팡이를 회수했다. 기스-제-라이가 채취한 혈액을 잠시 바라보다 별말 없이 품에 챙겨 넣었다. 그 과정에서 내게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이상할 정도였다.

나는 결국 그에게 물어보았다.

"왜 아무것도 묻지 않지?"

남자는 흘끗 쳐다봤다. 그리고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내 머리를 향해 검집을 휘둘렀다.

- 딱!

의식이 팍 꺼졌다.

- 다그닥! 다그닥!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난다.

'여긴. 어디지?'

의식이 희미하게 돌아왔다. 세상이 천천히 또렷해진다.

- 다그닥! 다그닥!

하지만 미친 듯이 흔들렸다. 다행히 어지러음은 느끼지 않는다.

두개골을 이리저리 움직여 상황을 파악했다.

나는 긴 막대 끝에 매달려 있다.

강철 수갑에 사지가 뒤로 꺾여, 깃발처럼 막대 끝에 매달려 흔들린다.

푸른 기사는 나를 기절시킨 뒤 어딘가로 끌고 가는 증이었다.

- 달그락!

한껏 힘을 줘 봤다. 하지만 수갑은 반응도 오지 않는다. 반응은 엉뚱한 곳에서 왔다.

[뼈 곳곳이 갈라진 상태입니다.]

[무리한 힘을 주면 체력이 영구적으로 감소합니다.]

[회복이 제한된 상태입니다.]

'회복 제한이라고?' 허공에 뜨는 메시지를 보고 팔다리를 얌전히 늘어뜨렸다. 지금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 다그닥! 다그닥!

아래로 달리는 말의 머리가 보였다. 하얀 털에 은은한 금빛이 섞였다.

말은 무척 키가 컸다. 무덤에서 죽인 망치와 석궁이 타던 블루 마일 로보다 넉넉히 머리 두 개는 컸다.

처음에는 말을 타고 산장까지 올라왔다고 믿기 힘들었지만, 산길을 달리는 모습을 보니 암벽이라도 탈 수있을 것 같았다.

가파른 산길을 장난처럼 툭툭 디뎌 내려가고 있었다.

날쌘 산악 늑대보다 넉넉히 두 배는 빠른 속도였다.

- 다그닥! 다그닥!

기사는 그물 침대에 누워 있는 것처럼 편안하게 말을 몰았다.

이 남자는, 유블람에 들르지 않았다. 곧바로 나를 쫓아온 것이다.

'무의미한 짓이었나.'

어디로 끌고 가는 걸까? 언제부터 쫓아온 걸까.

무엇보다.

확인해야 할 게 있다.

레나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운이 좋으신 거죠. 눈앞에서 제국4검주劍主 중 하나를 보고 살아남으신 거라면. 〉〈검 주劍主라고? 〉〈네. 새하얀 검집은 백조라 불리는세라펌 Seraphim. 외양을 들으면〈??? 푸른 사자들은, 마魔를 보면 무조건 베어 버린다던데. 〉- 다그닥! 다그닥!

회상을 끝냈다.

푸른 갑옷의 기사.

이 남자는, 레나의 말대로 정말 제국 4대 검주 가운데 한 명일까?

막대 끝에 매달린 채, 슬쩍 그를 떠보았다.

"다른 검주들은. 오지 않았나?"

하지만 그는 위쪽을 흘끗 바라보지도 않았다. 나를 완전히 무시하곤, 타고 있는 하얀 말의 목덜미를 솔로숙숙 긁어 주었다.

"히 힘!"

예민한 부위를 긁힌 말이 기분 좋은 듯 몸을 슬쩍 떨었다.

막대 위에 매달린 몸이 한차례 크게 움직여졌다.

추적당했다.

'아이템 때문인가.'

생각해 보면 이런 상황은 필연이다. 사실 아이템 때문이 아니라도, 나를 쫓을 가치는 충분하다.

황제의 암살 현장.

거기서, 유일하게 바깥으로 걸어 나온 무언가의 흔적.

게다가 마법사의 스태프, 황제의반지, 미스릴 갑옷까지 가져갔으니.

황당한 일을 저질렀다.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게부자연스럽다.

- 뀨. 뀨꾹!

새들이 나를 비웃는다.

남자를 처음 봤을 때를 떠올렸다.

레나를 동료로 맞이하고 한 달 뒤.

지금으로부터 약 이 주 후였다.

그때도, 아마 황제 암살을 조사하러 온 게 아니었을까?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저건?'

저 앞쪽, 바닥에 배가 반으로 갈라진 여섯 명의 사냥꾼이 보였다. 다들 창자가 조금씩 바깥으로 새어 나와 있었다.

- 다그닥! 다그닥!

거리가 급격히 가까워졌다. 지나가며 그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사냥꾼들은 고통으로 눈의 혈관이다 터져 있었다.

기사는 이 참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갔다.

'이자의 짓이다.'

분명했다.

그냥 죽인 게 아니다.

정교하게 복막을 갈랐다. 거기까지면 충분하다. 일부러 안을 꺼내어고통을 가할 필요도 없다.

연분홍빛 창자가 압력을 못 이기고바깥바람을 쐬면 진실은 자연스레 토해진다.

기사는 사냥꾼들에게, 위로 올라간 나에 대해 자세히 물었을 거다.

정작 내겐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잠시 이유를 고민했다. 고통으로다 터진 사냥꾼들의 실핏줄을 떠올리고 불현듯 깨닫는다.

이 남자는 고문 없는 대화에서는 의미를 찾지 못하는 부류일 거다.

내게 고통을 주는 방법을 모른다.

해골을 고문하는 방법을 모르기에 말도 걸지 않는 것이리라.

- 다그닥! 다그닥!

새하얀 말은 금세 산을 내려갔다.

나는 남자가 든 창대 위에 매달려비참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창대 위에 매달려 흔들리는 처지보다도, 이 남자와 나의 경악스러운 격차에 마음이 괴로웠다.

기스-제-라이에게 미안했다. 칠흑칼날 위에 새겨져 있던 글자들에게 미안했다. 주인을 잘못 만나서, 가진힘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소멸되어 버린 것이다.

근위대의 정수를 잔뜩 흡수해 내심우쭐해졌지만, 산장에서는 수수깡인형처럼 간단히 제압당해 버렸다.

그래도 저번 삶보다 나은 건 있다.

첫 번째.

예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몰랐는데, 지금은 칠흑 단검의 힘덕분이라고는 해도 분명히 유형화된 기운을 인식했다.

두 번째.

이번에는 혼자 잡혔다. 죽어 버려도 뒷일이 개운하다.

첫 만남 때는 레나와 함께였다.

동굴에서 한 달을 버틴 뒤 탈출해보니, 이 남자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서 있었다.

레나가 어떤 험한 꼴을 당했을지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하다.

사냥꾼들에게 한 짓을 보아 곱게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보를 얻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

다음 생에 레나를 만나면.

그녀에게 의존할 게 아니라, 내가많은 걸 알려 주고 싶다.

"미로를 한 번에 돌파한 걸 보니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나 본데 나는 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녀석은 나를 그물 안의 물고기라생각할 거다. 경계가 느슨해질 가능성이 높다. 죽기 전 무언가 중요한 정보를 알아낼 수도 있다.

아무렇게나 질문을 던져 갔다.

하나라도 반응이 있으면 이득이다.

잃을 게 없는 도박.

"언제부터 날 쫓았나?"

"가장 황제를 죽이고 싶어 할 자가 누구라고 생각하나."

"수도에서 여기까진 꽤 거리가 멀텐데. 마법사도 없이 혼자 온 건가."

- 다그닥! 다그닥!

하지만 녀석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말이 없었다.

"혼자 움직이는 걸 보니 끈이 떨어진 모양이군. 어차피 날 죽일 생각 아닌가. 입을 꾹 닫고 있는 걸 보니 날 감당할 자신도 없는 건가?"

나는 기사를 도발했다.

이렇게 끌고 가는 걸 보면 죽일 생각은 아니다.

팔다리뼈가 좀 부서진다고 해도,

뭐라도 알아낼 수 있다면.

- 스록!

기사는 말을 모는 자세 그대로, 철로 된 창대를 움직였다. 들고 있던 철창을 옆구리에 끼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내 머리를 당겨 잡았다.

- 뚜둑!

그는 내 턱뼈를 두개골에서 가볍게 뽑아낸 뒤, 말안장 오른쪽에 달았다.

- 달그락! 달그락!

몸이 말안장 왼쪽에 매달린 채, 나는 안장과 나란히 전방을 주시했다.

턱뼈가 없다.

"이번엔 내가 묻지. 그거, 다시 끼우면 조립되겠지?"

"봐 봐, 너도 대답 안 하잖아."

98화 가면 쓴 축복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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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뀨! 뀨뀨우우뀨!

가을 산새 우는 소리가 명랑하다.

'좋은 생각은 아니었나.'

괜히 말을 걸었던 듯하다.

- 달그락! 달그락!

말안장 곁에 바짝 매달려 산길을 달렸다. 강철처럼 단단한 근육이 내뼈에 닿아 실룩거린다.

말의 허리다. 아주 잘빠졌다.

위에서는 잘 달린다고만 느꼈지만.

오밀조밀 힘줄이 돋아난 근육.

그 압축 밀도는 두려울 정도다.

'곰도 혼자 밟아 죽이겠군.'

별 힘도 들이지 않고 툭툭 땅을 박찼다. 그때마다 몸이 위로, 앞으로싁싁 솟아오른다.

기사의 승마술도 놀랍다. 말에는 고삐도 없다. 안장이 특이하다.

안정성과 랜스 돌격의 위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엉덩이를 잘 감싸고등과 배 부분을 단단히 받치는 통상적인 안장이 아니다.

넓고 평평하다.

말의 척추에 무게를 부드럽게 분산시키는 용도밖에 없는 것 같다.

그 위에서, 기사는 몸을 전혀 흐트러트리지 않고 빠르게 말을 몰았다.

'어디로 가는 거지?'

대화는 불가능하다.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관찰뿐이다.

집중해 앞을 주시했다.

황제 암살 때문에 온 거라면, 나를수도로 압송할 가능성이 높았다.

'마법사들을 마주하게 될까?'

머리에서 기억이 뽑아내어지거나,

영원히 감옥에 갇힐지도 모른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국은 전쟁에서 승리한다.

'그렇다면.,

누군가 나를 구출해 줄 리도 없다.

마왕이 강림하는 9년 뒤까지.

아니, 까딱하면 아무도 모르는 지하에 갇혀서, 의식이 스스로 산산이 무너져 내릴 때까지.

옴짝달싹 못 한 채로, 좁고 작은 마법 새장(스펠홀드) 안에 갇혀 있을지도 모른다.

'그건. 안 돼.'

하지만 죽이지 않는 걸 보아, 사실그런 꼴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나는 끌려가고 있다.

영원히 갇혀서, 의식이 완전히 와해될 때까지 온갖 실험 대상이 되기 위해서 끌려가고 있는 것이다.

뼈에 소름이 끼치고 정신이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잠시 느슨했던 마음에 위기감이 확 다가왔다.

- 다그닥! 다그닥!

하지만.

말은 당장 최악을 향해 달리지는 않았다. 넓은 가도를 향하지 않았다.

산에서 내려와, 붉은 노을 아래 펼쳐진 밀밭으로 달려가고 있다.

아니, 그 너머.

기사는 유블람의 잿빛 성벽을 향해똑바로 말을 몰아가고 있었다.

'무시하고 온 거 아니었나?'

앞을 바라봤다.

경비병들의 감시는 여전하다. 하늘끄트머리가 조금씩 붉게 물든다.

감시조가 막 교대되려는 참.

처음으로 횃불을 든 녀석들이 성문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여섯 명의 경비병이 새로 나오고,

밖에 있던 녀석들이 들어갔다.

육중한 성문이 완전히 닫히는 게멀리서 보였다.

"놓쳤나.

기사는 아쉬운 신음을 홀렸다.

'안으로 들어가려고 한 건가? 이 거리에서?' 성문까지 삼백 미터. 이백 미터.

- 다그닥! 다그닥!

그제야 새로 나온 경비들이 기사를 발견했다.

교대에 정신이 팔린 까닭.

"정지! 정지!"

막 햇불을 들고 나온 경비들이 긴창을 겨누며 외쳤다.

같은 자세. 같은 타이밍. 그럭저럭 훈련된 놈들이다.

"멈추시오!"

- 다그닥! 다그닥!

기사는 움찔하지 않았다.

- 다그닥! 다그닥!

그는 여섯 자루의 창을 향해 똑바로 말을 달렸다. 피하지도 않았고 검을 뽑지도 않았다.

심지어 창벽을 건너뛰지도 않았다.

그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꺼져라."

그 순간.

"히, 히, 히이.!"

"이익, 이이익!"

"으, 으으으.

"엄마.

"꼭! 끄흑!"

낮게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 눈앞의 여섯 경비병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창은 물론 들고 있던 횃불까지 바닥에 멸어뜨렸다. 놈들의 텅 빈 손이 덜덜덜 떨렸다.

- 화특!

몇 명의 바지에 횃불이 엉겨 붙기 시작했다.

- 타닥! 타닥!

허공에 불똥이 튀었다.

"으, 으, 으아아!"

옷이 탔다. 살이 탔다. 하지만 일어날 수 없었다. 다리에 힘이 완전히 풀린 상태였다.

"으아아아??? 으아아아아!! "

놈들은 비명을 질렀다. 성벽 아래해자를 향해 엉금엉금 기어갔다.

- 풍덩!

- 풍덩!

그들은 해자에 몸을 던졌다.

꺼지라는 말 한 마디로 기사는 경비들을 모두 실금시켰다. 바닥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방금 본 능력은 이 남자의 고유한권능일 가능성이 높았다.

동굴 밖에서 기사를 처음 만났다.

그때를 떠올렸다. 기사는 비단옷을 입은 남자에게 자살을 지시했었다.

〈너. 〉

〈예, 마스터! 〉

〈제보가 과장됐잖아. 자살해라. 〉

〈자, 자, 자.! 〉

비단옷은 손을 떨었다. 안쓰러울 정도로 떨면서도 제 품을 뒤졌다.

푸른 갑옷 기사의 명에 따라 실제로 자살하려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농담이다, 영주. 제보자를 자살시킬 수는 없지. 그런다고 다 죽이면 누가 제대로 된 제보를 하겠나. 〉비단옷은 주저앉았다. 몸을 옭아맨 무언가가 탁 풀린 듯한 모습이었다.

그때 비단옷이 보인 모습은, 지금눈앞의 경비들과 꽤나 비슷했다.

-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나는 회상을 끝내고 앞을 바라봤다. 느긋이 말을 몰던 기사는 도개교 앞에서 부드럽게 멈췄다.

- 훌쩍!

기사가 말에서 뛰어내렸다. 나는 안장에 매달린 채 관찰을 계속했다.

벌어지는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커다란 회색 성域이 코앞이다.

기사는 경비들에게 위협을 가했고, 성벽 위에서 빼곡하게 화살이 날아올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기사는 느긋했다. 그는 마치 산책하듯 도개교를 건녔다. 허리의 칼조차 빼 들지 않은 채였다.

- 저벅.

기사는 성문에 다가섰다. 그 순간,

나는 기사가 하려는 일을 깨달았다.

하지만 단어를 실제로 머릿속에서 꺼내는 데는 꽤 시간이 걸렸다. 너무 터무니없는 단어였기 때문이다.

'1인. 공성?'

그가 발을 들었다.

걸어가던 자세 그대로였고, 든 발로 세차게 성문을 걷어찼다.

나는 눈을 의심했다.

- 광!

별다른 준비도 없는 발차기였다.

하지만 그 파장은 경악할 정도였다.

거대한 대포알이 성문을 직격할 때날 만한 소리가 허공을 진동했다.

단단한 금속이 덜 단단한 금속을 쳐서 찢는 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멍하니 앞을 주시했다.

발로 걷어찬 곳이 살짝 패여 있다.

"단단한 편이군."

작은 중얼거림이 들렸다.

기사는 몸을 살짝 낮췄다. 그리고 주먹을 쥐어 뒤로 당겼다. 몸에서 연푸른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 나왔다.

- 파지지직!

기운은 주먹 주위에서 짙어졌다.

건틀랫이 반쯤 투명하게 보였을 때,

주먹이 앞으로 뻗어졌다.

- 콰과광!

훨씬 더 큰 소리가 났다. 땅이 실제로 흔들릴 정도의 폭음이 터졌다.

나는 말을 잃고 앞을 바라봤다.

- 찌꺽! 찌꺽!

성문이 흔들렸다. 남자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문은 눈에 보일만큼 움푹 들어가 있었다.

단 한 번의 주먹질에 문 전체가 안쪽으로 푹 찌그러진 모양새였다.

한 명의 인간이 성域에 가하고 있다기에 는 너무한 만행이었다.

두어 번만 방금 같은 타격을 주면 문이 아예 떨어져 나가거나, 주먹을맞은 곳에 구멍이 뚫릴 것 같았다.

"히히힘."

말이 나를 흘끗거렸다. 말은 놀라지도 않았다. 이 정도는 자주 봤다는 것처럼 살짝 울었다.

나는 가만히 생각했다. 이 기사는 터무니없이 강하다. 어떻게 해 볼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도망쳐야 한다. 성문에 집중하는 지금이야말로 기회일지 모른다.

- 달그락.

몸을 조금 움직여 보았다. 팔다리가 수갑에 완전히 구속된 상태다.

무리를 하면, 체력 최대치 감소에 대한 경고가 다시 뜰 거다.

손목에 주의를 기울였다. 수갑에꽉 죄인 채로 곰곰이 생각했다. 힘으로 끊는 게 불가능하면, 손목뼈를좁게 만들면 되지 않을까?

'좁게.

아래팔뼈와 손을 이어 주는 건 8개의 손목뼈다. 수갑이 빠져나가게 하려면 이 부분을 재구성해야 한다.

가능할지는 모른다. 의식적으로 움직여 본 적은 없는 부분이다.

뼈를 움직여 좁게 만든다.

황당한 생각이었지만, 왠지 할 수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시선은 성문 앞의 기사를 향한 채,

나는 손목뼈 여덟 개를 어떻게든 모아 보려 애썼다.

- 오득. 오드득.

'움직였나?'

손목을 구성하는 건 여덟 뼈들이 조금씩 붙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손목의 축이 되는 뼈. 가동성을 담당하는 뼈들을 움직여 갔다. 조금씩 뼈가 조정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착각일지도 몰랐다.

흘끗 고개를 돌려 보았지만, 겉보기에는 전혀 변하지 않았으니까.

그때.

- 띠링!

효과음과 함께, 반투명한 낯선 메시지들이 허공에 떠올랐다.

[〈뼈의 군주〉의 숙련도가 미세하게 올라갑니다.]

[자신의 뼈에 대한 통제력을 발휘하려 하고 있습니다.]

K뼈의 군주〉에 내재된 부가 기능,

골격변용骨格變容이 가능해집니다.]

[골격 변용骨格變容]

- 자신의 골격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레벨이 올라가면 타자의 골격 변화까지 가능해집니다.

-〈뼈의 군주〉로 인한 보정에 의해, 근육 변화 능력까지 전부 뼈 변환 능력으로 환산됩니다.

- 현재 변용 범위: 부위별 5%

- '골격 변용?' 골격을 변화시킨다. 놀라운 이야기였다.

턱이나 어깨뼈, 골반 같은 부위까지 조금씩 변형할 수 있다는 건가.

얼핏 생각해도 놀라운 능력이다.

활용할 만한 방안 몇 가지가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갔다.

어떤 부분을 작게 만들었다가, 다시 크게 만들 수도 있다. 신분 세탁을 위해 외양을 변경할 수도 있다.

전투에 활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어쨌건.

지금은 탈출이 최우선 과제.

다시 손목뼈에 주의를 집중했다.

'줄어라. 줄어라.' - 우둑! 우두둑!

한계는 금방 찾아왔다.

- 띠링!

[더 이상 줄일 수 없습니다.]

[현재 손목 변용: 5.01%]

[초당 0.1%의 체력이 감소합니다.]

'이 정도로는 부족한데.

손목을 빼내 보려 했다.

- 철컥! 철컥!

역시 무리였다.

"히히힘?"

말이 고개를 돌렸다. 꼼지락거리는 게 신경 쓰인다는 듯한 눈빛이다.

'위협하는 건가.

백금e 金의 명마. 곰도 콱 밟아서죽일 것 같은 녀석이다. 놈의 눈빛은 꽤 살벌했다.

안장에서 우여곡절 끝에 벗어난다고 해도, 수갑에 매인 채라면 녀석에게 잡혀 짓눌릴 거다.

'몰래 숙련도를 쌓아야겠군.'

숙련도를 올리면 스킬 레벨이 올라간다. 지금보다 뼈의 변화 폭이 조금씩 더 커질 거다. 수갑이 지나갈 만큼 손을 좁힐 수도 있다.

일단 탈출을 미뤘다. 기회는 또 있으리라. 계속 시도하면서도 숙련도를 올린다. 스킬 레벨을 올린다. 그리고 한순간의 틈을 노리면 된다!

일단 희망은 발견했으니까.

99화 가면 쓴 축복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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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앞을 다시 바라봤다.

살짝 몸을 풀던 기사는 막 자세를 낮췄다. 다시 한 번 주먹을 뒤로 당기고 있었다. 투명한 기운이 사방에서 푸른 건틀랫에 집중되는 것 같았다.

'저게 기氣라는 건가?'

나는 집중했다. 움직이는 공기의결을 느끼기 위해 노력했다. 어차피 잡혀 있는 거라면, 놈의 능력을 감지하는 데 전념할 생각이었다.

토너먼트에서 기권한 남자가 떠올랐다. 그는 '기氣를 쓰는 수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잘 본다면. 뭔가 도음이 될지도.'

첫 만남을 떠올렸다. 그때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찢어져 죽었다.

하지만 몇 번 조우하며, 반복해서푸른 기사를 관찰한 탓일까.

무언가 느껴졌다.

분명히.

그의 주위에는.

규칙과 순서, 리듬을 갖춘 흐름이춤을 추고 있었다.

아직은 불가해不可解.

'느끼기야 하지만. 이해는 전혀 되지 않는군.'

- 쉬이이이익!

무형의 힘이, 기사의 주먹에 다시 한번 빨려 들어갈 때였다.

"후작 각하!"

성벽 위가 소란스러워졌다. 누군가의 헐떡이는 외침이 아래를 향했다.

기사가 주먹을 멈췄다.

위를 올려다봤다. 나도 그의 시선을 따라 성벽 위를 을려다봤다. 두 명의 남자가 성가퀴에 나란히 서서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칼과 창을 든 무리들이 그 주위로 각각 무리를 이룬다.

'저자는.?'

앞에 선 두 남자. 그중 한 명은 나에게도 익숙한 얼굴이다. 직접 눈앞에서 불태워 죽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부진 체격.

철제 흉갑과 망토.

가학적이고 부리부리한 인상.

'유블람의. 경비대장?'

안절부절못하는 얼굴이었다. 녀석의 인상에 어울리지 않게, 지독히공포에 짓늘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른 한 명은 초면이다. 머리까지 벗겨진 여우 가죽을 목에 두른 채, 풍성한 옷을 걸친 남자였다.

그가 연달아 소리를 치고 있었다.

"후작 각하! 이건. 오해입니다!"

'후작. 각하라고?' 레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외양을 들으면. 바티엔느 폰 레안드로 후작이겠네요. 〉레나는 그렇게 말했다. 푸른 갑옷의 기사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였다.

'정말 그자인가?'

〈. 푸른 사자 기사단 출신 최연소마스터죠. 〉

〈제국 4 검주의 한 명이. 〉

확실히, 그런 외양의 '후작'이 둘이나 있을 리는 없었다.

레나의 추측이 확인됐다.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갔다.

'대단한 녀석에게 당한 거였군.'

푸른 갑옷의 기사. 제국 4 검주의일익은 성벽 위를 흘끗 바라봤다.

아무 대꾸도 없었다.

그가 한 발을 뒤로 디뎠다.

주위의 바람이 그의 발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뚱뚱한 남자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저, 정말 오해입니다! 폐하의 인장이 어, 어떻게 여기 왔는지는 저희도 전혀 모릅니다!"

후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뒤로 디딘 발이 다시 한 번 땅에서 튕겨졌다. 땅이 움푹 파이며, 단단한 바닥이 깨져서 뒤로 흩날렸다.

- 콰과광!

- 쩌엉!

거대한 굉음이 울렸다.

성벽 위에 선 자들의 비명 소리도 묻혀 버렸다.

나는 성문을 바라봤다. 발에 맞은 부위는 이미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져있었다. 안이 들여다보일 정도의 크기로 구멍이 뻥 뚫렸다.

두꺼운 쇠창살이 보였다. 그 안쪽에는 다시 한 겹의 문이 있었다.

하지만 가장 두꺼운 건 지금 부서지고 있는 바깥쪽의 문. 주먹질 몇 번에 성域이 뚫리고 있었다.

성벽 위의 남자들은 패닉에 빠져버린 것 같았다.

"후작 각하! 이놈이 멋대로 받은 겁니다! 이놈입니다!"

"뭐야? 영주! 뭐 하는 거지?"

대머리 경비대장이 당황했다. 영주 곁에 있는 남자들이 칼을 빼 들었다. 그에 맞서 경비대장 근처에 있는 남자들도 엉겁결에 칼을 들었다.

영주가 소리쳤다.

"놈이 여행자들을 노예로 잡아 팔아먹었습니다! 이놈은 네크론 신사회의 주구입니다! 인장도 놈이 받았습니다. 제가 이놈을 처벌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레안드로 후작이 고개를 갸웃했다.

- 저벅.

후작은 한 발 물러났다. 찢어 가던 성문을 잠시 방치하고, 노을 아래의두 남자를 바라봤다. 팔짱을 낀 채가만히 그들을 응시했다.

영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영주는 말 없는 후작의 시선이, 하늘에서 내린 동아줄이라도 된 것처럼 붙잡고 열성으로 상대를 고발했다.

"이놈이 성 주변에 던전을 운용했습니다! 거미를 기르며 인간을 먹이로 던져 줬습니다!"

경비 대장도 지지 않고 맞섰다. 그는 대머리가 발갛게 달아오를 정도로 화를 냈다.

"이 새끼가, 제정신이냐! 다 네가 시킨 짓 아니야! 년 성 안에서 마약을 재배했잖아! 후작님! 주민들을 전부 마약에 중독 시킨 게 바로 이놈입니다!"

문득 이해하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동업자 아니었나.'

위기 앞에서는 황당할 정도로 쉽게 무너지는 동업인 모양이었다. 아니면 저 '후작'이 너무 심한 위기라거나.

재해로 취급당하는 후작은 한 발자국 앞으로 갔다.

지겹다는 태도였다.

그는 작은 구멍에 건틀렛 손가락하나를 쑥 집어넣었다.

- 끼, 끼이이익!

소름 끼치는 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성문이 옆으로 막 찢어져 가는 순간이었다.

"잡아서 바치겠습니다! 모두 쳐라!

제국법을 어긴 반역자를 체포해라!"

영주가 주위의 경비에게 외쳤다.

주먹으로 성을 부수는 남자 앞에서 공포로 머리가 돌아 버린 것이다.

후작은 걸음을 멈췄다. 성벽 위의 놈들이 둘로 갈라져 혈전을 벌였다.

숫자는 영주파가 더 많았다. 하지만 경비대장의 활약이 대단했다. 그는 옛 부하들의 가슴팍에 무참히 칼을 꽂아 넣으며, 숨겨 둔 손망치로영주의 안면을 퍽 으깨 버렸다.

그리고 황제의 인장을 영주의 손가락에 억지로 끼운 뒤, 그 시체를 아래로 던졌다.

"나, 나를 쫓지 마시오! 난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오! 정말.!"

애처로운 목소리였다. 성벽 위에서순식간에 열 명을 죽인 남자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였다.

- 철퍽!

영주가 죽은 채 떨어졌다. 기사는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시체의 손가락을 잘랐다. 인장을 가져갔다. 사무적인 태도였다. 그는 다시 성문에 다가갔다.

손을 구멍에 넣었다. 찢어진 부위를 잡고 좌우로 벌렸다.

- 끼이이이익!

성문이 확 찢어졌다.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구멍이 났다.

"히, 히이이익!"

내려다본 경비대장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작은 난리가 일어났다. 서있던 녀석이 성벽 안으로 내려갔다.

도망가는 것 같았다.

- 히히히잉!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성벽 안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연달았다.

'내했군.'

안장에 매달려 생각했다. 유블람에금괴와 인장을 던진 건 나다.

경비대장에게 넘기게 했다. 놈은날 무덤에서 일으켜 준, 루비아를죽인 원흉이다.

두 번 산 채로 구워 주었지만 당연히 미진한 감이 있다.

제대로 사건을 조사한 뒤, 그 뿌리까지 확실히 뽑아내지도 못했고.

'영주도 관련이 있겠지.'

이번에는 처리할 여건이 안 됐다.

도망 중이었다. 슬쩍 미끼만 뿌렸다.

나대신, 정체불명의 '추적자'에게 당해 보라는 마음이었다. 솔직히 기대는 안 했다.

하지만.

'이거. 너무 계획대로인데.'

추적자는, 놈들에게 굉장한 관심을 가져 버린 것 같다.

영주는 얼굴이 으깨져 성벽 아래로멸어졌고, 경비대장은 말을 몰아 도망갔다.

'으음.,

시시했다. 그들이 순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시시하게 느껴졌다. 후작의 뒤편에서 바라보아서 그런 걸까?

마약에 중독된 도시.

유블람의 영주 정도 되면, 탐욕과음모로 뭉쳐진 거악巨惡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토록 시시한 악인이었다.

복잡한 감정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처음에는 고소했지만 곧 허무했고,

조금 씁쓸했다.

앞으로도 회귀回歸가 계속된다면 놈들을 계속 죽여주어야 할 텐데, 벌써 그 민낯과 바닥을 보았다.

'고문하거나 살해해도. 별 감흥은 없겠군.'

후작을 바라봤다. 그는 내 앞에서'감흥 없음'을 논하지 말라는 둣 사무적으로 성문을 쫙쫙 찢었다. 그리고 그 안으로 발을 디뎠다.

- 드르르록.!

때맞춰 철창이 올라갔다. 이중으로된 두꺼운 창이 차례로 올라갔다.

망가진 바깥 성문도 삐걱거리며 힘겹게 열리기 시작했다.

때려서 바깥 성문을 부수고, 걸어들어가자 철창이 올라간다. 무슨 환각을 보고 있나 싶었을 때였다. 안쪽 성문이 양옆으로 활짝 열렸다.

주위에 엎드려서 뭔가 중얼거리는영지민들의 모습이 보였다.

후작은 주위를 둘러봤다. 휘파람을 불었다. 말은 나를 매달고, 거만한자세로 성문을 지나기 시작했다.

'이번엔. 별로 좋은 상태로 들어오지는 않는군.'

유블람은 두 번째였다. 주위를 둘러봤다. 성문을 연 영지 민들은 양옆으로 엎드렸다.

멀리 도망가는 경비대장이 보였다.

후작은 훌쩍 뛰어 말에 올라탔다.

나를 매달았던 창을 다시 들었다.

- 다그닥! 다그닥!

말이 도로를 달려갔다. 성문 바로 앞은 양옆으로 넓었다. 안쪽으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는 구조였다.

커다란 우물을 지났다. 말 두 필이나 지날 만한 좁은 도로가 나왔다.

북쪽으로 달렸다. 길은 다시 네 갈래로 갈라졌지만 혼동은 없었다.

도망가는 경비대장이 멀리 북문을 지나는 게 보였다. 점 몇 개로 보였던 거리가 빠르게 좁혀지고 있었다.

- 휘이잉!

세찬 바람이 두개골을 마구 흔들고지나갔다. 따라잡는 건 금방이었다.

경비대장이 말을 달리며 소리쳤다.

"나는 아무것도 몰라!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고!"

- 다그닥! 다그닥!

누런 평야 위를 여섯 마리의 말이 달렸다. 따라가는 경비대장을 따라가는 네 명은 하나같이 그의 심복인 모양이었다. 성에 남아 있기에는 집찝한 게 너무 많은 부류인 것이다.

이대로라면 잡힐 거라고 생각한듯, 경비대장이 크게 외쳤다.

"흩어져라!"

뒤쪽의 두 명이 각각 왼쪽과 오른쪽으로 흩어졌다. 후작은 나를 매달아 놓던 긴 철창을 들었다.

처음에는 창이라기보다 좀 이상한막대라고 생각한 무기였다. 창날이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후작이 철창의 어딘가를 누르고 왼쪽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 끼익. 끼이익.

철로 된 창대가 순식간에 길어지기 시작했다. 근위대 기사들의 랜스보다 훨씬 길었다.

2미터가 안 되던 막대가, 순식간에6미터에 가깝게 늘어났다.

? 쌩!

가장 뒤에 있는 녀석을 향해 후작이 강하게 창을 휘둘렀다. 그 긴 창을 휘두르면서도 말 위에서 아무런 반동도 없었다. 허리 힘 하나만으로 간단히 감당한 것이다.

막 좌우로 흩어지던 두 놈이 철창에 맞아 피를 뿌리며 말 아래로 떨어졌다. 그들은 황야 위에서 벌레처럼 꿈틀대다 몸이 축 늘어졌다.

나는 후작이 창을 휘두르는 모습을 자세히 관찰했다.

- 다그닥! 다그닥!

"히야 아압!"

앞에 가던 세 놈 중 하나는 포기하듯 후작을 향해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방금 거하게 약을 했는지, 눈동자가 하얗게 풀어져 있었다.

- 서격!

아직 완전히 솟아나지 않은 창날이 그의 목을 반으로 잘라 버렸다. 시체는 울컥울컥 피를 하늘로 뿌리며 잠시 말 위를 달렸다.

하늘은 이미 노을로 붉었고, 더 이상의 물감은 필요 없었다. 말은 곧주인을 떨어트렸다. 누런 황야가 붉게 물들었다.

- 끼익. 끼이익.

창날이 길어져 있었다. 기괴하게도,

날 끝이 가느다랗게 다섯 개로 분화되어 있었다.

'혼자 움직인 건가?'

후작이 뭘 건드린 것 같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솟아오른 듯했다.

"징징거리긴."

- 서걱!

후작은 창을 내질렀다. 경비대장곁에 있는 녀석의 심장을 찔렀다.

그 순간 다섯 개의 날이 사방으로 벌어졌다.

- 아작! 아그작!

이해할 수 없는 소리가 났다. 등이 꿰뚫린 남자는 말 위에서 몸을 벌레처럼 버둥거렸다.

비명도 못 내지르고 발작하듯 몸을 꼬았다. 짧은 시간에 지독한 고통을 겪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눈과 가슴, 하체 부분에서긴 창날이 솟아나며 사망했다.

'저런 게. 가능한가?'

- 차록! 차르록!

늘어진 창날이 새빨갛게 물든 채,

다시 창대 안으로 회수됐다.

빠르게 시체를 지났다. 얼굴이 보였는데, 나도 아는 녀석이었다. 경비대장에게 엉망으로 얻어터진 채로수레를 끌던 놈이었다.

〈기껏 잡아 놓은 걸, 입에 쑤셔 넣겠다고 재갈을 풀어서 자살을 하게 만들어? 이 새끼는 진짜 생각할수록 어처구니가 없다니까. 〉

'그자인가.'

"으아! 으아! 으아아아!"

경비대장은 지독한 공포심에 사로잡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혼자기 괴한 소리를 내지르며 앞만 보고달리고 있었다.

- 다그닥! 다그닥!

후작은 잠시 그와 나란히 말을 달렸다. 20초 정도였다. 경비대장이지나치게 박차를 가한 나머지, 그의말은 입에서 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 툭.

후작은 가볍게 대머리의 뒤통수를 쳤다. 기절한 그를 말 뒤에 실었다.

어디 한 군데라도 안 다치게 곱게 데려가는 모습에 잠시 의아했지만, 곧 그의 운명을 동정했다.

후작은 성에 돌아왔다. 주민들은 성문을 활짝 열어 두었다. 성문 양옆에 두 줄로 나란히 서서 머리를 아래로 조아리고 있었다.

그들은 오들오들 떨면서도 흘끗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아까처럼 후작에게서 살기가 뿜어지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 같았다.

그 기운이 뿜어진다면 심장이 약한 노약자들은 이 자리에서 숨이 끊어질지도 모른다.

후작은 주민들을 훑었다. 그리고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흰 수염의 노인을 지목했다.

"너."

"예, 나으리."

"제국 대상조(大上造) 겸 관 내후(關內候) 바티엔느 폰 레안드로다.

집무실로 안내해라."

'저렇게 긴 말도 할 줄 아는 놈이었나?' 나는 두 번 놀랐다. 첫 번째는 의외로 상식적인 놈의 언행이었다.

두 번째로, 그가 지목한 게 내가아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라스미어의 불을 줬던 노인이었다.

노인은 앞장섰다. 후작을 영주의성으로 안내했다. 인적이 뜸해졌을 때 즈음, 후작이 낮게 말했다.

"너만 아편이 중독 되지 않았더군.

설명해 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