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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화 오래된 친구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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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 떠오른 반투명한 상태창을 멍하니 바라봤다.

[종족 판명.]

[전직이 해제된 상태입니다.]

[루-륨의 충분한 습득으로 전직권한이 부여됩니다.]

[현재 클래스: 해골병사]

[다음으로의 전직이 가능합니다.]

- 해골 검객

- 해골 기사

- 해골 사냥꾼

전직.

상태창.

나는 주위를 돌아봤다.

"왜. 그러세요?"

-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

확신했다. 아이작은 물론이거니와, 루비아도 이 창은 보지 못한다.

전직 상태창은 나에게만 보이고 있었다.

클래스 체인지.

진화.

이 선택지가 다른 자들에게는 전혀나타나지 않는다.

[웹슬링거의 흥옥]을 감정했을 때 뜨던 창이 생각났다.

아이템을 감정했던 슬라임조차도 전직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지금껏 만난 존재들 중에서는 나만 할 수 있는 게 분명하다.

각각의 직업 밑에 작게 뜨는 창이 있었다.

[현재 가능한 전직 횟수: 1]

한 번인가.

세 선택지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반짝이는 글자#은 그저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자세한 설명이 하나씩 뜨기 시작했다.

[1. 해골 검객]

"검(劍)은 피 맛을 보기 전에는 칼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훌륭한 검객은 검의 눈에 잡히지 않는다."

- 칼은 역사적으로 가장 선호되는 무기였습니다. 전장과 일상에서 칼만큼폭넓게 사용되는 무기는 없었습니다.

- 당신은 무엇을 목적으로 칼을 휘두르시겠습니까? 명예를 위해?

재물을 위해? 누구를 지키기 위해?

무(武)의 한끝을 보실 생각이라면, 검객은 일반적인 시작점입니다.

[특전]

- ???

- ???

- ???

- ???

[패널티]

- ???

- ???

[전직하시겠습니까?]

이게 다 뭐야?

어처구니가 없었다.

대충 적당한 말로 얼버무린 직업설명만 나오고 끝이다.

특전과 패널티는 모두 ??? 으로

점철되어 있다.

뭘 얻고 뭘 잃게 될지도 모르는데 대체 무슨 전직을 한다는 말인가.

다음 선택지로 시선을 옮겼다.

[2. 해골 기사]

"어린 소녀들은 빛나는 갑옷의 기사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자란다. 유감이지만 그렇지 않다.

혹시 있을 '용감한' 기사들이 영웅적인 행위로 이 세계를 축복했더라도, 결국은 전쟁터에서 신들의 질투로 파괴되었을 테니까."

- 〈어쨌거나 웃어라〉, 리첼.

- 기사는 말 위의 전투기계입니다.

그들에게는 용기와 명예, 전투 전문가로서의 탁월한 무술 실력이 기대됩니다. 이상과 신념을 지닌 낭만적존재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 하지만 결국 기사란, 삶의 대부분을 누군가의 머리와 몸통에 창과 도끼를 박아 넣거나 박아 넣는 연습을 하며 살아가는 무리입니다.

- 당신에게 충분한 토지와 공물이 바쳐지지 않나요? 약탈하세요. 살해하세요. 칼과 창이 무엇을 위해있는지 보여 주세요.

[기본 특전]

- ???

- ???

- ???

- ???

[패널티]

- ???

- ???

[전직하시겠습니까?]

마찬가지다.

이쯤 되면 뭘 어쩌라는 건지 모를 지경이다.

[3. 해골 사냥꾼]

"사냥하거나, 사냥당하거나."

- 징표를 찍고 덫을 놓으세요.

그 아래에 있는 '해골 사냥꾼'도 다를 바가 없었다.

??? 라고 표시되는 부분을 가만히 바라봤을 때였다.

- 띠링!

[루-륨이 부족합니다.]

여기서 더 필요하다고?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총량이 부족하다는 걸까.

각각의 직업 설명 아래에 떠 있는 〈전직하시겠습니까? 〉라는 글자를 들여^봤다.

하지만.

- 띠링!

[루-륨이 부족합니다.]

전직 권한을 습득했다더니.

막무가내 전직조차 불가능하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루-륨으로는 직업 소개만 하고 끝인 모양이다.

"아이작."

- 왜 그러느냐?

"루-륨 남은 거 있나."

- 딱!

아이작이 부리를 닫으며 말했다.

- 이런 어처구니없는 녀석 같으니.

너에게 다 쓴 게 안 보이느냐?

"그 큰 놈을 잡았는데 나한테 전부 다 썼다고?"

- 그래도 나오는 양 자체는 얼마안 돼. 아니, 이 정도면 얼마 안 되는게 아니지. 바로 네놈에게 그만큼많이 썼다는 이야기다.

"여기 말고 다른 곳은? 루-륨이 있을 만한 곳을 알고 있나."

아이작은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뭘 어쩌냐는 듯 대답했다.

- .두 군데면 많이 아는 것이다.

여기서 뭘 더 알려 달라고 하느냐?

"캐빈 애슈턴의 유적들에 데리고 다녀 준다고 하지 않았나. 나를 또다시 속인 건가."

- 속이긴! 이거 봐. 이런 유적을나 아니면 누가 하나라도 아느냐!

아이작이 성내듯이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 어디 다른 데 가서 물어보거라.

레라지에의 성지를 나 말고 그 누가 알겠느냐. 이런 비밀 결계를 내가 아니면 누가 또 알겠느냐.

"그거. 다 하나 아닌가요?"

가끔 보면 루비아는 배려가 없다.

아이작이 말이 없어졌다.

이 녀석은 사실 별로 쓸모없는 게 아닐까?

역대 그라스미어 가주들의 시야을 공유했다고 해도, 갈 수 있는 곳과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꽤나 한정되어 있었던 거다.

결국 이 녀석이 잘나갔던 건 사백 년전일 뿐.

지금은 그저.

- 야! 너, 무슨 생각 하냐?

"네가 모른다니 곤란하다는 생각."

"저. 해골님."

루비아가 입을 열었다.

"뭐지?"

"정보를 찾아야 하면, 달리아크로 가는 건 어떨까요?"

"달리아크로?"

"네. 예전에 책에서 읽었는데.

루비아는 달리아크에 대해서 아는 것들을 털어놓았다.

그녀의 이야기는 이미 내가 아는 정보였다.

〈등불〉달리아크. 고위 정보상과 암살자들의 임시 평화 지대.

레나에게서 들은 바가 있다.

저번에도 직접 갔었고, 레안드로 후작에 대해 신선한 정보를 얻었다.

황실에 반란을 꾀하던 중, 은밀히 살해당한 뒤 자살로 위장당했다고.

고급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달리아크를 무의식적으로 배제한 이유가 있기는 하다.

그곳에서, 애슈턴에 대한 정보를 단칼에 거절당했으니까.

일말의 여지도 없이.

그래도 꼭 캐빈 애슈턴과 루-륨을 동일시할 필요는 없다.

루-륨에 대한 정보는 팔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문득 아이작이 끼어들었다.

- 어차피 너희는 못 들어가는데?

달리아크 회원권도 없잖아. 근처도 못 가고 쫓겨날걸. 참, 이런 것까지 하나하나 다 알려 줘야 되냐? 괜히 〈다가갈 수 없는 등불〉달리아크라고 불리는 게 아니.

"그건 300년 전이다."

- 뭐라고?

"일반인 투숙 지역이 따로 생겼지.

이제〈꺼지지 않는 등불〉이다."

무심코 아이작의 말을 끊었다.

맞나?

레나가 이렇게 말했던 것 같은데.

- 띠링!

[루비아가 당신에게 색다른 면모를 발견했습니다!]

[루비아의 호감도가 2 올라갑니다!]

색다른 면모라.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의외였던 모양이다.

하긴, 저번 생에서 레나가 한 말을 그대로 따라한 것뿐이니까.

아이작도 멍하니 나를 바라봤다.

- .그런 건 또 어디서 들었냐?

"그냥."

적당히 대꾸한 뒤 일어서서 주위를 둘러봤다.

해야 할 일이 하나 남았다.

아직 주위에 초록빛을 뿜는 시체가 많이 남아 있으니까.

- 띠링!

[숲 적응 Lv. 2를 흡수했습니다!]

[궁술 Lv. 1을 흡수.]

[쌍검술 Lv. 3을.]

흡수를 전부 끝마쳤을 때.

루비아가 곁에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엘프들이 가여워요. 혹시, 여기다매장이라도 해 주면 안 될까요?"

"그러지."

거절할 이유는 없다.

별 노력이 드는 일도 아니다.

'부스러기'가 쳐서 구멍이 파였던 곳곳에 엘프들을 묻어 주기만 하면 끝이다.

그들의 시체를 안장할 때였다.

"이게 뭐지?"

바닥을 향해 엎어진 엘프의 시신을 슬쩍 들었을 때였다.

그녀의 가슴팍 아래에 묘한 물건이 떨어져 있었다.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자그마한 나무 피리가 시선을 끌었다.

"유품인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 그건 아니다. 백魂도 념念도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아.

"그래? 그런 것도 볼 줄 아냐."

- 으흠. 내게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듣도록 하여라.

아이작이 말을 이었다.

나름대로 고급 정보인 것 같은데, 방금 전 내게 면박당한 걸 만회해보려는 듯 설명에 열심이다.

- 설령 그 육체가 분쇄되어도, 백은 소유했던 물품에 흔적을 남긴다.

지워질 때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는 흔적이지. 완벽하게 지워지지도 않고.

잠자코 녀석의 설명을 들었다.

- 한데 그 피리는 여기 있는 어떤 시체와도 끈이 느껴지지 않는다.

수백 년 전에 죽은 것도 아니고.

방금 죽은 녀석의 유품이라면 절대이럴 리가 없지.

"그럼, 이 피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여기 있던 거네요."

- 그렇다.

신전의 장식품이라도 되는 걸까.

- 그런데 왜 관심을 가지지? 뭐보이는 거 있냐?

"글쎄."

상태창 같은 건 뜨지 않는다.

그러나 기묘하게 익숙한 느낌이다.

익숙한 모양, 익숙한 감정.

아주 오래된.

아이작에게 나무 피리를 보여 주며 물었다.

"너한테는 뭔가 느껴지나?"

- 전혀. 아까 말했지만. 그 어떤 주술력도 느껴지지 않는다. 버리지 그러냐.

≪으 W

하지만 어쩐지 끌린다.

어설프게 직접 손칼로 깎은 듯한 피리에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는 알 수 없다.

가만히 들여다봤다.

입을 대고 부는 구멍이 하나.

그리고 소리를 내는 구멍이 비뜰비뜰나란히 셋 있다.

멍하니 피리를 손에 쥐고 있는 날보고 루비아가 눈을 빛냈다.

"가지고 다니실 거면.

그녀가 허리에 묶고 있던 깨끗한 끈 하나를 풀었다.

그리고 몇 번 꿰더니 금방 피리위에 연결하기 시작했다.

"이게 뭐지?"

"거는 끈이에요."

- 달그락.

나는 끈에 묶인 피리를 느릿하게 만지작거렸다.

"뭐 다른 건 없었나?"

- 그래. 애슈턴 이 자식. 책에 굉장히 중요한 곳인 것처럼 썼으면 보물이라도 잔뜩 숨겨 놔야지.

"루-륨을 얻었으면 된 거 아닌가."

- 그건 네가 싸워서 얻어 낸 거고.

대체 보물 창고가 왜 없는 거야?

- 파드득!

아이작이 크게 날갯짓을 했다.

깃털 안에 파묻힌 각종 장신구가 드러났다.

그중에는 쌍검을 쓰던 다크엘프가 가졌던 '루틱의 인장'도 있었다.

"??? 그게 다 뭐냐?"

- 니들이 기절해 있을 때 시체에서 챙긴 것들이다. 이거라도 있어야지.

나중에 레라지에 놈들에게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느니라.

루비아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저. 유품은 죽은 분들과 연결돼있다면서요. 안 껍껍하세요?"

- 전혀 안 찜찜하니라. 산 자들은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살 거라면 잘 살아야지. 그럼.

- 파드득!

아이작이 강하게 날갯짓을 했다.

- 달리아크든 어디든 어서 가자!

206화 9: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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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달려 사흘쯤 갔을 때였다.

〈등불〉달리아크의 도시, 아만이 저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겨울은 해가 일찍 진다.

날카로운 첨탑 사이로 천천히 어둠이 내려오고 있었다.

창 자루를 바닥에 몇 번 튕기며 마차들을 검문하는 경비들은 하나의 풍경처럼 보였다.

물론 걱정할 건 없었다. 그라스미어에서 받은 신분증도 있고, 투구를 벗어 보라고 하면 마스커레이드스킬을 쓰면 그만이다.

하지만 성문 앞에 도착했을 때, 경비병들은 우리를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이분들. 우리를 외면하네요?

외면 정도가 아니다.

"있는 걸 아예 모르는 것 같아요!

혹시 우리, 유령이 된 건 아니겠죠?"

루비아는 깜짝 놀란 얼굴로 경비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정말 안 보이나 보군."

"이제 어떡하죠?"

- 어떡하긴 뭘 어떡하느냐? 당연히 그냥 들어가야지.

나는 부리를 위로 처들고 으스대는 아이작을 향해 물었다.

"네가 부린 수작이냐?"

- 수작이라니 참. 말을 해도 곱게 하지 못하겠느냐. 이 몸이 가벼운현혹 주술을 사용했느니라.

오랜만에 쓸모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아이작이다.

메달에 봉인되어 있을 때와 달리, 스스로 준비해 둔 까마귀 인형에 들어간 상태라면 이런저런 주술을 쓸 수 있는 것 같다.

기분상의 문제인지는 몰라도, 놈은 애슈턴의 유적에서 루-륨을 잔뜩흡수한 뒤 훨씬 강해진 느낌이다.

"이분들은 평생 우리를 못 보는 건가요? 내일도? 모레도요?"

- 그건 아니다. 삼 분 정도면 전부 정신을 차릴 테니 어서 안으로 들어가기나 해라.

횃불이 타는 아만의 거리를 지나, 아이작의 안내를 따라 달리아크의 결계를 돌파했다.

- 시키는 대로 걸어라. 먼저.

별 해는 없지만, 지나가는 자들을 얌전하게 만들어 주는 결계라던가.

달리아크의 평화를 위해.

결계에 대해 설명을 들은 루비아가 미간을 모으고 작게 중얼거렸다.

"얌전하게 만들어 주나요? 이 결계라는 게 좀 웃기네요.

- 어떤 면이?

"아이작 님처럼 결계를 잘 알거나, 아예 힘으로 뚫을 수 있는 분들은 결계의 영향을 안 받는 거겠죠?"

- 당연하지.

"사실 그런 분들이야말로, 이곳에 정말 큰 해를 끼칠 수 있는 분들아닐까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이야기다.

파악하고 회피할 수 있는 자들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

약한 자들만 결계의 영향을 받아얌전하고 순종적으로 길들여진다.

- 세상이라는 게 다 그렇지. 죄다눈속임이야.

"그런가요.?"

루비아가 뭔가 가라앉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녀만큼은 세상을 그런 식으로 바라보지 않길 바랐지만, 별달리 반박할 말도 찾기 힘들었다.

좁아지는 돌담을 따라 빙빙 돌자, 곧 거대한 여관 입구가 등장했다.

커다란 건물들이 서른 채가 넘게 촘촘히 이어진 여관.

이곳이 달리아크다.

예전에 왔을 때는 하얀 가면을 쓴

여자가 우리를 맞이했지만,

- 팟!

- 어, 재 뭐냐?

아이작이 부리로 가까운 건물의 지붕위를 가리켰다.

어디론가 몸을 솟구쳐 사라지는 여자가 보였다.

예사롭지 않은 몸놀림이다.

얼핏 하얀 가면이 보인다.

저자는. 여기서 손님을 맞아야 할 여자 아니었나.

어디로 가는 거지?

"모르겠군. 일단 따라와라."

어쨌거나 길은 이미 알고 있다.

비회원 구역으로 곧장 걸어갔다.

멍한 표정의 인간들이 드문드문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왜 우리를 바라보는 거지?"

아이작이 가라앉은 어조로 답했다.

- 우리가 아니다. 저것들. '너'룰바라보고 있어.

"나를?"

"네. 맞아요. 해골님만 특정해서 바라보고 있어요."

- 건널목 지붕. 오른쪽 골목.

한두 녀석이 아니다. 대체 달리아크에서 무슨 짓을 한 거냐?

루비아마저 나를 흘끗 바라본다.

"저랑 계속 같이 움직이셨는데.!

이 도시에서 유명하셨던 거예요?"

물론 그럴 리는 없다.

저번 생에 레나랑 다녀갔었지만, 이번 생은 여기 오는 게 처음이다.

이상한 일이다.

한 놈 잡아서 물어볼까 싶었지만, 달리아크에서는 모든 종류의 폭력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물어봐야겠군."

- 어디^!?

"정보 경매장에서."

아이작이 작게 큭큭거렸다.

- 그거 참 신선한 발상이네. 그럼우리는 밖에서 기다리도록 하지.

어차피 루-륨의 위치에 대해서도 물어봐야 한다.

수상한 시선들을 의식하며, 혼자 〈경매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오직 한 명만 입장하는 게 이곳의철칙.

저번에는 메달에 봉인된 아이작과 함께 들어갔었지만, 지금은 녀석이 까마귀 인형 안에 있어서 데리고 들어갈 수도 없다.

문득 의문이 떠오른다.

저번 생에 녀석과 함께 경매소에 들어갔을 때.

나는 캐빈 애슈턴에 대한 정보를 구했다.

아이작은 어째서 아무 말도 없이 침묵했을까?

그때부터 뒤통수를 칠 예정이었던 거겠지.

"정보를 사러 오셨소이까."

장막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매소의 정보상인.

두 번째로 만나는 녀석이다.

이자의 정체는 뭘까?

첫 만남 때 내가 인간이 아니고, 결계에 영향을 안 받았다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냈다.

몹시 강한 존재다.

내가 비폭력 원칙만 지켜 준다면, 인외라도 상관없다고 했었지.

그런데 묘한 점이 있다.

이번에 녀석은, 아예 내 정체에 관한 말은 꺼내지도 않고 있다.

"정보를 사러 오셨소이까."

자연스럽게 다시 한 번 물을 뿐.

"그렇다만."

"그럼 어떤 정보를?"

먼저 루-륨에 대한 것부터.

"루-륨이 있는 곳들에 대해 알고 싶은데."

"그 정보는 경매를 해야 하오."

"경매를?"

"알고 들어온 거 아니오? 여기는 경매소니까. 가격을 불러 보시게."

룰은 알고 있다.

정해진 기간 동안 정보를 갖고

있다가, 그 기간에 가장 높은 가격을 부른 자에게 판매한다.

얼마를 불러야 할까?

아이작의 도움을 얻을 수도 없고.

가격이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이럴 거면 어느 정도 생각이라도하고 왔어야 했는데, 너무 막 들어와 버렸다.

생각해 보면 레안드로 후작에 관한 정보가, 드물게 정가를 매겨 파는 녀석이라고 했었지.

[회계 Lv. 1이 발동합니다!]

[스킬 레벨이 너무 낮습니다.]

[적정 가치를 산정할 수 없습니다.]

이것도 안 통하고.

어쩔 수 없다.

적당히 은괴 하나를 꺼내어 앞으로 내밀었다.

"1, 200로티. 12세이론이라. 좋소.

접수됐소."

"현재 최고가인가?"

"그건 알려 줄 수 없소. 공정거래따위를 보장할 생각도 없고."

당당하다.

하지만 아쉬운 건 이쪽이다.

무력으로 제압할 수 있는 녀석이 아닌 것도 당연하고.

게다가 정보가 보관된 안쪽에는 알수 없는 기관 장치가 있다.

[탐지 Lv. 7을 발동합니다!]

높은 레벨의 탐지로도 자세하게 느껴지지 않는 숨겨진 장치들.

측정할 수 없는 강력한 마법으로 보호받고 있을 게 분명하다.

기적적으로 이 녀석을 해치운다고 해도, 저 안에는 또 어떻게 들어갈것인가?

"더 낼 거요? 망설이는군."

"잠시 보류하지."

"마음대로 하시오."

회계 스킬이 먹히지 않는다.

가격을 더 올리기 전에 아이작의 조언을 들어 볼 생각이다. 돈이야 나중에 추가로 걸 수도 있고.

문득 궁금한 게 생긴다.

그런데 이 녀석은, 이번에는 나를 보고 놀라지 않는 건가?

처음에는 인외人外라느니, 결계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느니 하면서 꽤 관심을 가져 줬던 것 같은데.

지금은 내 정체를 원래부터 알고 있던 것 같은 느낌이다.

"더 살 정보가 있소?"

아무래도 물어봐야겠다.

"혹시. 이 도시에서 내가 알려져있는 건가?"

장막 안쪽의 남자가 소리 없이

피식거렸다.

"이건 퍼질 대로 퍼진 정보이니까그냥 알려 주도록 하지. 당신에게는 수배령이 내려져 있소."

"뭐? 수배라고? 누가 나를.?"

"그건 판매하는 정보가 아니라서.

조심해서 돌아가시오."

a.r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대체 누가 나를 수배한다는 거지?

이번 생애에 내가 한 일을 차분히 돌이켜 보았다.

푸르손의 추종자들과 적대한 적도 없다.

황실도 전혀 안 건드렸다.

레라지에의 성지에 가긴 했지만, 이미 다 전멸해 있던 녀석들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아이작의 조언이라도 들어 봐야 할것 같다. 초조한 걸음으로 막 천막밖으로 나갔을 때였다.

땅을 밟는 순간.

- 팟!

발아래서 뭔가가 작은 소리를 내며 터졌다. 발끝에서부터 온몸이 빠른속도로 굳어 갔다.

- 덥석!

장갑을 낀 손이 뻗어 와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여기 있네."

묘하게 변조된 목소리가 들렸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뒷덜미를 잡힌 순간부터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버둥거려 봐야 방법이 없다고.

"같이 가자. 돌아보지는 말고."

"당신이. 나를 수배한 건가?"

"그래. 얌전히 따라오라고."

이번에는 또 다른 목소리.

변조된 채지만 조금 앙칼지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뒤에 있는 녀석은 두 명.

대체 어디서 이런 녀석들이 튀어나온거지?

절대로,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어딘지 익숙하다.

목소리도 변조되었고 가면을 쓰고 있지만, 분명 어디선가 본 적 있는느낌.

유령들을 마주했을 때처럼 꺼림칙하고 불길한 감정만은 아니다.

"좋다. 가자고."

"어라? 순순히 응하네?"

"어차피 선택지는 없는 것 같은데."

"현명하군."

여기서 기적적으로 몸을 빼낸다고 해도, 억지로 도망쳐서 루비아까지 휘말리는 것보다 일단 이야기라도 들어 보는 게 낫다.

솔직히 궁금하기도 하다.

왜 나를 수배한 거지?

달리아크 안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무력을 행사하는 이들은 누구지?

- 쑤욱!

커다란 검은 보자기가 나를 덮었다.

마법이 적용된 물건인 듯 안쪽이 의외로 넓었고, 푹신푹신했다.

어깨에 메고 가는 걸까.

다행스럽게도 바닥에 질질 끌리지는 않았다.

검은 보자기 안에서 온갖 생각이 다 떠오른다.

칼은 이미 빼앗겼고, 양쪽 손목에 수갑이 채워진 상태.

발목에도 족갑이 채워져 있다.

어느새?

대단한 녀석들이다.

애초에 팔다리에 힘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힘을 줘서 끊을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최상의 컨디션으로도 나를 납치한 둘을 절대 이길 수 없을 것 같다.

확실한 직감이었다.

- 스록.

납치범들은 나를 검은 보자기에서 꺼냈다.

말 없던 녀석이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의자에 들어앉혔다.

인형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주위를 둘러봤다. 통나무로 지은 작은 오두막에 불과하지만, 눈앞의 두 가면이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니 절대 탈출할 수 없다는 아쥬라의 스펠홀드처럼 느껴진다.

"당신들은. 누구지?"

오른쪽 가면이 고개를 갸웃했다.

변조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가 할 질문이야. 넌 누구지?

환몽幻夢 계열의 주술을 전문으로 연마한 리치인가?"

주술은 대체 무슨 주술.

설마, 아이작이 내가 모르는 사이 또 엉뚱한 짓을 한 건가.

"무슨 소린지 전혀 모르겠는데."

일단 잡아떼기로 한다.

그나저나.

눈앞의 두 녀석이 이상할 정도로 익숙하다.

왼쪽 가면이 다리를 꼬며 말했다.

"흐음. 기다려 보지. 곧 당사자가 등장할 테니까."

어둠이 깔린 작은 오두막 안.

가면 뒤에서 전해 오는 시선을 한참 받아냈을 때였다.

- 삐그덕.

오두막의 문이 열렸다.

207화 9: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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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열렸다, 닫히면서 오두막은 조금 전보다 훨씬 익숙한 공간이 되었다.

들어온 여자 때문이었다.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몇 겹의 가면을 겹쳐 쓰고 두꺼운 옷으로 가리더라도 절대로 몰라볼 수 없는 인간이었다.

기억을 한껏 지우고 웅크리더라도 끝까지 남아 있을 상대.

죽음의 순간을 몇 번이나 곁에서 함께했던 여자였다.

"레나?"

그녀는 발걸음 소리도 내지 않고 표범처럼 내게 다가왔다.

- 콰직!

그리고 어깨를 빼낼 기세로 목을 강하게 틀어쥐었다.

칠흑의 벨벳 장갑 너머로 강력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벨벳은 얇고 손가락은 가늘었지만 가해지는 힘은 진짜였다.

정말 많이 강해졌다는 걸 한 번의 멱살잡이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뭐야. 이 리치 녀석, 날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레나가 다른 손으로 검은 가면을 벗었다.

두 눈과 입이 뚫린 가면을 벗자 분명한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익숙한 검은색 머리카락이 살짝풀어지며 홀러내렸다.

예전보다 조금 짧아진 단발이다.

그녀가 검은 단발을 귀 뒤로 넘기며 어둠 속에서 미간을 찌푸렸다.

- 달그락.

나는 묶인 손목을 아래로 가만히 늘어뜨렸다.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냐고, 어떤 현재와 과거를 가지고 있는지 너무궁금하다고 묻고 싶었다.

하나밖에 없는 동생은, 슬라임은, T&T와는 어떻게 된 거냐고 하나씩 자세히 묻고 싶었다.

밤새도록 묻고 들어도 부족하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건 건조한 대답뿐이었다.

"리치 같은 건 아니다. 마법이나 주술에 별다른 조예는 없어서."

"이 자식이.

레나라는 걸 알아차리자, 뒤쪽에 서 있는 두 여자도 그 정체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가면으로도 감출 수 없는, 백색에 가까운 긴 은발은 T&T 시조始祖, 트로핀 나냐우의 특색이다.

넓은 후드 뒤쪽에는, 낫 형태의 병기가 숨겨져 있겠지.

푸르손 교도들의 거대 포위망에서 단신으로 나를 구해 준 녀석이다.

이렇게 강한 것도 이해하기 쉽다.

다른 한 명은 조금 덜 확실하다.

하지만 역시 T&T의 고위 간부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예언대로네요. 날짜와 시간도 정확히 맞춰 주셨어요."

"흐흥. 이걸 예측하는 데 상당히 힘을 썼어. 어휴. 한동안 관절이 잔뜩 쑤실 것 같아."

레나를 자기 지부에 넣겠다면서 우겨 댔던 묘족 예언자인가.

특유의 앙칼진 말투가 틀림없다.

샤루니안이라고 했었다.

"예언과 관절이 무슨 상관이냐."

"시조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막말하지 마시죠."

"나한테도 힘을 받아 썼으면서.

어쨌거나. 이 녀석이 확실한가?"

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틀림없어요. 눈앞에서 보니 훨씬더 확실해지네요."

"정체를 알 것 같나."

"글쎄요. 감이 안 잡히네요."

"이게, 우리 레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날카롭게 갸르릉대는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가면 뒤눈동자가 노랗게 물들면서 세로로 길게 찢어졌다.

"음. 여러분, 잠시 저 혼자 여기 있어도 될까요?"

"나가 달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샤루니안이 투덜거렸다.

"만만한 녀석은 아니다."

트로핀 나냐우의 허스키 보이스가 들렸다.

"그래. 괜히 시조까지 데려온 게 아니라고. 너한테 무슨 짓을 할지몰라. 어떻게 널 혼자 남기니."

"〈활짝 핀 시스피리의 마비〉까지 거셨잖아요. 해 봐야 뭘 하겠어요."

내가 밟아서 터진 게 그건가.

예언의 능력 외에 그런 것도 가능하다니 다재다능한 고양이로군.

"하지만 잘못해서 마법이 풀리면 어떡해."

"저항할 생각은 전혀 없소."

참다못해 내가 끼어들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레나를 공격할생각은 조금도 없다.

게다가 나를 죽이려는 것도 아닌것 같다.

그랬다면 트로핀 나나우가 당장 나를 해치우지 않았을까.

"너 같은 걸 어떻게 믿고!"

"휴우. 과잉보호라는 말이 왜 생겨났는지 알겠네요."

둘은 못 이기겠다는 듯이 문밖으로 나갔다.

"엿들으시면 안 돼요"

"알았어. 알았다니까."

오두막 안에 나와 레나만 남았다.

평평하게 긴장되는 공기가 뼈마디사이사이로 들어왔다.

레나의 침묵이 공기를 더 차갑게 식혔다.

온갖 생각이 머리를 가득 메웠다.

그녀의 과거는 분명 바뀌었다.

더 이상 노예 장부에 그 이름이 적혀 있지 않다.

그녀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어떤 과거를 가지게 되었을까?

궁금한 게 많았지만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레나는 장갑을 낀 손으로 내 목을 계속 잡은 채, 의자에 묶인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너. 나한테 무슨 수작을 부린 거지?"

수작은 무슨 수작.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이 자식이 정말.

냉정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물론 그녀의 평소 톤을 잘 아는 나이기에 파악할 수 있는 미세한, 아주 미세한 떨림이었다.

나는 목이 쥐어진 채 고개를 올려그녀를 바라봤다.

동굴에서 시작했던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밑바닥을 구르며 한 명을 죽여서 한 끼를 해결하던 노곤한 느낌은 아니었다.

삶의 비열하고 어두운 면을 특히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럼으로써 가질 수 있는 기묘한 귀티 같은 게 그녀에게 흐르고 있었다.

피를 잔뜩 뒤집어써도 전혀 티가 나지 않을 것 같은, 흑적색 후드를 두른 그녀의 모습은 감탄이 나올정도로 잘 어울렸다.

시체들이 쏟아지고 피가 솟구치는 골목을 눈 하나 깜빡 않고 막 걸어나온 느낌이라고 생각했을 때였다.

- 띠링!

허공에 상태창이 떠올랐다.

[이미 완료한 시나리오입니다.]

[달성한 호감도(70)에 따른 보정이 반영되었습니다.]

[달성한 레벨(60)에 따른 보정이 반영되었습니다.]

[클리어 보정이 반영되었습니다.]

[현재 해당 시나리오를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호감도가 최소화됩니다.]

[이름: 레나]

[호감도: 20]

[자객 Lv.34]

[트릭스터 Lv. 2기

[유물 사냥꾼 Lv.22]

[어둠의 상인 Lv.7]

[모략가 Lv.9]

[체력: 50]

[힘: 43]

[민첩: 71]

[지혜: 47]

[기본 스킬]

??? (호감도가 부족합니다.)

[특전]

??? (호감도가 부족합니다.)

[칭히

??? (호감도가 부족합니다.)

[지위]

T&T 제3본부장.

상세효과: ??? (호감:도기"

부족합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도 훨씬레벨이 올라가 있었다.

직업 레벨의 상승은 물론, 스탯이 전부 크게 높아졌다.

게다가 칭호까지.

T&T 지부장으로 만들고 끝난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녀가 가지고 있던 루-륨이 어떤 식으로든 그녀에게 강한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놀라울 정도로 성장한 상태창을 보기만 해도 마음이 흐뭇해졌다.

"뭘 그렇게 보는 거냐?"

"당연히 너를 보고 있었지."

목을 죄는 악력이 더 강해졌다.

차가운 칼날이 정수리에 닿았다.

"장난치지 말고 어서 말해라."

우습게도 그녀의 얼굴이 살며시붉어져 가는 게 느껴졌다.

최소화되었다고 했지만, 20이라는 낮지 않은 호감도가 아직 유지되고 있었다.

그 영향인지도 모른다.

"아까부터 대체 뭘 말하라는 건지 모르겠군."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정수리에 닿은 칼날이 한기寒氣를 계속 내뿜었다. 철 자체의 온도는 아닌 것 같았다.

마력이 깃들어 있는 검인가.

예리한 날이 아주 느리게 머리로 파고 들어왔다.

괜찮은 무기까지 습득했나 싶어, 그 칼날의 한기와 예기가 조금도 꺼림칙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끝까지 대꾸하지 않자, 결국레나가 말을 이었다.

"왜.

무슨 말을 할까.

"내 꿈에 자꾸 나타나는 거냐."

차갑게 가라앉은 오두막의 공기가 살며시 흔들렸다.

그녀가 그 말을 뱉어 낸 뒤 작게 한숨을 쉬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처음 보는 스타일인 레나의 짧은 흑색 머리칼이 살짝 올라갔다 다시 내려앉았다.

"꿈에. 나타난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지만 사실짚이는 게 있었다.

〈이상한. 꿈을 꿨어요. 〉

〈한 번도 본 적 없는 장소들에서, 스승님과 함께하는 꿈을 꿨어요. 〉세계선은 분명히 달라졌다.

레나의 현재는 물론, 그걸 뒷받침하는 과거까지 바뀐 게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했던 기억은 희미한 꿈의 형태로 계승되는지도 모른다.

- 끼긱.

정수리를 파고든 차가운 칼날이 내상념을 깨트렸다.

"그래. 왜 내 꿈에 나타나서 신경쓰이게 하난 말이야. 네가 주술을건 게 아닌가?"

주술 따위는 없다.

함께했던 과거가 그녀의 마음에 흔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이런 계승은 얼마나 이어질까?

얼마나 세계가 바뀌면, 몇 번이나 다시 태어나면 없었던 것처럼 모두 사라지게 될까?

"너, 정체가 대체 뭐지? 그리고 나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

어차피 사실을 말할 수는 없다. 이번생에는 레나와 엮이지 않기로 다짐했다.

적당히 둘러대는 수밖에 없다.

나는 설익은 거짓말을 내밀었다.

"〈등불〉달리아크까지 찾아왔다.

T&T 길드 유명인사의 이름을 내가 모를까."

이 정도면, 크게 파고들 구석은 없는 거짓말이다.

"그럼 나 말고 밖에 서 있는 다른 둘의 이름은 뭐지?"

이번에는 쉽다.

"트로핀 나냐우. 샤루니안. 여기서 전부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 덜컥!

문이 열렸다.

"뭐야? 얘, 왜 우리를 다 알아?"

"안 엿듣는다면서요. 내 이럴 줄알고 이름 말해 보라고 했어."

"엿들은 거 아니야. 그냥 들렸어."

조용하던 트로핀 나냐우가 살짝고개를 갸웃했다.

"신경 쓰이면 그냥 없앨까?"

나냐우의 로브에서 앞쪽 날 길이만 1미터가 넘는 낫이 튀어나왔다.

낫날은 지지대, 자루는 포신.

자루에 장착된 커다란 손잡이를 그녀가 손가락 하나로 잡아당겼다.

- 철컥.

강철 방패를 든 전사를 흔적 없이 날린 은빛의 마탄魔彈이 장착되는 소리였다.

레나가 손을 내저었다.

"어휴. 신경 쓰이니까 못 없애는거죠. 뭘 하시려는 거예요."

"너, 어떻게 우리를 다 알지?"

나냐우가 가면을 벗었다.

가면을 벗으며 변조된 목소리가 다시 되돌아왔다.

"시조, 얘 그냥 떠보는 걸 수도 있는데 꼭 그렇게 벗어야겠어요?"

"넌 눈만 봐도 죄다 티 나거든. 그냥벗어. 이거 아직 시제품이라 그런지 성능이 마음에 안 드네."

나냐우가 손을 뻗어서 샤루니안의 가면을 벗겼다.

"어차피 다 알고 있는 녀석이야.

레나 꿈에 나타난 거 봐 봐. 지금일부러 잡혀 준 건 아니야? 몸수색제대로 했었나?"

레나가 손을 뻗어 몸 구석구석을 살살이 뒤적이기 시작했다.

- 투둑.

갑옷을 벗기고, 뼈를 살짝 벌리고 안쪽까지 전부 훌고 있었다.

마른 숨이 살짝 닿았다.

좀 곤란한 기분이지만.

손목 발목에 전부 재질을 알 수 없는 특수한 족쇄가 차인 데다가, 나냐우가 바로 옆에서 내 머리를 언제든 날려 버릴 수 있게 겨누고 있는 상태다.

저항은커녕 사실 움찔거리며 몸을 돌리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한참 여기저기를 뒤적이던 레나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수상한 건 없어요."

"푸르손 끄나풀은 아닌 듯한데. 뭐하는 녀석인지 모르겠군."

T&T 내부에서 푸르손 추종자들과 적대하는 상황은 여전한가 싶다.

다만 분명한 차이점도 있다.

예전에는 나나우가 가게에서 날 보고 슬쩍 지나쳤다.

그런데 지금은 달리아크 내에서 수배령까지 내리고, 마음대로 나를 납치한다.

행사하는 영향력을 보자니 그들의 상황이 훨씬 좋아진 듯하다.

"내가 T&T에 관심이 좀 많아서."

"하아, 길드가 이렇게 허술한 줄몰랐는데요."

"아무튼 꿈이고 뭐고 모르겠으니 슬슬 풀어 주지 그러나? 수배령도 해제해 줬으면 좋겠는데."

마음 같아서야 레나와 밤새도록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그래 봐야 더 수상해 보일 뿐이다.

이제는 그녀의 삶에 더 끼어들지 않기로 했었고.

물론. 나를 이대로 풀어 준다는 가정하의 말이지만.

"뭘 믿고 내가 널 풀어 줄 거라고 생각하지?"

"글쎄. 꿈에서 본 정이라든가."

내가 말해 놓고도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레나는 의외로 흔쾌하게 대답했다.

"그래. 좋아."

좋. 다고?

방금 내가 뭘 들은 거지.

"얘를 풀어 줘? 최고 마법사한테 보내서 제대로 조사해 봐야지."

"본부장, 진심인가?"

나냐우와 샤루니안이 동시에 반발했다.

208화 9:1 (3)

***************************************************

"진심이에요. 이분은. 이대로 그냥보내 드릴 거예요."

레나를 올려다봤다.

그녀는 더없이 진지한 눈빛이다.

"뭐? 네 꿈에 나오는 녀석이라고 해서 힘들게 잡았는데, 지금 농담하는거지?"

샤루니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가르릉거렸다.

"아뇨. 농담 아닌 거 아시잖아요.

이제 술법 풀어 주세요."

"후으어. 이해할 수가 없네."

심지어 풀려나는 당사자인 나도마찬가지였다.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다.

몸수색 전후의 태도 변화가 급격하다.

레나는 지금 뭘 하는 거지?

분명히 기억은 없고, 내 꿈을 계속해서 꾸는 상황일 뿐이라면서. 그저20 정도의 호감도로, 오래 노렸던 사냥감을 이렇게 간단히 풀어 줄 수 있는 걸까.

정말 꿈에서 봤던 정이라는 건가?

쉽게 이해는 되지 않았다.

- 스르록.

묘족 샤루니안이 하얀 고양이로 변했다. 예전에 들은 말이 떠오른다.

묘족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고양이 형태로 변한다고 했던가? 완전히 고양이로 변한 녀석은 귀를 종긋세우며 옆을 바라봤다.

[시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나와 레나를 한 번 구해 준 여자.

그리고 지금은 언제든 내 머리를 날려버릴 준비를 마친 여자, 트로핀나냐우의 대답은 간단했다.

"우리 본부장님 하고 싶은 대로 하셔야지. 귀한 분인데."

나냐우가 거대한 낫자루를 슬쩍아래로 내렸다.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꽉 조이고 있던 무형의 압박감이 풀렸다. 레나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나냐우에게 말했다.

"열쇠 주세요."

스스럼없는 태도다. T&T 내에서 그만큼 중요하게 아낌 받고 있다는 거겠지.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뿌듯함부터 느껴진다.

"여기."

그녀는 나냐우에게 열쇠를 받았다.

- 투칵.

단순하게 생긴 열쇠를 작은 틈에 넣고 돌리자, 묵직한 소리와 함께 한 번에 수갑과 족갑이 풀렸다. 이제보니 수갑 안쪽에 복잡한 룬 문자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다. 참 대단한 걸로 내 손발을 채웠지 싶었다.

"주술 풀어 주세요."

[허. 난 모르겠다, 정말. 이렇게 얘를 풀어 줘도 되나.]

"풀어 줘요, 샤루니안.'

[끄응.]

고양이가 눈을 푸르게 빛냈다.

- 툭.

말랑말랑한 앞발이 내 다리를 두드리자, 다리에 이어 몸 전체의 마비가 빠르게 풀렸다. 이전 생에서는 예언만 보여 준 고양이였는데 이런 능력까지 있다니. 정말 만만히 볼 수 없는 녀석이다.

保.]

샤루니안이 눈을 빛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나를 향한 묘한 감정이 느껴진다.

질투?

하지만 나한테 그걸 느낄 이유는 없으니 착각이겠지.

"이제 가셔도 좋아요."

레나가 등을 떠밀었다.

정말 이대로 나가는 건가?

뭔가, 이상하다.

하지만 어떤 부분을 딱 꼬집어서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럼, 난 이만 가 보도록 하지."

의구심은 다 해소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따져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자연스러운 척 밖으로 나갔다.

오두막 문을 완전히 닫기 전에, 슬쩍뒤를 돌아봤다.

트로핀 나냐우는 팔짱을 끼고 별표정 없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저자도 온몸의 피를 루-륨으로

대체했다고 했지. 하지만 지금은 물어볼 상황이 아닌 것 같다.

일단 놓아준 걸로 만족하자.

괜히 긴 골목을 돌고 돌아갔지만, 납치범들이 나를 뒤따라오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는다.

납치당한 경위도 당황스럽지만, 풀려날 때도 생각보다 훨씬 더 간단하게 풀려났다.

레나도 허술해진 게 아닐까.

원래였다면 나를 이렇게 순순히 보내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지위가 달라져서 그런가?

힘들었던 과거가 달라져서일까.

아니면, 나를 이대로 놓아주는 게 옳은 판단이라는 자신의 직감이라도 따른 걸까.

- 팟!

[은신 Lv. 6을 활성화합니다!]

[특전: 자취말소(C+) 적용 중.]

소는 잃어도 외양간은 고쳐야지.

비록 나냐우라는 괴물에게 납치당하기는 했지만, 달리아크의 다른 수상한 것들에게까지 뒤를 허락할생각은 전혀 없다.

따라오는 녀석이 없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아이작과 루비아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까마귀 인형이 성을 내며 부리를 딱딱 부딪쳤다.

- 네놈은 대체 뭘 하고 온 거냐?

딱히 기다리지는 않았느니라.

"그냥 경매에 좀."

- 그게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렸다고? 말이 되는 소리냐?

"많이 기다렸어요. 누구를 따로 만나고 오신 건 아니죠?"

"딱히."

마음 한구석이 뜨끔하다.

하지만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다.

만난 건 아니니까.

일방적으로 납치당한 거지.

- 이 자식, 뭔가 수상한데.

하지만 레나와 있었던 일을 말할이유는 전혀 없었다.

"안 믿어도 할 말은 없다."

- 흐음. 그래? 그렇단 말이지.

알았다.

아이작이 몹시 의심스런 눈초리로 나를 천천히 훑어봤다. 까마귀 인형의 검은 눈에 붉은빛이 슬쩍 떠올랐다.

부담스러운 시선이다.

얼른 말을 돌렸다.

"경매에서 문제가 생겼다."

"무슨 문제인가요?"

"루-륨의 위치 정보에 12세이론을 걸었어. 하지만 아무래도 경쟁자가 있는 것 같던데, 어떻게 하지?"

- 흠. 자세히 말해 보거라.

나는 경매소에서 있었던 상황을 둘에게 전달했다.

납치당했던 것만 빼면 숨길 것도 더할 것도 없었다.

이야기를 들은 아이작이 부리로 작은 원 하나를 그리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 내가 400년 전에 경매의 신 소리좀 들었느니라. 내 말을 듣거라.

"뾰족한 방안이라도 있나."

아이작이 기다렸다는 듯 거들먹거렸다.

- 경매의 기본은 상대를 파악하는거지.

당연한 말이다.

준비한 자금과 의도를 알면.

얼마를 부를 건지 알면 간단히

승리할 수 있다.

물론 말이야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달리아크의 정보 중개상은 당연히 상대를 알려 주지 않을 거다. 그이야기를 하자 아이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쯧쯧. 파는 녀석이야 당연히 안알려 주지. 우리가 직접 찾아야지.

사도의 피가 모인 곳에는. 비가 내리면 하얀 활이 뜬다.

"흰색 무지개 말씀이군요."

- 이걸 미끼로 해서, 상대를 낚아올리자는 거다.

"확실히. 루-륨을 찾고 있다면 그런 정보를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겠네요."

- 이해가 빠르군.

나도 좀 같이 이해하면 좋겠는데.

머리가 빨리 확확 돌아가는 스탯같은 건 없는 걸까?

지혜 수치를 아무리 높여 봤자, 스킬의 위력이나 지속되는 시간에 관여할 뿐.

실제로 머리가 좋아지게 만들어 주는건 아니다.

아무리 스탯이 강해져도, 어쩌면 이거야말로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인지도 모른다.

- 뭐야. 이해 못 했냐?

"우리 생각이 꼭 맞다는 보장도 없는데 왜 그렇게 나쁘게 말해요?"

- 무리하게 편들기는.

루비아가 내 손을 잡고 말했다.

"별건 아니에요. 루-륨이 있는 장소에서 흰 무지개가 나타난다면, 그걸 봤다고 소문을 퍼트리는 거죠.

그러면 누가 접촉해 올 거예요.

우리와 경쟁하는 상대겠죠."

- 나서 줘야 될 녀석이 이렇게 잘알고 있으니 걱정이 없군. 누구랑다르게 말이다.

"나서 줘야 할 녀석이라니. 설마루비아를 말하는 거냐?"

곁에서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이건 저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에요. 두 분, 인간 도시에서 활동하기 좋은 몸은 아니잖아요?"

루비아가 결의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 걱정되면 따라다니든가. 은신능력도 있지 않느냐. 너 정도 강하면서 뭐가 걱정이냐.

"내가. 강한가."

- 흐흐. 스스로를 대체 뭐라고 생각하느냐? 혼자서도 제국 기사단하나 정도의 힘은 낼 수 있는 게 바로 네놈이다. 이 몸께서 괜히 관심을 가져 준 줄 알았느냐?

생각해 보면 그렇다.

방금 전 속절없이 당해 자신감이 많이 멸어진 상태이기는 했지만, 이건 상대가 너무 나빴다.

'트로핀 나냐우.'

이 녀석은 그야말로 책 속에서나접할 만한 전설적인 존재다.

T&T의 창시자로, 무려 400년에

걸쳐서 활동하는 은막의 강자.

그 녀석 외에도 아이작이나 나냐우, 제국 무력의 정점인 검주 따위를 일상적으로 접하다 보니 스스로가 약하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내 주위 상황이 워낙 극단적으로 돌아가다 보니 감각이 영 이상해져버린 것이다.

아이작이 파드득거리며 강변했다.

- 거기에다 나까지 따라갈 테니까.

제국 4검주가 루비아를 암살하러 오지 않는 이상 아무 일 없다.

"꼭 그렇게 말해야 되냐?"

- 뭐 어쩌라는 것이지?

"왜 기분 나쁘게 제국 4검주가 어쩌니 운운하냐. 가정이라도 아예그런 말은 하지 말지."

몇 번이고 나를 쫓아오던 후작과 기괴한 모습의 공작을 떠올리니, 절로 마음이 답답해졌다.

"말이 씨가 된다고."

- 큭큭큭.

아이작이 강렬한 비웃음을 날리며 나를 조롱했다.

- 미친놈. 심각한 편집증에라도 걸린게 아니면 저런 생각을 할 수 없을텐데.

루비아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어. 감사하지만, 사실 걱정이 약간과하신 것 같기는 해요."

- 제국 4검주들이 대체 얼마나 할 일이 없으면 이런 여자애 하나 암살하러 여길 오느냐? 어마어마한 괴물을 토벌하거나 수만금을 받고 누군가의 아주 아주 곤란한 문제를 해결하고 있겠지.

"그런가.

- 정신병 자랑하지 말고 얌전하게 따라가거라. 검주는 아니라도 골목불량배 정도는 붙을지 모르니까.

핀잔을 들은 나는 조금 무안해져, 가만히 은신 스킬을 쓰고 루비아를 따라붙었다.

"후아.

루비아는 기지개를 켜고, 깊게

심호홉을 했다.

달리아크에서 가까운 포목점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무얼 찾으시나요?"

느긋해 보이는 인상의 중년 여성이 지키고 있는 가게였다. 내 눈엔 별특별한 점은 없어 보였다.

나는 은신 상태로 한구석에 기대있었고, 아이작도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 야, 긴장하지 마라. 은신까지 한 주제에.

루비아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연스럽게 포목점 주인에게 말을 걸었다.

"문 앞에 걸린 겨우살이 리스가 너무예뻐서요. 저도 모르게 그만 들어와 버리고 말았지 뭐예요?"

여주인은 그 한마디에 표정이

부드럽게 변했다.

난 있는지도 몰랐는데 꽤 자랑스러워하던 장식이었나 보다.

"제가 직접 만든 건데, 그렇게 말해주는 손님은 처음이에요."

"정말 너무 아름다운 걸요! 아, 이렇게 들어온 것도 인연인데 천 좀보여 주세요. 마침.

그렇게 5분이 지나자 루비아는

여주인네 집 포크 개수를 알 정도로 친해져 있었다.

"아, 그런데. 이 천을 보니까지나오면서 봤던 흰 무지개가 생각나네요. 굉장히 기억에 남았어요."

무지개는커녕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는데. 루비아가 눈 하나 깜짝안 하고 자연스럽게 그런 말을 꺼내는 데에 놀랐다.

의외로 거짓말에 소질이 있는지도 모른다.

포목점 주인은 무료한 일상에 좋은 이야깃거리가 생겼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어머나! 흰 무지개요?"

"네. 그런 건 정말 처음 봤어요.

안개에 휩싸인 것도 같고. 전혀엉뚱한 곳에 반원형을 그리는 게 어찌나 신기하던지.

"어때요? 저 잘했죠?"

밖으로 나온 루비아는 뺨을 사과처럼 붉힌 채 물었다.

"상상도 못 했는데."

"헤헤, 도움이 될 수 있다니 너무기뻐요.' 눈꼴사납구나.

"포목점 주인분의 반응이 굉장히 좋던데. 아이작 님도 슬쩍 도와준거죠?"

- 흥. 가벼운 주술을 걸었느니라.

이제 저 녀석이 앞장서 여기저기 떠들고 다닐 게 분명하다. 너는 마중물 역할만 하면 된다. 다음 장소로 이동해라.

다음 날까지.

온갖 가게를 들르며 루비아는 천연덕스럽게 제 역할을 해냈다.

"이쯤이면 됐을 거 같은데."

"이제는 정말 소문이 퍼질 수밖에 없을 거예요. 이미 퍼졌으려나?"

그렇게 꽃집, 옷집, 구둣방을 거쳐 빵집에 들른 뒤 밖으로 나와 함께 거리를 걸었다.

추운 겨울인데도 흩겹 옷만 입은 남자아이가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어휴. 가엾네요."

루비아가 막 구워진 빵을 조그린 아이에게 내밀었을 때였다.

"이해 없는 연민은 사실 별다른 도움이 되질 않아."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209화 9:1 (4)

***************************************************

얼어붙은 겨울 공기를 꿰뚫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 검은 후드를 썼지만 누군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레 나였다.

아까 만났을 때보다 훨씬 눈에 덜띄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놓아준다더니 왜 다시 쫓아온 거지?

나의 일행까지 잡아가려고 쫓아온걸까?

하지만 지금은 레나 혼자다.

그녀가 몰라볼 정도로 강해졌다고 해도 내가 못 이길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게다가 누군가가 나를 쫓아오는 기색은 느끼지 못했다.

다른 곳에서 연락을 받고 여기에 나타난 건가?

조금 당황하고 있을 때였다.

지붕 위에 있던 아이작이 말했다.

- 저 여자로군.

저 여자라니?

- 사도의 피를 찾으려는 여자다.

아이작의 말에 정신이 들었다.

당황해 잠시 뭘 하던 중이었는지를 잊고 있었다.

루비아를 이용해 소문을 퍼트린 건 경매 상대를 알아내기 위해서다.

갑자기 누군가 접근해 왔다면 경매상대라는 쪽이 이치에 맞다.

즉, 여기에 온 건. 내가 목적이 아니라는 뜻이다.

실제로 레나는 은신 중인 내 쪽이 아니라 루비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후드를 살짝 벗자 차가운 바람에 새까만 머리칼이 흩날렸다.

"아이에게 빵을 나눠 줘 봐야 결국왕초에게 빼앗기게 되지. 이런 게 먹힌다는 걸 알아차리면 아이들은 더 추운 날에, 더 얇은 옷으로 밖에 계속 내몰리게 될 거다."

루비아는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그녀는 상대가 누군지 묻지도 않고 말했다.

"하지만, 사실 그런 걸 생각해서 안 주는 게 아니잖아요. 주기 싫으니까 거기에 이유를 붙이는 거죠.

먹을 빵을 주기 싫고, 주머니에서 돈 한 푼 꺼내기가 아까우니까요."

경매 상대라는 걸 짐작하고 있는 건지 어떤 건지, 루비아는 당당히 말을 이었다.

"이 아이에 대해서도 사실은 잘모르시잖아요? 이름이 뭔지, 어디사는지, 정말 다 벳기는지요."

"큭큭.

거지 소년이 작은 소리로 웃었다.

"어어.?"

웃는 아이를 보고 루비아가 살짝당황했다.

아이는 레나 쪽을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레나가 아이의 헝클어진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슈니, 연락 주느라 수고했어. 저마음 따듯한 아가씨에게 빵은 마저받아야지."

"하지만 속였는데요?"

"속여 줬으니까 대가를 받아야지.

가르침을 내려 준 거잖아?"

남자아이가 루비아의 눈치를 보고 슬금슬금 움직였다.

루비아는 어처구니가 없는 듯 피식웃으며 긴 빵을 내밀었다.

"조심해서 먹으렴."

그라스미어에서 봤던 거지 아이가 생각났다.

내게 편지를 꽂아 넣고 도망쳤던 재빠른 소녀.

아만에서도 그곳처럼, 이미 정보망을 완성시킨 모양이었다.

레나의 수완과 영향력이 저번보다훨씬 늘어나 있다.

어쩐지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일자리가 있는 아이였군요."

"그래."

레나는 손목에 찬 무언가를 흘끗바라보더니, 다시 내가 은신해 있는 쪽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이었군."

나에게 하는 말이다.

은신한 나를 처음에는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는데.

무얼 보고 눈치됐는지는 몰라도 계속숨어 있을 수는 없었다.

거지 소년이 빵을 들고 어딘가로 쪼르르 사라질 때쯤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 파드득!

아이작도 내 근처 나뭇가지 위에 가볍게 앉았다.

"인연인지 악연인지. 그 우스운까마귀는 뭐지? 한패인가?"

"애완동물이다."

- 뭐가 어째? 저 건방진 자식이!

아이작이 날갯짓을 하며 꽥꽥거리는 소리는 일단 무시했다.

"어쨌거나.

레나가 한쪽 골목 벽에 비스듬히 기대서서 말했다.

"이렇게 할 필요 없어. 경매에선 당신들이 이길 테니까. 괜한 수고 하지 말라고 전해 주러 왔다."

그 말을 뱉은 레나가 루비아를

관찰하는 것 같은 시선으로 아래위로 찬찬히 훑어보았다.

"아가씨도 잘 있으라고."

- 팟!

레나가 지붕으로 올라가서 굉장히 빠르게 사라졌다.

루비아는 멍한 표정으로 사라지는 레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일까요? 뭔가 분하지만 친근한 감정이 드네요."

- 친근은 무슨. 어쨌건 미끼는 잘물고 끌려왔군. 일은 다 끝났다.

나는 아직 혼란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레나가 경매 상대인 게 어색한 일은 아니다.

루-륨 자체가 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물질.

나도 T&T와, 나냐우와 엮일 때

까지는 그게 뭔지도 몰랐으니까.

레나는 내가 사망하기 전에 루-륨여덟 병을 가지고 있었다.

나냐우는 온몸의 피를 그 은빛

액체로 바꾼 존재.

루-륨의 가치를 아는 몇 안 되는 집단이 T&T라는 뜻이다.

여기에 그들이 있는 이상, 오히려루-륨의 정보 경매 상대가 아닌 게 이상할지도 모른다.

생각에 빠져 있던 중, 루비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경매에서 우리가 이긴다고 한 건, 자기들은 빠지겠다는 뜻이겠네요.

참여하는 게 자기들이랑 우리밖에 없다는 사실도 안다는 거고."

"녀석들은 왜 그걸 우리에게 다 말해주지?"

하지만 이상하기는 하다.

경매를 포기한다니.

회귀 전의 레나면 나에 대한 높은 호감도 때문에 그런 일을 할지도 모른다.

나에 대한 레나의 호감도는 거의 초기화된 상태에 가깝다.

꿈에서 봤다고 이렇게 해 주는 건 확실히 이상하다.

레나는 절대로 양보해 줄 성격이 아니라는 건, 여러 생에 걸쳐 이미잘 알고 있는 바.

"함정이 아닐까? 우리가 가격을 안올리면 저 녀석들이 높게 부르고 정보를 사는 건.

아이작이 고개를 저었다.

- 큭큭큭. 그런 동전 던지기 같은 짓을 할 인간들은 아니다. 훨씬 더확실한 게 있는데 왜? 경매소 가서 가격이나 낮추고 오거라.

"확실한 거라고?"

- 나중에 말해 주마. 가기나 해라.

고민하면서도, 일단 녀석의 강요에 따라 경매소로 향했다.

"흐음. 이번에는 판돈을 좀 높이러오셨나?"

"낮추러."

"낮추러, 왔다고?"

동요가 느껴진다.

레나 측에서 이미 입찰을 취소한 상황이기 때문일까.

정말로, 아이작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곤란한가?"

너무 싼 가격에는 아예 안 팔아버리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지, 은근히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보상인은 의외로 순순히 승낙했다.

"원하는 대로 하시오. 경매 기간은 내일까지니 언제든 의견을 바꿔도좋고."

일단 경매에 붙인 정보는, 팔아야 한다는 규칙이라도 있는 걸까.

"1세이론으로 낮춰도 되나?"

"접수됐소."

폭리를 취하는 녀석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경매 형식을 취하면서도 자유롭게 가격을 다시 낮추는 것까지 가능할줄은 몰랐다.

어쩌면 돈벌이보다도 정보 공유에 관심이 있는 자들인지도.

천막 밖으로 걸어 나가, 아이작과 루비아가 기다리는 숙소로 돌아갔을 때였다.

- 다녀왔냐.

"별말 없이 낮춰 주더군."

환불받은 은괴 덩어리를 녀석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 흐흐. 그래도 속 좀 쓰릴 거다.

이제 연기는 끝났나. 잠깐 가만히 서 있어 봐라.

"가만히 서 있으라고?"

추위와 어둠 속에 까마귀의 검은 눈동자가 붉게 빛났다. 아이작이 내몸을 훑어보며 말했다.

- 사슬이여, 선명해져라.

주술이 발동되는 순간이었다.

꼬리뼈 안쪽 깊숙한 곳에서 뭔가 진동이 느껴졌다. 보기도, 만지기도 어려운 위치였다.

"이게. 뭐지?"

- 큭큭. 뭐겠냐. 몰래 박아 넣은 추적 장치지.

추적 장치라고?

당황해하는 사이에 아이작이 말을 이어 갔다.

- 네가 떡하니, 이딴 걸 달아서 오길래 루-륨을 찾으려는 쪽에서 심어 놨구나 싶었지. 얼마나 정신을 놓고 다니면 이런 걸 당하냐?

몸수색을 하던 레나가 떠올랐다.

어찐지 그렇게 쉽게 보내 줄 상황이 아니었는데, 이상하다 했다.

내 입장에서야 그 셋이 무척이나 친근하게 느껴지겠지만, 그들 입장에서도 그럴 리는 없다.

추적 장치가 레나 하나만의 생각일리도 없다.

처음부터, 전부 연극이었던 거다.

레나가 은신한 내 위치를 정확히 알았던 것도 추적 장치 때문이겠지.

꿈을 꿨다는 것까지 전부 거짓말은 아니었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날 전혀 기억하지 못하면서 연극을 한 걸지도 모른다.

부끄러움 때문인지, 머리가 조금어지러운 기분이 든다.

"이런 걸 알았으면, 최대한 빨리이야기를 해 줬어야 할 거 아니냐."

- 멍청한 놈, 알려 줬으면 네놈이 티를 안 냈겠냐? 여기저기서 온갖표를 다 내서 망했을 게 뻔하지.

아이작이 차갑게 대답했다.

나는 도움을 청하듯 슬쩍 루비아를 바라봤지만.

"음. 해골님은 훌륭하지만, 사실겉으로 알기는 쉬운 분이에요. 뭔가 티가 잘 나거든요."

확인 사살만 당했을 뿐이었다.

아이작에게 듣는 것보다도 이쪽이 훨씬 더 아프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나."

- 어. 당연하지.

- 이제 저 녀석들은 주적 장치를 쫓아올 거야. 우리가 다 찾아 놓은 사도의 피를 마지막 순간에 차지할생각이겠지.

"이제 어쩌지?"

아이작은 루비아를 부리로 가리키며 말했다.

- 네가 뻘짓 하고 있을 동안, 이미이 아이를 시켜 말 몇 필을 샀다.

도시를 나간 뒤. 그중 한 마리에 장치를 붙일 거다. 나중에 초원에서 풀 뜯는 야생마를 보면서 분통깨나터지겠지. 흐흐흐.

아이작은 별거 아니라는 듯 킥킥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내 몸에 붙은 추적 장치를 보는 순간, 이미 계획을 다 짜 놓은 놈의 역량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멍하니 있을 동안, 주위의 인물들은 다들 열심히 머리를 굴려 댔던 것이다.

그날 밤이었다.

아이작은 떠나기 전 동네 한 바퀴쭉 돌아보겠다고 밤마실을 나갔고, 루비아는 숙소에서 잠들어 있었다.

나는 탐지 능력을 켜 놓은 상태로 가만히 창밖을 바라봤다.

그때 누군가의 인기척이 잡혔다.

- 스숙.

인기척이 느껴진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창밖으로 뭔가가 흔들리며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방금 전까지 누군가 내 쪽을 바라보고 있던 듯했다.

누구지?

긴장감에 신경이 곤두섰다.

정말 검주? 황실의 유령일까?

하지만 살기는 아니다.

그저 시선이었다.

몸을 훌어보던 예리한 시선.

그러나 확실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기척이 빠른 속도로 멀어진다.

곧장 밖으로 나가 추적했다.

검은 옷을 입은 인간이 지붕 위와 골목 틈새를 가리지 않고 재빠르게 도망가고 있었다.

- 팟!

상대는 2미터가 넘는 벽을 손 한 번 짚고 간단히 뛰어넘으며 빠르게 도망갔다.

몇 걸음 만에 가파른 담을 훌쩍훌쩍걸어 새처럼 멀어졌다.

하지만 못 잡을 정도는 아니었다.

'질주.'

[질주 Lv. 7을 발동합니다!]

- 쾅!

돌바닥이 패일 정도로 발을 디디며 그의 뒤를 빠르게 쫓았다.

날 염탐하던 녀석을 몰아세우는 데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담 높이가 오 미터가 넘는 막다른 골목에 상대를 몰아세웠다.

"도망갈 곳은 없다."

가까이 다가가자 곧 상대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 왜 나를 보고 있었던 거지?"

루-륨을 추적하기 위한 위치 확인이면, 굳이 창밖에서 몰래 바라보고 있을 필요까지는 없다.

추적 장치를 달아 놓고 있다.

그걸로 충분할 텐데.

"흥."

레나는 복면을 쓴 채 묘한 표정을 지었다. 입가 위로 연갈색 피부가 드러난다. 저번 생에서 접한 그녀의 눈빛과 조금씩 겹쳐지는 것 같았다.

"왜 나를.

친근한 마음에, 무심코 한 걸음앞으로 더 다가갔을 때였다.

- 철컥!

소매에서 갈고리가 솟구쳤다.

까닿고 긴 쇠줄이 달린 갈고리가 높은 담 위 지붕에 단단히 걸렸다.

- 좌르르록!

순식간에 수 미터에 달하는 사슬이 당겨지며 그녀의 몸이 위로 솟구쳐 올랐다.

곡예에 가까운 몸놀림이다.

사슬을 잘라 낼 타이밍도 아예 없던건 아니었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창백한 달 아래 선 그녀가 나를 다시 한 번 내려다봤다.

그리고 곧 지붕과 지붕을 뛰어서 멀리 사라졌다.

무슨 의도였을까.

그나마 황실의 유령 따위가 아니라 다행이었다.

아이작이 검주가 어쩌니 했던 말에 실제로 신경 썼던 자신이 우스웠다.

숙소로 돌아갔다.

곤히 잠든 루비아의 곁을 지키면서 새벽을 맞았을 때였다.

- 똑똑.

210화 9:1 (5)

***************************************************

"숙소 관리인입니다."

"무슨 일이지?"

"경매소에서 손님을 찾으십니다.

오늘 찾아와 달라는군요."

관리인은 용건을 전달하고 멀어져갔다.

놀라운 일이다.

고작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경매가 끝난 건가?

잠시 가만히 기다리다가, 아이작이 돌아온 뒤에 녀석에게 물었다.

"우리가 이긴 거냐."

- 어. 당연하지. 정보를 가져가라고 부르지 진 걸 알려 주려고 부르냐?

놀리는 것도 아니고.

"그럼 지금 갔다 오면 될까?"

- 뭘 그런 것까지 물어보고 그래.

스스로 생각을 좀 해라.

- 큭큭. 농담이다. 네 녀석 정도면 안 물어보고 무슨 황당한 짓을 저지 를지 모르지. 앞으로도 꼬박꼬박나한테 물어보거라. 일단 경매소는 가거라. 하지만.

아이작이 잠시 말을 골랐다.

"하지만?"

- 낮은 가격에 정보를 넘긴 녀석이 잔뜩 분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가서 엉뚱한 바가지 쓰지 말고. 이상한 끼워 팔기 같은 짓에 절대 당하지

"알았다고."

아이작의 말을 홀리며 경매소에 도착했다.

정보 상인은 작은 지도를 나에게 건넸다.

"작은 동그라미가 그려진 부분에 가면 되오."

동그라미는 서북쪽에 자리한 사막한가운데 그려져 있었다.

도로나 상점, 거대한 바위 같은 지형지물까지 표시된 지도였다.

"이 표시는. 뭐지?"

나는 동그라미 안에 그려져 있는 세 개의 선을 바라봤다.

"신전. 예메라의 신전이오. 거기서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 거요."

원하는 것.

루-륨이 있다는 뜻이다.

신전 표시가 조금 신경 쓰였지만, 사막 한가운데 있는 신전이 별거있겠나 싶었다.

그냥 아무도 찾지 않는 오랜 유적정도겠지.

"흠. 그럼 이만."

가벼운 마음으로 경매소를 나가 보려 할 때였다.

정보 상인이 말을 건넸다.

"잠시만."

"뭐지."

"지금 그 신전 주변에서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그 정보는 살 생각이 있으시오?"

"그것도 경매인가."

"이건 가격이 정해져 있소. 처음 봤던 크기의 은괴 세 개만 준다면 정보를 팔지."

"너무 비싼데."

아까와 같은 크기의 은괴 셋이면 36세이론.

고작 1레벨에 불과한 회계 스킬로도, 어마어마한 금액임이 단번에 느껴진다.

괜찮은 장검을 무려 천 자루 넘게 살 수 있다.

마차를 서른 대 가까이 사거나, 심지어 작은 신전 하나를 지을 수 있는 돈이다.

망설이는 내게 남자가 재촉했다.

"위험에 대한 정보요. 한 번 잘못가면 그대로 끝인데 그래도 사지 않겠다는 거요?"

아이작이 한 말이 생각난다.

끼워 팔기라는 게 이런 걸까?

위험에 대한 정보라니 마냥 거절하기도 뭣하지만, 무턱대고 돈을 내는것도 마찬가지로 꺼려졌다.

"가서 이야기 좀 해 보고.

나는 얼버무리며 그 자리를 슬쩍빠져나온 뒤 아이작에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 내 예상이 딱 들어맞았군.

아이작은 부리를 거만하게 높이 쳐들고 말했다.

- 내가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냐?

바가지 씌울 거라고. 끼워 팔기에 당해 줄 필요는 없다.

"흐음.

녀석의 당당한 태도가 오히려 좀의심스러웠다.

"그래도. 위험하다는데 보험으로 사는 게 좋지 않을까?"

- 흥! 처음에는 말해 주지도 않았던 위험 정보라니. 그딴 게 어딨냐?

궁박하고 경솔한 녀석에게 폭리를 취하려는 아주 악의적인 짓이다.

"그건 왠지 네가 많이 해 봤을 거같은데. 필요한 정보일 가능성은?"

- 사막에서 나타날 거라고 해 봐아^별거 없지 않겠느냐? 정 겁나면 내가 해결해 주마.

"그렇다면야."

- 다그닥! 다그닥!

아만에서 산 두 필의 말이 머리를 나란히 하고 달렸다.

두 마리 말 중 위에 누군가 타고 있는 말은 한 필뿐이었다.

루비아가 말을 탈 줄 모르는 데다, 설령 탈 줄 안다고 해도 내 속도를 따라올 수 없기 때문에 함께 타고 움직여야 한다.

- 다그닥! 다그닥!

"지치지도 않네요."

처음 함께 말을 탈 때 루비아는 뻣뻣이 굳어 있기만 했는데, 이제조금은 익숙해진 듯 내게 말까지 걸었다.

[승마 Lv. 2가 발동 중입니다.]

초보적인 승마 스킬이지만, 말의 가치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다.

"비싼 값을 치르고 산 녀석들인모양이지?"

"2세이론을 주고 샀어요."

"한 마리에?"

약간 비싼 감이 있었다.

"두 마리 합쳐서요."

그러면 너무 싸다.

- 흐흐. 대부분의 값은 너희가 탄녀석이다. 옆에서 달리는 애는.

위에서 파드득 날면서 쫓아오는 아이작이, 안장도 걸치고 있지 않은 갈색 말을 흘끗 바라보며 말했다.

- 위에 누가 타기만 하면 그대로 풀썩 주저앉아 버리는 놈이지!

"뭐. 전설의 명마 같은 거냐?"

여러 가지 일화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은 인간은 안장에 못 앉게 하는 말이라든가.

루비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래요. 딱히 잘 달리는 말도 아니고, 딱히 힘이 센 것도 아니라고 했어요."

- 단순히 힘든 걸 싫어하는 거지.

이유 없이 게으른 거 처음 보냐?

뭔 전설의 명마까지 붙이고 그래.

"흠. 그래도 옆에서 잘 따라오고 있는데."

- 살짝 암시를 걸어서 그런 거다.

달리게 하는 정도는 그리 힘들지 않으니까.

북쪽으로 한참 달려가자, 서서히 풍경이 변하기 시작했다.

도로 주변에 빼곡하던 나무들이 점점더 드물어졌고, 그나마 있는 것들도 잎사귀가 드물어지고 잎이 뾰족해졌다.

바람에서 모래 알갱이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사막을 휘청거리다 온 바싹마른 바람이었다.

- 이 정도면 됐다. 멈춰라.

아이작은 북쪽과 서쪽으로 길이 두갈래로 갈라질 때 우리를 멈춰 세웠다.

- 휘저어져라. 은빛 촉이여. 어서 너를 뽑아내어 거울에 달라붙게 할지니.

추적 장치가 붙은 부위에서 응웅거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쑤욱, 하는 느낌과 함께 꼬리뼈에 붙은 무언가가 뽑혀 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아이작은 부리로 푸른 침 같은 걸 잡더니 옆에서 따라오고 있던 말엉덩이에 추적 장치를 붙였다.

꽂는다는 느낌도 없었는데 부착기능이 있는 것처럼 장치가 차록소리를 내며 말 엉덩이에 자리를 잡았다.

- 북쪽으로 가라!

아이작이 부리로 쿡 찌르자, 말이 북쪽으로 열심히 달려갔다.

지도에 표시된 루-륨의 위치와는 전혀 상관없는 곳으로.

- 우리는 지금부터 서쪽으로 간다.

"조금 신경 쓰이네요. 예메라의 신전에는 뭐가 있을까요?"

- 있긴 뭐가 있어. 참, 서부 지역이 왜 사막이 된 건지는 알고 있나?

"모르겠는데."

아이작과 보낸 시간이 많아서일까.

녀석이 어쩐지 다른 쪽으로 말을 돌리는 기분이 든다.

혹시 무슨 위험이 있는지 알면서 이야기를 안 해 주는 건 아닐까?

비싼 정보라도, 혹시 거기서 사야 했던 것은 아닐까?

너무 아이작을 믿었는지 모른다.

의심이 스멀거리며 올라왔다.

하지만 이미 사막 한가운데까지 왔다는 생각에서일까.

그는 침묵하고 있는 내 반응 따위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 한때는 여기가 대륙에서 제일번화하고 발전된 곳이었지. 걷는 인간들끼리 어깨가 부딪힐 정도로 번화하고 발전된 곳이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네요."

대륙에서 가장 번화했던 곳이라는 아이작의 말과 전혀 다르게, 말을 타고 서쪽으로 갈수록 메마른 모래바람만 불어왔다.

메마른 모래 알갱이들이 투두둑갑옷에 부딪혔다.

그나마 루비아가 뒤에 타고 있어다행이었다.

- 나한테도 '옛날'이야기니까 당연하지. 게다가 예메라의 사제들에 의해그 이야기들은 전부 금서로 분류될테니까.

"이 사막이 예메라와 관련이라도 있는 거냐?"

건성으로 아이작의 이야기를 받아치며 지도를 확인했다.

동그라미가 그려진 사막은 그리 멀지 않았다.

이대로 반나절 정도만 가면 금방목적지인 신전에 도착할 듯했다.

- 그래. 화려했던 문명을, 환락을. 예메라 년이 억지로 참회시켰다.

태양광을 강제로 모아서 다 태워버렸지. 그 덕분에 아직도 여긴이렇게 더워.

"대체 그런 이야기는 어디서 듣고 다닌 거지?"

- 영업 비밀이다.

- 힘을 되찾으면 너희에게 자세히 말해 주도록 하마. 그때까지 내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해라.

놈의 황당한 말은 무시했다.

하지만 루비아는 곰곰이 이야기를 곱씹는 모양이었다.

"지역 전체를 태양빛을 이용해서 태우려면, 정말 어마어마한 크기의 '렌즈'가 있어야겠네요. 얼마만큼유리를 모아야 그런 걸 제작할 수 있을까요?"

나는 고개를 들었다.

암벽 위에서 불타오르는 태앙을 슬쩍흘겨봤다.

"굳이 모으지 않아도. 이 자체로 충분히 피곤하군."

말이 씨를 뿌린 듯 달궈진 바람이 다시 한 차례 불어왔다.

언덕 하나가 사라지고 작은 언덕두 개가 생겼다.

작은 회오리 하나도 도로를 가로질러지나갔다.

가까이 없었던 게 다행이었다.

회오리는 앞쪽 멀리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근처까지 뿌옇게 시야를 만드는 위력이 있었다.

모래 먼지가 완연히 가라앉았을 때였다.

- 인간들이다.

아이작의 말대로였다.

남쪽 길에서 올라오는 인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스무 명이 조금 넘는 숫자였다.

모두 커다란 바람막이를 둘렀고, 우리처럼 말이 아니라 낙타를 타고 있었다.

제대로 사막을 다니는 무리인 모양이었다.

낙타 위에 체계적으로 짐을 실은 모습이나, 차분한 복장으로 보아도적 떼는 아닌 것 같았다.

- 우리랑 방향이 같은데? 따라가면 될 거 같다.

"굳이 그럴 것까지야.

- 모래 폭풍이라도 오면 재네들을 고기방패로 쓸 수 있잖아. 굳이 안따라갈 이유가 있냐?

그때 였다.

- 휘이이익!

상인들 쪽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함께 갑시다!"

구불구불한 수염을 가진 남자가 손을 흔들었다.

잠시 고민에 빠졌지만, 가는 길이 겹친다면 굳이 거절할 이유까지는 없었다.

"물 좀 드시겠소?"

"나는 됐고.

남자가 건네는 가죽 주머니에서 차가운 느낌이 전해졌다.

달궈진 건틀렛으로 주머니를 오래잡지 않고 루비아에게 넘겼다.

차가운 물이 꿀꺽꿀꺽 루비아의 목을 지났다.

그녀는 입가의 물을 슬쩍 닦으며 어지럼증이 풀린 표정을 지었다.

"물값은?"

"하핫. 주실 필요 없소이다."

- 사막을 지나는 상인이 물값을 안 받는다고? 웃기는 놈들이네.

'수상한 건가?'

- 일단 따라가기나 해. 손해 볼 거없잖아?

상인들의 후미에 붙었다.

과연 사막을 밥 먹듯이 횡단하는 자들인 것 같았다.

사막에서 며칠이고 버틸 수 있을 법한 장비들이 낙타들에 차곡차곡쟁여져 있었다.

처음 우리를 부른 남자는 상단의 두목인 것 같았다.

가까이서 보니 눈썹이 짙고 눈이 부리부리했다. 호남형이라고 불릴만한 인상이었다.

"길잡이도, 낙타도 없이 사막을 걸어가시다니. 목적이 어디시오?"

알 필요 없다고 자르려고 했는데, 루비아가 먼저 나서서 대꾸했다.

"예메라의 신전이요. 성지순례를 가는 길이에요."

"순례자들이셨군! 여긴 아가씨를 지키는 기사분인가?"

"비슷하다."

나는 짧게 끊고 루비아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도 그녀가 마신 건 탈 없는 깨끗한 물인 것 같았다.

긴장한 나를 보고 아이작이 한껏비웃었다.

- 킥킥. 멍청한 놈아. 네가 강한 걸 저놈들이 어떻게 알겠어? 덮칠 생각이었으면 다짜고짜 덮쳤겠지. 보면, 허점투성이면서 지가 하고 싶을 때만 의심이 많다니까.

구불구불한 수염의 상인 두목은 사람좋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어차피 그쪽으로 가니, 그때까지는 마음 놓고 따라오시면되오."

우리는 상인들을 따라 뒤쪽에서 천천히 따라갔다. 그룹을 이루니 일단바람에부터 조금 덜 휘말리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껏 접해 보지 못했지만.

어쩌면 이것이, 인간의 호의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211화 9:1 (6)

***************************************************

나는 괜히 뒤를 돌아봤다.

모래와 지평선밖에 없었다.

탐지 영역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누군가가 쫓아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월 본 것도, 들은 것도 아니다.

추적 장치도 떼어 냈다.

어차피 막연한 기분에 불과하다.

내 감이란 게 지금껏 맞은 적도 별로 없다.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봤다.

아무것도 없었고, 사막에 숨을 곳 따위는 더더욱 없다.

착각일 게 분명했다.

상인들이 우리에게 넌지시 말을 걸어 댔다.

"어디에서 오신 거요?"

"아만에서 왔어요."

"그쪽 출신은 아닌 것 같은데, 긴여행을 하셨군."

"뭐, 그렇죠."

루비아는 슬쩍 들어오는 더 깊은 질문을 차단했다.

어쨌거나 그녀는 도망자다.

어디까지 삼촌의 수배령이 내려져있을지 모르는데, 에라스트 출신인 걸 밝혀서 득이 될 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상인들은 포기하지 않고 자꾸캐물어 댔다.

"사막은 처음이시오?"

"네."

"딱 봐도 그런 것 같았지. 낙타가 아니라 말을 사서 오다니. 준비도안 되어 있고 말이지. 하하핫.

- 뭐야? 서부 사막 횡단하는 것도 아닌데, 얼마 가지도 않을 건데 말이면 어떻고 낙타면 어때.

살짝 무례해지는 놈들이 짜증 나긴했지만 적당히 참아 냈다.

애초에 우리를 도와주겠다고 하며 호의로 접근한 인간들 아닌가.

"갑옷에 문장이 새겨지지 않아서 그러는데. 기사님의 가문을 알려주실 수 있으시오?"

"이름 있는 가문은 아니다."

"그러시군.

상인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녀석들이 씩 웃으면서 말했다.

"어쨌건 우리를 만난 걸 행운으로 생각하시오. 성지까지 가장 빠른 길로 가게 해 드릴 테니까."

"가장 빠른 길?"

"그렇소. 지금 우리가 가는 길이 가장 빨리 성지로 가는 길이오."

그렇게 말한 구불구불한 수염의 상인이 낙타 옆에 매달린 육포를 집어서 내게 건넸다.

시원한 물이 담긴 가죽 주머니도 함께였다.

"안 드시겠소?"

손을 내저어 거절했다.

물 한 모금 안 마시는 걸 수상히 여길 염려도 있었지만, 경계심이 강한 거라고 해석해 주길 바랐다.

상단의 후미에서 앞을 바라봤다.

사막에는 신기루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온통 모래뿐이었다.

이곳이 한때 아이작 말대로 무척번화한 곳이었다는 게 쉽게 믿기 어려웠다.

루비아도 못 들어 봤다는 이야기 아닌가?

지어낸 이야기거나, 정말 오래된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상인들을 따라서 한 시간 정도를 갔을 때였다.

뒤에서 기척이 잡혔다.

말에 탄 누군가가 내 쪽을 향해똑바로 달려오고 있었다.

말이 모래를 박차는 소리, 후드가 바람에 펄럭이는 소리가 저 멀리서 느껴진다.

반사적으로 탐지 스킬에 한층 더집중했다.

기척은 탐지 범위의 끄트머리에 걸쳐 있었다. 인간에게 보일 만한 거리는 아니지만 빠른 속도로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가까워질수록 상대가 누군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먼 거리에서 정체까지 느낄 수 있다는 건.

아주 익숙한 상대다.

레나가 우리를 쫓아오고 있었다.

그녀 혼자서.

나는 짐짓 모른 척을 하고 태연히 말을 몰았다.

목적은 모르지만, 레나 하나라면 내가 어떻게든 감당할 수 있다는 묘한 자신감이 있었다.

괜히 아이작에게 말해 봐야, 혹시바닥에 함정을 놓으라든가, 이상한 주술을 쓴다든가 해서 일을 꼬이게 만들지도 모른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그녀가 다시 한 번 보고 싶었다.

적어도 쫓아오는 걸 못 하게 막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무슨 생각으로 혼자 나를 쫓아오는 걸까.

나냐우도, 샤루니안도 없이.

레나가 그렇게 막무가내일 리가 없는데.

"아.

루비아의 작은 탄식이 딴생각에 빠진 나를 깨웠다.

"투명하네요."

그녀가 하늘을 가리켰다.

사막으로 한참 들어가자 초입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작은 호수 하나, 오아시스 하나보이지 않으면서도 사막의 하늘은 또렷하고 푸르게 변했다.

더위 때문에 지친 기색을 보이고 있으면서도, 루비아는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감탄했다.

"정말 선명하네요. 이런 말은 좀어색할까요? 하늘, 땅. 구름과 저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요."

그랬다.

나 역시 사막은 처음이었고, 이 정도의 '맑음'도 처음이었다.

내가 헤매고 다녔던 어떤 남부와 중부에서도 이 정도로 맑고 깨끗한 하늘은 없었다.

- 흥. 맑은 거 너무 좋아하지 마라.

일 년 내내 이렇게 맑으면 아무도 못 사는 황야가 되어 버린다.

무슨 황당한 소리인가 싶었지만, 루비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공기 때문이죠? 기상학 책에서 읽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하지 못할 만큼 아름답네요."

그때 였다.

모래 언덕 너머로 인간 스무 명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공교롭게도 지금 동행하는 상단과 정확히 같은 숫자라, 자연스럽게 비슷한 부류의 녀석들인가 생각할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가오는 모습들을 보니 평범한 상인 같지는 않았다.

타고 다니는 낙타에 거래할 봇짐따위는 실려 있지 않았고, 양손에 활이나 창칼을 들고 우리를 겨누며 곧장 다가왔다.

하얀 터번으로 얼굴을 둘둘 싸고, 위는 붉은색, 하의는 하얀색으로 옷을 맞춰 입었다.

아무리 봐도 호의를 가지고 접근하는것 같지는 않은 무리다.

"일단 정지!"

선두에 선 거한이 길을 막았다.

놈들이 잔뜩 끌고 온 모래 먼지가 루비아에게 닿지 않도록, 검신의 넓적한 부분으로 칼을 휘둘렀다.

강한 바람이 생기며 모래 먼지가 좌우로 갈라졌다.

행렬의 후미에 있어서 우리에게 특별히 신경 쓰는 녀석은 없었다.

꽉 쥔 주먹 크기가 루비아의 얼굴정도 되는 거한은 무거워 보이는 칼을 한 손으로 붕붕 돌려 대면서 다른 손으로는 입 부분의 터번을 아래로 슬쩍 내렸다.

"통행세를 내놔라!"

- 사막 도적단이군.

아이작이 짧게 녀석들의 정체를 품평했다.

"경매소에서 나에게 팔려고 했던 위험 정보가. 이거였을까?"

- 흐흐흐. 글쎄다.

만약 이 녀석들이라면.

아이작 말대로 정보를 사지 않길잘했다고 생각했다.

36세이론의 가치는 없다.

앞에 나선 도적단 두목은 그나마강해 보인다.

벤슨 프레쳐나 유블람 경비대장정도는 될 것 같았지만, 그래 봐야 주먹으로 살짝 치면 머리가 멀리떨어져 나가면서 즉사할 거다.

하지만, 정말 달리아크에서 이런녀석들을 '위험'으로 판단한 걸까?

스무 명의 무장 강도단이긴 한데.

돈을 뜯어내기 위해 위험을 잔뜩과장한 건지도 모른다.

"사막에서 강도라니. 장사가 잘될까요?"

나를 믿고 있는 건지, 루비아도 긴장하지 않았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우리와 함께 가는 상인들에게도 전혀긴장하는 기색이 없었다.

구불구불한 수염의 상인 두목이 앞으로 나섰다.

"〈사막의 독사〉로벤 님이시군요.

통행세는 마련했습니다."

"흠.

둘은 한두 번 해 본 게 아닌 둣, 관례처럼 작은 가죽 주머니 하나를 주고받았다.

"통행. 세?"

달려들어서 물건을 다 빼앗을 줄알았는데, 신기한 광경이었다.

"강도 짓도 오래 해 먹으려면 항상싸울 수는 없으니까요. 이긴다고 해도 수배가 붙을 거고요. 적당한 선에서 통행세 받고 보내 주는 게 보통이래요.

서로 좋은 거죠."

루비아가 옆에서 설명했다.

- 모험기에서 읽은 장면을 실제로 보니까 아주 즐거운 모양이야? 응?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보세요, 이제 우리를 보내 줄.

그때 였다.

가죽 주머니를 연 '사막의 독사'로벤이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이거 봐, 예오만 씨. 단골이라고 깎아 달라는 거야, 뭐야? 평소보다둘이나 더 지나가면서 가격은 왜 반도안 주는데? 한번 해 보자는 거야,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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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다루니 짧게 잡았소. 아껴가며 쓰시는 거야 자유지. 솔직히 나도 끌릴 정도인데, 당신들에게 넘기는 건 정말 대출혈 서비스요!"

상단주가 푸르른 사막의 하늘을 향해두 팔을 활짝 벌렸다.

루비아는 자기가 무슨 말을 듣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녀의 귀를 막아 주고 싶을 정도로 더러운 말이었지만, 아이작은 뭐가 그리 신나는지 머리 위를 날면서 큭큭거렸다.

'사막의 독사'는 결정을 내린 것 같았다.

그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뒤탈 없는 것들이겠지?"

"아만 출신도 아닌 녀석들인데. 죽어자빠진다고 누가 알겠소."

상인들이 우리에게서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 자리를 터번을 두른 도적들이 메웠다.

"지금. 다들 뭘 하려는 거죠?"

- 흐흐. 인간이 인간 하는 거지, 뭐 다른 걸 하겠나?

"여기까지 우릴 제물로 데려온 거군."

- 그나저나 너무 싸구려로 팔린 거 아니니? 좀 자존심 상하지 않아?

고작해야 상단 통행세로 팔리니까기분이 많이 안 좋겠네. 싸워라!

싸워라! 이기는 편 우리 편?!

아이작은 또 왜 저렇게 신난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예쁜이, 안녕?"

- 대사 전형적이고!

도적 두목이 칼을 획획 돌리면서 우리 쪽으로 접근했다.

아이작은 위를 날아다니며 부리를 딱딱 부딪쳤다.

놈이 지나치게 신난 것 같아 문득 짜증이 났다.

품을 뒤져 은화 몇 개를 꺼냈다.

도적 두목에게 물었다.

"통행세 받을 생각 없나? 후하게 쳐주도록 하지."

"크하하하하하!"

우리를 둘러싼 스무 명의 도적이 일제히 웃었다.

몇 명은 활로, 몇 명은 긴 창으로 이쪽을 겨누고 있었다.

〈독사〉로벤이 말했다.

"뒤탈 없는 것들에게까지 뭣하러통행세를 받아? 다 벳고 죽여서 모래에 묻으면 그만이지."

어처구니가 없어서 주위를 둘러봤다.

뒤로 빠진 상인들은 아예 2차로 포위망을 구성하고 있었다.

몇 명은 아예 칼을 빼 들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단순한 구경거리이상이었다.

희생양이 만에 하나 도적단에게서 도망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상인들까지 뚫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저 사람들은. 왜 저러는 거죠?"

"철저히 입을 막기 위한 거겠지.

탈출한 자들이 이 일을 퍼트린다면 곤란할 테니까."

그렇게 많은 책을 읽었으면서도.

루비아는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한 일에는 유독 어두워진다.

공포 때문일까?

스스로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일까?

혹은 밑바탕에 깔린, 인간에 대한 신뢰 때문일까.

처음 그녀를 만날 때를 떠올렸다.

빼앗을 것도 없는데, 산적이 왜자신을 쫓아오냐고 순진한 눈으로 묻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능력치가 조금 오르기는 했지만.

지금이나 그때나, 그녀의 본성은 달라지지 않았다.

도적 두목이 루비아에게 두꺼운 칼을 겨누며 말했다.

"후후후. 네년을 내 노예 목록에 추가시켜 주마."

루비아는 혹시 무슨 마가 낀 게 아닐까.

왜 저런 것이 계속 꼬이는 걸까.

한두 번이 아니다.

네크론 신사회.

유블람 경비대.

이제는 저런 것들까지.

나는 슬쩍 대검을 들어 올리면서 두목에게 물었다.

"너희들, 이런 일이 자주 있나?"

한 손으로 대검을 너무 쉽게 들어올려서 일까.

낄낄대는 분위기가 한순간 조금경직됐다.

두목은 한 걸음 뒤로 물러가며, 내말에 엉뚱한 대답을 했다.

"그런 칼을 쓰니 힘은 제법 있는 모양이군. 함께할 텐가?"

"함께. 하자고?"

"그래. 같이 돌리자고. 아가씨의 수행기사 따위를 하는 모양인데. 솔직히 말해 봐. 많이 굶주렸지?"

"흐흐. 저런 몸매를 옆에서 보며 안 그랬을 리 없잖아. 대체 얼마나하고 싶었을지 상상도 안 돼. 좋아!

대출혈 서비스다. 네가 1번이야.

여기서 사막에 시체로 묻히느냐, 평소에 꿈만 꿨던 걸 하고 우리와 함께하느냐! 쉬운 선택이지."

덩치 큰 '독사'의 커다란 목소리가 사막에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어느새 열 대가 넘는 화살촉이

빼곡히 나를 겨냥하고 있었다.

그때 였다.

- 피리리리릭!

쿠크리가 날아와서 도적 두목의 칼을 든 손목을 날려 버렸다.

손목에서 피가 뿜어져 허공으로 분수처럼 뿌려졌다.

- 다그닥! 다그닥!

아까부터 빠른 속도로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던 레나였다.

은신 스킬을 쓴 탓인지 도적들은 레나의 존재조차 감지하고 못하고 있었다.

- 피리리릭!

부메랑 하나가 더 날아와서 도적두목의 남은 손목을 잘라 버렸다.

어느새 십여 미터로 거리를 좁힌 그녀가 후드를 살짝 내리고 차갑게 중얼거렸다.

"이런 게 출혈 서비스지. 서비스더 해 줄까?"

212화 9:1 (7)

***************************************************

- 뭐, 뭐야? 얘가 왜 여기 있어?

어떻게 쫓아온 거지?

도적단과 한바탕 맞붙을 걸 기대했는지,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듯이 낄낄거리며 머리 위를 날아다니던 아이작이 기겁했다.

레나는 도적 사이를 말을 탄 채 지나가며 비스듬히 구부러진 칼을 휘둘렀다.

칼이 길면 원심력이 크고 속도가 빨라지겠지만, 레나가 꺼낸 칼은 기묘하게도 칼끝으로 갈수록 뒤쪽도신이 두꺼워지는 칼이었다.

그녀는 한쪽에만 날이 선 칼을 마치 추처럼 빙빙 돌리며 도적들 사이를 누볐다.

빠르게 서너 번 돌린 뒤 내리치는 공격을 받아치는 도적들은 한 명도 없었다.

갑자기 사라진 손목을 찾는 비명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놀라울 정도로 효율적인 움직임이었다.

인간의 목은 뼈가 두껍고, 각종근육과 피막이 잔뜩 붙어 자르기가 상당히 까다롭다.

하지만 손목은 그보다 훨씬 쉽게 잘린다.

당당하게 길을 가로막았던 사막도적들은, 어느새 춤추고 소리를 지르며 사막에 붉은 물을 뿌리는 광대들로 변해 있었다.

- 피잉!

시위를 당겨야 할 손이 잘린 탓에 화살은 푸른 하늘을 향해 날아가거나 붉은 모래 속에 처박혔다.

레나에게 왜 쫓아왔는지 묻기도 전에 도적 열 명이 죽고, 열 명이 혼비백산해서 도망갔다.

뒤쪽에 구경하고 있던 상인들도 사태를 파악하고 도적들보다 한발앞서 도망가고 있었다.

그들을 막 쫓아가려는 레나 옆에 말을 달려 붙었다.

"잠깐! 어떻게 여기까지 우리를 쫓아온 거지?"

모래를 박차며 달리는 말 위에서 레나가 흘끗 우리를 돌아봤다.

그녀는 터번을 들어 얼굴에 묻은 피를 먼지처럼 털어내며 말했다.

"이럴 시간이 없다. 일단 이들을 전부 죽이고 이야기하지."

"급한 것 같은데. 방해 안 되게 여기에 남아 있을게요!"

루비아가 끙끙거리며 조심스럽게 말에서 내렸다.

어느새 타고 내리는 것 정도는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 걱정이라도 되냐? 크크. 내가 같이 있어 주마.

"으음.

엉겁결에 루비아를 남기고 밀리듯도적들을 쫓았다.

- 부응! 퍼걱!

도망가는 도적 두 명의 몸을 통째로 갈라 버렸다.

가로로 몸이 잘려 나가며 시뻘건내장이 모래 위로 후두둑 떨어져내렸다.

지금까지 그녀의 말을 들어 손해본 적은 없었으니까.

레나는 첫 열 명의 손목만 깔끔히 잘라 냈지만, 나까지 그럴 필요는 없었다.

남아도는 게 힘이었다.

지금까지 안 아끼고 계속 찍어 댄탓에 힘 스탯만 90이 넘어간다.

말 위에서 한 손으로 든 대검을 평행으로 휘둘렀다.

풍압에 말려, 낙타 위에서 기우뚱균형이 풀어진 도적이 대각선으로 몸이 터져 나갔다.

손목이 아니라 몸통이 잘려 나가 하얀 척추와 붉은 내장이 드러나자 근처에 있던 도적 두 놈은 놀라서 아예 낙타에서 떨어졌다.

떨어진 두 놈의 목으로 레나가

단검을 던졌다.

손목 아래 투척 장치가 있는 둣, 스냅을 거의 주지도 않았는데 목을 반쯤 관통할 정도로 칼날이 강하게 들어갔다.

한 명은 눈을 부릅뜬 채 죽었고 다른 한 명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죽었다.

"으아아아아!"

따라잡힌 도적 한 명이 뒤를 향해막무가내로 철퇴를 휘둘렀다.

나는 균형도 안 잡은 상태에서 그냥대검을 쭉 뻗어 철퇴를 쳐내고, 몇초 동안 배를 칼로 꿰어 든 뒤곧바로 모래 위에 내다 버렸다.

"넷 남았군."

"당신. 생각보다 훨씬 말이 잘통하는데? 이랴!"

레나는 질 수 없다는 듯 빠르게 말을 달렸다.

혼자 떨어져 멀리 도망가는 도적한 명의 목을 단칼에 날려 버렸다.

아직도 낙타 고삐를 잡고 있는, 목없는 녀석의 새빨간 피가 푸른 하늘로 솟아올랐다.

남은 셋을 쫓아갔다.

"으아! 으아아아!"

한 덩어리가 되어 달려가는 녀석들이, 내가 뒤에 붙은 걸 알아챘다.

"흩어져! 흩어져!"

서로 다른 세 방향으로 흩어지려할 때, 270도로 칼을 휘둘러서 셋모두를 한 번에 베어 버렸다.

그제야 옆으로 붙은 레나가 작은 탄성을 질렀다.

"당신. 대단한 전사로군."

대검에 묻은 피를 가볍게 턴 뒤레나를 바라봤다.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지? 추적장치는 이미 떼어 냈을 텐데."

"들켜 버린 건가. 대단한 솜씨네.

당신 연기에 당해 버렸어. 시조와 샤루니안은 북쪽으로 갔지."

그렇다면 더 알기 어려웠다.

"그럼 너는 왜 여기로 온 거지?"

레나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건.

말을 가만히 기다렸다.

"추적 장치는 북쪽을 가르켰지만.

만에 하나라도, 당신이 여기 오면 위험해지니까. 혹시 몰라 경고하러온 거다."

"위험하다고?"

나는 바닥에 널려 있는 시체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 정도의 인간들이라면 스물이 아니라 이백 명이라도 아무 부담이 없다.

루비아를 지키면서 싸우는 건 또다른 일이겠지만, T&T 본부장인지금의 레나가 그걸 걱정할 이유는 없을 것 같았다.

그녀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혹시. 피리를 불려고 하는 놈은 없었나? 당신이 죽인 도적들 중에 말이야."

"전혀."

그런 녀석은 없었다.

모두 낙타 고삐를 쥐고 도망가거나 무기를 들고 발작하듯 덤볐을 뿐.

레나가 바짝 긴장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사막 도적단이라고 했는데.

- 히히힘!

레나는 뭔가 떠오른 듯 다시 말에 박차를 가했다.

뭘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그녀의 뒤를 쫓아 모래 언덕을 넘었다.

부리나케 도망가고 있는 상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왜! 왜 우리까지 쫓아오는거요? 도적이나 죽이면 되지!"

후미에 있는 상인이 외쳤다.

낙타를 타고 필사적으로 도망가고 있었지만, 짐을 실은 채 이동하는 탓에 말보다 느렸다.

레나는 대답도 없이 말을 달리며 차분히 얇은 투창을 꺼냈다.

희한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상인들이 사막 도적들보다 낙타를 모는 솜씨가 더 뛰어난 것 같았다.

두 무리가 실제로 싸웠다면, 왠지 상인들의 압승으로 끝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피이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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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창이 날아가며 뒤쪽에 있는 상인한 명의 어깨를 날려 버렸다.

살아서 비명을 지르는 놈을 보며 레나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피했어.?"

비명을 지르는 녀석이 외쳐 댔다.

"대장! 신神.! 신을.!"

신이라고?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였다.

- 뿌우우우우.! 뿌우우우.!

도망가는 상인들 가운데서 기괴한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종류의 음색이었다.

구불구불한 수염의 상인 두목이, 낙타에 거꾸로 탄 채 우리를 보며 피리를 불고 있었다.

우리에게 물을 건넸던 녀석이다.

도대체 뭘 가지고 만든 건지 짐작할수 없는 묘한 모양의 쁠피리를 보고 레나의 안색이 변했다.

"발밑을 조심해라. 그걸 경고하기 위해 쫓아온 거다."

"발밑이라고?"

[탐지 Lv. 7을 작동합니다!]

모래 아래를 중점적으로 탐색했다.

하지만 아래쪽에서는 어떤 기색도 느껴지지 않았다.

- 화악!

엉뚱하게도, 도망가는 상인들 중 하나가 꽃처럼 쪼개지며 붉은 피가 꽃잎처럼 뿜어졌다.

모래 바닥에서 솟아오른 몸통이 피를 흠렉 머금은 채로 흔들렸다.

"대, 대장! 이게 어떻게 된.!"

- 푸욱!

다른 한 명의 몸도, 낙타와 함께 모래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모랫바닥이 몇 번 들썩이더니 곧새빨간 피로 물들었다.

- 파악!

씹다가 뱉은 것처럼, 뼈가 전부 드러난 시체가 너덜너덜해져 다시 밖으로 던져졌다.

- 와작! 와자작!

순식간에 상인 한 명이 서 있는 자리에서 바닥으로 끌려 들어가서 씹어 먹혔다.

눈썹이 짙으며 눈이 부리부리한, 예오만이라는 이름을 가진 상단주가 피리를 불다 말고 멈췄다.

그가 잘생긴 얼굴로 허공을 향해울부짖었다.

"시, 신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계, 계, 계약이.! 끄헤엑!"

상단주가 뭔가 낌새를 눈치채고 옆으로 빠르게 피했다.

민첩한 행동의 결과로 그의 몸은 왼쪽 절반만 뜯어 먹혔고, 먹히지 않은 오른쪽은 잠시나마 모래 위에 서 있다가 풀썩 쓰러졌다.

'신'이 예오만을 먹어 치울 때에야 생긴 모양을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밖으로 드러낸 길이만 해도 십여미터에 달했다.

둘레는 웬만한 영주의 성 기둥보다두 배는 더 두꺼웠고, 바깥쪽으로 다섯 개의 칼날이 달린 입안에는 끝부분이 인간의 손 형태인 혀가 매달려 있었다.

최대한 순화해 말하면 칼날 달린 지렁이 형태인 녀석은 입을 닫고 솟구치면 다섯 개의 칼날로 인간을 꽃잎처럼 잘라 냈고, 입을 쫙 열고 솟구치면 혀로 먹잇감을 감아쥐고 촘촘한 이빨로 아작아작 씹었다.

하지만 큰 긴장은 되지 않았다.

허공에 상세히 떠오르는 상태창때문이었다.

['사막의 신'과 만나셨습니다!]

[스페셜 필드 보스입니다.]

[동화울 70.5% 이하.]

[진명: 애쉬 웜]

[랭크: B더블 플러스]

[예메라의 힘에 의해 산 채로 타서 죽은, 옛 인간들의 재로 만들어진 벌레입니다.]

[빙계 공격에 암전한 모습을 보일확률이 높습니다.]

모랫바닥에 파고든 녀석이 점점속도를 높인다.

다가오는 게 느껴진다.

"당신! 뭘 하는 거야!"

레나는 준비해 온 장치 같은 걸 양손에 장착하고 있다.

폭탄이라도 쏘아 낼 셈일까?

말에서 훌쩍 내려섰다.

이 녀석까지 말려들게 할 필요는 없다.

"그냥 보고 있어라."

레라지에의 유적에 있던 녀석을 처리할 때처럼 뭔가에 씌이는 듯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내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중 Lv. 2를 발동합니다!]

[탐지 Lv. 7을 하나의 대상에 사용합니다.]

[추적 Lv.15 발동!]

[타깃: 애쉬 월]

[타깃의 은신 레벨이 당신의 추적스킬보다 낮습니다. 지형 은신을 실시간으로 간파합니다.]

[심안心眼(C+) 적용.]

녀석에게 정신을 집중하자, 모래아래쪽이 투명한 물 아래를 보는 것처럼 훤히 느껴지는 것 같았다.

[특수 상태: 명경지수明鏡止水에 도달하셨습니다.]

[관련 스킬의 경험치가 모두 크게 상승합니다.]

[검기 최대 출력.]

'결빙.'

[더블 캐스팅.]

'결빙.' 상태창이 가르쳐 줘서가 아니다.

그냥 내가 알고 있는 걸 상태창이 표시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질주 Lv. 7을 발동합니다!]

[500%의 속도를 낼 수 있습니다.]

[남은 시간: 24:59]

? 파사삿!

넘쳐나는 마력으로 바닥을 비스듬하게 얼린 뒤, 딛는 얼음이 모조리깨져 나갈 정도로 강하게 앞으로 몸을 쏘아 냈다.

213화 9:1 (8)

***************************************************

'사막의 신'과 내 사이의 거리가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잠시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녀석이 다시 모래 속으로 몸을 처박았다.

아래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진동을 피해 왼쪽으로 달렸다.

바로 뒤에서 몸을 솟구친 녀석이 입을 벌리고 달려들었다.

사막에서 지형 보정이라도 받는지, 질주 스킬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따돌리기 쉽지 않았다.

달리던 중에 대검의 방향을 돌려뒤로 강하게 휘둘렀다.

- 까앙!

달려드는 녀석의 머리 쪽 칼날에 맞아 몸이 거칠게 몇 바퀴 구르며 멀리 튕겨 나갔다.

회귀 전에 있었던 늪의 악령과의 싸움이 떠올랐다.

그 녀석보다 훨씬 강하고, 크고, 빨랐다.

하지만 나 역시 그때와는 다르다.

자세를 잡고 땅에 발을 디뎠다.

사방이 온통 모래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칼에 바람의 힘을 불어넣고 앞으로 휘둘렀다.

[냉기 폭풍 Lv. 1을 발동합니다!]

- 휘이이잉!

얼어붙은 바람이 뿜어졌다.

레라지에의 성지에서 루-륨을 흡수하고 나니, 마력을 발동하는 제한 이 훨씬 높아진 게 느껴졌다.

예전처럼 무리하게 발동한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사막의 신'이 일으킨 모래 먼지가 얼어붙으며 아래로 가라앉았다.

순간 모래 아래로 웅크리고 있던 거대한 '신'이 바닥에서 위로 솟아올랐다.

놈은 다섯 개의 칼날이 달린 입을 살짝 벌리고, 나를 향해 평행하게 돌진해 왔다.

모래 아래에서 바깥으로 나올 때 속도가 최고조에 달하는 듯했다.

십여 미터 앞에서 애쉬웜이 입을 꽃처럼 쫙 벌렸다.

머리는 세 배 정도 커졌고, 다가오는 속도는 그보다 더 빨라졌다.

멀리 피할 수는 없었다.

한 치 간격으로 오른쪽으로 구르며 칼을 옆으로 그었다.

'결빙.'

'질풍.'

- 화아아악!

검기가 '사막의 신'을 십여 미터이상 길게 베고 지나갔다.

상처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쳤다. 새까만 몸통에 난 긴 상처가 하얗게 얼어붙었다.

녀석은 지지 않고 빠르게 꼬리를 휘둘렀다.

공격을 예감하는 순간에 냉기가 흐르는 검을 깊숙히 박았다.

- 콰광!

강한 충격이 온몸을 덮쳤다.

[체력이 15% 감소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칼을 박은 성과는 있었다.

'사막의 신'의 몸 전체에 걸친 긴상처가 허공으로 튕겨진 내게 훤히 내려다보였다.

대검에 재가 묻어 새까맸다.

끈적하거나 냄새가 나지는 않았다.

인간을 씹어 먹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지만, 녀석은 유기체가 아니다.

- 부응!

칼을 옆으로 휘저었다.

허공에서 검압을 이용하면 원하는 곳으로 떨어지는 게 가능하다.

튕겨지는 힘을 이용해, 녀석에게서 되도록 멀리 자리를 잡아 착지했다.

[냉기 폭풍 Lv. 1을 발동합니다!]

나는 칼을 들고 녀석을 겨냥했다.

질주 스킬로 거리를 벌리며 계속마법을 쏘아 냈다.

[냉기 폭풍 Lv. 1을.]

다섯 개의 칼날이 달린 입을 쫙벌리고 달려드는 녀석에게 차가운바람을 먹였다.

한 번 마법에 맞을 때마다 놈이 조금씩 움찔한다.

- 쿠구구궁!

거리가 유지되고, 녀석이 다시 아래로 들어갔다.

아예 깊숙이 들어간 건지 기척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다.

탐지 영역을 아래쪽에 집중시켰다.

'여기다.'

아래에서 비스듬히 솟구치는 기척을 그대로 찍어 내렸다.

- 깡!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강하게 울려 퍼졌다.

솟구쳐 오른 녀석은 머리에 달린 다섯 개의 칼날 중 둘을 내 대검에 들이댔다.

칼날의 강도는 비슷했지만 질량의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몸이 높이 떠올랐다.

그 순간이었다.

놈의 움직임에 휘말려 피떡이 된상인들이 내려다보였다.

공포로 다리가 굳어 제대로 도망가 지도 못하고 있던 녀석들이었다.

그 가운데 한 명을 꽁꽁 결박해, 멀리 끌어낸 레나가 이쪽으로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저건.!'

레나에게 일단 피하라고 소리치려할 때였다.

- 쉬이익!

그녀의 팔목에서 투명한 줄이 솟아올랐다.

절단이 목적인 날카로운 와이어는 아니었다.

위로 솟구친 그녀는 '사막의 신'의 몸통 전체에 빛나는 갈고리를 꽂고 길게 감아 가기 시작했다.

투명한 줄은 레나의 팔목에 부착된기구에서 살아 있는 듯 쏘아 내지며 아름답게 춤을 췄다.

- 좌르록!

감기는 작업이 끝나자 '신'의 몸곳곳에는 디디고 잡기 편한 수많은 마디가 생겨났다.

레나가 '신'의 몸을 발로 차 디뎌달리면서 하얗게 얼어붙은 상처에 뭔가를 연속적으로 던져 넣었다.

- 콰과과광!

던져 넣은 것들이 몸통 안쪽으로만 방향성을 갖고 터져 나갔다.

마지막 마디를 디디고 비스듬하게 허공으로 몸을 던질 때.

레나가 나와 교차했다.

그녀가 소리쳤다.

"지금 쳐!"

'신'이 충격에 잠시 움찔하는 사이, 허공에서 칼을 들어 위에서 아래로 다시 내리쳤다.

[지혜가 충분히 높습니다.]

[예메라의 교리 Lv.1 의 숨겨진 기능이 발동됩니다.]

[여신의 저주를 받은 피조물들의 약점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참격 Lv.2]

? 칼날이 지나간 자리가 으스러집니다.

[일도양단 Lv.2]

- 상대의 방어력을 대부분 무시합니다.

[냉기 폭풍 Lv.2 발동합니다!]

- 사가가각!

녀석이 레나를 잡아먹기 위해 막입을 벌린 순간.

휘몰아치는 차가운 검기가 새까만 애쉬 월의 배를 머리 끝에서 배까지 갈라냈다.

- 화아악!

배가 갈라지며 붉은 피 대신 까만 저주가 사방으로 튀어나왔다.

저주가 흩뿌려진 모래가 새까맣게 물들었다.

"마디. 마디를 써.!"

저 멀리 착지한 레나가 허공에서 싸우는 나를 바라보며 외쳤다.

물론 그럴 생각이다.

그녀가 만들어 낸 '손잡이'를 잡고 계속 애쉬웜을 내려쳤다.

[〈속성: 산성酸性 Lv. 5〉를 칼에 덧씩습니다!]

[냉기 폭풍 Lv. 2를??????.]

새파랗게 달아오른 검이 상처를 산성으로 녹이고, 엉망이 된 부위를 다시 얼려 버렸다.

"우와.

감탄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슬쩍 아래를 봤다.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날 바라보며 레나의 모습이 보인다.

사실 내가 고마워야 할 입장이다.

그녀가 만들어 준 '손잡이'가 곳곳에 달려 있었다.

살짝 밑으로 내려가 목 즈음에서 가로로 칼을 휘둘렀다.

[일도양단 Lv.2 발동!]

상인들의 시체라도 소화되고 있던 부위인지 새빨간 피가 터져 나간다.

"괜히. 걱정한 건가.

탐지 스킬을 최대로 발동한 탓에, 아래에서 작게 중얼거리는 레나의 목소리까지 들린다.

걱정해줬다니 고맙긴 하다.

눈앞에서 얼굴이 꺼멓게 말라 버린 상인이 상처 밖으로 굴러떨어진다.

레나가 만든 손잡이를 잡고 당기며 몇 번씩 애쉬웜을 베어 냈다.

- 촤아악!

자리를 이동할 때마다 씹어 삼킨상인들의 시체가 굴러떨어진다.

슬슬 끝낼 때가 된 것 같았다.

마지막은.

'발도.' 칼이 꽂힌 애쉬월의 몸통 자체를 칼집처럼 사용하며 강하게 빼서 휘둘렀다.

[스킬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서번트 시스템: 마스터가 당신의 활약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숙련도가 30% 추가 상승합니다.]

서번트 시스템.

레나뿐만 아니라, 루비아가 가까이 다가오는 듯하다.

아이작이 데리고 오기라도 한 걸까.

마음이 급해진다.

'발도.'

- 사가각!

검기가 다시 한 번 애쉬웜의 몸을 가르며, 지나간 자리를 다시 한 번모조리 얼렸다.

움직임이 완연히 둔해진다.

'발도.'

아래에서 위로 솟구쳐 오르며 얼어붙은 부위를 다시 한 번 올려쳤다.

장식용이라고 보기에도 터무니없이 무거운, 10킬로에 가까운 쇳덩이를 아래에서 위로 올려쳤지만 내려치는 것과 위력이 동일했다.

힘 스탯이 90을 넘은 상태에서는 대검 무게나 중력 같은 건 아무런고려 요소도 되지 않았다.

- 콰광!

얼어붙은 부위가 부서져 나가면서 놈이 이십 미터가 넘는 몸을 부르르떨어 댄다.

- 쿠궁!

바닥 착지와 동시에, 놈의 긴 몸이 모래 위로 쓰러졌다.

상태창이 연달아 떠오른다.

['사막의 신'을 처리하셨습니다.]

[랭크: B더블 플러스]

[최후의 일격: 발도]

[숙련도가 50% 추가 상승합니다.]

강한 적을 쓰러트려서인지, 아니면 동화율이라는 게 낮아져서인지.

이제 마지막 일격까지 신경 써 주는 모양이다.

[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

[발도 Lv.5-> Lv.6]

[스킬 등급이 '희귀'로 조정됩니다.

발도에 속성이 부여됩니다.]

[속성: 대검(최다 사용)]

[힘 스탯이 85 이상입니다.]

[특전: 태도무쌍太刀無雙 획득!]

특전의 자세한 효과를 확인했다.

[1? 2인을 기본으로 하는 발도술의 범위가 3? 10인까지 증가합니다.

여럿을 상대로 해도 발도의 위력이 줄어들지 않습니다.]

[중형 이상의 적을 상대할 경우, 스킬 위력이 15% 상승합니다.]

나쁘지 않다.

아니, 나쁘기는커녕 한 번에 많은 적과 싸울 일이 갈수록 많아질 내게 꼭 필요한 스킬이다.

거대한 적을 상대할 경우 위력이 상승하는 것도 매우 마음에 든다.

반투명한 푸른 상태창이 끊임없이 허공에 떠올랐다.

[용사 포인트를 산정합니다!]

오랜만에 보는 용사 포인트다.

몇 가지 복잡한 계산이 지나간다.

랭크니, 난이도니 하는 것들이다.

물론 마지막 숫자만 보면 된다.

[1, 936포인트를 획득하셨습니다!]

[상점 이용 권한을 산출합니다.]

[누적 포인트, 견습 한계 돌파.]

- 띠링!

['일반(Normal)'으로 상점 권한이 상승했습니다. 더 이상 견습생으로서의 보호를 받을 수 없습니다.]

[포인트 시스템이 표기의 용이성을 위해 퍼센트로 변화합니다.]

[현재 구매력: 1.9% (일반)]

딱히 더 용이한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원래의 1, 000포인트가 1%로 환산되는 것 같았다.

포인트 아래쪽에 길다란 바 형태가 떠올랐다. 오른쪽 빈 공간에 하얗게 1.94%라는 숫자가 쓰여 있다.

이 길다란 바를 다 채울 경우에, 다음 등급으로 넘어간다는 사실이 직관적으로 느껴졌다.

이제 슬슬 끝인가 했더니, 골라야 할 게 하나 더 남아 있었다.

거의, 죽고 다시 시작할 만큼이나 상태창이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보유하신 구매력의 사용 시점을 결정해 주십시오.]

[상점 이용이 늦어질수록 강력한 보상을 얻을 수 있습니다.]

[2.5%]

[5%]

[10%]

[20%]

[100%]

묘하게 분리된 다섯 개의 선택지가 나타난다.

마지막에는 숫자가 20에서 단번에 100으로 된다.

100%까지 구매력을 충전하려면

이런 것들을 얼마나 잡아야 하는지 솔직히 상상은 잘 가지 않는다.

나는 생각에 잠긴다.

2.5%를 선택한다면 금방 보상을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모았다 쓸수록 큰 보상을 얻는다는 말이 계속 걸린다.

추가 정보를 얻기 위해 선택지를 하나씩 계속 바라봤다.

기이하게도 머릿속에 직접 정보가 흘러들었다.

첫 번째, 2.5%.

각종 영약이나 장신구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후작이 마셨던 황금빛 엘릭서나, 목에 걸고 있는 것만으로도 귀신을 쫓는 페티쉬, 금화가 꼬이는 팔찌같은 것들의 이미지가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열기와 냉기, 전기에 받는 피해를 줄여 주는 것도 있었다.

공통점은 간단했다.

자기 자신에게 쓰는 것들이었다.

시선을 내려 5%를 향한다.

본 적 없던 창이나 검 같은 것이 떠오른다. 이미지는 완전하지 않다.

흐릿한 부분들도 많다.

상처가 없는 적에게 세 배 피해를 주는 단검, 냉기 마법이 걸린 칼과 화염 마법이 걸린 장궁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일단 한 번 찔리면, 상처가 낫지 않게 되는 갈색 창도 보인다.

누군가를 겨냥할 물건들이다.

나는 시선을 내렸다.

10%는.

- 띠링!

요란한 효과음이 울렸다. 허공에 반투명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동화울이 너무 높습니다.]

10%나 20%는 뭐가 있는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집중.'

'명상.'

또렷하지는 않아도 약간의 느낌은 잡을 수 있었다.

흐릿한 안개에 휩싸인 듯.

수많은 군세나 거대한 요새에 대항하는 감각이 느껴졌다.

100%는 아예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였다.

- 치직.

- 치지직.

100%.

마지막 선택지가 아예 선택할 수 없게 되는 것처럼 조금씩 흐려지고 있었다.

충동이 일어났다.

이걸 선택해야 하나?

어차피 여기에 제대로 된 이해나인지 따위는 있을 수 없다.

이런 기괴한, 반투명한 창을 볼 수 있는 것도 오직 나 하나밖에 없다.

아이작이나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조언을 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 치직

마지막 100%는 계속 흐려졌다.

조금 주저했지만, 결국은 충동에 굴복해 '100%'를 선택했다.

허공에 상태창이 떠올랐다.

[100%를 선택하셨습니다!]

[구매력 최대치에 도달할 때까지 상점 이용이 불가합니다.]

[선택이 확정되었습니다.]

[구매 가능 품목이 한 종류로 확정됩니다. : 세계부정Anti-World]

214화 9:1 (9)

***************************************************

눈앞에서 다른 선택지들이 사르르지워진다.

객기를 부린 걸지도 모른다.

세계. 부정이라니.

조금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

유혹하듯 흐릿흐릿하게 깜빡이는 상태창에 속아 넘어간 느낌도 든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빨리 얻을 수 있는 보상을 선택해야 했을까?

5%를 골라 괜찮은 무기를 얻는 게 현명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더 이상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메시지도 마음에 걸린다.

설마 더 이상 반복해서 살아나지 않는다는 뜻일까?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일단 전진하는 수밖에.

그 아래로 이어진 레벨 업 메시지를 치우고, 적당히 포인트를 분배했다.

간만에 확인하는 상태창이다.

[Lv.28(226)]

[체력: 81]

[힘: 93]

[민첩: 84]

[지혜: 70]

예전에 에라스트 성에서 한차례 날된것과, 유블람 여관에서의 일, 그리고 레라지에의 성지에서 얻은 경험치에다, 이번에 '사막의 신'까지 해치우고 난 결과다.

주로 루-륨에 신경을 써 왔지만, 레벨이 상승할 때마다 스탯 분배는 빠짐없이 꼼꼼히 하고 있었다.

굉장하다면 굉장한 수치다.

웬만한 수준에서는 내게 손도 대지 못한다.

스킬이 전혀 없어도, 단순한 힘과 속도로만 밀어붙여도 부대 하나를 박살 낼 수 있는 힘이다.

내가 속했던 해골병사들이나 그에 맞부딪친 노예병의 전열戰列 정도가 아니라, 숙련 장창병이나 방어력이 높은 중보병 부대도 혼자 어렵잖게 박살 낼 수 있을 거다.

B더블 플러스라는 높은 랭크의 녀석을

이렇게 쉽게 잡은 것도, 꾸준하게 쌓아 온 스탯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당연한 소리다.

"당신. 정말 대단하던데."

어느새 곁에 다가온 레나의 말이 나를 상념에서 깨웠다.

"고맙다. 네가 큰 도움이 됐다."

디디고 잡을 마디를 만들어 주지 않았다면 훨씬 시간이 걸렸을 거다.

지반이 단단한 것도 아니고, 녀석은 잡기 어려울 정도로 빨랐으니까.

"내가 뭘. 멍하니 구경만 했지."

그녀가 날 바라보는 눈빛이 조금씩 묘해진다.

기억 없는 레나에게 이런 호의적인 시선을 받자 복잡한 마음이 든다.

"혹시 당신 일행, 어디 소속된 게 아니면 우리 길드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됐다."

"말도 끝까지 안 들어 보는 거야?

매정한데."

"추적 장치까지 달아 놓은 자들과 합류할 생각은 없어서."

"흐응."

레나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물론 추적 장치가 이유는 아니지만, T&T에 들어갈 생각은 없다.

레나라면 몰라도 T&T 의 다른

녀석들과 연을 맺고 싶지는 않았다.

누군가와 새롭게 얽히고 싶지 않다.

루비아도 제대로 도와주지 못하고, 모험이라는 명목으로 방황하게 하고 있는 처지다. 레나가 눈썹을 살짝내리며 말했다.

"너무 단호하게 자르시네."

흘끗 시선이 마주쳤다.

상처받은 표정이 보였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정말 권유대로 T&T에 들어갈까 망설이게 만드는 눈빛이었다.

고개를 돌렸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거대한 애쉬웜의 사체에서 초록색빛이 올라온다.

정수 흡수의 시간이다.

가만히 손을 뻗었다.

레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 모습을 바라본다. 저번 생에도 확인했지만, 그녀는 이 빛을 보지 못한다. 물론 다른 자들도 마찬가지다.

권능을 전수해 준 기스-제-라이 자신을 제외한다면.

[사막 적응 Lv.1.]

[사막 적응 Lv.2.]

[사막 적응 Lv. 5를 흡수했습니다!]

흡수 속도가 꽤 빠르다.

[해당 지형(사막)에서 다음 효과가 주어집니다.]

- 경험치 습득 15% 상승.

- 지형 패널티를 받지 않습니다.

- 오아시스와 야자나무를 발견할확률이 3배 상승합니다.

- 모래 폭풍과 조우할 확률이

65% 감소합니다.

- 유사流砂를 감지합니다.

단번에 5랭크의 지형 적응까지

흡수해 버린다. '사막의 신'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던 녀석인 만큼사막 적응은 확실한 모양이다.

모래 아래로 거대한 몸을 자유롭게 운신하던 녀석이니 이 정도 되어야 맞기는 하다.

사막 적응을 끝내자 초록색 빛이 반쯤 사그라든다.

계속 정수를 흡수하자 재미있는 게 나왔다.

[특전: 사무친 원한]

[예메라에게 터무니없이 살해당한 자들이 가지게 된 원한입니다. 예메라를 섬기는 적에게 15%의 추가 데미지를 가합니다.]

예메라의 추종자를 적으로 얼마나만나게 될지는 몰라도, 15%의 추가 데미지라면 당연히 나쁘지 않다.

흡수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혼백 씹고 뱉기(희귀) Lv.1 을흡수합니다.]

- 살해한 상대의 혼백을 씹은 뒤뱉어 냅니다. 영격靈格을 보존하게 할 수 없으며, 약한 상대의 혼백만 가능합니다. 마력이 아주 미약하게 차오릅니다.

까닿게 변해 있던 상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무렇게나 씹힌 건 그 녀석들의 육체뿐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체력 스탯이 1포인트흡수되며 애쉬웜에게서 뿜어 나오는 초록색 빛이 사라진다.

"당신, 방금 뭘. 한 거지?"

"글쎄. 죽은 자의 유지를 이었다고 해 두지."

정수를 볼 수 있는 것도, 그리고 흡수할 수 있는 것도 이 세계에서 나와 기스-제-라이 둘뿐이다.

거대한 녀석을 처리한 것치고 초록빛정수는 꽤 빨리 사라졌다.

스탯이 오르면 오를수록, 흡수로 얻을 수 있는 능력은 무척 빠르게 줄어든다.

납득할 만한 일이다.

이게 계속 유지된다면.

기스-제-라이는 혼자서 이 세계를 멸망시켰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지금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고민하는 사이, 레나는 애쉬웜의 영역 밖으로 끌어다 놓은 상인에게 사뿐사뿐 다가갔다.

그 많던 상인들 중 레나가 끌어다놓은 단 한 명만 살아남았다.

상단장의 곁에 있던 남자다.

부두목 정도는 되었던 것 같다.

레나가 칼을 빙빙 돌리더니 녀석의 가슴팍에 대고 물었다.

"말할 기회는 줄께. 흉측하고 커다란벌레는 어디서 나온 거지? 피리는 누가 준 거고?"

결박당한 상인이 모래 위에서 뒤로 주춤거린다.

"끄으. 일단 날 살려 준다고 약속해 주쇼! 전부 다 이야기할 테니!"

레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럴까? 어렵지 않지."

상인의 눈빛에 희망이 스쳐갔다.

"당신들이 모를 비밀까지 다 말해주겠소. 그러니 낙타 한 마리도.

같이 준다고 약속해 주쇼."

레나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품에서 은화 하나를 꺼내상인의 눈앞에 내보였다.

"던져서 앞면이 땅에 닿으면 살려주고, 낙타와 물까지 다 줄께."

상인은 침을 삼키며 앞면과 뒷면을 확인했다. 앞뒷면이 다 있는 평범한 동전이었다.

"던질 때 내가 던져도 되나?"

"그래. 마음대로 하라고."

레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인의 얼굴에 완연히 화색이 돈다.

동전 정도는 원하는 쪽으로 나오게 던질 재주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그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우리는. 크흠! 사실 사막 최고의 도적단이었지."

녀석은 보라는 듯 제 팔뚝을 움찔거렸다. 레나가 대신 소매를 걷어줬다. 굵은 팔뚝에 새겨진 긴 꼬리전갈 문신이 드러났다. 레나가 놈의 문신을 살살 만지며 말했다.

"호오. 너희가 바로, 그 유명한 〈독주머니〉구나?"

상인이 레나의 손이 닿은 팔뚝을 씰룩거렸다.

"딱 맞췄소. 아가씨가 뭘 아는군.

지금은 단원들 이름까지 전부 다바꿨지만. 대단했소이다. 상인들에게 강탈한 짐이 워낙 많아서, 이렇게 상단을 차려 버릴 정도였으니까."

'재밌네. 계속해 봐."

남자는 숨을 한 번 흑 들이쉬더니 말을 이었다.

"한창 여행자들을 사냥할 때였지.

몇 명은 일부러 풀어 주고 화살 쏘기 연습을 하는데, 한 남자가 이쪽으로 똑바로 다가오더군. 머리를 싹 밀고 검은 수도복을 입은 남자였는데.

나이는 40 초반 정도였소."

레나는 이야기에 끼어들지 않았다.

남자의 문신에 손을 얹은 채 조용히 집중하고 있었다.

전직〈독주머니〉도적단원 상인이 침을 꿀꺽 삼키면서 말을 이었다.

"우리가 수도자들을 대하는 방식이있소. 깊은 유사流砂에 빠뜨려 놓고, 네가 섬기는 신에게 기도해서 도와 달라고 하게 만드는 거요. 유사에 빠져 본 적 있으시오?"

레나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없지."

상인은 두 손이 뒤로 묶인 채로도, 은근히 의기양양한 태도로 레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발이 아래로 들어가는 건 부드러운데, 밖으로 빼내려면 마치 딱딱하게 굳은 돌에 박힌 것처럼 빠지질 않는다오.

그렇게 점점 아래로, 아래로 몸이 단단하게 고정되지."

레나는 '상인'에게 보여 준 은화를 손가락 위로 가볍게 굴렸다.

방패가 그려진 앞면과 밀이 그려진 앞면이 손가락 하나를 지날 때마다 한 번씩 뒤집히며 빠르게 지나갔다.

"듣고 있어."

"하지만 그 수도승은 달랐소. 칼로 위협해 유사에 들어가게 만드는 데까지는 성공했지. 우리는 신을 불러보라고 했소. 그는 품에서 피리를 꺼내 들더군. 그리고.!"

"재가 나타난 건가?"

레나가 애쉬웜의 거대한 사체를 가리켰다.

"그렇소! 수도사를 아래에서부터 태우고 꺼내더군. 우린 다 죽는 줄알았다오. 지, 진짜로 '신'이 나타나다니. r

"수도사는 어떻게 생겼지? 생긴 걸 자세히 말해 봐."

"얼굴이 길고 홀쭉했소. 눈은 움푹파였고. 머리를 밀기는 했지만, 좌우로 숱이 좀 빠졌소이다."

"흐음."

"우리를 죽이는 대신, 그는 거짓말처럼 피리를 불어서 다시 '신'을 모래아래로 사라지게 했지. 그리고 두목에게 피리를 건네주며 말했소. 원하는 대로 행패를 부리며 사막을 돌아다니다가. 감당할 수 없는 적이 나타나면 피리를 불라고. 그러면 계약에 따라 '신'이 적을 해치워 줄 거라고."

"그걸 믿었나?"

"솔직히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지.

하지만 일단 고이 가지고는 있었소.

버렸다간 무슨 화를 당할 줄 알고?

그러다 당신들을 만나 이렇게 된 거지.

이야기는 여기까지요."

"좋아."

현직 '상인'이 눈을 깜빡였다.

"이제 약속을 지켜야 하지 않겠소?

동전을 던질 테니 나를 이만 풀어주시오. 앞면이 바닥이랬지?"

레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 손으로는 놈의 포박을 끊어 주고, 다른 손은 앞으로 내밀었다. 가느다란손가락 위에서 앞뒤로 뒤집히던 동전이 상인의 눈앞에서 반짝였다.

"그럼.

남자가 막 동전을 집으려는 순간이었다.

- 콰득!

5로티짜리 은화가 레나의 손가락위에서 절반으로 접혔다. 방패가 그려진 앞면이 아예 사라졌다.

"던져 봐."

"이. 이게 무슨 짓이오!"

"평소에 하는 짓인데?"

tt 끄으으.!"

상인은 끙끙대며 양손으로 은화를 다시 펴려고 했다. 하지만 레나가 손가락 두 개로 접은 은화는 전혀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상인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지는 찰나에 레나가 놈의 목을 그었다.

모래 위에 피로 한 획이 더 그어졌다. 상인은 몸을 두어 번 움찔거리다 그대로 죽었다.

"깔끔하게 접었군."

나는 반으로 접힌 은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 그게.

레나는 나를 잠시 잊었던 것처럼 살짝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상인'의 이야기에 꽤나 몰입했던 모양이다.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 요즘 수도에서 유행이라서.

내가 너무했나?"

유행이라 따라 했다고 하기에는, 손가락으로 동전 굴리는 게 한두 번해 본 솜씨가 아니었지만.

문제 삼을 생각은 당연히 없었다.

"변명할 필요는 없다. 잘했어."

레나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나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던 과거의 그녀가 겹쳐 보였다.

분위기가 이상해져 말을 돌렸다.

"놈이 이야기한 수도사에 대해서 뭔가 알고 있나?"

"응. 잿빛 추기경 그레이시엄. 예메라의 사제장이야. 사막 지대인 제국서부에 던전이 많다는 이야기는 당신도 들었을 테지?"

"그래서?"

"자극할 수 있는 마물들을 모조리자극해서 출현시킨 뒤. 그 핑계로 군사를 일으켜서 대대적인 토벌을한다. 서부를 휩쓸고. 연합을 친다.

그게 지금 황제의 계획이야."

215화 9:1 (10)

***************************************************

"숨어 있던 녀석들까지 한차례 다쓸려 나가겠군."

아직 몬스터들이 많이 남아 있는 서부 사막.

하지만 그 대부분은 특별히 모래가 좋아서 여기 살아가는 게 아니다.

작렬하는 태양과 한 줌 습기조차 없는 메마른 공기.

그 환경보다도 인간이 두려운 탓에 사막에서 힘겹게 버티고 있을 터.

하지만 황실이 본격적으로 개입한 다면, 그들이 완전히 멸절될 것임은 당연한 일이다.

"놈들에게 닥칠 시련에 묵념이라도 보내자고. 그런데. '상인'들 물건은 내가 가져가도 될까?"

시체를 뒤지면서 누구에게 승낙을 구할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묘하게 쑥스러워 보인다.

"얼마든지. 다 가져도 좋다."

"고마워."

레나는 능숙하게 상인들의 시체를 뒤지며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녀와 전리품을 다툴 생각은 전혀없었다.

초록색 빛도 안 나오는 녀석들에게 별건 없을 거다.

레나가 시체를 뒤지는 모습을 보는건 꽤나 오랜만이었다.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전쟁 전의 대대적인 서부 토벌.

이런 사건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한 행동이 미래를 바꿨다고 보는 것도 무리가 있다.

나비효과라고 생각하기에도, 이번생에는 황실과 관련된 행동을 거의 한 적이 없다.

굳이 따지면, 삼촌으로부터 탈출한 루비아를 살려 낸 것 정도.

그 외에는 에라스트조차 가지 않고 얌전히 있었다.

여관에서 몇 명을 죽였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 이런 큰변화가 일어날 리는 없다.

게다가 서부를 휩쓰는 이 작전이 하루아침에 세워진 것도 아닐 테고.

물론, 그저 내가 이 역사적 사실을 몰랐을 가능성도 높다.

아니면 서부 사막 토벌은 분위기만 잡아 놓고, 빠르게 한탕 끝낸 뒤전쟁에 돌입하는 걸지도 모른다.

아예 그쪽에 주의만 돌리게 하고 다른 일을 벌이는 건지도.

어느 쪽일까.

생각에 빠져 있을 때였다.

- 후후후.

어느새 날아온 아이작이 관심 좀가져 달라는 듯 웃음을 홀렸다.

- 사막은 오래간만이구나. 더위도 추위도 느끼지 않는 몸이 되어 오니 꽤나 새롭구나.

사막은 또 언제 와 봤다는 건지 물으려다 관뒀다.

지금은 시꺼멓고 웃기는 인형 속에 들어가 있지만, 어쨌거나 수백 년전에 제국의 절반을 지배한 경력이 있는 놈이다.

옛날 얘기를 물었다가, 끝도 없이 제 자랑만 늘어놓을 게 뻔하다.

가만히 있자 놈이 말을 이었다.

- 잘 싸우더구나. 아주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보지만 말고 조금쯤은 도와주지 그랬나."

- 혼자도 잘하는데 뭐 하러. 원래혼자 사는 세상이야. 혹시 '보인' 건 없었느냐?

아이작은 꾸준히 상태창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녀석에게는 역시 아무것도안 보이는 모양이다.

애쉬월을 잡으며 자세한 상태창이 뜨기는 했지만, 굳이 말해 주고 싶지 않았다.

놈이 나에게 도움이 되거나, 좋은 정보를 제공할 때만 나도 아는 걸 말해 줄 생각이다.

"보이면 말할 테니 일일이 귀찮게 물어보지 마라. 그보다. 너, 서부사막에 이런 녀석이 있다는 걸 정말 몰랐냐? 와 봤다면서."

- 내가 이런 시골에 뭐가 있는지 어떻게 아느냐? 게다가 얼마나 오래전에 왔는데. 그걸 기억하냐?

아이작이 날개를 파닥이며 부인할때였다.

"전혀 놀라지 않으셨잖아요."

뒤따라온 루비아가 끼어들었다.

아이작이 움찔하며 부정했다.

- 그럼 이 몸이 고작 저런 거에 놀라야 되냐?

"놀라지 않은 정도가 아닌던데요.

고개도 끄덕끄덕하셨잖아요. "

- .짐작이야 했지. 하지만 뭐가 어디서 나올지 딱 알 수야 있느냐.

설사 안다고 해도. 안 알려 주지.

뭐라고?

사막 적응 스킬은 유사流沙를

탐지할 수 있다.

아이작을 거기에 확 파묻어 버리고 싶어졌다.

"안 알려 준다고?"

- 삶이라는 건, 일단 부딪쳐 보는거지. 왜 이렇게 도전 정신, 모험정신이 없냐?

설마 그런 생각으로 달리아크에서 위험 정보를 사지 말라고 한 건가?

저런 당당한 태도를 보자 어이가 없었다.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루비아가 나섰다.

"아이작 님이 부딪치는 게 아니니까 그렇게 말하시는 거죠. 아이작 님이 야말로 부딪치기 싫어서 무덤 안에 계속 계셨던 거 아닌가요?"

- .요즘 젊은것들은 틀려먹었어.

도전 정신도 없고, 말대꾸나 따박따박하고 말이야.

놈이 구시렁거리다가 파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저 멀리 날아갔다.

아이작이 사라지자, 루비아가 눈을 반짝이며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괜찮. 으세요?"

"뭐. 그럭저럭."

모래를 좀 뒤집어쓰긴 했지만, 적어도 크게 어디 부러진 곳은 없다.

루비아의 빵이 사과처럼 빛난다.

꼭 사막의 더위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죄송해요."

"뭐가 죄송하다는 거지?"

"멋지다고 생각해 버렸거든요.

걱정해야 하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저렇게 거대한 존재를 상대로.!

책을 읽으면서 머릿속으로 상상만 하던 장면이었어요.!"

레라지에의 성지에서 '부스러기'를 쓰러트릴 때는 아이작에게 기절해있던 상태였으니, 이렇게 싸우는 걸 보는 건 처음인 셈이다.

"그런가. 다친 데는 없고?"

"저는 당연히 멀쩡하죠! 아무것도안 하고 뒤에서 보기만 했는걸요."

그때 였다.

상인들의 시체를 탈탈 털던 레나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루비아가 계속 얼굴이 상기된 채 레나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 봤어요! 같이 싸우는 모습이 정말 멋지시던걸요."

- 화르록.

레나는 팔에 달린 와이어를 차분히 정리하며, 루비아의 말을 무시한 채 내 쪽으로 다가와 말했다.

"이런 곱게 자란 아가씨는 어디서 데려온 거지? 당신과는. 그리고 이런사막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가씨인데."

루비아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맞아요. 싸우시는 걸 보면서 사실주눅 들었어요. 저는 그렇게 도움이 될 수 없으니까요.

루비아가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아니. 무척 도움이 된다."

당연히 빈말은 아니다.

루비아에게 비밀로 하고 있지만, 〈서번트 시스템〉의 놀라운 효과만 해도 그녀를 계속 데리고 다녀야 할 중요한 이유였다.

루비아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사실 아니지만.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루비아의 호감도가 1 올랐다는 문구가 허공에 떠올랐다.

앞에 서 있던 레나의 표정이 문득 미묘해진 게 느껴졌다.

갑자기 침묵이 흘렀다.

내가 무슨 말실수를 한 건가?

"으음."

곤란했다. 뭔가에 끼인 느낌인데, 정확히 표현할 수는 없었다.

여기에서 말 한 마디만 잘못하면 큰일이 날 것 같은, 되돌릴 수 없는 무서운 일이 벌어지리라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힘이나 민첩, 검기나 마법 따위는 완전히 무용해지는 느낌이었다.

몇 초가 흘렀을 때였다.

"하.

레나가 숨을 뱉으며 뒤로 한 발물러났다.

"전갈 조심하라고."

그녀가 발로 '상인'의 문신을 툭차며 말했다.

루비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충고 감사드려요. 제가 또조심해야 할 건 없나요?"

레나가 피식 웃었다.

"재미있는 아가씨로군. 당신들.

혹시라도 너무 서북쪽으로는 가지 않는 게 좋아."

레나가 루비아와 나를 번갈아 돌아보며 말했다. 주위에 팽팽하던 묘한 기류가 사그라졌다.

나는 그제야 레나에게 물었다.

"그건 왜지?"

그녀는 눈썹 안쪽을 살짝 찡그리고 심각한 느낌으로 말했다.

"바티엔느 폰 레안드로. 들어 본이름인가?"

"어. 아는 사이세요?"

루비아가 나를 바라봤다.

전혀 티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옆에 붙은 탓에 한순간의 미세한 동요를 알아챈 모양이었다.

눈치 빠른 레나도 날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인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잠깐 딴생각을 했다.

놈이 어쨌다는 거지?"

"흐음.

레나가 말을 이었다.

"제국 푸른 사자 기사단 총단장.

4검주의 일익을 맡고 있는 남자지.

그가 서쪽에 바실리스크를 잡으러갔다고 하더군. 막 시작한 따끈한 작전이라고 들었어."

바실리스크 사냥 작전.

처음 듣는 이야기는 아니다.

후작이 바실리스크를 잡는 임무를 맡았다는 건, 레나와 함께한 마지막생에서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정확한 작전 기간이야 몰랐지만, 이때 즈음이었구나.

"그러면.

"마주치면 아주 곤란하겠지. 너무서북쪽으로는 가지 마."

괜한 허세를 부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레나 정도 된다면, 후작과 지금 내 힘의 차이는 당연히 절 수 있을 거다.

"정보 고맙다. 가격은?"

"먼저 받고도 물어봐 주는 거야?

좋은 손님이네. 하지만. 이 녀석들시체를 혼자 털게 해 준 보답이야.

적당한 값이라고 생각해."

레나가 은화를 모은 듯한 커다란주머니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런가."

레안드로 후작.

푸른 갑옷을 입은 기사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녀석을 만난다면 그 자리에서 다시 회귀하게 될 게 뻔하다.

특별한 원한은 없지만.

아니, 오히려 원한이 있는 건 굳이 따지자면 내 쪽이지만.

놈은 아무 원한 없이도 조우하면 내 정체를 알아보고 쪼개려 할 게 뻔하다.

게다가 딱 봐도 불길하게 보이는 아이작까지 함께 있다.

아마 두 배로 수상하게 여길 테고, 절대 그냥 안 지나치고 쫓아오겠지.

'진짜 싫다.'

레벨을 올려도 동쪽에서 올리는 게 좋을 거다.

내가 무척 강해지긴 했지만, 놈을 상대할 자신은 물론 없다.

정보를 말해 준 레나도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루-륨만 찾고. 우리는 여기서 최대한 빨리 빠져야겠군."

레나가 씩 웃었다.

"행운을 빌어. 만나서 반가웠고.

그럼 난 이만!"

- 히히힝!

레나가 말에 올라탔다.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조금 의아했다.

"너희도 어차피 루-륨을 찾는 게 아니었나?"

행운을 빈다며 그냥 가려는 그녀의 태도는 묘하게 어색하다. 예메라의 신전까지 따라올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다.

추적 장치를 붙일 정도였으니까.

레나는 말에 탄 채, 비스듬히 허리를 돌려 내쪽을 바라봤다.

"원래 그럴 생각도 있었지. 하지만 싸우는 실력이나. 나한테 다 말해주는 모습을 보니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아졌어. 무엇보다.

"무엇보다?"

"더 좋은 계획이 떠올랐거든."

그녀가 씩 웃었다.

"계획?"

"그래. 이렇게 자잘한 것들 말고, 크게 한 번 제대로 당길 계획."

"루. 륨을?"

"응."

솔깃한 이야기였다.

나도 그 은빛 액체가 필요하다.

예메라의 신전에서 찾을 루-륨이 〈전직〉에 충분할지 어떨지 알 수 없을 뿐더러.

원리나 이유는 몰라도, 그 액체는 회귀한 뒤에도 위치가 유지된다.

단순히 위치뿐만이 아니다.

강한 영향력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아홉 병을 가지고 있던 레나는 그스탯이 크게 올랐다.

지부장으로 만들어 주고 끝냈는데, T&T 본부장이 되어 거대한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만약 충분한 루-륨을 보유한 뒤, 루비아 시나리오를 클리어하고 그녀에게 넘긴다면?

지나친 망상일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다시 회귀할 때, 루비아가 패자霜者급의 강성한 영주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기대감을 안고 레나에게 물었다.

"신전에 있는 양이 자잘하다고?"

"신전뿐이 아니야. '밖'에 있는 걸 다 모아 봐야〈1〉밖에 안 돼. 〈9〉는 다른 데 있거든. 어때? 관심 있어?"

"나머지가 어디 있다는 거지?"

레나가 동북쪽 텅 빈 허공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각도가 향하는 곳이 어딘지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내가 떠올린 장소를 그대로 소리 내어 말했다.

"황실."

216화 9:1 (11)

***************************************************

"제국 황실에 루-륨의 9할이 모여있다는 건가? 다른 곳에 있는 걸 전부 합친 것의 9배라고?"

"물론이지."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아이작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 흐흐흐. 당연한 이야기를 하며 무슨 대단한 정보라도 주는 것처럼 굴고 있구나. 내 말하지 않았느냐?

세이론이 사도를 찢으며 얻은 피다.

황실의 비역에 있는 게 당연하지.

"그런데 그 까마귀, 애완용이라고했지? 하나도 안 귀엽게 생겼는데 날기는 파닥파닥 잘 나네."

레나가 흘끗 아이작을 바라봤다.

- 가슴도 없는 주제에. 황실을 몰라서 못 들어가느냐? 알아도 힘이 안 되서 못 들어가는 거지.

아이작의 반응이 격렬하다.

설마 안 귀엽다는 소리를 들어서 삐진 거라면 좀. 무섭다.

어쨌건 놈의 말이 옳다.

후작마저 살해당했다.

그 죽음을 파헤치려던 중, 최고의 추적술과 은신술을 가진 기사단원레일리도 벌레처럼 살해당했다.

지금 가 봤자 개죽음이다.

레나에게 물었다.

"황실의 비역을 털겠다는 거냐?"

레나는 한쪽 입꼬리만 살짝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스물셋은 자살하기에 좀애매한 나이잖아? 생각 없어."

슬쩍 품에서 뭔가 꺼내 쥔 레나가 말을 이었다.

"굳이 비역으로 들어가지 않고도.

다른 방법이 있거든. 자세한 내용은 함께하게 되면 알려 줄게."

- 휘익!

레나는 품에서 꺼낸 물건을 내게 던졌다.

무심코 손을 뻗어 잡는 순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굉장히 익숙한 물건이었다.

긴 줄을 감아쥐어 든 순간.

- 띠링!

경쾌한 효과음이 울려 퍼졌다.

허공에 뜬 반투명한 푸른 창에

메시지가 빼곡히 떠올랐다.

[계승 아이템을 획득했습니다!]

[레나의 펜던트(new!)]

- 가짜 보석이 박힌, 레나가 건네준오래된 펜던트. 그녀가 무엇보다소중하게 간직하는 물건이다.

- 원래 상품으로써의 가치는 없었지만, 뒤쪽 세계에서 행운의 상징인흑색 산호로 줄갈이가 완료된 상태.

알아보는 자들만 알아보는 초승달모양의 세공이 붙어 있다. (new!)

[시나리오 클리어에 의해, 다음의 능력이 임의로 부여됨.]

- 히어로급 이하의 스킬 숙련이 15% 빠르게 상승합니다.

- 일주일에 한 번, 높은 확률로 〈올바른 판단〉을 내리게 해 준다.

[특수 혜택 적용(new!)]

- 모든 종류의〈범죄〉가 발각될확률이 70% 감소합니다.

- 당신이 저지른〈범죄의 증거〉가 아무런 이유 없이 사라질 확률이 15% 추가 생성됩니다.

"수도에 와서 이걸 보이면 된다.

그때 보자고!"

펜던트를 던진 뒤 외친 레나는

부끄러운 듯 말을 달려 사라졌다.

레나의 호감도가 한참 올라간 뒤나에게 건네줬던 펜던트.

'꿈'에 의한 호감도의 효과인가?

그녀의 과거가 엮인 물건을 건네받을 줄은 몰랐다.

단순히 상징성만 있는 게 아니다.

이 펜던트는 나에게 놀라운 효과를 발휘한다.

살아 나갈 방법이 전혀 없을 때는 펜던트가 과부하로 깨져 버리지만, 그 전까지는 7일에 한 번 목숨을 구해 주는 놀라운 권능이 있다.

나는 익숙한 펜던트를 만지며 작게 중얼거렸다.

"판단을 시행한다."

[현재 설정:〈사망 및 그에 준하는 위기 시 자동 발동〉]

[설정을 변경하시겠습니까?]

[발동 후 7일 동안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사용되는 능력:〈위기회피(B)〉]

- 어린 시절부터, 온갖 종류의

위험을 숨 쉬듯 피해 온 여자가 갖게 되는 수준의 특수 능력. 동물적인 직감에, 인간으로서의 배움과 궁리가 결합되어 있다.

"사용하지 않는다. 그대로 놔둬."

[초기 설정을 유지합니다.]

- 팟.

상태창이 사라진 순간이었다.

"해골님?"

"아. 아아."

"굉장히 소중한 것처럼 쥐고 계시네요, 그 펜던트."

"아니. 전혀. 그냥 징표 같은 건가본데?"

"징표, 네요."

루비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도 더부드러웠지만, 그녀의 눈빛은 처음 보는 차가움을 담고 있었다.

자신의 말에서 돋아나려는 가시를 스스로 얇은 것까지 모두 뽑아낸, 너무 깔끔해서 섬뜩한 느낌이었다.

"별거 아니니까 처음 보는 나한테 줬겠지."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지나가듯대꾸했다.

"그렇군요. 납득이 되네요."

루비아의 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정말 납득을 하는 건지 어쩐지는 물어보기가 두려웠다.

"어이, 아이작."

녀석이 필요했다.

- 시끄러. 생각 중이다.

"무슨 생각?"

-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군.

사도의 피를 보관하는 비역은 하늘, 땅, 지하가 전부 막혀 있다. 외부반출은 아예 금지됐어. 한데 비역에 들어가지도 않고 루-륨을 얻을 수 있다고? 뭘 어쩌겠다는 건지 전혀모르겠지만.

아이작이 부리를 딱 부딪치며 말을 이었다.

- 하필이면 나냐우 그 꼬맹이와 아는 사이라니 완전히 무시하기도 뭣하군.

"그분은 어떤 분인데요?"

드디어 루비아가 다른 곳에 관심을 가져 주기 시작했다. 나는 레나의 펜던트를 슬쩍 다른 곳에 넣었다.

- 사도의 피에 관해서 좀 아는

녀석이다. 흠. 나중에. 한번 접촉은 해 보도록 해라. 무슨 계획인지나들어 보지.

"너도 비역은 못 뚫는 거냐?"

- 어. 못 뚫는다.

아이작은 고개도 안 까딱이고 바로 대답했다.

놀라울 정도로 깔끔한 인정이다.

언제 아이작이 자기가 월 못 한다고 인정한 적이 있었던가?

그 정도로 말이 안 되는 수준의 이야기인 거다.

황실의 비역에 들어가서 루-륨을 홈쳐서 나온다는 건.

"뚫기 어렵다면 엿보거나 할 방법도 없을까요?"

아이작이 고개를 저었다.

- 어렵다. 나도 엿보지 못할 만큼강력한 주술이 쳐져 있지. 심지어내가 원래의 힘을 되찾더라도 당장 엿볼 자신은 없다. 하지만.

잠시 부리를 위로 쳐들고, 곰곰이 생각에 잠긴 아이작이 말을 이었다.

- 두 가지 요건이 충족되면 된다.

황실의 결계가 1/4 이상 무너지고, 내가 절반 이상 힘을 찾으면 엿보기 정도는 될 거다.

"원래 힘을 다 찾으시면요?"

아이작은 한껏 긴 부리를 더 위로 쳐들었다.

- 후후. 그러면 충분히 가능하지.

하지만. 그게 쉬운 게 아니다.

놈의 입에서 무언가가 쉽지 않다는 말도 처음 듣는 것 같았다.

황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그의 새로운 면모를 보는 느낌이다.

어쩌면 아이작은 인정할 건 모두 인정하는 성격인지도 모른다.

녀석이 말을 이었다.

- 일리엔과 예메라, 비르폰이 내게 서로 다른 저주를 가했거든. 힘을 회복하려면 이것들의 저주를 하나씩 전부 깨뜨려야 한다.

나도 들어 본 이름이었다.

루비아가 살짝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빛의 여신, 참회의 여신, 그리고 불의 여신 말인가요?"

- 그래.

"살아 있을 때 대체 무슨 짓들을하고 다닌 거냐?"

- 별건 아니야. 신전이란 게 괜히 쓸데없이 넓잖아. 매음굴은 다닥다닥붙어 있고.

"그래서?"

- 내 영토에서는 매춘은 신전에서 하게 만들었지. 아이작령令 8호인가 그랬을 거다.

"그럼 사제들은 어디서 살고요?"

- 어디 살긴, 계속 신전에서 살지.

매춘부들을 대신 수발들면서 섬기게했어. 보이지도 않는 여신보다 훨씬실체적이잖아. 숫자도 많고, 얼마나좋아.

- 기능적이라고. 일리엔 사제들은 치유 능력이 있는 거 알지? 성병치료 전담으로. 비르폰 애들은 또 중독 회복 능력이 있거든. 술 위에 몰비드를 태워 들이켜고 질척하게 즐긴 다음에.

"더 말 안 해도 된다. 저주 받은 이유는 아주 잘 알겠으니까."

아이작이 어깨를 으쑥했다.

- 내가 뭘 어쨌다고. 신성력이 좀있으면 열심히 써야 될 거 아니야.

뭘 꿍쳐들 두고만 있냐. 좋은 데 쓰게 해 줬으면 저주가 아니라 축복을 내려야지. 내가 억울해서 진짜.

"좋아요. 일단 아이작 님의 힘을 회복하는 건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네요. 여신들이 여간 강력한 저주를 내린 게 아닐 테니까요."

"동감이다."

까마귀 인형 안에 있다고 하지만, 아이작과 함께 다니는 일은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위험할지도 모른다.

놈이 땅 파는 광산노예로 삼았다는 다른 마왕의 추종자들.

게다가 무려 세 여신의 저주.

이게 끝일까?

인성을 보면 그럴 리가 없다.

제국 남부를 다 먹으며 무슨 짓을 해댔을지 솔직히 알고 싶지도 않다.

"저. 지금 가려는 곳이 예메라의 신전인 거죠?"

루비아가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 그렇지.

"음. 아이작 님은 여신 예메라의 저주를 받았는데, 그 신전에 가면 혹시 문제는 없을까요?"

미처 생각 못 한 지점이다.

루비아가 정확하게 짚었다.

"괜히 너 때문에 못 들어가는 거아니냐?"

아이작이 부리를 옆으로 돌렸다.

- 흥! 그 미친년의 신전은 오히려

'들어가는' 게 문제다.

"들어가는 게 문제라고?"

- 참회의 여신은 무슨 얼어 죽을.

원한다면 근처에서 떨어져 주마. 아까개한테 찾아가서 황실 창고나 털어보든지.

녀석은 기분이 조금 상한 듯했다.

어쩌면 제 감정에 민감할수록, 남의 기분 따위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 성격이 되어 버리는지도 모른다.

"루비아, 어떻게 생각하지?"

"일단 예메라의 신전에 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수도를 가더라도.

일단 얻을 건 얻자고요."

루-륨이 있는 곳까지는 지도에서 손가락 한 마디였지만, 속도 내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다.

- 파바밧!

모래 아래 숨어 있던 열 마리의 전갈이 일제히 나에게 달려들었다.

물론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부터 녀석들의 존재는 모두 파악한 채로 걸어오고 있었다.

- 서걱!

칼날에 검기가 서린 대검을 횡으로 크게 한 번 휘둘렀다.

1미터가 넘는 꼬리침과 날카로운집게발이 푸른 검기에 터져 나갔다.

독을 머금은 탓에 앞 집게와 긴꼬리침이 끝만 새까만, 붉은 사막전갈들이 었다.

잘린 독주머니들이 조각난 채로 허공에 치솟았다.

닿는 순간 운동신경을 마비시키고, 감각만 증폭시키는 극독 '그릴린'이 모래 위에 허무하게 뿌려졌다.

하나도 놓칠 수 없었다.

2미터가 넘는 사막 전갈들은 내주위로 오면 즉시 죽는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전에 모두 죽었다.

[경험치가 138 올랐습니다!]

[경험치가.]

근처에는 유사까지 있는 까다로운지형이었다.

심지어 전갈을 싸워 이길 수 있는 녀석이라도, 유사에 빠진 뒤 쏘이면 끝이다. 그렇게 죽은 시체들이 이미몇 보인다.

"이쪽으로 오지 마라! 내가 다시 돌아간다."

극독이 방금 전 흩뿌려졌으니 조금돌아가는 게 낫다.

[서번트 시스템]

[마스터에게 안전한 길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지형 난이도: 중상]

['패스파인더' 칭호가 강화됩니다.]

[마스터와 함께 이동할 때 시야가 15% 증가합니다(new!)]

[위험을 발견할 확률이 10% 상승합니다 (new!)]

뭔가 날로 먹는 기분이다.

'사막의 신'에게 흡수한 5레벨의 〈지형 적응〉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강력했다.

죽은 전갈들을 슬쩍 바라봤다.

어쩌면 내 사막 적응력은 저 전갈녀석들보다 상위일지도 모른다.

사막 전갈들과 마주치는 것도 벌써 세 번째다.

독 능력을 흡수하면 쓸모 있으리라생각했지만, 전력 차이가 압도적인 탓에 경험치만 약간 오를 뿐이다.

아무래도 전갈 왕 정도는 처리해야 뭐가 나올 것 같다.

만나고 싶다는 건 전혀 아니지만.

루비아와 아이작이 기다리는 곳에 도착했을 때였다.

"뭔가 사막을. 엄청 편하게 가는것 같아요."

"그래?"

"네. 책에서 보면 사막은 정말로 힘든 곳이라던데, 우리는 한 번도안 헤매고 오아시스를 바로 갔고요.

해골님이 마법을 쓰신 거죠?!"

가까운 오아시스에서 적신 물기가 몸에 남은 루비아가 젖은 하얀 천을 얼굴에 두르고 말했다.

양손으로는 커다란 야자나무 잎을 쥐고 햇빛을 가린 채였다.

"뭐. 글쎄."

다시 말 위에 오른 뒤 루비아를 잡고 뒤에 앉혔다.

그 뒤를 낙타들이 따랐다.

상단이 놓고 도망친 낙타들은 그리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녀석들 옆에는 식량과 음료가 무척풍족하게 매달려 있다.

"어이, 아이작."

- 뭐냐? 사막의 안내자여. 크크크.

워낙 길을 잘 찾는 탓인지, 녀석도 어느새 나를 그렇게 부르고 있다.

"왜 이렇게 많냐?"

앞에서 위험 요소를 찾고 제거하는 내 입장에서는 조금 당황스러운 게 있었다.

- 뭐, 그래도 너한테 부담은 안 될 수준이잖아?

"아는 게 있으면 제대로 말해라."

전갈 무리만 세 번째 조우다.

사막 원숭이, 독사 떼까지 합하면 다섯 번째.

싸울 것들을 찾아다닌 게 아님에도 이러하다.

"이 정도면 인간들이 쓸어도 진작쓸었을 텐데."

- 별거 아니야. 그냥 미끼가 막뿌려졌으니 그렇다.

"미끼? 설마 우릴 말하는 거냐."

- 아니. 숨어 있는 마물들을 강제로 끌어당기는 주술의 덫이다. 곳곳에 더럽게도 많이 쳐 놨구나.

레나가 준 정보가 떠올랐다.

도적단에게 '피리'를 건네주고 떠난잿빛 추기경 그레이시엄.

자극할 수 있는 마물들을 모조리자극해 출현시키고, 그 핑계로 군을 일으키는 황실의 계획.

이것도 그 일환일 게 뻔하다.

"진작 이야기를 했어야지."

- 너무 걱정하지 마라. 여기 끌릴정도면 아주 약한 것들뿐이니까. 신전앞에서 기다릴 놈만 경계하면 된다.

- 파드득!

순간 높이 날아오른 녀석이 하늘위에서 큰 모래언덕 너머를 보며 말했다.

- 저~ 기 보이네. 퀴즈쇼 시작이다.

217화 9:1 (12)

***************************************************

퀴즈쇼라고?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 파드득!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아이작은 강한 날갯짓을 해서 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위로 올라갈수록 녀석이 점점 더속도를 높이는 것 같았다. 지금껏본 적 없는 높은 고도였다.

나는 사방을 돌아봤다.

하지만 어디에도, 아이작의 말대로 '퀴즈'를 낼 만한 상대는 없었다.

탐지 스킬에도 살아 움직이는 것은 전갈 한 마리 뱀 한 마리 잡히지 않는다.

오로지 끝도 없이 이어진 거대한 모래언덕뿐이다.

"아이작 님은 언덕 쪽으로 가네요.

지도에 보면 저 언덕 너머 예메라의 신전이 있다는데. 신기하네요."

"뭐가 신기하다는 거지? 신전이?"

"아니요. 모래언덕이요. 보세요.

지금껏 본 다른 모래언덕은 지도에 표시되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것만 신전 앞에 정확히 그려져 있어요."

루비아의 말대로였다.

앞쪽에 보이는 모래언덕이 확실히 눈에 될 정도로 거대하기는 했지만, 사구砂五는 모두 바람 부는 방향에 따라 이리저리 이동한다.

지도에 그릴 만큼 고정적으로 되어 있을 리가 없다.

게다가 바람 부는 쪽으로 구부정히 생겨난 보통의 모래언덕과 눈앞의 사구는 그 모양마저 달랐다.

녀석은 하나의 높고, 둥글고, 굵은 산에 가까웠다.

"그리고.

루비아는 저 높이 나는 아이작을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놈은 높은 고도를 유지하며 신전앞 거대한 모래언덕 위를 빙빙 돌고 있었다.

"뭐지?"

"아이작 님, 예메라에게 큰 저주를 받으신 거 아닌가요? 왜 제가 보면 신전 앞에서 일부러 저러는 것.!"

그때 였다.

- 쿠궁.

사막이 흔들렸다.

높이 20미터, 직경은 200미터도 훌쩍 넘어 보이는 거대 모래언덕이 위로 수십 미터를 치솟으며 모래를 폭포처럼 흩뿌렸다.

주변 수십 미터의 모래가 포악하게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 쿠구구궁!

고요한 사막이 거세게 진동했다.

루비아를 옆에 끼고 말 위에서 뛰어내렸다.

언덕 곳곳에 틈새가 벌어지고 금이 가기 시작했다.

뒤로 훌쩍 물러서 멀리서 바라보니 갈라지는 현상이 아니었다.

모래로 잔뜩 '덮여 있던' 무언가가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 파팡!

거대한 사구 앞쪽에서 오돌토돌한 까맣고 긴 언덕이 쑥 솟아났다.

모래알 하나하나가 마치 화살처럼 될 정도로 빠른 속도라고 느꼈지만, 그 거대한 크기를 놓고 생각한다면 반드시 다른 관점이 필요하다.

눈앞의 '언덕'은 귀찮아하며 몹시느릿느릿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쪽이 옳았다.

위로 솟아난 까만 언덕이 '눈'을 가늘게 떴다가 다시 닫았다.

〈와들루스 피곤해요. 〉 '언덕'은 입을 벌리지 않았다.

대신 머릿속에 천둥이 치는 것처럼 거대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신전 수호자: '석상' 와들루스]

[랭크: S마이너]

[숨겨진 크리쳐입니다. 상상할 수 없이 신성모독적인 존재를 감지하고 오랜 잠에서 억지로 깨어났습니다.]

"이게. 이게 대체 뭐야?"

나는 허공에 뜬 상태창을 확인하고 경악에 빠졌다.

상태창이 떴던 적들 가운데, 가장강한 녀석이 B더블 플러스 랭크의 애쉬웜이다.

레라지에의 성지에서 만난 녀석은 어째서인지 '상태창'이 뜨지 않았고, 내 힘으로 물리쳤다고 보기에 분명무리가 있기 때문에 일단 논외.

A랭크도 본 적 없는데, 난데없이 S마이너랭크라고 표시되는 녀석의 출현.

어쨌건, 상태창에 표시되는 랭크는 별개로 해도 눈앞에 솟아난 언덕의 존재감은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왠지. 저분이 아실 것 같네요."

내 품에 자연스럽게 안긴 채, 뒤로 도망치고 있는 루비아가 손가락을 곧게 뻗었다.

그 손가락은 '언덕' 위에서 날고 있는 아이작을 향해 있었다.

- 하하. 이 멍청한 거북이가 드디어 일어났구나. 400년 만이다!

거대한 언덕이 몸을 살짝 흔들자 굳어 있던 표면이 쩍쩍 갈라지며 모래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 촤아아악!

아직 '석상'은 제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지도 않았다.

몸의 반쯤은 모래에 파묻고 있는 상태다.

나는 아이작을 보며 진심으로 의문에 차서 물었다.

"설마. 이걸 상대로 싸우라는 건 아니겠지?"

- 할 수 있어! 힘내라! 성공하는자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본다!

"저런 미친.

- 파드득!

뒤로 물러나며 다시 녀석이 힘차게 날갯짓을 한다.

지금까지 본 것 중에 가장 높이 솟아오른다.

"아이작 님! 자기가 불러내고 지금무서워서 도망친 거죠? 우리한테 다떠넘기고 지금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지요?"

- 힘내라? 안 되면 되게 해라!

개소리다.

안 되면 안 해야 되는 거다.

아무래도 놈 또한 눈앞의 존재가 두려운 모양이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할 말을 잃었다.

〈와들루스 궁금해요. 이건 설마.

부패와 퇴폐. 금기와 모독의 기운인 건가요.'? 〉

"아이작! 저게 지금 네 이야기를하는 것 같은데."

뭔가 말투가 이상한 존재였다.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받아치고 있지만, 의사가 전달되며 어마어마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머리'가 한 마디 한 마디 의사를 전달할 때마다 거대한 언덕 곳곳에 모래 폭풍이 생겨났다.

사막이 울고 있었다.

작은 모래바람이 일어나는 곳들은 심지어 부분적으로 어두워지기까지했다.

간신히 루비아를 데리고 움직일 수 있었다. 안색이 파리해진 루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아이작 님이 뭔가를 도발한 거네요.

사막 전체가 응응거리는 느낌으로 '석상'이 의식을 전해 왔다.

〈저주받은 기운. 불결한 게 신전근처에 온 게 사실. 그럼 역시.

와들루스는 여기서 그걸 끝장내야하는 것이겠지요.? 〉거대한 발 두 개가 꿈틀거리면서 모래 속에서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것 하나하나가 삼 층 건물이

밀집한 골목만 한 크기였다.

발톱 끝에는 한눈에도 위협적으로 보이는 새까만 섬광이 뭉쳐져 있었고, 밖으로 드러난 열 개의 발톱은 그하나하나가 내가 들고 있는 양손검보다도 훨씬 더 컸다.

- 파지직.!

게다가 최대 출력 검기보다 진해보이는 새까만 섬광은 전혀 감당할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역시 귀찮지만. 어쩔 수 없이 공격해서 말살해야 하는 거예요.

마구마구. 엉망진창으로 울부짖게 만들어 줘야 하는 거예요. 〉어미는 괴상하지만, 힘은 한눈에 보기에도 어마어마한 존재다.

아이작은 무슨 미친 짓을 한 걸까.

사실 아이작 놈이 아니었다면 그냥얌전히 여길 지나, 원래 계획대로 평화롭게 루-륨을 얻을 수 있던 게 아니었을까?

'언덕' 근처에서 꿈틀거리는 검은 글씨들이 떠올랐다. 읽을 수 없는 언어로 된 흘려 쓴 글자들이었지만, 강력한 살의와 징벌의 의지를 담고 있다는 사실은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이작! 어떻게 해야 되는 거냐!"

루비아를 뒤에 세우고 칼을 들어어떻게든 막을 준비를 했다.

새까만 글자들이 내 쪽을 향해서 막 쏘아지려고 할 때였다.

- 퀴즈를 풀겠다고 해라! 지금!

망설이거나 고민할 여유는 없었다.

"퀴즈를 풀겠다!"

녀석을 따라 크게 외쳤다.

'석상' 근처에서 일어나던 폭풍이 한순간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허공에 떠 있던 새까만 주술들이 보이지 않게 점점 투명해졌다.

갑자기 어두워졌던 하늘이 곧이어원래처럼 맑아졌다. 어느새 가까이 내려앉은 아이작을 보고 물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냐?"

- 원래 이놈 주인은 수수께끼의 신이었다.

"수수께끼의 신이라고? 예메라의 신전을 지키는 수호자가 아니라?"

- 그신은 인간에게 스무고개를

패하고 스스로를 봉인했다. 이름도 버리고. 그 뒤 이놈이 예메라에게 대충 맡겨지게 됐다. 예메라 그년성격상 애완동물과 놀아 줬을 리가 없으니. 수수께끼라면 환장하지.

"넌 그걸 어떻게 다 아는 거냐."

아이작의 답변을 듣기 전 거대한 파장이 머릿속에 울려퍼졌다.

〈퀴. 즈? 정말 퀴즈를 푸는 고야?

와들루스랑 옛날의 그 퀴즈 놀이를 해 주겠다고 말하고 있는 고야.? 〉

"그래. 퀴즈를 풀겠다!"

나는 앞을 향해 외치며 아이작에게 슬쩍 물었다.

"못 맞추면 어떻게 되는 거지?"

- 당연히 다시 공격을 받는 거지.

뭘 그런 것까지 물어보냐? 힘내라!

터무니없이 거대한 사막 '거북'이 기괴한 어조로 의사를 전달했다.

규칙은 간단했다.

나와 루비아가 번갈아 가며 문제를 푸는 것이다.

〈서로 알려 주는 건 금지인 고야*??.

그러면 수수께끼를 푸는 이유 따윈없는 거예요.)

"내가 먼저인가? 대신 이 까마귀가수수께끼에 도전하면 안 되나."

거북이 거대한 고개를 저었다.

〈왜 그런 헛소리를 하는 고야요.

저 까마귀는 이미 와들루스 퀴즈를 겪은 기운이 느껴지는 고야. 게다가 까마귀는 수수께끼를 맞춰도 안으로 들여보낼 수 없는 거예요. 여신님의 신전이 더럽혀지는 거야요.! 〉- 흐흐흐. 그래. 나는 안 된다니까.

너희끼리 해. 몰래 알려 주려고 해도 녀석이 전부 알아차릴 거다. 힘내!

〈두 번 연속 실패하면 와들루스도 슬프지만 어쩔 수 없이 모두 죽이는 고야요. 두 번 연속 맞추면 아마도 통과시켜 주지 않을까요? 〉난데없는 퀴즈쇼다. 솔직히 맞출자신 따위는 전혀 없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할 수 있을

거예요,

루비아가 나를 격려한다. 하지만 어쩌면 여기서 이대로 끝장일지도 모른다. 대체 무슨 문제를 낼까?

〈그럼. 시작이에요. 〉

〈손이 없지만 찔러요. 발이 없지만 멀리 가요. 진실을 담지만 거짓도 담아요. 이게 뭘까요? 궁금해요.! 〉궁금해요. 궁금해요. 궁금해요.

사막 전체가 내게 묻는 듯한 강렬한 웅웅거림이 머릿속에 전해져 왔다.

찌르는 것? 멀리 가는 것? 손도 발도 없는 것? 독침일까? 화살?

하지만 진실과 거짓을 담고 있는 건 아니다.

손이 없는데 어떻게 찌르고, 발이 없는 데 어떻게 멀리 간다는 건가.

"힌트. 힌트는 없냐?"

거대한 거북이 고개를 아래로 푹숙였다.

〈어휴. 너무 멍청해 보여서 제일쉬운 문제를 낸 거라고요. 이것도 못 맞춘다면. 역시 죽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아. 이미 죽은 거라면 그만 심한 말을 해 버린 거예요.! 〉

218화 9: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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