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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녹빛으로 빛나는 달빛 아래 붉은 마법진이 그려졌다.

마법사들은 다시 한 번 세심한 조정을 가하여 마법진이 정상적으로 작동함을 확인한 후 뒤로 물러섰다.

"데려와."

"알겠습니다."

검은 로브를 펄럭이며 어둠의 뒤편으로 사라졌던 여자가 얼마 안 가 작은 인영과 함께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여자의 곁에는 이제 막 10살 남짓 되었을까 싶은 소녀가 사방을 살피며 불안에 떨고 있었다.

"여기 어디야? 나 너희 몰라! 돌려보내 줘! 울트는 어디 있어?"

"닥쳐."

계속해서 반항하는 소녀의 팔목을 여자가 우악스러운 손길로 잡아끌었다.

자그마한 소녀는 힘에서 성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왁!"

여자가 마법진 한가운데로 소녀를 던져 놓았다.

붉게 빛나는 마법진이 소녀의 외형을 어둠 속에서 밝혀냈다.

일견 볼품없다 느껴지는 살집 없는 몸뚱이는 평범한 아이의 것과 다를 게 없었지만, 머리 옆으로 길쭉하게 뻗어 나온 귀가 명백한 이질감을 자아냈다.

엘프.

세계수에서 태어나 세계수로 돌아가는 존재.

그 어떤 종족보다 순수한 마나를 타고나는 고결의 상징.

마법사가 보았다면 하다못해 강렬한 탐욕이라도 드러내야 할 상대였지만.

괴이하게도 엘프를 바라보는 마법사들의 시선엔 온전히 짜증만이 서려 있었다.

콱!

"아악!"

마법사 하나가 망설임 없이 소녀의 손목을 짓밟았다.

허리를 숙인 마법사가 단검으로 소녀의 손가락을 깊게 베었다.

마법진으로 흘러들어 간 핏물이 수십 갈래로 찢어지며 각기 다른 색으로 분화했다.

치이익!

"..."

시시각각 요동치는 마법진을 면밀히 살핀 마법사가 고개를 저었다.

마법사는 멀리 떨어져 일련의 과정을 주시하던 남자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로드."

"보고하라, 카이브."

"정밀 분석을 해봤지만... 결과의 변화는 없습니다. 어떤 기만이나 은폐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타고난 마나 자체가... 불순한 것 같습니다."

"어이가 없어 흥미로울 지경이군."

그 어떤 생물종보다 순수한 마나를 타고나는 엘프 아니던가.

헌데 저 빼빼 마른 엘프는 마나 한번 정제해본 적 없는 늙은 인간 노인보다 혼탁한 마나를 지니고 있었다.

타락했다는 뜻이 아니다.

그저 혼탁할 뿐이었다.

말하자면 저건 일종의...

"결함품이군."

"성장은 멈췄고 지능 또한 크게 떨어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허허, 엘프에게도 장애자가 태어나는가?"

"들어본 적 없습니다."

"허나 이상한 일은 아니지."

엘프 또한 결국엔 생물이었으니.

변이에 의한 특이 개체의 발생은 필연적이었다.

"엘프 중에도 선천적으로 뛰어난 자가 존재한다. 그 대척점 또한 분명 존재할 터."

"동족에게 버림받은 걸 주워왔다는 시종장의 말이... 사실일지 모르겠습니다."

"그 거만한 엘프들이 결함을 안고 태어난 동족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참으로 궁금하군."

클클거리는 로드를 보며 카이브는 의아한 감정을 품었다.

카이브가 생각하기에, 지금 로드의 감정은 결코 유쾌할 수 없었다.

"저 엘프에게 '게네시스'와의 연관성은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혹여 레시나의 핏줄이나 후계인가했지만, 저런 결함품을 레시나와 연관시키는 것도 불경이겠군."

"제물로서 가치조차 인간의 아이보다 떨어집니다. 처분...할까요?"

"시종장의 심문을 마치고 처분한다."

"알겠습니다."

"아파! 아프다고 하잖아!!"

엘프는 자기 피를 보고 계속해서 소란을 떨고 있었다.

그 품위 없는 행동에 카이브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가 깜짝 놀라 자세를 바로 했다.

"죄송합니다."

"심문이 마무리될 때까지 현 상황을 유지하는 데 집중하도록. 갱들의 통제를 맡기지. 다른 지역에 부정적인 소문이 돌아봤자 좋을 게 없다. 여의치 않으면 손을 써라."

"알겠습니다."

"로, 로드시여!"

암막 저편에서 턱수염을 길게 기른 중년 남성이 허겁지겁 뛰어왔다.

조르지아 패밀리의 수장, 조르지아였다.

몇몇 마법사들의 표정이 급격히 일그러졌다.

"이놈...!!"

타인에게 보여서는 안 되는 본인들의 영역을 침범당했다.

응당 분노를 드러내야 마땅한 일이었으나, 로드가 손을 휘젓자 들끓던 마나가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조르지아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로드에게 다가갔다.

"조금 뒤에... 다시 올까요?"

"괜찮네. 무슨 일인가?"

"며, 명하신 대로 그들을 찾아왔습니다. 가까운 곳에 가둬 놨습니다."

"훌륭하군. 아주 좋아. 카이브, 뒷일을 맡기지. 나는 잠시 자리를 비우겠네."

"...알겠습니다."

카이브가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카이브는 로드의 곁을 떠나면서도 끝까지 이해할 수 없었다.

상당한 공을 들여 영지 하나를 일시적으로 지배에 놓았다. 발각되면 한동안 집요한 추적이 계속될 터다.

위험을 감수하고 영지를 접수한 이유는 '게네시스'의 행방을 추적하기 위해서였다.

'허나 제대로 된 성과를 얻어내지 못했다.'

600년도 전 게네시스의 마지막 사용자의 흔적이 디나르 근처에서 끊겼다는 정보에 의지해 벌인 일이다.

처음부터 도박성 짙은 시도였다.

'허나 실망스러운 건 실망스러운 거다.'

아직 시종장의 심문이 끝나지 않았지만 앞뒤 상황을 보아하니 시종장 또한 대단한 정보를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대로는 영지에 눌러앉아 실종된 영주라도 찾아봐야 할 판이다.

그런데도 로드는 근래 계속해서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 냉철하고 잔혹한 로드가, 기대 이하의 성과를 얻고서도 무려 어깨가 들떠 있었다.

대체 이유가 뭐지?

카이브는 턱을 매만지며 엘프를 향해 걸어갔다.

*

하늘에 동이 트기 시작했다.

로드의 재촉에 조르지아는 산길을 성큼성큼 걸어서 오두막을 찾았다.

얼마 안 가 수하 하나가 오두막을 지키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르지아가 손짓하자 수하는 눈치껏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허겁지겁 오두막까지 달려간 조르지아는 벌컥 문을 열어 자신이 데려온 두 사람이 잘 있는지 확인했다.

"오, 얌전히 계셨구먼."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우린 그냥 보내주시기로 했잖습니까?"

"쓰읍!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돈 문제로 당신들을 다시 찾아온 게 아니야."

조르지아가 짐짓 화난 체를 하다 주머니를 뒤적여 순도 높은 은화 몇 개를 꺼냈다.

"일단 이거 받고 진정 좀 해."

은화를 받아든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조르지아는 친절하게도 남자의 손목을 붙잡아 주머니까지 인도해 주었다.

"당신들이 해줘야 할 일이 있어. 아주 간단한 일이야. 귀하신 분이 부탁한 일이니까, 이번 일만 잘 끝내고 한 몫 단단히 챙겨서 떠나면 돼."

때마침 오두막에 들어선 로드가 품에서 묵직한 주머니 하나를 꺼내 던졌다.

주머니를 슬쩍 열어본 남자가 기겁하는 소리를 냈다.

"착수금이다. 일이 잘 끝나면 동일한 금액을 한 번 더 지불하겠다."

"그... 나리, 저희가 이런 돈을 받을 만큼 대단한 재주를 지니고 있지는 않습니다. 혹시 사람을 잘못 찾아오신 건 아닌지..."

"아니."

로드가 웃었다.

"자네들이 해주어야 할 일이 있다. 그 누구도 아닌, 자네들만 가능한 일이지."

*

갑작스러운 백작의 호출에 지미와 매튜는 허겁지겁 옷을 챙겨 입고 영주성으로 말을 몰았다.

알레시아 실종 사건에서 활약하며 백작의 호의를 산 둘이다.

웬만해서는 영주성을 찾아가며 긴장하지 않았겠지만, 타이밍이 나빴다.

"혹시 레이 녀석이 사고 쳤나?"

"대장, 그 새끼는 사고를 친다고 선언하고 갔어."

"거리 생각하면 디나르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도 않았을 텐데 도착하자마자 사고 쳤다 해도 소식이 벌써 도착했겠어?"

"그럼 아침밥이나 같이 먹자고 부르셨나 보지."

"우리 같이 천한 용병놈들이랑?"

"아니면 아가씨께서 또 가출하셨거나. 그도 아니면 저번 일로 포상을 내리실 수도 있지."

"우리 이미 돈 받았잖아? 이제 와서 무슨 포상이야?"

"젠장, 나까지 불안해지니까 그만 좀 촐싹대, 대장."

영주성 앞에서 서로의 흐트러진 옷차림을 잡아준 지미와 매튜는 침을 꿀꺽 삼키고 메이드의 안내를 받아 집무실을 찾아갔다.

무기를 건넨 후 집무실에 입장한 지미와 매튜가 나란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백작님을 뵙습니다."

"...일어나게."

지미와 매튜는 오랜 용병 생활로 다져진 '눈치'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거 좋은 일로 부른 건 절대 아니었다.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어떻게든 시선을 피해 보려는 둘을 가만히 내려본 백작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지금 레이가 디나르 지역에 있나?"

"크윽!"

일순 혈압이 치솟은 지미가 제자리에서 비틀댔다. 매튜는 자신도 모르게 양손을 가져가 얼굴을 가렸다.

"반응을 보니 맞는 것 같군."

"그, 그것이..."

"혹시 레이가 디나르를..."

편지지를 한 번 살펴본 백작이 떫은 얼굴로 물었다.

"조르지아 패밀리를 '조지기' 위해서 갔나?"

"끄르륵..."

지미는 사뭇 거품을 물 것 같은 얼굴로 답답함을 토했다.

매튜가 백작 앞에서 실례를 무릅쓰고 지미의 등을 탕탕 두들겼다.

컥컥 거리며 숨을 뱉어낸 지미가 간신히 혈압을 낮춘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일단 묻지. 자네들이 레이에게 사주했나? 디나르 지역의 갱단과 마찰을 일으켜 달라고?"

"그, 그건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웬만해서는 9살 아이가 혼자 디나르에 찾아가 난리를 피웠겠냐고 심문하고 싶지만 상대가 레이이니 넘어가도록 하지."

"가, 감사합니다."

"레이가 디나르에 찾아간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나?"

"..."

잠시 고민한 지미가 앓는 소리와 함께 입을 열었다.

"레이가 최근 수집한 고아가..."

"수집한?"

"...데려온 고아가 디나르 산 고아입니다."

"디나르 '산'?"

"...디나르 지역에 거주하던 고아입니다."

"그게 문제가 되었다는 건가?"

"본래 조르지아 패밀리가 노리던 아이였습니다. 크음."

슬쩍 눈치를 본 지미가 말을 이었다.

"똑똑하고 미색이 괜찮은 아이였다 보니 탐이 났나 봅니다. 상대를 잘 찾으면... 비싼 값에 넘길 수 있으니 말입니다."

"이해했네. 그럼 레이는 충돌이 발생했던 조르지아 패밀리를... 제거하기 위해 디나르로 간 것인가?"

"비슷합니다."

"말릴 생각은 안 했는가?"

"백작님, 그놈 고집이 보통 고집이 아닙니다."

매튜가 한 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싸우면 저희가 집니다."

"..."

"힘으로도 못 말립니다."

매튜는 하늘을 우러러 9살 먹은 놈한테 힘에서 밀린다는 사실에 일절 부끄러움이 없었다.

레이가 2~3살만 더 먹었어도 어지간한 정식 기사조차 승부에서 발을 뺄 게 뻔했다.

떳떳하기 짝이 없는 매튜의 눈동자를 바라본 백작이 납득한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잠시 나가서 기다리게."

"알겠습니다."

집무실 문이 닫히자 백작은 편지의 앞면을 펼친 채 책상을 툭툭 두드리며 고민에 잠겼다.

"...모하메드 경."

"하명하십시오."

"흑마법사의 존재까지 확인됐다면 황실에 보고해 지원을 기다리는 게 현명한 처사 아니겠나?"

"필립스 백작령의 기사는 결코 나약하지 않습니다."

"나는 나의 기사들을 믿네. 그대들의 강건과 충직을 믿어 의심치 않아. 허나 굳이 남의 영지의 일에 내 기사 전력을 희생시킬 필요는 없는 법이지."

"시간이... 부족합니다."

"맞는 말일세. 지원을 기다리는 동안 누군가 '티티'를 해칠지 어떻게 알겠는가."

백작이 클클거리며 편지지를 읽었다.

['티티'에게 위해한 세력.]

이 마지막 줄만 아니었다면.

백작은 자신의 기사들을 결코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영락했네. 600년도 더 지난 선조의 맹약에 묶여서."

"..."

"필립스 가는 제국 변방에 기생하는 이름 모를 가문이 되었고, 자네는 빛나는 재능을 지니고도 황도 한 번 밟지 못하고 내 곁을 지켰지."

"백작님."

"우리들의 선조는 이 모든 것은 예견하고서도, 우리가 600년전 영웅과 같이 영락하길 바라셨지."

필립스 백작은 어린 시절 한 번 보았던 썩은 나뭇가지를 회상했다.

세계수가 태초로 대지에 내딛은 12 뿌리 중 하나이자.

세계수의 분노와 저주를 받아 그 가치와 힘을 잃고 영락한 영웅의 무장.

게네시스.

"흑마법사의 출연은 우연인가, 그도 아니면 이제 와서 무언가를 눈치챘나."

"..."

"하긴, 무슨 상관이겠나. 얼마 남지 않았네. 길어봤자 20년이지. 마지막 수호자조차 의무를 버리고 사라졌네. 알레시아에게까지 이 속박을 씌우진 않을 걸야."

"..."

"그러니 우리는 맹약에 의한 의무를 다하도록 하지. 기사들을 전부 소집하게."

"보육원에 파견을 나간 디디에 또한 귀환시키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인연 (1)

33화

보육원을 향해 열 기가 넘는 말들이 대열을 갖추고 달려왔다.

그 숫자도 놀라운데 말 위에 올라탄 이들 대부분이 무장을 갖춘 기사였다.

아이들을 상대해주다 보육원 입구까지 뛰어나온 디디에는 기사들 사이 백작의 얼굴을 확인하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디디에는 종자가 건네주는 무장을 받아들며 참지 못하고 물었다.

백작이 짧게 설명했다.

"디나르에 흑마법사가 나타났고, 자작가에서 지원을 요청했네."

지미와 매튜를 비롯해 자리에 있던 기사 대부분이 당황했다.

그들도 백작의 호출을 받고 모였을 뿐 자세한 상황은 모르고 있었다.

"백작령의 방위는..."

"마법사와 병사들이 맡을 걸세."

필립스 백작령에 머무는 마법사의 숫자를 생각하면 방위 전력은 충분하다.

다만 디나르를 지원하는데 오직 기사 전력만 편성했다는 것은 이번 사안이 대단히 민감하다는 것을 뜻했다.

디디에는 종자의 도움을 받아 갑옷을 입다가 눈을 얇게 떴다.

"백작님,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말하게."

"혹시 이번 사건에 레이가 연관되어 있습니까?"

"...놀랍게도 그렇다네."

심란한 얼굴을 한 디디에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불충한 기사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갑작스러운 디디에의 행동에 백작은 당황하면서도 너그러이 답했다.

"이야기하게."

"레이는 저와의 내기에서 이긴 후 제게 보육원 울타리를 한 달 동안 넘지 말아달라 청했습니다."

"아이들을 잘 가르쳐 달라는 이야기 아니었나?"

"저 또한 그리 여겼으나, 레이는 굳이 제 행동반경을 보육원 안으로 제한하기를 원했습니다. 레이는... 보육원의 방위를 제게 부탁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 사건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헤아려 주십시오."

"디디에 경!!"

필립스 가의 기사 중 한 명인 젠킨슨이 고함을 쳤다.

기사가 보육원에 와서 검을 가르치는 것도 경악할 지경인데 백작의 부름을 받아놓고 면전에서 이게 뭐하는 짓이란 말인가.

"머리라도 다쳤는가? 이게 대체 무슨 불충인가?!"

젠킨슨의 지적은 타당했으나 백작이 손을 휘젓는 것으로 발언을 막았다.

"지미, 매튜. 짐작 가는 게 있는가?"

지미는 위액이 역류해 식도에 구멍이 뚫릴 지경이었지만 이를 꽉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디나르에서 데려온 보육원의 아이가 서클을 타고났습니다. 마법사의 표적이 된 아이라는 걸 뒤늦게 깨닫고 레이가 직접 디나르를 찾아가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그 사실을 내게 숨겼군."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되었네. 디디에 경."

"하명하십시오."

"정예병 30명을 차출해 보육원을 지키게. 지미, 디디에 경을 돕게."

"백작님!"

젠킨슨이 경악했으나 백작이 다시 한 번 더 손을 저었다.

"서클을 타고났다는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디나르에서 패퇴한 흑마법사 중 일부가 보육원을 노릴걸세. 발견하면 반드시 척살하게."

"명 받들겠습니다."

"레이, 그 아이가 아니었다면."

백작이 상황을 이해 못 한 기사들을 차분하게 둘러보았다.

"흑마법사의 발견이 몇 주에서 몇 달 이상 늦춰졌을 걸세. 그는 충분한 공을 세웠고 존중 받을 자격이 있어. 그리고 매튜."

"예."

"디디에 경의 자리를 대신 맡아주게. 할 수 있겠나? 값은 치르겠네."

기사들과 나란히 서라는 백작의 제안에 매튜의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다.

무모하고 위험한 일이었다.

허나 레이가 디나르 지역에 홀로 잠입해있다는 걸 떠올린 매튜는 짧은 한숨과 함께 답했다.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레이는 웃음꽃을 피우면서도 바짝 긴장했다.

지하실을 확인한 시모네가 아이들을 제거하라 명하기라도 하면 당장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시모네의 곁을 갱단만 지키고 있다면 상관 없겠지만 실력 좋은 흑마법사라도 여럿 대동했다면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될 수도 있다.

덜그럭

지하실로 향하는 문이 열린다.

레이를 포함해 쓰러져 있는 아이 세 명을 확인한 시모네의 수하가 지상을 향해 소리쳤다.

"시모네님, 아이 세 명을 발견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살아있어?"

"확인해보겠습니다!"

나자빠진 브랙의 품을 뒤져 열쇠를 챙긴 수하가 철창을 열었다.

아이들의 코 아래 손가락을 대자 미약한 공기의 흐름이 느껴진다.

"살아있습니다!"

"기다려봐."

스스스!

캄캄한 지하로 내려오는 시모네의 곁으로 더욱 짙은 어둠이 겹친다.

거대한 구체 형태로 집약된 어둠 속에서 가느다란 팔다리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아이들을 발견한 어둠의 구체가 환희하며 아가리를 벌렸다.

구체의 절반이 쩍 벌어지며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나자 레이가 순간적으로 주먹을 말아쥐었다.

"으음, 아냐 아냐."

시모네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안 돼."

암흑 정령이 피와 살만을 탐했던가.

그들이 탐하는 건 혼돈과 공포가 뒤섞인 감정이었다.

이 상태로 먹이로 줘봤자 씹는 맛밖에 못 느낄 터다.

"기왕 던져줄 거면, 의식이 돌아왔을 때 던져주면 좋겠지."

"...어떻게 할까요? 깨울까요?"

"영주성으로 옮겨. 당장 깨워도 정신이 완전히 돌아올 때까지는 시간이 걸릴 테니."

"알겠습니다."

레이가 주먹에서 힘을 뺐다.

이대로 뛰쳐나가 시모네의 목을 움켜쥐고 인질극이라도 해볼까 싶었지만 포기했다.

무력한 아이로 취급되는 이상 지금보다 괜찮은 기회가 올 것이라 생각됐다.

입과 팔다리가 묶인 채 마차에 실린 레이는 자작령 영주성까지 옮겨졌다.

영주성엔 인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지하에 가둬놔."

"알겠습니다."

차가운 공기가 흐르는 영주성 지하엔 사람을 가둘 수 있는 장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공간은 창고로 이용되고 있었지만, 지하 깊숙한 곳에서 사람의 신음이 흘러나왔다.

레이와 아이들은 잡동사니가 쌓인 철창 안쪽에 갇히게 되었다.

레이를 철창 안에 던져놓은 수하는 스트레스라도 풀고 싶었는지 레이에게 발길질을 해댔다.

"젠장,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불안해 죽겠네!"

퍽! 퍽!

발길질을 당한 레이가 큰 충격을 받은 듯 꺽꺽대다 몸을 움츠린 채 혼절했다.

기분이 개운해진 수하는 바닥에 침을 찍 뱉은 후 지하를 떠났다.

잠시 말없이 쓰러져 있던 레이가 팔목에 힘을 주었다.

투둑!!

팔을 묶었던 끈이 떨어져 나갔다.

발목을 묶은 끈과 눈가리개까지 벗겨 낸 레이는 같이 잡혀 온 아이들을 바라봤다.

둘 중 하나는 정신을 차린 것 같았지만, 굳이 지금 결박을 풀어주어 소란을 일으킬 필요는 없었다.

"곧 구해줄 사람들이 올 거야. 불안해하지 말고 조용히 기다리고 있어."

"으읍..."

깨어난 아이를 진정시킨 레이가 철창을 붙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오랜 시간 관리가 안 되어 여기저기 녹슬어 있었다. 재질 자체도 싸구려 잡철에 가까워 힘을 잘못 가했다간 휘는 게 아니라 부러질 모양새였다.

'혹시 다시 들어올 때를 대비해야 하니...'

끼끼긱

레이의 손아귀에 붙들린 철창이 천천히 휘어졌다.

아슬아슬하게 사람 하나가 통과할 틈을 만든 레이가 철창을 빠져나왔다.

계단 위를 잠시 바라본 레이는 신음이 흘러나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시국에 영주성 지하에 감금당해있다는 건 평범한 죄인은 아닐 터다.

반대쪽 창고에서 굴러다니던 쇠막대기를 주운 레이가 지하 안쪽으로 발을 옮겼다.

영주성 가장 깊숙한 감옥에는.

노년이 다 되어가는 남자가 두 팔이 결박된 채 묶여 있었다.

*

영민한 아들은 다양한 분야에 재능을 보였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마나를 다루는 법을 깨달았고 정령과의 교감에도 성공했다.

아들이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 본인의 재능을 활짝 피우길 바랐다.

허나 그 녀석은 하필 나의 뒤를 잇길 갈망했다.

아이의 부모를 향한 동경을 껄끄러워할 애비가 어디있겠냐만은.

아들이 나와 같이 맹약에 묶여 서서히 말라죽어 가는 걸, 나는 바라지 않았다.

얼마 안 가 맹약이 종식된다.

나의 세대에서 끝낼 수 있었다. 내가 조금만 장수한다면, 아들에게 이 짐을 물려주지 않고도 결말을 맺을 수 있었다.

아들이 나를 동경하길 바라지 않았기에 아들을 멀리했다. 내가 정복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 되돌아보면, 그건 그저 나의 혐오를 아들에게 고집했을 뿐이었다.

내 일방적인 강요는 서로를 향한 오해와 균열을 일으켰고.

결국 나의 영민한 아들은 애비를 향한 증오와 열등감에 빠져 방탕함에 취하기 시작했다.

잘못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아들은 나의 후계를 자처할 반짝임조차 잃어버린 후였다.

누구를 원망할까.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인데.

처음엔 그리 생각했다.

허나 600년 전 맹약이 결국 나의 주인까지 홀려버린 후.

나는 이곳에 홀로 남아 피폐해져 갔다.

영주 대리의 권한으로 모든 보고를 서면으로 돌렸고, 그저 영주성 안에 틀어박혀 영혼 없는 눈으로 서류를 읽어내고 도장을 찍어갔다.

그 탓에 마지막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서류가 조작되었고 측근은 제거되었으며 대부분의 실권이 이미 장악당했다는 걸.

티티. 빌어먹을 티티.

당신이 원망스럽다. 당신이 너무나도 원망스럽다.

광기에 빠진 아들의 칼날을 피해 도망쳤을 때.

나는 영주성의 가장 깊숙한 방에 숨어서 당신의 목을 졸랐지.

그때 당신이... 뭐라고 했더라?

"영감님."

"...?"

"영감님, 정신 좀 차려봐요."

피에트로가 핏물이 말라붙은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누구?"

"혹시나 해서 여쭙는데, 자작가 시종장님 되십니까?"

시종장.

그 영광스럽고 저주스러운 직함을 떠올린 피에트로는, 뿌옇던 시야가 서서히 개는 것을 느꼈다.

컴컴한 감옥 너머에 자그마한 인영을 확인한 피에트로가 마른 입술을 열었다.

"...그래, 내가 시종장 피에트로다. 넌... 누구냐?"

"어, 그러니까요."

레이가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자식 농사 말아드셨다는 소식 듣고 백작령에서 찾아왔습니다."

다시 침묵에 빠진 피에트로가 간신히 입을 뗐다.

"...뭘 말아먹어?"

"자식 농사 거하게 말아드셨다면서요? 사실 저도 이꼴날까 걱정입니다. 기껏 먹이고 재우고 키워놨더니 나중 가서 딴소리하면 어떡하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피에트로는 눈앞의 녀석이 제정신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백작령에서 왔다고? 누구 지시로?"

피에트로의 반문에 레이가 잠시 고민했다.

여기서 '필립스 백작령의 고아 수집가인데 남의 고아 탐내는 새끼들 조지러 왔다'고 설명해봤자 의심만 살 게 뻔했다.

레이는 적당히 둘러댔다.

"필립스 백작님이 보낸 세작입니다."

"허허, 내 입을 열어보겠다고 별 수작을 다 부리는군."

어두운 감옥이다.

피에트로는 레이의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으나, 흐릿한 인영만으로도 상대가 어린아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저 몰골로 세작을 운운해?

너무나도 뻔한 수작에 피에트로가 헛웃음을 흘렸다.

"시모네가 시켜서 왔느냐? 아는 게 없다고 했을 텐데."

"...'티티'에게 위해한 세력."

피에트로의 몸이 움찔 떨렸다.

"필립스, 영주 대리 자격으로 즉시 병력 파견을 요청한다. 영지를 정상화시키길 바란다. 맹약에 속한 의무를 다하라."

"설마, 편지가 전해진 건가? 그럴 리가. 브릿지는 분명..."

"조르지아 패밀리가 가지고 있더군요. 제가 영지 사정을 정확히 알고 이곳에 온 건 아닙니다. 디나르 영지 내에 이상 징후가 발견되어서 파견되었고 조르지아 패밀리를 조사하던 중에 편지를 발견했죠."

"그럼 당장 돌아가 전하지 않고 뭐하는 건가!"

"편지는 제 브릿지를 통해 백작님께 전달했습니다. 저는 좀 더 상세한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이곳에 온 거지요."

"...!"

"잡담할 시간이 없습니다."

언제 누가 다시 감옥을 찾아올지 몰랐다.

"의심을 완전히 떨치진 못하신 것 같지만, 제가 원하는 건 이 일의 주동자와 협력자, 그들의 신분과 목적입니다. 이 정도는 제 정체와 관계없이 답해주실 수 있을 겁니다."

"...알겠네."

"시모네가 이런 일을 벌인 동기가 무엇인가요?"

"...암흑 정령과 계약했네."

"정령에 대해 무지해서 여쭤봅니다만, 암흑 정령과 계약한 게 동기와 대체 무슨 상관입니까?"

"술사와 정령은 교감을 통해 서로의 색깔을 닮아가네. 충분한 실력과 정신력을 갖추지 못한 술사가 정령과 계약하면 정령의 색깔에 일방적으로... 매몰되네."

부정(不正)의 감정에 취해 타락한 존재인 암흑 정령은 술사의 심층에 내재된 충동과 욕구를 손쉽게 유도하고 증폭시킨다.

레이는 어딘가에서 주워들었던 내용을 되새기며 상황을 되짚었다.

'암흑 정령과 계약을 시도한 시점에서 시모네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겠지만...'

이리 대범하게 일을 벌이고, 자기 친부까지 감금해서 고문할 지경까지 타락한 건 암흑 정령의 영향 탓이 컸을 터다.

다만 암흑 정령이 굴러다니는 돌멩이도 아니니, 누군가 시모네의 계약을 유도했다고 보는 게 합당했다.

"진짜 주동자가 누굽니까?"

"...로커스트. 고위 흑마법사이자 악명 높은 암흑 정령사."

"이런 씨..."

레이의 미간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로커스트란 이명을 들어봤기 때문이다.

이건 대단히 큰 문제였다.

마법사에 대해 무지한 레이가 이명을 들어봤다는 건 상대가 제국 전역에 이름을 떨친 악인이란 뜻이었다.

"사칭일 가능성은?"

"적다."

"그 외에 제가 백작님에게 보고해야 할 정보가 있습니까?"

"로커스트는 게네시스의 흔적을 쫓고 있었네. 알아들으실 거야."

계속된 고문 탓인지 탁한 기침을 뱉어낸 피에트로가 레이를 재촉했다.

"여기서 탈출해라. 시모네가 오기 전에."

"...시모네가 강합니까?"

"시모네가 다루는 암흑 정령은 만만한 존재가 아니다. 하나도 아니고 둘이야."

"걔들도 칼 맞으면 죽잖아요?"

"정령은 불멸의 존재야. 일시적으로 모습을 잃어버릴 뿐 다시 부활하지. 무엇보다 허상이라도 베려면 검기라도 다룰 줄 알아야 해."

"시모네 본신의 무력은?"

"...너 같은 아이가 대적할 상대가 아니다. 어서 나가!"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를 노리던 마법사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성공했으니 최소한의 목적은 이루었다.

진정 로커스트란 거물이 이번 일에 개입했다면 레이 홀로 더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빠르게 디나르를 벗어나 백작에게 정확한 사실을 알리고 상황의 추이를 지켜보며 보육원을 보호할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현명했다.

"씁..."

감옥에 갇힌 아이들이 순간 떠올랐으나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레이가 도주하면 그들은 분명 암흑 정령에게 잡아먹히겠지만 모두를 구할 수는 없었다.

결정을 내린 레이가 몸을 돌린 순간.

저벅

"....!"

발자국 소리.

피에트로가 속삭였다.

"시모네다. 반대편 감옥에 숨어 있어라. 내가 소란을 떨어 주의를 끌 테니, 그 사이 몰래 도망쳐라."

레이가 잠시 고민했다.

도망쳐도 몇 분 안에 아이가 하나 사라졌다는 게 들킬 거다.

셋 중 하나가 사라졌으니 못 알아볼 리가 없다.

그리 될 바에 차라리...

"영감님."

고문과 위협을 위해 누군가 가져다 둔 무기를 레이가 살폈다.

대부분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쓸만해 보이는 도끼와 검이 한 자루씩 있었다.

"좋은 소식과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는 소식이 있습니다."

"...?"

"좋은 소식은 제가 아드님보다 강하다는 겁니다."

어둠 속에서 레이의 안광이 시푸르게 타올랐다.

그제야 피에트로는 눈앞의 상대가 아이의 모습을 한 괴물인 걸 알아차렸다.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는 소식은, 협력해주신다면 제가 아드님의 목을 베어드릴 수도 있다는 겁니다."

"..."

"협력하시겠습니까?"

눈을 감았던 피에트로가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아들이 더 많은 업보를 쌓기 전에 죗값을 치르게 해주게."

레이가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할 일은 다 끝났다.

시모네를 마무리하고, 귀환해야 했다.

인연 (2)

34화

"시모네!! 시모네!! 시모네!!"

시모네는 지하실에 도착하자마자 피에트로의 괴성을 마주해야 했다.

철창 안 아이들의 모습을 제대로 살피지 않고 지나친 시모네가 곧장 지하실의 가장 깊은 곳에 설치된 감옥으로 향했다.

피에트로가 사슬을 들썩이며 연신 소리쳤다.

"네가, 네가 어찌 아비에게 이럴 수가 있느냐!!"

"아직 정정하시군. 앞으로 일주일은 더 매달려 있으셔야겠어."

자백을 받아낼 수단이야 많았지만 그 대부분이 표적의 정신력이 약화되었을 때 더욱 효과를 발한다.

때문에 피에트로의 정신력이 적당한 수준까지 떨어져 내릴 때까지 시모네와 마법사들은 지속적인 고문을 가했다.

시모네가 혀를 끌끌 차며 끝이 넓적한 쇠막대기를 잡았다.

화롯불에 저절로 불이 붙으며 쇠막대기를 달구기 시작했다.

"아직 버틸만 하신가봅니다?"

시모네가 낄낄거리며 쇠막대기를 들어 올린 순간.

레이가 반대편 감옥에서 은밀하게 땅을 박찼다.

크르륵!

시모네와 계약한 암흑 정령이 레이에게 반응했다.

눈깔이 어디 달렸는지도 모를 정령이 아가리를 쩍 벌리고 다가온다.

검은 덩어리가 울렁이는 광경을 보고 레이는 짙은 혐오감을 느꼈다.

'하여튼 빌어먹을 정령들.'

전생에도, 레이는 소설 속 정령을 향해 종종 불쾌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죽음에서 자유로운 존재들.

무엇하나 처절하지 않고, 모든 게 장난 같지만, 힘을 빌려줄 때는 더럽게 까탈스러운 새끼들.

소설 속 존재라 해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더군다나 지금은 현실이었다.

츠즈즉

레이가 검과 도끼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어차피 정령은 못 죽이니, 단번에 정령을 돌파해 시모네의 목을 벨 생각이었다.

퍼억!

암흑 정령에게 검기가 서린 병기가 박혀든다.

살을 찢어내는 촉감이 손가락 끝을 내달렸다.

병기가 박힌 틈 사이로 검은 무언가가 정령에게서 쏟아졌다.

"...?"

본래 망설이지 않고 시모네의 목을 치려 했던 레이가 걸음을 멈췄다.

정령의 감정이 정령사에게 역류한다.

휘몰아치는 당혹과 공포의 감정이 정령사를 잠식했다.

시모네는 새파랗게 질린 채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커걱...! 컥! 커헉...!"

"?"

암흑 정령이 어둠 속에서 꿀렁인다.

레이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촉수를 닮은 팔다리를 휘두르며 발악한다.

레이는 잠시 고민했다.

극단적인 예외를 제외하면 정령을 죽일 수 없다고 여겨지는 이유.

현실에 나타난 건 허상이고 본체는 다른 차원에 중첩되어 있다든가.

본체는 아공간에 머물고 그 일부만을 현실에 구현한다든가.

아무래도 뜬구름 잡는 소리이긴 했으나, 요지는 이거다.

정령의 불멸성은 결국 공간과 연관되어 있고.

하르시아 류 공간검의 검기는.

공간을 변질시킨다.

"말해 봐."

레이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웬만하면 참으려고 했지만.

워낙 입이 근질거리는 통에 결국 머리에서 맴돌던 대사를 내뱉고 말았다.

"정령도 피를 흘리나?"

[크르르가각...! 하르, 하르시...!]

레이의 입가에 진한 웃음이 피어남과 동시에.

촤악!!

검과 도끼가 암흑 정령을 양단했다.

레이는 정령에게서 흘러나오는 검은 무언가를 뒤로 한 채 시모네에게 다가갔다.

마음 같아선 이 불속성 효자에게 불속성 고문이라도 좀 가해보고 싶었으나 시종장의 앞이니만큼 자제했다.

"영감님, 물어봐야 하는 거라도 있습니까."

"...엘프, 엘프의 행방."

"시모네, 엘프를 어디로 데려갔지?"

"어, 허억! 허어억! 엘프?"

"그래, 엘프 어딨어?"

역류한 공포 탓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시모네가 꺽꺽거리며 답했다.

"아지트, 우리 아지트. 커컥!"

"아지트의 위치는?"

"크억! 컥!"

"아지트 어디 있냐고 묻잖아."

"도, 동쪽 강줄기 갈라지는 곳...!"

"흑마법사는 몇이나 있지?'"

"모, 몰라! 커거걱."

들어야 될 정보는 얼추 들었다.

더는 시간이 없었기에 레이는 시모네의 가슴에 검을 박아넣고 입을 막았다.

레이의 손아귀 안에서 시모네의 비명이 맴돌았다.

"크륵..."

잠시 부들거리던 시모네의 몸이 축 늘어졌다.

뒤로 물러선 레이가 피에트로를 바라봤다.

자식 죽였다는 이야기를 길게 해봤자 좋을 게 뭐가 있을까.

그저 덤덤하게 인사했다.

"그만 가보겠습니다. 다시 뵙게 되었으면 좋겠군요."

"...날 풀어주게."

"영감님까지 모실 여력이 없습니다."

"그게 아니야. 영주성 내에 쉘터가 있네. 몇 시간쯤은 농성할 수 있을 거야. 내가 미끼가 되겠네."

시모네를 죽인 게 들키게 되면 대신 관심을 끌어 시간을 벌겠다는 소리였다.

잠시 피에트로를 바라본 레이가 검을 휘둘렀다.

피에트로의 팔을 묶었던 사슬이 잘려 나갔다.

"큭!"

너무도 오랜만에 바닥을 디딘 피에트로가 후들거리는 다리로 비틀대다 벽을 짚었다.

철창을 나와 아들을 한 번 바라본 피에트로는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뒷문까지 안내해주겠네."

"알겠습니다."

뒷문이라면 정문보다는 눈에 덜 띌 터다.

레이가 앞서 걸어가 지하실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여전히 영주성 내부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피에트로를 실각시키는 과정에서 인력을 대부분 정리한 것 같았다.

피에트로는 간간히 비틀거리면서도 등허리를 곧게 핀 채 앞서 걸었다.

레이가 최대한 감각을 강화해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강요하는 건 아닙니다만."

"...?"

"목숨을 끊으실 거면 기간을 좀 넉넉히 잡으시면 좋겠습니다. 자작령 정상화를 위해선 영감님 도움이 필요할 것 같군요."

"...내 아들이 지은 죄가 너무 깊네. 나라도 살아서 갚아야지."

"그거 다행이군요. 삶에 목표가 생겼다는 건 좋은 일입니다. 백작님께 잘 말씀 드려 영감님을 빠르게 구출할 수 있도록 해보겠습니다."

"자네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군."

정신나간 화법과 암흑 정령 두 기를 단번에 베어내는 기사급 무력.

그리고 지하를 벗어나며 드러난 너무나도 어린 외견.

피에트로는 지금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산더미다. 그럼에도 피에트로는 침묵을 지켰다.

쓸데 없는 정보를 많이 알아봤자, 흑마법사에게 유출될 확률만 높아졌다.

피에트로와 레이는 서로 아무것도 모르는 관계여야 했다.

"다 왔군."

뒷문에 도착했다.

레이는 뒷문 너머로 아무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한 후 문을 열었다.

끼이익

그림자 두 개가 레이 머리 위로 진다.

레이는 고개를 들지 않고 검자루부터 잡았다.

감각을 최대한 강화했는데도 그 어떤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그럼에도 머리 위에 사람의 그림자가 진다.

레이는 검을 뽑아내면서도 좆 됐다는 걸 깨달았다.

얇은 목소리가 울렸다.

"조카? 조카야?"

"?"

뽑혀나오던 검이 멈췄다.

*

여자는 울트와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디나르를 찾아왔다.

울트는 영주성으로 찾아가 시종장 피에트로를 만나보라고 했다.

영주성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지만 정문에 손님을 받는 사용인이 없었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소리를 질러도 답변할 사람이 없을 것 같기에, 영주성을 크게 돌며 다른 입구를 찾았다.

"여긴...가?"

영주성 뒷편에 작은 쪽문 하나를 발견했다.

마침 인기척 두 개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여자는 얌전히 자리를 지키고 기다렸다.

그때 갑옷을 차려입은 남자 한 명이 영주성 정문으로 향하다말고 여자를 발견하곤 곁으로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아름다운 레이디. 여기는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있어."

"?"

"만나야 될 사람."

"아하. 저도 볼일이 있어 들렀습니다. 시간이 겹쳤군요."

남자가 인기척이 다가오는 방향으로 손가락을 들었다.

"마중이 나오는군요."

끼이익

문이 열렸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레이의 얼굴을 확인한 여자가 깜짝 놀라 물었다.

"조카? 조카야?"

"?"

검을 뽑다 멈춘 레이가 자기 기준으로 우측에 서 있던 여자를 보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자 갑옷을 입은 남자가 사람 좋은 웃음을 내보이며 한 발짝 물러났다.

"서로 면식이 있나 보군요. 먼저 오셨으니 먼저 볼일을 끝내시죠."

골몰하던 레이가 간신히 얼마 전 기억을 떠올렸다.

아버지 무덤에서 마주쳤던 여자. 목소리와 실루엣이 비슷했다.

"아, 설마 묘비?"

"아니야."

"네?"

"내 이름 묘비 아니야. 이름 세리아야."

"그렇군요."

레이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저랑 관계가 어떻게 되시기에... 절 조카라고 부르시죠?"

"아빠 동생. 아빠 동생이야."

"어, 음."

레이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애비라 부를 수 있는 분만 셋이라서요."

생물학적 애비.

호적상 아버지.

마지막으로 보육원을 운영하는 지미가 레이의 대부로 등록되어 있었다.

"셋 중 누구신지... 물론 앞뒤 정황으로 예상은 갑니다만."

"에반."

레이의 호적상 아버지의 이름이다.

레이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고모. 제대로 인사드리는 건 처음이네요."

세리아의 말을 온전히 믿는 건 아니었다.

다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레이는 꽤 조심스러웠다.

고모는 왜 여기있고 곁에 서 있는 남자는 누구란 말인가.

"여기까진 어쩐 일로 오셨나요?"

"부탁했어. 울트가 말이야."

한 발 물러나 있던 피에트로가 다급히 앞으로 나섰다.

"울트...? 영주님의 지인이십니까?"

드러난 피부에 온통 화상 자국이 새겨진 피에트로를 보며, 세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피에트로를 만나라 했어. 혹시 당신이?"

"제가 가디 자작가의 시종장 피에트로입니다."

"울트가 당신을 찾아가 물어보라 했어. 티티가 무사한지. 문제가 있다면, 해결해달라 했고."

"티티는... 그보다, 그보다 영주님은 무사하신 겁니까? 아니면 혹시...!!"

"잠시만요."

말을 자른 레이가 옆에서 흥미롭게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남자를 가리켰다.

"고모, 저분이랑 일행은 아니죠?"

"아니야."

"그, 무슨 일로 오셨나요?"

레이의 질문에 남자가 시원스레 답해주었다.

"시모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왔습니다. 물론 두 눈으로 확인한 건 아닙니다만."

레이가 피에트로를 뒤로 밀었다.

레이의 손이 검자루로 향한다. 남자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원리는 잘 모르겠지만 심장이 멈추면 연락이 가는 특별한 마법을 마법사 친구들이 심어놨었다고 합니다."

허리춤에 머물렀던 남자의 손이 사라졌다. 레이는 마주 검을 뽑아내면서도 늦었다는 걸 직감했다.

"여러분이 죽였나요?"

쩌엉---!!!

레이의 코앞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후끈한 열기가 뺨을 데우고 충격파가 고막을 뒤흔들었다.

휘청이는 몸을 다잡은 레이가 억지로 눈을 치켜떴다.

검을 휘둘렀던 남자가 어느새 수십 미터 가까이 밀려나 있었다.

"이런."

남자가 불에 그슬린 망토를 툭툭 털어내며 아쉬워했다.

"기척을 지우는 솜씨를 보고 검사인 줄 알았는데."

세리아를 중심으로 전개된 푸른빛의 실드가 균열을 일으키며 불똥을 튀기고 있었다.

남자의 공격에 가격당한 흔적이었다.

"폼 잡다가 괜히 거리만 내주었군. 로드가 봤다면 한마디 했겠어."

남자의 검에 맺힌 검기가 실처럼 압축된다.

수십 개의 검기 가닥이 동시에 치솟아 오르더니 서로를 옭아매고 회전하고 반발하며 눈 부신 빛을 토해냈다.

검강. 엑스퍼트의 경지를 초월한 규격 외의 강자의 상징.

한술 더 떠 검은 로브를 입은 마법사가 셋이나 모습을 드러내 남자를 보좌하듯 진형을 잡는다.

휘몰아치는 불쾌한 마나를 보고 레이는 확신했다.

흑마법사들이다.

'어설픈 동정심 탓에 내 무덤을 팠네.'

시모네가 죽자마자 적들이 움직일 거라곤 생각 못했지만 시모네를 암살하는 게 그냥 도망치는 것보다 리스크가 크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 시모네를 죽였던 건, 암흑 정령에게 씹혀나갈 아이들이 눈에 밟힌 탓이 컸다.

'그래듀에이트를 수하로 부리는 걸 보니 로커스트나 그에 준하는 거물이 이번 일에 개입하긴 했나보군.'

정보를 얻은 건 좋은데 저만한 전력이면 정말 반항도 못해보고 목이 떨어질 거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믿을 건 결국 혈육뿐이다.

물론 세리아와 레이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이었지만, 레이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세리아를 바라봤다.

"귀여운 조카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쟤들 누구야?"

바닥에 쓰러져 몸을 가누지 못하던 피에트로가 고변했다.

"저자들이 티티를 끌고갔습니다."

순간 세리아의 안색이 바뀌었다.

"...그래? 그러면 안 되는데."

콰앙!!

세리아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남자가 지면을 찍어누르며 폭발적으로 가속했다.

남자의 모습을 놓칠 뻔한 레이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잔상을 뒤쫓았다.

'세리아가 정말 고모라면 나이가 그리 많지는 않을 텐데.'

그래듀에이트를 상대 가능한가?

한껏 긴장한 채 검을 다잡는 레이를 세리아가 뒤로 밀었다.

그래듀에이트를 앞에 둔 세리아는, 물러서는 대신 한 발 앞으로 나섰다.

"헤일로 기동."

[헤일로 60초 과부하. 폭격 준비.]

은폐 장막이 벗겨지며 황금색으로 빛나는 직경 1 m의 원환면(도넛 모양) 형태의 아티펙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허공에서 회전하기 시작한 헤일로의 중앙으로부터 짙푸른 녹빛이 터져 나온다.

"폭격."

원반 형태의 빛 무리 수십 개가 헤일로로부터 쏟아져 나왔다.

지상을 향해 떨어지는 녹빛의 원반을 확인한 흑마법사들이 공격 마법을 포기하고 다급히 실드를 전개했다.

콰가가가가강!!!

굉음과 함께 땅이 뒤집힌다.

충분히 놀라운 위력이었지만, 그래듀에이트는 웃음을 잃지 않고 폭격의 한가운데를 유유히 돌파했다.

"멸리의 빛."

이번엔 세로로 갈라져 있는 은색의 병기가 세리아의 곁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적을 꿰뚫어라."

은색 병기의 끝이 시뻘겋게 빛나더니 붉은 광선을 전방으로 조사했다.

광선이 쏘아지는 궤적을 따라 지면이 삽시간에 타올랐다.

촤아악!!

남자가 갑옷의 성능을 믿고 팔로 상체를 가렸다.

허나 마나를 뒤집어쓴 값비싼 갑옷조차 초고열의 광선이 맞닿자 삽시간에 녹아내렸다.

"이런. 어디 돈 많은 마탑주의 자식이라도 되나."

아티펙트 하나하나가 고위 마법에 필적할 만큼 고강하다.

어지간한 마탑에선 외부로 반출 자체가 불가능한 등급의 아티펙트다.

그걸 몇 개씩이나 두르고도 검사 상대로 전진하는 멍청함까지 갖추고 있다.

남자는 여러 의미로 감탄했다.

"산책 나온 공주님 같네. 후환이 걱정될 지경인데."

콱!!

남자가 지면에 다리를 꽂아넣은 채 검을 휘둘렀다.

찬란히 빛나는 검강이 전방으로 방출됐다.

사아아아악!!

검강과 맞닿은 초고열의 열선이 수십 갈래로 나누어져 휘몰아친다.

사방이 불바다로 변함과 동시에 방출된 검강이 푸른빛의 실드와 격돌했다.

콰가가각!!!

방어엔 성공했으나 여기저기 균열이 간 실드가 스파크를 쏟아냈다.

그 찰나 시야를 가렸던 불길 사이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가 검강에 휩싸인 검을 횡으로 휘두른다.

가가가가각!!

실드가 바스라져 나간다.

실드를 전개했던 정팔면체 형태의 아티펙트가 주인에게 경고하듯 점멸했다.

검사와의 지근거리 전투는 마법사에게 반드시 피해야 할 상황이었다.

헌데.

정작 검이 맞닿을 만큼 거리를 좁히는데 성공한 남자가 급격히 표정을 굳혔다.

남자는 세리아를 코앞에서 마주 보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세리아는 지금까지 한톨의 마나도 운용하지 않았다.

말인즉슨, 모든 아티펙트가 자체 출력만으로 지금과 같은 위력을 쏟아냈다는 거다.

남자는 세리아를 마법사로 판단했었다.

정제된 코어의 마나는 아티펙트를 기동하는데 굉장히 부적합했기 때문이다.

허나 아티펙트를 기동하는데 애초에 사용자의 마나가 필요하지 않았다면.

모든 추측이 무의미했다.

"허큘러스, 모습을 드러내라."

세리아의 아티펙트에 은폐장을 부여하던 거대한 검이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세리아가 대검을 붙잡는다.

극도로 압축된 검기가 수십개 결집되어 대검을 뒤덮었다.

남자가 실드를 베기 위해 횡으로 휘둘렀던 검을 재빨리 회수했다.

허나 세리아가 조금 더 빨랐다.

콰아앙!!!!

"크윽...!!"

세리아의 검격을 간신히 상쇄한 남자가 멀찍이 물러섰다.

방어가 늦은 탓에 검강에 어깨가 갈렸다. 아예 잘려나간 건 아니지만, 피가 분수처럼 터져나왔다.

세리아의 곁을 지키는 아티펙트를 바라보며 남자가 의문을 토했다.

"황제 직속 친위대도 무장이 이렇게 화려하지는 않을 텐데. 3대 마탑 중 하나를 통째로 털기라도 했냐?"

"주웠어, 미궁에서."

세리아의 얼굴이 잠시 음울하게 변했다.

"10년 가까이 갇혀 있었던."

인연 (3)

35화

부모님은 내가 아직 어릴 적에 세리아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돌아가셨다.

본래라면 살아가기 꽤 퍽퍽했겠으나 나이 차가 나는 오빠 덕분에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에반. 날 길러주고 응원해준 오빠의 이름.

영민하고 근면한 나의 오빠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 빠르게 생활을 안정시켰다.

덕분에 따뜻한 방에서 잠을 청할 수 있었고, 먹을 게 부족해 배를 곯지 않았다.

오빠는 항상 이리 말하곤 했다.

사랑하는 여동생이 바라는 꿈이 있다면 자신이 꼭 이뤄주고 싶노라고.

오빠의 손을 잡고 여기저기 쫓아다니며 다양한 경험을 했다.

오빠와 함께한 모든 경험이 즐거웠지만, 나의 마음을 가장 강렬하게 사로잡은 건 다름 아닌 검 한 자루였다.

"기사가 되고 싶어요."

오빠는 우리가 귀족이 아니기에 기사가 되기 위해선 참으로 뛰어난 재능이 필요하다고 조언하는 한편, 벌어들인 돈 대부분을 내 검술 수업을 위해 투자했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생떼를 부린다는 자각은 있었다.

어쭙잖은 재능으로 2~3년 바둥대다 현실을 깨닫고 포기할 거라고, 스스로도 그리 되뇌곤 했다.

그래도 시골 바닥에서 나는 꽤 뛰어난 편이었다.

근방의 또래 중에 적수가 없어지자 오빠는 사람이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며 나를 황도 인근의 검술 교습소에 한 학기 다닐 수 있게 해주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러.

나는 알슈테인 공작가의 둘밖에 없는 여기사의 종자로 발탁될 수 있었다.

또래의 여아 중엔 가장 눈부신 재능을 지녔다고 인정받은 거다.

이대로 뛰어난 기사가 되어 오빠의 신세를 피게 해주겠다고 결심했다.

오빠가 진즉 자수성가하긴 했지만 공작가 기사가 된 여동생을 뒷배로 둔다면 꽤 마음이 든든할 터였다.

쭉쭉 늘어나는 실력 덕분에 기사 서임까지 약 2년가량을 남겨두었을 무렵.

오빠가 늦게나마 결혼을 한다는 소식이 도착했다. 아이가 생겼다나 뭐라나.

당연히 고향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이번에 마스터가 중요한 임무에 투입되게 되어 종자로서 옆을 보좌해야 했다.

축하의 내용을 담은 장문의 편지를 써서 부친 후 임무 개요서를 보았다.

발레리우스 미궁 공략 작전.

약 일천 년 전 인물인 발레리우스는 전설적인 마법사이자 마나 공학자로, 특히 공간 마법에 관해서는 따라올 자가 없었던 불세출의 천재라 평가받았다.

문제가 있다면 성격이 워낙 괴짜였던지라, 인간관계가 극히 협소했고 제자 하나 들이지 않았다.

그 덕분에 발레리우스가 만들어낸 대부분의 이론과 아티팩트가 그의 사후에 유실됐다.

발레리우스의 유산을 찾기 위해 많은 이들이 노력했다.

괴짜인 발레리우스가 괴이한 안배 하나쯤은 마련해두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희망 아래 조사가 계속됐고, 모두 실패했다.

이제는 이야기 속 전설처럼 여겨지던 발레리우스의 신화는, 얼마 전 격변을 맞았다.

산이 통째로 무너지는 재해가 발생한 직후 발레리우스가 세운 미궁이 발견된 것이다.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발레리우스의 이름값만큼이나 그의 유산을 탐내는 자들이 많았다.

황실의 중재 아래 힘 있는 귀족가와 마탑이 오랜 협의를 거쳐 서로의 지분을 나누고 수하들을 파견해 공략대를 구성했다.

내로라하는 제국의 세력들이 연합해 창설한 공략대는 수많은 기사와 마법사, 그리고 경험 많은 모험가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는 미궁이 두렵지 않았다.

공략대의 위용도 막강했지만, 이미 몇 번이나 조사팀을 파견해 미궁의 정체와 구조를 파악한 후였기 때문이다.

이런 대규모 공략대가 결성된 건 미궁의 위험성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가 컸다.

그리고 과잉전력이라 판단됐던 공략대가 던전에 진입한 직후.

입구가 막혔다.

발레리우스가 공간 마법에 관해서 불세출의 재능을 지녔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간과했다.

꼬여 버린 공간이 입구를 숨겼지만 공략대의 전력이라면 힘으로라도 새로운 입구를 뚫어낼 수 있었다.

허나 시간이 부족했다.

미궁은 시시각각 조여오며 인간이 생존하는데 필수적인 요소들을 하나씩 뺏어갔다.

입구를 뚫어내기 위해 발악하자 주변의 환경은 더욱 급격히 열악해졌다.

공기가 불타오르고, 지면에서 용암이 솟구치는 꼴을 보며 모두가 알아챌 수 있었다.

미궁은 공략대에게 정해진 길을 따라 전진하라 강요하고 있었다.

창조자가 의도한 대로 미궁을 공략해, 미궁의 끝에 다다르라고 겁박하고 있었다.

결국 공략대는 미궁 깊숙한 곳으로 나아갔다.

위험한 함정들과 봉인에서 풀려난 마수들을 제거하며 전진하자 일시적으로 주변의 환경이 안정됐다.

소량의 물과 인간이 섭취 가능한 회색 분말도 찾아낼 수 있었다.

심지어 고생한 보상이라는 듯, 정교하게 제작된 아티펙트까지 하나 발견됐다.

그제야 모두가, 발레리우스란 작자가 얼마나 정신 나간 새끼였는지 깨달았다.

시간이 흘렀다.

공략대는 몇 개월이 넘도록 전진과 휴식을 반복했고, 여전히 미궁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마법사가 말했다.

"인간이 아니다."

아무리 공간 마법에 정통한 마법사라 해도 고작 수십 년 만에 이리 장대한 미궁을 건설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내부로 들어갈수록 건축물의 양식에 변화가 생겼다.

지금 눈에 보이는 작은 건축물은 마법사가 말하길 900년 전 양식이라 했다.

공략대는 결론을 내렸다.

"드래곤이다."

일천 년 전에는 아직 드래곤이 소수나마 생존해 있을 시기였다.

마법사가 이를 갈며 말했다.

"드래곤은 발레리우스라는 거짓 신분의 죽음을 위장한 뒤에도 수백 년 동안 미궁을 확장하고 다듬은 게 틀림없다. 거기다 다른 드래곤의 도움까지 받은 것 같군."

"아직까지 살아있을 리는 없다. 언제 죽은 거지?"

"마지막 순혈 드래곤은 600년 전에 삶을 마쳤다. 그보다는 먼저 수명을 다했을 거다."

"운이 나쁘다면 우리는 아주 똑똑하지만 정신 나간 말년의 드래곤이 400년 이상 공을 들여 건설한 레어이자 미궁에 발이 묶인 거군."

삶의 끝자락에 도달한 드래곤이 마지막 유희를 위해 모든 역량을 동원해 건설한 최후의 역작.

그게 이 미궁의 정체였다.

우린 계속 전진했다. 어쩌면 같은 공간을 빙빙 돌며 새로운 적을 맞이하는지도 몰랐다.

한정된 공간을 왜곡시켜봤자 한계가 존재하니, 같은 자리를 맴돈다는 가설은 꽤 설득력이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아. 다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기사의 주장에 마법사가 고개를 저었다.

"왜곡된 공간에 함부로 힘을 가하면 하나 남은 출구도 잃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상황을 해결하라고 마법사를 동행시킨 거다."

"그 태도가 문제다. 마법사는 신뢰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공략대의 주력은 기사로 구성됐다. 미궁의 마법적 보안을 뚫고 공간 왜곡을 해제하려면 현재 마법사 전력으로는 어림도 없다. 대마법사라도 한 명 모셔왔으면 모를까."

"정말 불가능한가?"

"미궁을 붕괴시킬 수단이야 얼마든지 있다. 기사들만으로도 그건 가능하겠지. 허나 공략대 또한 몰살당할 거다."

"그럼 이대로 수백 년 전 뒈진 드래곤의 장난질에 어울려줘야 한다는 소리군."

2년이 지났다.

사람이 꽤 죽었고 나는 검기를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기뻐할 틈도 없이 죽음의 위기가 찾아왔다.

죽음을 확신했는데, 날카로운 화살 하나가 폭풍을 일으키며 키메라의 핵을 박살 냈다.

모두의 시선이 화살의 주인에게 돌아갔다.

경험 많은 모험가라며 공략대에 고용되었던 용병이었다. 무력 자체는 형편없다고 평가받았었다.

"너... 정체가 뭐야?"

"울트. 가디 자작가의 울트라고 합니다."

실력과 신분을 숨기고 있던 모험가.

몇몇은 강하게 화를 냈지만, 그게 무력 충돌로 번지지는 않았다.

손 하나가 아쉬운 시점이었다. 울트가 스스로의 실력과 정체를 드러낸 이유도 더 이상 병력 손실이 늘어나면 미궁 공략을 장담할 수 없다고 판단해서였다.

애초에 모험가로 고용되어 모험가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으니 화를 낼 명분도 적었다.

시간이 계속 흘렀다.

극한의 상황이 주는 스트레스 탓에 입을 열어봤자 불화만 짙어졌으므로 다들 묵묵히 미궁을 전진하는 데 집중했다.

허나 공략대가 열 명 남짓하게 줄어들었을 즈음에, 다시 분위기가 변했다.

우리는 전투가 끝날 때마다 자리에 주저앉아 왁자지껄 떠들며 숨겨왔던 사연을 풀어놓고는 했다.

살아남은 자들은 대부분 신체가 강건한 기사였기에, 대단히 독특하고 재밌는 사연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빌어먹을 미궁의 공략대에 소속되었던 이유도 다들 명쾌했다.

위에서 시켰으니까.

지식을 탐한 마법사도 한 명 있었고, 명예와 재화를 노리고 자원한 케이스도 한 명 있긴 했으나 단지 그뿐이었다.

자연히 모두의 시선이 울트에게 쏠렸다.

침묵하던 울트가 답했다.

"지인 중 한 명이 강력한 저주에 고통받고 있습니다. 저주를 해주할 방법을 찾기 위해 모험가 신분을 만들어 미궁과 유적을 돌아다니는 중입니다."

"여자냐?"

"여자군."

"여자네."

"남자일 수도 있지."

울트가 실소를 터뜨렸다.

나는 검에 기댄 채 물었다.

"왜 미궁에서 찾아요? 해주 방법을? 마법사를 안 찾아가고?"

"기원과 관련된 저주입니다."

사람이 죽어도 덤덤하던 우리의 분위기가 드물게 가라앉았다.

마법사가 고개를 저었다.

"네가 지닌 썩은 나뭇가지가 이제 이해가는군. 사정은 안 됐지만 기원과 관련된 저주는 해주가 불가능해."

"방법이 있을 겁니다. 그래요, 사람의 시간을 되돌리는 아티펙트 정도면 희망이 있지 않겠습니까? 저주가 육신에 깃든 시간대 이전으로 상태를 되돌리는 겁니다."

우리는 서로를 돌아보았다.

현재 공략대의 리더 격인 콜체스터가 미약하게 웃었다.

"좋다. 네 애인의 저주를 해결할만한 아티펙트를 발견한다면, 이 미궁을 벗어난 후 다 같이 네 애인부터 찾아가도록 하지."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나저러나 여기 모두가 울트에게 목숨 한 번씩은 빚진 경험이 있었다.

시간은 계속 흘렀고 마침내 공략대는 셋만 남게 되었다.

경지가 낮은 내가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운이 좋았던 덕분이라 말해도 될 것이다.

굳이 이유를 하나 덧붙이자면, 나는 아티펙트를 조종하는 실력이 뛰어났다.

다수의 아티펙트를 동시에 컨트롤해 전투에 활용하는 능력만은 공략대의 선두라 할만 했다.

어쨌든 우리는 셋이 되었고, 내가 다음 경지로 나아갈 때쯤 이 빌어먹을 미궁의 마지막 관문을 돌파할 수 있었다.

근 10년 만에, 우리는 미궁을 벗어났다.

쏴아아아아

바람이 분다. 햇살이 피부를 데운다.

웃음을 잃어버린 우리는 미궁을 벗어난 후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얻은 게 별로 없군."

콜체스터가 말했다.

그의 말대로, 무수히 많은 아티펙트를 미궁에서 얻었지만 그 대부분이 미궁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소실됐다.

발레리우스가 남긴 마지막 아티펙트는 가히 드래곤이 남긴 최후의 역작이라 부를만 했지만 저주의 해주에 사용할만한 아티펙트는 아니었다.

마지막 아티펙트를 받은 울트가 이빨을 갈아내며 중얼거렸다.

"...내겐 필요 없는 물건입니다, 콜체스터 경."

"그냥 자네가 가져가. 굳이 공략대의 최대 공로자를 따지면 바로 자네니까. 그보다 이제 다들 어떻게 할 생각이지?"

"갈래요."

"..."

"보고 싶어요. 오빠가. 너무 그리워서, 가슴이 아파. 집에 갈래요. 고향으로 갈 거예요."

"알슈테인 가로 귀환하지 않겠다고? 혹시 숨어 지낼 생각이냐?"

고개를 저었다.

많은 희생이 있었기에 미궁에서 살아나올 수 있었다.

갚아야 할 빚이 많았다. 적어도 공략대의 가족에게 마지막 유언쯤은 전해주어야 했다.

염치 없게 숨어살 생각은 없었다.

"돌아갈 거예요. 오빠 보러 갔다가, 그다음에. 돌아갈 거예요. 알슈테인으로."

"그럼 부탁 하나 하겠습니다."

울트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제겐 시간이 없습니다. 물색해두었던 미궁과 유적을 확인해야 합니다. 세리아의 고향은 제 영지의 근처이니, 저 대신 피에트로를 만나 티티가 무사한지 확인해줄 수 있겠습니까?"

"알겠어요. 내게 맡겨요."

"좋다. 둘 다 잘 들어."

콜체스터가 상황을 정리했다.

"울트, 모험가 신분의 자네는 미궁에서 죽었다. 모험가 노릇할 거면 신분을 새로 만들어. 세리아, 일 보고 돌아와. 공작가에 연락하지는 말고. 지금 어설프게 정체를 드러내면 칼 맞아 죽기 딱 좋으니까."

콜체스터는 두 달가량 숨어있다가 공략대와 연관된 모든 귀족에게 미궁 공략 사실을 서신으로 알릴 것이라 했다.

한동안 시끄러워지겠지만 그게 우리를 보호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콜체스터는 강조했다.

"폭풍을 피할 수 없다면 폭풍의 한가운데로 들어가야 한다. 알아듣나?"

"알겠어요."

"그래. 그리고 이건 네 몫이다."

학술적 가치가 있는 아티펙트를 챙긴 콜체스터는 전투용 아티펙트를 내게 건네주었다. 전부 내가 애용하던 아티펙트였다.

"고마워요."

"고마워할 필요 없다. 알슈테인에 귀환하게 되면 아티펙트를 내놓아야 할 거야. 알고는 있어라."

우리는 헤어질 때까지 자잘하게 의견을 조율했다.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태반이었기에, 조율 자체는 콜체스터와 울트가 하고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이틀 후 우리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떠났다.

그리고 오빠를 그리워하며 고향에 돌아온 내가 확인할 수 있었던 건.

잘 정돈된 차가운 묘비와.

비가 쏟아지는 날 묘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한 소년이었다.

*

전투가 잠시 멈췄다.

남자와 세리아가 서로를 응시하며 차분히 상황을 분석했다.

이대로 전투가 계속되면 세리아가 유리하다.

아티펙트 두 개면 흑마법사 셋의 화력을 상쇄시킬 수 있었다.

검술의 경지만 따지면 남자가 확실히 높았다. 허나 방심한 탓에 큰 부상을 입었고, 세리아에겐 아티펙트가 다수 존재했다.

물론 판을 뒤집을 요소가 없는 건 아니었다.

세리아는 남자에게 부상을 입히고도 바로 몰아붙이지 않았다. 지켜야 할 것이 있다는 뜻이었다.

남자는 레이와 피에트로를 집중적으로 공격해 방어전 양상을 만들면 승률을 높일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허나 굳이 여기서 목숨을 걸어야할 필요가 있는가?

남자는 회의적이었다. 일은 이미 꼬인 듯 했고 차라리 힘을 온전해 로드와 합류하는 게 나아보였다.

세리아도 고민에 빠졌다.

저들이 '티티'를 납치했다면 여기서 놓아주면 안 된다.

허나 이대로 전투를 속행하기엔 뒤에 서 있는 조카의 안위가 너무나도 걱정됐다.

울트에겐 미안했으나 하나 남은 가족인 조카의 목숨까지 위태롭게 하며 티티를 우선할 수는 없었다.

이대로 물러나는 게 좋지 않을까? 서로의 의견이 맞았다.

그 순간 레이가 앞으로 나섰다.

"길면 한 8초?"

"?"

물러서려던 세리아가 당황해서 휘청였다.

레이는 고심하며 손가락 두 개를 접었다.

"8초는 너무 긴가? 한 6초는 붙들 수 있을 것 같네요."

레이는 그래듀에이트의 검속을 눈앞에서 확인했다.

오버드라이브까지 활용하면 얼추 몇 합은 버틸 수 있겠다 싶었다.

검강을 검기로 버틴다는 게 어불성설이긴 했지만 레이는 하르시아의 이름 값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래듀에이트를 제가 붙드는 사이 마법사를 처리해 주실래요? 이 지역은 지금 저놈들 본거지예요. 지원이 더 오기 전에 빠르게 결판을 내야해요. 시간이 없어요."

"..."

세리아는 안타까웠다.

하나 남은 가족이자 소중한 존재인 조카는 면전에서 벌어진 전투 탓에 머리에 큰 충격을 받은 듯 했다.

그게 아니면 저런 헛소리를 하는 이유가 설명이 안 됐다.

세리아는 다급해졌다.

"해야 해. 응급처치."

세리아가 품을 뒤적이더니 미궁에서 얻은 포션을 꺼내들었다.

세리아는 강인한 완력을 십분 발휘해 레이의 머리를 포션병으로 후려쳤다.

깡!

"푸흑?!"

포션병이 깨지며 푸른 포션이 레이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난데없이 정수리를 가격당한 레이가 머리카락에서 포션을 뚝뚝 흘리며 세리아를 돌아봤다.

얼이 빠진 레이를 향해 세리아는 흡족하게 웃었다.

"이제 괜찮아."

미궁에서도 잠깐 정신이 나간 동료들을 이런 식으로 치료하곤 했다.

소중한 조카에게도 효과가 좋을 게 분명했다.

가족 (1)

36화

갑작스레 발생한 로커스트 수하들과 세리아의 전투는 방심했던 남자가 세리아에게 어깻죽지를 베이고 물러섬으로써 소강상태에 들어섰다.

레이는 열기가 식어가는 전장을 한발 물러선 채 살폈다.

헤일로라고 불린 세리아의 아티펙트는 동체가 과열된 탓인지 움직임을 멈춘 채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헤일로의 폭격을 얻어맞은 흑마법사들은 로브가 대부분 불에 타 얼굴이 드러났지만, 치명적인 피해를 허용한 이는 없어 보였다.

결국 이번 전투의 성과라고는 남자의 어깻죽지를 베어낸 것 하나였는데, 그 과정에서 아티펙트의 성능이 드러났으니 세리아의 일방적인 이득이라 보기도 어려웠다.

레이는 주변을 크게 둘러보았다.

남쪽의 영주성을 제외하면 사방이 탁 트인 개활지였다.

굉음과 불길이 연속으로 발생했기에 근방의 사람들은 대부분 도망갔겠지만, 혹시 철없는 아이가 몰래 다가와 숨어있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세리아는 자신을 고모라 소개했으나 레이 입장에선 근거 없는 주장일 뿐이었고, 설령 사실이라 해도 그녀가 어떤 인격과 배경을 지녔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 나서면 안 되긴 하는데...'

레이는 디나르에 진입할 때 교전수칙을 세웠다.

목격자까지 완벽히 제거 가능한 상황에서만 검기를 드러내고, 여의치 않을 경우 물러날 것.

여기서 검기를 뽑아내는 건 처음에 세웠던 교전 수칙에 완전히 반하는 행위였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디나르는 현재 적의 근거지다. 시모네를 죽이자마자 적들이 찾아왔다.

언제 다른 지원이 추가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전투는 피하거나, 최대한 빠르게 끝내야 했다.

물러날 수 있다면 물러난다.

그게 당장은 현명한 판단이었다.

'하지만 그래듀에이트가 로커스트와 합류하면 백작령과 자작령의 모든 병력을 동원해도 도주를 저지하는 게 불가능해질 거야.'

백작령 병력을 결집해 정면 대결을 벌인다 해도 기사만 절반 이상 죽을 거다.

필립스 백작이 로커스트와 철천지원수가 아닌 이상 그만한 희생을 감수하고 선공을 가할 리가 없다.

로커스트 또한 불필요하게 귀족을 해쳐 제국의 추적이 집요해지는 결과는 원치 않을 테니, 정체를 들킨 시점에서 얌전히 도주할 가능성이 컸다.

'먼저 건드리지만 않으면 양측이 서로를 방관하는 모양새가 될 거야. 이런 상황에서 백작이 보육원 아이들까지 신경 써줄 리는 없어.'

로커스트가 도주하는 길에 부모 없는 아이 몇을 보육원에서 납치한다 해도 기사단이 움직이진 않을 거다.

이건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는 사안이었다.

하지만.

로커스트 휘하의 그래듀에이트와 흑마법사들을 여기서 제거한다면.

필립스 백작이 로커스트를 '사냥할만하다'고 여기게 만들 수 있었다.

'더군다나 세리아와 피에트로의 대화, 백작에게 전해진 편지의 내용을 고려했을 때... 이들 전부가 로커스트가 데려간 '티티'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

티티라는 존재가 백작가, 자작가, 세리아를 하나로 묶는다.

판만 유리하게 깔아주면 이들은 힘을 합해 로커스트를 칠 것이다.

숨겨야할 실력을 세리아에게 노출하게 되는 건, 분명 많이 불안한 일이었다.

허나 로커스트 휘하의 병력이 아무 피해 없이 돌아가 규합하는 건, 훨씬 위험했다.

레이는 결정을 내렸다.

'나도 참전한다. 여기서 각개격파 해야 해.'

세상 일이라는 게 본디 최선보다 차악을 골라야 하는 때가 많았다.

레이는 정체를 알게 된 지 몇 분 되지도 않은 고모를 믿어보기로 했다.

'적의 전력은 그래듀에이트 하나와 3~5 서클 사이로 보이는 흑마법사 셋. 어느 쪽이든 만만치 않아.'

세리아의 아티펙트 하나에 손발이 묶였던 흑마법사들이지만 이는 기습을 허용했던 탓이 크다.

다시 붙으면 아티펙트 하나에 무력화 되진 않을 거다.

'속전속결로 전투를 끝내려면 흑마법사 무리와 그래듀에이트 중 하나는 내가 잠시 붙들어야 해.'

단순 전력 자체는 그래듀에이트가 월등하다.

하지만 경험이 적은 레이에게 있어 변칙적인 마법을 구사하는 흑마법사들은 상성이 안 좋았다.

'난도가 높더라도 그래듀에이트 쪽을 내가 붙든다.'

몇 초만 붙들면 된다.

세리아가 다수의 아티펙트로 화망을 형성한 채 돌격하면 흑마법사들은 무력하게 목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정말 길어봤자 10초 안에 전멸할 거다.

결론을 내린 레이가 앞으로 걸어나가며 자기 의견을 개진했다.

타인이 듣기엔 헛소리였고, 세리아는 망설이지 않고 포션병을 휘둘렀다.

깡!

"푸흑?!"

골통이 한 번 울리니 좁아졌던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잠시 얼을 탄 레이가 관자놀이를 툭툭 치며 정신을 차렸다.

너무 자기 생각에 매몰되어 일의 순서를 잊고 있었다.

합공을 위해선 당연히 세리아를 먼저 설득해야 했다.

레이가 코어를 활성화시켜 마나를 쏟아냈다.

입으로 설명해봤자 어차피 믿을 리가 없으니, 그냥 보여주는 게 빨랐다.

"고모, 고모께서도 한 재능 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푸르게 빛나기 시작한 레이의 눈동자가 세리아를 향했다.

그래듀에이트의 경지에 오른 세리아의 감각이 레이의 심장에서 뻗어나오는 마나의 흐름을 정확히 인식했다.

세리아의 눈가가 당혹스럽게 좁혀졌다.

"...?!"

"조카가 조금 더 잘난 것 같거든요."

레이가 가볍게 입꼬리를 올렸다.

"제가 그래듀에이트 붙드는 사이 흑마법사 좀 처리해주실래요? 5초면 충분하시죠?"

"...너무 위험해."

"시간 끌면 더 위험해져요."

잠시 고민한 세리아가 정팔면체 형태의 아티펙트를 레이에게 건네주며 물었다.

"달릴 수 있어? 나보다 빨리? 그럼 허락할게. 아니면 바로 물러나."

레이가 말없이 남자를 가리켰다.

콰앙!

레이와 세리아가 동시에 지면을 박찼다.

어깨를 지혈하던 남자가 갑작스러운 둘의 돌격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꼭 끝을 봐야...?"

애새끼 하나가 세리아와 함께 달려온다.

처음엔 아이를 품에 끼우고 싸울 생각인가 싶었다. 아예 말이 안 되는 짓거리도 아니었다.

허나 약간 뒤처졌던 레이가 한 번 더 가속하며 짓쳐들어오자, 남자가 탄식을 흘렸다.

그래듀에이트의 눈에는 보인다.

레이는 지금 어떠한 외부의 도움도 없이 본인의 신체를 활용해 세리아를 앞질렀다.

"...오늘 죽으면 굉장히 억울하겠는데. 지금 광경을 술안주로 써먹지도 못하고 뒈진다니."

남자의 검에서 검강이 솟구쳤다.

레이는 관절이 바스러지는 격통을 느끼며 검기를 뽑아냈다.

오버드라이브로 따라잡을 수 있는 건 속도 하나다.

그 속도란 것도 결국 가벼운 몸뚱이 덕분이고, 실질적인 운동량은 몇 배 이상 차이 난다.

어설프게 검을 맞대면 저 멀리 튕겨져나간다.

레이는 남자를 붙들어야 했다.

검을 돌려 잡는다.

초격은 아래에서 위로, 올려 베듯.

쿵!

지면에 다리를 박아넣으며 검을 휘두른다.

찰나의 순간 검 전체를 감쌌던 검기가 날을 따라 얇게 압축된다.

남자의 눈에 흥미가 새겨진다.

외견에 비해 참으로 믿기지 않는 성취였으나, 그와 별개로 얇게 압축된 검기 하나로 검강을 막아내는 건 불가능하다.

최대한 잘 빗겨낸다 해도 검기를 둘렀던 검이 통째로 박살 날 터다.

남자는 한 번 버텨보라는 듯 정직하게 검을 내려 벴다.

검강과 검기가 충돌한다.

쩌엉!!!

굉음과 함께 레이의 관절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어깨가 뒤틀리며 검로가 흔들렸다. 허리에 걸린 부하 탓에 자세가 무너졌다.

검기가 벗겨진 검신은 검강에 노출되어 쩍쩍 균열이 갔다.

허나 버텨냈다.

레이는 관절 사이에 다시 한번 마나를 폭발시켜 기형적인 움직임으로 충돌의 여파를 흘려냈다.

남자가 중얼거렸다.

"환상적이네."

괴이한 검기였다.

검강의 위력을 부분적이나마 분산시켰다.

현상을 보았음에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남자는 세리아가 마법사를 향해 방향을 트는 걸 인식했다.

다수의 아티펙트가 빛을 뿜어내며 마법사들을 화력으로 찍어 눌렀다.

'협공이 아니라 마법사를 노린다고?'

이 어린아이가 나를 붙들 수 있으리라 생각한 건가.

굴욕을 느껴야 하는 상황에서 남자는 희열을 느꼈다.

아이가 언젠가 닿을 경지에 대한 기대와, 이 불세출의 천재를 지금 내 손으로 찢어버리고 싶다는 욕구가 번잡스럽게 섞였다.

남자의 시야가 온전히 레이에게 좁혀졌다.

"좋아, 버텨 봐."

남자의 검이 지면을 긁다 레이의 허리를 노리고 사선으로 가속했다.

레이가 잠시 고민했다.

충격 해소를 위해서는 몸을 띄워야 한다.

허나 몸을 띄운 채로 검강을 받아냈다간 수십 미터를 날아갈 게 뻔했다.

다음 공격에 완전히 무방비해질뿐더러 남자를 붙들어 놓을 수도 없었다.

촤악!

레이가 왼쪽 무릎을 굽히며 오른발을 옆으로 길게 뻗었다.

자세가 확 낮아지며 상체가 좌측으로 기운다.

왼쪽 팔꿈치를 지면에 꽂아넣은 레이가 검을 비스듬히 세웠다.

카가가가각!!!

허리를 노리던 남자의 검격을 극단적으로 낮춘 자세를 활용해 하늘로 빗겨낸다.

검강과 충돌한 반발력 탓에 왼쪽 팔꿈치가 아예 지면에 파묻혔다.

레이는 꺾일 뻔한 손목을 이마로 짓눌러 고정한 채 허리를 옆으로 틀었다.

검강과 검기가 다시 한 번 부딪친다.

파가각!!

반발력을 역이용해 뒤로 물러난 레이가 몸을 일으켰다.

남자가 오른손을 검자루 아래로 미끄러뜨리며 왼손을 역수 형태로 다시 잡는다.

쿠웅!

지면이 갈라지며 남자의 잔상이 길게 이어졌다.

레이가 미처 자세를 다잡기도 전에 정면에서 찌르기가 들어온다.

이거 흘릴 수 있나?

왼손을 역수로 전진시켜 검을 잡았다는 건 기술이 아닌 힘으로 찍어누르겠다는 겁박이었다.

'이건 제자리에서 못 버틴다.'

레이가 다리에서 힘을 뺐다.

뒤로 밀려나며 지면을 굴러서라도 검강에 실린 위력을 분산시켜볼 생각이었다.

카각!

검기와 검강이 맞닿은 순간 불똥이 튄다.

아니, 불똥이 아니다.

피어오르는 불빛 하나하나가 얇게 압축된 검기였다.

남자가 고의로 검강의 제어를 느슨하게 한 탓에 검강을 이루던 검기가 사방으로 터져 나왔다.

레이의 시야가 온통 날카로운 빛 무리로 가득 찼다.

'이건 잘못하면 진짜 죽겠는데.'

검기의 그물에 완전히 갇혀버렸다.

힘으로 뚫고 나가야했지만 레이의 마나량으론 불가능했다.

위기의 순간, 뇌리에 각인된 하르시아의 기술들이 레이의 의식을 달궜다.

레이가 직감에 의지해 두 번째 검을 뽑았다.

검기 다발이 쏟아져 내리며 온몸을 찢어놓으려는 찰나.

양손의 검이 맞닿는다.

우웅-!

공간을 변질시키는 검기가 중첩되며 서로를 공명시킨다.

공간의 일그러짐이 파문처럼 번져나가며 일순 두 검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왜곡장이 생성됐다.

레이를 향하던 남자의 검기가 왜곡장의 영향을 받아 미약하게 방향이 틀어졌다.

촤자자작!

레이를 스쳐 간 검기가 지면에 흩뿌려졌다.

남자가 검을 고쳐 잡으며 중얼거렸다.

"이건 또 무슨 정신 나간 기술이야."

레이는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이론만 알던 기술을 생전 처음 써봤는데 예상보다 마나 소모가 극심했다.

실시간으로 관절과 근육까지 박살 나고 있어 눈앞이 멋대로 점멸했다.

세리아가 대가리에 내리쳤던 포션이 뒤늦게 흡수되지 않았다면 기절했을지도 몰랐다.

비틀거리는 레이를 향해 남자가 무자비하게 다음 일격을 가했다.

콰드득!

레이가 방어를 위해 휘둘렀던 왼손의 검이 완전히 박살 났다.

체력도 마나도 바닥을 보인다.

'더는 한계다.'

"어딜."

레이가 물러서려는 타이밍을 남자는 노련하게 간파했다.

검강이 빛을 토해내며 검신을 타고 올랐다.

남자가 검강을 방출하려는 순간.

레이의 품에서 방어 아티펙트가 가동되며 빛의 장막을 펼쳤다.

꽈드드득!!

검강을 정면에서 받아낸 실드가 균열을 일으킨다.

레이가 세리아를 돌아보았다.

마지막 마법사의 심장을 꿰뚫어버린 세리아가 레이를 향해 가속했다.

레이는 남자의 검을 한 번은 더 받아야 한다는 걸 직감했다.

실드가 한 번 부서졌었던 탓인지 아티펙트가 두 번째로 펼친 실드의 강도가 그리 단단하지 않았다.

레이가 하나 남은 검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헌데 남자는, 분명 당장이라도 실드를 뚫어낼 수 있음에도 어깨를 으쓱이며 한 발 물러섰다.

"진짜로 버텨낼 줄이야. 마법사도 다 죽었고, 저 레이디의 아티펙트를 피해서 도망가기도 그른 것 같네. 내가 졌어."

푸욱!

남자가 방금까지 딛고 섰던 땅에서 검은 창 한 자루가 불쑥 솟아올랐다가 사라졌다.

그 또한 세리아의 아티펙트였다.

"이거이거 무섭다니까. 아티펙트가 몇 개야?"

남자가 감탄하는 사이 세리아가 레이 곁에 와서 섰다.

승패는 갈렸다.

하늘을 바라본 남자가 길게 숨을 내뱉더니 자기 얼굴을 가리키며 또박또박 말했다.

"잘 들어, 꼬맹아. 내 이름은 댄이다. 미르테르 가의 쫓겨난 세 번째 아들, 댄."

"웬 통성명이야. 이제 와서 회개라도 하시려고?"

"회개는 무슨."

댄이 가슴에 힘을 준 채 두 팔을 넓게 벌렸다.

"꼬맹아, 훗날 쓰여질 네 서사시에 반드시 한 줄 적어놓도록 해. 바로 이 미르테르 가의 댄에게, 아직 꽃 피지도 못했던 어린 영웅이 거의 죽을 뻔했다고."

레이가 실소를 터뜨렸다.

"곧 죽을 녀석이 이상한 걸 바라는군."

"꼬맹아, 사람은 어차피 죽어."

아티펙트만 5개를 전개한 채 다가오는 세리아를 보며 댄이 시원하게 웃었다.

짧디 짧은 인간의 인생, 몇 년 길게 살려 발악하기보단 죽을 자리를 잘 찾아 눕는 게 중요하지 않겠는가.

이 정도면 죽을 자리로 나쁘지 않았다.

불세출의 천재가 써나갈 서사시의 첫 장에 이름을 남길 기회는, 좀처럼 없었으니까.

댄이 세리아의 검을 막아낼 준비를 하며 레이에게 당부했다.

"부디 객사하지 말고 잘 성장해서 훌륭한 영웅이나 악당이 돼라. 그래야 내 이름도 오래오래 기억되지."

"몽블랑 가의 스미스 씨, 덕담 말고 차라리 욕을 해줄래요?"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내 이름은 댄이라니까. 너 이 새끼 지금 일부러 그러지?"

세리아와 남자가 충돌했다.

콰가가각!!

*

세리아는 어렵지 않게 댄을 격살했다.

댄이 끝까지 반항한 탓에 산 채로 제압하진 못했다.

어찌됐든 로커스트에게는 아주 치명적인 출혈이 될 것이다.

세리아가 레이에게 포션을 들고 다가왔다. 레이는 일단 정수리부터 가렸다.

포션을 건네준 세리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먼 곳을 바라봤다.

레이는 피에트로를 데리고 일단 백작령으로 탈출하는 게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하다 한발 늦게 땅의 진동을 느꼈다.

레이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기사...?"

갑옷을 입은 기사가 돌격 대형까지 갖추고 말을 몰아 다가오고 있었다.

갑옷에 새겨진 문양이 굉장히 눈에 익었다.

필립스 가의 기사들이다.

방금 전 전투의 굉음을 들었는지 검기까지 줄기줄기 뽑아내며 돌격해오던 기사들이 이내 속도를 늦췄다.

저쪽에서도 레이와 피에트로의 얼굴을 알아본 것 같았다.

레이가 욱신거리는 관절을 붙잡으며 투덜댔다.

"아이씨, 올 거면 조금만 더 빠르게 오지. 성장판 다 갈아내고 나니까 달려오네."

사실 반 농담이었고, 편지를 받은 필립스 백작이 이렇게 신속히 반응할 줄은 레이도 예상치 못했다.

기사만 보낸 줄 알았더니 심지어 필립스 백작 본인도 무장을 한 채 동행했다.

영지 내 기사급 전력을 대부분 집결시킨 거다.

필립스 백작과 기사들, 피에트로, 세리아, 레이가 한자리에 모였다.

시체를 끌고 영주성 안으로 들어간 모두는 불필요한 이야기를 배제한 채 최대한 건조하게 현 사태와 관련된 정보를 공유했다.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레이는 자신이 간과한 부분을 깨닫고 다급히 물었다.

"디디에 경은 어디 있습니까?"

"보육원에 지미와 같이 남아있다."

레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감사합니다."

기사 전력을 대부분 이끌고 온 백작이 단순 호의로 디디에를 남겼을 리는 없다.

레이는 백작이 루나의 사정을 파악했다는 걸 알아챘지만 지금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핵심적인 이야기가 끝난 직후 레이가 주장했다.

"흑마법사가 도주하기 전에 아지트를 바로 쳐야 합니다."

젠킨슨이 나지막이 분노했다.

"이 천한 것이 어느 자리라고 입을 놀리느냐."

"편지 전달, 주동자 색출 및 제거, 피에트로 구출, 흑마법사 아지트 위치 파악까지 전부 제가 했습니다. 제게 입을 열 자격이 없습니까?"

"그게 네놈 공이겠느냐? 어린 것이 벌써부터 허언을 하고 다니는...!"

"그만."

백작이 기사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네. 흑마법사들이 도피하기 전에 아지트를 습격해 티티를 구출하고 역량이 허하는 선에서 제국의 적들을 섬멸하게. 이견 있는가?"

"..."

"바로 출발하지."

"명을 받들겠습니다."

기사들이 신속히 몸을 움직였다.

매튜가 기사들을 따라나서며 레이에게 검을 건넸다.

"꼴이 말이 아니구나."

"다행히 목은 붙어있네요."

필립스 가문의 인장이 찍힌 검을 받아든 레이가 숨을 크게 골랐다.

로커스트는 과거부터 열 명이 안 되는 소수의 수하들과 움직였다고 한다.

이변이 없다면 아지트 내 로커스트의 수하들은 기껏해야 다섯 안팎일 테고, 이쪽은 엑스퍼트 급 이상 전력이 11명이었다.

로커스트 본인의 무력이 변수이긴 하지만 세리아까지 동행하는 이상 충분히 해볼 만했다.

필립스 백작이 레이의 예상을 한참 상회하는 속도로 결단을 내린 덕분에 사태를 마무리할 기회를 잡았다.

레이는 부디 로커스트가 얌전히 아지트에 틀어박혀 있길 바랐다.

이게 마지막 전투가 되어야 했다.

*

"감사합니다."

보육원 입구를 지키던 지미가 디디에를 향해 불쑥 입을 열었다.

"백작님께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하나 싶었는데, 먼저 나서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디디에가 아니었다면 보육원이 무방비한 상태에 놓였을 수도 있었다.

지미가 거듭 감사를 표하자 디디에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아니라 백작님의 관대함에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오랜 용병 생활 동안 귀하신 분들을 많이 봤지만, 백작님처럼 관대하고 현명한 분은 몇 없었습니다."

대화를 이어가는 와중에도 둘은 감각을 바짝 세우고 있었다.

언제 흑마법사가 보육원에 나타날지 몰랐다.

허나 몇 시간 뒤 지미와 디디에가 마주한 건, 참 예상외의 인물이었다.

"뭐라고?"

지미가 인상을 쓰고 되묻자 수척한 남자가 자기 가슴을 텅텅 두드리며 외쳤다.

"내 딸을 되찾으려고 왔소. 듣자하니 이 보육원의 관계자가 멋대로 딸을 데려갔다고 하던데, 빨리 돌려주시오."

"딸 이름이 뭔데."

"루나. 루나라고 하오."

가족 (2)

37화

***

로커스트가 세운 아지트 주변엔 결계가 펼쳐져 있었지만, 결계가 모든 위협을 완벽히 보호해주는 수단은 아니었다.

때문에 결계의 외곽을 돌며 순찰을 진행하던 로커스트의 수하, 우니는 얼마 못 가 표정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연락이 늦어. 이 새끼들 어디서 뭐 하는 거야?"

"너무 조급해하지 마."

"빌어먹을, 시모네가 죽었어."

우니가 동료 흑마법사인 옥트를 향해 신경질을 냈다.

"일이 다 꼬였다고. 당장이라도 몸을 피해야 할 지 몰라. 시모네의 죽음을 조사하러 간 놈들도 그걸 모르진 않을 텐데, 이렇게 연락이 늦는다고?"

옥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시모네가 죽자마자 디나르 시내에 나가있던 동료들 전부가 영주성으로 향했다.

이를 마지막으로 소식이 끊겼다.

우니의 말이 맞았다.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지금, 영주성으로 향한 동료들은 최대한 빠르게 새로운 정보를 전달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헌데 벌써 한 시간이 넘게 연락이 없었다.

"불안해하는 건 이해해. 하아, 하필 이런 때 로드께서 자리를 비우시다니."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 있어. 젠장, 우리를 여기까지 끌고 와 놓고 무책임하게 뭐 하는 짓이야?"

"우니, 입조심 해."

"좋은 거 혼자 먹겠다는 건 알겠다고. 근데 굳이 이 타이밍에 밖으로 나돌아야겠어?"

"제발 진정해. 일단 우리끼리라도 의논이 좀 필요하겠어."

"그래, 지금 당장 말이야."

우니가 몸을 돌렸다.

강줄기를 따라 쭉 걸으니 아지트 역할을 하는 오두막이 나왔다.

오두막에 도착한 우니가 벌컥 문을 열며 외쳤다.

"노벰! 두오데! 이야기 좀 해요!"

"무슨 일이야?"

"불안해서 못 참겠어요. 여기서 더는 죽치고 못 있겠다고요."

"로드께선 기다리라고 하셨다."

"빌어먹을. 두오데, 아직도 모르겠어요? 로드는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있다고요!"

"우니, 지금 반기를 들겠다는 거냐."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당장은 로드의 도움을 받기 글렀으니 일단 우리끼리 살길을 찾아보자고요."

"그게 항명이다."

"왜 이렇게 답답하게 굴어요. 시모네도 죽었고! 조사대의 연락도 늦어지고 있어요! 제발 아지트라도 좀 옮기자고요. 노출됐을 확률이 높아요."

"..."

우니의 주장도 일리가 있었다.

두오데가 짧게 고민했다. 멋대로 아지트를 옮기는 건 분명 로드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거다.

허나 로드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수하들을 방치하고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나중에 형벌을 받더라도 당장의 목숨을 부지하는 게 중요했다.

두오데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짐 챙겨. 흔적 지우고. 로드께는 내가 따로 연락하겠다."

"훌륭해요, 두오데. 정말 고마워요."

"쓸 데 없는 소리 말고 빨리 움직여."

이야기를 듣던 노벰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엘프는 어떻게 할까요?"

"...일단 챙겨."

"그리하죠."

방에 들어간 노벰이 엘프의 팔목을 붙들고 나왔다.

끌려나온 엘프가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반항했다.

"이, 이거 놔아-!"

"닥쳐!"

노벰이 불같이 화를 내며 엘프의 다리를 걷어찼다.

퍽!

"아악!"

엘프가 넘어지자 노벰은 연속해서 복부를 걷어찼다.

등 뒤가 벽으로 막혀있었기에 엘프는 속절없이 폭력에 노출됐다.

퍼억! 퍼억!

"으극! 아악!"

"젠장, 쓸모없는 년. 동족에게도 버림받은 병신년이 주제 파악도 못 하고!"

신음이 잦아들 때까지 발길질을 계속한 노벰은 널브러진 엘프의 팔을 씩씩거리며 붙잡았다.

엘프가 피를 게워내며 중얼거렸다.

"울트가... 다 혼내줄 거야..."

"울트? 실종된 영주 놈을 말하는 거냐?"

"우엑, 우윽..."

"병신년."

노벰이 비웃음을 머금은 채 엘프를 끌고 나갔다.

아지트를 옮기기 위한 준비는 금방 마무리됐다.

제국에 쫓기는 처지인 만큼 그들은 언제나 도주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두오데가 약도를 펼쳐놓고 설명했다.

"강줄기를 타고 넓게 돌아 시그니 산맥으로 이동한다."

"좋은 판단이네요. 여의치 않으면 도망치기 좋은 곳이죠."

그냥 산맥 깊숙이 파고들어도 추적이 쉽지 않은 곳이다.

다들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결계를 해제..."

두오데가 흠칫 놀라며 숲속 어딘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침입자다. 숫자는 열 명. 속도를 보면 기병이다."

"시발, 이럴 줄 알았지. 결계로 시간을 얼마나 벌 수 있죠?"

"못 버틴다. 은폐 결계와 감지 결계가 동시에 찢겼어. 아지트 위치가 정확히 노출된데다 침입자 사이에 엑스퍼트 급이 포함되어 있다."

"빨리 튀어요. 침입자 중 기사가 몇 명이나 섞여 있을지 어떻게 알아요."

"짐은 최대한 줄이고 움직인다."

노벰이 혀를 찼다.

"그럼 이년은 처리하겠습니다. 언제 또 소리를 빽빽 질러댈지 모르니, 불안해서 못 데려가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고개를 끄덕이려던 두오데가 황급히 노벰의 목덜미를 잡아끌었다.

지면에서 검은 창이 솟아올라 노벰의 팔목을 꿰뚫었다.

"크악! 어떤 개새끼야!"

엘프를 놓친 노벰이 분노를 토하는 순간 아티펙트의 은폐장이 벗겨지며 세리아의 모습이 드러났다.

두 눈을 붉게 물들인 노벰이 팔목에서 흘러나온 피로 거대한 클로를 만들어냈다.

노벰은 다가오는 세리아를 향해 자신만만하게 클로를 휘두르려 했으나, 세리아의 검에서 검강이 터져 나오자 기겁하며 뒷걸음질쳤다.

세리아는 우선적으로 엘프를 확보한 후 다시 거리를 벌렸다.

정신 없어 보이는 엘프에게 세리아가 물었다.

"네가 티티?"

"티티?"

"응, 티티."

"티티를 알아?"

"잘 몰라. 울트에게 듣기만 했어."

"울트를 알아?"

"친구야."

"정말이지? 울트가 보고 싶어. 언제 돌아온대?"

묘하게 핀트가 어긋난 대화였으나 상대가 티티임을 확신한 세리아가 신호탄을 터뜨렸다.

말을 타고 아지트로 달려가던 모하메드가 신호탄을 확인한 후 지면으로 뛰어내렸다.

"제국의 적을 섬멸하라!!"

모하메드를 따라 말에서 뛰어내린 기사들이 찬란한 검기를 뽑아냈다.

다음 순간 수십 개의 검기가 난무하며 앞을 가로막는 나무를 전부 부수어냈다.

콰가가가가가각!!!

신호탄이 터진 위치까지 일직선으로 길을 연 기사들이 흑마법사들을 향해 전력으로 돌진했다.

흑마법사들의 안색이 시커멓게 죽었다.

*

"아이고, 기사님들 모시고 오니까 세상 편하네."

레이가 흙바닥에 주저앉아 기사들과 흑마법사들의 전투를 구경하며 감탄했다.

기사가 분대 단위로 결집해 화력을 쏟아내니 지형이 훅훅 바뀌었다.

멀쩡했던 평지가 분지처럼 주저앉은 후 강물이 쏟아져 들어와 고이는 광경을 보며 레이가 한탄했다.

"우리 애들은 언제 커서 저렇게 날아다닐까."

빨리 좀 컸으면 좋겠다.

그래야 고생을 좀 덜 하지 않겠나.

지금처럼 싸워댔다간 퇴행성관절염이 30대에 찾아올 거다.

레이는 10년만 더 버텨봐야겠다고 중얼거리며 전장을 살폈다.

자그마한 엘프가 세리아의 품에 안겨 찡찡거리고 있었다.

'저 엘프 하나 때문에 백작이 기사 전력을 싹 다 끌고 출전했단 말이야.'

덜 떨어져 보이는 인상과 다르게 상당히 중요한 인물인 모양이었다.

레이는 이번 일로 생색을 좀 내도 되겠다 싶었다.

뒷걸음질 치다 얻어걸린 격이긴 했지만, 레이가 아니었으면 사태가 얼마나 더 악화됐을지 모를 사안이었다.

'그건 그렇고 전투가 너무 일방적인데.'

세리아가 아티펙트를 활용해 티티를 무사히 구출한 덕분에 기사들은 앞뒤 가리지 않고 전력을 쏟아낼 수 있었다.

흑마법사 중엔 5서클에 이른 실력자도 있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이쪽은 엑스퍼트 급 이상으로만 11명을 꽉꽉 채워 왔다.

"크아악!!"

"아, 안 돼!! 으악!!"

흑마법사들은 변변찮은 반항도 못하고 죽어갔다.

레이는 한편으론 속이 시원했고, 한편으론 골치가 아팠다.

저들 사이에 로커스트가 포함되어 있었다면 전투가 이리 쉽게 풀리진 않았을 것이다.

가장 위험한 놈을 놓쳤다.

쿠우웅---!

폭음이 잦아들었다.

최후까지 저항했던 흑마법사가 허리가 양단된 채 지면을 굴렀다.

백작가 측의 피해라 해봐야 기사 두 명이 가벼운 부상을 입은 게 전부였다.

완벽한 승리였다.

허나 환호를 지르는 일 없이, 모두의 시선이 흑마법사 우니에게 쏠렸다.

동료 흑마법사들이 끝까지 저항한 것과 다르게 우니는 얌전히 생포됐다.

드문 일이었다. 흑마법사는 사형을 피할 수가 없기에 생포될 바에야 차라리 자결하곤 했다.

모하메드가 물었다.

"무슨 수작이지?"

"그냥 편하게 죽고 싶었을 뿐이야."

"얌전히 협력하면 고려해보겠다."

"지랄하지 마. 얌전히 잡혀줬으니 목이나 깔끔하게 쳐 주지?"

"로커스트의 수하가 맞나?"

"빌어먹을. 그래, 그놈 밑닦개 역할이나 해주고 있었지."

"로커스트는 어디 간 거지?"

"몰라, 모른다고. 그따위 눈으로 쳐다보지 마. 진짜 모르니까."

우니가 거칠어진 숨과 함께 배신감을 토로했다.

"그 새끼는 얼마 전부터 정신이 다른데 팔려 있었어. 기껏 여기까지 와 놓고 우릴 방치하다시피 했다니까? 제길, 이 꼴 날 줄 알았어."

"정신이 다른데 팔려 있었다?"

"그래. 대단한 보물이라도 찾았나 보지. 혼자 꿀꺽할 생각이었는지 우리에겐 아무 정보도 공유해주지 않았어. 지금도 그 정체 모를 보물 곁에 가 있겠지."

"언제 너희들 앞에서 모습을 감췄지?"

"오늘 아침."

"아이고, 돌겠네."

레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앞으로 나섰다.

"지금 당장 보육원으로 가봐야 합니다."

"이 정신 나간 놈이 정녕 선을 넘는구나."

젠킨슨이 레이를 향해 칼을 뽑아들며 분노했다.

무식한 천민이 함부로 주둥이를 놀리는 꼴을 더 이상은 용인할 수 없었다.

레이는 젠킨슨의 반응이 이해가 갔기에 일단 숙이고 들어가려 했는데, 세리아가 한발 앞서 젠킨슨의 검을 쳐냈다.

카강!

세리아의 살기가 젠킨슨을 향한다.

젠킨슨 또한 물러서지 않고 기세를 끌어올렸다.

긴장이 흐르는 순간 백작이 투구를 벗고 물었다.

"레이, 로커스트가 노리는 보물이 루나라고 확신하나?"

"아니었으면 제가 디나르까지 와서 이 난리를 치진 않았을 겁니다."

"정체를 들켰다고 판단한 로커스트가 수하들을 버리고 그냥 도망쳤을 수도 있네."

"압니다. 근데 당장 로커스트를 추적할 묘수가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현재 로커스트가 모습을 드러낼 확률이 가장 높은 장소가 보육원입니다."

"보육원이라."

"백작령에서 도망친다 하더라도 탐욕적인 마법사답게 눈독 들여놨던 보물은 챙겨가려 할 겁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아, 일리는 있군."

로커스트를 제거하고 싶은 건 백작도 마찬가지였다.

원한을 산 채 살려 보냈다간 후일 굉장한 불안 요소로 작용할 거다.

밑져야 본전이니, 백작은 레이의 말을 한 번 믿어보기로 했다.

"피에트로와 티티를 챙겨 보육원으로 이동해 디디에와 합류한다. 이견 있나?"

"..."

"움직이지."

"명을 받들겠습니다."

몇몇 기사들이 얼굴에 불만을 드러냈지만 뾰족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닌지라 일단 말에 올라탔다.

레이가 세리아에게 물었다.

"고모, 이번 사태의 주동자를 잡으려는데 도와주실 수 있나요?"

"응, 괜찮아. 다른 부탁 해도 돼. 조카니까 괜찮아."

"감사합니다."

레이가 고개를 숙이자 세리아가 뿌듯해하며 레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뭐? 루나의 부모?

지미가 수척한 남자를 향해 비웃음을 흘렸다.

애를 버리고 도망갈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딴소리를 하는가.

더군다나 시기도 아주 미묘했다.

지미의 표정을 읽은 남자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내 딸을 내놓으란 말이오!! 루나!! 애비가 왔다!! 어서 나와보렴!!"

남자의 곁에 선 여자가 신분패를 내보이며 따졌다.

"의심되면 확인해 봐요. 우리가 루나의 부모가 맞다니까? 자! 어서 확인해 봐요!!"

"허허, 이것들이 자꾸 개수작을 부리네."

"이런 깡패 새끼들한테 내 딸을 맡기진 못하오! 정식으로 고발하기 전에 어서 내 딸을 내놓으시오!!"

지미가 힘으로라도 이것들을 쫓아내야 하나 고민하는데 디디에가 앞으로 나섰다.

"너희들은."

쿠웅!

한 발 내디뎠을 뿐인데 땅이 둔중하게 울린다.

대놓고 마나를 흘려 루나의 부모를 위협한 디디에가 눈을 푸르스름하게 빛냈다.

"큰돈을 빌렸다가 갚지 못하고 자식을 버리고 도망갔다고 들었다. 사실이 아닌가?"

"오, 오해입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남자가 허겁지겁 고개를 저었다.

"친척에게 돈을 빌리기 위해 잠시 집을 떠났는데 사고가 좀 있었습니다. 그래서 돌아오는 게 좀 늦어졌을 뿐입니다. 금전 관계는 전부 청산했습니다."

"사실관계를 확인해 봐야겠군. 필립스 백작님께 탄원하게. 공정한 조사를 거친 뒤에 문제가 없다면 아이를 돌려주실 거다."

"아, 아니 우리가 부모란 말입니다! 부모에게서 이렇게 멋대로 아이를 뺏어가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디디에가 무어라 답하려던 순간 카렌의 목소리가 운동장을 크게 울렸다.

"루나는 내 친구거든요!! 절대 못 데려가요!!"

카렌을 시작으로,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민 아이들이 꽥꽥 소리치기 시작했다.

"루나는 우리 가족이거든!!"

"나쁜 어른들한테 뺏기지 않을 거야!!"

"루나 자꾸 괴롭히면 레이가 와서 때려줄 거예요!!"

"끄응."

지미가 콧잔등을 움켜쥐었다.

위험하다고 방 안에 들어가 있으라고 했더니 말은 참 더럽게 안 들었다.

"조용히 해!! 너희들 빨리 방에 안 들어가?!"

"지미, 나쁜 어른들 쫓아내 줘요!!"

"빨리 걷어차 버려요!!"

"계속 가만히 있으면 나중에 레이한테 이를 거예요!!"

"이젠 저것들까지 레이를 들먹이며 날 겁박하네."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린 지미가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루나가 보육원 건물 앞에 서서 자기 부모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이 어린 소녀는 혼란스러웠는지 작은 어깨를 가늘게 떨고 있었다.

지미는 굳은살 박인 손을 뻗어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불안해할 필요 없어."

"...?"

"우리 모두가 널 지켜줄 거야. 안심해라. 누구도 널 함부로 할 수 없어. 이곳에 남고 싶으면 남고 싶다고 말하면 돼."

루나의 떨림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마음을 안정시킨 루나는 결심을 세웠는지 지미에게 말했다.

"...엄마아빠한테 마지막으로 인사하고 싶어요."

"그럼 같이 가서 인사하자꾸나."

지미가 루나의 손을 잡고 울타리를 향해 걸었다.

루나는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지난 몇 개월 동안의 기억을 떠올렸다.

보육원에 와서 참 많은 걸 경험했다.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도, 공부를 배우는 것도, 친구를 사귀는 것도.

전부 다 처음이었다.

이불을 같이 덮고 조잘거릴 때 느꼈던 답답함도.

간식을 받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렸을 때 느꼈던 조바심도.

카렌과 사이가 벌어졌을 때 느꼈던 초조함조차도.

이제와서 돌이켜 보면 참 소중한 감정들이었다.

염치가 없는 바람이었지만, 루나는 계속해서 친구들의 곁에, 레이의 곁에 남고 싶었다.

울타리 입구까지 걸어간 루나가 웃음이 각박했던 부모를 향해 미소 지었다.

"엄마, 아빠."

루나를 확인한 남자가 반색했다.

"루나, 어서 집으로 돌아가자."

"집으로..."

루나가 고개를 돌려 보육원 너머 산기슭을 바라봤다.

검은 거인이, 거기 있었다.

루나는 알 수 있었다.

시리도록 어둡게 빛나는 검은 거인이, 금방이라도 현실에 간섭해 불길을 뿜어낼 것처럼 흉포한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더는 시간이 없었다.

루나는 친구들과 작별 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음을 아쉬워했다.

"정말 그리웠어요. 어서 우리 집으로 돌아가요. 엄마, 아빠."

가족 (3)

38화

레이는 자신만만하게 로커스트가 보육원으로 향했으리라 주장했지만 내심 자신의 추측이 틀렸기를 바랐다.

지금 백작령엔 로커스트를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로커스트가 보육원을 습격해 수하를 잃은 화풀이라도 했다면 꼼짝없이 참극이 벌어졌을 거다.

레이는 말을 같이 탄 매튜를 계속 재촉했다.

그리고 기사들과 함께 보육원에 도착한 레이가 볼 수 있었던 건.

운동장 한가운데서 남들의 시선을 받으며 엉엉 울고 있는 카렌이었다.

"얘는 왜 이러고 있어?"

주변을 둘러보니 지미와 디디에도 무사했고, 병사들도 멀쩡한 얼굴로 보육원을 순찰하고 있었다.

말에서 내린 레이가 지미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었다.

"루나 부모가 나타나서 루나를 데려갔다고요?"

레이는 두통이 오는 걸 느꼈다.

전생에서든 현생에서든 하여튼 부모 같지 않은 새끼들이 세상에는 너무 많았다.

"지미, 그걸 또 가만히 보고 있었어요?"

"야, 말리고 싶어도 명분이 있어야지. 루나가 자기 입으로 엄마아빠랑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얘기하는데 내가 거기서 뭘 더 어떻게 해?"

"나 돌아올 때까지만이라도 붙잡아 뒀어야죠. 근데 카렌은 왜 울고 있어요?"

"루나가 부모 손잡고 보육원을 떠나려니까 애들이 우르르 달려와서 말리더라고."

"근데요?"

지미가 조금 전 카렌과 루나의 대화를 떠올렸다.

카렌이 루나의 손목을 붙들고 외쳤었다.

"루나!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우리랑 계속 같이 있겠다고 약속했잖아?"

"...약속은 취소야. 엄마아빠가 날 데리러 와 줬어."

"저 사람들은 나쁜 어른들이야! 레이가 그랬어!"

"그렇지 않아. 카렌은 이해 못 해. 엄마도 아빠도 없으니까."

"...뭐?"

"나는 엄마도 아빠도 있어. 난 너희들이랑 달라. 그러니까 이거 놔."

지미의 이야기를 들은 레이가 미간을 꾹꾹 누르며 실소했다.

"가지 말라고 뜯어말리니까 그리 말했다고요? 루나가?"

"그래."

"아이고, 깝깝하다."

친구라 믿었던 루나에게 패드립을 당한 카렌은 서럽게 울면서 주먹을 말아쥐었다.

"루나랑은 절교야! 다시 찾아와도 절대 안 받아줄 거야!"

레이가 씩씩거리는 카렌을 일으켜주며 달랬다.

"루나도 진심은 아니었을 거야. 너무 상처받지 마."

"하지만 루나가 나한테 엄마아빠도 없다고 놀렸는걸!"

"카렌, 없느니만 못한 엄마아빠도 있는 법이야. 루나는 카렌이 엄마도 없고 아빠도 없다고 부러워 한 거야."

"못 믿겠어. 루나랑은 절교야!"

"그러지 말고. 다시 데려올 테니까 루나랑 한 번 더 이야기 해봐."

"루나 데리고 올 거야?"

"그래야지."

레이는 어렵지 않게 상황을 파악했다.

로커스트는 루나를 조용히 데려가기 위해 루나의 부모까지 포섭했다.

허나 디나르에서의 수작이 들킨데다 수하들까지 전멸했으니, 도리어 그를 억제할 요인이 사라져 버렸다.

이젠 일을 어렵게 할 필요가 없었다.

루나가 부모를 따라나서지 않고 버텼다면 직접 찾아와 보육원을 불태웠을 거다.

'로커스트의 존재를 눈치채고 보육원에 해가 갈까봐 제 발로 걸어 나간 건가.'

레이가 지미를 보았다.

"지미, 난 지미를 믿어요. 루나 부모가 어디로 향했는지는 파악했죠?"

"뻔하잖아. 시그니 산맥이야."

"로커스트도 거기 있겠네요. 디나르에서 벌였던 수작은 이미 망했으니, 루나를 챙기고 바로 근방을 뜰 생각인가 보군요."

물론 이건 레이의 일방적인 추측이다.

남들이 보기엔 그저 부모를 다시 만난 아이가 보육원을 떠났을 뿐이다. 아무 문제 없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기사들이 백작에게 조언했다.

"백작님, 영주성으로 귀환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처리해야 할 사안이 많습니다."

"로커스트는 이미 다른 지역으로 도주했을 겁니다. 제국의 지원을 받아 정식으로 추격대를 조직해야 합니다."

"안 됩니다."

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기사들 대부분이 인상을 찌푸렸으나, 할 말은 해야 했다.

"로커스트가 부모를 이용해 루나를 데려간 겁니다. 지금 당장 시그니 산맥으로 가 루나를 구하고 로커스트를 물리쳐야 합니다."

"정말 더 이상은 참을 수 없군."

젠킨슨이 차갑게 분노했다.

"백작님의 관대함이 너의 방종을 부추겼구나."

레이는 젠킨슨의 분노를 이해했다.

로커스트가 루나를 노리고 있다는 것도 제대로 된 근거 하나 없는 레이 혼자만의 주장이었다.

기사들도 어지간히 답답했을 거다.

로커스트는 진즉 몸을 뺀 것 같고 뒤처리 해야 할 건 산더미인데, 웬 애새끼가 자꾸 나서서 헛소리를 해댔으니까.

"천한 것들의 천성이 이렇다. 한 번 자비를 베풀어주면 감사할 줄 모르고 자꾸만 기어오르지."

젠킨슨이 계속해서 분노를 쏟아냈다.

백작도 더는 젠킨슨을 제지하지 않았다.

레이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루나는 엄마아빠 손을 잡고 보육원을 떠났다. 단지 그뿐이다.

백작과 기사들은 이쯤에서 일을 마무리하기로 마음을 굳혔고, 레이가 이 자리에서 아무리 화려하게 입을 놀려도 그들의 선택을 돌릴 수는 없었다.

젠킨슨이 검 손잡이를 붙잡고 경고했다.

"네 공로를 무시하는 건 아니나, 더 이상 주제 파악을 못 하고 입을 놀리면 백작님이 용서해도 내가 널 용서치 않을..."

"아, 시발."

레이가 침을 찍 뱉었다.

"야, 꼬우면 한 판 붙어."

갑작스러운 폭언에 젠킨슨이 잠깐 얼을 탔다.

"...뭐?"

"아가리만 놀리지 말고 남자답게 한 판 붙자고. 빨리 덤벼. 아님 내가 갈까?"

"이 정신 나간...!"

쿵!

레이가 지면을 박찼다.

오버드라이브로 가속된 신체가 기사들의 시야에서조차 껌처럼 늘어진다.

레이가 뽑아낸 검에서 섬광이 터져나왔다.

젠킨슨은 눈앞의 광경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휘둘렀다.

서로의 검기가 충돌한다.

카드득!

"?!"

젠킨슨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검기의 위력에서 밀렸다.

젠킨슨이 그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인지했을 때는 이미, 레이가 품을 파고든 뒤였다.

몸을 회전시킨 레이가 젠킨슨의 복부를 걷어찼다.

퍼억!

콰당탕!!

젠킨슨이 꼴사납게 지면을 굴렀다.

발에 차였을 뿐인데다 갑옷을 입고 있어 실질적인 피해는 없었다.

허나 젠킨슨은 흙바닥에 입을 맞춘 채 손가락 하나 까닥이지 못했다.

비단 젠킨슨뿐만 아니라, 자리를 지키던 모든 기사들이 눈을 부릅뜬 채 차갑게 굳어 있었다.

모하메드를 제외하곤, 다들 찰나의 순간이나마 레이의 움직임을 놓쳤다.

눈으로 본 현상을 받아들이지 못한 머리가 자꾸만 과열되어 사고를 흐트렸다.

"백작님."

레이가 검을 던졌다.

백작가 문양이 새겨진 검이 필립스 백작의 발아래 박혀 들었다.

무릎을 꿇은 레이가 고개를 숙였다.

"제 목을 걸고 부탁드리겠습니다. 루나가 위험합니다. 한 번만 더 도와주십시오.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백작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역사에 새겨질 불세출의 재능을 타고나고도, 고작 몇 달 알고 지낸 남을 위해 목숨을 걸어오는 이유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물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레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세상이 멸망하니 뭐니 레전드리 고아니 뭐니 그딴 소리를 해봤자 백작에게 씨알이라도 먹히겠는가.

그래서 적당히 둘러댔다.

"제 가족이니까요. 그것 외에 다른 이유가 더 필요합니까."

"..."

침묵이 흘렀다.

백작과 기사들의 얼굴에 다양한 감정이 스쳤다가 사라졌다.

가족, 가족을 위해서라는 그 고전적인 한 마디가, 무거운 돌덩이가 되어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젠킨슨이 모래알을 씹어내며 일어섰다.

"불가능하다."

"무엇이 불가능합니까?"

"네 추측이 전부 옳다고 해도 어떻게 로커스트를 찾아내자는 거냐? 상대는 고위 마법사고 시그니 산맥은 넓다. 현재로선 그를 추적할 방법이 없다."

"괜찮습니다."

레이가 확신했다.

"루나가 우리를 인도해줄 겁니다."

*

루나는 말없이 부모를 따라 걸었다.

보육원이 점점 더 멀어져 갔다.

시그니 산맥에 진입하니 조르지아가 나타나 루나의 가족을 안내했다.

루나는 부친의 허리춤에 달린 돈 주머니가 짤그락짤그락 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상상했다.

이번엔 나를 얼마를 받고 팔았을까. 저번보다는 비싸게 받았을까?

기왕이면 제값을 받았기를 바란다. 나의 심장이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귀한 물건으로 취급되는 것 같으니 말이다.

루나는 계속 걸었다. 검은 거인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얼마 안 가 루나는, 바람을 다루는 마법을 가르쳐준 남자와 재회할 수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흰자위를 검게 물들인 남자가 두 손을 힘껏 맞부딪치며 루나를 환영했다.

그는 덤덤한 척을 하려 했지만 찾아오는 희열이 생각보다 강렬했던지 입꼬리를 계속 꿈틀거렸다.

짤그락!

돈 주머니가 루나의 부모 앞에 떨어졌다.

루나의 부모는 돈 주머니를 챙기더니 루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등을 돌렸다.

"내 이름은 윌리암이다. 남들은 나를 로커스트라 칭하기도 하더군."

크르륵!

짐승을 닮은 검은 정령이 허공에서 튀어나왔다.

코앞에서 정령을 마주한 루나의 부모가 끔찍한 비명을 토해냈다.

루나는 가만히 서서 부모의 사지가 찢겨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로커스트, 윌리암이 착잡한 미소를 띠었다.

"디나르에서의 일은 완전히 망쳤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아. 널 얻었으니 말이다."

루나는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한 번 더 깨달았다.

코앞에서 부모를 찢어 죽인 걸 보면, 로커스트는 루나의 마음을 얻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에게 중요한 건 루나의 육체였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이렇게 솔직하게 나와준다면, 루나 또한 불안에 떨며 눈치를 살피지 않아도 되었다.

우웅!

루나의 서클이 활성화됐다.

루나의 몸을 감싼 거대한 서클을 보며 로커스트가 헛숨을 토했다.

"아... 훌륭하군."

로커스트의 눈이 독한 마약에 취한 것처럼 몽롱하게 풀렸다.

루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서클에 술식이 새겨지기 시작한다.

계산을 그만두고, 그저 화염을 빗발치게 하는 술식을 한계까지 반복하고 압축해서 새겨넣는다.

통제되지 않은 마나가 날뛰어댄다.

작은 불꽃이 하나 이는 순간, 화염이 폭풍처럼 터져 나왔다.

화르르르륵!!

예기치 못한 재앙에 조르지아는 허둥대다 불타 죽었다.

정령이 씹어 먹은 부모의 잔여물 또한 검게 타 재로 돌아갔다.

통제되지 않은 마나가 주인까지 잡아먹는다. 루나의 손아귀에서부터 물집이 잡히기 시작했다.

로커스트가 희열에 절여진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하!"

로커스트의 몸에서 마나가 뻗어나왔다.

멋대로 날뛰던 화염이 둥글게 압축되어 얼어붙었다.

루나가 재차 서클에 술식을 새겨넣으려 했지만, 쏟아져 들어온 로커스트의 마나가 루나의 서클을 붙잡아 봉인했다.

로커스트가 소리쳤다.

"너라면 할 수 있다. 네가 있으면 할 수 있어! 너로 인해 나는, 진정한 '로드'라 불릴 수 있게 될 것이다!"

마스터 급 무인과 대마법사.

홀로 국가 하나를 전복시킬 수 있는 전략 병기들.

그들을 하나로 묶어 로드라 칭한다.

언제나 한 끗 부족했던 그 수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다는 확신이 로커스트에게 찾아왔다.

"훌륭해. 훌륭하군! 하지만 이곳을 떠나기 전에 기를 조금 꺾어놔야겠구나."

시도 때도 없이 불을 피워대서는 곤란하다.

검게 물든 폭풍이 로커스트의 손아귀에서 피어올랐다.

팔다리 정도는 미리 잘라내 버릴 생각이었다.

농축된 마나가 루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옥죈다.

온몸이 비틀려가는 고통 속에서, 루나는 레이에게 불려 갔을 때를 떠올렸다.

'내 앞에서 말고는 절대로 힘을 드러내지 마.'

레이는 그리 당부한 다음 덧붙였다.

'루나,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네 목숨이 많이 위험하거나, 또는 친구들의 목숨이 위험할 때는, 망설이지 말고 힘을 써. 뒤처리는 내가 해줄게.'

루나는 그때 물었었다.

나 홀로 해결할 수 없는 위기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레이는 손쉽게 답을 주었다.

'불을 피워. 최대한 화려하게. 지평선 너머까지 보이도록.'

그럼 달려오겠다고 했다.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든, 단숨에 달려올 거라고 했다.

달려와서.

내가 너를.

'구해줄게.'

루나의 코앞까지 다가온 검은 폭풍을 찬란히 빛나는 검기가 양단했다.

카가가가각!!

폭풍을 베어낸 레이가 루나를 옥좼던 마나의 감옥을 힘으로 깨뜨렸다.

뒤로 넘어지려는 루나의 허리춤을 잡아챈 레이가 다시 한 번 불어닥친 검은 폭풍을 막아내고 크게 물러섰다.

레이는 관절에서 피를 뚝뚝 흘려내며,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얼굴 보기까지 참 오래도 걸렸다."

레이가 로커스트를 향해 검을 겨누며 감정을 토해냈다.

"너 때문에 키가 5 cm는 줄었겠다, 이 씹새끼야. 넌 뒈졌어."

"...어처구니가 없군."

로커스트가 할 말을 잃고 중얼거렸다.

꼬맹이 혼자, 검기를 뽑고 나타나서, 갑자기 낄낄거리며 욕을 내뱉는데, 일반적인 상식과 무엇하나 맞물리는 게 없었다.

허나 해야할 일은 명확했다.

"내가 누구인지는 알고 까부느냐?"

"너 하나 때문에 얼마나 굴러다녔는데 새끼야, 뭘 당연한 걸 쳐 묻고 있어?"

"근데 혼자 찾아와서 머리를 내밀어?"

"혼자 오긴 누가 혼자 와?"

보스 레이드를 해야하는데 설마 혼자 왔을 리가.

레이는 여기 싸우러 온 게 아니라 구경하러 왔다.

촤아아악!

사방에서 짙푸른 검기가 피어올랐다.

포위 당했다는 걸 깨달은 로커스트의 눈가가 살짝 좁아졌다.

레이가 루나를 자기 품으로 끌어안으며 선언했다.

"로커스트, 넌 여기서 뒈지는 거야."

당혹에 빠졌던 로커스트가 이내 조소를 터뜨렸다.

"무식한 촌뜨기 새끼들. 기사 몇 좀 끌고 오면 나를 어떻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건가."

검은 거인이 현실에 모습을 드러낸다.

동시에 검게 물든 정령들이 우후죽순 쏟아져 내려 지면을 뒤덮었다.

일백이 넘어가는 암흑 정령들이 검게 물결치기 시작했다.

"내가 왜 소수의 수하들만 대동하고도 제국을 공포에 떨게 했는지 잘 모르는가 보군."

크아아아아아-!!

현실에 현현한 최고위 암흑 정령이 적들을 향해 포효했다.

"너희들은 전부 여기서 죽는다."

그의 이명은 로커스트.

7서클의 경지에 이른 고위 마법사이자 제국이 두려워하는 최강의 암흑 정령사.

"내가 바로, 불사(不死)의 군단이다."

"불사?"

레이가 킥킥거렸다.

"이봐, 그거 알아? 정령도 피를 흘리더라고."

커버 (1)

39화

로커스트.

그를 사냥하기 위해 백작령 내의 기사급 전력이 전부 결집했다.

필립스 백작과 백작의 휘하 기사 아홉, 지미와 매튜, 그리고 세리아까지.

검을 휘둘러 바위를 박살 낼 수 있는 초인만 열셋이었기에, 그들은 내심 자신만만하게 산맥을 올랐다.

허나 일백이 넘어가는 암흑 정령들을 눈앞에서 마주하니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건 목숨을 걸어도 승리를 장담하기 힘든 전투였다.

모하메드가 백작을 바라봤다.

백작은 선대부터 내려온 군사 교리에 따라 얼굴이 보이지 않는 투구를 쓴 채 평범한 기사 흉내를 내고 있었다.

백작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저 강인한 눈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백작의 의중을 확인한 모하메드가 로커스트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제국의 적을 섬멸하라!!!"

검기를 줄기줄기 뽑아낸 기사들이 물결치는 정령들을 향해 돌진했다.

정령들 또한 아무렇게나 붙어있는 입꼬리를 길게 찢더니 기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파가가가가각!!!

사방에서 섬광이 빗발쳤다.

기사들은 날카로운 검기로 어렵지 않게 정령을 양단했다.

허나 하나의 정령을 베어내는 순간 다섯이 넘어가는 정령들이 아가리를 벌리고 덤벼들었다.

사지가 잘려나간 정령조차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을 붙이고 달려드니, 기사들은 계속해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화르륵!

"이런 젠장!"

매튜와 등을 맞대고 검을 휘두르던 지미가 정령이 뱉어내는 화염을 보고 기겁하며 검기를 방출했다.

화염을 가르고 날아간 검기가 정령으로부터 뻗어나온 촉수 두 가닥을 잘라냈다.

촉수가 잘려나간 정령은 제법이라는 듯 아가리를 길게 찢더니 금세 새로운 촉수를 만들어냈다.

"시발! 왜 하필 정령이야?!"

죽이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고, 무력화시키기도 만만치가 않다.

용병 시절에도 상대하기 가장 난해했던 적이 정령을 부리는 정령사였다.

"정령사를 빨리 처리해야 해!"

"대장, 입 다물고 힘 좀 아껴. 저쪽도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으니까."

크아아-!!

검은 거인의 형상을 한 최고위 암흑 정령, 탄탈로스가 아가리를 찢어져라 벌렸다.

질척한 어둠이 탄탈로스의 목구멍에서부터 뭉쳐져 검은 불꽃으로 변하더니, 아가리를 통해 레이저처럼 쏘아졌다.

촤아악!!

엑스퍼트 급은 막아낼 수 없는 공격이다.

곧장 정면으로 나선 세리아가 정팔면체 형태의 방어 아티펙트, 샤를의 장막을 기동했다.

으드드득!

허공에 생겨난 푸른 장막이 검은 불꽃을 빗겨낸다.

세리아는 곧장 탄탈로스의 아가리를 향해 검강을 방출했다.

탄탈로스가 손아귀를 뻗어 빛살처럼 짓쳐들어오는 검강을 움켜쥐었다.

콰드드득!!

거대한 손아귀가 통째로 터져나간다.

탄탈로스는 개의치 않고 반대 팔을 휘둘렀다.

단단한 금속처럼 보였던 탄탈로스의 팔뚝이 파도처럼 너울지더니 거대한 불꽃으로 변해 통째로 떨어져 나왔다.

하늘을 뒤덮은 불꽃이 수백 갈래로 나뉘어 지면을 폭격한다.

세리아 또한 헤일로를 발동시켜 탄탈로스의 화력을 아슬아슬하게 상쇄시켰다.

콰가가가가가가강!!

한편 모하메드는 아군이 정령들을 상대하는 사이 로커스트를 향해 일직선으로 질주했다.

로커스트가 우습다는 듯 손을 뻗자 모하메드를 둘러싼 공간이 전부 검게 물들며 날카로운 가시를 뱉어냈다.

허나 모하메드는 엑스퍼트의 경지를 초월한 기사.

파괴적인 검강이 칼날에서 솟구치며 주변을 잠식한 어둠을 단번에 부수었다.

파가가각!!

공격을 실패한 로커스트가 인상을 찌푸리며 본격적으로 마법을 구현했다.

모든 마법적 현상이 검게 물들어 있는 탓에 육안으로 그 정체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모하메드는 맞아줄 공격은 맞아주며 무식하게 돌진했다.

로커스트의 마나엔 그와 계약한 악마의 권능이 깃들어 있었다.

검은 불꽃을 막아낸 갑옷이 금세 녹이 슬어 삐걱거렸고, 생채기를 하나 허용했더니 상처 입은 부위가 통째로 괴사하기 시작했다.

허나 모하메드는 개의치 않았다. 여기서 망설이면 패배는 자명했다.

로커스트는 꽤나 당황한 채 모하메드의 추격을 피해 자리를 옮겨갔다.

'이게 제국 변방의 촌구석에서 키워낸 기사단이라고?'

세리아와 모하메드를 제외하고도 전체적인 기사들의 수준이 너무 뛰어났다.

기사들 전부가 검기를 다룰 줄 아는데다 연계도 뛰어났고, 무엇보다 죽음을 불사할 각오까지 지니고 있었다.

이만한 수준의 기사들은 권세 좋은 귀족가에서도 어지간하면 만나보기 힘들었다.

허나 그게 무슨 상관인가.

로커스트는 7서클에 이른 고위 마법사이자, 제국이 두려워하는 최강의 암흑정령사였다.

"당신의 권능을 나누겠습니다."

로커스트가 자기 손아귀를 깊게 그었다.

막대한 마나를 머금은 핏물이 허공에서 사라지더니, 이내 로커스트와 계약한 모든 정령의 머리 위에 검붉은 오망성이 떠올랐다.

악마의 권능이 잠시나마 정령들에게 전이된다.

"무슨...?!"

기사들이 경악했다.

정령들의 공격을 막아낸 갑옷이 녹슬고, 가벼운 마음으로 허용했던 상처가 검게 썩어들어가기 시작한다.

공포스러운 광경이었으나 기사들은 물러서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지미와 매튜조차 고함을 내지르며 정령들을 계속 베어냈다.

허나 급격히 깎여나가는 체력을 의지만으로 메워낼 수는 없었다.

기사들이 점점 더 밀려나기 시작한다.

세리아 또한 아티펙트를 침범하기 시작한 악마의 권능에 눈살을 찌푸렸다.

아군이 버텨주지 못하자 모하메드를 향해 점점 더 많은 정령들이 몰려들었다.

간신히 좁혔던 로커스트와의 거리가 다시 벌어진다.

이대로는 패배한다.

급격히 일그러지는 모하메드의 얼굴을 보며 로커스트가 조소했다.

"나는 제국이 두려워하는 불사의 군단...?"

끼에에에에에에에엑!!

비명이.

울렸다.

전장이란 본디 비명이 빗발치는 공간이다.

이 자리에 선 모두가 비명 소리는 익숙했다.

허나.

무언가가 달랐다.

콕 집어 말하긴 힘들었지만.

지금 울려퍼지는 비명 소리는, 이제껏 들어왔던 그 어떤 비명보다도 괴이하고 소름 끼쳤다.

전장이 얼어붙었다.

정령조차도 공격을 멈추고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모두의 시선이 쏠린 곳에서.

레이가 웃고 있었다.

"이봐, 로커스트. 혹시 모랄빵이란 단어 들어본 적 있나?"

레이는 가장 만만하고 약해 보이는 정령을 하나 찾아서 칼을 꽂아넣고 있었다.

허나 칼침을 맞은 정령이 위계가 높은지 낮은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비명 지를 아가리는 다들 뚫려 있었으니까.

"내가 참 궁금한 게 하나 있어."

레이가 검을 비틀자 암흑 정령이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러댔다.

"불사(不死)를 믿어 의심치 않는 군단에 첫 번째 죽음이 찾아왔을 때."

검이 위로 솟구쳐 정령을 양단한다.

"그때도 과연 군단이 군율과 전의를 유지할 수 있을까?"

양단된 정령에게서 검은 물이 줄줄줄 쏟아졌다.

침묵은 잠깐이었다.

정령의 죽음을 목도한 정령들이.

찢어져라 비명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끼에에에에에에에엑-!!!

로커스트는 시모네와 같은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다.

역류하는 정령들의 감정에 먹혀 자리에 주저앉지는 않았다.

허나 정령들을 통제할 수는 없었다.

죽음의 공포가 정령들 사이에 들불처럼 번져나간다.

암흑 정령들은 소름 끼치는 비명을 질러내며 막대한 대가를 감수하고 로커스트와의 계약을 파기하기 시작했다.

너무 강력한 계약에 묶여 계약 파기에 실패한 정령들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멋대로 날뛰어댔다.

레이가 낄낄거렸다.

정령들에게 이곳은 전장이 아니라 놀이터였다.

전쟁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그저 유희를 즐기기 위해 땅을 디뎠을 뿐이었다.

허나 이제는 아니다.

이제 정령들에게도, 이곳은 전장이었다.

불멸이 벗겨지고 목숨을 걸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자 그 공포를 이겨내지 못하고 자멸하기 시작했다.

레이가 로커스트를 향해 검을 겨누며 소리쳤다.

"당장 죽여버려!!"

정신을 차린 기사들이 눈을 번뜩이며 검기를 뽑아냈다.

전의를 상실한 정령들은 더는 기사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삽시간에 정령들을 뚫어낸 기사들이 로커스트를 향해 쏟아져 들어왔다.

로커스트가 검은 핏덩이를 게워냈다.

수십이 넘는 정령과의 계약이 동시에 파기되자 어마어마한 반동이 밀려왔다.

"이, 이, 말도 안 되는...!!"

로커스트가 제자리에서 휘청이는 사이.

탄탈로스가 공포와 분노가 뒤죽박죽된 비명을 토해냈다.

크아아아-!!

탄탈로스는 깨달았다.

한때 모든 정령들을 끔찍한 공포에 몰아넣었던 정령 참살자가 600년 만에 다시 귀환했다는 것을.

크아아아아아-!!!

여기서 죽여야 한다. 여기서 반드시 죽여야 했다.

탄탈로스의 의지에 로커스트가 감응했다.

정령을 죽인 저 이해 불가의 존재만 죽일 수 있다면, 겁에 질려 날뛰는 정령들을 안정시킬 수 있을지도 몰랐다.

"탄탈로스!! 놈을 죽여!!"

로커스트는 서클의 영구적인 손상까지 감수해가며 자신의 마나 대부분을 탄탈로스에게 전이시켰다.

탄탈로스 또한 정령으로서 격을 희생하면서까지 흘러넘치는 마나를 억지로 응축시켜 레이에게 쏘아낼 준비를 마쳤다.

막대한 에너지 파동을 감지한 세리아가 돌진하다 말고 레이의 앞을 가로막았다.

탄탈로스는 개의치 않았다.

사선의 모든 것을 지워버릴 것이다.

마나를 응축시키느라 턱이 떨어져 나간 탄탈로스는 레이를 향해 악마의 권능과 마법, 정령의 힘이 뒤죽박죽 섞인 검은 광선을 토해냈다.

세리아는 광선이 쏘아지기 직전 명령했다.

"멸리의 빛, 최종 형태 변환."

멸리의 빛을 두르고 있던 외장이 벗겨지며 동력부가 노출된다.

멸리의 빛은 발레리우스가 남긴 가장 강력한 아티펙트 중 하나.

동력원은, 드래곤 하트의 조각이다.

"허큘러스, 헤일로, 샤를의 장막, 라벨라 에로우, 프로키온, 보조 시작."

세리아가 지닌 모든 아티펙트가 멸리의 빛을 감싸듯이 회전하며 날뛰어대는 드래곤 하트의 마나를 통제, 증폭시킨다.

드래곤이 남긴 아티펙트가 재현하는 것은.

드래곤이 지녔던 가장 강력한 공격기.

"브레스."

황금색으로 빛나는 광선이 검은 광선을 향해 마주 쏘아졌다.

일개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막대한 에너지 광선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콰가가가가가가가각!!!

그 후폭풍만으로 시그니 산맥 다섯 군데에서 산사태가 발생했다.

도저히 눈을 뜨기 힘들 만큼 강렬한 빛 무리가 한동안 전장을 잠식했다.

서로의 사력을 다했던 충돌의 결과는, 상쇄.

양쪽 모두 유효한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치이익!

멸리의 빛이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기능을 정지했다.

다른 아티펙트 또한 마찬가지였다.

세리아의 전력이 절반 이하로 떨어진 격이었으나, 로커스트는 최후의 도박에 실패했다.

기사들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짓쳐들어왔다.

로커스트가 핏물을 뱉어내며 계속해서 고함쳤다.

"이럴 리가 없다!! 이럴 리가!! 제국의 변방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사방에서 검기가 빗발친다.

팔이 하나 잘려나간 로커스트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탄탈로스가 정면에 나서 잠시 잠깐 기사들의 추격을 제지한다.

허나.

푸욱!

탄탈로스는 느껴지면 안 될 고통을 느끼고 다리 아래를 내려다봤다.

레이가 검기가 맺힌 검으로 탄탈로스의 다리를 푹푹 찔러보고 있었다.

"어이, 고위 정령. 그거 알아? 나는 원래 나서지 않을 생각이었어. 정령들 사이에서도 소문은 돌 테니까."

오늘 일백이 넘는 정령들이 도망쳤다.

무사히 모습을 감춘 정령들에게 소통 수단이 있다면, 분명 이렇게 떠들 것이다. 정령을 죽일 수 있는 인간이 나타났다고.

"내 정보가 새어봤자 좋을 게 뭐가 있겠어. 그래서 욕 좀 먹더라도 루나만 얌전히 보호하려 했는데, 일이 참 마음 대로 안 되더라고."

레이가 검기가 서린 검을 좌우로 흔들며 경고했다.

"기사들 싹 다 불러 너부터 족치기 전에 가만히 있어. 피차 힘들잖아?"

탄탈로스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계약을 완전히 반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타협한 것 같았다.

마지막 방패를 잃은 로커스트는 얼마 못 가 모하메드에게 두 다리가 잘렸다.

다른 기사들도 달려들어 로커스트의 몸뚱이에 검을 꽂아넣기 시작했다.

"크악!! 안 돼!! 안- 커걱!"

로커스트는 내장을 쏟아내면서도 지면을 기어 도망가려 했다.

역류했던 정령들의 감정이 뒤늦게 로커스트의 정신을 잠식했다.

그는 더 이상 냉철한 마법사가 아니라, 공포에 미쳐버린 광인이었다.

촤악!

투구를 벗은 백작이 검을 휘둘렀다.

깔끔하게 잘린 로커스트의 목이 바닥을 굴렀다.

고위 정령 탄탈로스도 계약이 끊어지자 삽시간에 모습을 감췄다.

침묵이 찾아온 전장 한가운데서.

백작이 검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기사들의 환호가 터졌다.

"우아아아아아아아!!!"

제국을 두려움에 빠뜨렸던 최강의 암흑정령사를 해치웠다.

벅차오르는 환희와 미처 해소하지 못한 전장의 열기를 기사들은 환호성을 내지르며 해소했다.

레이는 천천히 얼굴을 쓸어내렸다.

검을 내려놓은 레이가 루나를 챙긴 채 백작의 곁으로 다가갔다.

백작이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레이의 어깨를 붙잡았다.

"고맙네. 다 그대 덕분이야."

"다들 무사하십니까?"

"걱정하지 말게. 회복 못 할 상처를 입은 자는 아무도 없어."

"다비드님께서 전사하셨다고요? 이런,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

잠시 얼을 탄 백작이 혹시 발음이 안 좋았나 싶어 또박또박 다시 말했다.

"레이, 전부 다 무사하네. 애초에 다비드는 이 전투에 참여하지도 않았네."

"정말 슬픈 일입니다. 다비드님께서 전사하시다니. 하지만 이상한 일은 아니죠. 왜냐하면 상대가 존나 존나 강력한 흑마법사였으니까요."

"..."

백작은 슬슬 눈치챘다.

이 새끼가 또 뭔 개수작을 부리려고 밑밥을 까는구나.

한편 세리아는 슬그머니 레이의 뒤로 돌아가 포션병을 꺼내 들고 있었다.

커버 (2)

40화

"로커스트라는 거악을 막아내다 유명을 달리하신 다비드 님의 희생은...?"

레이가 말을 하다 말고 아래를 내려봤다.

얌전히 품에 안긴 채 얼굴을 비비던 루나가 갑자기 두 손을 뻗어 레이의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얘가 왜 이러나 싶어 눈을 깜박인 레이가 슬그머니 뒤를 돌아봤다 기겁을 했다.

"아이씨! 고모! 포션병 내려놔요! 포션병!!"

시무룩해진 세리아가 중얼거렸다.

"치료, 해야 하는데..."

"포션병으로 대가리 내려치는 게 어떻게 치료가 돼요?!"

"효과 좋은데..."

미궁 생활 10년 동안 검증된 치료법이었다.

세리아가 세상 섭섭해하며 포션을 다시 집어넣었다.

레이는 세리아를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계속 입을 놀렸다.

"그, 다비드 님은 제국의 영웅으로서 우리 가슴 속에 기억될 겁니다."

"레이."

슬슬 기사들도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디디에가 부상을 입은 어깨를 감싸 쥔 채 눈가를 좁혔다.

"다비드 님이 전사하셨다고?"

"그렇죠?"

"그럼 시신은 어디 있지?"

"아, 시신 말입니까?"

레이가 손가락을 까닥여 산맥 어딘가를 가리켰다.

"워낙 치열했던 전장이라서, 혹시 시신이 훼손될까 두려워 제가 안전한 곳으로 옮겼잖습니까. 다들 못 보셨나요? 하하하."

모여든 기사들이 슬그머니 검자루를 매만졌다.

세리아 또한 슬금슬금 옆으로 움직이며 다시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레이가 루나를 몸에 딱 붙인 채 다급히 외쳤다.

"일단 귀환하시죠! 루나도 데려다 놔야 하고 말입니다."

*

산맥을 내려오자 백작령이 전체적으로 시끌시끌했다.

워낙 격렬했던 전투인지라 백작령 근방까지 땅이 울려대고 빛이 번쩍였었다.

두려움에 떨던 영지민들은 백작이 무사히 돌아와 얼굴을 내비치자 그제야 안심하며 표정을 폈다.

"레이가 돌아왔어!"

멀리서부터 레이의 얼굴을 확인한 보육원 아이들이 건물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레이는 루나를 품에 안은 채 지친 얼굴로 보육원에 들어섰다.

눈을 붉게 물들인 카렌이 아이들 사이에 서 있었다.

레이가 루나를 지면에 내려주었다.

"카렌..."

카렌을 마주본 루나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잠시 망설인 루나는, 조심스레 앞으로 한 발 나아갔다.

"...카렌, 나 돌아왔어."

"..."

카렌은 루나를 밀어내지 않았으나, 환영해주지도 않았다.

말 없이 눈을 찌푸리는 카렌을 보고 루나가 용기를 냈다.

천천히 카렌에게 다가간 루나가 두 팔을 뻗었다.

"카렌...!"

와락!

루나가 카렌을 껴안았다.

굳어 있던 카렌의 팔이 잠깐 움찔거렸다가 다시 아래를 향했다.

카렌은 이토록 쉽게 루나를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카렌이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루나는 우리랑 다르다며? 엄마도 아빠도 있어서... 앞으로 나랑 안 놀 거라며?"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내밀었던 손은 매몰차게 거절당했다.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계속 눈물이 나왔다.

루나를 원망하고 싶었다. 너 때문에 마음이 많이 아팠다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허나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루나가 더욱 강하게 카렌을 끌어안았다.

"미안해, 카렌."

"이거 놔. 나는 엄마도 아빠도 없으니까, 루나는 엄마랑 아빠랑 멀리 가버려!"

카렌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루나 또한 친구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걸 가슴 아파하며, 솔직하게 고백했다.

"...이제 나도 없어."

"...응?"

"이제 나도 엄마도 아빠도 없어."

루나가 고개를 들어 붉어진 눈시울로 해맑게 웃었다.

"이제 나도 카렌이랑 같아."

카렌이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정말? 루나도 이제 엄마아빠가 없어?"

"응. 엄마도 없고 아빠도 없어. 나 이제 진짜 고아야. 그러니까 이제 괜찮아. 카렌이랑 있어도 돼."

"흐윽!"

눈물을 왈칵 흘린 카렌이 루나를 마주 안았다.

"또 배신하면 그땐 정말 용서 안 할 거야! 영원히 절교할 거야!"

"응, 미안해."

"흐아앙! 멍청아! 다시는 못 볼까봐 무서웠어!"

"나도 무서웠어. 흑, 흐윽! 용서해 줘서 고마워."

부둥켜 안은 채 울음을 터뜨리는 둘에게 보육원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와 엉겨붙었다.

레이가 코를 훔치며 흐뭇하게 웃었다.

"이것 참 훈훈한 광경이네요."

지미가 미간을 찌푸리며 한마디 했다.

"미친놈아, 대화 내용이 전혀 훈훈하지 않잖아."

"아니 뭐 문제 있어요?"

"엄마 아빠 죽은 게 자랑이냐?"

"모든 부모가 부모답지는 않죠. 있는 것보다 없는 게 나을 때도 있는 법이에요."

"자기 밥벌이도 못할 나이에 부모까지 없으면 쟤들은 누가 키우냐?"

레이가 피식 웃더니 지미에게 주먹을 내밀었다.

"누가 키우긴 누가 키워요? 우리가 키우죠."

"진짜 개새끼다 너."

주먹을 마주친 지미가 잠깐 고민하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근데 다비드는 또 무슨 이야기야?"

"아."

레이가 콧잔등을 움켜쥐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