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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삶에서 깨어나는 것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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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어가고 있다.

당신은 이 문장이 역설이라고 지적할지도 모른다.

- 달그락.

두 눈이 텅 빈 새하얀 해골.

살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새하얗게 풍화된 해골.

해골은 죽음 자체를 의미한다.

영구적인 정지. 끝난 것. 종착.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무의미.

- 딱딱.

'하지만.'

나는 이렇게 이도 부딪힐 수 있다.

완전히 멈춰 버린 것과는 거리가 멀다. 날짜도 셀 수 있다. 기억도 또렷하다.

아마 당신보다 좋을지 모른다.

천둥이 치는 날.

20년 전 얼치기 사령술사의 의식으로 인해 깨어났던 날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은 머릿속에 잘 기록되어 있다.

해골병사로 살아온 20년.

나는 무생물이 아니었다. 의지가 있고 감정이 있었다.

다 끝난 것.

멈춘 것.

딱딱거리고 달그락거리는 것.

죽은 것처럼 보여도.

나에겐 분명히 삶이 있었다.

- 달그락.

왼팔을 흔들어 본다.

움직이는 건 이렇게 확실하다.

볼 수도 있다. 들을 수도 있다.

감각은. 조금 무디다. 그건 어쩔 수 없이 인정한다.

하지만 지금도.

분명히 고통을 느끼고 있다.

살해당하는 던전의 주인.

서큐버스님을 보며 마음의 고통을 느끼고 있다.

어떤가.

이제 더 이상 첫 문장에 양해를 구하지 않아도 되겠는가?

'나는 죽어가고 있다.'

- 서거!

서큐버스님의 배에 깊숙이 칼이 박힌다.

비틀리며 성감이 빼내어 진다.

다음번은 심장일 터.

내 마음이 아플까 봐서일까?

그분은, 비명도 지르지 않고 조용히 죽어가고 있다.

'아직 스무 살밖에 안 됐는데.'

마음이 영 좋지 않다. 내가 지켜 주었어야 하는데.

죽어가고 있는 나는, 이 작은 던전을 지키는 해골병사다.

하지만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

토벌 당했다.

용사. 각인을 새긴 자들. 저들이 어디서 나온 자들인지는 모른다. 인간들 사이의 오랜 전쟁에서 나왔는지.

마왕의 강림 이후에 등장했는지 알지 못한다.

물론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

- 달그락.

'지켜야 해.'

나는 던전을 지키는 자.

마스터를 지키는 자.

임무를 다해야 한다.

부서진 몸을 움직였다.

이미 많은 뼈가 빠지거나 조각났다. 팔은 하나만 남았다. 두 다리는 모두 부러졌다.

하지만.

저런 모습을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다.

- 덥석.

바닥에 떨어진 정강이뼈.

부러진 반쪽짜리 뼈를 잡는다.

억지로 왼팔을 움직인다.

잡은 뼈를 세차게 던진다.

- 휘리릭!

뼈는 기세 좋게 날아갔다.

- 툭.

용사의 팔을 쳤다.

물론-

어떤 피해도 주지 못했다.

내 최후의 일격이란 건 고작 이런 수준이다.

근육질의 용사는 나를 비웃는 표정으로 흘끗 본다.

입 꼬리가 비뚜름히 올라간다.

"이런 쓰레기가!"

용사도 아닌 시종이 나에게 천천히 걸어온다.

시종조차도.

온몸에 미스릴로 된 풀 플레이트아머를 걸친 상태.

키는 2미터에 달하고 몸은 걸어 다니는 전차처럼 보인다.

- 번쩍!

시종은 온갖 마법이 중첩된 그테이터 실드를 위로 든다.

- 콰직!

두껍고 거대한 실드 아랫부분으로 나를 찍어 버린다.

- 빠각!

- 빠가각!

뼈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사실 그레이터 쉴드가 아니라-

녀석이 발로 밟고 힘을 주어도 나는 부서진다.

- 털썩.

피를 홀리며 쓰러진,

서큐버스님과 눈이 마주친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 콰직!

- 우득!

- 빠각!

그 와중에도 내 몸은 산산이 조각나고 있었다.

다 부서지고 있다. 이제 움직일 수 있는 부분이 없다.

완전한 소멸에 가까워진다.

- 데구르르.

몸은 다 부서졌다.

머리만 남아.

던전 바닥에 굴러 떨어진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일개 해골병사.

작은 던전에서 평화롭게 숨어 지내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 꿈은 부서졌다.

용사도 아닌, 그 시종의 발에 짓밟혀 이렇게 부서져 간다.

서큐버스님의 눈동자가 비어 간다.

피와 함께 생명이 빠져나간다.

마음이 불편하다.

지켜주지 못하는 것이 화가 난다.

- 데구르르르!

나는 머리를 굴렸다.

두개골밖에 남지 않은 몸으로 온힘을 다해 바닥에 굴렀다.

- 데구르르!

"어, 어엇!"

시종이 소리친다.

나는 그냥 부서져 굴러 떨어지는 게 아니다. 의지를 갖고 두개골이 굴러 간다는 걸 알아챘다.

- 광!

녀석이 실드로 던전 바닥을 친다.

하지만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성공이다.'

성공했다. 서큐버스님을 살해하는,

용사의 발치에 다가가는 데.

타격을 줄 가능성은 없다.

하지만 분했다.

이렇게 무시당해 온 삶이.

숨어 지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은 삶이.

마지막 소중한 것조차 눈앞에서 비참하게 빼앗기는 삶이.

그들에게는 삶으로조차 보이지 않더라도.

나에게는 하루하루의 소소한 기쁨이 있었다.

텅 빈 내 가슴에 온기를 지펴 주던 서큐버스님과의 소소한 삶이.

- 데구르르르!

뒤를 돌아보는 용사.

하지만 나는 이미 녀석의 아래에 있었다.

- 콱!

용사의 발뒤꿈치를 있는 힘을 다해 깨물었다.

최후의 발버둥은 내 마지막 권리.

- 콰득!

빛나는 용사.

모든 것을 받은 용사.

선택된 용사에게는 아무 의미 없이 부서질 조형물로,

칼질 한 번에 쓰러져 약간의 경험치가 될 조형물로 보이겠지만.

나와 같은 해골에게도 마지막까지 발악할 권리가 있다.

- 콱!

- 아드득!

두개골에 박힌 이빨 몇 개가 떨어져 나간 것 같다.

"아아아 아아악!"

용사가 비명을 지른다.

뒤꿈치에서 새빨간 피가 흐른다.

- 좌르르!

두개골에 붉은 피가 끼얹어진다.

축축하고 붉은 피가 세차게.

- 주르르.

끼얹어진 피가 흐른다.

'뭔가 이상한데?'

기묘한 위화감.

터무니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이 용사는.

던전의 온갖 트랩.

칼날 괴물들의 돌격.

서큐버스님의 최후 마법.

그것들 모두를 킥킥거리며 맨몸으로 받던 녀석이다.

'더 해 봐, 더 없어?'라며 비웃음을 홀리던 녀석인데.

고작 나 따위가 깨물었다고 피를 흘릴 리가 없다.

"이게!"

- 콰직!

- 콰직!

흥분한 용사가 발로 나를 마구 짓밟는다. 두개골밖에 남지 않은 몸이 부서진다.

의식이 완전히 사라져 간다.

- 우드득!

이번에야말로.

완전한 끝.

- 콰작! 콰작! 콰작!

아웃사이더 성향의 서큐버스가 오순도순 운영하는 던전.

이름 없는 해골병사는 그렇게 아무 의미도 없이, 던전 돌바닥에서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조건을 모두 만족시켰습니다.]

[플레이어를 변경합니다.]

[동화율이 낮아집니다.]

[97.3%->94.8%]

'서큐버스님.!' - 우르릉! 광!

시끄럽다. 머리가 울린다.

부서졌다. 최후를 맞았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했다. 이렇게 시끄러운 장소에 가게 되리라고는.

두개골이 부서질 때, 의식에 깜깜한 막이 내렸다.

모든 게 까맣게 되었다. 이제 조용할 거라고 상상했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는데.

- 우르르 롱!

하늘에서 진동이 울린다.

없던 두통이 오는 것 같다. 머리를 손으로 어루만졌다.

양손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는다.

매끈한 두개골이 만져진다. 딱딱한 손뼈와 두개골이 서로 부딪친다.

- 톡! 톡!

소리가 들린다. 다시 부딪쳐 본다.

- 톡! 톡!

다시 한 번.

- 톡! 톡!

이상하다.

무언가가 이상하다.

나는 손을 들었다. 올려다봤다. 손가락뼈 다섯 개가 그대로다.

구부려 본다. 다시 펴 본다. 모두 이상 없이 움직인다. 주먹도 쥐어진다.

- 탁. 탁.

손가락뼈를 서로 맞대어 본다. 새하얀 뼈가 서로 닿아 소리를 낸다.

- 달그락!

손으로 어깨를 만진다.

탈구됐던 왼 팔을 움직였다.

하나는 날아가고 하나는 탈구됐던 양팔이 제자리에 붙어 있다.

부러졌던 양쪽 다리를 들어 보았다. 부러진 흔적이 사라졌다. 발가락 다섯 개가 전부 움직이고 있다.

몸 전체에 힘을 주어 움직였다.

골반. 허벅지. 척추.

- 달그락! 달그락!

몸 전체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초라하고 조잡한 몸이다.

하지만 분명 익숙한 몸. 20년 동안 함께해 왔던 달그락거리는 몸.

- 달그락!

'분명 부서졌는데.'

두개골이 가루가 될 정도로 밟혀 부서졌다. 서큐버스님을 지키지 못하고 산산히 부서졌던 몸.

그 몸이 다시 느껴진다.

어느 것 하나 잘난 것 없던 뼈다귀 몸이다. 골격도 크지 않다. 그리 튼튼한 뼈도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나'다. 그것만은 분명히 느낄 수 있다.

하늘을 바라봤다.

나에게 너무 집중했다. 하지만 주변 상황도 심상치 않다.

- 번쩍! 번쩍!

벼락이 연거푸 친다. 새까만 하늘이 밝아진다.

푸른 벼락이 나무라도 갈랐는지, 우지끈! 하는 소리가 들린다.

- 우르릉! 광! 콰광!

천둥이 연달아 커다란 소리를 낸다. 벼락이 커다랬던 만큼 천둥도 시끄럽다.

몸이 울릴 정도다.

^ xz xz rz XZ VZ iI I I I I I-.

그리고.

폭우가 쏟아지고 있다.

- 위이이이잉! 위이잉!

바람이 요란하다. 땅을 다 파헤친다. 나뭇가지를 뜯어낸다.

파헤치고 뜯겨진 것들이 캄캄한 허공을 날아다닌다.

천천히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 몸이 다시 돌아온 것은 확인했다.

- 달그락.

이제 주위를 더듬는다.

- 탁. 타닥.

하늘은 뚫려 있다. 그러나 양옆이 좁다.

- 탁.

누워 있는 상태다. 머리를 위로 부딪쳐 보았다.

- 쿵!

두개골이 단단한 나무에 부딪힌다.

발도, 머리도 힘껏 뻗자 부딪힐 정도다.

세로로도 몸에 딱 맞춰져 있다. 나는 좁은 상자 안에 누워 있다.

관.

깨닫는다. 여기는 관이다. 나는 관속에 누워 있다. 뚜껑이 열려 있어 하늘이 보일 뿐이다.

파헤쳐진 무덤. 그 속의 관. 거기에 누워 있는 해골이 나다.

- 우르릉! 쾅!

- 쏴아.!

관을 덮어야 할 봉분은 거칠게 파헤쳐져 있었다. 사람의 손이라기 보다, 무언가. 자연적인 것에 휩쓸린 느낌이었다.

'이런 폭우라면 그럴 만하지.'

그 순간.

- 띠링!

주위의 환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경박한 소리가 느닷없이 머릿속에 울렸다. 두개골 속에서 거대한 종을 치듯 울린다.

정말 신경 쓰이는 소리다.

그리고.

눈앞에 반투명한 뭔가가 떴다.

새카만 밤이지만 또렷이 보인다.

[계승되었습니다.]

[이름 : 없음]

[해골병사 Lv.1(36)]

[체력-29 힘-23 민첩-18 지혜-9]

'이게 뭐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다시 살아났다.

허공에 상태창이 뜬다. 상태 창은 자기 자신의 정보를 표현해 준다.

일단 다른 건 그대로다.

체력. 힘. 민첩. 지혜.

20년 동안 쌓아 온 능력치.

그런데〈레벨〉이 이상하다.

죽기 전에 나는 Lv.36 해골병사였다. 능력치는 보다시피 간신히 20대를 넘는 수준.

별로 대단한 능력치는 아니었다.

해골은 기본적으로 인간보다 약하다. Lv.36 해골병사라고 해도, 허약하기 그지없다. 낮은 레벨의 인간 모험가에게도 비참하게 진다.

그러나.

상태 창에 따르면 나는 지금 Lv. 1해골병사.

원래대로라면.

고블린 어린이에게도 질 한 자리의 능력치를 갖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능력치는, 죽기 전의 것 그대로.

[체력-29 힘-23 민첩-:18 지혜-9]

- 달그락!

나는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된 거지?'

또 거슬리는 소리가 난다.

이 소리가 날 때면 자동으로 신경을 집중하게 된다.

[스킬을 확인하시겠습니까?]

[예/예]

스킬을 확인하겠냐는 질문.

'그래야지.' 나는 허공에 손을 가져갔다.

오른쪽에 있는 '예'라는 글자를 건드렸다.

- 띠링!

그러자 허공에 글자들이 떴다.

새카만 허공 속에서도 하나하나가 또렷이 보이는 글자들이.

- 되는 대로 휘두르기 Lv.8- 부실하게 막기 Lv.6- 어설프게 찌르기 Lv.4- 적당히 구덩이 파기 Lv.5- 무턱대고 앞으로 달려들기 Lv.4- 손에 잡히는 대로 던지기 Lv.6- 두개골 굴리기 Lv.Knew!)

스킬 목록이다. 스킬은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말한다.

할 수 있어도 스킬로 표기되지 않는 일들도 많다.

2화 삶에서 깨어나는 것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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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킬 목록은 대부분 익숙하다.

'다시 봐도 한심하군.'

두개골 굴리기가 새 스킬로 추가되었다. 원래 없던 스킬. 부서진 몸에서 두개골을 굴리는 일 따위, 20년 동안 해 본 적 없었으니까.

마지막 순간에 해낸 것이다.

죄책감과 분노로.

서큐버스님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린다. 다 꿈은 아니었다는 건가.

멍하니 감상에 잠겨 있던 순간.

- 우르르 롱! 광!

다시 한 번 천둥이 울린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소리를 들었다.

"망자亡者여!"

천둥에 섞여 누군가의 외침이 들린다.

여자의 목소리.

처음에는,

낯선 목소리라고 생각했다.

"망자여! 내가 그대를 깨웠습니다!

내 말 들리시나요?"

로브를 입은 여자가 보인다.

그녀는 파헤쳐진 내 무덤 근처에 서서 소리친다.

관 속에 누워 밖을 올려다봤다. 여자와 눈이 마주친다.

여자가 걸친 것은 사령술사들이 자주 입는 진회색 로브.

옷이 누군가에게 저렇게 어울리지 않기도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령술사들을 본 적 있다. 그들도 저런 로브를 입었다.

하지만.

여자가 입은 로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크기도 맞지 않는다. 걸친 모양새도 어색하기만 하다.

로브를 걸친다면.

손가락 사이로 사르르 흘러내리는 붉은 비단으로 된 로브가 어울릴 법한 여자다.

이런 밤에 봐도, 자연스럽게 그런 이미지가 떠오르는 여자였다.

"망자여! 콜록, 콜록."

여자가 기침을 한다.

어울리지 않는 진회색 로브는 온통 비에 젖었다. 굴곡진 몸매가 그대로 드러난다.

- 달그락.

나는 여자를 가만히 올려다봤다.

여자의 목소리와 얼굴. 묘하게 익숙하다. 처음 듣는 게 아니다. 처음 보는 게 아니다.

얼굴뿐만이 아니다.

'기억에 있다.'

이 상황이.

머리가 아파 오기 시작한다. 기억을 되짚어 간다.

'분명히.'

20년 전 얼치기 사령술사의 의식으로 인해 깨어났던 날.

그때의 무덤이고, 그때의 폭우.

그렇다면 이 여자가.

상황이 점점 더 분명해졌다.

꿀꺽.

여자가 내 음직임을 본다. 목울대 너머로 꿀꺽 침을 삼킨다.

그러더니 뒤에서 무언가를 끙끙대며 가지고 왔다.

"망자여! 이걸 타고 올라오세요!"

사다리.

기억이 점점 자세히 되살아난다.

이것마저 똑같다.

얕은 무덤이다. 사다리 같은 게 없어도 충분히 나갈 수 있다. 물론 있어서 나쁠 건 없다.

'꿈이라도 꾸는 건가.'

꿈이라면, 사실 해골병사로 살아왔던 지난 20년도 꿈같은 시간들이다.

악몽도 꿈이니까.

지루하고 질척한 악몽이었다. 마지막 3년을 제외한다면.

- 달그락.

사다리를 잡고 움직여 나왔다.

로브를 걸친 여자 앞에 섰다. 무덤 밖으로 나와 선 것이다.

밖이다.

밤의 묘지에는, 비와 그녀와 내가 있다.

- 쏴아아아.!

무덤 안에 있을 때보다.

비가 얼마나 거세게 오는지 더 분명하게 느껴졌다.

- 번쩍!

눈앞의 여자를 본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작다.

여자가 한 걸음 다가온다. 로브가 펄럭인다. 선이 고운 얼굴이 살짝 드러났다.

냉소적인 표정이 어울릴 만큼 딱떨어지는 이목구비지만, 표정에서 어딘지 어설픔이 잔뜩 묻어난다.

다시 비 때문에 시야가 흐려진다.

한 치 앞을 보기 힘든 밤이다.

작살 같은 폭우가 미친바람에 휘감겨 쏟아지고 있다.

1? I~I~I"-I~? ?

비가 뼈마디를 부술 듯 두드린다.

강물을 쏟아 붓는 것 같다.

두개골을 두드려 쏟아지는 빗물이 턱뼈를 타고 주르르 흘러내린다.

- 휘이잉!

바람에 휘감긴 빗방울이 목과 둥의 경추 마디마디로 파고든다.

- 두두두!

몸을 타고 빗물이 흐른다. 뼈를 두드린다. 소리들이 세차게 울려 퍼진다.

- 철퍽.

빗속에서 한 걸음을 내딛는다.

그럴 때마다 질척해진 땅속으로 발이 깊이 묻힌다.

- 우르릉! 쾅!

중간 중간 섬광이 하늘을 가른다.

그게 아니면, 한 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울 정도.

"마, 망자여.!"

여자가 뭔가 결심한 듯 주먹을 쥔다. 내게 소리친다. 하지만 나는 앞에 선 여자를 잠시 무시했다.

상황을 받아들이는 중이다.

눈앞에서, 서큐버스님이 죽어 가던 모습이 아직 선연하다.

몸이 부서지던 감각이 선명히 남아있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본다.

좀 더 적응할 필요가 있다.

- 삐그덕.

목과 함께 머릿속이 돌아간다.

분명하다.

'꿈이 아니다.'

해골병사는 꿈을 꾸지 않는다.

'죽은 것도 아니라면.'

여기는 처음 무덤에서 일어나던 그날. 확신은 더해져만 간다.

20년 전의 그날이 분명하다.

주위를 돌아본다.

폭우로 묘지가 훼손되고 있다. 비석이 쓰러진다. 봉분이 파헤쳐 진다.

심한 경우는.

아예 관이 둥둥 떠다니기도 했다.

내가 묻혀 있던 무덤은 딱 그걸 면한 정도.

내 무덤의 비석은 앞으로 쓰러져있다. 비석의 뒷면을 바라본다.

읽을 수 없었다. 딱히 내 이름이나 삶이 궁금한 것은 아니다.

한적한 01=산의 초라한 묘지.

대단한 인생이 아니었을 것이다.

20년 동안 해골병사로 살아가며 여러 가지를 알았다.

살아서 뛰어났던 녀석들.

그들은 해골이 되어서도 남들과 다르다. 처음부터 해골기사가 되고 마법사가 된다.

해골에도 급수가 있는 것이다.

우스운 일이지만 해골사제가 되는 경우도 있다.

나는 해골전사도, 해골기사도 되지못했다. 그저 낮은 능력치의 해골병사에 불과했다.

처음부터 그랬고,

20년 동안 쭉 그래 왔다. 살아서도 비슷했을 것이다.

별 볼일 없는 묘소. 초라한 묘지.

그나마 객사는 면했었나.

"저. 망자여! 으음. 여길 좀. 봐 주시겠어요?"

한참 다른 생각을 하고 있자니, 어울리지 않는 로브를 입은 여자가 내게 다시 소리친다.

어설프다.

아득한 기억이 살아온다. 아직 말도 못 했을 때의 기억.

나는 여자가 누구인지 안다.

'그때 그 녀석.'

기억은 확신이 된다. 그 여자다.

20년 전 -혹은 지금- 나를 처음에 무덤에서 꺼냈던 여자.

나는 상황을 거의 받아들였다.

'이건 분명히.'

과거로 돌아왔다.

그 결론밖에는 없다.

믿기 어려울 것은 없다. 크게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다. 움직이는 해골병사로 20년을 살아왔다.

어떻게 과거로 돌아왔냐는 의문을 가지다가, 일단 그건 잠시 접어 둔다. 어차피 이런 내 존재조차도 나는 납득하고 이해하지 못한다.

어떻게 듣고 볼 수 있는지도, 생각할 수 있는지도.

나는 일개 해골병사다.

세상은 내 이해와 지식을 까마득히 넘어서는 것들로 가득하다.

실은 그런 것들밖에 없다고 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과거로 돌아온 일.

이것도 그저 내가 알 수 없는 마법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무지는 편리하고 포기는 달콤하다.

그나저나.

'서큐버스님.'

과거로 돌아왔다면, 그분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분을 찾아야 하는데.

하지만 거기에서 생각이 멈췄다.

찾았다고 해서.

다시 지킬 수 있을까?

- 달그락.

쏟아지는 빗속에서 팔을 움직여 본다. 초라한 하얀 팔이 보인다. 평범한 인간 남자에게도 쉽게 꺾이고 부러지는 팔이다.

이 팔로, 다시 만났다고 그분을 지킬 수 있을까?

무언가를 바꿀 수 있을까.

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러다,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다시 의식한다. 그녀가 말을 걸어왔다.

"저. 망자님.?"

한눈에 봐도 이 녀석은 굉장히 긴장하고 있다. 뭐 어쩌라는 거냐는 느낌으로 여자를 바라봤다.

내 고개가 그녀를 향해 돌아가자,

여자가 세차게 소리친다.

"으흠. 제 이름은 루비아! 만나서 반갑습니다, 망자여! 그대를 내 복수의 초석으로 삼겠습니다!"

무언가 준비된 외침이다.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다. 나는 녀석의 복수 같은 데 조금도 관심이 없다.

내 복수도 하지 못하는 해골이다.

멋대로 날 초석으로 삼지 말아 주었으면 한다.

- 우르르릉!

여자의 외침과 함께 우레 소리가 울리고.

- 띠링!

경박한 소리가 머릿속에 울린다.

〈S급 시나리오, '레이 루비아'가 열립니다. 〉

'뭐라고?'

시나리오? 전혀 알 수 없는 이야기다. 낯선 글자를 치우고 싶었다. 손을 허공에 휘저었다.

글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레이 루비아〉라는 글자가 유독 반짝인다.

'뭐지?'

반짝이는 글자에 손이 닿았다.

머릿속에서 종이 울렸다.

- 띠링!

[이름 : 레이 루비아]

[사령술사 Lv.1]

[체력-6 힘-5 민첩-6 지혜-12]

[호감도 : 3]

- 루비 아는 자신이 깨운 해골에 약간의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본 스킬]

- 호감도를 올리면 개방됩니다.

[특전]

- 호감 도를 올리면 개방됩니다.

[칭호- 호감도를 올리면 개방됩니다.

'루비아라고?' 확인하라는 것처럼, 글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여자는 그런 나를 멍하니 바라본다.

- 쏴아아아.!

비를 맞으며 여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 달그락.

어깨를 으쑥했다.

여자의 능력치를 보니 참 초라해 보인다.

물론.

내가 처음 나왔을 때.

해골병사 Lv.1 때보다는 나을지도 모른다. 나는 대부분의 능력치가 한 자릿수였다.

하지만 쓸 만한 인간 남자의 평균능력치가 10 정도.

'높은 건 지혜 스탯 하나군.'

하지만 지혜 스탯은 활용도가 낮다. 마법에 관련된 거라고 들었다.

이 녀석이 마법사일 리도 없을 터.

여러모로 부족하다.

그나저나.

'어떻게 남들의 상태창 같은 걸 볼 수 있게 된 거지?'

서큐버스님과 3년을 지냈어도, 그분의 상태창을 본 적이 없다. 다른 인간이나 마물들도 마찬가지.

특별한 마법이 아니면, 자신의 레벨과 능력치는 자기만 알 수 있다.

"으, 으흐음.

여자가 젖은 입술을 달싹거린다.

"말은 역시 못 알아들으시는 거죠?

그래도 일단 성공이네. 내 편이 하나는 생긴 걸까.

루비 아는 눈물을 홀리며 혼자 감격하고 있다.

'정신이 이상한 여자인가?' 감상에 잠겨 있는 여자를 건드리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불필요한 오해를 조장하는 것은 더 꺼림칙한 일이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네 편이라니?"

굳이 따지는 건 아니다.

크게 반대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물어볼 수는 있다.

이를 딱딱거리며 발성을 해냈다.

발성은 어렵지 않았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의 내 목소리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해골 역시 말은 할 수 있다.

해골로서의 발성을 익힐 때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뿐이지.

"히곡!"

- 펄쩍!

루비아가 깜짝 놀라 뛰어올랐다.

왜 이렇게 놀라나.

"아아."

나는 다시 입을 열며 한 발짝 다가갔다.

- 터벅.

고개를 갸웃했다. 내 동작 하나하나가 그녀에게는 충격인 모양.

"히, 히익!"

- 터벅.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아, 아앗!"

루비아가 작게 소리를 지른다.

- 철적.

제 가슴을 부여잡고 뒤로 덜컥 넘어진다. 녀석의 로브가 진흙투성이가 되어 버렸다. 더 놀라게 하면 곤란할 것 같다.

일단 접근을 멈췄다. 한 손에 들어오지도 않는 가슴을 붙잡은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놀라지 좀 말고."

"해, 해, 해골이. 마, 말을 하다니요?"

말을 하는 게 그렇게 놀랍나.

20년 전.

나는 무덤에서 깨어나 사령 의식으로 해골병사가 되었다.

'바로 이 녀석 덕분인 거지.'

물론 그때는 이렇게 말을 하지는 못했다.

생각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이를 움직여야 소리를 낼 수 있는지, 전혀 몰랐으니.

과거의 기억이 머릿속에서 천천히 재생되기 시작한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 된다.

초보 사령술사인 여자.

루비아는 여기서 곧 참혹한 꼴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산산이 부서진다.

뼈가 부서져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게 된다.

낭떠러지 아래.

차가운 얼음 계곡으로.

거기서 부서진 뼈를 재생하는 데한참이 걸렸다.

차가운 얼음장 밑에 잠겨 달그락거리며 1년 동안 있어야 했다.

그곳에는 얻을 게 아무것도 없다.

대비해야 한다.

'곧 적이 나타난다.'

돌이켜 보면.

내가 지키지 못했던 것이, 서큐버스님뿐이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다.

3화 삶에서 깨어나는 것 (3)

***************************************************

레이 루비아.

나를 깨운 사령술사.

이 여자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루비 아에게 곧바로 말을 걸었다.

"따라오시오."

"따, 따라오라니요?"

20년 전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곧 산적 두 명이 나타난다.

'그때는 당했지.'

처음으로 해골을 일으켜 본 사령술사. 방금 일어난,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해골병사.

독 오른 고블린 한 마리도 제대로 못 당해 낼 조합이다.

인간 산적들을 상대로 뭘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사람도 해골도, 참혹하게 유린당하고 파괴당할 뿐.

'지금은 다를지도.'

나는 20년을 살았다.

시간을 거슬러 왔다.

Lv.36 해골병사의 힘을 갖고 있다.

강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워도.

훈련되지 않은 인간.

훈련되지 않은 산적 정도는 해치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시 모험을 하고 싶지는 않군.'

산적이라는 건 정규군이 아니다.

전투력이 균일하지 않다.

하지만 우습게 볼 수만은 없다. 그만큼 그 위험도는 각양각색이니.

'게다가 20년 전.'

이때의 정확한 정황은 기억나지 않는다. 어렴풋하다.

어느 정도의 적인지 모른다. 일단 숨어 있는 편이 좋을 것이다.

- 달그락.

나는 손을 들었다. 루비아에게 손짓을 했다.

"여자."

그녀는 말도 제대로 못 한다. 여전히 당황하는 기색이다. 그녀의 이름을 불러 보기로 한다.

정신이 조금 들지도 모른다.

"루비아."

그제야 여자가 몸을 흠칫한다.

"이리 오라니까."

- 딱딱.

이를 부딪친다. 여유가 없다.

내가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 산적들이 여기로 왔던 건.

얼마나 빨랐는지는 기억에 없다.

하지만 서둘러서 나쁠 건 없다.

"따, 따라. 오라고요?"

겁먹은 말투로 그녀가 입을 연다.

산적에게 겁먹은 게 아니다.

나에게 겁먹은 거다.

"산적들이 여기에 올 거다. 어서."

다시 루비아에게 손짓했다.

"말을. 할 줄 안다니. "

루비아가 아직도 멍하니 서서 중얼거렸다. 여자는 사소한 사항에 집착하고 있다.

나는 조금 차가운 태도로 여자에게 그 사실을 지적했다.

"움직이는 건 왜 안 놀라고?"

나는 움직이고 있다. 손짓을 한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말을 하는 것에만 놀라운 건 우스운 일이다. 하지만 뱉어 놓고 보니 실언이었다.

이미 그녀는 충분히 놀란 상태다.

방금 전, 내가 무덤에서 일어났을 때부터 놀란 기색이었으니.

실언은 얼버무리기로 했다.

"이쪽에 숨어. 시간이 별로 없다."

손가락뼈를 들었다. 묘지로 올라오는 길의 반대편을 가리켰다. 수풀이 무성한 쪽이었다.

루비아와 함께 숨을 생각이다.

산적들이 나타난다면 저쪽 길밖에 없다. 그들이 무덤에서 솟아날 리도 없다. 이런 날씨에 수풀에 숨어 있을 리도 없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이 있다.

- ㅘ?}?]??]■. I비가 거세다. 의문이 든다. 아무리 산적이라도, 이런 날씨에 누굴 덮친다는 말인가.

뭔가 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게 있을 거다.

이런 날씨에, 산적이 왜, 굳이?

"아. 아아.

루비아를 바라본다. 그녀는 아직 당황하고 있다.

수풀로 숨으라는 내 말을 듣지 않는다. 여자 개인이 멍청하거나 둔해서라고 하기 어렵다.

나는 그녀가 갓 일으킨 해골.

막 무덤에서 일어난 해골이, 여기에 숨으라는 둥 터무니없는 말들을 하고 있다.

'피하긴 해야 하는데.' 가만히 있다간 나도 괴로워진다.

멀찍이 떨어진 절벽을 바라본다.

20년 전 저 아래로 걷어차였다. 차가운 얼음 속에 일 년이 넘게 갇혀 있었다.

이번에는 다를지도 모르겠다.

'부서져서 그대로 죽을지도.'

- 달그락.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싫다. 일단은 살아남는다. 비장한 각오는 아니다.

새로 주어진 삶. 달그락거리는 해골 병사로서의 삶에 그리 큰 집착이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아무렇게나 내던질 정도로 완전히 무심하지도 않다.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다시 서큐버스님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처음으로 돌아왔다. 예전과 다른 결과를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세계는 인간의 것.

그러나.

아주 깊은 곳이라면.

숨어 사는 데 성공할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그분과 함께.

"산적이 왜 저를. 빼앗을 것도 없는데?"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루비아의 말이 나를 상념에서 깨운다.

아직도 멍한 얼굴이다. 바보 같은 질문이다. 답을 주는 건 쉽다.

'빼앗을 게 없다고?'

- 달그락.

나는 손가락을 들었다.

루비아가 걸친 옷을 가리켰다.

"로브."

손에 든 날붙이를 가리켰다.

"단검."

다음으로, 그녀 자체를 가리켰다.

"쾌락."

"그, 그게 무슨.!"

루비아가 당황한다.

당황할 것도 없는, 당연한 이야기에 저런 반응이라니. 여자의 형편없는 능력치를 떠올렸다.

거기에 더해 어리숙하다. 무언 가복 수까지 추구하는 것 같다.

그게 무덤에서 해골을 일으킨 목적인 것 같다.

'거추장스럽군.'

그냥 버리고 갈까.

두 명의 산적이 나타날 거다.

하지만 혼자 숨어도 된다. 무시하고 내 갈 길을 가도 좋다. 남은 이 여자가 어떻게 되건 알 바 아니다.

산적에게 어떤 꼴을 당하고, 어떻게 울부짖고, 어떻게 몸이 칼이 그어져도.

- 우드득.

나는 주먹을 쥐었다. 뼈가 서로 모아 져 소리를 낸다.

고개를 저었다.

'그건 싫군.'

서큐버스님의 최후가 겹친다.

괴로운 기억이 떠오른다.

게다가.

이 여자는.

나에게 처음으로 삶을 부여한 자.

- 덤석!

나는 루비아를 잡아끌었다.

그녀가 놀라서 크게 눈을 떴다.

- 훌쩍.

여자를 쉽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 당황한다.

"무, 무슨 힘이 대체 이렇게.!"

나는 레벨 1의 해골병사. 그러나20년 동안 쌓은 꽤 높은 근력을 가지고 있다. 허약한 인간 여자 하나 정도는 쉽게 들고 갈 수 있다.

"해, 해골병사가 이렇게 세다는 얘기는. 전혀 못 들어 봤는데.!"

어지간히 놀란 모양.

"적응하시오."

"흑!"

구박하긴 했지만.

사실 이 정도면 적응이 느리다고 타박하는 건 야박한 일.

말하는 해골을 접하고 당황하지 않을 사람은 드물다.

심지어 그 해골을 일으킨 네크로멘서라도.

그 순간.

"히히히 힘!"

말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들려오는 방향은 올라오는 길 쪽. 산적들이 나타날 거라고 생각한 바로 그 방향.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이런. 늦었나.'

시간을 너무 지체하기는 했다.

루비아를 조용히 안아 들었다.

"쉿!"

손가락뼈를 그녀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촉촉하게 젖은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다.

그녀를 안은 채 빠르게 수풀로 다가갔다. 긴 수풀 사이에 몸을 눕혀 숨겼다. 숨을 수 있을까.

"하아. 하아.

"조용히."

- 우르르!

- 콰광!

폭풍우가 친다.

우레 소리가 몸을 울린다. 시야는 어둡다. 땅은 질척하다.

저자들이 누구든, 어떤 이유에서 여자를 쫓든지.

수색을 포기하기 좋은 환경이다.

몸을 숨기기 좋다.

그렇게 날씨에 희망을 건다. 거리는 지나치게 가까우니까.

멀리 도망치기엔 늦었다.

- 달그락.

엎드린 채로 고개를 들었다. 가만히 앞을 바라봤다.

- 철픽! 철픽!

산길에서 푸른색 말이 나타난다.

말이 질척한 진흙 길을 걷는다. 지친 듯 울음소리에 피곤이 섞인다.

"히히 힘!"

- 철퍽! 철퍽!

곧 두 번째 말이 나타났다.

- 번쩍!

- 우르르! 광!

번개가 칠 때마다 정신을 집중했다. 놈들이 가진 무기와 외형을 살폈다. 처음으로 나타난 녀석. 그 녀석은 장전된 석궁을 들고 있었다.

석궁 두 개를 겹쳐 놓은 모양새의 개량형.

'저런 석궁을 본 적이 있지.'

개량형 석궁. 그 살은 석벽에 박힌다. 방패를 뚫는 위력이 있다.

두 번째로 나타난 남자.

뒤에 따라오던 자. 그는 거대한 망치를 등에 메고 있다.

망치의 무게 때문일까. 남자의 푸른 말은 유독 더 지쳐 보였다.

- 철퍽!

어깨에 망치를 멘 남자가 먼저 말에서 뛰어내렸다. 망치와 함께 뛰어내렸다. 그러나 사뿐한 기색이다.

- 철적!

석궁을 쥔 남자도 이어 뛰어내렸다. 두 남자의 옷차림은 비슷했다.

가죽에 철제 징이 박힌 옷.

'산적이. 아닌가?'

20년 전. 그때는 산적에게 당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많다.

잘 제련된 무기를 갖고 있다.

기능적인 갑주까지 챙겨 입었다.

그런 산적은 드물다. 말까지 타고 있다. 그건 더 이상 산적이 아니다.

무엇보다.

'분위기가 범상치 않은데.'

사냥꾼의 냄새가 난다. 사람을 사냥하는 사냥꾼. 직업적으로 사람을 썰어 본 느낌의 인간들이다.

예전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녀석들에게 당했다.

하지만 지금은, 해골병사로 20년을 굴렀던 경험을 갖고 있다.

색다른 것이 느껴진다.

엎드린 상태로 조용히 녀석들을 바라봤다.

- 사각! 사각!

풀숲을 헤치는 소리. 위치를 짐작해 본다. 소리만으로는 부족하다. 다음 번개를 기다린다.

- 번쩍!

번개가 칠 때마다 그 방향을 바라봤다. 다행히, 루비아는 조용히 있다.

- 쏴아아아.!

비가 더 거세진다.

- 사록! 사르록!

남자들은 몇 분 정도 더 수풀을 헤쳤다. 묘지를 둘러봤다. 그리곤 곧 인상을 찡그렸다.

"날씨가 너무 안 좋은데. 일단 돌아가지."

- 번쩍!

둘은 서로 눈짓을 교환했다. 다시말 위에 올라탔다.

"가자!"

놈들이 길 아래로 내려갔다. 점점 확실해진다. 놈들은 산적이 아니다.

- 우르르! 쾅!

번개에 이어 천둥이 울렸다. 땅에 엎드려 있는 루비아의 몸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살짝 고개를 들으며 물었다.

"된 걸까요?"

- 퍽!

루비아의 머리칼을 잡고 다시 아래로 처박았다.

"쉿."

"아, 아앗.!"

놈들이 돌아간 것은 연기다.

번개가 쳤을 때 놈들은 눈빛을 교환했다. 의미가 짐작이 가는 눈빛.

추격이다.

놈들은 이 근처에 사냥감이 있는걸 알고 왔다.

'지금쯤.'

놈들은 이곳을 겨냥하고 있다.

멀리서 석궁을 메긴 채.

버티는 게임이다. 루비아가 오래 버티면 목숨을 얻을 수 있다.

사냥꾼들이 오래 버티면, 글쎄. 많은 걸 얻을 수 있겠지.

인간들을 오래 관찰했다.

젊고 반반한 여자라는 건 여러모로 비싸게 먹히는 물건이다.

특히 이 여자는.

하얗고 부드러운 몸을 가진 데다,

비판적으로 봐도 인간들이 입을 모아 미인이라고 할 만한 얼굴.

- 우르릉!

한참이 지났다.

몇 번의 천둥이 더 칠 동안 계속 엎드려 있었다. 갈비뼈 사이로 축축한 진흙이 들어찼다.

미약한 불쾌감이 느껴졌다.

'여자가 힘들겠군.'

인간의 몸은 기다림과 잘 맞지 않는다.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찌뿌둥함을 이기지 못한다. 온도에도 약하다.

역시, 괴로워하는 게 느껴진다.

- 우르릉!

"엄살 피우지 마시오."

천둥에 숨어 일부러 매몰차게 말했다. 20년 전의 일이 어렴풋이 떠오론다. 그때는 의미를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이 여자는 저 두 사냥꾼에 의해 처참하게 강간당한 후 납치된다.

차갑고 축축한 시간이 흘렀다.

- 스르륵.

길가 수풀 속에서 사냥꾼들이 다시 나타났다.

'역시.,

비에 젖은 몸이 추워 보였다. 석궁을 든 남자는 한껏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망치를 든 남자는 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한참 동안 숨어서 이곳을 지켜보고 있었던 모습.

'이런 짓이 익숙한 놈들.'

어디서 온 자들일까. 목표는 뭘까.

어떻게 여기에 나타난 걸까.

스치고 지나가는 의문들.

저번 생에는 녀석들에게 곧바로 당해서 그런 걸 생각할 틈도 없었지만. 그때는 부딪히면 이길 가능성 따위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심스레 가능성을 고민해 본다.

- 쏴아아.

- 철퍽.

녀석들이 조금씩 다가왔다.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수색 작업이 이루어진다. 아까보다 훨씬 더 신중하다.

- 철퍽.

- 철퍽.

우리를 향해 가까이 오고 있다. 이를 악문 루비아의 몸이 크게 떨렸다.

4화 삶에서 깨어나는 것 (4)

***************************************************

'도망쳐야 하나.'

고민했다.

확신이 없었다.

충분히 빨리 달릴 수 있을까. 얼어붙어 있는 루비아는 말할 것도 없다. 녀석들이 원하는 것은 어차피 여자일 거다. 해골 같은 건 그냥 덤비면 부수는 정도.

아무래도 싸움은 무리.

석궁에 매겨진 살.

뾰족한 살은 단숨에 루비아의 심장을 꿰뚫을 만큼 날카롭다.

키 큰 남자가 든 거대한 망치.

높이서 내려치는 망치를 쉽사리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맨몸. 방패도 장검도 없다.

'돌아오자마자 위기라니.'

이대로 쓰러질지도 모른다. 사실 그렇게까지 분할 건 없다. 어둠 속에서 사라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나는 다시 태어났다.

하지만 사실 누군가 큰 실수를 한 것인지도 모른다.

영웅, 마왕들, 하다못해 유망한 마법사나 연금술사 같은 존재들이 다시 태어나야 의미가 있지 않을까.

나 같은 해골병사가 다시 태어났다고 해서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을까.

20년을 살았다. 하지만 식견은 좁고 경험은 부족하다.

똑같이 과거로 돌아온다면, 내가 아니라 어디 다른 훌륭한 녀석이 더 큰 변화를 일으킬 거다.

패배주의와 자기 부정은 언제나 단맛이 난다. 그것들이 자주 곱씹어지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갈비뼈 안쪽 텅 빈 어둠으로 상념을 삼켰다. 가만히 몸을 굳혔다.

엉뚱한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녀석들은 점점 더 거리를 좁혀 온다.

오들오들 떠는 루비아의 팽팽한 긴장이 느껴졌다.

- 살락.

10미터.

- 사락.

7미터. 5미터. 바로 앞의 바위까지 놈들이 도달했다.

그 순간.

- 히히이이잉!

갑자기 사냥꾼들의 말이 울기 시작했다. 어딘가 아픈 걸까.

울음소리가 부자연스럽다.

사냥꾼들이 뒤를 돌아봤다. 서로 손짓을 교환했다.

놈들의 인상이 찌푸려진다. 묶어 놓은 말들을 향해 돌아선다.

'말들이 걱정되는 건가.'

놈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구슬푸게 우는 말들을 바라봤다.

블루 마일로.

사냥꾼들이 타고 온 말의 종류다.

종종 보던 말이다.

저 작고 푸른 말들은 산을 잘 오르지만, 다른 말보다 체온 변화에 무척 민감하다.

이렇게 오래 비를 맞혀 놓으면 몸살로 죽을지도 모른다.

'말 가격을 생각해라.'

놈들이 저 비싼 말의 가격을 생각하길 바랐다. 가 버리라고 기원했다.

- 푸슛! 퍽!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는 있었다. 석궁 살이 날아오는 모습이 언뜻 보였으니까. 하지만 막는 건 무리였다.

너무 빨랐다.

날아오는 소리와, 루비아에게 살이 박히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끄혹!"

루비아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를 바라봤다. 살은 로브로 싸인 어깨에 반 이상 파고 들어가 있었다.

강철이 덧씌워진 석궁 살에 뼈까지 부러진 모양.

"아, 아흐웃!"

부러진 뼈가 신경을 마구 찌르는 걸까. 루비아가 비명을 지른다. 어깨에서 마구 피를 흘렸다.

진창 위를 데굴데굴 뒹굴었다.

진회색 로브가 전부 엉망이 된다.

그때 였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목소리가 욕망으로 번들거린다.

"호오? 어디로 가 버리셨나 했더니여기에 숨어 계셨나? 응?"

"시, 싫어! 싫어! 누, 누구야!"

루비아가 소리를 지른다.

싫다고 외친다. 뭐가 싫다고 그러는 건지는 알기 어렵다.

그저, 본능적으로 저 목소리에서 혐오감을 느껴서인지도 모른다.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음침하게 깔린다.

"누구긴, 귀여운 예쁜이 잡아먹으러 온 저숭사자들이지. 영주님이 기다리고 계시거든? 하지만 곱게 모셔갈 필요는 없다고. 목만 가져가면 되니까."

영주라면.

인간의 우두머리들이다. 영주가 왜 이런 여자 아이를 쫓는 거지?

"그자는 영주가 아니야. 내, 내가정당한 계승자(JA마이너IzA마이너Varisa)다!"

루비아는 알 수 없는 말을 내뱉는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앗!"

손에 쥔 단검을 들고 기합을 넣는다. 그 모습을 석궁을 쏜 남자가 바라본다.

"킥 킥킥.

비웃음이 허공에 울린다.

"그래? 그럼 정당한 영주님 맛 좀볼까? 얼마나 우릴 즐겁게 해 줄지 기대되는 걸?"

남자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온다.

나에게는 관심도 없다.

'못 알아보는 건가.'

마물, 해골병사가 바로 곁에 있다.

한데 놈은 나를 공격하지 않는다.

연도를 생각했다.

지금이라면.

16명의 마왕들이 본격적으로 강림하기 전이다.

수천, 수만의 마족이 쏟아져 나와,

마계 魔界를 열기 전.

하지만.

패권을 쥔 인간에 의해 세계의 구석구석에 숨어 있기는 하더라도.

걸어 다니는 해골들을,

나와 같은 마물들을 찾는 건 지금도 어렵지 않다.

깊은 산과 사막. 지하 속에는 수많은 던전이 있기도 하고.

'정말 끝까지 나를 몰라볼까.'

수풀 속.

사냥감인 여자의 옆에 누워 있는 하얀 해골.

그냥 뼈다귀가 엎어져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

언제든 나를 공격할 수 있다. 일어나야 한다. 지금 싸워야 한다.

하지만 늦었다.

루비아가 더 빨리 움직였다.

- 팟!

루비아는 진창에 발을 내디딘다.

석궁을 쏜 놈을 향해 무작정 돌진한다.

"으아 아앗!"

비명 같은 기합을 내지른다.

미친 거 아닌가 싶었지만, 상대는 석궁을 들었다.

사출 무기를 든 상대를 향해 간격을 좁히는 일.

나름대로의 일리는 있다.

- 픽!

"끄, 끄악! 끄아악!"

- 픽! 퍽! 퍽!

그 가벼운 일리는 폭력 앞에 휴지처럼 구겨진다. 석궁을 든 남자는 루비아의 단검을 가볍게 피했다.

한 손으로 루비아의 머리채를 잡고, 주먹으로 얼굴을 가격한다.

- 픽!

"뭐 이런 장난감을 가지고 달려들 드시나? 응?"

"끄, 끄히헛!"

- 퍽!

발을 쭉 뻗어 루비아의 아랫배를 세차게 가격했다.

- 퍼걱!

"우우 읍!"

"아까는 기세 좋게 달려들더니, 내장 좀 내려앉은 것 가지고 왜 이래?

그래서 계승자가 되겠어?"

가격이 계속된다.

- 달그락.

나는 수풀에서 일어났다.

무덤에서 일으켜 준 네크로멘서에 대한 친근감일까. 여기서 혼자 도망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 꽉.

작은 돌을 잡았다.

'타깃은 둘.'

당장 루비아를 때리는 놈.

뒤쪽에서 해머를 들고 느릿하게 다가오고 있을 놈.

어느 쪽도 만만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쪽을 노린다.

- 철퍽!

루비아를 잡고 주먹질을 하는 녀석을 밀쳤다.

머리를 겨누고 돌을 내리찍었다.

사위가 어둡다.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 퍼적!

"아악!"

놈의 낮은 비명이 들린다.

맞기는 했나.

물론 한 번으로는 부족하다. 비명 소리도 작다. 다시 내리친다.

- 챙!

이런.

이번에는 타격감이 좋지 않다.

징이 박힌 부위를 맞은 것 같다.

놈은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다.

- 덤석.

놈의 손을 잡았다. 새카만 암흑 속에서 두 손이 얽힌다.

피와 살이 붙은 손.

하얀 뼈로 된 손.

뼈로 손가락을 얽어 짓눌렀다.

- 우드득!

힘은 내가 살짝 더 우위.

억지로 꺾어 누른 녀석의 손을 노린다. 돌로 내리찍었다.

- 퍽!

"아악! 이런 씨발!"

번개가 친다. 녀석이 허리춤에 손을 가져간다. 허리춤에 걸린 곤봉.

'잡기 전에.'

먼저 찍어야 한다.

돌을 꽉 잡고 머리를 노린다.

놈의 두개골을 깨기 위해 돌을 세차게 내리찍었다.

- 파가 앗!

시원하게 두개골 깨지는 소리가 났다. 의식이 흐려진다.

세계가 부서진다.

깨진 것은 내 두개골이었다.

"난데없이 사령 술이냐?"

- 파가!

- 파가앗!

- 과지 직!

거대한 해머가 내 뼈를 아작하며 박살내는 게 느껴졌다. 두개골을, 팔을, 다리를, 척추를 박살낸다.

의식이 점점 멀어져 갔다.

'당한. 건가.'

졌다. 죽었다. 짓밟혔다.

또 다시 지키지 못했다.

"뜻. 잘 부서지지도 않네."

석궁의 목소리는 아니다. 더 낮고 굵은, 폭력적인 목소리다.

'해머를 들었던.,

- 우르릉! 광!

번개가 칠 때.

석궁을 든 놈을 노렸다.

동시에.

해머를 든 녀석이 뒤에서 내 머리를 조준했다. 제대로 한 방 날린 거다. 상황이 정리된다.

- 콰직!

여러 가지 의문이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간다.

말을 해서 좀 놀라게 할 걸 그랬나? 20년 전, 그때는 어떤 식으로 살아남았던 거지? 가만히 움직이다가 몇 대 맞고 낭떠러지로 떨어졌던 것 같은데.

- 콰직!

지금은 두개골이 빠개져 버렸군.

전보다 더 안 좋은 결말인가.

"병신같이 계집이나 패다가 해골한테 습격을 당하나. 한심한 놈."

"이, 씨발. 해골이 뭐 이리 힘 이세? 진짜 죽을 뻔했잖아!! 무슨 리치가 소환한 해골인 줄 알겠네. 이런 년이 네크로멘시를 해 봤자 흐물흐물한 해골 아니야?"

"음. 타격감이 좀 이상하긴 해.

아무래도 이년 수준에서 일으킨 해골은 아닌 것 같은데. 이 산의 몬스터인가? 제대로 얘기를 안 해 준 여관 주인을 족쳐야겠어. 위험할 뻔했다."

"젠장. 이년 때문에 어깨뼈가 빠졌잖아!"

- 퍽! 퍽! 퍽!

"히, 힉, 끄, 끄흐! 읍, 으힘, 끼헉!"

"야, 그만 때려. 상품 가치 떨어트리지 마라."

"죽여서 데려 가도 1세이론이야."

"그래? 뭐, 시식은 나부터 하지."

눈앞이 까맣게 변한다. 의식이 완전히 빠져 나갔다.

여자의 절규 섞인 신음도, 놈들의 뒷말도 멀어져 간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사망 기록을 추가하시겠습니까?

Y/N]

- 번쩍! 번쩍!

벼락이 연거푸 친다.

- 우르릉! 쾅! 콰광!

천둥이 굉음을 낸다. 벼락이 커다랬던 만큼 천둥소리도 크다. 폭우가 내리는 한밤이다.

- 위이이이잉! 위이잉!

바람은 땅을 다 파헤치고 뒤집어놓을 정도로 요란하다.

나뭇가지들이 뜯겨 져 허공에 날아다니고 있었다.

- 달그락!

몸을 다시 움직여 본다.

'죽은 게 아니었나?' 분명히 망치에 두개골이 몇 번이나 박살났다.

두개골을 만져 본다.

손을 들어서.

팔과 손 없이는 무엇을 만질 수 없다. 되돌아왔다.

조각난 몸이 다시 그대로다. 터무니없는 현실이 강제된다.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봤다.

보이지 않았다. 꽉 막힌 관. 나는 그 속에 누워 있다. 뚜껑이 열려 있어 하늘이 보일 뿐이다.

파헤쳐진 무덤. 그 속의 관.

거기에 누워 있는 해골이.

- 띠랑!

[계승되었습니다.]

[이름: 없음]

[해골병사 Lv.1(36)]

[체력-29 힘-23 민첩-18 지혜-9]

[계승된 이후 첫 번째 죽음을 달성하셨습니다.]

['사망 기념관'이 열렸습니다!]

[사망기념관]

1. 사령술사를 위하여.

최후의 순간, 당신은 한 사령술사를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사령술사와의 관계에서 기본 호감도 20을 얻고 시작합니다.

2. 둔기는 위험해.

둔기에 머리가 부서져서 죽었습니다. 모든 둔기에 대한 물리 저항이40 오른 상태에서 시작합니다.

[이번 회자에 적용할 특전을 선택해 주십시오.]

1. 모든 사령술사와의 호감도 플러스20.

2. 둔기 류 물리 저항 플러스40

또다시 낯선 글자들이 나타난다.

나를 희롱하는 듯한 메시지들.

내게 이 폭우와 자세는 익숙하다.

오래된 것도 아니다.

한 시간 전에 취하고 있던 자세.

한 시간 전의 폭우 그대로다.

- 우르르릉! 쾅!

천둥이 울렸다. 천둥과 함께,

"마, 망자亡者여!"

진회색 로브를 입은 여자가 파헤쳐진 무덤 근처에 서서 소리친다.

"내가 그대를 깨웠습니다! 내 말 들리시나요?"

더 이상 낯설지 않은 목소리. 내려다보는 여자와 눈이 마주친다.

- 달그닥.

움찔했다.

천둥소리가 아니라, 여자의 존재에 움찔한다.

'루비아.'

분명히 그런 이름이었다. 해골병사로 살아온 이십 년. 나는 세상의 삼류 조연이었다.

놀라게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항상 놀라고 휩쓸리는 존재였다.

그러나 지금처럼 믿어지지 않는 상황에 처한 적은 없었다.

일어서는 것조차 잊고 여자를 멍하니 바라봤다.

5화 삶에서 깨어나는 것 (5)

***************************************************

빨간 드레스라도 입고 있는 편이 어울릴 만한 젊은 여자.

로브에 가려진 풍성한 머리카락.

보드라운 갈색의 눈동자.

"망자여! 콜록, 콜록."

한 시간 전에 들었던 기침.

비에 젖어 굴곡진 몸매가 드러나는 회색 로브.

'다시 돌아왔다고?'

시간에 갇혀 있는 걸까.

어디 꿈속 빗길에라도 미끄러져 깊숙한 곳으로 굴러멸어진 걸까.

캄캄한 안식도 얻지 못한다는 걸까. 하지만, 그런 불안보다도 먼저 반가움을 느꼈다.

- 달그락.

몸을 일으켰다. 한 시간 전보다 더욱 친숙하게 보이는 여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여자가 침을 꿀꺽 삼킨다.

입을 열었다.

"사다리는 가지고 올 필요 없소."

"아악!"

- 펄쩍!

여자가 뒤로 놀라 주저앉는다. 놀라게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속이고 싶지도 않다.

어쨌건 한 번은 놀라야 하는 일.

손바닥뼈로 흙을 짚었다.

- 철퍽.

흙물이 마구 홀로 들어와, 질척한관 바닥을 발로 디뎠다. 일은 무덤을 올라왔다. 간단한 일이다.

1? I~I? I??!

어두운 한밤. 장대 같은 폭우가 하늘에서 쏟아진다.

다시 한 번 갈비뼈 사이사이로 비를 맞아 낸다.

빗방울은 악기 건반처럼 뼈 사이사이를 두드린다. 서로 다른 소리들이 타닥타닥 울려 퍼진다.

- 철픽.

뒤로 넘어진 사령술사 루비아를 바라봤다.

"제, 제 이름은 루비아!"

이젠 내가 그녀를 내려다본다.

"흠! 만나서 반갑습니다, 망자여!"

여자를 계속 가만히 바라봤다. 무슨 복수 타령을 했던 것 같은데.

"그대를 내 복수의 초석으로 삼겠습니다!"

'똑같다.' 한 시간 전과 같다. 반복이다.

- 우르르 롱!

〈S급 시나리오, '레이 루비아'가 진행 중입니다. 〉뭐가 S급이라는 건지, 시나리오라는 게 뭔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레이 루비아〉라는 글자가 반짝이는 것까지 동일하다.

그녀의 이름이었지.

반짝이는 글자에 손을 가져다 댔다. 전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 띠링!

어김없이 효과음이 울렸다.

곧바로 새 글자들이 떴다.

[이름: 레이 루비아]

[사령술사 Lv.1]

[체력-6 힘-5 민첩-6 지혜-12]

[호감도: 3]

- 루비아는 자신이 깨운 해골에 약간의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본 스킬]

- 호감도를 올리면 개방됩니다.

[특전]

- 호감도를 올리면 개방됩니다.

- 호감도를 올리면 개방됩니다.

확인을 마치자 글자는 사라졌다.

나는 몇 번 달그락거린 뒤 천천히 상황을 받아들였다.

'한 시간을 못 살아남았구나.' 나는 문득, 상념에 잠겼다.

서큐버스님을 지키지 못했다.

용사에게 산산이 부서졌다.

죽고 난 뒤 20년 전으로 돌아갔다.

루비아라는 인간을 만났다. 나를 무덤에서 일으켰던 여자. 하지만 그 여자도 지키지 못했다.

해골병사 Lv.36.

20년 동안 힘을 쌓아 왔다. 하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방금 전 내가 보인 모습.

루비아를 지켜 주지 못했던 모습이 떠오른다. 거짓말이라고 하고 싶을 정도로 무력했다.

수풀 속에 어설프게 숨던 장면. 망치에 부서지던 장면. 눈을 가려도 보일 정도로 생생하다.

그게 현실이다.

'나는 약하다.'

해골 병사는 몬스터 중에 가장 약하다. 마물의 서열에서도 최하위. 생존력만은 제법.

그러나 나머지는 비참할 정도다.

"해, 해, 해골이. 마, 말을.!"

루비아가 내게 말을 건다. 아까보다 더 놀란 모습이다. 보는 이가 민망할 정도로 놀란 모습.

하지만 나는 그렇게 놀랄 만한 존재가 아니다.

당신이 죽는 걸 무력하게 볼 수밖에 없었던 해골에 불과하다고 토로하고 싶은 걸 참는다.

아직 나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현실이다.

놀라는 루비아를 보며 고민했다.

'호감도. 그걸 올리면 저런 모습을 안 보일지도 모르겠군.'

나를 조금 덜 부담스러워 할지도 모른다. 내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들어 줄지도 모른다.

[이번 회자에 적용할 특전을 선택해 주십시오.]

1. 모든 사령술사와의 호감도 플러스20.

2. 둔기 류 물리 저항 플러스40.

아직도 눈앞에 떠 있는 이 창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녀가 내 말을 잘 따라 준다고 해도, 여기서 살아남을 확률은 매우 희박하다.

한 시간 전에도.

그녀가 내 말을 듣지 않아서 죽은 게 아니다.

처음 보는 내 말에 따라, 수풀 속에 얌전히 숨어 주었다.

문제는 나에게 있다. 눈앞에 떠 있는 글자를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이번 회자에 적용할 특전을 선택해 주십시오.]

1. 모든 사령술사와의 호감도 플러스20.

2. 둔기 류 물리 저항 플러스40.

알 수 없는 창.

하지만 고민할 시간은 없다. 위협은 곧 닥쳐온다.

'둔기 류 저항.'

그걸 택해야 한다.

굉장한 이야기다. 둔기 저항을 40씩이나 올린다니. 해골병사의 약점은 기본적으로 둔 기류다.

- 달그락.

몸을 내려다본다. 해골에게 화살은 그리 위협적이지 않다. 쏘아도 지나가고 만다.

칼도 그리 두렵지 않다. 흘릴 피도,

쏟을 내장도 없으니까.

나를 잡으려면 둔기가 제격이다.

뭉툭한 망치로 몸을 부수고, 두개골을 부수면 된다.

물론.

협조해 줄 생각은 없다.

'2번.'

루비아를 넘어진 채 내버려 둔다.

나는 2번을 선택했다.

[사망 기념관 2번 특전. 둔기 류 물리 저항 플러스40이 적용됩니다!]

글자가 눈앞에서 연기로 변한다.

'놀라운데.'

처음 겪는 경험이다.

- 스르록!

연기가 움직인다. 내 몸 구석구석에 스며든다.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묘하게 안전해 지는 느낌.

[둔기 류 물리 저항이 40 올랐습니다!]

이쪽이 타당하다.

나는 호감도 20의 선택지를 망설임 없이 버린다.

지켜 줄 수 없는 여자의 호감을 사는 건 어떤 의미도 없다.

- 달그락.

내게 놀라, 진창에 넘어진 루비아.

못 일어나고 있는 그녀를 본다.

허리에 찬 작은 날붙이가 반짝인다. 하얀 뼈로 된 손을 내밀었다.

"단검을 주시오."

"아.

루비아가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리에 찬 단검을 얌전히 내게 내어 준다.

무방비하다면 꽤 무방비 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호감도를 올린 것도 아닌데, 가진 유일한 무기를 그대로 내어 준다. 자기가 일으켜 세운 해골이라 신뢰하는 걸까.

"고맙소."

- 덤석.

그 신뢰를 받아 든다. 작은 단검에 불과하지만 신뢰는 무겁다.

이 날붙이로 녀석들의 목숨을 끊어 놓아야 한다. 집중하자.

건네준 단검은 날카로웠다.

무덤에 굴러다니는 돌보다 훨씬 좋은 무기. 해 볼 만할 거다.

"저쪽에 숨어 있으시오."

이를 딱딱거리며 루비아에게 말을 걸었다.

여자가 아직도 무척 의아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젖은 입술이 떨린다.

"왜, 왜죠?"

"인간 사냥꾼들이 올 거요. 날 믿고 피해 있으시오."

"그걸. 어, 어떻게 알아요?"

루비아가 더듬으면서도 말을 끝까지 잇는다.

"그냥."

대충 대꾸했다. 온통 젖어 있는 그녀를 슬쩍 바라봤다.

나를 무덤에서 깨워 준 여자.

억지로 깨워 졌다고 할 수도 있다.

해골병사로서의 20년은, 마지막 3년을 제외하면 쓰고 건조하기만 했으니까.

그래도 그녀를 살리고 싶었다.

이대로 놓고 도망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내 삶의 첫 단추.

여기서부터 바꿔 보고 싶다.

고작 산적 두 명.

그들에게 여자 하나 지키지 못한다면, 용사들에게 서큐버스님을 지킬 수 있을 리가 없다.

인과도 논리도 전혀 맞지 않지만,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내 말에 뒤늦게 반응한다.

"그, 그냥이라니.

그때 였다.

- 히히 히힝!

다시 한 번 말 울음소리가 들려 온다. 푸른 종, 마일로의 울음소리가.

놈들이다.

"빨리!"

루비아에게 소리쳤다. 건너 수풀 쪽을 가리켰다.

단검을 꽉 쥐었다. 근처를 둘러보았다. 폭우에 휩쓸려 밖으로 나온 관이 있다.

'안식을 방해해서 미안하지만.'

- 획!

안에 든 유골을 멀리 던졌다.

빈 관 근처에 누웠다. 단검을 쥔 손은 관 아래에 숨긴다.

관에서 빠져나온 해골인 것처럼 가장한 것이다.

- 번쩍!

"히히히!"

번개가 쳤다.

산길에서 푸른 말이 나타난다. 시야는 어둡고 땅은 질척하다.

- 우르릉!

개량된 석궁을 들고 있는 녀석. 그가 내 위로 지나가길 기다린다.

- 철퍽.

석궁을 쥔 녀석이 방금 말에서 뛰어 내렸다.

- 철퍽.

- 철퍽.

질척한 땅을 걸어온다. 이제 두 번째라 익숙하다. 놈을 조금 더 자세히 관찰할 여유가 있다.

날렵한 걸음걸이.

자세 역시 흐트러지지 않는다. 축젖은 가죽 갑옷은 장애가 되지 못한다. 고작 저 한 놈조차 죽이지 못하고 부서졌다.

녀석이 석궁을 조심스럽게 앞으로 겨냥한다. 첫 번째 수색을 다시 시작한다.

- 사각.

녀석은 수풀을 헤치며 천천히 걷는다. 이번 수색은 비교적 엉성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수색하는 모습을'보여 주는' 용도이므로.

함정을 파는 것이다.

하지만 함정을 팔 때야말로 가장조심해야 할 때.

놈은 수색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는 생각에 너무 얽매여 있다.

가녀린 한 명의 여자를 사냥하러왔다. 그 여자가, 혹은 그 여자의 알수 없는 일행이.

어둠이 깔린 수풀에서 매복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약자를 사냥할 때는 생각이 게을러진다. 생각이 게을러지는 만큼 발밑은 취약해진다.

나는 그 발밑에서 기다리고 있다.

- 사록.

- 사르특.

갈비뼈 사이로 무덤가의 무성한 수풀이 흔들린다. 질척한 진흙이 등뼈를 파고 들어온다.

녀석이 나를 지나쳤다.

지금이다!

번개가 치기 전에 움직여야 한다.

- 달그락!

곧바로 몸을 튕기며 일어났다.

"음?"

- 서거!

슬쩍 돌아보는 놈. 맥박이 뛰는 그목에 단검을 박아 넣었다.

u끄, 끄, 주, 주겨.!"

비명이 제법 감미롭다.

- 파각!

루비아가 건네준 단검이 놈의 목에 제대로 박혔다.

단검을 잡고 비틀었다.

깊숙이 박은 단검을 통해 놈의 박동이 느껴진다.

"끼, 끄이.!"

녀석이 끅끅거린다. 손을 앞으로 휘저었다. 잡히지 않기 위해 단검을 쨌다. 뒤로 반걸음 물러났다.

- 푸슈슛!

붉은 피가 샘물처럼 솟구쳤다.

내 두개골과 턱뼈가 온통 녀석 의피로 물들었다. 축축했다.

다시 반걸음 앞으로 갔다. 뺀 단검으로 녀석의 입을 깊이 찔렀다.

- 좌르르.

입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석궁을 쥐고 있던 녀석이 나동그라졌다.

"뀌, 뀌이이, 끄에에.!"

- 부응!

석궁을 공격한 대가는 호되게 치러야 했다. 석궁의 동료가 뒤에서 거대한 전투망치를 내려쳤다.

- 광!

[둔 기류로 타격 당했습니다. 특전이발동합니다! 둔기류 저항: 4이]

얻어맞은 머리에 극심한 울림이 느껴졌다. 머리가 옆으로 젖혀졌다.

나는 구르며 땅에 내팽겨졌다. 몇 번이고 진흙을 구른 것이다.

- 달그락.

하지만 다시 일어나야 한다. 고통을 참으며 다시 일어났다. 두개골을 붙잡고 뼈를 맞췄다.

- 우두둑!

- 번쩍!

번개가 쳤다. 망치를 휘두른 놈의 얼굴이 보였다.

서 있는 나를 마주한 놈의 얼굴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믿을 수없다는 표정이었다.

- 우르르릉! 광!

번개가 지나가고 천둥이 울렸다.

"아. 안. 부서져.?"

망치를 휘두른 놈이 혼자 흘린 듯중얼거렸다. 망치에 얻어맞은 머리가 계속 욱신거렸다.

통중이 가시지 않았다. 눈앞이 어지러웠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어지럼중이 약간 가셨다.

- 번쩍!

"읍, 으, 히, 헉!"

석궁을 쥔 놈이 입에서 피거품을 홀렸다. 놈의 입에 단검을 찌르고마구 흔들었다.

고통이 적지 않을 것이다. 녀석의 웃음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녀석은 이번에는 웃지 못했다.

대신 신음을 뱉었다. 고통스럽게 바닥을 뒹굴었다. 나쁘지 않았다.

- 우르릉!

"아주 좆 됐네."

내 앞에 다른 놈이 선다. 망치다.

놈이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쓰러진 석궁을 슬쩍 보곤 입가를할았다. 놈이 커다란 제 무기를 고쳐 잡았다.

6화 삶에서 깨어나는 것 (6)

***************************************************

이제 기습의 묘를 누릴 수는 없다.

망치를 든 놈은 체격이 좋다. 키만 훌쩍 큰 것이 아니다. 어깨도 다부지게 딱 벌어져 있다.

- 콰광!

석궁을 든 놈보다 훨씬 강해 보인다. 이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일단 둔기 저항은 먹혔지만.'

계속 맞으면 위험한 건 당연하다.

망치를 피할 수 있을까?

루비아가 건네준 단검으로, 제대로한칼 먹일 수 있을까.

해골병사로 20년을 살아왔다.

삶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한들, 밀도 있는 삶은 아니었다. 멍하니 헛되이 보낸 세월이 많았다.

'시간을 헛되이 보내면 안 된다.'

그런 생각을 가지기는 어려웠다.

나는 그냥 해골이었다. 감정도, 감각도, 무언가에 막힌 듯 와 닿지 않았던 세월이 너무 길었다.

그저 하얀 뼈로 살아갔다.

- 철퍽!

망치를 든 녀석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놈이 이를 악물었다. 온몸이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망치가 몸을 돌린다. 앞으로 무게를 실어 한 발을 디딘다.

- 철퍽!

흙탕물이 어둠 속으로 튄다.

- 스숙.

망치 자루를 넓게 잡고 있던 손을 좁힌다. 위쪽을 잡은 손을 아래로슥 가져갔다. 스핀을 준다.

- 흑!

빠르다. 망치를 등 뒤로 젖힌다.

- 피리리릭!

몸무게를 실은 회전 일격.

둔기임에도 불구하고 날카로운 파공성이 울렸다.

- 철퍽!

나는 오른쪽으로 피해 있었다. 풀 플레이트도 단번에 우그러뜨릴 만한일격.

'방금은 저걸 맞고 살아남았다는 건가?'

둔기 저항의 대단함이 새삼 느껴진다. 아무리 봐도, 저걸 맞으면 즉사 외에는 답이 없다고 생각되는데.

하지만 여유롭게 감탄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 부응!

녀석은 해머를 고쳐 쥐고 다시 횡으로 휘둘렀다.

말려들면 으스러진다. 아무리 특전이 있더라도, 저건 위험하다.

- 철퍽!

발을 디뎌 움직였다. 가로로 날아오는 해머를 간신히 피해 냈다.

"음?"

망치를 쥔 녀석이 의아한 눈빛을 띠었다. 놈의 왼쪽 입꼬리가 비뚜름히 올라갔다. 웃는 표정이다.

"움직임은 느리네? 맞고 버티길래대단한 놈인가 생각했는데."

- 덤석.

녀석이 해머를 고쳐 잡는다. 문득공기가 싸늘해진다.

- 붕!

이런 커다란 전투망치는 리치가 길다. 파괴력이 매우 강하다. 무게로 모든 걸 부숴 버린다.

그런 만큼, 공격 속도가 느리다. 공격과 공격 사이의 텀이 길다.

- 부응!

하지만 녀석은, 갑자기 연속으로 해머를 휘둘러 댄다.

간격을 파고들기엔 너무 짧은 시간처럼 느껴졌다.

전투망치의 약점을 힘으로 커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무기는 힘 자체가 최고의 기술.

"이것도 한번 피해 볼까?"

완연히 여유를 되찾은 얼굴.

녀석이 망치를 반대로 돌려 잡았다. 머리 뒤 고리 부분이 앞이다.

- 피릿!

날카로운 파공성. 바람이 찢긴다.

'길다.'

아까보다 더욱 리치가 길다. 놈은 앞으로 두 발을 내디뎠다. 손은 어느새 망치 자루 끝부분.

망치를 휘둘러 끌어 '당긴'다.

뒤로 물러나기도, 앞으로 파고들기도 여의찮다.

휘두르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공격 범위가 갑자기 늘어났다.

급하게 몸을 숙였다.

하지만.

- 덜컥.

- 달그락!

나는 이미.

놈의 앞에 끌려와 있었다.

망치의 뒷부분. 긴 스파이크에 걸려서 끌려온 것이다.

스파이크 부분은 갈고리처럼 끝이 슬쩍 구부러져 있었다.

'이런.,

한 번 걸린 갈고리는 쉽게 빠지지 않았다. 게다가 내 몸은 걸 곳이 훤히 다 보인다.

어깨뼈에 걸린 스파이크. 아가미에꿴 낚싯바늘과 같다.

- 콰직!

놈이 내 손목뼈를 밟는다. 밟고 짓이겨 힘을 주고, 다시 밟는다.

덩치에 비해 무척 빠르다. 덩치만큼 무겁다. 손목뼈가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다.

- 달그락.

아직 버텨 주기는 한다. 괴로웠다.

아픈 것은 아니다. 짓눌려 있는 것이 괴롭다.

단검을 쥔 손에 힘을 줬다. 그러나 놈을 벗어나지 못했다. 놈은 나를 내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얼마나 버티나 볼까?"

해머가 역수로 쥐어진다.

- 쿵! 쿵! 쿵!

놈은 망치로, 절굿공이처럼 나를 찧어 대기 시작했다.

- 띠링! 띠링! 띠링!

메시지가 계속 뜨기 시작한다.

[둔기류로 타격 당했습니다. 특전이 발동합니다! 둔기류 저항: 4이]

[둔기류로 타격 당했습니다. 특전이 발동합니다.]

[둔기류로 타격 당했습니다.]

[둔기 류로.]

녀석은 나를 차분히 부숴 갔다. 일정한 높이에서 찧는 망치는 목가적인 느낌마저 주었다.

- 쿵! 쿵!

"거참, 이상하게 잘 버티네."

온몸의 뼈가 거의 바스러졌다. 공이처럼 찧는 해머에 짓이겨 진다.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상태로 점점 진창 속에 파묻혀 간다.

- 쿵! 쿵! 쿵!

역수로 망치 자루를 잡고 찧는다.

얼마나 지났을까.

놈은 어깨 위로 해머를 높이 들었다. 위에서 내려칠 생각인 것 같다.

망치가 단두대처럼 떨어진다.

- 퍼걱!

하지만 두개골은 잘 부서지지 않았다. 상쾌하게 부서지는 소리는 없다.

단단한 뼈는 진창으로 한층 더 처박힌다.

두개골 안으로 진흙이 들어찬다.

망치는 정강이뼈를, 어깨뼈를 향해 휘둘러진다.

망치는 화가 난 기색이다.

발로 걷어차도 쉽게 부스러져야 할 해골. 거기에 이렇게 힘을 써야 한다는 사실이 화가 난 걸까.

망치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놈의 힘에도 문제는 없다. 바닥이 진창이라 시간이 걸린 거다.

단단한 모루 위에 있었으면 더 나았겠지. 더 빨리 부서졌겠지.

놈이 소리친다.

"안 부서지면!"

- 콰직!

"부서질 때까지 부순다!"

- 콰직!

두개골이 경주와 분리된다. 이미 몸은 진흙 속에 파묻혀 있다.

폭력 앞에 놓인 해골병사에게 선택지는 몇 없다.

아래로 처박히거나 부서지거나. 어느 쪽도 아름답지는 못하다.

- 번쩍!

번개가 쳤다.

두개골이 분리된 내 눈에 다른 놈이 보인다.

"끄, 끄, 꼽.!"

석궁이 죽어 간다. 내가 단검으로 입속을 잔뜩 휘저어 놓은 놈이다.

찢어진 입에서 피가 흐른다.

"끄, 끼, 끼히.

놈이 벌레처럼 꿈틀거린다. 망치에게 계속 손을 뻗었다. 망치는 놈을 무시한다. 석궁의 눈에서 생명이 꺼져 간다.

"친구, 미안해."

망치는 석궁을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상황이 어쩔 수가 없네."

"히, 끼히익. r털썩. 석궁은 파르르 떠는 손을 드디어 아래로 떨어뜨린다.

그 순간.

- 띠링!

[경험치를 225 얻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포인트를 분배해 주십시오: 幻'레벨. 업?' 사람 하나 죽였다고 레벨이 2나 올라가다니.

황당할 정도의 일.

물론, 기껏 얻은 포인트는 분배하지 못했다.

분배해도 음직일 방법은 없다. 팔다리는 전부 바스러져 있다. 허공에든 창을 멍하니 바라보는 순간.

- 콱!

망치의 스파이크가 두개골에 구멍을 낸다.

- 파직!

두개골이 쪼개진다.

"앵? 이렇게 치니까 또 금방 쪼개지네?"

놈이 망치 뒤쪽 스파이크 부분을 대견한 둣 쓰다듬는다.

방금 죽은 제 동료 따위는 전혀 신경도 안 쓰는 기색.

의식이,

다시 한 번 새까맣게 칠해 진다.

- 번쩍! 번쩍!

벼락이 연거푸 친다.

- 우르릉! 광! 콰광!

천둥이 굉음을 낸다. 벼락이 커다랬던 만큼 천둥소리도 크다.

폭우가 내리는 한밤이다.

'설마.'

확실하다.

'죽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다. 짧은 시간에 같은 일이 세 번이나 반복됐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유는 알지 못하지만 반복되는 건 틀림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폭우가 내리는 묘지에서 벌써 세 번 죽었다. 쉽게 이 장소를 빠져 나가려면. 결론은 간단하다.

여자를 놓고 도망치면 된다.

놈들의 목적은 여자다. 해골 따위에 관심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도망쳐서 뭘 한다는 건가.

그렇게 이 장소를 벗어나고 나면 행복이 기다리나. 그럴 리가 없다.

아주 잘 알고 있다.

20년 동안 해골병사로 살면서 뼈저리게 경험했다.

우리가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지.

- 달그락.

해골병사의 성장에는 한계치가 분명하게 그어져 있다.

인간은 다양한 재능을 가진다. 다양한 소질이 있고, 스킬을 익힐 수 있다. 그 가능성이 매우 열려 있다.

수많은 길이 그 앞에 놓여 있다.

하지만 나와 같은 해골병사는 가장 약한 인간. 가장 깜깜하고 어두운 인간. 아무 재능도 없는 인간, 어떤 재능도 소질도 의지도 없는 인간과 비슷한 기준이 적용된다.

오히려, 그보다도 낮을 것이다.

해골병사는 그저 달그락 소리를 내며 돌아다닌다. 오크와 같은 힘은커녕, 고블린과 같은 독기나 날카로운 이빨도 없다.

고블린은 생동감이 있다. 살아 있다. 욕망이 있고 의지가 있다.

하지만 나와 같은 해골병사는 그런 욕망조차 없다.

우리의 존재 목적은 토벌되는 것.

그저 약간의 경험치가 되는 것에 불과하다.

섬길 신도 없으며 눈물을 삼켜 줄 왕도 없다. 무덤에서 일으켜져서, 지시에 따라 멍하니 이리 움직이고 저리 움직인다.

마물과 인간.

두 편의 전쟁이라도 벌어진다면.

적의 화력을 소모하는 최선두의 대열에 선다. 아주 작은 효용을 위해 끝도 없이 희생되어 간다. 완전한 죽음을 거듭 맞는다.

마왕들이 강림했을 때.

그때가 떠오른다. 그들은 마치, 해골병사는 아무렇게나 소모해도 되는 공짜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언제나 최전선에서 부서지는 용도였다.

사실 그 효용은 오히려 마이너스일지도 모른다.

해골 무리가 힘없이 쓰러져 가는 모습을 보며, 인간의 사기가 고취되는 걸 생각한다면.

내 상념을 상태창이 방해한다.

- 띠링!

[계승되었습니다.]

[이름: 없음]

[해골병사 Lv.1(38)]

[체력-29 힘-23 민첩-18 지혜-9]

[분배하지 않은 포인트: 2]

[계승된 이후 두 번째 죽음을 달성하셨습니다.]

[사망기념관]

1 - 사령술사를 위하여.

최후의 순간, 당신은 한 사령술사를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사령술사와의 관계에서 기본 호감도 20을 얻고 시작합니다.

2 - 둔기는 위험해.

둔기에 부서지며 죽었습니다. 모든 둔기에 대한 물리 저항이 40 오른 상태에서 시작합니다.

3 - 두개골 보호법 (new!)

2연속 두개골이 파괴되어 죽었습니다. 당신의 두개골은 조금 더 단단해 질 필요가 있습니다. 두개골의 물리 저항력이 10 올라갑니다.

4 - 써 보지 못한 단검 (new!)

당신을 죽인 적에게, 당신은 손에 쥐고 있던 단검을 제대로 휘둘러보지도 못했습니다. 단검술 Lv.10을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이번 회차에 적용할 특전을 선택해 주십시오.]

은※ 특전은 누적되어 적용되지 않습니다.]

또 사망 기념관이 나왔다. 내가 죽음을 경험할수록, 누군가가 기꺼워하는 것 같다.

이제는 뭘 골라 볼까? 나는 네 가지 선택지를 차분히 들여다본다.

첫 번째 특전은 사령술사의 호감도를 20 올리는 것이다.

지켜 줄 수 없는 여자의 호감을 사는 건 전혀 의미가 없다고 결론을 내린 바 있다. 이건 넘어간다.

두 번째 특전은 둔기 저항. 그 동안은 이걸 선택했다. 괜찮았다.

세 번째 특전은 두개골을 보호하는 특전. 머리가 깨지면 끝이긴 하다.

하지만 둔기 저항보다 여러모로 효율이 떨어질 거다.

가장 위협적인 무기가 둔기니까.

역시 둔기 저항이 좋을까? 하지만 나는 곧 마음을 굳혔다.

'4번.'

4번을 선택할 생각이다.

별로 망설이지 않았다.

똑같이 루비아가 나타나고, 망치와 석궁이 나를 공격할 것이다.

이번에는 반격을 하고 싶다.

'단 검술.'

게다가 레벨 10.

매력적이다.

제대로 된 스킬을 얻는 것이다.

20년 동안 살아왔다.

그러나 그 동안 제대로 된 스킬을 가진 적은 한 번도 없다.

내가 가진 스킬들을 살펴보았다.

- 되는 대로 휘두르기 Lv.8- 부실하게 막기 Lv.6- 어설프게 찌르기 Lv.4- 적당히 구덩이 파기 Lv.5- 무턱대고 앞으로 달려들기 Lv.4- 손에 잡히는 대로 던지기 Lv.6- 두개골 굴리기 Lv. 1같은 것들밖에 없다.

한숨이 나오는 수준이다.

7화 삶에서 깨어나는 것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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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는 대로 휘두르기〉같은 경우는 레벨이 8이나 된다.

얼핏 좋아 보인다. 하지만 이게 왜검 술이라고 표기되지 않겠는가?

이건 제대로 된 스킬이 아니다. 효율이 좋지 않다. 말 그대로〈되는대로〉휘두르는 수준.

다른 스킬도 마찬가지.

부실하게 막기. 적당히 구덩이 파기. 잡히는 대로 던지기.

모두 위력과 효용이 떨어진다.

스킬 레벨 업과 조합을 통해 제대로 된 스키로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저런 스킬조차도 레벨 업을 하기 쉽지 않다.

스킬 경험을 쌓기가 힘들다. 스킬 경험은 저 행동으로 누군가를 공격해야 오른다. 처치해야 한다.

그래야 경험치가 오른다.

하지만 해골병사보다 약한 존재는 거의 없다.

뭘 하려고 해도 결국 상대만 레벨 업을 시켜 주기 마련.

그런 나에게.

제대로 된 스킬을 가질 수 있는 기회는 몹시 매력적이다.

사실 단 검술보다 둔기 저항력이 실용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항력이 부족해 또다시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스킬을 한번 손에 넣어 보고 싶었다.

이전에는, 망치를 든 녀석에게 한방도 제대로 못 먹이질 않았나.

역시 공격 스킬을 갖고 싶다.

"2 번."

[사망기념관 4번 특전. 단검술Lv.10을 획득합니다!]

선택하자마자.

글자가 저번처럼 스르르 연기로 변했다. 다시 연기가 움직여 몸 구석구석에 스며들었다.

'이런 느낌이구나.'

단검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어떤 단검이라도 잘 다룰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갑자기 손이 허전해졌다. 단검을 쥐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다음으로 할 일.

남은 2포인트를 모두 민첩에 분배했다.

[민첩 18 -> 20]

상태창을 확인해 보았다.

[이름: 없음]

[해골병사 Lv.1(38)]

[체력-29 힘-23 민첩-20 지혜-9]

[전투 스킬]

- 단검술 Lv.10(new!)

- 되는 대로 휘두르기 Lv.8.

스킬 창이 변했다. 새로 생긴 단검술 Lv.10이 확인된다.

우습지만 조금 뿌듯한 기분.

앞길이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 우르르릉! 광!

확인까지 마치고 나니 때맞춰 천둥이 울린다. 여자가 다가온다.

"망자 士者여! 내가 그대를 깨웠습니다! 내 말 들리시나요?"

다시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보드랍고 촉촉한 갈색 눈동자.

강아지 같은 저 눈동자를 번번이 지켜 주지 못했다.

물론 내가 저 여자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짧은 시간에 벌써 두 번 실패했다.

한눈에 보아도 위험한 녀석들에게 여자가 유린당했다. 나도 몇 번이고 짓밟혀 부서졌다.

없던 오기도 생길 만한 환경이다.

용사들에게 난자당하던 서큐버스님이 생각나서라도, 이 인간 여자를 그대로 버릴 수가 없었다.

- 달그락.

나는 무덤에서 일어났다. 여자 가사 다리를 가지고 오기도 전이다.

"망자여! 이걸 타고. 어엇?"

"단검."

여자에게 다짜고짜 말했다.

"히, 히익!"

- 철적.

루비아가 뒤로 넘어진다. 놀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서둘러야 한다. 배려해 줄 여유가 없다.

약한 나에겐 그럴 여유가 없었다.

"빨리 주시오. 필요하니까."

나는 막무가내로 다그친다. 기세에 밀린 걸까. 루비아는 단검을 놓다시피 내어줬다.

단검을 받고 등을 돌렸다. 길가를 바라봤다. 시간이 별로 없다.

"숨어 있으시오."

"그, 그게 무슨.!"

그녀가 놀라서 숨을 들이킨다.

"저, 저는 루비아라고 하고. 당신을 소환했는데.

자기소개는 필요 없다. 그녀는 지금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외면한 채 앞으로 걸어간다.

- 위이이이잉!

폭풍우에 이리저리 흩날리는 나뭇가지들. 그 가운데서 길고 단단해 보이는 녀석을 주웠다. 묘지를 정리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 ㅘ?}?]??]?. |

쏟아지는 폭우. 파헤쳐진 무덤들.

관과 유골들이 떠내려간다.

'시체 두 구 정도는 새롭게 파묻어줘야 수지가 맞지.' 그 작업을 위한 사전 준비다.

- 달그락!

재빨리 수풀로 달려갔다. 기둥이 굵은 나무를 본다. 이 정도라면 적당하다. 나무 뒤에 숨는다.

말은 이 근처로 올 거다. 그때, 나뭇가지로 무릎을 후려칠 생각.

가파르고 미끄러운 산길.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여기까지 올라온 말과 인간들.

어둠에는 적응했겠지.

하지만 매복까지 대비가 되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놈들을 깜짝 놀라 날뛰는 말에서 떨어지게 만들 속셈.

비탈 아래로 굴러 떨어지면 제일 좋고. 어디 한군데 부러지기만 해도 훨씬 쉬운 싸움을 하게 된다.

- 쏴아아아.!

일찍 자리를 잡은 탓일까.

비만 퍼붓는다. 말울음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다행히 루비아는 이쪽으로 오지 않고 있다.

'내 말을 들은 걸까.'

조용히 기다린다.

곧 번개 칠 때가 되었다.

- 번쩍!

- 우르릉!

왔다.

"히히 힘!"

질척한 산길을 푸른 말이 달려오고 있었다.

앞서 오는 말. 그 위에는 석궁을 잡은 놈이 타고 있다.

하지만 타깃은 녀석이 아니다. 까다로운 놈부터 먼저 쳐야 한다.

'나는 화살에 강하니까.'

인간들에게는 치명적이지만, 나는 석궁이 크게 두렵지 않다.

화살의 효용. 그건 살과 근육에 깊숙이 박힐 때 가장 커진다.

박힌 채로 화살촉을 방치할 수는 없다. 살이 썩어 들어간다.

달고 움직이는 것도 거추장스럽기 그지없다. 그렇다고 화살촉을 빼내려면, 칼로 살을 찢어야 한다. 상처 부위가 커진다.

고통이 심해진다. 피가 흐른다.

하지만 나에게는 살도 근육도 없다. 워낙 빈 공간이 많아 맞추기도 쉽지 않다.

'석궁은 나중에 처리해도 돼.'

게다가 녀석은 약한 편이니까.

- 철퍽! 철퍽!

한 마리 말이 더 다가온다. 망치를 멘 놈이 타고 있다.

저놈이 목표다.

나를 부쉈던 녀석.

- 달그락!

몸을 튕기며 뛰쳐나갔다.

- 퍽!

망치가 탄 말을 힘차게 후려쳤다.

"히히 힘!"

말이 앞발을 치켜들며 울었다.

"뭐야?"

난데없이 얻어맞았다.

말은 놀라고 아파서 비틀거렸다.

망치를 든 녀석 역시 휘청거린다.

말이 계속 울부짖으며 마구 투레질을 한다. 가만히 놈을 바라본다.

'안 떨어지나?'

- 훌쩍!

망치는 말에서 뛰어내렸다.

'이런.'

말은 꽤 거세게 투레질을 했다. 웬만한 녀석이라면 분명 낙마했을 만큼. 하지만 놈은 어렵지 않게 뛰어내렸다.

마음의 대비도 없었을 터. 기마술이 웬만큼 뛰어나지 않으면 할 수없는 일.

생각보다 재주 있는 놈이다.

실패.

앞서가던 석궁도 뒤를 돌아봤다.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이 없다. 굳어있을 수는 없다.

- 꽉.

단검을 역수로 잡아 쥐었다. 과연 이길 수 있을까.

보호구가 없다면, 한 번만 스치게만 들어도 크게 유리해 진다. 하지만 놈들은 가죽 갑옷을 입은 상태.

숨을 끊어 놓기 위해서는 제대로 박아 넣어야 한다.

- 달그락!

망치를 든 녀석이 제대로 자세를 잡기 전에 달려들었다.

[특전: 단검술 Lv.10이 발동됩니다! 높은 레벨의 단검술이 몸의 움직임을 보조합니다.]

- 파파팟!

단번에 간격을 좁혔다.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민 첩의 한계가 있어 빠르지는 않다.

하지만 동선은 더없이 깔끔했다.

내가 움직이면서도 놀랄 정도였다.

'이게 나라고?'

한 치의 낭비 없는 움직임. 신경쓰지 않아도 몸이 움직인다. 균형이 절로 잡힌다.

칼날만큼 예리한 자세. 군더더기라고는 전혀 없다. 날카롭게 갈고닦인찌르기.

- 서거!

단검은 이미 놈의 목에 박혀 있다.

이것이 단검술 Lv.10의 효과. 내가갖지 못했던 스키의 효과다.

'기가 막히는군.'

"끄, 끅?"

망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눈이 파르르 떨린다. 한 번에, 경동맥이 제대로 끊겼다.

내가 봐도 놀라운 결과였다.

하지만 숨이 끊기기까지의 3초.

그 3초 동안 녀석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멍청했다. 스킬의 효과와 승리에 잠시 도취해 있었다.

- 푸슈슛!!

녀석은 목으로 피를 뿜으면서도,

- 부응!

망치로 내 어깨를 내리쳤다. 복수의 집념이었다.

- 퍼걱!

오른쪽 어깨가 한 번에 탈고되었다. 팔이 날아갔다.

오른손으로 쥐었던 단검은 산길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경동맥에서 피를 뿜으며 휘두른 필사의 일격.

나에겐 그걸 막을 방어력도, 망치를 회피할 민 첩도 없었다.

- 철퍽.

녀석은 목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 털썩.

나는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망치에 맞은 충격이 녹록치 않았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네 번의 레벨 업. 그리고.

- 퍼버벅!

뒤통수를 둔기가 가격한다.

'석궁이군.'

석궁을 쥔 놈이 그 동안 뒤로 돌아온 것이다.

놈과 한참을 투덕거렸다.

- 철퍽.

결국 쓰러졌다.

한쪽 팔이 날아간 상태에서 놈을 이기기는 힘들었다.

놈이 허리에 차고 있던 곤봉에, 온뼈에 금이 갈 정도로 맞았다.

"아악! 개 같은 프레쳐 새끼가 죽은 건 좋은데. 씨발. 해골 주제에 무슨.!"

석궁 잡이는 입이 몹시 더럽다. 놈은 욕설을 내뱉으며 나를 발로 밟고 있다.

- 콰직.

놈도 성치는 못하다. 얼굴은 멍으로 부어 있고 몸은 진흙투성이.

내가 팔로 놈을 잡고 비탈길을 구른 탓이다. 하지만 팔다리는 멀쩡히 붙어 있다.

'또 진 건가.'

이 상황이 조금 어이가 없었다.

내 20년은 정말 이 정도밖에 안 되는가

고작 인간 사냥꾼 두 명을 상대로 아득바득 발버둥 치고 있다.

세 번째 부딪히는 상황에서, 동귀어진 조차 이뤄내지 못한다는 건가.

아 드네 비참함에 이가 갈렸다.

그 순간이었다.

- 부스럭.

"해, 해골씨!"

익숙한 목소리다.

나를 무덤에서 꺼내 온 여자.

안 돼.

저 여자가.

이런 데 오면 안 되는데.

나는 몸을,

- 달그락.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는다.

"오호? 사냥감이 여기까지 찾아오셨네?"

- 달그락.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큭큭. 혹시 널 놓칠까 봐 얼마나 걱정했다고. 절벽에서 뛰어내리기라도 하면, 시체 찾기가 엄청 힘들거든?"

석궁 잡이가 싱긋 웃는다. 처절한 비명과 불쾌한 소리가 들린다.

나는 이번에도,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고 죽었다.

의식이 새까맣게 멀어진다.

[죽음을 기록하시겠습니까?]

[B 레벨의 비참함을 느껍니다.]

[동화율이 떨어집니다.]

[94.8%->94.25%]

- 띠링!

[계승되었습니다!]

[이름: 없음]

[해골병사 Lv.1(42)]

[체력-29 힘-23 민첩-20 지혜-9]

[잔여 포인트: 4]

- 쏴아아■아.!

나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본다.

휑하니 뚫린 눈구멍으로 폭우가 쏟아진다.

한심하다. 여자의 처절한 비명과,

불쾌하게 찌꺽대는 소리 가운데서 의식을 잃었다.

무력함에 치가 떨린다.

- 딱딱.

이를 부딪친다.

분노해 봤자 할 수 있는 일은 정해져 있다.

다시 앞을 본다.

새까만 밤 위에 반투명한 글자들이 떠 있다.

내 상태창이다.

죽기 전, 망치 잡이를 죽이고 얻은 포인트가 반영되어 있었다.

힘에 1, 민첩에 3을 투자했다.

[체력-29 힘-24 민첩-23 지혜-9]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계속 이렇게 스탯이 누적된다면.'

그리고 죽음이 반복되는 거라면.

터무니없는 스탯을 가지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 띠링!

[System: 특전 충돌!]

- 사망 기념관의 슬롯이 모두 찼습니다.

- 가장 최근에 획득한 특전과, 새 특전이 충돌합니다.

- 충돌로 인해 두 특전이 모두 사라집니다.

['써 보지 못한 단검' 슬롯이 삭제되었습니다.]

'불친절하^.,

안내는 전혀 없었다.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

'하나씩 배워 가라는 건가.'

다시 깨닫는다. 느긋하게 있을 때가 아니다.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일어날 일은 정해져 있다.

8화 삶에서 깨어나는 것 (8)

***************************************************

서둘러야 한다. 머릿속에 계획 이하나 떠오른다. 사망기념관에서 2번 슬롯을 선택했다.

[System: 둔기류 물리 저항 플러스40이 적용됩니다!]

단검술이 사라졌으니, 특전은 역시 둔기 저항이 좋겠다.

- 달그락!

무덤 밖으로 뛰다시피 나왔다.

아직 내게 말을 걸기 전의 루비아가 있다.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마, 히익!"

망자여, 라고 하려고 했겠지. 나를 부르지도 못하고 루비아가 넘어진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로브, 단검. 급하다."

"히, 히잇!"

루비아의 몸은 굳어져 있다. 당연하다. 이런 상황에 접하면 누구나 굳어지기 마련이다.

- 파록!

단검과 로브를 단번에 강탈했다.

비에 젖은 로브가 억지로 벗겨진다.

허리까지 내려올 정도로 풍성한 갈색 머리칼이 드러났다.

"아.

비에 젖은 입술이 오들오들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에는 추위와 공포가 섞여 있다. 루비아를 바라봤다. 로브 안에 바보 같은 세미 드레스를 걸치고 있다.

? 쏴아아.

생각해 보면 제정신이 의심되는 여자다. 이런 걸 걸치고 오다니? 드레스는 이미 비에 젖을 대로 젖었다.

정체도 의심된다. 자기가 무슨 계승자라고 한 것 같은데. 어쨌건, 위기를 넘기면 물어볼 시간은 많다.

다시 한 번 여자의 상태창을 확인한다.

- 띠링!

[이름: 레이 루비아]

[사령술사 Lv.1]

[체력-6 근력-5 지력-12 민첩-6]

내 사 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 근력.

전혀 반항하지 못하고 단검과 로브를 빼앗길 만하다.

상태창을 닫는다.

이 여자만 볼 수 있는 건지, 어떤 조건이 충족되면 다른 녀석들도 볼수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루비아를 보고 말했다.

"수풀 쪽에 가 있으시오. 절대 따라오지 말고. 목숨이 위험하니."

믿어 줄지 안 믿어 줄지 모른다.

설명할 시간도 여유도 없다.

빠르게 내뱉고는, 가장 길고 굵은 나뭇가지를 주웠다.

단단하고 쓸 만한 나뭇가지였다.

묘지는 새까만 어둠에 뒤덮고 있다. 하지만 이미 나뭇가지의 위치쯤은 다 알고 있다. 줍는 건 쉽다.

- 숙숙.

이번에는 새로운 계획이다.

단검으로 가지 끝을 몇 번 다듬었다. 충분히 날카로워 졌다.

그럭저럭 말뚝이라고 부를 만했다.

날카롭게 깎은 말뚝을 들고 산길로 달려갔다.

'여기로 올라오지.'

길목 아래로 좀 더 내려갔다.

로브로 덮은 몸을 풀잎과 진흙 속에 묻었다. 깎은 말뚝을 언제든 세울 수 있는 자세를 취했다.

- 철퍽! 철퍽!

소리가 들린다. 두 사냥꾼이 말을 타고 밤길을 달려오고 있다.

놈들은 왜 저 여자를 쫓는 걸까.

누구에게 청부를 받은 걸까.

지금까지는 줄곧 강간하는 것 같았다. 강간한 뒤는 죽일까, 아니면 팔아넘길까. 팔아넘긴다면 어떤 루트로 누구에게?

궁금증은 덮어 둔다. 당장은 저놈들을 처리하는 게 우선이다.

"히히 힘!"

말이 가까이 다가온다.

'석궁은 보낸다.'

놈은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으니.

강한 녀석을 먼저 노린다.

-철퍽! 철퍽!

석궁이 지나갔다.

망치가 탄 말이 왔다. 날카롭게 깎은 말뚝을 획 들어 올렸다.

- 푸욱!

말뚝은 정확히 말의 배에 박혀 들어갔다.

"히히 힘!"

고통이 느껴진다.

살아 있는 것의 처절한 고통이 비 젖은 밤을 떨게 만든다.

배를 찔린 말이 발작을 일으켰다.

- 철퍼덕!

말은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며 옆으로 넘어졌다.

말 위에 탄 놈이 뛰어내리고 말고 할 새도 없었다. 놀란 게 아니라 푹 찔려 넘어진 거다.

'됐다.'

말이 넘어진 방향은 비탈길.

"끄하학!"

- 퍼걱!

망치 잡이가 제대로 굴러 떨어졌다.

부딪히는 소리가 좋다. 어디 하나는 단단히 부러졌을 것 같다.

- 퍼버벅!

놈은 언덕 아래로 계속 굴러 떨어졌다. 얼핏 보았다. 저 비탈길의 경사는 몹시 가파르다.

놈의 몸이 굴러가며 마구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뭐, 뭐야?"

- 철픽.

앞서 가던 석궁을 든 놈. 곧바로 말에서 뛰어내린다. 저번 생에서는 저 녀석에게 죽었지.

고투 끝에, 망치잡이를 처치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다가온 석궁잡이의 곤봉에 부서졌다.

죽고, 다시 싸우며 죽었다. 이보다 사투라는 말이 어울리기는 어렵다.

이제 벌써 네 번째 조우다.

- 번쩍!

번개가 친다. 나는 석궁을 쥔 놈을 바라봤다.

루비아가 다가왔을 때 놈이 짓던 웃음이 생각난다. 징그럽기 짝이 없는 그 웃음을 떠올린다.

루비아의 단검을 꽉 다잡았다. 한발짝, 한 발짝.

장전한 석궁을 든 녀석이 조심스럽게 이쪽으로 다가온다.

- 피육!

다짜고짜 석궁 살이 날아온다.

녀석은 맹인이 아니다. 번개가 칠 때 나를 보고 노렸다.

뭔가 수상한 게 있다면 화살부터 날리고 보는 게,

나쁜 전략은 아니다.

- 풋!

덮어쓰고 있던 로브에 화살이 박혔다. 하지만 뼈 사이로 지나간다.

타격은 없다.

- 펄럭!

로브를 벗어 던졌다. 자리에서 튕기둣 일어났다.

석궁을 향해 외쳤다.

"내가 프레쳐다!"

얼핏 황당한 짓이다.

소리를 지르면 좀 놀라려나. 녀석을 당황시키기 위해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해 보았다.

프레쳐는 망치 잡이의 이름.

아까 날 곤봉으로 부수며 석궁이 이야기했다.

조금은 놀라 주지 않으려나.

"히, 히익! 뭐라고?"

다행히 예상은 적중했다.

녀석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난다.

질린 기색이다. 한순간 머리에 과부하가 온 거다. 동료의 이름을 대며 코앞에서 뛰쳐나오는 해골.

- 달그락.

단순하고 유치한 속임수다.

그러나 이런 방법일수록 효과가 좋다. 오래는 필요 없다. 잠깐 틈을 보일 정도면 된다.

놈의 몸이 잠시 굳어졌다. 그 사이를 놓치지 않았다. 단검을 그대로 놈의 목에 찔렀다.

- 획!

'이런.'

빗나갔다. 아까의 몸놀림이 나오지 않는다.

"힉! 이런 씨발!"

욕을 입에 달고 사는 듯하다. 놈이 허리로 손을 가져갔다.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다시단 검을 휘둘렀다.

- 획!

하지만 단검술의 빈자리는 컸다.

저번 생을 생각한다. 망치 잡이에게도 깔끔하게 단검을 박아 넣었다.

한 번에 절명시켰다.

하지만 지금은 수준이 한참 낮은 저놈에게도, 단검이 스치지도 못하고 있다.

'역시 스킬 차이인가.'

하지만 분명 빨라진 느낌. 민첩을 올린 효과는 있다. 달라진 속도가 의식이 될 정도였다.

나는 눈앞의 인간보다 조금 더 빠르다. 간신히 피하던 놈이 경악하며 소리친다.

"뭐, 뭐가 이렇게 빨라!"

놈이 세차게 곤봉을 휘둘렀다.

- 붕!

잠시 전이라고 해야 할까?

바로 전의 삶. 녀석이 이 곤봉으로 내 뼈를 부쉈다.

하지만.

나는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곤봉을 그대로 맞아 준다.

놈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 픽!

세차게 휘두른 곤봉. 금속을 덧씌운 게 분명한 강도다. 뼈에 부딪혀 둔탁한 소리가 났다.

하지만 타격은 크지 않다.

[둔기 저항 40이 적용됩니다!]

이 특전을 선택했으니까. 곤봉을 맞으며 안으로 뛰어들어, - 푸슛!

목에 단검을 박는다.

루비아의 단검이 놈의 목에 박혀 들어가는 소리가 상쾌하다.

이것으로 석궁의 목에 단검을 박는 건 두 번째.

"끄, 끄, 끄히. r- 좌르록!

석궁이 목에서 피를 뿌린다.

방어를 도외시하고 달려들었다. 곤봉을 그대로 팔로 받았다. 이런 건 생각하지 못한 건가.

하긴, 지금의 내 모습이 전형적인 해골병사는 아니다.

달그락 달그락, 뼈 소리를 내며, 무력하게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의지 없는 망자들.

한 번에 대량으로 부서지거나. 모험자의 사냥감이 되어 주는 것들.

이렇게 적극적으로 인간을 사냥할 줄은 몰랐을 거다.

"끅. 이, 이게 무. 끄힉.!"

녀석이 피를 뿜는 목을 손으로 옴켜쥔다. 생명력이 질기다. 아니면 단검이 동맥을 살짝 비껴갔거나. 나는 곤봉을 잡고, - 휘익!

녀석의 머리가 있는 쪽을 향해 세차게 휘둘렀다.

- 빠각!

경쾌한 소리와 함께 놈의 몸이 축늘어졌다. 출혈과 타격으로 죽어 버린 것이었다.

'일단 무기부터.'

석궁을 집어 들었다. 집어 든 석궁을 잘 챙기고, 시체의 허리춤에 있는 화살통도 뽑아 들었다.

- 삐그덕. 삐그덕.

석궁에 살을 메겼다.

앞으로 조준해 들었다.

"끼, 끼.!"

음? 아직 살아 있나. 제법이다.

이대로 놓아두어도 죽겠지만.

가능성을 남길 필요는 전혀 없다.

- 툭.

엎어진 놈의 가슴팍에 석궁을 댔다. 루비아를 유린하며 낄낄거리던 녀석의 모습이 떠오른다.

고통을 주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쥔 시위를 그대로 놓아 버린다.

- 퍼걱!

가죽 갑옷을 뚫고, 석궁살이 가슴에 박힌다. 즉사가 아니다.

'질기군.'

놈이 빗속에서 꺽꺽댄다. 심장이 아니다. 폐인가 보다. 어쨌거나 죽는 건 같다.

버려두고 일어섰다.

- 끼릭. 끼리릭.

화살을 다시 감았다.

- 쏴아아아.!

망치 잡이가 떨어진 비탈. 그곳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 번쩍!

'봤다.'

녀석의 모습이 보인다.

- 우르릉! 쾅!

놈은 한 손을 부여잡고, 얼굴에는 잔뜩 인상을 쓰고 있다.

'손가락이라도 부러졌나.'

배를 찔린 말에서 떨어져, 비탈에서 요란하게 굴렀으니까.

어디 하나라도 꺾이고 부러지지 않는 편이 이상하다.

굴러멸어졌을 때, 그대로 죽어 주었으면 더 좋겠지만. 그건 아무래도 과한 욕심인 것 같다.

일단 위치를 파악했다. 다행히 놈은 여기를 보지 못한 상황.

석궁을 겨누고,

- 피릿!

발사했다.

- 퍽!

"끄학!"

신음이 들린다.

'맞았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스친 게 아니다. 제대로 한 발 들어갔다.

- 달그락.

앞이 보이지 않는 새까만 어둠.

때맞춰 쳐 준 번개.

나는 놈을 보고, 놈을 나를 보지 못한 것.

미리 챙겨서 살을 메긴 석궁.

이런 요소가 모두 모여, 만들어 준한 발이다.

- 끼릭끼릭.

다시 석궁살을 메겼다.

시체에서 가져온 화살통 덕분에 살은 넉넉하다.

'몇 발이나 더 맞출 수 있을까?'

거리가 좁혀지고 있다.

- 철퍽. 철퍽.

적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망치를 잡고 놈이 걸어온다.

누구에게는 별것 아닐 것이다.

제국의 검주劍主들이나, 아쥬라의마법사 같은 자들.

정말 강한 자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죽일 수 있는 게.

걸어오는 저 녀석일지도 모른다.

- 철픽. 철퍽.

하지만 나는 해골병사.

녀석과 거리가 좁혀지면, 바스러져 죽을 확률이 높다.

- 쏴아아아.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추정해서 걷는 것 같다.

이런 상황이라면 숨거나 도망치는 게 정석일 텐데, 대단한 녀석이다.

'제대로 쫓아오는 것 같은데.'

- 우르릉! 광!

천둥소리에 섞여, 갑자기 발을 내딛는 소리가 빨라진다.

달려오는 듯하다. 나는 살을 매긴 석궁을 다시 들었다.

"으아 아아아!"

놈이 소리를 질렀다.

- 철퍽! 철픽! 철퍽!

소리를 지른 직후. 발 디디는 소리가 더욱 격렬해 졌다.

'방향을 속이고 있다.'

소리를 지르고, 다른 방향으로 재빠르게 음직인 것이다. 석궁을 쏜다면 허공에 날리게 될 거다.

살을 매긴 석궁을 잡았다.

주의를 집중했다. 어디냐.

거대한 망치를 손에 쥐고,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을 놈을 찾는다.

- 번쩍!

왼쪽이다.

- 피릿!

살을 바로 날렸다.

- 퍽!

녀석이 손을 든다. 석궁살이 손바닥을 단번에 꿰뚫었다.

손가락이 뭔가 이상한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부러진 손인가.'

전투에 쓰지 못하는 손을 들어서 석궁을 막아 낸 것이다.

제대로 비탈을 굴렀는지 온몸은 진흙 투성이 였다.

- 우르릉! 쾅!

"크하악!"

놈이 천둥소리와 기합을 맞춘다.

한 손으로 망치를 휘둘렀다.

망치를 휘두르기에 최적의 거리.

- 붕!

두개골로 망치가 날아든다.

피하면 다가올 거다. 다가가면 물러날 거고. 놈은 간격을 능란하게 조절할 줄 안다.

- 펄쩍!

나는 휘둘러지는 망치를 향해 뛰어올랐다. 망치를 향한 박치기.

- 쿵!

머리가 망치에 부딪혔다.

얼핏 보기에 미친 짓이 분명하다.

어지러웠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쪼개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9화 삶에서 깨어나는 것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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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망치를 한 손으로 휘두르는 데다,

회전 반경도 줄어들어 있다.

반면 두개골은 내 몸에서 가장 단단한 부위. 지금은 높은 둔기 저항까지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망치를 향해 박치기를 한다. 미친 짓임에 분명하다.

나 역시 내 행동이 납득이 가질 않았다. 하지만 짧은 시간 동안 세 번이나 녀석과 싸웠다.

놈과 싸우며 생긴 직감이, 이렇게 해야 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쓰러지지 않았다. 녀석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원래대로라면 스탭으로 거리를 벌려야 정상.

하지만 놈은 망치에 쓰러지지 않는 나를 보고, 당황한 나머지 발을 헛디뎌 버렸다.

- 퍼덕!

망치가 넘어졌다. 나는 날듯이 달려들었다. 놈의 목에 칼을 박았다.

- 푹!

놈은 팔을 들어 막는다. 손가락이 부러진 팔을 아예 방패처럼 쓸 작정이다. 날카로운 단검이 팔에 깊이 파고든다.

"으아아아!"

놈은 괴성을 지른다. 팔에 힘을 준다. 단검이 근육에 꽉 물렸다. 그대로 놈이 팔을 뒤로 휘두른다.

- 획!

단검을 손에서 놓쳐 버렸다.

- 번쩍!

번개가 친다. 어처구니없는 실수에 놀라 경추가 달그락거린다.

'한심하군.'

만회가 필요하다. 손가락뼈를 세웠다. 눈을 공격했다.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끄아아아아!"

놈이 고통으로 울부짖었다. 나를 잡고 던져 버렸다.

- 우르릉!

천둥이 울렸다.

나는 바닥에 떨어졌다.

프레쳐라고 했나. 이 녀석은 내가 처음이다. 하지만 나는 녀석이 처음이 아니다. 얼마 되지 않는 시간에 벌써 세 번을 본다.

그만큼 놈에게 익숙하다. 하지만아직도 죽이지 못했다.

원래대로라면 나는 이 녀석에게,

망치 몇 번 휘둘러 부수는 그런 상대에 불과하다.

첫 만남 때는, 그럴 가치조차 없어 발에 걷어차여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운명이었을 거고.

하지만 나는 시간 선에 갇혀 있다.

죽으면 다시 돌아오는 루프에.

놈이 언제 오는지 안다.

어디로 을지, 어떻게 움직일지 알고 있다.

내가 여기서 부서지면.

남은 루비아에게 무슨 짓을 할지도 알고 있다.

- 덤석.

던져졌지만 타격은 없다. 조용히 땅에 떨어진 석궁을 잡았다. 화살이하나 남았다.

-끼리릭. 끼리릭.

천천히 시위를 매겼다. 프레쳐는 내게 눈이 찔렸다.

제대로 뜨지 못하고 있다. 나를 보지 못한다.

소리는 듣고 있을까.

제 숨통을 끊어 줄, 석궁 감기는 소리는.

- 우르릉! 광!

하지만 천둥소리가 요란하다.

- 쏴아아아.!

나는 가만히 섰다. 석궁으로 녀석의 목을 겨냥한다.

"끄으, 끄, 하, 흐으윽!"

세 발자국 떨어진 거리.

사격.

- 피릿!

석궁살이 놈의 목에 박힌다.

"쩍!"

목이 완전히 뚫렸다. 놈이 부러진 팔로 목을 부여잡고 끅끅거린다. 녀석의 앞에 가만히 앉았다.

- 조록!

하지만 뼈가 부러져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성한 팔로도, 뿜어지는 피를 막을 수는 없다.

뚫린 구멍에서 솟아나는 피는 막 터진 샘 같다.

앞에 앉아 있는 내 두개골이 새빨갛게 칠해진다.

- 쏴? 아아아!

- 우르르르르!

비가 퍼붓는다. 두개골에 칠해진 붉은 피가 씻어 진다.

피로 칠해질 때도, 피가 씻겨 내려갈 때도 시원함을 느꼈다.

- 쏴아아.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내 모습을, 완전히 젖은 세미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그녀는 작게 탄식을 뱉으며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시체 좀 뒤져 보라고 시킬까.' 관두는 게 좋겠다. 이런 꼴을 보고 쓰러지지 않은 것만 해도 칭찬해 줄만하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이것부터 처리해야겠군.' 나는 상태창을 열었다.

[이름: 없음]

[해골병사 Lv.6(47)]

[체력-29 힘-24 민첩-23 지혜-9]

[분배하지 않은 포인트: 5]

레벨이 5나 올라 있었다.

두 남자를 죽였다.

각각 한 명씩을 죽였을 때는 레벨이 2, 4씩 올랐다. 하지만 둘을 죽이자 5가 올랐다.

다소 과다한 보상인 것 같다.

하지만 납득이 어려운 건 아니다.

레벨이 높아질수록 레벨 업에 필요한 경험치가 많아진다. 같은 상대를 쓰러트려도, 내 레벨에 따라 보상이 전혀 다르다.

나보다 높은 레벨의 상대를 쓰러트릴수록 보상이 높다.

한참 낮은 레벨의 상대는 아무리 쓰러트려도 유의미한 경험치를 얻을 수 없다.

내가 쓰러뜨린 놈들은 여간내기가 아니다.

해골병사 레벨 36의 능력치를 가지고도, 알 수 없는 특전까지 가지고도 연거푸 패배했던 상대들.

생각해 보면, 20년 전 정말로 내가 레벨 1 해골병사였을 때.

저런 인간들을 잡는 건 꿈도 꿀 수 없다. 아예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일이다. 묶어 놓고 칼로 찌르지 않는 이상에야.

레벨 1 해골병사 스무 명이 달려들어도, 놈들을 이기기는 어렵다.

'음.' 결국, 나는 완전히 불가능한 일을 해낸 것이다.

그에 따른 보상이라고 생각하면, 그리 터무니없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적은 건지도.'

어쨌건, 지금은 얻은 능력치를 배분하면 된다.

기본 능력치는 체력, 힘, 민첩, 지혜가 있다.

사실 나는 스탯들의 자세한 상관관계를 모른다. 그냥 어느 정도 체감으로 느낄 뿐이다.

지혜를 올려 본 적은 거의 없다.

처음에는 3인가 4였던 것 같다.

몇을 올려 봤다.

하지만 올려 봐도 아무런 효과 가없었다. 그래서 올리지 않았다.

체력은 공격에 얼마나 버틸 수 있는가를 뜻한다.

힘은 직접적인 공격력과 관련이 있다. 민첩은 움직임의 빠르기다.

힘을 올리면 세상이 더 가벼워지는 것 같고, 민첩을 올리면 세상이 더느려지는 것 같다.

사실.

서큐버스님을 만나기 전에는 스탯을 올리는 것조차 몰랐다. 포인트를 쌓아 둔 채로 헤매기만 했다.

멍하니 있다 보면 스탯이 자동으로 어딘가에 투자되곤 했다.

스탯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서큐버스님을 만나고 나서부터다.

그분은 내가 인간에게 맞아 죽지 않게 하기 위해서, 무조건 체력을 많이 올리라고 했다.

마스터의 권한으로 억지로 체력 스탯만 잔뜩 찍었다.

그래 놓고, 정작 날 싸움터에 내보내지도 않았다.

던전 마스터로서는 엉망이다. 실격이다. 기껏 던전 서 번트의 체력을 올렸다면, 최전선에 세우는 게 당연하다. 그게 당연한데.

- 달그락.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과거를 회상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분을 만나려면. 다시 만났을 때 지켜 주기 위해서는.

혼자 긴 세월을 싸워 나가야 한다.

얼마가 될지도 모른다.

힘에 3을, 민첩에 2를 투자했다.

[힘 24 -> 27]

[민첩 23 -> 25]

이제 남자들의 시체를 뒤질 때였다. 먼저 가까이 있는 망치 잡이의 시체부터 뒤졌다. 쓸 만한 물건은 싹 다 긁어모을 생각이다.

먼저 품에서 지갑이 나왔다. 제법 두둑하다. 어딜 가느라 주머니를 이렇게 채우고 있었을까.

내가 갖고 있어도 쓸모는 없다. 떨고 있는 여자를 바라본다. 상태창을열어 확인했다.

어느새 습관처럼 된 것 같다.

[이름: 레이 루비아]

[사령술사 Lv.1]

[체력-6 힘-5 민첩-6 지혜-12]

[호감도: 3]

- 루비아는 자신이 깨운 해골에 약간의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본 스킬]

- 호감도를 올리면 개방됩니다.

[특전]

- 호감도를 올리면 개방됩니다.

[칭호- 호감도를 올리면 개방됩니다.

기본 스킨과 특전, 칭호는 보이지 않는다. 모두 조건이 있다. 호감도를 올리라는 조건이다.

어떻게 하면 인간 여자의 호감도를 올리는 걸까? 상상하기 어렵다. 인간 여자를 접해 본 경험은 없으니까. 돈을 주면될까?

- 툭!

루비아의 앞에 가죽 주머니를 던졌다. 여자가 홈칫 놀란다.

"주우시오. 필요할 것 같은데."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다시 상태창을 확인한다.

[호감도: 3]

- 루비아는 자신이 깨운 해골에 약간의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호감 도는 여전히 그대로다. 돈을 주는 방법이 잘못됐던 걸까?

"무슨. 무슨 일인 거죠.

루비아가 파르르 떨며 말한다. 어지간히 겁먹은 표정이다.

던져 준 돈에는 관심도 없다.

'으음. 이걸로는 안 되나.'

그녀에게 던져 준 가죽 주머니는 제법 무거웠다. 짤그랑거리는 소리는 분명 들었을 거다. 하지만 그녀는 돈을 줍지 않는다.

떨기만 한다.

사실 저런 반응이 정상이다. 한참 숨어 있다가 나왔더니 해골이 사람 둘을 죽여 놓았다.

'좋다고 돈을 줍는 건 무린가.'

나는 머쓱해져 말을 돌렸다.

"당신이 날 일으키지 않았소?"

시체를 뒤지며 물었다. 루비아가 홀린 둣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잠시 혼란스러워 하다 말했다.

"그런데, 음, 괜찮으신 거예요?"

"괜찮냐니?"

"망치로. 머리를 세차게 맞으셨잖아요."

그랬지.

처음부터 보고 있었던 걸까?

'얌전히 숨어 있으라고 했는데.'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었다. 돌이었다.

"그건 왜 쥐고 있지?"

"혹시 도움이 될 수도 있잖아요.

위기에 처하면 도와 드려야죠."

제가 일으켰는데, 라고 말하며 루비아는 어색하게 웃었다. 나도 조금 놀랐다. 루비아는 점점 침착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게다가 나를 도와준다는 말까지.

터무니없는 소리이긴 하지만.

벌써 몇 번이나 겪었다.

내가 부서진 뒤, 그녀는 처참하게 유린당한다.

머릿속에서 그 광경이 스쳐 지나갔다. 떠올리고 싶지 않았지만 잊을 수도 없었다.

- 달그락.

고개를 혼 들었다.

"왜 그러세요?"

"빗물을 털어 내는 거요."

루비아는 아직도 주머니를 줍지 않았다. 대신 뭐라고 입을 웅얼거렸다.

잘 들리지 않았다.

루비아에게 던져 준 돈은 정확히72로티다.

물론 만져만 보고 액수를 아는 재주는 없다.

[72 노티를 습득하셨습니다!]

라고 허공에 글자가 떠서 안 거다.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돈을 주웠다고 글자가 뜨다니.'

신기한 경험이었다. 녀석의 가죽 주머니는 매우 두툼했다. 신체 파손에 대한 작은 위자료로 치자.

놈의 망치. 그 흉기에 벌써 두 번이나 두개골이 부서졌으니까. 루비아를 보고 말했다.

"몇 로티인지는 나중에 세어 보고."

"것!"

그제서야, 루비아의 커다란 갈색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로, 노티를 아세요?"

그 말 때문에 놀란 거구나. 알기는 안다. 써 본 적이 없을 뿐이지. 로티는 제국의 화폐 단위다.

인간의 제국.

실질적으로 무수한 세력으로 찢겨 있다. 그러나 제국이라는 이름 하에 화폐 단위는 동일하다.

"위젯도, 세 이론도 알고 있소. 아,

두갓도 알지. 셰켈도 알고."

루비아가 놀라서 딸꾹질을 했다.

"어, 어떻게.!"

제국은 위젯과 로티를 쓴다.

100로티는 1 세 이론.

계급 사회인 제국의 가장 큰 적은, 기나긴 지협地賊을 지난 저편에 있는 자유 연합이다.

물론 그 공화 주의자들이 쓰는 화폐는 제국과 동일하지 않다. 그들은 자유 두갓과 셰켈이라는 화폐를 쓴다. 25 두 갓은 1 셰켈에 갈음.

노티와 두갓은 은으로, 세이론과셰켈은 금으로 만들어 진다.

녹이면 모두 같아지는 금속. 그 위에 제국은 황제의 얼굴을 찍는다.

월계관을 찍는다.

자유 연합은 의회 조형과 투표하는 인간을 찍는다.

양측 모두 금속 위에 가치와 성격을 부여한다. 녹아서 흐물흐물한 금속 위에 무엇을 찍느냐로 자신의 사회를 중명하려 한다.

루비아가 내게 질문했다.

"저, 위젯은. 모르시나요?"

나는 어깨를 으쪽했다.

"물론 알고 있소."

위젯은 노티보다 낮은 제국의 화폐세이론, 노티, 위젯 순이다.

"어쨌건, 돈은 당신이 갖고 있으시오. 그게 돈이라는 걸 알아도 나에겐 쓸모가 없으니."

적선이 아니다.

반짝이는 은화를 쥔 것이 누구인가. 그것이 중요하다.

나는 살점이 하나도 붙어 있지 않은 해골이다.

이 손에 은화를 쥐고 있다면.

돈은 더 이상 거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10화 삶에서 깨어나는 것 (10)

***************************************************

인간들은 기쁘게 달려와 나를 부술 것이다.

혼자였다면 지갑은 그냥 버렸을 거다. 그러나 여자, 루비아가 든 지갑에든 돈.

그건 얼마든지 활용이 가능하다.

칼을 살 수 있다.

장창을 살 수 있다.

방패를 살 수 있다.

몸을 숨길 집을 빌릴 수도 있다.

'아예 무기술 교본을 사서 익혀 볼까.'

- 달그락.

나는 웃었다.

이 인간 여자는 내게 많은 일을 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필요하다.

"아. 알겠어요."

루비아는 돈을 주웠다.

"돈이 좀. 너무. 많은데요? 장사꾼일 요?"

72로티가 상당한 돈이긴 하다.

"글쎄, 좀 더 뒤져 봐야지."

그래야 알 것 같다. 나는 시체를 계속 뒤졌다.

"전위적이네요."

"응?"

"시체를 뒤지는 해골이라니.

"기왕이면 실용적이라고 칭찬해 줬으면 하는데."

적당히 대꾸한 순간, 망치의 품에서 수통을 발견했다.

- 찰랑.

빼낸 수통을 흔들었다. 물의 양을 가늠했다. 반쯤 차 있다.

- 끼리릭.

수통의 뚜껑을 열었다. 열린 수통을 바닥 한 켠에 놓아두었다. 빗물이 차기 시작했다. 차오르는 수통을 보며 루비아가 묻는다.

"해골도 물을 마시나요?"

"안 마시지. 당신이 마실 거요."

"이렇게 비가 오는데. 물을 받고 있으시네요."

"물은 비가 올 때 받아야 하지 않겠소? 이제 내가 좀 물어 봅시다. 어쩌다 나를 일으킨 거요?"

루비아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끼어들지 않았다. 가만히 이야기를 들었다.

여자가 자기 이야기를 할 때 끼어들면 가장 좋은 부분을 놓치는 법이다.

루비아의 아버지.

그는 에라스트 영지의 전前 영주.

레이 백작이었다.

루비아의 어머니는 그녀를 낳다가 돌아가셨다.

백작이 업무를 볼 동안 루비아는 대부분의 시간을 성의 도서관에서 파묻혀 보냈다.

사령 술에 관한 책, 아니 원고를 발견한 건 우연.

성의 장서는 수천 권에 달했다. 선대부터 이어져 온 영주의 장서 관이라는 게 흔히 그렇듯, 그 가운데는 아무리 지루해도 읽지 않을 만한 책도 많았다.

루비아의 생각에는 그런 책이 백 권은 족히 넘었다. 〈세이론 1세로부터 현 황제까지의 머리칼 색에 관하여〉역시 그런 부류에 속했다.

하지만 루비아는 묘한 집착이 있었다. 도서관 안에 있는 모든 책을 읽고 말겠다는 집착.

루비아는 여기 있는 책을 다 읽어 내겠다는 우스꽝스러운 편 집중으로 그 두꺼운 책을 펼쳤다.

그리곤 안에 숨겨진 사령술에 관한 원고를 발견해 버렸다.

사령술이 기록된 원고.

서간집까지 기록된 장서 목록에도 그 원고는 없었다. 루비아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루비아가 있는 영지는 당연히 제국 소속이다. 제국은 흑마법과 사령 술을 철저히 금지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사적으로는 느슨한 성격이었지만, 공적인 영역에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도덕적이고 정직했다.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말한다면?

발견된 원고를 상부에 보고할 것이다. 절차에 따라 움직일 것이다. 열아흡 살의 루비아는 생각했다.

'이런 문서를 공식적으로 드러냈다간. 아버지가 곤란해질지도 몰라.'

사령술이라는 원고의 진위는 둘째 치더라도, 말이다.

물론 그녀 멋대로의 생각이었다.

솔직한 심정은, 이런 걸 본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을 게 뻔했다. 하지만 꼭 보고 싶그런 게 열아홉이라는 나이.

'없었던 것처럼 가져가는 거야.'

루비아는 원고를 슬쩍 품에 숨겨놓았다. 누가 홈쳐 갈까 불안해서 품에 꿰매어 놓고 있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났죠. 그러던 어느 날, 새 황제가 즉위했어요."

얌전히 듣고 있던 내가 처음으로 끼어들었다.

"그게 비극의 시작이겠군."

루비아가 화들짝 놀랐다.

축축히 젖어 있던 머리에서 빗물이 사방으로 흩뿌려 진다.

몸이 움찔한 탓.

그녀가 놀란 표정으로 입을 연다.

"어떻게 아셨어요?"

"아무 일 안 하는 것 같이 빈둥거리고 있어도, 사실 누가 통치자냐 하는 문제는 사람들에게 굉장해 중요한 것 같더군."

해골은 아는 척 이야기했다.

'일반론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미 들은 이야기가 있다.

머릿속으로 가만히 생각한다.

약 1년 후.

대륙에 벌어지는 전쟁.

을해 즉위한 제국 황제.

그는 자유 연합에 대해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한다.

'9년.'

그리고, 무려 9년에 걸친 처절한 전쟁이 벌어진다.

해골은 확인차 물었다.

"지금 황제는 전쟁 파인가?"

"와. 어,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아세요?"

루비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심으로 놀라는 기색이 느껴진다.

'너무 다 아는 티를 냈나.'

루비아가 크게 놀란다.

"마, 맞아요. 확실히 짚고 계시네요. 어떻게 그런 걸.

- 띠링!

[루비아의 호감도가 3 올랐습니다!]

[루비아는 당신이 특별한 해골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스터에게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되는 데 성공했습니다.]

[칭호: '특별한 서 번트'를 획득합니다.]

[마스터를 위해 싸울 때 전투력이20% 증가합니다.]

서번 트라고?

이런 게 있었나 싶다.

'이 여자가 내 마스터라니.

괜히 서큐버스님에게 죄송해 진다.

하지만 지금 나를 깨운 것은 그녀.

그렇게 인식되어도 할 말은 없다.

전투력 20% 증가.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 그녀의 활용도는 꽤 커질 것이다. 어떻게든, 버리고 갈 수는 없는 여자다.

내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는지는 전혀 모르는 채로 루비아는 말을 이었다.

"말씀대로예요. 황제가 전쟁을 준비하고 있어요. 계속 안 좋은 일을 일으켰죠. 징집과 군사 훈련이 대폭 늘어났어요. 호전적인 자들에게 작위를 부여하기 시작했구요."

설명이 이어졌다.

작위에는 많은 경우, 그에 걸맞은 영지가 따라 가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작위만 가진 그들은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지였다.

작위를 갖게 되면 영지를 탐내는 게 인간이고, 언제든 다른 사람이 가진 영지를 자연스럽게 이어받을 수 있으니까.

각지의 영주들은 물론 반발했다.

루비아의 아버지, 레이 백작도 마찬가지 였다.

제국령 내의 세력들은 같은 화폐단위를 쓰지만, 사실 지방 자치에 가깝다.

황제라고 해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황제의 행동은 얼핏 무모해 보였다. 정작 황실이 쓸 수 있는 군사력은 많지 않다.

하지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어느 날부터, 황제의 뜻에 반하는 영주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어요."

그들은 시체가 되어 자신의 성에 던져졌다. 루비아의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 였다.

칼로 난자된 레이 백작에 대해 이야기할 때, 루비아의 눈에서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영주의 성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침입할 수 있는 건 아닐 텐데."

"원인은 몰라요. 검주劍主들이 움직였다느니, 아쥬라의 마법사들 이움직였다느니 소문만 많죠."

그리고 몇 차례의 고비를 넘긴 뒤,

루비아는 이곳에 와 있다.

"작위는 삼촌이 차지했어요. 인신매매 혐의로, 10년 형을 받아 구금되어 있던 최악의 남자죠."

- 툭.

그때. 나는 망치잡이의 품에서 두 개의 중서를 발견했다.

루비아가 물었다.

"그건 뭔가요?"

"용병 신분증 같은데. 커다랗군."

일단 앞면을 확인했다.

〈벤슨 프레쳐〉

클래스: 근접발급: 1143. 7.

랭크: D파이론 용병 조합.

신분증은 이렇게 간단히만 쓰여 있었다. 뒷면은 백지.

루비아에게 물었다.

"오늘이 며칠이지?"

1147년 1월 20일이에요."

4년 전 발행이라.'

용병 조합에서 발행한 신분증을 확인하고 챙겼다. 망치의 품에는 또한 장의 신분증이 있다.

그 신분증은. 뭔가 달랐다.

'정밀 초상화라.'

붉은색 신분증.

그곳에는 망치 잡이 밴슨 프레쳐의 정밀한 초상이 그려 져 있다.

'이름은 없고.'

프레쳐의 이름은 쓰여 있지 않다.

신분증 아래에는 [네크론 신 사회] 라고 적혀 있었다.

'신사회라고?'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신사라는 단어는 처음 듣는다. 정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일단 두 장을 모두 품에 넣었다.

그 순간.

- 띠링!

[퀘스트 - 네크론 신사회의 정체를 알아내십시오.]

[퀘스트 - 파이론 용병 단에 찾아가 보십시오.]

망치잡이의 신분증을 품에 넣는 순간 허공에 뜨는 창.

그리고.

결코 흘려 넘기기 어려운 단어.

'퀘스트라고?'

퀘스트. 익숙한 단어다.

익숙한 만큼이나-

두렵고 끔찍한 단어.

'용사들에게 자주 들었지.'

마왕을 처치하고, 던전을 유린하는 용사들.

그들은 퀘스트라는 단어를 종종 쓰곤 했다.

'퀘스트 성공'이라거나.

'퀘스트 실패'같은 단어들.

'해골병사 다섯 명 처리라니, 너무 쉬운 퀘스트잖아?'

'서큐버스 따먹는 퀘스트만 계속하고 싶은데.'

같은 이야기를 하곤 했다.

용사들 전용의 임무라는 뜻으로 추정 된다.

'그런데 나한테 퀘스트를 하라고?'

나는 지금까지 퀘스트의 주체가 되어 본 적이 없다.

항상 퀘스트의 대상만 되어 왔을 뿐이다.

부서지고, 밟히고, 치워졌다.

여러모로 초유의 상황.

퀘스트 운운하는 것 외에도,

알 수 없는 창들이 눈앞에 떠오르고 있다.

가만히 짐작해 보던 나는 두 가지결론 중 하나를 택하기로 했다.

'하나는 내가 미쳤다는 거겠지.'

그리고 다른 하나의 가능성.

용사에게 적용되어야 할 무언가가 엉뚱하게도, 해골병사인 나에게 적용되고 있다는 것.

일단 퀘스트 운운하는 창을 아래로 치워 두었다.

- 깜빡.

창은 오른쪽 아래에서 잠시 점멸하다 꺼져 버렸다.

'무시해도 되는 건가 보군.'

네크론 신사회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이든, 파이론 용병 조합에 찾아가는 것이든, 당장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으음.'

시체를 더 뒤질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신분증을 마지막으로, 이 벤슨 프레쳐라는 놈에게 얻어 낼 수 있는건 대충 다 얻어 낸 것 같다.

이런 저런 짐을 프레쳐가 걸치고 있던 겉옷에 감쌌다.

들고 움직이려 하니 루비아가 말을 걸었다.

"제가 챙길게요!"

"괜찮은데.

"들고 도망가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말아요."

루비아는 어느새 얼굴에 웃음기를 띄고 있었다.

"그러면 뭐."

짐을 건넸다.

이어 석궁에게 가서 시체를 뒤졌다.

석궁 역시 파이론 용병단원.

E급 용병이었다. 망치보다 한 랭크가 낮다.

석궁의 시체.

거기에서도, 네크론 신사회에서 발행한 카드가 나왔다. 카드는 은은한 붉은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법?'

"그 카드, 뭘까요? 굉장히 불길한 느낌이네요."

옆으로 다가온 루비아가 중얼거렸다. 붉은빛이 눈에 띈 모양이다.

"내 생각도 그렇소. 일단 알아봐야겠지."

"그렇죠.

석궁잡이의 시체를 계속 뒤졌다.

'이건 뭐지?' 놈의 품에서 두꺼운 수첩을 발견했다.

'빽빽한데.'

열어 본 수첩.

그곳엔 페이지마다 글자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페이지마다 왼쪽 상단에는 여자의 이름이 적혀 있다.

옆에는 A, B 같은 등급과 함께 가격이 적혀 있었다.

'레나, A등급, 10세이론.

옆에는 이름/등급/가격이 기본으로 적혀 있다.

아래에는 뭘 했느니, 뭘 했느니 하는 이야기들이 중간 중간 적혀 있었다. 어디를 개발했다느니, 어떻게 조교했다느니 같은 이야기였다.

나는 인간의 풍속에 대해서 알고 있다. 전화가 휩쓴 인간의 마을도 많이 다녀 보았다.

인간 수컷이 암컷을 어떤 식으로 대하고 싶어 하는지는 익숙하다.

무슨 의미로 그런 단어를 쓰는지는 이미 알고 있다.

루비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수첩을 바라보며 소리친다.

"노예 장부잖아요!"

"그렇겠지. 잡혔다면 당신도 여기에 이름이 올라 있겠지."

혹은 후환을 없애기 위해, 고문당하다가 그대로 살해당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루비아를 올려다봤다.

안색이 변하지 않는다.

몸을 더 떨지도 않는다.

이미 추위로 얼굴은 더없이 새파래진 데다, 비를 맞아 몸을 오들오들 떨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지나치게 무신경했음을 인정했다.

그녀는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다.

배려가 필요하다.

"어쨌건 비부터 피합시다. 아는 동굴이 있으니 따라오시오."

"노예 상인들이 왜 저를 쫓아왔을까요?"

"왜는 쉽지 않소. 왜가 아니라 어떻게 따라왔는지 알아야겠지."

11화 삶에서 깨어나는 것 (11)

***************************************************

- 쏴? 아아아.

- 우르릉! 광!

기억에 있는 동굴. 그곳에 가기 전해야 할 일이 있다.

새롭게 숨이 끊어진 시체 두 구를 처리해야 한다.

내가 나온 무덤에 놈들을 던졌다.

두 녀석의 시체가 굴러가며 관 속에서 포개진다.

- 퍼벅!

적당히 포갠 두 구의 시체.

그 위에 다른 관을 올려 버렸다.

번거롭게 흙을 뿌리는 것보다 그 편이 편할 것 같다.

누군가 여기서 시체 두 구를 발견할 수도 있다.

수상하고, 부자연스럽게 덮어진.

루비아를 용의자로 삼지는 않길 바란다. 아마 그럴 거다.

그녀가 처리했다고 생각하기엔, 두 남자는 지나치게 건장하다.

"이제 갑시다."

알고 있는 동굴로 향한다.

- 터벅터벅.

이십 분 정도를 걸었다.

'저기군.'

작은 입구를 확인했다.

음침하게 수풀로 가려진 입구.

그곳에서 삼 년을 산 내 눈에는 훤히 보였다.

길을 돌아 내려갔다.

"내가 먼저 들어가겠소."

"조심하세요."

여자는 나를 걱정한다.

'내가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군.'

동굴의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라지만 작은 틈에 가깝다.

1미터도 되지 않는 직경.

- 달그락!

손가락뼈로 입구를 잡았다.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뼈밖에 없는 몸.

'간단하지.'

"짐을 주시오."

"넷!"

루비아에게 짐을 받아 들었다. 망치와 석궁에게서 빼앗은 짐이다. 식량과 무기, 가죽 같은 것들.

- 쿵.

짐을 바닥에 놓았다.

짐을 쌌던 망치의 겉옷을 풀어서 손에 감았다. 루비아를 위해서다.

차가운 손가락뼈가 닿으면, 놀랄지도 모르니까.

"다리부터 들어오시오."

루비아는 잠시 흠칫했다.

그녀를 재촉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구멍으로 다리를 넣으려는 것이다.

망설이는 건 자연스럽다.

"옷.!"

쑥 뻗어 오는 다리에 겉옷을 감싼 손을 내밀었다. 새하얀 다리를 잡아 받아 주었다.

"고마워요."

"갑시다."

다시 짐을 싸서 들었다.

박쥐도 살지 않는 동굴.

'벌레도, 거미도 없지.'

이상할 정도로 황량한 곳이다.

안에서 삼 년을 살았지만, 나 말고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입구 근처에서 노는 동물은 있어도 안으로는 들어오지 않는다.

나를 의식해서는 아니다.

동물들도 날 그리 두려워하지는 않으니까.

'좀 이상한 곳이긴 해.'

- 달그락.

약간의 뼈 무더기.

그것밖에 없는 동굴이다.

누구의 뼈인지도 모른다.

이제 이 동굴에는, 또 다른 -움직이는- 뼈.

그리고 살아 숨 쉬는 여자 한 명이 더해졌다.

앞장섰다.

- 터벅터벅.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조금씩 넓어지는 공간.

얼마나 걸었을까.

루비아의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하아.

가파르게 내어 지는 숨소리.

- 스르르.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진다. 재빨리 그녀의 몸을 받쳤다. 뾰족한 바위에라도 부딪히면 다치게 된다.

'긴장이 풀려서인가.' 배려 없이 한참을 걷기만 했다. 약한 육체를 가진 여자다.

신경 쓰고 있다고는 해도 적응이 조금 어렵다.

이 여자를 어떤 식으로든 이용할 생각이라면, 조금 더 제대로 돌봐줄 필요가 있다.

짐을 풀었다. 망치잡이의 겉옷으로 여자를 덮어 주었다.

바닥에 눕히면 목이 불편할 거다.

_ 툭.

누운 여자의 머리를 허벅지 뼈로 받쳐 주었다.

'너무 딱딱할까?'

하지만, 누운 그녀는 몹시 편안한 표정이다. 풍성한 갈색 머리칼이 하얀 뼈 사이로 감겨들었다.

빛은 새어 들어오지 않았다.

잠시 차분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다. 일단 위기는 극복했으니.

'정리를 해 볼까.'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1. 소멸될 경우, 다시 처음 무덤에서 깨어날 때로 돌아온다.

2. 레벨은 1로 초기화. 하지만 스킬과 스탯은 누적. 배분하지 않은 보너스 포인트까지도 마찬가지.

생각해 보면 무척 유리하다.

레벨은 1에서 올리는 게 당연히 훨씬 쉽다.

레벨 업을 몹시 쉽게 할 수 있다.

스탯을 누구보다 쉽게 쌓을 수 있는 것이다.

'자살할까?'

갑자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죽으면 다시 무덤으로 돌아간다.

석궁과 망치를 죽이면 레벨이 5 오른다. 그리고 다시 죽으면 무덤으로 돌아간다.

'여기서 자살하면.

계속 그 일을 반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스탯을 올릴 수 있는 것이다.

- 달그락.

고개를 저었다. 무모한 짓이다.

일단 첫 번째로.

언제까지 다시 무덤으로 돌아가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

얼마나 다시 살아날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기현상이 언제까지나 지속되리라고 보는 건 무모하다.

죽으면 다시 돌아오는 조건.

그것부터 알아내야 한다.

'무덤 근방에서 죽으면 다시 돌아가는 건가?'

- 달그락.

고개를 저었다. 서큐버스님에게 죽었을 때를 생각했다.

거긴, 여기서 한참이나 먼 곳이다.

'일단은 살아가 보자.'

먼 미래에, 서큐버스님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고.

나를 깨운, 내 허벅지 뼈에 머리칼을 감고 자는 이 여자.

그녀는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한다.

'따듯. 한가.'

이 여자 곁에 있으면 나는 약간의 온기를 느낄 수 있다. 그런 온기는 나쁘지 않게 다가온다.

잠시 함께하는 것도 괜찮겠지.

벽에 조심스럽게 몸을 기댔다.

여자가 펼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감을 눈도 없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 했다.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았지만.

의식이 조금은 희미해져 갔다.

텅 빈 눈구멍.

그곳으로 빛이 들어온다.

후두골 안쪽이 간질거린다.

빛의 초점이 모이듯,

멍하니 흩트려 놓고 있던 의식이 서서히 모아지기 시작한다.

수풀에 가려진 좁은 동굴 입구.

그 틈으로도 빛이 새어 들어온 것이다.

고개를 숙였다.

루비아를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쌔근거리며 자고 있다.

평온해 보이는 얼굴.

'악몽은 안 꾸나 보군.'

그렇게 좋아한다는 책도 한 권 못 들고 여기까지 도망쳐 왔다.

안락하게 쉴 수 있는 곳은 꿈속 정도겠지.

루비아를 깨우기가 망설여졌다.

스스로 눈을 뜰 때까지 기다려 주기로 했다.

그 순간이었다.

- 띠링!

[튜토리얼을 클리어 하셨습니다!]

['첫 번째 밤에서 살아남기' 완료.]

[보상: 시나리오 슬롯 1개추가]

[현재 슬롯: 1/2]

[동화율이 내려갑니다.]

[94.25%->93.71%]

'튜토리얼? 동화율?' 낯선 단어들.

어제 떴던 퀘스트라는 단어는 들어 보기라도 했다.

그러나 튜토리얼이니 시나리오니,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말들이다.

'역시 내가 미쳤거나.'

알 수 없는 마법이 적용되고 있는것이다.

- 달그락.

머리를 뒤로 기댔다.

미쳤다면 어디서부터?

마법이라면 어딜 가서 물어봐야 하지?

- 딱딱.

나는 손가락뼈로 두개골을 몇 번 두드렸다.

첫 밤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워낙 정신이 없어서, 그냥 넘겨 버리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의문을 풀고 싶다. 약간 조급해 지는 느낌이 든다.

멍하니 고민하고 있을 때.

"으, 으응.

루비아가 신음 소리를 내며 서서히 깨어났다.

그녀는 일어나 살며시 눈을 마사지한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호흡을 가다듬는다.

"흐, 하으으.

"더 자도 괜찮을 텐데?"

"흐꼭!"

그녀가 깜짝 놀랐다. 딸꾹질을 한 뒤 홉, 하고 숨을 크게 들이킨다.

'좀 부주의했나.'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다.

역시 인간 여자를 대하는 건 익숙하지 않다. 잠시 굳어 있던 루비아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꾸, 꿈이 아니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꿈이 아니었구나. 꿈이 아니었어.

루비아는 몽롱한 표정으로 말하다 갑자기 기침을 했다.

"크흠! 음!"

목이 칼칼한 듯했다. 수통을 가져다 줬다.

- 꿀꺽꿀꺽.

"아. 고마워요. 혹시, 제가 갑자기 쓰러졌던 거예요?"

"그렇소."

그녀는 짐에서 육포를 꺼냈다.

가늘게 찢어 나에게도 권하려다 멈칫한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래턱뼈 아래 텅 빈 공社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갈비뼈 아래쪽을 가리켰다.

"혼자 드시오."

"아. 죄송해요."

루비아는 내 눈치를 보며 육포를 우물우물 씹었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마른 육포를 씹었다.

얼굴에 약간 활기가 돌아왔다.

루비아를 가만히 바라봤다. 시선이 계속 마주쳤다. 약간 머쓱함을 느꼈다.

어제 들은 이야기나 좀 더 해 보기로 했다. 밑도 끝도 없이 질문을 쑥들이 밀었다.

"복수할 거요?"

아버지가 살해당하고, 그 자리를 삼촌이 빼앗았다.

루비아는 수통을 내려놓고는, 조용히 손을 모았다.

의외로 어조는 차분했다.

"복수를. 모르겠어요. 처음에는 너무 무서웠어요. 이런저런 걸 생각할 수가 없었어요.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제가 여기 있으면 안 된다고 성에 있던 사람들이 울면서 이야기하고."

"거기 있었으면 죽었겠지."

"그럴까요?"

"당연한 소릴."

남았다면 죽는 건 당연하다.

지금의 루비아는 모르겠지만, 처음 그녀를 지켜 주지 못했을 때 쫓아온 석궁은 '영주님' 운운했다.

그녀의 삼촌일 것이다. 그는 조카를 죽이려고 악질 청부업자 둘을 보낸 것이다. 혹시나 모를 화근을 없애기 위해서.

루비아가 한숨을 쉬었다.

"성에 계시던 분들. 다들 저한테 참 잘해 주셨는데. 잘 계실까 걱정이에요."

조금 숨을 고르던 루비아가 말을 이었다.

"아버지의 복수를 해야 하는 걸까요? 제가 지금 가면, 저를 위해 싸운다고 또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갈 텐데. 그게 너무 무서워요."

도망쳤던 건가.

그리고 날 일으키고.

갑작스러운 상황에 제대로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겠지.

같은 편이 생겼다고 좋아하던 그녀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때의 루비아는 잔혹하게 간살奸殺당했다.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복수라면 나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서큐버스님을 위해.

하지만 용사에게 복수하는 일은 꿈만 같은 일이다.

터무니없는 힘의 격차를 논외로 치더라도, 용사라는 것들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건 마왕 강림 후.

10년을 기다린다?

그때나 나타날 용사들을 위해?

게다가 그 시간서이라면.

아직 서큐버스님을 만나지도 않았을 때다. 복수보다 중요한 건 그분을 지켜 드리는 것. 하지만 어떻게 찾을지도 막막하기만 하다.

나는 갑자기 침울해 졌다.

"왜 그런 심각한 분위기예요?"

서큐버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다. 그건 마음에 담는다. 꺼내지 않는다.

나는 다른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그냥 궁금한 게 많아서."

"뭐에 대해서요?"

"나에 대해서."

물론 거짓말은 아니다.

시간에 갇혀 있다. 반복되는 루프는 나에게 가장 큰 의문이다.

"어.!"

내 말을 들은 루비아가 잠시 흠칫한다. 턱을 괴고 그녀에게 물었다.

"왜 그러지?"

"미안해요. 해골 씨가 '나'라고 말하는 게 잠깐 어색하게 느껴졌어요.

왜 그랬을까요? 1인칭 단수가 인간만의 것도 아닌데."

"답은 당신이 해야겠지."

"책 때문일지도 모르겠네요. 인간들의 이야기만 너무 읽었거든요."

"무슨 이야기지?"

"저자의 '나'에만 익숙해 졌어요. 저자는 모두 인간이죠."

조금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들 1인칭으로 자기 서술을 해요. 나름대로 풍자와 객관을 섞어 3인칭으로 쓰려고 하는 책도 있지만, 결국은 1인칭이에요. 책을 쓰는 사람은 어차피 모두 1인칭이니까."

루비아는 말을 이었다.

"사실은, 제가 '나'라고 입 밖에 내는 것도 가끔은 어색하다니까요? 책을 읽다 보면 대부분 화자는 남자거든요. 아, 해골씨는 남자예요?"

- 달그락.

나는 몸을 움찔거렸다.

뭐라고 해야 할까?

동물의 성별이란 건 생식기 구조로 인해 판별된다.

생식기는 피와 살로 이루어져 있다. 나에게는 남은 건 달그락거리는 하얀 뼈밖에 없다.

골격을 보고 생전의 성별을 판단할 수 있다고 한들, 지금은 뼈도 살도 없는 그저 뼈에 불과하다.

구분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잠시 고민하다 적당히 대답했다.

12화 삶에서 깨어나는 것 (12)

***************************************************

"기억은 없소만. 당신의 이야기에 따르자면, 남자에 가깝지 않을까?"

"왜죠?"

"1인칭 단수가 나에겐 자연스럽게 느껴지니까."

우리는 잠시 달그락거리며, 키득거리며 작게 웃었다.

"자신에 대해 어떤 게 궁금해요?"

거짓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

이 여자는 어쨌건 나를 무덤에서 일으킨 여자.

나에게 악의를 품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솔직해 지기로 했다.

"시간이 반복되는 것 같아서 말이오. 이런 걸 어디 물어봐야 하나?"

"시간이. 반복된다고요?"

루비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놀라지는 않은 것 같다.

"그렇소. 죽고 나면 다시 무덤에서 일어났을 때로 돌아가 있는데.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모르겠"음, 그러면.

루비아가 가만히 고민했다.

'안 놀라나?'

의외로 잠잠한 반응이 놀라웠다.

너무 어처구니없는 일이라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아니면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혹시 아쥬라의 탑을 아세요?"

"알지."

"거기라도 가서 물어 보는 건 어떨까요? 너무 먼가?"

루비아가 제안을 했다.

"멀기는 확실히 멀지."

"음, 똑같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거든요!"

"뭐라고?"

나는 귀를 기울였다.

"〈시간의 틈바구니에 갇힌 천재 대마법사. 〉라는 책이 있어요. 저자는 무기명으로 되어 있는 소설이었는데. 드래곤이 만든 시간 함정에 갇힌 마법사의 이야기였어요."

맥이 탁 풀렸다.

"드래곤 같은 건 확실히 없으니 그건 그냥 소설이겠군."

"어. 확실히 없나요?"

"확실히 없지."

그랬다. 20년 후에도 드래곤 따위는 나타나지 않는다.

10년 후 16마왕이 나타날 뿐이다.

그리고 인간에게 처참하게 밟힌다.

마법사에게, 검주劍主들에게.

무엇보다 각지에서 나타나는 용사들에게.

"그런가요.

루비아는 눈에 띄게 아쉬워했다.

"그래도, 아쥬라의 탑은 뭔가 알려주지 않을까요?"

"글쎄.

우리는 아쥬라의 탑에 대해 서로 알고 있는 지식을 털어놓았다.

세계에서 가장 지혜롭다는 자들.

아쥬라의 마법사.

눈보라가 치는 북방. 아쥬라의 탑.

그곳에 살기에 그들을 아쥬라의 마법사라고 한다.

보통 마법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게 있다.

만다라, 시약, 스크롤, 트리거.

마법의 네 가지 요소.

정성껏 그린 만다라 위에서,

시약을 삼킨 마법사가 트리 거를 말하며-

스크롤을 찢는다.

그렇게 발동되는 게 마법이었다.

하지만, 그 네 가지가 없어도 마법을 쓸 수 있는 자들이 아쥬라의 마법사들이다.

그들은 느긋하게 걸어 다니면서도 땅을 얼릴 수 있다. 불꽃을 일으키고 바람을 바꿀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을 아쥬라의 마법사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저〈마법사〉라고 부른다.

'아쥬라의 탑'이라는 용어도 쓰지 않는다.

대신〈탑〉이라는 용어를 쓴다.

〈마법사〉들은 그 네이멍이 거만하다는 인식조차 없다.

〈탑〉은 제국 영토 내에 있다.

그러나 제국 법을 적용할 수 없는 성역.

〈탑〉에 이름만 올린 자들까지 모두 합해도 그 숫자는 고작 이백 명에 불과하다.

"실제로 거주하는 자들은 많아야 쉰 명 정도라던데요?"

그렇다.

쉰 명으로, 평방 35.4킬로미터의 영토를 자신들의 땅이라고 인정받고 있다. 개개인의 권능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신비와 기적에 관해서라면 그들을 배제하고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갈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멀어서요? 하긴 끝에서 끝이긴 하네요."

"그거 말고도. 여기서 거기까지 아무 일 없이 걸어갈 수 있다고 해도 문제야."

"혹시.

"그래. 아쥬라의 탑은 사령술과 흑마 법을 배척하지. 날 보면 단번에 소멸시켜 버릴지도 몰라."

"하지만 호기심 넘치는 사람들이라던데. 정말 그럴까요?"

"그런 사람들이 더 위험할지도 모르지."

만에 하나.

루비아의 말대로, 내 상담을 몰래 받아 주는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자들은 오히려 더 위험하다.

가장 독선적이고 미친 자들이니까.

세계가 멸망하더라도 자신의 호기심을 푸는 게 더 중요한 자들이다.

가서 상담 같은 걸 했다간.

눈을 빛내며 마법 감옥에 가둘 것이다. 아쥬라의 마법사가 만드는〈스펠 홀드〉.

그곳을 빠져 나가는 건 고위 마족도 어려운 일이다. 나 같은 해골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영원히 감옥 안에서 달그락거리며,

벗어나지 못하는 실험 체가 될지도 모른다. 고개를 젓는 내게 루비아가 제안했다.

"일단. 옷부터 살까요?"

"옷이라니?"

"갑옷이요. 이 상태로 도시에는 못 들어갈 것 같아서요. 길을 가기도 좀 곤란할지 모르고.

루비아의 말에, 나는 경추를 달그락거렸다. 그녀의 말이 옳다.

갑옷이 필요하다.

장갑과 투구까지 모두 갖춘 풀 플레이트를 입어야 한다.

방어용은 아니다.

은폐가 필요하다.

산속으로만 숨어 다닌다고 해도,

인간은 언제든 마주칠 수 있다. 나는 해골병사다.

이런 모습을 하고 있다간 무조건 공격을 받게 된다.

함부로 걸어 다닐 수조차 없다. 수풀 사이를 기어가기만 할 생각이 아니라면.

세계는 인간의 것이다.

동부 산맥이나 서부 사막이면 좀 덜하겠지만, 이곳은 제국 남부.

인간으로부터 자유로운 장소는 특히 더 드문 곳이다.

던전들 역시 꾸준히 약탈을 당하는 건 마찬가지.

얼마 안 되는 마물들은 던전 안에 박혀서, 인간의 방문을 두려움과 함께 기다린다.

나는 여자에게 제안했다.

"그럼 그라스미어로 갑시다."

"그라 스미어요? 아.

루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떻게 그라스미어를 아셨어요?"

"글쎄. 여기저기서 들었지."

여기저기는 아니었다. 모두 서큐버스님에게 들은 이야기다.

"여기저기요?"

"누군가 그에게 말을 가르치고 책을 읽어 준다면, 해골병사도 지식을 습득할 수 있겠지."

"네?"

그녀가 보기에 나는 갓 무덤에서 일어난 해골이다. 벙벙한 기색이다.

하지만 굳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공유하고 싶지 않다. 혼자서 잠기고 싶은 추억이다.

함께 나누며 통해 의미를 쌓아 가는 것도 많다.

하지만 서큐버스님과의 기억은 그런 종류는 아니었다.

화제를 대장간의 도시로 돌렸다.

"그라스미어는 남부에서도 가장 뜨거운 도시라더군. 지정학적 이유는 아니지."

"대장간들 때문이었죠?"

성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곳곳에 빼곡하게 늘어선 대장간들이 후끈한 열기를 뿜어 댄다고 한다.

"그렇지."

"한번 가 보고 싶었어요. 성문을 열면 정말 대장간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을까요? 불편한 위치에 있지만, 상인들이 반드시 한 번은 들를 만큼 품질이 좋다던데."

"우락부락한 대장장이들이 골목마다 늘어서 가게를 차리고 있으니, 별도로 치안 병력을 운영할 필요도 없다더군."

"기왕 갑옷을 살 거면 역시 그런 곳에서 사는 게 좋겠죠!"

"그래 주면 고맙지. 어쨌던 그라스미어로 갑시다."

나는 동굴을 걸어갔다. 루비아는 잠시 말없이 따라오다 물었다.

"갑옷을 구한 뒤엔 어디로 가실 생각인가요?"

"글쎄. 만날 사람이 있긴 해."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게 말하는 편이 알아듣기 쉬울 테니까.

"만날 사람이요?"

"하지만 만나려면 한참 남았지. 딱히 갈 만한 곳은 없소."

"갈 만한 곳이 없다니, 그건 저랑 비슷하네요.

루비아가 푸념했다. 그 말에 동의해야 할지 조금 고민하면서, 그녀와 발을 맞춰 동굴을 걸었다.

종유석 끝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나와 여자의 발소리가 동굴 안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서큐버스님을 다시 만난다면.

과거에는 없었던 선택지가 생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선택지는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다.

그분을 만날 때까지 투쟁해야 한다. 인간의 침해를 받지 않는, 내 영역을 구축할 정도가 되려면.

타자의 침해에서 자유로 우려면.

얼마나 강해져야 하는 걸까?

얼마나.

"어떻게 이렇게 잘 가세요? 여기가 거기 같고, 저기가 여기 같은데 그녀의 말에 상념에서 벗어났다.

루비아가 곁에서 입을 벌리고 감탄하고 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글쎄. 그냥?"

동굴은 아득한 세월로 빚어 졌다.

작은 것들의 인지와 시간을 아득히 초월해 있다.

"미로 같은데요. 아니, 이런 미로는 도저히 만들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런가?"

나는 별 대꾸 없이 계속 걸었다.

"넓고 촘촘해요. 동굴에 관한 책들도 꽤 읽어 봤는데, 이런 건 도대체 어떻게 길을 찾아가는 거죠? 갈래길이 끝도 없네요."

루비아는 옆에서 계속 조잘댄다.

"정말. 다 똑같은 거 같은데. 잘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가시는 거예요? 우와. 신기해요."

- 띠링!

[루비아의 호감도가 3 올랐습니다!]

[루비아는 당신이 길을 신기할 정도로 잘 찾는 대단한 해골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번트 시스템: 마스터에게 '길을 굉장히 잘 찾는다.'라고 생각되는 데 성공했습니다.]

[칭호: '패스파인더'를 획득합니다.]

[마스터와 함께 이동할 때 시야가10% 증가 합니다.]

'또 이게 나오는군.' 동시에, 무언가 조금 멀리까지 보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서번트 시스템이라는 것.

두 번째 등장이다.

'서큐버스님과 함께일 때 이런 게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조금이라도 그녀를 더 잘 지켜 줄수 있지 않았을까.

어쨌건, 지금은 이 루비아라는 여자를 돌봐 줄 필요가 있다.

그녀의 상태창을 확인해 보았다.

[이름: 레이 루비아]

[사령술사 Lv.1]

[체력-6 힘-5 민첩-6 지혜-12]

[호감도: 9]

- 루비아는 자신이 깨운 해골에게 약간의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의 활약을 보며 신뢰가 싹트고 있습니다.

[기본 스킬]

- 호감도를 올리면 개방됩니다.

[특전]

- 호감도를 올리면 개방됩니다.

的히- 호감도를 올리면 개방됩니다.

'호감도가 6 올랐군.' 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호감도가 알아서 잘 오르는 여자였다. 물론 거기에 불만은 전혀 없다.

하지만 아직 기본 스킨과 특전, 칭호 등은 개방되지 않고 있었다.

"정말 다 똑같은 거 같은데. 잘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가시는 거예요? 와.

루비아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감탄사를 연발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거의 길이 나뉠 때마다, 내가 길을 선택할 때마다 감명을 받는 것 같았다.

"그렇게 신기한가?"

"저는 길을 정말 못 찾거든요."

그녀가 잘 쫓아오도록 간격을 유지해 주며 계속 걸었다.

"이런 동굴은 만들어지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산 안에 이렇게 복잡하고 긴 동굴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요."

"그런가."

중간 중간 재잘거리는 그녀에게 별대 답도 않고 걸어갔다.

두 시간 정도를 걷자 반대편 동굴 밖으로 나왔다.

반대쪽 동굴 입구 역시 수풀에 가려져 있었다. 이곳은 완전히 다른 위치 였다.

- 꾸꾸꾸 꾸꾸꾸.!

- 뀨뀨뀨뀨!

- 삐꾹! 삐꾹!

- 쀼. 쀼쀼! 쀼. 쀼쀼!

동굴에서 나오자마자 산새 소리가 요란했다.

'날씨가 무색하게 울어 대는군.'

그 울음 사이로, 이젠 낯익은 효과음이 끼어들었다.

- 띠링!

하지만 그 아래로 펼쳐지는 글자들은 또 새로운 것이었다.

[C더블 플러스급 미로를 클리어 하셨습니다!]

[Exp 플러스15, 000]

[스킬을 사용하지 않고 미로를 클리어 했습니다.]

[경험치가 추가로 100% 더 주어집니다.]

[Exp 플러스15, 000]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응?' 미로라고?

별생각 없이 갔다. 동굴을 한 번 지나가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다 아는 길을 걸어갔을 뿐이다. 걷는다고 경험치를 주나.

'하나, 둘, 셋. 아홉, 열.'

레벨이 10이나 오르다니.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곰곰이 처음 동굴에 들어왔을 때를 생각했다. 동굴 안에서 밤낮은 알수 없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시간의 흐름은 느껴졌다. 이 동굴 안에서 3년 정도는 보낸 것 같다.

13화 삶에서 깨어나는 것 (13)

***************************************************

갈 곳이 없었으므로, 그저 동굴 안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며 3년을 달그락거렸다.

'그게 도움이 된 건가.'

생각해 보면, 들어가서 처음 출구를 찾는 데만도 1년이 넘게 걸린 것 같다.

'별로 신경도 안 쓰고 있었는데.'

어차피 갈 곳이 없었으니까. 먹을 필요도 햇빛을 받을 필요도 없다.

하여 동굴 안에서 헤맨다는 느낌도 없이 지냈다.

천장의 미묘한 기울어짐, 종유석의 모양과 벽의 결들을 자연스럽게 익혔다.

'하긴.,

그런 것들을 모두 알지 않으면 여기서 죽어 갈 것 같기는 하다.

이 동굴에는 동물들도 오지 않는다. 박쥐조차 없다. 여기 들어오면 죽는 걸 알고 있는 거다.

'으음.

나는 상태창을 확인했다.

[이름: 없음]

[해골병사 Lv. 16(57)]

[체력-29 힘-26 민첩-22 지혜-9]

[잔여 포인트: 10]

'이거 참.' 나는 '잔여 포인트 10'이라는 글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괘, 괜찮으세요?"

루비아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아, 괜찮지."

아주 괜찮다. 사실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다.

레벨 업을 하면 기본적으로 상당한 쾌감이 주어진다.

뜨거운 온천수에 몸을 담궜다가,

차갑게 식힌 냉탕에 몸을 담글 때와 같은 기분이다.

몸 전체에 톡 쏘는 상쾌한 향이 맴도는 듯한 기분.

지금은 한 번에 10이 올랐다. 뼈마디 구석구석으로 쾌락이 흐른다. 잠시 그 기분을 즐겼다.

가만히 서 있었다. 루비아의 시선이 느껴진다.

"잠깐만 기다려 줘."

"아, 맵!"

루비아는 더 이상 내게 말을 걸지 않는다. 새로 생긴 10포인트를 어디에 써야 할지 고민했다.

어디 한군데 몰아 쓸까?

힘에 전부 투자할까. 민첩에?

체력이나 지혜는 아니다. 이미 체력은 꽤 높은 데다가, 지혜에는 써봤자 실용성이 떨어진다. 마법사가 될 것도 아니니까.

잠깐 고민하다 결국 민첩에 7, 힘에 3을 분배했다.

[힘이 올랐습니다.]

[힘이.]

[민첩이 올랐습니다.]

[민첩이 올랐습니다.]

[민첩이.]

세계가 점점 느리고 또렷해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민첩 7의 효과는 굉장한 것 같다.

지금 당장 단검이라도 휘둘러보고 싶었다. 하지만 인간이 옆에 있다.

허공에 칼질을 하는 모습은 좀 우스광스러울 거다.

상태창을 다시 확인했다.

[이름: 없음]

[해골병사 Lv. 16(57)]

[체력-29 힘-30 민첩-32 지혜-9]

이제 체력, 힘, 민첩이 모두 29 이상으로 올랐다.

'훨씬 안정적인 느낌이군.'

망치와 석궁을 처치하는 데 그야말로 악전고투를 벌였다.

하지만 다시 마주치면 일이 훨씬 쉬워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민첩을 올리면 적의 공격은 피해내고, 내 공격은 명중시키기 쉬워 진다. 힘도 올렸다. 더 강하게 한 방한 방을 먹여 준다.

물론 생각만 그렇다. 생각대로만 된다면 세상에 어려운 일은 없다.

사실 스킬이 문제일 거다.

순수한 힘이나 민첩의 차이도 있었겠지만, 놈들이 가진〈스킬〉이 나와 전력의 차이를 만든다.

'나도 스킬을 익혀야 할 텐데.'

상태창을 손으로 끌어 치워 버렸다. 문득 시선을 느꼈다.

루비아가 말똥말똥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멋쩍게 말했다.

"가지."

"그럴까요?"

고개를 끄덕였다.

"흐어으. 흐이으어.

"일단 짐말부터 사야겠군."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루비아는 지쳐서 고개를 푹 늘어뜨리고 간신히 한 발 한 발을 걷고 있었다.

그러다가도 한 번씩 얼굴을 들어 나를 보고 웃었다.

기운이 남아 있는 척을 하고 있다.

그 모습이 애잔했다. 그녀는 간밤에 나름대로 고초를 겪었다.

게다가, 동굴에서 두 시간이나 걸었다. 힘든 건 당연하다.

레벨 1의 인간 여자. 체력 따위는 전혀 기대할 수 없다. 수치만 봐도 나보다 네 배는 약하다.

그녀가 헉헉대며 걸어간다.

업고 가기라도 해야 할까. 짐은 이미 전부 내가 들고 있다.

좀 거추장스러운 여자다. 지금이라도 그냥 버리고 갈까?

늑대의 먹이가 되건, 설원 트롤에게 몸이 찢겨지건 그냥 나는 내 갈길을 가는 거다.

어차피 트롤이 나오면, 지켜 줄 수도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나라고 딱히 목적지가 있는건 아니다. 이 여자와 크게 처지가 다르지 않다.

여기서 루비아를 버리고 가고 싶지는 않다.

딱히 도의적인 차원은 아니다.

이 여자는 이용 가치가 넘쳐난다.

일단 나에게 갑옷을 사 줘야 한다.

그 밖에도 인간에게 돈을 획득하게 된다면, 무언가를 구매해 줄자가 필요 하다.

해골이 거래를 할 수는 없으니까.

이 세계는 인간의 것이고, 나는 그들과의 고리가 필요한 것이다.

사실 여기까지만 본다면, 꼭 이 여자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나는 상태창을 열었다.

스탯과 스킬 아래.

거기에〈서번트 시스템〉이라는 항목이 새로 생겼다.

[서번트 시스템]

[명명命名: '패스파인더']

[마스터와 함께 이동할 때 시야가10% 증가합니다.]

[사념 思念: '특별한 서번트.']

[마스터를 위해 싸울 때 전투력이20% 증가 합니다.]

서큐버스님과 함께했을 때도 나오지 않던 것들이다.

처음 보는 것들이다.

부여되는 효과는 놀라울 정도.

여기에 대해 알아보아야 한다.

그걸 위해서라도, 이 루비아라는 여자와 함께할 필요가 있다.

나를 무덤에서 일으킨 자에게만 적용되는 걸까?

앞을 바라본다.

시야 10% 증가.

그 효과는 제법 컸다. 멀리까지 보일 뿐 아니라, 시야가 자체가 넓어진 신기한 느낌이었다.

더 많은 것들이 보였다.

발을 내디디며 걷는다.

- 뽀드득.

세상을 다 쓸어버릴 것처럼 비가 내렸는데, 동굴을 나오니 완전히 그쳐 있었다.

지금은 눈발이 날린다. 헛헛하게 마른 겨울 나뭇가지 위에는 하얗게 눈이 쌓여 가고 있었다.

성긴 눈발은 가늘었다. 하지만 비가 그친 뒤 밤새 쌓였는지, 벌써 바닥이 뽀득거릴 정도다.

눈은 싫어하지 않는다. 눈은 가볍다. 부드럽다. 날리는 눈발을 보며 가만히 걷는다.

눈바람에 실려 꽃향기가 났다.

'어디서 오는 걸까.'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린다. 그러다 문득 뒤까지 돌아본다.

남겨 지는 발자국이 보인다. 눈이 반갑지만은 않은 기분이었다.

'음.'

- 삐뀨뀨뀨!

- 과끅! 과곡!

"겨, 겨울에도. 산새들이 우네요. 듣기 좋다.

루비아가 옆에서 말한다. 겨울에 산새가 울던가? 사실 나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적당히 대꾸했다.

"밖으로 잘 안 다니는 성격인가?"

"책 읽는 게 제일 재미. 우읍!"

고개를 끄덕이던 루비아가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뭐가 나오진 않는다. 하지만 땅을 짚고 괴로워한다.

아무래도 그녀에게는 지나친 강행군이지 싶다.

"잠깐 쉬지."

"하, 하아.

- 털썩.

루비아가 나무 아래에 주저앉는다.

나도 근처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1월 20일은 정말 신비로운 날이에요."

루비아가 엉뚱한 말을 뱉어 냈다.

1월 20일은 어제다. 그녀가 어제 나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왜 그렇소?"

"그날 13시에서 18시 사이에 꺾은사르디아는 특별한 효능을 발휘한대요. 〈우연한 효능〉을요."

사르디아가 꽃이라는 사실은 알고있다. 겨울에 눈을 뚫고 혼자 붉게 피는 꽃이던가.

루비아가 말을 계속 이어 갔다.

"시약으로 쓰면, 마지막까지 무슨 효과가 나을지 모르는 거죠. 써 보고 나서도 잘 모를 때가 있대요. 그리고 그날 밤, 침실에서 효과를 알아차린다든가.

-딱딱.

나는 가볍게 이를 부딪쳤다. 이건 인간의 헛기침과 비슷한 행위다.

"낯 뜨거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군."

"네? 뭘 상상하신 거예요? 좋은 꿈을 꾸는 효과를 말한 건데."

- 딱.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해골을 놀릴 줄도 아는 여자로군.

"게다가, 1월 20일은 날씨가 항상 전날과 달라요. 그 다음 날과도 다르죠. 혼자 돋보여요."

"날씨가 다르다고?"

"맑다가 눈이 오고, 눈이 오다가 맑고, 비가 오다가 눈이 오죠."

"올해는 비가 왔으니. 전날에는 눈이 왔나?"

"맞아요. 눈이에요. 폭우가 쏟아졌죠? 1월 20일이 지난 후에는 다시 밤새 눈이 왔고요."

'그럴듯한데.' 1월 20일이 그런 날이었나?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서큐버스님이나, 다른 인간에게도 들은 기억은 없는 듯하다.

"그걸 관측한 지 얼마나 됐는데?"

15년 전부터요!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은 말하는 해골이 무덤에서 일어난 날이잖아요!"

루비아가 내 팔뼈를 꼭 잡았다. 그녀의 손에서 온기가 전해 졌다.

닿았을 때 내가 느끼는 따듯함. 그만큼 여자에겐 차가움이 전해질 것이다.

따듯한 피가 흐르는 자들은, 추우면 서로에게 다가간다.

거리를 좁힌다. 손을 잡고 안는다.

그렇게 서로 추위를 이겨 낸다.

그러나 나는 피도 온기도 없다. 상대의 온기만 빼앗아 가는 해골에 불과하다.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내 팔에서 떼어 냈다. 그녀가 가진 온기를 빼앗고 싶지 않았다.

"흐응. 매정하네요."

루비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으로 조금 걸어가더니 눈 속에 푹 얼굴을 묻는다.

"어라."

작은 감탄사를 듣고 고개를 돌려보았다. 거기엔 붉은 꽃이 있었다.

루비아가 방금 이야기했던 1월의사르디아다. 그녀가 천천히 그 주위에 손을 가져간다.

'꺾으려나.'

하지만 그녀의 말에 따르면, 오늘은 1월 21일이다.

20일은 이미 지났다.

시약으로 쓰기 위해 꺾는다면 아쉽게 하루를 지나친 셈.

- 달그락.

하지만 내가 알 바 아니다.

루비아를 방치하고 나뭇등걸에 몸을 기댔다.

멍하니 있자니 루비아가 슬그머니 근처로 다가왔다. 그리고 내 텅 빈 눈구멍에.

"압 r뭉친 눈을 던져 넣었다.

- 적!

가볍게 뭉쳐진 눈 덩어리가 후두골 안쪽에 맞았다.

경추 사이사이로 새하얀 눈이 가루가 되어 흩졌다.

하지만 아직도 두개골 안쪽에 눈 덩어리가 제법 남아 있었다.

'헤헤. 차가워요? 내가 이겼죠?"

나는 고개를 돌려 루비아를 무시했다.

그녀는 민망한 표정이 되었다.

"다 쉬었으면 일어납시다."

"으."

매몰차게 굴 생각은 없다.

그저 걱정이 될 뿐.

우리가 걷고 있는 곳은 산길. 치워지지 않은 눈 위에 적나라하게 발자국이 찍힌다.

동굴의 두 출입구.

들어간 곳과 나온 곳은 서로 전혀 동떨어져 있다.

그러나 흔적이 너무 적나라하게 남고 있다.

석궁과 망치는 죽였다.

무덤에 던져 주고 관으로 덮었다.

하지만 추격이 여기서 끝나리라는 가정은 너무 낙관적이다.

동료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

루비아의 삼촌. 새 영주 놈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처음 보낸 두 놈이 루비아의 시체를 갖고 돌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두 녀석이 시체가 되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영주는 훨씬 많은, 혹은 더 위험한 녀석을 보낼'필요하다면 그렇겠지.'

솔직히 그저 전 영주의 딸에 불과한 이 여자에게 무슨 구체적인 가치가 있는지는 알기 어려웠다.

인간의 권력 싸움이다. 내가 모를 이런저런 사정이 얽혀 있을 거다.

루비아라는 이 여자가, 나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하고 싶지 않은 걸 캐어물을 생각은 없다. 관심도 없다.

'어쨌건 서둘러야겠지.'

루비아가 내게 말한다.

"으. 기분 상했으면 미안해요."

"어"뭐가?"

"그, 눈을 던진 거요."

발자국 생각을 하느라 그건 이미 잊고 있었다. 사과할 필요는 없다.

"그건 아니오. 피곤이 안 풀렸으면 좀 더 쉬어도 좋고."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눈을 던진 손에는 꽃이 남아 있었다.

"이젠 꽃이 쓸모가 없는 건가?"

"아니요! 쓸모없는 꽃은 없어요.

이렇게 하면 어울릴 것 같은데여자가 가까이 다가온다.

내 머리에 손을 댄다.

힘으로 공격하려는 건가 싶었을 때, 그녀가 두개골의 작은 틈에 붉은 꽃을 꽂는다.

- 툭툭.

그리고 눈으로 덮어 단단히 고정시킨다.

"좋은데요? 해 보길 잘했어."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이건 무슨 낙인 같은 건가?"

"네?"

그녀가 크게 웃었다. 웃는 의미를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나도 웃었다.

뭔가를 이해하기 어려울 때, 그걸 따라해 보면 혹시 그 의미를 알게 될지도 모른다.

- 달그락.

모험은 성공했다. 조금은 그 웃음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14화 누구를 책망할 것인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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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차가웠다.

길은 험하고 좁았다.

곳곳에 뾰족하게 튀어나온 돌부리들이 많다. 발끝에 걸리는 몇 개의 돌부리를 확인하며 말했다.

"발밑을 조심하시오."

- 퍽!

그 말을 하자마자, 루비아가 갑자기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 달그락!

나는 빠르게 움직여 그녀를 잡아 줬다. 조금 더 일찍 말해야 했나?

갑작스레 넘어지는 모습에 나는 약간 당황했다.

"괜찮소?"

"아아.

탄식을 뱉은 그녀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전 월 하는 걸까요? 웃기려고 한 짓은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저 그런 거 싫어해요. 누가 웃기려고 작정하면 저부터 안 웃는단 말이에요"알고 있소. 천천히 물도 좀 마시면서 걷지."

나는 수통을 건넸다.

약한 숨을 내쉬며, 그녀가 작은 입에 물을 담는다.

벌어지는 입술을 가만히 바라봤다.

꿀꺽, 하고 그녀가 입안 가득 머금었던 물을 삼켰다.

가만히 하늘을 바라봤다.

아직 낮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산은 조금씩 어둡게 채색되며 온도를 낮출 것이다. 조금만 더 걷고 쉴곳을 찾아야 한다.

"험할 거요.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을 피하려고 택한 길이니까."

"괜찮아요. 다 들어 주시고, 계속 부축해 주시잖아요. 갈 만한데요?"

우리는 높은 곳을 통해서 그라스미어를 향해 가고 있다. 인간들을 조우하지 않기 위해서다.

추가 추격자를 염려한 내 제안이었고 루비아는 승낙했다.

고도가 높다. 험하다.

하지만 돌아가는 길은 아니다.

오히려 목적지에 빨리 도착할지도 모른다.

"갈까요?"

"충분히 쉬고 갑시다."

그때 였다.

- 크르릉.

앞에서 미약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몸을 긴장했다.

늑대 울음소리다. 바로 그쪽을 바라봤다. 거기엔 작은 새끼 늑대 한마리가 엎드려 있었다.

'새하얗군.'

눈처럼 새하얀 털의 늑대였다. 눈과 비슷한 색의 털 때문에, 무심코지나친다면 보지 못할지도 몰랐다.

늑대는 한쪽 앞발을 쭉 뻗은 채 눈 위에 바짝 엎드려 있었다.

그 발끝을 따라가 보니, 거기엔 시커먼 덫이 닫혀 있었다.

작은 늑대가 가파르게 숨을 쉰다.

허파 부분이 빠르게 올라갔다 내려가길 반복한다. 늑대는 제 발목을 향해 제대로 나지도 않은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제 발목을 깨물려는 건가?'

- 달그락.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새파랗게 빛나는 눈으로 늑대가 나를 바라봤다. 늑대는 몹시 아름다웠다.

궁금했다. 저 늑대는 제 발목을 결국 끊어 낼까. 그럴 수 있을까.

"엇, 새끼 늑대네요.!"

루비아가 뒤늦게 늑대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신경 쓰이나?"

"신경. 쓰여요."

"구해 줄까?"

루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걱정스러운 둣이 말했다.

"위험할 텐데. 나무판 같은 걸 찾아볼게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어."

그런 건 필요 없다. 저런 늑대는 나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못한다.

초조한 표정의 루비아를 가만히 있으라고 해 둔 뒤, 조심스럽게 녀석에게 다가갔다.

"크르르!"

해치러 온 줄 아는 걸까. 녀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한쪽발이 D자로 된 덫에 걸린 터라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덫은 바닥에 쇠말뚝으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새끼 늑대는 뒷발을 세워 보고, 다른 쪽 앞발로 땅을 밀어내려 애썼다. 하지만 말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버둥거릴 뿐이었다.

"크앙! 크아앙!"

세 발로 땅을 디딘 채 몸을 뒤로 당겼다. 고개까지 젖힌 채 덫에 걸린 앞발을 빼내려 애썼다. 그러나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애쓰는군.'

몸을 꺾어도 보고, 꼬리까지 힘을 줘 가며 하얀 새끼 늑대가 마구 발버둥을 쳤다.

덫이 달그락거리지만, 땅에 단단히 고정된 쇠말뚝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 획!

나는 녀석에게 육포를 던져 줬다.

하지만 녀석은 받아먹지 않았다.

'자존심인가?'

경계를 늦추라는 뜻이었는데 쉽지는 않다. 덫을 해체하러 내가 코앞까지 다가가자, 녀석은 이빨을 세우곤 내게 덤비기 시작했다.

"크르르! 크롱!"

눈 위를 뛰어 나를 세차게 깨물려 한다.

하지만 녀석의 몸은 작다. 입은 더욱 작고, 이빨이 아직 제대로 날카롭지 않은 늑대였다.

녀석이 내 몸 여기저기를 깨물어 온다. 물려 봤자 어차피 아프지도 않았다. 깨물 만한 살도 없다.

덫에 걸린 녀석이 움직이는 게 훨씬 더 아플 거다.

"크으응.

한참 내 몸 여기저기를 누르고 물다가, 지친 녀석이 결국 엎드린다.

앉아서 덫을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꽉 물린 덫을 위로 확 젖혔다.

- 투둑!

덫이 풀렸다. 쭉 내밀고 있어야 했던 한쪽 발을 당긴다. 녀석이 순간적으로 몸을 세차게 웅크린다.

경련하듯 몸을 파르르 뒤튼다.

일어나 몸을 돌리고 나와 반대 방향으로 파앗 하고 뛰쳐나간다.

녀석이 눈 내린 산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결국 이건 안 가져가나."

나는 육포를 흔들고, 녀석이 사라진 숲 속을 향해 던졌다.

툭, 하고 육포가 떨어지는 소리는 났지만 거기 그대로였다.

"바라 파 울프네요. 새하얀 털에 저런 새파란 눈. 던진 먹이는 안 먹을 거예요. 자존심이 강해서."

"그런 것도 다 책에서 읽은 건가?"

내 말에 루비아는 약간 부끄러워했다.

"그, 그래요! 하지만 정말 안 먹고 있잖아요?"

그 순간이었다.

- 띠링!

[새끼 늑대의 호감도가 7 올랐습니다.]

숲 쪽을 돌아봤다. 바닥에 던진 육포가 사라져 있었다.

"먹는 것 같은데?"

"어, 먹네요! 잘됐다.

태세 전환이 너무 빠른 것 아니냐고 한마디 하려다 말았다. 머릿속에 또 다시 띠링, 하는 소리가 울려 왔기 때문이다.

[루비아의 당신에 대한 호감도가20을 넘었습니다. 상대의 간단한 심리 상태를 읽을 수 있게 됩니다.]

[루비아의 현재 심리를 읽으시겠습니까? Y/N]

'언제 또 20을 넘었지?' 9까지는 확인했는데, 함께 걸어오면서 꾸준히 호감도가 오른 것 같았다.

보아하니 호감도 20은 제법 높은 수치인 둣.

그러나 나는 N을 선택했다.

동료의 마음을 멋대로 들여다보고 싶은 생각은 없다.

어색한 상황을 뒤로하고 한참을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크릉! 크르롱!"

갑자기, 아까 구해 줬던 새끼 늑대가 뛰쳐나왔다.

그리고 우리의 길을 가로막고 짖어대기 시작했다. 눈을 새파랗게 빛내며 이빨을 드러냈다.

"응? 이 아이가 왜 이러죠?"

"글쎄. 육포를 더 달라고 그러나."

- 툭!

나는 육포를 하나 더 꺼내서 녀석 앞에 던져 주었다.

하지만 녀석은 육포는 본 척도 하지 않는다. 길 앞을 막고 크르릉, 크르릉 울부짖었다.

"왜 이러지. 어디 아픈 걸까요?"

루비아가 녀석에게 다가가 가만히 쓰다듬었다. 조금 놀랐지만, 녀석은 루비아를 깨물지 않았다.

다만 길 앞을 가로막을 뿐이었다.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빨리 쉴 곳을 찾아야 해. 가자고."

나는 계속 울부짖는 녀석을 억지로 떼어 놓고 길을 갔다.

잠시 걸어가다가 뒤를 돌아봤다.

육포는 그 자리에 그대로였다.

'으음. 앞에 뭐가 있나?'

새끼 늑대가, 우리에게 무언가 경고를 해 준 건지도 모른다.

"조금 떨어져서 따라와."

주의 깊게 앞을 살피며 걸어갔다.

긴 나뭇가지를 하나 주웠다. 눈 위를 천천히 더듬었다. 넓게 보며 아주 조심스럽게 걸었다.

"왜 그렇게 짖었을까요?"

"알기 전까지는 조심하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무 몇 그루와 연결된 덫을 발견할 수 있었다. 덫은 아주 컸다.

늑대나 여우처럼 작은 짐승을 위한 덫이 아니었다. 그런 하중은 무시하도록 설계된 것 같았다.

사람이나, 커다란 곰도 한 번에 낚아챌 수 있을 만큼 무척 강하게 설계된 덫이었다.

이 길을 지나가면 반드시 걸리게 되어 있다.

"정지."

손을 들었다.

루비아를 멈추게 했다. 나무들 사이로 조심스럽게 돌아갔다. 보이지 않게 설치된 철사를 전부 다 끊고 풀어냈다.

투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덫이 무력화됐다.

'걸리면 꼼짝없이 당했겠군.'

늑대가 경고해 주지 않았다면 발견하기 어려웠을 덫이다.

커다란 나무 몇 그루에 고정되어있는 데다가, 몸이 위로 튕겨져 그물에 매이도록 되어 있다.

힘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세다고 해도 빠져 나가기 어려웠을 것이다.

구해 준 값은 단단히 한 늑대라고 생각했다.

이제 됐어, 라고 루비아에게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아직 가지 않은 길 쪽에서, 여러 인간의 인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뭐라 웅성대는 소리와 눈 밟는 소리가 들렸다.

"옆으로 피하자."

루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풀에 숨어 인간들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마주쳐서 좋을 일은 전혀 없다.

웅성대는 목소리는 금세 커졌다.

여섯 명의 인간 남자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여섯이라. 숨기를 잘했군.'

징 박힌 가죽 갑옷을 입은 녀석이 둘, 나머지는 크게 방어력이 없을 것 같은 털옷을 걸치고 있었다.

세 놈은 방패와 한 손 무기, 세 놈은 활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독특한 점이 있었다.

여섯 놈이 하나같이 여벌 무기로 창을 가지고 있다.

긴 장창이 아니라 모두 투창이었다. 던질 수 있는 투창을 등에 몇 자루 더 메고 있었다.

'까다로운 적이군.'

싸운다고 해도, 루비아까지 지키기는 어려워 보였다. 활도 활이고, 놈들이 가진 투창을 던지면 어쩔 수없이 맞아서 죽어 버릴 테니까.

'무슨 산적들이 투창을 저렇게 들고 다니는 거지.'

살이 메겨진 석궁을 조심스럽게 놈들에게 겨눴다.

숨기 전 발자국을 약간 흩트려 놓긴 했다. 하지만 숨어 있는 우리를 찾는 게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기습으로 세 놈 정도는 먼저 처리하더라도, 녀석들이 루비아를 해치면 막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길을 잘못 들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길도 일부러 인간을 피해서 조금 험한 길을 택한 거다.

'인간은 정말 어디에나 있군.'

- 뽀득. 뽀드득.

남자들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발걸음이 제법 날렵하다. 산을 많이 타 본 녀석 같다.

'싸워야 하나.'

발자국 정도는 금방 추적할 것 같았다. 혹시 추적자들이 벌써 따라붙은 걸까? 불안해하며 단검을 꽉 쥐었다.

그 순간.

경악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덫이, 덫이 망가졌어!"

"뭐야, 덫이 왜 이렇게 되어 있어?

어떤 놈이야?"

잔뜩 홍분한 목소리였다.

덫을 망가뜨린 자를 발견하면 당장이라도 죽여 버릴 것 같은 분노가 섞여 있었다.

'그거, 난데.'

인간들의 분노에는 묘한 감정이 하나 더 섞여 있었다.

공포였다. 그들은 분명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런 젠장.!"

"어떤 미친놈이 여기까지 와서 덫을 망가뜨려 놓은 거야?"

"여기, 발자국이 있다."

그때까지 아무 말 없이, 멍하니 망가진 덫을 보고 있던 남자가 말했다. 그들은 능숙하게 발자국을 더듬기 시작했다.

"하나는 좀 이상한데?"

"쭉 이쪽으로 걸어왔나 보군. 이 근처에서 흩트리기를 했는데.

땅을 보고 중얼거린다.

왼손에 메이스를 들고, 오른손에 나무 방패를 든 녀석이 수풀 쪽으로 몸을 숙인다.

몇 걸음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 공격해야 하나?' 아슬아슬하다. 곧 발각될 거다. 이한 놈을 죽이고, 투창을 뺏어서 던진다면.

'아무래도 무리.'

머릿속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그려 보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답이 영 나오지 않았다.

"다들 여기로 와 봐."

손에 메이스를 든 녀석이 동료들에게 손짓했다.

동료들이 일제히,

이쪽을 돌아봤다.

'끝장이군.'

그때 였다.

- 크오오오오!

저 멀리서, 거대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 크오 오오!

울음소리는 빠르게 가까워졌다.

- 쿵! 쿵! 쿵! 쿵!

무언가 지축을 울리며 뛰어온다.

무겁지만 빠르고, 날렵한 느낌의 울림이었다.

- 쿵! 쿵! 쿵!

"준비해!"

남자들은 일제히 등에 멘 투창을 꺼내 잡았다.

나름대로 자세가 숙련되어 있다.

자루 끝 창날이 날카로웠다.

'대체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