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급 헌터 커뮤니티의 흑막이 되었다 55화
55화
정부직속 헌터길드, HETX의 사옥.
인기척이 없는 옥상에서는 현재 어두운 안색의 남자 하나가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S급 헌터, 독왕 구성현.
HETX의 상징과도 같은 남자는 착잡한 눈으로 아무도 없는 하늘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대략 일주일 전에 '어떤 인물'을 마주한 이후부터, 구성현은 계속해서 이런 상태에 빠져있었다.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일주일동안 회사와 집을 왕복했던 것이다.
"······."
그리고 그 인물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구성현의 머릿속 깊숙한 곳에 쐐기를 박고 있는 채였다.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미등록 헌터.
단순히 등록절차를 거치지 않은 헌터로만 판단했던 그 인물은, 구성현의 머릿속에 끈적한 악몽을 남기고 사라졌다.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히 평범한 인상의 시민처럼 보이는 모습이었다.
허나, 그 속내에 어떤 존재가 숨어있는지 구성현은 잘 알고 있었다.
'원한다면 그 자리에서 얼마든지 날 죽일 수도 있었다.'
그는 압도적인 실력을 가진 헌터였다.
물론 대한민국에는 신창이나 검귀같은 강력한 헌터들이 있지만, 그가 만난 것은 저들과는 완전히 궤가 다른 부류의 헌터였다.
그에게는 구성현이 가진 모든 독이 통하지 않았으며, 살기를 내비친 것만으로도 구성현을 행동불능으로 만들정도였다.
죽음.
구성현은 그 자리에서 분명 확실한 죽음을 맞이했었다.
그럼에도 구성현이 살아돌아와 이 자리에 서있을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구성현을 살려두는 것을 선택한 덕분이었다.
'게다가 의도적으로 게이트의 상태를 제어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더군다나 그 남자는 단순히 강하다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성좌가 경고할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는 그것을 뛰어넘는 비밀들을 품고 있었다.
—게이트 브레이크.
그 남자는 인위적으로 게이트의 상태를 제어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뒤편에서 일렁이던 게이트의 잔재가 그 사실을 확실하게 증명했으니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대한민국의 어떤 연구기관도 그런 짓을 벌이는건 불가능했다.
어쩌면 게이트의 발생 그 자체를 제어할 수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만약 그 남자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게이트에 간섭했다면······.'
현재 대한민국에 있는 게이트들 중에서도, 특별한 '일부' 케이스는 남자의 손을 탔을지도 모른다.
상황에 따라서는 '불운한 게이트 사고'가 그 남자의 의지에 따라서 벌어진 것일수도 있고 말이다.
언제든지 대한민국 전역에서 각종 사건사고를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인 것이다.
"후우······."
짙은 담배연기와 함께 흐려진 기억속의 형상이 구성현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필요에 따라 게이트나 몬스터 사고를 발생시키며, 암중에서 자신의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
구성현은 그러한 존재를 무엇이라고 부르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대한민국 헌터계에 존재하는 어둠이었다.
그것도 대체 어디까지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모를 깊은 어둠 말이다.
"대체 몇사람이나 그 사실을 알고 있는거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은 구성현이 어느새 짧게 타들어간 담배를 재털이에 짓눌렀다.
거친 입김을 타고 희뿌연 연기가 공중에 흩날렸다.
말도 안되는 일을 생각하고 있자니 머리가 아파왔다.
아는 것은 저주다.
위험한 정보를 아는 것은 특히 그러했다.
얼굴을 찡그린 구성현의 입에서 진득하게 눌어붙은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심지어 S급 헌터인 나한테조차 공유하지 않은 정보라고?"
지금의 구성현에게 있어서 가장 의문스러운 사실.
그것은 한국의 헌터계에 존재하는 어둠에 대해서, 대체 누가 어디까지 알고 있느냐는 점이었다.
대한민국의 비밀스러운 권력 일부는, 분명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든 그 존재와 닿아있을 가능성이 컸다.
높으신 분들이라면 그만한 존재의 움직임을 염두해두고 있을테니 말이다.
허나, 이 정보는 구성현에게조차 공유되지 않는 정보였다.
자신에게조차 비밀을 숨긴 고위층의 행태를 원망하던 구성현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이름이 떠올랐다.
"······주선호. 설마 그 자식은 알고 있었나?"
구성현와 같은 S급 헌터, 신창(神槍)— 주선호.
대한민국 헌터계의 정점에 위치한 신창이라면 이 비밀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 것인가.
어쩌면 물밑에서부터 계속 그와 접촉해, 위험한 계획에 대해 묵인받으려고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여태껏 주선호만을 견제해왔던 구성현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하-.
뒤죽박죽 엉킨 머릿속에서 구성현이 짧은 탄식을 내뱉으려던 순간이었다.
지이이이잉.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구성현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전화가 왔네."
불이 꺼진 꽁초를 집어던진 구성현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부하로부터의 전화였다.
스윽-.
전화를 받아 스피커를 귀에 대자, 그 너머로부터 부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팀장님. 지금 어디 계십니까?"
"어, 지우야. 담배 한대 피고서 금방 내려가려던 참이다."
구성현은 그렇게 이야기하며 옥상의 난간에 기대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담배냄새에 찌든 구성현의 안색과는 다르게 오늘은 유달리 햇빛이 밝은 편이었다.
퉤-.
화단을 향해 침을 뱉은 구성현은 부하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 "방금 전에 협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게이트 브레이크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뭐? 게이트 브레이크?"
헌터 업계에서 가장 유명한 재해의 이름.
그것에 대해 들은 구성현은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름을 듣자마자 누군가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연상된 까닭이었다.
- "예. 이번에 게이트 브레이크가 관측되어서, 팀장님을 파견해줬으면 한다고······."
게다가 구성현에게 전해진 이야기의 내용은, 그런 게이트 브레이크 현장에 자신을 투입하겠다는 것이었다.
혹시 모를 재해에 S급 헌터를 투입하는건 당연한 일이지만, 구성현에게 있어서 지금의 이 상황은 이상하리만치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게이트 브레이크는 그리 자주 일어나는 재해가 아니었다.
불과 얼마 전에 게이트 브레이크가 터져서 헌터들이 파견되었던 상황.
그런 상황에서 공교롭게 이번에 또 다시 게이트 브레이크의 전조가 확인된 것이다.
'뭐지? 설마 이번에는 인위적으로 게이트를 조작한건가······?'
구성현의 머릿속에 불길한 가능성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가 아는 누군가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게이트 브레이크를 발생시켰을 가능성.
그런 가능성을 떠올린 구성현은 입술을 깨물며 손에 든 스마트폰을 기울였다.
'이번에는 느낌이 좋지 않아.'
아무래도 이번 게이트 브레이크는 느낌이 좋지 않았다.
구성현의 생각이 맞다면 현장에서 그 남자를 다시 만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건 너무나도 위험한 상황이었다.
"차출 거부해."
- "······예?"
결국 구성현이 선택한 것은, 자신이 마주한 상황을 회피하는 것이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의문에 젖은 부하의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구성현은 그를 향해 다시금 자신의 선택을 밀어붙였다.
"적당히 핑계대서 차출 거부하라고. 다른 S급들 중에서 하나한테 넘기라고 전해."
짧은 명령.
그 직후 구성현은 스마트폰의 통화를 끊어버렸다.
툭-.
통화를 끊어버린 후, 복잡한 얼굴의 구성현이 한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어넘겼다.
"하··· 진짜 미치겠네."
긴 시간이 지나도 도저히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있다.
헌터계에 드리워진 거대한 그림자.
구성현은 장막 너머에 존재하는 비밀을 앞에 두고서, 자신이 어린아이로 되돌아간 듯한 기분을 지워버릴 수 없었다.
서늘해진 가을의 바람만이 그런 구성현의 얼굴을 식혀나갈 뿐이었다.
* * * * * *
커뮤니티에 성좌들이 등장한 이후, 그동안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다.
커뮤니티의 이용자들 대부분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성좌들의 출현에 적응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수많은 이용자들이 적응했다고 해서, 모든 이용자가 적응한 것은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유달리 적응이 늦는 인물들은 언제나 존재하기 마련이었으니까 말이다.
"이 사람은 왜 항상 이러고 있지?"
S급 게이트, 버려진 영물들의 낙원.
나는 그곳에서 무수한 신수들을 쓰다듬으며, 커뮤니티의 게시판을 바라본 채 홀로 중얼거렸다.
새롭게 도래한 성좌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안타까운 인물.
커뮤니티 이용자명, 'nabi242'에 대한 평가였다.
우리의 단체 대화방 멤버들 중 하나인 'nabi242'는 새로운 시대에 합류하지 못하고 뒤쳐지고 만 것이다.
"여기서 이런다고 포인트가 생길리가 없는데 말이야."
스윽-.
나는 새하얀 털을 가진 참새를 어루만지면서, 게시판에 'nabi242'가 작성한 게시글 목록을 바라보았다.
- 성좌 발로헤드 이분 거지인가요? ㅠㅠ [4] (nabi242)
- 성좌님들 만나려면 어떻게 해요? [2] (nabi242)
- 성좌님들도 경매장 이용 가능해요? [1] (nabi242)
- 왜 나한테는 성좌들 안오지 ㅜㅜ [5] (nabi242)
- 우와 스크롤 너무 저렴해 ㅜㅜㅜㅜㅜ [2] (nabi242)
- 저도 곧 성좌님들한테 메세지가 올까요? [2] (nabi242)
S급 헌터, 풍랑(風狼) 서유화— 'nabi242'의 게시글들은 대부분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헌터들을 지켜보며 마음에 드는 이들을 후원하는 성좌들.
그들로부터의 후원 메세지가 자신에게 날아오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다시 말해서 성좌들이 그녀에게 유의미한 후원을 하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성좌들 경매장 이야기는 또 뭐야? 성좌들한테도 스크롤을 팔아먹으려고?"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nabi242'가 작성한 게시글의 내용을 읊었다.
스크롤이 너무 저렴하다는 내용과, 성좌들도 경매장 이용이 가능하냐는 질문.
기존에도 나에게 아이템을 팔아먹으려던 서유화의 행보를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성좌들한테까지 스크롤 매각 가능성을 고려하는 것으로 보였다.
포인트에 대한 집착이 정도를 넘어서 슬슬 광기를 향해 치닫고 있는 것이다.
커뮤니티 유저들이 그동안 비판해왔던 포인트 괴물— '리워드족'에 점점 가까워져가고 있는 셈이었다.
"심지어 맨위에 적은 글은 뭐야. 댓글도 4개나 달려있네?"
이용자명 'nabi242'가 남긴 게시글의 제목들은 하나같이 경이로운 편이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경이로운 제목은 단언컨데 가장 최근에 작성한 게시글이었다.
게시글명 '성좌 발로헤드 이분 거지인가요? ㅠㅠ'.
독특한 내용의 게시글은 그 내용이 자동으로 연상되는 수준이었다.
나는 해당 게시글의 내용을 확인해볼 생각으로, 게시글의 제목을 향해 손가락을 가까이 가져갔다.
툭-.
내 손가락이 해당 게시글을 터치하기 무섭게, 서유화가 작성한 게시글이 화면에 출력되었다.
[ 제목 ] 성좌 발로헤드 이분 거지인가요? ㅠㅠ
[ 작성자 ] nabi242
[ 이용자 정보 ] 서유화(28) / S급 / 풍랑
왜 1포인트밖에 안주죠? ㅜㅜ
이럴거면 그냥 주지말지..
yamazaki 이분은 성좌한테 1만포인트 받으셨다는데 흑흑..
저도 성좌님들한테 포인트 받아보고 싶어요..!
[ 댓글 4개 ]
- tex11 : 성좌 [tex11]이 포인트 구걸 그만하고 사냥이나 하라고 합니다
ㄴ nabi242 : 너 전화받아
- frz0777 : 레디아의 바람칼날은 팔았냐?
- xkingx : 성좌가 거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당신이 거지인 것은 무척이나 확실해보입니다.
[ 공지사항 / 수정 / 삭제 ]
'nabi242'가 작성한 게시글의 내용.
그것은 자신이 그토록 갈망해왔던 성좌가 찾아왔으나, 그 성좌가 고작 1포인트밖에 주지 않았다는 원망의 말이었다.
포인트 상한을 설정한다고 생각만 하고 미뤄두어서 그런지, 여전히 1포인트 후원을 하는 성좌가 남아있었던 것이다.
나와 거래를 하지 않은 성좌였는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1포인트를 줬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이 게시글에서 한가지 확실한 점이 있다면, 성좌가 거지일 가능성보다 'nabi242'가 거지일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이었다.
"xkingx··· 나선창 첸다오도 보통내기가 아니네."
나는 그러한 취지의 내용을 담은 'xkingx'의 댓글을 바라보았다.
평소에도 무척이나 잦은 빈도로 인기 게시글에 올라가더니, 이제는 댓글에서조차 그 위용을 떨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나선창 첸다오의 댓글에 감탄하면서 조금 더 위로 올라가보니, 거기에는 굉장히 익숙한 닉네임 역시 존재하고 있었다.
이용자명 'tex11', 파천궁 오지후의 댓글이었다.
"맨 위에 댓글 적은건 오지후인가? 서유화랑 아는 사이라고 했으니 뭐······."
내가 기억하는 한, 오지후와 서유화는 어느 정도 교류가 있는 사이였다.
신창 주선호에게 오지후의 아이디를 알려주었던 것도 서유화였으니까 말이다.
그런만큼 전화를 걸었다는 저 메세지는,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그런 두 사람의 사이좋은 대화를 지켜보면서, 같은 대화방 멤버인 서유화에게 위로의 댓글을 달아주기로 했다.
"나도 오랜만에 댓글이나 하나 달아둬야겠다."
타닥, 타다닥-.
허공에 떠오른 키보드를 두드린 나는 서유화를 향해 따뜻한 위로의 댓글을 남겼다.
서유화가 보면 커다란 희망과 감동을 받을만한 댓글이었다.
[ 댓글 5개 ]
- 거품판독기 : 저는 어제 성좌 인피니튜드님한테 5만 포인트 받았네요 ^^
[ 공지사항 / 수정 / 삭제 ]
가슴이 따뜻해지는 문장을 남긴 이후.
나는 손가락을 움직여 다시금 게시판 목록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대화방 동료에게 친절한 내용을 달아줬으니, 이제는 다시금 다른 게시물들을 탐색하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내가 게시판 목록에서 다른 게시글을 찾아보려던 순간.
띠링-.
1:1 대화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알림음이 울려퍼졌다.
"······nabi242가 보낸 메세지네."
나에게 메세지를 보낸 이용자의 닉네임.
그것은 방금 전에 내가 댓글을 남겨놓았던 게시글의 작성자, 'nabi242'였다.
아무래도 댓글을 보고서 나한테 할말이 생긴 모양이었다.
"대체 무슨 내용을 보냈으려나."
툭.
나는 화면을 터치해 'nabi242'가 전송한 개인 메세지를 확인했다.
- nabi242 : 우와 ㅜㅜ 5만포인트 너무 축하드립니다!
- nabi242 : 성좌님이 엄청 아끼시나봐요 ㅜㅜㅜㅜㅜ
- nabi242 : 그런데 혹시 '레디아의 바람칼날' 안필요하세요?
- nabi242 : 5만포인트면 충분히 사고 남을것 같은데요!
그리고는 그 내용에 경악해 손가락을 멈춰세웠다.
'nabi242'가 나에게 보낸 메세지의 내용.
거기에는 익숙한 아이템의 이름이 적혀있었던 것이다.
"······그거 아직도 안팔렸냐?"
<레디아의 바람칼날(S)>.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그 아이템이었다.
서유화의 메세지를 마주한 직후.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키보드 위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그걸 대체 왜 나한테 팔아."
S급 헌터 서유화와 나 사이에 개인적인 접점은 존재하지 않는 상황.
그러니 나는 서유화의 제안을 단칼에 끊는 메세지를 보내고, 그녀의 개인 메세지 전송을 막아두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나는 메세지를 입력하기 위해 키보드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고, 반투명한 키보드에 내 손가락이 닿으려던 찰나였다.
피익-.
내 손가락과 맞닿아있던 커뮤니티의 키보드가 갑작스럽게 모습을 감추었다.
"······?"
의문에 젖은 시선이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해할 수 없는 풍경에 내가 이 상황을 되짚으려고 시도한 것도 잠시.
머지않아 내 손가락이 닿아있던 허공으로부터, 익숙하면서도 낯선 메세지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띠링. 띠링. 띠링.
순식간에 나타난 메세지의 연쇄가 내 시야를 가득채웠다.
- [커스텀 네트워크(B)]에 충분한 에너지가 축적되었습니다.
- [커스텀 네트워크(B)]의 등급을 다음과 같이 조정할 수 있습니다.
- 특성 등급 : B → A
- 경고! 해당 선택은 당신에게 불가역적인 변화를 초래할 것입니다.
- 등급을 조정한 이후에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다시 되돌릴 수 없습니다!
- 등급을 조정하시겠습니까?
- [ 예 / 아니오 ]
눈앞에 나타난 메세지를 마주한 내 손가락이 제자리에 멈추어섰다.
고유특성 [커스텀 네트워크]의 에너지가 전부 축적되어, 서버 점검과 함께 승급의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불가역적인 변화?"
그것도 의미심장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경고메세지들과 함께 말이다.
S급 헌터 커뮤니티의 흑막이 되었다 56화
56화
살다보면 가끔씩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는 한다.
지금 내 눈앞에 띄워져있는 수상한 메세지들처럼 말이다.
고유특성, [커스텀 네트워크]의 승격에 대해 고지하는 반투명한 화면.
해당 화면에서는 나에게 직접 '선택'의 기회를 주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것도 내가 다음 단계로 나아갈 것인지 선택할 기회를 말이다.
"아니, 이건 대체······."
나는 눈앞에 떠오른 메세지를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고유특성이 성장하는 것은 분명히 좋은 일이었다.
굳이 이런식으로 내 의사를 물어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말이다.
깜빡. 깜빡.
이해할 수 없는 메세지에 수차례 눈을 감았다 떠보았지만, 그럼에도 내 눈앞에 있는 메세지는 여전히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 경고! 해당 선택은 당신에게 불가역적인 변화를 초래할 것입니다.
- 등급을 조정한 이후에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다시 되돌릴 수 없습니다!
- 등급을 조정하시겠습니까?
- [ 예 / 아니오 ]
한 번 선택하면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불가역적인 변화.
그것을 감수하고서 A급 특성에 도전할 것이냐는 질문.
나는 해당 메세지를 보고선 복잡한 심경이 되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왜 이런 설명이 떠오른 것인지 도통 납득이 가지 않는 까닭이었다.
"특성의 등급이 오르는 일이잖아? 대체 왜 경고를 할 필요가 있는거야?"
적어도 일반적인 특성의 성장개념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이번 등급조정이 단순한 변화 이상의 리스크를 반영한다는 뜻이었으니까 말이다.
리스크와 리턴.
유의미한 리스크만이 확실한 리턴을 가져올 수 있다면 나는 어떠한 결단을 내려야하는가.
납득할 수 없는 선택지.
그것을 마주한 채 고민하던 내가 내린 결정은 결국 하나였다.
"······설령 등급을 올려서 문제가 생긴다고 하더라도, 여기서는 당연히 앞으로 나아가야겠지."
세상이 서서히 변해가고 있다.
언제까지고 자리에 멈춰서있는걸 선택해서야, 결국에는 이 세상이 나를 놓아두고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그러니 나는 결정해야만 했다.
다가올 멸망의 시대.
다른 이들에게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는 앞으로 계속해서 전진할 필요가 있었다.
툭-.
나는 눈앞을 향해 손가락을 뻗어 등급조정을 수락했다.
그 직후, 내 앞에 떠올라있던 메세지가 갱신되며 화면이 뒤바뀌었다.
- [커스텀 네트워크(A)]의 안정화를 위해 다음 시간동안 모든 기능이 일시적으로 중단됩니다.
- 남은 예상 시간 : 23시간 59분 59초
그렇게 뒤바뀐 화면은 수차례 마주해왔던 덕분에 상당히 익숙해져버린 내용이었다.
등급조정에 따른 서버점검.
내가 가진 특성이 일시적으로 기능을 정지한 것이다.
이제는 익숙해진 점검 메세지를 바라보면서, 나는 내 뒤에 엎드려있던 백구의 위에 드러누웠다.
"백구야."
- 왈? 왈?
"잘 봐둬라. 남자는 자기가 내린 결정에 후회따위는 안하는거야."
나는 백구를 향해 신중한 의사결정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한 후, 등뒤로 느껴지는 녀석의 폭신폭신한 털을 즐겼다.
신성력을 채워 건강한 상태로 되돌아온 덕분이었을까.
나와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르게, 백구의 털은 상당히 포실포실 했다.
그렇게 백구의 등에 기댄 채 하늘을 향해 손을 뻗으며, 나는 낙원에 떠올라있는 태양을 올려다보았다.
드높은 하늘에서 낙원을 비추는 태양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잊어버린 것에 대한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아. 인기글부터 먼저 확인하고 나서 점검 시작할걸."
커뮤니티 없이 보내는 24시간.
아무래도 내 인생에서 가장 고독한 시간이 이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 * * * *
하루라는 시간은 상당히 짧은 듯하면서도 긴 시간이다.
하루. 24시간.
그 오묘한 단어의 무게는 때때로 사람을 미치게 만들기 마련이다.
누군가는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하고, 또 누군가는 하루나 기다려야한다는 소식에 절망하기도 한다.
이렇듯 하루라는 것은 저마다의 사람에게 저마다의 무게를 전해주는 법이었다.
"······대체 언제 끝나는거야?"
그리고 지금, 인적이 없는 작업실에서 또 하루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그 인물은 당연하게도 유튜브 영상을 편집하고 있는 나 자신이었다.
어제 [커스텀 네트워크]의 등급조정 메세지와 함께 커뮤니티가 서버점검에 들어간 이후, 지금까지도 이렇게 화면을 띄워두고서 점검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점검이 끝나기까지, 앞으로 5분 37초.
이 기나긴 시간은 거진 하루에 가까운 인내를 이어가고 있는 나에게도 밑바닥의 무언가를 드러내게 하기에 충분했다.
"······."
똑딱. 똑딱-.
침묵속에서 시간이 흐른다.
스스로가 커뮤니티 중독이 아니라는 주장을 늘 이야기하지만, 그럼에도 커뮤니티의 점검은 나에게 또 다른 단절을 안겨주기 마련이었다.
전세계에 있는 S급 헌터들과 더 이상 연결될 수 없다는 의미의 단절.
커뮤니티가 멈춰서있는 그 시간만큼은 내가 나약한 인간이 된 것 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 내가 나약해진 것도 맞긴했다.
[커스텀 네트워크]가 점검중인 지금, 나는 고유특성과 연결되어있는 스킬을 무엇 하나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으니까 말이다.
"하··· 착잡하네. 검을 놓고다니는 검객들이 이런 기분인가. 체감시간으로는 한 이틀은 지난 것 같은데."
커뮤니티가 없는 커뮤니티 관리자.
모든 스킬들이 잠겨있는 상태에서는, 나는 반지 하나에 자신을 묶어놓고 다니는 헌터 이하의 존재나 다름없는 셈이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일찍이 상태창이 이야기했던 '극단적인 변화'에 대한 불안감도 스멀스멀 올라왔다.
대체 어떤 변화가 찾아오기에, 그런식으로 경고문을 보여준다는 말인가.
툭. 툭.
그렇게 내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고 있으니, 머지않아 그토록 기다리던 시간이 눈앞에 찾아왔다.
"······뭐야. 드디어 점검이 끝난건가?"
[커스텀 네트워크]의 점검 메세지.
커뮤니티의 비활성화를 알려오던 메세지가 내 눈앞에서 사라진 것이다.
커뮤니티의 점검이 이제서야 종료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이렇게 된 이상 내가 할 것은 하나뿐이었다.
나는 커뮤니티의 점검 메세지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직후, 곧장 늘어져있던 몸을 세워 자세를 바로잡았다.
"—[네트워크 접속]."
그리고는 커뮤니티 화면을 호출하는 명령어를 입에 담았다.
띠링-.
커뮤니티를 실행하자 내 눈앞에 게시판이 출력되었다.
그리고 그 위로는 수많은 메세지들이 떠올라있는 모습이었다.
고유특성의 등급이 조정됨에 따라 나에게 생긴 변화들이었다.
"A급 고유특성··· 대체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한 번 확인해봐야겠지."
세상에는 다양한 특성들이 존재하고 있지만, 그런 특성들 중에서도 A급 특성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지는 편이었다.
어떤 파티라도 투입 즉시 핵심전력으로 이용할 수 있는 수준.
수많은 헌터들 중에서도 특별한 이들만이 손에 넣을 수 있는 특성이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A급에 도달한 [커스텀 네트워크]에 어떤 변화가 생겼을지 기대하면서, 긴장감 가득한 얼굴로 눈앞에 떠오른 메세지들을 읽어나갔다.
- [신규 기능 : 즐겨찾기]가 추가되었습니다.
- [즐겨찾기] 기능은 다른 이용자가 작성한 게시글을 저장해 모아볼 수 있는 기능입니다.
- 많은 수의 [즐겨찾기]가 등록된 게시글은 제목에 강조효과를 받게됩니다.
- [특수 기능 : 리워드]가 강화되었습니다.
- 이제부터 [리워드] 기능이 조금 더 특별한 상품들을 판매하기 시작합니다.
- <일일 출석 보상>이 이제부터 한달마다 특별한 아이템을 무작위로 지급합니다.
반투명한 화면을 가득채운 내용은 그 스크롤이 무척이나 긴 편이었다.
고유특성이 A급에 도달하면서 커뮤니티에 수많은 변경사항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내용을 위에서부터 천천히 읽어나갔다.
수많은 내용들중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즐겨찾기] 기능이었다.
"즐겨찾기라··· 다음에 다시 볼 글을 등록해두는 기능인가?"
게시판에 있는 글들중에서 목록에 남기고 싶은 글을 지정하는 기능인 모양이었다.
커뮤니티의 S급 헌터들이 남긴 게시글들중에는 무척이나 유용한 내용들이 있기 마련.
그중에서도 특별히 다시보고 싶은 게시글을 등록할 수 있는 것이다.
커뮤니티의 이용자들 입장에서는 상당히 유용한 기능인 셈이었다.
"[즐겨찾기]를 많이 받으면 게시글 제목에 강조효과가 들어가는 모양이네. 그리고··· 그 다음은 상점이랑 출석보상 쪽인가."
더군다나 [즐겨찾기]에 많이 등록된 게시글은 강조효과도 받는 모양이니, 유용한 게시글을 작성한 입장에서는 상당히 만족스러울 터였다.
해당 내용의 아래에는 [리워드]와 <일일 출석 보상>에 대한 내용도 적혀있었다.
고유특성의 등급이 오르면서 [리워드] 상점에 상품이 추가되었으며, 출석체크를 통해 특별한 보상까지 획득할 수 있게 된 모양이었다.
출석보상은 나도 받을 수 있는 항목이었으니, 나에게 있어서도 썩 나쁘지 않은 패치내역인 셈이었다.
"그 아래에도··· 이번에는 변경사항이 꽤 많은데. 아직까지 내용이 이렇게 남아있을 줄이야."
[커스텀 네트워크]의 변경사항은 아직도 더 남아있었다.
게시판에 대한 변경점을 확인한 이후, 나는 스크롤을 조금 더 아래쪽으로 내렸다.
스윽-.
스크롤을 내리자 더 많은 내용들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 [신규 기능 : 징벌]이 추가되었습니다.
- [징벌]은 [커스텀 네트워크]의 잔여에너지를 소모해 강력한 마력 파동을 발산하는 기능입니다.
- [징벌]은 100시간에 한 번 사용이 가능하며, 잔여 에너지가 부족한 경우 사용이 취소될 수 있습니다.
- [징벌] 기능에는 [에너지 증폭] 효과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 [특수 기능 : 에너지 증폭]이 강화되었습니다.
- [에너지 증폭]이 활성화된 이후, 해당 효과가 적용된 기능의 재사용 대기시간이 초기화됩니다.
[커스텀 네트워크]의 또 다른 변화들은 전투와 관련된 기능들이었다.
새로운 기능이 하나 추가되었으며, 기존에 있던 기능이 하나 강화되었다.
나는 그러한 변화들 중에서 새로 추가된 기능에 대한 내용부터 읽어나갔다.
"[징벌]··· 이전에 쓰던 [강력경고]와는 다른 유형의 스킬인가?"
새롭게 추가된 기능의 이름은 [징벌].
그것은 무거운 이름에 걸맞게 상당히 파격적인 설명을 가지고 있었다.
해당 기능을 사용하는 경우, 강력한 에너지 파동을 전방으로 방출한다.
굳이 '강력한'이라는 표현이 붙어있는 모습을 보건데, 아무래도 상당히 위력적인 공격수단처럼 보였다.
이전에 있던 스킬들과는 다르게 해당 스킬은 공격적인 측면에 치중되어있는 것이다.
"에너지 파동이라··· 자세한건 한 번 사용해봐야 알 것 같은데."
공포를 통해 적을 제압하던 [강력경고]와는 완전히 궤가 다른 스킬이었다.
스킬의 위력은 직접 전투에서 사용해봐야 확인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런 [징벌] 스킬의 추가와 함께 찾아온 것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에너지 증폭] 스킬의 변화였다.
[에너지 증폭]에 더해진 새로운 효과.
그것은 해당 효과가 적용된 스킬의 재사용 대기시간을 초기화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에너지 증폭]의 경우에는··· 이렇게 되면 하루에 두 번 스킬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건가?"
[에너지 증폭] 스킬을 사용하는 경우, [강력경고]나 [긴급방어] 스킬의 재사용 대기시간이 즉시 초기화된다.
다시 말해서 하루에 두 번 스킬을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강력한 위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신규 스킬.
그리고 사용가능 횟수가 한차례 더 늘어난 기존 스킬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내 전력이 크게 강화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한 상황이었다.
"안그래도 [강력경고]의 효과가 30% 더 강해졌는데, 거기에 두 번 사용까지 더해진다고······?"
광역 공포 두 번. 그리고 공격스킬 한 번.
이정도면 나에게 있어서는 상전벽해에 가까운 변화나 다름없었다.
진정한 의미에서 A급 헌터라고 부르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헌터 흉내는 낼 정도의 입지를 차지한 셈이었다.
"사실상 유리대포에 조금 더 가까워진 셈인가."
이제부터는 1회용 헌터, 혹은 유리대포라 부르면 마땅할 터였다.
기존에 내가 차지하고 있던 유사헌터 포지션과 비교하면 상당한 출세라고 볼 수 있었다.
허어-.
그렇게 자신에게 생긴 변화를 보며 감탄하고 있던 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다시금 화면을 향해 손가락을 가져다대었다.
아직도 눈앞의 상태창에는 스크롤이 추가로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뭐, 생각보다 다양한 변화가 있기는 한데··· 아직까지는 그렇게 경고메세지를 보낼 정도는 아닌 것 같단 말이지."
불가역적인 변화에 대한 경고.
상태창은 분명히 [커스텀 네트워크]의 등급 조정을 신중하게 결정하라고 나에게 이야기했다.
굳이 그 이유를 짐작해보자면, 아마도 해당 특성의 변화가 단순한 성장이 아니라 '조정'이기 때문일 터였다.
그렇다면 어떤 변화가 생겨났기에 그렇게까지 나에게 경고해왔던 것일까.
나는 조금 더 파격적인 변화를 찾아보기 위해 스크롤이 끝날때까지 손가락을 쭉 내려그었다.
"······."
그렇게 한계까지 스크롤을 내린 직후.
화면을 바라보던 내 얼굴이 그 내용을 마주하고서 딱딱하게 굳었다.
"뭐야, 이거."
그도 그럴 것이, 상태창에 나와있는 변화는 내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내용들이었으니까 말이다.
- 커뮤니티에 등록된 이용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변화가 적용됩니다.
* [신규 등급 : EX]가 개방되었습니다.
* 이제부터 모든 특성과 능력치가 최대 EX까지 성장할 수 있게 됩니다.
* 아직 완성되지 않은 [판정 등급 : EX] 게이트에 조기 진입이 가능해집니다.
- 커뮤니티에 등록된 성좌들이 조금 더 특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됩니다.
- [시험 : 이끄는 자의 자격]이 무작위 순서로 개방됩니다.
- 개방된 시험에 실패하는 경우, [커스텀 네트워크]의 모든 기능이 정지합니다.
- 개방된 시험을 통과하는 경우, 시험의 난이도에 적합한 보상을 획득합니다.
눈앞을 가득 채운 메세지들이 내 머릿속을 벼락과도 같이 스쳐지나갔다.
지나치게 파격적인 내용들이 내 머리를 헤집었으며, 정보의 격류속에서 나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한 사람의 선택이 짊어지기에는 너무나도 무거운 무게.
그럼에도 그것을 강요하는 상태창의 내용을 바라보던 나는,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멍하니 상태창을 응시했다.
"······신규 등급, EX? 능력치와 특성에 새로운 등급이 생겼다고?"
때로는 가벼운 선택으로부터 찾아오는 파격적인 변화도 있기 마련이었다.
선택에는 책임이 따르며, 책임에는 무게가 있는 법이다.
지나치게 급진적이면서, 또 불가역적이고 영구적인 변화.
그러한 변화속에서 나는 비로소 경고문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 * * * * *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S급 게이트, '미친 마법사의 던전'의 끝자락.
그곳에는 현재 검은 기운이 서린 마창을 들고 있는 남자가 서있었다.
S급 헌터, 신창 주선호.
대한민국 최강의 헌터라고 불리는 그가 혼자서 S급 게이트를 답파한 것이었다.
"하아, 하······."
몬스터를 쓰러뜨린 주선호의 이마에서 짙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허나 주선호는 몬스터의 머리에 창을 꽂고 있는 와중에도, 숨을 고르며 마음에 들지 않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자신의 창끝이 꿰뚫고 있는 몬스터였다.
여태까지 마주한 몬스터들과는 그 생태나 강함이 완전히 다른 녀석이었다.
—[절멸종].
그 끔찍한 이름으로 불리는 몬스터를 보며, 주선호는 일그러진 얼굴로 창을 뽑아들었다.
'고작해야 이 수준으로는 부족하다.'
푸욱-.
진득한 체액을 묻힌 채 창을 뽑아든 주선호가 [절멸종]의 시체를 보았다.
대한민국을 포함한 세계 각국의 게이트에 변화가 찾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주선호가 이번에 마주한 [절멸종]은 그러한 변화들 중의 하나였다.
지나치게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외계의 존재.
그 강함은 그들 스스로가 이미 절멸에 가까워진 족속인 것인지, 혹은 다른 세계를 절멸시키기 위한 생태를 가진 것인지 모호하게 만들 정도였다.
'이만한 존재가 단체로 넘어오기 시작하면, 지금 있는 헌터들로는 완전히 틀어막는 것이 불가능할거다.'
더군다나 토벌의 난이도는 일반적인 필드보스의 범주를 아득히 상회하는 수준.
그런만큼 S급 헌터인 주선호로서도 인류의 존속에 대한 불안감을 느낄 정도였다.
그가 이전에 마주했던 '어떤 몬스터'까지 고려한다면,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그 어떤 때보다도 커져버린 상황.
그렇기에 주선호의 얼굴은 날이 갈수록 어두워져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걸 해결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도··· 언제까지고 제자리에 멈춰있을 수는 없겠지.'
그러한 불확실성에서 탈출하기 위한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게이트와의 전쟁에서 최전선에 서있는 헌터들이 지금보다도 더 강해지는 것.
게이트 너머의 [절멸종]에 대항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어야만 했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주선호 역시, 벽을 부수고 나아가 한층 더 높은 곳에 도달할 필요가 있었다.
"슬슬 돌아갈 시간인가."
휘릭-.
주선호의 손이 마창을 휘둘러 그것에 묻어있던 체액을 털어내었다.
무기를 회수한 주선호는 게이트를 벗어나기 위해 몸을 돌렸다.
길드와 협회에 일절 보고되지 않은 토벌인만큼, 가능한 조용히 이곳에서 빠져나갈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주선호가 복잡한 생각을 품은 채, 게이트의 입구를 향해 나아가려던 순간.
띠링-.
주선호의 눈앞에 반투명한 메세지들이 떠올랐다.
- [신규 등급 : EX]가 개방되었습니다.
- 이제부터 모든 특성과 능력치가 최대 EX까지 성장할 수 있게 됩니다.
- 아직 완성되지 않은 [판정 등급 : EX]의 게이트에 조기 진입이 가능해집니다.
주선호의 눈앞에 떠오른 세줄의 메세지.
그가 마주한 것은 고작해야 짧은 길이의 메세지였지만, 그럼에도 그 중요성은 아무리 긴 내용으로도 표현이 부족할 정도였다.
신규 등급, EX.
새로운 등급이 개방되었다.
기존에 하늘을 가리던 천장을 넘어, 또 다른 목표가 헌터들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EX등급!"
하늘을 가리던 천장이 무너져내렸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새로운 하늘이 주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균 능력치 S+.
헌터로서의 한계에 직면하고 있던 주선호의 눈빛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
눈앞에 보이는 변화를 마주하던 주선호가 자신의 창을 바닥에 찔러넣었다.
S급 헌터, 주선호.
그는 자신이 오늘 밤 집에 돌아가기 어려울 것 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S급 헌터 커뮤니티의 흑막이 되었다 57화
57화
급진적인 변화란 언제나 극단적인 반응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그것은 현 헌터사회의 정점, S급 헌터들이 모여있는 커뮤니티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새로운 등급, EX급의 해금 이후.
커뮤니티의 헌터들이 수많은 이야기들을 게시판에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하··· 확실히 반응들이 뜨겁긴 하네."
S급 게이트, 버려진 영물들의 낙원.
나는 현재 게이트의 너머에서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게시글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새로운 스킬을 점검하기에 앞서, 새로 개방된 등급에 대한 헌터들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커뮤니티의 관리자로서, 그리고 이 사태를 일으킨 범인으로서 나름대로의 책임감을 느낀 것이다.
"······."
이미 정점에 다다른 이들의 머리 위에 새로운 등급이 생겨난 까닭이었을까.
커뮤니티는 난리가 났다고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모습이었다.
커뮤니티의 탄생 이래.
역대급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빠르게 게시글들이 올라오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런 커뮤니티의 모습에 감탄하면서, 현재 게시판에 올라와있는 게시글들을 간단하게 훑어보았다.
- EX급은 또 뭐야? [3] (tex11)
- 새로 나온 등급이 포인트로 갈 수 있는 등급인가요? [11] (thundershock)
- EX급에 도달하신 헌터분을 찾습니다 [5] (nineblade)
- EX급 게이트도 있다는 이야기 아닌가요? [3] (firefox)
- 어떻게 찍은 S급인데 너무 억울하지않아? [5] (artea)
- EX급 축구선수 이름 공개한다. [5] (ronaldo_7)
커뮤니티의 게시판에 올라와있는 수많은 게시글들.
그것은 하나같이 신규 등급의 개방에 경악하는 내용들이었다.
[커스텀 네트워크]의 등급이 오르며 EX급이 추가된 것이, 헌터들에게 있어 무척이나 파격적인 변화라는 이야기였다.
"EX급의 추가정도 되면 굉장히 파격적인 변화이기는 하지."
EX급 헌터.
그리고 EX급 게이트.
어느쪽이든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나 역시도 상태창이 나에게 전한 경고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던 내용이었으니까 말이다.
헌터라면 누구라도 진지해지지 않을 수 없는 주제인 셈이었다.
"근데 EX급 축구선수 글은 뭐냐?"
물론 검성같은 극히 일부의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검성은 커뮤니티만 들어오면 이상해지는 녀석이기에 크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내가 이미 현실에서 아서 본인을 수차례 마주해봤기에 내릴 수 있는 결론이었다.
"······뭐, 평소에 저런 글을 쓰기는 해도, 전투에 있어서는 굉장히 진지한 부류이긴 했지.
오히려 현실에서는 제법 기사다운 면모를 보이던 헌터이지 않던가.
최상위 등급의 개방은 검성에게 있어서도 신창과의 새로운 경쟁과 다름이 없을 터.
그런만큼 아서 테브란트도 한동안은 자신의 성장에 집중할 것이 분명했다.
"나도 물론 남말할 처지는 아닌가."
- 왈! 왈!
그렇게 커뮤니티 유저들의 반응을 살펴보던 나는, 이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금 눈앞으로 시선을 옮겼다.
헌터들에게 있어서 무척이나 커다란 변화가 생겼지만, 이번 일로 나 자신에게 생긴 변화도 적지 않은 편이었다.
새롭게 추가된 스킬이나 시험과 같은 것들이 그러했다.
모든 변화가 근본적으로는 [커스텀 네트워크]의 진화에서 기인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내가 지금 이 게이트에 찾아온 것도, 나에게 생긴 변화를 점검해보기 위함이었다.
"분명히 조만간 시험이 찾아올거라고 적혀있었지."
EX급의 개방 이외에도, 나에게는 시험이라는 또 하나의 벽이 있었다.
그것도 지금까지의 [커스텀 네트워크]와는 다르게, 전례가 없던 유형의 기능이 추가된 것이다.
- [시험 : 이끄는 자의 자격]이 무작위 순서로 개방됩니다.
- 개방된 시험에 실패하는 경우, [커스텀 네트워크]의 모든 기능이 정지합니다.
- 개방된 시험을 통과하는 경우, 시험의 난이도에 적합한 보상을 획득합니다.
해당 기능의 이름은 [시험 : 이끄는 자의 자격].
시험의 경우 무작위 순서로 개방되며, 시험의 결과에 따른 추가적인 조치가 존재했다.
시험에 통과하는 경우, 시험의 난이도에 걸맞은 보상을 받게 된다.
여기까지만 보면 나쁘지 않은 일처럼 보였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을 때의 일이었다.
"실패하면 고유특성의 기능이 완전히 정지하게 된다라······."
통과에 실패했을 경우, [커스텀 네트워크]의 기능이 정지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서버점검때와 동일한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해당 조치가 언제 해제된다는 기약조차 적혀있지 않았다.
혹시라도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는 날에는 말도 안되는 패널티를 짊어지게 되는 셈이었다.
"하필이면 또 이름이 재수없게 시험이란 말이지."
시험이라는 단어가 가져오는 불길한 어감 역시 한몫했다.
시험.
나는 이 단어를 유독 싫어하는 편이었다.
내 인생에서 시험이 가장 즐거웠던 순간이 수능 아랍어 시험 시간이었던 것도 한몫했다.
"하필이면 내가 제일 약한 분야를 들고 나오다니."
언제 이 시험이란게 자신에게 찾아올지는 모르겠지만, 패널티가 있는 시험을 봐야된다는 상황 자체가 그리 유쾌하지 못했다.
그렇게 내가 커뮤니티 화면을 보며 고민하고 있으니, 머지않아 내 귓가에서 익숙한 울음소리가 터져나왔다.
- 왈왈! 왈왈왈!
- [자동번역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 "일단 성수부터 뿌리고 고민하죠?"
내 옆자리에 있던 백구로부터의 조언.
그런 백구의 이야기를 듣자, 시험에 대한 고민이 순식간에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내가 이곳에 찾아온 첫번째 목적에 다시 시선이 향한 것이다.
"그래, 백구야. 그랬지."
내가 오늘 이곳에 찾아온 가장 큰 이유.
그것은 당연히 백구에게 성수를 나눠주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백구는 이곳에서도 비교적 자주 신성력을 공급받는 신수였기에, 굳이 지금 신성력을 공급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백구야. 잘 지켜봐라."
- 왈왈?
이번에 새롭게 추가된 스킬, [징벌].
이름만 보더라도 강력해보이는 이 스킬의 위력을 확인해보기 위해 게이트에 찾아온 것이다.
지금까지 추가되었던 모든 스킬을 통틀어 유일하게 공격적인 스킬이었다.
그 쿨타임도 짧지않은만큼, 나름대로 위력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지금부터 새로 얻은 기술을 보여줄테니까 말이야."
적어도 일반적인 장소에서 사용할 수 있을만한 출력의 스킬은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난 해당 스킬을 점검하기 위한 장소로 이곳을 선택했다.
스킬의 위력을 점검한다면 반드시 게이트 너머에서 진행해야만 했다.
게다가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낙원에 있는 순백의 용이 해결해줄 수 있을거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스윽-.
나는 손가락 두개를 펼쳐서는, 그 끝으로 낙원의 구석에 있던 언덕을 가리켰다.
"후우······."
처음으로 사용하는 스킬에 대한 기대를 안은 채, 짧은 심호흡을 내뱉는다.
그 직후, 내 시선이 손끝을 노려보았다.
- [징벌]이 활성화됩니다.
- 에너지의 충전시간에 비례해 [징벌]의 위력이 강력해집니다.
파앗-!
언덕을 가리키던 손끝에서 새하얀 반짝임이 터져나왔다.
사방으로 확산하는 빛.
그와 동시에 몸안에서 막대한 기운이 빨려나가는 듯한 감각이 전해져왔다.
"······!"
[징벌] 스킬을 사용하는데 소모하기 위한 에너지가 충전되기 시작한 것이다.
우우우우웅-.
손끝에서부터 퍼져나가는 파동.
진동하는 대기속에서 나는 이를 악물고 한계까지 힘을 밀어넣었다.
반짝임이 터져나오고서 3초 후.
내 눈앞에 새로운 메세지가 떠올랐다.
- [커스텀 네트워크]의 에너지 저장량이 30%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 충전을 종료합니다.
충전의 종료.
그것을 알리는 메세지와 함께, 내 손끝에서 터져나온 빛무리가 뻗어나갔다.
새하얀 빛은 한줄기의 선을 그었다.
그리고 그것을 뒤따르듯이, 막대한 광량을 터뜨린 빛줄기가 내려꽂혔다.
콰과과과과광—!
언덕을 향해 쏟아지는 빛의 폭격.
눈부신 광채를 발하는 궤적이 언덕을 가르고 지면을 파고들었다.
갈라지는 구름.
그리고 일그러지는 공기.
파아앙!
어마무시한 풍압이 터져나오며 내 머리카락을 뒤흔들었고, 타들어가는 냄새가 내 코를 타고 들어왔다.
손가락으로 경계를 내려긋듯이 세계를 양단하는 일격.
자신의 손끝에서 뻗어나온 빛줄기는 이해할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말도 안되는 양의 에너지를 쏟아붓기를 십여초.
치이익-.
허공을 향해 뻗고 있던 내 손가락 끝에서 연기가 흘러나왔다.
"하, 이게··· 내 스킬이라고······?"
손가락 끝을 바라보던 내 시선이 멍하니 주변의 풍경을 훑었다.
내 손가락이 목표로 삼았던 언덕은 어느새 사라져버린지 오래였다.
지형을 뒤바꾸고 대지를 양단시키는 위력.
파멸적인 궤적을 바라보던 나는 자신이 만들어낸 결과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헌터들의 전투를 수없이 지켜봐왔던 나였기에 알 수 있다.
이것은 고작해야 A급 특성이 만들어낼만한 결과값이 아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A급 특성이야."
S급, 그중에서도 상위로 분류되는 전투특성에서나 뽑아낼 수 있을만한 위력이었다.
신규 스킬, [징벌].
그것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징벌할 수 있을만한 출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경이로운 스킬의 위력을 확인하다가, 조용히 백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바로 옆에서 내 공격을 지켜보던 백구는, 혀를 늘어뜨린 채로 멍하니 나에게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었다.
- 왈왈?
- [자동번역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 "저한테는 쏘지마세요."
S급 게이트의 신수.
백구로부터의 감상이었다.
* * * * * *
다음날 점심.
나는 천시예의 부름을 받아 카페에 나왔다.
그 이유는 당연하게도 서로에게 나름대로의 용건이 있었던 까닭이었다.
"혹시 주선호가 벌써 EX급에 도달한건 아니겠지?"
카페에서 나를 마주한 천시예는 곧장 주선호에 대한 이야기부터 꺼내오는 모습이었다.
S급 헌터, 신창 주선호.
모든 헌터들의 정점에 위치한 그가 벌써 EX급에 도달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오래전부터 주선호를 뒤쫓기 위해 노력해왔던 천시예였다.
그런 그녀에게 있어서 주선호가 갑자기 EX급으로 승급하는건 상당히 심각한 문제일 터였다.
'EX급이라··· 주선호가 아니면 가장 먼저 올라갈 사람이 없겠지.'
물론 나 역시도 그런 천시예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EX급에 가장 먼저 도달할 헌터가 있다면 그건 바로 신창 주선호였다.
그는 지금도 모든 헌터들의 정점에 서있는 헌터였다.
그런 주선호가 아니라면 누가 EX급에 올라갈 수 있겠는가.
어떤 헌터라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주선호가 EX급에 올라가는건 미래를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이다.'
더군다나 주선호가 EX급에 도달하는 것은, 미래를 위해서도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아무리 주선호가 위험한 인물이라고는 해도, 그가 인류에게 있어서 중요한 전력이라는 사실은 틀림없었다.
위험한 존재가 더 위험해지는건 상당한 리스크지만, 주선호에 한해서만큼은 그 이상의 리턴도 따라오기 마련이었다.
앞으로 다가올 멸망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주선호를 적절하게 잘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양날의 검도 휘두르기 마련이었다.
그것을 잘 다뤄내는 것이, 헌터로서의 나에게 주어진 역할일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쫓아왔는데··· 앞으로 격차가 더 벌어질 생각을 하니까 조금 어지러워······."
물론 그런 내 생각을 알지 못하는 천시예로서는, 더욱 강해질 주선호를 생각하니 절로 한숨이 나오는 모양이었지만 말이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쉰 천시예의 눈이 허공을 바라보았다.
상태창. 혹은 커뮤니티를 바라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말이야, 내가 최근에 주선호에 대해서 본 글이······."
천시예는 그렇게 말하면서 허공에 손가락을 넘겼다.
커뮤니티에 있던 게시글과 관련해 무언가 할말이 있었던 것일까.
스윽.
허공을 향해 손가락을 넘기던 천시예의 얼굴이 갑자기 굳었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의아하다는 듯이 이야기를 전해왔다.
"······왜 게시판에 신창이랑 관련된 글밖에 없는거야?"
"갑자기 무슨 소리야? 주선호가 도배라도 했어?"
천시예의 이야기.
그런 그녀의 이야기에 나는 의문을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재 커뮤니티 게시판에 신창 주선호와 관련된 글밖에 없다는게 이해가 가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내가 의아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천시예가 아무것도 없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게시판 한 번 확인해봐."
"게시판을 확인해보라고? 알았어."
게시판을 확인해보라는 천시예의 이야기.
나는 그런 그녀의 이야기에 응해 게시판을 실행해보았다.
—네트워크 접속.
익숙한 키워드와 함께 눈앞에 반투명한 게시판이 출력되었다.
- 신창이 EX급 찍어도 나한테 절대 안되는 이유 [6] (frz0777)
- 하.. 다들 하나같이 신창 신창... [1] (tex11)
- 신창이 아니여도 다른 사람이 먼저 EX급에 도달할 수 있지 않나요? [3] (thundershock)
- 최두식 헌터님이.가장 먼저.EX급에 가요.^^~ [1] (마산사나이 최두식)
- 애초에 EX급 게이트 공략하려면 신창이라도 먼저 올라가야되는거 아닌가요? [5] (artea)
- 다들 본인이 먼저 승급할 생각을 해야합니다. [3] (xkingx)
눈앞에 나타난 커뮤니티의 게시판.
그곳에서는 수많은 이용자들이 신창 주선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래쪽에서 시작된 게시글의 흐름을 보건대, 아무래도 EX급에 대한 이야기가 주선호에 대한 화제로 번진 모양이었다.
누가 먼저 EX급에 도달할 것인가.
해당 질문의 가장 현실적인 답변에 대한 이야기였다.
천시예가 주선호에 대한 게시글을 검색하지도 않았는데, 그녀의 눈앞에 주선호에 대한 게시글이 잔뜩 나타난 셈이었다.
'이건 대체 뭐하는 글이야?'
나는 그런 게시글의 흐름을 바라보다가, 가장 위에 있는 'frz0777'의 게시글을 클릭해보았다.
해당 게시글의 제목은 '신창이 EX급 찍어도 나한테 절대 안되는 이유'.
남자라면 결코 참을 수 없는 제목의 게시글이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설령 주선호 본인이라고 해도 클릭을 참을 수 없을만한 게시글이었다.
툭-.
나는 해당 게시글을 터치해 열어보았다.
그리고는 러시아의 자신감 강한 헌터가 작성한 게시글을 보고서 벙찐 얼굴이 되었다.
[ 제목 ] 신창이 EX급 찍어도 나한테 절대 안되는 이유
[ 작성자 ] frz0777
[ 이용자 정보 ] 아샤 이바노프(20) / S급 / 빙하의 파편
창 뺏기면 아무것도 못해
[ 댓글 6개 ]
[ 공지사항 / 수정 / 삭제 ]
커뮤니티 이용자명, 'frz0777'이 작성한 게시글의 내용.
그것을 보니 익숙한 데자뷰가 머릿속을 스쳐가는 기분이었다.
그것이 실제로 성립될 수 있는지 여부와는 별개로, vs놀이를 좋아하는 'engine555'가 상당히 좋아할만한 주제이기는 했다.
나는 'frz0777'의 자신감 넘치는 발언을 보다가, 결국 고개를 저으며 화면을 닫아버렸다.
"뭐, EX급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잖아? 피할 수 없는 숙명인거겠지."
"······아무래도 그런 것 같네."
천시예 역시 게시글의 상태를 보고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기쁜 것인지 아쉬운 것인지, 그 감정을 짐작하기 어려운 얼굴이었다.
툭-.
그렇게 창을 닫아버린 이후.
빨대를 이용해 커피를 들이킨 천시예가 나를 향해 물었다.
"그러고보니 오늘 나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했는데, 어떤 이야기야?"
커피를 마신 천시예의 질문은 이야기의 본론에 대한 것이었다.
내가 오늘 천시예를 찾아온 이유.
그것은 내가 그녀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존재하는 까닭이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천시예에게 있어서는 그리 어렵지 않을 부탁이었다.
"내 부탁 말이지?"
"응. 주선호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루고, 일단은 그거부터 들어볼게."
"아마 그렇게 어려운 부탁은 아닐거야."
내가 천시예에게 하려는 부탁.
그것은 S급 헌터의 도움을 요구하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나는 천시예를 향해 내 요구를 전했다.
"S급 게이트중에서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이 필요해."
"S급 게이트?"
"어. S급 게이트."
판정 등급 S급 게이트.
나는 해당 게이트에 접근할 방법을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야 당연히 내 손에 끼워져있는 반지, <블렌도어의 약속(S+)> 때문이었다.
반지에 존재하는 게이트 등록 기능.
그것을 이용해 S급 게이트 하나를 등록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만약을 위한 수단은 하나쯤 들고있어야지.'
S급 게이트를 인위적으로 생성하고, 또 역류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반지다.
그러니 만약을 대비해 비상수단 하나쯤은 더 들고 있을 생각이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오면 게이트를 역류시킬 생각으로 말이다.
위험한 일에 엮여있는 이상, 이런 방법을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그렇게 내가 반지에 등록할 게이트에 대해 묻자, 천시예는 골똘히 고민하며 대답을 돌려주었다.
"인천에 있는 S급 게이트 중에 하나가 제대로 관리가 안되고 있을거야."
"인천에 있는 게이트?"
"응. 정확한 이름은··· 잠깐만 기다려줘. 내가 직접 찾아볼게."
스윽-.
천시예는 게이트의 이름을 검색할 생각인지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스마트폰을 꺼낸 천시예가 액정을 손가락에 가져가던 순간.
띠링-.
내 눈앞에 반투명한 메세지가 출력되었다.
- 새로운 [시험]이 개방되었습니다!
메세지의 내용을 확인한 나는 표정을 억제하는데 실패했다.
아무래도 나에게 충분한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주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
첫번째 시험이 찾아왔다.
S급 헌터 커뮤니티의 흑막이 되었다 58화
58화
누구나 시험을 두려워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시험에 대한 의무감과 성적에 대한 압박감은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요소였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공부를 영 못하는건 아니었기에, 나름대로 괜찮은 학교를 나오기는 했지만 말이다.
"조금 더 걸릴 것 같아. 잠깐만 기다려줘."
나는 스마트폰을 보며 이야기하는 천시예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눈앞에 떠올라있는 반투명한 화면을 바라보았다.
손가락으로 액정을 터치하는 천시예의 앞쪽.
그곳에 나타난 커다란 화면이 그녀를 가리고 있는 중이었다.
'이게, 시험이라고······?'
그런 화면에는 내가 처음으로 마주하는 내용들이 적혀있었다.
나는 눈앞에 적혀있는 내용을 천천히 읽어나갔다.
< 별자리 시험 : 이끄는 자의 자격 >
* [ 폐쇄형 커뮤니티 : 자격 시험 1 ]
- 당신은 84명의 커뮤니티 구성원을 이끄는 자로서, 그 자격을 증명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 멸망에 대비할 자격을 갖춘 이들만이 [????]를 허락받을 수 있습니다.
- 성좌 : [재생의 텔리오스]가 당신에게 걸맞은 시험을 개방했습니다.
- 시험에 통과하는 경우, 회복 능력치가 다음과 같이 변경됩니다.
- 회복 : E → B
- 시험에 실패하는 경우, [커스텀 네트워크]의 모든 기능이 정지합니다.
- 달성 목표 : <텔리오스의 손길(S+)>을 회수하십시오.
- 제한시간 : 29일 23시간 59분
눈앞에 띄워진 시험의 내용을 확인한 내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처음으로 마주한 시험의 내용은 상당히 경이로운 것이었다.
그것도 내가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커뮤니티를 이끄는 자로서 그 자격을 증명하라고? 그것도 나를 지켜보는 성좌들 앞에서 말이야?'
나는 눈앞에 띄워진 내용을 신중히 곱씹어보았다.
폐쇄형 커뮤니티의 자격 시험.
나에게 그러한 시험이 주어진 이유는 간단한 편이었다.
84명의 헌터들을 이끌고 있는 커뮤니티의 관리자.
한 집단의 지도자로서 그 자격을 증명하라는 것이다.
'이건 성좌들이 내 역할을 생각보다 크게 보고 있다는건데.'
성좌들의 앞에서 자격을 증명하라.
얼핏 보기에는 당연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 문장에 담겨있는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건 그들이 나에게 가지고 있는 기대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것도 사람과 성좌를 연결하며, 다가오는 멸망에 맞서기 위한 선봉장으로서의 역할에 대한 기대였다.
'아무래도 100만 유튜버한테 너무 많은걸 기대하고 있는거 아니야?'
나는 자신의 입가에 난감한 미소가 걸리는 것을 느꼈다.
저마다의 이유로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이 S급 헌터들의 특징이었다.
그런 이들을 가능한 문제없이 컨트롤해서 멸망을 막아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도 그들의 배후에서 말이다.
나는 성좌들의 무거운 기대를 받은 채로, 화면에 띄워져있는 시험의 내용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 시험 내용 : <텔리오스의 손길(S+)>을 회수하십시오.
- 제한시간 : 29일 23시간 58분
성좌, '재생의 텔리오스'가 나에게 제시한 시험.
그 내용은 한달안에 <텔리오스의 손길(S+)>이라는 S+급 아이템을 회수해오는 것이었다.
S+급의 아이템이라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힌트도 남아있지 않은 상황.
그런 물건을 나 자신과 커뮤니티의 힘으로 회수해야만 하는 시험이었다.
'어떤 방식으로 커뮤니티를 움직여 물건을 회수하는지 보는건가.'
적어도 성좌가 어떤 이유로 이런 시험을 제시했는지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커뮤니티를 움직이는 관리자로서의 역량.
그리고 그 바깥에 서있는 나 자신의 헌터로서의 역량을 보는 것이다.
시험의 내용은 분명 어려운 편이었지만, 집단의 힘을 활용하는 경우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시험을 통과한 보상으로 주어지는건······.'
게다가 이번 시험을 통과하는 경우, 보상으로 회복 능력치를 성장시킬 수 있었다.
고유특성이 A급으로 성장하기까지 여태껏 제자리에 멈춰있던 능력치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해당 시험의 내용으로 추정해보건대, 다른 시험의 보상 역시 능력치와 관련되어있을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계속해서 성좌들의 시험을 통과하다보면, 머지않아 등급에 걸맞은 능력치들을 얻게 될지도 모르는 일.
목표를 달성할 수만 있다면 괜찮은 일인 것만큼은 틀림없어보였다.
'시험을 통과할 수만 있다면 그리 나쁘지는 않은 상황이야.'
물론 시험을 무조건 통과해야한다는 전제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렇게 내가 반투명한 창을 보며 고민에 잠겨있다보면, 머지않아 스마트폰을 바라보던 천시예가 고개를 들어올리는 모습이었다.
스윽-.
손가락으로 화면을 넘기던 천시예가 나를 향해 시선을 보내며 입을 열었다.
"찾았어. 인천에 있던 게이트의 이름."
"게이트의 이름이 뭔데?"
인천에 방치되어있는 S급 게이트의 이름.
내가 그것을 그녀에게 묻자, 천시예는 커피를 한모금 빨아들이고는 대답을 돌려주었다.
"S급 게이트, 죽은 신의 무덤."
"뭐? 어떤 이름이라고?"
"—죽은 신의 무덤. 그런 이름이었어."
S급 게이트, 죽은 신의 무덤.
그것이 천시예가 이야기한 게이트의 이름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보이는 이름이었다.
더군다나 내가 그 이름에 더욱 신경이 쓰이는 이유는, 게이트의 이름이 아무런 규칙 없이 붙는게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전에 우리 집에 열렸던 게이트, '레델 화이트의 은신처'가 그를 증명하고 있었다.
"죽은 신의 무덤······."
멸망한 세계의 잊혀진 신.
그들에게서 버려진 세계.
그 사실을 더듬어나가다보면, 내 머릿속에 자그마한 가능성 하나가 떠올랐다.
그녀가 말한 '죽은 신의 무덤'이라는 게이트 자체가, 어쩌면 멸망한 세계의 성좌와 관련되어있는 공간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 것이다.
'어쩌면 게이트 너머에는 멸망한 세상과 관련된 기록이 더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게이트의 이름에는 저마다의 의미가 있는 법이다.
나에게 시험으로 제시된 <텔리오스의 손길(S+)> 역시, 성좌와 관련된 게이트 너머에 있을지도 모르는 일.
그러니 그녀가 말한 S급 게이트의 내용물을 한번쯤은 확인해보는게 좋을지도 몰랐다.
'안에 들어가서 한 번 확인해보는게 좋을지도 모르겠어.'
단순히 게이트를 반지에 등록하고서 끝날만한 장소가 아닐지도 모르는 것이다.
설령 게이트에 대한 내 추측이 틀렸다고 해도, S급 게이트를 폐쇄해서 나쁠 것은 없을테고 말이다.
나로서는 한번쯤은 해볼만한 도박인 셈이었다.
"신기한 이름이지?"
그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시예는 커피를 마시면서 이름에 대한 감상을 물어오는 모습이었다.
이름 자체에 무거운 분위기가 묻어나고 있는 까닭일 것이다.
끄덕-.
천시예의 물음에 고개를 움직여 수긍한 나는 그녀를 향해 말했다.
"확실히··· 한 번 내부를 조사해보고 싶을만한 이름이네."
"직접 들어가볼 생각이야?"
"들어가봐서 나쁠건 없겠지."
S급 게이트의 공략.
거기에는 그 등급만큼이나 많은 위험이 도사리기 마련이었다.
그런 게이트의 내부를 탐색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나 혼자서는 문제가 있을 것이다.
혹시라도 게이트를 빠져나오다가 협회쪽 사람들에게 들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고 말이다.
거기에 대해서 고민하던 나는 눈앞의 천시예를 향해 말했다.
"기왕이면 '랭킹 6위' 검귀님이 직접 게이트 안까지 안내해줬으면 좋겠는데."
"······안내?"
"물론 그만한 보상은 지불할 생각이야."
관리가 허술한 게이트.
그곳에 S급 헌터를 데리고 가서, 조용히 게이트 내부를 탐색해본다.
결론을 확정지은 나는 천시예를 향해 손가락을 펼쳐보았다.
그 의미는 당연히 포인트에 대한 내용이었다.
"개인적으로 S급 게이트 내부에서 확인해보고 싶은게 있어서 말이야."
500포인트.
내가 게이트 내부에 진입하는 보상으로 천시예에게 제안한 금액이었다.
"······알았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다음주에 시간을 내볼게."
막대한 포인트 보상.
그걸 앞에 둔 천시예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결국 그녀는 마지못해 내 제안을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검귀니 랭킹 6위니 해도, 결국 포인트에 약한건 모두가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나도 그동안 준비를 좀 해둬야겠지.'
처음으로 찾아가는 S급 게이트.
다가올 멸망과의 전쟁에서 최전선에 서기 위해, 한번쯤은 경험해봐야만 하는 과제일 것이다.
* * * * * *
천시예와의 만남 이후로 어느덧 며칠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징벌] 스킬의 쿨타임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구독자 100만명이 넘어선 유튜브 채널에 영상을 꾸준히 업로드했다.
유튜브 채널의 성장세가 기세를 타기 시작한 덕분이었을까.
어느덧 채널의 구독자가 104만명을 달성한 상황이었다.
내가 운영하는 '헌잘알' 채널이 최우현의 '헌터사전'을 거의 다 따라잡은 것이다.
간신히 50만을 넘어섰던 시절을 생각해보면 기적에 가까운 결과인 셈이었다.
"······추세만 보면 금방 110만까지도 달성할 것 같단 말이지."
채널의 성장세에 대한 감상을 늘어놓은 이후.
하암-.
나는 짧은 하품을 하면서 약속장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S급 헌터, 검귀 천시예.
그녀와 S급 게이트의 탐색을 위한 약속을 잡은 까닭이었다.
터벅, 터벅-.
그렇게 내가 발걸음을 옮겨 약속장소로 향하면, 점퍼차림의 천시예가 등에 무언가를 매고있는 모습이 보였다.
"오늘은 좀 늦었네?"
나를 발견한 천시예가 점퍼로 입가를 가린 채 이야기했다.
슬슬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을까.
천시예는 제법 포근해보이는 점퍼를 입고 나온 모습이었다.
그런 그녀의 등에는 기타케이스가 매여있었고 말이다.
그녀 나름대로 전투를 위한 복장을 갖춰나온 셈이었다.
"아무래도 위치가 위치다보니까 조금······."
나는 그런 천시예의 이야기에 나름대로의 항변을 하며 말끝을 흐렸다.
천시예가 말했던 것처럼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 장소인 까닭이었을까.
이 주변에는 제대로 된 도로라고 부를만한 장소가 없는 편이었다.
차에서 내려서 여기까지 한참을 더 걸어와야했던 것이다.
그런 내 이야기에 짧은 한숨을 내쉰 그녀는, 이내 기타케이스를 당겨매고서는 몸을 돌렸다.
"평소에는 게이트를 어떻게 찾아다닌거야?"
"내가 아무리 미등록 헌터라고 해도, S급 게이트에 혼자 들어가지는 않지."
"······그렇구나."
끄덕-.
내 이야기에 수긍한 천시예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물론 내가 천시예에게 한 이야기는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고작해야 E급 헌터에 불과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명목상으로는 A등급에 해당하는 헌터였다.
진정한 의미에서 미등록 헌터에 가까워지고 있는 셈이었다.
'아무리 성장하더라도 헌터협회에 직접 등록하기는 어렵겠지.'
허나, 내가 S급에 다다르더라도 협회에 직접 등록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내 능력은 헌터일에 그리 잘 어울리지도 않을 뿐더러, 무엇보다도 외부에 그 정보가 노출되어서는 곤란한 능력이었다.
커뮤니티는 상태창과 성좌에 대한 무한한 신뢰로 돌아가는 공간이다.
그러니 내 영향력을 최대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이 비밀은 언제까지고 혼자 가슴속에 묻고가야만 했다.
"저쪽으로 가자. 저 다리만 건너면 금방 나올거야."
그런 내 생각을 모르는 천시예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앞장서는 중이었다.
하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넘어서, 천시예의 뒤를 따라서 발걸음을 옮긴다.
터벅, 터벅-.
아무도 없는 고요속에서 길을 걷다보면, 용케 이런곳에 있는 게이트를 발견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잘도 이런 곳을 알고 있네."
"S급 게이트는 우리같은 S급 헌터들한테 최우선으로 배정되잖아? 그래서 직접 공략의사를 표하지 않으면, 대부분 게이트 브레이크 전조만 조사하는 편이야."
어째서 이런 곳에 위치한 게이트를 알고 있는가.
내 질문에 대한 천시예의 답변은 간단한 편이었다.
S급 헌터에게 게이트 공략의 의지가 없다면, 해당 게이트는 그대로 방치에 가까운 상태에 놓인다.
막대한 재산피해를 유발할만한 공간이 아니라면 더더욱 그러한 모양이었다.
"물론 당신처럼 게이트 공략도, 긴급출동명령도 안받고 돌아다니는 헌터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
나는 천시예의 이야기에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따라갈 뿐이었다.
나라고 S급 헌터가 되기 싫어서 이러고 있겠는가.
그저 최고가 되지못한 범재의 발버둥일 뿐이었다.
그렇게 나와 천시예가 적당한 대화를 나누며 나아가다보니, 머지않아 그녀가 이야기했던 게이트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여기가······."
"이곳이 내가 지난번에 말했던 게이트야."
갈라진 공간 사이로 쏟아져나오는 자줏빛 광채.
현실감을 흐트러뜨리는 균열이 인적이 드문 곳에 방치되어있었다.
숲이라고 부르기에는 그리 울창하지 않지만, 도심이라고 부르기에는 거리가 있는 위치.
그런 애매한 장소에 덩그러니 놓인 균열은 관측기만을 앞에 둔 채 남아있었던 것이다.
툭-.
게이트를 마주한 천시예는 기타케이스를 바닥에 내려놓고서는, 지퍼를 내려 안쪽에서 검을 꺼내들었다.
"죽은 신의 무덤. 그런 이름이 붙여져있는 S급 게이트야."
전용 장비, <운명검 아브락사스(S)>를 꺼내든 천시예가 나를 향해 이야기했다.
죽은 신의 무덤.
척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게이트다.
더군다나 완성되어있는 게이트들 중에서도 최고등급에 해당하는 S급의 게이트였다.
"바로 안에 들어갈 생각이야?"
해당 게이트의 내부를 정리할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반지에 등록해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할 것인가.
그것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역시 게이트의 내부를 조사해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나는 눈앞의 천시예를 향해 이야기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확인해보고 싶은게 있어."
"알았어. 들어갈게."
"그래. 빨리 들어가자고."
"폭군이 명령했으면 어쩔 수 없지."
"······뭐?"
내가 천시예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한 직후.
S급 헌터, 검귀는 아무런 불만없이 고용주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우우우우웅-.
진동하는 게이트를 향해 천시예가 손을 뻗었다.
그 직후, 천시예의 몸이 입자가 되어 게이트 너머로 사라졌다.
"······."
허-.
나는 그런 천시예가 사라진 게이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래서 자신의 이명을 알려주기 싫었던 것인데, 배우기 무섭게 효율적으로 잘 써먹는 모습이었다.
나는 검귀의 만행을 생각하면서, 헛웃음을 지으며 게이트를 향해 달렸다.
"······폭군은 솔직히 너무했지."
타다다다닥.
앞을 향해 내딛은 발걸음의 끝에서, 내 다리가 게이트를 향해 크게 도약했다.
- [게이트 : 죽은 신의 무덤]에 진입했습니다.
- 신성 마법이 해당 공간에서 크게 강화됩니다.
고수들은 게이트에 입장할때 반드시 점프를 한다.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비밀스러운 관습이었다.
* * * * * *
게이트 내부에 입장하고서 십여분.
나는 천시예와 함께 게이트 내부의 깊숙한 장소로 향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해당 필드의 대략적인 형태를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죽은 신의 무덤'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필드는 상당히 특별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무덤보다는 폐허가 된 신전에 가까워보이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무덤이라는 이름에는 어울리지 않는 장소네."
"그러게 말이야."
나는 '죽은 신의 무덤'에 대한 천시예의 평가에 동의했다.
이곳은 무덤이라기에는 지나치게 화려하고 웅장한 곳이었다.
적어도 죽은 누군가를 기리기 위한 장소와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기나긴 시간속에 부서지고 무너져내린 신전.
그런 표현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장소였던 것이다.
"신전기둥에 글자가 적혀있어."
다만, 이 신전에는 무척이나 특징적인 부분이 있었다.
신전의 기둥에 상형문자로 보이는 글자들이 적혀있다는 점이었다.
이전에 마주했던 '레델 화이트의 은신처'와 마찬가지로, 기록물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이곳에 있었다.
슥, 슥-.
나는 손을 뻗어 기둥을 뒤덮은 먼지와 모래를 닦아보았다.
그러자 그 너머에 있던 상형문자가 조금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글자··· 아무래도 상형문자같은데?"
"······."
멸망한 세계의 흔적을 바라보던 천시예가 입을 다물었다.
잘 모르겠다는 뜻의 침묵이었다.
나는 그런 천시예를 내버려둔 채로, 조금 더 글자에 시선을 가까이 향했다.
게이트 너머의 세계는 다가오는 멸망에 저항하지 못한 이들의 흔적.
그러니 그곳에서 발견한 자료는 저마다 학술적인 가치가 있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내가 상형문자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간 직후.
띠링-.
수능 아랍어 31점의 내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내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 [자동번역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 우리는 열쇠를 지키지 못했다.
- 더 이상 밤하늘의 별들은 인간의 음성에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기둥에 새겨져있는 짧은 문장.
그곳에는 상당히 심오한 내용이 적혀있는 모습이었다.
대충 보아서는 그 뜻을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말이다.
해당 문장을 바라보던 나는 주변의 기둥들을 보면서 고민에 잠겼다.
"이어지는 문장인가? 아니면 기둥마다 단편적인 내용이 적혀있는건가?"
무언가 앞뒤에 이어지는 내용 없이 짧게 끊겨버린 듯한 내용이었다.
평범한 신전에 있을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다른 기둥에 적혀있는 내용들 역시 확인해봐야 할 것 같았다.
나는 그 옆에 있던 기둥을 향해 다가가서는, 그곳에 있는 모래와 먼지 역시 털어내었다.
스윽-.
손바닥에 진득하게 묻어난 먼지들.
그 너머의 글자에도 역시 나름대로의 내용이 적혀있는 모습이었다.
- [자동번역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 이제는 그 누구도 인간에게 신의 음성을 전하지 못할 것이다.
-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우리의 유일한 빛.
- 우리는 그를 기리기 위해 이 거대한 무덤을 건설했다.
두번째로 나타난 문장.
그곳에는 이 '무덤'의 기원에 대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신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이곳은 신을 믿던 이들 나름대로 마지막을 고하는 장소였던 것이다.
사라진 이들이 남긴 문장을 보니 씁쓸함이 입가에 감돌았다.
그렇게 나는 뒤에 있을 천시예를 돌아보며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이름 그대로 무덤이 맞는 모양이야."
"······."
적막한 신전에 울려퍼지는 목소리.
허나, 천시예는 그런 내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는 그런 천시예를 향해 물었다.
"갑자기 왜 그래?"
"······수상한 기척이 있어."
"수상한 기척이라고?"
천시예의 태도에 은신처에서의 기억이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설마 이 근처에도 필드보스가 숨어있는 것인가.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과 동시에, 그 불길한 예감을 증명하는 상황에 직면하고 말았다.
- 저주받은 찬송가가 울려퍼지며 [필드 보스]가 등장합니다.
- [보스 : 버려진 영웅 바렐]이 출현했습니다.
필드 보스.
S급 게이트를 상징하는 존재가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상위 게이트에 필드보스의 출현비율은 무척이나 높기 마련.
여기까지는 상정대로였기에, 나는 천시예를 믿고 후위로 물러서려고 했다.
"아, 이런······."
이 자리에 나타난게 단순히 필드보스 하나였다면 말이다.
다만, 무척이나 안타깝게도 내가 가진 불운은 내 예상보다도 컸던 모양이다.
- 신의 무덤에 침묵이 내려앉으며 [절멸종]이 출현합니다.
- [절멸종 : 파단자 아드리올]이 출현했습니다.
절멸종.
세계를 집어삼키는 괴물이 함께 모습을 드러내었다.
S급 헌터 커뮤니티의 흑막이 되었다 59화
59화
헌터로 각성한 이후부터, 나는 수상한 가능성 하나를 가슴속에 품게 되었다.
내가 게이트들에게 지나치게 사랑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것도 필드보스와 절멸종이 동시에 출현한 상황이었으니까 말이다.
"······절멸종이 지금 나온다고?"
절멸종.
그 존재를 깨닫기 무섭게 입에서 절로 탄식이 터져나왔다.
쩌적, 쩌저저적-.
무너진 유적의 하늘에서부터 공간이 깨져나가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는 진득한 기운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익숙하지만 낯선 존재의 출현에 나는 복잡한 상념에 잠긴 채 뒤로 물러섰다.
"아무래도 우리가 심하게 운이 없는 것 같아보이네."
수차례 울려퍼지는 메세지를 마주한 천시예의 입에서 긴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철컥-.
천시예는 손에 쥐고있던 검을 검집에서 뽑아내는 모습이었다.
"하필이면··· 이런 타이밍에 둘이 동시에 나올줄이야."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여기서 어떻게 할거냐고······?"
나는 이마를 짚은 채로 무너져내리는 균열의 아래를 바라보았다.
파스스스-.
빠른 속도로 확장을 반복하는 균열의 아래에서 무언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응집하는 먼지.
그리고 제 육신을 구성하는 형태.
그것은 검은 피부를 가지고 있는 인간형의 몬스터였다.
버려진 영웅, 바렐.
이 게이트에 속박되어있는 필드보스가 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 그으··· 그으으윽······!
그것은 검은 먼지로 이루어진 검을 쥔 채, 붉은 눈동자를 번뜩이는 모습이었다.
근접전투를 메인으로 하는 필드보스가 틀림없어보였다.
S급 게이트에 귀속되어있는 필드보스.
나는 녀석의 모습을 마주하고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필드보스까지는 상정해두고 있었지만, 여기서 절멸종이 튀어나오는건 완전히 예상외였다.
"······."
아무리 천시예가 국내 2위의 헌터라고 해도, 절멸종과 필드보스를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대한민국의 S급 헌터, 파천궁의 출력으로도 쉽게 타격을 입히기 어려운게 절멸종이었다.
필드보스라면 몰라도 절멸종을 상대로 여유를 보일 수는 없었다.
그런 녀석을 상대해야만 한다면, 당연히 천시예가 절멸종을 상대로 장기전으로 끌고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전투가 진행되는 시간동안 다른 한명이 나머지를 붙들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내가 직접 전투에 나설 생각으로 들어온건 아니었는데.'
처음부터 나 자신의 참전을 상정하고 이 자리에 나온 것은 아니었다.
S급 게이트에서 출몰한 필드보스와의 전투 역시 마찬가지였다.
필사적인 전투를 강요받는 상황.
그것을 앞에 두고서 내가 내린 결정은 결국 하나뿐이었다.
"살고 싶으면 같이 싸워야겠지."
전투에 대한 참전선언.
당황에 젖은 천시예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직접 전투에 나설 생각이야?"
"그래. 둘이 같이 죽을 생각이 없다면 당연히 그래야지."
그 직후, 나는 손가락에 낀 반지의 금속 프레임을 뒤틀었다.
찰칵-.
청량한 금속의 마찰음과 함께 묵직한 파동이 주변을 뒤흔들었다.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기운.
확산하는 신성에 휩싸인 채로, 나는 하늘에 드리워진 균열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기왕 이렇게 된거, 여기서 부탁 하나만 하자."
콰직! 콰아앙-!
균열을 찢고 파고든 거대한 칼날.
그 너머에서 괴상한 형체를 가진 절멸종이 우리를 노려보았다.
—파단자 아드리올.
양팔에 칼날이 달려있는 기이한 곤충이 균열의 틈새에 눈을 가져다대고 있는 모습이었다.
세계를 집어삼키는 파멸의 표상.
검을 움켜쥔 천시예가 그것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으면, 지상에서는 검은 연기를 내뱉은 필드보스가 자세를 갖추었다.
- 그아아··· 그아아아악······!
두명의 헌터.
그리고 두마리의 괴물.
그 현실속에서 나는 지금이야말로 오랜 꿈을 이뤄야할 시간임을 직감했다.
나 자신이 카메라를 처음 들었던 순간부터 가슴속에 품고 있었던 꿈을 말이다.
"오늘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이곳에서 있던 일은 서로 비밀로 가져가자고."
"당신, 설마······."
"나라고 해서 정체를 숨기고 싶어서 이러고 다니는게 아니거든."
누구나가 영웅이 되기를 꿈꾼다.
최전선에서 괴물에 맞서는 영웅.
후대에 남을 영웅담을 써내려가는 강하고 멋진 헌터.
나 역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S급 헌터들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때로는, 그들과 같은 장소에서 나란히 어깨를 마주하고 싶었다.
"어쩔 수 없이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 뿐이지."
비록, 그것이 모두에게 인정받을 수 없는 꿈이라고 하더라도.
오늘만큼은 비밀스러운 이야기에 동참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허공을 향해 손을 펼쳤다.
파아아앗-!
터져나오는 광채.
허공에 찢어진 균열에 대응하듯이, 지상에 새로운 균열이 만들어졌다.
"—[공간연동]."
콰앙! 쩌저저적-!
서로 다른 균열이 서로를 견제하듯이 그 크기를 넓혀나갔다.
거대한 칼날은 검은 균열을 베어, 그 상체를 무너진 신전에 들이밀었다.
순환하는 황금의 원 역시 그 규모를 확장시키며 이질적인 낙원의 풍경을 비추었다.
우우우우웅-.
일그러진 균열이 서서히 제 몸집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나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를 향한 목소리를 흘렸다.
"밖으로 나가자. 너희가 그토록 기다려왔던 시간이다."
출격명령.
오랜 시간동안 닫힌 낙원에서 웅크리고 있던 짐승들을 불러들이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런 내 부름에 응답하듯이, 익숙한 누군가의 음성이 하나의 울림이 되어 이 공간에 흩뿌려졌다.
- [자동번역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 "그대가 그걸 바란다면 우리가 그 뜻에 따르겠다."
- "잊혀진 신과 그 약속에 묶인 거짓 아래에서, 가장 오래된 용이 이곳에 선언한다."
- "[뒤틀려라]."
순백의 용이 내뱉은 묵직한 전언.
그와 동시에 황금의 균열이 깨져나갔다.
콰앙! 콰과과과광-!
사방으로 확산하기 시작한 찬란한 빛의 향연.
그 아래에서 수많은 빛이 난반사하며 시야를 어지럽히는 모습이었다.
나와 천시예가 팔을 들어올려 눈을 가리자, 터져나간 균열의 여파가 주변을 뒤흔들었다.
후우우우웅-.
머리카락을 뒤흔들고 스쳐지나가는 바람.
무수한 짐승의 울부짖음이 내 귓가를 뒤흔들었다.
"······!"
뒤틀린 빛의 장막이 사방을 가득매웠다.
왜곡되어있는 벽과 어긋나있는 공간.
현실적인 풍경에서 벗어난 이질적인 현상이 온사방을 뒤덮은 모습이었다.
기이이이잉-.
무너져내린 무덤의 풍경은 어긋나고 조각났으며, 뒤틀린 공간을 따라 새하얀 짐승들의 향연이 이어졌다.
서로 다른 공간의 충돌.
역류하는 이질감속에서 주도권을 잡은 것은 하나뿐이었다.
- [게이트 : 버려진 영물들의 낙원]이 실체화됩니다.
- 신성 주문에 간섭하는 행위가 해당 공간에서 금지됩니다.
S급 게이트, 버려진 영물들의 낙원.
오랜 시간동안 멸망속에 묻혀있던 짐승들의 낙원이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유리된 공간이 저마다의 풍경을 비추며, 뒤섞인 풍경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지상을 뒤덮었다.
기나긴 그림자를 만들어낸 것은 왜곡된 뿔을 가진 백색의 용이었다.
—신수(神獸).
거대한 게이트를 지배하는 필드보스이자, 신의 힘을 제 육신에 깃들인 대행자가 출현한 것이다.
"이건, 설마 게이트 브레이크······!"
뒤바뀐 필드효과에 경악에 젖은 천시예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이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한 까닭이었다.
허나, 그런 그녀의 목소리는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콰앙! 콰아앙-!
균열을 찢고 빠져나온 멸망의 표상이 그녀를 노리고 쏘아져나온 것이다.
파단자, 아드리올.
녀석이 날카로운 칼날을 들고 천시예에게 쇄도했다.
"천시예!"
"큭······!"
카가가가각-!
다급하게 검을 들어올린 천시예가 날아오는 참격을 막아내었다.
충돌하는 검과 검.
맞대어진 경계로부터 수많은 기운이 뒤엉키는 모습이었다.
카앙!
날카로운 칼날을 내세운 아드리올이 앞으로 전진하는 것과 동시에, 공간의 일부가 균열을 일으키는 모습이었다.
"어느 틈에 균열을 찢고서······!"
"정신차려! 일일히 설명할 시간 없으니까!"
파단(破斷).
절단된 공간을 무너뜨리는 검격의 여파가 천시예의 점퍼 일부를 찢어버렸다.
지익-.
어깨부근이 찢어진 점퍼의 모습에 얼굴을 찌푸린 천시예가 재빠르게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 그르륵··· 그륵······?
기이한 울음소리를 흘리는 아드리올.
이성따위는 느껴지지 않는 괴물의 칼날이 계속해서 그녀를 노리고 움직였다.
카앙! 캉! 카아앙-!
빠른 속도로 쏟아지는 연격.
매서운 검격이 마주하며 불똥이 튀어나갔다.
'공간 자체에 영향을 미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건가.'
나는 천시예와 전투를 벌이는 절멸종의 모습을 분석하며 시선을 움직였다.
아무래도 이번 절멸종은 근접전투에 강점을 가지는 부류가 분명했다.
공격이 막혀 무위로 돌아가더라도, 그 여파로 피해를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이다.
그렇다면 마냥 두 사람이 대치하게 놓아두는게 정답은 아닐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쪽에서는······.'
고민에 젖은 채로 전황을 확인하기 위해 시선을 돌리려던 찰나.
콰앙!
묵직한 충돌음과 함께 무언가 자신의 앞에 불쑥 다가왔다.
- 그아아··· 그아아아악······!
검은 망토를 휘감은 인간형 몬스터.
녀석이 어느새 내 바로 앞쪽까지 접근해온 것이다.
버려진 영웅, 바렐.
한때 인간의 이름을 가졌던 망자가 나를 노리며 검을 내지르고 있었다.
"······!"
쐐애액-!
나를 노리고 비스듬히 휘둘러지는 어둠의 궤적.
눈앞의 몬스터를 발견한 내가 다급하게 반응하지만, 그보다도 주변에 있던 다른 짐승들이 움직이는게 더욱 빨랐다.
쾅!
어느새 녀석을 향해 다가선 백구가 녀석의 검을 입으로 틀어막는 모습이었다.
- 으르르르······!
- 그으으··· 그아아아아······!
불길한 기운을 품은 검이 백구의 입안을 매섭게 휘저었다.
촤악!
날이 선 칼날이 털을 비집고 상처를 만들어내었다.
사방으로 튀는 핏물.
허나 그것을 집어삼키듯이, 백구의 몸에서는 새하얀 연기가 쏟아져나왔다.
치이이이익-.
막대한 신성력을 머금은 신수의 육신이 재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찢겨나간 육신이 빠르게 되돌아오며, 기운을 되찾은 백구가 검을 늘고 물어졌다.
"너, 설마······."
나는 그런 백구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는 필드보스를 둘러싼 무수한 짐승들의 전투를 눈에 담았다.
순백의 용을 제외한 이들의 격은 명확하게 눈앞의 바렐보다 낮은 편이었다.
허나, 그들은 그 사실을 크게 신경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자신들이 어떻게 되더라도 상관없다는 듯이 몸을 내던졌다.
"······."
콰앙! 콰아앙-!
검은 기운을 퍼뜨린 바렐의 검격이 수차례 터져나왔다.
백색 털을 가진 짐승들은 그것을 몸으로 받아내고서는, 재생하는 육체로 육탄전을 이어나갔다.
콰드득! 콰득-!
콰아아아앙!
뒤틀리는 공간과 어긋나는 검격.
잘려나간 육신은 신성력에 의해 되돌아오며, 휘두르는 검은 점차 그 거리감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적극적으로 스스로의 몸을 부숴가며 공세를 이어나가는 신수들이었다.
- 그아아··· 그아아아악······!
짐승들에게 둘러쌓인 바렐은 괴성을 내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그럼에도 그 검이 유의미한 결과를 불러오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어긋나는 궤적속에서 녀석의 공격은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주도하는 것은, 저 드높은 하늘 위에서 절멸종을 향해 쇄도하는 거대한 용이었다.
———.
힘차게 울려퍼지는 용의 포효.
귀를 뒤흔드는 음성속에서 나는 비로소 자신이 손에 넣은 힘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싸워야하는지 역시 깨달았다.
새하얀 짐승들의 영역.
이곳에서 자신이 해야하는 일은 명확한 것이었다.
"하······."
쿠웅-.
커다란 심장의 고동이 귓가에 울려퍼졌다.
여태껏 자신의 것임을 잊고 살아왔던 고동이었다.
작은 두근거림.
그것으로부터 나는 이 장소가 지금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되새길 수 있었다.
"그래, 그런거였지."
오직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광활하고 오만한 영역.
커다란 심호흡을 내뱉으며 나는 허공을 향해 손을 들어올렸다.
허공에서 겹쳐진 손가락.
그 끝은 눈앞의 필드보스를 향해 겨누어졌다.
끼긱, 끼기긱-.
자신의 몸을 뒤튼 바렐이 나를 향해 접근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마저도 무수한 짐승들에게 묶인 채 용납되지 않았다.
어긋난 공간과 뒤틀려버린 괴물.
그 속에서 나는 타락해버린 영웅의 비명을 들었다.
- 그아아아아······!
타락한 영웅은 비명을 내지르고, 검을 겨루는 괴물은 순백의 용을 맞닥뜨렸다.
모든 것이 뒤틀리고 왜곡된 공간속에서 괴물들이 몸부림쳤다.
터벅, 터벅-.
필드보스는 제 육신에 뒤엉킨 짐승들을 매단 채 가까스로 발을 움직였다.
걷는다고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발을 끄는 듯한 움직임이 앞으로 나아갔다.
비스듬히 기울여지는 칠흑의 검.
허나 그마저도 내 시선을 마주하고서 의미를 잃어버렸다.
- [에너지 증폭]이 활성화됩니다.
- 오늘은 더 이상 [에너지 증폭]을 활성화할 수 없습니다.
- [강력경고]가 활성화됩니다.
- 오늘은 더 이상 [강력경고]를 활성화할 수 없습니다.
내 시야에 닿은 모든 것들이 공포에 젖은 채 자리에 정지했다.
원초적인 죽음의 공포는 대상의 생사여부를 가리지 않는다.
이것은 영락한 영웅과 이차원의 괴물을 한순간 자리에 묶어두었다.
내려앉은 침묵.
그 속에서 유일하게 시선을 벗어난 천시예의 검이 움직였다.
"—[광폭화]."
형식을 무너뜨린 채로 맹렬하게 휘둘러지는 검.
카앙-! 캉! 캉! 캉!
정지한 대상을 베어가르는 천시예의 검에 점차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빨라지는 리듬.
흐름을 더해가는 검격은 서서히 위력적으로 변모해가는 모습이었다.
- 그르륵······!
기존의 괴물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강인함을 가진 까닭이었을까.
꿈틀-.
천시예의 검격을 받아내던 절멸종이 자신의 몸을 뒤트는 모습이었다.
빠르게 정신을 되찾은 파단자 아드리올이 천시예의 검을 막으려고 하지만, 나는 그런 괴물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 [강력경고]가 활성화됩니다.
- 오늘은 더 이상 [강력경고]를 활성화할 수 없습니다.
- [징벌]이 활성화됩니다.
- 에너지의 충전시간에 비례해 [징벌]의 위력이 강력해집니다.
폭군이 전하는 죽음의 공포.
그와 함께 내 손끝에 환한 빛이 머금어졌다.
귓가에 울려퍼지는 검격의 연쇄를 이정표로 삼아, 내 손끝에 피어오른 빛 역시 그 크기를 더해나갔다.
영락한 영웅을 향해 겨누어진 빛.
그 속에서 나는 자신의 적을 진심으로 마주했다.
"후우······."
내 의지를 이해한 신수들이 녀석에게서 거리를 두었다.
찬란한 광채가 번쩍이며 빛의 파동을 퍼뜨렸다.
우우우우웅-.
묵직한 힘을 머금은 손이 떨리고, 징벌을 준비하는 빛이 일렁였다.
손안에 들어온 자그마한 반짝임은 지금의 나에게 주어진 전부였다.
"여기까지 오는데도··· 생각보다 오래걸렸네."
이렇게 진심으로 괴물과 마주해본 적이 언제였던가.
아무래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았다.
언제나 다른 이들의 등에 숨어 살아왔다.
손에 닿지 않는 이야기를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치부해왔다.
최전선에 선 헌터들의 이야기를 그저 바라만 보아야 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
하지만 언제까지고 다른 사람의 등뒤에 숨어있을 수만은 없는 법이다.
때로는 이런 식으로 나 스스로가 무대 위에 올라와야할 때도 있었다.
단 한사람을 위해 준비된 무대.
대본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연극속에서, 나는 주인공을 잃어버린 영웅담에 손을 뻗었다.
적에게 겨누어진 손가락.
그것은 탄환을 쏘아내는 권총과도 같이 흔들리며—.
눈앞의 풍경에 빛을 더했다.
- [필드 보스 : 버려진 영웅 바렐]을 처치했습니다.
콰아아아아앙—!
지면을 불태우는 열기.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검은 잿더미의 아래에서.
나는 비로소 헌터가 되었다.
S급 헌터 커뮤니티의 흑막이 되었다 6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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