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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벤다! 벤다!'

설령 죽더라도, 벨 것이다!

***

"허억···헉···."

연국의 황태자, 막리현은 갑작스레 목이 떨어진 서은현을 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사, 살았다.'

연국의 황태자인 그에게 주어지는, 구명법기.

축기기 수도자급의 일격을 낼 수 있게 해 주는 일회용 법기가 발동된 것이었다.

"···하, 하하. 하하하하!"

그는 미친 듯이 웃었다.

"내가, 내가 이겼다! 이 범인 녀석아! 너 따위는 절대 수도일족에게 도전할 수 없단 말이다! 하, 하하! 커헉! 컥!"

그는 피가 섞인 기침을 토했다.

무리하게 강력한 법술을 너무 많이 사용했다.

법력이 전부 닳았고, 다리에는 힘이 풀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일단 영석으로 법력을 회복하자.'

그는 상공을 바라보았다.

서은현과 함께 온 무림인 중엔, 어찌 되먹은 놈인지 축기기 장로들과 정면에서 일전을 벌이는 괴물마저 있었다.

'괜히 공을 세워 보겠다고 왔어. 일단 빠져나가야 한다. 자칫하면···.'

그때였다.

꿈틀―

"···?"

목이 떨어진 서은현의 시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

막리현은 멍청하게 시체를 바라보았다.

목이 떨어진, 몸만 남은 사체가, 기수식을 잡는다.

"뭐, 뭐야! 흐, 흐아아아!"

법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강시도 아니었다.

"왜, 왜 움직이는 거냐!"

그는 일어서서 도망치려 했으나,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때, 그의 의식 영역에 서은현의 의념이 잡혔다.

'이건···.'

집념(執念)!

무슨 일이 있어도, 일단 앞의 상대를 베겠다는, 가공할 집념이 서은현의 몸 안에서 남아 날뛰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이게 범인 따위가 가질 수 있는 집념이란 말이냐!'

서은현의 시체가, 기수식을 잡는다.

시체인지라 검에 기(氣) 따위는 모이지 않았으나, 막리현은 현재 법력도 없고, 몸은 움직이지 않는 상태였으며, 일회용 구명법기조차 써 버린 상황이었다.

검이 움직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어떻게 범인 따위가 이런 집념을 가졌단 말이냐! 어떻게 그런 걸 가질 수 있다는 말이야! 왜, 왜! 죽어서도 포기하지 않는 거냐!"

서은현의 육신이.

그가 평생 동안 무(武)를 연마해 온 그의 육신이.

수십 년간 인고의 세월을 보내며 검을 으스러져라 잡던 그의 손이.

평생을 연단(鍊鍛)해 온 그의 무(武)가, 죽어서도 스스로 움직이며, 제 할 일을 수행한다.

"왜 포기하지 않는 거냐! 왜 죽어서까지 저항하느냔 말이다!!!"

슈칵!

서은현의 검은 막리현의 입 위쪽을 깔끔하게 잘라 내어 버렸다.

그의 입은 죽는 순간까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벌어져 있었고, 그의 눈은 죽는 순간까지 믿을 수 없다는 공포감이 깃들어 있었다.

서은현의 목은, 떨어진 상태에서도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게 평생을 쉬지 않고 자신을 연단(鍊鍛)해 온 그의 이번 생애가 끝났다.

그것이, 서은현의 다섯 번째 회귀(回歸)였다.

5회차의 첫날

눈을 뜨자, 익숙한 내음이 풍겨왔다.

등선향의 숲 속.

'다시 회귀했군.'

나는 우선 내게 뭐라고 하려는 전명훈에게,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수면혈을 눌러 푹 재워버렸다.

'황태자는 베는 데에 성공했는지 모르겠군.'

몸이 움직였던 것 같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을런지...'

수도자들이 그런 것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하기사, 내가 경지에 올랐답시고 너무 안일했던 것이리라.

무림인도 평소에는 3할의 실력을 숨기고 다니고, 구명절초를 숨기는 이들도 많았는데 수도자라고 그 비슷한 것이 없을리는 없었다.

'끝의 끝까지 안 썼던 것을 보아, 아마 본인의 실력이 아닌 외물(外物) 같았다. 아마 법기(法器)의 한 종류겠지.'

다음부터는 수도자를 참할때는, 그런 구명법기가 있는질를 확인한 후 참해야 할 터였다.

나는 생각을 정리하며, 몸 곳곳에서 느껴지는 새로운 생명력을 느꼈다.

회귀한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지난 삶에서... 삼화취정에 올랐다.'

계속해서 꿈꿔왔던 성취였다.

동시에 반드시 저번 생에 이루고자 했던 목표이기도 했다.

그러나...

'너무, 빨리 죽었어.'

여태까지의 삶들에서는, 모두 내 수명에 맞게 죽었다.

전부 약 50년에 달하는 일생을 살며 차근히 성취를 정리하고 올려왔던 것이다.

그러나, 지난 생에서는 처음으로 내 수명 이전에 죽었었다.

'아쉽군.'

몇 십년을 더 살며 내 깨달음을 더욱 더 참오했다면, 어쩌면 오기조원으로 향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됐다. 아쉬워 해 봤자지.'

난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지금 또 다시 생을 얻은 것 역시 기적같은 일이었고, 나는 다시 얻은 이 생(生)에 작게 감사를 표했다.

"이, 이 보게 서 대리. 전 과장이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질 않는군. 여기는 또 어디고..."

김영훈과 오현석 차장이 전명훈을 붙잡고 안색이 하얘진 채 말했다.

"음, 제가 이전에 한의학을 배운 적이 있으니 한 번 진맥하게 해 주시죠."

"저, 정말인가? 믿겠네!"

나는 전명훈의 맥을 짚는 척 하며 다시 혈을 짚어 깨웠다.

"으음...? 여긴..."

난 녀석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다시 수면혈을 짚어 재워버렸다.

"음, 방금 깨어난 걸 보면 그냥 잠든 것 같습니다. 평소에 피로감이 쌓이셨던 것 같군요."

"그, 그런가? 다행이군."

"아니, 그럴 게 아니라 깨워야 하지 않나?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는데..."

나는 전명훈을 깨우니 마니 하는 김영훈과 오현석을 보며, 근처에 있던 큰 나무를 가리켰다.

"저는 잠시 저 나무 위로 올라가서 주변에 뭐가 있는지 보고 오겠습니다."

"으응?"

두 사람의 대답은 듣지 않은 채, 나는 나무를 향해 다가가, 지난 생에 깨달은 무공.

산군무와 월악보의 진체(眞體).

산군월악비(山君越岳飛)를 펼쳐보았다.

파아앗!

말 그대로 범이 큰 산을 넘으며 날아오르듯, 나는 겅중겅중 나뭇가지들을 뛰어올라 빠르게 나무 위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왔다.

"허어... 서 대리. 엄청나군."

"언제 그런 걸 배웠나?"

"하하..."

나는 적당히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설명을 해 주며, 사람들을 설득시켜 동굴로 끌고 갔다.

그리고 동굴에 바람막이를 만들고, 모닥불을 준비하며, 나는 계속해서 삼화취정의 깨달음을 갈무리했다.

'상대와 끊임없이 통(通)한다.'

삼화취정에 막 진입했을 때는 전투를 치루는 상대방과만 통하겠지만, 익숙해지면 익숙해질수록.

적이 아닌 주변의 동료, 혹은 키우는 동물의 의념과도 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능력이 극대화되면...'

결국에는 식물이나 무기물은 물론이고, 세계에 흐르는 수많은 의념을 읽어내어, 세계(世界) 그 자체와 통(通)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아마, 오기조원의 경지겠지.'

나는 오기조원의 경지를 어렴풋이 추측해 보며 싱긋 웃었다.

문득 웃음이 터져나왔다.

"하핫, 하하하핫!"

함께 모닥불에 쓸 나뭇가지를 모으던 오현석 차장이 의문어린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왜 웃는건가?"

"아, 아닙니다. 조금 웃긴 일이 생각나서 말입니다."

지금껏 삼화취정이 절정의 끝이라 생각해왔다.

하지만 삼화취정은 끝이 아니었다.

오히려 오기조원으로 향하는 시작일 뿐이었다.

'오기조원도 마찬가지겠지.'

끝은 곧 다음으로의 시작일 뿐이다.

나는 아직도 이렇게 미약하다.

하지만.

'언젠가, 반드시 도달할 것이다.'

시작이라는 건, 언젠가는 끝에 도달한다는 의미였으니까.

이번 생애의 목표는 당연하게도 오기조원!

이제, 수도자가 되기까지 한 걸음 남았다.

* * *

밤이 되었다.

회사 동료들은 모두 잠에 들었고,

낮동안 실컷 잠을 자던 전명훈이 일어나려 했지만, 내가 뒷목을 치자 다시 기절해 버렸다.

나는 동료들을 뒤로하고, 동굴 바깥으로 나가 황주삼들을 캐어먹고 내공을 찾았다.

그런 후 적당한 나뭇가지를 골라 깎아 목검으로 만들었다.

우우웅-

기와 의를 불어넣자, 목검에는 새하얀 검강이 맺혔다.

분명 평생을 단련해온 저번 생의 단단한 육체는 아니었다.

그러나, 더 이상 검을 쥐어도 손아귀가 아프지 않았다.

'좋군, 새로운 삶이란.'

항상 마지막 순간에 덮쳐온 죽음 직후, 그 다음에 느끼는 삶이란, 이리도 감사한 것이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내 몸을 관조했다.

그리고 검강을 바라본 후, 바람결에 실려오는 냄새를 맡았다.

'저쪽이군.'

타닷!

산군월악비를 펼치며, 나는 나무 위로 올라가 나무들을 건너뛰며 냄새가 느껴지는 쪽으로 달려갔다.

슈슈슉!

한 번 발을 디딜 때마다 나무들이 순식간에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듯 하다.

잊을 수가 없는 이 냄새.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의식 영역.

저곳에.

여우가 있었다.

찌릿, 찌릿!

여우의 영역을 육안으로 확인하자, 전신에 긴장이 맴돌았다.

여우의 영역은 여우를 중심으로 반경 30장이 넘는 크기였다.

'결단기 수준...!'

이제는 의식영역의 크기를 통해서 어느 정도 상대의 경지가 가늠이 가능했다.

지난 삶에서 스치듯이 한번 본 진씨세가 결단기 수도자의 의식영역이 딱 저 정도 크기였었다.

우웅-

나는 절정고수의 시야를 유지하며, 자색빛이 도는 여우의 영역을 관측하였다.

그때, 여우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눈을 떴다.

슈칵!

나는 황급히 의를 벼려내어 여우의 인식(認識)을 잘라내며, 귀식대법으로 존재감을 지워버렸다.

여우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이상함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다시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

'영역 밖에서 한참 떨어져 있었으니 망정이지.'

여우의 영역 안이었다면 택도 없었을 것이다.

연기기 저계 수도자의 의식과는 달리, 결단기에 준하는 존재의 의식은 훨씬 빽빽하고 농밀했다.

저 틈에서 결을 찾아내서 몰래 자를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

'...역시, 아직 내 수준으로 여우는 상대할 수 없다.'

말이 안 될 정도로 체급차이가 컸다.

'여우를 죽이기는 커녕, 도망치기라도 하려면 오기조원에는 도달해야 한다.'

그 전에는 저 빽빽한 의식의 틈을 감히 비집을 수도 없을 터.

'...일단, 삼화취정의 경지를 조금 연습해 봐야겠군.'

나는 눈 앞에 떠오르는 거대한 자색의 의식영역을 바라보며, 의식을 집중했다.

그러자, 얼마 후 자색의 영역은 적색으로 바뀌어가며 나와 여우의 의가 구분되었다.

삼화취정의 경지에서는 단순히 의념이 자색으로 보일수도 있었으나, 이런 식으로 의념을 통제해서 다시금 의가 적색과 청색으로 나뉠 수 있게도 인식할 수 있었다.

얼마간 자색의 의념과 청색, 적색의 의념을 통합했다 분리했다 해 본 나는, 천천히 땅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여우가 있는 쪽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디뎠다.

슈칵!

한 걸음을 내디디며, 동시에 다시 여우의 인식을 베어낸다.

다시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나는 차츰차츰 여우의 의식영역에 가까워지며 끊임없이 내 의념을 날카롭게 벼려내었다.

'의식영역의 안쪽에 들어갈 수는 없다. 하지만... 최대한 가까이 가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

나는 여우에게 얼마나 도달할 수 있을까.

의식은 어느 정도의 경계를 기준으로 공간을 장악하고 있는 듯 하지만, 사실 그 경계라는 것은 명확하지 않았다.

절정고수의 시야로 보기에 경계가 나뉘어 있는 듯이 보여도 사실 그 너머로도 끊임없이 미약한 의식이 흐르는 것이었다.

나는 그 미약한 의식을 자르며, 여우에게 접근해보는 것이었다.

'나는 어느 정도 수준인가.'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지금의 나는 어느 위치에 있는가!

나 자신을 시험할 기회이자, 동시에 월수궁무록을 이해하고, 단련할 기회였다.

부웅! 부웅!

내 목검이 허공을 가르며, 아주 미약하게 뻗쳐 있는 여우의 식(識)의 결을 베어나갔다.

한 걸음을 걸어갈 때마다 전신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무수한 의식의 결을 갈라낼 때마다 긴장감에 가슴이 두근댄다.

'아니, 더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한 걸음을 더 걸어갔다.

여우의 의식영역까지의 거리는 이제 서른 보가 남았다.

다시 의식의 결을 베어가며 한 걸음을 내디뎠을 때였다.

우우웅-

여우의 의식이 거세졌다.

뭔가 위화감을 느낀 것이었다.

나는 황급히 그 자리에서 온 집중을 쏟아 의식의 결을 베어내며 여우의 인식범위에서 벗어났다.

'멀다...'

지난 생의 김영훈이었다면, 이 정도 거리는 단숨에 스쳐지나고, 그대로 여우의 의식영역 안쪽에 진입할 수 있었겠지.

그러나, 나는 이 정도가 한계였다.

제대로 된 의식영역의 안쪽까지 스물 아홉 걸음. 이것이 현재의 내 수준인 셈이었다.

'아니,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를 악물었다.

'더 갈 수 있다.'

혼신의 집중력으로, 더더욱 많은 결을 본다.

그리고,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다시 검을 휘둘렀다.

휘익!

검에 맺힌 의(意)에 다시 결이 잘렸다.

'이게 내 한계라고?'

그렇다면 어쩌란 건가.

내 한계는 원래 훨씬 비천했다.

여우에게 가까이 오기는 커녕 항상 동굴에서 기다리다가 팔이나 뜯기는 처지.

한계의 한계를 계속해서 뛰어넘어 이 자리까지 왔다.

이번에도 내 한계를 뛰어넘을 것이다.

'뇌를 짜내라!'

뇌가 불타버릴 때까지!

절정경에 익숙해진 지금이야 편하지만, 원래 절정경에 처음 올랐을 당시에는, 뇌가 타는 듯한 기분을 상시 느껴야만 했다!

뇌가 타오르는 것 같다.

더욱 더 많은 의식의 결이 자세하게 보였다.

나는 다시 한 걸음을 디뎠다.

여우의 영역 안쪽까지의 거리가 점차 줄어들었다.

스물 일곱 걸음.

스물 다섯 걸음.

스물 두 걸음.

스무걸음.

열다섯 걸음.

그리고...

'열 걸음!'

과도하게 뇌를 과부하시킨 탓인지, 내 뇌가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한도를 초과한 긴장감에 근육과 몸이 한껏 수축해 있었다.

'한 걸음을 더 걸으면, 정말로 들킨다.'

이 다음 걸음은, 여우의 의식의 색조가 은은하게 새어나오는 곳.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여우에게 들킬수도 있다.

'...뭐, 어떤가.'

전신에서 식은땀이 비오듯 흘렀으나, 나는 오히려 히죽 웃었다.

'한 걸음을 더 내딛을 수 있다면, 죽어도 좋다.'

내 육신이 미친듯이 비명을 질렀다.

뇌에서 연기가 날 것만 같았다.

'살고 싶으면, 능력을 더 짜내라!'

나는 둔재다.

그러니, 기회가 될 때, 죽을만큼 능력을 짜내지 않으면,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죽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뇌에 피가 몰렸다.

동시에, 나는 반 보를 더 앞으로 나갈 수 있었다.

반 보.

본래는 일 보를 더 딛어야 했으나, 육체가 이 이상은 더 나아가는 것을 본능적으로 막아섰기에 생긴 현상이었다.

하지만...

'한계를, 넘었다.'

들키지 않았다.

여우는 여전히 잠을 자고 있었고, 내 육신은 내가 한계라고 생각했던 곳을 한참 넘어와 있었다.

나는 씨익 웃으며 기척을 죽이고, 다시 인식을 베어가며 뒷걸음질을 쳤다.

'이번 생에는 여기까지가 끝이었다.'

다음 생에는, 조금 더 깊숙히 들어갈 수 있겠지.

여우의 의식이 미치는 영향권을 완전히 벗어나, 나는 다시 동굴로 달려가며 생각했다.

'다음에는, 더욱 더...'

더욱 더 깊이 들어갈 것이다!

주륵...

동굴에 도착하자, 코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뇌를 하도 과부하시킨 탓인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쓰러질 것 같은 피로감에도,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하하, 하하하하하!"

이번 생.

일어난지 첫 날!

나는, 또 한 번의 한계를 넘어서는 데에 성공했다.

계속해서 한계를 넘어서서, 반드시 다음 경지에 이르리라!

다섯 번째 회귀.

오기조원(五氣朝元)이 이제 눈 앞에 보이는 듯 했다.

생(生)(1)

다음 날의 일은 여태까지와 비슷했다.

여우가 나타나 내 팔을 물어뜯고, 다음 날에는 뱀이 나타나 피를 달라고 했다.

또 다음 날에는 수도자 삼인방이 나타나 내 팔을 회복시켜준 후 동료들을 납치해갔고,

다음 날에는 해룡왕이 강 대리를,

곱사등이 괴인이 김 주임을 데려갔다.

그리고 나와 김영훈은 여느 때와 똑같이 공간 균열로 떠밀려 정신을 잃었다.

* * *

"...여기는."

눈을 뜨자, 모르는 천장이었다.

'천장?'

나는 화들짝 놀라 일어나서 주변을 살폈다.

김영훈이 주변에 널브러져 있었다.

아무래도 균열에서 빠져나온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연국 어딘가에 무작위로 전송되는 거야 알고 있었지만, 누군가의 방으로 전송되는 경우는 또 처음이군.'

나는 살짝 어이가 없어, 김영훈을 들쳐업고 방을 나가려 문을 열었다.

벌컥!

그리고, 나는 방문 앞을 지나는, 딱 봐도 시비로 보이는 한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꺄아아아악! 도둑이야!"

"...이런 젠장."

난 시비의 수면혈을 짚고 빠르게 방을 나왔다.

'여기는, 저택?'

그것도 상당한 권세가의 저택으로 보였다.

"저, 저기! 괴한들이 저쪽으로 도망갔어요! 그 괴한이 저를 잠재우고...아니, 어쨌든 괴한이 마님 방에서 나왔습니다!"

멀리서 내가 기절시켰던 시비의 목청이 울려왔다.

아무래도 우리가 떨어졌던 곳이 이 저택의 안주인 방이었던 듯 했다.

'젠장, 미치겠군.'

떨어져도 왜 하필 이런 곳에 떨어지는건지.

그렇게 생각하며 김영훈을 업고 빠져나가려 할때였다.

"감히 허세민 대감의 집에 숨어들다니, 정신이 나간 도둑놈이로구나!"

호위무사로 보이는 일류고수 두엇이 내게 달려오며 말했다.

'잠깐, 허세민?'

나는 그 이름을 듣고 멈칫했다.

그 이름인즉슨, 지난 생에서 황실의 몇몇 정보들을 들춰보며 본 정보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허 대감. 연국에서 다섯 손가락에 드는 탐관오리. 민초들에 대한 수탈이 심해서 몇 번이나 중앙에서 감사가 내려갔지만, 감사에게 뇌물을 먹이고, 연줄들을 이용해서 요리조리 빠져나간다는 망나니.'

어찌나 그 수탈이 심한지, 허세민은 권세를 이용해서 남의 집 신부를 빼앗아 첫날밤을 대신 치루기도 하며, 지주들의 땅을 온갖 트집을 잡아 빼앗아 소작농으로 만들어도 아무도 말을 못할 정도라고 했다.

'음, 그렇지. 인상깊은 쓰레기라서 기억에 남는 이름이었다.'

나는 도망쳐 나가려는 발걸음을 돌려, 다시 저택의 안채로 향했다.

'이런 쓰레기라면 평생 다 써도 재산이 부족할만큼 많을 테니, 내가 조금 빌려가도 아무 문제가 없겠어.'

나는 냉큼 허세민의 안채로 들어가 집을 마구 뒤졌다.

도중 허세민의 사병들이 들이닥쳐 나를 위협하려 하는 듯 했지만, 나는 전부 수면혈을 짚어 재워버린 후 허세민의 집을 계속해서 뒤졌다.

얼마나 그의 집을 뒤졌을까, 나는 허세민이 숨겨놓은 목궤에서 금두꺼비 열두 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음, 이 정도면 쓸만하겠군."

나는 금두꺼비가 든 목궤를 품에 넣고, 주변을 뒤져 금전 몇 푼을 더 챙긴 후 허세민의 집을 빠져나왔다.

이후 허세민의 저택이 있는 철륭성에서는 내 얼굴이 그려진 수배지가 나돌았지만, 나는 역용술로 얼굴을 바꾸고 장원을 사서 그 안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장원 안에서 김영훈에게 말과 무공을 가르쳤다.

그렇게 한 달이 되었다.

슈우우우-

나는 김영훈의 머리 위에 떠오른 세 개의 꽃을 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젠 한 달이군.'

삼화취정에 오른 내가 직접 김영훈을 지도한지 한 달.

김영훈은 내공을 어느 정도 쌓자마자 나와 같은 경지에 올랐다.

'가르치는 쪽의 경지가 올라갈수록, 배우는 쪽의 시간도 줄어든다...'

심지어 무공을 배운지 막 한 달이 된 차였기에, 살조차 채 빠지지 않은 김영훈이었다.

"하하, 나한테 이런 재능이 있을 줄은 몰랐구만. 이거 살도 다 빠지기 전에 이렇게 되니 원..."

"...삼화취정에 오르셨으니, 드릴 선물이 있습니다."

"음? 뭔가?"

지난 생의 김영훈이 만든, 조수월무경 6권을 통합한 1권의 비급.

조수월무결!

'이번 생의 김영훈은 더욱 더 높은 곳에 이르르겠지.'

그리고 다시 비급을 진화시킬 것이다.

나는 그에게 비급을 전해주고, 연국의 언어를 전부 가르쳐준 후, 장원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번 생에는 어찌할까.'

무림 곳곳을 돌아다니기도 해 봤고, 단체를 세우기도, 김영훈을 따라다니기도, 황실에 들어가보기도 해 봤다.

'아무래도 이번 생은 무공수련을 조금 진득히 하고 싶은데.'

그러나 그렇다고 막리세가의 무도한 짓을 두고만 볼 수도 없었다.

막리세의 무도한 짓을 막으며 무공수련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얼마간 고민하던 나는 금세 답을 알 수 있었다.

'진씨세가.'

그렇다.

막리세가를 연국에서 몰아내려 하는, 진씨세가의 수도자들이 있었다.

'이번 생에서는, 진씨세가에 협력해 봐야겠어.'

지난 생의 후반부처럼, 진씨세가를 도운다면 간접적으로 막리세가의 활동을 막을 수 있을 터다.

나는 진씨세가를 찾아가보기로 정한 후, 김영훈에게 찾아갔다.

"저는 이제부터 따로 다니겠습니다."

"음!? 아니, 무슨 일인가?"

"...조금, 돌아다니고 싶어서 말입니다."

김영훈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조금 불안해하는 듯 했으나, 나는 그를 진정시켜주고 철륭성을 나섰다.

5년에 한 번씩 이곳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으니, 앞으로 다시 만나는 데엔 문제가 없을 것이다.

나는 진씨세가의 영지가 있는 곳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 * *

진씨세가의 비지(秘地)는 연국의 동쪽지역, 벽라국 국경과 인접한 창호성 북쪽에 있는 수로곡이라는 계곡에 위치해 있었다.

지난 삶에도 몇 번 와 본적이 있는 곳이었다.

'이곳은 내가 듣기로 아마...'

진씨세가의 저계 수도자들이 머무는 곳이라고 들었었다.

나는 적당한 곳을 찾아 자리를 잡은 후, 수로곡에서 누군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며칠을 기다렸을까.

마침내 수로곡에서 붉은 장포를 입은 사내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사내의 주변으로는 그의 의식 영역이 공간을 장악하고 있었다.

'진씨세가의 수도자다!'

나는 그에게 몰래 따라붙어 그를 따라갔다.

얼마 후 창호성에 도착한 사내는 주루에 들어가 술과 음식을 시키기 시작했다.

'좋아, 적당히 붙어 볼까.'

나는 은근슬쩍 그와 합석해서 좋은 술을 하나 더 시켰다.

"으음? 자네는 뭔가?"

"하하, 형장이 적적해 보이길래 대작이나하러 왔습니다. 술값은 제가 내지요."

"허 뭐. 정말 본인이 내겠다면야..."

나는 그에게 상다리가 부러질만큼 음식과 술을 시켜준 후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가 어느 정도 취하자, 은근슬쩍 그가 수도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도록 유도했다.

얼마 안 있어, 술기운에 취한 진씨 수도자는 내게 자신이 수도자라는 사실을 털어놓았고, 임무를 위해 속세에 나왔다고 말을 했다.

"정말 대단하시군요. 수도자시라니, 저도 위대하신 수도자 일족과 일할 수 있다면 여한이 없을텐데 말입니다."

"흠흠, 뭐 하지만 본가에는 이미 자네같은 범인들은 넘쳐나는데 말일세..."

나는 은근슬쩍 내 제안을 거절하려는 그에게, 허 대감에게서 훔쳐온 금두꺼비 열두개를 보여주었다.

"제가 수도가문의 밑에서 일할 수만 있다면, 형장께 두꺼비들을 드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흠, 흠...!"

잠시 멍하니 금두꺼비들을 바라보던 진씨 수도자는 헛기침을 하며 내가 건낸 목궤를 받아들였다.

"뭐, 내 가문의 어르신께 말씀은 올려보겠네. 험험..."

"하하, 정말 감사합니다. 형장만 믿고 있겠습니다."

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에게서 약속을 받아내었다.

그리고 다음날, 술이 깬 그는 조금 곤란해하는 듯 했으나, 결국 금두꺼비의 탐욕을 이기지 못했는지, 나를 가문으로 데려다주겠다고 하는 척 하며 내게 화염술법을 날렸다.

금두꺼비는 가지고 싶고, 나를 가문에 소개하기는 싫고 한 모양이었다.

'연기기 1성정도 되어보이는 놈이...'

나는 눈쌀을 찌푸리며 검을 휘둘러 화염술법을 쪼개버리고, 검강을 뿜어내어 진씨 수도자의 방어법술을 박살내 버렸다.

"형장,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아, 아니 나는..."

"나를 가문에 소개하기 싫으면 싫으시다고 말을 해 주시지요. 왜 이러시는 겁니까. 형장은 내가 범인따위라고 우습게 보이시나 봅니다."

"히, 히끅..."

나는 진씨 수도자에게 살기를 쏘아대며 그의 멱살을 잡아올렸다.

'오히려 잘 됐지. 이걸 빌미로 잡아서 나를 가문에 데려가게 해야겠군.'

나는 진씨 수도자에게 눈치를 주어, 그가 받아먹은 금두꺼비 여섯 개를 토해내게 했다.

"형장, 어찌되었든 금두꺼비 여섯 개는 받아드셨으니 이번에는 제대로 안내를 해 주시겠지요? 이번에는 제대로 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알겠네. 수, 수도가문의 어른들에게 자네를 소개시켜 주겠네. 사, 삼화취정의 무림고수일줄은 정말 몰랐네!"

그는 말을 더듬거리며 나를 안내했다.

듣자하니 그가 맡은 임무는 다른 성에 있는 진씨가문 영지에 편지를 전달하는 임무였다.

나는 그와 함께 연국 용호성 인근에 있는 진씨가문의 비지에 도착했다.

그는 가문의 어른이라는 나이 많은 연기기 수도자에게 서한을 전달한 후, 그에게 나를 소개했다.

연기기 후반의 수도자는 내가 삼화취정의 고수라는 설명을 듣고, 눈을 빛내며 말했다.

"마침 잘 됐네. 자네 정도라면 충분히 수도일족에게 봉사할 자격이 되지. 하하, 안 그래도 범인들에게 무공을 가르칠 무공교관이 필요했는데. 삼화취정이면... 음, 범인들 기준에서 높은 경지였던 걸로 안다만, 맞는가?"

"...예. 감히 수도일족에게 비할 순 없으나, 그래도 제가 범인 중에서 높은 수위까지 무공을 익히기는 했습니다."

"좋군 좋아. 따라오게."

나는 수도일족의 영지, 한 훈련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열대여섯살 즈음 되어보이는 아이들이 수련을 하고 있었다.

무공을 가르치는 무공교두는 절정 초기의 경지쯤 되어보였는데, 아이들의 수가 너무 많아 힘들어하는 것이 보였다.

"최근 범인 아이들의 교육은 저치가 맡고 있네만. 영 잘 가르치는 것 같지 않아서 말일세. 자네라면 음, 저치보다는 무공수위가 높아보이니 더 잘 가르칠 수 있겠지?"

"예, 맡겨주십시오."

나 역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란 말에 작게 만족했다.

이 정도라면 나 역시 무공수련시간을 많이 뺏기지 않을 수 있었다.

특히나 삼화취정에 경지에 이른 후로는, 의념에 대한 탐구가 더욱 많이 필요했으므로, 아이들을 가르치며 아이들의 의념을 탐구할 수도 있으리라.

"그나저나, 이 아이들은 어떤 이유로 무공을 배우는 아이들입니까?"

"아, 그건 말이지."

연기기 수도자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최근, 수도가문의 위에서 군림하던 수많은 수도종문들이 갑자기 사라졌다고 하네. 뭐 나도 자세한 이야기는 모르지만, 결단기 이상의 경지의 수도자들이 갑자기 대거 사라졌다지?

그래서 현 수도계는 폭풍전야나 다름없다네. 결단기 너머로 최대한 빨리 향하는 수도자가 수도계의 권위자가 될 테고, 그가 속한 수도가문이 대가문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

하여 현 수도계는 겉으로는 잔잔해 보이지만 뒤로는 엄청난 암중혈투가 벌어지고 있네. 저 무도한 막리세가 놈들은 금단의 비약으로 결단기 수도자들의 수명을 늘려, 결단기 후기의 태상 장로들이 그 이상의 경지로 향할 발판을 닦는다지."

'그런 거였나...'

나는 지금까지 일어난 일련의 사건의 인과관계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천 년에 한번 열린다는 승천문.

수많은 고위 수도자와 수도종문이, 승천문에 도전하기 위해 등선향으로 몰려들었고, 현재 그 탓에 현 수도계에는 결단기 수도자만이 남은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 하루빨리 다음 경지로 가는 수도자가 수도계를 지배할 수 있었기에,

막리세가는 범인들의 정혈을 빨아, 가문에 남은 결단기 수도자들의 수명과 수행을 늘리려는 것이었다.

'그 괴물들이 상계로 비승하든지 말든지, 별 일 아니라 생각했었지만... 의외로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 그것에 있었었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연기기 수도자의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막리세가, 그 마도 가문은 금단의 비약을 만드는 공정으로, 막대한 범인들의 생혈을 필요로 한다네. 그 덕분에 연국 곳곳에서 실종자가 늘어나고 있고... 저 아이들은 우리 진씨세가가 구출한 생존자들이지.

저 아이들은 모두 자신들의 친지를 죽인 막리세가, 현 황실에 막대한 분노를 품고 있어. 그리고 본 진씨가문은 막리세가가 범인들의 정혈을 마구 갈취하며 금단의 비약을 완성해, 막리세가의 결단기 수도자들이 경지를 뛰어넘지 못하게 막고 싶지."

'수도가문과 저 아이들의 이해가 일치한 건가...?'

그렇다면, 저 아이들은 설마.

"...그래서 우리는 일단 연국을 막리 놈들한테서 탈환해, 막리 놈들이 마구잡이로 범인들을 잡아들이지 못하게 할 작정이네. 그 일환으로, 우선 현 연국의 황제인 막리정 놈을 암살할 생각이고."

나는 이어지는 설명에, 무언가 섬칫한 기분이 들었다.

"저 아이들은 모두 암살자로 자원한 아이들이라네. 자네가 저 아이들에게 무공을 가르칠 수 있겠나?"

그제야 나는 이어지던 섬칫한 기분의 실체를 알 수 있었다.

나는, 내가 지난 삶에서 손수 목을 잘랐던 아이들을 내 손으로 가르쳐야 하는 것이었다.

생(生)(2)

나는 멍청하게 아이들의 면면을 확인했다.

하나둘씩 익숙한 면면이 보이는 것 같았다.

"...다른 일은, 없습니까?"

"음? 다른 일이라니?"

"저는... 의술에도 조예가 있습니다. 그리고 정보를 다루는 일도 잘 하고, 기타 행정 분야도 자신이 있습니다. 혹은 독이나 약 제조를 맡기셔도 잘 할 수 있습니다. 혹은..."

"됐네 됐어. 의술이나 약독의 제조는 감히 범인 따위가 수도자에게 댈 수 없네. 그리고 정보나 행정도 지금 인원이 넘쳐서 별 쓸모가 없네. 자네 같은 삼화취정 경지의 무림인이라면 오히려 무공교관쪽이 더 쓸모있겠지."

"...그럼 삼화취정의 무림인이 할 수 있는 다른 일은..."

그러자, 연기기 노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네 자꾸 토를 다는군? 수도가문과 일하기 싫다는 겐가?"

"...아닙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의 제안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운명이라면...'

내가 손수 목을 잘랐던 아이들.

그런 아이들을 다시 내 손으로 가르치게 된다.

'얄궂은 운명이로군.'

나는 아이들에게 기본적인 무공초식을 가르치는 교두에게 다가갔다.

"자, 거기에서 내려찍기! 다음에 바로 이어 직선으로..."

"이보시오, 당신이 이 아이들 무공교관이시오?"

"음? 당신은..."

무공교두는 비수를 들고 시범동작을 보이고 있었고, 나는 그의 무공초식을 보자마자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지난 삶에서 암살자들이 썼던 비수법, 이 자가 가르친 것이었군.'

그는 내가 무림인이라는 걸 알아채자마자 나와 간합을 겨뤄보려는 듯, 붉은 의념을 쏘아냈다.

그러나 나는 삽시간에 내 의념과 그의 의념을 통하게 해, 자색의 의념으로 그의 의념을 덮어씌웠다.

이 자의 의(意)가 훤히 비추었다.

모든 색조가 사라진 세상.

청색, 적색, 자색의 의념만이 빈 공간에서 오간다.

나는 내게 뻗어오는 그의 의념을 모두 쳐내고 나의 의념으로 그의 간합을 파고들어갔다.

그는 황급히 방어하려는 듯 했으나, 나는 그가 피하려는 위치에 맞춰 끊임없이 의념을 쏘아보내며 그를 밀어붙였다.

얼마 후.

결국 나와의 간합싸움에서 한참을 밀리던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내게 포권을 취했다.

"후우, 삼화취정의 고수를 몰라뵈었소이다. 부디 용서해 주시구려. 맞소. 이 아이들의 무공교두인 적래호라 하오."

"서은현이라 하오. 만나서 반갑소. 진가의 수도자가 나를 무공교관으로 임명하더구려. 그래서 말인데... 혹 어디까지 가르치고 있는지 가르쳐주면, 내가 그 진도를 맞춰서..."

"아, 새로운 무공교관으로 오셨군!"

그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하하하! 이럴 게 아니라 자, 저쪽으로 들어오시지요."

그는 그의 처소로 보이는, 훈련장 옆 작은 오두막을 가리켰다.

"모두, 같은 동작을 500번 반복하고 있도록! 나는 잠시 손님을 대접하고 오겠다!"

"....?"

그는 아이들에게 의미 없어 보이는 반복동작을 시킨 후, 나를 오두막으로 데리고 갔다.

오두막 안은 단촐했다.

그의 짐이라고 할만한 것도 많지 않았다.

"우선 차부터 한잔 따라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상당히 젊어보이시는데 삼화취정이라니, 혹 전설속의 반로환동의 경지인 겁니까?"

"음... 반로환동은 아니오. 그냥 특이한 대법이라고만 생각해 주시구려."

"그렇군요. 하긴 수도자들 사이에서도 온갖 기이한 술법이 나도는데 젊어지는 대법이 하나둘 있다고 해서 이상할 일은 없겠지요. ...아무래도 수도가문에서 제가 가르치는 게 영 지지부진하니 새 고수님을 초빙해오셨나 봅니다."

나는 그가 차를 준비하는 것을 보며,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르치는 게 쉽지 않나 봅니다?"

"흐... 다들 의지야 넘칩니다. 하기사 부모형제를 막리가 수도가문에게 다 잃었고, 복수할 수 있게 해 준다는데 의지가 없겠느냐만은... 하지만 의지와는 별개로, 저 아이들은... 쯧."

쪼르륵

그는 내 앞에 작은 잔을 놓고 차를 따라주었다.

"재능이 없지요. 엄선해서 뽑은 게 아니라, 그냥 부모형제를 잃은 고아들을 막 데려다가 훈련시키는 것이니 재능이 있으면 이상한 것이겠지만... 가장 재능이 높은 아이도 제가 볼 때는 일류 초반. 아주 잘하면 검기까지야 쓸 수 있겠지만.

그것이 저 아이들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또 수도가문에서는 제가 못 가르친다고 생각해서 저를 들볶고 있는 지경이고요. 안 그래도 저 녀석들 때문에 개인 수련시간도 빼앗기는 중인데, 짜증이 나 미칠 지경입니다. 그래서 점점 가르칠 의욕도 떨어지고 있고 말입니다."

"흠..."

"그래서 사직서를 내 보기도 했지만, 가문에서는 새 교두가 생길때까지는 절대 사직을 허하지 않겠다는군요. 그런데 솔직히 수도가문은 무공교두로 최소한 절정고수 정도는 원하는 것 같은데, 어디 절정 고수가 동네 똥개마냥 흔한 존재입니까?

저도 여기서 이러고야 있지만 원래는 나름 강호에서 이름을 날리는 기인 중 하나였습니다."

나는 그가 내놓은 엽차의 향을 맡으며 질문했다.

"그럼 적 교두께서는... 이제 제가 오셨으니 사직하실 예정인 겁니까?"

"하하, 뭐 그렇지요. 너무 홀가분해서 말이 많았습니다. 어느 정도 기초는 만들어 놨으니 그럭저럭 가르치시면 될 겁니다. 보수가 많아서 일을 해왔지만, 더 이상은 저 녀석들을 가르치며 시간낭비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하하하, 그럼 이만 저는 가보겠습니다."

차를 다 마신 적래호는 내게 몇 가지를 설명해준 후, 내가 잡기라도 할까 빠르게 짐을 싸서 오두막을 나가버렸다.

어지간히 더 이상 교육을 맡기 싫었던 모양이었다.

"..."

'이건 예상 못했는데...'

나는 최소한 그와 함께 교육을 진행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첫날부터 다른 교관이 바로 도망가 버린 것이었다.

'무슨 저런 인간이...'

나는 살짝 어이가 없어 차를 다 마신 후, 훈련장으로 나갔다.

그곳에는 여전히 아이들이 비수를 잡고 찌르기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모두 정지!"

내가 내공을 담아 사자후를 지르자, 아이들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전 교관 적래호는 사직서를 쓰고 나갔다. 이제 내가 너희의 새로운 무공..."

나는 '교관'이라고 말하려다가, 말을 삼키고 말했다.

"무공 '스승'이다! 오늘부터 내가 너희를 가르칠 것이다!"

내 말에, 그들은 모두 하던 동작을 멈추고 각자 자리에 멈춰 각 잡힌 자세로 내게 포권을 올렸다.

'기본을 가르쳤다더니, 각 잡는 법을 가르친 건가.'

눈대중으로 본 아이들의 숫자는 약 500여 명 정도였다.

적래호에게 듣기로는 이곳 말고 다른 훈련장에서도 암살자들을 육성한다는 것 같았다.

'암살자들한테 각 잡는 걸 왜 가르친 건지.'

나는 잡념을 털어버린 후, 훈련장 아래로 내려가 가장 앞에 있는 아이에게 다가갔다.

"이름이 뭐냐."

"제 이름은 십사 호.."

"번호 말고 이름을 물었다. 네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이 있을 거 아니냐."

부모님이라는 말에, 아이의 호흡이 약간 거칠어지는 듯 했다.

"...만호입니다."

"그래. 모두, 만호를 제외하고 각자 훈련장 옆으로 가서 휴식을 취하도록! 지금부터 너희의 수준을 하나하나 들여다 볼 것이다!"

내 말에, 아이들은 잠시 술렁이는 듯 싶더니 훈련장 옆으로 가 앉았다.

"덤벼 봐라. 내가 막리세가의 수도자라 생각하고, 죽일 각오로."

잠시 머뭇거리던 만호는, 나를 노려보더니 땅을 걷어차 내 눈에 모래를 뿌렸다.

'판단력이 좋군. 체급차가 안 될 걸 알고 모래를 뿌려 시야를 점하고 달려든다.'

그러나.

'진정한 고수한테는 아무 쓸모 없다.'

나는 눈을 감고 만호의 의념을 감지해 녀석의 비수 끝을 잡아채서 빼앗았다.

"네 수준은 알았다. 들어가라. 다음, 너 나와라."

다음으로 나온 아이는 잠시 쭈뼛쭈뼛 하는 듯 하더니 내게 포권을 올렸다.

"인사 하지 마라. 실전에서도 적에게 인사하고 덤빌 거냐? 죽일 기세로 덤벼 봐라."

아이는 비수를 잡더니 빠른 속도로 내게 찔러왔다.

나는 몸을 살짝 움직여 피한 후 비수를 잡아채서 다시 뺏었다.

"좋은 찌르기군. 네 이름은 뭐지?"

"...열오입니다."

"그래, 열오는 들어가고. 다음 나와라."

나는 계속해서 아이들을 불러 대련을 하며 수준을 쟀다.

그렇게 이백 서른 세 번째 아이의 수준을 재고, 다음 아이를 불렀을 때였다.

흠칫!

나는 다음으로 나온 아이의 얼굴을 보며 흠칫했다.

아이는 여자아이였고, 꽤 예쁘장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그러나 표정에는 살기가 어려 있었다.

나는 저 얼굴을 알고 있었다.

'검사를 깨달았던 그 날.'

내가 직접 목을 잘랐던 여자 암살자였다.

"...이름이, 뭐지?"

"계화(季花)입니다."

"...그래. 덤벼라."

슈슉!

계화는 빠른 손놀림으로 내게 비수를 찔러왔다.

여태까지 봐 온 아이들 중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빨랐다.

하지만.

'이상하군.'

나는 발 끝으로 계화의 비수를 쳐내며 생각했다.

빠르지만, 그것뿐이다.

초식도 형편없고, 내공도 실리지 않았다.

삼류. 그것도 삼류 초반이었다.

물론 기본기가 잘 닦여진 것으로 보아 아이들 중에서는 아주 조금 재능이 있는 수준이었지만...

'재능이, 없다.'

이런 수준의 재능은 동네 도장에서 그저 조금 싸움 잘 하는 축에 불과했다.

어떻게 이런 재능으로 지난 삶 나를 위협했던 그 암살자가 될 수 있었단 말인가?

'수도자들이 뭔가 힘을 썼던 건가?'

지난 생, 김영훈이 말해주었던 정보 중에는 원혼을 이용해서 암살자들의 재능을 개화시켰다는 얘기도 있었었다.

'재능을 강제로 개화라... 그게 어떤 방식인지 모르니...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성장할지 감이 안 잡히는군.'

나는 생각을 정리하며 계화를 돌려보내고 계속해서 아이들을 시험했다.

그리고 500여명의 아이들을 모두 시험했을 때쯤에는, 해가 지고 저녁이 되어있었다.

'모두 여든 세 명이다.'

내가 지난 삶에서 직접 목을 자르고 얼굴을 확인했던 아이들의 숫자였다.

얼굴을 확인하지 않았던 암살자들까지 합치면, 숫자는 더욱 많을 터였다.

어쩐지 착잡한 기분이었다.

나는 지난 삶에 그저 내 본분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으나, 다시 찾아온 삶에 그 본분은 죄악처럼 느껴졌다.

'...어쩔 수 없지.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

이 찝찝함을 씻을 수 없다면, 다시 이번 생에서 최선을 다해 본분을 다하자.

"모두의 수준은 잘 알았다. 잘 들어라. 이제부터 다시 처음부터 한 명씩 나와 내 앞에서 무예 시범을 보일 것이다. 만호부터 다시 나와라!"

"저... 교관님."

"스승님이라고 불러라. 사부님이나."

"예... 사부님. 그, 이전의 적 교관님은 해가 지면 들어가서 내가기공을 연습하게 하셨는데..."

"내가기공?"

나는 콧웃음을 치며 말했다.

"모두 들어라. 너희는 둔재다. 내가 너희와 하나하나 대련해보며 느낀 바. 너희는 정상적으로 수련해서는 절대 절정고수는 커녕 일류고수에도 미칠 수 없다!

너희가 그 경지에 오르려면, 미쳐야 한다! 천재 이상으로 미쳐야, 천재 이상으로 위를 갈구해야 희망이 보일까말까란 말이다.

오늘부터는 해가 져도 들어가서 내가기공을 수련하지 않는다. 무공초식을 숨쉬듯이 자연스레 할 수 있을 때부터. 그때부터 내공 수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내 기준에 들 때까지 너희는 처소로 들어갈 수 없다. 해가 지든, 날이 새든, 제대로 수련하지 않으면 너희는 쉴 수 없다!"

내 말에 아이들의 눈에 불만이 어렸다.

"하나라도 똑바로 할 수 있게 하지 않으면, 앞으로 너희에게 휴식 따위는 없다! 다시, 한 사람부터 나와서 내 앞에서 무공을 시연한다!"

나는 만호부터 시작하여 다시 아이들을 차례대로 나오게 해 무공시연을 보았다.

'모두 기본적으로 비수를 사용하는 무공을 익히고 있다. 아마 적 교두의 영향이겠지.'

나는 내 앞에서 무공을 시연하는 아이들을 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비수를 사용하는 암살무공이, 아이들 모두에게 적합하지는 않는다.'

누구는 검과, 누구는 창과, 누구는 철퇴와 어울린다.

혹자는 그런 무공은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동선이 커서 암살에는 어울리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암중호위대 대주는 그 커다란 극(戟)을 쥐고도 암중에서 황제를 잘만 호위했는데. 암살자라고 굳이 작은 무기만 쓸 필요는 없지.'

나는 아이들의 무공시연을 보며 하나하나의 사소한 버릇, 습성, 의념의 흐름을 보며 그들에게 적합한 무기를 생각해냈다.

'만호는 대검이 어울리겠군. 열오는 호조가, 계화는 그대로 비수가 좋겠고.'

나는 무림맹주 시절에 봐왔던 무학서를 생각하며, 무기에 적합한 무공들을 떠올렸다.

무공시연이 끝난 후, 나는 다시 제자들에게 가 근처에서 적당한 나무를 베어오게 시켰다.

그런 후 각자에게 익히게 할 무기술을 알려준 후, 적합한 크기의 무기를 나무를 깎아 만들게 했다.

아이들이 전부 나무를 깎아 엉성한 무기를 만들자, 나는 각각에게 다가가 무기술과 무공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각자에게 맞는 무공구결과 무기, 훈련법을 암기하게 하자, 어느새 다시 날이 밝아오는 중이었다.

아이들은 내가 알려준 무공의 기본초식들을 익히며 하나같이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무기를 휘둘렀다.

얼마 후, 정오가 되자 수련장 곳곳에서 아이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탈진한 것이었다.

나는 탈진한 녀석들은 끌고 나와, 시원한 곳에 눕히고 시침법으로 생명력과 기를 활성화시켜, 자가회복력을 높여주었다.

얼마 후, 수련장에 있는 모든 아이들이 기절해 버렸다.

나는 녀석들을 전부 끌고 나와 시침법으로 생명력을 활성화시킨 후, 수도가문을 찾아갔다.

수도가문에는 가문의 수도자산을 관리하는 내부 재정관이 있었고,

금이나 은 등, 범인들의 세상에서 통하는 자산을 관리하는 외부 재정관이 있었다.

나는 외부 재정관을 찾아갔다.

"새 무기가 필요하외다."

"어떤 종류요?"

"종류는..."

나는 내가 적어온 무기의 종류들을 담은 종이를 꺼내, 가문의 외부 재정을 담당하는 범인 출신 재정관에게 건냈다.

외부 재정관은 종이를 보더니, 나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미쳤소? 이걸 다 달라고?"

"한 정씩만 지급해 주면 되오. 어차피 수도가문은 부자라서 상관 없지 않소?"

"이... 그래도 정도가 있지."

"그리고 무기 말고 약초도 조금 공급해주셨으면 좋겠군."

"뭬야? 약초? 무슨 약초!"

"수련 회복을 돕기 위한 약초들이오. 흠, 난 분명히 달라고 말 했소. 아이들 무공 진도가 나가지 않으면 그건 전부 당신 탓이오."

"뭣, 그게 무슨..."

외부 재정관은 발끈하는 듯 했으나, 결국 내 요청에 따라 무기들과 약초를 신청해 주기로 했다.

나는 며칠 후, 약초와 무기들을 받아, 무기들을 제자들에게 지급한 후 제대로 무기를 휘두르게 가르쳤다.

탈진할 때까지 내가 골라준 무기술을 익히고, 탈진하면 내가 만들어놓은 약들을 먹여 기력을 회복시켰다.

그렇게 1년 정도를 가르치자, 제자들의 눈에는 독기가 흘렀다.

이제는 모두들 무기술의 초식의 형(形) 정도는 눈을 감고도 따라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나는 그 즈음에서 내공심법을 가르쳤다.

물론 절대로 그냥 앉아서 내공심법을 편하게 수련하게 하지는 않았다.

모두 무기를 들고 휘두르며, 초식과 함께 수련해야만 했다.

다시 1년이 지나자, 제자들의 눈에는 나를 꼭 죽여버리고야 말겠다는 살기가 깃들었다.

'이제 다들 삼류 후반 정도로 성장했군.'

밥 먹고 일 보는 시간을 제외하고, 내 제자들은 한 시도 쉴 새 없이 무공을 수련했다.

잠자는 시간따위는 없었다.

해가 떠서 다시 해가 지고, 다시 해가 뜰 때까지 계속해서 몰아붙였으니까.

그러다가 기절하면 그게 곧 잠을 자는 거였다.

제자들의 몸은 결코 쉽게 상하지 않았다.

수도가문에서 보내준 약초들로, 내가 약을 제조해서 먹이고, 탈진한 이들은 직접 시침법을 사용해서 몸이 상하는 것을 막아주었으니 말이었다.

한 달에 두 번 정도만 원 없이 쉬게 해 주었고, 나머지는 전부 수련, 수련, 수련이었다.

어쨌든 내 정신 나간 지도법 덕인지, 제자들은 모두 3년만에 2류 초반에 접어들었다.

'모두 잘 따라와줘서 다행이군.'

나는 오늘도 제자들과 대련을 하며 생각했다.

토가 나올 정도로 고된 수련이었지만, 모두들 절대 포기하는 이는 없었다.

'그만큼, 가족을 죽인 막리세가에 대한 분노가 크다는 거겠지.'

부웅!

대도를 휘두르며, 해웅이라는 녀석은 살기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내 움직임을 좇았다.

그러나 나는 눈을 감고 그의 도를 피하며 다리를 발로 걷어찼다.

"하체가 비었다."

퍼억!

그러나 녀석은 다리가 걷어차여도 아랑곳하지 않고 버티며, 내게 도를 휘둘렀다.

'좋군, 기백이 나아졌어.'

나는 도를 다시 피한 후, 옆구리 깊숙히 손을 찔러넣었다.

"커헉!"

"다음."

다음 상대는 청야라는 여자아이였다.

듣기로 제 아비와 어미가 수도자의 손에 한 줌 핏물이 되는 걸 두 눈으로 봤다고 한다.

피잇!

청야는 양손에 암기를 들고 내게 쏘아왔다.

이 아이에게는 암기술이 적합했기에, 내가 직접 독문무공인 투괴암기술을 가르쳤다.

"쌍살사의 초식은 그렇게 쓰는 게 아니라 했을 텐데. 아주 미세한 시간차를 둬야 한다."

나는 청야가 날린 암기를 허공에서 전부 잡아낸 후 다시 돌려주며 말했다.

모두 3년전에 비하면 괄목상대할 성장이었지만, 아직도 내 눈에는 한참들 부족했다.

'그래도, 다들 하나같이 나보다는 재능이 있다.'

내가 삼류였을 때는 10년을 걸려서야 겨우겨우 다음 경지로 넘어갈 수 있었다.

물론 나 때는 세세한 스승도, 정신 나간 무공 수련 일정도.

무공 수련을 할 시간 자체도 부족했지만, 아이들 모두 나보다는 낫다.

'당장 나만 해도, 녀석들이 한 경지를 뛰어넘고 있을때. 나는 한 발자국 밖에 앞으로 나가지 못했으니까.'

나라고 해서 놀고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제자들의 무공을 봐 주면서, 매일같이, 끊임없이 절정고수의 시야를 켜고, 의념의 세계에 진입해서 의념들을 관찰했다.

가르침을 주면서도, 뇌가 터질때까지 월수궁무록을 운용하며 인식의 결과 결을 관찰했다. 의념을 파고들고, 또 파고들었던 그 노력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나는 최근에서야 삼화취정의 경지 안에서 한 발자국 더 진보할 수 있었다.

끊임없이 의념을 다루는 감각을 익히고, 월수궁무록을 수련하며, 의념 그 자체에 익숙해지자, 나는 세 개의 색으로 이뤄진 세계를 넘어, 그 다음 색조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네 번째 색조!

그것을 발견한 것은 지난번 제자들과 무한대련을 한 다음 날.

제자들이 한 달에 두 번 있는 쉬는 날에 발견한 것이었다.

그 의념은 다른 의념처럼 선명하지 않았다.

또한 전투 중의 의념처럼 선의 형태도 아니었으며, 그 의념을 통해 이어질 동작 역시 정확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내가 느껴온 의념들에 비해서 너무나도 이질적인 의념!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렇게 이질적인 의념이었기에 내가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네 번째 의념의 색은 연분홍색이었다.

그 의념의 이름은 연정(戀情).

연모의 의념은 만호에게서 뻗어나와, 계화에게 닿아있었다.

'풋풋한걸.'

그 의념을 발견하고, 나 자신도 굉장히 놀랐었던 기억이 났다.

이렇게 토가 나올 정도로 수련을 시키는데, 그 와중에도 사랑이 싹트는 것이었다.

물론 만호 외에도 다른 몇몇의 제자 역시, 다른 이들에게 연정의 의념이 뻗어있었다.

'인간(人間)이란. 신기하지 않은가.'

지옥 속에서도 감정은 싹튼다.

그것이 인간이었다.

나는 제자들의 의념을 관찰하며, 계속해서 녀석들의 무공을 봐 주었다.

* * *

연정의 의념을 발견한지 다시 2년이 지났다.

의념에 완숙해진 나는 2년만에 다섯 번째 의념을 발견하였다.

새로운 의념은 검붉은 색의 의념.

의념의 이름은 증오(憎惡)였다.

증오의 의념은, 그동안 너무나도 당연하게 제자들의 의념에 섞여있던 의념인지라, 발견에 조금 시간이 걸렸다.

증오의 의념은 아주 미약하게는 내 쪽에, 더러는 서로에게 향해 있었지만.

절대 다수의 의념은 보이지 않는 어딘가로 뻗어있었다.

아마도 막리세가의 수도자들을 향한 의념일 터였다.

'기이하군.'

삼화취정 이후에야 감지하게 된 의념들은, 무(武)와는 조금 거리가 있어보이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어째서 무(武)를 궁구함에 있어, 인간은 이런 의념들을 발견해가는 것일까.

상대와 무를 겨룸에 있어, 과연 이것이 어떤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이제 슬슬 약속한 기일이 다가오는군.'

김영훈과 만날 날이 다가왔다.

* * *

나는 오래간만에 진씨세가의 영지를 나와, 철륭성으로 향했다.

철륭성에 사 놓은 장원으로 들어가자, 김영훈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서은현이. 그렇게 찾아도 보이지 않았는데, 도대체 5년간 어디에 있다 온 건가?"

"흠, 뭐... 그냥 한적한 산골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나저나 김 형은..."

나는 그의 의념을 재며 물었다.

"이제 삼화취정의 끝자락... 아니, 벌써 다음 경지를 넘보고 있는 겁니까?"

그는 어느덧, 벌써 오기조원을 눈 앞에 둔 것이었다.

"하하, 그렇게 됐네. 천하제일인도 도전해 보고 하니. 어느새 오기조원에 도달해 있더군. 이게 다 조수월무결 덕일세. 그건 정말... 신의 무학이라 칭하기 모자람이 없더군."

확실히 조수월무결은 엄청난 무공이었다.

최소 입문 조건이 삼화취정이지만, 정작 삼화취정에 이른 나조차도 어려워서 그 하위호환인 월수궁무록만을 탐구하고 있을 정도로.

"여하튼 조수월무결 덕분에 여기까지 왔고... 자네도 무언가 진보가 있었던 모양이네?"

"예. 세 번째를 넘어 네 번째, 다섯 번째 의념도 발견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하하, 축하하네. 확실히 재미있지 않은가? 무의 세계란. 이제야 마침내 도달했다고 여겼지만, 끝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의념으로 다가가는 시작이었다는 사실이 말이야..."

재미라...

나는 과연 무학에 재미를 느끼는가?

모르겠다. 그저 생각하지 않고 도전해 왔을 뿐.

어쩌면, 저것이 김영훈이 가지는 재능에 대한 원천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에게 그동안 궁금했던 것을 질문했다.

"그나저나 김 형. 저는 이제껏 무를 수련해오며, 연정의 감정이니, 증오의 감정이니를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무를 힘씀에 쓸모가 없다 여겼지요. 실제로 무를 겨룸에 있어 그런 것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한데, 왜 우리는 무를 궁구하며 이런 감정들을 찾아내게 되는 겁니까?"

"흠..."

내 질문에 잠시 고민하던 김영훈은 히죽 웃더니 도를 뽑아들었다.

"무인이 입만 털어서 어찌 알겠는가. 한판 붙어보지."

"하하, 김 형 다우십니다."

스릉-

그래, 그게 무인(武人)이다.

피잉!

김영훈의 의념이 내게 쏘아져 왔다.

붉은 선이 내 의념과 얽히며 자색으로 화한다.

나는 그의 의념을 읽어내며, 그의 의도를 읽어내고 검을 휘둘렀다.

단맥도

산바람!

서로가 통(通)하는 자색의 의념 너머로, 김영훈의 무공절학이 마치 들려오는 듯 하다.

피잉!

인식하기 힘들 정도. 극속(極速)의 찌르기가 나를 노려온다.

단악검법

입산!

파앗!

나는 하단세로 전환하며 그의 찌르기를 피한 후.

단악검법

기산심천

경맥을 열어젖혀 검사의 길이를 늘여 김영훈의 발목을 노렸다.

단맥도

산울림!

티잉!

도명(刀鳴)이 퍼져나온다.

김영훈의 기운이 그의 도신을 진동시킨다.

은은하게 진동하는 도신이 내 검기를 향해 내리꽂힌다.

'닿으면 안 된다.'

검이 아니라 검기나 검사라 하더라도!

파아앗!

나는 검사에 의념을 불어넣어 김영훈의 의념과 통하게 하여 검강으로 화하게 했다.

투우웅-

진동하던 김영훈의 도신이 내 검강에 닿자, 검강은 그대로 눈에 보일 정도로 옅어졌고, 검속 역시 느려졌다.

'아마 검강으로 전환하지 않았으면, 검강이 흩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검사가 박살나고, 그 충격이 내게까지 전해져 왔겠지.'

김영훈의 의념이 넓게 퍼진다.

단맥도

산소리

그의 검에서 흘러나오는 강기가 마치 파(波)의 형태로 퍼져나간다.

사방팔방으로 울려퍼지는 듯 하나, 결국 나 하나를 노리는 강기의 일격!

저건 일반적인 무공으로는 막을 수 없다.

단악검법

산명곡응

나 역시 내 검강을 똑같이 파의 형태로 바꾸어 그의 초식을 상쇄시켰다.

산소리의 너머로, 수많은 의념이 휘몰아치며, 김영훈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경쾌하다.

그의 발걸음은 자유로웠으나, 동시에 그의 움직임은 공기의 결 하나하나를 모두 피해가며, 가장 힘을 낭비하지 않을 동선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단맥도

산새

그의 움직임은 마치 한 마리의 작은 새 같았다.

나는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의념의 궤적을 읽어내며 그의 다음 초수에 응수하려 할 때였다.

"...?"

김영훈의 가슴어림에서, 연모(戀慕)의 의념이 뿜어지더니, 그 의념의 궤적이 내가 살피려고 했던 의념의 궤적에 맞닿았다.

동시에, 내가 읽어오던 의념의 궤적은 뭐가 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이 되며 읽기가 힘들어졌다.

단맥도, 산새의 초식으로 다가온 그의 도신이 어느새 내 바로 앞에서 휘둘러진다.

'무슨...!'

나는 그의 궤적을 비틀기 위해, 우선 월악보로 접근해 그의 행동을 압박하며, 산새의 초식을 받아쳤다.

나에게 가까이 접근한 김영훈은 싱긋 웃는듯 하더니 도를 뻗어왔다.

단맥도

산열림

츄와악!

수많은 도신이 휘몰아친다.

나는 그에 맞서, 산수화의 초식으로 맞서며 그와 검을 주고받았다.

한 초식에서 또 한 초식.

그의 의념이 뿜어져 나오고, 나의 의념이 그의 의념을 받아친다.

한 초식을 겨룰 때마다, 의념의 세계에서 무수한 선이 교차하며 간합싸움이 벌어진다.

나의 푸른 선이 그의 붉은 선의 궤적을 막아냈을 때였다.

부웅!

김영훈의 붉은 궤적이, 검붉은 색으로 변했다.

증오의 의념.

그 증오의 의념은, 너무나도 쉽게 내 푸른 의념을 뚫고 내 간합 안으로 들어왔고,

실제로 나와 그의 검과 도가 부딪혔다.

그의 도신에 맺힌 강기가, 마치 불타오르듯이 끓어올랐다.

동시에, 의념의 세계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이, 그의 도가 내 검을 그대로 잘라내고 내 가슴을 노렸다.

파앗!

우리의 대련은 그렇게 끝났다.

"...방금 그건."

"자네도 봤지 않나."

김영훈은 싱긋 웃었다.

"무(武)에도 감정(感情)을 부여할 수 있다네."

"..."

나는 잠시 떨리는 머릿속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그에게 되물었다.

"무에 감정이 있다는 말은, 무(武)가 살아있다는 말입니까?"

그는 내 말에 씨익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생각하기에는 어떤가? 무는 살아있는가?"

"...아닙니다."

나는 내가 무공을 수련하며 느꼈던 것을 말했다.

내가 검사(劍絲)를 느꼈을 때 느꼈던 그 깨달음.

"무는 살아있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건 나 자신이며, 나 자신의 의(意)를 불어넣는 것이 무(武)일 뿐입니다."

"맞네. 검은 살아있지 않아. 하지만 검을 잡고 휘두르는 무인은 살아있지. 그 무인의 의를 불어넣은 것이 검사고, 그 무인의 의가 세계와 소통하는 것이 검강이야. 그렇다면 말일세..."

그의 말이 이어졌다.

"나 자신의 의를 불어넣는 게 무라면, 무란 곧 자기자신. 자네는 무를 수련하는 데에 연정과 증오등 감정이 의미가 없다고 했지만, 자기자신은 결국 그런 것으로 이뤄져 있는 법이네."

"...아..."

어쩐지 알 것 같다.

"무는 살아있지 않지만, 무를 휘두르는 인간은 살아있고. 그 인간을 이루는 게 바로 감정이야. 그러니, 무를 궁구하면 궁구할수록,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알게 되지 않겠는가. 우리들 자신에 대해서 알아가지 않겠는가.

자기 자신을 다루는 것이 수준에 이르면, 방금의 나와 같이 의념의 궤적에 영향을 주는 것도 가능하지."

"...조언 감사합니다."

"하하하, 청색과 적색이 생존본능의 수준이고, 자색이 참오의 수준이라면. 그 이후의 색조들은 자기자신에 대한 색이지. 그리고..."

그는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인간이 가진 모든 색조를 알아챘을 때. 우리는 인간이 가지지 않은 그 너머의 색조를 볼 자격을 얻는다네. 그것이 바로..."

"오기조원이군요."

김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수월무결 덕에, 나는 오기조원에 도전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네. 그래서 말인데, 혹시... 호법을 좀 서 줄 수 있겠는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요."

우리 외엔 사람도 없는 장원이었기에, 김영훈은 바로 가부좌를 틀고, 경지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나 역시 두 눈을 부릅뜨고 그가 경지를 넘는 장면을 보았다.

절정경의 시야.

청색과 적색.

삼화취정의 시야.

그를 넘어선 자색, 그리고 그 외의 수많은 또 다른 색조들.

'저게, 김영훈이 깨달은 색조들인가.'

내 눈에는 김영훈의 색조 중, 연분홍빛과 검붉은 빛만이 보였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두 가지의 색조를 통해 그의 또 다른 의념들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의념들이, 연정과 증오의 너머로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아아...!'

그의 적색의 의념이 점차 줄기줄기 뻗어나갔다.

여기까지는 지난 삶에서 봤던 모습.

그러나, 삼화취정에 이른 내게는 이제 또 다른 영역이 보였다.

연정의 의념, 증오의 의념이 얽히고 설키며 적색의 의념의 빈 곳을 메운다.

그리고, 그 의념과 연결되기 시작했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다른 의념들도 그와 같을 것이다.

적색의 의념이 뻗어나가고, 검붉은 의념이 그 자리를 스치고, 연분홍의 의념이 그 안쪽을 메운다.

아름답다.

이윽고, 수많은 그의 의념들이, 전부 이어지며, 그의 주변에 있는 영역을 잠식했다.

우우웅-

주변의 기가 빨려들어간다.

나는 자세히는 볼 수 없었지만, 김영훈은 이미 다른 세계를 보고 있으리란 사실이 짐작되었다.

그의 주변으로 몰려든 기운들은 이내 그의 머리 위에 다섯 개의 원 형태로 뭉치더니, 이내 한데 섞여 오색의 구름이 되어 김영훈의 입과 코로 흘러들어갔다.

잠시 후.

우득, 우드득-

김영훈의 몸이 환골탈태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나는 환골탈태를 하며 생기는 의념의 흐름마저 보려, 뇌가 터져라 그 광경을 관찰했다.

그의 피부가 깨끗해지고, 주름이 펴진다.

죽었던 세포가 살아나며, 그의 머리에서 모발이 자라났다.

늙은 그의 얼굴이 젊어지며, 나보다도 어린 모습이 되었다.

완전한 반로환동!

반로환동에 성공한 김영훈이 눈을 반개했다.

"봤나, 은현?"

"...예. 아름답습니다."

"자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군."

"감사합니다."

나는 그에게 허리숙여 감사를 표했다.

방금의 광경은, 내가 오기조원에 도달할 때 어마어마한 도움을 줄 것이다.

나는 그와 함께 며칠간 무학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다시 진씨세가의 영지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 나는 또 한 가지 의념을 깨쳤다.

색조는 황금색.

의념의 이름은 희(喜).

즐거움의 의념이었다.

생(生)(3)

제자들은 빠르게 성장해갔다.

교육 6년차.

현재 녀석들은 내 지옥수련 속에서, 어느새 이류 중반까지 성장했다.

그리고, 나 역시 김영훈을 만나고 온 후.

무를 다루는 것은 결국 인간이고, 인간은 결국 감정으로 이뤄져 있다는 것을 인지한 후부터, 나는 눈에 뜨일 정도로 성장이 일어났다.

'몇 가지 의념을 더 발견했다.'

황금빛의 즐거움(喜).

피처럼 붉은 빛의 분노(怒)

검푸른 빛의 슬픔(哀)

보랏빛의 쾌락(樂)

연분홍빛의 연정(愛)

검붉은 빛의 증오(惡)

이 여섯 가지의 의념을 중심을 바탕으로, 나는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다.

'기이하군.'

오기조원의 경지는, 그 어떤 경지보다도 힘겹고 험난할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의외로 나는 오기조원의 경지 속에서 순차적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왜일까.'

나는 제자들의 사이를 지나다니며, 그들의 의념의 결을 관찰했다.

의념의 결을 관찰하면 관찰할수록, 인간에겐 더욱 더 많은 색조가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단지 내 능력이 부족하여 그 이상은 볼 수 없는 것 뿐.

그러나 그조차도 꾸준히 월수궁무록을 단련하고 참오하다 보면, 언젠가는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묘한 확신이 든다.

'어째서일까. 오기조원의 경지는 다른 경지와 뭐가 다른 걸까...'

그것을 고민할 때였다.

"서 교관. 여기 있었군."

진씨세가의 연기기 노인이 비행법기를 타고 날아왔다.

그는 암살 계획을 총괄하는 사람으로, 일정 주기마다 들러 제자들의 성취를 확인하는 이였다.

"어쩐 일이십니까? 오늘은 들릴 날이 아니실텐데요."

"흠, 그게 말이지. 슬슬 가문의 윗분들이 성과를 내었으면 하셔서 말일세."

"성과... 말입니까."

암살 투입을 말하는 것일 터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을 찌푸렸다.

"말도 안됩니다. 저 아이들은 아직 이류 중반입니다. 황실 근위대만 해도 하나하나가 절정고수인데,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목이 잘릴 것입니다."

"흠, 나도 안다네. 가문의 윗분들도 대충은 알고 있고. 하지만 이제 슬슬 이 이상 시간을 끌기를 원하지 않으셔서 말일세. 예전부터 이럴 때를 대비해 준비해둔 게 있다네."

"준비해둔 것...?"

"따라오게나."

나는 그를 따라 비행법기를 타고 진씨가문의 어딘가로 향했다.

비밀리에 숨겨진 창고같은 그곳은, 음산한 음기가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총괄 노인은 나를 그 창고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창고 안에는 수십, 수백, 수천에 달하는 수정 구슬들이 줄지어 늘어져 있었다.

"이건..."

"삼화취정의 고수는, 수도자들처럼 완전히 의식이 트이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영감이 있다고 들었네. 보이는가?"

자세히는 보이지 않았으나, 수정구슬의 안에서 기묘한 의념이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검푸른 빛과 검붉은 빛, 그리고 시뻘건 빛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뭔가가... 안에서 괴로워하는 것 같군요."

"그래. 이건, 자네가 가르쳐온 아이들의 가족들. 그 원혼(怨魂)이라네. 막리세가의 수도자들이 정혈과 원기를 빼가고 남은 곳에서 우리가 수집해온 넋들이지."

"....!"

노인은 구슬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자네 말고 다른 조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관들에게도 전부 말 해 놓았네. 오늘부터, 아이들에게 각자의 친지의 원혼을 주입하여, 그들의 상단전을 강제로 자극시킬 거라네. 그렇게 된다면 저 아이들은 가진바 재능을 극한으로 개화하는 게 가능해지겠지."

"..."

"물론 수명도 조금 줄고, 정신에도 약간씩 문제가 생기겠지만, 큰 문제는 아닐 걸세. 암살 대상만 누군지 정확히 알고 있으면 되는 게..."

"거절하겠습니다."

나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제 수련법으로도 녀석들은 충분히 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 외법(外法)으로 강해진다 한들 진정한 절정고수들에게는 미칠 수 없습니다."

"흥, 자네가 잘 가르치는 건 알고 있네. 자네 말고 다른 교관들이 가르치는 조는 전부 기껏해야 삼류 후반의 실력이더군. 하지만 그래봤자 연기기 일성의 허약한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네.

그럴 바에야 외법을 써서라도 하루라도 빨리 더 높은 경지에 올려놓는 게 낫겠지!"

"...정신에 문제가 생기고 수명이 짧아진다고 하셨잖습니까."

"저 녀석들은 암살자들일세. 전부 사전에 너희는 부모의 원수를 갚을 수 있지만, 죽을 수도 있다고 경고를 주고, 자원받은 아이들일세. 모두 오래 살 생각은 없어."

나는 가까스로 수도자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넣을 뻔한 것을 참았다.

'뭣도 모르는 어린 아이들에게 그런 경고를 주고, 자원을 받았다고?'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억지란 말인가.

"...혹, 그 대법을 받다가 죽을 위험이 있습니까?"

"하하하, 걱정 말게. 우리가 괜히 범인들의 영혼을 힘써가며 수집했겠는가. 모두 각자의 친지였던 영혼일세. 원귀가 되었어도 혈육은 알아볼테니, 죽을 일은 없을 게야."

"...알겠습니다."

나는 속으로 이를 갈며, 창고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훈련장으로 가 제자들에게 소리쳤다.

"모두 들어라!"

내 말에도 이제 녀석들은 훈련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그러라고 시켰기 때문이었다.

그저 훈련을 하는 와중, 귀만을 열었을 뿐.

그러나 나는 녀석들에게 다시 말했다.

"오늘 할 말은 중요한 얘기이니, 모두 잠시 훈련을 정지하도록."

그러자 모든 녀석들이 일제히 훈련을 멈춘 후,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암살 총괄 노인에게 들은 것을, 그대로 제자들에게 전달해 주었다.

"...하여, 너희는 이제 너희 친지의 원혼을 몸에 받아들여, 재능을 개화하고 훈련을 받아, 암살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제자들과 눈을 하나하나 마주치며 말을 이었다.

"원하지 않는 이가 있다면, 내가 그 녀석은 구태여 원혼을 받지 않게 해 주겠다. 그리고, 굳이 암살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 녀석은, 내가 사정하여 수도가문의 외부인력으로 빠질 수 있도록 부탁을..."

그러나, 내 말이 끝나기도 전.

제자들은 모두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복수를 위해서라면, 언제 죽어도 상관 없습니다!"

"..."

녀석들의 주변에서는 피처럼 붉은 의념과 검붉은 의념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과연 이게 맞는 것인가.'

나는 작게 입술을 씹었다.

제자들의 눈은 하나같이 핏발이 서 있었다.

나는, 그들을 이해해줄 수 없다.

저토록 어릴 적에, 소중한 누군가를, 눈 앞에서 잔혹하게 빼앗긴 적은 없으니까.

그들이 가진 분노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나는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그저 분노를 가졌다는 것을 확인만이 가능할 뿐.

"...알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녀석들의 뜻을 인정해줄 수밖에 없었다.

"너희가 원하는 대로 해라."

이 자리에서 복수를 원하지 않는 이들은 없다.

그날 밤.

진씨세가에서 수도자들이 나와 내 제자들을 데려갔다.

그때까지도 내게 원혼을 받지 않겠다거나, 혹은 암살을 포기하겠다고 하는 녀석은 없었다.

원혼의 부작용을 설명해 줬음에도, 모두가 요지부동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이 밝았다.

"모두들, 괜찮으냐?"

나는 좌중을 둘러보며 물었다.

제자들의 의념이 조금 더 탁해져 있었다.

"괜찮습니다!!"

제자들의 눈에는 지금까지는 없었던, 기이한 광기(狂氣)가 맴도는 듯 했다.

나는 작게 입술을 짓씹으며, 훈련을 재개했다.

* * *

4년이 지났다.

쒜엑!

나는 내게 날아오는 암기를 피하며, 청야와 간합을 주고 받았다.

어느 정도 성숙해진 그녀는, 붉은 의념을 줄줄이 피워 올리며 자신의 궤도를 알아보고, 내 궤도를 읽어낸다.

챙, 챙, 챙!

나는 그녀의 암기를 튕겨버린 후, 그녀의 턱 끝에 칼날을 들이댔다.

"됐다. 이제 들어가 봐라."

"옛."

그녀는 내게 짤막하게 인사를 한 후 다시 제자리로 들어갔다.

나는 다음으로 오는 녀석과 다시 대련을 해준 후 다시 돌려보냈다.

지난 4년.

내 제자들은 모두 절정고수에 올랐다.

내가 평생을 바쳐 겨우겨우 오른 영역에 단번에 오른 제자들이었으나, 나는 딱히 녀석들의 경지 상승에 감탄하지도, 자랑스러워하지도 않았다.

녀석들은 극단적으로 재능을 개화하여 경지에 오르는 대신, 그들의 수명은 훨씬 짧아졌다.

원혼을 품고 있는 이상 계속해서 짧아질 것이라 했다.

또한 그들의 눈에서는 이제 더 이상 생기(生氣)가 흐르지 않았다.

제자들의 눈에는 이제 귀기(鬼氣)가 흘렀고, 가끔 살기를 줄기줄기 뻗쳐 올 때는 나조차도 흠칫 놀랄 정도였다.

거기에, 나는 녀석들의 한계를 더욱 잘 알 수 있었다.

'이 녀석들은, 저 상태로는 절대 절정 중기 이상으론 넘어갈 수 없다. 아니, 절정 중기에서도 절대 의(意)를 깨닫지 못해,'

한 마디로, 절대 검사(劍絲)를 쓸 수 없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녀석들이, 황실에 잠입한다면, 암중호위대를 상대로 필패(必敗) 한다는 것을.

'과연, 이 녀석들을 암살을 내보내는 것이 맞는가.'

최근에는 그런 생각이 뇌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전까지는 그저 지난 생의 약간의 죄책감.

그리고, 내가 녀석들을 가르친다는 책임감으로 이 녀석들을 훈련시켜왔다면.

지금은 생각이 달라져 있었다.

월수궁무록을 익히며 의념의 결을 느끼면 느낄수록.

삼화취정에 깊이 파고들며 더더욱 많은 의념을 느낄수록.

제자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이 아이들은, 살아있다.'

제자들의 생(生)이 여실히 느껴졌다.

귀기가 짙어졌지만, 살기와 독기가 더더욱 짙어졌지만.

그럼에도 만호는 계화를 좋아한다.

열오는 만두를 먹을 때 가장 기뻐한다.

청야는 휴식을 취할 때 새삼 행복한 의념을 내뿜는다.

계화는 무공에 열심히인지라 내게 칭찬을 받으면 희미하게 기뻐하는 것이 느껴진다.

성진은 민들레를 볼 때마다 부모님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슬퍼한다.

진삼은 내가 자세를 지적하는 것을 싫어한다.

희아는 수도가문의 지나가던 잘생긴 자제 중 한 명을 보고 그때부터 그를 연모한다.

...

이들은, 모두 살아있다.

그리고 나는, 이들이 절대 죽는 것을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사부님, 그나저나 저희는 언제쯤 암살을 나갈 수 있는 겁니까?"

만호가 나와 대련을 마친 후 내게 물어왔다.

다른 제자들 역시, 내 대답이 궁금한지 귀를 쫑긋 세우며 들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희는 황제의 호위대 중 가장 약한 녀석과 맞붙어도 흠씬 두들겨 맞을 거다. 황실 암중호위대는 하나하나가 대문파의 장문인, 혹은 원로급이다. 너희는 그 녀석들보다 최소 한수, 많게는 두, 세 수 이상 떨어지는데, 무슨 암살 같은 소리를 하는 거냐."

"끄음... 그래도 저희 500명이 전부 달려들면 해 볼 만하지 않습니까...?"

나는 무슨 개소리를 하냐는 듯 만호를 쳐다보며 말했다.

"500명이 달려들면 그게 암살이냐? 전쟁이지. 수도가문은 빠르게 막리정을 암살시키고 싶어하는 것 같지, 전쟁을 하고 싶어하지는 않는데. 수도가문의 지원 없이 한번 전쟁을 해 보지 그러냐?"

"끄음..."

녀석이 짜증스런 눈빛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난 이전 암중호위대에 있었을 당시, 암중호위대 전원이 모여 삼화취정의 고수를 상대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황실 어좌 암중호위대는 합격을 하면 나와 같은 경지의 고수도 격살할 수 있는 전력이다. 쓸데없는 생각들은 하지 말고 다들 더욱 정진해라."

지금껏, 수도가문에서는 다른 조의 암살자들을 하나둘씩 황실로 보내왔다.

이미 다른 조의 암살자들은 원혼을 이용한 재능 개화로, 무공 교관의 실력을 뛰어넘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아직도 제자들의 성취가 미진하다는 이유를 들어 한 명도 암살에 보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녀석들의 실력은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내 의술과 독술까지 전부 전수한 이 녀석들은, 사실상 하나하나가 검사를 사용하는 절정 중기 완숙급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다섯 이상이 합공한다면 능히 암중호위대를 뚫고 황제를 암살할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살아서 돌아올 수 없다.'

나는, 내 제자들이 살아서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랐다.

황제를 어찌어찌 죽이면 뭘 하나.

황제는 저래뵈어도 수도자다.

의식의 크기를 생각하면 연기기 4, 5성 정도 수준의 수도자.

거기에, 황태자가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구명법기도 한둘쯤은 몸에 바르고 있을 터.

두, 셋이 몸을 희생해서 황제를 죽인다 쳐도, 일정 이상의 소란은 무조건 야기할 것이고, 그럼 암중호위대뿐이 아닌 황제의 친위대까지 몰려들 것이다.

황제를 죽이러 간다는 것은, 동시에 본인이 죽으러 간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아마 초창기의 마음가짐이었다면, 황궁의 지도와 비밀통로까지 전부 알려준 후, 내가 제조할 수 있는 독과 약은 전부 만들어서 싸 준 후, 그렇게 암살을 보냈을 터. 그렇게 하고 마음을 정리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나는 더 이상 그럴 수 없었다.

이 아이들이, 살아있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저마다의 생(生)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며칠 후 김영훈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시 철륭성으로 향했다.

* * *

"오랜만이구나, 은현아."

"오래간만입니다, 김 형. 또 경지가 오르셨나 봅니다."

나는 그의 옆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강기의 환(丸)을 보며 말했다.

그는 조수월무결을 보며 어느새 다시 경지를 뛰어넘은 것이었다.

"그래, 강기압환(罡氣壓丸)의 경지에 도달하는 데에 성공했지. 이제는 솔직히 거의 두려울 게 없다. 그리고 너도 역시..."

김영훈은 내 시선을 보더니 눈에 이채를 띄었다.

"놀랍군, 칠정(七情) 중 벌써 육정(六情)까지 깨쳤나 보구나."

"예, 저도 놀랄 정도로 진도가 빠르더군요. 물론 아직도 수천수만가지의 의념 중 고작 여섯개입니다만..."

"하하하, 고작 여섯개라니. 칠정(七情)은 가장 기본적인 의념이다. 생존본능인 청색과 적색의 의념을 제외하면, 의(意)의 가장 근간을 이루는 것이 바로 칠정이다. 그 일곱 까지의 기본의념으로부터 시작해서, 수천, 수만, 수억에 달하는 인간의 감정이 성립되는 거지."

그는 내게 보여주려는 듯 자신의 의념의 흐름을 세분화해서 보여주며 설명을 이어갔다.

"여섯 개의 기본적인 의념을 장악했다면, 거기에서 파생되는 의념들만 관찰해도 계속해서 또 다른 색조를 발견할 수 있을 게다."

"흠... 그렇군요. 조언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제가 생각하기에, 삼화취정에서의 깨달음에 대한 것입니다만."

나는 그에게 궁금했던 것을 질문했다.

"흐음, 진도가 빠른 것 같다고?"

"예."

"네가?"

"..."

5년만에 삼화취정에서 오기조원에 이른 김영훈이 되물으니, 뭔가 창피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재능을 생각하면, 훨씬 느릿느릿 색조들을 발견해야 맞았다.

그래서 사실 생 초반에는 오기조원에 이르기까지 2, 3번의 회귀를 거칠 각오까지 한 상태였었다.

그런데 예상외로 색조들을 발견하는 숫자가 빠른 것이었다.

"음 뭐... 솔직히 나는 네가 깨닫는 속도가 빠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

"그래도 빠르다고 한다면, 아마 네가 삼화취정에 잘 맞는 자질인 게 아니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나는 정말로, 무예에 대한 자질은 한 톨도 없다.

그런데 어째서 삼화취정에 대한 자질이 뛰어나단 말인가?

"흠. 확실히 나에 비하면 떨어지긴 하지만, 내가 봐 온 다른 삼화취정의 노고수들과 비교해도 네 성장은 조금 빠른 감이 있긴 하지. 기이하군. 내가 관찰해온 바로... 사실 삼화취정에서의 깨달음은, 나이가 많은 사람일수록 유리하다."

"예?"

나는 살짝 놀라서 반문했다.

나이라니?

"삼화취정부터는, 무(武) 뿐이 아닌 자신의 생(生) 역시 중요해지는 단계. 삶을 이루는 칠정을 발굴하고, 거기에서 파생되는 수만 수억가지의 의념을 관조하는 단계이니, 오래 살아오며 느낀 바가 많을수록, 오래 살아오며 겪은 바가 많을수록 유리한 것이 삼화취정에서의 깨달음이다."

"...허."

"사실 나도 내가 삼화취정에서 오기조원까지 도달하는 데에 5년밖에 걸리지 않은 것이, 내가 상당히 나이가 있어서가 아닐까 생각해 봤다. 내가 이래뵈어도 나름 중견 기업에서 부장까지 간 사람이 아니냐? 내가 우리 회사를 살리기 위해 젊은 시절부터..."

김영훈은 갑자기 과거가 생각났는지, 아주 오랫만에 회사 시절 이야기를 하며 과거를 회상하는 듯 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말에, 그제서야 내 깨달음들이 이해가 가는 듯 했다.

'...빨리 깨닫는 게 아니었군.'

10년에 걸쳐 여섯 개의 의념을 관찰했다고, 내 깨달음의 속도가 빠른 것이 아니었다.

'내 나이에, 그 정도를 깨닫지 못하는 게 이상한 거야.'

육체적인 나이로, 나는 지금 39살이었다.

하지만 정신적인 나이는 김영훈의 할아버지 뻘이었다.

수 번의 회귀를 거치며 몇백년동안 각기 다른 삶을 살아온 것이다.

아마 연국의 무림인 중에서, 나보다 정신적으로 나이가 많은 사람은 없을 터.

오히려 다른 삼화취정의 고수들보다 한참은 유리한 조건이건만, 내 재능이 끔찍할 정도로 일천해서 오히려 이 속도로 깨달음을 얻고 있는 것이었다.

'...좋아해야 하나.'

나는 여태까지의 경지 중, 삼화취정의 경지에서 가장 깨달음을 얻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덕분에 여태까지의 삶들 중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깨달음을 얻고 의념을 알아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내 재능이 끔찍할 정도로 일천해, 다른 이라면 같은 시간 안에 수천, 수만가지의 의념을 깨달을 시간에, 고작 6가지의 의념밖에 깨닫지 못했단 말도 되었다.

'아마 김영훈이 나와 같은 시간을 살았다면, 삼화취정에서 오기조원으로 넘어가는 데에 2, 3초도 걸리지 않았겠지.'

어쩐지 조금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

"...그나저나, 네가 요 몇년 새에 보내준 정보들 말이다..."

나는 지난 몇 년간, 제자들을 가르치며 김영훈에게 수도자들에 대한 정보를 보냈다.

특히 막리세가의 영지 몇몇 곳과 통하는 곳에 대한 정보를 주로 보냈다.

"그 정보들을 통해서, 나는 수도가문의 영지라는 곳에 진입할 수 있었다."

"그렇습니까?"

점차 그의 눈에 분노가 어렸다.

"그들은, 진법으로 숨겨진 비지 속에서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르고 있더군... 그들은, 인간으로 약을 만들고 있어!"

얼마간 그의 노기어린 설명이 이어졌다.

"...해서, 나와 함께 그 천인공노할 수도자 놈들을 처리하지 않겠느냐? 그 놈들은, 그런 놈들은 이 세상에 살아있어서는 안 돼!"

"...예. 맞습니다. 한데... 김 형 혼자서는 결코 그들을 전부 죽이기 힘들 겁니다."

"물론 그렇겠지 해서 뜻 있는 자들을 모아..."

"그걸로도 부족합니다."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이제이. 이독제독. 악을 벌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악을 이용할 필요가 있겠지요."

"흠...?"

나는 그에게 진씨세가에 대해 말해주었다.

현 황실인 막리세가에 반하는 수도가문.

연국의 이전 황조였던 가문.

대놓고 마도 가문인 막리세가보다는 그래도 조금 더 나은 수도가문.

"이들의 손이라도 잡아보는 게 어떻습니까?"

"흠... 확실히. 그냥 맨 몸으로 도전하는 것보다는 낫겠군..."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내 요청을 수락했다.

나는 김영훈과 함께 진씨세가의 영지로 향했다.

"흠, 그쪽은 처음보는 수사(修士) 신 거 같은데. 진씨가문의 영지에는 어인 일이시오?"

진씨세가의 영지 진법을 지키는 연기기의 노인이 김영훈을 보며 물었다.

아마 그의 의식영역을 인식하고 한 말이리라.

"수사라... 나는 무림인이외다."

"흠...? 무림인? 농담따먹기 하지 마시고 영지에 온 목적을 밝히시오."

김영훈은 차근히 자신이 온 목적을 설명했고, 설명을 들은 노인의 얼굴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수도자가 아니라 정말로 무림인이었나보군. 아무래도 영근을 타고난 줄 모르고 무림의 무공을 익힌 것 같네만, 본 가문의 외부 구성원으로 들어오는 게 어떤가?

수도공법도 익히지 않고, 연기기 1성조차 되지 못한 상태로 그 정도 크기의 식(識)을 가진 것을 보면 그럭저럭 자질은 되는 것 같은데..."

"...내 말을 듣기는 한 거요? 나는 막리세가의 무도함을 막기 위해 당신들과..."

"흥, 무림의 무공 따위로 어찌 수도자와 맞선다는 건가? 헛소리 하지 말고. 내가 말하는 대로 외부 구성원이나 생각해 보게."

김영훈은 연기기 노인을 잠시 쳐다보다가, 칼집에서 도를 뽑아들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성질 나왔군.'

"하, 그 칼 집어넣게. 그걸 나한테 휘두르는 순간 자네는 잿더미가..."

붕-

콰아아앙!

김영훈의 행동은 짧았다.

그는 강기를 날려, 진씨세가의 영지를 덮은 진법을 향해 날렸다.

그의 강기다발에, 진법의 한 귀퉁이에 그대로 거대한 균열이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본 연기기 노인은 입을 쩍 벌리고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 * *

이후 김영훈의 요구는 쉽게 쉽게 진행되었다.

진씨세가의 축기기 수도자가 나와 그의 무력을 측정했고, 축기기 수도자는 김영훈의 환(丸)에 비오는 날 먼지가 날 정도로 두들겨 맞은 후 그의 실력을 인정해야 했다.

진씨세가에서 김영훈은 어엿한 축기기 수도자 급의 전력으로 인정되었다.

그리고, 진씨세가의 수락을 받은 김영훈은 세가의 전투원으로 인정받아, 영지 곳곳을 돌아다닐 권한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김영훈을 데리고, 내 제자들이 있는 훈련장으로 향했다.

"김 형, 저 아이들입니다."

"흠... 음? 저 애들, 왜 한 몸에 혼(魂)이 몇 개씩이나 들어가 있는 거지?"

"그것이..."

내가 제자들에 대한 것을 설명해주자, 김영훈의 눈에 은근한 노기가 어렸다.

"...솔직히, 막리세가보다 낫다고는 하지만. 네 설명을 들어보니 이 놈들이 정말 나은 놈들인지는 모르겠구나. 멀쩡한 영혼에 제를 지내주어 천도시켜주지는 못할망정, 그 혈육의 몸에 집어넣어 혈육의 수명을 깎아내?"

"...일단 저들 말로는 원혼들이 혈육의 몸으로 함께 원한을 갚을 수 있게 한다는 것 같기는 합니다만."

"흥. 궤변이다. 죽은 자는 살아있는 자에게 훗날을 맡기고 평안히 쉬어야지. 저건 또 다른 방식으로 망자를 능욕하는 것 뿐이야."

"...맞습니다. 해서 김 형을 데리고 왔지요."

나는 훈련중인 제자들을 보며, 김영훈에게 부탁했다.

"부디 김 형께서 제 제자들의 몸에 붙은 원귀들을 떼어내어, 그들이 부디 저승으로 갈 수 있게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잠시 제자들을 바라보던 김영훈은 고개를 저었다.

"힘들겠구나. 분명 조수월무결로, 영(靈)에 간섭하는 것도 가능하다. 오기조원에 이른 이라면 누구나 가능하겠지. 하지만... 저 아이들은 본인이 자신의 친지였던 영혼들을 묶어놓고 있다."

"..."

"스스로가 가족들과 떨어지고 싶지 않은 거겠지. 저 상태에서는 아무리 내 무공이라도 힘들다. 아이들이 스스로 놓아주거나, 혹은 아이들이 죽어서 함께 저승으로 가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어."

"...그렇습니까."

"혹은... 아이들이 마음을 터 놓을 수 있을 정도로 신뢰하는 이가 있다면, 그를 통해서도 가능할 수 있겠지만, 저 상태로는 수도자들도 별 방도가 없을 거다. 아이들이 스스로 가족을 붙잡고 있는 꼴이니..."

그는 혀를 차며 나직히 진씨세가의 수도자들을 욕하고는,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가버렸다.

앞으로 김영훈은 무림을 떠돌아다니며, 그와 뜻이 맞는 절정고수와 삼화취정의 무인들을 모아오기로 하였다.

나는 가만히 앉아, 제자들의 훈련을 지켜보았다.

'미안할 것 없습니다, 김 형. 저 역시... 저 아이들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니까요.'

이제 슬슬 수도가문에서도 내게 압박을 보내고 있었다.

슬슬 한 명쯤은 암살시도를 하러 가야 하지 않냐는 것이었다.

나는 암살시도를 보낸다면 20명이 한 조를 이뤄서 가게 할 것을 제안했지만, 너무 소란스럽고, 불필요하다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사실 이번에 내가 김영훈을 데려온 것 역시, 그런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일환으로 데려온 것도 있었다.

'...미안하다.'

이런 것 밖에는,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다.

나는 훈련장 안에서 명동하는 제자들의 의념을 보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 * *

"뭣... 무슨...!"

나는 원래 제자들에게 한 달에 두 번의 휴식을 주었으나, 녀석들이 절정고수가 된 후.

그때부터는 칠주야에 두 날은 쉴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안 그래도 깃든 원혼 때문에 피곤할 텐데, 계속해서 몰아붙이는 것보다는 휴식을 취하며 인간적인 삶을 원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돌아온 휴일.

제자 중 하나, 녹현이라는 녀석이, 내 처소에 한 장의 서신을 놔두고 사라져 있었다.

- 이렇게 계속 세월만 보낼 수는 없습니다. 형과 누님의 원수를 갚으러 가 보겠습니다. 설령 죽더라도 상관 없습니다. 그동안 가르쳐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이런 개 같은...!'

나는 이를 갈며 서신을 꾸겨서 품에 넣었다.

"만호! 녹현이 어디로 갔는지 보았느냐?"

나는 제자들의 실질적인 우두머리 역할을 하는 만호에게 녹현의 행방을 물었다.

그러나, 만호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내가 묻지 않았느냐. 녹현의 행방을 말해라."

"..."

"...만호!"

그때였다.

"왜 애꿎은 그 아이를 혼내나. 너무 그러지 말거라."

"...당신."

나는 어느새 비행법기를 타고 날아온, 암살조 총괄자 노인을 노려보았다.

"그 아이가 스스로 자원했다. 최소한 형제자매를 죽인 막리세가 놈들에게 칼질이라도 한 번 해야겠다고 하더군. 나 역시 그 기개에 감탄해서 칭찬도 해 줬고."

"당신이 부추겼군. 내가 말했잖소! 내 제자들은 아직 암살에 한참은 부족하다고! 꼭 보낼 거라면 스무 명이 한 조를 이루게 해서 가야한다고!"

"가문의 어른들이, 한 번도 암살에 참여하지 않은 채 훈련만 받고 있다는 조가 있다는 것을 듣고 기분이 상하셨다. 한 명은 정해서 보내야 했어.

그리고 스무 명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우리는 은밀하게 움직여야 할 필요가 있어. 그렇게 대규모로 암살자들이 간다면 막리세가에게 더 큰 명분을 쥐여주는 꼴 밖에 안 된다."

뿌득-

나는 병장기와 독, 암기들을 챙겼다.

"어딜 가는 거냐?"

"...제자 녹현은 갈 수 없소. 왜냐하면 오늘 사고로 두 다리가 부러져 어쩔 수 없이 쉬어야 하기 때문이오."

절대 안된다.

최소 스무 명이 조를 이루지 않으면, 어좌 암중호위대는 절대 뚫을 수 없다.

개죽음이다.

총괄자 노인은 나를 바라보며 혀를 찰 뿐, 제지하지 않았다.

나는 녹현의 흔적을 추적하며 영지를 나섰다.

'흔적을 지운 모양이다만.'

아무래도 녀석은 내 무림경력을 조금 무시한 모양이었다.

정보단체인 귀영각을 운영할 때부터, 흔적을 지우고, 다루는 일은 내 전문이었다.

'감히 내 앞에서 어설프게 흔적을 지우면서 이동해?'

100년을 넘게 강호에서 활동하며 시간을 보낸 노회한 무림고수가 바로 나다.

실전경험에 한해서라면 감히 김영훈조차 내 앞에 고개를 들이밀 수 없다.

나는 녹현의 흔적을 따라 이동하며, 녀석을 쫓아갔다.

산군월악비를 펼치며 산능성이를 넘자, 저 멀리서 녹현의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냄새를 지운다고 지운 것 같기는 했으나, 오감을 상시 극대화할 수 있는 내게 냄새를 숨기는 일은 큰 의미가 없었다.

쒜에에엑!

바람을 스치며, 녀석에게 달려갈 때였다.

촤라락!

철편(鐵鞭)이 허공을 가르고 쇄도해온다.

철편에서 세 갈래의 의념이 다시 뻗쳐나온다.

세 번의 연계기.

대련 때의 나라면 적당히 칭찬을 해 주며 합을 맞춰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슈캉!

발검과 함께 검강이 검에 맺힌다.

내 일검이 의념의 간합을 바로 뚫고 들어가 녀석의 철편을 잘라버렸다.

툭-

"나와라. 녹현."

풀숲에 숨어서 나를 노렸던 녹현이, 은신술을 풀고 나섰다.

"어딜 가는 거냐."

"...형과 누나를 갈아마신 쓰레기들을 죽이러 갑니다."

"황실로?"

녀석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혀를 차며 말했다.

"네 실력으로는 택도 없다. 어좌 암중호위대는 도박해서 들어가는 자리가 아니다. 너와 합이 좋은 녀석들 스무 명이 한 번에 들이치지 않으면..."

"스무 명은 필요가 없습니다."

녹현이 내 말을 끊었다.

"아홉 명 정도만 있어도, 저희는 황제를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자꾸 그런 무리한 조건을 내세우며 저희를 막으시는 겁니까?"

"아홉 명이면 분명 황제 목에 칼은 들이밀 수 있겠지. 하지만... 너희는 전부 죽을 거다."

"죽어도 된단 말입니다!!"

녀석의 눈에 핏발이 섰다.

"당신이 뭘 압니까! 당신이 눈 앞에서 가족이 산채로 갈려가는 걸 봤습니까? 지금도 내 머릿속에서, 실제로 형과 누나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어!

너무 아프다고, 너무 고통스럽다고! 제발 이 한을 풀어달라고! 당신이! 이 썩어 문드러지는 속을, 아냐는 말입니다!!!"

잠시 나와 현의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우리는 의념으로 간합을 주고받지 않고, 서로를 쳐다볼 뿐이었다.

"...모른다."

"모르면서!"

"내가 아는 건."

나는 녀석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네가 계화를 좋아한다는 거다."

"모르.. 예?"

"그리고 만호가 계화를 노리는 거 같아서 만호를 싫어하지."

갑작스러운 내 말에, 녀석은 어안이 벙벙한 듯 나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너는 두릅을 좋아하더구나. 참외를 싫어하고, 수박도 좋아하지 않지. 쉬는 시간에는 조각을 주로 하고. 내가 자세를 잡아주는 건 신경쓰지 않지만, 내공흐름을 지적하는 건 짜증나고 말이다.

겨울날 훈련을 하고,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후 뜨거운 물로 목욕할 때 굉장한 행복감을 느끼지 않느냐? 그리고 항상 뒷간에서 혼자 일을 볼 때 우울감이 치솟고."

"..."

"나는 네 속이 얼마나 썩어들었는지는 모르겠다. 단면적인 것만 볼 수 있을 뿐이지. 하지만, 단면적인 내 시선으로, 너는 이런 사람이다."

녹현의 의념이 요동쳤다.

형형색색의 의념들이 드러나며, 그의 감정상태를 보여주었다.

"너는, 이렇게 살아왔다. 이렇게 살아있고, 이렇게 살아가겠지. 나는, 너희가 살아있었으면 한다."

나는 기수식을 잡았다.

"그러므로, 너희가 죽으러 가게 할 수 없다. 덤벼봐라. 나를 상대로 50초동안 쓰러지지 않으면 보내주겠다."

얼마간 입술을 짓씹던 녀석은, 다시 품에서 새 무기를 꺼냈다.

파앗!

서로의 간합이 얽히며, 1초가 스쳤다.

그리고 내 주먹이 녀석의 안면을 그대로 파고 들어갔다.

생(生)(4)

1초.

내 주먹이 녹현의 안면을 파고들었다.

2초.

녀석의 의념이 뻗쳐오며 내 궤적에서 빠져나가려는 듯 했으나, 다리의 혈을 공격해서 땅을 구르게 했다.

3초.

땅에서 구르는 틈을 타, 녀석이 철편에 독을 묻혀 내게 휘둘렀다. 나는 암기로 철편을 쳐낸 후, 다가가 얼굴을 걷어찼다.

...

10초.

나는 녹현의 모든 무기를 빼앗고, 멱살을 잡은 채 들어올렸다.

"이 실력으로 지금 황실에 침입하겠단 말이냐?"

"...죽음을 각오하면."

"죽음을 각오해도 암중호위대한테는 안 된다. 가장 약한 녀석과는 동귀어진까진 노려볼 수 있겠지만, 둘 이상이 합격진을 펼쳐 너를 압박하면 그냥 죽은 목숨이야."

"..."

"돌아가자. 너는 아직 실력이 되지 않는다."

녀석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입술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언제까지, 언제까지 수련만 해야 하는 겁니까."

"..."

"저희가 수련을 하면, 그 암중호위대라는 놈들은 잠만 잔답니까? 황제를 호위하는 놈들은 안 강해집니까? 그놈들은 전부 병신이랍니까?"

녹현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외쳤다. 녀석의 눈에서는 귀기가 흐르는 듯 했다.

"그놈들도 계속해서 강해질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언제! 언제 우리는 복수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분명 사부님이 말씀하신 게 맞습니다.

저는 분명 그런 사람입니다. 제가 계화를 좋아하는 것도, 만호를 싫어하는 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 모든 삶을 버려서라도, 복수를 해야 한단 말입니다!"

나는 안타까운 눈으로 현이를 바라보았다.

겉으로는 귀기를 흘리고 있지만, 녀석의 의념은 검푸른 빛.

슬픔의 의념이었다.

짙고도 짙은 색이었다.

녀석은 지금 눈물 없이 울고 있었다.

"우리보고!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사사삿-

주변에서 기척들이 풍겨왔다.

나는 눈쌀을 찌푸렸다.

"...어떻게 나온거냐."

"총괄주님께서 진법을 열어주셨습니다. 가서 현이를 도우라더군요."

"...총괄주 개 같은 놈 같으니."

나는 짜증을 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만호, 해웅, 계화, 청야, 열오, 희아...

약 500여명의 내 제자들이 나를 포위하고 있었다.

"나를 잡아두겠다는 거냐? 녹현이 갈 수 있게?"

"예. 그리고 녹현뿐 아닌 몇 사람이 더 갈 겁니다."

뿌득-

나는 이를 갈며 제자들을 노려보았다.

"개죽음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너희는 너무 약하다."

"방금 녹현이 말했잖습니까. 우리만 강해지지 않습니다. 암중호위대라는 이들도 분명 계속해서 수련하고, 강해질 겁니다."

"...이렇게 해서까지 가겠다는 거냐."

"이렇게 손 놓고 세월아 네월하만 할 수는 없습니다."

"...좋다."

나는 살기를 품으며 말했다.

"내 입장을 밝히마. 난, 너희 중 한 명도 보낼 수 없다. 왜냐하면 너희는 모두 훈련 중 어느 한 곳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해, 며칠간 요양을 하게 될 터이니 말이다.

요양을 하게할지언정, 절대로..."

검을 들었다.

"누구도 죽게 할 수 없다."

"누구든 죽더라도 한을 풀고 싶어합니다."

스릉-

내 검이, 허공을 갈랐다.

다음 순간, 제자들의 눈에 당혹이 어렸다.

월수궁무록!

이 무공을 익힌 자와 익히지 않은 자는, 어른과 어린아이 정도의 차이가 있다.

유치원생 500명이 달려든다고, 성인 장정이 이기지 못할까.

원래도 나는 내 실전경험과 검법, 독을 사용하면 삼화취정의 경지에 이른 수준에서 이만한 수의 절정고수들의 발을 충분히 묶어놓을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월수궁무록의 무공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모두, 연기기 중후반의 수도자를 상대한다고 생각하고 발악해 보도록."

나는 육합전성으로 사자후를 사방으로 날린 후, 인식(認識)을 잘라가며 모습을 감추고 다가갔다.

삼화취정의 경지가 깊어지며, 계속해서 다른 의념들을 발견할수록.

월수궁무록의 완성도는 계속해서 올라만 갔다.

이제, 절정고수 중에서도 삼화취정에 이른 이가 아니라면, 나를 상대할 가능성조차 없었다.

푸욱, 푹, 푹!

나는 마비산을 묻힌 암기들에 월수궁무록으로 의념을 벼려, 인식을 잘라가며 사방으로 흩뿌렸다.

일수(一手)에 수십명의 제자들이 자리에 쓰러졌다.

"당황하지 마라! 모두 밀집대형!"

만호가 소리를 치며 중심을 잡으려 했으나, 나는 그의 뒤로 다가가 검의 손잡이로 뒷목을 쳐서 기절시켜버렸다.

촤아아아악!

그런 후 독분을 흩뿌려 시야와 호흡을 점한 후, 나는 하나둘씩 제자들을 기절시켰다.

그렇게 500여명의 제자들을 전부 기절시키는 데에 걸린 시간은, 약 3각.

나는 그 안에 모든 제자들을 제압한 후, 아연한 표정으로 이 전투를 보고 있던 녹현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방금 뭘 어떻게 하는건지, 보기는 했느냐?"

"...못 봤습니다."

"그래. 그게 너의, 너희의 실력이다. 아예 인지 자체를 못 하지 않느냐. 너희 실력으로는 감히 상위의 고수에게 댈 수 없어. 알겠나?"

"..."

"일어나서 영지 내의 하인들을 불러와라. 이 놈들을 옮겨야겠다."

녀석은 잠시 분한 표정을 짓더니, 눈을 감았다.

"...알겠습니다."

얼마 후, 나는 하인들과 함께 제자들을 다시 훈련장으로 옮겼다.

사실 녀석들은 절대 약하지 않았다.

김영훈이라는 절세천재가 수도자에게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낸, 월수궁무록이라는 신기(神技)가 너무 말도 안되는 수준인 것이지.

녀석들의 수준이라면, 스무 명 정도만 모인다면 안전하게 황궁에 잠입해서 황제의 목을 따고 무사생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수도가문에서는 절대 그렇게 대규모로 이동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막리세가에게 진씨세가를 공격할 명분을 준다는, 멍청한 이유였다.

그래서 진씨세가는 암살자들이 얼마나 죽어나가든 말든 신경쓰지 않고 하루에 한명, 많으면 2, 3명을 보내고는 했다.

'진씨세가 놈들...'

사람 목숨을 뭘로 아는건지.

어쩌면 저들은 암살자들의 목숨 역시 막리세가와의 정치싸움의 도구로 보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저 도구.

'막리세가는 가축. 진씨세가는 도구인가.'

나는 원혼을 받아들여, 억지로 절정의 세계에 진입한 제자들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막리세가보다는 어쨌건 괜찮으리라고 여겼지만. 정도와 규모의 차이일뿐. 진씨세가도 똑같은 존재들이 아닌가...'

얼마 후, 제자들이 일어나자, 나는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너희의 실력은 나도 잘 안다. 너희도 솔직히 지금의 상황에 불만이 있는 녀석들이 많겠지. 하지만, 그 정도 실력으로는 절대 암중호위대에게 맞설 수 없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하지만 그래도 불만이 있겠지. 너희 논리처럼, 너희가 강해지는데 황제의 호위대는 강해지지 않느냐고. 그래. 그 말이 맞다. 하지만."

파앗!

나는 녀석들의 눈 앞에서 또 다시 허깨비처럼 사라졌다가 나타나보이며 말을 이었다.

"방금 보았다시피, 내 무학은 일반적인 절정고수들과도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무학이다. 만약 너희가 이 무학을 익힐 수만 있다면, 너희의 살행을 허해주마."

물론, 월수궁무록은 삼화취정이 최소 입문 조건이니만큼, 절대로 쉽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원혼으로 인해 강제로 경지가 끌어올려진 녀석들이라면, 오히려 일반인보다도 더더욱 삼화취정으로 진입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제자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며.

이룰 수 없는 희망으로 하여금, 녀석들이 죽지 않게 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이 무학의 입문 조건은, 나를 쓰러뜨리는 것이다. 너희 500명이 전부 덤벼도 좋다. 암습도 좋다. 밤에 독을 타도 좋다. 자고 있을 때 습격해도 좋다. 인질을 잡아도 좋다. 무슨 수를 써서든, 나를 한 명이라도 쓰러뜨려 제압한다면, 이 무공을 모두에게 전수하마."

나를 쓰러뜨리던, 쓰러뜨리지 않던.

삼화취정에 도달하지 못하면 절대로 월수궁무록에 입문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뤄질 리 없는 허황된 망상을 들고, 약속했다.

"너희가 나를 넘을 가능성을 보여준다면, 차원이 다른 무학을 전수해주마!"

그 말에, 수많은 제자들의 의념이 요동쳤다.

분노, 설렘, 놀람, 기쁨, 기대...

'보인다.'

수많은 감정의 변화에, 나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몇 가지 색조를 더 볼 수 있었다.

'이래서, 삼화취정의 고수 중에는 은거기인이 별로 없나보군.'

재야에 묻혀있는 삼화취정의 고수는 거의 없다.

대다수가 대문파의 원로원에 들어서 문파의 대소사에 관여한다.

나는 왜 심산유곡에서 은거하며 폐관수련을 하는 기인이 없나 궁금해 했지만,

실은 요동치는 의념과 감정들을 관찰하는 것이야말로, 삼화취정의 고수에게 가장 도움되는 것이기에,

그들은 대문파의 요직에서 끊임없이 의념을 관찰하는 것이리라.

내가 그렇게 제자들에게 약속을 하고, 하루가 지났다.

피잇!

변소에서 일을 보던 중, 분변 더미에서 검이 튀어나와 나를 찔러들었다.

"첫날부터 과감하군."

찰나, 나는 암기를 분변 밑으로 던져 검을 튕겨낸 후, 변소 아래로 마비독을 풀어넣었다.

그런 후 볼일을 마친 나는 일어나서 변소 밑으로 손을 뻗었다.

철퍽!

불쾌한 감각이 닿았지만, 나는 감각을 무시하고 그 아래에서 마비독에 당한 제자를 빼냈다.

"멍청하긴, 똥에 빠져 죽으면 어쩔려고 그랬느냐."

난 마비된 제자를 끌고 가 냇가에 던진 후, 혈을 짚어 천천히 마비가 풀리게 했다.

"진짜 고수한테는 분변 속에서 습격하는 건 안 먹힌다. 차라리 더 검에 집중하도록."

나는 분변 속에서 나를 습격한 제자, 우륙에게 충고를 준 후, 의념의 흐름의 제어에 대한 충고를 주고 훈련장으로 향했다.

티잉!

훈련장에 도착하자, 암기술을 배운 두 명의 제자, 청야와 환형이 내게 각자 암기를 던져왔다.

촤악!

동시에 훈련장 모래 속에 숨겨져 있던 얇은 실이 드러나며 나를 묶으려 들어왔다.

타앗!

나는 허공으로 뛰어올라 암기와 실을 피한 후, 검을 뽑아들었다.

단악검법

능곡지변!

쿠과과광!

검기가 땅을 헤집는다.

땅 밑에 숨어서 나를 암습하려던 제자들의 모습이 드러났고, 녀석들이 만들어둔 함정들도 몇몇 개가 드러났다.

"오늘 아침은 이게 끝이냐?"

"쳐라!"

그러나, 만호를 중심으로 도검류를 쥔 제자들이 나를 포위하며, 합격진을 짜냈다.

합격진 속으로, 주변을 빼곡하게 덮은 의념이 나를 덮쳐왔다.

채 피할 구석이 없을 정도로 빼곡한 의념이다.

나는 씨익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너희가 만든 검진이냐? 안쪽에 잡힌 이를 완전히 갈아버리는 좋은 진이군."

상대가 나만 아니라면, 훌륭하다.

능곡지변!

쿠과광!

나는 다시 한번 검기를 땅으로 날려 주변을 헤집었다.

검진의 형세가 어긋난다.

그러나, 다시금 만호의 지휘 아래 제자들은 순식간에 검진을 다시 애워쌌다.

하지만 부족하다.

"검진을 다시 에워쌀 그 틈새에, 너희는 전부 세 번씩 죽었다."

슈칵!

단악검법

산명곡응!

내가 파(波)의 형태로 날린 검기가, 어느새 제자들의 가슴 앞섬을 잘랐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실전에서도 그럴 거냐."

단악검법

심산

유릉

심산의 초식으로 검진의 틈새로 파고들어간 후, 유릉의 초식으로 찔러들어가며 길을 낸다.

단악검법

첩첩산중

동시에 자잘한 검기를 사방팔방으로 뿌려대며 난전을 유도한다.

그 난전 속에서, 나는 검진의 궤도를 바라보았다.

'세 군데를 부수면 무너지겠군.'

흐름이 읽힌다.

나는 단맥도의 초식까지 섞어쓰며, 검기와 검강을 난무했다.

약 1각쯤 지났을까.

결국 만호의 주도 하에 세워진 검진은 무너져 버렸고, 제자들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검진을 짜며 잡념이 있는 놈들이 많더군. 무리를 이루니 여유가 생긴 거냐? 무리를 이루고 집단을 이룰수록 더욱 더 자신의 위치에서 집중해야 한다. 검진을 짤 때도 일대일로 생사결을 벌인다 생각하고 짜라."

몇 가지 검진에 대한 충고, 그리고 몇몇 녀석의 의념과 잡념에 대한 충고를 해 주고 검진을 나왔을 때였다.

척, 척, 척!

이번에는 장검, 창, 월도 등 장거리 무기를 익힌 녀석들이 나를 애워싸고 자세를 잡았다.

"검진 다음은 장창진인 거냐."

내 기력을 빼겠다는 의도.

그러나 나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검을 들었다.

"어디 해 보거라."

월수궁무록은 커녕 독도 제대로 안 쓰고 있다.

이 정도의 나를 상대로도 고전하는 녀석들이었다.

감히 내 체력을 빼 놓을수나 있는가.

나는 검을 들어올리며, 제자들을 향해 싱긋 웃었다.

"오늘 내 옷에 스칠 수라도 있으면 앞으로는 나체로 훈련을 맡지."

농담을 하는 나를 향해, 수많은 창격들이 짓쳐들어온다.

나는 기수식을 잡고, 제자들에게 쇄도해갔다.

* * *

한 달이 지났다.

"내가 지나다니는 길에 독을 살포해 놓다니, 이건 썩 나쁘지 않군."

나는 해독제를 꺼내 씹으며, 나를 향해 비수를 치켜든 계화를 바라보았다.

"독을 좀 흡입한 덕에 손끝이 떨려오고, 호흡이 가빠오는구나. 네게 승산이 조금 있겠어. 어디 덤벼 보거라."

파앗!

계화의 비수가 날카롭게 나를 찔러왔다.

동시에 나와의 간합을 주고받으려, 의념이 뻗어나왔다.

아마 상대가 내가 아닌 일반적인 절정고수였다면 썩 해볼만 했으리라.

하지만.

"네 수준에선 나와 간합싸움을 하기에 버거울텐데."

삼화취정에 막 올라, 자색밖에 볼 수 없는 고수라면 몰라도, 나는 이제 수십개의 색조를 눈에 담는다.

내가 읽어내는 의념의 흐름은 다른 절정고수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나를 상대로 간합싸움이 성립이라도 하려면, 최소한 삼화취정에는 올라야 한다.

티잉, 티잉, 티잉!

나는 계화의 비수를 모두 쳐낸 후, 수십 갈래의 의념을 뻗어낸다.

그 의념 모두가 내가 행할 수 있는 최적의 동선.

그리고, 그 동선에서 또 다시 의념이 끝없이 뻗어나간다.

계화 역시 자신의 의념으로 내 의념의 기세를 떨쳐내려는 듯 했다.

그러나, 나는 실시간으로 계화의 의념과 통하며 그녀의 의념을 읽어내는 중이었다.

파앗!

내 검이 그녀의 의념 사이를 뚫고 턱 끝에 겨눠졌다.

"집중하는 것도 좋고, 수련도 깔끔히 되어있다. 하지만 너무 경험이 없어. 다른 녀석들과 실전에 가깝게 대련을 해 봐라."

"...감사합니다."

그녀는 내게 포권을 올리는 척 하며, 얇은 실을 손가락 끝으로 조정해 내게 날려왔다.

슈칵!

난 손 끝으로 암기를 뻗어 실을 잘라냈다.

"좋군. 그렇게 정진하도록."

나는 계화를 칭찬해 주었다.

* * *

몇 달이 지났다.

월수궁무록을 알려주겠노라고 약속하지는 약 반년.

고작 반년이 지났을 뿐이지만, 제자들은 상당한 성장을 이뤄내었다.

합격진을 짜고, 나를 제압하는 것에 대해 연구하고, 불시에 기습하거나 암습하는 방법을 골몰하고 또 골몰한다.

동시에, 나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실력 또한 받쳐주어야 하니 끊임없이, 쉬지도 않고 무공을 단련했다.

그 덕인지, 맞지도 않는 절정경에 억지로 도달한 괴리감이 서서히 줄어드는 것이 보였다.

'이전까지는 솔직히, 절정고수와 같은 세계를 공유만 할 뿐 사실상 진짜 절정고수라기에는 다들 하자가 있는 수준이었지.'

하지만 이제는 점차 그 하자가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원귀를 이용해서 재능을 극대화한 제자들이 절정경에 올랐을 때에는 감흥이 없었지만,

점차 제자들이 무공을 단련하며 움직임에 하자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니 차차 감격스러워지고 있었다.

또한 성장한 것은 제자들뿐이 아니었다.

'나 역시, 의념에 있어서 더더욱 많은 진보를 보이고 있다.'

여섯 개의 의념을 깨닫고 난 후.

나는 그 여섯 개의 의념을 기반으로 그에서 파생되는 수백, 수만가지의 의념의 색조들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그 급격한 성장속도는 이전까지는 결코 느껴본적 없는 속도였다.

'빠르군, 아니... 이것도 느린 건가.'

나는 어지러울 정도로 많은 인간의 색조를 관찰하고, 또 파고들며 생각했다.

어떤 색조는 무엇을 뜻하는 색조인지 바로 알아볼 수 있었으나, 어떤 색조는 아예 무슨 이름을 지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그러나 그런 무수한 색조를 깨달으면서도, 나는 한 가지를 도무지 깨닫기 힘들었다.

칠정(七情) 중 마지막.

욕망(欲)의 정(情).

'욕망.'

나는 도무지 욕망의 색조를 볼 수 없었다.

아무리 관찰해도, 욕망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욕망은 뭘까...'

나는 찬찬히 제자들의 습격을 피해내며 생각에 잠겼다.

"욕망이 뭐냐라..."

오랜만에 만난 김영훈이 찻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그는 최근 연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그와 뜻을 같이할 무인들을 거의 모았다고 했다.

"욕망은 내면에 깊숙히 숨어있는 갈망(渴望)이지. 욕망이 없는 인간은 없네. 그렇기에 누구나 살아가며 저마다의 방법으로 욕망을 분출하는 거고. 어찌보면, 욕망이란 인간의 삶의 동력(動力)인 거지.

자네가 가진 가장 큰 갈망은 무엇인가? 그걸 계속 고민하다 보면 욕망의 색에 대해서도 알 수 있을 거야."

"흠, 혹시 욕망의 의념은 무슨 색인지 알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그 색을 보려 노력이라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영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자네도 그건 알고 있겠지? 삼화취정의 고수들이 보는 색은 전부 비슷하지만, 각각이 모두 다르다는 걸. 나도 자네도, 기쁨(喜)의 의념은 모두 금빛으로 보이겠지만, 자네와 내가 보는 그 의념은 약간의 색조차이가 있네. 나는 완전한 순금빛이고, 자네는..."

"황금빛으로 보이지요."

"그래, 그런 식으로 사람마다 볼 수 있는 의념의 색조에 미세한 차이가 있고... 특히나 욕망의 의념은 그 정도가 심하지. 모두가 가지고 있는 갈망이 다르기 때문일세. 그러니, 자네의 욕망의 색이 어떤지는 오직 자네만이 안다는 뜻이야.

그러니, 자네가 자네의 갈망을 잘 관찰하는 수밖에는 없어."

"그렇습니까..."

나는 김영훈의 조언을 받으며 생각했다.

내가 가장 원하는 것.

그것은 무엇일까.

김영훈에게서 화두를 전해듣고도, 나는 며칠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또 관찰했다.

그 날도 여김없이 나는 제자들의 합격진 속에서, 그들과 분투하고 있었다.

챙, 챙, 챙!

수많은 의념을 읽어내리며, 제자들의 헛점을 알아내어 찔러들어가고, 쉼 없이 날아드는 독침과 암기들을 피하고 쳐내며.

나는 상념에 빠져있었다.

'내 갈망.'

이번 생의 내가 원하는 것.

우선은 오기조원에 도달하는 것이다.

하지만 오기조원에 도달하려면 일단 욕망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나는 '욕망을 아는 것'이 욕망인 셈이었다.

'곤란한데.'

그럼 조금 기준을 넓혀보자.

내가 오기조원이 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수도자가 되기 위해서이지.'

수도자가 되려는 이유는?

수도자가 되어, 승천문으로 진입해 원래 세계로 돌아가, 내 회귀 능력을 사라지게 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회귀 능력을 없애려는 이유는?'

회귀 능력으로 인해, 내가 쌓아올린 모든 삶이 결국에는 부정당하게 될 테니까.

그러므로, 나는 내 회귀 능력의 근원을 알아내어, 결국 회귀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아, 그렇군.'

나는 어쩐지 내 갈망이 무엇인지 대략 알 것 같았다.

삶이 부정당하는 것이 싫다.

그 말은 즉슨, 나는 삶을 살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

'나는, 삶을 갈망한다.'

식욕도 성욕도 수면욕도 필요 없다.

이 세상 어떤 욕망과 욕구도 필요 없다.

나는 단지...

'살고 싶다.'

내가 이뤄온 그 모든 삶들이, 시간의 역류(逆流) 속에서 허망하게 없어지지 않았으면 한다.

비록 모든 걸 이루지는 못했을지라도, 많은 걸 이룬 내 소중한 삶이, 시간역행의 앞에서 부정당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러므로, 내 욕망은 삶(生)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하하, 하하하..."

제자들의 합을 파훼하며, 나는 욕망의 의념을 발견하지는 못할망정,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인지를 알 수 있었다.

"...얘들아."

만호의 대검이 내 눈 앞을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난다.

계화의 비수가 등 뒤에서 나를 찔러온다.

뛰어올라 피하니 청야가 허공에서 암기를 쥐고 나를 덮쳐온다.

나는 분명..

"나는, 너희가 살았으면 좋겠다."

이렇게, 자신의 욕망을 다른 이에게 강요하는 이기적인 사람이다.

내가 삶을 원하니, 죽으려 하는 이들에게도 삶을 강요하는 이기적인 놈.

하지만 그럼에도.

"왜냐하면, 너희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이 아이들은, 죽음을 욕망하면서도, 분명 살아있다.

슈칵, 슈칵 슈칵!

허공에서 덮쳐온 청야를 떨궈내니, 양옆에서 만호와 계화가 나를 공격해오고, 아래로 열오가 무기를 뻗는다.

녹현이 철편을 휘둘러 상반신을 압박하고, 다른 아이들이 독분을 흩뿌린다.

훌륭하다.

의념의 흐름이 보여도 빠져나갈 수가 없다.

'월수궁무록 극의를 쓰지 않고서는 못 빠져나가겠군.'

파앗!

곧이어, 아이들의 무기가 내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내가 내밀었던 조건은 나의 '제압'이었지 내 '살상'이 아니니까.

'애초에 제압이 훨씬 어렵지.'

그리고 내가 죽으면 정작 누가 전수해 주겠는가.

"훌륭하구나. 다들 그 짧은 시간 안에 많이 컸어."

"...숨기고 있는 한 수가 있는 건 압니다. 아마 그걸 사용하시면 유유히 빠져나갈 수 있으실 테죠."

만호는 내가 발톱을 숨긴 것을 알았는지, 조금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맞다. 이 한 수만으로도 너희를 전부 제압할 수 있어. 그리고 단악검법 오의인 22초식조차도 내게서 끌어내지 못했고. 23, 24초식은 두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짚어줄 헛점도 없다. 뭘 더 가르치거나 대련을 한다고 나아지지도 않겠지. 이후로는 너희 깨달음의 영역이니.. 너희는 나를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다. 내가 숨겨둔 한 수를 꺼내도 그건 너무 높은 한 수라, 너희가 봐도 알아먹지 못할 터. 그러나 너희는 할 수 있는 한을 다해서 나를 여기까지 몰아넣는 데에 성공했다."

대애앵-

문득, 수도자들의 처소 방향에서 커다란 종소리가 울렸다.

[영지 내의 모든 범인들은 들어라. 절정경 이상의 무인들은 모두 운릉(芸陵)으로 모이도록. 중요한 하달 사항이 있다.]

종소리와 함께, 진씨세가의 영지 곳곳으로 총괄주 노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무슨 일인지는 대략 짐작이 갔다.

"...너희가 나를 몰아넣는 데에 성공했으나, 제압하지는 못했기에 본래 가르쳐주기로 했던 무학이 아닌, 무학에서 파생되어온 진(陣)을 알려주지."

진의 이름은 월수진(越修陣).

신마전을 꾸렸던 회차에서, 영훈 형님이 월수궁무록에서 파생시켜 만든 합격진.

일류 후기경의 고수 이상이 펼치는 진으로, 그 위력은 능히 연기기 중후기의 수도자를 잡아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앞으로 이 진을 익혀서... 반드시 살기를 바라겠다."

내 어조에 제자들의 눈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결국 녀석들을 한 명도 암살을 보내지 않는 것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은 수도가문의 압력에 저항할 수 없었다.

그나마 김영훈을 이용해서 시간을 벌고, 압력의 방향을 바꾸는 것에 성공한 것이 그나마 얻은 소득이리라.

이제 내 제자들은, 황제 암살이 아닌, 막리세가의 영지를 습격하는 임무를 맡게 될 것이다.

황제 암살보다 어렵다면 어렵고 쉽다면 쉬운 임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내 제자들이 생존 가능성을 끌어올릴 것이다.

"...반드시, 살게 해 주마."

내 욕망은 삶이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그럼에도 욕망의 의념은 볼 수 없었다.

어쩌면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한 탓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삶을 모를 지언정 내 제자들이 살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너희는 살아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얼마 후, 나는 제자들과 운릉에 모여, 김영훈과 다른 축기기 수도자들의 작전계획을 경청했다.

앞으로 두 달 후.

우리는 막리세가의 영지 습격을 시작할 계획이었다.

생(生)(5)

3개월이 흘렀다.

나는 검은 무복을 입고, 각기 무기를 손질하고 있는 제자들을 둘러보았다.

"...모두들, 준비는 됐나."

"네!!!"

대답은 쩌렁쩌렁했다.

3개월 전,

막리세가 영지 침공 계획 설명회에서.

황제를 죽이지 않는다는 말에는 모두 이성을 잃을 듯이 흥분했었다.

그나마 직후, 황제는 아니지만 막리세가의 다른 영지를 공격할 것이라는 말에 그나마 이성을 찾았으나, 나름 큰일날뻔한 사건이었다.

'다들, 복잡한 심경이군.'

정작 그들이 꿈꿔왔던 황제는 죽일 수 없게 되었지만, 대신 다른 흉수들을 죽일 수 있다.

하지만, 제자들은 원하든 살행을 눈앞에 두었음에도, 각기 심정이 복잡해 보였다.

단순한 증오도, 분노도, 기대도 아니다.

모든 것이 혼재된 기이한 감정.

'무슨 색인지 읽을 수가 없군.'

그렇다고 저것들이 욕망도 아니었다.

나는 그것을 보며 무언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어쩌면, 나는 수천가지 색조를 알아낼 수 있을지언정, 절대로 인간의 모든 색조를 알아낼 수는 없을지도...'

인간의 감정이 과연 몇 개인가.

누가 그것을 정의할 수 있을까.

감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렇기에 경계를 지을수도, 그 색을 모두 알아낼 수도 없다.

'...그렇다면, 오기조원의 경지는 도대체 뭐지?'

오기조원의 경지가, 단순히 모든 색을 알아낸 경지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런 신(神)이 아닌 이상 불가능했다.

하지만, 내가 김영훈이 오기조원에 이르던 순간에 보았던 것은...

'김영훈의 내면에서, 내가 미쳐 알아볼 수 없는 무한한 색조가 나와 그의 영역을 채우던 것이었다.'

그의 식(識)은 무한한 색조들이 채워져 만들어졌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지금 인간의 감정은 전부 깨닫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느끼는 걸까.

'모르겠군...'

기이하다.

무한은 결코 도달하는 게 불가능하다.

그런 게 가능하다면 김영훈은 수도자들에게 밀리지 않고 오히려 결단기든 그 위의 경지든 압도했을 터.

하지만 그때 내가 보았던 것은 무한이었다.

"...모르겠군."

지금 생각해봤자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내 재능으로는 김영훈이 설명해 주어도 쉬이 알아낼 수 없으리라.

'그렇다면 알아낼 수 없는 것보다는,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게 맞겠지.'

나는 제자들의 채비가 끝난 것을 확인한 후, 각자에게 내가 배합한 특수독과 해독제를 나누어 주었다.

제자들은 각기 내가 배합한 독을 받아가 자신의 소매나 품 속에 넣었고, 나는 각자의 채비를 확인한 후, 소리쳤다.

"오늘, 수도자들을 죽이러 갈 것이다!"

모두의 얼굴에 결연한 표정이 맴돈다.

그러나, 나는 이들이 결연한 것을 원하지 않았다.

"모두들, 함부로 죽을 생각을 하지 마라. 수도자와 동귀어진을 할 생각도 하지 마라!"

내 말에, 결연한 표정을 지었던 제자들의 표정에 약간의 짜증이 어리기 시작했다.

아마 살라느니, 어쩌느니 한다면 이들의 짜증만을 돋울 뿐.

진심으로 살아야 한다는 이유를 줄 수는 없으리라.

'그렇다면, 살아갈 동기를 만들어 줘야겠지.'

"너희는 황제가 아니라 단순히 막리세가의 저급 수도자들을 치러 간다는 것에 약간 불만이 있겠지. 하지만! 내가 약속하마. 너희가 모든 막리세가의 영지와 거점을 부수는 데에 성공한다면, 그 때는 나도 너희의 실력을 믿을 수 있으니.

너희와 함께 황궁을 치러 갈 것임을 약속하마! 황제 막리정의 수급을 취할 수 있게 도와주마! 대신! 너희는 그때까지 결코 쉬이 죽지 말아라. 어떻게든 악착같이 살아서, 너희가 훈련을 해 온 이유가 헛되지 않게 만들어라! 반드시!!!"

나는 사자후를 담아 크게 외쳤다.

"살아남아라!"

내 이유있는 생환 명령에, 제자들의 눈에 결연한 빛 대신 굳은 의지와, 막리정을 향한 분노가 피어올랐다.

"예!"

나는 그들의 대답을 듣고, 야행복을 입은 후 앞섰다.

500여명의 제자들 역시 모두 귀식대법을 펼치며 소리소문없이 나를 따라왔다.

우리는 진씨세가의 영지를 나서, 첨벽성 서북쪽 구릉으로 향했다.

그곳에 막리세가의 비지가 있다.

* * *

'...지난 삶보다 훨씬 많군.'

나는 김영훈이 끌어모은 무림고수들, 그리고 나를 따라온 500여명의 절정고수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거기에 내 제자들은 지난 생처럼 억지로 기량을 끌어올려 도달한 반편이 절정고수가 아니었다.

하나하나가 뼈를 깎는 훈련을 거쳐, 억지로 도달한 경지에 맞는 기량을 갖춘, 절정고수에 걸맞는 실력들이었다.

'아마 이런 영지에는 제대로 된 수도자는 없을 터.'

대부분의 수도가문은, 나라 곳곳에 설치해둔 영지에는 크게 중요 인력을 배치하지 않는다.

그저 가문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연기기 1~5성 수도자들이나 보내는 정도고, 그들을 관리할 연기기 후기, 혹은 축기기 초기 수도자나 한둘 보내는 정도였다.

대다수의 전력은 깊숙히 숨겨진 수도가문의 본가(本家)에 있었다.

지금 우리가 진입할 영지 역시 극저계 수도자들이 더러운 연단을 하는 일차 정제소일 뿐이었고, 중요 인력은 크게 배치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생에선 내 제자들이 없었지.'

이번 생에서는 수백의 가공할만한 전력이 추가되었다.

아마 고전할 것도 없이 그냥 밀어버릴 수 있을 것이리라.

그러나, 나는 걱정을 떨치지 못하고 제자들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막리가의 영지에 진입하면 끔찍한 꼴을 많이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광경을 보더라도 냉정을 유지해라. 우리의 우선순위는 분노에 미쳐 날뛰는 게 아닌, 냉철하게 수도자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죽이고, 혹여라도 있을 일반인들을 구출하는 것이니까."

내 말에 제자들이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얼마 후, 구릉 앞에 선 진씨세가의 축기기 수도자가 결인을 맺었다.

"개(開)!"

파아아앗!

주위의 풍경이 일그러지며, 우리가 막리세가로 갈 수 있는 통로가 열렸다.

우리는 수도자들을 따라 막리세가의 영지로 진입했고, 나는 익숙한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결계에 휩싸인 거대한 마을.

그리고, 우리를 보며 황급히 침입을 알리는 막리세가의 수도자들.

'이제 시작이다.'

우우우웅-

이번에도 선봉장은 김영훈이었다.

조수월무결로 빠른 경지에 이른 그가, 지난 생과 같은 신기(神技)를 보인다.

강기압환(罡氣壓丸)!

쿠구구구구-

지난 삶에서는 절정 중기였기에 제대로 볼 수 없었던 강기압환의 묘리.

삼화취정에 이르러, 수많은 의념의 결을 볼 수 있게 된 지금에야 어느 정도 보는 것이 가능했다.

정확히는, 보는 것 '만' 허락되었다.

'여전히 어떻게 하는 건지는 감도 안 잡히는군.'

수많은 의념의 저 구체 안에서 휘몰아치고 있다는 것은 이해된다.

그러나 도대체 어떻게, 자신의 의념을 떼어내서 저 안에서 휘몰아치게 하는 것인지는 감도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보고, 또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꾸과과광!

김영훈의 강환이 막리세가의 결계에 떨어졌다.

결계가 터져나가며 커다란 바람구멍이 뚫렸다.

수도자들과 김영훈, 그리고 그가 데려온 삼화취정의 고수들 열댓명이 먼저 구멍으로 들어갔다.

"가자."

나 역시 제자들을 이끌고 구멍을 넘었다.

"치, 침입자다! 해치워라!"

"이 벌레같은 범인 놈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

퍼억!

입을 놀리던 수도자 하나가, 빠르게 접근한 계화에게 맞아 머리가 터져 버렸다.

계화는 비수를 들고 재빠르게 움직이며 수도자들을 상대했다.

콰앙!

만호는 대검을 휘두르며 수도자들의 방어법술을 두들겨 박살냈고, 녹현은 철편으로 수도자가 부리는 강시의 다리를 휘감아 집어던졌다.

지난 삶과는 달리 압도적으로 빠르게 수도자들의 마을이 불타기 시작했다.

콰과광!

연기기 3성 수도자를 막 해치울 때.

수도자의 집 한 채가 그대로 무너지며, 그 안에서 피와 시체들이 줄줄 흘러나왔다.

수도자의 집을 부순 이는 암기를 주로 쓰는 청야였다.

그녀는 그 작은 몸으로 기절한 수도자의 목을 잡아 올렸다가, 다시 들어 바닥에 내리꽂았다.

꾸과광!

내공을 들어 내리치자, 수도자는 상반신이 거의 박살이 나듯이 죽어버렸고, 그녀는 시체들의 한 가운데에서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언니..."

그녀는 가족이 눈 앞에서 죽지 않고, 어딘지 모를 곳으로 끌려갔다고 했었다.

수도자들이 약을 만드는 것을 본 그녀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뻔했다.

그녀의 눈에서는 실핏줄이 터져 피눈물이 흐르는 듯 했다.

[정신차려라. 지금은 전장이다. 막리가 수도자들을 찢어죽이는 건 우선 전투에 이긴 후에도 상관이 없다.]

나는 분노에 미쳐 날뛰기 직전인 그녀를 향해 전음을 보냈다.

내 전음을 받은 그녀는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다른 수도자들을 잡으러 몸을 옮겼다.

"...미안하구나."

내가 해 줄수 있는 것은, 이런 것 밖에 없다.

"이 범인 놈! 감히, 감히 네깟 놈이!"

나는 내게 일갈하며 달려드는 연기기 3성 수도자를 바라보며 검을 들었다.

"네깟 놈은 무슨."

파앗!

내 검이, 수도자가 쏘아내는 술법의 결을 잘라내고 그의 목을 향했다.

방어법술이 걸리는 듯 했으나, 일순간 검기에 정신을 크게 집중하자, 검에서는 환한 검강이 터져나왔다.

콰작, 슈칵!

내 검은 수도자의 방어법술을 유리처럼 깨 버리고 녀석의 목을 잘라버렸다.

"너도 고작 연기기 3성 주제에.."

절정 초, 중기야 연기기 1, 2성 상대지만.

삼화취정부터는 의념의 결을 보다 자세하게 보며 모든 헛점이 사라지고, 검강을 사용할 수 있다.

일반적인 삼화취정의 고수는 연기기 3~6성을 상대할 전력을 지니고 있었다.

거기에, 나는 살아온 세월로 인해 다른 삼화취정 고수들보다도 훨씬 빨리 삼화취정의 경지를 헤쳐나가고 있다.

또한 월수궁무록으로 수도자와 무림인의 상성관계에서 벗어나 있다.

이제는 연기기 5~8성 정도는 되어야 내 상대였다.

"...이제, 끝나 가는건가."

나는 수도자의 시체를 지나치며, 활활 타오르는 막리가의 영지를 둘러보았다.

"다들 무사할런지..."

이미 하늘에서 싸우던 축기기 수도자들의 결투도, 김영훈의 활약으로 결판이 났다.

우리의 승리였다.

* * *

"모두 살아남았군."

나는 제자들을 보며 짤막하게 말했다.

"...장하다."

'그리고, 고맙다.'

살아남아주어서.

"그럼 이제, 다들 수도자들의 집을 뒤져, 억울하게 희생당한 일반인들의 시신을 수습해서 묻도록 한다."

내 말에, 제자들은 묵묵히 나를 따라 땅을 파고, 시체들을 묻었다.

우리는 김영훈의 주도로 수많은 무덤들의 앞에서 짤막하게 제문을 읊고 읍을 하였다.

'부디, 그곳에서는 평안하시기를.'

나는 짧게 그들의 명복을 빌어준 후,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다들 일반인들이 수도자들에게 잔혹히 학살당한 흔적을 본 후, 의념이 거칠어져 있었다.

"다들, 속은 좀 어떻나."

"..."

아무도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제자들의 의념을 읽어내며 그들의 기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 짐작할 수 없었다고 해야할까.

제자들이 내뿜는 의념은 모두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혼잡하게 꼬여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피처럼 새빨간, 분노의 의념.

분노의 의념을 뿜지 않는 제자는 없었다.

"모두 같은 기분이겠지. 하지만, 모두 명심해라. 수도자를 죽이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너희의 복수가 끝나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할 것이다!"

"...그게, 뭐가 다른 겁니까?"

기세구라는 이름의 제자가 물어왔다.

나는 잠시 그와, 그리고 모두와 눈을 마주친 후 말했다.

"추후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동한다. 따라와라."

뭐가 다르냐라.

나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너희는 아직 모르겠지.'

알고 싶지도 않을 테고.

알고 싶지 않은 이에게 알려주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 천천히 알게 해 주는 수밖에...

우리는, 막리세가의 다른 영지를 향해 또 다시 달렸다.

* * *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났다.

우리는 13개에 달하는 막리세가의 영지를 불태우고,

15만 6천여구의 범인들의 시신을 수습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제자들의 눈에는 핏빛의 의념이 더욱 많이 깃들었다.

수도자들의 극랄한 짓을 볼 때마다 그들의 분노는 커져만 가는 듯 했다.

"이 범인 놈들 따위가! 무림 잡것들 따위가!!"

콰앙!

콰앙, 콰앙!

연기기 3성 수준의 수도자가, 내 제자들이 펼치는 합격진에 고전하며 법술을 마구 흩뿌린다.

그러나, 찰나의 순간.

콰과광!

수도자에게 빠르게 쇄도한 희아가 작은 낫을 들고, 수도자의 수급을 향해 휘둘렀다.

카앙!

낫에 실린 기(氣)가 수도자의 방어법술을 파고든다.

수도자는 이를 악물고 방어법술에 힘을 집중하려는 듯 했으나, 합격진을 상대하며 상당히 기력이 빠진 탓인지 점차 그의 방어법술이 내는 빛이 옅어지고 있었다.

"이,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내가, 내가 어떻게...! 어떻게 이 자리까지..."

그리고.

슈칵!

결국 녹현과 희아의 합공에, 수도자의 방어막이 깨지고 수도자의 목이 잘려나갔다.

수도자의 얼굴은 죽는 순간까지도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이제 슬슬, 막리세가 측에서도 대비를 하기 시작한다.'

나는 전장을 정리하며 제자들의 안위를 확인했다.

'처음 기습했을 당시에는 연기기 1, 2성 수준이 많았다면, 슬슬 연기기 3, 4성 수준도 많이 영지 곳곳에서 대기하고 있다. 점차 막리가 놈들도 대비를 하고 있는 거야...'

좋은 일은 아니었다.

연기기 수도자는, 비록 수도계의 밑바닥 중의 밑바닥이라고 하지만 그 힘은 감히 무림인에 비할 수가 없었다.

'고작 1성 차이로도 상당히 격이 달라진다.'

쓸 수 있는 법술의 갯수와 범위의 차이가 넓어지고, 의식영역이 커지며 공격의 위력이 올라갔다.

'슬슬 이런 녀석들이 계속 나오면, 위험할 수도 있겠는데...'

물론 연기기 7성 이상의 수도자들은 최소 삼화취정의 고수가 붙었고, 9성 이상의 실력자는 김영훈이 정리했으나, 우리가 막리세가의 영지를 습격할수록 점차 대비가 굳건해지는 느낌이었다.

'이조차도 진씨세가의 정보망을 이용해, 가장 허술한 영지들을 급습하는 거라고 하니...'

계속해서 막리세가의 영지를 습격만 한다면, 언젠가는 크게 당할 것이다.

'더욱 무서운 건, 아직도 막리세가와 진씨세가가 전면전을 벌이는 게 아니란 거지.'

진씨세가의 말에 의하면, 이 정도 격돌은 '암중혈투'의 영역이라고 했다.

영지 수십개가 통채로 불타고 수십의 수도자가 죽었는데도 암중혈투라는 말이 나올 수 있는가.

그렇게 생각도 했었으나, 듣기로 수도가문의 고위층 수도자들에게는 극저계 연기기 수도자들의 목숨 역시 범인들의 목숨과 심대한 차이가 있지는 않다고 하였다.

거기에, 우리가 막리세가의 영지를 칠 때에 보내는 인원 역시 모두 가문의 윗사람들이 보기에는 벌레 수준이라고 한다.

'절정 이상의 고수들은 모두 연기기 수도자급의 전력이지만, 어찌되었든 모두 무림인이나, 범인이다. 그리고, 진씨세가의 축기기 수도자들이 우리와 함께하기는 하지만...

그들이 막리세가의 축기기 수도자들과 싸우고 힘을 빼놓으면 결정타를 날려 죽이는 건 항상 김영훈의 몫이니...'

아직까지는 '두 세가가 관리하는 범인들의 싸움' 정도로 취급되어 전면전이 일어날 수가 없다는 듯 했다.

그리고 그런 '범인들'에게 죽은 막리세가의 하부 영지들은 너무 나약한 것들이라 막리세가의 상부에서도 혀를 찰 뿐 신경을 쓰지 않는다 한다.

'...하지만, 진짜로 전면전이 벌어지면...'

나는 막리세가의 수도자들을 모두 참한 후, 그들에게 희생당한 일반인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제자들을 보았다.

전투가 끝난 직후, 일반인들의 시신을 수습해 묻어주는 저 때만이 제자들의 눈에 씌인 핏빛의 의념이 옅어지는 순간이었다.

'삼화취정 이하는 도망치기에만도 급급하겠지. 그리고 제자들은...'

운이 좋다면 10~30 정도는 살아남을 것이고.

운이 나쁘다면 전멸할 것이다.

* * *

이번 막리세가의 영지 습격이 끝난 후, 나는 제자들과 함께 시신들을 수습해서 무덤을 만든 후, 김영훈의 주도로 제문을 외웠다.

우웅-

김영훈이 제문을 외자, 미약한 빛이 무덤 주변으로 맴돌며 주변에 깃든 원망과 귀기를 조금 씻어내는 듯 했다.

지난 몇 달간, 김영훈은 수도법술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딱히 무공이 막히거나 절망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죽은 이들에게 외워줄 제문과, 위령(慰靈)의 법술을 익히기 위해서 익힌 것이라고 하였다.

김영훈에게서 뻗어나온 저계 법술에, 남아있는 잔혼들이 천천히 천도되는 것이 육안으로 보였다.

본디 영(靈)들은 범인(凡人)들의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존재이다.

삼화취정의 성취가 깊은 이들이나 의념의 흐름을 읽어 보일락말락 하는 것이 영혼이었으나,

천도(天度)의 술법을 맞은 영혼들은 빛무리의 형태로 잠시 무덤 주변을 떠돌더니, 허공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우리는 그 모습을 보며 명복을 빌어주었다.

나는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본 후, 제자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수 개의 막리세가의 영지를 파괴했다. 그리고 막리세가의 수도자들을 수없이 참하고 또 참했다. 또한 이들에게 희생당한 이들의 시신을 수습해서 묻어주고, 원혼들을 천도해주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아이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이제... 됐지 않았느냐?"

내 말에, 녀석들의 표정이 씰룩였다.

"뭐가 됐다는 말씀이십니까?"

청야가 거친 목소리로 내게 물어왔다.

"아직도 이 더러운 놈들은 많고도 많습니다. 아무리 죽여도 분이 풀리지 않고, 아무리 죽여도 다음 영지를 가 보면 민간인들의 시신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런데, 사부님께서는 도대체 뭐가 됐다는 말입니까!"

나는 안쓰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네 가슴에 담긴 그 노(怒)가 온전히 너의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무슨, 말입니까?"

"너희 모두. 아직까지도 인간이 수 년전의 일로 그렇게 또렷한 분노를, 또렷하게 기억하는 것이 정상이라 생각하느냐?"

나는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의념을 바라보았다.

저들의 의념은, 단지 저들만의 것이 아니다. 그들의 의념 사이로, 이질적이고 탁한 의념이 더 새어나온다.

각기 친지와 혈육들의 노(怒)가 깃든 의념.

진씨세가는 제자들의 혈육들. 막리세가에게 억울하게 살해당한 그 원귀(怨鬼)들을 녀석들에게 흡수시켜 강제로 재능을 개화하였다.

어차피 수명은 줄을대로 줄었으나, 지금이라도 원귀를 천도시켜준다면 살 만큼은 살 수 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시는 건 저희와 함께하는 가족들을 말씀하시는 것이겠지요."

만호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맞습니다. 저희가 아무리 막리가 놈들을 베어넘겨도, 이 끓어넘치는 분노가 가라앉지 않는 것은, 분명 저희 가족들의 분노도 있을 것입니다. 단순히 저희의 분노만은 아니지요. 하지만! 그렇기에!"

만호의 표정은 굳건했다.

"단순히 저희의 분노만이 해갈된다 하여 복수를 끝낼 수는 없는 겁니다! 가족들과 함께, 모두의 한을 풀어야 이 감정이 해갈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만의 한이 아니기에 우리는 모두의 한을 풀어야만 하는 거란 말입니다!"

나는 잠시 우리가 수습해준 무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두 방금 빛무리를 보았느냐?"

"...보았습니다."

"방금 보인 빛은, 희생자들의 혼들이다. 하나, 희생자들은 고통 속에서 죽어갔을지언정, 천도되는 순간에는 빛무리와 함께 흩어졌다."

나는 다시 만호와 제자들을 보며, 그들의 상단전에 숨어있는 탁한 의념들을 보며 말했다.

"너희에게 당장 그만두라고는 하지 않으마. 하지만 최소한, 이제 어느 정도의 복수를 이뤘으니 죽은 이들을 다시 보내주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으냐?

죽은 이들은 이제 그들이 갈 곳으로 놓아야주어야 한다고 생각지 않으냐?"

내 말에, 만호의 얼굴에는 잠시 머뭇거림이 생겼다.

그러나 그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당신은, 저희의 아픔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이렇게라도, 죽은 가족과 함께하며 복수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저희의 위안인지, 모르실 겁니다."

"...계속 너희 가족을 잡아둘수록, 너희 가족도, 너희 자신도 좋은 결과는 얻을 수 없다! 너희의 수명은 계속 깎여만 갈 거고, 너희 가족 역시 가야 할 곳으로 가지 못해 원귀로만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스승님은 저희를 살리려고만 하시지요."

그의 눈에, 설명할 수 없는 색조가 깃들었다.

"저희는, 죽어도 상관 없단 말입니다! 남은 생애동안을 막리세가 놈들을 베어죽이는 데에 쓰다가, 그렇게 수명이 다해 죽으면, 가족들과 함께 제대로 저세상에 가도, 그래도 상관 없다는 말입니다!"

"..."

"..."

잠시 나와 제자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래, 되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꾸나."

우리는 그렇게, 그 날의 대화를 피하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