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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재밌는 걸 할 수 있게 될 거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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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가을이 한창이었다.

동굴에서 돌아오자마자 밖으로 뛰쳐나갔다.

레나와 함께 걸을 때보다 여름에더 가까운 시기다. 하지만 혼자 걷는 가을 길이 훨씬 추웠다.

- 투두둑!

낙엽을 밟고 오소리가 지나갔다.

레나가 보면 좋아했을까 싶다.

지도는 없지만 여기에서 묘지로 가는 길은 하나뿐이다. 레나가 없어도 햇갈릴 일은 없었다.

유일한 갈림길이라면, 이곳 삼거리뿐이다.

세 방향으로 길이 갈라지는 곳.

〈메마른 지하 묘지〉방향인 오른쪽으로 접어들 즈음이었다.

- 다그닥! 다그닥!

오른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말을 탄 병사 네 명이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투구와 갑옷, 잘 벼린 무기로 보아 꽤 훈련된 놈들인 것 같았다.

나는 수풀에 몸을 숨겼다.

'좀 애매한데.'

깊은 산속까지 순찰을 도는 건지 뭔지 알 수 없었다. 건성이지만, 수풀까지 포함해서 곳곳을 훑어보며 뒤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마주치게 된다.

'먼저 죽일까?'

인간들은 타자의 투구를 벗기길 좋아한다. 결국 죽일 수밖에 없다.

먼저 공격하고 경험치나 얻을지, 아니면 좀 더 바깥쪽에 숨어 놈들을 보낼지 잠시 고민하던 순간.

왼쪽 길에서도 인기척을 느꼈다.

나는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았다.

- 히히힝!

병사들이 탄 말이 울부짖었다.

인마의 시선은 왼쪽 도로를 향하고 있다. 병사들의 맞은편에는 검은 머리 남자 하나가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었다. 장발의 검은 머리를 하얀 머리띠로 묶고, 도복 같은 붉은 옷만 입고 있는 남자였다.

그의 허리에는 긴 칼이 있었다.

칼의 모양은 묘했다.

두 손으로 잡아도 한참 남을 만큼 손잡이가 길었고, 칼날 길이는1미터에 가깝게 길었다.

칼날은 곡선 형태였는데, 한쪽에만 날이 서 있는 도刀 형태였다.

'얇군.'

폭넓게 쓰이는 바스타드 소드와비교하면 검신이 얇았다. 두꺼운 부분이 없었다.

어지간히 솜씨 있게 제련되지 않았다면, 대검과 부딪쳤을 때 부서지거나 끊어져 버릴 것 같았다.

"멈춰라!"

말을 탄 네 명의 병사가 남자에게 창을 겨눴다. 남자는 멈추지 않고 그냥 걸음을 조금 늦췄다.

나는 도복 남자를 바라봤다. 그는 병사들이 멀리서 걸어올 때부터, 거리를 재고 있었다.

긴 칼집의 각도가 곧바로 빼기 쉽게 기울어지는 게 보였다.

승패는 볼 것도 없었다.

병사들은 남자에게 창을 겨눈 채 물었다.

"누구냐?"

남자가 대답했다.

"응? 그냥 사람인데."

병사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간첩 수색을 위해 정찰을 돌고 있다! 정체를 밝혀라!"

남자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간첩 수색? 이런 뻔하고 안전한길로만 다니면서?"

"뭐, 뭐야?"

"날 보면 제발 피해 달라는 복장을 하고 있는 주제에, 뭐? 간첩 수색? 급료 도둑질이 아니라?"

긴 칼을 찬 남자의 목소리는 거의 놀리는 투였다.

"이, 이놈이!"

말에 탄 병사들은 표정이 일제히일그러졌지만, 상대에게 느껴지는 기색이 심상치 않아 함부로 덤벼들지 못하는 듯했다.

"이, 이놈이!"

"신분을 밝혀라!"

병사들이 살짝 겁먹은 투로 말했다. 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간첩 맞아."

"뭐.?"

"간첩 맞다고. 그럼 어쩔 건데?"

"포위해!"

병사들이 일제히 창을 들고 남자에게 찔러 갔다. 방패가 없는 적을 상대로 창은 대단히 위협적이다.

기본은 되어 있는 병사들인 둣, 말위에서 창끝을 아래위로 흔들며 남자를 찔러 갔다.

아래위로 찔러 오는 네 자루의창은 웬만한 동체 시력이라도 혼란스럽기에 충분하다.

- 스룽!

- 서걱!

푸른 칼빛이 휘둘러졌다. 바람이 불었다.

두 자루 창이 동시에 잘려나갔다.

도복 남자는 앞으로 두 걸음을 디디며 다시 칼을 휘둘렀다. 칼이 뒤쪽의 두 자루 창을 향해 날았다.

- 서격!

- 투둑! 투두둑!

뒤쪽의 두 자루 창이 바닥에 다시 떨어졌다.

훌륭한 발도拔刀다.

뛰어난 재능과, 그동안 쌓아 왔을 고행이 느껴졌다.

못 잡을 정도의 속도는 아니었다.

수련은 좋았지만, 단순한 빠르기나 힘은 내 쪽이 앞설 듯했다.

에라스트에서 만났던 크리스티나보다 한 수 반 정도 앞서 있었다.

하지만 검집에서 뽑혀져, 푸른 예기를 줄줄히 내뿜는 칼이 제법 범상치 않아 보였다.

- 히 히힝!

네 마리 말이 모두 말머리를 돌려 도망치려 했다. 병사들도 사색이 되어 질려 버렸다.

그 얼굴 본 남자가 소리쳤다.

"농담이다, 멍청한 놈들. 간첩은무슨."

도복 남자가 품에서 신분증을 꺼내 들었다.

"첸들러 남작이다."

"아, 그라스미어의 공자님 아니십니까? 몰라 뵈어 죄송합니다! 무사수행을 떠나셨다고.

"그래. 무기는 내 성에 가서 받든지 해라."

남자가 품에서 증표 같은 것을 그들에게 던져 줬다. 금속으로 만든 작은 패였다. 무언가 새겨져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일 자주 있으니까, 무기는아버님이 알아서 내주실 거야."

"그라스미어의 무기는 제국 제일이죠! 영광입니다!"

병사들은 굽실거리며 다시 가던 길을 갔다.

'뭐지?'

기묘한 조우를 보고 잠시 수풀에더 숨어 있었다.

자신들의 임무가 장난처럼 취급당해도 어쩔 수 없다는 둣, 병사들이 자연스레 길을 가는 모습에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그라스미어의 공자라.'

영주의 아들쯤 되는 모양이다.

이야기를 듣자 루비아가 떠올랐다. 우리는 그곳에 들르려 했다.

뜨거운 대장간의 도시에.

지금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이미갑옷은 있다. 특별히 좋은 무기의 필요성은 느끼지 않는다.

그라스미어에 들른 뒤. 월 하려고 했더라?

'엠버.'

그 뒤에 엠버로 향하려 했다.

'엠버라.

T&T의 본부가 있는 도시.

루비아가 가고 싶었던 도시.

전쟁이 터지면, 역설적으로 가장먼저 젯더미가 되는 중립 도시.

어떨까.

이번 생은 그 도시를 목표로 삼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지금이 아니면 갈 수 없다.

전쟁은 곧 벌어진다. 일 년 후의엠버는 잿더미와 폐허뿐이다.

수천 개의 자치령은 하나하나 모두 숨이 끊어진다.

그곳에 가 볼까.

답이 나올지도 모른다.

'무정부주의자이신가? 해골에겐 국가가 없으니 정말 어울릴지도 모르겠네요.'

문득, 루비아의 말이 떠오른다.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도복 남자와 한바탕 한 덕분에 정신이 없었는지, 경비들은 이쪽은거의 훑어보지도 않고 말에 박차를 가했다. 덕분에 쓸데없는 소란은 피했다.

- 스르룩.

수풀에서 걸어 나왔다.

원래의 목적지인 〈메마른 지하묘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딜가도 책은 읽고 갈 생각이다.

아래로 졸졸 냇물이 흐르는 작은 다리를 건녔다.

긴 나무 사다리를 쓰러트려 만든 엉성한 다리다. 이제 곧 도착이다.

저 멀리 보인다.

? 쏴아公]? 아.

돌계단 사이로 흘러내리는 폭포.

쏟아지는 기세가 거세다. 하얗게 거품이 터진다.

저 아래로 가면 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텅 비어 있을〈메마른 지하 묘지 〉.

독서에 최적의 환경일 터.

하루 정도 책을 읽으며 천천히 휴식한 뒤, 길을 떠나자.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문득, 둥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온몸이 나른하게 풀어졌다.

시야가 바닥을 향해 하강했다.

방금 본 레나의 모습이 잔상처럼 머릿속을 스쳐 갔다.

'죽는. 건가? 왜? 어떻게?'

- 툭.

가느다란 의식이 끊어졌다.

그대로 어둠 속에 빠져들었다.

[System message]

[시전자의 〈종족: 해골〉에 대한이해도가 EX랭크입니다.]

[대상을 있을 수 없는 상태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잠에 들었습니다.]

[동화율이 떨어집니다.]

[87.0413% .]

[까지 2.0413.]

온통 어두웠다. 의식을 차렸지만 시야는 돌아오지 않았다.

오직 반투명한 푸른 상태창만이,

허공에 막 떠올라 올 뿐이다. 나는 메시지를 읽기 시작했다.

[숙면에 들었습니다.]

[마음에 쌓인 독소가 씻깁니다.]

[자괴감이 약간 완화되었습니다.]

[죄책감이 약간 완화되었습니다.]

[계속해서 잠에 익숙해지면, 〈꿈〉을 꿀 확률이 발생합니다.]

[〈꿈〉은 잠의 효과를 방해하고, 종종 특별한 효과를 발생시킵니다.]

'잠? 이게. 잔다는 건가?' 내가 겪는 건 처음이다. 레나가자는 건 많이 봤다.

첫날밤을 살아남았을 때, 루비아가 동굴에서 내 허벅지에 머리를 기대고 잤던 것도 기억난다.

斗스터 서큐버스는 굳이 잘 필요는 없는 것 같았지만, 놀이처럼 잠에 들곤 했다.

처음에는 죽는 건가 싶었다. 의식이 툭, 하고 꺼져 버렸으니까.

하지만 다시 깨어났다.

의식이 나간 뒤 다시 들어오는 건 낯설고 신기한 경험이었다.

잠에서 깨어났다는 메시지 아래.

또 다른 메시지들이 빼곡하다.

[결계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전능全能 감소〉

〈 감속 〉

〈항마降魔 억제〉

〈시야 억제〉

[시전자의 〈종족: 해골〉에 대한이해도가 EX 랭크입니다. 결계의 위력이 4, 000%까지 증가합니다.]

[시전자의 의지에 따라, 당신의〈모든 능력치〉가 97% 감소된 채 발현됩니다.]

[시야가 97% 감소합니다.]

'결계?' 메시지를 읽고 나서야 내 상태를 천천히 돌이켜 본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다.

울퉁불퉁하고 차가운 바닥에 달라붙어 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움직일 수 없다. 시야를 박탈당하자 시간이 낯설어진다.

엿가락처럼 늘어진다.

짧은 시간이 무한히 길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고, 긴 시간을 아주 짧게 느끼는 것 같기도 했다.

- 똑.

_ 똑- 똑.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동굴인가.'

울퉁불퉁하고 단단한 돌바닥과,

종유석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물방울 소리로 보아 동굴이다.

그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전능 억제가 조정됩니다. 스탯이85% 감소된 채 발현됩니다.]

[시야 감소가 조정됩니다.]

- 달그락.

몸에, 아주 약간 힘이 들어온다.

손으로 바닥을 짚는다. 바닥이 딱딱하다. 앞으로 몸을 구부려 일어났다. 그 정도만 할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농락당하고 있다.

'결계. 라고 했나?'

몸이 무거웠다. 거대한 철추 수십 개를 매단 감각이다. 하지만 강한 능력치에 지나치게 익숙해졌을 뿐.

처음 무덤에서 일어날 때는 결국이 정도였겠지.

주위로 손을 휘저었다.

아직도 새까만 어둠뿐이다. 아래로 몸을 더듬었다. 갑옷이 벗겨져있다. 딱딱한 뼈가 드러난다.

툭. 투둑.

손끝으로 두드려 본다. 오랜만에 만져 보는 척추, 갈비뼈, 골반이다. 줄곧 갑옷을 입고 있었기에 만져 볼 일이 없었다.

두 가닥 아래팔뼈 사이에 손가락을 넣어 본다.

한기가 와 닿는다. 새삼스럽다.

- 달그락!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안녕?]

안녕, 안녕, 안녕.

머릿속에 음성이 울려 퍼진다.

두개골에 〈각인〉되는 것 같은 소리다. 머리 안쪽에 거대한 종을 치는 것 같다.

'으음.'

E급 던전 〈메마른 지하묘지〉를향해 가고 있었다. 케빈 애슈턴의 책을 양쪽에 쥔 채로, 조용히 책을 읽을 공간을 향해서.

작은 소란을 피해 수풀에 숨었다.

다시 길을 재촉했다. 그러던 도중의식이 꺼져 버린 것이다.

'까마득하군.'

내 무력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저번 생을 떠올렸다. 제법 강해졌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슬라임의손바닥 안에 있었을 뿐이다.

단지 무력武刀의 차원이 아니라, 전반적인 역량이 너무 부족하다.

이번에는 다시 살아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의식을 잃고 알수 없는 공간에 떨어져 있다.

상대가 누군지도, 목적도 모른다.

그래도 희망적인 몇 가지가 있다.

묶여 있지 않다. 통중도 없다. 마치 조심스레 들려져 운반된 것처럼.

여기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관람자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곧폐기될지도 모른다.

나는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 달그락!

내가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소리는 뒤에서 났다. 순간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무언가 희끄무레한 것이 보였다.

'해골인가?'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 가까이서 보니 그러했다. 나와 비슷한 크기의 녀석이다.

키가 살짝 더 크고, 턱뼈가 조금 더 발달해 있다는 정도가 다를까.

콧구멍도 약간 더 크다. 유의미한차이는 아니다.

그밖에 는.

주먹을 좀 썼던 걸까. 몸에 비해손가락 마디가 제법 굵다.

나는 녀석을 집중해서 바라봤다.

녀석이 나를 이 장소에 납치한 건 아닌 듯하다. 그러기에 놈은 너무 초라하고 약해 보인다.

느리다. 허술하다.

? 딱딱! 딱딱!

녀석이 이빨을 세차게 부딪친다.

적의가 느껴진다. 나를 공격하려는 것 같다. 혹시 말을 거는 걸지도 모른다. 잠시 기다렸다.

기다림의 대가는 혹독했다.

가까이 다가온 녀석은, 다짜고짜 주먹을 휘둘렀다. 힘은 약간 있지만, 전혀 빠르지 않다.

빠르지 않.

- 빠각!

나는 그 녀석보다도 느렸다.

뼈로 만들어진 주먹이 내 두개골을 때린다. 머리가 뒤로 젖혀진다.

- 달그락!

비참하게 뒤로 몇 발자국 휘청거리며 물러났다.

살짝 몸이 뜬 것 같기도 했다. 가벼운 펀치에 불과하다.

하지만 내 몸도 가볍다.

- 탁!

둥이 곧 벽에 부딪혔다. 더 물러날 수도 없었다.

양손으로 주먹을 단단히 그러쥔 녀석이 내게 다가왔다.

- 달그락! 달그락!

주위를 더듬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무기로 쓸만한 건 아무것도 없다.

78화 재밌는 걸 할 수 있게 될거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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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으로 상대해야 한다.

- 휘익!

다시 한 번 주먹이 휘둘러졌다.

- 빡!

팔을 들어 급하게 막았다. 길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고통은 전혀 없었지만, 막은 팔이 뒤로 훅젖혀졌다.

주먹이 한 대 더 날아왔다. 같은 팔로 막았다. 어깨가 잘 움직이지 않는 느낌이었다.

? 딱딱, 딱딱I녀석은 세차게 이를 부딪쳤다. 나름 큰 턱으로 세차게 이를 부딪치니 위압감이 느껴졌다.

객관적으로 봐서 녀석은 〈망령의 납골당〉문지기 정도 수준이었다.

그런 수준의 녀석에게 위압감을느끼다니, 정말 상상해 보지도 못한 일이다.

'대체 몸이 어떻게 된 거지?'

능력을 억제하는 결계라는 게, 정말 가능한 거란 말인가.

하지만 반투명한 푸른 상태창. 메시지를 전달해 주는 상태창은 한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그리고 내 몸도, 상태창이 설명하는 그대로다.

능력이 엉망으로 떨어져 있다.

- 휙!

- 빠각!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다시 한번 두개골을 맞았다.

- 탁!

[경고! 체력이 75% 이하입니다!]

다시 한 번 암벽에 등이 부딪힌다. 몸이 더욱 느려지는 것 같았다.

녀석의 공격력은 형편없다.

하지만 지금의 내 체력도 그렇다.

벌써 25%가 깎였다. 계속 맞다보면 머지않아 머리가 쪼개질 거다.

이대로 맞을 생각은 없다. 어차피말이 통하는 상대는 아니다.

'패턴은 읽었다.'

녀석이 단단히 그러쥔 오른손을 뒤로 잔뜩 젖혔다.

나는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아무준비 동작 없이, 놈의 커다란 콧구멍 뼈를 향해 곧바로 왼 주먹을내 뻗었다.

- 딱!

작은 소리가 났다. 녀석은 주먹질을 하기 애매한 자세가 되었다.

나와 녀석의 팔 길이는 비슷했다.

잔뜩 뒤로 당긴 주먹을 내지를 수없는 상황. 놈은 얼굴로 내 주먹을 밀어붙이려 했다.

- 턱!

하지만 내 뒤는 암벽이었다.

나는 암벽을 등으로 세게 밀면서, 왼 주먹을 당기고 오른 주먹으로 녀석의 눈구멍 뼈를 향해 강하게 주먹을 날려 버렸다.

- 빠각!

경쾌한 소리가 났다. 녀석이 굴러 넘어졌다.

주먹으로 처음 해 보는 공격이다.

처음 해 보는 '제대로 된' 공격이라는 표현이 더 가까웠다.

날 공격한 녀석의 팔다리를 뽑아바닥에 던져 버렸다.

하지만 나도 성하지는 않았다.

양쪽 팔뼈가 덜그럭거렸다. 손가락 뼈 마디마디에 금이 갔다. 경추가 삐걱삐걱 흔들렸다.

갈비뼈는 몇 군데가 나가 있었다.

그야말로 사투를 벌였다.

항상 모험가들에게 당하던, 고작해야 문지기 해골 정도밖에 안 되는 녀석과 처절하게 싸운 것이다.

비참하다면 비참한 상황.

하지만 온몸에 기묘한 고양감이느껴졌다.

저번 삶을 생각했다.

철저하게 계산된 루트, 슬라임이배려해 준 루트만 줄곧 밟아 왔다.

잘 준비된 상태에서, 충분히 이길 상대와만 싸워 왔다.

그러다 이런 사투를 벌이니 온 뼈에 전율이 흐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 달그락! 달그락! 뚜둑! 뚜두둑!

내가 사지를 분리한 녀석의 뼈가 차곡차곡 결합되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거지?'

하지만 녀석은 다시 나에게 덤벼들지 않았다. 어둠 속으로 터벅터벅 걸어서 사라졌다.

그리고.

나 역시, 뭔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손을 바라봤다. 갈라졌던 뼈가 이미 전부 다 붙은 상태였다.

의아함을 느낀 순간이었다.

- 달그락!

- 달그락!

- 달그락!

세 구의 해골들이, 동시에 나에게다가 오고 있었다.

'피곤한데.'

한 손에는 검을 들고, 한 손에는 낡은 나무 방패를 든 채 삐거덕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안타깝게 볼 만한상황. 내 상대가 되지 않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결계에 납치된 지금 상황에서는, 천천히 걸어오는 저들이 트롤 세 마리에 버금가는 위협으로 느껴졌다.

온몸의 뼈 곳곳이 다 떨어진 채로, 간신히 셋을 물리쳤다.

- 중! 쿵!

다음으로 나타난 녀석이 발을 구르며 다가온다.

커다랗다. 머리 크기는 내 두 배정도. 입도 무척 크다.

턱뼈도 네 배는 될 것 같다. 훨씬 발달되어 있다.

종種이 다르다.

'오크 해골?'

오크는 명예를 아는 전사들이다.

실은 아는 정도가 아니다. 그들은 전투와 명예밖에 모른다. 인간들의 침략에도 결코 도망가지 않았다.

숨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끝까지 맞서 황야에서 싸웠다. 자신들의 땅을 절대로 내어주지 않았다.

게다가 싸움이 벌어지는 곳이라면 앞장서 나타났다. 자신의 힘을 시험하기 위해서, 라고 말하며.

그렇기^1.

인간의 세계에서 오크가 멸종의위기에 놓였던 것은 당연하다.

옛날에는 한 손에 꼽힐 정도로 수가 많은 종족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마왕군 강림 전까지 나도 오크를 거의 보지 못할 정도로 줄어들었다. 그들은 식용으로, 실험용으로, 학대용 혹은 전투용 노예로 인간에게 잡혀 들어갔다.

어쨌건, 순수한 체격으로 보았을 때 인간보다는 훨씬 우월하다.

녀석이 거대한 주먹을 휘두른다.

- 빠각!

뼈로 만들어진 주먹이 내 두개골을 때린다.

- 붕!

몸이 위로 떴다. 다시 한 번 주먹이 휘둘러졌다.

- 데구르르!

녀석 쪽으로 급하게 몸을 굴렸다.

길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양손으로 놈의 발목을 잡았다. 뼈를 분리하려고 했다. 하지만 힘이 한참 부족했다.

- 덥석!

오크는 내 팔뼈를 잡았다.

- 콰득!

맨손으로 부러뜨렸다. 팔뼈가 뚜두둑 소리를 내며 꺾여 나갔다.

부러진 내 팔뼈를 녀석이 잡아 아무렇게나 휘둘렀다.

녀석의 손에 들린 내 팔뼈가 바닥을 마구 때렸다. 뼈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몸을 굴려 아득바득 피했다.

- 달그락! 달그락!

차가운 돌바닥에 뼈 구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크 해골 하나를 상대로 하며, 압도적인 열세 속에서 생각했다.

사실은 이게 원래의 내가 아닐까? 루비아와 레나와 있었던 일들은, 모두 환상이었던 것이다.

지금의 이게 내 현실이다.

잠깐 꿈을 꾼 게 아닐까.

- 퍽!

녀석이 든 '왼쪽 팔'이 오른쪽 팔을 때렸다.

모두 내 팔이었다. 나는 옆으로 바닥을 몇 번 굴렀다.

오크는 제 손으로 끝내겠다는 듯내 '왼쪽 팔'을 바닥에 집어던졌다.

'저걸 잡아야 해.'

나는 필사적으로 바닥을 굴렀다.

왼쪽 팔을 잡았다.

[검술 Lv. 5가 발동됩니다.]

[적합도가 떨어지는 무기입니다.

효율이 70% 감소합니다.]

이걸로 승부를 봐야 했다.

- 휙!

녀석의 두개골에 벌어진 툼이 보였다. 손이 들어갈 정도로 커다란툼이었다. 그곳에 팔뼈를 끼웠다.

강하게 비틀었다.

- 뚜두둑!

뼈 뜯어지는 소리가 나며 오크해골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 털썩.

뒤로 주저앉았다. 탈골된 왼팔을 억지로 몸에 끼워 넣었다. 왼팔은반쯤 부서져 있었다.

'이것도. 회복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 구구구구구궁.!

바닥 한구석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쿠구구. 쿵!

움직임이 멎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조금씩 빛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빛이 허공에 글자를 만들었다.

〈알아서 골라 봐〉

'이건.?'

용사 포인트를 안내하고 레벨과스탯을 알려 주던, 반투명하고 푸른 상태창은 아니었다.

'마법인가?'

빛으로 글자를 쓴다.

이런 효과는 몹시 낯설다.

내 수준에서 마법사들을 접할 일은 극히 드물었으니까.

하지만, 글자 아래 은은하게 비치는 것들은 제법 익숙하다.

내가 들고 휘두르던 것들. 혹은 거기에 부서지던 것들이다.

차가운 금속으로 만든 무기들.

빛나는 글자 아래, 새롭게 돌출된 바닥. 그곳에 놓인 무기들을 하나씩 천천히 훑어봤다.

양손으로 들어야 할 철퇴.

잘 제련된 소형 철제 방패.

한손 검과 메이스.

철이 씌워진 그레이터 쉴드, 길다란 양손 검과 할 버드.

랜스와 츠바이핸더까지 있었다.

'골라 보라고?'

누군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공들인 무대가 마련되었다. 관객석이 없을 리 없다.

우리에 갇혔다. 갇힌 짐승은 재롱을 잘 떨어야 살아남는다. 여기서 순순히 죽을 생각은 없다.

설계자의 장난에 충실해야 한다.

- 덥석.

나는 조심스럽게 한손 검을 잡아들었다. 저번 생에서 바스타드 소드를 주로 쓰긴 했지만, 가장 익숙한 건 역시 이런 형태의 칼이다.

잠시 고민했다.

'또 뭘 들지.'

한 손이 빈다.

양손 무기는 탈락이다. 방패와 메이스 사이에서 갈등했다. 하지만 이런 동굴이라면 역시 방패가 옳다.

무슨 함정을 설치해 놓고, 이런장난을 치는지 모를 노릇이니까.

땅에서 커다란 방패를 집었다.

그 순간.

[전능 억제가 해제됩니다.]

[시야 감소가 사라집니다.]

라는 메시지와 동시에, - 파바바바박!

빛으로 빚어진 〈알아서 골라봐〉라는 글자가 터졌다. 어둠이 사그라졌다. 사방으로 빛이 퍼져나갔다.

그리고 보인 것은.

'뼈.'

뼈. 뼈. 뼈. 뼈. 뼈.

뼈뼈뼈뼈사방을 온갖 뼈가 메우고 있었다.

말의 뼈.

인간의 뼈.

오크의 뼈.

트롤의 뼈.

오우거의 뼈.

알 수 없는 뼈.

그리고 뼈 무더기 속에서, 달그락거리며 서서히 무언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뼈 무더기 속에서, 커다란 망치를 든 오크 해골 다섯이 나타났다.

'젠장.'

동굴 속의 거대한 공터.

반경 20미터 정도의 넓이, 거대한 뼈 무더기로 둘러싸인 무대 위에서.

의도를 알 수 없는 누군가의 가학적 관음이 한창이었다.

- 달그락.

나는 사방에 널브러진 수없는 해골들을 내려다봤다.

셋 다음에는 다섯, 일곱이었다.

오크 해골 일곱이 나온 다음에는 트롤 해골이 등장했다.

놈은 거대한 도끼를 들고 덤볐다.

커다란 방패는 간단히 반으로 쪼개졌고, 칼을 던져 시간을 번 뒤철제 소형 방패를 주웠다.

_ 크르르르.!

트롤 해골이 울부짖었다. 양쪽에서 트롤 해골 둘이 더 나타났다.

'망했군.'

트롤을 셋이나 한 번에 당해 낼 수는 없었다. 뼈밖에 남지 않은 해골들은 전투력이 한참 떨어지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놈들은 무슨 마법이라도 걸린 건지, 살아 있는 트롤에 뒤지지 않았다.

내 능력은 전부 되돌아온 상태였다. 그래도 상대는 힘들었다. 놈들 하나하나가 무척 빠르고 강했다.

뼈에서는 은은한 흰빛이 나고 있었고, 가진 도끼는 서늘하게 날이 살아 있었다.

- 피릿!

도끼가 내리쳐졌다.

두개골이 쪼개지는 걸 막기 위해 급하게 방패를 들었다.

? 쨍!

강한 충격이 덮쳐 왔다. 버틸 수가 없었다. 방패를 놓쳐 버렸다.

- 데구르르!

찌그러진 방패가 바닥을 구른다.

도끼가 방패를 쳤는데, 철제 방패가 상해 버렸다.

- 스릉!

트롤은 아직 하나도 잡지 못했다.

양쪽에서 두 녀석이 도끼를 아래위로 휘둘러 온다.

나는 무방비한 상태다.

두개골이 쪼개진다면? 다시 레나를 만나게 되겠지.

하지만 기적을 바랄 수도 없다.

실력 차이는 압도적.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동굴.

뼈 무더기에서 해골로 된 적들이 계속 쏟아져 나왔다. 잠시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소멸이 코앞이다.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나를 납치한, 관람자가 바란 게 정말 이런 것인가?

기껏 이런 무대를 마련해 놓고서?

- 데구르르!

나는 방패를 향해 바닥을 굴렀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하지만.

희망은 없어 보인다.

- 쾅!

가장 빠른 녀석이 찌그러진 철방패를 멀리 차 버렸다. 아무것도알 수 없는 이런 장소에서, 나는 정말 죽고 마는 걸까?

79화 재밌는 걸 할 수 있게 될 거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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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당해 내지 못했다.

- 뚜둑!

양팔이 뒤로 꺾였다. 트롤 해골 두 마리가 좌우에서 날 제압한다.

"크워어어.

나보다 세 배는 클 것 같은, 트롤해골의 커다란 손.

내 팔꿈치가, 손목이 잡힌다.

뒤로 꺾여 단단하게 쥐어진 팔은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다.

- 덜커덕!

양쪽에서 올라탄 트롤 해골들.

엄청난 완력이다.

두 마리가 동시에 짓누른다. 도저히 반항할 수가 없다.

'어떻게 해 보지도 못하겠군.' 턱이 바닥에 내리꽂힌다. 바닥은 차갑다. 울퉁불퉁하다. 충격으로 몸이 떨린다. 헛된 줄 알면서도 나는 발버둥쳤다.

- 달그락! 달그락!

두 다리를 마구 휘저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 콱!

곧 트롤 해골들의 커다란 발에 단단히 깔렸다. 빠져나오려 애를 썼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묵직한 무게에 사지를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녀석들은 나보다 훨씬 컸다. 훨씬 더 무거웠다.

'이런.'

온몸을 뒤틀었다.

생각으로만 그랬다. 실제로는 꼼짝도 못 했다. 괴로운 와중에 한편, 의문이 마구 솟아나고 있었다.

'이런 게 가능한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게 아닌가싶다. 상황은 그 정도로 괴상하다.

'트롤이 이렇게 통제되는 녀석들이라고?'

움직임이 무척 체계적이다. 실에 매여 있는 듯하다. 철저히 훈련받은 것 같은 정교함.

분명하다.

누군가에게 지배당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강력하게.

그렇다면 떠오르는 의문은.

'대체 누굴까?'

무덤에서 인간 해골 한 구를 일으키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초보 사령술사라도 가능하다.

'루비아도 했으니까.'

하지만 일으킬 대상이, 인간보다강한 힘을 가진 오크가 되면 한층 더 어려워진다.

'술자와 다른 종족인 경우에 특히 어렵다고 읽은 것 같은데.

대부분의 네크로멘서(사령술사)는 인간이다. 결국, 인간 외의 해골을 움직이는 건 이중으로 어려운 셈.

오크도 어려운데.

훨씬 강한 오우거나, 고산지대의폭군인 트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을 무덤에서 일으킬 수 있는자는 극소수.

전장에서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문제는 따로 있다.

무덤에서 일으킨다고 끝이 아니다.

일으킨 해골을 통제하는 게 훨씬 어사실 그게 핵심이다.

마왕군에 가담했던 인간 네크로멘서들을 돌이켜 본다.

내가 겪었던 네크로멘서들.

그들의 능력은 조잡했다.

해골병사에게 창을 들리고, 방진을짜게 할 정도의 능력을 가진 네크로멘서조차 없었다.

인간의 기병 돌격을 잠시 막을 만큼조차도.

어디 있고, 어디로 진군하라고 방향성을 제시하는 게 전부였다. 거기까지가 통제력의 한계.

고작 그 정도로도, 놈들은 마왕군내에서 거들먹거리는 위치였다.

하물며 이 정도의 통제력을 보이는 건 대체 어떤 존재일까?

'고위 마족이 미리 강림한 건가?

혹시 마왕 자신이?'

마왕의 힘 같은 건 모르지만.

한때 세계의 절망으로 군림했던16마왕 정도라면, 이런 일도 가능하겠지.

정말 그들일까.

혹은.

앞에서 작은 탄식이 들려왔다.

〈흐으음. 〉

이 장소에 떨어졌을 때, 처음 머릿속에 울렸던 그 목소리다.

- 달그락! 달그락!

유일하게 자유로운 머리를 위로 올렸다. 앞을 보려 움직였다. 누가 이장소를 지배하는지, 이들을 조종하는 건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 쿵! 쿵!

앞에 있던 트롤이 걸어왔다. 거대한 몸집이 시야를 차단한다.

- 콱!

감히 뭘 보려고 하냐는 둣, 트롤은 머리를 땅에 짓눌렀다.

너무 세게 누른 탓에 턱이 나가버릴 것 같았다.

'젠장.'

- 스르릉.

차가운 한기가 두개골에 닿는다.

도끼다.

- 휘익!

트롤이 도끼를 높이 들었다.

팔다리는 단단히 붙잡혀 어차피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 이제 죽는 건가 싶을 때였다.

〈더 숨긴 거 없어? 〉

작은 음성이 들려왔다. 키득거리는 웃음이 섞여 있었다.

'숨긴 거라니?'

- 덜그럭! 덜그럭!

양쪽의 트롤 해골들이 내 팔다리를 놓았다. 살아서는 인간을 산 채로 쭉쭉 찢었을 녀석들이, 순한 양처럼 얌전히 뒤로 돌았다.

주위의 거대한 뼈 무더기 속으로,

터벅터벅 걸어서 사라졌다. 기묘한 광경이었다.

- 달그락.

차가운 바닥을 짚었다.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너무 꽉 쥐여져서인지아직도 뼈가 얼얼했다.

'금이 좀 간 거 같은데.

그때 였다.

- 끼아아아아악!

허공이 떨렸다.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동굴에 울려 퍼졌다. 없는 귀를 틀어막고 싶은 비명이었다.

갑자기 천장 쪽에서 무언가가 나타났다. 반투명한 하얀 연기였다. 연기가 나를 향해 덮쳐왔다.

'스펙터?'

- 부응!

바닥에서 주운 칼을 휘둘렀다. 칼은 연기를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트롤처럼 이들 역시,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게 분명했다.

주위를 바라봤다. 하지만 아무것도보이지 않았다.

- 끼아아아악!

연기는 비명을 지르며 내 몸을 통과해 지나갔다. 기분 나쁜 한기가 온몸에 흑 끼쳤다. 연기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수십 마리스펙터가 나타났다.

하얀 연기 같은 스펙 터들은 반투명한 몸을 허공에 흐느적거리며 나를 둘러쌌다. 주위가 전부 그들로 덮여버리는 것 같았다.

그들이 희끄무레한 연기로 나를 일제히 덮쳐 왔다.

- 부응! 부응!

반사적으로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어떤 피해도 주지 못했다.

- 휘이이잇! 휘이이잇!

수십 마리 스펙 터가 내 몸 곳곳에 들어왔다 나가기를 반복했다.

으스스한 한기가 두껍게 온몸을 뒤덮었다.

'귀찮군.

생명력에 집적 적으로 해가 되는 건아니다.

내가 그들을 해칠 수 없듯 그들역시 나를 해칠 수 없었다.

하지만 계속 내 몸에서 장난질을 반복하자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고몹시 불쾌했다.

긴 시간이 지났다.

나는 완전히 지쳤다. 칼을 휘둘러도 의미는 없었다.

처음 이곳에 납치된 순간부터 이미 패배해 있었다.

- 털썩.

기괴한 뼈 무더기 한쪽에 기대어 쓰러졌다. 실험실에 갇힌 키메라는, 갇힌 그 순간부터 패배자다.

그냥 힘없이, 침묵하고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였다.

- 쉬잇. 네 손은 아주 붉구나. 어떤 죄악을 저질렀지? 그런데 또 어찜 이렇게 하얗니? 되는 대로 살아서는 너 같은 아이가 될 수 없어.

넌 누구니? 무슨 인형을 가지고 놀았니? 어떤 어미에게 버려졌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전혀 알수 없었다. 어디서 들려오는 말인지도 역시 전혀 알 수 없었다.

'희롱하는 건가.'

다시 몇 번이고 주위를 바라봤다.

옆에도, 뒤에도, 앞에도, 위에도 아무것도 없었다.

- 깡!

단단하고 울툴불퉁한 돌바닥을 칼로 두드려 봤다. 역시 바보 같은 행동이다.

스스로에게 진저리가 날 뿐이다.

칼을 멀리 던져 버렸다.

거대한 뼈 무더기로 만들어진, 기괴한 미로가 나를 비웃는 것 같다.

나는 허공에 작게 중얼거렸다.

"누구냐?"

- 누구냐. 누구냐. 누구냐.

칼을 던질 때는 울리지도 않던 메아리가, 작은 중얼거림에는 곳곳에서 중폭되어 되돌아온다.

- 굶어 죽은 창고지기, 혀를 뽑혀죽은 시인, 갑판 위에서 살해당한밀항자.

목소리는 줄곧 연극적이다.

'장난을 치는 건가.'

목소리가 어디서 들리는지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고,

사방의 거대한 뼈 무더기들이 응응 울리며 내는 소리 같기도 했다.

- 강간당해 죽고, 불타서 재가 된사령술사이기도 하지.

- 달그락!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비아를 알고 있어?'

게다가 명백한 조롱이다. 바닥에 놓인 긴 할버드를 들었다. 하지만보이지도 않는 상대다. 어디로 칼을 휘둘러야 할지도 모른다.

- 나를 찢어 버리고 싶니? 사지를 돌려서 분리해 버리고 싶니?

다리 사이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골반 가운데 텅 빈 부분에서.

- 아이야, 실은 네가 그렇게 될 거경추 하나하나를 올올이 울리며 목소리가 쏟아졌다.

- 네 뼈를 쪼개고 조립할 거야. 머리를 짜 맞추고 관절부터 갈아 끼워야지. 독수리의 날개를 달아 줄까?

트롤의 팔을 달아 줄까?

'뭐라고?'

그 순간.

여자가 누군지 알아차렸다.

저런 말을 할 만한 존재가 둘 일리 없다. 하지만, 머릿속에 곧바로 의문이 떠오른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그 존재가여기에 있지?'

그녀가 말하는 행위를 알고 있다.

뼈를 분해해서 다시 조립한다.

이종異種 간의 뼈를 짜 맞추고 갈아 끼운다.

살해와 육식처럼 누구나 하는 행위가 있고, 개인의 고유한 색을 가지는 행위가 있다.

해골 개조는 꽤나 고유한 행위다.

앉아서도 누워서도 네크로멘시에 대해 끝없이 궁리한 결과물이리라. 이런 행위는 남다른 내면과 자질을 나타낸다. 타자池者와 겹치지 않는 정체성의 좌표를 보여 준다.

거기에 이 절대적인 통제력.

지배와 결계의 네크로멘서.

그녀의 정체를, 내가 지금에서야 깨달은 게 오히려 기이할 정도.

'위치가 너무 엉뚱한걸.'

처음에 루비아와 함께 계획대로 여정이 진행됐다면 두말할 것 없이 엠버로 계속 향했으리라.

엠버행行은 바로 이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 이루어졌다.

호의를 구걸할 예정이었다. 접골시술을 요청하고. 계속되는 반복에 대해 물어볼 생각이었다. 최고의 네크로멘서였다고 했으니.

그 지혜를 빌릴 수 있지 않을까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있다고?'

사정을 도무지 짐작하게 어려웠다.

'음.

그녀가 나를 어떻게 요리하려 들지 알 수 없다.

이야기를 들어 보면 접골 실험에 사용하는 재료로 쓸 것 같다.

'이 많은 뼈들을 놓아두고.'

왜 하필 나인가, 의문이 들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건가?

'일단은.'

적극적으로 부딪쳐 보는 수밖에 없다. 나는 허공에 대고 크게 소리쳤다.

"나를 왜 여기 데려온 겁니까?"

〈호호호호. 〉

사기邪氣로 가득한 웃음소리.

사방에서 나를 죄어 오는 듯하다.

웃음소리가 발자국이 되어 허공을 마구 디딘다.

소리는 환청처럼 멀기도 하고, 귀바로 옆에서 울리는 종처럼 거대하기도 했다.

〈오순도순 얘기나 좀 하자고 데려온 거야. 〉

"얘기. 말이오?"

그럼 지금까지 나한테 한 짓은 다뭐란 말인가?

〈그래. 난 여기서 지겹게 누굴 기다려야 하거든. 이쪽에 공사해 놓은 게 있어서. 파는 건 이미 한참 전에 끝내 놨는데. 재밌어 보이는 아이가 있어서 살짝 초대한 거지. 체력검사도 끝났으니, 건강한 우리 아기이야기를 듣고 싶은걸. 〉공사는 또 무슨 이야기인가.

"나부터 시작해야 합니까?"

납치된 상황. 어떻게 봐도 거대한손가락 앞의 개미다.

하지만, 상대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감각이 나에게 우스운 자신감을 심어 준다.

다행히 손가락은 개미를 완전히 짓이기지는 않는다. 목소리에서 즐거움과 호의가 느껴진다.

〈내 얘기부터? 좋아. 물어봐. 〉

"불타 죽은 사령술사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으셨소? 나와 루비아를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겁니까?"

〈그 여자 이름이 루비아니? 나는 해골이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한 감정을 읽어 낸단다. 〉

"기억을 읽는다는 말씀이오?"

〈네가 해석한 기억이지. 실제로는 어떨지 몰라. 기억과 감정의 덩어리라는 게, 내밀한 만큼 제멋대로고엉성하잖아? 자세한 건 읽어 낼 수없고, 그냥 이미지야. 〉

"그럼 날 발견한 건.

〈이틀 전이지! 수풀에서 숨어서 인간들을 관찰하는, 갑주를 입은 해골을 발견한 거야! 그런 재밌는 걸 보고 어떻게 그냥 가겠니. 〉

'이틀 동안이나 여기 있었나.' 깊이〈잠〉에 빠져 있었다.

깨어난 후에는 해골들에 짓밟혀 발버둥 쳤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전혀 몰랐다.

〈이번에는 내가 물어볼게. 너, 건강하더라. 내 뱃속에서 태어난 아이도 아닌데 안고 싶을 정도야. 일어난 지는 얼마나 됐니?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잠시 망설이다가, 지금이 언제인지를 떠올리고 내뱉듯 대답했다.

"??? 3 개월이오."

〈3개월! 어려 보이기는 했는데 그 정도였니? 놀랍구나. 일어나서 여기까지 온 얘기를 해 줄래? 〉

'어려 보인다고? 그런 것까지 알수 있나? 별로 놀라지도 않는군.'

말로는 정말 놀랍다고 했다.

하지만 사실 그보다 다른 이야기를더 듣고 싶어 하는 듯하다.

씁쓸했다.

내 능력치는 20년 수련의 산물. 거기에, 무려 여덟 번을 죽고 살아나며 레벨 업을 한참 거친 결과다.

'그걸 3달 동안 했다고 하는 게,

그냥 좀 놀라고 말 정도인 건가.'

나는 몹시 허탈해졌다.

무언가 탁 놓아 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치욕은 도수가 높고 자학은 마시기 쉽다. 두 가지를 섞어 들이키자 금세 말이 많아졌다.

말뚝을 깎아 석궁과 망치잡이를 죽인 이야기, 루비아가 결국 경비병들에게 죽은 이야기를 했다.

동굴에 인간을 놓아두고 이 근처의〈메마른 지하 묘지〉로 향하던 이야기를 했다.

"이번 생은 그렇소."

〈이번. 생? 〉

공기가 흔들렸다. 의문이 느껴졌다.

- 쾅!

나는 할 버드를 바닥에 내던지며 소리 쳤다.

"그렇소. 이번 생이오. 이건 내 아홉 번째 삶이오. 기스-제-라이! 나는 여덟 번이나 고쳐 죽으면서도, 당신에게 고작 3개월짜리 삶으로 간단하게 납득 당했소. 아무도 지켜 주지 못하고, 구하지 못했소!"

내가 이렇게 감정이 격했던가?

루비아가 죽은 장면을 이야기하며 다시 치욕을 느꼈다.

내 20년은 3개월짜리로 너무 간단하게 납득되었다. 시디신 자멸을 느꼈다.

자신의 초라함에 취해 아무렇게 나말을 던져 버렸다.

여기서 뭘 한다고 해도 살아 나갈 거라는 보장은 없다. 그래도 너무막 던져 버린 게 아닌가 싶었다.

'그 네크로멘서인 게 분명한 것도 아닌데.'

그 순간이었다.

"깜짝이야!"

공기가 떨렸다. 공허에서 떨려 오던 것 같은 목소리가,

"여기야! 바로 네 뒤!"

바로 둥 뒤에서 들려왔다. 나는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여자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 달그락!

나는 될 듯이 놀랐다.

80화 재밌는 걸 할 수 있게 될 거야 (5)

***************************************************

해골이 인간을 보고 놀란다는 건 우스꽝스럽다. 하지만 둘 가운데 어느 쪽도 아닌 그녀의 모습은 감탄과 경악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이런. 존재였나?'

어둠 속에서 나타난 여자. 그녀는 압도적인 미인이었다. 외모 구석구석, 가장 작은 단위에서 정밀하게 조형된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 유려한 황금비에는 단 한 치의오차마저 없다. 압도적이고 잔혹하다. 그렇게까지 느껴질 정도다.

다만.

몸의 반은 해골, 반은 인간일 뿐.

반인반골半人半骨.

그녀는 인간도 해골도 아니다.

머리칼마저 그렇다.

컬이 져서 굽이진 하얀 뼈들이 귀뒤로 넘어가 있다. 이마 앞에서 우아한 컬을 연출한다.

입 주위, 가늘고 깊은 세 가닥 선이 각각 턱과 목까지 이어진다.

"으응.

그녀가 입술을 달싹인다. 반은 붉다. 반은 하얗다. 뼈로 된 부분과 살로 된 부분이 공존한다.

입 주위의 선이 벌어졌다. 깊숙이,

안쪽의 하얀 뼈가 드러난다.

- 스르륵.

그녀가 손을 든다.

한 손은 인간. 한 손은 푸르스름한 사기邪氣로 빛나는 하얀 뼈.

양손을 내 어깨에 얹는다. 툭툭 두드린다.

- 띠링!

[강력한 사령술에 접촉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조건을 충족하지 못합니다. 시나리오 활성화가 불가능합니다.]

'뭐라고.?' 나는 상태창을 확인했다. 정말로,

레벨이 무려 2나 올라 있었다.

동굴의 해골들과 싸우며 조금씩 올라 8이 되어 있던 레벨이 다시 두단계 상승한 것이다.

'고작 어깨를 두드렸다고, 레벨이올 라?'

기가 막힌 상황이다.

게다가 시나리오 운운하는 창도 신경 쓰인다.

[조건을. 시나리오 활성화가.]

반투명한 푸른 창을. 창 너머의 여자를 멍하니 바라봤다.

하지만.

정작 이 상황을 만들어 낸 눈앞의여자는, 허공에 뜨는 창을 전혀 보지 못하는 듯하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놀랐잖아! 내가 그렇게 유명해?"

'맞아 들어간 건가.'

"정말 신경 쓰이는 아이네. 내 이름은 또 어떻게 알았을까?"

멈칫했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기스-제-라이.

서큐버스님에게 이야기를 들었던 전설의 네크로멘서. 애초에 루비아와 함께 그녀를 찾아가려 했다.

반복 회귀 현상에 대해, 그녀가 도와줄 가능성을 생각하면서.

그렇다.

여기서는 솔직히 말해야 한다.

"나는 지금껏 여덟 번을 죽었소.

첫 번째 삶에선 지금부터 20년 후에 죽었지. 20년을 해골병사로 살다죽은 뒤, 돌아온 거요. 당신 이름은 한참 뒤에 알았지."

있는 그대로 말했다.

물론 진실은 자주 배려가 없다. 여자는 당황했다.

"으흥?"

"한참 전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시간 속에 갇혀 있소."

"세상에.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얼굴의 반이 갑각과 같은 해골이고- 그 해골은 정말로 '피부 같은' 해골이었다. 살이 파내어진 것이 아니었다. - 반은 인간인 여자가 진심으로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더없이 진귀한 보물이라도 손에 쥔둣. 잃어버린 혈육을 수십 년 만에 상봉하기라도 한 듯한 표정이다. 하얀 뼈 눈썹 아래 커다란 눈동자가 흔들렸다.

감격과 흥분.

'뭐지?' 여자가 꿀꺽 침을 삼켰다.

반은 뼈로, 반은 살로 덮여 있는 가녀린 목울대가 움직였다.

그녀가 말했다.

"세상에. 미친 해골이라니!"

- 띠링!

[네크로멘서 기스-제-라이의 호감도가 15 올랐습니다!]

[-15 올랐습니다.]

[현재 호감도: 3到나는 당황했다.

'왜 호감도가 오르지? 그리고 왜 벌써 35나 되는 거야?'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찾지 못했다. 하지만 두 번째는 곧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쓸모없다고 여겼던 영응급 특전.

나는 상태창을 띄웠다. 다시 한 번 특전을 확인했다.

[특전: 네크로멘서의 연인 (활성)]

- 모든 사령술사(네크로멘서)와의관계에서 기본 호감도 20을 얻고 시작합니다.

- 사역 관계를 맺은 사령술사의호감도가 추가로 10 상승합니다.

- 당신의 존재는 사령술사의 영감을 자극합니다. 당신 근처에 있는 사령술사의 네크로멘시 숙련도가5% 빠르게 상승합니다.

- 영웅급 특전입니다. 다른 영웅급 특전이 활성화될 때까지 강제로 이특전이 선택됩니다.

계속 강제로 선택되어, 실은 별로신경 쓰고 있지 않던 특전.

네크로멘서의 연인.

이 특전이 작용하고 있었던 거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모든 네크로멘서의 호감도를 강제로 사 버리는 특전이다.

처음에 납치당한 것도, 사실 이 특전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솔직히 내가 한 행동이라고 해 봐야 특별할 것도 없는 것들이다.

너무 과한 관심이라고 느꼈는데,

결국 특전 때문이었다고 생각하자수수께끼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 덥석.

기스-제-라이가 손을 뻗어 온다.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피가 흐르는 따스한 손이 내 손목을 잡는다.

"??? 뭐요?"

"아하 하하하하. "

따듯한 손은 내 손목을 잡고.

차가운 손은 제 배에 얹은 채.

전설의 네크로멘서가 몸을 들썩거리며 웃는다.

"여기 신사분은, 이게 자기 아홉 번째 삶이란다!"

- 달그락! 달그락!

여자는 나를 잡고 유쾌하게 웃으며 춤을 췄다.

나는 반항도 못 하고 그 손에 끌려 인형처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바다를 건너온 여행자! 파도에 고생해 건너왔네!"

- 달그락! 달그락!

한 손으로는 내 경추를 받치고, 한손으로는 내 손목을 잡고 흥에 겨워 마구 스템을 밟는다.

그녀는 멋대로 음을 지어내 노래마저 부르고 있다.

"철썩! 철썩! 파도가 뱃전을 갈겼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네!

하지만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네!"

- 달그락! 달그락!

"나는 네크로멘서! 조용한 녀석들을 일으켜서 시끄럽게 만든다네! 여기엔 용의 뼈를 찾으러 왔지!"

'용의 뼈라고?' - 달그락! 달그락!

손목이 잡혀 마구 흔들리면서도, 의문을 가졌다.

용 같은 건 이 세상에 없는데.

당연히 뼈 따위도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네크로멘서는 내 반응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다. 계속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춘다.

"이를 어째! 비슷한 것도 못 봤네!

하지만 괜찮아! 대신 찾았거든! 죽고 나서까지 미친 해골을! 이런 건 처음이야! 오늘은 축하의 날!"

- 달그락! 달그락!

정신에 구멍이 뚫릴 것 같았다. 이걸 상처받았다고 하는 걸까? 내 진실된 호소는 철저히 무시당했다.

나는 억지로 손목이 잡혀 춤추는 와중에 외쳤다. 아플 리가 없지만, 손목이 '아프게' 느껴졌다.

"그만 놓아주시오."

네크로멘서가 춤을 멈췄다.

"아하하하?. 아하하하핫. "

하지만 손목은 놓아주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허리에서 손을 땐 채, 처음처럼 자기 배를 잡고 다시 웃었다.

"앙탈 부리는 것도 귀엽잖아? 어디서 이런 게 생겼지? 누가 만든 거야, 진짜? 아하하핫.

어떻게든 이 여자의 정신을 차리게 하고 싶었다. 아니면 그냥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정신 나간 취급은 사양이다. 경고라도 하면 좀 나을까?

"말할 게 있소만."

미치광이로 취급받고 있다. 무슨 말을 하든 광기로 취급받는다면 거리낄 것은 없다. 최악의 경우라도 죽으면 그만이다.

"해 봐."

"당신이 믿든 말든 나는 회귀자요.

그리고 당신은 곧 죽을 거요."

"뭐?"

그녀의 인상이 확 찡그려진다.

"얼마 남지 않았지, 기스-제-라이.

당신이 접골 시술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소. 아쥬라의 마법사들은 그걸 위험하게 생각하고, 당신은 그들에게 곧 살해당할 거요."

마구 내질렀다.

기스-제-라이가 눈을 깜빡였다.

내게서 완전히 손을 땐다. 짝, 하고박수를 쳤다. 손 떨림을 숨기기 위한 움직이었다.

명백한 당황의 기색이다.

"어디서. 듣고 온 거지?"

역시 믿지 않는 걸까.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거든."

우리는 잠시 침묵했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두개골에 혹시 심안(心眼) 같은 게 내재되어 게 있는 건가? 분해해 봐야겠는걸."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말릴 겨를도 없이, 그녀가 내 두개골로 손을 뻗는다.

춤을 추기 위해 일으켰을 때와는 또 다른 손이다. 갑각처럼 하얀 뼈가 덮인 손을 내민다.

- 툭.

그녀의 손이 내 두개골에 닿는다.

모든 움직임이 정지됐다.

시야가 흐릿해진다. 의식이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았다. 마음대로 정신을 놓을 수도 없다.

- 서걱.

그녀를 만난 순간부터, 통제할 수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 서격.

머리뼈라도 벗겨지는 걸까.

위쪽이 허전하다.

네크로멘서는 내 머리에서 뭘 긁어간다. 제 머리에 입힌다.

내 머리에는 뼈밖에 없다. 뼈를 긁어 가는 거다.

- 서걱제 해골들에게 내 뼈를 붙여 본다.

해골들이 달그락거리며 움직인다.

여자는 그들을 한참 관찰한다.

흐릿한 시야. 그녀의 실망한 표정이 하나하나 또렷하게 잡힌다.

- 서걱 서걱서걱.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네크로멘서는 영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어떻게 된 거야? 뭐 이런 평범한 스킬밖에 없어? 광기와 저주는 다 어디로 간 거야?"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며 시야에 온통 안개가 낀 상태로, 나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본다.

'광기와 저주라고?'

그런 걸 기대했나.

누구에게도 효과는 없었던 모양.

당연한 일이다. 내게 특별한 광기는 없다. 가진 건 고작해야 두려움과 불안 정도다. 그런 건 광기라고 부르기엔 약하고 흔하다.

'광기를 찾나.'

나보다는, 눈앞의 당신이 훨씬 미쳐 있는 것 같다는 말을 삼킨다.

삼키고 싶지 않아도 어차피 입을 움직이지 못한다.

"어떻게 된 거야! 응?"

추궁한다. 이제 와서 물어봐도 할말은 없다.

그나저나.

두개골을 너무 많이 긁힌 걸까.

의식이 점점 더 흐려져 간다. 어둡다. 거의 보이지 않는다. 시야가 한점으로 서서히 좁아진다.

'끝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답답했다.

이번 생에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죽었다.

몇 번을 다시 태어났다.

그러나 제대로 된 강자를 만나면 항상 죽는다.

장난감처럼 무력하게 짓밟히는 자신을 확인하고 죽는다.

"왜. 아무 효과도 없는 거지?"

네크로멘서가 탄식한다.

'처음부터 내 말을 믿지 그랬나.'

그 말을 해 주지 못하고,

의식이 꺼져 버렸다.

- 우르릉! 광!

- 쏴아아아.

눈을 떴다. 이 소리는.

'무덤인가?!'

아직 시야가 돌아오지 않는다.

"루비아!"

나는 허공에 소리를 질렀다. 다시무덤으로 돌아왔다.

'영영 못 보는 게 아니었나?'

한동안 계속 동굴로 돌아왔다.

언제 또다시 무덤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른다.

이번에는 지켜 줄 수 있을까.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까.

? 루비아??? 루비아. 루비아.

메아리가 울렸다.

'환청. T빗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는다.

천둥소리도.

번개 소리도 없다.

바람도 불지 않는다.

몸을 움직였다. 주위를 더듬는다.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는다.

주위가 뚫려 있다.

'동굴인가?'

다시 레나에게 돌아간 건가.

'잠을 깨웠겠군.'

민망했다. 내 외침에 곤한 잠을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쪽도 아니었다.

"어휴. 이제야 정신이 드네."

네크로멘서가 나를 바라봤다.

"머리뼈 다 뜯어 가서 미안해. 아,

실은 두정골 정도지만."

'죽은 게 아니었나?'

"머리뼈를 다 뜯었다고? 그랬으면 죽었을 텐데."

"뜯은 다음 내 껄 좀 붙여 줬어.

어때, 살 만해?"

- 톡톡.

그녀가 뼈로 된 머리칼을 친다. 끝에, 꽤 뜯겨져 나간 부분이 있다.

머리칼이 짧아졌다.

"루비아 꿈 꿨니?"

나는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네크로멘서가 씩 웃었다. 그 웃음조차정밀하게 조정된 황금비였다.

지나치게 정밀한 수학적 아름다움이라, 동물인지 정물인지 알 수 없는 느낌마저 주었다.

"뼈는 좋은 거야. 잘 자라. 정수도 심어졌고. 내가 왜 이렇게 잘해 주는지. 모르겠다니까. 그냥 폐기해버려도 됐을 텐데."

태연자약하게 무시무시한 소리를 한다. 여자가 말을 이었다.

"재밌는 걸 할 수 있게 될 거야."

81화 재있는 걸 할 수 있게 될 거야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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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한다는 거지?"

- 톡톡.

네크로멘서는 대답하지 않는다.

빙긋 웃는다.

차가운 손가락으로 내 턱 아래를 가볍게 두드린다.

"직접 경험해 보렴."

- 터벅. 터벅.

그녀의 말이 끝난다. 동시에 어둠 속에서 시체가 걸어온다. 시체는 입술을 다물고 있다. 몸은 은은한 푸른 기운을 뿜는다.

팔다리는 잘리지 않았다.

배도 갈리지 않았다.

내장도 쏟아지지 않았다.

하지만 시체는 분명하다.

푸른 기운으로 부패되지 않고 보존되어, 어디 한 군데 상처도 없지만 고요히 정지해 있는 모습이다.

박제制製와 같은 모습.

박동도 없고 들숨 날숨도 없다.

- 달그락!

나는 시체를 보고 당황했다.

다가오는 시체를 보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자는.!"

이 시체를 알고 있다. 본 적 있는 낯익은 시체다. 옷도 무기도 안다.

자살할 것 같지는 않던 남자다.

나는 네크로멘서에게 물었다.

"당신이 죽였소?"

네크로멘서가 미소를 띤다. 긍정의 표현이다.

입술이 그리는 선은 곱다. 주름살 없는 가지런한 표정이다. 악의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선의가 느껴졌다. 선의는 자주 정의만큼 부조리하지만 그녀의 논리를 읽어 내기는 힘들었다.

"왜 죽인 거요?"

네크로멘서가 웃으며 대꾸했다.

"삶에서 깨어나게 해 준 거잖아.

안 그래, 챈들러?"

시체가 이쪽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없었다.

수풀에서 본 남자다. 헐렁한 붉은 도복을 입었다. 길고 검은 머리를 하얀 머리띠로 묶었다.

한쪽에만 날이 선 긴 도刀 역시여전하다. 손잡이는 두 손으로 잡아도 한참 남을 만큼 길다.

거기에는 한 손만 얹혀 있다.

아래위로 찔러 들어오던, 네 자루 창을 한 번에 잘라 내던 칼이다.

"저자를 뭐 어쩌라는 거요?"

나는 질문했다.

네크로멘서는 비스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착취해 봐."

"착취?"

"저 아이, 죽은 지 이틀도 지나지 않았어. 집중해 봐. 보이지 않아?"

"뭐가. 보인다는 말이오?"

네크로멘서는 대답하지 않는다. 차가운 손끝으로 내 두개골을 살짝살짝 긁는다.

엉뚱한 말을 한다.

"먼저, 제압해 볼래? 얼른 해 봐.

네가 충분히 이길 수 있잖니."

타이르는 듯한 말투였다. 대화가 비약한다.

"여기."

갑자기 어디서 났는지, 들고 있던롱소드 한 자루를 내게 건네줬다.

칼을 받아 쥐었다. 칼끝을 아래로 비스듬히 내려 쥐었다.

수풀에 숨어서 보았던 남자.

카타 나를 휘두르던 챈들러 남작.

시체가 된 그가 칼을 뽑았다.

- 스롱!

카타나의 울음소리가 잔뼈를 울린다. 발걸음 소리도 없이 나에게 다가온다. 적의는 명백하다. 눈동자에 푸른 불꽃이 비친다.

잠시 대치가 이어졌다.

녀석은 다리를 살짝 벌렸다. 오른발을 앞으로 했다. 칼을 앞으로 비스듬히 기울인 채 섰다.

긴 칼끝의 연장선이 내 두개골을 겨눈다. 전형적인 중단 겨눔세.

나도 발을 조금씩 움직였다.

검을 가운데로 을려 쥐었다. 거리를 좁혔다. 왼팔을 끌어당겨 칼을 높이 쥐었다.

일부러 허점을 노출시킨다.

하지만 녀석은 넘어오지 않았다.

지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한참을 서로 마주 보다가, 아래로 다시 칼을 내렸다.

- 팟!

그때였다. 녀석이 바닥을 박찼다.

긴 카타 나를 높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빠르게 내리쳐 왔다.

방심하고 있었다면 그대로 맞았을 것 같은 속도였다.

- 쨍!

롱소드를 비스듬하게 올려쳤다. 카타나의 궤도가 비틀렸다. 칼이 오른쪽으로 흘러 바닥을 향했다.

나는 왼쪽으로 한 걸음 움직이며,

롱소드를 휘둘렀다. 그대로 남자의 목을 날렸다.

파육음은 크지 않았다.

피도 솟지 않았다. 그의 심장이 더 이상 뛰지 않는다.

- 데구르르!

잘린 머리가 어두운 동굴 바닥을 구르며 소리를 낼 뿐이다.

하지만 녀석은 아직도 움직였다.

한 발을 뒤로 빼더니, 다시 칼을 들고 같은 자세로 내리쳐 왔다.

몸을 감싼 푸른 기운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였다.

롱소드를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 쨍!

내려치는 카타나를 봉쇄했다.

- 퍽!

한 발을 들어 가슴팍을 걷어찼다.

발끝에 닿는 단단하고 질긴 육肉의감각이 고무 덩어리 같았다.

바닥을 디딘 발이 돌을 긁어낼 정도의 발길질이었다.

타격이 제대로 들어갔다.

목 없는 녀석이 뒤로 몇 걸음 휘청거렸다.

곧장 앞으로 파고들었다.

- 서걱!

더 이상 뛰지 않는 심장에 칼을 박아 넣었다. 그러나 시체는 끝까지 움직였다.

'질기군.'

녀석은 다시 칼을 휘둘렀다.

처음처럼 칼을 홀려 냈다. 높이든 롱소드로 카타나 칼등을 강하게 내리쳤다. 쨍, 하는 소리와 함께 목없는 시체가 카타나를 놓쳤다.

- 쿵.

그제야 시체는 쓰러졌다.

"끝인가."

"녀석의 본령本領은 칼에 깃들어있었어. 칼을 떨어트리면 패배를 인정하는 부류가 된 거지."

네크로멘서가 설명을 늘어놓는다.

제가 일으킨 시체를 향해 제삼자를 바라보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그저 길을 걷던 인간 아니었나.

그냥 죽여 버린 건가?"

"응."

네크로멘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느릿한 그 고갯짓이 허공에 파문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잔혹하군."

나는 내 감상을 표현했다. 네크로멘서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아니, 평온하지."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네크로멘서는 한 손으로, 잘려 나간 챈들러 남작의 긴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고통을 먹어 치우지 않아도 돼.

다른 삶들을 짊어지지 않아도 돼."

그녀가 말을 이었다.

"덕지덕지 의미를 붙여 갈 필요 가없어져. 아주 깔끔해지지."

아리송했다.

"세계는 시체가 되어야 해."

세계를 죽이겠다는 뜻인 걸까?

알아듣지 못하고 멍하게 있었다.

"뭐, 농담이야. 실은 해야 할 일이 있었거든. 방해될 만한 녀석들을 싹다 정리한 것뿐이야."

그녀가 내 쇄골을 만지작거렸다.

"왜 그렇게 굳어 있어?"

나는 그녀의 손길을 피했다.

옆으로 걸어갔다. 목 없이 쓰러진그라스미어의 공자를 바라봤다.

묘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의 손목 주위에서, 초록색 빛이 반짝였다.

"이게.

흠칫하는 나에게 그녀가 말했다.

"보이니? 빨아들여 봐."

초록색 빛 위쪽, 작은 상태창이 여길 봐 달라는 둣 반짝인다.

확대했다.

[무력화에 성공했습니다.]

[흡수가 가능한 상태입니다.]

[정수 흡수 레벨: 1]

[죽은 지 48시간 내의 상대로부터 정수 흡수가 가능해집니다.]

'정수 흡수라고?'

[에픽 스킬입니다. 흡수와 소화를 반복할수록 스킬이 성장합니다.]

[스킬 레벨이 올라갈수록 다양한 제한이 풀리게 됩니다.]

나는 홀린 둣이 천천히 초록색 빛에 손을 가져다 댔다.

[흡수 조건을 충족합니다.]

[50 이하의 스탯을 흡수합니다.]

[Lv.5 이하의 스킬을 흡수합니다.]

[흡수 레벨(1)에 의해, 일반 스킬로흡수가 제한됩니다.]

- 고오 오오.!

빛 주위의 공기가 진동했다.

초록색 빛이 내 몸으로 빨아들여지며, 무언가 몸이 가득 차는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달그락! 달그락!

몸이 멋대로 움직인다. 한동안 달그락거린 뒤 정적이 찾아온다.

[지혜 1을 흡수했습니다.]

[발도拔刀 Lv. 1을 흡수했습니다.]

[동방어 Lv. 1을 흡수했습니다.]

[흡수하신 능력은 소화를 마친 후적용됩니다.]

메시지와 함께.

몸에 빨려 들어온, 초록색 빛이 천천히 온몸으로 흩어지고 있다.

'실제로 능력을 갖게 되는 데는.

약간 시간이 필요한 건가.'

[흡수한 능력을 소화하는 중.]

[소화까지 23:59:59.]

[스킬이 성장하고 있습니다.]

잠시 침묵했다.

이 상황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인지를 천천히 깨닫는다.

능력치 흡수.

스킬 흡수.

이런 걸 할 수 있다고?

기스-제-라이를 바라봤다.

"이게. 당신이 준 선물인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온몸의 뼈가 저렸다. 이건 뭐라 고할 말이 없다. 이건, 그녀가 행했다던 접골 시술의 궁극 같은 게 아닌가?

정수 흡수라니.

"!"

상대에게 능력을 흡수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현재 상태를 돌이켜 본다. 지혜를 제외한 내 스탯은 대부분 50 이상.

스탯 흡수는 별 이득이 없다.

그 부분이 약간 아쉽기는 하지만,

Lv.5 이하 스킬을 흡수하는 것만으로도 놀랍다.

게다가 스탯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죽은 뒤 다시 올리면 된다.

결국 올리기 힘든 건 스킬이다.

첫 번째 삶.

20년 동안 달그락거리며 살아왔지만, 제대로 된 스킬이라고 할 만한 것들은 전혀 얻지 못했다.

용사의 피를 뒤집어쓰고 다시 무덤으로 돌아온 뒤는 달랐다.

던전을 클리어하면 스킬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던전은 한정되어 있다. 한계가 있다.

그런데 그걸 극복할 방법이 생긴 거다. 메시지를 다시 들여다봤다.

[톱수한 능력을 소화하는 중.]

[소화까지 23:58:47?.

"]

[스킬이 성장하고 있습니다.]

'스킬이 성장한다니.

더 높은 스탯, 높은 스킬들까지 흡수할 수 있다는 뜻이겠지.

나는 경악에 가득 차 네크로멘서에게 물었다.

"당신은. 당신은 지금까지 이런 능력을 가지고 살아온 건가?"

인간 부분의, 왼쪽 입꼬리만 비뚜름히 올리고 있던 기스-제-라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득하다.

그녀의 능력이 어느 정도일지 감히 가늠할 수 없었다.

스탯을 흡수할 수 있다면 레벨을 올릴 필요조차 없다.

정체 구간을 걱정할 이유가 완전히 사라진다.

스킬 흡수는 한층 더 터무니없는 능력이다.

한 개체가 타고난 재능과, 각고의수련 끝에 쌓아 나간 정수.

그걸 그대로 가져간다는데 이르러서야,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이건 뭔가.

"이상하지?"

기스-제-라이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 달그락.

뭔가 잘못됐다.

나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다른 의미였다.

"이상하다니까. 내가 왜 너한테 이렇게 해 주는지 모르겠어."

"짐작 가는 거 있어?"

나에게 물어 봤자. 물론 짐작 가는 바는 있다.

선택권 없이 정해진 특전, 네크로멘서의 연인 때문이겠지.

강제로 얻은 특전으로, 이 여자의 호감을 사 버린 거다.

납치를 당하고 커다란 트롤들에게 잡히고 짓밟혀 농락당할 때는 정말 끔찍했다.

하지만, 이런 터무니없는 능력이심어지는 결과가 될 줄이야.

'이거 기뻐해야 하나?'

아마 그렇겠지.

[정수 흡수 레벨: 1]

[죽은 지 48시간 내의 상대로부터 정수 흡수가 가능해집니다.]

허공에 뜬 상태창을 또 확인한다.

당장으로서는, 던전을 공략하고 포인트를 획득하는 것보다 효율이 떨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난 뒤.

전쟁터에 숨어든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무수한 시체들에서 정수를 흡수할 수 있다.

그 시체들 가운데는 유망한 각국의 기사들도 적지 않을 거다.

그들의 시체를 계속 흡수한다면.

누구의 침해도 받지 않는다.

서큐버스님을, 그 누구로부터도 지켜 줄 수 있을 것이다.

짜릿한 고양감이 전신에 퍼진다.

그때 였다.

- 위이이잉.!

〈중력영창, 오닉스의 고리〉

네크로멘서가 입을 열었다. 두 단어를 발음했다.

그게 전부였다.

- 즉발영창.

동굴 안의 공기가 낯설어진다.

공기가 색을 갖는다. 있는 줄도 몰랐던 그림자가 흔들린다.

이 네크로멘서는 자신의 인식을 세계에 전염시킨다. 산을 무너뜨리고바다를 뒤집는 마법은 아니다.

그러나 작은 읊조림으로 준비를 끝낸 시점에서, 시전자의 수준이 명확히 증명된다. 어떤 시약도, 두루마리도, 만다라도 없다.

스스로 창조한 트리거를 작게 옮는다.

그것으로 세계가 균열한다.

갈라졌다가, 다시 붙으며.

새로운 모습을 취한다.

- 띠링!

[S+랭크 구속 마법, 오닉스의 고리에 영원히 묶였습니다.]

[삶과 죽음, 혹은 주인의 지루함만이 구속을 갈라놓을 것입니다.]

[거리 설정: 100미테'묶였. 다고?' 고개를 숙였다.

텅 빈 눈으로 내 몸을 더듬었다.

묶인 곳은 없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느껴지지 않는 건 아니다.

직감은 산 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 여자에게서 떨어지려 한다면, 거대한 힘에 옥죄이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왜, 어떻게?' 의문이 머릿속을 가득 메운다.

"처음 봤을 때부터 놔줄 생각은 없었는데, 이래서야 놓아줄 수도 없게 됐잖아."

기스-제-라이가 서늘하게 웃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내 몸을 옮긴 아기니까, 죽을 때까지 내 옆에 둬야겠다. 그렇지?"

82화 황제, 폐하, 만세 (1)

***************************************************

"느껴져?"

반듯하고 고고한 콧대 아래, 붉고단아한 입술이 움직인다.

"뭐가 느껴진다는 소리요?"

"시커먼 고리에 네 본령本領을 꽁꽁 묶어 버렸어."

아끼는 장난감 인형을 소중히 손에 쥐고 짓는 표정이다.

서큐버스님의 서재에서 읽은 책의내용을 떠올려 보았다.

마법의 발동에는 세계의 비역秘域에 대한 명철한 인식이 필요하다.

세계가 비틀어진 틈 사이사이를 구석구석 짚어 주는 통찰이 필요하다.

인식의 범위가 곧 마법사의 수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동된 마법을 감각하는 건 그보다 훨씬 쉽다.

그 마법이 당신을 향했을 때는 특히 더욱 그렇다.

허공에 울려 퍼지던 개념. '오닉스의 고리' 라는 개념.

물론 전혀 알지 못하던 힘.

하지만 느껴진다.

쇠사슬이나, 밧줄에 온몸이 꽁꽁 묶인 느낌은 아니었다.

몸의 텅 빈 공간 가운데 무언가가 심어진 기분이었다.

"어때. 거칠거칠한 헛바닥에 온몸이 막 핥아지는 기분이 나, 안 나?"

그런 기분까지는 들지 않는다.

감각이 둔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를 구속한 거요?"

"당연하지. 그럼 그냥 보내 줄 줄 알았어?"

그녀는 왜 그런 당연한 말을 하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곤란한데.'

당장의 구속도 문제다. 하지만 그녀는 죽는다. 이건 확실히 정해진 사실이다.

이 정도의 존재가 어떻게 죽는지는모르겠지만, 내가 상상하기 어려운 재앙이 닥칠 거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 있으면 나도 따라서 죽겠지.

그녀가 안전한 길을 가도록 설득해보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기서 근본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나는 안전한 길이 뭔지 모른다.

"왜 그리 심각해? 말이 없으니 어색하잖아. 산책이나 좀 하자."

뜻밖의 제의였다.

"동굴 밖으로 말이오?"

네크로멘서와 산책. 썩 잘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다.

그녀가 어이없다는 둣 대꾸했다.

"그럼. 동굴 안에서 하는 것도 산책이라고 부르니? 새로 배운 것도 많이 써 봐야 늘지."

'정수 착취를 말하는 건가.' - 달그락!

[고리가 조여듭니다.]

[거리 설정: 0.3미테나는 허공에 뜬 먼지가 끌려가듯그녀의 손아귀에 잡혔다.

푸른 기운을 띠는 차가운 손아귀가 목뼈를 감싸고 놓아주지 않는다.

"너무 좁은가?"

[거리 설정: 5미테얌전히 쫓아갈 수밖에 없었다.

? 와? 아아아-

동굴 바깥으로 나간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왜 놀라? 던전 처음 봐?"

물론 아니다. 게다가, 몹시 익숙한 풍경이었다.

수십 개의 돌계단 사이로 흘러내리는 폭포가 보였다.

쏟아지는 기세가 거세다. 작은 호수에 하얗게 거품이 터진다.

물방울이 잔뜩 튀어 오르는 폭포 아래로 향한다. 네크로멘서가 뒤에서 내 목뼈를 잡는다.

서늘하고 차가운 감각이 척추를 타고 발목까지 내려간다.

여기는.

〈메마른 지하 묘지〉.

레나와 함께 왔던 E급 던전이다.

하지만 안쪽에서는 상상도 못했다.

밖에 나와서야 그 정체를 알았다.

뼈로 백백한 미로.

허공을 가득 메운 사기邪氣.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달랐다.

레나와 함께 올 때는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공터뿐이던 공간이 원래 이런 곳이었나? 모든 것이 사라지기 전에는.

- 달그락.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고작해야 E급 던전에 트롤 해골이존재할 수가 없다.

이 네크로멘서의 등장으로 모든 것이 달라진 것이다.

천장에 박혀 있던 야광주들, 새장들이 전부 다 뼈로 뒤덮여 미로 가되어 있었다.

던전 안의 해골을 전부 다 끌어 모았다고 해도 그런〈분량〉이 될 리는 없다.

내부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새롭게 구축하는 건 불가능하다.

말하자면 이 동형 진지.

이단. 사술 그 자체다.

"인간들의 눈에 뜨인다면.

단급 병력이 출동하겠지.

하지만 기스-제-라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대꾸한다.

"결계로 다 막아 놨어. 아무도 모를 거야. 곧 여기 애들도 다 빼 갈 거고. 걱정이 많구나?"

"믿지 않았지만. 당신은, 당신은곧 죽을 거란 말이오."

스킬을 얻은 보답으로라도 재차 경고해 줄 필요가 있다.

이른 시일 내에, 당신은 아쥬라의마법사들에게 살해당한다고 다시 한번 경고했다.

죽는 날이 오늘일지도 모른다.

일시까지 아는 것은 아니니까.

나도 끼어서 허무하게 소멸되는 일은 피하고 싶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내 경고를 그녀는 조금도 엄중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입가가 갈라진다. 물에 잠긴 개를 바라보는 것처럼, 폭포에 조금씩 젖어 가는 나를 그녀가 귀엽다는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하핫.

"더 해 봐. 내가 죽는다고?"

순간 따듯한 미풍微風이 불어왔다.

바람은 분명 부드러웠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주위를 감싸는,

광기 어린 매혹이 느껴졌다.

"죽기는, 엘튼 클레멘스가 죽겠지."

- 달그락!

'뭐^고?'

"지금, 현 황제를 말하는 거요?"

"와, 모르는 게 없는 해골이네?"

그녀가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먼 바다를 건너온 네크로멘서.

그녀에겐 비밀스런 친구들이 있다.

암살교단 레드 플레이크.

기스-제-라이는 교단의 명예 사제다. 레드 플레이크의 정원은 일곱을 초과할 수 없다.

이미 일곱 명이 가득 찬 상태.

그녀는 일종의 위촉 단원이다.

"레드 플레이크라고 하셨소?"

나는 순간적으로 그녀의 말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응? 알고 있니? 너, 굉장한걸. 기초 상식이 풍부하구나."

네크로멘서가 따듯한 피가 흐르는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가 잠시 이야기를 멈춘다.

기특하다는 듯한 손길에, 반항할생각도 하지 못했다.

급하게 기억을 돌이켰다. 레나를 거미줄에 매달아 놓고 읽었던 책.

〈세계의 비공식적인 무력 집단에 대하여 - 1〉라는 책이었다.

백여 개의 엉뚱한 시만 잔뜩 실려 있어서 신경질적으로 페이지를 넘겼던 책이다.

마지막에 있던 해설을 어렴풋이 떠올려 보았다.

'그 시들이, 레드 플레이크가 자신들의 몸값을 높이려고 퍼트렸다 고한 거였지.'

네크로멘서가 이야기를 이었다.

암살은 시체를 공급하고 네크로멘서는 시체의 수요자다.

어려운 암살이 끝나면, 적어도 한구의 좋은 시체가 생긴다.

레드 플레이크가 취급하는 건 최고난이도의 죽음.

네크로멘서는 그 죽음에서 파생되는 시체들이 갖고 싶었다.

밀월蜜月은 자연스럽다.

그러던 어느 날.

레드 플레이크에 자극적인 의뢰가한 건 들어왔다.

[의뢰처: 자유 연합]

[암살 대상: 엘튼 클레멘스]

[개인 난이도: A+]

[주변 난이도: SS+]

[파장: 측정 불가]

[기한: 3개월 이내 희망]

[의뢰자 요구 사항: 없음. 죽여만 달라.]

[보상: 연합 의회가 공식/비공식적으로 허가할 수 있는 모든 것]

〈열람 회원 소견〉

거부: 5표기권: 2표개별의견:

- 흥옥의 바실리스크: 기억해라.

우리는 세계를 바꾸지 않는다.

- 맥박 빠른 타란툴라: 동의한다.

개입하지 않는다.

- 설아 : 재청. 누군가 해도, 나는안 하겠어.

- 별빛청여우: - (안식 기간)

- 루멘: 역시, 중립성을 지나치게 침해하는 의뢰야.

- 마니당: - (의견 없음)

- 보이지 않는 비: 우리는 암살자다. 용병이 아니다. 대신 전쟁을 해주지는 않는다. 의회는 왜 스스로하지 않는가?

일곱 명의 정회원은 모두 의뢰를 거절한다. 그러나 위촉 회원으로서, 기스-제-라이 역시 의뢰를 열람할 권한이 있다. 기스-제-라이는 의뢰를 받아들였다.

다만.

레드 플레이 크는 탈퇴해야 했다.

회원들은, 이 사건의 청부를 공식적으로 거절했으므로.

기스-제-라이는 암살의 대가로 원하는 뚜렷한 보상이 있었다.

〈쐐기돌 기념 공원〉

〈흑요석 언덕 공원〉

이 두 공원의 완전한 활용권.

이곳은 오랜 세월에 걸쳐 인간의자유와 평둥을 위해 싸운 전사자들의 묘지다.

세이론 1세가 인간을 이족異族으로부터 해방했다면, 이곳에 추도된 영웅들은 인간을 인간으로부터 해방하려 했다.

두 공원에 잠든 자들은 영웅이면서도 영웅주의를 거부했다.

가지런히 세워진 대리석 묘비들에는, 개인의 역량은 더 없이 뛰어났으나 가장 약한 자들의 평등을 위해 싸운 영웅들 한 명 한 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세계의 절반을 자유 진영으로 만들어 준 영웅들.

그 영웅들의 시신 전부를, 연합 의회는 망설임 없이 한 네크로멘서에게 팔아넘기기로 한 것이다.

뼈조차 남지 않고 풍화된 시체에 의견을 물을 수는 없다. 물론 묘비의 주인들은 찬성할지도 모른다.

노골적으로 군비를 중강 하는 제국의 황제, 엘튼 클레멘스.

그를 죽이기 위해 자신의 시신이 쓰인다. 그 사실을 몹시 기꺼워할지도 모른다. 의회의 일처리를 비루하다 평하는 건 별개겠지만.

"그래서, 여기서 지루하게 녀석을 기다리고 있었지."

네크로멘서의 설명이 끝났다.

황제 ^^살.

나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규모의이야기였다.

확실히 내가 아는 건 하나 있다.

황제 암살은 실패한다. 자유 연합의 의뢰는 실패한다. 제국은 전쟁을일으키고, 수백만 명이 죽은 9년 전쟁 끝에 마왕이 강림한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어디서부터 끼어들어야 할까?

내가 회귀했다고 해도 그녀는 전혀 믿어 주지 않는다. 나는 일단, 가볍게 이의를 제기했다.

"연합. 의회와 계약한 거요?"

"그렇지."

"인간들은 무덤에 큰 상징성을 부여할 텐데. 일이 끝나면 말이 달라지겠지. 기념 묘역의 시체를, 한 명의 네크로멘서가 전부 사용할 수 있게 한다니. 의회가 해산될 만한 안건이라고 생각하오만."

인간들의 상식을 최대한 활용해서그녀를 말려 보았다. 하지만 씨도 먹히지 않았다.

기스-제-라이는 쿡쿡 웃으며 말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레드플레이크 전체가, 입회인으로 들어갔으니까."

"입회인이 라니.?"

"레드 플레이크 전체가 이 계약을 중명하고 집행한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이 계약에 참여한 자들은 전부 죽은 목숨이야. 내가 받을 시체만 잔뜩 늘어나는걸? 의회 녀석들, 살만 찐 돼지들도 있지만 컬렉션에 넣고 싶은 놈들도 있어."

기스-제-라이는 자신만만하다. 무슨 그런 귀여운 걱정을 하냐는 표정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안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녀가 죽는 미래. 황제가 전쟁을 일으키는 미래. 그 둘을 엮어 보면 결론은 단순하다.

'이렇게 죽는 건가.'

전범戰犯, 클레멘스 2세가 이때 죽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 없다.

기스-제-라이는 여기서 황제 암살을 실패한다. 죽게 될 거다.

그녀에게 목줄에 쥐였으니, 높은 확률로 나도 휘말려서 죽겠지.

그래도 물어봐야 한다.

일이 어떻게 굴러가나 지켜볼 가치는 충분하다.

'다음'을 생각한다면, 이 여자의 계획을 알아 두어야 한다.

"그러면 암살은 언제요?"

"막 물어보네? 사흘 뒤야. 곧 이 근처로 와."

"황제가 여기까지? 몰랐는데.

그녀가 피식 웃었다.

"당연하지. 그런 걸 다 소문내고 다니게? 멋대로 갈아 치운 영주 녀석들을 점검할 겸, 남부를 순방하고 있거든. 이 근처에서는, "

"에라스트.

나는 순간적으로 툭 내뱉었다.

가장 가까운 도시는 에라스트와 유블람. 유블람의 영주가 바뀌었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다.

'어느 날부터, 황제의 뜻에 반하는 영주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어요.' 루비아의 말이 기억난다.

그들은 시체가 되어 자신의 성에 던져졌다. 에라스트 백작인, 루비아의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영주가 바뀐 곳이라면 거기겠지.

"오호?"

기스-제-라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83화 황제, 폐하, 만세 (2)

***************************************************

그녀가 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반짝이는 눈빛이 독수리 발톱처럼 나를 움켜쥔다.

보조개가 생긴다. 눈이 살짝 가늘어지고 입술 양단이 올라간다.

"대견한데?"

"그런 건 어떻게 알았니? 똑똑한 아이구나. 놀라운걸."

놀랍다기보다는 기특한 표정.

장난감 취급이다. 발끈해 소리쳤다.

"황제 암살이라니. 이건 분명 좋지 않게 끝날 거요."

"왜?"

"황실 근위대에 수행하는 마법사까지, 황제가 혼자 움직일 리 없다는 건 당연하지 않소?"

"개네 잘 아니?"

할 말이 없었다. 물론 황실 친위대가 어떤지, 마법사가 어떤지 내가 제대로 알 리가 없다.

기스-제-라이의 입술 양단이 점점 더 끌어 올려진다. 귀여워 죽겠다는 흐뭇한 표정이다.

"죽은 몸 취급받는데. 이상하게기분이 좋네. 걱정해 주는 거니?"

네크로멘서가 내 손을 잡았다. 뼈로 된 손이다. 차가운 기운이 손끝에서 몸으로 밀려든다.

- 달그락!

그녀가 손을 잡아끌었다.

눈으로 보일 둣 푸른 기운이 몸을 뒤덮는다. 멍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기운이 머리에 감도는 걸까.

이끄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낼 수 있는 힘에서도 밀린다.

하지만 그보다, 어떤 권위가 나를 순순히 움직이게 만든다.

산길에는 두 계절 사이의 풍경이 펼쳐진다. 여름 꽃은 졌다.

아직 단풍은 들지 않았다. 해는 조금씩 짧아지고 공기는 맑아진다.

"날씨 좋지 않아?"

그렇긴 하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선선한 기운이 몸으로 퍼진다. 공기는 맑고 곡식은 익어 간다. 인간에겐 최고의 계절.

"왜 그렇게 시무룩해?"

이곳은 원래 레나와 왔었다.

그녀와 함께 걷던 풍경보다 반 달정도 이른 가을.

'레나는. 잘하고 있을까.'

일어나 별 대화도 하지 않고 곧장 도망쳤다. 나와 떨어지면 그녀는 분명 잘 살 거라고 생각했다.

내 존재는 사실 거추장스러울 뿐일 거라고 생각했다.

'능력도 올라갔으니 괜찮겠지.'

죽은 뒤 돌아온 동굴에서부터, 레나의 능력은 저번과 꽤나 달라졌다.

'그것도 물어보고 싶긴 한데. 아예내 루프를 인정하질 않으니.'

말을 꺼내는 건 무의미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초반 능력 상승.

그것만으로 충분할지 걱정된다.

잘 해낼 수 있을까. 동굴은 무사히 빠져나갔을까. 도시에도 데려다주지못하고 헤어져 버렸다.

물론, 도시라고 해 봐야 더 안전한곳은 전혀 아니다. 인간을 가장 많이 살해하는 것은 인간이다. 게다가 가장 가까운 도시가 유블람이니.

'어쨌거나, 잘됐으면 좋겠는데.'

레나가 T&T의 간부들에 휩싸여살해당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 정말 가실 거예요? 〉

〈"? 같이 죽어야죠! 〉

그녀에게 두 번의 생명을 빚졌다.

삶이 처음으로 되돌아올수록,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빚이 점점 더 쌓여만 가고 있다.

기스-제-라이에게 받은 능력 역시또 다른 빚이 될 거다.

'정수 흡수라니.'

사용할 때마다 그녀의 존재를 의식하게 될지도 모른다.

곧 이 네크로멘서가 죽게 된다면,

나는 그녀 역시 구해 줘야 할까?

하지만.

그녀를 죽일 만한 존재들을, 내가어떻게 상대할 수 있을까.

'어떤 녀석들이려나.'

네크로멘서 기스-제-라이가 내게 느리게 물어 왔다.

"멍하네. 무척 그리운 표정인데?

걱정하는 표정이고. 대체 누구야?"

함부로 레나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말을 돌려 보기로 했다.

"표정이라니, 그런 건 없소."

"응? 아니야."

네크로멘서가 짧게 단정했다. 눈을 깜빡였다. 입술을 약간 오므리며 볼을 빨아들였다. 그리고 칼날을 벼려내는 것 같은 어조로 말했다.

"년 표정이 있어. 나한테는 읽히거든. 네 감정도 못 읽는 멍청한 애들만 상대하다 보니 그런 거 아니야?

전 주인이 그랬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아니오."

강하게 부정했다. 이번에는, 네크로멘서의 눈빛에 이채가 돈다.

"어? 진짜 읽을 줄 아는 애였어?"

"그렇소. 당신보다 나을 거요."

"어머, 발끈하네?"

표정은 몰라도, 그녀들이 내 감정을 읽었던 건 사실이다.

루비아도, 서큐버스님도 그러했다.

두 여자와 나의 연결 고리는 뚝 끊어져 버렸다. 하지만 그녀들이 매도당하는 건 듣기 불편하다.

"나를 잘 읽는 자들이었소."

"그런데 왜.

왜 헤어졌냐고 묻는 질문일 터다.

나는 침묵했다.

"저런, 죽었구나?"

잠시 말을 멈추던 기스-제-라이가 슬픈 듯이 말했다.

"아깝네. 사실 아무나 할 수 있는건 아니야. 네 감정을 읽는다는 건."

"사령술사의 재능이 있다는 거요?"

루비아가 생각나서 물었다.

"그럼. 살아 있다면, 내 라인에 끼워 줬을 텐데 아쉽게 됐어."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내 라인이라.'

나는 이 오만한 네크로멘서에게 핀잔을 주는 것처럼 말했다.

"동굴 속뼈들을 보면. 별로 그런것 같지는 않았소만."

말을 가려 하지는 않았다.

느낀 바를 그대로 뱉어 냈다. 동굴 안을 빼곡하게 구성한 해골들의 위용은 확실히 압도적이다.

허나 그들과, 기스-제-라이 사이 특별한 유대는 없어 보였다. 그 저명에 매인 인형들로 느껴질 뿐이다.

"아, 그야 그렇지."

의외다. 그녀가 웃으며 긍정한다.

"내가 아끼는 아이들은, 곧 다른 곳에서 만나게 될 거야."

"다른. 곳?"

"그래. 머지않아 만날 거야. 다들 기다리고 있단다."

'기다리고. 있다고?' 그녀는 나를 데리고 계속 걸었다.

험하고 좁은 오솔길을 지나, 제법잘 닦인 커다란 산길이 나왔다.

그때, 기스-제-라이가 넓고 훤한 길을 가리키며 내게 말했다.

"걸어."

"걷고 있지 않소."

"혼자 걸어 봐."

"그럼. 갑옷을 돌려주시오."

"소중한 건가 보지?"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무덤에서 일으킨 인간, 루비아의 유품이다. 무엇보다 저런 대로를 걷기 위해서는 갑옷이 필요하다.

하지만 기스-제-라이는 거절했다.

"하는 거 봐서 천천히. 갑옷 없으면 걷지도 못하는 거니?"

걸을 수는 있다. 장소가 문제다. 아무 가림 막도 없이 이런 대로를 지나갈 수는 없다. 길은 나 같은 해골을 위한 게 아니다.

내가 갈 곳은 가장 험한 곳, 가장돌아가는 곳, 눈에 뜨이지 않는 곳들뿐이다.

인간은 이런 길에서 인외人外를용납하지 않을 거다.

멈칫하는 나를 네크로멘서가 가만히 바라본다.

"갑옷 대신. 칼을 줄게. 널 가리지 마. 누가 널 보고 공격한다면, 그눈을 이걸로 찔러."

그녀는 내 손에 허리에 차고 있던 작은 단검을 내밀었다. 날은 흑탄처럼 까맣다. 짧은 검신에는 복잡한문양이 새겨져 있다.

말이 길게 이어진다.

"네가 공격받는다고 해도, 그건 네가 저 길을 걸어서가 아니야. 네가 스스로를 내보여서가 아니지. 그걸왜 네 탓을 해? 공격하는 녀석들이 잘못한 거란다. 봐, 너는 그냥 길을 걷는 거잖아. 그렇지? 아무도 해치려고 하지 않았어."

원리적인 이야기다.

결국 이 여자는 나에게 인간을 살해하게 만들고 싶은 거다. 그럴 의도로 산책을 데리고 왔다. '흡수'를연습시키기 위해서.

부추기는 모습이 조금 우스웠다.

잘 돌봐 주고 싶은 장난감 취급인가.

칼을 가만히 바라봤다.

검은 칼날은 판독불가의 문자열로 빼곡하다. 붉고 하얀 문자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칼날 위를 떠다닌다.

내가 쓰기엔 한참 아까워 보이는 물건이다.

기스-제-라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런 걸. 내가 써도 되는 거요?"

"왜, 갖고 도망치게? 나한테 매여 있는 물건이야. 누가 쓰든 주인은 변하지 않지."

그녀가 피식 웃었다. 내 손에 단검을 쥐어 주었다. 뼈로 된 손으로 단검을 놓고, 살로 덮인 손으로 내 손을 감싸 단검을 쥐게 했다.

칠흑의 칼날과 대비되어, 은색 가죽으로 싸인 손잡이가 내 손에 착달라붙듯 잡힌다. 단검에 이끌리는 기분이었다.

"자, 가 봐."

그녀가 대로를 가리켰다.

반항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정말마법이라도 걸린 걸까.

나는 달그락거리며 드넓은 대로를 천천히 걸었다.

노예와 징집 병들조차 해치우지 못하던 첫 번째 삶을 생각했다.

그 삶에 비한다면.

누가 오든 상관없는 것처럼, 반듯하게 닦인 도로를 걷는 내 모습은 제법 괜찮은 모습인지도 모른다.

"슬슬 결계 바깥이야. 잘해 봐. 아,

뭔가 오네?"

뒤에서 따라 오던 기스-제-라이가툭, 하고 내 허리뼈를 손으로 쥐어 잡았다가 놓는다.

'온다고?'

앞에 시선을 집중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걷지 않아, 앞에서 오는 인간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의 말 대로였다.

근방에서 헤매고 있는 세 남자가보였다. 계속 그 방향을 보며 신경 쓰지 않았다면 내가 먼저 발견됐을 것 같았다.

하나같이 표정이 심각하다. 길을 걷는다면 분명히 부딪힐 거다.

남자들을 가만히 바라본다. 투구는 걸치지 않았다. 걷고 있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곳곳을 훌어보고 있다.

은빛 갑주를 입었지만 레인저에 가까운 느낌이 들었다.

'이길 수. 있을까?'

인간을 상대로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오랜만이었다.

최근의 인간을 상대로 싸운 건, 네크론 신사회의 조무래기들을 동굴 안에서 아무렇게나 학살했을 때다.

하지만 저 앞의 남자들은 그들과 달랐다. 무거운 무기를 들고 산길을 움직이면서도 발걸음 하나, 숨소리하나 크게 내지 않았다.

'누구지?'

정체가 궁금했다.

저런 느낌을 줄 수 있는 인간들은 드물다. 꽤 떨어진 거리임에도 긴장감이 공기를 타고 전해져 왔다.

통풍 때문인지 흉갑만 걸치고 있지만 그게 허점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거리가 점점 더 좁혀진다.

내가 가진 무기는 리치가 짧다.

녀석들에게는 긴 창과 칼이 있다.

휴대용 투창까지 보인다.

날 발견한다면 공격은 곧바로 들어올 거다. 불리한 싸옴을 할 필요는 없다. 몸을 숨겼다. 길옆으로 빠져나무 뒤에 조용히 숨었다. 최대한 근접해야 한다.

'이 정도면 되려나.'

몸을 숨긴 나무는 충분히 넓다.

주위엔 다른 나무들도 빼곡하다.

단검 든 해골 하나 숨기는 데 별문제는 없겠지.

남자들이 더 가까워진다.

목소리가 들린다.

"이상한 점은 전혀 찾을 수 없소."

"이쪽은 폐하께서 지나가는 길도아닌데, 너무 열심히 찾아보는 거아닌가? 중요한 곳은 근위대와 마법사들이 다 점검할 텐데.

"그놈들, 우리가 없어져도 신경도안 쓸 거요."

"잠깐."

대화에 끼지 않던 목소리가 짧게 말했다. 나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가만히 나무 뒤에 있었다. 단검을 내리고 살기를 죽였다.

그때였다.

- 피리리릭!

'뭐야?'

- 퍽!

창이 나무를 뚫었다. 텅 빈 갈비뼈아래를 지난 창이 눈앞에서 파르르 떨렸다.

- 스르릉! 스르릉!

동시에 두 자루의 검이 동시에 뽑히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것도 안 걸렸는데요?"

"파육음이 없습니다."

"아니. 분명히 뭔가 있다."

'이런. 걸렸나.' - 피리릭!

다시 한 번 세차게 창이 날아왔다.

분명 나를 노린 공격이다.

이번에도 뼈와 뼈 사이 빈 공간에 맞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 달그락!

옆으로 다급히 몸을 움직였다.

가까스로 피했다. 좀 더 가까운 거리였으면 맞았을지도 모른다.

"뭐야?"

구른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세 갈래로 나를 포위해 들어오는 남자들이 보였다. 세 남자의 인상이 일제히 구겨진다.

가운데 있는 남자가 창을 던졌는지, 가지고 있던 투창이 두 자루 비어 있었다. 40대 초로 보이는 얼굴에 관록이 새겨져 있었다.

왼쪽에 있던 더벅머리 남자가 뭉툭한 코에 주름을 잡으며 말했다.

"망자의 해골이군요. 사령술의 흔적입니다. 근처 던전에서 흘러나온 건가?"

말을 하면서도, 긴 머리의 미남자는 민첩하게 몸을 움직였다.

원형의 철제 버클러(한 손으로 가볍게 쥘 수 있는 소형 방패)가 나를 향해 날아왔다.

84화 황제, 폐하, 만세 (3)

***************************************************

- 쉬익!

둥그런 쇳덩이가 코앞을 지나간다.

정신을 집중해 간신히 피했다.

- 우지끈! 우지끈!

버클러는 굵은 나뭇가지를 몇 개나부러뜨리고, 그 너머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맞아 커다랗게 쨍! 하는 소리를 냈다. 바위에서 부스스 먼지가 일었다. 맞으면 그대로 뼈가 조각날 힘이었다.

"쯧. 아깝네."

더벅머리 남자가 혀를 찼다.

하나씩 끊어서 공격해 들어가기 도전에 선공을 당했다.

'실력은. 긍정적으로 봐이= 비숫.'

하지만 숫자는 3 : 1.

어느 쪽으로 보나 불리한 상황이다.

"투창을 두 번이나 피했다. 제법 빠르다. 해골이라고 가볍게 보지 마.

단검을 주의하도록."

가운데 있는 남자가 주의를 환기시켰다. 조심성 투철한 리더까지 있다.

패배는 확정이다.

그때,

- 우우응.

단검이 나를 꽉 움켜잡았다. 그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나를 움켜잡은 단검이 웅웅거리며 울었다.

〈죽여라. 〉

머릿속에 외침이 울렸다.

'뭐야?'

- 팟!

몸이 허공을 박찼다. 가장 가까이 있는 남자에게 단검을 찔렀다.

단순한 직선.

"후"

버클러를 던졌던 더벅머리 남자가 뒤로 물러났다. 거리가 있는 데다, 후퇴도 빨랐다.

- 스륵.

결국 단검은 슬쩍 남자의 팔을 슬쩍 긁는 데 그쳤다.

버클러를 장비하고 있었다면 그걸로 아예 막아 냈겠지만, 방금 던지는 데 사용한 터였다.

그때 였다.

허공에 소리가 울렸다. 단검에 떠다니던〈하얀〉글자 한 조각이 베인 상처로 스며들었다.

글자는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혈관으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기괴한 일이 벌어졌다.

남자의 팔에서 흐르던 새빨간 피가 순식간에〈하얗게〉변해 갔다.

혈관이 찢어졌다.

위로 새하얀 피가 뿜어졌다.

"아, 아파, 아파아.!"

실력 있어 보이던, 절대 그럴 것 같지 않던 긴 머리 미남자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두 바퀴도 구르지 않아 숨이 몇었다. 세 바퀴째부터는 그저 관성으로 구르는 시체였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이게 무슨.!' 터무니없는 마검魔劍이었다. 한 번 스치면 곧바로 죽는 권능.

막 놀라고 있는 순간,

- 콱!

두 자루의 장창이 교차해 내 몸을 꿰뚫고 들어왔다.

뼈 사이를 뚫은 창날이 뒤에 있는 나무에 깊숙이 박혔다. 창대가 파르르 떨렸다. 몸이 살짝 위로 들렸다.

두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

옆구리에 낀 창으로 나를 나무에 박아 넣은 두 남자의 눈썹이 마구일 그러져 올라갔다. 단단히 굳은 입가가 분노로 떨렸다.

"감히 이런 쓰레기가 수색대원을살해하다니.!"

놈들의 눈에서 불이 타올랐다. 경악과 혐오, 살의가 사슬처럼 얽혀있는 표정이었다.

- 덥석!

'이런.,

동료를 죽인 분노가 이해는 간다.

물론 얌전히 당해 줄 생각은 없다.

손을 뻗어 창대를 붙잡았다. 나무에서 뽑아낼 생각이었다.

- 달그락! 달그락!

하지만 여의치 않았다. 남자들도 힘을 주고 있다. 한 명 정도는 몰라도, 허공에 뜬 상태에서 둘을 동시에 밀어낼 힘은 없었다. 만만한 자들이 아니었다.

"치세!"

창을 꽉 잡고 있던 '수색대원'들이 갑자기 칼을 들었다.

양쪽에서 동시에 덮쳐 왔다.

무수히 연습한 합격合擊.

어설픈 공격이 아니었다. 뛰어난 무재를 가지고 태어난 남자들이 일생에 걸쳐 수련한 검술이다. 무게와 속도가 날카로운 칼날에 실렸다.

나는 위기를 느꼈다. 이대로 기스-

제-라이가 어떻게 되는지도 보지 못하고 죽을 생각은 없었다.

홀린 듯이 단검을 휘둘렀다.

- 서걱! 서걱!

창대가 잘라졌다. 창날과 가까운 부분에는 얇게 철이 둘러져 있었다.

그럼에도, 단검에 떠다니던 붉은 글자가 빛을 발하자 창대는 수수깡처럼 쉽게 잘려 나갔다. 몸을 급히 수그렸다.

- 부응!

남자들의 칼이 허공을 갈랐다. 바로 내 머리 위였다. 옆으로 굴러 일어났다. 일제히 인상을 구기고 있는 자들이 보였다.

"에잇.!"

하지만 내 쪽에서 한탄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방금 창대를 잘라 살아남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도 어찐지 손에 쥔 단검에게 이끌린 기분이었다.

허공에 떠 있는, [검술 효과가70% 감소된 채 발휘됩니다.]라는 글자를 확인했다.

검술 Lv.5.

이 스킬은 단검을 위한 것은 아니다. 원 핸드 롱소드나 바스타드 소드를 위한 것.

괜히 단검술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그래도 약간의 효과는 유지되는모양이지만, 이 정도 녀석들을 상대하기엔 부족하다.

'역시 무리인가.'

녀석들은 이를 악물고 나를 노려보았다. 나를 완전히 부술 때까지 포기할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우두머리를 보이던 40대 남자가,

동료를 향해 손가락 셋을 들어 보였다.

"그건.! 무리가 가실 겁니다."

"빨리 끝내야 해."

젊은 남자가 입술을 깨물었다.

동시에 칼이 날아왔다. 각자 다른 속도와 궤도였다.

몸을 숙였다.

전부 피할 수는 없었다. 허리로 날아오는 칼을 단검으로 방어했다. 불꽃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무게로 본다면 단검이 한 번에 튕겨 나가야 정상이다.

하지만 단검과 부딪힌 남자가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내 힘이 월등했기 때문은 아니다.

'단검의 힘이군.'

그때 였다.

내 두개골을 노렸던 40대 남자의 눈빛이 변했다. 반투명한 푸른 기운이 눈동자에 도는 것 같았다.

남자의 몸이 떨려 온다. 억지로 힘을 꺼내 쓰는 것처럼 입과 귀에 서피가 흘렀다. 그가 칼을 치켜들었다.

칼날에는 마치 눈에 보일 둣 은은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막아야 해.'

직감이 경고를 보냈다. 궤軟가 다른 파괴력이 느껴졌다.

막기 위해 단검을 들었다. 하지만 생각뿐이었다.

"어딜!"

단검은 다른 남자의 칼에 봉쇄되었다. 그는 제 목숨을 내놓을 것처럼 달려들었다. 제가 든 칼이 칠흑 단검과 부딪치며 이가 나가는 걸 보면서 내 움직임을 저지했다.

"크아아앗!"

그 사이, 반투명한 기운을 머금은 칼이 머리로 날아들었다. 두 눈에 서피를 흘리면서까지 40대 남자는 칼날에 서린 기운을 유지했다.

- 서걱!

깨지는 소리가 아니었다. 칼날은 그대로 두개골을 무 자르듯 치고 지나갔다. 의식이 깜깜해졌다.

'이걸로 아홉 번째 죽음인가.?'

이런 녀석들과 무작정 부딪히게 한네크로멘서 가 원망스러 웠다.

아니, 이런 단검을 쥐어 줘도 못 이겼으니 내가 한심한 건지도 몰랐다.

- 달그락!

꺼져 가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끄, 꼭. 끄윽.!"

숨이 끊겨 가는 소리다. 고개를 들었다. 세련된 솜씨를 보였던 두 남자가 허공에서 발버둥 치고 있다.

내 두개골을 훌륭히 쪼개 놓던 자들이.

'응?'

죽지 않았다. 의식을 잃은 바로 그 장소에서 다시 깨어났다.

남자들을 번갈아 올려다봤다.

가슴에 이물질이 박혀 있다.

칼날처럼 변한 날카로운 하얀 뼈가 그들을 뚫었다.

"도와줄 일 없을까 봐 걱정했잖아.

마무리는 네가 하렴."

네크로멘서 였다.

양손으로 남자 한 명씩을 꿰어 들고 있는 여자가 나를 보고 씩 웃는다. 왼쪽 눈을 찡긋한다.

멍하니 있자 재촉이 이어진다.

"마무리하라니까? 직접 죽여야 더흡수 효과가 좋거든. 왜 안 해? 살려 두고 싶어?"

- 우우우응.

손이 떨린다. 어느새 손에 쥐어져있는 단검을 내려다봤다.

"이 단검.

"맘에 들어?"

"내가 쥐는 게 아니라 쥐이는 것 같아서 불쾌하오. 어떻게 된 단검인거요?"

"살짝 스치기만 해도, 글자 벌레가 핏줄을 파고들지. 너한텐 안전한 거야. 핏줄 없잖아. 딱 알맞은걸?"

"벌레 무서워해? 쓰기 싫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보조개를 만들고 눈꺼풀을 살짝 들어올린다. 짓궂은 표정이다.

"저런, 무서웠구나."

물론 내 대답은 쓰기 싫었냐는 것에 대한 대답이다. 하지만 반박할 힘도 없다. 사실 이모저모로 의욕이부족한 상태였다.

〈네크로멘서의 연인〉

그 호감도 특전을 선택한 탓에, 강제로 납치되었다.

이 여자의 완전한 장난감이 되어있는 상태다.

마법으로 구속당하고, 손에 쥐어준 단검에 이끌려 조종당한다.

나는 네크로멘서에게 핀잔을 줬다.

"누군가 의욕을 가지려면.

"먼저 자율로 무장하는 일이 필요하지 않겠소? 타자의 의지로부터 자유롭고, '침해'받지 않는 사적 영역이 필요하단 말이오."

나는 침해라는 단어에 힘을 줬다.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엠버에서 온네크로멘서다.

"고리에 매어 놓고 의욕을 기대하는 건 존중 없는 태도요. 나를 인형처럼 다루지 마시오."

"아하하핫.

기스-제-라이가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네 의지를 침해하지 않았어. 오닉스의 고리는〈원하는 곳에〉매여 있는 고리야. 그 단검은〈원하는 것을 행하는〉단검인걸."

그녀가 말을 이었다.

"조금 더, 너를 솔직하게 만들어준 것뿐이야. 너는 내게 매여 있고싶다고 생각했어. 이들을 죽여서, 정수를 흡수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고.

솔직해진 기분이 어때?"

"r수치심이 온몸으로 퍼졌다.

'이게 전부 내가 원한 거였다고?' 그러는 와중에도,

"끄. 끄으.!"

기스-제-라이에게 폐를 찔린 남자들은 입가에서 피를 흘린다. 한 가닥씩 하던 남자들이 목 꺾인 닭처럼 허공에서 바르르 떨고만 있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다. 숨도 쉬지못하고 입에서 피를 홀린다.

눈도 새빨갛게 붉다. 꺽꺽거리는 소리를 낸다.

날카로운 손이 깊숙이 들어갔다면 단번에라도 절명했으련만, 그마저어려운 깊이인 모양. 애매한 것들은 어디서나 고통스럽다.

"이 아이들, 어서 죽여주는 게 편할 거야. 직접 죽이는 편이 흡수 효율이 좋아. 서둘러."

바닥에 떨어진 긴 칼을 주웠다.

그녀의 말을 인정하는 건 아니다.

또 나를 희롱하는 건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이들을 죽여서 나쁠 건 없다. 폐를 찔려 고통에 몸부림치는걸 두고 보는 취미는 없다.

- 숙!

경동맥을 차례로 베었다. 칼날은 예리하다. 인간의 목은 여리다. 칼은 예로부터의 전통에 충실하게 인간들의 숨을 끊었다.

비명이 샌다. 두 남자는 차례로 절명했다. 피가 두개골에 잔뜩 튀었다.

나뭇잎을 뜯어 묻은 피를 닦아 냈다.

검격에 반으로 갈라졌던 두개골은,

그런 일 따위 없었다는 듯 매끈하게 아물어 있었다.

두 남자를 죽이고 난 뒤 언제나와 같이 레벨업 메시지 몇 줄이 떴다.

기스-제-라이의 인형들을 상대해서 10대 초반이 됐던 레벨은 이미10대 후반으로 변해 있었다.

쌓여 있는 스탯 포인트를 대충 고르게 분배했다.

땅에 쓰러진 남자들의 시체를 바라봤다. 서서히 초록색 빛이 올라왔다.

[흡수가 가능한 상태입니다.]

[정수 흡수 레벨: 1]

[죽은 지 48시간 내의 상대로부터 정수 흡수가 가능합니다.]

흡수 조건을 충족하고, 레벨 5 이하의 스탯을 흡수한다는 등.

카타나를 쓰던 녀석과 같은 메시지가 떴다. 일반 스킬로 흡수가 제한된다는 메시지까지 같다.

남자들의 팔 부분이 초록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뭐 해? 빨아들이지 않고."

네크로멘서가 나를 질책했다. 그게 내가 원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니라고 부정하기는 어려웠다.

눈과 귀에서 피를 홀리던 시체들을 바라본다.

푸른 기운을 칼날에 서리게 하던 남자. 내 두개골을 갈라놓은 검격을가한 그 손목에서 빛이 난다.

'흡수한다.'

흡수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뼈에 감돌던 푸른 정수가 스르빠져나와 내 뼈로 스며들어 왔다.

저릿한 감각이 손에서 머리를 타고을라왔다.

85화 황제, 폐하, 만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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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나를 휘두르던 전前 챈들러남작을 죽였을 때보다 더욱 생생한 기분이었다. 직접 죽여서 그런 걸까.

이런 감각이 기스-제-라이가 말하던 흡수 효율이라는 걸까.

[투창 Lv. 1을 흡수했습니다.]

[추적 Lv. 1을 흡수했습니다.]

[창술 Lv. 1을 흡수했습니다.]

[흡수하신 능력은 소화를 마친 후적용됩니다.]

[직접 살해한 시체입니다. 소화가400% 빨라집니다.]

[흡수한 능력을 소화하는 중.]

[소화까지 5:59:59.]

[스킬이 성장하고 있습니다.]

아래에 추가로 메시지가 떴다.

[현재 소화 중인 능력을 확인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발도拔刀 Lv.1] [21:34:41]

[동방어 Lv.1].

처음, 챈들러 남작에게서 흡수했던능력들을 확인한다. 소화라는 단어에는 우스꽝스러운 면이 있다.

나에겐 위장 따위는 없다.

메시지는 종족 특성을 고려해 주지 않는 건가. 역시 인간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듯하다.

"맛있게 먹었니?"

기스-제-라이가 눈을 찡긋했다.

"맛볼 혀도 없소만."

"단어야 적당히 빼앗아 쓰면 되지.

그럼 훨씬 영양 넘치는 식단을 짜러가 볼까?"

불안한 말이었다.

"무슨 말이오?"

"무슨 말이긴, 황제를 죽인다는 이야기지."

농담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되게 안전한 거야. 겁먹지 마."

그녀는 신뢰할 수 있는 화자일지도 모른다. 보여 주는 권능은 하나같이 놀라운 것들이다. 어딘가 '어긋나'있다고 생각될 만큼 강하다.

하지만 저 발화는 아무리 봐도 황당하다. 나는 멍하니 서 있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동굴 안에 있는 다른 자들은 버리고 가는 거요?"

"그럴 리가. 명령을 내려 놨어. 알아서 움직일 거야. 따라오기나 해."

빼곡한 뼈들을 생각했다. 대단하기는 하다. 하지만 그 정도의 전력으로 근위대를 상대할 수 있을까?

마법사를 상대할 수 있을까?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영역의 싸움은 아니다. 하지만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 달그락!

오닉스의 고리가 발동되었다. 강한 힘이 나를 잡고 끌어당겼다. 당해낼 수 없는 힘이었다.

이번 거리 설정은 1미터를 넘지 않는 듯하다. 내 몸이 네크로멘서에게 바짝 붙었다.

- 다그닥 다그닥.

보라색 로브를 입은 두 명의 노인이 천천히 말을 몰았다.

어떤 의복은 정체성이다.

보라색 로브는 아쥬라의 마법사에게만 허락된다. 면책특권과 치외법권을 의미했다. 다들 알아서 기라는 상징이다.

공포와 경외의 대상인 두 노인은,

황제가 지나갈 대로에서 어떤 마법함정도 발견할 수 없었다.

에라스트에서 유블람으로 향하는 통로 가운데, 황제의 팔두마차가 지나갈 수 있을 만한 길은 여기 하나.

면밀한 사전 답사가 필요하다.

그리고 노인들은 조사를 마쳤다.

"마법이 준비된 흔적은 전무해. 이만큼 깨끗하기도 어려워 보이는군.

스캔 장치에도 아무 반응이 없어."

"음. 주문 한번 사용해 보겠나?"

구부정한 노인이, 키 큰 노인에게년지시 이야기했다. 키 큰 노인은 하얀 수염을 슬쩍 쓰다듬었다. 그리고 한 손을 내밀었다.

스태프도 주문도 없이 그저 허공에 마법을 시전했다.

- 지지지직!

어떤 준비도 없이 손끝에서 작은 번개가 일어났다. 피와 살로 된 노인의 손에 머물며 이글거렸다.

노인은 그 번개에 어떤 부상도 입지 않았다. 멈칫하던 그가 먼지를 털 듯 손을 혼들었다.

이글거리던 뇌전이 곧장 앞으로 뻗어나가 땅을 때렸다.

- 광!

도로 옆 홁바닥이 한 자 깊이로패였다. 재가 된 풀과 흙이 튀어 오른다. 높게 먼지가 일어났다. 바닥의 풀은 새까맣게 타 있었다.

장난 같은 손짓 한 번으로 일으킨 터무니없는 위력이었다.

'저런 걸 인간에게 사용한다면 노인은 간단한 손짓만으로 수백 명으로 이루어진 부대를 살해할 수 있는 셈이다.

시약도, 스크롤도, 마법진도.

심지어 스태프도 없는 상태에서 행해진 의지.

'저게 아쥬라의 마법사인가.!'

지켜보는 이쪽의 경악과 다르게,

수염 노인은 한심해하는 느낌이다.

그가 탐탁찮은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끌어 내렸다.

손짓 하나로 허공에서 번개를 만들어 냈으면서도, 제 행사에 전혀 감명 받지 않은 듯하다.

"음. 역시 마법의 힘이 약한 남부답군. 그중에서도 여기는 독보적으로 약한데?"

"그렇네. 아케인(Arcane)도 잘 모아지지 않아. 마법에 의한 공격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자잘한 거야 근위대 애들에게 맡기자고."

"수레의 강력한 대마력에다. 이정도로 감도가 낮은 지역이면 뭐.

마법에 의한 저격은 없다고 봐도 되네. 가자. 일 다했다."

두 노인은 뒤로 돌아갔다.

우리는 언덕에서 그들을 바라봤다.

멀리 떨어진 위치였고, 아직 푸른 잎을 달고 있는 커다란 나무 그늘아래에 가려져 있긴 했다.

하지만 마법사들은 이쪽에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무척 이상하게 느껴졌다.

'결계 같은 건가?'

악신惡神처럼 오연하게 서서 언덕아래를 굽어보던 네크로멘서가 차갑게 뱉었다.

"역시 다 병신들이네."

냉혹한 품평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탑의. 마법사들이?"

"어? 알아보네?"

"시약도 마법진도 없이 단번에 마법을 행하지 않았소. 아쥬라의 마법사들인 것 같은데.

아쥬라의 마법사는 그 앞에 선 대부분의 인간을 초라하게 만들 수 있는 존재다. 하지만 기스-제-라이는 그게 뭐 어떠냐는 듯 대꾸했다.

"어, 그게 병신이란 뜻이야. 제대로 된 마법사는 한 년 말고는 없어."

지금까지의 이 여자를 봤을 때, 그게 누구를 말하는지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당신을 말하는 거로군."

기스-제-라이가 볼을 불룩하게 만들었다가 다시 빨아들인다.

그리고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아니. 난 네크로멘서고."

그녀는 하얀 뼈로 덮인 어깨를 으쪽했다. 그리곤 말을 이었다.

"그년 아니었으면 이렇게 쓸데없이 봉사할 일도 없어. 그냥 내 맘대로 묘역 다 파헤치고 가져갔지. 막을 애들도 없으니까."

이 여자에게 걸리적거리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게 누구요?"

"이름 바꿔 가며 노는 또라이 하나있어. 누가 그년 좀 확 찔러서 시체로 안 만들어 주나? 그럼 내가 나긋- 나긋하게 만들어 줄 텐데.

그녀가 말끝을 흐렸다.

어쩐지 알고 싶지 않은 말투였다.

더 캐묻지는 않았다. 대신 고개를 돌렸다. 전방을 주시했다.

마법사들이 말머리를 돌려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저들이. 월 모르는 거요?"

기스-제-라이는 대꾸하지 않았다.

마법사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서 서늘한 경멸이 느껴졌다.

마법 함정이라도 준비해 놓은 걸까?

정찰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두 명의 마법사 다음에는 기사들이 왔다. 그들은 훨씬 더 꼼꼼했다.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땅 하나하나를 찔러 보고, 도로 옆의 수풀을 넓게 흩어져 수색했다.

근처에 숨어 있었다면 분명 발각되었을 듯했다.

대충 땅에 번개 한 번 꽂고 간 마법사들과 무척 대조되는 태도였다.

"열심히 찾네."

"찾는. 다고?"

"우리가 죽인 애들. 외곽 수색대야.

표식을 하고 있더라. 어이구, 똑똑한척은 다 하더니 그건 몰랐구나. 귀엽기도 해라."

기스-제-라이는 뼈로 만들어진 눈 씹을 올리고, 턱을 살짝 내리며 아랫입술을 끌어당겼다.

놀리는 듯 흥겨워하는 표정이다.

나는 놀라서 달그락거렸다.

"그러면 이 근처를 싹 다 뒤져야하는 거 아니오? 왜 저렇게.

왜 저 정도에서 그치는가. 황제가갈 길을 수색하던 자들이 사라졌다.

실종자가 발생했다면 비상이 걸린 것이다.

갑옷을 걸친 기사들이 다들 심각한 얼굴로 꼼꼼히 수색하기는 하지만, 고작 저 정도로 끝낸다는 게 이해가가지 않았다.

내가 인간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건가? 혼란스러웠다.

"덜 중요한 거지."

"덜". 중요하다니?"

"황제가 정해진 길을 정해진 시간에 간다. 이게 훨씬 중요한 거야."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직접 가는 길도 아니야. 외곽에 보낸 세 놈이 실종됐다고 일정 취소할까? 보고할 놈 목이 날아갈걸?"

정식 기사도 아닌 녀석들인데. 오러도 제대로 못 쓰는 수준이잖아."

"보고하면 무조건 일이 생기는 거지. 보고 안 하면 일이 생길지, 안생길지 모르는 거고."

기스-제-라이는 그 뒤에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뭐, 살짝 허술한 감은 있네. 어쨌건 '저'녀석을 죽이는 걸로 계약한거니까. 뒷일이야 뭐.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나는 갑주를 입은 기사들을 가만히바라봤다. 일부는 돌아갔고, 일부는대로 곳곳을 점하고 서 있었다.

"우리의 다음 계획은 뭡니까?"

"별거 없어. 가만히 있다가, 황제가 오면 죽이러 간다. 끝이야."

느긋한 어조에 다시 한 번 말을 잃었다. 본인이 생사를 반전하는 권능이라도 가진 듯한 태도다.

"못 믿겠으면 갈비뼈 게임이나 하든지."

그녀가 이상한 제의를 던져 왔다.

"갈비뼈 게임이라니?"

기스-제-라이는 뼈로 된 손을 내흉부에 얹었다.

"네 갈비뼈를 하나씩 부러뜨려 보는 거야. 성공, 실패, 성공 순으로.

마지막 갈비뼈가 남았을 때 말하게 되는 게 진짜지."

어처구니없는 제의다.

"그냥 성공하는 걸로 칩시다."

그녀는 실패한다. 어차피 나도 휘말려서 죽게 될 거다. 그렇더라도, 미리 갈비뼈가 부러지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몇 시간이 흘렀다. 해는 하늘 높이떴다가, 다시 서서히 기울어졌다.

"아, 재네 온다."

대로를 바라봤다.

잿빛 갈기의 전투마.

그 위의 풀 플레이트.

준마에 탄 한 무리의 기사들이 먼저 길을 열고 있었다.

"웃긴 짓이네."

"웃긴. 짓?"

"도로를 열고 있잖아. 누가 길에서기 다리는 것처럼 저래. 환각이라도 보는 거야, 뭐야?"

도로는 깨끗하다.

사람은커녕, 쥐 한 마리 없었다.

"확실히. 아무도 없군."

"그래. 누가 여길 나오겠냐? 세금으로 다 경비 처리하는 근위대나 우러러볼 우리 폐하지. 돈 뜯기는 입장은 영 다르거든. 누가 와서 황제만세를 외친다고."

≪ ?"

■?.

말에 탄 근위기사 몇 명이 다그닥거리며 행렬을 조금 앞서갔다.

'화려하군.'

행렬 가운데 황제의 수레가 눈길을 끌었다. 팔두마차가 이끄는 거대한 수레였다. 화려한 몸체에 수십 겹의 복잡한 문양이 상감되어 있다.

웅장함과 화려함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저걸 보고 조악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황제의 수레는 네크로멘서에게도깊은 감명을 준 듯하다.

"직접 보는 건 처음인데. 잃어버린 지식들도 있네."

"잃어버린 지식?"

"실전된 아케인 문자들이 빼곡하잖아. 웬만한 마법은 근처에서 아예팍 꺼져 버리겠는걸."

'마법을 쓸 수 없다고?' 그렇다면.

역시 암살 운운은 농담인 것 같다.

마법도 없이 황제를 암살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

기스-제-라이는 그냥 황제의 행렬을 보고 싶었던 거다.

지금까지 한 말은 역시 다 농담이겠지, 하며 약간 안심했다. 하지만 곧 다시 불안해졌다.

'그러면 왜 죽은 걸까?'

네크로멘서의 사망은 이미 정해진 미래. 나는 그 미래를 살고 왔다.

죽는 건 확실하다.

시기적으로 봐도 그 사망은 지금 일어나는 게 딱 맞다.

혼란스러웠다.

- 다그닥. 다그닥.

앞서가는 정예 근위대가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살핀다.

황제의 행렬이 점점 가까워졌다.

순방을 위한 간소한 행렬이다.

수행원의 숫자는 고작 백 수십에 불과. 그러나 하나하나가 고르고 고른 정예일 터. 아까 보았던, 보라색로브를 입은 노인 둘은 황제의 수레 옆에 붙어 있다.

손짓 하나로 번개를 일으키는 아쥬라의 마법사가 둘이다.

근처의 영주들이 군대를 동원해서이 행렬에 달려들어도, 어렵지 않게 구워 버리겠지.

그들 외에도 또 하나, 관심이 가는 자가 있었다.

'누굴까?'

선두에서 살짝 처지게 말을 모는,

특이한 풀 플레이트 메일을 걸친 기사가 눈에 띄었다.

86화 황제, 폐하, 만세 (5)

***************************************************

정확히 말하면 눈에 들어오는 것은 기사의 갑옷이다. 재질은 한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다. 저런 갑옷을 알고 있다.

'미스릴.'

던전에 쳐들어온 용사.

서큐버스님을 살해한 용사. 그리고 그를 따르는 시종도 저런 미스릴로된 갑옷을 입었다.

'저런 갑옷을 입고 그녀를.

- 달그락!

"왜 그래? 무슨 불만 있어?"

네크로멘서가 내게 툭 끼어든다.

"무슨 말이오?"

"재한테 무슨 유감이라도 있어? 아는 사이야? 왜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봐?"

"그럴 리가."

알지도 못하는 자다. 유감이 있을 리가 없다. 다만 좋지 못한 장면이 연상되었을 뿐.

어쨌거나.

검도 아니고, 전체가 미스릴로 만I어진 갑옷이라면 그 가치는 희귀 넘어선다. 돈만으로는 갖지 못준아티 팩트 (Artifact) 급이 라고이야 기할 수 있다. 네크로멘서가 기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을 1하는,

"갑옷 예쁘지 않냐?"

확실히 그러했다. 투구까지 내린 기사의 갑옷은 하나의 걸작이었다.

빼곡하게 상감된 룬어와 문양.

하나하나가 강력한 대마법 문양일게 분명하다.

"너, 가져."

"무슨 소리요."

"저거 벳으면 너 줄게."

"빼앗는다고.?"

"그래."

네크로멘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입던 것보다 저게 낫잖아,

안 그래?"

"내가 입혀 줄게. 좋은 것 좀 입고 다녀라."

불쾌함에 앞서.

긴장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이 여자는, 정말 여기서 미친 짓을할 생각일까.

- 사박.

네크로멘서가 한 발을 내디뎠다.

그녀가 백백한 수풀로 이루어진 그늘에서 벗어났다.

- 사박.

풀을 밟는 발걸음 소리가 두개골에 울리는 것 같았다. 세상이 느려졌다.

기스-제-라이가 지금 이 순간, 죽으러 가고 있다.

9년 전쟁을 일으키는 전범戰犯, 제국 황제 엘튼 클레멘스의 행렬을 향해 천천히 걸어 나간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그녀는 계속 걷는다.

두 명의 마법사와, 수십 명의 황실근위대를 향해 단 한 명의 네크로멘서가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다.

필패必敗.

필사必死.

황당한 짓이다.

거느린 해골도 하나 없다.

손잡아 데리고 온 해골 하나는, 굳은 채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다.

- 휘이이이잉.

늦여름 햇빛이 지나간 자리, 초가을 바람이 분다.

무언가 저에게 홑날려 달라는 둣, 이리저리 불며 변덕을 부린다.

잔디가 흩날린다. 미처 피지 않은 가을 꽃씨가 흩날린다. 작은 잎사귀들이 뜯겨져 풀향을 피워 낸다.

하지만 네크로멘서의 머리칼은 혼들리지 않는다.

굽이굽이 컬 진 그녀의 머리칼은 하얀 뼈로 되어 있다.

어느 한순간.

그녀가 투명한 막 같은 걸 지났다고 느꼈을 때였다.

"히이이엉!"

수십 개의 시선이 동시에 그녀를 향했다. 말들이 그녀를 보고 놀라 멈춰 섰다. 기사들이 창을 쥔 손에 일제히 힘을 주었다.

그녀는 아무런 기운도 뿜어내지 않고 계속 걸어갔다. 비현실이 현실을 향해 걸어가는 것 같았다.

'막혔. 어?'

기스-제-라이는 그저 대로 한가운데에 가만히 섰다.

그것으로 행렬이 정지했다. 선두의 기사들이 멈칫하며 고삐를 당겼다.

필요 없는 짓이었다. 말들은 본능에 따라 이미 멈춰 있었다.

독특한 풍모와 카리스마가 그들을 멈추게 만들었다. 내가 나갔다면 곧바로 창에 꿰였겠지.

혼자 미스릴 갑옷을 입은 기사가, 차갑게 명령을 내렸다.

"되다 만 리치인가? 서 록시우스,

서 오즈먼, 치워라."

메마른 음색은 삭풍처럼 차가웠다.

약간 톤이 높았다. 투구 가리개는 들지 않은 채 그대로다.

'저자가 단장인가.'

"존명."

가까이 있는 두 기사가 거대한 창을 높이 들었다.

주위의 다른 기사들과 구분되게,

둘은 특히 긴 창을 들고 있었다.

창날에서부터 50cm 정도가 철로 씌워진 무거운 창이었다.

'돌격 랜스로군.'

- 다그닥. 다그닥.

두 기사가 가까이 다가왔다.

랜스 끝이 살아 있는 것처럼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뾰족한 날에 은은한 기운이 서렸다.

'저건.

문득 토너먼트에서 만난 남자와 나눈 대화가 떠오른다.

방패와 곡도를 들고, 효율적으로상대를 분쇄하던 남자.

제법 잘 싸웠다. 크리스티나와 대전하기 직전의 상대였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나를. 제국 4검주에 비하면 어떠한가? 〉

남자는 자세를 완전히 홑트리곤,

그 자리에서 폭발하듯 웃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왜 갑자기 헛소리야, 당신? 〉

〈헛소리? 〉

〈미쳐 버린 건가? 기氣를 쓰는 수준부터는 이런 거. 아무 의미 없잖아. 검 끝에 마력만 흐르게 해도 강철을 두부처럼 자르는데. 〉남자는 그 뒤 칼을 내렸다. 그리고 기권을 선언했다.

〈난 관둬야겠어. 미친놈이랑은 안 싸운다고. 그리고. 이런 데서 싸워봤자, 뭘 하겠어? 〉결국 그는 경기장을 나갔다.

관중들의 야유도 그에겐 아무런 자극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확실히. 저게 바로 검기인가.'

수색대원에 이어, 두 번 연속으로 보니 알 것 같았다.

기 오러Aura.

절삭력과 파괴력을 압도적으로 증폭시켜 주는 힘.

하지만 갸웃한 점이 있었다.

눈앞의 녀석들보다, 푸른 갑옷의 기사나 용사가 훨씬 더 강할 터. 하지만 그들의 무기에서 저런 기운은 나타나지 않았다.

나 따위에게는, 저런 권능을 쓸 가치도 없었다는 걸까.

- 다그닥. 다그닥.

두 기사가 조금씩 말을 몰았다.

비스듬한 각도로 기스-제-라이를 겨냥했다. 3미터가 훌쩍 넘는 랜스로 단번에 꿰어 버리려는 것이었다.

두 기사는 그런 처리를 전문으로 하는 듯했다. 자세와 움직임이 몹시 익숙해 보였다.

폭발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직전의잘 가라앉은 차분함이 느껴졌다.

감히 황제의 행차를 막아선 자.

죽음 외에 다른 처벌은 없다.

그들이 막 박차를 가하려는 순간,

"잠깐!"

뒤쪽에서 벽력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단순히 크게 내지른 목소리는 아니었다.

공기가 진동했다.

기사들이 일제히 뒤를 돌아봤다.

- 다그닥.

단장으로 추정되는, 미스릴 갑옷을 입은 기사마저 말머리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수염 기른 마법사를 향했다.

"왜 그러십니까?"

권능과 권위에서, 결코 경시할 수없는 자의 외침이다.

일행은 일제히 행동을 멈춘 채 마법사의 말을 기다렸다.

수염 기른 마법사는 대로에 난입한기스-제-라이를 바라보고 긴장한목소리로 소리쳤다.

"내가 저자를 안다. 엠버메어를 지키는 3강 중 하나다. 섣불리 공격하지마라!"

- 다그닥! 다그닥!

마법사는 빠르게 말을 몰아 앞으로 나왔다. 하지만 박차를 가하지도, 채찍질을 하지도 않았다.

마치 '말이 나오고 싶어서' 의지대로 달리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타고 있는 자세도 어설폈으나 말 은제 움직임을 마법사에게 맞추었다.

- 다그닥! 다그닥!

초가을 바람에 로브가 흩날렸다.

네크로멘서 앞에 다가간 아쥬라의마법사가 질문했다.

"용건이 뭔가?"

네크로멘서가 대답했다.

"어, 황제 암살."

"〈암살〉이라고?"

수염 기른 마법사는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가만히 네크로멘서를 바라봤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뒤를 흘끗 돌아봤다.

그의 시야에 백 명이 넘는 황실근위대와, 함께 파견된 마법사가 들어왔다. 다시 고개를 돌린 마법사가네크로멘서에게 물었다.

"헛소리를 하는군. 암살을 정의해보게."

기스-제-라이는 뭘 당연한 걸 묻냐는 듯이 픽 웃었다.

"목격자가 없으면 암살이지, 뭐."

"뭐라.?"

마법사의 얼굴이 찌푸려진다.

귀 밝은 기사들 역시 암살이라는 단어를 들었다.

"2격 준비. 3진은 마차를 호위."

단장이 차갑게 명을 내렸다.

황제의 수레 주위에 있던 기사들의 진형이 변했다.

- 다그닥. 다그닥.

2미터 길이의 미늘창을 든 다섯 기사가 말을 몰아 나왔다. 랜스 돌격이 빗나간 후, 상대를 찍고 베고 찌르기 위해 준비된 진陣 같았다.

차분히 제련된 살기가, 대로를 홀로 걸어온 네크로멘서를 향했다.

나는 엉겁결에 주위를 둘러봤다.

혹시 무언가가, 그녀의 군단이 어딘가에서 도착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숲은 고요했다. 산길은 고요했다. 그 어디에서도 원군은 오고 있지 않았다. 멀어서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잠깐."

다가오는 근위대를 마법사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나 혼자 처리하겠다."

기사들이 탐탁잖은 표정을 지었다.

황제를 암살하겠다는 자다. 근위대가 처리하는 게 당연한 터.

그러나 아쥬라의 마법사를 거역하기는 어렵다. 하물며 자기가 처리하겠다는 데에야.

"알겠습니다. 모두 물러나라."

랜스를 든 두 기사와, 미늘창을 든 기사들이 물러났다.

뒤에서 제3격, 4격을 준비하며 살기를 피워 올리던 근위대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었다.

마법사는 네크로멘서를 보고 말 을이어 갔다.

"군단도 없는 네크로멘서가 배짱도 좋군. 특이한 존재라고는 들었다. 하나. 감히 진짜 마법 앞에서 덤빌 생각인가?"

수염 노인이 슬쩍 지팡이를 들었다. 1미터 정도의 지팡이 끝에는 정교하게 세공된 황색의 케흐리바리원석이 박혀 있었다.

주변 공기와 스스로를 마찰시키는 전기 속성의 보석에 샛노란 기운이강하게 압축되어 있다.

네크로멘서가 피식 웃었다.

"그거 잘 안 되지 않아?"

"안 되는 건 너도 마찬가지일 터."

마법사 에레포르.

그는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근처는 아케인 이 매우 억제된 곳.

그런 까닭에 기운을 계속 스태프에 축적하고 있었다.

준비는 되어 있다.

눈앞의 네크로멘서는 맨손.

단검 하나 없다. 어떤 기계장치도,

축마蓄魔 장치도 없다. 군단도 없는네크로멘서와 싸워 질 리가 없다.

- 쉬익!

압축된 기운이 뻗어 나갔다.

공기를 압축한 기운에, 일렁이는샛노란 뇌전이 섞였다.

'아슬아슬한데.,

기스-제-라이는 빠르게 날아오는 공격을 가까스로 피해 냈다.

- 펑!

뇌전을 맞은 바닥에 수십 갈래의전기가 퍼졌다. 넓은 표면의 잔디가 순식간에 재로 변했다.

공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얼어라."

노인이 든 지팡이에서 다시 한 번 압축된 공기가 터져 나왔다.

허공을 찢는 공기에 짙푸른 냉기가 섞였다. 네크로멘서는 이번에도 간신히 피해 냈다.

마법을 맞은 바닥의 돌이 순식간에 얼어붙으며 몇 갈래로 쩍 갈라졌다.

아직 마법에 직격 당하지는 않았지만, 네크로멘서에게 그리 큰 여유는 없어 보였다.

지켜보던 근위대는 마법사의 승리를 확신하는 분위기였다.

- 다그닥. 다그닥.

뒤쪽에서 또 다른 마법사가 거들 기위해 말을 몰아 다가오고 있다.

"좀 어떤가? 내 거들지."

'이런.' 두 명의 마법사다. 합공은 당해 내기 어려울 것 같았다.

- 달그락!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도움이 될 수는 없겠지.'

하지만 이대로 도망칠 수도 없다.

루비아가, 전혀 도옴이 되지 않을 텐데도 돌을 쥐고 다가왔던 심정이 이해되었다.

소용없고 무의미하다는 걸 알면서도 할 수밖에 없는 행위들이 있다.

- 달그락! 달그락!

기스-제-라이를 향해 달려갔다.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도착하는 건 금방이었다.

달려오는 나에게 시선이 집중된다.

네크로멘서가 뒤를 돌아 나를 바라봤다.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감동인데? 안 가고 와 준 거야?"

"감히 눈을 돌려.!"

계속 공격을 가하던 흰 수염의 마법사가 짜증을 냈다.

- 쩌어어억!

짜릿한 냉기가 기스-제-라이가 서있던 주위 바닥을 하얗게 얼렸다.

마치 포위하는 것처럼 냉기가 나와 그녀 주변을 모조리 얼어붙게 했다.

직선 공격이 먹히지 않으니 아예 피할 공간 전체를 얼린 셈이다.

기사들이 웅성거리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바닥을 얼리면 황제의 마차가 길을 가는 데 지장이 생긴다.

물론 아쥬라의 마법사는 그런 사소한 일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수염 긴 마법사의 스태프에 전격이 맺히기 시작했다.

- 파츠즈즈즈즈즈!

동시에, 단단히 얼어붙은 땅 위에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나, 아쥬라의 에레포르. 여기를 네무덤으로 만들어 주마."

- 휘이익.

기스-제-라이가 휘파람을 불었다.

반은 뼈로, 반은 살로 된 붉은 입술사이로 어떤 신호가 새어 나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주위를 멀리 둘러봤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고, 코앞에는 강하고 무수한 적의敵意들이 우리를 마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기스-제-라이는 자신의 자리를 확인했다.

그녀만 알아볼 수 있는 작은 표식으로부터, 이제 네 걸음 앞이었다.

기스-제-라이가 입을 열었다.

"어휴. 네크로멘서 앞에서 무슨 무덤 얘기를 해?"

- 저벅.

세 걸음.

- 스르록.

그녀는 뼈로 된 손을 들었다.

앞을 가리켰다. 새하얀 손은 어떤 무기도 들고 있지 않다. 어떤 기운도 맺혀 있지 않았다.

곧게 뻗은 하나의 검지 뼈로.

네크로멘서는 두 걸음 앞의 땅을 가리키며 말했다.

"무너져라."

- 쿠구구궁!

거짓말처럼 땅이 꺼지기 시작했다.

균열이 생긴 게 아니다.

원래 텅 비어 있던 것처럼, 무언가가 무리하게 그 아래를 받치고 있었던 것처럼 무너졌다.

깔끔하게 깎인 돌이 촘촘히 박혀있던 도로가, 지반이 신기루처럼 아래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고작 네크로멘서의 몇 걸음 앞에서 벌어진 일.

짧은 비명 소리도 제대로 뱉지 못했다. 백 명이 넘는 인원이 통째로 떨어졌다.

유성이라도 떨어진 것 같은 구멍.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런 마법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어떤 발동 주문도 없다.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지시〉했을 뿐.

- 무너져라.

나는 그녀의 곁에 서서 물었다.

"이게. 이게. 대체 뭡니까?"

"공사해 놨다고 했잖아. 기억 안나는 거야?"

"대체.

"아래를 판다. 내 아이들이 하중을 지탱한다. 필요할 때 무너뜨린다. 끝이지."

"그게. 말이 됩니까?"

"엠버는 공학의 도시란다. 내 해골가운데 토목 공학자가 얼마나 많은데. 여기가 연약 지반 이랬나? 디테일은 개네한테 물어봐."

상식 밖의 소리.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광경. 나는 할 말을 잃고멍하니 서 있었다. 정말 놀라운 모습은, 구덩이 안쪽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