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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로커스트를 처단한 열넷의 무인들이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세리아의 포션병을 경계하며 앞장서 걷던 레이가 일행들의 침묵이 길어지자 먼저 입을 열었다.

"백작님, 근데 '티티'가 대체 누굽니까?"

레이도 티티가 어떻게 생긴 엘프인지는 알고 있었다.

구출 작전에 직접 참여했으니 말이다.

약간 멍청해 보이는 걸 빼면 특별한 구색을 찾기 힘든 엘프였다.

허나 티티의 신병을 확보하기 위해 백작이 직접 기사들을 이끌고 출전했던 걸 보면, 절대 평범한 엘프는 아니었다.

백작이 작게 신음하더니 입을 열었다.

"가문 밖의 사람에게 결코 유출되면 안 되는 비밀이지만, 추후 그녀와 관련해 그대에게 협력을 구하려면 한 번 이야기를 하긴 해야겠군."

"굳이 백작가의 비밀을 캐묻고 싶은 건 아닙니다만."

"이미 그대는 이번 일로 가문의 비밀에 발을 들여 놓았어. 우선 하나 알려주겠네. 티티는 레시나님과 혈연관계에 있는 엘프라네."

"레시나? 엘프 레시나? 혹시 600년 전 대영웅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레이는 근래 하르시아에 대해 알아본다고 이런저런 책을 뒤져봤던 탓에 600년 전 영웅들의 이름에 익숙했다.

사실 최근까지 레이가 무관심했을 뿐이지, 600년 전 영웅들의 이야기는 평민들 또한 잘 알고 있을 만큼 인기 있는 신화였다.

백작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 레시나가 맞네."

"아니, 엘프 대영웅의 혈육을 왜 인간이 지키고 앉아있습니까?"

"더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하도록 하지. 일단 다비드의 얼굴을 좀 보고 싶네만."

"아, 보여 드려야죠. 로커스트와의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신 우리 다비드님은 저쯤에 모셔다 놨습니다."

한편 별생각 없이 레이를 쫓아가던 지미는 눈치챘다.

이 방향은 '케냐의 저장고'로 향하는 방향이었다.

지미는 설마설마하며 레이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노려봤다.

'설마 아니겠지. 설마 아닐 거야.'

허나 과거부터 지금까지 쭉.

레이는 지미의 기대를 단 한 번도 배신하지 않고 돌려주었다.

"바로 여기 계십니다."

레이가 케냐의 시체 저장고로 들어가더니 끙끙거리며 다비드의 시신을 끌고 나왔다.

낮은 온도와 적절한 습기 탓에 시신은 그럭저럭 제 모양을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부패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시체 썩는 악취가 저장고에서부터 흘러나왔다.

"다비드 님은 최후의 순간까지도 로커스트에 맞서 명예롭게 분투하셨죠."

"...?"

고개를 기울이는 백작을 향해 레이가 태평하게 입을 놀렸다.

"로커스트와의 격전지에 추모비를 하나 크게 세우는 건 어떨까요? 문구는 [제국의 영웅 다비드 님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며] 정도가 좋을 것 같습니다."

스르릉

백작의 검이 뽑혀 나왔다.

레이가 기겁하는 흉내를 내며 한 발 물러섰다.

"배, 백작님?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한편 다비드의 시신을 살핀 모하메드가 앓는 소리를 내며 보고했다.

"백작님, 다비드가 맞습니다."

촤자자작!

기사들 전원이 검을 뽑아 레이를 겨눴다.

레이가 주변 눈치를 살피다가 결국 포기하고 솔직히 고백했다.

"제가 죽인 게 맞아요. 제가 다비드를 죽였습니다."

백작이 의문을 토했다.

"다비드를 죽여? 그대가 다비드를 죽였다고?"

"예, 뭐. 제가 죽였..."

"레이, 그대 혼자 다비드를 해치는 게 가능했을 리가 없네."

백작이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들은 기사들이 후방으로 검을 돌려 지미와 매튜를 겨눴다.

지미가 곧장 무릎을 꿇으며 목이 찢어져라 외쳤다.

"백작님!! 저는 억울합니다!! 저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이건 저 악마 새끼가 혼자 저지른 짓입니다!! 살려주십시오, 백작님!!"

지미의 빠른 손절에 레이가 입맛을 다시며 솔직히 불었다.

"저 혼자 죽인 거 맞습니다. 지미와 매튜는 아무 관련이 없어요."

"아니, 대체..."

황망한 감정을 내비친 백작이 간신히 마음을 추스르고 물었다.

"다비드를... 왜 죽인 건가?"

"다비드를 대동하고 보육원으로 알레시아 찾으러 오셨을 때 기억나십니까?"

"기억하고 있네."

"그날 다비드가 루나와 마주쳤습니다. 대놓고 루나를 탐내는 티를 내더니, 며칠 뒤 폭우가 쏟아지던 날 보육원에 침입해 루나를 납치하려 하더군요."

"혹시 제자로 삼겠다던가 그런 건..."

"루나의 심장을 뽑아 아티펙트로 가공하겠다고 제 앞에서 자랑했습니다. 그래서 죽였습니다."

"다비드가 그런 끔찍한 일을 벌일 리가... 있긴 있지만..."

살인의 동기는 납득이 갔다.

기사들도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 심장을 뽑아 아티펙트로 만들겠다고 지껄였다고? 인성 터진 마법사 새끼들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지.

기사들의 마법사 불신은 꽤 뿌리 깊었다.

허나 진짜 문제는 다비드를 어떻게 죽였냐는 거다.

"레이, 다비드는 고위 마법사네. 그대가 아무리 뛰어난 천재라지만... 이해가 가질 않는군. 그대 혼자 다비드를 죽였다고?"

"물론 저도 죽을 뻔하긴 했습니다만."

"정확하게 얘기하게."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어린아이 흉내를 냈죠."

"레이, 그대는 어린아이가 맞아."

"평범한 어린아이 흉내를 냈죠."

말을 정정한 레이가 당시의 상황을 대략적으로 설명했다.

"...그렇게 해서, 첫 일격에 서클에 치명상을 입힌 덕분에 죽일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듣던 지미가 흙바닥에 머리를 푹 찍었다.

그제야 레이가 얼마 전에 흉터가 멋지니 어쩌니 하면서 치료를 거부했던 진정한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야 이 새꺄!! 보육원을 통째로 태워 먹을 뻔했으면서 나한테까지 사고친 걸 숨겨?!"

"남한테 알린다고 답이 나오는 문제가 아니었던지라. 게다가 잘못하면 지미와 매튜도 죄를 덮어쓸 수 있었으니까요."

어깨를 으쓱인 레이가 백작과 마주봤다.

"백작님, 이거... 어떻게 커버 좀 쳐주실 수 있나요?"

"커버?"

"다비드의 죽음을 이번 일이랑 적당히 엮어서 묻어주실 수 있으시냐고요."

레이가 솔직하게 부탁했다.

고위 마법사가 죽은 일이다.

그럴듯한 장소에 다비드의 목을 대충 던져 놓는다고 일이 마무리 되진 않는다.

이건 필립스 백작쯤은 되는 권력자가 직접 나서서 그림을 예쁘게 꾸미고 마무리까지 신경 써줘야 덜미를 잡히지 않고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이었다.

만약 필립스 백작이 레이의 부탁을 거절하면?

어쩔 수 없었다. 그냥 얌전히 목 내밀고 죽는 수밖에.

"다비드님의 명예도 고려해주시길 바랍니다. 고위 마법사가 9살한테 칼 맞아 죽었다고 소문나면 죽어서도 얼마나 쪽팔리겠습니까?"

"레이, 알아들었으니 그만 입 좀 다물게."

탄식을 터뜨린 백작이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이들 전부가 백작의 명령 한 마디에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운 충직한 기사들이었다.

백작은 고민했다.

레이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레이의 말을 듣고 보니 사건 전후에 있었던 레이와 다비드의 이상 행동들이 퍼즐처럼 짜맞춰졌다.

실리적인 면에서도, 다비드가 9살된 아이한테 죽었다고 밝히는 것보다 로커스트와의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뭉개는 게 백작에게 이익이었다.

허나 다비드의 사인을 은폐하기 위해서는 기사들에게 위증을 강요해야 한다.

이는 백작에게도 기사들에게도 불명예스러운 일이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백작이 기사들을 둘러봤다.

"경들께 불명예스럽고도 기사도에 어긋나는 부탁을 해야겠네. 강요하는 게 아니야. 들어주지 않아도 좋네."

착잡해 보이는 백작을 향해 모하메드가 한 쪽 무릎을 꿇었다.

"개의치 마십시오. 저는 백작님의 검입니다. 어떤 명이든 받들겠습니다."

다른 기사들또한 한 쪽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어떤 명이든 받들겠습니다!"

"...다들 고맙네."

백작이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른 채 기사들의 어깨를 한 번씩 두드려주었다.

이야기가 괜찮게 풀릴 기미가 보이자 긴장의 끈을 놓쳐버린 레이가 제자리서 비틀거리다 주저앉았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백작님. 근데 그때는 제게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레이, 혹시 사고 친 게 더 있으면 지금 말하게."

"어... 흑마법사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디나르 지역 갱들을 검기로 좀 죽였습니다. 조르지아 패밀리 놈들요. 목격자는 피에트로님 한 분입니다."

"그건 상관없네."

"뭐... 그럼 더 없을 겁니다. 아마도요."

"일단 그대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도록 노력하지."

"감사드립니다. 하아... 드디어 일이 좀 마무리되는 것 같네요."

레이의 어깨가 좌우로 흔들렸다.

레이는 툭툭 끊겨가는 의식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아, 너무 무리했나."

그 말과 동시에 레이의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

"?"

레이가 천장을 보고 눈을 깜박였다.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뜬 기분인데 모든 게 달라져 있었다.

분명 산속에서 백작과 마주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침대에 혼자 누워 있었다.

낯설지 않은 천장을 보며 레이는 자기가 기절했었다는 걸 깨달았다.

굳어있던 머리가 다시 돌아가기까진 시간이 좀 걸렸다.

"다행히... 감옥 안은 아니네."

다비드를 죽였다는 걸 고백했다.

백작이 뒤처리를 해줄 생각이 없었으면 레이는 지금 감옥에 박혀 있었을 터다.

"이걸로 다비드 문제도 완전히 해결인가? 다행이긴 한데... 아이고, 온몸이 쑤시네."

끙끙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난 레이가 뒤늦게 팔꿈치와 무릎에 붕대가 감겨있음을 깨달았다.

"아, 관절 박살났었지."

순순히 다시 침대에 누운 레이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깜짝 놀랐다.

곱게 치장한 아름다운 여자가 침대 맞은 편 의자에 앉아 레이를 지긋이 노려보고 있었다.

레이가 당황해서 창문 밖을 바라봤다. 아직 해가 중천이었다.

어버버 얼을 타던 레이가 간신히 한 마디 했다.

"어, 엄마? 이 시간에 안 자고 뭐해?"

한숨을 길게 쉰 여자가 입을 열었다.

저주 (1)

41화

"너 엄마 없니?"

"어, 엄마 그게 무슨 말이야. 하하, 엄마가 없긴 왜 없어? 내 눈앞에 있는데."

"그럼 왜 그렇게 애미 없고 집도 없는 자식처럼 나다니는 거니? 어?"

"내, 내가 언제 그랬다고..."

레이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일단 고개부터 저었다.

지금까지 사고쳤던 게 워낙 많은 탓에 한 번 꼬리를 잡히면 한두 시간쯤은 우습게 설교를 들어야 했다.

미간을 찌푸린 레이의 양모, 벨라가 계속해서 쏘아붙였다.

"네 집이 여기가 맞긴 하니? 방도 따로 마련해주고 침대도 사주고 책상도 사주고 원하는 대로 꾸며줬더니 집구석엔 얼굴도 안 비치고 아주 보육원에서 눌러살고 있더만?"

"오, 오해야 엄마. 나 잠은 맨날 집에 들어와서 자."

"내가 밤마다 집에 없다고 아들이 뭐하고 다니는지도 모를 것 같지?"

"어, 음, 죄송합니다..."

멀쩡한 집구석 놔두고 보육원에서 살다시피 한 게 사실이라 변명할 구색이 없었다.

벨라의 한숨이 짙어졌다.

"요즘 사람도 패고 다닌다며."

"자꾸 양아치들이 보육원을 기웃거려서..."

"이게 지미랑 놀더니 깡패 다 됐네?"

"그런 거 아니야..."

"집에 가둬놔야 정신 차릴래? 백날 입으로만 얌전히 있겠다고 떠들어 대고. 이번엔 대체 어딜 갔다 온 거니?"

"디나르에 잠깐 볼일이 있어서 갔다왔어."

"잠깐? 지금 '잠깐'이라고 했니? 잠깐 볼일 있다는 녀석이 하루 넘게 실종되더니 기절해서 실려와?"

"기절이라니. 그냥 잠을 좀 못 자서 깜박 졸았던 거야."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지? 너 사흘 만에 깨어났어."

"어? 정말?"

레이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사흘 가까이 정신을 못차렸다고? 확실히 무리를 좀 하긴 했는데...'

디나르에 잠입한 후 로커스트에게 닿을 때까지 이틀에 가까운 시간이 소비됐다.

그 기간 동안 제대로 휴식을 취하기는 커녕 극도의 긴장 상태를 유지하며 계속 칼을 휘둘렀다.

돌이켜보니 어찌 마지막까지 안 쓰러지고 버텼나 싶긴 했다.

벨라는 사흘 동안 신관과 기사도 모자라 백작까지 레이의 곁을 다녀갔다고 투덜대며 깝깝한 표정으로 레이를 쳐다봤다.

"레이, 좀 평범한 9살처럼 굴면 안 되겠니?"

레이는 말없이 시선을 돌렸다.

여기서 입을 더 놀려봤자 하등 도움될 게 없었다.

벨라의 설교가 얼추 30분을 넘어갔을 때쯤.

노크 소리와 함께 새로운 손님이 레이를 방문했다.

"고모?"

레이가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려다 통증을 느끼고 침대에 엎어졌다.

갑옷 대신 평상복을 입고 다가온 세리아가 레이를 향해 물었다.

"일어났어?"

"방금 일어났습니다."

"몸 괜찮아?"

"움직일만 합니다. 근데..."

세리아와 벨라를 번갈아 바라본 레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두려운 감정이 급격히 마음 속에 차오르며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이 둘을 같이 둬도 되나?'

원망하는 감정을 가지고자 하면 양쪽 모두 충분히 가질 수 있는 관계였다.

눈치를 보던 레이가 앓는 소리를 냈다.

이미 마주친 건 어쩔 수가 없다.

두 사람이 통성명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기에, 레이는 일단 간단하게 상대를 소개했다.

"엄마, 이분은 내 고모 되시는 분이야. 그... 내 아버지, 에반의 동생분이야."

벨라의 표정엔 큰 변화가 없었다. 레이는 내심 안도했다.

"이름은 세리아라고 하셔. 이번에 대단히 큰 도움을 받았어. 그리고 고모, 이분은 제 어미니, 벨라예요."

벨라를 '엄마'라고만 소개하고 넘어가면 좋지 않은 오해를 살 수 있었다.

레이는 낯이 좀 뜨거웠지만 벨라와의 관계를 정확하게 풀어 설명했다.

"친엄마는 아니세요. 혈연적으로는 제 생물학적 모친의 친언니 되시는 분입니다. 갈 곳 없는 갓난아기였던 절 거둬주고 키워주신 분이죠."

벨라가 코웃음을 쳤다.

"키우긴 무슨. 지 혼자 멋대로 컸지."

"아니 엄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내가 틀린 말 했니?"

"하늘 같은 어머니 은혜가 없었으면 내가 지금처럼 멀쩡히 자랄 수 있었겠어?"

"에휴, 말장난 그만하고 쉬어라. 난 나가 보련다."

"고모랑 이야기 안 나눠?"

"아들 쓰러져 있는 사이 충분히 나눴어. 세리아, 레이 좀 부탁할게요."

"알겠어요."

레이의 염려와 다르게, 둘의 분위기가 아주 험악해 보이진 않았다.

걱정을 덜어낸 레이가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쉬고 있을게."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있어. 당분간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치료사님이 말씀하셨으니까."

"알았어."

자리에서 일어선 벨라가 피곤한 얼굴로 레이의 이마에 키스했다.

"많이 걱정했어."

"미안해, 엄마."

"다음에도 말 안 듣고 싸돌아다니면 아예 집에서 쫓아낼 줄 알아."

"니옙."

"필요한 거 있으면 지금 말하고."

"없습니다."

"난 자러 간다. 우리 효심 깊은 아들 덕분에 이틀 밤을 샜거든."

"안녕히 주무십셔."

덜컹!

벨라가 문을 닫고 나갔다.

레이와 단둘이 방에 남게 된 세리아가 물었다.

"괜찮아? 몸 진짜로?"

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전혀 안 괜찮아요. 끄으윽."

잠에서 깨어난 후 계속해서 사지가 비틀리는 듯한 고통을 느끼는 중이었다.

낑낑거리는 레이의 이마를 세리아가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워낙 몸을 함부로 굴린 탓에 앞으로 한동안은 고생을 좀 해야 할 터다.

포션이나 신성력으로도 바로 해결하는 게 불가능한 문제였다.

*

로커스트를 토벌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레이가 누워있는 동안 아델을 비롯한 치료사들이 자주 왔다갔다하며 회복을 도왔다.

레이는 슬슬 바깥 구경을 하고 싶었다.

너무 오래 침대 위에서 뒹굴거린 탓에 기분이 계속 처지는 것 같았다.

레이는 한참을 떼를 써 간신히 벨라에게 외출 허가를 받아냈다.

만약을 위해 세리아가 동행하기로 했다.

레이는 자기 발로 걸어나갈 생각이었으나, 문밖을 나가기 전에 세리아에게 겨드랑이 아래를 양손으로 붙잡혀 위로 들어 올려졌다.

시야가 확 높아진 레이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고모? 갑자기 왜 이러세요?"

"안 돼. 걸으면. 절대 안정 취해야 해."

"그래서 절 이렇게 들고 움직이시겠다고요?"

"응. 이러면 편해."

"편하고 자시고 남들에게 보이기 부끄럽습니다만..."

"괜찮아. 안 부끄러워, 나는."

"아니 제가 부끄럽다고요."

레이가 허공에서 두 다리를 버둥댔지만 곧장 세리아의 완력에 제압당했다.

세리아는 자기 새끼를 자랑하는 동물처럼 레이를 앞으로 내밀었다 뒤로 당겼다 해보더니 흡족한 얼굴로 집을 나섰다.

세리아의 품에 파묻힌 레이가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고모, 얼굴 화끈거리니까 제발 내려주시면 안 될까요?"

"조카 귀여워. 그러니까 괜찮아."

"고모, 저는 전혀 귀엽지 않습니다."

세리아가 레이를 둥가둥가 흔들어주며 고개를 저었다.

"조카는 귀여워."

레이는 뒷목이 당겨왔다.

몸만 9살이지 정신연령은 성인을 넘어선 레이로서는 이런 아이 취급은 도저히 견디기 힘들었다.

'뭐, 정을 붙여주는 건 고맙긴 한데...'

세리아는 미궁에 갇혔던 사이 유일한 혈육을 잃었다.

유일한 혈육의 흔적인 레이에게 정을 느끼는 것도 이해할만했다.

허나 레이는 분명히 선을 긋고 싶었다.

"고모, 아버지 묘비에서 뵈었을 때 말씀드렸지만."

잠시 망설인 레이가 말을 이었다.

"저는 아버지 친자식이 아니에요."

"으음..."

텁!

세리아가 레이를 옆으로 반 바퀴 돌려 잡았다.

레이와 두 눈을 마주한 세리아가 또박또박 자기 의견을 전했다.

"그건 모르는 일이야."

"네?"

"가능성 있어. 오빠의 아들일 가능성. 아예 없지는 않아."

"어, 음."

생물학적 애미애비가 몸을 비비며 지껄였던 소리를 전부 기억하는 레이로서는 동의하기 힘든 주장이었다.

"남의 자식일 확률이 훨씬 더 높을걸요?"

"그래도 괜찮아. 레이는 지켰어. 오빠 곁을, 끝까지."

세리아가 레이를 끌어안았다.

레이의 허리에 닿은 세리아의 손 끝이 잠시 떨렸다.

"그러니까 레이는 내 조카야. 오빠는 지키지 못했어. 조카는, 내가 지킬 거야."

"..."

세리아의 품은 따뜻했다.

레이는 더는 매정한 말을 하기 힘들었다.

한참을 고민한 레이가 세리아를 마주 안으며 밝게 웃어주었다.

"걱정하지 마요. 저 검 휘두르는 거 봤죠? 앞으로 몇 년이면 제가 고모보다 강해질 걸요? 그러니까 걱정 안 해도 돼요."

"...하나 줄까? 아티펙트? 잘 다룰 거야. 조카도."

"그거 돌려줘야 한다면서요. 괜히 저 때문에 문제 만들지는 마요."

틀린 말은 아닌지라 세리아가 아쉬워하고 있던 차에, 멀리서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이다!"

"레이 왔다!"

"이상한 누나한테 안겨 있어!"

레이가 안겨 있던 사이에도 세리아가 열심히 걸어준 덕분에 어느새 보육원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아이들의 선두에서 카렌이 루나와 요하나를 데리고 뛰어오더니 레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레이! 보고 싶었어!"

휘익!

세리아가 레이를 높게 들어올려 카렌의 손이 닿지 못하게 했다.

당황해서 머뭇거리는 카렌에게 세리아가 경고했다.

"만지면 안 돼."

"뭐, 뭐예요! 레이 돌려줘요!"

"조카는 지금 아파. 함부로 접촉 금지."

"그, 그런 게 어디있어요!"

카렌이 폴짝 폴짝 뛰어올라 레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허나 두 팔을 하늘 위로 뻗은 세리아의 높이를 따라잡는 건 무리였다.

결국 레이를 붙잡는 데 실패한 카렌이 은근슬쩍 세리아를 옆으로 밀었다.

물론 그래듀에이트의 경지에 이른 세리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울상이 되어가는 카렌을 보고 레이가 세리아의 손을 탁탁 쳤다.

"그만 내려 줘요."

세리아도 장난이었는지 순순히 레이를 내려줬다.

오랜만에 땅을 디딘 레이가 어설프게 중심을 잡은 후 카렌의 볼을 쓰다듬어 주었다.

"카렌, 나 없는 동안 별일 없었어?"

"없었어!"

"존댓말."

"없었어요! 레이는 몸 괜찮아요?"

"많이 괜찮아 졌어. 며칠만 더 쉬면 평소처럼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아. 루나랑은 잘 화해했지?"

"당연하죠!"

레이가 루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루나, 몸은 괜찮아? 어디 아픈 곳 없어?"

"...괜찮아요."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선생님들한테 이야기하고. 공부는 조금만 쉬었다 가르쳐줄게."

루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레이가 보육원 운동장 구석에서 이질적인 외형을 갖춘 아이를 발견했다.

엘프, 티티였다.

'쟤는 왜 아직도 보육원에 있어?'

백작이 기사들을 이끌고 달려오게 한 요주의 인물이다.

잠시 보육원에 머물렀다 해도 진즉 백작이 데리고 떠났어야 한다.

레이가 티티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낮고 굵은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레이."

뒤를 돌아보니 보육원 울타리 너머에 디디에가 서 있었다.

디디에가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마차를 가리켰다.

"백작님께서 널 찾으신다."

*

디디에의 안내를 받아 영주성에 찾아온 레이는 응접실에 앉아 백작을 기다렸다.

지난 일주일간 백작령과 자작령 전반에 걸쳐 대대적인 조사가 있었다고 한다.

짧은 기간이라 해도 대략적인 사건의 흐름은 파악이 끝난 건지, 백작은 상의해야 할 일이 있다며 레이를 영주성으로 불렀다.

레이 또한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다.

차분히 앉아서 백작에게 물어봐야 할 내용을 정리하고 있자니 응접실 문이 벌컥 열리며 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알레시아가 쳐들어왔다.

"레이! 레이! 큰일이 있었다고 들었다!"

레이는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고개를 끄덕였다.

"난리가 아니긴 했지."

"아버지가 말씀하시길, 이번 일에 레이가 아주 큰 공을 세웠다고 하시더구나!"

"다행이네."

레이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백작이 알레시아에게 저리 말했다면 감옥에 갇히는 꼴은 확실히 면한 것 같았다.

알레시아 입을 헤벌쭉 벌리고 레이의 머리를 쓱쓱 넘겨주었다.

"역시 나의 자랑스러운 기사로구나! 아주 장하도다! 응?"

레이의 얼굴을 자세히 살핀 알레시아가 당황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레이! 왜 얼굴의 흉터가 그대로인가?"

"아, 이거."

중간에 치료를 중단했으니 흉이 질 수밖에 없다.

아델이 말하길, 이제 와서 흉을 지우려면 더 굵은 상처를 새긴 후 다시 치료해야 한다고 했다.

당장은 로커스트의 수하들과 싸우면서 갈아먹은 관절의 치료에 집중하느라 여유가 없었다.

레이가 대충 답했다.

"알레시아, 생각보다 이런 거 치료받는데 돈이 많이 들어."

"돈? 돈이 문제인가?"

"항상 돈이 문제지. 나는 귀족도 아니잖아."

"나의 불찰이로다. 주인된 자로서 이런 것 하나하나를 꼼꼼히 신경써주어야 했거늘. 잠시만 기다리거라! 내가 아버지 몰래 모아놓은 용돈을 가지고 오겠다!"

"아니, 잠..."

레이가 뭐라 말리기도 전에 알레시아가 용돈 주머니를 가지러 응접실을 뛰쳐나갔다.

알레시아를 뒤쫓는 걸 포기한 레이가 슬그머니 탁자 위로 눈을 돌렸다.

탁자 위엔 알레시아가 두고 간 책이 한 권 놓여 있었다.

[귀축 기사와 악당 영애님]

"이게 아동용 도서가 맞나...?"

제목만 보면 음란 서적인데 알레시아는 이 책을 대놓고 들고 다녔다.

만약 진짜 불순한 내용이 담겨있었다면 진작에 빼앗겼을 거다.

책의 커버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전연령판'이라는 글자가 하단에 쓰여 있었다.

"전연령판이라면 문제없겠지."

레이가 아무 페이지나 펼쳐 책의 내용을 읽어봤다.

[찰싹!

그 누구의 손길도 허락한 적 없었던 아나스타샤의 엉덩이에 두꺼운 남자의 손이 휘감겼다.

섬찟한 감각이 허리를 타고오르자, 굴욕적인 자세로 엉덩이를 내보이고 있던 아나스타샤가 발가락을 오므리며 경련했다.

"레온하르트! 미쳤느냐?! 네가 감히...!!"

우윳빛으로 빛나던 아나스타샤의 엉덩이가 새빨갛게 부어 오른다.

굴욕과 고통으로 점철된, 허나 알게 모르게 달뜬 아나스타샤의 신음을 음미하며, 레온하르트가 나른한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아가씨의 성격이 아가씨 엉덩이의 반만큼이라도 말랑했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뭔데 시발?"

당황한 레이가 다음 장을 펼쳤다.

레온하르트가 채찍과 촛농을 들고 아나스타냐에게 다가갔다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었다.

"?"

레이가 책의 첫 장으로 돌아가 북커버 사이의 틈을 살폈다.

떨어져 나갔던 북커버를 끈적이는 풀로 조잡하게 이어붙인 자국이 남아 있었다.

책을 감싼 커버를 뜯어낸 후 내용물을 바꿔치기한 게 틀림없었다.

"이년이 벌써부터 발랑 까져가지고."

일단 이것부터 백작에게 일러야되게 생겼다.

저주 (2)

42화

레이는 앓는 소리를 내며 책을 덮었다가, 슬그머니 다시 손을 뻗었다.

백작을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기도 했고, 환생하고는 처음 접한 관능 소설인지라 관심이 좀 가기도 했다.

'어차피 내 정신 연령은 성인이니까.'

합리화를 마친 레이가 책 후반부를 펼쳤다.

대체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소설 속 주인공인 아나스타샤가 개 목줄을 찬 채로 달빛이 비치는 영주성 복도를 네 발로 걷고 있었다.

[차디찬 밤바람이 이성을 일깨웠던 탓일까.

홍조가 가득했던 아나스타샤의 얼굴에 뒤늦게 공포가 찾아왔다.

"레, 레온하르트. 이제 그만 돌아가자꾸나. 누, 누군가 보면 어찌하려고 이러느냐."

"아가씨."

레온하르트의 회색 눈동자가 달빛을 머금고 섬뜩하게 빛났다.

아나스타샤는 뒤늦게 자기 실수를 깨닫고 엉덩이에 달린 꼬리 장식을 애처롭게 흔들었다.

레온하르트는 비열한 미소와 함께 손에 쥔 목줄을 거칠게 당겼다.

"짐승이 사람 말을 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오우..."

레이는 퍽 흥미로운 심정으로 다음 장을 넘겼다

그러나 다음 장을 제대로 읽어보기도 전에 노크 소리와 함께 메이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작님께서 들어오십니다."

레이가 책을 덮고 몸을 일으켰다.

백작이 모하메드를 대동하고 응접실에 들어섰다.

레이가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취하자 백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의자에 앉았다.

"그대도 앉게."

"감사합니다."

"알레시아가 왔다 갔나?"

백작이 [귀축 기사와 악당 영애님]을 바라보고 물었다.

레이는 알레시아의 일탈을 알리는 걸 잠시 미루기로 마음먹었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가 많은데 이것부터 까발렸다간 분위기가 개판이 될 게 뻔했다.

"잠깐 다녀갔습니다."

"알레시아가 그대를 참 마음에 들어 하는군. 요즘 그대 이름을 입에 달고 살아."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열 살 아이의 정열이 길어봤자 얼마나 가겠습니까."

백작이 실소를 터뜨렸다.

"그대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지."

"그렇긴 합니다만."

레이가 마주 웃었다.

가벼운 잡담을 몇 마디 더 건넨 백작이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본제를 꺼냈다.

"레이, 우리는 로커스트를 토벌했네."

"네, 뭐..."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레이를 보고 백작이 조금 더 목소리를 높였다.

"솔직히 말하겠네. 이건 그대 생각보다도 정말 대단한 위업이야. 얼마 안 가 제국 전역이 이 주제로 시끄러워질걸세."

레이가 잠시 로커스트와의 일전을 상기했다.

그래듀에이트만 둘에 엑스퍼트가 열한 명이 달려들었음에도 도리어 밀렸었다.

정공법으로 로커스트를 토벌하려 했다면 엑스퍼트급 스물에 그래듀에이트급 넷 이상은 필요했을 것이다.

'만약 로커스트의 수하들까지 멀쩡하게 로커스트와 합류했다면... 그 두 배는 필요했을 테고.'

이리 생각하니 확실하게 와 닿았다.

로커스트는 비록 로드 급에 미치지는 못하였지만, 로드 급에 근접했다는 수식이 과장이 아닐 만큼 대단한 강자였다.

"참 운이 좋았구나 싶긴 하네요. 큰 피해 없이 로커스트를 토벌했으니."

"그대 공로가 크지."

"다비드 님이 전사하신 건 안타깝지만요."

"..."

찻잔 손잡이를 매만진 백작이 가볍게 웃었다.

"다비드 건을 처리해 주는 건 어렵지 않네. 로커스트의 지식을 탐한 다비드가 토벌 작전에 자원했다고 이야기를 꾸미면 되니."

"그래도 여러 흔적들... 같은 게 남았을 텐데요. 마탑에서 고위 마법사의 죽음을 조사하기 위해 사람을 보낼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레이, 다시 말하지. 우리는 엄청난 공로를 세웠네. 죄를 지은 입장이 아니란 말이야. 그 어떤 세력도, 현시점에서 우리를 무례하게 들쑤시는 건 불가능하네."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다비드의 죽음에 대해 금전적인 보상만 제대로 지급한다면 마탑도 굳이 까다롭게 굴며 백작가와 척을 지려 하진 않을 걸세."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백작님."

백작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레이 혼자서는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감사를 표하는 레이에게 손을 저은 백작이 바로 화제를 전환했다.

"근데 그대가 디나르에서 죽인 사람 숫자가 생각보다 꽤 되더군."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타박하는 건 아닐세."

레이가 죽인 이들 대다수가 직간접적으로 로커스트의 반역 행위에 협조하고 있었다.

제국법 대로 일을 처리했으면 부모 자식까지 깡그리 몰살당한 중죄였다.

"영지민들에게는 흑마법사의 사악한 주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고만 발표할 걸세."

백작이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레이에게 건넸다.

"황실에 올릴 보고서의 개요일세."

보고서에는 로커스트 토벌까지의 사건 개요가 시간순으로 나열되어 있었다.

레이가 자세히 읽어보니 사실과 다른 점이 많았다.

흑마법사의 흔적은 갱들 간의 세력 다툼 중에 우연찮게 발견됐다고 서술되었고, 레이가 세운 공로는 대부분 지미, 매튜, 세리아의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물론 레이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당분간 디나르 지역은 내가 관리하게 될 가능성이 높네."

"당분간이라면..."

"울트가 귀환할 때까지. 울트가 귀환하지 않으면, 아예 필립스 가의 영지로 귀속될 수도 있겠지."

"축하드리면 될까요?"

"나는 울트가 무사히 귀환하길 바라네."

한동안 대화가 이어졌다.

백작은 로커스트 토벌 건으로 황실이 백작가에 막대한 상훈을 내릴 것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어설프게 레이를 속여 빚을 지우기보다는, 레이에게 신뢰를 얻길 바랐기에 취할 수 있는 태도였다.

레이가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백작님."

"그리 생각해주니 고맙군."

"근데 백작님, 제 고모는 괜찮을까요?"

"세리아 말인가. 그녀가 문제 될 행동을 하긴 했지."

세리아는 미궁을 공략한 후 알슈테인 공작가에 어떤 보고도 없이 고향으로 향했다.

알슈테인 공작가가 한참 전에 세리아를 사망 처리했다지만, 어쨌든 트집이 크게 잡힐 행동이었다.

근심 어린 얼굴을 한 레이를 보고 백작이 웃음을 터뜨렸다.

"걱정하지 말게."

"백작님?"

"잘 생각해보게. 제국 변방의 보잘것없는 가문의 기사들이, 로커스트와의 전투에서 목숨을 걸고 활약했다는 사실을, 과연 사람들이 믿어줄까?"

백작이 고개를 저었다.

"다들 이리 생각하겠지."

백작가는 그저 숟가락을 얹었을 뿐이다.

로커스트를 토벌한 진정한 영웅은 따로 있다.

10년 만에 발레리우스의 미궁을 공략하고 복귀에 성공한 천재 기사 세리아.

그녀가 바로 로커스트를 물리친 진정한 영웅이다.

"사람들은 다비드와 세리아 단둘이서 로커스트를 물리쳤다고 생각할 확률이 높네. 우리는 멀리서 구경이나 했다고 여기겠지."

"어, 음..."

호응하기가 마땅찮았다.

결국 필립스 백작과 그의 기사들이 남들에게 무시당할 거란 이야기였으니까.

"괜찮으시겠습니까?"

"개의치 않네. 어쨌든, 향후 몇 년은 그녀의 이름이 제국 전역에 오르내릴 걸세. 세리아가 얻을 위명을 고려하면, 공작가도 큰 질책 없이 환영회를 열어줄 거야."

"그렇군요."

"물론 미궁에서 얻은 아티펙트는 순순히 내어줘야 하겠지만, 욕심부리지 않는 게 좋네. 거기 얽힌 세력이 워낙 복잡해."

"차라리 다행입니다. 지금처럼 아티펙트를 주렁주렁 들고 다녔다가는 누군가에게 노려졌을 테니까요."

레이가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근심을 가졌던 사안이 대부분 정리된 탓에 긴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더 물어볼 게 있나?"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딱 하나 더 남아있었다.

"왜 아직까지 티티가 보육원에 있는 겁니까?"

"그녀를 숨기기 적합하니까."

"백작님..."

백작의 의도를 모르는 건 아니다.

엘프를 영주성 안으로 들여 보호하면 당장은 안전하겠지만 남들의 시선을 살 수 있었다.

때문에 보육원에서 생활하게 하겠다는 거다.

받은 게 있어 무작정 거부하기 힘들었지만, 레이는 솔직하게 토로했다.

"저는 보육원이 위험해지는 걸 바라지 않습니다."

"기사 둘을 보육원에 순환 배치 시켜주겠네. 기사 여럿과 대련을 하다 보면 그대 또한 많은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거야."

"하아, 알겠습니다. 다만 이유를 말씀해주십시오. 레시나의 혈육을... 대체 왜 인간이 보호하고 있습니까?"

뒷사정을 알아야 만약의 상황에 대처가 가능했다.

한참 동안 레이를 바라본 백작이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게네시스가 무엇인지 아는가?"

"레시나가 사용했던 병기 아닙니까? 세계수의 뿌리로 만들었다던."

"맞네. 그건 본래 세계수를 지키기 위한 방위 병기로써 엘프의 영역 밖에서는 사용이 금지된 무기였네."

"...레시나가 규칙을 어겼군요."

"그랬지. 세계수는 분노했고, 레시나의 혈육에게 저주를 내렸네."

백작은 최대한 담담하게 선조의 일을 전했다.

"우리의 선조는 저주를 받은 레시나의 혈육을 외면치 못했네. 때문에 저주와 관련된 기록을 말살하고 후손들에게까지 수호의 의무를 지게 하였지."

"수호의 의무라면..."

"말 그대로 해석하면 되네. 저주를 받고 동족에게 쫓겨난 레시나의 혈육이, 하다못해 남은 생을 편안히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한 거야. 허나 길었던 가문의 의무도... 이제 곧 끝이 나겠지."

"티티가 레시나가 남긴 마지막 혈육입니까?"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가 티티의 외견을 떠올리고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직 어린 엘프 아닙니까? 한참 더 살 것 같습니다만."

"세계수가 남긴 저주 탓에 티티는 길어봤자 20년을 넘기지 못할 거야. 육체가 퇴화하고 기억을 잃어버리고 이지를 상실하고 마침내 영혼이 바스러져 죽음을 맞이하겠지."

잠시 침묵한 레이가 입을 열었다.

"백작님, 한 번만 다시 묻겠습니다."

"무엇을?"

"티티가 레시나의 '혈육'이 맞습니까?"

백작과 레이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백작이 한숨을 쉬었다.

"그만 나가보게."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백작님."

레이가 탁자 위에 올려놓은 책을 가리켰다.

"저거 한 번 읽어보시죠."

"...?"

"앞으로 책 안쪽 내용물도 제대로 확인하시고요."

"뭐?"

백작이 의아해하며 책장을 펼쳤다.

그로부터 약 3일 동안.

알레시아는 방 안에 갇힌 채 문을 쾅쾅 두드리며 백작에게 잘못을 빌어야 했다.

*

로커스트를 토벌한 지 2주가 지났다.

야밤에 침대에서 일어난 레이가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며칠 전만 해도 관절이 쑤셔대서 밤마다 잠을 설쳤지만 이제는 통증이 대부분 가라앉았다.

백작의 지원 아래 신성력과 포션을 아낌없이 쏟아부은 덕분이었다.

레이는 검 한 자루를 들고 밖을 나섰다.

주택가 앞에서 검을 뽑았다간 위병에게 잡혀가기 딱 좋았기에, 넓은 운동장이 있는 보육원으로 향했다.

'가볍게 몸만 풀고 들어가자.'

상처가 다 낫지도 않았는데 무식하게 검을 휘둘러 몸을 망칠 생각은 없었다.

그냥 재활한다 생각하고 천천히 검술을 점검해볼 요량이었다.

스릉

운동장에 도착한 레이가 검을 뽑았다.

달빛이 강한 날이었다. 매끄러운 검신이 달빛을 머금고 은은하게 빛났다.

머리에 새겨진 검로를 따라 천천히 검을 휘두른다.

레이의 몸은 완벽하게 하르시아가 창조해낸 검술을 재현했지만, 레이의 머리는 검술에 담긴 하르시아의 깨달음을 제대로 쫓아가지 못했다.

레이가 항상 스스로의 재능이 부족하다 되뇐 이유였다.

동작 하나하나를 끊어서 펼치니 더욱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레이는 그저 흉내를 내고 있을 뿐이었다.

하르시아라는 불세출의 천재가 닿았던 경지를, 레이는 정말 좁쌀만큼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후우..."

하르시아가 남긴 가장 기초적인 검술을 펼쳐본 레이가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한 발 떨어진 곳에서 레이를 지켜보던 작은 소녀가 입을 열었다.

"하르시아와 같은 검식을 사용하시는군요."

"..."

레이가 땀에 젖은 머리를 털어내곤 티티와 마주 봤다.

달빛을 받은 그녀는, 평소의 멍청했던 인상에 비해 조금은 강맹하고 조금은 서글퍼 보였다.

레이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600년 전 세상을 구하고도 세계수의 저주를 받아 영락한 영웅.

"레시나님."

저주 (3)

43화

환생 이전 내 불알 친구놈 말이다만.

정말 하루 종일 책을 놓지 않는 독서광이었다.

철학서나 수필도 자주 읽었고, 역사나 문화와 관련된 책도 굉장히 좋아했다.

물론 독서 시간의 절반 정도는 장르 소설에 투자했는데, 그놈은 장르 소설조차 종류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탐독했다.

소설 내용을 떠들기 좋아했던 그놈은 내가 환생한 세상의 예언서쯤 되는 [제국멸망기]의 내용 또한 자주 입에 담았지만, 이게 실질적인 도움이 안 됐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로 나는 완전기억 능력자가 아니었다.

내 기억력은 평범한 편이었고, 관심도 없는 소설 내용을 옆에서 떠들어봤자 9할가량은 곧장 머리에서 휘발됐다.

1할이라도 남은 게 어디냐 싶긴 한데 여기서 두 번째 문제가 터졌다.

불알 친구놈이 내게 떠든 판타지 작품 개수만 일백이 넘어갔다는 점이다.

[제국멸망기]와 설정이나 용어가 비슷한 작품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유사한 작품들의 기억은 시간이 지나 뒤죽박죽 섞이거나 왜곡됐고, 써먹을 수 없게 변질됐다.

허나 이번 사건을 겪으며 얻게 된 무수한 키워드들이 조각난 기억의 파편을 하나로 묶어 뒤늦게 의식 위로 끌어올렸다.

"레시나 얘는 뒷설정이 되게 불쌍하네."

불알 친구 놈과의 대화가 머릿속을 스쳤다.

"뭐가 불쌍해?"

"세상을 구해놨더니 저주를 받아 동족에게 버림받았고, 최후도 비참했고. 뭐, 이 소설 캐릭터가 다 이꼴이긴 하지만."

"무슨 저주?"

"그러니까, 어디 보자. 긴 시간에 걸쳐 육체가 쇠락하고, 기억을 망각하고, 이지를 상실해서, 결국 영혼이 붕괴하는 저주."

"난 그냥 자살하고 만다."

"그것도 마음대로 못한다는 설정일걸?"

적당히 호응하며 걸러들었던 내용이다.

허나 눈앞에 레시나를 마주하고 나니 잊고 있었던 그녀의 이야기가 하나둘 떠올랐다.

세계수의 분노를 받은 레시나는 본래 수백 년간 무력하게 세상을 떠돌며 갖은 풍파에 고통받다 폐인이 되어 바스러졌어야 했다.

허나 레시나의 동료이자 전쟁영웅이었던 카시야스는 레시나를 잠식한 저주의 존재를 알아채고 그녀의 수호자가 되길 자처했다.

카시야스는 자신의 죽음을 위장한 후 오직 레시나를 보호하기 위한 작은 가문을 새로 세웠다.

카시야스의 친우인 필립스가 그의 계획에 동참했다.

이미 영락했고 앞으로도 영락해갈 저주받은 영웅을 위해, 그들은 기꺼이 희생을 자처했다.

나는 떠오른 기억들을 곱씹으며 지독하게 탁한 눈을 한 레시나를 마주 봤다.

레시나는 잠깐 손을 떨더니, 조금씩 새는 발음으로 내게 물었다.

"당신은... 하르시아가 아닌 거죠?"

"우연찮게 그분의 진전을 잇게 되었습니다."

"그렇군요. 근데 울트는... 어디 있나요?"

가디 자작가의 울트.

그의 풀네임은, 울티마 가디언.

해석하자면, 최후의 수호자란 뜻이다.

그를 수식하는 건 이름이 아니라 그에게 부여된 임무 그 자체였다.

어려운 임무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레시나의 마지막을 지키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허나 최후의 수호자는 레시나의 종말을 용납하지 못했다.

선조였던 카시야스조차 이루지 못했던 저주의 해주를 위해 세상을 떠돌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결말이 어떻게 났더라?

사실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는다만.

아마도 울트는 레시나의 마지막을 지키지도 못했고, 저주를 해주할 방법을 찾는 것도 실패했을 것이다.

깊은 절망에 빠진 그는 결국 신을 원망하며 타락했고.

종래에 세계수를 제 손으로 불태웠다고 불알 친구놈이 떠들었던 것 같다.

레시나가 다시 물었다.

"울트는... 어디 간 거죠?"

"레시나님의 저주를 해결할 방법을 찾기 위해 잠시 여행을 떠났습니다."

"제 존재가 그를 망집에 들게 하였군요."

비틀거린 레시나가 눈물을 보였다.

"아직도 후회하고는 해요. 그날, ...가 내밀었던 손길을 거절하지 못한 것을."

레시나는 '카시야스'란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듯했다.

세계수의 저주는 이미 그녀의 기억과 이지를 대부분 앗아갔다.

레시나는 절망에 빠져 무너져 가는 얼굴로 호소했다.

"부탁할게요. 울트를... 설득해줘요. 저는 망령이에요. 그가 저와 함께 몰락하길 원치 않아요. 울트가 망집을 내려놓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앞으로 얼마나 남으셨습니까?"

"20년을 넘기지 못하겠죠. 달빛이 비칠 때 약간의 이지를 되찾는 것도... 이제는 힘들 거예요."

"부탁하신 건 최대한 노력해보겠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방으로 들어가시죠. 밤바람이 찹니다."

"고마워요."

레시나를 안내해주며 생각했다.

더 안전한 미래를 위해서는 울트의 타락을 막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레시나가 남은 삶을 편안히 마칠 수 있게 돕는 것만으로 그의 타락을 저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타락하기 전에 울트를 제거하거나, 레시나가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세계수를 불태우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 될 수 있었다.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았다.

여유를 두고 고민해볼 문제였다.

*

로커스트를 토벌한 지 3개월이 흘렀다.

레이가 아침부터 보육원에 들려 운동장을 거닐고 있자, 티티가 손가락을 쪽쪽 빨며 뒤를 쫓아왔다.

"레이? 레이 왔어?"

레이가 티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물었다.

"티티, 잘 지내고 있어?"

"울트가 안 와서 슬퍼."

"선생님 말 잘 듣고 있으면 곧 돌아올 거야. 걱정하지 마."

"응, 알았어. 선생님 말 잘 들을게."

다그닥다그닥

말이 지면을 내딛는 소리가 들렸다.

보육원에 도착한 매튜가 레이 앞에서 말을 멈추었다.

레이는 티티를 다른 선생에게 맡기고는 얼른 말 위에 올라탔다.

오늘은 무려 지미 보육원 디나르 지부의 완공식이 있는 날이었다.

보육원으로 활용할 부지와 건물을 구매하고 보강하는 데 든 금액은 대부분 백작이 지원해주었다.

백작은 디나르 지역을 관리하게 된데다 황실에서 내린 상훈까지 있어 복지 사업에 투자 가능한 예산이 크게 늘었다고 했다.

물론 공짜 호의는 아닐 터다.

레이는 티티를 조금 더 신경 써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말을 몰고 가며 매튜가 물었다.

"보육원을 두 군데 모두 네가 관리하기는 힘들 텐데. 괜찮은 계획이라도 있는 거냐?"

"음... [고아 승급 제도]를 한번 도입시켜 보려고요."

"...뭔 제도?"

"고아 승급 제도요."

매튜 말마따나 레이가 백작령과 디나르를 왕복하며 보육원 두 군데를 동시에 신경 쓰는 건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레이는, 앞으로 고아를 수집하게 되면 일단 노멀 등급을 매겨 디나르 지부에 수용시킨 후, 그중 눈에 띈다 싶은 고아를 레어 등급으로 승급시켜 백작령으로 데려올 계획이었다.

레어 승급에 성공한 고아는 백작령에서 더욱 양질의 교육을 접할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성공적인 인재 양성을 위해서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레이는 뿌듯해하며 자기 이이디어를 자랑했으나, 정작 이야기를 들은 매튜는 떫은 표정을 한 채 되물었다.

"너무 비인간적인 발상 아니냐?"

"아니, 이게 왜 비인간적인 발상이에요?"

사람 급 나눠서 구분하는 게 언제 하루 이틀 일인가.

당장 이쪽 세상은 태어날 때부터 신분이 매겨져 차별받았다.

레이 생각에 고아 승급 제도는 굉장히 합리적이고 선진적인 시스템이었다.

"내가 뭐 애들을 내다 버리겠다는 것도 아니고. 응? 애들 수준 맞춰서 눈높이 교육해주겠다는데, 얼마나 인도적이에요? 이름 하여 Orphan Promotion System. 줄여서 O.P.S. 어감도 괜찮네요."

"미친놈."

고개를 절래절래 저은 매튜가 말의 속도를 더 높였다.

얼마 안 가 디나르에 도착한 레이와 매튜는 먼저 지미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현재 디나르의 암흑가는 완전히 지미 패밀리의 지배하에 놓이게 됐다.

때문에 디나르에도 지미가 사용할 수 있는 사무실을 하나 마련하게 되었는데, 물론 지미의 동의 없이 백작과 레이가 멋대로 진행한 일이었다.

"지미, 여기 있어요?"

지미는 사무실 의자에 앉아 창문 너머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이가 찾아오고도 연초를 뻐끔거리며 한동안 말이 없던 지미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난 백작령에 정착하며 평화로운 슬로우 라이프를 꿈꿨어."

"네?"

"소소하게 용돈 벌이 좀 하고, 애들 좀 돌보고, 작은 밭도 하나 일구며 근심 걱정 없이 하루를 살아가는, 그런 슬로우 라이프 원했다고."

헌데 레이한테 휩쓸려 이리저리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백작령과 자작령을 아우르는 악명 높은 암흑가의 지배자가 되어 있었다.

지미가 자기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젠 이룰 수 없는 꿈이겠지."

슬픈 눈을 한 지미에게 레이가 한마디 했다.

"지미, 벌써 갱년기 왔어요?"

"이런 개...!! 에휴, 지금은 너한테 화낼 힘도 없다."

지미는 던지려던 화분을 내려놓으며 한숨과 함께 옷을 챙겨입었다.

오늘 완공식에 백작도 잠시 얼굴을 비친다고 하니, 어쨌든 제대로 예의를 지켜야 했다.

*

지미 보육원 디나르 지부 완공식을 마친 후 일주일 뒤에는 알슈테인 공작가에서 사람들이 찾아왔다.

세리아의 무사 복귀를 위해 공작가에서 파견한 호위 병력들이었다.

물론 필립스 백작의 허가를 구하고 파견한 병력들이었는데, 그 숫자가 일백에 가까웠다.

레이는 공작가 사람들이 세리아를 핍박하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들은 깍듯이 예의를 지키며 세리아를 대했다.

백작의 추측대로, 공작가 또한 세리아가 얻게 될 위명의 가치를 파악하고 잡음 없이 세리아를 포섭하기 위해 기분을 맞춰주는 것 같았다.

정치적인 계산이었지만 세리아에게 나쁜 일은 아니었다.

어느새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다.

세리아가 마중을 나온 레이를 번쩍 들어 올리며 당부했다.

"안 돼. 나 없을 때 사고 치면. 항상 조심해."

세리아는 레이가 걱정이었으나, 레이 또한 세리아가 걱정되긴 매한가지였다.

"고모도 조심하시고요. 공작가에선 포션병으로 사람 머리 내려치거나 그러면 안 돼요?"

"레이, 잘 들어. 엄마 말."

"돈 함부로 빌려주지 말고요. 도장 함부로 찍지 말고요."

"칼 휘두르지 마. 아무한테나."

"공작가에서 아티펙트 내놓으라 하면 그냥 다 줘버리고요."

"혼자 돌아다니지 마. 모르는 곳."

"제발 사기꾼 조심하세요."

"연락해. 누가 괴롭히면?"

레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절 누가 괴롭히겠어요?"

레이를 꼭 안은 세리아가 레이의 양 볼에 번갈아가며 입술을 맞췄다.

레이가 버둥댔지만 완력으로 찍어누른 세리아는 여덟 번이나 입술을 맞추고는 이마를 비벼오며 속삭였다.

"편지할게. 꼭 해야 해. 답장?"

"꼭 할게요."

"자주 찾아올게."

"알겠어요. 가늘 길 조심하세요. 가서도 조심하시고요."

레이를 내려놓은 세리아가 벨라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벨라도 마주 고개를 숙이며 세리아를 배웅했다.

레이는 어리숙한 세리아가 걱정되었지만, 설령 호구를 잡히더라도 공작가란 그늘 아래 있는 게 안전할 것 같았기에, 좋은 마음으로 세리아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로커스트를 토벌한 제국의 영웅 세리아가 백작령을 떠났다.

*

"자, 모두 숙제해 왔어?"

세리아가 떠난 다음 날.

구운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은 쿠키들이 든 자루를 등에 멘 레이가 교탁에 서서 소리쳤다.

레이보다 쿠키를 향해 이목이 집중된 아이들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네에!"

"그럼 어디 한번 숙제 검사해볼까?"

대부분의 근심걱정을 덜어낸 레이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맺혔다.

폭풍이 한차례 지나가고 평화가 찾아왔다.

레이는 되도록 이 평화가 오래가길 바랐다.

그렇게 세월이 빠르게 흘러, 어느새 4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사춘기 (1)

44화

봄이 돌아온 후 레이는 13살이 되었다.

얼마 전만 해도 앙상했던 나뭇가지에 반투명한 나뭇잎이 새롭게 피어올랐다.

창문을 내다본 레이가 시원섭섭한 감성에 젖어 중얼거렸다.

"내가 벌써 13살이라니..."

나이를 먹는 게 마냥 좋지가 않다.

주접을 떠는 게 아니라, 레이는 정말 그렇게 느꼈다.

시간이 빨리 흘러봤자 좋을 게 뭐가 있겠는가.

20대에 잠깐 반짝였던 신체는 빠르게 노화할 테고, 예정된 세계의 멸망 또한 성큼성큼 가까워질 거다.

"안갯속을 정처 없이 헤매는 기분이야."

이 세상의 미래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레이는 항상 마음 한편에 불안을 안고 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지금 걷는 길이 과연 정답이 맞을까.

도리어 멸망을 앞당기는 행위는 아니었을까.

하루에도 몇 번씩 그런 의문이 떠올랐다.

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답이 없는 문제였다.

사념을 지우기 위해 양 볼을 짝짝 두들긴 레이가 잠옷을 벗고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흠."

바지를 올리기 전 슬쩍 사타구니를 쳐다봤다.

슬슬 거시기에 털이 나고 있었다.

"불안불안한데."

근래 2차 성징이 찾아오며 크고 작은 혼란을 겪는 아이들이 많아졌다.

레어 이상의 고아들 다수가 레이 또래에 편중돼 있는 탓에 골치가 꽤 아팠다.

가만히 있는 거시기 털을 몇 번 쓸어본 레이가 방문을 열고 나섰다.

마침 벨라가 아침을 차리고 있었다.

벨라는 일주일에 두 번은 레이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자 했다.

레이 또한 벨라와 함께 식사하는 시간만은 웬만해선 준수하기 위해 노력했다.

식사 준비가 끝났다.

벨라와 식탁에 마주 앉은 레이는 포크로 계란을 가르다 말고 입을 열었다.

"엄마."

"왜?"

"슬슬 하던 일 그만두고 다른 일 알아보는 건 어때?"

"갑자기 무슨 말이니?"

"왜, 엄마 인기도 이제 좀 시들시들하잖아."

끼긱!

소시지를 찌르려던 벨라의 포크가 접시를 타고 미끄러졌다.

벨라가 항변했다.

"아들! 엄마 아직 인기 좋거든!"

"엄마, 솔직히 요새 픽률이 많이 떨어지긴 했잖아. 리사에게 에이스 자리 넘긴 지도 1년은 됐고."

짜악!

"아악!"

결국 등짝을 한 대 맞은 레이가 벽으로 달려가 등을 비볐다.

엄살을 떠는 레이를 향해 벨라가 도끼눈을 뜬 채 일렀다.

"이게 엄마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엄마가 얼마나 인기가 많은데!"

얼굴에 주름이 좀 지긴 했으나 벨라는 여전히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아직도 많은 남자들이 그녀와 하룻밤을 지내기 위해 기꺼이 높은 금액을 지불했다.

"5년은 더 있다 은퇴할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아니, 엄마. 평생 한 가지 일만 해서 먹고살아야 되는 것도 아니고. 이제 슬슬 다른 일 좀 알아보자."

벨라가 실소를 터뜨렸다.

"엄마가 무슨 재주가 있다고 이제 와서 다른 일을 찾니? 허드렛일 하루 종일 해도 지금 버는 돈의 반의반도 못 벌어."

"돈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니까."

레이가 이마를 짚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생활비야 지미나 백작에서 얼마든지 타서 쓸 수 있었다.

그럼에도 레이가 벨라의 은퇴를 종용하지 않은 건, 벨라도 벨라 나름의 프라이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직업은 단순한 생계유지 수단이 아니다.

사람은 직업을 가짐으로써 사회와 소통하고 심리적 욕구를 충족한다.

벨라는 '라일락의 저녁'이라는 집단에 소속됨으로써 나름의 안정감과 인정 욕구를 채워왔다.

다만 이제 그녀는 늙어가고 있었다.

얼마 안 가 벨라는 한물간 여자로 취급받으며 자존심에 이런저런 상처를 입게 것이다.

레이는 그때가 오기 전에 벨라가 매춘업에서 손을 뗐으면 싶었다.

물론 벨라는 반대했다.

예전보다 인기가 떨어진 건 사실이었지만 여전히 수입이 괜찮았다.

벨라는 최대한 많은 돈을 모아두고 싶었다.

재능 넘치는 아들이 추후 진로를 선택할 때, 돈이 부족하여 꿈을 포기하는 상황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벨라의 고집을 듣고 한숨을 쉰 레이가 방에서 검을 들고 나왔다.

"엄마, 잘 봐."

츠즈즈즉!

검에서 검기가 피어올랐다.

촛불처럼 일렁이는 검기가 햇살을 밀어내고 방 안을 푸르게 밝혔다.

레이가 부엌칼을 향해 검을 가져다 댔다.

깡!

부엌칼이 힘없이 부러졌다.

검술에 무지한 벨라였지만 눈앞의 현상이 무얼 뜻하지는 알 수 있었다.

"아들, 그거... 검기니?"

"응. 검기가 맞아."

레이가 검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엄마, 역사책을 뒤져봐도 내 나이 때 엑스퍼트의 경지에 이른 천재는 수십을 넘지 않아."

물론 역사에 적힌 수십의 인물도 절반 이상은 나이를 속였을 것이다.

"엄마, 내 걱정은 할 필요 없어. 아들은 어마어마한 천재거든. 백작님이 괜히 나한테 목을 매는 게 아니야. 이건 비밀인데, 사실 백작님이 날 사위 삼으려고도 했었어."

벨라는 당황스러웠다.

필립스 백작이 레이를 과하게 신경 쓰고 배려해 왔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레이가 상당한 재능을 지녔다는 건 눈치챘지만, 설마 열셋의 나이에 엑스퍼트의 초입에 들었을 줄은 상상치도 못했다.

벨라는 어찌할 줄 모르게 기뻐하면서도 레이를 걱정했다.

"네 어미가 나라서, 엄마 신분이 천해서, 아들 발목을 잡지는 않겠니?"

레이가 실소를 터뜨렸다.

벨라의 질문은 정말이지 우문이었다.

레이가 이 세계에 처음 환생했을 때.

워낙 못 볼 꼴을 많이 봤던 레이는 결심했었다.

제국을 밀어버리고, 이 빌어먹을 세계가 멸망하는 꼴을 봐야겠다고.

그렇게 해서라도 날 여기에 보낸 초월자를 엿 먹여야겠다고.

허나 레이가 이 세계에 정을 붙였던 건.

정을 붙이다 못해 종말을 막아보겠다고 결심했던 건.

오롯이 벨라라는 존재 때문이었다.

그녀는 레이에게 짐이 아니었다.

그녀는 레이에게, 한때 이 세상의 전부보다 가치 있는 존재였고,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엄마, 걱정하지 말고... 이제 슬슬 하던 일은 내려놓고,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 엄마가 계속 거기 있으면 아들 마음은 편하겠어? 솔직히 좋은 일은 아니잖아."

잠시 고민한 벨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 말은 알겠어. 지금 하는 일은... 올해 안으로 정리해보도록 할게."

눈물을 닦은 벨라가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듯 화제를 돌렸다.

"요즘 보육원 아이들은 잘 지내니? 아들이 애지중지하며 키운 아이들이잖아."

레이는 순간 뒷골이 당겼다.

"약-간의 문제들이 있긴 한데."

잠깐 고민한 레이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잘 지내고 있어."

*

그날 오후.

기사들과 대련 약속을 잡은 레이가 지미와 함께 보육원에 들렀다.

약속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도착했더니, 보육원 뒷편 목책에서 젠킨슨과 디디에가 요하나의 특별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기사들이 아이들에게 검술을 가르치기 시작한 지 4년이 지났다.

많은 아이들이 재능을 꽃피웠지만, 특히 눈부신 발전을 이룬 아이가 바로 요하나였다.

천부적인 운동신경을 지녔던 요하나는 마나 감응력까지 타고났다.

1년만에 마나를 활용해 육체를 강화하는 방법을 터득한 요하나는 근래 들어 얼추 기사와 합을 맞출 수 있을 만큼 실력이 발전했다.

지금 발전 속도 대로라면 2년 안에 엑스퍼트의 경지를 밟을 수도 있었다.

"후우..."

호흡을 고른 요하나가 가볍게 점프하며 검을 앞으로 찔렀다.

디디에가 찌르기를 흘려내기 위해 팔목을 움직이자 곧장 요하나의 검이 손목을 노리고 궤도가 뒤틀렸다.

디디에가 다시 방어 자세를 취한다.

요하나는 검을 위로 올려쳐 얻은 반동으로 지면에 안착하고는 나풀나풀 목책 안을 뛰어다니며 검을 휘둘렀다.

요하나의 움직임은 좋게 말해 화려했고, 나쁘게 말하자면 산만했다.

회전하고, 뛰어오르고, 구르고, 엎드리고.

전부 비효율적인 동작이었다.

실전에서의 검술은 빈틈 없고 간결해야 효율적이었다. 일반적인 상식으론 그랬다.

허나 빈틈 없고 간결한 검술이라고 치명적인 것은 아니었다.

매번 간결하게 급소만을 노리는 검술은 쉽게 읽힌다.

때문에 무인들은 항시 적의 눈을 속이기 위해 공격에 다양한 변주를 가했다.

요하나는 자기 재능을 믿고 기사들이 가르쳐준 검술에 본인만의 변주를 섞었다.

그리고 요하나의 시도는 꽤나 성공적이었다.

촥!!

화려함 속에 몸을 숨긴 찌르기가 부지불식 간에 튀어나와 디디에를 노렸다.

디디에는 급하게 허리를 틀어 공격을 피한 후 크게 뒤로 물러났다.

요하나의 검술을 보고 레이가 감탄했다.

"저게 진짜 재능이지."

천부적인 감각을 동원해 자신만의 검식을 찾아간다.

진정한 천재만이 이루어낼 수 있는 '창조'의 영역이었다.

'역시 유니크 고아로 요하나를 승급시킨 건 옳은 결정이었어.'

레이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쇳소리가 목책 안을 울렸다.

캉!! 카강!!

"어라...?"

디디에의 공격을 막아낸 후 다시 한 번 허공으로 뛰어오르려던 요하나가 움직임을 멈췄다.

목책의 모서리까지 몰린 탓에 더는 도망갈 곳이 없었다.

대련이 끝났다.

디디에가 목책을 활용해 요하나를 제압하는데 5분의 시간이 걸렸다.

손대중을 했다지만, 만약 목책이 없었다면 제압까지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짝짝짝!

"요하나, 정말 대단했어."

레이는 요하나의 발전이 굉장히 자랑스러웠다.

요하나를 보육원에 데려온 것도, 기사들에게 요하나를 소개시켜주었던 것도, 전부 레이가 한 일이었으니 뿌듯한 감정이 안 들 수가 없었다.

기쁜 마음으로 요하나에게 다가간 레이가 미리 준비해놨던 수건으로 요하나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려 했다.

허나 수건이 이마에 닿기도 전에 요하나가 매몰차게 레이의 팔을 쳐냈다.

탁!

"내 몸에 멋대로 손 대지 마."

요하나가 짜증이 깃든 눈으로 레이를 훑어보더니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재수 없어 진짜."

레이가 제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요하나는 디디에와 잰킨슨에게 감사 인사를 한 후 레이가 건넸던 것과 다른 수건을 가지고 목책 밖으로 나갔다.

"..."

잠시 냉기가 불었다.

제자리서 부들부들 떨던 레이가 이내 거품을 물며 소리쳤다.

"제엔장, 사춘기라니! 우리 순수하고 착했던 요하나에게 사춘기라니!!"

1년 전부터 조금씩 짜증이 많아지더니 근래 들어 아주 제대로 사춘기에 들어섰다는 티를 내고 있었다.

사춘기는 아이가 성인으로 성장하기 위한 아주 자연스러운 진통 과정이다.

아이가 사춘기를 맞았을 때는 무조건 타박하고 나무라기보다는 꾸준한 소통을 통해 유대감을 높여 천천히 마음의 문을 열어갈 필요성이 있었다.

허나 어디까지나 이론이 그렇다는 거고.

레이는 요즘 사춘기를 맞은 몇몇 아이들 때문에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제엔장, 내가 해준 게 얼만데! 먹여주고 재워주고 가르쳐 놨더니 날 이렇게 찬밥 취급 해?!"

머리를 쥐어뜯은 레이가 허공을 향해 외쳤다.

"니들이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내가 너희들 때문에 얼마나 개처럼 구르며 고생했는데! 굶어 죽거나 팔려갈 것들을 데려와서 키워놨더니 이제 와서 뒤통수를 쳐?!"

괴로워하는 레이를 보고 지미가 눈시울을 붉히며 미소지었다.

'저 새끼가 드디어 자기 업보를 치르는구나.'

레이 덕분에 강제로 암흑가의 지배자가 된 지미는 부디 보육원 아이들에게 더욱 지랄맞은 사춘기가 찾아와 레이가 더 큰 고통을 받기를 바랐다.

"크으윽...!"

레이가 흥분을 가라앉히기 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레이 또한 13살이 되면서 호르몬 밸런스가 좀 어긋난 탓인지 감정 조절이 예전보다 쉽지 않았다.

레이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사춘기가 찾아온 요하나가 마냥 거칠게 변한 건 아니었다.

도리어 사춘기가 찾아온 것 치고는 예전과 변함없이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검술 수업도 열심히 듣고 윗사람에게 예의도 바르고 교우 관계도 변함 없이 원활하니까.'

단지 레이를 향한 반항기가 좀 강해졌을 뿐이었다.

어찌보면 모든 부모가 아이를 키우며 한두 번씩 거치는 과정이었다.

한숨을 길게 내쉰 레이가 목책 문을 닫고 가볍게 몸을 풀었다.

애들 수업이 끝났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엑스퍼트 간에 검을 나눌 시간이었다.

"오늘은 최선을 다해 볼 생각인데."

허리춤에서 검 두 자루를 뽑아낸 레이가 지미, 디디에, 젠킨슨을 한눈에 담았다.

"세분 한꺼번에 들어오시죠."

사춘기 (2)

45화

"오늘은 최선을 다해 볼 생각인데."

레이가 최선을 다하겠다는 건 오버드라이브와 도약 검기를 제외한 모든 기술을 사용하겠다는 뜻이었다.

"세분 한꺼번에 들어오시죠."

열세 살의 싹바가지 없는 선언에 젠킨슨이 자연히 떫은 얼굴을 했다.

허나 꼬운 건 꼬운 거고 현실은 현실이었다.

젠킨슨은 고개를 저으며 검을 뽑아들었다.

스릉!

연이어 디디에와 지미가 검을 뽑았다.

일렁이는 검기가 압축되며 검 위를 코팅하듯 미끄러진다.

엑스퍼트급 무인 셋을 앞에 두고 레이가 검을 빙글빙글 돌리며 간을 봤다.

디디에와 젠킨슨은 숙련된 엑스퍼트 급 기사로서 어지간하면 뚫리지 않는 바위와 같은 존재였다.

지미 또한 4년 간의 노력 끝에 마나를 정제하고 코어를 만드는데 성공해 과거보다 훨씬 안정적인 검기를 구현할 수 있었다.

셋 모두 어딜가서도 한 자리 얻을 수 있는 실력자다.

쾅!!

디디에, 젠킨슨, 지미가 동시에 지면을 박찼다.

레이가 호흡을 고르며 되뇌였다.

'집중하자.'

하르시아류 공간검은 기본이 이도류다.

허나 레이는 4년 전만 해도 도약 검기를 사용할 때를 제외하곤 두 번째 검을 거의 뽑지 않았다.

이도류는 오랜 숙련 기간을 필요로 하는 검술이었다.

검 두 자루를 들고 어설프게 설쳤다간 금세 검로가 꼬여 빈틈이 고스란히 노출됐다.

레이는 여전히 두 자루의 검을 사용하기엔 기교가 부족했다.

더군다나 이도류는 필연적으로 어마어마한 근력을 요구한다.

상대가 두 손으로 휘두르는 검을 한 손으로 흘리거나 쳐내야 하니 남들보다 배는 뛰어난 근력을 갖추어야 했다.

레이가 정면에서 돌진하는 디디에를 바라봤다.

곰 같은 덩치를 자랑하는 디디에는 레이보다 근육량이 몇 배는 많았다.

이렇게까지 힘 차이가 나는 적을 상대로 익숙치도 않은 이도류를 쓰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허나 레이는 개의치 않았다.

츠즉!

검 전체를 감쌌던 검기가 얇은 실처럼 압축되어 검날을 타고 흐른다.

서로의 검격이 충돌했다.

카가각!!

"큭?!"

디디에의 몸이 옆으로 크게 휘청였다.

레이는 자연스레 한 발자국 물러서며 죄측에서 파고든 지미의 찌르기를 피했다.

젠킨슨의 검이 레이의 어깨를 노리고 사선으로 떨어져 내린다.

레이가 오른 손의 검을 시계 방향으로 돌려 젠킨슨의 검격을 쳐냈다.

파각!! 쿵!!

젠킨슨의 검이 지면을 내려찍었다.

본래 젠킨슨 정도의 실력자라면 지면을 찍기 전에 검을 회수했어야 한다.

젠킨슨이 표정을 일그러뜨린 채 검을 다시 잡았다.

'자존심이 남아나질 않는군.'

젠킨슨은 기가 찼다.

젠킨슨과 디디에는 혹독한 수련과 실전을 거치며 완성된 강인한 기사였다.

수없이 담금질 된 강철을 닮은 그들은 어지간한 변수가 아니면 틈을 내주지 않았다.

허나 레이와 검을 부딪칠 때마다 그들의 불굴에 균열이 일었다.

레이가 지닌 검기의 성질이 문제였다.

카가각!!

디디에의 몸이 또 다시 휘청였다.

일단 검기의 순수한 위력부터 레이에게 크게 밀렸다.

더군다나 레이와 검을 마주댈 때마다 매번 다른 방향으로 반동이 돌아왔다.

예컨데 정면에서 검이 충돌하면 그 반동이 좌측이나 우측으로 크게 꺾여 손아귀를 울렸다.

이 탓에 레이를 상대할 때는 평소보다 검을 제어하기가 배는 힘들었다.

"흐읍!"

디디에가 코어를 쥐어짰다.

찰나 간 검기의 위력이 증폭된다.

디디에는 빈틈이 노출되는 걸 각오하고 검을 크게 휘둘렀다.

레이가 왼손검을 들어올렸다.

카각!!

공격을 막아낸 레이의 왼손검이 우측으로 밀려났다.

일순 검로가 꼬인 레이가 움찔거리자 젠킨슨이 귀신 같이 그 틈을 파고들었다.

촤악!

허리를 노리고 들어오는 횡베기.

상체를 깊게 숙이는 동시에 몸을 회전시켜 공격을 피한 레이가 다리를 뻗어 젠킨슨을 걷어찼다.

허벅지를 얻어맞은 젠킨슨이 지면을 구르며 레이를 향해 검기를 방출했다.

촤악!!

"...!!"

검기 방출은 대련에서 활용하지 않기로 합의했었다.

허나 기사들은 고의로 합의를 어겨가며 레이를 곤경에 빠뜨리곤 했다.

돌발적인 변수에 민첩하게 대처하는 능력을 길러주기 위해서였다.

레이는 당황치 않고 검 두 개를 맞부딪쳤다.

우웅-!

공간의 일그러짐이 파문처럼 번져나가며 두 검을 중심으로 왜곡장이 생성됐다.

왜곡장에 휩쓸린 젠킨슨의 검기가 방향이 뒤틀리더니 레이의 배후를 노리던 디디에를 향해 쇄도했다.

"이런!"

파가각!!

디디에가 황급히 방어 자세를 취해 젠킨슨의 검기를 막아냈다.

레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혼자 남은 지미를 향해 가속했다.

지미가 물러서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카가각!!

아직 지미의 검기는 기사들보다 완성도가 떨어졌다.

예전처럼 검을 놓치지는 않았지만 일방적으로 밀려나야 했다.

검을 다섯 번 정도 받아내니 디디에와 젠킨슨이 재차 합류해 지미와 협공을 가했다.

몇 번 더 검을 나눈 레이는 이내 두 손을 들고 외쳤다.

"항복!"

코어의 마나가 바닥을 치고 있었다.

대련이 끝난 후 넷은 한동안 대화를 나누며 대련을 복기했다.

상황을 재현해보며 더 나은 선택에 대해서 토의도 하고 서로의 문제점을 번갈아 짚어주며 약 한 시간 동안 의견을 나누었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레이가 인사했다.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보육원에 오후 수업이 있다며 레이가 먼저 목책을 떠났다.

레이가 사라지자 검을 내동댕이친 젠킨슨이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투덜댔다.

"망할 괴물 꼬맹이 같으니라고."

셋이서 하나를 합공했는데 도리어 밀렸다.

더군다나 레이는 저게 전력도 아니었다.

젠킨슨은 레이가 몸을 두 배는 가속시킬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레이가 진짜 전력을 내면 셋이 합공해도 1분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쌍검술은 대체 누가 가르쳤어? 지미 너냐?"

"난 제대로 된 검술을 여기와서 처음 배웠어. 쌍검술은 견식도 못해봤다고."

지미가 고개를 저었다.

건방진 태도였으나 젠킨슨은 개의치 않았다.

로커스트 토벌전 당시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도 지미와 매튜는 악을 쓰며 전선을 유지했다.

지미와 매튜가 당연히 도망갈 것이라 여겼던 젠킨슨은 그 광경을 보고 크게 탄복했다.

의외로 호탕한 이면이 있었던 젠킨슨은 로커스트 토벌 이후 자주 지미와 매튜를 불러 술자리를 가졌고, 마침 연배도 비슷했던 덕에 이제는 거의 친구 같은 사이였다.

"그럼 대체 누구한테 배운 거야?"

"다른 기사님에게 배운 거 아니야?"

"그럴 리가. 물론 나도 쌍검술을 쓸 줄 모르는 건 아니야."

기사들은 다양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되도록 많은 종류의 병기를 다룰 수 있도록 훈련한다.

"하지만 쌍검술을 주력으로 삼는 기사는 백작가에 한 명도 없어. 백작령을 통틀어 저 괴물 꼬맹이가 쌍검술을 가장 잘 쓸 거다."

"그럼 레이 저놈이 쓰는 쌍검술은 어디서 난 거야?"

"아마도."

디디에가 앓는 소리를 내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직접 창안한 것 같습니다."

"...말이 됩니까?"

"9살에 검기를 뽑아내던 아이니, 말이 안 될 건 없잖습니까."

"옳은 말씀이긴 합니다만..."

디디에가 이가 나간 자기 검을 바라보며 시원섭섭한 감정을 드러냈다.

"레이는 엑스퍼트의 경지를 넘어서기 직전입니다. 신체를 가속시키는 불가사의한 기술까지 사용하면 그래듀에이트도 능히 맞상대 가능할 겁니다."

레이가 지닌 문제는 하나였다.

"대체 마나 연공법을 거부하는 이유가 뭡니까? 마나만 충분하면 어렵지 않게 엑스퍼트의 경지를 넘어설 텐데."

"아, 그게 말입니다."

지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마나를 안 늘리는 게 아니라 못 늘린다고 말하더군요."

*

레이는 고민했다.

2년 전 잠깐 마나연공법을 활용해 코어의 마나를 늘리려고 했다가 하마터면 비명횡사 할 뻔했다.

쥐꼬리만큼 늘어난 코어의 마나가 심장에 엄청난 부하를 걸었고, 근 한 달을 침대 위에서 굴러다녀야 했다.

'대체 어떻게 하면 코어의 마나를 안전하게 늘릴 수 있지? 정말 마법이라도 배워봐야 하나?'

허나 마법은 손쉽게 배울 수 있는 학문이 아니었다.

레이는 여러모로 마법사의 존재가 아쉬웠다.

루나는 4년이 지난 지금도 마법 공부를 제대로 시작하지 못했다.

스승이 필요했다.

허나 레이는 다비드와 로커스트의 일을 연달아 겪으며 마법사를 향한 불신이 극에 이르러 있었다.

'그렇다고 레전드리 고아를 시골 구석에 방치한 채 썩힐 수도 없고.'

이 문제에 대해선 백작과도 몇 번 의논했다.

얼마 전에 백작이 괜찮은 방안이 있으니 잠시 기다려 보라고 했는데 레이는 거기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이래저래 아쉬운 게 많아.'

고개를 저은 레이가 옷을 갈아 입고 교실로 향했다.

레이는 여전히 아이들에게 수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을 직접 가르치고 있었다.

쿠키 주머니를 어깨에 맨 레이가 교실에 들어섰다.

옛날만큼 아이들이 쿠키에 환장하지는 않았지만, 다들 그럭저럭 수업을 잘 따라오고 있었다.

레이는 평소처럼 수업을 진행했다.

"~해서, 이렇게 되는 거야. 이해 안 되는 사람?"

"..."

"좋아.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우와아!"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하나둘 교실을 떠났다.

레이도 교실을 떠나려 하자 카렌이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선생님! 질문 있어요! 물어봐도 돼요?"

"뭔데?"

"이 문제가 안 풀려서 그러는데, 한 번 풀어봐주면 안 돼요?"

"어디 보자."

레이가 카렌의 옆자리에 가서 앉았다.

카렌이 줄을 쳐놓은 문제를 보니 이차함수 개념이 필요한 문제였다.

레이가 필기구를 들고 설명을 시작하려는 찰나 카렌이 문제가 잘 안 보인다며 레이와 가깝게 몸을 붙였다.

이제 막 부풀어오르기 시작한 가슴이 레이의 팔에 맞닿는다.

레이는 별 생각 없이 설명을 계속하려 했지만 무언가 간지러운 기분이 들어 아래를 내려봐야 했다.

카렌의 손이 레이의 허벅지를 쓸어내리고 있었다.

레이는 생각했다.

'제발 좀.'

레이가 손을 뻗어 카렌의 뺨을 움켜쥐었다.

"으욱?"

레이는 망설이지 않고 카렌의 뺨을 움켜쥔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카렌, 카렌, 카렌!!"

"아으아으!"

"자꾸 이상한 거 배워올래? 응?!"

"무, 무든 마리야...?"

레이가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자 카렌이 제자리에서 버둥거렸다.

"아파아파!"

"또 리사 누나 찾아가서 이상한 거 배워온 거지? 응?"

카렌이 슬그머니 눈을 피한다.

레이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애들한테 이상한 것 좀 가르치지 말라고 그리 당부를 해놨는데!!'

레이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근래 들어 지미 보육원의 고질적인 문제가 터져나오는 중이었다.

바로 교육환경이 씹창나 있다는 점이었다.

보육원 바로 옆에 홍등가가 붙어있었으니, 교육환경이 씹창났다는 건 비유가 아니라 단어 그대로의 의미가 되어버렸다.

한참 성적 호기심이 왕성해진 아이들이 홍등가를 구경하기 위해 기웃거리다 레이에게 잡혀 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카렌 같은 경우 예전부터 알고 지낸 홍등가의 지인들을 찾아가 '남자를 유혹하는 법' 같은 이상한 지식을 배워와 레이에게 써먹으려 하곤 했다.

'돌아버리겠다.'

대한민국에 비해 비교적 널널한 성관념과 천혜의 교육환경이 합쳐져 여러모로 사건사고가 터지는 중이었다.

막아보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중이긴 했지만, 솔직히 버거웠다.

"카렌, 이런 건 어른 되고 배우자. 응?"

레이가 한숨을 쉬며 카렌을 타박했다.

카렌은 자기 유혹이 실패했다는 사실에 실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뒷 자리에서 이야기를 엿듣던 요하나가 레이를 향해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카렌보다 키도 작은 주제에 어른 타령이야."

우드득!

레이가 쥐고 있던 책상 모서리가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사춘기 (3)

46화

레이는 순간 눈앞이 핑 돌았다.

'내가, 내가 카렌보다 키가 작다고? 이 열셋 밖에 안 먹은 꼬맹이보다?'

물론 레이도 신체 나이로는 열셋 밖에 안 먹은 꼬맹이였고, 내심 요즘 카렌과의 눈높이가 비슷해져 스트레스를 받고 있긴 했지만.

아무렴 설마 카렌보다 작겠냐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내세워 고개를 쳐드는 불안을 찍어 누르고 있었다.

헌데 방금 요하나의 발언으로 레이는 억지로 현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손을 부들부들 떨던 레이가 카렌의 팔을 당겼다.

"카렌, 일어나봐."

"응? 일어나?"

"응, 일어나서 뒤돌아 봐."

레이는 여전히 설마설마 했다.

내가 그래도 머리카락 한 올 만큼은 카렌보다 크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카렌이 꼿꼿이 서자 레이가 얼굴을 쓸어내리며 마음의 준비를 한 후 카렌에게 등을 맞붙였다.

"데런, 이리와 봐."

눈치껏 교실 밖으로 슬금슬금 도망치려 했던 데런이 축 처진 얼굴로 레이에게 다가왔다.

레이가 물었다.

"누가 더 커?"

"음..."

레이 머리 위로 붉은 머리카락이 빼꼼 튀어나와 있었다.

데런의 눈빛이 흔들리자 카렌은 눈치껏 무릎을 살짝 굽혔다.

카렌의 키가 쪼그라들자 데런은 그제야 표정을 피며 답했다.

"혀, 형이 조금 더 커요."

"..."

물론 레이는 눈치가 없지 않았다.

레이가 참담한 심정으로 카렌과 떨어져서 입술을 씹는데 마침 루나와 눈이 맞았다.

루나가 볼을 빵빵히 부풀린 채 대놓고 웃음을 참고 있다는 티를 내고 있었다.

레이가 정색했다.

"루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웃으면 진짜 뒈질 줄 알아."

취이이익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빵빵했던 루나의 볼이 줄어들었다.

평소와 같이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간 루나를 보고 레이가 미간을 짚었다.

루나가 웃음을 못 참아서 볼을 부풀린 게 아니다.

그냥 레이를 한번 골려주고 싶은 마음에 저리 행동한 거다.

그저 착하기만 했던 우리 애들이 왜 이렇게 변하였는가.

레이는 자기 신세를 한탄하며 손을 저었다.

"루나는 잠깐만 나 좀 보고, 너희들은 그만 들어가 봐."

데런이 곧장 자리를 피했고, 요하나는 카렌의 팔을 잡아끌며 끝까지 레이의 속을 긁고 나갔다.

"꼬맹이 주제에."

'시발.'

레이는 잠시잠깐 저걸 쥐어팰까 고민했지만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속을 다스렸다.

사실 요하나가 대놓고 엇나갔으면 레이는 진즉 요하나를 쥐어팼을지도 몰랐다.

실제로 선을 어긴 몇몇 아이들이 개처럼 쳐맞고 운동장을 기어다녔던 경우도 몇 번 있었다.

허나 요하나의 신경질이 대부분 레이 하나를 향해 있었기에, 레이는 근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요하나에게 일방적으로 처맞고 있었다.

"우리 착했던 요하나가 대체 어쩌다가..."

눈을 감으면 마냥 해맑기만 했던 어린 시절의 요하나가 아른거린다.

레이는 옅은 갈색 머리카락을 지닌 요하나를 보며 전생에 사촌이 키웠던 골든 리트리버를 연상하곤 했다.

항시 웃는 얼굴로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던 귀여운 골댕이 말이다.

헌데 어쩌다가 저런 지랄견으로 암흑진화했던 말인가.

레이가 지친 얼굴로 의자를 끌고 와 루나와 단둘이 마주 앉았다.

루나의 볼이 어느새 다시 빵빵이 부풀어 있었다.

레이가 두 손을 뻗어 루나의 뺨을 잡고 흔들었다.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재밌냐?"

"..."

루나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포자기한 레이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 재밌으면 됐다. 근데 요하나는 요즘 나한테 왜 그러냐? 내가 뭐 실수한 거 있어?"

루나는 고민했다.

레이가 요하나에게 실수한 게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일단 레이는 기본적으로 터치가 가벼웠다.

사춘기가 찾아온 아이들은 감성이 섬세해지며 육체를 접촉하는 행위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는 아이들의 머리나 턱을 습관적으로 쓰다듬는 경우가 많았다.

좋아하는 애들은 여전히 좋아했지만, 아무래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아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레이는, 요하나가 제대로 검술을 구사할 수 있게 된 시점부터 요하나를 천재라고 엄청나게 치켜세워 주었다.

요하나는 확실히 또래의 아이들에 비해 독보적인 속도로 검술을 발전시켰다.

레이를 제외하고 말이다.

요하나가 기사의 검을 다섯 번이라도 막아내기 위해 끙끙댈 때 레이는 구석에서 기사를 주먹으로 패고 있었다.

기사를 들것에 실려 보낸 레이는 요하나에게 다가가 소리쳤다.

벌써 기사님의 검을 흘려낼 수 있다니! 요하나 너는 정말 천재구나!

아무리 좋게 봐도 기만행위였다.

허나 요하나가 레이에게 부리는 심통이 심각해진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관계성의 모호함 탓이 컸다.

요하나에게 레이는 어떠한 존재인가?

부모? 보호자? 또래 친구? 스승? 관심 가는 이성?

요하나를 비롯해 보육원의 아이들에게 있어 레이와의 관계성은 굉장히 복합적이었으며, 이에 따라 혼란을 느끼는 아이들이 많았다.

예컨데 아이들은, 또래들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 레이를 보고 동경과 자부심을 느껴야 할지 질투와 경쟁심을 느껴야 할지 헷갈리곤 했다.

사춘기가 찾아온 많은 아이들이.

부모에게 이유 없이 반항하기도 하고.

또래 친구에게 질투를 느껴 좌절하거나 분노하기도 하고.

좋아하는 이성에게 제대로 마음을 전하지 못해 괜히 괴롭히기도 한다.

그리고 요하나에게 있어 레이는, 부모이자 친구이자 멋진 이성이기도 했다.

"...요하나는 레이를 정말 좋아해요."

루나가 레이를 향해 눈을 깜박였다.

"...그러니까 요하나를 미워하지 말아요."

"내가 설마 그러겠니."

낄낄 웃은 레이가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루나는 여전히 레이의 손길이 좋았다.

한숨을 한 번 쉰 레이가 중얼거렸다.

"빨리 네 마법 스승을 구해야 할 텐데."

루나는 오늘 수업을 참석했으나, 사실 4년 전에 이미 배운 내용이었다.

레이가 루나를 처음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밑천이 털리기까지 2년을 예상했고, 실제로는 2년도 안 돼서 밑천 대부분을 털렸다.

결국 레이는 가르치기를 망설였던 물리학과 공학적 지식들까지 전부 루나에게 전수했다.

지구와는 다른 세계이기에 괜히 잘못된 지식이나 고정관념을 심어줄까 망설였는데, 레전드리 고아를 가만히 놀리기도 뭐해 '이런 가설도 세워볼 수 있다'는 뉘앙스로 수업을 진행했었다.

'그것도 얼마 못 갔지.'

정말 더는 가르칠 게 없어진 이후.

루나는 레이의 손을 잡고 백작가나 교단에 들려 관심 있는 책을 빌려 와 독서를 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복잡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레이를 향해 루나가 종이 더미를 건넸다.

"...이거 같이 풀어볼래요?"

"이게 뭔데?"

"직접 만든 문제예요."

레이가 슬그머니 종이 더미를 살폈다.

첫 장부터 잘 이해도 안 가는 수학 수식들의 조합이 쭉 나열되어 있었다.

근래 들어 루나는 레이의 두뇌 용량을 초과하는 수학 문제를 만들어와 코앞에 들이밀고 풀어보라 떼를 쓰곤 했다.

이해는 됐다.

루나의 곁에는 수리학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레이 하나밖에 없었다.

허나 레이는 루나의 사고 회전 속도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레이가 한숨을 삼키며 필기구를 집어들었다.

한 시간 정도는 루나의 취미에 어울려줄 생각이었다.

*

레이는 며칠 동안 애들 성교육을 다시 하고 홍등가 사람들에게 애들 관리에 협조하라고 으름장을 놓고 다녔다.

효과가 얼마나 갈지는 미지수였다.

요하나는 여전히 틱틱거리며 꼬맹이 꼬맹이 노래를 불렀고 루나의 뺨은 부풀어 올랐다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길 반복했다.

불평할 건 많았지만.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레이는 오랜만에 숲 속 냇가를 찾아가 바위에 걸터앉았다.

이전에 비해 보육원 예산이 풍족해져 굳이 피임구 알바를 뛰지 않아도 되었고 보육원 내에 수련 장소가 확보되어 이곳을 찾아오는 횟수가 줄었었다.

그리운 풍경을 마주 보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반투명한 나뭇잎이 떨어지는 햇살을 쪼개 무지개를 그린다.

고개를 드니 다채로운 색깔로 하늘이 가득 차 있었다.

레이는 마음이 진정됨을 느꼈다.

확실히 사춘기이긴 했다.

이성은 확고했으나 불균형한 호르몬 탓인지 자주 감정이 불안해졌다.

사춘기가 온 아이들이 왜 그렇게 지랄을 해대는지 맨정신으로 사춘기를 겪어보니 잘 알 수 있었다.

삐익-!

레이가 팔을 들어 올렸다.

백작이 날려 보낸 브릿지가 허공에서 내려앉았다.

편지를 뜯어본 레이가 몸을 일으켰다. 백작을 찾아가봐야 했다.

*

"나의 기사가 찾아왔구나!"

영주성에 찾아가니 알레시아가 가장 먼저 레이를 맞아주었다.

알레시아가 미리 정문에 나와 있었다는 건 백작이 귀띔을 해주었다는 의미일 터다.

14살이 된 알레시아는 겉모습만큼은 앳된 태를 슬슬 벗어나고 있었다.

찰랑이는 금발 사이로 드러난 싱그러운 미소가 퍽 매력적이었다.

레이는 감격스러운 얼굴로 알레시아를 마주 봤다.

'어렸을 때부터 발랑 까져가지고 사춘기까지 찾아오면 감당이 될까 싶었는데...'

레이의 근심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알레시아는 귀족 영애치고 여전히 조신함이 부족했지만 예전처럼 앞뒤 안 가리고 사고를 치진 않았다.

'사춘기가 좀 일찍 찾아왔었던 거네.'

이제 돌이켜 생각하면 사춘기라는 게 일찍 찾아오는 게 보호자 입장에서 차라리 편한 것 같았다.

머리가 좀 굵은 다음에 사춘기가 찾아오니 대처하기가 더 힘들었다.

뭐, 알레시아에게 문제가 하나 남아있다면.

여전히 눈치가 좀 없긴 했다.

"으음, 레이."

레이를 '내려다본' 알레시아가 레이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요새 좀 작아졌구나."

"으그그극..."

레이는 몸을 배배 꼬며 환생하고 처음으로 시간이 빨리 가길 바랐다.

어릴 때부터 보아왔던 꼬꼬마들에게 꼬꼬마 취급을 받으니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레이는 시간이 지나면 본인이 카렌이나 알레시아보다 키가 클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뭐? 키가 안 크면 어떡하느냐고? 그런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레이는 스스로를 그리 세뇌했다.

알레시아가 레이의 머리를 하늘을 향해 몇 번 당겨보더니 근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레이, 나의 기사는 나보다 키가 컸으면 좋겠구나."

알레시아의 취향은 확고했다.

첫키스는 자기보다 15cm가량 더 큰 상대가 약간 강압적으로 턱을 위로 끌어당겨 입을 맞춰주길 원하고 있었다.

헌데 레이를 바라보니 도리어 자기가 턱을 당겨줘야 할 모양새였다.

"레이, 키가 크려면 잠을 많이 자고 음식을 골고루 먹어야 한다고 하더구나."

"으그그극..."

안 그래도 레이는 잠은 정시에 자고 밥도 제대로 챙겨 먹고 있었다.

알레시아가 고통스러워 하는 레이에게 권했다.

"최근 아이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귀한 약재가 들어왔는데, 받아가도록 하여라."

평소의 레이였다면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알레시아의 권유를 쳐냈을 테지만.

때로는 자존심보다 우선되는 문제도 있는 법이었다.

레이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주시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잘됐구나! 부디 내 목이 뻐근할 만큼 크게 자라다오!"

내 키가 자라는데 네 목이 왜 뻐근하냐.

레이는 굳이 궁금증을 입 밖에 내지 않은 채 백작이 기다리는 응접실로 향했다.

먼저 응접실에 도착해 있던 백작이 레이를 향해 웃었다.

"들어오게."

레이가 곧장 한쪽 무릎을 꿇었다.

평소에 까불어 대는 만큼 이런 소소한 것에 신경을 더 써야 했다.

백작의 허락을 받고 몸을 일으킨 레이가 의자에 앉았다.

일상을 묻는 대화가 몇 개 지나간 후 백작이 본제를 꺼냈다.

"루나에 대한 그대 걱정이 무엇인지 알고 있네."

다비드와 로커스트가 탐낸 인재다.

스승을 구하겠다고 아무한테나 루나를 함부로 보였다간 골치가 조금 아픈 걸로 안 끝난다.

"아예 숨기고 사는 것도 방법이 될 터."

그게 가장 리스크를 줄이는 선택이긴 했다. 더군다나 백작은 루나를 평생 숨기고 살라는 것도 아니었다.

"그대가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후 루나의 정식 후견인이 되어준다면 얼마든지 마법을 배울 수 있을 걸세."

"안 됩니다."

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만약 루나가 영웅의 운명을 타고났고 대체가 불가능한 자원이라면.

당장 성장시키지 않으면 추후 세계가 멸망할 수도 있었다.

"그녀의 재능을 꽃피워주고 싶습니다. 괜찮은 방법이 없겠습니까?"

"그럼 이건 어떤가."

백작이 종이 한 장을 건네며 말을 이었다.

"그대가 직접 마탑으로 가 스승을 한 번 찾아보는 건."

레이가 되물었다.

"마탑이요?"

"그래, 마탑."

"거기 정신병자 소굴 아닙니까?"

레이가 생각하기에 마법사들은 정신병자였고.

마탑은 마법사들이 모인 곳이었으니.

마탑은 정신병자 소굴이 맞았다.

플로리아 (1)

47화

"마탑이 정신병자 소굴이라..."

백작이 새어나오는 웃음을 삼키기 위해 목울대를 꿀렁였다.

백작을 호위하던 모하메드 또한 괜히 헛기침을 터뜨리며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차를 한 모금 마신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 말이 옳다."

마법사들이 신의 없는 족속이긴 하다.

실리를 따른다는 핑계로 규율과 윤리를 저들 멋대로 재단하는 자들이다.

백작 또한 마법사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기에 레이의 머릿속에 박힌 고정관념을 나무랄 생각이 없었다.

"허나 레이, 그대에겐 체계화된 마법 이론을 학습한 마법사가 필요하지 않은가."

백작은 레이의 심중을 잘 알고 있었다.

레이는 기사가 파견되기 전까지 보육원의 아이들에게 검을 쥐여주지 않았다.

태권도 같은 생활 무술을 전수해 무게중심을 옮겨가며 몸 쓰는 법을 가르치긴 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레이는 걱정한 거다.

어설프게 검술을 가르쳤다가 토대가 잘못 잡혀 개선이 불가한 나쁜 습관이 들어버릴까 봐.

때문에 검술에 정통한 기사들을 데려올 때까지 검술 전수를 미룬 것이다.

루나 또한 마찬가지다.

시행착오는 겪을지언정, 어설픈 마법서 몇 권만 있어도 루나는 독학으로도 마법사 흉내쯤은 어렵지 않게 낼 수 있을 것이다.

허나 그건 재능을 버리는 짓이다. 레이의 지론은 그러했고 백작 또한 동의하는 바였다.

"마탑이 아니면 그대가 바라는 수준의 마법사를 찾기는 힘들 걸세."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헌데 제가 간다고... 그 폐쇄적인 마법사들이 얼굴이나 비춰주겠습니까?"

"이번에 알레시아를 황실 마탑으로 단기 유학을 보낼 기회를 얻게 됐네."

"황실 마탑이요?"

레이가 의아해하자 백작이 황실 마탑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황실 마탑은 황가의 지원 아래 탄생한 마탑으로, 마탑 간의 중재, 아티펙트 상용화, 연구 용역, 공동 학회 등의 역할을 수행하는 기구였다.

말만 마탑이지 기실 파벌이 나뉜 마법사 집단을 제어하고 거대 마탑의 정보 독점을 견제하려는 정치 기구에 가까웠다.

"편의상 마탑이라 부를 뿐이지 용도별로 구분된 건물들이 다수 모여 도시 형태를 이루고 있네. 황가의 지원을 받는 만큼 황실 마탑에 소속된 마법사들은 행동거지에 주의를 기울이는 편이지."

"눈치 보는 정신병자란 말씀이군요."

"틀린 말은 아닐세. 그래도 눈치 볼 게 적은 정신병자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끌끌 웃은 백작이 말을 이었다.

"이론 연구에 치중하는 마법사들의 비율이 높은 곳일세."

해박한 마법 지식에 비해 서클의 단계가 낮은 이들이 많다는 뜻이다.

통제하기도 쉽고 선생이란 역할에도 어울린다.

"어떤가?"

"정말 감사한 제의입니다만, 제가 무슨 자격으로 황실 마탑을...?"

"알레시아의 수행인으로 따라가게."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자리에서 손가락이나 빨고 있는 것보단 작은 가능성이라도 시도를 해보는 게 나았다.

"알겠습니다. 자리를 만들어 주셨으니, 노력해보겠습니다."

"흔치 않은 기회일세. 황실 마탑은 단기 유학이라 해도 아무나 받아주는 곳이 아니야."

황실에 줄을 댈 수 있는 얼마 없는 경로다.

때문에 황실 마탑에 단기 유학을 허가받기 위해선 연줄도 있고 배경도 뛰어나고 재능도 받쳐줘야 했다.

레이가 턱을 긁적였다.

"음... 알레시아가 마법적 재능이 그리 뛰어났나요?"

백작이 고개를 저었다.

"로커스트를 토벌한 위명 덕분에 기회를 얻게 됐네."

잠깐 망설인 백작이 말을 덧붙였다.

"마침 오시리스 백작 영애가 유학을 떠난다 하여, 오시리스 백작에게도 도움을 좀 받았네."

말인즉슨 유학을 떠나는 오시리스 백작 영애 옆자리에 알레시아를 억지로 낑겨 넣었다는 뜻이었다.

필립스 백작가와 이웃한 오리시스 백작가였지만, 그 위세는 다섯 배 이상 차이 났다.

상황을 납득한 레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왈가왈부해봤자 필립스 백작의 자존심만 상할 사안이었다.

"출발은 언제입니까?"

"시간적 여유는 충분하네. 족히 2주는 더 기다려야 하니 천천히 고민해보게."

"감사합니다."

"오시리스 백작 영애의 이름은 플로리아네. 알레시아와 동행하게 된 관계로 영주성에 한 번 들리겠다더군."

"성격은 어떻답니까?"

질문이 좀 건방지긴 했지만, 레이에게 이건 꽤 중요한 문제였다.

백작이 짧게 침음했다.

"실로 귀족적이네."

고생 좀 하겠군.

속으로 중얼거린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다시 하도록 하지."

백작은 유학 신청서처럼 보이는 종이를 집어넣은 후 밀봉된 편지 하나를 레이에게 내밀었다.

레이의 표정이 대번 밝아졌다. 세리아로부터 온 편지였다.

백작이 편지를 건네주며 덧붙였다.

"좋은 소식이 하나 더 있네. 심의를 마치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 감이 있지만, 드디어 명예 작위가 수여됐네."

"...명예 작위요?"

"작위라기보다는 훈장에 가깝네. 큰 공을 세운 이들에게 황실이 내리는 상훈이지."

"백작님, 제가 이런 사안에 대해 무지해서 여쭙니다만, 명예 작위의 혜택이 어떻게 됩니까?"

"큰 혜택이 있는 상훈은 아니나, 황실이 직접 내리는 상훈이니만큼 이름이 가볍지는 않네. 수훈자는 얄팍하게나마 준귀족 대접을 받을 수 있네."

눈을 깜박이는 레이를 향해 백작이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해주었다.

"위세 높은 귀족이라도 명예 작위 수여자에겐 정당한 절차 없이 함부로 벌을 내릴 수 없다는 의미일세. 황실의 권위를 모독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지."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인 레이가 가장 중요한 것을 물었다.

"근데 명예 작위 수훈자가 누굽니까?"

"누구겠나?"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신 백작이 느슨하게 입꼬리를 풀었다.

"그대 공을 대신 나눠 가진 자들이지."

*

태양이 쨍쨍 내리 찌는 하늘 아래.

밀짚모자를 눌러 쓴 지미가 땀을 뻘뻘 흘리며 잡초를 뽑아내고 있었다.

잡초 옆에는 하얀 뿌리에 짙푸른 이파리를 지닌 '라파'란 식물이 무릎에 닿을 만큼 크게 자라올라 있었다.

라파는 식용 채소 중 하나로 아삭아삭한 식감 덕분에 귀족과 평민을 가리지 않고 인기 있는 식자재였다.

울타리에 둘러싸인 자그마한 밭에는 라파 말고도 이런저런 채소들이 싹을 틔운 채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지미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미는 최근 본인이 꿈꾸던 슬로우 라이프를 부분적이나마 이루어보기 위해 작은 밭을 하나 일궈 채소를 가꾸고 있었다.

무럭무럭 자라는 채소들을 바라보니 지미는 그동안 쌓아왔던 스트레스가 천천히 해소되는 것 같았다.

"저, 저기..."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고개를 돌리니 아직 새파란 나이의 위병 하나가 사색이 된 채 입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흥이 깨진 지미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일이지?"

"여, 여기서 그, 그런 거 키우시면 안 됩니다."

"...?"

이건 또 뭔 소리야.

지미가 자꾸만 구겨지려는 얼굴을 어거지로 피며 말했다.

"이봐, 뭔가 착각한 것 같은데, 이 밭은 내 사유지야."

시세보다 높은 돈을 주고 밭을 샀고, 사람 먹을 수 있는 채소 몇 개를 길렀을 뿐이다.

문제 될 건 아무것도 없었다.

헌데 위병은 지미의 설명을 듣고 나서도 자리를 지키고 선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인내심이 바닥난 지미가 고함을 치려는 순간.

선임병처럼 보이는 위병이 다가와 젊은 위병의 머리를 후려쳤다.

"폴로! 여기서 뭐 해?! 내가 이 주변은 가까이 가지 말라고 했잖아!"

"하, 하지만 조장님, 저건 '브라시아' 아닙니까?"

폴로라 불린 위병이 '라파'를 가리키며 항변했다.

지미는 그제야 위병이 무엇을 오해했는지 알 수 있었다.

브라시아는 마약의 원료가 되는 식물로, 민간인이 멋대로 재배하는 게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헌데 브라시아는 라파와 생김새가 비슷해, 종종 라파로 위장하고 브라시아를 재배하는 악질적인 경우가 있었다.

지미가 허허 웃으며 '라파'를 가리켰다.

"아이고,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이건 라파입니다. 라파."

"하하, 확실히 '라파'가 맞군요. 실례를 끼쳤습니다."

선임병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장 폴로를 데리고 밭에서 멀어지며 속삭였다.

"야 이 새끼야, 내가 저기 가까이 가지 말랬지!"

"하, 하지만 조장님, 저건 라파가 아닌 브라시아 아닙니까?"

"내가 눈깔병신인 줄 알아? 나도 저게 브라시아인 건 알아! 근데 어쩌라고!"

상식적으로 암흑가의 지배자라는 인간이 태평하게 라파를 기르고 있겠는가.

저 밭에서 자라는 건 분명 특상의 브라시아일 게 분명했다.

허나 그렇기에 더더욱 아는 척을 하면 안 됐다.

"상대는 그 잔악무도하다는 암흑가의 지배자, 지미야! 야밤에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서 뒈지고 싶지 않으면 못 본 척해! 넌 모셔야 될 어머니도 있잖아! 알아들어?!"

폴로가 겁먹은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습니다."

"새끼... 앞으로는 말 잘 들어라."

선임병이 혀를 차며 폴로의 등을 쳐주는 사이 지미는 구슬픈 눈을 하고 라파를 바라보고 있었다.

꽤 떨어진 거리라 둘은 안심하고 있었지만.

지미의 귓가에는 위병들의 대화가 아주 잘 들렸다.

축 처진 얼굴을 한 지미가 정성을 들여 열심히 키웠던 라파를 뽑아냈다.

그는 우는 아이도 뚝 그치게 한다는 암흑가의 지배자.

무슨 행동을 하든 다들 색안경을 끼고 바라봤다.

정상적인 슬로우 라이프는 이미 물 건너간 지 오래라는 뜻이었다.

'내 인생은 대체 어디서부터 꼬였는가!'

그 새끼, 그 악마 같은 새끼만 만나지 않았다면, 모든 게 괜찮았을 텐데!

지미는 두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부디 보육원 아이들에게 더욱 지랄 맞은 사춘기가 찾아오게 해달라고.

부디 레이가 자기가 쌓은 업보에 깔려 고통받게 해달라고.

"와아아아-!"

지미가 자세를 경건히 하고 기도를 올리고 있는 와중에 아이들의 환호가 멀리서 들렸다.

흙을 털고 일어난 지미가 환호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먼저 도착하는 사람한테 쿠키 몰아주기!"

"와아아아!"

서른 정도 되는 아이들이 우르르 뛰쳐나와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었다.

전부 지미 보육원 '디나르 지부'에서 기거하는 아이들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미가 고용한 글쓰기 선생인 티모시가 아이들을 따라잡기 위해 헐떡거리며 달리고 있었다.

지미가 다가가서 물었다.

"무슨 일이지?"

"아, 지미님. 오늘 소풍이 있어서 말입니다. 아이들이 많이 신 났네요."

"소풍? 어디로 가는데?"

"다비드님의 추모비를 구경하러 갑니다."

지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다비드는 어느샌가 세리아와 함께 제국이 두려워했던 암흑정령사 로커스트를 토벌한 영웅이 되어 있었다.

그 병신이 9살 먹은 꼬마한테 칼 맞아 죽었다는 걸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야 할 텐데.

'정작 로커스트와 죽도록 싸웠던 나는 명예를 얻긴커녕 악명만 높아졌는데!'

하여튼 존나 억울한 일이었다.

속으로 툴툴댄 지미가 티모시를 향해 물었다.

"근데 아이들을 데려가기엔 좀 위험한 장소일 텐데."

"그래서 다른 선생들과 동행하기로 했는데 아이들이 신나서 먼저 뛰어갔네요. 얼른 잡아오겠습니다."

"아니, 뭐... 됐어. 내가 같이 갈게."

"아, 괜찮으시겠습니까?"

"마침 할 일도 없고. 어서 쫓아가자고."

아삭아삭!

지미가 방금 뽑아낸 라파를 생으로 씹어먹으며 아이들을 가리켰다.

티모시가 눈치를 보더니 슬그머니 물었다.

"근데 그거... 생으로 먹어도 약효가 있습니까?"

지미가 라파로 티모시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

"여기인가 봐."

시그니 산맥 초입.

은은한 푸른 빛을 내뿜은 광물인 청광석으로 제작된 다비드의 추모비 앞에서.

오시리스 백작 영애, 플로리아가 아직까지 주변에 남아있는 전장의 상흔을 살피고 있었다.

워낙 격렬한 전투였던지라 아직까지도 바스러진 바위나 박살 난 나무 기둥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아쉬웠겠어. 생환했다면 평생을 남들에게 떠받들어지며 살았을 텐데. 어마어마한 공훈이잖아? 단둘이서 로커스트를 토벌했다는 건."

"필립스 백작가의 기사들도 거들었다고 합니다."

호위 기사의 첨언에 플로리아가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웃었다.

"6서클의 마법사가 비명횡사한 전장이야. 진정 백작가의 기사들이 거들었다면 그들이 전부 생환할 수 있었겠어?"

전투에 참여하긴커녕 멀리서 지켜보기라도 했을까?

"부끄러움도 모르는 작자들 같으니라고."

부채를 탁탁 턴 플로리아가 추모비를 한 번 쓰다듬고는 등을 돌렸다.

"그만 영주성으로 가보자."

"알겠습..."

호위기사가 고개를 숙이려다 말고 눈을 가늘게 좁혔다.

수십에 가까운 인기척이 느껴졌다.

얼마 안 가 숲 속에서 10살 내외의 꼬맹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내가 일등이야!"

가장 앞서 달리던 꼬맹이는 추격해오는 다른 아이들을 보느라 앞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달려오는 방향이 정확히 플로리아를 향해 있어 기사가 호통을 치려는 순간.

"기다려 봐."

플로리아가 짐짓 흥미롭다는 얼굴로 기사의 행동을 제지했다.

플로리아 (2)

48화

지미 보육원에 기거하다 소풍을 나온 알프는 달리기 하나는 자신 있었다.

아이들을 추월한 알프는 혹시 따라잡히지는 않을까 뒤를 바라본 채 정신없이 내달렸다.

나무 뿌리 등이 돋아나 있는 산길은 굉장히 위험했으나, 이미 잔뜩 신이 나 있던 알프는 균형 감각 하나에 의지한 채 환호를 지르며 달려갔다.

그때 지미가 외쳤다.

"앞에 봐!!"

위압적인 지미의 외침에 알프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알프의 시야 끄트머리에서 녹색 늑대가 나타나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밀었다.

높이 뛰어오른 늑대는 알프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입을 덥석 닫았다.

"으아앗!!"

목을 물어뜯긴 줄 알았던 알프가 비명을 지르며 지면에 넘어졌다.

숨을 헉헉 몰아쉰 알프가 자기 목을 매만졌다.

피는 묻어나오지 않았다.

"어?"

[크르륵-]

알프를 그냥 통과해버린 반투명한 늑대가 이빨을 내보이며 으르렁거렸다.

늑대의 위협에 알프가 재차 비명을 지르며 엉덩이를 뒤로 끌었다.

텁!

얼마 물러서지도 못한 알프의 등이 누군가의 다리에 맞닿았다.

알프가 위를 올려다보자 부채로 얼굴을 가린 플로리아가 고저 없는 탄성을 내었다.

"어머, 아주 무례한 아이네. 함부로 귀족의 몸에 손을 대다니. 벌을 받아야겠어."

스르릉!

호위 기사가 검을 뽑아들었다.

알프는 상황 파악도 못 한 채 입을 벌리고 있다가 호위 기사가 검을 휘두를 자세를 취하자 그제야 딸꾹질을 했다.

날카로운 예기를 지닌 검이 금방이라도 떨어져 내릴 듯 번쩍였다.

허나 플로리아의 호위 기사 리옹은 정말로 검을 휘두를 생각이 없었다.

플로리아는 리옹에게 아이의 팔다리를 베어내길 바라는 게 아니었다.

플로이라는 주로, 이런 '일촉즉발의 상황'을 만들어 주변인의 반응을 감상하는 걸 즐겼다.

지금도 플로리아의 눈은 아이들을 쫓아온 지미와 티모시를 향하고 있었다.

아이들을 인솔하기 위해 애쓰던 선생들이, 과연 위기에 처한 아이를 앞에 두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도망칠까? 용서를 구할까? 아니면 얼어붙을까?

뭐, 눈이 돌아가 달려들 수도 있겠지.

플로리아가 흥미롭게 지미와 티모시를 지켜봤다.

그 순간, 빛살이 번쩍였다.

까앙-!

"큭?!"

일순 검을 놓칠 뻔했던 리옹이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나며 무게중심을 다시 잡았다.

자기 검을 바라본 리옹의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떠졌다.

투박한 검 한 자루가, 리옹의 검 한가운데를 관통해 있었다.

*

지미는 오판했다.

선생 몇 명보다 자신의 무력이 강하기에 서른에 가까운 아이들을 혼자 제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착각이었다.

아무리 검을 잘 다룬다 해도 손은 두 개였고, 애들 관리엔 무력보다 사람 머릿수가 더 중요했다.

지미 말 한마디에 아이들이 벌벌 떨었다면 무척 편했겠지만.

비교적 선입견이 덜한 아이들은 지미가 소문처럼 무서운 깡패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덕분에 지미는 아이들을 제대로 통솔하지 못했고, 발 빠른 몇몇 아이들은 지미의 시야를 벗어나 추모비를 향해 달려갔다.

아이들을 쫓아간 지미는 추모비 앞에 낯선 인물들이 머물고 있는 모습을 뒤늦게 발견했다.

상대의 차림새를 훑어본 지미가 알프에게 소리쳤다.

"앞에 봐!!"

알프는 늦지 않게 앞을 돌아봤고, 본래라면 다리를 멈춰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헌데 난데없이 웬 늑대 형상의 정령 하나가 나타나 알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지면을 구른 알프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플로리아의 신체에 멋대로 접촉했다.

직후 레옹의 검이 뽑혀나오자, 지미 또한 반사적으로 검을 뽑았다.

스릉!

달려가서 막기엔 거리가 너무 멀다.

지미는 용병이었고, 검기를 다룰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온갖 잡기를 익히며 살아남았다.

지미가 왼발을 지면에 내려찍으며 마나를 머금은 검을 투척했다.

까앙-!

알프를 내려 베려던 검 한가운데에 지미의 검이 박혀 들었다.

'시발.'

지미는 검을 던지고 나서야 좆 됐다는 걸 깨달았다.

붉은 머리카락을 묶어 올린 플로리아의 차림새는 누가 보아도 고귀한 귀족의 것이었고, 플로리아 옆을 지키던 기사 또한 광택이 서린 갑옷으로 무장해 있었다.

'귀족, 붉은 머리카락, 기사의 망토에 새겨진 늑대를 형상화한 문양.'

어렵지 않게 상대가 오시리스 백작가의 사람이란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지미가 입술을 씹었다.

아무리 급했다고 해도 귀족을 먼저 공격한 꼴이 되어버렸다.

적당히 무마하고 넘어갈 수 있는 선을 완전히 넘었다.

리옹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검신 중앙을 꿰뚫은 지미의 검을 노려보다, 손아귀를 뻗어 두 검을 분리했다.

끼기기기긱!

얼어붙은 분위기 속에서 쇠가 긁히는 소리가 산속을 메아리쳤다.

지미의 눈동자가 흔들리던 찰나 플로리아가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이건 예상 못 했는데. 설마 검을 던질 줄이야."

지미가 곧장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플로리아가 물었다.

"귀족이야?"

"아닙니다."

"귀족의 사생아라도 돼?"

"아닙니다."

"믿는 게 있으니 검을 던진 것 아니겠니? 대답해봐."

하다못해 귀족의 남첩이라도 되지 않는 이상.

머리가 제대로 달려 있으면 플로리아를 보고 감히 검을 던질 생각은 못할 터다.

대놓고 귀족티를 내기 위해 치장을 잔뜩 해놓았는데 검을 던진다는 건 그냥 목숨을 버리겠다는 뜻이었다.

지미가 지면에 머리를 붙였다.

"죄송합니다. 너무 흥분하여."

플로리아가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리며 알프를 흘겨봤다.

"이것과 관계가 어떻게 되기에? 아비라도 되니?"

"보호자입니다. 혈연관계는 아닙니다."

"호방함은 기사보다 낫네."

슈욱!

바람이 불어와 지미가 투척한 검을 쏘아냈다.

허공을 가른 검이 지미의 코앞에 떨어졌다.

"본래는 목을 베야겠지만, 선택지를 줄게."

플로리아가 알프를 가리켰다.

"이 아이의 팔 하나. 아니면 네놈의 팔 하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봐."

"...팔 하나로 용서해주시는 겁니까?"

"싫어? 그럼 한 번 덤벼볼래? 보아하니 실력에는 자신 있는 거 같은데."

"플로리아님!"

리옹이 기겁하자 플로리아가 깔깔 웃으며 구멍이 뻥 뚫린 리옹의 검을 붙잡았다.

"기사가 손에 쥔 검을 관통했다라. 기습이었다 해도, 어설픈 실력으로 불가능한 일인데."

엑스퍼트급 기사가 검을 쥘 때는 언제든지 검기를 자아낼 수 있도록 미리 마나를 흩뿌려둔다.

헌데 엑스퍼트급 기사가 손에 쥔 검이 관통당했다?

아무리 낮게 잡아도 동수의 실력자란 의미다.

"승산이 없지는 않잖아?"

플로리아의 권유에 지미가 검을 잡았다.

플로리아를 지키는 기사가 눈앞에 보이는 한 명도 아닐뿐더러, 여기서 싸워 이겨 시체를 땅에 묻는다 해도 뒷수습은 절대 불가능했다.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지미가 자기 팔에 검을 가져다 댔다.

플로리아가 부채 너머로 입꼬리를 치켜올린 채 속으로 되뇌었다.

'그만.'

늑대를 닮은 바람 정령이 슬그머니 플로리아를 돌아본다.

플로리아가 입가에 경련을 일으키며 재차 되뇌었다.

'그만.'

바람 정령의 고개가 살짝 돌아간다.

흡사 이리 말하는듯했다. 좀 더 간절하게 빌어봐.

'그만!'

"그만."

검이 지미의 살갗을 파고들기 직전 플로리아가 입을 뗐다.

부채를 살랑이며 숨을 고른 플로리아가 지미를 상찬했다.

"나름 재밌었어. 나를 즐겁게 했으니, 이번 한 번은 용서해줄게."

"..."

지미는 여전히 팔에 검을 붙인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플로리아가 물었다.

"기사는 아닌 것 같은데."

기사 작위를 받았다면 진즉 신분을 밝혔을 터다.

"이름이 어떻게 되니?"

"지미라고 합니다."

"지미, 지미... 아, 지미!"

기억 한편에서 지미의 이름을 떠올린 플로리아가 탄성을 내질렀다.

출신 천한 용병이 최근 명예 작위를 받게 되며 귀족들 사이에 잠깐 화제였는데, 그 당사자가 눈앞에 있었다.

"로커스트를 토벌하는데 공로를 세웠다는 용병이 맞니?"

"...공로라고 하실 것까지도 없습니다."

"내가 큰 실수를 할 뻔했네."

황실에서 직접 내린 수훈을 받은 자다.

작위를 계승하지도 못한 플로리아가 멋대로 해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여기서 더 괴롭히면 플로리아도 곤란해질 수 있었다.

플로리아는 강고한 의식과 감정을 담아 부채 너머로 바람 정령을 노려보았다.

바람 정령은 플로리아를 비웃듯 방정맞은 걸음으로 엉덩이를 흔들더니 실체화를 풀고 사라졌다.

플로리아가 한숨을 삼켰다.

어린 시절 멋모르고 해버린 정령과의 불공정 계약에 묶여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황실 마탑에 거주하는 마법사 중 정령학을 주로 다루는 마법사들을 찾아가볼 생각이었지만, 솔직히 원하는 답을 얻기는 요원해 보였다.

정령과의 계약은 일종의 '계약 각인' 중 하나였기에 상호 동의 없이는 멋대로 수정하기가 불가능했다.

일방적 파기야 가능했지만, 워낙 불공정한 계약에 묶여 있어 목숨을 걸어야 했다.

'이러다 평생 고생하겠어.'

자기 처지를 비관한 플로리아가 다시 지미를 바라봤다.

정령과는 별개로 지미에게 관심이 가는 건 사실이었다.

천박한 용병이라 들었는데, 자기 팔을 내주어 가며 혈연관계도 아닌 아이를 구하려는 모습이 꽤 흥미가 돋았다.

상대 신분에 어울리는 표현은 아니었지만.

기사도를 아는 자가 아닌가.

"필립스 백작령에서 생활하고 있겠지?"

"그렇습니다."

"마침 잘 됐네. 무례는 용서해줄 테니, 길 안내나 좀 해봐."

"길 안내라 하시면..."

"필립스 백작가의 영주성. 잘 알 것 아니니? 나는 초행길이라서."

잠시 알프를 돌아본 지미가 고개를 숙였다. 지금은 플로리아의 비위를 맞춰줘야 했다.

"알겠습니다."

*

젠킨슨이 떫은 얼굴로 레이를 바라봤다.

"너 아직도 나한테 4년 전 앙심이 남아있었냐?"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당시 제가 고집을 부렸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백작님을 비롯해 젠킨슨 경에게도 감사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근데 왜 하필 나야? 너 디디에 경이랑 더 친하잖아?"

"디디에 경은 훌륭한 기사님이시죠."

"그렇지."

"그러니 제가 없는 사이에도 보육원을 잘 보호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젠킨슨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결국 디디에를 제외하고 남는 놈들 중 고르다 보니 널 선택했다는 소리다.

레이가 젠킨슨의 반응을 보고 의아해했다.

"아니, 근데 뭐가 불만이십니까? 저 만큼 많이 배우고, 눈치 빠르고, 강한 종자가 어디있다고요?"

젠킨슨이 아예 두개골로 파고드려는 미간을 붙잡았다.

백작은 레이가 알레시아의 곁을 수행하기 전에, 적당한 신분을 갖춰야 하니 기사의 종자로 들어가라 일렀다.

기사의 종자, 즉 스콰이어는 귀족 대접은 못 받을지언정 어딜 가서 함부로 무시받지는 않았다.

백작이 기사들 중 모하메드를 제외하고 아무나 골라잡으라기에 레이는 젠킨슨을 택했다.

사실 별 생각 없이 고른 거였지만, 레이에게 지목된 젠킨슨은 죽을 맛이었다.

종자가 하나 새로 들어오는 거야 아무 문제 없다.

헌데 새로 들어온 종자가 나보다 많이 배우고, 나보다 눈치 빠르고, 나보다 강하다면 그건 굉장한 문제였다.

젠킨슨도 자존심이 있다.

종자보다 실력이 부족한 기사라니.

대체 어느 기사가 그딴 굴욕을 당하고 싶겠는가.

젠킨슨이 애원했다.

"레이, 이제라도 마음을 바꾸는 게 어떻겠냐? 백작님께서도 들어주실 거다."

"젠킨슨 경, 이미 결정된 사안인데 긍정적으로 생각하세요. 앞으로 언제 제 따귀를 한 번 후려보겠어요."

기사는 스콰이어를 임명하기 전 따귀를 한 대 후리는 전통이 있다.

젠킨슨이 한숨을 쉬었다.

레이의 말마따나 젠킨슨이 레이의 따귀를 후릴 수 있는 기회는 지금이 유일할 게 분명했다.

당장도 일대일로 붙으면 젠킨슨이 일방적으로 쳐맞는데 언제 레이의 따귀를 후려보겠는가.

젠킨슨이 현실을 수긍한 후 품 속에 고이 챙겨왔던 가죽 장갑을 꺼냈다.

거칠게 무두질이 되어 있어 살에 쫙쫙 감기는 장갑이었다.

레이가 식겁하며 한 발 물러서자 젠킨슨이 손가락을 까닥였다.

"쓰읍! 일로 안 와? 어딜 도망가?"

레이가 식은땀을 흘리며 되물었다.

"젠킨슨 경, 뒷감당 되시겠습니까?"

"벌써부터 협박질을 하는 거 보니 싹수가 노란 종자로구나. 이래도 지옥 저래도 지옥일 거 감정이나 한 번 풀자꾸나."

저저 속이 좁아터져 가지고는.

투덜댄 레이가 결국 눈을 감은 채 뺨을 대주었다.

얼마 안 가 살가죽이 터지는 소리가 영주성을 울렸다.

쫘악!!

레이의 고개가 꺾일듯이 돌아갔다.

온몸을 부들부들 떤 레이가 핏물을 뱉어냈다.

살갗이 터진 뺨이 금세 시뻘겋게 부어올랐다.

가래 끓는 신음을 길게 흘린 레이가 젠킨슨에게 손가락을 까닥였다.

"마스터, 대련 한 판 하쉴?"

"일 없다, 미친놈아."

젠킨슨이 슬금슬금 발을 빼는데 영주성 정문에 지미와 함께 못 보던 얼굴이 나타났다.

레이는 뽑아내려던 검을 내려놓은 채 헬쑥해진 얼굴의 지미를 바라봤다.

건방 (1)

49화

플로리아가 필립스 백작가의 영주성에 방문했다.

젠킨슨이 시종들과 함께 예를 갖춘 후 플로리아를 영주성 안으로 안내했다.

영주성 정문에 멀거니 남게 된 레이와 지미가 서로를 쳐다봤다.

"아니, 레이...!"

살갗이 터진 레이의 뺨을 확인한 지미가 따뜻한 미소를 머금었다.

"대체 어떤 귀인께서 네 얼굴을 이렇게 만든 거냐?"

레이가 자기 뺨을 쓰다듬더니 떫은 얼굴로 답했다.

"이번에 젠킨슨 경의 종자로 들어가게 되어서요."

"종자? 스콰이어 말하는 거냐?"

"그렇죠."

"그래서 뺨 한 대 얻어맞았고?"

"네."

"쯧쯧, 삼십 년 전만 해도 반나절은 몽둥이 찜질을 했다던데."

과거에는 스콰이어를 임명할 때 밧줄로 묶어놓고 반나절을 팼었다.

그 과정에서 골병이 들거나 아예 목숨을 잃는 스콰이어까지 나오자 점차 강도가 줄어들어 이젠 뺨 한 대로 대체되었다고 한다.

지미가 사라진 악습을 아쉬워하며 레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쨌든... 이제 천민 소리는 안 들어도 되겠네. 축하한다."

"그렇게 됐네요."

사실 천민과 평민을 나누는 정확한 기준이 존재하는 건 아니었다.

배경 없고 직업이 천하면 대충 뭉뚱그려 천민이라 부르고는 했다.

다만 지미의 말마따나 스콰이어를 천민 취급하는 미친놈은 없었다.

지미가 썩 부럽다는 눈빛을 하고 있자 레이는 명예 작위 이야기를 해주려다 입을 다물었다.

'미리 얘기하면 김 새잖아?'

아무것도 모른 채 백작에게 불려 가서 소식을 듣는 게 좀 더 극적일 터다.

속으로 낄낄거린 레이가 지미의 안색을 다시 살폈다.

"근데 오시리스 가의 영애님이랑은 어쩌다 동행하게 된 거예요?"

"그~게 말이다."

지미가 자기 팔을 더듬으며 추모비 앞에서 있었던 일을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레이가 미간을 구기고 있자 지미가 실소했다.

"귀족에게 칼 던져놓고 몸 성히 돌아왔으니 자비에 감사해야 할 판이다."

"아니, 그게, 하아..."

레이가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지미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여긴 신분제 사회다.

원인 제공을 귀족이 했다 해도 지미가 앞뒤 안 가리고 검을 투척한 건 중죄가 맞았다.

쉽게 넘어가 준 게 다행이었다.

레이가 고생했을 지미의 등을 한 번 쳐주었다.

*

필립스 백작이 플로리아를 영접하는 동안 양 가문의 기사들이 정원에서 만남을 가졌다.

공식적인 행사는 아니고, 남는 시간 동안 간단히 인사나 나누자는 취지였다.

오시리스 측에서 파견한 기사는 총 세 명이었다.

레옹, 멘데스, 아벤시오.

레옹은 현재 플로리아의 곁을 지키고 있었기에 멘데스와 아벤시오가 종자를 데리고 정원을 찾아왔다.

영주성에서 대기하던 디디에와 젠킨슨이 그들을 맞이했는데, 둘 곁에는 레이가 뚱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필 눈에 띄어가지고.'

얻어 터진 뺨을 크게 부풀린 채 젠킨슨을 뒤따르는 모습을 보여버렸으니, 이제 와서 종자가 아니었다고 무를 수도 없었다.

다과를 앞에 둔 오시리스 백작가의 기사, 멘데스가 레이의 뺨을 바라보더니 젠킨슨에게 물었다.

"아이가 스콰이어로 임명된 지 얼마 안 된 모양이오?"

"...그렇소. 오늘 막 스콰이어로 임명된 참이오."

젠킨슨은 레이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발 얌전히 있어라.'

레이가 이유 없이 사고를 치진 않았으나, 어째 옆에 두고 있자니 영 불안했다.

한편 멘데스는 레이의 나이를 가늠하고 있었다.

얼추 12~14살 사이처럼 보였는데, 근래 스콰이어의 임명 시기가 빨라지는 추세라는 걸 감안하면 조금 늦은 나이였다.

멘데스가 레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반갑구나."

"처음 뵙겠습니다. 멘데스 경."

악수를 마친 멘데스가 레이에게 물었다.

"혹시 귀족인가?"

"평민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가문의 사람인가?"

멘데스는 자연스럽게 질문을 이어갔다.

이는 무례가 아닌 당연한 수순이었는데, '평범한 평민'을 기사의 종자로 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작위를 지닌 귀족이 자식들을 낳으면 그들 중 한 명에게만 작위가 계승된다.

작위가 없는 귀족들이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들의 계급은 평민으로 내려간다.

계급이 평민으로 내려간 자들을 보통 '젠트리'라 칭하며, 준귀족 대접을 해주었다.

평민 계급의 아이가 스콰이어에 임명됐다면 대개 젠트리 계층이었다.

그러니까 멘데스는 레이를 젠트리 계층이라 생각하고 선대의 가문을 물어본 거다.

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내세울 가문은 없습니다. 아비 없는 자식이었던지라."

"호오."

의미 모를 탄성을 터뜨린 멘데스가 다시 물었다.

"그럼 어미는 있겠지? 어미의 직업이 어떻게 되나?"

"하하, 여기까지 하시지요."

젠킨슨이 레이가 입을 열기 전에 얼른 대화를 끊었다.

젠킨슨의 이마를 타고 식은땀이 한 방울 떨어져 내렸다.

'이 새끼는 면전에 대고 자기 어미의 직업을 매춘부라 밝힐 놈이다.'

레이는 벨라의 직업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레이에게 있어 벨라는 성역이었고, 벨라가 지닌 직업 또한 마찬가지였다.

4년 동안 레이를 보아왔던 젠킨슨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새끼는 자기가 욕먹는 건 별로 신경 안 쓴다.'

허나 벨라가 모욕당하는 경우엔, 높은 확률로 눈이 돌아갔다.

이 자리에서 레이가 벨라의 직업을 밝힌다면 오시리스 가의 기사들은 레이를 배려하긴커녕 이죽댈 게 뻔했다.

젠킨슨은 되도록 평화롭게 지금 순간을 넘어가고 싶었다.

"비록 평민이라 해도 좋은 재능을 가진 아이라오."

"어련하시겠소."

멘데스가 빈정거림을 숨기지 않았다.

네가 평민을 받고 싶어 받았겠냐? 네 밑에서 종자 노릇할 젠트리도 찾지 못했으니 마지 못해 출신이 천한 평민을 스콰이어로 받았겠지.

그런 의도가 잔뜩 담겨 있는 한 마디였다.

"하하..."

젠킨슨은 무시를 당하면서도 웃는 낯을 유지했다.

레이가 천연덕스럽게 다과를 집어 먹으며 속으로 혀를 찼다.

오시리스 가의 기사들이 필립스 가의 기사들을 무시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놈의 맹약이 문제로군.'

필립스 가의 기사들은 함부로 외부에 실력을 노출하지 않았다.

티티를 보호하는 데 있어, 저력을 되도록 감추는 편이 훨씬 유리했기 때문이다.

또한 필립스 백작령과 엇비슷한 역량을 지닌 영지들은 고작해야 엑스퍼트 급 기사 서넛을 운용하는 게 한계였다.

필립스 가는 맹약을 지키기 위해 그동안 과도한 군사력을 유지했다.

그 부담 탓에 영지가 이렇게 쪼그라들었으니, 맹약만 벗어나면 기사 전력을 크게 축소할 확률이 높았다.

'이 체계가 600년이나 유지된 것도 대단하다, 진짜.'

역시 영웅의 후손이라는 것일까.

어쨌든 외부의 세력들은 필립스 가의 기사들을 기껏해야 엑스퍼트에 발을 디디다 만 반쪽 짜리 기사라 여겼다.

젠킨슨을 비롯해 필립스 가의 기사들은 한평생 그런 모욕을 웃어넘겼다.

레이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젠킨슨을 향해 귓속말로 속삭였다.

"마스터, 배제할까요?"

"제발 그냥 닥치고 있어."

젠킨슨이 정색했다.

물론 레이도 농담이었다.

굵직하게 사고 친 게 많아서 평가가 박하긴 했지만.

기실 레이도 젠킨슨 만큼이나 불필요한 문제를 일으키기 싫어했다.

오시리스 백작가 측의 이야기를 적당히 한 귀로 흘리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레이!"

알레시아가 손을 흔들며 플로리아와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알레시아는 누가 봐도 신이 나 있었다.

'플로리아가 나의 영주성에 찾아오다니!'

비록 성격은 좀 나쁘지만, 플로리아는 알레시아가 과거부터 교제해 왔던 몇 안 되는 또래였다.

항상 알레시아가 일방적으로 오시리스 가를 왕래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플로리아가 필립스 가를 찾아왔다.

알레시아는 플로리아에게 정말 자랑하고 싶은 게 하나 있었다.

갑작스러운 백작가 영애들의 출현에 기사들이 황급히 예를 갖췄다.

대충 고개를 끄덕인 알레시아가 레이를 가리키며 자랑스럽게 외쳤다.

"플로리아, 이 자가 바로 나의 기사라네!"

레이는 골통이 아려왔다.

평소에도 '나의 기사'를 노래처럼 부르고 다니는 알레시아였지만.

설마 영주성을 찾아온 손님 앞에서도 나의 기사를 운운할 줄은 레이도 예상 못 했다.

뭐,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그만큼 알레시아가 레이를 신뢰하고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증거였으니.

다만 남들에게 내보이기엔 레이의 신분이 많이 천했다.

'알레시아가 그걸 모를 것 같진 않고.'

저래봬도 알레시아는 머리가 나쁜 건 아니었다.

천한 신분과 어울린다고 손가락질받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저리 행동한 거다.

'백작이 대놓고 어울리라 밀어준 탓인가.'

레이가 한숨을 쉬는 사이 플로리아가 부채를 살랑이며 레이를 위아래로 훑었다.

"정말 이자가 네 기사라고?"

"아직은 스콰이어지만! 곧 나의 기사가 될 것이네!"

"그래?"

나이가 열여섯인 플로리아는 레이보다 시야가 꽤 높았다.

레이를 내려다본 플로리아가 한 차례 지나갔던 질문을 반복했다.

"귀족이니?"

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평민입니다."

"어느 가문의 사람이니?"

"내세울 가문은 없습니다."

"...젠트리 계층이 아니란 말이니?"

"예, 맞습니다."

레이를 재차 훑어본 플로리아가 부채로 입을 가리며 조소했다.

"알레시아, 정말 이자가 네 기사가 맞니?"

"그러하다!"

"둘이 아주 잘 어울리네."

"정말 그러한가?"

알레시아가 얼굴을 붉히며 기뻐하자 레이가 앓는 소리를 냈다.

"알레시아님, 저거 비꼬는 겁니다."

"그게 무슨 상관인가? 아무튼 잘 어울린다니 되었다."

해맑게 웃음 짓는 알레시아를 보고 레이의 입꼬리가 풀리려는 순간 옆에서 웃음소리가 터졌다.

"크읍!"

멘데스의 종자인 빅토리가 잠깐 어깨를 들썩였다.

멘데스는 빅토리를 타박하긴커녕 따라서 어깨를 들썩이다 헛기침을 했다.

웃음은 바로 그쳤으나, 젠킨슨과 디디에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여전히 해맑은 얼굴을 한 알레시아를 바라본 레이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플로리아는 알레시아보다 나이가 많았고, 오시리스 가는 필립스 가에 비해 다섯 배는 강대했다.

그럼에도 알레시아는 플로리아를 하대했다.

알레시아가 멍청해서 실수한 게 아니다.

플로리아는 머리 위로 남자 형제만 셋이 더 있었다. 작위를 계승 받지 못할 확률이 굉장히 높았다.

그에 비해 알레시아는 필립스 백작가의 유일한 적통이었다.

작위의 계승이 예정된 귀족이란 소리였다.

이 자리에 서 있는 자들 중 가장 급이 높은 자가 바로 알레시아였다.

뭐, 플로리아는 알레시아와 오래 교제했다고 하니 선을 좀 넘는 장난도 칠 수 있다.

헌데 기사란 새끼들이 쳐 웃어?

웃음이 나올 수는 있다. 그럼 혀를 씹어서도 버텨야지.

웃음이 새어 나왔다면, 곧장 고개를 처박고 죄를 빌어야지.

헌데도 멘데스는 목을 뻣뻣이 세운 채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것도 오시리스 백작령이 아닌 필립스 백작령 한가운데서.

'대감 집에서 노비 질을 하다 보니 정신이 쳐 나갔다 보군.'

레이가 입을 뗐다.

"멘데스 경, 지금 발을 디딘 곳이 어디인지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군요."

"뭐라?"

멘데스가 되물었다.

레이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다과 접시를 잡아끌었다.

"이곳은 오시리스 백작령이 아닌 필립스 백작령입니다."

모서리를 향해 나아가던 다과 접시가, 이내 지면에 떨어지며 산산이 부서졌다.

쨍그랑!

멘데스를 코앞에 둔 레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느새 뽑혀나온 레이의 검이 멘데스의 흉갑을 톡 건드렸다.

깡!

"그러니까 건방 좀 작작 떨어 새끼야. 턱을 찢어놓기 전에."

건방 (2)

50화

갑작스럽게 뽑혀나온 검에 모두가 당황했다.

멘데스는 물론이고 동료 기사인 아벤시오까지 반사적으로 허리춤을 향해 손을 뻗었다.

허나 그보다 한발 앞서 디디에와 젠킨슨이 검 자루를 움켜쥐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차가운 침묵 속에서, 쇠 긁어내는 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끼기기기긱

레이의 검이 멘데스의 흉갑을 타고 오른다.

점점 목덜미로 다가오는 검 끝을 의식하며, 멘데스가 디디에와 젠킨슨을 돌아봤다.

둘 모두 레이를 말리긴커녕 언제든지 발검이 가능토록 허리를 뒤튼 채 검 자루를 잡고 있었다.

충분한 명분을 쥐고 있지 않는 이상 저리 강맹하게 나올 리가 없다.

그제야 멘데스는 상황을 되돌아봤다.

스콰이어가 기사를 모욕하고, 먼저 검을 뽑아 위협을 가한 건 상상키 힘든 무례가 맞았다.

허나 레이는 멘데스가 알레시아에게 무례를 범한 것을 명분 삼아 검을 뽑았다.

백작위 계승이 예정된 귀족에게 기사가 함부로 무례를 범한 것.

이건 스콰이어가 기사에게 칼을 뽑아 휘두른 것보다 훨씬 중대한 사안이었다.

문제를 삼지 않았다면 괜찮았다.

레이가 나서지 않았다면 알레시아는 상황을 웃어넘겼을 터다.

디디에와 젠킨슨 또한 주제넘게 나서지 않고 조용히 알레시아의 곁을 지켰겠지.

허나 레이가 검까지 뽑아들며 멘데스의 무례를 문제 삼은 순간.

멘데스는 이에 대해 반드시 해명해야 했다.

멘데스에게 레이가 행한 무례를 지적하는 건 그다음 순서였다.

헌데도 멘데스가 순서를 지키지 않고 레이에게 역정을 낸다면.

필립스 백작가의 기사들은 멘데스의 행동을 알레시아를 향한 모욕이라 판단하고 곧장 검을 뽑아들 것이다.

디디에와 젠킨슨은 검 자루에 손아귀를 올림으로써 그러한 뜻을 드러내고 있었다.

'감히 이것들이...!'

오시리스 가는 필립스 가보다 몇 배는 강대한 가문이다.

때문에 오시리스 가의 사람들이 가벼운 무례를 저질러도 필립스 가는 적당히 눈을 감고 넘어갔었다.

'헌데 갑자기 태도를 바꿔?'

멘데스는 분노했으나 상황이 좋지 못했다.

자존심 세우겠다고 검을 뽑아 백작가 영애들 앞에서 칼부림을 했다간 정말 목이 잘릴 수도 있었다.

플로리아가 나서서 레이를 타박한다면 당장은 상황을 무마할 수 있겠지만.

그랬다간 필립스 가의 적통한 후계자를 향한 모욕을 플로리아가 승인한 모양새가 되어 버린다.

고작 기사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플로리아가 그러한 정치적 부담과 오명을 감수할 이유는 없었다.

끄득!

멘데스가 목덜미에 닿기 직전이었던 레이의 검을 손으로 멈춰 세웠다.

잠시 레이를 내려다본 멘데스가, 알레시아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무례를 사죄드립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눈치를 보던 빅토르가 황급히 멘데스를 따라 무릎을 꿇었다.

알레시아는 은근히 상기된 얼굴로 히죽거리더니, 이내 손을 저으며 관용을 베풀었다.

"괘념치 말거라. 나는 마음이 넓으니, 사소한 무례쯤은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

멘데스가 앓는 소리를 삼켰다.

알레시아는 멘데스의 무례를 사소하다 치부하며 용서했다.

이제 와서 멘데스가 '더 작은 무례'를 범한 레이를 타박했다간 꼴이 이상해진다.

더군다나 알레시아가 대놓고 나의 기사라고 자랑한 스콰이어 아닌가.

굉장히 자존심 상했지만, 지금은 입을 다물어야 했다.

'저 빌어먹을 놈이...'

상황이 이리 돌아갈 걸 어느 정도 예상했기에 턱을 찢어놓니 뭐니 건방을 떤 것일 터다.

멘데스가 혀를 씹어가며 다시 한 번 알레시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알레시아는 세상 흡족한 얼굴로 레이를 바라봤다.

'역시 나의 기사는 다르구나!'

암, 주인이 모욕을 당했으면 저리 먼저 나설 줄도 알아야지.

알레시아가 흐뭇한 감정을 드러내는 동안 플로리아는 한 발 떨어져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레이를 살폈다.

어쨌든 더는 교류를 진행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오시리스 백작가 측 사람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

젠킨슨이 탁자 위에 흐른 다과를 집어들며 속삭였다.

"근데 레이 저놈이 위계 운운할 처지냐? 툭하면 아가씨께 이년 저년 하고 다니는 놈이?"

이년 저년에서 끝나면 또 몰라.

알레시아의 이마에 딱밤을 쳐대는 걸 기사들도 한두 번 본 게 아니다.

옆에 서 있던 디디에가 침음을 흘리더니 머쓱하게 답했다.

"아가씨께서도 좋아하시니 된 거 아니겠습니까."

"기사도를 숭상하는 네게 그런 말도 다 들어 보는군. 보통 하극상이 아닌데."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사람마다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게 썩 명예로운 일은 아니다만.

디디에 말마따나 상대가 상대였다.

젠킨슨이 고개를 저었다.

허나 투덜대는 젠킨슨의 입가에는 은은한 웃음이 맺혀있었다.

어쨌든 레이는 알레시아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서 검을 뽑았다.

남에게 할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레이의 등이 꽤 든든하게 다가왔다는 걸 젠킨슨은 인정하기로 했다.

*

일련의 과정을 영주성 안에서 지켜본 필립스 백작이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백작은 지난 몇 년 동안 레이의 성정을 꽤 정확히 파악해 놓았다고 자부했다.

루나를 구하기 위해 그 지랄을 떨었던 것 하나만으로도 쉽게 알아챌 수 있었지만, 레이는 '자기 사람'을 굉장히 아꼈으며 직접적으로 표현을 안 할 뿐이지 정도 많았다.

때문에 최근 4년.

알레시아가 레이를 쫓아다닐 동안 백작은 알레시아를 말리기는커녕 뒤에서 은근히 부추기기까지 했다.

정이라는 게 본디 얼굴 보는 시간이 길어지면 자연스럽게 붙는 것이다.

더군다나 알레시아가 어디 미색이 떨어지는 아이던가.

약간 맹한 구석이 있긴 했지만 다들 그런 모습조차 귀여워할 만큼 굉장히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레이가 대단히 특이한 감수성을 지니지 않은 이상 내심 알레시아를 마음에 들어 할 거라고 백작은 아비로서 자신했다.

물론 백작도, 한때는 알레시아가 레이를 따르는 걸 경계했다.

백작은 레이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비범한 인물이 되리라는 걸 직감했지만, 그렇다 해도 신분이 너무 천했다.

알레시아가 레이를 가까이한다면 추문이 붙는 건 금방이었다.

때문에 백작은 알레시아를 통제해 레이와 너무 가까워지는 걸 막았었다.

"멍청한 판단이었지."

추문 따위 붙어도 상관없다.

귀하게 키운 딸인 알레시아가 레이에게 푹 빠져 해롱거려도 문제없다.

알레시아가 레이에게 있어 '나의 사람'이 될 수 있다면 백작은 그걸로 족했다.

레이가 알레시아에게 푹 빠져 같이 해롱거려주면 더욱 좋았고.

성년이 된 알레시아의 곁을 레이가 지키고 있는 모습을 상상한 백작의 입 꼬리가 이리저리 뒤틀렸다.

"내 사위가 누구?"

제국 역대 최연소 소드마스터.

"크읍...!"

흐물거리는 입가로 웃음을 터뜨린 백작이 품위를 지키기 위해 자세를 다잡았다.

아직은 너무 앞서 간 생각이었다.

어쨌든 레이의 존재는 알레시아에게 필요했다.

필립스 백작가의 '맹약'이 마무리되면 잠깐은 혼란이 찾아올 터다.

이때 레이가, 어떤 형태로든 알레시아의 힘이 되어준다면 백작가는 빠르게 안정을 찾고 발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당장이야 필립스 가의 적통한 후계자가 천민과 놀아난다는 추문이 좀 돌겠지만, 그게 어쨌다는 건가?

레이는 현 시점에서 그래듀에이트의 경지를 목전에 두고 있었고.

전투 기량만 따지면 이미 완숙한 그래듀에이트를 정면에서 상대할 수 있었다.

이대로 나아가면 레이는 서른이 되기 전에 마스터의 경지에 닿는다.

그때가서도 신분 운운하며 레이와 알레시아를 무시할 수 있을까?

턱이 찢겨나가고 싶지 않으면 다들 알아서 바닥을 기어 다닐 거다.

"참으로 든든하군."

레이가 검술에 관한 재능만 타고 났다면 백작은 이토록 쉽게 알레시아의 곁을 레이에게 내주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레이는 충분히 똑똑하고 넓은 시야를 가진 아이였다.

방금만 해도 그렇다.

레이가 흥분을 주체 못하고 눈이 뒤집혀 칼을 뽑았을까?

아니다.

본인의 명분이 멘데스보다 앞선다는 분석이 끝났기에 거침없이 칼을 뽑은 거다.

결과적으로 레이는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는 한도 내에서 알레시아의 체면을 살리고 멘데스에겐 굴욕을 주었다.

"현명한 아이지."

거기에 정도 많고 받은 은혜도 쉽게 잊지 않으니, 설령 알레시아와 사이가 틀어지더라도 백작가가 곤란에 빠지면 반드시 손을 내밀어 줄 터다.

"...사고 방식과 수단이 좀 과격할 때가 있긴 하다만."

사람이 어찌 완벽하겠는가.

백작이 커튼을 다시 닫고 등을 돌리는데 마침 노크 소리가 들렸다.

출입을 허하자 지미와 매튜가 안내를 받고 집무실에 들어왔다.

"백작님을 뵙습니다."

백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예식용 검을 허리춤에 찼다.

명예 작위는 황제의 인가를 받은 수훈이다.

전달할 때도 격식을 지켜야 했다.

*

주변의 눈이 사라진 걸 확인한 빅토르가 멘데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마스터."

"...되었다. 네 잘못이 아니니."

"아닙니다. 벌을 내리시면 달게 받겠습니다."

"..."

침묵을 지키는 멘데스 대신 아벤시오가 입을 열었다.

"당분간은 입조심 하거라. 이곳은 필립스 백작의 영지다. 필립스 가의 기사들이 건방을 떠는 꼴이 눈꼴시렵긴하나, 기강을 잡으려거든 영지를 벗어나서 하는 게 옳다."

"알겠습니다."

"그렇다 해도 그 종자의 건방은 선을 넘었구나."

빅토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출신도 천한 스콰이어가 멘데스에게 치욕을 주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데, 이번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게 다름 아닌 빅토르 자신이었다.

두 주먹을 불끈 쥔 빅토르가 의지를 다졌다.

"반드시 손 봐주도록 하겠습니다."

레이를 후려팰 방법이야 많았다.

검술을 나누자며 대련을 신청해 자리를 만드는 게 가장 깔끔하겠다만.

막말로 지나가던 레이를 다짜고짜 후려팬다해도, 아예 불구를 만들지 않는 이상 그다지 큰 징계를 받을 일은 없었다.

그때 멘데스가 입을 열었다.

"하지 마라."

"예?"

빅토르가 당혹스럽게 되묻자 멘데스가 분명히 말했다.

"필립스 백작 영애가 아끼는 자다. 괜히 문제를 일으키지 마라."

아벤시오가 실소를 터뜨렸다.

"백작위 계승자가 평민과 놀아나다니. 귀족의 수치로군. 필립스 가의 후계자 교육이 문제인가, 아니면 후계자가 사리분별도 못할 만큼 멍청한 건가."

"둘 모두 아니겠습니까."

아벤시오의 종자인 하무스가 맞장구쳤다.

빅토르도 따라 웃는데, 유일하게 멘데스 만이 표정을 굳힌 채 자기 흉갑을 바라봤다.

레이의 검이 훑고 간 흉갑 겉면엔 쇠가 긁힌 자국이 아주 얇게 남아있었다.

멘데스가 가슴과 맞닿아 있던 흉갑 안쪽을 다시 살폈다.

흉갑의 강철이 기포처럼 부풀어 올라 크게 팽창해 있었다.

검 끝으로 갑옷 내부에 마나를 주입해 팽창시킨 거다.

아까는 너무 흥분한 탓에 눈치채지 못했는데, 계속된 가슴 통증에 흉갑을 열어보니 이꼴이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이 수준의 기예를 부리려면 최소 엑스퍼트엔 근접해 있어야 한다.

끼기긱!

부풀어 오른 흉갑 내부를 손가락으로 짓누른 멘데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괜히 출신 천한 아이를 스콰이어로 받은 게 아니군.'

기껏해야 14살일 텐데, 앞으로 2년 안에 엑스퍼트의 경지까지 발전할 게 확실했다.

또래 중엔 손꼽히는 기재일 게 분명했다.

"필립스 백작령을 떠날 때까지는 조용히 대기하도록."

멘데스는 굳이 동료 앞에서 남의 스콰이어가 지닌 재능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았다.

그 스콰이어가 본인에게 굴욕을 선사한 녀석이라면 더더욱.

빅토르는 불만을 품으면서도 멘데스의 명령에 고개를 숙이며 순응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경고 (1)

51화

오시리스 가 기사들의 속을 제대로 긁어놓은 레이는 곧장 영주성을 떠날 채비를 마쳤다.

애초에 다른 일정이 있기도 했고, 굳이 계속해서 얼굴을 보여 멘데스나 아벤시오를 도발할 생각은 없었다.

경고를 한번 했으니 한동안은 오시리스 가의 기사들이 알레시아의 앞에서 경거망동하지는 못할 터다.

이 세계에서 기사는 학문적인 소양도 갖춘 엘리트였고, 서임까지 받은 기사들이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할 만큼 지능이 모자란 경우는 적었다.

'마탑 가는 길에 기 싸움을 좀 해야 할 것 같긴 하다만.'

뭐, 어쩔 수 있나.

레이가 한숨을 쉬며 영주성을 나서자 알레시아가 정문까지 마중을 나왔다.

"레이! 조심히 들어가고, 자주 좀 찾아오너라."

"충분히 자주 들리는 것 같습니다만..."

최소 일주일에 한 번씩은 백작가에 얼굴을 보이는 중이다.

찾아오는 빈도가 높으면 높았지 결코 낮지 않았다.

"아가씨께서야 말로 보육원 좀 간간이 들리십시오. 예전에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셨으면서 요즘은 왜 그리 발걸음이 뜸합니까?"

"..."

알레시아가 입을 우물거리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린다.

알레시아를 가만히 살펴본 레이가 한쪽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물었다.

"쫄?"

"그럴 리가 있느냐!"

알레시아가 씩씩거리며 레이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레이는 정강이를 끌어당겨 알레시아의 발등을 보호한 후 반대쪽 입꼬리를 마저 치켜올렸다.

"두려운가?"

"레이! 그만 놀리거라!"

알레시아가 두 손으로 레이의 가슴을 마구 두드렸다.

알레시아가 이렇게까지 격하게 반응한다는 건 정말 싫다는 의미였다.

레이는 내심 곤란해하며 표정을 굳혔다.

'자존심이 많이 상한 것 같은데.'

만약 레이가, 알레시아를 길거리에서 주워왔다면 무슨 등급을 주었을까.

레어를 주기엔 재능이 모자랐고, 노멀을 주기엔 평가가 박한 감이 있었다.

어쩌면 마이너스 레어 같은 중간 등급을 하나 더 개설해 책정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레어에 비해서는 부족하다는 거지.'

4년 전만 해도 알레시아는 대부분의 분야에서 보육원 아이들을 앞섰다.

허나 현재는, 레어 고아들 전원이 자기 특기 분야에 있어서만은 알레시아를 추월했다.

항상 기세등등하게 보육원을 방문하던 알레시아는 언제부턴가 의기소침해졌고, 이제 와서는 거의 보육원을 찾지 않았다.

레이가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이건 확실히 함부로 입을 열기 민감한 문제였다.

알레시아는 스스로가 고귀한 혈통을 타고났다고 여겼고, 실제로도 영웅의 혈통을 타고났다.

헌데 부모 없는 고아보다 재능이 밀려 성장이 처진다는 건, 알레시아의 자존감을 굉장히 크게 손상시키는 일이었다.

굳이 천민들과 비교당해 상처를 입을 바에야 눈과 귀를 막는 게 편할 수 있다.

레이 또한 이를 모르지 않았으나, 웬만하면 알레시아가 보육원 아이들과 가까운 거리를 유지했으면 싶었다.

'만약을 대비해서 말이지.'

보육원 아이들 중엔 정상에 다다를 수 있는 '진짜 천재'가 최소 둘은 있다.

알레시아가 미리 친분은 다져 놓는다면 분명 큰 도움이 될 터다.

당장은 레이가 중간 다리가 될 수 있다지만, 상황이 언제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몰랐다.

레이는 차분히 말을 고른 후 입을 열었다.

"알레시아, 너는 고귀한 귀족이자, 필립스 가를 이끌어갈 후계자야."

"?"

알레시아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걸렸다.

평소에 이년 저년 거리며 딱밤을 날려대는 레이가 저딴 소리를 하니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건가?"

"고귀한 귀족이라고 모든 걸 잘할 필요는 없어."

검술이든, 마법이든, 회계든, 결국 실무를 보는 건 아랫사람이었다.

"네게 진정으로 필요한 건 용인술이야. 그리고 좋은 인재에게 충성을 얻기 위해선 상대를 포용하고 감화시킬 줄 알아야 돼."

레이가 알레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을 이었다.

"그, 창피할... 수 있어. 하지만 백작님께서도 기사보다 검술이 뛰어나시거나 마법사보다 마법을 잘 다루시는 건 아니잖아? 그럼에도 백작님은, 모두에게 존경받는 훌륭한 귀족이시지."

"..."

알레시아가 입을 우물거렸다.

레이가 하고자하는 말을 못 알아듣는 건 아니었다.

다만 자존심 강한 귀족으로서, 쉽사리 받아들일 수 있는 충고가 아니었다.

알레시아가 레이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레이, 귀족이 되고 싶지 않은가?"

귀족이 되게 해주겠다는 것.

레이가 곁에 남아주었을 때, 알레시아가 제의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보상이었다.

허나 알레시아가 철이 들수록, 자기가 레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레이에게 그다지 매력 없는 것은 아닐까 불안해지고는 했다.

음울한 얼굴을 한 알레시아를 향해, 레이가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 당연히 되고 싶지. 나중에 알레시아가 황제 폐하께 부탁해 작위라도 하나 내려주면 정말 고맙겠는데?"

"...내 곁을 충실히 지킨다면 생각은 해 보마."

"그래, 노력해 볼게."

"알겠다. 조심히 가거라."

알레시아는 레이를 떠나보내며 생각했다.

허울 뿐인 귀족이란 계층과 작위보다 차라리 빛나는 재능을 타고났다면, 레이가 좀 더 자기를 돌아봐 주지 않았을까.

문득 보육원의 몇몇 아이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어, 알레시아는 입을 삐죽이며 발을 돌렸다.

*

"레이가 요즘 너무 안 보여!"

플로리아가 필립스 백작가에 방문하고 며칠 뒤.

카렌이 세상 불만스러운 얼굴로 팔짱을 꼈다.

레이 이야기가 나오자 요하나도 일단 인상부터 찌푸리고 봤다.

카렌과 요하나를 따라 표정을 구기려던 루나는, 생각보다 얼굴 근육이 잘 안 움직이자 볼에 바람을 빵빵히 넣어 불만을 표시했다.

카렌이 씩씩거리며 레이를 원망했다.

"일주일 째 보육원에 안 나타나!"

레이는 마탑에 들릴 준비를 하느라 이래저래 바빴다.

물론 카렌은 마탑 건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

그걸 알았다면 이미 보육원이 한 번 뒤집어졌을 터다.

"다른 귀족 아가씨가 영주성에 방문했대."

카렌은 불안했다.

혹시 레이가 새로 방문한 귀족 아가씨에게 푹 빠져 보육원에 얼굴을 안 비치는 게 아닐까 싶어서.

"영주성으로 가보자!"

영주성 안으로 쳐들어가겠다는 건 아니었다.

그냥 영주성 주변을 빙빙 돌면서 혹시 레이가 머물고 있지는 않나 한 번 확인해보자는 뜻이었다.

본래는 그런 행동도 자중해야겠지만 이곳은 필립스 백작령이었다.

영주성 주변 좀 돌았다고 필립스 백작이 타박할 리도 없을뿐더러, 카렌과 요하나는 필립스 가의 기사들에게 무척이나 사랑받는 제자였다.

처음에 천민에게 검술을 전수한다고 불만을 품었던 기사들조차.

이제는 카렌과 요하나에게 자기가 먼저 새로운 검술을 가르치겠다고 투닥거려댔다.

"말 태워달라고 하자!"

교대 근무를 끝낸 기사에게 쪼르르 달려간 카렌이 말을 태워달라고 졸랐다.

잠시 난색을 보인 기사는, 얼마 안 가 안장 위에 카렌과 요하나, 루나를 올리고는 말을 몰아 영주성 근처에 데려다 주었다.

"레이는 어디 있지?"

카렌이 목을 길게 뺀 채 영주성 울타리 주변을 뺑글뺑글 돌았다.

한두 바퀴 돌고 없으면 여기까지 나온 김에 시장이나 구경할 생각이었다.

헌데 울타리를 반쯤 돌았을 때.

못 보던 얼굴의 여자가 알레시아와 함께 정원을 걷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아하게 땋아 올린 붉은 머리와 고고하게 빛나는 벽안을 보니 상대가 소문으로 들었던 오시리스 백작가의 영애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아름다운 꽃장식이 새겨진 부채와, 비단결을 따라 하늘 아래 너울거리는 드레스가 한순간 아이들의 시선을 뺐었다.

"...귀족은 좋겠다."

카렌이 수수하기 짝이 없는 자기 옷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시간이 지나며 희석됐던 알레시아를 향한 질투와 질시가 플로리아를 통해 다시금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나도 귀족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어린 시절부터 관리 받고 교육받았던 귀족들은 평민이 감히 범접하기 힘든 아우라를 흘리고는 한다.

부럽다.

카렌은 9살 때에 비해 조금은 솔직히 본인의 감정을 인정할 수 있었다.

귀족만이 자아낼 수 있는 그 우아함과 화려함은, 설령 카렌이 나이가 들어 작위를 받는다 해도 쟁취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알레시아와 플로리아의 걸음걸이를 지켜보며 카렌은 음울함을 떨치지 못했다.

실망한 친구를 바라보던 요하나가 입을 열었다.

"카렌, 카렌도 귀족일 수 있잖아?"

"응? 내가?"

"응. 카렌도 빨간 머리잖아! 저기 아가씨랑 같아."

카렌이 플로리아를 쳐다봤다. 플로리아는 카렌과 똑 닮은 머리카락색을 가지고 있었다.

"히히."

카렌이 웃었다.

물론 요하나의 말은 헛소리였다.

오시리스 백작가의 외적 특성 중 하나가 붉은 머리카락이긴 하나, 평민들 사이에서도 붉은 머리카락은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허나 카렌은, 자기를 버렸던 부모가 혹시 귀족은 아니었을까, 그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그럼 저 아가씨가 내 언니네?"

"카렌이 배다른 동생이야!"

전부 농담으로 하는 소리였다.

문제는, 잠시 외출했던 빅토르가 복귀하며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다는 거다.

"이런 정신 나간 것들을 봤나."

성큼성큼 다가온 빅토르가 목소리를 높이며 격노했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오시리스 가의 영애님을 모욕...!!"

"...!"

카렌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린다.

떨어지는 석양을 닮은 붉은 머리카락이 허공에 흐트러지며.

석양이 번져나간 구름을 머금은 듯한 반짝이는 눈동자가 빅토르를 향한다.

빅토르가 순간 입을 달싹였다.

"어, 어..."

빅토르는 생각했다.

'예쁘다.'

한 눈에 반했다는 이런 것일까.

빅토르는 가슴을 잠식했던 격노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잠시 말을 잃었던 빅토르가 목을 한 번 가다듬었다.

"큼, 함부로 그런 이야기를 하면 안 돼. 귀족이나 기사의 귀에 들어가면 크게 벌을 받을 수 있으니까."

"죄송합니다."

카렌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빅토르가 살짝 어지러운 정신을 붙잡으며 자기소개를 했다.

"흠, 나는 멘데스 경의 스콰이어인 빅토르라고 한다."

"스콰이어요?"

"그래, 스콰이어. 견습 기사 신분이라는 뜻이다. 기사님을 보조하며 검술을 비롯한 여러 무기술을 전수받는 직책이지."

"와, 정말요?"

스콰이어란 개념에 대해 정확히 모르는 카렌은, 빅토르에게 동질감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저도 기사님에게 검술을 배웠어요."

"뭐?"

이 아이도 설마 스콰이어인가?

혹시나 싶어 빅토르가 다시 물었다.

"너도 기사의 종자였나?"

"그런 건 잘 모르겠는데... 보육원에서 기사님이 검술을 가르쳐 주셨어요."

보육원?

보육원에서 기사가 검술을 가르쳐?

뭔 개소리야 그게?

"그... 레이디, 검을 다루는 사람을 다 기사라고 부르지는 않아."

"알아요. 멋진 갑옷도 입고 정식으로 서임을 받은 분들을 기사라고 부르잖아요."

"아니, 잠..."

정식으로 서임을 받은 기사가 왜 보육원에서 검술을 가르친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어디서부터 따져 물어야 할지 빅토르가 혼란을 겪는 사이, 빅토르를 따라왔던 하무스가 끼어들었다.

"듣자하니 이거 정신 나간 년 아니야?"

"하, 하무스 잠깐 기다려. 오해가 좀 있는 것 같다."

"빅토르, 오해고 나발이고 지금 저년이 우리를 모욕하고 있잖아."

카렌은 분명히 '서임을 받은 기사'가 '보육원'에서 '검술'을 가르쳐 준다고 말했다.

너무나도 상식 밖의 이야기였기에 하무스는 카렌이 빅토르와 본인을 모욕하려고 저런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려는 찰나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봐, 저 아이들이 거짓말을 한 게 아니야."

*

필립스 백작가의 기사, 피코르는 카렌 일행을 데려다 준 후 지미 패밀리에게 이 사실을 전달했다.

오시리스 가문의 사람들이 영주성에 머물고 있다는 상황을 고려해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신경 써준 거다.

마침 지미가 이용하던 사무실에 짐을 몇 개 챙기려 방문했던 레이가 그 이야기를 듣고 직접 영주성으로 향했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괜찮은 타이밍에 대화에 끼어들 수 있었다.

"그, 뭐냐."

레이는 잠깐 고민했다.

필립스 백작가의 기사가 보육원에서 검을 가르치고 있다는 건 이미 백작령 안에서는 소문이 꽤 났다.

지금 숨겨봤자 어차피 들킬 테니, 미리 백작과 입을 맞춰둔 적당한 이유를 말해주었다.

"필립스 백작령은 인구가 많지 않아서 말이야. 인재를 모집하는 데 있어 신분을 가리지 않거든. 그런 연유로 보육원에도 기사를 파견해 괜찮은 재능을 지닌 아이가 있으면 가르쳐서 제자로 들이고는 해."

레이가 덧붙였다.

"나도 그런 과정을 통해 스콰이어가 되었고."

하무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필립스 가의 기사들은 명예도 모른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긴 해."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인력이 모자란다 해도 출신 천한 아이에게 검술을 가르치고 종자로 들이는 건 이 세계의 보편적인 사고관에 한참 어긋난 일이었다.

"근데 여긴 필립스 백작령이야."

레이가 며칠 전에 했던 이야기를 다시 반복했다.

"그런 소리를 하고 싶으면 백작령 밖에서 하도록 해."

"..."

잠시 눈싸움이 일었다.

레이는 딱히 감정이 상한 건 없었지만, 지금 상황이 꽤 괜찮아 보였다.

빅토르와 하무스는 어린 나이에 스콰이어로 발탁되어 이제는 성년을 앞두고 있었다.

카렌보다는 실력이 뛰어날 거고 요하나보다는 살짝 처질 터다.

'카렌과 요하나도 비슷한 실력의 또래와 대련해본 경험이 거의 없으니...'

카렌과 요하나의 경험도 쌓게 해줄 겸, 저것들의 기를 미리 꺾어놓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레이가 제안했다.

"이봐, 말싸움은 그만하고, 이리된 거 대련을 한 번 해보는 게 어때?"

"뭐? 대련?"

"그래. 필립스 백작가의 인재 발굴이 효과가 있었는지, 아니면 그저 기사의 명예를 바닥에 처박은 바보짓이었는지, 직접 한 번 확인해봐."

"하. 주제 파악을 못 하는군. 네가 나랑 검을 나누자는 거냐?"

"일단 저 아이들의 실력을 한 번 확인해봐. 나는 그다음이고."

"대체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이냐?"

하무스는 코웃음을 치면서도 내심 기뻐했다.

멘데스는 괜히 문제를 만들지 말라 했으나, 상대가 먼저 대련을 신청했으니 굳이 물러설 것도 없다.

이리 된 거 제대로 콧대를 눌러줄 생각이었다.

한편 빅토르 또한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했다.

'거리를 좁힐 기회다.'

카렌의 신분이 천하긴 하지만 이미 빅토르의 가슴은 카렌을 향해 열심히 뛰고 있었다.

다정하게 검을 나누다 보면 없던 정분도 싹틀 수 있을 것이다.

레이가 의도한 대로 따라 상황이 매끄럽게 돌아갔다.

다만 레이가 하나 간과한 부분이 있었는데.

"카렌, 요하나. 너희도 이번 기회에 한 번 오시리스 백작가의 검을 견식해보는 게 어때? 실력을 발전시킬 수 있을 거야."

바로 요하나였다.

"내가 왜?"

요하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레이에게 쏘아붙였다.

"내가 너가 하라고 시키면 무조건 해야 돼? 재수 없어 진짜."

"?"

"나 안 해."

"..."

잠시 요하나를 바라본 레이가 결국 주먹을 쥐었다.

"야이씨, 너 일로 와 봐."

이년이 보자 보자 하니까, 뒤질라고 진짜.

경고 (2)

52화

매가 약이란 말이 있긴 하다만.

아이를 바른길로 인도하는 데 있어 폭력적인 수단이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님은, 레이 또한 전생에서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만약 레이가 고아들을 모아 사조직이라도 만들어 세력을 넓힐 생각이었으면 폭력으로 군림하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었겠으나.

레이의 목적은 거악의 운명을 타고난 아이가 비뚤어지는 걸 막고, 영웅의 운명을 타고난 아이가 재능을 꽃피워 사명을 이룰 수 있게 돕는 것이었다.

그래야 이 멸망이 예정된 세계에도 희망이 보이지 않겠는가.

물론 레이는, 아이들이 영 엇나간다 싶으면 쥐 잡듯이 쥐어패기도 했다.

헌데 요하나는 평소에는 멀쩡하면서 레이를 만날 때만 삐딱선을 탔다.

왜 나한테만 띠겁게 구느냐고 쥐어패기도 뭐해 지금까지 참고 있었는데, 레이는 슬슬 꼭지가 도는 걸 느꼈다.

"야이씨, 너 일로 와 봐."

"싫은데? 올 거면 네가 오든가. 자기가 뭔데 오라 가라야. 짜증 나게."

"...으흐흐흐흐흐."

레이의 입가에서 귀기 서린 웃음이 흘렀다.

레이가 목을 45°쯤 꺾은 채 성큼성큼 다가오자 잠시 움찔한 요하나가 이내 미간을 찌푸린 채 툴툴댔다.

"꼬맹이 주제에 맨날 어른 흉내나 낸...!!"

꽈앙!!

"액욱?!"

갑작스러운 충격에 시야가 흔들린 요하나가 괴상한 소리를 냈다.

요하나의 정수리에 꿀밤을 먹인 레이가 연거푸 주먹을 들어 올렸다.

"먹여주고!"

꽈앙!!

"재워주고!"

꽈앙!!

"가르쳐 놨더니...!!"

꽈앙!! 꽈앙!!

"이렇게 뒤통수를 쳐?!"

꽈앙! 꽈앙! 꽈앙!

"아악!! 아악!! 아악!!"

잇따라 꿀밤을 얻어맞던 요하나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빽 소리쳤다.

"내 몸에 멋대로 손대지 마!"

"내가 해준 게 얼만데!! 성장판까지 박박 갈아가며 등 따숩게 키워놓으니까 이제 와서 나를 무시해?!"

"내가 틀린 말 했어?! 너 꼬맹이 맞잖아!"

요하나가 떽떽거리며 레이의 주먹을 피하기 위해 몸을 틀었다.

허나 레이는 귀신같이 요하나의 움직임을 쫓아가 계속해서 정수리 위에 주먹을 적중시켰다.

요하나는 지금까지 배워왔던 무술을 총동원해 레이에게 반항했지만, 레이는 어렵지 않게 요하나의 머리카락을 붙든 채 좌우로 흔들며 괴성을 질렀다.

"나한테 뭐가 그렇게 불만인데?! 말을 해!! 말을!!"

"아악!! 이거 놔아!!"

"불만이 있으면 말을 해보라고오!!"

결국 옆에 있던 카렌이 요하나와 레이를 말리기 위해서 두 팔을 파닥이며 끼어들었고.

루나는 볼을 부풀린 채 가만히 서서 꽥꽥대는 레이를 구경했다.

그 난장판을 지켜보며 하무스가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근본 없는 귀족가는 처음 보는군."

후계자는 신분 천한 놈이랑 놀아나고 있질 않나.

기사들은 보육원에 가서 검을 가르치고 있고, 기사에게 검을 배웠다는 놈들에겐 규율과 품위를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혀를 찬 하무스가 역시 신분은 못 속인다며 한 마디 덧붙이려는 순간.

뒤에서 목 가다듬는 소리가 들려왔다.

"크음!"

고개를 돌리니 필립스 백작가의 기사 피코르가 서 있었다.

침음을 삼킨 피코르는 요하나의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는 레이에게 소리쳤다.

"그만하거라!"

피코르의 목소리가 들리자 레이는 곧장 손을 놓고 차렷 자세를 취했다.

요하나 또한 씩씩거리면서도 자세를 바로 하고 피코르를 바라봤다.

피코르는 둘을 향해 한소리 하려다,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포기하고 빅토르와 하무스를 돌아봤다.

빅토르와 하무스가 살짝 허리를 숙이며 예의를 표했다.

피코르가 입을 열었다.

"지나가다 들었다. 대련을 나누겠다고?"

"원치 않으시면, 없었던 이야기로 하겠습니다."

속내야 어찌 됐든 하무스는 꽤 겸손하게 답했다.

며칠 전 레이가 깽판을 친 이후부터 책잡힐 일은 최대한 줄인 하무스와 빅토르였다.

잠시 고민한 피코르가 요하나에게 다가갔다.

"다른 검식을 익힌 또래들과 검을 나누다 보면 깨닫는 게 또 있을 거다. 대련을 한 번 해보겠느냐?"

"알겠습니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요하나를 보고 레이가 뒷목을 잡았다.

차라리 사람 안 가리고 지랄을 하면 덜 꼬울 텐데, 왜 나한테만 지랄일까?

거품을 물려는 레이를 애써 무시한 피코르가 가까운 공터 방향을 가리켰다.

"따라오너라. 적당한 장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