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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 *

수 개월이 흐르고, 우리는 계속해서 막리세가의 영지를 습격했다.

많은 막리세가의 수도자가 참살당했고, 우리가 상대하는 막리세가 수도자들의 역량은 점차 높아져만 갔다.

연기기 1~3성 수준이었던 수도자들의 경지는 점차 높아져, 연기기 2~5성 수준까지 높아졌다.

'제길, 강하다!'

나는 연기기 7성의 수도자와 접전을 벌이며 이를 악물었다.

"눈이 좋군. 범인답지 않게 영감도 상당히 깨어있는 듯 하고. 범인도 영감을 갈고닦으면 우리처럼 영통이 뚫린다지? 네 시체로 강시를 만들면 그 강시는 수도자의 시체와 같을까 다를까?"

나는 수십마리의 강시를 조종하는 수도자를 상대하며, 검강을 줄기줄기 뿜어냈다.

'이런 녀석들이 수두룩하다. 제자들이 위험해!'

단악검법

능곡지변!

콰과광!

내 검강이 지형으로 파고들어, 강시들의 진세를 흐트러뜨렸다.

단맥도

산바람!

피잉!

내 검강이 빛살과도 같은 속도로, 강시들의 사이로 수도자에게 쏘아졌다.

카앙!

"흠, 내 방어법술에 흠집을 내다니, 훌륭..."

단악검법

기산심천!

부웅!

경맥을 열어젖히며, 검강을 크게 강화하여 대각선으로 베어나갔다.

콰과광!

커다란 검강이, 균열이 난 방어법술을 헤집고 수도자의 몸을 갈라갔다.

"무, 무슨...! 내가 범인 따.."

콰작!

나는 수도자의 상반신을 완전히 잘라버린 후, 주변으로 눈을 돌렸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너무 강한 이들이 많다.

'제발 살아있어 다오!'

검이 불길을 가르고, 내 제자들에게 합격을 받고 있는 연기기 4성 수도자에게 향했다.

연기기 수도자가 풍계 법술을 날리고 있었고, 제자들이 힘겹게 법술을 막아내는 형국.

나는 바람의 결을 베어가르며, 월수궁무록으로 그에게 접근하여 검을 휘둘렀다.

번쩍!

검강이 치솟았고, 연기기 수도자의 목이 바닥을 굴렀다.

그러나, 나는 바람이 걷혀지며, 피를 흘리는 몇 사람을 볼 수 있었다.

"...너희..."

뿌드득-

나는 이를 갈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내게 배운 기초적인 의술로 지혈은 해 두어 피는 더 흘리지 않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죽는다.'

살릴 방도가 없다.

이미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것은 둘째치고, 경맥이 완전히 뒤틀리거나 내장이 파열된 경우도 있었다.

"...멍청한 녀석."

나는 마지막 제자의 얼굴을 확인하며 이를 악물었다.

훈련장에서 멋대로 탈출한 전적이 있는, 녹현이었다.

"내가... 복수는 이만하라고 했잖느냐."

"흐, 흐... 저는, 만족, 합, 니다... 드디어, 드디어, 가족들과... 가족들과 함께할 수..."

제자의 몸에서 생명력이 빠져나간다.

점차 몸이 차가워지고 있었다.

"여기 남겨진 사람들은, 네 가족이 아니냔 말이다."

뿌득-

이를 악물었다.

목이 막힌다.

녀석들의 눈빛은, 죽어가면서도 평안했다.

죽은 제자들은 나를 바라보며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스승...님."

"당신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어쩐지 눈앞이 흐렸다.

그러나 이 이상 감정이 변하면 오히려 위태롭다.

지금은 전장이었다.

더 이상 눈이 흐려지지 않도록, 이빨이 으스러져라 이를 악물며, 천천히 제자들에게 속삭였다.

"...겠다."

내 말에, 제자들의 눈이 커졌다.

"...괜찮으시, 겠습니까?"

"분명 저희의 한은 전부 풀리지는 않았습니다만."

나는 제자들을 바라보며, 한 번 고개를 끄덕여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면혈을 눌러주었다. 곧 잠이 들 수 있을게야. 나는 이만 가 보겠다. 다른 녀석들도 할 수 있는 한 구해야겠다."

쓰러져 죽어가는 일곱 명의 제자를 뒤로하고, 나는 검을 잡았다.

"녹현, 희아, 청주, 장삼소, 구오오, 서문림, 금란... 모두, 잘 자거라."

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수도자들을 참살하고, 제자들을 구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 * *

이번 전투는 격했다.

그리고, 제자들 중에서 34명의 인원이 전사했다.

"녹현, 희아, 청주, 장삼소, 구오오, 서문림, 금란, 개진, 구삼, 일매, 서진, 기진태, 배기태, 허진수, 상현, 산호, 금쪽이, 대아, 칠득, 팔오, 팔륙 형제, 이력, 금삼, 견훈, 대식, 길수, 한수, 몽진, 주한, 주겸, 검오, 장칠, 홍화, 만숙..."

제자들의 이름을 불러주며, 나는 그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무덤을 만들어주었다.

"모두, 미안하다."

제자들을 묻어준 후, 나는 나머지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들어라. 이제 점차 막리세가 수도자들의 저항이 거세지고 있다. 이제 아무리 너희들이 합격진을 펼친다 해도 상대하기 어려운 연기기 후반의 수도자들이 즐비해서 반격해 오겠지.

그러니, 무공스승으로서 명하겠다."

앞이 흐리다.

스승으로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건만, 자꾸만 추한 모습을 보여주는 듯해,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너희는 이제 다음 급습부터는 함께하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훈련장에서 다시 훈련을 다져갈 것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가 어떤 심정인지 아신단 말입니까! 저희는..."

제자들이 핏발이 가득 선 눈으로 저항해왔으나, 나는 씹어뱉듯이 말했다.

"미안하지만, 이것은 부탁이나 제안이 아니다. 스승으로서 내리는 명령이다."

스릉-

나는 검집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내 뜻을 꺾고 싶다면, 나를 꺾어봐라. 나를 베기 전까지, 너희는 더 이상 복수를 할 수 없다!"

더 이상 봐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수백 개의 의념이 나를 노려들었으나, 나는 수천 수만개의 의념을 관찰하며, 제자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최적의 경로를 계산해내었다.

"더 이상, 너희는 죽지 않게 하겠다... 아니, 너희는 이제 죽을 수 없다...!"

생(生)(6)

나와 제자들의 투기가 부딪혔다.

얼마간 우리는 서로를 노려보며 의념의 공방을 주고받았다.

그 침묵 속에서, 만호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사부님께선, 저희와의 약속을 어기실 셈입니까?"

"약속...?"

"예. 당신께선 분명, 우리가 막리세가의 영지를 전부 없애는데에 성공하면, 함께 황궁을 치시기로 하셨잖습니까.

그것 때문에 저희더러 살아남으라 하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도대체 이제와서 왜 말을 바꾸시는 겁니까? 돌아가라니요?"

만호를 제외한 다른 수많은 제자들 역시 거친 의념을 내뿜으며 말을 이었다.

"맞습니다. 왜 사부님께선 우리에게 약속을 하셔놓고, 어찌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게 하십니까."

"우리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살아남으려 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언제 죽어도 상관 없다고 생각하고 지옥같은 수련을 버텨왔습니다.

그런데 왜...!"

나는 아이들의 의념을 살폈다.

역시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색이다.

하지만, 녀석들의 색은 대체적으로 검푸른 빛을 뿌리고 있었다.

애(哀)

제자들은, 모두 함께 울고 있는 중이었다.

'너희들도, 슬퍼하고 있구나.'

동료들의, 친구들의 죽음에...

'미안하다.'

너무나도 미안하고, 스승으로서 부끄럽다.

스승으로서 부족해, 제자가 죽게 만들었다.

'가슴이 시릴 정도로, 미안하구나.'

하지만 그렇기에, 나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었다.

"약속은... 지키겠다. 너희가, 제대로 나를 이길 수 있게 되는 날. 너희와 함께 황궁을 쳐 주마."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계화가 비수를 들고 내게 쏘아져 왔다.

"포위!"

그와 함께 만호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고, 제자들은 나를 중심에 두고 삽시간에 월수진(越修陣)을 펼친다.

수도자를 상대하기 위해 만든 진법.

절정경의 고수들은 수도자의 식 내부에서 제대로 수도자의 의념을 감지할 수 없고.

반대로 수도자는 절정고수의 움직임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다는,

무림인과 수도자의 극상성을 완화하기 위해 만든 진법.

'수도자가 행동을 들여다보아도 막을 수 없고, 수도자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어도...'

그 안에 갇힌 이를 완전히 갈아버릴 수 있는 합격진.

그것이, 월수진이었다.

'기본적으로 월수궁무록의 깨달음이 깃든 합격진이기에, 진의 흐름 자체가 의념의 결을 방해하게 만들어졌다.'

월수궁무록을 펼쳐, 이들의 인식에서 벗어나도 진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월수궁무록은 기본적으로 상대의 인식을 잘라, 감각에서 벗어나기 위한 무학체계이지.

갑작스레 공간 이동을 하는 술법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수도자를 상대하기 위해 만든 합격진답게, 상대의 행동이 예측이 되든 안되든.

상대가 인식에서 벗어나든 말든.

무조건 진에 갇힌 이는 그대로 갈려나가 버린다.

그것이 월수진!

34명의 전력이 비었으나, 제자들은 훌륭하게 서로의 의념을 연계하며 빈자리를 메우고 나를 압박했다.

파바밧!

원형으로 나를 둘러싼 제자들이, 회전하며 나와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수 개의 인간 장벽으로 둘러싸고, 각기 다른 방향으로 장벽을 회전시키며 진세를 좁힌다.

그 진세 안에서 수많은 의념의 흐름이 얽히고설킨다.

'월수진의 숙련도가 모두 한창 물이 올랐군.'

제자들의 움직임 자체가 의념을 방해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어, 누구의 의념이 누구의 것인지 잘 인지가 되지 않는다.

진 자체가 일으키는 기묘한 착시현상과 함께, 나는 녀석들의 행방을 읽을 수가 없어졌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분명 수도자를 상대할 수 있는 진이다.

어지간한 삼화취정의 무림인조차도 이 진에 걸리면 갈려나갈 터.

하나, 나는 삼화취정의 극한(極恨)에 가까워지고 있다.

오기조원을 눈 앞에 둔 나다.

최근에는 월수궁무록의 상위호환인 조수월무록과 조수월무경 역시 이해하고 있는 차.

"이런 실력으로 내 말을 듣지 않겠다는 거냐? 무슨 자신감으로?"

피잉-

정신의 집중력이 극한에 이르자, 의념의 세계에 진입하며 수만가지의 의념의 색조가 보였다.

그 색조 안으로 진입하며, 나는 제자들의 의념과 나의 의념을 삼화취정의 깨달음으로 동화(同和)시켰다.

조수월무록(眺修越武錄)

단순히 월수궁무록에서 의념과 인식을 베는 것을 넘어서서, 삼화취정의 깨달음을 극한으로 발전시켜,

상대의 움직임 속으로 완전히 파고들어버리는 무학.

내 검이, 빠르게 회전하는 월수진의 의념 사이를 그대로 파고들어갔다.

분명 상이한 의념이 끼어들었건만, 제자들은 내 검세가 진세의 안으로 완전히 섞여들어갈때까지도 아무런 이상을 느끼지 못했다.

이 중에 한 명이라도 검사(劍絲)를 쓸 수 있는 절정 중기 완숙의 경지라면 조금이라도 이상을 느낄 터.

그러나, 이들은 각자의 상단전에 깃든 가족의 원혼들 때문에 오히려 성장이 막혀있었다.

슈칵!

나는 진의 흐름 속으로 망설임 없이 파고들어가, 진의 흐름을 향해 검강을 휘둘렀다.

콰앙!

흙먼지가 비산한다.

땅이 울린다.

"크윽...!"

"막아라!"

단악검법

첩첩산중!

검강이 수천 갈래로 쪼개지며 사방으로 비산한다.

쪼개졌더라도 검강.

단순히 검기가 쪼개진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쿠과과광!

본래는 검기를 무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초식이, 사방으로 흩뿌려지며 진형을 궤멸시킨다.

"너희는 나를 막을 수 없다. 너희 스스로가 그 집착을 끊어내어 가족들을 천도시키고,

의(意)를 깨닫지 못하는 한은!"

콰아앙!

월수진이 붕괴된다.

"강해져서 가족들의 원수를 갚는 것이 너희의 목표가 아니더냐!

강해지고 싶다면, 집착부터 끊어내라!"

번쩍!

나는 능곡지변의 초식으로 지형을 뒤흔들어 완전히 합격진을 파훼해버린 후, 마비산을 흩뿌렸다.

영지 습격으로 가진 독과 해독제를 전부 써버린 제자들은 내 마비산에 저항하지 못하고 전부 쓰러져 버렸다.

낭아봉을 쓰는 제자, 규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녀석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떻게, 이걸 끊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내 가족들의 목소리를, 끊을 수 있단 말입니까...!"

"..."

"당신은, 우리를 이해할 수 없단 말입니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쓰러진 제자들을 강제로 끌고 가는 것.

그것밖에 없었다.

"못난 스승이라, 미안하구나... 가자. 더 강해질 수 있게... 도와주마. 더..."

"어딜 간다는 겐가. 범인들 무덤 만들어준답시고 해서 기다려주고 있었다만, 갑자기 저들끼리 쌈박질이라니... 이래서 무림 것들은."

암살부대 총괄주 노인이 혀를 차며 내 말을 끊고, 비행 법기를 타고 내려왔다.

"듣자 하니 웃기는 소리를 하고 있군. 네가 무슨 권리로 암살부대를 빼간다는 거냐.

좋은 무공교관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이 상황에서 부대의 이탈은 허할 수가 없다."

"...삼화취정에 이르지도 못한 허약한 내 제자들이 앞으로의 싸움에서 뭐가 도움이 된단 말이외까?

앞으로 삼화취정에 이르지 못한 이들은 더 이상 쓸모가 없을텐데... 양보다는 질이 중요해질 겁니다."

"중요하지 않다고 해서 쓸모가 없는 건 아니지."

"막리세가에서도 이제 슬슬 대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남은 영지들에 있는 수도자들은 대부분 연기기 중후반일 터.

그들에게는 이제 제 제자들이 쓸모가 없습니다."

"스스로가 교육을 미진하게 시켰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군."

"맞습니다. 제가 미진하게 시켰으니 죄를 청해 다시 제자들을 쓸모있게 교육시키겠습니다. 부디 허락해주시지요."

꿈틀

총괄주 노인의 이마에 작게 혈관이 돋았다.

그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법력을 끌어올렸다.

나는 황급히 그의 영역 바깥으로 물러나며, 언제든지 검을 뽑을 준비를 했다.

"자꾸 헛소리를 하며 부대를 이탈시키겠다니. 제정신인거냐? 어찌되었건 진씨세가와 막리세가의 이 암중혈투는 범인들의 비율이 높기에 명분이 있는 것이야.

그런 상황에서 범인 녀석들이 대거 이탈한다면 막리세가의 상위 가원들이 개입할 명분을 줄 뿐이다."

"제 미진한 제자들이 빠져나가더라도 김 형께서 데려오신..."

"이제 헛소리는 됐다. 명령불복종으로..."

우우웅-

총괄주 노인의 손에 법력이 맺힌다.

그때였다.

콰악!

소리없이 다가온 억센 손길이 노인의 팔을 붙잡았다.

김영훈이었다.

"어, 언제 내 의식영역으로..."

"흐음, 이보시게 진가 양반."

김영훈이 노인의 팔을 더욱 억세게 쥐며 미소를 지었다.

노인의 팔에 더 이상 피가 통하지 않는지, 손끝이 새하얘지며 법력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서 동생은 내 동향 사람이네. 동향 사람의 죄는 내 죄이기도 하니, 나도 같이 벌해주시게나."

"이, 이익..."

총괄주 노인은 김영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힘을 주고, 다른 손으로 뭔가 법술을 쓰는 듯 했다.

그러나 김영훈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기의 흐름이 노인의 법술을 모조리 베어내며 없애버렸다.

얼마간 김영훈과 기싸움을 하는 듯 싶던 총괄주 노인은 시뻘개진 얼굴로 소리쳤다.

"알겠네, 알겠어. 명령불복종 건은 넘어가겠네. 이만 팔을 놓으시게!"

"흠."

그제야 김영훈은 노인의 팔을 놓았고, 노인은 식은땀을 흘리며 팔에 법력을 불어넣어 회복하기 시작했다.

"...나는 넘어가지만, 가문의 어른들은 자네들이 그냥 이탈하게 두지 않네. 내가 방금 말한 것들은 전부 내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야.

저 녀석들은 단순한 전력을 떠나서 하나의 명분이란 말이다! 전력이 되든 안 되든 녀석들은 일단 전투에 투입되어야 해!"

"하면, 부탁이 있습니다."

나는 제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제자들은 재능을 강제로 개화하여 억지로 절정경에 이르렀지만, 내 훈련으로 어떻게든 절정경에 안착시키는 데에는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저 이상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의(意)를 깨달아 기사(氣絲)의 경지에 이를 필요가 있지요.

하나 제자들의 상단전에 그들의 친지가 깃든 이상, 이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원귀 부여의 술자(術者)가 당신인 걸로 압니다만. 제자들의 상단전의 원혼들을 천도시켜 주시지요.

이제 내 제자들에게 저런 것은 오히려 제약일 뿐입니다."

"흠, 원귀들을 다시 떼어내달라는 건가?"

잠시 제자들의 상단전을 흝던 총괄주 노인은 혀를 차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안 된다. 내가 술법을 해지하려 해도, 이 놈들이 자기 가족하고 떨어지고 싶어하지 않는 이상 술법을 풀 수가 없어.

이제 술법을 풀 방도는 두 가지야. 결단기 수준의 어른이 강제로 원혼들을 떼어내 주거나, 혹은 저들 스스로 놓아주는 수밖에."

"..."

"아, 생각해보니 하나가 더 있군. 저 녀석들이 죽으면 알아서 술법이 풀릴 테지. 이런 것들은, 너도 알고 있는 게 아닌가?"

총괄주 노인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알고 있는 건가.'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실 부질없는 희망을 부여잡고 물어본 질문이었다.

그리고, 슬슬 마비가 풀리기 시작한 제자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누구, 마음대로... 내 가족을, 떨어지게 하겠다는, 겁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부족한 실력은, 조금 더 전투경험을 쌓으면 된단 말입니다!"

한 명도 빠짐없이.

녀석들은 자신들의 가족을 놓아주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내 제자들을 바라본 총괄주 노인은 나를 바라보며 비웃듯 말했다.

"하, 꼴에 교관이란 놈이 자기가 어떤 놈들을 가르치고 있는지도 몰랐나 보군.

네가 가르친 저 아이들이 살아있는 놈들로 보였더냐?

저 아이들 모두, 이미 목숨을 버렸다 생각하고 있다! 네 제자 놈들은 전부 살아있되 살아있지 않은 놈들이야!

복수에 넋을 맞긴 망인(亡人)이란 말이다!

하, 좋다. 내가 조금 도와주지."

파아앗!

노인이 결인을 맺자, 그의 손아귀에서 녹색 빛이 터져나와 남은 제자들의 뇌리로 스며들었다.

"원혼 천도의 술법이다! 네 제자들이 각자 가족에 대한 미련을 끊어내는 데에 성공하고,

술법을 풀게 된다면 원혼들이 자연히 천도될 것이다. 그래, 네 제자놈들이 미련을 끊어낸다면 말이지!"

"..."

"흐흐, 자기가 뭘 가르치는지도 모르고 웃기는 명령을 하는 꼴이란! 가문의 어른들도, 네 제자들 본인들도 앞으로의 전투에서 빠지길 원하지 않는다!

너야말로 쓸데없는 망상을 집어치우고, 제대로 부대를 이끌기나 해라."

말을 마친 총괄주 노인은 김영훈을 잠시 노려보더니 '범인 출신 주제에' 라고 중얼거리고는 비행법기를 타고 날아가 버렸다.

나는 이를 악물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김 형. 진씨세가의 힘을 빌린 것이, 잘한 일인지... 너무나도 회의가 듭니다."

"나도다."

"어찌해야 합니까..."

"..."

"내가... 어찌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다. 진씨세가도 분명 선한 이들은 아니다. 하지만... 막리가의 수도자들은, 최악(最惡)이다! 우리는 저런 것이라도 선택할 수밖에는 없다..."

나는 이를 악물고, 쓰러진 제자들에게 해독약을 먹이고, 그들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들을 수습해서 다음 전투지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원하는 것이었으니까.

* * *

다시 반년이 지났다.

오늘도 치열한 전투가 끝났고, 나는 막리세가의 영지를 돌아다니며, 희생자들.

그리고, 제자들의 시신을 수습했다.

"최근 들어, 흰머리가 많아지는 것 같구나."

"..."

"괜찮은 거냐?"

나와 함께 시신을 수습하던 김영훈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최근 나는 급격히 늙고 있었다.

이전까지의 생애에서는 최초의 삶을 제외하고는, 나름 영약을 많이 먹은 터라,

그리 노화가 급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머리칼이 더욱 빠르게 회백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멀쩡합니다."

"...무리하지 말아라."

김영훈은 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다른 시신들을 수습하러 떨어졌다.

무너진 막리가 영지의 잔해에서, 나는 내 제자인 기세구의 시체를 발견했다.

녀석의 독문병기인 대도(大刀)는 언제나 잘 관리되어 있어, 그가 죽은 후에도 말끔하게 내 얼굴을 비추었다.

내 두 눈은 핏발이 붉어져 있었으며, 눈 아래로는 시커먼 눈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입술은 말라터졌고, 머리는 회백색 산발이 되어 있었다.

나는 또 다시 죽은 제자의 시신을 잔해에서 빼냈다.

내가 약해서, 오늘도 나는 제자를 구하지 못했다.

"왜!!!!!"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내게 왜 이러는 거냐! 왜!!!"

목이 끊어져라 외쳤다.

"왜 내게 이런 재능을 준 것이야! 왜 내가 아직도 삼화취정에 머물러야 하는 거냔 말이다!

왜! 왜! 왜! 왜 아직도 나는 오기조원에 들 수 없는 거냐!

왜 나는..."

나는 땅을 잡고서 으르렁거렸다.

땅에 내 손자국이 그대로 패였다.

"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야..."

알고 있다.

이건 하늘의 탓이 아니다.

전부 내 탓이다.

내가 조금만 더 노력했다면.

조금만 더 죽을 듯이 의념을 단련했다면.

뇌가 폭발하는 한이 있더라도 더욱 더 높은 곳을 궁구했더라면.

그래, 내가 조금 더 강하다면, 해결되었을 문제였다.

"제발... 내게 재능을 주십시오... 제발... 힘을 주십시오..."

나는 이를 갈며 울부짖었다.

"왜 나는 아직도... 이렇게까지 했음에도... 이리도 무력하단 말입니까..."

후회된다.

왜 멍청하게 제자들을 이런 곳에 투입시켰을까. 목숨을 걸어서라도 반대해야 했다.

아니, 왜 이 녀석들을 가르쳤을까. 쫓겨나는 한이 있더라도 이 녀석들을 맡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왜, 이 곳에 들어와 인연을 맺었을까. 그래, 막리세가의 악행을 막기 위해 진씨세가에 들어오지 말았어야 했다.

죄책감으로 가르쳤던 제자들은 어느새 내 생(生)의 일부였다.

그리고, 이 아이들이 숨을 거둘 때마다, 내 살이 깎여나가는 듯 했다.

"...시신을 수습했습니다, 스승님."

"...생존자는?"

만호가 기세구의 시신 앞에서 눈시울을 붉히고 있는 내게 다가와, 이를 악물고 보고를 했다.

"314명.. 입니다."

"그래... 가자."

나는 비틀거리며 제자의 시신을 안고, 매장지로 향했다.

나는 양지바른 곳에 제자들을 묻고, 김영훈의 주도로 제문을 외웠다.

김영훈이 익힌 위령의 법술이 스며들며, 희생자들의 영혼이 천도되었다.

그리고 김영훈은 내 제자들의 시신 앞에서도 제문을 외워주었다.

그가 제문을 왼 범인들의 무덤에서, 작은 빛무리들이 날아오르며, 허공으로 흩어졌다.

우리는 말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던 중이었다.

"하, 하핫! 드디어, 드디어 허락이 떨어졌다!"

우리와 함께 싸우던 진씨세가의 축기기 수도자 중 하나가, 희열에 찬 표정으로 외쳤다.

그의 손에는 한 장의 전음부(傳音附)가 들려있었다.

"모두 모여라! 본가의 어른들과 막리가 상부에서의 대화가 끝났다!"

그는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우리를 둘러보며 외쳤다.

"협상이 끝났다고 한다. 막리세가에서 범인들과 연기기 수도자까지의 참전만을 수락한다면,

연국 황실의 교체 도전을 허용해준다고 하더구나!"

"오오오! 드디어 어른들께서 협상에 성공하셨구려."

"역시 어른들이십니다."

진씨세가의 수도자들의 눈에 희색이 감돌았고, 내 제자들, 그리고 김영훈 휘하의 무림인들의 눈에 엄청난 감격이 깃들었다.

그러나 나와 김영훈은 각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협상이라.'

그동안 죽었던 수백의 목숨은, 그저 수도가문 상부의 협상 도구에 불과한 것이었다.

김영훈도 같은 같은 심정인 듯 했다.

쓴웃음을 짓던 그가 축기기 수도자에게 질문을 했다.

"그러니까... 교체를 허용했다 함은, 우리가 막리세가의 하부 세력인 연국 황실에 '도전'할 수 있다는 거요?"

"그렇다. 본래는 대규모로 황실을 습격한다면 막리세가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어, 막리세가와 전면전을 벌여야 했겠지.

하지만 그들이 교체를 수락했다는 말은, 우리가 막리가 황실에 대규모로 군대를 꾸려 쳐들어가도 전면전이 없다는 소리이다."

'...황실의 교체도 하부 세력이 사라진 정도인가.'

말투를 들어보아하니, 막리세가에겐 연국이라는 나라 자체도 하부 세력에 불과하고,

그들이 교체되는 것 정도는 용인할 수 있는 선인 듯했다.

"다만, 황조를 교체하는 것도 어쨌든 그들이 순순히 허락해주진 않는다.

그저 도전만을 허용해주는 거고, 그나마도 앞서 말했듯, 우리 측은 이제 축기기 수도자가 개입할 수 없어.

심지어..."

진씨세가의 축기기 수도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얼굴에는 짜증이 가득 퍼져 있었다.

"막리세가 놈들은 황조(皇祖)에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수도자는 전부 개입이 가능하다.

역대 연국의 황제(皇帝)로 지냈던 이들. 그 중에서도 특히..."

"건국황(建國皇)을 말씀하시는 거로군요..."

"그래, 연국 건국황 막리황신! 역대 황제는 모두 연기기 저계 수도자였지만,

그 놈은 가문의 뜻에 따라 황위에 오를 때부터 연기기 후반의 재능 넘치는 수도자였다.

그리고... 그는 황제의 위에서 내려와, 축기기 수도자에 등극했다."

진씨세가 수도자들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 말은 즉슨..."

"그래, 우리는 범인들과 연기기 수도자들로만 놈들에게 도전할 수 있지만,

그 놈들은 막리황신이라는 축기기 수도자가 한 명 있다는 거다."

"이 개 같은 막리세가 놈들! 어떻게 연기기 수도자가 축기기 수도자를 이깁니까! 이..."

그러나, 잠시 짜증이 어렸던 진가의 축기기 수도자가 얼굴을 폈다.

그는 김영훈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하지만 걱정 말아라... 우리에겐 이 놈이 있잖느냐!"

그는 김영훈에게 다가가 김영훈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이 어린 무림인이, 축기기 수도자급의 전력이니... 네 임무가 막중하다!

이번 임무가 끝나면 가문의 어르신들께서, 너를 상위 가원과 혼인시켜 진씨세가의 데릴사위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영광으로 알거라!"

"혼인..."

김영훈은 무언가 생각나는 것이 있는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뭐 그건 나중에 다시 말하고. 내 전력이 축기기급이라는 건 막리세가도 알지 않소? 나중에 또 무어라고 말이 있는 건 아닌지?"

그의 말에, 진씨세가의 축기기 수도자는 씨익 웃었다.

"흐, 네가 최근 들어 위령이니 뭐니 하며 수도공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해도, 네 법력(法力)은 분명 연기기 3, 4성 수준.

그쪽에서 정한 상한선은 분명 연기기 14성 수도자까지였고, 너는 그 기준에 부합하다!

하하하, 제놈들이 아무리 뭐라 딴지를 걸어봤자 어쩔텐가? 흐하하하!"

그는 기분이 좋은 듯 웃으며 말했다.

"비록 우리가 도움을 주지는 못할 테지만, 네 실력 정도라면 막리황신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겠지. 죽일 필요까지도 없다. 막고만 있어도 충분하다!"

설명이 이어졌다.

"연국 황실의 정통은 어찌되었든 현 황제 막리정과, 그 아들 막리현. 이 둘만 사살하는데에 성공하면,

어찌되었든 진씨세가의 승리이다. 역대 황제들은 모두 재능이 없어 축기기에 오르지 못했기에 전부 죽었고.

막리황신도 대외적으로는 죽은 녀석이니, 녀석은 살아있어도 딱히 문제가 없어!

네가 막리황신을 막는 사이, 연기기 수도자들과 범인들이 막리정과 막리현만 죽이면,

진씨세가가 다시 이 나라를 되찾는 게 가능하다!"

축기기 수도자는 흥분한듯, 큰 소리로 외쳤다.

"진(秦)가 황조가 다시 이름을 세울 수 있단 말이다!"

듣자하니, 저 수도자는 본래 진가 황조의 후손이었고, 본래부터 연국의 황조를 되찾기 위해 가장 혈안이 된 자라고 했다.

아무리 수도가문의 하부세력이라지만, 황조(皇祖)가 주는 이름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으니까.

얼마간 그는 진씨세가가 황조를 되찾는 것의 영광을 열변했다.

그런 후 그는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진씨세가 수도자들과 함께 비행법기를 타고 날아갔다.

우리는 영지 바깥으로 나갔고, 나는 조용히 축기기 수도자의 말을 경청하던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약속을, 지킬 때가 왔다."

제자들의 의념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그들은 모두가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를 악물며, 처음으로 이들이 전투에 나설 때 했던 것과 똑같은 부탁을 했다.

"부디, 살아다오."

그리고, 제자들의 반응 역시 똑같았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스승으로서 부탁하겠다. 제발, 살아다오."

"..."

이제는 녀석들을 막을 명분조차 없다.

나는 분명 살아남으면 함께 복수를 해 준다고 내 입으로 약속을 했으니.

"...너희들은 분명 가족들의 원을 갚기 위해 지금까지 살아왔겠지. 그리고 죽기에 망설임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남겨질 이들은 어쩌란 말인거냐... 왜 내 속은 생각하지 않는 거냐."

"...죄송합니다."

그들의 눈빛에 검푸른 의념이 깃들었다.

"스승님의 속은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사부께서는 저희의..."

"속을 모른다는 것이냐? 너희의 감정을 모른다는 것이냐? 내가?"

그때, 우리의 대화를 지켜보던 김영훈이, 내게 다가왔다.

"이 배은망덕한 놈들 같으니... 네놈들 스승이 어떤 감정인 줄은 알고서 막말을 하는 것이야!"

쿠우웅!

그에게서 막대한 기파가 뿜어져 나왔다.

김영훈에게서 뿜어지는 기파에, 제자들 모두가 자리에 쓰러졌다.

"커헉!"

"크어억..."

"끄으윽...!"

"서은현이 뭘 모른다는 거냐! 이 녀석에게서 듣지 않았느냐!"

그가 노한 기색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지난 시간 죽었던 네놈들의 친우들. 아직까지도 그 원(怨)이 전부 풀리지 않은 혼령들.

서은현이 내게 부탁하여, 자신에게 깃들게 하지 않았더냐! 지금 내 아우가 다 늙어가는 것도 그 때문인데 그것을 알고서도 그따위 망발을 입에 담아!

이 건방진 것들, 네놈들이 그러고도..."

문득, 말을 하던 김영훈은 제자들의 의념을 읽고, 이상한 기색을 눈치챘는지 나를 홱 돌아보았다.

"...너, 네 제자들에게 아무 말도 안 한게냐?"

"..."

"...멍청한 놈. 아둔한 놈! 아둔한 놈에 아둔한 제자들이구나!"

그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쾅쾅 두들겼다.

"모두 들어라! 너희의 스승이란 놈은, 너희의 그 비원을, 너희가 죽어서나마 들어주기 위해.

너희들과 똑같은 멍청한 짓을 했다!

혈육이 아님에도 너희 벗들의 혼을 상단전에 받아들여, 지금껏 그들과 함께 막리가 놈들을 베어왔단 말이다!"

김영훈의 누설에, 아이들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그동안 네놈들의 스승이 급격히 늙는 것을 보며 아무 이상도 못 느꼈느냐!

혈육이 아닌 원혼들을, 이백여 명이나 강제로 받아들이는 탓에, 수명이 극단적으로 짧아졌다!

너희의 그 질기고 건방진 비원을 들어주기 위해... 네놈들 스승이 어떤 심정으로 지내왔는지 몰랐단 말이냐!"

그는 대노한 기색으로 소리쳤다.

"이 아둔하고 건방지고 이기적인 놈들 같으니! 네놈들의 한(恨)만 감정이라는 게야? 네놈들 스승이 어떤지는 상관도 않는다는 게냐!"

"...그만하시오, 형님."

"...이 아둔하고 답답한 놈 같으니. 그걸 왜 네놈 혼자서 떠안고 있었다는 말이냐.

누가 칭찬이라도 해 줄줄 알았느냐? 저 아둔하고 이기적인 놈들이 너를 떠받들 줄 알았어?

내가 네 부탁을 들어준 건 너와 네 제자들의 관계를 생각해서였다.

그런데 이게 뭐냐! 지금까지도 그걸 속에 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이, 이..."

길길이 날뛰던 김영훈은, 한숨을 쉬었다.

"후우.... 되었다. 멍청한 놈 같으니. 네들끼리 정리하고 와라. 나는 먼저 출발하겠다."

잠시, 주변은 침묵에 휩싸였다.

나는 얼마간 감정을 정리한 후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첫 사상자인 서른 넷의 수락을 받고 한 일이었다. 그들에게 일일이 허락을 받고,

내 제자들의 혼을 내 상단전에 담았다. 이후로도, 죽은 아이들은 모두 나와 함께했다...

물론 그들의 친지까지는 모두 받아들이기 힘들어도, 최소한 그들만은 모두 죽어서 나와 함께해왔지..."

이전까지는.

그저 죽을 이를 붙잡고, 복수를 갈고닦는 제자들을 답답하게 여겼다.

그러나, 제자들과 똑같이 원혼을 받아들이고 나니, 나는 그제야 아이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는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받는다.

녀석들이 내게서 영향을 받은 것도 있듯이, 나 역시 이들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렇기에 사제(師弟)는 한 묶음으로 불리우는 것이리라.

나는 이제, 마냥 제자들을 막아설수만은 없게 되었다.

그 감정을, 그 가슴에 맺힌 한(恨)을 내 마음으로 이해해버렸으니.

"...이제는, 미력하게나마 너희에게 공감할 수 있다. 다들, 그 안에 품은 한과 고통이 얼마나 큰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그들의 감정을 정면에서 마주하며, 정면에서 공감하며.

나는 내 갈망을 입에 담았다.

"너희가, 살았으면 좋겠다."

내 재능은 비천하디 비천하다.

다른 고수들보다 한없이 유리한 조건에서 삼화취정을 헤쳐나가며.

제자들의 원혼을 받아들여 얼마 없는 재능을 극대화했음에도.

나는 아직까지도 칠정의 마지막.

욕(欲)의 의념을 발견할 수 없었다.

내 바람(欲)은 곧 삶(生).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나는 아직까지도 마지막 의념을 발견하지 못했고.

오기조원에 도달하지 못했으며.

삶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다.

못하고, 못하고, 또 못한 삶이었다.

그러니 부디.

"그 원을 갚지 말라고, 그 한을 잊으라고는 하지 않겠다. 다만..."

너희만이라도.

"부디, 살아다오..."

그 삶(生)을, 살아가다오.

지금껏, 내 말은 전혀 듣지 않았던 제자들이었다.

그러나, 녀석들은 지금에서야 내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반드시, 살겠습니다."

"살아서, 스승님께 인사드리겠습니다...!"

만호를 시작으로, 녀석들이 우르르 내게 엎드렸다.

"살아남겠습니다! 스승님!"

어쩌면, 스승과 제자가 된 지 처음으로.

사제의 마음이 통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최종결전을 앞에 두고 마음을 트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결전일(決戰日)이 다가왔다.

생(生)(7)

결전 당일.

황성 바깥에서의 대기 시간.

나는 책을 한 권 펼쳐들고, 꼼꼼히 읽기 시작했다.

"흠, 그런데 그건 왜 달라고 한 거냐?"

김영훈이 내가 책을 읽는 모습을 보며 의아한듯 물었다.

내가 읽는 서책은 제목이 없었다.

그야, 김영훈이 쓴 서책이었으니 말이었다.

오기조원에 다다른 천하제일인 김영훈이 만들어낸, 수도자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만든 무공, 월수궁무록.

그런 월수궁무록을 다음 회차의 김영훈이 이어받아 한층 진화시킨 조수월무록.

그리고 그런 조수월무록을 전승받은 김영훈이, 조수월무록으로 응용할 수 있는 모든 길을 파헤치며, 그 모든 심득을 적어낸 조수월무경.

그리고 다시 조수월무경을 익힌 김영훈이 6권의 조수월무경을 통합시키고 간략화시킨 조수월무결.

내가 지금 읽고 있는 것은, 이번 생의 김영훈이 조수월무결을 익히고,

또 다시 수도자들과의 끝없는 전투를 통해 다시 한번 진화시킨 조수월무결이었다.

조수월무경과 조수월무결이, 오기조원에서 그 다음의 경지로 넘어가는 방법과 깨달음을 논했다면.

조수월무결을 진화시킨 이 서책은, 오기조원 너머의 경지에서, 그 경지의 극한(極恨)을 보는 것에 대해 기술된 서책이었다.

물론.

'봐도 이해가 안 되는군.'

조수월무결을 또 다시 진화시킨 무학체계인 탓인지, 나는 또 다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이해 되지 않는 것을 붙잡고 끙끙대는 게 눈에 보인 탓인지, 김영훈은 혀를 차며 말했다.

"억지로 이해하려 할 필요 없다. 그건 완성된 무학이 아니야."

"완성된 게 아니라니요?"

"흠, 무학이란 건 전승되는 게 아니냐. 내가 고금제일인이 되었다고 해도, 언젠가는 죽고 스러지겠지. 하지만 내가 남긴 무학이 남음으로써 나 자신이 증명되는 것이야. 그러므로, 무학의 완성은 전승이란 말이지."

그는 내 손에 들린 서책을 보며 혀를 찼다.

"그런데, 그 무학의 최소 입문 조건은 오기조원이야. 일류가 절정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듯이. 절정 초기가 삼화취정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듯이... 오기조원 이하는 그 무학체계를 이해할 수 없어. 그런게 제대로 전승이 될 리가 없으니 미완성인 게지."

"흠, 한 마디로 완성은 됐으나, 입문조건이 너무 극한인지라 미완성이란 겁니까?"

"그래. 그 무학을 이제 삼화취정 정도만 되어도 이해할 수 있게 완화(緩化) 시키는 작업이 필요한데..."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씨익 웃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제 생각에, 그냥 오기조원에 이를 무인이나. 김 형 급의 재능을 가진 이에게 주면 완화도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만."

"흐흐, 은현아. 나 같은 무공 재능은 이전에 천 년. 이후에 천 년. 그 안에 절대로 나올 수 없다. 내가 장담하지. 내 재능은, 차라리 작위적일 정도로 말이 안 되는 수준이다..."

"흠, 그렇긴 하지요."

매 생마다 무학을 진화시키며 다음 경지로 더더욱 빠르게 향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저 재능은 정말로 말도 안되는 것이다.

하나.

'걱정 마시지요. 김 형. 이 무학은, 제가 다음 생의 당신에게 다시 전승해드리겠습니다.'

그의 무학은 굳이 완화시키지 않아도 전승될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니까.

"...그나저나, 한번 이 무학의 이름을 정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흠, 이름이라."

잠시 고민하던 그가 씨익 웃었다.

"수도자를 바라보며(眺修), 결국 무공의 틀을 뛰어넘은(越武) 구결(訣). 그것이 조수월무결이지. 이 무공의 창시자는, 평생을 수도자를 바라만 보다가, 그렇게 끝났을 것이야. 결코 수도자를 넘을 수 없었겠지.

하지만, 나는 조수월무결을 다시 한층 진화시키며, 수도자를 넘어설 가능성을 발견해냈다... 지금의 내 경지라면 축기기 후기 수도자와 힘싸움으로 밀리지 않아! 결단기 수도자 역시 암습하면 상당히 유의미한 부상을 남길 수 있으니..."

그가 허공에 글자를 썼다.

그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강기가 허공을 맑게 수놓았다.

"수도자를 뛰어넘고(越修), 무학의 틀을 뛰어넘어(越武) 도달할 기록(錄)!"

월수월무록(越修越武錄)

그것이, 새로 진화한 무학서의 이름이었다.

'월수월무록...'

마치, 월수궁무록과 조수월무록을 합친 듯한 이름.

나는 어쩐지 그 이름을 보며, 1, 2회차의 영훈 형님을 떠올렸다.

그들이 이루지 못한 비원이, 천천히 완성되어가고 있다.

나는 찬찬히 웃으며, 전부 읽은 월수월무록을 품에 집어넣었다.

구결을 외우는 데엔 성공했으니, 또 다시 전승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오늘 설령 죽더라도.

"갑시다, 김 형."

"그래, 슬슬 시간이군."

오늘, 연국의 황조(皇祖)가 바뀔 것이다.

파아아앗!

서경성(西京城) 상공.

그곳에서 푸른 빛과 붉은 빛이 번뜩였다.

진씨세가와 막리세가의 협의가 완전히 끝났다는 뜻.

'이제 진입하기만 하면 된다.'

번쩍!

서경성 동문, 서문, 남문, 북문.

사방문 방향에서 청색의 빛이 터져나왔다.

동시에 서경성 남동, 서남, 북서, 동북 방향에서도 적색의 빛이 터져나왔다.

막리세가와 진씨세가의 축기기 수도자들이 내는 빛.

그 빛은 서경성의 상공에서 얽히고설키더니, 서경성 전체에 법술(法術)의 영향력을 드리웠다.

쿠구구구-

두 수도가문이 합의해서 펼친, 수도자들의 결계가 성을 뒤덮었다.

그와 동시에, 서경성을 드나들던 일반 행인들이 모두 비틀거리며 쓰러지기 시작했다.

일류 중기 이하의 무인은 모조리 정신을 잃고 길가에 드러누웠으며, 일류 후기의 무인 정도만이 각자 병장기를 잡고 결계의 영향에 간신히 저항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검신합일 등의 집중을 잠시라도 해제하면 그대로 결계의 영향력에 잠식되어 쓰러지고는 했다.

이제 서경성 내에서 의식을 가진 것은, 의념의 세계에 진입할 수 있는 절정경 고수들뿐.

그마저도 절정경에 든지 얼마 되지 않아, 상시 의념의 세계에서 활동할 수 없는 무인은 의념의 세계에서 활동할 집중력이 모두 사라지면 다시 기절할 터였다.

'무시무시하군.'

수도자들의 무서움은 단순히 개개인의 강함이 아니었다.

그들이 모여서 펼치는 진법과 신통!

성(城) 하나를 한순간에 장악할 수 있는 법진을 축기기 수도자 단 여덟 명이서 펼친 것이었다.

그마저도 진씨세가와 막리세가의 수도자들이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일부러

8명이 펼친 것이지, 실상은 축기기 수도자 4명만 있어도 이 진을 펼치는 게 가능하다고 한다.

'거기에 절정경 이하는 저항조차 제대로 못할 정도이니, 범인의 군대는 아무리 모여도 수도자들을 이길 수 없다.'

이러니, 저들이 범인들을 벌레 취급하는 것일 터.

우리가 아무리 외쳐봤자 수도자들이 인간 취급을 하지 않으며, 들은 채도 하지 않는 이유일 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본적인 인간의 도리가 있지 않은가.

인간이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도리가 있지 않은가.

나는 막리세가의 만행을 떠올리며, 이를 부득 갈았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네놈들을 막을 것이다.'

타닷!

결계가 펼쳐짐과 동시에, 나는 황성 쪽으로 신법을 펼쳤다.

동시에 서경성 곳곳에서 잠복하던 내 제자들과 김영훈의 추종자들 역시 병장기를 집어들고 나섰다.

또한, 결계 너머로 적포를 입은, 100여명의 진씨세가의 연기기 수도자들이 비행법기를 타고 날아오고 있었다.

우웅!

결계가 펼쳐진 서경성 안쪽.

그 안쪽의 중심부, 황성(皇城)의 주변으로, 황궁을 뒤덮는 짙푸른 결계가 펼쳐진다.

한 눈에 보기에도 두꺼워보이는 결계진.

그 안쪽으로 청포를 입은 막리세가의 수도자들이 법결을 맺으며 진법을 강화하고, 법술을 펼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견고해 보이는 수성(守城)!

그러나, 김영훈이 날아올랐다.

파앙, 파앙!

그가 허공을 밟고 날아오르며 손을 뻗는다.

"모두, 진입을 준비하라!"

그의 목소리가 서경성을 뒤덮는 듯 했다.

허공에 뜬 김영훈이, 나직하게 장심(掌深)을 뻗는다.

그의 장심에서 동그란 환(丸)이 흘러나왔다.

'저것이...'

나는 그가 이룩한 경지를 눈에 담았다.

그의 손 위로 떠오른 강환(罡丸)이, 환한 빛을 내뿜는다.

그가 이번 생애에 또 다시 개척한 경지.

월수월무록을 쓴 심득!

빛의 환이, 세 갈래로 쪼개졌다.

세 개의 강환!

그러나, 세 개의 강환은 김영훈을 주변으로 공전하는 듯 하더니, 또 다시 세 개로 쪼개졌다.

아홉 개의 강환!

아홉 강환이 김영훈의 등 뒤로 도열했다.

직후, 강환들은 김영훈의 앞으로 하나, 그의 양 옆으로 네 개가 늘어섰다.

꽈과과과광!

아홉 개의 빛이 황궁을 덮은 진법에 떨어졌다.

푸른 결계진에 아홉 개의 바람구멍이 뚫렸다.

"진입!!"

촤라락!

진씨세가의 연기기 수도자들이 부적을 날리자, 부적들은 결계의 바람구멍에 날아가 붙었고, 결계의 수복을 막아냈다.

김영훈의 일격(一擊)에 이만큼의 구멍이 생길줄은 몰랐던지, 막리세가의 수도자들이 당황하는 것이 눈에 띌만큼 보였다.

타앗!

나는 산군월악비를 펼치며 날듯이 황궁 외벽을 타고 올라가, 김영훈이 뚫어놓은 구멍으로 들어갔다.

"범인 놈이 들어왔다! 막..."

단맥도, 산바람!

푸콱!

강기를 담은 내 찌르기가, 막 소리치려는 막리세가 수도자의 입을 꿰뚫고 그의 연수에 바람구멍을 내 놓았다.

단악검법, 구 초.

'산수화(山水畵).'

콰과과광!

검강(劍罡)이 실린 내 검이 사방팔방으로 난무된다.

대각선으로 그저 마구 흩뿌려지는 것 같았으나, 하나하나가 모두 최적의 동선!

최적의 동선으로 그어진 일검 일검이 연기기 저계 수도자들의 방어법술을 그대로 박살내고, 그들의 몸을 찢어발겼다.

황궁 외벽에 생긴 한 쪽의 구멍.

내가 있는 곳에, 삽시간에 혈무(血霧)가 일었다.

"크윽, 최상승 무림인이다! 모두 강시를 앞세우고 후방에서 법술을 준비해라!"

키에엑, 키에에엑!

시커먼 강시들이 시독(屍毒)을 흩뿌리며 내게 달려들었다.

이 초, 입산(入山)

십사 초, 기산심천(氣山心天)

연계기(連繫技)

기산입로(氣山入路)!

부웅!

하단세로 전환하며, 경맥을 열어젖혀 강기의 폭을 넓히며 그대로 넓게 베어간다.

슈콰광!

일초(一招)에, 사방에서 달려들던 강시들의 다리가 잘려나가, 쓰러진다.

'심산(深山). 등맥(登脈).'

산군월악비를 펼치며, 후방에서 진언을 외던 수도자의 품으로 들어가, 그대로 올려벤다.

콰드득!

내 검강이 수도자의 방어법술을 그대로 파고들며, 수도자의 육신을 대각선으로 쪼개버렸다.

"어, 어어...이, 이 범인 따위가..!"

당황하던 다른 수도자들이 무언가 법결을 썼다.

촤아악!

피유웅!

쿠우우우-

수구(水球)와 풍인(風刃), 음환(陰環)의 법술들이 내게 각기 다른 방향에서 쏘아져온다.

'유곡(幽谷).'

나는 유곡에 더불어 조수월무록의 구결을 운용하며, 법술들의 안쪽에서 느껴지는 의념을 그대로 파고 들어가, 법술들의 힘의 방향을 비틀었다.

한 바퀴를 그대로 회전하며, 세 가지의 법술들을 모조리 무화(無和)시킨다.

법술들은 내 옷깃조차 스치지 못했다.

"무, 무슨..."

'괴암(塊巖).'

붕, 붕, 붕!

콰가가각!

나는 그 자리에서 회전하며, 당황하는 수도자들에게 원형의 검강을 쏘아냈다.

채 다음 법술을 사용할 틈도 없이, 수도자들은 방어 법술이 으스러진 채 내 검강에 휘말려 갈려나갔다.

사방으로 육편이 비산하며 혈향이 코를 찔렀다.

내 엄청난 소란에, 수도자들의 이목이 전부 내 쪽으로 쏠렸다.

"저 무림인부터 막아라!"

"강시를 전부 투입해!"

"쫓아내라!"

수백 마리는 될 법한 강시군단이, 시독을 풀풀 풍기며 달려든다.

그리고, 내 뒤쪽의 구멍으로 다른 이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파바바밧!

314명의 제자들이 각자 병장기를 들고, 내 뒤쪽으로 도열한다.

"정리해라. 나는 안쪽에 먼저 들어가 있으마."

나는 짧게 말한 후, 외벽 아래로 향했다.

만호를 필두로 한 제자들 역시 짧게 고개를 끄덕인 후, 강시 무리와 부딪혔다.

타앗!

나는 외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서늘한 바람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간다.

그리고.

파아앙!

파공음이 터지며 한 자루의 투창(投槍)이 내게 쏘아져 왔다.

'피하긴 애매하고, 허공에서 받아치면 내가 조금 손해다.'

빠른 판단.

그리고 찰나, 나는 검을 외벽에 휘둘렀다.

콰각!

검사를 뿜어 외벽에 검을 박아넣은 후, 박아넣은 검의 위로 날듯이 올라가 검을 지지대로 삼고, 그 자리에서 다시 뛰어오른다.

그런 후, 다리에 내공을 불어넣고 회전하여 창을 올려찼다.

카아앙!

최적의 동선으로 이뤄진 반격에 창이 다시 퉁겨나갔고, 나는 빠르게 외벽에서 검을 뽑아 천근추를 사용하여 바닥으로 떨어지며 착지했다.

그리고, 내게 창을 던진 이를 비롯해, 주변으로 속속들이 절정고수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호오, 다들 오랜만이군."

"닥쳐라, 역도 놈! 우리는 너 같은 놈을 본 적이 없다!"

암중호위대 시절 보았던 면면들이었다.

황성 외곽수비대 대주와 부대주, 금군 제독과 부주들, 연의위 총사와 좌하 합관들.

오며가며 가끔 보았던 얼굴들.

물론 암중호위대는 그림자 속에 숨어있어야 했기에, 서로가 서로를 소 닭 보듯 한 밋밋한 사이였으나.

'죽이기는 조금 껄끄럽지.'

명령받은 대로 하는 저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하나같이 그저 충(忠)을 교육받고 행하는 것 뿐.

"걱정 마시지. 죽이지는 않을 테니."

수도자들이야 방어법술 때문에 힘 조절이 되지 않아, 죽이지 않는 쪽이 어렵지만.

이들은 훨씬 쉽다.

피잉!

투괴암기술, 직사(直蛇)!

빠르게 날아간 암기가 외곽수비대 대주의 어깨에 꽂혔다.

독을 발라놓았으니 얼마 후 마비될 터.

나는 품에서 해독단을 꺼내 입에 문 후, 주머니에 든 독분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투괴암기술, 환무사(幻霧蛇)!

독분 너머로 몇 개의 암기가 정확하게 수비대 부대주와 연의위 합관의 몸을 스쳤다.

나는 빠르게 검 끝에 독을 묻힌 후, 심산의 초식으로 연의위 총사와 금군 제독의 품으로 파고들어 그들의 피부를 살짝 베었다.

남은 것은 금군 부주들.

투괴암기술, 쌍살사(雙殺蛇)

슈칵, 슈칵!

두 자루의 암기가 서로 다른 궤도로 그들을 향해 날아갔고, 그 찰나 기수식을 다시 잡았다.

단맥도, 산바람!

피잉!

극속의 찌르기가 암기를 막는 부주들을 찔러들어갔고, 검끝에 맺힌 독이 주입당한 부주들은 곧이어 그 자리에 쓰러졌다.

"전부 즉사독은 아니니, 추후에 황궁 의당에서 해독해줄 수 있을 거요. 황실 어의가 나보다 조금 나으니까 배합은 알아서 해석하겠지."

나는 거품을 물며 자리에 쓰러져 꿈틀거리는 절정고수들을 뒤로하고, 주변의 건물 배치를 살폈다.

'황제가 비상시 숨는 대피소는 용엄전(龍奄殿). 대외적으로는 그곳이지.'

하지만 황제를 지근거리에서 수호했던, 암중호위대 부대주인 나는 알고 있었다.

'실제로 대피하는 장소는 근경각(瑾景閣). 근경각의 위치가 황성 서북쪽 장원 너머였었지...'

암중호위대 시절에는, 수도자인 황제를 왜 호위해야하는지도 몰랐고.

왜 저런 대피소가 존재하는지도 몰랐었다.

어차피 범인들의 반역이나 군대는 상대도 되지 않을 터인데 어째서 굳이 저런 대피소가 필요하단 말인가.

하지만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다른 수도가문이 협의하에 황조를 찬탈하러 올 때를 대비한 장소인거로군.'

키에에에엑!

외벽 위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많아보이는 강시떼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족히 수백 마리는 되어보이는 수.

딱히 조종하는 수도자는 없는 것으로 보아, 그냥 침입자들의 발을 묶기 위해 대거 풀어놓은 듯 했다.

뿌득-

저 강시들을 만들기 위해, 몇 명이나 되는 인간이 희생되었단 말인가.

나는 이를 악물며 검을 잡았다.

'이제 슬슬 됐을 텐데...'

타다닷!

생각한 순간, 외벽 아래로 내 제자들이 뛰어내렸다.

"사상자는?"

"전무(全無)."

"고맙다. 전부 정리하고 온 건가?"

"강시들만을 정리하고, 남은 막리가 수도자들은 영훈 님이 데려온 무림고수들과 진가의 수도자들이 교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좋다, 이제부터 전원 날 따라온다. 황제가 있는 곳으로 진입한다."

"옛!"

내 말에, 제자들은 흥분한 기색으로 외쳤다.

"우선 강시떼를 뚫는다. 어차피 발을 묶기 위한 놈들이니, 전부 해치울 필요는 없다. 전원, 쐐기대형!"

나를 선두로, 뒤쪽으로 제자들이 삼각형의 형태로 늘어선다.

"돌파한다!"

"예!!!!!"

절정고수쯤 되면, 그 내공으로 인해 그 개개인이 하나하나가 기마병과 동급의 전력이다.

수가 적을 뿐, 위력과 속도는 전혀 뒤지지 않는다.

나는 제자들이 따라올 수 있게 달려나가며 검강을 불어넣었다.

단악검, 사 초.

"유릉(流陵)!"

훈련을 할 때 연습했던 것과 같이 내가 초식명을 외치자, 제자들은 각기 적합한 태세를 취하며 연계하여 자세를 잡았다.

일반적인 진형은 무기를 통일하는 것이 맞으나, 의념을 읽어내는 절정고수들에게 그런 것은 큰 흠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각자가 각자의 부족한 부분을 메우며 돌파한다!

쿠과광!

본디 간결하게 찌르는 목적의 초식이었으나, 돌파력과 합쳐지자 전차가 충돌한 것마냥 폭음을 내며 눈 앞의 강시를 터트려 버렸다.

기산심천!

나는 다시금 경맥을 크게 열어젖히며 검강을 더욱 더 끌어올렸다.

쿠구구구구!

선두에서 강시들을 그대로 갈아버리며 저 앞을 향해 돌파한다.

좌우익의 제자들 역시 각자 병장기에 기를 불어넣으며 강시들을 떨쳐내고 돌파했다.

시커먼 강시떼들의 사이로 수백의 절정고수들이 파고들어가며 길을 열었다.

'끝이다!'

강시들의 파도를 찢어가르고 나아가자, 저 앞으로 황궁의 구역을 나누는 담벼락이 보였다.

단악검, 능곡지변(陵谷之變)!

검기를 날려, 주변의 지형과 함께 담벼락을 통채로 무너뜨린 후, 나는 선봉에 서서 그대로 담벼락을 통과했다.

좌우익의 제자들이 일순간 쐐기형태에서 서로 가까워지며 ㅣ 자 형태로 진세를 잠시 변형한다.

내가 뚫어낸 구멍으로 제자들이 줄줄이 꼬리처럼 따라들어온다.

담벼락을 뚫고 들어가자, 황실의 정원인 구화원(構花園)이 눈에 띄었다.

'이 앞으론 진법이 펼쳐져 있다.'

물론, 다행히도 그리 강한 진법은 아니었다.

거기에 더불어, 나는 진법의 생문을 전부 알고 있다.

"전원 내 뒤를 정확히 따라오도록!"

나는 구하원 곳곳에 펼쳐진 진법의 생문들을 떠올리며 이곳저곳을 밟아가며 진법을 풀어헤치고 나아갔다.

제자들 역시 내 뒤를 정확히 따라왔고, 이지가 없는 강시들은 제멋대로 구화원에 발을 들였으나 진법의 흐름에 따라 안쪽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바깥을 빙빙 돌 뿐이었다.

구화원의 끝자락.

다시금 담장이 보인다.

강시들은 이미 전부 따돌렸기에, 나는 급하게 담벼락을 부수는 대신 산군월악비를 펼쳐 담벼락으로 뛰어올라가, 그 너머에 착지했다.

사람 하나 없이 조용한 작은 누각이, 작은 호수 위에 떠 있었다.

내 뒤쪽으로 제자들 역시 밀려들어왔다.

"...스승님, 아무도 없습니다만..."

나는 말없이 검강을 끌어올려, 누각을 향해 날렸다.

콰아아앙!

동시에, 내 검강은 누각의 주위에 펼쳐진 투명한 벽에 부딪혀 스러져 버렸다.

"이곳이 맞다! 계화, 신호탄을 쏴라!"

내 말이 끝나기도 전, 뒤쪽에서 치직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신호탄이 하늘로 쏘아졌다.

피이잉- 퍼벙!

오색의 구름이 하늘에서 폭발한다.

그와 동시에, 적포를 입은 진씨세가의 수도자 다섯 정도가 비행법기를 타고 빠르게 이곳으로 날아왔다.

"이곳에 황제가 있소!"

"잘했다! 진을 해제하겠다!"

진씨세가의 연기기 수도자들은 각기 비행법기를 타고 누각의 다섯 방위를 점한 후, 각기 법결을 맺었다.

번쩍!

새하얀 빛이 터지더니, 보이지 않던 벽이 깨져나가고, 아무도 없던 누각 위로 황제와 황실근위대가 생겨나 있었다.

누각 위에는 청포를 입은 막리세가의 수도자들 수십 명이 대기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막리정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어떻게 찾은 거냐! 근경각은 근위대와 암중호위대만 아는 곳인데!"

퍼어엉!

막리정이 고함을 칠 때, 진법을 해제한 진가의 수도자 중 하나가 다시 신호탄을 터트린다.

이번에는 백색의 연기구름.

황제를 확실히 발견했다는 신호였다.

그와 동시에.

파바바밧!

외벽에서 막리세가의 수도자들을 밀어붙이던 전력 중 수십의 연기기 수도자들이 다시 이쪽으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재빠르게 누각이 있는 호수로 날아온 진씨세가의 수도자들이 각기 방위에 자리를 잡는다.

동시에 빛이 터져나오며, 그들이 진법을 이루었다.

"열(熱)!"

화르르르르!

허공에 십 장 크기의 화구(火球)가 생겨난다.

"거(去)!"

동시에, 진씨세가의 수도진으로 만들어진 화염구가 누각을 향해 떨어져내렸다.

꾸구구구구!

모습을 보이지 않게하던 환영진 말고도, 다른 결계진 역시 수십 개가 중첩되어 있는 듯, 누각을 감싼 청구(靑球) 형태의 결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치이이이-

그러나 진씨세가의 수도진이 만들어낸 화염구에, 누각 주위에 있던 호숫물이 모조리 증발해 날아가버렸다.

삽시간에 주변이 수증기로 휩싸인다.

그리고, 수증기 너머로 푸른 풍인(風人)과 음기(陰氣)의 법술들이 하늘에 떠 있는 진씨세가의 수도자들을 향해 쏘아져갔다.

결계 안쪽에 있던 막리세가의 수도자들이 결계 너머로 나서기 시작한다.

한 진씨세가의 수도자가 법결을 맺으며 내게 외쳤다.

"이봐, 범인! 우리가 수도자들을 상대할테니, 너희들은 범인 호위들을 뚫어라! 방금의 공격으로 결계도 처참할만큼 상했으니 너희의 검망으로도 뚫을 수 있을 것이야!"

"알겠소!"

나는 진씨세가의 수도자에게 답한 후, 호숫물이 말라버린 호수로 뛰어들어 누각으로 향했다.

그리고, 누각에 가까이 접근하려던 순간.

파앙!

누각 밑의 그림자에서 한 자루의 극(戟)이 뻗어나왔다.

카앙!

나는 극을 쳐낸 후, 상대를 보며 씨익 웃었다.

"어좌 암중호위대 대주. 도호극(屠虎戟) 곽일국. 오랜만이외다."

생(生)(8)

대주, 곽일국이 눈매를 꿈틀거렸다.

"나를 아나?"

"알다마다. 본인은 무한투괴(無恨鬪怪) 서은현이라 하오. 잘 부탁드리오."

내가 갑자기 정중하게 포권을 하며 인사를 하자, 그는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이상하군. 난 너 같은 놈은 모른다. 무림에 있을 때는 물론이고, 첩보부에서도 무한투괴라는 무림인은 들어본 적 없고."

"하하하, 당연하지. 이번 생에선 한 번도 무림활동을 한 적이 없으니까."

내 말에, 대주는 무슨 개소리를 하느냐는 듯 나를 해괴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와중에 그로부터 붉은 실선이 뻗어나와 내 목을 노린다.

하지만 나는 자색의 의념으로 그의 수를 모두 읽어내며, 그의 초수를 모조리 쳐내고 의념의 간합으로 역공을 가했다.

그는 나와의 간합싸움에 전력을 다하는 듯 했고, 나는 뒤쪽에 있던 제자들에게 말했다.

"봐라, 이게 암중호위대의 실력이다. 너희 중 일대일로 나와 간합싸움이 성립이라도 하는 녀석은 없지 않느냐."

"...과연."

제자들의 표정에 긴장감이 깃들었다.

안 그래도 녀석들이 살행을 가려 할 때마다, 내가 암중호위대와 끝없이 비교한 탓에, 제자들의 뇌리에 어좌 암중호위대라는 이름은 상당히 크게 박혀있을 터.

눈 앞의 대주는 계속해서 나와의 간합싸움에서 밀리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고, 나는 여유롭게 검을 쥐며 설명을 이어갔다.

"암중호위대 전원이 너희와 일대일로 붙으면, 너희의 필패다. 하나같이 절정 중기 완숙에 이르러 기사(氣絲)를 자유자재로 다루지. 기사를 못 다루는 녀석도 있지만, 그런 녀석은 오히려 나처럼 독을 다루거나 더 음험한 수를 쓰는 것들이니 훨씬 위험하다. 그리고, 황실근위대 역시 전원이 암중호위대화 비슷한 실력이지. 둘의 차이가 있다면 근위대는 황제를 '호위'하는 것을 집중적으로 훈련받았고, 암중호위대는 황제를 덮치는 자객을 '사살'하는 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았다는 거지."

나는 누각의 위에서 철벽같은 태세로 우리를 경계하는 황실근위대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너희는 황실근위대를 상대해라. 하나하나가 너희보다 실력은 위이지만 월수진과 너희 쪽수로 밀어붙이면 충분히 뚫을 수 있을 거다. 거기에 익힌 무공들 자체가 방어적이니 너희가 조금 더 안전하겠지.

모두, 가서 황실근위대를 뚫고 황제를 죽여, 너희 비원을 이뤄라!"

"에!!!!!"

내 제자들이 일제히, 우렁차게 대답했다.

시뻘건 분노의 의념이 제자들에게서 피어오른다.

나는 나와 간합을 겨루는 곽일국과, 누각의 그림자 아래에 숨어서 곽일국을 도와 나를 견제하는 암중호위대 전체를 보며 말했다.

"암중호위대는, 내가 맡지."

제자들이 나를 넘어, 누각으로 뛰어들어갔다.

황실근위대가 병장기를 잡고 합격진을 펼쳤고, 황제가 합격진의 중심에서 무언가 법술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끊임없이 의념을 쏘아내며 암중호위대 전체를 견제했다.

"...삼, 화취정. 그것도... 삼화취정 후반의 고수로군..."

나와 의념을 겨루던 곽일국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대단하군. 후반인 것까지 알다니... 역시 경계에 진입한 거요?"

대주는 현재 절정 중기와 후기 사이의 경계에 서 있었다.

아마 미약하게 세 번째 색을 볼락 말락 하는 경계일 것이다.

"당신같은, 나이에, 그 경지에 오른, 천재가... 어째서 역도들의 편에, 선 것이오..! 현재의 연국은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건만...!"

대주가 식은땀을 흘리며 극을 잡아들었다.

나는 헛웃음을 토해냈다.

"태평성대라... 확실히 적당히 사는 양민층에게는 이만한 태평성대가 없겠지. 하지만, 당신 정도라면 알고 있을 텐데 말이외다... 연국의 막리황조가 수도자 일족이며, 그들이 곳곳에서 암약하며 어떤 짓을 벌이는지를..."

"...알고 있소. 하지만, 당신은 전 황조인 진씨황조와 손을 잡았더군. 그들이라고 다를 것 같소! 그들 역시 수도자이며, 우리 범인들을..."

"도구로밖에 보지 않지."

나는 선선히 그 사실을 인정했다.

"대주 말이 맞소. 나만큼 그 사실을 뼈져리게 아는 사람이 없지."

지난 삶에서도 들었던 그의 생각.

나는 이제 그의 말을 완전히 이해했다.

진씨세가도 크게 다르진 않다.

다만...

"하나, 언제 잡아먹힐지 모르는 가축보다는... 도구가, 아주 조금 낫다고 생각했을 뿐이오."

막리세가는, 더 이상 연국의 황조로 앉아있으면 안 된다.

최악이 아닌 차악.

그것일 뿐.

"물론 어차피 우리 견해 차는 좁혀지지 않겠지. 덤비시오."

나는 의념의 간합 사이에 작은 빈틈을 보여주었다.

암중호위대는 그것이 함정인 것을 알면서도, 이를 악물고 내게 달려들었다.

"암중호위대의 저력을 얕보지 마시오!"

대주의 극이 내게 짓쳐들어오고, 동시에 참마도를 든 대원이 내 발목을 노린다.

등 뒤를 향해서 쌍수대검을 쥔 대원이 나를 덮친다.

분명 이들은 엄청난 전력.

나는 이들과 합격하여 삼화취정의 고수마저 격살한 기억도 있었다.

아마 일반적인 삼화취정의 고수라면 암중호위대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터.

하나, 나는 삼화취정 후반에 올랐으며.

파앗!

월수궁무록을 익혔다.

나는 찰나간 그들의 인식을 베어내고, 합격진 속에서 빠져나왔다.

철컥

나는 난전 속에서, 천천히 검집 속으로 검을 집어넣었다.

이리 만났으나, 어찌되었든 이들은 지난 삶에서 동료였던 이들.

물론 지난 삶의 이들과 지금의 이들은 전혀 다른 사람이다.

그러나, 심정적으로 이들을 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죽이진 않겠소.'

삽시간에 내 검이 대원들의 요혈을 짚었다.

그런 후 마비산을 흩뿌려 전부 제압한 후, 대주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며 검을 내리쳤다.

"크윽...!"

쿠웅!

그의 극과 내 검이 부딪히며 기파가 뿜어진다.

순식간에 대원들이 제압당한 것을 알자, 대주의 눈에 절망이 깃들었다.

"당신들에겐 감정 없소. 그저 충의를 다할 뿐이니."

카앙, 카앙!

나는 검집을 쥔 채로 그를 몰아붙이며 담담히 말했다.

"그러니 죽이지 않겠소."

"크...으아아아아!"

그의 의념이 더더욱 빨리 흐른다.

나는 그와 의념을 마주 대며, 천천히 합을 마주했다.

그와 비슷한 초식으로, 그와 비슷한 자세로, 그와 비슷한 의념을 주고받는다.

무기와 세세한 무공을 제외하면 마치 거울처럼 보이는 형국!

대주는 내가 자신을 가지고 논다고 생각했는지, 얼굴이 점차 시뻘개졌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의 의념이 변화한다.

제대로 내 궤적을 좇지 못했던 그의 의념이, 내 의념과 얽히기 시작한다.

섞여든다.

어느덧, 수치에 달아올랐던 그의 눈빛에 점차 홀황(惚慌)이 깃들기 시작했다.

인도해준다.

티잉!

내 검과 그의 극이 맞부딪혔다.

동시에 그의 눈에 정광(正光)이 깃들었다.

그가, 세 번째 색으로 진입했다.

"이것이..."

전투중인것도 잊은 채, 그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읇조릴 때였다.

콰과과과광!!!

어마어마한 충격파와 폭음(爆音)이 퍼져나갔다.

그 광대한 기파에, 그의 간합이 어그러졌다.

결국 그와 평행하게 검을 마주하던 내 검집이 그의 간합을 바로 파고들어가 그의 목을 강타했다.

"커억!"

어느 정도 힘을 조절한 내 일검에, 대주는 결국 그 자리에 쓰러져 기절해 버렸다.

'어쨌든 세 번째에 도달했으니, 깨어나서 깨달음을 정리하면 삼화취정에 오르겠지.'

시간이 돌았기에, 동일인은 아니었으나.

내 옛 상사였던 이에게 하는 최대한의 예우였다.

나는 기절한 대주를 놔두고, 폭음이 울린 진원지를 바라보았다.

회오리!

거대한 회오리가, 저 멀리에서 전각 하나를 통채로 들어올리며 부스러트리고 있다.

누각 위에서 내 제자들에게 맞서던 황실근위대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태자 전하가 계신 곳일진데! 크으윽!"

'저 위치는, 용엄전일텐데. 황제는 이곳으로 대피하고 황태자 녀석이 그 자리에 있었나 보군. 막리정이 자기 아들을 미끼로 쓴 건가? 아니, 한데...'

나는 눈쌀을 찌푸렸다.

'저 회오리의 위력은, 절대 막리현 놈의 법술이 아닌데?'

회오리의 중앙, 그 안쪽에서 거뭇거뭇한 그림자가 보였다.

가공할 존재감이다.

나는 회오리의 정중앙에 있는 자의 의식영역의 크기를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저 자가... 연국의 건국황. 축기기에 올랐다는 막리세가의 수도자...'

막리황신!

그리고, 그 회오리의 주변으로 누군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김영훈이었다.

"저건..."

김영훈은 한쪽 손에 뭔가를 쥐고 있었다.

안력을 높여서 보니, 누군가의 수급인 듯 했다.

'정황상 황태자 막리현의 수급일 터.'

막리정이 암중호위대와 근위대, 그리고 막리세가의 인원들을 데리고 근경각에 몰래 숨어들고.

자기 아들을 미끼로 사용했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하나, 착각이었던 모양이었다.

'아들을 미끼로 용엄전에 데려다 놓은 게 아니군. 오히려, 최강의 호위를 붙여놓았던 거야.'

하지만 저 꼴이다.

애초에 김영훈이 도달한 월수월무록의 깨달음은, 수도자에게서의 도주와 암습에 특화된 월수궁무록에게서 출발한 무학.

막리황신은 김영훈이 황태자의 수급을 치는 순간에야 그의 접근을 알았으리라.

쿠오오오오!

회오리에서 수많은 풍탄과 풍인이 김영훈에게 날아든다.

풍탄 하나에 전각의 한 개 층이 통채로 박살난다.

괴물같은 축기기 수도자의 전력!

하지만...

콰앙! 콰앙, 콰앙!

김영훈의 등 뒤에 떠오른 아홉개의 강환이 축기기 수도자에게 날아간다.

퍼어어엉!

굉음과 함께 강환이 회오리의 일부분을 꿰뚫고, 전각 하나를 통채로 무너뜨린다.

둘의 싸움에 황성이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크윽, 뭐냐! 저 괴물같은 놈은, 진씨세가 이 더러운 놈들! 협정을 어기고 축기기 수도자를 몰래 결계 내로 들여보냈구나!"

막리세가의 수도자들이 분통을 터트리며 법결을 맺었다.

그 말에 진씨세가 수도자들은 피식피식 웃을 뿐,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나, 누각의 중심에서 법술을 펼치는 황제 막리정이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 다들 무슨 걱정을 하는 건가! 선조께서는 최근의 수련에서 성취를 얻어, 정(井)의 단계에 오르셨다! 결단기조차 코앞일진데, 근본도 모르는 수도자 하나와 싸워서 질 것 같으냐!"

그 말에 진씨세가 수도자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벌써 그 단계라니!"

"축기기 대원만...!"

"과연 버틸 수 있을런지."

그러나 나는 다른 이들과 달리, 가벼운 마음으로 누각에 올라섰다.

'월수월무록은 커녕, 김영훈은 월수궁무록을 만들 당시에 이미 축기 후기 수도자를 죽이고, 결단기 수도자의 한쪽 손을 잘라냈다.'

절대 패할 일은 없다.

누각 안쪽으로는 공간을 비튼 법술이 적용된 모양인지, 밖에서 볼 때보다 안이 수십 배는 넓었다.

그 중앙에서, 황제가 법결을 맺고 근위병들의 뒤쪽에서 법술을 사용하고 있었으며,

근위대들이 사력을 다해 제자들의 합격진을 막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쪽수에서 압도적인 차이가 나며, 더욱이 제자들이 펼치는 것은 월수진!

절대 이길 수 없다!

"빨리 끝내도록 하지."

나 역시 검강을 뽑아들고 진형의 안으로 들어서려 할 때였다.

콰과과광!

또 다시 굉음이 울리며, 누각의 지붕이 통채로 뜯겨나갔다.

'뭐지?'

갑작스러운 돌발상황에 당황할 때였다.

촤르륵!

왠 핏물이 하늘에서 날아와, 떨어졌다.

근위대와 제자들은 무슨 상황인가 감을 잡지 못했으나, 자리에 있던 수도자들과, 나는 경악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핏줄기에 들어있는 의념!

그 안에 깃든 가공할 의식!

저건, 방금 전까지 김영훈과 싸우던 축기기 수도자였다.

그의 영혼, 원신(原神)이 깃들어 있는 핏줄기였다!

그 얼마 안 되는 시간에, 김영훈이 축기 대원만이라는 막리황신을 죽여버린 것이었다!

건국황, 막리황신의 원신이 깃든 핏줄기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막리정에게로 쏘아져 내려갔다.

황제의 얼굴에 경악이 어리기 시작했다.

"서, 선조! 아, 안됩니다! 선조님! 사, 살려주십시오!"

"....!"

"으, 으아아악! 선조님! 제발, 제발!"

철퍽!

막리황신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소리쳤으나, 핏줄기는 아랑곳 않고, 그의 얼굴에 떨어졌다.

"끄아아아아아아악!"

얼마간 막리정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그리고 잠시 후.

"....!"

오싹!

나는 목청이 터져라 소리쳤다.

"전원!!! 물러나라!"

다행히도 제자들은 본능적인 공포심에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막리정을 지키던 황실근위대는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 황제의 몸을 차지한 건국황의 마수를 피하지 못했다.

촤아아악!

"크아아아악!"

"끄아악..."

황실근위대의 생명력과 정혈이, 막리정.

아니, 막리정의 몸을 차지한 막리황신에게 빨려들어간다.

우우웅-

거대한 식(識)이 누각 전체를 메운다.

'위험하다!'

막리황신이 손을 뻗는다.

그의 손길은 이 자리에서 가장 수준이 높은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때였다.

누각 바깥에서 한 번의 섬광이 터졌다.

콰아아앙!

나를 가리키며 법력을 끌어올리던 막리황신이, 황급히 누각 바깥으로 손을 뻗으며 방어법술을 펼쳤다.

광풍이 불어오며, 막리황신이 친 방어법술이 유릿장처럼 깨져나가고, 공간법술이 걸린 누각의 절반이 뜯겨나갔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다가오는 김영훈을 볼 수 있었다.

"김 형...!"

내 안색이 창백해졌다.

김영훈은 전신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고, 허리춤의 살이 뭉텅이로 뜯겨나간 상태였다.

쿨럭, 쿨럭!

거기에 내장도 다친 모양인지, 그는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피를 한 됫박씩 흘리고 있었다.

'김영훈이 피해 없이 막리황신을 죽인 게 아니다!'

막리황신 역시 몸이 소멸당하면서까지 김영훈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힌 것이었다.

"커헉! 끄윽..."

그리고, 다시 강황을 응집하는 듯 하던 김영훈은, 상처가 막중한지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최악이다!'

"흐음..."

오싹!

막리황신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기력이 떨어졌나 보군. 괴물 같은 놈. 죽을 뻔했다."

철퍽, 철퍽!

그는 자신의 주변에 쓰러진, 근위대의 시체를 발로 차버리며 혀를 찼다.

"빌어먹을, 쓰레기 같은 자질의 후손 놈의 몸이나 빼앗아야 하다니. 거기다가 수행이 연기기 4성 수준까지 떨어졌다... 흠..."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와 동시에 진씨세가의 수도자들과 싸우던 막리세가의 수도자들이, 사색이 되어 미친 듯이 비행법기를 타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 쓰레기 같은 것들! 가문의 어른이 쳐다보는데 건방지게 도망을 쳐! 이번 교체전이 끝나면 모조리 한 줌 혈수로 녹여버려야겠구나!"

촤아아아!

축기기 대원만이라고 하는, 무지막지한 수도자의 의식이 허공으로 치솟는다.

막리황신의 의식이 손의 형태로 변하며, 뒤늦게 도망치는 연기기 1성 수도자 둘을 향했다.

막리황신이 법결을 맺자, 의식의 손에 희미한 빛이 감돌며 물리력이 생기는 듯 하더니, 저계 수도자들을 잡아끌어왔다.

"어, 어르신! 살려주십시오!"

"제, 제발! 저, 저는 선조님의 방계..."

"난 범인이나 다름없는 쓰레기 같은 자질의 후손을 둔 적이 없다."

그가 연기기 1성의 수도자들을 향해 손을 뻗자, 그들의 생명력과 정혈, 그리고 그들의 법력이 모조리 막리황신에게 빨려들어갔다.

후루룩-

꿀꺽

혈수(血水)로 변한 후손들을 집어삼킨 막리황신의 법력이, 연기기 4성 수준에서 5성의 끝자락까지 치솟았다.

연기기 5성 수준의 법력.

하지만, 그것을 다루는 것은 축기기의 극한에 도달했던 수도자!

저릿, 저릿...

본래라면 한 번에 달려가 목을 벨 수 있는 수준이었으나, 나는 본능이 미친듯이 경종을 울리는 것을 인지했다.

'단순히 연기기 5성 수준이 아니다. 축기기 극한에 있었던 수도자의 신식과 합쳐진다면, 저 노괴의 힘은...'

그가 나와 눈을 마주친다.

전신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느낌.

막리황신이 히죽 웃었다.

"범인 주제에 눈이 좋군. 내 전력을 가늠하는 게냐? 친절히 말해주지. 본 노(老)가 현재 낼 수 있는 전력은..."

쿠구구구구!

막리황신의 주변으로 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막리현의 것과는 비교도 안되는 바람이 그를 감싼다.

"연기기 13성 수준이니라."

나는, 이를 악물었다.

"제자들은 모두, 들어라!"

시간을 끌어야 한다.

"영훈 형님에게 각자 가지고 온 회복용 단약을 먹여라! 모두 최선을 다해, 어떻게 해서든 그가 정신을 차리게 해라!"

기수식을 잡았다.

"내가, 시간을 만드마!"

단악검법(斷岳劍法)

제이십삼초(第二十三招)

'어떻게든, 버틴다!'

산외산부진(山外山不盡)!

산외산부진(山外山不盡)

나는 기수식을 잡았다.

단악검법 제 1초, 월악(越岳).

전신의 기와 의념을 다스리며, 검 끝에, 앞으로 이어질 모든 동작의 끝에 정신을 집중한다.

그리고, 소리쳤다.

"모두! 축기기 수도자를 상대하기 위해선 영훈 형님이 필요하오! 의술에 조예가 있는 진가 수도자 분들은 형님을 치료해 주십시오!"

진씨세가의 수도자 중 한둘이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김영훈에게로 내려갔다.

그리고 도망친 막리세가의 수도자들을 상대하던 다른 진씨세가의 수도자들은,

하나같이 긴장한 눈으로 막리황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기기 13성!

연기기 극성인 14성 바로 전 단계!

지금 진씨세가 측에는 13성은 커녕 12성 수도자도 없었다.

그나마 11성 수도자만이 지휘부로 한둘 참전했을 뿐이었다.

이유야 너무 뻔했다.

12성 이상의 수도자는 하나같이 축기기에 오를 가능성이 있는, 진씨세가의 후기지수들이었으니까.

고작 범인들의 세력인 황실을 손에 넣기 위해 가문의 후기지수들을 버릴 필요가 없으니까.

진씨세가도, 막리세가도 이 전쟁은 결코 진심이 아니었다.

그저 각자 자존심을 조금 세우기 위해, 축기기 수도자 한 명.

그리고 축기기에 준하는 범인 한 명을 내세웠을 뿐이었다.

'막리황신이 건국황에 오른 것은 몇백년 전...'

그리고 축기기 수도자의 수명 역시 그와 비슷하다고 들었다.

그 말인 즉, 눈 앞의 막리황신은 축기기의 극한에 이르렀었지만, 몇백년의 세월동안 결단기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말이다.

'한 마디로, 저 자도 가문에서 그리 중요한 인사는 아니란 말이지.'

"모두, 합공해야 합니다! 제가 앞에서 큰 공격을 받아치겠습니다! 진가 분들께서 막리황신에게 공격을 가해주십시오!"

"알겠다!"

적포를 입은 진씨세가의 수도자들이, 다시금 수도진을 짠다.

"열(熱)!"

화르르르르!

아까 보았던 법술.

거대한 불덩이가 마치 태양처럼 누각 위에 떠올랐다.

"거(去)!"

수도자들의 진법으로 만들어진 불덩이가 아래로 하강한다.

그리고 막리황신이 입꼬리를 올렸다.

"벌레 같은 것들. 제아무리 연기기급으로 떨어졌기로서니, 축기기 수도자였던 존재와 감히 맞설 수 있다 생각하는 것이야?"

꾸구구구!

분명 느껴지는 영기의 압박은 연기기 5성 수준의 압력.

그러나, 그 신식의 크기로 인해 연기기 13성 수준의 전력을 낼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래도 상대할 수 있다고 여겼다.

어쨌건, 그는 지금은 축기기 수도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바람이 불었다.

콰아아아아앙!

회오리였다.

수천, 수만개의 풍인(風刃)으로 이뤄진 회오리가, 누각 전체를 갈아버리며 불덩이를 향해 승천하듯 움틀거린다.

그리고, 회오리의 끝단이 불덩이에 닿았을 때.

불덩이는 그대로 산산이 터져나가 비산해 버렸다.

수도진을 만들었던 진씨세가의 수도자들이 전부 피를 토하며 물러섰다.

"하하하, 범인 놈아. 감히 네 따위가 나를 막으려 들어? 네가 내 공격을?"

회오리 안에서 비치는 거뭇거뭇한 그림자.

막리황신이 회오리의 중앙에서 나를 보며 낄낄 웃었다.

"자, 어디 막아보거라. 축기기에 올랐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한번 느껴보면서..."

끼이이이이!

바람으로 이뤄진 대붕(大鵬)이 나를 향해 날아왔다.

이전 황태자 막리현이 보여주었던 법술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크기!

저 법술 하나만으로, 누각이 있던 호수 전체를 덮어버릴 것 같았다.

'피하면 안 된다.'

아직 제자들이 김영훈을 데리고 전부 피신하지 못했다.

'막아선다!'

단악검법

제이십이초

단악(斷岳)!

단악검법의 1초부터 21초까지의 절기가 순식간에 터져나온다.

그리고, 마지막 천지의 초식으로 힘을 거두어들인 후, 다시 일검을 내지른다.

촤아아아!

바람의 붕조는 완전히 박살나지는 않았으나, 일검에 반으로 갈라져 양옆으로 날아갔다.

"후우우-"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처음 잡았던 기수식.

월악을 펼치기 위한 기수식으로 돌아갔다.

막리황신은 진씨세가 수도자들의 화염술법을 막아내며, 킬킬 웃었다.

"오호라, 한 번은 막아냈구나. 엄청난 요행이로군. 과연 그 요행이 언제까지 갈지 한번 볼까? 아 그리고..."

번쩍!

순간, 광풍이 불며, 호수 전체에 푸른빛의 결계가 생겨났다.

진씨세가의 수도자들이 이를 악물었다.

"이건..."

"결계..!"

"못 도망가게 하려는 건가?"

막리황신이, 막 호수 너머로 도망치려던 김영훈과 내 제자들을 보며 씨익 웃었다.

"감히 내 육신을 터트린 저 빌어먹을 놈이 빠져나가게 둘 순 없지. 저 망할 녀석은 우선 진가 날파리들과 저 무림인 놈을 짓이겨 터트린 후에 천천히 살을 발라주마."

콰아아아!

다시금 그가 결인을 맺자, 막리황신을 감싼 회오리에서 한 마리의 풍룡이 튀어나와 나를 덮쳐왔다.

나는 이를 악물고 검을 들었다.

* * *

막리세가의 축기기 수도자,

막리황신은 천불이 나는 속을 진정시키며, 차분히 법술을 사용했다.

평생을 노력하여 축기기 후기를 넘어, 축기기의 네 번째 단계에 진입했다.

잘만 했다면 이번 생에 결단기까지도 노려볼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한 괴물같은 녀석 때문에 틀어졌다.

진씨세가가 준비한 결전병기.

비록 의식의 크기는 연기기 4, 5성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괴물은 자신의 의식을 피해서 후손인 막리현의 수급을 베었고,

기묘한 환 같은 것을 터트려서 결국 자신을 죽이는 데까지 성공했다.

'그나마 교체전이었기에 망정이지...'

아마 실전이어서 주변에 자신의 혈맥이 아무도 없었다면, 후손의 몸을 빼앗아 다시 부활할 엄두도 못 냈을 터였다.

그러나 부활을 하고 보니, 그가 차지한 후손인 막리정의 자질은 사실상 쓰레기나 다름없었다.

'차라리 막리현 놈의 몸을 차지할 수 있었다면 모를까!'

그나마도 무림인 녀석이 목을 베어서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결단기에 오를 희망이 있었건만...!'

이런 자질로는 결단기는 커녕 축기기의 실력을 회복하는 것에만 생의 남은 시간을 다해야 할지도 몰랐다.

모든 것이 저 진씨세가의 무림인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막리황신은 진씨세가의 날파리들과, 자신을 이 상황으로 몰아넣은 무림인과 친분이 있어 보이는 무림인을 전부 짓이겨 버린 후.

진씨세가의 결전병기 녀석의 살을 친히 하나하나 발라, 젓갈을 담가먹을 생각이었다.

분명히, 그 시도는 빠르게 이뤄졌어야 했다.

'뭐지?'

하지만, 자신에게 철 쪼가리를 들고 덤비는 저 무림인.

저 범인 녀석이, 도저히 쓰러지지 않는다.

대붕의 술법도, 풍룡의 술법도, 온갖 풍인과 풍환의 술법도.

전부 아슬아슬하게 받아친다.

그러고도, 범인 녀석은 도무지 쓰러질 줄을 몰랐다.

'범인 주제에, 이쯤이면 벌써 지쳐서 선 채로 과로사해도 모자라거늘.'

강한 술법을 몇 번이나 쏘아보내도 오뚝이처럼 다시 같은 자세를 잡고,

검강을 사용하여 법술을 튕겨내버린다.

'범인들의 단전은 애초에, 우리 수도자들의 열화판이기에 담을 수 있는 내공이 그리 많지 않다고 알고 있는데...'

어째서 저렇게 지치지 않는 것일까.

심지어.

'또 한 발.'

처억!

한 걸음.

한 걸음.

그렇게, 천천히.

한 걸음씩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귀찮군.'

안 그래도 진씨세가의 날파리들이 술법을 던져대며 귀찮게 하는데, 저 녀석의 접근까지 허용하면 의식이 분산될 터였다.

'조금 무리를 하더라도, 큰 법술을 사용해서 쓸어버려야겠어.'

막리황신은 법력을 끌어올리며, 더욱 큰 법술을 사용했다.

쿠구구구구!

그를 감싼 회오리가 움틀거린다.

그리고, 거대한 굉음과 함께 풍호(風虎)의 형상을 취하며, 오뚝이같은 무림인에게 날아갔다.

"하, 이제 네 내공도 전부 닳았을텐데. 그만 저항하고 편히 쉬거라. 이 정도 법술을 써 줌을 영광으로..."

그리고.

파아앙!

무림인의 칼질에, 막리황신이 날린 풍호가, 반토막이 나 버린다.

"...이게, 무슨."

그리고.

처억!

다시 한 걸음.

무림인이, 앞으로 다가온다.

"네놈, 내공이 무한히 솟아오르기라도 하는게야? 아직도 그 정도 기술을 쓸 힘이 있어?"

그리고, 다시 한 걸음.

그의 바람을 뚫고, 무림인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에게 다가온다.

'말도 안 되는, 검강을 아까부터 끊임없이 유지하는 것을 내가 보았거늘. 아직도 저 만큼의 기력이 있다고? 말도 안 되는! 무슨 수작을 부린 거냐, 이 범인 놈!'

한 걸음.

그렇게 한 걸음씩 접근하는 무림인을 보며, 막리황신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 * *

단악검법 이십삼초,

산외산부진(山外山不盡)

이 초식은, 특수한 기술이나 동작이 아니었다.

일종의, 단악검법을 어느 경지까지 익히면 도달하게 되는 개념.

검을 펼친다.

바람결을 베어낸다.

그리고, 다시 원래의 자세로 돌아간다.

모든 것이 원래의 그 자세로 돌아가며, 나는 그동안 낭비했던 모든 기력과 내력을 다시 원상태로 되돌렸다.

"후으읍!"

숨을 들이쉬자, 소모되려 했던 내공들이 다시 호흡에 붙잡혀 단전으로 돌아온다.

검강으로 새어나갔던 검기들 역시 다시금 붙잡혀 돌아오며 강제로 단전 안에 돌아온다.

어떤 초식을 펼치든, 다시 원래의 한 동작으로 기수식을 회귀(回歸) 시키며 기의 흐름 역시 해당 기수식을 처음 펼칠 때로 돌리며.

결코 내공이 닳지 않게 해 주는, 이론상 무한한 체력을 가질 수 있게 해 주는 초식.

그것이, 산외산부진의 초식이었다.

그러나 산외산부진의 초식은 이론상 무한일 뿐.

결코 무한이 아니다.

초식을 펼치는 것을 단 한 순간이라도 멈추는 순간.

내가 그동안 억지로 끌어모아왔던 기혈이 역류하고, 내 모든 체력이 일시에 빠져나가며 어마어마한 고통을 선사한다.

산외산부진을 몇 번 연습할 때도 느꼈던 고통.

'멈추면 안 된다.'

산 밖에 산이 다함이 없으니.

나 자신도 결코 다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죽을 각오를 다지고서 펼쳐야 하는 초식인 것이다.

부웅!

월악에서 단악까지.

끊임없이 초식을 연계하며 검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초식을 펼치면, 다시 월악의 태세로 돌아가, 산외산부진을 유지시킨다.

내 기술의 위력은 처음과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막리황신의 법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떨어질지언정,

내 기술은 처음과 동일하다.

그러나.

"끄으읍!"

산중호걸의 초식으로 풍조를 꿰뚫은 후, 다시 월악의 태세로 돌아간다.

'죽을 것 같군.'

내공이 소모되지 않는다는 것이.

정신력이 소모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온 정신을 집중해서 내력이 낭비되지 않게 초식을 펼치고,

다시 산외산부진의 기술로 기수식을 회귀시키며, 소모한 기력을 다시 억지로 붙들어 단전으로 때려넣는다.

그 과정을 연속해서 펼치는 것은 말 그대로 머리가 익어버릴 정도로 괴로운 일이었다.

부글부글-

나는 분명 맨정신으로, 기절하지도 않았으나.

머리로 몰린 열(熱) 때문에 입 안의 침이 끓어올라 거품이 된다.

푸콱!

눈과 코에서 핏물이 터져나온다.

기운을 강제로 몸 안으로 되돌리는 탓에, 몸 안의 경맥은 물론이고 팔다리가 끊어질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부웅-

"하, 이것도 베어내?"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포기해라, 무림인 녀석아. 보아하니 무한하지 않은 내력을 어찌어찌 돌려쓰는 수법을 쓰는 것 같은데. 네가 한 순간이라도 검을 멈춘다면, 넌 그 반동으로 자멸(自滅)해버릴 거다."

막리황신이 이죽거렸으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검을 들고 벤다.

붕조, 풍룡, 풍기(風麒), 풍린(風麟), 풍교(風鮫)...

수많은 형상을 한 법술이 나를 덮쳐온다.

하지만 나는 끊임없이 베어내고, 받아치고, 흘려내고, 되치며.

그렇게, 한 걸음씩 다가간다.

푸콱!

내 힘줄이 연이은 초식의 사용을 버텨내지 못하고, 터졌다.

팔이 끊어질 듯 고통스럽다.

힘줄이 끊어지자 팔에 힘도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내력으로 힘줄을 어떻게든 이어붙이며, 다시금 초식을 펼쳤다.

가로베기

올려베기

하단세 베기

부드럽게 찌르기

회전베기

변초

파고들어 대각선베기

공격을 비틀어 무화시키기

대각선 베기 난무

크게 내려베기

속도의 변화를 주어 올려베기

검기를 쏘기

...

그리고 다시 그 모든 것을 처음부터 반복.

우드득!

무슨 소리일까.

그래, 분명 뼈가 갈리는 소리일 터.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포기해라!"

쿠구구구구!

막리황신의 말이, 언령(言靈)이 되어 사방을 덮쳐갔다.

그리고, 그의 의식이 담긴 목소리에, 내 상단전에서 나와 함께하던 제자들의 원혼이 울부짖었다.

끼에에에에에-

가공할 귀곡성이 내 머리 안에서 울린다.

그리고 뒤쪽에서 이곳을 보고 있던 제자들 역시 각자 머리를 부여잡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하, 애초에 부족한 재능을 강화하기 위해 원혼을 강제로 상단전에 흡수시킨 모양이구나. 하긴 아무리 범인이라도 절정고수들을 저렇게 많이 양산하려면 저 방법 밖에 없겠지.

하지만 말이다. 애초에 축기기급의 의식을 지닌 자라면, 저 정도 원귀들을 자극해서 너희를 무력화하는 건 너무나도 간단한 일이다! 포기해라, 너희 범인들은 절대 수도자에게 맞설 수 없어!"

나와 막리황신의 간격은 이제 이십 보.

내 뒤로는 내가 흘린 피가, 내 발자국 모양으로 찍혀 있었다.

내공은 처음과 같지만, 천천히 흐르는 피는 이제 서서히 줄고 있었다.

그리고, 나와 막리황신 사이에는 저 자가 펼친 회오리가 있었다.

뚫을 수 있는가?

"감히! 썩 꺼져라!"

막리황신의 언령이, 다시금 내 뇌리를 뒤흔든다.

수백명의 제자들이, 그 혼(魂)들이 뇌리 속에서 비명을 질렀고, 나는 칠공에서 다시금 피를 뿜었다.

머리가 새하얗다.

하지만, 나는 그 고통 속에서도.

검을 움직였다.

수천 수만번 움직여왔다.

끊임없이 연단하고, 연찬하였다.

제자들을 가르치는 와중에도, 단 한 번도 검에서 손을 뗀 적이 없다!

인이 배겼으니까.

어쩌면, 나는 죽더라도 계속 검을 휘두를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는!!!"

이 검을.

"포기하지 않는다!!!"

놓지 않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한 걸음...

입에서 피를 뿜어내며, 눈 앞은 핏물 때문에 보이지 않아도.

그래도 한 걸음.

나는, 느릿하게.

하지만 꾸준히.

그렇게, 앞으로 나아갔다.

철퍽, 철퍽!

허공을 노닐던 진씨세가의 수도자들도, 막리황신의 공격을 맞고 한둘씩 혈수가 되어 터져나갔다.

그러나, 오직 나만이 꾸준히 그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막리황신의 얼굴에 질린 듯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의 의념의 결에도 역시 그러한 색조가 나타난다.

"내 뒤에 있는 사람은!"

푸콱!

막리황신이 날린 풍인(風刃)에, 내 허리춤이 한 움큼 뜯겨져 나갔다.

가공할 칼바람에 검을 쥔 손의 피부가 벗겨져 나간다.

"절대, 죽게 하지 않는다!"

콰아아아앙!

내 검에서 솟아난 검강이, 막리황신의 회오리.

그 최적의 결을 따라, 휘둘러졌고, 당황한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 이 무슨...!"

그리고.

나는 문득, 지금껏 볼 수 없던 일곱번째 색(色)을 볼 수 있었다.

아니, '보는' 것이 아니었다.

'아는'것이었다.

'아아, 그렇구나.'

기쁨(喜)

분노(怒)

슬픔(哀)

즐거움(樂)

연정(愛)

미움(惡)

그리고 마지막.

갈망(欲)

내 가장 큰 욕망은 결국, 삶(生).

그렇기에 내 욕망의 색은, 삶의 색.

삶은 무슨 색조를 띄고 있는가.

고개를 들어 허공(虛空)을 보아라.

삶은 총천연색(總天然色)!

무수한 색이 있고, 무수한 삶이 있다.

삶이란 곧 만색(萬色)이고, 그렇기에, 그 자체로 완전하다.

고로, 삶의 색은 한없이 투명한 무색(無色)이다.

'총천연색이기에 곧 무색이었던 건가.'

그렇다.

나는, 내 욕망의 색을 처음부터 보고 있었던 것이리라.

무색(無色)!

아무 색도 없기에, 곧 그것은 모든 색이었고, 삶의 모든 색조는 내가 처음부터 보고 있던 것이었다.

삶(生)의 색조를 처음으로 깨닫자, 나는 그동안 찾아헤메던 의문의 답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인간이 무한한 색조를 알 수 있는가?

어떻게 인간이 삼화취정 너머 오기조원에 도달할 수 있는가?

간단하다.

사실 인간은, 모든 존재는 무한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무한함을 인정하고, 무한한 색조의 변화를 인정하기만 한다면.

'어쩌면, 제자들을 보내주기 싫었던 것도, 그들이 꿈꿨던 복수를 틀어막았던 것도. 그저 내 집착과 아집, 그리고 무지였을지도. 그 아이들이 바랐던 염원을, 처음부터 신경쓰지 않은 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르겠군.'

무한한 가능성의 삶 속에서 새로운 세계를 볼 자격을 얻는 것이리라.

삶의 마지막에서, 나는 집착과 아집을 끊어냈다. 나는 나 자신의 감정을 인정함과 동시에, 비로소 제자들의 감정도 인정하였다.

내 시야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여섯 개의 가장 근원된 색.

그리고 그것에 더하여, 완전히 투명한 무색!

그 일곱가지 색조가 서로 섞인다.

섞이고, 변화하며, 통합된다!

그 변화 속에서, 나는 본래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색조가 무수히 많이 탄생한다.

물론 저 무한한 색조를 전부 인식할 수는 없었으나, 느껴진다.

저 색조들이 대략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이 무한한 인간의 감정을 인정하며, 어디까지 볼 수 있는지!

영혼의 소우주(小宇宙)가 열리며 천지(天地)와 통(通)한다!

무한한 색조가 얽히고설키며, 완전히 통합(通合)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색조가 합쳐진 단 하나의 색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무색(無色)!

모든 색이 합쳐진 단 하나의 색조는, 완전히 투명(透明)해지며 주변의 공간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단순히 시야와 감각으로만 인지했던 의념의 흐름.

무수한 천지간의 흐름이, 내가 잠식한 공간을 통해 그대로 뇌리에 입력된다!

주변의 모든 공간의 정보가 한 손아귀에 잡힐 듯 하다!

나는 이 공간의 모든 정보 속에서, 다시 일검(一劍)을 내지르고, 일보(一步)를 내딛었다.

"이런 미친! 어, 어떻게! 범인 따위가... 범인 따위가 식(識)을 각성한다고!"

경악한 막리황신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썩 꺼져라! 천한 범인 놈이, 감히 수도자의 세계에 발을 들이려 하느냐!"

찌이이잉-

그의 의식이 울려퍼지며, 그 언령에 뇌리에 깃든 제자들의 원혼이 비명을 지른다.

새로운 영역에 진입했으나, 여전히 그 귀곡성은 고통스럽다.

그러나, 나는 그 귀곡성 속에서, 내가 어째서 일곱 번째 색을 각성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제야 들린다.

-죽지 마십시오.

-살아주세요!

-제발, 살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죽은 제자들이 내뱉는 소리는, 단순한 귀곡성이 아니었다.

간절한 하나의 열망(熱望).

생(生)의 의지!

내가 바랐던 것과 같은, 삶의 열망!

그 무수한 목소리가, 비로소 나를 인도했던 것이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피가 마구 쏟아져내렸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폐가 터져라 소리쳤다.

제자들아.

아직 살아있는, 남아있는 내 아이들아.

비록 내 어리석은 아집으로 지금껏 고통받았을지라도.

이제 내가 고통의 근원을 해갈해 줄 테니...

"살아라!!!"

부디 살아서.

이토록 아름다운, 이토록 투명한 삶(生)을.

부디 살아다오.

다음 순간.

내 검강이 지금까지와는 비할 수 없는 빛무리를 토해냈다.

그 기세는 태산과도 같고, 그 마음은 하늘에 닿아라(氣山心天)!

전신의 경맥이 열리며, 마지막 남은 진기를 한 톨도 남김없이 짜낸다.

막리황신과의 거리는 다섯 보.

내 검강이, 막리황신의 회오리와 모든 방어법술을 그대로 꿰뚫는다.

"크윽! 버러지 같은 놈, 용케도 잘 버티는구나! 그래봤자 평생을 땅에서 기어다닐 것들이!"

바람이 막리황신의 주변으로 일며, 그가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막리황신과 맞서 싸우던 마지막 진씨세가의 수도자가 피를 토하며 날아가버렸다.

하늘로 올라가서 더 이상 신경쓸것도 없이 광범위한 법술을 쓰겠다는 속셈.

"하하, 하늘로 올라가면 네깟 놈이 어찌..."

전신에 남은 진기는 없다.

하지만, 남은 의지력은 있다!

월수궁무록(越修窮武錄)

극의(極意)!

지금껏 펼쳐온 월수궁무록이 추구하던 최후절초.

수도자의 앞에서 도주할 일말의 틈을 만들, 마지막 오의!

월수궁무록(越修窮武錄)

"노중로무궁(路中路無窮)!"

내 모든 의념(意念)이, 일점(一點)으로 모인다.

그 일점이, 빛과도 같은 속도로 막리황신의 의식을 뚫고 들어가, 그의 상단전을 파고들었다.

"크아아아아악!"

그가 머리를 부여잡고, 다시 땅으로 떨어졌다.

의식영역을 베어내는 것에서 출발해,

결국에는 인간의 의식 가장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 정신(情神) 그 자체를 공격하는 극의!

내 정신력으로 상대의 정신을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일격.

본인의 정신력으로 버텨내는 것 외에는 절대 막을 수 없는 공격이었다.

성큼!

"이, 이 자식이...!"

그가 결인을 맺자, 시퍼런 풍인(風刃)이 내게 쏘아진다.

남은 진기는 없다.

최적의 동선으로 베어낼 뿐!

슈캉!

그의 풍인과 내 검이 동시에 부숴진다.

성큼!

또 한 걸음!

"저, 저리가라!"

피웅!

그의 다리를 향해 암기를 던져 뒤로 물러설 수 없게 했다.

막리황신은 법결을 맺을 틈도 없이, 마구잡이로 법력을 뿜어댔다.

광풍이 몰아닥친다.

한 톨의 진기도, 내공도 없다.

그러나, 나는 개의치 않고 손을 뻗었다.

손잡이만 남은 검을 놓고, 바람을 헤치며 그에게 다가간다.

* * *

막리황신은 298년을 살아오며, 처음으로 한낱 무림인에게 공포라는 감정을 느꼈다.

지치지 않는다.

포기할줄도 모른다!

진씨세가가 이식해둔 원귀들을, 억지로 진씨세가의 술식을 뚫고 들어가 억지로 제어해서 발작시켰다.

원귀들이 내지르는 귀곡성이라면 머리를 실시간으로 난도질하는 것 같은 고통일진데, 그럼에도 저 미치광이는 포기하지 않는다!

살점이 뜯겨나가도, 칠규에서 피를 토해도, 검이 부러져도!

녀석은 포기하지 않고, 무슨 조화인지 갑작스레 범인 주제에 수도자와 같은 식(識)을 각성하기까지 했다.

'고, 고계 술법이 발동이 안 된다!'

범인 녀석이 무슨 수를 쓴 것인지, 의식을 칼로 도려내는 느낌과 함께 그의 원신(原神)에 일부 손상까지 생겨버렸다.

본래라면 간단한 손동작으로도 사용 가능했던 고계 법술을 전부 사용할 수 없었다.

고계 법술을 사용하려면 할 수야 있었지만, 지금 상태라면 제대로 수인을 맺고 진언을 읊는 의식을 치뤄야 한다.

바로 앞에 괴물 같은 무림인이 손을 뻗고 있건만!

'생각해라! 생각해!'

진씨세가 수도자들은 전부 물리쳤다.

이 거머리같은 무림인만 떼어내면 그의 승리였다.

'그래, 그래도 녀석의 체내에 기(氣)가 느껴지지 않는다!'

막리황신은 더욱 더 법력을 강하게 분출하며, 광풍을 뿜어내며 서은현을 밀어내었다.

'내 승리다!'

그리고, 그 때였다.

우우웅-

천지원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건...?"

막리황신은 멍한 눈으로, 천지영기(天地靈氣)의 흐름을 쳐다보았다.

"오행영기(五行靈氣)...?"

가장 기본적인 다섯 갈래의 영기가, 허공을 유영하며 원(圓)의 형태로 맺히기 시작했다.

막리황신의 눈이 커졌다.

"서, 설마..."

본 적 있었다.

오래된 고서(古書)에 적혀있던 내용.

범인(凡人)들도 끊임없이 단련을 하면, 수도자의 오행영근(五行靈根)과 상통하는 경지에 다다른다는 기록을.

'갑자기 식(識)을 각성한 이유도...!'

다섯 갈래의 영기를 담은 원형의 기운이, 다섯 개의 원으로 변하며 서은현의 머리 위에서 맴돌았다.

이윽고, 다섯 개의 영기가 부스러지며 오색의 기운으로 화했다.

오색의 기운이, 서은현의 코와 입으로 들어갔다.

'아, 안 돼!'

아무런 기(氣)가 없었던 눈앞의 상대에게, 상당량의 영기(靈氣)가 생겨나 있었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았던 그가, 광풍을 헤치고 온다.

콰악!

"끄아아아악!"

바람을 뚫고 그에게 다가온 서은현의 손이 막리황신의 양팔을 잡았다.

그 억센 악력에 막리황신이 비명을 질렀다.

"평생토록... 검을 으스러져라 쥔 손이다."

서은현의 눈이 막리황신과 마주쳤다.

"한번 잡은 것은 절대 놓지 않는다!"

구구구구구!

막리황신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새하얀 빛무리.

강기(罡氣)가 맺히기 시작한다.

'주, 죽는...!'

번쩍!

그리고, 빛이 터져나갔다.

"....?"

막리황신은 질끈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떴다.

살아있었다.

"허억...헉..."

부스스-

허공에 맺힌 빛무리가 흩어진다.

서은현의 눈에 마지막 남은 생기(生氣)가 사라져 있었다.

"...죽었, 군..."

눈을 뜬 채.

막리황신의 양 팔을 잡은 채로.

그렇게 서슬퍼렇게 선 채로 죽었다.

"하, 하하... 그런거군."

막리황신은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의식으로 서은현의 체내를 관조했다.

"억지로 기운을 유지하는 기술의 반동이군! 하하하, 어쩐지 쓰러지지 않는다 했구나. 그래, 그만한 기술을 쓰면서 아무런 반동이 없을 리 없지. 하, 하하..."

살았다.

그는 산 것이었다.

"흐, 흐하하... 내가 이겼다, 이 범인 놈..."

그가 승리의 환호성을 지르려 할 때였다.

주변으로 치솟아오른 먼지구름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먼지구름 너머로, 수많은 인영들이 서 있었다.

"하, 하하. 이건 또 뭐냐. 저 뒤쪽에서 숨어서 떨던 잡스러운 벌레들이 아니신가?"

서은현의 제자들.

그들은 몸을 떨며 이를 악물고 있었다.

막리황신은 문득 그를 몰아붙였던 괴물같은 무인, 김영훈이 의식을 차렸는가 싶어 의식으로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김영훈은 여전히 쓰러져 있었다.

"하하하, 너희 버러지 같은 것들이 아무리 모여봤자 뭘 하겠느냐! 내가 방금 전까지 상대하던 이 잡놈의 발끝만큼도 미치지 못할것들이..."

막리황신은 혀를 차며, 저 잡것들의 정혈이라도 취해 생명력을 회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결인을 맺으려 할 때였다.

우뚝!

"....!"

서은현의 시체가, 그의 양 팔을 놓지 않았다.

분명 시체였건만, 그는 죽어서도 두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피, 피가 안 통한다!'

결인을 맺기는 커녕 손에 감각조차도 없다!

막리황신이 다급히 족인(足印)이나 우보법(禹步法)등을 통해 결인을 맺으려 했지만.

그조차도 서은현이 다리에 던진 암기들 때문인지, 다리가 더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제길!'

득의양양했던 막리황신의 표정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팔도 다리도 봉쇄되었고, 서은현이 사용한 기술 때문에 원신이 상해버려서 의식을 이용한 고계 법술도 펼칠 수 없었다.

남은 수는 많지 않았다.

"울부짖어라!"

막리황신의 의식을 담은 언령이 서은현의 제자들에게 남아있을 원귀들을 발작시켰다.

그래, 그래야 했다.

"울부짖..울부..."

퐁, 포옹-

서은현의 주변으로, 맑은 빛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그의 제자들의 주변에서도 맑은 빛들이 떠올랐다.

막리황신은 그것이 무엇인지 똑똑히 알고 있었다.

"원신(原神)...? 천도의 술법...?"

그들에게 남아있던 원귀들이, 천부 천도되어 하늘로 승천하고 있었다.

서은현의 몸에 남아있던 것은 그가 죽음으로써.

그리고 그의 제자들의 몸에 남아있던 원귀들은...

"...스승님. 어째서... 마지막을 저희를 위해 쓰셨나이까..!"

만호가 눈물을 흘렸다. 그를 따라 수많은 제자들이 입술을 짓씹으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머리를 굴리던 막리황신은 뭔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서은현이 마지막에 허공에 형성한 강기는, 흩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저, 막리황신을 향해 내리꽂히는 것이 아닌, 수백 갈래로 빠르게 흩어져 그의 제자들의 영혼을 파고들었던 것이었다.

그는 최후의 순간, 적을 죽이는 것이 아닌 제자들의 상단전에 새겨진 법술을 부수는 것을 선택하였다.

막리황신의 안색이 다급해졌다.

손도, 발도, 의식도 전부 묶였다.

저계 언령조차 묶였다!

그리고, 만호를 비롯한 계화, 청야, 양록 등.

무수한 서은현의 제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병장기를 뽑아들고 있었다.

본디 서은현이 법술을 부쉈다 하더라도, 그들 자신이 가족들을 놓아주지 않으면 법술은 풀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들었다.

-살아라!!!

서은현의 목소리를.

그 안에 담긴 삶을 살라는 의지를.

그리고, 서은현이 마지막 순간 날린 강기로, 진씨세가에게 시술받은 술법이 깨지는 순간.

모두가 서은현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뒤는 맡기마.

그는 마지막 일격을 제자들에게 믿고 맡긴 것이었다.

제자들을 향한 신뢰.

그리고, 제자들이 그토록 꿈에 그리던 황제의 목을 칠수 있는 기회.

단지 그 기회를 주기 위해서.

"우리더러는 살라고 했으면서, 당신이 먼저 가버리면 어쩌라는 겁니까!"

그제야 제자들은 그들의 스승을 이해했다.

그들의 스승이 자신의 아집을 깨닫고 이해했듯이, 그들 역시 소중한 이를 남겨두고 떠나는 그 야속함을 이해했다.

"이... 저, 저리 꺼져라! 범인 놈들! 이 쓰레기 같은 것들!"

우웅-

막리황신이 황급히 언령으로 저급 방어법술을 펼쳤으나, 약 300여명의 절정고수가 연이어 방어막을 두들겨 내자, 점차 방어법술은 얇아지기 시작했다.

"아, 안 돼..! 나는 결단기에 이를 몸이다! 연국의 건국황이며, 축기기 마지막 단계를 밟은 수도자란 말이다! 나는, 나는..."

그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자신의 양팔을 잡고 있는, 죽은 서은현을 보았다.

서은현의 시체는 아직까지도 서슬퍼렇게 눈을 뜨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죽은 자였지만, 마치 그 기세는 태산(太山)과도 같았다.

"나는, 나는..."

산 바깥에 산은 다함이 없고(山外山不盡)

길 가운데에 길도 다함이 없다(路中路無窮)

한명의 인간은 다할 수 있을지언정.

그 인간이 남긴 것은 다하지 않는다.

콰칭!

막리황신의 방어막이 깨졌다.

방어막 너머로, 서은현의 의지를 이어받은, 그의 제자들의 눈빛이, 죽은 서은현과 똑같은 빛으로 막리황신을 노려보았다.

서은현이라는 태산 너머로 또 다시 산들이 끊이지 않는다.

"사, 살고 싶.."

만호의 대검이 막리황신의 수급(首級)을 잘라내었다.

푸콱!

자신의 후손, 현 황제, 막리정의 몸을 억지로 빼앗으면서까지 끈질기게 이어왔던 막리황신의 명(命)이 그렇게 끝나는 순간이었다.

"후우...후우..."

건국황 막리황신.

동시에 현 황제인 막리정.

그의 목을 벤 만호가, 막리정의 수급을 들고, 아직까지도 선 채로 죽어있는 서은현을 바라보았다.

서은현의 시체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만족한다는 듯 옅은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끝까지, 보고 가셨군요."

만호는 눈물을 흘리며 막리황신의 수급을 그의 앞에 바쳤다.

그리고, 무릎을 꿇었다.

계화, 청야, 역산, 열야, 곽기수, 서흔...

300여명의 모든 제자들이, 차례로 무릎을 꿇었다.

"안녕히 가십시오!"

서은현의 제자들이 입을 모아 절을 하며, 스승의 마지막을 송별한다.

그것이, 서은현의 여섯 번째 회귀(回歸)였다.

6회차의 첫날

번쩍!

"허어억!"

나는 숨을 들이쉬며 눈을 떴다.

살아있다.

그리고, 익숙한 산내음이었다.

나는 다시 회귀한 것이었다.

"서 대리.."

"흠, 잠시 조용히 하지."

파밧!

나는 전명훈이 뭐라 말하기도 전, 빠르게 움직여 전명훈의 수면혈을 짚었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려는 김영훈, 오현석, 강민희, 오혜서, 김연의 수면혈을 일시에 짚어버렸다.

풀썩, 풀썩, 풀썩!

나를 제외한 6인은 전부 그대로 잠들어서 쓰러져 버렸고,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빠르게 수면초들을 캐냈다.

그런 후 능숙하게 즙을 짜내어 각각의 입으로 흘려보내주었다.

이제 앞으로 서너시진은 깰 수 없을 것이다.

"...조금 뻐근하군."

아무런 기(氣)도 없는 몸으로 억지로 기혈을 끌어올리느라 그런 것인지, 팔다리가 조금 뻐근하였다.

나는 주변을 돌아다니며 빠르게 황주삼을 캐 내어, 얼른 입에 넣었다.

와드득, 와득-

흙조각이 조금 입에서 씹혔지만 그 정도야 참을 수 있었다.

얼마간 황주삼을 씹어삼키고 나니, 뱃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그대로 자리에 앉아서 운공을 하며 용맥기공을 우선 경맥에 안착시킨다.

앉아서 대주천을 몇 번이나 했을까.

"후우..."

나는 기본적으로 몸의 피로가 전부 풀렸음을 알 수 있었다.

"어느 정도 틀이 잡혔으니, 이제 제대로 시도해 볼까..."

지난 삶의 마지막.

그 때에 막리황신과 싸우던 중, 제자들의 영혼이 이끌어준 새 경지.

"후우우..."

심호흡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마지막 순간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단악검법을 잡은 자세를 취했다.

김영훈이야 가부좌를 틀고 깨달음을 얻었었지만, 나는 아무래도 기수식을 잡는 것이 조금 더 마음이 편한 탓이었다.

부웅- 붕-

아무것도 쥐지 않은 손으로, 그때의 기억과 감각을 되살린다.

희(喜), 노(怒), 애(哀), 락(樂), 애(愛), 오(惡), 욕(欲)...

일곱 가지의 기본적인 의념.

그 기본 의념을 바탕으로, 총천연색의 색조들이 천지간에 가득 차오른다.

모두 전부 나 하나에서만 나오는 무지막지한 의념들이었다.

'통합한다.'

하지만 많아보일 지언정 주체는 결국 하나.

모두 본디 하나의 색조에서 뻗어나왔다.

총천연색의 색조들이 얽히고설키며, 통합된다.

그리고, 완전한 무색(無色)이 되어 허공으로 스며든다.

무한한 색조들의 변화가 극한에 다다르며, 아무것도 없는 무(無)와 같이 변한다.

그렇게, 내 의념은 의식(意識)의 형태로 진화하며 주변의 공간을 잠식한다.

'들어온다.'

눈을 완전히 감고 있음에도, 주변 공간의 모든 정보들이 뇌리로 들어왔다.

단순히 의념을 읽는 게 아니었다.

모든 의념을 통합하여, 세계(世界) 그 자체를 감지한다!

색색거리며 잠을 자는 6인의 동료들.

풀 내음들.

땅 밑을 기어다니는 작은 벌레들.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살들.

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나뭇잎들.

모든 정보가 한 손아귀에 잡힐듯이 들어온다.

그리고, 나는 이제껏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감각을 개화(開化)하였다.

단순한 의념의 흐름이 아닌, 세계의 흐름.

세상 그 자체를 운행하는 천지간의 흐름!

천지영기(天地靈氣)!

'이것이... 영기(靈氣)...'

삼라만상 모든 것에는 영기가 있다.

인간과 같은 의념은 없을지언정, 각기 고유한 기(氣)를 가진 것이었다.

그 기(氣) 각각 사물의 흐름과 운행에 맞춰 자연스레 흐르고 있었다.

나는 땅 밑을 기어다니는 작은 개미의 기의 흐름을 인지하며, 그동안 궁금했던 의문 중 하나를 풀 수 있었다.

의념은 생자(生者)만이 가진 것이다.

그렇기에 강시는 검기를 사용할 수 없다.

그런데 왜 나는 강시에게서도 의념을 감지하는가.

'인간의 의념이 아니었던 거로군.'

그저, 강시에게도 당연하게 흐르는 기의 흐름을 읽어내었을 뿐이다.

우우웅-

수천 가락의 천지원기의 흐름을 인지하던 중.

나는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지하였다.

'머리가, 아프다.'

마치 터질것만 같았다.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현재 실시간으로 머리가 조금씩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이 비슷한 기분을 아주 오래전 느낀 적이 있었다.

일류에서 절정으로 넘어가려던 시절.

하루 종일 절정 고수가 보는 의념의 세계를 모방하던 그때!

그때에 뇌가 과부화되었을 때, 잠시 이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뇌가 과부하되고 있다!'

압도적인 정보량에 당장이라도 폭발하기 일보직전이었다.

비유가 아닌, 실제로 상단전이 주변의 기를 조금씩 흡수하며, 머리가 실제로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맞아, 그때도 그랬었군.'

지난 삶의 막바지에서도, 생각해보니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저 그때는 뇌 속의 귀곡성과 전신에서 느껴지는 고통 때문에 신경쓰지 않았을 뿐.

실제로 수도자와 같은 의식을 갖추게 되면,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는...'

지난 삶의 깨달음을 참오하며, 그 당시 했던 것과 같은 행동을 취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내 몸을 관조한다.

상중하단전의 균형이 비틀려져, 부조화스럽게 어긋나 있었다.

상단전이 지나치게 비대해져 있었고, 지금도 실시간으로 점차 커지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머리가 결국 상단전의 성장을 견디지 못하고 폭발해 버릴 터.

'육신을, 진화시킨다!'

천지영기는 삼라만상을 조화롭게 이루고자 하는 본질을 가졌다.

그렇기에, 자연스레 극심한 부조화를 호소하는 나를 향해 천지원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천지영기 중 가장 기본적이며, 천지만상 모든 기운의 운행의 시초.

오행영기(五行靈氣)!

다섯 가닥의 기운이 내 상단전 방향으로 모여들며, 상단전의 위쪽에서 뭉쳤다.

이윽고, 오행영기는 부스러지며 하나로 얽히더니 내 코와 입을 통해 내 신(身)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후우우...'

전신에, 천지만상의 균형을 이루는 데에 가장 근간이 되는 다섯 영기가 스며들었다.

그리고 나는 본능적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육신을 진화시킨다!'

이 다섯갈래의 영기를 기반으로, 육신이 이 상단전의 성장을 견딜 수 있게, 완전히 개조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그제서야 환골탈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예전에는 그저 체내로 스며드는 영기가 알맞게 몸을 진화시킨다고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영기는 몸을 진화시키지 않는다. 그저 몸을 개조시키는 데에 쓰이는 재료가 될 뿐.

환골탈태를 이루는 주체는, 결국 나 자신이었다.

'내가, 직접!'

우득, 우드득!

'내 몸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

의지로 근골을 빼내며 다시 짜맞춘다.

경맥을 이리저리 끌어올리며, 다시금 최적화된 경로로 흐르게 한다.

오행영기는 비록 도움은 주지 않았지만, 어떻게 다시 근골을 짜 맞추는 것이 '옳은' 길인지를 알려주었다.

거기에 의원이었던 나의 의술지식이 더해지자, 나는 아주 쉽게 육신을 개조할 수 있었다.

근골이 뒤바뀌고 피부가 벗겨진다.

쓸모없는 지방질이 전부 바깥으로 밀려나며, 혈맥 곳곳에 스며든 니코틴과 콜레스테롤 등 독기(毒氣)가 빠져나갔다.

전신의 근골이 천지의 흐름을 받아들이기에 최적화된 신체로 개조된다.

무(武)를 수련하기에도 최상의 신체.

경맥이 넓어지고, 근골이 더욱 튼튼해지며 단전이 훨씬 넓어졌다.

동시에 전신의 모든 미세혈도가 활짝 열리며 천지원기를 조금씩 빨아들였다.

코로 숨쉬지 않고 순수한 피부호흡만으로도 살 수 있을 지경.

지금의 나는, 평범한 인간이라기보단 아예 완전히 새로운 신인류(新人類)나 다름없었다.

번쩍!

눈을 뜨자, 눈에서도 정광(正光)이 흘러나오는 듯 했다.

"후우..."

아무것도 쥐지 않은 손으로, 기수식을 펼치며 단악검법의 월악(越岳)을 펼친다.

발 밑, 풀 끝에 달려있던 작은 이슬이 내 기수식에 튕겨오른다.

내 동작에, 이슬방울은 허공으로 더욱 더 튕겨올랐고, 내 눈에는 그 이슬방울의 동선 하나하나가 훤히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 이슬방울에 맺힌 한 인영을 볼 수 있었다.

잡티 하나 없는 깨끗한 피부, 썩 잘생기지는 않았어도 군더더기가 없어진 얼굴.

그리고 많이는 아니지만, 상당히 젊어진 얼굴.

환골탈태를 하며, 반로환동(返老還童)한 나의 모습이, 이슬방울에 비치고 있었다.

슈칵!

나는 손으로 허공을 갈랐고, 그 날카로운 기세에 허공에 퉁겼던 이슬방울이 반으로 갈라졌다.

끊임없이 검법을 펼치며.

천지간에 떠다니는 기(氣)의 흐름.

그 흐름 자체에다가 나의 의념을 흘려넣으며 내공을 불어넣는다.

우우웅-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강기(罡氣)가 맺히기 시작했다.

이제는 허공을 흐르는 그 '흐름' 그 자체를 무기로 삼을 수 있다!

콰악!

허공에 맺힌 강기를 잡고서, 단악검법의 일 초부터 22초까지의 초식을 다시 사용한다.

그리고, 나는 꼭 한번 해 보고 싶었던 일을 해 보기로 했다.

타앗!

산군월악비를 펼치며, 근처에 있던 가장 높은 나무로 뛰어올라간다.

순식간에 나무의 정상에 오른 나는, 그곳에서 다시 한번 나뭇가지를 박찼다.

보인다.

새로이 얻은 식(識) 안쪽으로.

새로이 얻은 새로운 육신의 감각 안으로.

창공을 흐르는 무수한 바람의 결들이.

그 바람 사이로 흐르는 천지영기의 흐름들이.

'이렇게 하면 되는건가.'

머릿속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어떤 곳을 '밟을' 수 있는지가 떠올랐다.

나는 최적화된 동작으로, 어떤 낭비도 없이, 바람의 결과 천지원기의 흐름을 '밟았'다.

파앙!

내 발이, 허공을 박찬다.

허공답보(虛空踏步)!

비록 아직 익숙하지는 않은 탓인지, 내공이 썩 많이 소모되었지만 나는 전신을 관통하는 짜르르한 쾌감을 느끼며, 계속해서 허공을 밟았다.

파앙, 파앙, 파앙!

허공을 밟으며, 끊임없이 하늘로 치솟는다.

더욱 더 높이.

더욱 더 멀리!

점차 지상이 까마득해지고, 하늘이 가까워졌다.

나는 더욱 더 빠르게 발을 놀리며, 허공의 흐름을 밟고 하늘을 향해 쇄도했다.

어느 순간.

푸확!

나는 하늘을 흐르는 구름을 뚫고, 구름 너머에 올라가 있었다.

"하, 하하... 하하하하..."

전신에 묻은 물방울들을 털어내며, 새하얀 운해(雲海)를 발 아래에 두고, 나는 그렇게 웃었다.

드디어, 도달했다.

바라고 또 바랐던 그 경지에.

내가 목표로 하던, 최소한의 경지에.

나는 어째선지 눈물이 나는 것을 느꼈다.

눈물은 구름에서 묻은 물방울들과 섞이며, 하늘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고맙다."

나는 지난 삶의 제자들에게, 이젠 다시는 볼 수 없는, 시간선 너머의 제자들에게 말했다.

"너희 덕에 다다를 수 있었다."

나는 너희를 마음으로 키웠건만.

이제는 영원히 너희를 볼 수 없겠지.

되돌아온 시간의 너희는 내가 키운 제자들이 아닐 테니까.

이젠 다시는 볼 수 없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마음을 다해 감사하는 것 뿐.

고맙다, 제자들아.

그리고, 미안하다, 제자들아.

어찌되었건, 나는 너희를 돌보며, 너희의 바람을 들으며, 그리고 너희에게 어리석은 아집을 부리며... 그 아집을 베어내며 이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단다.

한없이 도달코자 했던 경지.

"오기조원(五氣朝元)에."

허공답보를 유지하지 않고, 바람의 결을 맞으며 나는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시원한 창궁의 바람을 맞는다. 동시에 나는 내 제자들의 기억을 가슴 속에 묻었다.

이전까지의 추억을 가슴속에 간직하며, 나는 내가 이제야 제대로 된 출발선에 섰다는 것을 인지했다.

푸확!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겠지...'

구름 속에 파묻히며, 나는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래, 이제부터가 진짜 출발선이다.

오기조원(五氣朝元), 그리고 달라진 것들

나는 땅으로 내려와, 일행을 깨운 후 대강 상황을 설명했다.

우리는 조난당한 것 같으며, 여기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기타 등등...

나는 일행을 데리고 동굴로 데려가, 불을 피우고 적당히 음식을 먹였다.

그런 후 다시 잠을 재우고 동굴을 나섰다.

타닷!

나는 허공을 박차고, 여우가 있는 곳을 향해 달렸다.

타닷...

얼마나 허공을 거닐었을까.

나는 다시금 거대한 의식영역을 확인할 수 있었다.

꼬리가 세 개인 거대한 여우.

이번에는,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툭-

나는 땅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월수궁무록과 조수월무록을 동시에 운용하며 여우에게 서서히 다가갔다.

부웅, 붕!

수도(手刀)를 만들어, 허공을 갈라 여우의 인식을 베어내며 천천히 여우에게 접근했다.

의식영역으로부터 딱 열 보.

그것이 지난 삶에서의 한계였었다.

지금은 어떨까.

저벅-

나는 망설임 없이 열 보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벅-

그리고 다시 한 보.

삼화취정에 막 올랐을 당시보다, 훨씬 의식의 결이 또렷하게, 그리고 명확하게 보인다.

어디를 어떻게 베며, 어떻게 헤쳐가야 할 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계속해서 여우의 의식영역을 향해 걸어들어갔다.

아홉보, 여덟보, 일곱보...

세 보, 두 보, 그리고 마지막 한 보.

나는 마지막 한 보를 남겨두고 잠시 망설였으나, 이내 더욱 더 의식을 집중하며, 그대로 여우의 의식영역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었다.

우응-

나는 그렇게, 여우의 의식영역으로 한 걸음을 진입하는데에 성공했다.

'결단기급 요괴의 의식이다. 드디어...'

나는 여우의 의식 안쪽에서 싱긋 웃었다.

드디어, 결단기급 존재의 의식 안에서도 어느 정도 활동할 수 있다.

즉슨, 결단기 수도자의 앞에서도 최소한 도주는 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나는 월수궁무록을 포함해, 조수월무록, 조수월무경, 조수월무결 등을 운용하며 계속해서 여우의 의식영역을 헤쳐갔다.

여우의 의식의 크기는 여우를 중심으로 반경 30장.

나는 계속해서 걸어가며, 여우에게 1장 정도를 더 가까이 근접하는데에 성공했다.

남은 거리는 약 29장.

이 앞으로는 훨씬 여우의 의식이 빽빽해졌다.

그러나, 나는 의식을 집중하며 의념을 갈무리했다.

아직도 뇌리 속에 선명하다.

조수월무결을 한 차례 진화시킨, 김영훈의 깨달음의 정수(精髓).

-그 무학의 최소 입문 조건은 오기조원이야. 일류가 절정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듯이. 절정 초기가 삼화취정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듯이... 오기조원 이하는 그 무학체계를 이해할 수 없어. 그런 게 제대로 전승이 될 수 없으니 미완성인 게지.

지난 삶의 막바지.

김영훈의 말이 뇌리를 스친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겠군요. 이 무학은 이제...'

의식을 집중한다.

'제가 이어받을 테니까...'

월수월무록(越修越武錄)!

월수궁무록, 조수월무록, 조수월무경, 조수월무결, 그 모든 단계를 거쳐 탄생한.

최소 입문 조건만 오기조원인 극상의 무학체계!

그 깨달음이, 내 손끝에서 피어나온다.

월수궁무록이 인식을 베어내고.

조수월무록이 인식과 조화된다면.

월수월무록은 의식을 분리해내는 방법에 대해 말하는 무학이었다.

허공에 검강이 생겨난다.

그리고 허공에서 빛나는 검강은, 이내 내 의식영역 바깥으로 향하더니, 스스로 움직이며 월수궁무록을 펼쳐 여우의 의식으로 파고들었다.

생명이 없는 검강이기에, 생체 반응이나 기타 의념 등을 정리할 필요가 없이 그저 인식만 베어내면 되었기에,

나보다도 훨씬 접근하기가 용이하다.

검강은 삽시간에 6장을 더 주파하며, 여우와의 거리를 23장까지 좁혔다.

그러나 그 이상은 확실히 의식의 밀도가 더 농밀했기에 다가가기가 힘들었다.

나는 그 쯤에서 검강을 흩어버리고, 월수월무록의 깨달음을 정리했다.

'대략 이런 깨달음인가...'

내 의식(意識)을 잘라내어서 행동을 입력한 다음 보내는 기술.

단순한 행동뿐이 아닌, 의념과 깨달음마저 입력이 가능했기에 내 기술을 고스란히 펼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이것이, 오기조원의 다음 경지로 향하는 깨달음...'

강기압환(罡氣壓丸)을 사용하는 경지.

이전까지는 어떻게 김영훈에게서 떨어진 강기 덩어리들이 알아서 상대를 요격하나 했었으나, 지금에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월수월무록을 계속 따라가면, 언젠가 오기조원 너머의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희망을 가지며, 여우의 의식을 다시 자르고 동굴로 돌아갔다.

* * *

다음날 아침.

다시 여우가 찾아와서 팔을 달라고 했고, 이번에도 팔을 내 주었다.

내 원래 팔에 있던 콜레스테롤과 니코틴 등 독기가 전부 빠져서인지, 여우는 내 팔을 아주 맛있게 씹었고, 나머지 부위도 탐내는 듯 했으나, 결국 닷새 후에 다시 찾아오겠다고 하고는 갔다.

아무래도 환골탈태를 한 탓에 여우의 입맛에 더 잘 맞는 몸이 된 모양이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고.

다시 그들이 찾아왔다.

촤아아아-

창호자란 수도자가 발을 구르자, 내 팔이 재생된다.

세 명의 수도자가 나타나서 우리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전과는 약간 반응이 달랐다.

[흠, 영근이 있는 놈은 이렇게 넷인가.]

금색 장포를 입은 중년인이 손을 까딱였다.

그의 의식이 움직이자, 천지영기가 저절로 꿈틀거리며 나와 전명훈, 오현석, 강민희 대리를 감싸안았다.

'이건 또 새로운 광경이군.'

이전까지는 언제나 똑같이 저 셋만 선택받았지만, 지금은 나 역시 그들의 관심 대상이 된 것이었다.

그들은 이전과 똑같이 두런거리는 듯 하더니, 차례대로 전명훈, 강민희, 오현석 등을 데려갔다.

그리고, 그들은 마지막 남은 내게 시선을 돌렸다.

[흠, 내 술법에도 반응하지 않고.]

[내 귀도공법에도 반응하지 않는군.]

[내 법보에도 반응이 없구나.]

"..."

웅웅-

나는 의식을 웅웅 울리는 이들의 기이한 대화 방식에 의식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이전까지는 몰랐지만, 의식을 가지게 되니 이들이 말하는 방식이, 목소리로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닌 의식에 뜻을 그대로 불어넣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뭐 그럼 일단 무슨 속성 영질을 가졌는지나 볼까.]

금색 장포의 사내가 내게 손을 뻗었다.

우우웅-

"커헉!"

천지영기가 저절로 움직이며 내 전신을 압박했다.

동시에, 내 경맥 속으로 강제로 뚫고 들어온 천지영기가 몸 곳곳을 헤집는다.

그와 동시에 금색 장포 사내의 의식이 내 전신을 샅샅이 뒤지는 것이 느껴졌다.

"끄흡, 끄으읍!"

전신 경맥에 구멍이 뚫리는 듯한 고통!

그러나 나는 이를 악물며 고통을 참아냈다.

얼마 후, 우악스레 내 몸에서 천지영기를 회수한 금포 수도자가 말했다.

[음, 참을성이 좋군. 하나...]

파아앗!

내게서 빠져나온 천지영기들은 허공으로 뭉치더니, 다섯 갈래의 영력으로 나뉘었다.

오행(五行)의 속성.

그것을 본 금포 수도자와 흑색 마의인, 청갑 거한의 눈에 흥미가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오영근(五靈根)이로군.]

[거기다가 저 놈의 몸에서 느껴지는 불순한 기운... 무림인인가?]

[하하하, 표정을 보아하니 아예 수도계에 대해서 잘 몰랐던 녀석인가 보군. 하기사, 자기가 영질을 타고났다는 걸 모르고 그냥 산골에서 무공만 익혀왔을 가능성도 있지.]

청갑 거한, 창호자란 이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수도계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나보다만. 수도자들의 영질. 혹은 영근이라 불리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 속성이 적을수록 수련속도가 빨라진다. 반대로 가진 속성이 많을수록 더욱 더 수련속도가 느려지고.

그렇기에 단일 속성 영질은 하늘이 내린 영질이라 하여 천영질(天靈質)이라고도 하고. 두, 세가지의 속성을 가진 영질은 진영질(眞靈質). 네, 다섯가지 속성을 가진 영질은... 잡영질(雜靈質)이라 하여 천히 취급되지.]

"..."

[하하하, 하지만 너무 걱정할 것은 없다. 수선(修仙)이 오직 자질로만 결정된다면 너와 같은 오영질을 가진 이는 진즉에 모두 목매달고 자살했을 테니까. 수도는 자질뿐이 아닌 공법과 경지에 대한 이해와, 총체적인 오성 역시 중요하다.

거기에 끈기와 인내심, 의지력 역시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본좌가 보기에 너는 자질은 형편없고, 오성은 모르겠다만, 저 얍삽하게 생긴 황금색 장포 놈의 악랄한 영질 검사를 비명 없이 넘긴 것을 보아, 인내력과 의지력은 훌륭한 것 같구나.]

파아앗!

창호자는 껄껄 웃으며 내게 작은 빛무리를 튕겨주었다.

빛무리는 내 손등에 스며들며 작은 낙인으로 변모했다.

[내 가문 방계의 끝자락... 그 녀석들이 세운 수도가문이 하나 있다. 워낙 자질이 떨어지고 총체적으로 허약한 놈들이라 이번 승천문이 열릴 때에 데려가지 않지만. 그래도 네게는 도움이 되겠지. 가문의 외부 구성원 추천장이다.

벽라국이라는 범인들의 국가에 있으며, 청문씨(淸汶氏)를 사용하니, 청문세가를 찾아가면 될 것이야.]

말을 마친 창호자와 다른 두 명의 수도자는 빛무리로 변해 하늘로 사라져 버렸다.

"..."

난 내 손등에 찍힌 작은 낙인을 보며 작게 창호자에게 인사를 하였다.

"이, 이보게 서 대리. 저들이 도대체 뭐라는 건가?"

"...저도 잘 모르겠군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모르는 척을 했고, 다시 다음 날이 되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비바람이 불었다.

나는 동굴에 누워 끙끙거리는 오혜서 대리를 간호하며 그녀를 관찰하였다.

'천지영기가 그녀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전에는 하나도 몰랐지만, 의식을 각성한 지금은 알 수 있었다.

광대한 하늘의 영력이, 그녀를 중심으로 돌고 있었다.

얼마 후 다시 해룡왕 서휼이 나타나 그녀를 데리고 갔고, 얼마 지나 김연 주임이 능력을 각성했다.

쿠구구구구-

'이건...'

김연 주임 역시, 의식을 각성한 지금에서야 그 능력의 실체를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미쳤군. 이게, 인간의 의식이라고...?'

그녀를 중심으로, 수천, 수만, 수억 가닥은 되어보이는 의식의 실이, 천지간을 감싸안듯이 돋아나 있었다.

의식의 실의 크기는 차라리 수도자들의 그것과 비교해도 꿇리는 기색이 없었다.

동시에 나는 그녀의 상단전이 급격히 커지는 것을 알아차렸다.

'능력을 각성하면서... 나와 같은 부작용을 겪고 있나보근.'

나는 천천히 그녀의 능력에 작게 탄성을 내뱉으며, 혈을 짚어 상단전을 조금 안정시켜주었다.

"서...대리님이 만져주니까, 조금 머리가 덜 아픈 것 같아요..."

"..."

김연 주임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때, 그녀가 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여러 수도자들과, 해룡왕이 향했던 방향.

그곳에서 다시 꼽추 괴인이 날아오고 있었다.

후웅-

그리고, 꼽추 괴인은 날아오자마자 나와 김 주임을 보더니, 그녀에게 손가락을 퉁겼다.

그러자 새하얀 빛무리가 날아가 김 주임의 상단전에 안착했고, 그녀의 상단전이 비틀리는 작용이 완화되기 시작했다.

'저건...?'

이전 생에서는 본 적이 없었던 것이었다.

아무래도 이전 생에서도 계속 사용해 왔지만, 의식을 각성한 지금에서야 볼 수 있던 것이리라.

꼽추 괴인은 김 주임을 살펴본 후, 내게도 시선을 주었다.

[흐음... 흠, 이건 또 무어야.]

이전까지의 수도자들과 마찬가지로, 꼽추 괴인의 시선 역시 이전 회차와는 달라졌다.

[어디보자, 이 골격, 이 영질, 이 의식의 크기...]

잠시 나를 뜯어보던 꼽추 괴인은 갑자기 다가와 내 몸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얼마 후, 꼽추 괴인이 히죽 웃으며 낄낄거렸다.

[히히히, 그렇군. 이 내공. 이 골격. 이 경맥. 의식의 크기, 거기에 하필이면 오행영근이라니. 내 젊었을 적 봤던 그 놈하고 같은 부류로구만!]

꼽추 괴인이 이를 드러내며 낄낄거렸다.

[네놈, 타고나길 선택받아 태어난 수도자가 아닌게지? 그렇지?]

"....!"

그 말에 나는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이전의 수도자들과 해룡왕은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사실이었다.

아니, 관심이 없었다는 게 맞으려나.

노인은 낄낄거리며 계속해서 내 몸을 더듬었다.

기분이 조금 나빴지만, 노인이 가진 의식의 크기를 보아, 내가 감히 대항할 수 없는 존재였기에 꾹 참으며 잠자코 있었다.

[저런, 의식이 요동치는군. 내 말이 맞았어. 너... 무공을 익힌 무림인이로구나. 무공을 익혀서 수도자의 경계에 진입한 거로구나. 그렇지?]

"...어찌, 아셨습니까."

나는 김영훈과 김 주임이 알아듣지 못하도록 연국어를 써서 되물었다.

그러자 꼽추 노인은 낄낄거리며 말했다.

[그야, 천육백년 전에 네놈하고 똑같은 놈을 봤으니까. 그래, 무림인들은 오기조원이라고 불렀던가, 그 경지를?]

"...그렇군요."

하기사, 아주 오랜 세월을 산 이들일 것이라고 짐작은 했었다.

이런 자들이 그 긴 세월을 살며, 오기조원에 이른 무인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을 리는 없었다.

[그 놈도 나름 무림 기준에서는 천재라고 불리던 녀석이었지. 내가 축기기 수도자였을 때 만났다만, 이 나와 어느 정도 합을 겨룰 수 있을 정도였으니.

결국 내게 패배하긴 했지만, 상당히 재밌었던 경험이었다. 그 놈을 만나고 나서 고서들을 뒤져, 또 저런 기이한 존재가 있는지 찾아보기도 했다. 고서를 찾아보니, 몇백년에 한 번씩, 아주 드물게 그런 녀석들이 나오긴 한다는군.

그리고 특징도 너와 모두 똑같고 말이지.]

괴인의 손이 내 어깨를 짚었다.

[상당히 튼튼한 근골. 넓은 경맥. 단전을 가득 채운 무림인들의 내공.]

괴인은 내 턱을 붙잡더니, 억지로 내 입을 벌리고 이빨을 가리켰다.

순간 괴인을 걷어 차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으나, 그 짓을 했을 때의 후폭풍이 어떨지 알았기에 짜증을 억지로 참을 수밖에 없었다.

[완벽히 대칭된 깔끔한 치열. 이런 치열은 자연적으로는 '절대' 못 나오지. 영근을 가지고 태어난 수도자들도 이런 치열은 없어. 오직 오기조원에 이르러 환골탈태를 한 무림인만이 가지는 치열이야.]

괴인은 내 턱에서 손을 놓고, 내 의식영역을 자신의 의식으로 건드리며 말했다.

[그리고 일반적인 연기기 3, 4성 수도자 크기의 의식. 법력이 1푼도 없는 무림인 주제에 이런 의식을 가진다고? 어림도 없지. 이렇게 의식이 비대한 건 스스로 의식을 각성한 오기조원의 무인 뿐.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오행영근.]

그는 마지막으로 내 손목을 낚아채어 잡고는, 진맥하듯이 기를 흘려보내었다.

[오기조원의 무림인들은, 오기조원의 경계에 이를 때, 상단전의 불균형을 막기 위해 천지영기에서 오행의 영기를 균일하게 뽑아서 환골탈태에 쓴다고 하지.

그 덕에 너희 오기조원의 무인들은 일반적인 오영근 수도자들보다 훨씬 체내의 영기가 균일하게 자리를 잡고 있어. 이런 것들이 네가 평범한 오영근 수도자들이 아닌, 오기조원의 무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게지.]

꼽추 괴인은 낄낄 웃으며 내게서 손을 떼었다.

[나처럼 학식이 풍부하고 오래 살아 지혜로운 몸이 아니라면 알 수 없는 사실이니라. 오랜만에 젊을 적 친우와 만난 듯한 기분이라 잠시 흥겨워 조금 많이 떠들었군.]

아무래도 젊은 시절 만났다는, 천 육백년 전의 오기조원의 무인과 나를 잠시 겹쳐보았던 모양이었다.

꼽추 노인은 히죽 웃으며 내 손에 찍힌 낙인을 바라보았다.

[손에 낙인을 보니, 창호자 그 착한 놈이 추천권이랍시고 줬나 보지? 흐하하, 멍청하고 또 멍청한 놈 같으니. 오기조원의 무인이라면 제놈이 익히는 연체공법(鍊體功法)을 전수하기에 굉장히 좋은 자질이거늘.

오기조원이라는 것만으로도 기본 전력(戰力)은 보장된 놈인데. 하계에 남아있을 쩌리 가문에나 추천하다니. 그 아둔한 놈이 또 실수를 했구나.]

그는 재밌다는 듯이 낄낄 웃으며 나를 향해 질문했다.

[한 가지 질문을 하지. 일단 너는 뭘 주로 익힌 무림인이냐?]

"검법입니다."

[오, 그래. 검 좋지. 내가 만났던 친우는 창을 주로 사용했지만 검법 역시 익히곤 했어. 애초에 무림인 대다수가 검을 익히기도 하고... 아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너 말이다.]

그가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평생 검을 잡지 않겠다고 할 수 있느냐? 만약 그런 맹세를 한다면 내 너를 친히 제자로 받아들여주마.]

검을 잡지 말라고?

고민은 짧았다.

아니, 없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제안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검을 놓을 수 없습니다."

[흐음, 내 제자가 되면 나를 따라 승천문을 넘어 바로 상계로 비승할 기회를 얻는데도?]

"견문이 짧아 그것이 어떤 기회인줄은 모르오나, 평생을 수련해 온 무(武)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너는 내 제자가 된다면 앞으로 수백년은 더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고작 몇십년 수련해 왔을 그 무공을 포기 못한다는 게냐?]

고작 몇십년이라.

나는 작게 쓴웃음을 지었다.

몇십년도 아니고, 고작도 아니다.

내 지난 삶(生)들은...

그래, 무(武)란 나의 지난 삶들이었다.

"...죄송합니다. 하나, 저는... 짧게 살다가 짧게 죽을지언정, 이 손에 배긴 검을 놓을 수 없습니다."

[흐음...]

잠시 나를 뜯어보던 꼽추 노인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재미없는 것 같으니. 1600년 전 그 놈도 그랬지. 의식의 크기는 고작해야 연기기 4성쯤이나 되던 것이, 연기기 극성을 넘어선 공격을 퍼붓길래, 신기해서 제자로 삼으려 했더니만... 네놈하고 똑같은 말을 했다.]

그의 표정은 어쩐지 아쉬워보였다.

[되었다. 내 제자가 되지 않으려면 말거라. 참고로 나는 성격이 나쁘니 창호자 놈에겐 딱히 널 추천하지는 않을 게야. 그냥 서로의 연이 닿지 않은 게지. 그럼 이만 썩 꺼져라.]

우웅-

노인이 손을 뻗자, 뒤쪽에서 공간이 갈라지며 시커먼 공허를 내뿜었다.

이전과도 같은 진행.

나와 김영훈의 몸이 공간균열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뭐, 내 제자가 되지 않은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래도 기개를 지킨 점을 높이 사서 선물을 하나 주마.]

파아앗!

꼽추 노인의 손 끝에서 하얀 빛무리가 터져나왔다.

빛무리는 공간균열로 빨려드는 내 머릿속으로 스며들었고, 내 머릿속에 뭔가가 각인되는 듯 했다.

나는 이전까지와 마찬가지로 공간 균열로 떨어졌다.

이전까지와 다른 점이라면, 공간 균열 너머에서 마지막으로 본 것이,

우리에게 손을 뻗는 김 주임이 아닌, 손을 흔드는 꼽추 노인이라는 점이었다.

* * *

휘이이이이-

바람이 분다.

춥다.

그리고, 주변이 온통 파랗다.

"....?"

'여기는...'

나는 문득, 내가 빠른 속도로 하강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 이런 미친.."

나는 기겁을 하며 정신을 차렸다.

떨어지고 있다!

하늘에서!

주변을 둘러보니, 김영훈 역시 저 멀리서 나와 같이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허공답보를 펼치며 김영훈을 낚아채고, 깨지 않게 수면혈을 눌러준 다음 허공답보를 사용해, 낙하 속도를 낮추었다.

얼마나 떨어졌을까, 나는 허공을 밟으며, 무사히 지상에 착지할 수 있었다.

'정신을 안 차렸으면, 나도 모르게 바로 다음 생으로 넘어갈 뻔했군.'

소름돋는다.

아무리 무작위라지만, 아예 하늘에서 떨어질 줄은 몰랐다.

나는 식은땀을 훔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단 이곳은...'

허공답보를 하늘을 뛰어다니며 주변의 지형을 관찰한 결과, 나는 내가 있는 곳이 대강 어디인지를 알 수 있었다.

'연산성(鍊山城) 서쪽이군...'

연산성.

내가 최초로 떨어진 성.

몇 회차를 거쳐, 또 다시 이 인근으로 떨어진 것이었다.

'우선, 꼽추 노인이 내게 뭘 준 건지나 볼까...'

나는 눈을 감고 꼽추 노인이 내 머리에 입력시킨 법결들을 읽어보기 시작했다.

수도자(修道者)(1)

우우웅-

머릿속에, 한 권 분량의 법결(法訣)이 둥실둥실 떠다닌다.

나는 그 법결들을 살펴보며 그 내용을 파악해갔다.

법결의 이름은 은식술(隱識術)이라는 법술로, 자신의 의식(意識)을 숨겨서 경지를 조금 낮아보이게 할 수 있는 법술이었다.

법력이 아닌 의식의 운용만으로 펼칠 수 있었다.

또한, 은식술의 기본 원리는 자신의 의식을 압축시켜서 상단전 안으로 밀어넣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의식의 크기는 작아져도, 한시적으로 의식의 밀도가 높아지고 한순간 의식이 정순해지기에, 수도공법의 수련 속도를 조금 더 높일 수 있다고 했다.

'의(意)를 다루는 법결인 탓인가, 월수궁무록, 월수월무록과도 어느 정도 상통하는 부분이 있군.'

나는 찬찬히 곱사등이 노인이 남긴 법결을 전부 탐독했다.

그리고 법결의 최후반부의 남겨진 노인의 전언(傳言) 역시 읽을 수 있었다.

[오기조원에 이른 무림인의 의식은 여타의 수도자들보다 비대하나, 어줍짢은 오영근을 가지고서 잘난척하지 말아라. 그저 네 빼어남을 숨기며 수련에 매진하거라. 어울리지 않는 애매한 자질은 그조차 없는 이들에게 질시를 사기 마련이니.]

"...좋은 선물 감사히 받겠습니다."

나는 작게 곱사등이 노인에게 속으로 감사 인사를 표하고, 김영훈을 잠시 근처에 앉혀놓았다.

그런 후, 나는 인근에 있는 비적무리를 떠올렸다.

'투호단이라는 놈들이었지.'

녀석들에겐 각별한 기억이 있었다.

회귀를 경험하기 이전.

최초의 삶.

그 당시 마을에 흉년이 들었을 때, 내가 살던 마을에 쳐들어와 있는 재산 없는 재산을 모조리 약탈해간 비적단.

파앙, 팡!

나는 허공을 박차며, 녀석들의 근거지를 향해 달려나갔다.

연산성 인근이라면, 연국 그 어느 곳의 지리보다도 해박했다.

이내 투호단이 자리를 잡은 동굴에 도착한 나는, 익숙한 악취에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술 내음. 썩은 채소 내음. 말라붙은 정액 내음. 녹이 슨 병장기 내음. 씻지 않아 피부를 흐르는 땟국물 내음.

그래, 총체적인... 가난과 무지, 폭력의 내음들.

나는 이 내음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최초의 삶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여봐라. 모두 나와라."

나는 작게, 그러나 또렷하게.

투호단이 자리를 잡은 굴 안쪽으로 말했다.

딸꾹, 딸꾹..

대낮부터 술에 취해 얼굴이 벌건 투호단의 단원 하나가, 유엽도를 한 자루 든 채 비틀거리며 내게 걸어왔다.

"넌 뭐여 쒸펄..."

"하하하하..."

그 멍청하고 한심한 모습에, 나는 오히려 웃음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내가 절정 초기에 들었을 당시,

일각만에 몰살시켰던 계호수로채도 이 놈들보다는 체계적이고 수준이 높았다.

정말, 비천하고 한심한 도적놈들.

그것이 투호단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투호단 놈들의 발 아래에 머리를 조아리며, 가진 것을 전부 꺼내와 바치고 살려달라며 빈 기억도 있었다.

"너, 이 쉐끼 가암히 우리 대 투호단에 와서어..."

"살기가 힘들었겠지?"

"뭐어..?"

"다음 생에는 더 좋은 기회를 가지고 태어나기를."

투욱!

검은 커녕, 기수식도 필요 없다.

주먹을 쥘 필요도 없었다. 나는 그저, 손가락을 뻗어 술에 취한 투호단원의 머리를 툭 쳤다.

그리고, 어리둥절하던 투호단원은 이내 두 눈을 뒤집고 입에서 거품을 물며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손가락으로 발경의 수법을 사용하여, 뇌를 일수에 파열시켜버렸다.

고통은 없었으리라.

나는 악취가 나는 동굴로 들어가며, 최초의 삶의 기억을 새록새록 떠올렸다.

투호단은 악랄한 놈들이다.

하지만 얄궂게도, 이들은 대다수가 농민 출신이었다.

살기가 힘들어서, 지주들에게 땅을 빼앗겨서, 고향을 버리고 떠나와 도적이 된 이들.

어쩌면 나 역시도 조금만 더 의지가 약했더라면 이들과 같이 있었을 터.

이들은, 어쩌면 나의 비참했던 첫 삶에의 또 다른 가능성이었다.

투욱, 툭!

나는 만나는 이들의 머리를 전부 짚어주며, 뇌를 진탕시켜 일격에 절명시켜버렸다.

가엾은 이들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죄인이었다.

동굴로 더욱 깊숙히 들어가자, 납치당한 사람들과 여인들이 헐벗은 채 나뒹굴고 있었다.

난 그들의 수면혈을 짚고, 조용히 투호단의 사람들을 격살시켰다.

그렇게 얼마나 동굴 안을 거닐었을까, 나는 동굴의 끝자락.

그곳에서 술을 진탕 퍼마시고 있는 수염이 덥수룩한 거한을 마주했다.

투호단의 단주였다.

"...당신은 어쩐 일로 이런 비적단을 운용하시게 되었소?"

"끄음..."

술로 병나발을 불던 거한은,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내가 아는 자였다.

최초의 삶에서 가장 앞장서서 내 마을을 불태웠던 이였으니까.

그러나 이제와서 보니, 이자는 고작해야 이류무사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다.

"...뭐 별거 있나. 삶이 고통스러우니 나 말고 딴 놈들 행복을 뺏어오면 좀 삶이 나아질까 했지."

"그래서, 삶이 조금 나아지셨소?"

"하하, 보면 모르시나? 내가 지금 행복해 보이시오? 삶은 곧 고통이외다."

"삶이 왜 고통이오?"

"그야... 음. 고통이니까 고통이지. 말이 필요한가."

삶은 곧 고통이라.

나는 어쩐지 그 말에 공감이 되는 듯 했다.

분명 이 자와 나는, 다른 위치에, 다른 사정과 상황에 놓였있었으나.

나는 어쩐지 그에게서 내 예전 모습을 겹쳐볼 수 있었다.

삶에게서 고통을 부여받지만, 왜 고통스러운지 그 이유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나약하고 약소했던 나 자신의 모습.

나는 또 다른 약자의 모습을 통해, 내 지난 세월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맞소. 삶은 곧 고통이지."

"끅끅. 그래... 삶은 정말..."

"하지만..."

나는 안쓰러운 눈으로 투호단주를 바라보았다.

"내가 살아보니, 고통이 끝은 아니더이다."

투욱

내 손이 투호단주의 머리를 살짝 밀었다.

내가 손끝으로 밀어넣은 경파에, 투호단주의 뇌는 그대로 파열되었고, 그는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그 역시 편안하게 갔으리라.

나는 투호단의 거처에서 몇 냥의 은전과 돈을 챙기고, 다시 그곳에서 나왔다.

그리고, 동굴 바깥의 햇살을 받으며, 최초의 삶에서 나를 괴롭혔던 악몽에서도 나올 수 있었다.

나는 투호단에서 받은 은전을 가지고 연산성에 가, 나와 김영훈의 호패를 만들고 의복을 샀다.

그런 후 나는 성내의 사파무리에 쳐들어가 사파들을 전부 정리해버렸다.

사파무리를 정리하며 나온 금괴와 그들의 재산을 팔아 적당한 장원을 산 후, 나는 김영훈의 교육에 매진하였다.

약 한 달의 시간후.

김영훈은 오기조원의 경지에 이른 나의 가르침에 따라, 익숙하게 삼화취정의 경지를 밟았다.

우우웅-

세 송이의 기화(氣花)가 허공에서 피어나며, 곧이어 다시 김영훈의 체내로 들어갔다.

얼마 후 김영훈의 눈에 정광이 깃들었고, 그는 새로 얻은 감각이 신기한듯, 의념을 움직여보며 이리저리 초식을 펼쳐보았다.

그리고, 그의 의념이 나의 의식영역에 맞닿았다.

"...! 아니, 잠깐. 그나저나 서은현이... 자네가 가진 그... 그 의념은 도대체..."

그는 내 미간을 중심으로, 나를 원구형으로 둘러싼 의식이 신기하였는지 한참을 쳐다보았다.

나는 씨익 웃으며, 연무장에서 한 자루의 도를 꺼내어, 기수식을 잡았다.

그리고, 빠르게 단맥도법을 펼쳐보였다.

단맥도, 1초 뫼얼

도를 들고, 상단세와 하단세를 동시에 가격한다.

단맥도, 2초 산지기

도를 사방팔방으로 난무하며 회전하여 이 영역 안으로 누구도 들어올 수 없게 공방일체를 취한다.

단맥도, 3초 산능성이

첩첩이 이어진 산능성이와 같이 끊이지 않는 검기를 뿜으며 검무를 춘다.

단맥도, 4초 산바람

보이지도 않을 빠르기도 상대를 찔러 상대의 흐름을 끊는다.

단맥도, 5초 산열림

산수화의 초식보다 훨씬 더 흉폭한 도신의 난무가 사방팔방으로 펴져나간다.

단맥도, 6초 산새

경쾌한 보법을 밟으며, 눈에 보이지도 않을 빠르기로 도를 휘둘러 주변을 쳐낸다. 그리하여 이 경쾌한 발걸음을 누구도 막을 수 없게 하며 파고들어 도를 휘두른다.

단맥도, 7초 산울림

도명(刀鳴)이 울려퍼지며, 기운을 빠르게 진동시켜 그 진동에 닿는 모든 것을 분쇄해 버린다.

단맥도, 8초 산소리

도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파(波)의 형태로 뿜어진다. 산명곡응과 9할 이상이 똑같은 초식.

단맥도, 9초 산허리

도기가 지반을 파고들며, 강력한 도흔(刀痕)을 남기고 그 주변에 영향을 미친다.

단맥도, 10초 용릉(龍陵)

마치 용이 언덕 위에서 승천하듯이, 도의 끝이 움틀거리며 마구 짓쳐든다.

단맥도, 11초 백두(白頭)

승천한 용의 머리가 새하얗게 백열하며 구름을 뚫는다. 짓쳐든 도신을 잡고 열 갈래로 올려벤다.

단맥도, 12초 대간(大幹)

열 갈래의 도기가 모두 한 갈래로 이어지며 천년거석마저 베어낼 일참으로 변모한다.

단맥도, 13초 월산(越山)

단악검의 월악과도 비슷하나, 수 배는 빠른 일참이 허공을 가른다.

단맥도, 14초 환향(還鄕)

참격의 너머로 수십 갈래의 도기를 쏘아보내며 합을 나눈다.

단맥도, 15초 도묘(刀墓)

단맥도법의 1초부터 14초까지의 모든 초식을 일합에 쏟아붓는다.

단맥도, 16초 산외산부진(山外山不盡)

마지막, 17초...

파아앗!

나는 단맥도에 존재하는 열 일곱개의 초식을 전부 펼쳐내었다.

단맥도의 16, 17초는 단악검법의 23, 24초와 완전히 같은 초식이었고.

그 외에도 단맥도법은 기본적으로 단악검법과 상당히 비슷한 검초였다.

애초에 같은 뿌리에서 출발한 무공이었으니, 이상할 것은 없었다.

나는 멍하니 내 도를 바라보는 김영훈에게 도를 건내주며 말했다.

"방금 보셨겠지요?"

"...봤네."

방금 내가 펼친 것은 단순한 도법이 아니었다.

오기조원의 깨달음을 섞어, 도법 안에 수천 갈래의 의념을 섞어내며 보여주었다.

아마, 그가 방금 본 단맥도의 정화를 계속해서 탐구하다보면, 언젠가는 오기조원에 이를 수 있을 터였다.

"자네는 정말... 천재로군. 어떻게 이런 수준 높은 무학을..."

그가 탄성을 터트리며 말했고,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천재라.

"...저는, 천재는 아닙니다. 다른 회사 동료들이 그랬듯, 조금 특이한 능력을 각성한 거지요. 그 능력으로 인해 오기조원의 경지까지는 바로 도달할 수 있었지만, 이 이후는 무립니다."

그가 오해하지 않도록 말해주었으나, 그의 짧은 한 마디는 내 머릿속에 오래 남아 있었다.

천재.

나의 지난 모든 삶을, 그 짧은 단어 하나로 일축하는 한 마디.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부정할수도 없었다.

세상에는, 나의 지난 삶과도 같은 기회를 얻지도 못한 이들이 널리고 또 널렸으니까.

나는 천재라는 단어에 반박하는 대신, 김영훈의 무공을 짚어주며, 그에게 문자와 말을 가르치고, 무학을 가르쳤다.

그렇게 3개월 후.

그가 문자와 말을 전부 익히고, 무공에 익숙해 질 때 쯤.

나는 월수월무록을 장원에 남기고, 오기조원에 올랐을 때 읽어보라는 말과 함께 장원을 떠났다.

이번 생에는, 그와 큰 인연을 못 가질지도 몰랐으니.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