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감정鑑定과 감정感情 사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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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지는 못했지만.'
"검주劍主라고?"
"네. 새하얀 검집은 백조라고 불리는 세라핌Seraphim. 외양을 들으면. 바티엔느 폰 레안드로 후작이겠네요."
"강한가? 그자는."
이미 눈앞에서 그 남자에게 반으로 쪼개진 터. 그저 확인일 뿐이다.
"레안드로 후작이요?"
"그래."
"푸른 사자 기사단 출신 최연소 마스터. 마법사를 제외하면 열 손가락에, 마법사들을 포함해도 서른 명안에는 넉넉히 들죠."
레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이었다.
"진짜 보신 거 맞아요? 푸른 사자들은, 마廣를 보면 무조건 베어 버린다던데."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이미 베어진 것 맞다.
"그런데 왜 물으세요? 우리랑 아무상관도 없을 텐데."
바로 내가 묻고 싶은 말.
'제국 4 검주劍主 중 하나라니.'
그런 터무니없는 존재가 대체 왜 이런 장소에 온단 말인가?
제국 남부 끝자락에.
이 구석진 F급 던전에 왜. 결국 나는 레나를 웃길 수밖에 없었다.
"모험가 좀 죽었다고, 그런 녀석이 여기로 쳐들어온다면.
잠깐 머뭇거리다 말을 끝맺었다.
"그거 역시 이상하겠지?"
"아하하하.
레나가 크게 웃기만 한다.
대답할 가치가 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제국은 넓고검주劍主는 넷밖에 없어요."
그녀가 말을 이었다.
"다른 인간 따위는 사람 취급도 안할걸요? 모험가가 죽었다고 여기로 와요? 그럴 리가요."
바로 그 녀석에게, 우리 모두 죽었다고 말할 수도 없어서 가만히 있었다.
'바티엔느 폰 레안드로 후작이라.
푸른 사자 기사단, 검주劍主.
머릿속에 그 존재를 적어 놓았다.
언젠가 이유를 알게 될 날이 을 것이다. 그놈이 이 던전에 쳐들어왔던 이유를.
- 달그락.
나는 머리에서 잡념을 떨쳐 냈다.
"일단 유블람에 가자."
"벌써요?"
"응."
"〈메마른 지하 묘지〉부터 가야 하지 않겠어요? 그곳이 여기서 제일 가까운데요?"
"아니. 거기로 갈 필요는 없어."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던전을 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러면 가장 적절한 곳이.
레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그냥 이건 날 믿어."
"네."
단호한 내 태도에, 고개를 끄덕이고 납득한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내가 수련하기 위해 던전을 도는 것이다.
내 입장에 따르는 게 자연스럽다.
나는 다음 일정을 생각했다.
일단 유블람에 가서 노인을 만난다. 거기까지는 같다. 〈불〉을 구하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 도시에 간다면?
좀 일찍 가는 거다. 경비대와 마주치게 된다.
〈불〉없이 경비대를 맨몸으로 이길 수 있을까? 불확실하다. 패배할 확률이 크다.
우리가 유블람에 간 시간은 딱 좋은 시간대였다. 다시 그때로 가야한다. 던전에서 하루를 더 보내고, 우리는 유블람에 다시 들어갔다.
- 끼이이익.
성문이 열렸다. 경비대는 무사 통과였다. 손에 은화가 쥐어지자 깔끔하게 성문이 열렸다.
레나는 내 손을 잡고 걸었다.
"가을도 춥네요."
레나가 내 쪽으로 몸을 기댔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말하기로 했다.
"아편 냄새가 나지?"
"콜록! 콜록!"
레나가 기침을 했다.
"어떻게. 저보다 먼저 아세요?"
"내가 냄새에 좀 예민하거든. 경비병도 눈동자가 풀려 있고. 우린 외부인이니까 조용히 하자고."
레나가 눈만 깜빡였다. 미약한 웃음이 터져 나오려고 했지만, 이 도시에서는 웃고 싶지 않았다. 루비아가 죽은 도시다.
- 깡! 깡! 깡! 탕탕! 탕탕탕!
대장간을 지나 곧장 걸어갔다. 횐수염의 노인이 골목에서 나왔다. 시선이 느껴진다. 무시하고 걸었다. 곧그를 찾아갈 거다.
"여기가 유일한 여- 삐그덕.
나는 곧장 여관 문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카운터에 걸터앉은 여자와 시선이 마주친다. 몸의 윤곽을 드러내는 옷은 그대로다.
'확 뒤집어 버릴까.'
하지만 꼬투리를 잡을 만한 무언가가 없다. 정황상 수상하다는 것만으로 다 엎는 건 무리다.
여기는 인간 도시의 한가운데다.
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른다. 금방 살해당할 확률도 높다.
'으음.'
오늘은 얌전히 입실하기로 한다.
"방은 욕조가 있는 곳으로. 식사 때는 흑맥주 한 잔 부탁하고."
- 띠링!
[레나의 호감도가 2 올랐습니다!]
[현재 호감도: 31]
갑자기 반투명한 메시지가 떠서 옆을 돌아봤다. 레나가 살짝 상기된 얼굴로 눈을 깜빡인다.
'대신 말해 주기만 해도 호감도가올라가나?' 호감도는 예전보다 살짝 빠른 속도로 올라가고 있었다.
'오늘도 좀 피곤하겠군.'
방에서 장난을 받아넘길 생각을 하니 살짝 피곤해졌다. 그녀의 손을 잡고 방으로 을라갔다.
그런데 그녀의 태도가 조금 다른것 같았다.
'호감도가 올라간 거 아니었나?'
저번 생보다 말수가 조금 적어진 것 같았다. 별말 없이 나를 자꾸 흘끗흘끗 쳐다본다.
목욕을 마친 뒤, 수증기와 함께 욕실에서 나온 그녀가 묻는다.
"목욕하고 싶어 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책에서 읽었으니까. 인간은 주기적인 목욕이 필요하지 않나?"
"기사님은요?"
"좁은 건 싫다. 필요하다면 나중에 온천에라도 가는 걸로 하지."
식사를 마친 레나는 침대에서 꿈틀거렸다. 내 쪽으로 머리를 이동한뒤에, 나를 흘끗거렸다.
"화염병 써 보신 적 있어요?"
"써 본 적은 없다. 던져서 깨트리면 되는 거 아닌가? 기름과 끈적한걸 적당히 섞어 만들면 되겠지."
"잘 아시네요! 써 본 적 없다더니."
"추측이지, 뭐. 내일 아침에 잡화점에 가자."
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칼을 안았다.
침입자는 없다. 하지만 이 자세가편하다. 레나는 잠들지 못하고 몸을 뒤척였다.
"잠이 안 오나 보군."
"설레서 잠이 안 오나 봐요."
"무슨 말이지?"
"아니에요."
그녀는 이불에 조용히 몸을 부비며뒤척였다.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새벽이 되어서야 잠드는 것 같았다.
"으으응.
저번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 그녀와 잡화점으로 향했다.
잡화점은 커다랗다. 바깥의 붉은 창고를 가리켰다.
"기름은 저기 많군."
레나는 그 근처에서 냄새를 맡고입술을 살짝 벌렸다.
"진짜네요. 어떻게 아셨어요?"
"보면 알지 뭐."
잡화점 안에서 작은 소란을 피웠다. 주인은 휘발유도, 타르도, 병도없다고 했다.
"휘발유 냄새, 나던데?"
"아, 못 팝니다. 이미 살 사람들이 있어서. 예약이 끝났소."
그때 내가 끼어들었다.
"구매는 이미 끝나지 않았나? 살사람이란 말은 좀 이상하군."
경비병들은 이미 화염병을 잔뜩 마련해서 거미 굴로 향했다. 그렇다면'살' 사람이란 표현은 이상하다.
잡화점 주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살 사람이 맞소. 한 번 만사는 것도 아니고, 정기적으로 파는 거니까."
정기적으로 같은 던전에 간다는 뜻인가? 사실 같은 던전을 여러 번방문하는 일은 가능하다.
내부를 완전히 말살해 버리지 않는이상, 거미는 얼마든지 다시 알을깔 수 있기 때문이다.
보스 같은 존재가 다시 생기기 위해서는 특별한 조건이 필요하지만.
주인이 크흠, 헛기침을 했다.
"내가 왜 이런 것까지 말한담. 아무튼 못 파오!"
레나는 사겠다고 좀 더 우겼고, 나는 잠시 지켜보다 밖으로 나가자고했다. 그녀는 뭔가 눈치를 챈 듯 내게 순순히 따랐다.
뒤에 따라붙는 기척이 느껴졌다.
흰 수염의 노인이다.
그가 나타났던 장소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몸을 드러내기 직전, - 철컥.
뒤로 돌았다.
"히 익!"
노인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난다.
"할 말이 있으면 해라."
놀라던 노인은 집으로 우리를 인도했다. 도시를 떠나라고 권고했다.
어차피 연기에 불과하다.
노인은 우리를 관찰했다. 잡화점의 실랑이를 보았다. 우리가 화염병이 필요하다는 걸 안다.
〈불〉로 유혹한다면 쉽게 넘어올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지난 생의 나는 거기에 넘어갔다.
"이걸 받게나."
노인이, 철로 된 검은색 병을 꺼내며 말했다.
"잡화상에서 보니 거미 굴에 가고 싶어 하는 것 같던데. 내 마지막갑옷을 입어 준 보답이네."
"고맙군."
한마디 거절도 없이, 덥석 손에서 낚아채듯 바로 받았다.
"홈. 홈홈.
내 태도에 노인이 홈칫한다.
"이게 뭔지는 아나?"
"설명해 주겠지, 뭐."
"이건 아주 귀하고 무서운 건데.
〈그라스미어의 불〉이라네."
적당히 노인의 설명을 들었다.
노인은 우리에게 한 포대의 가루를 건넸다.
"쓰기 전에 이걸 몸에 뿌리게. 이걸 끼얹으면 뜨겁지 않아. 불에서 몸을 보호해 준다네."
'또 사기인가.' 나는 포대를 열었다. 반짝이는 가루가 포대에 가득했다.
포대 속가루를 한 줌 집어, 노인에게 확 끼얹었다.
"이, 이게 무슨 짓인가!"
"한번 실험해 봐도 되겠지?"
"무, 무슨!"
- 콱!
나는 노인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내 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뜨겁지만 않겠지."
"r노인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방염防炎 효과는 전무하다. 알면서 왜 이런 걸주지?"
"정말이에요?"
레나가 놀라서 나를 바라봤다. 나는 노인을 허공에 든 채 말했다.
"무슨 꿍꿍이냐. 왜 우리까지 죽이려고 한 거냐."
"으으. 자, 자네?."
허공에서 침음이 흐른다.
"말해라."
"자네, 인간이 아니지 않은가."
- 달그락.
나는 놀라서 노인에게 물었다.
"그게 어쨌. 아니, 그걸 어떻게 안 거지? 너는 마법사인가?"
노인이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내가 갑옷을 만든 지 벌써 오십 년일세. 갑옷 안에서 뭐가 움직이고 있는지도 모르겠나?"
침묵했다.
"어떤 사연이 있는 마물魔物인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일을 하고 죽는걸 세. 고맙게 생각해야지."
노인의 멱살을 놓았다. 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노인이 주저앉았다.
레나가 옆에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상황이 전반적으로 그녀에겐 매우 황당한 듯했다.
"아니, 할아버지. 제대로 된 걸 빨리 내놔요. 이걸 준 목적도 말 하구요. 좋은 일은 또 뭐예요?"
노인은 전부 털어놓았다. 하지만 원액에 대한 방염제 따위는 없다 고했다.
"그럼 희석해 줘요!"
우리는 1/20로 희석된 용액을 여러 통에 나눴다. 노인은〈불〉을 발사할 수 있는 혹철 분사기 몇 개를 더 갖고 있었다. 찍어 내는 틀이 있는지 규격이 일관되어 있었다.
'진작 이렇게 받았어야 하는데.'
더 가져갈 게 없나 싶어 주위를 돌아봤다.
"이 투창, 괜찮아 보이는군."
벽에 걸린 투창이 보였다. 들어 보니 무거웠다. 특별히 제작된 것 같은, 저지력에 집중한 것 같은 작품이었다.
"그건 안 파는 건데.!"
"우릴 죽이려고 하지 않았나? 값은이 정도면 되겠지."
- 쨍그랑.
투창 하나당 은화 하나씩 노인에게 던져 줬다. 물론 이것보다 훨씬 가격이 비싼 물건일 것이다.
제대로 던진다면, 던전 초반 통로의 거미들 정도는 충분히 저지할 수있는 위력으로 보였다.
그 외에도 좋아 보이는 무기 등,
노인의 밑천을 탈탈 다 턴 뒤 집을 나서며 말했다.
"그놈들은 확실히 죽여 줄 테니, 걱정하지 마라."
노인의 입을 막기 위해 죽일까 싶기도 했지만, 어차피 그에게도 다른데 말할 만한 사안은 아니었다.
우리는 평화롭게 길을 나섰다.
"어떻게 그런 걸 다 아세요?"
레나가 입술을 달싹거리며 물었다.
제법 상기된 표정이다.
"책 보고 알았지."
나는 레나의 상태창을 띄운 채 대답했다.
[호감도: 38]
- 연달아 레나에게 놀라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당신의 지식과 능력에'굉장히 감명을 받은' 상황입니다.
호감도가 지속 상승 중입니다.
[특전]
- 재능(B)
〈충분히 탁월한 재능〉
.레벨 업 때마다 얻는 스탯에 플러스2보정됩니다.
- 전투 감각(B)
〈하나 더 열린 감각〉
.같은 스탯을 가지고도, 훨씬 더뛰어난 전투력.
노인의 집에서 있었던 일을 통해약간 더 호감도가 올랐다. 저번보다 높은 호감도다.
"무슨. 책이요?"
"캐빈 애슈턴이 쓴 책. 아주 좋은 책을 쓰는 인간이더군. 찾게 되면 나에게 좀 넘겨줘."
물론 농담이다.
그가 쓴 책은 고작 두 권 읽었고,
내용도 전혀 다르다.
"캐빈 애슈턴이요? 캐빈 애슈턴.
알겠어요!"
'농담이라고 말해야 되나?' 살짝 고민하다 그냥 잊어버렸다.
희석한 통 하나를 그녀에게 들게 했다. 여분은 내가 들고 있지만, 되도록 그녀에게 사용하게 할 생각.
이번에는 레나를 집중적으로 성장시킨다. 효율이 압도적이니까.
그녀를 잘 키우면, 이 지겨운 반복을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51화 감정鑑定과 감정感情 사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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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나에게 분사를 몇 번 연습시킨 뒤 곧바로 던전으로 향했다. 말라죽은 나무들을 지나 거미굴 안으로 들어갔다.
"잠깐."
"왜 그러세요?"
"저기 시체 보이지?"
"네. 안에서 상반신만 먹혔네요."
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묶인 채몸 윗부분만 구멍에 처박힌 인간 서넛이 보인다.
"이렇게 조준하고.
흑철黑鐵로 된 분사기를 잡고 구멍을 향해 조준해 줬다.
"쏴라."
"저기로 펌프를 돌려요?"
"그래."
- 파바밧!
레나는 나에 대한 신뢰가 꽤 쌓인모양인지, 별말 없이 그대로 세차게 펌프를 돌렸다.
- 화르르르르!
관 끝의 점화 플래그에 불이 붙으며, 1/20로 희석된〈그라스미어의불〉이 구멍을 향해 뿜어졌다.
- 끼기기기긱! 크기이이익!
비명을 지르며, 살짝 그을린 중형거미들이 구멍에서 쏟아져 나온다.
"흐읍!"
갑자기 튀어나오는 놈들에 레나가 살짝 놀란다. 하지만 펌프를 돌리는 속도는 더 빨라진다.
- 파바밧!
- 화르르르르륵!
녀석들이 동굴 벽 옆으로, 위로 튀어 올라 피하지만 이미 상당히 데미지를 입은 터. 레나는 담담한 표정으로 화력을 집중시킨다.
- 키기기긱!
한 마리를 태워 죽였다. 다른 하나가 천장을 통해 덮쳐 온다.
- 퍼걱!
노인의 집에서 탈취한 투창을 던져거미에게 꽂았다. 투창의 무게와 힘에 거미가 십 미터 가까이 뒤로 물러난다.
- 화르르!
다시 화염이 쏘아진다. 달려들던 거미의 숨이 툭 끊어진다.
"구멍 근처에서 한 번씩 쏴."
레나는 침을 한 번 삼키더니 곧바로 명령을 수행한다.
- 화르르!
- 키기이이익!
거미들의 비명이 안쪽에서 울린다.
비명은 길지 않았다. 레나는 지나가둣 말했다.
"며칠 동안 식사가 어렵겠네요."
"그런가?"
"비위 약한 분이라면 말이죠."
나는 그녀의 상태창을 점검했다.
레벨이 5에서 7로 올라 있었다.
[이름: 레나]
[도적 Lv.7]
[체력-13 힘-14 민첩-18 지혜-15]
'역시 대단하군.' 능력치가 대폭 올라 있었다.
고작 거미 두 마리를 잡은 걸로 전체 포인트가 8이나 오른 것이다.
거미가 나오는 포인트마다 전부 레나에게 화염을 방사하게 했다.
멀리 떨어져 안전한 거리에서 지속적으로 발사한 덕분에, 〈불〉은 빨리 소모되었다.
- 퉁!
레나가 다 쓴 분사기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안쪽의 협곡. 부서진 사원에 남아있는 거미들을 전부 처리했을 때, 그녀의 레벨은 15가 되어 있었다.
'20까지 얼마 안 남았군.'
20부터는 레벨 업에 필요한 경험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거기까지는 금방 달성시켜 줄 수 있을 것 같다.
전부 레나에게 몰아준 덕분에 내레벨은 아직 1이다.
하지만 보스 존에 들어가 경비들과 던전 보스를 처리하면 된다. 내 레벨은 언제든 올릴 수 있다.
"수고했어."
레나는 현실이 잘 와닿지 않는 둣,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
"왜 그런 표정이지?"
"이렇게까지. 해 주실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나는 그녀의 상태창을 점검했다.
[이름: 레나]
[도적 Lv.15]
[체력-21 힘-22 민첩-29 지혜-20]
포인트가 자동으로 분배된다. 민첩이 조금 높고, 나머지는 균등하게 분배되고 있다.
레벨에 비해 놀라운 능력치다.
여기서 키워 준 덕분인지, 호감도가 조금씩 올라 40을 찍었다.
상한선이다.
"이렇게 해 주는 사람이 없었나?"
그녀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남자들이 널 좋아하지 않았어?"
레나가 피식 웃는다.
"그들의〈좋아함〉은, 제가 약한 상태로 있길 원하는 거죠. 절대 강해지는 걸 원하지 않아요."
"그런가."
타자의 세계관에 이러쿵저러쿵 개입할 이유는 없다.
어차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그만이다.
- 픽!
레나의 목덜미를 살짝 쳐서 기절시켰다.
'운이 좋았군.'
이번에는 실패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민첩은 벌써 29.
바로 옆에 있었던 데다가, 그녀가한창 감상에 젖어 있던 덕을 봤다.
'대피소'에 그녀를 넣고 밖에서 문을 잠갔다. 레나도 레벨이 오르긴 했지만 아직은 위험하다.
보호하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무엇보다, 경비병들을 죽이는 건 내개인적인 일이다.
나와 루비아와 그들 사이의 일. 레나를 개입시키고 싶지 않았다.
- 째쟁!
희석시킨 흑철黑鐵의 분사기를 전부 모았다. 남은 건 세 개.
다른 것들과 달리 더 진하다. 통이 없어서 어쩔 수 없었다.
1/7로 희석시킨 액체. 어느 정도의 위력을 보여 줄지는 모르겠다.
'죽지는 않았으면 좋겠군.'
- 투둑.
나는 분사기의 점화플러그를 전부 제거했다. 직접 불을 뿜는 대신, 이액체로 안에 있는 놈들을 흠책 적셔줄 생각이다.
플러그를 뺀 분사기를 잡아든다.
다른 준비는 없다.
이제 가짜 방염 제는 없다.
노인은 갑옷 안의 나를 알아봤다.
달그락거리는 해골임을 파악했다.
인간이 아니기에 방염 제를 주지 않았다 한다.
그 역시 거짓말이다. 노인은〈불〉
밖에 없었다. 〈불〉에 저항할 만한방염제를 갖고 있지 않았다.
내가 인간이었다 해도 별반 달라지는 게 없었던 셈이다.
관을 조준하고 손잡이를 쥐었다.
앞으로 걸어갔다. 사원을 벗어나 심층부로 들어간다. 전과 같다.
[보스의 인식 범위에 들어갑니다.]
[우두머리 사냥이 이루어지고 있는 중입니다.]
보스를 적대하겠냐는 메시지가 다시 떴다. 저 거대 거미를 도와주더라도, 공격받지 않을 확률은 0.1%에 불과하다. 모두 한 번에 바짝 태워 버리는 편이 낫다.
피아被我는 분명하다. 적은 나를 제외한 전부고, 내 편은 오직 나 하나다.
천장 사방에 거미 고치가 매달려있다. 거대한 구덩이 안쪽을 화염의고리가 두르고 있다.
- 쨍그랑! 펑! 화르르르!
불의 고리는 점점 좁혀진다.
몸길이 4미터쯤 되는 거대한 거미가 괴로워하며 날뛴다. 표피에 이미불이 붙었다.
- 키가아아아아아악!
나는 경비병을 하나하나 훌어본다.
저번에는 대머리에게만 시선을 빼앗겼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하나하나 천천히 훌어보고 있다.
모두 발견했다. 대머리가 뒤에 거느리고 나오던 놈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한다.
이미 찌르고 불태워 죽인 한 놈.
그 외의 세 놈이 전부 이 장소에 있었다.
그날 밤이 떠올랐다.
수레를 끌고 나오던 놈이 보인다.
대머리에게 맞아 온통 멍투성이던얼굴은 다 가라앉아 있었다.
그날의 일이 이것들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일상에 불과할 것이다.
나는 상관없다. 인정하는 게 달가울 리 없으나 부서지고 짓밟히는 건나의 일상이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매를 맞고 매도당하고 아무에게도 하소연할 수없는 건 내 일상이다.
하지만 루비아는 다르다. 그녀는 그런 취급을 받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잘못한 게 없다.
나는 조용히 분사기를 겨눴다.
보스존.
거대한 구덩이를 둘러싼 경비병들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대머리에게 죽도록 맞아, 온몸에 멍이 들었던 놈을 본다.
놈은 즐겁게 화염병을 던지고 있다. 거미가 씹다 뱉은 사형수의 시체가 화르르 불탄다.
'시작하지.'
- 좌르르!
- 화륵!
나는 위에서 그라스미어의 불을 놈들에게 마구 뿌렸다.
- 좌특!
흑철의 분사기에서 액체가 힘차게 뿜어진다. 점화플러그를 빼 놓았기에 불은 없다.
루비아가 실려 있던 수레를 절벽 아래로 밀어 버린 멍투성이 놈.
그의 얼굴에 뿌린다. 옷 안으로 뿌린다.
"응?"
액체를 맞은 놈이 이쪽을 바라본다. 수레 근처에 있던 녀석이다.
놈은 그 상황에서 화염병에 불을 붙이려다,
- 화르르르륵!
"끄기이이익익!"
온몸이 한 번에 구워져 버린다. 가죽과 살이, 입은 갑옷이 한 번에 익어 불타며 괴로워한다.
초열焦熱에 두들겨 맞아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다.
좀 더 천천히 고통을 가하고 싶다.
차근차근 심문하고 진상을 알아내고 싶다.
하지만 그럴 힘은 부족하다.
산 채로 구워 버리는 것 정도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게 내 현재의 좌표다.
불이 옮겨붙는다.
내가 분사한〈액체〉를 따라, 불도고통도 표정도 옮겨붙는다. 나는 높은 곳에서 그들을 바라본다.
루비아를 죽이고, 쓰레기라도 매립하는 것처럼 그 시체를 야산에 버린 놈들이 산 채로 활활 불타는 모습을 본다.
"끼, 끄히히이이으아!"
비명 소리가 다채롭다. 느긋하게 음미할 여유는 없다.
뒤로 빠지는 편이 좋을 것이다.
1/7로 희석한 액체는 새파랗게 타올랐다.
인간 열다섯의 비명 소리는 하나하나가 새로운 결이 있다.
대머리의 비명이 마지막까지 울려 퍼진다. 그가 끝까지 살아남는다. 놈이 루비아를 죽였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내가 목격한 간살과 시체유기의 현장.
거기서는 저 대머리가 지휘자다.
어쨌건 놈에게 책임이 있다.
"구, 구와아아악!"
온몸에 불이 붙은 대머리가 중심부를 빠져나온다. 놓지 않고 잡은 칼을, 나를 향해 휘두르려 한다.
살갗에 불이 붙어 타오르면서도 제법이다. 입구를 내줄 생각은 없다.
이자는 여기서 불타 죽는다.
- 쨍그랑!
비어 버린 분사기를 내던졌다.
한 손으로 방패를, 다른 손으로 검을 잡았다. 막아낸다.
불타 죽게 만들 것이다. 도망가지 못한다.
하지만 그 때,
- 퍼걱!
날카로운 장검 한 자루가 대머리의 가슴에서 튀어나온다.
불쑥 튀어나온 칼날은 피로 붉게 물들어 있다.
"끄, 꾸어어어.!"
가슴을 뚫고 나온 '칼날'을 대머리가 내려다봤다. 도무지 믿고 싶지않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칼날'은 살아 있는 것처럼 마구 꿈틀거렸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칼날 뒤쪽에는 검붉은 표피가 붙어있었고, 위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느껴진다. 이 날카로운 금속은 인간의 검이 아니다.
'빠져나온 건가?'
화염병을 던지던 경비병들이 아비규환에 빠져, 그녀를 둘러싼〈불의 고리〉가 일시적으로 약해졌을 때.
열두 발의 웹슬링거는, 이 던전의 보스는 구덩이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하나의 제 '다리'를 대머리의 가슴팍에 쑤셔 넣은 것이다.
"끄으아아아.!!"
대머리는 그 와중에도 비명을 질렀다. 앞으로 숙여 날카로운 '다리'에서 몸을 빼내고, 뒤를 돌아 반격하려 한다.
하지만 내가 용납하지 않는다.
_ 쨍!
나는 대머리의 칼을 방패로 짓눌렀다. 그리고, 거미의 '다리'가 쑤셔놓았던 부분에 다시 한 번 바스타드소드를 찔러 넣었다.
- 퍼걱!
눈앞에서 인간이 불타고, 바로 뒤에서는 직경 4미터의 거미가 불타고 있다.
- 푸슛!
피가 샘물처럼 솟는다. 진화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열기가 느껴진다. 갑옷이 달궈진다.
- 띠링!
[화염에 의해 0.3초당 2.25%의 체력이 감소합니다!]
[체력이 84.25%로 떨어집니다!]
[체력이 82%로 떨어집니다!]
[체력이 79.75%로 떨어집니다!]
[체력이.]
[로 떨어집니다!]
[체력이 66.25%로 떨어집니다!]
내 몸에도 불이 옮겨붙는다.
순식간에 몇몇 부분들이 녹아내리는 것 같다. 나는 버티고 있다.
저번처럼 아예 저항할 수 없을 정도의〈불〉은 아니다.
버틴 채로, 칼날을 쑤셔 박아 경비대장의 탈출을 저지한다. 마약이라도 잔뜩 복용했는지, 비정상적인 행동력을 보인다.
- 키갸아아아악!
화염에 불타는 거미의 비명.
- 콰득!
표피에 붙이 붙은 채로 거미는 곧거대한 머리를 들이댔다.
그리고 경비대장의 상반신을 우걱우걱 씹어 먹었다.
온몸에 박힌 눈을 번들거리며 경비대장을 산 채로 씹어 먹는다.
거미의 뱃속에서 경비대장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이런.'
거미에게 복수를 빼앗겼다.
끈적거리는 기름이 주위에 붙어,
화염이 미친 둣 너울거린다.
[체력이 41.75%로 떨어집니다!]
이 새파란 뜨거움이, 묘하게 상쾌하다. 이곳이 내가 사는 세상이다.
마음에 든다. 이런 순간은 상쾌할 정도로 단순하다.
'젠장.,
비명과 적의와 살해.
모든 것이 적과 나로 갈라진다. 모든 걸 쓰러트리면 된다. 경비대장을빼앗아 먹은 거미를 노린다.
온몸을 축으로 삼아 돌렸다.
아래에서 위로,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연달아 대검을 휘둘렀다.
놈의 상반신을 입에 문 거미를 반으로 갈라 버렸다. 초록색 독액이 사방에 터진다.
[독액에 의해 1초당 1.33%의 체력이 감소합니다.]
- 띠링!
[경고! 체력이 12.5% 이하입니다!]
뒤로 물러난다.
갑옷이 상당 부분 녹아 버린다.
더 이상 〈위장〉으로써의 기능은하기 힘들 것 같다.
눈앞에서는, 반투명한 창이 연달아 뜬다. 레벨 1 상태에서 D랭크 던전보스를 잡았다. 그에 걸맞은 보상이 있을 거다.
-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띠링!
[경고! 체력이 10% 이하입니다!]
온몸에 붙은 불이 쉽사리 꺼지지 않는다. 너무 전투에 몰입해서, 거미녀석에게 가까이 붙은 탓이다.
[클리 어!]
[던전 우두머리를 처치했습니다.]
[랭크 판정: D+]
[난이도 판정: 절망]
[난이도 판정으로 용사 포인트가200% 가산됩니다.]
[체력 10% 이하에서 던전을 클리어하셨습니다.]
[용사 포인트가 50% 가산됩니다.]
['경계선상의 모험가' 퀘스트를 시작합니다.]
'이건 또 뭐야?' 당황하고 있을 때에도, 포인트는차근차근 계산되고 있었다.
[D+ 랭크 클리어: 54포인트]
[난이도 가산: 108포인트]
[체력 10% 가산: 27포인트]
[189포인트를 획득하셨습니다!]
- 띠링!
[상점 이용 권한을 산출합니다.]
[하급 견습생 (Apprentice Low)으로 이용 권한이 인정됩니다.]
- 다음 등급까지: 403/1, 024[적절한 세 가지 능력 가운데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능력 스캔 중.]
[플레이어 스캔 중.]
52화 감정鑑定과 감정感情 사이 (3)
***************************************************
[용사 포인트로 첫 번째 선택을 시작합니다!]
눈앞에서 파란 빛이 피어난다.
1. 화염 저항 플러스30- 당신은 지금 불타고 있습니다.
화염 저항이 필요합니다.
- 이 특전을 선택할 경우, 1시간동안 B랭크 이하의 화염 데미지를입지 않습니다.
2. 질주 Lv.3- 당신은 발이 많은 거미를 죽였습니다. 이 거미는 땅에서도, 거미줄위에서도 아주 잘 움직입니다.
당신이 흡수한 포인트(정수)는, 다음 효과를 내는 스킬로 변환하기에 효율이 좋습니다.
- 질주 Lv.3: 15분 동안 300% 속도를 낼 수 있습니다.
- 쿨타임: 50분.
- 하루 사용 제한: 3회3. 거미류 친화도 플러스10- 당신은〈파멸된 거미의 볼트〉, 즉 거미굴의 어머니를 죽였습니다.
하지만 그 거미 보스는 불에 타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당신의 살해를 자비로 볼 수도 있겠군요. 모든 거미류에 대한 친화도가10 상승합니다.
친화도가 상승할 경우,
- 거미류 마물魔物의 약점을 더쉽게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 약간의 교감이 가능해집니다.
- 거미들은 당신보다 다른 상대를 먼저 공격할 것입니다.
이 중에서 마음에 드는 걸 고르라는 건가.
2번이 무척 유용해 보인다. 하지만나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온몸이 뜨겁다. 갑옷을 녹인 불이 뼈에 옮겨붙고 있었다.
- 띠링!
[경고! 체력이 7.5% 이하입니다!]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체력이 떨어지고 있다.
"1번, 화염 저항."
거미 친 화도는 모르겠지만, 2번 특전인 질주는 무척 유용해 보인다.
하지만 당장 살고 보는 게 급하다.
또 죽을 생각은 없었다.
[선택이 완료되었습니다!]
[화염 저항 플러스30]
[1 시간 동안 B랭크 이하의 화염데미지를 입지 않습니다.]
- 스르르.
몸에 붙은 불이 마법처럼 꺼져 가기 시작했다.
나는 몸을 내려다봤다. 갑옷 곳곳이 녹아 구멍이 뚫려 있다.
루비아가 남긴 갑옷이다. 이대로 버릴 생각은 없다. 다만 큰 수리가필요할 듯하다.
저벅저벅 앞으로 걸어갔다. 아직 구덩이에서는 불이 꺼지지 않았다.
하지만 데미지는 들어오지 않는다.
새까맣게 타 버린 경비대장의 시체, 다른 경비병들의 시체가 곳곳에 널려 있다.
'이겼다.'
조금 엉뚱한 방식이기는 했지만,
루비아를 간살한 놈들을 다 태워 죽인 것이다.
그 감정에 취해, 뜨거운 줄도 모르고 멍하니 서 있었다. 미약하게나마복수를 해낸 것이다.
- 달그락!
나는 검 손잡이를 꽉 쥐고 몸을 살짝 떨었다. 수레를 끌고 나오던 놈들의 모습이 다시 한 번 눈앞에 겹쳐지는 것 같았다.
"한 번으로는 안 돼.'
앞으로 몇 번이나 다시 회귀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놈들은 두고두고 태워 죽여야겠다.
몇 번이고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 태워 죽이는 것도 질릴 것이다.
압도적인 힘으로 제압할 수 있게된다면, 천천히 다른 방법을 시도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산 채로 거미들에게 먹이로 던져주거나, 뭐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레나에게 물어보면 잘 알려줄 것 같다.
나는 저벅저벅 소리를 내며 놈들 사이로 걸어갔다.
툭툭, 칼로 몸을 뒤집으며 녹아내린 은화를 수집했다.
'어?'
경비대장의 다 타 버린 안주머니에늘어붙은 건 은화가 아니었다.
- 반짝!
반쯤 녹아내린 금화였다.
'호오.'
세이론이다.
90%의 금과 10%의 미스 릴로 만들어진, 가장 커다란 주화. 무게는 로티(은화)의 두 배가 넘고 지름은위젯(동화)의 다섯 배가 넘는다.
1세이론의 가치는 100로티. 그리고 무려 1만 위젯에 달한다.
10%의 미스 릴과 90%의 금으로 제작되는 세이론은 마법사와 귀족들의 돈이다.
제국 황실 조폐 청에서 아쥬라의 탑과 협조해서 제작한다.
어떻게 이런 걸 알았냐고? 서큐버스님이 무릎에 내 두개골을 눕혀 놓고 책을 읽어 주셨기 때문이다.
인간 세계에 대한 내 지식이란 건 상당히 파편적인데, 서큐버스님이이야기해 주신 건 알고 나머지는 거의 잘 모르는 식이다.
그분은 이런저런 것들을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은 호의적이고 따듯한 웃음을 띠며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해 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살랑이는 미풍 같았고, 혀끝으로 촉촉하게 머릿속을 더듬는 것 같았다.
'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치유되지만, 그분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떠올리자 온몸이 달그락거리는 것같았다.
복수해야 한다. 그게 내가 가야 할 유일한 길이다. 마음에 잠긴 자물쇠가 철컥거린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시체들을 수색했다. 불이 잦아들고, 레나를 깨운 뒤 수색을 맡겨도 되겠지만.
그녀가 새까닿게 타 버린 인간 시체를 뒤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내 기분상의 문제였다.
그녀가 그 작업을 괜찮아하는지,
심지어 즐기는지 따위는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다.
인간들의 몸에서는 더 이상 별다른 게 나오지 않았다.
녹아내린 은화와, 경비대장이 갖고 있던 금화가 전부였다.
다른 걸 갖고 있더라도 벌써 다타 버렸으니, 회수할 수 없었다.
나는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아, 보스를 뒤져야지.'
깜빡하고 있던 거미 보스의 시체를 뒤져 봤다. 역시 그리 깔끔하거나, 아름다운 작업은 아니다.
반으로 가른 녀석의 심장부에서 붉은 보석이 나왔다.
[웹슬링거의 홍옥]
웹슬링거는 오랫동안 인간을 주 먹이로 섭취해 왔습니다. 그녀의 뱃속에서 메아리치는 인간들의 통곡과 절규가 축적되어, 붉은 결정結晶이되었습니다.
'인상적이긴 한데.' 음울하게 붉은빛으로 반짝이는 보석은 제법 인상 깊다.
하지만 이게 가격을 얼마나 받을 수 있을지, 어떤 식의 가공이 가능할지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 나에겐 그런 걸 측정할 능력은 없다.
어떤 기능이 있는지도 별도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레나에게 맡겨야겠군.'
그녀도 알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아는 누군가에게 가져갈 수는 있을것이다. 물론 내가 아이템을 감정하고, 해석할 수 있는 게 가장 이상적이다.
감정 마법 같은 거라도 익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꿈같은 일이지만, 죽음을 반복하다 보면 언젠 가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레나를 깨우기 위해 저벅저벅 사원 안쪽으로 다시 돌아갔다.
"왜 저만 빼고. 어떻게 저만 쏙빼놓고 갈 수가 있어요? 제가 그렇게 못 미더웠어요? 제가 지금 얼마나 비참한 줄 아세요?"
레나는 화가 많이 나 있었다.
눈물을 후두둑 홀리며 소리쳐 따졌다. 나는 그 모습에 당황했다. 하지만 크게 내색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었다.
녹아 버린 금화 몇 개와, 서로 엉겨 붙어 은괴銀魂가 되어 버린 덩어리를 그녀에게 건넸다.
"이게. 뭐예요?"
샛노란 금을 보고 레나의 눈이 반짝인다.
"경비병들에게서 나온 거다."
"푸하. 아. 진짜.
그녀는 방울방울 맺힌 눈물을 슬쩍 털어 낸다. 식어서 굳은 작은 은화와 금화를 두 손으로 받는다.
"돈은 좋잖아요.
한결 가라앉은 태도로, 대략적인액수를 가늠해 보던 레나가 조금씩 안정을 찾는다.
"하아.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는다. 나를 향해서 씩 웃어 보인다.
"꽤 되네요."
이제 화가 풀린 걸까. 하지만 곧다시 진지한 표정이 되어 외친다.
"그래도!"
"너무했어요. 제가 빨리 강해 지면되는 거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는 절대 이런 식으로 빼놓지 마세요. 전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아니에요."
그 말은 맹세처럼 들렸다.
'아, 잊고 있었군.'
나는 주머니에 넣고 있던 보석을 꺼냈다. 붉은빛을 내는 주먹만 한 보석을 보고 레나가 작게 침음을 토했다.
"아.
"거미에게서 나온 거다. 그럭저럭쓸 만하지 않을까?"
그녀의 얼굴이 붉게 상기됐다.
"분하지만. 그래도 좋네요. 하하하. 역시 돈이 최고야."
울다가 웃다가를 반복하는 모습 을보고, 조금 무섭다고 생각했다.
'목덜미를 너무 세게 때린 건 아니겠지? 힘 조절은 잘 했는데.'
"아직 약한 건 사실이니까, 빨리강해질 수밖에 없죠, 뭐."
"곧 나 이상으로 강해질 거다."
"정말 그럴 수 있을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그리고. 그 정도면 충분한가? 승급이란 거."
레나가 눈을 깜빡인다. 생각을 정리하는 듯 고개를 살짝 갸웃한다.
"정회원 승급이요? 지나치죠. 여기 있는 은화만으로도 가능해요. 금화와 보석은 처분하지 않아도 충분한걸요. 목표는.
"지부장인가?"
레나가 씩 웃었다.
"에이. 이 정도면 그 위를 노려봐야죠. 도움만 받고 있는걸요. 보답할 위치까진 가 봐야죠. 네크론 놈들을 찾는다고 하셨죠?"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경비병들을 다 태워 죽이긴 했지만, 루비아를 건드린 조직 전체를 뜯어내버릴 필요가 있다.
에라스트의 영주라는 녀석과, 이조직 전체가 문제가 된다.
그들의 손발을 못 박고, 심장을 뜯어내는 것은 상당히 개인적인 일이기도 하다.
루비아는 논외로 치더라도.
일단 그 조직 놈들이 나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죽이지 않았는가.
무덤에서 죽음을 반복하며 느낀 무력감. 그 감정은 어떤 식으로든 갚아 줄 필요가 있다.
복수는 꽤 즐겁다. 방금 경비병들을 산 채로 태우며 느꼈다. 상쾌하고 만족스러운 일이다.
내게 복수라는 건 어쩌면 습관이나, 일종의 생활양식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지부에 다녀올 건가?"
"그래도 될까요?"
"당연하지."
우리는 던전 밖으로 나왔다.
- 쏴아 아아아.!
밖에는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레나는 로브를 꺼냈다. 내게도 하나를 건넸다.
"인간을 위한 배려는 너 자신에게만 해라."
"그럴까요? 걸친 갑옷을 위한 배려이기도 했는데.
"어차피 이런 꼴이 되었지."
나는 구멍 난 갑옷을 가리켰다. 레나가 살짝 웃었다.
"수리가 필요하겠네요. 그 노인에게 맡기실 건가요?"
"고민 좀 해 봐야겠지."
홀리는 것처럼 대답했다.
레나는 로브를 뒤집어썼다. 천위로 빗방울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방수 처리가 된 것 같았다.
나는 일부러 비를 맞았다.
시체 탄 냄새가 씻겨 내려갔다. 인간 십수 명과, 거대 거미의 시체 탄 냄새는 제법 지독했다.
? 쏴? 아아 ?
비가 뜨겁게 느껴졌다.
구멍 뚫린 갑옷과 곳곳이 타 버린망토, 그 안에는 뻔뻔스럽게 멀쩡한 나만 남았다.
가을비가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수액이 빨려서 바짝 마른 나무들이 축축하게 젖어 간다.
수직으로 내리는 빗속에서 우리는 일부러 조금씩 비틀대며 걸었다. 그러고 싶은 기분이었다.
걷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지금 가는 곳은 어디지?"
그녀의 길드로 간다고 했다. 어떤 곳인지 모른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유블람 근처예요. 보육원이죠."
"보육원?"
"예."
길드가 근처 도시에 있다면 후보가 많이 있는 건 아니다. 유블람 근처마을에 접점이 있었나?
하지만 보육원은 길드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았다.
'보육원이 라.'
맥락에서 툭 떨어져 나온 것 같은 단어였다.
"T&T는 곳곳에 지부가 있어요.
마을이나 도시에 점조직으로 형성되어 있죠."
"그렇군."
"제가 접촉할 수 있는 점點은, 유블람 근처에 사는 한 명의 단원뿐이에요."
별말 없이 옆에서 걸었다. 화제를 던진 뒤 방치할 생각이었다.
레나는 그것에 대해 더 말하거나,
이야기의 방향을 돌릴 것이다.
그녀의 자유다.
하지만 조금 신경 쓰이는 단어가 있었다. 보육원이라는 단어를 어디서 들어 본 것 같다.
레나가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은 보육원을 운영하고 있어요. 제법 건실한 남자죠. 거리에서 발견된 아이들을 옮겨 키워요."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린다.
"보통 고아원은 교육이 아니라 수용을 위한 시설이에요. 폭력과 학대로 가득하죠."
"여덟 살부터는 직물 제조 공장에 파견을 가서, 빵 한 조각으로 좁은 업장에 갇혀 먼지를 마시죠."
〈메마른 지하 묘지〉에 매달려 있던 수많은 새장들이 떠올랐다. 몸 하나를 넣으면 꽉 차 버리던 무수한 철창들이.
"견디기 어렵겠군."
"네. 열서너 살만 넘으면 절반이 넘는 아이가 매춘에 뛰어들어요. 남자들은 범죄자나 부랑자가 되어 뒷골목에서 죽어 가죠."
"그런 걸 건실하다고 하나?"
레나가 고개를 저었다.
"그 남자는 다르니까요. 후원이 끊겨도 아이들이 굶지 않게 만들고, 제대로 된 직업을 주선해 주죠. 정작 본인은 수상한 길드에서 일하는 주제에 말이에요."
'이건 칭찬인가?' 레나가 타인에 대해 이 정도로 호의적으로 말하는 건 처음이다.
가슴속에 묘한 감정이 솟아났다.
당황스러웠다. 밖으로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이 감정은, 분명 질투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았다.
"으음.
"어디 아프세요? 역시 몸이.
레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니다. 가지."
"아, 사실 고백할 게 하나 있어요.
부끄러워서 말씀드리지 못했는데.
이제 그 남자보다 기사님을 더 믿으니까, 말씀드리지 않는 것도 이상한 것 같아요."
"뭐지?"
갑작스런 고백 예고에 팽팽한 긴장감을 느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저, 사실.
53화 감정鑑定과 감정感情 사이 (4)
***************************************************
무슨 말을 듣게 될까.
뚜렷이 짐작 가는 건 없었다. 그녀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사실, 지금 가는 곳에 동생이 있어요."
조금 당황했다.
"길드원이라는 자에게 맡기고 있는 건가?"
"맞아요. 보육원에서. 제가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아주 귀여운 아이죠."
길드 원에게 맡기고 있다고? 어떤 사람일까?
인간 불신의 상징 같은 여자인데,
누군가에게 동생을 맡기고 있다는 점은 상당히 의외라고 생각했다.
지금 말하는 투로 봐서는 제법 동생을 아끼는 것 같은데.
"믿을 만한 자인가?"
"네."
레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녀가 믿을 만한 인간이면 대체 어떤 자일지 궁금했다.
"으음.
어차피 그 인간은 곧 만나게 될 것이다. 레나는 걸으면서 간간히 동생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겉으로는 무척 건조하게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고 있었지만, 어딘가숨어서 작은 동생을 꼭 안고 우는 작은 소녀가 보이는 것 같았다.
소녀는 어린 동생과 둘이 남겨졌던 거다. 루비아가 간살衰殺당한 바로 그런 거리에.
물론 그녀의 과거나 사정에 대해깊이 알 필요는 없다. 그런 깊은 사이는 아니다. 그냥 적당히 이용하면 그만이지 않나.
애써 그렇게 생각을 돌리며, 잠시 잊고 있었던 걸 떠올렸다.
'상태창.' 포인트 분배다.
경험치를 나눠 주었다. 저번보다 내가 얻은 양은 적다.
그러나 경비병들과 던전 보스는 모두 독식했다. 레벨은 11이 올라 12가 되어 있다.
체력과 힘, 민첩에 적당히 포인트를 나눠 분배했다.
[체력-46 힘-48 민첩-48 지혜-15]
'음.' 세 능력치는 50에 가까워져 간다.
인간이라면, 꽤나 인정받고 살아갈만한 힘이다.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무재武才를타고나고, 착실한 수련을 한 뒤, 몇 년 동안 사지死地를 구르며 성장한 용병 정도는 되지 않을까.
일반 병사들 사이에서는 제법 두려운 존재로 군림하겠지. 하다못해 산 적질을 한다고 쳐도, 제법 큰 무리의 부두목 정도는 되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해골이다.
주류의 궤執에 서 있지 못한다.
세계는 인간의 것이며, 그들의 인식과 규범을 따른다.
그들의 세계에서.
나는 쓰러뜨릴 마물魔物로 규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내 적은 세계, 그 자체.
마음 놓고 눈에 될 만한 강함은 결코 아니다.
'역시 던전을 돌아야겠어.'
아직 수련을 할 시간이다.
어느새 비가 그쳤다. 슬슬 유블람의 회색 성벽이 보인다. 가을빛을 받아 조금은 물들어 있다.
도시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레나가 향하는 곳은 그 주변이다.
갑옷을 가리는 로브를 걸쳤다.
커다란 목재소가 있는 마을을 향해 걸었다.
이 층짜리 보육원 건물. 그 앞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이 보인다.
"와! 예쁜 레나 언니다!"
"내 언니거든?"
"잘 있었어?"
아이들은 깔깔 웃으며 레나를 둘러싼다. 레나는 그중 한 아이를 안아들고 볼에 입을 쪽 맞춘다.
안아 들린 소녀는 얼굴에 빨갛게 붉히며 꺄르르 좋아한다. 아직 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소녀다.
평범하고 예쁜,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여자아이다.
아이는 어디 하나 그늘 없는 맑은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에 내 안에 담긴 어둠까지 안개처럼 흩어지는 것 같았다.
"네. 동생인가?"
"닮았죠?"
레나가 밝게 웃었다. 무언가 한 꺼풀 벗겨진 듯한 웃음이었다.
'으음.'
외모는 분명 레나를 닮았다.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빼박았다.
그러나.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완전히 다른 세계를 살아온 느낌이다.
내 앞에 있는 열아홉의 여자.
레나라는 인간 암컷은, 눈에 칼을 쑤시고 귀에 독을 부어 넣는 세계에서 살아온 것이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저 소녀가 '평범하게' 웃는 모습을 지켜 주기 위해서.
쉽지 않았을 것이다.
부모도, 아무것도 없는 세계에서.
"원장님은 계시니?"
"원장님은 저 뒤에 가셨어요."
한 아이가 풀숲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누구랑?"
"저. 언니, 이상한 사람들이 왔어요. 원장님은 '어른'들끼리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셨어요."
"어떤 사람들이었니?"
"무섭게 생긴 사람들이었어요. 저는 원장님이 좋아서 원장님만 보고 있어서 알았어요. 다른 애들은 놀기만 좋아하고.
레나는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 언제?"
"어, 방금이요."
레나는 동생과 몇 번의 포옹을 더하고,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언니는 원장님이랑 같이 들어갈게. 잠깐 친구들이랑 기다릴래?"
"응. 나는 착한 아이니까, 기다릴께!"
소녀는 밝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함께 건물로 돌아갔다.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요."
"위험한 건가?"
"글쎄요. 누가 위험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죠."
- 터벅터벅.
우리는 풀숲으로 걸어갔다.
"저긴가?"
목과 양손에 수갑이 채워진 남자가서 있다.
목에 매인 사슬은 무척 짧다. 손 도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그를 둘러싸고 칼을 겨눈 인간 다섯이 보였다.
'얘기를 한다고?'
적어도 '얘기'로 끝날 상황은 아닌것 같다. 수갑을 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쩔그렁거리며 사슬이 움직인다.
"부탁대로, 여기에 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이들에게 험한 꼴을 보이기는 싫었거든요."
칼을 겨눈 다섯.
그중에서, 검은 얼굴의 뚱뚱한 여자가 킥킥거린다. 그녀는 수갑이 채워진 남자를 향해 소리친다.
"멍청한 놈, 네가 찬 게 뭔 줄 은아나?"
"글쎄요. 수갑 아닙니까?"
"용암 석으로 만든 거다. 목을 통째로 잘라 내기 전엔 빠져나갈 수 없지. 감사하다고? 킥킥킥. 그래, 감사해야지."
구불구불한 머리칼의 여자가 킥킥대며 남자를 비웃었다. 주위의 인간들도 한 번씩 웃는다.
그 때.
남자가 사람들에게 묻는다.
"아이들은, 참 귀엽지 않나요?"
"뭐?"
"조금씩 변하는 게. 참 사랑스러워요."
나무 사이로 햇빛이 들어왔다. 남자의 얼굴을 비췄다.
'무슨 소릴 하는 거지?'
남자의 눈이 보인다.
한쪽은 붉고, 다른 한쪽은 초록이다. 병에 걸린 것 같은 얼굴. 묘하게 부자연스럽다. 보석을 박아 넣은 것 같은 질감이었다.
나는 레나에게 조용히 물었다.
"저 남자인가? 길드원이라던. 구해 주지 않아도 되나?"
레나가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방관하는 건가.
"애들에게 감히 헛바람을 넣어? 조사해 보니 뒷배도 없는 놈 같던데.
우리 애들을 빼앗아 간 건 죽겠다는거지, 그렇지?"
여자가 단검으로 남자의 얼굴을 숙숙 그어 간다. 눈 근처를 위협하듯건드린다.
"누님, 어차피 죽일 거 아닙니까?"
"죽이기 전에 재미 좀 봐야지. 난 이런 새끼들이 잘못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하면서 엉엉 울부짖는 꼴이 그렇게 짜릿하더라. 응?"
그 때 남자가 말했다.
"아이들에게 매춘을 시키셨다고 들었습니다만."
남자의 얼굴에 칼을 그어 가던 뚱뚱한 여자가 옆을 돌아봤다.
"어, 그래서?"
"최근에 저희 보육원에 온 어떤 남자아이는, 속이 다 뒤집어질 때까지 술을 마시더군요. 그 기억에서 도망가려고 말입니다."
남자는 여자를 느긋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뭘 어떻게 생각해, 이 새끼야. 술을 마시든 정액을 마시든 갠 우리 애야. 어? 아주 씨발, 애들 다 빼가고 혼자 장사해 처먹으시려고?"
뚱뚱한 여자는 건들거리며 수갑을찬 남자의 눈 주위에 가져다 댄 단검에 더 힘을 줬다.
단검이 깊이 들어갔다.
남자의 눈 주위에서 무언가가 흐르기 시작했다.
"일단 눈부터 시작해 볼까?"
- 스르록.
'저게 뭐지?'
단검이 베고 있는,
남자의 눈 주위에서 무언가 흐른다. 붉은 피가 아니었다.
끈적한 초록색 점액질이었다.
"히, 히익! 뭐야 이거!"
"누님! 괜찮으십니까!"
살아 있는 둣한 진 녹의 점액이 차가운 검신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말을 섞을 필요도 없겠군요.
- 치이이익.
점액이 닿은 강철의 검신에서, 회색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손님이 오신 것 같으니 빨리 끝내겠습니다.
수갑을 찬 남자의 입에서 목소리가끈적하게 '흘러'나왔다.
- 철퍼덕!
한순간 남자의 온몸이 물컹거리며 아래로 '흘러'내렸다.
"으, 으아아아악!"
꿈틀거리는 초록색 점액질은 다섯 명이 서 있던 바닥에 순식간에 엉겨 붙었다.
- 치이이악안이 보이지 않는 진득한 녹색 점액질 덩어리에, 다섯 명은 발목부터 천천히 녹아 가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악!"
"히, 끼히익.!"
"괴, 괴, 괴물! 괴물!"
"신이시여!"
요란한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려고 했지만, 바닥에 넓게 퍼져 흐물거리는 진녹색 점액은 ^들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들의 발목은 곧 녹아들었다.
제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발버둥치던 그들은 곧 숨이 끊어져, 녹색 점액 위로 철퍽철퍽 자빠졌다.
나는 레나의 곁에서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바닥에 넓게 퍼져, 인간을 녹이며 한참을 꿈틀거리던 그 점액.
점액은 서서히 어떤 형상을 취하고 있었다.
그건 '일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꿈틀거리는 초록색 점액 덩어리에서, 수척한 문어 같은 모습이 위로 솟아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에 '다시' 고개가 생겼다. 고개가 돌아가 이쪽을 바라봤다.
문어처럼 밋밋한 회색빛 머리에는두 눈이 박혀 있었다. 한쪽은 붉게, 한쪽은 초록으로 빛난다.
- 꾸르르록.
잠깐 사이 회색빛 점액 덩어리엔 코가 생기고, 입이 생겼다.
흐물거려 넓겨 퍼진 아랫부분이 팔이 되고 다리가 되었다.
곧 인간 비슷한 형태가 되었다.
이제 눈앞에서 보았던 남자라는 걸 알아보기에 충분했다. 모든 과정을 코앞에서 보고도 놀라웠다.
〈남자〉가 내게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손님이 오셨는데, 처리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보육원 원장인 라임이라고 합니다. T&T 길드의 회원이기도 하지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나는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냐는 표정으로 레나를 돌아봤다.
"이런 걸 먼저 말해 줬어야 하는거 아닌가?"
그녀는 어깨만 으쓱했다.
"직접 봐이^ 재밌잖아요?
"저는 체인질링입니다. 그중에서도슬라임 족族이지요."
"슬라 임. 인가."
"예. 슬라임입니다만, 혹시 슬라임싫어하십니까?"
- 달그락.
고개를 저었다.
싫어하고 좋아할 것도 없다.
슬라 임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지성을 가진 슬라임은 무척 희귀하다고 한다. 그저 말로만 들었다.
마왕 군이 발호한다면.
눈앞의 이 남자는 해골병사인 나따위보다 훨씬 높은 계급에 올라갈 것이다. 그럼에도, 슬라임은 시종일관 실로 정중했다.
"같이, 인간 세계를 살아가는 처지라고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이다."
나보다 이 슬라 임이, 비교도 안 되게 잘 녹아들어 있지만.
"비슷한 처지라, 뵙자마자 무척 반갑더군요. 레나를 크게 도와주신다고 들었습니다."
"뭐. 피차 이용이다."
우리는 원장실로 향했다.
레나는 따각, 하고 단단한 쿠키를 부쉈다. 원장이 블랜딩한 커피에 찍어 커피만 조금씩 빨아 먹었다.
"그 버릇은 여전하군요, 레나."
"원장님이 내린 커피인데요. 아껴마셔 야죠."
"원두는 많이 있습니다만.
"커피는 맛있다고 너무 마시면, 생리통이 심해지더라구요."
"알겠습니다. 부디 편하신 대로 즐겨 주시죠."
슬라 임은 이제 내 쪽을 바라보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저는 체인질링입니다. 원하는 대로 모습을 변형할 수 있지요. 같은 해골의 모습이 편하시겠습니까?"
"아니, 그건 됐고. 좀 물어보지."
"말씀하십시오."
"슬라임이 어떻게 보육원을 하고 있는 거지?"
"저희는 무성無性의 존재고, 아이가 없지요. 저는 아이들을 매우 좋아합니다. 변하는 게 신기해서요."
"당신이야말로 뭐로든 변할 수 있는 존재 아닌가?"
"그건 그냥 껍데기뿐입니다. 따져보자면, 결국 뭘로도 변할 수 없는 존재가 저희입니다."
남자는 씁쓸하게 웃었다. 저런 디테일한 표정을 짓는 메커니즘을 생각하자 뭔가 무서워졌다.
남자가 '일어났을' 때, 다섯 명의 시체는 혼적도 없이 녹아 사라져 있었다.
매우 정중하지만, 이 남자는 눈앞에서 나를 없애 버릴 수도 있는 존재다.
"정체가 발각되면.
"발각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보육원을 오래 할 수 있으니까요."
남자가 커피를 홀짝이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T&T 길드에 몸을 담았습니다. 정체를 숨기려면, 이것저것 알아야 하는 게 많지 않습니까."
저 커피는 대체 어디로 넘어가서 어떻게 처리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며 남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남자는 자기가 매여 있던 용암석수갑을 들어, 뒤쪽의 커다란 창고에 넣었다.
'슬라 임에게 수갑이라니.'
끔찍하게 멍청한 놈들이었다.
"아까 그놈들은 왜 여기로 쳐들어온 거지?"
54화 감정鑑定과 감정感情 사이(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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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제가 장사에 방해가 되었던 모양입니다."
"장사?"
"보육원을 세우고, 아이들을 착취하는 일말입니다."
인간의 사정이지만, 짐작은 크게 어렵지 않다. 아이들은 약자고 고아는 더욱 그렇다.
착취하지 않는 편이 바보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넘쳐 난다.
"뒷수습은 어쩔 셈이지? 한둘이 죽은 게 아니다만."
살짝 눈을 아래로 깔아 내리며, 남자가 대답했다.
"인간의 길드에 괜히 가입한 것이 아닙니다. 그 정도는 해 주겠지요."
"길드에서 전부?"
옆에 있던 레나가 대신 답한다.
"이분은, 감정사鑑定士거든 요. 높은 감정 스킬을 갖고 계세요."
"감정 스킬이라고?"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종족 특성을 활용한스캔입니다. 그 덕에 길드에 웬만한 어리광은 다 부릴 수 있지요."
"그런가."
"저희 길드는 꽤 편리합니다만.
가입하시겠습니까? 보는 눈은 있다고 자부합니다. 대단히 훌륭한 회원이 되어 주실 것 같군요."
- 달그락.
나는 잠깐 고민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길드 같은 데 묶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누군가와 연緣을 맺는 일은 매우 불편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죽고 다시 시작할지 모른다. 맺은 인연이 쌓이게되면, 새로운 생에서 그만큼 걸리적거리는 게 많아진다.
루비아만 해도 그렇다. 반쯤 어쩔 수 없이 맡았던 그녀가, 지금 나에게 감정적으로 미치는 영향은 결코 적지 않다.
전생前生에서 레나와 얽힌 기억역시 마찬가지다.
원래대로라면 이런 여자 따위, 신경 썼을 리가 없다. 하지만 반쯤은 끌려가다시피 보육원까지 왔다.
누군가와 가까워질수록, 그건 지금뿐 아니라 다음 회차에서도 매우 신경 쓰이는 요소가 되어 버린다.
"아니, 가입은 거절하지."
"안타깝군요. 마음이 바뀌시면 언제든 방문해 주십시오."
"죽기 전엔 그럴 일 없을 거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레나를 툭 두드리며 말했다.
"가입보다. 정식 회원인지 뭔지 로이 여자가 신청할 게 있을걸. 아마준비도 해 왔을 텐데."
그리고 슬쩍 뒤로 빠졌다. 레나가 말을 받았다.
"여기, 기여금이요. 회원 승급을 신청합니다."
- 짤그랑.
레나가 녹아 붙어 은괴銀魂가 되어 버린 은화 덩어리를 내어놓았다.
남자는 손을 내밀었다.
- 스르록.
남자의 손이 흐물흐물 녹아 은괴를 덮어 갔다. 기괴한 광경이었다.
점액질 손이 은괴를 한차례 쓸고지나가자, 은괴에 붙어 있던 불순물들이 옆으로 털어졌다.
"무게로 보아 전부 91로티로군요.
승급 기준인 80로티를 충족합니다.
승급을 신청하시겠습니까?"
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좋습니다. 본부에 보낸 뒤 남은 액수는 환급해 드리겠습니다. 이제당신의 권리는 내 권리와 같습니다.
정식 길드원이 되셨습니다."
레나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게 그녀가 원하던 건가?
그 순간이었다.
- 띠링!
[다음 시나리오가 갱신되었습니다:
레나 이야기]
- 레나가 T&T 길드의 정식 단원이 되었습니다. 정보 입수 등급이 상향됩니다.
- 레나를 통해 T&T 길드와 더욱 원활하게 접촉할 수 있게 됩니다.
[동화율이 내려갑니다.]
[90.14% -> 90.02%]
'시나리오. 갱신이라.' 나는 다시 시나리오 메시지를 점검했다.
〈그녀를 T&T 길드 지부장에 앉혀보세요! '어둠 속의 조력자' 시나리오가 활성화됩니다. 〉라는 메시지를 본다.
이 조건을 만족한다면 뭐가 어떻게 된다는 걸까? 왠지, 거기까지 그리 머지않은 느낌이었다.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 드르륵.
서랍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은은하게 빛나는 석판을 내보였다.
"본부의 강령입니다. 형식적인 절차이기는 합니다만. 정회원 전환에 필요합니다. 한 번 소리 내어 읽어주시겠습니까?"
레나는 석판을 읽기 시작했다.
"엠버에 중대한 위협을 끼치는 정보를 입수할 경우, 지체 없이 모든 통로를 통해 공유해야 한다."
낭독이 끝났다.
"엠 버라고?"
나는 나도 모르게 끼어들었다. 방에 있는 셋이 모두 동시에 나를 바라봤다.
"왜 그러십니까?"
남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엠버라는 말을 듣자, 잠시 잊고 있던 게 떠올랐다.
"왜 서약에서 엠버를 말하는지 궁금해서. 뜬금없지 않나?"
"아, 길드의 본부가 엠버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말해 줘야 하나?' 엠버는 몇 개월 뒤〈중대한 위협〉
에 처한다.
제국은 대자유연합 전쟁의 첫 타깃으로, 항구 중립을 선언한 도시국都市國 엠버를 침공한다.
그곳의 건방진 아나키스트들부터 짓밟아 주겠다며 첫 번째 타깃으로^는다.
"하나 묻지."
"말씀하십시오."
"제국이 자유연합을 침공한다면,
엠버가 가장 걸리적거리지 않겠나?"
옆에 있던 레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남자도 오호, 하는 소리를 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지금 제국의. 전쟁 분위기를 알고 계신 거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말씀하셨습니다. 지리적으로, 정치적으로 보아도 엠버는 침략자에게 무척 걸리적거리는 요소입니다."
슬라임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인간의 정치에 대해 말하는 모습은 기묘한 추상화 같았다.
하지만 나는 별다른 품평 없이 그의 설명을 들었다.
"두 세력의 균형 사이에 존속하는 그 도시국가polis라면, 더 강대한 침략자의 뒤통수를 치고 싶어 할 확률이 높습니다. 침략자로서는 매우 껄끄러운 존재죠."
"그럼 지금이, 그〈중대한 위기〉
아닌가?"
내 말에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손깍지를 꼈다. 저 손가락들도, 흐물흐물하게 녹을 수 있는 점액질이 본령本領이라 생각하니 어딘가가 미끌거리는 느낌이었다.
"그렇습니다.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하지만.
남자는 한 템포 쉬었다.
"레나도 정회원으로 승급했고, 그녀에게 말하면 손님께서도 바로 알게 되시겠지요?"
"맞아요."
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앞에 놓인 커피는 삼분의 일도 줄지 않은 채였다. 남자가 말을 이었다.
"엠버는 이미〈대응〉을 완료했습니다. 제가 아는 것은 거기까지입니다."
"대웅을 완료했다고?"
"그렇습니다."
나는 몸은 가만히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다르다. 뭘 어쨌는지는 몰라도, 대응은 실패한다.
'전쟁은 일어나니까.'
그리고, 가장 먼저 잿더미가 되는 것은 엠버라는 도시다.
이 사실을 이야기해야 할까? 이 앞의 남자라면 내 말을 믿어 줄지도 모르겠다.
나는 남자에게 물었다.
"혹시, 당신은 마법사인가?"
"아닙니다. 감정鑑定의 스킬 외에 다른 건 없습니다. 전투력도 비루한수준입니다."
'비루한 수준이라니.' 농담에도 정도가 있다.
"아, 지금 입고 계신 갑옷을 바꿔야겠군요. 제가 도시에 다녀오겠습니다."
"수리는 안 될까?"
"가능할 겁니다. 다만 가격이.
"상관없다. 이걸로 부탁하지."
"예."
- 철컥.
갑옷을 벗어 남자에게 건넸다.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십니까?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물론, 필요한 건 언제나 많다. 남자가 알 만한 것부터 물어본다.
"네크론 신사회에 대해서 알고 싶다만."
남자가 곤란한 표정이 된다.
"죄송합니다. 놈들과 저희는 정보공유 조약을 맺고 있습니다. 서로에 대해 알아보는 자들을 공유하는 조약이죠."
"그래서?"
"저희를 통해 놈들을 알아보신다면, 놈들에게 노출되게 됩니다."
'역시 그런가.' 레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일단지금 정보를 얻어 내고, 죽는 선택지도 가능하다.
그렇지만, 자포자기식의 선택은 마지막 벽에 부딪혔을 때나 가서 고려해 볼 만한 것이다.
지금은 안전한 방법으로도, 더 많은 정보를 얻어 낼 수 있다. 나는 네크론 신사회의 조사를 잠깐 미뤄두기로 했다.
자살을 하더라도, 조금 더 많은 걸 알고 난 후에 결행하는 편이 좋은 것이다.
무엇을 알아보아야 할까.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럼.
잠깐 머뭇거리다 말을 뱉어 냈다.
"캐빈 애슈턴이라는 저자를 알고 있나?"
"캐빈, 애슈턴 말씀이십니까?"
알고 있다! 남자의 눈빛에서 그런 기색을 잡아냈다.
- 달그락!
흥분해서 몸을 앞으로 움직였다.
"그래. 캐빈 애슈턴. 혹시 그자가쓴 책을.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세한 움직임까지, 인간을 많이 연구한 듯하다.
"네. 저도 몇 권을 갖고 있습니다.
개국공신인 대공大公 가문의 직계장자이자, 아쥬라의 최고위 실력자였죠. 지금은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아쥬라의 실력자.
"그건 마법사란 말인가?"
"예. 탑주급의 마법사라고 알고 있습니다. 드문드문 얻은 소문에 불과합니다만.
- 탁.
나도 모르게 품에서 녹아 붙은 금화 덩어리를 꺼냈다. 그리고 남자의앞 책상에 놓았다.
"혹시 그 책들, 볼 수 없을까?"
남자는 서재에서 세 권의 책을 가지고 왔다.
"자유롭게 열람하십시오. 저도 수집 욕구가 있어서. 파는 건 죄송하지만 조금 곤란합니다."
사실 그편이 나도 좋다. 읽으면 그만이다.
"열람료는 어느 정도 지불하면 되지?"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책은 읽어 주는 사람이 있기에 가치를 갖는 것입니다. 제가 쓴 책도 아닌데, 값을 청구하겠습니까?"
그와 잠시 실랑이를 벌였고, 결국은화 몇 닢을 억지로 냈다. 이건 기분상의 문제였다.
〈캐빈 애슈턴의 업적 - 4권〉
〈캐빈 애슈턴의 업적 - 17권〉
〈캐빈 애슈턴과 음란한 슬라 임 메이드〉
'으음.
하지만 제목을 보고 조금 당황해버렸다. 아무래도 소장하고 싶지는 않은 제목들이다. 빨리 지혜만 을리고 덮어 버려야겠다, 싶다.
책들을 살펴보고 있는데, 옆에서남자가 슬쩍 말했다.
"이름을 끊임없이 바꾸는 성격이라, 캐빈 애슈턴이라고 말하면 모르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으음. 오늘 하루만 빌렸으면 좋겠는데."
"예, 부디 편하신 대로."
여기서 당장 읽어 보고 싶었지만,
눈앞의 슬라임에게 아직 부탁할게 남아 있었다.
"아이템 감정 하나 부탁하지."
나는 품에서 붉은 결정을 꺼냈다.
4미터가 넘는 거대 거미를 잡자, 심장부에서 떨어진 흥옥이었다.
레나에게 맡기려고 했었지만 깜빡하고 내가 그대로 갖고 있었다.
- 탁.
홍옥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음울한 핏빛이 탁자 위에 서서히 퍼지기 시작했다. 번들거리는 표면은 마치 마수의 눈처럼 보였다.
"재미있는 아이템이군요."
남자가 한쪽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 손이 흐물흐물 녹아 홍옥을 덮어가기 시작했다.
묘하게 형체를 잃어 가는 손을.
음울하게 빛나는 홍옥을 덮어 가는 초록빛 점액질을 바라본다.
생각해 보면 레나는, 나를 처음 보고 지나치게 친근하게 대한 감이 있었다. 역시 이 남자의 존재에 익숙해진 덕분일지도 모른다.
"스캔을 완료했습니다."
한참 동안 구슬을 감싸고 있던 푸른 점액질이 사그라들었다. 나는 생각에서 벗어나 앞을 바라본다.
푸른 점액은 다시 인간의 손으로 변했다. 색도, 형태도.
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가치가 높은 구슬입니다. 오랫동안 홉혈吸대과 홉정吸精을 해온 덕분에, 상당한 에너지가 농축되었습니다. 이 정도라면 칼에 박아서 휘둘러도 되고.
가치를 설명한다.
하지만, 나에게 남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 뜬 창하나가 보일 뿐이었다.
[스캔 완료됨]
[웹슬링거의 흥옥]
웹슬링거는 오랫동안 인간을 주 먹이로. 통곡과 절규가 축적되어, 붉은 결정結晶이 되었습니다.
[1 차 진화(클래스 체인지)의 재료로 사용 가능]
[사이드SIDE 마물魔物 전용]
[이 아이템을 활용해 진화할 경우]
- 당신에 대한 거미류 몬스터의친화도가 '미세하게' 증가 합니다.
- 거미줄 타기 Lv.1 스킬을 '매우 낮은' 확률로 익히게 됩니다.
- 곤충류 몬스터에 대한 공격력이'아주 조금' 증가 합니다.
[진화의 실마리를 얻었습니다.]
[동화울이 내려갑니다.]
[90.02% -> 88.68-%]
[??? 단계의 적용은 재.]
눈앞이 핑 돌았다.
55화 감정鑑定과 감정感情 사이(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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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순 이명이 들린다. 세상이 하얗게 흐렸다가, 다시 선명해진다.
"괜찮으십니까?"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좋은 의미로, 괜찮지 않았다.
'진화(클래스 체인지)라니.'
그런 게 있다는 말인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개념이다.
이십 년 동안, 주위에 그런 일이 발생하기는커녕 그런 걸 겪었다는 이야기도 들어 본 적이 없다.
해골병사는 끝까지 해골병사다.
능력치와 스킬은 조금씩 오를지 몰라도.
그 클래스는 변하지 않는다.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나는 남자에게 물었다.
"클래스 체인지?"
"예? 클래스 체인지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역시 이 남자는 모른다.
이 기묘한 상태창은 나에게만 보이는 것이다.
그가 아이템을 스캔하면, 숨겨져있던 정보가 드러난다.
하지만 그 가운데 어떤 정보들은,
나에게만 인식되는 것이다.
이 감정사鑑定士의 활용도가 어마어마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에게 다소 호의적으로 말을 걸었다.
"이모저모로 고맙군. 내가 당신에게 해 줄 만한 건 없나?"
"글쎄요.
남자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언젠가, 다른 슬라임을 보시게 된다면.
"얘기하시오."
"약간의 호의를 보여 주시겠습니까? 저는 그걸로 충분합니다."
"다른 슬라임?"
"그렇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조금 슬픈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희는 멸종 위기입니다."
'멸종이라고?' 하긴, 슬라임을 본 적이 거의 없기는 하다. 마왕군 발호 이후에도.
"좀 더 설명해 주면 좋겠는데."
그러자 남자가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말을 이어 갔다.
"슬라임은 대표적인 사냥감이었습니다. 초보 모험가들은 저희를 끊임없이 학살했지요."
- 달그락!
나는 웃었다.
"이쪽도 마찬가지야."
그리고 비슷한 처지를 슬쩍 토로했다. 친목 도모를 위해서는 동질감생성이 중요한 요소다.
"해골 분들 말씀이십니까?"
"물론. 우리는 장난감처럼 매번 부서지지.
"그렇습니까. 저희는.
남자는 술술 털어놓았다. 한참 그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저희는 박애주의자입니다. 인간들도, 다른 종족도 좋아합니다."
"인간들에게 친구가 되고 싶다고,
괴롭히지 말아 달라고 말하면서 수많은 동포가 죽었습니다."
무엇이든 껴안기 좋은 몸으로 태어난 슬라임은 박애주의자이며, 평화로운 종족이라는 이야기였다.
"쓸데없이 감상에 젖어 말이 길어졌군요. 죄송합니다."
남자가 고개를 꾸떡 숙였다.
나는 물론 박애주의자가 아니고, 인간이나 다른 종족을 껴안을 생각도 없다. 하지만 마음에 와 닿는 게없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잘 들었다. 슬라임을 보면 호의적으로 대하도록 하지."
- 띠링!
[라임의 호감도가 11 올랐습니다!]
'으음.'
"??? 그러면, 일단 갑옷부터 고치러 다녀오겠습니다."
"부탁하지. 아, 대장간 노인에게 의뢰는 완수했다고 전해 주고."
"의뢰를 받으셨습니까? 받기로 한대가를 말씀해 주시면 수령해 오겠습니다."
"대가는 선불로 넉넉히 받아서 그냥 전해 주기만 하면 돼."
"알겠습니다."
할 말은 끝이었다. 책을 정리해 들었다. '캐빈 애슈턴과 음란한 슬라임 메이드'라는 책 제목이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분명 그 탓일 거다. 쓸데없는 질문을 해 버린 것은.
"아. 궁금한 게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슬라임도 성별이 있나?"
"하핫. 없습니다. 저희는 무성입니다. 여체女體가 대하기 편하십니까? 보이지 않는 목 아래는 그때그때 적당히 만들고 있습니다만. 가슴이라도 만들까요? 원하시는 형태로 신체 변형이 가능합니다. 종족도, 성별도 자유롭게.
"아니, 내 실언이다."
나는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박애주의자라고? 역시 슬라임은 두려운 종족이라고 생각했다.
슬라임이 갑옷을 가지고 도시로 들어간 사이, 레나는 동생과 둘이서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방을 따로 하나 얻어 책을 읽었다.
〈캐빈 애슈턴의 업적 - 17권〉의페이지를 천천히 넘겼다.
자기 자랑으로 점철된 책을 바른 자세로 앉아 정독하자니 머리가 지끈거리며 자괴감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 대가 없이 지혜 스탯을 올릴 기회다.
불평할 계제가 아니다.
- 지혜가 1 올랐습니다!
'다음 책은?
[주인님, 이 손 좀 빼 주시겠어요?]
[미스 슬라임, 누가 보는 사람도없는데, 조금만 만져 보자구. 응?]
[아아, 곤란해요. 오믈렛을 망쳐 버릴 거라구요.]
[으으웃. 미스 슬라임의 그곳, 화상을 입을 것처럼 뜨거워.!!]
[흥분하면 몸이 산성으로 되어 버리니까요. 이런, 주인님의 손이 다녹아 버렸군요. 제 점액으로 다시 손을 만들어 드릴게요.]
음란한 슬라임 메이드가 가장 큰 고역이었다. 그러나 어떻게든 집중해서 읽어 냈다.
그리고 몹시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했다.
음란한 슬라임 메이드는 단권이 아니다. 이건 5-1 권에 불과했다. 심지어 5권도 아니었다.
'두렵다, 두려워.'
- 탁.
나는 책을 모두 덮었다. 페이지를 넘기던 손을 내려, 따로 챙겨 둔 웹슬링거의 흥옥을 만지작거렸다.
물론 이 구슬을 만지작거린다고 해서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진화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다른 무언가가 필요할 것이다.
'진화라.'
탈피. 진화. 그 일은, 분명히 내가강해지는 데 한 기점이 될 것이다.
어떤 조건을 충족시켜야 할지, 나는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때였다. 책상 위에 켜 둔 촛불이 살짝 흔들렸다. 바람이 들어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짧고 검은 머리카락의 여자가 서있었다. 그대로 잠들어도 될 것 같은 편안한 옷을 입고 있다.
그녀가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말했다.
"노크를 해도 대답이 없어서요."
"동생은?
"잘 자고 있어요."
레나는 살짝 고개를 옆으로 젖혔다. 나는 그녀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이름: 레나]
[도적 Lv.15]
[체력-21 힘-22 민첩-29 지혜-20]
[호감도: 40]
- 레나는 당신을 진지하게 신뢰하고 있습니다. 레나를 해치려 할 경우, 그녀는 큰 충격을 받을 겁니다.
'충격이라.' 물론 그녀를 해칠 생각은 없다.
도움이 되지 않으면 그저 헤어져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 겠지.'
나는 레나에게 물었다.
"동생을 데리고 다닐 생각인가?"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밖은 위험하니까. 여기 있는 편이 좋겠죠. 원장님만큼 믿을만한 분도 드물고."
≪ ?"
'舌
"하지만, 자리가 잡히면 언젠가는 함께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언젠가는 말이에요. 그때가 되면, 함께 살아 주실래요?"
"함께 산다고?"
"그래요. 진짜 삶을 살게 되면 진짜 삶이라.
레나는 그런 삶을 살아 본 적도 없고, 살 줄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언젠가, 언젠가, 라는 말을 입안에서 맛없게 되새김질하며 이야기하다죽게 될 것 같았다.
조금은,
이 여자가 가엾다고 생각했다.
무심코 고개를 끄덕일 뻔했지만,
- 달그락.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거절하지."
"왜 거절하시는 거예요?"
대꾸하지 않았다. 이미 진짜 삶이어 떤 것인지 경험해 보았다.
용사들에게 짓밟히기는 했지만.
내 '진짜 삶'은 눈앞의 이 여자와 함께할 수 없다. 그곳까지 잠시 같이 가는 관계일 뿐이다.
그마저도 중간에서 헤어질 거다.
나는 용사들을 적대한다. 결국, 나는 인간을 적대한다.
레나가 인간계에서 단단히 자리를 잡는다면, 결국 그녀와 부딪힐 날이올 확률이 높다.
결국 이 여자는 인간이다.
먼 홋날, 언젠가.
그녀가 나와 인간 사이에서 오직 나 하나를 선택한다면.
함께 살아갈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여자의 동생은 너무나 평범하고, 밝아 보이는 여자아이.
그런 아이가 마물의 세계에서 함께할 수 있을 리 없다.
관두는 편이 좋다.
그냥, 함께할 수 있는 눈앞의 길만 걸어간다. 거기까지다.
"갈 수 있는 데까지만 같이 가는 거다. 그런 사이야."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한쪽에 벗어 둔 로브를 당겨 몸에 적당히 걸쳤다.
레나는 조금, 복잡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다음 날 오후.
갑옷을 수리하러 간 슬라임이 돌아왔다. 갑옷은 하루 만에 말끔히 고쳐져 돌아왔다.
"빠른데?"
"저도 좀 거들었습니다. 여벌 재료가 많이 남아서, 작업이 어렵지 않다더군요."
"??? 당신이?"
"예. 녹이고 붙이는 건 제 힘을 쓸 수 있으니까요."
"노인도 당신 정체를 알고 있나?"
"그건 아닙니다. 적당히 둘러대고,
작업 공간을 받아서 도왔지요."
실로 다재다능한 슬라임 이었다.
흉갑뿐 아니라 건틀랫과 각반, 투구까지 깔끔하게 수리되어 있었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으음. 고맙다."
생각해 보면 이 슬라임은 대단히 유용한 존재다. 무엇보다 나에게 대단히 호의적이다.
초면에 나를 부수고 해체하던 인간들에 비하면, 별 이유도 없이 호의적인 이 슬라임의 태도는 내게 대단히 낯설고 놀라운 것이었다.
'그냥 성격이 좋은 건가.'
내 입장에서야 그저 레나를 키우면서 쭉 따라온 것에 불과하기에, 지금의 상황이 기연이라고 말할 정도까지는 아니다.
전반적으로 이번 생이 잘 풀리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천둥이 치던 무덤을 생각했다.
끝도 없이, 진흙을 구르며 답답하게 죽어 갈 때와는 확실히 다르다.
철컥.
슬라임이 건네준 갑옷을 받아 입으며 물었다.
"앞으로도 아이템을 구해 오게 될 것 같은데, 계속 감정을 받을 수 있을까?"
"언제든 환영입니다."
물론 맨입으로 해 달라고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감정료는 어떻게 지불하지?"
"같이 인간들 사이에 숨어 사는 처지 아닙니까? 마음 편하게 요청하셔도 됩니다."
"그건 불편하군."
거저는 거저가 아니다. 무엇보다 무거운 마음의 빚을 지게 된다.
"정 그러시다면.
남자가 잠시 망설이다가, 깍지를끼며 말을 잇는다.
"저희 지부나, 본부에서 나오는 의뢰를 수행해 주시겠습니까?"
"그러지."
"어디 보자.
남자는 서랍을 뒤졌다.
"마침 적당한 의뢰가 하나 있습니다. 산적 두목 퇴치. 그라스미어 행정관에게서 들어온 의뢰입니다. 현상금으로 기사님께 20로티가 지급될 겁니다. 좀 짜군요."
"현상금이라니? 나는 그냥 일을 해주겠다고 한 거다."
남자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받은 의뢰를 성공적으로 해결하면 그게 제 실적이 됩니다.
길드의 명성이 쌓이니까요. 대가는 당연히, 따로 받으시면 됩니다."
"으음.
레나가 끼어들었다.
"그 정도면. 빈민이 산적이 된 거 아니에요? 경비대로도 얼마든지 토벌할 수 있을 텐데. 귀찮은가."
"그런가 봅니다, 레나."
"약하다는 뜻인가?"
레나와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내 입장에서도 달갑지 않다. 기왕이면 조금 더 어려운 일을해 주고 싶었다.
"다른 의뢰는 없나?"
"설원 트롤 퇴치는 지나치게 어렵고, 에라스트 토너먼트 대회에서 진네이가家의 문장을 걸고 대리 참가? 이건 또 뭐람."
"에라스트. 토너먼트?"
"예. 올해 초 새로 즉위한 영주가주최하는 토너먼트입니다. 주변에 이런저런 가문들에게 초청장을 돌렸는데. 적당히 용병을 사서 면피하는 가문이 많죠."
슬라임은 토너먼트에 중점을 두어 대답했다. 하지만 내가 신경 쓰이는 것은 전자다.
에라스트.
'루비아'가 도망쳐 나온 도시다.
"현 진네이 가문의 가주는 기사도 따위엔 전혀 관심도 없고, 피혁 장사에만 집중한다고 합니다."
말을 이어 가는 남자 앞에 서서, 나는 엉뚱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루비아가 도망쳐 나온 도시에 대해.
들어가 볼 좋은 기회일까.
토너먼트라면 영주라는 놈도 볼 수 있겠지. 루비아의 삼촌이라는.
"한 번 이길 때마다 2세이론. 번쩍이는 커다란 금화를 두 개나 주는군요."
"그렇군."
아무래도 남자, 아니 슬라임은 이 의뢰를 꼭 나에게 맡기고 싶은 것 같았다.
"雄강 이후로는 지급 수당 없음〉
이라는 추신까지 있군요. 어차피 용병을 샀으니 주목을 끌 생각은 없다는 겁니다. 적당히 합리적인 게, 마음에 드는 의뢰입니다. 하시겠습니까?"
56화 세 가지 벽 (1)
***************************************************
나는 팔짱을 끼었다. 호의에 가득 찬 남자의 오드아이를 바라봤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 레나를 흘끗 돌아보았다.
"그 의뢰, 이 여자에게 받는 걸로 하면 안 될까?"
레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인간의 몸은 재미있다. 눈은 더욱 그렇다. 바라보면 저 아래가 아른아른 비쳐 온다.
"레나의 실적으로 하고 싶으시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지."
그녀를 길드에서 빨리 승급시킨다.
그게 현재의 목표였다.
"대신, 보상금은 당신이 가지도록하고."
남자의 눈에 당혹이 떠올랐다. 그가 얼른 손사래를 쳤다.
"그건 곤란합니다. 보상은 직접 일을 하시는 쪽에서 받으셔야죠."
"빚지기 싫다. 감정도 거저 해 주지 않았나."
남자가 후우, 하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걸 빚이라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의뢰를 수행하는 분이 당연히 보상을 전부 가져가셔야죠. 저는 전달자에 불과합니다."
"길드를 통하지 않았으면 의뢰를 받을 수도 없었을 거 아니야? 그냥감정료로 치라니까."
"보상의 10%만 받겠습니다."
"내가 10%를 받는 걸로 하자고.
당신이 90%."
단호하게 말했다.
남자가 가진 감정 스킬의 가치는 최소한 그 정도는 된다. 후려치고 싶지 않았다. 마음의 빚을 더 지고 싶지 않았다. 그게 가장 무겁다.
레나를 승진시키고 싶은 건 전생에 그녀에게 빚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남자에게 신세를 지게 된다면 언젠가 갚아야 한다. 죽음 이후에도 마음의 빚은 이어진다.
그걸 알 리가 없지만, 남자도 어지간하다. 쉽게 지지 않는다.
"90%라뇨. 안 됩니다."
"나도 안 돼."
"15%. 제가 그 이상을 받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아이들을 키우는 데 돈이 필요하지 않을 리 없잖아?"
일단 양보를 시작하자 어찐지 진심이 되었다. 지고 싶지가 않았다.
"인간 사회에 잘 숨어들어 자리를 잡았습니다. 걱정해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까 쳐들어온 인간들 다 봤어.
그 자리, 별로 안정적인 것 같지 않던데?"
우리는 서로 보상을 덜 받겠다고 싸운다. 역시 우습다고 생각한다.
아무렇지 않게 인간을 찔러 죽이고, 녹여 죽이는 괴물들이 인간의 돈을 양보하겠다고 싸운다.
문득 던전에 쳐들어왔던 모험가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이건 네가 해치워.'라거나'얘한테 나온 건 네가 먹어.'라면서 양보하곤 했다.
가만히 있는 나를 가지고,
가만히 숨어 살던 서큐버스님을 가지고 저들끼리 서로 순번을 정하고 양보를 했다.
우리는 놈들에게 텃밭이고 음식이었다. 맛 좋은 식사를 나누며 함께 즐기둣 양보 놀이를 했다.
나의 것을.
아니, 나 자체를 빼앗아.
서로의 겸양을 즐겁게 과시하던 놈들이 생각났다.
그들은 우리를 분배하며, 공동의 연대를 확인하곤 했다.
언젠가 인간들에게 그 분배 자체를 되돌려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쩐지 이 양보 놀이에 한층 몰입하게 되어 버렸다.
우리는 결국 50%에서 합의를 보았다. 슬라임이 지쳤다는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그럼 50%에, 제가 앞으로 의뢰를 계속 구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 주면 고맙겠군. 의뢰에 대한 사항을 알려 줘. 그리고.
"말씀하십시오."
"션이라는 아이를 잘 부탁하지."
돈을 더 받을 수 없다는 결의로 가득 찼던 남자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의아한 어조로 그가 물었다.
"그 아이를 아십니까?"
"뭐, 그냥. 다른 아이들과 잘 못 어울리는 것 같길래."
적당히 얼버무렸다. 원장의 표정이 s부드럽게 풀어졌다. 아까보다도 한층 더 호의적인 표정이었다.
"요즘 특히 신경 쓰고 있는 아이입니다. 예리하고. 따듯하시군요."
- 띠링!
[라임의 호감도가 9 올랐습니다!]
[호감도가 20에 도달했습니다!]
[라임은 당신이 아이들을 볼 줄 안다고 생각합니다!]
이상한 오해를 사 버린 것 같지만,
해명할 방법도 없었다. 나는 그냥어깨만 으쓱했다.
토너먼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방에 돌아갔다. 레나가 따라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왜 저한테 잘해 주시는 거죠?"
"잘해 주냐니?"
"저한테. 실적을.
그녀답지 않게 낮게 깔린 목소리였다. 잠겨 있다.
"그냥 써먹으려고 키우는 거지."
레나는 반쯤은 잠기고, 반쯤은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차라리 원장님을 정보원으로 쓰시는 건 어때요? 저보다 훨씬 뛰어나고, 훨씬 유용할.
말이 많다고 생각했다. 입을 좀 막을 필요가 있다.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던져 버렸다.
"년, 좋은 사람이니까."
"네?"
그녀가 손끝을 떨었다.
"년 좋은 사람이라고 했잖아."
"제가 지금까지 죽인 사람 숫자가 몇인지 아세요?"
"얼마 안 될걸, 그리고 그게 어쨌다는 거지?
인간의 입장에서 그녀는 성격장애형 범죄자에 불과하다. 하지만 내게는 잘해 줬다.
나 때문에 죽었다. 마지막까지 날 버리지 않았다. 나에게 있어 판단기준은 그것 하나다.
타인들 따위에게 어떻게 대하건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특히, 나를 죽이려고 했던 자들이라면 말할 나위도 없다.
좀 죽이면 어떤가? 삶아 먹어도 좋고 살을 발라 먹어도 좋다. 뭐라 고할 생각은 전혀 없다.
레나가 침음을 홀렸다. 말을 잇지못하고 몸이 굳는다.
"왜, 공적 쌓기 싫어?"
싫을 리가 없다.
"농담도 심하시네요."
어울리지 않게 그녀의 어깨가 움츠러든다. 뭔가 민감한 곳, 하지만 본인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곳을 깊숙이 찔린 것 같은 표정.
저런 모습을 보니 우스웠다. 레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화제를 전환해야겠다.
"아, 궁금한 게 있는데."
"예. 뭐든 말씀하세요."
"2세이론이라는 게 얼마나 되는 돈이지?"
"하핫."
조금 상기된 채로, 굳어 있던 레나의 표정이 조금 풀어진다.
"역시 그럴 때가 좋네요."
"그럴 때라니?"
"뭘 좀 모르실 때가 역시 좋은 거같아요. 귀여우시군요."
"대답이나 하지 그래?"
나는 일부러 퉁명스럽게 던졌다.
솔직히 말해 레나와 깊은 관계를 맺을 생각은 없다.
그녀를 도와주며 살다가 한 번 죽게 된다면, 내 빚은 그걸로 끝이다.
더 얽히고 싶지 않다.
레나가 표정을 조금 회복한 채로 대답한다.
아직 볼은 조금 붉어져 있다.
"좋은 말 세 필을 살 수 있는 돈이에요. 괜찮은 칼 백 자루를 살 수 있고."
"그리고?"
"사과술은 50통 정도. 한 달에 한통씩 먹어도 4년은 먹겠군요."
"음. 인간의 물가라는 건들어도 감이 잘 안 잡히는군."
"뭐 고민하실 거 있나요? 저한테다 맡기시면 되죠."
레나가 날 보고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씩 웃는다. 역시, 그녀에게는저런 표정이 어울린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에라스트로향하는 마차 안에 몸을 실었다. 원장이 빌려준 마차였다. 밖을 내다보면 레나가 지나가듯 말했다.
"어떻게 그렇게 강하신 걸까나."
"나 말인가?"
"네. 토너먼트에서 너무 무리하지마세요. 구경하는 사람들이 너무 놀랄 테니까."
"3승이 목표다만."
"너무 쉬울 거예요."
"우승하면 뭐라도 주나."
"좋은 전투마나 명검을 주겠지만.
시골 귀족한테 뭐 대단한 명검이 있겠어요, 그저 그렇겠지."
레나가 말을 이었다.
"원한다면 영주가 좋은 조건으로 우승자를 고용할 거예요. 집도 주고노예도 몇 명 딸려 오죠."
노예라.
"영 쓸모없군."
"부랑자들에게는 좋은 조건이겠지만, 돈을 벌려면 다른 걸 해야죠. 진짜 소득은 따로 있어요."
"뭔데?"
"토너먼트가 개최되면, 항상 비공식적으로 도박판이 벌어지거든요."
- 짤그랑.
레나가 지갑을 손에 들었다. 가득 찬 은화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인간들의 시체에서 주워 모은 은화들이었다.
"저도 쫙 당길 거예요."
"도박에 참가한다고?"
"그럼요."
레나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스무 배는 불릴 수 있을 텐데, 안하는 게 바보죠."
"누구한테 걸려고?"
"장난이 심하시네요. 다 이기실 거잖아요?"
"그럴 리가. 인간들이 그렇게 약하지 않겠지."
"자신을 너무 낮게 평가하시는 거아니에요?"
"글세.
이 여자는 나를 너무 높게 평가하는 것 아닐까. 황금알을 낳는 거위취급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한 푼도 건지지 못할지도 모른다.
'내가 그렇게 강한가?' 토너먼트 참가.
레나의 실적만 쌓아 주려는 목적은 아니다. 내 현재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아보고 싶다.
던전에 침략한 모험가들과 싸워 보긴 했다. 수십 명의 병사를 힘으로 물리쳐 보기도 했다.
하지만 앞에서 기다리던 한 명의기사에게 갑옷 째로 잘라져서 죽었다.
인간의 힘이라는 건 가끔 감이 잘 잡히지 않을 때가 있다.
단계적으로 조금씩 올라가면서, 내수준을 파악하기에 토너먼트만 한것도 없을 거다.
장소도 에라스트다. 루비아가 도망쳐 ^온 도시.
'삼촌이 랬나.'
루비아의 말에 따르면, 인신매매혐의로 10년 형을 받은 남자.
루비아에게 청부업자 둘을 보낸 놈이 영주인 곳이다.
어떤 놈인지, 얼굴 정도는 확인해두어야 한다. 나는 품에 있던 수첩을 펼쳤다.
- 경비대장과 그 무리(유블람) 0- 영주(에라스트) □
- 망치와 석궁(첫 무덤) 因체크 표시가 보인다.
망치와 석궁은 각각 서너 번 정도죽인 것 같다.
경비대장과 그 무리는 두 번에 걸쳐〈불〉로 바짝 구워 주었다.
그 비명이 귓가에 아직 생생하다.
남은 건 루비아의 삼촌, 에라스트의영주 하나다.
"토너먼트라면.
"예, 말씀하세요."
"영주도 참관하는 건가?"
"그럼요. 처음부터 끝까지 있을 거예요. 눈앞에서 싸움이 벌어지는데, 눈을 떼지 않겠죠."
"일은 안 하고?"
"듣기로는, 그런 걸 영주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남자니까요."
"영주를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군,
그래."
"여러 가지 소문이 있잖아요?."
"소문을 다 믿나?"
"세 가지 출처에서 공통적으로 말하는 건 믿어요. 그게 기준이죠. 그 영주한테 관심 있으세요?"
"글쎄."
얼버무렸다. 그곳에서 영주의 목을칠 수 있을까? 루비아의 복수를 지금 해낼 수 있을까?
'역시 무리.'
운 좋게 가까이 다가가, 암살을 성공한다고 해도.
레나도 죽고 다 엉망이 될 거다.
슬라임도 곤란해지지 않을까.
이런 식으로 일을 어설프게 망쳐버릴 생각은 없다.
죽인다면 철저히, 압도적인 위치에서 짓밟아이= 한다.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사양이다.
일단 얼굴이나 알아보자. 이번에는그 정도가 적합할 것 같다.
생각에 잠긴 내 어깨에, 레나가 슬쩍 몸을 기대 온다.
몸은 제법 단련되어 있다. 질감은 살짝 단단한 편이다. 물론 나보다는 훨씬 부드럽다.
"궁금한 게 있거든요."
"말해,
"검술은 어디서 익히신 거예요? 어떻게 그렇게 강하신 거죠?"
"수련을 좀 했지. 동굴에서 혼자."
반쯤은 솔직히 대답한다.
"동굴에서 혼자?"
"몸이 몸이지 않나. 먹고 잘 필요는 없지. 수련에는 유리하더군."
"하핫. 인간의 몸이란 건 정말로 거추장스럽긴 하죠."
"네 몸은 꽤 쓸 만해 보이는데?"
"흐응. 그래요?"
레나가 입꼬리를 올리며 배시시 웃었다. 전투적인 의미에서 한 말이었지만, 실언일지도 몰랐다.
굳이 대화를 하지 않으려고 했다.
마차 밖을 바라봤지만 여자는 자꾸 말을 걸어왔다.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이런저런 사소한 대화를 나눴다.
여자의 들뜬 웃음소리가 종종 마차 안을 떠돌았다. 에라스트까지는 금방이었다.
"벌써 왔네요."
"이렇게 금방인가?"
"저번에도 와 본 적이 있어요. 그때는 멀게만 느껴졌는데, 참."
"마차를 탄 탓이겠지."
"글쎄요. 과연 그럴까요?"
나는 밖을 내다봤다.
우리 말고도, 성문 앞에 길게 줄 을선 사람들이 있었다.
성문 앞에는 경비병이 여섯 명씩한 조가 되어 사람들을 검사하고 있었다.
두 명의 경비는 사람들을 쭉 지나치며 외쳤다.
"따로 초대장이 있으신 분은 말씀해 주십시오! 초대장이.!"
"우리 얘기군요."
레나가 내 옆구리를 툭 건드렸다.
그리고 마차 밖으로 몸을 내밀며 소리 쳤다.
"여기요! 초대장 있어요!"
경비병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토너먼트 참가자이십니까?"
"맞아요. 여기 진네이 가문의 초대장이 있어요."
"확인되셨습니다. 이분들부터 먼저모시라구!"
우리가 탄 마차는 멀리 늘어선 줄과 관계없이, 검사도 받지 않고 쾌속으로 들어갔다.
"편하네, 초대장."
레나는 고개를 한 바퀴 돌리며 말했다.
나는 밖을 바라봤다. 이곳이 루비아가 웃던 도시, 살던 도시인가.
도로와 다리, 그 아래를 지나가는 깨끗한 물까지도 루비아가 살았던 혼적으로 느껴졌다.
함께한 시간은 짧았다. 내 삶에 커다란 도움을 준 것도 아니다.
그저 내 앞에서 몇 번이고 거듭해죽어 갔던 모습 때문에, 머릿속에깊이 박힌 것일까. 도시 구석구석을 멍하니 바라보자, 레나가 궁금한 둣이 말했다.
"뭘 그렇게 유심히 보세요?"
"별로."
"전 영주가 도시 관리를 잘해 놨다고 하더라구요."
영주의 딸로서 살아갔을 루비아를 떠올렸다.
레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속삭였다. 별반 대꾸하지 않고 조용히 밖을 내다봤다.
초대장을 받은 자들은 영주의 성에서 하룻밤을 묵을 수 있었다.
안내받은 곳에 짐을 풀고, 밖에 나가 성벽을 따라 걸었다.
영주의 성은 작았다. 하지만 a자모양의 성벽 어디에서도 도시가 한눈에 들여다보였다.
"기능적인 성이네요."
레나가 성의 구조를 칭찬했다.
'이런 성벽 안에서, 칼로 난자되어쓰레기처럼 던져졌다는 건가.'
황제의 뜻에 반하는 레이 백작이 맞이한 최후에 대해 생각했다. 그의 딸인 루비아에 대해 생각했다.
- 저벅저벅.
그때 였다.
일부러 인기척을 내며 누군가 걸어왔다.
57화 세 가지 벽 (2)
***************************************************
앞서 봤던 행정관이었다. 그가 우리에게 물었다.
"안내가 필요하십니까?"
성벽을 살펴보는 게 달갑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나는 안내인에게 물었다.
"혹시. 도서관은 어디 있지?"
루비아를 생각하고 있던 탓에 나와 버린 질문이었다.
안내인이 당황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도서관. 말씀이십니까?"
"그래."
토너먼트에 참가한다는 자가 도서관을 찾는 건 낯선 경험일 것이다.
아예 들어가 본다고 하면 어떨까.
안내인은 조금 곤란해 하더니, 늙수그레한 노인을 불러왔다. 노인이 나를 보고 말했다.
"도서관을 물어보셨다고 들었습니다만.
"들어가 볼 수는 없겠지?"
루비아가 많은 시간을 보냈던 곳이다. 거절당하겠지만, 한 번쯤 물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건 영주님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따로 찾으시는 책이라도 있으십니까? 빌려드리는 것 정도는 가능합니다."
역시 안 되는 건가. 나는 루비아가 말했던 책 이름을 떠올렸다.
"시간의.
노인은 잠자코 기다렸다.
"틈바구니에 갇힌 천재 대마법사, 라는 책이 있나?"
"소설이겠군요. 한번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시간 뒤.
노인이 책을 찾아서 내 방으로 들고 왔다. 책에는 적색 비늘이 덮인용과, 깨어진 모래시계가 자수 놓여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표지가 멋지군. 이렇게 빌려줘도 되는 건가?"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분께서 사라지신 뒤로 장서 관엔 먼지만 쌓여 있지요. 불타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그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노인은 황급히 말을 돌렸다.
'그분이 라면?'
뻔하다.
루비아를 말하는 것이겠지. 사서노인의 안색이 순간 침중해졌다.
아마, 이자 역시 루비아를 좋아했으리라. 그녀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제가 여기 있으면 안 된다고 성에 있던 사람들이 울면서 이야기하고.
그중에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꽤나친근하게 느껴졌다.
사서 노인은 고개를 돌렸다. 옆으로 살짝 기침을 했다.
"크흠."
그리고는,
"다 보신 후에 불러 주십시오."
라고 말하며 사라졌다. 발걸음에서 어딘지 죄책감이 묻어났다. 꽤 가까운 사이였을지도 모른다.
종종 책에 대해 이야기하던 사이였을지도. 낡은 로브를 늘어뜨린 노인을 일별했다.
자수가 놓인 책을 천천히 펼쳤다.
책 제목과 저자가 드러났다.
〈시간의 틈바구니에 갇힌 천재 대마법사 - 캐빈 애슈턴〉- 달그락.
'캐빈. 애슈턴?'
이게 그 인간이 쓴 책이라고? 루비아에게 이 책 이야기를 들었을때, 저자 따위를 물은 적은 없다.
그저 루비아가 말한 책을, 기억나는 대로 한번 찾아본 것일 뿐.
이건 그저 우연일까? 나는 어느새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책 표지를 몇 번 만지작거리다가천천히 넘겼다.
내 회귀에 대해서 힌트를 줄 가능성이 없는지를 열심히 살폈다.
하지만.
〈. 그것이 내 서른두 번째 5월 12일이었다. 〉
〈??? 나는 알고 싶었다. 이 시간은 누구를 위해서 멈추고, 다시 흐르고, 반복되는 것인가? 〉〈. 시간은 실재하는 것인가? 〉
내용은 알아듣기 어려웠고, 영 와 닿는 게 없었다.
〈시간과 공간이 내 인식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라면, 나만이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인가? 나로 인해서 구성된 하나의 거대한 착각계인가? 〉시간과 공간이 자기 인식 속에서만 존재하는 거라고? 혼자서만 마음을 갖고 있는 거라고?
- 달그락.
나는 웃었다. 틀렸다. 일단 이 책을 읽는 나부터 마음이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책장을 넘겼다.
〈. 스스로 마음을 갖고 있다고 착각하는 무수한 창조물들은, 누구의인식 속에서 만들어진 것인가. 〉
'으음.
마법사라는 종족은 다 이렇게 자기중심적인 걸까.
소설이 아니라 무슨 수필처럼 써놓은 책이었다. 마치 실제로 겪었던 일이고, 경험한 일처럼.
'괜히 기대했나.'
이 소설의 주인공은 시간에 갇혀있는 인간.
내가 루비아에게 처음 내 상황에대해서 토로했을 때, 루비아는 나에게 이 책을 이야기했다.
같은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다고 하면서. 그때는 소설에 불과한내용이라고 일축했다.
하지만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던 것같다. 이 책에서 어떤 해결책을 제시해 주기를.
혹시 힌트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듯하다.
문득, 루비아와 앞으로의 날에 대해 고민하던 때가 스쳐 갔다. 그 여자는 정말 완전히 묻혀 버린 건가생각하면서, - 탁.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그 순간이었다.
- 띠링!
[동화율이 90% 이하인 상태에서캐빈 애슈턴의 첫 번째 히든 피스를 접했습니다.]
[지혜가 10 상승했습니다!]
[자기 표본 가정에 대해 '미약하게'의식하기 시작합니다.]
[종족 값을 점검합니다: 해골]
[특전: 통찰(E마이너)을 획득합니다!]
'10. 이라고? 통찰?' 상태창이 뜨는 것과 동시에.
싸한 느낌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흘러내렸다.
머릿속의 샘이 약간은 깊고 넓어진 것 같았다.
답답하던 머릿속 안개가 조금씩 걷혀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가지가 먼저 궁금해졌다.
'대체 캐빈 애슈턴이 누구지?'
그 인간은 대체 누구길래, 그자의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지혜가 상승하게 만들 수 있는가?
게다가?.".
'통찰이라고?'
나는 상태창을 열어, 스킬 상세를 확인했다.
[통찰 E마이너 (패시브)]
평범한 인간 수준의 통찰력. 영원히 짓밟히도록 설정된 해골병사로서는 본래 도달할 수 없는 레벨의 통찰력이지만, 수차례의 죽음 끝에 쟁취해 냈다.
주의: 〈평범한 인간〉을 과대평가하지 마시오.
다소 기분 나쁜 문구가 뜬 것 같지만, 뭔가 얻어내긴 한 것 같다.
어쨌거나.
대체 캐빈 애슈턴은 누구길래, 통찰이라는 스킬까지 고작 책 한 권에 심어 놓는다는 말인가?
마법사라는 존재는, 이런 걸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것인가?
의문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 달그락!
생각을 이어 가자, 몸이 으스스 떨려 오는 게 느껴졌다.
캐빈 애슈턴이라는 자는 마법사 중에서도 매우 놀라운 능력을 가진 자임에 분명하다.
그런 자조차, 반복되는 시간이라는 현상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이 현상의 이유를 알아낼 수 있을까?
문득 두려워졌다.
나는 도망치는 것처럼, 사서 노인에게 책을 반납했다. 그리곤 방으로 돌아갔다.
하룻밤을 묵고,
토너먼트 장소로 들어갔다.
지름 30미터 정도의 공간. 관중이 빼곡하게 둘러싸고 있다. 경기장은성의 한가운데다.
"넓군."
"원래 연병장으로 쓰이던 곳 같아요. 넉넉하네요."
주위는 시끄러웠다. 분위기가 뜨거워지고 있었다.
"떠들썩한데."
"지루한 걸 날려 버리려면. 안전한 곳에서 남의 목 날아가는 걸 보는 게 최고죠. 진짜 흥분되거든요."
"너도 그런가?"
"전 직접 자르는 쪽이에요."
단상에 사회자가 섰다.
"그럼 추첨을. 시작하겠습니다!
지정된 참가자 분들께서는 제 위치로 걸어와 주십시오!"
참가자들은 함에서 종이를 하나씩 뽑았다. 나는 숫자 6이 나왔다. 관리인이 숫자를 기록했다. 참가자들은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참가자용 자리는 따로 있었다.
"영주님께서 입장하시겠습니다!"
높이 마련된 객석에 더러운 인상의 남자가 섰다.
키는 중간 정도. 머리카락은 얇았다. 마른 체형에 배만 나왔고, 눈빛이 음침하게 번들거렸다.
살아온 인생에 의해 얼굴이 망가졌다는 표현이 딱 어울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저놈인가.'
내 손은 칼자루를 잡고 있다.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영주는 루비아를몇 번씩 죽게 만든 놈이다.
삼십 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단상위로 뛰어 올라가면 벨 수 있을지 모른다.
루비아의 복수, 아니 내 복수다.
저질러 버릴까.
"어휴, 눈빛이 왜 저래. 시궁창 쥐새끼 같네. 목에 저건 뭐야? 무슨지렁이 같은 걸 그려 놨나.
레나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나는 마음을 억눌렀다. 칼을 뽑지 않기 위해 애썼다. 여기서는 곤란하다. 의미 없는 짓이다.
죽이고 나서 내가 죽는다. 그런 건 한심하다.
영주의 주위로 하이에나처럼 생긴 남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들이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호위하는 경비병들이다.
"경호는 더럽게 과잉이네. 하여튼 더러운 데가 많은 새끼들이 저런다니까요."
옆에서 틱틱대는 레나의 반응이,
어쩐지 조금은 마음을 풀어 주었다.
여기서 저지르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칼자루를 쥔 손에서 힘을 풀었다. 하지만 시선은 영주에게서 떼기 힘들었다.
영주는 손을 함에 넣었다. 그리곤 종이 두 장을 뽑았다. 씩 웃었다.
사회자에게 종이를 넘겼다.
사회자는 굽실거리며 종이를 받아들었다. 참가자와 관중들을 향해 크게 외쳤다.
"6번, 진네이 가문의 세에레 자간!
17번, 놋쇠 고리 예배단원, 자콧 이삭!"
레나가 콕콕 옆구리를 찔렀다.
"1등이네요. 나가셔야죠."
"아.
세에레 자간이 나다.
즉석에서 대충 지은 이름이다.
토너먼트 참가를 위해 이름을 지어야 했다.
후대에 인간계에 강림하는 16마왕중 두 놈의 이름을 대충 섞었다.
폭주하는 수소, 자간(Zagan)은 그리 폰의 날개를 가졌다. 달궈진 거대한 쇠발 굽으로 인간을 밟아 뭉큰하게 즙을 잘 짜내던 녀석이다.
붕괴의 세에레(seere)는 눈빛만으로 인간을 얼음덩어리로 만들던 마왕이다. 세에 레는 공간 왜곡 능력을 갖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인간의 신체 일부를, 눈앞에 소환해서 붕괴시키는 것을 즐겼다.
물론 들은 이야기다. 실제로 그랬는지 어땠는지는 모른다.
내가 접할 수 있는 정보엔 한계가 있다. 마왕군 네크로멘서들의 세뇌와, 전장의 소문뿐이다.
실제로는 무력하고, 겹겹이 보호받지 않으면 목이 날아가는 자들이라고 해도 내가 알 도리는 없다.
어쨌든.
남부 전선을 담당하던 두 마왕의 이름을 적당히 섞어 본 것이다.
"세에레 자간!"
호명된 나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
별 감흥 없는 척을 하고 있지만 사실 긴장이 된다.
마음의 준비도 안 되어 있다. 하필처음이냐.
인간들이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본다면 대략적인 수준을 알 수 있을 텐데, 내가 처음이라니.
토너먼트.
어느 정도의 녀석들이 참가하는지 모른다. 천천히 검을 휘둘러서, 나를양분한 푸른 갑옷의 기사.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재의 수도회나 사자 기사단에서 평기사 하나만 보내도 내 정체가 드러나는 건 아닐까.
과연 1승이라도 건질 수 있을까.
괜히 나온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레나를 흘끗 바라봤다. 레나는 방긋 웃었다.
"돈 다 걸었어요. 불려 줘요!"
어젯밤.
캐빈 애슈턴의 책을 읽으며 끙끙거릴 때 어딜 갔는지 영 안 보이더니, 도박판에 참여한 모양이었다.
'긴장도 안 하나?'
레나는 전혀 걱정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투구라도 날아가면 내 정체가 드러난다. 같이 온 그녀의 목숨도 위험해질 텐데.
어쩔 수 없다. 죽으면, 레나를 위해 한 번 죽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면 이제 빚은 없다.
기분이 깔끔해진다.
- 터벅터벅.
바스타드 소드를 어깨에 올렸다.
천천히 결투장으로 걸어갔다.
사회자가 높게 소리쳤다.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진네이 가문의 참가자, 세에레 자간! 토너먼트 첫 데뷔입니다. 과연진네이 가문의 무명 기사는 어떤 실력을 갖고 있을 것인가?"
"와아-!"
"처음 보는 놈이다!"
"죽든가 죽이든가 해라!"
"우우! 약해 보인다구!"
사람들이 함성을 질렀다.
'시끄럽군.'
"놋쇠 고리 용병단원, 자콧 이삭!"
- 쿵!
- 쿵!
반대편.
거인이 공쿵 바닥을 울리며 걸어 나온다. 덩치가 내 두 배는 된다.
커다란 망치를 들고 있다.
성문이라도 부술 것 같다. 사람의 몸을 부수기보다, 건축물을 해체하는 데 적합한 무기로 보인다.
"해체자 이삭!"
"화끈하게 짓이겨 줘!"
"끼더? 아? 아? 아? 이? 시"
정체불명의 고성까지 어디선가 터져 나온다.
"이삭 님! 지면 안 자 줄 거야!"
'토너먼트라는 게 이렇게 요란한거였나.' 시끄럽다. 이삭이라는 놈은 손을 들어 관중을 향해 휘휘 젓는다.
- 쿠궁!
날 보고 발을 구른다.
뭐지? 몸무게를 과시하는 건가?
사회자가 규칙을 설명했다.
"항복을 받아 내거나, 상대의 무기를 떨어트리면 이기게 됩니다! 항복을 선언하면 즉시 공격을 멈춰 주십시오. 공격할 경우 실격패로 처리됩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 둥둥둥!
북이 울렸다.
58화 세 가지 벽 (3)
***************************************************
7북이 울렸다.
갑옷 안에 들어 있는 내 하얀 뼈가 울린다. 별다른 감흥은 없다. 살짝 진동이 느껴질 뿐이다.
심장이 있는 인간들은 다르다. 피가 끓는다는 둣 고함을 지른다. 주먹을 쥔다. 하늘 위로 흔들어 댄다.
사회자가 선언한다.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 부응!
상대는 바닥을 쿵쿵 딛는다. 망치를 거세게 휘두른다. 건물도 부술 것 같다.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놈이 헛바닥을 놀린다.
"세에레 자간이라고? 거참 병신 같은 이름이군. 곧 병신이 될 이름일테니, 어울리나?"
남자가 키득키득 웃어 댔다. 나는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붕괴의 세 에래. 폭주의 자간.
십 년 후, 두 마왕의 이름은 모든 인간이 알게 된다.
눈앞에 선 남자의 수준으로 보면,
십 년 후까지 살아남을 가능성도 별로 없어 보이지만.
남자는 무기를 휘둘렀다. 수준이한 번에 파악된다. 그에게 물었다.
"너 정도면 얼마나 강하냐?"
"뭐야? 크하하하! 널 부술 수 있을 만큼은 충분히 강하지."
그가 과장되게 웃었다. 주먹을 꾹쥐어 보이곤, 한 손으로 거대한 망치를 높이 든다. 헛점밖에 없다.
- 툭.
나는 아예 칼을 늘어뜨렸다. 그런 채로 물었다.
"선심 쓰는 셈 치고 대답 좀 해봐. 너 정도면 얼마나 강한 거냐?"
"몸으로 겪어 봐라.!"
- 부응!
남자는 망치를 거세게 휘둘렀다.
머리 위로 똑바로 날아오는 망치를 피한 뒤, 남자의 안쪽으로 돌아 들어갔다.
- 퍽!
그의 손목을 향해 바스타드 소드를강하게 내리쳤다. 피에 열광하는 인간 군중들의 열기를 더해 주기 싫었다. 검면을 썼다.
- 쨍!
"끄아악!"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망치를 손에서 놓았다.
- 쿵!
뒤로 자빠졌다. 거대한 망치를 발로 밟은 채 물었다.
"너 정도면 얼마나 강한 거냐?"
"으. 으으으 아아.
이 녀석은 방금 전의 격돌에서 수준 차이를 제대로 읽어 내지 못한 것 같았다.
다시 망치를 잡으려 들었다. 건틀렛을 낀 손을, 발로 콱 밟아 버렸다.
"끄익! 끄우어어어!"
"너 정도면 얼마나 강한 거냐?"
이번에도 대답은 없다. 머리가 모자란 놈인 것 같다.
- 퍼걱!
칼을 휘둘렀다. 망치 자루를 잘라버렸다. 이제 긴 나무 자루와 거대한 끄트머리만 남았다.
인간들이 제대로 달아오르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채 십오 초가지 나지 않았다.
사회자가 황급히 손을 들어,
"세, 세에레 자간, 승!"
내 승리를 선언한다. 커다란 대진표에서 나를 한 단계 위로 올렸다.
잠시 침묵이 있었다.
하지만 잠시 이어진 침묵을 덮듯,
관중들은 더 크게 환호했다.
"와아아아!"
"멋지다!"
"엄청 세잖아!"
군중들은 금방 내 존재에 익숙해져환호했다. 피를 뿌리지 않은 것에 불평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존중할 만한 의견은 아니었다.
피는 지겨울 만큼 뿌려지게 된다.
주위를 쭉 둘러봤다. 타인의 피와 폭력에 탐욕스런 군중이 보인다. 나는 저들의 운명을 안다.
9년 전쟁은 곧 일어난다.
눈앞에 보이는,
제국 평민들의 피.
자유연합 시민들의 피. 엠버 아나키스트들의 피가 뿌려진다.
군중 자신의 피를 뿌린다.
혹, 인간들 간에 벌어지는 9년 전쟁에서 살아남더라도.
이후에는 16마왕이 강림한다.
그때도 살아남는 건 더 적은 숫자가 될 거다.
내가 그들에 대해 갖는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와아 아아아.!"
새로 부상한 강자를 향해 응원과환호성이 쏟아진다. 내 쪽에 줄이라도 서는 것 같은 환호성.
내 승리는 저들의 삶에 어떤 도옴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저들은 환호한다. 내 편이 되어 즐거워한다.
이때만이라도, 승자의 입장에 이입하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물론, 명백한 패자들도 많다.
"아이고, 내 돈!"
방금 쓰러진 녀석의 승리에 걸었는지, 내 돈 내 돈 하면서 입을 쩍 벌리고 울부짖는 도박사들도 있다.
나는 압도적인 환호와 비적비적 새어 나오는 유를 모두 무시했다.
곧바로 레나에게 돌아갔다.
"생각보다 너무 쉽군."
여자는 나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배당이 40 : 1 이었어요! 50로티를 걸었으니까. 20세이론이 우리 거예요!"
돈 좀 벌어다 줬다, 이건가.
"전부 다 저 덩치에게 건 건가?"
"아, 그건 4 : 1 이었구요. 우승배당이 40 : 1 이에요."
"뭐라고?"
"다 이길 거잖아요, 그렇죠?"
레나가 씩 웃었다. 이걸 정말 어떻게 하나.
하지만 일부러 지는 것도 만만치는 않다. 지는 것도 적당해야 져 줄 수가 있는 법이다.
- 투둑!
반으로 동강 난 할 버드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검면으로 얻어맞은 두 번째 상대의 투구는 슬쩍 찌그러져 있었다. 제대로 힘을 줘서 쳤으면 맞아서 죽어버렸을 거다.
사망자가 나오면 시끄러워진다. 물론 관중들은 열광한다. 그런 게 싫었다. 적당히 패 주기만 했다.
"끄. 끄으으.
남자는 몇 번 뒷걸음치다가,
- 털썩!
홁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별거 아니로군.' 싸움은 쉽게 끝났다. 거대한 덩치고, 허공에 할 버드를 획획 휘두르던 남자도 내 상대가 되지 못했다.
사회자가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승자! 세에레. 자간!"
"와아아아!"
간단히 2승을 챙겼다.
군중이 함성을 질렀다. 박수 소리가 울렸다. 몇몇은 발을 굴렀다. 둥둥둥 북이 쳐졌다.
'수준 떨어지는군.'
그날의 싸움은 그 두 번으로 끝이었다. 나를 보고 인간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레나가 돌아오는 나를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오늘 밤에 연락이 올 거예요."
"무슨 연락?"
"저는 다른 방에 있을게요. 한번 느긋하게 즐겨 보세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레나는 먼저 슬쩍 빠져나갔다. 도박판에서무언가를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혼자서 거리로 걸어 나갔다.
"일합-合의 자간이다!"
날 부르는 건가?
갑옷에 둘러싸여 있었음에도, 나를알아보는 인간들이 많았다.
"오오, 저 사람이 바로.
"활약이 대단하던데. 두 상대 모두 한 번에 제압해 버렸어."
"와아아!"
몇몇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어떤 어린 남자아이는 어미의 손을 뿌리치고 내게로 달려온다.
부모가 말릴 새도 없이, 작은 손이내 차가운 건틀렛을 잡는다.
"멋있어요!"
남자아이의 눈이 반짝인다.
멋있다고?
뭐가 멋있다는 걸까? 속이 조금 울렁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인간이란 이런 종족인가.
적당히 손을 놓아 버리곤 영주의성으로 돌아갔다. 안내인이 황급히 나에게 다가왔다.
"자간 님, 한참을 찾았습니다."
"나를?"
"예. 무희들과 저녁 만찬이 준비되어 있으니, 부디 참석을.
"싫다."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하지만안내인은 제법 끈질겼다.
"오늘 벌써 16강이 정해졌습니다.
부디 자리를 빛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밖에서 식사하시는 게 꺼려지신다면, 무희만이라도 따로 방으로 보내 드릴까요?"
"됐다니까."
"부디. 사람 하나 살린다고 생각하시고, 부탁드립니다. 모시지 못하면 영주님이 제 목을 칠겁니다."
안내인의 표정은 제법 진지했다.
이 안내인이라는 자도, 루비아를 좋아했던 '성안 사람' 가운데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현 영주에게 빌붙어 근근이 살아가고 있겠지만.
나는 끝까지 거절하려다가, 오히려그편이 귀찮아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옷은 입고 있겠다. 화상이 심한편이라서."
적당한 핑계를 댔다. 납득한 것 같다. 안내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며,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안내인을 따라 연회장으로 걸어갔다. 영주에게서 가장 떨어진 자리,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칼을 차고 있어도 별다른 제지는 없었다.
상석에 앉은 영주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나를 흘끗흘끗 바라보다가, 참석자들을 향해 말했다.
"자, 마음껏 즐기시기 바랍니다!"
- 딩딩디딩 딩딩딩디리리?? 리리리리?? 리~ 딩디리딩딩딩?
영주의 말과 함께 음악이 시작되었다.
안이 다 비치는 옷을 입은 여자들이 뭘 하자는 건지 알 수 없는 춤을 추면서 연회장을 맴돌았다.
이게 인간의 연회라는 건가.
다 같이 떠들썩하게 즐기는 게 아니었다.
딱딱한 자세로 눈치를 보아 가며 음악을 연주하는 악사들.
안이 다 비치는 옷 아래로 손을 넣어 엉덩이와 가슴을 주무르는 손길들에, 싫은 기색도 못 내비치고 몸을 제공하는 무희들.
명백히 즐기는 쪽과 즐김 당하는 쪽이 나누어져 있었다.
식탁 위에 통째로 구워진 새들, 짐승들의 시체에 대해서는 말할 나위도 없었다.
몹시 인간다운 연회였다. 슬쩍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 몸을 빼려는데영주가 나를 불렀다.
"기사 자간! 본 영주가 주최한 토너먼트에 참가해 주어서 영광이오.
어디서 수행했는지 물어보아도 되겠소?"
개기름이 흐르는 얼굴을 씰룩거리며 녀석이 짐짓 뭐라도 되는 둣, 내게 물었다.
'베어 버릴까?'
곤란하다.
놈과 나는 거리가 멀다. 놈의 주변에는 경비병 여덟이 흐트러지지 않고 서서 호위하고 있다.
참가자들이 언제 영주를 공격할지모른다는 듯한 자세로, 각각 칼자루에 손을 얹고 상황을 날카롭게 주시하고 있다. 이 장소에서 취하지 않은 것은 오직 나와 그 여덟 명의호위뿐이었다.
나는 호위들을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토너먼트에서 단상을 호위하던 하이에나처럼 생긴 놈들이다.
풍기는 분위기는 유블람의 경비병들과 비슷하다. 어디서 저런 놈들을 찍어 내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 정도다.
"특별히 수행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혼자서 익혔지요."
나는 적당히 존댓말로 대꾸했다.
슬슬 짜증이 나긴 했지만, 여기서다 뒤집어엎을 생각이 아니라면 대립 각을 세우는 건 멍청한 짓이다.
"하하하! 정말 대단하구려. 도시에 들어온 이후에도 줄곧 경계를 풀지 않고 있다고 들었소. 대단한 태도요.
흠모하는 마음이 생길 정도야."
왜 나한테 친한 척인가 싶었지만,
영주의 입장에서 본다면 당연한 것이었다. 제 형을 죽이고, 그 혈육을 쫓아내고 차지한 영주 위位다.
정통성 따위는 없다. 불안정하다.
힘과 공포로만 유지해야 한다.
애초에 토너먼트를 연 것도, 쓸 만한 칼을 영입하려는 의도겠지.
나는 영주에게 적당히 대꾸하며 자리를 빠져나왔다. 방에 막 들어갔을 때였다.
"누구냐."
나는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침대 옆에는 투명한 옷을 입은 여자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암살자인가?'
"영주님의 명을 받고 모시러 왔습니다. 부디 잠자리 시중을 들게 해주시길.
나는 영주의 수작에 헛웃음이 지어졌다.
이게 아마, 영주라는 자가 다른 인간 수컷들과 유대 관계를 구축하는 방식일 거다.
그들의 마음을 사는 방식이겠지.
"꺼져라."
안이 다 들여다보이는 옷을 입은 여자는. 무릎을 꿇은 채 오들오들 떨기만 했다.
"저, 저 잘하는데요.
- 똑똑.
그 순간 뒤에서 문이 열렸다. 레나였다.
"적당히 재워 주고 보내요. 그냥 쫓아 보내면 성하지 못할 테니까."
"성하지 못한다고?"
"죄, 죄송합니다. r여자가 고개를 조아렸다. 레나가여자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그럴 거 없어요. 남 일 같지 않아서 그래요."
레나는 여자의 옷을 벗겨서 내게 등을 보여 줬다. 둥에는 채찍질로 살이 찢어진 자국이 가득했다.
레나가 말을 이었다.
"손님을 제대로 못 모셨다고 쫓겨나면, 최소한 이런 꼴을 당하죠. 더심한 꼴을 당할 때도 많고."
이곳저곳 여자의 몸을 살피던 레나가 혀를 쯧쯧 찼다.
"어휴, 이곳저곳 많이도 고문했네.
침대 다 차지하고 자도 돼요. 어차피 여기 이쪽은, 잠 안 자거든요."
여자는 눈치를 보며 떨기만 했다.
나는 레나를 보고 물었다.
"왜 갑자기 왔지?"
"이런 일이 있을 거 같아서 왔죠.
전 다시 가요. 수익 극대화를 위해서. 좋은 시간 되세요!"
레나가 다시 방 밖으로 사라졌다.
여자는 침대에 눕지 않고,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떨고 있었다. 레나가 벗긴 옷도 올리지 못한 채 그대로였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누워라."
"네."
여자가 가만히 침대에 누웠다. 나는 이불을 덮어 주고 말했다.
"이제 자면 되겠군. 나는 없는 셈치고 편하게 자라."
이 여자에게 루비아에 대해서 물어볼까 했지만, 역시 찝찝한 일이라 관뒀다.
그녀 본인에게도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생면부지의 여자와 함께, 어색한밤이 지나갔다.
침묵 속에서 여자가 몸을 잔뜩 굳히고 있는게 느껴졌다. 당연하다면당연하겠지만, 잠들지 못하고 있는것 같았다.
벽에 기대어 멍하니 앉아 있다가,
문득 한심한 기분이 들어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식 는?"
"죄, 죄송합니다.!"
한층 더 긴장한 기색이 느껴진다.
무슨 말을 못 걸겠군.
어쩐지 그녀의 처지가 예전의 나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59화 세 가지 벽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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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잠은 오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있는 여자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긴장이 느껴졌다.
'당연한가.'
놓아두면 알아서 할 거다. 신경을 꼈다. 다른 생각에 집중했다.
'다들 약했어.'
토너먼트에 나온 인간들은 하나같이 약했다. 한 합을 제대로 받을 수있는 놈이 없었다.
내가 강해진 것일까? 싸웠던 두 놈을 생각했다. 그들이 특별히 약한 놈들인지도 모른다.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작게 쌕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는, 한껏 긴장하고 있다가 그제야 잠든 것 같다. 인간의 나이는 대충 알아볼 수 있다. 어렸다. 열여섯이나 일곱 정도일 거다.
은은한 새벽빛이 소녀의 얼굴에 비쳤다. 입가에는 손으로 맞은 자국이 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단단한 햇살이 밤을 뚫고 비쳐 오고 있다. 새벽까지 잠들지 못하고 긴장하고 있었던 건가.
여자가 새삼 가엾게 여겨졌다.
밤은 얌전하게 물러갔고,
- 똑똑.
레나가 찾아왔다.
"좋은 아침이에요. 즐거운 시간 보내셨어요?"
레나는 촉촉하게 젖은 머리를 양팔로 넘기며 빙긋 웃었다.
"이 아이는 잠들었네요."
레나는 침대에서 잠든 소녀를 흘끗바라봤다. 빛이 그녀의 눈가에 머물렸다.
- 드르륵.
나는 창문에 커튼을 쳤다.
빛이 약해졌다. 소녀의 표정이 편안해졌다.
"너무 쉬웠다."
레나는 밑도 끝도 없는 내 말을 한번에 알아들었다.
"시골 영주가 하는 토너먼트예요.
아직 정식으로 백작伯詩 위도 계승하지 못해, 자작子詩으로 불리는 영주예요."
"그런가.
"강한 녀석들은 이미 대부분 넉넉한 고용주가 있거나, 어디 기사단에 들어가 있겠죠, 뭐."
"재미없는 곳에 왔군."
"그래도 제법 하는 녀석이 하나 있어요. 오전 첫 경기예요."
반가운 이야기였다.
"그래?"
"굉장한 덩치에, 투구를 항상 쓰고있다더군요. 덩치만 큰 게 아니라 힘과 속도가 제법이래요."
"무기는?"
"양손 검을 써요. 뭐, 걱정하실 정도는 아닌 것 같지만. 지금 판돈이 다어디로 몰린 줄 아세요?"
레나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내 가슴을 손끝으로 슬쩍 쓰다듬으며 귀에 대고 속삭였다.
- 톡톡.
"전부 여기로 몰리고 있다구요."
"사실 제 생각보다도. 너무 잘 싸워 주셨어요. 다 세에레 자간이 누구냐고, 굉장히 시끄러워요."
레나가 목소리를 살짝 낮췄다.
"너무 시선을 끈 건 아닌가 살짝 걱정스러울 지경이에요."
나는 잠시 고민하다 레나에게 말했다.
"3승이다."
"네?"
"3승만 하고 끝낼 거다."
이 이야기를 레나에게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도박은. 알아서 해라."
"그것 참 반가운 말씀이셔요."
"반가운가."
"안 그래도 다들 이쪽에 몰려들어서 살짝 곤란했거든요."
높은 배당을 받으려면, 모두와 반대편에 서야 한다는 이야기다.
나는 천천히 토너먼트 경기장으로 나갔다. 자리에 앉았다.
그때 였다.
"기사 자간 님!"
얼굴이 긴 남자가 다가왔다.
초면이다. 모직으로 된 고급 코트를 입은 남자였다. 삼십 대 후반 정도로 보인다. 그는 내 옆에 서서 슬쩍 말을 건다.
"반갑습니다. 라인츠 상회의 베나르라고 합니다."
나는 말없이 남자를 흘끗했다.
"뭐냐,
"갑작스럽게 죄송합니다. 활약 을보고 한눈에 반했습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제든 생각나신다면, 저희 상회에 연락해 주십시오."
남자가 내 갑옷에 손수건 하나를 슬쩍 꽂아 넣었다.
"저희 상회를 위해서 일해 주신다면, 지금 받으시는 봉록의 2배를 쳐드릴 수 있습니다."
"얼마 받는 줄 알고?"
"저희는.
그 순社"참가자 분에게서 떨어져 주시오!"
멀리 떨어져 서 있던 경비병 한 명이 내 쪽으로 걸어왔다. 연회장에서 봤던 얼굴이다.
'참가자에게서 떨어져 달라고? 나를 이야기하는 건가?'
그런 것 같았다.
경비병이 얼굴 긴 남자를 막아섰다. 태도가 거칠다.
"함부로 참석자들에게 접근하지 마십시오. 경고합니다."
경비병이 불량스럽게 위협하는 표정을 지으며 다가온다.
"이런. 역시 방해가 있군요. 언제든 환대하겠습니다. 만날 날을 고대하겠습니다."
긴 얼굴의 남자는 웃음기를 유지한채 물러갔다.
경비가 다가왔다. 마치 호의라도 보이겠다는 것처럼 씩 웃는다.
"저희 영주님께서 기사님께 관심이 많습니다. 건투를! 기원합니다!"
경비병은 괜히 말끝에 힘을 주었다. 친한 척도 해 본 놈이 잘한다.
영 어색하다. 경비는 잠시 주위에서 어슬렁거렸다.
루비아를 죽인 놈들과 비슷한 인상이다. 무시했다. 경비병은 곧 민망한 듯 저쪽으로 사라졌다.
'이건 또 뭐지.'
남자가 건넨 손수건을 펼쳤다.
실크 위에 상회 이름과 위치가 수놓아져 있다.
같은 일이 두어 번 더 반복됐다.
"기사님, 부디 저희 상회에.!"
"혹시 거처를 옮기실 계획이라면,
반드시 저희 가문에 대해 한번 생각해 주셨으면.!"
"원하는 게 있으십니까? 최대한, 아니 원하시는 것 이상으로 맞춰 드릴 수 있습니다! 기사님과 꼭 한번같이 일해 보고 싶습니다."
부유해 보이는 남자들이 내게 다가오다가, 경비병의 제지를 받고 물러났다.
"역시 인기네요."
레나가 옆에서 웃었다.
"뭐 하는 것들이지?"
"스카우트죠. 자기 칼이 되어 달라는 거예요. 돈 많은 놈들은 항상 힘센 칼잡이가 필요하거든요. 돈을 벌기 위해서도 그렇고, 지키기 위해서도 그렇고."
"ㅇ"
cT.
"영주는, 자기 토너먼트에서 영업하지 말라고 견제하는 거죠."
- 둥! 둥! 둥!
예비 북이 울렸다. 레나가 이야기를 돌렸다.
"아, 벌써 다음 경기네요. 저 사람이에요. 한번 보세요. 둘 다 우승 후보예요."
양쪽에서 두 사람이 걸어 나왔다.
한 명은 덩치가 무척 컸다. 그냥 크기만 한 건 아니었다. 탄력 있고 단단한 느낌이었다. 투구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나와 같은 풀 플레이트 갑옷을 입었지만, 갑옷의 질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곳곳에 금이 가고 낡아 있었다.
그리 기능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본인이 기사라고 말하기 위해서 입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저자인가?"
"네. 항상 저렇게 투구를 쓰고 있어요. 연회도 거절했다더군요."
"난폭자 크레스틴!"
사회자가 그를 소개했다. 그는 적당히 양손 검을 위로 들어 보였다.
"와아아아. 관중들의 환호가 쏟아졌다.
군중은 쏟아지는 피를 갈구했다.
발을 구르고 소리를 질렀다.
반면 크레스틴은 조용했다. 의외로 차분한 움직임이다. 투구 때문에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반대편은 차가운 창날, 웨인이라는자였다. 날씬한 중키의 남자는 작은 갑옷만 입고 있었다. 손에 든 창이아주 길었다. 2미터가 넘는 창대에서 탄성이 느껴졌다. 특별한 재질의나무로 만든 것 같았다.
- 둥! 둥! 둥!
"결투를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는 다시 한 번 주의 사항을 읊었다. 먼저 공격해 들어오는 녀석은 창잡이였다.
녀석은 덩치 주위를 빙빙 돌며 스텝을 밟았다.
- 피릭!
- 피리릭!
창이 빙빙 돌며 꿈틀거렸다. 가죽갑옷은 창을 길게 잡았다. 한 손을 받침대로 삼아 세차게 쏘아 냈다.
빠르게 회수하고, 다시 쏘아 냈다.
- 쨍!
양손검을 든 덩치는 안에서 밖으로 칼을 휘둘렀다.
- 챙! 챙!
덩치는 뒤로 한두 걸음을 물러났다. 하지만 자세가 흐트러지지는 않았다.
- 픽!
어깨가 창에 맞았다. 몸이 살짝 혼들렸다.
- 피릿!
창이 다시 아래로 뻗어 왔다. 덩치는 다리를 옆으로 디뎠다.
그리고 칼을 위로 들어 창잡이를 내리쳤다.
'제법 빠르군.'
커다란 양손검이, 막 창잡이의 머리 위로 날아오던 순간이었다.
- 팟!
창잡이는 손에 쥐고 있던 모래를 덩치의 얼굴 근처에 뿌렸다.
"큭.!"
옅은 신음이 투구 밖으로 새어 나왔다. 덩치는 재빨리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모래가 더 빨랐다.
흠칫하는 사이 창날이 투구를 향했다. 창은 구부러지둣 날아갔다.
- 툭!
투구가 벗겨졌다. 땅을 굴렀다.
덩치 큰 '난폭자 크레스틴' 의 얼굴이 드러났다.
투구 사이로 내비치던 크레스틴의검은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짧은 머리. 커다란 주먹코. 얽은 볼이 드러났다.
갑자기 군중이 웅성거렸다.
"응? 뭐가 좀.
"여 자?"
"혹시. 여자인가?"
"덩치만 보면 곰 같은데?"
"목소리를 내 봐라!"
잠깐 혼란에 빠져 있던 관중들이 크레스틴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빙빙 돌며 창을 찔러 가던 놈도 거기에 가세했다.
"사람이랑 싸우는 줄 알았는데, 웬오우거랑 싸우고 있었네? 이게 뭐야! 결투가 아니라 사냥이었어?"
나는 살짝 의문이 들었다. 인간 암컷과 수컷을 구분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하지만 저렇게 빠르게 알아차릴 수 있나?
머리칼이나 옷차림, 어딜 봐도 암컷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인간들은 제 종족을 빠르게 구분하나 싶었지만, 레나의 말을 들으니 그렇지도 않은 듯하다.
"바람잡이가 있네요. 잘 보면 여자긴 한데. 투구가 벗겨지자마자 저런 반응이라니."
그녀가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미리 알았다는 건가?"
"저 웨인이라는 놈, 상대가 여자인걸 알고 있던 것 같아요."
그때 였다.
투구가 벗겨진 크레스틴의 검은 눈동자가 착 가라앉았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연지라고는 한 번도 발라진 적 없을 것 같은, 수련으로 부르트고 거칠어진 입술이 움직였다.
"기사의 예의를 지켜라."
그 한마디뿐이었다. 창잡이가 비웃었다.
"기사? 아무래도 오우거 암컷 같은데? 니 숲으로 돌아가지 그래? 우하 하하하.
군중의 왁자한 웃음이 쏟아졌다.
창잡이는 조롱을 퍼부으면서도, 긴창을 가지고 날렵하게 크레스틴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야유와 웃음에도 크레스틴의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칼자루를 잡은 손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칼은 웬만한 남자들보다 짧었고, 한 번도 제대로 손질된 적 없는 것처럼 거칠었다.
"효과를 별로 못 본 거 같은데."
"네,
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상처라도 받을 거라고 생각했나본데, 영 안 먹히네요."
- 피릿!
창이 다시 한 번 쏘아졌다.
투구가 벗겨진 크레스틴은 이를 악물었다. 눈가의 모래를 다 털어 내지도 않은 채 자세를 낮췄다.
팔짱을 끼고 가만히 지켜봤다.
크레스틴이 쓰고 있던 건 시이를 크게 제한하는 투구였다. 그걸 벗어던지자 그녀의 움직임은 훨씬 빠르고 정확해졌다.
서른 합 정도가 지났다.
- 서적!
"항복!"
뱀처럼 꿈틀대던 창이 잘렸다.
크레스틴이 코앞까지 쇄도하자, 수세에 몰리고 있던 창잡이는 빠르게 항복을 선언했다. 속도도 힘도 한쪽이 압도적이었다.
크레스틴은 상대의 코앞에서, 대검을 천천히 뒤로 물렸다.
대검은 곳곳이 이가 나가 차라리 쇠몽둥이에 가까워 보였다.
한쪽 구석으로 도망간 창잡이가 넉살을 떨었다.
"어이쿠! 영주님, 오우거도 나오는 거였습니까? 항복! 항복입니다!"
웨인이 와하하, 하고 웃었다. 군중들도 따라 웃었다. 승자에게 보내는 환호와 찬사는 없었다.
그저 저질스런 휘파람이 관중석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나는 레나를 돌아보았다.
"왜 안 죽이지? 저런 모욕이라면 칼을 멈추지 않아도 됐을 텐데."
레나가 어깨를 으쪽하며 말했다.
"흔치 않은 기회니까요."
"기회?"
"기사단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여자를 안 받아요."
"종자로도?"
"네. 종자로도 안 쓰죠."
"? 으."
? T3 ?
"로망을 가진 여자들이 있나 봐요.
충성, 명예, 뭐 이런 거에."
그녀는 살짝 피식거리며 말했다.
"이런 결투 대회에 나오곤 하죠.
그렇게라도 기회를 잡으려고. 저도 이야기만 들었어요."
"그런가."
"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에요."
나는 경기장을 바라봤다.
2미터가 넘는 덩치의 크레스틴은, 관중들과 단壇 위 영주의 웃음을 경기장 한가운데 서서 가만히 감내하고 있었다.
영주가 다가가서 말했다.
"하하하.! 크레스틴이라고? 정체를 밝혀라. 편력 기사라고 되어있는데.
- 덥석.
크레스틴이 투구를 주웠다. 묻은 흙을 털어 냈다. 옆구리에 끼고 영주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맞습니다. 본 경기에는 자원해서 참가했습니다."
"그런가. 하하핫. 혹시 오우거의피가 섞인 건 아니겠지?"
크레스틴이 두꺼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런 일 없습니다."
스르릉
그녀가 칼을 집어넣었다. 주근깨로 얽은 볼이 살짝 떨렸다. 칼을 집어넣는 손은 떨리지 않았다.
"제대로 된 이름을 말하게. 본명은?"
"크리스티나 더 브루이져입니다."
그녀가 크리스티나, 라고 말할 때관중들은 다시 한 번 와하하핫 웃었다.
"크리스티나? 휘우우?"
휘파람을 길게 부는 놈도 있었다.
이런저런 말들이 들려왔다.
"브루이져 가문?"
"그 다 망했다는 가문 말이야? 거기 오우거가 있었나?"
- 철컥.
크리스티나는 다시 투구를 썼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사회자가 그제서야 선언했다.
"승자. 크리스티나!"
그 순간 다시 한 번 사람들이 킥킥대며 웃었다.
60화 세 가지 벽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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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스럽다. 야유와 휘파람, 드문드문 터져 나오는 박수.
그 사이를 크리스티나는 걷는다.
레나가 내 옆에 몸을 바짝 붙인다.
낮게 속삭인다.
"아마, 오후에 저 여자랑 싸우실 거예요. 크리스티나랑."
"다음 상대인가?"
"아니요, 다다음이죠. 다음 전투는 지금이거든요."
- 둥! 둥! 둥!
북이 울렸다. 내 차례였다.
"자간! 자간! 자간!"
군중들이 나를 연호한다.
10년 뒤 그들을 짓밟아 죽일, 그리 폰의 날개를 단 거대한 수소의 이름을 연호했다.
마왕의 것을 따 임시로 지은 이름이다. 내가 만들어 낸 작은 부조리 속을 걸어갔다. 결투장으로.
환호. 그 속에 요구가 섞였다.
"투구를 벗고 싸워라!"
"다들 얼굴 좀 보자! 또 여자가 있는지 보자구! 와하하핫!"
크리스티나의 정체가 드러났다. 그게 군중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녀를 원망해야 할까. 의심의 눈초리까지는 아니지만, 내게도 자연스럽게 관심이 쏟아진다. 물론 조금도 달갑지 않다.
인간의 도시 한가운데다. 정체가 드러나면 곧바로 죽는다.
상황이.
'빨리 빠지는 게 낫겠군.'
반대편에서 남자가 걸어왔다. 이번전투의 상대다.
방패와 곡도를 들었다. 싸우는 모습을 본 적 있다. 방패는 작고 두꺼운 원형. 손 부위가 둥그렇게 튀어나와 있다.
'저걸 글러브처럼 썼지.'
제압한 상태에서, 상대의 투구를 두드려 찌그러뜨리던 게 기억났다.
체구는 작지만 힘이 좋다. 기술도 있다. 나는 남자에게 물었다. 세 번째 질문이었다.
"너는 어느 정도지?"
남자는 내 질문에 당황했다. 옆구리에 손을 짚는다.
"너는 어느 정도 강한가?"
그가 피식 웃었다.
"나? 흐음. 그건 왜 묻냐? 아마 너보다는 약할 거다."
제법 공손한 태도다. 앞서 두 번의내 싸움을 본 것 같았다. 그가 말을이었다.
"네가 때려눕힌 놈들, 나도 대충 아는 놈들이다. 너처럼 한 방에 이길 자신은 없어."
인간의 칭찬이 낯설다. 어쨌건 내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다. 질문을 바꿔 보기로 했다.
"나는. 어느 정도 강하지?"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자꾸 웃기는 질문을 하는군. 어디 산에라도 처박혀 있다가 왔나?"
"비슷하다고 해 두지."
"너 정도면. 초인이다."
"초인?"
"그래. 어느 영지에 가도 좋은 대우를 받을 거야. 백작가 치안대장정도는 간단하게 꿰찰 수 있겠지."
그는 내 질문에 순순히 대답했다.
제법 호의적이다. 강자를 알아본다는 건가.
강자라.
문득,
푸른 갑옷의 남자가 떠올랐다.
레나에게 들은 이야기를 되짚어 보았다.
'운이 좋으신 거죠. 눈앞에서 제국 4검주劍主 중 하나를 만나고도 살아남으신 거라면.
남자가 점점 더 거리를 좁혀 온다.
슬슬 공격해 들어오려는 듯하다. 제국 4검주라.
나는 툭 던지듯 물었다.
"제국 4검주에 비하면 어떤가?"
단순한 질문이었다.
그 순간.
"푸하하하하!"
남자가 멈췄다. 그리곤 그 자리에서 폭발하듯 웃었다. 짓쳐 오는 자세를 흩뜨렸다. 입을 열었다.
"미쳐 버리기라도 한 건가?"
"무슨 소리지?"
"왜 갑자기 헛소리야, 당신?"
"헛소리?"
"그래. 기氣를 쓰는 수준부터는 이런 거. 아무 의미 없잖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검 끝에 마력만 흐르게 해도 강철을 두부처럼 자르는데, 강기로 온몸을 두른 마스터들을 자기와 비교해?
하. 하하하.
'강철을 두부처럼 자른다고? 그때 그게. 검기였나.' 아주 천천히 휘두른 검으로, 갑옷째로 나를 반으로 쪼개던 남자.
다시 떠올리니 소름이 끼쳤다. 그런 놈이 세상에 얼마나 있는 걸까.
최소 3명은 더 있다는 이야기다.
최소한.
그 순간이었다.
- 털썩.
남자는 칼을 내렸다.
"관둬야겠군. 사회자, 난 못 해 먹겠소. 기권이오."
'뭐지?' 병적인 심경 변화가 느껴진다. 나는 별말도 하지 않았는데.
"기권이라니까, 기권. 안 해."
남자가 연신 말을 반복한다. 사회자가 당황했다.
"참가자 테발드, 정말 기권이 확실한가? 정말로.
테발드라 불린 남자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데서 싸워 봤자. 뭐 하오?
저 미친 자가 이기라고 하쇼."
그를 바라봤다. 눈빛이 회한에 차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남자는 터벅터벅 밖으로 걸어 나갔다. 어쩐지 쓸쓸하고 괴로워 보였다.
황당한 승부였다.
"? ? ?? rn I I-'r 으"뭐, 뭐야!"
"재미없다-!"
군중들이 일제히 야유했다. 그는 야유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넘겼다. 곧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모르겠군.'
"숭자는.!"
내 승리가 선언됐다. 야유는 계속이어 졌다. 나는 터덜터덜 안으로 돌아왔다.
레나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무슨 얘기 했어요? 시끄러워서 영안 들렸는데."
"내가 얼마나 강하냐고 물었다."
"그래서요?"
"제법 강하다고 하더군. 그래서 검주들만큼 강하냐고 물었지. 검기가 어쩌고 하면서, 이런 건 다 의미 없다면서 관 두자더군."
"하핫.
레나가 한쪽 입꼬리를 비뚜름히 올리며 웃었다.
"그랬군요. 그래도 저런 반응은 격하네요. 기권이라니."
"무슨 일이지?"
"글쎄요. 함부로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아마 상처라도 자극한 게 아닐까요?"
"상처?"
"기氣는 재능이에요. 평생 그걸 못 느끼는 자들이 거의 다죠."
"그런가."
"처음부터 포기하면 좋은데. 어중간하게 뛰어난 자들이 있어요."
"저 남자 같은?"
"네. 그럼 고통스럽죠. 될 것 같기도 한데, 평생 잡힐락 말락, 보일락말락 하는 거예요. 그 경지가."
"으음."
"그러면 미쳐 버리는 거죠. 아예 감도 못 잡는 게 낫지."
알 둣, 말 듯한 이야기였다.
"눈앞에서 넘지 못한 벽인 거죠.
평생 포기하지도 못하고, 생각하면온몸이 파랗게 아파질 거 같고."
"계속 시도해 보면 되지 않나? 그러면 언젠가는.
"더 고통스러워질 뿐이죠. 차라리그 시간에 근력이나 기술을 키우는 게 낫지. 포기가 늦어질수록 고통은더 커지죠."
"으음."
"검주劍主들이 그 정점이죠. 그래도 저분이 무척 예민하긴 하네. 언급만으로 기권이라니."
레나는 가판에서 산딸기를 입에 넣으며 옆에서 말을 이어 갔다.
"마음에 뭐가 많이 쌓여 있었나 봐요. 뭐, 편해서 우리야 좋죠."
머릿속이 복잡했다. 가만히 생각하다가, 엉뚱한 소리를 했다.
"다음 경기는 진다."
하지만 레나는 즉각 이해한다.
"여기서 빠지시려구요? 하긴.
"그래. 다들 투구 안에 관심이 많더군. 슬슬 끝내고 떠나지."
"역시 그게 좋겠어요. 전 돈 빼고을게요!"
이해력이 빠르다.
레나가 바깥으로 사라졌다. 도박판이 벌어지는 곳으로 간 걸까.
레나가 떠나자, 누군가가 근처로 다가왔다. 인간 암컷이다.
"어머! 이 갑옷 안은 또 얼마나 단단할지 궁금해지네요."
입가에 열은 미소를 띤 인간 암컷이, 옆에서 엉덩이를 썰룩거린다.
'뭐 어쩌라는 것이지?'
"가까이서 보니 좋네요. 방금 그 여성분과는 어떤 사이신가요?"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눈가의 화장이 짙었다. 눈을 크게 강조하는 화장이었다. 어차피 눈구멍의 크기는 변하지 다.
두개골은 그대로다. 저런 분칠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의아했다.
한껏 치장한 인간 암컷이 내게 집요하게 치근덕거린다.
인간의 짝짓기는 규칙이 복잡한 것 같기도 하다가도, 아무 규칙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얀 목을 내보이며 제 딴에는 유혹하는 것 같다. 목을 잡고 멀리 던져 버리기에도 곤란한 환경이다.
나는 허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완전히 무시했다.
"쳇. 재미없다아."
눈에 분칠을 한 여자가 물러갔다.
몇몇 여자들이 더 다녀갔다.
"가요, 간다구요.
반응은 비슷했다. 폭력과 피의 현장에서 잔뜩 흥분한 여자들은 혼자 있는 나에게 치근덕거리다, 완전히무시하자 제풀에 지쳐 사라졌다.
레나가 도착했다.
양손에 든 가죽 주머니에서, 은화짤랑거리는 소리가 청량하다.
"패배에 거는 편이 낫지 않았나?
한 번 더 불릴 수 있었을 텐데."
"어색하지 않게 질 자신 있으세요?
승부 조작이라고 더 시끄러워질 거예요. 돈을 빼기도, 몸을 빼기도 어려워질 거구요. 빠질 거라면 그 냥돈을 빼는 게 나아요."
"그런가."
깔끔하게 빠지는 게 목적이다. 그녀의 말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다음 경기가 시작됐다.
"세에레. 자간! 그 상대는. 크리스티나!"
사회자도, 관중들도 한차례 와하하핫, 하고 웃었다. 크리스티나는 투구를 쓰고 있었다.
나는 칼을 아래로 내렸다.
"기사 크리스티나."
내 부름에 그녀가 움찔했다.
투구 사이로 비치는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름을 부른 것뿐이다. 흠칫할 만한 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투구사이로 순박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왜. 그러나. 기사 세에레 자간."
"최선을 다해 봐라."
나는 강하게 칼을 내리쳤다. 바람소리가 군중들의 환호성을 갈랐다.
- 쨍!
'제법이군.'
아직 누구도 막지 못했던 일격이 쇠몽둥이 같은 대검에 막혔다. 곧바로 반격이 들어왔다.
- 쌔앵!
그녀의 대검이 공기를 강하게 휘둘러졌다. 날카로운 금속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경기장에 울렸다.
피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강하고,
빨랐다. 순발력도 제법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내가 더 빠르고 강했다. 서른 합정도를 어울려 줬다. 그녀의 검은 내 몸에 닿지 못했다.
"하압!"
크리스티나가 처음으로 기합을 넣었다. 대검이 빠르게 세로로 내리쳐졌다. 나는 옆으로 비켜섰다. 간신히검 등을 쳐냈다.
제법 아슬아슬했다.
'맞았으면 위험했겠군.'
투구가 찌그러지고, 모습이 드러났을 거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이런 힘을 왜 쓰지 않았나?"
그녀가 부끄러운 둣 더듬거리며 말을 꺼냈다.
"기합을. 넣어야 해서.
"넣으면 되지 않나?"
"제가 .인 걸 알아챌 겁니다."
목소리가 갑자기 작아졌다. 단어가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여자라고 한 건가? 여자인 걸 알아첼 거라고? 이 인간 암컷은 자기를여자라고 하는 것조차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나는 좀 더 도발하기로 했다.
"뭘 어쨌다는 건지 모르겠군. 그런걸 생각할 정도로 여유로운가?"
그녀가 좀 더 힘을 내어 주지 않으면 곤란했다. 져 줄 생각이다.
하지만 그것도 상대가 웬만큼 해줘야 자연스럽다.
핀잔에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눈빛이 변했다. 자세가 낮아진다. 작은 침음이 흐른다.
'됐다.'
나는 칼을 잡은 손에 슬쩍 힘을 했다. 저 정도 힘과 속도라면, 어색하지 않게 무기를 놓칠 수 있다.
"흐압!"
그녀가 달려들었다. 몸을 한 바퀴 돌렸다. 원심력에 기합을 더한다. 대검을 휘둘렀다. 공기가 세차게 찢어졌다.
- 파리릭!
? 쩡!
칼과 칼이 맞부딪쳤다. 하지만 중량과 속도가 달랐다. 내가 가볍게 쥔 칼은 대검에 맞았다. 허공으로 멀리 튕겨 날아갔다.
- 퍽!
계산대로다. 칼이 멀리 떨어졌다.
"이, 이게 무슨.!"
그녀가 당황했다. 힘을 뺀 걸 알아차린 것이다. 나는 어깨를 으쪽하고말했다.
"패자는 이만 퇴장하도록 하지."
옆으로 걸어갔다. 몇 바퀴 돌아가바닥에 멸어진 검을 주웠다. 그리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사회자는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큰 망설임 없이, 크리스티나의 승리를 선언했다.
나는 토너먼트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도시 밖으로 나갈 생각이다.
레나가 옆에서 낮게 휘파람을 불며 걸었다. 그녀에게 물었다.
"중간에 그만뒀다. 손해가 큰가?"
"네? 손해요?"
레나가 품에서 꽉 찬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슬쩍 끈을 늦춰 안을 보였다. 짤랑거리는 은화가 안에 가득"손해라구요? 이게 다 이틀 만에번거라구요! 우린 이제 부자예요!"
"? ≫
저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지만, 즐거운 분위기를 셸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냥 놔뒀다.
대신 생각에 잠겼다. 부딪힌 몇몇 인간들에 대해 생각했다.
'웬만한 인간은 이기는 건가?"
토너먼트다. 지방 영지이긴 하지만,
꽤 많은 인간이 모였다.
내 상대가 될 만한 자는 없었다.
쭉 갔으면 우승이었을 거다.
자신감을 가져도 될까.
강해진 건 알고 있었다.
이 정도로, 웬만한 인간들을 모아놓아도 상대가 없을 거라는 생각은하지 못했지만.
다만.
기권한 남자의 말은 걸린다.
검기를 쓰는 놈들에 비교하면, 이런 건 전부 다 장난이라는 말.
나를 갑옷째 가르던 녀석이 쓰던 게 검기인 것은 확실하다.
인간들 중에 그런 자들이 얼마나더 있을까. 거기까지는 어떻게 도달해야 하는 걸까.
역시, 빨리 던전을 다녀야 한다. 마음이 조금 급해졌다.
'으음.
그때 였다.
"자, 잠시 이야기 좀 합시다!"
몇 명의 남자가 나를 둘러쌌다. 반사적으로 칼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적의는 없어 보였고, 모두비 전투원이었다.
"뭔가?"
주위를 둘러봤다.
"기사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배가 불뚝 나온, 중년의 인간 수컷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비단으로 된 옷을 걸친 자들이었다. 얼굴에서는 기름이 흘렀다.
"잠시만 이야기를 들어 주십시오!
에라스트 영주와 계약하지 않으시려고 나가신 거라면, 부디 저희 가문과.!"
남자들이 서로 앞다뤄 자기 얘기를 했다.
모두 비슷한 이야기다. 자신들의 전력이 되어 달라는 이야기였다.
"이미 계약이 되어 있어서.
레나가 남자들을 제지할 때였다.
"어허, 지금 이분에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나?"
그때 였다.
"기, 기사 세에레 자간!"
임시로 지은 가명을 애타게 부르며, 누군가가 뒤에서 달려오는 목소리가 들렸다.
크리스티나였다.
갑옷 일부는 벗은 채로 달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투구는 그대로였다.
나는 손을 내저었다.
주위의 유지들과 상인들을 물러나게 했다. 숨 가쁘게 달려온 그녀가 내게 물었다.
"왜, 왜 승리를 양보한 거요?"
투구 사이로 보이는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할 일이 있어서. 여기 영주가 어떤 자인지 알고 온 건가?"
"그렇지는 않소. 나는 그저.
"영주를 조심해라. 위험한 무리들과 연결되어 있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
"경고는 거기까지 해 두지."
어차피 그녀에게 대안을 제시할 수있는 처지도 아니다.
짤막하게 뱉은 뒤 그녀에게 물었다. 궁금한 점이 있었다.
"토너먼트 경기장도 아닌데, 투구는 왜 계속 쓰고 있지?"
그녀는 목소리를 낮췄다.
"내 모습이. 보기 흉하지 않소."
"무슨 기준인가?"
"그거야.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거라면 주위에서 나에게 돈을 제시하던 자들을 바라봤다.
얼굴에는 기름기가 흐르고 배가 나와 뒤뚱거렸다.
덩치는 크지만, 군살 없이 몸 전체가 탄탄하고 두꺼운 근육으로 뒤덮인 크리스티나와 대조적이었다.
"얼굴이나 몸을 가린다면 저들이 가려야겠지."
"당당해져라."
크리스티나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멍하니 있는 그녀를 남겨 두고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한참을 걷다슬쩍 뒤를 돌아봤다.
크리스티나는 그제야 투구를 벗으려다가, 멈칫하고 있었다.
"투구를 벗지 못하는군."
"사람은 쉽게 못 변하거든요. 적어도.
"적어도?"
"시간이 좀 필요하겠죠."
레나는 아무렇게나 지어낸 듯한 곡조로 휘파람을 불며 걸었다.
61화 인간성의 승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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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르륵.
레나는 마차 창문을 열었다.
- 휘이잉!
늦가을 바람이 차갑다. 공기에 조금씩 살얼음이 끼고 있다.
"이제 곧 겨울이겠네요."
"아직 한 달 정도는 남았지."
밖을 바라봤다.
밀밭이 양옆으로 펼쳐진다. 수확은 한참 전에 끝났다.
하지만 가을의 말엽末葉에도 밭은 비어 있지 않다.
추수가 끝난 밭을 사람들이 갈고 있다. 소도 없는지, 두 사람이 짝지어 쟁기를 끈다. 당장이라도 지쳐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성벽 안쪽, 아니 영주 성에서 벌어지는 화려한 파티와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그나마 젊은이도 없었다. 쟁기를 끄는 건 이마에 주름이 진 남자들이다. 뒤에서 비료를 뿌리고, 뭔가를심는 건 늙은 노파다.
비료를 뿌리는 노파는 몇 번씩 무릎을 부여잡으며 끙끙거렸다. 나는지 나가듯 물었다.
"괴로워 보이는군. 수확은 끝나지 않았나?"
"보리를 심네요. 저런 모습은 오랜만에 보네. 정말. 어지간히 뜯어가나 보다."
레나가 살짝 혀를 찼다.
"뜯어 간다고?"
"밀이랑 쌀을 굶을 정도로 뜯어 가니까, 수확하자마자 저렇게 보리를 심는 거죠."
"영주가 바뀐 것 때문인가?"
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전에는 살기 좋은 도시였거든요. 원래 이런 도시가 아니었는데."
루비아의 부친은 좋은 통치자였던 것 같다.
어수룩하지만 종종 총기를 발휘하던 루비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잘 교육받았다면 괜찮은 영주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루비아를 처음 만났을 때, 사냥꾼들에게 자기가 정당한 계승자라고소리치며 반항하던 게 기억났다.
단검을 들고 돌진해서.
- 달그락.
나는 뼈를 들었다 놓았다. 그 뒤에 벌어졌던 일을 생각하니 다시 한 번 괴로워졌다.
그녀가 영주였다면, 밀밭의 인간들은 저런 꼴을 당하지 않았을까? 잠시 동안은 그럴지도 모른다.
그 어설픈 모습이, 머릿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세요?"
"아무것도 아니야."
"젊은이들도 다 없네요."
"징집한 거겠지. 훈련을 시키고 있을 거고. 성벽 안쪽에서도 보이지 않았나."
"군사 훈련에 식량 긁어모으기. 계속 진행되긴 하는데, 정말 전쟁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세요?"
레나가 눈을 깜빡이며 묻는다.
"물론이지."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세요?"
"그냥."
그 외에 대답할 말은 없었다.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뭘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황제가 전쟁을 원하니까."
레나가 고개를 갸웃한다.
"연합과 엠버의〈대응〉을 믿지 않으시는 거군요."
"그 대응이라는 게, 그렇게 믿을만한 건가?"
"객관적으로 보면 믿을 만한걸요.
'그냥' 아는 것보다야. 저야 물론,
우리 남편님 말 믿지만.
레나가 내 어깨로 고개를 기울였다. 은은하게 열은 향수 냄새가 풍겨 온다. 빌 베리 꽃을 베이스로 만든 연한 향수 냄새가.
문득 위화감이 느껴졌다.
'언제 이렇게 냄새가 느껴졌지?'
내 후각은 향수를 하나하나 구분할 정도로 예민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슬쩍 밀어내고 창밖을 바라봤다.
길이 평탄해진다. 말들이 조금 더속도를 낸다. 마차는 살짝 더 흔들린다.
바퀴 아래로 먼지가 풀풀 날린다.
위쪽까지 닿지는 않는다. 멀리 뒤쪽으로 사라진다.
눈앞에 푸른 창이 떴다.
[동화율이 내려갔습니다.]
[88.68% -> 88.61%]
'동화율.' 계속 등장하는 말. 무슨 뜻인지는 아직도 모른다. 그렇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무언가가 새롭게 인식될 때마다 동화 을이 내려간다는 것.
처음을 돌이켜 본다.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용사를 깨물고, 두개골에 피가 쏟아졌을 때였나?
무언가가 있었던 느낌이 든다.
무언가가 ?
길드에는 금방 도착했다. 원장실에 들어갔다. 순한 인상의 중년 남자가 반색을 하며 나를 맞는다.
물론 그 정체는, 뭐로든 변할 수있는 끈적거리는 녹색 점액이다.
"아,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벌써?"
"어쩌다 보니.
원장은 창문 바깥, 나무에 앉아 있는 새를 흘끗 돌아봤다. 새의 발목에는 작고 검은 리본이 앙중맞게 묶여 있었다. 편지가 적힌 작은 원통이 매달려 있었을 터다.
"딱 좋을 정도로.
원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활약해 주셨더군요."
뒤로 돌았다. 벽에 붙어 있는 빼곡한 갈색 서랍장을 보고 섰다.
- 철컥.
열쇠를 들어 가운데 서랍을 연다.
무겁게 쩔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가 반짝이는 금화 한 닢을 꺼내어내게 건넨다.
"보수입니다. 감사드립니다."
받아서 손에 쥐었다.
3세이론을 획득했습니다, 하는 메시지와 함께 라임의 호감도가 2 올라갔다는 창이 떴다.
이런 창도 점점 익숙해진다.
"그럼 이 의뢰는, 레나가 달성한 걸로 하겠습니다."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그게 목적이다.
금화 세 개를 레나에게 툭 튕겼다.
제법 부피감이 있긴 하다.
"받아라."
"우와. 감사합니다!"
레나는 잽싸게 받는다. 제법 묵직한 금화 세 개가 그녀의 손에서 짤랑거린다.
레나는 밝게 웃는다. 반짝이는 금화를 천천히 쓰다듬는다.
양각된 초대 황제의 초상이 그녀의 손끝에서 몇 번이고 비벼진다.
금화의 감촉과 감도를 천천히 즐기는 것 같다.
'그렇게 돈이 좋은가.'
얼굴에 감격이 번진다. 그녀는 잠시 말이 없다.
눈 내리는 들판에 알몸으로 서 있다가, 갑자기 코트가 입혀진 것 같은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혼잣소리처럼 중얼거렸다.
"와. 이거 무겁네요."
"무거운가?"
세이론은 순금과 미스 릴을 섞어 만들어진다. 배합 비는 50 : 1이다. 은화에 비해 직경도 부피도 크다.
하지만 들기 힘들 정도는 아닌데.
"하하핫. 저한테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게. 무겁다구요."
눈이 조금 촉촉해진다.
민망한 기분이다. 잘해 주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이건 전혀 이타적인행위가 아니다. 빚진 감정을 아무렇게나 푸는 행위에 불과하다.
그게, 우연히 잘 진행되고 있는 것뿐이다.
이런 관계는 언제 파탄이 날지 모른다. 애초에 인간과 마물이다.
그녀의 감격을 피하고 싶다. 내겐 과하다. 나는 시선을 돌려 원장을 바라봤다. 화제를 돌린다.
"이 금화들, 진네이 가문 쪽에서 대금을 받은 건가?"
"그건 아닙니다만, 의뢰 수행자에게는 마땅히 먼저 드려야지요."
호의적인 태도다. 자기 돈을 먼저 꺼내 주는 것이다.
"다음 의뢰를 받지."
"서두르시는군요."
"아직 갈 길이 멀어서."
말 그대로다. 토너먼트에서 인간들 몇을 가볍게 이기긴 했다. 하지만 아직 나아갈 길이 까마득하다.
토너먼트에서 만났던 놈.
그는 '이런 건 다 장난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놈은 아주 진지했다.
강한 인간은 층층이 쌓여 있다는 거다. 세계에는 모르는 것투성이다.
서두르지 않으면 곤란하다.
초조한 듯한 내 반응에, 원장이 웃으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금 난이도 있는 의뢰가 하나 있습니다만.
"얼른 해치울 테니 이야기해 봐."
원장이 머그잔을 들었다. 커피를한 모금 홀짝였다.
3개월이 지났다.
동부의 하이 랜드(고산지대)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만, 제국 남부도 평평하지만은 않다. 그락스 산맥의 긴 자락이 곳곳에 퍼져 있다.
그 사이사이를 여기저기 누비고 다녔다. 독 묻은 가시로 가득한〈시들어 버린 미로〉를 공략했다.
붉은 눈에,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켄타우로스가 웅크리고 있던 〈피 묻은 승마자의 쿼터〉를 클리어했다.
넝마 같은 몸을 하고 있는 구울 들이 걸어 다니던 〈시체 출 금소〉도기 억에 남는다.
〈맹독 하이에나의 구덩이〉에서는 칼끝에서 스스로 독을 뿜어내는 단검을 얻었다.
대부분, 던전을 침략하는 모험가들의 뒤를 밟아 들어갔다.
침략자도 거주자도 모두 우리의 경험 치로 만들었다.
산적 소굴을 부쉈고, 복수를 대신해 주거나 상인을 호위해 주는 의뢰를 받기도 했다.
동선은 원장이 최적으로 짜서 넘겨주었다.
돈은 놀라울 정도로 많이 벌렸다.
레나는 그 이상으로 빠르게 강해졌다. 반면 내 성장은 지지부진했다.
레벨은 30까지 오른 상태에서 정체 중이다.
레벨 업 때마다 내 능력치는 1씩밖에 오르지 않는다.
해골병사라는 종족의 한계다.
서큐버스님도 그걸 안타까워했다.
반면에 레나는, 레벨 업 때마다 한번에 스탯이 4씩 오른다.
특전이 한 번 성장한 뒤에는 종종5씩 오를 때도 있다. 지나치게 효율이 차이 난다. 나중에는 경험치를 그녀에게 몰아주었다.
- 휘이이잉!
창문 바깥에는 눈발이 흩날린다.
- 타닥. 타다닥.
벽난로가 장작을 태운다. 날이 추울수록 난로는 온화하고, 따스하다.
장작 타는 소리에는 리듬이 있다.
짧다가 길어지고, 다시 짧아진다.
"따듯하다."
레나가 작게 중얼거린다. 그녀는 벽에 기대어 앉는다.
잠든 동생을 안고, 천천히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바닥에는 빈 커피잔이 있다.
뜯어진 쿠키 포장지 몇 개가 근처를 굴러다닌다.
"후아.
레나는 제 품에 잠든 동생을 조심스럽게 옆에 눕힌다.
그리곤, 뒤로 획 넘어가듯 내 무릎위에 누웠다.
갑작스럽다.
- 툭.
손을 들었다. 떨어지는 그녀의 머리를 아래에서 받친다.
"무릎에 눕지 마라."
"왜요? 관절염 있어요? 신경통?
같이 온천에라도 갈까요?"
레나는 내 손에 머리가 받쳐진 채로, 위를 쳐다보고 키득거린다.
반짝이는 눈동자가 맑다. 침전되어있지 않은 깨끗한 눈동자다. 이런 눈동자를 볼 때면 생각한다.
나는 어떻게 볼 수 있는 걸까.
말캉한 수정체가 있어야 할 자리,
탁한 회백질이 서서히 침전되어 갈자리에는 아무것도 없다.
텅 빈 구멍뿐이다.
세계는 어떤 정해진 법칙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가도, 때론 아무렇게나 그 설명을 망가뜨리고 훌쩍 초월해 버린다.
원래 현실이라는 게 이따위다.
"온천은 무슨."
"왜요! 돈도 많은데. 한 달 동안전세 내서 빌려도 넉넉한데요?"
웃기는 이야기다.
"아직 할 일이 많다."
돈이 많은 건 사실이다. 내가 벌었다고 하긴 애매하다.
각종 의뢰와 던전 공략을 숨 가쁘게 수행하며, 레나는 돈 될 만한 것들을 귀신같이 찾아냈다.
그녀를 키워 준다고 분주하게 돌아다녔지만, 나 혼자서는 그녀가 번 돈의 십 분의 일에도 한참 못 미쳤을 거다.
금화로 가득 찬 주머니가 몇 개나있다.
금전적인 면 외에도, 레나는 이제더 이상 내 도음이 필요 없다.
나는 레나의 상태창을 띄웠다.
[이름: 레나]
[도적 Lv.17] [트릭스터 Lv.13]
[사냥꾼 Lv.3]
[체력: 40 힘: 37 민첩: 53 지혜:
37]
[호감도: 60] [애정] [신뢰] [분리불안 下]
- 레나는 당신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등 뒤를 맡기는 데조금의 주저함도 보이지 않습니다.
- 이 상대는 마음 깊이 당신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 호감도가 50을 넘으면 '집착'이발 생합니다. 이 상대의 특성상 뚜렷한 강요나 구속으로 표현되지는 않습니다. 대신, 이 상대는 당신과 떨어져 있으면 불안을 느껍니다.
[기본 스킬]
- 백스탭 Lv.9- 급소 공격 Lv.1l- 함정 해체 Lv.7- 파괴 공작 Lv.3[특전]
재능 (B+)
〈보호받는 탁월한 재능〉
이 특전의 소유자는 범인보다 훨씬 더뛰어난 재능과 성장력을 가졌습니다.
- 레벨 업 때마다 얻는 스뱃이 플러스2에서 플러스3까지 보정됩니다.
전투 감각(B+)
이 특전의 소유자는 타인과 완전히 같은 스탯을 가지고도, 훨씬 더 뛰어난 전투력을 보여 줍니다.
- 이동속도가 약간 증가합니다.
- 회피 확률이 약간 증가합니다.
- 더 깊숙히 치명타를 박아 넣을 수 있습니다.
- 치명타 공격에 적중당할 확률이 제법 줄어듭니다.
※ [분리 불안 下]에 의해, 당신이 곁에 있어 주지 않으면 전투 감각이C+ 랭크로 감소합니다.
62화 인간성의 승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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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도 뭔가가 한참 길어진다.
'피곤하군.'
여기까지 보고 상태창을 닫았다.
상태창이 모든 대상에게 뜨는 건 아니다. 상태창이 뜨는 건 지금은 그녀밖에 없다.
'으음.'
레나의 레벨 총합은 33이다.
기본 직업인 도적 외에 사냥꾼과 트릭스터가 생겼다.
모험가와 마물들을 잡으며 레벨 업을 계속 시켜 주자, 별 이벤트도 없이 자연스럽게 직업을 획득했다.
호감도는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올랐다.
바닥에 뿌려진 기름이 화르르 폭발하는 기름 함정에서, 그녀를 안고탈출한 뒤로 상한이 한 번 더 깨져60이 되었다.
그 가파른 성장이 뿌듯하기도 하지만, [분리 불안] 같은 걸 보고 있으면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어 버렸나, 싶기도 하다.
나는 손으로 받친 레나의 머리를 놓아 본다.
머리는 가파르게 아래로 떨어진다.
속도가 조금도 줄지 않는다. 얼마 되지는 않지만, 상반신 체중을 전부 싣고 있었던 거다.
- 툭!
결국 다른 손을 들어 머리를 받쳐준다. 그녀에게 말을 건다.
"너, 슬슬 수도로 갈 때가 된 거아닌가?"
그녀의 승급 건이다. 길드 간부로 승급하는 거라고, 원장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의〈시나리오 클리어〉에 다가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면 대체 어떻게 된다는 걸까?
그게 궁금해서라도, 그녀를 성장시켜 오기도 했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시나리오 메시지를 점검한다.
〈그녀를 T&T길드 지부장에 앉혀보세요! '어둠 속의 조력자' 시나리오가 활성화됩니다.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으으."
레나가 침음을 홀린다.
머리가 받쳐진 채 나를 올려다보며, 그녀가 주먹을 꽉 쥔다.
칼을 들고 있어도, 싸우면 이길 자신은 전혀 없다. 물론 그녀는 나를 공격하지 않는다.
"원장님이 또 쓸데없는 말을 했어요? 정말. 어디 데리고 나가서 확없애 버릴까 봐."
"네 간부 승급 건이다. 중요한 일 아닌가."
"알아요. 같이 가요."
"곤란하다."
동생을 내려놓고, 그녀가 내 무릎에 볼을 비빈다. 귀를 막는다.
"안 들린다, 안 들리는데. 같이간다구요? 어, 알았어요!"
함께 안 가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녀와 너무 오래 붙어 있었다.
따듯한 벽난로 곁에서, 달콤한 꽃향기나 맡으며 지낼 때는 아니다.
이제 같이 던전에 가면, 그녀가 나를 키워 주는 꼴이 된다. 빚이 더해진다. 그런 식으로 이 인간과 깊이 얽힐 이유는 없다.
이제 과하다.
달래는 데 꼬박 반나절이 걸렸다.
그녀는 나를 꼭 끌어안았다.
"내가 지켜 줘야 되는데."
결국 이런 처지인가.
구태여 밀치지는 않았다. 호감도가오른 데는 내 책임도 크다.
"금방 다시 만날 텐데."
"그거야 당연하죠! 그런 사망 플래그 같은 말, 하지 말라구요!"
"사망 플래그?"
"됐어요. 금방 봐요."
그녀를 보낸 뒤.
나는 원장실로 들어갔다.
의뢰를 받기 위해서다. 레나가 제국 본부에 가 있는 동안, 놀고 있을 생각은 전혀 없다.
던전을 끊임없이 돌 생각이다.
혼자 찾을 필요는 없다.
필요한 아이템과 지도, 정보까지 원장이 제공한다.
내가 의뢰를 해결해 주는 만큼 실적이 쌓이기 때문일까.
호의적이다. 원장의 호감도 역시 조금씩 계속 올랐다. 26이 되었다는 메시지까지 확인했다.
원장이 스크롤을 펼친다.
"조금 난이도 있는 의뢰가 하나 있습니다만. 던전이 무대입니다."
"얼른 해치울 테니 이야기해 봐."
원장이 머그잔을 들었다. 커피를한 모금 홀짝였다.
커피의 향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세밀하게 느껴진다.
3개월 전.
그때와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다.
커피 냄새를 구분하는 스킬은 익힌 적 없다.
레벨이 꽤 올랐다. 동화율이 약간 떨어졌다. 달라진 건 그 둘 정도다.
그가 말을 잇는다.
"던전을 독점하는 모험가 무리가 있습니다."
"독점?"
"예. 무단 점거입니다. 게다가 근처의 길을 사용하는 데 통행세를 받는다고 하는군요."
"평범한 산적이군."
"그렇습니다."
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처를 아예 차단하고 있습니다.
의뢰는. '문제 해결'입니다."
"다 죽이라는 얘기군."
"홁으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남부의 치안은 3개월간 급격히 나빠지고 있었다. 분위기가 온통 뒤승승했다. 강제징집과 수탈이 극심했다. 농민들은 종자까지 빼앗겼다. 다들 산으로 도망가 숨었다. 산에서 농사를 지을 수 없으니 사람을 베고재물을 렛는다.
"의뢰자는 누구지?"
"글쎄요. 의뢰자가 자기를 밝히길 원하지 않습니다."
"원하지 않는다고?"
원장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습니다. 다만 안전한 의뢰입니다. 의뢰자의 악의는 한 톨도 없습니다. 제가 보증합니다."
그가 보증한 다라.
나는 잠시 기다린다.
"의뢰자가 그러더군요. 인간들이고블린들을 양식養殖해서 죽이는게, 보기 불편하다고 말입니다."
"자세히 말해 봐라."
"이번에 발견된 인간들은 고블린부락을 점거했습니다."
"그래서?"
"그 인간들은 부락 내의 고블린들을 반쯤 죽입니다. 그리고 다시 번식시키고, 다시 죽이죠. 고블린은.
번식과 성장이 무척 빠르니까요."
"아이를 죽인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고블린.
그들에 대해 아는 건 별로 없다.
몇 번 마주친 적은 있다.
날카로운 이빨과 독기를 가진 작은 녀석들이라는 것 정도를 안다.
인간을 피해서 더 깊은 숲으로, 지하로 파고 들어갔던가.
마왕 강림 이후에, 꽤 적극적으로 행동하던 녀석들인 건 기억난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남자에게 질문했다.
"왜 그렇게까지 하지?"
인간이 하는 짓은 잔혹하고 집요하다. 하지만 그들은, 거기에 항상 그럴듯한 이유를 붙인다. 무슨 까닭일지 들어나 보고 싶었다. 원장이 침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핏빛 사슴 고블린 부락이 인간들에게 발견되었습니다. 그들은. 두뇌 가운데에 1/5의 확률로 응고된 혈석血石이 있다더군요. 보통 고블린의 다섯 배가 넘는 확률이죠."
"그래서?"
"그걸 갈아 마시면, 면역과 정력에좋다고 하는군요."
고작 그따위 것을 위해서입니다,
라고 말하고 싶기라도 한 걸까.
그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그런 섬세한 움직임까지 익혔지만 눈앞의 남자는 인간이 아니다.
정작 인간이라면, 이런 일에 눈썹 같은 건 좀처럼 찡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잠시 침묵하던 원장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이번 일은. 3개월 동안 보여 주신 활약에 대한 약간의 호의입니다."
"호의?"
"예. 던전에 가 보시면, 알게 되실 겁니다. 승낙하시겠습니까?"
녀석이 살짝 웃는다.
"뭐, 그러지."
날 함정에 빠뜨릴 녀석은 아니다.
의뢰자가 누군지 말해 주지 않는 건처음이지만, 어차피 그런 게 크게 궁금한 건 아니었다.
낙엽을 밟으며 걷는다. 밤에 서리가 내렸는지 옅게 얼어 있다.
지도에 표시된 던전을 향해서, 한참 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도, 도와주세요!"
바람결에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저 높은 곳이다. 나는 그쪽을 흘끗바라봤다. 가는 길이긴 하다.
숲 한쪽에 여자 한 명이 훌쩍이며 서 있었다.
"기, 기사님! 도와주세요. 혹혹.
나는 여자를 바라봤다.
옷이 거칠게 찢어져 곳곳에 맨살이 드러났다. 머리도 마구 헝클어져 있다.
한쪽 신발은 벗겨져 하얀 발을 드러냈고, 날씬한 종아리는 군데군데진흙이 묻어 엉망이었다.
어디선가 급박하게 도망쳐 나온 모습이었다. 여자가 나를 바라봤다. 가만히 서 있는 내 모습에 눈빛이 흔들린다.
훌쩍이며 나에게 외친다.
"여기 좀 도와주세요! 흑흑. 고블린 세 마리가 친구를 강간하고 있어요! 어서 도와주세요! 제발.!"
- 바스락.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말이었다.
'고블린?'
멀지 않은 곳에, 고블린 던전이 있다. 하지만 그 던전은 인간들에게 점령당한 상태다.
거기서 탈출한 녀석들일까.
나는 길에서 벗어나, 여자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무슨 일인지 확인해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걸어가며 여자를 훌어봤다.
옷을 찢은 부위는 가슴과 허벅지 쪽이었다. 살에 상처는 없었다.
'누가 찢었는지 모르겠군.'
고블린의 손톱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의 손톱은 날카롭고 거칠다. 살은 내버려 두고, 옷만 곱게 찢을 수 있을까?
고개를 갸웃하던 순간이었다.
.r갑자기 발밑이 푹 꺼지며 땅이 시꺼떻게 입을 벌렸다. 몸이 그대로 아래로 떨어졌다.
깊게 파 놓은 구덩이 안에는 뾰족뾰족한 죽창들이, 푹신한 짚 더미를 뚫고 박혀 있었다.
- 퍽!
[낙하 데미지를 입었습니다!]
죽창들은 갑옷을 뚫지는 못한다.
이 정도 높이에서 떨어졌다고 생명력이 크게 깎이지도 않는다.
갑옷의 무게가 있다고 해도, 나는 살점 하나 없는 해골이다. 중갑에의한 데미지 가산 따위도 없다.
'한심하군.'
다만 레나와 헤어진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아, 이런 함정에 걸린 게 터무니없다.
역시 그녀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었다. 최근에는 함정 같은 건 그녀가 전부 해체하고 들어갔으니까.
그래도, 좀 너무하긴 한 것 같다.
스스로에게 진저리가 났다. 멍하니 함정 안에 쓰러져 있었다.
"뭐야? 비명도 안 지르냐?"
위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맨가슴과 허벅지가 훤히 드러난 옷을 입은 인간 여자가 위에서 나를 내려다봤다.
나는 높이를 측정했다.
키의 세 배.
수직으로 파진 함정.
뛰어서 나가기도 어렵다. 잡을 만한 것도 없었다.
"뭐, 어차피 이제부터 실컷 지르겠지만. 벗어!"
벗으라고?
인간 여자들은 다 이런 식인가?
대꾸하지 않고 위를 올려다봤다.
그때 였다.
어디서 나타난 걸까. 비쩍 마른 남자 한 명이 더 보였다. 말할 것도 없이 같은 무리다.
옷에는 여기저기 흙이 묻어 있었다. 땅을 파느라 고생 좀 한 건가.
퀭한 얼굴의 남자가 아래를 보고 소리친다. 목소리에 지친 쇳소리가 섞여 있다.
"안 들려? 갑옷 벗으라니까?"
나는 그들에게 물었다.
"뭘 하는 거지?"
여자가 낄낄대고 웃었다.
"몰라서 물어? 기사 사냥이지."
"기사 사냥?"
"먹을 게 없으니까 사람이라도 잡아먹어야 할 거 아니야. 빨리 갑옷 벗고 자살해."
어렵지 않다. 치안 악화는 가혹한수탈의 당연한 결과다.
내년에 심을 씨앗조차 군량이라고 빼앗아 간다. 법을 지키고 이웃을 사랑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래도 나는 묻는다. 사연은 본인의 입으로 직접 들어야 한다.
"설명해 봐라."
하지만 그들은 별로 설명할 의사 가없어 보였다. 대신, 땅에 놓은 무언가를 들었다.
솜과 기름으로 뭉쳐진 횃대였다.
여자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딱 10초 준다. 살에 녹아 붙은 건 우리도 벗기기 어렵거든."
- 화르르!
여자가 횃대에 불을 붙였다.
63화 인간성의 승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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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하하하.!"
여자는 깔깔깔 웃는다. 당장이라도횃불을 던질 것 같다.
음직임이 빠르다.
말할 시간조차 아깝다는 걸까. 사냥감과 대화하지 않는다는 주의인지도 모른다.
횃불 뒤로 여자의 비릿한 웃음이 너울거린다. 새된 웃음이 아래까지 전해진다.
바닥 가득한 건초와 횃불. 사냥감을 바싹 익힐 생각인 것 같다.
제법 괜찮은 함정이다.
옷이 엉망으로 찢겨져 훌쩍이는 젊은 암컷을 보면, 침착할 수 있는 인간 수컷은 드물다.
주의 깊게 바닥을 살피며 다가가기란 어렵다.
집요할 정도로 깊게 파인 함정에발을 디디면, 그걸로 끝이다.
좁은 공간이다. 도망가거나 숨을 수도 없다.
안에는 건초가 가득하다.
이곳에 불을 지른다. 바위나 쇳덩이를 떨어뜨리는 것보다 확실하다.
열기와 연기는 부드럽다. 단단한 갑옷 안까지 쉽게 파고든다.
그렇게 산 채로 불에 타며 질식사한다. 나쁘지 않다. 생계는 한동안 풍족했을 거다.
생각에 잠겨 여자를 올려다본다.
먹을 게 없으니까 사람이라도 잡아먹는다고? 아직 그 정도로 굶주려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여자가 의도한 게 식인은 아닐 거다. 함정에 빠진 내 갑옷과 칼이 식으면, 어딘가에 팔아넘기겠다는 의미다.
횃불이 열기를 전한다. 한참 위에 있지만 느껴진다. 여자가 환하게 웃는다.
여자는 손가락을 편다. 아홉 개다.
하나는 잘려져 있다. 그렇지만 열부터 센다.
"1 이"
"9!"
열과 아홉을 셀 때는 어떤 손가락도 접히지 않았다. 묘한 위화감이든 다. 수탈에 반항하다가 잘린 손가락일까?
"8!"
"기"
손가락이 접하기 시작한다. 나는 좁은 함정에 빠진 채 접히는 손가락을 멍하니 바라본다. 몸을 솟구쳐서 빠져나갈 수도 없다.
확실히 긴장감이 사라지고 정신이 느슨해져 있었다. 함정에 빠진 것은그 탓이다.
"6! 5! 4!"
수탈에 카운트다운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저 여자는 친절한편인지도 모른다.
나가게 되면 깔끔하게 죽여주자고 생각했다.
"3! 2! 1!"
여자가 잠시 멈칫한다.
"뭐야. 달라붙은 걸 벗겨야 돼? 어휴 짜증 나.
잠시 입술을 비죽거린다. 하지만 망설임은 길지 않다.
"너, 협박으로 끝날 줄 알았니?"
대답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여자가햇불을 아래로 던진다. 아래로 떨어지는 횃불을 가만히 바라본다. 여자의 얼굴에 죄책감은 없다.
그런 건 오래전에 태워 버린 듯하다. 혹은 오른쪽 손가락 하나와 함께 잘려 버렸을지도 모른다.
"잘 타보라구!"
- 휘익!
꽤 익숙한 솜씨다. 횃불이 아래로 수직 낙하한다.
함정 아래는 고기 탄 냄새가 배어있다. 처음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 화르르!
함정 안이 환하게 타오른다.
바짝 마른 낙엽과 건초, 앙상한 잔가지를 채워 넣은 바닥이 활활 타오론다. 불길이 나를 뒤덮는다.
'뜨겁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화염 저항이 적용됩니다!]
[열기에 의해 2초당 0.15%의 체력이 감소합니다!]
[체력이 99.85%로 떨어집니다!]
[체력이 99.70%로 떨어집니다!]
꽤나 여유가 있다.
거미굴에서 강제로 선택했던 화염저항 특전 덕분.
0.3초 단위로 체력이 팍팍 깎여 나가던〈그라스미어의 불〉과 비교하면, 발밑에서 건초를 태우는 불은 차라리 차갑게 느껴질 정도다.
"뭐, 뭐야! 왜, 왜 가만히 있어? 뭐야, 재?! 그냥 죽은 거야?"
놀란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불길 속에 그냥 드러누웠다.
원하는 대로 발광을 해 줄 체력까지는 없다.
'좀. 뜨겁군.'
나는 지나치게 태연하다.
지금도 생명력이 미세하게 줄어들고 있다.
해골이 불타지 않는 건 아니다.
피와 살을 가진 것들보다야 낫겠지만, 얼마든지 녹아내리고 잿더미 가될 수 있다.
[화염 저항이 적용됩니다!]
[체력이 98.5%로 떨어집니다!]
불구덩이 한가운데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지만, 체력 감소폭은 충분히 감당할 만한 수준이다.
물론 고통은 없다. 온도는 느끼지만 통각은 없다. 비명은 지를 줄도 모른다. 아무래도 기대에 꽤나 엇나간 것 같다.
안에 빼곡했던 마른 나뭇가지와 건초가 모두 다 탔다. 불이 꺼졌다.
구덩이 안에 연기가 자욱하다.
"죽었나? 죽었어?"
"거참, 비명은 참아도 숨은 못 참을 거 아니야. 저 안에 십 분은 있었는데, 당연히 죽었겠지."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퉁명스럽고 숨이 고르지 않다. 고생깨나 한 듯한 목소리다.
"왜 소리를 안 질러? 불안하게."
"한 번에 억, 하고 죽은 거 아냐?
어이쿠. 콜록, 콜록!"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발소리가 멈춰 선다. 기침을 한다.
"여보,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닌데뭘 그리 서둘러? 가만있어. 다 식고나서, 연기 다 빠지고 들어가라구."
"콜록! 그래, 그래야지."
대화가 잠시 멈춘다. 나는 그들의 기대에 부응한다. 잿더미 위에 몸을 가만히 눕힌다.
가만히 누워 있었다.
인간 죽이는 걸 좋아하는 열아홉 살의 누군가가, 커피에 적신 쿠키 서너 개를 천천히 먹을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연기가 다 빠졌다.
- 터벅터벅.
"큼, 큼! 내려가 볼께."
- 스르르록.
아래로 긴 줄사다리가 내려왔다.
사다리를 타고 한 인간 수컷이 천천히 내려왔다.
- 툭툭.
그가 막대기로 나를 친다. 그리 고위로 보고 소리친다.
"응! 안 움직여!"
"그거야 당연하구!"
위에서 여자가 화답한다.
그 순간이었다.
- 띠링!
[죽은 척하기 Lv. 1이 새롭게 스킬로 생성됩니다!]
- 죽은 척하기 Lv.1 (new!)
- 숙련도: 0/1, 000[용감한 사람은 한 번 죽지만, 겁쟁이는 여러 번 죽는다! 기꺼이 겁쟁이가 되세요. 진짜로 죽지 않으려면, 언제든 죽은 척하시라구요!]
메시지는 자주 이런 식이다. 이젠 슬슬 익숙하다. 아니, 〈원래부터〉익숙했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고리나 잘 걸어!"
위에서 날카로운 여자 목소리가 들린다. 줄사다리를 타고 내려온 남자가 내 근처에 선다.
정면에 그가 보인다.
푸석푸석한 피부. 나이에 비해 주름이 깊은 얼굴. 눈이 퀭하다. 몸은 비쩍 말랐다.
- 철컥!
그가 내 갑옷에 쇠고리를 건다. 루비아가 사 준 갑옷이다. 건드리는 게 달갑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금 이 남자를 죽이면, 위에서 사다리를 끊을지도 모른다.
허공에 뜬〈죽은 척하기〉스킬을좀 더 자세히 살펴본다. 약간의 설명이 붙어 있다.
[종족: 해골]
[특성이 반영되었습니다!]
[보정: 모든 대상에게 죽은 척이 5배의 효과를 발휘합니다.]
[안眼 계열 스킬이 없는 대상에게 추가로 5배의 효과를 발휘합니다.]
'25배라.' 웬만한 녀석들에게 죽은 척 하나는 확실히 할 수 있을 것 같다.
언제 쓸모가 있을까? 적어도 서큐버스님을 다시 만났을 때, 그녀 앞에서 쓸 만한 스킬은 아니겠지.
멍하니 창을 바라보고 있을 때, 옆에서는 남자가 소리친다.
"콜록, 콜록! 어휴, 갑옷 그을린 것좀 봐. 제값 받을 수 있을까?"
"내려가서 연기 마셨어?"
"응, 조금."
"값은 걱정하지 마, 새삼스럽게. 그을음만 닦으면 되지. 쇠가 어디 가려구? 을라오기나 해!"
"금방 갈게!"
고리에는 갑옷이 장착됐다. 남자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다.
- 드르륵. 드르록.
두 사람이 끌어당기는 힘이 느껴진다. 나는 천천히 위로 올려진다.
줄사다리를 잡고 올라가도 좋다.
하지만 직접 올려 준다는데 굳이 훼방을 놓을 건 없다.
부부의 대화가 들려온다.
"가볍네."
"비쩍 마른 놈인가 봐. 자기보다마른 놈 아닐까? 마른 장작이 잘타는데, 얘는 진짜로 타 버렸네! 오호호호!"
여자는 과하게 즐거워한다. 남자는 그럭저럭 장단을 맞춘다. 다정한 시간이다.
죽인 뒤에 이 함정에 함께 묻어주면, 배려가 될 것 같다.
중간쯤 올라갔을 때였다.
- 퍼걱!
"아아 아아악!"
"끄! 끄아아아!"
살을 뚫는 파육음과 함께 비명이 들렸다.
- 퍽! 퍽!
둔기로 뼈와 살을 짓이기는 소리가 들린다.
"끼히, 끼히이이익!"
뱃속 깊은 곳에서 긁어내는 비명소리가 들린다.
- 드르르록!
- 퍼걱!
나는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다행히 사다리는 그대로다.
"히히, 히히히. 드디어 잡았다. 이 새끼들이구나? 우리 구역에서 장사하던 게?"
음침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 픽!
"아아아아악!"
"좀 더 반항해 보지 그래? 어? 이년은 다 늙어서 성노예로도 못 써먹겠네. 마지막 가는 길이라도 좀 즐겁게, 꿈틀거려 보시라고?"
또 다른 목소리가 들린다.
"연기를 이렇게 풀풀 피워 대면 뭐, 제발 잡으러 오라고 광고하는 거 아닌가? 멀리서도 쫓아왔네."
살과 뼈를 부수고 꿰뚫는 파육음과, 비명이 들려온다. 나를 함정에 빠뜨린 여자의 비명 소리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사다리를 잡았다.
'질주.,
[스킬〈질주(Lv.2)〉를 사용!]
[10분 동안 250%의 속도를 낼 수 있습니다!]
[다음 사용까지 50 : 00]
[24시간 내 사용 가능 횟수 2/3]
E급 던전〈피 묻은 승마자의 쿼터〉.
그곳에서, 붉은 눈의 켄타우로스를 살해하고 얻은 스킬이다.
일정 시간 버프를 주면서도, 부작용이라는 게 없다.
- 팟!
사다리를 잡고서, 거의 튕기듯이몸을 솟구쳐 올라갔다.
순식간에 구덩이 밖.
"어?! 어어엉?"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을 한,
얼굴에 칼자국이 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너, 너는 모, 뭐냐?"
방금 전까지 바깥에서 이죽거리던 목소리였다.
빠르게 주위를 돌아봤다. 도끼와 가시 박힌 쇠몽둥이, 톱처럼 뾰족뾰족한 칼을 든 다섯 남자가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산적인가?'
산적들의 구역 다툼인가 싶었다.
바닥에는 비쩍 마른 남자가 머리가터진 채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피비린내를 풍기는, 몸에구멍 몇 개가 뚫린 여자가 주저앉아서 버둥거리고 있었다. 손으로 쥔 배에서 내장이 흘러나온다.
살아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이건 내가 처리할 거라서."
- 스르릉!
잔뜩 그을음이 묻은 칼집에서, 바스타드 소드를 꺼냈다. 한 발자국 앞으로 디디며 칼을 휘둘렀다.
함정 안으로 횃불을 던진 여자의 목이 날아갔다. 붉은 피가 치솟았다.
피가 그을음 묻은 갑옷 위로 비처럼 쏟아졌다.
- 툭.
배를 쥐고 있던 손이 바닥으로 멸어지며, 목 없는 여자의 시체가 허물어 졌다.
"이, 이, 이게 뭐야?"
"저기서 살아 나온 거야?"
- 철컥.
칼을 천천히 집어넣었다. 원한 없는 산적이다. 죽여 봐야 경험치도얼마 되지 않을 게 뻔하다.
- 터벅.
그들이 길을 막고 있다. 놈들은 서로 훔칫흠칫 눈치를 본다.
"가, 가자!"
놈들이 쭈뻣거리며 몇 걸음 물러난다. 무기를 내 쪽으로 향하고 서서히 뒷걸음질을 친다.
현명한 판단이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을 마주했을 때, 도망가 버리는 건 제법 안전한 선택이다.
나는 천천히 걸어가며, 품에서 지도를 꺼낸다.
젓더미가 손으로 빠져나간다.
지도가 다 타 버린 것이다.
나는 화염 저항이 있다. 하지만 지도까지 저항을 갖출 순 없다.
""? 이거 곤란하군."
고블린 던전까지 가는 길을 모른다. 지도가 필요하다.
'돌아가는 길은 알지만.'
아무런 소득도 없다.
〈죽은 척하기〉라는 괴이한 스킬하나를 습득했을 뿐이다.
다시 슬라임에게 돌아가는 건 조금 곤혹스러운 일이다.
"멈춰라."
놈들을 불러 세웠다. 남자들은 일제히 긴장하며 무기를 꽉 잡았다.
실용성보다는, 고통을 주기 위해 제작한 듯한 무기들에 피와 살점이 어지럽게 튀어 있었다.
나는 녀석들에게 물었다.
"고블린 던전으로 가는 길을 알고있나?"
그 순간,
칼자국의 눈썹이 꿈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