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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나른한 눈으로 동족을 잡아먹는 이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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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오오오!"

제법 공격적인 소리가 들린다. 해골들이 내는 소리.

기관 장치로 열린 석벽 안쪽에서기다리던 녀석들이다.

'상위 해골이군.'

석벽이 열린 곳.

상위 해골병사 넷이 이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밖의 다른 해골들과 조금 다르다.

같은 해골인데 좀 더 크고, 약간흉악한 느낌이다.

든 무기도 그럴듯하고.

첫 삶을 살아갈 때. 이 던전에서 3년을 보냈을 때가 떠오른다.

그때에는 이들이 정말 대단하게 느껴지곤 했다.

같은 던전에 있을 때.

그때는, 말하자면 이 녀석들의 근처에 가기도 겁이 날 정도였다.

"안녕?"

"쿠우오오!?"

하지만.

지금은 아직 말조차 하지 못하는 녀석들이 귀엽게 느껴질 정도다.

이 녀석들은 잘해 봐아^ 레벨 15에서 20 정도의 해골병사.

나는 명목상으로는 레벨 10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스탯으로 따지면 이미 레벨 70에 가깝다.

20년 전에는, 고작 이 정도의 녀석들이 두렵다고 생각하면서 납골당에서 어슬렁거렸던 거였군.

"쿠어어. r녀석들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다가온다.

비웃을 건 없다.

사실 나도 아주 오랫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서큐버스님이 성심성의껏 가르쳐주셔서 말을 할 수 있게 된 거다.

그분은 자기 마력까지 나에게 불어넣어 가며, 말을 가르쳐 주었다.

자신이 따로 보충할 수 없는 종류의, 양이 한정되어 있는 마력을 나에게 상당히 넣어 주신 것이다.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가엾다면서.

사고는 언어로 만들어진 인식의 영향을 받는다. 말을 배우지 못한 이해골들은, 아쉽게도 그만큼 정밀한사고 능력이 떨어진다.

이들이 제대로 된 싸움을 하지 못하는 건, 꼭 능력치가 터무니없이 떨어져서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쿠오오!"

커다란 바스타드 소드를 든 녀석이 선두에 있다. 녀석이 나를 향해 돌진해 온다.

들고 있는 바스타드 소드. 그것만큼은 그럭저럭 쓸 만해 보인다.

갑자기 엉뚱한 생각이 났다.

저들은 왜 저렇게 내게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건가?

석벽이 열리면 바로 공격하라고 세뇌된 걸까.

'여긴 사령술사도 없는데.'

이 던전에 숨어 있는 네크로멘서.

의도를 가지고 명령을 내릴 사령술사 따위는 없다.

같은 해골들뿐이다.

그런데도 왜 저렇게 열심인가. 뭘바라고 저러는 걸까.

이런저런 망상 속에 빠져 있을 때녀석이 코앞까지 도달했다.

슬쩍 걷어찼다.

- 퍽!

녀석이 뒤로 요란스럽게 날아갔다.

제법 멀리까지 광하고 날아가, 돌로 된 관에 부딪혔다.

그리고 손에 든 커다란 바스타드소드를 놓쳤다.

- 챙.!

바스타드 소드가 돌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홀 안에서 쩡그렁 하고 커다랗게 울렸다.

"우어어.!"

'너무 세게 걷어찼나.' - 달그락!

- 달그락!

다른 녀석들 셋도 각자 무기를 꼬나들고 내게 달려든다.

기관 장치 안쪽의 이 공간.

홀.

여기에 대해, 알게 된 건 들어가서일 년도 지난 뒤의 일이었다.

홀은 인간으로부터 보호된다.

덜 침략 받는다. 기관 장치와 석벽에 의해 보호받고 있으니까. 물론 들어올 수 없는 건 아니다.

준비성 있는 모험가들은 많다.

그 부류들은 던전의 모든 것에 대해 미리 알고 들어온다.

깊숙이 숨어 있는 녀석들까지 모두 때려눕힌다. 던전 공략율 100%에즐거워하며 돌아간다.

하지만 여기는 F 랭크의 던전.

초보용 놀이터다.

여기 들어오는 인간 가운데, 준비성이 있는 녀석들은 드물다.

많은 인간들이 이 기관 장치의 존재를 모른다.

별것도 아닌 기관 장치.

별것도 아닌 석벽.

하지만 어쨌거나, 여기서 분리와 특권이 발생한다.

이 석벽 너머의 녀석들.

그들은 엄연히 특권층이다.

납골당이라는 초라한 던전.

그 안의 약한 무리들.

인간 모험가들에게 장난감처럼 짓밟히는 그 집단 내부에서도, 계급이있는 것이다.

이들은 망령의 납골당 안에서 가장강하다. 그런 주제에 가장 안전한곳에 숨어 있다.

그리고 다른 약한 해골들을 여기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 콰직!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달려드는 녀석을 발로 걷어차 멀리 날려 보낸다.

"싸우기 싫다니까.

정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당해 주기도곤란하다.

갑옷이 막아 주긴 하겠지만.

언제까지 맞아 주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

나는 칼을 들고,

- 쌩!

달려오는 세 해골들을 향해 휘둘렀다. 그리 무겁지도 않은 한손 검이세 해골의 무기에 연속으로 세 차례 맞았다.

- 쩌엉!

크게 쇠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세 녀석이 손에서 무기를 놓쳤다.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다. 녀석들이든 무기가 내 무기보다 훨씬 크다.

무겁다. 내가 가진 힘이, 그 무게와 크기를 다 쳐낸 것이다.

- 쩡!

- 챙!

- 채챙!

무기 세 개가 동시에 멀리 날아가바닥을 나뒹굴었다.

"쿠오오.!"

녀석들도 휘청거리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 털썩. 털썩. 털썩.

그러고 셋 모두 아예 주저앉아 버렸다. 뒤로 자빠져 주저앉았다.

겁먹은 것도 고통 때문도 아닌, 순수한 물리력의 반발 때문이었다.

지금 내 힘은 그 정도는 된다.

"귀찮게 하지 마라. 인간을 잡으러온 거다."

"우어 어어.!"

하지만 녀석들은 다시 일어난다.

끝까지 나에게 달려든다.

피아 구분이 안 되나.

솔직히 같은 편을 들어 줄 생각은 없지만. 인간들을 처리하면 녀석들에게도 편할 텐데.

이 던전에서는 편안한 기분이 느껴진다.

나처럼 달그락거리는 해골들이 모여 있어서 그런 것도 있을 거다. 하지만 묘하게 설명할 수 없는 뭔가가 있다.

홀 안으로 들어오자 더 그랬다. 아마 이 안에, 이 던전을〈던전〉으로 만드는 무언가가 있지 싶다.

이 던전에서 당분간 지낼 예정이다.

이 해골들이 일어날 때마다 다시쓰러뜨려서야, 일이 피곤해진다.

한번 벗어 볼까.

- 탈칵.

갑옷을 벗어 놓았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석관에 고이 넣어 두었다.

"우어?"

달려들던 해골들이 멈췄다. 나를 동족으로 인식한 건가 싶다.

'이제야 되는군.'

그 순간이었다.

- 쿠구궁!

약한 진동이 울리며, 저 안쪽에서관이 열렸다.

돌로 된 거대한 관 밖으로, 발을내밀고 나오는 녀석이 있다.

- 쿵!

'저런 녀석은 본 적 없었는데.'

갑옷 비슷한 걸 몸 여기저기에 입은 해골이다.

물론.

제대로 된 갑옷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발끝에서부터, 손끝, 머리끝까지 제대로 가려진 내 갑옷과 비교하면 차이가 크다.

녀석의 것은 몸 여기저기에 철판을 조금씩 덧씌운 것 같은 갑주다.

'저런 놈이 있었다고?"

나는 이 던전에 3년을 머물렀다.

그런데도 저런 녀석은 처음 본다.

물음표가 떠오르는 순간.

- 띠링!

[던전 보스: 납골당의 우두머리]

[랭크: F+]

[플레이어의 레벨: 7]

[적정 클리어 레벨: 25]

[난이도 판정: 자학_虐!]

[솔로 플레이로 도전합니다!]

'이건 대체 뭐야?' 관에서 뛰쳐나오는 놈보다도, 허공에 떠 있는 창이 훨씬 더 신경 쓰였다.

"스케에에에엘.!"

조금 독특한 괴성이다.

다른 해골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크다. 놈이 이 던전의 보스라는 건가?

그건 알겠다.

하지만 플레이어라는 건, 난이도판정이라는 건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다.

- 쿵! 쿵!

놈이 위협적으로 땅을 울리며 달려든다. 내겐 초라해 보이기만 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우습다기보다도, 조금 짜증이 났다.

아마 놈을 봤으면 기억이 날 거다.

처음 본 건 확실하다.

그렇다면.

저 녀석은, 여기에만.

밖에서 다른 해골들이 수없이 부서져 나갈 때에도.

석벽까지 내린 채.

관 안에만 납작 엎드려 가만히 숨어 있었던 건가.

"구오오오오!"

"우어어어!"

녀석이 일어나자, 자빠져 있던 다른 해골들이 다시 달려들려 한다.

관에서 일어난 놈은 한 손에 커다란 방패를 들고, 다른 손에는 도끼를 들고 있다.

왼손으로 방패를 앞세우고, 오른손은 뒤로 빼서 도끼를 쥔 채 언제든 휘두를 자세를 취하고 있다.

-훌쩍!

녀석이 나에게 뛰어들었다.

오른쪽 무릎을 꿇다시피 해서 몸을확 낮춘다. 왼손의 방패로 위를 막으며, 오른손의 도끼를 수평으로 휘둘러 나를 치려 한다.

뒤로 슬쩍 빠졌다.

- 획!

도끼가 허공을 가른다.

'납골당의 우두머리라.'

석벽 바깥의 다른 해골들이, 홀 안으로 들어오는 걸 막은 것도 녀석인 것 같다. 여기서 통솔력을 발휘하는 것 같으니.

내가 이 던전에서 3년을 달그락거릴 때도, 기관 장치를 여는 법은 진작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홀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러려고 할 때마다, 홀 안에 있는 다른 해골들이 나를 공격해 왔기 때문이다.

혼자만 잘 숨어 있었다는 거다.

봐주는 것도 그만할까 싶었다.

나는 막기만 하던 자세에서, 발을디뎌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강하게 칼을 내리쳤다.

'우두머리'가 방패를 위로 들었다.

- 광!

내 일격의 위력은, 녀석의 상상 범위 밖에 있었던 듯하다.

"쿠어어 억!"

철이 덧대진 좋은 방패였다. 그렇지만 내 속도와 힘은 녀석이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녀석이 후들거렸다.

방패 위에서 불꽃이 일었다. 다른 녀석들은 아예 근처에 다가오지도 못했다.

- 쾅!

다시 방패를 내리쳤다.

힘과 속도만으로도 충분했다.

녀석은 방패를 놓쳤고, 나는 발을 걷어찼다.

- 빠각!

'우두머리'는 뼈가 몇 군데 부러진 채 한참을 데구르르 굴러갔다.

- 파앗!

덤벼드는 다른 해골들에게 몸을 날렸다. 한 번에 녀석들을 모조리 걷어찼다. 뼈와 뼈를 분리했다.

이제 녀석들은 달그락거리며 감히 반항하지 못했다. 몸을 일으키지도못하고 끙끙대고 있었다.

- 달그락!

'저 녀석은 다시 일어나는군.'

우두머리는 달그락거리며 다시 일어났다.

- 터벅터벅.

나는 천천히 녀석에게 걸어갔다.

제 편을 모두 잃은 우두머리는 나에게 또 달려들었다.

다시 칼을 내리쳤다. 방패와 무기를 모두 날려 버렸다.

- 쨍그랑!

방패가 흔들리고, 도끼가 저 멀리돌바닥에 떨어진다.

움직임을 보니, 기껏해야 레벨이30쯤 되는 녀석인 것 같다.

그러니까 녀석은, 내가 서큐버스님을 지켜 주지 못했을 때보다도 약하다. 이런 폐허의 대장 노릇이라면 그 정도로 충분한지도 모른다.

- 달그락.

변덕처럼, 녀석에게 무기를 다시 쥐어 줬다.

"다시 해 봐라."

말을 알아들을까?

녀석이 달그락거리며 달려든다.

- 챙!

다시 한 번에 칼을 휘둘러 도끼를날리고, 발로 방패를 차서 날려 버렸다. 그리고 걷어찼다.

"고작 이 정도인가?"

다시 도끼를 쥐어 줬다.

- 챙그랑!

쳐내서 날렸다. 다시 쓰러뜨렸다.

몇 번을 반복했다.

어느새, 녀석이 뛰어나온 관 근처로 가 있었다. 관에 손을 짚고 녀석을 바라봤다.

그 순간.

- 띠링!

[경험치가 1 올랐습니다.]

[납골당의 핵에 도달했습니다.]

[종족 값이 해골로 판명되었습니다.]

[레벨 30까지 1분마다 경험치가 오릅니다.]

'응?' 손을 짚고 선 석관을 가만히 바라봤다.

- 띠링!

[경험치가 1 올랐습니다.]

1분이 지나자, 다시 경험치가 1 올랐다.

'이 관이. 망령의 납골당의 핵.'

어떤 던전은 핵을 가진다.

핵이 발하는 에너지에 끌려 특정한마물들이 몰려든다.

마력을 가진 핵이 없더라도 던전이 구성되는 경우도 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

F급 던전인 망령의 납골당은 의외로 핵이 있는 경우인 것 같다.

'이런 게 있었다니.'

나도 모르고 있었다. 녀석은 그동안 이걸 독점하고 있었던 거다. 내가 여기에 있을 때도, 계속.

나눠 쓴다면 모두가 레벨 30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다른 녀석들의 레벨을 올려 주기 싫어서 아예 자기만의 관으로 쓰고 있었다.

이미 자신은 30에는 도달했을 텐데도,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던 거다.

짜증이 났다.

이 멍청한 녀석이 아니었다면, 이납골당의 모두는 진작에 레벨 30에 도달할 수 있었을 거다.

십수 년 전의 나까지 포함해서.

25화 나른한 눈으로 동족을 잡아먹는 이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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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어어.!"

관에 아예 걸터앉자, 녀석이 푸른 안광을 뿜어내며 달려든다.

제 것이라는 걸까.

녀석을 가만히 바라봤다.

피한 뒤 방패를 발로 밟았다.

칼로 머리를 뚫었다. 힘을 줘서 그대로 반으로 쪼개 버렸다.

- 퍼걱!

녀석이 쓰고 있던 머리 보호대는 무력했다. 쪼개진 두개골을 다시 붙여 주지도 못했다. 녀석을 쪼개 버린 내 충동을 후회하지 않았다.

- 띠링!

[클리 어!]

[납골당의 우두머리를 처치했습니다.]

[랭크 판정: F+]

[난이도 판정: 자학自虐]

[난이도 판정으로 용사 포인트가200% 가산됩니다.]

[솔로 플레이로 던전을 클리어했습니다.]

[용사 포인트가 100% 가산됩니다.]

'클리어.? 용사. 포인트?' 나는 용사가 아니다. 그 반대다. 용사를 죽이려는 자다. 내가 왜 이런 문구를 봐야 하는 건가. 저번의 퀘스트 운운하는 창도 그렇고.

하지만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계속해서 글자들이 떠올랐다.

- 띠링!

[F+ 랭크 클리어: 13포인트]

[난이도 가산: 26포인트]

[솔로 클리어 가산: 13포인트]

[52포인트를 획득하셨습니다!]

- 띠링!

[상점 이용 권한을 산출합니다.]

[상점 이용 등급: Novice]

- 다음 등급까지: 52/256[권한이 부족합니다.]

[용사 상점을 직접 이용할 수 없습니다.]

- 등급이 올라갈수록 상점 이용권한이 풀립니다. 이 제한은 초보용사들의 포인트 낭비 방지를 위해 고안되었습니다. 깊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자동으로 최적의 특전을 구매합니다. 환경 스캔 중.]

[플레이어 스캔 중.]

깜빡인다.

더없이 낯선 글자들이 깜빡인다.

등급 판정. 권한. 용사 상점. 포인트. 처음부터 끝까지, 전혀 알 수 없는 이야기들뿐이다.

글자들은 어딘가 친절한 것 같으면서도, 전혀 그렇지 않다. 무언가를 기본적으로 가정하고 있다.

당혹에 한참 잠겨 있을 때.

- 띠링!

[자동 산출. 포인트 사용 완료.]

[검술 재능 Lv. 1을 획득했습니다!]

[〈퀘스트: 수련〉이 개방됩니다!]

'뭐라고?' 재능이라니?

재능, 이라는 게 레벨처럼 습득되는 건가?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눈앞에 반투명한 글자들이 계속 이어서 떴다.

〈퀘스트 발생! 〉

[검을 1만 번 휘두르세요.]

[0/10, 000]

[보상: 검술 Lv.1]

그냥, 휘두르라고?

고작 1만 번.

고작 1만 번, 칼을 휘두르면 검술레벨이 올라간다고?

제대로 된 스킬이라는 게 얻기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 내 입장에서는 어처구니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무언가에 홀린 둣이,

몸은 움직이고 있었다.

한 녀석이 떨어뜨린 바스타드 소드를 주워들었다.

- 부응!

위에서 아래로, 두 손으로 칼을 잡고 휘둘렀다. 눈앞의 공간을 쪼개듯정확하게 반으로 갈랐다.

시야 한쪽에 작은 창이 떴다.

[1/10, 000]

'정말 숫자가 바뀌고 있잖아?' 이걸 당장 확인해 보고 싶었던 거다. 검술 레벨을 올릴 수 있다는 게정 말일까. 1만 번 정도 칼 휘두르는 건 몹시 간단하다.

'빨리 처리해야겠군.'

- 획! 획!

빠르게 대충 휘둘렀다. 제대로 된 스킬을 익히게 된다는 것에 설레서마구 휘둘렀다.

빨리 숫자를 채울 생각이다.

'음?,

하지만, 숫자가 카운트되지 않았다.

[1/10, 00이에서 멈춰 있다.

'왜 카운트가 안 되는 거지.'

잠깐 고민하다, 처음 바스타드 소드를 휘둘렀던 자세를 취했다.

두 손으로 잡고 집중해서 위에서 아래로 휘둘렀다.

- 부응!

[2/10, 000]

이제야 작게 숫자가 표시된다.

'신경 써서 휘둘러야 되나.' 그래도 크게 까다로운 조건은 아니다. 일단 여기에 집중해 보자. 어느 정도까지 수련으로 올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는 데까지 해 볼 수밖에.

'으음.'

왼손으로 검 자루의 끝을 잡는다.

오른손으로 가드 바로 아래 부분을 잡는다.

그냥 이렇게 해야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대로 내리친다.

- 부응!

[3/10, 000]

깔끔한 일격.

그리고 다시 내려친다.

- 붕!

[4/10, 000]

[1, 502/10, 000]

검격을 거듭할수록, 좀 더 정확한자세로 내려치게 되는 것 같다. 나는 마실 필요도 없고, 먹을 필요도 없다. 잘 필요도 없다.

피로도 느끼지 않는다. 그냥 몸이 움직여지지 않을 때까지 칼을 내려치면 된다.

[2, 998/10, 000]

[2, 999/10, 000]

[3, 000/10, 000]

띠링!

[내려치기를 완료했습니 다. 자세를 바꿔 보십시오.]

'어떤 자세를 하라는 거지.' 하지만.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게 있었다.

가슴 쪽에 검을 세워 두었다. 그 자세에서 오른발을 내디디며 옆으로 강하게 검을 휘둘렀다.

다시 왼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반대편으로 검을 돌려 수평으로 휘두론다.

[3, 001/10, 000]

[3, 002/10, 000]

역시 이 방법이 옳았다. 동시에 두 번의 카운트가 올랐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아니, 하루가 지났나?

이틀이 지났나?

- 띠링!

[체력이 고갈되었습니다.]

[더 움직일 경우 뼈가 부러질 수 있습니다.]

[남은 체력: 1.3%]

[9, 998/10, 000]

남은 횟수는 두 번.

바스타드 소드를 두 번 더 휘둘렀다.

- 부응! 부응!

다행히 뼈는 부러지지 않았다.

- 뜻뚜루!

[퀘스트 클리어!]

[수련이 완료되었습니다.]

[보상: 검술 Lv.1 습득]

뭔가가 느껴졌다. 뼈 마디마디가 쑤신다는 건 이런 감각일까?

'어차피 쑤실 건 뼈마디밖에 없으니.' 아마 맞을 거다. 생각할 힘도 없었다. 20년 동안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느낌이었다.

뭔가를 이렇게 제대로, 열심히 해본 적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뭘 해도.

어디에서도.

어떤 노력을 해도.

제대로 된〈보상〉따위는 받을 수가 없었으니까.

- 달그락.

처음으로 '지쳐' 보는 것 같았다.

몸을 휩싸는 탈력감이라는 건 의외로 제법 달콤했다.

- 털썩.

바스타드 소드를 잡은 채, 바닥에몸을 던지듯 누워 버렸다. 일단 '체력'이라는 걸 정상으로 만든 뒤 다음 행동을 취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 띠링!

[퀘스트 발생]

[검을 3만 번 휘두르세요.]

[0/30, 000]

[보상: 검술 Lv.2]

'이거 참.' 당장이라도 일어나서, 검을 휘두르라고 강요하는 듯한 창이다. 허공에 뜬 글자를 멍하니 바라봤다.

나는 과거를 돌이켜 보았다.

20년 동안 바닥을 굴러오면서, 강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렇지만 워낙 가망이 없었다. 20이 넘어가면서 레벨은 점점 더 올리기 어려워졌다. 30이 넘어가면서는 까마득할 정도였다.

레벨 업.

해골병사가 레벨이 올라간다고 해도, 사실 뭐 대단한 게 있는 건 아니다.

모험가들은 이상할 정도로 강했다.

나는 이상할 정도로 약했다.

스킬 차이 때문이다.

레벨 업에 따른 스탯은 중요하다.

그 스탯을 강력하게 활용할 수 있게 해 주는 게 스킬.

하지만 인간들을 흉내 내어 칼을 휘둘러 봐야, 나아지는 건 없었다.

스킬을 습득하기는 했다.

하지만.

〈되는 대로 휘두르기〉

〈어설프게 찌르기〉

그런 우스꽝스러운 이름의 스킬들밖에 습득되지 않았다.

거의 도움이 안 되는 스킬이었다.

이름만 들어도 짐작이 가능하다. 스킬의 위력과 효용이 매우 낮다.

'언제쯤이었지.'

무덤에서 일어난 지, 5년차 정도였나. 제국과 자유 연합의 인간들이 한창 서로 전쟁을 벌이던 때.

비교적 마물들이 인간의 관심을 덜 받을 수 있던 때.

산속에서 3년 동안 녹슨 칼을 잡고 열심히 휘두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되는 대로 휘두르기'의 레벨이 2에서 5로 올랐을 뿐이다.

세어 보면 1년에 하나씩 오른 셈.

느리다. 느려도 정도가 있는 건데,

내 성장 속도는 너무 느렸다.

마치 네가 감히 어딜 올라가려고해, 라고 꾸짖는 것처럼 성장 속도가 느렸다.

그 수련마저도.

지나가던 회색 곰에게 앞발로 한대 맞고 끝났다.

퍽! 하고 뼈다귀가 다 흩어졌다.

달그락거리며 몸을 모으느라, 한참을 고생했다.

내 삶에 어디 하나 고생 아닌 게있기는 했냐만.

그때는 한층 더 참혹했다.

무엇보다 비참했던 것은.

곰 앞에서는.

3년 동안 죽어라 녹슨 칼을 휘두르면서, 힘들게 익힌 스킬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점이었다.

〈되는 대로 휘두르기〉

그 아무 쓸모없는 스킬조차도.

지독히 느리게 익혔던 것이다.

구차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검술〉스킬 레벨이 올라가는 속도는 몹시 기이할 정도다.

- 붕!

[89, 999/90, 00이[90, 000/90, 000]

- 띠링!

[퀘스트 클리어!]

[보상: 검술 Lv.3 습득]

[한 번도 쉬지 않고 성실하게 검술을 수련했습니다.]

[추가 보상: 힘 플러스2]

- 달그락.

'또 한 번 해냈군.' 추가 보상에 눈길이 간다. 한 번도 쉬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고 보너스를 준다.

나는 자거나 먹을 필요도 없다.

체력이 고갈될 것 같으면 검을 아주 천천히 휘두르면 된다.

그 정도는 '쉬는' 걸로 카운트되지 않는 것 같으니까.

- 털썩.

〈퀘스트: 수련〉을 마치고, 나는 쓰러지둣 앉았다.

검술 Lv.3.

이 스킬을 익히는 데는 한 달밖에 걸리지 않았다. 모든 시간과 집념을 검술 수련에 집중했다.

강해질 수 있는 기회니까.

허공 한쪽에 뜬 숫자.

[89, 999/90, 000] 같은 숫자들.

이 숫자가 바뀌려면, 한 번 내려칠 때 정확히 자세를 잡고 힘을 다해내리쳐야 했다.

집중을 다해 내리쳐야 했다.

뼈에 과부하가 걸릴 때마다 빠짐없이 쉬어 줘야 하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하루에 4천 번은 넉넉하게 내려칠 수 있었다. 절대로 까다로운 조건은 아니었다.

'아니지.'

그 정도가 아니다.

그렇게 말하는 건 곤란하다.

내가 굴러왔던 20년을 생각한다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쉬운 조건이라고 해야 한다.

- 쌩!

나는 검을 가로로 휘둘렀다. 예전과는 달라진 게 한 번에 느껴졌다.

검이 허공을 가르는 바람 소리부터 다르다.

휘두르는 자세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안정되어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움직임을 통제할 수 있는 기분.

1만 번을 휘두르자 Lv.1 검술을 습득했다.

3만 번을 휘두르자 Lv. 2검술을.

9만 번을 휘두르자 Lv.3 검술에더해, 힘 플러스2가 주어졌다.

과거에는 몇 년을 연습해 봐야 이런 스킬을 얻을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살 수 있었다면 진작 강해졌을 거다.

- 달그락.

예전에는.

아무리 해도 아무런 희망이 없었다. 지금은 그냥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그게 숫자로 표시가 된다.

어디까지 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인간들은 설마 다 이런 식으로 살아온 걸까?

이렇게 편리하게?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였다.

아무래도 인간을 하나 잡아서, 심문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 쌩!

[269, 999/270, 000]

[270, 000/270, 000]

[퀘스트를 클리어했습니다!]

[보상: 검술 Lv.4 습득]

[성실하게 검술을 수련했습니다.]

[추가 보상: 민첩 플러스3]

인간을 하나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석벽 안쪽에서, 고립된 상태에서 하는 수련은 너무 달콤했다.

하나하나 올라가는 숫자에 보람과 기쁨을 느꼈다. 한순간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인간을 잡아 와서 말을 섞는 것보다는, 일단 수련에 집중하고 싶었다.

하지만.

인간을 잡으러 가지 않는다고 해도, 할 일이 하나 있기는 하다.

두 시간 뒤.

잠시 흘 안에 있던 해골들을 바라본다. 다들 새 얼굴이다.

원래 이〈홀〉을 점거하고 있던 녀석들은 다 바깥으로 던져 버렸다.

일종의 징벌.

가장 안쪽에 숨어 있던 놈들을, 인간을 마주하는 던전 입구에 던져 놓았다. 대신 입구에서 가까이 있던 녀석들을 몇몇 추렸다. 기관 장치안쪽에 데려왔다.

고생하던 문지기 녀석부터였다. 녀석이 납골당의 '핵'에 누워 있게 해서, 레벨을 올려 주었다.

그러자 우스운 일이 벌어졌다.

26화 나른한 눈으로 동족을 잡아먹는 이유 (4)

***************************************************

- 띠링!

['문지기 해골'의 호감도가 4 올랐습니다!]

['던전: 망령의 납골당'의 친화도가0.4% 올랐습니다!]

[0.4%/100%]

문지기 해골의 호감도와, 던전 친 화도라는 게 올라간 것이다.

'으음.

글쎄. 호감도는 모르겠지만.

던전 친 화도라는 게.

딱히 별 쓸모는 없어 보인다.

여섯 달이 지났다.

- 쌩!

그동안 기관 장치를 알아내서 안쪽으로 들어온 녀석은 하나도 없었다.

갓 모험자가 되려는 녀석들이 장난치는 곳이니만큼. 너무 이상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 쌩!

[809, 999/810, 000]

[체력이 완전히 고갈되었습니다.]

[더 움직일 경우 전신 탈골이 진행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남은 체력: 0.17%]

남은 한 번이다.

- 쌩!

[퀘스트 클리어!]

[810, 000/810, 000]

[보상: 검술 Lv.5 습득]

[한 번도 쉬지 않고 성실하게 검술을 수련했습니다.]

[추가 보너스가 주어집니다.]

[힘 플러스2, 민첩 플러스2.]

- 털썩.

[체력을 회복합니다.]

[0.171%.]

[0.174%.]

몇 시간 쉬면되겠지.

그리고 다시 수련에 돌입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여느 때와 달랐다.

[검술 재능이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현재 재능: Lv.1]

[더 이상 수련으로 스킬 레벨을 올릴 수 없습니다.]

[더 높은 재능을 구입해 주세요!]

'끝인가?' 여기서 끝이라는 건가.

재능이라는 게 한계가 없는 건 아니구나. 하긴 이대로 계속 나아간다면, 어처구니없이 강해지는 것도 가능하겠지.

아무 조건 없이, 그냥 검만 휘두르면 되니까.

'용사 포인트였나.'

던전을 공략하고, 그 포인트라 는걸 받자 자동으로 재능이 생겼다.

이걸 지속하려면. 다른 던전을 찾아야 한다는 걸까.

하지만 다른 던전의 위치는 잘 모론다. 계획을 가지고 세계를 조사한 게 아니다.

10년차부터는 마왕 군과 인간의 전쟁에 휘말려서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했고.

정보가 필요하다.

'인간을 심문해 봐야겠군.'

역시 지금이라도, 그걸 하는 게 옳았다.

'으음.'

몸을 정상으로 만드는 데는 한 시간 정도가 걸린다.

멍하니 '던전의 핵'을 바라봤다. 돌로 된 관 안에는 다른 해골 녀석이 경험치를 얻고 있다.

처음으로 관에 들어갔던 문지기 녀석은 밖으로 나갔다.

녀석이 레벨을 얼마까지 올린 뒤나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루비아의상태창은 보였는데, 다른 해골들의상태창은 보이지 않는다.

지금은 다른 녀석의 경험치를 올려 주고 있다. 나는 아직 저 관을 사용하지 않았다. 여기 있는 녀석들을 모두 레벨 업시켜 준 다음, 가장나중에 들어갈 생각이다.

쉬는 김에, 상태창을 띄워 보았다.

[이름: 없음]

[해골병사 Lv.8(64)]

[체력-30 힘-38 민첩-39 지혜-9]

잡다한 기본 스킬 아래, 빛나는[검술 Lv.5]가 눈에 띄어 제법 뿌듯했다.

그때 였다.

- 띠링!

[Dungeon message: 침입자가 들어왔습니다!]

- 현재 던전 친화도: 5.4%

- 친화도가 5%를 넘으면 초기 경보가 제공됩니다.

- 친화도가 올라갈수록, 던전의 다양한 기능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마침 잘 들어왔군.'

오랜만의 인간이다.

좋은 먹잇감이 들어왔다.

수련이라는 명목으로, 던전의 침입자들을 너무 오랫동안 방치해 두고 있었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 띠링!

[탈진 상태입니다!]

[움직일 수 없습니다.]

[탈진 해소까지: 58 : 42]

F급 던전, 〈망령의 납골당〉.

그 앞.

막 안으로 들어가려는 세 명의 모험자가 있다.

남자 하나와 여자 둘.

"F급은 수당이 얼마나 나와요?"

몸에 딱 붙은 가죽 갑옷을 입은 여자의 질문.

여자는, 무장이 잘 되어 있는 남자에게 애교 섞인 눈빛을 보낸다. 그러자 천 옷을 입은 은발의 탐험가가그녀를 비웃는다.

"레나 씨, 수당 보고 가는 건 아니지. F급인데. 이건 그냥 연습용이라고 생각하면 돼."

가죽 갑옷을 입은 여자는 보이지 않게 이를 악문다.

"어, 그런가요? 아하하. 폰자 씨는 똑똑하시네요!"

하지만. 가죽옷을 입은 여자는, 입으로 뱉는 말과 머리로 하는 생각이 전혀 달랐다.

'여우같은 년. 자기는 아예 따로 생각하는 게 있으면서. 남자는 독으로 죽이고, 저년은 칼로 천천히 찢어서 죽여야겠어. 건방진 은발을 다잡아 뜯으면서 몸을 칼로 조금씩 그어 줘야지.'

은발의 여자가 비웃는 표정을 유지하며 대꾸한다.

"으음, 그 정도도 알아보지 않고 온 거야? 갑옷이 아깝네?"

노골적인 도발.

'수상한 년이 계속 귀여운 척을 하네. 역겹잖아? 긁어 봐야겠어.'

은발 여자의 생각. 두 여자 사이에보이지 않는 불꽃이 튄다.

그때.

"하하하. 여러분, 폰자 씨말이 맞아. F급 던전은 사실 안에 있는 몬스터를 그냥 때려 부수는 용도지.

하지만 레나 씨도 궁금한 걸 질문하는 태도는 아주 좋다고. 언제든 물어보도록 해. 그럼 간단히 브리핑을 할까?"

위세 좋게 체인 메일을 걸치고, 커다란 그레이트 쉴드를 등에 찬 남자.

그가 상황을 정리하듯 말했다.

허리에는 제법 짧지만, 한 손으로 휘두르기엔 상당히 무거워 보이는 쇠도리깨를 차고 있다. 둔탁해 보이는 도리깨는 한 대 맞으면 그대로 뼈가 바스러질 것 같았다. 아니, 뼈를 부수기 위해 만들어진 무기 같았다.

"네!"

"잘 들을께요!"

두 여자는 남자를 향해 눈을 빛내며 돌아섰다. 남자를 으쪽으족하게만들어 주려는 의도였다. 남자가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주요 몬스터는 해골들이야. 좀 큰 거미들이 있긴 한데, 그건 한참 안으로 들어가야 나오고. 이젠 그것도 다른 모험가들이 다 죽여서 없다더라."

"해골이요? 해골은 안 죽였어요?"

가죽 갑옷의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질문한다.

이렇게 한 번씩 뻔한 부분에 대해추가 질문을 해 주면, 이런 남자들은 자기가 뭐라도 된 듯 기분이 좋아지게 마련이다. 필요한 일이다.

죽이기 전에 살살 근육을 풀어 주는 것이다. 칼이 잘 들어가도록.

"하하, 레나 씨는 정말 초보구나.

해골은 죽여도 시간을 두고 다시 조립되거든. 이제 알겠지?"

톡톡, 하고 남자가 가죽 갑옷을 입은 여자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그러면서 은근히,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손을 넣어 여자의 두피를 지분거린다.

"여기 두개골만 부수지 않으면 말이야. 그래서 연습으로 때려 부수기딱 좋지."

"와아. 신기해요. 조금 불쌍하구요."

가죽옷을 입은 레나는 남자가 혐오스럽다고 생각했지만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 눈을 촉촉하게 적시며 순진한 척을 했다.

"불쌍하긴 뭐가 불쌍해."

그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은발의 여자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방금 전까지 레나의 머리를 쓰다듬던, 쇠도리깨를 든 남자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두 여자를 모두 원했다.

"그래, 레나 씨. 개네 는 그러기 위해 있는 거라고. 부서졌다가 계속다시 조립되고, 다시 조립되고. 그러기 위해 있는 거야."

"신관들이 대규모 정화 작업이라도 해 주면 다시 안 살아나겠죠?"

레나가 질문했다.

"그렇지. 하지만 그걸 누가 하겠어? 계속 만들어져야 하는데. 대가 끊겨 버리는 거지. 연습용 해골은 언제든 필요하다구."

"그렇구나.

"흥."

은발이 코웃음을 쳤다.

"자, 그럼 안으로 들어갈까?"

두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만 믿고, 뒤에서 졸졸 사이좋게 잘 따라와. 알았지?"

징그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남자가앞장섰다.

"자, 여기 뼈 무더기가 보이지? 이게 조립되면서 해골병사로 일어날 수가 있어. 조심하라고. 엄청 느릿느릿하지만 말이야. 하하하하.

남자가 도리깨를 허공에 싁싁 휘두르는 포즈를 취했다.

- 획! 획!

혹시 눈먼 도리깨에 맞을까 봐 불편해하며, 은발 여자가 남자에게서 물러났다.

그리곤 남자에게서 떨어진 걸 자연스럽게 처리하기 위해, 궁금하지도않은 걸 질문했다.

"이 잿더미는 뭐죠?"

바닥에 모아진 잿더미를 보고 여자가 묻는다.

하지만.

남자는 그 재가 뭔지 몰랐다.

"아, 그거? 신경 안 써도 되는 거야. 무시해."

모르는 게 나올 때는 이런 식으로 대답하면 된다.

남자는 자기가 모르는 건 알 필요가 없는 거라고 생각했다.

- 터벅터벅 셋은 돌바닥을 지났다.

남자는 이 길을 모두 알고 있다.

수 년 전에 많이 와 봤던 길이다.

애초에 그는 이걸 던전 공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둘 다 내 것이야.'

여자 공략이라고 생각했지.

"갈림길이 있어요! 어떡하죠?"

가죽 갑옷을 입은 여자, 레나가 두려운 척 말한다.

"허허. 내 직감을 한번 발동해 볼까? 왠지 두 곳은 막히고 한 곳은 뚫려 있을 거 같은데."

"그렇게 말씀하시면. 믿어요!"

레나가 주먹을 꼭 쥐며 말했다.

물론 직감이 아니라는 사실은 남자도, 여자도 이미 알고 있다. 남자는 앞장서 여유롭게 걸어갔다.

- 철컹. 철컹.

함부로 걷는 남자가 든, 쇠도리깨 자편들이 서로 부딪쳐 울린다.

사실 남자의 준비는 만전이다.

해골들에게 최적화된 조합.

그래이트 쉴드. 그리고 뼈를 부수기 딱 좋은 쇠도리깨.

한 방이면 모두 나가떨어질 것이고, 남자가 다칠 확률은 없다.

잠시 걸어가자 모험가들이 쓰는 공터가 나왔다.

화롯불이 곳곳에, 환하게 밝혀져있었다.

"아가씨들, 좀 쉬고 싶으면 언제든 말해."

남자는 이제 두 여자를 아가씨들이라고 부른다. 이미 상대를, 전혀 동료 모험가로 보지 않는 태도.

그는 이런 던전을 오기엔 랭크가 높은 모험가다. 머릿속에는 초보 모험가인 두 여자들에게 완벽한 모습을 보여 줘서, 침대 위에 한꺼번에 둘을 눕힐 생각밖에 없었다.

그걸 생각하니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짜릿짜릿한 감각이 오는 것 같았다.

'크흐흐. 한 년은 이렇게 하고.

다른 년은.

아래로 묵직하게 피가 쏠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피로해서가 아니라, 그것 때문에 걷기가 불편했다.

몸에 착 달라붙은 가죽 갑옷을 입은 여자, 레나의 애교가 그를 더 자극했다.

그들은 얼마 걷지도 않은 상태에서 쉬었다.

"이제 가죠."

몇 분 정도 걸었을 때.

가죽 갑옷을 입은 여자가 천장을 가리켰다.

"천장에 덩굴이 말라붙어 있어요.

막 살아서 움직이는 건 아니겠죠?"

"레나 씨, 좀 상식적으로 생각해."

은발의 여자가 퉁명스럽게 끼어들었다.

"하하. 모르면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여긴 F급 던전이야. 그냥 나만 따라와."

남자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한다.

커다란 그레이터 쉴드를 들어 보이며.

F 급 던전.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붙어서 F+, F마이너스로 세세하게 나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던전은 여섯 단계로 나뉘어진다.

A급부터 F급까지. F급은 가장 낮은 단계의 던전이다. F급 던전이 되려면 몇 가지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물론, 던전의 분류에 있어 출현 몬스터가 기준이 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 외에도 몇 가지 조건이더 있다.

F급을 예로 들어 보자.

첫 번째.

함정이 없어야 한다.

마법은 물론, 기관 장치 둥으로 만들어진 함정이 없어야 한다.

바닥을 밟으면 칼날이 촘촘히 박힌 아래로 푹 꺼진다거나.

독이 든 늪으로 빠져 버린다면. 출현 몬스터가 아무리 약해도 그걸 F급 던전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두 번째.

길이 쉬워야 한다.

처음 들어가는 자도 쉽게 길을 찾고, 한참 들어갔다가도 어렵지 않게 다시 나올 수 있어야 한다.

몬스터가 거미밖에 없어도.

추적 스킬 없이는 안에서 빙빙 돌다 굶어 죽을 미로라면.

그걸 F급 던전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대신 D랭크 미로라거나, C랭크 미로라고 부른다.

그 외에도 몇 가지 기준이 있다.

하지만 간단히 말해서 F급 던전은 쉽다. 그냥 쉽다. 살아 움직이는 덩굴 같은 건 있을 수가 없다.

- 파삿!

남자는 쇠도리깨를 말라붙은 덩굴에 휘둘렀다.

27화 나른한 눈으로 동족을 잡아먹는 이유 (5)

***************************************************

- 푸스스.

살짝 길을 막고 있던 덩굴이 뜯어져 아래로 떨어졌다.

그대로 내버려 둬도 얼마든지 들어갈 수는 있다.

하지만, 남자는 쇠몽둥이를 휘두를 수 있는데 안 휘두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 획! 획!

별로 남아 있지도 않은 덩굴을 향해, 쇠도리깨가 함부로 휘둘러진다.

그때 였다.

- 달그락.

세 모험가는 첫 번째 해골을 조우했다. 새로운 문지기.

"해, 해골이에요!"

레나가 소리쳤다.

남자의 뒤에 붙는다.

원래 기관 장치 안에 있던 녀석 가운데 하나. 이제 녀석이 던전 입구에 던져져 있다.

- 달그락!

침입자가 다가오는 기척을 감지하고, 녀석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녹슨 칼을 들고, 방패도 없이 느릿하게 다가오는 해골.

"하핫, 내 뒤에 꼭 붙어 있어."

덩굴을 쳐내며 몸을 푼 남자가, 해골을 바라본다.

"흐읍!"

그는 과장된 기합을 내지르며 달려갔다. 정확히 해골을 겨누고 도리깨를 휘둘렀다. 해골의 움직임은 하나하나가 전부 느렸다. 지나치게 쉬운 타깃이다.

- 붕!

도리깨 끝에 달린 철편이 모처럼 강하게 휘둘러진다.

요란한 소리가 난다.

- 퍼걱!

녹슨 검을 들고 있던, 해골의 부실한 팔뼈가 날아갔다.

이미 수십 번은 날아간 팔뼈가 또다시 부서진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선제공격.

그는 자신이 명예롭다고 여겼다.

모험가는 인류의 이름으로 철퇴를 휘두른다. 망설일 것은 조금도 없다.

졸지에 한쪽 팔뼈가 날아갔다. 해골은 바닥에 자빠졌다.

"우어어. 우어.

- 달그락. 달그락.

그리곤 어그적 어그적 기어갔다.

잃어버린 자신의 팔뼈를 향해 기어간다. 해골병사를 쓰러뜨리면, 두개골을 부수지 않는 이상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

다시 가져다 붙이려는 시도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해골에게, 이제남은 건 쉽게 부서지는 뼈마디밖에 없으니까.

"우어.

해골은 자신의 잃어버린 팔뼈와 결합되기 위해, 바닥을 꿈틀대며 애써 기어갔다.

- 콰직!

하지만 더는 움직이지 못했다.

남자가 발로 해골의 경추를 짓밟았기 때문이다.

- 달그락!

해골은 한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움직여야 했지만 그 상태에서 나아갈 수는 없었다.

"으어어. 으어어어.

짓밟힌 해골이 망자의 신음을 뱉는다. 그러나 그저 제자리에서 꿈틀거릴 뿐. 움직일 가망은 조금도 없어 보인다. 무게가 다르다.

남자는 그레이터 쉴드와, 도리깨와,

체인메일과, 자신의 체중을 한껏 실어 해골을 짓누른 상태.

그가 두 여자를 돌아보며 말한다.

"하하하. 어때? 쉽지? 너희도 할수 있을 것 같지?"

어느새 '너희'로 호칭이 격하되었다. 은발의 여자가 얼굴을 살짝 찜그렸다.

그러나 이 남자에게 얹혀 가야 했기에 참았다. 애초에, 자기 힘으로 던전을 해결할 생각이었다면 이런 꼴을 당하지 않아도 된다.

남자가 은발 여자에게 말했다.

"폰자 씨, 메이스로 두드려 봐."

'?? 네."

폰자라고 불린 은발 여자가 앞으로 다가갔다.

"음. 역시 징그러운걸요."

- 퍽!

그러면서도 은발은 메이스를 내리쳤다. 해골의 남은 팔뼈를 조준해서.

해골을 짓밟고 선남자를 패 주는기분으로, 메이스를 내리친다.

'이 해골도 남자였겠지?'

- 퍽! 퍽!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메이스가 세차가 휘둘러진다. 그 모습 을보고 남자가 유쾌하게 웃었다.

"징그럽다면서 잘만 하네. 하하하!"

"두개골 한 번 깨 보고 싶은데, 괜잖아요?"

"아예 죽어 버리면 다음에 오는 사람이 못 쓰지. 다음 사람을 생각하라고. 물론, 위험할 경우엔 뭘 해도 상관없지만. 너희는 내가 지켜 주고 있잖아? 슬쩍 두드려는 봐."

남자가 해골이 제 것이 된 것처럼 여자에게 허락해 준다.

- 툭! 툭!

은발 여자는 메이스로 해골의 두개골을 두드렸다. 해골의 두개골에 미세하게 금이 가기 시작했다. 손에 제법 힘이 실려 있다. 욕은 남자에게 먹고 화풀이는 힘없는 해골에게 하는 것이다.

"아, 죽어 버리겠다. 힐링 포션 꺼내 봐."

그 말에 은발은 깜짝 놀랐다. 죽어버리겠다는 말이 아니라, 포션을 꺼내라는 말에 놀란 것이다.

"힐링 포션이요?"

"응.,

"그렇게 비싼 걸.!"

"하하, 나한테 잘 보이면 그 정도는 사 줄 수 있어."

해골의 경추를 밟고 선남자가, 은발 여자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촉감이 좋은지 남자가 시시덕거렸다.

은발 여자는 소름 끼친다고 생각하면서도 어깨를 으족하면서 참았다.

포션을 이렇게 막 쓸 정도라면 돈이 엄청나게 많은 것이다.

하지만 생리적 혐오감에는 약한둣, 머리칼을 쓰다듬어지는 은발의 어깨가 가늘게 떨린다.

뒤에 선 가죽옷을 입은 여자, 레나는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징그러워하기는. 다 자기가 좋아서 쫓아와 놓고. 아무튼, 포션을 저렇게 써? 키야, 저 녀석. 돈 많은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제 나한테 다기부하라고.'

레나는 알고 있다.

다 조사한 뒤 라라 붙은 거다.

저 남자는 돈이 많은 모험가다. 일신의 수준에 비해 장비와 아이템이지나 치게 좋다.

애초에 그녀가 따라온 목적은 분명하다. 던전 안에서 남자의 목을 따고, 장비와 돈을 모두 챙겨 도망갈 생각이었다.

그녀의 정체는 T&T 길드의 수련생. T&T는 살해와 도둑질, 정보 거래를 다 다루는 길드. 이 남자를 죽이면, 상납금으로 충분한 돈이 마련될 것이다.

'정식 길드원이 될 수 있겠지?'

동상이몽. 다들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쓰러진 해골의 머리에 극미량의 치유 포션이 발라졌다.

해골은 의식을 유지한다. 대신 팔다리는 모두 으깨졌다.

"이렇게 놀아도 되지."

남자는 해골을 가지고 떼었다, 붙였다 하며 잠시 놀았다.

그리곤 이제 흥미가 없다는 둣 두개골을 걷어찼다.

- 빡! 데구르르!

둥근 두개골이 저 멀리 굴러가 처박혔다.

일행은 안으로 좀 더 들어갔다.

두 구의 해골을 마주친 뒤 부수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꺄악!"

레나가 비명을 질렀다.

인간의 시체 세 구가, 물웅덩이 근처에 놓여 있었다. 깔끔하게 목이 베인 시체들이었다.

"흐음."

시체를 보자 약간 경계할 마음이드는 듯 남자의 몸이 굳어졌다.

그의 뒤통수를 칠 생각인 레나는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에잇, 괜히 놈이 긴장하게 됐잖아? 어떤 놈들인지. 시체를 만들었으면 좀 치워야 할 것 아니야.'

얼굴이 굳어진 남자가 은발 여자에게 말했다.

"홈, 내가 뒤를 지킬 테니 폰자 씨가 앞장서 볼까?"

"제가요? 역시 남자 분이 앞에 서시는 편이.

"아니야, 모험하러 들어온 거잖아?

경험 한번 쌓아 봐야지."

자빠진 세 구의 시체를 본 남자는 기분이 약간 찜찜한 듯했다.

은발의 여자가 잘 다듬은 눈썹을 완전히 구겼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앞에 섰다.

- 달그락.

- 달그락.

안쪽으로 들어가자 녹슨 검을 든네 해골이 나왔다.

"에잇!"

- 부응! 빠각!

은발 여자의 메이스가 해골병사들의 두개골을 가격한다.

제법 그럴듯한 몸놀림이다. 그보다, 실은 해골들이 너무 느리다.

녹슨 검은 허공에서 주절거리기 만할 뿐. 제대로 된 곡선도 직선도 그리지 못한다.

"잘하는데?"

위험 요소가 없음을 판별한 남자가 싸옴에 뛰어들었다.

느릿하게 다가오는 녹슨 검을,

- 광!

그레이터 쉴드로 막아 낸다.

도리깨를 휘둘러,

- 퍼적!

해골의 경추와 두개골을 분리한다.

두개골이 저 멀리 날아간다.

- 데구르르!

"후우."

다들 한숨을 쉬며 앞으로 간다.

'괜히 긴장했군.'

남자는 민망해졌다.

역시 F급 던전.

다섯 해골병사는 금세 정리됐다.

전투의 흥분으로, 아드레날린이 분비된다.

그가 다시 앞장섰다.

여기서 또 한 번 멋진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 근처에 기관 장치가 있을 텐데.

남자가 기관 장치를 찾으려 할 때.

- 쌩!

녹슨 칼이 날아왔다.

? 챙!

남자가 급하게 방패를 들었다. 방패에 맞고 녹슨 칼이 떨어진다. 거기에는 작은 키의 해골이 있었다.

남자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둘은 수 년 전 이 던전에서 입구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다.

녹슨 칼을 던진 해골.

그는 오랫동안 이 던전의 입구 근처를 지켰으니까.

지^^.

레벨 업시켜 준 누군가를 위해서.

석벽 앞을 지키고 있지만.

- 달그락!

오랫동안 문지기였던 해골은 눈 깊이 푸른 안광을 빛내며 달려들었다.

한 손에는 방패를, 다른 손에는 칼을 들고 있었다. 그 칼은 녹슬지 않았다. 제법 잘 관리된 칼이었다.

"우어어.!"

망자의 소리를 내며 다가온다.

"혹시 아, 아까부터 저거 서 있었던 건가요?"

은발이 놀라서 물었다.

"그런 거 같은데?"

남자는 해골을 바라봤다. 기관 장치에 다가가자, 칼이 날아온 게 분명해 보였다.

"이 자식이 왜, 가만히 숨어 있다가 칼을 날려? 맞을 뻔했잖아!"

남자가 쉴드를 앞세워 해골에게 다가갔다. 치켜든 쇠도리깨를 위협적으로 획획 휘두르며 달려갔다.

- 획!

"어쭈? 피해?"

남자는 조금 당황했지만, 해골의 움직임은 그리 빠르지 않았다. 해골은 몸을 날려 간신히 피하는 수준이었고, 반격은 생각하지 못하는것 같았다. 남자는 웃었다.

"좀 한다고 해 봐야 해골일 뿐이야."

자신감에 넘치는 목소리로 남자가 쇠도리깨를 휘둘렀다.

"그냥 얌전히 경험치나 바치라고, 해골."

쇠도리깨가 해골이 든 방패에 거세게 부딪쳤다.

해골의 팔이 흔들렸다.

- 빡!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해골은 방패를 끝까지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 상태에서 남자는 쇠도리깨를 휘둘렀고, 거기에 맞서 해골이 칼을 휘둘렀다.

- 챙!

해골은 두 걸음 물러났다.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다시 일어나려고 할때, 은발의 여자가 메이스를 휘둘러공격에 가세했다. 승리가 확실하다면 숟가락을 얹는 편이 좋은 것이다.

"이얍!"

- 퍽!

구석에 몰린 탓에 해골은 합공에 무력했다. 남자는 다시 쇠도리깨를 휘둘렀다.

- 빠각!

방패도, 뼈도 부서진 채 해골은 바닥에 쓰러졌다.

- 달그락!

해골은 끝까지 일어나려고 했다.

"으음. 왜 이렇게 끈질기지?"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남자는 쇠도리깨를 휘둘렀다. 철저히 짓밟았다. 어떻게든 일어나려 하는 걸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생각하는 둣, 부스러질때까지 밟았다.

"해골 주제에 건방지다."

그리고 남자는 주위를 돌아봤다.

'설마 저 말이 웃기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그게 맞았다.

재미없는 말을 뱉고 웃음을 강요하는 태도. 가죽옷을 입은 여자와 은발 여자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남자의 비위에 맞춰 꺄르르, 아하핫 하고 웃어 줬다.

초라할 정도로 작은 집단이라도,

권력과 우열이 발생하면 위에 있는자는 유머를 잃어버리게 된다.

- 터벅터벅.

여자들의 웃음에 만족한 남자는 기관 장치로 다시 걸어갔다.

'이걸 이렇게 하면.

그가 기관 장치를 조작했다. 기관의 조작법은, 돈을 주고 산 정보.

- 구우우응!

석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쿠오오오!"

문 근처에는 해골 넷이 서 있었다.

커다란 도끼 둘. 제법 상태가 좋은롱소드. 끝에 돌기가 달린 커다란 철추.

해골들이 가진 무기였다.

그들은 우두커니 서 있지 않았다.

괴성을 지르며, 어떤 종류의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인간을 맞이하게 위한 준비는 충분한 듯했다.

"해골병사예요!"

레나가 호들갑을 떨었다.

"지금까지도 해골병사였습니다."

핀잔을 뱉으며, 폰자가 메이스를꽉 쥔다.

"흠!"

두 여자를 동시에 눕힐 생각밖에 하지 않는 남자.

그가 기합을 뱉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기관 장치에 대한 정보는 정확했다. 남자는 모험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모험 따위는 아주 싫어하는 성격이다.

남자는 해골들이, 자기보다 한참 약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기관장치 안의 녀석들도 마찬가지다.

"간다!"

그가 웃었다. 쇠도리깨를 위에서 아래로 크게 휘둘렀다.

28화 나른한 눈으로 동족을 잡아먹는 이유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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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챙!

가운데 있던 해골이 철추로 도리깨를 막아섰다.

- 붕!

하지만 공격은 한 번에 그치지 않았다. 남자는 해골이 살아 움직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시 도리깨를 아래에서 위로 올려쳤다.

- 빠각!

"우어어.!"

턱뼈를 얻어맞은 해골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철편의 회전 반경이 작았다. 한 번에 해골의 턱이 부서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금이 가 너덜거렸다.

- 부응!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 도리깨를 옆으로 세게 휘둘렀다.

- 콰직!

도끼를 들고 있던 해골의 갈비뼈가 걸려서 부러졌다. 부러진 갈비뼈 조각이 데구르르 바닥에 굴러갔다. 도끼를 든 해골은 충격을 이기지 못해 나가떨어졌다.

"벌써 둘이 끝났잖아?"

남자가 여유롭게 킥킥거렸다.

"압!"

"하앗!"

곁의 두 여자도 자기 역할을 했다.

폰자는 메이스를 들고 달려갔다. 쓰러진 해골을 마구 공격했다. 레나는 턱뼈에 금이 간 해골의 뒤로 돌아 가다리를 때렸다.

롱소드를 든 해골이 남자에게 공격을 해 온다.

하지만 긴 칼은 느렸다. 제대로 된 파공음조차 나지 않는다. 남자는 그레이터 쉴드를 살짝 들었다.

- 찡!

강철로 된 쉴드가 롱소드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무게도, 강도도 쉴드가 더 강했다.

- 달그락!

해골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언제나 그래 온 것처럼 뒤로 물러섰다. 남자는 때를 놓치지 않았다. 발을 딛어 앞으로 뛰쳐나갔다.

- 붕!

쇠도리깨를 함부로 휘둘렀다. 그난잡한 폭력에 해골은 골반 부서졌다. 중추가 부서진 해골은 불만도 뱉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남자는 해골을 짓밟고 피식 웃었다.

"미안하지만, 너 같은 놈은 해골이아니라 인간이었어도 나한테 한참 안됐어."

"쿠어어어어.!"

남은 해골 하나가 달려들었다. 남자는 몸을 뒤로 했다. 원심력을 실어 강하게 도리깨를 휘둘렀다.

- 피릭!

강맹한 파공음이 울린다. 해골은방패도 없었다. 제대로 된 방어 자세를 취하지도 못했다.

- 빠각!

도리깨에 걸린 무기가 멀리 날아갔다.

- 채애앵!

무기가 돌바닥에 부딪쳤다. 던 전안에 메아리가 울렸다.

"후후. 심판이다!"

고취되어 제멋대로 외친다. 여자들은 소리로 고개를 젓는다.

이미 죽은 해골들은 신의 심판을 받지 못했다. 너절한 한 남자의 심판을 받고 있었다.

'이런. 체력이 별로 없는데.'

[체력을 회복 중입니다. 8.71%

모험가들이 난장을 피우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린다. 나는 석관 옆에 바로 누워서 그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곤란하다.

하필 탈진 상태일 때 녀석들이 쳐들어왔다. 해골들이 용감히 싸우고있지만, 사실 별 전력이 되지 않는다. 좀 더 엄격히 이야기하자면, 약간의 도움도 되지 않는다.

나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직 체력이 10%도 회복되지 못했다. 5%가 넘어가면 탈진에서 벗어나 움직일 수는 있다.

그 상태에서 일어난다면?

저들을 금방 제압하지 못하면 이쪽이 금세 곤란해진다. 10%는 채우는 편이 안전할 거다.

적의 숫자는 셋. 누워서 가만히 녀석들의 수준을 짐작해 본다.

하나는 나와 싸웠던 경비병보다 살짝 약한 수준. 나머지 둘은 레벨이 그보다 더 떨어져 보인다.

침입자들의 움직임을 보면, 사실처리하는 것 자체는 쉬울 것 같다.

어떻게 음직여야 할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가 머릿속에 그대로 그려진다.

'이게 스킬 레벨 업의 효과인가.'

능력치가 크게 오른 것은 없다.

다만 검술을 얻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볼까.

나는 가만히 누워 있었다.

어차피 혼자 싸우는 거다. 회복할 수 있을 때까지 회복한 뒤 움직이는 편이 좋다.

"후후! 이것이 심판이다!"

남자가 외치는 목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이 세계에 심판 따위는 없다. 승패를 나눠 줄 심판도 최후의 종언을 선고할 심판도 없다. 악마와 폭력이 다닥다닥 붙어 집을 짓고 사는 곳이 이 세계다. 서로가 서로의 눈을 뽑고 혀를 뽑을 준비에 한창이다. 어디에 심판이 있을까. 굳이 말한다면 우리는 우리 모두에게 심판이다.

[체력을 회복 중입니다. 8.94%

"정말 멋져요!"

"너희들도 잘했어. 하하하!"

무언가 만지작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녀석들이 대화하는 틈을타 조용히 갑옷을 입기 시작했다.

사실 검술을 수련할 때는, 갑옷을벗어 놓고 있었다. 움직이기 거추장스러웠기 때문이다. 갑옷을 입으면 체력 소모가 더 빨랐기도 하고.

- 철컥.

먼저 투구를 썼다. 바스타드 소드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상태창을 계속 확인했다.

[체력을 회복 중입니다. 9.05%

[체력을 회복 중입니다. 10.1%

'이 정도면 됐겠군.' 갑옷을 입고, 바스타드 소드를 꽉끌어 쥐었다.

- 철컥. 철컥.

한창 서로 지분거리던 모험가들이 조금 경계하는 목소리를 낸다.

"그런데 무슨 소리 나지 않았어요?"

"응? 무슨 소리?"

"금속 소리 같은 거요. 철컥 거리 들렸을 거다. 들으라고 낸 소리니당연하다.

"어디서?"

"석관 쪽이요."

"그, 그래?"

"혹시 남아 있는 거 아닐까요?"

"레나 씨가 가 봐."

"흠! 아니야. 내가 가지."

- 저벅저벅.

모험가들이 걸어온다.

- 달그락.

나는 칼을 잡고 일어났다.

이 홀에서 싸우던 녀석들은 한창머리에 열이 받은 멧돼지였다.

혹은 눈이 벌개져서 양을 쫓던 늑대들이었다.

하지만 전투도 끝나고 시간이 꽤 지났다. 모두 한차례 흥분이 가신상태. 타이밍으로 봐도, 이 즈음에서 베어 주는 편이 적절하다.

"히, 흐억!"

가까이 오던 남자가 놀라 뒤로 한걸음 물러간다.

"리빙. 아머인가? 저, 저런 건 없다고 들었는데?"

"듣다니요?"

은발의 여자가 물었다.

"아, 그게.! 저건 대체 뭐야?"

남자가 얼버무리며,

- 턱.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남자 하나와 여자 둘로 구성된 모험가 파티.

어떤 식으로 처리할까? 녀석들은 아직 서로 말하기에 한창이다.

"해골병사 아닐까요?"

"해골이 무슨 저런 걸입어!"

나는.

녀석들에게 먼저 말을 걸기로 했다. 제압한 뒤 물어봐도 된다.

하지만 제압 과정에서 실수로 죽여 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적당히 휘둘렀는데 그만 목이 잘려버린다거나.

제압용으로 팔다리를 쳤는데 꽃처럼 뜯겨 나가면서 과다하게 출혈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여자가 둘.'

인간 여자는 약한 동물이니 조심해야 한다. 나는 궁금한 게 많다. 먼저하나를 물어보자.

"너희 말이야."

끼홋, 하는 소리를 내며 은발의 여자가 놀란다.

"기관은 어떻게 해제한 거지?"

"기. 사님?"

가죽옷을 입은 여자가 말한다.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끼어든다.

이런 갑옷은 기사나 입는 거긴 하겠지.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 준다.

"그래. 조용한 곳을 찾아서 수련하고 있던 중인데."

그러자 남자가 경계하는 투로 대답"얼굴부터 좀 보여 주시오. 대화를 하려면서 투구를 쓰고 있는 사람이 어디 있소?"

"흉터가 있어서 곤란한데."

투구를 벗으면 바로 싸우게 될 거다. 나는 거절했다. 하지만 남자의 요구는 꽤 거세다.

"그럼 우리도 말 못 해. 당신처럼 수상한 사람한테는!"

"투구를 벗으면 말해 줄 건가?"

"그래! 어서 투구를 벗어!"

남자의 목소리는 격앙에 가득 차있었다. 거기에는 통찰이 부족했다.

F급 던전을 탐험하는 모험가에게 통찰을 바라기는 어려운 일일까. 초급모험가답게 공포 정도는 갖고 있을 법도 하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공포도 없었다. 나직하게 받았다.

"그럴^F?"

"그럼!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당신 수상하다고!"

남자의 표정이 제법 험상궂게 일그러진다. 그의 손에는 쇠도리깨와, 그레이터 쉴드가 들려 있다. 투구를 벗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 투구는 가면이다.

약자 앞에서 가면을 벗는 것은 쉽다. 자신을 그대로 강요할 수 있다.

눈치를 보거나 숨길 필요가 없다.

꾸미지 않아도 되고 상냥해질 것도 없다.

"투구를 벗으면 잘 대답해 줄 건가?"

"그래!"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체력을 회복 중입니다. 10.9%]

저들을 눈앞에서 바라보고 있다.

무기를 쥔 자세를 바라보니 한순간한순간 더 명확해져 갔다.

'내가 이긴다.' 압도적으로 이긴다. 모두 내 범위 안에 이미 들어와 있다. 순식간에 항거 불능으로 만들고, 평생 아무것도 월 수 없게 만들 수 있다. 시체로 만드는 건 더욱 쉽다. 셋이 전력으로 도망친다고 해도 잡을 자신이 생겼다.

- 툭.

나는 투구를 살짝 만져 본다.

이 가면은 내가 저들에게 베푸는 서툰 배려인 셈이다. 이 호의에는 상당히 순수한 면이 있다.

남자는 그 사실을 모른다. 가면을 벗기를 요구한다.

사람들은 종종, 책임질 자신도 없는 진실을 격렬히 요구한다.

- 철컥.

투구를 벗었다.

"꺄아아악!"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은발 여자의 것이었다. 여자는 메이스를 허공에 획, 하고 휘두르며 뒷걸음질을 쳤다.

"으허 억!"

"히 익!"

남자와, 가죽옷을 입은 여자가 각기 놀라 숨을 들이킨다.

"왜 놀라지? 납골당 안에 해골이 있는 건 당연하지 않나."

여기는 납골당이다. 어제의 인간들이 뼈다귀가 되어 걸어 다니는 건당연하다.

지금까지도 해골들을 부수며 여기까지 온 자들 아닌가. 놀라는 건 무척이나 부자연스럽다.

- 달그락.

나는 투구를 벗은, 고개를 좌우로 갸웃거렸다.

"사, 사람이 아니었어요!"

가죽옷을 입은 레나가 소리친다.

예상이 빗나갔다.

던전의 침입자인 남자와 두 여자.

그들은 투구 안에 인간이 있기를 기대했다.

세 사람이 투구 안쪽에서 상상하던 것. 그건 통로에 있던 시체들을 만든 정체불명의 살해자였다.

예상한 공포는 일상이 된다. 받아들이기 쉽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일상은 공포가 되어 버린다.

납골당에서 해골을 만나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사실만으로 잠시 겁을 집어먹게 된다.

물론,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에, 에잇! 오히려 잘됐어!"

곧 남자가 진정한다. 그리곤 말을 이으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해골이면 처리하기 더 쉽지!"

- 부응!

인간 남자가 몇 번 쇠도리깨를 휘둘렀다. 텅 빈 허공을 철편이 가른다. 놈과 나 사이에는 아직 꽤 거리가 있다. 원숭이 같은 몸짓을 가만히 바라봤다.

놈이 제 근처에 서 있는 여자들에게 말한다.

"놀랄 거 없어! 해골이 우연히 갑옷을 주워 입은 거야! 여기는 F급던전이고. 저런 해골 정도는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다구!"

적응이 빠르다고 해야 할까? 그는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상황을 표현한다. 실제로 그 말을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해가 빈약한 만큼 표현도 빈약하다.

F급 던전이고 결국 그곳의 해골,

그러니까 '내'가 이긴다. 그게 결국 녀석이 상상할 수 있는 한계다.

가죽 갑옷을 입은 여자가 옆에서 끼어든다.

"그치만, 갑옷이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걸요?"

"장식만 그런 거야. 봐 봐, 해골 따위는 뭘 입었어도 쉽게 때려눕힐 수있다고. 얼른 저 녀석들 해치우고우리가 갑옷을 가지자!"

남자가 여자들에게 가르치듯 이야기한다.

- 부응!

녀석이 조금씩 앞으로 전진한다.

그레이터 쉴드로 제 몸을 잘 가린 채. 그는 제가 든 무기를 크게 휘두론다.

'정열적이라고 해야 하나.'

고릴라가 암컷에게 키를 과시하듯두 발로 서서 돌아다니는 모습 같다. 그 몸짓에는 내가 가질 수 없을 뜨겁고 동물적인 게 있었다. 아주약간은, 부러워 보이기도 한다. 그런 정열과 욕망이.

"내가 한 번에 머리를 날려 주지!"

어째 쇠도리깨의 철편이 돌아가는소리보다, 저 남자의 외침이 더 요란하다.

- 쩡! 쩡!

원숭이가 가슴을 두드리듯, 놈이 커다란 방패를 쇠도리깨로 두드린다. 쇠도리깨는 짧은 편이다.

도리깨의 자루도 철편도 더 길게해서, 양손으로 휘두른다면 타격력은 더 강해질 거다.

하지만 그는 대신 한 손에 그레이터 쉴드를 들었다.

29화 나른한 눈으로 동족을 잡아먹는 이유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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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골병사들은 녹슨 무기를 쓴다.

혹시라도.

눈먼 칼날에 피부가 스친다면 파상풍에 걸릴지 모른다.

방패를 들면.

그런 일을 봉쇄할 수 있다.

효율적인 무기다.

'작정하고 들어왔군, 그래.'

양손으로 휘두르는 것과 달리, 공격에 실패하더라도 그레이터 쉴드로몸을 보호하면 된다.

안정적이다.

칭찬해 주고 싶은 무기 선택.

하지만.

'느리다.'

무엇보다 엉성했다. 파고 들어갈 틈이 너무 많았다. 맞아 주고 싶어도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히야앗!"

남자가 돌진해 들어왔다.

몇 초 동안 펼쳐질 그의 움직임도,

대응할 내 움직임도 허공에 선이 그어진 것처럼 보인다.

별 생각 없이도 몸이 움직인다.

- 부응!

휘두르는 쇠도리깨를,

- 철렁!

검신으로 슬쩍 감았다. 뒤로 잡아당겨 흑 멸쳐 낸 뒤, 동시에 앞으로 다시 칼을 휘둘렀다.

- 쨍그랑!

떨쳐낸 쇠도리깨는 뒤쪽 바닥에 떨어 졌고,

-서걱! 푸슈우웃!

앞으로 휘두른 칼에, 남자의 팔이 잘렸다. 아무것도 쥐지 못한 팔은허공에서 빙그르르 돌다가, 은발 여자의 얼굴 위에 피를 확 뿌리며 떨어 졌다.

"아아 아아악!"

승부는 한순간에 났다.

남자는 방패를 써 보지도 못했다.

힘과 속도의 차이도 컸다. 무엇보다 스킬이라는 걸 체감했다.

검술의 효과.

남자가 도리깨를 휘두를 때, 모편과 자편의 연결 사슬에 칼끝을 꽂았다. 뒤로 강하게 잡아당겼다.

도리깨를 휘두르던 그의 팔이 앞으로 크게 끌려 나왔다.

잠시 돌출된 어깨를 깊이 내리쳐잘라 냈다. 이 모든 것들이 당연한 것처럼 몸에서 펼쳐졌다.

이런 결과가 되리라는 건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놀랍기는 했다.

자신만만하게 소리 지르던 남자를 바라봤다. 팔이 잘린 절단면이 넓었다. 출혈은 몹시 컸다.

"구와아아아악!"

가만히 서서, 인간 수컷이 팔이 잘린 채 바닥을 구르는 걸 내려다본다.

썩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다.

"구, 구와아아아아아!"

비명을 크게 내지른다. 현실에서도망치려 필사적인 듯하다. 고통과박탈감, 출혈로 그 얼굴이 매 순간마다 여위고 일그러져 간다.

"끼야아아아아!"

"히, 히익!"

남은 두 인간들도 비명을 질렀다.

두 인간 암컷은 도망칠 틈도, 숨을틈도 잡지 못했다.

은발의 여자는 반쯤 정신이 나가 비명을 멈추지 않았다. 가죽옷을 입은 여자는 놀라 숨을 들이켰다.

피를 본 것보다도, 한순간에 난 승부가 그들을 놀라게 만드는 것 같았다.

공포에 질린 나머지, 여자들은 무기를 들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팔이 잘린 남자는 구와 아아악 하는 멱따는 비명을 지르며 동굴 바닥을 계속 피로 칠했다. 포션, 포션이라고 소리를 지르며 은발의 여자를 바라봤다.

그 순간이었다.

가죽옷을 입은 여자가 은발의 손에서 재빨리 남자의 가방을 빼앗았다.

그리고 나에게 그 가방을 던지며 말했다.

"저, 저는 살려 주세요!"

여자가 나에게 목숨을 애원한다.

'재미있군.'

조출한 제 목숨을 붙잡고 어떻게든 놓지 않으려 애쓰는 타입.

확실히 이런 자들이 더 재미있다.

어떤 자들은 죽음 앞에서 공황에 빠진다. 놀라 울부짖는 것이 그들이 하는 전부다. 상황을 이해하길 거부한다. 땅에 머리를 박는다. 도망가려고만 한다.

하지만 또 다른 부류가 있다.

위기 앞에서 더 적극적으로 되는 자들.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왜?"

"저는 아는 게 많아요! 뭔가 물어보려고 하셨잖아요! 다 말해 드릴께요! 저는.!"

이 여자와 같은 자들이다. 여자는내 눈치를 필사적으로 살핀다.

죽음 앞에서 머리가 빠르게 돌아간다. 적응이 빠른 걸 넘어, 본능적인교활함을 내비친다.

물론 우둔하고 둔탁한 것들보다야 이편이 낫다.

훨씬 더 말이 통하는 대상이다.

엉뚱하게도, 루비아가 떠올랐다.

그녀가 이런 성격이었다면, 더 오래 살아남았을까.

어떤 식으로 살아남았을까.

"아, 아아악!"

감상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은발여자의 비명은 끊이지 않는다.

그녀는 발버둥을 친다.

남자의 팔을 제 몸에서 쳐낸다. 피를 뿌리며 몸부림치던 그를 바라봤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죽었나?'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바닥을 구르면서 절규하고 있던 것 같은데, 막숨이 끊어진 듯하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던전 친화도가 올랐습니다!]

[현재 친화도: 6.15%]

레벨이 올랐다.

놈 하나를 죽인 게 그 정도 의미는 있었던 모양이다.

레벨과 함께 던전 친화도가 올랐다. 던전 친 화도는 어디에 쓰이는 건지 모르겠다. 다른 해골들에게 호감을 사니 올랐다, 방금은 인간을 죽이니 올랐다.

어쨌건, 지금은 이걸 보고 있을 때는 아니다. 허공에 뜬 창을 한쪽으로 치워 뒀다.

은발 여자를 바라봤다. 그녀는 앉은 채 몸을 뒤로 뺀다. 치렁치렁한 은색 머리카락이 온통 피에 묻어 어지럽다. 머릿결은 좋은 듯하다.

"으, 으아아!"

바깥으로 도망가려고 하는 걸까.

간신히 땅을 딛고 일어나, 등을 돌린다.

그 순社가죽 옷을 입은 여자가, 품에서 단검을 꺼냈다. 손에 쥔 단검 끝이 파르스름하게 빛난다. 뭔가 묻어 있는데, 라고 생각했을 때.

- 획!

깔끔하다. 그 자세에는 가지런한 느낌마저 든다.

많이 던져 본 솜씨다. 자세도 자세거니와, 단검을 던지는 모습에는 약간의 망설임마저 없다.

- 픽!

"끄허억.!"

은발의 둥 뒤에 단검이 박힌다. 이상한 점이 있다. 등에 단검이 박혔다. 그런데 은발은 제 목을 감싸 쥐고 쓰러졌다.

- 터벅터벅"커, 커허어억.!"

가까이 걸어가 보았다.

여자의 얼굴에 푸르스름한 혈관이 새파랗게 돋아난다.

죽음이 돋아나는 것 같은 기괴한 모습이다. 입가에 피거품을 문다. 입주변이 시커떻게 변하고 있다.

'독인가?'

"컥!"

은발 여자는 그대로 고꾸라졌다.

뒤를 돌아봤다.

가죽옷을 입은 여자는 얌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헤헤."

여자가 살짝 웃는다.

이 여자가 단검을 던진 거다.

그녀는 왼손 엄지를 펴고, 오른손으로 감싸 잡는다.

그대로 가슴에 오른손을 가져다 댄다. 저 손짓을 알고 있다.

제국 남부에서 쓰이는 손짓.

죽을 때까지 복종하겠다는 표현이다. 낯간지러운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여자였다.

"내가 그 표식을 알아볼 거라고 생각하나?"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치 준비된 것처럼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기사님께서는 인간의 세계에 조예가 깊으신 둣 보이니까요."

역시 적응이 빠르다.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여자는 내 눈치를 살살 살피더니말을 이어 갔다.

"저는 T&T 길드의 레나라고 합니다. 암살과 도둑질, 정보를 다루는 길드입니다. 그중 필요하신 게 없으신지요?"

들어 본 적 없는 길드다. 그러나 설명에서 구미가 당긴다. 여자에게다 가가며 추궁했다.

"방금 멋대로 단검을 던지더군."

"저년이 도망가면 기사님의 일이 귀찮아지지 않겠습니까?"

아니다.

어차피 나라면 쉽게 따라잡았을 거다. 속이 보이는 수작을 부리는 여자다. 그녀가 독 묻은 단검을 던진데 는 다른 목적이 있다.

은발과 자기 가운데서, 자신을 유일한 생존자로 만드는 것. 함부로 죽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

이들과 대화할 의사를 내비쳤다.

듣고 싶은 게 많기 때문이다.

루비아를 죽인 무리들. 인신매매집단. 용병단의 녀석들. 에라스트의 영주. 그라스미어의 경비들. 그들은 어떤 집단인가?

지금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안내가 필요하다.

은발의 여자가 살아 있으면 선택은 유연해진다. 이 녀석에게서 들어도 되고, 저 녀석에게서 들어도 된다.

동전을 던져 한쪽을 본보기로 죽인다음 시작해도 된다.

고문을 한다고 해도, 어쨌거나 여벌이 있으니 편리하다.

그런 내 두 가지 선택지를 여자는 하나로 좁혀 버렸다.

"레나라고 했지. 항상 그렇게 독묻은 단검을 가지고 다니나?"

"여자의 몸인데, 독이랑 단검 정도는 항상 들고 다녀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연스러운 둣 대답하지만, 지금 그녀는 제법 긴장하고 있다. 살짝 깨물고 있는 입술이 보인다. 이 자리의 생사여탈권은 나에게 있다.

그걸 또렷이 인식하고 있는 모습이다. 나는 언제든 그녀를 죽일 수도, 고문할 수도 있다.

"나한테 무기를 쓸 생각은 안 했나? 그게 너희의 기본일 텐데."

"한눈에 봐도 제 상대가 되지 않을 분입니다. 용병 길드에 가도 c랭크는 되실 분인데요. 게다가 독이 먹히지도 않을 것 같으니, 목숨을 구걸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용병 길드라.

그래. 그곳으로 가야 한다. 날 안내해 줄 수 있는 여자다.

칼을 완전히 내렸다.

- 덥석.

레나의 목을 잡아들었다. 맥박이 뛴다. 저항은 전혀 없이 얌전히 온몸에서 힘을 빼고 있다.

구석으로 천천히 걸어들어 갔다.

홀 한쪽 구석에 낡은 거미줄이 걸려있다. 꽤 높다. 이 납골당에 한때 거대 거미들이 살았다고 한다. 지금은 없다.

나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남은 것은 이런 거미줄뿐이다. 끈적하고단단하며, 탄력이 좋다.

거미줄을 짠 자의 협조가 아니라면, 커다란 동물이 걸려들어도 벗어나지 못하고 죽고 만다.

썩히기엔 아깝다.

이럴 때라도 써먹어 보자.

- 획!

커다란 거미줄에 그녀를 내던졌다.

거대 거미가 쳤던 끈적한 줄이 레나의 몸에 감겨든다. 예쁘장한 얼굴에 긴장이 서린다.

"거미의 먹이로 두시는 겁니까?"

"대답만 잘한다면 그럴 리가 없지."

사실 여기에 거미 같은 건 없다.

스스로 숨을 참거나 혀를 깨물지 않는 한 레나는 안 죽을 거다. 물론절대 그럴 확률은 없어 보인다.

이 여자는〈목에 칼을 들이대도〉

자살은 안 할 타입이다.

"여기에 온 전후 사정부터 얘기하는 게 좋겠군."

레나는 죽은 남자의 시체를 곁눈질했다.

"사실 저놈을 등쳐먹기 위해서 쫓아갔습니다."

여자가 침을 꿀꺽 한 번 삼키고 말을 잇는다.

"멍청한 녀석 같았지요. 부유하게태어나 아이템을 마구 쓰면서, 던전을 놀러 다니는 것처럼 하는 놈들이 있습니다. 그런 타입이죠."

내 눈치를 살핀다.

"은발 저년도, 비슷한 목적으로 쫓아온 것 같았습니다."

"등쳐먹으려고 했다고?"

"예;'글쎄다.

고작 등쳐먹으려고 쫓아왔다고 하기엔, 독 묻은 단검을 가져온 건 좀과한 것 같다.

단검에 묻은 독이 해골에게 먹히는 것도 아니다. 누가 봐도 사람을 찌를 준비를 단단히 해 온 거다.

"솔직해지자고."

레나를 거미줄에 매달린 채로 놓고 뒤돌아섰다.

모든 걸 내려놓기를 바란다. 아직 그녀는 그럴 준비가 되지 않았다.

"뭘 말할 수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봐. 쓸 만한 것들을 머릿속에서 정리해 보라고."

"저, 저기. r조금 더 절박해진 후에 대화하면 좋을 거다.

은발과 남자의 시체가 바라봤다.

쓸 만한 걸 찾아 시체를 뒤졌다.

'포션은 쓸 만하겠군.'

[최하급 힐링 포션을 손에 넣었습니다!]

[하급 힐링 포션을 손에 넣었습니다!]

[하급 최음 포션을 손에 넣었습니다!]

뭔가 엉뚱한 포션이 있는 것 같지만 하지만 무시했다. 식량도 잊지 않고 챙긴다.

매달려 있는 여자에게 먹여 줘야한다. 물론 저 인간 암컷이 충분히 고분고분해질 때의 이야기다.

유용해 보이는 아이템을 회수한 뒤시체를 구덩이에 굴려 넣었다.

나는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기관 장치를 내렸다.

- 구우우응??????!

여자는 부서진 해골들과 함께 흘안쪽에 갇혔다.

살려 달라는 말이 몇 번 나온 것 같다. 이미 살려 뒀는데 뭘 저렇게 애타게 울부짖는지.

밖으로 나와 걸었다.

몇 걸음을 걸을 때마다 부서진 해골들이 눈에 밟혔다.

처음으로 눈에 띈 것은 예전에 입구에 살던 문지기 해골이었다.

내가 석관에 넣고, 한참 동안 레벨을 올려 줬던 녀석. 몸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있었다.

'좀 심하군.,

끝까지 반항한 듯했다.

빠르게 일어날 수 있도록 몸을 한데 맞춰 주었다.

- 띠링!

[던전 친화도가 올랐습니다!]

[현재 친화도: 6.19%]

30화 나른한 눈으로 동족을 잡아먹는 이유 (8)

***************************************************

지나다니며 해골들의 뼈를 맞춰 줄때마다 던전 친화도가 올랐다. 하지만 남자를 죽였을 때 1% 오르던 것에 비하면 아주 미약한 수준이었다.

친화도가 5%를 넘자 침입자가 들어왔다는 경보가 울렸었다. 더 올라가면 뭐가 또 생길지도 모른다.

부서진 해골들이 보인다.

쇠도리깨를 든 남자와, 허약한 두 여자에게 부서진 해골들이다.

내가 몇 초도 걸리지 않아 제압한 녀석들.

그들에게.

이 던전의 모두가 부서졌다고 생각하니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쓸쓸함은 순수하지 않았다. 어떤 진득한 불순물이 섞여 있었다.

'우월감인가.' 내가 쉽게 살해한 인간에게 쓰러진 해골들. 그들에 대한.

- 달그락!

진저리를 쳤다.

고작 이들에게, 그런 걸 느끼고 있기엔 갈 길이 너무 멀다.

어느새 대부분의 해골들을 다시 맞춰 주었다.

5일 정도 지나면 다시 움직이게 될 거다.

- 띠링!

[던전 친화도가 올라갔습니다.]

[6.89%]

해골들의 뼈를 맞춰 주었다.

그리고 납골당 밖으로 나갔다.

사실 안에서 인간을 기다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문득, 잠시 바람을 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오래는 아니고. 잠깐만.' 바람이 불었다. 바깥에는 아무도 없었다. 밤이었고, 어두웠다. 조용하기만 했다.

'시간을 잘못 골랐나.'

나온 시간을 잘못 고른 것 같다.

한밤중이었다.

굳이 한밤을 골라 납골당에 들어오는 자는 없을 것이다. 손에 든 칼을 쓰다듬으며 한참을 걸었다.

그러다 재미있는 걸 발견했다. 뒤집어진 수레. 발등에 엮여진 종이뭉치들이 걸렸다.

책들이 어지럽게 땅에 흩어져 있었다. 산적들이 책장수를 습격한 건지도 모른다.

시체는 없었다.

'책이라.'

나는 글자를 읽을 줄 안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일어난 지 5년이 지난 뒤? 10년이 지난 뒤? 서큐버스님을 만난 뒤였을까?

그분에게 글자와 말을 제대로 배우기는 했다. 하지만 그 전에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전생의 기억 때문일지도.

바닥에 떨어진 책을 집어 들었다.

한 권을 들고 펼쳐 보았다. 달빛이 없다. 내용을 읽기는 힘들었다.

'안으로 들고 가야 되겠군:

되는 대로 몇 권을 집어 들어 되돌아갔다. 던전 안으로 다시 깊숙히 들어갔다.

- 구우우응!

기관 장치를 움직였다. 다시 석벽을 닫아 놓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끄으응.

거미줄에 매달린 여자가 신음 소리를 낸다. 흘끗 한 번 봐 주고 책에 집중했다. 이곳은 햇불이 켜져 있어서 책 읽기에 좋다.

먼저 손에 잡힌 책은〈세계의 비공식적인 무력 집단에 대하여 -1〉라는 이름의 책.

햇불이 잘 비치는 곳에 누웠다. 갑옷을 다 벗어 버리고 바닥에 옆으로 누워 책을 읽었다.

거미줄에 매달린 여자의 애타는 기색이 느껴진다.

안 그래도 저 여자를 좀 더 방치해 두려고 했는데, 딱 좋은 시기에 책을 발견했다.

이 책들이 아니었으면, 스킬 레벨도 안 올라가는 수련이나 계속 하고 있어야 했을 거다.

즐거운 마음으로 첫 번째 책을 펼쳤다. 그런데,

'좀 웃긴 책이군.'

〈세계의 비공식적인 무력 집단에 대하여 - 1〉책은 좀 우스꽝스러웠다.

엉뚱하게도 이상한 시만 잔뜩 실려 있었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27어느 행복한 날 즐거운 하루여자를 취하고 술에 취하고 빼앗은 침대에서 잠들었을 때벌컥 물을 들이켜 누웠을 때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 있는 건 분명했다 기척은 매우 익숙하게 느껴졌다 나는 중얼거렸다 신기하구나, 누구인지 볼까?

벽으로 움직였다 벽을 통해서인 기척을 확인한다광경을 확인하고 평온해졌다 어디에나 있는 하나의 조각이내 시체를 곱게 정리하고 있었다#41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전쟁 영웅인 나는 노예의 운명을 거부하는 적의 부인을 찔러 죽이고 있었다 전쟁을 투정했지만 학살과 폭력이 좋았다 엄격한 규율을 강요하면서도 마음껏 전리품을 빼돌렸다어느 날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 내 뒤에서 침대 아래에서막사 안에 빼돌려 놓은 전리품 무더기 안에서 들렸다 무슨 소리지?

하지만 찾는 의미는 없다 작은 조각이었기 때문에 그건 모든 곳에 있으니 소리는 금세 내 안에서 들려온다.

바스락,

바스락 창날이 내 가슴에서 그래야 할 것처럼 빠져나온 다부서진 조각으로 돌아갔다 나는 평온해졌다'이게 뭐람.'

책에는 백여 개의 조잡한 시가 실려 있었고, 끝에는 다음과 같은 짧은 해설이 실려 있었다.

〈수백 개가 넘는 버전으로 불려지는 이 시들은, 암살 집단 레드 플레이크가 자신들의 몸값을 높이기 위해 제작해 퍼트렸다고 추정된다. 많은 권력자들은 음유시인을 불러 이 노래를 청하곤 했다. 어디선가 자신을 보고 있을, 레드 플레이크의 호감을 한 조각이라도 사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대상으로 한 청부를, 부디 그들이 받아 주지 않길 바라며. 〉

'뭐 하는 책인지 모르겠군.'

이 책의 어디가 대체 '세계의 비공식적인 무력 집단에 대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정보라고 할 만한 것은 전혀 없었다. 책을 덮는 순간이었다.

- 띠링!

- 지혜가 1 상승했습니다!

'뭐라고?'

- 달그락!

나는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상태창을 확인했다.

'정말 올랐잖아!'

[해골병사 Lv.9(65)]

[체력-30 힘-39 민첩-39 지혜-10]

정말로 지혜가 1 올라서 10이 되어 있었다. 나는 이 사태에 몹시 당황했다. 책을 읽는다고 지혜가 오른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다. 그런게 가능했으면 독서가들이 이 세계를 지배했을 것이다.

게다가 내가 방금 읽은 책은 정말별 내용이 없는 책이었다. 나는 잠시 안절부절못하고 돌아다녔다.

나는 책들을 확보하기 위해 바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땅에 떨어진다른 책들까지 모두 품에 가득 안고 가져왔다.

'정말 지혜가 오르는 걸까?' 잔뜩 긴장해서 다음 책을 펼쳤다.

〈제국 화폐 제도를 죽여라〉라는 책이었다. 급한 마음으로 획획 건너뛰며 읽었다.

〈. 그리고 우리는 당연하게도 위젯을 가지고 있다. 당신의 주머니.

내 주머니에도 있는 그 위젯들. 가슴 큰 여주인 때문에 가는 선술집에서 오리시산産 밀 맥주 값을 치르고, 촉촉한 빵을 씹을 수 있는 위젯말이다.

〉〈. 세이론과 로티, 그리고 위젯에는 보는 바와 같이 상당한 가치의 괴리감이 있다. 세이론과 로티는 함께 가지만 위젯은 어쩐지 홀로 흑떨어져 있다. 제작 기관도 다르며, 가치도 전혀 다르다. 이러한 괴리감은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 작가의 장황한 서술은 잊어라.

정답은 혐오다. 황실과 귀족들의, 평민에 대한 혐오 때문에 이러한 괴리감이 발생한다. 〉〈. 상당수 귀족과 마법사들은 위젯을 손에 대는 것조차 싫어한다.

위젯 따위가 얼마의 가치를 갖는지 알고 싶어 하지도 않다. 〉〈. 황실과 귀족들은 모든 분야에서 평민들이 넘어을 수 없는 해자를 파고 싶어 한다. 명예와 부, 힘을 뱃속에 가득가득 넣는다. 울타리를 높이 세운다. 깊게 해자를 판다.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재미있는 책이었다.

그러나.

지혜는 오르지 않았다.

'혹시.'

검술 수련 때의 일이 생각났다. 마음을 다잡고 한 글자 한 글자 꼼꼼히 읽었다. 하지만, 여전히 지혜는 오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동굴 안을 서성였다. 다른 책을 붙잡고 읽었다.

〈소년이 사라진 거리〉라는 책을 읽었다. 벽을 통과해 다니는 소년에 관한 짧은 소설이었다. 문장은 정갈하고 이야기는 상상력을 자극했다.

즐거운 마음으로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역시, 지혜는 오르지 않았다.

'여러 권을 읽어야 하나?'

처음에 올랐던 게 예외적인 현상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네 번째 책을 집어 들었다.

〈추악한 마법사〉

지혜가 오르는 상황을 알 수 없었기에, 첫 페이지부터 한 글자씩 열심히 읽었다.

〈. 마법사란 극히 편의주의적인족속이다. 신분제의 편리함은 모두 누린다. 억압에 따른 반감은 귀족들을 내세워 뒤로 슬쩍 피해 간다.

악역을 떠넘긴다. 귀족을 미워하는 평민들도 아쥬라의 탑은 경외한다. 마법사를 추앙한다. 주인공으로 삼아노래를 부른다.

그러나 타고나지 않으면 마법사가 될 수 없다. 아케인 하트를 갖고 태어나지 않는다면 어떤 노력과 수련도 무의미하다.

귀족과 마법사 모두 단순한 우연의 산물. 룰렛을 돌려 운 좋게 얻어 걸린 것에 불과하다. 〉〈?"마법사들은 그나마도 하지 않는다. 권리는 최고 수준이나 의무는 없다. 생산성은 전무하다. 〉이번에는 마법사에 대한 조소와 경멸이 가득 담긴 책이었다.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작가가 살해당하지 않으려나?'

마법사들에게. 그런 걱정이 될 만한 책이었다.

내가 갖고 있던 지식을 점검했다.

아쥬라의 마법사들은 강하다. 지혜롭다. 신비와 기적의 화신이다.

손을 휘저으면 허공에 얼음이 맺힌다. 발을 구르면 땅이 갈라져 용암이 솟아난다.

그들이 모여 사는 탑은 일종의 성역. 탑 근처의 마을 주민들은 마법사에게 봉사하는 걸 무한한 영예로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읽고 있는 책은 그 마법사들의 지성을 날카롭게 비웃었다. 도덕성을 거칠게 깎아내렸다.

'찾아가 볼 생각이었는데.'

내가 겪는 현상에 대해, 마법사들에게 물어볼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은 아쥬라의 탑에 가고 싶은 마음이 꽤 사라지게 만들었다.

누가 이렇게 마법사를 욕하나 싶어저자를 확인해 보았다.

이름은〈캐빈 애슈턴〉이었다.

'도대체 뭐 하는 인간이지?'

물론 저자에 대한 소개는 없었다.

가명일지도 모른다.

찜찜한 마음으로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그 순간.

- 띠링!

- 지혜가 1 올랐습니다!

'뭐?'

지혜가 올랐다.

다시 한 번 상태창을 확인했다. 정말로, 지혜가 1 올라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두 번째 현상이다. 당황했다.

다른 책들을 계속 읽었다. 제국의 역사에 관한 책, 지리에 관한 책들을 읽었다.

그렇지만 더 이상 지혜가 올라가는 일은 없었다. 스무 권쯤을 읽었을 때 그만뒀다.

그리고.

머리를 붙잡고 다시 두 책을 살폈다. 읽은 뒤 지혜가 올라갔던 두 권의 책.

〈추악한 마법사〉

〈세계의 비공식적인 무력 집단에 대하여 - 1〉

공통점은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저자가, 같았다.

'캐빈 애슈턴.'

들어 본 적 없는 자였다.

'흐음.'

이름을 보면 남자다. 이 남자가 쓴 책을 읽으면 지혜가 오른다고? 그냥? 읽기만 하면?

이건 '죽은' 뒤 다시 그날로 돌아가는 것만큼이나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남은 책에서는 일단 저자부터 확인했다. 더 이상 그 남자가 지은 책은 나오지 않았다.

물론 책을 읽는다고 지혜가 올라가는 일도 없었다.

'정말 놀랍군.'

도시에 가게 되면, 이 사람이 쓴 책을 더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한참을 누워서 이리저리 뒹굴며 책을 읽었다. 시험 삼아 검술 수련도해 봤다.

- 띠링!

[더 이상 수련으로 스킬 레벨을 올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같은 메시지만 간간이 뜰뿐이었다. 역시 안 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다.

'이 책이 마지막이군.'

마지막으로 잡은 책.

용병들에 관한 책이었다. 캐빈 애슈턴이 지은 책은 아니다.

전설적인 용병들의 활약상이 쭉 적혀 있었다. 내용은 길지 않았다.

용병들이 서로의 랭크를 어떤 식으로 분류하는지가 제법 자세히 쓰여 있었다.

갓 시작하는 N에서, F, E, D, C, B, A, S 랭크의 분류 기준이 간략히 쓰여 있었다.

'으음.

나는 주머니에 있는 신분증을 오랜만에 꺼내 보았다.

〈밴슨 프레쳐〉

클래스: 근접발급: 1143. 7.

랭크: D파이론 용병 조합망치잡이를 죽이고 얻은 신분증이다. 4년 전에 발행된 신분증.

녀석의 랭크는 D.

31화 나른한 눈으로 동족을 잡아먹는 이유 (9)

***************************************************

책에 따르면, D랭크 수준의 랭크용병증이 있으면 어디서든 전력으로 인정받는 수준이라고 했다.

"랭크라.

무심코 입을 열었다. 나는 어느 정도의 랭크가 될지 궁금했다.

녀석을 쓰러트리고 꽤 시간이 지났다. 이제 C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었다. 여자에게 물었다.

근처에 매달린 여자가 절절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몸도 움찔거린다.

과도한 반가움이 이해가 안 되는바 는 아니다. 여자는 매달려서 이틀을 졸졸 굶었다.

'인간은 뭘 먹어야 하니까.'

고통스러울 거다. 그녀를 거미줄에 매단 장본인이긴 하지만, 애원해 볼 대상은 나밖에 없다.

물이라도 한 모금 줄 수 있는 건 나뿐이니까.

여자에게 물었다.

"너는 용병 랭크로 어느 정도지?"

여자는 일단 대답부터 한다. 그리곤 곧바로 입을 열었다.

"용병 랭크라면. E+를 조금 상회하는 수준입니다."

"다른 애들은?"

"죽은 년은 E, 죽은 놈은 D마이너 정도입니다."

그냥 다른 애들이라고만 했다. 하지만 죽은 두 일행을 말하는 걸 알아차리고 곧바로 대꾸한다. 다시 되묻지도 않는다.

다시 입을 연다. 목소리가 메말라있다.

"저 레나, 정말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진심으로 돕고 싶습니다. 이렇게 죽고 싶지는 않거든요."

절박해 보였다.

- 툭.

나는 읽던 책을 석관 위에 내려놓았다. 거미줄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여자는 불안한 듯 열심히 조잘거린다.

"사실 남자를 독 묻은 단검으로 죽이려고 했습니다. 걸리적거리는 다른 년도 마찬가지구요. 죽여서 다 털어 가려고 했습니다."

짐작하기 쉬운 이야기였다.

"평소에도 그렇게 동족을 죽이고 다니나?"

여자는 유연한 태도로 대답했다.

"필요한 경우만 죽입니다. 저를 훼손하려고 하는 자들만 죽입니다. 기분을 너무 나쁘게 하거나, 너무 걸리적거리는 자들만 죽이지요."

여자는 동족 살해를 꽤 가볍게 이야기한다. 그 태도는 싫지 않다.

내가 그걸 꺼릴 이유는 없다.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동행하고 싶어요. 제가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거미줄에 매달려 이틀 굶은 여자는 꽤 정중하고, 적극적이다.

"왜?"

"저는 인간이 싫습니다."

인간을 싫어하는 인간.

드문 일은 아니다. 과거를, 마왕이강림했을 때를 떠올렸다.

인류를 버리고 마왕 군에 붙은 인간들도 적지 않았다.

유형은 다양했다.

인류를 경멸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염인紙人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것을 고귀한 하나의정서로 여겼으며, 인류를 치는 마왕군에 가담했다.

또 다른 부류는 인류 전체에 대해,

피상적이고 불분명한 복수심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이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분명한 복수심을 가진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마왕군에 가담함으로써 그 목표를 달성하려고 했다.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이 여자는 어떤 타입일까. 실은, 그냥 살기 위해서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일 확률이 가장 높겠지.

"그래? 한편이 되고 싶다고?"

"네. 사용해 주십시오.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니, 잘하겠습니다."

말로는 뭐든 해 줄 것처럼 이야기한다. 하지만 거리낌 없이 동족마저 죽인다는 여자다. 여기서 풀려나면 도망가는 게 당연하다.

쫓아가 죽이는 것도 번거로운 일이다. 어려운 일이다.

괴이한 해골이 있다고 인간들 사이에 소문을 내겠지. 어떻게든 날 잡아 죽이려고 할 거다.

- 딱딱.

나는 이를 부딪쳤다. 이 여자를 당장 풀어 줄 생각은 전혀 없다.

뭘 물어봐야 할지 곱씹다가, 상태창에 있는 퀘스트 목록을 열었다.

'이걸 들으면 되겠군.'

물어야 할 단어들이 거기 있었다.

"네크론 신사회에 대해 말해 봐."

루비아를 쫓아온, 망치와 석궁이그 조직에 속해 있다. 몇 번이고 나를 죽인 놈들이다.

일단 이 녀석들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다. 여자는 어렵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그 녀석들을 알고 계시는군요. 네크론은, 인신매매 집단입니다."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게 본업인가?"

"청부 살인도 하고, 마약 제조도합니다. 하지만 인신매매가 본업입니다. 만만한 인간들을 잡아서 노예로 만듭니다."

"반항이 심할 텐데."

"으음, 마음 같은 건 부수려면 금방 부술 수 있으니까요."

여자는 조금 당황하며, 당연하지않냐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

'금방 부서지는 건가.'

루비아가 그런 꼴을 당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가라앉았다.

가만히 침묵했다. 그녀는 내 눈치를 살살 살피다가, 알아서 말을 이어 갔다.

"좀 이상한 점은 있습니다. 인신매매는 확실히 까다로운 일입니다.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지요. 그 조직과 인력으로 돈을 벌려면 다른 방법도 많은데, 인신매매에 유독 집착하는 것 같습니다."

"누가?"

"그게. 누군지는 모르겠습니다."

나는 네크론이라는 조직의 수장이 누군지 물어본 셈이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인 게 당연하다.

"계속해 봐."

"그 조직은, 여기저기 판매망도 잘 구축되어 있습니다. 대도시마다 지부가 없는 곳이 없다고 합니다."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서 물었다.

"유블람에도 있나?"

"물론 그럴 겁니다. 공권력이 뒤를 봐주거나, 아예 결합해 있거나 하죠.

유블람 경비대는. 아마 후자일 겁니다. 온갖 더러운 일은 다 하는 걸로 알려져 있거든요."

나는 생각을 정리했다.

'둘은 분리된 게 아니겠군.'

쫓아오던 두 놈과, 경비대 옷을 입은 다섯 놈은 같은 조직이거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셈이다.

부숴야 할 녀석들이 조금씩 명확해지고 있었다.

"혹시 놈들에게 유감이 있으신 겁니까?"

여자는 과잉 존대를 썼다. 고개를 끄덕였다. 유감이라니, 물론이다.

눈을 굴려 가며 내 모습을 열심히 살피던 그녀가 말을 잇는다. 어떻게든 비위를 맞추려는 말투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왜일까. 그 말투에 호의가 섞여 있다고 생각했다.

"헤헤, 저도 그런 놈들은 싫거든요.

어린아이까지 팔아넘긴다던데, 그런녀석들은 산 채로 불태우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웃기는 인간 암컷이다. 자기가 살아남고 싶어서 동료까지 내 눈앞에서 죽인 주제에, 은근히 정의를 말하고 있다.

"싸워 볼 만할까?"

"으음. 쉽지 않을 겁니다. 뿌리가 워낙 깊어서요. 한참 윗선까지 관련되어 있다는 소문도 있고요."

"죄다 불확실한 소문뿐이군. 잘 모르나 본데."

"아픈 델 찌르시네요. 하지만 알아볼 수는 있습니다."

"어떻게?"

갑자기 여자의 목소리에 활기가 깃든다.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하나는 돈을 주고 정보를 사는 겁니다. 저는 T&T의 단원이에요. 어디서 정보를 파는지는 알죠."

재밌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잠깐이라도 장단을 맞춰 줄까.

"돈은 얼마나 있으면 되지?"

"가격도 중요하지만. T&T는 정보 구매자를 추적해요. 누가 샀는지까지 팔아먹을 수 있으니까요. 우리를 추적하는 쪽에서 충분한 금액만제시한다면, 아마 노출될 겁니다."

나에게 믿음을 심어 주려고 노력하는 듯하다. 제법 귀엽다.

"상도의도 없나?"

"물론 없지요. 세상에 도의 같은 게 어딨습니까?"

석관에 걸터앉아, 다리를 꼬고 여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어쩌자는 거지?"

이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나올 거다.

여자가 배시시 웃었다. 하루 종일 굶었는데 저런 웃음을 지을 수 있다니, 제법이다.

"길드 자체가 놈들에 대해 알아보는 걸로 만들면 되죠."

"말 돌리지 마라."

"헤햇, 제 길드 등급이 올라가 면됩니다."

"얼마나?"

"지부장이요. T&T의 지부장은 기록 없이 정보를 열람할 수 있거든요."

"지부장이라는 게 많이 있나?"

"웬만한 도시마다 있으니까, 적어도 백 명 정도는 될 거예요."

"그 길드원 숫자는?"

"오천에서 만 명 정도라고 알고 있어요."

기가 차는 이야기다. 여자는 한눈에 봐도 말단으로 보인다. 제가 속한 조직의 정확한 인원 파악조차 하지 못하는 것만 봐도 명확하다. 그런데 지부장이 되게 해 달라고?

거미줄에 꽁꽁 묶인 채 하루를 꼬박 굶고, 걸어 다니는 해골을 앞에 두고 저런 소릴 하다니. 이럴 때〈웃음〉이란 걸 사용하는 게 아닐까싶다.

"거래를 좋아하는 모양인데, 좋아.

협상을 시작하지. 널 매달아 두고 난 계속 수련이나 해야겠다."

나는 여자를 버려두고 돌아섰다.

어느새 처지를 잊고 은근슬쩍 기어오르려 하는 게 우스웠다.

저 정도 되는 정보원은 널렸을 거다. 여기서 기다리면서 얼마든지 잡을 수 있다. 다른 던전을 돌아도 마찬가지일 거다.

"자, 잘못했어요! 살려 주세요여자는 하루를 더 굶었다. 나는 책을 더 읽었다.

그동안 재미없게도 던전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여자를 돌아봤다. 거미줄에 매달려혀를 내밀고, 천장 종유석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을 받아먹고 있었다.

인간이 저런 걸 먹다간 심한 배탈이 날 텐데.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없을 만큼 갈중이 심한 모양이다.

퀭한 눈동자가 애처롭게 빛났다.

- 터벅터벅.

여자에게 다가갔다. 거미줄에 매달려 사흘을 굶었다.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내려 줄 때가 됐다.

그 순간.

- 띠링!

[Dungeon message: 침입자가 들어왔습니다!]

이젠 익숙한, 반투명한 홀로그램.

두 번째 보는 던전 메시지다.

인간들이 쳐들어온 것 같다.

F급 던전에 어울리는 F급 모험가들이겠지.

'가서 잡을까?'

하지만 큰 고민 없이 기다리기를 선택했다. 놈들을 만나면 이런 저런걸 물어볼 생각이다.

그와는 별도로, 보고 싶은 것도 있었다. 여기 거미줄에, 이틀 굶은 여자가 묶여 있다.

인간 모험가들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궁금했다. 구경할 생각이다.

여자를 풀어 주지 않고 발걸음을 돌이켰다. 석관 뒤로 숨었다. 얼마지 나지 않아, 바깥에서 요란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왜 아무것도 없어?"

"누가 방금 한 번 다 쓸고 간 모양인데."

"에이, 재미없다."

울리는 발자국과 말소리.

남자 셋으로 구성된 모험가 파티였다. 당연히 싸우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바깥의 부서진 해골들이 아직 재구성되지 않았다.

놈들은 아무 저항 없이 걸어 들어온 것이다. 하나씩 잡아서 차분히 심문해 보자.

정보원은 많을수록 좋다.

그러나.

"어, 이거 어떻게 되는 거야?"

"밀어야 되나?"

"조정하는 게 있을 거 같은데석벽 저편에서 놈들이 막혔다.

멍청하게도, 기관에 대한 정보도 없이 들어온 것이다.

'초보자 파티 수준이 저렇지 뭐.' 저 기관도 풀 줄 모른다. 정말 아는 게 없는 무리인 셈이다. 속으로 잠깐 기대했지만, 정보원으로서의 가치는 형편없을 거다.

현실에 눈을 떴다.

'괜히 설레였군.'

던전 탐험은 어쨌건 목숨이 걸린 일이다. 저 정도 사전 조사도 안 하고 들어왔다면 수준은 뻔하다.

'그래도 기회는 줄까.'

얼굴이나 한번 보자는 생각이다.

- 구우우우응!

기관을 조작해 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한쪽에 슬쩍 몸을 숨겼다.

"엇! 열린다! 열려!"

"우오오!"

"이 앞에 서면 자동으로 열리는 건가?"

안으로 들어오는 모험가들. 시골출신들인지 투박하고, 순박해 보이는 남자들이었다. 풀이나 베고 나무나 하면 어울릴 인상이다.

물론 인간의 순박함이라는 건, 어떤 진저리쳐지는 부류를 순화해서 말한 것일 뿐이다.

인간은 자기 외의 다른 것들을 놀라울 정도로 소외시킨다. 순박하다고 불리는 부류들은 그중에서도 더한 편이다.

게다가 이들은 모험가로 살기를 선택했다. 부랑자, 약탈자의 삶을 선택했다. 빼앗고 홈치고 부수기를 선택했다.

평화로운 던전을.

이족異族의 부락을.

'발견했다!' '공략하자!'

그러나 그곳엔 이미 삶이 있다.

뭘 발견했다는 건가.

뭘 공략했다는 건가.

- 쿵!

완전히 석벽이 열렸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모험가들이 진입하자마자, 홀 내부의 해골들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벌써 복구되나?'

- 달그락!

"나, 나왔다!"

"치자!"

"크하하. 이제 포기하시지!"

가장 큰 덩치의 남자가 해골들에게 정체불명의 말을 지껄인다.

뭘 더 어떻게 포기하라는 말일까.

뭔가 손에 쥐고 있기라도 했나?

이미 포기할 건 다 포기한 존재들인데.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남자의 말은 자연스럽다.

포기하면 포기할수록, 더 많은 것을 포기하길 요구받는다. 세계는 그런 식으로 되어 있다.

32화 나른한 눈으로 동족을 잡아먹는 이유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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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아서 매달아 놓은 저 여자의 말처럼, 세상에 도의 따위는 없다.

- 휙!

포기를 강요한 남자가 도끼를 휘두튼다.

나무깨나 패 본 듯한 솜씨.

팬 나무를 영주에게 다 뜯기는 삶에 지친 걸까.

이제 F급 던전에서 약한 해골병사를 패고 있다.

- 부응!

클래스는 나무꾼 정도겠지.

- 콰직!

능숙한 도끼질.

이미 부서졌던 해골들이 다시 한번 부서진다. 아직 힘을 다 되찾지못한, 막 일어난 해골들이 기습에 당해 부서진다.

그나마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게다행. 몸을 숨긴 채 그들을 계속 바라봤다.

"헉. 헉.

해골들은 모두 부서졌다. 한창 무기를 휘두른 남자들이 숨을 몰아쉬었다. 호흡 하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초짜들이다.

인간 중에서도 격이 한참 낮다. 그야말로 순수한 F급 모험가.

한참 숨을 고른 뒤,

"으홈?"

남자들은 거미줄에 매달린 여자를 바라봤다.

발견이 꽤 늦었다.

대롱대롱 매달린 여자는 이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구조를 애걸하지도 않았다. 줄곧 조용히 있었다.

남자들이 놀라며 말했다.

"어, 여자잖아?"

한데 그들은 곧바로 구원의 손길을 뻗지는 않는다.

"어떻게 여기 매달려 있는 거냐?

심문을 시작한다. 나는 그들이 하는 짓을 흥미롭게 지켜본다.

여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뭐야, 얘. 구해 달라고 안 하나?"

은근히 놀리는 태도를 보인다.

'바로 안 구해 주나?'

조금 놀랐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납득해 버렸다. 사실 저런 태도가 자연스러울지도.

거미줄에 매달린 여자.

무력하게 구속당한 약자다.

인간이 약자에게 호의를 보이는 건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특히 이런 상황이라면 그렇다. 던전은 야만의 공간이다.

들어온 세 남자가 악의를 발휘해도, 매달린 여자는 악의로 되갚을 방법이 전혀 없다.

호혜적 사상 같은 건 개나 줘 버리면 된다. 보복당할 염려도 없고, 누구 눈치 볼 것도 없다.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

'조금 뜻밖인데.'

그러므로 뜻밖인 것은 남자들의 행동이 아니다.

여자가, 구해 달라 청하지 않는 것이 의외.

도끼를 들었던 남자는 허리춤의 물통을 잡는다. 사홀 동안 갈증에 시달린 동족 앞에서, 도끼가 물통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입술이 바짝 말랐는데, 마실래?"

그리고 여자 앞에서 물을 벌컥벌컥 들이 켰다.

물통은 금세 텅 비었다.

남자는 빈 물통으로 허공에 매달린 여자의 머리를 퍽픽 쳤다.

"웃어, 웃어야지. 예쁜 표정 지어봐. 우리가 구해 줄지도 모르는데."

"그렇지, 그렇지! 왜 여기 매달려있냐니까?"

그들은 손에 든 철봉으로 거미줄을 헤집으며 왁자하게 웃었다. 무방비하게 등을 내준 채 여자를 둘러싸고 시시덕거리는 놈들의 모습이 재미있다. 기다려서 관람하는 보람이 있다.

남자들은 주위를 휘휘 둘러보며 여자에게 물었다.

"동료 같은 건 없나?"

네 동료들이 여기서 죽어 나갔으면 우리가 그 시체를 고이 들고 나가 장사 지내 주겠다, 라는 의도는 눈곱만큼도 없는 질문이다.

우리가 너를 마음대로 할 건데 훼방 놓을 녀석은 없냐고 물어보는 확인에 불과하다.

아니면 너를 거미줄에 매달아 놓고 괴롭히는 다른 녀석이 있는지 물어보는 거다. 있다면 그 녀석과 협상하거나 싸워야 할 테니.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조금씩 험악해졌다.

언제든 죽이고 짓밟을 수 있는 상대에게 외면당하고 있다. 그 사실이 남자들을 열 받게 만들었다.

그들의 작은 세계에서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야, 지금 우릴 무시하는 거냐?"

도끼를 든 남자가 인상을 썼다.

"그런 처지면 살려 달라고 빌어야하는 거 아니야? 구해 달라고! 제발구해 달라고 부탁해 봐. 엉? 구해준 다음에는 뭘 드릴까요, 하고 공손하게 이야기해야지."

남자는 자신이 원하는 상황을 아주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민망함조차 느끼지 못하는 태도에 여자가 마른 한숨을 쉬었다.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부끄러움은 쉽지 않은 미덕이다.

"하아."

"하아?"

남자들의 눈이 가늘게 일그러졌다.

여자는 한마디 한마디를 또박또박 내뱉었다.

"너넨 왜 이렇게 멍청하냐?"

"너는 지렁이가 너한테 말 걸면 안 짜증나? 흐물흐물하게 생긴 것들이왜 이렇게 침을 튀겨 대."

매달린 여자는 토해 내듯 말한다.

"으, 으응?"

남자들이 당황했다. 잘못 들었는지귀를 의심하는 표정이었다.

그 가운데 한 남자는 심지어 자기 귀를 어루만졌다. 자기 귀가 잘 붙어 있는지 의심하는 것이다.

귀가 일단 멀껑히 붙어 있는 걸 확인하고 손이 슬그머니 내려간다.

"말로는 잘 못 알아듣지?"

가까이 있던 도끼 든 남자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목에 시뻘겋게 핏대가 섰다.

"이, 이년이 미쳤나.

"꺼지라고. 니들 먹물은 가서 서로빼 주면서 놀아, 병신들아."

보고 있던 나도 조금 당황했다. 격렬한 여자의 말투에는 제법 진정성이 배어 있었다.

진심이 담긴 짜중이었다. 깊은 곳에서 긁어져 나오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사홀 굶고 저 정도의 연기를 하기는 어렵다. 여자의 목소리엔 힘이 실려 있었다. 사흘을 굶었는데도 이 순간엔 제법 반짝이고 있다.

앞에 선 남자가 된소리를 내뱉었다. 어디를 어떻게 후벼 버리겠다는 등 신체 구조에 관한 소리였다.

말로만 끝나지 않을 둣 남자가 도끼를 치켜들었다.

- 달그락.

나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내버려 두면 피를 볼 것 같았다.

흥분해 있어서일까.

세 남자는 내가 걸어오는 것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 뒤에서 넌지시 말을 걸었다.

"너희들, 네크론 신사회라고 알고 있나?"

저들의 가치를 품평하게 될 중요한 질문이다. 뭔가 알고 있다면 살려줄 생각이다.

그걸 말하고 있는 동안은, 살려 줄 의사가 충분하다.

"그게 뭐야?"

"뭔 회?"

"히 이익!"

놈들은 질문을 던진 게 일행이라고잠시 착각한 듯했다.

그러나 곧 뒤를 돌아보곤, 깜짝 놀랐다. 나는 갑옷만 입은 채였다. 투구는 쓰지 않았다. 같은 상황에서, 투구를 벗으라는 말을 두 번 듣기는싫었기 때문이다.

다시 천천히 물었다.

"네크론 신사회, 모르나?"

"이, 이게 뭐야!"

"해골이 마, 말을 했어!"

세 남자가 나를 둘러쌌다.

발이 꼬여서 넘어질 뻔한 녀석도 있었다.

"아무래도 모르는 것 같군."

한숨을 쉴 수 있다면 쉬었을까.

- 달그락.

경추를 움직였다.

갈비뼈를 살짝 들었다 내렸다.

"저게 대체 뭐야!? 가, 갑옷을 왜 입고 있어!?"

"쳐, 치라고!"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녀석들에게 물었다.

"칼도 안 들고 왔는데 너무한 거아닌가?"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이 말에는 진심도 조금 섞여있다. 맨손으로 접근하는데 당장 공격부터 해 오는 건 확실히 따질 만한 일이다.

맨손으로 접근하는 데는 물론 이유가 있다.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단검을 맞고 죽은 은발 여자보다도 약하다.

남자들은 내 말에 대답하지 않는다. 주제 파악을 하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대신 기합을 넣는다.

"이야 아압!"

한 놈이 들고 있는 철봉으로 나를 후려쳤다. 거미줄을 쑤셨던 철봉이다. 개중 민첩한 녀석이지만, 지루할 정도로 느리다.

손을 들었다. 휘둘러지는 철봉을 그대로 휙 잡아당겼다.

"끼이잇!"

철봉은 자연스럽게 잡아채졌다. 놈이 내게 넘겨주려 한 것처럼.

놈은 앞으로 휘청거리며 넘어졌고,

나는 철봉을 강하게 내려쳤다.

- 빠각!

남자는 머리가 부서졌다. 뇌수와 피가 허공으로 튀었다. 별로 뭐가 담겨 있지는 않아서인지, 뇌수의 색이 조금 열은 것 같았다.

'아니, 그런 건 별로 상관없겠지.'

내 생물학적 지식을 회의적으로 고찰하며, 한 걸음을 더 내디뎠다.

"흐아아악!"

남은 두 남자가 겁에 질려 뒤로 물러났다. 공포가 그들을 빠르게 집어삼킨다.

- 챙그랑!

나는 철봉을 바닥에 던져 버렸다.

겁을 줄 생각은 전혀 없다.

길을 물어보는 것처럼, 그냥 순수하게 물어보고 있다.

"확실히 모르는 거 맞지?"

"히, 히이익!"

남은 둘은 비명을 지르다가, 내가빈손이 되자 뒷걸음질을 멈췄다.

'음? 멈추는군.'

어쨌건 이곳은 해골병사가 나오는 던전. 그들은 해골을 잡으러 왔다.

갑옷을 입고 있고,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것 같긴 하지만.

어쨌건 해골에 불과하다.

그런 생각이었을까. 도끼를 든 놈과 칼을 든 놈이, 서로 눈짓을 교환하더니 무기를 꽉 잡았다.

'호오.'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목격했다.

그럼에도 덤벼들려고 하는 건가 싶어 재미있었다.

"해, 그냥 해골이야! 겁먹지 마!"

저들을 용기 있다고 말해 줄 수도 있다. 아직도, 그들에게 나는 마땅히 부서져야 할 해골병사.

어떻게 보자면 순수한 시선이다.

상황이 좀 이상하지만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고 덤빈다.

많은 자들이 하나의 단면에 아무런 진단도 없이 몰입한다. 그리고 단면과 함께 잘려 나간다.

"가, 감히 내 친구를!"

도끼를 잡은 놈이 크게 소리를 지론다.

"그렇게 따지면 저기 내 친구들은또 어떻고."

부서진 해골들을 가리켰다. 녀석은내 말에 반박하지 않는다.

놈은 대꾸하지 않는다.

물론 차분한 논의 따위를 기대한 것은 아니다.

"죽어라 몬스터 어어!! 으아 아아!"

놈이 거세게 도끼를 휘두른다. 도끼 자루가 멋들어졌다.

녀석이 그동안 저 도끼로 쪼개 왔을 나무들이 떠올랐다. 나무들을 대변할 의리는 전혀 없다.

그냥, 무언가를 끊임없이 쪼개야만 하는 삶의 방식에 대해 생각했다.

"이야 아압!"

옆에서는 다른 놈이 칼을 내리친다. 휘둘러지는 도끼날을 슬쩍 피했다. 한 발자국 옆으로 움직여, 칼을 내리치는 놈의 발을 걸었다.

"흐익!"

발 걸린 놈이 넘어지며 도끼 든 녀석의 목을 쳤다.

칼은 힘없이 휘둘러졌다. 이런 '순박한' 자들에게는 칼보다 도리깨와 도끼가 어울린다.

칼에 익숙하지 않은 남자였다.

도끼의 목은 제대로 떨어지지도 않았다.

"끄, 끄에에.

도끼는 목을 감싸 쥐고 자빠졌다.

피는 줄줄 홀렸지만 채 한 치 깊이로도 베이지 않았다. 죽으려면 좀시간이 걸릴 거다.

칼을 빼앗아, 그걸 휘두르던 놈의 가슴에 박아 넣었다.

- 서걱!

칼을 가지고 다니면 역시 칼을 가지고 다니는 놈을 만난다. 칼을 휘두르면 그 칼에 심장이 꿰뚫릴 각오는 되어 있어야 한다.

표정으로 보아, 그런 각오는 전혀 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가슴에 칼이 박힌 놈의 두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구멍 난 가슴에서 피가 샘물처럼 뿜어졌다. 한 걸음을 옆으로 움직여피분수를 피했다. 칼을 휘둘러 도끼의 목을 깔끔하게 쳐 주었다.

- 데구르르.

도끼의 목이 잘려 나가 바닥을 뒹굴었다. 민망해질 정도의 수준이다.

이 정도로 수준 차이가 나면, 몇을죽여도 경험치가 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경험치가 121 올랐습니다.]

[경험치가 134 올랐습니다.]

[경험치가 125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셋을 죽이자 레벨이 올랐다.

내 레벨은 실제 수준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게 되어 있다.

오는 모험가들이 수준이 낮지만,

내 레벨도 터무니없이 낮다. 상태를 확인해 본다.

'상태창.'

- 띠링!

[이름: 없음]

[해골병사 Lv. 10(66)]

[체력-30 힘-39 민첩-39 지혜-11]

[잔여 포인트: 1]

남은 포인트를 힘에 배분했다. 민첩과 힘은 비슷하게 맞추고 있다.

민첩을 먼저 올리기도 하고, 힘을먼저 올리기도 한다. 두 스탯의 밸런스는 중요하다.

[힘 39 -> 40]

모험가들의 시체를 뒤지기 시작했다. 무덤에서 일어난 뒤, 시체를 뒤지는 일이 잦다.

갓 죽은, 갓 죽인 시체들이다.

'이 짓도 하다 보니 익숙해지나.' 칼을 찔러 넣은 가슴팍을 뒤지고,

옆으로 멘 배낭을 뒤졌다.

사후경직으로 굳어 가는 몸을 단단한 손뼈로 점검한다.

- 짤그락.

놈들의 지갑은 얄팍했다. 몇 로티 되지 않았다. 다만 식량은 제법 풍족했다.

33화 동굴에서 날개가 퇴화하는 이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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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프게 칼을 휘두르던 녀석의 짐을 뒤졌다.

새로 마련한 듯한 바스타드 소드를잡고, 이리저리 휘두르던 모습이 조금도 어울리지 않던 녀석.

그의 짐에서 커다란 나무 곽을 발견했다.

뭔가 싶었다.

'도시락인가?'

뚜껑을 열었다. 종류별로 과일이 들어 있다. 그중에서도 커다란 포도가 눈길을 끌었다. 알이 크다.

싱싱해 보였다.

한 알씩 떼었다.

좋은 품질의 와인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붉은 껍질을 손끝으로 찢어천천히 벗겨 냈다.

안은 촉촉하다. 과육이 꽉 들어차있다. 씨도 없다.

포도를 익게 만든 비옥한 토지와 뜨거운 태양이 느껴졌다.

몇 번 손끝으로 톡톡 건드리다가 찢어지지 않도록 가볍게 힘을 줘 껍질을 벗겼다.

- 스르륵.

공들여 껍질을 까고 있다.

하지만 이 달콤한 과육을 내가 먹을 건 아니다.

씹는 건 가능하지만, 내게는 과육을 맛볼 혀도 소화할 내장도 없다.

내 갈비뼈 사이에는 텅 빈 어둠과 바람밖에 없다.

- 달그락.

거미줄에 매달린 여자를 바라봤다.

인간은 연약하다. 물만 안 마셔도 죽는다. 저대로 놓아두면 금방 한계가 올 거다.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입에 뭐라도 넣어 줄 때가 됐다.

'다른 인질은 없지.'

방금, 던전에 들어온 셋을 죽였다.

목을 쳤다. 가슴에 칼을 박았다.

다른 쓸 만한 녀석은 없다.

저 여자를 살려야 한다.

물을 게 많다.

- 터벅터벅.

거미줄에 가까이 다가갔다. 여자가입을 연다.

하지만 그 입에서 튀어나오는 건 간청이나 애원이 아니었다.

의외의 말이다.

"협상할 마음이 드셨나요?"

홈칫 놀랐다.

경추를 타고 올라오는 의아함에,

순간 그 자리에서 멈춰 버렸다.

이 여자는 허공에 매달려 있다. 그렇게 사흘을 졸졸 굶었다. 눈은 움푹 들어가고 목소리에도 영 힘이 없다. 희미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런 처지에서 협상을 운운한다.

'우스운데.'

껍질을 깐 포도. 하얀 과육을 바라봤다. 건네주지 않았다.

내 입에 넣고 깨물었다.

이 사이로 홀러내리는 물큰한 액체가 느껴진다.

- 주르륵.

혀가 있다면 진한 포도 향과 달고 신 감칠맛을 즐기고 있겠지만, 아쉽게도 그런 질깃질깃한 감각을 느낄 수는 없다.

이건 그냥 약 올리는 거다.

"하아.

여자가 탄식한다.

아깝겠지. 촉촉한 과육을 몇 번 씹고 그만뒀다.

텅 빈 갈비뼈를 통해, 바닥에 씹다만 과육이 떨어진다.

하지만.

약은 내가 올라야 했다.

"그거, 맛있나요?"

나는 감각을 느낄 수 없다. 여자는그 지점을 지적하고 있다.

피부가 있다면 얼굴이 붉어졌겠지.

여자를 바라봤다. 어리다.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어린 여자에게 유치한 짓을 했다.

- 달그락!

나는 스스로에게 진저리를 쳤다.

여자가 말을 잇는다. 어색한 침묵이 깨어졌다. 다행이다.

"협상이라는 말에. 마음이 상하셨나요?"

사실이다.

인정하기는 부끄러웠지만.

- 딱딱.

태연한 척 대꾸했다.

"그 말이 웃기긴 하지. 네가 그 정도 가치가 있을까?"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것들보다야 훨씬 있지 않겠어요? 저들은 바로 죽였지만 저는 살려 두셨잖아요?"

여자는 죽어 자빠진 남자들을 본다. 나도 그들을 바라봤다.

옳은 말이다. 널브러진 남자들과,

거미줄에 매달려서도 할 말을 하는 여자가 대비된다.

여자는 처음에 애원을 하고, 목숨을 구걸했다.

그러나 내가 칼을 접고 테이블에 앉자 밀리지 않으려 한다. 제 카드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F급 던전에서.

이만큼 가치 있고, 협조적인 모험가는 드물다.

여기서 만날 수 있는 놈들은 대부분 전혀 쓸 수 없는 수준이다.

저기 널브러진 세 남자.

그들보다 조금 낫거나 심지어 조금 더 한심한 수준이겠지.

아는 건 책 한 권 분량의 지식.

조악한 단면으로밖에 세상을 볼 수없는 자들일 거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보여 줘도.

나를 그저 마땅히 부서져야 할, 해골병사로밖에 볼 수 없는 자들이나잔뜩 오겠지.

'으음.,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여자를 써먹어야 된다.

- 스르륵.

다시 한 알을 깠다. 이번엔 넣어줄 거라고 눈치를 챈 걸까.

"아.

여자는 바짝 마른 입술을 벌린다.

어린 새처럼 벌린 입으로, 포도를밀어 넣었다.

"하으.

탄식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까지 뱉는다. 꼭꼭 씹는다. 무척 맛있게 먹는다. 몸까지 떨린다. 저렇게 먹을거면서, 협상을 운운한 건가?

"자제력이 대단하군."

"헤햇.

매달린 여자가 눈웃음을 짓는다.

새의 입에 먹이를 넣어 주는 느낌이다. 한 알 한 알을 더 까서 먹여 주었다. 다른 음식들도 조금씩 넣어줬다.

"우읍. 으읍.

천천히 먹게 내버려 두었다. 어느 정도 포만감을 느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물었다.

"왜 그랬지?"

추궁이 아니다. 순수한 질문이다.

정말 궁금했다. 왜 그랬을까? 내질 문에 여자가 나를 바라본다.

어떻게 보면 뜬금없는 이야기가 혹들 어온 것이다.

그러나 여자는 짐작하는 표정이다.

어떤 질문을 하는지 알고 있다.

"무슨 의미이신가요?"

하지만 곧바로 대답하지 않는다.

뜸을 들인다.

배시시 미소를 짓는다. 습관인가?

인간 수컷에게라면 제법 통할 만한웃음이다. 재차 질문했다.

"왜 구해 달라고 하지 않았지?"

방금 전 내가 죽인 셋.

그들에게 왜 구원을 요청하지 않았을까. 사실, 아직 묻지 않은 중요한질문도 많다.

주변의 던전에 대해서라든가. 그쪽이 실용적인 화제다.

하지만.

무엇보다 일단 그걸 묻고 싶었다.

그러자, 여자가 갸웃하며 대답했다.

"에이, 남자가 어떻게 여자를 구해주나요?"

답변은 지체되지 않았다. 어조는 의아스러웠다. 왜 당연한 걸 묻느냐는 투다. 당황했다.

"너희는. 동족이지 않나?"

"아하 하하하.

여자가 쾌활하게 웃음을 터트린다.

던전에 아하 하하하, 하는 웃음소리가 몇 번씩 메아리친다. 힘도 없을 텐데 온몸을 울리며 웃는다. 뭐가 그리 우스운 걸까?

"왜 웃지?"

"하핫. 제가 그들과 동족이라고요? 그만큼 동족에서 멀기도 쉽지 않을 텐데요? 심지어 제가 원하더라도, "

여자는 잠시 뜸을 들이고 말을 이었다.

"그들부터 절대로 저를 동족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제 생각 같은 건알 바 없이, 옷 찢어 눕힐 생각만 하는데 그게 동족인가요? 하, 그거참 대- 단한 동족이네."

문득 루비아가 당했던 일들이 떠올랐다. 허공에 매달린 여자의 말이, 약간은 공감이 가기 시작했다.

가만히 그녀의 말을 곱씹으며 침묵했다. 여자가 말을 이었다.

"동족이라면, 차라리 기사님과 제가 동족에 가깝겠죠. 훨씬 더."

"같은 적을 가져서?"

"구조가 비슷해요."

"구조?"

"〈저들〉을 보세요. 기사님을 보면달려들어서, 대가리 깨고 탈탈 털어갈 생각밖에 안 하잖아요? 어머, 내입 좀 봐."

여자는 눈치를 살짝 살폈다.

"우린, 처지가 비슷하다니까요."

말하고 싶은 바는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더 이상 거기에 대해 캐묻지 않았다.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여기에 대해 계속 질문을 던지고대답을 듣는 건, 그녀와 정신적 관계를 갖는 행위처럼 느껴졌다.

루비아가 당한 일이 생각나서 조금 괴로워지기도 했다. 나는 이야기를 전환했다.

"레나라고 했지?"

"네! 맞아요."

"기사님은 이름이 없나요?"

"없어."

"으응, 제가 지어 드려도 될까요?"

갑자기 혹 들어온다.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죄송해요. 무례했네요."

나는 잠시 침묵하다 말을 이었다.

"널 한번 이용해 볼 생각이다. 인간들의 유품을 모아 주겠다. 너는 그걸 팔아라. 네 길드에서 성장하고, 정보를 가져와."

"좋아요! 제가 원하던 거예요."

레나는 싱긋 웃으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을 잇는다.

"그렇지만 이용이라니, 기왕이면 믿어 주시는 게 어때요?"

아무도 믿지 않을 것 같은 여자가 저런 말을 하니 우스웠다.

아니, 의도된 농담 같았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행위에 오히려 터무니없이 거리를 두고 있기에, 나올 수 있는 가벼운 농담이었다.

- 달그락.

경추를 조금 움직였다. 이게 웃는다는 표시인 걸 알아줄까?

나는 전부 거미줄을 끊어 냈다.

동굴 바닥에 적당히 모포를 깔아주고 여자를 앉혔다.

- 털썩.

레나가 그 위에 주저앉는다.

"으으으."

온몸이 다 결리는 둣 몸을 몇 번뒤틀다가, 곧 얌전해졌다. 그녀에게 물었다.

"근처의 던전에 대해서 아는 대로말해 봐."

"음,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

"목적이. 모험자 사냥인가요, 던전 공략인가요?"

"둘 다."

"오호.

레나가 작게 신음을 뱉었다.

나는 던전에 꼬이는 모험가들만 처리할 생각은 아니다. 8개월 동안 아무 조건 없이 검만 휘둘러서, 검술레벨 5를 달성했다.

인간 사냥으로 얻은 스킬이 아니다.

던전 공략으로 얻은 검술 재능Lv.1 덕분. 납골당의 우두머리를 처치하고 이런 보상을 얻었다.

다른 던전 보스들에게도 그 보상을 청구해 볼 생각이다.

F급 던전이나 지켜야 할 일개 해골병사가 밖으로 나와, 다른 던전을 돌아다니며 보스들을 사냥해도 되는가?

그 질문은 원천적으로 잘못됐다.

그건 시답지 않은 소리다. 논쟁거리도 되지 못한다.

요행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일개 해골병사가 다른 던전들을 돌면서 보스를 사냥하는 건 단연 후자에 속한다.

누가 누구의 편이기에 앞서, 결코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에는 가치판단이 무의미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일을 할 생각이다.

여자가 나를 말똥말똥 올려다보며 말했다.

"모두가 적이 되겠네요."

콜록, 하고 기침을 작게 하고 말을 잇는다.

"묘급 던전 하나, D급 던전 하나,

C급 던전 둘이 있어요."

"네 개가 고작인가?"

"네."

"일주일 거리 안에서 제가 아는 건그 정도예요. E급은〈메마른 지하묘지〉, D급은〈파멸된 거미의 볼트〉, C급은〈비틀린 안개 지역〉과〈야비한 정글〉."

"일주일 거리라면 도보로 말인가?"

"네, 걸어서요. 어라. 별로 없는 건가요? 이 정도면 많은 거 같은데.

고개를 가웃한다.

하긴 이 시기는 그랬었나 싶다. 아직 마계가 열리기 전이다.

장소도 장소고.

"이 근처에는 몬스터가 별로 없지?"

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남부는 중부 다음으로 던전이드물다구요. 서부 사막이나 동부 산맥으로 가면 아직 좀 많죠. 아실지모르겠지만, 부락도 꽤 여럿 있구요."

그렇다.

마물들은 서부 사막과 동부 산맥에 산다.

물론 모래가 좋아서, 산이 좋아서거기에서 사는 마물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다수파는 아니다.

절반 이상은 밀려나서 그곳에 사는 것뿐이다.

작렬하는 태양과 건조한 공기가,

고산의 추위와 험한 지세가.

그저 인간보다는 덜 끔찍하기에 그곳에 산다.

인간과 접촉하지 않기 위해서, 마물들은 인간에게 없는 것처럼 취급당하기 위해 그런 곳에 살고 있다.

34화 동굴에서 날개가 퇴화하는 이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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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와 남부.

큰 강을 낀 비옥한 평야들.

온도도 습도도 살기 알맞고, 품질좋은 과일과 채소들도 흔하게 잘 자^는 곳.

그런 곳에는 마물들이 발을 붙이지 못한다. 마왕 강림 전에는 꿈도 꿀수 없다.

강을 낀 곳, 자원이 풍부한 곳, 땅이 비옥한 곳들.

달빛이 부드럽고 꽃이 아름다운 곳은 철저히 인간의 것이다.

- 툭.

상념에 잠겨 있을 때,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레나의 몸이 모포 위에 떨어지는 소리였다. 쌔근째근 잠자는 숨소리가 곧 홀 안에서 작게 울린다.

'잠들었나?'

여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자는 척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여자는 삼일 밤낮을 거미줄에 매달려 있었다.

먹지도 못했고, 제대로 잠도 자지 못했을 거다.

모험가들에게 빼앗은 여행용 모포를 한 겹 더 위에 올려 주었다.

이 여자에 대해 생각해 볼 시간은 많다. 받아들이기로 한 내 결정을 가만히 돌이켜 보았다. 잘못된 판단은 아니라고 믿고 있다.

목표를 향해 혼자 움직이기에는 이런저런 제약이 많이 따른다.

일단 인간을 아는 자가 필요하다.

내가 머지않아 죽일 무리도 인간이고, 10년 뒤, 20년 뒤에 죽일 무리도 용사라는 이름을 가진 인간들이'으음.'

- 달그락.

실은 동료라는 걸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다. 루비아를 동료로 만들려다 실패했다.

20년을 달그락거리면서.

서큐버스님을 제외한다면 나에게 동료 같은 건 하나도 없었다. 모험가들은 던전을 쳐들어오며 서로를 동료라고 불렀다.

나에게는 그런 게 없었다. 서로를 구하다가 죽을 동료는커녕, 손을 잡고 있어 줄 누군가조차 없었다. 잠든 여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이 여자는 동료가 될 수 있을까?

- 달그락.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잠시 함께할 수는 있다. 하지만 동료는 아니다. 그런 친숙한 단어를 사용하는 건 무리. 여자는 제멋대로 내게 동질감을 말한다.

그러나 나는 거리감을 느낀다.

이 수상한 여자가 하는 말을 듣고,

하는 행동을 볼 수는 있다. 하지만 마음은 알 수 없다. 앞으로도 모를 것이다.

유용성은 확실하다.

신뢰성은 글쎄.

혼자 생각에 빠져 있던 중.

- 띠링!

언제 나와 같은, 귀에 익은 경박한 소리와 함께.

〈B급 시나리오, '레나 이야기'가 열립니다. 〉

〈그녀를 T&T 길드 지부장에 앉혀보세요! '어둠 속의 조력자' 시나리오가 활성화됩니다. 〉〈높은 호감도에 방심하지 마세요!

그녀는 언제든 당신의 뒤통수를 때릴 수 있습니다. 〉

재미있는 말이었다.

나는 픽 하고 웃었다. 경추를 달그락거렸다. 세세하게도 알려 준다고 생각했다. 알려 준 내용은 그리 싫지 않았다.

'언제든 뒤통수를 칠 수 있다고?'

고마운 말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해골이다. 인간에게 뒤통수를 맞을 수 있는 관계를 맺는 것조차 어렵다.

배신당하고 음모에 빠지는 것 정도야 해골이 아니라 인간이라도 당한다. 그 정도면 환영이다.

나는 잠이 든 여자를 바라본다.

여자는 쌕쌕거리며 깊이 잠들어 있다. 그녀의 숨소리는 규칙적이다.

〈B급 시나리오, 레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

반짝이는 '레나'라는 글자에 손을 가져다 댔다.

- 띠링!

[이름: 레나]

[도적 Lv.5]

[체력-13 힘-11 민첩-17 지혜-11]

[호감도: 11]

- 레나는 당신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기본 스킬]

- 호감도를 올리면 개방됩니다.

[특전]

- 호감도를 올리면 개방됩니다.

[칭호- 호감도를 올리면 개방됩니다.

역시 호감도를 올리지 않으면 기본스킬과 칭호, 특전은 볼 수 없는 것도 같다.

그런데.

'언제 호감도가 올랐다는 거지?'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나에 대한그녀의 호감도는 11을 기록하고 있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여자였다.

레나의 능력은 준수했다.

인간은 개체차가 크다.

터무니없는 힘을 가지고 태어나는 자도 있고, 성장 속도가 놀라울 정도로 빠른 자들도 있다.

아직 특전이나 칭호는 확인해 볼수 없다. 하지만 레나는 분명 재능이 뛰어나다. 빠르게 레벨을 올린다면, 오래지 않아 나를 추월할지도 모른다.

도중에 이 여자를 죽이게 된다면,

혹은 죽이고 싶어진다면. 그 시기를잘 잡아야 할 것 같았다. 나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잠든 여자를 바라봤다.

"으음.

레나는 서서히 깨어났다. 잠이 묻은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앞으로 5년 동안은 잠들어 있을 것 같던 여자는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아 깨어났다. 꿈도 꾸지 않고 꼭꼭 잠 속에 파묻혀 있던 여자는 몸을 이리저리 돌리며 일어났다.

그녀는 아, 하고 탄식을 뱉었다.

품에서 무언가를 뒤졌다. 나는 실수를 깨달았다. 조금 불안해졌다.

품에 무슨 위험한 무기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에게는 온갖 특별하고 기상천외한 무기가 있다.

휴대용 폭탄이라는 것도 있다.

품속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그 폭탄을 꺼내 던지면, 나는 날아가 버리게 된다.

온몸의 뼈가 깨져서, 죽지는 않더라도 여자는 확실히 놓치게 되겠지.

너무 방만했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살아 있는 인간의 몸을 뒤진 적은 없다. 루비아도 그렇고레나도 그렇다.

그들이 어떤 것을 가지고, 숨기고있는지 알지 못한다.

쓸모없이 예의를 차리고 있었던 듯하다. 아무도 나에게 기대하지 않는 것을 무심코 지키고 있었다.

칼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언제든 여자의 목을 날려 버릴 수 있도록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기우였던 것 같다. 레나가 품에 손을 넣어 뒤지는 태도는 느긋했다. 무기는 아닐 것 같았다.

"저.

레나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에 줄 달린 작은 장식이 있다.

낡고 조잡하다.

십자 모양으로 교차된 가운데에는 작은 큐빅 하나가 걸려 있다. 레나가 날 보고 말을 걸었다.

"이거, 어머니의 펜던트예요."

"펜던트?"

"네."

팬던트는 목에 거는 장식품이다.

길게 줄을 늘어뜨린다. 보통 이런건 가운데에 보석을 박는다. 여자의 것은 그냥 줄 달린 보랏빛 큐벅처럼보였다.

큐벅은 빛이 바랬다. 주변부는 조금 닮아 버린 것 같았다.

어디서도 이런 걸 팔 것 같지는 않았다. 골동품 가게에서도 취급하지 않을 거다.

어머니의 펜던트라는 말이 딱히 거짓말인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진품이라고 해서, 나에게의미를 갖는 건 아니다.

"왜 이런 걸 나한테 주지?"

"신뢰의 중표예요. 저를 풀어 주셨지만, 완전히 믿기는 어려울 거라고 생각해서요."

웃기는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신뢰는 가슴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주관적 정서다. 어떤 정물도 그 중표가 될 수는 없다. 나는 팬던트를받지 않았다. 믿기로 한다면, 낙엽한 장 주워 주지 않아도 믿을 수있다.

"싫어."

"네?"

"말하지 않았나? 싫다고."

레나가 주춤한다. 손에 펜던트를쥔 분위기로 볼 때, 상당히 의미가 있는 물건처럼 보이긴 한다. 약간 곤란해 보이는 표정이다.

"이 펜던트, 진짜입니다만.

"믿지 않으려면, 심장이 담긴 병을 두고 가도 믿을 수 없잖아?"

줘도 뭘 이런 걸, 이라고 생각하면서 말했다. 나는 계속해서 이를 딱딱거렸다.

"도움이 되는 선까지만 서로 이용하자는 거다."

이런 말을 하면서도, 나는 눈앞의 여자와 어떤 종류의 관계를 맺고 싶은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서큐버스님이나, 몇 번씩 그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루비아처럼, 지켜주고 싶다는 감정은 없다.

물론 그녀라는 개인을 신뢰하는 것도 아니다.

제 동족인 인간들을 아무렇지 않게 죽인 여자가, 내 뒤통수는 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터무니없다.

일단은, 눈앞의 여자를 사용하고 싶다. 원하는 걸 제공해 주고, 내가원하는 걸 제공받고 싶다.

신뢰나 지켜 주고 싶다는 말랑말랑한 감정 대신 그런 게 괜찮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하핫.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에, 펜던트를 거절당한 여자가 앞에서 작게 웃음을 뱉는다.

"역시 이런 건 바보 같죠?"

얼굴이 밝다. 여자는 다시 제 품에 펜던트를 넣는다.

그 순간이었다.

- 띠링!

[레나의 호감도가 3 올랐습니다.]

[현재 호감도: 14]

묘한 포인트에서 호감도가 오르는 여자였다. 나는 화제를 돌렸다.

"잠은 잘 잤고?"

"네. 덕분에요. 어느 던전부터 갈까요?"

"랭크대로 가지."

"그럼, 〈메마른 지하 묘지〉를 다음목적지로 잡을게요. 준비할까요?"

"준비가 필요한가?"

"사실 기사님과 함께라면, 여긴 별다른 준비도 필요 없을 것 같긴 해요."

〈메마른 지하 묘지〉는 E랭크 던전이다. D나 C랭크 던전으로 가면 경험치는 많이 주겠지. 하지만 한 단계씩 올라가는 편이 안정적이다.

그곳으로 지금 가 볼까?

하지만 신경 쓰이는 게 있다.

이 안에서 해골들의 뼈를 맞춰 주고, 던전에 침략한 모험가들을 죽일 때마다 변화하던 게 있었다.

던전 친화도.

던전 친화도라는 건, 어떻게 쓰이는 걸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지금까지를 가만히 되짚어 봤다.

친화도가 5% 올랐을 때는 던전 경보가 떴다. 던전에 누가 들어왔는지 표시됐다. 침입자가 들어왔다고 경보가 울렸다.

10%, 20%가 오른다면 뭔가 다른 게 주어질지도 모른다.

"으, 으흠."

옆에서 레나가 헛기침을 했다.

"뭘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나에게 묻는다.

혼자 생각에 빠져 그녀를 너무 방치했다. 거미줄에 매달아 놓고 사흘을 내버려 뒀다. 그런데 풀어 주고도 멍하니 방치해 두고 있었다. 레나를 바라봤다.

"너, 마을에라도 다녀와라."

"예?"

"합류하겠다며? 제대로 자고 오지 그래."

간단히 먹이긴 했다. 그러나 이런 걸로는 한참 부족하다. 모포를 깔긴했지만, 잠도 동굴 바닥에서 잔거다.

레나는 상당히 꾀죄죄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살아 있는 인간은 정기적으로 씻는 과정이 필요하다. 몸에 묻은 땀과 소금기를 물로 씻어 내야한다. 이런 던전에서, 그런 일을 할수는 없다.

"어어.

여자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나를 살펴본다. 놀라서 나를바라보다가, 믿기 어렵다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

"이렇게 놓아주셔도 되는 건가요?

정말로요?"

나는 여자를 가만히 바라보곤 반문했다.

"싫어?"

"아, 아니죠! 다녀올게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여자는 몸을 아직 일으키지 않고 있다. 너무 빨리 도망가 버리면 신뢰를 잃을 거라고 생각하기라도 하는 걸까.

나는 모험가들에게 빼놓은 짐 더미를 살펴봤다. 짐에는 이런저런 잡다한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작고 비싼 것이나, 딱히 크게 돈이 될 만 한건 없어 보였다.

짐은 F급 모험가들의 삶을 닮았다.

하나같이 부피가 컸다. 별다른 쓸모는 없었다. 환금성이 떨어지는 것들뿐이었다. 값어치가 없었다.

- 쨍그랑.

무기들을 선별해 놓았다.

이건 적어도 쇠 값은 받을 수 있다. 전부 다 팔면 조금은 돈이 될 거다. 내가 가져가서 팔 생각은 없다.

괜히 여자를 풀어 준 게 아니다.

이 물건들은 모험가들을 죽여 얻은 장물이다. 사기나 공갈, 절도로 얻은 장물보다도 훨씬 위험하다.

하지만 레나는 암흑가의 길드에서일한다고 했다.

물건을 처리할 방법은 남아돌 거다.

"가격만 맞는다면, 물건의 출처 따위엔 관심 없는 인간들도 많겠지?"

"물론이에요."

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짐을 가리켰다.

"짐 모아 놓은 거 봐."

"예!"

"네가 알아서 처리해라. 팔아서 뭘사든, 그대로 쓰든."

"깔끔하게 처리하겠습니다."

레나는 언제든 그대로 도망가 버릴 수도 있다. 나를 버릴 수 있다. 여기서 놓아주면, 토벌대라도 데리고 공격해 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를 제대로 사용하려면,

어차피 인간 도시에 혼자서 몇 번이고 보내야 한다. 레나 혼자서, 나를두고 행동하는 일이 많아야 한다.

옆에 두고 항상 감시하는 식이라면효용은 터무니없이 떨어진다. 살려두기로 결심했다면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게 당연하다.

35화 동굴에서 날개가 퇴화하는 이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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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나는 짐을 정리했다. 시체에서 나온 장물을 정리하는 태도가 능숙해 보였다.

'많이 해 본 솜씨 같은데.'

자기가 죽인 시체에서 물건을 챙긴다음, 암시장으로 향하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그려졌다. 역시 위험한 여자다.

"대충 다 챙겼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싼 짐은 그리 크지 않다. 대부분의 큰 짐들이 남아 있다. 조금 의아한 눈으로 보자 레나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여러 번 다녀갈께요. 지금은 들 힘이 없어서요."

고개를 끄덕였다. 기관 장치에 대해 설명했다. 홀 안쪽과 바깥쪽을 분리하는 장치.

"비석은 여기에 있고.

숨겨진 조작 장치의 위치와 어디에뭘 맞춰야 하는지 알려 줬다.

"뱀, 부엉이, 말 그림 순으로 비석을 돌리면.

"아, 이렇게 하는 거군요.!"

레나가 고개를 끄덕인다. 간단한장치긴 하지만, 한 번 본 것만으로도 쉽게 따라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이해가 빠르다.

구우우응- 쿵, 하며 석벽이 열린다.

"이번에는 닫아 볼게요!"

레나는 기관 장치를 몇 번 조작해 열고 닫다가, 다시 석벽을 연채로 터벅터벅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럼 다녀올게요!"

"조심해라."

무심코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내말에 레나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발걸음은 멀어졌고, 나는바닥에 놓여 있는 무기들에 시선을 줬다. 그리곤 레나가 매달려 있던 거미줄을 바라봤다.

홀 안의 공기가 조금씩 식어 갔다.

괜히 허전했다. 함께 있었다고 들뜨기라도 했던 걸까? 사홀 간을, 일방적으로 방치해 놓았으면서.

- 붕!

감상을 떨쳐 내고 싶었다. 한 손으로 바스타드 소드를 휘둘렀다. 허무한 짓이었다. 검술 레벨은 더 이상 오르지 않았다. 퀘스트는 끝났다.

한 시간 정도가 흘렀다.

가만히 있느니 나가서 인간이라도 사냥할까 고민하던 순간이었다.

- 띠링!

[Dungeon Messeage: 침입자가 발생했습니다!]

[숫자 - 5명]

'으음?' 갑자기 경보가 울렸다.

다섯 명의 모험가가 안으로 침입했다는 경보였다. 별거 아닌 경보. 던전에 침입자가 발생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싸늘하다.

차가운 칼날이 파고드는 듯하다.

레나와 관련이 있나?

시기가 묘하다. 여자가 밖으로 나간 지 한 시간밖에 안 되어, 모험가 다섯이 쳐들어온다. 연관되어 있을 확률이 높다. 놓아주자마자 배신당한 걸까?

'기대하고 있었나.'

결국 믿고 있었다. 배신감이 얼룩처럼 가슴에 내려앉았다. 물론 섣부른 판단이다. 레나와 아무 관계없는 모험가 다섯일 수도 있다.

어쨌건 나는 최악을 가정한다. 그편이 안전하다.

'각오해야겠군.'

레나는 내가 전투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저 그런 모험가들을 데려오진 않았을 거다. 그녀가 데려온다면 나를 확실히 제압할 수 있는 전력이다.

- 스르릉.

검집에 넣고 있던 바스타드 소드를천천히 뽑아냈다.

- 툭.

검 끝을 살짝 석관 위에 걸쳐 놓았다. 비스듬한 자세로 기다리고 있다. 칼날을 바라봤다. 충분히 날카롭다. 칼을 보려면 날을 보면 된다.

하지만 주인을 보려면 자루를 봐야한다.

시선을 안쪽으로 당겼다.

가죽으로 된 칼자루를 본다.

이 칼의 주인은 먹을 것만 잔뜩싸 가지고 다니던 녀석이었다. 가죽으로 감긴 칼자루는 때 묻지 않았다.

누덕누덕 닮지 않았다. 만들어진 지얼마 되지 않은 칼이다.

하루에도 수십 자루의 칼이 이런 상태에서 주인을 잃어버린다. 칼자루가 낡는 것보다 주인의 목이 날아가는 편이 훨씬 빠르다.

던전 안으로 들어오는 녀석들은 어떤 칼자루를 쥐고 있을까? 충분히 낡은 칼자루의 소유자라면 내 머리가 부서질지도 모른다.

- 터벅터벅.

가까이 다가온 듯하다. 발자국 소리가 던전 곳곳에 울린다. 던전 벽면은 고르지 못하다. 소리가 어지럽게 반사된다.

"어이. 정말 여기 괜찮은 게 있는 거야?"

남자의 목소리다.

"흐흐, 도망치는 건 아니겠지?"

또 다른 목소리. 굵고 낮다.

"이런 데서 뭘 어떻게 도망쳐요?"

'레나?' 그녀의 목소리였다.

'도망친다고?'

"던전이라더니 아무것도 없네, 정말인가 본데?"

"그럼 제가 거짓말하는 줄 아셨어요?"

목소리에 교태가 섞여 있다. 두 번 들으니 레나가 확실했다. 나가자마자 정말 누군가를 데리고 들어오는 건가.

"밖에서 하는 것보다 여기가 훨씬낫죠, 안 그래요?"

레나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발자국소리가 석벽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기관 장치를 조작하는 소리가 들린다.

- 구우우웅. 쿵!

석벽이 열리며 천장에 쿵, 하고 부딪힌다. 세게 부딪히는 소리가 던 전안에 크게 울린다. 안팎으로 먼지가 흩날린다.

의아했다.

홀 안으로 들어오는 인간들을 가만히 바라봤다.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석관에 걸터앉은 채로 그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숫자는 다섯.

레나와 남자 넷이다.

그런데, 그들은 제대로 된 무장을 하지 않았다. 갑옷도 무기도 없었다.

그냥 천 옷이 끝이었다.

모험가도 사냥꾼도 아니다. 인간남자였고 그걸로 끝인 자들. 던전을 공략하는 태세는커녕, 저러고 돌아다녀도 이 세계는 저들에게 안전한가 싶어서 고개가 갸웃거려질 정도였다.

"히이이익!"

남자들은 나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무심코 뒷걸음질을 쳤다.

아무래도 몬스터가 있을 걸 예상하고 들어온 놈들이 아닌 것 같았다.

여기가 던전인 줄 모르고 온 건가싶었다. 혹은 던전인 줄 알고도,

"으헉! 뭐야!"

누군가의 꼬임에 휩쓸려 생각 없이 들어와 버렸다거나. 대단한 강심장이라면 강심장이고, 생각 없이 산다는 면에서는 박수를 쳐 주고 싶을 정도다.

"해, 해, 해골이잖아!"

남자들이 나를 가리키며 홈칫 놀란다. 아직도 도망가지는 않았다. 나는 레나를 바라봤다.

설명을 요구할 생각이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있다. 그녀는 젖어 있었다.

몸과 머리카락이 촉촉하다. 검은색눈동자와 머리카락이 물기를 머금어 반질거렸다. 나는 레나를 추궁했다.

"이게 다 뭐냐?"

그러자 레나가 씩 웃으며 말했다.

"죄송한데요, 얘네 좀 죽여주실 수 있나요?"

"아악!"

그녀의 손목을 쥐고 있던 남자의 손목을 슬쩍 돌려서 그대로 꺾으며, 레나는 당황한 남자 무리에서 빠져나왔다. 촉촉하게 젖은 검은색 머리카락을 흔들며 금세 이쪽으로 타닥타닥 다가왔다.

"어, 어어!"

멍청한 표정을 한 침입자들은 당황했다. 상기된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다.

"너, 지금 뭐 하는 거냐? 너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지 않아?"

정말이지, 어디서 이런 민간인들을 데려온 건지 모르겠다.

경보가 뜰 때.

홀 안으로 남자들이 들어올 때. 여자가 나를 배반하려고 한 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준비되지 않은 남자들이었다.

무기 하나 안 들고 이런 던전까지 기어드는 저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나 오는 건지 궁금하다.

레나는 이미 내 쪽으로 빠르게 걸어왔다. 남자들과 거리를 벌리며 멍청한 표정의 그들을 비웃었다. 살짝짜중을 실어 그녀에게 물었다.

"뭐 하는 짓인지 궁금한데."

레나가 몸을 살짝 뒤틀며 말했다.

"으으, 삼 일 동안 씻지도 않은 상태로 도시에 들어갈 순 없잖아요.

좀 봐주세요."

"그래서?"

씻지 말라고 한 적은 없다.

"계곡에서 씻고 있었는데 저놈들 이오더라고요. 자기들을 대놓고 유혹하는 거 아니냐면서, 슬슬 빠져나가려고 했는데 그럴 분위기가 아니던데요? 아예 거기서 덮쳐 버릴 것 같았거든요."

"여기까지 끌고 올 건 없잖아?"

"네. 사실 제가 죽일 수도 있지만,

시체를 처리하기도 번거로워서레나가 말을 흐렸다.

- 달그락.

뼈로 한숨을 표현했다.

고의적이다. 저들을 구태여 여기까지 끌고 왔다. 내가 해치워 주길 바란 거다. 반쯤은 장난기가 서려 있지만, 목적은 분명하다.

신뢰성의 제고다. 저 넷의 죽음은 우리의 관계에 바치는 첫 제물이 된다.

나는 남자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황당하게도 내가 모아 놓은 짐 더미에서 무기를 하나씩 집어 들고 있었다.

"같이 공격하면 될 거야! 주위를 보니 움직이는 건 저 해골 하나뿐인걸?"

"웬 요망한 계집인가 했더니, 이런데 숨어 사는 마녀였어? 혼 풀을 내준 다음 신전에 넘기자!"

날 보고 홈칫 놀라던 놈들이, 어느새 금방 의기가 양양해져 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레나, 궁금한 게 있는데"

"예! 뭐든 말씀하세요."

"저런 자신감은 대체 다 어디서 나오는 거지?"

"그러게 말이에요. 구멍 좀 뚫어서빼내야겠어요."

칼을 고쳐 잡았다.

굳이 꺼지라고 해 줄 만큼 친절하지도 않다. 짐도 없는 걸 봐서 근처도시의 인간들. 죽일 거라면 빠르게 처리한다.

- 팟!

석관을 디디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 서걱!

"커, 커헉!"

똑바로 찌른 바스타드 소드에 한남자의 심장이 뚫렸다. 살과 근육은종이처럼 찢겨졌다. 남자가 눈을 크게 떴다. 입과 가슴으로 피를 뿜어내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경험치가 14 올랐습니다!]

[던전 친화도가 0.09% 올랐습니다!]

한 녀석의 즉사를 보고도, 그들은내 움직임에 조금도 반응하지 못했다. 찌른 칼날을 뽑아내 곧바로 회전 시켰다. 나란히 서 있는 두 녀석의 그대로 베어 버렸다.

- 좌록!

- 촤르륵!

피가 뿜어졌다. 시체 두 구가 풀썩풀썩 바닥에 쓰러졌다.

[경험치가 9 올랐습니다!]

[경험치가 11 올랐습니다!]

[2연격! 상대가 너무 약합니다. 검술 숙련도가 오르지 않습니다.]

[던전 친화도가 0.2% 올랐습니다!]

"끼, 끼히익.!"

한 명 남았다. 그는 몸을 돌려 도망가려 했다. 민망할 정도로 무방비한 등을 칼로 찔렀다.

- 서걱!

등을 찌른 칼날이 가슴을 뚫었다.

다시 뽑아냈다. 피가 앞으로 솟구쳤다. 그는 비척거리며 세 걸음을 걸었다.

끄힉, 하는 단말마를 뱉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제가 쁨은 피 웅덩이에 얼굴을 묻었다.

[경험치가 18 올랐습니다!]

[던전 친화도가 0.12% 올랐습니다!]

한참 낮은 레벨의 놈들. 경험치도거의 들어오지 않는다. 던전에 새롭게 네 구의 시체가 생겼다.

나는 유언도 묻지 않고 칼을 휘둘렸다. 듣는다 해도 지켜 줄 의향도 없다.

삶에서 떠난 자리, 몇 마디 주절거림이 남아 보아야 아무런 의미도 없다.

- 달그락.

나는 돌아섰다. 칼에서 피를 털어내고 남은 것은 천에 닦았다. 네 남자를 몇 번 숨도 쉬지 않은 사이모두 죽여 버렸다. 내 숨은 아니다.

"하아.

레나의 숨이었다. 그녀는 몸을 파르르 떨었다.

- 휘이이익!

그녀가 휘파람을 분다. 기분이 좋아 보인다.

"휘우! 짜릿하네요."

인간 숫자가 줄어드는 게, 자신의쾌감과 직결되는 것 같은 감상이다.

그녀의 감상을 품평하지 않았다. 레나가 이쪽으로 와서 시체를 뒤졌다.

"쓸 만한 건 역시 없고. 죽였다는 걸 의의로 삼아야겠네요."

원래 그녀가 갖고 있던 짐을 제외하고 별다른 건 없는 듯하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강탈하고 살해하는 세계에서, 좋은물건은 강한 자들이 갖게 된다.

"약한 자들이었다."

"그렇죠. 힘겹게 한 푼 두 푼 모아서, 쌓아 두면 당연한 것처럼 간단히 빼앗겨 버리는 자들이죠. 이들이 가여우신 건가요?"

"동정해야 하나? 그들은 널 빼앗으려고 했다."

"헤햇, 그 순간만큼은 저들도 강자가 될 수 있으니까요. 잔뜩 흥분했겠죠. 아, 여기요."

시체에서 주운 지갑을 레나가 나에게 건넨다.

36화 동굴에서 날개가 퇴화하는이유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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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로티 91위젯을 습득했습니다!]

몇 푼 되지 않는 돈이다. 지갑을 받아 들고 레나에게 물었다.

"이 날씨에 계곡에서 목욕이라니,

안 추운가?"

"겨울도 아니고 그냥 가을인데요,

뭘."

툭, 하고 지갑을 다시 레나에게 던져 주었다.

[2로티 91위젯을 건네주었습니다!]

"목욕은 여관에서 해라."

"같이 하실래요?"

대꾸하지 않았다. 레나가 흠, 하고헛기침을 몇 번 하고 말을 이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뭘 해?"

"그냥 기다리는 것보다는. 제가인간들을 꾀어 오는 거죠. 그럼 기사님이 처리하시는 거예요."

"글쎄.

밖에서 인간을 사냥하는 것. 가만히 앉아 침입자를 기다리는 것. 레나가 제안한 방식은 그 중간쯤에 있다.

"미끼를 자처하는 건가?"

"저는 그게 쉽고 편해요. 적성에 맞거든요. 알아서 잘 데려., 쿨럭!"

레나가 기침을 했다. 며칠 굶어 몸이 쇠약해진 데다, 찬물에 들어가서 감기라도 걸린 걸까?

- 딱딱.

나는 이를 부딪쳤다. 별달리 좋은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다. 맡겨 보기로 했다.

"그럼 여기 좀 더 머물러 있어야겠군."

기침을 삼킨 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길어도 한 달 정도 만요. 너무 오래 있는 건 위험하겠죠. 그동안 잔뜩 끌어당겨서, 바짝 털고 가는 거예요."

한 달이라. 어차피 그 이상 있으면 레벨도 제대로 오르지 않겠지만. 레나가 말을 이었다.

"모험가들이 계속 실종되면, 영주가 신경을 쓰게 될 테니까요."

그 말을 듣자 궁금해졌다.

"그들은 어차피 사회의 쓰레기 아닌가? 모험가 따위를 왜 영주가 걱정해 주지?"

"듣는 모험가들 서운하겠어요. 나름대로 사회 분업의 일익을 담당하지 않나요? 마물로부터 인간을 보호해 주는걸요."

"정말?"

"아- 니요. 다 놈팡이들이죠. 치안이나 불안하게 만들고. 민폐 그 자체인걸요. 하지만 웃기죠. 영주들은 모험가를 격려해요."

"지방 영주들이 모험가를 격려한다고? 인증받지 않은 무장 집단 아닌가. 무척 경계할 것 같은데."

"그러게 말이에요. 하지만 제국 황실도, 영주들도 모험가들을 격려하죠. 급수가 높으면 심지어 수당까지 준다니까요."

"왜 그렇지?"

레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표현할 단어를 찾는 것 같았다.

"어, 그게. 적이 있으면 좋으니잠깐 침을 삼키던 그녀가 바닥에 앉아 말을 이었다.

"바깥에 괴물이 있다고 소리를 쳐야죠. 위협은 과장될수록 좋고 괴물은 무시무시할수록 좋아요. 그래야 안에서 피를 빨아먹기 좋거든요."

"으음.

"그러니, 모험가들을 신경 써 줘야하지 않겠어요?"

레나가 내 팔을 툭툭 치며 웃었다.

"이런 괴물들과 맞서 싸우는 분들인데."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저는 근처에서 정보를 더 모아 볼게요. 아이템도 좀 사구요. 주신 돈으로!"

레나가 씩 웃고는, 터벅터벅 동굴 밖으로 걸어 나갔다.

던전 안.

다시 하룻밤을 보냈다.

- 투둑! 투두둑!

네 구의 시체는 홀 안쪽 동공에 던져 버렸다.

석관에 기대앉았다.

별반 피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훈련되지 않은 인간 넷을 죽였다.

그들의 강함?

Lv.1 해골병사보다야 낫겠지.

하지만.

지금 내 실질 능력치는 Lv.66에 달한다.

죽이는 건 순식간이었다.

손으로 툭 털어 낼 먼지.

동굴 안에 처박힌 네 남자는 그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 그래야 했다.

그런데 어떤 불편한 긴장이 마음을 간질였다.

죄책감.

그들이 살아온, 그리고 살아갈 삶의 무게.

그것은 사라지지 않고 뼈 위에 얼룩처럼 자꾸 내려앉았고, 마음 밑바닥에는 축축한 물길이 들어왔다.

그 감정에 침몰하기는 쉬웠다. 가라앉아 있기는 쉬웠다.

하지만.

더 깊은 바닥에서 의문이 피어올랐- 달그락.

이상하다. 이런 감정은 역시 이상하고, 수상쩍다고 생각했다.

왜 나는 죄의식을 느끼는가?

왜 나만 죄의식을 느끼는가?

20년간 해골병사로 살아갈 때 나를 공격했던 모험가들.

그들이 죄의식을 느끼는 것은 한번도 보지 못했다.

어딜 감히 해골이 덤비냐고 멸시하며, 손에 쥔 무기를 힘껏 휘둘러 진압하기나 했지.

저들끼리 계급과 이념을 놓고 싸우다가도, 우리를 제압할 때면 언제나 단단히 함께 뭉쳐서 덤벼든다.

나는 인간들에게 경험 치였고 도구였다.

이제 내가 그들을 진압할 수 있는 입장. 그들 가운데 일부지만, 말이다. 나라고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란 법은 없다.

괜히 인간의 입장에서 인간의 행복을 생각하면서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그들도 해골의 입장과 해골의 행복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으니까.

나는 어차피 인간이 아니다. 그들과 동족이 아니다. 레나가 하고 싶었던 말이 조금씩 이해되는 것 같았다.

다시 하룻밤이 지났다. 레나가 돌아왔다. 깨끗하게 씻은 상태였다. 젖은 몸을 모두 꼼꼼히 닦았는지 머리에도 옷에도 물기는 없었다.

"옷 괜찮나요?"

"적어도 깨끗하기는 하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 그러지 말고 좀 자세히 봐주세요. 써먹을 만할까요? 그냥 제취 향으로 골랐거든요. 어때요. 인기가 많을까요?"

나는 뭐 어쩌라는 거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나는 네가 유혹할 인간 수컷이 아닌데?"

"그래도 제삼자의 객관적인 시선이라는 게 있잖아요?"

레나가 내 앞에 서서 몸을 빙그르 돌며 이리저리 걸어 다녔다. 비평을강권당한 나는 천천히 그녀를 바라봤다. 새로 사 입은 검은색 야회복 아래로 곧게 뻗은 날썬하고 하얀 다리가 드러났다. 가죽 벨트를 찬 허리는 잘록하게 들어가 있었다. 가슴은 별로 크지 않았지만, 부드럽게부풀어 있었다. 라인과 밸런스가 좋아 몸 전체가 탄탄한 모습이었다.

"혼자 걸어가고 있으면, 다들 쫓아올까요? 온다고 해 줘요. 아니면 다시 사러 가야 하니까."

"그럴 것 같군."

"헤헤. 그럼 이걸로 확정!"

그 순간이었다. 레나가 몸을 살짝 비틀며 팔을 뻗자,

- 투툭!

풍성한 야회복의 소매에서, 단검이확 하고 튀어나왔다.

"어때요? 쓸 만하죠?"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사흘이 지났다.

유혹과,

살육의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녀는 내가 처리하기 적당한 만큼 서너 명씩 남자들을 유혹해서 데려왔고, 나는 계속 초대받은 모험가들의 목을 땄다.

죽음의 초대였다.

이 근처를 지나는 모험가들의 씨를 말리는 협업은 나쁘지 않았다. 나보다도 레나가 즐거워했다.

"즐거운가?"

"네!"

"어떻게 그렇게 사람들을 잘 데려오는 거지?"

"아직 그럴듯한 유혹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구요."

"응?"

"인간 말이에요. 노예나 시체로 전락하지 않고 살아가는 인간들은.

그저 아직 제대로 된 유혹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죠."

레나가 입술을 달싹거리며, 눈웃음을 쳤다.

"물건이나 잘 팔아라."

나는 모험가들의 짐을 그녀 쪽으로 밀어 놓았다. 유품을, 모험가들이 남긴 장비를 처분하는 것은 레나의 몫이었다. 하지만 왔다 갔다 하는 게조금 과하게 느껴졌다. 밤낮으로 두 번이나 던전과 도시를 오갈 때도 있었다.

"어딜 그렇게 오고 가는 거냐?"

"한 번에 많이 가져가는 건 별로라 서요. 의심을 사기도 쉽지 않겠어요?"

하지만, 자꾸 왔다 갔다 하는 그녀를 보고 있자면 내가 의심이 들었다. 도시에서 누구를 만나는 걸까?

뭘 하는 걸까?

단순히 물건을 처분하러 간다기엔왕복 횟수가 많다. 도시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었다.

아무래도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던전에 머무르는 시간은 점점적어졌고, 같이 있을 때에도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구태여 캐묻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녀를 완전히 신뢰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처음에 떴던 시나리오 창.

거기서도, 그녀가 언제든 뒤통수를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써먹어 보기로 결정했다.

최악의 경우라도, 나는 죽으면 그만이니까.

- 띠링!

[Dungeon Message: 침입자가 발생했습니다!]

[숫자 - 4명]

여느 때처럼 메시지가 떴다.

레나는 얼굴이 상기되어 있는 세 명의 남자를 데리고 던전 안으로 들어왔다.

그럭저럭 장비를 갖춘 모험가였지만 고급품은 아니다. 적당한 수준의사냥감으로 보였다.

나는 그들이 접근해 오기를 기다리며 동굴 벽에 적시되어 있는 문구를 가만히 바라봤다.

'초보자 놀이터'라는 문구와, '두개골은 깨지 마시오.'라는 문구는 지워져 있다.

거기에는 새로 새긴 문구가 있다.

〈주거침입죄: 사형〉

레나가 새긴 문구였다.

- 서걱!

그리고 나는, 새로 들어온 녀석들에게 그 문구를 충실히 집행했다.

잘린 목에서 뜨거운 피가 뿜어졌다.

레나의 초대를 아무도 거절하지 않는 걸까? 모험가의 무리는 그야말로 끝이 없었다.

무방비하게 던전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녀석들이 정말 미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녀석들이 달그락거리는 다른 해골들과 마주치기도 전에, 나는 던전입구에서 남자들의 목을 쳐서 떨어트리고, 석궁을 쏘아 죽였다.

종종 약한 무리를 데려올 때는, 레나도 단검으로 남자들의 목을 그었다. 내가 셋을 죽이면 레나가 한 명을 죽이는 식이었다.

하지만 내가 전부 다 죽일 때가더 많았다.

레나는 자신에게도 조금 맡겨 달라며 가끔 투정을 부렸다.

나는 말없이 무시했다.

그녀에게 경험치를 넘겨주는 게 조금 꺼려졌기 때문이다.

어느 날 그녀에게 물었다.

"어떻게 이렇게 남자들을 잘 데려오지?"

그러자 레나가 말했다.

"그냥 모집하면 돼요. 쉬워요. 산길만 걸어가도 잘 모이는걸요? 인간은일 년 내내 발정기니까요. 저 같은 경우는 특정한 시기에 집중되어 있긴 하지만.

"그다지 알고 싶지 않군."

"알고 싶지 않아도 좀 들어 줘요.

동료의 욕구를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니, 그만."

"도와줄 수 있다구요. 온몸이 다딱딱한 분이 왜 그러실까."

인간에게 희롱당하는 건 매우 당황스러운 기분이었다.

우리는 시체를 계속 만들었다. 레나는 정말로 이들을 동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건지, 조금의 공감도하지 않는 건지, 죽이는 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자신과 교미를 꿈꿨을 인간 수컷들의 숨을 끊으면서,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는다. 물론 나 역시 인간을 죽이면서 괴로워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나와 레나의 레벨은 조금씩 올랐다. 하지만 효과는 전혀 달랐다. 나는 해골이다.

레벨 업 때마다 내 능력치는 1씩올랐다. 반면에 레나는, 레벨 업 때마다 한 번에 스탯이 3씩 올랐다.

인간은 대체로 레벨 업을 하면 스탯이 2씩 오른다. 3이라면 흔히 말하는 영재인 것이다.

'따라잡히겠군.'

죽이지 않으면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은 차이가 많이 났고, 레벨 업이라는 게 사실 그렇게 쉽게 되는 것도 아니다.

이대로 일 년 정도가 지나면 이 근처를 지나는, 혹은 이 근처에 사는 남자 모험가의 씨가 마를 거라고 생각했다.

레나가 이야기했다.

"이건 인간에게도 좋은 작업이라구요. 성비라는 게 자연적으로 1.1 :1 정도라고 하더라구요. 너- 무 발정한 인간 수컷들 으은. 이렇게 죽여주지 않으면 곤란한데요."

그녀는 이어서, 사정射精의 욕망은죽음의 욕망과 닮았기 때문에, 자신이 옳은 일을 해 주고 있는 거라고 밝은 얼굴로 말했다.

나는 그녀의 논리를 품평하지 않았다. 레나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헛소리를 늘어놓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 푸슛!

모험가의 심장을 뚫은 칼이 뽑힌다. 따뜻한 피가 세차게 뿜어지며내 하얀 뼈를 덥혔다.

[경험치가 118 올랐습니다!]

[던전 친화도가 0.14% 올랐습니다!]

이렇게 경험치만 오르면 된다.

37화 동굴에서 날개가 퇴화하는이유 (5)

***************************************************

20년 뒤 서큐버스님을 만난다면,

다시 지켜 줄 정도의 능력을 갖게 된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 던전 안에서 죽으면, 저들처럼되나요?"

레나가 달그락거리는 다른 해골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몇몇은 그럴 거다. 정확히는 몰라."

그때였다. 모험가가 침입했다는 경보가 다시 울렸다. 레나의 유혹 없이 들어온, 오래간만의 순수한 모험가였다. 우리는 하필 홀 안에 있었다. 몇 구의 해골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입구 쪽을 향해 걸어갔다.

모험가를 조우했다.

놈은 혼자였다. 덩치가 무척 컸다.

이런 던전에 들어오기에는 그럭저럭 강해 보였다.

"호, 해골 주제에 꼴같잖은 갑주를 걸치고.

하지만 말을 섞을 가치가 있을 정도로 강하지는 않았다. 녀석이 도끼를 휘두르기도 전에, 몸을 회전시키며 바스타드 소드로 목을 날려 버렸다. 이런 수준의 놈들은 지겹게 죽여 왔다. 지겹고 충분하다.

- 데구르르!

잘린 목이 바닥을 구른다.

- 띠링!

[던전 친화도가 0.35% 올랐습니다!]

[14.57%/100%]

[경험치가 391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포인트를 분배해 주십시오: 1]

슬슬 레벨이 오를 때가 됐던 건가.

'상태창.'

[이름: 없음]

[해골병사 Lv. 14(70)]

[체력-33 힘-40 민첩-39 지혜-11]

[잔여 포인트: 1]

체력에 1을 분배했다.

몸에 퍼져 가는 상쾌한 기분을 느끼고는, 모험가가 바닥에 떨어트린 도끼를 주웠다.

[전투용 도끼를 습득했습니다!]

'흐음.' 제법 질이 좋았다. 도끼날을 엄지와 검지 끝으로 잡고, 스르록스르록곡선을 따라서 문질러 보았다. 날카로움이 느껴졌다.

이만하면 훌륭할 것 같았다. 날이 무척이나 잘 갈린 데다, 뒤쪽이 두툼해서 무게감도 좋았다.

대기만 하면 뭐든 쩍쩍 잘려 나갈 것 같은 도끼였다.

'괜찮은데.'

그런데, 요즘 마음에 좀 걸리는 게있었다. 던전에서 지내며 살육을 계속할수록 몸이 붕 뜨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머리가 멍한 느낌이 들며 기분이묘하게 편안해졌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사흘, 나흘이 흘렀다.

일주일이, 이주일이 지났다.

비슷한 일을 반복했다.

얼마 전부터 들던, 몸이 미묘하게 붕 뜨는 느낌이 더 강해졌다.

이건 뭘까, 고민하고 있을 때 레나가 나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좀 오래 나가 있을 거예요. 일주일 정도 있다가 올게요! 여기를 떠나기 전에 준비할 게 있어서요."

"그러든지."

- 달그락.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던전에 혼자 남았다.

며칠이 더 지났다. 침입자는 오지 않았다. 정신이 흐릿하고 몸이 편안해지는 느낌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강해졌다.

입구에서 머물러 있던 나는 홀린 듯 던전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싶었기 때문이다. 칼을 휘두르는 것도 도끼를 휘두르는 것도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안쪽으로 터덜터덜 걸어 들어가자 느릿하게 어슬렁거리는 해골들이 보였다.

그들 근처로 다가갔다.

느릿느릿하게 움직임을 맞춰 걸어 다녔다.

- 달그락. 달그락.

- 터벅. 터벅. 터벅.

박자를 맞춰 걷는다. 머리가 멍한 느낌이 들며 기분이 편안해졌다. 모든 걸 잊고 가만히 던전 내부를 배회하고 싶었다.

멍하니 달그락거리며 걸어 다니고,

벽에 기대거나 바닥에 누워서 이를 딱딱거리니 참 편했다.

- 띠링!

[던전 친화도가 20을 넘었습니다.]

[던전이 당신을 집어삼키려고 합니[주사위 굴림을 시작합니다!]

[지혜: 11]

[저항 굴림에 실패했습니다.]

[해골병사의 본성에 굴복합니다.]

'이게. 뭐야?' 의식이 흐릿해진다. 어디선가 띠링,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이건. 던전 경보다.

[Dungeon message: 침입자가 들어왔습니다!]

[모험자가 침입했습니다.]

[숫자: 1]

한 명이다.

흐릿해지고, 멍해지는 기분을 조금씩 견디며 던전 입구로 걸어가 보았다.

레나였다. 그녀는, 등에 엄청나게 커다란 배낭을 메고 있었다. 무언가무거운 것이 잔뜩 들어간 둣 레나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저 배낭은 뭘까,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물어볼 만큼 궁금하지는 않았다. 나는 천천히 턱을 움직여 물었"이번에는 혼자네?"

모험가들을 유인해 오지 않았다.

"네, 이제 슬슬 여기에서 벗어날 때가 온 것 같아요."

레나가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제법 들떠 있었는데, 내가 아무 반응이 없자 내 눈치를 살폈다. 약간 서운한 표정.

관심을 바라는 표정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다.

"으음.

아쉬웠다. 여기에 더 남아 있고 싶었다.

"조금만 더 있어 보지.

내 태도에 레나의 표정이 변했다.

인간 남자를 수십 명씩 죽일 때도 찡그려지지 않던 표정이 조금 구겨졌다. 예상하지 못한 문제에 부딪힌 얼굴이었다.

"어, 어어.

그녀는 당황한 것 같았다.

"정말 안 가실 거예요? 위험한데.

인간들이 대규모로 들이닥칠 텐데요."

나는 입을 열었다.

"응. 안 갈래."

입에서 저절로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던전에 더 머무르고 싶었다. 마치 몸에 거미줄이라도 쳐진 것 같았다.

뼈마디 마디가, 이 던전에 머물러있기로 각각 결심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당황한 레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에게 물었다.

"어느 정도 머무르실 건데요?"

"글쎄."

"어. 같이 가고 싶은데. 정말, 하루만 더 기다릴게요."

"으음."

그녀는 던전 입구 근처에 쭈그리고 앉았다. 조금 지친 표정으로, 고단하고 불안한 모습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그녀의 표정이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조금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그냥이 안에 가만히 있고 싶은 마음이 훨씬 더 컸다. 다른 건 부차적인 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나는 나를 기다려 줬다.

하루가 완전히 지났을 때였다. 나는 여전히 떠나지 않았다. 레나 역시 나를 떠나지 않았다.

'왜 안 가지?'

궁금했다.

나는 서큐버스님을 만나기 전까지,

나를 기다리는 누군가를 접해 본 경험이 없다.

아무도 나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나에게 시간을 쓰고 나를 가만히 보아 주지 않았다.

던전에 쳐들어와서 나를 짓밟고 부쉈던 모험가와 용사들은 물론이고, 강제로 나를 휘하로 편성한 10년 뒤의 마왕군 역시 어떤 방식으로도 나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최전선에 투입했다. 부서지면 버렸다. 강해지도록 시간을 주지 않았고 돌봐 주지 않았다.

누군가 나를 위해 자신의 시간을 공백으로 둔다는 것.

이건 신선하고, 말하자면 따분함과는 거리가 멀고, 부드럽고 따듯한 상황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계속 방치했다. 계속 기다리게 했다. 어쨌건 이 던전에 머물러 있을 생각이다.

하루가 다시 지났다. 레나가 나에게 물었다.

"정말 안 가실 거예요?"

"확인해 볼 게 있어서.

"뭘 확인해 보실 건데요?"

"으음.

잘 모르겠다. 나는 그냥 이 안에 머물러 있고 싶다. 이 안에서 꼭꼭 숨어서 달그락거리고 싶다.

레나는 하루를 더 기다렸다.

그녀는 처음에 거의 제 몸통만 한 커다란 배낭을 메고 왔었는데, 사흘동안 던전 안팎을 오가면서 배낭의 크기는 하루하루 급격히 줄어들었다. 식량이라도 들어 있었나?

하지만.

역시 배낭에 대해 물어볼 만큼 궁금하지는 않다.

오늘도 한차례 밖에 갔다 온 뒤,

그녀가 나를 독촉한다.

"전 정말 가요. 우리 계획은 다 어떻게 된 거예요?"

얼른 가자고, 레나가 손을 내밀면서 불평을 했다. 그녀의 불평은 매우 온당했다. 하지만 나는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이었다.

- 띠링!

[침입자가 발생했습니다.]

[숫자: 40 이상]

굳이 경보가 없더라도, 수많은 침입자가 들어왔다는 건 바로 알 수 있었다.

던전 입구 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쿵쿵거리며 이곳으로 쳐들어오는 소리였다.

"아아.

레나는 탄식했다.

"결국 끝이네요. 하아."

그녀가 한숨을 내뱉었다.

나는 그제야,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것 같았다. 몽롱했던 정신이 약간은 깨어나는 것 같았다.

여전히 흐릿한 정신으로 생각해도이건 위험하다.

침입자 40명 이상. 들어오는 인간들을 전부 F급 모험가라고 가정해도, 저건 위험한 숫자다.

적들이 코앞까지 닥친 현실에 몽롱했던 정신이 조금씩 깨어났다. 아직도 시이는 약간 흐릿했다.

혼자 던전 안에 숨어서, 현기중 나는 세상 같은 건 바라보지 않고.

햇빛도 피하고 인간들의 칼날도 피해 숨어 살고 싶다는, 붕 뜨고 현실감 없는 감정.

그건 여전히 나를 뒤덮고 있다.

하지만.

세상의 발톱이 정작 던전 안으로 들어온 데에야, 눈을 뜨지 않을 도리가 없다.

결국 이런 날이 오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몰랐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신호는 충분했다.

위기는 모두 기척을 낸다. 항상 몇 번이고 사전에 자신을 알린다.

그럼에도, 나는 그냥 눈을 꾹 감았다. 이 구멍 안에 처박혀 남아 있고 싶었던 것이다.

'왜. 그랬지?'

뒤늦게 의문이 든다.

나는 왜 여기서 이러고 있었던 걸까? 궁금했다. 이런 결말은 분명한데, 대체 왜 안에서 머리를 박고 있었던 것일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던전과 상관이 있는 걸까?'

정신이 들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몸은 잘 움직이지 않았다.

던전 깊숙한 곳에서 나를 계속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밖으로. 벗어난다는 생각을 하기가 어려웠다. 두려웠다.

- 덜그럭! 덜그럭!

내가 가만히 있자 레나가 나를 잡고 흔들었다.

"이거 보세요! 뭐예요! 뭔가 진지하게 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굴더니, 큰 꿈이 있는 것처럼 굴더니 왜여기에서 이러고 있는 거예요. 이젠끝이라구요. 아직도 정신이 안 드세요?"

나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내가. 뭘 하려고 했더라?'

- 서큐버스님.

- 루비아.

- 복수. 엠버. 아쥬라의 탑.

그것들마저도.

머릿속에 기억으로는 뚜렷하게 있지만 감정에는 한 꺼풀이 덧씌워진둣 생생하게 와닿지 않았다.

나는 레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나와 대비되어, 그녀의 눈동자는 생생했다. 살아 있었다.

머리 어딘가에서, 핑 도는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 달그락.

나는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벗어. 나야겠지?"

"그럴 수 있겠어요?"

"해 봐야지."

"하아.

레나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선두, 제1열.

방패를 든 자들이 있다. 방패에 걸맞게 짧은 한 손 무기를 들었다.

이 던전에 사는 해골들을 두드려 부수기 좋은 둔기들이다.

레나와, 레나가 죽인 은발 여자와 함께 왔던 쇠도리깨 남자.

철제 그레이터 쉴드를 들었던 그 남자가 떠올랐다.

그런 자들 십수 명이 열을 맞춰다가오고 있다.

서너 명이라면 몰라도 저런 숫자를 뚫을 자신은 없다.

어떻게 해 보기 어렵다.

- 쿵! 줌!

〈주거침입죄: 사형〉이라고 쓰인 낙서를 지나 침입자의 대열이 바닥을 찧으며 다가왔다.

- 달그락!

해골들이 일어났다.

그들은 멋모르고 인간 침입자들을 향해 걸어갔다. 나름대로 세차게 칼을 휘둘렀다.

-깡! 까앙!

먹혀 들어가는 건 한 합도 없다.

해골들의 공격은 밀집된 방패들에 민망할 정도로 쉽게 막혔다.

- 까앙!

둔탁한 쇳소리만 던전 안에 힘없이 메아리 쳤다.

멍청한 공격이다.

협공을 하고 싶어도, 던전의 해골들은 내 통솔을 따라 주지 않는다.

무턱대고 걸어가, 침입자에게 칼을 휘둘러 공격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