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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풍덩!

"···!"

꼬르륵, 꾸르르륵!

나는 갑작스럽게 나를 덮쳐 오는 물살에, 정신을 번쩍 차리고 발버둥을 쳤다.

'이건 무슨, 이, 이건···.'

물 속이었다.

끄르릅, 끄르르륵!

나는 정신을 차리고 빛살이 비추는 위쪽을 향해 헤엄쳐 나갔다.

지난 삶에서 수적들을 잡아 족칠 때에 수영은 웬만큼 배워 놓았기에 헤엄에는 문제없었다.

"푸하, 빌어먹을. 지난번에는 나무 위였다가, 이번에는 물 속인가. 가지가지 하는군."

이번에도 역시 연국이겠지만, 문제는 연국 곳곳에 내가 무작위로 떨어진다는 점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커다란 호수였다.

'잠깐, 그나저나 김영훈은?'

나는 주변을 둘러보던 중, 문득 호수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김영훈이 입에서 물거품을 토하며 저 아래로 가라앉고 있는 게 보였다.

'젠장, 놔두면 죽겠잖아?'

나는 황급히 물살을 헤치고 나가 김영훈을 들쳐 업고 다시 물 바깥으로 헤엄쳤다.

호숫가로 올라가 김영훈을 눕힌 나는, 그의 배와 폐에 침투경을 사용하여 물을 강제로 바깥으로 내뿜게 했다.

푸와악!

입과 코에서 물 분수를 내뿜은 김영훈은 얼마 후 정신을 차리는 듯했다.

"허, 헉! 여기는!"

"완전히 다른 곳입니다."

나는 그에게 적당히 상황 설명을 해 준 후, 그와 함께 주변을 살폈다.

'음, 위치를 보아하니 계두호(鷄頭湖)로군.'

호수의 형태가 위에서 내려다보면 닭의 머리처럼 생겼다 해서 붙은 이름의 호수였다.

네 번의 생을 반복한 내게, 이제 연국에서 모르는 장소 따위는 없었다.

아마 근방에 창호성(昌湖城)이 있을 거다.

"으, 으으··· 그나저나 어떻게 하나? 완전히 다른 곳으로 떨어진 거라면··· 근처에 사람이 있으려나?"

"음, 그런 것 같습니다. 저기 마침 건물이 하나 있군요."

"오, 정말이군?"

나는 계두호 구석에 세워진 수상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 수영을 할 줄 아니, 저 건물에 가서 옷과 돈, 먹을 것을 빌려 오겠습니다."

"아, 아니. 저 사람들한테 말이 통해야 하는 게 아닌가?"

"사실 제가 중국어를 배워 뒀었는데 대충 통하는 것 같더군요. 나중에 알려 드리겠습니다."

나는 적당히 변명을 한 후, 수상 건물을 향해 헤엄쳐 갔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 건물은 분명.

'계호수로채(鷄湖水路砦)의 소굴이었지.'

지난 삶에 내가 토벌하러 갔었던 곳이었다.

수로채주가 일류 후기의 고수, 부채주가 일류 중기. 그 외에 사대수적이란 놈들이 일류에 턱걸이를 한 놈들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머지는 별 볼 일이 없고, 대부분이 삼류에서 이류 정도.

물론 숫자가 많아서 독을 풀어야 하긴 했다.

첨벙, 첨벙!

수로채의 소굴에서 망을 보던 이류쯤의 수적 몇이, 나를 보며 소리를 질렀다.

"어―이! 너 뭐냐 임마!"

"하하, 저거 왠 미친놈이야? 수로채의 소굴에 헤엄쳐서 와?"

"하하하, 혹시 뭐 수로채 입단하겠답시고 오는 거 아니냐?"

"이거 신입이였구만!"

와하하하―

난 녀석들이 뭐라고 하던 신경 쓰지 않고 천천히 수로채에 접근할 뿐이었다.

그때, 수적 중 한 놈이 바지를 내리는 것이 보였다.

"하하하, 신입 놈아. 본 채에 들어오고 싶으면 신고식부터 치러야지!"

쪼르르―

노란 물줄기와 함께 고약한 냄새가 풍겨 왔다.

노란 물줄기 몇 방울이 내 머리에 튀긴다.

녀석은 아예 하초를 가지고 내 머리를 조준하며 내 머리에 그것을 직격시키려 했다.

철퍽, 철퍽.

나는 담담히 녀석의 액체를 맞으면서, 수로채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퍽, 퍽!

"이게 건방지게 어딜 올라와! 다시 안 내려가?"

"임마, 빨리 형님의 성수 세례를 한번 맞고 오라고! 흐하하!"

잡졸 녀석들이 나무막대기로 내 머리를 툭툭 밀며, 나를 다시 수면 아래로 밀어 넣었다.

그러나 나는 녀석들이 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끝끝내 수로채 위로 올라가 버렸다.

"아나, 이 새끼가. 내가 올라오지 말라고···."

나무 막대기를 든 수적이 내게 달려들었다.

퍼억!

"끄으··· 으아아악!"

그리고, 나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녀석의 발목을 걷어차 넘어뜨렸다.

"흠, 적당하군."

나는 녀석이 떨어뜨린 나무 몽둥이를 들고 무게를 재 본 후, 손에 쥐었다.

"우선 너. 넌 수로채에서 몇 놈을 죽였나."

"이, 이 빌어먹을 새끼가. 내 손에 뒈진 놈들만 해도 쉰이 넘···."

푸콱!

난 엎어진 녀석의 대답은 더 듣지 않고, 막대기를 휘둘러 녀석의 목을 베어 버렸다.

"다음, 너희들. 너희는 지금까지 몇을 죽였지?"

"이, 이 새끼가 지금 뭔 짓을 한 거여!"

슈캉, 슈캉!

수적 녀석들이 품에서 망설임 없이 칼을 꺼내 들고 내게 달려들었다.

"찌르는 데에 망설임이 없는 걸 보니, 많이 죽였나 보군."

슈칵, 슈칵!

나는 다시 한번 막대기를 휘둘러 달려드는 녀석들을 깔끔하게 절단한 후, 물 밑으로 빠뜨려 버렸다.

"으, 으아아··· 자, 잠깐···."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내게 오줌을 갈겼던 수적 놈이었다.

"저, 저는 수로채에 들어온 신입입니다! 아, 아직 아무도 죽인 적이 없···."

"다른 놈들이 형님이라 부르던데."

"사, 살려···."

부웅!

슈칵!

녀석은 하초부터 시작해서 머리까지 깔끔하게 이 등분을 해 주었다.

철퍽!

수적 놈들의 피로, 더러운 오줌을 씻은 후, 나는 수로채 안쪽으로 들어섰다.

수적들은 왁자하게 담배와 마약을 피우며 술을 먹고, 여자를 끼고 놀고 있었다.

여자들은 대부분 잡혀 온 이들인 듯, 손발이 묶여 있고 얼굴 곳곳에 멍이 들어 있었다.

"우하하, 아. 저놈 뭐야?"

그때 한 수적이 피 칠갑을 한 채 수로채로 들어온 나를 보며 눈을 비볐다.

"어, 어어 이놈 봐라?"

"이거 웬 놈이야?"

"야, 무기 들어라. 손님이 오신 것 같다."

술에 취한 녀석들이었으나, 하나같이 사람을 죽이던 것을 업으로 삼던 놈들인 탓인지, 병장기를 잡고 자세를 취하는 데에 부자연스러움이 없었다.

"···이 안에 있는 것들은, 물어볼 것도 없겠군."

우웅―

나는 나무막대기에 검기를 씌웠다.

"다 죽어라."

"뭐 해! 손님 맞아드려라!"

"이야아아아!"

"히헤헤헤!"

전방, 위, 양옆에서 수적 놈들이 각자 병장기를 쥐고 내게 우르르 달려든다.

나는 절정 고수의 시야로 진입했다.

붉은 선들이 사방에 팽배하다.

저 선들이 나를 향하는 녀석들의 공격 궤도.

'이런 기분인가, 절정 고수라는 건.'

왠지 굉장히 우스꽝스러운 기분이다.

한 놈도 내게 닿지 못할 거라는 걸 미리 안다는 기분은.

나는 눈을 감았다.

이런 놈들을 상대하는 데에, 시각 따윈 필요 없기 때문이었다.

눈을 감고, 소리도 듣지 않고, 촉각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오직 붉은 선만을 집중하며, 나는 막대기를 들어 올렸다.

"일 초, 월악."

슈칵!

허리를 굽혀, 앞서 달려오던 세 놈의 무기를 피한 후, 검을 가로로 휘둘러 세 녀석을 베어냈다.

"이 초, 입산."

하단세로 전환하며 주변에서 달려드는 수적 놈들 다섯의 다리를 잘라 버리고.

"삼 초, 등맥."

하단세에서 검을 고쳐잡고 올려 벤다.

그리고, 월악보를 사용해 수적들의 한 가운데로 뛰어들며, 다시 검을 휘둘렀다.

월악, 입산, 등맥.

세 가지의 기본초식만을 계속해서 사용하며, 나는 붉은 선들의 궤적을 피하고, 푸른 선들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검기를 뻗어 모조리 베어 넘겼다.

"월악, 입산, 등맥."

"등맥, 입산, 등맥."

"월악, 등맥, 입산."

"입산···."

슈칵, 슈칵, 슈칵!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최대의 수적들을 베어 낸다.

그리고, 더 이상 나를 향하는 붉은 선들이 보이지 않을 때 즈음.

다시 눈을 뜨자, 주변은 피바다가 되어 있었다.

"끄···으어어··· 꺼어억··· 어억···."

한쪽을 보자, 계호수로채의 채주였던 녀석이 꿈틀거리며 바깥으로 기어 나가고 있었다.

'내 기억으로 일류 후기였던 녀석이었는데.'

정신없이 베어 넘긴 녀석 중에, 저 녀석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봐."

난 거의 죽어 가는 채주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저, 저, 절정, 절정 고수···! 사, 살, 살려···."

"이봐, 한 가지 물어보마. 내가 이 수채에 쳐들어온 지 얼마나 됐지?"

"이, 일 다경, 정도···."

"그래. 고맙다. 죽어라."

"자, 잠깐. 돈, 어디 숨겼는지···."

슈콱!

난 대답을 듣지 않고 녀석의 목을 베어 버렸다.

"어차피 지난번에 왔어서, 네놈 비자금 위치쯤은 알고 있다."

나는 채주의 머리를 내버려 두고, 묶여있던 여인들을 풀어 주고, 수채의 감옥으로 가 포로로 잡혀 있는 듯한 이들 역시 풀어 주었다.

"가, 감사드립니다. 대협!"

"이 씹어먹을 수적 놈들에게 복수해 주어, 감사드립니다!"

나는 내게 감사 인사를 하는 포로들과 여인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준 후, 채주의 방으로 가 가장 멀쩡해 보이는 옷 두 벌을 꺼냈다.

그런 후 채주의 방 벽을 부숴, 채주의 비자금이 들어있는 작은 목궤를 꺼냈다.

궤를 열자, 그 안에는 은괴(銀塊)가 세 덩이나 들어있었다.

"거, 알뜰한 수적이군."

나는 피로 더럽혀진 원래의 옷을 벗어 버리고, 채주의 옷을 입은 후 수로채에 딸려 있는 나룻배에 올라탔다.

"대, 대협. 혹여 성명별호라도 알려주신다면 꼭 보답하겠습니다."

"음, 성명별호라···."

나는 뒷정리를 하던 포로 중 한 명이 내게 와서 묻자, 머리를 긁적이며 고민했다.

'회귀한 지 얼마 안 돼서 아무것도 없다만···.'

잠시 고민하던 나는 지난 삶에서 쓰던 별호를 꺼내 들었다.

"무한투괴(無限鬪怪)가 내 별호요. 그리 알면 될 거요."

"가, 감사합니다, 대협! 제가 언젠가 꼭 보답···."

"알겠소~ 그럼 이만 가 볼 테니 적당히들 나오시구려."

난 귀찮은 일을 피하기 위해 나룻배의 노를 저어 다시 호숫가로 향했다.

호숫가에는 김영훈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 옷이 바뀌었군?"

"예, 주인이 친절해서 옷을 주더군요. 저희 사정을 말했더니 돈까지 꿔 줍디다. 참 순박한 분이신 게, 시골 인심이 이래서 좋구나 싶었습니다."

"하하하, 주인분께 감사드려야겠구만. 저 집이 너무 멀리 있어서 잘은 못 봤네만, 저기는 뭐 하는 곳이라고 하는가?"

"음··· 제가 듣기로 시골에서 고기잡이하는 분들이 모여서 만든 뭐··· 고기를 잡기 편하기 위해 만든, 뭐 그런 거라고 합니다."

"그런가? 그것참 신기한 것도···."

나는 김영훈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그와 함께 가까운 창호성으로 향했다.

'지난 삶에서, 계호수로채를 쳐들어가서, 녀석들을 몰살시키는 데에 걸린 시간은 약 하루.'

그것도 독을 써서 놈들을 미리 중독시키고, 수채에 불을 질러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죽인 놈들이 더 많다.

그 짓을 했음에도 녀석들을 몰살하는 데에 하루나 걸렸다.

그러나, 절정지경의 영역에서 싸우자, 단 일다경 만에 놈들을 모조리 전멸시킨 것이었다.

'그것도 나무막대기로.'

이것이 절정과 일류의 차이였다.

'지난 삶에선 일류의 그릇으로, 일류에 걸맞은 것들을 얻어 갔다. 이제는 절정 고수가 되었으니, 절정에 걸맞은 것들을 얻을 수 있겠지.'

회귀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이만큼 생이 기대되는 것은 이번 회차가 처음인 듯싶었다.

절정 고수(2)

나는 김영훈과 함께 창호성으로 가, 수적들에게서 약탈한 돈으로 호패를 만들고, 장원을 하나 샀다.

그런 후 그에게 문자와 무공을 가르쳤다.

그렇게 약 2달 후.

우우웅―

'더 빨리 성장하는군.'

나는 살짝 어이가 없어져, 눈앞에서 황주삼을 먹고 삼화취정에 접어드는 김영훈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절정 고수에 오른 내가 단맥도법이라는 일류 무공을 성심성의껏 붙어서 전수해 주어, 이렇게 빠른 성장률을 보인 듯했다.

'조금 허탈할 지경인데.'

하기야 늘 이런 식이었다.

누구는 평생을 걸쳐 절정경에 올랐지만, 누구는 절정 고수의 가르침과 일류 무공만으로, 절정지경을 아예 건너뛰어 버리고 삼화취정에 바로 진입하는 것이다.

곧이어 세 개의 꽃 형태의 기운이 그의 코와 입으로 빨려 들어가고, 김영훈이 눈을 반개했다.

그의 눈에서 정광이 맴돌았다.

"···삼화취정에 오른 걸 축하드립니다. 문자도 다 배우기 전에 삼화취정부터 뚫으시다니···."

"흠, 나도 내가 신기하군. 나한테 이런 무재(武才)가 있을 줄이야···."

나는 담담히 김영훈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일말의 호승심이 이는 것을 느꼈다.

'지금껏, 김영훈이 삼화취정에 이른 후에는, 한 번도 그와 대련다운 대련을 해 본 적이 없지.'

늘 내가 그의 아래에서 지도 대련을 받는 것뿐이었다.

지금이라면 어떨까.

절정 고수에 이른 나와, 삼화취정에 막 이른 김영훈.

"···일단 축하드리고, 그럼 한번··· 대련을 해 보시겠습니까?"

"하하, 대련 좋지. 이번에는 왠지 자네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가 자신의 도를 뽑아 들며 호승심을 불태웠다.

나 역시 검을 뽑아 들었다.

장원 내의 비무장에서, 두 절정 고수가 대련을 시작했다.

피잉―

나는 김영훈에게 살기를 쏘아 올렸다.

수십 개의 푸른 선들이 그에게 달라붙었다.

수십 개에 달하는 최적의 경로들이 그를 노린다.

그때, 김영훈이 기수식을 다시 잡았다.

"···!"

수십 개에 달하는 푸른 선들이 모조리 사라진다.

그의 허점이 사라지고, 내가 시도할 수 있는 최적의 공격들이 모조리 소용없는 것으로 변했다는 의미.

우웅―

동시에, 수백 가지의 붉은 실선들이 내게 뻗쳐 있었다.

나는 기수식을 바꿔 잡으며 내 허점을 없애고, 김영훈의 공격에 반격할 준비를 했다.

그러자 그에게서 뻗어 나온 붉은 선들이 밀려나는 듯하며 사그라든다.

서로의 붉은 선과 푸른 선이 얼마나 얽혔을까.

처음 공격을 시작한 것은 김영훈이었다.

"단맥도, 산바람."

피잉!

가공할 속도를 가진 찌르기!

그러나 저 찌르기에서 또다시 수백 갈래의 붉은 선이 파생되는 것이 보였다.

뒤이어 올 연계기가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뜻.

"단악검, 괴암."

붕, 붕, 붕!

나는 그 자리에서 회전하며 공방 일체의 태세를 취하며 그의 찌르기를 막아섰다.

"단맥도, 태백!"

그의 찌르기가 허공에서 꺾어지며 내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참격을 날렸다.

"단악검, 월악!"

나는 그의 검에 맞서 가로로 베어 들어간 후, 다시금 수십 가지의 경로를 계산해 냈다.

내 푸른 선이 그의 머리, 허리, 다리를 겨냥한다.

"단악검, 입산."

부웅!

나는 하단세로 전환해 그의 다리 어림을 베어 갔다.

짧은 찰나, 둘 사이의 푸른 선과 붉은 선이 수십 가지는 오간다.

"단맥도, 용릉!"

단악검의 유릉과 비슷하지만, 더욱더 기기묘묘한 변화를 품고 있는 초식이 나를 내리찍어 온다.

그 짧은 찰나, 나와 그의 사이 허공에서 또다시 수십 가지의 실선이 오간다.

우리는 이미 가상의 영역에서 수십 합의 간합을 주고받았다.

'피할까? 아니, 피하면 계속 뒤로 밀릴 터.'

그러다가 패배할 거다.

상관은 없다.

어차피 대련이니까.

하지만···.

나는 어쩐지, 지기 싫다는 호승심이 피어올랐다.

왜일까.

'아, 그렇군. 이번 생에서, 이제 김영훈을 이길 수 있는 건···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테니까.'

앞으로 그는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뛰며 폭주 기관차처럼 성장해갈 것이다.

다음번에 또 겨루면 이제는 내가 쳐다보지도 못할 만치 올라가겠지.

이번이.

삼화취정에 막 올라 있는 이번이, 그를 쓰러뜨릴, 이번 인생의 마지막 기회인 것이다.

그래, 이기자.

내 모든 걸 동원해서라도.

나는 빠르게 손을 놀려, 소매 속에 숨겨 놓았던 암기를 잡았다.

"투괴암기술(鬪怪暗器術), 직사(直蛇)."

피빗!

내 손에서 뻗어 나간 작은 암기가 김영훈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그의 얼굴에 당황함이 어리며, 빠르게 회피했다.

그러나 그 틈새로 기수식에 균형이 인다.

티잉!

나는 그의 검을 쳐 내고, 반격에 들어갔다.

"단악검, 유릉."

피잇!

구불구불한 검기가 그에게 쏘아졌다.

'막힌다.'

붉은 실선이 내 검을 쳐 낼 수 있는 각도로 그어져 있다.

동시에 그 실선에서 새로운 가지가 뻗어 나와 내 어깨를 노린다.

'쳐 낸 후, 반격.'

슈칵!

그와 동시에, 나는 다시금 소매에서 암기를 꺼내 쥐었다.

암기를 쥔 것만으로, 내가 이용할 수 있는 푸른 선이 배는 많아졌다.

그의 붉은 실선의 궤도가 수정된다.

내 검을 향했다가 어깨로 뻗어 나갔던 붉은 가지가, 내 검에서 내 암기 쪽으로 수정되었다.

그리고 내 암기를 쳐 낸 후에야 다시 내 쪽으로 붉은 가지가 뻗어 온다.

'좋군.'

하지만 아직 무르다.

'실전 경험으론 내가 앞선다!'

"단악검, 용맥, 기산심천, 단애."

세 가지 초식을 일수(一手)에 담아낸다.

용맥의 초식으로, 용맥기공의 내력을 일순간 빠르게 돌리며 검기를 강화한다.

동시에 기산심천으로 전신 경맥을 열어젖히며 검기를 다시 강화한다.

단애의 초식으로 검속(劍速)에 차이를 두어 반응을 어렵게 한다.

슈칵!

검 끝에 검사(劍絲)가 맺히며 기가 유형화된다.

그러나 한껏 강화된 검기를 흩뿌렸으나, 김영훈은 그 찰나에 보법을 펼쳐 뒤로 물러났다.

그 덕분에 내 검 끝은 그의 가슴께를 훑어 작은 생채기 하나만을 냈을 뿐이었다.

'됐다. 기세를 잡았다.'

산군무, 월악보.

산군의 기세로 달려들며, 월악보로 접근해 월악을 펼친 후, 산중호걸의 초식으로 수 개의 참격을 때려 넣는 척하며 산수화를 사용해 난투를 벌였다.

동시에,

피잉! 피잉!

다른 한 손으로 암기를 날려 대며 그와 검을 마주했다.

내가 기세를 잡고 그를 몰아붙이고 있었으나, 김영훈은 그 와중에도 수 개의 붉은 선을 뻗쳐 오며 반격의 기회를 잡았다.

하지만, 나는 실전이라고 생각하며 기회가 될 때마다 바닥의 모래를 뿌리고, 입속에 숨겨 둔 침을 발사하는 등 기회를 잡을 때마다 기오막측한 공격을 해 갔고, 점차 수세에 몰리던 김영훈이 짜증이 났는지 도에 더더욱 기운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우웅―

기세가 변한다.

'위험하다.'

큰 게 온다.

"삼화취정의 경지를 보여 주마!"

우우웅!

점차 그의 도에 실린 기운이 변화한다.

무형의 아지랑이 같았던 도기가 응축되며, 마치 실과도 같은 형태의 도사(刀絲)가 되고, 다시 한번 기사(氣絲)가 진화했다.

'저건···!'

도에 씌워진 기운이 완벽하게 유형화되며, 새하얀 빛을 발한다.

"도강(刀罡)!"

"타아앗!"

새하얀 빛이 내 앞을 뒤덮는다.

아마 저것과 맞붙으면 내 검은 그대로 잘려 나갈 것이다.

어떤 절정 고수를 이 자리에 데려다 놔도 마찬가지.

하지만.

내가 익힌 단악검법은, 오기조원에 이르렀던 세기의 천재가 창안한 절세 무공.

"단악검, 공곡전성(空谷傳聲)!"

지난 생, 오기조원에 이르렀던 김영훈의 강기마저 떨쳐 냈던 초식!

아직 삼화취정에 막 올랐을 뿐인 그의 강기라면.

부웅!

'검 속에 담긴 의(意)를 빼고, 공(空)의 상태로 만든 후, 그대로 상대의 힘을 받아들여···.'

되친다!

콰아앙!

나는 김영훈의 강기를 받아 그에게 되쳐 버렸다.

폭음이 울려 오며, 김영훈이 세 발자국을 뒤로 물러섰다.

"허, 허허··· 대단하군."

투웅―

김영훈의 도가 반으로 갈라져 떨어져 버렸다.

하지만 나는 속으로 경악하는 중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내 되치기를 다시 강기로 받아쳤다고?'

내 계산대로라면, 공곡전성으로 되쳤을 때 그는 몇 발자국 물러나는 것이 아닌, 도신이 박살 나 산산조각이 나고 저 너머로 날아갔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찰나, 다시 도를 회수한 후 다시금 강기를 사용해서 되치기를 받아친 것이었다.

"내 패배일세. 병장기가 망가졌으니 무인으로서 수치라 할 수 있겠군. 자네, 굉장히 노련하던데?"

"···걱정 마십시오. 이제 앞으론, 저는 절대 당신을 이길 수 없으니."

나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은 후 담담하게 말했다.

오늘의 대결을 마지막으로, 나는 다음 생까지, 김영훈을 이길 수 없다.

그는 싸우는 와중에도 실시간으로 성장했고, 싸움을 마치고 깨달음을 갈무리하면 더 강해질 것이며, 나와 싸우며 실전에 가까운 대련 경험까지 얻었으니 단숨에 삼화취정 중에서도 상위의 강자가 될 터였다.

거기에.

"사실 절정경에 오르셨으니, 축하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오, 이 대련이 축하 선물 아니었나? 뭔가 더 준비한 건가?"

"예, 여기···."

나는 집으로 들어가 그동안 준비해놓은 여섯 권의 서책을 그에게 건냈다.

"이건···."

"조수월무경(眺修越武經)이라는 무학서입니다. 어떤 노인에게서 산 서책인데, 최소 입문 조건이 삼화취정이라 하더군요. 저도 읽어 봤지만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드리겠습니다."

"오오, 그야말로 기연이로구만. 내 감사히 읽겠네."

조수월무록에서 얻은 깨달음을, 지난 삶의 김영훈이 극대화시키며 여러 심득으로 정리해 놓은 것.

나는 그 책자들을 록(錄)이 아닌 경(經)으로만 바꾸어서 그에게 건네주었다.

이제 앞으로, 조수월무경을 익히며, 그는 내가 감히 상대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질 터였다.

나는 그에게 한 달 정도 더 문자와 언어를 가르친 후, 생활비를 벌기 위해 창호성 인근에 있는 산채와 사도방파들을 학살하고, 수배가 된 사파의 마두들을 잡아들였다.

내게 문자를 전부 배운 후, 김영훈은 조수월무경 6권을 쳐다보며, 반쯤 혼이 나간 표정으로 넉 달 정도 미친 듯이 수련을 할 뿐이었다.

그렇게 넉 달이 지났다.

"영훈 형, 돈 벌고 왔습니다."

나는 창호성 인근 유명한 일류 후기의 마두를 잡고 그 현상금을 받아 집에 왔다.

그러나 김영훈이 집에 없었다.

'뭐지? 나갔나?'

그동안은 계속 미친 듯이 조수월무록을 읽고 비무대에서 수련만 하는 듯싶더니, 오늘은 장원 어디를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기척도 없는 것이 아예 집을 나간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휙!

"헛···!"

갑자기 김영훈이 허깨비처럼 허공에서 나타나는 것이었다.

"무, 무슨···!"

"하하, 조수월무경에 적힌 기술 중 하나를 사용해 보았는데, 정말로 발견을 못 하는군. 과연 이 서적은 엄청난 무공 서적이다···!"

"김 형, 그건···."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저 기이한 기술은, 지난 삶의 김영훈이 오기조원에 이르고 나서야 사용했던 기술.

그런데 지금의 김영훈이, 회귀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지금의 김영훈이 사용한 것이었다.

"아하, 이거 말인가? 조수월무경에 적힌 기술 중 하나라네. 본래 오기조원에 도달하면 훨씬 간단하게 쓸 수 있다고 하지만 지난 며칠간 이것 하나만 파고들어서 삼회취정의 경지임에도 이 기술 하나만은 어찌어찌 쓸 수 있게 됐지."

"허어··· 아직 오기조원은 아닌 겁니까?"

"하하하, 오기조원이 무슨 장난인 줄 아나? 조수월무경에 적힌 깨달음만 따라가도 5년은 족히 걸린다네. 그나저나 이 기술은 정말 무시무시하군. 절정경인 자네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라니,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암살이 가능하겠어."

나는 그의 재능에 말문이 막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참, 그나저나 이제 앞으로 실전을 쌓으러 강호를 돌아다닐 터인데, 혹시 서 동생은 안 따라올 텐가?"

"음, 강호를 말이지요."

잠시 고민하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전 됐습니다, 김 형."

"응? 무슨 말인가?"

"저는 절정의 경지를 조금 더 안정시키려 합니다."

"흠, 하긴. 자네는 아직 검사(劍絲)도 못 쓰는 절정 초기니까."

"예, 다녀오는 것은 김 형 혼자서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그와 잠시 헤어져 있기로 했다.

이유는 말 그대로였다.

절정 초기인 나는 실력을 안정시킬 시간이 필요했다.

그를 따라다니며 고수들의 대결을 눈에 담는 것 역시 좋지만, 지금의 내게는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최소한 절정 중기까지는 대련과 실전이 아닌, 참오와 반복 수련만이 답이었다.

'일단, 하루 종일 절정 고수의 시야에 진입하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김영훈이 장원을 나가 인근 문파들에 가서 도장 깨기를 하는 동안, 나는 우선 절정 고수의 시야에 익숙해지는 연습을 했다.

연습 상대는 창호성 인근의 사파 무리들이었다.

녀석들은 수도 많고 끈질기며, 무엇보다 죽여도 상관이 없었기에 연습 상대로는 제격이었다.

'전방의 놈이 독침을 쏘려 한다.'

'후방에서 창을 찔러 오고.'

'대각선 오른쪽 뒤에서 채찍으로 내 발목을 감으려는 놈이 있다.'

수많은 붉은 실선들이 내게 쇄도한다.

나는 내게 쏟아져 오는 사파들의 온갖 잡다한 공격을 전부 피하며,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사파 무인들을 전멸시켰다.

나는 사파 무림인들과 싸울 때는 항상 눈을 감고 귀마개를 한 다음 녀석들을 찾아가 덤볐다.

어차피 감각 따위는 없어도 전부 절정경의 세계에서 죽일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창호성 인근의 사파 무림인, 수적, 산적 떼들을 잡아대며 수련을 하기를 약 3년.

나는 마침내, 온종일 절정경의 세계에 진입해도 뇌가 타는 듯한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뇌가 이 세계에 완전히 익숙해진 것이었다.

심지어 절정경의 세계에 진입하는 요령을 얻어, 내공을 사용하지 않고도 하루 동안 절정의 세계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했다.

3년의 시간 동안 사파 무림인들을 상대로 '연습'을 한 결과.

나는 드디어 완전히 절정지경의 세계에 진입하는 데에 성공했다.

동시에 창호성에서 현상금을 두둑이 받으며 주머니 사정도 풍족해졌고, '무한투괴'라는 내 별호 역시 다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심지어 제자로 받아 달라는 이들이나, 나를 추종하는 무림인들도 생겼을 정도였다.

'물론 이 역시 김영훈에 비하면 새 발의 피지.'

근 3년.

김영훈은 연국제일도의 칭호를 받고, 연국무림의 천하제일인의 자리에 올랐다.

무림 최강!

무공을 배운지 3, 4년밖에 되지 않는 자가 도달한 경지였다.

김영훈의 추종자와,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이의 숫자는 나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많았다.

'그리고 아마 지금쯤이면···.'

김영훈의 무림맹주 병이 도질 때가 되었다.

언제나 천하제일인의 자리에 오르면 오르는 자리였으니.

아니나 다를까, 김영훈이 다시 내게 찾아와 무림맹 부맹주의 자리를 건의했다.

물론 나는 소처럼 일하게 될 미래를 알고 있었기에 단칼에 거절한 후, 적당한 핑계를 대었다.

"김 형, 저는 이제 황실에 들어가 보려 합니다."

"뭐, 뭐? 황실?"

"예. 김 형의 제안을 거절하려는 이유도, 황실에 몸을 담으며 관아의 입장에서 김 형을 돕기 위해서입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허어, 서 동생. 정말 고맙네."

물론 내가 황실에 몸을 담으려고 마음먹은 것에는 조금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

'황실에 몸을 담으면, 수도자 일족과 더더욱 접촉할 일이 많을 터다!'

무림맹주의 책사, 그리고 정보 단체 귀영각의 각주로 지낸 삶.

그때 당시 알아냈던 정보에 의하면, 황실은 연국의 그 어떤 집단보다도 수도일족과 깊게 얽혀있다고 했다.

들리는 말로는, 연국 황실이 수도일족의 방계라는 말조차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었다.

나는 우선 연국 군부에 지원을 했다.

군부는 무림에서 유명한 절정 고수인 내 지원을 달갑게 받아들였고, 나는 군부에 들어가 빠르게 실력을 인정받아 장군의 자리까지 올라갔고,

그 시점에서 황실 근위대에 지원하여, 무리 없이 통과하였다.

회귀 햇수 5년 만에 도달한 결과였다.

"자네의 임무는 황제 폐하를 암중에서 호위하며 목숨을 걸고 수호해 내는 것일세. 절정 고수라면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겠지?"

"옛,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황실 암중 호위대로 들어가, 4개월간 은신술과 귀식대법 등을 훈련받은 후 황제 호위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나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황제가··· 수도자였다니!'

우웅―

나는 황제의 미간을 중심으로, 그를 둘러싼 붉은빛의 영역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수도자의 식(識)이다! 황제는 본디 수도자였던 거야.'

그러한 사실은 황실의 인원, 황태자와 황녀 몇몇을 만난 후에 더더욱 확실해졌다.

황가의 일원 중 절대다수가 수도자의 식을 가지고 있는, 수도자였다.

'그래도 고위 수도자는 아닌 것 같군. 다들··· 그 여우에조차 한참 미치지 못해.'

아마 기껏해야 다들 연기기 수도자일 것으로 보였다.

'연기기 수도자를 절정 고수인 내가 도대체 왜 호위해야 하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황제가 은연중에 드러내는 기세는, 절대로 연기기 1성 정도가 아니었다.

저 정도 실력이면 차라리 황제가 암중 호위대를 전부 합친 것보다 강할 수도 있었다.

'아마 암중 호위대는 그냥 자기가 자객들을 처리하기 귀찮아서 부리는 건가.'

황제는 슬프게도 황실에서 가장 암살 위협을 많이 받는 이였다.

거의 매일 밤 자객이 찾아왔고, 나는 매일 밤 자객들과 싸워 그들을 제압해야 했다.

'실전 경험은 거의 매일 쌓을 수 있어서 좋은 건가?'

그렇게 황제의 호위로 실전 경험을 쌓으며, 암중 호위대로 지내기를 5년이 흘렀다.

***

"무림맹주는 하실 만합니까?"

작은 밀실, 나는 그곳에서 김영훈과 대작을 하며 물었다.

황제의 호위인 나는 공식적으로는 무림맹주인 그를 만나는 게 금지되었으므로, 이렇게 몰래 만나야 하는 것이었다.

"머리가 너무 아프지 뭔가? 하하, 자네가 함께했으면 조금 덜 아팠을 텐데."

"곧 저보다 젊어지실 것 같은데, 뭐가 문제입니까?"

"하하, 뭐···."

내 물음에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맘때쯤이면 그가 슬슬 반로환동을 할 때도 되었다.

아니, 오히려 시기를 생각하면 조금 늦은 감도 있었다.

"오기조원이 코앞이긴 하지. 자네 역시 기도가 남달라진 것 같은데. 축하한다 해야겠군."

"하하··· 황제 옆에서 계속 칼질하다 보니 실력이 안 늘 수가 없긴 하겠더군요."

황제를 암살하러 오는 자객은 최소가 일류 후기의 고수였고, 최대가 삼화취정의 고수였다.

평균적으로 나와 비슷한 경지의 절정 고수가 자객으로 오는 경우가 많았기에, 나는 동급 경지의 강자들과 마음껏 실전을 벌일 수 있었다.

"자네야말로 황제 호위는 할 만한가 보지?"

"말도 마십시오. 왜 하고 있어야 하는지, 황제 실력을 가늠할 때마다 회의감이 듭니다."

"으하하, 황제가 수도자라니. 거 참, 지킬 맛도 안 나겠구만."

그는 지난 몇 년간 무림맹주직을 하며 수도자들의 존재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고, 그들과도 붙어 보고 싶어 하는 듯 했다.

"그나저나 김 형은, 수도자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본래 이쯤이면 김영훈은 수도자들을 찾아다니며 붙고 싶어 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김영훈은 어쩐지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내 질문에 그는 잔을 들이키며 말했다.

"흐, 물어 뭘 하나. 당연히 싸워 보고 싶지. 하지만···."

"하지만?"

"나는 아직 조수월무경 6권의 모든 걸 깨우치지 못했네. 특히 조수월무경 6권 마지막에 적힌 구결들은···."

내가 조수월무경 마지막에 써 놓은 구결들은, 지난 삶의 김영훈이 막바지에 얻은 깨달음들이었다.

"조수월무경을 완벽히 익히기 전에는 도전할 수조차 없는 깨달음이야. 그래서 나는 그 구결들까지 전부 파헤친 후에, 그 후에야 수도자들을 한번 찾아다녀 보려고 하네. 그때쯤이면 무림맹주직도 내려놓을 수 있을 테니···."

"그렇군요···."

"그나저나 자네, 조금 실력이 는 것 같은데?"

김영훈이 씨익 웃으며, 술잔에 술을 따랐다.

'술잔에 술과 함께 공력을 같이 불어넣고 있군.'

이 인간이 진짜.

나는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어디 한 번 받아 보게나."

부웅!

그가 술잔을 날렸다.

기이하게도 술잔에 들어 있는 술은 한 방울도 넘치지 않았다.

가벼워 보이는 술잔, 그러나 나는 전신의 내력을 끌어올리며 술잔을 향해 집중했다.

지난 5년간, 나는 끊임없이 실전을 치른 결과, 절정 초기에서 절정 중기로 넘어가는 데에 성공했다.

절정 초기가 막 절정의 세계에 진입해 선 하나를 보는 경지라면.

절정 중기부터는, 붉은 선과 푸른 선을 '동시에' 보는 것이 가능했다.

지금까지는 붉은 선을 보기 위해서는 푸른 선을 보는 것을 포기하고, 푸른 선을 보기 위해서는 붉은 선을 보는 것을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절정의 세계에 진입하는 것이 심화되며, 붉은 선과 푸른 선을 동시에 보는 게 가능해진 것이었다.

촤아악!

절정의 세계에 진입하자, 술잔에서 뻗어 나오는 무수한 개수의 붉은 선들이 보였다. 동시에, 그 술잔을 받아칠 수 있는, 내가 취할 수 있는 최적의 경로들이 푸른 선의 형태로 나타난다.

김영훈은 저 술잔을 통해, 자신의 궤도를 드러내며 나와 수십 합의 간합을 주고받는다.

월악으로 후려치려 하자,

붉은 선의 궤도가 세로로 내리꽂히듯이 바뀌고.

등맥으로 올려치려 하자,

붉은 선의 궤도가 종횡무진하며 따라잡을 수 없게 바뀌며.

산수화로 난무하려 하니,

붉은 선은 난무의 틈새를 정확히 짚고 내 약점을 노렸다.

그 찰나, 김영훈과의 간합 싸움을 한 끝에, 나는 그의 간합을 뚫고 들어가는 단 하나의 경로를 만들어 내는 데에 성공했다.

"단악검, 유릉!"

쩌엉!

검 끝과 술잔이 부딪쳤건만, 광풍이 불며 밀실이 덜걱거렸다.

나는 유릉으로 술잔에 담긴 내력이 해소된 것을 알자 빠르게 검을 거두고 팔을 뻗어 떨어지려는 술잔을 잡았다.

다행히 술은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후우, 먹을 걸로 장난을 치면 됩니까?"

"뭐, 어떤가. 그나저나 상당히 늘었군. 검사(劍絲)의 경지도 코앞이야."

검사(劍絲).

검기가 실처럼 압축되며, 본디 무형인 검기가 유형화되는 첫 단계.

지난 삶의 김영훈은, 내가 검기의 이해도가 높으니 절정경에 오르기만 하면 검사의 단계에 오르는 건 빠르리라고 했으나, 그는 내 재능을 너무 얕보았다.

나는 회귀 햇수로 10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검사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절정 중기에 오르고서는 조금 실마리가 보였다는 거지만.'

일류 후기에서 절정으로 넘어갈 때만큼 난이도가 높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음, 그나저나··· 내가 오기조원을 목전에 두었다 했잖나."

"그랬지요."

"사실 나는 언제든지 오기조원에 도전할 수 있는 수준이라네. 다만 오기조원에 도전하는 중 누군가가 습격하면 답이 없으니, 믿을 만한 이를 불러 호법을 시켜야겠는데···."

"호법을 서 달라는 거로군요."

"하하, 그래."

나는 김영훈의 폐관 수련실로 함께 갔다.

"동향 사람만큼 믿음직한 이는 없지."

"아무렴 그렇겠습니까. 빨리 시작이나 하시지요."

"그럼···."

김영훈은 수련실 가운데에 앉아, 연공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기세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음?'

나는 문득, 절정의 세계로 진입하여 그의 붉은 선을 관찰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절정 고수들의 붉은 선은 평소에는 절정 무인의 팔과 그의 무기 사이에 이어져 있다.

그러나, 김영훈의 손과 그의 도 사이에 있던 붉은 선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저건···.'

붉은 선에서 수십 개의 가지가 뻗어 나온다.

동시에 그의 붉은 선이 김영훈의 사방팔방을 뒤덮는 듯했다.

저 안으로 들어간다면 김영훈의 공격에 의해 당장이라도 썰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절정 고수라면 누구든, 미치지 않는 이상 저 간격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익숙한 변화에 동공이 바싹 졸아드는 것을 느꼈다.

김영훈의 사방팔방을 덮은 붉은 선은, 점차 그 사이사이를 메워 가기 시작했다.

그의 주변이 점차 붉은 영역이 되어 갔다.

그 모습은 마치···.

'수도자들의 식(識)!!!'

수도자의 미간을 중심으로 나 있는, 그들의 붉은 영역!

그들의 식(識)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파아앗!

김영훈의 식이 완전히 또렷해지며, 단 하나의 틈새조차 없어졌다.

그리고 식의 형태가 김영훈의 미간을 중심으로 반경 반 장 정도 원구(圓球)의 형태로 안정되었을 때였다.

우우웅―

주변의 기(氣)가 빨려 들어가는 듯하더니, 그의 식 안에서 어떠한 흐름을 형성하는 듯했다.

그 흐름들은 서서히 뭉치더니, 그의 머리 위에서 다섯 개의 원구를 형성해 내었다.

오기조원으로 넘어갈 때에 일어나는 저 현상!

나는 지금껏 이 정도로 오기조원으로 넘어가는 현상을 자세히 관찰한 적이 없었다.

아니, 일류 시절에는 저 미세한 기의 흐름을 관찰 자체가 불가능했었다.

절정 고수가 된 후, 상대의 기세를 읽는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지금에서야 보이는 현상이었다.

'아, 아쉽다.'

나는 문득 아쉬움이 느껴졌다.

내가 만약 삼화취정의 경지에 이르러 있다면, 나는 어쩌면 훨씬 많은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일단 지금 저 상태만이라도 자세히 관찰하자.'

나는 다섯 개의 원을 미친 듯이 노려보았다.

저 안에서 흐르는 어떠한 흐름.

저 다섯 개의 원들이 서로 공전하는 그 법칙.

김영훈의 머리 위에서 원들이 떠 있는 원리.

모든 것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 깨달음의 편린만으로도 나는 검사(劍絲)에 대한 어떤 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스르르―

다섯 개의 원들이 부스러지며 오색의 기운으로 변화했다.

오색의 기운은 김영훈의 코와 입으로 들어갔고, 동시에 그의 몸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우득, 우드득!

그의 몸이 비틀린다.

김영훈의 뼈와 살이 바뀌며, 그의 피부의 주름이 사라졌다.

동시에 휑하니 비어 있던 그의 머리에 풍성한 모발이 자라났다.

우드득, 우득!

파아앗!

일순간, 수련실의 모든 기운이 그에게 빨려 들어가는 듯하더니 그가 눈을 반개하였다.

"무사히 오기조원에 도달했군."

"···축하합니다. 반로환동했군요."

그의 모습은 나보다도 어린 20대로 돌아가 있었다.

지난 삶에서도 보았던 광경이었으나, 이번 삶에서는 특히 얻은 것이 많았다.

"자네에겐 참 아쉽게 됐어. 서 동생이 삼화취정만 되었어도 훨씬 더 많은 걸 볼 수 있었을 텐데."

"저도 마침 그 생각을 했습니다. 뭐 어쩌겠습니까, 제 경지가 일천한 잘못이지요."

"그래도 아예 도움이 안 되지는 않았을 테니, 한번 돌아가서 곱씹어 보게나."

그는 풍성해진 자신의 모발이 마음에 드는지, 모발을 만져 보았다.

나는 문득,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김 형도 지금껏 수도자들을 한둘 만나셨겠지요?"

"흠, 그렇지."

"지금 제 눈에는··· 그들이 가진 식과, 당신이 형성한 영역이 매우 비슷해 보입니다. 혹시 관계가 있으리라 보십니까?"

"흠···."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있으리라 보네. 나는 이 영역 안에서라면, 연기기 수도자들이라는 놈들과 동등하게 싸울 수 있을 것 같아. 조수월무록의 무학을 사용하면 더 높은 경지의 수도자와도 어느 정도 싸울 수 있겠지. 어쩌면, 오기조원에 이른 이는 수도자와 비슷한 시야를 공유하는 걸지도 모르겠군."

"그렇군요···."

그의 대답을 통해, 나는 어째서 오기조원에 이른 무림인이 수도자와 같은 영근을 얻는지 대략 상상이 가능했다.

'수도자와 똑같은 식을 얻으니, 그를 통해 수도자와 같은 수련이 가능한 걸지도···.'

일류는 절정과 보는 세계가 다르고.

절정과 삼화취정 역시 보는 세계가 다르다.

삼화취정과 오기조원 역시 완전히 다른 차원의 세계를 보며 살아갈 것이다.

오기조원이 수도자들의 수도법술을 수련 가능한 이유 역시, 일반인들이 보지 못하는 영역을 볼 수 있기에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 경험은 훗날 오기조원에 오를 때 도움이 되겠지.'

나는 그날 김영훈에게 무공 지도를 조금 받은 후, 잡담을 조금 하고 다시 황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날 그가 보여 준 오기조원으로의 등극 상황을 곱씹으며 깨달음을 갈무리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

나는 그날도 어둠 속에서 황제의 침소를 지키고 있었다.

스르르―

저 멀리 어둠이 꿈틀거리며 누군가가 접근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암살자였다.

'절정경 고수.'

기세를 보아 막 절정지경에 오른 자다.

그러나 나는 방심하지 않았다.

내가 조금 더 강하기야 했지만, 절정 중기와 초기는 일류와 절정만큼 차이 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상대는 감히 황제를 암살하러 올 만큼의 암살의 귀재.

슈칵!

어둠 속에서 붉은 선이 생겨나더니, 황제의 침소를 지키던 내게 비수가 뻗쳐 왔다.

채앵!

나는 검으로 비수를 쳐 낸 후, 암기를 던져 암살자의 발목을 노렸다.

암살자는 황급히 내 암기를 피하더니 다시 내게 비수를 찔러 왔다.

나와 암살자의 간합이 얽혔다.

내 푸른 선과 그의 붉은 선이 허공에서 교차한다.

'이상하군.'

분명 싸움에 집중해야 하는데, 어째서인지 김영훈이 오기조원에 등극할 당시의 상황이 눈앞을 떠나질 않는다.

동시에, 나는 검기(劍氣)에 대하여 고민하기 시작했다.

'검기란, 검신합일의 도달하기 시작했다는 증거.'

'일류 중기에 검기를 발현하여, 검신합일의 초입에 도달한다.'

'일류 후기에 완전한 검신합일에 도달하여 제대로 된 검기를 사용 가능하다.'

어째서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눈앞의 상황이 아닌, 검기에 대한 고민과 오기조원에 이르던 김영훈의 모습이 떠오르는 걸까.

'절정지경에 오르며, 항상 최적의 경로를 볼 수 있기에 그 최적의 경로를 따라가는 이상, 검기는 절대 꺼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지난 삶의 김영훈이 내게 하루 종일 검기를 유지하는 훈련을 조언했던 것이리라.

'내가 보는 최적의 경로란 결국 내 검법이 가리키는 극한(極限). 검기는 결국 내 검법의 특질을 검신합일로 인해 극한으로 발현시켰을 때 나오는 것.'

검법(劍法)은 곧 검기(劍氣)이다.

여기까지가 내가 무공 수련하며 느낀 것이었다.

'잠깐, 아니다. 뭔가 아니야.'

그러나 나는 문득 내 생각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암살자가 비수를 연달아 세 번 찔러 왔고, 나는 산수화의 초식으로 비수를 쳐 낸 후 다시 입산의 초식으로 그의 균형을 무너뜨렸다.

그의 붉은 선이 내게 뻗어 오며 다시 갈라진다.

비수를 찌른 후 변초를 줄 것이다.

나는 내 푸른 선으로 그의 의도를 차단하고, 서로의 간합을 겨뤘다.

'검법이 곧 검기라면, 무인(武人)의 존재 의의는 뭐지? 그냥 수도자들이 강시나 움직이는 허수아비를 만들어서 검법을 익히게 하면, 그것들도 검기를 써야 하는 게 아닌가?'

난 어째서 수 번의 생을 반복하며 무기물이 검기를 쓴다는 말을 못 들어 본 걸까.

'검기는, 단순히 검법이 아니다.'

그렇다면 검기는 무엇일까.

암살자와 수십 합의 간합을 주고받으며 공방을 주고받던 중, 암살자의 붉은 선이 내 푸른 선 사이를 꿰뚫었다.

그의 비수가 정확히 내 미간을 향한다.

'검기는···.'

김영훈이 오기조원에 진입할 때, 그의 미간을 중심으로 붉은 영역이 생겨났던 장면이 떠오른다.

아아, 그렇구나.

검기가 검법에 의해 만들어질지언정.

그 중심은 결국 인간.

그 검을 펼치는, 무인(武人)의 의(意)!

동시에, 나는 내가 지금껏 보아온 붉은 선과 푸른 선의 정체를 아주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단순한 최적의 경로, 적의 의도가 아니었다.

무를 펼치는 무인의 의(意)!

의념(意念)의 향방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나는 어째서인지 검을 쥔 손에 기묘한 감각이 드는 듯 했다.

마치 검에서 혈관이 자라나, 내 피부를 뚫고 손으로 들어온 기분.

단순한 검신합일이 아닌, 그 이상의 더욱더 끈적한 합일(合一)!

나는 무심코 더욱더 깊은 합일을 이룬 검을 향해 검기를 밀어 넣었다.

지금껏 검법이 곧 검기인 줄 알았다.

그러나 검법은 그를 펼치는 무인과 함께 완성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무인의 의(意)가 향하는 곳이라면, 그것은 검법에 얽매이지 않더라도 검법일 것이다.

부웅!

나는 일 검을 내질러 암살자에게 휘둘렀다.

지금까지는 단악검법의 검로를 벗어나면 검기의 위력이 크게 약해졌다.

그러나 지금은 검로를 벗어나, 아무렇게나 검을 휘둘러도 검기의 위력이 전혀 낮아지지 않았다.

'아니, 이게 끝이 아니다.'

나는 내가 방금 얻은 깨달음이 고작 이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계속해서 검기에 의식을 집중했다.

지금까지는 검기를 진화시키려면 기산심천 등으로 기운을 일순간 강화시켜야 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검의(劍意)를 계속 불어넣는다!'

절정의 세계에서, 내 검이 점차 푸른 빛에 휩싸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임계점을 넣자, 내 검은 푸른 빛에 휩싸이는 것을 넘어, 검 자체가 푸른 실로 화해 버렸다.

현실에서 나는 검을 쥐고 있었지만, 절정의 세계에서 나는 푸른 실을 쥐고 있었다.

'아, 이게···.'

검사(劍絲)!

절정 중기 완숙의 증거!

키이잉―

현실에서도 무형에 불과했던 내 검기는 마치 실처럼 얇아지며 은은하게 유형화되어 있었다.

절정에 오른 지 약 10년.

나는 절정 중기에 이르러, 검사(劍絲)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절정 고수(3)

나는 내가 각성한 검사를 쳐다보았다.

검사(劍絲), 혹은 검망(劍芒)이라고도 불리는 경지.

검기의 유형화는 모든 검객들이 꿈에도 그리는 경지였다.

물론 검망의 압도적인 상위 호환인 검강(劍罡)이란 게 있었지만, 검강의 경우는 삼화취정에 이른 고수가 아니면 구경하기도 힘들었기에 무림에서는 반쯤 전설처럼 칭해졌고,

검강보다는 훨씬 보기 쉬운 검망의 경지가 오히려 많은 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내 검망을 보자, 암살자는 당황한 듯 기세가 위축되었다.

나는 그 틈을 파고들어 가 암살자와 다시금 간합을 겨루었다.

푸른 선과 붉은 선이 허공에서 교차한다.

나와 그의 의(意)가 서로를 시험했다.

암살자의 비수가 내게 뻗쳐 온다.

동시에 그의 비수 끝에서 붉은 선이 다섯 갈래로 뻗어 나온다.

저 공격에서 파생될 수 있는 연계기가 다섯은 된다는 의미.

그러나, 나는 검사를 쥐었다.

절정 고수의 세계에서, 내 검은 마치 실과도 같이 변한 상황.

암살자의 시야에도 내 검이 붉은 실처럼 보일 터였다.

검기가 검사가 되었다는 건, 단순히 위력이 증가했다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피잇!

푸른 실로 화한 검 끝에서, 다시금 수 개의 푸른 실이 뻗어 나가며 경로를 점한다.

이전의 내가 만들었던 경로보다도 훨씬 많은 수였다.

동시에, 내가 손목을 조금 꺾어 검 끝을 수정하자, 푸른 실들의 위치가 같이 움직인다.

정해진 경로였던 푸른 실선들이 움직인다.

그 광경을 보는 암살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난번에, 김영훈과 싸울 때는 그가 삼화취정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망정이지.'

그가 나와 같은 방식으로 싸운다는 것을 생각해 냈으면 나는 바로 그에게 패배했을 터였다.

내가 뻗어 낼 수 있는 경로가 훨씬 더 많고, 자유분방하다.

그는 비수로 내 검을 얼마간 쳐 내는 듯했지만, 결국 내 쪽에서 뻗어 나가는 경로가 훨씬 많았고, 내 경로를 보며 계산을 하다가 점차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산군무(山君武).

산군의 기세로 몰아붙이며.

월악보(越岳步).

다시 1 초식으로부터 시작해 끊임없이 초식을 연계하여,

상대의 피를 말려 죽인다.

챙, 챙, 챙, 챙!

얼마간 그와 나의 검과 비수가 부딪혔다.

암살자는 끝까지 분전하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검망을 다루며 의를 다루는 데에 훨씬 능숙해졌고, 결국 암살자는 나와의 간합 싸움에 패배해, 내게 일격을 허용해 버렸다.

퍼억!

내 다리가 암살자의 허리를 가격했다.

암살자는 옆으로 나가떨어지며 비수를 놓쳤고, 암살자의 복면이 벗겨졌다.

"호오, 익숙한 얼굴이군."

암살자는 최근 새로 들어왔다는 황제의 시비 중 하나였다.

약 20대 정도의 외모의 시비를 보며 나는 작게 감탄했다.

"그 나이에 절정 고수라니, 살 수만 있다면 능히 삼화취정에 도달할 재능이로구나."

"···내 동생은 더 재능이 뛰어났다. 하지만··· 황제 놈 때문에···."

"오, 감성에 호소하는 건가?"

"당신, 무한투괴지? 당신 실수하는 거야. 황제의 명에 민초들이 죽어가고 있다! 그는···."

슈칵!

나는 암살자의 말을 더 듣지 않고 그녀의 목을 잘라 버렸다.

"미안한데, 이 자리는 원래 많은 걸 들으면 안 되는 자리라."

나는 뛰어난 재능을 내 손으로 거둔 것에 작은 안타까움을 느끼며, 다른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시신을 정리했다.

방금 전까지 바깥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건만, 황제는 침소에서 미동도 하지 않는 듯 했다.

듣기로는 한 수도자가 잠귀가 밝은 황제를 위해, 황제의 침소에 방음(防音)의 술법을 걸어주었다고 했다.

그 덕분에 암중 호위대는 자객들과 다소 시끄러운 소리로 싸워도 문책을 받지 않았다.

'근데, 저 술법 수도자가 와서 걸어 준 게 아니라 황제 본인이 걸어 놓은 것 같은데.'

사실 암중 호위대의 사람 중에 황제가 수도자인 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절정 고수의 눈에는 수도자의 영역이 두 눈으로 식별이 되니까.

다만 다들 주어진 임무이기에 군말 없이 황제를 호위하는 것뿐이었다.

'그나저나, 원래 이렇게 황제 암살 시도가 많았나?'

사실 우리 같은 암중 호위대가 세워진 것 역시 최근의 일이라 했다.

듣자 하니, 이렇게 황제에게 자객을 보내는 횟수가 많아진 것도 근래의 일이라고.

무림맹 책사나 귀영각주로 살 때는 몰랐던 정보들이었다.

그야, 황실이 미쳤다고 최근에 자객이 많이 들었다 광고를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왜 최근에 황제 암살 미수가 더 많아졌을까.'

근래 연국은 더없이 천하태평을 누리고 있었다.

물론 못 사는 이들은 여전히 못 살았지만, 최소한 멀쩡한 양민들이 도적 떼로 변모하거나 하는 일은 없는 정도였다.

'그리고 중세 중국 수준 정도 문명에 그 정도면 양호한 거지.'

더불어 연국의 권신들은 수도자 황실이라는 막강한 황권 앞에 모두가 고개를 얌전히 조아리며 복종하는 형태였기에, 중앙집권적인 힘이 굉장히 강했다.

그렇기에 감히 황제를 암살 시도할 만한 정신 나간 조직이라면.

'무림문파?'

관과 사이가 좋지 않은 무림문파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상한 점은, 내가 지난 삶 무림맹 책사 및 정보 집단의 수장으로 있을 때는 그런 일은 전혀 들어보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무림문파가 아니라면, 어떤 놈들이 황제를 위협하는 자객을 이렇게 꾸준히, 그것도 많이 보내는 건지. 그리고 방금 그 암살자처럼, 내 별호를 아는 자도 있었다.'

거기에 연국어도 상당히 능숙하게 했다.

그 점을 보아, 벽라국이나 성제국의 자객 역시 아니었다.

'연국 사람이다. 연국의 사람이 황제를 암살하러, 주기적으로 자객을 보내는 것이다.'

나는 자객들을 심문해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자객들은 그들이 무어라 떠들기 전에 즉결 처형이 원칙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뭐, 천천히 알아보면 되겠지.'

황실에 몸을 담고, 천천히 황제의 신임을 받아 가며, 필요한 정보들을 모으다 보면 언젠가는 알고 싶었던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다시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며, 생각을 정리했다.

***

황제의 곁에서 그를 호위하기를 10년.

나는 꾸준히 호위를 하며 황제의 신임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그 권한을 이용해, 황실 곳곳의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다.

물론 핵심적인 정보들은 알아낼 수 없었으나, 관청에서밖에 알아낼 수 없는 정보들 역시 많이 알아낼 수 있었다.

가령.

'해연력 33년. 황상 폐하의 은덕으로 고아와 거지들의 숫자가 크게 줄었으며, 이로 인해 도적 떼로 유입되는 이들이 없어졌다. 그 덕분에 연국 곳곳에 폐하를 찬탄함이 끊이지 않으며···.'

관아에서 행하는 호구 조사.

호구 조사는 세수와 직결된 문제였기에 관아에서만 통제하던 정보였고, 무림맹주나 정보단체의 수장으로 있던 시기에는 나 역시 제대로 알 수 없었던 문제였다.

그러나 황제의 호위대가 된 지금은 호구 조사에 대한 기록을 열람할 권한이 허락되었다.

'거지는 물론이고 빈농의 숫자도 줄었다.'

지난 삶들에서는 고아, 거지, 빈농들의 숫자에 대해서는 알아보지 않았으나, 황실의 안에서 호구 조사의 기록을 보자, 나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니, 어떻게 고아, 거지, 빈농의 숫자가 줄어든다는 거지?'

단순히 빈층들을 구휼하여 그들에게 생계 수단을 만들어 준 게 아니었다.

수많은 이들이 그대로, 그냥 사라져 버렸다.

'굶어 죽었나?'

그러나 장부에 적힌 숫자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이 정도의 숫자가 집단 아사했다면 결코 내가 지난 삶에 그 정보를 몰랐을 리 없었다.

'아사가 아니다. 그냥, 말 그대로 이들이 [삭제] 되었다.'

도적 떼가 들었다는 기록 역시 없었고, 나 역시 정보 단체를 운영했을 당시 도적 떼가 못 사는 이들을 굳이 찾아가서 죽였다는 기록 역시 들은 바 없었다.

그런 악랄한 도적들이 즐비했다면 내가 모를 리 없었으니까.

나는 몇몇 정보들을 더 알아보며, 차근히 지난 삶의 정보들을 취합했다.

'무림맹에서 책사를 할 시, 나와 김영훈은 연국 곳곳의 사파 무리를 척결하고 정도천하를 이룩했다.'

'또한 정보 단체 귀영각을 설립할 시, 나는 이상할 만큼 쉽게 암중 혈투에서 다른 어둠 속의 정보 단체들을 빨리 해치울 수 있었다.'

두 삶의 공통점은, 삶의 후반부로 갈수록 사파들을 더 빨리 해치울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거기에 삶의 후반. 회쟁파 등, 갑자기 사도방파에서 정도문파로 탈바꿈한 문파도 상당히 많았다.'

사파란 기본적으로 불법 조직이다.

산적이나 수적 같은.

그리고 그런 사파들은 주로 거지, 고아, 빈농들이 굶주림을 이기기 힘들어 남들을 약탈하는 것에서 주로 시작된다.

비적 떼나 산적 떼가 점차 경험과 무력, 자금을 쌓으며 덩치가 커지면, 성안으로 잠입해 불법적인 일을 손에 대기 시작하며 제대로 된 사도방파가 생겨나는 것이었다.

'어쩌면, 지난 삶에서 사도방파들을 쉽게 척결할 수 있었던 것은···.'

이 호구 조사의 내용대로라면, 사도방파에 새로운 피가 될 빈민층이 갑자기 대량으로 [삭제]되어서 규모가 축소된 사도방파들을 제압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삭제]된 빈민층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나는 정보를 취합해 보며,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수도일족.'

이 사건이, 수도일족과 연관되었으리라는 것이었다.

'몇 년 전부터 갑자기 황제를 노리는 자객이 많아진 것도. 암중 호위대가 생겨난 것도···.'

무언가 빈민층이 삭제되는 일과 관련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몇 년 전 만났던 여자 암살자처럼, 암살자 중에는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았는지, 마지막에 입을 털다 죽는 것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암살자들은 대부분 똑같은 말을 하며 죽었다.

―황제에 의해 얼마나 많은 민초들이 죽었는지 아느냐!

이상했다.

지금의 황제는 성군까지는 아닐지라도, 평균 정도의 재목은 되는 이였다.

그의 통치로 연국이 어려워진 것도,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간 것도 아니었다.

전쟁조차 없어 평화로운 이 나라일진대, 어째서 암살자들은 그런 말은 하는 것일까.

'수도일족. 이건··· 수도 일족과 관련됐다.'

내가 이렇게까지 파고들었는데도 답이 나오지 않은 것은, 수도가문에 대한 것들뿐이었다.

'아무래도, 이 너머에 대한 조사는···.'

김영훈에게 맡겨야 할 것 같았다.

***

초대 무림맹주 김영훈의 퇴임식이 거행되었다.

그는 많은 이들의 축하와 아쉬움 속에서 무림맹주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많은 이들이 그의 퇴임을 아쉬워했으나, 오히려 그의 눈에는 상쾌함이 가득했다.

아무래도 그럴 것이다.

그가 무림맹주의 직위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그가 조수월무경 6권을 전부 이해하고, 최후의 구결들마저 이해했다는 뜻이었으니까.

"상쾌하신가 봅니다?"

나는 김영훈의 방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마주하며 물었다.

"어이쿠, 누가 몰래 들어와 있길래 자객인 줄 알았더니 자네였나. 암중 호위대라더니, 점점 어째 기척이 자객하고 비슷해지는군."

"뭐, 자객 놈들하고 서로 닮아 가는 거겠죠. 그나저나 무림맹주에서 그만두셨으면 이제 뭘 하실 겁니까?"

"알면서 뭘 묻나? 조수월무경을 모두 이해했으니, 이제 수도자 놈들을 찾아가서 겨뤄 보고 깨달음을 갈무리해야지."

"흠, 조수월무경에 있는 성취를 모두 대성하신 겁니까?"

내 말에 김영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닐세. 조수월무경은 사실 무공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무학 체계야. 뭐 삼류, 이류, 일류, 절정 등을 '무공'이라고 하진 않잖나. 무공에 대한 일종의 기준이자 단계이지.

조수월무경은 오기조원의 '다음 단계'에 대해서 설명하는 무학서야. 그 '다음 단계'에 이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오기조원에서 어떤 수련을 하는 게 맞는 수련인지 등이 기술되어 있다네.

그리고 나는 조수월무경을 전부 '이해'하기는 했으나, '체화'하여 오기조원의 너머로 향하지 못했네. 앞으로 수도자들과 싸워 보며 전투 경험을 얻고 오기조원 너머로 향할 예정이지."

"그렇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그에게 물었다.

"사실, 요즘 황실에서 일하다 보니 굉장히 수상한 게 보입니다."

나는 내가 취합해 낸 정보와 결론을 그에게 말해 주었다.

"···해서, 저는 황실 뒤의 수도자 일족이, 황실과 관아를 이용해서 빈민층을 납치, 혹은 학살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흐음···."

"하지만 저는 황실 암중 호위대라는 직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금처럼 휴가 신청을 하고 나오거나 하는 게 아니면 서경성 바깥으로 나가기도 힘들뿐더러, 나온다고 해도 자유롭게 수도자 일족을 조사할 수 없습니다. 해서··· 김 형이 수도자 일족을 찾아다니며 조사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거 확실히 조사해 볼 만하군. 하지만 나도 수도자 일족들 같은 게 어디 있는지는 솔직히···."

"그런 건 제가 알려 드리지요."

황실에서 일을 하며, 지난 생에서 몰랐던 수도 일족들이 살아가는 몇몇 장소를 알아낼 수 있었다.

"정보는 제가 드릴 테니, 김 형은 찾아가셔서 놈들에게 정보를 얻어 내 주셨으면 합니다."

"그래, 그러지. 놈들이 과연 뭘 하고 있는지 나도 한번 알아봐야겠어···."

그렇게 나는 김영훈을 통해 수도일족의 꿍꿍이를 제대로 파헤쳐 보기로 했다.

***

'최근에는 자객의 수가 조금 줄었군.'

근 10년간은 거의 끊이지 않고 자객들이 찾아왔지만, 최근에는 점차 줄어드는 추세였다.

거기에 찾아오는 자객들 역시 절정경에서 일류 정도 수준으로 많이 실력이 격하되었다.

'일류 고수 정도야, 막 들어온 신입들 연습 상대나 시켜 주면 될 정도고···.'

하긴, 생각해 보면 자객을 보내는 쪽 역시 절정 고수를 무한히 양산하는 건 불가능했다.

이젠 보내는 족족 살해당하다 보니 슬슬 저들이 쓸 수 있는 패도 떨어질 것이었다.

15년 동안 암중 호위대로 근무하다 보니, 이제는 직급도 상승해서 부대주까지 상승했다.

대주가 노화로 은퇴하면 내가 다음 대주가 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계속 저급 암살자들만 오기 시작하면, 우리 암중 호위대는 쓸모가 없는 게···.'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저 멀리서 어둠이 꿈틀거린다.

암살자다.

'이번에는 어느 정도 경지의 암살자려나··· 일류쯤 되면 신입들 시켜야···.'

그렇게 생각하며, 암살자의 무공 경지를 가늠하기 위해 절정의 세계로 진입했을 때였다.

"···!"

붉은빛이, 원형으로 안정된 채 공간을 메우고 있다.

원구 형태의 의념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수도자! 이런 미친···.'

이 미친놈들이, 절정 고수가 떨어져 가니, 수도자를 암살자로 보내온다!

파바밧!

다른 이들 모두 수도자의 영역을 확인했는지, 순식간에 암중 호위대 전원이 황제의 침소 앞에 집결했다.

"수도자다, 모두 만전을 가하도록!"

암중 호위대주가 긴장에 찬 목소리로 그의 독문병기인 극(戟)을 들어 올렸다.

암살자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수도자가 쓰는 은신술과 귀식대법은 무림의 기준으로 엉망이었다.

아무리 봐도 대충 배운 티가 팍팍 나는 기술들.

그러나,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더욱 긴장했다.

'저 대충 배운 기술들로, 어떻게 황궁에 잠입한 거지?'

뭔가 숨기고 있는 게 있다는 얘기다.

그때, 암중 호위대를 발견했는지 이쪽으로 다가오던 수도자가 멈춰섰다.

"흠, 다 절정 고수들인가. 귀찮군. 절정 고수 놈들은 하나같이 은신법술이 제대로 안 먹힌단 말이야. 그 짜증 나는 시야인지 뭔지 때문인가."

스르르―

수도자는 우리를 발견하자 숨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지, 은신을 풀고 대놓고 걸어 나왔다.

"그래도 그 눈을 가지고 있으면 알아보겠지? 내가 수도자라는 것쯤은. 목숨을 부지하고 싶으면 썩 꺼져라."

그의 말에 반응하는 이도, 대답하는 이도 없었다.

"쯧, 나와 해 볼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냐? 머릿수만 믿고? 개죽음만 당할 거다. 마지막으로 경고하겠다. 너희 절정 고수라는 놈들이 싸워볼 수 있는 한계는, 연기기 1성 수도자들이다. 나는 무려 연기기 2성이란 말이다."

우웅―

그가 부적을 꺼내 들자, 주변의 공기가 요동쳤다.

"너희들이 일류와 절정이 상당히 차이가 나는 것처럼, 연기기 1성과 2성 역시 아주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지. 당장 꺼지지 않으면···."

파밧!

우리는 놈이 더 떠들게 두지 않고, 빠르게 녀석을 향해 쇄도해 갔다.

티잉!

내가 쏘아 보낸 암기가 수도자의 앞, 허공에 부딪히며 튕겨져 나갔다.

보이지 않게 방어 법술을 치고 있었던 듯했다.

내 공격을 시작으로, 절정 고수들이 그에게 달려들며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흥, 버러지 같은 것들이. 오늘의 암살을 위해 내가 지원받은 부적이 몇 장인 줄 아느냐?"

촤악!

그러나, 수도자가 허공으로 수 장의 부적을 뿌리자 강력한 반탄력이 느껴졌다.

나와 대주는 각자 검과 극에 기사(氣絲)를 불어넣으며 반탄력을 잘라 내어 버텼고, 나와 대주를 제외한 다른 대원들이 전부 떨어져 나갔다.

"흐음, 너희가 가장 강한 놈들인가?"

다시금 수도자가 부적을 꺼내 들었다.

화르륵!

뜨거운 화탄(火彈)이 그의 손 위로 떠오른다.

'맞으면 재가 된다!'

나는 생존 본능이 보내는 경고를 무시하지 않고, 뒤로 물러나 수도자의 영역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저 영역 안에서는 수도자의 의념을 읽는 게 불가능했기에, 그의 공격을 예측할 수가 없었다.

피잇!

수도자의 영역 바깥으로, 한 줄기 붉은 실선이 빠져나왔다.

곧이어 실선을 따라 화탄이 내게 쏘아졌다.

'빌어먹을!'

나는 화탄을 막지 않고 피했다.

수도자의 근거리에 접근하려 하면, 그의 의식 영역 안쪽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공격의 궤도를 예측할 수가 없다.

반대로 원거리로 피하면 원거리 공격수단이 넘쳐 나는 수도자에게 유리하다.

'자신에게 유리한 싸움을 강제하는군.'

무림인과 수도자의 상성 자체가 극렬하게 나빴다.

퍼석!

내가 피한 화탄은 뒤쪽 기둥에 맞았으나, 크게 불이 옮겨붙지 않고 그대로 꺼져 버렸다.

'수도자가 법술을 취소한 거다. 녀석도 일이 크게 번지기를 원친 않는다.'

나는 암중 호위대 중 발이 빠른 몇몇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들은 내 신호를 알아듣고, 수도자의 너머로 빠져나가 다른 근위병들을 부르러 움직였다.

"어딜 가느냐. 너흰 못 빠져나간다."

파앗!

수도자가 은은한 빛이 어린 부적을 한 장 꺼내자, 시꺼먼 그림자가 터져 나오며 우리와 수도자를 가두는 결계가 되었다.

"바깥으로는 소리도 안 새어 나갈 터. 빛조차도 바깥으로 새어 나갈 수 없다. 너희를 모두 죽인 후 황제, 막리가(家) 방계 놈을 죽일 것이야."

수도자는 주머니에서 다시금 수십 장의 부적을 꺼내 들었다.

'젠장, 개 같은 놈 같으니.'

연기기 2성이니 뭐니 뻐기듯 말했지만, 아마 저놈의 원래 실력이면 우리가 달려들어 죽일 수 있을 터였다.

아마 나와 대주만 합공해도 손쉽게 죽을 터였다.

그러나 저 녀석이 바리바리 싸 들고 온 부적 때문에, 녀석은 지금 본 실력 이상을 발휘하고 있었다.

'삼화취정만 됐어도.'

삼화취정에 올라 강기만 사용할 수 있었어도, 수도자 놈의 방어 법술을 박살 내 버리고 반으로 갈라 죽일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나는 절정 중기일 뿐.

아직도 삼화취정은 감을 잡지 못했다.

'···아냐, 어쩌면.'

"···대주님, 드릴 말이 있습니다."

"뭔가."

"제가 놈에게 접근할 한순간만 만들어 주십시오. 딱 한순간만 만들어 주시면, 수도자에게 치명상을 입혀 보겠습니다."

"···믿겠다."

대주는 고개를 끄덕이고, 극을 잡은 채 수도자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허리춤에서 독액을 담아 두던 병에서 독초즙을 꺼내, 면포로 검에 발랐다.

'방어 법술을 깨고, 이 검을 저놈에게 스치기만 한다면.'

이쪽의 승리다.

타닷!

나는 호위대의 공격에 가담하며, 수도자에게 달려들었다.

수도자가 부적들을 허공에 흩뿌리며 주문을 외자, 부적들은 전부 새하얀 빛을 발하는 비수가 되어 우리에게 쏘아졌다.

나는 수도자의 품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새하얀 비수가 내 미간을 노리고 달려든다.

부웅!

까강.

대주의 극(戟)이 회전하며 내게 날아오는 비수를 쳐냈다.

화르륵!

수도자가 나를 보며 화탄술을 사용해서 내게 날린다.

"하아압!"

신입 중 하나, 쌍검을 주 무기로 사용하는 녀석이, 내게 달려드는 화탄을 향해 쌍검을 교차하며 검기를 날렸다.

화탄은 검기에 휘말려 궤도가 바뀌었다.

이제 나와 수도자의 거리는 3장 안팎이 되었다.

'이제 수도자의 영역으로 진입한다.'

저 안쪽으로는 내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다.

사방이 적색이기에 수도자의 의념을 볼 수 없으니까.

"흥."

푸화악!

수도자가 손을 까딱거리자, 강인한 바람이 불어오며 나를 밀쳐 내려 했다.

단악검법.

월악, 등맥.

나는 두 가지의 초식에, 검사를 덧씌워 휘둘러 십(十)자로 바람의 결(缺)을 잘라 내고 그의 의식 영역 안쪽으로 접어들었다.

적의 의념을 볼 수 없다.

그렇다면.

키이잉―

지난 삶, 상시 공간의 형태, 청각, 촉각, 후각 등으로 오감을 극대화하여 적의 공격을 간접적으로 계산해 냈던 그 오감의 극대화를 더더욱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양옆.'

좌우에서 공기의 파동이 느껴진다.

무언가가 온다.

"부대주님, 가십시오!"

"놈을 잡아라!"

호위대의 한 사람이 오른쪽의 법술에 달려들어 법술을 막고, 대주가 극을 던져 왼쪽의 법술을 박살 내 버렸다.

그리고.

'앞!'

나는 바로 앞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감지했다.

앞쪽의 온도와 습도가 달라진다.

수도자의 결인에, 새하얀 얼음이 허공에서 응결되며 화살의 형태를 취한다.

단악검법.

'하단세!'

입산!

나는 빠르게 하단세로 전환하여 아슬아슬하게 피한 후 검을 내질렀다.

그러나, 바로 앞에는 수도자가 쳐 놓은 방어 법술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불의의 일격을 날리는 와중에도, 수도자는 지루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절대적인 여유!

'그 나른한 표정을 싹 지워 주마.'

하지만, 나는 씨익 웃으며 입산의 초식에 다른 초식을 담아냈다.

단악검법.

용맥, 기산심천, 단애!

용맥으로 검사의 흐름이 빨라지며 강화된다.

기산심천으로 전신 경맥이 잠시 열리며 다시 검사가 강화된다.

단애로 검속이 순간 더 빨라진다.

그리고.

'전신의 내공을 일거에 짜낸다!'

나는 의원으로서의 지식으로, 기경팔맥에 정신을 집중해 전신의 내공을 남김없이 짜냈다.

수백 년 묵은 황주삼 8개를 한 번에 먹어치운 나의 무식한 내공이, 내 검에 담겼다.

파아아앗!

검사(劍絲)가 일순간 진화한다.

번쩍!

검강(劍罡)!

찰나.

간신히 1초나 될까.

그 짧은 촌경에, 내 검에 맺힌 빛이 수도자의 방어 법술을 두부처럼 파고들었다.

절정 고수(4)

벤다!

벤다!

필생의 의지력을 쥐어짜 내며, 수도자의 다리를 향해 검을 내지른다.

여유롭던 수도자의 얼굴이, 내 검강이 그의 방어 법술을 파고 들어가자,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그리고.

슈칵! 카각, 칵!

피잇.

내 모든 내력을 짜내 만든 검강이, 바람에 닿은 촛불처럼 싱겁게 꺼져 버렸다.

공력이 부족했다. 수십 년 어치의 내공을 일거에 쏟아부었을지언정, 깨달음이 없이는 검강을 1초 이상 구현하기 불가능했던 모양.

내 검은 방어 법술 안쪽, 수도자의 다리 어림, 그의 옷을 조금 잘라 내고 그의 다리에 작은 상처를 냈을 뿐이었다.

우그극···.

검강이 꺼지자 더 이상 검은 방어 법술을 뚫고 들어갈 수 없었다.

동시에 모든 내공을 일거에 쓴 반동이 몰려오며,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고, 전신에 힘이 빠져버려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커헉! 컥!"

쿨럭, 쿨럭!

기침을 할 때마다 피가 튀어 나왔다.

내장이 진탕될 것 같았다.

"이, 이··· 더러운 범인 자식이···!"

그리고, 내 공격은 수도자를 제대로 분노하게 하는 데에 성공한 모양이었다.

푸콱, 푸콱!

그가 부적을 꺼내 흩뿌리자, 부적들은 적광이 감도는 비수로 변해, 내 팔과 다리를 찔렀다.

"끄···으윽···!"

나는 고통을 참으며 검을 잡으려 했으나, 수도자가 다리로 내 손을 짓밟았다.

"쓰레기 같은, 범인, 자식이!"

퍽! 퍽! 퍽!

그는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주변으로 더더욱 강한 방어 법술을 펼친 후, 내 손을 마구 짓밟기 시작했다.

"감히, 감히 누구를 벤다는 말이냐! 네가, 네 따위가 감히! 이 몸은 너희 하등한 범인 놈들이 감히 손댈 수 없는 고귀한 수도일족의 핏줄이란 말이다! 감히, 감히 네 따위가!!"

얼마간 내 팔을 짓밟던 그는, 허리춤에 있는 주머니에서 다시금 부적을 한 움큼 꺼내더니 허공에 흩뿌렸다.

"막리가 방계 놈을 죽이기 전에 여흥으로 놀려 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너희 범인 놈들을 모조리 벌레처럼 찢어 죽여 주마!"

화르르륵―

부적들은 모두 불타는 화탄(火彈)으로 변해, 호위대원들을 향해 하나둘 쏘아지기 시작했다.

"잘 봐 둬라, 벌레 놈. 너는 특별히 네 동료들을 전부 찢어 죽이는 모습을 전부 보게 한 후 잘근잘근 씹어먹어 주마. 너희 벌레 놈들 따위는, 아무리 발버둥 쳐 봤자 감히 수도자들의 앞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음을 보여 주마!"

"···크헉, 커억···."

나는 피를 한 됫박은 더 토해 냈다.

내공을 한 번에 쏟아내며 내장이 진탕된 탓인지, 눈앞이 흐려왔다.

그러나, 청각은 멀쩡한 탓인지 몇 단어가 귀로 들어오는 듯 했다.

벌레 놈.

의미가 없다.

'그래, 나는 벌레나 다름 없다.'

재능도, 실력도, 이 목숨마저도.

진정 재능 있는 이들이나, 수도자들에 비하면.

"···는, ···레···다."

"응? 뭐라고? 살려 달라고 비는 거냐?"

하지만.

꿈틀.

수도자에게 짓밟힌 손에, 힘을 주었다.

내가 힘을 주려는 걸 얼아챘는지, 수도자는 더더욱 거세게 내 손을 밟았다. 그에게 거세게 짓밟혀 반쯤 으스러진 손이었지만, 나는 더더욱 힘을 주었다.

"···는."

"뭐라고 하는 거냐. 좀 더 크게 빌어 봐라!"

"···나는, 벌레가, 맞다!"

우극, 우그극!

전신의 힘을 짜낸다.

공력은 한줌도 없고, 팔에는 비수가 박혀 있으며, 손은 수도자 놈에게 짓밟혀 으스러졌지만.

그럴지라도.

내가 단련해 온 세월.

그 인고(忍苦)의 시간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덜걱, 덜걱, 덜걱!

팔에 힘을 주자, 점차 수도자의 발이 들리기 시작했다.

'대강대강 은신을 펼칠 때부터 알아봤다.'

이 녀석은, 몸을 그렇게 단련한 적도.

검을 들고서 치열하게 간합을 재 가며 싸운 적도 없다.

그저 태어나기를 뛰어난 재능으로 태어나, 운 좋게 수도법술을 익혔을 뿐인 녀석.

그런 녀석 따위에게, 질 수는 있다.

그 앞에 쓰러질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거쳐온 세월이.

우리가 노력해 온 모든 게, 그저 헛된 발악이라고.

아무리 해도 도달할 수 없다고.

우리의 인고를 짓밟는 것만은,

"나는, 벌레가, 맞다. 하지만···."

콰득!

'절대 참을 수 없다!'

다 으스러진 손으로, 그의 발목을 잡았다.

"벌레라도, 그 발버둥이, 아무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이··· 더러운 게, 헛소리 하지 말고 내 몸에서 손을 떼라!"

화르륵!

수도자의 손 위로 또 다시 화탄이 떠올랐다.

저것에 맞으면 난 순식간에 재가 되겠지.

하지만.

'시간이 됐다.'

화르르···.

피식···.

수도자의 손에 떠오른 화탄은 시간이 지나며 그대로 꺼져 버렸다.

"···어? 이게, 무슨···."

녀석의 눈, 코, 입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독이 듣는다!'

일시적으로 검강을 써서 녀석의 방어 법술을 돌파한 것은 사실상 부차적인 것.

진짜는, 검에 발라 둔 맹독이었다.

나는 당황하는 녀석에게 히죽 웃어 보이며, 녀석의 발목을 잡고, 강하게 끌어당겼다.

휘청!

녀석은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아, 안··· 해, 해독···."

녀석의 손이 주머니로 향했다.

탁!

그러나, 나는 손을 뻗어 녀석의 주머니를 멀리 쳐 버렸다.

"끄, 끄륵···."

점차 놈의 입에서 피거품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녀석이 두 손을 모아 무언가 결인을 맺으려는 듯했다.

'그렇게 둘 줄 아느냐.'

어디, 그 무시하던 벌레 맛 좀 봐라.

철퍽, 철퍽!

나는 전신의 힘을 짜 내, 녀석의 몸 위로 올라탔다.

그리고, 진언을 외려는 녀석의 입에, 으스러진 손을 집어넣었다.

"커, 커헉! 꺼억!"

놈은 주문을 욀 수 없다.

동시에, 나는 결인을 외려는 녀석의 손을 몸무게로 짓눌렀다.

"자, 법술을 써··· 봐라···!"

결인도, 주문도 욀 수 없게 된 수도자는, 꿈틀거리며 나를 떨쳐내려 했다.

그러나, 내공을 전부 소진했을지라도, 수년간 강인하게 단련된 내 몸은 녀석의 저항을 허락하지 않았다.

수도자는 목숨의 위기를 느낀 것인지, 입속에 들어간 내 손을 씹으려고 하기 시작했다.

녀석이 필사의 의지로 손을 강하게 물어뜯자, 아릿한 고통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나는 녀석의 눈을 보며 씨익 웃어 주었다.

"이미 손을 버릴 각오쯤은 해 뒀다. 계속 해 봐라."

"끄, 끄으읍···!"

얼마간 오공에서 피를 흘리던 수도자는,

그렇게 발버둥 치다가 죽었다.

수도자의 시체는 그가 평생을 벌레 취급하며 쉽게 죽여 왔을 범인들의 시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죽은 모습은 누구에게나 평등했다.

파스스···.

그의 방어 법술이 무너졌다.

그가 펼친 방어 법술 바깥에서 우리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호위대주와 대원들이 빠르게 내게 달려왔다.

수도자가 쳐 놓은 흑색의 결계가 다시 사라졌고, 나는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의식을 잃었다.

***

눈을 뜨자, 내 방이었다.

그리고 대주가 내 옆에서 곰방대를 피우는 모습이 보였다.

"음, 일어났나."

"···예. 그나저나 환자 옆에서 연초를 뻑뻑 피우셔도 됩니까?"

"무슨 소리인가. 연초는 건강에 좋은 약초라네."

'씨발, 저게 무슨 소리지.'

생각해 보던 중, 여기가 잠시 중세 수준이라는 것을 잊었었다.

"그나저나 어찌 됐습니까, 그 수도자는."

"네가 죽여 놓고 뭘 묻나, 서은현 부대주. 깔끔히 죽었다. 네가 몸을 초개처럼 바쳐 가며 수도자를 죽였다는 것 역시 황제 폐하께 잘 보고드렸으니 걱정하지 말아라."

"오늘도 임무 완수로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몸 상태를 점검해 보았다.

오른손은 아직 감각이 없었고, 몸 곳곳의 기혈은 조금 상해 있었지만, 안정되어 있었다.

수도자에게 비수로 찔렸던 곳도 전부 나아 있었다.

"폐하께서 너를 치료하라고 황실 어의를 붙여 주셨다. 성은에 감사하도록."

"황실 어의가 깔끔하게 고쳐 놨군요. 의술 솜씨가 배우고 싶을 지경인데요."

난 어의의 의술 실력에 작게 감탄하며 내공으로 일주천을 했다.

침상에 누워 있어 찌뿌둥하던 몸이 조금 상쾌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네 오른손은···."

잠시 내 오른손을 바라보던 대주가 말을 잠시 흐렸다.

그렇게 얼마간 침묵하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쓸 수는 있겠지만, 예전 같지는 않을 거라고, 어의가 그러더군. 아직 완전히 낫지는 않았을 테니 무리하게 움직이진 말아라."

하기야 수도자가 그렇게 밟아 대고 씹어 댔던 손이었다.

솔직히 멀쩡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상관없습니다. 사실 밟혔을 때부터 어느 정도 각오는 했는지라. 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지덕지지요."

"···그래. 긍정적이라 좋군. 그리고, 폐하께서 네 기개에 감탄하여 상을 내리시기로 결정하셨다. 암중 호위대는 공식적인 치하가 불가능하니, 내게 대신 전해 주라 하더군.

자, 황제 폐하를 대리하여 어좌 암중 호위대 부대주 서은현에게 상을 내리겠다."

나는 그 말을 듣자, 침상에서 일어나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께서 가로되, 암중 호위대 부대주 서은현은 신성한 어좌를 몸을 던져 수호하였으니, 그 막중한 책임감을 잊지 말라는 뜻에서 포상을 내리노라 하셨다.

전설 속 수도자들이 먹는다는 축기단과 같은 재료를 사용한 축허단(築虛團)을 내리노니. 서은현은 망극한 마음으로 받으라."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곧 나는 대주에게서 작은 비단궤를 하나 받을 수 있었다.

비단궤 안에는 붉은빛이 도는 작은 단약 하나가 들어 있었다.

"흠, 듣기로는··· 연기기의 수도자가 축기기로 넘어갈 때 먹는 축기단이라는 단약에서 실(實)만을 빼서 만들어졌다 하더군.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나는 대주의 말을 듣자, 이 약이 어떤 약인지 대강 알 수 있었다.

'찌꺼기 약이군.'

의당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만큼, 나 역시 영약을 몇 번 만들어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영약을 만드는 연단사들이 일반적으로 영약을 만들고 난 후.

그 약효가 다 빠져나간 찌꺼기들을 모아 만드는 것을 찌꺼기 단약이라고 불렀다.

보통은 숙취 해소제로 팔거나, 사이비 차력사들한테 파는 것이 찌꺼기 약이었다.

'그리고 그 찌꺼기 약을 고급스레 부르는 말이, 원본 영약에서 실(實)을 빼서 만든 단약이지. 연단사들의 은어라 모르나 본데···.'

아무리 수도자들이 먹는 영약이라지만, 약효가 다 빠진 찌꺼기 단약이, 대체 무슨 효력이 있을까.

'황제도 은근 쪼잔한 면이 있군.'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듣기로, 그 약효는 범인들이 먹었을 때 약 십 년의 수명을 늘려 주는 효과가 있다 하더군."

"···시, 십 년?"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 되물었다.

고작 찌꺼기로 만든 게 수명을 십 년 늘려 준다고?

그러자 어쩐지 단약의 빛깔이 달라 보이는 듯했다.

'어마어마하군···.'

나는 목궤를 받아들고 품속에 넣었다.

대주의 눈에 부러운 눈빛이 스치는 것을 보아 단약이 탐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단약이 아무리 탐난들 황제의 하사품을 어찌할 순 없는 법이었다.

"조금 더 경맥이 안정되면 그때 복용하겠습니다."

물론 경맥이 안정되면 먹는 게 아닌, 수명이 거의 닳았을 때 먹을 예정이었다.

그래야 약효가 제대로 확인이 될 테니.

'천천히 먹어도 아무 문제 안 될 테니.'

"그래, 항상 황은이 망극함을 잊지 말도록."

말을 마친 대주는 내 방에서 나갔다.

'하여간 황실이 복지는 좋다니까.'

10년이다.

무려 10년!

나는 앞으로 내 인생에서 10년의 시간을 더 벌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황실에 들어온 내 결정을 칭찬하며, 다시 침상에 쓰러져 눈을 붙였다.

어쩐지 이번 생은 잘 풀릴 것 같다는 기대감을 가슴에 안으며.

***

'···젠장.'

십 주야가 지났다.

몸이 다 낫고, 훈련을 위해 검을 쥐었을 때였다.

아프다.

검을 쥔 손의 감각이 전처럼 예리하지 않고, 검을 세게 쥘 때마다 손에서 끊임없이 통증이 울려 퍼졌다.

'제길, 이 정도면 검법을 펼칠 때 심하게 영향이 갈 것 같은데···.'

나는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두르며 단악검법을 펼쳐 보았다.

1 초식부터 24 초식까지 검초를 펼칠 때였다.

까앙!

나는 손에서 나는 통증을 참지 못하고 검을 떨어뜨려 버렸다.

'젠장, 아프다!'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검을 쥘 수 없는 건가?'

나는 눈앞에 떨어진 검을 노려보았다.

나는 검사다.

그런 검사가, 손의 통증 때문에 검을 쥘 수 없다.

그 말은 즉.

'내 무(武)가, 여기까지라는 건가?'

물론, 앞으로도 싸울 수는 있을 것이다.

절정 고수의 시야는 여전하고, 가공할 내력도 여전하며, 나는 암기술도 상당 수준으로 익혔기에 암중 호위대 역할도 계속 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이번 생에, 더 이상··· 검을 익힐 수 없다고?'

이제 검을 잡을 수 없다.

나는, 이제 검사로서는 끝이 난 것이었다.

"···아냐."

나는 떨어진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건, 아냐."

검의 손잡이를 쥐자, 다시금 끔찍한 통증이 손에서 느껴졌다.

아프다.

너무 아프다.

하지만···.

'검을 쥐지 못하는 건, 더욱 아픈 삶이겠지.'

나는 계속 검을 수련할 것이다.

왜냐하면, 검이야말로 내 무(武)의 근간이기에.

그리고, 나는 반드시.

'다음 경지에 올라야 하기 때문에!'

나는 비명을 지르는 손아귀를 무시하고, 그대로 다시 단악검법을 펼쳐 보았다.

단악검법의 1 초식에서 24 초식.

이번에는, 검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절정 고수에 들어가기 위해 매일같이 검기를 유지했을 때도. 항상 정보 처리를 하는 능력을 단련했을 때도. 절정경에 들어 절정 고수의 세계에 익숙해질 때도."

고통은 늘 나와 함께했다.

어차피 아픔으로 점철된 삶이었다.

그런 삶에, 다시금 이 정도의 아픔이 추가된들 어떠리.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반드시 경지를 올릴 것이다!

***

수도자를 처리하고 세 달 후.

김영훈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용인즉슨, 내가 준 정보에 따라 수도일족이 사는 곳을 찾아가 비무를 벌이고,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알려준 수도일족들은 너무 실력과 계급이 낮은 탓인지, 빈민층 실종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고 했다.

―그러니, 나는 내가 쓰러뜨린 수도일족에게서, 더 높은 수도일족이 사는 곳의 정보를 받아 더 높은 경지의 녀석들에게 도전해 보려 한다. 추후에 다시 연락하마.

나는 김영훈이 보낸 편지를 화로에 넣고 태워 버린 후 그의 경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김영훈은, 이번 생에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으려나.'

지난 삶들에서, 결단기 수도자의 손만을 자르던 그는, 내 바로 전 삶에서 결단기 수도자의 팔을 터트려 버리는 데에 성공했다고 했다.

'이번 생에는, 조금 더. 조금 더 올라갈 수 있을까?'

그가 지닌 무재(武才)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나는 그것을 궁금해하며, 김영훈에게 보낼, 다른 수도자들의 위치에 대한 정보들을 편지에 옮겨적었다.

***

다시 10년이 흘렀다.

회귀한 지 30년 차.

이제는 손아귀의 고통도 익숙해졌다.

그리고, 검사를 다루는 능력도 완숙해졌으며, 암기술 역시 점차 몸에 익어 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수도자들이 숨기는 비밀에 거의 다가갔다.'

나는 김영훈이 보내 온 정보를 읽으며 생각했다.

'수도 일족은 대다수가 강력한 신통을 품은 진법(陣法)에 자신들의 처소와 거주지를 숨기고 살아간다. 신통이 약한 극저계 수도자들은 일반인들의 세상에 장원을 짓거나 해서 살지만, 제대로 된 수도가문의 직계, 혹은 인재들은 수도가문의 진법 속에서 안전하게 생을 보낸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알아내 온 수도자들은 전부 연기기 1, 2성쯤 되는 극저계 수도자들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수도가문의 영지라고 수도자만 사는 것은 아니다.'

수도가문의 영지에도, 범인들이 살았다.

수도자들의 수발을 들거나, 잡다한 노동을 할 이들은 필요했으니까.

그리고 최근 김영훈이 보내온 정보에 의하면, 지금껏 황실에 절정 고수를 보내던 것은 수도자 가문 중 하나고, 그들은 자신들의 영지 안에서 재능 있는 범인들을 모아 절정 고수로 육성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껏 몇 번의 삶을 살면서도, 그런 절정 고수들에 대해 들어본 게 없는 거였군. 전부 수도자들의 영지 안에서 육성된 무림인들이니까.'

그제야 지금껏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들을 납득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장부에서 삭제된 빈민층들 역시 수도자들의 영지 내로 갔을 가능성이 높겠군. 그리고 아마··· 암살자로 키워지거나 수도자들의 수발을 드는 생을 살아갔을 확률이 높아.'

나는 사건의 전모를 이해하며 김영훈이 보낸 편지를 불태웠다.

'그리고 수도자를 암살자로 보낸 전적으로 보아, 아마 수도 가문 사이의 암투가 지금까지 황제의 암살 전적이었던 거겠지.'

이제는 수도가문에 대한 의문보다는, 내 무공과 김영훈의 행적에 조금 더 집중하는 게 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떄였다.

턱!

"···!"

내 방 창문을 열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무슨··· 헛! 김 형?"

밤 중의 손님은 다름아닌 김영훈이었다.

"마침 김 형이 저번에 보낸 편지를 다 읽고 태운 참이었습니다. 수도 가문의 영지라는 게 있다는 걸 안 덕에···."

"음, 그 내용의 편지는 저번 달에 보낸 편지인데. 이 세계의 운송 수단이 느려서 늦게 도착했나 보군. 그나저나 지난 한 달간 기함할 만한 것을 발견했기에 네게 찾아왔다."

"무슨 말입니까?"

굳이 황궁에 침입할 정도의 중요한 정보란 말인가?

내가 의아해할 때였다.

덜걱.

그는 창문을 닫은 후, 도를 뽑아 허공을 향해 몇 번의 칼질을 하였다.

슉, 슉!

보이지 않는 '뭔가'를 자르는 듯한 모양새였다.

"뭔가 수상해 보이는 법술들이 있길래 잠시 끊어 놨다. 일단 할 말을 하자면, 이 연국에는 두 개의 수도가문이 있다."

"예, 보내 주신 편지에서 봤습니다. 하나는 현 황실인 막리세가이고. 하나는···."

"이 나라의 전(前) 황조, 진(蓁)가다."

김영훈의 설명이 이어졌다.

"막리세가와 진씨세가는 수 세기 동안 이 나라를 독식하려 암중에서 암투를 벌여왔다고 한다. 그리고, 한 세기 전 오랜 시간 동안 연국을 다스려 왔던 진씨세가를 몰아내고 공식적으로 국가를 손에 넣은 것이 막리세가였다.

막리세가가 연국을 손에 넣고 난 후, 진씨세가의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고 하더군. 그리고 진씨세가는 근래에 들어 범인들을 데려다가 절정 고수로 키워 황제를 암살하려고 했다."

"예, 거기까진 김 형이 보내 주신 서찰에서 보아 알고 있습니다."

"그래, 중요한 건 이다음이다. 진씨세가가, 범인들을 데려다가 절정 고수로 키울 수 있던 이유가 무어라 보느냐? 어떻게 그렇게 양산하듯이 절정 고수를 찍어낼 수 있었을까?"

"음··· 뭔가 그들의 원기를 상하게 하는 방법으로 몸을 극한으로 밀어붙여 훈련시킨 게 아닙니까?"

내가 지금껏 보아 온 암살자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았으나 죽인 후 그 몸을 검사해보면 하나같이 선천진기가 대량으로 소모되어 있었다.

한 마디로, 암살자를 보내오는 수도가문에서 범인들을 데려다가 선천진기를 강제로 촉발시켜 수명을 줄이면서까지 암살자의 재능을 극한으로 개화시키는 대법을 쓴다는 의미였다.

"그래, 그것도 있지. 하지만, 진씨세가는 암살자들의 육신에, 그들 가족들의 원혼(怨魂)을 집어넣어 그들이 가진 모든 생기와 의지력을 끌어모아, 재능을 극한으로 개화하게 했다."

"가족의 원혼? 그들이 암살자들의 가족을 죽여 그들의 몸에 집어넣었단 말입니까?"

나는 눈을 찌푸렸다.

하지만 김영훈을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야. 진씨세가는 암살자들의 가족을 죽이지 않았다. 그들의 가족을 죽인 건, 현 황실. 황실의 뒤에 있는 수도가문, 막리세가이다."

"예···?"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근 2, 30년간. 막리세가는 고아, 거지, 빈농들을 잡아들였다. 더러는 수도가문의 영지로 데려가 노역을 시키려는 의도 또한 있었으나. 그 중 9할 이상은 다른 곳에 쓰였지."

"다른··· 곳?"

김영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잠시 머뭇거리던 김영훈은, 입술을 짓씹으며 말했다.

"약(藥)."

그의 눈에 가공할 노기가 깃들었다.

"막리세가는, 범인들의 정혈(精血)과 선천진기(先天眞氣)를 모아, 수도자들의 수명(壽命)을 늘리는 금단의 영약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 영약의 재료 수급을 위해,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고, 사회에 영향을 미치지도 않는 빈민층을 잡아다가 갈아 넣어 약을 만들고 있다!"

"···!"

나는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뭐, 무, 무슨···."

범인들의 정혈과 생명력으로, 약을 만든다고?

"그건··· 그건, 식인(食人)이 아닙니까?"

"그래, 맞다. 놈들은 사람을 잡아먹고 있어!"

나는 아연해져 헛웃음을 터트렸다.

중세 수준의 문명이니만큼, 간혹 인간 젓갈을 담가 먹는 사파나 마두들도 가끔 있었다.

물론 그런 극악한 녀석들은 대부분 금세 토벌당하고는 했고, 정사파를 막론하고 금수 취급 받고는 했다.

그런데, 수도자들은 뭔가.

'그들은, 자칭 하늘에 오르겠다며 도를 닦는다던 놈들이 아닌가?'

사파나 마두도 아니고, 수도자란 놈들이, 그런 역겨운 짓을 한다고?

욱, 우욱!

나는 갑작스레 치미는 토악질을 참지 못하고, 방 안에 있는 요강을 열어 구토를 쏟아 냈다.

"막리세가의 뒤를 캐던 내게, 진씨세가의 수도자들이 접촉해 왔다. 내게 기회를 줄 테니, 막리세가를 치는 일에 동참하지 않겠느냐고 하더군."

그는 이를 갈며 말을 이었다.

"그들의 말에 수락하기로 했다. 사람을 먹어치우는 더러운 놈들은, 더 이상 살아있어서는 안 된다!! 그런 놈들이 이 나라를 통치해서는 안 돼!

무림문파를 돌며 이 사실을 친한 몇몇에게 얘기하고, 나와 뜻을 같이할 고수들을 모았다.

은현아, 너도 함께하자. 진씨세가가 다시 연국의 황조로 올라선다면 이 더러운 막리가 수도자들보다는 조금이라도 낫겠지!"

나는 얼마간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김영훈의 눈은 다시 없을 정도로 짙은 안광을 흩뿌리고 있었다.

그가 저만큼 분노한 것을 본 적은 없었다.

"···좋습니다. 저도 동참하겠습니다."

나는 내 방에서 중요한 것들을 챙겼다.

진실을 들은 이상, 이 끔찍한 황조에게 충성할 마음은 단 1푼도 생기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그 날 김영훈과 함께 황실을 빠져나갔다.

연단(1)

김영훈을 따라 황실을 나가, 서경성 외곽 작은 장원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김영훈을 따라왔다는 무림인들이 모여있었다.

"당신들은···."

나는 김영훈이 끌어모았다는 무인들의 면면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사성삼마의 원로원···? 거기에 각 대문파 원로원 소속도 보이는군."

무림맹주였던 그 인맥을 통해, 서경성 사성삼마 일곱 문파의 원로원들과, 연국의 대문파들의 원로원의 원로들 몇몇을 끌어모은 듯 했다.

모두 하나같이 절정 고수로, 검사(劍絲)를 못 쓰는 이가 없었으며, 삼화취정의 고수만 해도 열 명이 넘는 전력이었다.

'수도자만 없었다면, 능히 황실도 뒤집어엎을 전력이다···!'

내가 그들의 전력에 감탄하는 새, 그 중 몇몇이 내게 투기를 쏘아 댔다.

붉은 의념이 내 목과 미간, 급소를 노려 대며 나를 자극했다.

'뭐야, 시험이라도 하는 건가?'

피잇!

나 역시 내게 의념을 날리는 이들에게 의념으로 그들의 급소를 가리켜 주었다.

짧은 순간 나는 몇몇의 대문파 원로들과 간합을 겨뤘다.

"큼, 초대 맹주, 천하제일도께서 데려온 이는 누구요? 서경성에서 처음 보는 고수이오만."

"아, 이 자는 서은현이라는 내 동생으로. 이십 년 전 창호성 일대에서 이름을 날린 절정 고수일세. 최근에는 황실의 어둠 속에서 활동하다가 내 제안을 듣고 따라 나왔지."

그 말에, 몇몇 원로들의 눈에 불쾌감이 깃들었다.

"하필 관의 인물을 데려왔단 말이오? 그것도 하필 황실 사람을?"

"아직도 저자가 황제에게 충성하고 있다면 어쩐단 말이외까?"

"나는 관의 인물은 믿을 수 없소!"

아무래도 무림문파들은 기본적으로 관과 사이가 안 좋다 보니 자연스레 편견이 있는 모양이었다.

"잠깐, 다들 진정하시오. 그는 분명 황제의 밑에서 일하던 이였으나, 내 말을 듣고 완전히 황제를 배신했소이다. 그렇지 않나, 서 아우?"

"그렇습니다. 원하신다면 황제의 욕이라도 한번 해 보지요."

나는 헛기침을 한 후, 그동안 황제에게 쌓아뒀던 울분들을 담아 터트렸다.

"황제! 막리정, 이 자라같은 놈! 부하들은 개같이 부려먹고 자기는 편히 잠만 처자는 후안무치한 놈아, 이제 네 일족의 만행을 천하에 까발려 주겠다!"

황제의 호위를 하며, 황제는 자기도 수도자면서 암살자가 오면 싸울 생각도 하지 않고 침소에서 방음 법술을 켠 채 실컷 자고만 있는 그 모습이 짜증 났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거기에 나는 처음부터 연국의 백성으로 커서 황제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황제라는 존재에 대해 일정 부분의 반감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내가 얼마간 황제에 대해 욕을 퍼붓자, 그제야 자리에 모인 절정 고수들의 눈에 경계심이 조금 옅어졌다.

"음, 하긴. 저 정도 욕설이라면 첩자로 들어왔다고 해도 사형감이로군."

"황실의 첩자였다면 안전한 욕만 했겠지."

나는 그렇게 절정 고수들의 인정을 받았다.

어느 정도 나에 대한 인정이 끝나자, 김영훈은 좌중에 모인 무림인들에게 말했다.

"들으시오. 전에 말했다시피, 현 황실. 그리고 황실의 뒤에 있는 수도가문, 막리세가는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져버리고 수많은 민초들의 정혈을, 문자 그대로 빨아먹었소. 식인을 하는 마두들과 다를 바 없는 이들이란 말이오.

모으고자 하는 동료도 다 모았으니, 나는 오늘부터 막리세가의 반대파인 진씨세가라는 수도가문과 손을 잡고, 막리세가의 거점들을 하나하나 무너뜨릴 것이오."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진씨세가가 우리의 뒤를 받쳐 줄 것이며, 우리는 그들의 인도하에 막리세가의 숨겨진 영지들을 찾아가, 그들이 민초들을 갈아 단약을 만드는 연단로를 부술 생각이오.

이곳에 모인 대협들께서, 이 영 모의 뜻에 동참해 주었으면 하는 바이오."

모두 큰 대답은 없었다.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럼, 우선 하루라도 빨리 그 악랄한 마도(魔道) 수도자들의 거점으로 향해 그들의 단로를 하나라도 빨리 부숩시다!"

우리는 김영훈을 따라 서경성을 나섰다.

서경성에서 동북쪽에 떨어진 작은 산골.

임맥곡이라고 불리는 협곡.

그곳에, 한 무리의 적포 수도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저자들은···.'

몇 년 전 황제 암살에 참여했던 수도자와 같은 복색이었다.

저들이 진씨세가 수도자들이리라.

"흠, 하나같이 쓸 만은 해 보이는군."

그들 중 나이가 많아 보이는 노인이 우리를 둘러보며 말했다.

"약속은 지켰소. 나와 동조하는 이들을 데려왔으니, 함께 저 간악한 수도자들을 처리할 수 있게 해 주시오."

"그래, 그래. 맞는 말이네. 간악한 막리가 놈들은 전부 연국에서 없어져야 하지. 그럼, 막리세가의 영지로 향하는 문을 열겠네."

우웅―

적포 노인이 수결을 맺자, 협곡의 모양이 이지러지기 시작했다.

"우리를 잘 따라오게. 지금부터, 막리세가의 진법을 돌파할 예정이니."

우리는 적포 수도자들을 따라, 이지러지는 길을 걸어 들어갔다.

얼마 후, 협곡이 일그러지던 풍경이 사라지고, 우리는 어느새 왠 마을에 들어와 있었다.

초가집들이 늘어서 있는 아주 자그맣고 향토적인 마을이었다.

'이 냄새는.'

그러나 나를 포함한 수많은 절정 고수들이,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곳곳에서 피 냄새와,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

"침입자다! 진가 놈들이 쳐들어왔다!"

대앵, 대앵!

마을의 한 망루 위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초가집 곳곳에서 청포를 입은 수도자들이 나와 수결을 맺기 시작했다.

우웅!

마을 전체에 푸른 장막이 씌워지며, 우리가 진입할 수 없게 만들었다.

"하하, 무림인 놈들 좀 데려왔나 보다만, 너희 진씨세가 놈들은 감히 이곳으로 들어올 수 없다!"

척 봐도 튼튼해 보이는 결계.

푸른 광막의 두께는 내가 저번에 강기로 깨부쉈던 수도자의 종잇장 같은 법술보다 몇백 배는 두꺼웠다.

그때였다.

저벅, 저벅···.

김영훈이, 앞으로 나섰다.

"장로님, 저 범인 놈은 뭡니까? 정말 믿고 맡겨도 되는 겁니까?"

뒤에서 적포를 입은 진씨세가의 수도자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적포 노인이 잠시 침음하다가 말했다.

"범인 놈이지만, 저놈은 별개다. 믿기지 않겠으나, 저놈은 범인의 몸으로 이 나와 겨루며 한 치도 밀리지 않았다. 거기에, 놈이 쓰는 기술의 위력은, 간혹 내 방어력을 뛰어넘기도 했으니···."

우웅―

김영훈이 기를 끌어올린다.

나와 절정 고수들, 심지어 삼화취정에 오른 노괴들마저, 김영훈의 일 초(招)를 눈에 담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우우웅―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허공에 기운이 맺히기 시작했다.

기운은 점차 뭉치더니 강기의 형태로 뭉쳤다.

강기 속에서 느껴지는 가공할 힘에, 우리는 물론이고 진씨세가의 수도자들마저 움찔거리는 이가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강기의 변화는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저것은···!'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 김영훈의 초수를 바라보았다.

강기가, 뭉친다.

쿠구구구구!

'저건···!'

지난 삶의 마지막.

김영훈이 미친 듯이 달리며 추구했던 경지.

꾸구구구구―

'오기조원, 그 너머의 경지!!!'

그가 최후의 최후까지 바라왔던 경지가, 지금 또다시 김영훈의 손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강기가 뭉치며, 작은 환(丸)의 형태로 변화한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저 환(丸)에 직격당하면, 무사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으리라는 것을.

지난 삶, 결단기 수도자의 팔을 터뜨렸던 일격!

축기기 수도자와 정면으로 힘 싸움을 벌일 수 있다는 초수!

저 강기의 환(丸)이, 김영훈의 손짓에, 수도자들이 펼친 결계로 떨어졌다.

쿠과과과광!!!

빛이 번뜩이며 광풍이 몰아친다.

수도자들을 저마다 광풍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무언가 법술을 펼쳤고, 우리 절정 고수들은 그저 다리 힘으로 버티거나 바람의 결을 베어 내며, 저 광경을 눈에 담았다.

보인다.

수백, 아니.

수천, 수만에 달하는 도강(刀罡)들이 저 환에서 폭발하듯 튀어나오며 결계를 난도질하는 것이.

절정 고수의 세계에서, 수천수만의 의념(意念)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궤도로 이지러지며 춤추는 것이.

"끄음···."

진씨세가의 장로라는 적포 노인이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어쩐지 저 환에 안 좋은 기억이 있는 듯이.

광풍이 잦아들었고, 빛이 꺼졌다.

눈앞에 드러난 것은, 결계의 한가운데에 대문짝만하게 뚫린 바람구멍이었다.

"모두, 진입하라!"

"예, 장로님!"

진씨세가 수도자들이 각자 비행법기를 타고 김영훈이 뚫어놓은 바람구멍으로 들어갔다.

우리 역시 각자 병장기를 들고 결계의 구멍을 향해 들어섰다.

"마, 막아라! 진가 놈들을 막아!"

"자, 잠깐! 저 무림인 놈팽이들부터 막아라! 무림인들···."

슈칵!

삼화취정에 오른 절정 고수의 검강이, 앞에서 떠들던 수도자의 방어 법술을 그대로 뚫고 그의 목을 갈라 버렸다.

"버, 범인이 수도자의 법술을!"

"무림인 중에서도 최상위층이다! 연기기 일, 이성 수도자들은 후방으로 물러나고, 강시를 풀어라!"

동시에, 마을의 이곳저곳에서 시커먼 강시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파앙!

강시들이 절정 고수들에게 달려들었다.

녀석들의 속도는 우리보다 빨랐고, 힘은 한참을 앞선다.

그러나.

'보인다.'

강시들이 내지르는 최적의 경로가 훤히 드러났다.

'기이하군. 예전에는 생각지 못했지만··· 저 선은 의(意)를 뜻한다. 그렇다면, 이미 죽어 고혼이 된 강시들에게도, 의(意)가 있다는 말인가?'

나는 나를 향해 달려드는 강시의 손을 피한 후, 심산의 초식으로 파고들어 대각선으로 베며 생각했다.

'단순히 조종하는 이들의 의념인가? 아니,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강시들에게 의념이 있다면, 어째서 강시들은 검기를 못 쓰는 건가.'

나는 강시들을 베어 넘기며 생각했다.

강시 너머로, 한 수도자가 법술을 준비하는 것이 보였다.

피슛!

나는 빠르게 손을 놀려, 수결을 맺는 수도자를 향해 암기를 날려 주었다.

까강!

암기는 수도자의 방어 법술을 맞고 튕겨 나갔으나, 수도자는 전투 경험이 없는 모양인지 암기소 리에 준비하던 법술을 그만 취소해 버렸다.

'식(識)의 크기로 보아··· 연기기 일 성 정도군.'

나는 상대하던 강시를 베어 넘겨 버리고, 수도자의 품으로 파고들어 가 검사(劍絲)를 내질렀다.

까앙!

검사에 적중당하자, 수도자의 방어 법술은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금이 가는 것이 보였다.

'지난번 싸웠던 연기기 이성 수준의 수도자가 쓰는 법술보다, 형편없이 약하다.'

물론 그 수도자는 부적으로 인해 실력이 뻥튀기된 점도 없잖아 있었으나, 방어 법술만은 그의 실력으로 펼친 것이었다.

까강, 깡!

검사로 얼마나 내리쳤을까,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그 수도자의 법술을 그대로 꺠져버렸다.

"흐, 흐이익··· 사, 살려. 살려주십시오."

나는 내게 비는 수도자의 멱살을 잡은 후, 녀석이 나온 집으로 끌고 들어갔다.

토속적인 초가집이었지만, 모든 집들에서 각각 끔찍한 피 냄새가 풍겨오고 있었다.

벌컥!

집의 문을 열자, 눈에 보인 것은 차마 말로 표현하기 힘든 참혹한 풍경이었다.

수많은 인간들이 죽어 있었고.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정혈이, 방 한가운데에 있는 작은 진법에 흘러들고 있었다.

"···이건 뭐냐."

"제발 살려 주십시오. 쇤네는 그저 가문에서 시키는 일만 했을 뿐입니다. 하고 싶어서 하는 일도 아니었고, 저는 사실···."

"뭐냐고 물었다. 말하지 않으면 죽이겠다."

"히익, 말하겠습니다.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이건 일차 정제입니다."

나는 미간을 꿈틀거렸다.

"일차, 정제?"

"예. 범인들의 정혈과 선천진기를 일차적으로 뽑아낸 후, 진법에 모아서 일차적으로 정제를 해 원혈(原血)로 만듭니다. 그 원혈을 이제 가문의 윗사람께 전달하면 그분이 더 높은 영지로 가져가, 원혈들을 한데 모아 섞은 후 다시 이차 정제를 합니다.

그런 식으로 삼차, 사차, 오차 정제까지 한 후, 범인들의 피와 선천진기 수천 개 분을 합친 선혈(鮮血)로 정제한 후, 그것으로 연단(燃丹)을 하면 결단기 태상 장로님들이 잡수실 복명단(復命團)이 완성됩니다.

아이고 대협, 저는 정말 잘못이 없습니다. 워, 원하신다면 제가 정제한 저 원혈들을 전부 대협께 드리겠습니다. 원혈들은 나름 강력한 기운의 덩어리인지라 대협이 잡수시면 내공 증진은 물론이고···."

"고맙다."

나는 녀석을 쳐다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너희를 망설임 없이 죽일 수 있겠구나."

"예, 예···?"

푸콱!

나는 검으로 목을 베지 않고, 주먹에 내공을 불어넣어 수도자 놈의 머리를 터트려 버렸다.

약간의 망설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아무리 마도 수도자들이라도, 그저 이곳에서 평안하게 수련하는 이들도 있지 않을까.

마을의 생김새와 같이, 순박한 수도자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망설임.

'이 마을에, 선한 놈은 없다. 아니,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모든 망설임을 떨쳐 버리고, 강시들을 부리는 청포 수도자들을 향해 검을 뽑아 들었다.

"너희들 전부, 살아있을 이유가 없는 놈들이다."

단악검법.

기산심천!

전신 경맥을 크게 열어젖히며, 한껏 강화된 검사를 뻗어 내게 달려드는 강시들을 일거에 베어 넘기며, 나는 청포 수도자들에게 달려들었다.

"전부 죽어라!"

***

전투는 빠르게 끝이 났다.

마을 중앙에 있던, 막리세가의 축기기 수도자는 진씨세가의 장로와, 김영훈의 합공을 받아 순식간에 죽어 버렸고.

축기기 수도자를 족쳐 버린 김영훈이 돌아다니며 강시들과 다른 수도자들을 강기 다발로 썰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흐하하, 좋다, 좋구나! 역시 막리세가 수도자답게 주머니가 두둑하군!"

"이번 토벌에 오기를 잘 했어!"

진씨세가 수도자들은 하나같이 막리세가 수도자들의 시체를 뒤지며, 그들의 주머니를 털고 있었다.

심지어 진씨세가의 장로마저도 막리세가 축기기 수도자의 시신을 뒤지고 있었다.

"···수도자 놈들은 조금 너무하는군."

"어떻게 사람을 죽여 놓고 주머니 뒤질 생각이나 한다는 말인가."

"크흠, 흠."

그에 반해 나와 다른 절정 고수들은 조금 불편한 눈치였다.

나 역시 사파무림인들을 죽인 후 그들의 무기나 재산을 갈취한 경험은 있었으나, 저런 식으로 시체를 적극적으로 뒤지는 짓은 한 적이 없었다.

"험험, 승자가 전리품을 챙기는 건 당연한 걸세. 자네들은 범인이라 수명이 짧아 잘 모르겠지만, 전리품을 챙긴다는 것은 패자의 명예를 지켜 주는 일이기도 하다네."

한 진씨세가 수도자가, 절정 고수들이 쑥덕이는 소리를 들었는지 조금 얼굴이 붉어진 채로 궤변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들을수록 우리의 표정은 더욱 굳어질 뿐이었다.

"큼, 됐네. 어차피 수도자들의 생각을 범인들이 이해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어. 그리고, 자네들은 챙길 게 없으면 슬슬 마을을 뜰 채비나 하시게나."

그때, 김영훈이 우리에게 걸어오며 말했다.

"먼저 기다리고 계시구려. 우리는 할 일이 있소."

"흠? 뭔가. 아, 역시 자네들도 전리품을···."

김영훈은 수도자의 말을 무시하고, 우리를 향해 말했다.

"수도자들의 집에는, 각기 희생당한 범인들의 사체가 있소. 그들의 시체가 계속 저렇게 방치되지 않게 최소한 묻어 주기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대협들의 생각은 어떠하오?"

"맞는 말이오."

"그래, 그들을 잊었군."

우리는 각자 막리세가 수도자들이 살던 집으로 들어가, 범인들의 사체들을 끌고 나와, 하나하나씩 땅에 묻어 주었다.

"쯧, 가만히 놔두고 오게나. 어차피 죽은 이들일세. 빨리 떠나는 게 낫지 않나?"

전리품을 다 챙긴 진씨세가의 장로가 짜증 난다는 듯, 땅을 파고 있는 김영훈에게 말했다.

그러나 김영훈은 물론이고, 우리 중 누구도 그쪽으로 눈길을 주지 않은 채 묵묵히 땅을 파고 시신들을 묻었다.

몇 시진이 지났을까.

우리는 기어코 수많은 시신들을 전부 묻어 준 후, 김영훈의 주도로 짧게 제문(祭文)을 읊어 원귀가 되지 않게 빌어 준 후 마을을 떠났다.

연단(2)

"김 형."

"왜 그러냐."

"왜 수도자란 놈들은 저리 무정(無情)한 겁니까."

"···그걸 내가 알겠나."

나는 수도자들의 행실을 생각하며 눈쌀을 찌푸렸다.

우리의 말 따위는 들은 척도 안 하던, 회귀 초반에 만나는 괴물들부터 시작해서.

막리세가의 잔혹무도한 단(團) 제조법.

그리고 죽은 이의 시체를 뒤지며, 시신을 묻어 주려는 우리를 오히려 나무라는 진씨세가 수도자들.

'백 번 양보해서, 시체를 뒤지는 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죽은 이를 묻어 준다는 것을 왜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걸까.

어째서 사고방식 자체가 다른 걸까.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오기조원의 세상을 보던 이들이기에. 우리와는 사고방식 자체가 다를 수도 있지. 거기에 평생을 범인들은 사람 취급도 안 하던 이들이니."

나는 답답함에 한숨을 쉬었다.

진씨세가 수도자들은 우리에게 다음 집결 장소를 알려 준 후, 마을에서 나와 막리세가 영지의 진법을 폐쇄한 후 비행법기를 타고 전부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다.

우리는 현재 그들을 따라 달려가는 중이었다.

"···시야의 차이인가."

아니면 태생적인 수도자들의 오만함인 것일까.

그도 아니면 수도자는 누구든 저렇게 되는 걸까.

나는 과연 내가 수도자가 되는 것이 맞을지, 잠시 고민을 해 보았다.

그렇게 우리는 진씨세가 수도자들의 인도를 따라, 막리세가의 또 다른 거점을 파괴하러 계속 이동하였다.

***

황실을 나온 지 5년이 흘렀다.

"흐하. 은현아, 봐라. 네 얼굴이다."

"···."

나는 저잣거리에서 떠돌아다니는 수배서에 내 얼굴이 적힌 걸 볼 수 있었다.

나뿐이 아니었다.

김영훈은 물론이고, 그를 따라나선 무수한 정사지간의 고수들이 수배서에 올랐다.

죄목은 역모죄였다.

"역모는 무슨, 그래 봤자 수도가문의 하부 세력 주제에. 진씨세가의 영지 내에 머무르는 우리를 어떻게 잡겠다는 건지. 거기에, 네가 만든 이 무공 덕에 운신에 거의 제약도 없고 말이다."

"역용술이 도움이 되니 다행입니다."

나는 5년에 걸쳐 내가 가진 의술 지식과 변용술 지식을 사용하여, 얼굴 근육을 조작해 용모를 바꾸는 역용술을 만들어 냈다.

덕분에 수배서가 내려져 있더라도 아무 문제 없이 거리를 나다닐 수 있었다.

"그나저나 다음 거점은 어디랍니까?"

"연산성 서쪽에 있는 구릉인데, 그곳에 막리세가의 연단로가 하나 있다고 하더구나. 이번에 없앨 연단로는 특히나 거대하다고 하니, 막리세가의 마도 수도자들이 훨씬 많겠지."

"그렇겠지요."

"그리고 내가 듣기로, 그곳에는 막리세가에서 기른 절정 고수들도 상당하다고 하더군. 단순 강시가 아닌 절정 고수들이기 때문에 우리도 조금 긴장해야 할 거다."

절정 고수라.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회귀햇수 35년차.

'회귀 후 약 10년만에 절정 중기에 올라 검사를 손에 넣고. 25년째.'

내 경지는 변함이 없었다.

'내 재능은, 삼화취정을 아직도 보지 못하는가.'

삼화취정.

해당 경지에 대한 단서는 김영훈은 물론이고, 그를 따르는 다른 삼화취정의 고수들 역시 꾸준히 알려 줘 왔다.

'세 번째 색.'

적의(敵意)를 뜻하는 붉은 의념.

자의(自意)를 뜻하는 푸른 의념.

그 밖에, 세 번째 의념을 찾아내어 읽어야 도달하는 경지인 것이다.

그러나.

'무공을 겨룸에 있어, 나와 너. 이 둘 외에 뭐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분명, 나와 너 이상의 것이 존재한다.

그것이 존재함을, 삼화취정이라는 경지 자체가 증명하고 있으니까.

욱신.

나는 욱신거리는 손의 비명을 무시하며, 검을 쥐고 거리를 거닐며 주변의 의념을 느꼈다.

다른 이들의 의념이 보인다.

내 의념이 보인다.

그러나 그 너머의 것은 아무리 눈을 치켜떠도 보이지 않았다.

'깨달음은 아직도 찾아오지 않는군.'

그렇다고 김영훈에게 삼화취정에 대해 물어보아도, 나는 그의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애당초 김영훈은 절정경에 오를 당시, 절정 초기, 중기를 밟지 않고 바로 삼화취정에 도달했으니.

그런 그에게 절정 중기에서 삼화취정으로 넘어가는 것을 묻는 것도 어불성설이었다.

물론 다른 삼화취정의 고수들에게도 어찌하면 삼화취정으로 넘어갈 수 있는지를 물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져 보시게.

―너도 없고 나도 없음을 이해하면 된다네.

―순수한 무(武)에 대해서 탐구해 보면 된다네.

등의 형이상학적인 대답뿐이었다.

'누구는 무아지경에 안 빠지고 싶어서 이 자리에 머무르고 있나.'

찢어질 듯한 손의 통증을 무시하며 검을 휘두르기를 수 년.

아무리 검신합일을 유지하고, 수 번이나 생사를 건너뛰는 싸움을 해도.

나에게, 팍 하고 경지를 건너뛰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절정경에 이를 때만큼 절망적이지는 않았을지라도, 이 위로 올라가는 데엔, 또다시 엄청난 재능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었다.

'절정 고수들이 많이 포진하고 있다라···.'

연산성 서쪽에 위치한 막리세가의 거점.

'절정 고수들이 많다면, 그들과 싸우며 조금이라도 무언가를 얻을 수 있겠지.'

나는 어쩐지, 이번에 진씨세가가 찾아낸 그 거점이 함정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씨세가의 수도자 중 하나가, 어떤 경위로 거점을 알아냈는지, 거점의 무력 수준이 어떤지에 대해 듣고 내렸던 판단이었다.

'막리세가 측에서도, 진씨세가와 김영훈을 잡고 싶어 한다.'

거기에, 황실의 배신자인 나 역시.

그렇기에 어쩐지 이번에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우리를 맞이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걱정이 안 되는군.'

나는 옆에서 걷는 김영훈을 흘깃 보았다.

그는 최근에 한 권의 책을 쓰고 있었다.

책의 제목은, 조수월무결(眺修越武訣)이었다.

'조수월무경 6권의 심득을 압축시키고, 다시 심화시켜 완전히 하나로 통합한 심득서라고 했었나.'

월수궁무록, 조수월무록, 조수월무경과 마찬가지로.

내가 들여다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 심득서였다.

하지만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했다.

김영훈은, 지난 삶의 경지를 뛰어넘었다.

그리고, 그런 그라면 이제 결단기 수도자 앞에서도 유의미한 타격을 입히고 빠르게 도망칠 수 있다!

'함정도 소용은 없다.'

우리는 이번에도 유유히 그들의 거점을 파괴하고 나갈 것이다.

***

연산성.

'내가 회귀 이전 최초의 삶에서 처음 떨어졌던 곳이군.'

굉장히 오랜만에 와 보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비누를 만들고, 약초를 캐고, 술을 빚고, 도적 떼한테 살려 달라고 빌고···.'

그때의 비참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자, 서쪽으로 가 보지."

"···예."

주 씨네 딸은 태어났을까.

금 대감네 집은 아직도 하인들이 고개를 뻣뻣이 들고 다니나.

성 씨네 감나무는 감이 여전히 잘 열릴까.

나는 얼마간 연산성을 바라본 후, 김영훈을 따라 서쪽으로 달렸다.

지금은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오직 나만의 추억.

이 추억을, 오직 나만 아는 것으로 바꿔 버린 것은 내 회귀 능력.

분명 기적과도 같은, 너무나도 고마운 능력이었지만,

그렇기에 이 능력은 없어져야만 했다.

앞으로도 나만 알고 있을 이 추억들은 쌓여만 갈 테고, 그럴수록 내 정신은 버티기 힘들어질 테니까.

그러므로 나는 반드시 이전 세계로 가, 내 능력을 없앨 것이다.

그리고.

'그때까지, 나는 인간일 것이다.'

인간으로서, 인간의 생을 살아갈 것이다.

절대로.

막리세가의 수도자들처럼 마도에 물들어, 인간의 도리에 어긋나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더러운 마도 놈들이, 내 앞에서 더 날뛰게 만들 수도 없지.'

인간의 도리를 어긴 이들 역시, 손이 닿는 한 벌해야 할 것이다.

타닷!

김영훈과 함께 뛰어 도착한 곳에는 이미 적포를 입은 진씨세가의 수도자들과,

다른 절정 고수들이 모여 있었다.

"이번 막리세가의 거점은, 함정일 확률이 높다는 의견이 진씨세가의 장로회의에서 나왔다. 그리하여, 진씨세가 장로회의 3분지 1이 친히 친전을 나섰다.

그러므로 너희 무림인들 역시 만전을 다해 싸워야 할 것이다."

적포의 수도자들 중에는, 상당한 의식 영역을 가지고 있는 축기기 수도자들이 상당 숫자 끼여 있었다.

"알겠소. 걱정하지 마시오. 나는 늘 최선을 다해 싸우고 있으니."

"흠, 좋다. 그럼 진법을 열겠다."

우웅―

진씨세가의 장로 중 한 명이 수결을 맺자, 허공이 이지러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진씨세가의 장로들을 따라 진법으로 들어갔고, 곧이어 이전과 마찬가지로 마을을 볼 수 있었다.

이번 마을은 여태까지의 막리세가의 영지보다도 두 배 정도는 거대했으며, 초가집뿐이 아닌, 기와가 쌓인 저택들도 상당수 보였다.

그리고.

"···역시 함정이었나."

막리세가의 수도자들이, 마을 앞에서 진을 치고 수결을 맺고 있었다.

"결(結)!"

막리세가의 수도자들이 일시에 수결을 맺으며 주언을 외친다.

동시에, 지금까지와는 비할 수 없는 거대한 결계가 막리세가의 영지를 둘러쌌다.

"수(水)!"

동시에, 수십 명의 수도자가 다시 결인을 맺으며 또 다른 법술을 사용했다.

촤아아!

동시에 수도자들의 뒤쪽에서 거대한 물살이 흘러나오며, 결계 바깥에 있는 우리에게 덮쳐 왔다.

물에서는 시체 썩는 냄새가 물씬 풍겨 왔으며, 한 방울이라도 몸에 닿으면 큰일 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때였다.

"장로회는 앞으로!"

진씨세가의 축기기 수도자들이 앞으로 나서며 결인을 맺었다.

"염(炎)!"

화르르르!

불꽃의 장벽이 생겨났다.

거대한 불의 벽이, 수류를 막아서고, 그대로 증발시키기 시작했다.

"밀고 나간다!"

치이이이―

진씨세가의 수도자들이 한 발씩 앞으로 나서자, 거대한 불의 벽 역시 그에 맞춰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범인! 우리가 길을 낼 테니 너는 결계를 뚫어라!"

"알겠소!"

파앙!

김영훈이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그러던 그는, 어느 순간 허공으로 뛰어올라, 다시 허공을 밟고 결계로 달려갔다.

그리고.

우웅!

김영훈이 손을 뻗자, 그의 손에 기운이 뭉치는 듯하더니, 그의 장심(掌深)에서 강기의 환(丸)이 튀어나왔다.

'저게, 김영훈이 6권의 조수월무경을 압축하고 통합하며 얻은 경지.'

강기가 허공에서 복잡하게 뭉치지 않고, 체내에서 단출하게 방출되며 순식간에 환(丸)을 이룬다.

모르긴 몰라도, 그는 지난 삶의 김영훈이 얻은 경지에 도달하고, 다시 그 경지를 뛰어넘어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이리라.

'거기다가 지난번처럼 강기를 압축하는 데에 비해, 훨씬 준비 시간이 짧다!'

나는 전투 시작 전, 김영훈이 내 품에 넣어 준 조수월무결을 떠올렸다.

'이 구결을 다시 다음 생의 김영훈에게 전달한다면.'

또 다시 저 경지를 뛰어넘을 것이다.

콰아아앙!

김영훈이 환을 날려, 결계를 때렸다.

또 다시 폭음이 울리며 광풍이 분다.

그러나, 이번에는 결계가 조금 흔들릴 뿐 요지부동이었다.

'역시, 이번에는 막리세가도 준비를 단단히 했어!'

하지만 김영훈은 당황하는 기색이 없이 다시금 장심을 뻗었다.

그리고 또 다시 강기의 환이 튀어나왔다.

꽈아앙!

연속으로 결계에 폭음이 울린다.

결계에 금이 간다.

그리고, 김영훈은 다시 장심을 내밀었다.

콰아아앙!!

결계에 금이 많아졌다.

김영훈은 다시 장심을 내밀었다.

이어지는 공격에, 결계에는 점차 균열이 생겨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파캉!

김영훈의 공격을 견디지 못한 결계에 바람구멍이 뚫려 버렸다.

"전부 결계로 향해라!"

"막리가 놈들의 사업장을 불태워 버려라!"

진씨세가의 수도자들이 김영훈이 뚫은 구멍을 향해 달려들어 갔고, 절정 고수들 역시 그 틈을 파고들어 결계 내부로 들어갔다.

"죽어라, 이 마두 놈들."

그리고, 나 역시 검을 잡고 결계 안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파앙!

파공성이 들리며, 기다란 뭔가가 내게 짓쳐들어왔다.

극(戟)이었다.

카앙!

나는 검사를 뿜으며 극을 막아섰고, 뒤이어 내게 극을 내지른 자의 용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동공이 흔들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대주?"

어좌 암중 호위대 대주.

일전의 내 상관이, 나를 막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쪽으로, 암중 호위대의 대원들이 도열해, 병장기를 들고 있었다.

"···오랜만이구려."

"···나는, 반역도 놈 따위는 모른다."

부웅!

대주가 극을 휘둘러 왔다.

그의 극에서 일곱 개의 붉은 의념이 뻗어 나왔다.

나는 붉은 의념에 대항해 내 의념으로 그의 의념을 막았다.

붉고 푸른 나와 그의 의념이 허공에서 교차한다.

"반역도라니. 대주, 현 황실이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 아시오?"

"···알고 있다."

부웅!

그가 극을 휘둘러 왔다.

나는 그와 의념의 간합을 겨루며 극을 피하고 검사를 늘어뜨려 휘둘렀다.

"알고 있다니. 알고 있으면서 충성을 한다는 말이오? 그게, 인간이 할 짓이오?"

"···우리는 인간이기 이전에, 황제 폐하의 수족이다. 수족은 생각하지 않는다. 명받은 대로 움직일 뿐! 폐하께서 너를 잡으라고 명을 내리셨으니, 나 또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답답하기는! 황제의 눈에 우리 같은 범인은 그와 같은 인간이 아니오! 우리는 그의 백성이 아니라, 그가 기르는 가축일 뿐!"

대주가 극을 들고 회전해서 찍으며, 세 번을 찌른 후 다시 기사(氣絲)를 늘어뜨려 나를 베어 왔다.

나는 월악보를 밟아 대주의 공격을 피하며, 산수화의 초식으로 찌르기를 받아치고 검에 검사를 씌워 그의 기사를 받아쳤다.

"충의도 바칠 대상이 따로 있지, 그에게 충의를 바쳐 봤자 돌아오는 것은 힘없는 민초들의 죽음일 뿐이요!"

우리 둘의 간합이 얽힌다.

그리고, 내 간합을 뚫고 대주의 무릎이 내 허리를 노렸다.

"커헉!"

나는 대주의 발차기를 맞고 허공에 붕 떠서 한 바퀴를 돈 후 착지했다.

'실력이 늘었다. 대주··· 저 자는.'

삼화취정의 경계에 있다!

"···그쪽은 다른가?"

그때, 대주가 음울한 얼굴로 내게 물어 왔다.

"너희가 함께하는, 진가의 전 황조 놈들은 다르냔 말이다."

"그 마도 놈들보다는···."

"아니. 너와 함께 온 그 진가 황조 역시, 수도자다. 현 황조와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범인을 벌레로 보는 것은 똑같다! 네가 지금 옳은 편에 서 있는 듯싶으냐? 틀렸다! 그저 범위와 정도의 차이일 뿐.

그자들 역시 연국의 백성들을 갈아 넣는 건 똑같을 거다. 전혀 다를 게 없는, 똑같은 놈들이란 말이다!"

"···."

붕, 붕, 붕!

그가 극을 휘두르자, 바람이 대주의 품으로 빨려들어 가는 듯했다.

의념이 회전하며, 내게 쏘아져 왔다.

'막을 수 없다!'

내 기산심천처럼, 사전에 알아도 저지할 수 없는 성격의 공격이었다.

"어느 쪽이나 다른 게 없다면, 난 적어도 지금 바친 충의를 되돌리지 않겠다!"

극의 움직임이, 한 곳으로 귀일하며, 내게 쏘아져 온다.

그의 극에 있던 기사(氣絲)가 점차 강화되며, 진화하기 시작했다.

파아앗!

찬란한 빛이 터져 나온다.

강기(罡氣)!

"···그게 당신의 생각이라면."

나는 내게 짓쳐들어오는 강기를 보며, 검에 힘을 뺐다.

"그 역시, 존중하겠습니다."

검의(劍意)를 빼자, 내 검에 맺힌 검사(劍絲)가 사라지고 순수한 검기만이 남는다.

나는 그 상태로 내게 짓쳐들어오는 극에 검을 가져다 대고, 그 극의 힘을 내 검에 받아 내었다.

단악검법.

공곡전성!

"···!"

대주의 눈에 당황함이 어렸다.

그리고 나는 내 검에 담긴 그의 강기를, 한 바퀴 회전해서 그대로 되쳤다.

번쩍!

빛이 번뜩인다.

그리고, 휘광의 폭풍이 잦아든 자리에는, 오른손이 잘려 나간 대주가 서 있었다.

"···내 패배군. 역시 네 검법은 몇 번을 견식해도 기오막측해."

"···제게는 과분한 검법이지요."

"과분? 그럴 리가. 방금 전의 네 초식만 해도, 삼화취정의 깨달음이 있는 초식이었다. 내가 본 초식 중 가장 아름다운 초식이었어."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평생을 무를 수련하며 삼화취정에 도달하기를 바랐건만, 도달해 보니 결국 수도자의 하위 호환에 불과했다. 전설상의 경지인 오기조원이 아닌 이상, 영원히 무림의 무공은 수도자들의 아류(亞類)에 불과하겠지. 하하하, 서은현. 알겠는가? 수도자들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의미가 없다."

"···."

"이 무공에 아무것도 의미가 없으니, 결국 남은 것은 내가 의미를 부여하는 수밖에. 내가 부여한 의미는 충의(忠意)였고, 내가 충의를 바칠 대상이 지금의 황제였을 뿐이다."

그는 어쩐지 서글프게 웃었다.

"너와 내가 가진 의(意)가 다른 것이, 아쉬울··· 뿐···이다."

쿨럭, 쿨럭···.

대주는 피를 토하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더 이상 생기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죽은 것이었다.

"···너희는 왜 싸움에 끼어들지 않았지?"

나는 다른 암중 호위대 대원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나와 대주가 싸울 때, 그들이 끼어들었다면 나는 죽었을지도 몰랐다.

"···대주의 부탁이었습니다. 저희가 끼어들면, 부대주님이 암기와 독을 쓰기 시작할 테니, 순수한 무(武)를 겨룰 수 있게 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아직도 나를 부대주라 불러 주는군."

"한 번 상사는 영원한 상사. 또한, 한 번 충(忠)을 바친 대상 역시 영원한 충성의 대상입니다."

"그래, 너희 역시 현 황조에게 충의를 유지하겠단 거군."

나는 내 이전 부하들을 향해, 서글픈 미소를 지어 주었다.

"미안하다."

오늘 너희를,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

파바밧!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암중 호위대 전원이 병장기를 꺼내 들고 내게 달려들었다.

촤악!

나는 우선 독을 뿌리고 암기를 꺼내들었다.

투괴암기술(鬪怪暗器術).

쌍살사(雙殺蛇).

피잉, 피잉!

두 개의 암기에 각기 다른 효과를 지닌 독을 묻혀 대원들에게 던졌다.

총 열한 명의 대원들은 전부 독이 묻은 암기에 부딪히지 않고 최소한의 동작으로 피했다.

단악검법.

산수화.

입산.

유릉.

심산.

산수화로 검을 난무한 후, 하단세로 전환해 균형을 노리고, 구불구불한 찌르기로 견제한 후.

파고들어 벤다.

"하압!"

그러나 대원들은 빠르게 피한 후, 각자 병기를 내게 휘둘렀다.

투괴암기술.

삼두사(三頭蛇).

슈칵!

암기 세 개를 왼손에 끼운 후 가장 가까이 있는 대원에게 호조처럼 휘둘렀다.

세 번을 연이어 휘둘러 거리를 벌린 후, 암기에 독을 묻혀 시간차로 쏘아 냈다.

피잉, 피잉, 피잉!

내게 달려들던 세 명의 대원이 암기를 피하는 사이, 그 뒤에서 오던 대원들이 그들을 뛰어넘어 병장기를 휘둘렀다.

검, 도, 참마도, 연검, 비수.

각기 다른 무기가 나를 향해 짓쳐들어왔다.

단악검법.

괴암.

붕, 붕, 붕!

나는 몸을 회전하며 공방 일체의 태세로 검을 휘둘렀다.

동시에 주머니에서 독분(毒粉)을 꺼내 주변으로 퍼뜨렸다.

투괴암기술.

환무사(幻霧蛇).

독분의 사이사이로, 또 다른 독을 묻힌 암기들이 날아가 대원들을 노렸다.

녀석들이 암기를 피하려는 틈을 타.

단악검법.

입산.

하단세로 전환하여 균형을 노렸다.

"크윽!"

"제길, 이게 같은 절정 중기···?"

"과연 부대주님이십니다."

우득.

나는 해독단을 꺼내 씹으며 검을 으스러지도록 잡았다.

손이 깨질 듯한 통증을 호소해 왔으나 그대로 무시하며.

"입 열지 마라. 살고 싶으면 귀식대법을 써. 방금 뿌린 독분은 피부로는 중독되지 않으니까."

빠르게 면포에 마비산을 묻혀, 검 날에 바른 나는 대원들을 향해 다시금 기수식을 잡았다.

'검법이 아닌, 도법(刀法)이지만.'

같은 뿌리이기에 비슷하게는 사용할 수 있다.

단맥도(斷脈刀).

산바람.

오연(五連).

피잉!

가공할 속도의 찌르기가, 반응하기도 힘든 속도로 다섯 번 허공을 갈랐다.

"끅, 끄극···!"

다섯 명의 호위대원들이 마비산을 묻힌 칼을 맞고 자리에 쓰러졌다.

'아직 여섯 남았다.'

내게 달려드는 여섯 명의 대원들을 보며, 나는 다시 암기를 꺼내 쥐었다.

투괴암기술.

홍사(紅蛇).

앞서 달려오는, 쌍검을 든 대원을 향해 세 개의 암기가 시간차를 두고 날아간다.

첫 번째 암기는 그의 미간으로,

두 번째 암기는 바로 그 뒤쪽에 이어서 그의 발목으로.

세 번째 암기는 다시 그 뒤에 이어 그의 단전으로.

그 암기들의 의념의 궤도는 마치, 한 마리 붉은 뱀을 보는 듯했다.

티딩!

그의 쌍검이 두 개의 암기를 쳐 냈으나, 세 번째 암기는 쳐 내지 못했다.

나는 득달같이 달려들어 월악보를 사용해 월악을 사용했다.

촤악!

대원의 가슴 앞섬과 함께, 그의 피부가 약간 베였다,

곧이어 그는 마비산에 중독되어 그 자리에 쓰러졌다.

"계속 덤빌 거냐."

나는 남은 나머지 대원들을 향해 물었다.

"역시 부대주님이십니다."

"능히 백전노장이시로군요."

"그 막대한 실전 경험에서 오는 실력 차이는 도무지 어찌할 수 없습니다만···."

그들은 각기 창, 월도, 쌍수대검, 권(圈), 검 등의 병기를 들고 나를 보며 웃었다.

"수도자들이 어차피 모두 똑같다면, 지금 충의를 바친 대상한테나 잘 하자는 대주님의 생각에 너무 공감이 되어서 말입니다."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맞는 말이다."

어차피 진씨세가가 황조를 되찾는다 한들, 어쩌면 범인들의 처지는 달라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은, 조금은 달라지리라는.

그런 얄팍한 희망을 품으며, 내 행동을 밀어붙이는 것일 뿐이었다.

"모두 덤벼라."

권이 내게 날아왔다.

창이 내게 짓쳐들어온다.

월도가 권의 반대쪽에서 휘둘러진다.

쌍수 대검을 쥔 녀석이 창의 반대편에서 검을 휘두른다.

검을 쥔 녀석은 날듯이 뛰어올라 나를 내리찍어온다.

그 사이에도 무수한 의념의 간합이 나를 노린다.

붉은 선과 푸른 선이 수많은 궤도를 그리며 내 주변에서 튀겼다.

뇌가 익어 버릴 것만 같았다.

어떻게 하면 이 위기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리고, 나는 문득 그 무수한 간합 속에서, '세 번째 색'을 보았다.

푸콱!

창이 내 허리춤을 스치고 지나갔다.

창에 실린 기운에 허리춤의 살이 그대로 뜯겨 나갔다.

투괴암기술.

삼두사.

피잉!

나는 세 개의 암기를 손가락에 끼운 채, 암기에 마비산을 묻혀 창을 휘두른 대원에게 하나를 던졌다.

내 암기는 아주 간단하게 녀석의 간합을 뚫고 어깨를 맞혔다.

권(圈)이 회전하며 내 머리를 노린다.

나는 암기를 던져 권의 궤도를 꺾고, 권을 던진 녀석에게 마지막 암기를 던졌다.

이번에도 역시 내 암기는 녀석의 간합을 쉽게 뚫고 그의 허벅지에 꽂혔다.

두 명의 대원이 전투불능이 되었다.

남은 건 셋.

뭔가가, 보인다.

나와 저들의 간합 사이.

붉지도, 푸르지도 않은 세 번째 색이.

슈칵!

쌍수 대검이 오른쪽에서 왼쪽 아래로 휘둘러진다.

나는 허리를 꺾어 대검을 피했다.

그러나 대검에 맺힌 검사에 내 이마에서부터 왼쪽 턱까지, 기다란 자상이 생겨났다.

월도가 내 허리를 노리고 베어 온다.

위로 피하면 위에서 내리찍는 녀석에게 꼬챙이가 될 거고, 아래로 피하면 다음 기수식을 준비하는 쌍수 대검에게 베일 것이다.

하지만 붉고 푸른 간합이 이어지는 와중.

생사를 건 싸움 속에서, 내 시선은 막 나타나기 시작하는 세 번째 색에 가 있었다.

단악검법.

유곡.

천지.

유곡의 초식으로 검으로 내리찍는 녀석의 궤도를 비틀어 흘리고, 천지로 월도를 휘두르는 녀석의 행동을 찰나간 정지시킨다.

그 사이, 다시 기수식을 완성시킨 쌍수 대검의 대원이 내게 다시 대검을 휘둘렀다.

나는 찰나, 월도와 검을 든 대원의 팔 다리에 마비산이 묻은 암기를 날린 후.

쌍수 대검의 대원을 향해 홀연히 검을 내밀었다.

단악검법.

공곡전성!

청색과 적색이 겹치는 그 사이.

그곳에 나타난 색상은, 자색(紫色)이었다.

대원의 의념과 내 의념.

둘 중 누구의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그 자색의 의념이, 나와 그의 사이에서 내게 새로운 궤도를 보여 주고 있었다.

나는 그 처음보는 궤도를 따라, 공곡전성의 초식으로 쌍수 대검 대원의 초식을 되쳐 버렸다.

카앙!

내 검에, 녀석의 대검이 그대로 잘려 나갔다.

대원은 무기가 잘려 버리자 품에서 비수를 꺼내고 달려들려는 듯 했지만, 내가 암기를 꺼내 던지는 것이 더 빨랐다.

"커, 커헉··· 마치, 그 움직임. 대주님을, 뵙는 것 같았습니다."

"···."

"···저희를 전부 죽이실 수 있으셨잖습니까. 그랬다면 훨씬 편하게, 상처 없이 가능하셨을 텐데. 왜 그런 어려운 길을 택하신 겁니까···? 죽이진 않더라도, 팔다리 하나쯤 자를 각오를 하셨다면, 훨씬 더 제압이 쉬웠을 텐데···!"

나는 쓰러진 쌍수 대검의 대원에게, 짧게 말해 주었다.

"너희가, 나를 부대주라 불러 줬잖느냐."

"···큭. 재밌으신 분이십니다."

"···."

"방금 그 움직임. 대주님의 것과도 비슷해 보였습니다. 간합을 넘어서 갑작스레 치고 들어오는 공격··· 붉은 빛이 보이지 않았는데 갑자기 간합을 뚫고 들어오는 그 능력···. 새로운 시야를 얻으신 겁니까···? 삼화취정에··· 오르신 겁니까···?"

나는 그 질문에,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그럼···."

"감을 잡고 있다. 서서히, 그 영역에 접어들고 있어."

세 번째 색상.

자색의 의념은, 간혹 보였다 안 보였다 했다.

계속해서 안정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색을 안정적으로 보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생사를 건 싸움이 필요하리라.

그리고 그때.

누군가가 내게 다가왔다.

이번에도 내게 익숙한 이였다.

암중 호위대로 있을 당시, 두세 번 호위해 본 대상.

황태자.

막리현이었다.

"놀랍군. 부대주의 실력이 이 정도라니. 아버님이 나를 보내신 이유가 있으셨군."

"오랜만입니다. 태자 전하. 아까부터 보고 계셨다면 어째서 중간에 안 끼어드신 겁니까?"

"어째서기는, 내가 끼어들면 재미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태자라 부르지 말게. 오늘 나는 막리세가의 방계 출신을 대표해서 온 거지, 황족의 신분으로 온 게 아니니까."

"재미라··· 자칫하면 호위대 전원이 제게 죽었을 수 있었습니다만. 태자 전하께는 그게 재미입니까?"

"태자라 부르지 말래도··· 뭐. 자네가 자꾸 태자라 부르니, 한 가지 알려 주겠네. 왜 내가 황태자가 된 건지 아는가?"

황태자가 그의 영역을 부풀리기 시작했다.

그의 붉은 의념이 주변 공간을 잠식한다.

"내가, 어린 나이에 아버님과 같은 연기기 사성에 이르렀기 때문이지! 삼화취정이니 뭐니 해도, 연기기 일성, 이성, 삼성 정도들과 겨우 맞서는 수준이네. 자네가 이 나를, 연기기 사성에 다다른 나를 감히 이길 수 있겠는가?"

"···다시 묻겠습니다. 이게 재밌냐고 물었습니다."

"쯧, 재미없기는. 이제 그만 말하고 덤비게나."

하여간, 황제를 호위할 때도 사사건건 암중 호위대에게 말을 걸던 짜증나는 녀석이었다.

말을 하면서도, 늘 우리의 필요성에 의문을 표하던 잘난 놈이었었다.

하지만, 저 녀석에게는 그런 심술을 부릴 자격이 있었다.

강하니까.

무림인 따위는 몇이 덤벼들든, 상대가 안 될 정도로 강하니까.

일반 삼화취정 고수들조차, 저 녀석을 상대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삼화취정에 들어간 것도 아니고, 그저 경계를 막 밟은 상황.

녀석에게 대적하다간, 필히 죽는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내 입가에, 웃음이 맺혀 있다는 게 느껴진다.

'아아, 그래.'

죽어도 좋기 때문이다.

깨달음의 실마리를 얻었는데, 바로 다음 순간 죽는들 대수겠나!

"···잘 있어라, 암중 호위대 전원. 나는 이제··· 죽으러 가겠다."

오늘 아침에 깨달음을 얻었으니.

저녁에는 죽어도 좋다.

이 깨달음을 체화하기 위해서.

나는 오늘 죽을 것이다.

나는 황제의 아들, 황태자를 향해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미약하게 보이는 자색의 빛을 보며, 나는 수 번의 회귀를 하면서도 엄두를 못 냈던 한 가지를, 어째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그동안 머릿속에 박아 두기만 하고, 절대 이해할 수 없었던 무학.

천무(天武)에 이르는 기록(錄)!

황태자의 붉은 의식 영역으로 진입하며, 나는 그토록 바라 왔던 무공을 사용했다.

"월수궁무록(越修窮武錄)."

다음 순간, 서은현의 신형이 마치 허깨비처럼 사라져 버렸다.

연단(3)

새로운 세계가 눈에 보인다.

아직 저 세계에 완전히 진입하지는 못했지만, 진입하기만 한다면.

나는 이전까지와는 완전히 달라지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자색(紫色)의 의념.

그 새로운 길이 가리키는 방향을 눈에 익히며, 월수궁무록의 구결을 떠올렸다.

지금까지는 구결을 암기는 했어도,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었다.

그랬기에 정작 신공(神功)을 가지고 있어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지금.

자색의 길이 보인 순간, 나는 어쩐지 월수궁무록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월수궁무록을 보는 사람은 누구나 이것을 말도 안되는 무공이라고 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

그래, 이것은 연국 무림의 역사를 송두리째로 부정할 수 있는 무학이다.

그 근간은 비록 수도자들에게서 도망치고, 암습하기 위한 무공일지언정.

제대로만 사용하면 이것은.

―분명 이 월수궁무록이라는 건, 저 수도자 놈들을 잡아 죽이기 위한 무공이다!

먼 옛날.

월수궁무록을 익혔던 김영훈이 월수궁무록에 내렸던 평가였다.

그래, 제대로만 사용하면 능히 수도자를 죽일 수 있는 무공인 것이다!

월수궁무록의 구결이 뇌리를 스친다.

[무를 겨룸에 있어, 색조가 부딪히는 것이 무공이라면··· 그 색조 자체를 공격할 수는 없는가?]

삼화취정의 경계에 발을 들이기 전에는 이해가 안 되었던 구절.

그러나, 이제는 알 수 있다.

'색조는 의념. 그리고, 색조 자체를 공격한다는 말은.'

상대의 의념 그 자체를 공격한다는 의미!

의념으로 간합을 주고받는 걸 넘어, 의념 자체를 공격하다가, 더욱 더 심화하여 상대의 인식(認識) 그 자체를 베는 것이 월수궁무록의 근간.

그리고, 이를 근간으로 월수궁무록을 사용하는 자는, 수도자의 식(識) 또한 베어 넘겨 수도자의 사각(死角)을 점할 수 있다!

김영훈이 여태껏 보여 주었던, 허깨비처럼 사라졌던 신기(神技)는 그의 경신법이 아닌, 내 인식을 빠르게 베어 내서 순간적으로 내가 그를 인지할 수 없게 하던 비기였던 것이다!

슈칵!

내 검이, 황태자의 식(識)의 흐름을 파고들었다.

인간의 인식에도 결과 결이 있다.

그 결의 틈새를 향하는 자색의 궤적을 향해, 나는 월수궁무록의 구결대로 의념을 집중하며 그의 식을 베고 들어갔다.

파아앗!

그의 식의 귀퉁이가 갈라진다.

나는 그의 눈앞에 서 있었지만, 그의 눈에는 내가 마치 허깨비처럼 사라진 것처럼 보이리라.

수도자의 사각(死角)을 점했다.

보통의 무림인은 완전히 공간을 장악한 수도자의 의념을 파악할 수 없다.

반대로 수도자는 자신의 의식 영역 안쪽에 접근한 무림인의 모든 행동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월수궁무록은 수도자의 사각을 파고들게 해 줌으로써, 수도자 역시 무림인의 행동을 파악할 수 없게 해 준다.

무림인과 수도자가, 일시적으로나마 대등(對等)해지게 해 주는 무학!

이것이.

'인간이 하늘을 넘어서고자 만든 무학이다!'

빠르게 황태자의 의식의 결을 베어 내며, 그의 지근거리에 도달한 나는 검을 들어올렸다.

단악검법.

일 초.

월악!

파앗!

검사를 씌운 검이 황태자의 목을 정확히 노린다.

그리고, 쇳소리가 울렸다.

카앙!

반투명한 방어 법술이 어느새 그의 몸을 덮고 있었다.

"허, 허억···! 이 놈, 무슨 잔재주를 부린 거냐!"

내가 갑자기 사라졌다가 지근거리에서 목을 노리자, 소스라치게 놀랐는지 그는 법결을 맺었다.

콰앙!

기(氣)가 꿈틀거리며 주변 기류의 흐름이 바뀌었다.

퍼엉!

나는 강력한 반탄력과 함께 뒤쪽으로 나가떨어졌고, 황태자를 중심으로 작은 용오름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잔재주는 재밌었지만, 진정한 수도자에게는 안 된다는 걸 보여 주마!"

피융!

그를 뒤덮은 용오름에서 수 개의 풍인(風刃)이 발사되었다.

나는 황급히 뒤로 물러나, 황태자의 의식 영역 바깥으로 피했다.

의식 영역 바깥에서는 의념의 흐름이 제대로 보인다.

단악검법.

괴암.

붕, 붕, 붕!

나는 공방일체의 태세로, 최적의 경로에 맞게 풍인들을 모조리 쳐 낸 후 다시 그의 영역 안쪽으로 들어갈 태세를 취했다.

그러나, 황태자가 다시 법결을 맺자, 용오름에서 내 상반신만 한 풍탄(風彈)이 쏘아지며 나를 노려 왔다.

'일단 피해야겠군.'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신법을 펼쳐 막리세가의 영지 마을 안쪽으로 몸을 피했다.

콰앙, 콰아앙!

풍탄 공격에, 초가집 몇 채가 쓰러졌고, 그 안에서 범인들의 사체와 핏줄기들이 흘러나왔다.

'회오리 안쪽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황태자의 회오리를 자세히 관찰하고는 혀를 찼다.

'저 바람결 하나하나가 모두 풍인(風刃)이다. 안으로 접근했다가는 갈기갈기 찢길 거야.'

인식을 베고 접근해도 정작 회오리를 뚫지 못하면 타격을 줄 수 없다.

'아니, 아니지.'

회오리를 뚫어도 황태자의 방어 법술이 남는다.

내 검사로는 그의 법술을 뚫을 수 없다.

'어떻게 해야 저 모든 걸 뚫을 수 있을까.'

콰앙, 콰앙, 콰앙!

나는 마을의 골목에서 골목으로 피하며, 수도자들의 가옥을 방패 삼아 황태자의 공격을 막았다.

피하는 건 문제 없다.

계속해서 황태자의 의식 영역 밖에서, 풍인이 올 곳의 의념만 잘 관찰하면 되니까.

하지만 기본적으로 무림인의 내공은 수도자의 법력보다 불순하기에, 내공이 아무리 많은들 무림인은 수도자보다 훨씬 빨리 지치게 된다.

'시간을 끌면 안 돼.'

빨리 끝내야 한다.

그리고, 그러려면.

'지금, 바로 지금. 삼화취정에 올라야 한다!'

이 단서를 놓치지 말고, 바로 올라가야 한다.

죽을 각오를 다지고서!

타앗!

나는 월악보와 함께 한 가옥의 지붕에 올라가, 황태자가 던지는 풍탄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부웅!

콰아앙!

등맥의 초식으로 올려 베자, 풍탄은 반으로 쪼개져서 양쪽으로 날아갔다.

징, 징, 징!

'손이 떨린다.'

그러나 과연 풍탄에 담긴 힘은 가공할 것이었다.

검을 쥔 손이 미치도록 아파 왔다.

'저 공격들을, 계속 받아친다.'

그러나 나는 피할 생각을 접고, 계속해서 그의 풍탄과 풍인들을 향해 검을 뻗었다.

풍탄과 풍인의 의념이 나를 향한다.

나는 좌우에서 오는 공격을 보며 기수식을 잡았다.

단악검법.

산수화!

대각선의 참격이 좌우로 뻗어 나가며 달려드는 풍인과 풍탄을 벤다.

그러나 그 너머로 또 다시 끝이 없는 풍인들이 몰려 왔다.

'멈추지 않는다.'

나는 검을 잡고 계속해서 초식을 펼쳐 나갔다.

단악검법.

요산요악.

유릉.

기석.

괴암.

종회무진하며 바람을 베고.

찔러 가며 풍탄을 터트리고.

변초를 준 후 공방일체로 막아 낸다.

그러면서,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다시 접근하기 시작했다.

슈칵!

슈칵!

그 와중에도 미처 피할 수 없는 속도로 쏘아지는 몇몇 풍인들이 내 몸 곳곳을 베고 지나갔다.

어깨, 허리, 뺨, 허벅지.

풍인이 스치고 지나간 곳의 살점은 그대로 넝마가 되었다.

"흥, 어딜 감히 걸어오느냐! 죽어라!"

황태자가 법결을 맺자, 회오리가 꿈틀거리며, 수많은 풍인들이 뭉치기 시작했다.

풍인들은 이내 곧 한 마리의 붕조(鵬鳥)의 형상을 취하였다.

시뻘건 의념이 나를 향한다.

가공할 살의(殺意)가 내가 서 있는 공간 전체에 내리꽂힌다.

못 막는다.

못 피한다.

저게 날아오는 순간, 나는 죽는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어째서인지 그런 것이 걱정되지 않았다.

그저, 하염없이, 적색의 의념 사이로 이어지는, 미약한 자색(紫色)의 의념을 좇을 뿐이었다.

'자색은, 무얼 의미하는 걸까.'

청색은 보신(護身)의 의념이다.

그렇기에 나에게서 뻗어 나간다.

적색은 살의(殺意)의 의념이다.

그렇기에 적에게서 뻗어 나온다.

그렇다면 자색은 무엇일까.

자색은···.

문득, 나는 적색과 청색의 의념이 이지러지며, 어쩐지 태극(太極)을 그린다고 느꼈다.

비록 청색은 적색에 비해 미약한 수준이었으나, 적색과 섞여 들어간다.

그리고, 적색과 청색의 사이.

그 곳에서, 자색(紫色)의 의념이 길을 연다.

'자색은, 청색과 적색이 섞여 태어나는 색이다.'

적의와 자의.

호신의 의지와 살의의 의지.

어째서 두 의념이 섞일 수 있을까.

나는 문득, 내가 잡은 기수식을 보며 어이가 없었다.

저 무시무시한 공격을 마주하고서, 나는 단악검법 일 초, 월악(越岳)의 기수식을 잡은 것이었다.

'살기 싫어진 건가?'

아니, 아니다.

나는 늘 살고 싶어 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기수식 또한 살고 싶다는 내 의지가 만들어 낸 기수식이라는 의미.

'아, 그렇지.'

이건 단순한 월악이 아니다.

월악은 단악검법의 시작이자 끝.

그렇기에, 오의인 단악(斷岳)의 초식을 여는 초식 또한 될 수 있는 것이다.

끼에에엑!

붕조가 날아온다.

나는 붕조를 향해, 단악검법 이십이 초, 단악(斷岳)을 시작했다.

월악(越岳).

입산(入山).

등맥(登脈).

유릉(流陵).

괴암(塊巖).

기석(奇石).

심산(深山).

유곡(幽谷).

산수화(山水畵).

용맥(龍脈).

단애(斷崖).

십이광일출봉(十二光日出峰).

횡 베기를 하고, 하단세로 다시 베며, 검을 잡고 올려 베고, 구부정하게 찔러 든 후, 공방 일체의 태세로 회전하며 변초를 주고 달려들어 올려 벤다.

상대의 힘을 비틀어 흘려내어 무화시키고, 대각선으로 수차례 난무한다.

일순간 검기를 강화해 빠르게 종 베기를 한 후,

다시 속도에 변화를 주어 올려 벤 후, 그 너머로 열두 갈래의 검기를 쏘아 낸다.

이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이뤄졌다.

나는 미친 듯이 단악검법을 펼치며, 끊임없이 자색의 궤적을 좇았다.

붕조의 힘이 더더욱 강해진다.

붕조의 몸에서 뿜어지는 칼바람에, 전신 곳곳에 칼자국이 나고 상처가 벌어진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인지 눈앞이 흐려졌다.

'조금 더, 조금 더!'

계속해서 검을 움직여라.

한 발자국이라도 더 저 색에 가까워져라!

다음 순간, 죽을지라도!

'재능이 없으면.'

요산요악(樂山樂岳).

기산심천(氣山心天).

첩첩산중(疊疊山中).

산중호걸(山中豪傑).

능곡지변(陵谷之變).

공곡전성(空谷傳聲).

'미치기라도 해야지!!!'

지금 죽어도 좋다.

그러니, 제발 내게 길을 보여 다오!

그 순간.

나는 문득, 나를 향해 쏘아지는, 거대한 붉은 의념을 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무(武)를 겨루는 데에는, 나도 남도 없는 걸지도.'

나는 지금껏, 타인(他人)의 의념은 무조건 붉은색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입장을 바꾸어 보자면, 타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의념은 푸른색이고, 내 의념은 붉은색일 것이다.

나는 절정 고수의 세계가 타인의 의념과 내 의념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나.

그건 어쩌면 틀린 생각일지도 몰랐다.

타인의 의념도.

나의 의념도.

관점의 차이일 뿐, 어쩌면 모두가 같은 색일지도 모른다.

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관점을 달리하자, 내 의념이 붉은빛으로, 붕조의 의념이 푸른빛으로 보인다.

다시 눈을 깜빡였을 땐 다시금 색상이 원래대로 돌아왔으나, 나는 알 수 있었다.

'의(意)가 사실 모두 같은 것이라면, 남는 것은 내 무(武)일 뿐인지도···.'

나의 색과 황태자의 의념의 색의 경계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붉은색과 푸른색이 서로 녹아들며, 내 눈앞에는, 천지사방이 자색으로 물든 듯한 풍경이 펼쳐졌다.

몸은 실시간으로 넝마가 되는 중이었으나, 동시에 나는 기묘한 황홀경에 접어들었다.

무(武)라는 것은 결코 홀로서 완성되지 않는다.

이 무를 가진 나와 함께 춤출 상대가 필요한 것이다.

'아, 그렇구나.'

나는 삼화취정의 경지가 무엇인지, 비로소 이해했다.

상대와 통(通)하는 경지!

상대의 의념과 내 의념의 경계가 사라지며, 상대의 의도를 읽는 것에 있어 보다 더욱 직접적이고 세심해진 경지!

상대의 의(意)를 통해, 자기 자신의 행동을 파악하는 것 역시 가능해지기에 자신의 모든 초식과 행동에 허점이 완전히 사라지는 경지인 것이다.

나는 황태자의 의념에, 내 모든 식(式)을 거울처럼 비추며, 내가 그동안 얼마나 기(氣)를 낭비해 왔는지.

얼마나 초식을 펼칠 때 쓸데없는 동작들이 많았는지를 완전히 이해했다.

후우우우―

나는 호흡을 들이마셨다.

내가 초식을 펼치며 쓸데없이 흩뿌렸던 내력(內力)을, 다시 끌어 모은다!

***

어좌 암중 호위대는 마비산에 당해 바닥에 쓰러진 상태에서 서은현과 황태자의 대결을 지켜보았다.

젊은 나이에도 압도적인 실전 경험을 가진, 백전노장의 절정 고수!

그것이 서은현이 암중 호위대에 들어왔을 때부터 받았던 평가였다.

그런 노련한 고수가, 몇십 년의 세월을 지새며 고련했다.

하지만 암중 호위대 모두가, 그가 황태자를 이길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는 수도자였으니까.

무림인과는 별격(別格)의 존재였으니까.

실제로 서은현은 황태자와 싸우며 실시간으로 넝마가 되어 갔다.

몸에 바람구멍이 뚫려 갔고, 전신에 상처가 났으며 입에서는 피를 토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꿋꿋이 한 발짝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저 발악이, 무의미하리라는 것을.

그때였다.

대원들의 눈에 경악이 깃들었다.

서은현이 검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차라리 검무(劍舞)에 가까워 보였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이어지는 일련의 동작들.

하지만 그들을 경악하게 한 것은 다음의 일이었다.

서은현의 의념의 흐름이 정련된다.

동시에, 절정 초, 중기인 대원들이 도저히 그 궤적을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리고, 주변으로 퍼지듯 이어지던 서은현의 의념은 어느 순간 세 개의 점으로 귀일(歸一)하였다.

"사, 삼···."

검무(劍舞)를 추는 그의 머리 위로, 세 송이의 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삼화(三花)···취정(聚頂)!"

잠시간 그의 머리 위에 머물던 세 송이의 꽃은, 이내 그의 코와 입으로 빨려 들어갔다.

***

후우우웁!

낭비되었던 모든 기력이 일거에 돌아온다.

단악검법을 연이어 펼치며 소모되었던 내력들이 순식간에 다시 차올랐다.

나는 대주가 공곡전성의 초식이 왜 삼화취정에 닿아 있다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상대의 힘을 받아 되치는 초식.'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상대와의 의념을 주고받으며, 결국 통(通)하게 하는 연습이나 다름없었다.

'···고맙소, 형님.'

지난 삶의 김영훈에게 마음속으로 깊은 감사 인사를 올리며, 나는 계속해서 검을 움직였다.

너도 없고 나도 없다.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오직, 무(武) 그 자체일 뿐.

어째서 삼화취정의 고수들이 무아지경에 빠지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형이상학적인 대답이 아닌, 네 의념도, 내 의념도 없는 상태에 도달하라는 조언이었던 것이다.

산명곡응(山鳴谷應).

구산팔해(九山八海).

무아지경에서 검을 떨친다.

검을 펼치는 데에 있어, 단 1푼의 낭비도 존재하지 않는다.

청색과 적색을 벗어난 자색의 영역에서, 나는 검의를 계속 불어넣었다.

'너도 없고 나도 없이, 무(武)만이 존재한다면, 의(意) 역시 네 것도 내 것도 없겠지.'

검기가 검과 하나 되어 기를 불어넣고.

검사가 검의(劍意)를 깨달아 불어넣는 것이라면.

그 다음은.

'검의(劍意)가, 세계(世界)를 흐르는 의념과 통(通)하게 하는 것일 터.'

파아아앗!

검사(劍絲)가 진화한다.

희미하게 검을 두르던 검사가 굵어지며, 빛무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검(劍)에 별빛(罡)이 맺힌 것만 같았다.

검강(劍罡)!

왜 내 본신의 힘만으로는 아무리 내력을 쏟아부어도, 검강을 1초 이상 유지시키지 못했는가.

삼화취정의 경지에서는 뻔한 얘기였다.

무(武)란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 펼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상대의 의(意).

그리고, 세계의 의(意)와 통해야, 진정한 무를 완성시킬 수 있는 것이다.

단악검법.

천지(天池)!

나는 투명한 호수가 되어, 그대로 눈앞의 붕조의 '흐름'을 검으로 쓸었다.

기경팔맥이 존재하지 않는 술법체이건만, 나는 어째선지 붕조의 구조를 알 것만 같았다.

붕조 내부를 흐르는 의념의 흐름이 훤히 보인다.

붕조의 힘이 일순간 내 검으로 빨려 들어왔고, 나는 납검과 함께 단악검법 오의를 펼쳐 냈다.

단악검법.

오의.

"단악(斷岳)."

촤아아악!

납검했던 검을 다시 발검하며, 붕조를 향해 내뿜는다.

내 검에는 환한 검강이 뚜렷하게 맺혀 있었다.

쩌엉!

검강이 붕조를 산산이 갈아 버린다.

"후우···."

나는 숨을 골랐다.

그리고, 투명한 눈으로 회오리 속에서 이를 갈고 있는 황태자를 쳐다보았다.

"하, 이놈. 법술 하나를 파훼했다고 좋아하지 말아라. 어디, 이것도 받아 봐라!"

수많은 풍인들이 뭉치며, 이번에는 거대한 교룡의 형상으로 변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저것들이 나를 죽일 것 같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다.

타닷!

나는 월악보를 펼치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크오오오!

풍룡이 울부짖으며 날아든다.

나는 보법을 펼치던 중, 한 가지를 더 깨달았다.

"산군무(山君武)와 월악보(越岳步)는, 하나의 무공이었군."

그동안 재능이 일천해서 깨닫지 못했었다.

그러나, 삼화취정에 오르자 이제야 보였다.

김영훈이 이 보법을 만들어 주며, 보법에 남겨 놓은 의도가.

산군(山君)이, 큰 산을 넘는다(越岳)!

'그리고, 날아오른다.'

산군월악비(山君越岳飛).

나는 겅중겅중 뛰어오르며, 풍룡을 날듯이 피한 후, 그의 영역 안쪽으로 접어들었다.

"긴장하시지요. 전하."

이제부터는, 월수궁무록을 펼치는 데에 아무런 제약도 없어졌으니까.

그의 영역에 들어간 순간, 황태자가 가진 식의 흐름이 내 전신을 쓸어 오는 듯한 느낌이 느껴졌다.

나는 월수궁무록을 사용해, 의(意)를 날카롭게 벼려, 상대의 식(識)을 그대로 잘라 내었다.

방금 전까지는 황홀경에서 무의식중에 잘라 낸 것이라면, 지금은 완전히 인지하고서 펼치는 일 식!

"하, 또 다시 잔재주를 쓰는구나. 하지만 네가 감히 이 회오리를 뚫을 수 있을 것 같으냐!"

황태자를 둘러싼 회오리.

저것은 수천수만의 풍인(風刃)들이 회전하는 법술의 결정체였다.

그러나 나는, 어쩐지 자신감이 생기는 듯 했다.

'쳐 낼 수 있다.'

법술의 귀퉁이.

가장 풍인의 회전력이 약한 곳.

나는 그곳으로 향해 쏘아져 들어갔다.

카앙!

수십, 수백 개의 풍인들이 나를 향해 쏘아지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의념을 감지했다.

느껴진다.

카앙, 캉, 캉, 캉!

산수화(山水畵)!

수십 개의 참격이 사방으로 뻗쳐 나가며 풍인들을 떨쳐 냈고, 나는 무사히 회오리의 안쪽에 진입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쯤 들어서자, 황태자의 의식은 더욱 더 농밀하게 응집되어 있어 더 베기 힘든 지경이었다.

'상관은 없지.'

그러나, 이 거리면 어차피 내 검이 닿는 거리였다.

검강을 불어넣는다.

파아앗!

새하얀 빛이 검에서 터져 나왔고, 그제야 나를 발견한 황태자의 눈에 경악이 깃들었다.

'방금 전에는, 검사로 방어 법술을 뚫지 못했지만.'

검강(劍罡)은 다를 것이다!

콰앙!

내 일 검에 황태자의 방어 법술이 유리처럼 깨져 나갔다.

"크아아악!"

촤악!

내 검이 그의 목 일부분을 뜯어 냈다.

파아아앗!

황태자는 무언가 다급히 바람의 법술을 펼쳐 내 검을 피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의 눈에는 처음으로 공포가 떠오르는 듯했다.

"히, 히익. 오, 오지 마라."

파앗!

나는 황태자에게 득달처럼 달려들며 월수궁무록으로 그의 식을 베어 갔다.

다시금 내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황태자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꺼, 꺼져라! 꺼지란 말이다! 어, 어서, 저리 꺼져!"

콰아아아!

광풍이 몰아친다.

그는 내가 보이지 않으니 사방팔방으로 바람을 뿌려 댔으나, 나는 바람의 결을 빠르게 잘라가며 다시금 그에게 접근했다.

촤아악!

검강을 사용하며 또다시 녀석을 노렸다.

황태자는 기함하며 다시금 법술을 썼고, 또 다시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죽어라! 죽으란 말이다!"

파아앗!

녀석이 법결을 맺으며 주문을 외자, 다시금 붕조와 풍룡, 봉황과 기린 등의 형상을 한 풍계 법술들이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이미 삼화취정에 완전히 발을 디디고, 월수궁무록을 사용하는 내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슈칵!

심산의 초식으로 붕조에게 달려들어 베어 버리고, 다시 유릉의 초식으로 풍룡을 찔러 터트려 버린 후.

산군월악비를 펼쳐 다른 법술을 피하며 황태자를 쫓아갔다.

다시금 녀석은 강력한 법술을 쏟아내며 나에게서 도망쳤다.

상황이 역전되었다.

"흐, 흐억! 흐어억!"

황태자는 비참하게 도망치며 계속해서 법결을 맺었다.

단 한 푼의 낭비도 없이 내공을 사용하는 나에 비해, 맞지도 않을 큰 규모의 법술을 끊임없이 날려 대던 황태자는 어느새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다.

"주, 죽어! 제발 죽으란 말이야! 흐아아아!"

'다음 일격으로 끝낸다.'

나는 기산심천의 초식을 준비하며, 숨을 들이쉬었다.

그때였다.

"하, 핫! 크윽!"

도망치던 황태자가 급격히 방향을 바꿔, 법술까지 쓰며 도약했다.

'기산심천!'

슈칵!

내 검기가 크게 늘어나며 황태자의 다리를 노렸고, 그의 다리를 이내 잘라 버렸다.

"크아아아악! 제길, 제길! 무림인, 무림인 따위가! 왜 무림인 따위가!!"

그는 다리가 잘려 고통스러워하며, 나를 향해 이를 갈았다.

"너! 네가, 네가 지금 하는 게 옳은 일인 줄 아느냐? 네가 함께하는 진가 놈들은 뭐가 다를 줄 아느냔 말이다!"

나는 말없이 검을 들고 녀석에게 다가갔다.

"하하하! 그래, 네놈도 몇 년 전 아버님께 축허단을 하사받지 않았느냐! 축허단은 축기단과 같은 재료로 만들었지.

너 말이다. 연기기 수도자가 축기기로 올라갈 때 먹는 축기단이 뭔지는 아느냐?"

시끄럽게 떠드는 녀석을 향해 검을 들어올렸다.

"축기단은 인간의 100년 치 생명력과 정혈을 재료 중 하나로 한다! 축기기 수도자 중에서 축기단을 먹지 않고 축기기에 이르는 수도자가 있을 것 같나?

9할 9푼 이상의 축기기 수도자들이 축기단을 처먹고 경지에 오르는 것이야! 네가 따르는 진가 놈들도 결국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결국 사람을 잡아먹는 건 똑같단 말이다!

너도 축허단을 먹은 이상, 다를 건···."

퍼억!

나는 황태자의 가슴을 발로 걷어찼다. 그는 컥컥 거리며 숨을 토해 냈다.

그러나, 나 역시 가쁜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너무 피를 많이 흘렸다.

살점이 송두리째 뜯겨 나간 곳도 있었으며, 허벅지 쪽에서는 점차 감각이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잠시 아래에서 컥컥거리는 황태자를 내려다본 후, 품에서 비단궤를 꺼냈다.

그리고, 비단궤의 안쪽에 있던 축허단을 꺼내 보았다.

붉은빛이 도는 탐스러운 단약.

범인이 한 알을 먹으면, 수명을 10년이나 늘려 준다는 천고의 영약.

나는, 오늘에서야 축허단에 도는 붉은 빛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툭―

뿌드득.

난 이 더러운 단약을 황태자의 옆으로 던진 후, 발로 밟아 으깨 버렸다.

"걱정 마라. 앞으로, 너희 수도자들이 만든 더러운 단약은 절대 먹을 생각이 없으니까."

화르륵, 화르르―

막리세가의 거점이 되는 영지는, 어느새 진씨세가 수도자들이 쓰는 염계 법술에 의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영지의 상공에는 축기기 수도자들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김영훈 역시 그 싸움에 참여하는 중이었다.

'빨리··· 도우러 가야 하는데.'

방금 축허단을 먹었다면 조금이라도 더 움직일 수 있었을까.

하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인간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더러운 단약 따위, 입에 대고 싶은 생각은 없다.

스릉―

나는 검을 들었다.

"잘, 가시오."

그리고, 황태자를 내리쳤다.

슈칵!

뭐지?

왜, 내 몸이 거꾸로 서 있는 걸까.

나는 문득, 목 아래가 허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그렇구나. 내 목이 잘린 거로군.'

황태자의 가슴 어림, 그가 차고 있는 목걸이에서 갑작스레 날아온 풍인 때문이었다.

그 풍인은 나로서는 감히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이 빨랐다.

'베야··· 하는데.'

이제야, 경지에 올라.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될 수 있는데.

이렇게 죽는 건가.

'···아니, 아니다.'

이렇게 죽을지언정.

한 푼이라도 도움이 되어라.

바라던 경지에 올랐을진대, 아무것도 못 하고 죽을 소냐!

'벤다! 벤다!'

설령 죽더라도, 벨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