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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화 기분의 문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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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다.

경비병들의 피 냄새가 허공에서 씻겨 사라진다.

이 정도면 새로 얻은 스킬들은 모두 충분히 실험했다.

체술. 검술. 참격. 산성. 흡착.

스무 구의 시체들은 서로 다른 사인으로 처참하게 죽어 있었다.

'으음.'

뒤에 주저앉아 지켜보는 포로들을 흘끗 바라봤다. 눈앞의 참상을 보고도, 두 손에 수갑이 차인 그들의 얼굴에는 흠칫 희망이 스친다.

- 서걱.

마지막 남은 경비의 가슴팍에 박은 칼을 빼냈다. 칼에 묻은 피와 연기를 털어 냈다.

- 치이이익.!

산성 속성을 해제하려 할 때였다.

- 털썩! 털썩!

수갑 찬 인간들이 앞다뤄 내 앞에 엎드렸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중에 나이 많은 노인 한 명이 살짝 고개를 들고, 조심스럽게 내게 질문했다.

"전前 유블람 수석 행정관 유라드카젤이 감히 여쯤니다. 공께서는 혹시 제국 상조上造십니까?"

머릿속에 제국 예법이 번뜩였다.

상조上造는 소상조라고도 불리며, 수사권과 형법 집행권을 가진다.

제국 20품계에서 후작보다 한 단계 낮은 작위.

'뭐라고 해야 되나.

노인을 바라봤다.

꽤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백발이 성성했으나 표정에서 강단이 느껴졌고, 말도 더듬지도 않았다. 제 아비가 끌려가 죽었다는 젊은 행정관과 얼굴선이 비슷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공께서는 수사 결과를 가지고 죄인들에게 형을 집행하셨습니다. 또한 검기를 태연히 사용하고 계시니, 필시 9품계 이상의 관작이실 터J- 치이이익!

나는 아직도 부식되고 있는 칼날과 노인을 번갈아 바라봤다.

'이거 검기 아닌데.' 노인이 말을 이었다.

"젊었을 적 수도에서 수학한 적이 있었습니다. 〈피닉스의 방패〉기사단장의 칼에서 타오르던 기운을 보았지요. 지금 보여 주신 것과 같은 검기 입니다."

'본 적 있다고? 근데 이걸 검기라고 한단 말이야?

당황했다. 혹시 저자는 어떤 상황을 유도하고 있는 걸까. 어떻게 해야 되나?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오해를 하고 있다면 아예 확 키우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떤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다면, 내가 올라타고삐를 쥔다.

[가면무도회Masquerade 활성화!]

[짧은 시간 동안 얼굴에 '인간'의모 습을 덧씩 읍니다.]

[최근에 본 가장 인상적인 인간을가장합니다.]

다른 건 다 좋은데, 이 부분이 좀곤란했다.

[변신: 바티엔느 폰 레안드로]

[65% 흡사합니다.]

[남은 부분은 무작위 처리됩니다.]

[제한 시간: 10분]

[다음 사용까지: 6시간]

마스커레 이드.

수녀에게 흡수한 스킬이다. 처음해 보는 건 아니다.

산속에서, 레나를 수련시키는 도중혼자서 사용해 보았다.

얼굴 부분만 덧씌워진다. 목 아래는 그대로 해골.

그렇지만 몸은 갑옷이 감싸고 있다. 물에 비춰 보니 그럭저럭 한 명의 인간 남성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거기엔 치명적인 문제가 하나 있었다.

'왜 하필 이 녀석인 거야.

그것도 몹시 어설프게 닮았다. 후작을 아는 사람이 본다면 절대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얼굴.

하지만,

- 철컥.

- 휘이잉.

머리카락 색은 제법 그럴듯하다.

투구를 벗자 회청색 머리카락이 바람이 흩날렸다.

나는 고개를 든 사형수들과 하나하나 눈을 마주쳤다.

"그. 머리칼은! 설마.

처음 말을 걸었던 노인이 기겁하는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나는 거침없이 말했다.

"제국 대상조大上造 바티엔느 폰레안드로가 명한다."

"관내후關內候를 뵙습니다! 감히 정체를 떠보려 했던 소인의 무례를 죽음으로 벌해 주십시오!"

노인이 외쳤다.

주위가 크게 웅성거렸다. 인간들이 일제히 나에게 거듭 예를 갖췄다.

'이렇게 가지, 뭐.'

어차피 여기에 후작 얼굴을 제대로 아는 이가 있을 리 없다.

아까 제국법 습득을 시험할 겸 후작 말투를 따라한 게 오히려 잘됐다싶었다.

기억에 남지 않는 평범한 얼 굴이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선택권이 없었다.

언젠가 스킬 레벨이 오르게 되면,

꼭 다른 모습으로 변해 보리라.

- 툭.

경비대장의 시체를 뒤졌다. 열쇠를 꺼내 수갑에 묶인 인간들에게 던지며 말했다.

"유블람 영주에게 전해라. 자살할 이틀의 여유를 주겠다. 이틀 후에도 목숨이 붙어 있으면 본인이. 직접아편굴에 던져 준다고 해라."

일행이 잠시 웅성거렸다. 기쁨의 옹성거림이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눈빛이 반짝였다.

"반드시 전하겠습니다!"

일행은 서로를 부축하며 조심스럽게 물러갔다.

그들이 보이지 않게 될 때 즈음.

"음. 잘한 건가?"

나는 경비대장의 시체를 털었다.

녀석의 안주머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알고 있다.

- 반짝!

예전에 뒤질 때는 반쯤 녹아내려있었던 금화가, 지금은 온전한 형태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거지.'

세이론. 초대 황제의 이름을 뜬 주화.

90%의 금과 10%의 미스릴로 만들어진, 가장 커다란 주화가 나를 반겼다.

레나와 두 번의 생을 함께한 이후 나도 반짝이는 걸 보면 챙길 생각부터 하게 된 것 같다.

경비대장의 주머니만 챙기고, 다른녀석들의 자잘한 은화는 그대로 놓아뒀다.

누군가 주워 가겠지.

썩어 가는 시체를 뒤질 만큼 절박하다면 몇 푼의 은화를 가져갈 자격은 있다.

'아까 녀석들한테 줄 걸 그랬나.'

하지만 이미 끝난 일이었다.

내가 만들어 낸 스무 구의 시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정도면.

이제 웬만한 인간들에게 비해도 그야말로 압도적으로 강하다.

무장한 스무 명의 경비대.

인간 사냥을 주로 하는, 전투에 능숙한 패거리를 장난처럼 가볍게 몰살시켰다.

'음.,

고양감이 서서히 사라지자, 그 자리로 작은 걱정이 올라왔다.

'후작을 사칭했는데. 쫓아오진 않겠지?'

엉뚱하게 떠오르는 문구가 있었다.

〈제국 형법 93조, 신분사칭죄. 〉

〈신분과 자격을 사칭하여, 그 위력을 행사한 자는 5년 이하의 노역에 처한다. 〉- 철컥.

스무 명을 살해해 놓고 고작 신분사칭죄를 떠올리는 게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생각하며, 나는 작게 실소를 홀렸다.

'안 쫓아오겠지, 뭐.'

원래대로라면 후작은 유블람에 들르지도 않는다.

게다가 이런 자질구레한 일에는 별신 경을 쓸 것 같지 않다.

놈의 분노는 근위기사단장 이사벨시몬느와, 애마 미유가 살해당한 건에 집중되어 있다.

'이제. 은괴나 얻자.'

- 팟!

Lv. 4의 질주!

은괴를 묻은 곳으로 달려갔다.

3.5배의 속도로 풍경이 빠르게 스쳐갔다. 은괴가 묻힌 나머지 두 장소까지는 금방이었다.

'여기인가.,

첫 번째 장소처럼 위장에 제법 신경을 써 놓았다.

하지만.

[탐지 Lv. 5를 활성화합니다!]

'아무 쓸모없다니까.'

두 번째에 이어, 세 번째 장소에서은괴를 캐낼 즈음에는 벌써 달이 뜬 저녁이었다.

- 반짝!

순도가 무척 높아 보이는 은괴가 달빛을 받아 은은히 반짝였다.

'레나가 보면 좋아하겠군.'

전부 집어서 주머니에 챙겼다.

인간을 사냥하고 강제로 아편에 중독 시켜서 만들어 낸 은괴다. 하지만 은에는 죄가 없다.

은과 금은 중립적이다. 거기에는 선도 악도 없다.

별빛청여우를 기다리던 선장을 본 뒤부터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저 인간. 왜 나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는 거요? 〉〈반짝이는 걸 믿으니까. 상당히 세련된 인간상이지. 〉선장은 해골인 나를 보고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공격하지 않았다.

인간들 중에서도, 내 생각과 달리정말 종족을 초월해서 '돈만 보는'녀석들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은과 금으로 만들어진 저울.

인간들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그 저울은 나를 해치기보다 돕는 쪽에 훨씬 더 가깝겠지.

'선장, 다음번에는. 한번 제대로 만나보고 싶은 녀석이었어.'

아까운 인간이다. 배에 숨어든 후작에게 살해당해, 키에 매달려 콩콩거리던 모습이 떠오른다.

한번 거래해 보고 싶은 상대다.

일단 선장과 거래를 뚫어 놓으면,

비슷한 가치관의 친구들을 많이 소개받을 수 있을지도.

- 휘이이엉.

가을밤이 흔들린다. 낙엽도 없는 황야. 홁먼지만 조금 안은 채 밤바람이 이리저리 불어 댄다.

회상에서 벗어났다.

유블람에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할 일이 더 떠올랐다.

'바로 근처네?'

거미굴이 가까이 있다.

- 팟!

밤에 오는 건 처음이다.

얽히고설킨 죽은 나무들이 달빛을 받으니 한층 더 으스스해 보였다.

안으로 발을 디뎠다.

안에 있는 거미들이라고 해 봐야, 경비병보다 조금 강한 수준.

'탐지.'

일정한 반경.

움직이는 거미들이 느껴졌다. 앞뒤좌우뿐만이 아니다.

곳곳에 난 구멍 안.

길고 좁은 통로에서 움직이는 기척이 모두 느껴졌다.

구球 형태로 완전히 적의 존재를 파악한다는 것.

5레벨의 탐지 스킬에 의해, 그동안과 한 단계 다른 차원의 전투가 가능해 진다.

- 키긱! 키기긱!

나를 감지한 거미 한 마리가, 구불구불 긴 구멍에서 뛰쳐나올 준비를 하며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낌새는 이미 입구에서부터 감지한 터.

'하나씩 처리하기도 귀찮군.

[은신 Lv. 5를 발동합니다!]

내 기척을 완전히 죽였다.

- 끼긱? 끼기기긱?

나에게 집중하고 있던 녀석이 당황하는 게 느껴진다.

피식 웃으며 걸어 들어갔다.

조무래기 몇 마리를 은신으로 지나안으로 들어갔다.

〈그라스미어의 불〉을 써 가면서 힘겹게 진행했던 던전이지만.

이젠 그런 게 전혀 필요 없다.

칼 한 번 휘두를 때마다 간단히한 마리씩 처리해도 되고, 지금처럼은신 스킬을 사용하면서 아예 무시해도 된다.

- 끼이이익.

앞으로 계속 나아가 철문을 열자협곡 같은 공간이 펼쳐졌다.

- 키기기긱! 키긱! 키기기긱!

그 순간 철문 앞뒤로 여섯 마리거미가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아직 어쩔 수 없나.'

문을 열면서까지 은신을 유지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철문을 열면서 그대로 사뿐히 협곡 아래로 뛰어내렸다.

- 쿵!

[체술 Lv. 7의 영향을 받아 낙하 데미지가 55% 감소합니다!]

[체력이 4.5% 감소했습니다!]

'좀 아프군.,

뛰어내린 순간.

나를 놓치고 신경이 잔뜩 곤두서있던 입구 쪽 거미들과, 협곡 안쪽에 있던 굶주린 거미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 티디디딕! 티딕! 티디디딕!

'구태여 죽겠다면야.'

[레벨이.]

[올랐습니다!]

순식간의 5 레벨 업.

경비들을 죽인 뒤에는 주로 민첩에스탯을 분배했고, 거미들을 죽이며얻은 스탯은 전부 힘에 몰아넣었다.

- 철컥.

"조용하군."

협곡 안쪽.

무너진 사원 곳곳에 세워진 거미조각들을 둘러봤다.

밤에 와서 그런 걸까?

조각들이 이상하게 조금 더 생생해보였다. 가만히 노려봤다. 움직이지는 않았다. 조각들은 그대로였다.

협곡 안쪽으로 더 들어갔다. 울퉁불퉁한 검은 바위 위를 걸었다.

나올 녀석은 아까 다 나왔는지 이제 거미는 없었다. 저 멀리 깊은 구덩이를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웹슬링거 이 녀석. 벌써 세 번째 만나네."

113화 기분의 문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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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창.'

[Lv. 15(149)

[체력: 61]

[힘: 68](new!)

[민첩: 69](new!)

[지혜: 50]

준수한 건 스탯뿐만이 아니다.

각각 고랭크에 이른 검술과 체술이서로를 보조하며 협력 효과를 만들어 낸다.

게다가 잿빛 기사에게서 흡수한 세 가지 스킬은, 특이하게도 모두 별도로 계산되어 공격 효과를 증폭시킨다.

'은신.' 바위 사이사이에 몸을 숨긴 채 거대한 구덩이 사이로 다가간다.

상대의 반응을 눈치 채기 위해 탐지는 최대로 활성화한 상태다.

[던전 보스: 열두 발의 거미 (진명: 웹슬링거Webslinger)]

[랭크: D+]

[플레이어의 레벨: 15]

[적정 클리어 레벨: 55]

[난이도 판정: 절망]

[난이도 판정으로 용사 포인트가200% 가산됩니다.]

[솔로 플레이로 도전합니다!]

지금 상황은 절망과 거리가 멀다.

절망은커녕, 몸길이 4미터의 거대한 이 거미는 내가 근처에 숨어들어온 것조차 모른다.

은신 Lv. 5인데도 이 정도다.

'Lv.10쯤 되면 가관이겠군.'

그 정도로 레벨을 올리면, 깨어난상태에서 털을 몇 가닥 뽑아 가도무슨 일인지 모를 것 같다.

물론 거미 털 따위에 관심은 없다.

내가 할 일은 녀석을 빠르게 죽여주는 일이다.

칼로 녀석의 급소를 조준한다. 홍옥이 쏟아져 나왔던 부위가 심장 비슷한 곳이다.

'잘 가라.'

[질주 Lv. 4를 발동!]

[발도 Lv. 5를 발동!]

[〈속성: 산성酸性 Lv. 5〉를 칼에 덧씌읍니다!]

[일도양단 Lv. 1을 발동합니다!]

- 일도양단 Lv. 1에 의해 상대의 방어력을 '대부분' 무시합니다.

[참격 Lv. 1을 발동합니다!]

- 참격 Lv. 1에 의해 칼날이 지나간 자리의 세포가 으스러집니다.

[기습으로 인해 데미지 300%의'치명타'가 발동합니다!]

- 쩌억!

- 촤아 아앗!

- 철컥!

질주 가속을 실어 칼을 휘둘렀다.

베어 낸 뒤 빠르게 몸을 굴렸다.

터지는 초록색 독액을 한 방울도 맞지 않고 피해 냈다.

웹슬링거는 역설적으로 거미줄을 뿜어내지 못하는 거미다.

녀석이 두려운 것은 열두 개의 다리와 거대한 이빨로 인한 공격도 있지만.

무엇보다 초록색 독액.

철로 된 갑옷까지 쉽게 녹일 수 있는 수준의 독액이다.

맞는다고 바로 죽지는 않겠지만, 일부러 당해 줄 이유는 전혀 없다.

- 치이이이익!

초록색 독액이 바위에 끼얹어져 요란한 소리를 낸다. 나는 뒤로 빠져다음 일격을 준비했다.

그 순간이었다.

-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뭐야? 이대로 끝이야?'

[클리 어!]

[던전 우두머리를 처치했습니다.]

- 열두 발의 거미 (진명: 웹슬링거Webslinger)

[랭크 판정: D+]

[난이도 판정: 절망]

[난이도 판정으로 용사 포인트가200% 가산됩니다.]

[솔로 플레이로 던전을 클리어 했습니다.]

[용사 포인트가 100% 가산됩니다.]

[D+ 랭크 클리어: 54포인트]

[난이도 가산: 108포인트]

[솔로 플레이 가산: 54포인트]

[216포인트를 획득하셨습니다!]

- 띠링!

[상점 이용 권한을 산출합니다.]

[하급 견습생 (Apprentice Low)으로 이용 권한이 인정됩니다.]

- 다음 등급까지: 943/1, 024용사 포인트. 오랜만에 보는 상태창이 다.

'슬슬 다음 등급으로 넘어갈 때가됐나.

계속 포인트를 누적해 왔다. 망령의 납골당에서, 거미굴에서, 그리고레나와 함께 돌았던 피 묻은 승마자의 쿼터, 시체 출금소, 맹독 하이에나의 구덩이에서.

[적절한 세 가지 능력 가운데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능력 스캔 중.]

[플레이어 스캔 중.]

눈앞에서 파란빛이 피어난다.

1. 거물 사냥꾼 Lv.1- 커다란 녀석을 치명타로 살해했습니다.

- 이 특전을 선택할 경우, 대형 몬스터 공격에 치명타가 들어갈 확률에 플러스5%가 보정됩니다.

치명타 데미지는 검술 레벨에 비례해 결정됩니다.

2. 질주 Lv.5- 당신은 발이 많은 거미를 죽였습니다. 당신이 흡수한 포인트는, 다음 스킬로 변환하기에 효율이 좋습니다.

- 질주 Lv.5: 20분 동안 400% 속도를 낼 수 있습니다.

- 쿨타임: 50분.

- 하루 사용 제한: 3회3. 보너스 스탯 플러스5'으음.

나는 생각에 빠진다.

온몸에 불이 붙어 있던 저번과 다르다. 시간은 넉넉하다.

밤새 고민해도 상관없다.

선택지는 세 가지다.

치명타. 질주. 스탯.

보너스 스탯을 받는 건 깔끔하다.

뭐니 뭐니 해도 스탯만큼 중요한 것도 드물다.

올리는 만큼 분명한 결과로 보여지고, 범용성도 가장 높다.

질주는 자주 활용하는 스킬이다.

이동시에는 물론 전투 시에도 더없이 유용하게 활용된다.

'치명타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하지만 전체 확률에서 5%가 올라간다는 건 상당히 크다.

스무 번 공격에 한 번은 꼭 치명타가 박힌다는 이야기다.

기준을 알 수 없는 '대형' 몬스터한정이긴 하다.

하지만 인외人外 가운데.

내가 부담스러울 만큼 강한 녀석들 중에서는 주로 커다란 녀석이 많을 거다.

지금 아니면 또 언제 얻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특전이기도 하고.

"1번. 거물 사냥꾼."

[선택이 완료되었습니다!]

[거물 사냥꾼 Lv.1 습득.]

[대형 몬스터 공격에 치명타가 들어갈 확률에 플러스5%가 보정됩니다!]

- 데구르르!

이어 탁하게 반짝이는 붉은 보석이, 정확히 내가 반으로 가른 부위에서 굴러 나온다.

[웹슬링거의 홍옥]

웹슬링거는 오랫동안 인간을 주 먹이로.

'이거 또 감정해야 되나.' 슬라임을 찾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온몸의 뼈가 슬라임의 뜨거운 점액에 녹아내리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감정 스킬을 배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주머니에 흥옥을 넣었다. 대충 무슨 아이템인지는 안다. 마물魔物 전용의 진화 아이템. 사용 방법은 모론다.

이제 메시지는 더 이상 뜨지 않는다. 거미를 내려다보며 잠시 감상에 젖는다.

별짓 다 해 가며 잡던 녀석을 칼질한 번에 간단하게 처리했다.

'싱거워졌군.'

그 순간이었다.

"어?"

무언가 아주 작은 위화감이 스쳐지나갔다. 구덩이를 둘러봤지만 별다른 건 없었다.

'뭐지?'

[탐지 Lv.5]

[활성 상태로 전환합니다!]

[스킬 효율 1, 000% 증가!]

[현재 체력 기준, 초당 0.0024%의체력이 소모됩니다.]

탐지를 켜자.

한쪽에 있는 낡은 거미 조각상이 유독 내 주의를 끌었다.

겉만 보면 주위를 둘러싼 다른 조각상과 비슷한, 거미줄투성이의 조각상이다.

하지만, 분명히 뭔가 있다.

- 철컥!

나는 조각상을 힘껏 밀었다.

'어? 안 밀려?'

- 덥석.

양손으로 잡고 힘차게 밀었다.

- 부스스!

하지만 잡은 부위에서 먼지만 떨어질 뿐 조각상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헛짚은 건가 싶었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다.

스킬은 정확하다.

탐지 스킬을 켰을 때, 이게 수상하게 여겨지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미는 힘이 부족한가?'

- 철컥! 철컥!

나는 몸 전체를 동원해 조각상을 세차게 밀어붙였다.

그때 였다.

- 쿠르르르르릉.!

제대로 힘을 줘서 밀자 거미 조각상이 안으로 쑥 들어갔다.

몸이 앞으로 끌려 들어갔다.

- 달그락!

내가 밀긴 했지만, 나도 놀란 나머지 갑옷 안쪽의 뼈까지 마구 달그락거리는 게 느껴졌다.

무려 1? 미터 정도 동굴 안쪽으로 조각상이 쭉 밀린 자리에는 아래로 향하는 지하 계단이 있었다.

"이건 대체.?"

나는 어두컴컴한 지하 계단 앞에 서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건 이상하다.

여기는 D+급 던전이다.

보스라고 해 봐야 나에게 고작 한칼에 죽는 수준.

그런 내가 안간힘을 써야 겨우 밀리는 비밀 통로가 있다는 건 확실히 매우 수상하다.

힘으로 부순 것도 아니고, 그저'밀었을' 뿐인데.

하지만 조각을 밀어 놓고 이제 와서 돌아갈 수는 없다. 다시 당겨 놓는 방법도 모르겠다.

'어쩌지.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 터벅.

조심스럽게 앞으로 한 발을 디뎠다. 발소리가 좁은 통로에 유난히 울렸다.

'은신.'

[은신 Lv. 5를 활성화합니다!]

발걸음에 소리가 사라졌다. 아래로한 발자국씩 내려가자, 희미한 빛이 비추기 시작했다.

안쪽에도 야광주가 박혀 있는 듯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공간은 조금씩 더 넓고 환해졌다.

'아무것도. 없어?'

그 흔한 거미줄도, 살아 있는 거미나 벌레 한 마리도 없었다.

안쪽으로 몇 발자국 더 걸어가자 커다란 원형의 공간이 나타났고, 피라미드가 반쯤 잘린 것처럼 생긴 커다란 칠흑 제단이 있었다.

제단 위에는 조각상이 있었다.

'거미인가?'

하지만 평범한 거미는 아니었다.

다리에 비해 몸체가 너무 크고 높았다.

게다가 몸 중간이 벌어져 있었다.

조각상에 접근하기 전에 잠시 멈춰주의를 집중했다. 하지만 무언가 움직이는 기척은 전혀 없었다.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자, 희미한야광주 빛 아래 조각상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 달그락!

나는 조각상의 모습을 보고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왕관을 쓴 인간의 머리.

아래 달라붙은 커다란 거미의 몸.

서로 다른 여덟 개의 다리는 비스듬히 팔방을 점한다.

그 모습을 익히 알고 있다.

가장 널려 알려졌으며, 가장 익숙한 모습이었다.

마왕.

^111 좌.

번제 포식자.

천사를 도륙하는 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규모의,

무려 66군단을 이끄는 왕.

'바알.!,

이곳은, 오랫동안 버려진 바알의 신전이었던 것이다.

바알의 조각상은 커다랗게 입을 쩍벌리고 있었다.

구슬 하나가 박히면 딱 적당할 것처럼 보였다.

'혹시.,

품을 뒤져 홍옥을 꺼냈다.

'딱 맞아 보이는데.'

넣으면 바로 딱 들어갈 것 같은 크기. 그걸 확인하자 어쩐지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이곳은 마왕, 바알의 제단.

홍옥은 인간들의 통곡과 절규를 축적한 붉은 결정結晶이다.

웹슬링거가 인간을 꾸준히 씹어 먹으며 뱃속에서 만들어 낸 홍옥은, 원래 주기적으로 바알의 조각상에 바쳐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음.,

잠시 고민하던 나는, 홍옥을 다시 품에 집어넣었다.

'안 줘.'

과거, 인간 대 마계의 전쟁 시절.

나는 바알의 휘하에 속해 있었다.

녀석은 내 상관이었다.

물론 놈은 마왕이고, 나야 까마득한 말단의 말단이었지만.

그 군단에서 좋은 대접을 받았던 기억은 없다.

아무렇게나 소모해도 되는 공짜 취급을 받았고 최전선에서 부서지는 용도로 쓰였다. 제대로 된 훈련은커녕 쓸 만한 장비조차 지급받지 못했다.

놈의 제단에 공물을 바칠 생각은조금도 없었다.

게다가 입에 흥옥을 물려주면 내가 또 어처구니없는 일에 끌어들여질지 누가 알겠는가? 저번 생의 고생이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냥 제단 주위를 휘휘 둘러봤다.

고요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반쯤 부서진 블랙 유니콘의 조각들이, 제단 주위를 멀찍이서 둘러싸고 있을 뿐.

'그나저나.'

정말 마왕 부활을 위한 제단은 여기저기 있는 것 같았다.

T&T에서는 푸르손을, 네크론에서는 보티스의 흔적을 찾았다.

가까운 던전에서는 벌써 제1 마왕바알의 제단까지 발견했다.

'확실히, 마왕 강림은 막을 수 있는 게 아니군.

쓸 만한 아티팩트 같은 게 없을까싶어 주위를 좀 더 둘러봤지만, 소득은 없었다.

'흠.,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바알의 머리통을 괜히 발로 한 번 차 주려다 관뒀다.

'뭐가 또 잘못 작동할지도.'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피며 뒤로 천천히 물러났다.

계단을 올라가 밖으로 나간 뒤, 안쪽으로 쑥 밀어 버린 거미 조각상을 보며 고민했다.

'이거, 원상 복구해야 되나?'

- 달그락.

나는 고개를 저었다.

"뭐. 인간들이 알아서 하겠지."

재의 수도회 같은 기사단이 망치를 들고 몰려와 안을 다 부수든.

비프 론이나 예메라의 사제들이 던전 전체에 난리를 피우며 정화 의식을 행하건.

별로 알바는 아니었다.

어차피 바알 놈도 군단 끄트머리해골병사가 무슨 취급을 당하든 알바 아니지 않았는가?

은괴는 챙겼고.

흥옥도 챙겼고.

레벨도 꽤 올랐다.

발걸음도 가볍게 거미굴 밖으로 나와, 레나와 약속한 유블람 여관으로 향했다.

114화 기분의 문제 (5)

***************************************************

유블람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반짝이는 은괴들을 본 레나가 기뻐할 생각을 하니 발걸음이 한층 가볍다.

레나의 '시나리오'가 떠오른다.

저번 생보다도 한층 더 강해졌다.

내 힘은 분명히 그녀에게 도움이 될거다.

레나가 궤도를 타기 전까지 최대한도움을 주고, T&T 이너 서클이 나에게 관심을 갖기 전 한발 뒤로 물러선다면.

꽤 견고한 위치에서, 그녀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게 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느긋하게 걸어갔다. 아직 날이 밝기까지는 시간이 꽤 남았다. 달빛이 발끝에 걸렸다.

천천히 걷다, 검술을 다시 한 번가 다듬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 싁!

소리는 한 번처럼 겹쳐 들렸지만 칼질은 두 번이었다.

네 조각으로 잘린 풀잎이 바람에 흩날렸다.

검술 Lv.10을 달성하고 가능해진움직임이었다.

나는 내 상상보다도 빠른 속도로 강해지고 있었다. 여기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데는 무엇보다 기스-제-라이의 도움이 컸다.

'기스-제-라이.'

그 이름을 떠올리니 복잡한 심경이 몰려온다.

나는 유블람으로 걸어가고 있다.

얽히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그녀의 죽음을 외면하고서.

반대 방향에 있는 메마른 지하 묘지에선 그녀가 황제 행렬을 기다리고 있을 터다.

아무리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해도, 경고 하나 없이 이대로 지나쳐도 되는 걸까.

- 달그락.

루비아가 남겨 준 갑옷 속에서 뼈를 조금 움츠렸다. 가을 밤바람이갑자기 차게 느껴졌다.

생각에서 도망치듯 다시 칼을 몇번이고 휘둘렀다.

칼날에 베인 하얀 달빛 조각들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바람 끝에 매달려 있던 풀벌레 소리가 몇 가닥씩 잘려 끊어졌다. 가을밤의 열은 추위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결국 베고 싶은 건 마음 깊숙이 숨은 죄책감이었지만, 그건 내 칼로 베기엔 너무 강한 감정이었다.

- 스르릉.

한참 달빛 아래를 휘젓다 다시 칼을 집어넣었다. 아무도 지켜보고 있지 않았다고 한들, 달빛에 우스운 꼴을 보인 것 같아 부끄러웠다.

"대단하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칼에 정신이 팔려 있다 보니 다가오는 기척마저 느끼지 못했다.

나는 긴장한 채 뒤로 돌아섰다.

비록 목소리에서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고 잡념에 빠졌다고 한들, 접근을 허용한 상대다.

붉은 도복을 입은 남자 하나가 이쪽을 향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저 녀석은.'

달빛에 비친 녀석의 얼굴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상대가 작게 어깨를 으쓱했다.

"놀라운 기술이고, 힘과 속도야. 감탄해서 멍하니 봐 버렸어."

긴 검은 머리를 하얀 머리띠로 묶고, 도복 같은 붉은 옷만 입고 있는 날렵한 몸매의 남자.

허리에 찬 긴 칼이 인상적이다.

'챈들러. 남작 이랬나.'

내가 발도 술과 동방어, 지혜를 흡수한 상대. 만만한 녀석은 아니다.

창 네 자루를, 고작 두 번의 칼질로 열두 조각으로 만든 남자다.

뛰어난 기술과 속도의 보유자.

'안. 죽은 건가?'

하지만 저번 생에서 녀석은 기소-

제-라이에게 장난처럼 살해당했다.

내 첫 번째 '먹이'로 활용됐다.

정수 흡수의 희생양으로.

동굴에서 깨어난 첫 번째 날에 벌어진 일이다. 오늘은 내가 깨어난 지 삼 일째 되는 날.

하지만 생생하게 살아 있다. 남자가 말을 이었다.

"나는 챈들러 형빈 이라고 한다. 무사 수행 중이지. 네 이름은?"

"형빈 이라고?"

특이한 이름이었다.

"동방에서 받은 법명法名이지."

나는 남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메마른 지하 묘지 쪽을 손가락으로가 리키며 물었다.

"저쪽에서 오나?"

"그래."

'역시 그렇군.' 이자는 예전과 같은 루트를 탔다.

하지만 기스-제-라이에게 살해당하지 않았다.

눈앞의 검사가 그녀에게 죽었던건, 역시 나 때문이었나.

"그럼 됐다. 이제 웬만하면 저쪽으로는. 얼씬도 하지 마라."

- 터벅.

남자가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이름을 물었다만."

"궁금하면 가르쳐 줘야 하나?"

"호오."

챈들러 남작이 작게 웃었다.

"뭐, 이름이 중요한 건 아니지. 이것도 인연이니. 한 수 가르침을 청하고 싶군."

가르침?

"무슨 헛소리.

녀석을 떨쳐 내려다 말을 삼켰다.

저번 생에서 저 녀석은 내가 아니었으면 안 죽어도 될 운명이었다.

괜히 길을 가다가, 내 먹이로 삼아지려고 기스-제-라이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나와 일대일로 싸웠다면 충분히 이길 만한 검술 실력을 가지고서도.

거품이 툭 꺼지듯 억울하고 허무한 죽음이 오죽 많겠냐만, 놈의 죽음에 책임감을 느끼는 건 사실이다.

'그냥 죽인 것도 아니고, 스킬도흡수했는데.,

칼 한 번 섞어 주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저번 생보다 강해진 지금.

나보다 분명히 한 수 앞서 있던 인간을 상대로, 검술 실력을 확인해보고 싶기도 했다. 그래도 이 녀석이라면, 경비대장보다 서너 발자국은 앞서 있는 실력이니까.

"그래. 덤벼 봐라."

나는 칼자루에 손을 가져다 댔다.

챈들러는 발을 움직였다. 역시 칼자루에 손을 댄 채, 칼을 빼어 들지 않은 채 자세를 낮췄다.

잘 아는 자세다.

발도술.

'보인다.'

내가 들어갈 때 어떤 각도로, 어떤궤적으로 도가 그어질지 전부 눈에 선명히 읽혔다.

타이밍을 맞춰 교묘하게 피하며, 내 목을 날리려는 수작이 하나하나전부 허공에 선처럼 그어졌다.

속도, 힘, 약점이 모두 보였다.

'이거. 내가 너무 유리하군.'

녀석을 앞에 두고 보니, 발도술을알고 있다는 것 외에도 녀석과 나의수준 차이가 확연히 느껴졌다.

'탐지.'

눈앞에 있는 챈들러의 심장박동과,

근육 움직임까지 어느 정도 잡혀 왔다.

? 털썩.

칼을 빼서 던져 놓았다. 그리고 검집만 손에 들었다. 이걸로 충분히 이길 수 있었다.

"T7. ㄲㅇ ?

챈들러 남작의 미간이 좁혀지며,

입술이 강하게 다물렸다.

"지금 모욕하는 거요?"

나는 가볍게 대꾸했다.

"최선의 공격을 해 봐라. 세 수를 양보해 주마."

"목숨이 네 개쯤 되나?"

챈들러의 안광이 폭사됐다.

"일단 열 개는 넘는 거 같은데.

"무례하다!"

나름대로 성실한 답변이었지만, 챈들러는 흉흉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그가 세차게 땅을 디녔다. 절기 발도 술이 극쾌의 속도로 펼쳐졌다.

- 팟!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하지만 챈들러 본인에게 발도술을흡수한 내가 공격을 맞아 줄 리가 없다.

손에 단단하게 쥔 검집으로, 가장힘이 적게 실리는 도신의 약점을 핀 포인트로 후려쳤다.

- 픽!

"커헉!"

부딪히는 순간 챔들러는 뒤로 몇 발자국 튕겨 났다.

칼은 간신히 잡고 있었지만 놓치기 어려운 허점이 한가득 생겨났다.

"하나."

"으으웃.!"

자세를 가다듬은 챈들러는 다시 앞으로 달려 나가며 나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질주.'

나는 아예 챈들러의 뒤쪽으로 이동해 버렸다. 챈들러의 칼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베었다.

'은신.'

뒤에서 은신 스킬을 사용하자, 놈은내 위치를 잡지 못하고 홈칫거렸다.

곧 육안으로 확인해 내게 칼을 겨누긴 했지만, 전투 중에 이런 식으로도 스킬을 사용할 수 있나 싶어제법 신선했다.

'자주 써먹어 봐야겠군.'

"둘. 이제 한 번 남았다."

첸들러가 이를 꽉 악물었다.

"히야 아압!"

비 검秘劍신 월참新 月 新한 자루의 칼이 두 갈래로 휘어졌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좌우의 사선에서 나를 가두는 것처럼 대각선으로 베어 왔다.

'호오. 이런 기술도 있었나?'

흡착!

- 촤르륵!

하지만 결국 한 자루의 칼. 흡착Lv. 5에 챈들러의 긴 칼은 꼼짝없이 내 검집에 착 하고 붙어 버렸다.

"옷! 으웃!"

챈들러는 검을 떼어 내려 발버둥쳤다.

"이게 어떻게 된.!"

하지만 전생에 처음 만났을 때조차도, 힘은 내가 녀석보다 훨씬 더 높았다.

"세 번 다 끝난 거 같은데?"

- 획!

녀석을 당겼다. 칼을 놓칠 수 없는 검객인지, 챈들러의 몸은 그대로 흑끌려왔다.

- 픽!

주먹을 살짝 배에 꽂아 넣었다"끄흐억!"

챈들러가 헛구역질을 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이걸로 된 거겠지.'

"끝났다."

나는 한 마디를 남기고 뒤로 돌아섰다. 그때였다.

- 덥석.

"자, 잠시만.!"

"뭔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르침을 주시지 않겠소? 제발. 손해는 안 보실 거요."

챈들러가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더 하자고?"

"그렇소. 제발.

"왜 그러지?"

"검술에 진전이 없어 괴롭던 참이었소. 내 몸에 무기를 댈 만한 수준의 검객이 없었지. 대체 얼마 만인지. 동방에서 돌아온 뒤로는 한 번도 만나지 못했소이다."

'없기는.' 나는 후작을 생각하고 흠칫 몸서리가 쳐졌다.

하지만 챈들러 녀석도 무사 수행이랍시고 많이 돌아다녔을 텐데 이런 말을 하는 걸 보아, 내 저번 생에 괴물이 지나치게 많았던 건 확실히 사실인 듯하다.

"그런가."

못 해 줄 것도 없었다. 시간은 많고, 나는 챈들러에게 약간의 죄책감을 느낀다.

- 빠악!

"끽!"

- 빡!

"크흑!"

- 퍼억!

"끄아악!"

"그만할까?"

"아니오. 더. 더 때려 주시오."

'말이 좀 이상하잖아」

- 베? 악! 빡! 삐? 박!

"끄흑. 끄허어억!"

경쾌한 소리가 달밤 아래 울려 퍼졌다. 챈들러의 정강이와 팔뚝을 세 차례 연속으로 후려갈긴 뒤 뒤로 물러났다.

나는 첸들러의 희망대로 그를 밤새 지도해 주었다.

부러진 곳은 없었다. 그저 통증을 극대화할 정도로만 때렸다.

'확실히. 재능은 있군.'

한 번 맞을 때마다 같은 부분을또 맞지 않도록 움직임이 보완되는 게 보였다.

"끄흑. r챈들러가 식은땀으로 온몸이 범벅된 채 비틀거렸다. 나는 서서히 동이 트는 하늘을 보며 물었다.

"이제 가야 된다."

"조금만 더 하면.

"정중히 거절하지."

"아쉽군. 하지만 정말 고맙소. 많은 가르침을 얻었소이다."

챈들러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예를 취하려 했다.

툭.

억지로 일어나려는 녀석의 어깨에검집을 대서 다시 앉혔다.

"무리하지 마라."

바닥에 앉힌 채, 다시 가도로 향하려 할 때였다.

"자, 잠시만. r

"더 맞으면 정신을 잃을 거다."

"그게 아니라.

첸들러는 품에서 금빛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작은 패를 꺼냈다.

"오늘의 가르침은 정말 잊지 못할 것 같소. 답례로, 이거라도 받아 주시지 않겠소?"

"이게 뭔데?"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그라스미어의 차기 영주요. 기본적으로 칼 보는 눈은 있지."

알고 있다.

제국에서 가장 뜨거운 곳, 대장간의 도시 그라스미어. 눈앞의 남자가 그곳의 차기 영주라는 것도.

챈들러가 말을 이었다.

"가지고 계신 무기가. 실력에 비해 아쉽더구려. 이걸 그라스미어 경비병에게 보이고, 안내를 받으시오.

평생 무기 걱정은 안 하시게 될 거요."

- 덥석.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팬들러가건네주는 금속 패를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안 그래도 무기를 맞춰 볼 생각이었으니까.

"잘 써먹도록 하지."

"다음에 만날 때는 더 성장해 있겠소! 기대하시오! 어이쿠. 77ㅇ ?.!"

온몸에 타박상이 뒤덮여 혼자 끙끙거리는 그를 놓아두고, 유블람으로걸어갔다.

가도를 따라 쭉 걸어갔다. 중간에,

벌써 시체들을 뜯어먹는 까마귀 떼가 있었다. 그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옆으로 슬쩍 돌아갔다.

'다 왔군.'

곧 회색 성벽과 도개교가 보였다.

수풀 사이로 난 가도를 걸어가 성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활짝 열린 성문에는,

놀랍게도 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

'경비병이. 없어?'

적당히 돈을 먹일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숨어 있는것도 아니었다.

무슨 함정인가 싶었다.

'탐지.'

하지만 근처에 매복해 있는 녀석도 없다.

'무슨 일이지.,

- 터벅.

성문 안으로 발을 디디자, 거리가무언가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나는지 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무슨 일이오?"

"어이쿠!"

하지만 그는 깜짝 놀라더니 고개를 내저으며 곧 내했다.

'으음.

자갈돌이 가지런히 깔린 거리를 따라 올라가자 곧 오른편에 대장간이보였다.

깡깡거리는 소리는 나지 않지만 인기척이 느껴진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하얀 수염을 기른 노인이, 작업복을 벗으며 말쑥한 옷을 챙겨 입고 있다.

'이 녀석.

익숙한 얼굴이다. 〈불〉을 가지고 있는 인간 노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녀석은 제법 들뜬 표정이다.

"노인, 말 좀 물읍시다."

"크흠! 당신, 날 아시오?"

"초면이오만."

"그런데 왜 이리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거요? 몇 번 만나기라도 한사람처럼."

살짝 놀랐지만, 대충 얼버무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질문을 이었다.

"거리가 왜 이렇게 어수선한 거요?

성문이 경비병도 없이 활짝 열려 있던데?"

노인이 헛기침을 했다.

"크흠. 여행객이신가?"

"그렇소."

"거, 투구 좀 벗어 보지.

'마스커레 이드.' 나는 스킬을 시전한 뒤 투구를 벗었다. 이 노인은 후작의 얼굴을 모르고, 이건 정확히 말하면 후작의 얼굴도 아니다. 노인은 나를 보고고개를 갸웃하더니 말을 이었다.

"확실히 처음 보는 분인데. 음.

그게, 이 도시 영주라는 놈이 야밤에 뒷문으로 내뺐다오. 뒤가 더러운 놈 몇몇도 같이 도망갔지. 지금 경비대가 난리가 났지 난리가."

'나 때문이군.' 나는 유블람 경비대장과 그 패거리를 죽인 뒤, 영주에게 자살하라 고전했다.

돌이켜 보면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영주는 자살하는 대신, 지은 죄가 두려워 야반도주를 택한 거다.

'반쯤은 장난이었는데.'

진짜 영주가 하룻밤 만에 도망쳐버린 거다.

한번 쫓아 볼까 싶었지만, 한밤중에 도망쳤다면 어차피 지금 추격해선 늦다.

'관두지. 그나저나.

내 행동이 미래를 바꾸고 있다. 생생하게 와 닿고 있었다.

동굴에서 일어난 지 고작 사흘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그라스미어의 공자 챈들러가살아남아 나에게 대련을 청했고, 유블람 영주는 모든 걸 버리고 밤중에 도주했다.

내가 개입하려고 하면, 미래는 어마어마하게 바뀌게 되는 것.

'전쟁이나. 마왕 강림, 용사 출현 같은 걸 아예 막을 수도 있을까.'

물론 지금으로서는 터무니없는 이야기. 하지만 이렇게 회귀를 반복하면서 끝없이 누적 레벨을 올려 간다면, 언젠가는 4대 검주도 이길 만큼의 힘을 가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런데. 전쟁과 마왕 강림을 막게 된다면, 서큐버스님도 보지 못하게 되는 걸까.'

나는 잠시 고민했지만, 어차피 지금 수준에서 생각할 건 아니었다.

나는 노인에게 흘끗 인사를 한 뒤대장간을 나와, 여관을 향해 걸어 올라갔다.

115화 기분의 문제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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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올라가지 않아 흰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여관임을 알리는 간판이 걸려 있다.

- 끼이익.

두꺼운 나무 문짝과 문설주가 맞붙어 마찰하며 소리가 울렸다.

"어서 오세요!"

유쾌한 목소리가 다정하게 인사를 건넨다. 이젠 제법 낯익은 목소리.

'아무도 없나?'

홀을 좌우로 훑어봤다. 예전에 왔을 때처럼, 술을 마시며 주인의 몸을 흘끗거리는 남자들은 없다.

한참 어수선한 도시의 분위기를 생각했다.

4대 검주가 도시에 쳐들어온다고하고, 영주가 야밤에 도주했는데 속편하게 술 마실 종자들은 별로 없는 거겠지.

"오늘은 한가하군."

무심코 던진 말에, 카운터에 선여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어머, 우리 가게 처음 아니세요?

뭔가 익숙한 태도시네?"

"글쎄."

대충 얼버무렸다. 정확히 대답할 필요는 없는 질문이다. 홀을 훑은 뒤 주인을 똑바로 바라봤다.

언제 봐도 수상쩍은 여자다. 어떻게 저 자리를 차지했을까? 주인일까? 단순한 여급일까?

네크론 신사회와는 무슨 관련이 있을까? 관련이 있다면, 왜 아직 도망치지 않았을까.

여관의 관리 상태는 변함없이 좋다. 건물은 낡았지만 꼼꼼한 손길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입을 다물고 있자 여관 주인이 묻는다.

"식사? 맥주? 아니면 잠자리를 봐드릴까요?"

"만나기로 한 일행이 있소. 여자혼자 왔을 텐데. 머리가 여기까지오고, 가죽 갑옷에.

"아, 손님한테 이야기 들었어요!

사실 들어오실 때부터 딱 알았죠.

이쪽으로 올라오세요."

레나가 주인에게 이야기해 두고,

주인은 차림새나 들어오는 시간으로 나를 알아챈 것 같았다.

"3층이에요."

주인이 주저하지 않고 나를 안내했다. 오래된 까닭인지 계단은 어쩔수 없이 작게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탐지.'

계단이 좁다. 이제는 습관처럼 탐지를 켰다. 세계는 인간의 것이고, 인간들은 대부분 내 존재를 양해하지 않으려 애쓴다.

반경 안의 움직임은 항상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레나뿐인가?'

구球 형태로 감지되는 범위 안에 투숙객은 한 명밖에 없었다. 건물은고요하고 한가했다.

"여기에요. 일행분이 묵고 계세요.

가장 넓은 방을 드렸죠."

3층에 다다랐을 때, 방 안에 혼자 있는 여자의 기척이 느껴진다.

'안에 레나가 있겠군.'

- 똑똑.

"실례합니다."

주인이 안쪽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덜컥 문이 열렸다.

"엇, 스승님! 오셨습니까!"

레나의 두 눈이 초롱초롱 빛난다.

"자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관 주인은 만남을 확인한 뒤 은근한 미소를 짓고는, 내게 키를 건네고 아래로 내려갔다.

"기다렸습니다."

레나를 바라봤다. 조금 낯설었다.

그동안 살아오며 본 그녀와 다른 사람 같았다.

말투도, 움직임도, 나를 향하는 눈빛도 모두 조금씩 변했다. 하지만 레나는 분명히 레나다.

"별일 없으셨습니까?"

"어, 그래."

대충 대답하고 생각했다.

'바뀌는 건. 사건뿐만이 아니야.'

미래의 사건만 바뀌고 있는 게 아니다. 나를 대하는 주위의 태도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

내가 바위를 한 번에 갈라 버리는 모습을 레나가 훔쳐본 것. 그녀가 검술을 배우게 싶게, 내게 매달리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우리 둘의 관계는.

적어도 레나가 나를 바라보는 태도는 달라졌다. 익숙하지 않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느낌이다.

조금 무리해서, 관계를 재정의해 볼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뭘로? 어떻게?'

돌아갈 수 있을까. 예전이 더 나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룻밤 새 더 말랐군.'

눈두덩이 움푹 꺼졌다. 눈가가 파르르 떨리고 있다. 푹 쉬라고 보내준 건데, 오히려 한잠도 안 자고 나를 기다린 것 같다.

"안 자고 뭐 했어?"

미형의 이목구비 위로 머리카락 몇 가닥이 흐트러져 있었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실은. 준비를 조금 했습니다."

"준비?"

레나는 품에서 주머니를 꺼낸 뒤,

툭- 하고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꽤 묵직하다. 그리곤 제 손으로 주머니를 살짝 열어 보인다.

주머니 안에 들어 있는 은화가 찬란한 빛을 뿌린다.

"720로티입니다."

풀 플레이트 갑옷을 열두 벌은 살수 있는 돈이다.

"하나를 환전했습니다. 남은 두 개는 차차 바꾸겠습니다. 한꺼번에 너무 다 하면 눈에 띄어서.

머쓱한 표정을 짓고 있다. 칭찬해달라는 표정이 아니라 자신이 좀 부족하지 않냐 는 듯한 표정이다. 안자고 뭘 했나 싶었더니 그 사이 은괴를 환전해 놓은 듯하다.

솔직히 감탄했다.

아무 장사꾼에게나 가져가서 이 커다란 은괴를 환전해 달라고 할 수는 없다.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잔 지친몸으로, 유블람에 들어가자마자 이일부터 곧장 해낸 거다.

"무기도 약간 준비했습니다."

그녀가 침대 위의 커튼을 걷자 몸에 두르는 단검 띠, 딱 맞는 날카로운 단검들, 롱소드와 바스타드 소드, 투척용 도끼, 세이버와까지 차분히 놓여 있었다.

"어떤 걸 쓰실지 몰라서.

약간 부끄러운 태도다. 나는 고개를 가웃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정신없이 자고 있어야 자연스러운 거 아닌가?"

허공에 매달려서 사흘을 보냈다.

하루 자긴 했지만, 다시 검술을 수련하며 이틀 밤을 새다시피 했다.

지금까지 있던 일만 생각해 보면,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푹 곯아떨어진 그녀를 보는 편이 자연스"무리한 이유를 듣고 싶은데."

피곤한 얼굴로, 잠시 머뭇거리던 레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뭘?"

시선이 얽힌다. 레나의 눈동자가흔들렸다. 절박한 감정이 느껴진다.

"스승님과 만난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스승님이 왜 저에게 이렇게 잘해 주시는지는 모릅니다.

처음에 계약 관계, 라고 말씀하셨지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계십니다. 그러니 전, 뭘 할 수 있을지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철컥.

나는 투구를 벗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무리할 필요는 없어. 나는 지금도 충분히 이득을 보고 있다."

그녀를 위해서 뭔가를 해 주고 있는 건 전혀 아니다.

그냥 나도 레나의 시나리오를 해결해 보고 싶을 뿐이다. 저런 태도를 취하면 조금 불편하다.

의아한 표정을 짓는 레나가 더 묻기 전에 말을 끊었다.

"식사는?"

"식사는 좀 일찍 했습니다! 오시기전에.

"그럼 좀 자지 그래? 사흘 전부터 거의 못 자지 않았어? 네가 나 같은 해골도 아니고 말이야."

"품. 앗, 죄송합니다!"

레나가 몸을 들썩이며 웃다 황급히 죄송하다고 말한다.

"웃으라고 한 건데."

"아. 하핫.

조금 상기된 얼굴로 그녀가 말을이었다.

"그런데. 거리에서 묘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영주가 도망가고, 제국4대 검주 중 한 명인 레안드로 후작이 여기로 온다고 합니다. 그 정도의 검사라면. 스승님의 정체를 한눈에 꿰뚫어 볼지도 모릅니다. 꼭꼭 숨어 계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제가 망을 봐 드리겠습니다."

나는 레나의 진지한 표정에 피식거리며 웃었다.

"됐어."

"예? 아무리 스승님이라도 레안드로 후작을 만나면 곤란.

"바로 썰리겠지."

"그렇게는 말씀 안 드렸습니다!"

"아니, 바로 썰려. 하지만 그놈은 여기 안 올 거다."

놈이 온다는 헛소문은 당연히 나 때문에 퍼진 거다.

올 이유도 없고, 엉뚱한 소문이 들린다고 물리적으로 올 수 있는 거리가 아닐 거다.

'지금쯤 어디 먼 곳에 있겠지.'

황제 암살.

아니 '이사벨 시몬느'가 살해당한2주 후에나, 그는 내가 있던 동굴에 들어왔으니까.

레나가 갸웃한 표정을 짓는다.

"어. 스승님이 그러시다면.

레나의 말을 끊었다. 나도 나름대로 보여 줄 게 있다.

"그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예!"

레나가 은화 주머니를 올려놓았던 테이블 위에, 은괴를 한 개씩 차곡차곡 쌓아 놓았다.

맨 아래는 세 개, 그 위에는 두개, 그 위에는 한 개로.

- 쿵. 쿵. 쿵-

모두 여섯 개다.

"이거나 좀 갖고 있어."

"!"

레나가 그 자리에 굳어서 눈만 낌백거렸다.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근위대에게 스킬을 흡수한 뒤, 이정도의 은괴면 어느 정도의 금액인지 대략적인 환산이 가능해졌다.

'뭐, 그래 봐야 금괴 하나만큼 도안되는데 뭘.'

하지만 레나는 입을 떡 벌린 채 멍하니 있다가, 간신히 침을 꿀꺽 삼킨다.

"잠깐 다녀온다고 한 게 이걸 가지러.

"그래."

"구할 수 있으면 네가 마실 포션도좀 사고. 폭탄이라든가. 부족하면.

다른 데서 좀 구해 오지, 뭐."

"부, 부족하다뇨!"

레나는 손을 내저으며, 은괴 하나라도 얼마나 많은 장비를 살 수 있는지 황급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정도 돈이면. 포션을 물처럼 마시면서 폭탄을 던져도 될 것 같습니다. 어쩌면 번외番外급 장비도 맞출 수 있을 것 같고요."

"번 외급 장비?"

"네. 그라스미어 장인들 가운데는 특이한 무기를 만드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전투력을 터무니없이 올려 주는 장비들이죠. 이를테면 폭탄 발사기라든가, 손목에 걸고 쏘는 대포라든가. 불꽃을 뿜는 기계 말입니다."

불꽃을 뿜는 기계.

물 위에서도 타오르던〈그라스미어의 불〉이 생각났다.

그걸 원료로 사용한 걸까? 그런 무기라면, 나에게도 충분히 위협이 될만하다.

"물론 번 외급 장비를 돈만 준다고 쉽게 만들어 주진 않겠지만.

나는 품에서 첸들러가 준 금속 패를 꺼냈다.

"이런 게 있으면 좀 낫나?"

금속 패에는 서명 아래, 작은 글씨가 깨알같이 새겨져 있었다.

패를 본 레나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이건. A급무기 제작 허가패 아닙니까! 이런 걸 대체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순금으로 코팅된 패가 반짝이며 빛을 발한다.

"A급?"

"예. 최고급 장인들은 아무에게 나무기를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외부인이 살 수 있는 건 대부분 '보급용' 무기죠."

"그런가."

"네. 기술 유출 문제를 방지하기위해서기도 하고, 최고급 무기는 만들 수 있는 숫자가 아무래도 정해져있으니까요. 그나저나. 정말 대단하십니다."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레나의 호감도가 올랐다는 메시지가 연달아 떠올랐다.

수치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내게 가진 호감이 공기를 통해 조금씩 와 닿기 시작했다.

표정에서 호감, 기대감, 고마움, 알수 없는 아련함이 느껴졌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놀라운 수준의 검술을 보여 주고, 그녀를 지도해 줬다.

고작 하룻밤 만에 은괴를 몇 덩이씩 가져와 안겨 줬다.

그라스미어의 무기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무기 제작 패를 던져 줬다.

'이건 좀 우연이지만.'

빠른 호감도 증가는 납득할 만한일이다.

"저, 여기. 패는 다시 돌려드리겠습니다."

"필요 없어."

나는 단번에 거절했다.

"네가 쓰라니까?"

레나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 혼란에 빠진 것 같았지만, 결국 호감으로 귀결되는 것 같았다.

그 증거로 효과음과 함께 허공에 호감도가 올라간다는 메시지가 계속 떠올랐다.

'으음.'

이런저런 감정이 휘몰아쳐서 그런건지, 레나의 얼굴은 한층 상기된 표정이었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게나한테까지 들렸다.

'잠은 다 잔 것 같군.'

"안 잘 거면. 자세나 다시 봐 주도록 하지. 적당한 장소가 있나?"

"감사합니다! 여관 뒤쪽에 적당한 공터가 있습니다."

"한 자루 들고 와."

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세이버를 쥐었다. 키로 방문을 잠근 뒤 계단을 내려갔다.

삐걱거리는 계단을 지나 밖으로 나갔다.

과연 여관 뒤편에는 정원처럼 쓰이는 꽤 넓은 공터가 있었다.

'신경 좀 쓴 것 같은데.'

이 정원을 꾸미는 데, 루비아 같은 여자들을 팔아넘겨서 얻은 수수료도 들어가 있을까.

씁쓸해졌다. 정원의 풍경이 더 이상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돌아간다면 루비아를 구할 수 있을 텐데.'

예전과 달리, 유블람 경비대 정도는 간단히 처리할 수 있으니까. 그 아이 한 명 정도는 어떻게든.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떨쳐 냈다.

어떻게 갈 수 있을까.

전혀 방법을 모른다.

게다가 나 때문에 두 번이나 죽은 레나를 앞에 두고 루비아 생각에 빠져 있는 건 곤란하다.

"이건 이렇게.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층 더집중해 레나를 지도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온몸이 땀으로 흠백 젖었을 때였다. 정신력으로 버틴다고 해도, 그녀도 슬슬 한계 같았다.

"헉, 허억. 흐으.

"그만 들어가지."

"스승님은. 안 가십니까?"

"나는 할 일이 있어서."

잘 필요도 없고, 내가 있으면 레나가 편하게 잠을 못 잘 것 같았다.

게다가 마음에 복잡하다. 잠시 밖을 서성이고 싶었다.

"옛.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레나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비틀비틀 위로 올라갔다. 나는 혼자 고민에 잠겨, 팔짱을 끼고 초승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되나.'

곧 황제의 행렬이 기스-제-라이의 함정을 지나간다. 오늘 낮이다. 몇 시간 남지 않았다.

고민은 밤새 이어졌다.

간다.

가지 않는다.

경고한다.

외면한다.

외면하고 싶었다.

기스-제-라이에게 경고한다면, 세계 정상급의 괴물들과 당장 얽히는 루트로 가게 된다.

네크로멘서의 죽음을 외면한다면, 레나와 함께 던전을 돌며 쉽고 안정적으로 강해질 수 있다.

기스-제-라이에게 경고하는 건 결국 자기만족에 불과하다.

별다른 도움도 되지 못할 주제에, 정수 흡수를 심어 준 은혜를 갚는다는 자기 위안이다.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밤새 멍하니 서 있었다.

- 파르르륵.!

정원 나무에서 나무 사이로 풍뎅이한 마리가 날아간다.

"풍뎅이.

여우 가면의 수녀가 떠올랐다.

후작에게 사지가 결박당한 나를 구해준 여우 가면.

끝까지 나한테 도망가라고 하며 후작과 맞서던 그녀가 떠오른다.

날 구출해 준 것도 결국 기스-제-

라이 때문이었다.

소중한 흔적을 더듬듯 내 두개골을 만지작거리던 감각이 기억났다.

'안 되겠어.' 기스-제-라이를 외면한다면, 마음한구석이 죽어 버릴 것 같았다.

종이와 펜을 꺼냈다. 레나의 방문에 끼워 둘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한심하군."

한심했다.

충동적이다.

일관성도 없다.

레나와 함께 살아가기로 했다가,

결국 기스-제-라이가 죽는 것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 견디지 못하고 움직여 버린다.

그렇지만 적어도 한 번은, 기스-제-라이를 살리기 위한 시도를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무용한 시도일지라도 이건 기분의 문제였다.

- 끼익.

나는 방문에 편지를 깊숙이 끼워 넣었다.

편지의 내용은 조잡했다.

미안하게 됐다. 두 달 뒤 그라스미어에서 보자. 내가 널 찾아가 도록하지. 그때 안 오면 기다리지 말라는 내용의 편지였다.

별첨으로 지금까지의 생에서 얻은 던전과 보물 정보를 전부 써넣었다.

고민도 편지도 쓸데없이 길었다.

슬슬 동이 터 오기 시작했다.

네크로멘서를 만류하려면.

늦지 않으려면.

지금은 출발해야 했다.

116화 기분의 문제 (7)

***************************************************

편지를 남겨 둔 채 슬쩍 성문 밖으로 나갔다. 밤인데도 성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후작을 두려워하는 건가?'

그가 온다고 경고했는데, 감히 성문을 걸어 잠근 역적이 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가을 하늘이 서서히 푸른빛으로 동터 오고 있었다.

세상이 밝아 오고 있다. 아름다운광경이었다. 기스-제-라이의 죽음이막을 길 없이 가까워져 오는 신호이기도 했다.

질주를 써서 밀밭 사이를 달리고,

가도를 내달렸다. 잠시 후 살해하고살해당할 자들의 모습을 생각했다.

스쳐 가는 풍경이 피를 홀리고 있는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극히 이기적으로, 죄책감을짊어지기 싫다는 이유로 모든 계획을 어그러뜨리고 기스-제-라이에게 달려가고 있다.

어디까지 막을 수 있을까.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을까.

그런 것보다도, 결국 아무것도 책임지기 싫다는 마음으로 행하는 짓에 불과하다.

일찍 나와 밀밭에 서 있던 노인 몇몇이, 질주하는 내 모습을 보고 흠칫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난다.

나는 이런 세계에서 도망쳐 진짜괴물들의 세계로 간다.

내 선택이 결과를 바꾸지 못하는,

뭘 해도 상관없는 세계로 도망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삼거리가 나왔다. 세 방향으로 길이 갈라지는 곳이다. 〈메마른 지하묘지〉방향으로 접어들었다.

말 탄 병사 네 명과, 챈들러가 마주쳤던 장소를 지났다. 작은 냇가를건녔다. 폭포가 보인다.

'이 즈음인데.,

기스-제-라이가 나를 기절시켰던 장소에 도달했다. 하지만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고요했다.

주위를 휘휘 둘러보아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탐지.'

사실 기스-제-라이 수준의 네크로멘서를 내 탐지 스킬로 잡아내는 건 완전히 무리였다.

'일단 묘지 쪽을 봐야겠군.'

〈메마른 지하 묘지〉쪽을 직접 들어가 보는 편이 좋을 듯했다.

- .

폭포 안쪽 동공으로 들어가 계속계단을 내려갔다. 닫혀 있는 철문을 그대로 밀었다.

- 쿠구구궁.!

저항감 없이 철문이 열렸다.

'없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던전에 처음 가 봤던 때처럼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전부 밖으로 나간 건가? 벌써?'

늦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기스-제-라이는 나를 데리고 정오쯤에 밖으로 나갔고, 지금은 아직 아침이다.

하지만.

나를 만나지 않는 세계선에서는,

그녀가 이 시간에 이미 밖에 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나를 만난다는 사소한 사건이, 기스-제-라이의 시간 축을 조금 바꿔놓은 건가.'

안쪽 곳곳의 방을 빠르게 훌어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E급 던전, 〈메마른 지하 묘지〉에결 계를 구축하고 있던 '군단'.

그들은 모두 이동한 상태였다.

'언덕으로 가 봐야겠어.'

- 팟!

빠르게 달렸다. 거리는 금세 좁혀졌다. 얼마 가지 않아 바닥에 살해의 흔적이 보였다. 시체는 없었지만 발자국이 그러했다.

각기 다른 세 명이 움직였다. 그리고 셋이 한 번에 죽었다.

'제국 수색대인가.

외곽을 수색하던 상당한 실력자들이었다. 창을 들어 나를 나무에 박아 넣고 죽이려 하던 놈들.

그들 가운데 한 명은, 무리해서 검기 비슷한 것까지 잠깐이나마 사용할 줄 알던 녀석이었다.

'살해자의 흔적은 없어.'

하지만 무흔無疫이 무엇보다 뚜렷한 흔적이다.

증거가 없는 게 증거다.

'기스-제-라이.'

그녀 혼자, 수색대원 셋을 간단히 꺾어 죽이고 이 장소를 지나쳤다.

'여길 지났다면.

지금 황제에게 똑바로 가는 중. 나는 다시 앞으로 강하게 바닥을 박찼다.

'언덕이다!'

기스-제-라이가 황제의 행렬을 오연하게 내려다보면 언덕이 보인다.

그녀가 그늘에 서 있던, 아직 푸른 잎을 달고 있는 커다란 나무가 보인다.

앞은 조용하다. 아직 황제의 행렬이, '함정'을 지나가기 전이다.

그녀를 만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무슨 말을 해야 믿어 줄까?

기스-제 - 라이가.

뒤를 돌아봤다. 그녀가 손가락을 들었다.

- 쿠옹!

거대한 힘이 나를 덮쳤다.

공간을 비틀고, 시간을 비틀 정도의 인력引方이 나를 탐욕스럽게 잡아당겼다. 비명이나 저항 따위는 생각해 볼 여지가 없었다.

단숨에 수십 미터가 좁혀졌다.

보이지 않는 손이 허공에서 나를 서서히 우그러뜨리고 있었다.

- 철컥.

투구가 벗겨졌다. 반인반골伴人伴骨의 네크로멘서는 허공에 나를 띄운 채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으음. 나한테도 좋아하는 해골타입이라는 게 있었구나."

그녀가 나를 빤히 바라봤다. 갑옷안쪽의 뼈가 격한 긴장으로 달그락거리는 것 같았다.

"어디서 이런 물건이 나타났을까.

영웅 묘역에서 일어났다고 해도 믿겠는데?"

- 스르륵.

기스-제-라이는 천천히 손을 위에서 아래로 내렸다.

측정할 수 없는 랭크의 탐색, 혹은감정鑑定 마법이.

"아주 마음에 들어. 나도 몰랐던 내 취향을 이제야 알겠네."

나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살살이훌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 좌르르록.!

이후, 보이지 않는 힘이 나를 허공에 꽁꽁 옭아맨다. 투명한 수십 가닥의 촉수들이, 몸 구석구석으로 깊숙이 파고드는 것 같은 느낌이다.

- 철컥. 철컥. 철컥.

이음새로 파고든 무형無形의 촉수들이 갑옷을 하나하나 벗겨 낸다.

보자마자 이런 짓인가.

미리 적절한 대사를 준비해 두지 않은 탓인지, 거친 말이 튀어 나가버린다.

"원래 다 이런 식이오?"

"응? 이런 식이냐니?"

"당신 마음에 들면, 보자마자 기절시키거나 끌고 와서 구속하시오? 그리고 아무렇게나 유린하고?"

"뭐? 언제 기절을 시켰다 그래?

너. 너, 나 알아?"

대화가 처음부터 완전히 망가지고 있었다. 나는 내 준비성 없음에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지만, 뭘 준비해왔더라도 이 네크로멘서 앞에서는 먹히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엉뚱하게도,

띠링!

[기스-제-라이의 호감도가 3 올랐습니다!]

호감도가 올라갔다. 나는 되는 대로 뱉어 버리기로 했다.

레나를 버리고, 편하고 쉬운 길을 버리고 내 스스로 히드라 아가리로 머리를 밀어 넣었다.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다.

경고.

그것만 해 주면 할 일은 끝이다.

기스-제-라이는, 허공에 매달린 나를 뚫어져라 계속 훌어보고 있다.

"너. 놀라지도 않네?"

"이 정도로 놀라야 된단 말이오?"

나는 몸을 꽁꽁 옭아맨 투명한 힘에 슬쩍 저항하며 말했다.

"마법은 좀 아끼는 게 낫지 않겠소? 이왕 아케인 이 잔뜩 억제된 땅으로 골랐을 텐데. 힘들 거요."

"허. 얘 뭐야? 재밌네? 이런 애처음 봐."

"할 말 있어 보인다, 너. 얘기해.

되게 재밌는 얘기 할 거 같은데. 뭐 없어?"

하면 뭘 하나.

다 자기 마음대로 할 텐데.

하지만 말하러 왔다.

"쐐기돌 기념 공원."

그 단어가 나오는 순간.

기스-제-라이는 흠칫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흑요석 언덕 공원."

"너.!"

두 영웅 묘역의 완전한 활용권이, 기스-제-라이가 암살의 대가로 요구한 보상이다.

세계의 절반을 자유 진영으로 만들어 준 영웅들. 그 영응들의 시신을 넘기는 조건으로 연합 의회는 기스-제-라이와 계약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수상하기 이를 데 없단 말이지.'

전쟁은 반드시 진행된다.

푸른 갑옷의 기사는 죽은 황제를'인형'이라고 불렀다.

자유연합 의회는, 오늘 죽는 황제에 대해 뭘 얼마나 알고 있을까? 왜의뢰를 했을까?

기스-제-라이가 나를 심각한 눈으로 바라보며 묻는다.

"??? 너, 〈교단〉에서 왔니?"

암살교단 레드 플레이크.

현재 황제 암살의 계약 조건을 아는 측은 의뢰를 제시한 연합 의회와, 당사자인 기스-제-라이.

그리고 계약 입회자인 레드 플레이크밖에 없다.

기스-제-라이의 물음은 타당하다.

나는 자연스럽게 대꾸했다.

"내가 입회 자는 아니오. 별빛청여우가 근처에 기다리고 있겠지."

"뭐? 여우가? 여우는 지금 쉬는 기간인데.

"뭐, 여우는 당신을 좋아하니까. 페르시우스에 탄 채, 여기서 사흘거리에 대기하고 있소."

나는 되는 대로 마구 말을 던져 버린다. 어차피 이 판에 끼어들기로한 이상 제정신으로는 힘들다.

그녀의 손끝에서, 생생한 경악이 내게 전달된다.

"너, 대체. 이걸. 당장 뜯어볼 수도 없고.

나는 속으로 허무하게 웃었다.

'적절한 때 왔나.' 기스-제-라이는 지금 황제의 행렬을 기다리고 있다.

해가 떴다. 마법사와 기사들이 정찰을 오고, 곧이어 본 행렬이 도착할 때가 머지않았다.

그녀가 내 머리뼈를 뜯어낸 뒤, 여기저기 부하들에게 이식해 볼 정도로 시간이 남아돌지 않는다.

나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본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이색적이다.

기스-제-라이가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 철컥.

손가락을 들었다.

저 아래, 평야 전체에 걸쳐 설치된 함정을 가리켰다.

"내가 뭐라고 해도, 당신은 저걸 무너뜨릴 생각인 거요?"

"너, 이 자식.

"길라우트."

"오웨인. 안드레이. 펜리르. 하멜라인. 그들 모두 오늘 살해당하오."

듀라한들의 이름을 하나씩 읊어 줄때마다, 그녀의 얼굴에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 상황을이해할 수 없다는 혼란이, 남은 여백을 소비하고 있었다.

"도망치시오. 잠시 후 저곳을 지나갈 황제를. 방관하시오."

하지만 내 이야기는 결국 먹히지 않았다. 믿어지지 않게도, 기스-제-라이는 곧 침착을 되찾았다.

그녀가 반쯤은 뼈로 된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빙빙 감으며 말했다.

"뭐, 다 죽인 다음에 널 천천히 연구해 보면 되겠지. 소중히 다뤄 줄게. 왜 이렇게 급할 때 나타나서.

슬프게. 한동안 너만 갖고 놀아도 안 질릴 것 같아."

실패인가?

나는 허공에 매달린 채 그녀에게 소리쳤다.

"기스-제-라이! 대체 무슨 말을 하면 행동을 바꿀 거요? 무슨 말을들으면, 황제를 공격하지 않을 거난말이오!"

기스-제-라이가 고개를 들었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말을 듣는다고 내 계획을 바꾸겠어? 내 계획은 완벽해."

그리고 그녀가 손가락을 뻗어, 내가 가리켰던 평야를 짚었다.

"네가 어떻게 저 함정을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저 아래 있는 아이들은 수십 일을 고생하며 땅굴을 팠어. 몇 날 며칠을 저 아래에서 황제가 오기만을 기다렸지. 내 가장 소중한 아이들이야.

처음 보는 네가 무슨 말을 한다 고해도.

- 달그락.

반인반골의 네크로멘서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저 아이들과 나를 믿지. 우리가세우고 실행한 계획을 믿지, 네 말을 믿지 않아. 우리는.

- 털썩.

기스-제-라이가 나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오늘, 황제를 죽일 거다."

갑옷을 우그러뜨리는 것 같던 압박이 풀어졌다. 흔들리던 기스-제-라이의 눈동자가 다시 가라앉았다.

'참관하겠나?"

- 달그락.

대답 대신 손을 들었다.

"그럼 한 가지만, 한 가지만 부탁드리오."

기스-제-라이의 죽음은 이걸로 확정이다. 잿빛 기사에게 그녀와 그녀의 군단은 모두 살해당한다.

그렇다면.

"뭐지?"

네크로멘서가 나를 바라본다.

'당신의 죽음을 못 막는다면.'

나는 제2의 안을 떠올린다.

"계획을 취소하란 이야기는 안 하겠소. 황제를 죽이지 말란 이야기는 아니오. 그냥.

"근위대 가운데서, 내가 말하는 딱한 명만 살려 주시오."

"그래? 스켈레톤 나이트가 아니라,

생생한 인간 그대로 살려 달라는 부탁인가?"

"그렇소. 부탁드리겠소."

117화 기분의 문제 (8)

***************************************************

"흐음. 좀 귀찮은걸. 불이 나무를 가려 가며 태우지는 않잖아? 한 명만 뽑아서 살리긴 번거롭지."

네크로멘서가 뼈로 된 손을 뻗어내 어깨를 툭 쳤다.

"게다가 황실 근위대잖아? 군단에 전부 편입시킬 생각이야. 한 명을 살려서 뭘 어쩌고 싶은데?"

뭘 어쩌고 싶으냐는 그녀의 말에,

가만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살아남고 싶었다.

오직 나 하나를 위해 기사단장을살릴 생각이었다.

기스-제-라이의 황제 살해를 막을 수 없다면. 그녀의 죽음을 막을 수없다면 나라도 살고자 한 것이다.

'확실한 것도 아니지.'

기사단장이 살아남는다고, 내가 후작의 추적을 받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었다.

침묵하는 나를 향해 기스-제-라이가 다시 물었다.

"근데 누굴 살리겠다는 거야?"

"이사벨 시몬느. 근위기사단장이오.

멀리서 본다면 구분할 수는 있소."

"어라. 그 녀석을?"

"알고 계시오?"

"온다는 것만. 그 아이는 특별히 상위 듀라한으로 만들어 주려고 했는데. 살리긴 좀 아까운걸."

문득 그녀가 고개를 돌려 아래를 바라봤다. 멀리서 기사들이 가도를 점검하고 있었다. 마법사들은 이미 다녀간 것 같았다.

기사들은 땅 하나하나를 찔러 보고, 도로 옆의 수풀을 넓게 흩어져수색하고 있었다.

예전과 같은 풍경.

언덕 쪽을 한 번도 돌아보지 않는 태도도 동일했다.

네크로멘서는 곧 그들을 무시하곤,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살려 주면, 나한테는 뭐가 좋아?"

기스-제-라이는 내가 뭘 해 줄 수 있느냐고 묻고 있다. 나는 예언처럼, 미심쩍은 맹세처럼 중얼거렸다.

"그 여자를 살려 준다면. 언젠가,

당신을 벗어날 수 없는 죽음의 운명에서 구해 주겠소."

이번에는 기스-제-라이를 구할 수없다. 대신 내가 눈앞의 죽음으로부터 도망친다.

계속 살아남는다. 확인할 수 있는걸 더 확인한다. 강해질 수 있을 만큼 강해지고, 세계의 변화를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알아본 뒤에 죽는다.

그때 였다.

- 철컥.

기스-제-라이의 뼈로 된 손이 내턱을 위로 들어 올렸다. 그녀의 눈이 반짝이며 나를 바라봤다.

"정말이야? 날 죽음에서 구해 줄거야?"

그녀가 입술을 달싹인다. 입 주위,

턱과 목까지 이어지는 세 가닥 선이 벌어지며 하얀 뼈를 드러낸다.

- 달그락.

"정말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F급 모험자에게 부서지는 해골에서, 열 번을 반복해 죽으며 여기까지 올라왔다.

스무 번, 서른 번을 더 반복해서죽은 후의 시간선이라면.

회귀를 반복하며 힘을 쌓다 보면,

언젠가는 잿빛 기사를 상대할 정도로 강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지한 눈빛으로 이야기를 듣는 것 같던 네크로멘서는 갑자기배를 잡고 광소를 터트렸다.

머리칼을 대신하는, 컬이 져서 굽이진 하얀 뼈들이 마구 흔들린다.

"푸하하하하. 크핫, 하하, 푸하하하. 득. 큭큭. 으하하하.

하하하하.

「'쿡쿡거리는 웃음이 언덕을 가득 채웠다. 주위에 결계結界가 그려져 있기에 소리가 넘어가지는 않았다. 저 아래를 수색하는 기사들 중 누구도위를 바라보지 않는다.

"하핫. 아하하하핫. 큭큭.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너, 지금 진지하지? 으하하하.!"

"다음이 안 되면 그 다음에라도.

"이런 걸 누가 키웠는지 모르겠어.

받기로 한 영웅 묘역에 이런 녀석 있으면 즐거울 텐데."

기스-제-라이는 간헐적으로 웃음을 멈추지 않고 내 두개골을 쓰다듬었다.

"재밌고 좋은데, 잠깐만 기다려 봐.

일 끝나면 끝까지 놀아 줄 테니까."

믿지 않는다. 받아들이지 않는다.

'실패인가.'

- 촤르륵!

그녀의 등에서, 뼈로 된 한 가닥 촉수가 뻗어 와 나를 허공에 들었다.

몸이 돌려졌다.

아래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예전처럼 몇몇 기사는 도로에 남아있었고, 몇몇은 수풀을 지키고 서있기도 했다.

반쯤 체념한 채로, 완전히 솔직해지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기스-제-라이에게 물었다.

"물어볼 게 있소."

"뭔데?"

"황제 살해 계획은, 무슨 말을 들어도 바꾸지 않는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무슨 말을 들어야 내 회귀를 믿어 줄 거요?"

이미 그녀는 날 그저 미친 해골 취급한 전력이 있다. 하지만 다음 생에서 써먹기 위해서라도, 할 수있는 건 다 해 봐야 했다.

"뭐? 회귀?"

"그렇소."

나는 기스-제-라이에게 그녀와 만났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루비아와 레나에 관한 이야기는 생략했다.

기스-제-라이와 만나서, 내가 그녀에게 갑작스럽게 납치당한 순간부터 자세히 이야기했다.

회귀란 말에 피식거리려던 기스-

제-라이는 의외로 내 말을 귀 기울여 들었다.

"어, 그럴듯하게 들린다."

"믿어 주는 거요?"

"글쎄? 확실히 내가 할 만한 짓들이긴 하네. 계속해 봐."

이야기를 할 때마다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네크로멘서의 호감도가 1씩 계속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레드 플레이크를 언급하고, 연합의회와의 계약을 언급하고, 그녀의군단을 언급했다.

황제를 어떻게 죽이는지 말하는 부분에서 기스-제-라이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마법사 에레포르에게 했던 대사까지 읊어 주었을 때 기스-제-라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맞아. 목격자가 없어야 암살이지.

그런데 넌, 목격자를 만들려고 하고 있잖아?"

"곤란한 요청이었군."

"그래. 다음은?"

기스-제-라이는 내 이야기에 눈을 빛내며 완전히 몰입하고 있었다.

그녀가 잿빛 기사에게 어떻게 살해당하는지, 그리고 쫓아온 후작에게 내가 어떻게 쫓기는지 설명했다. 이야기는 몇 시간이 넘게 이어졌다.

"여기까지요."

하늘 가운데 떠올랐던 해가 조금씩 기울어지고 있었다. 모두의 죽음이 가까워져 오는 신호였다.

"흐음.

기스-제-라이는 신경 쓰이는 듯팔짱을 낀 채, 손가락으로 팔을 탁탁 짚어 갔다.

'의외인데.' 그녀의 예전 모습을 생각한다면.

미친 해골이라고 깔깔거리던 예전보다 훨씬 더 진지하게 내 이야기를 들어 주고 있었다.

"좋아."

기스-제-라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듯한 이야기야. 네가 열거한 것들은 모두 사실이다. 거기까지면모르겠지만, 네가 묘사한 내 행동들은 모두 내가 할 법한 이야기다."

묵직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희대의 네크로멘서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는 네 말을 '계산'에 넣을 수 없다."

"계산에 넣을 수 없다니?"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 멀리를 흘끗했다. 나도 무심코 돌아봤다.

준마에 탄 한 무리의 기사들이 가도좌우로 갈라지고 있었다.

기스-제-라이가 나를 시험했다.

"길을 열고 있네. 저것들을 보고,

내가 뭐라고 할지 맞춰 봐."

"웃긴. 짓이라고 할 거요? 누가 와서 황제 만세 따위를 외친다고.

"그것도 맞았네. 하지만 나는 네 말을 토대로 계획을 짤 수 없어."

"왜 할 수 없다는 거요?"

"나는.

네크로멘서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내 앞에 복속시킬 수 없는 것들은 믿지 않아.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은 상정하지 않는다. 그런 걸 끼워 넣게 되면.:, 기스-제-라이는 손으로 허공을 더듬거리는 시능을 했다.

"이 작은 실험대가 무너져 버린다.

세계에 균열이 일어나 버리지."

그런 건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는 듯한 말투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네크로멘서는 멀리서 다가오는 황제의 행렬을 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연구 환경이 싹 무너지는 거야.

정수 흡수를 얻었다고 했나?"

"그렇소."

"그럼 내 수준까지는 빠르게 성장하겠군."

"당신을. 먹어 치워서 말이오?"

"그래. 네가 다음 생에 날 만나서,

막아서 살리고 싶다면 그만큼 강해져서 와라. 나를 힘으로 막아 봐."

- 차르록.

- 털썩.

몸을 옥죄던 기스-제-라이의 뼈촉수가 풀렸다. 몸이 바닥에 털썩 떨어졌다. 네크로멘서는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사박사박 풀 밟는 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말리지는 않을게. 이사벨이라는아이, 살릴 수 있으면 살려 봐."

툭, 하는 소리와 함께 곁에 단검한 자루가 떨어졌다.

은색 손잡이. 칠흑의 칼날. 붉고하얀 문자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칼날 위를 떠다니는 단검이다.

"내 증표다. 아이들에게 보여 주면얘기는 들어 줄 거야."

"듀라한들 말이오?"

"그래. 누구든."

- 달그락.

나는 그녀가 던져 준 단검을 소중히 꼭 쥐고 일어섰다.

"고맙소."

기스-제-라이는 천천히 걸어가며 느긋한 투로 말했다.

"나 어차피 죽는다며? 목격자 하나 살려 두는 거야 뭐. 네 말 틀리면, 그때 죽여도 되지."

나는 다급히 일어나, 약간 거리를 두고 그녀를 따라갔다. 네크로멘서는 내게 단장을 살려 볼 기회를 준 것이다.

- 다그닥. 다그닥.

근위대의 말발굽 소리가 들린다.

황제의 행렬이 가까워진다.

- 다그닥! 다그닥!

"저 아이니?"

기스-제-라이가 손가락을 뻗어 단장을 가리켰다.

"그렇소."

단장이 보인다.

전체가 미스릴로 만들어진 갑옷.

빼곡하게 상감된 대마법 문양.

물론 이번에는 절대 욕심을 부릴 생각이 없다.

〈피고는 백작 위를 가진 여성의 사체로부터 갑옷을 벗겨 냈다! 피고는 살해와 사체 훼손, 유품의 강탈을 인정하는가?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내 목을 잡고 허공에 흔들던 후작의 모습이 아직 눈앞에 생생하니까.

'절대 안 가져간다고.'

"그래. 잘 살려 봐."

기스-제-라이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먼저 결계를 지났다.

- 히이이잉!

수십 개의 시선이 동시에 그녀에게 내리꽂혔다.

미스릴 갑옷을 입은 근위기사단장,

이사벨 시몬느가 주위의 두 기사를 각각 호명하며 차갑게 말했다.

"치워라."

"존명."

거대한 돌격 랜스의 창끝에 푸른 기운이 서렸다.

나는 아직 결계를 벗어나지 않은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 뛰쳐나갈 수도 없었다.

이사벨에게 도망가라고 말한다면,

기스-제-라이의 함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건 내게 증표까지 맡겨 준 네크로멘서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게다가 이사벨에게 도망가라고 말한다고, 그녀가 도망갈까? 근위기사단장이, 이런 상황에서?

그럴 가능성은 조금도 없다.

그리는 시나리오는 하나.

난전 중에 뛰어들어 기회를 노린다.

수십 수백의 군단에 당해서 기력이다 멸어진 이사벨을, 어떻게든 살려내어 바깥으로 던져 버릴 기회를.

'저번처럼, 듀라한의 검에 뎅겅 목이 잘려 버리기 전에 말이지.'

- 다그닥! 다그닥!

"잠깐!"

'똑같군.' 수염 기른 마법사가 말을 몰고 앞으로 나왔다. 기사들의 반응도, 마법사의 대사도 똑같았다.

"내가 저자를.

"엠버메어를 지키는 3강.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정확히 같았다.

이번 생에서 내가 벌인 행동들은,

황제의 행렬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 것 같았다.

"섣불리 공격하지 마라!"

- 다그닥! 다그닥!

흰 수염 마법사 에레포르가 기스-

게-라이의 앞에 섰다.

에레포르가 말 위에서 위엄을 잡으려 애쓰며 물었다.

"용건이 뭐.

네크로멘서는 녀석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하품을 했다. 그리고 손을 아래로 몇 번 내저으며 말했다.

"후아아. 무너져. 무너져라."

- 쿠구구궁!

순식간에 땅이 꺼졌다.

"왜 이렇게 빨리!"

나는 앞으로 급하게 뛰어나갔다.

결계 바깥으로 나오는 나를 보고 기스-제-라이가 중얼거렸다.

"말 너무 많이 했어. 좀 졸려서."

- 히이이이잉!

- 끄아아아아!

- 함정이다! 적습! 적습!

- 퍽!

- 서걱!

- 푸슈슛!

비명과 아우성이 곳곳에 울려 퍼졌다. 쇠 찢는 소리, 고기 뚫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도륙의 시작이다.

'은신.'

'탐지.'

'질주.'

- 팟!

나는 구덩이 안으로 뛰어들었다.

전과 달리 기스-제-라이를 향해 날아오는 투창은 없었다.

황제의 행렬은 덜 준비된 상태에서 급하게 함정에 빠졌다.

미처 대비하지 못한 자가 많았고, 함정의 효과는 더욱 컸다.

'이사벨. 죽지는 않았겠지.'

구덩이 위에 서서 미스릴 갑옷을 입은 이사벨을 찾았다.

안쪽은 아비규환이었다.

- 챙! 쨍!

- 끄아, 끄아아아아!

수십 배가 넘는 군단이 근위대를 잡아먹는 모양새.

'저기다.'

이사벨은 그 안에서 은빛 점이 되어, 새하얀 뼈의 파도를 타 넘으며 포위망을 돌파하고 있었다.

'쉽지 않겠는데.

"멈춰라! 산 자여! 그대의 칼로 명예를 증명하라!"

돌파하는 그녀를〈견고한 오웨인〉

이 막아섰다.

- 쩌엉!

칠흑 연기를 줄줄이 내뿜는 마검과, 이사벨의 은백색 검이 세차게 부딪쳤다.

한 번의 격돌로는 어느 한쪽도 크게 밀리지 않는 호각지세였다.

이사벨의 뒤쪽으로 접근할 루트를 계산해 보고 있을 때였다.

"에이잇!"

근위대 앞쪽.

구부정한 마법사가, 수정구에 저장된 압축 화염을 뿜어냈다.

- 퍼버버벙!

활활 타오르는 압축 화염이 공기를 터트리며 해골들을 향해 폭사되어갔다.

- 파바바밧! 달그락! 달그락!

수십의 해골이, 폭발에 휩싸여 허공 높이 튀어 올랐다가 사방으로 우수수 뿌려졌다.

격발 가운데 서 있던 다섯 명의근위대는 터져 날아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몸에 불이 붙어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쳤다.

"악! 아아악!"

"뜨거워! 뜨거워!"

'같은 편에게 저런.

당황한 탓인지, 마법사들이 이전보다 더 빨리 폭주하고 있었다.

'지금 뛰어들어 봐야 본전도 못 건지겠군.'

나는 잠시 기다렸다.

불꽃을 정면으로 맞고도,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난 채 버티고 있는 듀라한이 보였다.

'길라우트였나.'

"흥. 얼어라!"

흰 수염의 마법사가 영창했다.

- 아사사삭!

몸에 불이 붙은 채 괴로워하던 기사들과, 폭발에도 버티고 있던 길라우트가 한 번에 얼어붙었다.

에레포르는 거기서 끝내지 않았다.

수정구에서 샛노란 빛이 줄기줄기 뻗어 나오기 시작할 때였다.

"어휴. 너무 잘못 늙었네, 진짜!"

기스-제-라이가 칼을 휘둘렀다.

- 마법 역류.

나직한 외침과 함께, 수정구에 맺힌 뇌전이 흘러나오지 못한 채 그대로 터져서 거꾸로 흘렀다.

'이제 뛰어들어도 되겠군.'

마법사들을 기스-제-라이가 담당한 뒤부터, 전장은 빠르게 정리되어가고 있었다.

- 팟!

나는 구덩이에 몸을 던졌다.

네크로멘서의 군단은 나를 아군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사벨에게 도달하는 게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그녀는 벌써 두 명의 듀라한에게합공당하고 있었다. 갈수록 부딪치는 합이 불리해져 가고 있었다.

'저대로 놔두면 죽겠는데?'

키 큰 듀라한이 이사벨의 허리를 향해 거대한 양손검을 휘둘렀다. 나는 급하게 바스타드 소드를 내밀어그 칼을 막았다.

- 쩌엉!

칠흑의 마검에 바스타드 소드가 부딪히며 손이 얼얼하게 울렸다. 양손검을 휘두른 듀라한도 흠칫하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두 듀라한이 일제히 나를 향해 돌아섰다.

"그대는 누군가?"

"주主의 명을 받들고 있거늘, 왜막아서는 거냐?"

"한데 처음 보는 실력이야. 우리 다섯 외에 이런 자가 있었던가?"

나는 그들에게 기스-제-라이의 칠흑 단검을 슬쩍 보여 줬다.

"두 분, 잠시 실례 좀 합시다."

"으음.

두 듀라한이 칼을 살짝 내렸다. 한순간도 검을 놀리고 싶지 않았는지, 한 명이 빠져서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정리가 더 빨라지겠군.' 나는 옆에 선 오웨인의 뻘쯤한 시선을 무시하고, 단장을 똑바로 바라봤다.

"이사벨 시몬느."

"뭐, 뭐냐!"

그녀가 투구를 쓴 채 내게 칼을 겨눴다. 하지만 갑자기 적에게 목숨이 구해진 데다, 똑바로 이름을 불린 탓인지 그녀의 목소리에 약간의 당혹이 서려 있었다.

시간이 별로 없다. 나는 즉석에서 빠르게 사기를 치기로 했다.

"제국 중경中更 이사벨 시몬느, 바티엔느 폰 레안드로 후작이 당신을 애타게 찾고 있소."

- 철컥.

근위기사단장의 동요가 눈으로 보일 정도로 커졌다.

118화 기분의 문제 (9)

***************************************************

"뭐라고?"

그녀는 아예 투구를 벗었다. 바깥으로 긴 실버블론드가 흘러내렸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 근육에 어울리지 않게.

무엇보다 도살의 한가운데 있는 인간답지 않게, 여자는 묘하게 달뜬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말을 이었다.

"당장 여기서 도망치시오. 후작이꼭 전해 달라 했소. 황제는 가짜요.

헛되이 목숨을 버리지 마시오."

"그, 그분이. 왜, 왜 나를?"

근위대에게 명령을 내리던, 삭풍 같던 목소리와는 완전히 어울리지 않는 말투였다.

그나저나,

"왜 당신을. 이냐니.

의아한 이사벨의 반응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 반응은 뭐지? 결혼이라도 한 사이 아니었나?'

"레안드로 후작과 당신. 친밀한 사이 아니었나?"

의문을 입 밖으로 꺼냈다.

명철하지 못한 의혹을 교환하고 있는 사이, 주위에선 창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비명을 지르는 쪽, 으스러지는 쪽은 주로 근위대였다. 한 명 한 명의실력은 근위대가 우월했지만 숫자에서 너무 밀렸다. 그만큼 이사벨은급했고, 나는 느긋했다.

"헛소리! 함부로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 마라!"

이사벨은 얼굴을 붉혔다. 그녀가나에게 칼을 내리쳤다.

여러 자루의 창이 그녀를 찔러 왔다. 하지만 그녀를 저지하는 공격을 전부 흘려 내고, 나를 쪼갤 기세로 똑바로 검을 내리쳤다.

- 쩌엉!

'이 정도로 강했다니.

검신이 부러지지 않은 게 용했다.

칼자루를 쥔 손아귀가 충격으로 떨려 왔다. 이사벨은 칼을 휘두르면서도 다급하게 외쳤다.

"그분에 대해 뭘 알고 있지? 너희 따위의 마수에 그분이 당할 리는 없다만.

"그렇지 않소!"

다른 해골들이 끼어들려고 했다.

나는 그들의 창칼을 내 손으로 쳐내며 대화를 이어 가려 애썼다.

곁에 있던 듀라한들은 칠흑 단검을 보여 주자 다른 전장으로 뛰어들었지만, 일반 군 단병들은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레안드로 후작은 여기서 멀리 떨어져 있소. 아주 안전한 상태지. 난 그냥 부탁을 받은 거요."

"너 따위가? 헛소리!"

"전장을 보시오. 우리가 압도적이지 않소?"

"그게 어쨌다는 거냐."

"가만히 놓아둬도 어차피 황제는죽는데, 당신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지 않소?"

이사벨은 칼자루를 조금 낮췄다.

하지만 목소리에 서린 한기는 여전했다.

"증표는 있나?"

증生후작의 말을 듣고 왔다 할 증표.

그런 게 필요했나.

"증표도 없이. 감히 나를 현혹시키려 했단 말인가."

- 팟!

그녀가 땅을 박찼다. 흙이 뒤로 높이 튀었다. 몸이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빨랐다.

'젠장.'

간신히 칼을 들어 막았지만, 커다란 소리와 함께 들고 있던 바스타드소드가 부러져 버렸다.

그녀는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오며 다시 공격해 들어왔다.

- 쨍!

쇠와 쇠가 세차게 부딪쳤다. 나는 뒤로 네 걸음을 물러난 후에야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잠시 현혹되었던 내가 부끄럽군.

너는 그분을 모른다. 증표도 없이 명을 내릴 분이 아니시다."

'실패인가.' 기절이라도 시켜 멀리 버려두면 좋겠지만, 그럴 만큼 만만한 상대가 결코 아니었다.

단장이 든 검을 바라봤다.

칼끝뿐 아니라 날 전체에 은은한 연푸른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일부가 아니라, 전체에 검기를 구현시키고 있었다. 이사벨 시몬느는이제 힘을 아끼지 않는다. 끝을 보려는 태도였다.

"증표는 무슨 증표난 말이오!"

뭔가 알아내려 말을 걸었다. 하지만 이사벨은 문답무용으로 곧장 공격해 들어왔다.

주위의 칼을 주워 몇 번의 검격을교환했다. 홀려 내며 시간을 끌려했지만 상대가 되지 않았다.

'증표. 증표라.

구하는 건 불가능했다. 후작이 그런 증표를 내게 건네줄 리 없다. 녀석과 만날 생각도 없었다.

생각이 흐트러지자 칼이 절로 어지러워졌다. 훌쩍 뛰어 뒤로 십여 미터를 물러났다.

그 사이를 스켈레톤 나이트들과 트롤 해골들이 치고 들었다.

이사벨은 연푸르게 빛나는 칼을 휘둘렀다.

네크로멘서의 군단병들은 조각난 창칼을 붙잡고 뒤로 튕겨지거나, 빛나는 칼에 베여 쓰러졌다.

비슷한 일이 반복될수록 주위에 부서진 해골이 늘어났다. 하지만 뒤편에서 들리는 비명과 파육음은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어느 순간, 나와 그녀의 주위에 기묘한 정적이 생겨났다.

네크로멘서의 군단이 모두 물러나공터를 만들어 냈다.

거칠 것 없는 이사벨의 검이 내두개골로 다시 날아왔다.

- 드르르르록!

땅에서 수십 가닥의 뼈 촉수가 그녀에게 덮쳐 왔다.

- 화특! 화륵! 촤르륵!

"끄으윽!

팔다리가 단단히 뒤로 구속되고,

온몸이 뼈 촉수에 칭칭 감긴 채 지친 이사벨이 허공에 솟아올랐다.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예언자 아기, 뭐 하니? 내가 죽는거니, 아니면 네가 죽는 거니?"

기스-제-라이였다.

- 화록! 좌르록!

버둥거리는 이사벨을 향해 몇 가닥의 뼈 촉수가 더 조여졌다. 작은 숨구멍만 빼고 온몸이 완전히 조여진 상태였다.

고요했다. 나는 전장을 돌아봤다.

'다. 정리된 건가?'

근위대는 대부분 전멸했다. 두 마법사의 처리도 끝난 것 같았다.

"벌써?"

벌써 끝난 거냐는 물음이었다.

기스-제-라이는 알아들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친 네크로멘서는 피식 웃었다.

뭘 씹어 먹기라도 했는지 입가에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내가 물었다.

"저번보다. 처리가 빠르군. 뭐가 달라진 거요?"

"힘을 개방했어. 부작용은 있겠지만, 내가 죽는다는데 아낄 거 없잖아? 예열 좀 했지."

굽이굽이 컬 진 그녀의 머리칼이 선홍빛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유려한 곡선 뒤로 방울방울 흐르는 피가 묘하게 아름다웠다.

기스-제-라이의 시선을 따라 마차 쪽을 바라봤다.

날씬한 체구의 듀라한이 황제를 수레에서 덥석 잡고 끌어냈다.

"주군, 목표를 확보했다."

"어, 펜리르! 민첩하네?"

펜리르라고 불린 듀라한은 옆구리에 끼고 있던 제 머리를 높이 한번 던졌다.

머리가 360도로 빙그르르 돌아가며 솟아오르다가, 떨어져 다시 펜리르의 손에 잡혔다.

'승리 의식 같은 건가.'

네크로멘서는 전장의 다른 듀라한들을 차례로 바라봤다.

"하멜라인, 안드레이, 길라우트. 늙은이 둘 목 따느라 수고했어."

"주군이 미리 마법을 봉쇄한 덕분이지. 우리가 한 거 있나."

네크로멘서의 시선이 향하는 쪽에,

목이 잘리고 심장이 꿰뚫린 두 구의시체가 보였다.

그나마 로브에 쌓여 있어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아쥬라의 권위를 상징하는 보랏빛로브는 붉은 피가 더해져 검붉게 변해 있었다.

'이번에는. 그나마 시체는 남기고 죽었군.'

두 마법사도 강렬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잠시 그 환한 빛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을 때였다.

- 촤르륵!

기스-제-라이의 촉수가 뻗어졌다.

끌려 나온 황제가 묶인 채 허공에 번쩍 들렸다.

"황제를 죽여 보고. 별일 없으면 다시 이 아이를 죽이는 걸로 하기로 했으니까. 좋지?"

네크로멘서는 촉수에 꽁꽁 묶인 이사벨 시몬느를 턱으로 가리켰다. 그녀가 나긋나긋하게 웃으며 내 동의를 구하고 있었다.

- 달그락.

홀린 듯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나를 존중해 주고 있었다. 불만을 말할 여지는 전혀 없었다.

"이제, 뭐더라? 정체불명의 잿빛기사가 나타나서 우리를 다 죽인다고 했나? 크하하하하.

"하하하하.!"

다섯 듀라한이 그녀를 따라서 웃었다. 기스-제-라이가 전장을 향해 손짓했다.

- 드르르륵!

굵고 거대한 삐 촉수들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 끝에 자줏빛 기운이 은은히 서리고 있었다. 나는 기소-제-라이에게 물었다.

"당신은 저번에, 죽은 기사들을 일으켰소. 지금은.

"뭐가 나온다며? 당장 전력으로 쓰기에는, 이런 게 좋아. 전원, 0호 전투태세."

"존명."

그녀를 따라 웃던 듀라한들이 군단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수천의 해골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별거 다 아는 예언자의 말이니 무시할 수 없지."

기스-제-라이는 나를 보고 말을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나타난다고?"

나는 묶여서 말 한 마디도 제대로 뱉어 내지 못하는 황제를 가리키며말했다.

"황제를 죽이면. 근처에서 허공을 찢고 출현하오."

수천의 군단은 일종의 진법을, 결계를 형성하는 것 같은 모양으로 움직였다.

나는 이들의 준비를 보고 내심 웃기는 걱정이 들었다.

'안 나타나면 어떡하지?'

준비를 마치고 멍석을 깔아 놓으면 일이 벌어지지 않는 법이라고, 입버룻처럼 말하던 어떤 마족이 떠올랐다.

황제를 죽였는데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으면 내 입장이 얼마나 난처할까 싶었다.

물론 그 기사가 다시 나타나는 걸 바라는 건 아니었다.

기스-제-라이와 다섯 듀라한이,

수천의 군단이 순식간에 살해당하는걸 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그걸 막기 위해서 여기에 왔던 것이다.

"그럼 해 볼까."

주위의 공기는 진지했다.

네크로멘서의 지시 한 마디에.

수천의 군단병은, 실제로 어마어마한 적이 나타나는 걸 상정한 듯이긴 장하고 있었다.

"시작한다. 모두, 마음의 준비를."

그녀가 손을 들었다.

'죽었다!'

기스-제-라이는 촉수를 뻗어 황제의 숨통을 끊었다. 호화로운 황금빛수의壽衣에 피가 묻었다.

촉수에 목이 졸려 있는 은발적안의 황제는 단말^가도 뱉지 못하고 죽었다.

'황제 폐하 만세도 못 외치는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주위는 태풍의 눈처럼 고요했다.

"당장 나타나는 건 아니오!"

나는 변명처럼 외쳤다.

"그래. 그래."

기스-제-라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관에 피를 담았다. 투명한 관에 피가 차올랐다.

보랏빛으로 변했다.

"본인 확인 완료.

여기까지는 모두 같았다. 기스-제-라이에게 말해 둔 그대로였다.

긴장된 침묵이 십여 초 이어졌다.

정신을 집중했다.

이제 허공이 벌어질.

- 우우우우우응!

시작이오!"

이사벨 시몬느도 발버둥을 멈췄다.

그녀가 기괴하게 비틀리고 있는 공간을 주시했다.

- 우우 우우우.!

"젠장."

공간에서 나오는 기운을 느낀 기스-제-라이가 욕설을 내뱉었다.

이번에는 촉수를 만들어 공간을 구속하지도, 도망치라고 소리 높여 외치지도 않았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이미 직감한 것 같았다.

그녀가 내게 말을 걸었다.

"다시 날 보거든."

"말씀하시오!"

"찾지 못했다 해 포기하지 말라 고전해라. 린트부름의 태양과 평행하는 꿈을 걸으라고 해라. 알아들을 거다. 어쩌면. 멈출지도 모르지."

'린트. 뭐?'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뜻하는 바는 분명했다.

'증표다.'

그녀는 내게 일종의 증표를 건네준 것이다. 다음 생의 그녀를 만나면사용할 증표를.

구덩이 전체가 폭발적인 긴장감에휩싸였다.

기스-제-라이처럼 정확히 힘을 절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모두 찢어지는 허공에서 끔찍한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 저벅! 저벅!

다섯 듀라한이 부글부글 끓는 허공주위로 걸어가 칼을 겨눴다.

- 털썩.

네크로멘서는 살아 있는 이사벨 시몬느를 땅에 내려놨다.

나는 이사벨을 돌아봤다. 그녀도안색이 죽어 있었다. 숨통이 트여 콜록거리긴 했지만, 분위기에 압도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그저 주위를 더듬어, 검한 자루를 손에 잡았다. 그리고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기스-제-라이는 손을 들었다.

그 움직임에 따라 수십 가닥의 거대한 뼈 촉수가 허공에서 꿈틀거렸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쇄도.' - 파바바바밧!

부글부글 끓는 허공을, 수십 가닥의거대한 뼈 촉수가 공격해 들어갔다.

- 콰득. 콰드득. 우두두둑!

하지만 수십 가닥의 뼈 촉수는 허공으로 쑥 들어가더니, 그대로 으스러져 버렸다.

파삭, 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깨진 공간에 서피가 흘러나왔다.

두 번째 목격이다.

잿빛 기사의 모습을 좀 더 자세히 파악할 수 있는 기회였다.

나는 온 정신을 집중했다.

부글부글 끓는 무언가가 거대한 대검을 휘둘렀다.

터무니없는 풍압에 주위 수십 미터가 휩쓸렸다.

듀라한들의 몸을 감싸던 칠흑 연기가 모두 날려 사라졌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무언가가, 대검을 휘둘러 모두를 양분해 버리려던 순간이었다.

- 쿵.

기스-제-라이가 이를 악문 채 발을 굴렀다. 상대가 잠시 그 자리에 멈칫했다.

'멈췄. 어?' 듀라한들과, 수천의 해골에게서 무형의 기운이 전해져 네크로멘서에게집중되는 것 같았다. 공기가 웅웅거리며 진동하고 있었다.

'결계인가?'

119화 기분의 문제 (11)

***************************************************

군단 전체의 힘을 통합한 결계.

하지만 잘되고 있다는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다. 기스-제-라이의 표정만 봐도 그러했다.

잿빛 기사는 멈추긴 했지만, 전혀곤란한 기색은 없었다.

진회색 갑주에 걸쳐 새겨진 기하학적인 회로가 번쩍였다.

- 피슛!

주황색으로 반짝이는 건틀랫에서,

거대한 빛의 구가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나는 무심코 이사벨을 돌아봤다.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침을 꿀꺽 삼키고는 칼자루를 꽉쥐고 있었다. 그 모습이 더없이 무력하게 느껴졌다.

세계가 환해졌다고 생각한 순간,

- 슈우우우응!

커다란 구가 터지며, 수천수만의빛살이 주위를 덮쳤다.

죽었다.

부서졌다.

소란은 순간이고 고요는 길었다.

한 번에 내려앉은 죽음과 파괴로 사방은 온통 무거웠다.

하지만.

나와 이사벨을 포함해.

기스-제-라이의 뒤편에 있는 몇몇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잿빛 기사는 살아남은 자들이 거슬린다는 태도로 고개를 갸웃하며 이쪽으로 걸어왔다.

"도망을.

말을 삼켰다. 주위를 둘러봤다. 누구도 도망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크. 크흐.!"

네크로멘서는 온몸이 벌집처럼 뚫린 채 힘겹게 헐떡거렸다. 그 뒤쪽은 모두 굳어 있었다.

이사벨도 그러했다. 그녀는 간헐적으로 손만 파르르 떨었다.

- 콰드득!

잿빛 기사는 검면으로 네크로멘서를 으깨 버렸다. 뼈와 살점이 반반씩 으스러지는 소리가 기괴했다.

- 저벅.

걸어오는 죽음이 아래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칼을 휘둘렀다.

네크로멘서의 뒤에 서 있던 해골들이 한칼에 서넛씩 부서졌다. 휘두르는 대검에 뻣가루가 묻어났다.

어느새 나와 이사벨만 남았다. 이사벨의 두 손이 덜덜 떨렸다. 거기에는 순수한 공포가 있었다.

- 달그락.

나는 칼을 주워 들었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칼이었다. 칼끝으로 잿빛 기사를 겨눴다.

'저 녀석.

직감했다.

왜인지는 모른다. 놈을 공격할 수있는 건 나밖에 없다.

이사벨은 나보다 강하다.

그런데 이유 모를 공포에 사로잡혀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기스-제-라이마저 잿빛 기사에게 섬뜩한 공포를 느꼈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압박감은 감당할 만한 수준이다.

두 번째 만남이라 그런 걸까?

첫 번째에도 놈의 출현에 당황했을뿐이지, 몸이 얼어붙을 정도의 공포는 느끼지 않았다.

'내가 해야 돼.'

녀석은 나를 차갑게 내려다봤다.

투구 저편에 검붉은 빛이 끓듯이 이글거렸다.

[IT6a o a ar\u a i〉 r t) eia a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

하지만 예전과 같은 언어인 듯했다. 대검이 허공에 들렸다. 일어선 나를 찢어 놓으려는 대검이, - 부응!

나를 그대로 지나쳤다.

[양손검술 Lv. 4를 습득했습니다!]

[양손검술 Lv. 5를 습득했습니다!]

[참격 Lv. 2을 습득했습니다!]

[일도양단 Lv. 2을 습득했습니다!]

'??? 이거다!' 반복되고 있었다. 두 번을 겪고 분명히 알았다.

나는 놈의 공격을 단순히 맞지 않는 게 아니다.

그 공격을 흡수하고 있었다.

잿빛 기사의 투구에 붉은 회로가 반짝인다. 얼굴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회로가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같은 반응이었다.

'다음은.,

- 좌르록!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날개처럼 수십 자루의 칼이 떠올랐다.

- 우우우응!

공간이 찢어지며 울었다.

허공에 뜬 수십 자루의 칼이 나를향해 폭사됐다.

'똑같아!'

- 생!

칼들이 그대로 나를 통과했다.

허공에 텅 빈 공간이 생겨났다.

전부 같았다.

기사의 전신 회로가 분노로 새빨갛게 물들었다.

'내 공격은. 통할까?'

공격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자,

어디 있었는지 모를 용기가 솟아올랐다. 적의에 불이 붙었다.

- 질주.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가며 칼을 휘둘렀다. 내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였다.

- 부응!

하지만 칼은 허공에 미끄러졌다.

놈의 속도는 환영으로 느껴질 정도로 빨랐다. 잿빛 기사는 나를 상대하지 않고 지나쳤다.

뒤에서 섬뜩한 파육음이 들렸다.

공포에 떨던 이사벨 시몬느가 꼬치처럼 배가 꿰어 허공에 들렸다.

거대한 검신이 등 뒤로 비죽이 튀어나왔다. 부러진 뼈들이 엉망으로 내장을 찔렀다.

"끄, 끄, 끄허.!"

후작의 이름을 들을 때 얼굴이 상기되 던.

기사단장 이사벨 시몬느의 눈동자가 잠시 커졌다.

잿빛 기사가 검을 털었다. 이사벨은 쓰레기처럼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숨이 끊어져 있었다.

달려들어 칼을 휘둘렀지만 전혀 닿지 않았다. 이미 저 멀리 떨어진 잿빛 기사가 뒤를 흘끗 돌아봤다.

지독한 존재감이었다.

사방에 뿌려진 피와 시체 부스러기들이, 티끌이 되어 허공으로 휘말려 올라가는 것 같았다.

그는 활짝 벌린 허공으로, 질척한세계의 이면程面으로 발을 디뎠다.

공간이 찌그러져 닫혔다. 봉합선은 없었다. 학살자는 사라졌다.

- 달그락.

곁의 칼을 집어 들었다. 칼로 땅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위를 둘러봤다. 죽음이 거대한 장막처럼 펼쳐져 있었다. 저번처럼 혼자만 살아남았다.

두 번째다.

정신을 차리는 건 처음보다 훨씬더 빨랐다. 나는 의지를 짜냈다. 일어서서 한 걸음을 디뎠다.

이사벨의 시체가 발에 걸렸다.

참혹하게 배가 뚫려 죽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인간의 편이 아니다.'

잿빛 기사는.

네크로멘서의 군단을 몰살시켰다.

황제의 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근위단장인 이사벨을 죽일 리가 없다.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어쨌건 이사벨이 죽었다. 저번과 같은 상황이다. 레안드로 후작도 곧알게 될 거다.

'이제 놈이 쫓아오는 건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어지러웠다. 부릅뜬 이사벨의 눈을 천천히 감겨 줬다.

잔해를 지나 기스-제-라이에게 다가갔다.

시체라기보다는 폐허에 가까웠다.

살해당했다기보다는 파괴당했다는 말이 어울렸다.

나는 그녀가 한 말을 떠올렸다.

〈찾지 못했다 해 포기하지 말라 고전해라. 린트부름의 태양과 평행하는 꿈을 걸으라고 해라. 〉

'린트부름의 태양과 평행하는 꿈.'

의미는 알 수 없다.

그녀가 죽기 전, 자길 멈출 수 있을지 모른다고 전해 준 말이었다.

흉악한 힘을 느끼고, 급히 내게 던져 준 유언이자 증표. 그 말을 건넨다면 정말 반응이 달라질까?

나는 기스-제-라이의 시체 앞에서서 침묵에 잠겨 있었다.

감상은 복잡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취할 행동은 무정할 정도로 단순하다.

나는 눈부시게 환한, 네크로멘서의시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두개골을 이식한 대상입니다.]

[특수 조건을 충족합니다.]

[에픽 등급 스킬: 정수 흡수 Lv. 1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에픽 스킬 보유자의 숫자가 정상범위⑴로 확인되었습니다.]

[조정 프로세스 완료.]

[흡수를 허가합니다.]

[정수 흡수 Lv. 2를 획득합니다!]

[동화율이 낮아집니다!]

[동화울: 81.53%]

레어 스킬도, 유니크 스킬도 아닌에픽 스킬을 또다시 흡수했다.

[뼈가 능력 흡수에 충분한 적응을 마친 상태입니다. 흡수 능력의 즉각적인 소화가 가능합니다.]

[소화 시간 24:00:00 -> 즉시]

[훨씬 더 효율적으로 정수를 흡수할 수 있습니다.]

[한 구의 시체에서 흡수할 수 있는 정수의 용량이 50% 상승합니다.]

[죽은 지 7일 내의 상대로부터 정수 흡수가 가능해집니다.]

[흡수 가능한 스탯 상한이 75로 상승합니다.]

[흡수할 수 있는 스킬의 등급이 한 단계 올라갔습니다!]

[흡수 레벨⑵에 의해, 레어 등급스킬로 흡수가 제한됩니다.]

나는 이 커다란 비극 위에 서서,

어쩔 수 없이 흡족함을 느꼈다.

흡수하는 정수의 용량이 올랐고,

흡수로 도달할 수 있는 스탯의 상한도 지금보다 훨씬 더 올랐다.

48시간 내 죽은 시체의 흡수에서,

7일 내의 시체 로부터로 스킬 사용의 가능 시간대가 크게 길어졌다.

하지만 무엇보다 매력적인 것은 레어 스킬의 흡수.

레어 스킬을 가져갈 수 있다면.

정수 흡수의 효율은 완전히 새로운 수준으로 발돋움한다.

- 털썩.

네크로멘서 앞에 주저앉았다.

손을 조심스럽게 모아 주고, 눈을감기고, 잔해를 정리해 주었다.

"다음에는."

빼앗는 죄의식과 올라선 흡족함, 미래에는 반드시 지켜 주리라는 책임감이 어지럽게 섞인 상태로 그녀를 멍하니 바라봤다.

빛은 잦아들었다.

뼈의 군주 같은 스킬도 더 이상 흡수할 수 없었다.

정수 흡수를 가져간 것으로 아예 끝인 모양이었다.

- 저벅.

근위 기사들과 이사벨의 시체를 향해 되돌아갔다.

구덩이는 예전처럼 찬란하지 않았다. 멀리 떨어져 있는 두 명의 마법사를 포함해서, 빛을 내는 시체는 일곱 구 정도였다.

'입맛 까다로워졌군.'

기사들의 정수를 흡수하며 자잘한 스킬들을 얻었다.

검술 교육. 승마. 기마 창술.

'교육은. 레나를 가르칠 때 쓸 만 하려나.'

물론 가르칠 기회가 있을 때의 이야기다. 후작의 추적을 받는다면 곧죽어 버릴 확률이 높다.

체력과 민첩, 힘은 전혀 오르지 않았다. 나보다 높은 스탯을 가진 기사는 없었다.

이사벨을 흡수했다.

'혹시.

검기를 사용할 수 있는 조건.

〈깨달음〉을 흡수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민첩과 힘이 주르륵 올랐다.

그리고,

[검기劍氣 Lv. 1을 흡수합니다!]

칼끝에 미약한 검기를 발현시킬 수있습니다. 숙련도가 낮을 경우, 무기가 파괴되는 일이 잦습니다.

레벨이 올라갈 경우 발현 범위와 발현 자유도가 상승합니다.

검기劍氣 Lv.6 이후로는 별도의단계로 취급됩니다.

'이제 된 건가.'

하지만 곧이어 다른 메시지가 떠올랐다.

[깨달음 Lv. 1이 필요합니다.]

[사용이 불가능합니다.]

'으음.' 검의 무언가를 깨달아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런 깨달음이 쉬울 리가 없다. 이사벨에게서는 더이상 빛이 나타나지 않았다.

- 저벅.

이제 남은 건 마법사들.

저번에는 형체도 남기지 못하고 핏자국이 되었던 남자들은, 예전과 달리 환한 빛을 뿜어내고 있다.

기스-제-라이에게는 미치지 못했지만, 멀리서도 그 광채가 또렷하게 보일 정도였다.

아무 빛도 뿜지 않는 시체와 잔해들을 넘어 그들에게 다가갔다.

잘린 목이 휑하다. 찾아서 붙여 줄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흡수한다.'

검붉게 변한 로브에 손을 뻗었다.

- 우우우우응!

강렬한 초록빛이, 온몸의 뼈를 울리며 스며들고 있었다.

첫 흡수.

집중한 채 기운을 빨아들였다.

만다라도, 시약도, 스크롤도 필요 없이 마법을 발동시키는 자들.

아쥬라의 마법사.

기스-제-라이의 거대한 함정에 빠져 살해당하기는 했지만, 결코 만만한 자들은 아니다.

지팡이를 한 번 휘둘러서 불꽃을일으키고, 땅을 얼리고, 번개를 일으킨다.

〈탑〉의〈마법사〉.

드넓은 이 제국에서 고작 이백여명에 불과한 존재.

나는 그들의 시체를 앞에 놓고, 그힘을 내 것으로 빼앗으려 한다.

- 우우우우응!

네크로멘서의 죽음을 막지 못한 이상, 나는 이 장소의 모든 정수를 제대로 빨아들일 의무가 있다.

[마법장전 Lv. 1을 흡수합니다!]

- 스크롤이나 만다라, 시약 없이트리거만으로 권능을 발동시키는 마법사의 비의秘儀.

- 술자가 보유한 아케인 하트에 마법을 재어 넣습니다. 장전된 마법은 회로를 타고 격발됩니다.

'마법 장전?'

낯선 개념이다. 아케인 하트가 없다면 노력과 수련이 무의미하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까지는 들어 본 적 없다.

'탑의 마법사들만 공유하는 건가'

비밀 사회의 장막을 슬쩍 들춰 본 기분이었다.

내가 모르는 개념, 내가 모르는 세계는 깊고 넓었다.

그때 였다.

- 띠링!

[아케인 하트가 필요합니다!]

[현재 '마법 장전' 스킬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 달그락.

고개를 숙였다.

텅 빈 갈비뼈 안쪽을 내려다봤다.

'아케인 하트라.

아케인 하트는 고사하고 평범한 심장도 없다. 어디서 가져다 박아 넣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으음.'

일단 흡수를 계속했다.

강렬한 초록빛이 연달아 흘러들어오며, 계속 메시지가 떠올랐다.

[격발Blzae Lv. 1을 흡수합니다!]

[격발Blzae Lv. 2를 흡수합니다!]

[아케인 하트가 필요합니다!]

[스킬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질풍Blast Lv. 1을 흡수합니다!]

[아케인 하트가 필요합니다!]

[스킬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격발Blzae 과 질풍 Blast 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울거리는 불꽃 - 격발의 플레어 Lv. 1이 해제됩니다.]

[아케인 하트가 필요합니다.]

[스킬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뇌격雷擊 Lv. 1을 흡수합니다!]

[아케인 하트가 필요.]

[얼음 방벽 Lv. 1을 흡수합니다!]

[아케인 하트가.]

[결빙Frost Lv. 1을 흡수합니다!]

[아케인 하트.]

'이거 좀 소외감 느끼는데.,

역설적으로.

사용 가능한 것은 빛이 약해져 갈때 입수한 스킬들뿐이었다.

[더블 캐스팅 Lv. 1을 흡수합니다!]

[명상 Lv. 1을 흡수합니다!]

[명상 Lv. 2를 흡수합니다!]

잡념을 정화하고 마음을 진정시킵니다. 깊은 명상에 잠긴 자는 자기 자신과 대면하게 됩니다.

명상 중 낮은 확률로 깨달음을 얻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레벨이 올라가면 명상 상태에서 자신만의 개념 공간을 창조하거나, 천리안을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집중 Lv.1l- 흡수합니다!]

[집중 Lv. 2를 흡수합니다!]

확산되는 의식을 한군데에 모읍니다. 스킬의 수련 효과를 상승시킵니다.

명상과 함께 활용할 경우 명상의 효과가 크게 상승합니다.

레벨이 올라가면 자신의 감각을 조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건 괜찮겠군.'

아케인 하트가 없으면 원천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마법들이나, 더블캐스팅은 몰라도.

명상과 집중.

두 가지는 지금도 중분끼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스킬들이었다.

수련 효과를 상승시킨다.

무엇보다.

〈명상 중 낮은 확률로 깨달음을 얻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 띠링!

스킬 창을 열었다.

이사벨에게 흡수한 검기 스킬을 다시 확인했다.

['깨달음' Lv. 1이 필요합니다.]

[현재 사용이 불가능합니다.]

'명상 스킬을 사용한다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검기를 사용할 수 있는 단서를 찾은 것이다.

120화 기분의 문제 (11)

***************************************************

[명상 Lv. 幻와 [집중 Lv.2]를 흡수한 뒤 마법사들에게서 빛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주위를 돌아봤다.

더 이상 빛은 없었다.

'저번과 다르군.'

시간이 부족해서 빛을 빨아들일 수없는 게 아니었다.

빛을 흡수할 수 있는 숫자 자체가 무척 줄었다.

의아한 점은.

수많은 근위대의 시체.

그 가운데 전투력은 나만 못해도,

다른 면에서는 훨씬 더 뛰어난 인간도 많을 터.

하지만 다른 시체들에게서는 아예 빛이 비치지 않았다.

'능력의. 총량 같은 건가?'

이런 식이라면, 다음에 왔을 때는기스-제-라이와 두 마법사 외에는 흡수할 상대도 없을 확률이 높다.

정수 흡수.

놀라운 권능이다.

하지만 그 한계가 조금씩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기스-제-라이가 제국 황제까지 암살해 가며, 영웅 묘역의 이용권을 얻어 내려고 한 마음이 이해됐다.

내 능력에 벌써 이 정도로 흡수대상이 까다로워진다면.

기스-제-라이는 '빛'을 보고 산 지무척 오래되었을 테니까.

근위대의 말들을 바라봤다.

질주 스킬을 흡수했던 명마들이다.

이제 아무런 빛도 비치지 않는다.

'시간이 남는데.'

마법사의 지팡이 두 자루를 챙기고, 근위대의 명검과 듀라한의 마검을 주워 모았다.

황제의 시체에 다가갔다. 손가락에서 인장을 빼냈다. 옥관을 벗겨 냈다.

이사벨은 건드리지도 않았다.

금괴와 금화들을 쓸어 모았다.

금괴의 싯누런 빛은 압도적인 데가 있었다.

〈반짝이는 걸 믿으니까. 상당히 세련된 인간상이지. 〉수녀가 자길 기다리던 선장에 대해하던 말이 떠올랐다.

이 정도 금액이라면, 돈을 믿는 녀석들을 잔뜩 고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해적이라든가. 용병이라든가.'

이어 갑옷과 방패까지 좋아 보이는 건 잔뜩 모았다.

물론 가져갈 생각은 아니다. 어떤 추적 마법이 걸려 있을지 모를 물품들이니까.

나는 저번처럼, 허공에 떠 있는'공간'에 그것들을 차례로 집어넣기 시작했다.

- 쑤욱!

무기와 보물들은 아무 저항 없이 공간 안으로 쑥 들어갔다.

들어간 뒤 크기가 1/10 정도로 축소되는 것도 그대로다.

하지만.

저번과 비교해 공간이 두 배 정도로 넓어진 것 같았다.

'웬만한 건 다 들어가겠는데.'

4미터를 넘는 랜스가 안으로 손쉽게 들어갔다. 눈에 띄는 무기와 방패들을 대부분 넣고도, 꽤 공간이 남았다.

시선을 내렸다. 기스-제-라이의 시신을 바라봤다.

이대로 놓아둔다면 좋은 꼴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건 당연하다.

산산이 찢어져 곳곳에 매달리게 될지도 모른다.

- 달그락.

나는 팔을 내렸다. 조심스럽게 네크로멘서의 시체를 안아 들었다.

부스러진 뼈 촉수와 뼈 머리칼이팔 사이로 흘러내렸다.

몸 곳곳이 깨지고 뚫린 탓일까.

시체는 가벼워서 슬펐다.

네크로멘서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걸까? 어디서 다시 시작하게 될까?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방향성 없이 떠오르는 생각을 치웠다.

품에 안은 시체를 향해 말했다.

"당신이 여기 들어가는 걸 좋아할지 모르겠지만.

발끝부터, 그녀의 시체를 천천히 정체불명의 아공간 안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레드 플레이크를 떠올렸다. 언젠가 그들을 만나면 답을 줄지도 모른다.

기스-제-라이가, 자신의 시체를 어떤 식으로 처리하는 방법을 선호할지를.

지금은 시간도 여유도 없다. 잠시 이렇게 보관해 둔다.

남들의 눈에 이 공간이 보이는지,

사용할 수 있는지도 못 확인했지만.

'이번에는 다시 와서 확인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일단 자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무수한 시체를 지나 걸어갔다.

시체와 시체 사이의 좁은 여백에발을 디뎠다. 이들은 충실하게 자신의 싸움을 했다. 내가 보일 수 있는 약간의 예우였다.

곧 구덩이 외곽까지 도착했다.

이제 이곳의 주인은 까마귀들이 될것이다.

나는 도망치고 숨을 계획이다.

'어떻게 될까.'

유류품을 가지고 도망쳤을 때, 레안드로 후작은 나를 쫓아왔다.

아이템에 추적 각인이 있었던 거라고 짐작된다.

아무것도 갖지 않고 이 자리에서벗어난다면, 그는 이번에도 나를 추격할까? 흔적만으로?

맨손으로 구덩이를 벗어날까 했지만, 외곽에서 죽은 스켈레톤의 평범한 철검 하나를 집어 들었다.

'실례.'

마법 따위는 절대 걸려 있지 않을 것 같은 단순한 철검.

- 저벅.

구덩이 밖으로 나가는 마지막 발걸음을 디뎠다.

레나에게 바로 가는 건 안 된다.

후작의 추적을 받을 경우 그녀에게 피해가 간다.

'두 달.'

편지에 써 놓은 기한.

그동안 다시 동굴로 들어가 후작을 기다릴 생각이다. 놈은 2주 후 동굴로 들어왔다.

편지에 넉넉히 두 달로 써 놓기는했지만, 사실 한 달로도 좋다.

추격이 붙는지 안 붙는지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 팟!

일부러〈메마른 지하 묘지〉에 들렸다. 아이템 습득을 제외하고, 미래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요소들을 최대한 저번과 같게 만들고 싶었다.

'같은 루트로 간다.'

폭포를 지나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별거 없군.

확인을 마친 뒤 다시 미로 동굴로 향했다.

삼 년 동안 산 동굴.

후작 정도가 아니라면 들어올 엄두도 못 낼 천연 미로. 저번과 같은 장소에 자리를 잡았다.

갑옷을 풀어 놓았다.

- 철컥. 똑.

갑옷 벗는 소리에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섞였다.

허리에 매달고 있던 기스-제-라이의 단검이 눈에 띄었다.

'이것도 놓고 왔어야 했나?'

약간 꺼림칙했지만, 그녀가 일부러 내게 증표로 준 물건이다.

가지고 있고 싶었다. 만에 하나를 대비하는 차원에서 대부분의 물건을 놓고 왔지만, 어차피 추적되던 건 이사벨의 갑옷일 가능성이 높다.

혈혈단신으로 나를 쫓았던 후작은'인형' 황제가 아닌 이사벨의 죽음에 집착했으니까.

하얀 글자들이 꿈틀거리는 칠흑의 단검 표면을 손끝으로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뭐. 자살 용도로 쓰기도 좋고.'

2주.

멍하니 후작만 기다리고 있을 생각은 없다. 새로 얻은 스킬을 써 보기로 했다.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명상 Lv. 2를 시전합니다!]

잡념을 정화하고 마음을 진정시킵니다. 깊은 명상에 잠긴 자는.

메시지가 스르르 사라졌다.

머릿속에서 잡념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마음에 틈이 생겼다.

불안과 두려움이 그 틈으로 하나둘씩 빠져나갔다.

'새로운 건. 없는데.'

명상 스킬이, 그동안 전혀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경지를 보여 주는 건 아니었다.

명상 스킬은 오히려 부드러운 천에 가까웠다. 마음에 묻은 먼지와 때를 조금씩 지워 주는 느낌이었다.

세계가 조금씩 선명해지고 있었다.

[집중 Lv. 2를 시전 합니다!]

명상과 함께 사용하고 있습니다.

명상의 효과가 크게 상승합니다.

- 달그락.

명상을 유지한 채 철검을 집어 들었다.

칼끝을 지그시 응시했다.

자루를 잡은 손의 감각을.

몸의 자세를 아주 느릿하게 음미하기 시작했다. 세계가 가장 또렷하게 인식되는 순간, 칼을 내리쳤다.

칼에서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만큼 빨랐던 건지, 느렸던 건지 알아차릴 수 없었다.

무언가 아련하게 잡힐 듯 말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잡히지 않았다. 수련을 그만두고 다시 앉아서 가만히 명상에 잠겼다.

간지러운 무언가를 또렷이 잡아 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다시 칼을 들었다. 다른 스킬을 더해 보기로 했다.

'탐지.'

[탐지 Lv. 5를 활성화합니다!]

[스킬 효율 1, 000% 증가!]

[현재 체력 기준, 초당 0.0024%의체력이 소모됩니다.]

- 똑. 똑. 또옥 ■

멀리서 떨어지는 종유석의 물방울소리.

물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바닥에가라앉은 공기가 흔들리는 소리.

그게 전부였다.

나는 다시 명상에 잠겼다.

간지러운 무언가를 잡으려고 애써 노력하지 않았다. 굳이 잡념을 지우려고도 하지 않았다.

생각이 떠오르면 떠오르는 대로 놓아두었다.

시간이 흘렀다.

생생한 이미지와 함께, 어떤 순간에 깊숙이 잠긴 느낌이 들곤 했다.

〈착석하시오! 소란을 피우는 방청객들은 모두 퇴장시키겠소! 〉후작의 기억.

바다 위.

그의 근처로 기어 오던 인어들이,

새파랗게 빛나는 칼에 온몸이 터져나가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장면이 360° 의 환경環景으로 천천히 펼쳐졌다.

칼날이 닿지도 않은 상태에서 하피들을 반으로 가르던 모습.

- 달그락.

일어나 철검을 들었다.

머릿속에 있는 그 모습을 재현해보기 시작했다.

열흘이 지났다.

- 뻐걱.

[체력이 고갈되었습니다!]

[더 움직일 경우, 영구적으로 전체체력이 줄어들 수 있습니다!]

[남은 체력: 0.17%]

- 달그락!

뼈가 움직이지 않았다. 검을 잡은 채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특별한 깨달음은 없었다.

이대로 쓰러질 수밖에 없는 걸까?

'일단 체력을 좀 회복해야겠군.' 저번 생처럼 흘러간다면, 후작과 마주치기까지 며칠 남지 않았다.

잘 움직여지지 않는 손가락 끝으로 칼자루를 더듬었다.

철검이 만져진다.

칠흑 단검의 위치도 확인했다.

후작의 발소리가 들리면, 스스로 두개골에 칠흑 단검을 꽂아 넣을 생각이다.

두 번 잡혀 줄 생각은 없다.

[체력을 회복합니다.]

[99.1%.]

날짜가 지나갔다.

동굴 안은 고요하기만 했다.

놈을 만날 시간이 가까워 올수록 긴장은 점점 고조되어 갔다.

'올 때가 됐는데.'

마음 놓고 수련할 수도 없었다. 언제 나타나 뒤통수를 치고 팔다리를 묶어 끌고 갈지 모르는 놈이다.

'탐지.'

스킬을 활성화했다.

놈이 마음만 먹으면 여기에 걸리지도 않겠지만, 초조한 마음을 달래 기위한 용도였다.

온다.

오지 않는다.

온다.

오지 않는다.

2주의 마지막 날.

벽에 등을 붙인 채 기스-제-라이의 단검을 꼭 쥐었다.

새까만 날 위에 꿈틀대는 글자들을 가만히 바라봤다.

이 자리에 찾아올 후작이 어떤 괴물인지는 뱃속 깊이 안다.

조금씩 시간이 흘러갔다.

아직 들리지 않는 놈의 발소리에 거듭 귀를 기울였다.

시간이 사각사각 흐른다. 뭉쳤다가 핏물처럼 주르륵 흘러내린다.

- 똑. 똑. 똑-

14일째.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후작은 오지 않았다.

하루가 더 지났다.

- 달그락.

긴장이 풀리며 몸이 내려앉았다.

'안 오는 건가?'

싱숭생숭한 상태로 며칠을 더 기다렸다. 탐지를 켠 상태로 동굴을 오갔다. 하지만 발자국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 저벅. 저벅. 저벅.

일부러 소리를 내어 걸었다. 동굴가운데로 돌아왔다.

몸을 천천히 동굴 바닥 위에 내려놓았다. 여전히 고요했다.

팔다리를 쭉 펴고 누워 동굴 천장을 바라봤다.

나는 물방울이 맺혀 떨어지는 종유석을 보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살아. 남은 건가?"

정신이 멍하니 마비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뭔지 모를 감각으로 마음곳곳이 간질간질 욱신거렸다.

하루가 더 지났다.

"살아남았군."

저번 생에서 놈에게 추격당한 건,

이사벨의 유류품을 가져갔기 때문인것 같았다.

아직 레나와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는 사십여 일이 더 남았다.

넉넉하게 두 달을 잡은 덕분이다.

"명상을. 다시 해 보자.'

탐지 스킬을 켠 채 다시 집중명상에 빠졌다.

좀 더 마음 편하게 후작의 움직임을 떠올리며 칼을 휘둘렀다.

'이렇게. 아니, 이렇게.

- 쌔앵!

열흘이 지났다.

[주의!]

[무리하게 더 움직일 경우, 영구적으로 체력이 줄어들 수 있습니다!]

온몸이 랙백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무언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바로 앞에 있었다.

거의 다 왔다는 게 느껴졌다.

'탐지.'

[탐지 Lv. 5를 활성화합니다!]

[스킬 효율 1, 000% 증가!]

[현재 체력 기준, 초당 0.0024%의체력이 소모됩니다.]

외부를 살피지 않았다. 내면에 집중했다. 내 움직임을, 손끝부터 발끝까지 하나하나 감지했다.

온몸의 뼈가 삐그덕대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낼 생각은 없었다.

칼을 휘둘렀다.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죽였던 인간들이 하나씩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심장을 파고들어 갔던 칼의 감각이 떠올랐다.

나는 기억과의 대화를 시작했다.

검기는 얻어야 하는 게 아니었다.

이미 있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내 쪽에서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검기란.

끌어올리는 게 아니었다. 솟아나게 만드는 게 아니었다. 있는 걸 알아차리면 될 뿐이었다.

칼이 허공을 가른다.

한 번만 더.

- 달그락!

[무리한 움직임으로 인해, 체력이영구적으로 1 감소합니다!]

몰아沒我의 상태를 조금이라도 더길게 이어 가고 싶었다.

- 우우우웅 !

칼이 우는 것 같았다.

[무리한 움직임으로 인해, 체력이영구적으로 2 감소합니다!]

이쯤 되니 칼이 아니라 팔을 휘두르는 느낌이었다.

'기스-제-라이.

반으로 쪼개지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무수한 빛에 온몸에 구멍이 뚫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무리한 움직임으로 인해, 체력이영구적으로 3 감소합니다!]

무너지려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칼을 휘둘렀다.

[무리한 움직임으로 인해, 체력이 영구적으로 4 감소합니다!]

[주의하십시오! 체력 영구 감소가 누적되고 있습니다!]

선 채로 몸이 굳어 있었다. 하지만나는 굳은 채 칼을 휘둘렀다. 칼이 나를 휘두르는 건지, 내가 칼을 휘두르는 건지 구분되지 않았다.

이 순간을 낚아채야 했다.

- 우우우응!

낡은 철검이 세차게 울었다.

- 슈아앙!

푸른 빛줄기가 시리게 허공을 베어나갔다.

- 파각!

앞으로 뻗어 나간 빛줄기가 바위벽에 아주 얇은 상흔을 남겼다.

상흔은 철검의 날보다 얇았다.

제대로 보지 않으면 확인할 수 없을 정도의 굵기.

"!"

나는 그 자리에 굳은 채 깊게 파인 벽의 흔적을 바라봤다.

벽과 나 사이에는 다섯 걸음이 넘는 거리가 있었다.

- 우우우응.!

철검은 부르르 떨고 있었다.

뻗어 나온 푸른빛이 허공을 격해벽에 상흔을 새겨 넣은 것이다.

"아아."

한참 동안 멍하니 의식 속에 가라앉아 있던 내가, 방금 뭘 해낸 건지 천천히 되짚어 보려 하는 순간.

- 달그락!

- 털썩!

몸이 저 스스로 무너지며, 가벼운타격감과 함께 동굴 천장이 보였다.

억지로 서 있을 체력조차도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121화 패치워크 (1)

***************************************************

[체력을 회복 중입니다.]

[17.71%.]

체력이 서서히 회복됐다. 조금씩 정신이 돌아왔다. 일단 현재 상황부터 파악하기로 했다.

'상태창.'

[Lv. 18(152)]

[체력: 51](new!)

[힘: 73]

[민첩: 71]

[지혜: 50]

수련에 몰두한 나머지, 무려 두 달 가까이 열지 않았던 상태창이었다.

이번 생을 시작했을 때와 비교해민첩과 힘이 약간 올랐다.

체력 스탯이 붉게 번쩍였다.

'??? 10이나 깎인 건가.' 깨달음을 눈앞에 뒀다고, 무리한 수련을 한 결과였다.

하지만.

정수 흡수 2단계 스킬로, 이제 스탯을 75까지 흡수할 수 있다.

50초반으로 감소한 스탯 정도는 어렵지 않게 메꿀 수 있었다.

'으음.'

아래로 빼곡히 펼쳐진 스킬 창을 확인했다.

화려했다.

수십 줄이 넘었다.

무수한 스킬과 특전 가운데, 눈에확 들어오는 부분이 있었다.

[검기寒! J홍 Lv.1] (Rare)

- 검술 레벨이 10 이상입니다.

- 깨달음 Lv. 1을 얻었습니다.

- 스킬 잠금이 해제됩니다!

검기 스킬에는, 추가로 제법 상세한 설명이 붙어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대부분의 무사들에게 검기란 꿈의 경지입니다. 재능을 가진 무인이 평생을 수련해도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높은 수준의 검술 레벨과, 기를원하는 방식으로 통제하고 분출할 수 있는 스킬이 필요합니다. 검기를 사용하면 검의 파괴력.]

나는 차분히 스킬 설명을 읽어 내려갔다.

[검술에 관한 기초적인 깨달음도 필요합니다만, 그 정도의 깨달음은 검기를 꿈꿀 정도의 무사라면 이미가지고 있습니다.]

'뭐?,

고개를 갸웃거렸다.

결국 어려운 건 검술 레벨 달성과 검기 스킬의 습득이라는 이야기다.

지금 그 깨달음을 얻지 못해서.

체력이 무려 10이나 깎여 가며 두 달 동안 고생했다는 건가?

알고는 있었다. 해골병사는 어떤 재능도 소질도 의지도 없는 인간과 비슷한 기준이 적용된다.

하지만 왜.

어째서 그러한가.

첫 번째 삶에서는 깊게 고민하지 못했다.

억지로 납득했다.

의문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부서지지 않기 위해 눈앞의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는 데 온 힘을 집중했다.

다른 걸 생각할 틈이 없었다.

저 위의 천장은 너무 멀기만 했다.

물론 내가 납득하든 납득하지 않든,

세계는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무언가가 나를 톡톡 가로막고 있는 게 느껴지고 있었다.

벽이 만져진다. 천장이 만져진다.

물론 천장은 하나가 아니다.

까마득하게 많은 칸막이가 있었다.

촘촘한 칸막이 사이사이의 삶들에 대해 생각했다.

F급 모험가.

산적.

인신매매에 참여하는 D급 용병.

범죄 조직인 경비대.

거대한 거미.

고블린 부락을 사육하는 놈들.

근위기사들.

나는 천장 사이사이에 있는 놈들의 힘을 빼앗으며 차근차근 올라가고 있다. 죽음을 반복하다 보면, 구조를 만들어 낸 무언가와 직접 대면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 달그락.

머리를 흔들었다. 생각을 털어 내고 칼을 들었다. 얻은 힘을 시험해볼 때였다.

'검기.'

- 우우우우응!

낡은 철검이 부르르 떨렸다. 연푸른 기운이 피어올랐다.

- 슈아아앗!

칼을 휘둘렀다.

묵은 공기가 요동쳤다. 칼날에 맺힌 기운이, 날카로운 절삭력과 관통력이 무엇보다 생생했다.

'이 정도라면.'

칼을 들어 벽에 꽂았다.

- 파삭!

칼은 동굴 암벽을 두부처럼 뚫고 들어갔다. 별다른 힘을 쓸 필요도 없었다.

띠링!

허공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검기는 스탯에 영향을 받습니다.

파괴력은 힘에 비례합니다. 정확도는 민첩, 안정성과 지속력은 지혜에 비례합니다.]

- 스릉!

웅웅거리며 우는 칼을 동굴 벽에서 다시 뽑았다.

의지를 보내자 칼끝에서 손가락 한마디 정도로 푸른 기운이 얇게 엉기고 있었다.

실처럼 흐르는 얇은 기운이 엉기고 엉겨 푸른 면을 형성한다.

후작이 만들던 검기를 떠올렸다.

뚜렷한 형태가 위로 몇 미터씩 솟구치던 것과 비교하면 미약하다.

하지만 중요한 한 걸음.

- 우우우웅.!

검이 울었다.

첫 번째 생에서는, 아예 꿈도 꾸지 않았던 경지가 내 손끝에서 펼쳐지는 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산성.'

[산성酸性 Lv. 5를 발동합니다!]

크라켄에게 흡수한 속성. 산성Lv. 5를 검기에 섞어 발동했다.

- 파지이이이이익!

푸른 검기에 투명한 기운이 섞이며 연기가 피어올랐다.

절삭력을 가진 검기에 물질을 녹여버리는 산성이 덧씌워진다.

- 치이이이이익!

한눈에 봐도 위험한 기운이 검에 활활 솟아오른다.

이대로 잡고 있으면 위험하다.

그대로 동굴 벽을 향해 휘둘렀다.

- 파사사삭! 치이이익!

단단한 암벽에 깊고 거대한 자국이 새겨졌다. 자국은 칼날보다 두껍고, 검신보다 깊었다.

'흡착!'

[흡착吸着 Lv. 5를 발동합니다!]

허공에 매달린 종유석을 향해 칼을 휘두르자, 주변의 석순과 종유석들이 우두두둑 꺾이며 칼 주위로 달라붙었다. 단순히 흡착 속성을 사용했을 때보다 훨씬 범위가 넓고 강렬했다.

- 드드드득! 드드드득!

검기의 범위에 휘말린 종유석들은 마구 으스러지며 칼 주위에 달라붙거나, 가루가 되어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

- 팟!

나는 뒤로 한 걸음 멀리 물러났다.

시험 삼아 한번 섞어 보자고만 생각했는데, 결과가 엄청났다. 주위가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었다.

'이 정도일 줄이야.'

그 압도적인 위력에 감탄하고 있을 때였다.

- 파직! 파지직!

[주의! 무기 내구도가 30%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이런.' - 파지지직!

철검에 금이 가고 있었다.

'해제!'

검기와 산성, 흡착 속성을 즉시 사그라트렸다.

- 치이이이익 !

- 파지직!

기운을 거둬들였지만, 철검은 몇 초 동안 소리를 내며 금이 갔다.

[주의! 무기 내구도가 25%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주의! 무기 내구도가 22%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내구도가 22%가 되어서야 경고 메시지가 멈췄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철검을 조심스레 내렸다.

'일단 무기부터 바꿔야겠군.'

곧바로 떠오르는 곳이 있었다.

그라스미어.

챈들러 남작에게 직접 받은, A급무기제작패를 주면서 레나를 그곳으로 보냈다.

떼어 놓고 떠난 지 두 달째.

편지에 써 놓은 대로.

그곳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까?

사라졌어도 원망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그편이 책임감은 덜어진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녀는 내 부탁을 거절한 적도, 날 배신한 적도 한 번도 없었다.

호감도가 낮은 상태에서도 끝까지 나를 책임지려고 애썼다.

불가사의할 정도로.

별일 없다면 그 자리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누군가 날 기다린다는 건 묘한 기분이다.

'쫓아오는 건 말고.

- 달그락.

후작을 생각했다.

지난 생에는 2주 차에 나타난 놈이두 달이 지나도록 오지 않는다.

'나가자.'

하지만 곧바로 그라스미어로 가기전, 그래도 한 번쯤은 다른 곳에 들르고 싶었다.

동굴 미로를 간단히 뚫고 들어오는 후작이 아니더라도, 혹시 다른 기사단이나 마법사들이 주위를 수색하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블람의 경비대를 몰살시킨 데다,

바알의 신전을 방치해 버렸다. 미래가 변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산장에 가 봐야겠군.'

후작에게서 몸을 숨겼던 사냥꾼들의 산장.

그곳을 들러, 추격자가 있는지 밖에서 한번 살펴볼 생각이다.

게다가 산장에는 케빈 애슈턴의 책이 있다. 들러서 손해 볼 건 없다.

- 쏴아아아아.

입구 수풀을 헤치고 나왔다.

비가 내렸다.

'늦가을이군.'

잎 끝까지 물든 단풍들이 빗방울에 하나둘씩 더 떨어졌다.

- 저벅.

사냥꾼들의 산장으로 향하는 좁고 험한 길로 접어들었다.

'??? 탐지.'

습관적으로 스킬을 켰다. 비 내리는 소리만 있다. 사냥꾼도 짐승도 깊이 숨은 듯하다.

〈뚜둑! 〉

말을 타고 길을 내려오며, 턱뼈를잡아 뽑던 놈의 손길이 떠올랐다.

'그놈, 정말 안 쫓아오는 건가?'

이사벨은 죽었다.

회청색 머리칼의 그 집념 가는 이제 누굴 책망할까? 누굴 쫓아갈까?

대신 쫓길 상대를 작게 마음속으로 애도하며, 한 시간 정도를 올라갔을 때였다.

'또 보이는군.'

까맣게 녹슨 덫이 눈에 들어왔다.

눈에 익은 녀석이다. 풍화되어 죽은 새끼 늑대 뼈를 여전히 물고 있다.

두 번째로, 습관처럼 덫을 잡고 열었다. 작게 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뼈가 밖으로 빠졌다.

덫에 물린 부분의 뼈는 심한 자국이 나 있었다. 눈처럼 하얀 털도, 새파랗게 빛나던 예쁜 눈도 없다.

남은 건 그냥 뼈다. 늑대 해골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뼈의 군주를 사용하겠냐는 메시지가 뜬다.

'물론이지.'

- 달그락!

두 번째로 녀석의 뼈가 일어났다.

저번에는 후작에게 부서졌던 녀석이었다. 이번에는. 아마, 지켜 줄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 달각. 달각_녀석을 땅에 내려놓았지만, 아직네발로 제대로 서지 못한다.

비를 오래 맞아 뼈에 습기가 너무차고, 풍화가 심하게 이루어진 탓같았다. 가엾었다. 트롤의 위험을 온몸으로 경고해 주었던 녀석이다.

- 달그락.

제대로 서지 못하는 녀석을 그대로 안아 들고 걸어갔다.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새끼 늑대해골의 호감도가 증가한다는 메시지가 연달아 떠올랐다.

'빠르게 오르네.'

놀랄 일은 아니었다.

덫에 묶인 채 외로움과 추위에 오래도록 버려져 있다면, 어떤 마음이 될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십 분 정도 걷자 높이 축대를 쌓은 산장이 보였다.

문 앞에 서서,

- 스롱.

칼을 빼 든 채 검기를 일으켰다.

자물쇠는 소리도 없이 간단히 동강났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전과 다르게 피 냄새나 방부액 냄새는 나지 않았다.

- 화르록!

등불을 켰다. 방 안이 흐릿하게 밝아졌다.

완성된〈트롤 가족〉이 보였다.

'작업이 끝났군.'

2층으로 올라갔다. 새끼 늑대 해골을 침대에 내려놓았다.

- 달각! 달각!

녀석은 침대 위에서 조그맣게 움직이는 연습을 했다.

나는 테라스로 갔다. 의자에 앉아주위를 둘러봤다.

- 투둑! 투두두둑.!

'집중.'

'탐지.'

한참 동안 두 스킬을 사용했다.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최대한범위를 넓혀 주변을 살폈다.

비바람이 불어온다. 젖은 낙엽이 흩날린다.

- 위이이이잉.!

한참이 지났다. 별달리 탐지되는 것이 없었다. 작은 짐승들도 소굴로 자취를 감춘 듯했다.

침대 위에 있던 새끼 늑대 해골이달각거리며 내 근처로 다가온다.

예전에는 침입자를 감지해서 바깥으로 나갔던 녀석이다.

녀석을 무릎에 올리고 팔로 비바람을 막아 줬다.

후작은 오지 않는다.

발소리는 없었다.

'으음.'

할 일이 하나 남았다.

안으로 들어와 침대 곁에 놓인 책을 펼쳤다. 그 위치 그대로다.

등불을 켰다.

제목과 글쓴이가 보인다.

〈당신이 트롤을 죽이고 싶다면〉

〈캐빈 애슈턴〉

집중하며 마지막 페이지에 도착했을 때였다.

인쇄되지 않고, 손으로 적어 놓은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깨진 조각들과 접촉할 것〉

'제대로 읽히는군.'

처음에는 기괴하게 보이던 글씨가, 한 번에 제대로 읽히고 있었다.

그 아래, 처음 보는 숫자가 스르록 떠오르고 있었다.

〈1/7〉

'이런 건. 없었는데?'

〈깨진 조각들과 접촉할 것〉

'제대로 읽히는군.'

처음에는 기괴하게 보이던 글씨가, 한 번에 제대로 읽히고 있었다.

.

〈1/7〉

'이런 건. 없었는데?'

〈깨진 조각들과 접촉할 것〉

'제대로 읽히는군.'

처음에는 기괴하게 보이던 글씨가, 한 번에 제대로 읽히고 있었다.

그 아래, 처음 보는 숫자가 스르록 떠오르고 있었다.

122화 패치워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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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은 세 가지였다.

'첫 번째.'

〈깨진 조각들과 접촉할 것〉

캐빈 애슈턴의 책 마지막에 문장.

'무슨 뜻일까.,

- 톡톡.

생각에 빠져 팔을 두드렸다.

수려하게 쓰인.

그러나 기괴한 느낌의 문장.

저번 생에는 그 문장을 보고 동화율이 떨어졌다.

세계가 흔들렸다.

분명 나와 관련이 있는 문장이다.

하지만 무엇의 조각인지, 어디가 어떻게 깨졌다는 건지.

'책에 단서도 전혀 없단 말이지.'

그런 정보는 주어지지 않았다.

두 번째 의문.

〈1/7〉

〈깨진 조각들과 접촉할 것〉이라는 문장 아래에 새로 나타난 숫자.

어쩌다 나타난 건지도 모른다.

분명히 전에는 없었다.

저번에 온 시점과 지금은 한 달 반 정도 차이가 난다.

그 사이에 누가 이 문구를 적어 놨다는 건가?

미심쩍었다. 역시 뭘 뜻하는 건지 짐작할 수 있는 게 전혀 없다.

세 번째 의문은 동화율.

처음 이 책을 읽을 때는 동화율 이크게 떨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숫자까지 새롭게 나타났음에도 동화율은 변경되지 않는다.

'왜 그런 걸까.'

'이미 반영됐다는 걸까?'

해결되는 의문은 없다.

책을 덮었다.

- 툭!

작은 바람이 피어올랐다.

띠링, 소리와 함께 지혜가 51로 상승했다는 메시지가 떠오른다.

'지혜라.

예전 같았으면 아무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을 스탯.

체력, 힘, 민첩에 비해서 전투에 전혀 도움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검기와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스탯으로 활용된다.

검기 출력의 안정성과 지속력에 비례 한다.

올라가는 게 반가울 수밖에 없다.

여태껏 캐빈 애슈턴의 책을 찾아 읽어 온 보람이 있었다.

그런 탓일까.

'지혜 스탯이 좀 높은 편인가?'

기스-제-라이에게 살해당한 무수한 황실 기사들.

단장인 이사벨까지.

그들의 시체에서 지혜는 흡수되지 않았으니까.

높은 지혜 스탯을 제대로 활용하기 시작한 느낌이었다.

검기 사용으로 끝이 아니다.

지혜가 높으면 마법의 위력이 강해지는 것은 상식.

두 명의 마법사에게 스킬을 잔뜩 흡수했다.

언젠가 쓸 날이 올 거다.

아케인 하트가 없어서 사용할 수없다고 하지만.

검기처럼, 언젠가 그것들도 사용방법을 찾을 가능성도 있다.

'혹시.,

품에서 웹슬링거의 홍옥을 꺼냈다.

붉은 보석을 손에 잡은 채로 가만히 어루만졌다.

허공에 흥옥의 상태창이 떴다.

[웹슬링거의 홍옥]

웹슬링거는 오랫동안 인간을 주 먹이로. 통곡과 절규가 축적되어, 붉은 결정結晶이 되었습니다.

'이걸 아케인 하트 대용으로 쓸 수는 없을까?'

툭.

음울하게 빛나는 녀석을 갈비뼈 안쪽에 가져다 댔다. 심장도 보석도 붉다. 혹시 어떤 역할을 해 주지 않을까 싶었지만 무리였다.

아무 반응도 없었다. 다시 홍옥을 집어넣었을 때였다.

- 달각! 달각!

새끼 늑대 해골이 나에게 놀아 달라는 듯이 달려들었다.

- 스스숙. 스스숙.

녀석은 작은 앞발로 나를 긁었다.

뒷다리로 깡총깡총 뛰며 내 팔을 살짝 깨물려 했다. 하지만 점프력 은약했다. 뼈 상태가 좋지 않은 탓인지도 모른다.

쇠를 물게 하고 싶지 않았다.

갑옷을 벗고 팔을 가져다 댔다.

녀석은 입을 크게 벌린 채, 내 팔을 톡톡 깨물어 왔다.

꼬리뼈를 흔드는 모습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책을 협탁에 내려놓고 두개골과 척추를 쓰다듬었다.

녀석도 나도 세계 어딘가에 가파르게 매달려 있다.

바위투성이 언덕에 힘들게 손을 박아 넣고 매달린다. 아래는 아찔하고위는 거칠다.

내가 이 녀석과 다른 건. 조금 더튼튼한 팔을 가졌다는 사실 정도.

녀석은 쓰다듬는 내 손에 달라붙듯엉겨들었다.

덫에 묶인 채 추운 겨울까지 혼자 보내게 두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다.

'이걸 가져갈까.

산장 안에서 부드러운 천으로 된 주머니를 하나 챙겼다.

"이제 가자."

새끼 늑대 해골을 데리고 산장 밖으로 나가, 그라스미어로 향했다.

산장은 산의 정상에 있다.

내려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어느 정도 몸이 적응된 건지, 늑대 해골은 달그락거리며 젖은 땅을 달리기 시작했다.

떨어져 내린 낙엽들이 축축하다.

- 폿! 폿!

녀석이 힘차게 잎들을 밟을 때마다 단풍에서 작은 안개가 피어난다.

목적지까지는 금방이었다.

'저긴가.'

멀리 떨어진 곳에 커다란 성이 내려다보였다.

'유블람보다 훨씬 더 크고. 이중구조로 되어 있군.'

첫 번째와 두 번째 성벽 사이에는 수십 미터의 거리.

해자도 훨씬 깊고 넓다.

레안드로 후작이라도 맨손으로 간단히 부술 수는 없을 듯하다.

'아니, 성은 원래 주먹으로 때려 부수는 게 아니니까.'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떨쳐 냈다.

이상한 기준은 머릿속에서 얼른 떨쳐 버리고 싶었다.

달리고 있는 늑대를 안아 들었다.

인간들의 눈에 보인다면 곤란하다.

산장에서 챙긴 커다란 주머니를 벌렸다.

"움직이지 말고 있어."

[호감도가 20 이상입니다!]

[의사 전달의 성공률이 높습니다!]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곤, 자기가 알아서 안으로 쏙 들어갔다.

공간은 넉넉하다.

잠시 꼼지락거리는 게 느껴졌지만,

곧 움직이지 않고 얌전히 있었다.

'탐지.'

[스킬을 활성화합니다!]

인간의 도시에 가까워진다.

세계를 지배하는 종족, 인간들은 대부분 나의 적이다.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꼼꼼하게 탐지하며 산 아래로 내달리고 있을 때. 앞쪽에서 인간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산적인가?'

열댓 명 정도였다.

갑옷 입은 기사에게, 지레 꽤 많은 숫자다.

오히려 벗겨 먹을 갑옷이 있다고 좋아할 거다.

안쪽의 내용물은 고문하거나 구워먹거나 할 테지.

'조금 귀찮아지려나.'

자세히 동향을 파악한다.

놈들은 산 아래 턱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발걸음을 늦춘 채 인간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들리는 목소리는 전부 남자였다.

탐지 스킬 덕분에 또렷이 들린다.

"어휴, 저번에 왔을 때도 저런 놈들 때문에 시간을 끌었는데."

"이번에는 또 다른 놈들입니까?"

"그래요. 또 쫓겨나네. 전쟁이 진짜 벌어지긴 할 건가 봅니다."

"그럼 우리들은 어떡하죠."

"자넨 직업이 뭔가?"

"전 카즈아린 전문 요리사예요."

"카즈아린?"

"내장에 독이 있는 물고기예요. 그 주위 살이 제일 맛있는데, 내장을안 터트리게 조심하면서 주변 살을잘 발라내야 해요.

대화가 잠시 이어졌다.

앞쪽에 모여 있는 인간들이 산적이 아닌 건 확실한 듯했다.

다양한 직업의 인간 여행자들이다.

원래 알던 사이는 아닌 듯했다.

'마주쳐도 상관없겠군.' - 저벅.

나는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녀석들에게 접근했다. 대화 소리가 잠시 잦아들었다.

"누구. 시오?"

열댓 명의 인간이 내 쪽을 동시에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쪽도 그라스미어로 오신 거요?"

초록색 로브를 입은 남자가 붙임성 좋게 물었다.

특이하게도 검은색 단발머리에, 깔끔한 외모지만 왠지 눈빛이 깊은 남자였다.

서른 후반에서 마흔 중반 정도.

하지만 남자의 눈빛은 마치 아이 같은 반짝이는 총기를 띠고 있다.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생생히 살아있는 눈빛이다.

"뭐, 일단은."

"그러셨군. 하지만.

초록색 로브의 남자가 손가락으로 성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은 못 들어가실 거요.

저기 한번 보시겠소?"

남자들이 모여 있는 장소는 시야가성 쪽으로 뻥 뚫려 있는 위치였다.

여기 모여 있는 이유가 있었다.

'잘 보이는군.'

그라스미어 성에서 따로 길게 빠져나온 성문 쪽이 보인다. 지금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장소.

"저들은.?"

성문 앞.

장검과 쇠뇌로 무장한 병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숫자는 마흔 정도.

텅 빈 수레 다섯이 그들의 옆에 놓여 있었다.

'뭔가 실어 가려는 건가?'

"무기를 사러 온 무리들이요. 요즘 들어 더욱 많아졌지."

초록 로브의 남자가 내 생각을 읽은 듯 말을 이어 갔다.

"저자가 보이시오? 근처 도시의 영주나, 뭐 장수 정도일 거요."

남자가 가리키는 곳에는 말을 탄기사가 있었다.

"그런가.

잘 세공된 갑옷을 입은 기사는, 말위에서 그라스미어의 경비병에게 역정을 내는 것 같았다.

'무슨 얘기를 하는 걸까.' 나는 여행자 무리에게서 적당히 떨어진 곳에 앉았다.

'집중.'

'탐지.'

집중 스킬은 탐지 스킬과 사용하면 확실히 효과가 좋다. 범위와 정확도가 증폭되는 느낌이다.

굳이 곁의 남자에게 말을 전해들을 필요는 없다.

직접 들으면 된다.

성문 앞.

수백 미터는 떨어진 곳의 대화였지만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독점 계약은 맺지 않습니다."

"독점이 아니라니까!"

"지금 요구하시는 분량의 무기를 공급하려면, 몇 개월 동안 그걸 위해서만 대장간이 돌아가야 합니다."

"적당히 만들면 되지 않나? 이미 만들어 놓은 것도 많을 거고!"

"적당히 장사하는 가게는 저희 도시에 없습니다. 물건들은 대부분 만드는 즉시 팔려 나갑니다. 다 예약되어 있거든요."

비슷한 대화의 반복.

기사는 값을 잘 쳐주겠다는데 왜 팔지 않느냐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팔 굵기가 소나무만 한 그라스미어의 경비병은 요지부동이었다.

"정말 말이 안 통하는군! 책임자를 불러와! 내가 누군지 아는 거야!"

"제가 책임자입니다."

답 없는 대화가 지겨워질 때쯤.

곁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요하지 않으시는구려. 저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궁금하지 않으시오?"

"글쎄."

어깨를 으쓱했다. 다 들을 수 있는데 딱히 궁금할 이유는 없었다.

"소란스런 상황에서 궁금하지 않다면 보통 두 가지지."

남자는 저 혼자 말을 이어 갔다.

"무슨 상황이 벌어지든 제 몸 하나는 감당할 자신이 있다거나, 이미다 알고 있는 거요."

"어느 쪽이든 관심이 가는 분이시군. 필시 고명한 기사실 터."

'어지간히 붙임성이 좋군.'

옆에서 줄곧 무시했는데 계속 말을 걸어오는 근성.

'장사꾼인가?'

성문의 소란은 아직 좀 더 이어질 것 같았다. 나는 남자를 슬쩍 훌어보고 물었다.

"그라스미어에서. 자기들 무기를안 팔겠다는 건가?"

"그렇소."

남자는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내 질문이 반가운 듯했다.

하지만 그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밝아진 얼굴 표정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이제 슬슬. 전쟁이라오."

"영주들이 징집 명령을 받았지."

"그래서?"

"자기 군대를 그라스미어의 강철로 무장시키고 싶어 하는 거요."

남자는 다시 성문 앞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서. 억지까지 써 가면서 물건을 받아 내려고 하는 거지."

그를 슬쩍 바라봤다. 전쟁에 별다른 가치 판단을 내리지 않는 것 같은 묵묵한 표정이다.

"그라스미어의 강철은. 고분 속의 악마, 아니 영혼들이 전승해 주었다고 평가될 정도의 제조 술이니까!"

초록 로브를 입은 남자가 침을 꿀꺽 삼켰다.

"악마라고?"

못 들어본 이야기였다.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은데."

"하핫, 이런 얘기를 좋아하시는구려! 물론 해 드리지."

- 달각!

주머니 안에 있던 늑대 해골이 갑자기 꼼지락거리며 살짝 움직였다.

'너도 듣겠다는 거냐?'

슬쩍 주머니를 양팔로 가렸다. 남자는 별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한 듯 말을 이어 갔다.

"크흠! 한때 남부를 지배하던 주술사가 있었소. 제국과 연합이 갈라질 때의. 어지러운 시절이었지."

"그는 자기가 묻힐 무덤을 만들기 위해 곳곳에서 건축가와 대장장이들을 불러 모았소."

의문이 들었다.

"??? 대장장이는 왜?"

"무덤을 지켜 줄 강철 골 렘들을 만들기 위해서요."

'그럼, 던전이 됐겠군.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지하에 거대한 무덤을 만들고, 어디인지 모르게 정령들을 풀어 땅을 다졌다고 전해지오."

"정확한 위치는?"

"모르오. 아무도 모르지."

맥이 탁 풀렸다.

"그냥 전설 아닌가."

"으흠. 아주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니요. 그때 모인 대장장이의 후손들이, 그라스미어를 무기의 도시로 만들었다고 하니까."

"후손이라니. 본인들은 어쩌고?"

"주술사가 저주를 걸었다고 하오.

골 렘을 만든 대장장이들의 혼을 빼앗아서, 고분 안의 강철 골렘들에 넣어 버린 거지. 영원히 무덤을 수선하라고.

"??? 으음."

"믿거나 말거나 아니겠소. 골렘에 갇힌 영혼들이 후손의 꿈에 나와 기술을 전승해 줬다나 뭐라나. 나야 주술사도 마법사도 아니라 이러쿵저러쿵 못 하겠소만."

언젠가 서큐버스님에게, 골렘은 그 몸을 제작한 자와 싱크로가 가장 잘 맞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오래전 대장장이들의 영혼이 봉인된 골렘 던전.

정말 사실일지도 모른다.

이 근처 어딘가에 있는 걸까?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초록 로브의 남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어이쿠, 이야기가 너무 샜군."

"하나라도 더 받겠다고 저렇게 시위를 벌이는 놈들이 있지만, 멍청한 짓이지. 왜냐하면.

- 쿠르르르릉.!

그라스미어의 외성 성벽 위로 거대한 기계가 나타났다.

- 쿠르르. 쿠르르르'

탐지 스킬에 걸리는 게 아니었다.

그 웅장한 굉음은 한참 떨어진 여기까지 분명히 들려왔다.

곁에 있던 초록 로브의 남자가 씩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부리나케 도망칠 거니까."

123화 패치워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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