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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동굴에서 날개가 퇴화하는이유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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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어붙여!"

던전에 들어온 침입자의 제1열. 그들은 철제 방패를 들었다.

날카로운 밑 부분으로 해골들을 마구 찍어 댔다.

- 콰직, 빠가각!

잠시 잊고 있었다.

이 소리를.

한 달여 만에 듣는 소리였다.

하지만 지난 수십 년간 익숙하게 겪어 온 소리이기도 했다. 해골들이 부서지는 소리다.

"당겨! 뽑아!"

던전의 해골들이 참혹한 꼴이 되어 쓰러졌다. 침입자들은 해골을 하나씩 끌어당겼다.

경추를 뽑아냈다.

흉골을 부러뜨렸다. 잡은 골반을저 멀리 집어던졌다. 분리된 해골들은 모래처럼 무너졌다.

아니, 다르다.

모래는 한 번에 흩어지는 그 모양새가 깔끔하기라도 하다.

해골들의 잔해는 더욱 처량하고 비참하다.

- 툭. 투두둑.

- 털썩. 털썩.

중심부가 뽑힌 해골들은 망가진 인형이 되었다.

바닥을 뒹굴었다. 함부로 차여 이곳저곳으로 흩어졌다.

- 달그락!

뼈다귀 굴러가는 소리가 던전 안에 요란했다. 인간들이 서로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아직까진 그냥 해골들인데요? 별거 없습니다. 이런 던전에서 어떻게 그 많은 모험가들이 실종됐다는 건지.

"아니, 여기가 맞아. 긴장을 늦추 지마라. 바닥 창으로 훌고, 다시 전진!"

제2열의 누군가가 소리쳤다. 긴 창을 든 2열의 침입자들이 창으로 던전 바닥을 홀었다.

- 투둑! 투두둑!

"깨끗합니다!"

"전진!"

- 저벅. 저벅.

그들은 한 발자국씩 천천히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안쪽에서 걸어 나오며 그들을 지켜본다.

저들을 모험가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잘 조직된 작은 군대다.

1열은 방패. 2열은 창.

조금 더 거리를 둔 3열에는, 활을든 자들이 있다.

역할 분담이 제대로다.

다만 입고 있는 복색은 통일되지 않았다. 색상도 스타일도 가지각색인 게 다소 의외였다.

상비군이라기보다는. .

'용병에 가깝겠군.'

하나하나가 적어도 E랭크는 될 것 같은 녀석들이다.

그럭저럭 훈련되어 있다. 만만하게보기는 어렵다.

지금껏 상대했던, 레나가 유혹하기 쉬웠던 즉물적이고 단순한 바보들은 아니다.

'영주가 움직인 걸까.'

용병들이라고 생각한다면, 근처의영주가 이 던전 문제를 해결하는 데상당한 금액을 건 것 같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점이 있었다.

'다친 녀석이 많아.'

녀석들은 어디서 치열한 전투라도 벌이고 온 것 같은 모습이다. 많은 자들이 크고 작은 상처를 입어 피를 홀리고 있었다.

발을 절뚝거렸다. 멀쩡한 놈들도 무언가에 질린 얼굴을 하고 있다.

- 툭. 투둑.

부서지고 뽑혀진 해골들의 잔해가발에 걸렸다. 한참 뒤쪽인 여기까지 날아온 것들이.

앞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아직 녀석들과 꽤 거리가 있다. 하지만 다른 해골들이 부서지자, 침입자들은 나를 쉽게 알아차린다. 집중하기 시작한다.

"왔다!"

"저거 아니야?"

"조심해! 저놈이 보스일 거다."

- 핑.

나를 향해.

일제히 활시위가 매겨졌다. 살이 걸린 시위를 팽팽하게 당기는 소리가 공기를 긴장시켰다.

- 쿵. 쿵.

커다란 방패를 든 제1열이 천천히 내게 접근해 들어왔다. 거리가 좁혀졌다. 내가 있는 공간이 조금씩 압박되는 기분이었다.

"집중해!"

"수십 명이 죽은 던전이다."

"방심하지 마!"

녀석들이 서로 외쳤다.

? 스? 르/릉,

나는 바스타드 소드를 뽑았다. 툭,

하고 아래로 늘어뜨렸다. 대체 왜여기에 계속 머물러 있었을까? 왜레나의 말을 듣지 않았을까? 내 행동들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 툭.

조각난 다른 해골의 두개골이 칼끝에 걸렸다.

이제 이 녀석은 다시 달그락거리며 돌아다닐 수 없다.

동족으로서의 연대 의식 따위가 있는 건 아니다. 이렇게 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이들의, 이런삶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착잡함이 마음에 감겨 오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부서져 자빠진 놈들 중에는, 내가석관에 넣고 레벨을 올려 준 녀석들도 있었다.

그 녀석들도 당해 버린 거다.

'쉽지 않겠군.'

고개를 돌렸다. 레나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레나는 던전이 꺾이는 위치에서 천천히 나오고 있었다. 그녀를 향해 말했다.

"너라도 항복하면 되지 않을까?"

"아하하하, 농담도 잘하시네요."

레나가 한 발짝 밖으로 걸어 나왔다. 침입자들이 레나를 보고 소리쳤다.

"마녀다!"

"해골을 부리는 마녀다!"

"고위 사령술사일지도 모른다. 모두 조심해라!"

놈이 일제히 웅성거렸다. 레나가 어깨를 으쑥하며 내게 눈짓했다.

"보세요. 도저히 항복할 분위기는 아니잖아요?"

"너는 마녀인가?"

아직까지 머리에 낀 안개가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그것 때문일까. 몹시 멍청한 질문을 해 버렸다.

레나는 피시식 웃었다.

"그런가 보죠, 뭐."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여자는, 진짜 마녀 짓을 안 하고 살면 여간 손해가 아니거든요."

침입자들은 경계하는 눈빛을 보냈다. 아직도 바닥을 훌어가며 천천히 다가오고 있다.

긴장하며 그들을 바라봤다. 레나가내 곁에서 툭 던지듯 말한다.

"아무래도, 다음 생에는 꼭 마법이라도 익혀야겠네요."

"그래도, 많이 죽이고 가는 건 좋아요."

그 순간이었다.

- 피리리리리릿!

3열의 궁수들이 레나를 향해 일제히 활시위를 놓았다. 십수 발의 화살이 날아왔다.

- 팟!

나는 갑옷을 입은 몸을 던졌다. 화살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그녀에게 화살이 닿지 않게 하기 위해 크게 칼을 휘둘렀다.

- 부응!

- ㅌ ㄷ:〔 1=

기 ≫ I I 국.

대부분의 화살은 갑옷에 맞아 떨어졌다. 두어 발이 칼에 걸렸다. 막기는 다 막아 냈다.

"왜 먼저 가지 않았지?"

레나에게 질문을 던진 뒤, 눈으로는 침입자들을 바라봤다.

의문이 떠올랐다.

녀석들은 지나치게 신중하다. 다가오는 속도가 너무 느렸다.

한 번에 몰아친다면.

희생을 좀 감수하더라도 나를 짓밟고 부술 수 있을 텐데.

먼저 달려드는 해골들만 부수고는, 줄곧 바닥을 천천히 창으로 훌으며다가오고 있다.

나는 혼잣말처럼 뱉었다.

"왜들 저럴까."

레나가 대답했다.

"질문은 하나씩. 덫이 효과가 좀있었나 봐요. 던전 주위에 덫을 수십 개 깔아 놨거든요. 아무래도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서. 독 바른 것도 있고, 안 바른 것도 있고."

그녀는 노래하듯 대답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킥킥거리며 침입자들을 향해 외쳤다.

"내가 깐 덫들이 좀 잘 조이던가요, 여러분? 꽉 조이는 거 좋아하잖아. 안 그래?"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험가인지, 용병인지 모를 놈들은 분노가 울컥 을라오는지 얼굴이 붉어졌다.

"마, 마녀!"

"태워 죽이겠다!"

"흐흐흐. 우리가 끝이 아니다. 멍청한 마녀, 우리는 그냥.

"시끄러워. 혀 잘리고 싶어?"

던전 안이 마녀를 태워 죽이겠다고 소리치는 목소리로 가득 찼다. 나는 레나에게 물었다.

"덫 수십 개를 깔았다고?"

"몰라요, 안 세어 봐서. 백 개가 넘을 수도 있고, 여튼."

그녀가 어깨를 으쑥하며 말했다.

"좀 넓게 했어요."

전혀 몰랐다.

문득.

그녀가 메고 오던, 몸통보다 커다란 배낭이 떠올랐다.

"그 배낭에. 다 덫이 들어 있었던 건가?"

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지 서글픈 눈웃음이 약간 섞여있었다.

"맞아요. 전부 다 덫이었어요. 떠나기 전에, 덫이나 한 번 쫙 깔아 주고 가려고 했죠."

"어차피 떠나는 길인데, 왜?"

"하핫, 그래도 한 달 넘게 있으면서. 꽤 정도 들었고. 던전으로 쳐들어오는 녀석들 골탕 좀 먹으라 고한 거죠."

'그런 일을.,

내가 던전 안에 가만히 처박혀서,

멍하니 달그락 거리만 하던 사이.

이 여자는 밖에서 그런 일을 하고 있었던 건가.

말도 듣지 않고, 멍청하게 안에 처박혀 있는 나를 위해서.

- 쿵! 쿵!

침입자들이 천천히 발을 디뎠다.

던전 안에는 함정이 깔려 있지 않다는 사실을, 그들도 서서히 알아채고 있는 것 같았다.

다가오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가라앉아 있던 던전의 공기가, 저들의 적의와 긴장으로 파르라니 떨렸다.

"왜. 먼저 가지 않았지?"

레나는 피식거리며 대답했다.

"오늘은 정말 그냥 버리고 가려고 했는데. 좀 늦었네요. 아무래도 틀린 것 같아요."

대화를 나누는 사이, 우리는 안쪽까지 후퇴해 있었다.

- 철컥!

나는 바닥에 놓인 그레이터 쉴드를재빨리 주워들었다. 바스타드 소드는 한 손으로도 충분히 휘두를 수있다. 그 정도 힘은 된다.

실질 레벨은 70.

힘 수치는 40.

"쏴라!"

- 피이이이이익!

지휘관의 외침과 함께 십수 발의화살이 다시 날아들었다.

나는 거대한 철제 쉴드를 들었다.

그 상태로, 레나에게 몸을 날려 그녀를 보호했다.

몸 전체를 가릴 만한 그레이터 쉴드에 수십 발의 화살이 맞아서 튕겨나갔다.

철로 코팅된 쉴 드는 멀쩡했다.

"조금 더 안쪽으로 오세요!"

레나가 소리쳤다. 나는 뒤로 물러나서 그녀가 있는 곳까지 갔다.

"미안하다."

나는 레나에게 말했다.

"그런 거 말해 봤자 의미 없어요.

여기서 살아 나가면 다른 좋은 말 좀 해 보자구요."

고개를 내밀어 밀집한 무리들을 바라봤다.

침입자들은 여전히 창으로 바닥을 계속 더듬으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정말이지, 덫에 어지간히도 당한 모양이었다.

"밀집해 있으니까 잘됐네."

레나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짧은 도화선이 연결된 사각형의 무언 가였다.

"폭탄?"

"조잡해요. 제 수완으로는 이런 것밖에 못 구했네요."

레나는 품 안에서 커다란 유리병을 꺼냈다. 밴드로 폭탄에 묶었다. 손놀림이 몹시 빠르다.

- 툭!

투명한 유리병 안에 새까만 액체가 가득 찰랑거렸다. 한눈에 봐도 위험해 보이는 액체였다.

물어보지 않아도 독액임을 알 수있었다. 레나는 마지막으로, 품에서작은 성냥갑을 꺼냈다.

- 치익!

막 그은 성냥이 확 타들며 매캐한 황 냄새가 번졌다.

- 화륵!

손가락 반 마디도 안 되는 짧은 도화선 끝에 불을 붙인다.

"폐업 기념 선물이야!"

- 휘이이익!

레나는 침입자들을 향해 곧바로 폭탄을 던졌다.

- 펑!

- 쨍!

굉음이 울리며, 작은 화염과 함께 유리 조각과 매캐한 연기가 침입자들 위로 퍼졌다. 한순간 시야가 가려졌다.

- 콜록, 콜록!

사람들이 기침을 뱉었다. 폭음은 컸다. 연기는 자욱했다. 방패를 든 침입자들의 대열이 흐트러졌다. 독액이 든 병의 효과인지 소리를 지르며 뒹구는 자들도 많았다.

밀폐된 좁은 던전 안.

효과는 극대화됐다. 하지만 연기는 금방 이쪽으로 퍼졌다.

레나는 수통으로 적신 수건으로 입과 코를 막았다. 그녀가 나를 툭툭치 며 재촉했다.

"한 발밖에 없어요. 금방 걷히니까,

빨리 나가요!"

던전을 가득 메운 연기가 갑옷 사이로 스며들어 왔다.

"콜록, 콜록!"

"뒤로 빠져, 뒤로!"

침입자들이 아우성을 쳤다.

독성인 듯한 연기가 갑옷 사이로 스며들어 온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무런 효과도 없다. 호흡을 하는 건 인간뿐이다.

- 팟!

땅을 박차고 달려갔다. 레나가 내뒤로 바짝 붙었다.

39화 동굴에서 날개가 퇴화하는이유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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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막아!"

가장 많이 흐트러진 1열이 나를 공격한다.

다리를 축으로 몸을 빠르게 회전시키며, 방패로 무기들을 세차게 후려쳐 냈다.

- 깡! 까강!

겨눠지던 무기들이 튕겨 나갔다.

힘과 힘의 대결이다.

다행이다.

여기 있는 인간들 가운데 나보다 강한 자들은 없는 듯하다. 비슷한 수준도 없다.

'제법 쓸 만해진 건가.'

다시 한 번 발을 세차게 디디며 방패를 휘둘러 밀어붙였다.

- 까강!

앞쪽의 침입자들은 이미 연기에 중독 되었다. 무기를 떨어트리고 괴로워하는 자들이 많았다.

돌파는 어렵지 않았다.

"크, 크허억!"

"독연毒煙이다! 뒤로 빠져!"

- 털썩! 털썩!

힘에 밀린 남자들이 뒤로 자빠져간다. 하나씩 쫓아, 죽여 끝을 내는 건 당연히 무리다.

그러나.

이미 무너진 대열을 돌파하는 것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 싁!

- 쉬익!

제1열을 돌파했다.

앞쪽에서 두 자루의 창이 나를 찔러 왔다. 2열의 창잡이들이다.

하지만 던전 통로는 좁다. 숫자의 우위가 빛을 잃는 곳이다.

'어떻게든 빠져나간다.'

전부 내 책임이니까.

집중해서 앞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검술 Lv. 5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 서걱! 서걱!

좌우로 찔러 오던 두 자루의 창은 아예 창대가 잘려 나갔다.

- 툭! 툭!

잘라진 앞부분이 바닥에 힘없이 떨어진다.

"히 익!"

"푸하! 후아! 역시 이놈이었어!"

창날을 잃은 녀석들이 뒤로 황급히 물러간다. 뒤로 도망가서 거칠게 참았던 숨을 쉰다.

날 저지하려는 확고한 의지 같은건 별로 보이지 않는다.

레나는 몸을 숙이고 내 뒤에 바짝 붙어 오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연기는 금방 흩어질 거예요."

레나가 내게 속삭였다. 한때 통로에 가득 퍼져 매캐했던 연기가 다른 곳으로 퍼지며 조금씩 걷혀 가는 게보였다.

- 팟!

서둘러 걸음을 내디뎠다. 지휘관 같은 녀석이 뭐라 뭐라 외쳤다. 그러나 놈들이 빠지는 속도보다 내가 접근하는 속도가 빨랐다.

가까이 붙었다.

창을 쥔 녀석들은 더 이상 거리의 우위를 차지하지 못했다.

왼팔에 든 방패로 레나를 보호하면서, 오른손에 든 바스타드 소드를 마구 겨누고 휘둘렀다.

- 깡!

- 서걱!

- 퍽!

대부분 철과 철, 혹은 철과 나무가 부딪치는 소리였다.

굳이 하나하나 죽이고 갈 여유도,

이유도 없었다.

가장 뒤쪽에 있던 활잡이들은 무슨 이유에선지 이미 바깥으로 나간 것 같았다. 아직도 콜록거리는 몇 명의침입자들을 걷어 내고 입구 쪽으로 나갔다.

'살아남은 건가?'

멍청한 선택을 해서 안쪽에 계속남아 있었다. 그러나 탈출에 성공했는지도 모른다.

왜 여기에 남아 있겠다고 생각했는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옆에 붙은 레나가 말했다.

"푸하.! 뭔가. 이상한데요? 죽자고 들어오던 거에 비해 너무 쉽게 길을 열어 줬잖아요."

그렇기는 하다. 심지어, 마치 돌파되기를 원했다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당연히 우리를 못 막을 거라고 생각한 것처럼 말이에요. 여기서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바깥에서 활이라도 겨누고 있을 나는 방패를 앞에 세우고 던전 문을 열었다.

- 끼이이익.

던전 문이 열렸다. 바깥의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한 달 가까이 접하지 않았던, 청명한 하늘이 보였다. 적당히 건조한공기가 시원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하늘 아래, 푸른 갑옷을 입은 남자 한 명이 서 있었다.

재질은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한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은 분위기의 갑옷이다.

푸른 갑옷에는 멋지게 용이 상감되어 있었다.

옷도 먼지 한 톨 묻지 않을 만큼 깨끗하게 관리된 상태.

얼굴은 20대 후반으로 생각될 만큼 젊었다. 누가 봐도 미남이라 고할 만한 깔끔하고 정중한 인상.

하지만 그 얼굴에서는 기묘한 악취가 나는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구덩이에 가득 쌓인,

수많은 시체들에서 나는 악취 같은 것이었다.

남자의 깔끔한 표정 아래, 수백 수천 구의 시체가 감춰져 있는 것 같았다.

- 쓰윽.

남자는 버릇처럼 제 머리를 톡톡 쓰다듬었다. 잘 넘겨진 가느다란 머리칼은 회청색으로 시들어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건 아닌데."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청명한 가을 하늘이.

적당히 건조한 맑은 공기가 동시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나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쳤다.

남자가 불평했다.

"이 따위 걸로는. 두 마법사는커녕 근위대에도 못 닿을 건데. 완전히 시간만 낭비했잖아."

푸른 갑옷을 걸친 남자가 옆을 돌아봤다.

'옆?'

거기에는 비단옷을 입은 남자가 쩔쩔매고 있었다.

비단옷을 입은 남자.

주변의 다른 기사들.

그리고 활을 내리고 얌전히 서 있는 궁수들이 보였다.

있는지도 몰랐던 새로운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아.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푸른 갑옷을 입은 남자의 존재감이 너무 강했다. 모두 거기에 먹혀 들어가 있었다.

그래서였다.

내가 비단옷을 입은 남자도, 주변에 서 있는 다른 기사들도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푸른 갑옷을 입은 남자가 비단옷을 입은 남자에게 말했다.

"너."

"예, 마스터!"

비단옷을 입은 남자가 움찔하며 몸을 곧추세웠다.

"제보가 과장됐잖아. 자살해라."

비단옷을 입은 남자가 몸을 덜덜 떨었다. 그가 몸을 떨 때마다 뱃살과 가슴살이 출렁거렸다.

그동안 쌓아 왔던 직감이 외쳤다.

어떤 본능 같은 것이 미친둣이 울부짖었다.

'도망쳐라. 도망쳐라. 도망쳐라.'

하지만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자, 자, 자.

비단옷을 입은 남자가 손을 떨면서 품을 뒤졌다. 저거, 설마 진짜 자살하려는 건가?

"농담이야, 영주. 제보자를 자살시킬 수는 없지. 그런다고 다 죽이면 누가 제대로 된 제보를 하겠어? 안 그래?"

영주라고 불린 남자는 말도 못 하고 떨기만 했다.

그리곤 무언가 자기를 옭아매던 것이 한 번에 탁 풀린 듯,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푸른 갑옷을 입은 남자가 내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고요하다. 그는 나와 같은 풀 플레이트 메일을 입고 있다.

그런데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정말 발소리가 나지 않는지, 내가 그걸 듣지 못하고 있는 건지도 잘 구분되지 않았다.

그 순간 세계에는 레나도, 다른 주위의 누구도 없고 오직 나와 그 남자만이 존재했다.

- 우우우.!

남자가 허리에 찬 검을 검집째로 천천히 휘둘렀다.

궤적이 보일 만큼 느렸다.

지루할 만큼 느렸다. 졸음이 느껴질 만큼 느렸다. 공간을 질질 끌어오는 것처럼 느렸다.

어디로도 피할 수가 없을 만큼,

느렸다.

[스킬 - 위압이 발동됩니다.]

[저항해 주사위를 굴립니다!]

[힘이 너무 낮습니다. 주사위를 던지려는 손목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지혜가 너무 낮습니다. 주사위를 굴리는 방법을 잊어버렸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지배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무기도, 방패도 들 수가 없었다.

- 퍽!

머리에 강렬한 충격이 가해졌다.

[측정할 수 없는 검술 랭크로 공격이 가해졌습니다! 모든 저항력이 무시됩니다.]

[레벨 차이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회피 확률이 원천적으로 사라집니다.]

머리가 반으로 쪼개진다.

푸른 기운을 띠는 새하얀 검집이 몸을, 죽은 루비아가 샀던 갑옷을 아예 반으로 갈라놓는다.

레나는, 저 여자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의식이 꺼져 버렸다.

- 덜컥!

날도 서지 않은 검집이, 천천히 두개골부터 가르고 지나가던 감각은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 철컥! 철커덕!

몸을 흔들었다. 하지만 불쾌한 감각은 잘 떨쳐지지 않았다. 확인을 위해 팔을 들었다.

- 툭툭!

두개골을 함부로 더듬었다. 평평하다. 구멍도 틈새도 없다. 단단하고 훌륭한 두개골이다.

아주 잘 붙어 있다.

'꿈?'

두개골이 갈라진 건 꿈속에서 벌어진 일일까?

- 달그락!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꿈 따위가 아니다.

당연하다. 해골병사는 꿈 따위를 꿀 수가 없다. 미칠 수도 없다.

전부 실제로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분명히 죽었다.

주위는 아주 고요했다.

쌔액, 쌔액 하는 누군가의 숨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깊이 잠든 숨소리가 희미하게 울려왔다.

'숨소리?'

어딘지 익숙한 소리였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아봤다. 모포 위에 잠든 여자가 있었다.

- 철컥!

화들짝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

- 퉁!

그러다 벽에 부딪쳤다. 소리가 흘안에 퉁퉁거리며 울렸다.

"으으 으음.

여자가 잠꼬대를 하며 살짝 몸을 비틀었다. 아는 얼굴이다.

아는 정도가 아니다. 잠시 전까지만 해도 같이 있었다. 함께, 던전을 탈출하려 했다.

'레나.' 그녀였다.

- 띠링!

[계승되었습니다!]

[이름: 없음]

[이름: 없음]

[해골병사 Lv. 14(70)]

[체력-34 힘-40 민첩-39 지혜-11]

[자동 진행. 변착회귀突華回歸의어 스커리 네 (uskoreniye)를 사용 완료로 체크합니다.]

[동화율이 내려갑니다.]

[93.54%->92.49%]

눈앞에서 상태창이 떠오른다. 머리에 박히는 둣 또렷하다.

다만.

어떤 단어는 처음 나타날 때는 흐릿하게 표시되었다.

그러다 시간을 두고, 점차 명확한 글자가 되어 나타났다.

〈변착회귀의 어스커리네〉라는 단어가 그러했다.

머리가 아프다.

실제로, 지끈거렸다.

한동안 가만히 서서 움직일 수 없었다. 무언가 미세한 균열이 가는것 같은 느낌.

'변착회귀의. 뭐라고?' 이런 걸 이해하려면 지혜를 올려야하나. 전혀 들어 본 적 없는 생소한 단어와 어감.

나중에 포인트가 남으면 한번 쭉올려 볼지도 모르지만.

사실 힘과 민첩, 체력에만 투자해도 항상 부족한 게 포인트.

지혜는 마법의 위력에 직결되고,

나는 마법과는 거리가 멀다.

- 달그락.

머리를 흔들었다. 일단 내가 알 수있는 것에 집중하기로 하자.

'다시 살아났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졌다.

무덤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주위는 고요하다.

미친 것처럼 쏟아 붓던 폭풍우도,

머리가 덜덜 울리게 만들 정도로 커다란 천둥소리도 없다.

회색 로브를 걸친 얼치기 사령술사도 없었다. 나를 부르던 애타는 외침이 없다. 내 움직임 하나하나에 깜짝 놀라던 그 여자가 없다.

'루비아.'

그녀는, 이제 사라진 걸까?'

처음은 항상 밤의 묘지였다. 비, 그리고 그녀와 함께 시작했다. 크게 도움은 되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지켜 주려다 몇 번이나 죽었다.

행동 하나하나가 어설픈 데다 세상을 온통 책으로 배운 여자였다.

하지만 그렇게 죽어야 할 여자는 아니었다.

그 누구도 그런 식으로, 비참하게 난자당해 죽으면 안 된다는 소리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런 도덕이나 이상 따위는 없다.

학대와 고문은 어디에나 넘친다.

약탈과 살해는 세계의 일상. 어차피모두가 시체를 먹고 산다.

다만.

그녀는 나를 무덤에서 일으켰다.

처음으로 반가워했다.

호감을 보였다. 별거 아닌 행동들에 놀라고 감격해 주었다.

이곳은 던전.

망령의 납골당.

레나를 거미줄에서 막 꺼내서, 모포 위에 눕혀 주던 때로 돌아왔다.

'루비아의 죽음은 확정된 걸까?'

다시 그녀를 만났던 시점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걸까, 싶었다.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루비아는 비참한 꼴을 당했다.

그녀가, 그대로 과거에 묻혀 버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답답했다.

- 띠링! 띠링! 띠링!

혼자서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머릿속에는 계속 경박한 소리가 울리고 있다.

눈앞의 허공은 계속 반투명한 푸른 창들이 메워 가는 중.

[사망기념관]

[계승된 이후 다섯 번째 죽음을 달성하셨습니다.]

[이번 죽음에 당신이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이 적용되었습니다. 관련된 특전을 얻을 수 없습니다.]

[다른 특전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몇 번을 선택하시겠습니까?]

1. 사령술사를 위하여플러스

2. 둔기는 위험해3. 두개골 보호법

40화 동굴에서 날개가 퇴화하는이유 (8)

***************************************************

'이해할 수 없는 개념?'

하긴.

그 공격 앞에서 나는 꼼짝도 할수 없었다.

느긋하게 한 발짝 내디딘 남자.

그가 뭉툭한 검집으로 갑옷째 내 몸을 천천히 가를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대체 그 남자는 누구였을까? 어떻게 그 자리에 있었던 걸까?

F급 던전, 망령의 납골당.

자기가 산 칼도 제대로 휘두를 줄 모르는 놈들이 잔뜩 오는 곳이다.

그런 녀석들만 상대하다 보니 제대로 대처를 못 한 걸까?

- 달그락.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푸른 갑옷의 남자는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20년 동안 달그락거리면서도, 그런 수준은 본 적이 없다.

어차피 내가 논평할 만한 수준은 아니겠지만.

그런 식으로 죽을 수 있다는 게아예 이해되지 않았다. 그가 검, 아니 검집을 휘두르던 모습을 다시 한번 천천히 되새겨 보았다.

하늘에서 막 엉기기 시작한 눈발처럼 새하얀 검집.

아무런 무늬도 새겨지지 않은 그검집은 지휘자의 연 주봉 같았다.

아주 느리고, 평온하며, 느긋한 템포를 표현하는.

그 속도로 휘둘러진 검집이 나를 반으로 갈라놓은 것이다.

아직도 혼란스럽다.

어쨌거나.

지금은 눈앞에 뜬 것에 집중해야한다. 특전 강화.

나는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선택이라면. 1번이지.'

망설일 건 없다.

1번 특전에는 플러스가 붙어 있다.

한 번 강화되었다는 뜻.

무언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미 강화된 걸 다시 선택하는 게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뭐든, 1차 강화보다 2차 강화가 어려울 테니까.

"1 번."

[1 번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돌이킬 수 없습니다. 신중하게 고르세요.]

[확정/다시 선택]

"확정."

[특전을 강화 중입니다.]

한참 동안 그 메시지가 떠 있다.

후회하고 있지는 않다. 다른 쪽이더 실용적일 가능성도 있다.

사령술사(네크로멘서)의 호감도를올리는 특전.

호감도라는 건 일방적이다. 타자의호감이 반드시 내게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특전을 선택한다.

루비아를 다시 못 만난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 여자를 다시 만났을 때.

나에게 좀 더 편안함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특전을 강화했습니다!]

[동화율이 떨어집니다.]

[93.04%->92.49%]

공간 어딘가가 살며시 열렸다.

어둠이 스멀스멀 기어 와 발끝에 닿았다.

발가락에서부터 조금씩 위로.

나를 한 겹 한 겹 부드럽게 휘감기 시작했다. 가만히 서서 그 어둠에 몸을 맡겼다.

[특전을 자동으로 장착합니다.]

특전: 네크로멘서의 연인 (new!)

- 모든 사령술사(네크로멘서)와의관계에서 기본 호감도 20을 얻고 시작합니다.

- 사역 관계를 맺은 사령술사의호감도가 추가로 10 상승합니다.

- 당신의 존재는 사령술사의 영감을 자극합니다. 당신 근처에 있는사령술사의 네크로멘시 숙련도가5% 빠르게 상승합니다.

- 영웅급 특전입니다. 다른 영응급특전이 활성화될 때까지 강제로 이 특전이 선택됩니다.

'으음.'

아예 다른 특전을 선택할 수도 없다라. 게다가 포인트 투자는 아예 날아가 버린 건가 싶었다.

'호감도 집중 특전인가.'

어쨌건 내가 선택한 일이다. 회의는 갖더라도 불평은 할 수 없다.

- 터벅. 터벅.

나는 갑옷을 입은 채로 걸었다. 홀 안의 정적을 깨뜨리지는 않을 정도로 조심스럽게 걸었다. 그리곤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의 죽음들과 달리, 이번죽음에는 의문들이 많이 남는다.

첫 번째.

나는 왜 던전에 계속 남아 있으려고 했을까?

이 고민을 붙잡고 계속 걸었다.

언제부터 였을까.

던전 안에 박혀서 한 달쯤 지났을 때였나?

아마 그 즈음일 거다.

의식이 점점 흐릿해졌다. 제대로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생각과 생각을 이어 갈 수가 없었다.

던전 속에, 그늘 속에 꼭꼭 숨어있고만 싶다고 생각했다.

멍하니 달그락거리며 허공을 보고 있으면 그저 괜찮을 것 같았다.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왜 그랬지?'

지금 생각해도 이해는 어렵다. 허공에 무슨 메시지가 뜬 것 같기는 했다. 의식이 이미 흐려져 있을 때라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좀 더 생각해 보자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친화도 때문인가?'

5%, 10%를 넘긴 다음에는.

어디에 쓰이는 건지 도무지 알 수없었던 것.

던전 친화도.

확실히, 그게 올라가면서 점점 던전 안에만 있고 싶어졌던 것 같다.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되었지.

'10%가 되기 전에 나가야겠군.'

기준을 10%로 잡는다면, 머물 수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저번 삶과 비슷한 식이라면. 아마도 열흘 정도이려나?

바빠질 것 같다. 나는 아직도 째근쌔근 잠든 레나를 바라봤다.

그녀에겐 미안한 점이 많았다.

처음에는 그녀를 의심했다.

일단 써먹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신뢰는 없었다.

그녀는 나와 자신이 동족이라고 말하며 적극적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러나 그녀의 말을 홀려들었다.

놓아주자마자 뒤통수를 치더라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반쯤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그녀를 부려먹었다.

그런데 레나는 놀라울 정도로 나에게 충실했다. 남자들을 진지하게 유혹했다. 유품들을 성실하게 팔아먹었으며, 민첩하게 모험가들의 목을 따기도 했다.

나와 '그러기로 했다.'는 것만으로는 그녀의 적극성을 설명하기 어렵다.

그 일은 레나의 적성과 취향에 딱알맞아 보였다.

'참 잘해 줬어.'

게다가.

그녀는 던전에 틀어박힌 나를 위해서, 던전 주위에 깔 함정까지 잔뜩 준비해 줬다.

모든 걸 망친 건 결국 나였다.

- 달그락.

'이번엔 잘해야지.'

결심하고 있는 순간.

허공에 글자가 깜빡인다.

〈B급 시나리오, 레나 이야기가 진행 중입니다. 〉

'이건가.,

다시 한 번,

반짝이는 '레나'라는 글자에 손을 가져다 댔다.

- 띠링!

[이름: 레나]

[도적 Lv.5]

[체력-13 힘-11 민첩-17 지혜-11]

[호감도: 11]

- 레나는 당신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기본 스킬]

- 호감도를 올리면 개방됩니다.

[특전]

- 호감도를 올리면 개방됩니다.

[칭호- 호감도를 올리면 개방됩니다.

같다. 역시 능력치가 뛰어나다. 이번에는 그녀를 제대로 키워 봐야겠다. 나는 차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려 했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으으음"

레나가 얕은 신음을 뱉는다.

입을 살짝 벌려 하아, 하고 갇혔던 숨을 뱉어 낸다. 서서히 잠에서 깨어난다. 눈가에는 아직 피곤이 잔뜩 묻어 있다.

한쪽에 기대어 선 채로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세상모르고 자고 있던 그녀가 생각보다 금방 일어났다.

회귀回歸의 시간은 그녀가 슬슬 잠에서 펠 때쯤인 걸까?

아니면, 내가 생각에 잠겨 홀을 걸은 게 소란스러웠나.

"끄으웃.

레나가 굳은 몸을 이리저리 돌린다. 예전과 비슷한 표정.

"피곤하면 더 누워 있지 그래? 삼일 동안. 매달려 있었지 않아."

솔직히 매달아 놓은 당사자가 할말은 아니었다.

"흐웃. 네.?"

작게 숨을 내쉬던 그녀가, 내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그런 표정을 지을 것까지는 없지 않나.

"아니면 여관으로 가든지. 며칠 푹쉬는 것도 괜찮을 텐데."

레나가 눈을 끔뻑거린다.

왜 저런 식으로 날 쳐다볼까.

- 짤그랑.

여행자들의 짐에서 모은 은화 몇 개를 그녀의 곁에 떨어뜨렸다.

"혼자 쓰기엔 충분하겠지."

레나가 홈칫 몸을 움츠렸다.

"어. 저한테 갑자기 왜 그래요?"

"무슨 소리야?"

"왜 갑자기 친절해지셨어요? 그러면 무섭잖아요, 기사님."

왜 친절해졌냐고?

할 말이 없었다.

딱히 한 것도 없는데. 대꾸할 말을 찾아 잠시 머뭇거렸다.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입을 닫고 있다고 그럴듯한 말이 떠오르진 않을 듯하다.

되는 대로 뱉어 냈다.

"그래? 난 원래 친절한데."

레나가 멍한 표정을 짓는다.

대답을 잘못 골랐던 걸까.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 말을 이었다.

"어쨌건, 내 동료가 되기로 한 거아니었나? 편하게 지내라."

조금 당황한 것 같던 그녀는 갑자기 표정이 변했다.

제 가슴팍 살짝 아래에 손을 대고마구 웃기 시작했다.

"아. 아하하. 아하하핫.

왜 웃지?

웃을 때 흔들리는 가슴을 살짝 받치는 걸까. 가슴팍 아래에 손을 대고, 몸을 들썩이며 웃는다.

'버릇인가?' 저번에도 웃을 때 저런 모습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하하핫. 뭐예요, 기사님. 진짜 재미있어."

"뭐가 어쨌다는 거지?"

"한숨 자고 일어나니까, 갑자기 성격이 확 변해 버리셨네요?"

웃는 얼굴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레나의 머리 위에 떠 있는 글자를 살짝 늦게 발견한 것은.

- 띠링!

[레나의 호감도가 6 올랐습니다!]

[현재 호감도: 17] 라는 메시지가, 반투명한 창 안에떠 있었다.

'작은 차이로군.'

잡담을 나눈 게 긴장 완화에 도움이 된 걸까? 호감도가 올랐다. 저번보다 약간 더 오른 것 같다.

한참을 웃어 대던 그녀가 품 안에 손을 넣는다.

'음.'

그 품에는 작은 단검. 맹독이 든 유리병. 폭탄에 불을 붙일 성냥갑이 있겠지.

하지만 그녀가 내게 건네려 꺼내는 것은,

어머니의 유품이라는 펜던트.

줄 달린 작은 장식을 내게 건넸다.

"이거, 받으세요. 드리려고 했는데웃다가 잊어버릴 뻔했네요."

저번과 같다.

한 가지 다른 점은, 이번에는 눈꼬리와 입가에 웃음이 걸려 있다는 점정 도다.

"이거, 어머니의 펜던트예요."

빛이 바랜 장식. 길게 늘어진 줄.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나에게 주는 신뢰의 증표인가?"

레나의 얼굴이 살짝 물들었다.

"어엇.! 깜짝 놀랐네."

살며시 상기된 얼굴로 그녀가 말 을이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속으로 그 말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당신한테 들었지.' 한 달 전 그녀가 한 말이다. 혹은,

잠시 후 나에게 할 말이다.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대로 알려 줬다가는, 미쳤다는소리밖에 듣지 못하겠지.

"중요하지 않으니 넘어가지.

말을 얼버무렸다. 나는 레나의 안색을 슬쩍 살폈다.

처음에 그녀에게 펜던트를 받을 때에는, 어차피 그녀를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심장이 담긴 병을 놓고 가도 신뢰하지 않는다. 그 심정에 가까웠다.

지금은 그녀를 경험했다.

믿고 있다. 이제는 낙엽 한 장 주워 주지 않아도 신뢰할 수 있었다.

어느 쪽이든, 펜던트 같은 게 의미가 없는 건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제, 그녀의 이야기는 나에게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 나는 적당히 말을 이어 갔다.

"감정이나 약속들. 그런 건 물건에 담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 너한테 의미 있는 게, 펜던트 자체는 아닐 테니까."

처음 그녀에게 펜던트를 받을 때와 논조는 비슷하다.

하지만 그 태도는 전혀 달라져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레나가 건네준 펜던트.

줄이 달린 그 장식을, 다시 그녀의 하얀 손에 살며시 쥐여 주었다.

"어어.

레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그대로 네가 갖고 있어라.

어머니의 펜던트라고 했나?"

"네, 맞아요."

"그럼 네 어머니 얘기를 들려줘.

그편이 더 신뢰가 갈 것 같은데."

레나가 동그랗게 뜬 눈을 깜빡였다. 그 눈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조금 복잡한 표정이었다.

"우리 어머니는. 하루에 세 명씩꼭 사람을 잡아먹어야 했어요."

41화 부역자와 불타는 자 (1)

***************************************************

"뭐라고?"

그 자리에, 덜컥 걸음을 멈췄다.

- 딱!

놀라서 이를 부딪쳤다.

홈칫 굳는 반응을 본 레나는 웃기 시작했다. 가슴 아래에 손을 댄 채.

웃을 때의 버릇이 맞는 것 같다.

내게는 어떤 버릇이 있는지 생각했다. 반복된 행위를 버릇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패배하거나 부서지는 것을 내 버릇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 달그락.

나는 다시 몸을 움직였다.

그녀는 계속 웃는다.

어딘가 허물어진 웃음소리가 동굴 벽을 투두둑 때리며 메아리친다.

"아하하핫. 별거 아닌 말에도 금방 놀라시네요. 장난이에요."

"장난?"

그녀가 웃음기 띤 얼굴로 고개를끄덕였다.

"네. 농담이라구요."

그녀가 샐쭉 입을 내민다.

"저만 잔뜩 놀라고 있어서 억울했거든요?"

레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가에 남아 있던 잠은 어느새 싹 벗겨져 있었다.

"갑자기 적응이 안 됐단 말이에요.

자고 일어나니까 놀래는 말만 하셨잖아요. 우연인지, 아니면 관찰력이 뛰어나신 건지."

"관찰력?"

"네. 정확히 딱딱 짚어 들어오셨잖아요? 제가 약한 곳들을. 아무튼 고마워요. 뾰족뾰족한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뾰족하다고?"

나는 손을 들어 바라봤다. 확실히 살은 덮여 있지 않다.

"하핫. 몸으로 웃기는 거예요? 경계심이 많아 보였다구요. 뭐, 이런세상에서 해골로 살다 보면 그게 당연하지만."

레나는 중간에도 몇 번씩 쿡쿡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 얘기, 진짜 궁금해요?"

- 달그락.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더알고 싶었다.

"거리의 여자였어요. 남자들을 만족시켜 주는 일을 했죠. 그나마 비싸게도 못 받았어요. 들러붙는 놈팡이들만 잔뜩 이었지."

레나는 그 뒤를 이어 간단히 모친의 삶을 구술했다. 중립적이고 담담한 어조였다.

나는 끼어들지 않았다. 이야기는 금방 끝났다.

"결국 성병과 우울중에 쪼개져서죽었어요. 정작 자기 손에는 몇 푼 쥐지도 못하고."

레나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관성이 붙는 것 같았어요. 모멸감이라는 건, 그렇잖아요?"

무슨 말인지, 그녀가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건지 머리로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나는 짧게 끼어들었다.

"삶에 적응하지 못한 건가?"

네 어머니는, 이라는 말이 앞에 생략되어 있는 물음이다.

"마비되지 못한 거죠, 뭐."

레나는 손끝으로 펜던트 가장자리를 문지르듯 몇 번 쓰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제 품에 집어넣었다.

- 달그락.

나는 조용히 레나의 이야기를 곱씹었다. 빤히 그녀를 바라봤다.

다시 한 번 눈이 마주쳤다.

심장이 있었다면 박동이 조금은 빨라졌을지 모른다. 더욱 가까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 뜻뚜루? 月처음 듣는 소리와 함께, 눈앞에 반투명한 푸른색 상태창이 떴다.

[레나의 호감도 상한선이 한 단계 올라갔습니다!]

[현재 상한: 20]

[변경 후 상한: 40]

[현재 호감도: 17]

'뭐라고?' 잠시 감상에 빠져 있는데, 기괴한효과음이 내 감상을 산산이 조각냈다.

'호감도 상한이라니.'

그런 게 있다는 말인가?

루비아의 호감도가 20에서 올라가지 않던 것이 생각났다.

'상한선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이긴 하다. 나는 레나를 바라봤다.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에게 어떤 처우를 할 것인지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

예전과 같다.

다시 놓아준다.

달아나도 좋다. 배신해도 좋다. 원하는 대로 하게 놓아둔다.

저번 생에서 그녀를 무척 곤란하게 했다. 그러니 이번에는, 그 빚을 갚는 기분으로 살아가 준다.

'으음.'

순간, 나는 스스로의 생각에 위화감을 느꼈다.

'이번 생이라니.'

죽은 뒤, 다시 돌아가 반복하는 삶을 완전히 전제하고 있었다.

이런 사고방식은 위험하다.

'이미 달라졌어.'

다섯 번을 죽었다. 그러자 다시 살아나는 시점이 달라졌다.

이 세계엔 루비아가 없다. 이미 비참하게 죽었다.

루비아의 죽음은,

〈확정된 과거〉

돌이킬 기회는 없다.

'처음'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 회귀回歸가, 무조건 보장되는 어떤 단단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불안했다.

'정말 돌아갈 수 없을까?'

강해진 다음 다시 만나서, 제대로지켜 주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혼자 두기는 아무래도 불안했던,

옆에서 어떻게든 해 주지 않으면 안되는 여자였는데.

아직도 그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나는 갈색 머리칼의 사령술사는, 난도질당한 시체로 과거로 묻혀 버린 것이다.

- 달그락.

마음이 무거웠다.

다음 회귀는, 눈앞에 있는 레나의 죽음마저 확정된 시점일지 모른다.

갈비뼈 안쪽의 공기가 싸늘하게 가라앉는 것 같았다.

긴장감에 온몸이 조여 왔다.

- 툭툭.

긴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칼자루를 손끝으로 몇 번 두드렸다. 작은 소리가 홀 안에 울린다.

레나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침묵하는 그녀에게 말했다.

"이야기. 고맙다."

"고맙긴요. 저도 갑자기 하고 싶어져서 한 건데요, 뭘."

"도시에서 쉬고 와."

"네.?"

"열흘만 넘기지 말고."

열흘을 넘기면 곤란하다. 던전이내 정신을 먹어 버릴지도 모르니까.

레나는 내 말에 당황했다.

"놓아주셔도 되는 건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으으."

레나는 작은 침음을 내며 눈을 깜빡거렸다.

"싫어?"

레나가 후우, 하고 한 번 숨을 몰아쉰다.

"아니요. 알겠어요."

저번과 조금 다른 식으로 대화가 흘러간다. 내가 놓아주는 걸 좀 더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저건 네가 팔아 둬. 내가 장사를할 수는 없잖아?"

"하핫. 그래야죠."

레나가 고개를 끄덕이고 짐을 정리한다. 역시 능숙한 태도다. 적당히 짐을 챙긴 레나는 던전 입구를 향해터벅터벅 걸어갔다.

나는 그녀에게 들리도록 혼잣말을 했다.

"누군가 강에서 몸을 씻고 싶다면,

몸에 무기를 지니고 들어가는 편이 좋겠지."

레나는 내 쪽을 한 번 보더니 피식 웃고 던전을 떠났다.

- 달그락!

중요한 것 하나를 잊고 있었다.

석벽을 열고 닫는 법. 기관 장치작동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열어 놓고 있어야겠군, '

하룻밤이 지났다.

기다림은 불안하지 않았다. 루비아를 기다릴 때와 다르다.

레나는 자기 몸 정도는 어떻게든 지킬 여자다.

타자의 목에 단검을 쑤셔 주거나, 귀에 독액을 부어 넣는 일이 그녀에겐 자연스럽다.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걱정할 필요는 없다.

특히 남자라면 훨씬 더 쉽게 상대할 수 있는 여자다.

나는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이틀째 되는 날, 던전 안에만 있기에는 조금 답답해 밖으로 나갔다.

밤이었다. 바위에 걸터앉아 달을 바라봤다.

안으로는 새어 들지 않는 달빛을 몸으로 맞이했다.

그듬이 었다.

서른 날에 가까운 그듬은 가을의산을 비추고, 음침한 납골당의 닫힌 문은 스산히 그을렸다.

가을밤에 우는 풀벌레 소리는 다정했다. 취한 것처럼 칼을 허공에 들어 보았다. 달빛 대신 별빛이 내려앉아 나를 흘끗거렸다.

- 달그락!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책이 쏟아졌던 수레.'

책장수가 산적에게 습격이라도 당한 것처럼, 수레에서 쏟아진 책들이 널브러져 있는 장소가 있었다.

레나를 매달아 놓고 산책을 하다 발견했었다.

이곳에서 멀지 않다. 멀더라도, 일단 그곳에 가 보아야 하는 이유가거기서 발견한 책 중에는, 그저 읽기만 해도 지혜 수치가 오르는 책들이 있었다.

'캐빈 애슈턴이었나.'

그 저자가 쓴 책 두 권.

반드시 입수해야 한다.

- 팟!

나는 땅을 박찼다.

수레가 엎어진 장소까지 도착하는 건 금방이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엎어진 수레밖에 없었다.

책은 없었다. 주위를 몇 번 돌아봐도 마찬가지였다.

아무것도 없었다.

달그락거리며 주위를 몇 번 빙빙 돌다가 깨달았다.

'시점을 착각했다.'

이미, 책들은 납골당에 있다.

내가 던전 한구석에 가져다 놓은 것이다. 이 시점에서 살아난 것이 처음이라, 혼동이 온 것이다.

땅을 박찼다. 망령의 납골당 안으로 다시 돌아갔다.

아직 해골들은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고, 던전은 아주 조용했다. 독서에 좋은 환경이다. 구석에 놓아둔 책들을 금방 발견했다.

〈세계의 비공식적인 무력 집단에 대하여 - 1〉

'캐빈 애슈턴.'

저자를 확인하고 진지한 태도로 책을 펼쳤다. 이미 다 읽은 책이었지만 지혜 플러스1을 얻기 위해서 못 할건 없다.

〈. 수백 개가 넘는 버전으로 불리는 이 시들은, 암살 집단 레드 플레이크가 자신들의 몸값을 높이기 위해 제작해 퍼트렸다고. 〉마지막 페이지를 읽었다. 역시 정보라고 할 만한 것은 전혀 없었다.

- 툭.

긴장된 마음으로 책을 덮었다.

그 순간.

- 띠링!

[지혜가 1 올랐습니다!]

'됐다!' - 달그락!

지혜 1이 올라갔다. 사실 별거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뭔가 발견했다는 생각에 춤이라도 추고 싶은 기분이었다.

읽은 책을 다시 읽었는데 지혜가 오른 것이다.

'상태창.'

일단 상태창을 호출했다. 확인부터 하고 싶었다.

- 띠링!

[이름: ]

[해골병사 Lv. 14(70)]

[체력-34 힘-40 민첩-39 지혜-1 幻[스킬]

- 검술 Lv. 5푸른 창이 내 능력치를 보여 줬다.

분명했다. 11이었던 지혜 스탯이 12가 되어 있었다.

지혜는 따로 올리지 않았다. 쓸모가 체감되지 않는 스탯이라 버려두었다. 민첩이나 힘만 올렸다.

하지만 어떤 능력치든지, 오르는 게 싫을 리는 없다.

'다른 걸 읽어 보자.' 캐빈 애슈턴이 쓴 책을.

이번에는〈추악한 마법사〉를 꺼내들고 다시 읽었다.

아쥬라의 마법사들에 대한 조소와경멸이 잔뜩 담긴 책이다. 아까보다도 진지한 태도로 읽었다.

〈. 아케인 하트를 갖고 태어나지 않는다면 어떤 노력과 수련도 무의미하다. 귀족과 마법사 모두 단순한우연의 산물. 룰렛을 돌려 운 좋게 얻어걸린 것에 불과하다.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다.

책의 내용에 따르면 나는 어차피 마법을 쓰지 못하는 존재.

지혜가 올라도 역시 쓸모는 없는 건가 싶었다.

- 툭.

책을 덮는 순간.

역시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지혜가 1 올랐다.

'이제 13인가?'

어쨌거나 능력치가 오른다는 건 좋은 일이다. 나는 괜히 들떠서 철컥철컥 던전을 걸어 다녔다.

몇 시간이 더 흘렀다.

아침이 되었을 시간이다.

햇빛은 들어오지 않지만 짐작은 가능하다.

- 띠링!

[던전에 침입자가 발생했습니다!]

[숫자 - 1명]

한 명이다.

던전 입구로 걸어가 보았다.

'레나로군.'

"어, 오셨네요!"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발견했다.

던전으로 들어오는 그녀의 얼굴은꽤 밝아 보였다.

도시에서 이것저것 장만해 온 것같았다. 들고 온 가방을 한쪽에 놓아두고 그녀가 말했다.

"저, 옷은 어때요?"

처음에는 품평을 거절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튕기지 않고 봐주기로 했다.

'다른 옷이군.'

입고 있는 옷이 다르다. 전에 사왔던 검은색 야회복은 아니다.

하긴, 이번에는 모험가들을 끌어들이자는 계획 따위를 세우지 않았으니 자연스러운 일이다.

소매가 풍성했던 야회복과는 달리, 이번에 산 가죽 재킷과 바지는 제법음직이기 편해 보였다.

"어때요?"

"실용적으로 보이는군."

"끝인가요?"

"좋아 보여. 주머니가 많아서 기능적일 것 같은데?"

레나가 입을 샐쭉하게 내밀었다.

"늘씬한 라인이 훌륭하다든가, 뭐이런 감상은 없는 건가요.

"아니에요. 다음은.

레나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옆에 놓아둔 커다란 가방에서 둘둘 만 무언가를 꺼냈다.

42화 부역자와 불타는 자 (2)

***************************************************

"이거 한번 입어 보세요!"

"뭐?"

나는 그녀가 꺼내 든 걸 바라봤다.

진홍색 로브처럼 보인다.

"갑옷 뒤에 걸치면 분위기가 확 살것 같아서 사 왔어요. 가만히 계셔보세요."

- 피리릭.

레나가 손에 든 로브를 펼쳤다.

머리를 감싸는 부분이 있어 로브인줄 알았는데, 펼친 걸 보니 그냥 진홍색 망토였다.

"자, 가만히 계세요.

그녀가 내 뒤로 다가왔다.

- 철컥. 철컥.

레나는 멋대로 내 갑옷의 연결 부위를 몇 군데 해제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자기가 사온 진홍의 망토를 집어넣는다.

몸에 하나를 더 입는다.

무언가를 걸치고 있다는 건 역시그것만으로도 신경이 쓰인다.

'하지만.,

저번 생에서, 그녀는 나 때문에 죽었다. 확인은 하지 못했어도 살아나갈 상황은 아니었다. 고작 이 정도를 거절하기는 어렵다.

"으음.

"와, 그림 괜찮네요."

레나가 즐거워했다. 나는 마지막반항처럼 살짝 투덜거렸다.

"왜 이런 걸 샀지? 망토 따위는 필요하지 않아."

"누가 기사님이 필요하대요? 내가보려고 샀죠. 나 보기 좋으려고."

레나가 쿡쿡거리며 갑옷과 망토를더 깊숙이 연결한다. 나는 망토 의좋은 점을 찾아보기로 했다.

"색깔이 이러면. 피 좀 뒤집어쓴다고 티는 안 나겠군."

"하아, 살벌하기도 하셔라."

그녀가 살짝 한숨을 쉬었다.

옆에 바짝 붙어 망토를 입혀 주는 중이다. 숨이 어깨뼈에 닿았다.

"그렇게 고른 거 아닌가?"

"누가 옷 살 때 그런 생각을 하고 골라요? 그런데 말이에요."

레나가 화제를 돌렸다.

"얘기해."

"강에서, 그런 일이 생길지는 어떻게 아신 거예요?"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저번과 비슷한 일이. 나는 태연한척 대꾸했다.

"쉬운 추측이었다. 너희 인간들이 원래 그렇지 않나?"

내 대답에 그녀가 쿡쿡대며 웃었다. 과장된 웃음은 아니었다. 살짝살짝 새어 나오는 웃음이었다.

"사실은, 제법 고민했어요. 이대로도 망갈까 싶었죠. 하지만 결심했어요. 이렇게 남을 잘 믿는 해골이라면, 옆에 있어 줘야겠다고 말이죠."

나는 레나를 바라봤다.

상태창이 떴다.

다른 건 그대로였다. 그런데 호감도가 21로 올라 있었다.

무언가, 혼자 여관에 있을 때 마음이 움직이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20이 넘었군.'

처음 넘겨보는 수치였다.

그리고,

[이름: 레나]

[도적 Lv.5]

[체력-13 힘-11 민첩-17 지혜-11]

[호감도: 21]

- 레나는 당신에게 동질감과, 친근함과, 유용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 그녀는 당신과 더욱 친해지고 싶어 합니다. 호감도가 계속 올라가는 중입니다.

[기본 스킬]

- 단검 투척 Lv.3- 함정 제작 Lv.3- 모략 Lv.2- 목 긋기 Lv.2- 흔적 추적 Lv.1- ??? (호감도가 부족합니다.)

특전과 칭호는, 여전히 개방되지 않은 상태. 루비아의 호감도를 20으로 올렸을 때와 비슷한 창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짐이 처리되는 대로 다른 곳으로 가지."

"여기 좀 더 있어도 괜찮기는 할 텐데. 적극적이셔서 좋네요."

"던전을 빨리 돌아보고 싶군."

내 말에, 레나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메마른 지하 묘지〉부터 가는 거괜찮으세요? 일단 E급 던전이에요.

D급 못지않다고 플러스가 두 개 붙기는 했지만, 일단 제일 가까워요."

"해골들이 나오는 곳 아닌가?"

"맞아요."

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또 동족을 처리하는 건가? 하지만망설일 생각은 없다.

"그래. 거기로 가지."

"저는 지도를 구해 올게요."

사흘이 지났다. 레나는 금세 짐을다 처리했다. 짐을 처분한 돈으로 자세한 던전 지도와, 이런저런 물품들을 구해 왔다.

커다란 배낭을 멘 데다가, 주머니마다 뭔가가 잔뜩 이다.

'독이나 폭탄, 투척 무기겠지.'

- 끼이이익.

우리는 던전 문을 열고 나갔다.

'드디어 나오는군.'

저번 생에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나는 던전 안에 계속 박혀 있었다.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레나와의 계획을 무시했다. 이유도 없이 거절했다. 나를 다그치며 기다리다 그녀마저 죽었다.

던전 안에 박혀 있는 일은 익숙하고 편안했다.

하지만 계속 머물러 있자 정신이 흐려져 버렸다. 자기 결정권마저 잃고 허우적거렸다.

내면으로 파고드는 집중과는 다른 감각. 오히려 산만하고 흐릿한 몽상에 불과했다.

- 저벅저벅.

던전 입구로 걸어갔다.

'여기에 푸른 갑옷이 서 있었지.'

그 남자는 대체 누구였을지 궁금했다. 회청색 머리칼의 남자는 나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마법사니 근위대니 하는 이야기를 했어.'

전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한 뒤나를 부숴 버렸다.

고작 나 때문에 왔다고는 보기 어려울 정도로 강한 인간.

16마왕과 인간의 전장에서조차 구경하지 못했던, 기괴한 느낌의 인간이었다.

계속 다시 살아난다면, 그 인간을 다시 보게 될 날도 있을까.

"뭘 그렇게 생각하세요?"

- 달그락.

레나의 말에 정신이 들었다.

나를 흘끗 바라보며, 내 곁으로 다가와 말을 건다.

앞에 펼쳐진 산길을 함께 걸었다.

"어제는, 비가 내렸어요. 가을비도 괜찮더라고요. 그래서 하루 늦게 왔어요. 안에 계셔서 몰랐죠?"

"그래."

"나오니까 어때요, 좋아요?"

"좋네."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곤 풍경을 시야에 담았다.

그녀의 말 대로였다. 가을비가 한차례 내린 듯, 흙에는 빗방울 무늬가 이리저리 찍혀 있었다.

'가을이 한창이군.'

루비아를 묻은 건 지난겨울.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린 게 느껴졌다. 납골당에 들어오기 전에도 초가을의 산을 걸었다.

초입과 한창은 달랐다.

밤의 가을과 낮의 가을도,

혼자 걷는 가을과 둘이 걷는 가을도 달랐다.

- 저벅저벅.

어떤 단풍은 심장에서 솟는 피처럼 붉었다.

마냥 새빨간 단풍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잎 모양은 비슷해 보이되어떤 연유인지 아직 곳곳이 초록인 나무도 많았다.

어떤 나무는 반은 물들어 가는 연적색으로, 반은 아직 물들지 않은 연초록으로 남겨 두었다.

- 투두둑!

"어! 오소리다!"

작은 오소리 한 마리가 앞으로 지나갔다. 단풍이 빼곡히 깔린 산을 부스럭 소리를 내며 달려갔다.

"도망가는 걸까?"

"그냥 갈 길 가는 거겠죠? 해칠 건지 안 해칠 건지 동물들은 다 알아요."

"그래?"

"네, 정말이에요."

동물들을 바라보는 레나의 눈빛은 편안하고 따듯해 보였다.

"귀여워.

남자들을 유혹해 던전으로 데리고 올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그때는 사정없이 목을 그어 대던데.

'으흠.' 인간 제외 박애주의자라도 되나?

레나는 지도를 몇 번 다시 들여다보며 걸었다.

하늘이 조금씩 어두워질 때쯤.

- 쏴아아아.

수십 개의 돌계단 사이로 흘러내리는 폭포가 보였다.

쏟아지는 기세가 거세다. 작은 호수에 하얗게 거품이 터진다.

물방울이 잔뜩 튀어 오르는 폭포 아래로 레나가 나를 인도했다.

"이쪽이에요!"

물줄기가 흐르는 암벽 안쪽.

커다란 동공이 있다. 그 아래로는 계속 갈 수 있는 계단이 펼쳐진다.

'여긴가.'

- 철컥!

넓고 가파른 돌계단을 한 걸음, 한걸음 내려갔다.

"홋!"

레나도 뒤처지지 않고 따라온다.

"폭포에서 물이 좀 튀네요.

양손을 들어, 살짝 젖은 머리칼을 뒤로 쓸어내면서도 날렵하게 계단을 디뎌 내려온다.

'혼자 가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여기는 E급 던전.

나름대로 준비를 했다지만, 그녀에겐 아직 위험하지 않을까?

내가 막는다고 해도, 어떤 변수가 그녀를 해칠지 모른다.

'못 들어가게 막아야겠군.'

문 앞까지 따라오는 걸 막을 수는 없지만.

- 쿵!

갑옷을 입은 채로 마지막 계단을 뛰어내렸다.

- 우우우웅.

동공 가운데에 커다란 철문이 있었다. 아무런 무늬 없는 철문을 아치형 돌이 감싸고 있었다.

나는 그 앞쪽에 섰다.

"금방 왔군."

"그렇네요. 반나절 거리예요."

〈메마른 지하 묘지〉는〈망령의 납골당〉과 정말 가까웠다.

아침부터 빠르게 달려오긴 했지만,

아직 해가 떨어지지 않았다.

"다른 던전들보다 훨씬 가깝죠. 성격이 비슷해서 그럴까요?"

레나의 말대로다.

비슷한 성격의 던전.

둘 다 해골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물론, 망령의 납골당보다 이쪽의 레벨이 훨씬 높다.

"여기서부터는 나 혼자 간다."

나는 단정하듯 중얼거렸다.

레나가 눈꼬리를 샐쭉 올리고는 툴툴거렸다.

"뭐예요. 그 진부한 대사는?"

"따라오겠다는 건가?"

"설마 혼자 두고 갈 생각이세요?

그 사이에, 웬 불한당이 와서 절 납치해 가면 어쩌죠?"

"??? 뭐라고?"

"어느 놈한테 팔려 갈 줄 알고 두고 간다는 거예요? 절단 애호가라도 만나면.

"제가 위험하다구요, 제가."

레나는 자기가 장착한 내 망토를 슬쩍 쓰다듬으며 말했다.

"진짜 놓고 가실 거예요? 솔직히E급 정도는 할 만하다구요. 다음 던전은 안 낄게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일단 체크부터 해 보자고."

- 저벅저벅.

커다란 철문을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굳게 닫힌 철문 앞에 섰다.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

"기다리시는 거라도 있어요?"

"??? 그냥."

'납골당 때는 분명히 떴는데.' 납골당 앞에 섰을 때를 떠올렸다.

던전의 이름과, 랭크. 그리고 적정레벨과 클리어 인원이 떴다.

하지만, 이번에는 던전 이름도, 적정 레벨도 뜨지 않았다. 창 자체 가없었다. 이상했지만 레나에게 내색하지는 않았다.

'일단 들어가 봐야겠군.'

철문을 그대로 밀었다.

- 쿠구구궁.!

철문은 별다른 저항감 없이 그대로 열렸다.

- 철컥.

던전은 조용했다.

'아무도 없어?'

저벅저벅 발소리를 내며 안으로 들어갔다. 어디에서도 반응이 없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싹 비었네요?"

"이해가 가지 않는군."

"그러게요. 모험가들이 왔다 간 걸까요? 이렇게 흔적마저 없는 건 이상한데.

레나는 던전 지도와 눈앞을 번갈아 바라봤다.

통로는 비어 있었다. 요격 나온다는 왼쪽의 공터도, 물 고인 오른쪽작은방도 텅 비어 있었다.

"정말, 다들 어디 간 거죠?"

'갔다.' 레나의 말에 머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그렇다. 이 지하묘 안에 있던 마물들은 어딘가로 이동했다.

'그럴 수 있는 걸까?'

세계는 인간의 것이고, 마물들이달리 갈 곳 따위는 없다.

보통, 마물들은 던전에 박혀서 토벌되기를 기다리는 처지인 것이다.

마물 서열 최하위에 자리 잡은 해골 병사 역시 그렇다.

내 첫 번째 삶을 떠올렸다.

엉뚱하게 인간들의 전쟁에 휩쓸려납골당이 다 파헤쳐지기 전까지, 나 역시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인간들이 짓밟으면, 짓밟는 대로.

불평 한마디 없이 계속 부서졌다.

물론 내가 있던 작은 납골당과, 제법 거대한 이 지하 묘지를 일괄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다.

일단은 던전 거주자의 수준 차이라는 게 있을 테니까.

의식을 가지고 던전을 벗어나는 해골들이, 이〈메마른 지하 묘지〉에는 존재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이런 단체 이주는 이상하다.

의구심에 휩싸여 터덜터덜 텅 빈 복도를 걸어갔다.

천연 동굴 같은 망령의 납골당에비해, 이곳은 바닥에 빠짐없이 타일이 깔려 있다. 벽도 벽돌로 잘 정비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지도에 표시된 함정까지 없어요.

다 사라졌어. 이건 진짜 이상하네."

황량했다.

더 크고 강하고 다양한 해골들이있고, 함정이 있고, 뼈다귀가 굴러다니고 있어야 하는 던전이다.

아무것도 없었다.

안쪽으로 계속 들어갔다.

"철창도 다 열려 있어요!"

구역과 구역을 분리하는 철창은 하나같이 전부 열려 있었다.

이 던전은 곳곳이 철창으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철창들은 전부 다 위로 올라간 상태였다.

곳곳의 선반에는 녹아내린 커다란 양초들이 있었다.

음산하게 안을 밝히고 있어야 할 양초들은 전부 다 불이 꺼져 있다.

천장에 매달린 것들도, 선반에 있는 양초들도 전부 마찬가지였다.

43화 부역자와 불타는 자 (3)

***************************************************

모든 것들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그 와중에도 레나는 낡은 상자와 나무 그릇들 위에서 돈이 될 만한 물건을 전부 챙기고 있었다.

"부지런하군."

"손만 뻗으면 주울 수 있는데, 내버려 두면 너무 아깝잖아요?"

- 짤그랑.

레나가 내게 주머니를 건넸다. 던전에서 주운 돈 가운데는 동화가 많았지만, 은화도 꽤 있었다. 살짝 녹슬었지만, 가치는 그대로인 둣,

[41 로티 74위젯을 습득했습니다!]

돈을 받을 때 허공에 창이 떴다.

'제법 되는군.'

내가 입고 있는 갑옷을 하나 살 수 있을 만한 돈이다.

레나에게 주머니를 돌려줬다.

그녀가 열심히 돈을 모으는 사이에, 통로에 늘어뜨려진 쇠사슬을 칼로 툭툭 건드려 보았다.

- 철컹! 철컹!

쇠사슬 소리가 던전을 울렸다.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다.

침입자를 알리기 위한 쇠사슬들이 야단스레 쩔렁거려도, 던전 안에선 무엇 하나 나타나지 않았다.

- 광! 광!

방패로 벽을 강하게 쳐 보았다. 저 안쪽까지 메아리가 울렸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안에서는 끽소리도 없다.

몇 걸음을 더 걸어가 다시 난동을 피웠다. 헛수고였다. 허탈했다.

"잠시 만요."

레나는 지도를 다시 확인했다.

우리는 돔형으로 된 공터의 가운데에 섰다.

납골당의 홀보다 다섯 배는 넓었다. 세 배는 높은 천장을 거대한 석조 기둥들이 받치고 있다.

"위를 보세요. 다 비어 있네."

레나가 손으로 위를 가리켰다.

"으음.

텅 빈 새장 수십 개가 매달려 있다. 검게 녹슨 철제 새장. 인간 하나가 몸을 웅크리면 꽉 찰 듯하다.

자세히 들여다봤다.

높이별로 족쇄 세 개가 장착되어있었다. 위에 하나, 가운데 둘, 아래쪽에 둘이었다.

"여기에요."

레나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원래는 수십의 해골과 스펙터가비명을 지르며 달려드는 장소인데.

- 쿵!

나는 바닥을 방패로 쳐 보았다.

"조심할 것도 없겠네요."

아무런 반응이 없다.

"여기가 끝인가?"

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심층부까지 온 거예요. 열흘 만에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열흘 만?"

"이 던전 정보가 그때 갱신된 거란 말이에요. 일부러 최신 정보로 구했는데."

"모험가들이 들어온 게 아닐까?"

레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시잖아요? 이건 토벌 같은 게아니에요. 마치.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안에 있던 거주자들이, 전부 다어딘가로 이사라도 간 것 같아요.

이렇게 깔끔하게 사라지기도 쉽게 않겠는데요."

이사라.

실은 그보다 가까워 보이는 말이 있다. 적출이다.

E급 던전, 〈메마른 지하 묘지〉의해 골들은 모조리 적출되어 있었다.

던전의 핵으로 보이는 것도, 해골도"무슨 일인지 상상이 안 돼요. 조금만 더 일찍 왔다면 알았을까요?"

"거기 휘말렸을지도 모르지. 일단 올라가자."

레나와 함께 던전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며 조금씩 탄식을 터트렸다.

"여유롭게 보니까 참 넓긴 하다.

텅 빈 던전도 괜찮네. 타일도 다 깔려 있구요."

거주자가 없는 던전은 하나의 멋들어진 건축물 같았다.

"여기서 살아도 되겠어요. 넓고 좋네. 우리가 가지면 안 되나?"

나는 달그락거리며 웃었다.

해골들로 가득 찼을 던전이 텅 비어 버렸다. 이제 여기는 산적의 소굴 같은 게 될 확률이 높다.

전략적 가치가 있다면 정규군이 관리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무법자들의 위험한 은신처가 될 거다.

"다른 던전으로 가야겠군."

레나가 잠깐 고민하더니 말했다.

"다음은 바로 D급 던전인데. 조금 부담스럽지 않으시겠어요?"

"무슨 던전이지?"

"중형 거미들이 나오는 던전이에요. 뒤틀린 볼트라는 이름을 갖고 있지요."

중형이라면 어느 정도일까, 라고 생각했을 때 그녀가 말을 이었다.

"키 1미터 정도의 거미들이에요.

독액을 내뿜고, 화염에 약하죠."

- 툭툭.

레나가 배낭을 들어 보였다.

"여기 빈 병을 잔뜩 담아 가야 할거예요. 던전 앞에서 화염병을 제조해야겠죠."

"거기, 이미 이것저것 들어 있는것 ^은데?"

"그렇긴 하지만, 기름통이나 빈 병을 잔뜩 넣고 다니진 않아요."

"그러지."

도시에 들르는 일이 귀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레나의 말을 듣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가는 길에 인간들을 좀 사냥하실 생각인가요?"

"글쎄.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 근처에서 날뛰고 싶지 않았다.

'푸른 갑옷을 입은 인간.' 그 남자가 떠올랐다. 사실 그가 나타나는 건 어차피 한 달 후다. 지금은 어디 있을지 전혀 모른다.

하지만 이건 기분상의 문제였다.

하얀 검집이 천천히 내려오며 갑옷 째로 나를 분리하는 감각은 지금 생각해도 서늘했다.

"조용히 가자."

"인간이 없는 길로요? 그러면 이쪽이에요."

레나가 등고선이 겹겹이 쳐진 부분을 가리켰다. 그 지점을 보자 퍼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처음에 갔던 길이잖아?'

루비아와 첫날밤을 처음으로 살아남았을 때, 그라스미어로 가기 위해 택했던 고산 루트다.

그리고 우리는 트롤을 만났다.

설원 트롤은 사냥꾼 다섯을 순식간에 물어 죽인 뒤, 근처에 있던 내두개골을 손으로 쪼개 버렸다.

- 달그락!

한차례 머리를 혼든 뒤 레나를 보고 물었다.

"혹시 여기 트롤이 출현한다는 이야기는 없었나?"

"거기까진 못 알아봤어요. 트롤은 워낙 활동 범위가 넓어서,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알기가 어렵죠."

"그냥 인간이 있는 쪽으로 가지."

"그러면 이 도시를 거치는 게 좋을 거예요."

레나가 한 지점을 가리켰다.

- 딱딱.

무심코 이를 부딪쳤다. 레나가 나를 흘끗 쳐다보고 말했다.

"유블람이라는 도시예요."

계절이 달라졌다. 함께 걷는 여자도 달라졌다.

뽀드득 눈 소리 대신, 발에 밟히는 낙엽이 바스락 소리를 냈다.

레나가 앞장섰다. 곧, 단풍 사이로익숙한 회색 성벽이 보였다.

"다 왔네요."

유블람이다. 저 도시에서 루비아는걸어 나오지 못했다. 수레에 실려쓰레기처럼 버려졌다.

- 달그락.

"왜 그러세요?"

레나가 뒤를 돌아본다. 미간이 살짝 좁아져 있다.

티를 안 내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여기까지 오는 이틀 내내 나를 신경 썼다.

"안 좋은 기억이라도 있으신 거 같은데, 얘기 안 해 주시려나?"

사실을 털어놓는 것도 우습다.

그녀는 신뢰할 만하다. 나에게 높은 호감을 보인다. 하지만 루비아의기억은 루비아의 것. 타자와 나누고 싶지 않았다.

"가지."

바스락 소리를 내며 우리는 산길 아래로 걸어갔다. 넓게 펼쳐진 밀밭이 한껏 여물어 있었다. 일렁이는 황금빛 사이로, 커다란 낫을 든 농부들이 오가고 있었다.

"가을걷이가 한창이군요. 일주일정도 지나면 다 끝나겠는데요."

좌우를 둘러보며 밀밭 사이를 걸었다. 앞을 바라본다. 회색 성벽이 제법 높다. 첨탑과 망루가 보였다.

루비아를 혼자 보낸 도시다. 이미 뒤늦은 후회지만, 이번에는 반드시 함께 들어간다.

- 짤그랑.

레나는 주머니에서 은화 몇 개를 꺼내 손에 쥐었다. 도개교 안쪽에두 명의 경비가 보인다.

"어이, 정지!"

도개교 앞쪽에서 경비가 소리쳤다.

근무 태도가 매우 느슨한 녀석들이다. 하지만 우리가 다가오는 모습을 보자 살짝 긴장하는 게 보였다.

'나 때문인가.'

풀 플레이트 갑옷을 입고, 커다란양손 검을 들고 있다.

이런 복장의 누군가가 성문으로 다가온다면, 하품을 하다가도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들여보내지 않을지도 모르겠군.'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실수로라도 뽑지 않으려 억눌렀다.

여기서 싸움을 벌일 생각은 없다.

의미도 없고, 나는 그렇게 무모하지 않다. 죽으면 또 어떻게 될지 알 수없는 일이니까.

경비병이 이쪽을 보고 손짓했다.

"거기, 여자부터 건너오슈."

레나가 도개교를 건넜다. 경비병이 말했다.

"당신들은 누구요? 그리고 저 갑옷기사는 뭐고?"

"제 남편이에요."

멀리서 대화를 들으며 침묵했다.

레나는 경비의 주머니에 무언가를 찔러 넣어 줬다. 두 경비에게 모두마찬가지였다. 작게 짤그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경비병들이 몇 번 헛기침을 했다.

"홈, 평범한 여행자들인 것 같군.

절대 안에서 소란은 피우지 마쇼."

옆에서 꾸벅꾸벅 졸다 일어난 다른 경비병이 덧붙였다.

"조심하라고. 우리 대장에게 그 자리에서 목이 날아갈 수도 있어. 이도시의 경비대는 무척 무섭거든? 다른 곳을 생각하면 안 돼."

몇 번의 잡담 끝에 커다란 성문이 열렸다.

- 끼이이익.

우리는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누가 네 남편이야?"

"그럼 뭐예요? 남편 맞잖아요?"

"뭐?"

나는 어이가 없어서 어깨만 들썩거렸다.

"남편이 뭐 별거라고. 좀 해 줘 봐요."

- 철컥.

투구를 쓴 고개를 흔들었다.

"거절한다."

레나는 못 들은 척을 했다. 앞으로 걸어가며 내 손을 잡았다.

"손도 잡았다. 이제 남편 맞네. 그렇죠?"

그 상태로 놓아주지 않았다. 어쩐지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냥 내버려 둔 채 옆에서 나란히 걸었다. 가슴속 어두운 곳에서, 조금씩 물이 찰랑거리는 것 같았다.

"가을도 출 네요."

레나가 내 쪽으로 몸을 기댔다. 장난을 치는 것 같아서 슬쩍 몸을 뺐지만, 레나가 나를 붙잡았다. 머리에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거리에서 아편 냄새가 나요."

""? 그런가."

내 후각은 인간의 것만큼 예민하지 못하다. 레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달달한 향이 곳곳에 배어 있어요.

제가 냄새에 좀 예민하거든요. 경비병도 눈동자가 풀려 있었고. 이거.

잘 봐이^겠는데요."

"아편에 중독 되어 있다는 건가? 도시 전체가?"

"쉿. 누가 감시하고 있을 거예요.

우린 외부인이니까. 조심하세요."

레나의 목소리가 낮아진다.

아편에 중독 되어 있던 여관 주인이 떠올랐다.

그는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제대로 된 판단을 전혀 할 수 없었고, 기분 전환이 병적으로 급격했다.

고문 때문에, 고통을 잊기 위해 아편을 핀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는, 처음부터 중독되어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문에 서 있던 두 녀석은 제법 멀쩡해 보이던데."

"양의 차이죠. 정해진 양을 조금씩 복용하거나 피우면, 생활은 가능해요. 중독 됐다는 사실만 잊으면. 그 녀석들, 몽롱해 보였잖아요?"

"그렇더군."

"초기 증상이죠."

길가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크게 티 나는 자들은 없지만, 레나의 말을 들은 뒤라 그런지 모두중독자처럼 보였다.

- 깡! 깡! 깡! 탕탕! 탕탕탕!

망치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성문 쪽 길가에 대장간이 있다. 대장간 앞에 나열된 갑옷들을 바라보았다. 내가 입은 것과 비슷하게 생긴 갑옷들이 있었다.

"갑옷 보시네요?"

"신경 쓰지 마. 살 건 아니다."

이미 있으니까. 그것도 같은 대장장이가 만든 작품이다.

나는 씁쓸해져서 발걸음을 뗐다.

뼈밖에 안 남은 노인이 골목에서 밖으로 나왔다. 노인은 우리를 한차례 유심히 훌어봤다.

그러더니 하얀 수염을 손으로 쓰다듬은 뒤, 골목으로 다시 들어갔다.

"중독자인가?"

레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외양은 그래요. 아편 냄새도 짙고.

하지만 눈동자가 제법 또렷했어요.

잘 모르겠어요."

"우릴 왜 쳐다보지?"

"글쎄요.

자갈돌이 가지런히 깔려 있는 거리를 따라 올라갔다.

길 양옆으로 다갈색의 목조 건물이 줄지어 서 있었다. 지붕은 횐색이기도, 검은색이기도 했다.

푸르거나 붉기도 하다. 레나는 3층짜리 횐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여기예요."

"유일한 여관이지?"

"맞아요."

루비아가 묵었던 여관이다. 가슴이 차갑게 내려앉는 것 같았다.

갑옷을 사고, 처음 들어왔던 여관이다. 동선을 보면 딱 맞는다.

그녀가 죽어 나간 도시. 그녀가 머물렀던 여관. 적진 한복판에 뛰어드는 기분이었다.

- 삐그덕.

레나가 앞장서서 문을 열었다.

44화 부역자와 불타는 자 (4)

***************************************************

두꺼운 나무로 된 문이 소리를 내며 열렸다. 육중한 편이다.

"어서 오세요."

카운터에 걸터앉은 여자가 인사했다.

4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다.

목과 눈가에는 살짝 주름이 있지만, 몸은 전혁 퍼지지 않았다.

일부러 윤곽을 드러내는 옷을 입었다. 군살 하나 없이 탄탄하게 관리된 몸을, 주변 테이블에 앉은 남자들이 흘끗거리며 감상하고 있다.

"새 주인인가?"

전 주인은 나에게 살해당했다.

네크론 신사회에게 여관을 빼앗겼다고 토로했다. 그렇다면 눈앞의 여자는, 그 집단의 일원일까?

목에 줄이 매여 있는, 인신매매 집단의 꼭두각시라거나.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을 것이다.

사방에 뱀이 쑥쑥거리며 지나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언제든 앞으로 튀어 나갈 태세로 주위를 경계했다.

무슨 수작을 부릴지 알 수 없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자들이 협공할지도 모른다.

- 특!

레나가 내 옆구리를 특, 하고 쳤다.

정신이 들었다. 살기를 흘렸을지도 모르겠다. 여주인은 처연하게 웃고만 있었다.

"처음 는 분이네요. 여행객이신가요?"

"네!?

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탁자와 의자들은 잘 정리되어 있다. 바닥의 청소 상태도 좋다.

한눈에 봐서는 마약 소굴이라거나, 범죄의 온상 같은 느낌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가 분명하다. 루비아가 실종된 곳은.

"방은 2층부터예요. 두 분이 같이 쓰실 건가요?"

"물론이죠. 욕조가 있는 곳으로 배정해 주시고…."

주위를 살피는 내게 레나가 힐끗눈짓을 보낸다. 그리곤 맥주를 한 잔 시킨다. 1충을 살펴볼 시간을 벌어 준다는 건가?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놀라운 눈치다.

- 탁.

바에 큼지막한 나무 잔이 놓였다.

검은 맥주가 가득 따라졌다.

레나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서서 주인과 대화를 섞는다.

"치즈는 없나요?"

"여기요. 마른안주도 좀 드리죠."

카운터 앞에 서서, 레나는 맥주를 아주 천천히 홀짝였다.

그동안 1충을 살짝 걸어 다다.

앉아 있는 사람들을 돌아봤다.

아는 얼굴은 없다. 적어도 대머리와 그를 따라 나왔던 놈들은 없다.

곳곳에서 발을 조금씩 굴렀다. 빈공간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아래에 공간이 있다. `

하지만 여관에 지하실이 있는 걸 미석게 여기기는 어렵다. 와인이나 치즈 창고로 쓰일 테니까. 딱히 수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다.

레나의 맥주잔이 결국 비워졌다.

"저녁 식사는 한가지예요. 방으로 가져갈까요?"

"네. 그렇게 해 주세요. 올 때 흑맥주 한 잔 더 주시고."

계단을 올라 4층으로 갔다. 방은 꽤 넓다. 침대는 하나뿐이다. 어차피나는 자지 않으니 상관없다.

- 사를.

레나는 욕실 앞에서 옷을 벗었다.

나는 구석에 앉은 채, 적당히 고개를 돌려 밖을 바라봤다.

옷이 하나하나 벗겨지는 소리가 방안에 울린다.

뜨거운 물이 틀어지고, 그녀는 안으로 들어간다. 수증기에 섞인 목소리가 밖으로 흘러나온다.

"세상 참 좋아졌죠? 뜨거운 물도 나오고"

물을 곳곳에 끌어 올리고, 데울 수 있는 기술은 엠버에서 가장 먼저 개발되었다.

공학의 도시국0)뼈)인 만큼 자

연스러운 일. 그 기술은 자유 연합에 전해졌고, 제국에도 전해졌다.

물론 100년쯤 전의 일이다.

"나이가?"

습기 느긋한 대답이 들렸다.

"왜요. 나이 좀 어리면 세상 좋다는 얘기도 못 하나."

첨벌거리는 물소리가 들려온다.

"들어올래요? 목욕으로 안 끝나도좋고."

"사양하지."

"흑맥주 풀고 목욕하면 진짜 괜찮은데. 싫어요?"

어처구니없는 농담에 대꾸하지 않았다. 구석에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품에 안긴 검이 딱딱하다.

멍하니 밖을 바라보다 혼짓말을 중얼거렸다.

"좁은 건 싫다"

〈메마른 지하 묘지〉의 심층부에

매달려 있던 수많은 새장이 떠올랐다. 해골 하나가 들어가면 딱 맞을것 같은 그 새장들.

좁은 새장에 간혀 있으면 무기력과 고통이 늘어난다. 나도 저런 새장에 감힌 적이 있다.

많은 고위 마족들이, 해골병사를 저런 곳에 가뒤 두고 사용했다.

멍하니 엉뚱한 생각에 잠겼다.

"그럼 다음엔 같이 온천으로 가요. 거긴 넓으니까 괜찮겠네."

두 시간 정도 느긋하게 첨병거리고 놀던 레나가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흥얼거리며 노래를 불렀다. 욕조문이 열리자 온기와 수증기가 그녀의 뒤를 따라왔다.

커다란 타올 하나만 적당히 가슴아래에 두른 레나가 두 손을 들어촉촉한 검은 머리를 매만졌다.

살짝 연갈색을 떤 건강한 피부와 잘 은 팔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씩 웃었다.

"더 보고 싶으세요? 내릴까요?"

장난스럽게 타올 끈을 잡아당기며 만지작거린다.

그 순간이었다.

- 꼬르록.

배가 고갔는지, 레나의 배에서 꼬르륙, 하는 소리가 났다. 날 희롱하려 기껏 조성한 분위기를 본인이 깨트려 버린 셈이다.

- 달그락.

나는 몸을 덜럭거리며 웃었다.

"킷~아아기

레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타올을 두른 채 이불 속에 들어가 돌아눔는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다.

- 똑똑.

때마침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식사였다. 내가 받았다. 침대에 숨어 있는 레나에게 말했다.

"이 인분이다. 배는 채워지겠군."

"02

그녀는 신음을 밸으면서도 바깥으로 나와 밥을 먹었다.

'열아홉이랬나.' 과연, 식성이 좋은 나이였다.

잠시 그녀를 지켜보다 한쪽에 칼을 안고 앉았다.

문을 바라보는 위치다.

누군가 침입한다면 쓰러트리고 심문할 생각이다. 하지만 식사 시간뒤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갑옷을 벗으라느니 어쩌니 하는 레나의 시답잖은 장난이나 특톡 치면서, 늦가을의 밤이 지나갔다.

"으, 으아응…

정오 즈음에 깨어난 레나의 첫 대사였다. 뒤늦게 일어나 흐트러진 모습엔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그녀는 이불 안에서, 형클어진 머리를 양손을 들어 뒤로 정리했다.

"너무 일찍 일어났나요?"

"벌써 정오다."

"그러네. 벗으라는데도 빨리 안 벗어서 그런 거잖아요? 이건 전적으로 기사님 때문이에요."

"올리지 말 걸 그랬나, 호감도."

레나의 호감도가 20을 넘기자 저런 말들이 습관처럼 터져 나왔다.

살짝 피곤할 지경이었다.

어차피 교미를 할 수 없는 상대를 가지고 놀리는 건가, 싶기도 했다.

"상태창. `

나는 레나를 바라보며 살짝 율었다.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머리 위에 상태창이 떠. 함께 움직인 덕분인지 호감도는 소소하게 계속 올랐다. 29였다.

30이 넘으면 어떻게 될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호감도 좀 낮춰야겠군."

레나의 성희롱에 묵묵부답으로 철벽을 쳤다. 그러자 결국 제대로 된이야기를 입에 올린다.

"화염병 재료를 구해야 할 텐데… 혹시 써 보신 적 있어요?"

- 달그락.

고개를 저었다. 사용해 본 적도 없고, 사용당한 적도 거의 없다.

온갖 무기가 횡행하는 전장.

그 최전선에 있으면서 화염병 같은것도 모른다는 건 우습다. 하지만 전선의 해골병사들에겐 제대로 된무장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싸움이 벌어지면 우리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부서진다. 작전 계획도 전혀 모른다. 제대로 된 훈련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적의 예봉을 살짝 흡수하는 쿠션같은 것에 불과하다.

녕분"

전장에서, 해골병사로 이루어진 부대는 3분 안에 모조리 부서진다.

전장에서.

우리는 제사에 끌려 나온 제물에 불과하다. 손에 쥐어진 칼은 모두 녹슬고 날이 빠진 것들뿐이다.

"그런 무기를 써 본 적은 없다."

"어렵지는 않아요. 던져서 깨트리면 되니까요. 병이 충격으로 부서지며 확! 불이 터지죠. 화염 구름이 생겨요. 끈적한 걸 섞으면 불길이 달라붙어서 효과가 더 좋구요."

"그런가."

"재료를 사러 가요."

"기름 같은 걸 팔까?"

"돈만 주면 팔아요. 정상적인 경우라면. 안 팔면… 들수셔나 보죠."

무슨 계획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따라가기로 했다.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레나는 도시 지도를 보면서, 다닥다닥 붙은 집들 사이의 좁은 뒷골목을 걸어갔다. 나는 결에서 주위를 경계하며 따라 걸었다.

골목엔 해가 비치지 않았다. 어두웠다. 담벼락에는 나도 맡을 수 있을 정도로 아편 냄새가 배어 있다.

"일관성이 있네요."

"일관성?"

"마약굴이라면 좀 더 다양해도 괜찮을 텐데. 시플러스나 해시시 냄새는 없어요. 전부 아편이에요."

"뭘 뜻하는 걸까?"

레나가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아마, 배급?"

골목골목에 서 있는 사람들은 어딘가 멍한 표정이었다.

남루한 웃을 입은 사람들은 입구에서 봤던 경비병들보다 눈동자가 훨씬 더 풀어져 있었다.

플레이트 메일을 입은 나를 흘끗거리며 몸을 움낄하는 자들도 있었다.

무기력한 경계심이 읽힌다.

요지

뒷골목의 끝 쪽에 자리 잡고 있는 잡화점에 도착했다. 밖에서 안을 슬찍 흘끗거렸다.

가게는 패 켰다. 간단한 생필품만 파는 수준은 아니었다.

일 층이었지만 스무 명 정도가 한 번에 들어와도 될 만큼 넓었다. 공간은 전부 물건으로 픽팍 채워져 있었다.

바깥에 붉게 칠해진 별도의 창고도 있었다. 창고 근처에서 레나가 코를 살짝 콩콩거렸다.

"휘발유는 많네"

가게에 들어셨다. 남색 재킷을 입은 주인이 우리를 보며 말했다.

"어서 오시오"

회색 머리칼은 적당히 헝클어져 있었고, 코와 턱의 수염은 길지 않게 정리되어 있다.

무심코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하지만 아편에 중독된 건지 아닌지는, 알기 어려웠다.

주인이 두 손을 질고 선 카운터 안쪽으로 시선을 넘겼다.

손잡이가 달린 서랍들은 주인의 키를 한참 넘기는 곳까지 빼곡하게 놓여 있었다.

백여 개를 넘는다. 기호가 하나씩 쓰여 있다. 잡화점 주인만 알아보는 기호인 것 같다.

"무얼 찾으시오?"

"일단 빈 병 서른 개만 주세요."

"빈 병? 서른 개는커녕 세 개도 없소. 하필 왜 그걸 찾나."

레나의 얼굴이 그러졌다.

"잡화점에 빈 병이 없다구요? 거참. 그럼 유리병에 담긴 제일 싼 술이랑… 타르 한 통 주세요."

"타르도 없소이다."

"네? 휘발유는 있죠?"

"그것도 없아…"

"저 창고에 다 팍 차 있는 거 아니에요? 휘발유 냄새, 나던데?"

레나가 바깥의 붉은 창고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 못 팝니다. 이미 살 사람들이 있어서. 예약이 끝났소. 거기 뒤에 있는 분은 뭘 찾으시오?"

레나가 씩 웃으며, 어깨를 다. 그리고 손으로 내 가슴을 탕탕 쳤다.

철갑 올리는 소리가 잡화점 안에 작게 퍼졌다.

"남편이에요. 훌륭한 자유 기사죠."

저 소리는 여기서도 하나.

"아무튼 다 떨어져서 못 파오."

남색 재킷을 입은 주인이 입가를 굳게 다물었다. 단호해 보인다.

"외지인이라고 안 파는 거예요? 잡화상이 언제부터 그랬죠? 돈만 맞으면 파는 거 아니었어요?"

주인이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인다. 손으로 카운터를 질는다. 마디마디가 꽤 두꺼운 손이다.

"못 판다는데 왜 그러시나? 다른 도시는 몰라도 우리는 그래."

둘은 실랑이를 벌였다. 잡화점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흘끗거렸다. 밖에 멍하니 지나가던 자들마저 안을 바라봤다.

"저럴 여자가 아닌데."

일부러 시선을 끄는 듯한 모습이었다. 레나는 억지를 썼다. 주인의 거절은 간결하게 이어졌다.

삼십 분 정도 실랑이가 이어졌다.

"그만 나가슈! 장사 방해니까!"

"계속 방해할 건데? 있는데 왜 안판다는 거예요?"

"그냥 나가지."

레나에게 말했다. 정확히 뭘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만하면 시선은 충분히 끈 것 갈았으니까.

그리고, 누군가가 뒤로 따라붙는 기척이 느껴졌다.

"한 마리가 붙었군."

"곧 늘어나고, 우릴 덮치겠죠?"

"기사님만 믿어요."

45화 부역자와 불타는 자 (5)

***************************************************

미행은 계속되었다. 거리는 일정하게 유지됐다. 계속 한 명이었다.

'이상하군.'

으슥하고 좁은 골목을 계속 돌아다니고 있다. 덮칠 만한 상황인데도, 공격이 들어오지 않는다.

따라붙는 자들의 숫자도 더 늘어나지 않았다.

물론, 감각에 잡히지 않는 자들이더 따라오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느껴지는 기척은 그저 평범한 한 명의 인간.

생각해 보면.

나에게 느껴질 정도다. 정말 평범한 인간일 확률이 높다.

미행을 파악하는 법 따위는 모른다. 감이 좋다고도 할 수 없다.

검술 레벨이 오르면서 주위에 대한감각이 조금씩 넓어졌을 뿐.

- 저벅저벅.

얼마나 걸었을까. 따라오던 인간이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나는 벨 준비를 했다.

- 철컥.

칼자루를 잡고, 왼발을 축으로 몸을 숙이며 뒤로 돌아섰다.

하지만 눈앞에 나타난 것은,

하얀 수염의 노인이었다.

'저 노인은?'

"어라, 저 할아버지였나요, 줄곧 우리를 쫓아오던 게? 힘도 좋네요."

대장간 앞에서 봤던 노인이었다.

우리를 한차례 유심히 훌어봤던 노인이다.

하얀 수염을 손으로 쓰다듬은 뒤, 다시 골목으로 들어갔던.

마약 중독자인지 아닌지, 레나와처음 이야기를 나눴던 노인이었다.

나는 주위를 경계하며 칼자루에 손을 올렸다. 미행하던 자가 모습을드러냈다면, 갑자기 주위에서 공격이 가해질 확률이 높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없었다.

그저 노인이 몇 걸음 앞으로 다가올 뿐이었다.

"자네들.

"말해라."

"따라오게."

"따라오라고?"

나는 당장에라도 칼을 뽑을 준비를 하고 있다. 저런 모습이라도 인간의전투력은 천차만별이다.

"그래. 여기서 시간을 끌면 위험하네."

"이 골목 말인가?"

"아니, 이 도시."

노인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몸은 뼈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는 눈빛은 제법 또렷했다.

'뭔가. 이상한데.'

직감이, 이 노인을 따라가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레나를 돌아봤다.

그녀도 나와 비슷한 느낌을 받는지고개를 끄덕였다.

"가 보죠, 뭐. 이 할아버지는 중독자가 아니네? 그것만으로도 따라갈 가치는 있을 거 같아요."

"그렇지. 금방 알아봤군."

노인은 우리를 인도했다. 골목을제 손바닥 보듯 잘 아는 것 같았다.

금세 작은 집에 도착한 노인은 주머니에서 키를 꺼냈다.

"들어오게."

- 끼이익.

문이 열렸다. 쇠 냄새가 흑 끼쳐왔다. 안에는 각종 무기가 전시되어있었다. 무기를 모르는 내 눈에도 그럴듯해 보이는 명품이었다.

"차는 권하지 않겠네."

노인이 말을 이었다.

그는 여기까지 들어오며 몇 번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의자도 권하지 않겠어. 빨리 이도시를 떠나게."

"그게 무슨 말이죠, 할아버지?"

레나가 턱을 괴고 물었다. 하지만 노인은 레나를 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왜 나를 저렇게 보는 거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침묵했고, 레나가 말했다.

"이왕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쫓아오고, 부른 거 아닌가요? 좀 자세히 말해 주세요."

노인은 줄곧 나만 바라봤다.

"경비병들이 다시 되돌아오기 전에 도시를 떠나게."

- 철컥.

나는 건틀렛을 낀 손으로 깍지를끼었다. 경비병들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물어야 한다.

"되돌아오다니?"

"말 그대로일세. 지금은 없지만, 오늘 중으로 되돌아올 거야."

"아까 성문에는 경비들이 그대로 있던데요?"

- 툭.

나는 레나를 제지했다.

"조금〈다른〉녀석들에 대한 이야기인가? 경비 복장을 하고 있지만, 흉악한 범죄자인 녀석들.

노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맞네! 뭔가 알고 온 건가?"

"계속 이야기해 줘."

"그들은, 이 도시에서 반항하는 자들을 모두 사형시키러 갔다네."

"사형이요?"

레나의 반문. 나는 가만히 있었다.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6번의 죽음을 거듭했다.

그중에서, 나는 처음으로 '운이 좋은' 상황을 마주하고 있었다.

갑자기 골목에서 누군가 나타나,

내게 마구 정보를 쏟아 낸다.

지금까지 대로라면.

이런 정보는, 같은 장소에서 최소한 서너 번은 죽은 뒤에야 얻어 낼수 있는 것.

죽고, 다시 죽어서 상황을 거듭 파악한다. 정보를 줄 만한 자들을 알아내어, 그들의 약점을 잡거나 호감을 사는 과정이 필요할 거다.

황당할 정도로.

'??? 운이 좋다?'

생각해 보면.

그건 적절한 표현은 아니었다. 그렇다기보다, 무언가 부자연스럽다.

"당신은. 대체 왜 그걸 나에게 말하고 있지?"

나는 집 안을 훌어보며 물었다. 정갈하게 정리된 집이었다.

이상할 정도로, 진열된 무기가 많다는 걸 제외한다면.

"그 갑옷."

노인이 내 갑옷을 가리켰다. 똑바로 뻗었음에도 손가락 끝은 떨리지 않고 있었다.

근력이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이다.

"그 갑옷, 내가 만든 거네. 도로에 있던 대장간도 내 가게야."

a.r

"어디서 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일세."

노인이 작게 숨을 골랐다.

"그거, 내가 마지막으로 만든 갑옷이라네."

어지러웠다. 이건 여관 주인의 집에서 빼앗은 갑옷이다. 루비아가 샀을 갑옷이다.

"이 갑옷을 당신이 만들었다고?"

"그래. 마지막으로 만든 세트라네.

자네, 계속 그걸 걸치고 있더군."

그야 당연하다. 벗는 순간 인간들이 모두 나를 공격할 것이다. 나는고 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갑옷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던게야, 하하하.

웃음이 어딘가 허탈하다. 굳이 오해를 해소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노인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네. 그리고. 그 갑옷을 산 여자가 생각나더군."

거기서 말이 끊겼다. 루비아를 말하는 게 분명했다.

"작년 겨울인가?"

노인이 흡, 하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어떻게 알았나?"

"그냥. 이 갑옷을 구한 게 그때 즈음이다."

노인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라스미어에서 태어나, 이 도시출신의 아내를 만나 이주해 왔지.

40년을 살았네만. 요즘은, 이 도시에서 너무 많은 죄를 본다네."

그의 얼굴에 죄책감이 가득했다.

방관자의 죄책감이었다.

노인이 무슨 말을 삼키고 있는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정확히 이야기해 주시오. 무슨 죄책감이란 말이지?"

- 꿀꺽.

침을 삼키고 노인이 말을 이었다.

"영주가 마약을 재배하고 있다네.

파는 건 물론, 이 도시 사람들에게 아편을 조금씩 배급하고 있다네. 강제 중독이야. 거절하거나, 불만을 말하는 자들은 모두 죽이거든."

레나가 끼어들었다.

"할아버지는?"

"나는. 쓸모가 있으니까."

노인이 뒤편을 돌아봤다. 진열된 무기들을 바라본다. 그 목소리에는 진한 죄책감이 묻어 있었다.

"내가 경비대의 무기를 만든다네.

약 먹으면, 작업을 못 한다고 우겼지. 그렇게 살아남았네."

"협박할 것도 없는 혈혈단신이라그런가, 그냥 내버려 두더군."

"경비대는 어떻지?"

"크흠, 구태여 말할 것도 없다네.

영주의 개가 되어 있어. 삼 년 전이었나 싶네. 범죄자 같은 놈들 열댓 명을 데려왔지. 경비대에 꽂았어. 그 뒤로 더 끔찍해졌다네."

나는 직접 묻기로 했다.

"네크론 신사회라고 알고 있나? 들어왔다는 경비가 그놈들인가?"

내 말에 노인이 눈만 끔택였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떠돌긴 하네만, 함부로 혀를 놀리면.

크흠, 하고 노인이 기침을 했다.

"이제 소문조차 돌지를 않는다네.

나는 도시에 갇힌 노인에 불과해.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네."

레나가 끼어들었다.

"우리한테 이렇게 말해도 돼요?"

"죽이기밖에 더하겠나. 자네들, 모험가 같은데, 그. 던전에 가려는 거지? 거미굴 말일세."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하게. 경비대도 거기로 갔네.

사람들을 산 채로 거미에게 던지려고 말이야. 지금 가야 만날 게야. 자네들이 목격자라면, 살려 두지 않을걸 세."

"으으.

레나가 몸을 움찔거리곤 노인에게 질문했다.

"그걸 다 알면서도, 할아버지는 여기서 안 떠나요?"

노인이 피식 웃었다.

"누가 놓아주나?"

"그래도 몸 하나 빼내긴 어렵지 않을 텐데. 중독도 아니잖아요."

그가 고개를 저었다.

"내 아내가, 여기서 나고 죽었네.

이 도시에 묻혀 있고. 내가 달리 어딜 가겠나? 부인이 묻힌 곳에서 죽어야지."

"하아.

레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노인에게 질문했다. 문득 생각나는 게있었다.

"혹시. 이 도시에 서점은 없소?"

"서점? 서점이라. 왜 그러지?"

잠시 멈칫했지만, 이 노인에게는 말해도 될 것 같았다.

"캐빈 애슈턴이라는 자가 쓴 책이 있나 싶어서."

"모르는 이름이야. 처음 들어 보네.

책방 같은 건 없지. 영주의 도서관이라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들여보내 줄 리가 만무하다.

일단 그건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우리는 밖으로 나갔다.

"이걸 받게나."

노인이, 철로 된 검은색 병을 꺼내며 말했다.

"잡화상에서 보니 거미 굴에 가고 싶어 하는 것 같던데. 내 마지막갑옷을 입어 준 보답이네."

"이게 뭐지?"

"거미굴에 가게 된다면 이걸 쓰게.

물에 1 : 30 비율로 희석해도 웬만한 기름과 비교도 안 될 거야. 〈그라스미어의 불〉이라네."

레나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그, 그건.!"

그라스미어의 불이라. 그 불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서큐버스님은 내 머리를 무릎에 눕혀 놓고 책을 읽기를 좋아했다.

허벅지에 닿는 딱딱한 촉감이 좋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분은 책을 읽다, 재미있는 부분이 나오면 내게 소리 내어 읽어 주시곤 했다.

- 철컥.

그분의 이야기가 떠올라, 나도 몸을 달그락거리며 물었다.

"절대 꺼지지 않는다는. 액체로된 불길이 이건가?"

"내가 태어난 곳의 비전이지. 평생한 병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네. 걸작을 만드는 데 써먹을까 했지만.

만들어 봤자 저 악마들에게 주는데뭣 하러 그러겠나?"

"이런 걸 줘도 되는 거요?"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다. 가치가범상치 않다는 건 분명하다.

말하는 투로 보아, 뛰어난 대장장이가 평생 한 병이나 가질 수 있으면 다행인 물건이리라.

"물론이지. 받아도 되네."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하시오."

"나는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네. 시간이 얼마 없어. 이〈불〉을그냥 버리기는 아깝고 말일세."

노인은 말을 돌렸다.

"줄 사람이 없나?"

"모두가 중독 됐네. 영혼까지 저들의 노예야. 도덕도, 가치도 없어졌네."

"약만 받으면 그만이게 됐다는 소리군요?"

레나가 끼어들었다.

"그렇지."

"하지만 할아버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닌 거 같은데요?"

노인이 클클거리며 웃었다.

"눈치가 빠른 여자군. 이걸로. 할수 있는 걸 해 주게."

"똑바로 말하지 그러나."

"크흠! 경비대는 오늘 밤이면 돌아올 거야. 지금 거미 굴로 가게. 그리고 모두 태워 버리게."

"하, 그럴 줄 알았어."

레나가 한쪽 입 꼬리만 올리면서 피식 얼굴을 찡그렸다.

"놈들이 돌아온다면, 내 집에 왔던 자네들을 추적할 거야. 내게 무슨 말을 들었다고 생각하겠지. 자네들을 죽이려 할 걸세."

"놈들을 먼저 치게. 기회는 한 번이라네."

팔짱을 끼었다. 건틀랫을 철컥거렸다. 레나는 와, 대단한 협박이네, 라며 입 꼬리를 씰룩거린다.

노인에게 물었다.

"무슨 원한이 있는 거요?"

"칠십오 년을 비겁하게 살았네. 눈치나 슬슬 살피면서, 그저 내 몸 하나만 건지려고 발버둥 쳤지. 부인이죽은 뒤, 내 삶에는 작은 꽃밭 하나 없었다네."

한숨을 쉰 노인이 말을 이었다.

"죽지 못해 사는데 영주가 도시에 마약을 뿌리더군."

"언제부터?"

"삼 년 전부터일세. 부인이 살아있다면 어땠을까 싶었어. 살해당했겠지. 정의감이 강한 성격이거든."

"견디기가 힘들더군. 그렇게 생각하니 말일세. 그러던 와중에 자네들을 발견한 걸세. 어때, 이 한심한 부역자의 협박에, 넘어가 주겠나?"

46화 부역자와 불타는 자 (6)

***************************************************

노인은 내게, 거미굴로 향한 경비들을 죽여 달라고 했다. 삼 년 전, 영주가 데려온 흉악한 무리를.

좀 더 확인해야 한다.

"우두머리는 어떤 놈이지? 말하자면. 경비대장 같은 거 말이야."

노인이 몸을 흠칫한다. 틈을 주지 않고 곧바로 질문했다.

"어떻게 생겼지?"

"머리가 거의 다 벗어진 자일세.

몹시 다부진 체격이야."

노인이 말을 이었다.

"눈빛을 보면 금방 알아볼 걸세,

그놈이 우두머리라는 걸 말이야."

- 철컥.

온몸의 뼈에 힘이 들어갔다.

'그들이겠지.'

루비아를 살해한 자들.

성문에서 수레를 끌고 나오던 놈들의 모습이, 눈앞에서 생생히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놈도 거미굴로 갔나?"

"그래. 부하들과 함께 움직인다네.

그놈과 함께 있으면. 다른 놈들은 아주 제대로 기합이 들어 있지. 일을 제대로 못 하면, 상대를 가리지 않고 반쯤 죽여 놓거든."

이가 꽉 맞물렸다.

확실하다.

부하를 패던 대머리의 태도와 모조리 잡아먹을 듯 주위를 돌아보던 혐오스러운 시선이 떠오른다.

'여기에 집중한다.'

굳이 의뢰를 받지 않아도, 어차피해야 할 복수다.

그냥, 일이 훨씬 쉬워진 거다.

거미굴에 모여 있다면, 몰아넣고태워 죽일 수 있다면 그보다 간단하고 편리한 방안은 없다.

'지금은. 그게 최선인가.'

뿌리를 캐다 보면.

결국, 도시의 영주에게 닿을 거다.

더 커다란 것에 닿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

경비병 놈들을 하나씩 잡아서, 산채로 천천히 고문할 만한 압도적인능력은 없다.

흑막을 캐더라도, 영주성에 걸어 들어가 모든 걸 뒤집어엎어 놓을 능력은 없다.

언젠가는,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날이 오늘은 아니다.

"이건 이렇게 쓰는 걸세."

노인은〈불〉의 사용법을 우리에게 가르쳤다. 검은 철로 된 커다란 통은 매우 무거웠다.

통을 두 손으로 잡았다. 자체적으로 냉기를 띠고 있다. 온몸에 한기가 퍼져 나갔다.

'차갑군.'

밖에는 잡고 돌리는 수동식 펌프가 장착되어 있다.

앞쪽에는 기다란 관이 있다. 끈적거리는〈불〉이 뿜어지는 구조였다.

"이건 어떻게 끄지?"

"조심하게. 끌 수 없네."

"끌 수 없다고?"

"영원히 타오르는 불이라네."

목소리에서 자부심이 느껴진다.

"물을 부으면 안 되나?"

"물?"

노인이 클클대며 웃는다.

"한번 부어 보게. 단, 붓기 전에 꼭서른 걸음은 피해 있게나."

"안 꺼진다는 거요?"

"이 불은 바다 깊숙한 곳에서도 타오른다네. 진흙이나 모래로도 끌 수가 없지."

노인은 우리에게 한 포대의 가루를 건넸다.

"쓰기 전에 이걸 몸에 뿌리게."

"이게 뭐죠?"

레나가 끼어들었다.

"불에서 몸을 보호하지. 이걸 끼얹으면 뜨겁지 않아."

"신기하네요."

"그래, 신기하지? 이것만 바르면 몸을 보호한다니까."

우리는 〈그라스미어의 불〉대신 물을 담은 분사기로 몇 번이고 연습했다.

통에 달린 버튼을 꾹 눌렀다.

- 푸슛!

물은 일직선으로 길고 강하게 쁨어졌다. 10미터 정도 앞까지 세차게 나아간다.

"장착된 펌프가 꽤 강하네요."

떠나기 전, 노인은 우리에게 검은 철로 된 통을 하나 더 줬다.

"여기 들어 있는 건 1/20로 희석된 액체일세. 밖에서 감을 좀 잡고 가는 편이 좋을 거야."

우리는 노인의 집을 떠났다.

"의뢰를 받으셨네요?"

도시를 나간 뒤, 레나가 내게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그래."

"놀랐어요. 꼭. 정말 그 일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으셔서."

"어차피 우리에게 좋은 일 아닌가?

재미있는 무기가 하나 더 생긴 셈인데, 싫을 거 없지. 모험가나 경비대나 처리해야 할.

문득 말을 멈췄다.

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가만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황하셨어요?"

말이 나도 모르게 빨라졌나 보다.

마음속 깊은 곳을 찔린 것 같다. 가만히 침묵하고 있는데, 레나의 얼굴이 살짝 상기된다.

"좋았어요. 그 할아버지 말을 승낙해서."

"무슨 말이지?"

의외라고 생각했다. 이 여자는, 인간을 혐오하지 않나?

망설임 없이, 남자들의 목을 즐겁게 긋는 모습이 기억난다. 그것과지금의 모습은 전혀 다르다.

"저도 승낙하고 싶었거든요, 그 의뢰라는 거. 마음이 음직였어요."

이해하기 어려웠다. 결국, 직설적으로 물을 수밖에 없었다.

"너.

"말씀하세요."

"인간을 싫어하지 않나?"

"아하하하.

왜 웃는지 알 수 없었다. 인간을혐오해서, 그 반사 심리로 나를 따르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레나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지도 모르죠. 대부분의 인간은 끈적거리면서, 저를 무작정 착취하려고만 하니까요."

"기사님을 좋아했던 건, 맺고 끊는 게 확실해서? 주고받는 게 확실해서였어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혜 수치를 조금 올리면, 이런 여자의 마음 같은 걸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될까?

"자기주의자면서도, 아닌 척하면서남까지 생각하는 해골이네요. 너무 좋은 거 같아."

당황스럽게도, 레나가 살짝 부끄러운 표정을 짓는다. 저런 표정을 언제 봤더라?

그 순간.

- 띠링!

[레나의 호감도가 6 올랐습니다!]

그리고, 눈앞에 반투명한 메시지들이 계속 떠올랐다.

[호감도 30을 돌파했습니다!]

[특전이 해제됩니다.]

[특전은 성장 가능합니다.]

[상대방의 정보를 확인합니다.]

- 띠링!

[이름: 레나]

[도적 Lv. 到[체력-13 힘-11 민첩-17 지혜-11]

[호감도: 3到- 레나는 당신의 행동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호감도가 방금〈크게〉오른 상태입니다.

- 분위기가 유지될 때, 호감 포인트를 집중적으로 자극하세요. 평소보다 호감도가 큰 폭으로 올라갑니다.

[기본 스킬]

- 단검 투척 Lv.3- 함정 제작 Lv.3- 모략 Lv.2- 목 긋기 Lv.2- 흔적 추적 Lv.1- ??? (호감도가 부족합니다.)

[특전]

- 재능(B)

〈충분히 탁월한 재능〉

이 특전의 소유자는 범인들보다 훨씬 더 뛰어난 재능과 성장력을 가졌습니다. 레벨 업 때마다 얻는 스탯이 플러스2 보정됩니다.

- 전투 감각(B)

〈하나 더 열린 감각〉

이 특전의 소유자는 타인과 완전히 같은 스탯을 가지고도, 훨씬 더 뛰어난 전투력을 보여 줍니다. 상세효과는 ??? (호감도가 부족합니다.)

- ??? (호감도가 부족합니다.)

[칭호- 호감도를 올리면 개방됩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잠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할 말이 없었다.

'대체 이게 뭐지?' 갑자기, 엉뚱하게 확 상승해 버린호감도도 호감도지만.

일단, 레나의 상태창이 압도적으로 눈길을 끌었다.

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인간은 레벨 업 때마다 스탯이 2가올라간다. 그것만 해도 나의 2배.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스탯 차이까지 생각하면, 레벨 20의 해골병사가레벨 10의 인간보다 약하다.

하지만, 이 여자의 성장력은 다시인간의 두 배다. 한 번 레벨이 오를 때마다 스탯이 4 올라간다. 성장력이 나의 4배인 셈.

게다가 전투 감각이라는 특전.

'같은 스탯인데, 뛰어난 전투력?'

무시무시한 성장력에다, 그 성장력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다니.

이 여자는 괴물이다. 인간 중에서도 매우 드문, 뛰어난 재능의 개체로 보인다. 지금은 약하다. 하지만 제대로 키운다면.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금방 답은 나온다.

'좀 무서운데.'

레벨이 20만 되더라도, 지금의 나를 간단히 때려눕힐 것이다.

지금 이대로의 약한 그녀가 좋을지도, 하는 생각마저 든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레나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온다. 고개를 돌렸다. 레나의 예쁘장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 여자를 보호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웃기는 생각이 될 날이 머지않은 것 같다.

"아무것도 아니다."

레나는 나를 인적 없는 강가로 데려갔다.

"여기에서 한번 실험해 봐요! 〈그라스미어의 불〉을 뿜어 보는 거예요. 어때요?"

"어디로?"

레나가 손으로 강을 가리켰다. 바위 사이사이로 청명한 소리를 내며 강물이 흐르고 있다.

"수면 위로요."

희석된 액체를 담은 통을 잡았다.

앞으로 고정하고, 펌프를 돌렸다.

- 휘이이이이익!

기이한 소리가 나며 불길이 앞으로화르르륵 뿜어졌다.

열 걸음 앞까지는 액체처럼 일직선으로 분사되고, 그 뒤로는 불길이 부풀어 허공에서 춤을 춘다.

불길이 강 위에 솟은 바위에 닿자바위가 새까맣게 그을린다. 화르록타오르는 불길 위에서 검은 연기가 춤을 춘다.

"와아. 말만 들었지 저도 보는 건 처음이에요. 이런 거였구나."

"맞고 살아남기는 어렵겠군."

"안에 든 것도 평범한 공기가 아니네요. 분사력이 대단해요."

"나도 놀랐다."

1/20이 저 정도라면, 희석을 안 한 원액은 어떨까.

- 툭.

"엇.!"

"내가 갖고 있지."

레나가 가지고 있던 검은 통을 빼앗아 들었다. 재능은 재능이고, 지금의 그녀는 연약하다.

1/20로 희석되었는데도.

경악스러운〈불〉의 위력을 목격했다. 아예 레나가 그 통을 들고 있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여 기예요!"

레나는 지도와 길을 번갈아 본다.

앞장서서 나를 인도한다.

"잘 찾는군."

"수십 명이 걸어간 흔적인데요. 목적지도 정해져 있고. 놓치기가 더어렵죠."

흔적이 뚜렷하긴 하다.

"노인의 말대로인가."

"경비가 열다섯. 사형시킬 인간이열 명이라고 했죠? 대충 맞는 것 같아요."

우리는 계속 걷는다.

나는 갑옷을 입고, 진홍색 로브를 뒤에 걸치고 있다.

"그것참, 볼수록 마음에 드네요. 정말 잘 사서 입혔다니까?"

레나가 뿌듯한 표정을 짓는다.

내 모습이 어지간히 마음에 드는듯하다.

망토는 별로 거추장스럽지 않다.

무게도 잘 느껴지지 않는다.

저렇게 좋아한다면, 입어 주는 게크게 어렵지는 않다.

어느새.

레나를 따라 멍하니 걷다 보니, 풍경이 조금씩 달라졌다.

"나무들이 죽어 있네요."

말라 죽은 나무들이 늘어난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면, 잎 하나 매달려 있지 않다.

- 투각.

레나는 칼을 꺼내 나무껍질을 조금 벗겨 냈다. 몇 번 만지작거리며 살펴보더니 말했다.

"수액이 다 빨려 있어요."

조금 더 걸어갔다.

"저기."

레나가 손으로 앞을 가리킨다.

'던전인가.'

구불구불한 계단 끝에 멀찍이 거대한 동공이 보인다. 그 주위의 나무들은 모두 새까맣다.

"나무들이 왜 다 저렇지?"

"거미들이 지하에 굴을 파고, 나무뿌리에서 수액을 다 빨아 먹어서 그래요."

"거미가 수액을 빨아 먹는다고?"

"보통 거미들은 안 그렇겠죠. 하지만 이것들은 마법사가 만든 키메라예요. 뭘 해도 이상하지 않죠."

"그런가."

"네. 인공 던전은 처음이네요."

자연스럽게 해골들이 모여들어 형성된〈망령의 납골당〉같은 것과달리, 어떤 던전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다. 골 렘이 지키는 던전들이 대표적이다.

D급 던전〈파멸된 거미의 볼트〉

역시 그렇다. 마법사가 쓰다 버린 키메라로 가득 찬 던전이다.

레나는 집중해서 주위를 살폈다.

배낭에서 이것저것 꺼내 들고 조심스럽게 동공 근처로 접근했다.

"일단 들어간 건 확실하네요. 노인이 말한 그 무리."

"따라가면 되나?"

"잠시만요.

레나가 긴 막대에 칭칭 감긴 와이어를 천천히 푼다.

굵은 나무들을 중심으로 와이어를 연결한다. 삽으로 땅을 판다.

곳곳에 덫을 놓는다. 칼날에 독을 발라 함정을 만든다.

"덫을 짜는 건가?"

"네. 안에서 다 못 죽일 거 같으면, 밖으로 나와서도 상대해야죠."

대꾸하면서도 분주하게 움직인다.

한참 뒤,

"좋아!"

"된 건가?"

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여긴, 이제 우리 구역이에요!"

47화 부역자와 불타는 자 (7)

***************************************************

레나는 와이어를 설치한다. 독 바른 덫을 곳곳에 깐다. 덫은 발목을 문다. 트랩은 침을 쏘아 낸다.

레나는 덫의 위치를 다시 확인한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안에서 잘 안 풀리면.

그 뒤는 듣지 않아도 안다. 여기로 도망쳐 나오자는 거다.

물론 정말 잘 풀리지 않으면, 여기까지 나오기도 어려울 수 있다.

"가지."

깊고 어두운 동공으로 들어간다.

나선으로 된 계단을 내려간다.

계단에는 친절하게도, 나무로 된 난간까지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저벅저벅 내려간다. 레나는 뒤에서 조용히 따라오고 있다.

동공은 음험하고 위험해 보인다.

함부로 몸을 들이밀다간 죽을 거라고, 주위의 말라 죽은 나무들이 충고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어차피D급 던전에 불과하다.

서큐버스님과 살던 던전은, 인간들이 A마이너급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나는 그런 던전을 장난처럼 유린하는 용사들을 상대해야 한다.

동공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오히려 밝아졌다. 곳곳에 빛을 내는 구슬이 박혀 있다. 여덟 개씩 박혀 있는 구슬이 거미의 눈동자 같다.

작은 철문 앞에 선 순간.

- 띠링!

[파멸된 거미의 볼트]

[던전 랭크: D]

[절대 클리어할 수 없는 레벨의 던전입니다.]

[적정 레벨: 3卜40]

[적정 클리어 인원: 4? 6]

내 앞에 반투명한 메시지가 떴다.

망령의 납골당에 이어 두 번째로 보는 메시지다. 납골당의 던전 랭크는 F. 적정 레벨은 15까지였다.

나는 상태창을 확인했다.

[이름 : ]

[해골병사 Lv.1(70)]

[체력-34 힘-40 민첩-39 지혜-13]

[스킬]

- 검술 Lv. 5내 레벨은 1이다.

푸른 갑옷의 기사에게 살해당한뒤, 여기까지 오며 인간을 사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던전의 메시지는 현재의〈레벨〉을기반으로 나타난다. 레벨만 본 다면이건 확실히 미친 짓이다.

"전보다 높은 랭크의 던전인데, 입구는 상당히 좁죠. 한동안 좁고 긴 통로가 이어질 거예요."

"지도를 외웠나?"

"물론이죠. 숫자가 적은 우리에게유리해요. 만나는 대로 불을 뿜으면, 놈들은 반항할 새도 없이 죽을 거예요."

고개를 끄덕였다. 레나가 나를 보고 말했다.

"이번엔 저도 좀 나설게요. 불이 있으니까요."

레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녀의 재능은 압도적이다.

레벨을 올려 간다면, 오래 지나지 않아 나를 추월할 것이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는 경계했다.

하지만 지금은 믿을 수 있다.

그저 인간들에게 나온 장비나 돈을 처분시키는 역할로 끝내서는 안 된다. 그녀가 성장한다면, 굉장한 전력이 될 것이다.

'키워 줘야 하겠지.'

그녀에게 경험치를 몰아주어도 좋을 것이다.

물론, 여건이 된다면 말이다.

- 철컥.

허리에〈불〉이 담긴 통을 찼다. 한손으로 칼을 뽑아 들었다.

- 스르릉.

칼 뽑히는 소리가 싸늘하다.

다른 한 손으로 그대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 쿠르르르.!

철문이 작게 울부짖는다.

구멍은 좁고 길게 아래로 이어져있다. 하지만 인간이 지나가기에 어렵거나 답답할 정도는 아니다.

애초에 이 던전을 디자인한 이가인간 마법사이므로,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구불구불한 통로를 한참 내려갔다.

통로에는 천장에 눈처럼 박힌 야광주夜光珠 외에 아무것도 없다.

오른쪽으로 한참을 내려가고, 다시왼쪽으로 한참을 내려갔다.

"여기는 거주지가 아닌가 보군."

"네. 한참을 내려가야 해요. 통로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경비병들이. 사형수를 거미에게 먹이로 던져 준다고 했나?"

"맞아요. 그래도 일단 깊이 내려가야죠. 여기에 놓아두면 굶어 죽을 뿐이니까요."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레나가 고민하듯 말을 잇는다.

"거미에게 산 채로 먹히는 것과 굶어 죽는 것."

그녀는 작게 속삭인다.

"어느 쪽이 더 고통스러울까요?"

"생각에 깊이 잠길 만한 주제는 아닌 것 같은데."

"잡아먹히는 쪽이 더 나을 것 같지 않아요? 꽁무니에 달린 침에는 최음성분이 있대요.

나는 내려가는 길에 집중했다.

한참을 더 내려가자 바닥에 모래가 조금씩 밟히기 시작했다.

더 내려가자 작은 공터가 나왔다.

"저기요!"

레나는 한쪽을 가리켰다. 바짝 탄 거미 시체 세 구가 있다.

몸길이가 적어도 1미터 정도는 될 것 같은 거미였다.

"거미 안 무섭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거미가 왜 무섭죠? 굳이 기를 생각까지는 없지만. 혹시, 거미 무서워하세요?"

"일반론 아닌가? 인간들은 거미를 무서워한다더군."

"배수구에 숨어 있는 커다란 녀석이나, 옷이랑 시트 안쪽에 있는 것들은 싫겠죠."

그녀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 곳에 있으면, 뭐든 싫고 징그럽지 않겠어요? 아, 기사님은 제시트 아래에 있어도 좋아요."

레나는 허무한 농담을 하며 공터곳곳을 돌아봤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갔다.

자세히 보니, 공터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거미가 간신히 기어 나올 수 있을 법한 구멍이다.

"저기로 가기는 어렵겠군."

"네, 거미 전용이네요."

결국 내려가는 길은 한 군데였다.

"이리로 오세요."

계속 동굴 아래로 더 내려갔다. 쓰러진 거미의 시체와, 묶인 채로 상반신만 '거미 구멍'에 처박혀 있는 인간 서넛이 보였다.

구멍 주위에, 요란하게 피가 튀어있다. 안쪽에서 상반신만 거미에게파먹힌 것 같다.

레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 경비라는 놈들, 계속 아래로 들어갔네요. 정말 보스라도 공략할생각인 거 같은데요."

"그거, 안 좋은 건가?"

"아래로 내려가면 공간이 넓어지거든요. 우리에게 썩 좋은 구성은 아니죠. 좁은 통로에서 만나야 유리할 텐데."

- 키기기긱! 키기기긱!

그 순간이었다.

인간의 상반신이 쑥 들어간 구멍하나에서, 피 칠갑을 한 새까만 거미 두 마리가 기어 나왔다.

"빠져라."

레나부터 뒤로 물리고 내가 뛰어들었다.

- 키기긱! 키기기긱!

중형 거미들은 기괴한 소리를 내면서 내게 달려든다.

여덟 개의 다리 하나하나가 각자장검 정도의 길이다. 굵기는 인간여자의 허리 정도.

- 퍼걱!

가까이 있는 거미의 몸통에 바스타드 소드를 꽂아 넣는다.

힘에서도, 속도에서도 내가 우위에서 있다. 바깥에 있는 이 거미들은 조무래기에 불과하다.

꼬치처럼 칼에 꿴 채, 그대로 구멍에 다시 밀어 넣어 버린다.

여덟 개의 다리를 버둥거리지만,

내 힘을 당해 내지 못하고 다시 구멍에 처박힌다.

- 끼기깅!

방패로 검신을 긁어내는 소리가 섬뜩하다.

옆에 있는 다른 거미를 곧바로 꿰어, 연속으로 구멍에 밀어 넣었다.

- 광!

방패로 구멍 입구를 막는다. 바스타드 소드를 털어 냈다. 초록색 피가 동굴 바닥으로 화록, 떨어진다.

- 키기긱!

놈들은 그 와중에도 인간의 시체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피를 흘렸으니 영양을 보충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일지도 모르겠다.

미안하지만 느긋하게 식사 시간을줄 생각은 별로 없다.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 속담을 읽은 적이 있다.

물론, 나는 내가 개보다 낫다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불〉을 1/20로 희석한 통을 잡는다. 뾰족한 관을 구멍에 댔다. 수동식 펌프를 세차게 돌려 버린다.

- 화르르!

- 화르르륵!

- 키기이이이익!

- 키키기기이!

작은 구멍으로 화염이 쏟아진다.

'확실히 불에 약하군.'

불태워지는 거미들이 몸부림치는 소리가 안쪽에서 섬뜩하게 울린다.

물론 저들에게 특별한 죄가 있는 건 아니다.

그냥 자기들의 보금자리에 나타난무언가를, 만들어진 본능에 따라 공격했을 뿐이다.

자연스럽고 평화로운 일이다.

내 침략을 변호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나는 방어자의 정당한 요격을 가혹한 불길로 진압했다.

나는 인간들에게도 악이며, 이 던전에 사는 거미들에게도 악이다.

물론 아무래도 상관없다.

20년 후의 누군가를 지킬 힘을 얻기 위해서라면, 나는 뭐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구멍 안쪽이 조용하다. 안쪽에 다시 쑤셔 넣은 거미 두 마리가 모두 죽은 듯하다.

몇 초가 걸리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거미들의 다리를 잘라 내고, 몸통에 몇 번이고 바스타드 소드를 찍어야 했을 것이다.

그건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다.

거미줄과 독액으로 범벅이 되어 한참 동안이나 발버둥을 쳐야 했을지도 모른다.

적절한 무기를 가지고 온 덕에 큰 수고를 아낀 것이다.

자만은 금물. 게다가, 바깥에 있는이 거미들은 조무래기에 불과하다.

안쪽에 있을 보스와는 비교도 되지^는다.

'레벨이 4나 올랐군.'

민첩과 힘에 각자 2를 투자했다.

[체력-34 힘-42 민첩-41 지혜-13]

힘과 민첩, 모두 40을 넘겼다. 휘두를 수 있는 힘도, 속도도 빨라진 게 느껴졌다.

"곧 문이 나올 거예요."

레나가 옆에서 말했다.

"문?"

"네. 좁은 통로는 슬슬 끝이에요.

더 가실 건가요?"

"그래야지."

무심코, 그녀를 너무 깊숙이 데리고 와 버렸다. 보호해 줄 수 있을지확실하지 않다.

몇 분 정도 더 걸어가니 레나의 말대로 작은 철문이 나왔다.

- 끼이이익.

문을 열자 작은 협곡 같은 공간이 펼쳐졌다.

"고대의 콜로세움 같은 느낌이네요. 마법사들의 취향이란 건 참협곡 곳곳에 거미줄이 가득했다.

온몸이 새까맣고 눈만 새빨간 거미들이 거미줄을 타고 다닌다.

새하얀 거미줄 곳곳에는 동그랗게 말린 인간들이 있었다.

레나도 나와 비슷한 때 허공에 매달린 인간들을 발견했다.

"저기에 던져 놓았군요. 아직 살아있어요."

"쾌적해 보이지는 않는군."

완전히 거미줄에 감기지 않은, 여자의 하얀 다리가 저편에서 경련하둣 버둥거린다.

나는 그 모습을 잠깐 바라봤다. 살아 있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머리가 있어야 할 부분이 새빨갛다.

거미가 산 채로 머리만 아삭 베어 먹은 것이다. 버둥거리는 하얀 다리는 그냥 거미줄에 매달려 흔들리고 있던 것에 불과했다.

나는 시선을 내렸다. 계곡 아래를 천천히 살펴봤다.

불타 죽은 거미들과 깨어진 화염병조각이 낭자하다. 끈적한 타르과 기름이 타고 남은 흔적이 계곡 곳곳에 가득했다.

"아래로 내려갔군."

"네. 사형수는 대부분 여기에 다던져 놓은 것 같아요."

"불 좀 빌려주실래요?"

레나는 희석한〈불〉이 담긴 통을 내게 받아 들었다. 그리고 계곡 저편의 하얗게 둘둘 감긴 거미줄을 겨냥하고 펌프를 돌렸다.

- 화르르록!

불길이 마구 뿜어졌다.

계곡의 거미줄에 달라붙어 허공의거미들도, 꽁꽁 감긴 인간들도 모두 태워 버린다.

- 키기기이익!

- 키이이이익!

거미들이 마구 뛰어내린다. 계곡을 지나 이쪽으로 다가온다.

크게 위협적이지 않다. 이미 한차례 경비병들의 화염병에 쓸린 뒤라 그런지 몇 마리 남지 않았다.

'하나, 둘. 다섯이군.'

- 화르륵!

- 희? 르르르르!

레나는 별 감정 없는 눈빛으로 거미들을 향해 불길을 쏘아 냈다.

세 마리는 오는 도중 불길에 휩싸여 죽었다.

화염병에 담겨 있던 액체가 바닥에남아서인지, 계곡 곳곳이 폭발하며 새롭게 불길이 솟아올랐다.

계곡을 기어오르는 한 마리를 칼로푹 찔렀다. 머리에 칼이 박힌 거미가 몸을 부르르 떤다.

크게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휘둘러서 절벽으로 털어내 버렸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또다시 레벨이 올랐다. 내 레벨보다 중요한 게 있다. 나는 레나를 바라봤다.

그녀의 머리 위에도 비슷한 창이떠 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진짜 올랐잖아?'

[이름: 레나]

[도적 Lv.1O(new!)]

[체력-13 힘-11 민첩-17 지혜-11]

[잔여 포인트: 20(new!)]

[호감도: 35]

- 당신은 레나의 취향입니다.

- 그녀는 당신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이 캐릭터는 당신과 관계를 맺지 않았습니다.]

[포인트를 임의로 분배합니다.]

[체력-19 힘-17 민첩-20 지혜-16]

[각색완우(角色抗偶)의 아나픽시아(an요pxia)를 시작합니다.]

[동화율이 내려갑니다.]

[92.49%->90.14%]

세계가 한차례 흔들렸다.

48화 부역자와 불타는 자 (8)

***************************************************

처음 나타날 때는 흐릿하다가.

점차 명확한 글자가 되어 나타나는 문장.

[각색완우(角色抗偶)의 아나픽시아(an쇼pxia)를 시작합니다.]

머리가 아픈 것도 같고, 머리가 사라진 것도 같다.

시야가 대책 없이 출렁거린다.

침침해지다 또렷해지고, 곧 다시 거칠게 흔들린다.

의식에 장막이 내려진다.

아니다.

이미 내려진 장막을 의식한다. 그불투명한 장막이 조금씩 찢어진다.

'각색. 뭐라고?'

두 번째다.

이런 조합의 메시지가 뜨는 건. 어딘가 흐릿하고, 빠지고 비뜰어진 글귀들이 기괴한 긴장을 조성한다.

그리고.

그때마다〈동화율〉이 큰 폭으로 내려갔다.

90.14%:

현재의〈동화울〉이다.

동화율이란 단어는 이제 슬슬 익숙해지고 있다. 의식의 한구석을 분명하게 점령하고 있다.

시나리오, 튜토리얼, 동화울.

축축한 의구심이, 발목에서부터 위로 천천히 들어차고 있다.

'90% 아래로 내려가면, 무슨 일이 생긴다는 거지?'

어쩌면 그 일은 진행형인지도 모른다. 조금씩 나를, 세계를 잡아먹는 중인지도 모른다.

동화율을 모르던 세계와 동화율90.14%의 나.

뭐라고 집어서 말할 수는 없어도,

무언가 달라진 세계가 느껴진다.

무언가가 솟아 나온다. 스며든다.

서늘한 칼날을 들이민다. 무너진다.

껍질을 벗긴다.

의식의 문을 노크하고 있다.

- 토토? I ?I ?

- 톡톡.

""? 기사님?"

"기사님, 괜찮으세요?"

한 여자가 내게 노크를 한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납골당에 쳐들어왔던 여자. 그녀가이번에, 내 의식에 쳐들어왔다.

나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본다. 천천히 입을 열어 말한다.

"레벨."

"네?"

"너, 레벨이 올랐어."

"맞아요. 방금 허공에 매달린 거미들을 잡아서 레벨이 올랐어요."

레나가 고개를 끄덕인다. 뭐 이상한 일이라도 있냐는 듯한 말투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본다.

- 달그락.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얘기를 하더라도 지금은 아니다.

앞으로 가는 게 중요하다.

이 던전에는.

내가 죽여야 할 무리가 있다. 일단은 거기 집중한다.

"아니야. 아무 생각 안 해. 가자."

우리는 협곡 아래로 내려갔다.

협곡 아래에는 불타 죽은 거미들과 깨진 화염병 조각들이 난장판을 이루고 있었다.

'전부 죽었군.'

협곡 아래로 걸어간다. 죽은 거미들이 전부 살아 있었다면, 처리하는데 꽤나 애를 먹었을 것이다.

그만큼 깨진 화염병 조각도, 죽어있는 거미의 숫자도 많았다.

협곡 안쪽에는 사원이 있다. 동굴 안에 사원을 만들어 낸 건, 옛 마법사의 취향인 걸까. 무너진 사원 곳곳에는 거미 조각들이 새겨져 있다.

"아직 형체들이 생생하네요. 조각들 말이에요."

"살아 음직이게 될까?"

"하하, 아무래도 그건 무리죠. 그런 마법이 유지된다면, 저 사원도 훨씬 잘 보존되었을 테니까."

사원은 낡고 헤졌다. 대리석 기둥들은 이가 빠져 있다. 부스러기가 땅 곳곳에 뒹굴고 있다. 무딘 단면이 이미 오래전에 떨어져 나갔음을 말해 준다. 거미줄은 조각과 조각 사이를 잇는다.

나는 언제든〈불〉을 뿜을 준비를 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역시, 대부분의 거미들은 살해당해 널려 있었다. 사원으로 들어가 철로 된 문을 연다. 문은 거미줄로 꽁꽁 봉해져 있다.

- 투둑!

억지로 연다. 거미줄이 뜯어진다.

안쪽에 통로 따위는 없다.

'뭐 하는 곳이지?,

문 안쪽에는, 언뜻 의미를 알 수없는 작은 공간이 있다.

공간의 문은 안에서도 밖에서도 열고 잠글 수 있는 듯하다.

'임시 대피소 같은 건가?'

한 명이 들어가면 끝일 것 같은 크기다.

'여기 집어넣고 가 버릴까.'

그편이 레나에게 안전할지도.

레나는 그 사이에도 여기저기 놓여있는 상자를 체크한다.

내가 이 던전에 온 목표는 사냥과 복수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만의 목표가 있다. 아이템 수집이라는.

하지만, 안타깝게도.

"전부 텅 비어 있네요."

"직접 뜯어내면 되는 거 아닌가?

경비대 녀석들에게."

레나가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요. 놈들에게 받아 내야겠죠."

새까닿게 타 버린 거미줄과 시체들 사이를 저벅저벅 걷는다. 울퉁불퉁한 검은 바위 위를 걷는다.

- 티디디딕!

- 티디디디딕!

어디 숨어 있다가 나오는지, 아직살아남아 나를 덮치는 거미도 종종 있다.

곡도曲刀 같은 여덟 개의 다리가 연달아 바위를 디디는 소리가 제법 섬뜩하다.

"피해라."

레나에게 낮게 소리친 뒤 거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 취익!

처음 마주한 녀석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독액을 뿜어 댄다.

나는 대각선으로 바스타드 소드를 휘두른다. 검이 허공에 촤르륵 뿜어진 독액을 베고, 독액을 뿜은 녀석의 몸을 입부터 베어 버렸다.

- 치이익!

검으로 양단된 독액이 갑옷에 그대로 쏟아진다. 표면부가 제법 요란한소리를 내며 부식된다.

하지만.

내가 위태로울 정도는 아니다.

- 팟!

허공에 뛰어올라 다시 바스타드 소드를 내려친다.

- 퍼걱!

독액을 몸으로 받아 내며 거미들을 하나하나 반으로 쪼개 버린다. 어차피 경비대가 지나갈 때 도망쳤던 잔당에 불과하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몇 마리를 잡자 금세 레벨이 3이나 올랐다.

크게 어려운 것은 없다.

경비대를 죽이러 가는 마당에, 이런 것들에게 먹이가 되어 줄 생각은조금도 없다.

레벨이 올라서인지, 레나는 아까보다 움직임과 판단력이 더 좋다.

거미들과 내 싸움에 말려들지 않고 미리 몸을 빼놓고 있다.

몇 분을 더 걸었다. 레나가 내게 속삭인다.

"쉬잇. 이제부터 조심히.

- 광!

- 화르르!

- 끄아아아아아!

"갈 필요도 없겠네요."

와장창 깨지는 소리와 타오르는 소리, 되풀이되는 외마디 절규와 위태로운 울음소리가 거듭 울린다.

소리가 풍경을 전하고 있다.

"한창인 것 같은데요."

레나가 지도를 확인하며, 마지막으로 말을 잇는다.

"우두머리 사냥이."

나는 레나를 돌아봤다. 이 앞은 아무래도 혼자 갈 수밖에 없다. 그녀를 지켜 줄 자신은 없다.

"넌 여기 있어."

"싫은데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같이 가야지."

나는 잠시 고민했다.

"어엇.

- 퍽!

레나의 목덜미를 살짝 쳐서 기절시켰다. 그녀는 내 공격을 막 알아채려던 참이었다. 조금만 더 경계하고 있었으면 실패할 뻔했다.

'정말 대단하군.' 나의 민첩은 그녀의 두 배가 넘는다. 그런데도, 바로 옆에서 들어오는 공격을 피할 뻔한 것이다. 놀라운 센스였다.

하지만 저 앞의 지옥도에 동참시킬 수는 없었다.

지나오면서 보아 왔던, 사람 한 명이 딱 들어갈 크기의 '대피소'에 그녀를 넣고 밖에서 문을 잠갔다.

안에서도 문을 열고 잠글 수 있는 구조다. 내가 죽더라도, 그녀가 살아남을 희망이 없는 건 아니다.

다시 길을 돌아, 요란한 소리가 나는 방으로 뛰어갔다. 노인이 준 '가루'를 전신에 끼얹었다. 몸 곳곳에 비비고, 갑옷과 망토 위에도 잔뜩 뿌렸다.

'이제 끝이군.'

레나의 허리둘레만 한 검은색 철통을 잡았다.

〈그라스미어의 불〉의 원액이다.

기다란 관을 앞으로 조준하고, 수동식 펌프 손잡이를 꽉 쥐었다.

- 터벅.

나는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사원을 벗어나, 부서지고 불타는 절규의 장소로 향한다.

[보스의 인식 범위에 들어갑니다.]

[우두머리 사냥이 이루어지고 있는 중입니다.]

[사이드 판정: 마물魔物]

[특전이 주어집니다]

[던전 보스, 열두 발의 거미 (진명眞名: 웹슬링거Webslinger)를 적대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 웹슬링거 Webslinger 를 도와줄 경우, 0.051%의 확률로 그녀가 당신에게 매혹됩니다.

- 0.049%의 확률로 그녀가 당신을 방관합니다.

99.9%의 확률로 날 공격한다는 소리다. 물론, 도와줄 생각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

높은 곳에서 주위를 둘러본다.

길이가 4미터쯤 되는 거대한 거미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다리는 여덟 개가 아니다.

'네 개가 더 많군.' 열둘. 그러나 움직임은 몇 배나 빠르다.

거미는 불의 고리에 갇혀 있다.

이리저리 날뛰며, 인간들이 던지는 화염병을 필사적으로 피한다.

거미의 발치.

그곳에는, 씹다 남은 인간의 시체들이 즐비하다. 무장하지 않은 인간들이다.

'알 만하군.'

상황이 한눈에 파악됐다.

열두 발의 웹슬링거.

그녀가 경비들이 던져 준 인간들을 아작아작 씹어 먹는 사이.

경비들은 화염병을 투척했다.

그녀를 가두는 불의 고리를 만든 것이다.

- 펑!

- 화? 르르!

- 쨍그랑!

- 화르르록!

던져지는 화염병은 끝이 없다.

고리의 직경은 20미터 정도.

그 불의 고리 안에서, 수십 개의 눈을 가진 그녀는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하지만 고리는 점점 더 좁혀진다.

이미 몸에 불길에 번졌다.

- 키갸아아아아아악!

타들어 가며 그녀가 지르는 비명을 경비병들은 빙 둘러서서 즐기고 있었다.

나는 하나하나를 훌어본다.

팔짱을 낀 대머리가 보인다.

- 달그락.

〈불〉을 두 손에 쥔다. 아비규환의 와중에서도, 대머리는 작은 소음을 놓치지 않는다.

그가 고개를 돌린다. 눈이 마주친다. 단단하게 생긴 녀석의 얼굴에 얼핏 당황하는 표정이 스쳤다.

저 남자가 어떻게 태어나,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 죽을지는 알고 있다.

"저, 저기!"

놈이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킨다.

나는 녀석을, 경비들을 겨냥한 채온 힘을 다해 파밧, 펌프를 돌렸다.

- 파■아다아■아다아■악?!

〈새하얀〉불길이 터져 나가며 십여 미터 앞에서 모든 걸 터트렸다.

구덩이 근처에 붙어 있던 불길이 새파랗게 변했다.

한순간에 뭉게뭉게 용솟음치며 던전으로 폭발했다.

공기가 새하얗게 타올랐다. 불길의중심에 있던 '웹슬링거'는 순식간에 하얀 재가 되었다.

온몸에 불이 붙은 경비들도 몇 초를 넘기지 못하고 까맣게 타서 즉사했다.

"끄, 구와아아아악!"

몸이 반쯤 허물어진 경비대장이 불길 속에서 발버둥쳤다.

혼자서만 방염防炎제를 몸과 옷에 잔뜩 뿌리고 있었는지, 기이할 정도로 오래 살아남고 있다.

녀석도 곧 죽을 것이다.

하지만, 이 불길 속에서도.

'뜨겁지 않아.'

나는 조금도 뜨겁지 않았다.

보스존 바깥까지 뭉게뭉게 휩쓴 화염에도, 조금의 뜨거움도 느끼지 않고 있다.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 띠링! 띠링!

하는 소리가 울린다. 온갖 현란한상태창이 계속 뜨고 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 업 메시지만 한 페이지를 빼곡하게 뒤덮는다. 계속 메시지가 올^온다.

- 띠링!

[클리 어!]

[던전 우두머리를 처치했습니다.]

[랭크 판정: D+]

[난이도 판정: 절망]

[난이도 판정으로 용사 포인트가200% 가산됩니다.]

- 띠링!

[D+ 랭크 클리어: 54포인트]

[난이도 가산: 108포인트]

[162포인트를 획득하셨습니다!]

- 띠링!

[상점 이용 권한을 산출합니다.]

[상점 이용 등급: Novice]

- 다음 등급까지: 214/256[권한이 부족합니다.]

[용사 상점을 직접 이용할 수 없습니다.]

- 등급이 올라갈수록 상점 이용권한이 풀립니다. 이 제한은 초보용사들의 포인트 낭비 방지를 위해 고안되었습니다. 깊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자동으로 최적의 특전을 구매합니다. 환경 스캔 중.]

[플레이어 스캔 중.]

[특전 부여 불가.]

'불가라고? 왜?' 나는 고개를 갸웃한다.

- 투둑.

- 투두둑.

그런데 왜인지,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전혀 뜨겁지 않은데.

이렇게 시원한데.

왜 일까?

나는 고개를 내렸다.

- 툭.

그 순간.

두개골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 파삭.

부서져 먼지가 된다.

마지막으로 본 광경은.

불길에 양초처럼 녹아내리는 내 몸이었다.

'어째서.?'

녹아내린 내 몸.

막 의문을 품는 순간.

의식이 완전히 꺼져 버렸다.

49화 부역자와 불타는 자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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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그락!

'대체 어떻게 된 거였지?'

의문이 가슴속에서 끓어올랐다. 왜죽었던 걸까. 모든 게 순조롭게 잘되어 가고 있었다.

던전 공략, 모험자 사냥, 그리고 경비병들에 대한 복수.

이 세 가지를 한 번에 해결하는 쾌속 진행을 하고 있었다.

의외의 조력자도 나타났다.

〈그라스미어의 불〉이라는 놀라운 아이템도 손에 넣었다.

1/20로 희석했어도 어마어마한 위력을 발휘하던 그 액체. 원액의 위력은 상상을 한참 초월했다.

'대단했지.'

죽었을 때의 상황을 회상했다.

레나를 기절시켰다. 안전한 곳에 강제로 놓아두었다.

노인이 준 가루를 몸과 갑옷에 잔뜩 뿌렸다.

'불을 막아 준다는 가루.'

던전의 최심부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경비병들을 확인했다. 불을 난사했다. 경비들도, 거대한 거미 보스도 새하얀 재로 변해 버렸다.

그런데, 나는 왜 죽은 거지?

'노인의 말대로 했는데.'

안전거리와 가루의 사용, 모두 철저히 지켰다.

나 역시 뜨거움을 느낀다.

감각이 덜하긴 해도, 위험할 정도의 온도는 당연히 느낀다.

하지만 가루를 몸에 뿌리자, 전혀뜨거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였어.'

안심하고 계속 불을 난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유에서다.

뭔가 잘못되는 걸 느꼈다면, 액체를 그만 뿌렸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계속 불을 난사했고.

불은 새하얗게 폭발하며, 모든 걸 하얀 재로 만들어 버렸다.

나까지도.

문제는 결국 하나.

"노인이 뒤통수를 친 건가?"

그가 우리에게 거짓말을 했다. 물론〈불〉은 진짜였다.

세상에 그런 불길이 있으리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다.

새하얗게 폭발하며 공기에 반응해가는 불길은 공포 그 자체였다.

하지만.

'71? ㅌ 7]■ㅘ? 〉.,

노인이 뿌리라고 한 가루.

몸에도, 갑옷에도 잔뜩 뿌렸지만, 방염 효과 따위는 전혀 기대할 수없었다.

사실, 그런 불길 앞에서 방염이 가능한 물질이 있을까?

- 달그락.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객관적으로 따져 보면, 왜 노인을 믿었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노인의 〈연기〉에 속은 건가? 제부인 을 팔아먹은 그 연기에.

〈불〉이 가진 아우라가 너무 강했는지도 모르겠다.

분노가 슬쩍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궁금하기도 했다. 뭐 하러노인은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그 가루의 진짜 효과는 뭘까?

멱살을 잡고 제대로 물어볼 생각이다. 사실 그 불이 없었다면, 놈들을죽이는 것조차 어렵긴 했을 거다.

어쨌건 불은 진짜였다. 다시 만나서, 그걸 손에 넣을 필요가 있다.

양초처럼 녹아내리던 내 갑옷이 머릿속에 스치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레나는 잘 살아남았을까.'

심층부에서 폭발한 불길은 보스 존을 가득 메웠다. 그도 모자라 바깥통로로 폭발적으로 번져 나갔다.

그녀는 석벽 안쪽에 숨겨 놓았다.

정신을 차리면 안쪽에서 열고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괜찮았을까.

나와는 다른 시간선에 있는 그녀를 상상한다.

모든 게 다 바짝 구워져 버린 보스존에서, 아이템이라도 좀 챙긴다면 좋을 텐데.

은화가 녹아 버렸다고 해도, 은괴銀魂 형태로 가져가면 되겠지, 뭐.

- 덜컥.

회상을 슬슬 정리한다.

나는 고개를 움직였다. 주위를 가만히 둘러본다.

고요한 동굴이다.

이번에도, 무덤이 아니다.

모포 위에 잠든 레나를 바라봤다.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들린다.

'루비아는 영영 없어진 건가.'

그때.

- 띠링!

익숙한 소리가 울린다.

[계승되었습니다!]

[이름 : ]

[해골병사 Lv.1(88)]

[체력-34 힘-42 민첩-41 지혜-13]

[잔여 포인트: 14]

이제 이것도 익숙하다.

죽을 때마다 모든 포인트와 스킬, 특전이 보존되어 다시 살아난다.

그 사실에 더 이상 별다른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확 쌓인 잔여 포인트를 보자, 죽고다시 살아나는 것도 의외로 할 만하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죽기 전 던전으로 들어갈 때는,

레벨 1 상태. 거미 몇 마리를 죽이고 레벨이 금방금방 올랐다.

거기 더해서 D랭크 던전 보스와 흉악한 경비들 열 명을 죽이자, 레벨이 한 번에 대폭 오른 것이다.

'또 할까?' 계속 드는 유혹이다.

몇 번만 반복한다면 금세 스탯이어마어마하게 쌓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회귀 시점이 달라져 버린 것에서 알 수 있듯, 위험 부담이 크다. 회귀의 정체를 정확히 알아내기 전까지 그런 짓은 무리다.

일단, 그저 한 걸음 한 걸음 최선을 다해 발버둥 칠 수밖에 없다.

스탯창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레나에게 시선이 갔다.

'레나는 나보다 네 배는 빠르게 스탯이 올랐었지.'

레나의 상태창을 띄워 보았다.

- 띠링!

[이름: 레나]

[도적 Lv.5]

[체력-13 힘-11 민첩-17 지혜-11]

[호감도: 11]

- 레나는 당신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기본 스킬]

- 호감도를 올리면 개방됩니다.

[특전]

- 호감도를 올리면 개방됩니다.

[칭호- 호감도를 올리면 개방됩니다.

'처음으로 돌아왔군.' 레나는 처음 그대로다. 그녀의 스탯은 누적되지 않는다. 나의 회귀와 별개로 간다.

호감도도 마찬가지.

조금 아쉽고, 씁쓸하다. 내 쪽에서는 그녀에 대해 많은 걸 경험했다.

함께 수많은 인간들을 죽였고, 산길을 걷고 던전을 탐험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눴고 장난을 쳤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나를 본다.

몸도, 마음도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로 되돌아가서.

- 띠링!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눈앞에 다른 메시지가 떠오른다.

[사망 기념관]

[계승된 이후 여섯 번째 죽음을 달성하셨습니다.]

1. 네크로멘서의 연인2. 불조심 강조 주간(New!)

새하얀 불에 녹아 죽으셨습니다.

무섭죠? 마음속에 〈불조심〉이라고 적어 넣으세요.

화염 저항력이 25 상승합니다. 단, 마법으로 만들어진 화염에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 이 특전을 선택할 경우, 1시간동안 B랭크 이하의 화염 데미지를입지 않습니다.

'2번을 선택해야 되나? 어차피 사령술사를 만날 일도 없으니.

그 순간.

- 띠링!

[특전을 자동으로 선택합니다.]

특전: 네크로멘서의 연인영웅급 특전입니다. 다른 영응급특전이 활성화될 때까지 강제로 이 특전이 선택됩니다.

'그랬었지.'

잠시 잊고 있었다. 아예 다른 특전을 선택하는 게 불가능하다.

나를 향한 사령술사들의 호감도가잔뜩 올라간다는 이 웃기는 특전.

특전을 강제로 장착한 채, 뼈를 달싹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레나를 바라봤다. 잠꼬대도 없이 조용히 잔다.

이번에는 내가 조용히 있어서 그런지, 잠을 설치지 않고 깊은 꿈이라도 꾸는 건가 싶다.

그녀가 한창 자는 동안 던전에 있는 책을 읽었다.

캐빈 애슈턴의 책 두 권을 읽자 다시 지혜가 2 올랐다.

'역시 되는군.'

[이름 : ]

[해골병사 Lv.1(88)]

[체력-34 힘-42 민첩-41 지혜-15]

[잔여 포인트 : 14]

체력에 7, 힘에 3, 민첩에 4를 배분해 보았다.

[체력-41 힘-45 민첩-45 지혜-15]

'이 정도면 괜찮겠지.' 스탯만 놓고 보면 어디서 그리 꿀리지 않을 거다.

인간들도 비슷하다.

레벨은 20, 30이 넘으면 잘 오르지 않는다.

이 정도 능력치는, 인간 중에서도 쉽게 보기 어려운 정도일 거다.

괜히 좀 뿌듯한 마음이 들었지만,

지금까지 죽은 서큐버스님과 루비아, 레나를 생각하자 기분이 다시 가라앉았다.

단순한 능력치는 을라갔지만 나는 조심성도 부족하고,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지혜를 올려야 했나? 뭐, 캐빈 애슈턴이라는 녀석의 책을 좀 더 찾아서 읽으면 좀 나을지도.'

그때 였다.

"끄으응. 잘 잤다.

레나가 서서히 깨어났다. 푹 잔 듯하다. 눈이 마주쳤다.

처음에 그녀를 무척 경계하던 게떠올라 괜히 우스워졌다. 살짝 탄식을 뱉으며 품을 뒤지려 한다. 나는 그 전에 레나를 보고 말했다.

"난 널 믿어."

"네?"

밑도 끝도 없이 엉뚱한 말이었다.

레나는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그녀를 배려하지 않고, 그냥 멋대로 하고 싶은 말을 한다.

"널 그냥 믿는다고. 난 네 편이야.

하고 싶은 걸 해."

설명이 귀찮은 건지 어떤지, 내 심리를 나도 잘 모르겠다.

회귀한다고 말해 봐야 믿지 않을건 당연하다. 그러니, 그냥 이렇게 멋대로 말해 버리고 있다.

나는 이 여자를 알고 있다.

유혹해서 데려온 남자들의 목을 어떻게 긋는지 기억한다.

던전에 멍청하게 박혀 있던 날 위해서, 산에 빼곡하게 함정을 깔아놓았던 것을 기억한다.

거미굴 앞에서 함정을 치는 모습을내 눈으로 생생하게 보기도 했다.

여긴 우리 구역이라며 씩 웃던 모습을 기억한다.

그녀가 옷을 어떤 식으로 마구 벗어던지는지, 욕조에 받은 뜨거운 물에 들어가면 어떤 노래를 흥얼거리는지 기억한다.

어떤 농담을 하고 어떤 장난을 치길 좋아하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날 모른다. 당황하는 것도 당연하다.

어쨌건, 난 그녀를 믿는다.

과거의 그녀라도 지금의 그녀라도마찬가지다.

- 짤그랑.

"돈은 여기에 다 모아 놨다.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사고, 팔 만한 아이템이 있으면 알아서 처분해라."

"그걸로 뭘 마련할까요?"

"얘기했지 않나?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마음에 드는 옷이라도 사든지."

레나는 눈만 깜빡인다. 영 이해가안 된다는 눈빛이다. 한 손은 아직 품에 들어가 있다.

"갑자기 저한테 왜 이러세요? 무섭. 잖아요."

이미 들은 대사다. 비슷한 상황이니만큼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네가 자는 동안, 내가 성격이 확변해 버리기라도 했나 보지."

슬쩍 농담을 던졌다. 하지만 이게 농담인 걸 알려면 이전 생의 기억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건 나에게만 농담이 된다.

"으으.?"

머리 아픈 둣, 이해 안 되는 것 같은 표정이 귀여웠다.

"그냥 갑자기 믿는 거예요? 아무이유도 없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글쎄. 던전 안에 오래 박혀 있었더니 외로워졌다거나, 뭐 설명할 방법은 많지 않나?"

"하, 하핫. 다른 해골도 많지 않아요?"

나는 어깨를 으족했다.

"유감스럽게도 말이 안 통해서."

"대화가 중요하신 거군요.

"방식이 어떻든, 대화는 중요하지."

내가 레나와 나눴던 대화를 고스란히 기억한다.

"아무튼 감사하네요. 절 믿어 주신다니."

눈과 입가에 웃음이 살짝 걸린다.

그 웃음은 처음 만날 때마다 조금씩 달라진다.

"아이템 처분은 자신 있어요. 저한테 맡겨 주세요."

레나가 펜던트를 꺼내려 할 때, 나는 같은 이야기를 했다.

호감도 상한선이 다시 한 번 오르는 걸 경험하면서 나는 약간의 죄책감마저 느꼈다.

'속이는 거지.'

이건 레나를 속이는 일이다.

그녀에게 모든 걸 털어놓아야 할까? 그렇다면 믿어 줄까?

회귀를 중거할 수 있는 뚜렷한 무언가가 있기 전까지는, 그냥 조용히 있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레나는 아이템을 정리하며 사홀 동안 던전과 도시를 왕복했다.

"입어 보실래요?"

사흘째 되는 날, 그녀가 망토를 사왔다. 예전의 진흥색 망토였다.

"자, 가만히 계세요.

그녀가 내 뒤로 다가왔다.

- 철컥. 철컥.

갑옷이 풀어진다.

나는 군말 없이 몸을 맡겼다.

어떻게 망토를 장착하는지 알고 있다. 그녀가 편하게 입히도록 몸을 움직였다.

"멋지네요. 여기 좀 더 머물러 있을까요?"

"아니."

여기 머물러 있어 봤자 좋은 일은 없다. 빨리 벗어나고 싶다.

던전 친화도가 올라가면서 이상한일을 겪는 데다가, 푸른 갑옷의 기사가 쳐들어온다.

내가 능력치를 좀 올리긴 했지만 그 녀석의 강함은 차원이 다르다.

문득 그 녀석이 생각나서 레나에게 물었다.

"혹시.

"네, 말씀하세요."

"이런 문양에 대해서 알아?"

나는 푸른 갑옷에 새겨져 있던 문양을, 인간들의 수첩에 쓱쪽 그리기 시작했다.

그럭저럭 완성된 그림을 레나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바라봤다.

"이거, 푸른 사자 기사단인데요?"

"푸른 사자 기사단?"

"네. 무력으로는 수위를 다투는 제국 기사단이에요."

기사들의 강함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정도였나? 전장에서도 한 번도 못 본 압도적인 느낌이었는데.

나는 고민하며 레나에게 물었다.

"뭉툭한 검집으로, 갑옷을 두부 베둣 자를 수 있나? 그것도 아주 천천히 휘둘러서 말이야?"

레나가 고개를 갸웃한다.

"검이 아니라 검집으로 갑옷을 가른다고요? 그런 건 불가능하죠."

"만약 내가 그런 자를 봤다면? 청회색 머리칼에, 눈처럼 새하얀 검집을 휘두르더군."

레나가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차력쇼나 서커스에 휘말리신 게 아닐까요?"

"아니면.

"아니면?"

"운이 좋으신 거죠. 눈앞에서 제국4검주劍主 중 하나를 보고 살아남으신 거라면."

50화 감정鑑定과 감정感情 사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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