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급 헌터 커뮤니티의 흑막이 되었다 60화
60화
S급 헌터, 검귀(劍鬼)— 천시예.
그녀가 한국의 미등록 S급 헌터에 대해 알게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몇달 전의 일이었다.
대한민국에는 정체를 숨기고 지내는 S급 헌터가 하나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튜브 채널 '헌잘알'을 운영하는 100만 유튜버, 신유호.
그는 커뮤니티에 접속가능한 권한을 얻은 S급 헌터였지만, 단 한번도 자신의 능력을 외부에 드러낸 적이 없었다.
미등록 헌터 신유호는 이상하리만치 경계심이 강한 인물이었다.
그런만큼 천시예는 자신이 헌터 생활을 이어가는 동안, 그의 능력을 알게될 일이 전혀 없을거라고 생각했다.
그저, 그 능력에 대해서 근거리 전투에 특화되어있겠거니 하는, 막연한 짐작만을 가지고 지내왔을 뿐이었다.
"······."
그러니 지금 그녀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풍경은, 그녀가 예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풍경인 셈이었다.
신앙과 관련된 제약을 풀고 자유롭게 아이템을 사용하는 것도.
게이트를 자의로 무너뜨려 몬스터를 역류시키는 모습도.
또 필드보스 하나를 순식간에 지워버린 강력한 일격마저도.
천시예가 예상하던 신유호의 수준을 아득히 넘어선 것이었다.
'지금까지 저런 괴물을 숨겨두고 있었던거야?'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큰 충격을 안겨준 것이, 지금 천시예의 눈앞에서 움직이고 있는 백색의 용이었다.
뒤틀린 뿔을 가지고 있는 순백의 용.
거대한 동체를 움직이는 그 존재는 입을 쩍 벌리며 절멸종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쿵-!
신체가 충돌할 때마다 터져나오는 둔탁한 충돌음.
그 궤적속에서 용의 몸이 흔들리고, 기다란 용의 잔상을 절멸종의 칼날이 스쳐지나갔다.
- 그륵, 그르륵······?
휘익-!
적을 놓친 아드리올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허망한 시선이 흩어져가는 잔상을 바라보았다.
그 자리에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기이한 현상.
전설속의 도술을 부리는 영물이 있다면 저러한 모습일 것인가.
이해할 수 없는 재주를 펼친 용이 신비로운 음성을 주변에 퍼뜨렸다.
- [자동번역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 "[꺾어라]."
- "[눈을 가려라]."
신묘한 기운이 느껴지는 목소리의 무거운 울림.
그 음성이 전해진 직후, 눈빛이 바랜 절멸종의 팔이 왜곡되었다.
뚜둑-.
기이한 각도로 비틀려나간 팔꿈치.
아드리올 스스로 신체의 동작한계를 넘어선 움직임을 취한 것이다.
휘익, 휘이익-!
더군다나 천시예를 강렬한 기세로 몰아붙이던 검격은, 더 이상 그녀를 찾지 못하고 허공을 향해 휘둘러졌다.
'고작 두 마디 말로, 절멸종을 이렇게 만들어버린거야······?'
카앙! 캉! 카아앙-!
절멸종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천시예의 눈동자에 놀라움의 기색이 깃들었다.
고작해야 두번의 기적이 펼쳐졌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무척이나 처참했다.
녀석은 덜렁거리는 팔을 들고서, 눈앞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채 허우적거리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 그르륵··· 그르르륵······!
자신에게 생긴 문제에 경각심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었을까.
파단자 아드리올은 스스로의 육감에 의지한 채로, 매섭게 몰아치는 천시예의 검을 간신히 막아내는 모습이었다.
카앙! 캉!
빠르게 이어지는 충돌.
그 와중에도 천시예의 검은 점점 흉악한 기운을 쌓아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전투가 길어지면서 <운명검 아브락사스(S)>가 제 본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하아, 하······!"
카가가가각-!
강화된 천시예의 검 끝이 괴물의 갑각을 파고들었다.
터져나온 체액에 불길함을 느낀 것인지, 검격을 받은 아드리올은 다급하게 뒤로 물러섰다.
단 한번의 검격으로 파단자 아드리올의 몸에 선명한 흉터를 새겨넣은 것이다.
- 그르륵? 그륵······.
불리해져가는 상황에 절멸종은 고민에 빠진 모양이지만, 녀석을 지켜보던 순백의 용은 그러한 고민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우우우우웅-.
다섯갈래로 번지는 용의 신형.
허상과 실체가 뒤섞인 용의 공격이 절멸종을 순차적으로 타격하기 시작했다.
콰앙! 쾅!
콰드드드득-!
묵직한 충격에 휩쓸린 아드리올의 육체가 꺾이고 뒤틀렸다.
백색의 용은 아드리올에게 움직일 틈조차 주지 않고 압박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연쇄에 붙잡힌 파단자 아드리올이 비명을 내질렀다.
- 끼에에에엑······!
타다다다닥-.
섬뜩한 비명이 절멸종에게 접근하는 천시예의 고막을 휘저었다.
그녀는 인상을 쓴 채 소리를 견뎌내면서, 용에게 제압된 아드리올을 향해 돌진했다.
———.
터져나오는 함성.
분리된 공간속을 메아리치는 비명.
사방을 뒤덮은 소란속에서 천시예는 용이 만들어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으윽······!"
까득-.
이를 악문 천시예의 손이 야성적이고 패도적인 검격을 휘둘렀다.
우우우웅-.
진동하는 칼날.
거듭해서 쌓아온 공격에 강화된 검이 최적의 궤도를 타고 움직였다.
생애 처음으로 도달한 <운명검 아브락사스(S)>의 증폭 한계치.
최대의 출력으로 뻗어나온 일격이 그녀의 검을 타고 절멸종의 육신을 내달렸다.
- 끼엑, 끼에에에엑······!
콰득! 콰드드드드득-!
갑각을 깨부수는 묵직한 일격.
일직선으로 그어져 내려가는 검격이 파단자 아드리올을 양단했다.
쩌저저적!
산산히 깨져나간 갑각.
흩뿌려진 체액.
반으로 잘린 육신은 검은 연기를 머금은 채 지상에 떨어졌다.
툭. 치이이이익-.
갈라진 괴물의 육체가 바닥을 더럽혔으며, 괴물을 베어낸 천시예의 검은 허공에 멈추어섰다.
"하으, 하······."
양단된 적과 필드에 찾아온 침묵.
그 속에서 숨을 몰아쉬는 천시예의 눈앞에 낯선 메세지가 떠올랐다.
- [절멸종 : 파단자 아드리올]의 침공을 저지했습니다.
- 처음으로 [절멸종]을 처치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절멸종, 파단자 아드리올.
그녀가 처음으로 상대한 이차원의 침입자가 쓰러진 순간이었다.
"후우··· 드디어 쓰러뜨린거구나······."
흩뿌려지는 검은 연기속에서 천시예는 거칠어진 숨을 골랐다.
갑작스럽게 게이트 내부에 난입했던 괴물이 사라졌다.
허나, 그런 괴물을 마주한 천시예의 상태는 썩 멀쩡하지 못했다.
단단한 갑각을 갉아내던 팔은 천근처럼 무거웠으며, 긴장한 채로 공격을 막아낸 탓인지 이마에는 땀이 흘렀다.
찢어진 점퍼의 너머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내리는 모습이었다.
처음에 그녀가 아드리올에게 공격을 허용하면서 생긴 상처였다.
"저 용한테 도움을 받지 못했더라면··· 이렇게까지 전투를 쉽게 끝내지는 못했을거야."
털썩-.
유적의 바닥에 주저앉은 천시예가, 게이트에 있는 다른 누군가에게 들리도록 이야기했다.
통상적인 몬스터의 강함을 아득히 뛰어넘은 개체, 절멸종.
그런 절멸종을 그녀가 베어낼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충분한 시간을 통해 출력을 높힌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을 벌어다준 것이, 신유호와 그가 소환한 순백의 용이었다.
"당신은 대체··· 어떻게 저런 소환수를 불러낼 수 있었던거야?"
그러니, 신유호의 활약에 대한 천시예의 의문 역시 당연한 것이었다.
스윽-.
천시예는 가늘게 뜬 눈으로 신유호를 바라보며 그에게 물었다.
그런 천시예의 질문을 예상했던 것이었을까.
어느새 지상에 가까이 내려온 용을 쓰다듬던 신유호가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야, 내가 이 녀석들에게 명령을 내릴 자격을 가지고 있는 신의 성자니까."
"······성자?"
—성자(聖者).
그 이야기를 듣기 무섭게, 천시예의 생각이 한가지 가능성에 닿았다.
눈앞의 유튜버가 여태껏 실력과 정체를 숨겨왔던 이유.
지금이라면 그 이유들 중 하나를 깨달을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신유호의 이야기를 들은 천시예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아, 그래서 지금까지······."
신앙에 대한 제약이 걸려있는 특수한 아이템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에 해당하는 신의 인정을 받아야만 했다.
신앙과 관련된 제약을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난 헌터.
그런 헌터가 있다고 한다면, 그 존재가 노출되는 것은 그것 자체로 상당한 리스크였다.
존재에 대해 알려지는 것만으로도 기존에 쓰레기라 취급받던 아이템들의 가치가 재고될테니까 말이다.
제약이 걸려있는 아이템들의 평가가 높아지는 경우, 신유호가 아이템을 수집하는 일에 제동이 걸릴 터였다.
그렇기에 눈앞의 헌터는 자신의 능력조차 철저히 숨겨둔 채, 신앙과 관련된 아이템들을 비밀리에 수집하고 있던게 분명했다.
"이제야 이해했어. 당신이 지금까지 능력을 숨기고 있었던 이유."
"······그 이유를 눈치챘다고?"
천시예의 이야기에 놀란 것이었을까.
신유호가 당황에 젖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천시예 자신이 거기까지 알아내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조금은 가슴이 아픈 시선이긴 했지만, 그녀는 애써 담담한 척을 하며 검을 들어올렸다.
"응. 물론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겠지만,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철컥-.
경쾌하게 울려퍼지는 소리.
신유호와 대화를 나누던 천시예의 손이, <운명검 아브락사스(S)>를 검집에 수납했다.
그리고는 무언가의 맹세가 담긴 시선으로, 눈앞에 있는 헌터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오늘 했던 약속은 틀림없이 지킬테니까."
"······뭐, 일단은 비밀을 지켜준다니 고맙다."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솔직히 말해서, 당신이 아니었으면 나도 여기서 무사히 나가지는 못했을테니까."
천시예의 말은 사실이었다.
아무리 그녀가 검귀라고 불리는 S급 헌터라고 해도, 절멸종과 필드보스를 혼자서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어려웠다.
한계까지 몸을 비틀어봐야 간신히 쓰러뜨릴까 말까 한 수준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천시예는 눈앞의 헌터에게 경의를 느끼고 있었다.
"S급 헌터인건 진작에 알고 있었는데, 내 생각보다도 강한 사람이었구나."
"······."
한국의 헌터들 중에서도 수위에 놓기에 충분한 강함.
검귀 천시예가 처음으로 '폭군(暴君)'의 이명을 가진 헌터를 다시 보게 된 순간이었다.
* * * * * *
필드보스와 절멸종을 처치한 이후.
나는 천시예와 함께 계속해서 게이트 내부의 탐색을 이어나갔다.
나와 천시예가 이곳에 온 근본적인 목적부터가, 유적의 내부를 탐색하고 정보를 수집하기 위함이었던 까닭이다.
더군다나 몬스터들이 쓰러진 자리 아래에서, 지하의 입구가 발견되었던 만큼 진입을 미뤄둘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지금 천시예와 함께 신전의 지하를 조사하는 중이었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갈까?"
"아무래도 그게 나을 것 같아.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수는 없잖아?"
어둠이 가득차있는 유적의 안쪽.
그곳에서는 나와 천시예의 발걸음 소리가 울려퍼졌다.
터벅, 터벅-.
유적의 지하를 향해 내려가는 내 마음은 그다지 편치 못한 상황이었다.
내가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
그것은 지금 내 뒤를 따라오고 있는 천시예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보다는 조금 더 원초적이고 직관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내 시야 한구석에는 메세지가 띄워져 있었으니까 말이다.
- [절멸종 : 파단자 아드리올]의 침공을 저지했습니다.
- 당신의 힘이 조금 더 특별한 가능성을 찾아냅니다.
이곳에 나타난 절멸종을 처치한 이후.
내 눈앞에 기나긴 메세지와 함께 새로운 선택지가 나타난 것이었다.
당연하지만 나는 아직 눈앞의 메세지를 제대로 확인조차 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주어진 선택지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어디까지나 신중하게 판단할 수 있는 상황에서 진행해야만 할 터.
지금은 천시예와의 유적탐험쪽에 더 무게를 두려는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현재 스마트폰의 플래시라이트에 의존한 채, 무너진 신전의 비밀공간을 향해 진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당히 깊숙한 곳까지 이어져있는 모양이야."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뒤에서는 유적에 대한 천시예의 평가가 이어지고 있었다.
천시예의 이야기대로 유적의 지하는 상당히 깊은 편이었다.
입구를 발견한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툭. 투둑-.
더군다나 천장에서는 물방울이 조금씩 떨어져내리는 모습이었다.
작게 이야기해도 목소리가 사방에 울려퍼질만한 공간이었다.
벽면에 메아리치는 물방울 소리에 이따금씩 섬뜩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체감상 한참동안 내려온 것 같은데. 잘도 이런 곳에 이만한 공간을 만들어놨어."
"마법을 사용해서 만든건 아닐까?"
"마법이라······."
천시예는 이 공간이 마법에 의해 만들어진게 아닐까 추측하는 모습이었다.
마법을 통한 공사.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헌터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들 중에서도 상당수는 멸망한 세계에 근간을 두고 있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나는 그런 천시예의 추측에 간단한 대답을 돌려주고서 발걸음을 옮겼다.
상당히 오랫동안 아래로 내려온 덕분이었을까.
끝도 없이 내려가던 계단은 어느새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 모습이었다.
기나긴 계단에 이제서야 끝이 찾아온 것이다.
터벅, 터벅. 턱-.
가장 먼저 아래로 내려간 내가 지하공간에 발걸음을 내딛자, 그런 나를 따라서 천시예 역시 바닥에 안착했다.
메아리치는 발걸음 소리.
그것을 배경으로 삼아 나는 스마트폰을 들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는······."
S급 게이트, '죽은 신의 무덤' 아래에 위치한 지하공간.
그곳에는 굳게 닫혀있는 자그마한 보석함과 함께, 벽면에 수많은 문자가 적혀있는 모습이었다.
벽면에 보이는 상형문자들은 지상에서 보았던 문자와 동일한 것이었다.
다만, 레델의 일기에 적혀있던 문자를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제사나 의식을 위한 문자일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아마도 이 보석함을 보관하기 위해 만든 공간인 것 같은데."
스윽-.
나는 손에 든 스마트폰을 벽면에 가까이 가져가보았다.
기둥에 비해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되어있는 벽면의 문자.
그 내용이 내 눈앞에 출력되는 모습이었다.
- [자동번역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 열쇠를 잃어버린 세계에 더 이상 미래는 없다.
- 그럼에도 우리는 신앙의 마지막 유산을 이곳에 남겨두고자 결의하였다.
- 죽어가는 신의 유해.
- 언젠가, 당신이 스스로의 육신을 취하고자 이곳에 돌아왔을 때.
- 우리에게 안식을 남겨주소서.
이곳에 무덤을 건설한 성직자들이 남긴 메세지의 내용.
그것은 이 자그마한 보석함 안에 죽은 신의 일부가 들어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을 보관하기 위해, 무덤이라는 이름의 신전을 만들어낸 것이었고 말이다.
'그래서 게이트와 연결된 필드의 이름이 신의 무덤이었던건가.'
신의 파편을 보관하기 위해 만들어낸 거대한 신전.
이곳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던 것인지, 조금은 생각해볼 수 있는 내용이기도 했다.
다가오는 멸망속에서도 이들은 자신들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이곳에 남아있었던 것이다.
버려진 영웅, 바렐이라는 녀석 역시 이곳을 지키던 인물 중 하나였을테고 말이다.
'어쩌면 죽어서까지 제 역할을 다하고 간 셈일지도 모르겠어.'
스윽-.
벽면에 적혀있는 내용을 확인한 나는 보석함을 향해 손을 뻗었다.
사라진 신을 대신해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물건.
그 정체를 확인할 시간이었다.
"내용물을 확인해보려고?"
"그렇게 해야지. 그래야 저 사람들이 뭘 지키려고 했는지 알 수 있을테니까 말이야."
딸깍.
나는 굳게 닫혀있던 보석함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그 아래에 담겨있던 자그마한 보석 목걸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 오르미르의 선견 (S+) >
[ 아이템 설명 ]
- 잊혀진 신 오르미르가 교단에 내린 권능의 파편입니다.
- 오르미르의 인정을 받은 성직자만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 아이템 효과 ]
- 예지 : 신성력을 소모해 최대 10초 앞의 미래를 내다볼 수 있습니다.
아이템명, <오르미르의 선견 (S+)>.
무려 S+ 등급에 해당하는 아이템을 발견한 내 입에서 경악에 젖은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뭐야, 이거."
10초간의 미래 예지.
터무니없는 효과를 가진 아이템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61화
새롭게 획득한 아이템에 대한 처분은 상당히 빠르게 결정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신전에서의 전투를 본 천시예가 순순히 나에게 목걸이를 양보해온 까닭이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쓸모가 없는 아이템이니, 내가 가지는 것이 좋겠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결국 나는 그런 천시예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천시예에게 약속했던 보수를 포함해 1000포인트를 선물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지금 내 책상위에 놓여있는 목걸이였다.
"분명 이게 신의 유해라고 했었지."
레델 화이트의 은신처에 위치한 책상.
그곳에서 나는 책상에 놓여있는 <오르미르의 선견(S+)>을 바라보았다.
붉은색의 보석이 반짝이는 목걸이.
큼지막한 보석의 모습만 봐서는 명품 브랜드가 만든 악세서리가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다.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까··· 당분간은 그냥 여기에 놓아둘까."
실제로도 <오르미르의 선견(S+)>의 역할은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잊혀진 신에게 인정받지 않으면 아무런 쓸모도 없는 물건이 아니던가.
아무리 대단한 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한들, 사용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단순한 악세서리에 불과했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어떤 방식으로 오르미르라는 신과 접촉할 수 있을지 고민해봐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은··· 아무래도 아이템보다는 이쪽이 더 중요하겠지."
더군다나 나에게는 지금 바로 처리해야하는 일이 하나 존재하고 있었다.
지금 내 눈앞에 떠올라있는 반투명한 메세지들.
절멸종, 파단자 아드리올을 쓰러뜨린 직후에 나타난 메세지에 대한 것이었다.
상당히 오랜만에 나타난 메세지의 내용이 나에게 또 한번의 선택을 제안해온 것이다.
"매번 이렇게 선택의 순간이 올때마다 고민하게된단 말이지."
흐음-.
나는 자신의 턱을 어루만지며 눈앞에 떠오른 메세지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 커뮤니티의 누적 활동치가 기준치를 돌파했습니다!
- [커스텀 네트워크(A)]가 당신의 커뮤니티에 세번째 분기점을 제시합니다!
- '개방형 커뮤니티'를 선택하는 경우, 커뮤니티의 최대 인원이 2배 증가하며, 커뮤니티의 모든 구성원에게 혜택이 적용되는 보너스 상점이 새롭게 해금됩니다.
- '폐쇄형 커뮤니티'를 선택하는 경우, 특별한 능력치가 새롭게 개방되며, 완성된 별자리에 따라 개방된 능력치가 강화됩니다.
내 눈앞에 떠오른 두가지의 선택지.
그것들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분기를 제시하고 있었다.
인원을 늘리고 많은 사람에게 적용되는 보상을 받아갈 것인가.
혹은, 인원을 제한하고 소수에게만 적용되는 보상을 받아갈 것인가.
다만 평소와 차이점이 한가지 있다면, 이번에 제시된 '폐쇄형 커뮤니티'의 보상이 이전과는 조금 달라졌다는 점이었다.
"뭐야. 이번에는 나 혼자서 보상을 받아가는 구조인건가?"
기존에 해당 선택지를 골랐을 때 받았던 보상의 경우, 대부분 나를 포함한 커뮤니티의 구성원들 전부에게 적용되는 기능이었다.
허나 이번에는 '폐쇄형 커뮤니티'를 선택하는 경우, 나 혼자서만 보상을 받아가는 구조로 되어있는 것이다.
특별한 능력치의 해금.
그리고 완성된 별자리에 따른 특별한 능력치의 성장.
지금까지의 선택지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유형의 보상이었다.
"아니, 뭐··· 가끔씩은 나에게도 이런 특별한 선물이 필요하지 않나······."
그런 파격적인 선택지를 앞에 두고서 나는 신중한 고민을 거듭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나 자신은 굉장히 훌륭한 커뮤니티 관리자였다.
비록 내가 '폭군'이라는 오명을 달고있지만, 무척이나 공명정대한 방식으로 커뮤니티를 이끌어가고 있는 것이다.
필요할 때만 제재하고 그 이외에는 권력을 남용하지도 않으며, 커뮤니티의 모든 구성원에게 항상 바르고 고운 말로 대화를 전달한다.
나만큼 커뮤니티의 이용자들을 사랑하는 관리자도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내가 이번에는 커뮤니티의 이용자들 대신, 나 자신에게 혜택을 줘야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커뮤니티의 헌터들이 크는 것도 중요하지만, 관리자인 내가 성장해야 커뮤니티에도 미래가 있는거겠지."
모두에게 적용되는 작은 혜택.
나에게만 적용되는 커다란 혜택.
이 둘을 비교하자면 당연히 후자가 우선이었다.
내가 욕심이 많아서 이러는게 아니라, 나 자신이 곧 커뮤니티인 까닭이었다.
내가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서 허공을 향해 손을 뻗으려고 하자, 갑작스럽게 내 눈앞에 누군가의 후원메세지가 떠올랐다.
띠링-.
나는 눈앞에 떠오른 후원메세지의 내용을 바라보았다.
- 성좌 [황금의 라스테리오]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황금의 라스테리오]가 당신의 논리가 조금 이상한 것 같다고 주장합니다.
성좌, 황금의 라스테리오.
나와 알고 지낸지 제법 시간이 지난 성좌가 내 결정에 의문을 표한 것이다.
물론 나는 그런 라스테리오의 의문을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 대신에 지난 며칠동안 고민하고 있던 내용에 대해서 그에게 물어보았다.
"후원 최소컷 1000포인트로 올리는게 나을까요?"
짧은 침묵.
갑작스러운 정적이 은신처 안을 맴돌았다.
침묵이 내려앉고서 1분여 후.
나는 황금의 라스테리오에게서 또 하나의 후원 메세지를 받아볼 수 있었다.
- 성좌 [황금의 라스테리오]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황금의 라스테리오]가 자신의 논리가 조금 이상했던 것 같다고 정정합니다.
그러면 그렇지, 아무래도 성좌님께서 실수를 하신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성좌의 조언을 적극적으로 참고해서, 공동체에게 있어서 보다 나은 선택지를 고르기로 했다.
툭-.
내 손가락이 화면속의 선택지에 맞닿은 직후.
내 눈앞에 메세지가 연달아 출력되었다.
- '폐쇄형 커뮤니티'를 선택하셨습니다.
- 다음 분기점이 나오기 전까지, 더 이상 최대 인원을 확장할 수 없습니다.
- 새로운 능력치, [신성]이 추가됩니다.
- [신성] 능력치는 커뮤니티에 등록된 별자리의 개수, 커뮤니티에 대한 성좌의 영향력, 당신이 통과한 별자리 시험의 개수에 비례해 상승합니다.
- 현재 당신의 [신성] 능력치 : E
세번째 분기점에서 '폐쇄형 커뮤니티'를 선택하는 것으로 획득한 특별한 보상.
그것은 다름아닌 '신성' 능력치였다.
보상에서 이야기하던 특별한 능력치의 정체가 바로 '신성'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커뮤니티의 상태에 따라 그 등급이 변하는 성장형 능력치이기까지 했다.
"여기서 신성 능력치가 나온다고······?"
나는 눈앞에 나타난 신규 능력치를 확인하고서 입을 쩍 벌렸다.
내가 비록 성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기는 하지만, 신성력따위는 사용하지 못하는 빈껍데기에 불과했다.
허나 이번 분기점을 통해 비로소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빈껍데기 성자였던 내가 드디어 성자(E)로 진화한 셈이었다.
"신성력 E짜리 성자라고 생각하니까 조금 기분이 이상하기는 하네······."
E급 성자라고 생각하니까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성장을 생각해보면 자연스럽게 기분이 좋아졌다.
구독자 109만의 홀리 유튜버.
그 유명한 헌터마스터조차 얻을 수 없는 타이틀이었다.
"그래도 이게 아무나 얻을 수 없는 능력치긴 하지."
그렇게 '홀리 유튜버'로 전직한 나는, 자신에게 들끓는 신성한 힘을 확인하기 위해 게이트를 열었다.
찰칵-.
반지의 금속 프레임을 돌린 나는, 게이트 너머에 있을 신수 하나를 불러들였다.
"백구야. 가까이 다가와봐."
- 왈왈?
그런 내 부름을 들은 것이었을까.
머지않아 게이트 너머에서 거대한 털뭉치가 다가오는 모습이었다.
총. 총. 총. 총.
나를 향해 빠르게 접근하는 거대한 털뭉치.
그것은 게이트의 바로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더니, 이내 나를 앞에 두고서 코를 킁킁거리는 모습이었다.
"백구야. 뭐가 느껴지냐?"
나는 냄새를 맡는 백구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나에게서 피어오르는 신성력의 기운을 느낀 것이었을까.
크응-.
크게 공기를 들이마시던 백구가 나를 향해 이야기했다.
- 왈! 왈왈?
- [자동번역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 "성수 한모금 했어요? 마시지 말고 그냥 나 주지."
냄새를 맡던 백구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야기.
그것은 나에게 있어 상당히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뭐라고······?"
허어-.
나는 허탈한 시선으로 눈앞의 백구를 바라보았다.
진정한 의미의 성자로 각성한 내 힘을 보여주기 위해 불렀건만, 녀석은 나에게 성수를 한모금 마셨냐고 물어보는 모습이었다.
더군다나 백구의 이야기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 왈왈왈.
- [자동번역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 "오늘 싸우느라 힘들었으니까 구슬이나 하나 줘요."
내가 가진 E급짜리 신성력은 필요없으니, <신성한 오브(B)>나 하나 던져달라고 이야기한 것이다.
E급의 신성 능력치.
그것은 <신성한 오브(B)> 하나만도 못한 것인 모양이었다.
후우-.
짙은 한숨을 내쉰 나는 결국 책상위에 있던 오브를 게이트 너머로 집어던졌다.
"······."
성자, 신유호.
아무래도 B등급의 아이템을 대체하기 위해선, 한동안 열심히 정진해야될 모양이었다.
* * * * * *
살다보면 누구나 이해할 수 없는 꿈을 꾸고는 한다.
그리고 그것은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짙은 어둠.
타오르는 불길만이 앞을 비추는 공간.
기이한 냄새가 후각을 마비시키는 가운데, 나는 멸망한 도시를 홀로 걷고 있었다.
터벅. 터벅.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 도시에서, 나는 목적지 없는 발걸음을 계속해서 이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
그런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언어였다.
단 한번도 사용해본 적이 없는 언어.
그럼에도 꿈속의 나는 그것을 익숙하다는 듯이 내뱉는 모습이었다.
끝도 없이 흘러나오는 무거운 말.
그것은 마치 누군가를 향한 기도문처럼, 애절하게 사방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
꿈.
깊은 밤중에 펼쳐지는 이질적인 풍경은 나와는 크게 인연이 없는 것이었다.
알지도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다.
홀로 움직이는 자신의 육신을 제어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단지, 나는 눈앞의 자신에게 이끌리듯이 그것을 바라볼 뿐이었다.
종언이 도래한 땅.
그곳을 홀로 걸어다니는 방랑자의 모습은 무척이나 초라했다.
그럼에도 그 어깨에 짊어진 무게만큼은 어째서인지 무거워보였다.
"———."
꿈속의 나는 계속해서 멸망한 도시를 거닐었다.
그 발걸음이 이어지는 장소마다 끔찍한 풍경이 펼쳐졌다.
철퍽-.
발이 닿는 장소에 피로 만들어진 웅덩이가 있었다.
비명이 들리지 않는 장소에는 무수한 죽음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한 길이 무너진 도시속에서 끝없이 반복해서 펼쳐졌다.
눈앞에 보이는 도시는 무척이나 익숙한 것이었다.
번영의 상징과도 같은 랜드마크는 무너진 채 불에 휩싸였으며, 사람으로 북적이던 광장은 묘지나 다름없는 싸늘함을 가지고 있었다.
일찍이 도시에 감돌았을 번영의 흔적따위는 일절 남아있지 않은 풍경.
그 속에서 나는 계속 걸어나갔다.
"———."
이해할 수 없는 말이 귓가에 울려퍼졌다.
그리고 그 음성이 울려퍼질 때마다, 주변에 있던 망자들의 몸에 빛이 내려앉았다.
자그마한 반짝임.
그럼에도 무엇보다도 따스해보이는 빛이, 불타오른 도시에 서서히 퍼져나가고 있었다.
끝이 없는 여정속에서 나는 계속해서 기도를 이어나갔다.
누구를 향한 기도인지도 모르는 채.
계속해서 기도를 이어나가면서, 그 끝에 있을 누군가를 찾아나섰다.
터벅, 터벅-.
그렇게 한없이 이어지던 발걸음이 향하던 끝자락.
그곳에서 꿈속의 나는 비로소 살아있는 무언가와 마주할 수 있었다.
"———."
무너진 도시의 끝자락.
그곳에 서있는 것은 어떤 남자의 모습이었다.
어둠을 휘감은 창을 든 채, 쓰러진 괴물의 사체를 마주하고 있는 남자.
스윽-.
괴물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나를 향해 움직였다.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신창, 주선호.
꿈속에 보이는 헌터는 무척이나 지치고 피곤해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피에 젖은 창을 움켜쥔 채, 나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전했다.
"전부 다 죽였어야 한다고."
무겁게 내려앉은 주선호의 한마디.
깊은 감정이 어려있는 그 목소리가 내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 직후, 나와 주선호를 감싸던 어둠이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쩌적, 쩌저적-.
갈라지는 하늘.
사라져 무너지는 풍경속에서, 내 시야에 환한 빛이 들어왔다.
"아······."
굳게 닫힌 창문 사이로 새어들어오는 환한 빛.
눈앞을 어지럽히는 그 빛은 나에게 있어서 익숙한 것이었다.
따뜻한 아침 햇살.
아침 7시 30분의 태양이 나를 비추고 있었던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태양을 마주한 직후, 나는 멍한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게 대체 무슨 꿈이야."
유튜버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래, 오랜만에 마주하게 된 이른 아침.
그 속에서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하암-.
피곤이 뒤섞인 짙은 하품이 내 입밖으로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지난밤에 악몽을 꾼 모양이었다.
그것도 꽤나 인상적인 악몽을 말이다.
"하··· 꿈이 이래서야 복권도 못사는데."
기왕이면 좀 괜찮은 꿈을 꿀 것이지, 하필이면 굉장히 애매한 꿈을 꿔버린 상황이었다.
결국 나는 하품을 내뱉으며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그렇게 멍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길 십여초.
띠링-.
가만히 벽지를 바라보고 있던 내 눈앞에, 갑작스럽게 메세지 하나가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 성좌 [전지의 오르미르]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전지의 오르미르]가 당신이 본 예지몽에 대한 감상을 물어봅니다.
눈앞에 떠오른 성좌의 후원 메세지.
그것을 확인한 직후, 나는 순식간에 잠이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흠칫-.
나는 예상외의 상황에 놀라버린 나머지, 허공에 팔을 뻗은 채로 굳어버렸다.
그리고는 내 눈앞에 나타난 메세지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잠깐만, 오르미르······?"
잊혀진 신, 성좌 오르미르.
그가 나에게 메세지를 보내온 것이다.
더군다나 그가 나에게 보낸 메세지의 내용 역시 범상치 않은 것이었다.
—예지몽(豫知夢).
내가 방금전에 꿨던 말도 안되는 꿈이 사실은 예지몽이었다고 주장해온 것이다.
"그게··· 예지몽이었다고? 멸망한 세상이 전부 미래의 일이었다고······?"
멸망한 세계와 무너진 도시.
그 모든 것이 예지몽이라는 이야기에 나는 당황한 얼굴로 성좌에게 물었다.
내가 성좌를 향해 물음을 던진 직후.
띠링-.
성좌는 다시금 나에게 메세지를 보내왔다.
- 성좌 [전지의 오르미르]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전지의 오르미르]가 당신이 꾼 꿈이 틀림없는 자신의 권능이라고 주장합니다.
- 성좌 [전지의 오르미르]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전지의 오르미르]는 다가올 멸망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당신이 노력해야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성좌, 전지의 오르미르.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내가 마주한 꿈은 성좌가 권능을 사용해 보여준 풍경이었다는 것이다.
충격적인 이야기에 나는 멍하니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미래에 다가올 멸망."
내가 마주한 풍경이 성좌의 권능을 통한 예지몽이었을 줄이야.
성좌의 메세지를 보며 고민하던 나는, 머지않아 자신을 지켜보는 성좌를 향해 이야기했다.
"다른 미래는··· 당신의 힘으로 또 다른 미래를 보여줄 수는 없는겁니까?"
오르미르에게 미래를 보여줄 수 있는 힘이 있다고 한다면, 내가 마주했던 풍경 이외에 다른 것도 보여줄 수 있을 터.
나는 조금 더 가까운 미래를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런 생각을 가진 채 오르미르를 향해 질문을 던지자, 오르미르가 나를 향해 의외의 답변을 보내왔다.
- 성좌 [전지의 오르미르]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전지의 오르미르]는 당신이 마주한 풍경이 마지막으로 남은 힘을 쥐어짠 권능이었다고 주장합니다.
- 성좌 [전지의 오르미르]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전지의 오르미르]가 당신이 본 예지몽의 대가로 39800포인트를 양도할 것을 요구합니다.
나에게 돌아온 오르미르의 답변.
그것을 마주한 나는 실없는 소리를 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예?"
성좌 오르미르가 나에게 보여준 하룻밤의 예지몽.
아무래도 그것은 유료 서비스였던 모양이었다.
62화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정보를 갈구해왔다.
예언이나 예지.
혹은 미래를 내다보는 꿈이나 점술.
수많은 이들이 저마다의 방법으로 미래를 알아내기 위해 도전했던 것이다.
미래를 안다는 것은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
그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인 셈이었다.
그렇기에 인류는 오랜 역사에 걸쳐 끝없이 미래를 예측하고 개변하고자 시도해왔다.
"······그래서, 39800포인트만 지불하면 목걸이도 쓸 수 있게 해주는겁니까?"
그리고 나는 지금, 인류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미래에 대한 정보를 손에 넣은 상황이었다.
그것도 39800포인트에 말이다.
저렴하다면 저렴해보이지만 비싸다면 또 비싸보이는 금액이기도 했다.
분명 가격대가 3만원대이긴 한데, 3만원대라고 하면 욕먹는 것처럼 말이다.
'예지몽이 보여준 미래에 대한 정보가 굉장히 난해한 편이야.'
더군다나 예지몽이 보여준 단편적인 정보 역시 써먹기가 난감한 것이었다.
포인트를 지불할 수는 있는데 마음이 석연치 않은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거기에 '성자' 자리를 더해, 도합 39800포인트에 흥정을 시도해보았다.
- 성좌 [전지의 오르미르]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전지의 오르미르]는 물질적인 대가를 받고 임명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다만, 애석하게도 오르미르의 반응은 내가 예상하던 것과는 크게 달랐다.
성좌, 전지의 오르미르.
예지와 예언의 능력을 타고난 초월적인 존재는 내 제안을 칼같이 거절하는 모습이었다.
이전에 나에게 성자 자리를 판매했던 블렌도어와는 다르게, 고작해야 포인트 따위에 성직자로 임명하지는 않겠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돈을 주고 팔아도 되는 자리가 아니라서 안된다고? 블렌도어는 잘만 팔던데?'
나는 그런 오르미르의 대답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할지 난감한 기분이 되었다.
유료채널 30초 미리보기 마냥 뚝 끊겨버린 예지몽에 39800포인트나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던가.
지불하려면 얼마든지 지불할 수 있는 금액이지만, 포인트를 조금 더 지불하더라도 성자자리까지는 받아내고 싶었다.
흐음-.
나는 게이트 너머에 있을 <오르미르의 선견(S+)>을 떠올리며 고민했다.
"오르미르님. 그래도 제가 조금이라도 더 강해져야 미래에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계속해서 적당한 말을 꺼내며 오르미르를 설득하고자 시도해본다.
어떻게 해야 오르미르를 설득할 수 있을까.
내가 침대에 앉아 고민하고 있으니, 머지않아 오르미르가 장문의 메세지를 나에게 보내왔다.
- 성좌 [전지의 오르미르]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전지의 오르미르]는 지금 당신에게 선물하는 100포인트가 마지막 남은 포인트이며, 당신이 계속해서 대화를 진행하고 싶다면 39800포인트를 빨리 자신에게 지불해야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 더 이상 이러한 대화조차도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라며 진지하게 경고합니다.
오르미르가 보내온 후원 메세지.
나는 그것을 보기 무섭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와··· 이게 저렇게까지 길게 늘려서 쓸 수도 있는거였네."
성좌 오르미르에게 주어진 마지막 100포인트.
그가 그것을 이용해 내용을 한계까지 꽉꽉 눌러담아서 메세지를 보낸 것이다.
아무래도 오르미르 역시 블렌도어처럼 출석체크 포인트만으로 후원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째서 그가 나에게 일방적으로 예지몽을 보여주고서, 39800포인트를 달라고 요구했는지 이해가 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지금 오르미르는 굉장히 다급한 상황에 처해있었던 것이다.
"성좌님. 포인트가 없으시군요."
끄덕, 끄덕-.
나는 성좌의 말에 수긍하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남아있는 포인트가 없어서 그런 것이었을까.
성좌 오르미르로부터 더 이상 메세지가 날아오는 일은 없었다.
"포인트가 없다··· 예. 그럴 수도 있을거라 생각했습니다."
돌아가는 상황으로부터 자신의 처지를 이해한 나는,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할지 떠올릴 수 있었다.
성좌에게 포인트가 없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그런 오르미르님을 위해 제가 드리고 싶은 제안이 있습니다."
오르미르와의 공정하고 건전한 협상.
내 협상능력으로 성좌와의 거래를 온전히 끝낼 가능성이 보인 것이다.
나는 협상용의 미소를 짓고 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오르미르에게 들리도록, 무척이나 배려심 넘치고 합리적인 이야기를 전달했다.
"제가 생각해도 39800포인트에 성자자리까지 받으려는건 좀 성자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르미르로부터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나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오르미르님께서 제게 예지몽이라는 기적까지 베풀어주셨는데··· 어떻게 고작해야 그 금액으로 끝내겠습니까."
아무래도 39800포인트에 성자자리를 먹으려니 양심이 없는 것 같다는 이야기.
그 뒤에 내 본론이 나왔다.
"그러니 예지몽을 포함해서 89800포인트에 성자 자리를 구매하겠습니다."
도합 89800포인트에 예지몽에 성자자리까지 구매하겠다는 제안.
내가 생각해도 무척이나 합리적인 이야기였다.
"혹시라도 이 제안에 불만을 가지고 계시다면 얼마든지 듣겠습니다."
나는 혹시 모를 오르미르의 불만까지 경청하려는 자세를 보였다.
거래 상대의 불만은 협상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였으니까 말이다.
오르미르는 그런 내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별 다른 불만을 표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늘의 성좌조차 그런 내 제안이 합당하다고 여긴 것이다.
"불만이 없으시군요. 잘 알겠습니다."
성좌 블렌도어도 흔쾌히 받아들인 제안이었으니, 오르미르 역시 이 제안에 만족해주지 않으면 곤란했다.
그렇게 오르미르에게서 긍정의 의사를 확인한 나는 침대에 있던 이불을 정리했다.
"성자가 되면 바로 포인트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리고는 침대 위에 다시 드러누웠다.
협상이 끝났으니 잠이나 마저 잘 생각이었다.
오전 10시에 일어나도 상관이 없는 수면패턴의 자유.
그것이 전업 유튜버의 특권이 아니겠는가.
"······."
침대에 드러누운 나는 다시금 수면을 취하기 시작했다.
서서히 가라앉는 의식.
그 속에서 꿈의 단면이 서서히 기억위로 부상해나갔다.
- <오르미르의 선견(S+)>이 당신을 주인으로 선택했습니다!
그로부터 3시간 뒤.
잠에서 깨어난 나는 S+급 장비 아이템의 주인이 되었다.
* * * * * *
흔히들 고운 마음을 가지고 있을수록 바르고 고운 말을 사용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지금 내 눈앞에서 지금 채팅을 치고 있는 사람은, 대체 어떤 마음을 가슴속에 품고 있는 것인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눈앞에 떠올라있는 채팅창을 바라보았다.
- swordmaster : 아이템. 한번. 찾아볼게. ^ O ^
- swordmaster : 물론. 길드 창고에. 없을지도. 모르겠어 ?¿?¿
- swordmaster : 그래도. 노력해봄. ㅎㅅㅎ!!!
커뮤니티 이용자명, 'swordmaster'.
대한민국의 S급 헌터, 천시예의 커뮤니티 말투는 상당히 독특한 편이다.
처음에야 최두식에게 영향을 받았나 싶었지만, 날이 갈수록 독자적인 방향으로 진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주류 네트워크와 백만광년쯤 단절된 듯한 말투에는, 그녀의 특별한 성장과정 역시 커다란 영향을 미쳤겠지만 말이다.
"······."
독특한 채팅 말투를 구사하는 천시예의 메세지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도 잠시.
나는 머지않아 천시예를 향해 감사의 메세지를 전달했다.
타닥, 타다닥-.
셀레스티아 길드의 창고에서 <텔리오스의 손길(S+)>을 찾아주겠다는 천시예의 제안.
그녀의 제안에 깊은 감사를 표한 것이다.
"······별다른 보상 없이도 이렇게 나서주니까 고맙긴 하네."
커뮤니티가 아니었다면 S급 헌터들의 이런 면모를 알 수 있었을까.
아마도 계속해서 TV에 나오는 그들의 모습만 보면서, 영원히 그들을 우상으로서 바라봐야만 했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그들이 내 우상인 것은 여전하지만, 그럼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과 점점 가까워져가고 있는 것은 틀림없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지도 모르는 일이고 말이다.
처음에야 커뮤니티 관리자 자리를 두고서 불만을 가졌지만, 최근에 들어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행운에 감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대형 길드들의 창고에서 아이템이 나와주면 좋을텐데 말이야."
그렇게 내가 천시예의 채팅에 답장을 보낸 이후.
툭-.
나는 대화창을 닫고서 커뮤니티의 게시판으로 돌아왔다.
지난 밤동안 커뮤니티의 유저들이 분주하게 대화를 나눈 까닭이었을까.
커뮤니티에는 수많은 게시글들이 올라와있는 모습이었다.
"그러고보니 어제는 피곤해서 게시글 확인을 못했었지."
성좌가 개방한 시험에 통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유튜버로서의 본업을 소홀히 하지 않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S급 헌터들이 모인 커뮤니티는 수많은 화제거리가 모여있는 보물창고나 다름없는 공간.
그런만큼 커뮤니티의 게시글들을 확인하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일이나 다름없는 셈이었다.
"오늘은 어떤 글이 올라왔는지 한 번 확인해볼까."
스윽-.
나는 스크롤을 내려가며 눈앞에 띄워져있는 게시판의 게시글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 중국이 숨기고 있는 최강의 헌터병기 [3] (xkingx)
- 레전드 매치면 당연히 이 선수 들어가있어야 하는거 아냐? [7] (ronaldo_7)
- 뇌제가 알려주는 여름철 전기비 절약방법 [5] (thundershock)
- 요즘 성수 가격이 왜 이럴까요? ㅜㅜ [2] (nabi242)
- 요즘들어 게이트에서 쓰레기밖에 안나온다 [3] (engine555)
- 오늘은 파리에 있는 미쉐린 레스토랑에 왔습니다. [5] (artea)
지난 밤동안 커뮤니티에 올라온 게시글들의 주제는 다양한 편이었다.
이용자명 'xkingx'가 올린 중국에 대한 소식부터, 'ronaldo_7'의 축구 이야기.
거기에 더해 'artea'의 파인다이닝 버전 최두식타임까지.
하나같이 다양한 주제로 게시글을 작성한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유독 시선이 향했던 것이, 바로 'nabi242'가 작성한 성수 관련 게시글이었다.
"성수 가격··· 아무래도 나 때문인 것 같은데."
최근에 들어서 성수 가격이 왜 이렇게 변했냐는 'nabi242'의 게시글.
당연하게도 그 원인은 여기에 있는 커뮤니티 관리자 때문이었다.
포인트 무한발행이 가능한 내가 경매장 시세를 교란시킨 것이다.
나는 약간의 미안함을 느끼면서, 'nabi242'의 게시글을 향해 손가락을 가져갔다.
게시글의 내용을 한 번 확인해보기 위함이었다.
"뭐, 시장경제라는게 다 그런거 아니겠어."
툭-.
눈앞의 화면을 향해 뻗은 손가락이 서유화의 게시글을 터치했다.
[ 제목 ] 요즘 성수 가격이 왜 이럴까요? ㅜㅜ
[ 작성자 ] nabi242
[ 이용자 정보 ] 서유화(28) / S급 / 풍랑
성수 가격이 원래는 안이랬던거 같은데....
최근 들어서 너무 비싸진거 같아요 ㅜㅜ
한달만에 대체 얼마가 올라간건지 흑흑....
[ 댓글 4개 ]
- tex11 : 성수기라서 그럼 ㅋㅋ
ㄴ nabi242 : 죽어
[ 공지사항 / 수정 / 삭제 ]
아니나 다를까, 게시글의 안에서는 성수 시세에 대한 시세한탄이 이어지고 있었다.
성수는 원래부터 헌터들이 자주 사용하는 소모품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그런만큼 내가 올려놓은 성수값에 대해 큰 부담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저 댓글은 또 뭐야. 오지후가 적은거네?"
더군다나 그런 서유화의 게시글에는 오지후가 남긴 짤막한 댓글이 달려있었다.
성수기라서 성수값이 비싸다니.
참으로 저렴한 유머가 아닐 수 없었다.
쯧, 쯧-.
나는 혀를 차며 오지후의 댓글을 비판하고서는, 다시금 게시판의 목록으로 되돌아갔다.
"오지후 이 사람··· '헌잘알'의 고급 헌터유머부터 보고 배워야겠네."
아무래도 오지후가 나에게 '헌잘알의 헌터유머'를 전수받아야 할 것 처럼 보였다.
그렇게 게시글 목록으로 돌아온 이후에는, 게시판의 다른 게시글들 역시 훑어보았다.
'nabi242'의 게시글 아래에는 또 다른 익숙한 헌터의 게시글이 보이고 있었다.
이용자명 'engine555'.
그림자사냥꾼 이지성의 게시글이었다.
게시글의 제목만 봐서는 게이트에서의 수확이 썩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상하게 이 글에 시선이 간단말이지."
게이트 안에서 나온 아이템에 대한 불만은 평소에도 많이 올라오고는 했다.
그러니 평소라면 'engine555'의 게시글 역시 무시하고 지나갔을 것이다.
허나, 오늘따라 어째서인지 해당 게시글에 대한 묘한 이끌림을 느꼈다.
작성자가 이지성이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면 게시글의 위치 때문일까.
이상하리만치 이지성의 게시글이 눈에 밟히기 시작한 것이다.
"뭐가 나왔는지 한 번 확인해볼까."
결국 나는 이지성의 게시글 역시 한 번 확인해보기로 했다.
툭.
손가락을 뻗어 화면을 터치하자, 이내 해당 게시글의 내용이 눈앞에 떠올랐다.
[ 제목 ] 요즘들어 게이트에서 쓰레기밖에 안나온다
[ 작성자 ] engine555
[ 이용자 정보 ] 이지성(30) / S급 / 그림자사냥꾼
(사진)
S+급이면 뭐해.
이런건 대체 왜 자꾸 나오는거야?
[ 댓글 3개 ]
[ 공지사항 / 수정 / 삭제 ]
이용자명 'engine555'가 작성한 게시글의 내용은 간단한 편이었다.
사진 한 장.
그리고 2줄의 짧은 불평.
허나, 해당 게시글을 마주한 직후 나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 사진은······."
이지성이 올린 사진의 안쪽.
그곳에는 녹색 보석이 박혀있는 새하얀 나뭇가지 하나가 보이는 모습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게이트 내부에서 출토된 아이템으로 보였다.
더군다나 그 아래에는 이지성이 직접 남긴 글이 적혀있었다.
"S+급 아이템이라고?"
S+급의 헌터장비.
그럼에도 쓸모없다는 소리를 들어야만 하는 물건.
그에 대한 내용을 확인한 직후, 나는 곧장 커뮤니티의 개인 메세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설마 이지성이 그 아이템을 발견한건 아니겠지······?"
어쩌면 이지성이 가지고 있는 물건이, 성좌가 제시한 시험에 나온 물건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 것이다.
아이템의 정확한 명칭은 확인해봐야 알겠지만, 어떻게 보더라도 반드시 회수해야하는 아이템인건 분명해보였다.
나는 빠르게 손을 움직여 개인 메세지 탭으로 이동했다.
"······아무래도 직접 본인한테 연락을 넣어봐야겠어."
개인 메세지 화면에 들어온 나는 목록에서 'engine555'의 이름부터 찾았다.
그렇게 'engine555'와의 개인 대화방을 발견한 내가 이지성을 향해 메세지를 보내려던 순간이었다.
띠링-.
갑작스럽게 귓가에 울려퍼진 선명한 알림음.
나는 그것을 듣고서 손을 멈춰세웠다.
- 최초로 [헌터 등급 : EX]에 도달한 플레이어가 등장했습니다!
어느새 내 눈앞에 떠올라있는 반투명한 메세지.
나는 그것을 보기 무섭게 이마를 부여잡았다.
"······."
아무래도 당분간은 골치아픈 일들이 자주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63화
세계 최강의 헌터라고 불리는 남자, 신창 주선호.
그는 현재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메세지를 보며 고민에 잠겨있었다.
"······."
복잡한 감정이 어린 눈동자에 반투명한 화면이 비추어졌다.
주선호의 눈앞에 나타난 메세지.
그것은 주선호 자신이 그토록 오랫동안 고대해왔던 내용이었다.
- [헌터 등급 : EX]에 도달했습니다!
- [만류귀종(S+)]의 등급이 다음과 같이 조정됩니다.
- 특성 등급 : S+ → EX
주선호가 오랫동안 가로막혀있던 최상위 랭크의 벽.
그것을 지금에서야 돌파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지금까지야 특별한 부가증폭효과를 받아도 S+라는 특수등급에 도달하는 것이 한계였다.
허나 그는 이제 거대한 벽을 넘어서, EX라는 새로운 등급에 처음으로 발을 내딛었다.
"EX급 헌터라······."
남다른 감회에 젖은 주선호의 눈동자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물론 이 결과가 만들어진건 주선호 혼자만의 노력덕분은 아니었다.
그간 한계치에 도달해있던 특성과 능력치에 더불어, 그가 선을 넘으면서 획득한 대량의 포인트들.
거기에 성좌로부터 받은 특별한 능력이 더해진 결과물이었다.
띠링-.
그 사실을 깨우치게 하려는 듯이, 감상에 잠겨있는 주선호의 눈앞에 새로운 메세지가 떠오른 모습이었다.
- 성좌 [파멸의 알라티오]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파멸의 알라티오]가 당신에게 새로운 경지에 오른 감상을 물어봅니다.
성좌, 파멸의 알라티오.
주선호에게 새로운 특성을 안겨준 성좌로부터의 메세지였다.
새로운 경지에 오른 감상—.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고민하던 주선호는,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성좌에게 이야기했다.
"아무리 강하더라도 결국 다가오는 미래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질 뿐이지."
이것은 주선호가 게이트 너머에서 '그것'을 마주했던 순간부터 계속해서 품어왔던 생각이었다.
신창이라는 이명으로 불리며 남들보다 높은 자리에 도달해도, 그런 주선호의 생각은 달라지는 법이 없었다.
이차원의 진정한 괴물들 앞에서 S급 헌터란 결국 작은 개미에 불과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주선호는 강해지기 위해서 끝없이 노력해왔다.
"그러니 내 나름대로 최대한의 발악을 하고 있을 뿐이다."
발악.
그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발악이었다.
미증유의 재해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나름대로의 발악인 것이다.
그리고 주선호 자신이 언젠가 게이트 너머에서 마주했던, 어떤 '사고'에 대한 최소한의 속죄이기도 했다.
그런 주선호의 이야기를 비웃듯이, 성좌의 메세지가 다시금 눈앞에 떠올랐다.
- 성좌 [파멸의 알라티오]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파멸의 알라티오]가 지나치게 건조한 감상이라고 당신을 비난합니다.
- 성좌 [파멸의 알라티오]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파멸의 알라티오]는 당신이 조금 더 야욕에 가득찬 모습을 보이길 요구합니다.
후우-.
주선호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터져나왔다.
성좌가 무슨 이야기를 원하는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얼마든지 이해하고 있었다.
"계획을 포기할 생각은 없어. 결국 모든건 계획대로 돌아갈거다."
주선호라는 남자는 애초부터 그런 인간이었으니까 말이다.
누군가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그리고 주선호는 그 짐을 짊어질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이야 게이트가 충분히 억제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머지않아 우리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찾아오겠지."
서서히 다가오는 게이트 재해.
그 속에서 모두를 지킬 수는 없다.
한국에 있는 헌터 모두가 EX급이 된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어찌할 수 없는 흐름이었다.
그러니 누군가는 그중에서도 미래를 위해 필요한 이들을 남겨야만 했다.
비록 비각성자들을 모두 버리는 한이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니 우선은 헌터협회와 5대 길드들을 제대로 장악하는게 먼저야. 본격적으로 움직이는건 그 다음이다."
언젠가 마주했던 풍경으로부터 이어져온 거대한 결심.
한국의 유일한 EX급 헌터는 그 결심을 끌어안은 채로, 자신의 손아귀에 쥐어져있는 정보를 마주했다.
헌터협회에서도 극히 일부만이 알고 있는 거대한 진실.
그것이 적혀있는 종이를 말이다.
- 현재까지 미완성 EX급 게이트로 추정되는 현상을 37개 발견하였음.
신창, 주선호.
그는 영웅이 되기를 오래전에 포기했다.
* * * * * *
최초의 EX급이 탄생한 사상초유의 사태.
그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한 인물에 대해서는,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EX급에 도달한 본인이 직접 메세지를 보내온 것이다.
그것도 사람이 4명이나 들어와있는 단체 대화방에 말이다.
- 망원동불주먹 : 방금 전에 EX급에 도달했다.
- 망원동불주먹 : 나는 이번 승급이 우리의 계획을 진전시키는데 커다란 도움이 될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 망원동불주먹 : 그러니 다들 너무 혼란스러워할 필요는 없을거야.
- nabi242 : 와 EX급 ㅜㅜㅜㅜ
- nabi242 : 몇포인트나 들어갔어요?
커뮤니티 이용자명, '망원동불주먹'.
신창 본인이 직접 EX급에 도달했다고 인증한 것이다.
그것도 아주 자신감이 넘치는 말투의 메세지로 말이다.
누가 EX급에 도달했나 했더니, 역시나 주선호가 가장 먼저 EX급에 도달한 모양이었다.
"역시 주선호가 먼저 도달한건가."
물론 누구나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던 이야기이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주선호만큼 정상에 가까운 헌터도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본인으로부터 직접 듣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한국에서 최초로 EX급 헌터가 탄생한건 기쁜 소식이지만, 마냥 기뻐하기에는 걸리는 부분이 조금 남아있는 편이었다.
"헌터 유튜버로서는 좋은 일이긴 한데··· 마냥 기뻐하기에도 좀 걸린단 말이지."
주선호가 가지고 있는 거대한 야망부터가 문제였다.
헌터들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정부의 설립.
그 생각이 얼마만큼의 피를 불러올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얼마전에 꿨던 예지몽만 하더라도 주선호가 나오지 않았던가.
주선호가 멸망을 막는데 반드시 필요한 인물인 것은 맞지만, 그를 어떻게 대해야하는지에 관해서는 고민이 되는 부분이 있었다.
나름대로 주선호에 대해 많은 것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는 셈이었다.
"그래도 일단 축하 인사정도는 보내둘까."
다만, 나도 일단은 주선호의 국가전복파티 4인방 중 하나이기는 했다.
그러니 지금은 채팅창에 그의 EX급 달성을 축하하는 메세지를 보내두는 편이 나을 것이다.
타닥, 타다닥-.
나는 키보드에 주선호가 좋아할만한 내용의 축하메세지를 입력했다.
그렇게 간단한 메세지를 보낸 이후에는, 단체 대화방을 닫고서 이지성과의 1:1 대화방에 들어갔다.
"천하의 신창이 EX급 헌터가 되기는 했어도··· 일단 내 할일부터 해야겠지."
그림자사냥꾼, 이지성.
나와 그 사이에는 나름대로 껄끄러운 관계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지성 본인은 모르고 있겠지만, 나와 그는 이미 서로 한방씩 주고받은 상태였다.
그런만큼 주선호 못지않게 이지성을 대하기도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신성 관련 아이템의 회수는 필요한 법이지만 말이다.
"흐음······."
나는 이지성에게 어떤 핑계를 대야할지 고민하다가, 그냥 적당한 구실로 이야기를 전하는 것을 선택했다.
- 거품판독기 : 얼마전부터 제약이 걸려있는 아이템들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는 중인데
- 거품판독기 : 게시글을 보니까 최근에 비슷한 물건을 하나 얻은 것 같더라고
- 거품판독기 : 괜찮으면 아이템 좀 양도해줄 수 있어?
천시예에게 들은바에 따르면, 신앙과 관련된 제약이 걸려있는 아이템들은 헌터들에게 있어서 아무런 가치도 없는 아이템들이었다.
그런만큼 이번에는 이지성이 순순히 양도해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이지성을 향해 메세지를 보냈다.
"이지성이 순순히 물건을 넘겨주려나 모르겠네."
평소같았으면 상대를 향해 대량의 포인트를 제시했겠지만, 지금은 물건이나 거래상대 어느쪽이든 거래를 제안하기엔 적절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지성의 고약한 성격도 문제였으며, 아이템 역시 가치를 높게 부르기 힘든 물건이었다.
마냥 포인트를 가지고 밀어붙이기도 곤란하다는 뜻이었다.
가능하다면 이지성이 선의로 아이템을 넘겨주는게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또 다른 방법을 생각해내야만 했다.
내가 그렇게 고민에 잠겨있는 것도 잠시.
띠링-.
머지않아 내 메세지를 확인한 'engine555'가 나에게 답장을 보내왔다.
- engine555 : 연구?
- engine555 : 협회의 노인네들이나 관심있는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ㅎㅎ
- engine555 : 원한다면 그냥 건네주더라도 문제는 없어
- engine555 : 나도 지난번에 동료를 시험했던것 때문에 미안한 마음이 좀 남아있거든
내 걱정이 단순한 기우였던 것이었을까.
이용자명 'engine555'는 나에게 아이템을 건네주는데 문제가 없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이지성 본인이 순순히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표명해온 것이다.
나를 향해 지독한 장난을 보여줬던 그때와는 다른 일면에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야. 천하의 이지성이 아이템을 그냥 넘겨주겠다고?"
얌전히 아이템을 넘겨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한번에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그림자사냥꾼에게서 나올만한 반응은 아니었다.
나는 의심의 눈으로 화면을 노려보았지만, 이지성은 따로 조건을 걸거나 하지는 않는 모습이었다.
흐음-.
잠시 고민하던 나는 계속해서 이지성을 향해 메세지를 입력했다.
- 거품판독기 : 고맙다 형제
- 거품판독기 : 어떻게 받으면 될까
- 거품판독기 : 경매장?
- engine555 : 그건 좀 위험하지 않아? ㅎㅎ
- engine555 : 너무 싸게 올렸다가 누가 가로채갈지도 모르잖아?
- 거품판독기 : 다른 방법이 있나?
- engine555 : 그렇다고 직접 만나는 것도 서로 곤란할 것 같으니
- engine555 : 지난번이랑 비슷한 방식으로 넘겨줄게
지난번과 비슷한 방법.
그 이야기를 듣기 무섭게 내 머릿속에 더스트 길드와의 일이 스쳐지나갔다.
그때도 나와 이지성은 서로 마주하지 않은 채 물건을 교환했다.
그것도 지하철의 물품보관함을 이용해서 말이다.
"이번에도 물품보관함으로 물건을 주고받자는건가?"
그 이야기를 들으니 커뮤니티에 택배 기능이 없는게 조금 안타깝게 느껴지기는 했다.
지나치게 과한 욕심인가 싶다가도, 경매장에 채팅에 송금기능까지 있는걸 보면 막상 그런 생각도 싹 날아갔다.
물품보관함을 통한 거래.
거기에 대해 고민하던 나는 결국 이지성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설마 이번에도 물품보관함에 '사소한 장난'같은 짓을 벌이지는 않겠지."
당근마켓 나눔이 으레 그렇듯이 무료 나눔이라는게 당연히 주는 사람이 갑 아니던가.
결국 내 입장에서는 이지성이 원하는 방식으로 맞춰가는 수밖에 없었다.
- 거품판독기 : 편한 방식으로 진행해
- engine555 : 그럼 토요일쯤에 넘겨줄게 ㅎㅎ
- engine555 : 저번 일은 미안했어~
내가 짧은 답장을 보낸 직후.
'engine555'의 답장과 함께 채팅이 종료되었다.
중증 치질환자와의 짧은 거래채팅이 끝난 이후.
나는 이지성과의 채팅이 끝난 거래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진짜 믿어도 되는거겠지?"
세상이 나를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는가.
그게 아니면 내 얄팍한 믿음이 이 세상을 각박하게 만들었는가.
어느쪽이 먼저인지는 기다려보면 알게 될 일이었다.
* * * * * *
며칠 후, 이지성과 약속한 토요일이 찾아왔다.
나는 전철을 타고 이지성과의 약속장소에 찾아갔고, 그곳에서 기다란 기타가방 하나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말해서, 이지성은 약속장소에 정확히 물건을 놓아두었다.
화장실에서 기타가방을 열어서 간단하게 확인해본 결과였으니 틀림없었다.
이지성이 준 가방에는 보석이 달린 나뭇가지가 그대로 들어있었던 것이다.
'아. 내가 믿음이 부족해 진정한 형제를 의심했구나.'
이지성이 준 선물을 확인한 나는 곧장 이지성에 대한 평가를 고쳐먹었다.
마냥 고약한 성격인줄 알았더니, 막상 내 생각만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에게 이런 면모도 있는걸 보아서는 말이다.
- 거품판독기 : 고맙다 형제
- 거품판독기 : 좋은 하루가 되기를.
물건을 받은 나는 이지성에게 감사인사와 함께 덕담을 보냈다.
그리고는 가방을 챙겨 작업실로 돌아가는 전철에 올랐다.
이지성으로부터 곧바로 답장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지금 게이트 안에 들어가있거나, 나름대로 바쁜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사람마다 저마다 스케줄이 있는 법일테니, 나로서는 크게 신경쓸만한 일은 아니긴 했다.
'작업실에 돌아가면 바로 낙원에 들어가서 아이템을 확인해봐야겠어.'
오히려 지금 당장은 가방 안에 있을 아이템쪽이 더 우선이었다.
다른 이들의 시선때문에 아이템 정보까지 확인해보진 못했으니, 게이트에 들어가서 아이템을 본격적으로 분석해볼 생각이었다.
과연 어떤 효과가 있는 아이템일 것인가.
그것에 대해 고민하고 있으니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
나는 커다란 기대감을 끌어안은 채로 덜컹거리는 전철을 타고 나아갔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조용히 바라보기를 잠시.
수많은 풍경을 지나쳐 작업실이 있는 동네에 도착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후에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여정이 이어졌다.
터벅, 터벅-.
이제는 익숙해진 길을 걸어서는, 작업실이 있는 자그마한 건물에 들어선다.
오래된 계단을 올라가면 나오는 2층에 있는 현관문.
그것을 열고 들어가야만 비로소 111만 유튜버의 작은 작업실이 나오는 것이다.
"후······."
슬슬 날씨가 싸늘해지기 시작한 탓이었을까.
입가에서는 체온을 빼앗는 뜨거운 숨결이 새어나오는 모습이었다.
삑. 삑. 삑-.
현관문 앞에 도달한 나는 곧장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익숙한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문이 열리며 심플한 디자인의 작업실이 드러났다.
대단한 물건은 없지만 나름 풀옵션을 모두 갖춘 곳이었다.
"슬슬 내용물을 확인해볼 차례인가."
언제나와 똑같은 작업실의 풍경을 확인한 나는, 손에 끼고 있던 반지의 금속 프레임을 돌렸다.
찰칵-.
경쾌한 소리와 함께 <블렌도어의 약속(S+)>에 걸려있던 봉인이 풀리는 모습이었다.
반지를 조작한 나는 작업실의 벽면 위에 오른손을 얹었다.
그리고는 '버려진 영물들의 낙원'으로 향하는 게이트를 개방했다.
"—[공간연동]."
지이이이잉.
황금의 원이 회전하며 균열이 벌어지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 직후에 나타난 것은 백구가 있는 낙원과 이어지는 통로였다.
나는 이미 숱하게 건너보았던 낯익은 게이트를 넘어섰다.
파앗-!
시야가 환하게 물드는 감각.
새로 개방한 게이트를 건너간 너머에는, 평소처럼 나를 반겨주는 신수들의 모습이 보였다.
- 왈! 왈왈왈!
"백구야. 많이 기다렸지?"
가장 먼저 나를 향해 달려오는 것은 새하얀 털의 백구였다.
총. 총. 총. 총.
녀석은 특유의 발걸음을 이용해 나에게 빠르게 다가오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런 내 머리 위에서는, 거대한 육신을 늘어뜨린 순백의 용이 시선을 향하고 있었다.
- [자동번역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 "익숙한 향기가 나는 물건을 가지고 왔나."
내가 가지고 온 아이템의 기운을 느낀 것이었을까.
순백의 용은 나를 보기 무섭게 울림을 퍼뜨려 자신의 의지를 전해왔다.
"사실, 이번에······."
그런 용의 의지에 내가 정겨운 대답을 돌려주려던 찰나.
우우우우웅-.
그보다도 한층 더 빠르게, 용의 이야기가 다시 한 번 울려퍼졌다.
- [자동번역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 "그리고 낯선 냄새가 나는 인간 역시 데리고 들어온 모양이군."
귓가에 울려퍼진 용의 이야기.
그 직후, 나를 향해 달려오던 백구가 나를 스쳐지나갔다.
———!
귓청이 터져나갈 기세로 울려퍼지는 포효.
빠른 속도로 쇄도하던 백구의 모습이 사라지더니, 이내 검은 무언가와 충돌해 바닥을 나뒹굴었다.
콰앙!
둔탁하고 묵직한 충돌음.
새하얀 털뭉치와 함께 바닥을 나뒹구는 것은, 그림자로 전신을 감싸고 있는 어떤 남자의 모습이었다.
"윽······!"
낙원에 울려퍼지는 익숙한 목소리.
수풀이 가득한 지면 한가운데 뒹구는 익숙한 얼굴.
남자를 마주한 나는 그 정체를 확인하고서 표정을 뒤바꾸었다.
대한민국의 S급 헌터들 중 하나.
그림자사냥꾼, 이지성.
그가 바닥에 쓰러진 채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지성."
낯선 존재가 낙원에 침투했다.
그 사실을 이해한 나를 향해서, 하늘을 헤엄치는 용으로부터의 전언이 이어졌다.
- [자동번역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 "그대여. 어떻게 하길 원하는가."
흔히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S급 헌터들이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지금 내 눈앞에서 바닥에 처박혀있는 이지성처럼 말이다.
64화
그림자사냥꾼, 이지성.
그는 대한민국에 있는 S급 헌터들 중에서도 상당히 특별한 포지션에 서있는 인물이었다.
—암살자.
독왕 구성현과 더불어 정부가 가장 경계하는 헌터들 중 하나였으니까 말이다.
특히나 이지성의 은신술은 전세계에서도 최고수준으로 꼽히며, 작정하고 은신한 이지성은 같은 S급 헌터조차도 쉽게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 은신능력을 가진 이지성이 몸을 숨기고 다른 이들을 뒤쫓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었다.
그래. 종종 있는 일이었다.
적어도 지금 이지성 자신의 눈에 보이고 있는 풍경만 아니었다면, 이번에도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터였다.
"—[공간연동]."
"······."
세상에는 결코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이지성의 눈에 보이고 있는 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지성의 눈동자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풍경을 비추었다.
일개 인간이 자신의 손으로 게이트를 열어젖히는 풍경.
그 말도 안되는 광경을 눈에 담은 이지성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게이트를 직접 열어젖혔다고······?'
게이트 발생의 전조라고는 무엇 하나 보이지 않는 공간.
그런 공간에서 갑작스럽게 게이트가 만들어졌다.
적어도 이지성이 알고있는 상식으로는 결코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설령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해서는 안되는 일이기도 했다.
게이트를 임의로 발생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부터, 전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게이트에 대한 의심이 시작될테니까 말이다.
'내가 대체 무슨 풍경을 보고 있는거지?'
미등록 S급 헌터, 신유호.
그 능력부터 그 목적, 심지어는 정체마저도 베일에 감추어져있는 존재.
이지성 자신이 오래전부터 의심해왔던 헌터가 말도 안되는 일을 벌인 것이다.
더군다나 신유호는 해당 게이트가 실제로 기능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듯이, 게이트 너머로 몸을 감추어버리는 모습이었다.
파아앗-.
사방으로 흩날리는 빛의 입자.
게이트 너머로 사라지는 신유호의 모습에 이지성의 심장이 거칠게 내려앉았다.
'신유호··· 대체 어떤 비밀을 숨기고 있는거냐.'
일개 헌터가 숨기기에는 지나치게 커다란 비밀이 그곳에 있었다.
이지성은 지금 자신이 무척이나 위험한 장소에 발을 내딛었다는 것을 이해했다.
대한민국 헌터계의 깊숙한 곳에 숨겨져있는 비밀.
이지성 자신에게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거대한 비밀의 너머에, 스스로의 의지로 발을 내딛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대체 어떤 목적으로 게이트를 만들고, 아이템을 수집하고 있는건지 확인해야만 한다.'
게이트를 바라보던 이지성의 머릿속에 오래전의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수년 전.
그는 주선호와 이야기를 나누고서, 오직 주선호만이 세계의 유일한 희망임을 확신했다.
허나, 주선호는 이지성과는 태생부터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같은 헌터들을 지나치게 쉽게 믿는 편이었다.
통제가 안되는 5대 길드의 길드장을 상대할 때부터 그러했다.
풍랑 서유화를 포섭할 당시에도 그랬고, 심지어는 갑작스럽게 신유호라는 녀석을 데려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명도 능력도 무엇 하나 알 수 없는데다가, 스스로 헌터협회에 등록마저 거부한 인간이다.
대체 그런 인간의 무엇을 믿고서 등을 맡길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니 이지성 자신만큼은 신유호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경계해야만 했다.
그것이 그림자사냥꾼 이지성이 스스로에게 맡긴 역할이었다.
'내가 나서야만 하는 일이다.'
오직 이지성 자신에게만 가능한 역할이다.
진작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이지성은 게이트 너머로 발을 내딛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스윽-.
그림자에 집어삼켜진 채 울려퍼지지 않는 발소리.
그것을 앞으로 내딛은 이지성의 다리가 게이트의 너머로 향했다.
그리고 그의 발걸음이 거대한 경계선을 완전히 넘어섰을 때.
그는 비로소 게이트 너머의 진정한 풍경을 마주할 수 있었다.
"······."
그곳에 있는 것은 거대한 신전이었다.
이끼가 뒤덮힌 낡은 신전.
그 주변에는 무수한 수풀이 뒤덮혀있었으며, 녹음의 위에는 새하얀 짐승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마치 짐승들만을 위해 존재하는 듯한 거대한 낙원.
그것이야말로 신유호가 모두에게 숨겨두고 있던 게이트 너머의 비밀이었던 것이다.
- [자동번역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 "낯선 냄새가 나는 인간 역시 데리고 들어온 모양이군."
더군다나 그러한 낙원의 하늘에는, 기다란 몸을 늘어뜨린 거대한 용이 존재하고 있었다.
백색의 비늘로 뒤덮힌 순백의 용.
그것은 거대한 위압감을 퍼뜨리며, 고개를 내려 지상을 굽어보는 모습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보이는 기운을 품고 있는 모습이었다.
—용종(龍種).
여태껏 그 누구에게도 길들이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흉포한 괴물이 신유호를 비호하고 있는 중이었다.
- 이해할 수 없는 신비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 [보스 : 허광신룡 라그나트리오]가 출현했습니다.
용의 시선.
그것은 모습을 감추고 있는 이지성을 올곧게 내려다보는 모습이었다.
그 시선 아래에서 이지성을 감싸고 있는 그림자의 장막은 의미를 잃어버렸다.
숨을 죽이고, 기척을 죽이고, 소리마저 집어삼킨 은신을 간파한 것이다.
게다가 게이트 너머의 미지가 드러내는 이빨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 왈! 왈왈왈!
민감해보이는 코를 가진 백색의 마수가 그를 향해 달려온 것이다.
총. 총. 총. 총.
한없이 가벼워보이는 발걸음이지만, 그럼에도 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공간이 접히며 왜곡된다.
거리감을 상실한 발걸음은 순식간에 그를 향해 다가오더니, 이내 그림자에 숨어있던 이지성의 몸과 정확히 충돌했다.
콰아아앙!
흐트러진 그림자의 경계선 바깥으로 자신을 밀어내는 듯한 감각.
그 직후, 그림자 바깥으로 튕겨나간 이지성의 몸이 바닥에 처박혔다.
"윽······!"
투웅-.
트럭에 치인 것마냥 멀찍이 튕겨나가는 신체.
균형을 잃어버린 몸이 바닥을 긁으며 지나가고, 그 위에서는 새하얀 용의 시선이 이지성을 지켜보았다.
추레한 미물을 내려다보는 듯한 압도적인 포식자의 시선.
기나긴 용의 아래에서 신유호의 눈동자가 이지성에게 향했다.
- [자동번역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 "그대여. 어떻게 하길 원하는가."
거대한 용의 전언이 사방에 울려퍼졌다.
신비로 감싸인 그 목소리는 신유호를 향해 자신의 처분을 묻고 있었다.
그러한 용의 이야기로부터,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눈치챈 것이었을까.
장난기라고는 일절 느껴지지 않는 신유호의 진지한 눈동자가 이지성을 보았다.
"······이지성."
묵직하게 내려앉은 차가운 시선.
그와 함께 신유호가 이지성에게 이야기했다.
"봐서는 안되는걸 기어이 보고야 말았나."
언제나 조금은 경박해보이는 어조로 이야기하던 신유호였다.
허나, 그런 신유호가 지금은 무척이나 차가운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자신을 탐색하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에서는 심상치 않은 기운이 흘러나오는 모습이었다.
"으윽······."
바닥을 나뒹굴던 이지성은 통증을 억누르려고 노력하며 몸을 일으켜세웠다.
비틀거리는 몸이 가까스로 자세를 잡아내었다.
되살아나는 그림자.
자세를 추스리는 이지성을 내버려둔 채로, 신유호는 계속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모습이었다.
"S급 헌터, 이지성씨."
"······."
"당신이 이야기하던 동료간의 믿음이나 신뢰는 결국 이거밖에 안되는거였나?"
피식-.
차가운 얼굴에 날카로운 미소가 드리워졌다.
이지성 자신을 비웃는 듯한 시선.
자신이 비웃음 받을만한 일을 했다는 자각은 가지고 있다.
그러니 그것을 정면에서 마주한 채, 이지성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신유호, 너는 대체······."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
어색한 목소리의 끝에서 입밖으로 나온 것은, 웃음기를 완전히 잃어버린 질문이었다.
"주선호한테 무엇을··· 대체 어떤 비밀을 숨기고 있는거지······?"
"비밀? 어떤 비밀 말이야?"
"이만한 공간과 몬스터들을 숨겨두고서, 설마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야기할 생각인거냐······?"
이지성의 시선이 주변을 훑어보았다.
드넓은 게이트를 가득 채우고 있는 백색의 짐승들.
하나 하나가 신유호를 지키려는 듯이 그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더군다나 하늘에 부유하고 있는 필드보스의 시선은, 명백하게 신유호에게 우호적인 것이었다.
그가 이미 해당 게이트를 포함해 수많은 몬스터를 수중에 두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혼자서 게이트를 만들어내고, 몬스터들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
"대체 그만한 능력을 가지고서, 뭘 노리고 주선호의 손을 잡은거냐."
이지성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일개 헌터에게 저만한 힘이 허용되고 있는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힘을 가지고서도, 태연하게 이지성에게 휘둘리는 연기를 하던 신유호의 모습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벅-.
엉망진창이 된 바닥에 발을 내딛은 이지성이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들었다.
"······신유호. 너는 대체 뭘 알고 있는거냐."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산더미처럼 눈앞에 쌓여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이지성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떨리는 손으로 한자루의 단검을 뽑아드는 것 뿐이었다.
이런 거대한 비밀을 들켜버린 이상, 신유호는 결코 그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을 것이다.
이곳에서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뭐라도 해야만 했다.
"뭘 숨기고 있는건지 말해!"
꿀꺽-.
거센 외침을 터뜨린 이지성이 고여가던 침을 삼켰다.
평생 몸을 숨기고 불리한 상황에서 도망쳐왔던 이지성이었다.
허나, 지금 이곳에서는 몸을 숨기고 도망가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게이트 전체가 신유호의 의지 아래에 놓여있었다.
그가 허락하지 않는 한, 자신은 결코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없을 터였다.
'아무것도 못하고 죽을 수는 없어.'
까드득-.
이빨이 갈리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온 사방에서 터져나오는 괴물들의 울음소리.
그것을 들으며 이지성은 한껏 경계심을 끌어올렸다.
"······이지성씨."
그리고 그런 경계심의 한켠을 뚫고서.
신유호의 선명한 목소리가 이지성의 귓가에 울려퍼졌다.
"혹시 그거 알고 있어요?"
묵직하게 내려앉는 목소리.
가라앉는 목소리를 융단으로 삼아, 신유호가 발걸음을 앞으로 내딛었다.
저벅. 저벅.
풀밭을 헤집고 오는 신유호가 이지성을 보며 이야기했다.
"당신이 아는 게이트 너머의 풍경이, 이미 한 번 멸망해버린 세상이라는거."
"······뭐?"
그런 신유호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이지성 자신으로서는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내용이었다.
게이트 너머에 존재하는 필드.
신유호는 그것이 이미 멸망해버린 세계의 흔적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처음으로 듣는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게이트 너머에 있는 필드들은 하나같이 불완전하게 찢겨나간 채였으니까 말이다.
"당신,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있잖아. 그렇지?"
저벅-.
짧은 고민속에서 어느덧 신유호와의 거리가 한걸음 줄어들었다.
이지성을 바라보며 올곧게 걸어오는 신유호의 모습.
그것을 지켜보던 이지성이 그림자를 찢어 쏘아내었다.
"더 이상 가까이 다가오지마!"
파앙-!
대기를 찢어발기며 날아가는 그림자의 단면.
스윽.
허나, 신유호는 단지 고개를 꺾어 그것을 피해보일 뿐이었다.
가볍게 움직인 고개 너머로, 이지성이 쏘아낸 그림자가 스쳐지나갔다.
은은하게 빛나는 목걸이를 어루만진 채, 신유호는 계속해서 이지성을 향해 걸어왔다.
"그림자를, 어떻게······!"
눈앞에서 벌어진 풍경에 이지성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아무리 신체 능력이 높다고 해도, 이지성 자신의 민첩 능력치를 크게 상회하지는 못할거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신유호는 고작 고개를 움직인 것만으로도 공격을 피해버린 것이다.
마치 이지성의 공격이 어느 타이밍에 날아올지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말이다.
"······."
이지성의 공격을 가볍게 피해버린 채로, 신유호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앞으로 내딛었다.
침묵속에서 신유호는 느긋하게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다가오는 신유호의 모습에 이지성은 끊임없이 맹공을 퍼부었다.
쌔액! 쌔애액-!
수많은 그림자의 파편이 신유호를 노리고 쏟아져나왔다.
그 이후로 이어지는 풍경 역시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기를 찢어발기며 나아간 공격이, 신유호를 맞추지 못하고 바로 옆을 스쳐지나간 것이다.
이지성의 그림자가 만들어낸 유의미한 흔적이라고 해봐야, 고작해야 뺨에 만들어진 자그마한 상처 하나뿐.
그마저도 신유호를 저지하는 일에 있어서 아무런 의미조차 가지지 못하는 것이었다.
"가까이 오지말라고 했을텐데!"
두려움에 젖은 이지성이 계속해서 공격을 쏟아내었다.
내딛는 발걸음 하나.
가벼운 움직임 하나가 이지성의 공격을 피하는 계기로 변모한다.
마치 어린아이의 공격을 피해내듯이, 그는 손쉽게 모든 공격을 피해 이지성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 모든 공격이 빗나가고서, 어느덧 이지성의 바로 앞까지 신유호가 다가왔을때.
신유호는 자리에 굳어버린 이지성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휘말려버린다는 사실이 두렵게 느껴지는거겠지."
"······."
"이해해. 나도 그랬으니까."
굳어버린 육신.
이마에 얹어진 커다란 손이 이지성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통제권을 잃은 채 눈동자만 굴리고 있을뿐인 이지성의 앞에서, 무수한 메세지들이 눈앞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 성좌 [인피니튜드]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인피니튜드]가 당신에게 지금 당장 자살할 것을 권유합니다.
- 성좌 [인피니튜드]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인피니튜드]가 당신에게 찾아올 파멸을 애도합니다.
시야를 뒤덮는 성좌의 전언.
왜곡되는 시야 너머로 신유호의 손바닥이 그의 눈을 뒤덮었다.
깊은 어둠.
그와 함께 신유호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래도, 선은 지켰어야지."
귓가에 울려퍼지는 선명한 목소리.
그 목소리에 이끌린 이지성이 무어라 입을 열려고 하던 순간.
그것은, 돌연히 그에게 찾아왔다.
죽음.
혹은 마지막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풍경이었다.
"끄아아아아악—!"
이지성의 눈이 어둠을 보았다.
짙은 어둠 속에서 그는 찢어졌다.
해체와 결합.
갈라지고 나뉘며, 또 다시 달라붙기를 반복하는 시간.
미증유의 고통이 이지성의 뇌를 헤집었으며, 직시할 수 없는 공포가 이지성의 영혼을 갉아먹었다.
이름을 가진 인간이 갈갈이 찢겨 흩어진 채, 그 영혼마저 잡아먹히는 듯한 섬뜩한 감각.
시간의 괴리속에서 지옥같은 시간이 이지성을 붙들어놓았다.
"아악! 아아아아악——!"
전신이 불타는 듯한 감각.
절대로 꺼지지 않을 지옥의 불꽃이 이지성을 휘감고 불태웠다.
달아오른 신경계가 이변을 호소했다.
춥고, 뜨겁고, 날카롭지만 둔탁했다.
모순적인 감각이 그를 휩쓸고 지나가기를 한참.
수없이 가라앉고 부상하던 이지성의 감각이, 어느 순간 그의 눈을 뒤덮고 있는 손바닥의 감촉을 느꼈다.
"끄으윽··· 으윽, 흐으으······."
뇌를 헤집는 죽음이 스스로를 유린하는 감각속에서, 그는 간신히 자신의 육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죽음의 시간이 끝난뒤에도, 이지성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손에 얼굴을 붙잡힌 채였다.
후욱, 후우-.
정돈되지 않은 숨결이 입밖으로 흘러나왔다.
그런 이지성의 귓가에 익숙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다시."
"······?"
목소리의 주인은 신유호였다.
여전히 이지성의 눈을 뒤덮고 있는 손의 주인.
그가 이지성에게 의미를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전했다.
그 직후, 이지성의 머릿속에서 다시금 죽음이 반복되었다.
"끄아아악! 끄으으으윽······!"
방금 전과 동일한 풍경이 이지성에게 찾아왔다.
똑같은 감각.
그리고 똑같은 현상.
그럼에도 그는 자신에게 다가온 죽음에 결코 익숙해질 수 없었다.
뇌를 파먹는 공포가 끊임없이 이지성을 짓눌렀다.
"아아악······! 아아아아악······!"
흐려지는 기억.
전신을 흩어버리는 공포속에서 그는 한순간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렸다.
이곳이 어디인지 잊어버렸으며, 또 그가 무엇을 위해 여기에 왔는지 잊어버렸다.
단지, 이지성은 두려워졌을 뿐이었다.
그가 지금 마주한 상황이 두려웠다.
그리고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기약없는 죽음이 두려웠다.
진득한 침이 흘러내려 바닥을 적셨으며, 눈에서는 눈물이 나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허억, 헉··· 끄아아아아악······!"
어느 순간 이지성의 평형감각이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갈라졌던 시야가 되돌아오며, 이지성을 감싸던 어둠 역시 사그라들었다.
철퍽-.
거친 비명에 갈라져버린 목소리.
그럼에도 비명을 쥐어짜내던 이지성은, 어느새 바닥에 엎드린 채로 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웨엑··· 우웨에에엑······!"
후욱, 훅-.
엇박으로 들이마시는 숨결속에서 그는 자신의 뺨을 스쳐가는 바람을 느꼈다.
손아귀에 쥐어진 풀잎.
바닥을 마주한 채 숙여진 이지성의 눈이 스스로 내뱉은 토사물을 보았다.
공포가 완전히 잦아든 순간, 그가 마주한 것은 차가운 현실이었다.
한바탕의 악몽속에서 그는 바닥에 엎드린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허억··· 흐윽, 흐으으······."
입에서는 피비린내가 느껴지고 있었으며, 뜨겁게 흐르는 눈물은 눈앞을 가리는 모습이었다.
애써 거친 숨을 가다듬는 이지성.
그런 그의 시야에 가까이 다가선 누군가의 신발이 보였다.
익숙한 신발.
그 발은 이지성에게 죽음을 알려준 인물의 것이었다.
"이지성씨. 내가 대체 당신을 어떻게 해야할까."
"······."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용납가능한 선이라는게 있는 법일텐데."
꽈악-.
이지성의 손아귀가 바닥에 늘어선 풀잎을 움켜쥐었다.
이곳에 들어왔을 때의 비장감같은건 어느새 사라져버린지 오래였다.
수없이 찢어지고 봉합된 스스로를 자리에 둔 채, 좌절하고 있는 이지성의 앞에 낯선 메세지가 떠올랐다.
- [폭군]에게 굴복의 맹세를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경고! [폭군]에게 전한 맹세는 강제적인 효력이 발생하며, 어떠한 수단으로도 패널티를 무효화할 수 없습니다.
폭군(暴君).
그 단어에 누구보다도 걸맞은 인물이 지금 이지성의 눈앞에 서있었다.
공포에 젖은 이지성의 눈이 폭군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제자리에 서있는 채로, 이지성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처음부터, 이지성이 당연히 그렇게 했어야만 한다는 것처럼 말이다.
"흐, 으······."
거칠어진 숨결이 입밖으로 흘러나왔다.
추레하고 비참한 자신의 모습이 짙은 그림자 속에 비추어졌다.
떨리는 손길.
흙먼지에 뒤덮힌 손을 움직이던 이지성이 스스로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으윽······."
그것은 항복의 선언이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폭군에 대한 추레한 목숨구걸이었다.
S급 헌터, 그림자사냥꾼.
암살자들의 정점에 선 인물은 스스로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뭐든지··· 할테니까······ 그러니, 제발······."
비참한 항복의 말.
그것을 앞에 두고서 폭군이 움직였다.
- 맹세가 성립되었습니다!
- 더 이상 어떠한 수단으로도 해당 맹세를 무효화할 수 없습니다.
헌터, 이지성.
그는 압도적인 공포 아래에 굴복했다.
6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