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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5-385

375화 없으니까 이제 만들어야지. (2)

펜리스의 생산 시설은 지셀이 델무드와 싸우러 가기 전 이미 상당 부분 완공된 상태였다.

특히 포션 조제 시설과 마법 연구소는 자리를 잡은 지 오래되어서 특별히 새로 설계할 만한 시설은 없었다.

이후로는 계속 기존 생산 시설들의 수를 늘리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라 드워프들의 일은 전보다 상당히 줄어들었다.

공사 감독 및 지휘 업무로 돌아온 갈바릭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야, 이렇게 보니 참 뿌듯해."

펜리스 영지는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 도시 하나하나마다 철저한 계획하에 배치된 건물들이 잔뜩 들어섰다.

이 장엄한 영지를 만드는 데는 역시 드워프들의 공이 제일 크다고 할 수 있었다.

아련한 눈빛으로 영지를 둘러본 갈바릭이 말했다.

"이제 좀 쉴 수 있겠구나."

다른 드워프들도 눈물을 글썽였다.

"그간 참 고생 많이 했지."

"그래, 이제는 좀 쉬엄쉬엄 일하자고."

"영주도 더 만들 게 없는 거 같더라."

대장장이의 수도 많이 늘어났다. 인부들은 말할 것도 없다.

생산량이 어마어마하니 병사들의 무장 공급은 이제 걱정할 게 없었다. 각종 도구나 생필품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포션 제조야 마법사들만 고생하면 되는 일이고.

드워프들은 이제 다른 이들을 이끌며 지금의 생산량만 잘 유지하면 된다.

갈바릭과 드워프들은 예전처럼 공방에 모여 쑥덕거렸다.

"이제 진짜 이 정도의 일을 유지해야 해. 아무리 생각해도 더 이상 만들 건 없어."

"그래야지. 시간이 지나면 여기서 일이 더 줄어들 거야. 그래도 티를 내면 안 돼."

"여전히 엄청 바쁜 척하자고."

드워프들은 그렇게 야무진 꿈을 꾸며 회의를 이어갔다. 언제나 적당한 엄살과 함께하는 업무 조절이 필요하다.

그래도 전처럼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식량, 장비, 도구 등 영지에 필요한 물건은 다 만들었다.

여전히 바쁘게 돌아가고는 있지만 그건 새로운 물건을 개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꾸준하게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뿐이었다.

갈바릭이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이렇게만 하면 몇 달 뒤에는 여유 시간이 많이 남을 거야! 최대한 영주가 늦게 알아채게 하자고!"

"그래야지! 부려 먹어도 너무 부려 먹잖아? 결국 일을 조율하는 사람은 현장에 있는 우리라고! 으하하하하!"

"영주는 어차피 생산량 보고만 받잖아? 그것만 대충 맞추면 된다고!"

그 언젠가 비슷한 대화를 했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도 갈바릭과 드워프들은 크게 웃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드워프들이 웃음을 뚝 멈췄다.

갈바릭은 그런 그들을 보며 물었다.

"왜? 갑자기 표정들이 왜 그래? 못 볼 걸 본 사람들처럼."

되물어도 드워프들은 말이 없었다.

사람은 학습하는 동물이다. 갈바릭은 심호흡을 크게 했다. 동시에 누군가가 불쑥 그의 옆에 다가와 속삭였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자고, 친구."

"...그냥 죽여 줘."

"피오테가 살려 줄 거야."

갈바릭과 드워프들은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래, 이번에는 무엇이오?"

"공성 병기."

"뭐?"

갈바릭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 물었다.

"우리 공성 병기는 충분하지 않소? 영지 몇 개에서 털어 왔는데?"

카발디 백작령은 물론이거니와 데스몬드 백작령에 있던 공성 병기도 전부 지셀의 소유가 됐다.

이 정도만 해도 공성 병기 보유량은 북부 제일이라 할 수 있다. 다른 대영주가 아니라면 갖출 엄두도 못 낼 수량이었다.

솔직히 지금도 각 요새와 성들에 충분한 수량이 배치되어 있었다. 많아서 나쁠 건 없지만 효용성이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지셀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무겁고 이동도 힘들고 조립도 힘들잖아. 그냥 방어용으로만 쓸 거야."

"그... 공성 병기는 원래 공격용인데? 결국 분해하고 이동하고 조립하는 건 당연한 일이오."

"그러니까 우리는 새로운 개념으로 접근해야지."

"혹시나 엄청나게 크고 강력한 걸 만들 생각이오? 그러면 정말 이동하고 조립하는 게 더 힘들 텐데."

"아니야. 내가 원하는 건 기존의 투석기에 있는 단점을 최대한 없앤 물건이야. 최대한 기동성을 살리고 싶거든."

투석기는 무겁다. 가볍게 만들면 사거리와 파괴력이 필요한 만큼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거대한 돌을 지탱하고 던질 수 있으려면 그만큼 크고 단단해야 했다.

그렇기에 빠르게 옮기기가 힘들고, 여러 대의 수레에 싣고 다니며 분해하고 조립하기를 반복해야 한다.

현지에서 나무를 베어 만들 수는 있지만 그러면 조잡하고 위력이 약한 물건밖에 만들 수 없었다.

작은 성은 몰라도 단단한 요새나 큰 성에는 거의 효과가 없을 것이다.

그걸 잘 아는 드워프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수레에 장착해서 끌고 다니는 중소형 투석기를 원하는 것이오?"

이동식 투석기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은 공성에 쓸 만한 파괴력을 내지 못한다.

야전에서 쓰려고 해도 궁수들이 활을 쏘는 것보다 효과가 떨어져 사장된 지 오래였다.

지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기존 투석기의 파괴력과 사거리를 유지하면서 무게는 절반 이하로 가볍고 분해와 조립은 간단한, 그런 투석기가 필요해. 그래야 빠르게 이동할 수 있잖아?"

"으하하하, 그런 투석기가 필요하구나. 말도 안 되는 투석기가 필요하구나!"

드워프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이 영주가 농담하는 것 참 오랜만에 들어 봤다.

그런데 지셀은 말이 없었다. 드워프들이 그를 흘깃 살폈다. 표정이 무척 진지한 게, 농담이 아닌 것 같았다.

"...진짜로? 그런 투석기?"

"응, 그런 투석기."

"말도 안 되오! 세상에 그런 투석기가 어디 있소? 그런 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소이다."

"없으니까 이제 만들어야지."

갈바릭이 다시 발끈하려고 할 때, 옆에 있던 다른 드워프가 말했다.

"우리 영지에 룬스톤이 많잖아? 영구적인 마법진은 불가능하다 해도 룬스톤을 이용해서 경량화 마법을 걸면 될 거 같은데."

영구적인 마법진을 새기려면 8서클 이상의 대마법사가 필요하다. 반영구적인 수준에서 만족한다 해도 최소 7서클은 되어야 한다.

그러니 지금 펜리스 영지에서 쓸 수 있는 방법은 룬스톤을 이용하는 것뿐이었다.

"으음, 그러면 모든 프레임마다 룬스톤을 박아야 하는데... 돈이 어마어마하게 들잖아?"

"그래도 그렇게 하면 가능은 할 거야."

드워프들이 나름대로 해답을 내놓았지만 지셀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투석기 하나에 성 하나 세울 값을 쓸 셈이야? 그건 기술이 아니라 돈지랄이지. 대량 생산도 할 수 없고."

"그러면 방법이 없소이다. 가벼울수록 지지대가 힘을 버티지 못하오."

투석기를 이루는 가장 큰 재료가 목재다. 당연히 목재 자체의 무게를 배제할 수는 없었다.

문제는, 나무라는 재료의 단단함은 무게에 비례한다는 것이었다.

"흑단목을 재료로 쓴다면 가능하겠지만...."

흑단목은 자연의 정기를 먹고 자란 검은 나무로, 다른 목재보다 훨씬 가볍고 단단하다.

하지만 흑단목을 쓰는 건 더 말이 안 된다. 그러면 룬스톤을 쓸 때보다 가격이 더 들 것이다.

애초에 그만한 양을 구하기도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지셀은 손바닥을 짝 마주치면서 말했다.

"우리한테 비슷한 재료가 있잖아?"

"어?"

"갈바니움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드워프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갈바니움이라면 목재 대용으로 쓸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흑단목보다는 무겁다.

"갈바니움이 단단하고 가볍다고는 하지만 강철과 비교해서 그렇다는 거요. 결국 공성 병기에 들어갈 크기로 만든다면 상당히 무거워질 것이오. 목재를 쓰는 것과 별다른 것도 없고 수레로 그 모든 부품을 옮겨야 하니 큰 차이가 없을 텐데?"

"그러니까 새로운 개념으로 접근하자는 거지. 내가 기반을 잡아 줄 테니까 제대로 보강해 봐. 막상 알면 쉬운 거야."

지셀은 갈바니움을 이용한 투석기에 관해 제법 잘 알고 있었다. 전생에 수도 없이 분해하고 조립해 봤기 때문이다.

밥만 먹고 전쟁만 했으니 대륙에 존재하는 웬만한 투석기는 거의 다 써 봤다고 할 수 있었다.

"금방 그려 줄게. 정말 쉬운 거야."

지셀은 드워프들에게 보여 줄 설계도를 바로 그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완성된 투석기 그림은 무척이나 기괴한 모양이었다.

전생에 사람들은 이 투석기를 농담조로 '뼈다귀 투석기'라고 부르곤 했다.

두꺼운 목재 대신 얇은 갈바니움 프레임만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철과도 같은 강도 덕분에 목재보다 더 단단하게 버틸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것의 가장 무서운 점은 바로 어마어마한 기동성이었다.

"자, 봐 봐. 이 골조 하나하나가 다 창대라고 생각해. 갈바니움으로 만든 창대 끝에 홈을 만들고 창날을 달 수 있는 거지."

아주 긴 창대 끝에 창날을 돌려 끼우는 결합 구조가 있다.

창날을 빼면 다른 프레임과 연결하는 구조물을 장착할 수 있다.

그렇게 창대를 서로 연결해 골조로만 이루어진 투석기를 만드는 것이다.

"오...."

드워프들은 지셀이 그려 준 설계도를 신기해하며 뜯어보았다.

말이 안 되는 거 같은데 설명까지 들으니 말이 된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얼개는 대략 그려져 있다. 조금만 손보면 충분히 실현할 만했다.

돌을 얹을 자리도 창대를 여러 개 연결해 사각형으로 만들면 충분하다.

지셀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때? 이러면 병사들이 모여 작은 투석기를 만들 수 있고,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크게 만들 수 있지. 계속 연결만 하면 되니까. 돌과 무게추로 쓸 건 현지에서 조달하면 그만이고."

설명을 다 듣고 이해한 드워프들은 소름이 돋았다.

이러면 따로 부품을 실어 나를 필요가 없어진다.

병사들이 창을 들고 싸우다가 서로 모여서 조립을 하면 투석기가 만들어진다.

각 창대를 연결하는 구조물은 각자 가지고 있으면 되고, 필요한 줄 또한 허리띠로 사용하다가 풀어서 쓰면 된다.

이건 정말 전쟁의 양상을 완전히 바꿀 수 있는 신형 병기였다.

"어, 어떻게 이런 발상을...."

전쟁에서 기동성이 중요하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공성 병기와 기동성이 양립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모든 군대는 각자의 역할에 맡는 부대를 여러 개 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게 만들어진다면....'

이미 펜리스는 휴대가 편한 전투 식량을 개발한 상태다. 보급에 한해서는 작전 반경이 말도 못 할 정도로 넓어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조립식 투석기까지 완성되면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공성까지 치를 수 있다. 누구도 이런 속도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기존의 제약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가 있어!'

갈바릭은 설계도를 보며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미 재료가 있는 이상 만드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대단한 발상이었다. 이게 완성되면 전략 전술의 혁신이 일어날 것이다.

"이, 이것도 영주가 생각해 낸 것이오?"

지셀이 고개를 살짝 돌리며 중얼거렸다.

"전설의 대장장이가...."

"아아! 도대체 하늘은 왜 나 갈바릭을 낳고 또 그자를 낳았단 말인가!"

갈바릭이 울부짖었다. 그는 여전히 자기 자신과 싸우며 진한 패배감을 느끼고 있었다.

지셀은 갈바릭의 절규를 무시하며 말했다.

"아무튼. 내가 그림을 조금 못 그려서 그런데 어떤 방식인지는 알겠지?"

"얼마든지 가능하오. 갈바니움이 있으니 이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하거든. 최대한 하중을 견디고 조립이 쉽게 구조를 보완해 보겠소."

새로운 지식과 새로운 기술은 언제나 드워프들을 흥분시킨다.

거기에 오직 자신들만이 효과적으로 만들 수 있는 물건이라면 더욱더 좋다. 일하긴 싫지만 본성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다만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빨리 만들려면 영지의 대장장이들과 생산된 갈바니움을 모두 이쪽으로 돌려야 하오. 병사들이 쓸 창대를 새로 만들어야 하니까. 그런데 그간 만들었던 게 너무 아깝지 않소?"

"괜찮아. 어차피 일반적인 창도 많이 필요하거든. 예비용도 필요하고, 남는 건 영지민들과 친왕파에 지원해 줄 생각이야."

"끄응, 알겠소. 일단 영지의 주 생산 품목은 이걸로 진행하겠소."

"좋아. 언제나 빠르고 확실하게. 알지?"

"알았다고...."

그렇게 해서 드워프들과 영지의 대장장이들은 모두 새로운 구조의 투석기 제작에 들어갔다.

그리고 지셀이 로드리크 후작령과 한바탕하고 온 뒤에야 시제품들의 완성이 됐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지셀은 드워프들이 미리 만들어 놓은 시제품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잘 나온 거 같네. 이제 조립 훈련을 할 병사를 뽑지."

천 명의 병사가 뽑혀 새로운 창대와 결합용 부품을 받았다. 그들은 며칠에 걸쳐 갈바니움 투석기의 조립 방법을 연습했다.

그리고 다가온 시연회 날.

그간 차지했던 영토 중에 버려진 작은 요새가 하나 있었다. 지셀과 측근들은 신형 병기의 위력을 보기 위해 요새 근처로 모였다.

두두두두두!

시간이 되자 천 명의 병사들이 말을 타고 나타났다.

펜리스의 병사들은 어느 때고 병종을 바꿀 수 있게 되었다. 말 타는 건 이제 기본 교양이었다.

클로드가 그들을 보고는 손을 흔들며 외쳤다.

"시작하라!"

그러자 병사들이 200명씩 짝을 지어 창대를 연결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5대의 중형 투석기가 완성되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나도 속도가 빨랐기 때문이다.

"오오오! 대단합니다!"

"저런 속도라니!"

"이건 전쟁사에 혁명을 불러일으킬 병기입니다!"

사람들의 호들갑에 갈바릭은 역시 자신이 세계 최고의 대장장이라며 자랑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위력만 확인하면 된다. 병사들이 준비된 돌을 올리고 쏘려고 할 때, 지셀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투석기 한 대가... 삐거덕거리고 있었다.

376화 없으니까 이제 만들어야지. (3)

"저거 왜 저래?"

지셀의 말에 사람들도 한쪽으로 기울어진 투석기를 바라보았다.

저런 상태면 곤란하다. 원하는 곳에 제대로 맞추지 못할 것이다.

갈바릭과 드워프들도 식은땀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왜, 왜 저럴까?"

자신들의 설계는 완벽했다. 불량품이 나왔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클로드는 드워프들을 한번 쓱 둘러보더니 싱긋 웃으며 외쳤다.

"그냥 쏴라!"

파앙! 파앙! 파앙! 파앙!

4대의 투석기에서 쏘아져 나간 돌은 정확하게 요새의 벽에 적중했다. 하지만 불량품에서 나간 돌은 달랐다.

피익!

한쪽으로 기울어진 투석기에서 쏜 돌은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다. 포물선도 제대로 그리지 못하고 그냥 지면을 향해 곤두박질치는 듯한 모습이었다.

텅! 터엉! 텅!

돌은 그대로 지면을 몇 번 튕기고 굴러가다가 멈췄다. 기울어져서 각을 제대로 못 맞추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딴 투석기는 줘도 안 가질 것이다.

"...."

사람들은 침묵했다. 몇 개가 제대로 만들어졌다 해도 성공이 아니었다.

기동성을 살리기 위해 갈바니움 창대로 만드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런 식이면 뭐가 불량인지도 모르고 움직이게 된다.

중요할 때 불량이 생기면 작전에 크게 지장이 생길 것이다.

사람들의 차가운 눈길을 느낀 갈바릭이 외쳤다.

"자, 잠깐만! 이유가 있을 거야! 기, 기다려!"

갈바릭과 드워프들이 불량 투석기에 몰려갔다. 뭐가 문제인지 살펴보려는데 긴장이 돼서 집중이 잘 안 됐다.

그 모습을 본 클로드가 옆에 있는 웬디에게 말했다.

"생각해 보니까 드워프들이 만들 때 뭐 하나 제대로 만든 적이 없는 거 같아. 열기구도 그렇고 닭장도 그렇고. 안 그래? 너무 거품 잔뜩 낀 거 아냐? 아, 왜 밀어!"

웬디가 입 좀 닥치라는 표정으로 클로드를 옆으로 치워 버렸다.

하지만 갈바릭과 드워프들은 이미 클로드의 깐족거림을 들었다. 눈에서 자꾸 땀이 흐르는 거 같았다.

긴장이 되니 문제점도 바로 찾지 못했다. 딱히 어디가 부러지거나 깨진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당황하고 있을 때 지셀이 슬쩍 다가와서 말했다.

"결합부의 크기나 창대의 길이가 달라서 그럴 거야. 다시 한번 확인해 봐."

"헛!"

갈바릭이 살펴보니 정말 미묘하게 다른 거 같았다. 그 차이 때문에 투석기가 한쪽으로 기운 것이다.

사실 목재로 만든 투박한 투석기를 쓸 때는 이런 일이 거의 없다. 규격만 적당히 맞추면 두꺼운 목재가 지지해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대의 얇은 프레임만으로 구조를 만드니 미묘한 차이에도 이런 불량이 발생하고 말았다.

"끄응.... 영주는 어떻게 한 번에 보고 알았소?"

"그야... 기울어졌으니 그럴 거 같아서."

지셀은 대충 둘러댔다. 사실 전생에서 겪어 본 일이었다.

서로 다른 지역에서 만든 갈바니움 창대를 결합할 때 규격이 조금씩 달라 몇 번 문제가 생겼었기 때문이다.

갈바릭도 왜 이런 문제가 생겼는지 깨달았다.

"으... 각 대장간에서 쓰는 틀을 다시 확인해야겠군."

규격을 정해 곳곳의 대장간에 알려 줬지만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다. 그러니 차이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지셀이 갈바릭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제발 좀 정확하고 빠르게 하자. 응?"

"...알겠소."

뭔가 빡치지만 결과물이 제대로 안 나왔으니 할 말도 없었다. 갈바릭과 드워프들은 당분간 잠을 줄여야겠다고 결심했다.

모든 대장간에 들어갈 틀을 점검하고 문제가 되는 부분은 자신들이 직접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셀은 피식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비록 불량품이 나왔지만, 어차피 이런 시행착오를 겪을 것은 각오했다.

'일단 중형급은 괜찮네.'

200명이 모여 만든 중형 투석기는 사거리도, 위력도 충분히 보여 줬다.

하지만 중형 다섯 대가 모이는 대형 투석기도 조만간 확인을 해야 한다. 대형 투석기야말로 단단한 성과 요새를 박살 낼 수 있는 비장의 병기였으니까.

조금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다들 뒷정리를 하고 하나둘씩 자리를 떠났다.

클로드는 이번에도 자리를 떠나며 웬디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눴다.

"봐 봐, 내 말이 맞다니까? 드워프 거품 맞다니까! 뭐 하나 한 번에 성공한 적이 없어요. 그냥 종족별로 자기 잘났다고 포장을 하느라.... 아, 밀지 말라고! 천천히 걷자고! 나 다리 아프다고!"

웬디는 클로드를 억지로 떠밀면서 자리를 떠났다. 완장을 찬 알포이도 지나가면서 슬쩍 한마디를 던졌다.

"뭐 어렵다고 그런 것도 제대로 못 만들어. 너무 나태해진 거 아냐? 공부를 안 해서 그래, 공부를. 쯧쯧쯧."

드워프들은 들으면서도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이상하게 이 동네에 와서 새로운 걸 만들 때마다 한두 번씩은 꼭 실패했기 때문이다.

"아으으으... 저 클포이 새끼들이 제일 얄미워."

억울한 면도 있었다. 대형 부화기는 마법사들이 계속 실험을 하느라 다시 만든 거다.

그런데 클로드는 돈이 나갔으니 아무튼 실패라고 우겼다. 알포이는 옆에서 뻔뻔하게 거들었고.

"빨리 가자. 저 새끼들 얄미워서라도 어떻게든 제대로 만든다."

갈바릭의 말에 드워프들이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든 이번에는 제대로 만들어서 깜짝 놀라게 할 생각이었다. 드워프들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우울한 드워프들을 뒤로한 지셀이 뒤따라오는 클로드에게 물었다.

"준비는 다 됐나?"

"그럼요, 바로 보낼 수 있습니다. 바로 확인하시죠."

클로드는 지셀을 넓은 공터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식량과 병장기들이 쌓여 있었다.

"이게 1차로 보낼 수량입니다. 현재 3차까지 계획 중입니다."

"브랜포드 후작이 깜짝 놀라겠어."

"그렇죠, 영주님 같은 짠돌이가 이런 선물을 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을... 아야얏!"

한 대 얻어맞은 클로드가 바로 웬디의 뒤로 숨었다.

이 물건들은 친왕파에 보낼 지원품들이었다. 넘치는 자원을 바탕으로 지셀은 이제 친왕파 귀족들을 밀어줄 생각이었다.

특히 갈바니움제 갑옷과 무기들은 친왕파 기사들의 전력을 더 올려 줄 것이다.

"이 정도면 단번에 밀리지는 않겠군."

공작가의 주력을 상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다른 공작파 귀족과 싸우는 데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클로드가 부은 눈을 비비며 말했다.

"이 정도면 친왕파가 공작가의 발목을 꽤 오래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지셀이 웃으며 답했다.

"그래. 그래야 내가 로드리크 후작을 완전히 박살 낼 수 있지."

서부의 요충지를 점령하고 적들이 들어오는 길목을 끊는다. 그렇게 된다면 친왕파와 공작가의 싸움은 남부와 동부에 집중될 것이다.

그리고 지셀은 그 틈을 이용할 계획이었다.

* * *

공작가의 라울은 연달아 올라오는 보고에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중 가장 충격적인 건 펜리스 백작의 진정한 실력이었다.

"그놈이... 정말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고 델무드를 죽였다고?"

몇 번이나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발자크 백작이 연회 때 그를 보고 내렸던 평가를 떠올렸다.

― 움직임과 호흡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아. 그런데 그냥 보면 또 그렇게 강해 보이지 않으니....

적어도 당시엔 펜리스 백작이 마스터가 아니었던 건 확실했다. 발자크 백작의 눈이 틀렸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는 건 고작 몇 년 만에 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정도로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났다는 뜻이었다.

"우리가 실수를 했구나...."

데스몬드 백작도 델무드도 느꼈던 후회를 라울도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 북부고 뭐고 펜리스의 그 애송이부터 죽였어야 했다.

이제는 후회해도 늦었다. 펜리스 백작은 누구도 건들기 힘든 거물이 됐다.

"그놈이 진홍의 마탑을 멸망시키다니...."

오랜 시간 수많은 재화를 투자해 7서클 마법사를 만들어 냈다. 내전에도, 이후의 일에도 강력한 전력이 됐을 카드를 허무하게 잃었다.

데스몬드 백작도 잃고 델무드도 잃었다. 이제 북부에 남은 건 아멜리아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이쪽도 문제가 생겼다.

"대리인과... 연락이 끊겨?"

라울의 말에 참모진 중 한 명이 대답했다.

"네, 북부에 진입한 것까지는 확실한데 행방이 묘연해졌습니다."

"갑자기 행방이 사라졌다는 건 죽었다는 뜻이군."

상당히 뛰어난 기사들과 병력을 붙여서 보냈음에도 죽었다는 건 그 이상의 병력이 왔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럴 힘이 있는 영지는 북부에서 펜리스와 레이폴드밖에 없다.

하지만 레이폴드는 공식적으로 중립이다. 데스몬드 백작 때와 마찬가지로 공작파에 합류했다는 걸 사람들은 모른다.

그러니 펜리스 백작이 그걸 알고 대리인을 죽였을 리가 없다.

"아멜리아인가?"

아멜리아가 욕심이 많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공작가의 힘을 아는 그녀가 배신할 거라고는 믿기 힘들었다.

참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다시 대리인을 보낼까요?"

"아니, 이제 그럴 시간이 없다. 아멜리아는 전쟁이 시작된 후에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고 결정하겠다."

"알겠습니다."

지금은 진홍의 마탑과 대리인 문제보다 더 골치 아픈 일이 있다.

라울은 자신의 앞에 놓인 보고서를 보며 화를 꾹꾹 눌렀다.

"로드리크 후작...."

공작파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무게감이 큰 귀족이다. 이 강대한 귀족이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판도가 달라진다.

그런데 하필이면 내전을 앞두고 펜리스 백작과 시비가 붙었다.

"멋대로 군대를 움직이겠다고?"

아들의 복수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그 속을 모를 라울이 아니다. 지금 로드리크 후작은 자신의 자존심과 욕심을 위해 움직이려는 것이다.

그것도 감히 공작가에 '통보'를 해 왔다. 더 이상 공작가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한 사람 때문에 이리 발목을 잡히다니."

라울은 눈을 감았다. 언제부터인가 모든 일이 꼬이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수습할 수 없을 만큼 판이 망가졌다.

그리고 그 모든 상황의 중심에는 펜리스 백작이 있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라울이 고개를 몇 번 주억거렸다.

"그래, 이제 수습할 단계가 지났구나. 정말 힘으로 하는 수밖에...."

그 말에 참모들은 긴장해 마른침을 삼켰다.

공작가가 그간 힘이 없어서 참고 있던 게 아니다. 더 큰 대업을 위해 힘을 아꼈을 뿐이다.

하지만 점점 모든 일이 통제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이 상태로 가다간 상대방만 더 키워 주는 꼴이 되리라.

라울은 눈을 뜨고 참모들에게 물었다.

"준비는?"

"언제든 출정할 수 있습니다. 다만 로드리크 후작과 아멜리아의 움직임을 고려해서 전략을 수정해야 할 거 같습니다."

"그래. 각지에서 대기하고 있는 병력을 소집하고 지휘관을 선정하겠다. 소홀한 부분이 없도록 마지막으로 점검해라."

"알겠습니다. 하면 로드리크 후작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로드리크 후작은 군대를 둘로 나누겠다고 통보했다. 하지 말라고 해도 억지를 부릴 게 뻔했다.

라울은 서늘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내버려둬라. 거기에 맞춰 전략을 수립하면 된다. 그놈은 내전이 끝난 뒤 죽이겠다."

전쟁하기로 한 이상 라울에게 거리낄 건 없었다. 시건방지게 군 놈들은 적이고 아군이고 가만두지 않을 계획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라울이 갑자기 뜬금없은 걸 물었다.

"연락이 온 지 꽤 됐는데 언제쯤 도착할 거 같은가?"

"한 달 정도면 도착할 거 같습니다."

"그래. '그'가 도착하면 바로 전하께 보고를 올리겠다. 마저 준비하도록."

"알겠습니다."

공작가의 참모들은 휘하 병력을 소집하고 점검에 들어갔다. 공작파의 귀족들에게 은밀히 연락을 취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기다리던 사람이 도착하자 라울은 바로 에른하르트를 찾아갔다.

에른하르트는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물었다.

"그래, 소식을 듣자 하니 골치 아픈 일이 많이 생긴 모양이더구나. 이제 결정은 내렸느냐?"

라울은 식은땀을 흘렸다. 모든 정보는 자신이 통제하고 있으며 아직 보고를 올리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에른하르트는 거처에서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모든 걸 알고 있었다.

라울은 고개를 더욱더 깊이 숙였다.

"...예, 전하."

"라울,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일이다. 작은 것에 연연하지 말거라."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내 이번에는 기대해 보겠다. 알아서 잘 처리하도록 하라."

에른하르트가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젓자 라울이 급히 말을 이었다.

"그들이 보내 준 자가 도착했습니다. 전하께 인사를 드리고 싶어 합니다."

에른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들라 하라."

쿠웅!

대전의 문이 열리며 일단의 무리가 들어왔다.

은빛으로 빛나는 화려한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었다. 그중 가장 선두에 선 남자를 보고 공작가의 가신들은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허어...."

"저런 기사가 있었단 말인가."

"대단한지고...."

찬란한 금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미남자였다. 그의 외모는 화려한 갑옷과 어우러져 범접할 수 없는 기품을 뿜어내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그의 걸음걸이 하나하나에서 신성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뿜어내는 기도도 대단했다. 에른하르트의 옆에 서 있던 왕국제일검, 카이엔 발자크 백작도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에른하르트가 흥미 어린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남자는 우아하게 몸을 숙이며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전하. 저는 전하의 대업을 도우러 온...."

남자의 고개가 살짝 올라온다. 그의 눈빛에는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흉포함과 잔인함이 서려 있었다.

"백은 기사단의 단장, 아이던이라고 합니다."

그는 훗날 대륙 7강의 일원이자 '고결한 기사'로 불린 자였으며.

전생에 지셀의 목을 직접 베었던 장본인이기도 했다.

377화 선물을 좀 가져왔습니다. (1)

"아이던, 아이던이라...."

에른하르트는 무엇에도 심드렁하던 평소와 다르게 아이던에게 제법 관심을 보였다.

그럴 만도 했다. 아이던의 기도는 공작가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래, 나를 도우러 왔다고?"

"예, 전하. 제가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대 같은 자를 보낼 정도로 이곳의 상황이 어려워 보이는가?"

에른하르트는 여전히 웃고 있지만 그 말에는 뼈가 있었다. 굳이 도움을 받지 않아도 왕국을 차지하는 데는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아이던 또한 방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설마 저희가 전하의 힘을 우습게 보겠습니까? 다만 루타니아 쪽의 일을 조금 더 빨리 처리해야 하게 되어서 말입니다."

"무슨 말인가?"

"아무래도 '문'을 여는 시기를 앞당겨야 할 거 같습니다."

그러자 에른하르트는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치켜들었다.

"호오, 그래? 어째서지? 약속된 날은 아직 멀지 않았는가."

"어찌 일이 계획대로만 되겠습니까? 우리를 쫓는 자가 나타났습니다."

"누구인가?"

"'전쟁의 성녀'와 '세계수의 수호자'가 아무래도 눈치를 챈 거 같습니다. 이미 암중에서 몇 번이나 싸움을 벌였습니다."

"흐음.... 그리 조심히 움직였음에도 생각보다 빨리 발각이 됐구나."

"사람이 하는 일인 이상 완벽할 수는 없지요. 대륙 곳곳에 우리의 손이 안 뻗친 곳이 없으니, 그만큼 실수가 일어날 가능성도 커지는 법이고요. 애초에 그들은 오래전부터 우리의 존재를 경계했으니 말입니다."

"그래, 우리에게 우리의 사명이 있듯이 그들 또한 그들의 사명이 있는 법이지."

"그리고... 이곳 루타니아 왕국 때문에 더 서두르는 면도 있습니다."

"이곳 때문에?"

아이던이 고개를 들어 에른하르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네, 바로 펜리스 백작 때문에 말입니다."

"펜리스 백작?"

펜리스 백작이란 이름은 근래 에른하르트가 가장 많이 듣는 이름이었다.

그자 때문에 왕국을 쉽게 차지하려는 라울의 계획이 엉망이 됐다. 이제는 힘으로 깨부숴야 할 정도로 최악이 된 상태였다.

하지만 기껏해야 왕국 안에서나 통하는 수준일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펜리스 백작 때문에 대계를 앞당겨야 할 일까지 생기다니?

"설명해 보아라."

"마수의 숲 때문입니다."

"마수의 숲?"

"펜리스 백작이 마수의 숲을 개척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저희가 마지막 후보로 두고 있던 곳이지요. 그리고... 얼마 전에 결계를 지키던 첫 번째 수호자가 죽은 걸 확인했습니다."

에른하르트가 조금 더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의 눈에는 전과 다른 열망이 이글거렸다.

"마수의 숲이 확실한가?"

"확실합니다. 이미 마수의 숲을 제외한 대륙의 모든 금지를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펜리스 백작이 숲을 개척했을 즈음에 성물의 빛이 하나 꺼졌습니다. 그자가 마수의 숲을 더 헤집기 전에 루타니아의 일을 끝내야 합니다."

"하, 하하하하하하!"

에른하르트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가신들은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 에른하르트가 왜 웃는지도 알 수가 없어 당황했다.

대전이 떠나가도록 웃던 에른하르트가 갑자기 광기 어린 눈빛으로 라울에게 말했다.

"라울."

"예, 전하."

"당장 허수아비인 국왕의 목을 꺾고 마수의 숲을 밀어 버려라."

애초에 공작가는 마수의 숲을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게 했었다. 그곳에 자신들이 찾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마수의 숲에 있는 것이 확실해진 이상 더는 참을 필요가 없었다.

라울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이미 전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최대한 적은 피해로 왕국을 차지하기 위해...."

에른하르트는 라울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또 시간을 끌겠다는 것이냐?"

"저, 전하. 뜻은 알겠사오나 마수의 숲이 정말 그곳이라면... 그곳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많은 병력이 필요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후에 싸울 병력이...."

에른하르트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살기 어린 눈빛으로 라울을 바라보았다.

"왕국의 모든 이가 죽어도 상관없다. 왕국을 차지한 뒤 모든 백성에게 무기를 쥐여 주고 밀어 넣으면 된다. 알겠느냐?"

"...명을 받들겠습니다."

"이번에는 실수하면 안 될 것이다."

차갑게 라울을 일별한 에른하르트가 다시 아이던에게 물었다.

"그대는 무엇을 도울 것인가?"

"전하의 대업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치울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던이 예의 그 화려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펜리스 백작의 목을 가져다드리겠습니다."

* * *

친왕파의 귀족들은 왕성에 모여 며칠 동안 골머리를 썩였다.

로드리크 후작이 이제는 대놓고 펜리스를 공격할 기세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드리크 후작이 정식으로 펜리스에 선전 포고를 했잖아! 그놈들이 출정 준비를 하고 있다고! 그 오리 새끼가 결국 내전을 앞당긴 셈이야!"

모리스의 고성에 브랜포드 후작은 무표정하게 답했다.

"어차피 좋든 싫든 내전이 일어날 것은 예정된 일이 아니었나. 그저 로드리크 후작이 먼저 움직였을 뿐이네."

"그놈 때문에 우리가 세운 전략이 엉망이 됐잖아! 결국 공작가랑 싸우기도 전에 서부의 군대들을 상대해야 한다고!"

친왕파의 기본 전략은 언제나 그랬듯이 방어다. 최대한 다른 전선을 지키고 주력을 모아 공작가를 치는 게 목표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일이 꼬였다. 펜리스를 잃을 수도 없으니 서부의 군대와 먼저 싸워야 한다.

중재는 이제 불가능하다는 걸 모두 알고 있다.

"그놈이 서부에서 그 정도로 난리를 쳤으니 어쩔 수 없지."

지셀이 로드리크 후작의 2만 병력을 섬멸하고 약탈까지 했다는 소문이 왕국 전역에 퍼졌다.

이제는 국왕이 나서서 말리려 해도 말릴 수가 없게 되었다.

브랜포드 후작은 여전히 지셀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굳이 서부를 자극한 거지?'

친왕파로서는 조금이라도 더 전력을 모으고 전쟁을 대비하는 게 낫다. 지금 군대를 움직여 괜히 공작가가 치고 들어올 틈을 만들어 줄 필요도 없었다.

고심하던 브랜포드 후작이 중얼거렸다.

"그놈이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일 놈이 아닌데."

"걔는 생각이 없어! 왜냐하면 생각이 없는 놈이니까!"

모리스가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마구 쳤다.

그가 보기에 지셀은 그냥 오늘만 사는 놈이었다. 그런데 운이 좋아서 하는 일들이 죄다 성공하고 뭔가 계획이 있었던 듯 보일 뿐이다.

한 마디로 천운을 타고난 놈이다.

그들이 그렇게 한데 모여 고심하며 전략을 다시 짜고 있을 때, 왕실의 기사가 와서 고했다.

"후작님, 펜리스 백작이 찾아왔습니다."

그 한마디에 모든 친왕파 귀족들이 눈을 빛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붙잡고 물어볼 기회였다.

"들라 하라."

브랜포드 후작이 말하자 기사가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저기...."

"왜 그러는가?"

"좀 나와 보시라고...."

"...그놈이?"

"네."

시건방진 요구에 잠시 회의실에 정적이 흘렀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모리스가 외쳤다.

"그 새끼가 이제 미쳤나! 마스터면 다야? 누구보고 오라 가라야!"

마스터면 다가 맞다. 그렇지만 친왕파 귀족들은 그간 자신들이 지셀을 키우고 밀어준 덕분에 그가 성장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생각이 완전히 틀린 바는 아니기도 하고.

그리고 작위로 보나 세력으로 보나 나이로 보나 아무튼 다 따져도 자신들이 윗사람이다.

"요새 좀 컸다고 그렇게 시건방지게 구는 거야? 야! 기사들 다 불러! 마스터랍시고 수도에서 건방지게 굴면 죽는 거야!"

모리스가 두툼한 수염을 흔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왕국 최고 권력가 중 한 사람으로서 그는 지셀의 건방진 행동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기도 했고 말이다.

그러자 기사가 변명하듯 말했다.

"저, 그게 아니라... 펜리스 백작이 선물을 좀 가져왔는데 직접 보셔야 한다고...."

"이 새끼야!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 거야? 선물을 가져왔으면 공손히 여기까지 가지고 와야지!"

"그게 여기까지 가지고 올 수 있는 양이...."

"닥쳐! 내가 당장 가서 그 새끼 버릇을 고쳐 줄 테다!"

모리스는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기사들을 불러 움직였다. 그를 따르는 친왕파의 귀족들도 그 뒤를 따랐다.

다른 귀족들의 기사들까지 모이니 그 수가 엄청났다. 과연 왕국의 실세들이라 할 수 있었다.

브랜포드 후작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갔다.

모리스는 밖으로 나가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뭐야! 이 새끼 어디 있어?"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무도 없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소식을 전했던 기사가 황급히 뒤따라와서 다시 고했다.

"성 밖에 있습니다."

"뭐? 감히 성 밖에서 우리를 불렀다고?"

"아니, 그게 그러니까...."

"야! 내 마차.... 아니, 말 가져와! 병사들도 불러! 이대로 그냥 간다!"

성질 급한 모리스는 기사의 말도 제대로 듣지 않고 달려갔다. 이 기회에 지셀의 코를 납작하게 하고 버릇을 고쳐 줄 생각이었다.

두두두두두!

최고의 귀족들이 기사들과 병사들을 이끌고 우르르 움직이니 수도의 모든 이들이 놀랐다.

다들 자리를 피하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전쟁이라도 일어날 것만 같은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성 밖으로 나간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펜리스의 깃발을 휘날리는 수많은 수레와 병사들이었다.

병사만 해도 얼핏 천 명은 되어 보였다.

모리스는 그 모습을 보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다가갔다.

"봐 봐! 저 미친 새끼가 수도 인근까지 병력을 끌고 왔어!"

브랜포드 후작을 비롯한 다른 귀족들도 눈살을 찌푸렸다. 화장품 상단이라기에는 병사들의 수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 정도 병력이 수도로 오려면 여러 난관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는 게 의아할 정도였다.

모리스가 기사들과 함께 다가가자 지셀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맥쿼리 후작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 오리 새끼야!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감히 수도 인근까지 이 많은 병력을 끌고 오다니! 반역이냐!"

보자마자 시비를 걸자 지셀도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별로 안 많은데요? 호위로 데리고 온 것입니다만?"

상단 병력치고는 많은 거지, 수도를 도모하기에는 현저하게 적은 수다. 그건 지셀이 아무리 마스터라 해도 불가능하다.

모리스가 다시 발작하려고 하자 브랜포드 후작이 제지하고 물었다.

"그래, 무슨 일로 우리를 여기까지 나오라고 했느냐."

"후작님, 잘 지내셨습니까?"

"인사는 됐다. 무슨 일인지부터 말해라."

여전히 차가운 브랜포드 후작의 모습에 지셀이 혀를 찬 뒤 말했다.

"선물을 좀 가져왔습니다."

"도대체 무슨 선물이기에 이런 난리를 피우는 것이냐?"

지셀이 후작에게 대답하는 대신 병사들에게 손짓했다. 병사들이 옆으로 물러나자 그들의 뒤에 있던 수레들이 더 잘 보였다.

수백 대의 수레가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 장관이었다.

모든 귀족이 그 모습을 보고 순간 입을 떡 벌렸다.

얼핏 봐도 수레에는 식량과 병장기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왕국에서 손꼽히는 세력가인 그들도 살면서 이렇게 많은 양을 한 번에 본 적은 없었다.

넋이 나간 그들을 보며 지셀이 씨익 웃었다.

"식량과 병장기, 약초를 비롯한 여러 가지 군수품들입니다. 제가 친왕파에 드리는 선물입니다. 내전 때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표정 변화가 없는 브랜포드 후작도 이번만큼은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가뭄의 여파가 이제 좀 회복되고 있다고 하지만 예전만큼 여유롭지는 않다. 그러니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자원을 아껴 쓰고 있었다.

그런데 저렇게 많은 양의 군수품을 선물이라고 가져오다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저, 정말이냐? 저걸 우리에게 준다고?"

"후작님도 말을 더듬으실 때가 있군요."

"...정말이냐고 물었다."

"네, 정말입니다. 후작님도 의심이 많아지셨네요."

올 때마다 뭔가 꼭 뜯어가던 세상 짠돌이가 이렇게 준다고 하니 안 믿어지는 게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본인이 진짜라고 하니, 다들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몰아쉬었다.

모두가 모리스를 바라보았다. 이런 선물을 가져온 장본인한테 반역이니 뭐니 하고 호통부터 쳤다.

"이, 이 새끼...."

모리스는 당황하더니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지셀에게 다가갔다.

"왜요?"

지셀이 여전히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모리스가 잠깐 멈칫거리더니 다시 외쳤다.

"이 새끼야!"

그는 마치 잃어버린 가족과 재회한 사람처럼 지셀을 꽉 껴안았다.

378화 선물을 좀 가져왔습니다. (2)

"아, 뭡니까?"

지셀이 불편한 듯 몸을 빼자 모리스가 다시 지셀의 양팔을 꽉 잡았다.

"야, 이 새끼... 이 흑마법사... 오리인 줄 알았는데... 새끼, 언제 이렇게 성장해서 마스터도 되고... 이런 선물도 가지고 오고...."

"아니, 뭔 소리입니까?"

"고맙다! 이 새끼야!"

모리스는 감격 어린 표정으로 지셀을 다시 덥석 껴안았다.

다른 귀족들은 그냥 그러려니 하는 표정으로 혀만 찼다.

모리스는 무척이나 단순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살면서 숨긴 적이 없었다. 그냥 좋고 싫은 걸 바로 표현했다.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진 모리스가 지셀을 계속 붙잡고 있자 브랜포드 후작이 옆으로 밀어 버리고는 물었다.

"정말 이렇게 많이 줘도 괜찮다는 거냐?"

"뭐가 많아요?"

"...이게 안 많다고?"

얼핏 봐도 어지간한 영지의 수년 치 예산은 들었을 양이다. 왕국의 모든 군단에서 써도 1년 이상은 운용이 가능할 양이었다.

그런데 이어지는 지셀의 말이 더 놀라웠다.

"이번이 1차 지원입니다. 3차까지 계획해 둔 상태입니다. 한 번에 가져오기에는 양이 너무 많아서요."

그 말에 친왕파의 귀족들은 모두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지금 온 것도, 얼핏 보기만 해도 어마어마한 수량이었다. 그런데 이런 양을 두 번이나 더 가져다준다고 한다.

예전에 친왕파가 지셀에게 지원해 준 것보다 수십 배는 많은 수량이었다.

"정말 이만한 지원을 두 번이나 더 해 주겠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지셀에게는 이제 안 쓰게 된 것들, 너무 많아서 그냥 뒀다간 버려야 할 것들이다. 그걸 친왕파 전력 상승을 위해 베푸는 척 넘기는 것일 뿐이다.

그래야 친왕파가 공작가와 열심히 싸워서 그들의 발목을 잡아 줄 테니까.

"허어...."

브랜포드 후작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다른 귀족들도 침만 삼키며 지셀의 선물을 구경하기에 바빴다.

'도대체 돈이 얼마나 많아진 거야?'

'3차까지 이 정도 양이 온다면 그것만으로도 전쟁을 치를 수 있을 거야.'

'저기서 조금만 떼어먹어도 엄청난 부자가 될 수 있겠는데?'

펜리스가 북부에서 제일 부자가 됐다는 건 그들도 알았다. 하지만 얼마나 부자가 됐는지는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정도의 양을 그냥 나눠 주는 걸 보니, 자신들은 꿈도 꾸지 못할 거부가 된 게 분명하다.

지셀은 귀족들을 쓱 한번 훑어보고 말했다.

"후작님이 알아서 분배해 주시기 바랍니다. 따로 빼돌리는 자가 없도록 말입니다. 전부 전쟁 대비를 위해서 쓰여야 합니다."

"그래,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브랜포드 후작의 말에 귀족들은 입맛을 다셨다. 깐깐한 그가 통제한다면 빼돌리기가 상당히 곤란해질 것이다.

괜히 걸리면 망신만 당하고 있던 재산도 다 뺏길 수도 있었다.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된 듯하자 지셀이 병사들에게 다시 손짓했다. 병사들은 수레에서 갑옷을 한 벌 들고 왔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이 없던 귀족들은 곧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뭐지? 병사들 힘이 좋은가? 뭔 갑옷을 저렇게 가볍게 들고 와?'

브랜포드 후작도 병사들이 가져온 갑옷을 보고 물었다.

"이게 무엇이냐? 보기에는 평범한 갑옷 같은데."

"신소재로 개발한 갑옷입니다. 친왕파의 기사들에게 나눠 주십시오. 강도는 강철과 같지만 무게는 강철의 절반도 되지 않습니다."

"뭐라?"

브랜포드 후작이 깜짝 놀라며 갑옷을 받아 들었다. 검술을 익히지 않은 그도 가볍게 들 수 있을 만큼 가벼웠다.

꼼꼼하게 살펴보던 브랜포드 후작에게 지셀이 말했다.

"여기서 한번 확인해 보시지요."

브랜포드 후작은 고개를 끄덕이고 옆에 있는 기사에게 손짓했다.

"확인해 보아라."

기사는 지체하지 않고 검을 뽑아 갑옷을 내리쳤다.

카앙!

갑옷에서 느껴지는 반탄력을 확인한 기사가 고개를 숙였다.

"강철 수준의 강도가 맞습니다."

"허어!"

브랜포드 후작이 감탄하자 다른 귀족들도 와서 갑옷의 다른 부위들을 들어 보았다.

"이럴 수가! 갑옷이 이렇게 가볍다니!"

"도대체 언제 이런 걸 만들었다는 말이오!"

"이런 걸 나눠 준다고?"

귀족들은 얼이 빠져 지셀에게 물었다. 지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천 벌 정도 가져왔습니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주력 귀족들의 기사들에게는 충분히 나눠 줄 수 있을 겁니다."

이번만큼은 다들 입만 벌린 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이 갑옷은 보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무게가 이렇게 가볍다면 기사들이 체력과 마나를 더 오래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말의 속도와 체력 유지에도 크게 도움이 된다. 갑옷 하나로 전투의 양상이 크게 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걸 천 벌이나 준단다. 모두가 지셀을 미친놈 보듯 바라보았다.

'저 짠돌이가 미쳤나?'

'이런 보물을 막 가져다준다고?'

'도대체 왜?'

이런 장비는 영지의 힘이나 마찬가지다. 남한테 함부로 나눠 줘서 좋을 게 없다.

다들 지셀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셀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남아도는 게 그건데.'

영지의 경비병조차도 갈바니움 무장을 풀세트로 장착하고 있다. 펜리스 기사들은 아예 룬스톤을 박아 넣은 마법 갑옷을 입고 다닌다.

그러니 펜리스에서는 저런 건 특별한 보물도 아니었다.

그래도 이왕 주는 거 지셀은 생색을 확실히 내기로 했다.

"다 같이 힘을 합쳐서 공작가와 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절대 이런 걸 아끼는 사람이 아닙니다."

지셀은 주먹을 꽉 쥐어 올리며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저는 모든 걸 다 나눌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저는 혼자 다 먹는 걸 무척이나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클로드가 들었다면 황당함에 목뒤를 잡고 기절할 만한 말이었다. 하지만 귀족들은 지셀의 본심을 알지 못했다.

"오오오오!"

귀족들은 모두 감탄을 내뱉었다. 어떤 자는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우리가 펜리스 백작을 잘못 봤구나!'

'저렇게 생각이 깊은 자였을 줄이야!'

'지원품을 빼돌리려고 한 나 자신이 부끄럽도다!'

생각해 보면 펜리스 백작은 예전에 포리스코와 함께 수도에서 성자라 소문난 적도 있었다. 그때는 우습게 봤었는데 그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모리스도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지셀을 다시 껴안았다.

"이 새끼! 이 오리 새끼! 정말 잘 컸어!"

"아, 자꾸 왜 이러십니까?"

지셀이 몸을 비틀며 다시 모리스를 밀어냈다.

그사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브랜포드 후작이 말했다.

"일단 들어가자, 들어가서 마저 얘기를 나누자꾸나."

후작가의 병력이 수레를 인계받고 지셀과 귀족들은 다시 왕성으로 움직였다.

귀족들은 원래 지셀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따지려고 했다. 그런데 이런 선물까지 받고 감동적인 말까지 들었으니 감히 그러지 못했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자 결국 브랜포드 후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일단 선물은 고맙게 받겠다. 큰 도움이 될 것이야."

"별말씀을요. 제가 정말 영지의 재산을 박박 긁어서 가져왔습니다. 이게 다 친왕파를 위해서...."

지셀의 생색이 계속 이어지자 브랜포드 후작이 헛기침을 연신 내뱉었다.

"크흠흠, 그래, 아무튼 고맙다. 그런데 무슨 생각인지나 말해 보거라. 어째서 로드리크 후작과 그런 상황까지 간 것이냐."

지금은 공작가의 공격에 준비를 단단히 하고 기회를 봐야 할 때다. 오히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좋았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전력을 더 확충하고 방비를 하지 않겠는가.

브랜포드 후작의 물음에 지셀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마음에 안 들어서요."

"뭐?"

"서부에 있는 놈이 북부까지 와서 이래라저래라하니까 마음에 안 들더라고요."

"그, 그래서 싸웠다고?"

"말은 정확히 하셔야죠. 제가 먼저 시비를 건 게 아닙니다. 그쪽에서 먼저 시비를 걸었죠. 전 단지 되갚아 준 것일 뿐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애초에 싸움을 건 건 로드리크 후작이었다. 로드리크 후작이 먼저 상단을 공격했고 지셀은 그에 맞춰 대응했을 뿐이다.

하지만 친왕파에 속한 자로서는 대응이 과격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너무 정세 판단을 안 하고 움직인 게 아니냐고 브랜포드 후작이 한마디 더 하려고 할 때, 지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차피 이번 일이 아니어도 전쟁은 조만간 벌어졌을 겁니다. 가만히 기다린다고 능사가 아닙니다. 적들의 전력을 깎을 수 있을 때 깎아 놔야 합니다."

"적들의 전력을 깎는다?"

"네. 이번에 로드리크 후작은 저 때문에 2만의 병력을 잃었고, 여덟 개의 봉신 영지가 초토화됐습니다. 봉신 영지들은 쉽게 복구하기가 힘들 겁니다. 즉 곧 있을 내전에서는 빠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죠."

지셀이 아예 재화를 다 털어 갔으니 재기를 하려면 적어도 수년은 걸릴 것이다. 영지민들이 더 수탈당하겠지만 당장 그런 사정까지 봐줄 수는 없었다.

브랜포드 후작도 지셀의 말뜻을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건 아슬아슬한 칼날 위에 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말이 쉽지, 적의 전력을 깎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번에도 상황이 운 좋게 맞아떨어진 것이지 않으냐? 그리고 로드리크 후작이 전면전을 선포했다. 곧 그의 군대가 움직일 것이다."

지셀은 드레이크 용병단을 영입할 때부터 지금의 판을 짜 두었던 거지만, 친왕파로서는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지셀이 아닌 다른 이들이 괜히 적의 전력을 깎겠다고 나섰다가는 더 큰 전쟁만 벌어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지셀도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 건으로 왈가왈부하고 싶지도 않았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어차피 싸워야 한다면 먼저 치는 게 낫습니다."

"먼저 치겠다고?"

"네. 로드리크 후작이 군대를 출정하면 공작가도 더 이상 구경만 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펜리스를 잃지 않으려면 친왕파도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공작가는 그 틈을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지셀은 품에서 몇 개의 문서를 꺼내 브랜포드 후작에게 넘겼다.

"이게 무엇이냐?"

"수도와 각 영지에 있는 공작가의 꼬리들입니다."

"무어라?"

브랜포드 후작이 문서를 살폈다. 제법 유명한 상단부터 이름도 들어 보지 못한 하찮은 단체들까지 가리지 않고 적혀 있었다.

"이것들이 전부... 공작가가 거느린 곳이라고?"

"네. 무장 병력을 보유한 상단, 암살자 단체, 정보 집단 등 다양합니다. 이들은 전쟁이 벌어지자마자 수도와 각 영지에 혼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브랜포드 후작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손을 부르르 떨었다. 목록 중에는 후작가와 거래하는 곳도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이라면 심각한 일이었다. 자신들의 앞마당에서 활약하고 있었음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걸 알았느냐?"

"따로 은밀하게 조사했습니다."

전생에서 알게 된 정보였다.

물론 지셀이라고 공작가의 끄나풀들을 완벽하게 다 알지는 못했다. 분명 빠진 곳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곳은 그만큼 중요도가 떨어지는 곳일 테니 상관없었다. 하찮은 곳은 전쟁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할 테니까.

브랜포드 후작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지셀에게 다시 물었다.

"정말 확실한 곳이냐? 그냥 넘겨짚었다면 후에 일이 더 커질 것이다."

"확실합니다."

"증거는?"

"딱히 보여 드릴 건 없습니다. 믿으십시오."

"...."

브랜포드 후작과 친왕파의 귀족들 모두 황당함에 제대로 입을 열지 못했다. 증거도 없이 목록만 가져와서 공작가의 수하들이라 들이미는 걸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아무리 지셀이라도 전생의 정보를 가져다줄 수는 없다. 그렇다고 저 많은 곳을 하나하나 다 새로 조사해서 증거를 찾을 시간도 없었다.

그러는 동안 공작가는 준비를 끝마치고 진군할 것이다. 이제는 증거니 뭐니 고려할 때가 아니었다.

지셀이 진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후작님, 전쟁은 이미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저희가 먼저 움직여야 합니다."

"먼저... 움직이자고?"

"네. 북부로 진군하는 로드리크 후작의 군대는 제가 알아서 막고 있겠습니다. 어차피 싸워야 하니까요. 후작님은 먼저 다른 일을 해 주십시오."

"설마...."

지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곳곳에 숨어 있는 그 벌레들부터 퇴치해 주십시오. 최대한 빨리 시작해야 합니다."

"명분도 없이... 이곳들을 치라고?"

"이제 명분 따위는 필요 없는 시기입니다."

"명분이... 필요 없다?"

브랜포드 후작의 말에 지셀이 씨익 웃었다.

"네, 지금은 오직 힘으로만 증명할 때입니다."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 펜리스는 더 이상 빠르게 확장하기 힘들어졌다. 그리고 공작가도 대놓고 병력을 소집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렇다면 답은 단 하나.

자신이 원하는 시기에 전쟁을 시작해서, 원하는 대로 이끌고 갈 생각이었다.

그래야 한다. 그렇게 해야....

곧 다가올 환란의 시기에 대비할 수 있었다.

379화 네놈이 여기 있을 줄이야. (1)

전생에 환란의 시기가 정확하게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느 순간 대륙에 정체도 모를 괴수들이 날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 확실한 건, 루타니아의 내전이 끝나고 공작가에서 마수의 숲을 개척한 뒤였다는 것이었다.

당시 지셀은 용병으로 지내며 끊임없이 수련하고 있었다. 환란의 시기에 한참을 활약하고 나서야 용병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시기가 맞는군.'

분명 자신은 미래를 바꿨다. 데스몬드 백작을 꺾고 북부의 패권을 차지했다.

자신 때문에 전생에 일어나지 않았던 전쟁들이 일어나고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지셀이 내전을 앞당겼다고 생각한다.

'그건 맞긴 하지만....'

현 상황을 보면 자신이 내전을 앞당긴 게 맞다. 그러나 전생과 비교하면 내전이 일어난 시기는 거의 비슷했다.

가뭄으로 인해 이미 몰락한 친왕파는 이 시기에 완전히 끝장이 나고 말았다.

'전생에는 지금쯤 약해질 대로 약해진 친왕파를 공작가가 쉽게 밀어 버렸지.'

하지만 이번에 공작가가 움직인 이유는 친왕파가 약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지셀 때문에 계획이 다 망가졌기 때문이다. 공작가가 힘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지셀의 활약이 시기를 앞당겼지만, 그가 가뭄기에 친왕파를 도와줌으로써 다시 시기를 늦춘 셈이 된 것이다.

마치 일어날 일은, 반드시 그 시기에 일어나야 한다는 것처럼 말이다.

'오히려 나에게는 좋은 일이야.'

미래가 완전히 틀어지지 않는다면 그가 상황을 통제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지금 지셀이 내전뿐만이 아니라 환란의 시기까지 대비하려는 것도 그 일환이었다.

그 시기가 오기 전에 치워야 할 놈들은 다 치워 버려야 했다.

"어서 결정하셔야 합니다."

"으음...."

지셀의 재촉에 브랜포드 후작은 침음성만 내뱉었다.

그는 명예를 아는 자부심 높은 귀족이다. 단 한 번도 명분 없이 움직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왕국 귀족들에게 존경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브랜포드 후작에게 명분도 없이 누군가를 치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오히려 옆에 있는 단순함의 대명사 모리스가 이런 일에는 더 나았다.

"뭘 고민해! 나쁜 새끼들이라잖아! 바로 치자고! 내가 책임질 테니까!"

선물을 잔뜩 받아서 기분이 무척 좋아진 모리스는 지셀이 누굴 때려 달라고 하든 다 때려 줄 기세였다.

지셀도 은근슬쩍 거들었다.

"후작님께서 불편하시면 제가 데려온 병력으로 일단 수도부터 정리하겠습니다."

"...."

브랜포드 후작은 피식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자신을 허수아비로 세워 놓고 일을 벌이겠다는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힘으로 증명할 시기라....'

어차피 싸워야 하는 건 기정사실이다. 만약을 위한다면 의심 가는 놈들은 먼저 치는 게 효율적이긴 하다.

'왕권을 강화할 기회긴 하군.'

노회한 정치가답게 그는 다른 이득도 바라보고 있었다. 명분도 없이 힘을 휘두르면 많은 이들이 두려워할 것이다. 그 두려움이 왕권을 높이는 토대가 되리라.

자신의 신념과 명예만 버리면 된다. 비록 왕의 위에 선 신하라는 오명을 쓰더라도 말이다.

"받은 명단을 나눠 주겠소. 저쪽에서 눈치채기 전에 바로 기습하도록 하지. 각 영지의 영주들에게도 바로 소식을 전달하시오."

결단을 내린 브랜포드 후작의 말에 지셀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친왕파의 귀족들은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진짜로 명분도 없이 칼을 휘둘러야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직 모리스만이 호기롭게 외쳤다.

"당장 애들 모아서 다 치자고!"

그는 신이 나서 움직였다. 다른 친왕파 귀족들도 그를 따라나섰다.

고개를 몇 번 저은 브랜포드 후작이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지셀에게 물었다.

"아직 할 얘기가 남은 모양이구나."

"네,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

역시 이놈은 공짜가 없다. 또 뭘 뜯어가려고 그럴까?

과연 지셀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저 선물 하나만 주십시오."

"...뭐냐."

"왕실의 비고에 있는 드래곤 하트 조각을 하나 얻었으면 합니다."

"...."

왕실에서 드래곤 하트 조각을 몇 개 가지고 있다는 건 비밀도 아니다. 드래곤 하트의 조각은 왕실 비고에 있는 보물 중에서도 최고 등급의 보물이었다.

오랜 역사를 이어 온 루타니아 왕국도 드래곤 하트를 겨우 하나 가지고 있었다. 인간이 전부 흡수할 수는 없기에 조금씩 조각을 내어 대대로 충성스러운 신하들에게 사용해 왔다.

"그건 왕실에 충성을 바친 자에게만 줄 수 있는 것이다."

충성한다고 아무나 주는 것도 아니다. 정말 필요한 자에게만 준다.

이번 대에서는 왕실의 소드마스터와 왕실 마탑의 탑주가 드래곤 하트 조각을 하사받았었다.

어쨌든 지셀에게는 줄 수 없는 것이다. 왕실에 충성하는 성격이 아닌 것도 이유지만, 그의 영지가 왕실과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지셀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지금 그런 걸 아낄 때가 아닙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전력을 올려야 합니다."

"네놈은 이미 마스터지 않느냐. 그런 욕심까지 내야겠느냐?"

"제가 아닙니다."

"그러면 누구에게 주려는 것이냐?"

"저희 영지에 6서클 마법사가 있는 건 이제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7서클의 벽을 넘을 수 있는 재능을 타고났지만 마력이 너무 부족합니다. 드래곤 하트의 조각 정도가 아니라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으음...."

"공작가에는 발자크 백작과 일로이스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휘하에 뛰어난 기사들과 마법사들도 많습니다. 병력의 질과 양으로는 공작가를 압도할 수 없습니다. 초인이 하나라도 더 있어야 합니다."

"으음.... 하지만 7서클의 벽을 넘지 못할 수도 있지 않으냐."

왕실의 소드마스터는 그 조각을 받고 벽을 넘었다. 하지만 왕실 마탑의 탑주는 조각을 받고서도 결국 7서클의 벽을 넘지 못했다.

6서클인데 마력만 무지막지하게 많은 마법사가 된 것이다.

지셀은 단호하게 말했다.

"분명 넘을 수 있을 겁니다. 이미 깨달음과 지식은 충분합니다. 벽을 넘을 수 있는 마력이 부족할 뿐입니다."

바네사는 전생에 엉터리 마나 연공법을 가지고도 7서클에 올랐다. 마법 재능이라면 대륙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브랜포드 후작도 바네사가 6서클에 오르기엔 상당히 젊은 마법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왕국 역사상 그런 천재는 흔치 않다.

그래도 왕실의 보물을 내주는 건 선뜻 내키지 않았다.

저 꼴통 놈이 마스터인데 그 수하까지 7서클이라면? 공작가를 처치한 뒤에는 아무도 저놈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아, 진짜 그러실 겁니까? 제가 이번에 저렇게 큰 선물도 가져왔는데요?"

"...."

"3차까지 드린다니까요, 3차까지!"

"...."

"저거 다 안 받으시면 전쟁 힘드실 텐데요?"

"...."

지셀은 집요할 정도로 브랜포드 후작을 달달 볶았다.

브랜포드 후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은 자기가 원하는 걸 얻을 때까지 사람을 괴롭힐 놈이다.

그리고 꼴통이긴 하지만 왕위에는 관심이 없는 것만은 확실했다. 공작가와 싸우기 위해서는 강한 자가 하나라도 더 있는 게 낫다.

"알겠다. 내 재상과 상의해서 최대한 빨리 조각을 내오도록 하겠다. 며칠만 기다리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지셀은 오랜만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6서클에 오른 바네사다. 충분히 조각을 흡수하고 7서클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기다리면서 수도 정리부터 조금 도와드리겠습니다. 혹시 병력 필요하시면 말씀 주시고요."

"...그래라."

브랜포드 후작은 피곤한 안색으로 손을 휘저었다.

언제나처럼 제가 원하는 건 야무지게 챙기는 놈이었다.

* * *

"아가씨, 오랜만에 뵙습니다. 무슨 일로 소인을 부르셨습니까? 달리 필요한 게 있으신지요?"

켈리아 상단의 상단주, 제프리는 야비한 웃음을 지으며 로잘린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는 동부에 본거지를 둔 상단의 상단주로 주로 동부와 수도를 잇는 거래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수도에도 자주 머물곤 했다.

그는 특히 브랜포드 후작가와 많은 거래를 맺고 있었다. 로잘린이 거느린 단체가 많다 보니 필요한 물품도 그만큼 많았기 때문이다.

촤르륵.

로잘린은 부채를 펴서 눈 아래를 가리고 입을 열었다.

"그동안 저희 때문에 재미를 많이 보셨죠?"

"네? 아... 후작가와의 거래는 언제나 영광스러운 일이지요. 아가씨의 배려 덕분에 저희 상단이 이렇게나마 운영이 되고 있습니다. 항상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뭔가 날이 서 있는 듯한 그녀의 말에 제프리는 부드럽게 넘어갔다.

로잘린은 피식 웃더니 말을 이었다.

"거래는 오늘부로 끝이에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켈리아 상단은 오늘부로 문을 닫아야 하니까요. 동부에 있는 상단의 모든 재산도 후작가가 압류할 것입니다."

"무, 무슨 소리입니까!"

청천벽력 같은 말에 제프리가 황당해하며 외쳤다.

부채로 얼굴을 가렸기에 그녀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저 눈에 보이는 살기는 지금 하는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걸 보여 주고 있었다.

"후작가가 언제부터 강도 집단이 되었단 말입니까! 모든 귀족과 상인들이 후작가를 지탄하고 후작가와 거래를 끊을 것입니다!"

"상관없어요."

"뭐, 뭐라고요?"

"이제 끝이니까. 공작가의 개들아."

"무슨 소리를!"

"쳐라."

차앙! 차앙! 차앙!

로잘린의 주변에 있던 기사들과 병사들이 무기를 빼 들고 제프리와 그를 따라온 수하들을 공격했다.

"으아아악!"

상단의 수하들은 무기를 채 들기도 전에 후작가의 병력에 몰살당했다. 애초에 이곳에 있는 기사들과 병사들은 최정예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곧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카가가가강!

어느 틈에 무기를 꺼낸 제프리가 후작가 기사들의 공격을 전부 막아 낸 것이었다. 그의 검에는 푸른 빛이 서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로잘린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일개 상단주 주제에 최정예 기사들의 협공을 막는다?

가능성은 무척 작지만, 재능만 타고났다면 그럴 수는 있다. 돈이 많으니 잘 먹을 테고, 수련할 시간도 많이 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저런 실력을 갖춘 주제에 세간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건 이상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의심할 만했다.

그리고 그 의심은 곧 확신으로 바뀌었다.

"이 개 같은 년! 도대체 어떻게 안 거냐!"

이미 걸렸다고 생각한 제프리가 로잘린을 향해 험한 말을 지껄이며 자백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빙긋 웃으며 답했다.

"알 거 없어. 더 추하게 굴지 말고 죽어라."

"이년이!"

제프리가 단숨에 로잘린에게 달려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움직임은 기사들과 병사들에게 막히고 말았다.

카앙! 카앙! 카앙!

제프리의 실력은 뛰어났지만 그 혼자서 이곳에 있는 병력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그는 점점 수세에 밀리기 시작했다.

푸욱! 푸욱! 푸욱!

결국 제프리는 몸 곳곳이 검에 찔려 심각한 상처를 입고 말았다.

"흐흐흐...."

피를 뚝뚝 흘리며 웃는 그에게 기사 하나가 다가갔다. 바로 목을 치기 위해서였다.

"죽어라!"

기사는 단숨에 검을 휘둘렀다.

카앙!

"아니?"

놀랍게도 제프리는 다시 검을 들어 공격을 막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그그그그!

그의 몸이 부풀어 오르며, 옷이 사정없이 찢어지기 시작했다.

"뭐, 뭐야?"

이상한 현상에 기사가 놀라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다른 이들도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제프리의 근육이 비대하게 커지며 힘줄이 터질 듯이 솟아 나왔다.

기사들은 몸이 저릿할 정도로 강한 마나의 압력을 느꼈다. 다 죽어 가던 제프리의 몸에서 이런 힘이 나온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온몸에서 피를 흘리던 제프리가 갑자기 괴성을 내질렀다.

"크아아아아!"

누가 봐도 이성이 사라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 괴물처럼 변한 그의 모습에 다들 섣불리 다가가지 못했다.

"어서 죽여요!"

로잘린이 부채를 접으며 급히 외쳤다. 제프리와 가장 가까이 있던 병사들이 바로 그에게 창을 찔러 넣었다.

카앙! 카앙! 카앙!

"무슨...."

하지만 병사들의 창은 제프리의 겉가죽조차 뚫지 못했다.

"카아아악!"

퍼어어억!

제프리가 검을 휘두르자 가장 앞에 있던 병사들의 목이 단숨에 날아갔다.

"이놈!"

뒤늦게 정신을 차린 기사들이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제프리는 그 공격을 온몸으로 받으면서 앞으로 달려 나갔다.

"아가씨!"

"막아라!"

갑작스럽게 뛰쳐나간 제프리를 아무도 막지 못했다. 그는 오직 로잘린을 향해 달려갈 뿐이었다.

이성을 잃었으면서도 목표는 잊지 않은 것이었다.

"이, 이런...."

순식간에 코앞까지 다가온 제프리를 보고 로잘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후작가의 기사들이라면 어지간한 강자는 막을 수 있다. 제프리가 그 이상의 실력자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니, 저런 괴물이 될 줄은 몰랐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크르르르르!"

제프리의 일그러진 얼굴은 마치 웃음을 짓는 듯했다.

그는 로잘린과 거리를 좁히자마자 바로 검을 휘둘렀다.

로잘린은 눈을 질끈 감았다. 기사들이 뒤늦게 달려오고 있었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사아아악!

제프리의 검이 로잘린에게 닿기 직전, 공기를 찢어발기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퍼어억!

어느새 그녀의 뒤에서 날아온 창 하나가 제프리의 몸을 꿰뚫고 있었다.

380화 네놈이 여기 있을 줄이야. (2)

"크아아아악!"

제프리는 창에 꿰뚫린 채 그대로 뒤로 날아갔다.

콰아앙!

창에 실린 힘이 어찌나 강한지 제프리는 아예 벽까지 밀려가 꽂히고 말았다.

"크르르륵!"

그럼에도 그는 죽지 않았다. 붉은 눈을 빛내며 짐승 같은 괴성을 지를 뿐이었다.

"크아아아!"

제프리는 곧바로 자신의 몸에 꽂힌 창을 박살 내며 바닥으로 내려왔다.

로잘린이 깜짝 놀라며 바로 뒤를 돌아보았다. 창을 던진 이는 혀를 차며 그녀 앞을 막아섰다.

"쯧쯧, 여기도 이럴 줄 알았다."

"백작님!"

"잘 지내셨습니까."

여유 있는 걸음으로 나타난 자는 바로 지셀이었다.

위기에 빠진 영애를 구해 주는 건 지독할 정도로 흔하고 인기 있는 소재다. 대부분의 귀족 영애들은 어릴 때 그런 이야기책을 한 번쯤은 보고 자란다.

멋진 기사가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며 사악한 용을 무찌르는 이야기.

지금 로잘린은 어릴 때 읽었던 동화의 한 장면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붉어진 눈시울을 적시며 다시 한번 지셀을 불렀다.

"펜리스 백작님!"

"공격도 안 당했는데 눈이 왜 그러십니까? 눈병 나셨습니까?"

"...."

이 새끼는 로맨스를 모르는 놈이 분명하다. 로잘린은 표정이 일그러지려는 것을 참으며 심호흡을 크게 하고 물었다.

"어떻게 오신 거죠?"

"달려왔는데요."

"...아니, 어떻게 상황을 알고 오신 거냐고요."

"지금 수도 곳곳에서 저런 놈들이 난리를 피우고 있습니다."

그 말에 로잘린은 깜짝 놀랐다.

그렇다는 건, 친왕파에서 습격한 곳에는 전부 저런 괴물들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정말 지셀이 알려 준 대로 공작가의 개들이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셀은 로잘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튼 다행입니다.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이곳으로 달려왔습니다. 저놈들을 처음 보면 당황할 수밖에 없거든요. 몸도 엄청 튼튼하기도 하고요."

"그, 그러면 저를 구하기 위해 가장 먼저 이곳으로 온 건가요?"

지셀이 예의 그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이 수도에서 당연히 아가씨를 가장 먼저 구해야죠."

"배, 백작님...."

두근!

로잘린은 거세게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얼굴을 붉혔다.

수도의 유력 귀족들을 제치고 자신을 가장 먼저 구하러 오다니. 정말 이야기 속의 공주님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백작님이 저를 그렇게 연모...."

"우리 화장품 상단의 자금 관리도, 판매도 맡고 계신 분이신데 당연한 거죠. 어휴, 큰일 날 뻔했네. 아가씨 안 계시면 그 많은 돈이 다 날아가잖아요.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네놈 새끼는 나랑 돈 얘기 말고는 할 게 없냐!'

로잘린의 얼굴이 단번에 일그러졌다. 역시 이 새끼는 돈 말고는 관심이 없는 새끼다. 착각한 게 너무 분했다.

"표정이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아, 저놈부터 빨리 처리해야겠네. 다른 곳도 가 봐야 하거든요. 바쁘다, 바빠."

지셀은 여전히 여유로운 걸음으로 제프리를 향해 갔다.

후작가의 병사들 또한 지셀의 소문을 들었기에 모두 거리를 벌려 공간을 내주었다.

"크아아아아!"

제프리는 자신을 방해한 지셀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바로 포효를 내뱉으며 달려들었다.

부웅! 부웅! 부웅!

상급 기사에 버금가는 속도로 제프리가 검을 휘둘렀지만 지셀은 가볍게 피했다.

바로 공격을 안 하는 것이 마치 무엇인가를 관찰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크아아아!"

제프리는 자신의 공격이 통하지 않자 짐승 같은 울음소리만 계속 내었다.

몇 번 더 공격하는 걸 본 지셀이 중얼거렸다.

"흠, 확실히 해럴드보다는 약하네."

해럴드가 변신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공격 속도도 느리고, 공격의 정확도도 낮았다. 아무래도 본신의 실력에 따라 변화된 뒤 낼 수 있는 힘도 다른 모양이었다.

"그래도 폭주해서 미치는 건 똑같군."

아무리 봐도 그냥 미쳐 버린 짐승 수준이다.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는 목표 외에는 모든 사고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 같았다.

만약 그 목표가 없다면 전생의 바네사처럼 무차별적인 학살을 벌이는 듯했다.

"그러면 이제 처리를 해 볼까."

화르륵.

지셀의 주먹에 이글거리는 검붉은 기운이 맺혔다.

퍼억!

"크아악!"

제프리는 지셀의 주먹에 얼굴을 한 대 얻어맞고 비틀거렸다. 그 틈을 타 지셀의 주먹이 폭풍처럼 날아들었다.

퍼퍼퍼퍼퍼퍽!

"크아아아악!"

제프리는 제대로 반격도 못 하고 두들겨 맞았다. 맞을 때마다 그의 몸 곳곳이 부러졌다.

그 모습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제대로 검도 안 통하던 놈이 겨우 주먹질에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콰아아앙!

몸의 뼈가 다 박살이 나 흐물거리는 제프리의 머리에 지셀의 주먹이 강하게 꽂혔다.

"커어억...."

바닥에 쓰러진 제프리가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이, 이 무슨... 왜 내가...?"

그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한번 폭주하면 이성을 잃고 싸우다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분명 다른 실험체를 봤을 때는 그러했다.

그런데 몇 대 맞고 나니 정신이 돌아와 버린 것이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줄이야...."

최악의 경우에나 사용할 만한 힘이다. 어떻게든 로잘린이라도 죽여 혼란을 만들려고 했는데 막히고 말았다.

지셀이 죽어 가는 제프리를 보며 중얼거렸다.

"흠, 이건 똑같네."

강한 충격을 주면 역시 효과가 사라진다. 아직 공작가가 개량을 끝내지 못했다는 뜻이다.

"하긴, 시기가 너무 차이가 나니까."

완전히 폭주할 정도로 개량된 것을 본 건 그가 용병왕에 오르고 난 후다. 지금과는 상당히 시간 차이가 있었다.

몸이 점점 쪼그라들며 급속도로 노화하기 시작한 제프리가 물었다.

"너, 넌 도대체 뭐냐...."

하지만 제프리는 물음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코어가 파괴되고 생명력까지 전부 소모됐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미라처럼 변한 그는 제대로 된 대답조차 듣지 못하고 죽어 버렸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떠올랐다.

"도대체 이게 뭐지?"

"죽기 직전에 괴물이 되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로잘린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지셀에게 다가와 급하게 물었다.

"이놈은 뭐죠? 이런 게 수도 곳곳에서 날뛰고 있다고요?"

"네, 공작가에서 만든 마나 연공법입니다."

"공작가에서 이런 끔찍한 걸 만들었다고요?"

"평범한 기사도 원래보다 몇 배나 강한 힘을 낼 수 있습니다. 물론 쓰면 반드시 죽지만, 그사이에 피해가 커지겠죠."

지셀은 자신이 아는 걸 로잘린에게 전해 주었다.

저 괴물들은 무시무시한 전력이지만 힘을 내는 데 시간제한이 있다. 정보를 알고 상대하면 못 잡을 리가 없었다.

"이놈들이 날뛰면 병사들의 피해가 커질 겁니다. 원래의 실력에 따라 낼 수 있는 힘이 다르긴 하지만, 기사들로 침착하게 상대한다면 상대 못 할 정도는 아닙니다."

익숙해지면 그냥 좀 강한 기사가 미쳐 날뛰는 수준에 불과하다. 기사들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정도다.

물론 이런 놈들이 수백 수천이나 날뛰면 상당히 곤란하겠지만 말이다.

"일단 이놈 수습을 부탁드립니다. 저는 다른 곳도 도와주러 가야 해서요. 다들 지금 놀라고 있을 테니까요."

"아, 알겠어요."

"그리고 준비할 게 많으니 이번 달 정산은 좀 서둘러 주세요."

"너는 나랑 돈 얘기 말고는 할 게 없냐!"

로잘린이 사자와 같이 우렁찬 외침을 내지르자 지셀이 깜짝 놀랐다.

"뭡니까? 지금 그 목소리?"

"앗,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속마음이 그만...."

그녀는 부채를 촤악 펼치며 얼굴을 가렸다. 물론 살기가 이글거리는 눈빛은 그대로였다.

'어우, 저 성격은 여전히 종잡을 수가 없네. 빨리 피해야겠다.'

지셀이 꺼림칙한 표정을 지으며 씩씩거리는 로잘린을 피해 바로 자리를 떴다.

콰앙! 콰아앙!

"으아악! 괴물이다!"

"미친놈이 나타났다!"

"도망가!"

로잘린이 있던 후작가 저택 외에도 수도 곳곳에서 난리가 난 상태였다.

폭주한 괴물들을 피해 사람들이 도망가고, 기사들과 병사들이 날뛰는 괴물들을 쫓았다.

"잡아라!"

"빨리 죽여!"

"어서 포위해라!"

수도 곳곳에서 기사들과 병사들이 바삐 움직였다.

이미 그들에게 잡혀 죽은 괴물들도 있었지만, 병사들을 죽이고 사방으로 흩어진 괴물들도 있었다. 그 괴물들은 목표도 없이 보이는 것들을 마구잡이로 공격하고 있었다.

물론 살아남은 괴물보다 죽은 것들이 훨씬 더 많다. 수도 기사들은 어지간한 영지의 기사들보다 실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별거 아니라 생각하고 소수의 인원만 간 곳이 문제였다. 갑작스럽게 폭주한 괴물들을 막지 못하고 놓치고 만 것이다.

지셀은 건물들 위를 뛰어다니며, 난동을 부리는 괴물들의 수를 빠르게 파악했다. 다행히 대부분이 그 자리에서 잡혀 죽었는지 많지는 않았다.

화르르륵!

그의 주변으로 검붉은 마력의 창들이 생성되었다.

"가라."

콰아아아앙!

엄청난 굉음을 내뿜으며 쏘아져 나간 마력의 창이 괴물의 머리를 박살 냈다.

지셀이 건물들 사이를 누비며 괴물들을 죽이기 시작하자 많은 사람이 그 모습을 보게 되었다.

"펜리스 백작님이다!"

"북부의 마스터께서 오셨다!"

"와아아아아! 성자님이다!"

지셀이 나타난 것만으로도 기사들과 병사들의 사기는 올라갔다. 도망가던 사람들도 걸음을 멈추고 환호를 내질렀다.

콰앙! 콰앙! 콰아앙!

괴물들은 마력의 창에 허무할 정도로 쉽게 머리가 터지며 죽어 나갔다.

수도에서 암약하던 놈들이 꽤 많았기에, 괴물을 죽여도 죽여도 어디선가 또 기어 나왔다.

하지만 이곳이 괜히 수도가 아니다.

"당장 저놈들을 잡아 죽여라!"

브랜포드 후작가의 기사단장 톨레오가 나타나 단숨에 괴물의 목을 베었다. 그 외에도 고위 귀족들의 기사들이 힘을 보태자 괴물들은 빠르게 죽어 나갔다.

마법사들까지 나서자 오히려 생포당하는 놈들까지 나왔다.

그 모습을 본 지셀이 피식 웃었다.

"하여간. 센 놈들을 다 수도에 모아 놓으면 어쩌자는 거야?"

왕실과 고위 귀족들이 있는 수도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지셀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아쉬운 일이기도 했다.

저 고급 전력들을 최전방에서 싸우게 해야 공작가와 화끈하게 맞부딪칠 텐데 말이다.

"슬슬 다른 쪽으로 가야겠네."

피해를 줄이기 위해 먼저 움직였지만, 실력자들이 나선 이상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제 귀족들이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곳을 치러 가야 한다.

지셀은 바로 쥬아나의 신전으로 향했다. 신전 안에는 한 사람이 무장 병력을 주위에 두르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포리스코 주교님."

"으... 백작님 오셨습니까?"

신전 기사들을 잔뜩 대동하고 있던 자는 바로 포리스코였다.

그는 현재 성자란 소문 때문에 나쁜 짓도 못 하고 무척이나 심심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명성이 또 싫지는 않아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중이었다.

차기 대주교 자리에 오르는 것은 확정되었으니 괜히 사달을 내고 싶지 않은 면도 있었다.

그는 지셀을 보자마자 슬그머니 다가가 속삭였다.

"진짜... 쳐도 되는 거 맞지?"

"그렇다니까요. 그놈들 다 공작가가 뿌린 놈들입니다."

"내 명성에 금이 가거나 그러진 않겠지?"

"오히려 더 올라갈걸요?"

"좋아, 너 믿고 진짜 친다."

"절 믿지 말고 주교님의 신앙을 믿으세요. 주교님은 수도의 제일 성직자이자 여신이 선택한 성자 아닙니까? 무지몽매한 백성들을 영도할 책임이 있죠."

"그, 그렇지? 역시 나밖에 없겠지?"

포리스코는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호기롭게 외쳤다.

"내가 아니면 누가 지옥에 가랴! 내 오늘 수도에 암약한 어둠을 치워 버리겠다!"

"와아아아아!"

포리스코가 외치자 신전 기사들이 다 같이 크게 함성을 내질렀다.

기세등등하게 움직인 그들이 향한 곳은 수도 외곽에 있는 큰 건물이었다.

[카르데니아 신학 연구회]

신학 연구회라 이름 붙었지만 실상은 여러 교단의 사람들이 모여 자발적으로 여신들의 뜻을 설파하고 봉사하는 곳이다.

귀족들은 그 명성과 위치 때문에 그들을 함부로 칠 수 없었다.

이들은 오랜 시간 수도의 어려운 이들에게 봉사하며 지냈다. 그러니 연구회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엄청나게 많을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곳이 공격당하면 민심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릴 것이다. 아무리 명분 없이 친다 해도 이곳만큼은 공격하기가 다들 껄끄러웠던 것이다.

정치와 종교를 철저하게 구분하며 지내는 것은 루타니아 왕국뿐 아니라 대부분 나라의 기조였다.

그런 상황에서 정치적 부담 없이 그들을 쓸어버릴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연구회에 못지않을 정도로 사람들의 민심을 얻은 자. 종교까지 등에 업고 성자라 소문이 난 자.

그런 자가 이곳을 상대해야 했다.

그리고 이 수도에는 그에 부합하는 인물이 한 명 있었다.

"당장 저 이단 새끼들... 아니, 이단자들을 끌어내라! 재물은 모두 압수하고 화형식을 진행하겠다! 으하하하!"

가짜 성자 포리스코가 광기 어린 웃음을 흘리며 외쳤다.

381화 네놈이 여기 있을 줄이야. (3)

지셀은 눈이 돌아 외치는 포리스코를 보며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어떻게 참고 살았나 몰라.'

포리스코는 그 위치를 이용해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다 저지르고 다니던 놈이다.

그런데 성자라 소문이 난 뒤부터는 억지로 착한 척을 하고 살아왔다. 그러다 누구를 괴롭힐 기회를 얻자마자 그 본성이 나와 버린 것이다.

"빨리, 빨리 다 끌어내라! '진짜' 교단의 엄중함을 보여 줄 것이다! 이 천벌을 받을 것들!"

신이 난 포리스코의 명령에 신전 기사들이 대거 건물로 들어갔다.

여러 교단의 사람들이 모여서 봉사하는 곳이다 보니 건물은 꽤 큰 편이었다. 안에 있는 사람도 많을 테지만 포리스코는 별걱정이 없었다.

'후후, 그냥 첩자 나부랭이들이 뭘 할 수 있겠어?'

포리스코가 알기로는 그저 첩자들이 모여서 봉사활동이나 하는 척하는 곳이다.

첩자들인 만큼 기본 실력은 있겠지만 신전 기사들의 상대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신전 기사는 사제만큼은 아니더라도 약간의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다. 거기에 상당한 무력도 쌓고 있다.

한 마디로 자가 치유가 가능한 기사라 할 수 있다. 고작 첩자들에게 질 리가 없었다.

그렇게 포리스코가 화형식을 어떤 화려한 방식으로 치를까 고민하고 있을 때,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챙그랑!

"응?"

2층 창문이 부서지며 신전 기사 하나가 떨어졌다. 포리스코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뭐야?"

조금 강한 놈이 있었나 포리스코가 의아해하던 그때, 건물 안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괴물이다!"

"어서 죽여라!"

콰앙! 콰앙! 콰앙!

상당히 소란스러웠다. 무언가 깨지고 박살 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다른 건 몰라도 눈치 하나는 빠른 포리스코다. 지금껏 그를 살렸던 위기 감지 능력이 발휘됐다.

포리스코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며 중얼거렸다.

"고작 봉사 단체 하나 치는데 왜 이렇게 요란할까?"

콰아앙!

갑자기 문이 박살 나며 신전 기사의 시체가 튀어나왔다. 포리스코의 몸이 조금 더 뒤로 움직였다.

"크르르르...."

몸이 비대하게 부푼 괴인이, 짐승과도 같은 울음소리를 흘리며 나타났다. 옷이 모두 찢어지고 몸 곳곳에 피가 흐르고 있어 무척이나 징그러워 보였다.

"으헉! 저거 뭐야! 괴, 괴물이다!"

포리스코가 기겁하자 호위를 맡고 있던 신전 기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도 처음 보는 괴생명체에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나온 괴물은 그것 하나가 아니었다.

"크르르륵!"

신전 기사들의 시체를 들고 있는 괴물들이 수십이나 줄지어 나왔다.

쿠웅! 쿠웅! 쿠웅!

창문을 통해서 뛰어내린 괴물들도 무려 열 놈이 넘었다. 문을 부수고 나온 놈들까지 합하면 모두 삼십여 마리다.

그 모습을 본 지셀이 눈을 찌푸렸다. 다른 곳과 다르게 괴물들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영지의 기사단도 상대할만한 수였다.

그리고 기존 것들과는 다른 점도 있었다.

"크르륵...."

괴물들이 마치 대열을 짜듯 일렬로 늘어선 것이다. 이성을 잃고 무작정 달라붙던 다른 놈들과는 달랐다.

'조금 더 개량된 놈들인가?'

확실히 전생에는 정신을 유지하는 놈도 있긴 했었다.

지금 나온 놈들은 분명 기존 괴물들보다 개량된 놈들이 분명했다.

지셀이 눈을 가늘게 뜨고 괴물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건물 안에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딸랑.

그 소리는 묘한 마력 파동을 싣고 있었다.

'이 소리는?'

지셀이 흠칫 놀람과 동시에 괴물들이 움직였다.

"크아아아!"

수십여 마리의 괴물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자 포리스코가 깜짝 놀라며 외쳤다.

"막아! 막아!"

남은 신전 기사는 고작 열 명이었다. 이 숫자로는 저 괴물들을 막을 수 없다.

그래도 도망갈 수는 없기에 그들은 이를 악물며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그때, 지셀이 싸움에 끼어들었다.

콰아아아앙!

"크아아아!"

지셀이 신전 기사들의 앞을 막으며 한 바퀴 몸을 돌리자 괴물들의 몸이 단번에 터져 나갔다.

'더 약하군.'

괴물은 변하기 전의 실력에 비례해서 강해진다. 이놈들은 무언가의 통제에 따르고 있지만, 정작 힘은 약했다. 변하기 전에는 기껏해야 일반인 수준이었을 만한 힘이었다.

그조차도 초급 기사보다는 강한 편이었지만 말이다.

육편이 되어 사라지는 괴물들을 보며 포리스코가 다시 외쳤다.

"으하하하하! 펜리스 백작은 마스터다!"

생각해 보니 여기에 왕국에서 강하기로 손꼽히는 강자가 있다. 도망갈 필요가 없었다.

딸랑.

"크르르륵...."

뒤이어 덤비려던 괴물들은 종소리가 다시 울리자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건물 안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창백한 얼굴에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남자는 무척이나 마르고 초췌해 보였다.

남자는 이 상황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혼자 중얼거렸다.

"이런.... 도대체 어떻게 알고 온 거지? 하필이면 내가 왔을 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지셀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분명 전생에 본 기억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 기억을 떠올린 지셀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네놈이 여기 있을 줄이야. 라비에르."

라비에르라 불린 남자는 눈을 찌푸리며 지셀을 바라보았다.

"날... 알고 있어?"

"그럼, 잘 알고 있지."

지셀은 정말 반갑다는 표정을 지었다.

라비에르는 전생에 지셀을 막았던 숨겨진 강자 중 한 명이었다. 그 특이한 능력 때문에 기억에 선명하게 남았던 놈이다.

라비에르는 지셀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대가 펜리스 백작인가?"

"그래."

"역시 마스터에 올랐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성전사'들을 이렇게 쉽게 죽이다니."

"성전사? 그 괴물들을 그렇게 부르나?"

전생에는 그냥 보이는 대로 때려잡았으니 괴물들이 어떻게 불리는지는 몰랐다. 라비에르란 이름도 죽이기 직전에 들었을 뿐이다.

라비에르는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죽음이 예정되어 있음에도 그 목숨을 아끼지 않으니 그 얼마나 숭고한가. 성전사라 불리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음이로다."

"사람 몸을 실험체로 쓰면서 참 거창하게 포장하는군."

"대업을 위해서 필요한 희생일 뿐이다."

지셀은 라비에르의 말을 듣고 살짝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는 지금까지 이 괴물들을 공작가가 만들어 낸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라비에르가 하는 말을 들으니 아무래도 엉뚱한 놈을 의심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지셀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한번 상대를 떠보았다.

"네놈이 만든 건가?"

그 말에 라비에르가 고개를 저었다.

"연구를 시작한 건 나지만 지금은 여러 사람이 참여하고 있다."

"네놈이 시작한 건 맞네. 나머지 놈들도 찾는 대로 다 잡아 죽여야겠군."

지셀이 이죽거리자 라비에르가 우습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말했다.

"펜리스 백작. 마스터에 올랐다고 무척이나 오만하구나. 네놈은 우리의 힘을 모른다."

"아니, 잘 알고 있어. 구원교의 심판관, 라비에르."

그 말에 라비에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자신들의 정체를 아는 자는 극소수였다. 자신들과 아무런 접점이 없는 펜리스 백작이 자신의 직책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게 충격적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포리스코가 외쳤다.

"구원교? 저, 저, 저! 역시 이단 놈들이었구나. 다, 당장 저놈을 죽여라!"

하지만 신전 기사들은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솔직히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 분위기가 아니었다.

라비에르는 포리스코를 무시하고 지셀을 노려보았다.

"왕국의 정보 단체도 우리의 정체는 모른다. 도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거기에 내 신분까지 알고 있다니... 도대체 너는 누구냐."

"왜? 너희만 비밀이 있으라는 법 있나? 나도 비밀이다."

"이놈이...."

지셀은 여유로운 웃음을 지었다.

사실 그도 구원교에 대해 많이 아는 건 아니었다.

이글거리는 검은 태양을 상징으로 내세운 구원교는 환란의 시기에 갑자기 나타났다. 당시는 절망에 빠진 사람이 많았고, 그만큼 많은 사람이 구원교를 믿게 되었다.

당시 지셀을 비롯한 대륙의 귀족들은 구원교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들은 한낱 사이비 종교에 신경 쓸 만큼 한가하지 않았으니까.

단지 여신의 교단들이 극렬하게 구원교에 반대하며 놈들을 탄압하려 했을 뿐이다.

'그때는 그놈들이 탄압을 피해 델파인 공작을 도왔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이미 이때부터 손을 잡은 상태였군.'

지셀이 그들에게 관심을 둔 건 1년 전쟁이 시작된 후였다. 루타니아 왕국이 지셀에게 짓밟히자 여러 곳에서 숨어 있던 강자들이 나타났다.

그중 몇몇이 구원교에서 파견된 걸 알게 된 지셀은, 구원교도 보일 때마다 같이 쓸어버렸다.

라비에르도 그 당시에 모습을 드러냈던 강자 중 한 명이었다.

'그때 더 자세히 알아봤어야 했는데.'

어차피 지셀의 목적은 델파인 공작이었다. 단순히 공작가와 구원교가 손을 잡았다고만 생각했으니, 구원교 쪽 정보를 얻는 데는 조금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공작부터 잡고 나중에 쓸어버리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결국 전쟁에서 패배하고 죽어 버렸으니 더 알아보고 싶어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뭐 이제부터 알아보면 될 일이지.'

지셀이 씨익 웃으면서 검으로 라비에르를 가리켰다.

"심판관이면 교단에서 제법 높은 위치겠지? 네놈 입에서 무슨 얘기가 나올지 궁금하네. 내가 고문에는 일가견이 있거든."

"약속의 날이 아니기에 아직 힘을 보일 때가 아니지만...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여기서 너를 없애는 게 나을 거 같구나."

라비에르의 눈이 붉게 빛났다. 동시에 검은 기운이 그의 몸에서 피어올랐다.

지셀은 그 모습을 보고 입매를 비틀었다.

'역시.... 이놈들은 이 당시에도 힘이 있는데 숨어 있었군. 뭘 노리는 거지?'

라비에르의 검은 기운은 마력이 아니었다. 오히려 신성력에 가까운 느낌을 풍겼다.

구원교는 신성력과 닮은 그 특유의 기운 때문에 검은 교단이라 불리기도 했다.

초창기에는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처음에 사람들은 구원교 사제들의 힘을 보고 두려워했다. 하지만 흑마법이 아니니 그 핑계로 탄압을 할 수도 없었다.

평화로운 시기였다면 귀족들과 기존의 교단들이 가만히 두지 않았을 것이다. 구원교는 환란의 시기를 이용해 정말 적절하게 세를 넓힌 것이다.

''약속의 날이 아니다'라... 설마 환란의 시기와 관계가 있는 건가?'

세상이 혼란스러웠던 때니 새로운 종교가 탄생할 수는 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뭔가 구원교와 관련이 있다는 느낌이 영 지워지지 않았다.

회귀라는 기적을 겪은 지셀은 언제나 작은 가능성과 단서도 허투루 넘어가지 않는 성격이 되었다.

그리고 라비에르가 말한 '약속의 날'은 내전을 뜻하는 게 아니라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뭐, 하나씩 잡아 죽이다 보면 알게 되겠지."

콰아앙!

지셀의 눈이 붉어지며 그의 몸에서 검붉은 마나가 뿜어져 나왔다. 라비에르의 힘을 알고 있는 그는 단숨에 짓쳐들어갔다.

딸랑.

"크아아아!"

라비에르가 작은 종을 흔들자 남은 괴물들이 전부 지셀에게 덤벼들었다.

지셀은 괴물들을 향해 바로 검을 휘둘렀다.

카가가가가각!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지셀의 일격에 터져 나갔던 놈들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강한 철판을 찢는 것처럼 무언가 걸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라비에르가 뿜어낸 검은 기운이 괴물들을 감싸 보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지셀의 검은 가장 앞에 있는 몇 놈밖에 가르지 못했다. 그리고 그 틈을 타 남은 괴물들이 전부 지셀의 몸을 덮쳤다.

라비에르는 그 모습을 보고 음산한 미소를 지었다.

"마스터라 소문난 것치고는 너무 약하구나. 과장된 소문이었던가."

딸랑.

그가 가볍게 종을 흔들자 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한 파동이 퍼져 나갔다.

동시에 라비에르의 검은 기운이 괴물들의 몸을 감쌌다. 그러자 괴물들의 몸이 전보다 더 크게 부풀기 시작했다.

지셀이 마나를 끌어올리며 괴물들을 쳐 내기도 전에.

콰아아아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괴물들의 몸이 폭발하며 검은빛의 기둥이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지셀의 몸은 아예 그 폭발의 기둥 안에 갇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포리스코와 남은 신전 기사들은 사색이 되어 자리에 주저앉았다.

"으, 으어어어... 뭐, 뭐야.... 이건 뭐야...."

포리스코는 겁에 질려 제대로 말조차 잇지 못했다. 마스터에 이른 펜리스 백작이 저렇게 허무하게 죽을 줄이야.

"도, 도대체 뭐야.... 이놈들 뭐야...."

이글거리며 하늘 높이 솟아오른 검은 빛의 기둥은 감히 그가 손쓸 엄두도 못 낼 정도로 위력이 강했다.

심지어 저 검은 기운은 신성력과 같은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포리스코는 그 사실을 이해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었다.

세상에 저렇게 불길한 신성력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라비에르는 이글거리며 솟아오르는 검은 빛의 기둥을 바라보았다. 저 기둥은 자신과 성전사들의 성력이 다해야 사라질 것이다.

"고작 저런 놈을 못 죽여서 방해를 받고 있었다는 말인가...."

라비에르가 불쾌한 감정을 얼굴 가득 드러냈다.

자신들을 쫓는 자들이 있는 상황이다. 저 힘을 내보인 이상 이제 자신도 안전할 수 없었다. 분명 추적자가 붙을 것이다.

그리고 수도 한복판에 저런 현상이 벌어졌으니 귀족들이 가만히 있을 리도 없었다.

"쯧... 웬 애송이 때문에 수도의 일은 실패군. 일단 몸을 피할 수밖에...."

라비에르가 몸을 돌리자 예의 그 검은 기운이 그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어서 빨리 이 자리를 피할 생각이었다.

그는 포리스코와 신전 기사들은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렇게 라비에르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는 찰나, 누군가의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왔다.

"어디 가?"

"...?"

라비에르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너...."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지셀이 사나운 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향해 오러 블레이드를 휘두르고 있었다.

382화 네놈이 여기 있을 줄이야. (4)

라비에르는 바로 정면에 검은 방패를 만들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지셀이 휘두르는 검이 조금 더 빨랐다.

촤아아악!

"크읏!"

그의 가슴이 길게 베이며 피가 뿜어 나왔다. 몸이 완전히 갈라지진 않았지만 뼈가 보일 정도의 중상이었다.

라비에르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연신 뒤로 물러났다. 충분히 거리를 벌린 뒤에야 그가 외쳤다.

"네놈이 어떻게!"

성전사들의 생명력을 불태우고 거기에 자신의 힘까지 한껏 얹어 시도한 공격이다. 어지간한 기사는 단숨에 재가 됐어야 정상이었다.

아무리 마스터라도 큰 부상을 입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이 실려 있었다.

과연 지셀의 몸도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치이이이이!

마치 화상을 입은 사람처럼 온몸에 수포가 끓어오르고, 머리카락도 불길에 일그러진 것처럼 타 버렸다.

찢어진 옷 사이로 보이는 몸은 아예 뼈가 보일 정도로 살점이 날아간 부분도 있었다.

그럼에도 지셀은 하얀 이를 내보이며 사나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지셀의 모습을 확인한 라비에르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으며 웃었다.

"아직도 웃고 있어? 허세를 부리는구나. 그런 상처를 입고 나와 싸울 수 있을 거 같으냐?"

스으으윽....

그가 검은 기운을 뿜어내자 가슴의 상처가 점점 아물기 시작했다. 정말 신성력과 같은 효과를 가지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그도 상처를 완전히 치유하지는 못했다. 아문 상처 안에는 여전히 지셀의 기운이 남아 날뛰고 있었기 때문이다.

혀를 차고 치유를 마친 라비에르가 말을 이었다.

"그 공격에서 살아남아 이 정도 기운을 남기다니.... 괜히 마스터란 소문이 난 게 아니구나. 그런데 그 몸으로 제대로 싸울 수는 있겠느냐."

지셀의 몸은 보기가 끔찍할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전투를 치른 지셀로서도 이런 상처를 입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 정도로 라비에르의 공격은 강력했다.

"페, 펜리스 백작!"

포리스코가 깜짝 놀라 달려왔다. 그는 겁이 많지만 눈치는 빠른 인물이다.

지금 여기서 펜리스 백작이 죽으면 자신의 목숨도 위험해진다는 것을 잘 알았다.

"내, 내가 치료해 주겠소!"

포리스코가 온 힘을 다해 신성력을 내뿜었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절실하게 신성력을 사용해 본 적이 없는 거 같았다.

치이이익!

하지만 지셀의 몸은 쉬이 낫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그가 가진 신성력은 상당히 조악한 편이었다.

애초에 신성력이 아니라 정치질로 주교 자리에 올라간 인물이었으니까.

하지만 조악해도 신성력은 신성력이다. 약하게라도 치유가 되어야 하는데 상처 곳곳에서 강한 저항이 느껴졌다.

마치 길리언의 딸, 레이첼이 걸렸던 '영원의 형벌'처럼 여신의 신성력을 강하게 거부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이게 왜 안 낫지?"

"크크크큭...."

당황하는 포리스코를 보며 라비에르가 한껏 비웃음을 지었다.

아주 강력한 신성력이 아니라면 자신의 공격을 쉽게 치유할 수 없다. 그렇기에 포리스코를 신경도 쓰지 않은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스스로의 힘으로 이겨내야 한다. 하지만 펜리스 백작은 상처가 심해 이제 그럴 힘도 없어 보였다.

"다른 놈들이 몰려오기 전에 빨리 처리해야겠군."

수도 한복판에서 이런 소란이 일어났으니 곧 병력이 몰려올 것이다. 라비에르의 손에 검은 기운이 뭉치기 시작했다.

그런 라비에르를 보며 지셀이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저벅.

절뚝거리며 다가오는 지셀을 보며 라비에르가 다시 웃었다.

"고집도 세구나. 도대체 그 몸으로 어찌 나와 싸운다는 것이냐."

드드드드드!

그는 말하면서도 멈추지 않고 더 힘을 모았다.

그래도 마스터랍시고 이미 한 번의 공격을 버텨내었다. 단숨에 죽이고 이 자리를 뜨기 위해서는 조금 더 힘을 써야 할 거 같았다.

저벅.

지셀은 말없이 라비에르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상처 때문에 절뚝거리는 모습이었다.

"이런 힘을 가지고도 뭐가 무서워서 공작가와 손을 잡고 뒤에서 수작을 부리고 있을까?"

지셀의 물음에 라비에르가 미소를 지었다.

"그저 시기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네놈들이 말하는 그 '시기'가 도대체 뭔데."

"내가 설명해 줘야 할 이유가 있나?"

지셀이 잠깐 걸음을 멈추고 라비에르를 심유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야기하다 보니 무언가 짐작 가는 게 있었다.

"역시 네놈들이었나?"

"뭐가 말이냐."

"대륙 곳곳에 이상한 괴물들을 풀어 사람들을 절망에 휩싸이게 하려는 놈들 말이다. 그게 네놈들이 말하는 '시기'냐?"

"...너, 도대체 누구냐."

라비에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건 자신들을 추적하고 있는 자들도 제대로 모르고 있는 일이다.

그런데 한낱 북부의 영주에 불과한 자가 자신들의 대계 중 하나를 알고 있다니.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어디서 정보가 새어 나갔는지 알아야 했다.

"도대체 어떻게 안 것이냐."

"글쎄...."

지셀은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역시 이놈들이었군.'

그의 통찰력과 직관은 작은 단서도 허투루 놓치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있는 건 심증뿐이라 떠본 것이지만, 라비에르의 반응으로 확실해졌다.

이놈들이 환란의 시기를 연 배후다.

그리고 환란의 시기가 멀지 않았다는 건, 이놈들도 대부분의 준비를 끝냈다는 것이다.

"앞당겨서 해야 할 일이 더 많아졌네."

저벅.

절뚝거리며 다가오는 지셀을 보며 라비에르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우리를 알고 있는 거지?'

'어디서 정보가 새어 나간 거지?'

'저놈을 잡아가야 하나?'

지셀이 회귀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상 그가 아무리 고민을 해도 답이 나올 리가 없다.

결국 라비에르는 지셀을 잡아가서 정신 지배를 하든 고문을 하든 답을 알아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마스터라고 해도 지금 몸 상태를 보면 충분히 잡아갈 수 있을 거 같았다.

'일단 확실히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고....'

라비에르는 천천히 다가오는 지셀을 보며 고민을 거듭했다.

'응?'

그러다 그는 어느 순간 이상함을 느꼈다.

치이이이익!

지셀의 상처 곳곳에서 검붉은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분명 심각한 상처임에도 저렇게 웃으며 여유롭게 다가오는 게 마음에 걸렸다.

다리를 절뚝거리던 지셀은 어느 순간부터 똑바로 걷고 있었다.

저벅.

지셀이 다시 한 걸음을 옮긴다.

저벅.

치이이이익!

라비에르의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저벅.

한 걸음씩 움직일 때마다 지셀의 상처가 사라지고 새살이 돋았다. 타 버린 머리카락도 빠지고 새로운 머리카락이 자라 찰랑거리고 있었다.

"무, 무슨...."

라비에르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기운을 모두 내보낸 것도 모자라 상처를 저렇게 빠르게 회복하다니!

펜리스 백작에게 저런 능력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저벅, 저벅, 저벅.

지셀의 걸음이 갈수록 더 빨라졌다.

그의 몸은 걷는 순간에도 계속 회복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미 마나는 다크 덕분에 넘칠 대로 넘치는 지셀이다. 즉사만 하지 않는다면 회복하는 건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네, 네놈은 도대체 정체가 뭐란 말이냐!"

라비에르가 경악감 가득한 비명을 내지르며 손을 뻗었다.

콰아아앙!

검은 번개가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갔다. 동시에 지셀의 검에서도 다시 오러 블레이드가 솟구쳐 올랐다.

파악!

콰아아앙!

지셀이 검을 휘두르자 번개가 갈라지며 주변의 건물들을 가루로 만들었다.

라비에르가 흠칫 놀라며 다음 공격을 준비하려 했지만, 그 전에 지셀이 그의 눈앞까지 순식간에 다가왔다.

"여전히 싸움은 못하는구나."

강한 힘을 가지면 무얼 하는가. 그걸 제대로 쓸 줄을 모르는데.

라비에르가 반응하기도 전에 지셀이 빙긋 웃으며 검을 휘둘렀다.

파아악!

"크아아악!"

라비에르가 가까스로 신성력을 뿜어내며 몸을 틀었지만 공격을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빠르게 뒤로 물러난 그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상처를 한 손으로 틀어막았다. 그의 반대쪽 팔은 어깨부터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크윽...."

라비에르가 잘린 상처에 신성력을 불어넣었지만 상처가 치유되지 않았다.

어찌 된 일인지 상처에 담긴 지셀의 기운이 아까보다 더 강하게 날뛰고 있었다. 아니, 날뛰는 걸 떠나 몸 안으로 더 파고들려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기운을 없애고 제대로 치유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거 같았다.

"이게... 너의 진짜 힘인가...."

얼굴이 조금 전보다 더 창백해진 라비에르가 중얼거렸다.

그는 7서클 마법사를 상회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교단에서도 제법 높은 위치를 차지한 것이었다.

거기다 신성력이란 힘은 적과 싸울 때 더 큰 힘을 발휘한다. 특유의 회복력과 방어력 덕분에 쉽게 쓰러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가 회복이 가능한 펜리스 백작에게는 그런 장점도 그리 큰 의미가 없는 거 같았다.

'더 힘을 써야 하는가....'

그가 침중한 눈빛으로 제 앞에 있는 지셀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더 힘을 쓰면 정말 위험해진다.

하지만 힘을 쓰지 않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었다. 상대가 여유를 부리고 있을 때 결판을 내야 했다.

과연 지셀은 검을 까닥이며 한껏 여유를 부렸다.

"항복하고 다 불래? 아니면 여기서 죽을래?"

"큭, 크크큭...."

자조적인 웃음을 지은 라비에르의 눈빛이 달라졌다.

쿠르릉!

갑자기 그의 두 눈에서 강렬한 보랏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등에서는 검은 기운으로 이루어진 날개가 뽑히듯 튀어나와 일렁거렸다.

하나만 남은 손의 손톱에서도 번개처럼 번뜩이는 검은 기운들이 튀어나와 길어졌다.

일렁이는 검은 기운이 몸 곳곳을 감싸며 타고 올라갔다. 마치 악마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본 포리스코가 다시 주저앉았다.

"아, 악마다! 악마다 나타났다! 여신이시여!"

하지만 지셀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마치 라비에르가 그런 모습이 될 줄 알았다는 듯.

라비에르는 지셀에게 이빨을 드러내며 말했다.

"그 여유,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군."

콰아앙!

라비에르가 빛처럼 빠르게 지셀에게로 쏘아져 나갔다. 순식간에 다가간 그가 손을 휘둘렀다.

터엉!

검을 들어 공격을 막은 지셀이 튕겨 나가듯이 뒤로 물러났다. 그가 자세를 바로잡기도 전에 라비에르가 다시 쇄도해 들어왔다.

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힘과 속도였다.

"죽어라!"

라비에르가 희열에 찬 웃음을 지으며 손을 휘둘렀다. 이 강대한 힘을 쓰고도 눈앞에 있는 애송이를 죽이지 못할 리가 없었다.

휘릭.

비틀거리던 지셀의 몸이 한 바퀴 돌아가며 라비에르의 공격을 피했다. 동시에 라비에르의 머리 위로 검이 떨어졌다.

"크읏!"

카아앙!

라비에르가 놀라운 반사신경으로 공격을 막았지만 지셀의 움직임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카가가가가강!

순식간에 수십 개의 검격이 라비에르에게 쏟아졌다.

라비에르는 그 모든 공격을 막아 냈다. 하지만 아무리 반격을 해도 지셀의 몸을 제대로 맞출 수가 없었다.

그의 공격은 애꿎은 허공만 갈랐다. 겨우 맞춰도 어느 순간 지셀의 검에 막혔다. 라비에르는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뭐지? 왜 제대로 맞지 않는 거지?'

분명 힘과 속도는 자신 쪽이 위다. 굳이 재 보지 않아도 확실하게 느껴진다.

펜리스 백작의 공격은 그 어떠한 것도 자신에게 통하지 않았다. 어느 방향에서 공격이 들어와도 놀라운 감각과 신체 능력은 찰나의 순간에 그것을 알아챘다.

설령 놓치더라도 이 강력한 몸은 충분히 공격을 막아 낼 정도로 단단했다.

문제는 저 움직임이었다. 라비에르가 반격을 시도하는 순간 이미 펜리스 백작은 시야에서 사라져 있었다.

'크읏... 이런 힘을 가지고도 압도하지 못한단 말인가!'

그는 대륙의 마스터들을 조금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자신의 힘이 그들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야 마스터란 이름이 가진 무게를 깨달았다.

'기술 격차가 이 정도나 되다니!'

마스터는 단순히 힘이 강한 자가 아니다. 끝없이 자신을 수련하여 스스로 그 자리에 올라간 자다.

그 과정에서 극에 이른 기술은 단순한 힘으로 재단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라비에르는 교단의 성직자로서 전투 담당이 아니기에 당연히 전투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자신이 받은 성력만으로도 어지간한 자는 다 이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계를 넘은 초인을 만나자 생각처럼 일이 풀리지 않았다. 자신이 가진 강대한 힘이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공격을 받아 내기는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콰앙! 콰앙! 콰아아앙!

두 사람은 남들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르게 움직였다. 두 사람이 부딪칠 때마다 강력한 충격파가 주변에 퍼져 나가 건물을 부쉈다.

그럼에도 둘 다 서로에게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했다.

힘과 속도는 라비에르가 우위였으나 지셀의 기술을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어가다시피 해서 자리를 피하던 포리스코는 덜덜 떨며 중얼거렸다.

"저, 저런 악마가 수도에 나타나다니... 말세다, 계시록에 적힌 말세가 온 거야...."

그나마 펜리스 백작이 마스터라서 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여길 치는 순간 꼼짝없이 죽을 뻔했다.

"그런데 저 악마.... 경전에서 본 거 같기도 한데...."

경전에는 수많은 악마의 형상에 적혀 있다. 문득 포리스코는 저 악마에 대해 적힌 구절을 읽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 설마...."

기억을 더듬던 포리스코는 지셀과 싸우고 있는 라비에르를 공포에 질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조, 종말을 알리는 악마...."

포리스코가 기억을 완전히 떠올리기 직전, 수많은 기사와 병사들이 몰려왔다.

"사, 살았다! 도와줘! 악마가 나타났다!"

경전의 구절은 포리스코의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그는 악마고 뭐고 자신의 안위에만 관심이 많았다.

몇몇 기사들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그를 부축하며 뒤로 물러났다.

곧바로 브랜포드 후작가의 기사단장인 톨레오가 크게 외쳤다.

"주변을 막아라! 저 괴물부터 잡는다!"

콰아앙!

지셀과 라비에르가 다시 맞부딪치며 서로 튕겨 나갔다. 톨레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끼어들었다.

그는 최상급에 이른 기사답게 위협적인 공격을 시도했다.

"흐읍!"

강렬한 푸른 마나에 휘감긴 검이 라비에르를 향해 날아들었다.

카앙!

라비에르가 급히 팔을 들어 검을 막았다. 하지만 다른 기사들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해 들어왔다.

"크읏, 이놈들!"

기술로는 초급 기사만도 못한 라비에르다. 거기에 후작가의 기사들은 모두 최정예라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라비에르는 힘으로 그 모든 차이를 상쇄했다.

콰아아앙!

그가 힘을 내뿜자 반투명한 검은색 구가 주변에 생성되며 후작가의 기사들이 모두 뒤로 튕겨 나갔다.

최상급에 이르는 톨레오조차도 순간 밀려날 정도로 강한 위력이었다.

하지만 지셀은 그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고 날아들어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앙!

겨우 막아 낸 라비에르가 지셀의 힘을 역이용해 뒤로 물러났다.

펄럭!

순간 라비에르의 등 뒤에 있는 검은 날개가 펄럭였다. 공중에 떠오른 그가 지셀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번에는 그냥 물러나마.... 다음에는 반드시 그 목을 베어 제단에 바치겠다...."

만약 시간이 더 있었다면 분명히 펜리스 백작을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 위험하다.

자신의 존재와 힘이 이렇게 오래도록 노출된 적은 처음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자신을 보았다.

그리고 아무리 라비에르가 강해도 펜리스 백작과 수도의 강력한 기사들을 모두 상대할 수는 없었다.

펄럭!

라비에르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더욱더 높이 떠올랐다.

톨레오와 기사들이 창에 마나를 가득 담아 던졌지만 라비에르는 유유히 그것들을 쳐 내고 곧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라비에르가 그렇게 사라질 때까지 지셀은 딱히 어떤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단지 정신을 집중하며 의식 속의 존재와 짧은 대화를 나눌 뿐이었다.

'최대한 붙어 있어라, 다크.'

지셀은 라비에르를 그냥 보내 줄 생각이 없었다.

383화 네놈이 여기 있을 줄이야. (5)

지셀과 의식이 연결된 다크가 엄살을 부렸다.

― 젠장! 이놈 안에 있는 기운이 계속 날 쫓아내려고 해! 버티기가 힘들어!

'어떻게든 버텨 봐. 지금은 도망가느라 상처에 집중할 수는 없을 테니까.'

― 알겠어, 마력을 잘게 쪼개서 최대한 티 나지 않게 있어 볼게.

지셀은 라비에르의 팔을 자르며 다크의 일부를 상처 안에 집어넣었다.

상처가 상당히 컸으니 라비에르로서는 기운의 잔재가 날뛰는 것과 구분하기가 힘들 터였다.

'조금이라도 확인을 해야 한다.'

구원교는 이 시기에 아예 정체가 드러나지 않았던 단체다. 지셀도 아는 정보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미래를 알고 대비하고는 있지만 조금이라도 더 정보를 얻어야 했다. 그래서 다크를 붙여 일부러 놓아준 것이다.

'설마 저놈들이 배후인가? 단순히 조력자가 아니라?'

전생에 델파인 공작은 구원교를 정식 종교로 인정해 주었다. 그렇기에 지원해 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전부터 손을 잡고 있는 걸로 보아 저놈들이 배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델파인 공작이 뭐가 아쉬워서?'

공작가의 힘은 한낱 종교에 의지할 정도로 약하지 않다. 지금도 왕국을 뒤엎을 만한 힘이 있는 그들이 왜 사교와 손을 잡겠는가.

'왕국 말고도 노리는 게 있군.'

그게 무엇인지는 아직 지셀도 모른다. 하지만 환란의 시기와 구원교, 그리고 공작가의 반역까지 전부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안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차라리 잘됐다. 지금부터 다 같은 패라 생각하고 움직이면 된다.

"후.... 그나저나 쉽지 않겠군."

자신도 모든 힘을 쓴 건 아니지만 그건 라비에르도 마찬가지였다. 전생에 본 그의 힘은 지금보다 더 강했다.

전투 사제가 아님에도 마스터와 맞대결 할 수 있을 정도로 강했다. 그런데 저런 놈이 교단에는 수십이나 존재한다.

후에 구원교와 싸우는 다른 강자들이 나타나긴 하지만, 그들만 믿고 기다릴 수는 없었다. 이미 구원교와 적이 된 지셀로서는 더 확실한 준비가 필요했다.

"백작님! 괜찮으십니까?"

톨레오가 허겁지겁 달려와 묻자 지셀은 생각을 머릿속 한구석으로 밀어 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음, 괜찮습니다."

"도대체 갑자기 나타난 괴물들은 뭐고 저놈은 뭐였습니까? 하늘을 날다니...."

톨레오는 숙련된 기사답게 갑자기 나타난 괴물들을 보고서도 당황하지 않고 싸웠다. 하지만 상황이 정리되니 궁금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수도에서 반란을 준비하던 놈들이 만든 괴물입니다."

"예, 예?"

"구원교라는 단체에서 만든 놈들입니다. 이건... 어느 정도 설명해 둘 필요가 있겠군요. 일단 후작님에게 가야겠습니다."

지셀은 바로 브랜포드 후작을 만났다. 포리스코도 반 강제로 끌려왔다.

브랜포드 후작은 난데없이 날벼락을 맞은 상황에 당황하고 있었다. 단순히 공작가의 숨겨진 꼬리를 쳐 내겠다고 벌인 일인데 듣도 보도 못한 괴물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톨레오와 기사들의 보고를 한참 듣고 난 뒤 후작이 지셀에게 물었다.

"구원교? 그게 무엇이냐?"

"공작가와 손을 잡은 사교 단체라 생각하면 됩니다."

"왕국은 4대 여신의 교단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도대체 그런 놈들이 어디서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는 말이냐."

"그것까지는 저도 모릅니다. 아마 공작가가 내전을 벌이면 함께 사람들을 선동할 생각이었던 거 같습니다."

지셀은 추측하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지만, 직접 눈으로 봤던 내용이었다.

전생에 곳곳에서 암약하던 공작가의 휘하 단체들은, 내전이 시작되자마자 사람들을 선동해 수도와 친왕파 영지 내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가뜩이나 가뭄 때문에 삶이 피폐해진 사람들이다. 영주들도 군대를 우선으로 챙기기 바쁘니 다들 살기가 더 힘들어졌다.

그들은 그 틈을 이용해 사람들에게 식량을 풀어 민심을 얻고 반란을 일으켰다.

특히 이번에 라비에르와 만났던 곳처럼 봉사 단체의 탈을 쓴 경우 민심을 휘어잡기가 더 쉬웠다. 그러니 친왕파는 공작가의 공격뿐 아니라 내부의 반란도 동시에 수습해야 했다.

'하지만 그때도 구원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지.'

지금 생각하면 조금 이상한 일이었다. 마치 환란의 시기가 올 때까지 어떻게든 자신들의 정체와 힘을 꼭꼭 숨기려고 하는 것 같지 않은가.

지셀은 적당히 둘러대며 말했다.

"그들은 강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 정체를 드러낼 생각은 없는 거 같습니다. 저도 이번에 그곳을 치다가 우연히 알아낸 거니까요."

"그... 하늘을 날아 도망갔다는 놈은 마법사였던가?"

"교단의 사제 같습니다. 싸워 보니 최소 7서클 마법사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더군요."

"...."

브랜포드 후작이 톨레오를 바라보자 톨레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펜리스 백작의 말이 맞습니다. 저와 기사단이 모두 덤벼들었는데 제대로 상처조차 내지 못했습니다."

"이런...."

브랜포드 후작은 이마를 짚었다. 정체도 모르는 놈들이 공작가와 손을 잡고 있다는 것도 골치 아픈데 초인급이 껴 있다고 한다.

심지어 그런 놈이 몇이나 있는지도 모른다. 만약 초인이 없는 전장에 그놈들이 끼어들면 엄청난 피해를 보게 될 것이다.

고민하는 브랜포드 후작에게 지셀이 말했다.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대로 다른 전력을 충원하면 됩니다."

"다른 전력? 어디에서 말이냐. 어느 한쪽 편을 들 만한 사람은 이미 다 갈라졌다."

지셀의 활약 덕분에 친왕파에서 이탈하는 귀족들의 수가 적어졌다. 중립을 표방한 귀족을 제외하고는 모두 어느 편에 설지 선택한 상태다.

브랜포드 후작의 물음에 지셀이 포리스코를 바라보았다.

"여신의 교단은 전부 이 전쟁에 참여해야 할 겁니다. 그렇죠? 포리스코 주교님."

"어? 어? 우리가? 우리가 왜 내전에...."

교단은 정치에 관여할 수 없다. 하물며 영지전에 참여하는 것도 금지인데 내전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지셀은 뭐가 문제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건 단순한 내전이 아닙니다. 이교도와 손을 잡은 공작가를 벌주기 위한 싸움입니다. 삿된 것들과 싸우는 건 교단의 임무 아닙니까?"

"그, 그렇지?"

지셀의 말대로, 이교도와 싸우는 건 교단이 해야 할 일이었다. 이교도와 엮이면 귀족이고 뭐고, 신분도 따지지 않고 무조건 잡아 죽여야 한다는 게 교단의 교리인 것이다.

그렇기에 전생에서도 모든 여신의 교단들은 구원교를 잡아 죽이려고 안달이 나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내전이 아니라 '성전'이라는 얘기지요."

"성전...."

포리스코의 코가 벌렁거렸다. 성전! 이 얼마나 가슴 뛰는 단어인가!

성전에 참여했다는 건 대대손손 자랑할 만한 영예지만, 솔직히 평생 살면서 겪어 볼 일이 없는 게 정상이다.

갑자기 포리스코가 가슴을 탕탕 치며 브랜포드 후작에게 외쳤다.

"본 주교와 신전 기사들이 그 악마의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우리 쥬아나 교단은 이 '성전'에 참여할 것이고 다른 교단에도 즉시 이 사실을 알릴 것입니다!"

"...크흠, 악마라 하셨소?"

"그렇습니다! 그 악마의 형상은 경전에 나와 있는 종말을 알리는 악마와 똑같았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우리가 참전해서 그것을 막아야지요!"

"...크흠, 흠."

브랜포드 후작은 몇 번이나 헛기침을 내뱉었다. 사실 그는 악마니, 종말이니 하는 걸 믿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무척이나 좋은 기회였다. 공작가에 이교도란 이미지를 씌우고 교단들이 정식으로 참전하는 명분을 만들 수 있으니까.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여론으로 조금 더 흔들 수 있겠구나.'

그렇게 된다면 공작가 휘하로 들어간 귀족 중에서도 이탈하는 자가 나올 것이다.

이교도란 낙인이 찍히는 건 강대한 귀족들에게도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었으니까. 그것도 4대 교단 모두에게 이단 취급을 당한다면 말이다.

브랜포드 후작이 지셀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 괴물들이 구원교에서 만든 괴물들이 확실한가?"

"네. 하지만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죠. 지금 상황을 최대한 이용해야 합니다."

공작가의 전력을 꾸준히 약화해 온 지셀이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지셀이 씨익 웃으며 답하자 브랜포드 후작도 웃음을 지었다.

그걸 구원교에서 만들었든 공작가에서 만들었든 사실 상관은 없었다. 이미 많은 사람이 그 괴물들을 봤다는 게 중요하다.

공작가가 이교도의 힘을 빌려 만든 실험체들이라고 소문만 내도 되는 일이었다. 증거도 충분하고 증인들도 충분하다.

브랜포드 후작이 곧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수도에 있는 모든 교단의 대주교와 귀족들을 소집하라. 이 일을 왕국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관련자를 모두 벌할 것이다."

그의 눈빛이 스산한 살기로 물들기 시작했다.

"또한 구원교를 사교로 지정하고 관련자들을 모두 색출한다. 검은 태양을 상징으로 하는 자들은 발견 즉시 체포하고 반항하면 죽여도 좋다. 이 사실을 왕국의 모든 귀족에게, 그리고 타국에도 알리도록 해라."

브랜포드 후작은 방침이 정해지자 거침없이 움직였다.

"마지막으로 델파인 공작가를 사교와 결탁한 왕국의 공적으로 지정한다. 공작가와 함께하는 귀족들 또한 마찬가지다. 모든 교단과 함께 그들을 징벌할 테니 결백한 자들은 스스로 증명하도록 하라."

명분 없이 공작가의 꼬리들을 치면서 솔직히 좀 불안했지만, 상황이 오히려 더 좋게 흘러갔다. 지셀 덕분에 공작가 쪽을 완전히 흔들 수 있는 상황이 온 것이다.

단순한 내전이라면 힘 있는 공작가 쪽에 붙는 것이 이득일 터다. 하지만 교단들이 친왕파의 손을 들어 준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공작파 귀족들은 이제 정말로 제대로 마음을 정해야 할 것이다.

후작가의 가신들이 모두 바쁘게 움직였다. 수도뿐만 아니라 각 영지에서도 공작가의 꼬리들을 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마 괴물들, 공작가가 사교와 결탁했다는 증거가 더 나올 수밖에 없게 된다.

브랜포드 후작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지셀에게 말했다.

"네 덕분에 또 일이 잘 풀렸구나. 교단들이 참전하면 무척 큰 힘이 될 것이다."

4대 교단의 사제들이 대놓고 전쟁에 참여한다면, 병사들은 싸우면서도 상처와 체력을 회복할 수 있게 된다. 기사들은 말할 것도 없다.

특히 전쟁의 여신을 모시는 사제들은 그 전투력마저 기사들 못지않다.

어지간한 병력이 참전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군대가 강해지는 것이다.

거기에 강력한 사교가 발호했다고 하면 타국에서도 지원을 보내 줄 수도 있다.

정말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브랜포드 후작은 인정했다. 이번만큼은 지셀이 정말 복덩이 중의 복덩이였다. 그래서 이번엔 자진해서 물었다.

"이제 돌아가겠구나. 가기 전에 혹 더 필요한 게 있느냐?"

"원래는 없었는데 이번에 싸우면서 필요한 게 또 생겼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라면 해 주겠다."

"드래곤 하트 조금 더 주십시오. 아니, 그냥 남은 거 다 주십시오."

후작은 잠깐 감정에 취해 호언장담했던 조금 전의 자신을 원망하며 되물었다.

"...왕실의 보물을 다 달라는 말이냐?"

"지금은 아껴야 할 때가 아닙니다. 조금이라도 전력을 강화해야 합니다. 어차피 얼마 남지도 않았잖아요?"

"그러니까 그걸 왜 너만...."

"지금은 보물이고 뭐고 정말 다 써야 합니다. 이제 상대 쪽에 초인이 얼마나 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친왕파에서 재능 있는 자들에게는 이미 다 써 보시지 않았습니까. 실패한 거 알고 있습니다."

"으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교단들까지 참여해서 이쪽 전력이 늘어난 건 맞지만, 저쪽에 정체불명의 초인들이 있는 것이 문제다. 어떻게든 이쪽의 전력을 조금이라도 더 강화해야 하는 건 맞았다.

하지만 지셀의 말처럼 친왕파에서는 새로운 초인을 만들 여력이 없었다. 재능 있는 기사들과 마법사들에게 드래곤 하트를 조금씩 떼어 주었지만 다들 경지를 넘어서는 데는 실패했다.

그 때문에 귀족들 사이에서 아깝게 드래곤 하트만 날렸다는 한탄이 한동안 돌기도 했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브랜포드 후작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정말로 그걸 쓰면 경지를 올릴 수 있는 자가 영지에 더 있느냐?"

충성심이 검증된 소수에게만 하사하는 최고의 보물이다. 그런데 드래곤 하트의 조각을 쓰고도 경지를 못 올리면 그만한 손해가 없다.

단순히 마력이나 마나만 올리는 데 쓰기에는 정말 아깝다.

물론 마나 양도 오르면 좋긴 하지만, 경지가 오르는 것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 그래서 왕실 마법사는 지금도 두고두고 욕을 먹고 있었다.

지셀은 걱정 말라는 듯이 말했다.

"제가 충분히 활용할 수 있습니다."

결국 브랜포드 후작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과한 걸 넘겨준다는 생각이 안 드는 건 아니지만, 그만큼 선물도 과하게 받았다.

특히 공작가를 사교 집단과 엮은 건 지셀이 준 지원품보다 더 큰 선물이었다. 아예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 아끼다가 전쟁에서 패하면 모두 의미가 없어지긴 하지.'

이미 이쪽에서는 쓸 만한 사람은 다 써 봤다.

결국 브랜포드 후작은 조금 더 지셀을 밀어주기로 결정했다.

"알겠다. 남은 걸 전부 줄 테니 그걸로 전력을 강화하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지셀이 즐거운 웃음을 지었다. 드래곤 하트를 쓰면 영지의 전력이 단번에 몇 단계 이상은 올라갈 것이다.

운이 좋게 구원교와 엮여서 가장 구하기 어려운 보물을 계획했던 것보다 더 많이 얻어냈다.

'어차피 그놈들이 대놓고 나타나면 상대할 놈들도 나타나긴 할 텐데.'

아마 그래서 그놈들이 숨어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셀은 그 사실은 끝까지 얘기하지 않았다.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에 이쪽의 전력은 올릴 수 있을 때 최대한 올려야 한다.

'좋아, 이제 당분간 더 얻을 건 없을 거 같네.'

언제나 챙길 수 있는 건 야무지게 죄다 챙겨가는 것이 지셀의 신조였다.

* * *

사방이 울창한 나무로 둘러싸인 숲.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사방에 피어난 꽃에 부딪혀 흩어지며, 숲을 무척이나 아름답고 신비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 숲의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나무 하나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이 솟아 있었다.

나무는 어찌나 큰지 밑동이 어지간한 마을 하나 크기는 될 정도였다.

그 나무 앞에는 한 엘프 여성이 의자처럼 엮인 덩굴 위에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엘프는 팔과 다리까지 모두 덩굴에 감싸여 도무지 움직일 수조차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무척 평화로운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짹짹짹짹.

사방에서 새들이 지저귀며 엘프 주위로 몰려들었다. 새들은 엘프의 몸 곳곳에 앉아 노래를 부르듯 재잘거렸다. 엘프는 미소 지으며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곧이어 사방에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와 그녀의 몸을 감쌌다. 땅에서 흐르는 기운도 그녀의 발에 닿아 들썩였다.

주변에 흐르는 작은 개울의 흐르는 소리가 그녀의 귀에 맴돌았다. 나뭇잎이 흔들리며 반짝이는 빛이 그녀의 얼굴을 간지럽히듯 흔들렸다.

그것들은 마치 세상의 모든 재미난 이야기를 그녀에게 전해 주는 것만 같았다.

한참 동안 조용히 미소를 짓고 있던 그녀가 갑자기 눈을 떴다.

번쩍!

그녀의 눈에 찬란한 연녹색의 정광이 스쳐 지나갔다.

엘프는 미소를 거둔 채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곳에 있었구나."

384화 너도 서클 좀 올리자. (1)

수도에 숨어 있던 공작가의 비밀 단체들은 대부분이 박멸되었다.

일부 성 밖으로 도망친 자들이 있었으나, 모두 대기하고 있던 왕국군과 길리언이 이끄는 지셀의 병력에 잡혀 죽었다.

명분이 없음을 걱정하던 귀족들도 괴물들이 나타난 걸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공작가가 사교와 손을 잡고 그딴 걸 만들었을 줄이야. 이번에 치길 잘했습니다."

"아주 잘된 일입니다. 왕국이 들썩일 겁니다."

"본 사람이 너무 많으니 공작가도 할 말이 없을 겁니다."

귀족들은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면서도 연신 웃음꽃을 피웠다.

종교의 힘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공작가를 사교와 엮은 이상, 어지간한 명분은 무시하고 공작파 귀족들을 압박할 수 있었다.

이러니 지셀의 명성은 또다시 높아졌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역시 성자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물론 그 소문을 들은 포리스코는 연신 입을 삐죽거렸지만 말이다.

'뭐? 그놈이 성자라고? 어이구, 그런 놈이 성자면 난 여신이다.'

세상 막 나가는 놈이 성자는 무슨 성자란 말인가.

그래도 덕분에 교단의 힘을 크게 키울 기회를 얻었다. 이런 건 다른 교단보다 더 먼저 움직여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명성도 올라가기 때문이다.

"빨리, 빨리! 전역의 신전 기사들을 모아라! 사제들도 돌아오라고 해! 브랜포드 후작과 상의해서 다시 배정해 주겠다! 아, 펜리스에 있는 애들은 내버려 두고."

루타니아에 있는 쥬아나 교단은 이미 포리스코가 장악한 상태다. 그는 허수아비가 된 대주교를 대신해 모든 일을 지휘했다.

그렇게 다들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때, 지셀의 손에 드디어 드래곤 하트가 들어왔다.

브랜포드 후작은 조금 찝찝해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에게나 주는 물건이 아니니 꼭 필요한데 쓰도록 해라."

"걱정하지 마십시오. 분명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지셀이 씨익 웃으며 드래곤 하트를 살펴봤다.

온전한 드래곤 하트가 아니기에 크기는 상당히 작았다. 고작 어린아이 주먹 정도의 크기.

하지만 이 안에 담겨 있는 힘은 누구라도 탐낼 만큼 강대했다.

이걸 사용한다면 펜리스의 전력은 전보다 훨씬 더 빨리 강해질 것이다.

"역시 후작님이십니다. 이렇게 빨리 일을 처리해 주시다니요."

무려 왕실의 보물이다. 재상과 상의해서 꺼냈다고는 하지만, 브랜포드 후작이 결정하면 누구도 반대할 수 없을 것이다.

국왕은 병에 걸려 누워서 겨우 목숨만 연명하고 있는 상태다. 그러니 왕국의 대소사는 모두 브랜포드 후작의 손에 달려 있었다.

실상 이번 내전은 브랜포드 후작과 델파인 공작의 싸움이나 마찬가지였다.

인사를 하고 나가던 지셀은 문득 궁금한 게 생겨 물었다.

"후작님은 왕이 될 생각이 없으십니까?"

이자가 진작에 왕이 됐다면 왕국은 어쩌면 더 평화로웠을지도 모른다. 전생에 페르디움이 멸망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물론 전생에서 내전 과정을 모두 지켜봤기에 후작이 어떤 대답을 할지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지셀은 브랜포드 후작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다.

그의 물음에 브랜포드 후작이 피식 웃었다.

"실없는 소리 말거라. 왕실을 지키는 것이 내 소임이다."

"그렇게 말씀하실 거 같았습니다."

지셀도 마주 보고 웃은 뒤, 몸을 돌렸다.

누구나 자신의 일생을 다해 지키고 책임지고 싶은 게 있는 법이다.

브랜포드 후작에게는 그것이 이 왕국과 왕실이리라.

* * *

"그놈들이 단순히 조력자가 아니라 배후일 수도 있겠고...."

지셀은 영지로 돌아가는 길에 계속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만약 이번에 라비에르를 만나지 못했다면 여전히 공작가가 마나 연공법을 개량해서 뿌리는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라비에르는 자신이 직접 연구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아이던이 말했던 놈들이 구원교 놈들일 가능성이 크군."

전생에 자신의 목을 베었던 아이던은 타국의 사람이다. 그가 루타니아까지 올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 또한 구원교 소속이라면 대충 그림이 맞아떨어진다.

구원교는 단순히 전쟁 때만 델파인 공작가를 도와준 게 아니라 이미 배후에서 움직이고 있었다는 뜻이다.

"도대체 그놈들이 뭘 노리는 걸까?"

단순히 왕국을 엎는 것뿐이라면 구원교가 끼어들 필요도 없다. 공작가가 가진 힘만으로도 진작에 가능했었다.

그렇다는 건 다른 목적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지셀은 지금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몇 가지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마수의 숲에 뭔가 있군."

처음 마수의 숲을 건드렸을 때 해럴드는 바로 반응을 보였다. 공작가의 명령 없이 그럴 리는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 전생에 구했던 정보에도 이상한 점이 있었다.

"마수의 숲 지도에는 가려 놓은 부분이 있었지."

어지간한 고위 관리자도 접근하지 못했던 정보라 지셀도 알아내지 못한 부분. 바로 마수의 숲 지도에 까맣게 칠해져 있던 부분이었다.

전에 그렉스들을 잡을 때도 뭔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확실히 그 부분이 구원교와 관련이 있다는 감이 왔다.

"마수의 숲이 필요한 놈들과 왕국을 전부 차지하고 싶은 놈들이 손을 잡았다고 해야겠군."

하지만 지금 마수의 숲은 자신의 손에 있다. 결국 그놈들도 자신과 결판을 내야 그곳을 차지할 수 있다는 뜻이다.

'어차피 내전이 코앞이니 싸우다 보면 줄줄이 엮어 나올 게 분명해. 굳이 먼저 찾아다닐 필요는 없겠군.'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지셀은 영지에 도착했다.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바로 가신들을 소집했다.

"새로운 마나 집속진을 만든다."

클로드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마나 집속진은 영지에서 넘쳐나는 룬스톤을 이용해 계속 만들고 있었다.

기사들과 마법사들의 실력을 조금이라도 더 늘리는 데 필요한 일이다. 당연히 아낄 리가 없었다.

"새로운 마나 집속진이 뭡니까?"

"바로 이것을 조금씩 추가해서 만들 거야."

지셀이 작은 덩어리를 꺼내자 다들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마나를 느낄 수 있는 몇몇만이 표정을 굳혔다.

마나는 개미 눈곱만큼도 느낄 줄 모르는 클로드가 이리저리 그것을 살펴보다 다시 물었다.

"그게 뭔데요?"

"드래곤 하트."

"푸훕!"

클로드가 거하게 비웃음을 터트렸다.

그도 드래곤 하트가 뭔지는 안다. 드래곤을 잡아야 얻을 수 있는 보물이 드래곤 하트다.

그리고 지셀은 드래곤을 잡은 적이 없다. 아무리 영주가 강해도 드래곤과 싸우면 피떡이 될 거라 확신했다.

"아이참, 그건 또 무슨 장난이에요. 웬디야, 봐 봐. 저게 드래곤 하트래."

클로드가 안 속겠다는 마음으로 웬디를 부르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상해서 주변을 둘러보니, 마나를 다룰 줄 아는 인물들은 다 같은 표정이었다.

오직 지셀을 따라 수도에 갔던 길리언만 별 표정 변화가 없었다.

"지, 진짜 드래곤 하트예요?"

"그렇다니까?"

"우, 우와아아! 그거 뭐예요! 어디서 얻은 거예요?"

"왕실의 보물을 받아 온 거야. 대단하지?"

지셀이 자랑스럽게 말하자 가신들은 모두 경악했다.

드래곤 하트는 일국의 왕이라도 내어주길 아까워하는 보물이다. 도대체 무슨 일을 했길래 저런 걸 받아 올 수 있었을까?

지셀은 가신들에게 수도에서 있었던 일을 적당히 설명했다. 가신들은 들으면서도 믿기가 힘들었다.

갑자기 엉뚱한 사교가 튀어나오고 괴물들도 나오고. 그냥 지어낸 이야기 같았다.

물론 지셀은 가신들이 믿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아무튼 그런 일들이 있었으니까 우리도 준비할 게 많아. 빨리 마법사들 전부 모아서 새로 마나 집속진을 만들도록 해. 마법진마다 들어갈 양은 내가 정해서 쪼개 주겠다."

손톱보다 작은 조각이라도 어마어마한 마력을 품고 있는 게 드래곤 하트다. 분명 기사들의 수련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수도에서 있었다는 일이 진짜였든 영주의 허풍이었든, 영주가 드래곤 하트 조각을 얻어 온 건 사실이었다. 다들 흥분해서 왁자지껄 떠들며 대전에서 나갔다.

그 틈을 타 지셀이 바네사를 따로 불렀다.

"7서클에 대한 깨달음과 지식은 충분하지?"

"그, 그게... 그렇게 생각은 하는데, 마력이 부족해서 잘 모르겠어요."

바네사가 안절부절못하며 답했다.

7서클 마법서는 적염의 마탑에서 잔뜩 얻어왔다. 예전처럼 룬스톤으로 실험도 잔뜩 거쳤다.

하지만 마력은 현재 3서클도 채 되지 않으니 확신할 수가 없었다.

지셀은 작게 쪼갠 드래곤 하트를 꺼내며 말했다.

"괜찮아. 이걸 흡수하면 확실히 오를 수 있을 거야."

"여, 영주님. 그럴 수는 없어요. 그런 보물은 여러 사람을 위해서 쓰여야...."

"아니. 우리 영지에는 강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필요해. 바로 시작할 테니까 준비해."

바네사가 거절해도 지셀은 전혀 들어 주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를 위해 이걸 얻어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언제까지 다른 마법사들의 마력을 빨아먹으면서 싸우게 할 수는 없었다. 다른 마법사들은 그들 나름대로 할 일이 있었다.

지셀의 강권에 못 이겨 바네사는 어쩔 수 없이 연무장에 가 자리에 앉았다.

"이번에는 내가 도와줄 필요는 없을 거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 옆에 있어 줄게."

"네...."

바네사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드래곤 하트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지셀이 알려 준 마나 연공법을 이용해서 흡수만 하면 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으읏!"

이 작은 조각에서 엄청난 마력이 그녀의 몸으로 흘러 들어갔다.

보통 마나 연공은 대기 중에 있는 마나를 조금씩 흡수해 자신의 마나를 늘리는 방식이다. 한 번에 흡수할 수 있는 양도 한계가 있다.

하지만 드래곤 하트의 마력은 조각에 있는 그대로 전부 몸 안에 파고 들어갔다. 그걸 버틸 수 있느냐 없느냐는 사용자의 의지와 실력에 달려 있다.

대기 중에 있던 마나와 비교도 안 되는 높은 밀도의 마력이 몰려 들어오니 버티기가 힘들었다.

"으으으...."

그래도 바네사는 이를 악물며 참아 냈다.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면 마나가 다시 빠져나갈 것이다.

'할 수 있어.'

'버텨야 해.'

'내가... 내가 더 강해져야 해.'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는 달랐다. 그녀는 이제 영지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전력이자 마법사들의 스승이었다.

하지만 바네사는 단순히 그런 의무감만으로 버티는 게 아니었다.

'영지를... 지켜야 해....'

이 영지에 와서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이곳이 누군가에게 짓밟히는 건 원하지 않았다.

처음 전쟁에 나섰을 때처럼.

바네사는 누군가의 부탁과 명령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로 이곳을 지키고 싶어 했다.

구오오오오!

흡수된 마력이 그녀의 몸에서 뛰쳐나가려고 날뛰기 시작했다. 바네사는 온 힘을 다해 그것을 통제하려고 했다.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몸이 부풀어 올라 터질 것만 같았다.

'할 수... 있어....'

마나 연공으로 자연스럽게 마력을 모을 때와는 달랐다. 보물을 이용해 억지로 마력을 늘리는 데는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녀의 몸 곳곳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지난한 과정에 정신이 꺼져만 가는 거 같았다. 버티려고 했지만 도무지 버티기가 힘들었다.

'실패... 인가....'

역시 드래곤 하트 같은 보물은 아무나 흡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그렇게 정신을 잃어 가기 시작할 때.

지셀의 목소리가 그녀의 정신을 깨웠다.

"잘 버텼어. 바네사."

쩌엉!

바네사의 눈이 번쩍 뜨였다. 동시에 엄청난 마력이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그 마력은 연무장 밖까지 퍼져 나가 다른 이들까지 깜짝 놀라게 했다.

"아...."

바네사는 자신이 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힘이 넘치다 못해 폭발할 것만 같았다.

그간 다른 사람의 마력을 흡수하며 마법을 시전했다. 고통스럽기도 했지만, 마력의 순도가 그리 높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몸 안에서 꿈틀거리는 이 힘은 다른 사람의 마력을 흡수할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순수하고 깨끗했다.

마력의 순도는 효율과도 연관이 있다. 순도가 높을수록 더 빠르게 마력을 움직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게... 내가 얻은 힘...."

혼자 중얼거리던 그녀가 살짝 손을 들어 올리자.

지잉―! 지잉―! 지잉―!

수십 개의 마법진이 허공에 단번에 만들어졌다. 마법진 하나하나에 들어간 마력은 최소 4서클 이상이었다.

그걸 본 지셀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역시 전생과 같군.'

그간 마력이 부족해서 제대로 쓰지 못했던, 그녀의 장기인 다중 영창이 드디어 제대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저서클 마법 정도는 수십, 수백 개를 동시에 시전할 수 있는 재능이다.

한 마디로 바네사 혼자서 수십 명의 마법사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주님...."

바네사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지셀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3일이나 걸린 거 알아?"

"네? 3일이나요?"

그녀가 깜짝 놀랐다. 상당히 시간이 많이 지난 거 같기는 했는데 앉은 자리에서 3일이나 지났을 줄이야.

거의 무아지경에 빠져 있어서 시간이 그렇게 지난 줄도 몰랐다.

그런데 지셀이 계속 옆에서 지켜 주고 있었을 줄이야.

"죄, 죄송해요. 바쁘실 텐데 저 때문에...."

"괜찮아. 이 영지에 새로운 초인이 탄생하는 일인데 그 정도 해 주는 건 어렵지 않지."

지셀은 정말 기분이 좋았다. 이제 명실공히 바네사는 이 왕국의 초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 힘은 앞으로의 전쟁에 무척이나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이 기분 좋게 웃고 있을 때, 사람들이 연무장으로 달려왔다.

"도련님! 뭐예요?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누가 혼자 좋은 거 다 먹은 거야!"

"바네사! 정말 7서클이 된 거야?"

벨린다와 카오르, 알포이 등이 허겁지겁 찾아왔다. 소름 끼칠 정도로 강력한 마력이 퍼지는 걸 느끼고 달려온 것이다.

지셀은 그들을 보고 마침 생각난 게 있다는 듯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엄지손톱보다 더 작은, 자투리처럼 남은 드래곤 하트의 조각이었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알포이에게 다가가 말했다.

"알포이."

"응?"

"너도 서클 좀 올리자."

"엑?"

알포이가 멍청한 얼굴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385화 너도 서클 좀 올리자.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