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9

100화 가면 쓴 축복 (13)

***************************************************

노인은 입을 열었다.

"저는 대장장이입니다."

"아편에 취한 채로는. 작업 못 한다고 우겼습니다. 덕분에 살았지요."

이야기가 이어졌다. 후작은 적당히 납득했다. 비중독자라는 건 알아봤지만 큰 관심은 없는 듯했다.

노인이 영주의 내성으로 안내를 계속했다. 내성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허겁지겁 나온 문관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들어가기 전.

사방이 탁 트인 곳에서, 후작이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함정이라도 느낀 건가?'

그가 안장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주위에 선 인간들이 움찔했다.

- 부스럭.

하지만.

폭력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온 건 무기가 아니었다.

'신호탄?'

길쭉한 끈이 달린 폭죽.

후작이 끝에 달린 끈을 살짝 잡아당겼다.

- 화르록!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심지가 빠르게 탔다.

- 피이이이잉!

폭죽이 하늘 위로 빠르게 솟았다.

- 퍼버벙! 퍼버벙!

어둑어둑해지는 저녁 하늘에 푸른 장막이 퍼져 나갔다.

'이건.,

비슷한 걸 본 적 있었다.

T&T의 이너 서클에 포위당했을 때, 레나가 쓴 폭죽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누굴 부르는 건가.'

무표정하게 폭죽을 쓴 후작은 곧안으로 들어갔다.

내성은 화려했다.

경비대장과 싸우다가, 손 망치에 얼굴에 으깨져 죽은 영주의 시체가 떠올랐다.

[회계 Lv. 1이 작동합니다!]

근위 기사에게 흡수했던 스킬이 발동되기 시작했다.

눈앞의 풍경은, 정상적인 세수로 얻을 수 있는 건 결코 아니었다.

'엄청나게 벗겨 먹었군.'

루비아 같은 여행자를 판돈도 이런 장식에 사용됐을 거다. 뼈마디로 차가운 분노가 치솟았다.

주위의 인간들을 돌아봤다.

굽신거리며 문을 연 남자들은 덜덜 떨고 있었다.

'행정관들이군.'

모두 적극 공조하거나 방조한 이들이다.

Lv. 1의 회계 스킬로도 한눈에 알아볼 정도다. 저들은 훨씬 더 빠삭할게 분명하다.

'경황이 없어서 도망도 못 갔나.'

부역하며 지은 죄가 만만치 않은 자들이겠지.

후작은 손가락도 까딱하지 않았다.

경비병들에게 했던 것처럼 살기를 뿜어내지도 않았다.

하지만 내성 안에서 마음대로 움직이는 인간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가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내성은 짙은 물안개가 들어찬 것처럼 백백했다.

실제로 무형의 기운이 행정관들을 향해 퍼지는 게 느껴졌다.

"으. 으어.!"

- 쿵.

기운이 퍼진 지 십여 초도 되지 않아서, 한 명의 남자가 앞으로 떨어져 졸도했다.

후작은 그게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기운을 멈췄다.

행정관들은 졸도한 동료에 신경도못 쓰고 있었다.

고문 하나 당하지 않았는데도 온몸에 땀이 범벅되어 있었다.

후작이 기운을 갈무리하는 게 희미하게나마 느껴졌다.

기의 출납에 신경을 집중했다.

'이런 식으로 활용할 수도 있는 건가.

행정관들은 후작이 몇 초만 더 옥죄었으면 선 채로 심장이 및어 버렸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서류."

후작이 낮게 말했다.

"예! 예!"

"전부 다."

"알겠습니다!"

굳어 있던 남자들은 제발 살려만 달라는 둣 차곡차곡 문건을 정리해서 바치기 시작했다.

물안개처럼 백백한 기운에 숨 한번 못 들이키던 남자들이, 그제야후들거리면서 네 발로 기어서 서재로 향하고 있었다.

놈들이 두 발로 서는 데는 무려 십분이 넘게 걸렸다.

"영주의 장부입니다!"

"마약 재배 일지입니다!"

"인신매매 기록입니다!"

후작은 빠르게 서류를 훌었다.

슥슥 넘기며 적당히 목차만 보는것 같았다.

"사업을 많이 했군. 황제의 인장이 있으면 좋기야 하겠지만.

후작은 행정관들을 쭉 둘러보고 말을 이었다.

"빠진 고리가 너무 많은데.

남자들은 덜덜 떨었다.

빠진 고리라는 게 뭔지 감도 못 잡고 있는 듯했다.

'알 리가 없지.' 유블람의 행정관들이.

황제 암살에 대해 알 리가 없다.

내가 경비대장에게 황제의 인장을 떠넘긴 것도, 고작해야 한 시간 전에 벌어진 일.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다.

녀석들이 보기엔 어떨까.

천벌이 내렸다고 생각할 거다.

유블람의 온갖 악행에 대한 벌로,

황실에서 눈앞의 이 남자를 보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후작이 말했다.

"얘기해 봐."

그래서겠지.

행정관들은 영주와 경비대장이 저질러 왔던 악행을 낱낱이 보고하기 시작했다.

후작이 그걸 원하는 것처럼.

뭘 숨겨야 할지, 뭘 말해야 할지머리를 굴릴 여유는 없어 보였다.

"아편 재배 동굴은 이곳입니다! 여기를 온실로 만들어서 활용하고 있습니다."

행정관 하나가 손가락을 뻗었다.

지도 위의 한 지점을 손으로 가리켰다.

보안상의 이유인지.

지도에는 어떤 표시도 없었다.

녀석이 침을 꿀꺽 삼키고, 설명을추가했다.

"냇가를 건너서 수풀로 3km 지나가면 됩니다! 동굴 입구는 수풀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다른 녀석이 거들었다.

"일부러 잡풀을 더 심어서, 유독우거진 지역입니다. 지키는 경비는세 명입니다."

이야기가 술술 홀러나왔다.

후작은 흘껏 지도를 바라봤다. 나도 그 위치를 바라봤다. 영주의 의자에 놓인 덕분에 위에서 잘 내려다보였다.

'기억해 두자.'

언젠가 써먹을 만한 정보다. 지금이 아니면 알기도 쉽지 않다. 신경 써 둬서 나쁠 건 없다.

"태우실 생각이라면, 이쪽에 불을 놓으면 안쪽으로 활활 잘 타들어 갈 겁니다!"

다른 행정관들도 질세라 거들었다.

지도의 다른 곳을 가리키며 정보를 마구 털어놓았다.

"이곳에는 경비대장이 은괴를 묻어놓았습니다. 제가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압니다."

"여기도 있습니다!"

보물을 매설한 지점 세 군데가 밝혀졌다. 행정관끼리도 서로 모르고 있던 위치였다.

"성 지하에 특수한 방이 있습니다. 아편에 중독된 자들에게 약을 끊어 놓고, 금단 증상에 발작하는 자들을 철창에 가둔 채 구경하는 방입니다."

음침한 인상의 행정관이 말했다.

피로한 듯 눈 밑이 검게 푹 꺼진 남자였다.

여기저기서 침을 꿀꺽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대부분 몰랐던 듯했다.

마지막으로.

가장 젊은 행정관이 끼어들었다.

지도 한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는. 거미굴입니다. 반항하는자들은, 여기에 끌고 가 산 채로 먹히게 합니다."

그 정보는 모두가 아는 둣, 다들 고개를 비슷하게 끄덕였다.

하지만 다음으로 나온 말에 모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며칠 전 제 아비도 끌려갔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굴 안으로 들어가 보았지요. 유해라도 수습하고 싶어서.

미친 사람을 보는 시선들이 젊은 행정관에게 쏟아졌다.

어떻게 멀쩡히 돌아왔냐고 중얼거리는 자도 있었다.

젊은 행정관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곳에 거미는 한 마리도 없었습니다. 모두 새까맣게 타서 죽어 있었습니다."

"그런 일이.!"

주위가 크게 웅성거렸다.

머릿속에 누군가의 얼굴이 번뜩이며 지나갔다.

'레나다.'

"타서 죽어 있었다.

후작이 작게 중얼거렸다.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 툭.

그가 경비대장의 재갈을 풀었다.

"끄, 끼히, 끽, 히, 끄흑!"

기괴한 딸꾹질 소리가 피와 침, 부러진 이에 섞여 튀어나왔다.

이미 데려오며 신경에 기를 침투시켰는지, 경비대장은 온몸을 오들오들 떨며 피땀을 비 오듯 홀리고 있었다.

"사실인가?"

후작이 물었다.

경비대장이 발작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항하는 자들을 정리하고, 거미를잡으러 갔지만 누군가 이미 다 태워버렸다는 이야기였다.

그때.

- 저벅.

대장장이 노인이 한 발자국 앞으로나 섰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집에 뿌리기만 해도 불이 붙는 액체 병기가 있었습니다만.

후작이 약간의 관심을 보였다.

"〈그라스미어의 불〉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네가 만든 건가?"

"예, 각하."

"제법이군. 장인이 평생 한 병을 만들기 쉽지 않다던데."

"운이 좋았습니다. 하나 가진 것을 꽁꽁 숨겨 놓았지요. 한데, 며칠 전 그것을 도난당했습니다."

"도난당했다.?"

"예. 범인이 누군지는 모릅니다. 짐작 가는 자도 없어 불안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속으로 중얼거 렸다.

'확실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레나가 다녀갔다. 그녀 외에 다른 인간일 수가 없다. 슬쩍 성 안으로들어와서, 그라스미어의 불을 홈친게 분명하다.

나는 그녀에게 노인의 집 위치와,

〈그라스미어의 불〉이 숨겨진 장소를 정확히 알려 줬다.

'정보를. 제대로 활용했구나.'

레나 혼자 거미 던전 공략에 성공한 것이다.

'해냈어.'

붙잡힌 내 처지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첫 단추는 잘 꿰었다.

레나는 더 잘될 거다. 거미굴을 공략하는 동안 내 정보가 정확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준 정보를 기반으로, 세상을향해 빠르게 치고 나갈 수 있다.

폭력과 욕망뿐인 이 세계에서.

그녀가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했다.

조금 안심이 되려는 순간.

"으음.

후작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긴장감이 몸이 사로잡았다. 최악의 시나리오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쫓아가는 건 아니겠지?' 후작이 쫓는다면.

레나가 아무리 성장했다고 해도 도망갈 수 없다.

반드시 붙잡힌다.

눈앞의 남자는, 내가 3년에 걸쳐 익힌 미로를 단번에 주파한 자다.

상상할 수 없는 추적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전투력은 말할 것도 없다.

'막아야 해.'

나나 대머리 경비대장이 당한 꼴을 생각했다. 그런 걸 레나가 당하는건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이번에는 정말, 그녀의 삶에 절대방해가 되고 싶지 않았다.

도와주고 싶었다.

- 달그락!

몸을 움직여 관심을 끌려 했다. 후작은 나를 뭐 어쩌라는 거냐는 눈빛으로 흘끗 바라봤다.

'거미굴에 관심 꺼. 제발 꺼 달란 말이다.'

그때 였다.

- 끼이익.

내성의 문이 활짝 열렸다.

후작과 비슷한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당당히 들어오고 있었다.

발걸음은 깃털처럼 사뿐했다.

강철로 된 풀 플레이트가 아니라 가벼운 천이라도 걸친 것 같았다.

숫자는 고작 일곱.

하지만 들어서는 순간 내성 전체가 다시 한 번 장악되는 듯했다.

그들은 후작의 열 걸음 앞에서 정확히 걸음을 멈췄다.

- 철컥.

그리고 일곱 명이 동시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주먹을 가슴에 댔다.

"푸른 사자 기사단 7인, 마스터를뵙습니다."

"??? 너무 빠른데?"

"주둔지는 더벤카트입니다만, 우연히 주위를 순찰하고 있었습니다. 부름에 처음으로 응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좋다. 관작官爲 있나?"

"기사 메렉 아벤빅. 10등급 좌서장左麻長의 작위를 갖고 있습니다."

처음에 대표로 말했던 기사가 손을 들었다.

[제국 예법 Lv. 1이 발동합니다!]

관작官爲은 제국 20품계의 9급 이상을 일컫는다.

시골 영주 위位를 수행하기에 전혀 부족함 없는 신분이다.

후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좋다. 좌서장左麻長, 메렉 아벤벅.

그대에게 유블람을 맡긴다. 치안 공백을 처리하고,"

후작이 행정관들을 흘끗 돌아봤다.

"저들을 조사한 뒤, 죄질에 따라 형을 집행해라."

행정관들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입술을 덜덜덜 떨면서 주저앉는 녀석도 있었다.

"마스터의 명을 받듭니다."

"업무 협조에 따른 감형은 그대의 재량에 맡긴다."

"존명."

완전히 죽어 가던 행정관들의 낯빛에 한 가닥 희망이 비쳤다.

후작이 지도로 눈을 돌렸다.

"아편굴과 거미굴은.

'제발.,

온몸에 긴장감이 감돌았을 때.

"역시, 좌서장左麻長 메렉에게 위임한다."

'후우.' 딱딱하게 굳었던 뼈마디가 천천히 풀어졌다. 당장 이 괴물이 레나를 쫓는 일은 없으리라.

후작이 음침한 얼굴의 행정관을 바라봤다.

"성 지하에 감옥이 있다고 했나?"

"그렇습니다."

"안내해라."

- 저벅.

후작은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나를 곁에서 떼어 놓을 수 없다는둣 들고 내려왔다.

어두운 통로는 피와 소독약 냄새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 위에 목쉰 절규들이 요란히 칠해졌다.

눈을 바치고 심장을 바칠 테니 제발 아편 한 모금만 필 수 있게 해달라는 외침들이 절절히 울렸다.

후작은 감흥 없는 눈빛으로 지하 감옥을 한차례 훌었다.

그리고 툭, 하고 경비대장의 머리에 손을 댔다.

파직거리는 기운이 경비대장의 대머리로 스며들었다.

신경을 긁어내는 기운이었다.

경비대장이 몸을 발작적으로 파닥거렸다. 재갈은 풀린 채였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지만, 대머리는죄를 끝없이 자백했다.

제발 죽고 싶다고 빌었다.

목표는 그것뿐일 정도로 괴로운 것같았다.

고통으로 이빨이 다 빠져 발음을제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후작과 그의 대화 패턴은 대략다음과 같았다.

"완전히 맛이 간 것들은 아편굴에 처박아서.

"다음."

"팔다리를 자른 채"다음."

후작은 답변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행정관들에게 들은 사실은 다음,

다음이라고 말하면서 계속 넘겼다.

하지만 새로운 건 정말 드물었다.

나오는 것마저도 후작이 원하는 게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저 경비대장 녀석은, 황제 암살과 아무 상관도 없으니까.

자초지종을 아는 건.

오로지 나 하나뿐.

궁금하면.

'턱이나 다시 끼워주든가.'

상악골 아래가 허전했다.

아래턱뼈를 후작이 뚝 떼어 간 터라, 이를 딱딱 부딪칠 수도 없다.

물론.

끼워 준다고 해서, 자세한 사정을 알려 줄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이 녀석에게서 도망가는 게 확실할 때에나 말해 줄 생각이다.

"다음. 다음."

후작은 그 말만 계속했다.

그는 엉뚱한 이야기나 실컷 들어야했다.

대머리 경비대장은 자기가 어렸을 적 괴롭힌 아이, 어렸을 적 강간한 경험까지도 전부 탈탈 털어놓았다.

몸에서 그가 털어놓은 비밀만큼이나 많은 피가 흘렀다.

무기로 낸 상처는 없었다.

전부 순수한 고통으로 인해, 그의눈과 귀에서 피가 터져 줄줄 흐르고 있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났다.

"하."

후작은 짧지만 깊게 한숨을 쉬었다. 들을 만한 게 더 없다고 판단한듯했다.

감옥 철창 안에서, 금단 증상에 몸부림치는 이들의 비명 소리와 경비대장의 꺽꺽거리는 소리가 계속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후작은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경비대장에게 물었다. 마지막 질문이었다.

"정말 재 몰라?"

"끽, 히힉, 모, 모홉니다!"

'그래. 알 리가 없거든.' 후작은 진심으로 짜중 난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더 이상 경비대장을 고문하지 않았다. 곁에 선행정관에게 명령했다.

"아편 한 덩이 들고 와."

"여, 여기 있습니다!"

행정관은 구석에 있는 상자를 열었다. 검게 뭉친 아편 한 덩어리가 있었다.

후작은 덜덜 떠는 경비대장의 입에 아편 덩어리를 통째로 퍽, 하고 처넣었다.

걸리적거리는 이빨도 없었다.

치사량의 아편 덩어리를 삼킨 경비대장이 코에서까지 피를 뿜으며 괴로워했다.

"삼십 분 정도 살겠군."

후작은 경비대장의 남은 수명을 판단했다.

그리고 손으로 아편 중독자들이 갇힌 쇠창살을 제꼈다.

- 끽! 끽!

명색이 쇠창살이지만, 반항도 못하고 찰흙처럼 옆으로 허물어졌다.

후작은 벌어진 창살 틈으로, 대머리경비대장을 던져 넣었다.

"히, 히이이?"

중독자들은 모두 눈이 뒤집혀 달려들었다.

경비대장의 목으로 넘어간, 뱃속으로 넘어간 아편 덩어리를 어떻게 해서든 한 조각이라도 가지겠다는 둣뱃가죽을 찢고 내장을 파헤치고 있었다.

"끄, 끄힉, 흐이, 이익! 히이아악!"

감옥 ^■은.

꺼져 가는 모닥불에 잘 타는 활성탄을 던져 넣은 듯한 모습이었다.

불티 대신 피와 내장이 튀어 올랐다.

행정관은 덜덜 떨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후작은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밖으로 나갔다.

나는 경비대장의 명복을 빌지는 않았다.

후작에게서 탈출할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차서, 그렇게까지 여유롭지는 않았다. 성 안 지하 감옥에서 수십 명에게 감시당하고 있는 편이, 후작의 손에 들려 가는 것보다 백배는 나을 것같았다.

하지만 후작은 나를 안장 앞에 엎어 놓고 말을 몰았다.

- 다그닥! 다그닥!

'??? 나한테서 뭘 얻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영 희망이 없었다. 할 수 있는 게없었다. 수갑이 없어도 놈에게서 도망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멍하니 경치나 바라봤다.

평범한 남부의 가을 풍경이었다.

레나와 함께 걸을 때는 최고의 계절이라고 생각했다.

신선한 공기가 온몸을 훌고 간다.

이파리들이 가장 다채로운 색을 뽐내는 계절이다.

하지만 후작의 말안장에 엎어져 가니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모든 게최악으로 느껴졌다.

'볼 맛도 안 나는군.'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 차드드득! 차드득!

길게 고개를 빼서 엎드린 귓가로,

날카로운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황동색 풍뎅이였다.

'참 잘 날아다니네.'

어디서 날아온 건지는 몰라도, 자유톱게 가을 하늘을 비행하는 녀석이 진심으로 부러웠다.

물론 녀석도 천적이 있다.

땅에 있을 때, 다람쥐나 족제비 같은 녀석들에게 몸이 뜯겨서 간단히 잡아먹힐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누구의 방해도 없이 맑은 공기를 가르며 마음껏 날아다니는 것이다.

'적어도,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고 묶여 있는 일은 없겠지.'

부러운 마음으로 녀석을 흘끗거렸다. 황동색 풍뎅이는 주위를 살짝 맴돌더니 곧 멀리 사라져 갔다.

후작은 가도 근처 작은 마을에 들렸다. 여물을 먹이고 말을 편히 쉬게 했다.

방에 들어가 갑옷을 벗었다. 단정한 흑색 무복이 드러났다. 재질과자수가 몹시 고급스러워 보였다.

그는 몸을 씻은 뒤, 앉아서 무언가를 수련하는 것 같았다.

- 휘우우우우!

'웬 바람이지?'

사방이 막힌 방에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도, 바람이 일어나는 듯 그의 무복이 펄럭이다 내려앉고, 다시 펄럭이다 내려앉곤 했다.

'자는지 안 자는지 모르겠군.'

그를 가만히 관찰했다.

제국 4대 검주라 불리는 인간의 일상이다. 무언가 얻어 배울 만한 게있을지도 모른다.

'집중해 보자!'

하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가만히 앉아 있는 걸 보고 뭔가 얻어 간다는 건 무리.

옆에서 그를 지켜본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으니까.

재능 레벨을 올리거나.

오랫동안 지켜본다면 뭔가 깨닫게 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군.

밤이 깊었다. 멀리서 작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 우꾸꾸. 우꾸꾸꾸.

후작을 관찰해 봐이^ 지금은 소득이 없다. 자연스럽게 울음소리에 관심이 쏠렸다.

얼핏 인간 아이 울음소리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나는 이게 무슨 소리인지 알고 있었다.

'여우 울음소리네.'

산에서 오래 생활한 터라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 우꾸꾸꾸꾸. 우꾸꾸꾸꾸우.

여우가 계속 울었다.

'뭘 하길래 저렇게 우는 걸까?'

문득 여우가 사람이 되는 옛날이야기가 생각났다.

서큐버스님이 나를 무릎에 눕혀 놓고 읽어 주었던 이야기였다.

'여우가 사람이 될 필요가 없는.

그런 세상은 올 수 없을까?'

책을 다 읽어 준 뒤, 그녀가 덧붙인 이야기가 떠올랐다.

- 우꾸꾸꾸. 우꾸꾸꾸꾸우.!

여우 우는 소리와 함께 또 하룻밤이 지나갔다. 울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서큐버스님이 생각났다.

후작은 새벽에 출발했다.

바람이 뺨을 뚫고 지나갔다. 아래턱뼈가 분리된 터라 두개골로 더욱 휑하게 바람이 불어왔다.

모래 먼지가 두개골 안쪽을 투둑,

치고 지나갔다.

- 차드드! 차드드득!

이번 길에서도 풍뎅이가 날아왔다.

아까와 같은 황동색 녀석이었다.

'풍뎅이가 많이 사는 지역인가?'

녀석은 쇄골에 앉았다가, 날갯짓을해서 두개골에 앉았다.

- 달그락!

반사적으로 두개골을 흔들었다.

귀찮다는 듯 털어 내는 몸짓을 후작이 흘끗 보다가, 말없이 다시 말을 몰아갔다.

- 차? 드드드드!

풍뎅이는 작은 소리를 내며 몸 근처를 날아다녔다.

여기 앉고 저기 앉았다.

녀석을 두 번 보자 무언가 갸웃한 점이 느껴졌다.

- 차드드! 차드드드득!

'소리가. 특이한걸.'

아주 조그마한 칼날들이 계속 철컥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쓸데없는 생각이다.

칼날 날개를 가진 풍뎅이 따위가 있을 리 없다.

엄지손가락만 한 녀석은 사실 꽤 귀엽다. 예쁘고 정교한 생물체였다.

하지만 좀 걱정되기도 했다.

'너무 함부로 다가온 거 아닌가?'

위험에 대한 자각이 부족한 것 같았다. 달리는 말 같은 큰 생명체에게 함부로 다가오고, 내 근처에서 친근한 척 날아다니다니.

녀석이 내 근처를 맴도는 감각이 간지러웠다.

'귀찮기도 하고.

몸을 흔들면 쫓을 수는 있을 거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

녀석이 놀도록 방관했다.

묶여서 아무것도 못 하는 처지다.

이런 작은 녀석에게나 까다롭게 굴려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풍뎅이들은.

나를 무슨 휴게소 같은 걸로 여기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엄지손가락만 한 녀석은 어느새 내갈비뼈를 기어가고 있었다.

가장 직경이 넓은 갈비뼈를 한 바퀴 쭉 돌았다. 척추를 타고 기어가 골반을 한 바퀴 돌았다.

마지막으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천천히 기어간 뒤.

- 차드드드득!

날개를 빠르게 파닥거리며 멀리 날아갔다.

'방금 내 몸에서 뭘 한 거지? 풍뎅이의 습성 같은 건가?'

- 다그닥! 다그닥!

산길로 접어들며 경사는 점점 굴곡져 갔다. 아래위로 몸이 거칠게 흔들렸다. 작은 풍뎅이에 대한 생각은 곧 머릿속에서 지워져 갔다.

여정 일주일째 되는 날.

말은〈새까만 수풀 길〉에 접어들었다. 밤이 찾아왔다.

'강가에서 야영할 셈인가. 근처에 마을이 없나 보군.

후작과 말이 모닥불 주위에서 잠드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그들은 곧 깊게 잠드는 것 같았고,

팔다리가 구속된 채 매달린 나는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달그락. 달그락.

뼈를 차근차근 움직였다. 일주일동안 줄곧 해 온 일이었다.

그것밖에 할 수 없었다.

수갑에서 벗어나려고, 손목뼈를 모아 보았다.

하지만 성과는 없었다.

〈뼈의 군주〉의 부가 기능.

〈골격 변용〉의 숙련도는 5.02%를넘기지 못했다.

'할 수 있는 게 전혀 없군.'

한없는 무력감이 덮쳐 왔다.

단순한 위기가 아니다. 뭘 해도 이길 가능성이 없는 압도적으로 무력한 상황이었다.

첫 번째 생이 떠올랐다.

용사의 시종에게 짓밟힐 때가.

던전 바닥에서 달그락거리며, 부서진 내 다리뼈를 집어 힘없이 던지던 기억이 떠올랐다.

용사의 발에 밟히고, 시종의 방패에 찍혀 빠각빠각 우드득우드득 부서지던 기억이 떠올랐다.

삶을 송두리째 빼앗기던 기억들.

이를 악물고 싶었지만 아래턱뼈 가빠진 채였다.

위턱뼈는 힘없이 허공을 헛돌았다.

그때와 비슷한 무력감이 온몸을 엄습했다.

나는 후작과 용사를 비교했다.

'느낌은 상당히 달라.'

하지만 한 가지는 비슷하다.

터무니없이 강하다.

자신을 강요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이도록 한다.

세계와 타자를 침공한다.

종種으로서의 인류가 세계를 지배하는 것과 비슷하다.

거기에 윤리나 논리는 없다.

'필요하지도 않지.'

오직 폭력과 욕망뿐이다.

그때도 지금도 나는 침해를 강요받는다. 조금 강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나는 알고 있다.

'아직. 무의미한 수준이야.'

처참하게 살해당하던 서큐버스님이떠올랐다.

그녀라도 지키려면.

이 인간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강한 용사들을 이겨야 한다. 마음을 조금 느긋하게 먹었던 스스로에게 황당함을 느꼈다.

순간 지독히 허기가 졌다. 내가 갈길이 얼마나 먼지 생각하자, 다시한 번 힘에 대한 갈구가 솟아났다.

나는 각오했다.

마법사들에게 수십 년을 갇혀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걸 느슨한 태도를 취한 내가 받아야 할 응당한 징벌로 생각하기로 했다.

'좋아.'

어디로 끌고 가든, 끌려가 준다. 황실의 비밀 감옥이라도 좋고, 아쥬라의 스펠 홀드라도 상관없다.

기억을 읽어 내고 나를 오랫동안 봉인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오래 고통 받는 만큼.

제대로 방향을 잡을 수 있을지도모른다.

나는 죽어도 끝이 아니다.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겠지.

그렇게 각오를 다질 때였다.

- 우꾸꾸. 우꾸꾸꾸.

'여우가 많이 사나?'

첫날 밤 들었던 울음소리 였다.

풀벌레 소리, 다른 짐승이 우짖는 소리와 강물 소리에 섞여 들렸다.

하지만 오늘 따라, 울음소리가 묘하게 신경 쓰이는 데가 있었다.

깊이 잠든 후작을 바라봤다.

깨는 기색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자장가라도 듣는 것처럼 더없이 편안한 표정이었다.

- 우꾸꾸꾸꾸. 우꾸꾸꾸꾸우.

여우 울음이 다시 한 번 울렸다.

나는 스킬을 사용했다. 묶인 채로도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었다.

계속 써 온〈골격변용〉과 함께 종종 써 온 터라, 숙련도가 상당히 상승해 있었다.

'탐지.'

[탐지 Lv. 幻[활성 상태로 전환합니다.]

[스킬 효율 400%.]

[초당 0.0014%의 체력이.]

하지만 감각에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울음소리는 들리는데, 기척은 전혀 없다고.?'

오싹한 위화감이 들었다.

문득, 가을 밤 맑은 공기가 낯설고 무겁게 느껴졌다.

묶인 채 주위를 천천히 돌아봤다.

동은 트지 않았지만, 어둠이 겉에서부터 희미하게 열어지기 시작- 깡!

허공에 강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머릿속이 찌르르 울렸다.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봤다.

내가 돌아보던 수풀과 반대쪽, 바로 뒤에서 나는 소리였다.

- 깡!

어슴푸레한 어둠 아래, 쇠와 쇠가 서로 긁히며 불꽃이 튀었다.

칠흑 단검을 상대할 때도 손가락한 마디 정도만 뽑혔던 후작의 칼이검집에서 전부 다 뽑혀 있었다.

얼룩 한 방울 없이 잘 갈린 검이었다. 광채 없는 은백색이 어둠을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누구지?'

반대편에는 괴한이 있었다. 어두워잘 보이지 않았다.

- 까가강!

다시 한차례 칼날이 얽혔다.

튕겨 난 괴한은 숨을 고르고 두 발자국 크게 물러섰다. 그리고 손에든 무기를 고쳐 쥐었다. 양손에 하나씩 든 무기는 무척 기괴했다.

갈고리를 소검小劍처럼 만들면 저렇게 될 것 같았다.

날카롭게 푹 파고든 뒤 찍어 당기기 좋아 보였다.

'저런 걸. 갑옷 입은 상대에게 사용한 다는 말인가?'

뭘 찍어 당기려는 건지는 몰라도.

여기서는 적절하지 않은 무기였다.

애초에 괴한의 목적은 격돌이 아닌것 같았다. 둘 사이에 떨어진 후작의 배낭이 보였다.

'가지고 도망가려고 했군.'

후작이 잠에서 깬 이상.

혹은 자는 척을 하고 대비하고 있었던 이상. 괴한의 운명은 실패를 향해 가파르게 굴러가고 있었다.

"오래 기다렸다."

후작은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디며 횡으로 칼을 휘둘렀다. 어떤 준비동작도 없었고, 눈으로 잡히지 않을 만큼 빨랐다.

- 끼기기기긱!

괴한은 양손의 갈고리를 교차해 간신히 칼을 막아 냈다. 칼이 갈고리를 주르륵 긁으며 불꽃이 튀었다.

괴한이 가볍게 불평했다.

"??? 너무 세잖아?"

성별과 나이를 전혀 알 수 없는 목소리였다.

익숙한 목소리라면 알아볼 텐데,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렇지 않았다.

격돌의 충격으로 괴한은 뒤로 다섯 걸음 물러났다. 후작은 한순간에 그의 움직임을 따라잡았다.

"얘기는 천천히 하자고."

후작은 느릿하게 말했다. 휘둘러지는 칼은 조금도 느리지 않았다.

- 까앙!

괴한은 휘청거렸다. 간신히 칼을 막아 냈다. 딛고 선 바닥이 깊게 푹파였다. 괴한의 다리가 종아리까지 진흙탕으로 푹 파고 들어갔다.

"일단 양팔을 가져가 주지."

후작의 몸이 순간 흐릿해졌다.

그가 든 검에서 새하얀 빛무리가 날카롭게 일어났다.

동시에 양손에 든 검붉은 갈고리가 썩은 나뭇가지처럼 잘렸다.

무기가 잘린 괴한은 피하지도 못했다. 그런 만만한 속도로 휘둘러지는 검이 아니었다.

- 슈우응!

양팔을 후작의 은백색 검이 가르고 지나갔다. 검에 맺힌 빛무리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방금의 참격은, 괴한이 열 걸음 뒤로 물러났어도 그대로 잘라 냈을 만큼 공격 범위가 길었다. 괴한은 한걸음도 뒤로 피하지 못했다.

하지만 파육음이 들리지 않았다.

피도 흐르지 않았다.

짧은 비명도 없었다.

괴한은 그대로 팔을 뻗었다. 검에 갈라졌던 팔은 그대로였다.

반으로 갈라진 괴한의 손이 후작을 향해 뻗어졌다.

손에 쥔 '갈라졌던' 검붉은 갈고리는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후작의 갑옷 흉부를 통과했다.

뚫은 게 아니었다.

쇠와 쇠가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나지 않았다. 후작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황하는 기색이 스쳐 갔다.

두 개의 갈고리는 후작의 '심장'을양쪽에서 잡아 뜯어내고 있었다.

"심장, 가져간다?"

가면 뒤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 팟!

후작은 땅을 박찼다.

- 스록!

내던진 몸이 괴한을 그대로 투과해서 바닥에 나뒹굴었다.

안에 박혔던 갈고리가 앞으로 빠지며, 후작은 바닥에 한 움큼 격하게 피를 토했다.

심장은 지켰지만 갈고리에 안쪽 장기가 엉망으로 망가진 것 같았다.

후작은 바닥을 굴렀다.

쇼크로 떨리는 손을 품에 넣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작은 약병을 꺼냈다. 딸 시간도 없이, 피를 토하는 입에 억지로 처넣었다.

- 와그작!

병째 포션을 씹는 소리가 울렸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피범벅이 되어 후작의 속살을 마구 유린했다.

그 사이에 괴한은 배낭을 잡았다.

그리고.

- 달그락!

쇠말뚝을 간단히 뽑아내고, 나까지 잡아 들었다. 나는 그제야 그의 정면을 바라볼 수 있었다.

'여우?'

진짜 여우는 아니었다.

가면이었다. 괴한은 이마에 세 가닥 붉은인이 찍힌 하얀색 여우 가면을 쓰고 있었다.

- 팟!

괴한이 바닥을 박찼다. 가면 뒤의 변조된 목소리가 내게 속삭였다.

"코드네임, '별빛청여우'. 입회 활동을 시작한다."

101화 가면 쓴 축복 (14)

***************************************************

다음 날 아침.

- 다그닥! 다그닥!

한 필의 말이 성을 떠났다.

후작은 단 한 명의 부하도 데려가지 않았다. 폭죽으로 기사단을 호출한 이유는, 파괴와 살육으로 혼란해진 성의 뒷정리 때문이었던 듯하다.

'나도 좀 놓고 가든가.'

성 안 지하 감옥에서 수십 명에게 감시당하고 있는 편이, 후작의 손에 들려 가는 것보다 백배는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후작은 나를 안장 앞에

어 놓고 말을 몰았다.

- 다그닥! 다그닥!

'…나한테서 뭘 얻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영 희망이 없었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수갑이 없어도 놈에게서 도망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멍하니 경치나 바라봤다.

평범한 남부의 가을 풍경이었다.

레나와 함께 걸을 때는 최고의 계절이라고 생각했다.

신선한 공기가 온몸을 훌고 간다.

이파리들이 가장 다채로운 색을 뽑내는 계절이다.

하지만 후작의 말안장에 었어져 가니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모든 게 최악으로 느껴졌다.

'…볼 맛도 안 나는군.'

나는 고개를 폭 숙였다.

- 차드드득! 차드득!

길게 고개를 빼서 드린 가로,

날카로운 날짓 소리가 들려왔다.

황동색 풍덩이였다.

'…참 잘 날아다니네.'

어디서 날아온 건지는 몰라도, 자유롭게 가을 하늘을 비행하는 녀석이 진심으로 부러웠다.

물론 녀석도 천적이 있다.

땅에 있을 때, 다람쥐나 족제비 같은 녀석들에게 몸이 뜨서 간단히 잡아먹힐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누구의 방해도 없이 맑은 공기를 가르며 마음껏 날아다니는 것이다.

'적어도,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고 묶여 있는 일은 없겠지.)

부러운 마음으로 녀석을 홀긋거렸다. 황동색 풍탱이는 주위를 살짝맵돌더니 곧 멀리 사라져 갔다.

후작은 가도 근처 작은 마을에 들렀다. 여물을 먹이고 말을 편히 쉬게 했다.

방에 들어가 갑옷을 벗었다. 단정한 흑색 무복이 드러났다. 재질과 자수가 롭시 고급스러워 보였다.

그는 몸을 껏은 뒤, 앉아서 무언가를 수련하는 것 같았다.

- 휘우우우우!

…원 바람이지?"

사방이 막힌 방에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도, 바람이 일어나는 듯 그의 무복이 펄럭이다 내려앉고, 다시 펄럭이다 내려앉곤 했다.

'자는지 안 자는지 모르겠군.'

그를 가만히 관찰했다.

제국 4대 검주라 불리는 인간의 일상이다. 무언가 얻어 배울 만한 게 있을지도 모른다.

'집중해 보자!"

하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가만히 앉아 있는 걸 보고 뭔가 얻어 간다는 건 무리.

옆에서 그를 지켜본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으니까.

재능 레벨을 올리거나.

오랫동안 지켜본다면 뭔가 깨닫게 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군….)

밤이 깊었다. 멀리서 작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 우꾸꾸. 우꾸꾸꾸.

후작을 관찰해 봐야 지금은 소득이 없다. 자연스럽게 올음소리에 관심이 쏟렸다.

얼핏 인간 아이 올음소리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나는 이게 무슨 소리인지 알고 있었다.

'여우 울음소리네.' 산에서 오래 생활한 터라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 우꾸꾸꾸꾸. 우꾸꾸꾸꾸우.

여우가 계속 올었다.

ㆍ뭘 하길래 저렇게 우는 걸까?"

문득 여우가 사람이 되는 옛날이야기가 생각났다.

서큐버스님이 나를 무릎에 눔혀 놓고 읽어 주었던 이야기였다.

'여우가 사람이 될 필요가 없는…

그런 세상은 올 수 없을까?

책을 다 읽어 준 뒤, 그녀가 덧붙인 이야기가 떠올랐다.

- 우꾸꾸꾸… 우꾸꾸꾸꾸우…!

여우 우는 소리와 함께 또 하릇밤이 지나갔다. 울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서큐버스님이 생각났다.

후작은 새벽에 출발했다.

바람이 밤을 줄고 지나갔다. 아래턱뼈가 분리된 터라 두개골로 더욱행하게 바람이 불어왔다.

모래 먼지가 두개골 안쪽을 투둑, 치고 지나갔다.

- 차드드! 차드드득!

이번 길에서도 풍탱이가 날아왔다.

아까와 같은 황동색 녀석이었다.

'풍맹이가 많이 사는 지역인가?"

녀석은 쇄골에 앉았다가, 날짓을 해서 두개골에 앉았다.

- 달그락!

반사적으로 두개골을 흔들었다.

귀찮다는 듯 털어 내는 몸짓을 후작이 흘끗 보다가, 말없이 다시 말을 몰아갔다.

- 차드드드드!

풍디는 작은 소리를 내며 몸 근

처를 날아다다.

여기 앉고 저기 앉았다.

녀석을 두 번 보자 무언가 가웃한 점이 느껴졌다.

- 차드드! 차드드드득!

'소리가… 특이한걸.

아주 조그마한 칼날들이 계속 척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쓸데없는 생각이다.

칼날 날개를 가진 풍탱이 따위가 있을 리 없다.

엄지손가락만 한 녀석은 사실 패귀엽다. 예쁘고 정교한 생물체였다.

하지만 좀 걱정되기도 했다.

'너무 함부로 다가온 거 아닌가?"

위험에 대한 자각이 부족한 것 같았다. 달리는 말 같은 큰 생명체에게 함부로 다가오고, 내 근처에서 친근한 척 날아다니다니.

녀석이 내 근처를 맵도는 감각이 간지러웠다.

"귀찮기도 하고...."

몸을 흔들면 쫓을 수는 있을 거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

녀석이 놀도록 방관했다.

묶여서 아무것도 못 하는 처지다.

이런 작은 녀석에게나 까다롭게 굴려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풍탱이들은.

나를 무슨 휴게소 같은 걸로 여기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엄지손가락만 한 녀석은 어느새 내갈비뼈를 기어가고 있었다.

가장 직경이 넓은 갈비뼈를 한 바퀴 쪽 돌았다. 척추를 타고 기어가 골반을 한 바퀴 돌았다.

마지막으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천천히 기어간 뒤.

- 차드드드득!

날개를 빠르게 파닥거리며 멀리 날아갔다.

"방금 내 몸에서 뭘 한 거지? 풍탱이의 습성 같은 건가?"

- 다그닥! 다그닥!

산길로 접어들며 경사는 점점 굴곡져 갔다. 아래위로 몸이 거칠게 흔들렸다. 작은 풍탱이에 대한 생각은 곧 머릿속에서 지워져 갔다.

여정 일주일째 되는 날.

말은 〈새까만 수풀 길〉에 접어들었다. 밤이 찾아왔다.

'강가에서 야영할 셈인가. 근처에 마을이 없나 보군‥….)

후작과 말이 모닥불 주위에서 잠드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그들은 곧 깊게 잠드는 것 같았고, 팔다리가 구속된 채 매달린 나는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달그락. 달그락.

뻐를 차근차근 움직였다. 일주일동안 줄곧 해 온 일이었다.

그것밖에 할 수 없었다.

수갑에서 벗어나려고, 손목뼈를 모아 보았다.

하지만 성과는 없었다.

〈뼈의 군주〉의 부가 기능.

〈골격 변용〉의 숙련도는 5.02%를 넘기지 못했다.

"…할 수 있는 게 전혀 없군."

한없는 무력감이 덮쳐 왔다.

단순한 위기가 아니다. 뭘 해도 이길 가능성이 없는 압도적으로 무력한 상황이었다.

첫 번째 생이 떠올랐다.

용사의 시종에게 짓밝힐 때가.

던전 바닥에서 달그락거리며, 부서 진 내 다리떠를 집어 힘없이 던지던 기억이 떠올랐다.

용사의 발에 발히고, 시종의 방패에 찍혀 빠각빠각 우드득 우드득 부서지던 기억이 떠올랐다.

삶을 송두리째 빼앗기던 기억들.

이를 악물고 싶었지만 아래턱뻐가 빠진 채였다.

위턱뼈는 힘없이 허공을 홀았다.

그때와 비슷한 무력감이 온몸을 엄습했다.

나는 후작과 용사를 비교했다.

'느낌은 상당히 달라.'

하지만 한 가지는 비슷하다.

터무니없이 강하다.

자신을 강요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이도록 한다.

세계와 타자를 침공한다.

종\으로서의 인류가 세계를 지배하는 것과 비슷하다.

거기에 운리나 논리는 없다.

'필요하지도 않지.'

오직 폭력과 욕망뿐이다.

그때도 지금도 나는 침해를 강요받는다. 조금 강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나는 알고 있다.

"아직… 무의미한 수준이야."

처참하게 살해당하던 서큐버스님이 떠올랐다.

그녀라도 지키려면.

이 인간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강한 용사들을 이겨야 한다. 마음을 조금 느긋하게 먹었던 스스로에게 황당함을 느다.

순간 지독히 허기가 졌다. 내가 갈길이 얼마나 먼지 생각하자, 다시 한 번 힘에 대한 갈구가 숫아났다.

나는 각오했다.

마법사들에게 수십 년을 간혀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걸 느슨한 태도를 취한 내가 받아야 할 응당한 징벌로 생각하기로 했다.

*좋아.

어디로 끌고 가든, 끌려가 준다. 황실의 비밀 감옥이라도 좋고, 아쥬라의 스펠 홀드라도 상관없다.

기억을 읽어 내고 나를 오랫동안 봉인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오래 고통받는 만큼.

제대로 방향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죽어도 끝이 아니다.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겠지

그렇게 각오를 다질 때였다.

- 우꾸꾸. 우꾸꾸꾸.

'여우가 많이 사나?"

첫날 밤 들었던 울음소리였다.

풀벌레 소리, 다른 짐승이 우즌

소리와 강물 소리에 섞여 들렸다.

하지만 오늘 따라, 울음소리가 묘하게 신경 쓰이는 데가 있었다.

깊이 잠든 후작을 바라봤다.

깨는 기색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자장가라도 듣는 것처럼 더없이 편안한 표정이었다.

- 우꾸꾸꾸꾸. 우꾸꾸꾸꾸우.

여우 울음이 다시 한 번 울렸다.

나는 스킬을 사용했다. 묶인 채로도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었다.

계속 써 은 〈골격변용〉과 함께 종종 써 온 터라, 숙련도가 상당히 상승해 있었다.

"담지:

[탐지 1#. 2]

[활성 상태로 전환합니다.]

[스킬 효율 400%....]

[…초당 0.0014%의 체력이....]

하지만 감각에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울음소리는 들리는데, 기척은 전혀없다고...?' 오싸한 위화감이 들었다.

문득, 가을 밤 맑은 공기가 낮설고 무겁게 느껴졌다.

묶인 채 주위를 천천히 돌아봤다.

동은 트지 않았지만, 어듬이 겉에 서부터 희미하게 열어지기 시작- 강!

허공에 강한 섯소리가 올려 퍼졌다. 머릿속이 찌르르 올렸다.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봤다.

내가 돌아보던 수풀과 반대쪽, 바로 뒤에서 나는 소리였다.

- 강!

어슴푸레한 어돔 아래, 쇠와 쇠가 서로 굽히며 불꽃이 튀었다.

칠흑 단검을 상대할 때도 손가락한 마디 정도만 뽑혔던 후작의 칼이 검집에서 전부 다 뽑혀 있었다.

얼룩 한 방울 없이 잘 갈린 검이었다. 광채 없는 은백색이 어둘을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누구지?' 반대편에는 괴한이 있었다. 어두워잘 보이지 않았다.

- 까가강!

다시 한차례 칼날이 혔다.

됨겨 난 괴한은 숨을 고르고 두 발자국 크게 물러섰다. 그리고 손에 든 무기를 고쳐 쥐었다. 양손에 하나씩 든 무기는 무척 기괴했다.

갈고리를 소검4웨처럼 만들면 저렇게 될 것 같았다.

날카롭게 폭 파고든 뒤 찍어 당기기 좋아 보였다.

"저런 걸… 갑옷 입은 상대에게 사용한다는 말인가?"

뭘 찍어 당기려는 건지는 몰라도.

여기서는 적절하지 않은 무기였다.

애초에 괴한의 목적은 격돌이 아닌것 같았다. 둘 사이에 떨어진 후작의 배낭이 보였다.

'…가지고 도망가려고 했군.'

후작이 잠에서 겐 이상.

혹은 자는 척을 하고 대비하고 있었던 이상. 괴한의 운명은 실패를 향해 가파르게 굴러가고 있었다.

"오래 기다렸다."

후작은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디며 횡으로 칼을 휘둘렀다. 어떤 준비동작도 없었고, 눈으로 잡히지 않을 만큼 빨랐다.

- 끼기기기격!

괴한은 양손의 갈고리를 교차해 간신히 칼을 막아 냈다. 칼이 갈고리를 주르륙 굽으며 불꽂이 튀었다.

괴한이 겹게 불평했다.

"…너무 세잖아?"

성별과 나이를 전혀 알 수 없는 목소리였다.

익숙한 목소리라면 알아볼 텐데,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렇지 않았다.

격돌의 충격으로 괴한은 뒤로 다섯걸음 물러났다. 후작은 한순간에 그의 움직임을 따라잡았다.

"얘기는 천천히 하자고."

후작은 느릿하게 말했다. 휘둘러지는 칼은 조금도 느리지 않았다.

- 까앙!

괴한은 휘청거렸다. 간신히 칼을 막아 냈다. 딜고 선 바닥이 깊게 파였다. 괴한의 다리가 종아리까지 진흙탕으로 폭 파고 들어갔다.

"일단 양팔을 가져가 주지."

후작의 몸이 순간 흐릿해졌다.

그가 든 검에서 새하얀 빛무리가 날카롭게 일어났다.

동시에 양손에 든 검붉은 갈고리가 썩은 나못가지처럼 잘렸다.

무기가 잘린 괴한은 피하지도 못했다. 그런 만만한 속도로 휘둘러지는 검이 아니었다.

- 슈우웅!

양팔을 후작의 은백색 검이 가르고 지나갔다. 검에 맺힌 빛무리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방금의 참격은, 괴한이 열 걸음 뒤로 물러났어도 그대로 잘라 냈을 만큼 공격 범위가 길었다. 괴한은 한 걸음도 뒤로 피하지 못했다.

하지만 파육음이 들리지 않았다.

피도 흐르지 않았다.

짧은 비명도 없었다.

괴한은 그대로 팔을 뻔었다. 검에 갈라졌던 팔은 그대로였다.

반으로 갈라진 괴한의 손이 후작을 향해 뻔어졌다.

손에 권 '갈라졌던' 검붉은 갈고리는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후작의 갑옷 흉부를 동과했다.

은 게 아니었다.

쇠와 쇠가 부및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나지 않았다. 후작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황하는 기색이 스쳐 갔다.

두 개의 갈고리는 후작의 '심장'을 양쪽에서 잡아 뜰어내고 있었다.

"심장, 가져간다?"

가면 뒤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 팟!

후작은 땅을 박찰다.

- 스름!

내던진 몸이 괴한을 그대로 투과해서 바닥에 나굴었다.

안에 박혔던 갈고리가 앞으로 빠지며, 후작은 바닥에 한 움큼 격하게 피를 토했다.

심장은 지켰지만 갈고리에 안쪽 장기가 엉망으로 망가진 것 같았다.

후작은 바닥을 굴렀다.

쇼크로 떨리는 손을 품에 넣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작은 약병을 꺼냈다. 딸 시간도 없이, 피를 토하는 입에 억지로 처넣었다.

- 와그작!

병째 포션을 씬 소리가 울렸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피범벅이 되어 후작의 속살을 마구 유린했다.

그 사이에 괴한은 배낭을 잡았다.

그리고.

- 달그락!

쇠 말뚝을 간단히 뽑아내고, 나까지 잡아 들었다. 나는 그제야 그의 정면을 바라볼 수 있었다.

여우?)

진짜 여우는 아니었다.

가면이었다. 괴한은 이마에 세 가닥 붉은 인이 찍힌 하얀색 여우 가면을 쓰고 있었다.

- 팟!

괴한이 바닥을 박찾다. 가면 뒤의 변조된 목소리가 내게 속삭였다.

"코드네임, '별빛청여우'. 입회 활동을 시작한다."

102화 벌레들의 무덤 (1)

***************************************************

'별빛. 청여우? 입회 활동?'

기억이 번뜩였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디서 들었는지 떠올리는 데는.

'기스-제-라이.'

반인반골伴人伴骨의 네크로멘서에게 들은 말들이 떠올랐다.

자유연합의 의회가 황제 암살의 대가를 치르지 않을 거라고 걱정하자, 그녀가 내게 말해 주었다.

〈이 암살의 입회인으로서. 〉

〈레드 플레이크 전체가, 이 계약을 증명하고 집행한다. 〉암살 집단, 레드 플레이크가 황제살해를 입회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괴한은 그 일원이다.

'하지만.

기스-제-라이는 이미 죽었다.

'그러면 끝인 거 아닌가?'

암살을 수락하고, 수행한 자.

대가를 받아야 할 자가 사라졌다.

그런데 나타났다.

무엇을 위해서?

답은 나오지 않았다.

- 달그락! 달그락!

시야가 마구 흔들렸다.

여우 가면을 쓴 괴한은 한 손에는가방을, 한 손에는 나를 든 채 숲을 마구 내달렸다.

- 팟! 팟!

바닥이 폭발하듯 흙이 튀었다.

짐을 잔뜩 가지고 있었음에도 달리는 속도는 경이로울 정도로 빨랐다.

- 흘끗.

괴한이 고개를 돌렸다.

'뭘 보는 거지?'

괴한의 시선을 따라갔다. 쓰러져입가에 피를 홀리고 있었지만, 몸이천천히 황금빛으로 회복되는 후작이보였다. 괴한이 투덜거렸다.

"엘릭서를, 방울도 아니고 병째로 처먹어.? 저런 과소비는 사람들을 화나게 한다구!"

- 휘이이이이!

나는 기묘한 소리가 나는 가면을 바라봤다.

'안에 뭐가 있는 건가?'

그때 였다.

- 차드드득! 차드드드드득!

곳곳에서 차드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 아까의 풍뎅이?'

사방을 바라봤다.

곳곳에 나타난 수십 마리의 황동색풍뎅이를 바라봤다.

빛이 나고 있었다.

- 차득! 차드드득!

수십 마리의 풍뎅이는 얇은 칼날이 겹쳐지는 소리를 내며, 후작을 향해 날아갔다. 세 번째 보고 나서야 알수 있었다.

'뭔가 달라.'

그냥 '풍뎅이'가 아니었다.

저렇게 등딱지의 색깔이 선명한 건 이상하다.

저렇게 일사불란하게, 인간을 향해 날아가는 건 이상하다.

'날갯소리도. 기괴해.'

한참 멀어지는 저편.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수십 마리풍뎅이를 보고.

짙푸르게 두 눈을 부릅뜨는 후작과 얼핏 시선이 얽혔다.

심장이 반쯤 찍혀 나간 그 눈빛이 흉흉해 살짝 시선이 흔들렸을 때.

- 과과과과과광!

자기가 쏟아 낸 피 웅덩이 속 꿈틀대는 후작 주위에서, 수십 마리풍뎅이가 연쇄적으로 폭발했다.

'저럴 수가.!'

수십 마리 풍뎅이.

저 작은 몸뚱아리들에서 일어날 수있는 폭발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살아 있는 폭탄이라고?'

굵은 나무들이 아예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냇가 근처의 바위가 가루가 되어 뿌옇게 흩어졌다.

- 화르르!

폭발의 여파로.

넓은 반경에 불길이 옮아 붙었다.

시선이 멸어지지 않았다.

폭발의 원점을 바라봤다. 화염과 연기로 자욱했다.

또렷이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죽었군.'

터져 나간 증거인 참혹한 인간즙이, 후작이 있던 자리를 중심으로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었으니까.

- 팟! 팟!

여우 가면은 나를 가볍게 든 채,

이미 그 장소로부터 한참 먼 곳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에구. 내 아까운 풍뎅이들.!"

충분히 도망쳤다고 생각했는지 발걸음이 조금씩 느려지며, 여우가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여우 가면이 나를 흘끗 바라봤다.

"아참, 내 정신 좀 봐."

여우 가면이 품에 손을 넣었다.

검은색 장갑을 낀 손에는, 후작이뽑아 갔던 내 턱뼈가 들려 있었다.

'가져온 건가?'

"짜잔! 우리 해골 친구를 위해서 특별히 챙겨 왔지."

- 뚝!

장갑을 낀 손이 아래턱뼈를 끼워 넣었다.

"됐어? 됐어?"

- 딱딱.

나는 이빨을 부딪쳐 봤다.

"됐네! 됐어!"

여우 가면은 손뼉을 치며 매우 좋아했다.

"밝은. 성격이군."

"맞아! 난 밝은 성격이야! 그리고 널 도와줄 거야."

여우 가면은 배낭을 뒤졌다. 열쇠를 꺼냈다.

"돌아앉아 봐."

말만 그렇게 하곤 나를 들어서 돌아 앉혔다.

- 철컥.

- 투둑.

수갑이 풀렸다.

- 철컥.

- 투둑족갑이 풀렸다.

K.r뒤로 꺾인 채 며칠 동안이나 묶여있던 수갑과 족갑이 풀렸다.

자유다.

수십 년 동안 묶인 채 고통 받을걸 각오했는데.

팔다리가 다시 움직인다.

아찔할 정도의 해방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한참동안 현기증을 느낄 정도였다.

- 우두둑! 우두두둑!

나는 팔다리를 천천히 돌리며 몸을 풀었다.

굳은 뼈를 다시 돌렸다. 도취될 정도의 후련함이 밀려들었다.

"정말 고맙다."

나는 여우 가면에게 깊이 감사를 표했다.

이 괴한이 나를 어떻게 처리할지는 모르지만, 지금 내가 느끼는 짜릿한 해방감만 해도 이런 감사를 표하기에 몹시 충분했다.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 들어준다.

궁금한 게 있다면 전부 말해 준다.

그런 기분이었다.

"고맙다."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했다.

"헤헤."

가면 뒤에서 살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달빛에 비치는 상대의 가면을 가만히 바라봤다.

어쩔까.

'나를 구해 줬어.'

직설적으로 나가자.

시간을 아껴 보기로 했다. 나는 살짝 이를 딱딱거리다, 내가 이해하는 상황을 그대로 표현했다.

"혹시 내가, 당신들. 레드 플레이크에게 뭔가 해 줄 만한 게 있나?"

꽤나 건방진 질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나가는 편이 이야기가 빨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 휘리릭.

그 순간 여우 가면이 손을 허공에 휘저었다. 원이 두 개 겹치는 모양의 사인을 그렸다.

의외로 호의적인 느낌이었다.

가면이 어깨춤을 췄다.

"해골 친구가 날 위해서 뭔가 해주고 싶다고 했어!"

"아무도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없었는데!"

"으음.

내가 여우 가면의 말투에 조금 당황하고 있을 때, 여우가 말을 이었다.

"해골 친구, 뭘 해 줄지 생각할 필요는 없어. 친구가 뭘 받을지에 대해 생각해야지."

"받는다니, 그게 무슨.?"

- 사르록.

여우 가면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장갑을 벗었다. 왼손은 남겨둔 채 오른손만 장갑을 벗었다.

얇고 검은 장갑을 꼼지락거리며 빠져나온, 매끄럽고 새하얀 손이 나를향해 뻗어 왔다.

악수를 청하는 몸짓이었다.

나는 엉겁결에 여우 가면의 악수를 받았다. 여우 가면이 아래위로 손을 흔들며 경쾌하게 말했다.

"소개부터. 암살교단(레드 플레이크) 소명수녀 (S命修女), 엘윈 에사우. 코드네임 별빛 청여우."

'수녀라니.' 암살자에 어울리지 않는 호칭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검고 얇은 장갑에서 사르륵 손을 빼는 그 동작은, 분명히 어떤 신성함에 가까워 보였다.

"이름 없는 해골이오."

"헤에, 좋아. 해골 친구, 만나서 반가워. 적당히. 수녀라고 불러."

"??? 좋소."

수녀가 말을 이었다.

"입회 중인 황제 암살의 종료를 확인했어. 하지만.

여우 가면을 쓴 수녀는 깊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기스-제-라이가 죽었잖아?"

"그렇소만."

수녀가 어깨를 으쪽하며 말했다.

"일은 됐지. 증거도 있지. 그런데 하나가 없네?"

"??? 뭐가 없다는 거요?"

"대가를 받을 사람이 없잖아."

"당신들, 레드 플레이크가 받으면 되는 거 아니오?"

"우린 그렇게 일 안 해. 기스-제-라이가 교단을 탈퇴하면서 받은 의뢰인걸? 우리가 갖는 건 잘못됐지."

"그럼 뭘 어떻게 하겠다는.

- 툭.

수녀가 장갑을 벗은 손을, 내 어깨뼈에 얹었다.

- 달그락.

순간 몸을 움찔했다.

수녀가 짧게 말했다.

"네가 있잖아. 기스-제-라이의 마지막 병사. 황제 암살의 증거까지네 가 가지고 있었잖아? 네가 권리를 계승해야지."

나는 손을 내저었다. 그건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아니, 내가 받을 수는 없소."

자격이 없다.

"에? 왜 안 돼?"

"나는 암살에 참여하지 않았소. 우연히 그 자리에 있었고. 그녀의 군단이었던 것도 아니오. 탐나는 물건 몇 가지를 갖고 도망쳤던 것뿐. 나에게는 그녀를 계승할 그 어떤 자격도 없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수녀는 전혀 믿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해골 친구, 내가 널 어떻게 쫓아갔는지 아니?"

"모르오."

"기스-제-라이와 나는 친구였어.

그녀가 황제 암살을 한다고 했지.

끝나고 만나기로 했어. 그런데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더라고. 그래서 혼적을 쫓았지. 암살 장소를 봤고, 거기서 기스-제-라이의 마력흔魔刀疫을 쫓았어. 그게. 바로 너야."

"그건.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수녀의 하얀 손이 광대뼈 밑으로들어와, 두개골 안쪽을 스르록 스르륵 문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야. 아주 신경 쓴 구속흔拘束疫이 남아 있지."

그 손길은 집요하고, 반복적으로두개골 구석구석 이어졌다.

수녀의 손길에는 알 수 없는 짙은 감정이 섞여 있었다.

누군가의 흔적을, 애써 거듭거듭 느끼려는 손길이었다.

'질. 투?'

수녀가 입을 열었다.

"너 말이지, 그녀가 좋아했던 다섯 안에는 간단히 들어갈 거야."

"그 정도요?"

"모르는 척하는 거야? 너도 아파서 잊고 싶은 거야?"

뭘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곤란한 상황이었다.

회귀를 거듭하며 얻은 영웅 특전,

〈네크로멘서의 연인〉으로 인한 결과라고 하면 역시 미친 취급밖에 받지 못하게 된다.

나는 침묵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동이 터 오고 있었다.

우리는 말없이 한참을 걸었다.

그리고.

계속 길을 가던 나와, 그녀의 눈앞에 거대한 곤충이 나타났다.

"??? 풍뎅이?"

내 중얼거림을 들은 수녀가 피식 웃었다.

"풍뎅이긴 풍뎅이지."

새까만 풍뎅이는 무척 날렵했다.

그리고 무척 기괴했다.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고, 아래쪽에 거대한 바퀴두 개가 장착되어 있었다. 마차의 바퀴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앞뒤로 하나씩 붙은 바퀴의 직경은내 팔 길이만 했고, 바뒷살은 특이하게 은빛 별 모양이었다.

살아 있는 건지, 어디에 쓰이는 건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 박제 같은 건가?'

흠칫하는 사이.

- 지이이잉.

풍뎅이의 날개가 열렸다. 그 안에는 의자가 있었다.

"마법. 생물이오?"

"글쎄. 비슷할걸?"

수녀는 날개 열린 풍뎅이 위에 올라탔다. 새처럼 가벼운 몸짓이었다.

"의자라니.

등껍질 위치에 있는 의자를 멍하니 바라봤다. 수녀는 풍뎅이의 안쪽 뿔을 잡았다. 뿔의 위치도 잡기 편 한곳에 있었다.

- 부롱! 부릉!

갑자기 풍뎅이가 기묘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수녀가 나를 흘끗 보고 말했다.

"얼른 타. 아무나 안 해 주는 거야."

103화 벌레들의 무덤 (2)

***************************************************

- 드르륵 드르륵!

장갑을 낀 수녀는 손으로 거침없이뿔을 당긴다. 거대한 풍뎅이가 기괴하게 울부짖었다.

- 부우우응!

짜릿한 진동이 척추로 올라온다. 수녀가 발로 힘껏 아래를 밟았다.

- 파박! 파바바박!

불꽃 튀는 소리가 들렸다. 거대한 풍뎅이가 앞으로 튀어 나갔다.

폭력적인 가속에 머리가 뒤로 젖혀졌다. 새까만 의자가 몸을 부드럽게 감쌌다. 의자는 마치 몸에 정밀하게 맞춰진 것 같았다.

-부우우우우우우우우우!

빠르다. 너무 빨랐다. 달리는 말보다 적어도 다섯 배는 빠르다. 하지만 아직도 가속이 끝나지 않았다.

".!"

-우우우우우우우우웅시야가 빠르게 홀러갔다. 풍경이 점점 더 빠르게 흐르다가, 하나의 점點처럼 굳어져 왔다.

수녀는 완전히 몰입해 있었다.

풍뎅이의 뿔을 조작하는 손가락들.

칠혹의 장갑을 낀 얇은 손가락들이 간간히 파르르 떨렸다.

몹시 흥분하고 있음을.

살아 있음을 실감하는 걸, 손가락의 움직임이 보여 주었다.

눈앞에 구부러지는 가도가 보였다.

모퉁이 진입 직전 수녀가 왼발을 살짝 밟았다.

- 끼이이이!

오른쪽 뿔을 살짝 더 잡아당기며, 왼쪽 뿔을 위로 올렸다.

- 드르륵!

앞뒤 바퀴의 진행 방향이 반대로 틀어지며 풍뎅이가 모퉁이를 끼고 부드럽게 돌았다.

- 쉬이이이이익!

모퉁이에서 벗어나며 수녀가 오른발을 더 깊이 밟았다.

바퀴는 같은 방향으로 틀어지며 가파르게 속도를 올렸다.

기적과도 같은 기예였다.

[안내합니다. 현재 속도 400km八! 를초과했습니다.]

[안전 운행하세요.]

풍뎅이 내부에서 묘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무척 매끈하고 세련된 여성의 목소리였다.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속도는 점점 올라갔고, 풍경은 오히려 흔들림 없이 정물뚫物! 처럼 단단하게 굳어져 갔다.

멍한 기분이 되며 음이 기묘하게 차분해졌다.

그 안에서 생각했다.

일단은, 내가 알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정리하기로 했다.

'후작이 죽었어.'

폭탄에 몸이 터져서 죽었다.

사방에 튀어나갔던 피와 고기즙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놈에게 붙잡혀 끌려갈 때.

수십 년 동안 갇혀 있을 걸 각오했는데.

후작에 관한 정보를 떠올렸다.

본인 입에서 나온 말도 있고, 전생에서 레나에게 들은 말도 있었다.

〈제국 대상조大上造 겸 관 내후■內候〉

〈푸른 m 가 시단 출신 최연소 마스터. 〉

〈제국 4대 검주. 〉

그런 자가 죽었다.

눈앞의 수녀에게.

'하긴, 황제도 죽었는데.

세상은 너무 넓었다.

내 존재라는 게 지독히 하잘것없이 느껴졌다.

며칠 사이.

제국 4대 검주劍主라는 게, 얼마나터무니없이 강한 존재인지 온몸으로실^^다.

푸른 갑옷의 기사.

래^드로 후작.

그는 범죄자 졸개 수십을 해치우고 우물거리던 나 따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강했다.

비집고 들어갈 틈 따위는 애초에 터럭만큼도 없었다.

기스-제-라이가 전해 준 유품을 쓰며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장난처럼 튕겨졌다.

지금은.

그 검주를 간단히 죽여 버린 여자의 도움을 받고 있다.

레드 플레이크의 1인. 하지만 이런 여자의 존재는, 20년을 살면서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다.

게다가 말보다 열 배는 빠른 마법괴물이라니.

이런 세상이 있는 줄 몰랐다.

내가 너무나 작고 초라한 존재임을 깨닫고 있었다.

[안내합니다. 현재 속도 500km/h를초과했습니다.]

매끈한 목소리가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다.

어느새 풍뎅이는 가도의 끝으로 향하고 있었다.

끝은, 산의 정상頂上.

'죽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기묘한 기분.

비참한 기분이었기에, 이대로 끝나도 큰 미련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수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풍뎅이의 뿔을 잡은 수녀는, 전혀 죽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뿔을 잡은 손이 조금씩 떨렸다.

'들떠. 있어?,

[안내합니다. 현재 속도 550km八! 를초과했습니다.]

떨어진^?

3.

2.

- 쌔애애애애애앵!

산꼭대기에서, 거대한 칠흑의 풍뎅이가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아래는 까마득한 절벽.

제?,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경고합니다. 직하直下 1, 000피트까지 도로 인식 불가.]

[비행 모드로 자동 전환합니다.]

- 차5ㄹ. g륵!

매끈한 무기질의 목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닫혔던 풍뎅이의 날개가 한순간에 펴졌다. 날개가 넓어지며 몸 뒤쪽과 이어졌다. 날개 끝에 반짝이는 푸른색 불빛이 들어왔다.

풍뎅이는 떨어지지 않았다.

- 휘이이이엉?!

한차례 거친 바람을 받으며.

오히려 더 높이 날아올랐다.

'날고. 있어?'

수녀는 뿔을 좌우로 조종했다.

- ^륵. 드르륵.

그 섬세한 손짓에 따라 허공에 뜬 거대한 풍뎅이가 움직였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앞을 날개가 펼쳐진 이후로.

안쪽에서 보는 시야각이 270도 정도로 활짝 넓어져 있었다.

앞은 구름, 아래는??

""

넓었다.

위에서 보는 풍경은 아름다웠다. 이것이 세계인가 싶었다. 일 초 일 초가 길었다. 펼쳐지는 풍경에 매초마다 몰입했다.

끝도 없이 펼쳐진 밀밭과 가도들, 그리고 중간중간 성을 중심으로 모인 빼^한 가옥들.

'저게. 유블람인가? 저기는. 에라스트?' 위에서 내려다보는 회색빛 성들은 주먹보다 훨씬 작았다. 가옥들은 손톱크기만 했다.

저 작은 것들 사이에서 꼼지락거리며 괴롭게 살았구나.

몸 구석구석이 꽉 조여 왔다. 무언가 맺히는 것 같았다.

반대로 모두 탁 풀리며, 터져서 허공으로 흩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 끼이이이익!

매들이 한참 아래에서 날아다니며 울었다.

끼마득한 저편에 동부 산맥이 보였다. 녹지 않는 만년설이 보였다.

거대한 성들은 장난감처럼 보이고 인간은 작은 점처럼 보였지만, 그래도세상은 넓었다.

- 피리리리릭! 피리리리리리릭!

수녀는 능숙했다.

양 뿔을 당기고, 벌리고, 앞뒤로 조금씩 움직였다.

거대한 풍뎅이는 수녀의 손짓에 따라 일정한 고도를 유지했다.

구름을 뚫고 잠시 올라갔다.

다시 천천히 내려왔다. 암살교단의소명수녀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유산은 대단해. 그대로 풍경이 내려다보이지? 탄산중합수지로 만들어진 거야."

"탄산. 중합. 수지.?"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였다. 수녀가 살포시 웃었다.

"헤헤. 나도 잘 몰라. 기록된 대로 읽을 뿐이야."

가면을 쓴, 암살교단의 소명수녀는살짝 어깨를 으쑥했다. 그때였다.

[페르시우스 V.H.A.-111 활공 중인기체 내부의 어색함을 감지했습니다.

음악을 재생합니다.]

[DUDUD①①① UDUDUN ?!]

[DDUDUN! DDDUN!]

풍뎅이 안에서 거칠고 폭력적인 음악이 울려 퍼졌다.

'이것도 마법인가?'

어떤 악기도 없는 허공에서, 갑자기울려 퍼지는 음악.

혹은 굉음.

'음악'은 뜨겁고 우둘투둘했다.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상상해 보지 못한 풍의 음률.

한 박자 한 박자는 진격의 개시를 알리는 북소리처럼 온몸을 저릿하게 울렸지만.

불규칙한 리듬은 기분 내키는 대로 빠르게 변덕을 부렸다.

한 음 한 음을.

뼈를 쪼갠 뒤 그 사이사이에 박아 넣고 흔드는 느낌이었다.

깊숙이 들어오는 한 음 한 음에 경련이 일어날 것 같았다. 음악을 들으며 아래를 계속 내려다봤다.

- 피리리리리리릭!

활공은 계속됐다.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풍뎅이는 저 멀리 북동쪽을 향하고 있었다.

에라스독 유블람 같은 도시들을 뒤편에 두고 산맥을 돌〈가 나왔다.

아래로 거대한 평야가 펼쳐졌다.

누란 밀밭도 없고, 물들어 가는 가을의 숲도 없었다. 인간이 사는 가옥도 없는 그저 황량한 평야였다.

'저런 곳이 있었나.'

"저게. 어딤니까?"

륙지."

음악이 멈췄다.

수녀가 양쪽 뿔을 당긴 채 조심스럽게 조종했다. 활공 때보다 훨씬 더 집중하는 둣 보였다.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현재 고도: 1, 000피트]

[보조 기어를 내리는 중입니다.]

- 쌔애애애애앵!

풍뎅이 바깥에서 들리는 소음이 한차례 더 심해졌다. 황량한 평야가 급격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 쿠구구궁! 쿠구궁! 쿠구궁! 쿵!

풍뎅이가 바닥에 닿으며 몸이 마구 들썩였다. 몸이 오싹하게 내려앉는 감각과 함께 몸에 타격이 전해졌다.

- 덜커덕! 덜컥!

거대 풍뎅이의 몸이 거칠게 흔들리며 평야를 쭉 가로질렀다. 어느새 풍뎅이가 멈췄다.

천천히 정신이 되돌아왔다.

- 지이이이잉!

풍뎅이의 날개가 열렸다.

- 훌쩍!

가면을 쓴 수녀가 먼저 내렸다. 몸놀림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나는 잠시 움직이지 못하고 밖을 바라봤다.

칠흑의 풍뎅이는 처음에 봤던 것처럼, 땅에 바싹 붙어 있었다. 날개가 천천히 정리되기 시작했다.

"아."

나는 작게 탄식했다.

밖은 환했다. 아직 새벽에 가까운 아침이었다.

후작에게서 도망칠 때와 비교해도,

별 차이가 없었다.

한 시社 아니 20분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완전히 홀렸던 기분이었다.

- ^그락.

나는 간신히 내렸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흔들렸다. 옆을 바라봤다.

수녀와 시선을 마주쳤다.

"마법, 이었던 거요?"

가면 뒤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유산이야. 발굴한 옛 시대의 마법이지. 뭐, 비슷하네."

여우 가면을 쓴 수녀가 풍뎅이에 몸을 기댔다.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어때? 좋았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았다. 황홀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수녀가 웃었다.

여우 가면이 완전히 얼굴을 가리고있었지만, 그렇게 느껴졌다. 빙긋 미소를 짓는다고 생각했다. 가면 뒤를 보고 싶었지만 자제했다.

누군가 가면을 쓸 때는 이유가 있다.

함부로 벗기지 않는 것이 좋다. 게다가 그녀는 암살교단, 레드 플레이크에소속되어 있다. 가면 뒤를 보면 곧바로 죽어야 할지도 몰랐다.

끝도 없이 펼쳐진 평이를 가만히 바^봤다.

그녀와 나는 잠시 침묵했다. 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여기서. 쉬어 가는 거요?"

"응? 아니?"

수녀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검은 장갑을 끼었다. 자연스러운 태도로 풍뎅이의 뒤로 돌아갔다.

"이제 밀어야 돼. 연료 아껴야 되거든."

"어디서 충전할 수도 없어. 한 방울이라도 아껴야 돼. 얼른 밀자구?"

한나절이 지났다.

- 달그락! 달그락!

충실히 풍뎅이를 밀었다. 내가 할 수있는 건 이 정도였다.

처음에는 이걸 밀면서 간다기에 무척당황했지만, 후작에게서 구출해 준 은혜를 생각하면 몇 개월이라도 밀 수^을 것 같았다.

토를 달 일은 아니었다.

옆에서 함께 풍뎅이를 밀던 수녀가 짧게 해설했다.

"이 녀석 이름은 페르시우스야. 수륙양용활공기. 공학의 예술이지."

공학.

〈엠버는 공학의 도시란다. 〉

기스-제-라이의 말이 떠올랐다.

"엠버에서는 이런 것도 만들어 낼 수있다는 말이오?"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이 정도의 능력이 있었다면.

제국의 침공에, 첫 번째 희생양이 되어 무력하게 멸망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수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잃어버린 기술이야. 깊이 파묻혀 있던 기술들. 지금은. 꿈도 못 꾸지. 장치는커녕, 연료도 어떻게 만드는지 모르는데, 뭘."

"이런 게. 엠버에 얼마나 있는지 물어봐도 되겠소?"

수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물어?"

"제국 황제가".

제국 황제가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고말하려다, 순간 멈칫했다.

황제는 내 눈앞에서 죽었다. 수녀는 그 증거를 가지고 엠버로 돌아가는 중이다.

"응?"

"아니오. 그냥.

일단은 지켜봐야 했다.

104화 벌레들의 무덤 (3)

***************************************************

삭막한 황야 위로 밤빛이 희미하게 부서진다. 냄새도 소리도 없다. 한포기 풀은커녕 지표가 될 만한 바위조차 보이지 않는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미약하게 피어오르는 흙먼지 소리가 이곳의 유일한 배경음이었다.

걸을수록 주위는 점점 스산해졌다.

나와 수녀까지도 이 낯선 정적으로 잦아드는 것 같았다.

'이런 장소가 있었나?' 이런 장소라고 했다. 하지만 그건 바르지 않은 용어다. 내가 아는 장소 따위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얼음 계곡에서 일 년.

미로 동굴, 망령의 납골당, 에라스트 근처의 산에서 3년씩을 보냈다.

좁디좁은 에라스트 근방 지리 정도가 내가 아는 전부였다.

그 뒤로는 마왕군에 의해, 거대한 무리의 일부가 되어 이리저리 끌려만 다녔다. 많이 다니긴 했다. 하지만 보이는 건 오직 같은 해골들의 뒤통수뿐.

그 안에서 숫자가 되어 살아갔다.

한 덩어리가 되어 흔들리면서, 7년을 생각 없이 홀려 보냈다. 아무 생각이 없어야 견딜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회상해 보니 문득 의문이 솟구쳤다.

'왜 도망치지 않았을까?'

나를 담당한 녀석의 통제력은 그렇게 강력하지 않았다. 네크로멘서였지만, 기스-제-라이와는 태양과 반덧불 차이 정도였다. 도망치려면 얼마든지 벗어나서 혼자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마왕군에서 벗어나 뭘 할지대안이 전혀 없었다.

도망친다면 예전처럼 산속에서 야생 짐승에게 장난감처럼 부서져서죽거나, 별거 아닌 최하급 모험 자에게도 연습용 타깃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냥 그 속에 묻혀 살았다.

'잘한 선택이었을까.

하지만 지금은 점점 달라지고 있다. 죽음을 반복할 때마다, 빠른 속도로 내가 접하는 세계가 크게 넓어지고 있다.

네크론.

T&T.

푸르손의 추종자들.

제국 4대 검주.

기스-제-라이.

레드 플레이크.

'그래. 지금부터 얻는 정보들이.

〈진짜H1 가까울 거야.'

멍하니 살아왔던,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살아왔던 세월과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정보들이 머릿속으로 속속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집중하자.'

새로운 장소로 가고 있다. 최대한 많은 걸 알아내야 한다. 모든 게 단서가 된다. 예전처럼 생각 없이 시간을 흘려보낼 수는 없다.

이번 생은 여러모로 특별하다.

전설로만 전해지던 네크로멘서에게놀라운 권능을 전수받았다.

황제 암살을 경험한 데 이어, 제국4대 검주 중 하나라는 후작에게 납치당했다.

하지만 기적적으로 레드 플레이크의 암살자에게 구출되었다.

질적으로 다른 경험이 계속되고 있다. 더 신중하고 집중해야 한다.

- 달그락. 달그락.

풍뎅이를 밀며 생각했다. 이번 생을 최대한 오래 지속하는 게, 향후의 행보에 엄청난 도움이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지금도 새로운 장소를 지나가고 있다.

그렇다면.

'탐지.'

주위를 살펴서 하나라도 더 정보를 습득하고 싶었다.

[탐지 Lv.2]

[활성 상태로 전환합니다.]

[스킬 효율 400% 증가.]

[현재 체력 기준, 초당 0.0014%의체력이 소모.]

메마른 땅이 느껴졌다. 고요하다.

밤이 내린 황야는 끝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다.

그 순간.

옆에서 여우 가면을 쓴 수녀가 나를 흘끗 바라보고 말했다.

"대단하네?! 레인저였어? 〈깨끗한 눈〉이 울고 가겠어. 이 거리에서 곧바로 탐지를 켜다니."

- 달그락.

작게 움찔했다.

'깨끗한 눈'은 자유 연합의 최정예레인저 집단이다.

제국에 맞서 마지막까지 항전하고,

도망쳐서 마왕군과도 싸웠다던 유명한 자들.

물론 그런 자들과 비교됐다는 것에 놀란 건 아니었다.

'스킬을. 곧바로 알아냈어?'

첫 번째.

내가 탐지를 사용했다는 사실.

그걸 수녀가 곧바로 알아차린 사실에 흠칫했다.

두 번째로.

'뭐가 대단하다는 거지?'

그 부분을 알기 어려웠다. 우연히 탐지 스킬을 썼지만, 정말로 앞에 뭐가 있을지도 모른다.

탐지를 활성화한 채 집중했다.

최대한 넓은 범위를 느끼고, 보려했다.

'없는데.'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방에 기이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는 평야.

그냥 나를 놀린 것 같았다.

집중을 유지하고 있을 때, 곁에서수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엠버에 가 본 적 있어?"

엠버.

솔직히 말한다면 믿지 않을 거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기도 싫다. 그래도 날 구해 준 여자다.

"1157년까지는 가 본 적 없소."

몸을 딱딱하게 굳히고, 일부러 애매하게 말했다.

1157년.

그 이후였다.

군 단병으로서 사역당하며, 그곳을침략했던 것은. 잿더미와 시체밖에 남지 않은 엠버에 가 본 것은.

여우 가면이 쿡, 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이 1147년인데? 친구, 무슨엉뚱한 소리를 하는 거야?"

"1157년의 엠버까지는.

나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아하하하. 해골 친구, 누굴 꼬시려고 말을 그렇게 재밌게 해?"

"그래서 깃스가 좋아한 건가. 이정도면. 두상도 예쁘고 말이야."

수녀가 내 반들반들한 머리를 쓰다듬으며 큭큭 웃었다.

'깃스? 혹시 그게 기스-제-라이의 애칭인가.'

하지만 직접적으로 캐어묻지는 않았다. 대신 다른 질문을 했다.

"별빛. 청여우, 당신은. 엠버에머물 생각이오?"

"글쎄."

역사가 예전과 같이 흘러간다면,

여우 가면의 수녀는 몇 개월 안에 죽는다.

전쟁 첫 해.

제국의 침공에, 엠버는 얼마 버티지 못했다고 전해지니까.

나는 그녀에게 자못 엄숙하게 경고했다.

나를 구해 준 상대니까.

"??? 분명히 말하겠소. 올해는 다른 곳에 있는 게 좋을 거요."

"푸하핫! 왜? 우리 해골 친구, 방금 완전 진지했어?"

그때였다. 멀리 저편의 어둠이 조금씩 짙게 느껴졌다.

진동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 쏘이이이이이?]이이잉. J'벌레?'

윙윙거리는 소리를 느꼈다.

소리는 탐지 범위의 끄트머리에 걸쳐 있었다.

'수백. 수천. 수만.

그 이상이었다.

측정할 수 없는 숫자의 조그마한 날갯짓, 주파수들이 멀리서 느껴지기 시작했다.

- 위이이이이잉! 위이이이이잉!

- 차차차차차차차차차차찻.!

저편의 짙은 어둠이 조금 더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섬뜩했다.

반사적으로 탐지 스킬에 한층 더집중했다. 새까만 어둠의 결 하나하나가 느껴졌다. 셀 수 없는 무수한금속음이 들렸다.

천.

이천.

오천.

그 정도밖에 느끼지 못했다. 그 숫자가 극히 일부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나는 수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수녀가 먼저 말했다.

"벌레들이 야."

"아까 말한 게 혹시. r

"응."

수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숫자를 다 세지도 못하겠소."

"몇 마리까지 셌어? 1억? 2억? 그것보다 좀 더 되는데-."

그 말에 깜짝 놀라 풍뎅이를 밀지도 못하고 멈칫거렸다.

수녀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수억 마리의 벌레 떼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셈이었다.

"수억 마리라니.

"저런 군체 숫자가 이 부근에 수백은 될 꺼야."

숫자 계산이 되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멈췄다. 아직 이쪽으로 다가오려면 몇 분은 넘게 남은 것 같았다. 하지만 풍뎅이를 미는 속도로도 망치기는 곤란했다.

"저게 뭔지. 알고 계셨소?"

수녀가 피식 웃었다.

"B마이너14 지역. 보다시피 황량한 평야지만, 우리끼린 '붉은 늪.'이라고 부르지. 이곳을 맴도는 기계 부유물들이야."

"기계라고?"

"그래. 아까 봤던 풍뎅이들 같은.

그런데 좀 달라."

수녀가 말을 이었다.

"훨씬 작고. 폭발하는 대신 전부다 갉아먹거든? 돌이든 뼈든 안 가리구. 만나면 굉장히 힘들 꺼야."

- 달그락.

나는 무심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다양하게 죽어 봤지만, 벌레 떼에게 갉아 먹혀서 죽는다는 건 상상해 본 적 없었다.

"수억 마리의 벌레라니. 우리는 왜 여기로 온 거요?"

"아하하하하핫.

웃음소리는 뱃속에서부터 깊게 터져 나오는 것이었다. 수녀가 내 팔을 잡고 말했다.

여우 가면의 붉은 두 눈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 너 버리러 왔어. 질투 나서.

내 깃스를 버리고 혼자 살아남은 군 단병이잖아? 총애는 잔뜩 받은 주제에. 마지막 뼈 한 조각까지 먼지로 만들어 줘야지."

순간, 바닥 깊은 곳을 흐르는 지하수까지 얼어 버린 것 같았다.

"에에? 정말 속았어어? 농담이야.

코드네임 별빛청여우, 입회의 의무에 충실하겠습니다! 헤햇."

농담이 심한 여자였다.

농담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얼어붙어 있다가 몇 초가 지난 후에야 대꾸할 수 있었다.

"그럼 도망갑시다. 빨리 이 풍뎅이에 올라타서.!"

수녀가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뭐, 그럴 것까지는 없고. 연료 충전해 놨다가 나중에 써야 돼."

"그럴 게 없다니, 당장 죽게 생기지 않았소. 저런 게 대체 왜. 어디서 나타난 거요?"

그때 였다.

"이거나 좀 볼래?"

수녀가 품에서 작은 판을 꺼냈다.

손에 쏙 들어오는 판이었다.

- 타닥. 타다닥.

그 판을 몇 번 두드렸다.

풍뎅이의 두 눈에 파란빛이 들어왔다.

아까처럼 부우우우응, 하는 기괴한 진동은 울리지 않았다. 허공에 매끈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S.G.I.S. - 절전모드로 기동 중.]

[지형 정보 서비스를 시작합니다.]

[현재 위치 인식. 저장하신 API 배율을 로드 합니다.]

[MapType 객체는.]

수녀가 짧게 말했다.

"유산만?"

[사용자 지정 프로젝션을 구현합니다.]

풍뎅이의 두 눈에서 비치던 파란빛이 모아졌다. 허공에 반투명한 창이 생겨났다.

'지금 누구랑. 얘기를 한 거지?'

하지만 질문을 할 틈은 주어지지 않았다. 수녀가 반투명한 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봐 봐. 여기 동그랗게 표시된 게이 녀석이야."

곧게 뻗은 손가락은, 반투명한 창위의 파란색 점을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풍뎅이 엉덩이 부분을 툭툭 두드렸다.

나는 수녀에게 물었다.

"지도인 거요?"

"응. 반경 16km."

파란 점 주위엔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나타나지 않소?"

"절전모드거든. 맵타입 객체를 유산만 표시해서 그래. 뭐, 이 근처에 생명체 따위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리고. 여기."

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가 힘들었지만 일단 수녀의 손놀림을 따라갔다.

수녀는 북쪽에 있는 거대한 붉은 원을 가리켰다.

자세히 보니 원은 아니었다. 안쪽으로 갈수록 점점 더 붉어지는 소용돌이였다. 소용돌이는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반투명한 허공에 표시되어 있는 걸보는 것만으로도 어떤지 섬뜩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붉은 소용돌이를 보고 물었다.

"이게. 저 벌레 무리요?"

수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것들은 여기에 구현되지도 않았어. 유산만 나와."

그녀는 잠시 후 말을 이었다.

"붉은색은. 등록되지 않은 파장.

즉 미발굴 유산을 뜻해. 일단, 우리는. 이 소용돌이를 '1만 배'라고 부르고 있어."

"1만. 배?"

"지금까지 발견된 유산 중에 가장 강력한 파장보다, 수치가 1만 배 강하거든."

나는 뒤에서 밀고 있던 풍뎅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이 풍뎅이도 '유산'이라고 하지 않았소?"

"개랑은 3만 배."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눈앞의 여우가면이, 무슨 말을 하는지 조금씩 짐작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풍뎅이만 해도 황당할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말보다 열 배는 빠르다. 심지어 날개를 펼쳐서 하늘을 활공하는 것도 가능하다.

한눈에 봐도 방어력이 만만치 않아 보인다.

기동성 하나만 생각하더라도.

활용도가 대체 얼마나 될지 떠오르는 것만 해도 까마득하다.

게다가.

새로운 능력이 양파처럼 한 꺼 풀한 꺼풀 계속 드러나고 있다.

"터무니없지 않소."

터무니없다.

이것의 3만 배라니.

어떤 기준으로 봐도 그 숫자는 어처구니가 없다. 여우 가면의 수녀가 어깨를 으쪽한다.

"그러니까, 이 근방 50km가 전부 저런 기계 부유물로 가득한 거지.

유산이 내뿜는 파장에 끌린 거야.

이쯤 되면, 뭐가 있는지 우리도 솔직히 상상이 안 가."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제국에서는 그냥. 그대로 저 걸보고만 있소? 이 넓은 땅을 못 쓰고있었다는 말이오?"

그때 였다.

- 위이이이이이이잉.!

105화 벌레들의 무덤 (4)

***************************************************

- 차칵차칵차칵차칵!

- 쿠구우이이이이잉!

점점 더 가까이 오고 있었다.

셀 수 없는 거대한 날갯소리가 어둠을 뒤덮었다. 폭력적일 정도로 강렬한 진동이 전해진다.

찰칵거리는 무수한 마찰음이 온몸의 뼈를 울린다.

몸을 바싹 움츠렸다.

고작 벌레 떼의 진동 소리에 이 정도로 긴장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아, 잠시만. 벌레 좀 쫓아낼까?"

수녀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잠시 넣어 두었던 작은 판을 몇 번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허공에 반투명한 지도를 만들어 냈던 판이었다.

[페르시우스 VHA마이너111 고주파 발산 모드를 작동합니다.]

이번에는 음성이었다.

풍뎅이의 외부에서, 매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지이이이잉.

날개가 넓게 펴지기 시작했다.

- 투칵.

활공할 때와는 달리, 양 날개가 90도까지 완전히 펼쳐졌다.

- 피리리리리릿.!

직각으로 펴진 날개가 기이한 음파를 토해 내기 시작했다.

날개 끝에서, 가운데서, 그리고 진동하는 풍뎅이의 몸 전체에서.

들릴락 말락 하는 고주파가 넓게 퍼져 나왔다.

공기에 새로운 진동이 섞이기 시작했다. 저쪽에서 울려오는 벌레 떼의 진동과 비슷하면서도, 그것을 상쇄시키는 소리였다.

상쇄는 공기 중의 진동에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저 앞에서 빠르게 다가오던 새까만 어둠이, 조금씩 멀어지며 우릴 비껴가기 시작했다.

당신이 어떤 현상에서 논리를 찾아낼 수 없다면 쉽게 감상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나는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에 압도당했다. 멍하니 서 있는 내게 수녀가 친절히 설명을 들려주었다.

"나름대로 섬세한 기계들이야. 싫어하는 파장을 발사해 주면 돼. 우린 중심부로 가는 것도 아니고, 슬쩍 비켜 가는 거니까."

설명은 기적의 신비성을 훼손하지 못했다. 이해하지 못하는 대목이 너무 많아서인지 모른다.

나는 잠시 침묵의 시간을 보내다,

간신히 한 단어를 뱉어 냈다.

"마법"

황제를 호위하던 두 마법사보다,

눈앞의 이 여우 가면이 하는 행동들이 훨씬 더 마법 같아 보였다.

수녀가 피식 웃었다.

"헤에, 제대로 설명했는데? 설명이 마음에 안 든 거야?"

"마법사.

"뭐, 그러시든지. 그런데 아까 무슨얘기 했었지?"

나는 그제야 약간 정신을 차렸다.

"제국에서. 이런 땅을 가만히 두냐는 이야기였소. 황폐한 채로."

"그래, 말 잘 했네. 탑에서 여길 조사한 적이 있어. 탑주급 '마법사'들이 전부 몰려왔지."

"탑주급 마법사들이?"

"응. 실력자들을 추려서 왔어. 개네도 궁금하잖아? 왜 이런 일이 생기나. 기계 부유물들을 얼리고 태워서, 잠깐이나마 가운데 도착할 수 있었어. 그런데 말이야."

잠시 뜸을 들이던 수녀가, 가면 쓴 얼굴을 기웃했다.

"아무것도 없었어. 그냥 땅이야!"

그녀는 흙바닥을 발로 찼다.

진동이 울리지는 않을 정도로 가볍게 찼지만 메마른 먼지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흙이 무릎까지 피어오르는 배경 속에서 여우 가면은 나를 바라보고 말했다.

"이런 땅 말이야. 텅텅 비어 있었다고."

나는 입을 닫았다. 전혀 알지 못하는 주제다. 단호한 침묵만큼 현명한 태도는 없다.

"그리고 저 부유물들. 벌레들이 곧장 다시 생겨났어. 마법사들은 잠깐 방문하는 데 만족해야 했지. 도망쳤어. 그래도 탑주급이잖아? 다들 잘살아서 빠져나갔지."

여우 가면의 수녀는 어깨를 으쪽하고 말을 이었다.

"그 뒤로 여기는 조사하지 않아.

기록에서도 없앴고. 〈탑〉이 도망간 게 부끄러운 거지, 뭐."

하지만 그들이 한심하거나 초라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수억 마리로 이루어졌다는 기계 벌레의 군체群體.

그 끄트머리를 살짝 탐지하고 나자, 오히려 제을 퇴치하며 가운데로 향했다는 아쥬라의 탑주들이 경이롭게 느껴졌다.

수녀가 안타까운 어조로 말했다.

"사실 우리가 먼저 그곳에 가 봤어야 했는데.

레드 플레이크를 말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다른 질문을 꺼냈다.

"당신들은. 그곳에서 뭘 어쩌실 작정이었소?"

"어쩌긴. 파내야지!"

"파낸다고?"

"텅 빈 황야인데, 감지되는 파장은'1만 배'야. 뭐가 있으면 지하에 있을 거 아니야? 수백 미터라도 파고내려가야지, 어쩌겠어?"

"놀라지 마, 친구. 해골 친구한테 삽질하란 소리는 안 하니까."

수녀는 실없이 킥킥거리며 웃다가말을 이었다.

"여긴 곧 자유의 땅이 될 거야. 그런 다음, 제대로 깊이 파서 조사해볼 생각이야."

그녀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화들짝 고개를 돌려 되물었다.

"자유의. 땅이라고?"

수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방해야지. 안 그래?"

"해방.?"

"압제와 특권. 계급으로부터 이 가엾은 자들을 해방시켜야지."

수녀가 뒤를 길게 돌아봤다.

활공으로 지나쳐 왔던 산줄기가 보였다.

그 너머에 넓게 펼쳐져 있을 땅과,

서로를 욕망하고 착취하며 살아가고 있을 인간들이 상상됐다.

"전쟁을 벌이겠다는 거요?"

"엠버와 연합이 선공한다면, 승산은 충분하지."

"제국을 이긴 연합이. 엠버를 그대로 둘 거라고 생각하시오?"

섬나라 엠버는 10만 제곱킬로미터를 조금 넘는 도시국가다. 좌우의큰 세력에 비하자면 면적도 인구도1/10이 되지 않는다.

제국도 연합도, 단독으로 엠버를멸망시키는 게 가능하다. 서로 손을 잡을 필요도 없다.

하지만 제국과 연합이 만들어 낸,

힘과 이념의 균형 사이에 그들은 제3 지대로서 살아남아 왔다.

"엠버는 균형 사이에서 산다. 그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버텨 온 거 아니오?"

"뭐, 그렇지. 자세히 아는 거 있어?"

"없소."

수녀는 피식 웃었다. 황이는 넓었다. 시간은 많았다. 오직 둘뿐인 밤이었다. 그녀는 조금 수다스러워지기로 했다.

"최근에 있었던 일부터 말해 볼까.

엠버로 도망가는 범법자들에 지긋지긋해진 연합이 수사관을 강제 파견한다고 협박했을 때.

엠버는 제국 도시개발국장과 공공연하게 접촉했다.

그리고 미스릴 원석을 받는 대가로 토목공학 전수 협약을 맺었다.

제국이 병기 공학까지 억지로 얻어내려 했을 때, 엠버는 연합 의회 국방위원들을 돈으로 구워삶는다.

신형 기갑 골 렘의 위력을 설명한 뒤, 3기를 제국과의 국경에 좋은 값으로 대여 배치했다.

한쪽이 엠버를 향해 칼을 빼 들면,

다른 쪽과 가깝게 움직인다. 그러나 결코 퍼 주는 장사는 하지 않는다.

담당자를 돈으로 구워삶거나, 암살로 협박해서 언제나 원하는 바를 성취한다.

"제국. 연합. 양쪽 다 우리가 조종하는 인형으로 만들어서 살아왔지.

우리는 쏙 빠진 채로, 그들의 피나 잔뜩 흘리면서 말이야."

이야기를 듣고 나자 의문은 더 커졌다.

"그 좋은 걸 왜 관두겠다는 거요?"

"실이 끊어졌어."

수녀가 말을 이었다.

"제국이 제어되지 않아. 대어 놓은 선들이 이상하게 전부 다 잘려 나가고 있어. 일단 엘튼 클레멘스는 죽였지만, 이걸로 효과가 없다면. 해가 넘어가기 전에 먼저 쳐야 해."

"당신들도 황제의 죽음을 원하면서, 그걸 또 자유 연합에 비싸게 팔아넘긴 거요?"

"큰 건수잖아. 생색은 내야지."

그 뒤로 수녀는 엠버와 연합이 공조해, 제국을 침략하게 할 계획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했다.

'이런 거였나.'

그동안 알고 있던 역사가 완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T&T 이너 서클은 제국이 전쟁을 준비하는 거라고만 했는데. 이런 건 몰랐나?'

연합과 엠버가 제국을 먼저 침공하려는 계획.

알았다면, 그때 이야기하지 않았을 리 없다.

숨기진 않았을 거다.

심지어, 섬기는 마왕 푸르손에 대한 얘기까지도 전부 나왔으니까.

'녀석들도 몰랐어.'

연합이 먼저 제국을 치는 공작.

7인으로 이루어진 암살교단, 레드플레이크 내부의 극비 정보다.

큰 그림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거대한 단서들이 너무 많이 주어지고 있었다.

'전쟁.,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10년에 걸친 대전쟁.

전쟁을 막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적은 없었다.

하지만.

전쟁을 막으려 한다고 해도.

황제만 저지하면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여우 가면의 수녀가 소속된 조직.

레드 플레이크와 엠버, 연합까지저지해야 한다.

'어려운 얘기군.'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 뒤로 하루가 지났다.

여우 가면의 수녀는 내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풍뎅이 모양의 '유산'.

페르시우스에 대해서도 많은 걸 들었다.

"충전식이야. 시동 꺼 놓은 상태에서 별빛을 충전해야 돼."

"별빛이라면. 낮에 끄는 건 무슨의미가 있소? 그때는 그냥 운전하는 게 낫지 않을지."

"태양도 별이거든, 친구."

"태양이. 별이라고? 농담이 너무 심한 거 아니오. 별은 밤에 나오고, 태양은 낮인데."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

수녀는 나를 흘끗 바라봤다. 그러고 체념한 듯 말했다.

"그래, 내가 잘못 말했어. 태양 빛도 받고 별빛도 받아야 해."

살짝 놀림 받는 기분이 들었다.

"으음.

어색한 침묵 속에서 나는 한 가지질문을 떠올렸다.

"그런데 말이오."

나는 그동안 줄곧 궁금하던 사안을 물었다.

"그. '1만 배' 말이오."

"응, 친구. 얘기해."

"찾게 된다면, 누구나 쓸 수 있는거요?"

수녀가 똑바로 나를 쳐다봤다.

"왜? 갖고 싶어?"

"갖고 싶어?"

나는 침묵했다.

수녀가 한 글자 한 글자씩 씹어 뱉듯이 말했다.

"갖게 해 줄 수 없어."

어둠이 싸늘하게 내려앉았다.

"그걸 절대로, 네가 갖게 해 줄 수없어. 유산은 레드 플레이크가 관리한다."

- 달그락.

나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헤헤헤.

수녀가 다시 배시시 웃었다.

"에이, 다른 사람이 관리해 봐이^

골칫덩이라구. 이해가 상당히 중요해. 함부로 사용하다간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몰라. 우리한테 맡겨 둬."

그 대화 뒤로.

나는 그녀에게 별다른 질문을 하지못했다.

잠깐 보여 준 수녀의 태도에 완전히 압도된 탓이었다.

수녀가 이런저런 농담을 하면서 분위기를 풀었지만.

이틀이 지나고 나서야, 그녀에게먼저 말을 걸 수 있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아무래도 참기 어려운, 직접적이고실용적인 질문이었다.

"우린 지금 어딜 가는 거요?"

여우 가면은 고개를 앞으로 푹 숙이더니, 다시 나를 돌아보며 외쳤다.

"하아. 너무 늦게 질문하잖아!"

"신뢰했다고 생각해 주시오."

"당연하잖아. 엠버로 가지. 전쟁 계획까지 말해 줬는데 친구를 어디로 데려가겠어. 제국 수도라도 갈까?"

엠버행行.

물론 짐작했다.

하지만 짐작하고 있었기에 질문한 것이다.

"그러면 방향이. 이쪽이 아니지 않소?"

그녀는 종종 허공에 반투명한 지도를 띄웠다. 그걸 볼 때마다 의문이더 확고해졌다.

엠버로 가려면.

남쪽으로 가야 한다.

제국과 자유 연합을 연결한 길고 좁은 카브롤타 지협地賊으로 가야한다.

지협의 중간에서 배를 탄다.

북쪽으로 근해近海를 조금 올라가면 나오는 섬.

그곳이 엠버메어다.

"남쪽으로 가야 할 텐데. 계속 동쪽으로 가고 있는 것 같소만."

나는 지레짐작으로, 덧붙여 다른 것까지 물었다.

"혹시 해안선을 따라서 쭉 내려갈 생각인 거요? 그럼 너무 돌아가는 게 아닌가?"

"으응? 해안선?"

수녀가 의아한 둣 되물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우린 바다를 건널 거야."

106화 벌레들의 무덤 (5)

***************************************************

- 덜컥.

나는 살짝 입을 벌렸다. 그건 상상하지 못한 루트였다.

"바다는.!"

"헤헤. 포악한 녀석들이 잔뜩 기다리고 있다고?"

"당신도 알고 있소?"

"그럼. 내가 직접 건너왔는데."

"그런데도 바다로 나간다는 말이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20마일 정도의 근해를 넘어가면,

바다는 상상을 뛰어넘는 포악한 악의로 넘쳐 난다고 들었다.

그건 죽은 지식이 아닌 단단하고 검증된 상식이었다.

무수한 증인과 기록을 도처에서 만날 수 있었으니까.

그때 였다.

"친구."

수녀는 얇은 장갑을 낀 손으로 내어깨를 덥석 잡으며 말했다.

"이 풍뎅이, 대체 왜 밀고 있다고 생각해?"

"나중에 달리려고. 당신 말대로 충전하고 있는 거 아니오?"

"달릴 거면 지금 달리면 되잖아.

틀렸어. 달리기 위해서가 아니야. 바다를 가르기 위해서라고."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혹시. 기계 벌레들을 쫓던 것처럼, 흉포한 바다 녀석들도 쫓을 수있다는 이야기요?"

"그래. 너무 큰 놈은 어렵지만.

개네도 싫어하는 건 마찬가지야. 그리고 지금은, 큰 놈들 대부분이 북쪽에서 먹이를 찾을 시기고."

"북쪽?"

"크라켄이 제일 좋아하는 클램토푸스(Clamtopus)가 지금 산란기거든.

배에 알을 잔뜩 채우고 북쪽으로 가고 있을 거야."

여우 가면이 쏟아 놓는 지식에 놀라서 얌전히 듣기만 했다.

그녀와 조금 더 적극적으로 대화룰, 아니 수강受講을 했으면 좋았을 거라는 사실을 사흘 만에야 비로소 분명히 깨닫고 있었다.

조금 더 일찍 깨달았다면 더 많은걸 배울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도 늦은 건 아니었고,

나는 수녀의 말을 귀 기울여 들었다.

샤크월 Sharkworm.

오클리 언 Orkallion.

모칵스 Moqax.

스코그모어 Scogmowr.

이름도 생소한 녀석들의 특징에 대해 하나씩 배워 나가고 있을 때.

- 철썩. 철썩.

파도 소리가 뼈에 닿았다.

눅눅한 습기가 닿은 게 먼저인지도 몰랐다.

"도착한 것 같은데.

"그래. 5km 정도 남았네."

탐지 스킬은 이미 Lv.5.

무수한 기계 벌레들을 끊임없이 포착해 왔던 덕분이다.

'최대 포착 숫자를 유지하면. 숙련도가 가파르게 오른다는 걸 처음 알았지.'

- 철썩. 철썩.

파도 소리가 점점 더 선명해진다.

소금기를 머금은 짠 바람이 뼈마디사이사이로 불어온다.

우리를 반기듯 해안에서 흔들리는 배가 보였다.

어선이 있을 만한 위치는 아니다.

정박된 배는 단 한 척.

하지만 크기는 충분했다.

'스무 명은 탈 것 같은데.

수녀가 외쳤다.

"선장-!"

"아, 오셨습니까?"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하늘.

그 아래로.

거친 질감의 진청 코트를 입고, 커다란 항해용 모자를 쓴 남자가 배에서 걸어 나왔다.

'인간.!'

- 달그락.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아예 내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오직 여우 가면의 수녀만 똑바로 바라보고 다가올 뿐이었다.

가까이 온 그가 모자를 벗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거칠거칠한 질감의 진청색 코트를입고, 검은색 모자를 쓴 중년 남자가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아, 이제 오셨습니까?"

"응! 출발하자구."

남자가 하늘을 슬쩍 바라봤다.

"날씨는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지. 딱 좋네. 선장은?"

"저야 근해까지만 데려다 드리니괜찮습니다만, 손님께서 내리실 때좀 어두울 겁니다."

"상관없어. 가자구."

선장은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모자를 벗자 짙은 금발이 흩날렸다.

나이는 40대 초반 정도.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남자였다.

어깨가 넓다. 슬쩍 드러난 팔뚝에서 근육이 잔물결처럼 움직였다.

상체만이 아니었다. 몸 전체가 균형 있게 발달되어 있었다. 제대로 된 뱃일로 만들어진 근육 같았다.

'특이한 인간이군.'

수녀에게 가면을 벗기를 요구하지도, 움직이는 해골인 나를 보고 공격하려 들지도 않았다.

심지어 묻지도 않는다.

선장이 가교를 내릴 때, 곁에 선 수녀에게 물었다.

"저자는 누구요?"

"선장이지 누구겠어? 근해近海는 엄청 평화로우니까, 괜히 연료 쓸거 없이 남의 배 타고 가자고."

"근해까지라면.

"응. 해안에서 20마일."

"고작 20마일인데.

저런 배를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냐는 물음이 생략되어 있었다. 수녀는 풍뎅이를 톡톡 두드리며 대답했다.

"이거 충전하기 엄청 어렵거든? 아껴야 잘살지."

"그리고 한참 더 가야 돼."

수녀가 친절하게 설명을 이어 갔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허공을 죽그었다.

"후작에게서 널 여기까지 직선으로 데려왔잖아. 엠버는 위도 상으로 좀더 아래야. 배 타고 일단 남쪽으로좀 더 가야 돼. 해안 따라 6시간은 탈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교를 내린 선장이 다가왔다.

"짐 옮기겠습니다, 손님."

그는 근육질의 몸과 어울리지 않는 살가운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타고 온 풍뎅이를 번쩍 들어 갑판 위에 올려놓았다.

"서비스 좋네. 잔금 먼저 줄게."

- 짤랑!

수녀가 건넨 돈을 받아 든 선장이 더없이 밝은 표정를 지었다.

"오늘도 저희 크루즈 서비스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수녀는 그 말에 즉즉 대며 웃었다.

"와, 그거 어디서 봤어?"

"저번에 이용하신 교단 수사修士분 책자에 나와 있던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 사용하는 거라더군요. 그럼 운항 준비하겠습니다."

선장은 갑판 가운데로 다가갔다.

쇠막대가 교차로 박힌 원뿔 막대를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뿔은 다 자란 소나무 정도의 굵기였다. 쇠막대의 길이는 1미터가 넘었다.

- 끼기기긱. 끼기기긱.

네 명은 달라붙어야 할 만한 뿔이 간단히 돌아갔다. 뿔에 감긴 줄이 당겨졌다. 쇠닻이 올라왔다. 혼자 닻을 올린 선장은 돛도 혼자 폈다.

- 파라락!

'평범한 인간은 아니군.'

수상한 배가 출발했다.

순풍을 받은 돛이 펄럭였다.

키를 잡은 선장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바람이 조금 쌀쌀하다.

선장이 걸친 진청색 레인코트가 날씨와 어울린다. 다시 고개를 돌려수녀를 바라봤다.

"저 인간. 왜 나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는 거요?"

수녀는 세이론을 꺼내 손가락으로한 번 튕겼다.

팅, 하는 경쾌한 소리가 나며 제국의 금화가 허공에서 돌았다. 햇빛이 어지럽게 반사됐다.

"반짝이는 걸 믿으니까. 상당히 세련된 인간상이지."

아직 가면을 벗지 않은 수녀는 제국의 금화를 내 손에 쥐여 주었다.

"거래하기 좋은 상대야. 실제로 단골이기도 하고."

햇살을 받았기 때문인지, 수녀가쥐고 있었기 때문인지 금화에는 약간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나는 세이론 하나를 손에 쥔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수녀는 객실로 들어갔다.

능숙하게 키를 다루는 선장을 멍하니 서서 잠시 바라봤다.

어느 쪽에게든.

무언가 말을 걸어 묻고 싶은 충동이 올라왔다. 하지만 나는 침묵으로 절제를 지켰다.

항해는 순조로웠다.

3일 동안 황야에서 풍뎅이를 민 터라 피곤했는지 수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자고 있는 건지 눈만 감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나도 근처에서 몸을 기대고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항해는 순조로웠다.

하늘이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했지만, 심한 풍랑은 치지 않았다.

부슬비가 살짝 내리는 정도였다.

- 쿵.

작은 소리와 함께 배가 흔들렸다.

큰 흔들림은 아니었다.

수녀가 곧바로 눈을 떴다. 나는 그녀를 따라 갑판으로 나갔다.

진청색 레인코트를 입은 선장은 굳건히 키를 잡고 있었다.

선장이 뒤를 돌아보고 말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파도에 살짝 부딪혔습니다."

수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쪽 날씨는 조금 험하네.

투둑. 투두둑 갑판에 비가 조금씩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내게 수녀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 페르시우스의 항해능력은 엄청나니까."

객실에 돌아간 지 이십 분쯤 지난 뒤였다. 빗줄기가 점차 굵어졌다.

갑판에 빗방울이 거세게 튀는 소리가 울렸다. 파도가 본격적으로 거세지고 있었다.

수녀가 소리쳤다.

"선장!"

- 쿠궁!

뱃전에 부딪치는 파도 때문에 듣지못했는지, 선장의 대답은 없었다.

"우리는 이쯤에서 내린다! 날씨가생각보다 험하네. 수고했어."

- 투두둑! 투둑! 투두두둑!

- 콩! 콩! 콩!

빗방울 부딪히는 소리에 무언가 괴상한 소리가 섞여 들렸다. 수녀가 객실 밖으로 나가며 소리쳤다.

"어이, 선장! 키 안 돌려? 당신은 돌아가야지?"

- 번쩍!

- 우르르롱!

천둥이 약하게 쳤다.

진동이 울렸다. 배가 휘청거릴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수녀를 바라봤다.

"이 정도는 뭐. 괜찮아. 안심해.

어이! 선장! 용감하네?"

선장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여전히 바깥에 키를 잡고 홀로 서있었다.

- 콩. 콩. 콩.

빗방울이 갑판에 부딪히는 소리도,

뱃전에 파도가 부딪히는 소리도 아니었다.

선장은 돌아보지 않았다.

진청색 레인코트 안에, 몸을 조금 움츠린 채로 여전히 서 있었다.

'키를 한 손으로. 잡고 있나?'

작은 파도가 갑판 위를 휩쓸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선장의 머리를 가리고 있던 커다란 항해용 모자가 공중으로 날아갔다.

그 아래로 회청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손은 가느다란 회청색머리칼을 뒤로 천천히 쓰다듬었다.

'저건.!'

나는 화들짝 놀랐다. 그때였다. 선장이 뒤로 몸을 돌렸다.

- 번쩍!

새파란 빛줄기가 반응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코앞까지 날아왔다.

- 달그락!

몸이 거칠게 위로 솟구쳐졌다.

옆에 있던 수녀가 나를 잡고 객실지붕 위로 올라가 섰다.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수녀의 입에서 연달아 험한 욕설이 흘러나왔다. 객실 지붕에 올라가자한눈에 상황이 파악됐다.

- 콩. 콩. 콩.

피가 뚝뚝 흐르는 금발 남자의 시체가, 닻줄에 묶여 키 아래에서 덜렁거리고 있었다.

"선장은 죽어서도 배를 인도한다.

시적이지 않나?"

- 우르릉! 쾅!

천둥이 울렸다. 바람이 점점 거세졌다. 기분 탓일지도 몰랐다.

- 파르륵!

후작은 안쪽이 피로 범벅이 된 진청색 레인코트를 벗어서 폭풍우에 멀리 날려 보냈다.

수녀의 입에서 심각한 욕설이 연달아 튀어나왔다.

'어떻게. 살아남았지?'

수십 마리 풍뎅이가 후작의 주위에서 폭발했다.

연기가 자욱하긴 했지만, 걸레처럼터져 나간 고기 파편과 핏자국을 분명히 확인했다.

찢겨진 파편은 충분히 많았다.

'충분히. 오히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았는데.'

키를 등지고 선 인간이 천천히 위를 올려다봤다.

화상을 처음부터 입지 않은 건지,

포션으로 치유한 건지 얼굴은 번듯했다. 피부가 타지도, 어딘가 떨어져나가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의 주변을 맴도는 공기는 매우 기괴했다.

후작은 무표정했다.

얼굴 곳곳에 피가 묻어 있었다. 눈 밑에 깊게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고 입은 살짝 벌어져 있었다.

마치 어딘가 심하게 일그러져, 함부로 녹아내리다 멈춘 듯한 분위기가 풍겼다.

후작은 가만히 수녀를 노려봤다.

둘 사이에서 일어나는 차가운 긴장감에 완전히 압도당한 나머지, 몸을움직일 수가 없었다.

거칠게 갑판을 때리는 빗방울 소리하나하나가 아주 느리게 들렸다.

긴장의 농도가 점점 짙어졌다.

주위의 공기가 완전히 얼어붙는 것같았다.

- 우르릉! 광!

천둥이 쳤다.

배가 한차례 크게 흔들렸다.

갑작스러운 폭풍우를 받은 배는 점점 원해를 향해 가파르게 나아가고 있었다.

수녀가 주먹을 꽉 쥐었다.

오른쪽 소매에서 후작의 심장을 뜯어냈던 갈고리가 홀러내렸다. 갈고리는 반투명했다.

- 팟!

여우 가면의 수녀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후작은 검을 뒤로 당겼다.

칼이 빛을 내며 달아올랐고, 하얀섬광이 수녀를 향해 날아갔다.

- 파지직!

수녀는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최단 거리로 갈고리를 휘둘렀다. 하얀빛줄기가 수녀의 허리를 절단했다.

하지만 양쪽의 공격은 모두 무위로 돌아갔다.

잘린 수녀의 허리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것처럼 합쳐졌고, 후작은 섬광을 날리는 순간 이미 몸을 옆으로 피하고 있었다.

- 광!

수녀의 갈고리를 맞은 키가 폭발하둣 반으로 갈라졌다. 선장의 시체를 매단 키가 바다로 빠졌다. 배가 휘청 이며 반 바퀴 돌았다.

어느새 스무 걸음 떨어진 위치에서난간에 몸을 기댄 후작이 비웃듯이 말했다.

"물질투과의 권능. 너희들이 말하는 '유산'이겠군."

그가 검으로 수녀의 여우 가면을 가리켰다.

"그건가?"

후작의 두 눈동자가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 팟!

그는 달리는 자세 그대로 칼을 휘둘렀다. 칼이 여우 가면을 가르고 지나갔다.

목을 쳤고, 다시 반대로 되돌아와허리를 잘랐다. 하지만 이번에도 파육음은 없었다.

검붉은 갈고리가 반격했다.

빠르게 움직여 후작을 노렸지만,

이미 바닥을 굴러 몸을 뺀 뒤였다.

'후작이 더 빠르다.'

후작은 수녀의 모든 공격을 원천적으로 피해 내고 있었다.

나는 끼어들 타이밍을 재고 있었지만, 도저히 틈이 나오지 않았다. 레벨이 지나치게 다른 싸움이었다.

"어이, 엘릭서 많아? 너라도 두 병은 절대 없을 텐데. 심장 한 번 더뜯기면 바로 죽어. 알지?"

변조된 목소리가 가면 뒤에서 튀어나왔다.

이미 수녀에게 멀리 떨어진 후작이무표정하게 대꾸했다.

"밀도 조절이든, 위상 조정이든 상관없다. 모든 유산은 소모성이지."

"하. 나 참. 진짜 별 스토커 같은 새끼 다 보겠네. 야, 너 여자한테 인기 없지?"

후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이번에는 그의 칼이 청백색으로 빛났다. 아까보다 훨씬 더 환한 빛이었다. 후작 근처의 빗줄기가 즉시 증발해서 타올랐다.

- 번쩍!

내리친 번개마저 후작의 칼에 빨려 들어가며 연료가 되어 타올랐다.

빛을 모은 칼이 당겨졌다가, 반동을 주는 것처럼 앞으로 휘둘러졌다.

아침을 세 시간쯤 당길 정도로 환한 청백색 빛이 여우 가면을 향해 세차게 터져 나갔다.

107화 벌레들의 무덤 (6)

***************************************************

새파란 기운이 파도처럼 일어나 허공을 휩쓸었다.

수녀는 가면에 손을 가져다 댔다.

검에서 피어오른 푸른 기운은 이번에도 수녀를 그대로 통과했지만, 돛을 반쯤 날려 버렸다.

- 피리릭!

반쯤 남은 돛이 아무렇게나 풀어졌고, 육중한 돛대가 바닥에 쓰러졌다.

- 쿵!

- 파각!

커다란 소음과 함께 강한 진동이 느껴졌다.

중심을 잃고 흔들리다, 객실 근처의 난간을 잡아 몸을 지탱했다.

쓰러진 돛대는 갑판을 그대로 뚫어버렸다. 배가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심하게 뒤뚱거렸다.

그 와중에도.

수녀의 시선은 순간적으로 풍뎅이를 향했다. 동시에 후작이 풍뎅이를 노려봤다.

'눈치겠어. 저 녀석으로. 바다를 건넌다고 하지 않았나?'

나는 수녀에게 소리쳤다.

"막으시오!"

- 달그락!

객실 지붕에서 뛰어내렸다. 비에 젖은 갑판에서 미끄러지지 않고 균형을 잡았다.

짧은 시간이나마 벌기 위해 후작에게 달려들려 했다. 하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후작은 새파랗게 빛나는 칼을 풍뎅이에게 겨누고 있었다.

"피고는 범죄자들을 싣고 국경을 넘은 것을 인정하는가?"

그는 풍뎅이를 살아 있는 사람처럼 엄숙하게 노려보며 소리쳤다. 세찬비바람에 후작의 회청색 머리칼이 흩날렸다. 망가진 키가 핑그르르 돌면서 갑판으로 파도가 쳤다.

"야! 이 미친 새끼야! 다 죽겠다는거냐?"

- 우르릉! 광!

천둥이 수녀의 외침을 묻었다.

후작이 검을 세웠다.

눈을 슬쩍 치떴다.

칼을 들어 갑판 위에 세워진 풍뎅이에 마구 박아 넣기 시작했다.

- 파직! 파지직!

풍뎅이 위에서 작은 번개들이 튀었다. 날개가 박살나고, 몸통이 마구 우그러졌다.

칼을 풍뎅이 깊숙이 박은 상태에서 헤집어 돌리려 할 때 수녀가 갈고리를 휘둘렀다.

후작은 다시 멀찍이 피해 냈다.

수녀는 풍뎅이의 상태를 살폈다.

여우 가면 뒤에서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다채로운 욕설들이 연달아 흘러나왔다.

'이제. 끝인가?'

그때 였다.

- 쿵.

갑판 위로 시커먼 무언가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 콰직!

기괴하게 생긴 것들이 갑판 위로무리 지어 올라오며, 갑판에 앞발을 박아 넣고 있었다.

'인어.?'

몸통은 2미터 정도였다. 상반신은 원숭이에 하반신은 물고기.

이빨은 기형적으로 비죽비죽 튀어나왔고, 손은 낫처럼 날카로웠다.

웬만한 육지 짐승 정도는 산 채로 쉽게 해체할 수 있을 것처럼 생긴 녀석들이었다.

그런 녀석 수십이, 갑판으로 한 번에 올라오고 있었다.

후작 쪽으로.

"미쳐 돌아가는구나. 해골 친구!

미안해."

"미안할 거 없소! 어떻게 도와 주면되겠소?"

"미안. 도움 안 돼."

수녀가 내게 소리치고 있을 때.

후작 주위로 스무 마리가 넘는 인어가 몰려들어 낫처럼 생긴 앞발을 마구 휘둘렀다.

- 부응!

파공음이 날 정도의 속도였다.

후작은 칼을 손에 쥐고 올라오는 인어들을 하나씩 찍어 냈다.

"정숙! 정숙!"

- 퍼걱!

칼에 찍힌 부위는 뚫린 게 아니라 그대로 몸이 터져 나갔다.

"방청객들은! 모두 착석!"

- 퍼걱!

"착석하시오! 소란을 피우는 방청객들은 모두 퇴장시키겠소!"

후작 근처로 기어 오는 인어들은 모두 새파랗게 빛나는 칼에 몸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몇 초 지나지도 않아 동료들이 전부 핏물이 되자 인어들은 공포에 질려 괴상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더 올라오지 않았다. 후작은 인어들의 피가 묻은 칼로 나와 수녀를 겨누고 외쳤다.

"피고는 1147년 10월 17일 제국황제 엘튼 클레멘스를 살해했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가?"

"저 미친 새끼, 저거.

"피고는 반성의 기색이 없다! 자신이 유죄임을 인정하는가!"

다음 순간.

- 쿵! 쿠궁!

선체가 급격하게 흔들리며, 배의속도가 한층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곁에 다가온 수녀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인어들이 배 밑으로 들어갔어. 우릴 바다 깊이 끌고 가는 중이야. 더늦기 전에 도망쳐."

"도망이라니.!"

"뛰어내려! 해안으로 어떻게든 가!

지금은 이 아래에 인어 정도밖에 없을 거야. 해골 친구는. 살아남을 확률이 있어."

가면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조금씩 여유가 사라지고 있었다. 폭풍우가 휘몰아쳤다. 저 시커먼 바다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살 수 있다고 해도, 이런 목소리로 말하는 상대를 두고 도망칠 마음은 도저히 들지 않았다.

- 번쩍!

번개가 아니었다.

후작의 검과 검집이 각각 수녀와 나를 향해 휘둘러졌다.

수녀는 기다렸다는 듯 두 갈고리로 카운터를 날려 나를 보호했다.

- 광!

후작은 마지막 순간 방향을 틀었다. 결국 부서진 갑판 조각들만 허공으로 치솟았다.

"피고는 제국 황제 엘튼. 좋다!

그 인형 새끼는 알 바 아니다! 피고는 근위대를 죽였는가? 최소 80명!

최소 80명의 인명을 살상했는가?"

후작은 그 이후로 나를 공격하지 않았다. 단번에 죽이고 싶지 않은것 같았다.

대신 여우 가면의 수녀를 향해 몇번이고 공격을 날렸다. 공격은 단한 번도 먹히지 않았지만, 수녀는조금씩 지치는 듯한 기색이었다.

후작의 두 눈에서 파란빛이 활활 타올랐다. 제 생명을 태우는 듯한 빛이었다.

- 파드득! 파드득!

어딘가에서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 :끼이이아? 아? 아!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가 가까이서 울렸다.

'하피?'

파란 바다 하피들이 배로 몰려들고 있었다.

바다 한가운데서 먹잇감을 발견해 기쁘다는 듯 요란한 괴성을 내며 앞다뤄 배로 날아들었다.

T&T의 이너 서클에서 신성 모독을 외치던 녀석과는 모습이 꽤나 달랐다. 바다에 살아서 그런지 몸 곳곳에 물갈퀴가 달려 있다.

인간과 물고기. 독수리를 1/3씩 섞은 모습이었다.

다행히 공격은 후작에게 집중됐다.

마왕군 시절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명백한 아군이 아니라면, 하피는 인간 남자를 최우선으로 공격한다.

하지만 괴성을 지르는 하피들의 합공도 별 효과는 없었다.

바다 하피 두 마리가 양쪽에서 칼날 발톱을 세우고 날아들었다.

후작은 공격을 받기 직전 뒤로 두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당겼던 칼을 가볍게 휘둘렀다.

- 파각!

하피 두 마리가 겹쳐진 상태로 베어 졌다.

발톱째 몸이 갈라진 두 하피가 질척한 피 보라를 갑판 위로 뿌렸다.

- 철썩!

때마침 높이 친 파도가 갑판을 쓸었다. 갈라진 네 조각 사체가 바다에 삼켜졌다. 막 죽은 자들의 신선한 피 내음이 소금 냄새에 깊숙이 버무려지고 있었다.

- :끼아기아"아? 아!

후작은 덮쳐 오는 한 마리의 머리채를 잡았다.

- 서격!

배에 칼을 쑤셨다. 하피는 발톱을 교차해 막으려 했지만 이미 칼날이등까지 뚫은 뒤였다. 발톱은 이미그녀를 관통한 칼만 톡톡 긁었다.

- 끼, 끼이.!

후작은 찌른 칼을 아래로 내렸다.

강철도 찰흙처럼 자르는 칼날이 그대로 발톱을 잘랐다. 하피의 배가 통째로 세로로 갈렸다.

- 후두둑!

잘린 손목과 함께 내장이 아래로 경쾌하게 쏟아졌다.

수녀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풍뎅이에게 달려갔다. 칼이 박힌 부분을 살폈다. 풍뎅이를 가동시키려는 것 같았다.

- 스롱!

나는 배낭에서 칼을 빼내 들었다.

수녀의 근처에 섰다.

'하피들이 후작을 단념하면. 다음타깃은 우리야.'

그때 였다.

- 촤아아악!

강한 파도가 왼쪽에서 올라왔다.

회전이 실린 물보라가 갑판을 휩쓸었다.

- 촤르륵!

온몸의 뼈 사이사이를 짠 바닷물이홈백 훌고 지나갔다.

"젠장.! 배 밑에 붙은 놈들이 속력을 더 내고 있어!"

수녀가 풍뎅이를 두드리며 외쳤다.

배는 계속 거칠게 흔들렸다. 바닥은 인어와 하피들의 피로 미끄러웠다.

균형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안 돼. 안 돼.

수녀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 툭.

잘린 하피의 목이 굴러와 발에 걸렸다. 갑판을 바라봤다. 내장과 신체부위들로 만들어 낸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다.

- 우르릉! 광!

후작은 피를 뒤집어쓴 채 그 위에혼자 서 있었다.

- 촤아아악!

부서진 배 앞머리로 새까만 파도가 덮쳐 왔다.

잘 정비된 큰 배였지만, 폭풍우에완전히 휘말려 이리저리 돌고 있었다. 키도 부서진 상태였다.

수녀가 날 보고 말했다.

"아직 도망 안 갔냐? 숨 쉴 필요 없잖아! 빨리 뛰어내려!"

- 달그락.

나는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도망치고 싶지는 않소."

칼을 쥔 손이 힘을 줬다.

"하아. 목숨 아까운 줄 모르네."

수리를 포기한 수녀는 후작을 다시 공격해 들어갔다.

- 광!

- 콰광!

불꽃이 튀었다. 둘의 격돌에 배가여기저기 부서지고 있었다.

- 투둑! 투둑! 투두두둑!

거칠게 쏟아지는 빗방울이, 부서진자리를 다시 때렸다.

배는 점점 더 위태로워졌다.

여우 가면을 쓴 수녀가 불리했다.

후작은 공격에 거침이 없었지만,

수녀는 갑판이나 풍뎅이 쪽으로 공격이 가지 않게 신경 쓰고 있었다.

속도와 힘에서도 밀렸다. 수녀는 점점 힘겨워하고 있었다.

나는 칼을 쥐었다.

'뭐라도 해야 해.'

- 질주.

팟, 하고 몸을 앞으로 튕겼다.

몸에 걸리는 순간 가속이 흑 느껴졌다. 떨어지는 빗방울이 느릿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후작의 뒷모습이보였다.

검집을 평행하게 돌리며, 그대로 검을 쭉 빼어 횡으로 베었다.

- 발도.

하지만 필사적으로 휘두른 칼날은 후작의 두 손가락에 간단히 잡혔다.

곧바로 인어들을 으깨던 검집이 손목을 향해 날아왔다. 속도도 힘도 감당할 수 없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오른 손목이 사라졌다. 후작은 내 목덜미를 잡아허공에 들었다.

- 번쩍!

- 우르릉!

"피고는 제국 중경中更 이사벨 시몬느의 살해를 인정하는가!"

이사벨 시몬느.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후작이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온몸에서 발산되는 무형의 기운에,

내리는 빗줄기가 그의 몸에 닿지 못하고 그대로 증발하고 있었다.

"피고는 백작 위를 가진 여성의 사체로부터 갑옷을 벗겨 냈다! 피고는 살해와 사체 훼손, 유품의 강탈을 인정하는가?"

갑옷.

내가 갑옷을 벗겨 낸 기사는 한 명밖에 없었다. 듀라한들에게 몰려 목이 잘린 근위기사단장.

'그녀인가?'

나는 무심코 후작에게 물었다.

'특별한. 사이였나?"

- 달그락! 달그락!

후작이 내 목을 잡고 허공에 흔들었다. 활활 타오르는 눈빛이 잠시흠칫했지만, 그걸 숨기려는 둣 기세는 한층 더 강렬해졌다.

"질문은 허용하지 않는다! 피고는 이사벨 시몬느의 살해, 사체 훼손, 유품의 강탈을 인정하는가!"

- 촤아아악!

강한 파도가 뱃전을 넘어왔다.

배가 한차례 크게 흔들리며, 갑판에 널린 하피 시체와 내장이 대부분바다로 쓸려 내려갔다.

- 첨벙!

- 와그작! 와그작!

아래에서 배를 끌고 가는 인어들이 요란하게 하피 시체를 씹어 먹는 소리가 들렸다.

"이 멍청한 해골바가지야. 도움안 된다니까! 도망이나 가라니까 대체 뭐 하는 짓이야?"

수녀의 공격이 이어졌다.

- 달그락!

후작은 나를 객실 쪽에 내던졌다.

수녀의 공격을 피해 낸 뒤, 이번에는 그녀를 집요하게 공격해 갔다.

후작은 두 눈에서 푸른 줄기를 뿜어내며 발작하고 있었다.

"피고는 미유의 살해를 인정하는가! 피고는 죄 없는 말을 터트려 죽였다!"

'?"말?' 걸레처럼 터져 나간 고기 파편과 곳곳에 널려 있던 핏자국.

한 인간이 그런 걸 남기고는, 결코살아남을 수 없을 정도의 분량이다.

하지만.

한 인간의 것으로 보기에는 오히려 너무 많았다.

'말이 후작을 보호하기 위해 뛰어들었다면.,

상황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말이 터져 나간 파편을 보고 착각했다.

완전히 안심하고 있었다.

수녀가 가면 뒤에서 힘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 하하. 너 이새끼, 바티엔느폰 레안드로 후작 이랬나? 와. 바깥에 알려진 거랑 성격이 왜 이렇게 달라?"

"피고의 발언권을 묵살한다! 피고는 13세 소녀, 미유의 살해를 인정하는가!"

"쿨한 성격인 줄 알았는데 말 성애 자에 이런 또라이일 줄이야.

그때 였다.

하늘이 어두워졌다.

- 과과광!

108화 벌레들의 무덤 (7)

***************************************************

피와 비로 젖은 갑판 위.

하늘에서, 꿈틀거리는 거대한 촉수가 내리꽂혔다.

- 콰직!

"잡아!"

검은 장갑을 낀 손이 나에게 빠르게 뻗어 왔다. 강렬한 반동으로 튕겨져 나가려던 몸이 간신히 잡혔다.

- 콰득! 콰드드득!

꿈틀거리는 새까만 촉수가 갑판을 마구 찢었다.

폭발적인 굉음과 함께 배가 미친둣 흔들렸다.

- 쿠구구구.

- 쿠구구구구구_십여 개의 거대한 촉수들이 사방에서 첨벙거리며 배를 타고 올라왔다.

촉수의 곳곳에는 인어들이 매달려있었다.

동료들을 후작에게 잃은 인어들.

그들이 배아래 매달려 크라켄에게배를 끌고 간 것이다.

옆에 서 있던 수녀가 깊게 숨을 내쉬었다.

"? 1"

? ?? 아.

절망이 읽혔다.

그녀가 주먹을 쥐고 막 뛰쳐나가려할 때였다.

- 퍼격!

갑판을 쑤시며 꿈틀거리는 거대한 촉수 중앙을 새파랗게 빛나는 칼이 관통했다.

끝에서 2미터가 넘게 새파란 검기劍氣를 줄줄이 뿜어내는 칼.

- 파가아아갓!

굵은 크라켄 촉수가 아래에서부터 폭발하듯 쪼개졌다.

반으로 갈린 촉수에서 새까만 점액이 갑판으로 후두둑 쏟아졌다.

- 첨벙!

돛대보다 굵은 촉수가 양 갈래로 나뉘어 허공에서 버둥거리다 바다 아래로 급히 들어갔다.

다른 촉수들도 흠칫한 듯 수면 아래로 첨벙이며 도망쳤다.

'쫓아낸. 건가?'

_ 쿵.

허공에 솟아올랐던 후작이 가볍게 갑판에 착지했다.

그리고 나와 수녀를 향해 촉수를 잘라 낸 칼을 겨눴다.

- 철썩!

솟아 오는 물줄기가 배를 한차례 세차게 흔들었다.

후작은 검은 점액으로 질척거리는 갑판을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왔다.

"제국 대상조大上造가 판결한다!"

그는 한 걸음마다 광기 어린 외침을 뱉어 냈다.

"국경단속법 제4조!"

"제국 외의 지역에서 승선한 선박으로부터 제국에 밀항 및 이선離船한 자, 3년 이하의 노역에 처한다!"

"제국 형법 제52조! 외국과 통모하여 제국에 항적抗敵한 자는 사형 또는 무기노역에 처한다!"

"치밀하게 계획된 뒤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그 죄질이.

- 번쩍!

- 우르릉! 쾅!

빗줄기를 가르고 새하얀 번개가 내리 쳤다.

번개는 후작이 들고 흔들던 칼에 흡수됐다. 번개가 그의 젖은 몸을 한차례 타고 지나갔다.

후작은 몸을 부르르 한 번 떨었다.

그리고 나와 수녀를 향해 칼을 겨누며 다시 소리쳤다.

"피고 2인은 97인의 인명 살해와 공모했다!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존엄한 가치인 생명을.

'어울리지 않는 소리를 하는군광기에 젖어 다가오는 녀석을 보고다시 한 번 의문이 깊어졌다.

기사들에게 흡수한 패시브 스킬,

제국 예법에 따르면.

제국 관내후關內候는 자신의 영지에서 완벽한 치외법권을 가진다.

제국 대상조大上造는 공소권을 가진 걸어 다니는 검사檢事이자.

동시에 판관判官이 될 수 있는 터무니없는 지위.

그런 자리에 있는 자가.

황제 암살에 대해서는 별 유감이 없어 보인다.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애초에 추적해 온 게. 황제 암살 때문이 아니었어.'

제국에 의전 서열 20위 안에 드는 후작 본인이, 혼자 움직이는 것도 기괴한 일.

'개인적이다.'

사적인 원한.

사적인 복수.

근위기사단장과 특별한 사이였는지 물었을 때.

후작의 눈빛이 새파랗게 타오르던 모습이 떠올랐다.

추측이 확신으로 변해 갔다.

내가 죽음을 목격하고 미스릴 갑옷을 뺏은 근위기사단장.

그녀의 복수를 하러 이곳까지 쫓아온 것이다.

'갑옷, 괜히 건드렸나.

그때 였다.

- 좌르르륵!

물러난 줄 알았던 수십 가닥의 촉수들이 움츠리며 배 주위의 허공에 똑바로 곧추세워졌다.

그 끝은.

창처럼 날카롭게 오므라진 상태.

수십 가닥 촉수가 빈틈없이 사방에서 동시에 뻗쳐 오는 순간.

곁에 있던 수녀가 내 손을 잡았다.

여우 가면 뒤에서 매끈한 음성이 홀러나왔다.

"동조-투영投影."

- 파바바바밧!

지옥의 심판처럼 보이는 수십 갈래의 칠흑 촉수가 보이는 모든 공간을 꿰뚫었다.

배 위의 모든 시설물이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바다의 지배자.

크라켄.

분노한 칠흑 촉수들은 감히 어디서 날뛰고 있냐는 듯 모든 걸 꿰뚫고, 다시 꿰뚫고, 조이고, 빨판으로 빨아부수고, 물어뜯어 나긋나긋한 상태로 만들었다.

그리고.

- 촤아 아아악!

바다가 입을 벌렸다.

더 이상 배라고 부르기 어려운, 우리가 간신히 딛고 선 파편을 바다가 통째로 입을 벌려 삼켰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입인지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 콰득! 콰드득! 콰드드득!

파편들이 잘게 부서지는 소리.

수천 개의 단단한 것들이 연신 으득거리며 갈려 왔다.

하지만 모든 공격은 우리를 투과해지나갔다.

암흑뿐이었다.

긴 통로를 지나, 안으로 정신없이 홀러 들어갔다.

곁에서 매끈한 여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유산 - 별빛청여우의 충전이 필요합니다. 잔여 배터리 15%. 분절사용 모드를 추천합니다.]

[&여 14.75%??????.]

"명도 조절."

가면 뒤에서 수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아직도 내 손은 꽉 잡혀 있다. 곁을 바라봤다.

"입회 실패다."

여우 가면의 수녀가 중얼거렸다.

"여긴. 어디요?"

"뱃속이야."

"크라켄의?"

수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닥은 물컹했다. 거대한 부식성높지대 같았다.

- 치이익!

- 치이이익!

배의 잔해들이 크라켄 위액에 타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나무와 쇠들이, 연기를 만들며 위액의 파도에 부식되어 갔다.

반쯤은 공기.

반쯤은 출렁이는 늪.

뱃속은 끝도 없이 넓었다.

가면에서 나오는 빛이 주위를 밝혀주고 있었다.

그러나 크라켄의 뱃속은 어디가 시작인지 끝인지, 다른 것들은 얼마나안에 들어가 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잔여 배터리 12.5%.]

가면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크라켄의 뱃속에서 울리며 메아리쳤다.

"카아아아아아!"

통째 삼켜진 인어 한 마리가, 주위의 새까만 액체에 온몸이 녹아내리면서도 비명을 지르며 나에게 달려들었다.

몸이 녹아내리는 고통 속에 있다면 누구나 타자를 공격할 수밖에 없다.

공격의 대상은 고통의 원인보다 쉽게 손닿는 누군가가 된다.

- 쉬익!

하지만 휘두르는 손 낫은 그대로 나를 통과했다.

- 치이이익!

달려오는 관성까지 더해, 인어는 크라켄의 위액에 빠져 첨벙거렸다.

온몸이 부식되며 버둥거리며 괴로워했다. 단번에 죽지도 못하는 것같았다. 비슷한 상황에 처한 인어들이 곳곳에 보였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촉수에 으스러지거나 씹혀서 들어오지 못한 먹이들이 이곳에서 천천히 소화되고 있었다.

"가엾군."

[잔여 배터리 10.75%.]

"몇 분 뒤면 우리도 저런 꼴이 되"우린 어떻게 살아남은 거요?"

수녀가 여우 가면을 가리켰다.

"유산의〈동조-투영投影〉. 너한테까지 영향을 주게 해 놨어."

"투영이라니.

"공격으로 인식되는 걸 스쳐 지나가게 하는 거야. 먹어서 가두는.

이런 짓에는 대응이 곤란하지만."

수녀가 나를 보고 말을 이었다. 그건 독백 같았다.

"나는 입회에 실패했어. 제국 4검주도, 탑주급 마법사도 없는 일행에게 기스-제-라이가 당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해골 친구마저 지켜 주지 못할 줄은. 미안하다."

나는 수녀를 바라봤다.

입을 다무는 대신 이런저런 것들을 좀 더 물어보기로 했다.

"궁금한 게 있소. 후작은 도대체 날 어떻게 따라온 거요?"

중요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나오는 대답은 그리 신통치 않았다.

"암살 현장에서 흔적을 따라서 추적했을지도. 아니면 친구가 챙긴 물품에 추적 마법이 걸려 있었거나.

둘 다일 확률이 높겠지."

"황야를 건넌 건.?"

"쫓아올 수만 있었다면[주의! 연료가 10%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가면에서 경보음이 울렸다.

"방금 전 배에서 싸워 본 저놈이라면, 기계 부유물들 정도는 검기로 녹여내며 쫓아왔을 거야. 연료를 충전한다고 3일을 걸어 왔으니. 쫓아올 시간은 충분했겠지."

잠시 멈칫한 수녀가 말을 이었다.

"정보가 잘못됐어. 우리가 검주劍主급과 제대로 격돌해 본 경험이 부족하기도 했지만, 저 녀석은 예상보다 훨씬 강해."

"절대 4 검주의 말석에, 혼자서 후작의 좌에 있을 놈이 아니야. 힘을 숨기고 있었어."

수녀가 중얼거렸다.

"저런 녀석과는. 얽히지 말았어야했는데."

- 달그락.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동의하오."

놈과 얽히지 말았어야 한다는 사실에는 열렬히 공감이었다.

[주의! 잔여 연료가 8% 이하로 떨어 졌습니다!]

가면 바깥에서 다시 기묘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때였다.

- 으아아아아아아!

위액이 뿜어내는 염소로 가득 찬 어두운 공기를 뚫고 혼란스러운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크라켄의 입 쪽에서 단단한 것들이부서지고, 깨지고, 찢어지는 소리가 연달아 세차게 울려 퍼졌다.

파괴의 소동은 점점 안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수녀가 중얼거렸다.

"그놈이야. 살아남았어."

- 쉬이이이이잇!

폭포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딜 잘못 찔렸나.

제 피에 젖은 크라켄의 참혹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라켄은 온몸으로 요동치며 바다 깊숙이 파고 들어갔다.

- 꾸투루루룩!

측정할 수도 없는 속도였다.

뱃속에서도 지독히 강해지는 수압에, 부식되며 괴로워하는 인어들의 몸이 퍽퍽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볼품없는 내용물들이 빠른 속도로 드러나며 바깥으로 쏟아졌다.

[경고! 경고! 경고! 잔여 연료가1%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저 꼴이 되느니. 자살이 낫겠군."

거대한 뱃속에서 마구 휩쓸리던 수녀가 중얼거렸다.

그녀가 갈고리를 들어 순식간에 제목을 그었다.

진한 피가 허공으로 뿜어졌다.

'사라졌다.'

- 치이이익!

세계가 다시 몸에 '닿기' 시작했다.

고통스럽게 죽어 간 인어들처럼 뼈가 부식되고 있었다. 몸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때 였다.

"으아아아? 아아? 아아!"

위장 입구 쪽.

거대한 고함 소리가 메아리쳤다.

마구 번뜩이는 새파란 빛이 거대한크라켄의 위장을, 심장을 끝까지 마구 찢어 놓고 있었다.

꾸룩거리며 바다 깊숙한 곳으로 미친 듯이 헤엄쳐 들어가던 크라켄이 점점 힘을 잃어 가기 시작했다.

크라켄이 멈출 때 즈음.

- 파아앗!

온몸을 새파란 기로 감싼 후작이다가 오기 시작했다.

발에서 기를 뿜어내어 몸을 솟구쳐오고 있었다. 후작은 손을 휘둘러서 나를 잡아챘다.

- 달그락!

후작은 한 손으로 내 척추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수녀의 목을 잡고 외쳤다.

압력에서 미처 보호하지 못했는지,

힘이 다했는지 두 눈과 귀에서 피를 줄줄 홀리고 있었다.

후작이 끈적한 피를 쏟아 내는 입을 열어 말했다.

"나는 너희를 스펠홀드로.!"

아무도 그를 건드리지 않았지만,

후작의 목이 자연스럽게 꺾였다.

그의 몸에서 더 이상 새파란 빛이 나지 않았다.

'죽었. 어?'

그러나.

자연스럽다.

나는 그의 손에 잡힌 채 생각했다.

지금까지 살아 있는 편이 오히려 기괴하다.

시체가 되어 크라켄의 뱃속에 꾸물거리고 있는 편이 옳았다.

원래대로 따지면 배 위에서 수십 가닥의 촉수에 당했어야 할 몸.

폭탄에 터졌어야 했을 몸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 데미지가 누적되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후작은 죽어서도 나를, 수녀를 놓지 않았다.

- 우우우웅.

주위가 고요하다.

뼈가 부식되며, 체력이 떨어진다는 메시지가 계속 떠올랐다.

나는 그 와중에 어처구니없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방이 온통 초록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수녀의 시체.

후작의 시체.

그리고, 크라켄의 시체에서.

109화 영양식 (1)

***************************************************

크라켄의 뱃속 어둠이 환한 초록빛에 젖었다. 빛은 어느 한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게 아니었다. 공간 전체가 찬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황홀할 정도로 반짝이는 것이 내 눈앞에 있다.

제국 4대 검주인 후작.

그가 전신에서 뿌리는 반투명한 옥빛은 섬뜩할 정도로 강렬했다.

시체가 줄줄이 뿌리는 초록색 빛.

처음 보는 현상이 아니다.

네크로멘서 기스-제-라이.

그녀에게 정수 흡수 스킬을 이식받은 후.

막 죽은 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

단, 위액 위에 부식되어 떠다니는 인어들에게는 일체 그런 빛이 나지 않는다.

그들은 여전이 캄캄하다.

'능력 차이 때문이겠지.'

내 전반적인 능력이 상대를 한참초월하거나.

딱히 흡수할 만한 가치가 없는 능력만 가졌을 경우.

그럴 때는 빛이 나지 않는 듯하다.

나는 후작을 바라봤다. 여유를 부리고 있을 시간은 없다.

- 치이이익.!

['부드러운 소화액'에 의해 3초당0.165%의 체력이 감소합니다!]

[크라켄의 위액은 영양 성분을 조합시키기 위해 뱃속에 들어온 먹잇감을 천천히 녹입니다.]

후작의 시체도.

수녀의 시체도.

내 몸도 크라켄의 뱃속에서 천천히 부식되어 가고 있었다.

수압에 몸이 터져 죽은 인어들의 시체처럼.

- 치이이익.

위액에 잠겨 있는 하반신이 조금씩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산성 저항.

부식 저항 따위는 갖고 있지 않다.

'시간이 많지 않아.'

앞으로 30분이면 두개골까지 전부 부식되어 녹아내리겠지.

- 달그락.

단호히 후작에게 손을 뻗었다.

[흡수하시겠습니까? Y/N]

'흡수한다.' - 우우우우응!

'가져가 줘야겠어. 전부 다.'

강렬한 초록색 빛이 나에게 서서히 흘러들어 온다.

'차가운데?'

빛에도 온도가 있다. 기스-제-라이의 빛이 편안하고 즐거운 온도였다면 후작의 빛은 냉정하고 차갑다.

정수 흡수.

가진 능력을 다 흡수할 수는 없다.

그게 가능하다면 내가 기스-제-라이를 흡수했을 때 이미 전설적인 네크로멘서가 되었거나, 근위대를 흡수했을 때 근위대 전체가 덤벼도 이길 만한 검사가 되었을 것이다.

눈앞의 후작을 흡수한다고 해서,

내가 단번에 제국 4대 검주의 자리를 빼앗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흡수할 수 있는 능력의 양과 질.

그건 분명히, 상대의 강함에 제대로 비례한다.

_ 스스스스스슷!

강렬하게 빛나는 초록빛이 마치 용암처럼 스멀거리며, 온몸의 뼈 구석구석 스며들기 시작했다.

주위는 고요했다.

크라켄은 이미 죽어 있어 더 이상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떠오르며 흔들리기만 했다.

다른 살아 있는 것들은 전부 수압에 몸이 터져 죽은 상태.

첫 번째 스킬이 흡수됐다.

띠링!

[은신 Lv. 1을 흡수했습니다!]

지형지물 속에 당신의 몸을 숨길 수 있습니다. 스킬 레벨이 올라갈 경우, 그림자나 안개 속에 원활히 몸을 숨길 수 있게 됩니다.

[은신 Lv. 2를.]

[Lv.3.]

[Lv.4.]

[은신 Lv. 5를 흡수했습니다!]

은신 중 공격할 경우 200%의 데미지가 가산됩니다. 스킬이 일정 수준에 도달할 경우, 혜택이 생깁니다.

수년.

혹은 수십 년에 걸쳐 수련해야 닿을 수 있는 레벨이지만, 눈앞에서단번에 흡수해 버린다.

스스스스스스슷!

'은신'이 몸 곳곳으로 퍼져 나간다.

다음 빛이 들어오고 있다.

[제국법 Lv. 1을 흡수합니다!]

제국의 인간들 사이에 강제되는 규범입니다. 레안드로 후작은 걸어 다니는 즉결 법정이자 1인 법 집행 기관인 대상조大上造로서, 특히 형법에 통달해 있었습니다.

[Lv.2.]

[Lv.3.]

[Lv.4.]

머릿속에 제국의 법률 체계가 차근차근 들어오기 시작했다.

압도적인 폭력으로 완전히 멋대로 구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일단알고 있는 지식은 상당한 수준인 것같다.

근위기사단장의 시체에서, 전술 스킬을 흡수할 때보다 훨씬 많은 지식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 왔다.

'레벨 차이로 인한 건가.'

- 치이이익스킬을 흡수하는 도중에도 하반신이 계속 부식되어 가고 있었다.

'시간이 없군.'

체력이 떨어진다는 메시지가 연달아 계속 울린다.

후작에게서 발하는 빛은 줄어들 기색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다음으로, 가장 환한 빛 덩어리가 몸으로 폭발하듯 스며들려 했다.

빛은 내 몸 근처에 머물고 더 이상나아가지 못했다.

[히어로 스킬: 호신강기護身剛氣의흡수가 저지됩니다!]

[에 픽 스킬: 템페스트 Tempest 의흡수가 저지됩니다!]

[히어로 스킬: 망아지경忘我之境-

뇌雷의 흡수가 저지됩니다!]

[히어로 스킬: 섬예적총I지%的免의흡수가 저지됩니다!]

에픽이나 히어로 스킬들. 이런 걸 하나만 제대로 수련해도, 세상 위에오연하게 군림할 스킬들이다.

하지만 모두 막힌다.

'역시 안 되는 건가.'

정수흡수 스킬의 제약 때문.

기스-제-라이는 특수한 경우였다.

- 우우우우응.!

빛은 후작의 몸으로 되돌아갔다.

뭔가를 찾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가늘고 연한 빛이 되어 내뼈로 다시 스며들었다.

[추적 Lv. 1을 흡수합니다!]

추적 스킬을 가지게 되면 원하는 상대를 계속 쫓아가며, 흔적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탐지와 함께 사용하면 매우 높은 효율을 보입니다.

몸 구석구석 깊숙이 파고드는 빛줄기가 끝이 없다.

[Lv.2.]

[Lv.10을 흡수합니다!]

추적 Lv.10를 달성할 경우, 한 명의 상대에게, 자신이 살아 있는 한사라 지지 않는 낙인을 심어 넣을 수있습니다. 상대는 거리에 상관없는 추적이 가능하며, 추적할 때 이동속도가 10% 증가합니다.

후작의 스킬이다.

그가 누구에게 낙인을 찍었는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 달그락.

'징그러운 인간.'

하지만 메시지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추적 Lv.15를 흡수합니다!]

추적 상대의 은신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스킬 레벨이 올라갈 때마다 이동속도가 증가합니다.

- 치이이이익!

몸이 녹아 간다. 하지만 그것마저 잠시 잊게 될 정도였다.

후작에게서 흡수할 수 있는 스킬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마어마했다. 입이 벌어질 정도다.

단 한 명에 불과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얻은 스킬만 해도, 황제의 근위기사 십수 명을 합한 것보다 많은 걸 얻은 듯했다.

- 우우우우옹!

_ 스스스스스스슷!

다음 빛이 들어왔다.

[검술 Lv. 7을.]

[Lv.8.]

[Lv.9.]

[Lv.10을 흡수합니다!]

검술 Lv.10을 달성할 경우, 검기Lv. 1의 사용 자격을 얻습니다.

'됐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검기劍氣 Lv. 0을 흡수합니다!]

- 달그락!

한층 더 놀라서 흠칫 움직였다.

사후경직이 일어난 후작의 손은 아직까지 내 척추를 단단히 잡고 있어 크게 움직일 수는 없었다.

'검기를?'

에라스트 투기장에서 만난 남자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미쳐 버린 건가? 기氣를 쓰는 수준부터는 이런 거. 아무 의미 없잖아. 검 끝에 마력만 흐르게 해도 강철을 두부처럼 자르는데. 〉검기劍氣.

한 인간이 평생을 끙끙거려도 도달하지 못하는 경지를, 나는 후작에게서 단 한 번에 흡수해 버린 것이다.

'그런데 Lv. 0이라고?,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천천히 메시지를 다시 확인했다.

[검기劍氣 Lv. 0을 흡수합니다!]

['깨달음' Lv. 1이 필요합니다.]

[현재 사용이 불가능합니다.]

메시지는 거기서 끝났다.

'깨달음이라고?'

- 치이이이익!

뼈가 녹아들어 가고 있다.

깊게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아쉬운 마음을 안고 흡수를 계속했다.

그 후로는 모두 스탯 흡수였다.

[지능을 1 흡수합니다.]

[지능 1을.]

[지능 1을.]

[흡수한 능력을 소화하는 중.]

[소화까지 23:59:59.]

빛나던 초록빛이 모두 몸 안으로 사라졌다.

'엄청나군.'

하지만.

걱정되는 게 남아 있었다.

'소화를 다하지 못한 상태로 죽으면. 이 스킬이 전부 보존될 수 있을까?'

모두 흡수하고 탈출한다면.

24시간을 생존한다면 좋겠지만, 크라켄의 뱃속 밖으로 탈출한다고 해도 바다에 어떤 것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몸이 위산에 부식되어 당장 죽는것보다도, 소화 상태의 스킬들이 어떻게 처리될지가 걱정.

어쨌건.

당장의 흡수가 급하다.

- 치이이익.!

[체력이 61.75%로 떨어집니다!]

아직 빛은 장내에 가득하다.

유독 강렬하게 뿜어지던 옥빛 하나가, 내 몸 안으로 녹아 사라졌을 뿐이었다.

- 달그락.

고개를 돌려 수녀를 바라봤다.

여우 가면을 쓴 수녀.

날 엠버로 데리러 온 나의 구원자.

'기스-제-라이와 특별한 관계였던 것 같은데.,

하지만, 원래는 기스-제-라이를 데리러 왔을 여자.

그 여자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는 모른다.

정체가 뭘까.

그 가면 아래에는 무엇이 있을까.

여우 가면을 뜯어볼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관두기로 했다.

정수 흡수는 몰라도, 시체의 가면까지 뜯어내는 건 예의가 아니다.

몸이 부식되어 갔다.

더 망설이지 않고 수녀에게 손을 뻗었다. 언젠가, 그녀도 구해 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스스스스슷.

수녀의 목에 난 상처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지렁이처럼 일렁이는 환한 초록빛이 내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다.

[기계공학Lv. 1을 흡수했습니다!]

기초적인 기계 시스템의 분석 및유지/보수가 가능합니다.

스킬 레벨 상승에 따라 자체적인기계 설계와 제조가 가능해집니다.

금속 제련 술과 조합될 경우 효과가상승합니다.

'이걸 어디에 쓰지?'

어디 써먹을지 짐작하기 어려운 스킬이었다. 이런 게 있다고 수녀 가타던 풍뎅이 같은 걸 만들 수 있을 리는 없으니까.

기계공학 스킬은 Lv. 3까지 오른 뒤멈췄다.

그때 였다.

수녀의 가면 근처에서 멈칫거리던빛이, 손을 타고 멈칫거리다 쑥 흘러들어 왔다.

[가면무도회Masquerade Lv. 1을 흡수했습니다.]

[짧은 시간 동안 얼굴에 '인간'의모 습을 덧씩 읍니다. 상황에 따라 유지 시간이 달라집니다.]

[직관력이 높거나, 분석이나 간파계열 스킬을 가진 상대에게는 먹히지 않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레벨이 올라갈수록 다양한 모습으로 변장할 수 있습니다. 수준이 낮은 상대일수록 당신이 만드는 가면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호오.' 자세하지 않은 설명이 조금 불안했다. 하지만 이거라면 혼자서도 인간들의 사회에 잠입할 수 있다.

에라스트나 유블람.

그런 장소에 스스럼없이 들어갈 수있다.

인간들과 스스럼없이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 선택지가 크게 늘어나고 있었다.

[체술 Lv. 1을 흡수했습니다!]

[체술은 맨손 격투에는 물론, 무기를 사용할 때도 그 진가를 발휘합니다. 스킬 레벨이 올라갈수록, 상상할수 없는 속도와 각도로 공격해 들어갈 수 있습니다.]

[??? Lv.2.]

[체술 Lv. 7을 흡수했습니다!]

그걸 끝으로, 수녀에게서는 더 이상 빛이 흡수되지 않았다.

나는 앞을 바라봤다. 후작에게서도 수녀에게서도 더 이상 빛이 흘러나오지 않았지만 아직 공간 전체가 초록빛으로 환했다.

- 치이이이이익!

[체력이 32.5%로 떨어집니다!]

'공간 전체'가 뿜어내는 빛이니까.

- 달그락!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위액.

타오르는 염소 공기.

전체가 초록빛이다.

'크라켄.'

까마득한 저편의 위장 벽을 향해재차 손을 뻗는다.

'흡수한다.'

스스스스슷.

공간을 가득 채운 빛이 내게 빨려들어 왔다.

하반신이 완전히 녹아내릴 때 즈음이었다.

떠다니던 인어들도 이미 흐물흐물한 죽이 되어 있을 때.

[산성酸性 Lv. 1을 흡수했습니다!]

뱃속의 위액뿐만이 아닙니다. 크라켄의 몸을 흐르는 검은 피는 그 자체가 산성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격에 산酸 속성이 섞여 들어갑니다. 공격 도중에라도 언제든 속성을 해제하고 다시 장착할 수 있습니다.

[산성酸性 Lv.2.]

[-Lv.3]

[산성酸性 Lv. 5를 흡수했습니다!]

산은 물질을 녹여낼 수 있는 성질이다. 실질 전투력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아직 검증해 볼 수 없다.

하지만 이게 분명 필요한 상황도 언젠가 나타날 거다.

전장에서 한 명의 마족이 시전한〈독액의 늪〉에 수백의 인마人馬가한순간에 녹아내린 모습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산성 마법이었다고 들었어.'

얼마나 레벨을 올려야, 그런 위력으로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우우 우우우-

[흡착吸着 Lv. 1을 흡수했습니다!]

크라켄의 빨판은 웬만한 인간들도 간단히 우그러뜨릴 정도로 강한 흡착력을 가집니다.

당신이 가하는 공격에 원할 때마다 흡착吸着 속성을 섞어 넣을 수 있습니다.

[흡착吸着 Lv. 5를.!]

산酸 속성과 같은 단계까지 스킬레벨이 올랐다.

'이건 활용도가 높겠는데?'

상대를 빨아들이고, 적이 휘두르는 병기를 붙게 해서 끌어들이는 속성.

스킬 레벨이 오른다면, 무기가 부딪혔을 때 서로 붙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상대를 한곳에 붙여 버릴 수도 있다.

혹은 더 나아가서, 아예 우그러뜨려 버릴 수 있다.

'크라켄의 빨판처럼.'

우우우우우우우!

빛이 서서히 희미해지고 있다.

[공포 Lv. 1을 흡수했습니다!]

크라켄은 바다의 공포입니다. 그 외양뿐이 아닙니다. 실제로 크라켄은 공포의 기운을 뿜어내어, 미천한먹이들을 광망狂妄으로 몰아갑니다.

원할 때마다 언제든 끄고 결 수 있는 패시브 스킬입니다.

액티브 스킬로 사용할 경우, 체력이 소모되며 위력이 증가합니다.

당신과 먹이 사이의 스탯 차이가 스킬의 효력을 결정하게 됩니다.

[흡수한 능력을 소화하는 중.]

[소화까지 23:59:59.]

공포를 마지막으로.

공간을 가득 채웠던 빛이 서서히 잦아든다. 크라켄의 거대한 뱃속이 다시 어둠으로 가득 찬다.

- 치이이익.!

[체력이 1.5% 남았습니다!]

'??? 후.' - 달그락! 달그락!

나는 손을 내저어 후작의 팔을 풀려 했다.

이미 몸 대부분은 녹아 있다.

하지만 저 녀석의 손에 쥐인 채 죽는 건 아무래도 피하고 싶었다.

- 달그락!

하지만.

후작은 죽은 상태에서도, 몸 곳곳이 부식되어 가는 상태에서도 나를 꽉 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시체도 지독하군.'

막 들어왔을 때와 같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어둠 속.

- 치이이익.!

[체력이 0.5% 남았습니다!]

나는 곧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110화 기분의 문제 (1)

***************************************************

후작의 검집에 날아갔던 오른손이 보인다. 이리저리 뻗으며 정수를 흡수했던 왼손이 보인다.

마디 하나하나를 천천히 확인하듯이 양손을 쥐었다 폈다. 다 부식된 내 몸을 세심하게 만져 봤다.

- 톡. 토독. 토도독.

모두 온전히 붙어 있다. 크라켄의위액에 천천히 녹아내렸던 몸이 원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 털썩.

동굴 벽 한쪽에 몸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천천히 중얼거렸다.

"다시. 돌아왔나."

죽은 뒤 다시 살아나는 것 자체는 충분히 익숙한 일이었다.

관건은.

어디로 돌아왔냐는 것.

눈앞에는 초췌한 모습의 인간 여자가 째근쎄근 자고 있었다.

눈이 움푹 들어가 있지만 워낙 미인인 탓에 추하게 보이지 않는다.

다시 주위를 돌아본다.

온몸으로 새파란 검기를 뿜어내던 후작은 없다.

물체를 투과하는 갈고리로, 그런후작의 심장을 반쯤 뜯어냈던 수녀도 없다.

마법으로 작동하는 거대한 기계 풍뎅이도. 몸이 터져 떠다니던 무수한 하피와 인어도.

부식성 위액으로 가득 찬, 크라켄의 거대한 위장도 없다.

기스-제-라이도 없다.

이 작은 동굴에는 나와 레나뿐.

그녀가 잠든 모습을 바라보며 반가옴과 편안함을 느꼈다.

'힘들었다.'

저번 생은, 측정할 수 없는 레벨의 강자들에게 온통 이리저리 치였다.

정신이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로 압박을 받고 있었다.

동굴 벽은 딱딱했지만 그마저 편하게 느껴졌다. 머릿속에 이번 생의첫 번째 목표가 빠르게 떠오른다.

'후작은 만나지 말자.'

결코 다시 얽히고 싶지 않았다.

시체가 되어서도 내 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던 그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질 때.

- 띠링!

반투명한 푸른 창이 떠올랐다.

[계승되었습니다!]

[해골병사 Lv. 1(135)

[체력: 61]

[힘: 61]

[민첩: 62]

[지혜: 50]

'역시 레벨은 1부터 시작이군.' 초기화된 레벨.

스탯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 먼저 확인해야 할게 있었다.

'스킬은 어떻게 된 거지?'

이게 급했다. 흡수는 모두 마쳤지만, 소화가 끝날 때까지 살아남지 못했다. 도중에 죽어 버렸다.

만약 흡수 스킬이 없던 게 되면,

후작과 수녀, 크라켄이 내 앞에서 동시에 죽은 행운이 아무런 쓸모 가없게 되어 버린다. 나는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창을 내렸다.

'제발.'

아래로 스킬 목록이 펼쳐졌다.

원래 가지고 있었던 스킬들이 먼저 주르륵 나열되기 시작했다.

[질주 Lv.4]

[발도 Lv.5]

'여기까지는 확인됐고.

그리고 스킬창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반짝거리는 새로운 스킬들을 모두 확인할 수 있었다.

[은신 Lv.5](new!)

[제국법 Lv.4](new!)

[추적 Lv.15](new!)

[검술 Lv.1OKnew!)

[검기貪lj 氣 Lv.0Knew!)

[기계공학 Lv.3](new!)

[가면무도회 Lv.1](new!)

[체술 Lv.7](new!)

[산성텔'性 Lv.5](new!)

[흡착吸" Lv.5](new!)

[공포 Lv.1Knew!)

'됐다!' 다행이었다. 스킬 하나하나를 설명까지 전부 다시 확인했다. 그만큼 중요한 문제였으니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면 정말 괴로웠겠지.

죽기 전 흡수한 스킬들이 전부 소화되어 있었다. 소화에 필요한 시간도 표시되지 않는다.

'시간을 건너뛰어 버린 건가?'

소화 시간이 사라져 있다.

'흡수한 뒤 죽으면. 지연 없이 곧바로 소화되는 건가.'

새로 입수한 빼곡한 스킬들.

하나하나가 비범한 스킬들이다.

당장에라도 밖으로 나가 그 위력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눈앞에 계속 창이 떠올랐기 때문에 곧장 동굴 밖으로 걸어 나갈 수는 없었다.

- 띠링!

[사망기념관]

[계승된 이후 여덟 번째 죽음을 달성하셨습니다!]

'이것도 여전하군.' 아래로 선택지가 펼쳐진다.

1. 네크로멘서의 연인5. 산성 저항플러스 (new!)

5번 특전에 플러스가 붙어 있다.

[크라켄의 소화액에 천천히 녹아죽으셨습니다.]

- 산성 저항이 20 상승합니다.

- 착용한 모든 아이템에 추가로 5의 산성 저항이 적용됩니다.

괜찮은 특전. 하지만 별 의미는 없었다.

띠링!

[특전을 자동으로 선택합니다.]

특전: 네크로멘서의 연인영웅급 특전입니다. 다른 영웅급 특전이 활성화될 때까지 강제로 이 특전이 선택됩니다.

이걸로 강제 고정이니까.

- 달그락.

'네크로멘서. 기스-제-라이.'

그녀를 생각하자 복잡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어떻게 도와줘야 하나.

결과만 놓고 보면 갚기 힘든 은혜를 입었다.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에픽스킬을 심어 주었다.

그러나.

사실 지금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내가 끼어들 레벨이 아니다.

가 봤자 노리개가 되어 실험당하다, 암살 현장에 끌려가 똑같은 일을 보게 되겠지.

〈얼마 남지 않았소. 당신이 접골시술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소.

아쥬라의 마법사들은 그걸 위험하게 생각하니, 당신은 그들에게 곧 살해당할 거요. 〉〈어디서 듣고 온 거지?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거든. 〉〈네 두개골에 혹시 심안心眼 같은 게 내재되어 있는 건가? 분해해 봐야겠는걸. 〉- 서걱. 서걱.

나를 무력하게 만든 채, 두개골을긁어내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다시한 번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일단 만나면 돌이킬 수 없어.'

기스-제-라이는 황제를 죽이고,

근위대를 몰살시킨다.

이어지는 잿빛 기사.

후작.

별빛청여우.

위험이 너무 큰 상황들.

하지만.

사망이라는 결과가 변하지 않을지라도. 기스-제-라이를 그대로 방치하기는 미안하다.

기스-제-라이에게 간다.

가지 않는다.

- 달그락.

머리를 감싸고 고민하다가, 한숨을내쉬고 레나를 바라봤다. 멍하니 한참 바라보니 상태창이 떴다.

- 띠링!

[이름: 레나]

[호감도: 11]

[호감도 상한: 60]

[도적 Lv.5]

[트릭스터 Lv.1]

[사냥꾼 Lv.1]

[체력: 21]

[힘: 19]

[민첩: 25]

[지혜: 19]

[특성]

- 탁월한 손재주: 대부분의 무기를 다룰 수.

- 범죄 친화: 그녀는 인간의 도덕률을 전혀 믿지 않.

스탯과 스킬은 예전 그대로였다.

한 번 강화되었던 대로 여전하다.

이전 생의 시작과 별다른 차이는 없었다.

측정할 수도 없었던 괴물들에 비한다면 무척 평범한 그녀의 상태창.

마음의 평화를 얻는 기분이 든다.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무심코 입 밖으로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좋아."

좋았다.

이 순간.

나는 이번 생의 초반은 레나와 함께 행동하기로 결심했다.

'괴물들은 좀 피해 가면서, 며칠이라도 평범하게 살아 봐야겠어.!'

그때 였다.

"후아아암. 뭐가. 좋아요?"

- 달그락!

흠칫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레나가 하품을 하며 눈을 떴다.

굶주림과 피곤으로 살짝 꺼져 있으면서도, 앞을 똑바로 응시하는 속 깊은 눈빛이 나를 향했다.

"뭐가 좋다고 하신 거예요?"

- 톡톡.

손가락으로 팔뼈를 두드리며 멈칫했다.

'깨어나 버렸군.'

그녀는 조용히 나를 바라보았다.

조금 흔들리는 손으로 품에서 펜던트를 꺼냈다. 펜던트를 눈빛에 얹어내게 건넸다.

"저. 이건.

손을 내저었다.

"아니. 네가 갖고 있어."

받지 않았다. 함께하더라도 받을 자격이 없는 물건이다. 펜던트를 지켜내지도 못했다.

기스-제-라이에게 빼앗기게 된다.

처음에 펜던트를 거절할 때 했던 말을 적당히 늘어놓자 호감도가 3올라갑니다, 라는 메시지가 떴다.

어찐지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잠시 망설이다가, 할 일을 정했다.

"나가지. 따라와."

하나하나 정보를 말해 줄 필요는 없다. 그녀와 함께 있을 생각이다.

내가 안내하면 그만.

"네!"

레나가 힘차게 대답하며 물건을 챙기려고 했다. 흘끗 그것들을 바라보고 말했다.

"필요 없어. 몸만."

"어. 그래도 되나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굴 안에 있는 거라고 해 봐야 모험가들의 잡동사니 정도.

그런 걸 모을 필요는 없다.

유블람 영주와 경비대가 아편을 팔아서 생긴 은괴 덩어리.

그걸 파내 가면 저런 잡동사니는집 몇 채를 가득 채울 정도로 살 수 있으니까.

레나는 살짝 머뭇거렸지만, 별다른토 없이 순순히 나를 따라왔다.

나는 걸어가다 공터 가운데 섰다.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린다.

〈으으, 삼 일 동안 씻지도 않은 상태로 도시에 들어갈 순 없잖아요.

좀 봐주세요. 〉

아직 그녀는 내가 어색할 거다. 먼저 말해 주는 편이 좋겠지.

"산을 내려가기 전에. 일단 좀 씻지. 그리고 다시 여기서 만나자."

레나가 눈을 깜빡였다. 띠링, 하는소리와 함께 그녀의 호감도가 1 올라갔다는 메시지가 떠오른다.

"어떻게 아셨어요?"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냥."

그녀를 보낸 뒤 주위를 둘러봤다.

괜히 보낸 건 아니다. 나도 잠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일단 검술부터 실험해 볼까.'

인간 허리 두께 세 배 정도의 단풍나무를 잠깐 바라보다, 다른 대상을 찾기로 했다.

나무 정도는 원래도 간단하게 베어 넘길 수 있었다.

'이게 낫겠군.'

높이 2미터가 넘는 거대한 암석이보였다.

나는 머리 위로 칼을 들었다.

예전보다 한 단계 높은 검술의 경지로 접어든 게 확연히 느껴졌다.

바위는 단단함의 대명사다. 칼날로 바위의 표면을 후려친다면 불꽃이 튀고 날이 나가게 된다.

하지만.

- 스르릉.

그저 가만히 들고만 있었음에도.

칼날에 서린 예기가 저 스스로 울음소리를 낼 정도.

벨 수 있을 것 같았다.

칼과 내가 완전히 하나가 된 것 같았다.

칼의 기분과 강도가 느껴졌다.

'??? 이거지!'

순간 바위를 가를 수 있는 선이 보이는 것 같았다.

[산성酸性 Lv. 5를 발동합니다!]

[공격에 해당 속성이 섞여 들어갑니다.]

[무기에 따라 부식 현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 치이이익.!

칼날에 새로운 기운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걸로 부족했다.

[일도양단 Lv. 1을 발동합니다!]

[참격 Lv. 1을 발동합니다!]

잿빛 기사가 나를 공격하자 생긴 스킬들. 저번 생에는 제대로 활용해볼 기회가 없었다.

칼 한 번 제대로 휘두를 기회가 없었으니까.

- 쌩!

명검도, 마법검도 아닌 평범한 F급모험가의 바스타드 소드가 세차게 바위를 내리쳤다.

- 쩌억!

2미터가 넘는 거대한 바위가.

별것 아닌 칼에 반으로 쩍 쪼개져버렸다.

- 퍼버벅!

주먹만 한 다양한 크기의 돌조각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내렸다.

나는 눈앞에서 내가 만들어 낸 광경을 보고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직경 2미터짜리 바위를, 단 한 번의 칼질만으로 반으로 가른 뒤.

부스러기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사방에 피어오르는 돌먼지를 감상하며 멍하니 서 있을 때였다.

- 털썩.

갑자기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옆을 바라봤다.

레나가 어울리지 않게 무릎을 꿇고, 새카만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얘, 왜 여기 있지?'

씻으러 가라고 했는데.

- 꿀꺽.

레나가 침을 삼켰다.

쇄골 위에서 끝나는, 갈색에 가까운 더티 블론드가 조금 흔들렸다.

그녀가 단호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스승님!"

"스. 숭님?"

나는 당황해서 그녀를 바라봤다.

레나는 단호하게 소리쳤다.

"검술을. 가르쳐 주십시오!"

111화 기분의 문제 (2)

***************************************************

"혹시 이거 때문?"

갈라진 바위를 가리키며 물었다.

레나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렇습니다. 검술을 배우고 싶습니다. 조금이라도 가르쳐 주시면 평생 동안, 제가 할 수 있는 건 뭐든 하겠습니다. 죽으라면 죽겠습니다."

너무 진지한 분위기다. 나는 당황하며 말했다.

"어. 보고 있었어?"

레나가 부끄러운 표정으로 고개를끄덕였다.

아무래도 씻으러 가지 않고, 풀숲에 숨어 나를 몰래 지켜보고 있었던것 같다.

- 달그락.

어깨를 살짝 으쪽했다.

"이런 것 정도는 그냥 가르쳐 줘도 되는데? 목숨을 바친다니. 네 목숨이 훨씬 소중하지. 이런 거랑 절대비교하지 마."

진심이었다. 그녀가 다시 나 때문에 죽는다면 견디기 힘들 테니까.

움찔하는 몸짓. 레나의 눈꺼풀이 조심스레 파르르 떨렸다.

그 아래, 내가 스며든 새까만 두호수가 마구 흔들린다.

감정의 풍랑이다.

"왜? 가르쳐 달라며?"

"맞습니다!"

"뭐. 잘못된 거라도 있어?"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레나가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일어나 절을 하려고 했다.

- 덥석.

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았다. 고개를 숙이려다 막힌 레나가 나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다.

"고개 숙이지 마."

"너는 내 동료다. 누구에게도 고개 숙일 필요 없어."

레나의 눈빛이 더욱 흔들린다.

손까지 살짝 떨고 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이다.

말도 못 하고 있는 그 모습을 보고,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뒤늦게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지.'

우리가 깊은 사이라고 생각하는 건나 하나뿐이다.

나는 레나와 함께 수많은 던전을 탐험했다. 그녀를 잘 안다.

말버릇을 알고, 기분에 따라 짓는 표정을 안다. 함정을 어떤 식으로놓는지, 어떤 손놀림으로 남자들의 목을 그어 대는지 안다.

죽음까지 두 번이나 함께했다.

푸르손의 제단에 가기 전, 둘이 멀리 도망치자고 애절하게 말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우리는 그런 사이까지 된 적이 있었다.

그 모든 게 내 기억에 있다.

하지만 이 순간, 레나의 입장에서 본다면.

나는 하루 전까지만 해도 그녀를 허공에 매달아 놓고 방치한 수상한 해골에 불과하다.

같은 편이 되자는 합의를 마친 지얼마 되지도 않은.

- 달그락.

씁쓸함, 안타까음, 안도감이 뒤섞여갈비뼈 안쪽에서 휘몰아쳤다. 그녀를 똑바로 보고 말했다.

"검술을 배우고 싶다고? 지금이라도 해 보자."

나는 레나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녀의 시선이 내가 들고 있는 칼을 향했다.

- 치이이익.

'이런.,

멍해 있는 사이 칼에는 꽤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칼날에 덧씌운 속성 때문이다.

[산성酸性 Lv. 5를 해제합니다!]

'신경 좀 써야겠군.'

속성을 오래 유지하면 부식되기 쉬울 것 같았다. 속성을 끄고, 연습삼아 다시 켰다가, 꼈다.

이건 금방 익숙해질 것 같았다.

하지만 나를 홀린 듯이 바라보는 레나의 저 표정은.

어째 익숙해질 것 같지 않았다.

신기한 걸 보는 표정 같기도 했고,

귀신을 보는 표정 같기도 했다.

묘한 책임감과 의무감을 느끼게 만드는 표정이었다.

산속에서 이틀이 흘렀다. 당장이라도 한번 해 보자고 한 게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났다.

레나의 열의는 대단했다.

처음에는 지도해 주셔서 감사하다며 무척 상기된 얼굴이었지만, 수련에 몰입할수록 무표정해졌다.

조금도 쉬지 않고 집중해서 검을 휘둘렀다.

휘두르다 지치면 잠시 차가운 계곡물에 몸을 담궜다가, 다시 수련을 계속했다.

- 쌩!

레나의 칼이 허공을 가른다.

가르치는 건 생각보다 재밌었다.

레나의 높은 열의가 나에게도 전염되었다.

그녀는 산에 머무르는 이틀 동안 놀라울 정도의 검술 습득 속도를 보였다. 타고난 센스가 압도적이다.

'단검만 잘 쓰는 게 아니었군.

베기뿐만 아니라 유독 찌르기에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 쉿!

레나의 칼끝이 허공을 가른다.

'깔끔하군.'

마음에 걸리는 건.

일반적인 롱소드나 바스타드 소드보다는, 좀더 얇고 날카로운 검이 적당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아예 꼬챙이는 아닌데.

이런저런 무기를 들려서 연습시켜보고 싶었다.

'무기를 사 봐야겠군.'

슬슬 모험 자들에게 빼앗은 식량 도다 떨어지고 있다.

"내려가자."

"네! 스승님!"

"스승님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그렇지만. 그렇게 부르고 싶으면 어떡합니까?"

산에 머무르는 이틀 동안, 나에 대한 레나의 호감도는 무려 29까지 가파르게 올라갔다.

하지만 나를 대하는 태도는 예전 비슷한 수치의 호감도일 때와 살짝 달랐다.

조금 더 진중한 느낌.

'이런저런 감정이 합산되어 호감도로 표현되는 건가., 일단 땅에 묻힌 은괴부터 회수하기로 했다. 레나도 있다. 환전에 별문제는 없을 거다.

우리는 각각 칼 한 자루만 들고,

잡동사니는 전부 산에 아무렇게나 뿌려 둔 채 가볍게 길을 걸었다.

유블람의 행정관들이 가리켰던 장소까지는 금방이었다.

하지만 제법 신경 써서 숨겨 둔덕분인지, 겉으로 봐서는 어디 은괴를 묻었는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어디 숨겨 놨는지 모르겠습니다.

스승님은 아시겠습니까?"

'스승님이 라니.

저렇게 기대감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는데 못 찾는다면 곤란하다.

물론 찾을 자신은 있다. 이럴 때 쓰라고 스킬이 있다.

'탐지.'

[탐지 Lv.5]

[활성 상태로 전환합니다!]

[스킬 효율 1, 000% 증가!]

[현재 체력 기준, 초당 0.0024%의체력이 소모됩니다.]

황야를 건너며, 무수한 기계벌레를포착해서 꽤 높은 레벨까지 만든 탐지 스킬.

스킬을 활성화하는 순간.

인간들의 발자국과.

한곳에 집중적으로 삽질을 한 자국이 단번에 느껴졌다.

제법 신경 써 흙을 덮고 마구 근처를 어지럽혀 놨지만, Lv.5 탐지스킬을 속일 정도는 전혀 아니다.

- 푸욱!

땅속 깊이 칼을 꽂았다.

- 팅.

어느 한 지점에서 흙과 조금 다른 감촉이 와 닿는다.

"여기다. 파 봐."

레나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가,

뭉툭한 단검으로 땅을 살살 파헤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어? 이거. 이거.!"

"있어?"

"어. 진짭니다! 진짜 있습니다!

스승님은 어떻게 이런 걸. 이런 것까지 아십니까?"

- 번쩍!

레나는 땅에서 나온 은괴 세 덩어리를 들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기뻐했다.

황제의 인장이 찍힌 금괴를 본 터라 그렇게까지 큰 감흥은 없었다.

하지만 레나가 달밤에 춤을 추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흐뭇했다.

레나는 은괴 세 덩이를 내 앞에 가지런히 놓고 물었다.

"스승님, 이건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십니까?"

"알아서 해."

"그 말씀은.

"쓰고 싶은 데 쓰고. 내일 유블람여관 3층에서 보자."

"내일 말씀이십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할 일이 있거든."

"으음.

레나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고작 이틀 사이에 꽤나 나에게 정이 들어 버린 걸지도 모른다.

불안하지는 않겠지.

"그런 표정 짓지 말고. 금방 올 테니까 푹 쉬고 있어."

"알겠습니다. 꼭 오셔야 됩니다."

- 달그락.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 동안 안 쉬고 수련한 그녀를 쉬게 할 때도 되긴 했고, 혼자 해볼 일이 있었다.

'질주.'

- 팟!

레나와 헤어져 달렸다.

뒤편을 흘끗 돌아봤다. 가을 달 아래로 산이 펼쳐졌다. 뒤쪽은, 메마른지하 묘지 방향이다.

- 달그락!

한차례 몸서리가 쳐졌다.

메마른 지하 묘지.

일단 그쪽만 피하면, 후작, 여우가면, 기스-제-라이라는 3종 괴물은 피하는 셈이다.

'좋아. 잘 가고 있어.

목적지는 유블람과 거미굴의 중간지점.

인적이 드문 황야다.

내일 아침 인간 한 무리가 그곳을 지난다.

새로 얻은 스킬을 활용하기에 적합한 녀석들.

바위는 쪼개 봤다.

다른 능력들도 레나를 수련시키며 짧게 발휘해 봤다.

하지만 역시 실전 경험을 쌓아야한다. 쇠붙이와 악의로 덤벼드는 무리들을 상대해 볼 필요가 있다.

'잘 가고 있겠지.'

레나가 향한 쪽을 바라봤다.

언제나처럼 별 탈 없이 유블람에들어갔을 거다.

혼자 가는 이유에는, 그녀를 쉬게 해 주려는 것 외에 다른 것도 있다.

이건. 루비아에 관한 일이니까.

'빌어먹을! 대장도 참. 나까지 거기에 꼭 가야 된다는 거야?'

자칭 '예술가' 크로멜은 처음부터이 임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190cm를 넘는 키.

통나무만 한 허리.

하지만 덩치에 걸맞지 않게 세심한손놀림을 가진 그는, 유블람 경비대장 아스포데의 심복 중 하나였다.

고문기술자로서.

'거미굴 따위, 재미없는데.

유블람의 반항분자들을 엮어 거미굴로 데려가는 일.

이 임무에는 아스 포데 라인의 경비병 전원이 참석해야 했다.

'어휴.

크로멜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인간들이 산 채로 아삭아삭 씹혀먹는 모습은 관심 없다.

굶주린 거미들은 급하다. 그건 너무 빠른 죽음이다.

'천천히 해야지. 천천히.'

죽음은 느릴수록 좋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크로멜은 느긋한 고문이 좋았다.

파들파들 떨리는 인간들의 신경과근육이 좋았다.

신발을 할으며 살려 달라고 비는 것도, 꿋꿋한 척 이를 악물고 비명을 삼키는 것도 모두 좋았다.

'아깝게.

반항분자로서 끌려가는 시민들.

그들은 아직 충분히 더 고통 받을 수 있는 자들이었다.

아직 제대로 망가지지 않았다.

크로멜은 그게 너무 아쉽고, 안타까웠다.

'자원 낭비잖아! 대장이 또 언제인간 사냥을 나가려나? 교육을 맡겨주는 것도 뭐 괜찮긴 한데.

크로멜이 선홍빛 미래를 위한 깊은 고민에 빠져 있을 때였다.

"어이쿠!"

일행이 갑자기 멈춰 선 탓에, 한참상상에 잠겨 있던 크로멜은 앞에 있는 동료와 강하게 부딪혀 버렸다.

"어쿠, 어쿠. r동료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한심한 행동에 대한, 대머리 대장의 질책도 없었다.

싸늘했다.

'분위기가 왜 이래?' 모두가 긴장 상태였다.

크로멜은 당황해 앞을 바라봤다.

'잰 누구야?'

도시에서 쉽게 구할 수 있을 법한.

평범한 풀 플레이트 메일을 착용한기사가 황야에 서 있었다.

투구로 완전히 얼굴을 가린 탓에 정체를 확인하기 힘들었다.

낡아 여기저기 이가 빠진 검으로 보아 어려운 상대는 아니었다.

'검 관리도 제대로 못 하나.

그때 였다.

- 철컥.

갑옷을 입은 기사가 앞으로 한 발자국 다가왔다.

그는 칼도 빼들지 않고.

자연스러운 태도로 경비대장 아스포데에게 말을 걸었다.

"어이? 너!"

'어? 저놈, 대체 뭐야?'

크로멜은 당황했다.

놈의 말투 때문이 아니다.

눈앞의 기사는.

수많은 경비병 중, 대장 아스포데를 정확히 찍어 부른 것이다.

그가 우두머리임을 처음부터 알고 다가오는 둣.

몹시 자연스러운 태도다.

- 철컥.

검집이 울렸다.

경비대장 아스포데는 경계하는 태도로 칼자루에 손을 가져다 댔다.

주위의 경비들도 일제히 창을 다잡았다. 크로멜도 긴 할버드를 쥔 손에 힘을 줬다.

"어디서 왔어? 누구야?"

대장이 묻고 있었다. 만만해 보이는 놈이면 바로 죽인다. 하지만 대장도 경계하고 있다.

어딘가에 끈이 있는 놈일 가능성도 있었다. 거래 상대인 네크론 신사회의 소속원일지도 몰랐다. 일단 정체를 파악해야 한다.

투구를 쓴 기사가 대답했다.

"나? 그냥 지나가는 나그네지."

그리고 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 쪽에 아편굴이 있던데. 그거너희 거냐? 신고를 받아서 말이야."

대장이 손짓했다.

경비대가 재빠르게 움직였다.

크로멜도 엉거주춤 움직였다. 눈앞의 기사가 도망가지 못하게 둘러싸라는 손짓이었다.

대장 아스포데가 말을 이었다.

"뭐? 신고라고 했냐?"

"그래, 신고. 그거 너희 꺼라며?"

- 철컥. 철컥. 철컥.

스무 명의 경비가 포위망을 완성했다. 기사는 한 발자국 더 앞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제국 마약관리법 3장 6조 1항. 아편을 수입하거나 재배한 자는 5년 이상의 노역에 처한다."

- 스르릉!

경비대장 아스포데의 검이 뽑혔다.

"뭐 하는 새끼야! 식구야 뭐야? 투구 안 벗어!"

- 스릉! 스릉!

칼을 가진 경비들이 칼을 뽑았고,

창을 가진 경비들은 창을 겨눴다.

크로멜도 뒤쪽에서 기사에게 할버드를 겨눴다. 하지만 기사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2항. 영리의 목적으로 이를 행한 자는 무기노역. 상습으로 행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

"이 새끼가. 쳐!"

아스포데의 곁에 있던 세 놈이 일제히 기사에게 창을 찔러 갔다.

그 순간이었다.

- 차차착!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내지른 세 자루의 창이, 전부 기사가 가볍게 들어 올린 검집에 찰싹 붙어 버렸다.

마치 빨판에라도 붙은 것처럼.

"어? 어어?"

"이, 이게 뭐야?"

"대, 대장! 안 떨어집니다!"

- 획! 획!

기사는 세 자루 창이 전부 찰싹 붙은 검집을 좌우로 흔들었다.

세 경비는 그 가벼운 손놀림에 휘둘려 볼썽사납게 우당탕 바닥에 넘어 졌다.

"에, 에이잇!"

그들은 대장의 눈초리를 느끼고 마음이 급해진 둣, 허리춤의 칼을 빼들고 다시 기사에게 달려들었다.

- 차차작!

다시 검집에 칼 세 개가 붙었다.

창칼 여섯 자루가 낡은 검집에 착달라붙은 광경은 몹시 기괴했다.

기사가 중얼거렸다.

"흠. 잘 되네?"

- 스롱!

검집에서 칼이 뽑혔다. 동시에 칼을 쥐고 있던 세 명의 팔이 일제히피보라를 뿌리며 날아갔다.

'보, 보이지도. 않아?'

팔이 잘린 경비들이 비명을 지르며 흙바닥을 나뒹굴었다.

"천천히 하자고, 천천히. 이것 저것다 해 봐야 되니까."

반쯤 망가진 바스타드 소드를 한손에 쥔 기사가 경비들을 한 번 숙훌어보고 말했다. 그와 잠깐이나마눈이 마주친 크로멜은 심장이 직접 쥐어지는 공포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