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11

123화 패치워크 (3)

***************************************************

"저, 저게 대체 뭡니까?"

모여 있던 인간들이 옹성거렸다.

"석궁. 아닌가?"

"석궁이 무슨 저렇게 커! 발리스타보다 열 배는 큰 거 같은데!"

"저걸 누가 당겨?"

"여기까지 날아오는 건 아니겠지?"

수백 미터가 떨어져 있는데도 뒤로몇 걸음을 물러나는 인간도 있었다.

곁에서 초록 로브를 입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게 그라스미어의〈메신저〉라오.

말을 해도 못 알아듣는 놈들을 위한폭력적인 전령이지. 자세히 말하자면 '기계'라는 건데.

초록 로브의 남자는 내게 사근사근한 말투로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때 였다.

[기계공학 Lv.3!]

[기계 분석을 자동 발동합니다!]

성벽 위에 나타난 거대한 기계.

〈메신저〉의 구조와 작동 원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 쿠르르르.!

레버가, 사슬톱니가 돌아가는 게 보였다.

- 콰지지직!

나무 부서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발사된 거대한 철기 둥이 성벽 아래에 놓여 있던 수레 세 대를 동시에 부쉈다.

조작자는 기계 안에 들어가 있는 지보이지 않았다. 병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수레 바로 근처에 있는 녀석들은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 바닥을 몇 바퀴씩 구르기도 했다.

'으음.'

준비 순간부터 발사 순간까지.

응력이 가해지는 지점이 보였다.

가속과 탄성이 또렷이 보였다.

"기능적이지 못한 운용이군.

실로 그러했다.

설계는 잘 되어 있는데, 운용 측면에서 지적해야 할 게 한두 군데가 아니다.

"저런 식으로 쓰면 수명이 너무 짧아질 텐데."

"뭐, 뭐라고?"

초록 로브의 남자가 펄쩍 뛰었다.

"이보시오! 저 구조에 대해서 뭔가 알고 계시오?"

"별건 없지 않나?"

나는 대략적으로 기초적인 작동 원리를 설명했다.

성벽 위의 기계는 크기만 컸지 구조가 복잡하지는 않았다.

수녀에게 흡수한 기계공학 Lv.3 정도로도 전부 분석이 가능한 수준.

아주 기초적인 것만 설명했는 데도 남자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깊은 감탄을 내뱉었다.

"크으. 이거 정말 대단하신 분을 만났구려! 기계를 아는 기사라니 !"

기계공학 Lv.3.

직관적으로도, 그다지 높은 레벨은 아니다.

하지만 남자의 얼굴은 정말 놀라운 대상을 보는 표정이었다.

"대단한 건가?"

내 질문에 남자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답했다.

"당연히 대단하지! 이거 참. 날 놀리시는 거 아니오?"

"그런 건 아닌데."

"크흠. 저런 걸 한눈에 보고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시오? 특히 제국에서?"

"저 무기를 쓰고 있는 녀석들도 방금 말씀하신 정도로는 모를 거요.

애초에 저 녀석은 자유 연합에서 제련 기술을 전수해 줘서 고맙다고 그라스미어에 선물한 거니까."

"예전에는 교류가 자유로웠나?"

"으음? 예전에는.

초록 로브의 남자는 제국과 연합의 역사에 대해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적당히 홀려들으며 앞을 바라봤다.

부서진 수레를 놓아두고 뒤로 물러가는 병사들이 보였다.

말 위에 탄 기사는 뒤로 물러가면서도 잡스러운 소리를 계속해 댔다.

전쟁터에서 함께할 텐데, 분명히 후회할 거라고 시끄럽게 떠들었다.

물론 그라스미어 녀석들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애초에 '무기'를 가진 쪽이 어딘지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자꾸 짖어 대는군."

"어이쿠, 나 말씀이오? 듣기 싫으시다면 언제든 물러나겠소만.

"아니. 저놈."

가도를 통해 말을 몰아가는 기사를 턱 끝으로 가리켰다.

옆에서 말을 걸던 남자의 눈이 한층 더 휘둥그래졌다.

"저 거리에서. 들리시는. 거요?"

남자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졌다.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는 눈빛을 한층 더 깊게 빛냈다. 그리곤 바로초록색 로브에 깊숙이 손을 넣었다.

- 번쩍!

비가 개인 뒤 나타난 햇빛을 받아금빛 명함이 번쩍였다.

"받아 주시면 영광이겠소. 나는진네이 유베라고 하오. 진네이 가문의 가주를 맡고 있소."

이번에는 내가 놀랄 차례였다.

"뭐라고? 당신이 그자인가?"

"허헛."

남자가 멋쩍게 웃었다.

단단한 턱. 굳은 입술. 깊게 잔주름이 진 눈가. 숫자에 밝을 듯한, 총기로 빛나는 눈이 보였다.

진네이 가문.

에라스트 토너먼트 대회에서, 날 대리로 내세웠던 가문이다.

〈현 진네이 가문의 가주는 기사도 따위엔 전혀 관심도 없고, 피혁 장사에만 집중한다고 합니다. 〉슬라임이 했던 말을 회상했다.

'돈만 보는 자, 라고 했었나.'

이번에는 내가 그 의뢰를 받지 않았다. 남자가 누구에게 토너먼트를 맡겼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하지만 물어볼 수는 없었다.

이 기억은 전생의 기억.

얘기해 봐야 수상한 눈길만 받을게 분명하다.

지금까지 미행하면서 자길 조사했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날 알아주시는 거요?"

"이곳저곳에서 이야기 나오던데.

가주가 꽤나 장사 수완이 좋다고."

왠지 반가워 말을 이어 갔다.

"그런데 수행도 없이 다니시는군."

남자가 쑥스러운 얼굴로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별 대단한 위치에 있는 건 아니지만. 섞여 들어가야 보이는 세상이라는 게 있소이다."

;정체를 밝혀도 되는 거요?"

"그쪽 분에게는 내가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신분을 밝히고 싶소."

"왜?"

"꼭 잡고 싶기 때문이지. 아! 오해는 말아 주시오. 그 명함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건 절대 아니오."

남자는 묻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다만 내 쪽에서는 좀 더 진실한 시작을 위해서 다 밝히는.!"

그때 였다.

"이제 갑시다! 피혁 장사 아저씨!

안 가세요?"

저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함께 돌아봤다.

카즈아린 내장을 발라낼 요리 칼을 사려고 그라스미어로 왔다는 인간 청년이 말하고 있었다.

"에 가네! 곧 가! 먼저 가게!"

진네이 유베가 대답했다. 그가 날 바라보며 말했다.

"손 떨어지겠네. 명함. 받아 주지 않겠나?"

나는 그의 손에서 금빛 명함을 받아 들었다. 이름이 새겨진 금빛 명함 밑에 새까만 카드가 한 장 더 들어 있었다.

카드를 뒤집었다.

아래에는 한 개의 오각별과 함께 하얀 글씨가 쓰여 있었다.

[흔들리는 세상, 당신을 위한 철제침대를 마련하세요!]

카드를 손으로 더듬었다. 오톨도톨한 재질이 무척 특이했다.

"이건. 뭐요?"

"뭐, 내가 속한 길드의 소개장이오.

고객의 바람을 어떻게든 해결해 주려는 훌륭한 상인들의 모임이지."

"비싸고 좋은 것부터 해서, 돈으로 못 사는 물건을 구하려 하시거나, 운송 서비스를 원하실 때 큰 도움이될 거요. 모아 두셔서 나쁠 건 절대 없을 카드지."

"모아 둔다고?"

"별 하나로는 효력이 없어서. 거기 있는 별 다섯 개를 모으시면, 그때부터 우리 고객이 되실 수 있소."

머릿속에 문득 스쳐 가는 게 있었다.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물었다.

"인간도 파나? 살인은?"

진네이 유베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우리보다 잘하는 자들이 많아서. 아, 나만 해도 정보 길드에 맡기는 게 많소. 각자 잘하는 분야가 있는 거지."

'네크론 쪽은 아니로군.'

"일단 받아 두지."

나는 카드를 받아서 주머니 깊숙이 넣었다. 진네이 유베라는 남자는 내게 제법 호의적이었다.

토너먼트 의뢰 상금도 어김없이 제대로 지급했다. 장난을 칠 만한 장사꾼은 아닌 것 같았다.

언젠가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이런 단체가, 카드가 있는 건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다.

"그럼 내려가시겠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네이 유베는 내 곁에 붙었다.

슬쩍슬쩍 내 눈치를 보아 가며, 근처 도시들의 분위기와 시장을 보러왔다느니 하는 말을 늘어놓았다.

그라스미어는 자주 다녀가는 것 같았다.

어느새 경비병이 검문을 하고 있는 장소까지 도착했다.

아까 봤던 인간들 중에는 이미 검문을 받고 성안으로 들어간 자들도 있었다.

성벽은 아직 거대한 석궁이 아래로 내려가지 않은 상태 그대로다.

'거참, 살벌하군 그래.'

"출입 목적은?"

"건축가입니다! 좋은 건축 장비를 구하기 위해서.

"흠. 들어가시오."

팔 굵기가 어마어마한 경비병은 별절차 없이 요리사와, 건축가와, 행상인들을 들여보냈다.

내 차례가 됐을 때였다.

"왜 답답하게 여기서도 쓰고 계셔?

투구 벗어 주시오."

'마스커레이드.' - 철컥.

변장한 얼굴을 드러냈다. 경비병이손에 든 종이를 숙숙 넘겨봤다.

"흐음. 수배 서에 있는 얼굴은 아니군. 출입 목적은?"

나는 스킬 사용으로 거의 다 망가진 철검을 보여 주었다.

"이런 걸 사러 왔소."

경비병은 기가 차다는 둣 혀를 쯧쯧 차며 솥뚜껑만 한 손을 내저었다.

"어휴. 도대체 칼을 뭘 어떻게 쓰면 그렇게 되나? 응? 통과!"

내 뒤에 있던 진네이 유베도 물론무사 통과였다.

- 끼이이익. 쿵.

바깥쪽의 성문이 다시 닫혔다.

'50미터.'

성문을 지나, 좁은 길을 걸어 안쪽성문에 도달하기까지의 거리.

무언가 갑갑한 느낌이 든다.

대충 들여보냈던 바깥 성문과 달리, 안쪽 성문에서는 조금 더 철저한 검문이 행해졌다.

"신분증을 보여 주시오. 가방 안을 보여 주시오. 통과."

여러 명의 경비가 한 명씩 행인을 검사했다.

'신분증은 없는데. 이거 곤란하군.'

진네이 유베라는 녀석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까?

'벌써부터 신세를 지기는 싫은데.'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 레나를 만나야 한다.

신분증이 없느니 어쩌니 옥신각신을 한다면, 10분은 금세 지나 버리고 마스커레이드가 풀린다.

전부 베고 도망가 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 레나와의 약속도 지키지 못하는 것이다.

"통과! 다음은.

한 명씩 줄어드는 줄에 서서 초조해하고 있을 때.

가장 안쪽에 수그리고 앉아 있던 남자가 경비들 사이로 다가왔다.

"아, 감독관님!"

경비병들이 그에게 인사했다.

"잠깐만. 거기 서 있는 기사, 투구한번 써 보게."

'벗는 게 아니라 쓰라고?' 갸웃했지만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품에 안은 투구를 머리에 썼다.

감독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낡은 갑옷. 체형도 맞고. 묘사와 일자도 정확하군. 여기 이분은 통과시켜! 내가 보장한다!"

"아, 앱! 그러죠!"

경비병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갔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몰라 주춤하고 있을 때였다.

감독관이 다가와 낮게 말했다.

"〈먼 숲 엘프〉여관에서 당신을 기다리는 분이 있습니다."

"먼. 숲. 엘프?"

"그곳까지 가는 약도입니다."

감독관은 무언가 결연한 눈빛으로,

삐뜰빼뜰하게 그린 도시 지도를 나에게 건넸다.

"이렇게 해서 사거리에서 쭉 왼쪽으로 가시면. 이해되십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핫. 다행이군요. 저는 감독관 네그리아누였습니다. "

마치 제 이름을 기억해 달라는 듯한 말투였다.

누가 날 기다린다는 건지 캐어묻고 싶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자세히 들을 분위기는 아니었다.

'누구지? 레나인가?'

기다릴 만한 인간이라면 레나밖에 없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를 경비병에게 듣는다는 건 기이하다.

'뭐, 가 보면 알겠지.'

일단 안으로 들어갔다.

"다음!"

"예, 저는 행상인입니다만.

뒤에서 가명을 대는 진네이 유베의목소리가 들려왔다.

- 깡! 깡! 깡!

도시 안으로 들어선 순간.

나는 잠시 멍해졌다.

입구에서부터 망치 두드리는 소리가 무척 요란했다.

이틀, 사흘 떨어진 도시인 유블람이나 에라스트보다 인구도 훨씬 더 많아 보였다.

"이거 얼마요?"

"예약한 물건 받으러 왔습니다!"

"저희 여관으로 오세요?!"

여행자들에게 손을 흔드는 무리도 있었다.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활발하군.,

도시의 풍경에 감탄하고 있었다.

살아 있다.

인간의 문명이 집약된 곳.

이런 걸 도시라고 부르는구나 싶어 아찔하게 풍경에 취해 있을 때였다.

"허허. 혹시 곤란한 상황에 처하면 호의를 좀 사 보려고 했는데 기회를 놓쳐 버렸군."

뒤에서 진네이 유베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내가 의도한 상황은 아니다. 녀석을 다 믿을 순 없으니 내막을 말하지는 않았다.

저번 생에서 나를 토너먼트에 대신 내보냈던 남자가 말을 이었다.

"나는 사거리 쪽, 〈붐비는 선인장〉

에 묵을 생각이오. 혹 필요한 게 생기거나, 내키신다면 언제든 들러서'바토 시마'를 찾아 주시오."

바토 시마는 녀석이 경비병에게 댄 가명이다.

"뭐. 나중에."

어깨를 으족했다. 놈의 가명은 흘려버렸다. 지금은 레나를 만나는 게 급했다.

- 저벅.

한 걸음 발을 디뎠다. 일단 생각을 좀 해 봐야 했다.

혹시 날 기다리고 있다는 게 누군가의 함정은 아닐까?

후작 같은 녀석이 나를 옴짝 달싹 못 하게 감금하기 위한 덫은 아닐까?

하지만 그럴 확률은 극히 낮았다.

녀석은 산에서 나를 잡아서 끌고 가면 그만이다.

다른 누군가 함정을 판다면, 아까 성문과 성문 사이에서 나를 잡았으면 그만이다.

'피해 의식인가.

아무래도 저번 생에 당한 탓에 쓸데없는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 잡힌 것 같았다.

'내 쪽에서 레나를 먼저 찾을까?

아니면〈먼 숲 엘프〉에 가 볼까?'

레나를 찾는다고 해도, 어디서 만날 건지도 정하지 않은 것이다.

여관만 해도 하나둘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무작정 도시의 뒷골목을 향해 들어갔다.

〈먼 숲 엘프〉와 반대되는 쪽.

그때 였다.

- 타다다다닥!

열 서넛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내게 빠른 걸음으로 달려왔다.

허리에 단검 두 자루를 찬 소녀의발걸음은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생각해 보니 녀석은 성문 근처에서계속 날 보고 있었던 듯했다.

생각에 너무 깊이 빠져 있어 홀려 넘겼지만 분명히 그러했다.

"어이! 기사님! 반대편이야!"

짧은 머리 소녀는 내게 소리친 뒤,

편지를 꽂아 넣고는 골목으로 다시 사라졌다.

- 타다다다닥!

여간 날쌘 속도가 아니었다.

평범한 인간들은 편지가 아니라 칼을 찔러 넣었더라도 반응하지 못할 만큼 빨랐다.

'뭐지?'

날쌘 소녀가 건넨 편지에는 딱 한 문장이 쓰여 있었다.

〈먼 숲 엘프 여관으로 오세요! 〉

'질주.'

'탐지.'

'은신.'

- 쌩!

"어, 뭐, 뭐였어 방금?"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뒤로하고, 골목으로 사라진 소녀를 쫓았다.

5레벨의 스킬 세 가지를 한꺼번에 사용했다.

제법 민첩한 인간 아이라고 해도절대 놓칠 만한 수준은 아니다.

- 덥석.

그 사이 3층 난간에 올라가, 몸을그늘에 숨기고 휘파람을 불고 있는 소녀의 뒷덜미를 잡았다.

"치, 침입.!"

여기서 소리를 지르면 귀찮아진다.

무심결에 녀석을 향해 스킬을 사용했다.

'공포.'

[공포 Lv.1 스킬을 사용합니다!]

[대상: 단일]

[체력이 0.17% 소모됩니다.]

[당신과 먹이 사이의 스탯 차이:

절대적.]

"후, 후으, 히.

- 털썩.

민첩했던 소녀는 그 자리에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아, 아, 아.

전신에서 식은땀이 솟아났다.

안색이 완전히 새하얘지며 입술이 파랗게 질렸다.

손끝부터 발끝까지 신경이, 근육이 날뛰듯 덜덜 떨리고 있었다.

발작에 가까운 증상이었다.

'이런. 공포 해제.' 조금만 더 지속했다간 심장마비로 죽을지도 모른다.

"으. 으. 아아."

소녀는 그 뒤로도 말 한 마디 잇지못하고 한참을 떨었다.

'이 정도였나?'

엉겁결에 쓰긴 했지만, 지금까지공포 스킬을 사용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위력을 몰랐다.

'고작 1레벨인데.'

나는 짧은 머리 소녀의 눈앞에 편지를 들이대고 물었다.

"미안하다. 그런데 이 편지, 혹시 이렇게 생긴 여자가 보낸 거냐?"

레나의 외모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소녀는 눈을 꼭 감고 대답하지 않았다.

- 딱딱 딱딱.

대신 세차게 이를 부딪치면서도,

허리에 찬 단검으로 천천히 손을 가져가려는 것 같았다.

물론 진정되지 않은 손끝은 허공에서 마구 떨리기만 했다.

"아,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녀는 행동과 분위기로 답변을 충분히 대신하고 있었다.

- 훌쩍!

나는 솟구쳐 올라갔던 난간에서 다시 골목으로 뛰어내렸다.

감독관이 설명해 준〈먼 숲 엘프〉

쪽으로 망설임 없이 걸어갔다.

- 땅! 땅! 땅!

망치 소리가 요란한 그라스미어의 뒷골목을 걸으며 생각했다.

'레나는, 도대체 여기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124화 패치워크 (4)

***************************************************

한 시간 전까지 비가 쏟아졌을 터.

그러나 그라스미어의 뒷골목은 무척 깔끔했다.

'챈들러 백작인가? 영주가 일을 제대로 하는군.'

유블람이나 에라스트와는 비교되는 풍경이다.

여행자를 노리는 불량배도 없다.

가게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달 군쇠를 두드리는 굵은 팔의 대장장이들 때문인지도 모른다.

- 깡! 깡! 깡!

어느 골목에도, 대장간이 하나는 자리 잡고 있다.

안을 슬쩍 들여다봤다.

남자 셋이 작업에 한창이다.

열 두엇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막대로 화덕을 쑤신다.

삼십 대 남자는 커다란 메로 달 군쇠를 내리친다.

- 깡!

집게로 달군 쇠를 고정시키고 있는건 흰머리의 노인.

노인은 쇠메로 내리치는 순간과 순간 사이에, 작은 손 망치로 쇠끝을 세심하게 다듬는다.

세 남자의 얼굴 윤곽은 비슷하다.

삼대三代.

50년 전에도 대장간은 비슷한 풍경이었으리라.

쇠끝을 다듬는 흰머리 노인이,

화덕 옆에 선 소년의 모습이었겠지.

하지만.

50년 뒤엔 전혀 다른 풍경일 거다.

모두 사라져 있을 터.

전쟁의 불길.

거기서 살아남을 수는 있어도.

마왕이 강림할 때, 버티는 인간의 도시는 무척 적다.

내 기억에 따르면.

그 목록에 그라스미어는 없다.

- 달그락!

고개를 흔들고 걸음을 재촉했다.

- 깡! 깡! 깡!

재가 되어 스러질 풍경들이.

절규에 묻힐 소리들이 양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여기쯤인가.,

지도를 다시 확인하고, 주변 풍경과 대조했다.

〈옛 숲 엘프 여관〉

동그랗게 표시된 곳.

감독관이란 녀석이 알려 준 장소가 맞다.

여관으로 천천히 다가설 때.

"히야압!"

여자의 기합.

'잠깐.'

어디선가 들어 본 목소리다.

'어디서지?'

기억을 되감아 보려 할 때였다, - 까앙!

하지만 기합은 곧 커다란 칼 소리에 묻혀 버렸다.

흠칫 그 자리에 섰다.

스무 걸음 앞.

장소는 정확하다.

〈먼 숲 엘프〉라는 간판이 정문에 커다랗게 걸린 여관.

'맞는데.'

경비 감독관에게 이야기를 듣고,

재빠른 소녀에게 편지로 전달받은 장소가 분명하다.

"이 압!"

- 쌩!

기합이 다시 울려 퍼졌다. 칼이 바람을 가른다. 레나는 아니다.

그녀보다 훨씬 굵은 목소리.

'탐지.'

두 명의 인간이 잡힌다.

싸움은 여관 앞마당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정원.

문은 닫혀 있다.

탐지로 그 정체까지 파악하기는 무리였다.

두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

'은신.'

끼어든다면 기습이 낫다. 담벼락에 가까이 다가갔다.

- 쩡!

다시 쇳소리가 울렸다.

가까이 다가가 돌담을 훌쩍 타고 올랐다. 2미터 정도의 높이였지만 도약 한 번에 해결됐다. 담장 위에선 채 안을 내려다봤다.

안에서 싸우고 있는 두 남녀를 확인하고 나는 무척 당황했다.

'저 인간들이 대체 왜 여기 있지?'

게다가 전혀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었다.

"갑니다!"

공격을 하는 건 여자였다.

여자는 날이 없는 연습용 칼을 쥐고, 긴장된 표정으로 다섯 걸음 떨어진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가 남자보다 머리 둘은 더 컸다. 탄탄한 근육으로 다져진 몸 덕분에 부피는 2배에 가까웠다.

- 팟!

여자가 세차게 발을 디뎠다.

맞은편의 호리호리한 남자는 한 손에 쥔 검을 슬쩍 늘어뜨렸다.

그는 완연히 여유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 쌩!

여자의 칼이 허공을 갈랐다. 날은없어도 쇠로 만들어졌다.

맞으면 인간의 뼈 정도는 수수깡처럼 부러진다.

- 째쟁!

하지만 남자는 칼등으로 살짝 여자의 공격을 받아 내더니, 가볍게 뒤로 돌아가며 여자의 정강이를 검으로 살짝 쳤다.

"실패! 그래도 좋아졌네!"

여자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가 다시 자세를 잡고 남자에게 칼을 겨눴다. 하지만 다음 격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 쿵!

나는 기척을 드러내며 강하게 아래로 뛰어내렸다.

"어이쿠!"

"헛!"

두 인간이 화들짝 놀라며 내 쪽을 바라봤다.

'사실 놀란 건 내 쪽인데.'

기다리고 있는 건 레나여야 한다.

하지만 여관 밖에 나와 있는 건 전혀 엉뚱한 자들이었다.

둘 모두 익숙한 얼굴.

하지만 여기에서 보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어이쿠^?? 어이쿠."

잠깐 놀라긴 했지만, 호리호리한남자는 나를 보고 곧 활짝 웃었다.

"정말 와 주셨구려.! 성문에서안내 잘 받으셨소?"

"날 기다린 게 당신인가? 옷 색이 바뀌었군."

호리호리한 하얀 도복의 남자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뭐, 이런 스타일로 한 스무 벌 정도 있소. 색만 다 다르지."

두 달 전.

달밤에 요란하게, 한바탕 칼싸움을 벌인 남자가 나를 바라보고 다시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감독관에게 일러뒀는데, 일을 제대로 한 모양이로군."

"챈들러 형빈, 당신이 날 기다린 건가?"

"하핫. 그렇소."

'이상하군. 레나라고 말할 때 분명히 소녀가 반응했는데.

칼자루에 슬쩍 손을 가져다 댔다.

하지만 칼을 빼 들지 않았다.

함정은 아니다.

챈들러의 어투에서 적대적인 감정은 전혀 읽히지 않았다.

일단 차분히 대화를 진행하며 레나의 행방을 캐어 볼 생각이었다.

향후 레나를 찾는다고 해도, 녀석의 도움을 얻는 편이 빠르다.

그라스미어의 차기 영주.

말하자면 인간의 우두머리다.

'나에게 협조적으로 보이는데.'

싸워서 좋을 건 전혀 없었다.

나도 녀석에게 짐짓 친근한 척 말을 걸었다.

"챈들러, 그날 헤어지고. 다시 무사 수행을 떠난 게 아니었나?"

"하핫.

첸들러가 가볍게 웃었다.

"그때 귀하에게 밤새 가르침을 받으며 생각했지. 지나가는 기사의 칼이 이렇게 매운데, 동방까지 배우러간 게 다 헛일인가 싶었소."

"당신 검도 꽤 훌륭했어."

"말씀 고맙소. 그날 이후, 여기저기돌아다니며 결투를 했지만 마음에안 차더군. 그래서 실은. 다시 귀하를 찾아다녔소."

챈들러의 실력이라면 황실 근위대에 들어가도 밀리지 않는다.

제대로 무장한 병사 스물 정도는 한자리에서 가볍게 꺾는다.

그 정도의 실력자가 근방에 많을 리는 없다. 불만족스러운 비무행을계속했을 것이다.

"날 찾았나."

"하지만 어딜 가셨는지 도저히 감도 안 잡히더군."

"그래서 어떻게 했지?"

빨리 레나 이야기가 나오길 기대하며 질문을 던졌다.

직접 캐물으면 제대로 대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 그러던 중 에라스트에서 토너먼트를 연다는 소식을 들었소."

"참석했나?"

"그렇소. 혹시 귀하를. 만날까 해서 말이오. 하지만 거기 계시진 않더군."

나는 챈들러 옆에 선 여자를 흘끗 바라봤다.

대련을 벌이던 여자.

익숙한 얼굴이다. 에라스트 토너먼트에 참가했을 때.

나를 제외하면 가장 강한 검술을 보여 주던 여자였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제대로 된 대접은 받지 못했다.

〈하하하.! 크레스틴이라고? 정체를 밝혀라. 편력 기사라고 되어있는데. 〉〈맞습니다. 본 경기에는 자원해서 참가했습니다. 〉〈그런가. 하하핫. 혹시 오우거의피가 섞인 건 아니겠지? 〉크리스티나 더 브루이져.

그녀가 여기 있는 사연이 한순간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저 기사는 토너먼트에서 만난건가?"

크리스티나가 눈을 끔핵거렸다. 첸들러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어떻게. 아셨소?"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뭐, 그냥 그럴 것 같아서. 훌륭한 기사로 보이는군."

"맞소! 정말 감도 좋으시지."

챈들러가 활짝 미소를 지었다.

"딱 말씀대로요! 토너먼트에 참가한 인재인데, 쓰레기통 속에 던져두기 아까워 데리고 왔소이다."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호감도 상승 메시지가 남자의 머리 위에 떠올랐다. 제법 흡족한 표정이었다. 자신의 안목이 인정받은 것에 호감을 느낀 것이다.

나는 여자를 보며 생각했다.

'미래가 변했군.'

원래대로라면 이 여자가 챈들러와 만날 일은 없었다. 저번 생과 달라진 점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기스-제-라이에게 며칠 늦게 간 덕분에 챈들러는 살아남았다.

녀석은 저번 생에서 비참하게 살해당했을 메마른 지하 묘지 주위를 자연스레 지나쳤다. 그리고 나와 유블람 가도에서 마주쳤다.

나에게 '가르침'을 받고 에라스트토너먼트에 참가. 토너먼트에서 크리스티나를 만나 데려온 거다.

내 시선이 향한 탓일까.

크리스티나가 살짝 기사의 예를 갖추며 말했다.

"챈들러 남작님의 제자, 크리스티나 브루이져입니다."

"에이, 에이."

챈들러가 고개를 저었다.

"제자가 아니라 호위! 내 유일한호위지! 공식적으로 임명했잖아?"

"남작님을 지킨다고 말씀드리기에 턱없이 부족한 실력이라.

"제대로만 배우면 지금 나 정도는일 년 안에 뛰어넘을 거야. 자신감을 가지라고."

챈들러가 장난스레 웃으며 크리스티나를 격려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뒤로 한 걸음 물러난 상태에서도,

내가 챈들러에게 위해를 가하면 언제든 튀어나올 수 있게 몸을 잔뜩 긴장시키고 있었다.

'열심이군.'

레나가 하던 말을 회상했다.

〈낭만을 가진 여자들이 있나 봐요.

충성, 명예, 뭐 이런 거에. 〉

〈이런 결투 대회에 나오곤 하죠.

그렇게라도 기회를 잡으려고. 〉

'기회를 잡은 건가.'

족쇄 같던 투구를 벗고 있는 모습은 시원해 보였다.

하지만 머릿속에선 레나가 계속 떠올랐다. 빙빙 도는 다른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뭐라고 물어봐야 하나.'

레나의 행방에 대한 질문을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챈들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 나만 당신을 기다린 건 아니오. 〈우리〉가 기다리고 있었지. 나와 레나가 말이오."

"뭐? 레나는 어디지?"

"정확한 위치는 모르오. 내가 파악할 수 있는 여자는 아니니까."

"아는 사이인가? 어떻게 알게 된 거지?"

내 질문에 챔들러가 사람 좋은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게, 토너먼트가 끝나고 여기 돌아와서의 일이오. 보고를 받았소. 내서명이 있는 무기 제작권을 웬 여자가 행사했다더군."

'무기 제작권이라면.

작은 글씨가 깨알같이 새겨져 있던 금속 패.

"내게 준 거 말인가?"

"그렇소. 처음엔 당황했소. 누군가 싶어 찾았지. 한참 지나도 못 찾겠더군. 내 도시인데 말이야."

챈들러가 멋쩍은 둣 싱긋 웃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던 중 그녀가 날 찾아왔소.

귀하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군. 이 도시로 들어온다고 말이야!"

"그 말을 믿고 날 기다린 건가?"

"그렇소! 정말 신뢰할 만한 여자였어. 수완이 아주 훌륭하더군."

"레나, 그래. 당신의 레나도 여기곧 도착할 거요. 늦지 않게 온다 고했으니까."

- 저벅.

챈들러가 내 쪽으로 한 발자국 걸어왔다.

"그동안 대련 한 번 부탁드려도 되겠소? 나도 두 달 동안 놀고 있었던 건 아니라오."

- 스르록.

그가 연습용 칼을 아래로 천천히 늘어뜨렸다.

'더 강해졌군.'

완전히 날이 지워진 칼. 그럼에도 서늘한 살기가 느껴졌다.

그때 였다.

- 스스스슷!

허공에 매달린 투명한 줄을 타고무언가가 빠르게 다가왔다.

"제가 먼접니다!"

검은색 옷을 입은 여자가 지붕에서 떨어지듯 갑자기 나타났다.

"스승님!"

"레나?"

그녀가 바닥에 가볍게 착지했다.

툭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몸에 걸친 새까만 옷은 특수한 재질로 보였다.

그 위에 얇은 강철 보호대가 곳곳에 둘러진 특이한 형태였다.

- 스르릉!

다리에 수납되어 있던 가느다란 사이드 소드가 뽑혀 나왔다.

'살짝. 짧다?'

롱소드보다 날이 한 탬 짧았다.

무엇보다 칼이 얇았다.

칼끝으로 갈수록 점점 좁아졌다.

지나치게 날카롭다는 느낌마저 줄 정도였다.

검신에는 피를 흘리기 위한 홈이 기능적인 형태로 파여 있었다.

손잡이와 가드의 디테일은 세련되고 아름다웠다.

컨트롤을 살리기 위해서인지, 가드부분은 몇 개의 강철 매듭이 회오리치듯 잡혀 있었다.

약간의 조작만으로 검을 빠르게 회전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 휙!

레나는 칼을 허공에 한 번 휘두른 뒤 제대로 잡았다.

'레이피어도, 장검도 아니다.'

두 가지 특성을 모두 결합한 무기였다. 절단과 관통에 모두 기능적으로 보였다.

'찌르고 베고. 찌른 뒤 베고.'

그녀와 완벽한 밸런스를 보이는 것같은 검.

곁에서 직접 골라 줘도 저 이상의 칼을 선택해 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좋은 칼을. 찾았군."

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빼낸 검으로 천천히 나를 겨누며 말했다.

"가르쳐 주세요, 두 달 치."

125화 패치워크 (5)

***************************************************

- 철컥!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잠시 머릿속에서 지우고 있었다.

'분명 약속했지.'

검술 정도는 그냥 가르쳐 준다고 확언했다.

검술 따위보다 네가 훨씬 소중하다는 입바른 소리를 지껄였다.

그때 그녀의 눈빛이 떠오른다.

흠칫 놀라던 몸.

파르르 떨리던 눈꺼풀.

나를 담은 채 흔들리던 새까만 두 눈 동자.

'심한 짓을 했군.'

그런데 거의 봐주지 못하고 훌쩍 떠나 버렸다.

편지 한 장 남기고 두 달 동안.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도 없었다.

칼을 잡은 레나에게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먼저 갈게요, 스승님."

"와라."

레나는 곧바로 커팅 레이피어를 휘둘렀다.

- 피릭!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렸다.

허리에 찬 철검을 빼, 왼쪽으로 찔러 오는 얇은 칼을 쳐냈다.

한 번 부딪치고 곧장 깨달았다. 나는 완전히 방심하고 있었다.

'강하다.'

그녀의 칼은 내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 챙챙챙!

연달아 세 번 소리가 울렸다.

간격도 없이 공격이 몰아쳐 왔다.

가느다란 칼이었지만 강한 힘과 회전이 실려 있었다. 가드의 장식을 이용해 각도를 돌려 가며 세검을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 채채챙!

반 이상 부서진 철검을 세검이 잡아먹듯 휘감아 왔다.

'곤란하군.'

대충 받아 낸다면, 안 그래도 데미지가 심한 철검이 완전히 부서져 버릴 것 같았다.

- 피릿!

레나의 검이 목 쪽으로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너무 빠르다고.'

철검 손잡이로 검신을 쳐내며 레나의 상태창을 열었다.

[이름: 레나]

[호감도: 34]

- 왜곡된 호감(B): 레나는 당신에게 버려졌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남긴 것들로 인해 크게 성장했지요.

이 과정에서 그녀는 끝없이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내부에 당신의 견고한 이미지를 만들고, 호감도를 계속 키워 갔습니다.

- 당신에 대한 레나의 호감도 가멸어지지 않습니다.

- 호감도가 떨어질 만한 일을 할 경우, 대신 특별한 이벤트가 생길확률이 높습니다.

'이거 뭐야. 무서워.

[호감도 상한: 60]

[도적 Lv.153[트릭스터 Lv.13]

[사냥꾼 Lv.3]

[어쌔신 Lv.5]

[상인 Lv.5]

[체력: 36]

[힘: 38]

[민첩: 51]

[지혜: 34]

[특전]

재능 (B+)

- 레벨 업 때마다 얻는 스탯이 플러스2에서 플러스3까지 보정됩니다.

전투 감각(B)

〈하나 더 열린 감각〉

이 특전의 소유자는 타인과 완전히같은 스탯을 가지고도, 훨씬 더 뛰어난 전투력을 보여 줍니다.

'다 개방됐잖아?' - 채채채챙!

네 번의 검격이 겹치듯 들어왔다.

가속도와 회전력이 섞인 공격을 쉽게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주의! 무기 내구도가 18%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뒤로 두 걸음을 물러났다. 레나의 성장은 놀라울 정도였다.

호감도가 알아서 올라간 데다, 호감도가 올라야 달성할 수 있는 특전도 이미 개방되어 있었다.

'던전 셋을 다 돌았나?'

함께 던전을 돌았던 때보다도 레벨이 훨씬 높았다.

알려 준 던전을 전부 다 돌고, 혼자경험치를 독식해야 가능한 상승세.

'초반 차이가 이 정도로 큰 격차로 나타나다니.'

세검이 다시 뱀처럼 사각으로 휘감겨 왔다. 한 발을 디디며 칼을 크게 휘둘렀다.

- 쩌엉!

레나의 몸이 붕 뜨며 뒤로 날아갔다.

- 팟!

하지만 곧 다시 자세를 잡고 더욱 빠르게 다가왔다. 날카로운 칼끝은잔상이 길게 이어져 보일 정도로 빨랐다.

[주의! 무기 내구도가 17% 이하로떨어졌습니다!]

'이대로라면.,

칼이 금세 부서진다. 힘을 흘려 내기 위해 뒤로 세 걸음을 물러나며 공격을 받아 내는 순간.

- 툭.

등에 담벼락이 부딪혔다.

"스승님. 그만할까요?"

레나가 벽에 부딪힌 내 모습을 보고 주춤거렸다.

그녀가 뿜어내는 투기가 잠시 누그러져 있었다.

나는 레나의 상태창을 꼈다.

'이대로 끝내면 곤란하지.'

한순간에 제압하려면 검기를 쓰는 편이 좋다. 하지만 위험한 선택이다.

무리하게 철검에 검기를 불어넣다가칼이 깨질지도 모른다.

좋은 꼴은 아니다.

'그거라면.

나는 다른 방법을 떠올리고 레나를 도발했다.

"아니. 더 빠르게 와 봐."

"정말입니까?"

"지금 너무 느려."

"갑니다!"

- 피리릿!

칼날이 내 얼굴 쪽으로 빠르게 뻗어 왔다. 가장 빠른 속도였지만,

'흡착.'

- 탁!

날카로운 칼날이 건틀렛에 잡혔다.

쇠와 쇠가 마찰하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한 번에 레나의 세검을 빨아들이듯 잡아냈다.

레나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오오!"

챈들러의 감탄사가 들렸다. 호감도가 1 올랐다는 메시지가 허공에 떠올랐다.

"어떻게 저걸 잡아낼 수가.!"

크리스티나의 작은 감탄사도 들렸다. 하지만 느긋하게 즐기고 있을 기분은 아니었다. 아슬아슬했다.

'망신당하는 줄 알았네.'

도박이었다. 흡착 스킬을 건틀렛으로도 쓸 수 있을 거라고는 확신하지 못했다.

"잘 수련했.

칼을 다시 놓아 레나에게 돌려주려할 때였다.

- 와락!

레나는 내가 잡은 칼을 탁 놓아버린 채 갑작스럽게 나를 안았다.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돌 벽에 가로막힌 상태.

칼을 잡은 왼손을 뒤로 물리는 사이 레나가 품을 파고들었다. 스탯의차원을 떠나서,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절체절명의 공격이다.

그녀는 내 가슴에 머리칼을 묻으며 허리를 꼭 감싸 안았다.

"크흠.

챈들러가 헛기침을 했다.

"먼저 들어가지. 한바탕 대련을 했더니 피곤하군. 크리스티나?"

"예!"

"얼른 가자."

챈들러가 넉살을 부리며 여관으로 올라갔다.

레나는 그들을 신경도 쓰지 않고나만 보며 말을 걸었다.

"그렇게 말도 없이 가시다니.

"다시 그렇게 떠나실 거예요?"

인간들을 거리낌 없이 살해하지만,

나에게는 이상하게 부드러운 눈매.

똑바로 나를 응시하는 검은 눈동자가 촉촉하다.

"미안하다."

그녀에게 할 말은 없었다.

레나를 떠난 건, 그녀와 상관없는기스-제-라이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다.

기스-제-라이 본인에게는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 알량한 책임감.

네크로멘서는 내 앞에서 다시 온몸이 벌집이 되어 죽었고, 내 정수 흡수 레벨만 올라갔다.

레나가 느리게 입술을 열었다.

"미안하실 건 없어요. 역시 제가 쓸모없었으니까 그런 거겠죠?"

입을 다물었다.

"쓸모 있어지기 위해 그동안 무척 노력했어요."

그때 였다.

- 쏴? 아아아아.

잠시 그쳤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차가운 빗줄기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적셨다.

몰아붙여져 추궁당하고 있던 참이라, 분위기를 끊는 비가 반가웠다.

레나가 내게 말했다.

"우리도 방으로 들어갈까요?"

"그러지."

'탐지.' 나는 안으로 들어가며 여관을 샅샅이 훌었다.

전세를 얻은 건지, 3층짜리 여관에는 1층에 있는 종업원과 첸들러 일행 외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기품 있고 깔끔한 여관이었다.

입구로 들어갈 때부터 고급스럽고 청량한 나무 향이 났다.

"스미디쉬 원목으로 만든 여관이래요. 추울 때는 따듯하게, 더울 때는 시원하게 온도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신기한 나무죠. 비가 올 때랑 아닐 때랑 다른 향이 나요."

그녀는 곁에서 나란히 계단을 밟으며 말을 이어 갔다.

"옛 엘프 숲에서는 특별한 나무가더 많았다던데.

"엘프는 멸종하지 않았나."

"네. 숲과 함께 죽었죠. 박제가 되어 귀족들의 밀실에 전시되어 있거나. 아, 같은 말이구나? 우리 방은 여기에요."

레나가 문을 열어 준 방은 무척 넓었다. 다섯 칸으로 구분된 방은 열댓 명이 한 번에 묵어도 될 것같은 곳이었다.

테이블과 침대를 비롯해 여관 곳곳에 배치된 시설과 물건은 하나하나가 모두 깔끔하고 세련된 기품을 뿜어냈다.

[회계 Lv. 1이 작동합니다!]

[숙련도가 미세하게 올라갑니다!]

자연스럽게 스킬이 발동됐다. 한눈에 훌어봐도, 어지간히 부유하지 않고는 묵지 못할 여관으로 보였다.

세련된 욕실만 해도 웬만한 여관의 로비만 했다.

욕실 창문에서는 오래된 나무와 돌조각들, 작은 연못이 있는 뒷마당이한 번에 내려다보였다.

"동방 스타일의 여관이에요. 챈들러 남작이 좋아하더군요."

"그가 잡은 건가?"

"네. 여관을 전부 다 빌렸어요."

"능력도 좋군."

"차기 영주니까요. 유일한 후계자에, 영주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이라고 한다던데요."

나는 그 말을 듣고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그런 자식이, 동방으로 무사 수행을 가겠다는데 막지 않은 건가? 가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데?

'뭐. 뜻을 존중한다는 건가.'

적당히 의문을 홀려 보냈다. 크게신경 쓸 만한 건 아니었다. 그보다 아까부터 레나의 안색이 심상치 않다. 말은 잘 하고 있지만, 몸짓과목소리가 불안하게 흔들린다. 혹시독 같은 거에 당한 걸까?

'탐지.'

나는 그녀의 상태를 훌었다.

'심장이 빠르게 턴다.'

'호흡도 살짝 가파른데.'

그리고 몸짓이 조금씩 경직되고 있었다.

밖에서는 이러지 않았는데, 나와 둘이서 방 안에 들어오자 몸이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괜찮은가?"

"네? 아, 네! 괜. 찮은데요?"

조금씩 굳어 가는 분위기가 약간어색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 달각! 달각!

주머니 안에서 새끼 늑대 해골이 움직였다. 레나의 눈동자가 커졌다.

"어? 안에 든 거 뭐예요?"

"그게.

녀석이 밖으로 획 뛰쳐나왔다.

"어이쿠."

엉겁결에 잡으려 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레나의 심상치 않은 안색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던 터라 다른 데신 경 쓰지 못한 것이다.

"뭐. 그냥 늑대 해골이다."

'레나 앞이라면 상관없겠지.' 녀석은 발치를 빙빙 돌았다.

"이것 좀 봐. 이리 와 볼래?"

레나는 놀라지 않고 놀자는 듯이 손을 뻗었다.

테이블 밑에 숨은 녀석이 목을 내밀어 이를 부딪쳤다.

- 딱딱! 딱딱!

"도망가 버리는데?"

"잡을 거거든요? 압!"

레나가 몸을 앞으로 내밀며 늑대를 잡는 시능을 했다. 녀석은 안으로 도망쳤다가 다시 반대편으로 몸을 내밀고 달그락거렸다.

'좀 귀엽군.'

"어쭈? 도망치네? 이리 온? 안 잡아먹는단다? 이 압!"

레나는 달그락거리는 녀석과 테이블을 둘러싸고 몇 바퀴를 돌았다.

'저거. 혹시 일부러 안 잡는 건가?'

그나저나.

굳어 있던 레나의 안색이 갑자기좀 풀린 것 같아 다행이었다.

"이런 귀여운 애를 어디서 구해 오셨어요?

레나가 훨씬 풀어진 얼굴로 날 보며 말했다.

"그냥 산에서 주워 왔지."

"일으킨 거예요?"

"그래."

- 달각! 달각!

테이블 아래 숨어 있던 녀석은 레나가 자길 잡으려 하지 않자 터덜터덜 밖으로 나와 가만히 엎드렸다.

레나가 늑대 해골의 척추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두 달 동안 뭘 하셨나 했더니. 이름은 뭐예요?"

"이름이 필요한가?"

"당연하죠! 안 지어 주셨구나. 밤톨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밤톨?"

"네. 두개골이 밤톨 같은걸요."

그 순간이었다.

- 띠링!

['작은 새끼 늑대' 해골을 '밤톨'이라고 명명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뭐, 그러지."

나는〈예〉에 눈길을 보내 승낙의 의사를 표시하며, 레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띠링!

['작은 새끼 늑대' 해골의 이름이'밤톨'이 되었습니다.]

[밤톨이가 자신의 이름을 좋아합니다.]

[〈뼈의 군주〉의 숙련도가 약간 올라갑니다.]

[호감도가 3 상승합니다.]

[민첩이 1 상승했습니다.]

[이름: 밤톨]

[늑대 Lv.1]

[체력: 8]

[힘: 6]

[민첩: 10] (new)

[지능: 7]

[진화 확률이 미세하게 상승합니다.]

[이름 부여에 의해 자율 E랭크를 획득합니다.]

'스탯까지 올라가는군.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이름을 지을 걸 그랬나?' 이름.

많은 것은 하나의 이름을 가진다.

레나도, 루비아도 그렇다.

늑대도 그렇다.

이름을 부르고 말을 걸고 마음을 만든다.

기록에 남고 비석에 남는다.

내 이름은.

- 달그락!

문득 소스라치는 기분이 들었다.

[동화율이 낮아집니다!]

[동화율: 81.13%]

- 철컥.

테이블을 짚었다.

"괜찮으세요?"

레나가 말을 걸었다.

"아. 그냥 좀 귀여워서."

"밤톨이요? 완전 귀엽죠. 헤햇."

레나가 새끼 늑대 해골을 몇 번밤톨아, 라고 부르며 쓰다듬었다.

- 달각! 달각!

늑대는 그 이름에 반응하듯 레나의 품에서 마구 꼼지락거렸다. 잠시 후레나가 안색을 가라앉혔다.

"스승님."

그녀의 눈빛이 문득 진지해졌다.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스승님이 어떤 분인지, 뭘 하시려는 건지는 사실 잘 모르겠어요. 일단네크론을 뜯어 버리시려는 건 맞죠?"

레나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지금 와서는 그 목표가 다소 퇴색되었다고는 해도, 처음에 레나와 그렇게 이야기했다.

"역시 낮은 권한으로 놈들에 대해 알아보기는 찜찜하더라구요. 열람기록이 읽히니까. 그래서 말씀드린 대로 지부장이 되는 거에 초점을 맞춰서 활동했어요."

"그런가."

잠시 잊고 있었다.

눈앞의 이 여자를 T&T의 지부장으로 만들기로 했다.

〈네크론 신사회요? 놈들에 대해 알아볼 수 있습니다. 〉〈제 길드 등급이 올라가면 됩니다.

T&T의 지부장은 기록 없이 정보를 열람할 수 있거든요. 〉그게 처음의 대화였다.

우리의 기본 관계다.

회귀를 반복했기 때문에, 잠시 나와 그녀의 관계에 대해 제대로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또 하나 잊고 있는게 있었다.

내게 주어진. 〈시나리오〉.

'상태창!'

상태창을 열고 한참을 뒤적였다.

오랫동안 열지 않아 어디 있는지도 잊은 시나리오 창을 열었다.

雄급 시나리오, '레나 이야기'가 열립니다. 〉

〈그녀를 T&T 길드 지부장에 앉혀보세요! '어둠 속의 조력자' 시나리오가 활성화됩니다. 〉이 시나리오를 달성하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예전에는 그게 궁금해서라도 레나를 지부장으로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때는 T&T 내부, 푸르손의 추종자들에게 살해당해 실패했지만.

'지금이라면.'

레나의 이 정도 성장 속도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레나가 말을 이어 갔다.

"일단 헤어진 첫날, 정식 회원으로 등록했어요. 실적을 쌓아서 벌써 한번 승급을 거쳤고요."

"훌륭하군."

그 정도면 예전보다도 훨씬 더 빠른 속도였다.

"스승님 덕분이죠. 그래도 이런 식이면 5년은 있어야 바라볼 수 있겠더라고요. 짜증나게 연차 제한이라는 게 있어서. 대신 좋은 걸 찾았죠."

툭.

레나가 품에서 낡은 책 하나를 꺼냈다.

"오늘. 성문에 못 나가서 죄송해요. 딱 맞춰서 환영해 드리고 싶었는데. 이걸 구하느라 늦었던 거예요."

126화 패치워크 (6)

***************************************************

레나가 품에서 꺼낸 책은 한눈에 봐도 무척 오래된 것이었다. 하지만 보관 상태는 좋았다.

'밀봉되어 있었나.'

레나는 책의 표지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첫 페이지를 펼쳤다.

〈트로핀 나나우, 여기에 길드 규칙을 남긴다. 〉

독특한 글씨체로 쓰인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적어도 백 년의 세월을 지나온 둣,

종이는 누렇게 바랬지만 아직 글자에는 힘이 남아 있었다.

"트로핀. 나냐우?"

"T&T 두 창립자 가운데 하나죠.

그가 남긴 룰북이에요."

그녀가 내게 말했다.

'또 변했군.'

중요해 보이지만, 분명 처음 보는 책이다. 저번 생에서 레나는 이런 책을 손에 넣은 적이 없었다.

미래가 변했다.

세계선이 변했다. 아마 이제부터 과거의 기억 같은 건 쓸모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녀는 책을 내 쪽으로 기울인 채,

가운데를 펼치고 손가락으로 한군데를 짚었다.

"여길 보세요."

〈지부장의 자격과 임명〉이라는 조항이었다.

.다음 두 가지에 해당하는 자 가운데, 소속 지부장과 다른 지부 장두 명의 제청으로.

- 5년 이상 T&T에 몸담은 자.

- 실적 수치가 1, ??? 을 넘은 자.

"5년이라면. 어떻게든 안 되는 거아닌가?"

"아래를 보세요."

그 밑의 여백을 바라봤다. 종이 맨 아래쪽에 깨알 같은 글씨로 무언가가 적혀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단, 루-륨 100ml를 가져오는 자는 그 즉시 지부장 대우를 한다. 〉추가된 수칙인지 뭔지, 장난처럼작게 적혀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도통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형식은 정확했다. 크기가 작을 뿐뜯어보면 글씨체도 같았다.

"루. 륨?"

"마력 액이에요. 엠버에서 동력원으로 쓰는 물건이죠. 생산은 불가. 수집만 가능. 효율이 무한정에 가까운 귀중한 에너지원이에요."

"그럼 이 조항은 엠버를 위해서 만들어진 건가?"

"그것까진 잘 모르겠어요. 트로핀 나냐우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조항을 만들었는지는 캐 봐도 안 나오더라고요. 저도 궁금하니까, 지부장이되면 알아볼게요. 헤햇."

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지금 구하러 가자. 말을 구해야겠군."

"아, 아니요. 그럴 필요는 없어요."

의아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라스미어에 있어요. 루-륨을 동력원으로 작동하는 것들이."

"설명해 봐라."

"이 도시엔, 골렘들이 지키는 지하던전이 있거든요."

문득 깨달았다. 성문 앞에서 만난진네이의 말이 떠올랐다.

〈크흠! 한때 남부를 지배하던 주술사가 있었소. 〉

〈무덤을 지켜 줄 강철 골렘들을만들기 위해서요. 〉

"혹시, 지금 주술사의 무덤을 지키는 골렘들을 말하는 건가?"

- 꿀꺽.

레나가 침을 삼켰다.

"알고 오신. 거예요?"

그리고 무척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떨어트렸다.

"아니. 그냥 여행자에게 주워들은 전설 수준이지."

정말 그런 던전이 있다면 굳이 레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일단 나부터도 관심이 간다.

골렘은 마력으로 작동한다. 하지만골렘이 마법을 쓰는 건 아니다.

마법의 재능이, 아케인 하트가 있을 리가 없다. 동력원은 따로 있다.

레나의 말에 따르자면 골렘의 동력원은 루-륨.

그 원리를 파악한다면-

'아케인 하트가 없는 문제점이 해결되지 않을까?'

마법을 쓰게 될 실마리를 거기에서 찾는다. 미약한 가능성이지만, 시도할 가치는 당연히 있다.

레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라도 꼭 가보고 싶은 던전이다.

하지만 진네이의 말에 따르면 와본 모험가가 하나둘이 아니다.

다들 무덤을 찾아 도시 주변을 뒤졌지만 찾지 못했다. 그럼 그냥 전설일 확률이 높다고 레나에게 말했을 때였다.

"하지만 사람들이 한 번도 안 건드린 곳이 있죠."

"그게 어디지?"

레나가 씩 웃었다.

"이것 좀 보시겠어요?"

그녀가 능숙한 손길로 배낭을 뒤적였다. 그리고 길다란 종이 세 장을 꺼냈다. 지도였다.

- 휘리릭.

큼지막한 지도가 테이블 위에 펼쳐졌다. 그라스미어 전체가 표시된 지도였다. 건축 설계부터 지하 하수도까지 빼곡했다.

"어딜 가든 사람들은 다 돈이 부족하더라고요. 특히 행정관들이 그래요. 건축기획과나, 수도사업본부나."

돈을 줬다고 해서 이런 걸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자금을 꽤 넉넉하게 주고 갔다고 한들, 고작 두 달밖에 안 된 일이다.

놀라울 정도의 수완이었다.

"여길 보세요."

레나가 손가락으로 지도 가운데를스르록 훌었다.

"성. 인가?"

지도 전체에서.

백작이 지배하는 내성 부분만 텅 비어 있었다. 나는 한 번에 레나가 말하려는 걸 알아차렸다.

"지금 팬 들러 가문이. 그 던전과 엮여 있다는 뜻인가?"

"분명해요. 일단.

레나는 영주의 내성 지하에 던전이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하나씩 중거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영주가 직접 관리하고 있는 게 분명해요. 돈을 꽤 풀어서 알아봤는데, 지하로 들어가 본 사람이 아예 한명도 없었어요."

"한 명도?"

"네. 정말 이상하죠? 일하다 보면, 실수로라도 한 번쯤은 들어가 보기마련인데."

설명이 쭉 이어졌다.

그녀의 말을 하나씩 듣다 보니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수상하군. 그동안 아무도 안 건드린 건가?"

"영주가 관리하는 내성 지하예요.

웬만한 무력 집단은 다 그라스미어에서 무기를 공급받을 텐데, 괜히건드려서 갈등할 이유가 없죠."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던전과 엮여 있는 가문이라. 정말 악마에게 무기 제조법이라도 배우는 건가?"

그때 였다.

- 똑똑.

방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흠칫 놀랐다. 잠시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 똑똑.

"들어가도 되겠소?"

챈들러의 목소리였다. 레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감도 좋네."

그녀는 내게 보여 줬던 지도를 말아서 배낭에 집어넣었다. 나는 어느새 축 잠들어 있는 밤톨이를 안아서자루 안에 살짝 집어넣었다.

"이제 오라고 해."

"아, 들어오세요!"

: 르륵.

문이 열렸다. 깔끔하게 옷을 갈아입은 남자가 얼굴을 비췄다. 뒤에는 챈들러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크리스티나가 말없이 서 있었다.

'들었을까?'

레나의 이야기에 지나치게 집중한탓에, 다가오고 있는 걸 신경 쓰지 못했다. 방이 워낙 넓은 데다 문과테이블 사이에도 칸막이 두 개가 있다. 듣지 못했을 가능성도 높다.

'탐지.'

반사적으로 챈들러를 체크했다. 하지만 별달리 수상한 기색은 없다.

영주의 내성에 골렘 던전이 있다면, 과연 이 녀석은 알고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던전을 내성에 숨겨서까지, 챈들러 가문이 얻고자 하는 건 무엇일까.

나는 녀석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지?"

"같이 식사하시지 않겠소?"

레나와 눈이 마주쳤다. 레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러지."

그러자 내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는 둣, 종업원들이 차례로 음식접시를 나르기 시작했다.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는 호박색 수프 그릇을 시작으로 인간의 음식이 차례대로 놓이기 시작했다.

'전부 기다리고 있었군.'

"안 드시오?"

나는 챈들러의 물음에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배고프지 않다."

"아, 그럼 배고플 때 드셔야지. 먼저 실례하겠소."

의외로 권유는 없었다.

살짝 뒤로 앉아 그들을 관찰했다.

레나는 방금 전까지 수상한 둣 말하고 있던 챈들러도, 크리스티나도자연스럽게 환대했다.

역시 그녀답다고 할까.

기본적으로 대화 능력이 무척 탄탄했다. 고개를 끄덕거리고 눈을 반짝이며, 상대에게서 이야기를 끌어내는 능력이 뛰어나 보였다.

며기 공자님은 스승님을 참 좋아하나 봐요."

"그렇소!"

"스승님께서 주신 제작 패를 제가 쓰자마자 무서울 정도로 절 쫓아오시고.

"하하하핫. 그거야.

챈들러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식사에 반주를 곁들였다. 촉촉한 와인 향기가 퍼져 갔다.

권하려는 둣 슬쩍 내 쪽을 쳐다보는 챈들러에게 손을 저어 거절했다.

"스승님이 오시길 이분이 얼마나 기다리셨는지 몰라요. 질투 날 정도였다니까요. 저 성을 지배할 차기영주가 경쟁자라니.

레나가 챈들러의 속내를 떠보려는 듯 흘끗 성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챈들러의 낯빛이 순간 어두워졌다.

분명히 마음에 무언가 거리끼는 게있는 태도였다.

"물려받는 성이라는 게 뭐가 그리 대단하겠소. 자신이 두 손으로 해낸 게 중요하지. 그런 면에서. 존경하고 있소이다."

"나에 대해 모르지 않나."

"검을 쥔 자는 검으로 말하고 검으로 생각하지. 검을 맞대다 보면 열홀 밤을 나눈 것보다 더 깊이 상대에 대해 알게 되지요."

검술 지상주의자 같은 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눈앞의 남자가 날이 정도로 좋아할 이유는 없다.

레안드로 후작 같은 격외급 강함을 보여 준 것도 아니다.

지금 내 수준은 이사벨 정도지만,

유블람 가도에서 첸들러와 맞붙었을 때는 그보다 훨씬 약했다. 근위대를두 번째로 흡수하기 전이었으니까.

'무슨 속셈이 있는 거지?'

적당히 쓸모없는 환담을 나누는 레나와 챈들러를 흘끗 바라봤다.

식사는 거의 다 끝나 가고 있었다.

'수상하지 않게. 가기 전에 얼굴한번 보여 줄까?'

물론 마스커레이드를 쓸 생각.

레나는 놀랄 거다.

내 정체를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 자리에서 티 내지 않을 정도의 판단력은 충분히 있다.

'마스커레이드.'

스킬을 쓴 뒤, 투구를 벗으려 손을 가져다 댔다.

그 순간이었다.

"스승님.?"

벗기 전 레나가 잠시 흠칫했다. 그녀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걱정할 필요 없어."

얼굴이 살짝 붉어지며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작 우스운 건 챈들러의 반응이었다.

나를 계속 곁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는지, 그 역시 흠칫했다.

'왜 그러지?'

- 철컥.

나는 투구를 벗었다. 그러자 챈들러가 깜짝 놀랐다. 눈을 크게 뜨고몇 번이나 깜빡거렸다.

내 모습을 아는 레나는 몰라도, 챈들러까지 놀랄 이유는 전혀 없다.

날 처음 보는 크리스티나는 역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가면무도회 활성중!]

[짧은 시간 동안 얼굴에 '인간'의모습을 덧씩읍니다.]

[남은 시간 - 09:43]

"아.!"

귓속말을 해 둔 덕분인지.

레나는 납득하고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챈들러의 반응을 이해할 수없었다. 그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했다.

마치 예상과 다른 무언가를 보는듯한 태도.

"왜 그러지?"

"아니오, 그냥. 투구를 벗는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라서."

챈들러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아무래도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태도였다.

챈들러는 백색 포도주 한 잔을 쭈욱 들이켰다.

아무래도, 향취도 즐기지 않고 취하기 위해 들이켠 것 같았다. 셔츠 끝이 떨어진 술방울로 살짝 젖었다.

'취했나.'

챈들러가 술을 마시는 속도가 한층 더 빨라졌다. 크리스티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남작님.

"아니. 괜찮으니 놔두게."

향긋한 와인이지만 도수는 높은 듯했다. 잔뜩 마신 탓에 그의 목소리에서 취기가 돌기 시작했다.

챈들러가 만들어 내는 긴장이 점점더 고조되고 있었다. 그는 식사를 하러 온 게 아니었다.

무언가를 말하러 온 게 분명했다.

레나도 그걸 알아차린 것 같았다.

어느새.

나와 레나, 크리스티나 셋은 챈들러의 입술만 바라보고 있었다.

묘한 정적이 흘렀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내 쪽으로 걸어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 털썩.

그가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실은. 한 가지 꼭 물어야 할 게있소."

"뭔가."

"당신은.

127화 패치워크 (7)

***************************************************

"인간인 거요?"

챈들러의 눈빛은 기묘하다. 의혹과 확신이 반씩 섞여 있다. 녀석은 둘 사이에 서 있는 게 아니다.

두 감정은 각기 따로 존재했다.

"글쎄."

나는 딴청을 부렸다.

이 대답은 얼핏 생각해도 치명적인분기점이 된다. 뒤에 칼을 짚고 선 크리스티나가 몸을 긴장시킨다.

챈들러 남작.

그가 이미 내 정체를 알고 묻는 느낌이 든다. 조사라도 붙인 건가.

그렇다면 왜 이제 와서. 뭘 어쩌자고 묻는 걸까. 어쩔 셈일까. 갈비뼈안쪽에서 궁금증이 피어올랐다.

"중요한 질문인가?"

챈들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내 가문과, 이 도시의 운명이 걸린 일이라오."

갑자기 거창한 이야기가 들어선다.

녀석은 전혀 전투태세를 갖추지 않았다. 내가 인간이든 아니든 공격할 생각은 없는 건지도 모른다.

- 저벅.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챈들러 앞에 걸어가 섰다.

이건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 없는 도박이다. 내가 읽어 내고, 내가 판단해서 답변해야 한다. 나는 결정했다.

"인간이. 아니다."

'마스커레이드 해제.' 나는 가면을 벗었다.

드러난 모습을 보고 크리스티나가 눈을 크게 부릅떴다. 소리를 지르거나 넘어지지는 않았다. 챈들러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인 듯했다.

레나는 어느새 창문을 닫고, 커텐을 내린 채 방문을 잠궜다. 그리고그 앞을 지키고 섰다.

놀라운 건 챈들러의 반응이었다.

"역시. 그대였군! 그대였어.!"

내 모습을 확인한 그라스미어의 공자는,

- 털썩.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주, 주군! 취하셨습니다."

크리스티나가 화들짝 놀라며, 챈들러의 곁에서 그를 일으켰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담대한 모습을 보여 주는 기사다. 호위를 잘 수행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놓아라."

"아니, 잡고 있어."

챈들러의 말이 묻히도록, 나는 크리스티나에게 강하게 말했다.

그녀는 살짝 굳은 채 그대로 챈들러를 부축하고 있었다.

단단하고 굵은 팔뚝에 몸이 잡힌 챈들러는 움찔거렸지만, 순수한 힘은 크리스티나에게 완전히 밀리는 듯 옴짝달싹도 못 하고 있었다.

"놓으라니까.

"주군.!"

나는 크리스티나를 더 이상 곤란하게 만들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무슨 일인가."

챈들러가 떨리는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귀하에게. 부탁이 있소."

그는 절박했다. 간절했다. 스스럼없이 무릎을 꿇을 만큼, 저 자신의 품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검술 정도는 이런 짓 안 해도 가르쳐 준다."

그럴 생각이었다. 이 녀석은 저번 생에, 내 정수 흡수의 첫 번째 실험대상으로 비참하게 살해당했다.

굳이 그런 연이 아니라도.

[검술 교육]이라는 스킬까지 흡수한 상태다. 스킬 숙련을 올려 볼 겸어 울려 줄 생각은 충분히 있다.

그러나 챔들러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나는. 나는. 지난 2개월간 매일같이 당신의 꿈을 꿨소."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냐?"

진지한 표정이었지만, 전혀 영문을알 수 없을 엉뚱한 소리였다.

"처음이었소. 다른 꿈을 꾼 게."

그때 였다.

- 뾰록!

자루에 있던 밤톨이가 얼굴을 내밀었다. 녀석이 자루 안에서 고개만내밀어 좌우를 살피더니, 밖으로 훌쩍 뛰쳐나왔다.

- 달각! 달각!

밤톨이가 내 발 위로 올라왔다. 갑작스런 녀석의 출현에 무거웠던 분위기가 살짝 전환됐다. 챈들러와 크리스티나는 당황한 듯했지만, 이미내 정체를 밝힌 상황이다.

'해골이 하나건 둘이건 큰 차이는 없겠지.'

녀석이 나에게 머리를 들이밀었다.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몸짓이다.

'이거 참.

나는 밤톨이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챈들러를 바라보고 물었다.

"아까 뭐라고 했지?"

그는 두 눈을 깜빡거렸다. 침을 삼키고 말을 이어 갔다.

"이십오 년 동안 같은 꿈을 줬소.

세상이. 뒤집히는 꿈을."

'설마 예언자인가?' 세상은 분명 뒤집힌다. 두 번씩.

나는 챈들러를 바닥에서 일으켰다.

의자에 앉혔다.

"계속 말해 봐라."

"인간이 벌레와 짐승들에게 잡아먹힌다오. 그리고 거대한 까마귀가 그라스미어에 내려앉지. 온몸에 빼곡하게 보석을 붙인 까마귀가."

보석 옷을 입은 까마귀.

익히 아는 존재다.

마왕 말파스.

"인간 세계가 모두 갈려 나갈 때, 그 까마귀는 나와 이 도시만은 굳게 지켜 준다오. 마왕이라는 걸 알았지.

그런 꿈을 이십 년 넘게 꿨소."

챈들러가 떨리는 목소리로 설명 을이어 갔다.

가문의 시조는 남부를 지배하던 대주술사의 부하였다.

마왕을 섬기던 주술사는 죽기 전,

챈들러 가문의 핏줄에 노예의 저주를 걸었다.

계시와 생명을 공유하는 저주를.

나는 그에게 물었다.

"생명을 공유한다고?"

"그렇소."

"주술사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말인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죽기 전 마지막 힘으로 완성한 결계 속에서, 자발적인 가사 상태에 빠져 있다오. 마왕 강림을 기다리며 힘을 아끼는 것이지."

챈들러가 계속 설명했다. 가주의 직계直系는 스물다섯이 되면 지하결계 속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송장에 가까운 주술사가 일어난다. 그리고 옛 노예의 후손을 포옹해 생명력을 유지한다. 기가 막힌 이야기였다.

"그렇게 우리는 노예로 살아왔소.

심지어 마왕의 노예도 아닌, 그 대주술사의 노예로."

"저.

레나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혹시 주술사 이름이 벨'호멧 아이작인가요?"

챈들러가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그걸!"

"미안해요. 사실 나름대로 조사해봤거든요. 그리고.

레나는 챈들러의 뒷조사를 한 사실을 고백했다. 그들 사이의 대화를 적당히 홀려들으며 생각했다.

챈들러 가문.

가주의 직계는 매일 밤 꿈을 꾼다.

마왕이 강림하는 꿈.

종말의 때에 오직 가문과 도시만 구원받는 꿈.

평소에는 마왕의 축복으로, 도시가 번성하는 꿈.

물론 거짓말이다.

챈들러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꿈이 거짓이다. 그라스미어는 지켜지지 않는다.

말파스의 권속으로 추정되는 주술사 벨'호멧 아이작이라는 자도, 그보석 까마귀에게 속아서 거짓 계시를 받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라스미어는 사실.

도시 전체가, 마왕 강림의 제물로 바쳐지게 되겠지.

그럼에도.

챈들러 가문이 가사 상태의 주술사를 살려 두는 이유는 간단하다.

매일 같은 꿈을 꾸면 진실로 믿어버린다. 마취와 세뇌다.

마왕 강림. 구원. 축복.

그런 게 정말이라고 믿는다.

영주에게, 생명력이 빠져나가는 것정도는 감당해야 할 일이 된다.

종말론적 협박과 세속적 기복.

그 두 가지가 결합된 트랩이다.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도 못했겠군.'

어디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마왕의 축복을 받으면서, 그 권속과 몇 대에 걸쳐 가문이 연결되어있다는 사연을.

〈재의 수도회〉에서 불타는 망치를 들고 성문을 때려 부술지도 모른다.

비프 론이나 예메라를 섬기는 열혈사제들이, 가문 전체를 이단심판에붙일 가능성도 있다.

챈들러를 바라보고 물었다.

"그런데 왜 나지?"

문제는 그거다. 갑자기 내게 이야기를 하며 도움을 요청하는 까닭을알 수 없다. 챈들러가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그때 귀하를 만난 이후. 그 꿈이 걷혔소. 더는 그〈계시〉을 받지 않게 되었지."

"마왕 강림을 꿈꾸지 않게 되었다는 거냐?"

챈들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다른 계시를 받았소. 투구를 벗은 그대가. 내성 지하의 골렘들을 부수고, 망령으로 가득 찬 세계를 갈라내는 계시를."

"내가 그렇게 나왔다고?"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병상에 누워 계신 아버님도 같은 꿈을 꾸었다고 하오."

챈들러 남작.

그가 꾸는 꿈은 의도된 주술이다.

'거기 내가 나왔다는 건.

그 주술에 내가 엮여 들어갔다 는걸 뜻한다. 어떤 식으로? 어떻게?

왜? 궁금한 게 하나둘이 아니었다.

눈앞에서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약 계시가 거짓이라면, 우리를누대에 걸쳐 기만한 주술사 아이작은 반드시 죽어야 하오."

챈들러가 격앙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계시가. 진짜라면! 부디 함께 실현시켜 주시오. 우리를 노예의 운명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면, 내 아버지와 내가! 가문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드릴 거요."

그 순간이었다.

[퀘스트 활성화]

[고분 속의 주술사 - 챈들러 가문의 저주]

격동의 세월, 남부를 지배하던 대주술사 벨'호멧 아이작은 챈들러 가문을 대대로 노예로 삼았습니다.

아이작은 단단한 결계를 치고, 반쯤 죽은 상태에서 가주들의 생명력을 빨아먹으며 생존했습니다.

악랄한 주술사 벨'호멧 아이작을 퇴치하십시오!

당신을 만난 이후, 수십 년 동안의〈계시〉에서 벗어난 의뢰인들의 신뢰도는 대단히 높습니다.

퀘스트를 승낙할 경우: 챈들러 가문 전원의 당신에 대한 호감도가 크게 상승합니다.

퀘스트를 성공할 경우: 제국 남부지역에서 당신의 평판이 크게 상승합니다. 더 중요한 건, 챈들러 가문이 당신에게 아주 특별한 보상을 할지도 모른다는 거죠. 무기의 도시에서 주는 가장 특별한 보상. 기대되지 않으세요?

퀘스트를 거절할 경우: 첸들러 형빈이 높은 확률로 우울증에 걸립니다. 다른 '터무니없이 강한 자'를 막무가내로 수배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오랜만에 퀘스트창이 뜬다.

퀘스트창이 뜨는 기준은 알 수 없었다. 어떨 때는 뜨고, 어떨 때는 뜨지 않는다. 레나와 함께하는 활동은 별다른 퀘스트가 뜨지 않는다.

이 세계의 그물망은 일관성 따위를 유지하지 않는다.

'으음.: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어차피 수락해야 할 퀘스트지.'

마력 액을 알아보는 건 물론이고,

레나를 지부장으로 만들기 위해서도필요하다. 그런데 챈들러가 직접 요청한다. 보상까지 얻을 수 있다.

'문제라고 한다면.'

던전을 지키는 강철 골렘들의 능력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 정도다.

수백 년 뒤까지 이름을 남긴 대주술사가, 자기 무덤을 지키기 위해 만든 골렘들이다.

전보다 몇 배는 강해지긴 했어도,

꼭 이긴다는 보장은 없다.

그렇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삶이 반복된다는 확신이 있다.

'죽으면 또 동굴로 돌아가겠지.'

레나와 다시 시작이다.

그녀를 T&T 지부장으로 키워 주기로 결심했다면.

〈시나리오〉를 클리어해 보기로 결심했다면, 이게 가장 빠른 길이다.

죽을 때 죽더라도, 골렘과 싸워 본 경험은 가지고 돌아갈 테니까.

'해 보자.'

수락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레나에게 눈길을 보냈을 때였다.

"엄청난 이야기군요."

레나는 내게 눈을 찡긋하더니 짐짓 심각한 말투로 말했다.

"물론 저희 스승님은 강하셔서 골렘 던전쯤은 문제없으시겠지만. 사실 저희는 내일 다른 곳으로 갈 계획이었습니다."

챈들러의 표정이 안타까움으로 일그러졌다.

"그. 그렇지만!"

"휴, 사정이 딱하시니. 일단 스승님께서 생각해 보시고 응답을 주실 겁니다."

챈들러는 몇 번이나 고개를 조아리며 물러갔다.

"왜 바로 수락하지 않았지? 골렘들에게서 마력 액을 빼내야 한다고 하질 않았나?"

"한 번쯤은 튕겨 줘야죠. 우리 스승님, 해 달라면 다 해 주는 분 아니잖아요?"

"후. 대단하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느긋하게 계시다가, 내일 점심 지나서 가시는 게 어때요?"

피식 웃으며 끄덕였다.

"그러지."

나는 밤톨이를 쓰다듬었다.

다음 날, 챈들러를 만나러 갔다.

녀석은 제대로 못 잤는지 뜬눈으로 나를 맞았다. 레나가 잔뜩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전 계획대로 하자고 했지만, 저희스승님이 너무. 공자님을 소중하게생각하시네요. 원래 이러면 안 되는 건데.

연기가 일품이었다.

보고 있는 나까지도, 정말 일정이 잡혀 있었던가 싶을 정도였다.

"정말 고맙소. 일정 차질로 생기는 손해는. 어떻게든 메꿔 드리겠소.

귀하는 내 생명의 은인이오! 고통스럽고 끔찍한 운명에서 우리 가문을 구해 주었다오."

챈들러가 양손을 붙잡고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호감도가 올라갔다는 메시지가 연달아 주르륵 떠올랐다.

그에게는 안된 일이었지만, 하루뜸을 들인 게 극적인 효과는 있는것 같았다.

"그래. 그럼 내성으로 가지."

"안내하겠소!"

[첸들러 가문의 저주]

[퀘스트를 수락하셨습니다.]

회색 빛깔로 되어 있던 퀘스트창이파랗게 빛나며 활성화됐다.

녀석은 도시를 나란히 걸으며 나를 성으로 안내했다. 챈들러 남작은 뛰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무척 흥분한 게 한눈에 느껴졌다.

"고맙소! 정말 고맙소!"

"으음. 조용히 걷자."

나는 도로에서 외치는 그를 적당히 진정시켜야 했다. 남작에게 인사하는 시민이 많았고, 대체로 무척 호의적이었다. 내가 그동안 전해들은'영주의 아들'을 대하는 태도와는 조금 달랐다.

피하지 않았고 두려워하지 않았다.

식곤증으로 하품을 하다가, 챈들러형빈을 발견하고 반갑다는 둣 손을 흔드는 상인들도 있었다.

도로를 지나고, 방어에 기능적으로 보이는 구불구불한 계단을 올라가내성에 도착했다.

- 끼이이익.

우람한 체구의 경비병이 내성 문을 열었을 때.

나는 안을 둘러보고 생각했다.

'의외로군.'

내성은 화려하지 않았다.

선대로부터 내려온 공간인 만큼 넓고 컸지만, 약간 비루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검소했다.

사치를 부린 흔적은 그 어디에 도보이지 않았다.

쿨력!

저 앞에서 부축을 받아 내려오는 인간이 고통스러운 기침을 했다.

적어도 여든 살은 될 법한 노인이었다. 곁에 선, 건장한 체구의 시녀가 든 손수건에 피가 묻어 있었다.

"아버지! 누워 계시지 않고.!

챈들러가 외쳤다.

'지금 아버. 지라고 한 건가?'

128화 패치워크 (8)

***************************************************

챈들러의 '아버지'는 나를 향해 힘겹게 걸어왔다. 지팡이를 짚은 팔이 작게 떨렸다.

노인의 주름은 오래된 기억과 시간이 쌓여 깊게 파인다.

그 아래에는 켜켜이 쌓인 지혜와 통찰이 들어차거나, 뻔뻔함과 욕심이 자리 잡는다.

하지만 걸어오는 노인, 그라스미어영주의 모습은 어딘가가 부자연스러웠다.

달랐다. 천천히 쌓인 기억과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주름살은 깊었지만, 강제로 시계추가 잡고 흔들려진 모습이었다.

'잡아먹었군.'

억지로 돌린 시겟바늘. 그 아래로 쏟아지는 생명력을 누군가 입을 벌리고 털어먹었다.

"아버지! 안 누워 계시고. r챈들러가 달려가 노인을 부축했다.

"널 구해 줄 분이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느냐?"

가까이서 본 영주의 상태는 더욱 심각했다. 몸이 쪼그라들어 있었다.

하지만 눈빛은 흐리지 않았다. 총기와 결단이 살아 있었다.

"버터스 챈들러라고 합니다. 불민하나마 그라스미어의 영주를 맡고 있습니다."

노인은 깍듯한 존댓말을 구사하며 저자세로 나왔다.

'독특한 인간이군.'

그는 대도시의 영주이며 백작의 위位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억지로 꾸민 티는 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며 존댓말을 쓴다고 해서, 그의 권위가 손상되다는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다.

"그라스미어 백작인가. 당신이 무덤 속 주술사에게 생명을 빨아 먹히고 있는 거요?"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꿈에서 본 그날 뒤로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부담스럽군.' 흡수한 제국 예법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약간 부담스러운 태도다.

하지만 주위의 시선이라고 해 봐야영주를 부축한 시녀 한 명 정도다.

그녀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익숙한 건가?'

백작은 우리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넓은 성의 복도를 지났다. 면적에 비해 관리인과 경비의 숫자는 적다.

하지만 한 명 한 명이 책임감과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지나가는 영주에게 존경이 담긴 눈빛으로 웃으며 깊게 고개를 숙였다.

흔한 혐오나 공포, 알맹이 없이 텅 빈 동경의 시선은 없었다. 대우가 좋은 모양이었다.

응접실은 햇빛이 들어 밝았다.

가로세로 20미터 정도 되는 커다란 방이었다. 휑하게 느껴질 정도로, 사치품 따윈 전혀 없었다.

나는 백작과 마주 앉았다.

"송구합니다만, 제가 꿈에서 뵌 분이 맞는지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투구를 벗어 달라는 이야기였다.

챈들러의 질문과 비슷한 맥락이다.

나는 주위를 슬쩍 돌아봤다.

"여기 있는 인간들은.

"모두 믿을 수 있는 자들입니다."

- 철컥.

투구를 벗었다. 마스커레이드는 쓰지 않았다.

"아아아.

백작은 깊게 탄식했다. 그의 손끝이 떨렸다.

"제가 꿈에서 뵌. 그분이. 그분이 맞습니다.!"

"흐음. 이번엔 내가 하나 물어보지.

지하의 주술사가, 어떤 식으로 생명을 빨아들이는 거지?"

구체적으로 듣지 못한 이야기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챈들러도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았다.

백작은 뒤로 돌며 상의를 벗었다.

탄탄한 몸에 강제로 시간이 지나간 흔적이 깊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척추를 보십시오.'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심각했다.

척추 근처에 촘촘하게 구멍이 뚫려있었다.

비슷한 크기의 깊고 작은 구멍들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빼곡했다.

노인의 둥이 묘하게 울렁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탐지 스킬을 썼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것들이 척추를 중심으로 무수히 움직이고 있었다.

'벌레인가?'

챈들러와 크리스티나는 물론, 인간죽이기를 나뭇가지 꺾는 것보다 못하게 생각하는 레나조차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아버지. r보다 못한 챈들러가 달려들어 다시상의를 입혔다. 백작이 작게 기침 을하고 아들에게 말했다.

"기괴하냐? 저분이 아니라면, 이제네가 이런 꼴이 되어야 한다."

백작이 다시 나를 바라봤다.

"이렇게 등에 관을 꽂고 벌레를 넣습니다. 눈으로 안 보이는 크기의 녀석들입니다. 낮 동안 척수를 빨아들이지요. 그리고 매일 밤마다 가사상태에 빠진 주술사에게 기어가서.

쿨력!"

기침이 이어졌다. 듣기만 해도 고통이 느껴졌다. 백작은 몸을 들썩이다 힘겹게 말을 이었다.

"흡수한 생명력을 다시 주술사에게 불어넣습니다."

"주군.

크리스티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이런 거였습니까. 충격 받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게."

"그래."

"화가 납니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그 주술사를 반드시 제 손으로 짓이겨 버리겠습니다."

흠칫할 정도의 살기였다. 영주가 작게 웃었다.

"건강한 호위를 뒀어. 좋군."

그때 였다.

기침이 서서히 잦아드는 백작을 흘끗 바라보더니, 레나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심각한 상황이란 건 잘 알겠습니다. 그렇지만 먼저 확실히 해 둘 게있어요."

"크흠, 말하게."

"아드님이 말씀하시더군요. 가문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드린다고. 백작님 뜻인가요?"

"물론이지! 뭐든 다 내드리고, 다해 드려야지. 바로 내 아들을 구하는 일인데, 어찌 망설이겠나.!"

하지만 레나는 질문을 전혀 늦추지 않았다.

"그건 챈들러 가문의 가주家主이자 동시에 그라스미어의 영주領主로서 말씀하시는 건가요?"

"쿨럭. 무슨 소린가?"

"이를테면, 영주의 권한으로 그라스미어 무기 창고를 스승님에게 완전히 개방하겠다는 확약이겠죠?"

"으홈."

백작의 기침이 거짓말처럼 및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막 숨이 넘어갈 것 같던 그가 갑자기 10년은 더 젊어 보였다.

"허허허.

그라스미어 백작, 허버트 챈들러가 작게 웃었다.

"동정해 주지 않는군."

"동정이라뇨. 굉장히 재밌는 말씀을 하시네요. 제가 어떻게 감히 백작 각하를 동정하겠습니까?"

"허허허헛.

기침은 온데간데없었다. 착 가라앉은 눈빛이 빛나고 있었다.

"뭐가 필요한가? 제시해 보게."

"글쎄요. 그냥 말씀을 확인받고 싶었을 뿐이에요."

백작은 나를 바라봤고, 나는 레나를 흘끗 바라봤다. 어차피 해 줄 퀘스트인데 왜 저렇게까지 하나 싶기도 했지만, 레나는 무척 진지했다.

"얘기는 저랑 하시죠, '영주'님."

"기력이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무기 창고는 곤란해. 황실에서 선점한 물건이야. 그걸 주면 우리가 곤란해지네."

"군대를 무장시킬 계획은 없어요."

"하핫, 그렇다면 문제 있나? 가져갈 수 있을 만큼 가져가게. 영주로서 내 확실히 서약하지."

"그럼 먼저 〈선조들의 전당〉부터이용할게요."

"아니 자네. 어디까지 알아본 건가?"

"기본만 했는데요, 영주님?"

"허허허허.

백작이 뒤로 몸을 기대며 웃었다.

웃음소리 뒤에서 혈기 왕성한 젊은이가 비쳐 보이는 듯했다.

"장사를 해도 잘하겠군. 재밌는 친구야. 자네에게 소개시켜 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 올 때가 됐는데.

노파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던 챈들러의 얼굴에도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 였다.

- 털썩.

레나와 대화하며 잠시 기운을 차리는가 싶던 영주가 눈을 감고 픽 쓰러 졌다.

"아버지!"

챈들러가 소리쳤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영주를 살폈다. 하얗게 뜬 얼굴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집사와 시녀가 뜨거운 수건을 영주의 손발 에두르고 마사지를 시작했다.

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라스미어의 잘 정비된 도로를 생각했다. 걱정 없이 망치를 두드리던 대장장이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강박적일 정도로 검소한 성 내부와, 사용인들의 존경 어린 눈빛까지.

'명군明君인가.'

백작은 주술사에게 꾸준히 생명을 먹혀 왔다. 세금을 걷을 때도, 행정을 지휘할 때도, 손님을 맞이하는 응접실 의자 위에서도. 백작의 등에서는 매 순간 벌레가 꿈틀거린다.

그때마다 백작은 진실을 깨닫는다.

자신이 노예라는 진실을.

허황된 굴레로 아무리 자신을 둘러도, 자각할 수밖에 없는 피착취자로서의 삶이다. 그게 백작을 조금 더성숙시켰는지도 모른다.

"한 번 쓰러지시면 다음 날에나 일어나십니다."

시녀가 백작을 주무르며 말했을 때였다. 문득 밖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호출을 확인한 집사가 조심스럽게 챈들러에게 말했다.

"손님이 찾아오셨다고 합니다."

"누구지?"

"오늘까지 부탁받은 물건을 구해 오셨다는데, 여기로 들일까요?"

"그분인가? 드디어 오셨군. 그렇게 해 주시오."

"모시겠습니다."

나는 투구를 고쳐 썼다. 곧 집사의 안내를 받아 한 남자가 응접실로 들어왔다. 첸들러가 앞쪽으로 나가 남자를 맞았다.

"오랜만입니다. 이쪽은 우리와 함께하는 분들이니 주저 없이 말씀하셔도 됩니다."

챈들러가 옆으로 물러서며 레나와내 쪽을 가리켰다. 놀랍게도 들어온 자는 낯익은 얼굴이었다. 그가 먼저 나를 알아보고 입을 열었다.

"당신은.!"

성에 들어오기 전에 본 인간이다.

내게 금빛 명함과 정체불명의 새까만 카드를 준 남자.

언제든 자신이 묵는 여관으로 찾아오라던 남자.

진네이 가문의 가주, 유베. 그가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때 본 그분이구려.! 역시 범상치 않은 분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여기서 뵙게 될 줄이야!"

"두 분, 구면입니까?"

챈들러가 끼어들었다. 진네이가 연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뵌 적은 한 번밖에 없지만, 계속구면으로 지내길 바랐던 분이지. 아, 공자님. 실례했군. 물건은 여기에."

- 툭.

진네이 유베가 품에서 커다란 두루마리 몇 장을 꺼냈다.

레나가 슬쩍 두루마리를 보고 눈을 크게 부릅떴다.

"이거 설마.?"

"오, 뭔지 알고 계시나?"

"내가 못 구한 건데.!"

레나가 분한 표정을 지었다.

"후후후. 내가 못 하면, 다른 사람도 하면 안 되나? 그거 되게 특이한 사고방식이네?"

레나가 눈썹을 추켜올렸다. 하지만 책상 위에 놓인 두루마리의 가치를 인정하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이게 뭐길래?"

내 질문에, 챈들러 형빈이 대신 대답했다.

"골렘 설계도요. 저 아래에서 주술사를 지키고 있을 놈들이지. 이번에 놈들을 부술 작정을 했으니. 알아볼 필요가 있어 구했던 거요."

진네이를 바라봤다.

나에게 골렘 던전의 존재를 처음 알려 준 자가 이자다.

챈들러 가문의 사연을 알면서도 전설이라고 했으니, 나를 은근히 떠봤을 확률이 높았다. 이 건에 대해 아는지 모르는지. 얼마큼 아는 건지.

혹은 나에게 이 사건에 대해 넌지시 홀린 건지도 모른다. 나를 괜찮게 보고서. 나와 시선이 마주친 녀석은, 날 보고 눈을 찡긋거렸다.

'적응 안 되는 친화력이군.'

녀석은 두루마리를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설명했다.

"뭐, 설계도는 있는데. 안타깝지만 멈추는 법은 못 구했소이다."

이어 품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설명서는 구했지만, 희한한 고어로 되어 있고."

급하게 앞으로 다가온 챈들러가 두루마리를 서둘러 살폈다.

그는 곧 안색이 굳어지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전혀 못 알아보겠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모르겠군."

곁에 선 레나는 이미 다른 한 장을 집어 들고 세세히 한 부분씩 뜯어보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다. 그녀는 인상을 작게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이거, 구했어도 곤란했겠네요."

진네이 유베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렇지. 설계도가 있다고 일이해 결되는 건 아니라네. 모르는 자는 봐도 이해하기가 힘들지. 시간 맞춰구해 드리긴 했지만, 이럴 것 같아 가져오면서도 마음이 좀 불편했지."

"혹시 추가로 정보를 부탁드려도 되겠소? 기한은.

챈들러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을 때였다.

진네이가 그의 말을 잘랐다.

"그런데. 성 앞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하나 찾았지요."

"그 방법이 대체 뭐요?"

모두의 시선이 진네이 유베의 입으로 옮겨 갔다.

나에게 황금 명함과 새까만 카드를준 상인은, 과장된 몸짓으로 내 쪽을 향해 양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바로 저분."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지?' 여섯 쌍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골렘도 기계지. 기계 쪽에 놀라운 식견을 가지신 분이지요."

과장된 말이다. 헛소리다. 성문에서몇 마디 섞은 것 가지고 녀석은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니, 그런 능력은 없다."

고작 기계공학 레벨 3일 뿐이다.

별빛청여우가 쓰던 말도 안 되는 도구들이 떠올라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게〈기계〉라면 나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

"에이, 그러지 마시고. 분위기를 보아하니 이미 협조가 약속된 것 같은데. 한번 봐주시지요."

"부탁드리오."

"봐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모른다니까. 너희들이 모른다면 내가알 리가.

어쩔 수 없이 테이블로 다가가 두루마리를 바라봤다. 골렘에 대한 설계 설명도다.

군데군데 한 번에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지만, 여러 장의 두루마리를 겹쳐 보니 대부분 짐작이 갔다. 언어는 읽을 수 없어도 구조는 읽혔다. 골렘의 작동 원리와, 약점과, 마력액을 추출하는 방법이 머릿속에 흡수됐다. 나는 궁금해졌다.

근처에 선 좌중을 둘러보고 물었다.

"뭘. 모르겠다는 건지 모르겠는데?"

129화 패치워크 (9)

***************************************************

모두 멍한 상태로 나를 바라봤다.

"스승님. 이걸 그냥 다 이해하시는 거예요?"

"그게.

쏠리는 시선에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아는 게 당연한 것처럼 말하긴 했지만, 설계도를 알아본 건, 크라켄 뱃속에서 죽어 바다 밑에 가라앉은 별빛청여우 덕분이다.

스킬이 자연스럽게 발동돼 모두를 당황시킨 것 같았다.

"아. 설명해 주지."

최대한 알기 쉽게 설명했다. 알 필요 없는 부분은 제외하고, 전투에서필요한 부분만 말했다.

띠링, 띠링 소리와 함께 레나의 호감도가 올라갔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챔들러와 크리스티나, 진네이의호감도도 연달아 올랐다.

한창 설명을 이어 갈 때였다.

- 똑똑.

누군가 응접실로 들어왔다.

"진네이 유베 님, 전언이 왔습니다."

"내게 전언이.?"

"예. 자신을 17호 회원이라고 소개한분이 성 앞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말을 듣자 진네이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을 크게 떴다.

"이런.! 아무래도 당장 가 봐야할 것 같구려."

챈들러가 유베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했다.

"가져와 주신 물건에 대한 사례금은 상회를 통해 보내 드리겠습니다."

유베는 고개를 끄덕이곤, 나가기 전내 쪽을 보며 아쉬운 눈빛을 깜빡 빛냈다.

"이렇게 일찍 떠나게 되어 섭섭한걸. 꼭 한번 연락 주시오. 절대 후회는 안 하실 거요. 나보다. 훨씬쓸 만한 친구들을 소개시켜 줄 수 있소이다."

"쓸 만한 친구?"

유베가 문으로 향하면서도 내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카드를 기억해 주시오! 언제든 기다리고 있을 테니, 용무가 끝나면 꼭!"

그는 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허겁지겁 밖으로 빠져나갔다.

"급한 일인가 보군.

하지만 세 사람은 곧 다시 집중했다.

나는 설명을 이어 갔다.

"결국 여기, 여기, 여기에 충격을 줘야 한다는 이야기다."

관건은 어느 정도의 힘으로 골렘에게 타격을 주고, 얼마나 빠르게 피할 수 있느냐.

"설계도상 관절의 회전 반경은.

물론 이론과 실제는 다르다. 하지만 머릿속에 상대를 꼼꼼히 그려 보는 것만으로도 실전에서 큰 도움이 된다.

갑자기 사라지긴 했지만.

진네이가 구한 설계도는 골렘의 공격반경과 패턴까지 꼼꼼히 보여 준다.

철저한 회피.

그리고 핀 포인트에 반복해서 타격을 누적시키는 게 중요하다.

챈들러나, 크리스티나, 레나 가운데누군가는 한순간에 으스러져 핏물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설명으로는 부족하겠지. 내일부터 대련이다."

내 말에 챈들러가 대답했다.

"연무장을 준비해 놓겠소이다. 일단 오늘은 부디 편히 쉬고 계셔 주시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하는 사이 미리 준비가 다 되어 있었던 둣 집사가 나를 안내했다.

나름대로 극진히 대접하려는 듯했지만, 성 자체가 워낙 검소하게 지어진 덕분에 화려한 연회 같은 건 없었다.

그래도 커다란 특사용 방을 전 부나와 레나가 차지했다. 집사는 우리의 시중을 제대로 들기 위해 무척신경 쓰는 모습이었다.

"갑옷은 벗으셔도 됩니다. 믿을 수있는 시녀들만 들이겠습니다."

"내 정체를 알고 있다는 건가?"

"첸들러 가문의 저주도 아는 시녀들입니다. 어차피 가까운 자들에게는 숨길 수도 없으니, 철저히 믿을 수있는 사람들만 대대로 고용하지요."

"그런가."

- 철컥.

갑옷을 벗어 놓았다. 식사가 곧 준비될 거라고 말하며 집사가 물러났다. 그런데 레나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인간의 감정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뭔가 침울해 보였다.

"무슨 일이지?"

레나는 눈꼬리를 처연히 늘어뜨렸다. 그녀의 모습은 무척 가련했다.

도저히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어서 말해 봐."

레나가 풀이 죽은 채 조심스럽게 중얼거렸다.

"스승님이 저만 가르쳐 주셨으면 좋겠나 봐요. 필요하긴 하지만, 다른사람들에게 차분히 설명해 주시는 모습을 보니 뭔가 괴로워서요."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반응이었다.

몸을 돌려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냥 기분이 그랬다는 거예요.

죄송해요. 스승님은 저만의 것이 아니니까요."

레나는 말을 얼버무렸다. 뭐라도한마디 해 줘야 할 것 같았지만 결국 당연한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냥 의뢰를 달성하기 위해서야.

네 승급을 위해서기도 하고. 알고 있지 않나?"

레나가 조금 풀어진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차라리 지부장 따위 된다고 하지말 걸 그랬나.

"그런 말 하지 마. 신경 쓸 필요는없다. 결국 내 제자는 너 하나뿐이니까."

그때 마침, 문을 연 시녀들이 식사를 날라 오기 시작했다.

"헤에.

잠시 침묵하던 레나가 실없는 웃음을 홀렸다.

아마 향긋한 스프 냄새를 맡자 기분이 좀 나아지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정갈하고 커다란 식탁에, 메이드들은 음식을 내오면서부터 무척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 앞에 선 단발머리의 시녀가, 이마에서 식은땀을 홀리며 물었다.

"저. 드시지는. 않으시죠?"

고개를 끄덕였다. 시녀가 가져온 스프 그릇을 통째로 레나에게 밀었다. 레나 앞에 스프 그릇 두 개가 놓였다.

"저, 곁들일 식전 주를 준비했는데.

시녀가 옆에서 백포도주 병을 들고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술도. 안 드시는 거군요.

"네가 다 먹어."

나는 레나 앞으로 와인 잔도 옮겨주었다.

침울했던 그녀의 표정은, 놀랍게도급격히 풀어지고 있었다.

"이거. 이거 뭐예요? 뭔데 이렇게 맛있어요?"

"베르무트로 간을 한 카즈아린 스프입니다. 이건 피스타치오 버터를 바른 뒤 숯불에 구운 바닷가재고.

단아한 식기에 담긴 메뉴들이 차례차례 나왔다. 가짓수가 많지는 않아도 음식 하나하나가 무척 신경 써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나는 음식이 올 때마다 슬쩍 레나 앞으로 밀어 놓았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입꼬리가 숨길 수 없는 기쁨으로 실룩거렸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그래."

레나는 나오는 음식들을 알뜰살뜰하게 하나씩 다 발라 먹었다.

'저게 다 어디로 들어가는 건지 모르겠군.

"이것도 너무 맛있네! 맛있어.!"

그녀는 음식을 내주는 시녀 두 명과도 번갈아 눈을 마주치며, 연신맛있다고 밝게 웃어 보였다.

'무슨 일 생기면. 일단 먹여야겠어.'

한편 시녀들은 내 앞에 아무 접시도 안 놓이는 게 아무래도 영 불편한지, 꽃이나 장식이 놓인 예쁜 접시를 내 근처에 놓기 시작했다.

시녀들이 어쩐지 쩔쩔매는 것과는반대로, 나는 레나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식사가 끝나 갔다. 레나는 무릎 위로 올라온 밤톨이를 천천히 쓰다듬고 있었다.

"아까 그 상인은 어디 간 걸까요?

정말 당황하면서 나가던데.

그때였다. 식사를 다 내온 뒤 밖에 나가 있던 시녀가 들어왔다.

"저, 침구류는 최고급으로 준비했습니다!"

"침구류? 왜?"

그러자 어린 시녀가 무척 슬픈 표정을 지었다.

"잠도. 안 주무시는. 건가요.?"

- 달그락.

고개를 끄덕였다.

시녀의 표정이 점점 더 무너진다.

뭔가 잘못하고 있는 걸까.

"그럼 목욕물은! 목욕물은 허브를 띄워서 온천수로 준비해 드릴게요!"

"얼른 한다고 하세요. 울겠어요."

레나가 옆에서 작은 소리로 빠르게 속삭였다.

"목욕? 꼭 해야지. 계속 기다렸다."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할게요!"

어린 시녀는 잔뜩 기합이 들어 밖으로 뛰쳐나갔다.

시녀는 레나와 나를 서로 다른 탕으로 안내했다.

'레나는. 언젠가 온천에 같이 가자고 했었지.'

물에 잠겨 있으려니 레나와 보냈던 여러 생이 떠올랐다.

〈들어올래요? 목욕으로 안 끝나도 좋고. 〉

〈사양하지. 〉

〈흑맥주 풀고 목욕하면 진짜 괜찮은데. 싫어요? 〉

그때의 그녀는, 거미굴 안에 남겨 두고 나 혼자 불에 타서 죽어 버렸다.

〈지금 저랑 같이 가는 거,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 될지도 몰라요. 〉〈그깟 길드, 별로 상관없는데. 〉〈알지도 못하는 기만자의 호의에기대서 살고 싶지는 않아요. 〉그때의 레나는 슬라임에게 녹아 사라졌다. 그때와 지금의 레나. 같은 사람이면서도 같지 않다. 관계도, 상황도 달라졌다.

그때의 그녀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어쩌면 반복되는 다른 모든 것도.

'씁쓸하^.,

밖으로 나오자 갑옷이 반들반들 깨끗하게 닦여 있었다. 구석구석 먼지하나 없었다. 무언가 이거라도 해놓아야겠다는 필사적인 각오가 느껴졌다.

"아까 그 이가 닦아 놓은 거예요."

먼저 나온 레나가 뽀얀 얼굴로 갑옷을 가리켰다.

"대단하네."

이름이라도 알아 놓을까 싶었지만,

관두기로 했다.

그 이름 모를 어린 시녀도, 전화戰火나 마왕 강림의 제물이 되어 바쳐질 거다.

구해 줄 힘 따위는 없다.

그런 여유는 없었다.

아침이 밝았다. 집사는 우리를 성뒤의 개인 연무장으로 안내했다.

"경비대가 집결하는 성 앞의 연병장과는 별도로, 가문에서 사용하는 곳입니다. 연무장 쪽으로 내려다볼 수 있는 창문도 뚫려 있지 않지요."

레나가 끼어들었다.

"뭘 해도 비밀은 보장된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집사가 고개를 끄덕였고, 챈들러가집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신경 써 줘서 고맙네."

"모두 도련님의 것인데 뭘 그러십니까. 부디 목표하시는 바를 이뤄주십시오."

연무장은 그늘지고 폐쇄된 곳에 있었지만, 관리의 흔적이 느껴졌다. 무척 넓었고, 다양한 연습 장비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가운데에는 커다란 천으로 덮인 무언가가 있었다.

"저게 뭐지?"

챈들러가 가운데로 걸어갔다.

"두 달 전, 귀하의 꿈을 꿀 때부터아버지게서 이날을 생각하며 준비해둔 물건이지요."

그리고 비장한 표정으로 연무장 한가운데 놓인 천을 걷었다.

"와."

크리스티나가 작게 탄식했다. 레나도 말없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그곳에는 3미터가 넘는 골렘 모형4기가 서 있었다.

"안은 못 만들어도, 모양은 흉내 낼 수 있소. 그게 우리 장인들의 기술력이지."

"비밀이 새어 나갈 걱정은 안 했나?"

"그냥, 강판을 이어 만든 모형일 뿐이라오. 새어 나갈 비밀이랄 게있겠소이까?"

"실전 연습이 되겠네요."

레나가 벌써 칼을 겨누며 거리를 가늠하고 있었다.

"자. 그럼.

챈들러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내 쪽을 봤다. 챈들러뿐이 아니었다. 레나와 크리스티나까지 내게 무언가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뭐 어쩌라는 것이지?' 레나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지도를 부탁드립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첸들러, 크리스티나도 레나를 따랐다.

어쩔 수 없이 골렘 앞으로 다가갔다. 챈들러는 일단 강판으로 모형을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실제 골렘이 어떻게 움직일지. 어디를 쳐야 하는지는 역시 내가 도와줘야 한다. 설계도를 보고어제 하루 설명한 걸로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이건 그냥 교육보조재에 불과하다. 독학용은 아니다.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

구조도를 보고 파악한 골렘의 취약점을 연습용 검을 들어 하나씩 지적했다. 낡은 철검은 이미 집사에게 맡겼다. 제대로 된 무기는〈선조들의 전당〉에 들어가서 받기로 했다.

날 없는 연습용 검이었지만 아주 단단하고 밸런스가 잘 잡혀 있었다.

자루를 잡는 느낌도 아주 좋았다.

끼기를 쳐라. 핀에 타격을 누적시켜야 몸이 무너지는 구조다."

열 마디 말보다 한 번 보여 주는 게 나을 듯싶어 먼저 시범을 보였다.

- 콰직!

날 없는 연습용 칼이 그대로 강판을 뚫고 들어갔다. 3미터가 넘는 골렘 모형이 요란하게 앞뒤로 흔들렸다. 칼을 뺀 뒤 그대로 뒤를 돌아 다른 골렘의 관절 부위를 찔렀다.

손잡이까지 뚫고 들어간 칼을 빼며골렘을 발로 차 쓰러트렸다.

- 까강! 까가강!

챈들러가 마련한 골렘 세 구가 순식간에 쓰러졌다.

여섯 쌍의 눈에서 뿜어내는 열기가 한층 더해진 느낌이었다. 어쩐지 부담스러워, 쓰러트린 골렘들을 괜히 다시 일으켰다.

실단 이렇게 감을 잡자는 거지.

스승님.

?왜 그러지?"

실력을 숨기고 계셨군요!

130화 패치워크 (10)

***************************************************

"별로 그런 건 아닌데.

챈들러와 크리스티나는 연습용 검으로 완전히 깔끔하게 뚫린 철판을 바라보고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봉으로 철판을 뚫는 것 정도는 연습용 검으로도 간단하다.

'검기도 안 썼는데.' 내려앉은 정적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다들 묘하게 들뜬 표정이었다.

"연습 시작하지. 뚫린 곳을 노려라."

옆에서 그들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뭘 가르치는 입장이 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색했다. 하지만 가슴 안쪽이 살랑거리는 것 같은 기분도 있었다.

그때 였다.

- 띠링!

[검술 교육 Lv. 2를 활성화합니다!]

검술 교육. 기스-제-라이에게 살해당한 근위대에게 흡수한 스킬이다.

흡수한 녀석들 가운데 근위대 교관들도 있었던 모양이다.

생각해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황실 근위대를 두 번째로 만났을 때는, 적어도 교관급 기사가 아니면 초록색 빛을 뿜어내지 않았을 테니까.

[피교육자의-]

[약점 교정 방향이 당신에게 확인됩니다.]

[집중력이 일시적으로 상승합니다.]

[이해력이 일시적으로 상승합니다.]

[일반 스킬의 습득 속도가 상승합니다.]

[교육이 성공적일 경우, 피교육자의 당신에 대한 호감도가 랜덤으로올라갑니다.]

교육 스킬의 효과는 무척 뛰어났다. 내게 버프가 주어지는 게 아니라, 가르치는 녀석들의 성장에 가속도를 붙여 주는 스킬이었다. 하지만전반적으로 무척 효과가 좋았다.

"손목. 그렇게 돌리는 게 아니다.

반대쪽으로. 몸 전체를 실어서 쳐."

약점이 단순한 약점으로 보이는 게아니었다. 어떻게 교정해야 할지가중점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크리스티나와 챈들러의 자세에서 부족한 부분을 고쳐 줬다.

다음은 레나가 골렘을 공격하는 모습을 봐줄 차례였다.

- 퍼격!

모형 표적에 연습용 칼이 정확히 박혀 들어갔다.

"너는. 됐다. 그냥 그렇게 해."

"흐응.

그녀가 조금 뾰루퉁한 표정이다.

- 찡.

나는 날 없는 연습용 칼로 그녀의 칼을 툭 치며 말했다.

"잘하고 있으니까."

내가 다른 사람의 자세를 봐주는동안, 그녀는 곁눈질을 하더니 처음에 갖고 있던 허점을 이미 없애고 있었다.

'이 정도였나?'

예측했던 대로다.

회귀를 거듭하며, 재능과 호감도가올라가는 속도가 한층 빨라지고 있다.

- 달그락.

고개를 흔들었다. 기묘한 일이지만당장 알 수 있는 건 없다. 일단 눈앞의 의뢰 해결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사흘이 지났다. 그동안의 훈련 으로세 사람의 실력은 꽤 향상되었다.

"히압!"

챈들러가 왼발을 앞으로 딛고, 강한 기합을 내지르며 양손으로 쥔 칼을 강하게 내리쳤다. 골렘 팔의 너덜너덜한 타격 부위가 때맞춰 부서졌다.

- 쩌엉!

주저앉은 골렘의 목을 녀석의 칼이 시원하게 날아갔다.

수천 차례 타격으로 걸레짝이 된 부분이라 떨어져 나가기 직전이었다.

잘려진 골렘의 목이 요란하게 바닥을 굴러다녔다.

"차앗!"

내가 처음 보여 줬던 것과 비슷한 움직임이었다. 레나는 물론, 크리스티나도 이제 골렘의 타격 부위는 전부 익힌 것 같았다.

여기서 더 해 봐야 효과는 없다.

- 저벅.

나는 골렘이 쓰러진 장소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막 칼을 휘둘렀던 챈들러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제 날 공격해라. 골렘은 가만히 맞아 줄 리가 없으니."

레나는 올 게 왔다는 표정을 지었다. 챈들러는 천천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툭.

나는 몸의 몇 군데를 연습용 칼로가르켰다. 지금껏 세 인간이 연습한골렘의 약점과 같은 곳이다.

"훈련을 시작하지. 여기 한 번이라도 닿으면 오늘 훈련은 종료다."

일주일이 지났다.

"끄으으윽.!"

언제나와 같이.

눈을 반쯤 뒤집은 채,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챔들러가 보였다.

최대한 부상을 입지 않게 쳐냈는데도 녀석이 가장 적극적인 탓에 누적되는 데미지가 가장 컸다.

"많이 발전했군."

"하지만. 스승님을 한 번도 못 쳤는걸요."

"한꺼번에 덤볐는데도 그랬습니다."

"끄으윽. 끄으으으.

챈들러는 퉁퉁 부은 한쪽 뺨을 손으로 가리며 말도 못 하고 끙끙거렸다.

"뭐. 이 정도면 됐다."

다들 핀 부분을 어떻게 쳐야 하는지는 감은 잡은 것 같았다. 재능이 떨어지는 녀석은 없었다.

[〈검술 교육〉스킬의 숙련도가 미세하게 상승했습니다!]

[교육이 성공적으로 진행됩니다!]

[대성공!]

[레나의 검술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검술 랭크가 상승했습니다!]

[검술 Lv.4 ->Lv.5]

[레나의 호감도가 9 상승했습니다.]

[호감도 상한: 60]

[현재 호감도: 43]

[피교육자 랭크 상승 특전! 당신의 검술 숙련도가 크게 상승합니다.]

'나까지 영향을 받는 건가?' 그녀 외의 두 사람의 검술 숙련도와 호감도 역시 가파르게 올라갔다.

[첸들러의 검술 숙련도가 크게 상승했습니다!]

[크리스티나의 검술 숙련도가 크게 상승했습니다!]

[챈들러는 당신에게 검술을 배웠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첸들러는 그 사실을 당당히 알리고 다닐 것입니다. 챈들러가 검술로 명성을 떨칠 경우, 당신의 평판이지속적으로 추가 상승합니다.]

계가 누군 줄 알고?'

그때 였다.

"영주님이 찾으십니다."

집사가 찾아왔다.

실제 나이보다 서른 살은 더 들어보였던 영주는, 그 사이 얼굴이 더욱 파리해져 있었다.

"아버지.

챈들러는 매일 밤 부친의 상태를 확인하는 둣, 놀란 기색은 아니었다.

'몸이 무너지는군.' 나는 영주에게 물었다.

"주술사를 죽인다면, 당신도 죽는 거 아닌가?"

"충격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버려둬도 어차피 오래가진 못할 몸입니다. 모험이라도 해 보고 싶습니다."

"으음."

이 인간은 누구보다 간절하게 성공을 바란다. 의뢰가 성공한다고 해도, 실패한다고 해도 어차피 오래 살아남지 못할 인간이지만.

챈들러의 눈가가 다시 붉어졌다.

처음부터 이미 늦어 있었다.

"일찍 왔다면 당신이 살았을까?"

"허헛, 이미 지나간 시간을 어떻게 돌릴 수 있겠습니까? 어차피. 되돌아가서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영주가 천천히 말을 열었다.

"수련에 방해가 될까 봐 잠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게 느껴지더군요."

그가 나를 부른 목적은 간단했다.

영주는 고분의 구조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던전 입구까지는 제 아들이 안내해 드릴 겁니다. 녀석도 그곳까지 가는 길은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안쪽에서부터 인데 .

그가 숨을 골랐다. 나는 느긋하게 기다렸다.

"길은 하나밖에 없고, 빙빙 돌아 내려가면 커다란 홀이 있습니다. 별도로 문을 열고 가야 합니다. 안쪽에 주술사가 잠들어 있고, 전당 주변은 여덟 기의 강철 골렘이 감싸고 있지요."

"끝인가?"

"끝입니다. 하지만 사실 주술사에게 도전해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지요.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도 그동안 벨'호멧 아이작에게도전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첫 번째라고?"

"예. 사슬을 끊어 내려는 첫 번째 시도입니다."

"어째서?"

"대대로 도시가 잘 발전했으니, 주술사와 연결되어 있는 게. 정말 축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주들의 생명으로 도시가 번성한다고 믿었지요."

그라스미어.

대대로 노예임을 자각하는 영주가통치하는 도시.

영주들은 실체 없는 축복을 믿었다.

지하에 누운 주술사의 축복 덕분에 도시가 발전했다는 거짓 암시에 빠져 제 생명력을 빨려 왔다.

물론 그런 축복 따위 있을 리 없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화로 불을 지핀 아이들.

어떻게 두드려야 더 나은 품질의 철을 만들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더 제대로 날을 세울수 있는지 고민해 온 대장장이.

사욕을 부르지 않고, 도시의 발전에 힘을 쏟은 그라스미어의 영주들.

그게 축복이다.

저주는 그저 저주다.

주술사를 죽이고, 노예라는 자각에서 벗어난 챈들러 형빈이 영주가 된다면 이 도시는 무언가 달라질까?

- 달그락.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떨쳐 버렸다.

의미는 없는 일이다.

선정이건 폭정이건, 어차피 10년후에는 전부 쓸려 나갈 테니까.

"언제쯤 안으로 들어가시겠습니까?"

"지금 가도 상관없다."

기본적인 수련은 마쳤다.

시간을 끈다고 특별히 전력이 늘어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럼. 먼저 약속드린〈전당〉을열어 드리겠습니다."

영주는 아들에게 열쇠 하나를 건네주었다. 챈들러 형빈은 열쇠를 공손히 받아 들었다.

"문을 여는 방법은 알고 있겠지?"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챈들러가 앞장서서안내를 시작했다.

우리는 첸들러의 안내를 받아 성지 하로 들어갔다.

- 달각! 달각!

['밤톨이'가 관심을 요구합니다!]

[관심을 주지 않을 경우-]

[주인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높은 확률로 자존감이 떨어집니다.]

[매우 낮은 확률로 자율 랭크가 상승합니다.]

수련 기간 동안 자신에게 관심이 너무 부족했다는 둣, 밤톨이가 내주 위를 빙빙 돌고 있었다.

지금 가는 통로에는 경비병도 시녀도 없어서 별 상관은 없었다.

나는 녀석을 안아 들고 쓰다듬었다.

[밤톨이의 주인은 당신입니다.]

[누구보다도, 당신의 관심이 아이의 행복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칩니다.]

물론 쓸모는 전혀 없는 녀석이다.

하지만 일단 일으킨 이상 책임감을 가지고 돌봐 줄 필요가 있다.

곧 지하 복도 끝에 새까만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흑철?'

거대한 문엔 열쇠 구멍이 두 개있었다.

- 끼릭.

챈들러는 특이하게 생긴 열쇠 두개를 천천히 안에 넣었다.

- 끼긱. 끼긱. 끼기긱.

안쪽의 복잡한 굴곡을 열쇠가 하나씩 탁탁 자극하는 소리가 들렸다.

금속성의 소리가 이어졌다.

"이제 열겠습니다."

"그러지."

수련 기간 이후, 챈들러는 나를 스승으로 섬기겠다며 아홉 번의 절을 하려고 했다.

〈이런 가르침을 아무렇게나 받을 수는 없지! 내 감히 구배지례九拜之禮를 올리고 정식으로 제자가 되겠소! 〉〈. 정중히 거절하지. 〉물론 거절했다. 나야 별로 상관없었지만, 챈들러를 노려보는 레나의 눈빛에서 서늘한 살기를 읽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날 이후 챈들러의 태도는 조금 바뀐 듯했다.

- 끼기기기긱.!

나란히 뚫린 두 구멍에 전부 열쇠를 넣은 챈들러가 동시에 열쇠를 돌렸다.

거대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여기가 바로, 〈전당〉입니다."

- 저벅.

안으로 한 발을 디뎠다.

"넓군."

"무슨 신전. 같은데요?"

〈전당〉은 무척 넓었다.

입구에 서 있어도, 한눈에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수련했던 연무장의 몇 배는 되는 넓이라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원래 넓은 동굴이었다고 합니다. 확장 공사를 해서 창고로 쓴 것이지요."

안으로 들어가며 주위를 둘러봤다.

레나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여기가. 선조들의 전당?"

레나가 중얼거렸다.

"그렇소이다. 사실 실험적인 작품이 많지. 뭐가 있는지는 아버지도, 나도 제대로 모르오."

"얘기로 듣던 거랑은 좀 다르네요."

"어떤 얘기를 들으셨길래?"

"온갖 아티팩트가 가득하다던데요.

역시 소문을 믿을 게 못 되나?"

"하핫. 명품이긴 한데, 양산이나 활용은 좀 어려워 보이는 것들을 주로 넣는다오. 천천히 둘러보시오. 원하는 건 뭐든 가져가시고."

"기꺼이 그러죠."

레나와 챈들러의 대화를 홀려들으며 앞으로 나아가 걸었다.

그라스미어 지하.

선조들의 전당.

투명한 유리로 된 반짝이는 전시대 같은 건 없었다.

보석도 없었고, 장식도 없었다. 심지어 잘 정리되어 있지도 않았다.

여기저기 무기와 용도를 알 수 없는 기계들이 자리를 널따랗게 차지하고 놓여 있었다. 뒤에서 크리스티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칼은 어디 있습니까?"

"아, 이리로. 대검류는 안쪽에 많다."

챈들러가 크리스티나를 안내했다.

크리스티나가 가는 쪽을 슬쩍 바라봤다. 그녀가 날이 넓은 투핸디드소드를 쥐고 만족스러워하는 모습이보였다.

'역시, 대검은 힘이지.'

그녀에게 어울리는 무기였다.

나는 안쪽을 천천히 돌아봤다. 커다란 상자에 담긴 것들도 많았는데, 일부러 떼어 놓았는지 주로 뚜껑이 없는 게 많았다.

"담아 둘 때. 아무래도 어디 선물할 생각은 아니었나 보군."

"상용화는 안 되어도, 최고 장인이 실험적으로 만든 물건들입니다. 다른 데 넘기긴 위험한 것들이죠."

"기술 유출이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한참 이것저것을 돌아보다가, 나는 상자 안에 놓인 커다란 통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건 뭐지?"

"그게.

챈들러가 머리를 긁적였다. 본인도잘 모르는 것 같았다. 하긴 정기적으로 관리하는 게 아니니 당연하다.

그저 키만 나눠서 보관하고 있다가, 무언가 독특한데 감당하기는 어려운 게 생산되면 여기 가져다 놓는 것 같았다. 나는 멋쩍은 표정을 짓는 녀석에게 손을 내저었다. 공학스킬만으로 전부 원리를 파악할 수는 없었다. 다른 스킬이 필요한 것같았다.

'휴대용 대포 같긴 한데.

길이는 160cm 정도. 슬쩍 들어 봤다. 특수 재질의 철로 만들어졌는지, 들어 보니 무게는 사람 한 명 정도만큼은 됐다. 상자 바닥을 보니 설명서가 있었다.

천천히 설명서를 읽었다.

[기계공학 Lv. 3을 활성화합니다!]

화약을 넣고, 폭발시키는 구조는 아니었다.

'마력액을 사용한다고?'

131화 패치워크 (11)

***************************************************

핸드캐논에는 화약 대신 마력액을넣는 양과 방법이 적혀 있다.

커다란 구경과 길다란 포신이 강한 파괴력을 짐작하게 한다.

하지만.

마력액을 사용한다. 그 외에 다른 건 알기 어려웠다. 기계공학 스킬이 활성화되어 있었지만 마찬가지.

'쓸 줄만 알면, 골렘을 상대로 이만한 무기가 없을 거 같은데.'

마력 액은 없다. 그러나 골렘의 작동원이 바로 마력액. 한 기를 사냥하고, 마력액을 채운 뒤 다시 사냥한다면 효율이 좋을 것 같았다.

'어쨌건 지금은 사용이 어렵고.

조금 더 안쪽으로 걸어갔다. 탱크와 연결된 화염방사기가 보인다.

"안에 든 액체를 발사하고, 1초 후에 발화되게 만든 병기입니다. 저 도아는 병기지요."

"그런가."

"병기 자체는 상용화가 가능합니다만. 발화 액이 문제입니다."

"〈그라스미어의 불〉말인가?"

챈들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잘 아시는군요. 우리끼리는 불이 아니라 분노라고 부릅니다. 대장장이의 분노라고 말이죠. 장인이 평생 한 병을 뽑아내기 힘든 물건인데. 사실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들 자기만 아는 곳에 꼭꼭 숨겨 둔다는군요."

문득 유블람의 대장간 노인에게 속은 기억이 떠올랐다.

"혹시.

"말씀해 주십시오."

"저걸 방어하는 가루는 없나?"

챈들러가 갸웃한 표정을 했다.

"그런 물질은 없습니다. 단순히 감각을 죽이는 거라면 몰라도."

그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뜨거움을 잊는다는 건 위험합니다. 그 가루는 철저히 사용을 금지하고 있지요."

'역시 그런 거였나.' 나는 다시 무기를 둘러봤다.

이걸 안쪽에서 사용하는 건 무리다.

밀폐된 공간에 화염을 뿜으면 내부가 불타고 모두 죽기 딱 좋다.

강철 골렘들이 녹기 전에, 첸들러와 레나, 크리스티나가 활활 불타서 하얀 뼛가루가 될 거다.

"전장에서는 어떤가?"

"역시 무립니다. 재료도 구하기 어려운 데다, 이런 걸 들고 있다간 저격수의 집중 타깃이 될 테니까요.

몇 걸음 나가기도 전에 완전히 고슴도치가 되겠죠. 난전 중에 사용하면아군까지 새까맣게 타 버릴 거고."

"으음."

핸드 캐논은 사용법을 모른다. 화염방사기는 지하에서 무리다.

"일단 계속 둘러보지."

"예!"

넓은 안쪽을 계속 둘러봤다.

병기 류가 압도적이다. 그러나 골동품 따위도 만만치 않게 많았다.

재질을 알 수 없는 특이한 돌덩이도 있었고, 옛 시대의 금화가 담긴 상자도 있었다.

크리스탈로 정교하게 조각된 여신의 조각상이나 백금으로 만들어진 촛대 같은 것들은 아무렇게나 고물처럼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거, 버리기 아까운 건 정말 그냥 다 여기 쑤셔 박아 놨는데?'

- 달각! 달각!

밤톨이가 주위를 맴돌다 어딘가로 달려갔다. 바라보니 레나가 서 있는 곳이었다.

'멀리도 들어갔군.'

레나는 혼자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둘러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벌써 수첩에 무언가를 빼곡하게 적어나가고 있다.

그녀를 흘끗하며 나도 좀 더 안쪽으로 향했다.

프레스 장치를 사용해 위력을 분출하는 무기가 많았는데, 검기를 쓸수 있는 수준에서는 흥미와 의외성외에 큰 의미는 없는 것들이었다.

'레나 정도만 되도 쓸 만하겠군.'

그래도 그냥 나가긴 아쉬웠다.

야광주의 빛이 비치지 않는 곳까지 도착했을 때였다.

'이게. 뭐지?,

커다란 〈칼자루〉하나가 돌 벽에 박혀 있었다.

- 덤석.

칼자루를 잡았다. 손에 찰싹 감기는 느낌이 마음에 든다.

안에 무언가 길게 박혀 있는 게분 명했다.

칼자루는 맞지만 특이하게 생긴 녀석이다. 길이만 40cm가 넘는다. 두 손으로 잡아도 한참 여유가 남는다.

- 푸스스!

살짝 힘을 주자 바깥으로 먼지가 요란하게 피어올랐다.

"아, 기사님!"

가까이 있던 첸들러가 내가 칼자루를 잡은 모습을 뒤늦게 발견하고 내게 빠르게 다가왔다.

"그건. 칼입니다만, 지금은 사용이 어렵습니다. 뽑으실 수 없습니다."

"뽑을 수 없다고?"

"예. 장인이셨던 3대 영주께서, 검기를 불어넣지 않으면 칼이 안 뽑히는 기술을 개발하셨습니다. 검기를쓸 수 없는 녀석은 칼도 쓰지 마라, 뭐 이런 건데. 워낙 터무니없는 짓이라 곧 폐기됐습니다."

"불어넣으라고?"

"예? 아, 네.?"

'검기.'

[검기 Lv. 1을 활성화합니다.]

- 우우우응.

벽에 박혀 있던 칼이 미세하게 떨기 시작했다. 단단히 박힌 석벽 안에서 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어. 어.?"

챈들러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갔다. 크리스티나의 눈이 크게 떠졌다.

레나는 혼자서 저 안쪽 멀리 들어간 탓에 여기를 보지 못하고 있다.

아직 한 번에 뽑히지는 않는다.

잠들어 있는 칼을 일깨우는 시간이필요한 것 같았다.

덜컥거리던 녀석이 서서히 힘을 풀고 내게 몸을 맡긴다.

[경고!]

[스킬: 검기 Lv. 1의 남은 출력이20%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이 정도면 됐나.' - 스르릉!

나는 긴 칼날을 천천히 석벽에서 뽑아냈다.

- 우우우응〈

[잔여 출력: 15%]

칼을 느릿하게 감상했다.

전체 길이는 2미터에 가까웠다.

날은 제대로 세워져 있지만 칼의 가운데가 너무 두꺼웠다.

[잔여 출력: 13%]

무게를 조금 더 가볍게 하려는 건지, 검신 가운데에는 커다란 구멍몇 개가 뚫려 있었다.

'특이한 디자인이군.

그 사이를 내가 활성화한 검기가 은은하게 오가고 있었다.

그 모습에 왠지 끌려 검신 전체에 검기를 계속 유지했다.

[잔여 출력: 8%]

검집이란 게 아예 존재하지 않는 커다란 녀석이다. 무겁고, 튼튼하다.

- 부응!

2미터가 넘는 칼을 앞으로 휘둘렀다. 강한 풍압이 주위를 쓸어 갔다.

챈들러의 머리카락이 뒤로 확 흩날렸다.

[잔여 출력: 3%]

"뭐, 괜찮아 보이는데."

들고 다니면서 쓰기는 아주 괜찮을 것 같았다. 골렘 같은 커다란 녀석들을 잡기에 특화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 순간.

-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챈들러가 예를 갖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검주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동안결례가 많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무슨 헛소리지?"

"그게. 사령술에 이끌려 무덤에서 일어나셨는데도, 이렇게 오래 검기를 유지하실 정도라면 생전에는 검주셨던 게 분명합니다!"

곁에서 크리스티나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 달그락.

나는 어깨를 들었다 내렸다.

"그런 착각은 거절하지."

[잔여 출력: ?%.]

[검기가 강제로 해제됩니다.]

검신에 은은히 감돌고 있던 기운이한순간에 사라졌다.

"그 실력에 겸손까지.!"

"이 경지가, 순수한. 수련의. 결과라는 말씀이십니까?"

소란이 느껴졌는지, 레나가 저 멀리서 이쪽을 흘끗 바라봤다.

"소란을 피울 필요는.

"아. 비밀이신 겁니까? 알겠습니다! 철저히 지키겠습니다!"

챈들러가 호들갑을 떨었다. 크리스티나도 곁에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뭔 소릴 해도 안 먹히겠군.'

"난 돌아가지."

크리스티나가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벌써 끝내십니까?"

"그래. 이거면 됐다."

나는 크리스티나를 바라봤다.

수련을 시키면서 녀석과도 꽤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저번에 만났을 때는 투구도 제대로 벗지 못하고 있던 녀석이다. 스스럼없이 물어 오는 모습을 보니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저길 봐라."

손가락으로 까마득한 안쪽을 멀리 가리켰다. 커다란 배낭을 구해, 안에서 이것저것 주워 담고 있는 레나가보였다.

"대신 다 털어 가는 인간이 있으니까. 나는 이 정도면 됐다."

어차피 의뢰를 마치면, 언제라도 들어올 수 있는 장소다.

무리해서 담을 필요는 없다.

"레나가 끝나면 불러라."

"알겠습니다!"

억지로 떼어 놓긴 했지만, 입구에서 아직도 상기된 표정으로 서 있는 챈들러에게 통보했다.

방에서 느긋이 기다리고 있었던 건 결과적으로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다.

레나가 첫 번째 탐색을 끝내는 데는, 무려 일곱 시간이 더 걸렸으니까.

준비는 착착 진행되어 갔다.

챈들러는 나를 볼 때마다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레나의 신경을 긁는 듯했지만, 내가 의도적으로 챈들러와 거리를 둔 탓에 심하지는 않았다.

특사가 묵는 방에서, 시녀들이 저녁 식사를 날랐다.

"내일이군."

"맞아요."

- 툭.

로즈마리 솔트를 뿌린 양갈비 접시를 레나 쪽으로 밀어 놓았다.

내 앞에 음식은 없다.

시녀들도 이제 내가 식사하지 않는 것에 별다른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뭐든 익숙해진다.

나는 조금 초조해 보이는 레나를 바라봤다. 저런 모습은 익숙하지 않다. 오늘따라 별로 식욕이 없어 보인다.

"무슨 일이지?"

"우리, 충분히 대비한 걸까요?"

"뭐가 부족했나?"

"글쎄요. 왠지 모르게 불안해요."

"불안하면 나 혼자 가든지. 그게 나야 편하기는 할 텐데."

일부러 그녀를 훈련시켰다.

챈들러는 의뢰 당사자다. 대대로주술사의 노예로 살아왔다. 죽일 기회를 줘야 한다. 크리스티나는 어쨌거나 녀석의 호위다.

레나까지 데려가는 이유는 간단하다. 키워 주기 위해서. 본인이 불안하다면, 가지 않으면 그만이다.

'으음.'

문득 불길한 느낌이 든다.

'비슷한 상황이. 세 번째인가?'

레나는 감이 좋다.

후작이 찾아오기 전 동굴 안에 남아 있을 때도, 푸르손의 추종자들을 찾아갈 때에도 그녀는 내게 몇 번이나 경고를 보냈다.

하지만, 고작 한 성의 지하 던전에서 별다른 일이 있을까 생각할 때였다. 레나의 눈이 의심스러운 빛을 띄었다.

"스승님, 설마.

"설마?"

"저를 빼고 챈들러랑 가시겠다는 말씀은 아니시죠."

그녀의 눈썹이 안쪽으로 날카롭게 모아졌다.

그렇다고 대답하면 사망 플래그다.

챈들러 남작의 사망 플래그.

녀석의 죽음에 두 번 연달아 책임이 생기는 건 곤란하다.

"으흠! 그런 건 아니지."

"저랑 같이 가요. 죽어도 같이 죽는 거니까 괜찮아요."

시녀들이 식기를 다 치우고 물러갔다. 레나는 내 손가락 마디를 천천히 만지작거리며 차분히 숨을 골랐다.

날카롭게 세워졌던 그녀의 눈썹이,

다시 느슨하게 풀어졌다.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모두 무척 긴장하고 있었다. 특히 챈들러의 결의 가대단했다.

레나는 짐을 간추렸는지 좀 더 작아진 배낭을 떴다. 다리와 가슴에 뭔가를 차고 있었다.

'대단한 준비성이군.'

나는 그리 긴장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력은 이쪽이 압도적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쪽이 압도적이다.

가사 상태에 빠진 주술사와 몇 기의 강철 골렘. 유일한 문제는 함께 가는 녀석들의 안전이다.

하지만 반경과 동작 패턴은 대충 다 연습시켜 줬다. 살아남기는 할거다.

백작은 물론, 그 심복인 집사와 시녀들까지 우리를 정성껏 마중했다.

"정말 갑옷은 없으셔도 되겠습니까? 혹시 몰라서 다시 맞췄습니다만.

집사가 고급스럽게 빛나는 풀 플레이트 메일 한 벌을 보여 주며 물었다.

"이걸로 충분하다."

거절했다. 루비아가 샀던 40로티짜리 갑옷을 적당히 걸쳤다.

어차피 맞을 일은 없다.

골렘들에게 공격을 허용할 정도라면, 애초에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다.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고, 따라오겠다는 백작을 만류했다.

백작과 손을 꼭 잡고 작별을 나눈 챈들러가 아래로 우리를 안내했다.

- 저벅.

어둡고 좁은 복도에 작은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132화 패치워크 (12)

***************************************************

"벌레들만 지나다니던 길입니다."

챈들러가 낮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현 그라스미어의 영주인 백작.

그가〈포옹〉당한 이후, 아무도 이길을 다시 걷지 않았다.

제물로 바쳐질 가주家主 혼자 걸어야 하는 길이었다. 반원의 석조로된 회랑은 무척 길고 음산했다.

타닥타닥 소리와 함께 챈들러가 든 횃불이 타올랐다. 그러나 석벽 틈마다 스며든 어둠은 지워지지 않았다.

작은 횃불이 지나간 자리 뒤에는 곧질 척한 어둠이 다시 가득 채워졌다.

한참 동안 멎어 있던 오랜 공기가뼈 사이사이를 흘러간다.

"후우-."

레나가 작게 숨을 쉬었다.

- 달각.

밤톨이도 조심스럽게 걸었다.

'데려오지 않으려고 했지만.

녀석은 절대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어쩔 수 없었다. 혼자 놓고 가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복도의 경사는 부드럽다.

하지만 분명히 빙빙 돌아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

내려갈수록 조금씩 더 차가워졌다.

복도 끝에는 불길하고 숨겨진 것이,

희미한 유령의 흔적이 서성이고 있을 것 같았다.

"여기는 아무도 안 오나?"

"그렇습니다. 챈들러 가문의 피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이 복도로 들어올 마음 자체를 먹지 못합니다.

그게 바로 주술이고, 결계입니다."

밸'호멧 아이작.

가짜 주술사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확실히. 기분 나쁜 곳이군.'

복도 양쪽에는 열 걸음 간격으로 횃대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불이 붙은 횃대는 단 하나도 없었다.

햇불은 챈들러가 들고 있는 것뿐.

나선형으로 돌아 내려가는 회랑 양옆의 횃대들은, 바싹 빨아 먹히기라도 한 듯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

챈들러가 들고 간 불빛에 생겨난 그림자도 앙상했다. 몸체보다 큰 그림자가 벽을 타고 불길하게 울렁였다.

돌고 도는 복도는 몇 킬로미터나 이어지는 것 같았다.

툭.

챈들러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유독 새까만 횃대 앞에 섰다.

"여기입니다."

그가 새까만 햇대를 손으로 잡고 옆으로 돌렸다. 끼기기긱, 하는 날카로운 금속성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무로 만든 게 아니군."

"그렇습니다. 비밀 통로 손잡이지요."

"깊어도 너무 깊은데요. 아무도 못 찾았던 게 이해가 되네요."

레나가 작게 속삭였다.

- 쿠구구구구궁I석판이 천천히 움직였다. 저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드러났다. 딱 한사람 정도가 들어갈 만한 크기다.

"먼저 가겠습니다."

챈들러가 조심스럽게 발을 디뎠다.

계단은 좁고 어두웠다. 마치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나선형 입니다."

모두 그를 따라갔다. 발자국 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탐지.'

어디에도 트랩은 없었다. 서너 번을 돌아 내려갔다. 벽 없이 넓게 트인 공간이 나왔다.

"이리 오십시오."

잠시 계단을 내려갔다. 거대한 철문이 보였다.

까마귀 발톱 모양의 손잡이에서 질척한 핏빛 광채가 홀러나왔다.

'불길하군.'

"결계입니다. 잠시 멈춰 주십시오."

챈들러는 문 왼쪽 아래를 향해 걸어갔다. 그곳에는 매끈한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조각상이 보였다.

거대한 까마귀가, 날개 달린 천사들의 눈을 쪼아 먹는 조각이었다.

'말파스를. 기리는 모습인가.'

챈들러가 준비한 유리병을 열었다.

병에 담긴 자신의 피를 까마귀의 부리 부분에 천천히 부었다.

한 병을 다 부었을 때였다.

까마귀의 두 눈에서 은은한 핏빛기운이 감돌았다.

[네가 바친. 제물을. 받는다.]

피를 한껏 마신 까마귀 부리에서 음침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챈들러는 꿀꺽 삼킨 뒤 입을 열었다.

"이제 됐습니다."

수백 년 전 남부를 지배하던 대주술사 벨'호멧 아이작.

그가 남은 힘을 전부 소모해서 친 결계가 제물의 출입을 허용했다.

- 쿠구구구구구구구.!

십 미터가 넘는 거대한 문이 열렸다.

그 너머로 지금까지와 비교되는 광활한 공간이 펼쳐졌다.

안쪽은 꽤나 밝았다.

'무덤이라기보다는. 신전에 가깝군.'

대주술사 아이작.

그는 말파스의 권속일 터.

이곳은 원래부터 신전으로 기획되었는지도 모른다.

[벨'호멧 아이작의 전당]

[던전 랭크: B마이너]

[적정 레벨: 81-90]

[감히 접근조차 할 수 없는 레벨의 던전입니다.]

[적정 클리어 인원: 1인]

반투명한 메시지가 떴다.

'던전 취급이군.' 한데 적정 클리어 인원이 1인.

지금까지는 모두 적정 클리어 인원이 많은 경우만 보아 왔다.

갸웃했지만 물어볼 상대는 없다.

주위를 돌아봤다. 허공을 홀어보는자는 아무도 없다. 인간이라고 모두 이런 창이 보이는 게 아니다.

더욱 확실해진다.

"밤톨아, 년 이리 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두리번거리는 녀석을 자루에 담아 놓았다.

"움직이지 말고 얌전히 있어라."

[교감 성공! 밤톨이가 당신의 뜻을 이해합니다.]

K뼈의 군주〉의 숙련도가 약간 올라갑니다.]

- 터벅.

크리스티나가 들어가고 나까지 안으로 완전히 몸을 들였다.

"대단하네요."

"직접 보니 더 위압적입니다."

수 미터가 넘는 사방의 조각들은 돌이 아니라 황동으로 제작되어 있었다. 벽과 기둥들도 이야기를 들은 대로 황동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마왕 말파스는 까마귀다. 반짝이는 것을 좋아한다.

모두 금으로 칠할 수는 없었기에 황동으로 타협을 본 것 같았다.

- 저벅.

통로를 지나자 더욱 넓은 원형 공간이 펼쳐졌다. 수백 명의 인간이 여유롭게 서 있을 정도의 공간이다.

백작의 이야기대로다.

"골렘들은. 저기 있습니다."

챈들러가 앞을 가리켰다.

거대한 황동색 골렘 여섯 기가 사방에 큰 원을 그리며 서 있었다.

앞으로 한 발자국 나아가는 순간.

골렘 한 마리가 앞으로 한 발자국 움직였다. 가슴에 새겨진 까마귀 조각상에서 소리가 울렸다.

[제단에는. 오직 한 명의 제물만. 불순물은 진입할 수 없다.]

'적정 인원이 그 소리였나.' 챈들러 한 명이라면 골렘이 막아서지 않는다. 어쩌면 혼자 안쪽까지간 뒤, 주술사를 죽이고 돌아오면 끝나는 일일지도 모른다.

주술사를 살해할 경우 골렘이 통제를 잃은 가능성이 있으니까.

챈들러가 나를 바라봤다.

"선택해야 합니다."

이야기한 대로다. 그 혼자 들어가서 주술사부터 처리하거나, 아니면 차례대로 다 부수고 들어가거나.

나는 골렘을 바라봤다.

[기계공학 Lv. 3을 사용 중입니다!]

[탐지 Lv.5.]

[집중 Lv.2.]

_ 쿵.

- 쿠구궁.

천천히 다가오는 녀석의 동작 반경과 패턴이 한 번 확인됐다.

약점 부위가 읽혔다. 팔과 다리의 핀이 공격해 달라는 둣 그대로 보인다. 설계도를 확인한 터라 한층 더쉽게 눈에 들어왔다.

'이 정도면. 생각보다 쉽겠는데?'

부수는 쪽이 편하다.

이 정도면 쉽다.

"부순다. 셋이 오른쪽 하나씩. 내가왼쪽 셋을 상대한다."

나는 왼쪽 셋을 동시에 상대할 생각이었다.

대답을 들으며 앞으로 몸을 튕겼다.

'질주.,

- 팟!

가속이 걸린 몸으로 뛰어올라, 곧장 골렘의 팔에 칼을 찔렀다.

- 까강!

'약한데?'

황동 도금이 벗겨진다.

진회색 강철의 산화된 피막被膜이 칼질 한 번에 뜯겨져 나갔다.

'녹슬었군.'

- 쿠궁!

다른 골렘 두 기가 서로 다른 방향에서 짓쳐 온다. 가볍게 뛰어 옆으로 피했다.

- 끼긱! 끼기긱!

나를 놓치고 방향 전환에 실패한 골렘의 관절이 삐걱거린다. 스스로의 무게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수백 년을 움직이지 않았다더니.

머릿속에 상황이 그려졌다.

아무도 지하에 잠든 주술사에게 반항하지 않았다. 있지도 않은 축복에 고개를 조아렸다.

강철 수호자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키워 가고 있었다.

결국.

참고만 있으면 모른다.

싸워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그럴듯한 황색 도금을 벗겨 보려면 직접 칼을 들어야 한다.

위압적인 누런 칠.

그 안에 자리 잡은 건.

제 무게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삐걱거리는 유물뿐이 었다.

내구도 테스트는 이걸로 끝이다.

녀석들은 모두, 강철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부식되어 있었다.

'검기.'

[검기 Lv.1 최대출력.]

우우응!

대검이 떨리기 시작했다. 검신에 난 커다란 구멍 사이사이로 실처럼 흐르는 얇은 기운이 서로 엉겨 댔다.

[검기 Lv. 1을 활성화합니다!]

[잔여 출력. 3여기서 끝이 아니다.

철이라면 훨씬 간단히 공략할 방법이 있다. 굳이, 비정상적으로 튼튼해 보이는 이 칼을 골라 든 이유가 있다.

[산성酸性 Lv. 5를 발동합니다!]

- 파지이이이이익!

푸른 검기에 투명한 기운이 섞이며 연기가 피어올랐다. 절삭력을 가진 검기에 물질을 녹여 버리는 산성이 덧씌워진다.

산酸 속성은 세월을 가속한다.

이미 부식될 대로 부식된.

수백 년 전의 강철 골렘들에게.

최후의 종말을 고하는 조합이다.

- 파사사삭! 치이이익!

철을 부식시키는 기운이 검기를 통해 활활 솟아올랐다. 하지만 칼은 꿈쩍도 하지 않고 버렸다. 예전에 주운 낡은 철검처럼 부식되는 기세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애초에 검기 사용자만 쓸 수 있게 만들어진 칼. 절삭력은 검기가 해결할 테니, 무슨 짓을 해도 괜찮도록 튼튼하게만 버텨 달라는 느낌의 대검.

- 부우응!

처음 싸웠던 골렘이 주먹을 내려찍는다. 안타까울 정도로 느리다. 한발 옆으로 피한 뒤 왼팔의 핀에 칼을 박았다.

- 퍼벅!

녹슨 핀 주위에 칼이 박혀 들어갔다. 도금이 날아간다.

- 퍼벅!

붉게 산화된 피막이 부서진다.

- 퍼버버벅!

핀이 깨져 버린다.

지하 습기에 오래 방치되어 녹슨 데다, 강력한 산성 검기가 포인트를 제대로 뚫고 들어온다. 당연한 결과다.

'빠질까.'

패턴과 공격 반경, 속도까지 이미머릿속에 생생히 담아 왔다. 놈이 반격할 때가 됐다.

뒤로 훌쩍 뛰어 피했다.

- 부우응!

골렘이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파트너와 엇박자로 한층 더느린 춤을 추는 모양새다.

'한 번. 두 번 더 찔러도 됐겠군.'

- 콰과과광!

골렘이 휘두른 주먹이 땅에 맞았다. 느리지만 주먹은 강력하다. 맞으면 한 번에 생명력이 흑 깎일 것같다.

굉장한 파괴력.

평범한 인간들은, 주먹 한 방에 즙이 되어 버릴 힘이다.

물론 맞아 줄 생각은 전혀 없다.

다른 녀석들에게도 회피를 최우선으로 하라고 교육을 끝내 놨다. 세녀석을 흘끗 바라봤다.

다들 시작은 좋다.

- 부우응!

뒤에서 다른 골렘이 주먹을 휘두르는 순간 놈의 팔위에 가볍게 올라탔다. 수녀에게 흡수한 체술이 자연스럽게 발동된다.

- 타다닷!

팔위를 가볍게 달려 어깨 위에섰다. 바닥에서부터 4미터가 넘는 위치에 있는 목이 눈앞에 보인다.

다른 녀석들에게는 기둥이 되는 두 다리를 무너뜨리고, 팔을 무너뜨리고, 천천히 해체하라고 교육했다. 하지만나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하면 된다?

'검기.,

133화 패치워크 (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