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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누구를 책망할 것인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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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머리를 슬쩍 들어 상황을 확인했다. 여기를 보고 있는 남자들은 없었다. 덫이 왜 망가졌는지는 더 이상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 덫에 '걸려야 했을'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다.

인간 남자들은 모두, 저 위에서 눈길을 달려오는 거대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2미터가 훌쩍 넘는 키.

키만큼이나 옆으로 벌어진, 근육과 힘줄로 흉악하게 얼기설기 엮어진 어깨. 그리고 인간의 몸통만큼이나 두꺼운 양팔.

인간 같은 건 가볍게 잡아 뜯을 수 있는 설원 트롤이,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 쿵! 쿵! 쿵!

농담으로라도 무심해 보인다고 할 수는 없었다. 저 트롤은 포화처럼 이곳을 향해 달려들었다.

무척이나 화가 나 있었다.

누군가 그녀에게 원한을 샀다면 그건 확실히 잘못된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문제는, 거기에 나와 루비아까지 휘말리게 생겼다는 사실이다.

나는 엎드려 덜덜 떠는 루비아의 손을 꼭 잡았다.

"쿠워어어어!"

눈길을 달려오던 트롤은 고함을 지르며 도약했다.

- 쾅!

트롤이 착지한 바닥의 눈이 폭죽처럼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고작 한 번의 도약으로 녀석은 십여 미터를 뛰어넘었다. 미처 투창을 던지지도 못한, 가까이 있는 인간의 목을 잡고 물어뜯었다.

- 콰직!

물린 남자의 목이 종이처럼 찢겨지고 너덜너덜해 졌다.

'도망쳐야 해.'

그 외의 답은 없다. 어서 여기를 벗어나야 한다.

"쿠오오오오!"

트롤이 울부짖었다. 쌓인 눈과 트롤의 털은 새하얗다. 뜯겨 진 인간의 목이 피를 움찔움찔 뿜으며, 선명한 대비를 이뤘다.

나는 사방을 살펴봤다.

'곤란한데.'

될 곳이 없었다. 일단 산길을 내려가려면, 저들이 싸우는 곳으로 나가야 했다.

"투창!"

인간들이 발작적으로 외친다.

- 슈슈슈슛!

착지한 트롤을 향해, 다섯 개의 작살이 일제히 바람을 갈랐다.

- 퍽!

하지만 트롤은 이미 자리를 벗어난 뒤였다.

그녀는 목이 너덜너덜한 시체를 잡고 휘두르며 투창을 막아 냈다.

하나의 투창이 허벅지를 스쳤을 뿐이다. 그나마 힘줄을 끊을 만큼 깊지 못했다.

트롤은 온몸이 고밀도의 근육으로 단단히 뭉쳐져 있다. 암컷은 더욱 그렇다.

'전멸이다.'

인간들은 여기서 다 죽을 것이다.

트롤은 등에 활을 지고 있는 인간 남자를 발로 걷어찼다.

- 우직!

뼈 부서지는 소리가 울렸다. 커다란 트롤의 발에 가슴을 걷어차인 남자는 피를 토하며 날아갔다.

"이야앗!"

트롤이 발을 차는 그 순간, 가죽갑옷을 입은 다른 남자가 손으로 투창을 던졌다.

하지만 트롤은 몸을 움직여 투창을 피해 버렸다.

'도망갈 타이밍을 제대로 잡아야 하는데.

잘못한다면 양쪽 모두의 타깃이 될 가능성도 있다.

나는 바깥을 계속 살폈다.

"크오오오!"

트롤은 그대로, 투창을 던진 남자에게 돌진했다. 이글이글 불타는 눈빛으로 남자의 어깨를 잡았다.

"꾸웨에에에엑!"

쇠를 구부리는 악력에 남자의 어깨가 두부처럼 으스러졌다.

살점이 뭉개지고 하얀 뼈가 마구 부러져 밖으로 튀어나왔다.

트롤은 다른 손으로 남자의 얼굴을 잡았다. 힘을 주고 얼굴을 짓이겼다.

남자는 바닥에 누런 진액을 흩뿌리며 즉사했다.

- 슈슛!

세 개의 투창이 서로 다른 각도에서 날아왔다.

'나름대로 분전인데.'

사냥꾼들은 다리를 후들거리면서도 투창을 던지고 있었다.

"쿠오오오!"

트롤은 그중 하나의 투창을 맞았다. 투창을 맞은 트롤은 빼내려고 했다. 멍청한 짓이었다. 투창은 갈고리 형태로 되어 있다.

투창을 빼내자,

- 푸슛!

살점과 함께 트롤의 푸른색 피가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트롤은 제 허벅지에서 뽑아 낸 투창을 그 남자에게 던졌다.

- 피릿! 퍽!

빛처럼 날아간 투창이 남자의 두개골을 부수고 그 시체를 눈 위에 처박았다.

'저렇게까지 세던가?'

트롤이 저 정도였나?

트롤을 본 적은 적지 않다. 하지만 저 트롤은 그 중에서도 특별한 것 같았다. 이제 인간은 둘밖에 남지 않았다. 더 지체할 수는 없다.

트롤은 후각이 매우 뛰어나다. 나는 몰라도, 숨어 있는 루비아를 알지 못할 리는 없다. 나는 루비아의 손을 잡고 외쳤다.

"도망가자!"

남은 두 인간이 조금이라도 미끼가 되어 줄 때 도망쳐야 한다.

급박한 상황이다. 루비아를 안고 뛰쳐나갔다.

"히, 히익!"

갑자기 뛰쳐나온 날 보고 인간 하나가 놀라 주저앉았다. 해골이 갑자기 뛰쳐나오니 준비된 사냥꾼이라도 놀랄 수밖에 없다. 주저앉은 남자에게 트롤이 덮쳐 갔다.

- 퍽!

남자가 방패를 드는 것까지만 봤다. 나는 루비아를 안고 산길을 달려 내려갔다.

- 뽀득! 뽀드득!

워낙 급하게 달려 내려간 덕에, 눈 밟히는 소리가 더 요란한 것 같았다. 물론 그런 걸 신경 쓸 정신은 없다. 남은 인간 하나가 최대한 오래 버려 주기를 빌며 도망갔다.

"끄아아아악!"

하지만.

몇 걸음 걷지도 못했을 때, 뒤에서인간의 단말마가 울려 왔다.

대체 저런 실력으로 무슨 트롤 사냥꾼을 한다는 건가? 정말 덫 하나만 믿고 그러는 건가? 끔찍할 정도로 황당한 놈들이었다.

- 쿵! 쿵! 쿵!

뒤에서 발소리가 울려 왔다.

"크워어어어어!"

트롤은 살아 움직이는 모든 걸 적대하는 것 같았다.

- 쿵!

설원 트롤은 날 장난처럼 뛰어넘어 내 앞에 섰다.

"도망가시오."

루비아에게 말했다.

하지만 도망갈 수 있을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내 달리기로도 금방 따라 잡혔으니까.

나는 트롤의 앞에 섰다. 손에 쥔건 단검 하나뿐이다.

"아, 안 돼요.!"

루비아를 억지로 밀었다. 하지만 루비아는 도망가지 않았다. 나를 보며 절벽 근처에 서 있었다.

'무슨 생각이지?'

나는 고개를 돌렸다. 단검을 쥐고 트롤을 바라봤다. 트롤의 몸에는 투창이 두 개 꽂혀 있었다.

데미지를 입었으니 승산이 있을지도 모른다. 제법 피로한 기색이 기도하고.

- 퍽!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트롤은 손을 휘둘러 내 팔을 잡았다.

트롤의 팔 길이는 2미터. 공격 범위가 너무 길었다.

그리고 힘이 너무 강했다. 힘을 주고 버티려고 했지만, - 우두둑!

팔이 금세 뜯어져 나갔다. 광기와 분노로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는 트롤의 눈이 보였다. 트롤은 내 두개골을 잡고 반으로 쪼개기 시작했다.

의식이 순식간에 캄캄해 졌다.

- 픽!

어디서, 무언가 떨어져 부딪히는 소리가 멀리 메아리쳐 들렸다.

[사망 기록을 저장하시겠습니까?]

[Y/N]

[동화율이 내려갑니다.]

[93.71%->93.54%]

- 번쩍!

번개가 하늘을 깨물듯 친다.

- 우르릉! 광! 콰광!

천둥이 운다.

이젠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놀랄 것도 없다. 번개의 잔상이 보인다.

- 똑똑.

양옆을 두드리면 단단한 관이다.

- 쏴아아아. I장대 같은 빗줄기가 미친 둣이 퍼붓는다.

새카만 밤하늘을 바라본다. 조금 있으면 루비아가 나타날 것이다.

죽었다. 그리고 돌아왔다.

좀 벗어나나 했더니, 고작 하룻밤을 더 살고 죽어 버렸다.

이렇게 금방 금방 죽었던 주제에.

'처음에는 도대체 어떻게 20년을 살아남았던 거지?' 의문이 들 지경이었다.

혹시 이렇게 죽는 건, 루비아라는 여자와 관련 있는 걸지도 모른다.

'치워 버려야 하나.'

- 달그락.

하지만 고개를 저었다. 버린다고 해서 뭐가 나올 것 같지는 않다.

인연에 따라 자연스럽게 헤어지게 된다면 모를까, 나를 일으킨 사령술사를 매몰차게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손을 들어 두개골을 어루만졌다.

두개골은 그 자리에 여전하다.

분명히 반으로 쪼개졌던 두개골이 잘만 붙어 있었다.

'네 번을 다시 돌아왔군.'

이번에는 어처구니없게도 트롤에게 죽었다. 인간을 피한다고 일부러 험한 산길로 올라갔다.

하지만 그곳에서 설원 트롤을 만나버린 것이다.

'새끼 늑대가. 길을 막던 게 덫이 아니라 트롤 때문이었던 거군.'

덫을 발견하고 안심했다.

그것만 해제하면 위협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사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다. 생각해 보면 설원 트롤이 나타나기 좋은 위치다.

그렇지만.

그 녀석은 뭔가 좀 달랐다.

트롤 중에서도 특별히 강한 것 같았다. 얼마나 강해져야 이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덫을 그대로 놓기도 찜찝했다. 여섯 명의 사냥꾼을 이길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덫은 그대로 놓는 편이 맞다.

루비아를 신경 쓰지 않으면 인간 여섯 명은 이길 약간의 가능성이라도 있지만, 그 정도로 흉악한 트롤은 절대로 이길 수가 없으니까.

만날 수는 있으려나.

서큐버스님.

가는 길이 이렇게 험해서야.

- 달그락.

나는 내 식대로 한숨을 쉬었다. 척추를 움직여 갈비뼈를 들었다가, 내려놓는다.

- 띠링!

[계승되었습니다.]

[이름: 없음]

[해골병사 Lv.1(57)]

[체력-29 힘-30 민첩-32 지혜-9]

그에 맞추듯 상태창이 나타났다.

나는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천천히 상태창을 바라봤다. 몇 번을 봐도 신기해 할 수밖에 없다.

'이번에도 레벨 1이군.'

16까지 올라갔던 레벨이, 다시 1로되돌아와 있었다.

역시 스탯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스킬도 그대로였다.

모든 스탯과 스킬을 보존한 채 다시 회귀하는 걸 확인한 것이다.

'음.

이어서 다른 창이 뜨기 시작했다.

[사망기념관]

[계승된 이후 네 번째 죽음을 달성하셨습니다.]

1. 사령술사를 위하여플러스 (new!)

최후의 순간, 당신은 한 사령술사를 위해 목숨을 두 번 연속 바쳤습니다. 사령술사와의 관계에서 기본 호감도 20을 얻고 시작합니다.

원하는 사령술사의 스탯 포인트를10만큼 올릴 수 있습니다.

[잔여 포인트: 10]

'변했잖아?' 사령술사를 위하여, 라는 특전.

그 특전의 설명이 바뀌었다.

'기본 호감도 20이라는 것만 있었는데.'

새로운 게 추가됐다. 사령술사의 능력치를 10만큼 올릴 수 있다는 설명이 추가로 붙었다.

'으음.'

이런 게, 정말 되는 걸까?

아직 생각이 흐릿한 채로, 아래로 눈을 내렸다.

사망기념관 특전 목록.

2번과 3번은 동일했다.

둔기 저항과 두개골 저항이다. 쓰면서 몸으로 확인했다. 둔기 저항이 확실히 유용하긴 하다.

하지만 두 번이나 연속해서 선택했다. 역시 다른 걸 한번 해 보고 싶기도 하다.

[이번 회차에 적용할 특전을 선택해 주십시오.]

어둠 속에서, 글자가 홀로 반투명하게 반짝였다.

지금 당장 선택할 필요는 없다. 그런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니까.

생각 좀 해 보고 골라도 된다.

- 번쩍!

- 우르릉! 쾅!

이제 루비아가 말을 거는 타이밍을 정확히 잡을 수 있다. 두 번째 천둥이 칠 때다.

무덤 근처에 서 있을, 그녀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잘 들려!"

"망자여, 다, 흐웨어이익!"

루비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 철픽!

주저앉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무덤 위로 간단히 올라갔다.

처음 회귀했을 때보다도 훨씬 몸이 가볍다. 힘이 넘치는 상태.

그래 봐야 트롤에게는 한 번에 붙잡혀, 두개골이 쪼개지는 꼴을 당하긴 했지만 말이다.

세상은 위험으로 가득하고 이 힘은 부족하기만 하다.

"히끅!"

딸꾹질을 하며 나를 보는 루비아가 보인다.

'또 놀라는군.'

그녀는 나를 처음 보는 거다. 하지만 나는 벌써 다섯 번째 조우다. 그런데도 저런 반응이라니.

잠시 고민하던 특전 선택을, 충동적으로 결정해 버린다.

'1번 선택.'

[특전: 사령술사를 위하여플러스 가 적용되었습니다. 모든 사령술사와의호감도가 20 을러 갑니다.]

[원하는 사령술사의 스탯 포인트를10 올릴 수 있습니다.]

스탯 포인트는 글쎄, 모르겠다. 그보다 이제 좀 덜 놀라려나? 그녀에게 정리해서 몇 마디를 해 줬다.

"말 알아듣고, 잘하고, 적당히 지식이 있는 해골이오. 놀라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일단 말은 해 두는 편이 좋을 거 같은데."

16화 누구를 책망할 것인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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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위한 배려라기보다 나를 위한 배려다. 비슷한 말을 몇 번씩 반복하는 건 지겨우니까.

'이제 또 놈들이 나타나겠지.'

멋대로 이야기를 뱉어 낸 뒤 혼자고민에 빠졌다. 곧 추격자 두 놈이 나타날 것이다.

맞서서 싸울 수도 있지만 지금 빨리 움직이면 먼저 동굴로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흐음. 어쩔까.'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싸움을 굳이 피할 건 없었다.

한 번 이겨 본 상대들이다.

게다가 그때보다 강해졌다. 다시 부딪친다면 더 여유롭게 꺾을 수 있을 것이다.

안전하게, 먹혔던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길에 매복해 있다가 덮치는 거다.

앉아서 숨을 고르는 루비아를 바라봤다. 그런데 이 여자, 분위기가 방금 전과 살짝 다르다.

일단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단검 좀 줘 보시오.

"아, 네, 여기요!"

루비아가 나에게 순순히 단검을 건넨다.

아니, 순순히라기보다는.

이제 상당히 적극적이다.

자기가 칼날을 잡고 나에게 단검손잡이를 내민다.

그녀가 내게 묻는다.

"저, 그러니까. 또 뭘 도와드려야하나요?"

"으음?"

당황했다.

'이게 호감도의 효과라는 건가?'

루비아가 먼저 뭘 도와주겠다고 나서다니. 처음 겪는 일.

그녀를 바라봤다. 상태창이 떴다.

- 띠링!

[이름: 레이 루비아]

[사령술사 Lv.1]

[체력-6 힘-5 민첩-6 지혜-12]

[호감도: 20]

- 루비아는 왜인지는 몰라도, 당신에게서 친근함과 안정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호감도가 올라가 있다. 그리고 이게 끝이 아니었다.

[기본 스킬]

- 책 찾기 Lv.10- 책 읽기 Lv.10- 베이킹 Lv.4- 고대어 Lv.3- 룬어 Lv.3- 독도법 Lv.3- 예법 Lv.2- ??? (호감도가 부족합니다.)

- ??? (호감도가 부족합니다.)

[특전]

- 호감도를 올리면 개방됩니다.

[칭호- 호감도를 올리면 개방됩니다.

[잔여 포인트: 10]

- 배분해 주세요!

'고대어에, 룬어까지 읽을 줄 안다고?' 다양한 스킬들을 보자,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몇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그런데 레벨이. 1밖에 되지 않는 거지?'

내가 볼 수 있는 건 사령술사 레벨뿐이고, 다른 직업 레벨이 숨겨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타인의 상태창을 보는 건 낯선 일, 뭐가 이상해도 이상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가만히 그녀의상태창을 감상했다.

그나저나.

'잔여 포인트라니.'

그녀의 포인트를 내가 배분할 수 있다는 건가. 허공에서 '잔여 포인트'를 눌렀다. 그러자, [체력-6플러스 힘-5플러스 민첩-6플러스 지혜-12플러스]

루비아의 능력치가 떴고, 옆에 각각 플러스 표시가 떴다.

이걸 누르면 되나.

기묘한 일을 경험하고 있었다.

이해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할 수있다면, 포인트를 그대로 놓아두는 것도 말이 안 된다.

뭐부터 해야 할까.

'일단.

체력이 너무 낮다. 따라오기 힘들어하던 게 생각났다.

힘과 민첩도 좋다. 하지만 싸움을 시키지는 않을 생각이다.

그건 내가 해결할 테니까. 일단 체력을 1 올려 보았다.

- 띠링!

[체력 6 -> 7]

효과음과 함께 루비아의 체력이 1올라갔다. 루비아를 바라봤다.

혈색이 조금 좋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를 보고 물었다.

"몸은 좀 어때?"

"어, 해골님을 보고 난 다음부터 갑자기 힘이 솟아나는 것 같아요.

이, 이상하죠?"

- 달그락.

나는 어깨를 으쪽했다. 다른 포인트를 어디에 투자할지는 조금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일단 나무 아래 피해 있어."

"아, 네!"

루비아가 나무 아래로 갔다.

"그 나무 말고!"

황급히 소리치며 루비아를 잡았다.

그 나무는 이 근처에서 가장 크긴 하다. 하지만 잠시 후 번개를 맞는 나무다.

- 위이이이잉!

바람이 거세다. 루비아를 적당한 나무 아래 앉혔다. 긴 나무를 주워 날카롭게 다듬었다.

여유롭게 걸어가 산길에 숨었다.

몸을 진흙 속에 묻고 기다렸다.

앞으로 두 놈이 여기로 올 거다.

가만히 기다렸다.

'너무 일찍 왔나.'

여유를 갖고 기다렸다.

"히히힘!"

말이 다가온다.

- 철퍽 철퍽!

석궁을 든 놈이 지나갔다. 망치를 등에 멘 놈이 다가왔다.

말뚝을 들어 올렸다. 망치를 멘 놈은 비탈길로 굴러 떨어졌다.

굴러 떨어져 부딪히는 소리가 좋았다. 놈이 어디로 떨어지는지, 어떤반응을 보이는지 눈에 선했다.

석궁이 뭐야, 하는 소리와 함께 뛰어내렸다. 전부 같다.

서거! 땅에 발을 제대로 딛기도 전에 목에 칼을 박아 줬다.

이미 위치를 잡은 터. 눈을 감고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칼을 맞은 석궁이 곡꼭대며 목을 감싸 쥐었다. 머리를 진흙에 처박고 괴로워하다 죽었다.

시체에서 석궁을 주웠다.

비탈로 걸어갔다. 언덕 아래로 떨어뜨린 망치 놈은 이번에도 한쪽 팔이 부러져 있었다.

석궁을 발사했다. 두 발을 모두 맞췄다. 어렵지 않았다.

답안을 알고 푸는 문제는 쉽다.

'산 채로 잡아서, 천천히 심문이라도 해 봤다면 좋았을지도 몰라.'

어렵지 않게 놈들의 목숨을 끊어놓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유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아직 압도적으로 제압하는 건 무리였다.

놈들의 목숨이 확실히 붙어 있는 상태에서 제압하려면, 갈 길이 멀다.

목에서 피를 뿌리는 놈들을 빗속에 놓아두고 시체에서 원하는 것만 딱딱 빼냈다. 지갑과 장부와 신분증, 무기를 챙겼다.

다시 한 번 레벨이 5 올랐다. 여기까지는 같은 일의 반복.

'포인트는 어디다 쓰지.

잠시 고민하다 체력에 1, 힘과 민첩을 2씩 올렸다.

[해골병사 Lv.6(62)]

[체력-30 힘-32 민첩-34 지혜-9]

라고 뜨는 창을 확인했다.

비가 거세다. 일단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번개가 친다. 옆을 돌아보자 루비아는 벌써 곁에 와 있었다.

"아. 괜찮으세요!?"

전과 같이 온몸이 젖어 있었다. 차이점은 호감도 하나.

"괜찮소."

이번에는 가죽 주머니를 그녀에게 던지지 않았다. 호감도를 올리는 방법은 이미 알고 있다.

은화를 던져 준다고 좋아하는 여자는 아니다.

루비아를 바라봤다. 손에, 예전처럼 작은 돌을 쥐고 있었다.

- 달그락.

머리를 혼들어 빗물을 털었다.

"동굴로 가지. 아는 곳이 있소."

루비아는 순순히 따라왔다. 확실히 저번보다 훨씬 빠른 적응이다.

호감 도라는 게 편리하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반쯤 차 있는 수통을 그녀에게 그대로 건넸다.

굳이 물을 더 받는다고 그녀를 비 맞게 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나는 물이 필요 없다.

그녀 혼자뿐이라면, 반 정도 차 있는 수통으로 충분하다.

십 분 정도 걸었다. 역시 힘들어보이길래, 그냥 안아 들었다.

"어엇. r의외로 별 저항 없이 안겼다.

루비아의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상태창을 체크했다. 하지만 호감도는 오르지 않았다.

'이건 아닌가?' 수치가 오르지 않는 행동이었다.

잊어버린다. 여자의 심장 박동은 그냥 놀라서 빨라진 것 같다.

동굴의 작은 입구로 들어갔다. 들어간 뒤 돈과, 영주와, 그녀의 사정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예전에 이야기를 나눴을 때, 띠링!

하는 소리가 울리며 호감도가 3씩올라가던 이야기들을 했다.

이번에도 놀라며 눈이 동그래지는 건 같다. 하지만 호감도는 전혀 오르지 않았다. 변화가 없다.

'좀 이상한데?'

그녀의 상태창을 다시 확인했다.

[이름: 레이 루비아]

[사령술사 Lv.1]

[체력-7 힘-5 민첩-6 지혜-1幻[호감도: 20]

- 루비아는 왜인지는 몰라도, 당신에게서 친근함과 안정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호감도가 20에서 오르지 않는다.

아까부터 고정이었다.

"고민 있으세요?"

루비아가 내게 물었다. 경계심 없는 태도다.

네 호감도가 영 오르지 않아서 고민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냥고개를 저었다.

'흐음.

호감도는 일단 놓아둔다.

어쨌건 지금은, 어디로 움직여야할지가 고민이었다.

저번에는 거칠고 험한 길을 택했다. 인간을 피하기 위해 높고 가파른 산길을 택한 것이다.

하지만 그 길에는 트롤이 있었다.

'결국 인간도 못 피했고.'

투창을 든 여섯 명의 인간 남자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들 외에 또다른 누가 있을지도 모른다.

괜히 인간을 피한다고 높은 산길로 가느니, 그냥 다른 도시에 묵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짐말도 구하고, 루비아는 도시의 여관에서 자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그녀에겐 그쪽이 훨씬 편하겠지.

루비아가 말을 다시 걸었다.

"심각한 분위기네요.

지나가듯 그녀에게 물어 보았다.

"트롤에 대해 알고 있소?"

"네! 그게 고민이셨구나."

"글세. 아는 대로 얘기해 보시오."

"트롤은. 짝을 구하면 평생을 함께한대요."

혹시 내가 모르는 트롤을 상대하는 특별한 방법이라도 알고 있을까, 해서 물었다.

그런데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다.

짝을 구하면 평생을 함께하는데, 그게 어쨌다고?

심드렁하게 받았다.

"그런가."

루비아는 눈치 없이 말을 이었다.

"주로 동굴에서 함께 지내지만.

짝이 살해당하면 미쳐 버린대요. 눈에 보이는 모든 걸 공격한다고 들었어요."

으음, 짝 잃은 트롤이었나.

산길에 놓여 있던 덫을 해체 했던 게 떠올랐다.

덫을 그대로 놓아뒀다면 트롤이 걸려들었을까? 몸 전체가 철사로 된 그물에 감겨, 공중에 매달리게 되는 덫이었다.

가만히 놓아둔다면 트롤 문제는 해결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묘하게도,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덫이 작동한다고 해도, 결국 사냥꾼들이 문제다.

트롤에게 금세 찢어지긴 했지만,

여섯 명의 사냥꾼 역시 쉽게 감당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닐 거다.

고민에 잠겨 동굴을 걸었다. 이번에는 루비아가 먼저 내게 말을 걸어온다.

'호감도를 올린 효과인가?'

조금 귀찮았지만 입을 막을 이유는 없었다. 길을 서둘러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 애초에 호감도를 올린 건 나다. 책임감 있게 얘기를 들어 줄 필요가 있다.

"새로 등극한 황제 있잖아요."

"얘기하시오."

누군지는 알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인간의 황제다.

해골로서 살아왔던 20년의 대부분을 그 황제와 함께했다.

물론, 함께 했다는 건 같은 시대에 있었다는 것 정도다.

인간의 황제가 나를 알 리가 없다.

나는 그의 병사도 아니었으니까. 이름이 떠올라서 추임새를 넣었다.

"클레멘스 2세 말인가?"

"네, 맞아요. 엘튼 클레멘스. 첫 칙령이 뭔지 아세요?"

"모르겠소."

그의 첫 칙령 따위는 모른다.

멍청한 공화주의자들을 모두 공격하라! 아쥬라의 건방진 마법사들을 학살해라!

뭐, 이런 건 아니었을 거다.

아마 별거 아닐 거다. 기억하지 못하는 걸 봐서.

"모르시는구나!"

루비아의 입에서 감탄이 터진다.

그녀가 싱긋 웃었다.

유쾌해 보인다.

생각하면 나는 화폐에 대해서도,

인간의 권력 다툼에 대해서도 이모저모로 그녀에게 아는 척을 했다.

드디어 모르는 걸 알려 주는 게 기쁜 모양이다.

활짝 웃으며 그녀가 말했다.

"〈숫자 외의 다른 이름으로 달을 칭하는 행위를 공문서에서 일체 배제한다. 〉래요. 행정 효율이 떨어진다나."

클레멘스 2세는 그 효율을 올려 징집을 한다. 군수품을 모은다. 그리고 9년에 걸친 전쟁을 벌인다. 효율이라는 건 재미있는 단어다.

"음. 세이론의 달과 승천의 달까지 말인가?"

10월은 건국제인 세이론이 태어난달. 11월은 그가 죽은 달이다. 그래서 인간들에게 10월은 세이론의 달.

11월은 승천의 달이라 불린다.

"그런가 봐요."

과감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세이론을 건드리는 황제라.

"제국은 그를 신성시하지 않나?"

사람들은 세이론 1세의 동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

"그렇기는 해요. 재미있는 건, 초대황제는 혐신嫌神론자에 가까웠다는 것이에요. 그 남자는 모든 종류의 숭배를 경멸했죠."

17화 누구를 책망할 것인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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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황제 본인은 그 조치를 좋아할지도 모르겠군."

"그럴 지도요. 뭐, 그래도 동상은 남지만 말이에요."

세이론의 동상은 제국 곳곳에서 쉽게 발견된다. 영웅들은 쉽게 그런 비극에 처한다.

나는 한마디를 거들었다.

"하지만 황제 본인도. 어디서 하나 떼서 클레멘스의 달이라고 붙여주면 좋아하지 않을까? 달을 하나빼서, 현 황제의 달이라고 아예 하나 따로 정하는 게 평화로울지도 모르겠군. 이번에는 클레멘스, 다음에는 애슈턴.?"

내 말에 루비아는 킥킥 웃었다. 별로 우습다고 생각하고 던진 말은 아니었다.

- 퍽!

웃던 그녀가 돌뿌리에 걸려 넘어졌다. 갑작스런 모습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민첩하게 움직여 그녀를 잡아 줬다.

'달라졌군.'

예전에는 이때 넘어지지 않았다.

처음 그녀가 넘어졌던 때는 동굴 밖으로 나가서였다.

그리고, 예전에는 이런 대화를 그녀가 시도하지도 않았다.

칙령과 세이론에 대한 대화를.

몸도 마음도 경계가 상당히 풀린 게 확실했다. 뭔가 말하려고 하는 그녀에게 말했다.

"일부러 넘어진 게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소."

아마 밖에서 처음 넘어졌을 때,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루비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부끄러운지 그녀가 눈을 내리깔고, 화제를 돌렸다.

"전 사실 엠버 (Ember)에 가보고 싶었어요. 갑옷을 사고 나면, 같이 거기로 가 보지 않을래요?"

- 달그락.

새로운 화제였다.

루비아의 말에 나는 약간 동요했다. 경추를 덜컥거렸다.

엠버. 엠버메어. 왜 거기를 잊고 있었을까.

"왜 그렇게 놀라세요.? 뭐든 아시니까 그 도시도 잘 아시겠죠?"

루비아가 가볍게 물어 왔다.

"아.!"

나는 잠깐 감탄했다. 중립도시 엠버메어 (Embermere). 거기에는 전설적인 네크로멘서가 있다.

'그녀가, 올해 죽던가.'

물론 전해들은 이야기다. 자세한 내막은 모른다.

하지만 기스-제-라이라는 이름의 네크로멘서. 전설로 남은 그 네크로멘서가, 나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반복 회귀.

이 현상의 해결에 대해.

딱딱한 표정을 하고 있었나 보다.

루비아가 유쾌한 어조로 물어 온다.

"몹시 진지한 표정이네요. 으으음, 무정부주의자신가? 해골에겐 국가가 없으니 정말 어울릴지도 모르겠네요. 엠버로 가시는 게."

그녀의 말대로다.

엠버는 무정부주의자들의 도시.

〈수천 개의 자치령〉

그 별명이 엠버를 대표한다.

엠버는 아나키스트들의 도시다.

엠버의 인간들은 어떤 강제도 거부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다스린다. 한명 한 명의 인간, 개개인이 걸어 다니는 자치령이 된다.

나는 엠버에 가 본 적이 있다. 정상적인 출입 절차를 거친 것은 아니다. 한 고위 마족의 군단병으로서사역당하며, 그곳을 침략했다.

그러나 그 엠버는 이미 죽어 있던 엠버였다. 젓더미와 시체밖에 남지 않은 도시.

하나하나의 '자치령'은 모두 숨이 끊어진 뒤였다. 나는 그 광경을 떠올리곤 쓸쓸해졌다.

루비아는 계속 말을 이었다.

"황제도 의회도 인정하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신도 인정하지 않는다.

한 번은 꼭 가 보고 싶었어요. 어떻게 두 세력 사이에서 버티고 있는지."

제국과 자유 연합은, 길고 좁은 카브롤타 지협地缺으로 연결된다. 중간 지점에서 배를 타고 올라가면 작은 섬이 나온다.

그곳이 무정부주의자들의 도시. 정치적으로도, 지리적으로도 엠버는 하나의 작은 섬에 불과하다.

"공화주의자들이 암암리에 엠버를 지원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소만."

"모르는 게 없으시네요. 적응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깜짝깜짝 놀라 버려요.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아세요?"

나는 일개 해골병사. 아무리 오래 살았다고 해도, 그런 것까지 알기는 어렵다.

하지만 나는 인간들의 이야기를 꽤 귀담아 듣는 편이었다.

의식이 있었으니까. 반쯤 불탄 책을 주워 읽기도 했다.

공포에 질려 도망가는 인간들.

그 깃발이 어느 것인지 알아볼 의식은 있었다. 전쟁터의 수많은 비명과 고함 속에는 지식이라 부를 만한 것도 종종 섞여 있었다.

"그냥 알지."

"그냥이라구요? 혹시 세이론 1세의 유골 같은 건 아니겠죠?"

나는 그 말에 조금 웃었다. 달그락거리며 대답했다.

"그런가? 아까 그 묘지, 제국 0묘역치고는 너무 관리가 안 되어 있던거 같은데."

"뭐예요, 그 이상한 농담!"

"농담은 당신이 먼저 시작했지. 엠버에 가고 싶다는 게 사실이오?"

"네."

"조사는 해 봤고?"

"글쎄요. 거기는 규칙이 하나밖에 없다던데요. 〈침해하지 않는다. 〉"

"맞소."

루비아가 그 규칙을 비평했다.

"하지만 침해하지 말자, 해서 그런 게 될까요? 인간의 본성을 그저 인정하지 않는다면, "

루비아가 말을 이었다.

"거리와 골목, 우물과 회벽 안쪽마다 시체가 즐비하지 않을까요?"

그리 새롭지는 않다. 그건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견해였다.

엠버에 대한 비평은 그런 관점이 주류라고 봐도 좋았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 견해가 안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엠버에 관해 내가 본 것은 멸망후의 잿더미뿐.

그래서일까. 어쩐지 그곳을 변호하고 싶어졌다.

"꼭 그럴까? 의외로 평화로운 도시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데."

내가 본 것은 잿더미밖에 없다.

무너져 내려앉기 전에 무엇이었는지는 마음껏 추측할 수 있다.

그게 잿더미의 아름다운 점이다.

"이상주의자시네요. 가기 전에 내기라도 해 볼까요?"

"굳이 내기를 할 정도로 확신하는 건 아니오. 하지만 내게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하시오. 갈비뼈?"

"아하하하.

루비아는 잠깐 쾌활하게 웃었다.

긴 갈색 머리칼이 흐트러졌다.

"엠버라면 좀 멀긴 하군."

"멀어서. 가고 싶었어요"

굳이 따지자면 위험하다느니, 법도없는 곳에 가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느니 하는 말을 해 줄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나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제 삼촌이란 자에게 추격당하는 신세다.

나는 '저번'을 생각했다.

첫날조차 루비아를 지켜 주지 못했던 때를 생각했다.

그녀는 알지 못하겠지만, 추격자들은 그녀를 고문한다. 살해하거나, 절대 벗어나지 못하는 어딘가로 팔아넘길 것이다.

어디가 위험하니 같은 말은 의미 가없었다. 여기에 멈춰 있는 게 그녀에겐 가장 위험하다.

"한 달 정도 걸리겠군."

동굴을 걸어갔다.

루비아에게 들은 이야기들을 가만히 되짚어 보았다.

클레멘스 2세.

엠버메어.

호감도가 오르기 전의 루비아는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저 내 앞에서 조심스러운 행동을 보였을 뿐.

호감도가 20이 되자 그녀는 황제의 지령을 품평했다.

엠버라는 도시에 가 보고 싶었다는 마음을 드러냈다.

호감도에 따라 선택적으로 이런저런 것들을 함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와 꽤 가까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이번에도 내가 동굴을 헤쳐 나가는 모습에 감탄했다. 그 모습에는 변함이 없었다. 다만 이번에는 좀더 격의 없이 감탄했다.

"마치 와 본 길 같아요!"

"와 본 길이오. 사실 나는 이 동굴반대편에 살던 사람이니까. 동굴을 걸어와서 묻혔다오."

"어, 재미없는 농담이다!"

루비아는 해골을 앞에 두고 겁나지도 않는지 쿡쿡 웃고 있었다.

"동굴 진짜 복잡하다. 박쥐도 하나 없네요. 그런데 맞는 길로 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신기하네요."

그야 옳은 길로 가고 있으니까. 감은 좋은 것 같다. 나는 적당한 공터에서 멈춰 섰다. 사방이 비교적 트인 장소였다.

누울 자리를 깔았고, 그녀는 거리낌 없이 내 허벅지에 머리를 올려놓고 잤다. 안심한 듯 잠드는 그녀를 바라봤다.

저번보다 표정이 편안해 보였다.

특전으로 호감도를 올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굴에서 나가자 눈이 내렸고, 산새가 울었다.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기대하고 있었던 건가?'

동굴을 나와도 아무 일이 없었다.

미로 클리어.

C더블 플러스급 미로를 클리어 했다면서, 요란하게 울리던 말들.

한 번에 10씩 올라가던 레벨.

나도 모르게 그걸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망감을 느끼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한 번 지나간 건 안 주는 건가?'

솔직히 약간 아쉽기도 했다. 그만큼 쉽게 레벨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왜 그러세요?"

"아, 별거 아니오."

"뭔가 아쉬운 표정이신데.

눈치가 빠른 여자라고 생각했다.

호감도가 올라가면 내 생각을 읽을 수 있게 되는 건 아니겠지?

"아니오. 갑시다."

태양력 1147년.

한 남자가 옛 사도들에 의해 고문용 장난감으로 사육 당하던 인간을 해방하고, 시공의 수정을 파괴해 유계와 현계의 연결 고리를 끊은 지천 년이 훌쩍 넘은 시기.

세이론이 죽은 승천의 달(11 월),

반反 제국 공화정이 세워진 자유의달(12월)을 넘어, 한겨울에 눈을 뚫고 오직 홀로 붉게 피는 꽃, 사르디아의 달 1월도 삼분의 일을 넘어21일 아침이 되었을 때.

한 해골과 초보 사령술사가 산길을 걸어갔다.

중립도시 엠버메어를 향해.

물론 엠버메어는 이곳에서 아직 한참.

농담으로라도 곧바로 엠버로 간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번에는 도시에 들를 계획이다.

인간과 접하며 움직이는 것이다.

"그라스미어는 안 가는 거예요?"

"갑옷은 거기서 사는 게 좋겠지.

하지만 당신은 중간에 여관에서 쉬어야 할 테니까."

루비아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눈 덮인 산을 걸어갔다.

사르디를 발견했고, 그녀는 이번에도 나에게 눈을 뭉쳐 던졌고, 나는 가볍게 피했다. 그녀는 울상이 되어 축 쳐졌다. 허무하게 피해버리는 걸 슬퍼했다.

쳐져 있는 모습을 우습다고 생각하다가,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저런.'

그녀의 포인트를 올리는 걸 잊어버리고 있었다.

잔여 포인트가 있었지.

루비아의 상태창을 띄웠다.

[이름: 레이 루비아]

[사령술사 Lv.1]

[체력-7 힘-5 민첩-6 지혜-1幻[호감도: 20]

[잔여 포인트: 9]

- 배분해 주세요!

체력을 1 올리고, 그 이후로는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바보 같았군.' 체력 옆의 작은 플러스자를 눌렀다.

[사령술사 '루비아'의 체력이 증가 했습니다.]

[7 -> 8]

[사령술사 '루비아'의 체력이 증가 했습니다.]

[8 -> 9]

[사령술사 '루비아'의 체력이 증가했습니다.]

[9 -> 10]

"홋!"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든다.

그리고 날 쳐다보며 말한다.

"몸이 이상해요."

"아픈 건가?"

모르는 척 말한다.

"아니요. 엄청 건강해진 거 같은데. 막 힘이 나고.

효과가 괜찮은 것 같다.

우울해하거나 쳐질 때마다 한 번씩 눌러 주면 좋을 것 같았다.

"가장 가까운 도시는 어딘가요?"

"유블람. 거의 다 왔지."

"작은 도시네요. 그래도 괜찮은 여관은 있겠죠?"

"좋은 곳으로 가. 돈을 아낄 필요는 없어."

"갑옷 살 돈은 남겨 놓을게요."

"여기, 90로티."

석궁과 망치는 각각 72, 18로티의 돈을 가지고 있었다.

"이 정도면 넘치는데요? 그냥 여기서 사도 될 것 같네요."

"그런가?"

"네."

"가격에서 손해를 보지 않을까?"

"그라스미어에 가는 건 가격보다 품질 때문이죠, 뭐."

그녀는 갑옷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

"가격 같은 건 알고 있나?"

"양산 형은 60로티, 잘 관리되지 않은 중고라면 25로티까지도 흥정이가능하다고 읽었어요. 나귀까지 한마리 살 수 있지 않을까요?"

대장간에서 흥정깨나 해 본 사람처럼 말했다. 하지만 나귀 가격에는 자신이 없는 듯하다.

"사흘거리인 그라스미어를 두고굳이 여기서 갑옷을 살 필요는 없지 않나?"

"글쎄요. 하루라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으니까?"

18화 누구를 책망할 것인가 (5)

***************************************************

"무슨 뜻이지?"

"갑옷을 빨리 살수록, 좀 더 안심하고 같이 움직일 수 있잖아요. 같이 도시로 들어갈 수도 있고."

나는 그녀를 도시에서 재우고 싶어하고, 해골을 들여보내 줄 도시는 당연히 없기 때문이다.

"갑옷으로 가려도, 정체를 제대로 확인하기 전까지 들여보내 주지 않을 도시도 많지 않을까."

"둘러댈 거야 많죠. 심각한 화상이 있어 투구를 벗지 않는다든가. 경비병들이야 어차피 뇌물에 약하잖아요? 여행기에 나오는 상식이라고요."

굳이 반박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부딪쳐 보면 알게 될 것이다.

"도시 안에서도 문제가 되겠군."

"뭐, 항상 갑옷을 걸치고 투구를 쓴다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긴 하겠죠? 그래도 괜찮아요. 이상한사람으로 남아 있으면 되니까."

뭐가 괜찮다는 건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그녀에게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겨울 산을 걸었다.

뽀드득거리는 소리가 걸음마다 울려 퍼졌다.

내가 앞장섰다. 한참을 걷다가, 손가락뼈로 수풀 너머를 가리켰다.

눈 덮인 겨울나무 사이, 저 아래를 가리켰다.

낯선 도시의 회색 성벽이 보였다.

"저기 있군."

루비아가 묵을 도시, 유블람이다.

뒤를 돌아보았다. 루비아가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무언가 묘해서 그 뒤를 살펴보니,

내 발자국을 루비아가 다시 디디며오고 있었다.

한 발 한 발 딛는 그녀의 입에서 입김이 뿜어졌다.

그녀를 죽게 만든 시간 선을 생각했다. 죄책감을 가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신경 쓰이긴 했다.

여자의 입에서 뿜어지는 하얀 김을 가만히 바라봤다. 살아서 따듯한 숨을 내쉬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차갑게 달그락거리는 건 나로 충분하다.

"거의 다 왔네요! 다음 도시부터는 같이 들어갔으면 좋겠다."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는 산길 아래를 걸어갔다. 성 앞에 넓게 펼쳐진 눈 덮인 밀밭이 보인다.

도시를 둘러싼 성벽은 재에 가까운 회색. 그리 높지는 않다. 세월의 퇴적을 탓하지 않더라도 저 도시의 성벽은 원래 잿빛이었을 거다.

시간이 표면을 한층 부드럽게 연마하기는 했겠지만. 잿빛 성은 오늘하얀 모자를 쓰고 있었다.

밤새 내려 동틀 즈음에 그친 눈.

하얀 눈은 첨탑과 망루, 성벽 위낮게 쌓은 담의 오목한 자리마다 제법 쌓여 있었다.

"예쁘다."

"낯선 곳이니 조심하시오."

뻔한 말밖에 할 수 없다.

실제로 도움을 줄 수는 없으니.

낯선 도시를 방문하는 건 언제나 위험한 일.

높은 성벽 안쪽이라도 위험은 도처에 깔려 있다.

사람의 얼굴을 한 위협들.

젊고 아름다운 여자에게라면 더욱 그렇다.

거금을 소지하고, 여기저기 돈 쓰는 모습까지 보인다면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그녀를 보낸다. 겨울의산이라고 덜 위험하지 않다.

트롤 같은 마물들이 있다.

몰려다니는 사냥꾼들이 있다.

사냥꾼이라고 해도, 산을 혼자 다니는 여자를 보면 어떤 본성을 드러낼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게다가 해골과 함께 다니는 여자라면 더욱 그렇다.

마녀를, 네크로멘서를 사냥한다는 아주 좋은 명분이 주어진다.

그들로부터 하나하나 지켜 줄 자신은 역시 없었다.

날렵한 독사들도 있다.

그들은 손가락삐 사이로 쉽게 빠져나가 루비아의 목을 간단히 물어뜯을 거다. 그녀는 도시로 들어가는 편이 옳다.

- 달그락.

나는 해골이며, 밤새 눈 속에 묻혀있어도 상관없다.

하지만 루비아는 다르다.

내 앞에서 몇 번이고 참혹하게 살해당했던 이 여자는, 따듯하게 데워진 목욕물과 푹신한 침대가 있는 깨끗한 여관에서 잘 필요가 있다.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나는 좋은 스류를 대접받을 필요가 있다.

질 좋은 소고기와 토마토가 잔뜩들어가고, 달콤한 양파와 타몬 잎이 버터에 잘 볶아 들어간.

그런 스튜를 떠먹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식사를 마친 뒤, 예쁜 찻잔에 홍차라도 한잔한다면 좋겠지만.

잿빛 성벽의 저 도시에 그런 찻집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우리는 산을 거의 다 벗어났다. 성으로 향하는 길이 펼쳐졌다.

무성한 수풀 아래로 슬쩍 몸을 숨기며 말했다.

"숨어 있을 테니, 가서 푹 쉬다 오시오. 이틀 정도는 여유롭게 기다려줄 테니까."

"에이, 늦어도 저녁까지는 올게요.

경비병 뇌물은 1로티 정도가 적당하루비아는 몇 마디를 혼자 중얼거린다.

"진심이니, 도시가 마음에 들면 하루 정도는 쉬다 오시오. 정말 지쳤을 테니."

"하핫. 금방 다녀올게요!"

루비아가 웃었다.

- 달그락.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운 수풀에 몸을 숨겼다. 멀리두 명의 경비가 보인다. 도개교 안쪽에서 문을 지키고 있다.

- 끼룩. 끼르륵.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한다.

석궁에 살을 장전했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

- 터벅. 터벅.

루비아가 대로로 걸어 나간다. 나는 수풀 속에 엎드린 채 조심스럽게 석궁을 들었다. 가만히 경비병의 얼굴을 조준했다.

석궁 실력에 자신이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쏜 건 전부 가까운 거리였다.

경비와 나 사이는 무척 먼 거리.

오십 걸음은 된다. 열에 열은 엉뚱한 곳으로 날아갈 확률이 높다.

살을 날린다면 루비아가 맞을지도 모른다.

그럴지라도-

무의미함을 알면서도 무언가를 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다.

할 수 있는 건 그냥 이 정도다.

도개교 건너의 커다란 성문.

문 좌우의 두 경비병이 보인다. 근무 태도가 썩 좋은 편은 아니다.

몸을 슬쩍 벽에 기댄다. 짝다리를 짚는다. 창도 놓은 채 하품을 한다.

모두 느슨한 표정.

지루하고 따분하다는 분위기.

그저 하루하루가 별 탈 없이 지나가기만 바라는 인상의 남자들.

성문을 지나는 여행자에게 괜한 시비를 걸어 돈을 뜯겠다거나, 험상궂은 범죄자로부터 반드시 도시를 지켜 내야겠다는 각오 같은 건 눈에 보이지 않는다.

느슨함은 전염되기 쉽다.

'괜한 걱정인가.'

루비아는 성문을 향해 터벅터벅 계속 걸어갔다.

도개교 앞의 루비아.

그녀를 보고도 경비들은 그저 하품만. 눈빛에는 '오, 예쁜 여자다.'라는 일반적인 감상 외에 별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몇 가지 문답이 교환되는 것 같았다. 루비아는 신분증을 제출했다. 커다란 성문은 허탈할 정도로 쉽게 열렸다.

- 끼이익루비아는 아무런 문제없이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경비들은 뇌물조차 받지 않는다.

'인간끼리는 저렇게 쉽게 열어 주나.'

- 털썩.

나는 석궁을 든 손을 천천히 늘어뜨렸다.

무사히 들어가는 모습을 보니 잠시나마 긴장이 풀렸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없는 일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 짹짹. I 짹짹짹.

새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아침이 지났다.

경추와 갈비뼈 사이사이로 겨울 햇살을 쬐었다. 수풀을 뚫고 들어오는 약간의 햇볕을 느낀다.

겨울 태양은 어딘가 좀 지친 것 같다. 충분히 따듯하지 않다. 루비아와함께 있을 때에는 동굴에서도 온기를 느꼈는데.

거기에 적응해 버린 것일까. 나는 벌써부터 조금씩 초조해졌다.

- 달그락.

손가락뼈로 손가락뼈를 더듬는다.

앞으로의 여정을 생각했다.

초조함을 잊기 위해 억지로 생각을 돌리는 것이다.

'엠버라. 나쁘지 않겠지.'

그곳에는 뛰어난 학자들이 많다.

굳이 학자가 아니더라도, 뛰어난 개인들이 놀랄 만큼 많다고 한다.

그럴 만도 하다.

엠버는 아나키스트의 도시.

스스로 설 수 있는 자들, 자기 자신에게 자신이 있는 자들은 구조화된 권위를 거부하게 마련이다.

그곳에는.

전설적인 네크로멘서도 있다.

왜 계속 무덤에서 일어나는 시점으로 되돌아가는가?

나에게 일어나는 기현상.

기스-제-라이라는 네크로멘서가,

나에게 이 현상에 대해 무언가 실마리를 줄지도 모른다.

물론 아쥬라의 탑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곳이긴 하지만.

이런저런 생각에 휩싸였다. 시간은 쉽게 가지 않았다.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느리게 갔다.

긴 기다림.

하늘 높이 뜬 해가 천천히 기울기 시작했다.

끝내.

석양이 졌다.

쓸쓸함이 텅 빈 몸에 들어차기 시작했다. 낯설고 화끈거렸다.

나는 부정하듯 고개를 저었다.

- 찌르르. 찌르르 밤벌레 울음소리가 뼈를 타고 전해진다.

별도 없이 캄캄한 밤이다. 눈도 비도 내리지 않는다.

느슨한 경비들은 또 다른 느슨한 경비들로 교체된다.

도개교 앞 거치대에 횃불을 건 경비들은 꾸벅꾸벅 졸았다.

- 털썩.

살이 풀어진 석궁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열 시간이 훌쩍 넘는 동안 나는 수풀 속에 몸을 숨기고 석궁을 들었다, 놨다 반복했다.

혼자 맞이하는 밤은 쓸쓸했기에 스스로 우스웠다.

잘 들어갔을 것이다.

따듯한 물로 목욕을 하고, 새 신발과 의복을 사고, 필요한 것들을 샀을 거다. 어쩌면 저 도시에서 정착을 결심했는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그녀에게 내가 무슨필요가 있을까?

말을 할 줄 안다는 것 외에 나는 별로 특별한 해골이 아니다.

그녀가 나와 여행을 함께 할 이유는 없다.

엠버 같은 아나키스트의 도시가 아니더라도.

세계 어디서도 그녀를 받아 주고,

도와줄 도시는 많을 것이다.

루비아는-

누구에게나 호의를 받을 만한 인간이니까.

- 찌르르. 찌르르.

반면.

나는 17년 동안 차가운 적의와,

경멸밖에 받아 본 적이 없는 해골병사.

내 기준으로 세상을 판단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세상은, 나와 그녀에게 전혀 다른 표정을 지어 보일 테니까.

웃으며 보내 주자.

- 달그락.

나는 혼자서, 내 길을 걸어가자.

이틀이 더 지났다.

아직도 수풀 속에 엎드려 있다.

나는 떠나지 못했다.

- 찌르르. 찌르르.

세 번째 밤이 찾아왔다.

눈도 비도 없는 맑은 밤이었다.

밤벌레는 어김없이 울었다.

나는 쓰레기처럼 버려진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면 후련했다.

차라리 그 편이 낫다. 가장 좋은 경우다. 마음이 깔끔해진다.

그녀는 그녀, 나는 나. 각자의 길을 가면 된다.

혹은 잠시 잊은 것일지도 모른다.

계속 기다리면 돌아올지도.

하지만 기약 없는 기다림은 고통스럽다. 기다릴 수밖에 없는 밤은 악동과 닮아 있다.

'돌아온다고 했는데.'

거짓말이었을까.

갈비뼈 사이로 길게 자란 갈색 잎이 바람에 흔들렸다.

긴 잎사귀가 뼈 안쪽의 어둠을 쓸어 댔다. 그러나 불안은 쓸리지 않고 계속 남았다.

역시 무슨 일이 벌어졌다.

높은 호감도를 확립해 놓은 점이 오히려 꺼림칙했다.

그게 아니라면 날 버렸을 거라고 생각하고 안심할 수 있었을 텐데.

마음속에서 무언가 조금씩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이라도 들어가 볼까.'

석궁을 들어 횃불을 켠 보초들을 겨눴다. 햇불이 바람에 흔들려 스산한 그림자를 만든다.

끔뻑끔뻑 졸고 있는 두 보초를 죽이는 건 쉬워 보인다.

그러나 잠입은 곧 자살.

몰려나올 도시의 경비대들을 모두 죽일 수는 없다.

게다가.

몰래 진입한다고 하더라도.

움직이는 해골이 도시의 골목에 숨어들 수는 없다.

그때 였다.

- 끼이익.

닫혀 있던 성문이 열렸다.

'한밤중에 성문이 열리나?'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연스레 주의가 쏠렸다.

- 터벅. 터벅. 달그르르.

안쪽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부리부리안 인상이다. 머리는 옆에만 몇 가닥 남고 위는 훤하다.

키는 중간 정도.

체격이 몹시 다부지다. 철제 흉갑위에 망토를 받치고 있다.

대머리가 터벅터벅 걸어오자, 느슨하게 서 있던 두 경비병은 남자를 알아채곤 깜짝 놀랐다. 몸을 바짝 붙이며 똑바로 섰다.

걸어 나온 대머리 남자는 서 있던 두 경비병에게 별다른 타박을 하지 않았다. 그들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느슨하게 서 있던 경비병들은 우물쭈물하다가 지시에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불길하다.

대머리 남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19화 누구를 책망할 것인가 (6)

***************************************************

경비들이 들어간 성문.

그곳으로, 네 명의 새로운 남자들이 등장했다. 경비병 복장을 하고 있는 녀석들이었다.

대머리가 뒤에 거느린 네 명의 경비들도 살펴봤다. 그중 한 녀석은 수레를 끌고 있었다.

'수레를.?'

이상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천천히 석궁을 들었다. 대머리의 얼굴을 조준했다.

아까의 경비병들은 느슨한 표정.

하루하루 편안히 지나가기만 바라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새로 나온 녀석들의 인상은 다르다.

경비병의 복장은 같다.

그러나 눈매가 다르다.

시체의 살점을 물어뜯는 하이에나의 눈빛이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대머리 녀석은 그보다 더하다.

시체가 아닌 것도 시체로 만든 뒤,

골수를 빨아먹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수레를 보았다. 수레를 끄는 녀석도 전체적 인상은 비슷했다. 경비병 복장도 일단은 같다.

그러나 얼굴이 멍투성이. 다리도 절뚝거렸다.

문득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혼자 수레를 끄는 부상자라.'

넘어져서 들 만한 멍은 아니다.

집중적으로 구타당한 흔적.

대장으로 보이는 대머리는 앞으로 성큼성큼 걸었고, 수레를 끌던 남자는 바로 그 뒤를 따랐다. 다른 세 명의 경비병도 따라붙는다.

주위를 살피며 사뿐사뿐 대로를 걷는다. 한 명 한 명이 제법 강해 보였다. 나는 거리를 두고 수풀 속에서 가만히 따라갔다.

'망치나, 석궁. 그 이상이다.'

경비병으로 뽑히는 남자들은 보통 만만치 않다. 치안을 관리하는 자들이므로. 그러나 이들은 더욱 악랄하고 강해 보였다.

산길로 접어드는 남자들.

수풀 속에서 조심스럽게 그들을 쫓았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횃불을 들고 있다.

거리를 두고 따라붙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본다. 그들은 나를 보지 못한다.

-사박사박.

밤벌레 소리에 걸음을 묻는다.

십 분 정도 걸었을 때.

대머리가 무언가 지시를 내렸다.

손수레를 끌던 멍투성이 남자가,

수레에서 벗어나 거꾸로 미는 자세를 취한다. 그리고 절벽으로 수레를 기울였다.

'뭐지?'

- 툭! 투둑! 투둑!

수레에서 무언가 떨어진다.

바위에 몇 번씩 부딪히며 아래로 굴러 내려갔다.

경비들은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몰래 쓰레기라도 매립하는 듯한 태도.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다시 대로로 걸어 돌아간다.

내가 엎드려 있던 수풀 근처를 지났다.

뭐가 떨어졌는지 확인해야 한다.

초조가 극에 달했다.

- 달그락.

그만, 몸을 움찔거렸다.

"응? 근처에 뭐 있나?"

갑자기 주위를 휘휘 돌아보는 대머리. 눈 치팬 걸까.

'발각되면 끝인데.'

경비병은 다섯. 자신은 하나.

대장으로 보이는 대머리.

그 혼자만으로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오크의 그것처럼 다부진 어깨.

싸운다면 놈 하나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 순社- 철픽!

빈 수레를 끌던 남자가 앞으로 엎어진다.

대머리의 관심이 그에게 쏠렸다.

- 퍽!

대머리는 갑자기 멍든 남자, 수레를 끌던 남자를 구타하기 시작했다.

거기엔 기묘한 자연스러움이 느껴졌다. 마치, 한참 전부터 이어지던 구타를 재개한다는 듯한 자연스러운 태도.

"열 받게 하지 마."

- 퍽!

"이 새끼야, 자빠지는 것도 내가자빠지라고 할 때 자빠져."

- 퍼벅!

"기껏 잡아 놓은 걸, 입에 쑤셔 넣겠다고 재갈을 풀어서 자살을 하게 만들어? 이 새끼는 진짜 생각할수록 어처구니가 없다니까."

- 우두둑!

"끄아아아!"

멍든 남자의 비명이 하늘 높이 울려 퍼진다.

대머리는 약간 진정한 듯 다시 앞으로 갔다.

'무슨. 이야기냐.'

그들의 대화가 들린다. 불안이 점점 증폭된다. 수레에 실은 뭔가를 산에 버려 놓고, 성문 안으로 들어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숨어서 멍하니 바라봤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대머리는 경비를 두 명만 남겼다.

성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대머리가 사라지고 한참이 흘렀다. 성문을 흘끔거리는 남은 두 경비가 욕설을 하며 땅에 침을 뱉는다.

"너무 아까운데. 사실 버리기 전에 쓰고 싶었단 말이야.

"쓰고 오든지, 정신병자 새끼야."

"흠, 흠흠! 이건 좀 놓고 간다. 칼만 들고 갈께."

맡겨지는 방패와 창을.

"쳇, 또 그걸로 겁나 쑤시겠구만.

취향 하고는."

"너도 할래?"

"절대. 난 살아서 움찔거리는 것만해. 안 그러면 무슨 재미냐?"

바람이 내가 있는 수풀 쪽으로 불었다. 경비들의 대화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대화 내용이 뭘 뜻하는지, 상상하지 않으려 애썼다.

내 눈으로 보기 전에는 아무것도 확신하지 않으려 했다.

끔찍한 걸 떠올려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일단 가 보자.

- 터벅터벅.

허리에 칼만 찬, 키 큰 경비가 대로를 걸어오기 시작했다.

횃불을 든 놈의 얼굴이 자세히 보였다. 구불구불한 짧은 흑발. 움푹 들어간 붉고 혼탁한 눈.

조금 전 일행이 갔던 산속으로 움직이는 남자.

놈은 수레가 기울어진 장소의 아래로 향한다.

- 스르르.

나는 수풀을 따라, 경비병을 조용히 따라갔다.

조금씩 현기중이 나기 시작했다.

"헤헤.

남자는 자신이 찾는 것에 열중했다. 그런 나머지 수풀 속에서 해골하나가 자기를 쫓아오는 것도 모르는 것 같다.

남자가 보는 것.

그걸 나도 보고 있다.

거기에는 한 여자의 시체가 있다.

'40로티면 될까요? 뇌물은 1로티면. 으응.'

'1월 20일은 정말 특별한 날이에요. 그날 사르디아를 꺾으면.

책에서 읽은 갑옷 가격을 머릿속으로 열심히 되뇌고, 흥정 방법을 고민하던 여자. 경비병에게 줄 뇌물을 고민하던 여자. 꽃의 효능에 대해 말하고 새 황제의 칙령에 대해 함께 농담하던 여자.

나를 무덤에서 꺼내 준 여자. 단검을 빌려 준 여자. 바보 같게도, 제가일으킨 해골이 걱정되어 돌을 쥐고쫓아와 줬던 여자. 나에게 눈 덩어리를 던지며 장난을 쳤던 여자. 당신 혹시 세이론 1세의 유골이 아니냐며 농담을 했던 여자.

그 여자.

루비아의 시체가 있었다.

발가벗겨진 시체는 곳곳이 멍과 자상 투성이였다.

왜.

왜.

왜.

대체 왜?

이 여자는 어째서 이렇게까지 고통 받아야 하는가?

고통은 이 여자의 운명 같은 거라도 된다는 말인가?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하나.

처음부터 잘못된 건가?

나에게.

어쩌라는 말인가.

해골은 눈물을 홀릴 수 없다.

텅 빈 구멍 안에는 눈물샘 대신 어둠과 바람만이 감돌고 있다.

- 달그락.

나는 수풀 속에 수그린 자세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흐흐흐.

시체를 보며 경비가 웃는다. 웃음에서 핏물이 떨어진다.

나는 죽은 그녀를 본다. 시체는 차갑다. 시체는 침묵한다. 그러나 보는 자들은 침묵할 수 없다.

- 바스락.

"응? 거기 뭐야!"

놈이 소리를 듣고 놀란다.

- 피슛!

목을 향해, 이미 장전해 둔 석궁을 발사했다. 우리는 열 발자국 넘게 떨어져 있다.

그러나 놈의 입에서는 역겨운 냄새가 났다. 그 숨을 멈추고 싶었다.

- 퍽!

경비의 팔에 석궁살이 꽂혔다.

마음이 흐트러진 탓일까. 조준이 엉망이다. 목에서 한참 벗어났다.

"끄악! 아아악!"

석궁살에 맞은 남자가 호들갑을 떤다.

먹따는 소리를 내는 저 목을 한 번에 꿰어 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심한 실패다.

분노와 슬픔은 사격 실력을 조금도 향상시켜 주지 못한다.

멋들어진 일격 같은 건 나오지 못했다.

해골 따위가 화를 내고 슬퍼해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언제나 그랬다.

나는 곤봉을 들었다.

멋들어진 일격 따위는 애초에 성공한 적 없다. 성실히 다음 일격을 준비할 뿐이다.

몸이 부서지기 전까지 다음 공격을 준비한다.

계속, 그리고 계속.

- 부응!

곤봉을 휘둘렀다. 경비가 황급히 바닥에 몸을 굴렸다.

방향을 바꿨다. 녀석이 몸을 굴리는 바닥으로 내리쳤다.

- 퍽!

"끄아악!"

곤봉에 왼쪽 다리를 맞은 놈이 비명을 지른다. 데구르르 몸을 굴린다.

하지만 타격감이 약하다. 중간에 곤봉 방향을 바꾼 탓이다.

곤봉에 맞은 경비가 허리의 칼을 뽑는다.

- 획!

놈이 일어나며 칼을 휘두른다.

- 챙!

곤봉으로 칼을 맞받았다. 곤봉의 재료는 나무다. 그러나 겉에 철이 씌워져 있고, 안에 굵은 철심이 박혀 있다.

칼에 비해 무게도, 강도도 그리 밀리지 않는다.

- 챙! 챙! 챙!

간격은 한 걸음. 혹은 반걸음.

붙다시피 한 상황. 칼과 곤봉이 세차게 부딪힌다. 경비는 이를 악물었다. 안색이 좋지 않았다.

놈이 든 건 휴대용 한손 검. 이 상황에서 좋은 무기는 아니다. 해골은인간과 다르다. 칼에 찔려도 죽지 않는다.

뼈를 부수려면 둔기가 제격이다.

놈이 방패만 갖고 있었어도 나를 훨씬 수월하게 상대했을 테지.

- 투둑!

- 화르르!

격돌에 휘말려, 경비가 바닥에 세워 놓은 횃불이 쓰러진다. 마른 겨울 잎에 불이 퍼진다.

"이, 이 괴물이.!"

경비가 소리친다. 나는 아직 괴물은 못 된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냥 달그락거리는 하얀 해골일 뿐이다.

- 챙! 챙! 챙!

경비는 나를 맞아 싸움에 집중하고 있다. 시체 애호가인 주제에 상당히잘 훈련되어 있다.

자신을 덮치는 해골, 마물을 보고도 공황에 빠지지 않았다. 공포에 잠겨 몸이 굳어지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제법이다.

거리가 ?에 가까워졌을 때. 경비가 틈을 노렸다.

- 덤석!

놈은 내 손을 잡았다. 내 곤봉을제 옆구리에 끼웠다. 동시에 주먹으로 내 턱뼈를 강하게 친다.

- 탁!

나를 밀쳐 내며 곤봉을 빼앗으려했다. 놈은 무슨 무기를 들어야 할지 아는 거다. 해골을 부술 둔기를 원하고 있다.

'넘어가 준다.'

잠시 버티는 척하다가, 경비의 칼자루를 잡았다.

- 달그락!

힘을 줬다.

놈은 팔에 석궁살이 박힌 상태. 온전한 상태였다면 나를 이겼을지도 모른다.

"옥!"

하지만 지금은 팽팽하다.

곤봉을 주며 칼을 취했다. 서로의무기가 바뀌었다.

화르르르!

주위로 불이 번져 간다.

바닥에 깔린 메마른 겨울 잎들이 바삭바삭 타들어 가기 시작한다.

물기 한 점 없이 주글주글 말려진 잎들은 장작처럼 활활 타들어 갔다.

곤봉을 빼앗아 쥔 경비가 이를 악문다. 인간은 불에 약하다.

- 붕!

놈이 오른쪽 위에서 대각선으로 세차게 곤봉을 내리쳤다. 키가 큰 장점을 적극 활용하는 것.

- 챙!

칼을 들어 오른쪽 위를 막았지만 동시에 다른 공격이 이루어졌다.

경비는 오른쪽 발을 뻗어,

- 퍼벅!

내 옆구리를 세차게 걷어차 왔다.

한 걸음 뒤로 튕겨났다.

'제법이군.'

꽤 강한 킥. 하지만 맞고만 있지는 않는다. 공중에 살짝 뜬 상태에서 놈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 숙!

살갗이 베이는 소리가 상쾌하다.

"아악! 아악!"

피를 홀리며 경비가 발악한다.

엄살이 심하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습격에도 임기응변이 몹시 뛰어난 녀석. 경비 중에서도 특히 강한 녀석일 거다.

혹은, 변두리 도시의 경비병 하나 쉽게 처리하지 못할 만큼, 내가 저 한참 바닥을 기고 있다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 투둑!

놈이 앞으로 두 발을 디딘다.

어떻게든 빨리 끝내겠다는 기세.

피를 홀리고 있으니 그편이 현명하다.

? 부응!

세차게 곤봉을 휘두른다. 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한 발자국 물러났다.

둔기 저항이 있었다면, 그대로 맞으면서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둔기 저항을 선택하지 않았다. 루비아의 호감도를 올리는 옵션을 선택했다. 후회는 없다.

- 붕!

다시 한 번 곤봉이 휘둘러진다. 슬쩍 피하면서, 그대로 앞으로 반걸음을 내디뎠다. 손에 끝까지 잡고 있던 칼을 앞으로 내밀며, - 서거!

그대로 놈의 가슴팍을 찔렀다.

칼끝을 똑바로 박아 넣었다. 카운터가 깔끔하게 들어간 것이다.

경비의 가슴을 날카로운 칼날이 헤집었다. 경비가 곤봉과 교환한 제자신의 칼이었다.

20화 누구를 책망할 것인가 (7)

***************************************************

"끄, 끄, 끄헤엑. r놈이 죽어 간다.

녀석은 곤봉으로 나를 두드려 부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평소라면 옳았을 놈의 판단은 빗나갔다.

나는 피해 냈다. 내 민첩은 놈에게 낯선 것이었다.

나는 칼로 놈을 찔러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 시도는 제대로 먹혀들었다.

놈이 방패를 놓고 왔기 때문이다.

놈은 싸우러 온 것이 아니라 시체를 간음하러 왔다.

그런 짓을 하는 데 방패까지 들고 오지는 않은 것이다.

'방패는 경비병의 필수품 아닌가.' 놈이 방패를 들고 있었다면.

이 시체 애호가는 안정적으로 내공 격을 막아 내며 나를 천천히 분쇄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성공적으로 부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또 다시 무덤으로 돌아가게 되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 터벅.

한 발자국 물러났다. 녀석의 심장을 찌른 칼을 천천히 뺐다.

- 푸슈슛!

샘물처럼 선혈이 튀었다. 경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갔다.

내 하얀 두개골은 놈에게서 튀는 피로 새빨갛게 물들었다.

텅 빈 눈구멍을 향해 피가 뿜어졌다. 안쪽 후두골이 새빨갛게 칠해졌다. 저번 생에서, 루비아가 던진 눈 덩이를 맞았던 그 자리였다.

- 턱. 턱. 터벅.

경비는 세 걸음 뒤로 물러났다.

"끄, 헤. 꾸히 무. 슨. 해, 해골이. r^ ? ? Iㄱn~-?-, ?

칼에 찔린 심장이 피를 분수처럼 뿜어냈다.

- 털썩.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지만 놈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경비병은 의문을 안고 쓰러졌다.

깔끔한 절명이다. 어울리지 않는 편안한 죽음이었다.

하지만 나에겐 놈을 잡고 고문할만한 역량이 없었다.

그런 압도적인 폭력이 없다.

방심한 상대를 기습하고도 발버둥 끝에 간신히 가슴에 한칼을 꽂아 넣었을 뿐.

- 달그락.

고개를 저어, 더러운 피를 털었다.

그 순간.

레벨이 올랐다는 표시와 함께 빼곡한 글자가 허공에 떠올랐다.

[퀘스트 활성화]

[서브 퀘스트 - 경비병 살해가 활성화됩니다.]

당신은 경비병을 처음으로 살해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부패한 공권력을 부숴 버리십시오! 부패하지 않았나요? 뭐,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다른 도시의 경비병도 살해해 보십시오. 열두 도시의 경비병을 살해하면, 무언가를 얻게 될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현상 수배범은 될 수 있겠네요.

- 현재 경비병을 살해한 도시:

1/12 (유블람)

- 예측 보상: ???

[즐거운 공권력 파괴 되세요!]

퀘스트라.

뭐 이런 같잖은.

나는 제대로 보지도 않고 손을 휘둘러 퀘스트를 치워 버렸다.

경비의 시체를 걷어찼다.

숨이 끊어진 경비의 시체가 데구르르 굴렀다. 횃불이 만든 불길 안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도 실패했다.

루비아라는 여자를, 또 다시 처참하게 죽게 만들었다.

처음부터 그녀를 버렸다면.

이렇게 무력감을 느끼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이끌었다. 함께하려고했는데, 이틀도 채 지켜 주지 못했다.

한심했다.

지켜 주지 못했던 서큐버스님의 환영이 다시 온몸에 달라붙는 것 같았다. 죄책감은 무겁고 강했다. 벗어버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 달그락.

여기 있다간 루비아의 시체도 불탈 것이다. 그녀의 시체에 서큐버스님의 죽은 모습이 겹쳐 보였다.

시체를 안아 들었다.

산속으로 들어갔다.

손에 든 칼로 땅을 겨눴다. 눈을 걷어 냈다.

- 퍽! 퍽! 퍽!

얼어붙은 땅을 내리찍었다. 잘 파지지 않아 몇 번이고 억지로 내리찍었다.

얼어붙은 땅 하나 제대로 파지 못하는 초라한 몸이 느껴졌다. 더욱깊게, 깊게 땅을 파 내려갔다.

2미터 정도 팠을 때.

- 화르르르!

꽤 걸었다고 생각했지만 불이 크게 번진 둣, 저 멀리서 열기가 전해졌다.

루비아의 시체를 모피로 감쌌다.

구덩이 아래에 그녀를 조심스럽게 놓았다. 파헤쳐 올린 흙을 시체 위에 조금씩 덮었다.

흙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얼어붙은 흙이 딱딱하게 덩어리져있다.

칼등으로 땅을 쓸어내렸다. 흙을 모아 덮어 주었다. 무덤이라고 불리기엔 초라하다.

작은 비석 하나 세워 줄 수 없다.

죽은 경비의 동료들이 이 무덤을 파헤칠지도 모른다. 숨겨야 한다.

- 위이이잉.!

바람이 분다. 차갑고 날카로운 바람이 뼈 사이로 시리게 파고든다.

- 달그락.

흙을 꾹꾹 눌러 다지는 것밖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견뎌야 한다.

살아남아야 한다.

지금 죽고 다시 돌아간다면.

다시 루비아를 지켜 줄 수 있을까?

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자신이 없다. 자연으로부터도, 인간으로부터도 무엇 하나 제대로 지킬 수 없는 게 지금의 나다.

짐을 들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인간의 눈에 띄지 않도록 깊이 들어갔다. 한참 들어간 후, - 푸르르!

석궁의 수첩을 펼쳤다.

앞에는 사람의 이름과 가격, 성적학대를 가한 방식이 나와 있다.

사람을 사고파는 장부로 사용되는 걸로 추측된다.

뒤쪽부터는 하얀 공간이었다.

펜을 들었다. 수첩 뒷장에 한 줄씩 이름을 적어 넣기 시작했다.

- 경비대장과 그 무리(유블람).

- 영주(에라스트).

- 망치와 석궁(첫 무덤).

'망치와 석궁'의 옆에는 작은 표시를 했다.

일단 완료된 작업이므로.

에라스트의 영주는 루비아의 삼촌이라는 놈.

놈은 일련의 일들에 어떤 식이든 연관되어 있을 확률이 높다.

망치와 석궁도 영주가 보낸 걸로 추측된다.

경비대장과 그 무리는 말할 것도 없다. 놈들이 루비아를 안에서 살해한 거다. 고문도 행해졌을 거다.

다른 비상식량과 수통, 외투 둥은전부 다 버렸다.

이제 쓸모없는 것들이다. 마실 사람도 걸칠 사람도 없다. 망치와 칼, 석궁만 묶어서 챙겼다. 휘두를 무기만 있으면 된다.

'일단 동굴로 들어가자.'

자연 미로. 거기라면 약간의 안전은 보장된다. 익숙하고 유리한 곳이다. 잠시 그곳에 머무르자.

트롤에게 당한 것. 인간 마을에 그녀를 혼자 보내야 했던 것. 모두 강하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다.

애초에, 서큐버스님을 지켜 주지 못했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시작된 것이다.

일단.

강해질 필요가 있다. 그것만 생각한다.

루비아를 묻은 곳 너머, 타오르며활활 번지는 불길을 바라봤다.

잦아들 기세는 보이지 않는다.

겨울은 건조한 계절.

웬만큼 피를 뿌려도, 금방 말라붙어 버리겠지.

_ 똑- 또똑.

날카로운 종유석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진다.

동굴에 들어간 뒤에는 시간이 많았다. 다음 타깃에 대해 천천히 생각했다.

루비아가 도시에 들어간 뒤, 어떻게 된 걸까. 여기저기 물어볼 필요가 있다.

물론 당장 심문하고 싶은 놈들.

그들은 그라스미어의 경비대장과그 무리들이다.

대가를 치르게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루비^를 보낸 뒤, 수풀에엎드려 삼 일 동안 지켜본 바.

그들은 쉽지 않은 목표다.

경비들은 둘 이상이 순찰을 다녔다. 호각을 항상 소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대머리 경비대장을 본 것도, 루비아를 버리러 나온 남자들을본 것도.

수레를 끌고 나온 때가 처음.

그리고 마지막이었다.

하이에나처럼 생긴 그 무리들은 밖에서 근무하지 않았다.

'도시 내 근무자들인가.'

헛되이 모험을 걸 생각은 없다.

여기서 다시 두개골이 깨져 죽는다면, 다음 회귀 때 어떤 식으로든 루비아가 또 죽는 꼴을 봐야 한다.

그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녀와 함께하고 싶다. 하지만 충분한 힘을 갖지 않은 상태에서는 혼자 있고 싶었다.

짧은 사이에 몇 번 이런 일을 겪다보니, 그녀에 대해 묘한 오기와 집착이 생겼다. 죽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일단 도시 주변을 돌아본다. 들을 수 있는 사정은 정확히 알아본다.

나는 유블람이라는 도시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사실, 그 도시의 위치 외에는 전 혀라고 할 만큼 아는 게 없다.

영주의 성이 작다.

많은 사람들이 성벽 바깥에 산다.

그 정도일까.

알아야 할 것이 많다.

지나가는 인간을 잡아 친절히 물어볼 생각이다.

다만.

경비병을 죽였으므로, 한동안 시끄러울 것이다. 한눈에 봐도 켕길 것이 많은 무리들이다.

제 무리의 누가 죽어 자빠졌으면, 눈에 불을 켜고 진상을 파악할 거라고 생각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봐 둘 필요가 있다.

'잠시 기다리고 있자.'

동굴 안에서 조용히 한 달 정도를 보냈다. 해골에게 시간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주저앉아 조용히 기억을 반추하다보면 시간은 놀랄 정도로 빠르게 지나간다.

'이 정도면 됐으려나.'

입구 근처에서 시작해서, 조심스럽게 밖을 살펴 갔다.

밖은 의외로 조용했다.

칼에 찔린 놈의 시체. 그게 불에 제대로 타 주었던 걸까.

무언가를 찾아 산속을 수색하는 인간들은 특별히 보지 못했다.

내가 죽인 경비를,

그저 산불에 휩싸여 타 죽은 걸로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슬슬 나가도 될 것 같은데.'

나는 동굴 밖으로 나갔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산길까지 나갔다.

길옆 수풀에 엎드렸다. 정보를 얻어 낼 만한 사람들을 기다렸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인기척이 들려온다.

'좀 많은데.'

하나, 둘, 셋.

여섯 명이다.

모두 어렸다. 열대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인간 아이들. 아이들은 누군가를 질질 끌고 나타났다.

'뭐 하는 녀석들이지?'

다섯이 하나를 끌고 온다.

나는 수풀에 엎드린 채, 가만히 어린 인간 수컷들을 관찰했다.

다섯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소년이, 끌려오는 아이의 멱살을 잡아들었다. 기세가 꽤 거칠다.

"션, 넌 오늘 진짜 죽는 날이야. 또몰래 술을 흠쳐 마셔? 우리가 고용주한테 하나하나 털리게 만들어? 오늘은 패는 걸로 안 끝난다."

소년이 씩씩대며 말했다.

"나, 나 아니야.!"

소년의 손에 멱살이 잡혀, 매달린아이가 항변한다. 하지만 소년은 듣는 척도 않는다.

"이 개자식, 네가 당번일 때마다 술이 없어지잖아. 내가 똑똑히 봤어.

너 같은 놈은 확 땅에 묻어 버려야해."

"미안, 미안해!"

"필요 없어. 보육원 출신들이 너때문에 일자리를 잃게 생겼으니, 너는 오늘 죽는다."

허공에 매달린 아이를 바라봤다.

뭘 어쨌는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눈까지 완전히 풀어진 채였다.

'술이라도 퍼먹었나.'

인간은 술에 잔뜩 취하면 저런 모습이 된다. 피부가 붉어진다.

제대로 걷지 못하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여기에 파자!"

삽을 들고 온 아이들은 산 중턱에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 퍽! 퍽! 퍽!

세 명이 동시에 파니 구멍이 금세 깊어졌다.

아직 추운 겨울이다.

하지만 땅이 비교적 부드러운 부분이었는지, 바깥으로 걷어 내지는 흙입자들이 꽤 고와 보였다.

"시, 실수했어! 실수했어어!"

멱살 잡힌 아이가 울부짖는다. 하지만 취할 대로 취해서 영 긴장감은 없어 보인다.

- 적! 퍽!

"땅 잘 파지네!"

44어때, 네가 들어갈 자리다!"

놈들을 가만히 지켜봤다. 솔직히 구덩이는 별로 깊게 파이지 않는다.

죽이고 묻을 만큼 깊지는 않다.

"미. 미안! 미안! 저, 절대 술 안마 실께!"

"니가 술을 안 마셔?"

션이라 불린 아이. 그가 술을 안 마신다는 말에, 주위에 있던 아이들이 배를 잡고 와하하 웃었다.

"1년이야, 이 개자식아. 1년 동안 너는 매번 와이언 씨 와인을 홈쳐먹었다고! 와이언 씨는 우리가 나눠먹은 걸로 생각하더라."

"빨리 묻자! 산짐승이 저놈 머리만 뜯어먹게."

"저기, 나, 나는.!"

열세 살이나 될까 싶은 션은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인간 아이들은 어깨까지 오는 높이로 션을 땅에 묻었다. 바닥을 광광 밟아 흙을 다졌다.

"가자! 이런 새끼는 필요 없어. 우리 보육원의 수치야."

션을 땅에 묻은 아이들은 어깨에 삽을 메고 내려갔다.

얼굴이 벌건 션은 땅에 묻혀 흑흑거리며 울었다. 아이들이 내려가며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눴다.

21화 누구를 책망할 것인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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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죽으면 어떡하지? 그냥 두들겨 패면 안 됐을까?"

"매번 그랬잖아. 저놈에겐 교육이필요하다고."

"그래도 죽일 것까지는 없는 거 아니야?"

"한 시간 뒤에 슬쩍 다시 와 보자."

"멍청아! 한 시간은 너무 짧아! 두 시간은 있어야 해."

"늑대가 나타날지도 모른다구! 목이 다 뜯겨 있으면 어떡해?"

"요즘 이 근처에 산짐승 싹 다 없어진 거 몰라? 일부러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어. 다른 지역 사냥꾼들이 싹 다 쓸어 갔다고 다들 난리들이야."

잠시 아이들을 따라가 이야기를 들었다.

묻힌 녀석에게 돌아가 보았다.

- 드르릉.

어처구니없게도 녀석은 그 사이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나는 수풀에 숨어 녀석에게 말을 걸었다.

"션."

"히끅!"

션이 딸꾹질을 하며 놀랐다. 머리를 흔들며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션!"

"고윽.!"

'저러다 토하겠군.' 저 나이에 알콜 중독이라니. 하지만 내가 저 아이에게 해 줄 수 있을 일 같은 건 없다.

션이 내 쪽을 보려 했다. 하지만 묻혀 있는 탓에 고개가 돌아가지 않는다. 허공을 보고 말했다.

"다, 다시 꺼내 주러 온 거야?"

"그래."

"우린 치, 친구들이지? 고, 고마워!"

션은 제대로 술에 절어 있었다. 자길 묻은 아이들과 내 목소리를 혼동할 정도다.

어린 나이에 알콜 중독으로 뇌 손상이 온 건 아닌가 싶었다.

"대신 눈을 감아."

션에게 눈을 감게 시켰다. 내 모습을 보게 할 생각은 없다. 션이 반문한다.

"누, 눈을?"

"응. 눈을 감아. 친구들 몰래 구해주러 온 거니까. 내가 누군지는 비밀이야."

션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수풀에서 빠져나갔다. 녀석을 묻힌 땅에서 끄집어내 주었다.

딱딱한 손이 자신을 잡고 꺼내는데도, 녀석은 별다른 위화감을 느끼지못하는 것 같다.

션은 꼬부라지는 목소리로 고맙다고 말했다.

감겨 있는 션의 눈을 천으로 둘렀다. 그리고 며칠 전 유블람에 들어간 여자에 대해 물어보았다.

별로 노력을 기울일 필요도 없이,

션은 내가 궁금한 사실에 대해 이것저것 털어놓기 시작했다.

주정뱅이 꼬마는 의외로 도움이 되었다.

핵심적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여관이라.'

아이는 유블람에 여관이 하나밖에 없다고 했다. 그 여관은 특별하다.

혼자 여행하는 여자들은 그곳에서종종 실종되곤 하기 때문.

"여행객 누나들이 들어가긴 해도,

나오질 않더라고.

그리고, 그 여관 주인은 성 밖에 방앗간을 소유하고 있다.

"방앗간이. 강 근처라고?"

"응, 우리 많이 홈쳐, 히끅! 먹었잖아. 왜 모르는 척해, 히히.

다행히 그놈에게는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방앗간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될 것이다.

조금 더 직접적으로, 대머리 경비대장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그러자 션은 갑자기 술이 깬 목소리가 되었다.

"끄흑! 그, 그건 절대 말하면 안되는 거잖아! 너, 너, 왜 그래? 끅!"

아이들에게도 조심스러운 화제인걸까. 녀석이 서서히 술에서 깨는 게 느껴졌다. 일단 여기서는 물러나야겠다.

"그래. 가만히 있어. 천천히 백을 세면서 반성해. 아니면 다시 묻어버리겠어. 이번엔 절대 안 꺼내 줘."

"으, 으응!"

션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아. 둘. 세엣.

- 스르록.

주정뱅이 꼬마에게 사기를 친 나는, 곧바로 수풀을 타고 강 근처로 향했다.

'여관 주인이라.' 일단 거기서부터 캐물어 간다.

바람이 수풀 속으로 느릿하게 걸어 들어온다. 나는 엎드린 땅이 점점 딱딱해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후 2시.

이글거리는 겨울 해가 계절을 잠시 부정하는 시간.

밤새 얼어붙은 땅도 아침부터 녹아제법 부드럽다. 땅이 딱딱해진다는 느낌은 심리적인 것이리라.

'비슷한 자세였나.'

성문 근처에서, 사흘 밤낮 루비아를 기다렸던 한 달 전에도.

기다리던 그녀 대신 나오던 경비병들. 덜컹거리던 수레.

- 달그락.

두개골을 흔들었다. 생각을 떨쳐낸다. 앞을 바라봤다.

물레방아가 돌아간다. 방아채 끝이 들어 올려지고, 다시 떨어졌다.

- 쿵!

곡식을 찧는 소리가 아니다. 공이는 텅 빈 절구 바닥을 때린다.

'비었다.,

여관이 소유하고 있는 제분소. 전혀 제대로 운영되지 않고 있다. 무슨 일인가 싶다.

- 끼이익.

방앗간에 딸린 집. 문을 열고 남자가 나왔다. 마흔 정도로 보였다.

'저놈인가.'

여관의 주인이겠지. 다른 사람일 것 같지 않다.

남자는 근처 돌담에 앉았다. 꺼진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연기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남자의 몸은 상해 있다. 얼굴에 심한 멍이 들었다. 귀에서는 진득한 핏물이 흘러내린다.

고문의 흔적이다.

하지만 저놈을 누가? 가만히 되짚어 본다.

제대로 된 도시라면.

경비대가 그를 수사할 거다.

여행객이 사라지는 여관이라니.

과도한 수사를 하는 경비대에게 저런 꼴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머리 경비대장과 그를 따르던 네 명의 경비대. 놈들은 밤중에 그 여행객의 시체를 싣고 나왔다.

산중에 유기했다. 시간까지 하려는 놈도 있었다. 경비대의 탈을 쓴 극히 흉악한 범죄 집단.

그런 놈들이라면.

여행자를 납치하는 여관 주인과 손발이 아주 잘 맞으면 맞았지 어긋날 것 같지는 않다.

남자는 한참 밖에 나와 있더니 안으로 곧 들어갔다.

혹시나, 누가 나타날까 싶어 이틀을 기다렸다. 엉뚱한 자를 덮치면 곤란하니까.

하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 달그락.

'오늘이 삼 일째인가.'

- 스르록.

수풀을 통해 조용히 뒤로 돌아갔다. 석궁을 목에 겨누고 남자에게 물었다.

"네가 여관 주인인가?"

남자가 몸을 홈칫 떨었다.

- 퍽!

이 정도면 반응은 충분하다.

돌아보려는 남자를 기절시켰다. 목덜미를 쥐었다. 짐짝처럼 방앗간 옆의 집으로 끌고 갔다.

- 끼이익.

문은 잠기지 않은 채였다.

- 털썩!

기절시킨 남자를 바닥에 던져 놓고내부를 살폈다.

'엉망이군.'

남자가 사는 집이다.

가구엔 먼지가 두터웠다. 제자리에 있는 거라곤 하나도 없었다.

'이건 뭐지?'

한쪽에, 플레이트 아머가 놓여 있었다. 투구와 장갑까지 세트로. 산지 얼마 되지 않은 물건 같다.

잠시 둘러보다가, 기절한 남자를 밟아서 깨웠다.

"으, 으으옥.

기절한 남자가 신음 소리를 내며일어났다. 그리곤,

"히, 히익!"

몸을 웅크리며 벽에 몸을 붙였다.

놀라는 건 당연하다.

"다, 당신이 해골로 보이는데.

하지만 말이 좀 엉뚱하다. 해골로보인다라. 자기가 뭘 잘못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오해하고 있다면, 그대로 두자. 굳이 자기소개를 할 생각은 없다.

"그래, 뭘 처먹고 앉았으면 사람이 해골로 보이나?"

대충 얼버무렸다. 어차피 이 남자를 살려 둘 생각은 없기 때문이다.

남자가 떨면서 말했다.

"아, 아편 때문인가. 더, 더 뭘 어찌겠다는 거요. 나,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니까.!"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다. 그게꼭 불의의 침입자는 아닌 듯하다.

정말 모른다니, 월 말하는 걸까.

남자에게 물었다.

"뭘 모르는데?"

"에라스트에서 출발한 두 조직원이 어떻게 됐는지도, 경비병이 어떻게 됐는지도 모, 모른다니까! 내, 내가왜 그들을 해치겠소.!"

손을 떤다. 에라스트에서 출발한 두 조직원이라. 루비아의 삼촌이 보낸 녀석들을 말하는 게 아닐까.

"네크론 신사회의 두 놈을 말하는 건가?"

신분증에 적힌 대로 이야기해 본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조직. 에서 나온 거 아니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남자가 다시 몸을 파르르 떤다.

"그럼 누, 누구요!"

"질문은 내가 한다. 갈색 머리. 회색 로브의 여자. 기억나겠지?"

남자가 몸을 흠칫 떨었다. 정직한 반응이다.

"설마. 그 여자의. 일행이오?"

"그래."

"제, 젠장.!"

- 타닥!

남자가 도망가려고 했다. 제정신은 아니다. 아편인지 뭔지, 마약 물질에 심하게 중독된 듯하다.

해골을 보고도, 그냥 환각을 보는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도망가려 한다.

나는 문 쪽을 막아서고 있다.

도망갈 방법은 없다.

시도는 좋았다고 말해 주고 싶어도, 그런 공허한 칭찬은 무리다.

- 퍽!

무릎으로 가슴을 가격했다. 남자가 가슴을 안고 쓰러졌다.

"끄헉!"

- 푸슛!

바닥에 쓰러진 놈에게 석궁을 발사했다. 코앞이라 조준이 엇나갈 일도 없다. 석궁살은 남자의 왼손을 뚫고마루에 틀어박혔다.

- 파르르!

석궁살 끝부분이 떨린다.

"아아아악!"

"쉿."

손가락뼈를 입에 가져다 대며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흐, 흐곡, 곡, 끄흐흑.!"

울부짖음이 멈추지 않는다.

"이제 좀 마음이 가라앉았나?"

"끅. 끄흐으윽.

아닌 듯하다. 손에 화살이 박힌 남자가 고통으로 흐느낀다.

나는 심문을 시작했다.

"왜 그랬지?"

다짜고짜 질문한다.

다 알고 있다는 자세로 몰아치자,

약에 중독 되어 망가진 이 남자는 우습게도 술술 불어 버린다.

"그, 그들에게 협조하지 않았다간 여관 문을 닫아야.!"

그들이라면 네크론 신사회라는 놈들을 뜻할 거다. 나는 다시 아는 척질문했다.

"혼자 묵은 여자를 그냥 보냈다고여관 문을 닫게 한다고? 그랬는지는 어떻게 알고? 그들이 무슨 아쥬라의마법사라도 되나?"

손목을 밟은 발에 힘을 주었다. 손에 박힌 화살을 툭툭 건드렸다.

"끄, 끄흐흑.!"

여관 주인은 갑자기 감정적으로 격해졌다.

흐느끼며 울부짖는다.

급격한 기분 전환.

마약중독의 부작용인 듯하다.

"젠장! 그냥 죽여! 내가, 내가 할 수 없단 말이다."

"무슨 말이지?"

"난. 가망이 없어! 약을 먹어도 안 돼! 이, 일을 치를 수가 없어. 여자들에게 벌어지는 일을 상상하면서대리 만족이라도, 끅, 느끼는, 흐윽. 거라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다리에 힘이 풀렸다.

- 달그락.

남자의 손목을 밟던 발을 반걸음 뒤로 물렸다. 남자는 미친 것처럼 계속 쏟아 낸다.

"이, 이젠 그것도 끝이지만. 회원둘이 실종됐다고 나한테 그 책임을 덮어씌우는 거야! 그냥 내 여관을 빼앗기 위한 명목이겠지만. 고, 고문할 것까지는 없잖아! 귀에, 끅, 귀에그런 괴물을 집어넣었다고. 괴물을. 이제 곧 제분소도 압류할 거야. 난 끝이야. 끝이야."

남자는 실성해 아무렇게나 말을 내뱉으며 흐느꼈다.

이런저런 비슷한 이야기가 조금씩 다르게 변주되었다.

얼마나 이야기를 들었을까.

- 띠링!

[퀘스트가 갱신되었습니다!]

[네크론 신사회에 대한 정보가 추가되었습니다.]

- 네크론 신사회는 인신매매 집단입니다.

- 그들은 유블람의 여관 주인을 고문했습니다.

- 그들은 고문에 특별한 벌레를 사용합니다.

- 유블람의 경비대장은 네크론 신사회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 유블람의 여관 주인은 더 이상은 알지 못합니다.

나는 멍하니 상태창을 바라봤다.

잠깐 잊고 있었다.

이것도 엄연히 퀘스트다.

목록에 가만히 잠들어 있던 탓에 신경 쓰지 않고 있었지만, 일단은퀘스트 진행 중이라는 거다.

망치잡이의 신분증을 품에 넣는 순간 허공에 뜨던 창. 네크론 신사회에 대해서 알아보세요, 라는 우스꽝스러운 퀘스트.

허공에 뜬 글자들을 한 줄 한 줄 가만히 읽어 내려갔다.

'여관 주인은 더 알지 못한다고?'

여기서 꼬리가 끊긴다고?

솔직히 웃기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껏 저 반투명한 푸른 창이 거짓말을 한 적은 없다.

나는 석궁을 들었다. 천천히 들었다가 다시 놓았다.

여관 주인이라는 남자.

이자를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죽이는 것과 아닌 것, 어느 것이 더고통스러울지 알 수 없었다.

고통스럽게 만들고 싶은지, 그저죽이고 싶은지도 알 수 없었다.

22화 누구를 책망할 것인가 (9)

***************************************************

- 끼릭. 끼리릭.

석궁에 살을 감았다.

"그래, 주, 죽여!"

남자가 발작하듯 소리친다. 그의 오른쪽 손목을 다시 밟고, - 피슛!

석궁살을 고정된 오른쪽 손바닥에 박아 넣었다.

- 퍽!

개량형 석궁의 관통력은 뛰어났다.

살은 손을 지났다. 반 이상 바닥을 뚫고 바닥에 박혀 들어갔다.

두 발에도 살을 박아 넣었다. 팔다리가 바닥에 고정되었다.

살과 뼈를 헤집는 고통이 심한지입에 피거품을 물고 있다.

피거품이 숨을 막는다. 여관 주인은 끅끅대며 한참을 괴로워했다.

고통은 지리멸렬하고 단순한 감정이다. 관람에 큰 즐거움은 없었다.

- 툭.

조금이라도 높이 들려 애쓰던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발버둥이 멈췄다. 방 안이 고요해졌다.

- 띠링!

[경험치가 149 올랐습니다.]

나는 추한 시체가 된 남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일단 한 놈을 죽였다. 하지만 뒷맛이 조금도 개운하지 않다.

말하자면, 이 녀석은 루비아를 죽인 놈들의 이너 서클도 아니다.

쓰레기 같은 놈이긴 하지만, 그 집단에서도 이용하고 버리는 피라미에 불과하다.

'허무하^.'

한참을 발버둥쳐서, 고직 여기에 도달했다는 거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나아가지도 못한다.

힘이 없기 때문에,

성벽 안으로 뛰어들 수는 없다.

망치와 석궁을 보낸 영주가 있는에라스트의 성벽으로도.

루비아를 죽게 만든 경비대가 있는유블람의 성벽으로도.

두 도시에 공통적으로 엮여있는네크론 신사회라는 조직에 대해서도, 어디서부터 찾아가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방 안을 뒤졌다. 얼마 되지 않는 돈을 챙겼다. 그 외에 건질 만한 물건은 나오지 않았다.

한구석에 놓여 있던 풀 플레이트메일밖에 없다.

- 철컥.

나는 갑옷을 입었다.

여관 주인을 죽이기 전.

갑옷이 어디에서 난 거냐고 여관주인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마음에 짚이는 게 있었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게 있으니까.

달그락거리며, 혼자서 각반을 끼고건틀렛을 끼고 투구를 썼다.

- 찰그락.

몸 전체가 가려졌다.

겉으로만 본다면 해골이라고는 알수 없을 정도였다.

그럴듯한 한 명의 기사와 같다.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이 옷을 입고 그녀와 함께 걸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 뀨뀨.! 뀨뀨뀨.!

혼자 산길을 걷는다. 2월이다.

이곳은 제국 남부다.

남부는 눈이 일찍 녹는다. 눈 내린 겨울 풍경이 금세 부옇게 없었던 것이 된다. 하지만 겨울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 저벅.

흙을 밟는다. 돌맹이를 밟는다.

눈 없는 산길을 걸어간다.

지금은 녹아 버린 눈 위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한다.

갓 사령술사가 된 여자와 있었던 일을 생각한다.

눈을 맞았던, 후두골 안쪽이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 달그락.

몇 번이고 생각했던 것처럼, 강해져야 한다. 위험에 노출되지 않으며 안정적으로 강해져야 한다. 방법은하나. 레벨을 올리는 것이다.

빠르게 레벨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은 인간 사냥이다.

하지만 아무렇게나 돌아다니는 건 곤란하다. 산길에 숨어 아무나 공격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다.

인간의 강함은 겉보기와 비례하지 않는다. 그들은 파격적인 존재다.

마물의 경우 한눈에 강함을 판단할 수 있다. 겉으로 보이는 판단은 대체로 정확하다. 고블린과 트롤, 오우거를 일렬로 놓아 보라. 마물의 강약은 보이는 그대로다.

하지만 인간은 개개인의 편차가 매우 크다. 겉보기로도 가늠할 수 없을 때가 많다. 기묘할 정도다.

겉으로는 약해 보이는 여자아이가,

터무니없는 힘을 내기도 한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어딘가가 왜곡되고, 뒤틀려 있다. 균일하지 않다.

바로잡을 방법은 모른다.

굳이 바로잡아야 할 필요도 전혀 느끼지 못한다.

다만 조심할 뿐.

만만해 보인다고 아무나 공격하단큰일이 난다는 이야기. 단숨에 사망의 골짜기에 던져진다.

무덤으로 다시 돌아가게 될 거다.

'던전으로 가야 해.'

그게 내 결론이다.

나는 던전으로 가고 있다.

얼핏 보면 이상한 짓이다. 던전은 준비된 인간들이 찾아온다. 호전적인 인간들이 구태여 찾아오는 곳이던 전이다.

그런 곳으로 가는 행위가 미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게 맞다.

던전으로 오는 인간들은, 그 강함을 측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험자의 강함은 그가 찾는 던전에 거의 정확하게 비례한다.

이를테면 조악하게 달그락거리는해골병사만 있는 곳에, 대마법對魔法 갑주를 입은 사자 기사단이나 재의 수도회가 가지는 않는다.

고블린 소굴을 토벌하는 데, 아쥬라의 마법사나 검주劍초들이 가지는 않는다.

불문율이랄 것도 없다.

당연한 일이다.

잡아 봤자 정말이지 아무 이득도 없는 곳에 가는 인간은 없다.

인간들은 자기와 맞는 수준의 던전에 들어간다.

F 랭크의 던전을 예로 들어 보자.

그곳에는 1레벨에서 15레벨 정도의 모험가들이 들어간다.

갓 모험을 선택한 자들이 들어간다. 그 이상의 인간이 들어가 봐야제대로 된 경험치를 얻을 수 없다.

- 달그락.

나는 깊은 산 속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가까운 던전들을 생각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던전이 하나 있다.

〈망령의 납골당〉.

첫 삶에서 삼 년 정도 머물렀던 던전이다.

에라스트 근처의 동굴 미로에서 삼년을 살았다.

빠져나온 뒤 정처 없이 걸었다.

짐승과 사람을 피해 돌아다니다가그곳에 도착했다. 왠지 모르겠지만 끌리는 장소였다. 들어가 보니 나와 같은 해골들이 가득했다.

내가 삼 년을 머물렀던 던전.

망령의 납골당, 이라는 이름만 보면 그럴싸하게 들린다. 하지만 사실, 실속은 전혀 없는 초라한 던전이다.

초보 모험가들이 연습용으로 거쳐 가는 곳.

일종의 담력 시험장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다. 아주 낮은 난이도를 가진 던전. 훔쳐갈 것도 없는 연습용에 불과하다.

그다지 흥분할 것도 없이 픽퍽 때려 부수면 되는 해골병사들로 구성된 던전이다.

나를 포함해서.

'거기서 수없이 부서졌지.'

모험가들의 연습용으로 몇 번이고 짓밟혀 부서졌다.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주가 지나면 다시 일어나곤 했다. 달그락거리며, 그리 넓지 않은 던전 안을 헤매던 기억이 아련하다.

기억을 되짚어갔다.

망량의 납골당은 제법 특기할 만한점이 있다.

안쪽에 트인 공간이 있는 것.

특수한 기관 장치가 있다. 돌 퍼즐을 맞춰서 석벽을 누르면, 서서히안쪽으로 향하는 문이 열린다. 그곳에 던전 보스가 있다.

'거기서 지내면 괜찮겠군.'

던전 보스가 있던 홀.

나는 그곳에 숨어 있을 생각이다.

기관 장치로 열리는 석벽 안에.

거기 숨어 지내면서, 던전에 들어온 인간들을 하나둘씩 끊어 먹을 생각이 다.

그러다 보면.

레벨 업이 되어 있을 거고.

낮은 레벨의 인간들을 죽여서 더이상 레벨 업이 되지 않을 때쯤, 다른 던전으로 이동하면 된다.

오래 머무를 곳은 아니다.

그 던전.

깊고 어두운 산속에 있다. 그림자몇 겹 드리운 좁은 동굴 입구.

안은 음침하다. 초라하다. 곳곳에 물웅덩이가 고여 있고, 뼈 잔해는 곳곳에 쌓였다.

'입구에 몇 갈래 길이 있었지.'

다만 메인 루트가 아닌 쪽은 금방 막힌다. 길을 잘못 들었다면, 그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는 곳. 재미는 없지만 공략은 쉽다.

그럴듯한 트랩도, 동굴을 지키는 룬도 없다. 약한 인간들이 즐겨 들어온다. 해골들을 부수고, 가벼운 여훙을 즐기는 곳.

던전 내부를 자세히 떠올리며 산길을 걸었다. 생각에 빠져 걷자 걷기가 훨씬 덜 지루했다.

- 철컥. 철컥.

한참을 걸었다. 쉼 없이 빠르게 걸어서일까. 플레이트 갑옷이 철컥거리는 소리가 제법 요란하다.

문득 의식해 보면, 내 걸음걸이가 상당히 빠르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쫓기듯 걷고 있다. 내 무력함에 쫓겨서 초조하게 걷고 있다.

'다 왔군.'

도착했다. 여기가 던전 앞.

- 구우우우.!

입구 주변은 매우 어두웠다. 마치,

던전의 짙은 어둠이 밖으로 흘러나온 것 같았다.

하지만.

속으로 쿡, 하고 실소했다.

이 던전의 핵심 방어 요소는 몬스터도 아니고, 미로도 아니다. 그냥 이런 음침한 곳에 던전에 있다는 사실 하나다. 겉으로 보기에 좀 으스하다는 것. 그게 전부다.

'분위기만 있지.'

나오는 몬스터는 약하고 미로는 간단하다. 웬만한 인간들은 그 사실을다 알고 있고.

'하지만.,

이제 내가 여기 들어간다. 내가 본격적으로 모험가 사냥에 개입한다면, 이 던전의 레벨이 조금 올라갈지도 모른다.

인간들이 제 동료를 하나둘 잃어갈 때, 던전에서 위화감을 느낄 때.

그때 이곳을 떠나면 된다.

[망령의 납골당]

[던전 랭크: F]

[적정 레벨: 卜 15]

[현재 레벨에서는 조금 어려울 수 있는 던전입니다.]

[적정 클리어 인원: 3? 4인]

'이게 무슨 말이지?'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하자.

허공에 기괴한 메시지가 떴다.

마치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은 메시지다. 이젠 어디 들어가는 것까지 띄워 주나.

문을 그대로 밀었다.

- 쿠구구궁.!

커다란 던전 입구가 열린다.

'여기서부턴 눈 감고도 훤하지.'

이 안에서 3년이나 살았다. 어차 피별 함정도 없지만.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 터벅. 터벅.

발소리가 던전 안에 울린다. 바닥은 평범한 돌. 바닥에 쏟아진 뼈 무더기 몇 개와 쏟아진 재가 있다. 잠시 재를 쳐다보고 앞으로 갔다.

세 개의 갈림길이 있다. 가장 오른쪽이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다른 곳에 간다고 해도 볼 것도 없다. 그냥 시간만 더 쓸 뿐.

오른쪽 길로 들어갔다. 나오는 계단을 오르자 주위가 탁 트였다.

'이런 곳이 있었지.'

꽤 큰 공터가 기다리고 있다. 공터는 고요하다.

- 타닥타닥.

화롯불이 안을 밝히고 있었다. 모험가들이 공통적으로 쉬어 가는 곳처럼 보인다.

'이제 보니 아예 놀이터였군.'

던전 안에 아예 모험가들의 캠프 비슷한 게 있다니. 던전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공간이었다.

공터를 거쳐 아래쪽으로 진입했다.

다 말라붙은 덩굴이 곳곳에 얽혀 있는 곳을 지났다.

덩굴을 가만히 바라본다.

덩굴 중에는 종종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들이 있다. 팔다리를 감고 피부를 녹이거나 사지를 뜯어 버리는 것들이 있다. 물론 이런 F급 던전에 그런 덩굴은 없다.

여기 있는 덩굴.

그것들은 그저 말라붙은.

어떤 것도 잡아당기거나 저지할 수없는.

죽은 지 오래된 덩굴이었다.

가장 약한 해골들이 달그락거리며 돌아다니는 이곳에 어울리는 덩굴이라고 생각했다.

모험가들이 고개를 숙여 지나가기가 귀찮았는지, 덩굴을 적당히 정리해 놓았다. 그 덕에 나도 들어가기가 수월했다.

- 달그락.

조금 걸어가자 소음이 났다.

'던전 지키는 녀석들인가?'

대화는 없다.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나니 모험가는 아닐 거다. 천천히 걸어갔다.

확인해 본다. 과연 해골이다. 일부러 기척을 내며 걸었다.

- 달그락!

해골이 뒤를 돌아본다.

한 손에 녹슨 칼을 들고, 다른 손에는 방패도 없이 허공을 허우적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온다.

'문지기 녀석인가.'

해골병사에게 이름은 없다.

그냥, '문 지키던 녀석'이 있었던 정도만 기억한다. 가장 먼저 부서지던 녀석. 그리고 다시 조립되던 녀석이다.

덧없고 가여웠다. 녀석은 진지하게 문을 막아선다. 하지만 거기에는 어떤 의미도 없다. 인간들은 그저 즐길 뿐이다. 녀석을 쓰러뜨리고, 다시쓰러뜨리고, 다시 쓰러트리는 것을.

나도 저 녀석과 같은 입장이었다.

말도 하지 못하고, 제대로 된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이 동굴 안을 떠도는 입장이었다.

목적도 지향도 없다. 욕망도 갖지 못한다. 그저 멍하니 걸어다니는, 어떤 움직이는 것에 불과하다.

23화 나른한 눈으로 동족을 잡아먹는 이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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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당하고 짓밟히고.

하나 둘 셋으로.

약간의 경험 치로 카운트되는.

언제나 타자의 입장에 놓여 있는 해골에 불과했다. 아무도 해골들의 마음이나 처지 같은 건 신경 써 주지 않았다.

- 달그락.

고개를 흔들어 씁쓸한 감상에서 벗어난다.

동굴 벽 한쪽.

공지처럼 적힌 커다란 글자들을 발견했다.

이 즈음에 도달했다면, 보지 않고지나치기는 어려운 글자들.

인간이 쓴 문구였다.

〈초보자 놀이터〉

〈두개골은 깨지 마시오〉

저 문장을 쓴 인간들의 의도에, 문득 괴로운 기분이 들었다.

해골은 두개골을 부수면 더 이상일어나지 못한다.

〈두개골은 깨지 마시오〉라는 말.

혼자서만 가지고 놀지 말고, 다음사람이 쓸 수 있도록 재활용을 거듭해 달라는 이야기다.

이 던전의 해골들은 인간에게, 유흥을 위한 공공재로 사용되고 있는것이다.

문구를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아직도 나에게 도달하지 못한, 천천히 달그락거리며 걸어오는 문지기 해골을 바라본다.

그의 시간은 느리다. 이 문지기는꽤 키가 작다. 여기에서 얼마나 낡아 있었는지 모른다.

어쨌건, 내가 처음 여기 왔을 때도 있었다.

적어도 나보다는 오래된 셈이다.

문지기 해골은 한 손에 녹슨 칼을 들고 있다. 곳곳에 균열이 일어나고, 부스러진 쇠붙이다.

귀를 가져다 대면, 무척 오랜 세월을 들려줄 것 같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저 녹슨 칼엔 날붙이로서의 어떤 효용도 없다.

가엾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연민과동정은 건방진 일이다. 내가 할 만한 일이 아니다.

- 달그락!

문지기 해골은 웅크리지 않는다.

침입자를 향해 계속 걸어온다.

쓰러지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덤비는 게 녀석.

인간의 첫 유희거리가 되는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다.

- 달그락!

어느새 다섯 걸음 안이다.

"우어. 우어어.

녀석이 괴상한 소리를 낸다. 칼을 치켜든다. 나에게 돌진한다.

투구를 벗었다. 하얀 내 해골이 드러난다.

정체를 밝힌다.

나는 여기에 인간들을 살해하러 왔다. 닥치는 대로 해골들을 부수러온 건 아니다.

다만.

이곳을 '도우러' 왔다고 말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던전의 마물들은 물론이거니와, 나와 같은 해골에게조차 그 리큰 선의는 가지고 있지 않다.

굳이 그들과 싸워야 한다면 그렇게못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일단은 한번 설득해 본다.

"진정하라고, 친구."

"우어 어?"

내 새하얀 두개골을 본 녀석이 조금 머뭇거린다. 하지만,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내게 다가온다.

'잘 알아듣지 못하는 건가.'

혹은 그냥 둔한 건지도.

던전의 해골들은 모두 말을 하지 못했다. 이곳에 있을 때의 나 역시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보고도 모르나.'

고개를 갸웃했다. 종종 같은 해골끼리 싸우기도 한다.

하지만 이 녀석까지? 문지기가 나를 공격한 적은 없었는데.

- 획!

녹슨 칼이 허공을 가른다. 녀석이 제법 열심이다. 목표는 나.

'제대로 휘두르는군.'

제법 살기를 띠고 있다.

텅 빈 동공 안쪽에서 미약하게, 파란 불빛이 빛나는 듯하다.

- 휘익!

하지만 느리다.

녀석의 걸음만큼이나 느리다. 리치는 짧다. 위력은 약하다.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

슬로우 모션을 보는 것 같다.

당연한 일이다.

녀석과 나의 민첩은 세 배 넘게 차이가 날 거다. 어떤 무기를 써도, 어떤 전략을 써도 이 녀석은 나를 이길 수 없다.

납골당에 있을 때.

나와 비슷한 수준이던 이 녀석은.

이젠 나를 단 한 대도 때릴 수가 없다.

녀석과 나 사이에는.

이제 도저히 남을 수 없는 격차가 있다.

이런 녀석이 다섯, 열이 덤벼든다고 해도 처리하는 건 간단하다.

녀석과 비슷한 시절이 있었다는 게거짓말처럼 느껴진다.

조금, 들떴다. 하지만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를 생각하자 기분이 다시 가라앉았다.

나를 보호하며 키워 준 서큐버스님의 죽음을 보고.

나를 깨워 준 인간 여자를 눈앞에서 벌써 몇 번이나 잃어 가며 여기에 도달한 것이다.

고작, 이 정도에.

- 획!

- 획!

몇 번 칼을 피하며 말을 걸어 보았다. 투구를 벗어, 나는 너를 해칠 생각이 없다고 말해 보았다. 하지만 말을 전혀 들어 먹지 않는다.

"우어.! 우어어.!"

괴상한 소리를 내며 덤벼들 뿐.

'어쩔 수 없나.'

내 몸을 내려다본다.

녀석이 보이는 저런 적대가 합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입고 있는 것은 인간과 같은 풀 플레이트 메일.

손에 든 것은 녹슬고 무딘 칼이 아니라 반짝거리는 인간의 무기.

게다가 녀석은 나를 처음 본다.

내 반가움은 기억에 의한 것.

이 문지기가 나를 대하는 태도에 거리가 있는 게 자연스럽긴 하다.

녀석이 다시 칼을 치켜든다.

"우어어.!"

험하게 다루고 싶지는 않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이런 녀석과 싸우지 않고 싶었다. 갑옷을 벗으면 조금 나을지도 모른다.

몸까지 같은 해골인 걸 알아보고 공격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건 루비아가 나에게 사 준 갑옷이다. 도시에 들어가서 갑옷부터 산 뒤 살해당한, 그 갑옷이다.

벗고 싶지 않았다.

문지기가 싸우고 싶어 한다면, 맞서 주는 편이 예의일지도 모른다.

- 덥석.

칼을 휘두르는 팔을 잡았다. 녀석이 마구 발버둥치지만, 몸은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약하다.'

가여운 수준이다.

녀석을 가지고 장난을 칠 생각은 없다. 그런 짓은 부끄럽다.

함께 박해받던 녀석들이다.

하지만 방해받고 싶지도 않았다.

손을 들었다. 문지기 해골의 녹슨 칼을 빼앗았다. 빼앗은 칼을 멀리 던져 버렸다.

- 쨍!

녹슨 칼이 돌바닥에 부딪힌다.

녀석을 뒤로 밀쳐서 넘어뜨렸다.

- 달그락!

뼈 무더기로 사이로 넘어진다. 소리가 요란하다. 하지만 다시 일어나내게 달려든다.

녹슨 칼을 잡는다.

칼이 무뎌지면 차라리 몽둥이를 드는 편이 좋다. 타격에 적합하게라도 되어 있으니까.

계속 덤벼든다.

'어찐다.'

귀찮아진다. 자꾸 칼을 휘둘러 오는 녀석의 한쪽 어깨뼈를 잡고 그대로 탈골시켰다. 팔을 뼈 잔해에 던졌다. 다리를 랬다.

- 털썩.

그제야 녀석이 바닥에 쓰러진다.

쓰러진다기보다, 빠진 제 팔과 다리를 주워 몸에 가져다 대려 한다.

한동안 저 상태일 것이다. 쉽게 결합되는 건 아니다. 한 번 분리되면, 합쳐지는 데 시간이 걸린다.

한동안 무력화에 성공한 것이다.

상대하며 다시 느꼈다. 해골병사는정말 약하기 그지없다.

나는 무기도 쓰지 않았다. 그냥 느긋하게 몇 번 피했다. 그리곤 팔을잡아서 빼고, 다리를 랬다.

쓰러진 문지기를 지나,

한 걸음을 걷는 순간.

- 띠링!

[경험치가 34 올랐습니다.]

[던전 공략을 시작합니다!]

'던전 공략?' 당황스러운 메시지.

그런 단어는 인간에게 어울린다.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지키기 위해서 왔다.

문지기를 무력화하자 던전 공략을 시작한다는 말이 떴다.

마치 내가 던전을 공략해야 자연스러운 무언가가 된 것 같은 느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던전 안으로 계속 걸어 들어갔다.

속옷만 입은 인간의 시체 여러 구를 발견했다. 피가 제법 낭자하다.

아직 완전히 말라붙지 않았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습.

인간들에게는, 방금 쓰러뜨린 문지기 같은 느려 터진 해골보다 이 광경이 훨씬 위협적일 거다.

'서로 싸웠나?'

인간들끼리 서로 싸우곤, 죽인 뒤가죽 갑옷까지 벗겨 간 것 같다.

납골당의 해골병사들은 인간을 벗기지 않는다.

유품을 가져가지 않는다. 이 던전에 있을 때는 나 역시 그랬다.

이건 인간의 소행이었다. 칼로 툭툭 시체를 뒤적였다. 품에는 위젯한 푼도 남아 있지 않다.

'살해한 놈이 다 털어 갔군.'

이런 짓을 벌였으니 아마 밖으로 도망쳤을 거다.

던전은 은폐되어 있다. 그런 만큼 던전을 분쟁의 장소로 쓰는 인간들도 있다.

아이템이 탐나는 동료의 뒤통수를 치기도 한다.

위험한 순간에, 마물과 맞닥뜨린파티원의 뒤를 공격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마 그런 식으로 죽은 자들은 아닐 거다.

F급 던전은.

뒤통수를 치기에도 별로 적합하지 않은 던전이니까.

애초에 살해가 목적이었거나, 그냥서로 싸우다 이런 꼴을 당한 거라고 생각된다. 던전 안에서 죽은 자들의 시체는 풍화된다.

나중에는 이 던전의 일부가 된다.

걸어 다니는 해골이 된다.

내가 여기에서 죽일 인간들도 그렇게 될 거다.

시체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안쪽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곳곳에 관이 세워져 있거나 눕혀져있다. 물론 관 안에서 제대로 안식을 취하는 해골은 없다.

해골들은 모두 이 던전의 알 수 없는 힘에 사로잡혀 있다.

침략자가 나타나기만 기다린다.

관 근처에서, 멍하니 돌아다니던 해골들이 이쪽을 바라본다.

잘 들어가지도 않을 것 같은, 녹슨 검을 든 다섯 해골.

방금 눕혀 준 문지기 해골보다 크게 나을 게 없는 녀석들이다.

"딱딱딱.

- 달그락- 달그락 놈들이 이를 부딪치며 어기적어기적 걸어온다.

내가 왜 그렇게 적대적으로 보이는 건지는 모르겠다.

전혀 싸우고 싶지 않은 놈들이다.

게다가, 이런 녀석들을 처리해 봐야보람도 보상도 없다.

하필 인간이 없는 시간에 들어온 것 같다. 시간대가 나쁘다.

인간 모험가들이 한창 진입하고 있었다면, 뒤를 멋지게 쳐 줄 수 있었을 텐데.

- 탈칵.

투구를 벗은 내 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내가 같은 해골임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녀석들은 아직도 나를 적대하는 눈빛이다.

이거 피곤한데.

"우어어.!"

놈들이 달그락거리며 돌진해 들어온다. 환대를 바란 것은 아니다. 그런 건 어떻게 받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들어오자마자, 이렇게 공격하다니. 그건 생각하지 못했다.

"나도 해골이라니까."

"우어어.! 우어.!"

숫자가 다섯인 만큼 제대로 포위라도 하고 덤벼들면 좋으련만, 일렬로달려드는 모습이 안타깝다.

- 휙!

휘두르는 검은 가볍게 피했다.

하나씩 밀어 던져 버렸다. 서로에게 겹쳐지며 녀석들이 허무하게 무너진다. 느리고 약하다.

- 달그락! 달그락!

- 우지끈! 투컥!

달려드는 놈들은 하나씩 무력화했다. 탈골시켜 잔해에 던져 놓았다.

나는 단순히 스탯만 높은 게 아니다. 녀석들을 어떻게 상대하면 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다섯 녀석을 전부 눕히자 무려 레벨까지 하나 올랐다.

워낙 낮은 레벨이라 그런 듯하다.

전혀 반갑지는 않다. 인간을 잡을 생각으로 들어왔지, 이런 녀석들과투닥거릴 생각은 없었으니까.

길을 찾는 건 쉬웠다. 낡은 덩굴들과 물웅덩이들을 지났다. 모두 눈에 익었다.

몇 년을 달그락거렸던 공간이다.

길을 잃으려 해도 그럴 수도 없다.

허름한 상자와, 곳곳이 부서진 돌로 된 탁자 같은 게 드문드문 발견된다.

하지만 모두 다 쓸어 가 버린 걸까. 삐걱거리며 열리는 상자들 안에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었다.

점점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던전을 지키는 녀석들이 자꾸 다가왔지만 나를 막을 수는 없다. 안쓰러울 정도로 약한 녀석들뿐.

어렵지 않게 던전을 걸어, 원하는위치에 도착했다.

'이쯤에 석벽이 있을 텐데.'

다음으로, 구석구석에 숨겨진 기관 장치를 차례로 작동시켜야 한다.

'뱀, 부엉이, 말.

표식을 찾아간다. 나뭇가지와 돌덩이를 치우자 금방 표식이 보였다.

기관 장치를 하나씩 작동시켰다.

기계 함정도 마법 함정도 없는 이 던전. 뭔가 제대로 된 장치라고 해봐야 이것 하나밖에 없다. 기억하기 어렵지는 않다.

- 구구구궁-

생각했던 대로 석벽이 열린다.

딱히 어려운 기관 장치도 아니다.

실패해도 바닥이 꺼진다거나, 돌이굴러온다거나 하는 일조차 없으니.

- 쿵!

석벽이 끝까지 위로 올라갔다.

- 띠링!

[F 급 기관 장치를 해제하셨습니다.]

[경험치 350이 주어집니다.]

약간의 경험치를 받는다. 레벨은 오르지 않았다. 방금 전에 레벨 업을 해서인 걸까.

그때 였다.

24화 나른한 눈으로 동족을 잡아먹는 이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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