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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디에 (4)

27화

경험도 경지도 디디에가 우세하다.

허나 결국은 엑스퍼트. 압도적이진 못하다.

레이가 완연하게 밀리는 것은 단 하나. 완력.

이미 완성된 기사의 육체에 마나가 깃들자 그 파괴력은 감히 저항하기 힘들었다.

콰앙!!

"...!!"

충돌 직후 지면을 재차 구른 레이가 손아귀를 풀었다.

정면에서 힘 싸움은 아예 성립이 안 된다. 9살의 육체에 마나를 쏟아부어 봤자 기껏해야 몸 좋은 성인보다 조금 나은 정도였다.

'검기를 맺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긴 하는데...'

일단은 보류.

검기를 내보일 환경도 아닐뿐더러, 우세를 점하고 있는 적과의 전투를 제대로 경험해보고 싶었다.

검을 빙글빙글 돌린 레이가 자세를 새로 잡았다.

레이가 디디에보다 우위인 것. 작은 몸뚱이에서 나오는 순간 가속과 민첩성.

하르시아 류 공간검의 보법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레이의 몸이 좌우로 흔들렸다.

카각!!

재차 서로의 검이 맞부딪친다.

레이가 검을 타고 흐르는 반동을 활용해 횡으로 몸을 이동시켰다.

허리를 내준 디디에가 앞발을 좌측으로 빼며 발목을 돌렸다.

간신히 잡은 기회가 삽시간에 날아간다.

카캉! 카가가각!

레이가 자꾸만 반동을 타고 횡으로 움직이자 디디에가 레이의 진행 반향과 반대로 검을 휘둘렀다.

레이가 공격을 흘리려 해봤지만, 페이크였다.

어설프게 주춤거린 레이를 향해 디디에가 명치 아래로 검을 찔러넣는다.

"윽!"

허리를 비틀어 공격을 피한 레이가 구르다시피 몸을 낮춰 뒤로 물러났다.

슬쩍 거리를 좁힌 디디에가 반 박자 빠르게 검을 찔렀다.

일직선으로 다가오는 공격을 흘릴 방법이야 수없이 넘쳐난다.

허나 레이가 공격을 받아내려 할 때마다 디디에의 손목이 낭창거리며 삽시간의 검의 경로를 뒤바꿨다.

수싸움으로 가니 노련한 디디에에게 아예 상대가 안 됐다.

크게 물러난 레이가 무게중심을 낮춘 채 사방을 어지럽게 뛰어다녔다.

허나 디디에의 눈은 레이의 잔상을 지워냈고, 디디에의 몸은 눈이 향하는 방향을 귀신같이 따라잡았다.

레이가 보법을 활용해 아무리 목책 안을 헤집고 다녀도 디디에는 제자리에서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레이를 압박했다.

제대로 된 기사는 이토록 철벽과 같았다.

카가가가강!!

폭풍 같은 검격이 몇 차례나 이어진다.

시간이 흐를수록 레이가 밟아가는 지면의 면적이 줄어들었다.

지친걸까?

입을 헤 벌린 채 레이를 지켜보던 아이들은 그리 생각했지만.

정작 레이의 검격을 받아내는 디디에의 이마에는 서서히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빠르게... 적응한다고?'

경험 부족.

레이는 기사급 강자와의 전투 경험이 극도로 부족했다.

때문에 나아가야 할 때 두 발자국 더 나아갔고, 물러서야 할 때 세 발자국 더 물러섰다.

미친 개마냥 사방을 뛰어다녔던 건 체력이 남아돌아서가 아니라 불필요한 움직임이 많아서였다.

허나 레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움직이는 반경을 좁혀갔다.

끊임 없이 회전하되, 서서히 디디에의 곁에 머물기 시작했다.

이론만 숙지했던 검술이 실전을 거치며 체화된다.

당연한 과정이지만, 그 속도가 예상을 훨씬 상회했다.

'가히 영광이로다.'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레이의 검격에 디디에는 숨이 턱턱 막혀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강한 희열을 느꼈다.

현 시점에서 레이는 분명 디디에보다 약하다.

디디에는 계속해서 손속에 사정을 두고 있었다.

허나 이만한 발전 속도라면.

오래 걸리지 않아 역전될 거다.

이 아이라면 분명 정점에 닿는다. 디디에는 확신했다.

서로의 검격이 강하게 충돌했다.

콰앙!!

더 이상은 날붙이가 버티질 못한다.

레이와 디디에가 반동을 이겨내고 자세를 고정한 채 서로를 마주 봤다.

자연스레 뜻이 통한다.

마나가 휘몰아치며 찰나 간 검이 번뜩였다.

카각-! 터엉!!

"?!"

디디에의 손아귀가 검을 놓쳤다.

디디에가 경악했다.

혹시 몰라 검기의 출력을 줄이고 손아귀에 일부러 힘을 빼긴 했다.

허나 그를 감안해도 설마 손에서 검을 놓칠 줄은 몰랐다.

디디에는 튕겨져 나가는 자기의 검을 눈으로 쫓다 다시 한번 경악했다.

검이 날아가는 경로에 알레시아가 고개를 빼꼼 내민 채 두 팔을 파닥이고 있었다.

"무슨?!"

다행히도 검과 부딪치기 직전 알레시아의 몸이 목책 아래로 쑥 내려갔다.

자기 머리 위를 휙휙 날아가는 검을 바라본 알레시아가 얼을 타다 기함했다.

"디디에 경이 나를 암살하려고 하였다!"

모하메드가 콧잔등을 쥐었다.

"...오해입니다. 디디에 경은 충직한 기사입니다."

"그러한가?"

"그렇습니다."

"믿어보도록 하겠다!"

마음을 가다듬은 알레시아가 옷을 한 번 정리하더니 목책 문을 열었다.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목책 안의 모두가 잠시 눈을 깜박였다.

"니가 여긴 웬일이십니까?"

어설프게 말이 꼬인 레이를 향해 알레시아가 환하게 웃었다.

"레이! 오랜만이로구나! 근데 여기 이상한 냄새가 좀 나는구나아아..."

"오랜만은 아니지요."

"너는 천민 주제에 항상 말이 많구나. 내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줄 알거라."

"그래서, 여기까진 정말 무슨 일이십니까?"

잠시 주변의 눈치를 보던 알레시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만나주지 않으니 레이가 섭섭하다고 하지 않았느냐? 천민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니 고맙게 여기거라."

"...뭐, 기왕 오셨으니 편히 놀다 가세요."

알레시아와 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자리에서 성질을 긁어봤자 좋을 게 없다.

레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니 알레시아의 얼굴이 활짝 폈다.

"대련은 잘 보았다. 디디에 경이 검을 놓치게 하다니, 참으로 훌륭했도다!"

한편 알레시아를 확인하고 눈치를 살피던 카렌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슬금슬금 다가왔다.

레이에게 한 소리 들은 게 있어 잘못을 빌 생각이었다.

카렌이 다가가는 사이에도 알레시아는 레이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부디 계속 정진하거라, 레이. 꼭 기사가 되도록 하여라. 기사가 되는 날 나의 옆자리를 내어줄 것이라 약조하겠다!"

"옆자리?"

레이가 되묻자 알레시아가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어, 그, 호, 호위 말이다! 호위! 혹시나 오해 말거라!"

대화를 듣던 카렌이 눈가를 좁혔다.

문득 알레시아가 옆에 끼고 있는 분홍색 책이 눈에 들어왔다.

[귀축 기사와 악당 영애님]

빠득!

제목을 읽어낸 카렌의 미간이 급격히 좁아졌다.

"안녕하세요, 알레시아 님."

"음?"

"저번에는 제가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카렌의 사과에 알레시아가 흡족하게 웃었다.

"용서해주도록 하마. 오해가 있었다고 하니 깊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나는 관대한 귀족이니라!"

"정말 죄송합니다. 알레시아 님이 진짜 귀족이실 줄 몰랐어요. 두 번이나 졌으니까... 그래도 마법은 정말 신비로웠어요."

빠득!

이번엔 알레시아의 미간이 좁아졌다.

바들바들 떤 알레시아가 레이에게 소리쳤다.

"당장 목검을 가져오거라! 내 그때의 실수를 오늘 만회해야겠다!"

*

탁! 타닥!

아이들의 목검을 휘두르며 실력을 겨루는 모습을 지켜보며 모하메드가 웃었다.

"아가씨가 즐거워 보이는군."

"또래와 교류할 기회가 많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디디에는 살피려던 검을 내려놓은 채 아이들의 대련에 집중했다.

"잠시 둘러봤을 뿐이지만, 보육원에서 자랐다기엔 믿기지 않을 만큼 많이 사랑받고 많이 배운 아이들입니다."

"아가씨께서 나쁜 물이 들 걱정은 없겠군."

"다만 걱정됩니다. 제국을 둘러봐도 백작님과 아가씨처럼 관대한 귀족은 찾기 힘들 겁니다. 지금의 거리감이 익숙해지면, 나중에 문제가 될 겁니다."

"그 말이 옳다. 허나 우리가 참견할 문제는 아니다. 더군다나 길어봤자 20년이다."

"예?"

"20년 뒤면 저 아이들이 누구의 식구가 될 것 같으냐?"

"..."

타닥! 탁!

목검이 부딪친다.

알레시아가 요하나를 밀어붙이며 다짐했다.

'이번엔 절대 지지 않을 것이다!'

알레시아는 요하나와 겨루다가 검을 한 번 놓친 후에 잘 때마다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족보 없는 요하나의 검술을 어떻게 파훼해야 하는가?

답은 어렵지 않았다. 당황만 하지 않으면 된다.

요하나가 기이한 행각을 벌이면 한발 물러서서 동작을 살피면 되는 일이다.

변수만 제대로 통제하면 고급 검술을 익힌 알레시아가 요하나에게 패배할 일은 없었다.

"이야압!"

"우왁!"

요하나를 구석까지 밀어붙여 제압한 알레시아가 목검을 들어 올리며 환호했다.

"그날의 굴욕을 갚았구나!"

요하나는 비틀대며 물러나더니 다시 봉투를 잡고 입을 헤 벌렸다.

"우에에엑..."

속이 뒤집어진 지 얼마 안 돼 몸을 거칠게 놀렸더니 반동이 온 듯싶었다.

"졌어요에엑..."

"어, 어디 안 좋은 것이냐?"

"괜찮아여에엑..."

"으음, 그, 그렇구나. 몸을 잘 추스르거라."

알레시아가 찝찝한 얼굴로 다음 상대를 지목했다. 카렌이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카렌이 꽉 잡은 목검으로 알레시아를 겨누었다.

탁다닥!

목검이 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며 모하메드가 물었다.

"아들아, 그래서 어찌 보느냐."

잠시 고민하던 디디에가 답했다.

"집중적으로 가르치면 두 달... 속성으로 교육하면 몇 주 안에도 어떻게든 될 것 같군요."

요하나가 검술로 알레시아에게 승리를 쟁취하기까지.

디디에는 길어봤자 두 달이면 충분하리라고 말하고 있었다.

"경이로운 거리 감각입니다. 신체 밸런스도 굉장히 좋아보이는군요."

"그렇다면 머리카락이 붉은 여아는 얼마나 걸릴 것 같으냐?"

"열심히 노력하면 반년이 넘어가진 않을 것 같습니다."

"혹시 보육원의 아이들이 전부 다 저만한 수준의 재능을 지니고 있는 거냐?"

모하메드가 세상 심각해져서 묻자 디디에가 고개를 저었다.

"저들이 보육원에서 가장 재능 있는 아이들이라 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설마... 마나 감응력까지 타고난 건 아니겠지?"

입을 뻐끔거리던 디디에가 웃음을 터뜨렸다.

"임무와 관련된 사안인지라. 아버지께도 비밀입니다."

모하메드가 따라서 껄껄 웃었다.

"공사 구분은 명확히 해야 하는 법이지. 기사답구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부자를 향해 레이가 다가갔다.

레이의 접근을 눈치챈 디디에가 먼저 말을 꺼냈다.

"믿기지 않을 만큼 훌륭했다. 계속 정진한다면 네 이름을 역사에 새길 수 있을 거다. 내기에서 이겼으니, 내게 할 부탁이 생기면 개의치 않고 요청하면 된다."

"지금 바로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지금 바로? 일단 들어보지."

"오늘부터 한 달 동안 보육원 안에서만 머물며, 숙식 또한 보육원 안에서 해결해 주십시오."

"한 달이라."

디디에는 레이의 의도를 알겠다는 듯 웃음 지었다.

한 달 동안 숙식을 보육원에서 해결하면서까지 아이들의 수업에 성의를 다하길 원한다는 거다.

거부할 이유가 없었기에, 디디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 부탁을 들어주마. 보육원을 벗어나지 않도록 하겠다."

"감사해요."

레이가 꾸벅 고개를 숙인 후 몸을 돌렸다.

'기회를 잡았다.'

혼자 설치고 다니기엔 보육원의 안전이 걱정되던 참이었다.

어지간한 침입자는 짓밟을 수 있는 훌륭한 방어 포탑을 보육원에 박아놨으니 이제 마음 놓고 움직일 생각이었다.

*

"크읍!! 으으읍!!"

디나르 지역의 음습한 뒷골목.

어깨와 쇄골 사이에 쇠붙이가 박힌 칼이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그조차도 쉽지 않았다.

자꾸만 바둥거리는 칼의 아가리를 틀어막은 레이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뒤지기 싫으면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해."

"크흡! 으읍! 으으..."

"루나를 눈독 들이고 너희 패밀리를 사주한 새끼가 누군지, 아는 건 전부 다 불어봐."

완전범죄 (1)

28화

"상담할 게 있어요."

레이가 입을 열자 지미는 뒷목부터 잡았다.

노이로제 섞인 반응에 레이가 뻔뻔한 얼굴로 따졌다.

"본론도 안 꺼냈는데 왜 이리 과민반응이에요?"

"기다려봐. 소화제 좀 먹고 올 테니까."

지미가 소화제를 가지러 간 사이 레이가 허리춤에서 검을 풀어 탁자에 놓았다. 필립스 백작가의 인장이 박혀 있는 검이었다.

매튜가 썩 부럽다는 얼굴로 검을 바라보자 레이가 방긋 웃으며 검을 내밀었다.

"매튜, 이것 좀 며칠 보관해 줄래요? 훈련할 때 남들 몰래 몇 번 써봐도 괜찮아요."

"오, 정말 그래도 괜찮겠...?"

잠깐 검에 눈이 돌아갔던 매튜가 이성을 되찾았다.

필립스 가문의 문장이 찍힌 검을 굳이 남에게 맡겨?

대놓고 사고 한 번 치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속이 거북해진 매튜가 지미를 따라서 소화제를 찾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잠시 뒤 돌아온 지미와 매튜가 레이를 향해 험악하게 눈을 좁혔다.

"그래서, 뭔데?"

"가디 자작령에서 현재 가장 힘 좋은 조직이 조르지아 패밀리 맞나요?"

"디나르 지역은 꽉 잡고 있다고 봐야지."

그 말이 그 말이었다.

"조르지아가 언제 그렇게 컸죠?"

"원래 세력은 컸지만 지역을 완전히 장악한 건 몇 달 안 됐어. 그거 포함해서 자작령이 좀 뒤숭숭해. 영주는 몇 년째 두문불출에 치안은 갈수록 안 좋아지고 있지. 최근 들어 약장사까지 횡행하고 있다는 소식이 있어."

레이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루나 아시죠? 머리 푸른 애."

"잘 알지. 똘똘한 거 같더만."

"너무 똑똑해서 문제죠. 후우... 지미, 매튜, 잘 들어요.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절대 외부로 새어나가면 안 돼요."

"무게 그만 잡고 얘기해봐."

"루나가 말이죠... 대마법사의 자질을 타고난 것 같아요."

"..."

잠시 말이 없던 지미가 정색한 채 손가락을 두 개 들어 올렸다.

"레이."

"네."

"아무리, 아무리 멍청한 사기꾼이라도."

"?"

"같은 상대에게 같은 사기를 두 번 치지는 않아."

레이가 황당한 얼굴로 검을 뽑아들어 검기를 생성했다.

"아니 내가 언제 사기를 쳤어요? 나 소드 마스터 될 거라니까?"

공수표를 뿌린 거긴 하지만 9살이 검기 촥촥 뽑아내는 시점에서 최연소 소드 마스터 내정자 선언은 결코 신빙성이 부족하지 않았다.

레이가 억울함을 표하겠답시고 앉아서 검기를 휘두르자 지미가 덩달아 흥분해서 소리쳤다.

"야 임마! 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이 좆만 한 백작령에서 로드(Lord) 급 인재가 둘이나 튀어나온다는 게 말이 되냐?! 너 하나만 해도 믿기지가 않아!"

"지미, 틀렸어요."

검을 내려놓은 레이가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채 지미의 착오를 바로잡았다.

"루나는 필립스 백작령이 아닌, 디나르 산(產) 고아예요."

"...아하, 백작령이 아니라 디나르."

"그렇죠."

"아이고오~ 미안해서 어쩌나아? 내가 아주 큰 실수를 할 뻔했어! 고아를 어디서 캐왔는지 다 헷갈리고!"

에베베베 혓바닥을 놀린 지미가 얼굴을 들이밀며 소리쳤다.

"야 이 새끼야!! 내가 지금 고아를 윗마을에서 주워왔는지 옆마을에서 주워왔는지 따지는 거 같냐?!"

"산지가 얼마나 중요..."

"둘 다 그만!"

쾅!

매튜가 책상을 내려쳤다.

벌겋게 변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매튜가 지끈거리는 두통을 참아내며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레이, 네 말을 믿는다고 치자. 루나의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뭐지?"

불신의 기색이 서린 매튜의 표정을 보고 레이가 두 손을 들었다.

"음... 알겠어요. 좀 급했네요."

레이, 지미, 매튜 모두 마법에 관해선 무지한 편이었다.

마법을 다룰 줄도 모르는 레이가 마법사의 자질에 대해 입을 놀려도 신뢰를 사긴 어려웠다.

레이가 자기 실수를 인정하고 정확한 사실만 이야기했다.

"루나가 서클을 타고났어요. 무슨 뜻인지 이해하죠?"

"서클을 타고났다고?"

"이미 각성도 끝났어요. 알레시아가 사용한 마법을 단번에 모방하더라고요. 마법이 발현되기 전에 겨우 말렸죠. 지금 보여달라고 하진 말아요. 보육원에 기사님까지 와 있어서, 잘못하면 걸려요."

"제기랄."

지미와 매튜가 동시에 앓는 소리를 냈다.

"제대로 된 배경 없는 어린아이가 마법적인 재능을 뽐내고 다니는 건 자살 행위야. 함부로 내보이면 안 돼."

"주의하고 있어요. 근데 루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골치가 좀 아프더라고요."

진정된 분위기 속에서 레이가 루나의 사정을 처음부터 설명했다.

몇 개월 전.

루나는 서클을 각성했다.

허나 서클을 각성했을 뿐, 서클의 정확한 용도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루나의 부모는 자식에게 무관심 했다.

허나 집안일을 열심히 해놓으면 가끔은 짧은 칭찬을 들었기에, 루나는 그날도 물을 길어 낑낑거리며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집에 도착하기 직전 부모를 발견한 루나는 반갑다고 빨리 걷다가 돌을 밟고 넘어졌다.

크게 다칠 뻔한 순간, 바람이 불어 몸을 지탱했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가 다가와 물었다. 괜찮으냐고.

고개를 끄덕인 루나는 직감적으로 서클의 사용법을 깨달았다.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아이였기에, 루나는 남자와의 만남이 운명이라 생각했다.

루나는 남자가 자리를 떠나기 전에, 남자의 심장 주위를 회전하는 서클의 흐름을 모방하는데 성공했다.

바람이 불었다.

미약한 바람이었기에, 루나의 서클은 잠시 점멸하다 사라졌다.

루나는 기뻐했다. 자신이 기회를 잡았다고 확신했다.

남자는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루나의 부모가 다가오는 걸 깨닫고 루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말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렴.'

그후 얼마 안 가.

루나의 부모는 도박에 빠져 갚지 못할 빚을 졌고.

본래 자식에 대한 애정이 없다시피 했던 부부는 루나를 버리고 떠났다.

"-라는 사연인데."

레이의 이야기가 끝날 때쯤 지미와 매튜는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빠져 있었다.

레이가 웃었다.

"궁금한 건 이거죠."

일련의 사건이 우연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왜 굳이 이렇게 복잡한 방법을 썼는가? 이걸 물어보고 싶었어요. 루나가 탐났으면 그날 밤에라도 납치하면 됐잖아요? 왜 갱단을, 조르지아 패밀리를 끌어들였죠?"

"합법적인 집단에 속한 마법사가 아닐 가능성이 높아."

지미가 두피를 벅벅 긁으며 답답함을 드러냈다.

"뒤가 켕기는 게 없다면 회유든 협박이든 납치든 빠르게 일을 마쳤을 거야. 공사친 걸 보면 최대한 잡음 없이 일을 처리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아, 잘 모르겠네."

남자의 정체가 제국에 수배된 흑마법사였다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행적이었다.

고작 아이 하나 빼오는 일이다.

그냥 야밤에 몰래 납치해 도주하는 게 양아치들을 동원해 어설프게 공사치는 것보다 차라리 깔끔했다. 상대가 귀족도 아니지 않은가.

관자놀이를 두드리던 매튜가 입을 열었다.

"가설을 하나 세워보자면."

둘의 시선이 매튜에게 향했다.

"상대는 흑마법사다. 디나르 지역에서 중요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던 거야. 프로젝트를 위해 조르지아 패밀리와 결탁했지."

"루나와 마주치기 이전에 이미 가까운 사이였다?"

"그래. 프로젝트가 완료되기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고, 흑마법사는 그 기간 동안 디나르를 떠날 수 없다. 프로젝트 성공을 위해 눈에 띄는 짓은 삼가야 했기에, 길에 떨어져 있던 '보석'을 줍는 일은 조르지아 패밀리에게 위탁한 거다."

"만약 '보석'의 가치가 남에게 위탁하기 힘들 만큼 높았다면요?"

"글쎄. 조르지아 패밀리를 완벽히 컨트롤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대단히 중대해 눈 돌리기 힘들었을 수도 있겠지."

어디까지나 가설이다. 그래도 꽤나 그럴듯했다.

지미가 한숨을 푹 쉬었다.

"어쨌든 마법사 놈이 노리던 아이를 보육원에 데려다 놨다는 거 아니야?"

"그렇죠."

"매튜 가설대로라면 그 프로젝트 끝나자마자 여기 찾아오겠네?"

"그렇죠."

레이가 낄낄 웃다가 정색했다.

"사람을 좀 죽여야겠어요."

"..."

지미는 레이에게 사람을 함부로 죽이면 안 된다느니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사람 죽이겠다는 놈 앞에 세워놓고 확인해야 할 건 하나였다.

"사람 죽여는 봤고?"

"많이는 아니고. 몇 명 정도."

"미친놈. 좋아, 우리에게 원하는 게 뭐냐?"

"어... 별 거 없어요. 앞으로 며칠 간 시내 좀 나가서 사람 좀 많이 만나고, 야밤에 술도 좀 사 먹고 하세요."

"?"

레이의 말을 이해 못 한 지미가 되물었다.

"네가 디나르 가서 사람 죽일 동안 우리는 놀고먹고 있으라고?"

"음, 지미. 저는 보육원을 호시탐탐 노리는 잠재적인 적을 방치할 생각이 없어요. 최소 마법사의 신상이라도 알아야겠어요. 원만한 해결을 위해 대화를 하고 싶어도 상대를 알아야 하잖아요?"

사실 무조건 죽여야 했다.

레이 혼자서 죽일 수 없다면, 지미든 백작이든 끌어들여 반드시 죽여야 했다.

레이는 이런 마음을 감춘 채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 사안을 양보할 생각은 없어요."

"그래서?"

"그 마법사 놈의 신상을 파악할 때까지 조르지아 패밀리를 쑤시고 다닐 거예요. 상대가 갱이라고 해도 상해나 살인 사건이 연달아 터지면 문제가 커질 테죠."

"...그렇겠지."

"그래서 검기를 사용할 거예요."

"...뭐?"

"검기요. 양아치든 갱들이든 검기로 목을 치고, 검기로 반토막을 낼 거라고요. 무조건. 목격자만 없으면 돼요. 여의치 않으면 목격자 목까지 쳐버리죠. 그렇게만 하면..."

지미는 레이가 하려는 말을 알아들었다.

"넌 용의선상에서 벗어나게 되지."

"정확해요."

"너 대체...!"

"그러니까 검기 쓸 줄 아는 지미와 매튜는, 괜히 불똥 튀지 않게 알리바이 많이 만들어 놓으라고요. 이해해요?"

레이는 9살이다.

9살은 검기를 사용하지 못한다.

그건 당연한 상식이다.

때문에 목격자만 없으면, 레이가 검기로 사람 목을 얼마나 자르든, 또한 범인과 행적이 얼마나 겹치든 간에 용의선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꼬리가 길면 잡히겠지만, 딱 한 번 정도는, 자유롭게 자작령을 휩쓸고 다니며 사람을 죽일 수 있다.

9살이기에 가능한 특권이었다.

"맙소사, 진심이냐? 한두 명 죽여서 될 일이 아닐 텐데?"

"어쩔 수 없어요. 잘못하면 보육원이 습격당할거예요."

"젠장, 레이!!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 그냥 고아일 뿐이잖아? 완전히 남이라고? 차라리 그냥 내줘버려! 주워왔던 자리에 다시 버리고 오라고!"

책상을 쾅쾅 내려친 지미가 진심으로 분노했다.

"몇 년도 아니야. 몇 달 전만 해도 생판 남이었던 고아 하나 지키기 위해 네가 그런 위험을, 그런 업보를 감수해야 할 필요가 어디 있다는 거야?"

"한 번 유기된 고아 다시 유기하라는 건 인간적으로 좀..."

"검기로 사람 수십 찢어죽이겠다는 건 인간적이냐?!"

"지미."

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연거푸 고함을 치려던 지미는, 섬뜩하게 빛나는 레이의 눈동자를 보고 목소리를 죽였다.

자리에서 일어선 레이가 창밖을 바라봤다.

어두워지기 시작한 운동장엔 아직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서로를 향해 깔깔대고 있었다.

루나를 지키기 위해 저들을 방패삼을 수는 없다.

역으로, 다른 아이들을 위해 루나를 희생양 삼을 생각도 없었다.

이건 양보가 가능한 문제가 아니다.

레이가 웃었다.

"제 보육원에 들어온 이상, 제 식구예요. 제가 지켜야죠."

잠시 멍하니 레이를 바라보던 지미가 따라 웃었다.

"여기가 내 보육원이지 왜 니 보육원이야 시발놈아."

"흐흐흐..."

셋은 잠시 마른 웃음을 흘렸다.

지미가 호흡을 고르며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레이의 계획이 말도 안 되는 건 아니었지만, 되도록이면 동선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었다. 꼬리는 짧아야했다.

"누구부터 칠 거냐?"

"한스와 칼. 루나를 데려가려 했던 놈들. 얘들이 대단한 걸 알 것 같진 않고, 이놈들부터 타고 올라가 루나의 납치를 사주한 놈을 찾을 거예요."

"...사주한 놈을 찾을 때까지, 다 죽일 거냐?"

"어쩌겠어요. 쓰레기 치운다는 마음으로 해야죠."

레이가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다비드와의 일전이 상기됐다.

다비드의 관심을 끄는데 실패했으면, 루나와 더불어 카렌, 요하나, 미아까지 목숨을 잃을 뻔 했다.

다비드와 전투 때 조금만 판단을 잘못했어도, 보육원이 통째로 불탈 뻔했다.

레이는 다짐했다.

보육원이 전장이 되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레전더리 고아 한 번 뽑았다가 골치가 더럽게 아프다 싶긴 한데...'

이번 일만 잘 마무리 되면 불안 요소는 완전히 사라진다.

레이가 손아귀를 강하게 쥐었다.

피를 뒤집어 쓸 각오는 했다.

이제 움직여야 했다.

완전범죄 (2)

29화

준비를 끝마친 레이는 조용히 백작령을 떠났다.

레이가 자작령 근방에 발을 들였을 때는 이미 하늘이 꽤 어두워져 있었다.

"후우."

가라 앉은 마음속에서 심장 박동만이 불규칙하게 가슴을 때린다.

지금 느끼는 감정이 불쾌함인지 긴장인지 흥분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레이는 가죽 주머니에 꽂힌 단검을 매만지며 호흡을 골랐다.

검은 로브를 반으로 접어 허리에 감은 덕분에 무기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역으로 눈에 좀 띄긴 했다. 날씨에 맞는 복장이 아니었다.

콰득!!

나무 쪼개지는 소리가 들렸다.

레이가 민가 근처로 다가가자 왜소한 남자 하나가 열린 문 틈으로 허겁지겁 기어나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부서진 의자를 들고 선 양아치가 남자를 따라나오며 소리쳤다.

"돈 갚으라고 돈!!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 먹어, 응? 이자 밀린 거 어떡할 거야?"

"하, 한 달만 기다려주시면 이자는 제가 반드시...!"

"이 병신이 그게 지금 몇 번째 하는 소린 줄 알고 떠들어?!"

자주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레이는 사람이 얻어터지든 말든 간섭할 생각이 없었다.

다만 영지병 둘이 낄낄거리며 남자가 얻어터지는 꼴을 구경하고 있었기에, 흥미가 생겼다.

영지병은 치안을 유지하는 역할을 맡는다.

상비군이자 정예병이기에 권위가 결코 낮지 않다.

음지에서 갱들이 돈놀이하는 거야 모를 사람이 없지만, 아무리 기세 좋은 갱들이라도 영지병들 앞에서 대놓고 사람을 패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설령 돈을 받아먹었다고 해도 병사들이 저리 대놓고 폭행을 방관하며 킬킬대는 건 어지간히 기강이 박살났다는 뜻이었다.

병사에게 다가가자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꿉꿉한 냄새가 흘렀다.

체취는 아니었다.

'연초...라기엔 냄새가 독특한데.'

디나르 지역에 약이 돌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레이는 자꾸만 올라가려는 눈꼬리를 툭툭 쳤다.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이른 시일 내에 조져 놔야겠는데.'

타락은 쉽게 번진다.

자작령에서부터 시작된 나태와 무질서는 금세 백작령까지 영향을 끼칠 터다.

아무래도 지미가 관리해야 할 영역이 넓어질 것 같았다.

레이는 지미를 어떻게 구슬려야 하나 머리가 아팠다.

"막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사람 때리잖아요."

레이가 병사에게 다가가 물었다.

꽤 극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이런 정신 나간 새끼가."

병사 하나가 밑도 끝도 없이 발길질을 해왔다.

레이는 옆으로 몸을 옮기며 병사의 몸무게를 지탱하던 반대 다리를 걷어찼다.

지면을 뒹군 병사가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검 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이 시발놈이!!"

레이가 뒤로 훅 물러섰다.

쇠 긁는 소리와 함께 검이 뽑혀 나왔다.

병사의 행동을 보며 레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저씨 머리 다쳤어요? 양아치 새끼들은 가만히 두고 9살 애새끼를 상대로 무기를 뽑아?"

"이 빌어먹을...!"

"적당히 해."

다른 병사의 제지에 레이에게 검을 휘두르려던 병사가 움직임을 멈췄다.

'선임병과 후임병.'

둘의 관계를 파악한 레이가 팔을 꼰 채 선임병을 바라봤다.

레이가 생각해도 시건방진 태도였으나, 선임병은 사람 좋게 웃더니 양아치들을 향해 걸어갔다.

"적당히들 해. 금전 관계에 간섭할 생각은 없지만 사람을 그리 패버리면 되겠어?"

양아치들은 저들끼리 눈빛을 교환한 후 일단 고개 숙이는 시늉을 했다. 저쪽 업계에서 눈치만큼 중요한 재능도 없었다.

폭행 사건을 무마한 선임병은 다시 사람 좋은 웃음을 걸친 채 레이에게 다가왔다.

"주변에서 못 보던 얼굴인데, 혹시 다른 지역에서 왔니?"

"백작령에서 왔어요. 이름은 레이라고 해요."

레이는 굳이 자기 이름을 밝혔다. 선임병의 눈가가 찰나 간 휘어졌다.

"여기까진 무슨 일이니?"

"심부름 왔어요. 잡화점의 오일러 씨에게 전해줘야 할 물건이 있어요."

"그렇구나. 잡화점의 정확한 위치는 알고 있고?"

"직접 찾아가본 적은 없어요. 그래도 괜찮아요."

"음..."

고민에 빠진 척 침음을 흘린 선임병이 이윽고 자기 가슴을 툭툭 치며 장담했다.

"곧 밤이 될 거야. 아이가 혼자 돌아다니기엔 위험하니, 내가 안내해줄게."

"그래도 될까요? 정말 감사해요. 사실 여기 지리는 아직 익숙지가 않아서 걱정하고 있었어요."

"걱정 말고 잠시만 기다리렴."

후임병에게 다가간 선임병이 귓속말로 속삭였다.

"저거 그 녀석이다. 고아 수집가."

"아, 저 새끼가요?"

"그래. 그러니까..."

한동안 귓속말을 이어간 선임병이 레이에게 되돌아와 등을 떠밀었다.

"잠시 인수인계를 했어. 자, 빨리 출발하자. 널 빨리 안내해줘야 나도 다시 내 업무를 보지."

"배려해주셔서 감사해요."

레이는 이 새끼가 참 거짓말을 못한다 싶었다.

마을 변두리를 한 바퀴 돈 선임병은 점차 음습한 장소로 레이를 이끌었다.

반쯤 무너져 내린 폐건물 사이로 들어서자 일련의 무리가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껴있던 덩치가 반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어이~ 시발놈아. 너 무슨 낯짝으로 다시 디나르에 기어왔냐?"

한스였다.

한스의 무리 뒤에서 후임병이 낄낄거리며 레이를 비웃고 있었다.

레이가 선임병을 되돌아보자, 선임병은 짐짓 엄한 얼굴로 레이를 꾸짖었다.

"네가 남의 '물건'을 함부로 탐했다는 이야기는 예전에 들었어. 잘못을 빌고 훔친 물건은 되돌려 주도록 해."

앞뒤 사정을 몰라서 저딴 개소리를 하는 건 아닐 터다.

레이는 한스가 속한 무리를 살폈다. 마른 남자, 칼이 보이지 않았다.

"하, 일을 두 번 하게 생겼네."

첫만남 때 대화를 고려하면 칼이 분명 한스의 상급자였다.

내심 칼이 이 자리에 나오길 바랐는데, 칼 대신 덩치만 기어나왔다.

"어이, 한스."

레이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물었다.

"고작 이 인원으로 날 잡겠다고? 백작령에서 소식은 못 들었어? 더 데려올 친구 있으면 빨리 불러와봐."

"미친 새끼. 마나를 다룰 줄 아는 게 너 하나일 것 같냐?"

한스가 레이의 오만을 비웃었다.

일반인 중에서도 마나를 다루는 법을 깨우쳐 일시적으로 근력을 강화하는 등의 묘기를 부릴 수 있는 자가 몇 있었다.

한스가 속한 무리에는 미약하게나마 마나를 각성한 자가 둘이나 있었다.

같은 경지라면, 당연히 경험 많고 덩치 큰 성인이 유리하다.

같은 경지라면 말이다.

"혹시 칼이란 녀석은 안 왔냐?"

"넌 시발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지?"

"파악 잘하고 있어. 둘이 같이 좀 다니지 그랬어. 그럼 일이 편했을 텐데."

레이는 투덜대며 검을 뽑았다.

검집을 긁지 않고 깔끔하게 뽑혀나온 검이 선임병의 가슴을 꿰뚫었다.

"컥?!"

선임병은 반응하지 못했다.

레이의 속도가 빨랐다기보다는 방심한 탓이 컸다.

"?!"

병사가 찔렸다.

그 아찔한 광경을 코 앞에 두고 양아치들이 잠시 얼을 탔다.

뇌리를 휘몰아친 강렬한 당혹과 분노는 이내 괴성이 되어 터져나왔다.

"저 미친 새끼가!!"

병사가 죽으면 골치가 심각하게 아파진다.

약 몇 주 치 쥐여주고 껄껄 웃으며 무마시킬 일이 아니란 뜻이다.

양아치들이 광분하며 레이에게 달려들었다. 그들 사이 후임병도 섞여 있었다.

후임병은 특히나 골치가 아팠다.

선임병이 9살짜리 꼬맹이 칼에 맞아 죽었다.

보고를 대체 어떻게 써 올려야 책임을 회피할 수 있을지 머리가 복잡했다.

허나 후임병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후욱!

선임병의 가슴을 꿰뚫은 레이의 검에서 푸른 빛이 타올랐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시간.

시야를 밝히는 푸른 빛의 존재감이.

모두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촤악!

사람의 몸뚱이가 갈기갈기 찢겨 나간다.

조각조각 쪼개진 선임병의 장기를 뒤집어쓴 양아치들이 다리를 멈춰 세웠다.

살얼음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돌처럼 굳어있다 간신히 숨을 들이켠 양아치들은, 비릿한 혈향이 뇌리를 타고오르자 그제야 현실을 자각할 수 있었다.

"어, 어?"

퍼억!

뒷걸음치던 후임병의 목에 단검이 박혀 들었다.

후임병의 대가리가 지면을 때림과 동시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에, 엑스퍼트!!"

"도망쳐!! 도망치라고!!"

"으아아아아악!!"

"다들 좀 닥쳐."

촤악!!!

비명을 크게 지른 순서대로 목이 떨어져 나갔다.

몇몇은 사지가 절단난 채 제자리에서 꿈틀거리다 움직임을 멈췄다.

다리에 힘이 풀린 한스가 주저앉았다.

도망치던 양아치 몇이 한스를 지나쳤지만, 귀신같이 날아온 단검에 허리나 다리가 꿰뚫린 채 넘어졌다.

어느새 새파랗게 빛나는 검기가 눈 앞에 다가와 있었다.

한스가 오줌을 지렸다.

그대로 한스를 지나친 레이는 단검에 맞아 부상당한 양아치들을 먼저 정리했다.

핏물이 여기저기 튄다. 한스는 귀를 막은 채 제자리에서 덜덜 떨었다.

마침내 자지러지던 비명 소리가 잦아들었다.

소리 없이 다가온 레이가, 한스의 목에 칼을 겨누었다.

"한스? 상황 파악은 되셨지요?"

"네? 네, 네!"

"목소리는 낮추시고, 묻는 말에만 대답."

"네, 네, 알겠습니다."

"나랑 처음 만난 날 기억하지? 그날 데려가려 했던 아이, 데려오라고 사주한 친구가 누군지 알아?"

"모, 모르겠습니다. 저, 저는 그런 거..."

"그럼 데려오라고 명령한 조직원은 누구야?"

"저, 저, 저는 칼 형님이 시키는 대로..."

"칼은 지금 어디 있는데?"

"주, 주점에서 한잔한다고 들었습니다."

"어느 주점?"

"잘은 모, 모르겠습니다. 이 주변에..."

"이것 봐. 도움이 안 된다니까."

"잠깐...!!"

푸욱!!

"커, 커컥..."

검기에 가슴이 꿰뚫린 한스가 얼마 버티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검을 뽑아낸 레이는 혹시 묻었을지 모를 핏물을 털어내며 혀를 찼다.

"얻은 게 별로 없군."

칼, 그 새끼를 찾아야 한다.

*

여자를 끼고 술을 마시던 칼이 요의를 느끼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화장실에 들어가기 전부터 바지를 주섬거리던 칼이 두 눈을 부릅떴다.

푸욱!

"크읍!!"

단검이 쇄골에 박혀들었다.

칼의 아가리를 틀어막은 레이가 칼을 질질 끌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칼이 사라진 방향을 따라 노란 물이 길게 이어지다 지면에 스며들었다.

음습한 뒷골목까지 칼을 끌고 간 레이가 귓가에 대고 물었다.

"뒈지기 싫으면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해."

"크흡! 으읍! 으으..."

"루나를 눈독 들이고 너희 패밀리를 사주한 새끼가 누군지, 아는 건 전부 다 불어봐."

"컥! 너, 너 누구...!"

"레이."

"...!"

"아가리 열게 해줄 테니까, 눈치껏 조용히 해."

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떠들어 봐. 누가 사주했지?"

"나, 나도 시켜서 한 거야."

"날 자꾸 실망시키면 재미 없을 텐데."

"이, 이런 일을 담당하는 간부가 따로 있어. 브, 브랙이라고... 브랙이라면 사주한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을 거야."

"그분은 어디 계실까?"

"어디있는 지 알아. 내, 내가 안내해 줄게."

"상황 파악 안 돼? 왜 자꾸 개수작이야."

레이가 쇄골에 박아넣은 검에 힘을 주자 사지를 부들부들 떤 칼이 애원하듯 매달렸다.

"아, 아지트가 있어. 문 닫은 술집처럼 꾸며놨지만, 간부들이 자주 모여 의견을 나누는 곳이야. 브랙도 거기 있을 거야. 내가 안내해 줄게. 혼자 찾아가긴 힘들 거야."

"그래?"

"저, 정말이야."

"어쩔 수 없네."

쇄골에서 검을 뽑아낸 레이가 허리에 묶어둔 로브를 탁탁 턴 후 몸에 뒤집어썼다.

로브를 여미어 얼굴까지 가려버리니 그 알맹이가 무엇인지 알아채기 쉽지 않았다.

까치발을 한 레이가 잠깐 걸어보곤 한숨을 푹 쉬었다.

"여자치고도 키가 좀 작긴 한데 네 취향이 특이한 걸로 하자고."

칼의 허리춤에 딱 달라붙은 레이가 로브 안에서 단검을 겨누었다.

날붙이의 예기가 로브 너머에서 느껴지자 칼이 몸을 떨었다.

"자연스럽게 걸어. 애인 하나 옆에 끼웠다 생각하고 움직이면 되잖아."

칼은 목구멍까지 치솟은 욕설을 간신히 씹어 삼켰다.

레이가 낄낄 웃으며 단검에 힘을 주었다.

로브를 찢고 튀어나온 단검 끝이 칼의 살갗을 가로질렀다.

"아지트로 안내해. 제발 개수작 부릴 생각 말고. 목숨은 소중하잖아, 칼."

완전범죄 (3)

30화

칼에겐 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레이는 마나를 각성한 게 분명해 보였다.

칼은 쇄골에 검이 박히기 직전 머리 위에 짙은 그림자가 지는 것을 느꼈다.

레이는 분명 자기 키보다 높게 뛰어올라 칼을 기습했다.

아무리 대단한 신체능력을 타고 났다 해도 마나 없이 그딴 묘기가 가능할 리 없었다.

칼은 가쁘게 호흡하며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아, 안내해 줄 테니까 진정해."

"난 아주 차분한 상태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네가 쓸데없는 행동만 안 하면 우린 아주 행복할 거야. 자자, 내 어깨에 손도 올려도 돼. 자꾸 떨어지려 하지 말고 옆에 딱 붙어."

"큽, 크읍!"

"숨 좀 가라앉혀. 나도 지금 상황이 썩 유쾌하진 않아."

"크흡, 젠장..."

호흡을 고른 칼이 레이를 옆구리에 끼운 채 골목을 벗어났다.

옷을 찢어내 여민 상처에서 피가 새어나왔지만, 갱들끼리 술을 마시다 보면 으레 싸움질을 하곤 했기에 칼의 부상에 대해 깊이 신경 쓰는 자들은 없었다.

칼과 안면이 있는 양아치들의 관심사는 대개 레이를 향했다.

"칼 형님, 그새 여자 취향이 변하신 겁니까? 좀... 많이 작습니다?"

"나이가 어린 겁니까, 몸집이 작은 겁니까?"

"쓰읍... 저 몸집에 제 물건이 들어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은데."

"어? 이 새끼 이거, 지금 칼 형님 물건이 작다고 쪽 주는 거냐?"

"시발놈이 뭐라는 거야? 형님, 오해십니다! 크크큭!!"

눈치없는 양아치들의 헛소리에 얼굴이 시퍼렇게 질린 칼이 다리를 부들부들 떨었다.

레이가 허리춤을 가볍게 쳐주며 속삭였다.

"미안하게 됐어, 칼. 의도치 않게 네 사회적 명성에 누를 끼쳐 버렸네."

칼은 대꾸도 안 한 채 그저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칼의 반응을 확인한 양아치들이 다시 한 번 낄낄거리더니 저들끼리 뭐라 떠들어댔다.

칼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계속해서 거리를 걸었다.

"...이쪽이다."

인기척이 적은 구역으로 들어가자 어두운 거리 가운데 홀로 빛이 새어나오는 건물이 보였다.

건물의 정문에는 덩치 좋은 남자 하나가 짝다리를 짚은 채 연초를 태우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문지기가 칼을 돌아보더니 대놓고 눈살을 찌푸렸다.

"칼? 칼 맞지?"

"어어."

"무슨 일이야?"

"보고해야 할 문제가 있어서 왔다."

"여자까지 끼우고?"

"큼, 금방이라도 도망갈 것처럼 굴어서 말이야."

"간부들한테 들키면 재미 없을 걸. 일단 내가 데리고 있을 테니, 보고하고 나와."

"그래."

레이는 잠시 문지기 옆에 나란히 서게 됐다.

칼이 정문을 쿵쿵 두드리며 안쪽의 패밀리에게 자기 신원을 밝히는 동안 문지기가 슬그머니 레이를 위아래로 훑었다.

"너... 참 작구나?"

"그러게요. 얼른 키가 컸으면 좋겠어요."

"뭐? 키가 커? 너 지금 몇 살인데?"

"이제 9살인걸요."

"허억!"

기함을 한 문지기가 칼에게 고개를 돌렸다.

칼은 초조해 하며 안에서 문을 열어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문지기는 큰 충격을 받은 듯 입을 뻐금거리다 두 눈을 번뜩이며 분노했다.

"9살? 맙소사, 칼! 그렇게 안 봤는데 취향이 아주 고약하군! 딸까지 있는 놈이 말이야! 어떻게 9살을!"

레이가 거들었다.

"괜찮아요. 저는 남자인걸요."

"제기랄! 저거 아주 짐승 새끼였구먼!!"

뒷목을 붙잡은 문지기가 바닥에 침을 뱉었다.

"카악, 퉤!! 내가 저런 새끼랑 어제저녁에도 술을 처먹었다니! 칼, 나는 네가 게이인 줄 몰랐다고! 술 먹고 꼴았을 때 내 몸을 더듬거나 한 건 아니겠지?"

덜컹!

문이 열렸다.

문지기의 목구멍에 단검이 박혀든 것과 칼이 건물 안쪽으로 몸을 던진 것은 거의 동시였다.

"커억...!"

무릎을 걷어차 문지기를 넘어뜨린 레이가 문지기의 멱살을 붙들고 건물 안으로 끌고 갔다.

술잔을 쥐고 있던 조르지아 패밀리의 간부 중 하나가 레이의 몰골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크크큭. 깜찍한 손님이군!"

허리밖에 안 오는 꼬맹이가 시체를 붙들고 어둠 속에서 걸어나온다.

온갖 험악한 꼴을 자주 본 갱들에게 있어서도 충분히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술에 취해서일까. 다들 훌륭한 안줏거리를 본 것처럼 손뼉을 치며 레이를 환영했다.

숨이 끊어진 문지기를 구석으로 밀친 레이는 다시 빗장을 걸어 잠갔다.

그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여기저기서 폭소가 터졌다.

바닥에 나둥그러진 칼이 소리쳤다.

"지미의 수하입니다! 고아 수집가 녀석이에요! 마나를 각성했습니다!"

"뭐야, 설마 진짜 저놈 하나한테 쫓겨 온 거냐?"

"혼자라해도 마나를 사용할 줄 압니다! 여기서 죽여버려야...!"

"이봐, 이봐, 칼!"

우락부락한 근육을 가진 간부가 혀를 끌끌 차며 칼을 타박했다.

"저런 꼬맹이한테 쫄아서 여기까지 기어들어 와 놓고 왜 이리 목소리가 커? 응?"

"죄, 죄송합니다. 대가를 치를 테니, 부디 저 악귀 같은 놈을 처리해주십쇼."

"쯧쯧, 일단 거기서 얌전히 무릎 꿇고 있어."

촥!

허리춤의 낫을 뽑아든 채 홀로 걸어나가는 간부를 보고 칼이 경악해서 소리쳤다.

"같이 쳐야 합니다!"

"이런 멍청한 새끼가. 우리가 너 같은 병신인 줄 알아?!"

근육질 간부가 눈은 칼을 향한 채로 재빠르게 디딤발을 내딛어 낫을 투척했다.

가만히 서 있던 레이가 간발의 차로 허리를 꺾어 미간을 향하던 낫을 피했다.

콰악!!

레이를 스쳐간 낫이 나무로 된 정문을 그대로 꿰뚫었다.

사방에서 탄식이 흘렀다.

"아이고~ 아까워라. 꼬맹아, 운이 좋았네?"

레이가 태평하게 되물었다.

"어... 이 중에 브랙이라는 간부님 계신가요? 아니면 조르지아님? 여기 계시나요?"

잠시 얼을 탄 근육질 간부가 고개를 치켜든 채 폭소했다.

"하하하하!! 아~ 시발, 진짜 골 때리는 꼬맹이가 찾아왔네."

"브랙님? 정말 안 계신가요? 칼이 여기있다고 했는데?"

"큭큭, 꼬맹아. 브랙은 여기 지하에 있어."

웃음기를 지우지 못한 근육질 간부가 구석에 떨어져 있는 탁자를 가리켰다.

"저~기 탁자 치우고 지하로 내려가면 돼."

"지하 말이죠."

거짓말을 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목표한 대상을 찾았다.

'이제 어쩐다.'

브랙과 대면하기 전에 주변을 깔끔하게 정리해야 했다.

목격자를 남기면 안 되었기에 건물 안의 인원을 정확히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기감을 넓게 퍼뜨려 사방을 찔러보는 짓은 마나가 부족해 하지 못한다.

레이는 신체의 오감을 최대한 강화해 보았다.

지하에서 인기척이 몇 개 느껴진다.

건물 주변에 인기척은 없었다.

다행히도, 건물 안의 양아치들만 처리하면 될 듯 싶었다.

레이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뱉었다.

"브랙에게 볼일이 있어서요. 혹시 비켜줄 수 있나요?"

말장난에 물렸는지 근육질 간부가 쿵쿵거리며 돌진해와 레이의 목젖을 노리고 낫을 휘둘렀다.

제 아무리 상대가 하수라도 9살 몸뚱이로 힘 싸움은 비효율적이다.

대각 방향으로 발을 뻗은 레이가 자연스레 발검 자세를 취했다.

촤악!

깔끔하게 뽑혀나온 검이 낫을 쥐고 있던 팔을 잘라냈다.

근육질 간부가 균형을 잡지 못하고 바닥을 굴렀다.

곧장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그보다 앞서 레이의 단검이 목에 박혀 들었다.

"컥!!"

"덮쳐!!"

지역 하나를 주름잡는 갱단의 간부들이니만큼 상황 판단과 움직임은 나름 기민했다.

대충이나마 마나 다루는 흉내를 낼 줄 아는 숫자가 무려 다섯이었다.

마나를 어떻게 써먹어야 적에게 칼침을 놓을 수 있을지, 나름의 노하우는 갖추고 있는 자들이었다.

레이는 검을 한 바퀴 돌려 피를 털었다.

되도록 힘을 아껴야했지만, 안타깝게도 저들의 사체에 반드시 검기의 상흔이 필요했다.

검기를 발현한 레이가 정신을 집중했다.

구름처럼 흐르던 빛 무리가 검신을 타고 올라 검봉에 집약됐다.

검봉에서 뿜어져 나온 검기가 찰나 간 길게 늘어난다.

시푸르게 발광하는 검기가 채찍처럼 휘둘러졌다.

촤아아악!!

일시적으로 얇게 늘어난 검기의 길이만 3 m.

레이의 팔과 검신의 길이까지 더해지자 반경 4 m에 달하는 공간이 푸른 궤적에 휩쓸렸다.

밀도를 낮춘 검기인지라 강철까지는 자르지 못하겠지만, 조르지아 패밀리 중 금속으로 된 갑옷을 챙겨 입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억...?"

"커억?"

"크륵?!"

궤적에 들어섰던 살덩이가 여지없이 반으로 양단됐다.

일순간 눈앞의 풍경이 온통 붉게 물들었다.

투두두두둑!

절단난 살덩이가 바닥에 쏟아진다.

끔찍한 광경을 앞에 두고 칼은 여전히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었다. 그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

"크아...!!"

사람의 생명은 질겼다.

하체가 통째로 떨어져 나가고도 쇼크사를 피한 간부 중 하나가 비명을 지르려 했다.

레이는 곧장 간부의 아가리를 짓밟으며 앞으로 돌진했다.

살아남은 이들 중 간부가 옆에 끼고 있던 여자들도 있었다.

그들 모두가 근육질 간부가 던진 낫이 레이의 대가리를 터뜨리지 못한 걸 아쉬워했다.

레이가 무력한 어린아이였다면 그대로 대가리가 터져 그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을 터다.

그러니 저들은 전부 악인이었다.

아니, 아니다.

이건 자기 합리화다.

그들의 죄악을 낱낱이 파헤쳐 죽여야할 할 이유를 강구하는 것은 방어기제의 발현에 불과했다.

레이는 디나르에 들어서기 전에 무고한 피조차 감수하겠다고 결심했다.

물론, 그렇다 해도.

"너희가 수많은 범죄를 저지르고 방관하며 죄악을 쌓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지."

레이는 기꺼이 자기 합리화를 받아들였다.

"자, 잠까...!!"

"으아...!!"

"꺄아악...!!"

촥!! 촤악!!

휘둘러지는 검에 망설임은 없었다.

비명을 지르려는 놈부터 차근차근 해치웠다.

칼은 이 모든 게 꿈처럼 느껴졌다.

"허억! 허억!"

칼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누구보다 레이를 경계하고 있었기에, 학살이 벌어져도 눈치껏 입을 다물 수가 있었다.

덕분에 목숨을 조금 더 부지할 수 있었다.

주르륵

피가 물처럼 흘러내렸다.

칼은 차라리 비명이 더 오래 울려퍼지길 바랐다.

허나 얼마 안 가, 소름 끼치는 침묵이 사방에 내려앉았다.

자기 차례가 왔음을 직감한 칼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자, 잠깐! 잠깐만, 잠깐만."

"칼? 브랙이 지하에 있는 거 맞지?"

"맞아! 맞고말고! 브랙은 지하에 있어! 내가 제대로 안내해 줬잖아. 그치? 그러니까 제발 살려줘. 제발, 제발 한 번만 살려줘. 오늘 일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게."

"이미 한 번 뒤통수를 맞았는데 너를 어떻게 믿고?"

"혀를 잘라도 좋아. 아니 잘라버려! 목숨만 살려줘 제발. 난 가족이 있어! 아이가 있다고! 가족에겐 내가 필요해!"

절절한 칼의 호소에 레이가 앓는 소리를 냈다.

"아이가 아직 어린가?"

"11살밖에 안 됐어. 내가 돌봐줘야 한다고!"

일말의 가능성을 본 칼이 곧장 무릎을 꿇고 계속해서 자비를 호소했다.

검을 치켜든 레이의 입가에 따뜻한 웃음이 걸렸다.

"어리다니 잘 됐네. 걱정하지 마."

"어? 그, 그럼 살려주는...?"

"너 죽고 마누라가 다른 남자랑 도망가면, 네 소중한 자식은 우리 보육원에서 잘 길러줄게."

"...뭐, 뭐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너 같이 애들이나 팔아먹는 쓰레기 밑에서 커봤자 양아치밖에 더 되겠어. 자식의 미래를 위해 네 한 몸 희생한다고 생각해."

"이런 개새-!!"

촤악!!

잘려나간 칼의 목이 바닥을 굴렀다.

사방으로 번져가는 핏물이 바닥을 덮어간다.

레이는 핏물을 피해 걸으며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칼, 너도 알고 있었잖아. 난 성자가 아니야."

얼마나 많은 아이들을 구하든.

얼마나 성의를 다해 아이들을 가르치든.

그 누구도 레이를 어린 성자 따위로 부르지는 않았다.

레이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상기했다.

"나는 필립스 백작령의..."

재차 피어오른 검기가 공기를 울린다.

레이가 나무로 된 계산대를 향해 검을 내려쳤다.

계산대 아래에 숨어 있던 여자의 머리가 같이 쪼개졌다.

"고아 수집가, 레이다."

고아를 수집하고, 또한 그들을 보호하며 인도한다.

자잘한 희생에 목 매달며 얼을 탈 생각은 없었다.

차갑게 빛나는 레이의 눈이 지하실 입구로 돌아갔다.

브랙을 만나야 할 때다.

확전 (1)

31화

소란스럽던 위층이 조용해 졌다.

지하에서 대기하던 브랙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갑작스러운 소요가 발생할 수는 있으나 그 끝이 침묵이어서는 안 됐다.

마른 침이 꿀떡꿀떡 넘어가는 와중 탁자 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살짝 열린 지하실의 문틈으로, 주먹만 한 무언가가 통통 굴러 온다.

"...?"

쉬이이이익!

"제길!"

주먹만한 구체로부터 연기가 새어나오자 황급히 코를 막은 브랙이 수하와 함께 비밀 통로로 달려갔다.

건물 바로 옆에 세워진 창고로 이어진 통로는 브랙의 마지막 목숨줄이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브랙이 창고 구석에서 머리를 내민 채 주위를 살폈다.

'없다.'

일단 창고 내부는 안전하다.

브랙이 환희하며 창고 문을 열자 레이가 어둠 속에서 푸른 기류에 휩싸여 다가오고 있었다.

브랙의 심장이 덜컥 굳었다.

"둘 중 누가 브랙이지?"

"주, 죽여!"

브랙의 명령에 수하가 무심코 창고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레이는 잘 알겠다는 듯 고개를 까닥이며 검을 휘둘렀다.

촤악!

수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목이 떨어졌다.

창고 안으로 들어선 레이가 브랙과 시선을 마주했다.

"쉽게 쉽게 가자."

레이가 손가락을 입에 가져가 붙이자 브랙은 바짝 얼어붙은 채로 눈알만 좌우로 굴렸다.

레이는 지하실에서 연기가 빠질 때까지 잠시 시간을 가졌다.

지미의 설명에 따르면 저 연기를 밀폐된 공간에서 들이 마시면 어지간해서는 의식을 잃는다고 했다.

연기가 잦아들자 레이가 브랙을 사다리 아래로 걷어찼다.

"자, 진실의 방으로."

"크억!"

등부터 떨어져 고통스러워하는 브랙을 붙들고 레이는 지하실을 향해 내려갔다.

"네가 브랙 맞지?"

"그, 그렇습니다만..."

"물어볼 게 있어서 찾아왔어. 오는 길이 좀 험하더라."

지하실에 들어서니 작은 감옥이 하나 마련되어 있었다.

쇠로 된 창살 너머에는 레이 또래쯤 되는 아이 두 명이 잠들어 있었다.

"이 새끼들 이거 뒷구멍에서 내 가챠 빼돌리고 있었네."

우측으로 시선을 돌리자 지하실에 어울리지 않는 세련된 책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책상 위로 자잘한 서류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의자에 앉은 레이가 싸구려 종이 위에 쓰인 문자를 읽어가며 브랙에게 물었다.

"인신매매는 어떻게 이루어지지? 음습한 곳에 경매장이라도 열리냐?"

"서, 설마요. 그... 브로커가 있습니다. 고객들과 저희를 이어주는."

"그쪽이 더 일리가 있긴 하네."

레이가 책상 서랍을 하나씩 열어보며 질문을 이어갔다.

"최근 칼과 한스가 납치하려 했던 아이를 기억해?"

"...네?"

"너희들이 부모가 도망가도록 작업 쳤잖아. 아이 혼자 남았을 때 데려가려고 칼과 한스를 보냈고."

"그, 기억이 잘..."

"마법사."

순간 브랙의 눈꼬리가 가늘게 떨리는 모습을 레이는 놓치지 않았다.

"마법사가 사주했을 거야. 아이를 납치해 달라고. 기억나지?"

"그, 그건 저도 잘..."

레이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브랙은 그제야 강렬한 후회를 느꼈다.

"저, 저기..."

"무릎 좀 꿇어봐."

"무릎요? 끄으으으읍!"

발목을 짓밟힌 브랙이 입이 틀어막힌 채 몸을 떨었다.

"반항할거면 화끈하게 혀라도 깨물든가. 그럴 자신 없으면 쉽게 좀 가자."

"끄윽..."

"그 아이의 납치를 사주한 마법사 정체가 뭐야?"

"저, 저도 잘 모릅..."

콰가각!!

채찍처럼 휘둘러진 검기가 브랙 바로 앞의 지면을 후려쳤다.

얼굴에 돌조각이 박힌 브랙이 무심코 뒤로 물러섰다가 곧장 제자리로 돌아와 무릎을 꿇었다.

레이가 시푸른 검기로 브랙의 목을 겨누었다.

"좋게좋게 말하니까 내가 지금 농담하는 것 같지?"

"시, 시종장! 가디 자작가 시종장의 아들 시모네! 시모네의 측근이 사주했습니다!"

"시모네라는 녀석의 측근이 마법사라고?"

"그, 그렇습니다."

"이 새끼가 자꾸 장난질을 치네?"

레이가 인상을 구기자 브랙이 기겁을 했다.

"자, 자, 잠깐만! 대체 뭐가 문제야?!"

"마법사가 뭐가 아쉽다고 자작가 시종장 아들 옆에 붙어 측근 노릇을 해?"

"오해입니다! 그, 그쪽께서 자작령 사정을 잘 모르셔서 그렇습니다!"

잠시 동안 브랙을 응시한 레이가 제자리로 돌아가 뒤지던 서랍을 마저 확인하며 경고했다.

"팔다리 멀쩡히 달렸을 때 똑바로 대답하자?"

"알겠습니다!"

"목소리 낮추고."

"네, 넵."

"자작령 사정이 뭔데?"

"영주님이 몇 년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서... 업무 전반을 시종장이 처리하고 있었습니다."

"영주가 실종됐고 시종장이 영주 대리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뿌드득!

잠겨 있던 서랍을 무식하게 열어 재낀 레이가 안의 내용물을 보고 눈가를 좁혔다.

푸른 깃털을 지닌 새가 날개가 뜯긴 채 죽어있었다.

브릿지다.

브릿지 옆에는 뜯어진 편지지가 한 장 놓여 있었다.

레이가 편지지를 들어 올렸다. 암호 기법이 사용됐는지, 아는 문자인데도 전혀 해석할 수가 없었다.

"브랙, 혹시나 해서 묻는데, 설마 시모네가 아버지를 제치려고 너희와 야합한 거냐?"

"...그렇습니다."

"마법사도 그 과정에서 개입했고."

"그렇습니다."

"걔들은 대체 뭘 노리고 개입한 거야?"

"자, 잘 모르겠습니다. 정말입니다!"

"어련하시겠어."

레이가 자꾸만 찌푸려지는 미간을 눌러 피며 생각을 정리했다.

'영주가 실종됐다. 헌데 그간 별문제가 없었던 걸 보면 영주가 미리부터 시종장이 자기 역할을 대신할 수 있게 준비했다고 봐야 해.'

근 몇 년 동안 자작령은 문제없이 잘 돌아갔다.

헌데 이제 문제가 생길 거다. 자식새끼가 갱단까지 동원해 아버지를 제쳤으니.

벌써부터 조르지아 패밀리가 활개를 치고 다니며 분위기를 흐리고 있지 않은가.

"브랙, 솔직히 말하자면."

한숨을 쉰 레이가 자기 한탄을 늘어놓았다.

"나는 이 문제가 간단하길 바랐어. 그냥 멍청한 마법사 하나만 제거하면 끝날 문제이길 바랐다고."

근데 매튜의 가설처럼 앞뒤로 자꾸 이상한 게 엮여나오기 시작했다.

갱단부터 시작해 영지 내 암투까지 마법사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니 정수리가 다 화끈거렸다.

"생각보다 판이 너무 큰데. 마법사에 대해 뭐 더 아는 것 없어?"

"시종장의 눈과 귀가 되어주는 측근들을 치울 때 그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주었..."

"한 명이 아니야?"

"여, 여러 명이었습니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한 사람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납치를 사주한 인간이 그 대장격 마법사야?"

"그렇습니다."

"아하..."

실소를 자아낸 레이가 자기 콧잔등을 움켜쥐었다.

"야, 마법사 이름은 들은 적 있어? 하다 못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아냐?"

"전혀 모르겠습니다. 조, 조르지아 형님이라면 아는 게 있을 수도... 으억!!"

브랙이 깜짝 놀라 손아귀로 바닥을 긁으며 물러섰다.

레이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줄줄 떨어지고 있었다.

"이걸 작성한 게 시종장이고?"

"나, 날아가는 브릿지를 마법사가 죽였고 저희가 회수했습니다. 아, 아마도 시종장이 보낸 게 아닐까요...?"

무작위로 나열되었던 문자가 법칙에 따라 재정렬된다.

아예 사라지는 문자와 새롭게 합쳐지는 문자를 겹쳐보며 레이는 기절하지 않기 위해 혀를 깨문 채 암호화된 편지를 읽어갔다.

[실권이 강탈당했다.]

[조르지아 패밀리가 조력함.]

[치안, 행정 분야를 담당하는 관료들 대거 회유 됨. 비협조적인 인물은 실종 상태.]

[주동자는 시모네로 파악.]

[흑마법사 존재를 확인.]

['티티'에게 위해한 세력.]

마지막 줄을 읽은 레이가 탄식을 흘렸다.

[필립스, 영주 대리 자격으로 즉시 병력 파견을 요청한다. 영지를 정상화시키길 바란다. 맹약에 속한 의무를 다하라.]

"대체 이 시종장이란 새끼는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두 손 놓고 뭐한 거야? 옆에 새끈한 여자라도 붙였냐? 침대 위에서 기력을 다 빨아놓기라도 했어?"

"그런 건 아닙니다만..."

"그럼 대체 뭔데? 아, 돌겠네."

어쩐지 스타팅 지역이 좀 평범하다 싶더라고.

갓난아기 때부터 센세이셔널한 출생의 비밀을 마주한 것치고는 스타팅 지역인 백작령은 나름 평화로운 장소였다.

"그래, 이해해. 이런 이벤트 한두 개쯤 터질 수는 있어. 근데 시발 나는 이게 무슨 이벤트인지 모른다고."

레이는, 말하자면.

읽지 않은 소설에 빙의당했다.

공략집이 존재치 않았기에 파편적인 정보만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움직여야 했다.

지금 사태가 어설픈 마법사 몇 명이 떡고물 좀 먹으려고 벌인 일인지.

혹은 대단한 사연이나 음모가 얽혀 있어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는 사안인지.

누구도 명쾌한 답을 알려주지 않았다.

"하늘에 계신 초월자님, 사람을 잘못 보내놨으면 계시 같은 거라도 내려줘야 하지 않을까요?"

[...]

"응, 기대도 안 했어 병신아."

저 멍청한 시발련한테 내가 뭘 바라겠냐.

툴툴댄 레이가 최초의 목적을 상기했다.

흑마법사의 제거. 제거가 불가능하면 최소한 정체라도 정확히 파악할 것.

'돌아가는 꼴을 보니 나 혼자 칼 들고 돌격했다간 개죽음일 것 같고.'

일단 이 사태를 필립스 백작에게 알려야 했다.

가디 자작과 필립스 백작이 어떠한 관계에 놓여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흑마법사까지 연관되었다면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할 터다.

다만 걱정됐다.

백작의 움직임을 눈치챈 흑마법사들이 먼저 발을 빼버리면 그들을 추적하기 극히 힘들어진다.

도망친 흑마법사들은 언제고 보육원으로 돌아올 터다.

레이가 손가락을 탁탁 튕겼다.

전생에서 레이는 도박을 썩 좋아하지 않았지만, 환생하고 내내 하는 짓거리가 가챠였다.

'자작령을 이렇게 휩쓸고 다닐 기회도 이번이 마지막이니...'

불확실한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기회를 잡았을 때 목적을 달성해야 했다.

레이가 편지의 뒷면을 펼친 채 책상 위에 굴러다니던 펜을 들었다.

[안녕하십니까, 장인어른. 오랜만에 편지드립니다.]

강탈 당할 위험 탓에 일부러 이렇게 썼다.

[저는 디나르에 와 있습니다. 아이들을 사고판다는 조르지아 패밀리를 조지다가 죽은 브릿지와 함께 이런 편지를 주웠습니다. 무슨 뜻인지 해독 가능하실는지요? 장인어른이 그런 잡기에는 능하셨지 않습니까.]

필요한 정보는 다 담아야 한다.

잠시 고민한 레이가 계속 펜을 움직였다.

[디나르의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영지의 주인이라도 바뀐 것처럼요. 혹시 방문하게 된다면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제가 돌아가기까지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으니,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이른 시일 내에 다시 뵈었으면 좋겠군요.]

몇 줄 더 적어넣은 레이가 브랙에게 물었다.

"마법사를 몇 명이나 봤지? 대충이라도 말해봐."

"세, 셋에서 다섯? 정도였을 겁니다. 다들 차림이 비슷해서 같이 모여 있지 않으면 동일인인지 구분이 안 갔습니다."

레이가 시종장이 암호로 적어낸 '흑마법사'란 단어 위에 '최소 3~5'라는 내용을 추가했다.

지하실 바깥으로 나온 레이가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잠시 기다리니 바람 소리와 함께 브릿지가 팔 위에 내려앉았다.

브릿지는 푸른 부리로 살쾡이처럼 생긴 짐승을 물고 있었다.

"독수리도 아니고 이걸 혼자 잡아? 네가 영물이긴 하구나."

가볍게 웃은 레이가 브릿지의 다리에 편지를 동여맸다.

"조용히, 낮게 날아라. 걸리지 말고."

살쾡이 닮은 짐승을 뱉어낸 브릿지는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듯 밤하늘을 낮게 날아 시야에서 벗어났다.

브릿지의 무사를 기원한 레이가 지하실로 다시 내려갔다.

"감옥 열쇠 좀 줘봐."

"네? 네, 여기 있습니다."

단검 하나만 들고 아이들이 갇혀 있는 감옥으로 들어간 레이가 철창 사이로 손을 뻗어 다시 자물쇠를 잠갔다.

"그... 뭐하십니까?"

스스로 감옥에 갇힌 레이에게 브랙이 눈치를 보며 물었다.

레이가 열쇠 꾸러미를 던져준 후 주머니를 가리켰다.

"열쇠 다시 집어넣어."

"알겠습니다."

"야, 혹시 너도 키우는 자식 있냐?"

"그, 아들딸 하나씩 있습니다만..."

"이 양아치들은 남의 자식 팔아가며 제 자식 입에 고기 집어넣는 게 취미인가."

혀를 찬 레이가 바닥에 눌러앉았다.

"니들 같은 놈들 안 설치게 일 끝나면 디나르도 아예 지미가 관리할 수 있도록 해야겠어."

"..."

"자애와 사랑이 넘치는 지미 보육원 '디나르 지부'도 하나 만들고."

최근 인근의 고아를 싹 쓸어간 탓에 고아난에 허덕이고 있던 레이다.

허나 오늘을 기점으로 가챠 돌릴 코인이 꽤 쏟아져 나올 예정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브랙."

"?"

"디나르 지부가 완공되면 네 아들딸부터 우선 입소시켜줄게."

퍼억!

브랙의 미간에 단도가 박혀 들었다.

충격량을 이기지 못한 브랙의 몸뚱이가 바닥을 굴렀다.

레이가 잠든 아이들 사이로 몸을 끼워 넣었다.

'운이 좀 따라주었으면 좋겠는데.'

흑마법사의 존재를 다수 확인한 이상 몸을 사리긴 해야 했다.

허나 어떻게든 마법사의 정체를 파악해야 했던 레이는, 아예 피해자 행세를 하며 기회를 노려보기로 마음 먹었다.

시모네가 이번 학살극을 숨기고 싶다면 측근을 보내 뒷처리를 맡길 거다.

운이 좋다면 시모네의 측근에게 회수되어 가장 가까이서 마법사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 기회를 얻을 지도 몰랐다.

물론 까딱 재수 없으면 독 안에 갇혀 목숨을 잃는다.

모 아니면 도에 가까운 도박.

레이가 자기 신세를 한탄하며 눈을 감았다.

피비린내 나는 어둠 속에서 누워있길 한참.

천장에서 울리는 발걸음 소리에 레이가 다시 눈을 떴다.

과연 어떤 놈이 미끼를 물어줄 것인가.

쇠창살 너머를 응시하는 레이의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습격을 당한 것 같습니다. 어찌할까요? 시모네님."

레이의 입가에 웃음 꽃이 피었다.

확전 (2)

3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