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5화 그냥 부숴 버리자. (2)
린더스타인은 왕국에서도 한 손에 꼽힐 정도로 무척이나 크고 견고한 성이다. 서부 사람들은 왕국의 수도인 카르데니아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또한 로드리크 후작은 서부의 병력을 싹싹 긁어 오면서도 봉신들의 반란과 도적들을 견제하기 위해 2만이나 되는 수비군을 린더스타인에 두고 왔다.
그렇기에 테넌트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린더스타인은 거대한 성입니다. 아무리 펜리스 백작이 마스터라 해도 홀로 점령할 수 없는 크기입니다. 수비군도 2만이니 지원군이 갈 때까지 충분히 버텨 낼 수 있을 겁니다. 펜리스 백작은 현재 제대로 된 보급선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로드리크 후작과 다른 가신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의 본진이 얼마나 버티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것이다.
어차피 보급선이 긴 것은 서로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펜리스 백작의 군대도 1만이나 되니, 주변을 약탈하며 보급을 채우기도 힘들 것이다.
얼마 전에 약탈당했기 때문에 봉신 영지에는 남은 재산이 거의 없다. 약탈당하지 않은 영주들도 후작에게 병력을 보내며 식량 대부분을 딸려 보냈다.
로드리크 후작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전에도 2만이나 보냈는데 펜리스 백작을 잡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는 1만의 군대까지 이끌고 있다. 이번에도 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있나?"
테넌트가 전혀 문제가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쪽의 병력은 2군단의 4만과 후작령의 수비군 2만, 총 6만입니다. 이 정도 수로는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습니다. 공성 중인 펜리스 백작의 뒤를 치면 됩니다."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강해지는 게 군대다. 병력이 6배나 차이가 나는 이상, 아무리 마스터라 해도 당해 낼 수 없을 것이다.
테넌트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펜리스 백작은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결국 싸움을 피할 겁니다. 지금 그는 우리를 흔드는 게 목표일 테니까요."
"흐음...."
"펜리스 백작이 물러나면 2군단으로 하여금 보급선을 지키게 하면 됩니다. 펜리스 백작의 병력은 고작 1만. 보급선을 끊지 못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 사이 저희가 펜리스를 점령하면 그는 갈 곳도 잃게 됩니다."
로드리크 후작이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2군단을 후작령으로 돌려보내라. 이번에야말로 펜리스 백작을 잡아 죽이도록."
전부 우르르 몰려가서 펜리스 백작에게 끌려다니는 것은 하책이다. 본진을 지키면서 펜리스를 점령하면 된다.
마스터인 펜리스 백작만 잡으면 전쟁은 끝난 것과 마찬가지다. 친왕파에 대한 군사 지원은 조금 더 나중에 해도 된다.
그렇게 로드리크군의 2군단이 철군을 시작했고 1군단의 진군 속도가 더 빨라졌다.
* * *
두두두두두두!
펜리스의 1만 기동군은 엄청난 속도로 움직였다. 이미 약탈을 당할 대로 당하고 도적들까지 들끓는 서부에서 이들을 막을 자는 없었다.
"더 빨리 움직인다! 슬슬 소식이 들어갔을 것이다!"
지셀의 외침에 모두가 이를 악물고 말을 몰았다. 펜리스군은 이제 기마 민족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기마술이 뛰어나다.
처음에는 엘프들의 도움을 받아 기술을 익히고, 이후 화살 배송 등의 업무와 강도 높은 훈련을 이어 온 덕분이었다.
그들은 짧은 기간 동안 벌써 몇 개의 성과 요새를 뚫었다. 그럼에도 쉬지 않고 달렸다.
"오늘은 저기다!"
저 멀리 가까운 요새가 보인다. 후작령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작은 요새였다.
열심히 지셀을 쫓던 카오르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카오르 정도 되는 실력자도 피곤함을 느낄 정도의 강행군이었다.
"오늘은 저기 먹고 좀 쉬죠?"
하지만 지셀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빨리 후작성을 점령해야 보급을 끊을 수 있어."
"그러면 그냥 우회해서 거기로 가면 안 됩니까?"
"요새들을 내버려두면 나중에 움직일 때 귀찮아진다. 전쟁은 확실하게 해야 해."
"에이... 피곤해 죽겠네."
투덜거려도 방법은 없다. 영주가 하자고 하면 하는 거다.
"바로 친다!"
두두두두두두!
펜리스군은 그대로 요새 앞까지 다가갔다. 당연히 요새에서도 난리가 났다.
"적이다! 적이 쳐들어왔다!"
병사들이 소리를 지르며 전투 태세를 갖췄다. 하지만 펜리스군을 보는 요새의 지휘관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이전에 점령당한 영지들의 소식이 속속 들어오는 중이었다. 하나같이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전부 무너졌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주변에는 병사 500명이 전부였다. 정말 말 그대로 도적들 정도나 막을 수 있는 인원이었다.
지휘관은 덜덜 떨리는 손을 꽉 쥐고 목소리를 높였다.
"저, 전원 전투 준비...."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성벽 위로 누군가가 올라왔다.
"누, 누구십니까?"
"펜리스 백작."
"히이이익!"
뭔가 해 보기도 전에 그 유명한 펜리스 백작이 올라왔다. 고작 500명 가지고는 마스터를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 항...."
스각!
지휘관은 항복을 외치기도 전에 목이 날아가 버렸다. 그 뒤로 펜리스 기사들 200명이 단숨에 벽을 타고 올라왔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그들을 보고 병사들은 사색이 되어 벌벌 떨었다.
"으아아아! 도망가자!"
"살려 줘!"
"항복입니다!"
어떤 병사들은 소리를 지르며 도망가고 어떤 병사들은 무기를 버리고 바닥에 엎드렸다.
지셀의 위명은 이제 너무나 널리 퍼져 있었다. 특히 서부에서는 거의 악마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았다.
"흠."
지셀은 도망가거나 엎드린 병사들을 보며 외쳤다.
"전부 이 요새를 벗어나 도망간다면 살려 주겠다. 멋진 도적들이 되도록!"
그 외침은 절망 속에 내려온 한 줄기 빛이나 마찬가지였다. 엎드린 병사들이 모두 벌떡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복 받으실 겁니다!"
"꼭 서부를 점령하십시오!"
로드리크 후작은 악명 높은 영주였다. 병사들에게 충성심이란 전혀 없었다.
그들은 죽다 살아난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자신들의 무기를 챙겨 도망가기 바빴다.
지셀은 굳이 이들을 죽이지도, 요새에 남겨 두지도 않았다.
어차피 나중에는 자신의 병사가 될 이들이니 죽이는 건 손해다. 그렇다고 요새에 남겨 두면 로드리크의 추격군이 데리고 갈 게 뻔했다. 밖으로 몰아내는 것이 최선책이었다.
지셀이 피식 웃더니 기사들에게 말했다.
"쉽지? 잠깐 쉬었다가 다음 장소로 이동하자고."
요새 하나 점령하는 데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숫자 차이가 너무나도 명백하니 적들은 감히 싸울 엄두도 내지 못했다.
물론 끝까지 덤비는 적들은 깡그리 몰살했다. 그러니 악명은 더 치솟고, 다들 지셀과 싸우기를 더 꺼리게 되었다.
펜리스군은 전투보다는 오히려 이동하느라 더 지친 상태였다.
요새를 점령한 이들은 잠깐이나마 편하게 쉬면서 요새에 비축되어 있던 식량을 전부 거덜 냈다.
당연히 이 요새에 있는 식량만으로는 1만이 배를 채우기는 부족했다. 그렇기에 오는 동안 쓸어 온 식량을 모두 털어먹고, 그러고도 부족해 가루로 된 전투 식량까지 챙겨 먹었다.
잠깐 쉬는 동안 정찰을 나갔던 다크가 지셀에게 다가왔다.
까마귀로 변한 다크는 지셀의 어깨에 앉아 수다스럽게 떠들었다.
"주인, 주인. 추격군이 움직이고 있다."
"위치는?"
"아직 서부 인근에도 도착하지 못했어. 그런데 엄청 많아."
"얼마나 되는 거 같은데?"
"어... 몇만은 되는 거 같아. 아무튼 그냥 많아. 진짜 많아. 우리 몇 배는 되는 거 같아."
다크는 아직도 병력 규모를 잘 파악하지 못했다. 수가 적으면 눈대중으로 대충 읽지만, 수가 많으면 그걸 하나하나 일일이 세곤 했다.
몇 번이나 가르쳐 주어도 영 익히지 못하고 있었다.
지셀이 혀를 차며 다크를 타박했다.
"아니, 왜 아직도 그걸 몰라?"
"내가 숫자에 약해."
"어휴.... 그러면 진군 속도는 어떻지? 언제쯤 서부에 도착할 거 같아?"
"우리보다 느려."
"...그래."
정찰과 통신 수단으로 굉장히 편리하긴 한데 정교함이 상당히 떨어진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다크의 분신체에 다시 마나를 조금 주입한 지셀이 말했다.
"계속 위치 확인하고, 우리가 쳐부순 곳에 도착하면 알려 줘. 그 정도면 내가 속도를 예측할 수 있으니까."
"알겠어!"
다크는 다시 하늘을 날아 추격군을 감시하러 떠났다.
지셀은 모두를 둘러보며 외쳤다.
"자, 다시 이동!"
두두두두두!
속도 하나만큼은 이제 왕국 제일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펜리스군이다. 이들은 비슷한 방식으로 각 성과 요새들을 순식간에 쓸어버리며 움직였다.
얼마 전에도 지셀이 와서 한번 난리를 치고 갔던 데다, 로드리크 후작이 병력을 죄다 차출해 갔으니 도무지 그들을 막을 자가 없었다.
간혹 도적들이 정찰을 나왔다가 펜리스의 깃발을 보고 기겁했다.
"북부의 악마가 또 왔다!"
"이번에는 군대까지 끌고 왔어!"
"모두 피해라!"
도적들 대부분이 저번 전투 때 지셀에게 단단히 혼이 난 자들이었다. 그들은 깃발을 보자마자 숨거나 도망가기 바빴다.
아무도 앞을 막는 자가 없으니 고작 며칠 만에 펜리스군은 목표로 하던 곳에 도작할 수 있었다.
로드리크 후작의 본거지이자 서부 최고의 성, 린더스타인.
지셀은 성을 바라보며 웃었다.
"저 성만 점령하면 놈들의 보급이 끊기고 굶어 죽는 거다."
"우와...."
기사들과 병사들은 린더스타인 성을 보고 입을 벌렸다.
정말 수도인 카르데니아 못지않게 거대한 성이었다. 저런 성은 지금까지처럼 그냥 넘어서 점령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런 거대한 성은 꼼꼼할 정도로 곳곳에 방어 마법을 새겨 놓곤 한다. 대대로 성을 증축할 때마다 많은 돈을 들여 계속 마법진을 새기는 것이다.
서부 최대의 부호인 로드리크 후작가의 성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저 정도면 마법으로 부수기는 쉽지 않겠지."
6서클 마법까지는 충분히 막을 수 있을 테고, 7서클 마법사인 바네사가 마법을 난사해도 위력이 반감될 것이다.
그래서 지셀은 바네사를 영지에 두고 몇몇 보조 역할을 할 마법사들만 데리고 왔다.
그녀가 있으면 더 편하긴 했겠지만 아직 영지에 초인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공개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바네사가 없어도 저 성 정도는 충분히 부술 수 있으니까.
린더스타인의 지휘관, 레이넌은 저 멀리 펜리스군이 진을 치는 걸 지켜보았다.
"마법사들은 곳곳에 대기해라! 펜리스에는 6서클 마법사가 있다! 방어 마법으로 막을 수 있겠지만 혹시 모르니 디스펠 마법을 준비하도록!"
그는 이 성의 방위 사령관을 맡을 정도로 능력이 출중한 자였다.
펜리스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수성 준비를 단단히 해 둔 상태였다.
"적의 수장은 마스터지만 겁먹을 필요 없다! 저들은 공성 병기를 가져오지 않았다! 기사들과 함께 성벽을 넘지 못하게만 하면 된다!"
성벽을 넘는 데 필요한 갈고리와 사다리를 쉽게 걸지 못하도록 경사진 구조물을 추가로 성첩에 배치했다.
또한 적들이 올라오는 도중 화살을 쏘거나 창을 찌를 수 있는 틈 뒤에는 병사가 아니라 기사들을 배치했다.
빠르게 올라오는 펜리스 기사들을 노리기 위해서였다.
적들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공격할 수 있는 대형 발리스타도 배치되어 있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지원군이 와서 저들의 뒤를 칠 것이다! 우리는 그때까지 버티다가 그때 나가서 싸우면 된다! 남은 투석기도 가져와라!"
투석기는 대부분 본대가 가져갔지만, 방어를 위해 두 대 정도는 남아 있었다.
이 정도면 아무리 펜리스 백작이라도 이곳을 점령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들은 그저 막기만 하며 기다리면 된다.
아니, 막을 필요도 없을 터였다. 적들은 공성 병기가 없으니 쉽게 다가오지도 못할 것이다.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아라! 야간에 몰래 성을 넘으려고 할 수도 있다!"
레이넌은 정말 최선을 다해 대비했다. 병사들이 긴장감을 놓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격려하고 사기를 북돋웠다.
이 정도면 서부에서 흔치 않은 지휘관이었다.
과연 펜리스군도 방법이 없는지 저 멀리서 대기하고만 있을 뿐이었다.
지셀은 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야, 준비 많이 했네. 성벽을 넘지 못하게 하겠다는 의지가 여기서도 느껴질 정도야."
이 상태로는 돌격을 해도 투석기와 발리스타 공격에 당할 것이다. 마법으로 견제를 하려 해도 성에 남아 있는 마법사들과 성벽의 방어 마법에 대부분이 막힐 것이다.
피식 웃은 지셀이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돌 좀 구해 와라. 그냥 부숴 버리자."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200명의 기사 전원과 2천의 병사들이 사방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레이넌이 비웃음을 띠었다.
"식량을 구하러 가는 건가? 제대로 식량도 준비해 오지 못한 모양이군."
딱 봐도 전원이 전투병이다. 보급 부대가 따라올 만한 속도도 아니었다.
"고민만 하다가 돌아가겠군."
마스터가 끼어 있다 해도 고작 1만의 군대에 무너질 만한 성이 아니다. 그것도 공성 병기가 없다면 더더욱.
성벽을 몰래 넘어오는 것만 조심하면 된다. 결국 저들은 어쩔 수 없이 퇴각할 것이다.
그렇게 하루가 꼬박 지나고 다음 날이 오자 성의 병사들은 조금 긴장을 놓았다.
정말 공성 병기도 없이 병사들만 계속 왔다 갔다 하니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아무리 펜리스 백작이라도 여기는 어쩔 수 없나 봐."
"그럼, 다가오기만 해도 다 죽어 버릴걸?"
"맨몸으로 이 성에 돌격하는 건 무모한 짓이긴 하지."
안심하면서도 그들은 눈을 부릅뜨고 펜리스군을 살펴보았다. 어쨌든 방심하면 순식간에 성에 달라붙을 놈들이니까.
그러던 중 갑자기 한 병사가 중얼거렸다.
"도대체... 뭐 하는 거지?"
다른 병사들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펜리스군은 무지막지할 정도로 큰 돌을 마구 쌓아 놓고 있었다.
"공성 병기도 없으면서 뭐 하는 거야?"
"설마 여기에 돌성이라도 지으려는 건가?"
"그런 거 해서 뭐 하게?"
그렇게 신기하다는 듯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모든 병사가 몇 명씩 조를 짜고는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멍한 표정으로 그걸 보고 있던 병사들의 눈이 점점 커졌다.
"뭐, 뭘 만드는 거지?"
이상한 구조물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창대를 연결해서 계속 높이와 크기를 키우는 것 같았다.
가장 높은 곳에서 그걸 보고 있던 레이넌의 표정에도 의아함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잠시 후, 펜리스군이 만든 물건을 본 로드리크 병사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저, 저거...."
"설마 투석기야? 저게 정말 투석기라고?"
"어, 어떻게 갑자기 투석기가...."
펜리스군의 진영에는 무척이나 거대하고 괴상하게 생긴 구조물이 순식간에 10개나 세워졌다.
그리고 그건... 아무리 봐도 투석기 같았다.
396화 그냥 부숴 버리자. (3)
린더스타인의 지휘관인 레이넌은 저 멀리 줄지어 서 있는 거대한 투석기를 보며 넋이 나간 채 중얼거렸다.
"뭐, 뭐지?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세상에 갑자기 저렇게 투석기가 나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마, 마법인가?"
대마도사라 일컬어지는 8서클 이상의 마법사라면 워프 마법을 사용해 물건과 사람을 옮길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왕국에 8서클 마법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애초에 8서클은 인간이라면 천 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경지라고 알려져 있다.
"도대체 저게 뭐냐고!"
그가 발끈하며 외쳤지만 아무도 대답해 주지 못했다.
뭔가 뚝딱뚝딱 만든다 싶더니 갑자기 투석기가 나와 버렸다. 도대체 그 과정을 누가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물론 투석기를 현지에서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 투석기는 딱 봐도 조잡하다. 애초에 이런 성을 공격하는 데 쓸 수가 없다.
투석기에 어떤 기술이 들어갔는지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아니야, 저런 게 있을 리가 없어. 분명 엉터리인 게 분명해. 생긴 것도 이상하잖아? 저 돌도 분명 다른 용도로 쓰려고 모아 온 걸 거야."
레이넌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중얼거렸다.
모양은 투석기와 비슷하긴 했지만, 뼈대만 앙상한 것이 괴상한 생김새였다. 크기는 엄청나게 크지만 저렇게 뼈다귀를 연결한 것 같은 구조로는 강한 공격을 하지 못할 것이다.
동요하는 병사들을 향해 레이넌이 외쳤다.
"걱정하지 마라! 딱 봐도 이상하지 않으냐! 저런 걸로는 성을 부술 수 없다!"
그 말에 병사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이 봐도 저걸로 무거운 돌을 던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신중한 레이넌은 병사들이 방심하지 않게 덧붙였다.
"부패한 시체나 독이 묻은 가벼운 물건을 던질 수도 있다! 모두 바로 치울 수 있게 준비해라!"
성안에 독과 시체를 던져 전염병을 돌게 하는 건 유구하게 쓰이는 전략 중의 하나다.
저 이상한 투석기가 무거운 돌은 날리지 못해도 적당한 무게를 실어 작은 건 날릴 수 있을 듯했다.
레이넌의 명령에 병사들은 부랴부랴 조를 짜서 사슴 가죽으로 만든 장갑과 마스크를 썼다.
성의 병사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지셀이 갈바니움 투석기를 보며 웃었다.
"첫 실전인가? 재미있겠어."
이 투석기의 위력이 대단하다는 건 전생에 이미 증명되었다. 적들은 아마 혼이 빠져나갈 정도로 당황할 것이다.
때마침 정찰을 나갔던 다크가 의식으로 소식을 전했다.
― 주인! 추격군이 우리가 지났던 곳에 도착했다. 그 협곡이 있던 곳 있잖아.
"서부 인근에 도착했군."
대군인 주제에 제법 속도가 빨랐다. 하지만 그들은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
린더스타인은 오늘 함락될 테니 말이다.
"돌은 충분하군."
저 정도 성을 부수기 위해서는 쉴 새 없이 강력한 공격을 들이부어야 한다.
수백의 기사와 수천의 병사들이 인근에서 말과 그물을 이용해 거대한 돌을 잔뜩 구해 왔다.
아예 산까지 가서 바위를 깎아 온 자들도 있었다.
"시작해라."
지셀이 명령을 내리자 병사들이 투석기에 무게추 역할을 하는 돌을 달았다.
그리고 기사들이 마나까지 이용해 거대한 돌을 투석기에 채웠다. 빠른 공격을 위해 기사들이 손을 보탠 것이다.
데리고 온 4서클 마법사들은 무게추와 투석기의 돌에 더 단단해지고 무거워지는 마법을 걸었다.
이미 몇 번이고 훈련한 상황이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그들이 크게 외쳤다.
"1번 투석기 준비 완료!"
"2번 투석기 준비 완료!"
....
"10번 투석기 준비 완료!"
모두의 준비가 끝나자 지셀이 손을 앞으로 뻗었다.
"쏴라."
옆에 있던 기사가 지셀의 말을 받아 크게 외쳤다.
"쏴라!"
파아아앙!
엄청난 소리를 내며 돌들이 쏘아져 나갔다. 그 모습을 본 린더스타인의 병사들은 모두 몸이 굳어 버리고 말았다.
설마설마했는데 정말 거대한 돌들이 날아온다. 시체나 다른 수작을 부린 물건이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돌을 집어 던진 것이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돌들을 보니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꿈은 엄청난 굉음과 함께 깨어졌다.
콰아아아아앙!
"으아아아악!"
콰아앙! 콰아앙! 콰아아앙!
성벽의 성첩이 박살 나고, 그 충격에 휘말린 병사들도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그 정도면 다행이었다. 아예 돌에 깔려 몸이 완전히 박살 난 병사들도 있었다.
"지, 진짜 공성 병기다!"
"피해! 피하라고!"
"모두 빨리 흩어져라!"
펜리스군이 성벽을 타는 걸 막기 위해 모두 성벽 외곽에 바짝 붙어 있던 상태였다. 그런데 거대한 돌이 갑자기 날아오자 제대로 피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돌이 또 날아왔다.
콰아아앙! 콰아아앙! 콰아앙!
"으아아아악!"
병사들은 몸을 피하기도 전에 돌에 깔려 피떡이 되어 버렸다. 벌써 몇몇 성첩은 완전히 박살이 나 흉물스럽게 변했다.
공격 속도도, 위력도 일반적인 투석기와는 달랐다. 너무 빠르고 너무 강력했다.
콰아앙! 콰아아앙!
성벽이 부서지고 병사들의 비명이 끊임없이 울렸다.
그 모습을 보던 레이넌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정말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모든 게 느릿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시야에는 터져 나가는 성의 잔해들과 병사들의 시체 조각들만이 가득했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어, 어떻게 저런 파괴력을...."
어지간한 투석기로는 이 성에 큰 타격을 줄 수가 없다. 하지만 펜리스군이 쓰는 저 이상한 투석기는 엄청난 파괴력을 선보였다.
조금씩이지만 이 거대한 성벽을 위쪽에서부터 점점 허물고 있었던 것이다.
멍하니 있던 그를 깨운 건 옆에 있던 기사의 외침이었다.
"사령관님! 어서 대응 명령을 내리셔야 합니다!"
공성 병기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 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마스터인 펜리스 백작이 기사들과 성벽을 타고 넘어오는 것에만 대비했다.
그런데 정작 펜리스 백작은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돌만 쉼 없이 날아와 성을 두들기고 있었다.
그러니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레이넌이 외쳤다.
"우, 우리도 투석기를 사용하라! 적들의 진영을 공격해! 그리고 병사들은 모두 성벽 밑으로 피하라고 해라!"
저런 공격이면 성벽에 붙어 있을 수가 없었다. 일단 몸을 피해야 한다.
레이넌의 명령에 그제야 병사들이 성벽 아래로 몸을 피했다.
끼이이익....
파아앙! 파아앙!
로드리크군의 투석기가 펜리스군 쪽으로 돌을 날렸다.
사실 레이넌은 그 공격이 성공할 거라고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애초에 펜리스군은 투석기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쓰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저 펜리스군이 돌격해 올 때나 사용하려고 준비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먼 거리에서 펜리스군의 투석기는 성벽을 줄기차게 때려 대고 있었다.
"저, 저건 뭔데 사정거리가...."
장전 속도와 파괴력만 봐도 미칠 거 같은데 사정거리에서도 상대가 안 됐다.
너무나도 이기적인 공격이었다. 자신들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마법사! 마법사들은 방법이 없는가!"
로드리크군의 마법사들도 모두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 남아 있는 마법사들의 수장은 고작 4서클이었다. 그 아래 있는 이들은 2서클에서 3서클 수준이다. 그나마 몇 명 남아 있지도 않았다.
실력 있는 자들은 로드리크 후작이 전부 끌고 갔기 때문이다.
콰아앙! 콰아아앙!
레이넌은 성벽이 천천히 허물어지는 걸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보고만 있어야 했다.
병사와 기사들도, 발리스타도, 투석기도.... 준비해 두었던 것들은 어떤 것도 통하지 않았다.
콰아아아앙!
투석기들이 적의 공격에 맞아 박살이 났다.
콰아아앙! 콰아아앙!
성벽 곳곳에 배치한 대형 발리스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마구잡이로 돌을 던져 맞춘 게 아니었다.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게 목표 지점을 맞춘 게 분명했다.
"어떻게 저런 투석기가...."
기술이 몇 단계나 차이가 났다. 저런 투석기를 막는 건 불가능하다.
콰아앙! 콰아아앙!
린더스타인의 병기를 부수고 난 뒤 펜리스의 공격은 성벽의 몇 군데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게 무슨 뜻인지 레이넌은 너무나도 잘 알았다.
"모, 모두 대형을 갖추고 전투를 준비해라."
명령을 들은 병사들의 얼굴도 공포로 물들기 시작했다.
콰아아앙!
몇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돌이 날아오자 결국 성벽의 몇 군데가 뚫려 버렸다.
쿠르르르릉!
집중 공격을 받아 구멍이 뚫린 성벽의 일부가 그대로 무너졌다. 아래쪽에 잔해가 쌓였지만 기마병이 충분히 넘을 수 있는 높이였다.
그 모습을 본 지셀이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흑왕의 말고삐를 당겼다.
"가자."
히이이이잉!
흑왕이 기쁜 듯 울부짖으며 달려 나갔다. 펜리스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차례로 그 뒤를 따랐다.
두두두두두두!
레이넌은 그 모습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성벽에 올라가 견제하는 건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콰아앙! 콰아아앙! 콰아앙!
자리에 남은 펜리스군이 여전히 돌들을 쏘아 대며 견제를 했기 때문이다.
병기들은 모두가 부서졌고 성벽에는 오르지도 못한다. 결국 레이넌의 낯빛이 시커멓게 죽었다.
"이, 이게 북부 최강 펜리스...."
말로만 들었을 때는 코웃음을 쳤다. 가난한 촌놈들이 꼴값을 떤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한 쪽은 자신이었다.
저 척박한 북부에서 쉼 없이 전쟁을 겪으며 살아남은 군대는 감히 자신이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실력을 쌓고 있었다.
두두두두두두두!
1만에 가까운 기마병들이 움직이자 땅이 울렸다. 린더스타인의 병사들은 가쁜 숨만 내쉬며 덜덜 떨기 시작했다.
소문의 그 군대가 온다. 자비 없이 적들을 죽이는 그 군대가 말이다.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조금씩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히이이이잉!
우렁찬 말 울음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무너진 성벽 틈으로 뛰어들었다.
콰아아아앙!
"으아아아악!"
지셀은 단숨에 적들의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가 창을 휘두르자 순식간에 로드리크군의 진형이 무너졌다.
콰아앙! 콰아아앙!
펜리스군의 투석기 공격은 진작에 멈추었다. 하지만 로드리크 병사들은 펜리스군을 견제하기는커녕 공격을 피하기도 바빴다.
지셀이 마나를 뿜어내며 창을 휘두를 때마다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가 났다.
실제로 마나를 과하게 뿜어냈는지 병사들의 몸을 가르기만 해도 땅에 창이 움직인 흔적이 남을 정도였다.
"괴, 괴물이다!"
"펜리스 백작이다! 펜리스 백작이 나타났다!"
"피해! 절대 못 이겨!"
로드리크군은 모두 선두로 들어온 남자가 지셀임을 알아보았다.
붉은 눈을 빛내며 거대한 검은 말을 타고 있는 자. 그 특징이 누굴 가리키는지는 이제 왕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성벽이 무너지고 전의를 잃은 지 오래인 로드리크군은 제대로 대응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지셀의 뒤를 이어 펜리스의 기사들까지 넘어왔다.
콰아아아앙!
그들은 그대로 전진하며 로드리크군을 갈아 버렸다.
"으아아아악!"
애초에 수성을 전제하고 모인 병사들이다. 기마병은 하나도 없었고 제대로 된 중보병도 없었다.
그러니 기사들의 돌격을 막을 수가 없었다.
레이넌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무너지는 병사들을 보고 악을 썼다.
"싸워라! 싸우란 말이다! 우리의 수가 훨씬 더 많다!"
그가 아무리 외쳐도 소용이 없었다. 펜리스의 기마병들까지 넘어오자 로드리크군은 마치 모래성처럼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악!"
"살려 줘!"
"도망가!"
로드리크군 병사들은 아예 전투를 포기하고 말았다. 그들이 믿었던 성이 무너지자 마음도 같이 무너지고 만 것이다.
병사들이 도망가기 시작하자 남은 건 학살뿐이었다. 말을 타지 못한 그들은 펜리스의 기마병들에 쫓겨 허무하게 쓰러졌다.
레이넌도 피눈물을 흘리며 기사들과 함께 자리를 피했다.
로드리크의 심장이자 자랑이었던 성을 잃고 말았다. 심지어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저 투석기 때문에!"
펜리스군이 가진 신형 병기의 존재를 알았다면 다른 방식으로 대비했을 것이다. 이렇게 허무하게 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두고 보자! 내 반드시 후작님께 이 사실을 알리고...."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어느 순간 붉은 머리카락의 남자가 옆에 다가왔기 때문이다.
"여기 있었네! 네가 대장 맞지?"
"너, 너는 뭐냐!"
"나는 카오르다. 길리언보다 강한 남자지. 저승에 가서도 잊지 마라."
길리언은 수비를 위해 펜리스에 남아 있었다. 카오르로서는 자신의 명성을 떨칠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레이넌은 카오르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뭐? 하얀 사자 길리언?"
"카오르라고!"
하얀 사자란 이명을 얻은 길리언은 왕국에서 꽤 유명해졌다. 하지만 레이넌은 카오르란 이름을 처음 들어 봤다.
레이넌이 뭐라고 더 대답하기도 전에 검이 날아왔다.
퍼어억!
"끄윽...."
그는 분노한 카오르의 검에 목이 떨어졌다. 그리고 죽는 순간까지 왜 카오르가 화가 났는지 몰랐다.
"내가 더 강하거든?"
레이넌이 들은 마지막 말은 그것뿐이었다.
지휘관의 목까지 떨어지자 로드리크의 병사들은 더 거리낄 게 없었다.
그들은 무기까지 내던지고 도망갔다. 도망에 실패한 자들은 바닥에 엎드리며 외쳤다.
"항복입니다!"
"살려 주십시오!"
"펜리스를 따르겠습니다!"
말을 탄 기마병의 추격을 뿌리칠 수 없다고 느낀 그들은 전부 엎드리며 항복이라는 말만 외칠 뿐이었다.
적들이 전부 엎어지자 펜리스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무기를 치켜들고 외쳤다.
"우리가 이겼다!"
"성을 점령했다!"
"와아아아아!"
다들 신이 난 표정이었다. 왕국에서 유명한 성을 단 하루 만에 함락할 줄이야.
투석기가 강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실전에 쓴 건 처음이라 조금 긴장했었다. 그런데 이런 위력을 보일 줄이야.
지셀 또한 창을 거두고 웃으며 병사들을 치하했다.
하지만 성을 점령했다고 끝이 아니었다. 아직 예정된 전투가 남아 있었다.
"곧 추격군이 도착할 것이다. 그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한다."
지셀의 말에 전원이 웃음을 멈췄다. 긴장해서는 아니었다. 그들의 표정에는 여전히 자신감이 넘쳤다.
그저 지셀의 말 한마디에 자신을 통제할 정도의 수준까지 올라온 것이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을 둘러본 지셀이 입을 열었다.
"투석기를 분리해서 중형 투석기를 만들어 성벽에 배치해라. 다음에 올 적들을 깜짝 놀라게 해 주자고."
그 말에 병사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전장을 정리할 틈도 없었다.
그리고 곧 린더스타인의 성벽 위에 100대의 중형 투석기가 세워졌다.
397화 기술의 차이를 보여 줘라. (1)
"살려 주십시오!"
"저희는 죄가 없습니다!"
"펜리스에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로드리크 후작가의 가신들은 병력이 몰려오자 사색이 되어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성이 점령당할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이번 전쟁도 압도적인 병력 차를 토대로 당연히 승리할 거라 확신했다.
그런데 순식간에 성이 점령당하고 침략군이 몰려왔다. 아예 도망갈 틈조차 없었다.
지셀은 그들을 둘러보며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치워라."
후작가의 대소사를 맡고 있던 가신들이 그 한마디에 전부 끌려갔다.
"으아아아! 후작님이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다!"
가신들이 저주의 말을 내뱉었지만 지셀은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로드리크 후작가는 어차피 자신을 죽이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린더스타인을 점령하니 당연히 후작령 전역의 행정이 마비되었다. 그 말은 현재 출정한 로드리크군에게 가는 보급도 막혔다는 뜻이다.
지셀은 지도를 보며 중얼거렸다.
"배고픈 놈들은 제대로 싸울 수 없는 법이지."
주변 영지들은 지셀과 도적들에게 털릴 대로 털린 상태였다. 그나마 여력이 남아 있는 영지도 식량 대부분을 차출당했다.
이제 로드리크군에 남은 식량은 처음 출발할 때 가져간 것이 전부였다.
대군인 만큼 상당히 많은 양을 가지고 출발하긴 했겠지만, 보급이 끊겼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버티기가 힘들어질 것이다.
후작가의 후계자들과 가신들을 처리하고 나니 곧 기사 하나가 다가와서 말했다.
"적들이 도착했습니다."
"그래, 이제 그놈들에게도 충격과 공포를 선사해야지."
지셀이 히죽 웃으며 성벽으로 올라갔다. 과연 4만에 이르는 대군이 성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
"와, 정말 많이도 왔네."
예전에 싸웠던 데스몬드군보다도 수가 더 많았다.
물론 펜리스도 그때보다 훨씬 더 강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저 수와 정면으로 맞붙는 건 위험했다. 그럴 필요도 없고.
"다들 준비해라."
지셀의 명령에 기사들과 병사들이 100대의 중형 투석기 주변에 일사불란하게 모였다.
그리고 펜리스군에 점령당한 린더스타인을 보며 로드리크군은 다들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 성이 점령당했다고? 그것도 이렇게나 빨리?"
"분명 공성 병기가 없는 군대라고 알고 있었는데!"
펜리스군 전원이 기마병이란 소식은 들었다. 당연히 속도가 빠를 거라고 예상은 했다.
하지만 기마병이 공성 병기를 끌고 그만한 속도로 움직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로드리크군의 2군 사령관, 글래스고 백작은 분노와 짜증, 당혹감이 섞인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뭘 했길래 벌써 성을 뺏겼단 말이냐! 이 멍청한 것들!"
4만 명이나 되는 대군이라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걱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기마병만으로는 절대 저 성을 점령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런데 그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성이 펜리스 쪽에 넘어가고 말았다. 이건 도무지 말이 되지 않았다.
그가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었지만 참모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다 같은 생각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겨우 마음을 가라앉힌 글래스고 백작이 성을 살펴보았다.
"성벽 위에 세워 둔 저것들... 투석기가 맞는 건가?"
상당히 크기가 큰 무언가가 무려 100대나 세워져 있었다.
린더스타인은 성벽도 무척이나 크고 넓다. 당연히 투석기를 세워 둘 공간은 있지만, 누가 힘들게 그런 수고를 한다는 말인가?
거기에 모양도 골조만 연결해 놓은 것처럼 이상했다. 투석기와 비슷한 생김새이긴 하지만 정확히 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흔적만 보면 공성 병기를 쓴 게 분명한데...."
성벽 곳곳이 깨졌고, 몇 군데는 잔해가 쌓일 정도로 허물어져 있었다.
마스터인 펜리스 백작이 기사들과 함께 성안으로 들어가서 난전을 유도했다면 수비군이 버티기 힘들었으리라.
저 성벽을 도대체 어떻게 뚫었는지는 의아했지만.
"저런 공성 병기가 있다는 건 들어보지도 못했다. 우리를 헷갈리게 하려는 수작인가?"
아무리 봐도 저게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기마병이 공성 병기와 함께 그토록 빠르게 움직였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무언가 수작을 부렸을 것이다. 성벽 위에 있는 괴이한 것들도 진짜 투석기는 아니고, 자신들이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게 허세를 부리는 것이 분명하리라.
참모가 글래스고 백작에게 다가와 물었다.
"저희는 공성 병기가 없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공성 병기는 펜리스를 점령하러 간 1군단이 가져갔다.
애초에 2군단의 본래 목적지는 수도 인근이었다. 그곳에서 공작가와 싸울 때 필요한 식량과 병사들을 지원받으면 될 거라 여겼었다.
글래스고 백작은 수염을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
"무슨 상황인지는 성을 다시 점령하고 알아보면 된다. 공성 병기는 필요 없을 거 같다."
무려 4만이나 되는 대군이다. 어지간한 영지는 순식간에 쓸어버릴 수 있다.
원래 공성 병기 없이 린더스타인을 점령하는 일은 불가능하지만, 지금은 이미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지 않은가?
잔해로 얼기설기 대충 막아 뒀을 뿐이라 병사들이 충분히 넘을 수 있는 높이였다.
"이미 무너진 곳을 집중적으로 공략한다. 적의 병력은 1만이다. 구멍이 나 있는 성은 제대로 된 성이 아니다."
이 대군이 전부 성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순식간에 성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성벽이 일부 무너졌다 한들,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으니까.
"펜리스 놈들도 뚫린 곳을 중점적으로 막으려 할 것이다. 그곳이 가장 치열한 전장이 될 테니 병력을 축차 투입해서 밀어 버린다."
좁은 틈 몇 군데에 병력이 집중될 테니 당장은 대군의 이점을 살릴 수 없다. 하지만 교대로 치다 보면 결국 수가 적은 상대방이 먼저 지칠 수밖에 없다.
"최선을 다해서 적을 죽여라. 기마병들도 전부 하마시켜서 투입한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다. 피해는 감수해라. 보급을 확보하는 게 우선이다."
대군이기 때문에 로드리크군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식량을 소모하고 있었다. 당장 자신들도 며칠 치 식량밖에 안 가지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저 성이 점령당해 있는 동안은 보급도 끊길 수밖에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린더스타인을 되찾아야만 했다.
참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성벽 위에 있는 것들이 새로운 병기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저런 무기가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도 없다. 분명 우리가 저것들의 정체를 밝혀내겠다고 고민하게 해서 시간을 끌려는 속셈일 것이다."
"그렇군요.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입니다."
전쟁사에서 괴상한 것들을 만들어 적들을 혼란에 빠지게 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특히 지금의 펜리스군처럼 시간을 끌어야 하는 처지에서는 더더욱 많았다.
글래스고 백작이 성벽 위를 보며 혀를 찼다.
"쯧, 펜리스 백작이 잔머리를 굴리는군. 그래도 벌써 성을 점령했을 줄이야. 역시 마스터라는 건가? 피곤하게 됐어."
어떻게 성벽을 공략했는지 궁금했지만, 알아내려고 시간을 쓸 여유가 없었다. 이제는 무작정 병사들을 밀어 넣어야 한다.
애초 생각했던 작전에서 벗어난 상황이라 피해가 커지겠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전군 출진하라! 적은 전부 기마병이다! 궁병도 없고 성벽은 뚫려 있다! 충분히 들어갈 수 있다! 최대한 빨리 성을 되찾아야 한다!"
"와아아아아아!"
글래스고 백작이 외치자 4만이나 되는 대군이 성을 향해 몰려갔다.
내지른 함성의 크기만큼이나 로드리크군의 사기는 대단했다. 자신들의 수가 상대를 압도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일처럼 밀려오는 로드리크군을 바라보던 지셀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쏴라."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100대의 중형 투석기가 돌을 쏟아내었다.
파아아아아앙!
성을 향해 돌격하던 병사들의 눈이 커졌다. 그냥 모양만 투석기와 비슷하게 생긴 게 아니라, 진짜로 투석기였던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당황하던 그들의 머리 위로 무려 100개의 돌이 떨어졌다.
콰아앙! 콰아아앙! 콰아아앙!
"으아아아악!"
"투석기다! 진짜 투석기였어!"
"100대나 있다!"
선두로 달려가던 병사들 수백 명이 순식간에 돌에 맞고 터져 버렸다.
4만에 비하면 무척이나 적은 수였지만, 문제는 이들이 투석 공격에 아무런 대비도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로드리크군은 살면서 이렇게 많은 투석기에 공격당해 본 적이 없었다. 다들 당황해서 돌격 속도가 느려졌다.
그리고 펜리스군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들의 투석기는 그 장전 속도도 무척이나 빨랐다.
파아아아앙!
로드리크군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다시 100개의 돌이 날아왔다.
콰아앙! 콰아앙! 콰아아앙!
"으아아악!"
"멈추지 마라! 어서 달려!"
"더 가까이 가야 공격을 피할 수 있다!"
그나마 정신을 차린 몇몇 기사들이 채근하자 병사들은 이를 악물고 달렸다. 로드리크군의 지휘부는 넋이 나가 제대로 명령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콰아아앙! 콰아아앙! 콰아앙!
수없이 많은 돌이 날아왔다. 달려오던 로드리크군은 100대나 되는 투석기의 공격에 휘말려 순식간에 수천이 사망하고 말았다.
그래도 4만의 대군이 동시에 움직이는 이상, 그 많은 투석기로도 로드리크군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됐다! 더 달려라! 수로 밀어붙이면 된다!"
중간중간 포진한 지휘관들의 외침에 병사들이 희망을 품고 달렸다.
그리고 선두 병력은 마침내 투석기 공격이 불가능한 범위로 들어갔다. 적들은 전부 기마병이니, 자신들을 막으려면 이제 성벽의 무너진 부분 쪽으로 내려와야 했다.
로드리크군으로서는 차라리 그게 나았다. 창칼로 맞부딪친다면 수가 많은 쪽이 훨씬 유리하니까.
하지만 펜리스군은 여전히 성벽 위에서 미동도 없었다. 지셀이 다시 손을 들고 짧게 말했다.
"다음 공격."
갈바니움 전신 갑옷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철컥! 철컥! 철컥!
삼단으로 접혀 있던 것을 펴자 활이 되었다. 엘프들과 궁기병들이 쓰던 갈바니움 접이식 활이었다.
옆에 둔 통에서 화살을 꺼낸 모든 펜리스군이 시위를 당겼다.
그 직후 지셀이 명령이 떨어졌다.
"쏴라."
파아아아앗!
1만의 화살 비가 다가오는 로드리크군을 향해 날았다.
퍼퍼퍼퍼퍼퍼퍽!
"으아아악!"
"궁병이다! 전원 활을 쏜다!"
"뭐야! 궁병은 없다며!"
돌격하던 병사들이 속절없이 쓰러지며 비명을 내질렀다. 겨우 투석기 공격을 피하나 했더니 이번에는 화살이 날아온다.
전원 기마병이라는 소리만 믿었는데 다 거짓말이었다.
물론 궁기병이라면 활을 쏠 수야 있겠지만, 전신 무장 궁기병이 1만이나 된다고? 그런 건 본 적도 없고 그런 소리도 듣지 못했다.
"젠장! 다 엉터리 정보잖아! 활 공격이 너무 매끄러워!"
돌격하던 기사들도 병사들만큼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설프게 그냥 막 쏘는 화살들이 아니다.
저 많은 인원이 정확하게 방향과 거리를 잡고 한 곳에 화살이 집중되게 쏘고 있었다.
로드리크 병사들의 마음속에 아군 지휘관들에 대한 불신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없다더니, 투석기도 있고 활도 쏘잖아!"
그리고 펜리스군에 대한 불신도 자라났다.
"저런 병사들이 어디에 있냐고!"
이들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펜리스 기동군은 혹독한 훈련을 통해 모든 무기를 다룰 수 있다.
이들은 기마병이자 궁병이었으며 필요에 따라서는 보병과 방패병, 창병도 될 수 있다.
모두 갈바니움 전신 갑옷을 입고 있으니 일반 병사들에게는 기사와 비슷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다.
거기에 공성 병기까지 갖춘 이상, 어느 상황 어느 환경에서도 싸울 수 있는 정예 중의 정예가 된 것이다.
"배, 백작님! 일단 후퇴 명령을!"
넋이 나가 있던 로드리크군의 참모가 그나마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정말 아무 대비도 없이 돌격했다가 가까이 가는 족족 죽어 나가는 중이었다.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이번 전투를 끝으로 전멸할 것이다.
글래스고 백작이 비명을 지르듯이 외쳤다.
"퇴, 퇴각하라! 어서 뒤로 물러라!"
뿌우우우우우!
퇴각 나팔이 울리자 병사들은 혼비백산해서 뒤로 물러났지만, 퇴각도 쉽지 않았다.
성벽 위에서 쉴새 없이 화살이 날아왔기 때문이다.
"후퇴해! 빨리 뒤로 물러나라!"
사방에서 고함이 울리고 병사들은 허겁지겁 물러나기 바빴다. 그런 와중에도 계속 쏟아지는 화살에 죽어 나가는 병사들도 부지기수였다.
그나마 뒤에서 따라가던 병사들은 돌아오기가 쉬웠지만, 선두에서 달리던 병사들은 대부분이 죽고 말았다.
겨우 투석기의 사정거리 밖까지 벗어난 병사들은 헐떡이며 쓰러졌다. 어떻게 달려왔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이 비참한 현실에 글래스고 백작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피, 피해는...?"
참모들이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잽싸게 움직였다. 잠시 뒤에 돌아온 참모 중 하나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약... 1만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
1만의 병력만 있어도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영주가 된다. 그 정도로 대단한 병력이다.
그런데 그런 엄청난 병력이 지금 잠깐의 돌격으로 사라진 것이다.
마스터인 펜리스 백작은 활약도 안 했다. 저 괴상한 투석기와 단순한 화살 공격만으로 본 피해다.
"으으으...."
글래스고 백작은 머리를 쥐어 잡았다. 세상에 적의 공성 병기와 궁병 앞으로 그냥 병사들을 내모는 멍청이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1만이 아니라 10만을 보내도 전멸하고 말 것이다.
그런데 그런 놈이 여기 있다. 그게 바로 자신이었다.
하지만 글래스고 백작에게도 변명거리는 있었다.
분명 펜리스군은 전원 기마병이라 들었다. 그게 아니면 북부에서 그렇게 빨리 이곳에 올 수가 없었다.
기마병이 활도 잘 쏘고, 공성 병기를 끌고 다닐 거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으아아아! 저놈들은 도대체 뭐야!"
그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펜리스군은 뚫린 성벽을 막지도 않고 있었다. 대놓고 로드리크군을 무시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으아아아! 펜리스! 펜리스 백작!"
글래스고 백작은 한참을 발광하다가, 머리가 산발이 된 채 붉게 충혈된 눈으로 참모에게 물었다.
"이, 이제 어떻게 하지?"
그의 목소리는 상당히 떨리고 있었다.
도무지 저 안으로 들어갈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398화 기술의 차이를 보여 줘라. (2)
성을 직접 점령하기 힘들 때 쓰는 대표적인 방법은 성을 포위하고 그 안의 병력을 굶기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지금은 쓰기 어려웠다. 그랬다간 정작 자신들이 굶어 죽게 생긴 상황이다. 로드리크군에게 보낼 보급품이 전부 저 안에 있었다.
주변 봉신 영주들은 거지가 됐다. 약탈할 곳도 없었다. 어떻게든 저 성을 다시 뺏어야 원활하게 보급을 할 수 있었다.
"방법을 찾으란 말이다! 방법을!"
"이, 일단 저희도 공성 병기를 구해야 할 거 같습니다. 성벽 위의 병력과 투석기를 공격하고 이미 뚫린 곳을 더 넓게 만들면 대군의 이점을 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구하겠다는 거냐!"
"주변 영지들을 돌면 분명 남은 게 있을 겁니다. 그곳에서 차출해 오고, 그래도 부족하면 이곳에서 자원을 구해 만들어야 할 거 같습니다."
"으으으... 그딴 게 저 성에 통하겠냐?"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어떻게든 해 봐야 할 거 같습니다."
어쩔 수 없이 글래스고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되든 안 되든, 뭐라도 다 해 봐야 할 상황이었다.
"일단 주변 영지들을 돌면서 공성 병기와 식량도 얻어 와라. 나중에 후작가에서 충분히 보상해 주겠다고 하도록."
글래스고 백작의 명령에 따라 일부 병력이 주변 영지로 흩어졌다.
며칠 뒤 돌아온 그들은 고작 3대의 투석기와 한 대의 충차만 구해 왔을 뿐이었다.
글래스고 백작은 숨을 씩씩 내쉬며 물었다.
"이게 전부라고? 식량은?"
"대부분이 펜리스군과 도적 떼에게 파괴되었고... 멀쩡한 것들은 우리가 차출한 상태였습니다. 식량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다른 영지들도 굶고 있었습니다."
"으으... 으으으으...."
글래스고 백작은 이만 갈며 어떠한 말도 하지 못했다. 실제로 후작가에서 병력과 함께 물자까지 어마어마하게 징발한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펜리스군이야 전부터 서부 영지들을 약탈하고 돌아다녔기에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완전히 토벌하지 못한 도적 떼가 아직도 문제인 모양이다.
"이, 일단 가져온 투석기로 공격해 봐라."
충차는 쓸 필요도 없었다. 끌고 가는 중에 집중 공격을 받고 박살 날 게 뻔했다.
로드리크군은 그나마 구해 온 투석기로 공격을 시도했다.
파아아앙!
쿠웅! 쿠웅! 쿠웅!
돌은 성에 닿지도 못하고 떨어졌다. 좋은 건 진작에 다 1군단이 가져갔으니 남은 건 오래되고 성능이 떨어지는 것뿐이었다.
"조금 더 가까이 가고 돌을 가벼운 걸로 바꿔 봐라."
아쉬운 마음에 다시 시도해 보았다. 과연 거리를 좁히고 가벼운 돌을 쓰자 성벽까지 날아가긴 했다.
하지만 성벽에 닿는 것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콰아아앙!
성을 향하던 돌은 어디선가 날아온 창에 맞아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무게도 가볍고 작은 돌 따위는 펜리스의 기사들도 부술 수 있었다.
하물며 달랑 3개씩 날아오는데 그게 무슨 위협이 된단 말인가.
"으으으...."
글래스고 백작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지셀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기술의 차이를 보여 줘라."
끼이이익....
펜리스 기동군 병사들이 투석기에 가벼운 돌을 장전하고 쏘아 대기 시작했다.
퍼엉! 퍼엉! 퍼엉!
돌들은 높이 포물선을 그리며 로드리크군이 대기하고 있던 진영까지 떨어졌다.
콰앙! 콰앙! 콰앙!
"으아아악!"
"저놈들이 투석기 공격을 시작했다!"
"군사를 더 뒤로 물리셔야 합니다!"
뜬금없는 투석기 공격을 받고 병사들이 또 죽어 가기 시작했다.
글래스고 백작이 이를 갈았다. 이쪽은 공격을 못 하는데 저쪽은 공격을 한다. 미칠 것만 같았다.
"뒤로 물러나라! 더 뒤로 물러나라!"
로드리크군은 미처 정신도 차리지 못하고 혼비백산해서 물러났다. 그나마 가져온 3대의 투석기는 이미 박살이 나고 말았다.
글래스고 백작은 그제야 깨달았다. 전쟁은 단순히 초인과 기사들만으로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기술의 격차로도 이런 압도적인 결과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글래스고 백작은 손톱을 마구 물어뜯었다.
"어떻게 하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처음 출정할 때만 해도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이 대군을 이끈다는 자부심과 자신감이 무한히 치솟았다.
펜리스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머릿속엔 오직 공작가와의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워 왕국에 자신의 이름을 날릴 생각만 가득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 펜리스군에 1만이나 되는 병력을 잃고도 이길 방도가 보이지 않았다.
포기할 수도 없었다. 여기를 탈환하지 못한다면 자신들의 본대도 끝이리라.
"아니, 아니지. 펜리스는 식량이 많다고 들었어. 본대는 쉽게 그곳을 점령할 수 있을 거야."
그나마 다행인 일이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자신만 펜리스 따위에 병력을 잃어버린 한심한 놈이라고 망신당하게 된다. 자칫하다간 명예도 잃고 목숨도 잃을 수 있었다.
어떻게든 여기를 되찾아야 했다.
글래스고 백작은 단단히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기마병과 방패병을 앞세워 모두 성을 향해 달려라. 기마병들도 모두 방패를 착용하도록."
"위험합니다!"
"어떻게든 투석기의 사정거리만 돌파하면 된다. 앞서가는 기마병들과 방패병이 화살 공격을 막는다. 그사이 다른 병력이 밀고 들어가면 된다."
"피, 피해가 엄청날 겁니다."
"그게 아니면 방법이 있나! 전군이 전부 돌격하면 돼! 1만의 피해를 보더라도 2만이 들어가면 우리가 이길 수 있다!"
참모는 침을 꿀꺽 삼켰다. 2만이 들어가도 이긴다는 보장이 없었다. 펜리스 백작 홀로 수천의 병사는 상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한번 당했으니 병사들도 전처럼 당황하지 않을 거다. 저번처럼 주춤하지 말고 전력을 다해 달려라. 이 인원이 다 달리면 투석기가 100대라도 막을 수 없다. 알겠나?"
"아, 알겠습니다."
부우우우웅!
전투 나팔이 울리고 로드리크군은 다시 진형을 갖췄다.
명령을 전달받은 병사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저 무시무시한 공격이 쏟아지는 성으로 죽을 각오를 하고 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살려면 어떻게든 빨리 성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게 그나마 살아남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로드리크군이 진형을 갖추고 돌격을 준비하는 걸 보고 지셀이 혀를 찼다.
"쯧쯧.... 쓸데없이 병사들을 소모하는군."
그가 봤을 때는 최악의 방법이었다. 차라리 물러났다가 다른 방법을 찾아왔어야 했다.
그 마음은 이해가 갔다. 시간이 갈수록 보급 문제로 시달릴 테니 마음이 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와 이렇게 된 거 더 열심히 뛰어오게 해 줘야지. 성문을 열어라."
끼이이익....
지셀의 명령에 린더스타인의 거대한 성문이 열렸다.
단단한 성문은 동시에 수백 명도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컸다.
갑자기 성문이 열리자 글래스고 백작은 당황했다.
"뭐야? 저걸 왜 열어? 설마 나와서 싸우겠다는 건가?"
그러면 더 좋다. 직접 맞서 싸우면 자신들이 이길 수 있다. 아무리 상대 쪽에 마스터가 있다 해도 이 많은 병력이라면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성벽 위의 펜리스군은 미동도 없었다. 대신 지셀이 화살 하나를 쏴 로드리크군의 진영에 떨어뜨렸다.
글래스고 백작은 이게 뭔 일인지 몰라 눈만 껌뻑거렸다.
"뭐야? 저거 뭐야?"
"화살에 쪽지가 묶여 있습니다."
"가져와 봐라."
협상하자는 건가 싶어 조금 기대하며 쪽지를 펴 보았다.
[성문을 열어 놓고 싸우겠다. 자신 있으면 들어와 보든가.]
"이, 이이익! 이 새끼가 감히!"
엄청난 자신감에서 비롯된 조롱이었다. 글래스고 백작은 열이 올라 얼굴이 시뻘게졌다.
"감히! 북부의 촌놈 새끼가 감히!"
사실 지금은 명성으로도, 실력으로도 글래스고 백작은 펜리스 백작에게 안 된다. 하지만 오랫동안 북부를 무시했던 글래스고 백작으로서는 이런 조롱을 참을 수가 없었다.
"당장 돌격해라! 충분히 할 만하다! 방패병들은 전력을 다해 화살을 막아라!"
"와아아아아!"
병사들은 두려움을 던져 버리려는 듯 크게 함성을 내지르며 달려 나갔다.
두두두두두!
가장 먼저 기마병들이, 그 뒤를 이어 방패병들이 달려 나갔다. 이들이 어떻게든 자리를 잡고 화살 공격을 막아야 했다.
콰아앙! 콰앙! 콰아앙!
성에서 다시 투석기 공격이 시작됐다. 달려오던 병사들이 무수하게 터져 나갔다.
그래도 전과 달리 주춤거리지 않자 꽤 많은 인원이 살아남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거기다 전군이 이를 악물고 달리고 있다. 투석기만으로는 3만에 가까운 수를 막을 수가 없었다.
병사들이 개미 떼처럼 성에 달라붙으려 하자 다시 활 공격이 시작되었다.
파아아아앗!
"으아아아악!"
1만에 가까운 화살을 맞고 죽어 가는 병사들이 더 많았다.
겨우겨우 도착한 기마병들과 방패병들이 진형을 갖추고 방패를 들어 올렸다.
타앙! 타타탕! 타앙!
타고 온 말들은 죽었지만 방패를 올린 자들은 살아남았다. 그리고 뒤이어 들어온 보병들이 그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두 명, 세 명씩 짝지어 전진했다.
그 모습을 본 글래스고 백작이 충혈된 눈으로 웃었다.
"봐라! 가능하잖아! 저대로 들어가면 되잖아!"
화살 공격이 분산되니 살아남는 병사들이 확실히 더 많아졌다. 하지만 참모들의 표정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벌써 수천이 죽었다.'
'들어간다 해도 이길 수 있을까?'
'펜리스 백작이 아직 안 움직였어.'
만약 상대측에 마스터가 없다면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천의 용병들만으로 2만의 군대와 싸워 이긴 적도 있는 펜리스 백작이다.
병사들을 밀어 넣는다고 끝난 게 아니라는 뜻이다.
과연 참모들의 불길한 예상을 실현해 주려는 듯, 성벽 위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셀이 창을 이리저리 몇 번 흔들더니 말했다.
"기사들은 날 따라와라. 화살 공격은 뒤쪽에만 하도록."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승리할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구경만 하고 있기에는 몸이 근질근질했다.
지셀은 단숨에 성벽 위에서 뛰어내렸다.
콰아아아앙!
"으아아아악!"
지셀이 땅에 창을 꽂으며 마나를 폭발시키자 모여있던 로드리크군이 전부 몸이 터지며 튕겨 나갔다.
번쩍!
그의 창이 움직일 때마다 붉은 선이 번뜩였다.
화살 공격만 막으며 성문으로 들어가려 했던 병사들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할 수밖에 없었다.
콰앙! 콰아아앙!
지셀은 주변에 있던 적들을 빠르게 죽여 나갔다. 그의 갑작스러운 난입에 로드리크군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으아아악!"
"적이 나왔다!"
"싸워라! 어서 싸워라!"
언제부터인지 투석기와 화살 공격은 뒤쪽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어떻게든 싸워 보려고 방패까지 집어 던지고 덤벼들었지만 지셀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지셀이 미친 듯이 적들을 죽여 나가자 이번에는 새로운 자들이 다가왔다.
"적은 하나다! 모두 다 덤벼라!"
로드리크의 기사들이 크게 외치며 지셀에게 달려들었다. 기사답게 투석기 공격을 피하고 화살 공격까지 쳐 내며 다가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지셀의 공격을 막지 못하고 덤비는 족족 죽어 나갔다.
그사이 성벽 위에서도 기사 200명이 줄을 잡고 급하게 뛰어내렸다.
쿠웅! 쿠웅! 쿠웅!
"아야야야!"
"너무 급하게 뛰었어!"
"젠장! 팔 나간 거 같아!"
성벽이 너무 높다 보니 기사들은 지셀처럼 멋지게 뛰어내리지 못했다. 대부분이 낙법을 써서 구를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높아도 너무 높았다. 너무 아파서 비명이 나올 정도였다.
지셀을 막기 위해 다가오던 로드리크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그들에게 달려왔다.
"다 넘어져 있다!"
"저놈들이라도 먼저 죽여라!"
"지금이 기회다!"
어떻게든 적을 하나라도 줄여야 하는 로드리크군의 입장에서는 정말 좋은 기회였다.
저 높은 성벽에서 뛰어내리다니 미친놈들이 분명했다. 충격이 클 테니 자신들만으로도 죽일 수 있으리라.
스각! 스각!
하지만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어느 순간 벌떡 일어난 카오르가 미친개처럼 날뛰었기 때문이다.
"빨리 일어나라! 이 병신들아! 누워 있다가 죽을 거야?"
카오르의 검이 움직일 때마다 다가오던 병사들이 우수수 죽어 나갔다. 그의 실력은 실전을 겪을수록 더 날카로워졌다.
그 틈을 타 벌떡 일어난 기사들이 로드리크군에게 덤벼들었다.
"으아아악! 이놈들 멀쩡하잖아!"
로드리크군은 펜리스 기사들의 공격을 받고 비명을 내질렀다.
투석기와 화살 공격을 피해 겨우 여기까지 왔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뒤에서 달려오는 아군들은 여전히 원거리 공격에 죽어 나가고 있었다. 그러니 빠르게 인원이 모이지도 못했다.
그런데 200명이나 되는 펜리스 기사들이 날뛰니 도무지 막을 방법이 없었다.
콰앙! 콰앙! 콰앙!
"으아아아악!"
로드리크군의 비명이 사방에서 울렸다. 죽어 가면서 달려왔는데 도착하면 도착하는 대로 또 죽는다.
보다 못한 참모들이 글래스고 백작에게 외쳤다.
"후, 후퇴하셔야 합니다! 펜리스 백작이 앞을 막고 있습니다!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으으으으.... 성공했잖아! 앞까지 다가갔잖아! 저놈만 뚫으면 다 들어갈 수 있잖아!"
"안 됩니다! 이 방법으로는 절대 안 됩니다! 대군으로 포위하지 않는 이상, 가는 족족 펜리스 백작에게 죽고 말 겁니다!"
"으아아아아아! 펜리스 백작!"
글래스고 백작은 피눈물을 흘렸다. 얼핏 봐도 순식간에 1만이 넘는 인원을 또 잃었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 빠른 속도로 병력이 줄어들고 있었다.
정말 공성탑이라도 여러 대 가져오지 않는 이상 저 성을 공략하기는 불가능했다.
"후퇴하라! 후퇴해!"
그가 비명처럼 후퇴 명령을 외쳤다.
뿌우우우우!
후퇴 나팔이 울리고 로드리크군은 살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다시 투석기 공격과 화살 비를 뚫으며 도망가야 하지만 앞으로 돌격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도망가는 적들을 펜리스의 기사들이 쫓으려 하자 지셀이 소리 질렀다.
"멈춰라!"
그 한마디에 기사들이 걸음을 멈췄다. 성벽 위에서 쏘아 대던 투석기와 화살 공격도 멈췄다.
피범벅이 된 지셀이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외쳤다.
"펜리스!"
지셀이 창을 앞으로 뻗었다. 대열이 다 망가진 채 도망가는 로드리크군이 보였다.
"전원 돌격하라!"
그의 외침은 그 어떤 때보다 전장에 크게 울렸다. 동시에 성벽 위에 있던 병사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두두두두두!
말에 올라탄 펜리스의 병사들이 열린 성문과 뚫린 성벽을 통해 뛰쳐나왔다.
399화 살고 싶으면 충성을 맹세해라. (1)
히이이이잉!
두두두두두!
긴 울음소리와 함께 흑왕이 열린 성문을 통해 뛰어나왔다.
지셀은 바로 흑왕의 말고삐를 낚아채며 올라탔다.
성안에서 나오던 병사들 중 일부는 말을 옆에 하나씩 더 끼고 달려 나왔다. 기사들이 탈 말이었다.
기사들도 재빨리 달려 나온 말에 올라탔다. 이제 펜리스군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말에 올라타게 되었다.
지셀이 흑왕과 함께 전방으로 내달리며 다시 외쳤다.
"가자! 모두 쓸어버려라!"
"와아아아아!"
펜리스군이 함성을 터트렸다.
지셀이 탄 흑왕은 빛살처럼 빠르게 앞으로 뻗어 나갔다. 병사들보다 늦게 출발했지만 어느 순간 선두를 차지하고 있었다.
도망가던 로드리크군은 사색이 되어 소리를 질러 대기 바빴다.
"펜리스군이 나왔다!"
"기마 돌격이다!"
"도망가! 어서 피해!"
두두두두두두!
무려 1만의 기마병이 움직이니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울렸다.
로드리크군의 지휘부에서는 급하게 고함이 터져 나왔다.
"이 멍청이들아! 대열을 갖춰라! 창을 들고 방패를 들어라! 어서 대열을 갖추란 말이다!"
로드리크군은 이미 대열이 망가지고 뒤를 보이고 있었다. 이대로 기마 돌격에 당하면 전원이 몰살당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얻어터질 대로 얻어터지고 사기가 잔뜩 떨어진 병사들은 감히 펜리스군에 맞서 싸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너희가 싸워!"
"우리는 도망갈 거야!"
"못 이겨! 저놈들은 우리가 이길 수 없다고!"
오히려 병사들이 지휘부를 향해 악을 썼다. 그들이 보기에 지휘부는 이기지도 못할 싸움을 건 멍청이들이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조금이라도 살 가능성을 찾아 도망가는 것이 나았다.
하지만 대부분이 보병인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펜리스군에 뒤를 잡히고 말았다.
콰아아아앙!
"으아아아악!"
1만의 기마병이 일렬로 서면 엄청난 범위를 밀어버릴 수 있다. 펜리스 기동군은 그렇게 로드리크군을 갈아 버리며 앞으로 전진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지셀이 있었다.
그는 로드리크군의 사이를 일직선으로 뚫으며 외쳤다.
"죽기 싫으면 무기를 버리고 엎드려라!"
그의 외침에 로드리크의 병사들이 바로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하지만 그들이 전부 살아남지는 못했다. 일부러 피해 가기에는 로드리크군의 병사들이 너무 많이 엎드렸기 때문이다.
콰아아앙! 콰지지직!
펜리스군 전원이 돌격하다 보니 경로에 있던 병사들을 어쩔 수 없이 짓밟고 갈 수밖에 없었다.
"으아아아악!"
"항복했잖아! 살려 줘!"
"옆으로 피해! 옆으로 굴러!"
말에 밟힌 병사들과 어떻게든 피하려는 병사들의 외침이 섞여 전장은 금세 혼란스러워졌다.
그래도 펜리스군은 엎어진 병사들을 일부러 죽이고 가진 않았다. 그저 앞을 막고 있으면 뚫고 갔을 뿐.
두두두두두두!
그렇게 펜리스군은 완전히 무너진 로드리크군을 거침없이 뚫으며 달려 나갔다.
로드리크군 병사들은 어찌어찌 옆으로 피하며 전장에서 벗어나거나, 전투를 포기하고 엎어졌다.
그 모습을 본 글래스고 백작이 피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저 멍청한 것들! 이 많은 수를 가지고도 덤비지도 못한다는 말이냐!"
만약 전원이 몸을 돌려 반항했으면 이렇게 허무하게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지금도 수는 여전히 자신들 쪽이 많았다.
하지만 아무도 싸우고 싶지 않아 하는데 어찌 싸움이 되겠는가.
전쟁이란 이런 것이다. 수가 더 많아도 한번 전의가 꺾이면 공포는 모두에게 전염병처럼 옮겨 간다.
그래서 병사들의 사기와 충성심을 유지하는 것은 전쟁에서 무척이나 중요하다. 로드리크군은 수는 많을지언정 가장 중요한 것들이 없었다.
"이 쓸모없는 것들! 이 쓰레기 같은 것들! 어서 싸워라! 어서 몸을 돌리고 싸우란 말이다!"
글래스고 백작은 연신 자신의 병사들을 보며 욕을 내뱉었다.
서부의 병사들은 수만 많지, 나태하다는 소문은 예전부터 유명했다. 글래스고 백작도 그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누구와도 싸울 일이 없고 누구도 덤비지 않으니 문제 될 일이 없었다. 다른 귀족들이 질투심에 깎아내리는 말이라 생각했다.
"이렇게 형편없을 줄이야...."
그런데 그 말이 전부 사실이었다.
귀족들부터 병사들까지 모두 현재의 평화에만 안주해 있었다. 그 누구도 긴장감을 품고 살지 않았다.
그러니 매일 지옥 같은 훈련과 수많은 실전을 겪은 펜리스군에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영지를 위한다는 그 마음가짐까지도.
전장에 펜리스군의 외침이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무기를 버리고 항복해라!"
펜리스군의 돌격은 이제 속도가 줄어들 대로 줄어들었다. 너무나 많은 로드리크군의 병사들이 엎치락뒤치락하며 길을 막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엎드린 병사들을 넘어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정신을 못 차리고 길을 막는 병사들은 가차 없이 베어 넘겼다.
로드리크군이 완전히 무너지자 글래스고 백작 옆에 있던 참모들과 기사들이 외쳤다.
"도망가셔야 합니다!"
"어서 본대에 이 소식을 알려야 합니다!"
"전멸입니다! 우리는 전멸입니다!"
벌써 절반 이상이 뚫렸다. 그나마 병사들이 많아 지금까지 버틴 거지, 그렇지 않았으면 진작에 지휘부까지 들이닥쳤을 것이다.
글래스고 백작은 침음을 애써 삼키고 말했다.
"호위병들은 앞을 막아라! 기사들과 참모들은 퇴각해라! 어떻게든 후작님에게 이 사실을 알려라!"
그렇게 외친 글래스고 백작은 바로 말머리를 틀었다. 호위 기사들이 그의 옆에 바짝 붙었다.
남은 참모들과 지휘관들, 기사들도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도망가기 바빴다.
호위병들이 그 모습을 보고 외쳤다.
"사령관과 기사들이 도망간다!"
"이 개자식들아!"
"우리보고 어떻게 막으라고!"
엘리트 병사로만 구성되어 그나마 군기가 잡힌 호위병들이지만, 지휘관들이 저들만 살겠다고 도망가는 상황에서까지 충성할 정도는 아니었다.
두두두두두두!
분개하던 호위병들은 말발굽 소리에 급하게 앞을 돌아보았다. 이미 펜리스군이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특히 가장 선두에 선, 눈에서 붉은 빛을 뿜어내며 웃는 자는 그들도 무척이나 잘 아는 자였다.
"우리도 항복하겠습니다!"
누군가의 외침과 동시에 호위병들이 모두 옆으로 빠지며 엎드렸다.
지셀은 순식간에 그들을 지나치며 말했다.
"네놈들은 쓸 만해 보이는군. 그대로 자리에서 기다려라. 도망치는 자는 죽이겠다."
빠르게 지나갔음에도 마치 옆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그들의 귓가에 지셀의 말이 맴돌았다.
그 말에 호위병들은 침을 꿀꺽 삼키고 얌전히 바닥에 엎드려 있을 수밖에 없었다.
두두두두두!
글래스고 백작은 한참을 달리다가 뒤를 힐끗 바라보았다.
"으허헉!"
그러고는 기겁한 표정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펜리스 백작이 홀로 쫓아오고 있었다. 아직 거리가 충분히 멀 때 도망치기 시작했는데도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마, 막아라! 막으란 말이다!"
이제 호위 기사도 버려야 한다. 이대로 있다가는 따라잡힐 게 뻔했다.
호위 기사들은 백작의 명령에 서로 눈치를 봤다.
글래스고 백작을 따라가는 기사는 고작 10명이었다. 본래는 100명이 넘었지만 그중 일부는 이미 전투 중에 도망갔고, 남아 있던 자들 대부분도 성 앞에서 진작에 죽은 상태였다.
그런데 10명 만으로 마스터인 펜리스 백작을 막으라고?
그냥 죽어서 시간이나 벌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서로 눈빛을 교환한 호위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이곤 갑자기 옆으로 퍼져 나갔다.
글래스고 백작을 버린 것이다.
"이, 이놈들! 이게 무슨 짓이냐! 막아라! 저 새끼를 막으란 말이다!"
글래스고 백작이 애타게 소리를 질렀지만 그 말을 듣는 기사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자기 살기에 바빴다.
지셀은 그 모습을 보고는 씨익 웃더니 한 손을 뻗었다.
화르르르륵!
파아아앗!
검붉은 마력의 창들이 수십 개나 생성되어 날아갔다. 마력의 창은 도망가는 기사들을 놓치지 않고 모두 등을 뚫었다.
"크아아악!"
무방비 상태의 기사들은 그대로 등이 뚫리며 절명했다.
이제 남은 건 글래스고 백작 하나.
순간 지셀의 몸에서 검붉은 마나가 흘러나오며 흑왕을 감싸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두!
흑왕의 눈이 붉어지며 속도가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글래스고 백작은 연신 뒤를 돌아보다가 그 모습을 보고 경악성을 내뱉었다.
"으, 으아아아!"
지셀이 벌써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창만 던져도 자신은 등이 뚫려 죽을 것이다.
"오지 마! 오지 마!"
글래스고 백작은 추한 외침을 내뱉으며 말고삐를 마구 흔들었다. 하지만 흑왕의 속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어느 순간 옆으로 다가온 지셀이 손을 뻗어 글래스고 백작의 목을 잡았다.
"커헉!"
글래스고 백작은 목이 꺾일 것 같은 고통을 느꼈지만 죽지는 않았다.
그를 태우고 있던 말은 그대로 앞으로 달려 나가며 전장을 벗어났다.
글래스고 백작은 흑왕에 올라탄 지셀의 손에 목을 잡힌 채 대롱대롱 매달리게 되었다.
"사, 살려 주시오. 내 충분한 보상을 하겠소."
"그냥은 못 죽이지."
"뭐, 뭐요?"
지셀은 창을 버리고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바로 글래스고 백작의 배를 찔렀다.
푸욱!
"커허헉!"
글래스고 백작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배가 뚫렸지만 그는 죽지 않았다. 지셀이 절묘하게 급소를 피했기 때문이다.
지셀은 차가운 눈빛으로 글래스고 백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본대의 편제, 기사와 병사들, 병기들의 정확한 수, 현재 설정한 보급로 등 모든 정보를 불어라."
대충은 알고 있었다. 굳이 정보를 캐내지 않더라도 펜리스에 남은 이들이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정확한 정보를 알아 두려는 심산이었다.
글래스고 백작은 부들부들 떨며 입을 열었다.
"그, 그걸 말하면 날 죽일 게 아니오."
"말 안 해도 어차피 죽는다. 고통스럽게 죽을 것인지 편하게 죽을지만 선택하면 된다."
푸욱!
지셀이 또다시 검으로 글래스고 백작의 몸을 찔렀다. 마나까지 살짝 집어넣자 그의 몸이 경련을 일으키듯 떨렸다.
"끄아아악! 말하겠소! 말하겠소!"
머리카락이 곤두설 정도로 소름 끼치는 고통을 느낀 글래스고 백작이 마구 외쳤다.
이 미친놈은 고문에도 일가견이 있는 게 분명했다. 차라리 곱게 죽고 싶었다.
글래스고 백작은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모두 토해 냈다. 중간중간 지셀이 고통을 주니 머리를 굴릴 틈도 없었다.
"별거 없군. 그럼 잘 가라."
지셀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듣고 있다가 바로 글래스고 백작의 목을 베었다.
역시 예상한 대로 그냥 수로만 무식하게 밀고 오는 중이었다.
"뭐, 그 정도면 잘 막아 낼 수 있겠지."
지셀의 측근들은 카오르만 제외하고 대부분 영지에 남아 있었다. 카오르와 돌격대는 수성에 어울리는 놈들이 아니라서 데리고 온 것이다.
6만의 본대가 펜리스를 노리고 움직이고 있다. 병력의 질과 수, 병기의 수마저 이곳에 온 추격군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지셀은 당장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아군을 믿고 이곳에서의 일을 빨리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전장으로 돌아오자 이미 전투는 완전히 끝난 상황이었다.
로드리크군은 모두 무릎을 꿇고 손을 머리 뒤로 올린 상태였다. 펜리스군은 곳곳에 서서 그들을 감시하며 지셀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남은 자들 중에서 가장 계급이 높은 자가 누구냐!"
지셀의 외침에 병사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지휘부야 다 도망갔지만, 병사들 사이에도 계급이 있다. 누군가는 자신의 선임을 바라보고 누군가는 더 높은 자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서로서로 고개를 돌리다 보니 곧 한 사람에게 시선이 모였다.
시선을 피하던 남자는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자 어쩔 수 없이 천천히 일어났다.
"이, 이번에 호위대를 이끌던 월터입니다. 이전에는 2군단 소속의 제3보병 중대를 이끌었습니다."
그는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휘관은 모두 죽일 거 같았기 때문이다.
지셀은 월터를 잠시 바라보더니 말했다.
"좋다, 너한테 임시 지휘권을 줄 테니 당분간은 네가 남은 병사들을 이끈다. 알겠나?"
"네, 네? 아, 알겠습니다!"
월터는 대체 왜 자신에게 지휘권을 맡기는지 궁금했지만 이유는 묻지 않았다. 괜히 목이 달아나고 싶지 않았다.
"남은 병사들을 파악하고 다시 부대별로 모아라. 지휘관이 없으면 가장 선임 병사를 임시 지휘관으로 삼도록."
"알겠습니다!"
월터가 바쁘게 움직이며 병사들을 추슬렀다.
보통 이렇게 다시 적군이 모이게 하는 건 위험한 일이지만 펜리스군은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로드리크군 따위는 압도적인 힘을 가진 상대에게 다시 덤벼들 엄두를 내지 못할 테니까.
어설프게나마 병력을 다시 추스른 월터가 지셀의 앞에 섰다.
"나, 남은 병사들은 약 1만 5천입니다! 소속마다 남은 인원이 너무 달라 크게 천인대 단위로 모아 놨습니다."
"좋아. 편제야 나중에 다시 하면 되니까."
항복이 빨라서 그런지 생각보다 병사들이 많이 살아남았다. 애초에 지셀이 의도했던 결과이기도 했다.
지셀은 모두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이제 린더스타인은 펜리스의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도 자랑스러운 펜리스의 병사들이 된 것이다! 앞으로는 펜리스를 위해 싸우면 된다.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죽다 살아나게 된 병사들은 크게 대답했다. 속마음이야 어떨지 몰라도 감히 반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전투력의 차이를 극명하게 느꼈는데 누가 감히 덤빌 마음이 들겠는가.
그리고 펜리스가 병사들을 잘 대우해 준다는 건 서부에서도 유명했다. 살짝 기대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지셀은 그들을 이끌고 당당하게 린더스타인으로 들어갔다.
"자, 이제 다음 일을 해 볼까?"
지셀 자신은 최대한 빨리 펜리스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기껏 점령한 서부를 다 버려두고 갈 수는 없었다.
그러니 이곳에서 얻은 병력과 식량을 최대한 활용할 생각이었다.
400화 살고 싶으면 충성을 맹세해라. (2)
성안의 사람들은 모두 집 안에 숨어 있었다.
잔인한 로드리크 후작 아래서 살다 보니 모두 귀족들을 무서워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침략군이 자신들을 약탈할까 봐 겁에 질려 있었다.
왕국에서 손에 꼽히게 잘 산다는 서부임에도 영지민들의 생활 수준은 다른 영지와 다를 게 없었다.
영지민들의 반응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영주성으로 직행한 지셀은 로드리크 후작의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의자가 좀 크네. 아무튼 월터, 너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리겠다."
"분부만 하십시오!"
월터가 크게 대답했다. 그는 임시 지휘관이란 명목으로 여기까지 계속 끌려왔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지셀의 눈에 잘 들어야 앞으로의 인생이 편해질 터였다.
지셀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부상자를 제외하고 먼저 3천의 병력을 추려라. 너에게 맡기겠다."
"저, 저한테요?"
"그래, 오늘 하루는 잘 먹고 푹 쉬고 내일 내가 명한 곳으로 가라."
"아, 알겠습니다. 어디로 가면 되겠습니까?"
"이곳에서 가까운 셀버크 백작령으로 가라."
셀버크 백작은 로드리크 후작의 봉신이다. 그쪽도 상당히 많은 병력과 식량을 차출당했지만 그래도 서부의 다른 영지들보다는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영지의 위치상 지셀에게 약탈을 당하지도 않았고, 어느 정도는 힘이 있어 도적들에게 당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로드리크 후작을 싫어하니 이번 전쟁에 출정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가서 내 말을 전해라. 당장 여기로 와서 모든 이가 보는 앞에서 나에게 충성을 맹세하라고. 거절하면 내가 군대를 이끌고 가서 성을 불태우고 한 놈도 살려 두지 않겠다고 전해라."
"아, 알겠습니다! 그, 그래도 거절하면 어찌할까요?"
그 말만 전할 생각이라면 사실 전령만 보내도 되는 일이다. 그런데 3천의 군대를 맡겼다. 그렇다는 건 해야 할 게 있다는 뜻이다.
"성을 포위하고 한 놈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라. 기다리고 있으면 내가 가서 직접 성을 점령하겠다."
"알겠습니다!"
월터는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적일 때는 무서웠지만 이제 같은 편이라고 생각하니 무한한 자신감이 솟구쳐 올랐다.
그저 명령만 받았는데도 마음이 편해지고 든든하다. 과연 북부 최강이라는 명성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린더스타인에는 엄청난 식량이 쌓여 있었다. 그간 영지민들에게서 착취하고 전쟁을 위해 봉신들에게서도 긁어모은 식량이었다.
지셀은 그걸 병사들에게 아낌없이 풀었다.
"다들 잘 먹고 쉬어라. 또 바쁘게 움직여야 하니까."
병사들은 갑작스러운 식량 세례에 깜짝 놀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우와아아! 고기다!"
"이렇게나 많이 준다고?"
"이거 항복한 게 더 좋은데?"
병사들로서는 어쨌든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병사 신분으로는 먹기 힘든 것들이 마구 쏟아지자 입이 찢어지도록 기뻐했다.
그들은 정말 배가 터지도록 실컷 먹으면서 말했다.
"야, 펜리스가 진짜 병사들한테 잘 대해 주나 봐."
"그러니까 저렇게 열심히 싸우지."
"달려올 때 봤냐? 나 오줌 지릴 뻔했다니까!"
무장도 돌려받았지만 반란을 일으킬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애초에 로드리크 후작가에 충성심도 없었으니 그들로서는 당연히 더 나은 주인을 섬기는 것이 맞았다.
누군가는 하루 만에 전향한 것을 비웃겠지만, 원래 사람은 자기 목숨이 제일 소중한 법이었다.
월터는 하루 동안 배불리 먹고 편히 쉰 병사들 중 비교적 멀쩡한 자들 3천을 차출했다.
그들은 기세등등하게 펜리스의 깃발을 들고 셀버크 백작령으로 향했다.
지셀은 남은 병사들의 편제를 새로 하고 부상자들을 쉬게 한 뒤,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자, 이제 남은 식량도 풀자."
무려 10만의 보급을 책임지던 곳이다. 비축해 둔 식량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지셀은 그중 최소 병력 유지를 위한 식량만 남겨 두고 전부 풀어 버릴 생각이었다.
지셀의 명령에 따라 엄청난 식량이 영지민들에게 풀리기 시작했다.
"우와아아! 이걸 다 우리한테 준다고?"
"뺏어가는 게 아니라?"
"그렇지 않아도 전쟁 세금 때문에 죽을 거 같았는데!"
펜리스군을 두려워하던 영지민들은 기쁜 마음으로 식량을 받았다.
펜리스 사람들이 잘 산다는 소문은 알음알음 들었지만 실제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확인하기 어려웠던 탓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식량을 풀고 민심을 안정시키려는 모습을 직접 보니 조금은 믿음이 생겼다.
실상 지셀은 민심엔 별 관심이 없고 그냥 다 쓸 생각으로 풀어 버리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펜리스 만세!"
"우리도 이제 펜리스 사람이다!"
"환영합니다!"
식량 좀 풀었다고 사람들의 민심이 확 바뀌어 버렸다. 그간 로드리크 후작의 폭정이 그만큼 심했다는 얘기다.
예나 지금이나 영지민들은 잘 먹는 게 최고다. 주인이야 누가 됐든 사실 상관은 없었다.
다시 로드리크 후작이 이곳을 되찾을 수 있겠지만 이미 먹은 식량을 어찌하겠는가?
그렇게 민심은 빠르게 펜리스 쪽에 기울었다. 지셀은 남의 걸로 생색을 제대로 낸 셈이었다.
"다른 곳에도 마저 풀어야겠군."
현재 서부의 많은 영지가 초토화되고 도적들이 들끓고 있었다. 전쟁 때문에 식량은 부족하고 치안 유지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아마 서부 사람들은 로드리크 후작뿐 아니라 펜리스도 같이 원망하고 있을 것이다.
다른 영지들도 빨리 안정화를 해야 하지만, 지금 당장 자신이 모든 영지를 돌 수는 없었다.
지셀에게 그걸 대신 할 사람으로 뽑힌 셀버크 백작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충성 맹세를 하라고...."
셀버크 백작의 말에 가신들이 난리를 피웠다.
"영주님! 그건 굴욕입니다!"
"그렇습니다! 어찌 스스로 찾아가 무릎을 꿇는다는 말입니까!"
"펜리스 백작이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 귀족의 명예를 너무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셀버크 백작은 그런 가신들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다들 성을 내고는 있지만 누구도 대안은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찌하자는 거냐! 저 북부에서 온 최강의 군대와 싸우자는 말이냐!"
"로드리크 후작이 이길 때까지 버티면...."
"린더스타인도 하루 만에 점령됐다! 우리가 어떻게 버틴다는 말이냐! 이미 성도 포위된 상태인데! 지금 우리는 저 3천도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
"...."
그 말에 가신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사실 자존심 때문에 말해 본 거지 그들도 펜리스를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침묵 속에서 한 가신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공개적으로 충성 맹세를 하라는 건, 로드리크 후작가와 우리를 완전히 떼어 놓겠다는 뜻입니다. 만약 펜리스에 숙였다가 후작가가 이기면 우리는 죽은 목숨입니다."
셀버크 백작은 눈을 감았다.
지금 살자고 펜리스 백작에게 충성을 바치면?
로드리크 후작이 전쟁에서 이긴다면 절대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의 제안을 거부한다면?
오늘 목숨을 잃고 이 영지는 모두 짓밟힐 것이다. 펜리스 백작은 자신에게 덤비는 자에게 절대 자비를 베풀지 않는 걸로 유명하다.
이미 수많은 영지가 그런 결과를 보여 주지 않았는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 그렇다면 살 가능성이 큰 쪽에 걸어야 한다.
한참을 고민하던 셀버크 백작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린더스타인으로 가자. 내 펜리스 백작을 직접 만나 보겠다."
"영주님, 혹여 펜리스 백작이 쉽게 영주님을 잡으려고 계략을 꾸민 거면...."
그러자 셀버크 백작이 피식 웃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그가 마음만 먹으면 나 정도 죽이는 건 식은 수프 먹기보다 더 쉽다."
병력도 대부분이 로드리크 후작에게 차출당한 상태다. 마스터인 펜리스 백작이 홀로 와도 자신은 살 수 없을 것이다.
멀리 도망을 가면 이 위기를 넘기고 살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3천의 병력에 성이 포위된 이상 그것도 불가능했다.
펜리스 백작은 그가 빠져나갈 틈을 아예 주지 않았다. 역시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셀버크 백작은 곧바로 지셀을 찾아갔다. 그를 만난 지셀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항복하고 나에게 충성을 맹세하시죠, 셀버크 백작. 좋은 대우를 해 드리겠습니다."
"내가 여기서 백작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나에게 명예도 없는 놈이라 손가락질할 것이오."
그러자 지셀이 피식 웃었다. 그의 말투가 바뀌었다.
"탐욕스러운 로드리크 후작의 폭정을 거드는 건 명예로운 일이었나? 비록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었다고는 하나 그대의 책임도 없지는 않지. 이번 전쟁에도 병력을 제공했으니 말이야."
"...."
"어차피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죽는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불명예스러운 건 마찬가지지. 설령 여기서 내가 당신을 살려 준다 해도 로드리크 후작이 당신을 가만둘 거 같아? 당신은 이미 죽은 목숨이야."
"그걸 어떻게...."
셀버크 백작이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실상 그와 로드리크 후작은 상당히 사이가 안 좋았다. 성정이 꼿꼿한 편인 셀버크 백작이 로드리크 후작의 정책에 여러 번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그가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었던 건, 서부에서 유서 깊은 가문이라 명망이 꽤 있었고 본인도 제법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봉신으로서의 의무를 버릴 수 없어 이번 전쟁에 병력 대부분을 넘겼다. 전쟁이 끝난 뒤 로드리크 후작이 그걸 순순히 돌려줄 리가 없었다.
'어떤 핑계를 대고서라도 날 죽이려 하겠지.'
그런 상황이 올 거라 예상은 하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삶의 기회일 수도 있었다.
자신의 자존심과 명예만 조금 버린다면 말이다.
지셀 또한 그걸 알고 셀버크 백작을 선택한 것이기도 했다.
전생의 정보까지 이용할 필요도 없었다. 로드리크 후작이 셀버크 백작을 싫어하는 건 서부에서도 공공연하게 퍼진 사실이었다.
'아마 내전이 끝나고 죽었었지?'
전생에 셀버크 백작은 내전이 끝난 뒤 로드리크 후작에게 수많은 수모를 받고, 결국 누명까지 쓴 채 비참하게 죽었다.
이번 생에는 로드리크 후작이 지셀에게 박살 날 예정이라 후작에게 당할 일은 없으리라.
지셀이 보기에, 그런 비참한 죽음을 피하게 해 준 것만으로도 자신을 충분히 자비를 베푼 것이었다. 제안을 거부한다면 죽일 것이다.
일이 조금 귀찮아지기야 하겠지만 필요한 인물은 다른 곳에서 찾으면 되니까.
지셀은 마지막 기회라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살고 싶으면 충성을 맹세해라. 그게 네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지셀의 사나운 기세를 마주한 셀버크 백작은 침을 꿀꺽 삼켰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절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결국 고개를 숙였다.
"깃발을 바꾸겠습니다."
깃발을 바꾸겠다는 건 다른 이의 휘하로 들어가겠다는, 충성의 대상을 바꾸겠다는 뜻이다.
셀버크 백작은 자존심이 조금 상했지만 애써 좋게 생각했다. 상대는 자신보다 어려도 신분은 더 높다. 북부의 대영주이자 북부군 사령관이다.
어차피 로드리크 후작 그 새끼도 자신보다 어렸다.
기대했던 대답에 지셀은 활짝 웃었다. 사납던 기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지고 말투도 다시 정중하게 바뀌었다.
"잘 생각했습니다. 지금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상대의 신분이 신분이다 보니 지셀도 어느 정도는 셀버크 백작을 대우해 주었다. 어쨌든 이자도 왕국의 유서 깊은 고위 귀족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셀버크 백작의 충성 맹세가 이루어졌다. 이제 그는 펜리스가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바라야 했다.
충성 맹세를 끝낸 셀버크 백작이 물었다.
"이제 제가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점령한 서부의 모든 영지는 펜리스의 직할령으로 만들 생각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관리들을 보낼 테니 그곳들을 당분간 맡아 주시죠."
"저는 남은 병력이 별로 없습니다. 그 많은 곳을 전부 맡기에는...."
"이번에 얻은 1만 5천의 포로를 맡기겠습니다. 그 병력을 이용하면 어렵진 않겠죠. 그리고 이곳에 있는 식량을 펜리스의 이름으로 아낌없이 푸세요."
그 말에 셀버크 백작이 살짝 놀랐다. 1만 5천의 군대를 가지고 린더스타인을 비롯한 서부 지역을 차지한다면 대영주라 불리어도 부족하지 않다.
거기에 식량도 넘쳐날 정도로 많다.
"이제 막 합류한 저에게 그렇게 다 맡겨도 되겠습니까? 제가 배신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지셀이 피식 웃었다.
"덤비고 싶으면 언제든지 덤벼도 좋습니다."
짧은 한마디지만 무한한 자심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 대답에 셀버크 백작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2만의 수비군과 4만의 추격군을 쳐부수고 린더스타인을 점령한 자다. 고작 1만 5천의 군대를 가지고 덤벼 봐야 뼈도 못 추릴 게 뻔했다.
아니, 덤비기도 전에 당할 대로 당해 본 병사들이 먼저 도망갈 것이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서부를 안정시키고 있겠습니다."
"아, 그리고 도적들한테는 내 이름으로 모두 투항하라고 전하세요. 그놈들 다 나한테 당한 놈들이라 어지간하면 항복할 테니."
펜리스 깃발만 봐도 도망가는 놈들이다. 그러니 셀버크 백작이 무리 없이 흡수할 수 있을 것이다.
셀버크 백작도 살기 위해서는 펜리스의 승리를 바라야 하지만, 만에 하나 펜리스가 패배했을 때를 대비해야 했다.
그러니 빠르게 주변 지역을 안정화하고 전쟁을 준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지셀은 전쟁 후 제일 중요한, 점령지를 안정화하는 과정을 남의 병력으로, 다른 사람에게 맡겨 쉽게 해결했다.
"이제 돌아가서 나머지 놈들을 처리하자."
다시 펜리스 기동군이 북부를 향해 움직였다.
* * *
지셀이 서부를 유린하고 린더스타인을 점령하고 있을 즈음, 로드리크군의 본대도 펜리스에 도착했다.
로드리크군 본대에는 기사와 마법사, 훌륭한 병기와 정예병들이 수없이 많았다.
단순히 친왕파를 도와주기 위해 분리했던 2군과는 차원이 다른 전력이었다.
그 대군이 펜리스의 최전방 요새를 점령하기 위해 진을 쳤다.
요새에는 남은 펜리스의 병력과 장수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철컥! 철컥! 철컥!
기사들이 움직이며 갑주가 부딪치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렸다.
그들을 이끄는 길리언이 성벽 위로 올라섰다. 바네사를 비롯한 다른 지휘관들도 모두 성벽 위로 올라왔다.
하지만 그 누구도 지휘소 한가운데에 서지 않았다. 무관장인 길리언도, 마법 연구소장인 바네사도, 집사장인 벨린다도.
그 외에 첩보관 로웰이나 알포이, 사제 피오테, 드워프 갈바릭, 엘프 루미나와 아스콘, 인력소장 케인 등 영지에서 제법 이름 좀 날리는 모든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한쪽으로 비켜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들 사이로, 누군가가 하품을 하며 나타났다.
"아휴, 이제 온 거야? 진짜 귀찮아 죽겠네. 왜 이렇게 귀찮게 싸움을 거냐고! 꼭 맞아야 정신을 차리는 놈들이 있어요!"
정말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타난 사람이 어기적어기적 지휘소의 가장 높은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는 바로 현재 펜리스 수비군의 총사령관이자 영지의 총관.
북부의 뇌물왕이라 불리는 클로드였다.
401화 전쟁 X같이 하네. (1)
클로드가 나타나자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건 지셀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길리언과 벨린다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에 클로드를 무시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대우였다.
다른 건 몰라도 펜리스의 군율은 지엄하다. 지셀이 전쟁 군주였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클로드는 이런 분위기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흐음, 평소에도 나를 이렇게 소중하게 여겨줬으면 좋았을 텐데. 이제 좀 내 위치를 찾은 거 같아."
"...."
전시에 군권을 가진 총사령관이다. 다들 한 마디 쏘아 주고 싶지만 그냥 입을 닫았다.
처음 지셀이 총사령관으로 클로드를 임명했을 때 다들 깜짝 놀랐다. 당연히 무관장인 길리언이 맡을 줄 알았기 때문이다.
언제나 지셀의 명을 최우선으로 하는 길리언은 순순히 받아들였다. 애초에 그는 그런 공명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반발했다.
"도련님! 총관은 제일 먼저 항복할 사람이라고요!"
"맞습니다! 전쟁을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총관에게 전군을 맡기다니요! 분명 뇌물을 받고 항복할 겁니다!"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평소에도 불만이 참 많았어요!"
가신들이 난리를 피우자 괜히 기분이 상한 건 클로드였다.
"뭐야! 내가 달라고 했어? 왜 가만히 있는 사람 욕을 하고 그래! 사람을 어떻게 보고!"
클로드는 길길이 날뛰며 가신들과 서로 손가락질을 하고 다투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클로드가 끼면 분위기가 개판이 된다.
지셀은 그냥 보고만 있지 않았다.
쿵!
발 한번 굴려서 주변을 닥치게 만든 지셀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수비군 총사령관은 클로드다. 그리 알도록."
한 번 한 말은 반대해 볼 수 있지만, 두 번 말하면 결정됐다는 뜻이다. 가신들은 입맛만 다시며 클로드를 흘겨보았다.
클로드도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는 지셀에게 바로 따졌다.
"아니, 내가 하겠다고도 안 했는데 왜 줘서 욕을 먹여요? 영주님, 저 마음에 안 들죠?"
"공식적으로는 네가 이 영지의 이인자잖아. 당연한 거 아니야?"
"그, 그건 그런데...."
워낙 권위가 없어서 그렇지, 클로드가 이 영지에서 지셀 다음가는 자리에 앉아 있는 건 사실이다.
지셀이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한번 마음껏 해 봐. 내가 돌아올 때까지만 버티면 돼."
실전이 처음인 클로드에게 서부 최강자를 상대로 마음껏 해 보란다. 사람들이 어이없어하는데 클로드의 반응이 더 가관이었다.
"진짜 마음대로 해요?"
"그래, 마음대로 해 봐."
"흐흐, 재밌겠네요."
펜리스가 예전에 무척 약했을 때는 어떻게든 도망갈 궁리만 하던 클로드였다. 하지만 북부 최강의 전력과 최고의 기술을 손에 쥐게 되니 이것저것 해 보고 싶은 게 많아졌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지셀이 없는 동안 펜리스군의 총사령관은 클로드가 되었다.
클로드와 가신들이 있는 요새, '실버라이트'에 주둔한 수비군은 1만 명이었다. 나머지는 다른 성과 요새에 분산되어 있었다.
1만이 적은 수는 아니지만 6만의 대군을 상대하기에는 현저히 적은 수였다. 거기다 총사령관이 클로드이니, 사람들은 영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클로드는 그런 사람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크흠, 준비는 다 끝났겠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길리언이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준비는... 명하신 대로 다 됐습니다."
"으흐흐. 아휴, 우리 무관장님 대답 들으니까 몸이 왜 이렇게 간지럽지? 그래, 아무튼 이제 기다리자고. 적들이 알아서 반응을 보일 테니까."
클로드의 명령에 따라 펜리스군은 그저 기다리기만 했다. 어쨌든 이쪽의 목표는 이곳을 지키면서 시간을 끄는 거였으니까. 피해는 언제나 최소화하는 게 좋았다.
머릿수 차이 외에 다른 조건들도 그리 모자라지 않았다. 예전부터 수성을 강조했던 클로드 때문에 요새는 새로 만들다시피 할 정도로 엄청나게 증축이 되었고, 전략 물자도 충분했다.
조용히 웅크리고 있는 거대한 요새를 보며 로드리크 후작은 크게 웃었다.
"북부 촌놈들이 돈 좀 벌었다더니 요새 하나는 끝내주게 지었구나."
이 요새에 실버라이트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간단했다. 하얀 석재로 지어서 마치 은빛으로 빛나는 듯했기 때문이다.
드워프들의 미적 감각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무척이나 아름다운 요새였다.
"멋진 요새가 무너지는 건 아깝지만 나중에 재건하면 되겠지."
로드리크 후작은 자신이 승리할 것을 의심치 않았다. 아무리 펜리스가 준비를 잘했어도 6만이나 되는 대군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로드리크군은 무려 사흘이나 걸려서 진을 꾸렸다. 병력의 수도 많았지만, 수많은 공성 병기를 조립하는 시간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공성 병기가 완성되고 진영을 전부 꾸리자마자 로드리크 후작이 명령을 내렸다.
"룬스톤 함정이 있는지부터 확인해라!"
후작가는 마스터인 지셀을 상대하기 위해 펜리스에 대한 정보를 다시 수집했다. 그리고 그간 펜리스가 전쟁에서 썼던 수법들을 알아내었다.
가장 유명한 것이 룬스톤 함정과 열기구였다. 후작가의 참모들은 그것들에 대비하기 위한 방책을 확실히 세워 왔다.
"마법사들을 보호하라!"
테넌트의 외침에 기사들이 마법사들을 에워싸고 조금 앞으로 나섰다.
로드리크군에는 무려 6서클 마법사 세 명과 5서클 마법사 여섯 명, 그 이하 마법사들도 100여 명이 참전했다.
어지간한 마탑은 저리 가라 할 인원이었다. 그 정도로 서부의 마법사들은 수준이 높았다.
그들은 광범위하게 마력 탐지 마법을 시전한 뒤 외쳤다.
"찾았습니다! 몇 군데에서 마력이 감지되었습니다!"
"룬스톤 함정이 분명합니다!"
"가까운 곳입니다!"
마법사들의 보고에 로드리크 후작이 무릎을 치고 외쳤다
"역시 룬스톤 함정이 있었구나! 당장 군대를 조금 뒤로 물리고 그것을 해제해라!"
로드리크 후작이 크게 웃었다. 적들이 준비한 함정이 너무나도 뻔했기 때문이다. 하긴, 저들도 별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멍청한 놈들, 같은 방법이 또 통할 줄 알았느냐. 그래, 룬스톤은 얼마나 묻어 놨지? 우리가 다시 수거해서 쓸 수 있겠느냐?"
"총 다섯 군데로 파악됩니다. 다시 쓸 수 있는지는 새겨진 술식을 먼저 확인해 봐야 합니다."
"다섯? 보통 이런 함정은 룬스톤을 최소 수백 개는 쓰지 않나?"
"그... 현재 마력이 감지된 건 다섯 군데뿐입니다. 그것도 아주 미약합니다."
"으음.... 일단 혹시 모르니 확인해 보아라."
로드리크군이 바쁘게 움직이며 병력을 조금 뒤로 물렸다. 언제 룬스톤의 마법이 발동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조금 뒤에야 병사 몇 명이 긴장한 표정으로 앞에 나섰다.
펜리스에는 6서클 마법사가 있다. 파내는 중에 어떤 마법을 발동시킬지 모르니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먼저 나설 수는 없었다.
대신 병사들에게 여러 강화 마법을 걸어 주고 땅을 파라고 보냈다. 병사들이야 죽어도 안 아까웠으니까.
퍼억! 퍼억! 퍼억!
병사들이 조심스럽게 땅을 파기 시작했다.
로드리크군의 진영에서 가깝고 요새에서는 꽤 거리가 있었기에 펜리스 측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긴장해 머뭇대던 병사들은 별다른 이상이 없자 빠르게 땅을 팠다. 마법이 발동되면 죽은 목숨이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발견했습니다!"
"룬스톤이 확실합니다!"
"응? 이게 뭐지?"
병사들은 작은 룬스톤을 쥐어 들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룬스톤에 웬 종이가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수상한 걸 들고 갈 수는 없다. 그래서 병사들이 종이를 먼저 풀어 펴 보았다.
그리고 그 안에 적힌 글을 본 병사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 모습을 본 테넌트가 크게 외쳤다.
"그게 무엇이냐! 문제가 없는 거면 당장 가져와서 후작님에게 고하라!"
병사들은 머뭇거리며 룬스톤과 종이를 가져왔다. 별 이상이 없는 걸 알게 된 로드리크 후작이 바로 종이를 받아 펴 보았다.
[병신, 속았죠?]
"...."
종이에는 노골적인 욕이 적혀 있었다. 로드리크 후작의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다른 종이를 펴 보자 다른 글이 적혀 있었다.
[6만 대군이 룬스톤 다섯 개에 막혔죠? 룬스톤 다섯 개가 무섭죠?]
[헛수고했지? 멍청하니 몸이 고생이네?]
[열 받아? 열 받으면 어쩔 건데?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나는 신을 이긴 남자...]
어떤 종이는 누가 급히 뭔가를 썼다 지운 흔적만 있었다. 무슨 뜻인지 알아먹기가 힘들었다.
"...."
로드리크 후작은 종이를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명백한 조롱이었다. 그들이 땅을 확인하고 룬스톤을 꺼낼 걸 알고 미리 이딴 수작을 준비한 것이다.
그런데 그게 통했다. 자신들은 혹시 몰라서 군대까지 조금 뒤로 물렸다. 멍청하다고 조롱해도 할 말이 없었다.
"이, 이 새끼들이 감히!"
언제나 고귀한 대접을 받아 온 로드리크 후작으로서는 처음 겪는 굴욕이었다.
설마 상대방이 이렇게 유치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명예도 모르는 천박한 것들이나 하는 짓이다.
자신처럼 고귀한 자가 이런 일을 당하니 더더욱 속이 긁혀 미칠 거 같았다.
이 왕국 최고의 귀족인 자신이 이딴 글귀를 스스로 가져가게 하고, 군대까지 뒤로 물리게 하다니!
"이 건방진 놈들을 가만두지 않겠다!"
로드리크 후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당장 전군을 움직여라! 저놈들의 목을 어서 가져오란 말이다!"
그러자 테넌트가 옆에서 말렸다.
"후작님! 하찮은 도발입니다!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어떤 함정을 파 놨을지 모릅니다. 어차피 우리가 승리할 테니 잠시 화를 거두십시오!"
로드리크 후작은 성정이 무척이나 폭급한 자다. 그는 조그마한 거슬림도 용납하지 않고 살아왔다.
그래도 전쟁이니 테넌트의 말을 듣고 겨우 화를 억누르며 참았다.
"혹시 다른 룬스톤이 남아 있는지 확인해 보아라."
이를 갈며 말하자 마법사들이 다시 마력 감지를 하며 주변을 훑기 시작했다.
요새 위에서 편하게 앉아 로드리크군의 움직임을 구경하던 클로드가 물었다.
"팠어? 다 파 갔어? 나 저렇게 멀리까지 잘 안 보인다고."
그의 물음에 옆에 있던 마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확실히 파 갔습니다. 술렁이는 걸 보니 쪽지도 확인한 모양입니다."
"좋아. 로드리크 후작이 성질 더럽고 급하다고 했지?"
그 물음에는 첩보관인 로웰이 대답했다.
"예. 먹고 싶은 음식을 내오는 게 조금 늦었다고 하녀를 죽인 일도 있습니다."
"어휴, 정말 더럽네. 저런 놈이 지 욕하는 건 또 못 참거든. 혼나 본 적이 없어서."
클로드는 손을 몇 번 까닥거리며 누군가를 불렀다.
"조금만 더 열받게 해 보자고."
불려 온 자는 욕쟁이 엘프 아스콘이었다. 앞으로 나선 그는 비장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시발.... 오늘 다 뒤졌다."
클로드의 명령에 곧 마법사들이 소리를 증폭하는 마법을 시전했다. 그리고 아스콘이 로드리크군을 향해 욕을 하기 시작했다.
"야! 로드리크 후작 이 XXX, XXXX XXX! 느금X XX XX XXXXXXX! 이 시발, XXX! 너 같은 새끼는 통구이로 XXX XXXX...."
입에 담지도 못할 험한 욕이 전장에 울려 퍼졌다. 어찌나 심한지 같은 편인 펜리스 사람들도 떨떠름한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
클로드도 혀를 차며 옆에 있는 웬디에게 말했다.
"야, 오늘 아스콘 퍼포먼스 미쳤다. 어떻게 사람 주둥이에서 저런 더러운 말이 계속 나올 수 있지? 저거 입에 쓰레기통 집어넣었나?"
"...."
웬디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전쟁하는 기분조차 들지 않았다.
같은 편인 펜리스군에서도 이런 반응이 나올 정도다. 당연히 욕을 먹고 있는 로드리크군은 모두 경악에 찬 표정으로 입만 벌렸다.
로드리크 후작은 목뒤를 잡고 부들거렸다. 그의 얼굴에 피가 몰려 새빨개졌다.
"저, 저, 저, 저, 미, 미친놈이 지, 지금 뭐, 뭐라고 하는 거냐."
자신의 욕은 물론이고 부모님 욕과 가문 욕까지 나오고 있다. 욕이 너무 상스러워서 듣기만 해도 치욕스러웠다.
그는 생전 살면서 이런 욕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누가 감히 자신에게 이런 욕을 하겠는가? 공작가도 그러하지 못했다.
로드리크 후작 정도 되는 귀족은 욕에 대한 내성이 아예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주, 죽여라! 어서 저놈들을 잡아 죽여!"
로드리크 후작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속에서 불길이 끓어오르는 거 같아 참을 수가 없었다.
이 전쟁은 평범한 전쟁이 아니었다. 북부 최강이라 불리는 펜리스를 꺾고 북부와 서부를 통합하는 위대한 여정이다.
그런데 저놈들이 이 장엄한 전쟁을 시정잡배들의 유치한 다툼으로 만들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룬스톤 함정만 확인하고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이번만큼은 테넌트도 반대하지 못했다. 그가 듣기에도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
당사자가 아닌 그가 들어도 열이 오를 정도인데 로드리크 후작은 얼마나 속이 긁혔겠는가.
전쟁사에 욕으로 상대를 도발하는 경우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명예를 중시하는 풍조 때문에 누구도 쉽게 시도하지는 못했다.
테넌트가 마법사들의 수장인 6서클 마스터, 드네시에게 급히 물었다.
"다른 룬스톤 함정은 더 없습니까?"
드네시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더 이상 마력 감지가 되는 곳은 없습니다. 확실합니다. 슬슬 진군해도 좋을 거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테넌트가 크게 외쳤다.
"전군! 요새를 공략한다!"
척! 척! 척!
병사들이 절도 있는 걸음으로 조금 더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투석기에 돌을 장전해 쏠 준비를 하였다.
그 모습을 본 길리언이 헛기침을 하며 클로드에게 물었다.
"크흠흠, 적이 공격을 시작할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욕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무래도 영주님의 명예가...."
그들이 준비한 작전은 적을 도발하지 않고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적을 도발하는 의도가 궁금했다.
이게 소문이 나면 지셀의 명예가 떨어질까 우려스러운 이유가 가장 컸다.
길리언의 물음에 클로드가 다리를 건방지게 꼬고 말했다.
"우리 무관장님은 싸움은 잘하지만 다른 건 모르시는군요. 전쟁과 도박은 그 본질이 크게 다를 게 없어요. 그러니 본격적으로 붙기 전에 꼭 해야 할 게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클로드가 씨익 웃으며 답했다.
"바로 상대방을 빡치게 하는 겁니다."
"...."
다들 할 말이 없어졌다. 그게 의도라면 정말 훌륭하게 통했다.
그렇게 열을 받을 대로 받은 로드리크군이 드디어 투석기 공격을 시작했다.
콰아아앙!
402화 전쟁 X같이 하네. (2)
로드리크군이 준비한 투석기는 무려 20대였다. 그것도 전부 대형 투석기였다.
대형 투석기에서 던져지는 돌은 하나하나가 강력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돌들이 실버라이트의 성벽에 닿는 일은 없었다.
콰지직!
콰아아아아앙!
하늘에서 낙뢰가 떨어져 날아오는 돌들을 모두 파괴했기 때문이다.
"적 마법사가 움직였다!"
"마력장을 펼쳐라!"
로드리크군의 마법사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펜리스군의 마법사들을 막고 역으로 공격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법사들의 수장인 6서클 마스터 드네시가 외쳤다.
"펜리스의 최고 마법사는 6서클 마법사다! 나머지는 서클이 낮으니 충분히 봉쇄할 수 있다. 상대 마법사들을 먼저 봉쇄한 뒤 투석기 공격을 다시 전개하고 마법으로 성벽을 공격해라!"
전쟁에서는 원거리 공격으로 적의 기세를 꺾는 것이 기본이다. 마법사가 많을수록 그 과정이 쉬워진다.
마법사들의 마력 싸움이 다시 시작되었다.
펜리스 측에도 100여 명에 가까운 마법사들이 있다.
하지만 로드리크군은 6서클 마법사만 무려 세 명이다. 이 중 한 명만 나서도 상대 6서클 마법사를 막을 수 있다.
그리고 남은 6서클 마법사 두 명이면 충분히 저 서클 마법사들을 견제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5서클 마법사들과 나머지 마법사들이 펜리스 쪽에 마법을 난사할 수 있었다.
"우리가 먼저 공격한다!"
로드리크의 마법사들은 자신만만하게 마법을 시전했다. 이쪽이 먼저 공격하면 상대는 방어에 더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
파아아아악!
로드리크군 진영에서 수많은 마법이 뻗어 나갔다. 이 정도면 성벽 위의 병사들을 해치우는 것은 물론이고 성도 부술 수 있을 것이다.
상대측 마법사들은 마법을 해제하기 바빠 반격하지 못할 것이다.
드네시가 손을 앞으로 뻗으며 다시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마력을 아끼지 말고 써라! 저쪽은 마법을 전부 해제할 수 없다!"
펜리스의 6서클 마법사가 마력을 아끼지 않고 쓴다면 이쪽 6서클 마법사 두 명의 공격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은 마법사들이 힘을 합해도 나머지 공격은 절대 막을 수 없다.
드네시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실버라이트의 성벽 위에서 한 여성이 앞으로 나서기 전까지는 말이다.
"사라져라."
바네사가 조용히 읊조리며 허공에 손을 그었다.
동시에 실버라이트로 날아오던 수백 개의 마법이 신기루처럼 흩어지며 사라졌다.
"어?"
드네시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현상은 절대 일어날 수가 없다.
펜리스의 마법사들이 전부 힘을 합쳐서 마법을 해제하는 데만 집중했더라도 저 서클의 마법들부터 순차적으로 사라져야 했다.
로드리크의 마법사들이 모두 당황해 순간 공격을 멈추었다.
"뭐, 뭐지?"
"우리보다 마법사가 많은가?"
"그건 말이 안 되는데?"
펜리스의 마법사들이 100여 명에 가까울 정도로 늘어난 건 그들도 정보를 접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거의 다 저서클 마법사일 터였다. 절대 고위 마법사들의 마법을 이렇게 한순간에 해제할 수는 없었다.
로드리크군의 마법사들이 당황하고 있을 때 바네사가 다시 우아하게 손을 움직였다.
"파이어 필라."
5서클 마법이지만 7서클 마법사가 시전한 마법이다. 거기에 남들은 엄두도 못 낼 다중 영창이다.
곧 거대한 불의 기둥들이 로드리크군의 진영 곳곳에서 동시에 터져 나왔다.
콰아앙! 콰아앙! 콰아아앙!
"으아아아악!"
로드리크군이 정신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강렬한 불기둥이 그들의 투석기와 공성탑을 뚫으며 올라왔다.
콰아아앙!
거대한 투석기와 공성탑이 화염에 휩싸이며 부서져 갔다.
그제야 드네시가 정신을 차리며 외쳤다.
"어서 마법을 해제해라! 내가 반격하겠다!"
그의 옆에 있던 6서클 마법사가 마력을 모아 디스펠을 시전했다. 불기둥 몇 개가 약간 흔들리다 사라졌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여전히 불기둥이 곳곳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콰앙! 콰아아앙!
"뭐 하느냐! 어서 마법을 해제하래도!"
"제 마력으로 역부족입니다!"
다른 6서클 마법사가 사색이 되어 외쳤다. 강력한 마력이 자신의 주문을 대부분 무력화하고 있었다.
드네시는 다른 마법사에게 외쳤다.
"어서 도와라!"
콰아아앙!
불기둥이 조금 더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곳곳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안 됩니다! 마력 저항이 너무 강력합니다!"
"그게 무슨!"
드네시가 이를 갈고는 마법을 해제하는 데 손을 보탰다.
그러자 압도적인 힘의 격차가 느껴졌다.
드드드드드드!
6서클 마법사 세 명이 모든 마력을 쏟아붓고 있음에도 상대의 마력은 그걸 기어코 뚫었다.
그 틈을 타고 흘러온 마력이 이 공간에 재배치되며 마법을 구현하고 있었다.
콰아아앙! 콰아아앙! 콰아앙!
"으아아악!"
마법이 계속 이어지자, 어떻게든 공격을 피하며 군율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하나둘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드네시가 식은땀을 흘리며 다급하게 외쳤다.
"모, 모두! 힘을 보태라! 마법을 어서 해제해야 한다!"
결국 5서클 마법사들과 다른 저서클 마법사들까지 모두 마법을 해제하는 데 달려들었다.
고서클 마법사들은 물론이고 무려 절반에 가까운 마법사들이 달라붙어 마력을 쏟아붓자 드디어 상대의 마력이 완전하게 막혔다.
그럼에도 계속 상대의 마력이 이 공간을 뚫고 들어오려고 했다. 그 힘에 로드리크의 마법사들은 공포를 느꼈다.
그들의 수장인 드네시는 겁에 질린 듯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말했다.
"이, 이게 무슨.... 도대체 저기에 누가 있길래...."
말이 안 된다. 펜리스에서 가장 서클이 높은 자는 6서클로 알려져 있다.
6서클도 대단한 경지긴 하지만, 절대 이 많은 이들을 홀로 상대할 수는 없었다.
이런 일을 할 수 있으려면 초인의 경지에 오른 7서클 마법사 정도는 되어야 한다. 하지만 북부의 유일한 7서클 마법사 델무드는 이미 죽었다.
"도대체 누구란 말이냐!"
바네사가 7서클에 오른 건 최근의 일이었다. 지셀이 일부러 숨긴 덕분에 아직 어디에도 알려지지 않았으니, 이들이 혼란에 빠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상대의 정체를 파악할 겨를도 없었다. 지금 방심하면 마력장이 뚫려 버릴 것이다.
"이, 이 힘은 말이 안 된다.... 절대 개인의 힘이 아니야."
로드리크의 고서클 마법사들이 전부 손이 묶여 버렸다. 저서클 마법사까지 합하면 마탑 두세 개와 맞먹는 전력이 막혔다는 뜻이다.
7서클 마법사인 바네사도 발이 묶였지만, 병력의 수가 상대보다 현저하게 적은 펜리스 입장에서는 훨씬 더 이득이었다.
드네시는 지금 상황을 인정할 수 없었다.
"크윽! 남은 마법사들이라도 성을 공격해라! 펜리스에는 더 나설 마법사가 없을 것이다! 분명 무슨 수작을 부렸을 것이다!"
7서클 마법사가 존재한다고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 드네시는 펜리스의 모든 마법사가 힘을 합쳐서 모종의 방법을 사용했을 거라 믿었다.
로드리크의 남은 마법사는 약 50여 명. 대부분이 4서클 이하 마법사들이긴 하지만 상대측에 마법사가 없다면 압도적인 힘을 보여 줄 수 있는 전력이었다.
파아아앙! 파아앙!
다시 로드리크군 진영에서 수많은 마법이 쏘아져 나갔다.
저서클 마법들이긴 하지만 일반 병사에게는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 있을 터였다.
스르르륵....
하지만 그 마법들은 성벽에 닿기도 전에 사라졌다. 그리고 역으로 펜리스 측에서 저서클 마법들이 시전되었다.
"마법사가 남았단 말인가!"
드네시가 또다시 경악하며 외쳤다.
50여 명의 마법을 막았다는 건, 상대 쪽에도 그 정도의 마법사가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펜리스에 남은 마법사들도 아직은 수준이 낮았다.
그래서 로드리크의 남은 마법사들이 펜리스 측의 마법을 막을 수는 있었다.
픽! 푸슉! 파악!
고서클 마법사들이 서로에게 붙잡혀 있으니 저서클 마법사들의 하찮은 마법이 양측에서 시전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아스콘이 그걸 보며 중얼거렸다.
"X밥들 싸움 실화냐.... 가슴이 옹졸해진다."
북부 최강과 서부 최강의 군대가 맞붙은 마법 대결이 마을 축제 불꽃놀이 수준이었다.
클로드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아직 우리한테는 패가 하나 더 남아 있지."
적들은 아직 혼란에 빠져 대열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있었다. 투석기는 바네사 덕분에 거의 다 파괴되었다. 공성탑도 상당히 많이 부서졌다.
클로드가 손을 앞으로 뻗자 한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후... 드디어 내 차례인가."
모든 마법사가 봉쇄됐지만 펜리스에는 아직 고서클 마법사가 한 명 남아 있었다. 바로 이번에 5서클에 오른 알포이다.
그는 아직 5서클 마법은 모르지만, 드래곤 하트 덕분에 마력만은 5서클을 뛰어넘은 상태였다.
클로드가 그를 보며 물었다.
"잘할 수 있지?"
"내 4서클 마법은 6서클과 같다."
알포이의 허세에 다들 피식 웃었다. 이 새끼는 공부 시간을 그렇게 많이 줬는데도 아직 5서클 마법을 익히지 못했다.
하지만 4서클 마법만으로도 기사를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다. 급하게 익혔지만 병사들에게는 충분히 통할 터였다.
"파이어 랜스! 파이어 랜스! 파이어 랜스!"
수많은 공사 경험 덕분에 마력 운용 실력만큼은 영지에서 손꼽히는 알포이다. 빠르게 캐스팅된 불의 창들이 로드리크군의 진영에 떨어졌다.
콰아앙! 콰아앙! 콰아앙!
"으아아악! 적 마법사가 남아 있다!"
알포이를 막을 마법사가 없으니 로드리크군은 속수무책으로 불의 창에 당할 수밖에 없었다.
알포이는 드래곤 하트를 먹고 방대해진 마력으로 미친 듯이 마법을 난사했다.
'좋아! 정말 좋아! 이게 바로 나다!'
알포이는 신이 나서 더욱더 열심히 마법을 날렸다.
그간 전쟁에서 마법으로 활약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의 역할은 바네사에게 마력을 제공해 주는 생체 마력 저장고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난생처음으로 전쟁에서 직접 마법을 사용하니 기뻐 죽을 지경이었다.
'내 이름이 더 널리 알려질 거야!'
명예욕으로 똘똘 뭉친 알포이는 정말 모든 힘을 다했다.
어쩌면 대군을 상대하기에는 5서클 마법을 쓰는 것보단 4서클 마법을 쓰는 쪽이 나을 수도 있다. 벌써 수십 번을 날렸음에도 마력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콰앙! 콰앙! 콰아앙!
6만이나 되는 대군이니 단번에 병사들이 쓸려나가진 않았다. 하지만 적들에게 상당한 피해와 혼란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기사들이 막아라!"
더 이상 마법 전력을 활용할 수 없게 되자 로드리크군의 기사들이 곳곳에서 튀어나와 방패로 마법을 막기 시작했다.
알포이 혼자서 수십의 기사를 상대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태였다. 그 또한 엄청난 전과지만, 그는 마법이 막히자 불만이 가득 차 버렸다.
'뭐야! 왜 점점 막히고 있어! 내 마법으로 다 쓸어버려야 하는데!'
그는 지금 자신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했다. 그냥 자신의 마법이 막히고 있다는 생각에 화가 날 뿐이었다.
전쟁에서 가장 우선해야 할 건 서로 간의 마법 전력을 봉쇄하는 것이다. 양측의 마법 공격이 겨우 소강상태에 이르자 로드리크군이 바쁘게 움직였다.
"저 씹어먹을 놈들을 어서 죽이란 말이다!"
이미 열을 받을 대로 받은 로드리크 후작은 마법 전력이 별 성과도 내지 못하고 막히자 더 분개했다.
그의 명령에 곳곳에서 지휘관들이 외쳤다.
"어서 대열을 다시 갖추고 진군해라!"
"투석기는 버려라! 공성탑을 끌고 가라!"
"단숨에 성을 점령해야 한다!"
6만 대군이 움직이자 그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보는 사람마저 질리게 할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거기에 아직 남아 있는 공성탑이 10대나 되었다. 단 한 대만 있어도 작은 성 정도는 점령할 수 있는 대형 공성탑이었다.
구구구구궁!
병사들이 공성탑을 끌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공성탑 10대가 성에 붙는다면 펜리스군은 절대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중보병들이 먼저 길을 만들어라!"
넓은 방패를 든 중보병들이 대열을 갖추며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섰다. 적들의 화살 공격을 막으며 공성탑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버라이트는 주변보다 살짝 높은 곳에 세워져 있었다. 멀리서 보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한 차이였지만, 공성탑을 밀고 가는 병사들은 그 차이를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젠장, 경사진 곳인가? 훈련 때보다 더 힘들잖아?"
"조금만 더 힘을 내. 이거 붙으면 저 새끼들 끝이야."
"더 열심히 밀어라! 경사진 곳이다!"
아무리 경사가 낮아도 무지막지한 무게를 가진 공성탑을 밀고 가다 보니 금세 차이가 느껴졌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다가가고 있는데 여전히 펜리스 측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화살조차 날아오지 않는다.
"야! 로드리크 후작! 이 치명적인 등신아!"
그냥 아스콘의 욕설만 들려올 뿐이었다.
당연히 로드리크 후작의 분노에 휘말린 지휘부에서는 병사들을 재촉했다.
"더 빨리 움직여라!"
"더 가까이 가야 화살 공격을 할 것이다! 접근할수록 우리에게 유리하다!"
지휘관들의 외침에 병사들은 속도를 조금 더 높였다.
그리고 그들은 가까이 갈수록 움직이는 게 점점 더 불편해지는 걸 깨달았다.
푸욱. 푸욱. 푸욱.
어느 지점부터 땅은 흙과 모래로 가득 차 있었다. 움직이는 병사들의 발목까지 차오를 정도였다.
"젠장, 북부라서 그런가? 진짜 땅까지 거지 같네."
"어후, 이 먼지 올라오는 것 봐."
"모래 때문에 걷기도 힘들어."
당연히 공성탑의 움직임도 더 느려졌다. 경사도 졌는데 흙과 모래가 가득하니 밀기가 더 힘들었던 것이다.
푸욱! 푸욱! 푸욱!
병사들은 주변에 가득한 흙과 모래를 헤치며 나아갔다.
너른 평야가 넘치는 곳에서 살던 그들로서는 걷기만 해도 힘이 빠지는 환경이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공성탑을 붙일 수 있다. 그런데 아직도 화살 공격이 시작되지 않았다.
로드리크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있는 힘껏 속도를 높였다.
그들이 눈에 훤히 보일 정도로 가깝게 다가오고서야 클로드가 입을 열었다.
"전쟁이란 게 사실 카드 게임하고 다를 게 없거든. 서로 순서대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서로가 가진 패를 보는 거지. 물론 결국은 더 좋은 패가 많은 쪽이 이긴다는 거야."
그가 웃으며 손을 까닥거렸다.
"1차 수문을 열어라."
클로드의 명령에 병사들이 움직였다. 곧 실버라이트의 성벽 하단에 있는 작은 구멍 수백 개가 열리며 물이 쏟아져 나왔다.
콰아아아아!
403화 전쟁 X같이 하네. (3)
수문이 열림과 동시에 클로드가 외쳤다.
"알포이! 시작해!"
여기저기 마법을 난사하며 기사들을 잡아 두고 있던 알포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포그 클라우드!"
요새 앞에 짙은 안개가 깔리기 시작했다. 안개는 점점 퍼지며 범위를 넓혀 갔다.
워낙 넓다 보니 조금 옅어지긴 했지만 앞쪽에 있던 로드리크군의 시야를 가리기엔 충분했다.
"마법이다! 안개가 가득 찼다!"
병사들이 곳곳에서 소리를 질렀다.
전쟁에서 시야가 가려지는 건 큰 위험이다. 앞이 보이지 않아도 수성하는 쪽은 무작정 화살만 쏘면 되지만, 공성하는 측은 회피도, 반격도 하기 어려워진다.
"젠장! 우리 마법사들은 뭐 하는 거야!"
병사들이 불만을 내뱉었다. 그들은 왜 아군 마법사들이 가만히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의 눈에는, 그 대단하다는 사람들이 고작(?) 하늘에서 불덩이나 몇 개 번쩍이면서 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주르르륵....
로드리크군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작은 수문에서 흘러나온 물이 그들의 발밑으로 스며들어 갔다.
하지만 아무도 그걸 신경 쓰지 않았다. 시야가 가려져 있긴 해도, 곧 성에 공성탑과 사다리를 붙이고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집중력을 뺏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야이! 로드리크 후작아! 네 거울보다 더 못생긴 새끼야아아아아!"
성벽 위에서 끊임없이 욕이 들려왔다. 마법사 하나가 붙어서 소리 증폭 마법을 쓰고 있는지 소리가 참으로 우렁찼다.
이 시끄러운 전장에서도 천둥이 울리듯이 귓가에 내리꽂히는 정도이니 말이다.
그 욕설을 듣고 로드리크 지휘부에서도 연신 병사들을 재촉했다.
"빨리빨리 밀어라!"
"저 새끼부터 잡아서 죽여라!"
"적 공격이 없잖아! 겁먹지 말고 가라고! 안개는 곧 마법사들이 해제해 줄 것이다!"
로드리크 후작이 길길이 날뛰니 다른 지휘관들도 죽을 맛이었다. 그들은 애꿎은 병사들만 닦달할 뿐 주변을 제대로 살피지 않았다.
끼이이익.... 끼이익....
얼마나 지났을까. 병사들은 점점 더 움직이기가 힘들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공성탑과 충차는 제대로 밀리지도 않고, 걷기도 힘들었다.
철벅, 철벅.
"뭐야? 땅이 젖었잖아?"
"언제 이렇게 된 거야?"
"끄응.... 걷기가 힘들어졌어."
땅이 질척거렸지만 로드리크군은 이유를 알지 못했다. 요새 성벽의 가장 아래쪽에서 물이 흘러나와 가뜩이나 눈에 띄지 않는데, 안개로 시야까지 가려지니 더 알아차리기가 힘들었다.
6만 대군의 진군 속도가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로드리크군 지휘관들은 조급하게 고함을 질렀다.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뭔가 일이 잘 안 풀리는 느낌이었다.
"어서 안개부터 없애라! 궁병들은 어서 견제 공격을 해라!"
앞쪽 시야가 가려지니 뒤쪽에 있던 병력들도 제대로 나아가지 못했다.
성벽 위에서 언제 어떤 공격이 날아올지 모르기에 로드리크의 궁병들이 빠르게 앞으로 나섰다.
파아아앗!
그들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성벽 위에 화살을 쏘아 댔다. 일단 견제라도 할 셈이었다.
탕! 타타탕!
펜리스군은 이미 전원이 방패를 들고 대기 중이었다. 딱히 공격하겠다고 움직이지도 않으니 화살 공격에 피해를 볼 리도 없었다.
로드리크군의 후열에 있던 궁병들까지 성벽에 접근해 전열의 병사들과 섞였다.
몇 명의 마법사가 나서서 안개 마법부터 해제했다. 어차피 펜리스 측에서 날아오는 마법은 대부분 저서클 마법이라 해제하지 못하고 맞아도 큰 피해는 없었다.
스으으으윽....
안개가 점점 흩어지면서 시야가 다시 넓어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클로드가 외쳤다.
"2차 수문을 열어라!"
덜컹! 덜컹! 덜컹!
아까보다 조금 더 큰 수문들이 열렸다. 실버라이트 성벽 아래에 난 수많은 구멍에서 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
안개가 사라지자마자 로드리크군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대량의 물이 자신들을 덮치는 모습이었다.
"뭐야?"
"물을 왜 뿌리는 거야?"
"별거 아니야! 다시 앞으로 가!"
물의 양은 꽤 많았지만 병사들에게 위협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경사진 면을 따라 몸을 흠뻑 적시고 갈 정도였다.
하지만 물 때문에 땅은 이제 완전히 질퍽질퍽해졌다. 진흙탕이 되어 버린 땅 위에서는 무척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그그그극....
"젠장! 공성탑이 안 밀려!"
"발이 다 빠지잖아!"
"더 힘을 내 봐!"
바지와 신발이 진흙에 파묻히니 걷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공성 병기는 이제 제대로 밀리지도 않았다.
"이 새끼들 공성 병기 붙지 못하게 하려고 이런 거야!"
그제야 적들은 펜리스군의 의도를 눈치챘다. 이런 상황이면 공성탑을 붙이는 건 불가능했다.
걷는 것조차 불편할 정도인데 이 무거운 대형 공성탑을 진흙탕 속에서 어떻게 밀고 간단 말인가?
"일부러 수문을 개조한 거야! 이렇게 하려고!"
모든 성과 요새에는 작은 수문과 배수로가 있다. 홍수와 같은 재난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실버라이트는 그 수문을 더 넓게 개조한 게 분명했다.
병사들이 우왕좌왕하며 어쩔 줄 몰라 하자 지휘관들이 곳곳에서 다시 외쳤다.
"궁병들은 계속 견제 공격을 해라! 기사들은 공성탑에 붙어서 같이 밀어...."
"야이! 로드리크 후작 이 똥 마려운데 막상 앉으면 안 나오는 똥 같은 새끼야아아아아!"
"저 새끼부터 빨리 잡아 죽여!"
욕하는 놈의 목청이 어찌나 좋은지 지휘관들의 외침이 묻힐 정도였다. 끊임없는 욕에 다들 짜증이 솟을 대로 솟은 상태였다.
철벅! 철벅! 철벅!
두껍게 쌓인 흙과 모래는 흘러나온 물을 금세 흡수했다. 끈적한 진흙 때문에 발이 끌린다.
기사들이 마나까지 쓰며 공성탑을 밀어야 겨우 밀리는 수준이었다. 이러니 다들 싸우기도 전에 걷다가 지쳐 갔다.
그리고 전장이 완전히 진창으로 변하는 것이야말로 클로드가 의도한 바였다.
"당겨라!"
그의 외침과 동시에 요새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수백 개의 쇠사슬을 잡아당겼다.
철컹! 철컹! 철컹!
수백 개의 쇠사슬이 땅을 뚫고 올라왔다.
이 쇠사슬 자체로는 사실 별 게 아니다. 그냥 땅 밑에 숨겨 놨던 쇠사슬들을 잡아당겨 위로 튀어나오게 했을 뿐이다.
하지만 힘겹게 걷고 있던 로드리크의 병사들이 넘어지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켁!"
"이게 뭐야!"
"함정이다! 함정이 있다!"
로드리크군은 도무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쇠사슬이 당겨진 쪽에 있던 병사들이 넘어지며 순간 대열이 망가졌다. 그들 옆에 있던 병사들도 같이 넘어지며 진흙탕에 구를 수밖에 없었다.
쇠사슬은 큰 피해를 주지 않았다. 그저 일부 병사들을 넘어뜨리며 대열을 망가뜨리고 옆으로 이동하기 힘들게만 할 뿐이었다.
"진로만 방해하는 거다!"
"빨리 다가가라! 어서! 넘어진 놈들은 빨리 일어나!"
"호들갑 떨지 말고 움직여라! 기사들은 쇠사슬을 베어라!"
지휘관들의 닦달에 로드리크군이 다시 움직이려는 찰나, 클로드가 한발 먼저 외쳤다.
"알포이! 앞쪽부터!"
"알겠어!"
영지 내에서 가장 사이 안 좋은 두 사람이 협동을 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파이어 버스트!"
콰아앙! 콰아앙! 콰앙!
알포이는 얼마 남지 않은 마력을 모두 쏟아부어 전방의 중보병들을 공격했다.
"으아아악!"
"적의 공격이 시작됐다!"
"막아라!"
화염이 곳곳에서 폭발하자 대열이 무너졌다. 마법을 막을 기사들이 대부분 공성탑에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머릿수가 워낙 많아 피해는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다. 단지 중보병들의 대열을 망가뜨린 정도였다.
하지만 그 정도로 충분했다.
"쏴라!"
클로드의 외침과 함께 드디어 펜리스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파아아아앗!
수없이 많은 화살이 로드리크군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화살 비가 쏟아진 곳은 로드리크군의 전열이 아닌 중열과 후열이었다.
"으아아아악!"
"피해라! 뒤로 피해!"
"방패! 어서 아군을 보호해라!"
중보병들 뒤로는 경보병들이 따라가고 있었다. 후열의 궁병들도 견제를 위해 성벽에 더 가까이 붙은 상황이었다.
화살 공격이 날아오자 다들 다시 대열을 갖추려고 했지만, 진흙탕에 빠진 상태라 걸음이 너무 무거워서 빠르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쇠사슬과 그것 때문에 쓰러진 아군들은 발목까지 찬 진흙탕에서 엄청난 장애물이 되었다.
경보병들도 방패를 들고 있기는 했지만, 화살이 비처럼 쏟아지니 곳곳에서 쓰러지는 병사들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막아! 막으란 말이다! 같이 쏴라! 견제를 하라고!"
로드리크군도 화살을 열심히 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애초에 갈바니움 전신 갑옷을 입은 펜리스군과 맞상대가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퍼억! 퍼억! 퍼억!
"으아아아악!"
로드리크군은 완전히 혼란에 빠져 버렸다. 누군가가 쓰러질 때마다 옆 사람까지 진흙탕에 구르기 바빴다.
기사들이 달려와 급하게 쇠사슬을 끊어 냈지만 이미 많은 병사가 휘말린 상태였다.
콰아앙! 콰앙! 콰앙!
거기에 곳곳에서 터지는 알포이의 마법들도 신경을 거슬렀다.
순식간에 전장은 난장판이 되었다. 로드리크군의 병사들은 그제야 깨달았다.
발목까지 찬 이 진흙탕에서는 적이 공격하는 대로 맞아 줘야 한다는 걸 말이다.
뒤쪽에서 상황을 보고 있던 참모들이 조심스럽게 로드리크 후작에게 말했다.
"일단은 후퇴해야 합니다."
"병사들이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공성탑도 다가가기 힘들 거 같습니다."
"마법사들을 따로 빼서 저 진흙탕의 수분을 전부 말려 버려야 합니다."
이 상태로라면 병사들은 계속 당하고 말 것이다. 일단 후퇴한 뒤 다시 정비를 해야 했다.
"으으으으...."
로드리크 후작은 얼굴이 벌게진 채 부들부들 떨었다.
6만의 대군이 성벽에도 제대로 못 붙고 고작 진흙탕에서 구르고 있었다. 진흙탕으로 유인해 야전에서 승리한 기록은 본 적 있어도 공성전에서 일부러 진창을 만드는 건 단연코 처음 봤다.
"펜리스 백작은 서부에 있는데 어떤 놈이 저런 걸 생각하고 준비했다는 말이냐!"
로드리크 후작이 길길이 날뛰었지만 참모들도 알 수 없었다.
"일단 후퇴해라! 다시 정비한 뒤 작전을 세우겠다!"
로드리크 후작의 말에 그제야 후퇴 나팔이 울렸다.
병사들은 화색을 띠며 뒤로 움직였다. 그런데 문제는 퇴각조차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철벅! 철벅! 철벅!
다리를 움직이기가 생각보다 힘이 들었다. 옆에는 시체들이 굴러다니고 있다.
등을 보이면 화살 세례가 쏟아질까 봐 뒤로 물러나다가 넘어지는 병사들도 부지기수였다. 이러니 다들 움직임이 느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클로드가 준비한 진짜는 지금부터였다.
"시작해."
그의 명령에 지금까지 대기만 하고 있던 펜리스군의 투석기가 움직였다.
파아앙! 파아아앙!
수많은 돌이 진흙탕에 빠진 로드리크군에게 날아갔다.
펜리스에는 그간 치른 전쟁에서 뺏은 투석기들이 상당히 많이 있다. 거기에 드워프들이 개량해서 그 위력도 상당했다.
콰앙! 콰아앙! 콰아앙!
"으아아악!"
"적들이 투석기 공격을 시작했다!"
"피해라! 어서 피해라!"
큰 돌이 날아오면 방패로 막는 것도 소용이 없다. 이러면 등을 돌려서라도 도망을 가야 한다.
투석기의 공격 범위 때문에 전열에 있던 병사들은 비교적 안전했지만 중후열에 있던 병사들은 제대로 피하지도 못하고 죽어 나갔다.
콰아아앙!
"달려라! 어서 피해!"
지휘관들이 아무리 외쳐도 따르기가 쉽지 않았다. 이미 진흙 때문에 몸이 무거워진 병사들은 빠르게 전장을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넘어진 병사들이 가장 큰 문제였다. 펜리스에서 투석기를 쏘는 족족 얻어맞을 뿐이었다.
돌을 피해 등을 돌린 병사들은 화살을 무수하게 맞고 죽어 갔다.
"이, 이 미친...."
전열에 있던 병사들은 겁먹은 채 제대로 도망가지도 못했다.
앞쪽에 떨어지는 돌들을 피해 도망갈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여기에 계속 있을 수도 없었다. 언제부터인지 펜리스 기사들이 마나를 담아 창을 던지며 전열의 중보병들도 뚫어 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작가의 기사단장인 테넌트는 그 모습을 보며 이를 갈았다.
"당했구나."
처음엔 욕을 하며 로드리크 후작을 도발했다. 우습게도 그건 매우 잘 통했다. 상대의 전력을 가늠하지도 않고 바로 전군이 움직였으니까.
거기다 자신들이 다가갈 때까지 투석기 공격과 화살 공격을 전혀 하지 않았다.
만약 초반에 공격을 해 왔다면 자신들도 조금은 다르게 움직였을 것이다. 어쨌든 피해를 아끼려면 상대의 공격에 대응해야 하니까.
펜리스는 가까이 오면 다 죽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에, 최대한 많이 끌어들이려고 수를 썼던 것이다.
"어서 피해라! 어서! 공성 병기는 모두 버려라!"
이제는 방법이 없다. 마법사들이 힘을 쓰지 못하는 이상 병사들이 자력으로 물러나야 했다. 공성 병기까지 끌고 도망갈 여유는 없었다.
콰아앙! 콰앙! 콰아앙!
"으아아아악!"
전장에는 로드리크군의 비명이 끊임없이 울렸다. 클로드가 그 모습을 보며 거만하게 말했다.
"어때? 다 통하지? 이래서 먼저 상대방을 빡치게 해야 한다니까."
"...."
주변 사람들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침묵했다.
펜리스가 이 작전을 준비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공사에 있어서는 이들이야말로 왕국 최고였으니까.
흙과 모래는 지금껏 해 온 공사 때문에 넘쳐났고 드워프들까지 있다. 준비는 순식간에 끝낼 수 있었다.
그런데 정말 준비한 대로 상대가 다 당해주는 게 신기했다.
자신이 짠 판에 상대를 끌어들이는 건 지셀과 비슷했다.
지셀은 그 강력한 무위와 뛰어난 병력 운용으로 상대의 허를 찌르고 승리를 거둔다. 하지만 클로드는 개개인의 무력보다는 준비한 전략을 차분하게 풀어 가는 성격이 더 강했다.
"후... 도박보다 전쟁이 쉽네. 이거 금방 끝나겠는데? 뭐 쏘는 족족 다 맞아 줘?"
클로드가 거만하게 말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길리언과 같은 실력자들도 딱히 할 일이 없을 정도였다.
콰아앙! 콰앙! 콰아앙!
로드리크군은 욕만 먹고 도망도 제대로 못 가고 죽어 나갔다. 진흙탕에서 구르다 무거워진 몸을 가누지 못하고 기어가는 병사들도 속출했다.
클로드는 최고의 효율을 내려고 일부러 적들이 죄다 다가오길 기다렸던 것이다.
그 모습을 구경하던 아스콘은 욕을 멈추고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이 새끼 진짜 전쟁 X같이 하네.'
아스콘으로서는 최고의 찬사였다.
한참을 진흙탕에서 구르던 로드리크군은 겨우 빠져나갔다. 진흙탕 범위를 벗어나자 완전히 다른 세계에 온 거 같았다.
"어서 병력을 뒤로 물려라! 어서!"
테넌트의 외침에 로드리크군은 조금 더 뒤로 물러났다. 그제야 마법사들도 서로의 견제를 끝내고 물러날 수 있었다.
"와아아아아! 우리가 이겼다!"
로드리크군이 엄청난 피해를 보고 물러나자 펜리스군의 함성이 전장에 울려 퍼졌다.
겨우 살아남은 로드리크의 병사들은 씁쓸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만 봐야 했다.
어느 정도 상황이 수습되자 로드리크 후작이 분노에 찬 표정으로 테넌트에게 물었다.
"사상자는 몇 명이냐."
"...절반 정도입니다."
그 말에 다들 눈을 감았다. 생각지도 못한 수법에 절반의 병력이 한 번에 날아갔다.
그럴 만한 전략이었다. 움직이기 힘들게 해 놓고 화살과 돌들을 쏘아 대니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으으으으...."
로드리크 후작이 부들부들 떨며 또 발광하려 했지만, 먼지를 가득 뒤집은 기사 하나가 그를 방해했다.
초췌한 모습으로 도착한 그가 다급하게 외쳤다.
"린더스타인이 펜리스 백작에게 점령당했습니다!"
그 말에 후작가에 소속된 인물 모두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404화 전쟁 X같이 하네. (4)
도착한 기사는 글래스고 백작의 2군단에 속해 있던 자다.
그를 알아본 로드리크 후작이 떠듬거리며 물었다.
"내, 내 성이 점령당했다고? 이렇게 빨리 린더스타인이 점령당했다고?"
로드리크 후작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계속 같은 말을 꺼냈다.
기사는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린더스타인은 펜리스 백작에게 점령당하고 수비군은 괴멸되었습니다."
"2만이나 남겨 두었는데! 2군단은? 글래스고 백작의 2군단은 어떻게 되었느냐! 분명 2군단이 도착했을 거 아니냐!"
"저희 2군단 또한... 펜리스 백작에게 괴멸되었습니다. 글래스고 백작도 펜리스 백작에게 사로잡혀 목이 베였습니다."
"어어억!"
로드리크 후작이 괴성을 내지르며 자리에서 쓰러졌다.
"후작님!"
테넌트가 급히 로드리크 후작을 부축했다. 겨우 다시 일어난 로드리크 후작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도대체! 도대체 어떻게 6만이나 되는 군대가 기마병 1만에 당할 수 있다는 말이냐! 그것도 이렇게 빨리! 그놈들이 뭘 어떻게 했기에 이리도 빨리 린더스타인을 점령했다는 것이냐!"
로드리크 후작이 전령을 노려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말해 보아라! 어떤 놈이야! 어떤 배신자가 성문을 열어 줬다는 말이냐!"
"투석기로 성을 부수고...."
"이노옴! 말이 되는 소리를 하여라! 전군이 기마병인데 무슨 투석기란 말이냐! 투석기를 끌고 가면 절대 그 속도로 서부까지 갈 수 없다!"
말이 안 되는 속도였다. 그게 가능하다면 그 어느 곳에서도 펜리스의 기습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저, 정말입니다. 투석기로 성을 부수고 점령했습니다. 그 뒤에 저희도 그 투석기에 당했습니다."
기사는 억울하다는 듯 자신이 본 뼈다귀 투석기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다.
하지만 듣고 있던 사람들의 표정은 풀릴 줄 몰랐다. 직접 보고도 믿기 힘들 정도인데 말만 전해 듣는 사람들이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기사의 꼴을 보니 정말로 2군단이 괴멸하고 성이 점령당한 것은 사실인 듯했다. 안 믿을 수도 없었다.
로드리크 후작이 숨을 거칠게 내쉬며 다시 물었다.
"그러면 펜리스 백작은 린더스타인에 눌러앉은 것이냐?"
"아마... 그럴 겁니다. 포로도 많이 잡았으니 그들을 버려두고 움직일 수는 없을 테니까요."
기사는 전투에서 패배하자마자 바로 북부까지 달려왔다. 그래서 현재 린더스타인과 서부의 상황을 알지 못했다.
로드리크 후작은 이번에 테넌트를 노려보았다.
"테넌트! 6만이나 되는 군대가 펜리스 백작에게 괴멸당하고 우리의 본진까지 점령당했다!"
"...."
테넌트는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양동 작전을 제안한 건 자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나도 비상식적인 결과인지라 속에서 억울함이 올라왔다.
그렇게 빠르게 움직이는 군대에 공성 병기까지 있다고 도대체 어느 누가 생각하겠는가.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드는데 정확히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니 자신도 미칠 지경이었다.
"으으으.... 한심한 놈들!"
로드리크 후작이 결국 욕을 내뱉었다.
수비군까지 포함하면 무려 12만이나 되는 군대였다. 그런데 이제 남은 병력은 3만 명밖에 없다.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다들 당한 것이다.
"이게 어찌 서부 최강의 군대라 할 수 있다는 말이냐!"
로드리크 후작이 길길이 날뛰어도 다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드네시! 마법사들은 도대체 뭘 하는 거냐! 이번 전투에서 아무런 힘도 못 쓰지 않았느냐!"
애꿎은 마법사들에게 화살이 돌아갔다. 6서클 마법사가 세 명이나 있고 5서클 마법사도 여섯 명이나 있는데 어떠한 결과도 내지 못했다.
드네시가 땀을 뻘뻘 흘리며 변명을 했다.
"펜리스 측에 아주 뛰어난 마법사가 있는 거 같습니다. 저희 모두 그자를 막느라...."
"도대체 그게 누군데! 펜리스에 무슨 7서클 마법사라도 있다는 말이냐!"
"...."
그 말에도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7서클 마법사면 초인이다. 그 정도면 펜리스 백작처럼 왕국 전역에 진작 이름을 날렸을 것이다.
로드리크 후작가의 가신들은 다들 미칠 거 같았다. 모든 게 안개에 싸인 느낌이었다. 도무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는 이겨도 이긴 게 아니다. 실상은 패배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순식간에 초췌해진 로드리크 후작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보급은.... 보급은 어떻게 할 것이냐...."
순식간에 절반이 사라졌지만 남은 3만도 적은 수가 아니다. 하루에 소모되는 식량이 어마어마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돌아갈 식량도 부족할 것이다.
아니, 지금은 돌아갈 곳이 없다.
펜리스 백작이 돌아갈 곳 없게 만들려고 했는데 자신들이 그렇게 되어 버렸다.
"저곳을 차지하지 못하면 우리는 죽은 목숨이다."
실버라이트를 점령해야 다시 정비하고 펜리스 백작과 싸울 수 있다.
하지만 6만의 군대로도 점령하지 못한 곳이다. 공성 병기까지 죄다 진흙탕에 빠져 망가진 상태다.
"마법사들이 나서서 저 진흙탕을 다 말려 버릴 수 있겠는가?"
"...."
그 말에 마법사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들이 뭘 해 보려고 하면 상대측에서 봉쇄할 게 분명하다.
그리고 이제 와서 진흙을 말리면 무얼 하는가? 진군하는 도중에 적의 화살과 투석기 공격에 가는 족족 죽어 나갈 것이다.
"왜 아무런 말도 없는 것이야! 방법을! 방법을 찾으란 말이다!"
3만이나 되는 군대를 거느리고도 보급이 끊겨 죽을 위기에 처했다. 로드리크 후작은 이 상황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결국 테넌트가 조심스럽게 나섰다.
"먼저 주변 마을이라도 약탈해서 조금이라도 식량을 확보하는 게 나을 거 같습니다."
"계속 말해 보아라."
"당장 저 성을 공략하는 건 무리입니다. 성공한다 해도 피해가 엄청날 겁니다. 그렇게 되면 돌아오는 펜리스 백작과 싸우기가 힘들 것입니다."
"약탈을 하면 공략할 수 있다는 말이냐?"
"펜리스 백작은 영지민을 아끼기로 유명합니다. 우리가 주변 마을을 전부 없애 버리고 약탈을 자행하면 저 요새에 웅크리고 있는 놈들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으음...."
"어차피 당장 돌아가더라도 린더스타인을 차지한 펜리스 백작과 싸워야 합니다. 차라리 펜리스 백작이 그곳에 묶여 있을 때 저놈들을 끌어내서 싸우는 게 낫습니다."
펜리스 백작은 이쪽의 보급로를 끊기 위해서라도 린더스타인을 쉽게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당장은 테넌트의 말대로 요새의 적을 끌어내는 것이 최선이었다.
로드리크 후작이 잔인한 눈빛으로 말했다.
"당장 1만의 병력을 데리고 주변을 초토화해라. 한 놈도 살려 두지 말도록. 나머지는 대기하고 있다가 요새에 있는 놈들이 나오면 맞붙어라."
로드리크군은 재정비를 한 뒤 요새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주변을 약탈하고 부수다 보면 분명 펜리스군이 반응을 보일 거라 믿었다.
그렇게 사방으로 퍼져 나간 1만의 군대는 이틀 만에 돌아왔다. 군대를 이끌고 나갔던 지휘관이 시커멓게 죽은 안색으로 말했다.
"마, 마을이 하나도 없습니다."
"뭐? 그게 말이 되느냐?"
"정말입니다. 이 근방에는 작은 마을 하나조차 없습니다. 멀리 가 봤는데도 모두 성과 요새들뿐입니다."
"...."
이 영지는 정말 너무 이상했다. 다들 불길한 예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 * *
진흙탕이 된 전장에는 로드리크군의 시체만 가득했다. 펜리스의 대승이었다.
얼핏 봐도 저 대군의 절반은 없애 버린 거 같았다. 단 한 번의 교전으로 믿을 수 없을 만큼 훌륭한 전과를 낸 것이다.
펜리스의 가신들은 전장을 둘러보며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와, 이게 되네?'
'여기에 진흙탕을 만들 생각을 하다니. 대가리 미쳤네.'
'진짜 괜히 총관 노릇 하는 게 아니구나. 등신인 줄 알았는데....'
사람들은 새삼스럽다는 눈빛으로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영주가 총사령관을 맡겼을 때는 긴가민가했는데 진짜 그럴 만한 능력이 있었다.
딱히 강자들이 앞에 나서서 치열하게 싸운 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차근차근 준비한 함정으로 적을 끌어들여서 치명적인 피해를 주었다. 전쟁이 쉬워도 너무 쉬워 보였다.
물론 바네사가 적 마법사들을 모두 봉쇄했기에 가능한 일이긴 했다. 하지만 그 또한 클로드가 지시한 일이었다.
강력한 바네사의 공격을 다른 쪽으로 활용하며 적이 반격할 기회도 주지 않은 것이다.
그녀만 제하면 평범한 사람들과 그들이 준비한 것만으로 저 대군의 절반을 없애 버린 셈이었다.
언제나 클로드 때문에 수치심을 느끼던 웬디는 오랜만에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할 때는 하는 사람이라니까.'
클로드는 그 능력에 비해 영지에서 상당히 저평가되는 인물이다. 그간 잔망스럽게 사고도 많이 치고 권위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위기 상황에서는 확실히 능력을 보여 준다. 사실 영지가 원활하게 돌아가는 것도 클로드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알포이랑은 다르지.'
클포이라고 묶여서 저평가되지만 웬디가 봤을 때는 그래도 클로드가 조금 더 낫다. 이제 보니 얍삽한 외모도 알포이보다는 나은 거 같았다.
최근에 알포이가 활약을 좀 하긴 했지만 역시 큰일은 클로드가 한다고 해야 할까?
바네사를 제외한다면 이번 전투에서는 작전을 짠 클로드와 마법을 난사한 알포이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지긴 했다.
웬디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알포이가 잘난 척을 하며 말했다.
"어때? 내 실력 봤지? 내가 이 정도야. 내가 6서클이 되면 어떨지 나도 무섭다. 두려워서 서클을 못 올리겠어. 더 올리지 말까?"
"병ㅅ... 아니, 잘했어. 난 널 믿었어, 브로. 우리야말로 영지 최고의 지성인들이니까."
클로드와 알포이가 오랜만에 거만한 표정으로 서로의 주먹을 맞부딪쳤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이번에도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저 두 사람이 성공할 때도 있다니....'
'진짜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앞으로 잘난 척하는 꼴 계속 봐야겠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웬디와 바네사는 뭔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 다 어딘가 모자란 애들을 하나씩 보살피고 있다 보니, 그놈들이 활약했을 때 보람도 컸다.
썩은 생강 씹은 표정을 짓던 벨린다가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크흠, 총관님한테 이런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네요."
"지능의 차이가 느껴지십니까?"
"...어쨌든 우리가 이번에는 승리했으니...."
"우리가 아니죠."
"네?"
클로드가 벨린다의 말을 끊고 거만하게 다리를 꼬며 말했다.
"내가 승리한 거죠."
이 새끼는 왜 이렇게 얄미울까? 한 대 때려주고 싶은데 총사령관을 사람들 앞에서 때릴 수는 없었다.
"...그래요. 어쨌든 적들의 수가 많이 줄었는데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성을 공략할 방법이 없으니 후퇴할 거 같은데."
공성 병기는 죄다 진흙탕에 빠져 쓰지 못하게 되었다. 로드리크군은 겨우 자신들의 몸만 빠져나가느라 제대로 병기들을 챙겨 가지도 못했다.
그런 와중에 남은 병력으로 이곳을 공략하는 건 불가능하다.
남은 3만도 대군이라 할 만하지만, 이곳에는 갈바니움 무장병이 1만이나 있다. 요새를 끼고 싸운다면 병기도 없는 저들은 덤비는 족족 죽어 나갈 것이다.
"흐음, 영주님이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저들의 움직임이 달라질 텐데...."
클로드는 전군에 대기 명령을 내렸다. 영주가 서부 점령에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에 따라 자신들의 움직임도 달라질 것이다.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로드리크군 일부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모습을 보고 클로드가 웃었다.
"오호, 영주님이 성공한 건가?"
다른 참모가 로드리크군의 움직임을 보고 물었다.
"뭐지? 다들 뭐 하는 겁니까?"
클로드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마 보급에 문제가 생겼을 거다. 그러니 저렇게 급하게 움직이는 거겠지."
"아.... 그렇다면?"
"그래, 영주님이 성공한 거야. 린더스타인을 점령한 게 분명해."
로드리크군은 주변을 약탈하고 파괴해서 식량을 얻고 이곳의 병력을 끌어내려는 속셈일 것이다.
그런데 펜리스에는 그들이 약탈할 만한 곳이 없다. 이미 예전부터 전쟁에 대비해 영지민들을 모두 성과 요새로 강제 이주시켰기 때문이다. 주변엔 작은 마을 하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클로드가 다시 웃더니 말을 이었다.
"저쪽이 급하게 움직인 걸 보면 우리한테도 곧 소식이 들어오겠네. 그 다크인가 뭐인가 하는 놈으로 말이야."
과연 조금 기다리자 까마귀 하나가 날아와 클로드의 앞에 섰다.
"야, 클로드."
"...."
"미안하다. 오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 늦었다. 이미 저쪽은 소식을 전달한 게 같네. 뭐야? 왜 인상을 써? 내가 늦고 싶어서 늦은 게 아니거든? 내가 지도야? 내가 길을 어떻게 다 알아?"
"...그래."
다크가 무척 건방지다는 건 이제 모두가 다 알고 있다. 어차피 소환체 비슷한 놈이라 쥐어패 봤자 별 타격을 줄 수 없다.
그러니 이제는 다들 그러려니 하는 중이었다.
클로드가 몇 번 고개를 저은 뒤 물었다.
"영주님 쪽은 어떻게 됐지?"
"린더스타인을 점령하고 다른 이에게 그곳을 맡겼다. 곧 북부로 돌아오겠다고 한다. 그때까지 잘 지키고 있으라는데... 너 쟤네 많이 죽였더라?"
다크도 오면서 요새 앞에 깔린 시체를 봤다. 설명을 듣지 않아도 대승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클로드가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말했다.
"별거 아니지. 그러면 이제 저놈들도 발악하겠네. 슬슬 마무리를 지어야겠어. 다크, 대기하고 있는 용병들에게 소식을 전하도록."
보급이 끊긴 로드리크군은 이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남은 수는 단 두 가지밖에 없다.
새롭게 식량을 구해 장기전을 치르든가, 서부로 돌아가 린더스타인을 되찾는 것뿐이다.
물론 어느 쪽을 택하든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클로드는 저들을 이 북부에서 전멸시킬 생각이었다.
404화 전쟁 X같이 하네. (4)
도착한 기사는 글래스고 백작의 2군단에 속해 있던 자다.
그를 알아본 로드리크 후작이 떠듬거리며 물었다.
"내, 내 성이 점령당했다고? 이렇게 빨리 린더스타인이 점령당했다고?"
로드리크 후작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계속 같은 말을 꺼냈다.
기사는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린더스타인은 펜리스 백작에게 점령당하고 수비군은 괴멸되었습니다."
"2만이나 남겨 두었는데! 2군단은? 글래스고 백작의 2군단은 어떻게 되었느냐! 분명 2군단이 도착했을 거 아니냐!"
"저희 2군단 또한... 펜리스 백작에게 괴멸되었습니다. 글래스고 백작도 펜리스 백작에게 사로잡혀 목이 베였습니다."
"어어억!"
로드리크 후작이 괴성을 내지르며 자리에서 쓰러졌다.
"후작님!"
테넌트가 급히 로드리크 후작을 부축했다. 겨우 다시 일어난 로드리크 후작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도대체! 도대체 어떻게 6만이나 되는 군대가 기마병 1만에 당할 수 있다는 말이냐! 그것도 이렇게 빨리! 그놈들이 뭘 어떻게 했기에 이리도 빨리 린더스타인을 점령했다는 것이냐!"
로드리크 후작이 전령을 노려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말해 보아라! 어떤 놈이야! 어떤 배신자가 성문을 열어 줬다는 말이냐!"
"투석기로 성을 부수고...."
"이노옴! 말이 되는 소리를 하여라! 전군이 기마병인데 무슨 투석기란 말이냐! 투석기를 끌고 가면 절대 그 속도로 서부까지 갈 수 없다!"
말이 안 되는 속도였다. 그게 가능하다면 그 어느 곳에서도 펜리스의 기습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저, 정말입니다. 투석기로 성을 부수고 점령했습니다. 그 뒤에 저희도 그 투석기에 당했습니다."
기사는 억울하다는 듯 자신이 본 뼈다귀 투석기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다.
하지만 듣고 있던 사람들의 표정은 풀릴 줄 몰랐다. 직접 보고도 믿기 힘들 정도인데 말만 전해 듣는 사람들이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기사의 꼴을 보니 정말로 2군단이 괴멸하고 성이 점령당한 것은 사실인 듯했다. 안 믿을 수도 없었다.
로드리크 후작이 숨을 거칠게 내쉬며 다시 물었다.
"그러면 펜리스 백작은 린더스타인에 눌러앉은 것이냐?"
"아마... 그럴 겁니다. 포로도 많이 잡았으니 그들을 버려두고 움직일 수는 없을 테니까요."
기사는 전투에서 패배하자마자 바로 북부까지 달려왔다. 그래서 현재 린더스타인과 서부의 상황을 알지 못했다.
로드리크 후작은 이번에 테넌트를 노려보았다.
"테넌트! 6만이나 되는 군대가 펜리스 백작에게 괴멸당하고 우리의 본진까지 점령당했다!"
"...."
테넌트는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양동 작전을 제안한 건 자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나도 비상식적인 결과인지라 속에서 억울함이 올라왔다.
그렇게 빠르게 움직이는 군대에 공성 병기까지 있다고 도대체 어느 누가 생각하겠는가.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드는데 정확히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니 자신도 미칠 지경이었다.
"으으으.... 한심한 놈들!"
로드리크 후작이 결국 욕을 내뱉었다.
수비군까지 포함하면 무려 12만이나 되는 군대였다. 그런데 이제 남은 병력은 3만 명밖에 없다.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다들 당한 것이다.
"이게 어찌 서부 최강의 군대라 할 수 있다는 말이냐!"
로드리크 후작이 길길이 날뛰어도 다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드네시! 마법사들은 도대체 뭘 하는 거냐! 이번 전투에서 아무런 힘도 못 쓰지 않았느냐!"
애꿎은 마법사들에게 화살이 돌아갔다. 6서클 마법사가 세 명이나 있고 5서클 마법사도 여섯 명이나 있는데 어떠한 결과도 내지 못했다.
드네시가 땀을 뻘뻘 흘리며 변명을 했다.
"펜리스 측에 아주 뛰어난 마법사가 있는 거 같습니다. 저희 모두 그자를 막느라...."
"도대체 그게 누군데! 펜리스에 무슨 7서클 마법사라도 있다는 말이냐!"
"...."
그 말에도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7서클 마법사면 초인이다. 그 정도면 펜리스 백작처럼 왕국 전역에 진작 이름을 날렸을 것이다.
로드리크 후작가의 가신들은 다들 미칠 거 같았다. 모든 게 안개에 싸인 느낌이었다. 도무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는 이겨도 이긴 게 아니다. 실상은 패배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순식간에 초췌해진 로드리크 후작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보급은.... 보급은 어떻게 할 것이냐...."
순식간에 절반이 사라졌지만 남은 3만도 적은 수가 아니다. 하루에 소모되는 식량이 어마어마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돌아갈 식량도 부족할 것이다.
아니, 지금은 돌아갈 곳이 없다.
펜리스 백작이 돌아갈 곳 없게 만들려고 했는데 자신들이 그렇게 되어 버렸다.
"저곳을 차지하지 못하면 우리는 죽은 목숨이다."
실버라이트를 점령해야 다시 정비하고 펜리스 백작과 싸울 수 있다.
하지만 6만의 군대로도 점령하지 못한 곳이다. 공성 병기까지 죄다 진흙탕에 빠져 망가진 상태다.
"마법사들이 나서서 저 진흙탕을 다 말려 버릴 수 있겠는가?"
"...."
그 말에 마법사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들이 뭘 해 보려고 하면 상대측에서 봉쇄할 게 분명하다.
그리고 이제 와서 진흙을 말리면 무얼 하는가? 진군하는 도중에 적의 화살과 투석기 공격에 가는 족족 죽어 나갈 것이다.
"왜 아무런 말도 없는 것이야! 방법을! 방법을 찾으란 말이다!"
3만이나 되는 군대를 거느리고도 보급이 끊겨 죽을 위기에 처했다. 로드리크 후작은 이 상황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결국 테넌트가 조심스럽게 나섰다.
"먼저 주변 마을이라도 약탈해서 조금이라도 식량을 확보하는 게 나을 거 같습니다."
"계속 말해 보아라."
"당장 저 성을 공략하는 건 무리입니다. 성공한다 해도 피해가 엄청날 겁니다. 그렇게 되면 돌아오는 펜리스 백작과 싸우기가 힘들 것입니다."
"약탈을 하면 공략할 수 있다는 말이냐?"
"펜리스 백작은 영지민을 아끼기로 유명합니다. 우리가 주변 마을을 전부 없애 버리고 약탈을 자행하면 저 요새에 웅크리고 있는 놈들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으음...."
"어차피 당장 돌아가더라도 린더스타인을 차지한 펜리스 백작과 싸워야 합니다. 차라리 펜리스 백작이 그곳에 묶여 있을 때 저놈들을 끌어내서 싸우는 게 낫습니다."
펜리스 백작은 이쪽의 보급로를 끊기 위해서라도 린더스타인을 쉽게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당장은 테넌트의 말대로 요새의 적을 끌어내는 것이 최선이었다.
로드리크 후작이 잔인한 눈빛으로 말했다.
"당장 1만의 병력을 데리고 주변을 초토화해라. 한 놈도 살려 두지 말도록. 나머지는 대기하고 있다가 요새에 있는 놈들이 나오면 맞붙어라."
로드리크군은 재정비를 한 뒤 요새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주변을 약탈하고 부수다 보면 분명 펜리스군이 반응을 보일 거라 믿었다.
그렇게 사방으로 퍼져 나간 1만의 군대는 이틀 만에 돌아왔다. 군대를 이끌고 나갔던 지휘관이 시커멓게 죽은 안색으로 말했다.
"마, 마을이 하나도 없습니다."
"뭐? 그게 말이 되느냐?"
"정말입니다. 이 근방에는 작은 마을 하나조차 없습니다. 멀리 가 봤는데도 모두 성과 요새들뿐입니다."
"...."
이 영지는 정말 너무 이상했다. 다들 불길한 예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 * *
진흙탕이 된 전장에는 로드리크군의 시체만 가득했다. 펜리스의 대승이었다.
얼핏 봐도 저 대군의 절반은 없애 버린 거 같았다. 단 한 번의 교전으로 믿을 수 없을 만큼 훌륭한 전과를 낸 것이다.
펜리스의 가신들은 전장을 둘러보며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와, 이게 되네?'
'여기에 진흙탕을 만들 생각을 하다니. 대가리 미쳤네.'
'진짜 괜히 총관 노릇 하는 게 아니구나. 등신인 줄 알았는데....'
사람들은 새삼스럽다는 눈빛으로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영주가 총사령관을 맡겼을 때는 긴가민가했는데 진짜 그럴 만한 능력이 있었다.
딱히 강자들이 앞에 나서서 치열하게 싸운 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차근차근 준비한 함정으로 적을 끌어들여서 치명적인 피해를 주었다. 전쟁이 쉬워도 너무 쉬워 보였다.
물론 바네사가 적 마법사들을 모두 봉쇄했기에 가능한 일이긴 했다. 하지만 그 또한 클로드가 지시한 일이었다.
강력한 바네사의 공격을 다른 쪽으로 활용하며 적이 반격할 기회도 주지 않은 것이다.
그녀만 제하면 평범한 사람들과 그들이 준비한 것만으로 저 대군의 절반을 없애 버린 셈이었다.
언제나 클로드 때문에 수치심을 느끼던 웬디는 오랜만에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할 때는 하는 사람이라니까.'
클로드는 그 능력에 비해 영지에서 상당히 저평가되는 인물이다. 그간 잔망스럽게 사고도 많이 치고 권위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위기 상황에서는 확실히 능력을 보여 준다. 사실 영지가 원활하게 돌아가는 것도 클로드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알포이랑은 다르지.'
클포이라고 묶여서 저평가되지만 웬디가 봤을 때는 그래도 클로드가 조금 더 낫다. 이제 보니 얍삽한 외모도 알포이보다는 나은 거 같았다.
최근에 알포이가 활약을 좀 하긴 했지만 역시 큰일은 클로드가 한다고 해야 할까?
바네사를 제외한다면 이번 전투에서는 작전을 짠 클로드와 마법을 난사한 알포이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지긴 했다.
웬디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알포이가 잘난 척을 하며 말했다.
"어때? 내 실력 봤지? 내가 이 정도야. 내가 6서클이 되면 어떨지 나도 무섭다. 두려워서 서클을 못 올리겠어. 더 올리지 말까?"
"병ㅅ... 아니, 잘했어. 난 널 믿었어, 브로. 우리야말로 영지 최고의 지성인들이니까."
클로드와 알포이가 오랜만에 거만한 표정으로 서로의 주먹을 맞부딪쳤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이번에도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저 두 사람이 성공할 때도 있다니....'
'진짜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앞으로 잘난 척하는 꼴 계속 봐야겠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웬디와 바네사는 뭔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 다 어딘가 모자란 애들을 하나씩 보살피고 있다 보니, 그놈들이 활약했을 때 보람도 컸다.
썩은 생강 씹은 표정을 짓던 벨린다가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크흠, 총관님한테 이런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네요."
"지능의 차이가 느껴지십니까?"
"...어쨌든 우리가 이번에는 승리했으니...."
"우리가 아니죠."
"네?"
클로드가 벨린다의 말을 끊고 거만하게 다리를 꼬며 말했다.
"내가 승리한 거죠."
이 새끼는 왜 이렇게 얄미울까? 한 대 때려주고 싶은데 총사령관을 사람들 앞에서 때릴 수는 없었다.
"...그래요. 어쨌든 적들의 수가 많이 줄었는데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성을 공략할 방법이 없으니 후퇴할 거 같은데."
공성 병기는 죄다 진흙탕에 빠져 쓰지 못하게 되었다. 로드리크군은 겨우 자신들의 몸만 빠져나가느라 제대로 병기들을 챙겨 가지도 못했다.
그런 와중에 남은 병력으로 이곳을 공략하는 건 불가능하다.
남은 3만도 대군이라 할 만하지만, 이곳에는 갈바니움 무장병이 1만이나 있다. 요새를 끼고 싸운다면 병기도 없는 저들은 덤비는 족족 죽어 나갈 것이다.
"흐음, 영주님이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저들의 움직임이 달라질 텐데...."
클로드는 전군에 대기 명령을 내렸다. 영주가 서부 점령에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에 따라 자신들의 움직임도 달라질 것이다.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로드리크군 일부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모습을 보고 클로드가 웃었다.
"오호, 영주님이 성공한 건가?"
다른 참모가 로드리크군의 움직임을 보고 물었다.
"뭐지? 다들 뭐 하는 겁니까?"
클로드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마 보급에 문제가 생겼을 거다. 그러니 저렇게 급하게 움직이는 거겠지."
"아.... 그렇다면?"
"그래, 영주님이 성공한 거야. 린더스타인을 점령한 게 분명해."
로드리크군은 주변을 약탈하고 파괴해서 식량을 얻고 이곳의 병력을 끌어내려는 속셈일 것이다.
그런데 펜리스에는 그들이 약탈할 만한 곳이 없다. 이미 예전부터 전쟁에 대비해 영지민들을 모두 성과 요새로 강제 이주시켰기 때문이다. 주변엔 작은 마을 하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클로드가 다시 웃더니 말을 이었다.
"저쪽이 급하게 움직인 걸 보면 우리한테도 곧 소식이 들어오겠네. 그 다크인가 뭐인가 하는 놈으로 말이야."
과연 조금 기다리자 까마귀 하나가 날아와 클로드의 앞에 섰다.
"야, 클로드."
"...."
"미안하다. 오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 늦었다. 이미 저쪽은 소식을 전달한 게 같네. 뭐야? 왜 인상을 써? 내가 늦고 싶어서 늦은 게 아니거든? 내가 지도야? 내가 길을 어떻게 다 알아?"
"...그래."
다크가 무척 건방지다는 건 이제 모두가 다 알고 있다. 어차피 소환체 비슷한 놈이라 쥐어패 봤자 별 타격을 줄 수 없다.
그러니 이제는 다들 그러려니 하는 중이었다.
클로드가 몇 번 고개를 저은 뒤 물었다.
"영주님 쪽은 어떻게 됐지?"
"린더스타인을 점령하고 다른 이에게 그곳을 맡겼다. 곧 북부로 돌아오겠다고 한다. 그때까지 잘 지키고 있으라는데... 너 쟤네 많이 죽였더라?"
다크도 오면서 요새 앞에 깔린 시체를 봤다. 설명을 듣지 않아도 대승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클로드가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말했다.
"별거 아니지. 그러면 이제 저놈들도 발악하겠네. 슬슬 마무리를 지어야겠어. 다크, 대기하고 있는 용병들에게 소식을 전하도록."
보급이 끊긴 로드리크군은 이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남은 수는 단 두 가지밖에 없다.
새롭게 식량을 구해 장기전을 치르든가, 서부로 돌아가 린더스타인을 되찾는 것뿐이다.
물론 어느 쪽을 택하든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클로드는 저들을 이 북부에서 전멸시킬 생각이었다.
405화 사냥을 시작하자.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