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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5-395

385화 너도 서클 좀 올리자. (2)

서클을 올린다.

솔직히 알포이는 그 부분에 대해 포기한 지 오래였다.

그냥 매일같이 바쁘게 살고 있었다. 마법사들 감시역을 맡으며 좀 여유로워지긴 했지만, 그래도 바쁘면 일손을 거들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언제 공부를 하고 마력을 모은단 말인가?

애초에 지금은 종신 노예나 마찬가지다. 살아생전에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그가 원하는 건 일이 끝나고 마실 수 있는 시원한 술 한잔과 푹신한 잠자리뿐이었다. 가끔 완장질로 스트레스를 푸는 건 덤이다.

그런데 갑자기 서클을 올리자고?

알포이가 눈치를 힐끔 보며 물었다.

"그... 드래곤 하트 나 주는 거야? 요?"

손톱보다 작은 크기지만 저 안에도 엄청난 마력이 깃들어 있다. 분명 저걸 흡수한다면 4서클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지셀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당연히 너 주는 거지."

"왜...?"

드래곤 하트는 보물 중의 보물이다. 마법사에게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영지에 전력이 되는지로 따지면 자신은 사실 중요도가 낮았다. 실전 경험이야 늘었어도 고작 3서클 마법사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셀을 만나고 나서부터 언제나 당하기만 했던 알포이는 이번에도 의심부터 할 수밖에 없었다.

불신 가득한 그의 표정을 보며 지셀이 혀를 찼다.

'사람이 완전히 의심 덩어리가 됐네. 이게 다 클로드 때문이다.'

본인의 책임도 어느 정도 있지만 지셀은 클로드에게 다 뒤집어씌웠다. 사실 클로드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건 맞으니까.

그래도 알포이는 퀸 그렉스를 잡을 때도 활약을 했고 최근 진홍의 마탑과의 대결에서도 준수한 실력을 보여 줬다.

분명 알포이는 이곳에 와서 바뀌었다. 오만한 마탑의 후계자에서 이제는 훌륭한 영지의 일꾼이 됐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지셀은 알포이의 그런 면을 제법 높이 평가하는 편이었다.

"너도 고생 많이 했으니까 선물로 주는 거야. 너무 겁먹을 필요 없어."

"지, 진짜지? 요?"

"그럼, 이거 확실히 너 준다. 여기 있는 사람 모두가 증인이야."

그 말에 벨린다가 영혼 없는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바네사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잘됐어요, 알포이 님! 저 조각을 흡수하면 분명 경지가 오를 거예요!"

"그, 그렇겠지?"

알포이의 심장 박동이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드래곤 하트는 마법사들이 원하는 최고의 보물이다. 룬스톤은 그에 비하면 돌조각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런 보물을 준다고 하니 기쁘긴 한데... 소심해진 그의 성격이 문제가 되었다.

'저거... 진짜 내가 흡수할 수 있나?'

저런 거 잘못 먹으면 몸이 터져 죽는다. 보물도 그만한 자격이 되는 자나 가질 수 있는 법이다.

특히 적염의 마탑 마법사들은 마탑주인 휴베르트 때문에 소심함이 전염병처럼 옮겨붙은 상태였다.

탑주부터 장로들까지 전부, 룬스톤이 없다고 수련조차 안 하던 사람들이다. 그러니 제자들도 그 분위기에 물들 수밖에 없었다.

위험하면 하지 말자. 이게 적염의 마탑의 새로운 기조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하, 저거 내가 못 먹을 거 같은데....'

먹고는 싶은데, 먹으면 체할 거 같다. 알포이는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덥석 달라고도 못 하고, 그렇다고 포기하지도 못하고 끙끙거리기만 했다.

그 모습을 본 지셀이 피식 웃었다.

"왜? 몸이 터질까 봐 무서워?"

"아, 아니... 무섭긴 뭐가 무서워! 그냥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뭐?"

"그냥 조금 위험할까 봐... 요."

"어? '신을 이긴 남자'가 드래곤 하트 조각 따위에 겁먹은 거야?"

"겁을 먹은 게 아니라! 조심하자는 거지!"

"그럼 다른 사람 줄게."

"그렇게 말을 바꾸면 안 되지!"

"아, 그럼 어쩌라는 거야."

"...."

알포이가 우물쭈물하고 있자 바네사가 옆에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알포이 님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제가 옆에서 지켜드릴게요!"

벨린다와 카오르도 옆에서 거들었다.

"도련님, 그럼 그냥 그거 제가 먹을게요."

"아니, 아니! 내가 먹을게! 먹기 싫다는 놈 뭐 하러 줍니까!"

구경을 왔던 다른 기사들도 달라고 난리를 피운다. 알포이는 자기가 조금 위험해지더라도 절대 남 좋은 일은 하기 싫었다.

"됐어! 다들 조용히 해! 내가 먹을 거다!"

준다는데 못 먹으면 바보다. 알포이는 굳게 마음먹고 손을 내밀었다.

'그래! 내가 신의 힘도 이겨 냈는데 드래곤 조각 따위도 못 이길까! 어차피 신 앞에서는 그냥 파충류잖아?'

당당한 알포이의 모습에 지셀이 웃으며 조각을 넘겼다.

'뭐... 저 정도는 충분히 먹을 수 있겠지?'

그간 알포이가 활약했던 걸 생각하면 그럴 만한 근성과 의지는 있을 거 같았다. 진홍의 마탑과 싸울 때도 훌륭하게 이겨 내지 않았는가.

그리고 알포이의 깨달음도 충분할 거라 생각했다.

깨달음은 자신만의 길이다. 같은 경험을 하고 같은 경지에 올랐더라도 가치관과 사고방식, 신념 등은 모두가 다르다.

알포이는 이곳에 와서 많은 경험을 했다. 그렇기에 분명 자신만의 길이 생겼을 것이다.

과연 알포이는 마음을 굳게 먹었는지 바로 자리에 주저앉아 마력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구오오오오!

'크읏!'

상상도 못 했던 양의 마력이 흘러들어오자 알포이가 이를 꽉 물었다.

고작 조각 따위에 이런 거력이 들어 있다니! 과연 드래곤 하트라 할 만했다.

'버틴다!'

마탑 대결 때 경지가 오르지 않았다고 은근히 눈치를 받고 무시당하지 않았던가. 속 좁은 그는 절대 그 일을 잊지 않았다.

'단번에 4서클로 올라선다!'

구오오오오!

마력이 끊임없이 들어온다. 고작 3서클에 불과한 알포이가 견딜 수 있는 양이 아니었지만, 그의 마력 운용 능력은 놀라울 정도로 발전한 상태였다.

알포이는 흘러들어 오는 마력을 능숙하게 이끌며 심장에 쌓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이들도 살짝 놀랐다. 그가 무척이나 평화로운 표정으로 마력을 흡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게... 알포이?'

'알포이 주제에 저런 평화로움이라니....'

'진짜 저걸 혼자 다 흡수할 수 있다는 말이야?'

그런 사람들의 기대와 놀람 속에서 알포이는 계속 마력을 흡수했다.

'후후.... 괜히 쫄았네. 별거 아니잖아?'

지금 흡수한 것만 해도 자신이 평생 쌓아 온 마력보다 훨씬 더 많다. 그런데 아직 절반도 흡수하지 못한 거 같았다.

'후후.... 이제 슬슬 새로운 고리를.... 왜 안 끝나?'

심장에 무리가 가기 시작한다. 마력을 흡수하는 몸이 점점 찢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그만....'

더는 흡수하지 못할 거 같았다. 그런데 끝이 나지 않았다. 손을 떼고 싶은데 아예 붙어 버린 것처럼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어... 어?'

알포이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온몸에 미친 듯한 고통이 몰려왔다.

받아들이는 마력이 너무 크니 몸이 겨우겨우 버티고 있었다.

문제는 알포이의 정신력이었다. 그간 많은 활약을 했다고는 하지만, 마력을 빨릴 때 외에는 고통을 거의 느낀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고통에 무척이나 약한 남자였다.

'으으으... 아, 아파! 안 돼! 이러다가 나 죽어!'

의지가 약해지니 마력 운용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렇게 통제를 놓치자 마력이 몸 안에서 날뛰기 시작했다.

멋대로 날뛰는 마력은 알포이에게 엄청난 고통을 선사해 주었다. 이런 고통은 살면서 처음이었다.

"으아아아악! 안 돼! 나 못 해!"

알포이가 눈을 부릅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드래곤 하트를 떼어 낼 수가 없었다.

이미 몸과 조각이 마력 통로로서 붙어 버렸기 때문이다.

버티지 못하고 일어나자 더 큰 문제가 생겨버렸다. 아예 손을 놔 버리니 마력이 그의 몸을 터뜨리려고 했다.

몸 곳곳이 부풀어 오르자 알포이가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아악! 살려 줘!"

"에라이."

지셀이 바로 알포이의 입을 막고 등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내가 마력을 인도할 테니까 버텨! 안 그러면 너 진짜 죽는다! 아깝게 그만 처뱉고!"

"으갸갸갸각! 듁어 뎌!"

알포이는 이제 정신을 완전히 잃었다. 그냥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만 싶었다.

지셀은 이를 악물고 자신의 힘으로 알포이의 몸에 날뛰는 마력을 잡아 이끌었다.

아무리 작은 조각이라도 역시 드래곤 하트였다. 상당한 마력이 지셀의 통제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바네사! 내가 마력을 통제할 테니 남은 걸 알포이의 심장으로 보내!"

"알겠어요!"

바네사가 쉬지도 못하고 알포이의 심장 근처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지셀은 날뛰는 마력을 붙잡고 아주 천천히 조금씩만 풀어 주었다. 그렇게 풀려난 마력을 바네사가 외부에서 대신 운용해 알포이의 심장으로 인도해 주었다.

벨린다가 그 모습을 보고 혀를 찼다.

"정말 손이 많이 가는 애야."

"끄르르륵...."

알포이는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고, 그냥 정신을 놔 버린 상태였다.

그래도 지셀과 바네사 덕분에 드래곤 하트의 마력은 천천히 알포이의 몸에 쌓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꼬박 반나절이 지나서야 겨우 마력이 안정되고 알포이의 몸에 자리를 잡았다.

"휴우...."

지셀이 손을 떼자 알포이가 그냥 철퍼덕 바닥에 쓰러졌다. 이제 기다리면 안정화된 마력이 고리를 생성할 것이다.

만약에 깨달음이 없다면 그냥 마력만 늘어난 셈이 될 테고.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알포이의 주위에 몰려와 그를 내려다보았다.

한참을 기다려서야 눈을 뜬 알포이가 물었다.

"나... 살았어?"

대답은 조금 떨어져서 쉬고 있던 지셀이 해 주었다.

"그래."

"드래곤 하트는?"

"다 흡수됐다."

"으흐흐흐...."

한 것도 없으면서 알포이가 히죽거리며 웃었다. 중간에 조금 추한 모습을 보여 주긴 했지만 어쨌든 흡수에 성공했다.

한심하다는 사람들의 눈빛에도 불구하고 알포이는 신이 나서 자신의 고리를 확인했다.

"으흐흐.... 나도 이제 4서클이다. 하나, 둘, 셋.... 어?"

심장의 고리를 확인하던 알포이의 표정이 멍해졌다. 지셀이 그런 알포이를 보며 다시 물었다.

"왜?"

"고리가...."

"설마 4서클에 못 올랐어? 그냥 마력만 늘어난 건가?"

그러면 드래곤 하트 조각을 날린 셈이 된다. 지셀이 눈을 살짝 찌푸리자. 주변 사람들이 난리를 쳤다.

"이럴 줄 알았어!"

"알포이 따위가 그럴 리가 없지!"

"아까운 드래곤 하트만 날렸잖아!"

바네사도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알포이가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답했다.

"다섯 개인데?"

"...와우."

지셀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알포이는 5서클에 올라 버렸다.

* * *

"와, 그놈이 5서클에 오를 줄이야."

"미친 거 아냐? 알포이가 5서클이라고?"

"그렇다니까! 지금 완전히 신이 났어. 아, 나도 드래곤 하트 조각 먹었으면 더 올랐을 텐데."

영지의 마법사들은 모두 모여서 우울한 표정으로 알포이의 얘기만 했다.

원래는 바네사가 7서클 마법사가 된 것이 더 세간의 관심을 끌 만한 일이었지만, 서클을 두 단계나 뛰어넘는 황당한 일이 벌어진 탓에 알포이가 더 주목받게 되어 버렸다.

가뜩이나 성질 더럽고 오만한 놈인데 경지까지 올라 버렸으니 얼마나 사람들을 달달 볶을지 마법사들은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야야야야! 일 안 하고 뭣들 하냐!"

아니나 다를까, 마법사들이 말 꺼내기가 무섭게 알포이가 주황색 완장을 차고 나타났다. 그 뒤로 푸른 완장을 찬 그의 측근들이 따라왔다.

알포이는 노닥거리고 있는 마법사들을 보며 호통을 쳤다.

"지금 '신을 이긴 5서클 남자'인 내 지시를 어기고 노닥거리는 거야? 쉬는 시간 끝났잖아! 빨리빨리 움직이라고!"

"예, 예...."

마법사들 사이에는 서클이 깡패다. 이 영지에 바네사를 제외하고는 알포이보다 경지가 높은 마법사는 이제 없었다.

애초에 5서클이면 마탑의 장로급이자 한 영지의 전속 마법사도 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러니 마법사들은 알포이에게 감히 덤벼들 수가 없었다.

"캬, 이게 5서클 맛이구나. 왕국 역사상 나처럼 젊은 나이에 5서클에 오른 자가 있었을까?"

마탑주인 휴베르트도 그러지 못했다. 알포이는 전보다 더 오만해졌다.

그렇게 5서클에 오른 기쁨을 만끽하고 있을 때 뒤에서 뾰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포이 님! 또 공부 안 하고 여기서 뭐 하고 계세요!"

"바, 바네사?"

"지금 4서클 마법도 하나도 모르잖아요! 빨리 익혀야 한다니까요?"

"...공부 싫은데."

펜리스에 온 뒤 공부랑은 담을 쌓고 산 알포이다. 당연히 3서클 마법 말고는 아는 게 없다.

경지가 오르면 무얼 하는가? 그에 맞는 마법을 시전할 수가 없는데.

그래서 지셀은 바네사에게 특별 명령을 내렸다.

― 최대한 빨리 5서클 마법까지 익히게 하도록.

타고난 성격도 무척이나 성실한 바네사에게 지셀의 명령까지 떨어졌다. 당연히 그녀는 알포이가 평소처럼 노는 걸 두고 보지 않았다.

알포이는 제대로 잘난 척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바네사에게 잡혀 연구소로 끌려갔다.

지셀은 알포이가 잡혀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혀를 끌끌 찼다.

알포이가 경지에 맞는 마법을 익히긴 해야 하겠지만, 어쨌든 전쟁을 앞두고 경지 높은 마법사가 둘이나 탄생한 건 영지에 좋은 일이었다.

그리고 때마침 갈바릭이 또 다른 좋은 소식을 들고 지셀을 찾아왔다.

"영주! 이번에는 확실하게 규격을 맞춰 만들었소! 시험해 보시오!"

고블린처럼 삐쩍 말라 버린 그가 형형하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386화 너도 서클 좀 올리자. (3)

갈바릭에게는 바네사가 7서클에 올랐든 알포이가 5서클에 올랐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들어찬 것은 이번에야말로 드워프의 자존심을 살리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대형 투석기에는 무려 천 개의 창대가 들어가기 때문에 중형 투석기보다 훨씬 더 정교해야 했다.

갈바릭은 정말 영지의 모든 대장간을 돌며 손수 견본을 만들어 규격을 통일시켰다.

"빨리 확인해 보시오! 아, 빨리!"

갈바릭의 재촉에 못 이겨 지셀과 측근들은 바로 시연회를 준비했다.

전에 결합 훈련을 했던 병사들이 다시 버려진 요새로 모였다. 그들은 능숙한 솜씨로 갈바니움 창대를 조립하여 다섯 대의 중형 투석기를 만들었다.

클로드가 무척이나 귀찮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고 외쳤다.

"쏴라!"

터엉! 터엉! 터엉! 터엉! 터엉!

콰아아앙!

다섯 대의 중형 투석기는 원하는 방향에 정확히 돌을 날렸다. 요새 성벽의 일부가 깨져나갈 정도로 파괴력도 준수했다.

미심쩍은 표정을 짓던 사람들이 그제야 감탄했다.

"오오! 이번에는 정확한데요?"

"위력도 준수합니다."

"천 명의 병사가 중형 투석기를 다섯 대나 보유할 수 있다니. 이 정도면 엄청난 기동력을 갖추는 셈입니다."

다들 박수까지 치며 기뻐했다.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 성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게 남아 있었다.

튼튼하고 거대한 성벽은 중형 투석기만으로는 공략하기가 힘들었다. 제대로 타격을 주기 위해서는 강력한 대형 투석기가 필요했다.

"조립해라!"

클로드가 귀찮음이 조금 덜해진 표정으로 외치자 병사들이 이번에도 바쁘게 움직였다.

다섯 대의 투석기를 재빠르게 분해하고 그 모든 창대를 하나로 모았다.

크기가 큰 만큼 지지대를 잘 결합하는 게 중요했다. 병사들은 연습한 대로 조를 짜서 각 부분을 만든 뒤 다시 합치는 작업을 반복했다.

다들 숙련된 덕분에 얼마 걸리지 않아 중형 투석기들이 분해되고 대형 투석기가 만들어졌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우와... 진짜 저게 되다니...."

"분리했다 조립하는 게 정말 신기한데?"

"그런데 너무 커서... 충격을 버틸 수 있으려나?"

웅장하긴 한데, 갈바니움 창대로 뼈대만 만들어서 세워 놓으니 뭔가 조금 약해 보였다.

저 뼈다귀 같은 투석기가 엄청난 돌의 무게를 견디고 원하는 곳에 쏘아 낼 수 있을지 우려스러웠다.

"쏴라!"

클로드의 신호와 함께 바로 투석기가 돌을 쏘아 냈다.

파아아앙!

강렬한 파공음을 내며 돌이 목표 지점에 정확하게 날아들었다.

콰아아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요새 한쪽이 단숨에 파괴되었다. 작은 요새인 걸 감안해도 무지막지한 파괴력이었다.

"우와아아아!"

"저런 파괴력이라니!"

"저 정도면 카르데니아도 부술 수 있겠는데?"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환호했다. 저 대형 투석기가 10대만 있다면 어떤 성이든 무너뜨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중형 투석기에 이어 대형 투석기 시연까지 성공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전장에서 사용하기에 문제가 없을 것이다.

갈바릭과 드워프들도 주먹을 꽉 쥐고 소리를 질렀다. 그간의 설움이 싹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이야아아아아아!"

갈바릭은 가슴속에서 치솟는 희열에 휩싸여 바로 클로드에게 달려갔다.

"봤지! 성공했잖아! 봤냐고! 어? 봤냐고!"

"아, 예, 예."

클로드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갈바릭이 입에서 침까지 튀기며 외쳤다.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또 실패할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냐고! 수명이 진짜 실시간으로 깎이는 느낌이었다고!"

"수명은 원래 실시간으로 깎이는 건데?"

"어?"

갈바릭은 살짝 눈을 굴렸다. 역시 이 새끼랑은 말싸움을 하면 안 된다.

"아무튼! 성공했잖아! 더 이상 우리 드워프들을 무시하지 마라!"

"아, 예, 예."

"야이씨! 너 진짜!"

갈바릭이 눈을 까뒤집고 달려들려고 하자 웬디가 클로드를 밀치며 자리를 피했다.

지셀은 옆에서 무슨 난리가 나든 아랑곳하지 않고, 첩보관인 로웰에게 물었다.

"로드리크 후작의 움직임은 파악하고 있나?"

"현재 도적들을 토벌하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많은 인원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서 꽤나 골치가 아픈 모양입니다."

"흐음, 아주 좋은 현상이네."

로드리크 후작은 저번 접전으로 대단히 큰 피해를 보았다. 특히, 지셀이 패잔병들을 모조리 죽이거나 포로로 잡지 않고 풀어 놔 버린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직접 손쓰지 않고 적의 전력을 깎는 동시에 귀찮은 일도 만들어 주는 셈이니 지셀로서는 그보다 더 좋은 수가 없었다.

그래도 로드리크 후작은 서부의 대영주로서 무시할 수 없는 병력을 가지고 있으니, 그런 피해를 보았어도 금세 수습하고 움직일 것이다.

"일단 정보는 쉬지 말고 모아. 구원교 때문에 귀족들이 어느 편에 설지 다시 고민할 테니 개전에는 시간이 좀 걸릴 거야. 로드리크 후작은 도적들도 토벌해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지셀은 로웰에게 몇 가지를 더 지시한 뒤 가신들에게 말했다.

"영지의 모든 생산 역량은 갈바니움 창대 생산으로 돌리도록 해라. 우리가 적들보다 먼저 준비를 끝낸다."

식량과 무장, 포션 등은 이제 충분하다. 남은 건 전 병사에게 지급할 새로운 투석기용 창대와 드래곤 하트 조각을 이용한 기사들의 마나 집속진 훈련뿐이다.

이대로 준비만 끝난다면 폭풍처럼 적을 휘몰아칠 수 있을 것이다.

"로드리크 후작이 출정하면 바로 마중을 나가도록 하자고."

구원교가 드러난 덕분에 모든 것이 계획했던 것보다 더 잘 풀리고 있었다.

지셀은 무척이나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 * *

쾅! 쾅! 쾅!

로드리크 후작은 연신 의자를 내리치며 고함을 질렀다.

"아직도 도적놈들을 다 토벌하지 못했다고? 그래서야 도대체 언제 출정하겠다는 거냐!"

후작가 본대의 출정 준비는 거의 다 끝난 상태였지만, 쉽게 자리를 비우기도 힘들었다.

후작령 인근과 봉신 영지들에 어마어마한 도적들이 날뛰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작가에서는 세력이 큰 놈들부터 잡아서 토벌했지만,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생겼다.

"개돼지 같은 놈들이 왜 그놈들한테 합류한다는 말이냐!"

작고 가난한 봉신 영지의 영지민들은 오히려 곳곳의 도적 떼에 합류하고 있었다. 그러니 토벌을 해도 어디선가 또 큰 세력이 나타나곤 했다.

어차피 봉신 영주보다 도적 떼들이 더 강성하니 영지민들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후작가에서는 어쩔 수 없이 회유책까지 쓰며 투항한 병사들은 용서해 주겠다고 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간 로드리크 후작이 워낙 잔인하게 영지민들을 대했기에 생겨난 결과였다.

"으으으... 차라리 다 죽이고 갈 것이지! 그 씹어먹을 새끼가!"

로드리크 후작은 이를 갈며 지셀을 욕했다. 1만에 가까운 병사들이 곳곳으로 흩어져 도적 떼가 되니 곤욕도 이런 곤욕이 없었다.

로드리크 후작의 분노에 가신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괜히 또 나서서 죽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침묵 속에서 겨우 화를 가라앉힌 로드리크 후작이 기사단장인 테넌트에게 말했다.

"테넌트! 세력이 큰 놈들만 먼저 잡아 죽이고 잔챙이들은 내버려둬라! 나머지는 펜리스를 친 뒤에 정리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아무리 분노에 차 있다지만 최악의 결정이었다. 제대로 토벌하지 않으면 도적 떼에 합류하는 영지민들이 오히려 더 늘어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봉신 영주들의 힘은 더 약해지고, 결국 후작가에 원망의 화살을 돌릴 게 뻔했다.

하지만 로드리크 후작은 그걸 알면서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에게는 영지민들과 봉신들의 안위보다 개인적인 명예 회복이 우선이었다.

"최대한 빨리 처리해라. 늦어질수록 내 명예가 땅바닥에 처박힐 테니까."

로드리크 후작의 엄포에 다들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흉흉한 분위기가 속에서 후작가의 집사가 급히 달려와 서신 하나를 전했다.

"뭐냐?"

"왕실에서 중대한 발표를 했습니다."

"하, 다 죽어 가는 허수아비 국왕이 무슨 발표를 한단 말이냐. 브랜포드 후작이 또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겠지."

촤악.

거칠게 서신을 편 로드리크 후작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공작가가 사교와 결탁을 해? 4대 교단에서 모두 검증까지 마치고 공적으로 삼았다고?"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모든 교단이 친왕파에 붙어 버렸다.

이건 공작가가 반역자로 찍히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자신들도 사교와 엮여서 교단의 공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자세히 설명해 보아라!"

"수도에 있는 공작가의 꼬리들이 잡혔사온데...."

집사는 후작가의 정보망을 이용해 얻은 소식을 빠짐없이 전달했다.

그리고 그 얘기를 들은 로드리크 후작과 가신들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얘기를 다 들은 테넌트가 말했다.

"심각한 일입니다. 친왕파만이라면 모를까 4대 교단까지 적으로 돌리면 내전에서 승리해도 위험해질 겁니다."

4대 교단은 왕국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나 마찬가지다. 비록 사제들이 욕을 많이 먹고 있긴 하지만 그건 인간의 일이지, 그 누구도 여신의 권위를 의심하지는 않는다.

4대 교단 모두에게 이단으로 찍히면 내전에서 승리한다 해도 국정 운영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된다.

반대하는 자들을 힘으로 밀어 버리면 대륙의 다른 왕국들이 그 빌미로 루타니아를 침공할 것이다.

말 그대로 진짜 '성전'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이익.... 공작가는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인 거야!"

괴물들의 존재는 로드리크 후작도 처음 듣는 얘기였다.

델파인 공작이 오랫동안 공석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했더니, 뒤에서 이런 이상한 짓을 꾸미고 있을 줄이야!

아무리 같은 편이라 해도 용납할 수 있는 선을 넘어 버렸다.

집사가 조심스럽게 다시 말을 올렸다.

"브랜포드 후작이 왕국의 모든 영주에게 한 달 내로 자신이 결백하다는 것을 증명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뒷말은 안 들어도 뻔하다. 자신도 4대 교단에게 사교 집단으로 찍히게 될 것이다.

로드리크 후작이 서신을 구기며 이를 갈았다.

"그놈이 감히 교단을 등에 업고 머리를 굴리다니...."

증명을 하라는 건 공작파에서 빠지라는 뜻이나 마찬가지다. 무척 자존심이 상하지만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분명 공작가와 힘을 합하면 우리가 내전에서 승리하겠지. 4대 교단도 다 쓸어버릴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 이후에 이 왕국은 정말 '성전'의 무대가 되어 쑥대밭이 되리라.

역시 브랜포드 후작이다. 단숨에 이렇게 전세를 역전시키다니 말이다. 그가 만든 외통수에 걸려 버린 셈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로드리크 후작이 갑자기 비열한 웃음을 지었다.

"흐흐흐... 그래, 차라리 잘된 일이지."

자신도 부담이 될 정도인데 다른 귀족들은 말할 것도 없다. 이 기회를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사교 집단과 손을 잡은 공작가를 강력하게 지탄한다. 그러니 파벌에서 빠지겠다고 공표해라."

"후작님, 그 말씀은...."

"그래, 이 기회를 이용해서 공작가를 거꾸러뜨리고 우리가 그 자리를 차지해야겠다."

공작가는 분명 단일 세력으로는 왕국 최고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말 이 왕국 전체와 4대 교단을 상대할 수 있을까?

절대 불가능하다고 로드리크 후작은 확신했다.

그리고 만약에 공작가가 쓰러지면?

자신이야말로 단일 세력으로는 이 왕국에서 제일가는 귀족이 될 수 있었다.

"으하하하하! 오히려 잘됐지 않은가! 수도를 칠 병력은 그대로 공작가를 치는 걸로 목표로 바꿔라! 나한테 명령을 내리던 그 시건방진 요제프 자작의 목을 직접 베어 버리겠다!"

공작가를 확실하게 없애기 위해서는 자신도 힘을 보태야 한다. 잘못하면 역으로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로드리크 후작은 공작가 때문에 자신의 야심을 꾹꾹 눌러 왔다. 한데 공작가가 몰락할 조짐이 보이니 그 야심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내가 이 왕국의 왕이 될 것이다.'

가신들 앞에서도 꺼내지 않은 야망이지만, 그의 눈빛만 보면 누구든 그 속내를 알 수 있었다.

테넌트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누가 봐도 로드리크 후작의 판단이 맞았다.

하지만 수도를 치기로 했던 병력만 목표를 돌리라는 말뜻은 다시 확인해야 했다.

"두 개로 나눈 군단 중 남은 하나는 여전히 펜리스를 목표로 합니까?"

"당연한 말 아니겠나. 오히려 더 잘 됐다. 친왕파도 내가 공작파에서 빠지면 그놈 편을 들지 않을 것이다. 영지전을 치를 명분도 확실한 나와 굳이 싸울 필요는 없으니까. 안 그런가?"

"그렇습니다. 공작가를 치기 위해서만 힘을 모으겠지요. 여기서 후작님과 싸우면 그들은 큰 손해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 그리고 난 이제 공작가의 압박에서도 벗어나기로 했지. 그러니 마음 편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됐다."

공작가도 친왕파도 이제 자신을 건드릴 수 없게 되었다. 정치적 부담과 군사적 부담까지 덜었다.

오직 펜리스를 멸망시키는 것에만 집중하면 되는 것이다.

"어서 도적들을 토벌하고 출정 준비를 마쳐라. 내 직접 펜리스의 땅을 밟고 그곳을 모두 불태울 것이다."

로드리크 후작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387화 이건 기회다. (1)

로드리크 후작은 수도의 소식을 듣고 새로운 야망을 꿈꾸게 되었다. 하지만 그 사태를 초래한 장본인은 그런 정치적인 문제 따위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구원교의 사제, 라비에르는 수도를 벗어난 뒤 인적이 드문 곳에 도착해서야 겨우 숨을 골랐다.

"후우... 내가 이런 곤욕을 치를 줄이야."

내전 때 폭동을 일으키려고 했던 단체들이 전부 발각된 건 관심 밖이었다. 그건 그의 임무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펜리스 백작이란 놈 때문에 일부 계획이 망가진 것은 문제였다.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고 연구 중이던 성전사들까지 모두 잃고 말았다.

"펜리스 백작.... 그놈 때문에...."

자신과 성전사들의 존재로 인해 구원교가 세상 밖으로 알려졌다. 하필이면 그곳에 쥬아나 교단의 신전기사들과 주교로 보이는 인물도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나와 교의 정체를 알고 있는 거지?"

아직 준비도 다 끝나지 않았는데 본신의 힘까지 전부 보여 주고 말았다. 이건 빼도 박도 못할 증거였다.

라비에르는 걸음을 옮기면서도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지 못했다.

"우리를 알고 있었다면 대체 왜 지금까지 조용히 있었던 거지?"

분명 자신의 이름과 교의 이름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펜리스 백작은 자신이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낌새를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고민해도 이해가 안 가니 미칠 거 같았다.

그때, 팔에서 느껴진 고통이 끊임없이 이어지던 생각의 고리를 끊었다.

"크윽... 무슨 상처가...."

라비에르는 이를 갈며 다쳤던 팔을 내려다보았다. 겉보기에는 이미 아물었지만 속에서는 지금도 기운이 날뛰고 있었다. 조금만 무리해도 다시 상처가 터져 버릴 것이다.

차분하게 기운을 다스려야 할 테지만 지금은 무리였다. 추적자가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니 안전한 곳으로 가야 했다.

"당장 남부까지 가는 건 무리인가?"

공작가가 있는 남부가 가장 안전하지만 거리가 멀다. 우선 부상을 다스리고 힘을 회복해야만 했다.

며칠 동안 인적 드문 길만 골라 남쪽으로 내려가던 라비에르는 곧 목적지를 결정했다.

"앨버멀 백작령으로 가야겠군."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친왕파 귀족의 영지였다. 친왕파 영지긴 하지만 엘버멀 백작령에도 공작가의 은신처가 있으니 당분간 그곳에 숨어있으면 될 것이다.

산길까지 타며 조심히 움직이던 그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벌써 눈치채고 쫓아오다니...."

바람의 흐름이 이상했다. 벌레들도 울지 않았다. 무거운 공기가 그의 주변을 압박해 오는 듯했다.

파아악!

라비에르가 힘을 끌어올리자 다시 검은 기운이 그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짙은 로브를 입고 마스크를 쓴 자들이 나타났다.

호리호리한 체형에 날카로운 눈빛. 약 십여 명 정도 되는 그들은 잘 벼려진 비수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라비에르는 그들을 둘러보며 비웃음을 보냈다.

"엘프들인가?"

자신들을 쫓는 단체는 한둘이 아니었다. 그중에서는 엘프들로 이루어진 단체도 있었다. 아무래도 이 근처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놈들이 쫓아온 모양이었다.

라비에르를 포위한 자들 중 리더로 보이는 자가 두건을 뒤로 젖히고 말했다.

"기운을 보니 구원교가 맞군. 너를 생포하겠다. 순순히 따라와라."

"노예 종족 주제에 건방지구나."

그 말에 엘프는 눈을 찌푸렸다. 노예로 사는 동족을 내버려두는 건 그들로서도 가슴 아픈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더욱더 중요한 사명이 있었다.

"긴말은 하지 않겠다. 다른 이들과 네놈들의 본거지가 어디에 있는지 불어라."

라비에르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내가 평범한 교도로 보이나?"

"뭐?"

"날 잡아가고 싶으면 네놈들 말고 더 강한 놈이 왔어야지."

파아아악!

라비에르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더욱더 강하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마스터급인 지셀과 싸울 때처럼 악마의 형상을 내보일 필요도 없었다.

엘프들은 라비에르가 뿜어내는 힘을 보고 표정을 굳혔다.

"주교급이다. 모두 조심해라."

리더가 경고를 내뱉자 엘프들도 각종 정령을 소환해 라비에르를 공격했다.

콰아아앙!

양측의 힘이 강하게 부딪쳤다. 엘프들은 모두 중급 정령사인 데다 수도 많았다. 하지만 라비에르는 모든 힘을 끄집어내지 않아도 7서클 마법사에 버금가는 위력을 보일 수 있었다.

콰앙! 콰아앙! 콰앙!

그들 외에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두 세력 간의, 몇 번째인지 모를 다툼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라비에르도, 엘프들도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 존재가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 주인! 그놈 또 싸운다! 싸워!

지셀이 라비에르에게 붙여 놓은 다크가 실시간으로 상황을 중계해 주기 시작했다.

지셀은 드래곤 하트를 받아 영지로 돌아간 상태였지만, 그러면서도 중간중간 라비에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계속 보고를 받았다.

그는 라비에르가 싸우고 있다는 얘기를 듣자 바로 호기심을 보였다.

"싸워? 누구랑 싸우고 있지? 브랜포드 후작이 보낸 추격대인가."

브랜포드 후작은 지셀에게 얘기를 듣자마자 바로 추격대를 꾸렸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라비에르의 행적을 놓친 상태였다.

― 아니야! 엘프들이야! 정령사들 같아!

"엘프들? 정령?"

― 그래, 엘프들이야! 그런데 정령을 직접 보니까 내 친구들 같지는 않네. 영 느낌이 달라.

다크는 지금 상황보다 눈앞에 보이는 정령들에 더 관심을 보였다. 지셀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엘프라.... 어느 쪽인지 알겠네."

― 뭐? 알고 있다고?

"있어, 아는 사람."

― 전생에서 알던 사람이지? 영지에 있는 엘프들은 다 좀 모자란 애들이잖아.

"뭐, 그렇지."

전생에 구원교와 무척 사이가 안 좋았던 인물이 몇몇 있었다. 바빠 죽겠는데 왜 그렇게 사이비에 이를 가는지 모르겠다고 다들 답답해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보니, 이미 오래전부터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사이였던 모양이었다.

"아직 제약이 안 풀려 못 움직이는 건가? 안타깝네. 직접 움직였다면 라비에르 그놈은 바로 피떡이 됐을 텐데."

지셀이 전생에 만났던 엘프를 생각하며 웃었다.

'세계수의 수호자'라 불리는 그 엘프는 정말 무지막지한 힘을 가졌다. 그녀에게 현재 제약이 걸려 있는 걸 구원교가 다행으로 여겨야 할 정도로 말이다.

만약에 그녀가 직접 나섰다면 라비에르는 쉽게 도망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전투는 어떻지?"

― 싸움 구경 너무 재미있어!

"...상황을 말하라고."

― 상대도 안 돼. 정령들이 그놈의 기운을 아예 뚫지도 못하고 있어.

― 아, 벌써 두 명이나 죽었어.

― 다섯 명 죽었어.

― 와, 그래도 한 명은 제법 잘 싸우는데?

― ...다 죽었다. 이놈 진짜 세네. 내상도 입고 한쪽 팔도 날아갔는데 이 정도라니. 주인이 잘 싸우는 거였네.

다크가 열심히 알려 준 덕분에 지셀은 대략적인 상황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었다.

"엘프들은 활동하기 어려우니 쉽지 않겠어."

만약 다른 교도였다면 엘프들이 쉽게 잡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라비에르는 교단에서도 상당히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강자다.

그를 잡으려면 더 강한 자들이, 더 많이 움직여야 할 텐데 인간들의 눈을 피해 움직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인간들이 엘프를 보면 노예로 삼으려고 덤벼들 테니 말이다.

"그놈은 어떻게 하고 있지?"

― 다시 움직이고 있어.

"얼마나 있을 수 있을 거 같아?"

― 모르겠어. 이놈이 지금 제대로 치료를 못 하고 있어서 버티는 거지, 오래 붙어 있기는 힘들 거 같아.

"흐음.... 어떻게든 작은 단서라도 잡아야 할 텐데. 하다못해 은신처 하나라도 더 말이야."

― 기운이 줄어들고 있어. 거리도 더 멀어지고 있고. 의식의 연결이 점점 늦어지는 게 느껴져.

다크의 진짜 의식은 지셀의 안에 있다. 의식을 일부 분리해 보낸 거니 기운이 약해질수록 연결이 희미해질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 버텨 봐."

― 알겠어.

그래도 공작가와 구원교가 지금 시기부터 이미 한패였다는 걸 알았으니 다행인 일이다. 구원교와 환란의 시기를 동시에 대비할 수 있으니 말이다.

지셀이 다크를 통해 감시하는 줄도 모르고 엘프들을 죽인 라비에르는 다시 지친 몸을 움직였다.

"후... 이렇게 고생을 하게 될 줄이야...."

빨리 은신처로 숨어 들어가 부상을 치료하고 회복을 해야 한다. 엘프들은 대놓고 움직이기 힘드니 이 이상 추적해 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자신의 정체가 밝혀진 이상 친왕파의 귀족들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라비에르는 최대한 흔적을 남기지 않고 더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만큼 이동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그가 강해도 다친 상태로 계속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 왔군."

엘프들에게 뺏은 로브를 뒤집어쓴 라비에르는 은밀하게 앨버멀 성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도 내전 때 소요를 일으키기로 한 단체가 있다. 당분간 그곳에 숨어 있으면 될 것이다.

그러나 상단으로 위장하고 있던 공작가의 비밀 단체를 찾아간 라비에르는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이, 이런...."

큰 전투라도 있었는지 건물은 거의 반파된 상태였다. 곳곳에 잔해들이 널려 있고, 사방이 피 칠갑 되어 있었다.

주변에 일반인은 없고 기사들과 병사들만 잔뜩 있었다.

"도, 도대체 어떻게...."

라비에르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배신자라도 있지 않은 한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어떻게 가는 곳마다 은신처가 다 박살이 나 있단 말인가!

당황한 라비에르를 기사들은 가만두지 않았다. 한 기사가 그를 보며 말했다.

"저거 뭐야? 여기가 어디라고 와? 수상한데? 끌고 와 봐."

이미 대부분의 영지는 가장 빠른 전령을 통해 공문을 전달받고, 공작가의 숨겨진 단체들을 습격하는 중이었다. 당연히 괴물들의 존재까지 드러났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대피시켰고 위험하다는 소문까지 났는데 은근슬쩍 접근하는 라비에르가 수상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기사의 말을 들은 병사들이 라비에르에게 다가갔다.

"어이, 따라와라."

병사의 말에도 라비에르는 침묵을 지켰다.

"뭐 해? 따라오라니까?"

병사가 그의 팔을 잡아채려 했지만, 잡히는 것은 빈 소매뿐이었다.

곧 병사가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외, 외팔이다! 공문에서 내려온 그놈 같습니다! 외팔이입니다!"

퍼억!

병사의 머리통이 순식간에 터져 나갔다. 그 모습을 본 기사가 호각을 길게 불었다.

삐이이이이익!

동시에 주변에 있던 모든 기사와 병사들이 움직였다.

"잡아라!"

"수도에서 날뛴 놈이 분명하다!"

"죽여도 좋다!"

라비에르가 다시 검은 기운을 뿜어냈다.

"이놈들...."

파아아아악!

그가 뿜어낸 검은 기운이 다가오는 병사들의 몸을 꿰뚫었다. 기사들도 몇 명 되지 않아 죽이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서 피해야 한다.'

곧 이 성의 병력이 전부 몰려올 것이다. 전부 몰살하려면 못할 것도 없지만, 그렇게 하면 더 위험해질 것이다.

'여기서 더 힘을 쓸 수는 없다.'

얼마나 많은 자들이 자신을 추적하고 있는지 모른다. 더 강한 기사들과 많은 병사가 모여들수록 빠져나가기가 힘들어지게 된다.

거기에 엘프들까지 자신의 행적을 추적하고 있었다. 힘을 최대한 아껴야 한다.

라비에르는 곧바로 몸을 돌려 다시 도망치기 시작했다.

오만한 그는 이렇게 도망쳐 본 경험이 없었기에 엄청난 분노를 느끼기 시작했다.

"으으으으! 도대체! 도대체! 어떻게 모든 걸 알고 있단 말이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친왕파는 자신들의 은신처를 정확하게 알고 공격하고 있던 것이다.

거기에 자신은 이미 수배령까지 떨어진 모양이었다.

이 상태로라면 남부로 갈 수 없다. 이미 가는 길목은 전부 막혀 있을 게 뻔했다.

빠져나가려면 누군가가 자신을 도우러 와야 했다.

"펜리스 백작.... 그놈 짓이 분명해."

자신의 이름과 정체를 알고 있는 그놈이 모든 정보를 넘긴 게 확실했다.

"죽여 버리겠다. 반드시 죽여 버리겠어."

라비에르는 이를 갈며 다시 인적이 드문 곳을 향해 움직였다. 죽일 때 죽이더라도 일단은 자신이 살아야 한다.

몸을 피한 라비에르는 고민에 빠졌다.

"남부로 가는 길목은 분명 막혔을 것이다. 그리고 가까운 은신처들도 다 박살이 났겠지. 그렇다면...."

공작가와 상관없이 구원교가 따로 대계를 위해 준비한 장소가 있다.

하지만 그곳만큼은 그도 함부로 갈 수 없었다. 괜히 꼬리가 붙으면 무척이나 곤란해진다.

게다가 그곳도 이미 발각이 됐다면 가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입술을 질겅질겅 씹으며 고민하던 라비에르가 갑자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야. 거기는 분명 아직 탄로 나지 않았을 거야. 친왕파가 치는 곳은 전부 공작가가 내전을 위해 준비한 장소였어."

자신들과 적대적인 세력도 그곳의 존재를 모른다. 그곳에서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조차 모른다.

애초에 그곳이 발각됐다면 이미 난리가 났을 것이다.

"그곳으로 가는 수밖에...."

자신이 힘을 회복하고 다시 떠나려면 숨어서 쉴 곳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 주변에는 이제 마땅한 은신처가 없었다.

그는 방향을 돌려 동쪽으로 움직였다. 펜리스 백작은 자신들의 계획 일부를 아는 것만 같았기에, 라비에르는 무척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마침내 그는 동부로 가는 길목에 있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가득한, 무척이나 평화로운 곳이었다.

혹시 몰라 멀리 숨어서 마을을 한참 동안 지켜보던 라비에르가 웃었다.

"역시 이곳까지는 몰랐구나."

교에서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수십 년간 비밀을 지키며 준비한 곳이다.

아무리 펜리스 백작이라도 역시 이곳까지 아는 건 무리였다.

주변을 한번 살펴본 라비에르가 천천히 마을로 향했다. 확실히 지금 자신의 뒤를 쫓는 자는 없다.

그리고 그 모습을 다크가 지셀에게 전달했다.

― 한참을 도망 다니다가 웬 작은 마을로 들어가는데?

"마을? 도망치는 놈 주제에?"

― 응. 그냥 작은 마을이라서 쉬었다가 갈 생각인가? 아니면 여기 마을 놈들을 다 죽이고 갈 수도 있겠지.

"그 마을이 어딘데?"

지셀이 지도를 펴니 다크가 열심히 경로를 알려 주었다.

그리고 그 마을의 위치를 알게 된 지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곳은...."

분명 그도 아는 곳이었다. 전생에 무척이나 유명해진 장소 중 하나였으니까.

환란의 시기에 끝도 없이 이계의 괴수들을 뱉어내던 미지의 통로.

바로 '균열'이라 불리는 것이 존재하는 장소였다.

388화 이건 기회다. (2)

몬스터나 야생 짐승의 습격을 막기 위한 목책으로 둘러싸인 마을은 꽤나 조용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경계를 서고 있던 마을 주민 하나가 라비에르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여행자십니까?"

"그렇소, 잠시 쉬어 가려고 온 것이오."

"그렇군요. 편안한 여행길이 되시길 바랍니다."

겉보기에는 마을에 오는 손님을 반갑게 맞이해 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라비에르의 지저분한 로브에 묻은 핏자국을 보고도 마을 사람들은 아무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의 신분을 제대로 묻지도 않는다.

지나가는 마을 사람들도 여행객을 반긴다는 듯이 웃으며 맞아 줄 뿐이었다.

"어머, 우리 마을에 여행자가 온 건 정말 오랜만이네요."

"와아, 반갑습니다."

"우리 마을은 치즈가 참 맛있어요. 꼭 한번 드셔보세요."

라비에르도 싸울 때와는 다르게 인자한 미소를 띠고 그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평화롭지만 무척이나 이질적인 광경.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다크는 무언가 섬뜩한 기분이 들어 진저리를 쳤다.

웃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단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모두 웃고 있었다.

― 뭐지, 이놈들은? 왜 다들 이런 반응이지? 다 아는 사이인가?

여기도 구원교가 마련한 은신처라면 서로 다 같은 편일 테니 그럴 수도 있었다. 그런데 막상 라비에르의 반응을 보면 또 서로 잘 아는 사이 같진 않았다.

"누구십니까?"

허옇게 수염을 기른 노인이 묻자 라비에르가 그제야 걸음을 멈췄다.

"네가 이곳의 책임자인가?"

"누구시냐고 물었습니다."

노인은 경계의 눈빛을 감추지 않았다. 이곳은 외부인이 이렇게 평화롭게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라비에르는 그런 노인의 앞에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스스스슥....

그러자 아무것도 없는 손바닥에서 검은 태양의 그림이 떠올랐다. 검은 태양 밑에는 다크가 알지 못하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하지만 노인은 그것을 알아본 듯 고개를 숙이며 무척이나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귀하신 분을 뵙습니다."

"그래, 당분간 제단에서 쉬었다 가야 할 거 같구나."

노인이 주변을 둘러보며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여기는 귀하신 분도 함부로 오시면 안 되는 곳입니다."

"알고 있다. 하지만 사정이 여의찮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으음, 알겠습니다. 하지만 오래 있으실 수는 없습니다. 대계가 거의 끝나가는데 이곳이 발각되면 안 되지 않습니까?"

"걱정하지 마라. 추적은 확실하게 뿌리치고 왔다."

노인은 그래도 불안해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라비에르가 상당히 곤욕을 치른 듯한 몰골이었기 때문이다.

교의 심판관이 이 정도로 곤란함을 겪었다면 상대도 만만치 않다는 뜻.

노인은 제발 평화로운 이 마을에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서 오시지요. 누가 봐서 좋을 게 없습니다."

"그래, 알겠다."

라비에르는 불쾌해하는 표정으로 노인을 따라갔다. 하지만 교의 중요한 규율을 어긴 건 자신이니 딱히 벌을 줄 수도 없었다.

노인은 이 마을의 촌장이었다. 자신의 집으로 라비에르를 데리고 온 노인이 바닥의 카펫을 들추고 무언가를 건드렸다.

구구구구궁!

곧 바닥이 열리며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노인이 먼저 내려가자 라비에르도 뒤를 따랐다.

지하는 거대한 공동이었다. 무척이나 어두운 공간 군데군데 기괴한 장치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바닥에는 핏빛으로 빛나는 거대한 마법진이 새겨졌고 사방에도 뜻을 알 수 없는 여러 도형이 그려져 있었다.

역겨운 냄새가 나는지 라비에르가 잠시 코를 잡고 인상을 찡그렸다.

노인은 그런 그를 보며 말했다.

"음식은 며칠 치를 따로 챙겨 드리겠습니다. 일주일 이상은 계시면 안 됩니다."

"알겠다. 며칠이면 되니 걱정하지 말거라."

노인이 고개를 숙이고 나가자 라비에르는 자리에 앉아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 시작했다.

"몸만 회복하면 바로 공작가로 가서 이 소식을 알려야겠군."

자신 때문에 교의 존재가 발각됐다는 건 이미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상대가 펜리스 백작이란 건 모를 터였다.

교에 배신자가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러니 펜리스 백작이 자신의 이름과 직책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어떻게든 빨리 알려야 했다.

스스스스슥....

라비에르는 자신의 몸에서 아직도 날뛰고 있는 지셀의 기운을 소멸시키려 했다.

그렇게 해서 상처를 완전하게 치유하고 소모된 성력을 채운다면 충분히 적들을 뚫고 남부까지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라비에르의 기운에 짓눌려 점점 마력이 흩어지자 다크의 의식이 외쳤다.

― 크윽! 주인! 이놈이 회복을 시도했어! 안전한 곳에 갔어!

"그 마을인가?"

― 어떤 노인 집 지하로 숨어 들어갔어! 그런데....

"왜? 다른 게 있어?"

지셀이 기대를 품고 물었다. 라비에르가 숨은 곳이 전생에서 중요한 장소였다는 게 무척이나 수상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러자 다크가 비명을 지르듯이 외쳤다.

― 이거 미친 새끼들이야! 여기 전부 시체로 가득해! 수백...? 아니 뼈들까지 합치면 수천 구는 되어 보여! 그냥 산처럼 쌓여 있어!

"뭐?"

다크가 말한 것처럼 라비에르가 쉬고 있는 곳은 평범한 장소가 아니었다.

핏빛으로 빛나는 마법진 주위에는 알 수 없는 통들이 있고 그곳에는 사람들이 갇혀 있었다.

그리고 그 통들과 이어진 줄이 마법진에 사람들의 피를 계속 공급하고 있었다.

그렇게 죽은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는지 넓은 공간이 사람의 뼈로 가득 차 있었다.

― 주인.... 이놈 몸에 너무 오래 붙어 있었다.... 겨우 붙어 있었는데 이제는 한계야....

며칠 동안이나 마력을 보충하지 못했으니 조금씩 소멸해 가고 있던 마력이었다. 그 와중에 라비에르가 본격적으로 힘을 사용하니 더 이상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푸스스스스....

― 푸하! 이제 안 보여! 완전히 쫓겨났다고!

그 말을 끝으로 라비에르의 몸에 붙어 있던 다크의 분신이 완전히 소멸해 버렸다.

지셀은 굳은 얼굴로 바로 기사들을 소집했다.

"기사 200명은 당장 무장을 갖추고 나를 따라와라. 최대한 빨리 움직인다."

"네?"

"시간이 없다. 설명은 가면서 한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설명 없이 움직인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기사들은 바로 무장을 갖추고 말에 올라탔다.

"길리언, 공작가와 로드리크 후작이 언제 움직일지 모르니 언제든지 출정할 수 있게 군을 관리해 두도록."

"알겠습니다."

"카오르와 벨린다, 바네사는 나와 함께 간다."

카오르는 또 싸우러 간다 생각하고 히죽 웃었다. 벨린다는 평소처럼 지셀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챙겼다.

하지만 바네사는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알포이 님! 제가 없는 동안 놀지 말고 공부하고 계셔야 해요!"

"아, 그럼! 공부가 제일 좋아!"

자신만만하게 외치는 알포이의 모습에 바네사가 미덥지 못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믿는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준비를 마친 지셀과 기사들은 바로 움직였다.

"최대한 도로를 타고 빠르게 움직인다."

영주가 왜 이렇게 서두르는지 다들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뭔가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하면서 뒤를 따랐다.

도로가 친왕파 영지의 모든 곳에 깔려 있고 기사들도 기마술에 상당히 숙련되었다.

덕분에 그들은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이동을 할 수가 있었다.

지셀은 이동하면서도 끊임없이 전생의 정보를 이용해 현재 상황을 추론했다. 생각보다 더 큰 정보를 얻었다.

'구원교의 다른 인물이나 은신처 정도나 좀 알아볼까 했는데... 균열이 있는 곳으로 갈 줄이야.'

전생에 환란의 문, 또는 균열이라 불렸던 그곳에서는 정체불명의 괴수들이 튀어나왔다.

그 괴수들은 끝없이 세를 불려가며 대륙을 가득 채웠고 결국 사람들은 한정된 지역에서 힘겹게 그것들과 싸워야 했다.

전생에 모든 마법사와 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상의했지만 왜 균열이 생겨났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 위치도 무작위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균열은 별다른 규칙도 없이 대륙 곳곳에 생겨났기 때문이다. 때로는 한 곳이 없어지면 다른 한 곳에서 갑자기 나타나기도 했었다.

누구도 그 정체와 원인을 알지 못했다.

종말.

다들 4대 교단의 경전에 똑같이 적혀 있는 '인세의 종말'이 시작된 거라 생각했다.

누군가는 발버둥 쳤고 누군가는 겸허히 그것을 받아들였다.

4대 교단들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는 끝까지 싸웠고 누군가는 여신의 뜻을 받들자고 했었다.

'그때 나타난 게 구원교였지.'

구원교는 달랐다. 사람들을 도우며 끊임없이 외쳤다.

― 우리의 신이 너희를 지켜 주고 구원해 줄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 종말이란 벌을 내린 여신들을 향해 대항하자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4대 교단과 구원교는 철천지원수와도 같은 사이가 된 것이다.

'이건 기회다.'

구원교 놈들이 환란의 시기와 연관이 있다는 건 라비에르를 통해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균열을 어떻게 여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전생에 알고 있었던 대로 무작위로 열린다고 생각했다.

라비에르가 균열이 열렸던 곳으로 간 걸 알았을 때도, 그저 구원교 놈들이 균열에 관해 미리 알고 무언가를 시도한다고 짐작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사실 그 균열을 모두 그놈들이 열었던 거라면!'

지셀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이건 정말 생각지도 못한 기회였다.

자신은 용병으로 대륙을 떠돌며 수많은 괴수와 싸워 왔다. 그렇기에 대륙 곳곳에 생성된 균열의 위치를 대부분 알고 있었다.

물론 자신이 모든 균열을 막을 수는 없다. 자신은 당장 공작가 때문에 이 왕국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

하지만 지금 상황만 잘 이용한다면 균열의 수를 상당히 줄일 수 있었다. 그렇게만 되어도 인류의 삶은 전생보다 훨씬 더 나아질 것이다.

지셀은 전생에 알고 있던 정보 중에서도 균열의 위치에 관한 정보가 그 무엇보다 가장 가치 있다고 확언할 수 있었다.

그는 공작가 외에 균열과도 처절하게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달려라! 조금이라도 더 빨리 도착해야 한다!"

라비에르를 잡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런 놈이야 언제든지 잡아 죽이면 된다.

이 두 눈으로 그 마을에 있는 것을 직접 봐야 했다.

두두두두두두!

다행히 라비에르가 숨은 곳은 친왕파 영주의 영토였다. 가는 길도 도로 덕분에 거칠 것이 없었다.

"비켜라! 펜리스 백작이다!"

지셀의 외침과 펜리스의 깃발 덕분에 그들은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았다.

워낙 빨빨거리며 수도를 돌아다녔던 탓에 검문소의 기사라면 누구든 펜리스의 깃발만 봐도 바로 문을 열어 줄 정도였다.

이유도 묻지 않았다. 그 정도로 지셀은 이제 친왕파의 거물로 추앙받고 있었다.

두두두두두두!

북부를 지나 수도 인근을 지날 즈음에는 지셀의 병력은 무려 천 명 정도가 늘어나 있었다.

지셀이 수도 인근에 있던 왕국군의 병력을 일부 차출해 갔기 때문이다.

펜리스에 무조건 협조하라고 명령받은 왕국군의 군단장은 급하다는 지셀의 말에 이유도 묻지 않고 병력을 빌려주었다.

이들은 증인이 될 예정이었다. 지셀은 왕국 전체에 소문을 내기 위해 일부러 이들을 끌고 가는 것이었다.

두두두두두!

며칠간 이어진 강행군 끝에, 지셀 일행은 라비에르가 숨은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병사들은 바로 마을을 포위해라!"

지셀의 명령에 병사들이 빠르게 퍼졌다. 지셀과 기사들은 그대로 마을로 짓쳐 들어갔다.

경계를 서던 자들이 그들이 오는 것을 이미 알렸는지 마을 사람들은 모두 한곳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침략자들을 바라보았다.

차앙!

지셀이 말에서 내려 그들에게 검을 겨누며 말했다.

"이곳의 책임자를 데리고 와라."

"...."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겁을 먹은 표정도 아니었다. 마치 밀랍 인형과 같은 그들의 표정에 뒤따라온 기사들은 묘한 섬뜩함을 느꼈다.

그리고 저 현상을 알고 있는 지셀이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모두 죽여야겠군."

그 말이 신호가 된 것처럼, 마을 사람들의 상태가 이상해졌다.

뚝, 뚜둑! 뚝!

뼈가 꺾이는 듯한 소리가 나며 마을 사람들의 몸이 기괴하게 이리저리 비틀렸다. 그 움직임은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펜리스의 기사들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뭐, 뭐야? 저것들 사람 맞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뚜둑! 뚝! 뚜둑!

몇 번이나 이리저리 목과 몸을 비틀던 마을 사람들에게 더욱더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다.

찍, 찌직, 찌익.

그들의 머리가 정수리부터 갈라지며 마치 껍질이 벗겨지듯, 인간의 허물을 벗기 시작했다.

그리고 벗겨진 허물 안에서 나온 건 충격적으로 징그럽게 생긴 생물이었다.

마치 인간의 뇌에 두꺼운 촉수들이 꿈틀거리며 달려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촉수들에는 광석과도 같은 것들이 곳곳에 붙어 있었다.

머리로 보이는 곳에도 마치 눈처럼 붉게 빛나는 광석이 붙어 있었다.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물이다. 마수의 숲에서도 이런 건 본 적이 없었다.

다들 아무 말도 못 하고 입만 뻐금거리고 있을 때, 지셀이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이미 변이가 된 놈들이었군."

이들은 균열의 기운에 잠식되어 버린 '변이자'들이었다.

389화 이건 기회다. (3)

징그럽게 꿈틀거리는 생명체들을 본 기사들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없는 거부감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셀이 했던 말을 되뇌었다.

"벼, 변이자? 그게 뭐지?"

"뭐든 꼴도 보기 싫다."

지셀은 검을 까닥거리며 알려 주었다.

"이곳에 이상한 기운들이 퍼지고 있다. 그 기운에 영향을 받은 놈들이지. 그리 강하진 않은 놈들이니까 상대하기에는 어렵지 않을 거다."

그 말에 기사들이 정신을 집중하자 과연 주위에 은은하게 퍼진 기운이 느껴졌다.

무척이나 불길하고 불쾌한 기운. 그 기운은 조금씩 자신들의 몸에 파고들려고 하고 있었다.

숨만 쉬어도 기운이 자연스럽게 몸에 들어온다. 기사들이 기겁을 하며 외쳤다.

"뭐야! 이 기운은?"

"집중하지 않으면 알 수도 없겠는걸?"

"젠장, 벌써 몇 모금이나 마신 거 같아."

기사들이 호들갑을 떨자 지셀이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고작 그 정도로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니 신경 쓸 거 없다. 기운이 없는 곳으로 가서 마나 연공을 하거나 시간을 좀 보내면 알아서 없어질 거다. 일반 사람들이나 위험하지, 마나를 다루는 사람들에게 잠깐 정도는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

"영주님은 그런 거 어떻게 아십니까?"

"난 다 알아."

"아, 예...."

기사들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저런 식이었으니 딱히 반박할 말도 없었다. 다 안다는 말이 좀 아니꼽게 들리긴 하지만, 영주는 진짜로 다 알았으니까.

"어쨌든 너희한테는 별거 아니니까 겁먹을 필요 없다."

변이자들은 평범한 사람들보다 빠르고 강하다. 하지만 그래 봐야 딱 훈련받은 병사 수준이었다.

수가 많으면 위협적이겠지만, 이곳에 있는 기사들의 상대는 아니다.

바네사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 제가 치워 버릴게요."

징그러운 건 빨리 없애 버리는 게 낫다. 아예 시체도 안 남기려고 그녀가 마력을 모으며 나섰다.

하지만 지셀이 그녀를 제지하고 기사들을 돌아보며 웃었다.

"앞으로 자주 볼 텐데 다들 익숙해져야지?"

바로 치라는 뜻이다. 카오르와 기사들은 찝찝하다는 표정으로 무기를 들고 달려 나갔다.

츠츠츠츳....

변이자들도 괴상한 소리를 내며 기사들을 향해 촉수 다리를 뻗었다.

고든이 제게 쏘아져 오는 다리를 베며 외쳤다.

"와이 씨! 징그럽잖아! 피도 녹색이야!"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무척이나 불쾌했다. 거기에 징그러움으로 따진다면 마수의 숲에서 본 팔로르와 그렉스도 상대가 안 된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치이익!

"어? 뭐야! 이거!"

허공에 튄 변이자들의 피를 맞은 기사들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들은 모두 갑옷 위에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변이자들의 녹색 피가 묻은 곳마다 천이 매캐한 냄새를 풍기며 타들어 갔다.

지셀이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그놈들 피는 산성 독이다. 닿으면 꽤 아플 거야."

"그럼 미리 얘기해 주셔야죠!"

"실전에서 누가 다 알려 주고 싸워? 앞으로 별별 놈들이 나올 테니 항상 조심하라고."

"아오!"

지셀이 얘기를 안 해 주는 건, 기사들이 몸으로 부딪치며 익혀도 감당할 수 있을 때뿐이다. 물론 상당한 고통이 수반될 때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콰직! 콰직! 콰직!

일반 병사 수준인 변이자들은 금세 머리(?) 부분이 쪼개지며 쓰러졌다. 수도 상대적으로 적으니 기사들이 변이자들을 전부 해치우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치이이이이익!

변이자들의 피가 땅에 녹아 들어가며 매캐한 냄새를 뿜어냈다.

루카스가 그걸 보며 중얼거렸다.

"어우... 이거 병사들은 상당히 상대하기 어렵겠는데?"

전투력은 약하지만 저 독이 문제였다. 기사들에게는 그리 위협적이지 않지만, 마나가 없는 자들은 냄새만 맡아도 호흡이 곤란해질 것이다.

만약 오랫동안 저 냄새를 맡으면 심각한 중독 상태에 빠질 게 분명했다.

변이자들을 모두 처리한 지셀은 기사들을 이끌고 노인의 집으로 향했다.

노인은 이미 마을이 습격당한 것을 알고 집 앞에 나와 있었다.

지셀은 그를 보며 물었다.

"네가 책임자인가?"

"그래, 내가 이 마을의 촌장이다."

"평범한 척 사느라 고생했다. 라비에르는 안에 있겠지?"

"...."

노인은 이를 악물었다. 역시 꼬리가 붙어 있었다. 교의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가 망가지게 되었다.

노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사들의 가슴에 새겨진 문장, 저 멀리 마을을 포위한 병사들이 들고 있는 깃발을 보았다.

이 시골 마을에 있는 노인도 알 정도로 유명한 귀족의 문장이었다.

"네가 펜리스 백작인가?"

"그래."

"공작가와 대립을 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여기까지 추적할 줄이야.... 진작 네놈을 없앴어야 했는데."

"이미 늦었지. 안 그래?"

지셀이 비웃음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공작가와 구원교의 계획을 망칠 수 있었던 건 전생의 정보들 덕분이었다. 자신이 회귀한 걸 모르니 적들은 애초부터 자신에게 신경을 쓸 이유가 없었다.

노인이 지셀을 노려보며 말했다.

"신께서 네 오만을 벌하실 것이다."

구오오오오!

노인의 몸이 갑작스럽게 커지기 시작했다. 이자도 성전사가 되는 마나 연공법을 익힌 것이다.

"카아아악!"

노인이 붉은 눈을 빛내며 괴성을 내질렀다. 그런데 기사들은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오오, 저게 그 괴물이구나."

"변신하는 걸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야."

"나는 아예 처음 보는데, 진짜 갑자기 강해지네. 뭔가 우리랑 비슷한걸?"

소문만 무성한 괴물이다. 지셀이 해럴드와 싸울 때 먼발치에서 본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데스몬드군과 정신없이 싸우느라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나마 예전에 봤던 사람도 눈앞에서 보는 건 처음이라, 유명인을 보는 느낌으로 탄성만 흘렸다.

너무나도 긴장감이 없는 모습에 괴물로 변신한 노인마저 조금 당황한 듯했다.

"크아아악!"

반쯤 이성을 잃은 노인이 지셀에게 달려들었다. 동시에 기사들이 앞을 막으며 무기를 휘둘렀다.

카앙! 카앙! 카앙!

"뭐야!"

검을 찔러 넣은 기사들이 깜짝 놀랐다. 변이자들과는 다르게 노인의 몸에는 검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크아아아!"

노인은 괴성을 지르며 자신의 주변에 있는 검들을 주먹으로 쳐냈다. 그리고 당황하는 한 기사의 배를 발로 걷어찼다.

퍼어억!

"크헉!"

발차기에 얻어맞은 기사는 그대로 뒤로 날아가 버렸다. 맞은 부위의 갑옷은 움푹 파일 정도로 찌그러져 있었다.

무지막지한 괴력에 모두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에이씨! 비켜 봐!"

자칭 '창술의 천재', 타칭 '고독한 엄살쟁이' 루카스가 순식간에 파고들며 노인의 배에 창을 찔러 넣었다.

마나를 한껏 집어넣은 공격이었다.

푸욱!

"오?"

들어가긴 했는데 별로 깊지 않았다. 루카스가 고개를 들어 거대해진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런 미친...."

퍼억!

"커어억!"

얼굴을 얻어맞기 전에 가까스로 팔을 들어 공격을 막은 루카스도 날아가 버렸다.

그는 데굴데굴 구르며 외쳤다.

"아악! 팔 부러진 거 같아!"

정말로 루카스의 팔은 한쪽이 꺾여 있었다. 이번에는 엄살이 아니었던 것이다.

"무슨 힘이...."

말도 안 되는 힘에 기사들이 다시 뒤로 물러났다. 공격도 제대로 통하지도 않는데 엄청난 괴력까지 휘두르고 있다.

만약에 저 노인이 무기를 들었다면 벌써 몇 명은 죽었을지도 몰랐다.

성전사라 불리는 저 괴물들은 변하기 전 본신의 경지가 높을수록 더 강하다고 한다.

저 정도면 못해도 최소 중급에서 상급 초반의 기사와 맞먹는 실력자였을 것이다. 거기에 다른 괴물들과 다르게 어느 정도 이성도 남아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지셀이 노인을 보고 피식 웃었다.

"괜히 이 마을을 책임지고 있었던 게 아니군."

그만한 실력이 있기에 이곳을 맡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가 나름대로 강한 건 인정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기사들의 반응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드래곤 하트 조각을 이용한 마나 연공을 끝내지 않고서도 충분히 잡을 수 있을 만한 상대인데, 기세에 밀려 버렸다.

공격이 안 통하니 다들 당황하느라 기회를 놓친 것이다.

카오르가 콧김까지 내뿜으며 나서려 하자 지셀이 막으며 말했다.

"정신 차려라. 저런 놈 상대하는 데도 익숙해져야지?"

지셀의 한마디에 기사들의 몸에 군기가 바짝 들어갔다. 이렇게 멍청한 모습을 계속 보이면 돌아가서 지옥 훈련을 받게 된다.

그들의 눈에 강한 살기가 깃들기 시작했다.

"크아아아!"

노인은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더욱더 흉포하게 주변을 공격했다.

카앙! 카앙! 카앙!

정신을 집중한 기사들은 처음처럼 그냥 당하지는 않았다. 몸이 진탕되는 충격에도 검을 들어 노인의 공격을 막았다.

그리고 그 틈을 이용해 다른 기사들이 공격을 시도했다.

퍼억! 퍼억! 퍼억!

여전히 둔기로 때리는 듯 검날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기사들은 당황하지 않고 바로 뒷사람과 자리를 바꾸며 공격을 이어 갔다.

강자를 상대하기 위한 합격술은 질릴 정도로 훈련했기 때문이다.

퍼퍼퍼퍼퍼퍼퍽!

몸이 풀린 기사들이 마나를 아끼지 않고 뿜어내며 노인의 몸을 두들겼다.

"크아아악!"

괴물이 된 노인은 마구 주먹을 휘둘렀다. 엄청난 힘과 속도에 몇몇 기사들이 얻어맞고 날아갔지만 문제는 없었다.

무려 200명이나 되는 기사들이 돌아가며 끊임없이 공격하자 노인은 점점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도끼로 하자!"

누군가 외치자 기사들이 검을 툭 내려놓고 허리춤에서 손도끼를 꺼냈다.

기사들이 쓸 법한 무기는 아니지만, 다들 지셀에게 배운 탓에 무장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장비하는 편이었다.

퍼억! 퍼억! 퍼억!

마나를 머금은 기사들의 도끼가 노인의 몸을 수도 없이 찍어 눌렀다.

"크아아악!"

괴물의 단단한 방어력도 결국 마나에 기반한다.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해도 몸을 보호하기 위한 마나는 계속 소모될 수밖에 없었다.

퍼억! 퍼억! 퍼억!

기사들과 괴물의 난타전은 끝날 줄을 모르고 이어졌다. 기사들도 이를 악물고 마나를 폭발시키니 점점 노인의 몸에 상처가 늘어가기 시작했다.

"이제 제대로 무기가 들어간다!"

"조금만 더 갈겨!"

"죽여라!"

이성을 잃고 괴물이 된 노인처럼 기사들도 광기에 물들어 갔다.

애초에 거칠게 살아온 자들이다. 전투에 몰입하자 이들의 악바리 같은 근성이 제대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퍼억! 퍼억! 퍼억!

뒤로 나가떨어진 자들을 제외하고도 백 명이 넘게 한 사람을 공격하고 있다.

노인의 몸은 빠르게 마나를 잃고 점점 걸레짝처럼 변해 갔다.

"거의 다 끝나 간다!"

퍼억! 퍼억! 퍼억!

"크아아악!"

아무리 노인이 강해도 역시 혼자서 200명의 기사를 상대하는 건 무리였다.

마나가 거의 다 소모된 몸은 도끼가 내려찍히는 족족 갈라지기 시작했다.

"야야! 비켜!"

고든이 마치 괴물처럼 근육을 잔뜩 부풀리며 노인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다른 건 몰라도 힘만큼은 펜리스 기사 중 최고 수준이었다.

바짝 붙은 고든은 노인의 얼굴을 우악스럽게 잡은 뒤 도끼로 목을 내리쳤다.

쩍!

"크르륵!"

노인이 팔을 들어 고든을 잡아채려 했지만 다른 기사들이 그의 팔다리를 붙잡고 버텼다. 이미 힘이 빠질 대로 빠진 노인은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고든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쉼 없이 노인의 목을 내리쳤다.

"죽어! 죽어! 제발 좀 죽어라!"

고든도 땀을 흘리며 젖 먹던 힘까지 끌어냈다.

진짜 질긴 괴물이었다. 다른 괴물보다 특별히 더 강한 걸 감안해도, 질릴 정도로 상대하기 피곤한 놈이었다.

퍼억! 퍼억! 퍼억!

"끄르르륵...."

고든의 도끼질로 결국 노인의 목은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제야 기사들은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와, 진짜 질기네."

"저런 놈이 전장에서 수백 마리나 날뛰면 어쩌지?"

"어쩌긴, 다 뒈지는 거지."

기사 200명과 홀로 싸우며 이렇게나 오래 버텨 내다니.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나는 놈이었다.

단순히 힘으로만 보자면 한 지역의 제일검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런 놈이 수백이나 있으면 정말 전장은 초토화되리라.

물론 저 정도로 강한 괴물이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저놈뿐일 리도 없었다.

기사들의 넋두리에 지셀이 픽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수고했다. 그런데 뭘 그렇게 쫄아? 너희들이 다 저 정도로 강해지면 문제없잖아."

"...."

기사들은 차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400명 정도 되는 펜리스 기사들이 다들 저 괴물 정도의 힘을 가지면 정말 문제없긴 할 것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지옥 훈련이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쉬고 있는 기사들을 내버려두고 지셀은 성큼성큼 노인의 집으로 향했다.

다른 집들보다 훨씬 더 큰 집이다. 가까이 다가간 지셀이 입을 열었다.

"구경 다 했으면 나와라."

끼이익....

문이 모습을 드러낸 자는 몸을 숨긴 채 회복하고 있던 라비에르였다.

그는 서늘한 표정으로 지셀을 노려보며 물었다.

"도대체... 도대체 어떻게 이곳까지 안 것이냐."

"네가 안내해 줬잖아?"

"추적은 없었다."

"그건 네 생각이고."

"...."

엘프들과도 싸우고 다른 영지의 병사들과도 싸웠다. 그렇기에 더욱더 조심하면서 왔다.

자신의 실력이면 충분히 주변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마을에 들어오기 전에 분명 추적자가 없는 것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

그런데도 펜리스 백작이 이렇게 자신을 쫓아 나타난 상황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너는 누구냐."

어떻게 쫓아왔냐는 물음은 필요 없다. 조금 더 근원적인 질문이 필요했다.

라비에르로서는 지셀이라는 존재 자체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지셀은 피식 웃었다.

"알 거 없다. 네 역할은 여기까지다. 덕분에 좋은 걸 알았으니까."

라비에르도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네가 뭘 알았든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우리의 대계는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까."

"아니, 이제 많이 달라질 거야."

그래, 확실히 전생과 달라질 것이다. 적어도 균열의 절반은 자신이 닫을 수 있을 테니까.

라비에르는 자신감 넘치는 지셀의 얼굴을 보며 힘을 끌어올렸다.

"어쩔 수 없지. 내 모든 힘을 다해 여기서 너를 죽이겠다."

자신 혼자 상대하기는 상대편 쪽 수가 너무 많았다. 하지만 이곳을 버리고 도망갈 수는 없었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어떻게든 펜리스 백작을 죽이고 대계를 지켜야 했다.

구오오오오!

그렇게 힘을 끌어올리던 라비에르가 흠칫 놀랐다. 자신의 뒤에 누가 있는 게 느껴졌다.

스각!

390화 이건 기회다. (4)

라비에르는 앞으로 구르며 가까스로 공격을 피했다. 뒤쪽 머리카락이 조금 잘리긴 했지만 상처는 입지 않았다.

돌아보니 웬 여자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단검을 빙빙 돌리고 있었다.

"어머, 피했어? 도련님, 얘 싸움 못한다면서요?"

벨린다가 혀를 찼다. 움직임을 보니 전투 기술은 전혀 모르는 듯 보이는데 반응 속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라비에르가 분노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감히 기습을...."

그는 말을 다 끝내지도 못했다. 이번에도 누가 다가와 검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앗차!'

적들을 앞에 두고 한눈을 팔다니. 라비에르가 급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파악!

바로 피했는데 살짝 옷이 베였다. 이번에는 웬 건방지게 생긴 놈이 검 두 개를 휘두르고 있었다.

"아, 이걸 피하네. 공격력 두 배라서 맞으면 한 방에 뒈졌을 텐데."

카오르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마스터인 펜리스 백작도 아니고 그 아랫놈들이 덤벼들자 라비에르는 머리끝까지 열이 솟았다.

자신을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실력도 모자란 것들이 덤벼든단 말인가!

"이놈들이 감히...."

쇄애애액!

카오르를 노려보던 라비에르가 강렬히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고 급히 고개를 들었다.

지셀이 저번처럼 붉은 눈을 빛내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건 피할 수 없다. 라비에르는 성력을 모두 전면으로 뿜어내었다.

콰아아앙!

"크으읏!"

겨우 막기는 했지만, 충격을 완전히 상쇄하지는 못하고 라비에르는 뒤로 한참이나 밀려났다.

땅에 착지한 지셀이 라비에르를 검으로 가리키며 웃었다.

"이거 봐. 쟤 싸움 되게 못한다고 했잖아."

그러자 다른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 같네요. 그런데 반응 속도가 보통이 아닌데요?"

"그래 봤자 내 쌍검에 한 대만 맞으면 죽을 거야. 맷집이 딱 봐도 약해 보이잖아."

세 사람이 두런두런 떠들며 라비에르를 포위했다. 협공할 심산인 것이 대놓고 티가 났다.

라비에르는 지셀을 노려보며 외쳤다.

"너! 마스터가 부끄럽게 협공을 할 셈이냐!"

"그게 왜 부끄러워?"

"뭐?"

"저거 바보 아냐? 내가 너랑 결투하냐? 마스터면 혼자 싸우라는 법이 있냐?"

"이, 이놈이...."

지셀이 검을 까닥이며 말을 이었다.

"루타니아 북부군 사령관이자 왕국의 귀족으로서 말한다. 네놈은 공작가와 손을 잡고 반역을 꾀했으며, 사교 단체의 일원으로 왕국민들을 현혹하였고 무고한 자들을 수도 없이 죽였다. 이에 왕국의 법에 의거해서 너를 체포하겠다. 그 죄가 가볍지 않으니 당장 무릎을 꿇고 지엄한 법의 심판을 받도록 하라. 이러면 되겠나?"

"올...."

기사들이 지셀의 말을 듣더니 자신들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역시 영주도 저런 말을 하려면 할 수 있었던 거였다. 이유도 말 안 해 주고 항상 주먹부터 나가서 문제일 뿐.

하지만 라비에르는 지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다. 저건 자신을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이놈!"

구원교의 높은 자리에 앉아서 언제나 우아하게 살았던 라비에르에게 이런 굴욕은 처음이었다.

수도에서 준비하던 일이 망가졌고 이제는 가장 중요한 금지까지 발각되고 말았다.

어차피 이대로 돌아가도 실수에 대한 죗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 교의 율법은 그리 너그럽지 않다.

이 모든 게 바로 저놈 때문이었다.

파아아아아악!

그의 몸에서 다시 검은 기운으로 이루어진 날개가 솟구쳐 나왔다. 한쪽만 남은 손에서 검은 기운이 손톱처럼 길게 튀어나왔다.

저번처럼 어설프게 힘을 쓸 생각은 없었다.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펜리스 백작을 죽여야 했다.

콰아아아앙!

라비에르는 남은 성력을 전부 폭발시켰다. 그의 몸 전체가 이글거리는 검은 기운으로 감싸였다.

그 힘에 다른 이들이 모두 놀라 주춤거렸다.

"모두 뒤로 물러나라. 공간을 넓게 비워."

지셀의 말에 기사들이 멀찌감치 자리를 피했다. 벨린다와 카오르만이 라비에르의 주변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을 뿐이었다.

라비에르는 힘에 비해 기술이 상당히 떨어진다. 전투 담당이 아닌 사제라서 그렇다.

그래서 지셀도 모든 힘을 다해 싸울 생각이 없었다. 협공해서 더 쉽게 잡을 수 있는데 굳이 안 할 이유도 없었다.

지금의 벨린다와 카오르라면 자신의 보조 역할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다. 괜히 혼자서 몸 망가질 정도로 무리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내가 먼저 간다."

파앙!

지셀이 마나를 폭발시키며 뛰쳐나갔다. 라비에르가 전면을 향해 바로 검은 기운을 내뿜었다.

콰아아앙!

라비에르의 공격은 제대로 적중되지 못했다. 잽싸게 뛰어오른 카오르가 휘두른 검을 피하느라 자세가 흐트러졌기 때문이다.

라비에르의 몸이 흔들리더니 순간 뒤로 이동했다.

"쳇!"

라비에르와 달리 공중에서 자유자재로 이동하는 기술이 없는 카오르는 혀를 차며 다시 땅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카오르를 피한다고 끝이 아니었다.

어느새 나타난 벨린다가 라비에르의 목을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

"크읏!"

카앙!

너무나도 절묘한 타이밍에 라비에르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들어 단검을 막았다.

검은 기운이 몸을 모두 감싸고 있기에 큰 피해는 입지 않았지만, 성력이 뭉텅이로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그의 연약한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힘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라비에르가 반격을 시도하기도 전에 벨린다의 로브가 펄럭였다.

파파파파파팍!

수십 개의 단검이 뱀처럼 움직이며 라비에르의 몸을 향해 날아갔다.

"이년이!"

콰아아앙!

라비에르는 검은 기운을 뿜어내며 단검을 모두 날려 버렸다. 하지만 그 짧은 빈틈을 노리고 지셀이 쇄도해 왔다.

지셀의 검은 오러 블레이드다. 자신의 힘으로 충분히 버틸 수는 있지만, 적중되면 성력의 소모가 어마어마하게 커진다.

라비에르는 다시 성력으로 방패를 만들어 내며 뒤로 물러났다.

콰아아아앙!

겨우 피한 것도 잠시, 이번에는 카오르가 또 공격을 시도했다.

다시 몸을 빼면 벨린다가 공격을 했고 어떻게 해 보기도 전에 지셀이 들어온다.

"으으으... 이 비겁한 놈들...."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자신보다 약하다. 그런데 막고 피하느라 바빠서 도무지 숨을 돌릴 틈이 없었다.

라비에르는 지금까지 경전의 연구와 교리 수행에만 전념해 왔다. 그는 전투 기술을 소홀히 한 걸 오늘처럼 후회한 적이 없었다.

카앙! 카앙! 카앙! 카앙!

네 사람은 그렇게 누구도 끼어들지 못할 속도로 움직였다.

그래도 라비에르는 강한 힘과 놀라운 반사신경으로 간간이 반격에 성공하기도 했다.

콰아앙!

"켁!"

카오르가 검은 기운에 배를 얻어맞고 떨어졌다. 벨린다도 갑작스럽게 들어오는 공격을 막은 충격으로 나가떨어졌다.

다행히 라비에르가 다른 공격에 신경이 분산되어 제대로 힘을 싣지 못한 덕분에, 두 사람은 몇 번이나 얻어맞아도 치명상은 피해 다시 움직일 수 있었다.

콰앙! 콰앙! 콰앙!

그나마도 지셀은 한 대도 맞지 않았다. 전부 다 피하고, 검으로 막아 냈다.

그러다 보니 라비에르는 조금씩 초조해졌다. 자신도 상대의 공격을 잘 막아 내고는 있지만 갈수록 성력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렇게 적들의 협공에 끌려다니기만 하면 결국 지쳐서 죽을 것이다.

더 압도적인 공격을 해야 했다. 어차피 힘을 아낄 생각은 없었다.

쿠오오오오!

생명력까지 태우기 시작하자 라비에르의 머리카락이 하얗게 새었다.

순식간에 더 높이 솟구친 라비에르가 세 사람을 노려보며 말했다.

"죽어라, 이 하찮은 벌레들아."

라비에르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던 보랏빛이 더욱더 짙어졌다. 곧 그의 몸에서 수천 가닥의 검은 기운이 뽑히듯이 튀어나왔다.

하늘을 수놓은 별처럼 무수히도 많은 검은 빛이 순식간에 공간을 장악했다.

그리고 그 빛은 세 사람을 향해 쏘아져 내렸다. 자신의 기술이 부족함을 아는 라비에르는 아예 힘으로 밀어붙인 것이다.

콰아아아아아!

주변을 모두 초토화할 정도로 강력한 힘이었다. 누구도 이걸 쉽게 막지 못할 것이다.

세 사람은 굳은 얼굴로 마나를 끌어올리며 충격에 대비했다. 피할 공간조차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 세 사람만 있는 건 아니었다. 지셀의 명령을 받고 라비에르가 저 공격을 쓸 때까지 기다리던 사람이 있었다.

"파이어 실드."

세 사람의 머리 위로 불타는 방패가 생성되었다. 바네사의 마력이 절반이나 소모될 정도로 강력한 방패였다.

콰콰콰콰콰쾅!

불의 방패와 부딪힌 검은 기운은 방패를 뚫지 못하고 소멸했다. 수천 가닥이나 되는 기운이 쉬지 않고 방패를 두들겼지만, 강대한 마력을 품은 불의 방패는 그 공격을 훌륭하게 버텨 내었다.

일부나마 드래곤 하트를 흡수한 7서클 마법사가 절반의 마력을 들여 만들어 낸 방패다. 검은 기운도 총량은 그에 못지않지만, 방패를 뚫기에는 너무 넓은 영역에 퍼져 있었다.

쿠쿠쿠쿠쿵!

마침내 마력을 다한 방패가 사라졌지만 그만큼 검은 기운도 약해져 있었기에 세 사람은 마나를 이용해 버텨 냈다.

"뭐냐!"

라비에르가 분노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성력 대부분을 밀어 넣은 공격이다. 이 공격만큼은 다시 쓸 수가 없기에 반드시 성공시켜야 했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마력의 흐름을 쫓아 시선을 돌리니, 저 멀리 피해 있는 기사들 위로 한 여자가 공중에 떠 있는 것이 보였다.

"마법사?"

한 명이 더 있을 줄이야. 라비에르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바네사가 마법을 시전했다.

"파이어 랜스."

지잉―! 지잉―! 지잉―!

순식간에 그녀의 주변으로 수십 개의 마법진이 떠오르며 불의 창을 쏟아 내었다.

예전처럼 연달아 빠르게 사용한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동시에 마법을 구현한 것이었다.

"이, 이 무슨!"

다중 영창을 처음 본 라비에르가 기겁하며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한 박자 빠르게 지셀이 손을 뻗었다.

화르르르륵!

지금까지 쓰지 않았던 마력의 창들이 라비에르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불의 창과 마력의 창들이 공간을 가득 채우며 날아왔다. 라비에르는 감히 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콰아아아아!

그의 몸에서 남은 성력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며 검은 반구형의 보호막을 만들어 냈다.

콰콰콰콰쾅!

"크으으윽!"

창들이 쉼 없이 라비에르의 보호막을 두들겨 댔다. 보호막은 순식간에 기운이 다해 결국 사라지고 말았다.

라비에르가 조금 전의 공격으로 이미 성력의 대부분을 소모한 탓이었다.

겨우 막아 내기는 했지만 그는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싸우는 데는 제대로 관심을 두지 않았던 그는 자신의 힘을 제대로 분배하지 못하고, 무작정 힘과 속도만 앞세워서 싸우려고 했다.

그런 라비에르의 곁에서 벨린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필살기가 실패했으면 죽어야지?"

스각!

"크으윽!"

결국 그는 갑자기 공격해 온 벨린다에게 목을 베이고 말았다. 죽지는 않았지만, 목에 크게 난 상처에서 검은 기운이 연신 뿜어져 나왔다.

콰앙!

라비에르가 간신히 힘을 끌어올려 벨린다를 밀쳐 냈지만 이번에는 카오르가 그의 가슴을 베었다.

"커억!"

라비에르의 검은 날개가 몇 번 떨리더니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다시 반격을 하려 했지만 그보다 바네사의 마법이 더 빨랐다.

번쩍!

하늘에서 빛이 번뜩이더니 라비에르의 몸으로 낙뢰가 떨어졌다.

콰아앙!

"크아아아악!"

목을 베이고 가슴을 베이고 번개에 맞았음에도 라비에르는 죽지 않았다.

핏발 선 눈으로 어떻게든 힘을 더 끌어올려 공격을 하려 했다. 질릴 정도로 대단한 생명력이었다.

"감히! 감히 신의 힘을 받은 나에게!"

그가 핏발선 눈으로 힘을 끌어올렸지만, 처음과도 같은 기세는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그런 라비에르의 모습을 본 지셀이 웃었다.

"힘이 거의 다 빠진 모양이네. 이제 슬슬 끝을 내자."

콰아앙!

지셀이 3단계의 코어를 활성화하자 곧 검붉은 기운이 그의 몸을 감쌌다.

검붉은 기운이 감싼 지셀의 모습은 날개만 없다 뿐이지 라비에르와 별다를 게 없었다.

아니, 그의 기운은 라비에르의 성력보다 더 짙고 더 촘촘하게 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래서 지셀도 전장에서 라비에르처럼 악마라 불렸던 것이다.

파앙!

붉은 눈을 빛내며 쏘아져 오는 지셀을 보고 라비에르는 몸이 굳고 말았다.

막거나 피해야 하는데 그럴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겁을 먹어서가 아니라, 무척 놀랐기 때문이었다.

'저, 저 힘은!'

라비에르는 떨리는 눈빛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그의 몸을 둘러싼 기운은 자신의 성력과도 비슷했다. 갑자기 폭발하는 마력은 자신들이 연구하는 마나 연공법과도 비슷했다.

그 두 가지 힘을 지셀은 아무렇지도 않게 같이 쓰고 있는 것이다.

'마, 말도 안 돼....'

자신들이 쓰는 힘과 비슷한 효과가 있는 것들은 대륙을 뒤져 가며 모두 찾아 연구했다.

하지만 지셀이 쓰는 힘은 그런 게 아니었다. 자신들이 쓰는 힘과 더 가까웠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저 정도까지 힘을 폭발하자 확연하게 느껴졌다.

이 순간만큼은 연구자로서의 자아가 라비에르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자, 잠깐!"

그가 허겁지겁 손을 내뻗으며 외쳤지만 지셀은 가볍게 무시했다.

전투 중에 적의 잔재주에 넘어가는 건 하수다. 한번 죽이겠다고 마음먹었으면 오직 그것에만 집중하는 것이 지셀의 전투 방식이었다.

"끝이다."

콰직!

지셀이 길게 뽑은 오러 블레이드가 단숨에 라비에르의 목을 갈랐다.

이미 힘도 떨어질 대로 떨어져 무방비한 상태였던 라비에르는 그 공격을 그대로 받아 주고 말았다.

그렇게 목이 떨어져 나간 뒤에도 그의 얼굴은 여전히 의구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너... 어떻게...."

내용도 제대로 담기지 않은 의문만이 라비에르가 남긴 마지막 말이 되었다.

391화 일이 쉽게 풀렸군. (1)

지셀은 땅에 떨어진 라비에르의 머리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놈 뭐야? 갑자기."

최대한 빨리 죽이기 위해 3단계까지 활성화했지만, 라비에르라면 몇 번 정도는 반항할 힘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마치 순식간에 전의를 상실한 것처럼 공격을 받아 버렸다. 지셀 정도의 실력자가 그걸 못 알아볼 리 없었다.

"유언이라도 남기고 싶었나?"

지셀은 잠깐 고민하다 곧 고개를 저었다. 전생부터 지금까지 싸우면서 확실히 배운 게 있다면, 수세에 몰린 적의 말에 굳이 귀 기울일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괜히 말 들어 주다가 목이 날아갈 뻔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지금은 답도 알 수 없는 고민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전투가 끝나자 기사들이 달려오며 외쳤다.

"우와! 저놈을 잡았다!"

"역시 다 같이 패는 게 최고라니까!"

"이길 줄 알았습니다!"

기사들은 마음 편히 웃었다. 영주가 나서서 못 팬 놈이 없었기에 이번에도 당연히 이길 거라 믿고 있었다.

여기저기 얻어맞아서 몸이 상당히 망가진 카오르가 주저앉았다. 그는 침을 질질 흘릴 정도로 헐떡이면서 외쳤다.

"저 새끼 싸움 존나 못하네! 야, 다들 봤냐!"

"...."

기사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상당히 아파 보이는 주제에 뻔뻔하게 저런 말을 하는 사람에게 뭐라고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벨린다도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제는 서 있기도 힘들었다.

"휴, 기술이 전혀 없는 놈인데도 상대하기가 쉽지 않네."

보기에는 쉽게 이긴 거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공격 하나하나에 담긴 힘이 만만치 않았다.

만약에 제대로 맞았다면 정말 죽을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지셀도 최대한 공격을 쳐 내며 피한 것이다.

만약 저런 힘을 가진 자가 제대로 전투 기술까지 익혔다면 절대 이렇게 쉽게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저번에 싸워 봐서 그런가? 저놈이 저런 기술을 쓸 건 어떻게 알았지?"

특히 라비에르가 마지막에 쓴 기술은 어마어마했다. 만약 바네사가 미리 마력을 모으고 집중하고 있지 않았다면, 세 사람의 힘만으로는 막기 힘들었을 것이다.

"에이, 도련님이 숨기는 게 워낙 많아서.... 물어봐도 또 대충 둘러대겠지."

벨린다가 살짝 투덜거렸다.

그녀의 짐작대로, 지셀은 라비에르가 궁지에 몰리면 그 기술을 쓸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전생에 그 때문에 제법 큰 피해를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네사에게 미리 방어 마법을 준비시켰던 것이다.

촌장과 라비에르까지 처리했으니 이제 더 이상 지셀 일행을 막을 자는 없었다.

"다 부숴서 수상한 게 있는지 확인해라."

지셀의 명령에 기사들이 아예 마을을 부수고 바닥까지 파며 확인에 들어갔다.

전투를 보고 넋이 나갔던 병사들도 일단은 기사들을 따라 수색에 들어갔다.

그리고 촌장의 집 지하로 내려간 지셀은 눈을 찌푸렸다.

"짧은 시간 내에 만든 게 아니군."

다크의 말대로 거대한 크기의 마법진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주변에 있는 시체들에게서는 견딜 수 없는 악취가 피어올랐다.

뒤따라온 기사들도 그 광경을 보고 기겁했다.

"으헉! 뭐야!"

"이 미친놈들.... 여기서 뭔 짓을 하고 있었던 거야?"

"우웨에엑!"

어지간히 못 볼 꼴을 많이 보고 살아온 그들도 헛구역질을 할 정도로 잔인하고 역겨운 광경이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 봐라."

지셀의 말에 기사들이 주변의 장치들을 부수고 사람들을 꺼냈다.

빠짐없이 조사한 그들이 고개를 저었다.

"전부 죽어 있습니다."

"죽은 지 오래된 거 같지는 않습니다."

"산 채로 피를 뽑은 모양입니다."

기사들의 말에 지셀이 혀를 찼다. 수천 구에 가까운 뼈들이 가득 차 있다. 도대체 몇 년이나 이 짓을 했는지 가늠조차 안 될 정도였다.

그리고 이 거대한 마법진에서 풍겨 나오는 기운은, 전생에서 느꼈던 기운과 비슷했다.

'확실하군. 이 마법진으로 균열을 열었다.'

균열은 마치 공간이 갈라진 듯한 모양이었다. 환한 빛을 내뿜고 있기에 그 안에 뭐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여러 사람이 들어가려고 시도했지만 들어가지 못했다. 오직 이계의 괴물들만 갈라진 틈에서 쏟아져 나왔을 뿐이었다.

그 갈라진 공간에서 새어 나오던 기운과 이 마법진이 뿜어내는 기운은 비슷했다.

"바네사, 마법진을 해석할 수 있겠어?"

지셀의 말에 바네사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이미 마법진을 분석하는 중이었다.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좌표계 마법, 마나 집속진처럼 주변의 기운을 빨아들이는 마법의 흔적이 있긴 하지만... 기존 마법과 궤를 달리하는 방식이에요. 독자적으로 개발한 방식 같아요."

"흠, 역시 그런가."

전생에 바네사보다 더 뛰어난 마법사도 균열의 정체를 밝혀내지 못했다. 그녀가 알아내지 못한 것도 이상하진 않았다.

바네사가 지셀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람들의 생명력과 주변의 마나로 힘을 축적하고 있는 건 확실하니, 시간을 들여서 역으로 분석을 해 보면 어떨까요?"

"아니, 당장 파괴한다."

"이거를요?"

"그래. 오래 내버려둘수록 주변에 더 안 좋은 영향을 끼칠 거야. 결계를 쳐도 막을 수도 없다. 아깝긴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바네사의 말처럼 기존의 마법과는 궤를 달리하는 방식이라 그런지, 마법으로 결계를 쳐도 균열의 기운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균열이 열리면 주변은 점점 그 기운에 침식당한다. 그래서 인류는 많은 땅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번 열린 균열을 다시 닫기 위해서는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이 균열 하나를 닫기 위해서 전생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하였던가.

아직 기운만 뿜어내고 있을 때 이 마법진을 파괴해야만 했다.

지셀이 바네사와 기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까보다 더 강한 기운이 몸에 침투하려 할 거다. 그 기운을 계속 받아들이면 변이자가 되는 거다."

전생에 균열 근처에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 변이자가 되었다.

지금이야 완전히 열리지 않았으니 마을 사람들만 변이가 됐지만, 균열이 열리면 그 영역은 훨씬 더 커지게 된다.

기사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마법진과 가까워지자 마을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은 기운이 몸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 기운을 계속 받아들이면 변이자가 된다는 말도 상당히 찝찝했다. 당장 클포이 머리 부수듯이 마법진을 부수고 싶었다.

지셀은 오러 블레이드를 뽑아내 바로 마법진을 갈랐다.

콰아아앙!

불길한 기운을 뿜어내던 마법진이 마치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실제로 소리가 난 건 아니지만 다들 그런 느낌을 받았다.

콰앙! 콰아아앙! 콰아앙!

균열의 끔찍함을 알고 있는 지셀은 마법진의 흔적조차 남지 않도록, 바닥을 말 그대로 가루로 만들었다.

그는 새어 나오던 기운이 아예 느껴지지 않는 것을 몇 번이고 확인한 뒤에야 행동을 멈췄다.

"병사들을 불러 이 광경을 보여 주고 시체들과 뼈들을 수습해라."

왕국군에서 지셀이 차출해 온 지휘관과 병사들은 지하의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일부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을 정도였다.

3군단 소속의 지휘관이 떨리는 눈빛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그는 예전 데스몬드와의 전쟁에 참전해 지셀과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배, 백작님.... 이, 이게 무엇입니까?"

"구원교가 벌이는 짓이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놈들이 사람을 제물로 써서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

지셀은 균열의 존재까지 얘기하지 않았다. 어차피 증거도 없었다. 사람들에게는 눈에 확실히 보이는 것만 보여 주면 된다.

3군단 소속의 지휘관은 절로 욕을 뱉었다.

"이 미친놈들이.... 도대체 뭘 하는 거야?"

구원교란 이름은 요즘 왕국의 공적이자 사교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괴물들 때문에 유명해지긴 했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소문을 듣고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어차피 그들의 일상에는 와닿지도 않았고, 그저 귀족들끼리 싸우는 핑곗거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원교가 이렇게 사람들을 마구 죽이고 실험을 하고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 이 정도면 아주 오랫동안 납치를 했겠군요."

"그래, 단기간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부랑자나 빈민들을 몇 명 납치했다면 몰라도, 고작 이 작은 마을에 수천 명이나 납치해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변에서 수십 명만 없어져도 난리가 났을 게 뻔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조용했다는 건, 아주 오랫동안 조금씩 사람들을 납치했다는 뜻이다.

"일단 정리는 제대로 하고 보고를 올려. 내가 브랜포드 후작님에게는 따로 말씀드릴 테니까. 내가 알아낸 장소가 몇 군데 더 있다."

"이런 곳이 또 있단 말입니까?"

"대륙 곳곳에 이런 시설들을 꽤 많이 만든 모양이야. 다 찾아서 박살을 내야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죽은 놈이 다 불었어."

사실 거짓말이었지만 이들은 지셀의 말이 진짜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그는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무튼 심각한 상황이니까 소문도 확실히 내. 사람들이 경각심을 가져야 하니까. 안 그래?"

"네, 네. 알겠습니다. 어차피 같이 본 병사들도 많아서 감추기가 더 어려울 겁니다."

소문은 들불처럼 널리 퍼져야 한다. 그래야 구원교의 적이 더 많아지고 귀족들이 자신에게 협조할 테니까.

병사들이 주변을 수습하는 동안 지셀은 홀로 생각에 잠겼다.

'일단 대략적인 위치는 알고 있으니 상당히 많은 균열을 미리 닫을 수 있다.'

지금처럼 정확하지는 않아도 대강의 위치는 기억하고 있다. 주변을 수색하다 보면 분명히 나올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자세히 조사해 둘걸.'

아쉽게도 지셀이 풋내기 용병으로 활약할 때 생긴 균열,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생긴 균열은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자신의 역할은 조사가 아니라 전투였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건, 그가 용병으로 완숙한 경지에 이르렀을 때는 대륙 곳곳을 떠돌아다녔다는 점이다.

당시에 싸웠던 균열은 거의 다 기억하고 있었다.

'역시 북부에는 균열이 없는 것도 의도된 일이었군.'

신기하게도 몇몇 지역에는 균열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그중 하나가 루타니아 왕국 북부였다.

정확히는 북부로 가는 경계에 하나가 있긴 했지만, 북부 내에는 없다고 할 수 있었다.

'마수의 숲 때문인가.'

저들도 마수의 숲을 노리고 있으니 일부러 이런 작업을 피한 게 분명하다.

전생에는 다들 그 사실을 모르니 무작위로 생겼다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북부에 균열이 열렸다면 그 장소를 미리 조사해 봤을 것이다. 하지만 북부엔 그게 없었으니, 조사해 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환란의 시기에 대비하는 작업만 해 온 것이다.

'아주 잘됐어.'

이유는 모르지만 적어도 적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았다. 그리고 자신은 그놈들이 일을 꾸미는 장소를 상당히 많이 알고 있다.

애초에 균열 전체가 열릴 것을 대비해 많은 준비를 해 왔다. 그 전에 균열을 조금이라도 미리 닫는다면 상황을 더 유리하게 이끌어 갈 수 있었다.

'빨리 움직여야겠군.'

로드리크 후작이 곧 군사를 움직일 것이다. 거기에 공작가도 균열의 존재가 발각된 이상 더 발악할 게 뻔했다.

지금 알아낸 사실을 빠르게 브랜포드 후작과 다른 왕국에 알려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구원교와 공작가를 더 압박할 수 있을 것이다.

"수도로 가자."

지셀은 주변을 경계할 병사만 일부 남겨 두고 바로 수도로 움직였다.

회귀한 뒤 이렇게 바쁘게 움직인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브랜포드 후작은 지셀이 돌아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찾아오자 살짝 의심스러워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냐? 돌아간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러자 브랜포드 후작이 무척 근엄하고도 단호하게 말했다.

"더는 없다."

"...뭐가요?"

"없다지 않았느냐."

"아니, 그러니까 뭐가 없다는 겁니까?"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드래곤 하트 조각도 다 내어 주지 않았느냐. 또 뭘 가져가려고 온 것이냐."

"...."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이다. 이번에는 정말로 뭐 받으러 온 게 정말 아니었다.

"뭘 가져가려고 온 게 아닙니다."

그러자 브랜포드 후작이 무척이나 수상스럽다는 눈빛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이놈한테 말려서 그간 뜯긴 게 한두 번이 아니지.'

결과가 다 좋게 나오긴 했지만, 그래도 당한 사람으로서 기분이 상하는 건 별수 없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놈한테 더 부족한 건 없어 보였다.

그런 브랜포드 후작의 반응에 지셀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구원교가 꾸미는 짓 중 하나를 알아냈습니다. 그리고 증인도 데리고 왔습니다."

"음? 뭐라?"

뭔가 잘못짚었다는 걸 알게 된 브랜포드 후작이 그제야 관심을 보였다. 그러자 지셀을 따라온 왕국군의 지휘관이 자신이 본 걸 설명했다.

어찌나 설명을 잘하는지 듣는 사람도 그 자리에 있던 것처럼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었다.

깜짝 놀란 브랜포드 후작이 지셀에게 물었다.

"그게 정말이냐? 사람들을 납치해서 죽이고 있었다고?"

"네, 사교답게 더러운 짓을 꾸미는 모양입니다. 흑마법사들처럼 사람들을 제물로 쓰고 있습니다."

"이놈들이...."

"그리고 그 장소가 하나가 아님도 확인했습니다."

지셀은 마을에서 왕국군 지휘관에게 그랬던 것처럼, 라비에르를 통해 알았다고 대충 둘러댔다.

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브랜포드 후작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 왕국뿐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그런 짓을 하고 있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그자가 거짓 정보를 너에게 흘린 것일 수도 있다. 만약 아니라면 우리는 망신을 당할 것이고, 우리의 말은 힘을 잃을 것이다."

그러자 지셀이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니 지금 당장 가까운 곳부터 확인하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확인되는 즉시 동시에 쳐야 합니다. 다른 왕국에도 바로 알려야 하고요."

브랜포드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가가 있는 남부는 확인하지 못하지만 수도 인근과 동부, 서부 등 조사할 곳은 많았다.

그리고 만약 지셀이 알아 온 내용이 사실이라면 공작가와 구원교가 손을 쓰기 전에 먼저 움직여야 했다.

브랜포드 후작이 손을 들며 말했다.

"집사, 당장 왕국군을 움직일 준비를 해라."

"알겠습니다."

브랜포드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는 직접 눈으로 확인할 생각이었다.

"어쩌면 이게 더 큰 기회가 될 수 있겠군."

어지간해서는 수도를 떠나지 않는 그가 움직일 결심을 할 정도로 큰일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전부 사실로 밝혀진다면.

구원교와 공작가는 대륙의 모든 왕국을 적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392화 일이 쉽게 풀렸군. (2)

브랜포드 후작이 왕국군을 소집하고 출정 준비를 하는 동안, 지셀은 지도를 펴고 균열의 위치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야 해."

환란의 시기에는 인류 전체가 힘을 합쳐 싸워야 한다. 모두가 같이 준비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그렇게 설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 얘기를 했다가는 그냥 진짜 정신병자로 몰렸을 테니까.

그래서 지셀은 자신만이라도 대비를 해서 아예 힘으로 왕국을 이끌고 갈 생각이었다.

"라비에르 덕분에 일이 쉽게 풀렸군."

공작가와 싸우면서 친왕파를 강제로 끌고 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굉장히 피곤한 일이 될 것은 각오했다.

하지만 전생에 얻은 정보와 지금까지 그가 준비해 온 것, 적들의 실수가 기가 막힐 정도로 적절한 타이밍에 어우러졌다. 정말 이번만큼은 하늘이 도왔다고도 할 수 있었다.

"먼저 루타니아 왕국부터 확실히 정리해야 한다."

인류 전체의 싸움이니 다른 곳의 균열도 중요하긴 하지만, 루타니아 왕국은 지셀의 기반이니 중요도가 훨씬 높았다.

다른 왕국을 설득하는 데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만큼 왕국 내의 균열은 최대한 제거해야 했다.

그렇게 해야 지셀이 더 오래 싸울 수가 있었다.

"여기는 확실하고... 여기도 있었지.... 여기에는 있었나?"

루타니아를 침공했을 때 당연히 균열의 위치도 파악을 해 놨다. 그가 풋내기였을 시절에 생성되었다가 사라진 균열까지 전부 기억하지는 못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그놈들은 공작가가 있는 남부에도 균열을 상당히 많이 열었었다.

"그걸 없애면서 구원교와 공작가의 민심이 꽤 올라가긴 했지만 피해도 그만큼 많이 봤었지. 애초에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 놈들이라 생각해야 해."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목표를 세우고 음모를 꾸미는 놈들이다. 상식을 잣대로 판단하는 건 멍청한 짓이다.

그래도 공작가는 남부의 요새와 성들을 꽤 많이 지켜 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머지는 죄다 제물로 바친 것만 같았다.

"그림이 그려진다, 그림이."

전생의 정보와 현실에서 알게 된 음모를 조합하자 많은 의문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지셀은 루타니아 왕국뿐만 아니라 대륙 곳곳에도 기억나는 대로 표시를 했다.

균열 전체를 완벽하게 지도에 표시하지는 못했지만, 환란의 시기에 유명했던 곳과 1년 전쟁 때까지 남아 있던 곳은 대부분 기억해 냈다.

브랜포드 후작에게 찾아간 지셀은 바로 자신이 작성한 지도를 넘겼다.

"으음... 왕국에 이렇게나 많다는 말이냐?"

"네, 거의 확실할 겁니다."

"만약 이 위치에 가서도 찾지 못한다면 이번에 발견했던 곳에 관한 정보까지 신빙성을 잃을 것이다."

"높은 확률로 확실할 거니 믿으셔도 좋습니다. 뭐, 아니면 어쩔 수 없죠. 이미 4대 교단이 끼어들었으니 상황이 더 나빠질 일은 없습니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지만...."

지도를 더 살펴보던 브랜포드 후작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북부에는 한 곳도 없다는 게 맞느냐?"

"네, 없습니다."

"왜?"

"제가 있기 때문이지요."

"...."

후작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요새 너무 잘 나가다 보니 반박할 말이 없는 게 뭔가 더 재수 없었다.

지셀은 후작의 속내를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딴청을 피웠다.

사실 지셀 자신 때문이라기보다는 마수의 숲 때문일 가능성이 크지만 어쨌든 그곳도 지셀의 것이긴 하니 틀린 말은 아니다.

마수의 숲에 대해 자신도 아직 모르는 게 많으니 굳이 밝힐 필요는 없었다. 왜 그곳을 노리는지도 아직 명확하지 않고 말이다.

브랜포드 후작은 조금 찝찝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단 제일 가까운 곳으로 가 보자."

"이곳도 작은 시골 마을입니다. 지도에도 제대로 나와 있지 않은 곳이죠."

"병력은 적당히 데려가면 되겠군."

후작의 명으로 대기하고 있던 군대를 본 지셀은 조금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왕국군 1만 명과 후작가의 기사 100명, 왕국군 소속 기사 200명이 도열하고 있었다.

작은 마을을 조사하고 공격하는 병력치고는 조금... 많았다.

지셀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심정을 대놓고 드러내며 말했다.

"누가 보면 영지전이라도 나가는 줄 알겠습니다."

"사자가 움직일 때는 그 기세가 세상을 뒤덮어야 하는 법이다."

브랜포드 후작은 당연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것이 진정 왕국 최고의 권력가다운 모습이었다.

서부와 남부는 대놓고 뒤져 볼 수가 없다. 그렇기에 브랜포드 후작과 왕국군은 수도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로 향했다.

겉보기에는 평화로운 마을이다. 하지만 왕국군이 포위하자 마을 사람들은 바로 정체를 드러내었다.

츠츠츠츠츳!

인간의 겉가죽이 찢어지고 괴생명체가 나오는 장면은 누가 봐도 기겁할 만한 모습이었다.

"뭐, 뭐야!"

"진짜 이상한 것들이 있다!"

"저번 괴물보다 더 징그러운 놈들이잖아!"

어지간하면 잘 놀라지 않는 브랜포드 후작과 후작가의 기사들까지 모두 놀라고 말았다.

지셀은 놀란 그들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전투력은 그리 강하지 않은 놈들이다! 대신 피에 독이 있으니 충분히 거리를 두고 싸워라! 기사들은 마나로 몸을 보호해야 한다!"

지셀이 알려 준 정보 덕분에 기사들과 병사들은 변이자들을 쉽게 처리했다. 애초에 작은 마을에 숨어 있는 것들이라 수도 그리 많지 않았다.

책임자로 보이는 몇몇 성전사들도 보였지만 이 많은 군대를 상대할 수는 없었다.

괴물과 변이자들의 시체를 본 브랜포드 후작은 화를 꾹꾹 참으며 이를 갈았다.

"정말 이런 괴생명체가 나타날 줄이야. 그렇다는 건 이 마을 어딘가에 왕국민 수천의 시체가 있다는 말 아닌가."

그가 바로 손을 들어 기사단장인 톨레오에게 말했다.

"당장 이곳의 땅을 모두 뒤엎어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무려 1만의 병사와 300의 기사들이다. 거기에 왕실 마법사들도 몇 명이 따라왔다.

이들은 그냥 집을 부수고 땅을 파는 평범한(?) 방법을 쓰지 않았다. 말 그대로 이 지역의 땅을 전부 순식간에 갈아 버렸다. 숫자의 무서움을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

"찾았습니다!"

단번에 밀어 버리니 비밀 공간도 금세 찾을 수가 있었다.

기사들이 먼저 내려가 안전한 공간을 확보한 뒤, 브랜포드 후작이 호위들과 함께 들어갔다.

"후우!"

브랜포드 후작은 지하로 내려가자마자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척이나 역겨운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기괴한 마법진, 수천의 시체가 쓰레기처럼 쌓여 있는 안타까운 광경을 보니 마음이 술렁였다.

앞서 들어왔던 기사들과 후작을 뒤따라온 자들도 경악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보다 더 놀란 것은 증인의 역할로 따라온 4대 교단의 사제들이었다.

"이, 이럴 수가!"

"악마 같은 놈들이로다! 아니, 악마가 분명합니다!"

"여신을 부정하는 이교도 놈들이 이렇게 활개를 치고 있었다니!"

사제들은 누구보다도 더 난리를 치며 시끄럽게 떠들었다.

그들은 마음 깊이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4대 교단의 경전에 쓰여 있는 종말의 구절 중에 비슷한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에 없던 짐승들이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땅을 멸망으로 이끄니, 그 기이한 짐승들은 사람들의 피로 사서 그들이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으리니....]

"이번 일은 경전에 쓰여 있는 그 내용이 분명합니다! 이걸 막지 못한다면 정말 종말의 시대가 오는 겁니다!"

"그런데 올라온 게 아니지 않습니까? 이 마법진이 그냥 변이만 시키는 걸 수도 있지 않습니까."

"지금 몸을 파고드는 사특한 기운을 느끼면서도 그런 말이 나옵니까? 아니, 어쨌든 저 이교도 놈들은 다 잡아 죽여야 합니다!"

경전의 구절은 사실 결과를 보고 해석하기 나름이다. 그러니 다들 제가 믿는 종교의 경전에서 비슷한 구절을 찾아서 신학 토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다른 자들은 그런 사제들을 무시하고 그냥 마법진을 부수고 시체를 치우는 작업에만 전념했다.

브랜포드 후작은 속이 끓어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공작가만 신경을 쓰느라 왕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조차 몰랐다. 아니, 누구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살기 어린 눈빛으로 지셀을 바라보며 물었다.

"지셀."

"네, 후작님."

"시체의 수만 봐도 한두 해 동안 한 짓이 아니다. 거기에 이런 곳이 왕국을 비롯해 대륙에 수도 없이 많다고 했던가? 숨어 사는 사교 단체가 아무리 강해도, 이런 일을 벌이면서 이렇게 오래 모두의 눈을 피할 수는 없다."

"맞습니다. 이들을 도와주는 자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루타니아 왕국에서는 델파인 공작가겠군."

"그렇습니다."

"다른 왕국도 그놈들의 뒤를 밀어주는 귀족들이 있을 테고."

"후작님의 생각이 맞을 겁니다."

뭔지는 모르지만, 구원교와 공작가는 모종의 목적을 위해 힘을 합한 것이 확실했다. 그러니 공작가 또한 구원교의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줬을 것이다.

브랜포드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델파인 공작이 칩거하고 미쳤다고 소문이 났을 때부터였겠군."

델파인 공작은 오랫동안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리고 공작가의 힘이라면 그동안 충분히 구원교를 도와줄 수 있었을 것이다.

공작가에서 왕위에 대한 야망을 대놓고 드러냈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눈이 완전히 가려진 것이다.

다들 내전이 언제 일어날지에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으니 왕국민들의 안위를 제대로 살필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정말 답답하군. 이 정도 인원이 없어지는데도 어찌 아무도 눈치를 못 챘단 말인가."

"아마 대부분은 남부와 서부에서 왔을 겁니다. 그리고 주변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만 납치해 왔겠죠."

빈민, 부랑자, 여행자, 모험가, 떠돌이, 심지어 용병과 산적, 도적 등. 찾아보면 쥐도 새도 모르게 납치해 올 자들은 의외로 많다.

그리고 남부는 완벽하게 공작가의 통제에 들어가 있다. 꾸준하게 인간을 공급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

서부의 로드리크 후작 또한 사람 목숨을 마구 다룬다. 공작가가 요청할 때마다 죄수나 노예 따위를 보내 줄 여력은 차고도 넘쳤다.

"후우, 그러면 제 놈들 영토에서나 할 것이지, 수도 인근과 다른 지역까지...."

"아마 내전 때 소요를 일으킬 단체들과 힘을 합쳐서 무언가를 하려 했던 거 같습니다."

여기서 균열에 대한 정보를 줘도 믿지 않을 테고, 설령 믿는다 해도 문제였다. 재수 없으면 중요한 순간에 자신과 의견이 갈릴 수가 있었다.

그래서 지셀은 적당히 둘러댔다. 지금은 최대한 빠르게 균열의 후보지들을 없애는 게 중요했으니까.

브랜포드 후작은 여전히 화를 억누르는 표정으로 말했다.

"일단 내 영향력이 닿는 곳은 이대로 내가 최대한 빠르게 없애겠다. 그리고 지금 당장 전령을 보내 다른 왕국들에도 현재 상황과 위치를 알려 주겠다.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브랜포드 후작은 자신이 결정한 사항에는 남의 의견을 묻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 지셀만큼은 예외였다.

지셀이 아니었다면 친왕파가 이런 반격의 기회를 잡을 수 없었을 테니까.

"저는 바로 영지로 돌아가겠습니다. 로드리크 후작가가 움직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정말 홀로 싸울 생각이냐?"

"어차피 로드리크 후작은 공작파에서 빠졌습니다. 저도 부담 없이 싸울 수 있습니다. 후작님은 빨리 마법진들을 없애고 공작가와의 싸움에 대비하십시오. 그들도 이제 다른 방법이 없을 겁니다."

"알겠다. 그리하도록 하마. 단, 로드리크 후작가와의 싸움에서 밀리면 우리가 개입하겠다."

든든한 브랜포드 후작의 말에 지셀이 씨익 웃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자신만만한 지셀의 말에 브랜포드 후작이 흐린 웃음을 지었다. 옛날 같았으면 헛소리 말라고 일갈부터 날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이 안 든다. 걱정은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대가 든다.

왠지 저놈이 지는 광경은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는 문득 자신의 생각이 바뀐 이유를 깨달았다.

브랜포드 후작이 지셀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지셀을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더 따뜻함을 품고 있었다.

'이제 너에 대해 조금은 알겠구나.'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항상 아슬아슬하게 구는 것처럼만 보였다. 그렇기에 완전히 신뢰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착각이었다. 지셀에게는 자신만의 계획이 있었다. 그리고 그 원동력은 추악한 권력욕이나 야망 따위가 아니다.

이제야 비로소 지셀이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 거 같았다.

미소를 짓던 그가 갑자기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승리를 기원하겠네. 펜리스 백작."

지셀은 조금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 마주 미소 지으며 답했다.

"저 또한 후작님의 승리를 기원하겠습니다."

브랜포드 후작에게 인사를 한 지셀은 바로 기사들을 이끌고 마을을 떠났다. 펜리스는 이제 로드리크 후작과 전쟁을 치러야 한다.

4대 교단까지 힘에 업은 친왕파라면 자신들의 영역에 있는 균열의 후보지 정도는 충분히 없앨 수 있을 것이다.

떠나가는 지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브랜포드 후작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톨레오, 이번 전쟁이 끝나면 앞으로 펜리스 백작이 나에게 무언가를 요청하러 올 필요가 없을 거 같구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펜리스 백작은 또 필요한 게 있으면 득달같이 후작님을 찾아올 것입니다. 요새는 대놓고 달라고 하지 않습니까?"

"뭐 하러 그러하겠느냐. 필요하면 그냥 가져가면 될 것을."

"서, 설마... 각하, 지금...."

톨레오가 떠듬거리자 브랜포드 후작이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그래, 펜리스 백작을 내 진정한 후계자로 삼을 것이다."

"각하! 영지에 대공자가 있지 않습니까!"

"내 아들 말인가? 동부에 처박혀 있기만 한 그놈이 무슨 그릇으로 왕국의 국정을 운영한다는 말이냐. 그놈은 로잘린보다도 못하다.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야. 후작가나 무사히 물려받으면 다행이지."

"펜리스 백작은 왕실에 충성하는 인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전쟁이 승리로 끝나면 공작가보다 위험해질 것입니다."

"알고 있다. 하나 저놈만큼 뛰어난 놈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구나. 그리고 나는 이제 저놈이 무엇 때문에 저리 열심히 사는지 알 거 같구나."

"그, 그게 무엇입니까?"

"책임감."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톨레오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펜리스 백작은 언제나 제멋대로 하며 사고만 치고 다니기로 유명하다.

요새 조금 친왕파에 잘해 주긴 했지만, 지금까지 망나니처럼 군 과거가 어디 가진 않는다.

그런데 그런 자가 책임감으로 움직인다니. 안 어울려도 그렇게 안 어울릴 수가 없었다.

차라리 그냥 무법자라고 했다면 바로 수긍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브랜포드 후작은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었다.

"나 또한 그런 마음으로 살고 있기에 알 수 있었다. 저놈은 제 영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놈이다. 가족, 친구, 수많은 수하와 영지민들을 등에 업고 말이다."

"...."

"지금까지 보니 저놈은 등에 업은 그 많은 것들을 하나도 포기하지 않고 싶어 하더구나. 참으로 욕심 많고 집요하면서도 독한 놈이다."

"그, 그렇다면... 후작님의 뜻은...."

브랜포드 후작이 갑자기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러니 저놈에게 왕국을 맡기면 왕국의 수호신이 될 것이 아니냐. 그거면 됐다. 굳이 먼저 나서서 왕실의 목숨까지 끊을 놈은 아니니까 말이다."

브랜포드 후작은 무언가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지셀 페르디움이라는 존재로 인해.

그는 드디어 은퇴를 꿈꿀 수 있게 되었다.

393화 일이 쉽게 풀렸군. (3)

지셀은 영지로 돌아오자마자 기사들을 재촉했다.

"자! 시간이 없다! 빨리 교대로 들어가!"

요즈음 기사들은 드래곤 하트 조각으로 만든 마나 집속진에서 수련하고 있었다.

펜리스에 룬스톤은 이제 넘쳐난다. 모두가 개인용 마나 집속진을 쓸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드래곤 하트 조각은 양이 한정되어 있기에 그걸 이용해 만든 마나 집속진은 100여 개 정도였다.

수량에 제한을 둬서라도 확실하게 효과를 보겠다는 의도였다.

"으으... 이거 진짜 아픈데."

기사들이 엄살을 부리며 마나 집속진에 들어갔다.

드래곤 하트 조각으로 만든 집속진은 기존 것과 다르게 훨씬 더 많은 마나를 제공해 주었다. 그만큼 몸에 걸리는 부하도 커진다.

고통스럽지만 더 빠르게 강해져야 한다는 목표가 있기에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끄으으으윽...."

기사들은 마나 연공을 하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몸을 터트릴 듯이 마나가 몰려왔다. 어떻게든 정신을 집중하며 그것을 다스려야 했다.

한 번 들어간 이상 지셀이 예전처럼 닦달할 필요도 없었다. 진짜 몸이 터지기 싫으면 알아서 노력해야 했다.

그래도 한 번 들어갔다 나오면 마나가 전보다는 훨씬 늘어난 것이 느껴졌다. 그런 기쁜 보상이 있으니 힘들어도 버틸 수 있는 것이다.

기사들만 그런 고통스러운 수련을 하는 게 아니었다.

쿠웅!

"후욱, 후욱...."

지셀 또한 틈만 나면 자신의 육체를 강화하기에 바빴다.

몸에 두른 통짜 강철 갑옷은 예전보다 훨씬 더 무거워졌다.

드르르륵....

몸을 연결한 쇠사슬에 달린 추도 더 무거워졌다. 이제는 인간이 들 수 있는 무게가 아니다.

하지만 그는 그 상태에서도 검을 휘두르고 움직이며 수련을 멈추지 않았다.

'더, 더 육체를 강화해야 한다.'

다크 덕분에 급속도로 늘어난 마나를 버티려면 육체는 더 강해져야 한다.

물론 아무리 단련해도 육체 자체가 인간이란 종의 한계를 넘을 수는 없다.

그렇기에 마나를 다루는 자들의 육체 수련은 일정 수준 이상부터는 조금 방식이 달라진다.

'버텨라!'

지셀이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마나를 억제한 상태이기에 한 번 휘두르기도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전혀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로 발을 내뻗었다.

쿠웅!

이렇게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넣을수록 몸의 장기와 혈관이 버티지 못하고 마나를 끌어오게 된다.

예전 지셀이 스스로를 공격하며 마나가 저절로 움직이게 한 것과 비슷한 원리다.

그렇게 육체가 마나를 쓰는 데 익숙해지면 버티는 힘도 늘어난다. 마나가 몸을 강화해 주는 셈이다.

이 고통스러운 과정과 깨달음까지 합쳐져야 인간이란 종의 한계를 넘어 초인이 되는 것이다.

심지어 지셀은 이제 드래곤처럼 자연스럽게 몸에 마나가 흐르는 상태였다. 육체를 몰아붙일수록 다른 이들보다 더 빠르게 마나가 몸을 강화해 준다.

쿠웅! 쿠웅! 쿠웅!

'조금만 더.'

근육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져도 상관없었다. 몸에 흐르는 마나와 뛰어난 재생력은 금세 몸을 회복시켜 주었다.

그리고 그 단계를 몇 번이나 반복하며 지셀의 몸은 점점 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안에서 보고 있는 다크는 혀를 내둘렀다.

'와, 이거 진짜 사람이 아니야. 그렇게 강하면서 아직도 이런 수련을 해? 진짜 독종이네, 독종이야.'

자신이라면 이 넓은 영지와 넘치는 재산을 가지고 평생 인생을 즐기면서 살 텐데 말이다.

'뭐...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

지셀이 겪은 전생의 기억을 훔쳐본 다크는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 복수심은 자신도 다 담지 못할 정도였다. 거기에 더해 지금은 소중한 것을 지키겠다는 다짐까지 생생하게 느껴졌다.

어차피 공작가와 구원교는 지셀과 맞부딪칠 수밖에 없다. 그러니 혹사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신체를 단련하는 것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래도 도망가서 살면 편할 텐데. 나 같으면 그러겠다.'

이해는 하지만 완전히 공감은 하지 못했다. 다크는 언제나 혼자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주인과 함께하는 건 제법 재밌기는 했다. 웃기는 놈들도 많이 보고 말이다.

수련을 끝내고 나서도 지셀은 잠시도 쉬지 않았다. 영지를 둘러보고 각 사업의 진행 상황을 꼼꼼하게 확인했다.

특히 요새 중점적으로 보는 건 점점 늘어나는 용병들에 관한 내용이었다.

"영입한 용병들은 요새 어떻지?"

"많이 좋아진 상태입니다. 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사기가 올라갔습니다."

클로드가 제법 자부심 넘치는 표정으로 답했다.

그는 지셀의 명령을 받아 용병들의 처우 개선에 힘썼다. 특히 넘치는 돈을 아낌없이 베풀어 다른 이들은 상상도 못 할 정책을 만들었다.

"여기저기서 우리 용병단에 가입하겠다고 난리입니다."

펜리스 용병단의 소문을 듣고 왕국의 모든 용병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다른 용병단과는 차원이 다른 대우 때문이었다.

"내가 말했던 건 다 잘되고 있지?"

지셀은 자신이 용병으로 살며 힘들었던 걸 클로드에게 말했다. 막연히 이런 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들이었다.

그리고 클로드는 그걸 훌륭하게 다듬어 정책으로 만들었다.

"그럼요, 먼저 각 지역에 용병들을 위한 병원을 짓고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호평받고 있습니다. 현재 영지의 아카데미에서 계속 의사들을 배출하고 있으니 병원도 더 늘어날 겁니다."

용병들이 살면서 가장 많이 걱정하는 것이 바로 치료비다. 사제들은 수가 적기도 하지만 치료받는 가격도 비싸서 만날 엄두도 내지 못한다.

대부분은 조악한 지식으로 스스로 치료하다가 상처가 악화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펜리스 용병단은 도로가 연결된 모든 영지에 소속 용병들이 싸게 치료받을 수 있는 시설을 세웠다.

덕분에 펜리스 용병들은 싼 가격에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예전에 만들었던 아카데미에서 계속 인재들이 양성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좋아, 아픈데 돈도 없으면 정말 서럽거든. 그다음은?"

"친왕파 영지 쪽에는 최소한의 식량과 주거 환경을 제공할 수 있게 했습니다."

도로 건설에 참여했던 인부들은 슬슬 일거리가 떨어져서 놀고 있었다. 그 인부들을 다시 새로운 건설 사업에 참여시켰다.

병원뿐만 아니라 소속 용병들이 무료로 편히 쉴 수 있는 안전한 주거 공간을 건설하는 사업이었다.

임무가 없을 때도, 이동 중에도 언제든 이용할 수 있기에 용병들은 배고픔과 피로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돈을 아끼는 건 덤이다.

"용병들 가족들도 잘 챙기고 있지?"

"그럼요, 그들에게도 거주지를 제공하고 물품 배송 신청이 들어오면 싸게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남은 가족들에게 필요한 물품이 생기면 펜리스 화살 배송을 이용해 빠르게 제공했다. 그러니 용병들과 가족들까지 전부 만족하는 것도 당연했다.

지셀도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래. 갈 곳 없고 쉴 곳 없으면 정말 비참한 법이지."

지셀도 풋내기 용병 시절, 비바람 피할 곳도 없이 노숙을 밥 먹듯이 했었다. 그래서 그 서러움과 비참함을 잘 알았다.

클로드도 그 심정을 잘 알고 있다. 그 또한 한때 도박 빚 때문에 노숙왕으로 살았으니까.

"그 외에도 각종 교육 시설을 세우고 사회 보장 제도도 시행하고 있습니다."

용병들은 주로 선배들에게 여러 지식과 기술을 배우곤 한다. 그러다 보니 배운 것이 전문적이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지셀은 원하는 기술을 확실히 배울 수 있게 용병들이 이용할 수 있는 교육 시설도 세우라 했다.

그 외에 부상이나 나이 때문에 은퇴한 용병들을 위한 사회 보장 제도도 시작했다. 펜리스 용병단 소속이었다면 영지 차원에서 최소한의 생활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제도였다.

"아직은 시행 초기라 조금 더 다듬어야 하지만, 그런 제도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용병들의 마음이 편해진 거 같습니다."

지셀이 전생에 본 선배 용병들은 대부분 끝이 좋지 않았다.

애초에 용병 일을 하면 치료비며 생활비로 나가는 비용 탓에 많은 돈을 모으기 어렵다. 더 이상 용병 일을 하기 힘들게 되어 은퇴한 자들은 얼마 남지 않은 돈으로 생활을 꾸리느라 힘겨워했다. 그마저도 사기를 당해 빈털터리가 되기 일쑤였다.

편하게 노후를 보내는 것도 유명하고 실력이 있어야 가능하지, 평범한 용병들에게는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지셀은 그런 부분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쓰라고 지시했다.

지셀은 보고서를 보고 씨익 웃었다.

"잘 되고 있군. 용병들이 정말 많이 늘어났는데?"

"지금 소속된 용병만 2만 명입니다. 용병단으로 들어온 자들은 최대한 독립성을 유지하게 해 주고 있습니다."

대륙에 전무후무한 정책을 펼치니 알아서 용병들이 몰려들었다. 오죽했으면 다른 왕국에서 이주해 오는 용병들도 있을 정도였다.

덕분에 루타니아 왕국의 서부는 난리가 났다.

남부야 원래 용병들 없이 잘 살았지만, 서부 영주들은 용병들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서부에서 활동하던 용병들이 거의 다 떠났으니 분위기가 안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동부에서는 드레이크 용병단이 활약하며 계속 새로운 용병단을 영입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강제로 흡수하는 것에 가까웠지만, 펜리스에서 제공하는 혜택이 소문난 뒤로는 오히려 용병들이 먼저들 알아서 찾아왔다.

한 마디로 왕국의 용병계는 빠르게 지셀의 손에 들어오고 있었다.

"드디어 해볼 만한 준비가 됐네."

펜리스 군은 꾸준하게 늘어나 이제 3만에 이르렀다. 넓은 영지에서 체계적으로 인구 관리를 한 덕분이었다.

3만 명이 모두 갈바니움 무장을 갖춘 것만으로도 정예군이라 할 만했다.

그중 따로 추려낸 1만의 군사는 '기동군'이라는 이름을 달고 이동식 투석기 무장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엘프들의 지도를 받아 기마술과 궁술까지 익힌 정예 중의 정예들이었다.

병사들뿐만이 아니었다. 2만에 이르는 용병들은 지금 각 지역에 퍼져 있지만 지셀의 한마디면 바로 모일 것이다.

거기에 기사들은 400명, 마법사는 이제 100명에 이른다. 마법사들은 대부분 속아서 넘어온 것에 가깝긴 하지만 어쨌든 지금은 펜리스 소속이다.

지셀이 마스터고 바네사 또한 7서클로 초인이 두 명이나 된다. 그 외에 최상급에 이르는 실력자들도 여러 명이 있다.

이 왕국에서 이제 혼자 펜리스를 상대할 수 있는 영주는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클로드도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이 정도면 정말 해볼 만하군요."

처음에 왔을 때만 해도 돈을 어떻게 벌어야 하나 걱정되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북부 최강이라 불리고, 왕국 최강의 자리까지 노리고 있다.

그 모든 과정을 함께한 클로드와 가신들로서는 뿌듯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객관적으로 보면 아직도 공작가의 전력은 펜리스보다 강하다. 하지만 친왕파와 4대 교단이 자신들과 함께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꿀리는 상황도 아니었다.

지셀이 고개를 끄덕이며 모두에게 말했다.

"공작가는 당분간 친왕파가 막아 줄 거야. 우리는 그사이에 로드리크 후작가를 없애 버린다."

"출정 준비는 끝났습니다."

병사들의 무장과 식량, 포션 등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물품은 모두 챙겼다.

길리언 또한 클로드의 뒤를 이어 말했다.

"병사들의 훈련 상태 또한 문제없습니다. 병사들뿐만 아니라 영지민들도 모두 사기가 최고조에 이른 상태입니다."

지금은 그 어떤 영지보다 풍족하게 살고 있지만, 영지민들은 다들 가난에 허덕이며 살았던 사람들이다.

이 영지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모두에게 스며들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로드리크 후작과 싸운다는 소문에도 겁을 먹지 않았다. 이 영지와 함께 죽을 각오도 했기 때문이다.

며칠이 지나자 드래곤 하트 조각을 이용한 기사들의 수련도 끝이 났다.

"후... 전보다 두 배는 강해진 거 같아."

고든의 말에 다른 기사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과정이 고통스럽긴 했지만 정말 마나가 몰라보게 늘었다. 이제 전보다 더 강한 힘을 발휘하며 오래 싸울 수 있게 되었다.

지셀은 영지 현황을 확인할 때마다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알포이의 실력이 영 만족스러운 수준까지 오르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알포이 님! 도대체 제가 없는 동안 뭘 한 거예요!"

"그, 그게... 마법사들의 감시를...."

"공부나 하고 있으라고 했잖아요!"

"쉽지 않아."

"이게 뭐가 어렵다고요!"

"알겠어, 그러면 잠깐만 쉬고...."

"어디 가요! 빨리 방으로 들어가세요!"

"...네."

펜리스 마법 연구소에서는 바네사의 호통이 하루도 빠짐없이 들려왔다. 현재 알포이는 5서클은커녕 4서클 마법 몇 개도 겨우 익힌 상태였다.

하도 공부를 안 했더니 알포이는 머리가 굳어 버렸다. 그나마 욕먹기 싫다고 주문 몇 개라도 익힌 게 다행이었다.

어쨌든 이제 당장 더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펜리스는 모두가 하나가 되어 현재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다. 알포이만 빼고.

그렇게 펜리스에서 모든 준비가 끝났을 즈음, 전령이 달려와 알렸다.

"로드리크 후작이 군대를 움직였습니다."

모두가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렇기에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소식을 들은 클로드가 지셀에게 물었다.

"용병들을 소집할까요? 지금이라도 소집령을 내리고 위치만 지정해 준다면 진군 중에 모일 수 있을 겁니다."

"아니, '고작' 로드리크 후작 정도에 열심히 일하고 있는 용병들까지 다 모을 필요는 없어. 용병들을 소집할 시기는 따로 알려 주겠다."

"수성으로 갈 생각입니까?"

"그러면 재미없지. 이번에 준비한 최정예 1만을 끌고 서부로 가겠다. 나머지는 내가 알려 준 대로 대응하고 있도록."

지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서늘한 웃음을 지었다.

"가자, 이번에야말로 서부를 확실히 점령하겠다."

마침내 1만의 펜리스 기동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394화 그냥 부숴 버리자. (1)

친왕파는 지셀이 알려 준 구원교의 은신처들을 치면서 왕국군을 차근차근 남부 인근으로 이동시키는 중이었다.

왕국 전체에 난리가 났음에도 공작가는 아직 어떠한 성명도 발표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었다.

어차피 4대 교단에 사교로 찍힌 이상 결국 힘으로 무마하려 할 것이다. 그래서 전쟁에 대비하여 왕국군을 움직인 것이다.

그러던 와중 로드리크 후작의 진군 소식을 듣고 다들 깜짝 놀랐다.

"10만? 진짜 10만이나 된다고?"

왕실에서 회의하던 중 소식을 들은 모리스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소식을 들고 온 전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남은 봉신들의 병력까지 총동원령을 내려 전부 끌어모았다고 합니다. 현재 6만은 펜리스로 진군하고 4만은 수도 인근으로 이동 중이라고 합니다. 공작가와의 싸움에 도움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허, 그놈 하나 잡겠다고 서부의 전 병력이 움직였다는 거야?"

얼마 전 전투에서 2만이나 되는 병력이 와해됐다고 들었는데 단숨에 10만을 모아 오다니.

과연 서부 최강의 대귀족이라 할 만했다.

모리스가 턱수염을 긁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크흠.... 공작가와의 싸움에 도움을 주는 건 좋은데, 오리 새끼는 그럼 어쩌지?"

모리스의 물음에 브랜포드 후작이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일단은 내버려두시오. 두 사람의 싸움이니까."

"아니! 어떻게 그렇게 얘기해! 그놈이 6만을 어떻게 막아! 펜리스 병력이 1만인가? 2만인가? 아무튼 그거밖에 안 되는데! 우리 그런 사이 아니잖아!"

"...."

모리스의 외침에 다른 귀족들이 모두 어이가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항상 펜리스 백작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더니 사람이 확 변했다.

"왜! 뭐가! 그놈은 나한테 조카 같은 존재라고!"

"...."

얼마 전 펜리스에서 보낸 2차 지원품도 왕국군에 지급되었다. 왕국군 총사령관인 모리스는 좋아서 입이 찢어질 정도였다.

"그놈을 그냥 넘길 수는 없잖아! 다시 중재라도 해 봐야 하는 거 아냐? 공작가와의 싸움을 앞에 두고 당장 같은 편끼리 싸우면 어쩌자는 거야!"

로드리크 후작은 친왕파의 중재에도 단호하게 거절했다. 내전이 끝난 뒤 결판을 내라고 해도 고집을 부렸다.

어쨌든 명분은 로드리크 후작에게 있었기 때문에 친왕파도 그 이상 만류하진 못했다.

모리스가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브랜포드 후작에게 말했다.

"그 새끼 그거, 4대 교단까지 껴서 우리가 이길 거 같으니까 우리 힘을 줄이려고 하는 거라고."

"알고 있소."

"그런데 내버려두겠다고?"

로드리크 후작은 이전부터 왕실에 위협이 되는 존재였다. 당장은 공작가와의 싸움 때문에 받아 줄 수밖에 없지만, 전쟁이 끝나면 골치 아픈 존재가 될 게 뻔했다.

특히 자원이 넘치는 펜리스까지 그가 차지하면 새로운 공작가가 탄생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브랜포드 후작은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펜리스 백작을 믿어 보시오. 쉽게 당하지는 않을 테니. 언제나 그렇지 않았소?"

"아니, 그건 그렇지만.... 이번에는 너무 차이가 큰데."

"언제나 그걸 극복해 냈소이다."

"크흠...."

모리스는 할 말이 없었다. 운이든 뭐든 어쨌든 지셀은 항상 승리해 왔기 때문이다.

"에잉, 모르겠다. 일단은 진행 상황을 보고 다시 고민해 보자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모리스와 다른 귀족들은 걱정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다고 지금 상황에서 힘으로 로드리크 후작을 억제할 수도 없었다.

로드리크 후작이 공작가와 결별한 것만으로도 큰 소득이기 때문이다. 저 10만의 병력이 공작가와 함께 수도로 진군했다면 정말 지옥이 펼쳐졌으리라.

결국 펜리스와 로드리크가 알아서 결판을 낼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걱정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질 만큼, 펜리스로 진군하는 로드리크군의 분위기는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비대한 체구만큼이나 거대한 말에 올라탄 로드리크 후작이 비열한 웃음을 지었다.

"드디어 그 애송이 새끼를 잡아 죽이는구나."

지셀이 마스터라는 건 이제 모두가 알고 있다. 그래도 로드리크 후작은 걱정하지 않았다.

마스터 혼자서 이 전쟁을 감당하기에는 이쪽의 병력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진군 속도를 더 올려라! 어서 빨리 그놈이 절망하는 표정을 보고 싶구나!"

로드리크 후작의 말에 병사들이 속도를 높였다. 북부까지는 거리가 꽤 멀기에 빠르게 움직이면 피로가 많이 쌓일 테지만 로드리크 후작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압도적인 병력으로 밀어버리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로드리크군이 펜리스 영지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몇몇 영주들의 영지를 통과해야 했다. 친왕파 영주 중 한 명인 알반스 백작의 영지도 그중 하나였다.

보통 영주들은 다른 이에게 순순히 영지를 지나가라고 길을 내어주지 않는다. 그 군대가 마음을 바꿔 자신을 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존심과 명예도 걸린 일이었다.

그렇기에 알반스 백작도 일반적인 영주들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뭐? 갑자기 나타나서 북부로 가게 길을 열어 달라고? 누구 마음대로 길을 열어 달라는 거야!"

알반스 백작은 대영주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제법 힘이 있는 영주다.

거기에 친왕파까지 등에 업고 있으니, 아무리 서부 최강의 귀족이라 해도 쉽게 길을 열어 줄 생각은 없었다.

지셀을 위해서가 아니라, 괜히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다른 영지로 돌아가라고 해라! 아니면 적절한 명분과 보상을 가지고 오던가."

공작가와의 싸움을 준비하고 있기에 자신도 충분히 병력을 모으고 훈련을 한 상태다.

물론 싸우면 지겠지만 로드리크 후작도 지금은 친왕파에 합류한 상태다. 섣불리 싸움을 걸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알반스 백작이 버티고 있는데 곧 전령이 다시 와서 외쳤다.

"로드리크 후작이 그냥 영지 내로 들어왔습니다! 이대로 지나갈 테니 방해하지 말라고 전해 왔습니다."

"누구 멋대로 영지로 들어왔다는 말이냐!"

알반스 백작이 분노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이쪽을 공격하지 않는다 해도, 허락도 없이 영지를 침범하는 건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였다.

이런 걸 그냥 두고 보면 다른 귀족들한테도 무시와 조롱을 당한다. 어떻게든 물러나게 해야 했다.

"당장 내 갑옷을 가져오고 병력을 모아라! 힘으로라도 막아서겠다! 후작의 병력은 얼마나 되느냐!"

"그, 그게...."

"어서 말하지 못할까!"

"10만입니다!"

"...1만?"

"10만입니다! 10만!"

"...."

전령의 말에 잠시 가만히 있던 알반스 백작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천장을 바라보며 몇 번 한숨을 내쉰 그가 조용히 말했다.

"가장 빠른 길로 안내해 드려라. 가시는 길에 불편함이 없게 정중하게 모시도록...."

"...알겠습니다."

이건 자존심을 세울 일이 아니었다. 다른 귀족들도 이해할 것이다.

로드리크 후작의 진군 길에 있던 영지는 그들을 막아설 생각도 하지 못하고 다들 숨만 죽였다.

알반스 백작처럼 거부하는 귀족도 있었지만 로드리크 후작은 무시하고 그냥 지나갔다.

친왕파 영주든 공작파 영주든 중립 영주든 그 누구도 앞에 나서서 막지 못했다.

로드리크 후작은 영지들을 지나가며 몇 번이나 웃었다.

"한심한 놈들이 감히 누구 앞을 막겠다는 거냐."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상황이다. 자신의 힘을 다시 한번 피부로 느꼈다.

정말 공작가만 거꾸러뜨리면 자신을 막을 자는 이 왕국에 없으리라.

"이쯤에서 병력을 나누는 게 낫겠군. 테넌트, 뒤따라오는 2군단은 이제 수도 인근으로 이동하라고 해라."

"알겠습니다."

현재 로드리크군은 후작이 이끄는 6만의 1군단이 앞에서 움직이고 4만의 2군단이 천천히 뒤를 따르고 있었다.

아직 왕실로부터 수도 인근에 주둔하도록 허락받지 못했지만, 어차피 힘을 합해야 하니 지금쯤 움직이면 될 것이라 판단했다.

2군단에 새로운 명령을 전달하는 사이 로드리크 후작이 북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곧 펜리스에 도착하겠군."

병력이 워낙 많아 진군 속도가 느리니 답답했다. 어서 빨리 가서 펜리스를 짓밟고 싶었다.

그래도 날씨가 참 좋았다. 날씨만큼 로드리크 후작의 기분도 좋아졌다.

그렇게 흐뭇한 기분을 느끼고 있을 때, 전령이 허겁지겁 다가왔다.

무척 지저분한 꼴을 보아하니 쉬지도 못하고 달려온 모양이었다.

로드리크 후작이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냐? 어디서 온 것이냐?"

"페, 펜리스 백작이...."

"그놈이 왜? 항복이라도 한다고 했느냐? 받아 줄 생각이 없는데?"

"그, 그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면 무슨 일이란 말이냐?"

전령이 크게 심호흡을 하며 외쳤다.

"펜리스 백작이 기마병 1만을 이끌고 서부를 침략했습니다!"

"뭐?"

로드리크 후작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지금 자신이 침공하는 걸 알고 있을 텐데 서부를 침략하고 있다니?

그러면 펜리스를 비워 놓고 갔다는 말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후작의 곁에 있던 테넌트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제대로 설명해 보아라! 펜리스 백작이 왜 서부에 나타났다는 말이냐!"

"말 그대로입니다! 현재 펜리스 백작이 서부를 공격했습니다! 앞을 막던 봉신 영주들이 전부 잡혀 죽었습니다! 요새도 하나둘씩 뚫리고 있습니다! 진군 방향은 로드리크 후작령입니다!"

그 말에 모두의 표정이 굳어졌다. 현재 봉신 영주들의 영지에는 병력이 거의 없었다. 모두 로드리크 후작에게 차출당했기 때문이다.

각지의 요새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전부 토벌하지 못한 도적들 때문에 최소한의 병력은 남겨 두었지만 그뿐이었다.

펜리스군은 성벽을 타고 넘는데 도가 튼 놈들이다. 소수의 병력으로는 절대 1만의 군대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지금 상황이라면 마스터인 펜리스 백작이 그냥 혼자 뛰어 들어가도 된다.

테넌트가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후작님! 일부를 돌려서 막아야 합니다!"

다른 곳은 다 점령당하고 짓밟혀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펜리스를 점령하면 지셀도 다 뱉어 내야 할 테니까.

애초에 고작 1만으로 그 넓은 서부를 제대로 지킬 수도 없다.

하지만 다른 문제가 있다.

"후작령이 점령당하면 보급이 끊기게 됩니다!"

로드리크와 펜리스 사이에 거리가 있는 만큼 보급선도 무척이나 길다. 만약 보급선이 무너지면 10만 대군은 결국 굶고 말 것이다.

정신을 차린 로드리크 후작이 열을 내며 외쳤다.

"그러면 일부가 아니라 당장 전군을 돌려라! 펜리스 백작만 먼저 잡으면 끝나는 게 아니냐!"

그러자 테넌트가 반대하고 나섰다.

"그건 안 됩니다. 이건 펜리스 백작의 계략입니다."

"뭐라?"

"펜리스 백작이 만약 결전을 피하고 도망쳐 다니면 우리로선 잡을 수 없을 겁니다. 그쪽은 전원 기마병입니다."

"으음... 설마 그놈의 생각이...."

"맞습니다. 여기서 쫓으면 우리가 계속 끌려다닐 겁니다. 지금 그는 보급선을 인질로 붙잡고 우리를 철군시키려는 겁니다. 서부가 비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 미친놈이 제 영지까지 버리고 나올 줄이야...."

"그게 아니면 방법이 없을 테니까요. 이 대군을 수성으로 막을 수는 없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아마 계속 보급선을 끊으려고 하겠죠."

로드리크 후작이 이를 갈았다.

"전쟁을 좀 한다는 소문이 있더니 제법 머리를 굴리는구나."

"하지만 펜리스 백작을 잡고 펜리스도 점령할 방법이 있습니다."

"어떻게 말이냐?"

"수도로 갈 2군단을 후작령으로 보내 펜리스 백작의 뒤를 치고 보급선을 지키게 하십시오. 그리고 1군단이 펜리스를 점령하면 됩니다."

"그 전에 내 성이 점령당하면?"

"아니요. 절대 쉽게 점령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째서? 그는 마스터지 않은가?"

"펜리스군은 1만이 전부 기마병입니다. 그러니 벌써 서부까지 갈 수 있었던 겁니다."

"오호, 그렇다는 건...."

로드리크 후작이 무언가를 알겠다는 듯 무릎을 쳤다.

테넌트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들은 공성 병기가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결국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보급선을 끊는 것뿐입니다."

마스터는 홀로 수천의 병사를 상대할 수 있다고 한다.

만약 주둔 병력이 적은 작은 성이나 요새라면 혼자 뛰어들어도 점령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마스터가 강해도 규모가 큰 성과 요새는 홀로 점령하기 불가능했다.

그리고 그런 성이 서부에도 하나 있다. 바로 로드리크 성 '린더스타인'.

그곳은 절대로, 공성 병기도 없이 점령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395화 그냥 부숴 버리자.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