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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화 9: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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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이 지났네요. 〉

루비아가 내 손을 잡고 부드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분명히 그녀도 조마조마해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못 맞춰도 된다는 걸까?

금방 생각날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걸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무지 답을 알 수 없었다.

사실 이런 퀴즈라는 건 맞추는 게 말이 안 되는 거 아닐까.

자기만의 억지 장난을 구성해 놓고 그걸 알아주기를 바라는 게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2분이 지난 거예요. 〉

거대한 거북이가 시간을 알렸다.

답을 알 수 없었다.

떠오르는 것 자체가 없다.

가만히 앉아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이 거대한 녀석 앞에서 두 번 연속틀리면 죽는다는 압박을 받으면서 제대로 문제를 풀 수 있을 리가 없다.

〈2분 30초 지났네요 답이 꼭 하나로 정해져 있는 건 아닌 거예요. 만들어서 설득시키면 되는 거예요. 아아, 그래도 모르는 고야요? 〉슬쩍 열이 받기 시작했다. 녀석의 수수께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해치우고 지나가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것도 어려워 보인다.

상태창에서 나타나는 S마이너랭크라는 표시가 아니라도, 강렬한 압박감이 아니더라도.

일단 뭘 어떻게 공격해 들어가야 할지 감도 안 잡힌다.

크기라는 건 그 자체만으로 상대를 질리게 만드는 데가 있다. 지형을 상대로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이작을 원망하고 싶은 마음도 살짝들었지만, 잡념을 지우고 다시 문제에 집중했다.

진실이나 거짓을 담고 있는 것.

아니, 그런 것들이 담길 수나 있는 물건인가?

〈3분 지났어요. 탈락인 거예요. 〉

"답이 뭐냐?"

〈아아, 이 쉬운 답을 모르는 당신은 불쌍해요! 〉

"닥치고 알려 주면 안 될까? 이미문제는 끝났잖아."

〈수수께끼는 만들기 어려운 거예요.

답은 유출하지 않는다구요. 〉

"정답은 말이에요."

말.? w

"네. 진실도 거짓도 담고, 무엇보다아프게 상대를 찌를 수 있죠. 발도 날개도 없지만 순식간에 대륙 끝에서 끝까지 가곤 하지요."

〈정답! 하지만 문제 푸는 도중에는 가르쳐 주면 안 되는 고야요. 주의 하지 않으면 무서운 일이 일어나버려요! 〉녀석의 어조는 우스꽝스러웠지만, 말하면 찢어 죽여 버리겠다는 듯이 집채만 한 발을 루비아 쪽으로 슬쩍움찔거렸다. 혹시 이번 생은 여기서 끝나 버리는 게 아닐까?

뒤쪽으로 도망갈 생각도 해 봤지만, 녀석이 아까 일으키려고 했던 모래폭풍보다 빨리 도망갈 자신은 전혀없었다.

무엇보다 저 거대한 몸으로 몇 발디뎌 후려치면 그대로 끝이다.

신전에 그냥 들어갔으면 루-륨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아이작은 무슨생각으로 이걸 깨운 걸까?

분명히 이놈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도.

루비아를 믿은 걸까?

〈기회는 한 번 남은 거예요.! 〉

_ ㅇ ㅇ ㅇ ㅇ O ?

기 I I r .

거대한 거북이의 주위에서 새까만 룬어들이 떠올랐다.

한눈에 봐도 무시무시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인간 여자분.! 인생에서 마지막수수께끼가 될지도 모르는 거야요.

각오는 되신 건가요? 〉

"네. 풀께요."

〈필요할 때는 버려요! 하지만 필요없을 때는 다시 줍는 것은? 이건 뭘까요? 와들루스는 공정하게 3분드리는 거예요. 모래만 튕겨도 죽는 약한 인간 암컷이라고 해서 특별히 5분 주거나 하지 않는 거예요. 〉거대한 머리가 앞으로 나왔다.

사막의 빛에 적응하기라도 한 듯, 그 푸른 눈이 조금 더 크게 떠지며 루비아를 슬쩍 바라봤다.

그녀는 반대로 집중하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정말 맞출 수 있을까?

아이작은 대체 뭘 하는 거지?

대책 없이 이런 상황에 던져 놓고 정말 우리가 퀴즈를 해결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첫 퀴즈는 루비아의 설명을 듣고 보니 이해가 갔다.

'말'이라는 정답.

맞출 수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 나온 퀴즈는 정말 말도 안 되는 거다.

필요할 때는 버리고, 필요 없을 때 줍는다.

그런 게 대체 뭐란 말인가.

루비아가 눈을 떴다. 역시 문제가 말도 안 된다고 따지려고 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그녀는 확신에 찬 듯 살짝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정답은 닻이에요. 항구에 정박할때는 아래로 던지고, 출발할 때는 다시 위로 감아올리니까요J 〈아아, 정답인 거예요."

.! 와들루스는 흐뭇해져요. 〉허공에 떠올라서 나를 겨누고 있던 새까만 글자들이 일제히 사라졌다.

"이걸 어떻게 맞춘 거지?"

"평소에 수수께끼를 좋아하거든요.

수수께끼의 논리라는 게 사실은 꽤 비슷해서. 부끄럽네요. 별거 아닌걸로 칭찬해 주셔서 기뻐요."

"별거 아닌 게 아닌데.

허공의 빼곡한 글자들은, 루비아가 틀렸으면 곧바로 우리를 향해 쏘아졌을 거다.

〈그럼 다음 질문인 거예요. 〉

거대한 거북이는 질문을 반복했다.

루비아가 맞추고 내가 못 맞추는 패턴이 몇 번이고 반복됐다.

〈제 이름을 불러 주세요! 그럼 저는 사라질 터이니! 이건 뭘까요? 〉

"침묵이죠."

루비아는 채 십 초도 걸리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정답! 수수께끼를 이렇게 잘 푸는 당신은 소중해요! 수수께끼가 마구풀리며 와들루스 기분 좋아져요.! 〉

"휴우.

루비아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힘든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긴장이 거의 풀린 듯, 답을 맞추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그럼 다른 분에게 질문인 거예요.

어차피 틀릴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규칙이니까 물어 주는 거야요. 〉녀석은 점점 루비아에게는 호감을, 나에게는 노골적인 무시를 보이고 있었다.

불평할 수도 없었다.

루비아는 다섯 퀴즈를 모두 맞췄고 나는 다섯 개를 모두 틀렸으니까.

이게 여섯 번째 수수께끼였다.

〈나를 만든 자, 나를 원하지 않는다.

나를 사는 자, 내가 필요치 않다.

나를 쓰는 자, 나를 모른다. 나는 누구인가? 수수께끼가 어려운가요?

어렵겠지요. 어차피 쉬운 걸 내도 틀리니까 어렵게 냈어요. 〉이 새끼가.

후작은 왜 이놈을 토벌하지 않고 바실리스크를 토벌하러 갔을까.

심히 유감이었다.

훨씬 가까이에 이런 S급 사냥감이 있는데 대체 뭘 하는 건지.

혹시 놈의 존재를 몰랐던 거라면, 다음 생에는 투서라도 해 볼까.

정답를 고민하는 사이 이미 시간은 모두 지나갔다.

〈3분 지난 거야요. 끝! 〉

- 달그락.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제 루비아에게 놈이 다시 퀴즈를 낼까 싶었지만, '거북이'는 앞발을 살짝 꼼지락거리더니 말했다.

〈음??. 아무래도 여러분은 일행으로 취급할 수 없겠네요. 인간 여자분혼자만 신전으로 들어가서 여신의 축복을 받으셔야 해요. 다른 분은 출입 금지인 거예요. 〉

"저 혼자서요? 그건 곤란할 거같은데요.

- 쿠구구구궁!

〈곤란하다구요? 들어갈 생각이니까와들루스에게 이렇게 문제를 많이 내게 만든 거 아니었나요? 설마와들루스를 가지고 장난쳤다고 하는 걸까요? 사실인가요? 〉 '석상' 와들루스가 거대한 육체를 서서히 일으키고 있었다.

모래로 된 산이 솟구치는 모습은 경악 그 자체였다.

[S마이너랭크〈존재감〉광역 발동!]

[스탯 총합과 스킬, 종족값에 따라광역 압박에 저항합니다.]

[스탯 총합: 32到

[심안心眼 (C+) 보유.]

[명경지수明鏡止水 경험 확인.]

[일부 저항에 성공했습니다.]

[다음 행위가 가능합니다.: 도주]

- 팟!

나는 루비아를 안아 들고 그대로 뒤로 몸을 튕겨냈다.

거대한 모래언덕이던 부분은 사실등껍질의 일부에 불과했다.

녀석이 네발로 일어서며 아래로 파묻혀 있던 부분이 드러났다.

사막이 물처럼 출렁거렸다.

〈어딜 가는 고야요.? 〉

목이 우리 쪽으로 쭉 뻗어 오자, 이글이글 타오르던 태양이 가려지고 새까만 그림자가 사막을 뒤덮었다.

루비아는 놈의 존재감에 질린 듯 숨만 겨우 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나마 녀석이 루비아를 데려가려해서 힘을 크게 쓰지 않는 것이지, 기세를 뿜어내려 했다면 루비아는 이미 놈의 위압만으로 심장이 및어버렸을지도 몰랐다.

〈이렇게 문제를 잘 풀어 놓고는 신전에 안 들어가겠다는 건가요? 〉연푸른색이던 와들루스의 두 눈에 피처럼 붉은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갈색이던 등껍질을 포함한 전신이 새까맣게 변하고 있었다. '거북이'가 네발로 막 일어선 순간이었다.

〈이게. 무엇이냐.? 〉

모래가 춤을 추며, 놈의 양옆에서 묘한 글씨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 쌔애애앵!

그림자보다 까만 점 하나가 정면에 서부터, 막 드러난 와들루스의 배아래로 날았다.

- 매니 히포니스, 리히스테오. 페타오 라타 프라그마타 사스. 니오 톤엑사파니 페르 테오.

(잠에 빠져들어라. 미끄러져라. 모든 짐을 내려놓아라. 사라진 신의 감촉을 느껴라.)- 니오 톤 엑사파니 페르 테오.

오른쪽 모래 위에 떠 있는 글자들이 '까만 점'에 끌려 그물처럼 거북의 배 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차토 우 페네브마 소 이치오 토텔라치니.

(마지막 눈 쌓이는 소리에 스스르정신을 잃어라.) 와들루스가 일어서며, 놈의 왼쪽위에 솟은 글자들이 역시 까만 점에 끌려 바늘에 꿰인 실처럼 배 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스파테 토 리체 포뇨르!

(잠의 벼랑에 부서져라!)

글자들이 자욱한 회색 연기가 되어 '거북'의 배 가운데를 타격했다.

마법과 주술의 이론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계속해서 마력을 다루며 어느 정도 힘의 흐름은 읽어 낼 수 있었다.

사방에 빼곡히 숨겨져 준비되었던 주술은 와들루스가 몸을 일으키는 바로 그 힘을 이용해서 발동되도록한 것 같았다.

배가 드러나는 바로 그 순간에.

〈와들루스. 배 간지럽히면. 졸린 거예. 요.)- 쿠구궁!

거대한 거북이가 다시 사막에 배를 대고 엎드렸다.

반만 파묻힌 채였다.

새까만 점이 이쪽으로 빠르게 날아오며 외쳤다.

- 하하하.! 시간을 잘 끌었구나!

원래 주인공은 마지막에 나타나는 법이다.

"무슨 짓을 했던 거지? 이놈은 대체 왜 자극한 거냐."

- 이 녀석이 일어나야 신전 내부가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느니라.

"신전. 내부요?"

아직 파리한 낯빛을 띤 루비아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 그래. 서둘러라! 신전에 들어가〈야 이놈을 오래 잠재울 방법이 있다.

219화 9: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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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아이작을 따라 '와들루스'의 거대한 몸을 빙 돌아갔다.

묻고 싶은 건 많지만.

하나하나 따질 때가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저 거대한 S마이너랭크 보스에게 무슨짓을 한 건지는 몰라도, 분명 임시방편으로 보이니까.

신전으로 들어가야, 오래 재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말도 그렇고.

- 파드득!

날아가는 아이작이 말을 건다.

〈멋지지 않았느냐? 〉

급하다면서.

자랑할 때가 아니라면서.

"아, 그렇지. 정말 대단했다. 역시 수준이 다르다고 느꼈어. 최고였다."

듣고 싶은 대답을 빨리 던져 줬다.

〈??? 흥. 얼른 따라오기나 해라. 〉

아이작이 한차례 저 높이 솟구쳐 올랐다.

- 팟!

'사막 적응' 스킬 덕분인지 모래를 디뎌도 질주 속도는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

"와아.

루비아의 머리칼이 바람에 빠르게 휘날린다.

잠든 와들루스의 몸은 생물학보다지리학이 적용되어야 할 정도였다.

꼬리 부분에 도착하는 데만 무려일 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여기겠지."

"지도를 봐도 여기 맞네요. 정확히 이 지점이에요."

우리는 고풍스럽다기보다 황량한 회색의 신전 앞에 섰다.

"참회와. 속죄의 전당.

루비아가 신전 앞에 구불구불하게 새겨진 글씨를 읽었다.

"예메라의 신전이군."

문도 없이 뚫린 안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신전에는 조각 한 점 없다.

일부러 장식을 배제한 듯한 신전은 황량한 분위기를 조장하는 듯했다.

그저 가학적인 엄격함을 유지하는 표정의 동상이, 신도들이 걸어올 길을 매섭게 내려다볼 뿐.

조각 대신 다른 것들이 보인다.

살을 뜯는 채찍.

거꾸로 매달고, 몸을 네모난 좁은 칸에 가두고, 무릎 꿇리고 무거운돌을 올리는 고문 기구들.

"이게. 다 뭐죠?"

말도 안 되는 수수께끼를 아무렇지 않게 풀어 버리는 루비아가 여기서는 모르겠다는 모습을 보인다.

"예메라의 신도들은, 여신 앞에서자기 죄악을 떠올리며 육체에 벌을 내린다는군."

예메라의 교리가 자연스럽게 머리에 떠오른다.

예전에 근위 기사단에게 흡수했던 능력 가운데 하나다.

"이것들이 전부 자기를 고문하는 기구라는 건가요?"

"그렇지.

참회는 오직 고통으로만 증명된다.

스스로가 충분히 정화할 때까지, 여신 앞에서 무절제하게 살아왔던 자신의 육체를 학대한다.

알고 있는 교리를 루비아에게 짧게 설명했다.

"아, 저건 뭔지 모르겠는데."

동상 가장 가까이에 세워진 열린 관 하나는 안쪽에 빼곡한 못이 꽂혀있다.

인간이 들어간 채 닫으면 그대로 쇠못꼬챙이가 되어 버릴 물건.

안에 넣으면, 고통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죽어 버릴 것 같은데.

관에서는 묘하게도 실제 사용감이 느껴진다.

"으으."

루비아가 무섭다는 듯이 내 옆에 붙을 때였다.

- 쌔애앵!

〈야! 니들 거기서 뭐 하냐? 〉

수직으로 직하해 내려온 아이작이 소리쳤다.

〈왜 맘대로 거기부터 들어가? 〉

"네가 여기로 인도한 거 아닌가?

딱 봐도 저 동상에 루-륨이 담겨있는 것 같은데."

- 딱딱!

아이작이 부리를 부딪쳤다.

〈흥. 그건 맞다. 하지만 건드리면 안 돼. 이 '아래'가 무너져 엉망으로 섞여 버리거든. 밖이다! 〉

"밖.?"

엉겁결에 녀석을 따라 신전 외부로 나왔다.

〈거북이 꼬리 쪽을 잘 봐라. 〉

신전 아래, 그늘진 곳.

거대한 뒷발과 긴 꼬리 사이에는, 거북이가 일어나며 만들어진 음푹한 골짜기가 있었다.

일어나면서 부분이 치워지자 미묘하게 슬쩍 드러나 보인 공간.

〈내려가라. 〉

깊이 파인 모래 골짜기 안쪽에는 직경 1미터 정도의 새까만 암석이 있었다.

경계가 부드럽게 깎인 암석이었다.

"여기에. 뭐가 있는 거지?"

〈저게 예메라의 '뒷면'이다. 돌을 치우면 재밌는 걸 볼 수 있지. 〉≪으. ≫- 쿠궁.

간단히 암석을 옆으로 밀었다.

거북이 꼬리와 뒷발로 가려져 있던 비밀스러운 공간.

애초에 '와들루스'를 처리할 만한 상대라면 이런 암석이 장애가 될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걸 아는지, 돌은 걸리는 것도 없이 옆으로 굴러갔다.

"날아드는 모래 정도나 막으려고 해 놓은 장치 같아요.

안쪽은 작고 좁은 공간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바로 위의 신전보다 훨씬 더 작은 공간에는, 반짝이는 보석과 금화가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이게 다 뭐죠?"

〈흐흐흐. 참회료지. 〉

"참회. 료?"

〈피차 힘들게 흉흉한 고문 기구들을 쓰는 대신, '더러운' 재물을 낸다면 그걸로 깨끗해지는 거지. 아까 동상발치에 있는 참회료 구멍 못 봤냐? 〉주의 깊게 보지 않았지만.

돌이켜 보니 보석이나 금화 정도만 들어갈 작은 구멍이 있던 것 같기도하다.

그쪽에 보물을 떨어트리면 여기로 굴러와 모이는 구조일까.

"이런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비공식적인 루트니 당연하지. 뭐, 신전도 먹고살아야 되니까. 〉- 촤륵!

아이작은 양 발톱으로 가장 값비싸보이는 보석들만 잔뜩 음켜쥔 뒤, 나머지는 부리로 덥석덥석 삼키기 시작했다.

녀석이 사백 년 전에 특별 제작한 페티쉬이라고 했던가.

뜯어보면 볼수록 신기한 인형이다.

〈뭐 하냐? 어서 주워 담아야지. 〉

"은화도 없어요! 모두 보석과 금화뿐이네요."

〈은화는 충분히 더럽지 않거든.

그런 걸 내면 괘씹죄로 여신이 벌을 내린다고? 〉

세상에서 괘씸죄를 가장 안 두려워할것 같은 태도로, 녀석은 부리로 천장을 쿡쿡 찍었다.

〈요기야. 〉

천장에 작은 구멍 하나가 있는데, 그 밑이 보석과 금화가 가장 높게 쌓여 있던 곳이다.

"역시 이런 걸 가져가면 여신님의 저주를 받겠죠?"

"걱정하는 것치고 너무 거침없이 주워 담는데?"

루비아도 어느새 재빠르게 보석과 금화를 챙기고 있었다.

"음, 참회료는 냈다는 게 중요하지 그게 어디로 가는지는 별 상관없지 않을까요?"

루비아의 말을 들으며 나도 곁에서 여기저기 흩어진 보석들을 주웠다.

[회계 스킬을 발동합니다!]

가짜 따위가 아니었다.

하나하나가 진짜 보석이다.

게다가 상당수가, 고작 1레벨의 회계스킬로도 상품上品이라는 걸 알 수 있는 녀석들이다.

유블람 경비대장이 세 곳에 분산해놓은 은괴도 상당한 수준이었지만, 여기 있는 보석들은 얼추 그 가치가 열 배는 되어 보였다.

부피 자체는 얼마 되지 않음에도 하나하나가 가치 높은 것들.

대부분 다 챙겨 갈 때였다.

- 구구구.

"아이작! 바깥이 울리고 있다!"

녀석이 잠시 재웠던 거북이가 다시 깨어나는 것 같았다.

〈어? 이제 위로 올라가자구. 〉

뒤쪽을 바라봤다.

잠이 완전히 깨지는 않은 듯 낮고 중후한 소리를 뱉어 내며 거북이가 몸을 움찔거렸다.

저 녀석이 깨어난다면 같은 공격이 두 번 다시 통할까?

전혀 그럴 것 같지 않다.

일어나면 분명히 우리를 가만두지 않겠지.

그래도 아이작이 자신 있는 태도를 취하니, 뭔가 방법이 있을 거다.

녀석은 파드득 날아서 동상 위에 앉았다.

〈이거다. 네가 찾는 사도의 피를 원동력으로, 이 동상이 감시 장치가 되어 작동하는 거다. 〉

"거북이도 이게 컨트롤하는 건가?

이게 망가지면.

〈그래. 와들루스 녀석도 다시 잠에 빠져들겠지. 뜨거운 모래만 적당히 덮어 주면 쿨쿨 계속 잘 거다. 〉그럼 이대로 부순다.

대검을 휘두르기 위해 뒤로 크게 당긴 순간이었다.

〈아니. 여기는 내가 해결한다. 년얌전히 있어. 〉

녀석의 어조는 단호했다.

기세에 눌려 뒤로 한 걸음 물러나 가만히 바라봤다.

- 깡! 까앙!

아이작이 부리를 앞뒤로 리듬감넘치게 움직이면서 예메라의 눈을 쪼아 댔다.

- 까강!

신전에 강렬한 소리가 몇 번이고 거듭해서 울려 퍼졌다.

눈의 칠이 막 벗겨진 때였다.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상태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참회의 여신, 예메라의 동상이 공격받고 있습니다!]

[동상의 신성력: C+랭크]

[주의: 공격자에게 여신의 강렬한 저주가 스며듭니다!]

? 화르르!

동상의 눈을 부리로 찍을 때마다 회색 연기가 피어오르며 까마귀의 몸을 감쌌다.

처음은 실오라기처럼.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회색연기가, 나중에는 촘촘한 그물처럼 변해 까마귀를 몇 겹으로 조였다.

저주받는다는 상태창이 아니라도 좋게 보이지는 않는 현상.

- 까앙!

그러나 아이작은 전혀 개의치 않고 계속 동상을 쪼았다.

"어이, 괜찮은 거냐? 연기가.

입에 잔뜩 보석을 머금은 아이작이 날개를 살짝 파닥였다.

〈어. 저주야. 〉

녀석도 이미 알고 있는 듯하다.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

"저주라구요?"

〈후후, 귀여운 것들. 저주는 이미많이 받았다. 이 정도 더 받는다고 달라질 것도 없다. 〉- 깡!

동상의 눈을 찍는 소리가 더 높이 울려 퍼졌다.

분명한 악의가 느껴지는 회색 연기 따위는 정말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모양새.

대체 얼마나 원한을 사고 저주를 받고 다녔길래.

녀석과 같이 다니면 나까지 함께 도매금으로 넘겨지는 게 아닐까?

조금 섬뜩하다고 생각할 때였다.

- 주특.

동상의 한쪽 눈에서 은빛 액체가 한 방울 홀러나왔다.

곧이어 다른 눈에도 맺힌 은빛의 마력액은 곧 아래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거, 담아야 하는 거죠?"

루비아가 어느새 빈 병을 동상

아래에 대고 루-륨을 담고 있었다.

한 병이 채워질 때 즈음, 잠에서 다시 깨어나려던 거북이의 움직임이 서서히 멈췄다.

"조용해졌어요!"

"이 신전 구조는 어떻게 다 알고 있던 거지?"

아이작이 부리를 쳐들고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너야 모르겠지만, 이 몸이 신전하루 이틀 터는 줄 아느냐? 어디에 뭐가 있는지는 당연히 다 알지〉- 주르륵.

두 병을 거의 다 채우는 마지막 '눈물'이 떨어질 무렵.

아이작이 하도 쪼아 댄 덕분인지, 뜯겨지다시피 한 예메라의 두 눈은 기어코 바닥에 떨어졌다.

- 닥다르르르.!

바닥에 떨어진 두 눈은, 곧 지하와 이어진 '참회료' 납부 통로로 굴러들어갔다.

"이걸로 된 거냐?"

나는 움직이지 않는 거북이 상태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물었다.

〈어. 바깥에 있는 녀석은 한동안 잠이나 처자고 있을 거다. 공격할생각 없지? 〉

"전혀."

어떻게 상대할지 감도 안 잡히는 녀석이다.

그때 였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말해. 〉

"그냥 이 신전 동상에서 지금처럼 루-륨만 가져가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러면 저 거북이 녀석이 계속 잠든 상태인 거 맞지?"

〈어. 그렇지. 〉

"그럼. 몰살당할 뻔한 위험을.

고작 보석들 때문에 감수한 거냐?"

〈'고작 보석' 때문이라니. 세상에 그런 말은 없어. 〉〈다 잘됐는데 뭐가 불만? 얼른사도의 피나 흡수해 봐라. 저주도 내가 받아 줬는데 쓸데없이 우울해하지 말고. 〉그건 인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보석 때문에 우리를 심각한 위험에 빠뜨렸지만, 동상을 파괴하며 대신저주 받아 준 걸로 메꾸기로 했다.

"어휴. 해골님. 여기 가져왔어요."

루비아가 가져온 투명한 병.

그곳에 담긴 루-륨에 손을 뻗었다.

- 쉬이이이익.!

병에 모여 있던 액체가 증발하면서 은은한 은색 빛이 몸에 스며든다.

레라지에의 성지에서 '부스러기'를 잡고 난 뒤로 이런 방식이 자연스레느껴지기 시작했다.

옆에서 루비아가 침을 꿀꺽 삼키며 내 모습을 바라본다.

[서번트 시스템]

[마스터가 당신을 신비한 존재로 생각합니다!]

[신비도神秘度가 약간 오릅니다.]

[해당 수치가 올라갈수록, 상식의 궤執를 벗어나는 존재들에 대한 대항이 가능하게 됩니다.]

이런 것도 있었나.

〈다시 봐도 기이한 광경이군. 〉

〈이런 방식으로 사도의 피를 흡수하는 건 이 몸마저 처음 구경한다.

뭐 떠오르고 보이는 건 없느냐? 〉

물론.

눈앞에서 상태창이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루-륨 흡수에 익숙해집니다.]

[종족 판명.]

[전직이 해제된 상태.]

레라지에의 성지에서 봤던 말들이 다시 떠오른다.

[현재 클래스.]

[추가 루-륨을 습득하여 기본적인 전직 정보가 해제됩니다.]

[다음 직업의 특전/페널티 정보가 모두 해제되었습니다.]

해골 검사

해골 기사

해골 사냥꾼

220화 9:1 (15)

***************************************************

[1. 해골 검객]

"검(劍)은 피 맛을 보기 전에는.

자세한 설명은 이미 본 적이 있다.

빠르게 아래로 내리고 특전과 페널티를 살폈다.

[특전: 전직 시 자동 취득합니다:\- 1. 제비 베기: 직업 레벨이 오를 때마다〈검〉의 공격 속도가 추가로 4% 상승합니다.

- 2. 선택과 집중: 스킬〈검술〉의 숙련 속도가 350% 상승합니다.

- 3. 바위 쪼개기: 스킬〈검술〉의 위력이 레벨당 6%씩 상승합니다.

- 4. 선禪: 당신은 5레벨마다 낮은 확률로〈깨달음〉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성공할 경우 모든 스탯이 10상승합니다. 랜덤 보너스가 추가 부여됩니다. 실패할 경우 특수상태〈주화입마〉에 빠지게 됩니다.

[페널티: 해당 직업을 유지하는 동안

지속됩니다:\

- 1. 중갑 장착 시, 공격력이 50%감소합니다. 또한 공격 속도가 75%감소합니다.

- 2. 선택과 집중: 검 이외 다른 무기의 숙련도가 75% 감소합니다.

네 번째 특전이 인상적이다.

선禪.

5레벨이 오를 때마다 모든 능력이 10씩 상승한다면, 레벨이 40 올라간것과 같은 터무니없는 효과.

다만, '주화입마'라는 단어가 붉게 반짝이는 게 뭔가 불길하다.

게다가 중갑 착용에 대한 패널티가 만만치 않다.

일단 갑옷을 입고 다녀야 하는 내입장에서는 치명적인 결함.

조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다음 선택지로 시선을 옮겨 계속읽었다.

[2. 해골 기사]

"어린 소녀들은 빛나는 갑옷와 아는 내용이다.

빠르게 시선을 내렸다.

새롭게 나타난 특전을 확인한다.

[특전]

- 1. 기동성: 스킬〈승마〉의 숙련속도가 100% 올라갑니다.

- 2. 무장: 중갑을 페널티 없이 착용할 수 있습니다. 착용 아이템의 효율이 25% 올라갑니다.

- 3. 전투 전문가: 모든 무기의 숙련속도가 45% 더 빨라집니다.

- 4. 초급 지휘관: 당신 근처에서 싸우는 아군의 경험치가 약간 더빠르게 올라갑니다.

- 5. 해골마 소환: 죽은 말을 다시 일으켜 사역합니다. 당신의 능력에 따라 일으킬 수 있는 말의 수준이 정해집니다.

- 6. 지정 보호: 특정 개체에 대한 '보호'를 수행합니다. 스킬이 시전될동안, 대상에 가해지는 타격을 자신이 대신 흡수합니다.

특별한 페널티는 없고, 전반적으로 폭넓은 혜택이 주어지는 직업이다.

게다가 특수한 스킬들까지.

해골마 소환이나 지정 보호 같은 스킬이 어떤 식으로 발휘될지 무척궁금하다.

지정 보호를 루비아에게 사용할 수 있다면, 그녀가 '마스터'로서 주는 버프를 그대로 받으면서 전장에서 유리하게 싸울 수 있는 게 아닐까?

아이작에게 맡겨 놓을 필요조차 없어진다.

너무 루비아를 도구처럼 이용하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지정 보호, 라는 단어를 속으로 되뇌며 마지막 직업을 확인했다.

[3. 해골 사냥꾼]

"사냥하거나, 사냥당하거나."

- 징표를 찍고 덫을 놓으세요.

바람의 방향을 읽고 시위를 차분히 당기세요. 당신이 쏘는 화살 한 발로 혁명이 시작됩니다.

- 사냥꾼은 대부분의 원거리 무기와 트랩을 능숙하게 다룹니다. 사냥은 '상상보다도' 쉬워집니다. 사냥감은 공포와 불안에 시달리다, 혹은 생각도 못 하고 있다가 곧 따듯한 피를 흘릴것입니다. 어둠과 추위만이 그에게 남겨지겠지요.

설명을 한차례 다시 훑고, 특전을 처음으로 확인했다.

[특전]

- 1. 손에 익은 것: 모든 원거리

무기와 덫의 숙련 속도가 60%

올라갑니다.

- 2. 살아 움직이는 과녁: 하나의 적에게 '징표'를 찍을 수 있습니다.

징표가 찍힌 적에 대한 원거리 무기 명중 확률이 120% 상승합니다.

- 3. 내 눈이 조준기: 처음 쓰는 활을 잡더라도 조준점이 자동으로 맞춰집니다. 맞지 않는 조준점으로 인한 페널티가 사라집니다.

- 4. 내 손가락이 안전장치: 스킬레벨과 상관없이, 원거리 무기 오발확률이 0%로 조정됩니다.

- 5. 고통 찾기: 약점을 발견할확률이 올라갑니다. 상대의 수준에 따라 확률이 달라집니다.

- 6. 관통의 순간: 모든 종류의 〈방어〉를 뚫고 들어갈 확률이 두 배오릅니다.

[페널티]

- 1. 단검을 제외한 근접 무기의 숙련도가 80% 감소합니다.

- 2. 중갑 장착 시, 공격력이 50%감소합니다. 또한 공격 속도가 75%감소합니다.

세 번째 직업.

사냥꾼.

특전 설명부터 확연히 좋아 보인다.

내가 칼이 아니라 활을 썼더라면, 뒤도 안 돌아보고 이걸 골랐겠지.

다른 직업에게는 없는〈징표〉라는 기능이 있다.

한 번쯤 시도해 보고 싶기는 한데, 지금 내가 고르기에 직업 페널티가 너무 마음에 걸린다.

근접 무기의 숙련도가 무려 80%감소한다니.

현재 쓰는 대검 같은, 근접 무기와 관련된 스킬 숙련은 아무래도 기대할수 없다는 이야기.

곤란하다.

지금까지는 대부분〈정수 흡수〉로 스킬 숙련을 올려 왔다.

하지만 정수 흡수 권능에도 한계는 강해질수록 써먹기 힘든 능력.

해골 사냥꾼을 2차 직업으로 선택한다면, 검술 레벨 하나를 올리기 위해서는 준準검주급이라도 죽여야 하지 않을까.

게다가 두 번째 페널티.

해골 검객와 마찬가지로, 중갑은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

역시 어렵다.

마스커레이드의 지속 시간은 고작10분에 불과하고, 세상은 내 모습을 보면 칼부터 휘두를 인간들의 것.

모습을 아무렇게나 드러내도 좋은 시기까지는 아직 10년.

인간 사이의 전쟁이 끝나고 마왕이 강림하기까지는 그만큼 남았다.

그렇다고 도시 안에서 페널티를 감수하고 중갑을 입으면, 적지 한가 운데서의 기습에 취약해지는 셈.

어쨌거나.

[2차 클래스 전직 공통 특전]

[레벨이 오를 경우 획득하는 스탯포인트가〈2〉로 조정됩니다.]

[모든 능력치가 10 상승합니다.]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스킬 경험치20, 000이 부여됩니다.]

전직은 필수다.

자세히 하나씩 읽어 보니, 뭘 하든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혜택을 주고 있었다.

이 좋은 걸 못 하고 있었다니.

하지만.

각각의 직업 설명 아래에 떠 있는 〈전직 하시 겠습니 까? 〉라는 글자를 들여다봤을 때였다.

- 띠링!

[루-륨이 부족합니다.]

해골 기사도.

- 띠링! 띠링!

검객도, 사냥꾼도 모두 전직 실패.

이번에는 전직 정보의 개방만으로 끝인 모양이다.

루-륨을 얼마나 더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걸까?

아니, 사실 내가 방금 보충한 양이 터무니없이 적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작."

〈어, 말해. 〉

"아무래도 황실을 털어야겠다."

나는 조용히 선언했다.

9할 이상의 루-륨이 제국 황실에 밀집되어 있다면.

그리고 이 은빛 마력액이 나에게 특별한 효과를 발휘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진 이상, 빙빙 돌아갈 이유는 없었다.

전직은 반드시 필요하다.

〈확실히 뭐가 보이는 모양이로군.

근데 말해 주기는 싫다 이거냐?

요런 앙큼한 녀석 같으니. 〉

〈좋아. 네가 굳이 하나하나 말하지 않아도, 반응만 보면 대충 짐작은 가거든. 〉머릿속에 또 하나의 상상이 떠오른다.

"루-륨이. 황실이 가진 힘의 원천이라고 했었지?"

〈그래.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움직이지 않던 아이작 무덤의 '골렘'들.

교단이 없던 열두 병의 루-륨.

마지막으로 헤어졌을 때보다 훨씬강해진 레나.

내가 이동시킨 루-륨의 위치는 그변경 상태가 유지된다.

황실에 있다는 만큼 대량의 루-륨을 가져가면.

어쩌면 '다음 생애'에 황실의 힘이 대폭 줄어들지도 모른다.

다음 생에 아니라면 그다음 생.

그다음 생이라도.

아이작이 그 결계를 뚫고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로.

그때였다. 루비아가 나와 아이작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그럼, 수도로 가서 그 여성분과 협조하는 건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겠지."

언젠가 루비아에게도 평온한 정착지를 선물해 줄 수 있을까? 데리고 다니며 몰래 이용만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오히려 자신이 폐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게 더욱.

루비아가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버리고 온 성안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몰래 괴로워한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루비아를 영주로 만들고, 성안의 인간들을 구하는 건 지금은 불가능하다.

최소한 한 번의 '전직'은 거쳐야.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흐흐흐흐. 〉

뭘 생각하는지 모를 아이작의 웃음소리가 상념을 깨트렸다.

"반대하지 않는 거냐? 수도행을."

〈황실로 막무가내로 뚫고 들어갈생각 아니잖아? 〉

"당연하지. T&T와 접촉할 거다."

〈솔직히 내가 볼 때는 뭘 어쩌든 적극적인 자살이지만. 일단 무슨이야기를 하나 들어는 봐도 좋겠지.

자살 방법이 궁금하기는 하니까. 〉

"실패할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렇게 말한 적 없는데? 〉

둘의 대화를 흘려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수도에 가는 이유는 하나 더 있다.

T&T의 정보망을 통해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기스-제-라이.

나에게 정수 흡수를 심어 준 네크로멘서.

그리고 그녀를 죽인 잿빛 갑옷을 입은 기사에 관한 정보를 얻을 생각이었다.

천외천의 존재로 생각되던 기스-제-라이를 간단히 살해할 수 있는 존재라니. 대체 뭐였을까?

후작보다, 크라켄보다.

'소녀 공작'보다도 강렬한 존재감을 내뿜었던 기사.

그럼에도, 어째서.

잿빛 기사의 공격은 내게 먹히지 않았던 것일까.

나는 가만히 날짜를 헤아렸다.

약 2개월 뒤면 기스-제-라이의 황제암살과, 그녀의 죽음이 동시에 이어진다.

막으려면〈린트부름의 꿈〉을 말해달라고 했던 네크로멘서.

정말 그걸로 그녀의 죽음을 막을 수 있을까.

어쨌거나 움직이기 전에,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고 갈 필요가 있다.

?아이작, 기스-제-라이를 아나?"

〈어? 당연하지. 엠버메어의 유명한 네크로멘서잖냐. 호오. 이것 봐라.

너, 개랑 깊은 관계구나? 〉

"아니, 아무렇게나 막 던지지 말고.

기스-제-라이에 대해서 뭔가 알고 있는 걸 듣고 싶은데."

〈동쪽에서 건너왔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엠버메어의 막후를 지배하는 한 축이지. 연합과 제국에도 발을 뻗고 있고. 아, 새로운 시체를 찾아바다를 건너왔다고 했던가. 〉아이작이 한동안 말을 이었다.

직접 목격한 본신의 터무니없는 강력함 외에도, 그녀가 엠버와 연합에 행사하고 있는 정치적인 영향력이 상당한 것 같았다.

〈엠버의 흑마법 단체 '이상주의자'가 그녀를 멋대로 숭배하고 있어. 아주 골치 아픈 일도 그녀가 개입한다는 소문만 돌면 깔끔히 해결되지. 〉

"그라스미어 영주의 시야만 공유했던 거 아닌가? 꽤나 자세히 아는군."

〈흐흐. 그라스미어의 영주를 너무무시하는 거 아니냐? 놈은 '상인 연합'과 자문 관계를 맺고 있다. 정기적으로 다양한 정보를 구매하고 있어. 〉상인 연합.

"이 녀석들 말인가?"

나는 품에서 카드를 꺼냈다.

오각별이 그려진 검은색 카드.

유베가 건네준 캐빈 애슈턴의 책 '사람을 흉내내는 인형'에 끼워져있던 카드다.

〈그래. 그걸 건네준 놈이 영주의 계약자였다. 〉

이걸 건네받을 때 아이작이 내게 빙의된 상태였다.

〈꽤 쓸모 있어 보이는 녀석이다.

이런저런 심부름을 잘하지. 언제 한번연락해 두도록. 〉아이작이 이렇게 말할 정도라니, 진네이 유베의 탁월함이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그런데 하나로는 의미 없다. 〉

"알고 있다."

다른 쪽 품에서 카드를 하나 더꺼내 보였다.

유블람 경비대장의 비밀 상자에서 빼앗은 카드다.

〈이런 건 또 어디서 꿍쳐 놨느냐?

'두 번째' 별이군. 좀 낫다. 크크.

세 개만 더 모으거라.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

진네이 유베의 경우를 생각한다면, 오각별의 '상인'들은 나와 엮이면 호의적으로 카드를 건네줄 확률이 높았다.

과연 다섯 장을 모을 때까지 살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으로.

아이작에게 확인해 볼 게 하나 더있었다.

"혹시 '린트부름'이 뭔지 알고 있나?"

〈응. 알지. 그런데. 〉

아이작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말을 이었다.

221화 생매장 (1)

***************************************************

〈안 알려 줘. 〉

"뭐라고?"

처음에 말을 끌 때 약간 불안했다.

하지만 정말 안 알려 준다고 말할줄이야!

"왜 안 알려 주겠다는 거지?"

〈너도 물어보기만 하고 중요한 건 하나도 안 알려 주잖아? 사회성이 왜 이렇게 부족하냐? 〉정신이 멍해진다.

아이작에게 사회성을 지적받았다.

사실 터무니없는 지적도 아니다.

궁금한 것 위주로 멋대로 계속해서 묻기만 하고 아이작에게는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미안한 감정을 한 톨도 느끼지 않았다.

녀석과 계속 대화하다 보니 어느새닮아 버린 건 아닐까.

나는 이대로 괜찮은가.

스스로에 대한 회의감이 몰려왔다.

〈공손하게 스승님, 알려 주십시오.

제가 아둔해 아는 게 정말 하나도 없습니다, 해 봐. 〉린트부름에 대해 알고 싶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기스-제-라이를 만나면

그녀가 자세히 설명해 줄 테니까.

관두라고 하려던 참이었다.

"드래곤이에요."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루비아가 끼어들었다.

〈.흥! 건방진 인간. 〉

아이작의 삐진 목소리는 무시했다.

"드래곤(용). 이라고?"

루비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어 갔다.

"네. 하늘 위의 하늘을 나는 자들, 가장 강대한 용종龍種을 고대어로 린트부름이라고 불러요."

〈넌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아냐? 〉

아이작이 핀잔을 놓았다.

루비아는 입가에 희미하게 웃음을 띠고 부드럽게 대답했다.

"드래곤에 대한 이야기는 예전부터 좋아했거든요. 기아티아, 카-티아칸, 치조크, 헤텐세'지. 다양한 종류의 드래곤을 부르는 이름도 모두 알고 있는걸요. 날개로 넓은 하늘을 덮고 전능한 마법을 쓰는. 그 존재들은 인간을 보며 어떤 기분일까요?"

〈드래곤이니 뭐니 그딴 건 어차피죄다 소설에 불과해. 400년 전에도 그딴 건 없었다. 린트부름은 무슨.

필요 없는 정보라 굳이 언급하지도 않았던 거다. 〉

가장 강한 드래곤의 종種이라고?

린트부름의 정체를 알았지만 더욱혼란에 빠졌다.

기스-제-라이와 린트부름이 대체무슨 관계라는 걸까.

당시에 그녀가 했던 말들을 차분히 되짚어갔다.

〈찾지 못했다고 포기하지 말라고 전해라. 린트부름의 태양과 평행하는 꿈을 걸으라고 해라. 〉- 달그락.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게 아니다.

그 전에 했던 대화, 아니, '노래'를 한 줄씩 떠올린다.

〈나는 네크로멘서! 〉

〈조용한 녀석들을 일으켜서.) 반복해서 회귀하는 현상을 솔직히 고백했을 때.

그녀는 미친 해골을 봤다며 무척흥겨워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다.

틀림없다.

〈여기엔 용의 뼈를 찾으러 왔지! 〉

하지만.

비슷한 것도 못 봤다고 했던가.

그녀가 린트부름의 태양 운운하며 스스로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바는 분명하다.

최강 용종龍種의 뼈를 찾아라.

그러기 위해, 원해를 건너서 서쪽대륙까지 온 게 아니냐고 상기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가벼운 전율이 일어났다.

퍼즐이 풀렸다.

스스로 뭔가를 알아냈다는 느낌은 상당히 각별했다.

해냈다는 뿌듯한 감각.

만만치 않은 상대를 아슬아슬하게 살해했을 때와 비슷하다.

싱거운 것들을 칼로 잔뜩 살해했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기분 좋다.

앞으로도 생각과 판단을, 웬만하면 내가 하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아이작이 부리로 나를 찔러 온다.

〈야, 너 지금 이상한 생각 하지?

포즈가 어째 불안하다. 〉

"아이작 님도 정말 민감하시네요.

옆만 계속 바라보고 있나 봐요."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더 묻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유의미한 건전부 말해 줄 테니까. 〉나는 한 번도 보지 못한 방식으로 세공된, 잿빛 기사의 외형에 관해아이작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갑옷 전반에 걸쳐 반짝이던 기하학적인 회로.

기스-제-라이를 몇 번이고 내리쳐 부수던 칠흑의 대검.

잠시 고민하던 아이작이 갸웃하며 말했다.

〈타이탄이 생각나긴 하는데, 사실모르겠군. 딱 맞는 갑옷 형태라니.

그렇게 작은 형태는 없을걸. 〉

"연합의 철인鐵人들을 말씀하시는거죠?"

〈어. 파괴력을 높이기 위해 일부러부피를 키우거나 전투중량을 올리는 기체가 많은데. 갑옷 형태라는 건 이상하다고. 〉아이작도 모른다면 방법은 없다.

회로 모양이라도 자세하게 그려서 설명하면 혹시 알아볼지 모르지만, 아쉽게도 그 정도로 눈여겨보지는 못했다.

이렇게 끝내는 건 조금 애매하다.

하지만 찜찜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나중을 기약할 수밖에.

언제고 다시 그놈을 보게 된다면, 회로를 자세히 기억해서 아이작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다.

[사막적응] 스킬은 아이러니하게도 사막을 벗어나는 데 무척 유용했다.

서부 사막과 초원의 전환은 서서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느 순간까지 빼곡한 모래였다가, 해안처럼 초원인 지점이 나타났다.

사막안沙模岸이라고 부르면 좋을 듯한 경계를 건너, 수도 방향으로 가도를 따라갔다.

사막을 벗어나며 추스른 서너 필낙타까지 함께 몰고 가는 참이라, 위용은 꽤나 그럴듯해 보였다.

관리는 그럭저럭 되어 있었지만, 의외로 이용하는 여행자들은 그다지 보이지 않았다.

레나와 함께 이틀 걸렸던 가도를 이번에는 사흘 동안 느긋하게 갔다.

세 번째 석양이 지기 시작할 무렵.

저쪽 멀리 익숙한 협곡이 보였다.

- 파드득!

높이 날다가 다시 내려온 까마귀가 낙타 등에 앉으며 말했다.

〈뭐 없다. 지나가라. 〉

"저것만 넘으면 바로 수도네요."

루비아가 지도와 앞을 번갈아 보며 중얼거렸다.

그리곤 제 정수리에 찬물을 부으며 머리를 두어 번 흔들었다.

긴 갈색 머리카락 몇 가닥이 살짝그을린 흰 피부에 달라붙었다.

한 달도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처음 에라스트에서 도망쳤던 때와 지금 그녀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그저 피부색뿐만이 아니라 여행에 꽤 익숙해진 모양새였다.

"여기서부터는 걸어서 간다."

타고 가던 말과 짐을 실은 낙타를 전부 평원 쪽으로 멀리 풀어놓았다.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깊은 협곡을 느긋하게 걸어갔다.

저번에 마왕 푸르손의 추종자들이 빼곡하게 포위망을 구성하고 있던 장소다.

물론 이번에는 아무것도 탐지되지 않았다.

작은 동물들이나 새들의 기척만이 느껴지고 있을 뿐이다.

이번 생에는 푸르손의 제단들에서 난장을 피우지 않았기 때문에, 그게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전쟁이 일어나길 원하던 녀석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다양한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던데.

지금은 다 어디 숨어 있는 걸까?

샤루니안처럼 자유자재로 모습을 숨길 수 없는 수준의 녀석들도 많이 있을 텐데.

하긴, 레라지에의 성지처럼 결계로 숨겨진 공간도 많으니까.

한참 걷다 보니 아이작의 후예라며 공격받던 지점이 나왔다.

놈은 여기에서 나를 죽여서 자신의 '봉인'을 풀게 만들고 싶어 했다.

그걸 생각하니 다시 한 번 빡침이 몰려온다.

물론 그 기억은 아이작에게 전혀없겠지.

명심하자.

이 녀석은 언제든지 내 뒤통수를 후려갈길 수 있는 놈이다.

오크 족장을 마주쳤던 곳을 지나, 나냐우와 만난 장소에 도착했다.

비밀 지하 통로로 간다면 더 쉬울지 모르지만 위치를 기억한다고 갈수 있는 곳은 아니다.

결계를 뚫어야 한다.

아이작에게 부탁하면 지하 통로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혹시알려 주지도 않은 통로로 들어갔다, 나냐우에게 쓸데없는 적의를 사게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냥 정공법으로 가기로 했다.

협곡을 나와 한 시간쯤 걸어가자 드디어 수도의 끄트머리였다.

뾰족뾰족하게 높이 솟은 첨탑부터 보였다.

아래는 촘촘하게 쇠뇌 구멍이 난 성벽이, 서로 다른 높이로 미로처럼 쌓여 있었다.

단순히 이중이나 삼중이 아니다.

어디를 무너뜨려도 방어진을 돌파하는 데 최대의 노력을 쏟도록 정교하게 만들어진 개미지옥 같았다.

"저런 성을 공략하려면 어떤 방법을 써야 할까요?"

루비아가 원래 그런 걸 생각하는 인간이었던가.

변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상대라면, 보급로를 끊어안에서부터 아사飯死하게 만들어봐야지. 엄청 오래 걸리겠지만. 뭐, 저런 오래된 도시라면 지하 통로도 거미줄처럼 쫙쫙 깔려 있겠지? 쉽지 않을 거야. 〉알고 하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이작의 말이 옳다.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지하 통로를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성을 공략한다는 이야기에, 문득 떠오르는 과거의 장면이 있었다.

"그냥 부수면 되지 않나?"

〈네가 여기를? 〉

"아니. 내가 아니라. 검주劍主급강자라면 단신으로 성문을 부수고 성벽을 무너뜨릴 수도 있을 텐데."

미로에 빼곡하게 배치된 경비들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돌이나 철 따위로 레안드로 후작같은 검주들을 막을 방법은 없다.

〈응? 개네가 성벽을 왜 부수겠냐.

부술 힘을 가진 것들은 안에 모두 받아 주니까 성벽인 거다. 〉아이작의 요지는 뻔했다.

성벽을 부술 힘을 가진 녀석들은 저 안이 제집이다.

재산이고, 누리는 곳이다.

아직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내부로 포섭한다.

〈저 안에 자리 잡고 싶냐? 사실, 너도 포섭 대상이 될 수 있다고. 〉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는 인간이 아니다."

〈흐흐흐. 그런 건 솔직히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야. 저 성벽을 유지하는 데 협조하느냐, 깨려고 하냐가 중요하지. 깨려고 한다면 제 부모나형제라도 서슴없이 쳐 죽일 거다. 〉

"유지하는 걸 돕는다면 해골님도, 라는 말씀이군요."

〈그래. 이놈이 아니라 마왕이라도 기꺼이 손에 손을 잡겠지. 〉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는 성문앞에 도달했다.

양쪽에 꽤나 긴 성벽이 자리하고, 성문은 안으로 움푹 들어간 형태다.

좌우 성벽 위에는 쇠뇌 수십 대가 성문 근처를 겨냥하고 있었다.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본격적인 공성攻域이라도 들어가게 된다면 각양각색의 끔찍한 무기가 다 튀어나올 거다.

여기서 허튼짓을 하느니 바깥쪽벽부터 차근차근 다 무너뜨리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은 모습이다.

우리는 길게 늘어선 줄의 끝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쪽으로 오면서 여행자는 그다지 발견하지 못했지만, 각지에서 모인자들이 몇 군데 안 되는 성문으로 들어가기에 병목현상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검문 자체도 깐깐했다.

상인도, 여행자도, 잠깐 일을 보고 나갔다 들어오는 자들도 꼼꼼하게 짐 검사를 하는 모양이었다.

성문 옆에는 피로에 쩐 표정으로, 커다란 수정구가 박힌 지팡이를 든마법사까지 보였다.

"저게 뭐지?"

〈탐지 마법이다.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수상한 것들도 수정구 근처에 다가가면 발각되게 되지. 〉- 삐익1 삐익!

수정구에서 경보음이 울렸다.

자연스럽게 지나가려던 여행자에게 양쪽에서 창칼이 겨눠졌다.

마법사가 피곤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스크군요."

"아니, 내 얼굴이 왜! 왜!"

- 부욱!

경비병의 강한 손길에 여행자의 '얼굴'이 뜯겨져 나갔다.

"에잇!"

검은색 가죽 갑옷을 걸친 경비들은 얼굴이 벗겨진 상태에서 도망치는 상대를 간단히 제압했다.

몰래 수도로 들어오려던 수배범인듯했다.

"에이. 깐깐하게 검사하겠네."

"웬만하면 이 정도는 봐줄 텐데.

뒤쪽에 늘어선 상인들 가운데 몇이 뭔가를 슬쩍 바닥에 버렸다.

"우리. 들어갈 수 있는 거냐?"

〈후후후. 〉

아이작이 가볍게 웃었다.

나도 크게 긴장하지는 않았다.

여차하면 여기서 인간 경비병 몇을 죽이고 도망쳐도 된다.

굳이 좋게 생각하면.

별로 신경도 안 쓰고 있는 서브퀘스트 '경비병 살해'를 추가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다음.

우리가 심사대에 섰을 때였다.

아이작은 경비병들은 보지도 않고 수정과 마법사를 향해 중얼거렸다.

〈무슨 힘으로 감히 누구의 기만을 막겠다는 것이냐. 〉와들루스를 재울 때처럼 주문조차 외우지 않았다.

그저 가볍게 검은 연기가 팟, 하고 아이작으로부터 빠져나왔을 뿐.

그러자 마법사의 수정구가 한순간뿌옇게 흐려졌다.

경비들도, 피곤한 표정의 마법사도 그저 텅 빈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를 통과시켰다.

- 저벅.

우리는 몽롱한 얼굴의 경비병들을 지나, 심사대를 넘어 성문 안쪽 긴터널로 들어갔다.

"다 넘은 건가? 제법인데."

〈이런 걸로 일일이 감탄하지 마라.

피곤하다. 〉

그때 였다.

"와아! 신기한 까마귀잖아!"

우스꽝스러운 모피 자켓을 입은, 부스스한 빨간 머리 소년이 어느새옆에 서서 따라오고 있었다.

바깥 줄에 이런 녀석이 있었던가?

굳이 기억을 되살려 보니 우리와는 한참 멀리 떨어진 뒤편에 느긋하게 서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정상적으로 검문을 받는다면 최소1시간은 걸릴 법한 간격이었는데.

물론,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탐지 스킬을 특별히 활성화한 건 아니지만, 옆을 완전히 내줄 때까지 아예 눈치도 못 채고 있었다.

싸늘한 감각이 뼈 사이로 흘렀다.

무슨 목적으로 접근한 걸까?

어쩌면 빠져나가기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옆에 선 녀석을 가만히 바라봤다.

외모는 10대 중반 정도 되었을까.

"넌 누구냐."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오른손을 활짝편 뒤 엄지 하나를 접었다.

"4?"

소년은 아이작을 가리키며 단호히 말했다.

"4로티 줄께! 그거 팔아!"

222화 생매장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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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을 팔라니.

"4로티!"

갑자기 나타난 붉은 머리 소년은 밑도 끝도 없이 4로티를 외친다.

"그 정도면 적절한 가격 같은데.

팔아 주지 않을래?"

소년이 워낙 간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어서일까.

한순간이지만 정말 확 팔아 버릴까싶은 마음이 떠오른다.

애초에 저번에는, 메달에 봉인된아이작을 T&T 마법사에게 공짜로 넘기지 않았나?

눈과 입가에 검은 점이 찍힌 마법사는 아이작을 넘겨받아서 연구에 즐겁게 사용했을 거다.

하지만 이번은 다르다. 4로티든4?? 세이론이건, 벨'호멧 아이작을 팔아넘기는 건 무리다.

온갖 저주를 다 받았다는 녀석과 떨어지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사실정도 많이 들었다.

위기에 빠뜨린 적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결과적으로는 좋게 풀렸다.

딱히 배신한 적도 없고.

아직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방금 전에도 아이작 덕분에 원활히 성문 통과를 해내지 않았던가?

〈야! 뭘 그렇게 멈칫거리고 있어?

당연히 바로 안 된다고 딱 잘라서 거절해야지! 〉

'안 그래도 거절할 거다. 겁먹지마라.'

〈겁은 누가 무슨 겁을.! 〉

"정중히 거절하지."

소년이 인상을 찡그린다.

"정말? 정말 그럴 거야? 안 되는거야?"

"비매품이 다."

"헤에, 너무한걸. 기계장치에 뭐가 깃들어 있는 거야? 안을 꼭 한번뜯어보고 싶으면 어떡하지?"

소년이 나를 똑바로 바라본다.

호기심 넘치는 눈동자다.

안 판다고 쉽게 물러날까?

기척조차 탐지하지 못한 실력자다.

옅은 붉은색 머리카락에, 커다란맑은 눈동자를 가진 소년.

외모는 m대 중반의 인간이지만

정체가 뭔지는 짐작되지 않는다.

'아이작, 저 친구는 아무래도 널원하는 거 같은데? 네가 쫓아내지그래?'

〈후. 안 먹힌다. 〉

아이작이 착 가라앉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삭월湖셔의 정령광음이 녀석을 보호하고 있다. 낮에도 이 정도인데 밤에는 더 곤란하겠군. 〉

'달에 보호받는다고?'

〈그래. 꼬락서니를 보니 푸른 늑대의 직계 같다. 무척 정순한 힘을 가진 녀석이라. 나와 상극이다. 주술이 잘 먹히지 않아. 〉

'흠.

〈두들겨 패서 쫓아낼 생각은 하지마라. 네가 처맞을 거다. 〉웨어울프라는 건가.

수도 안에 제대로 들어가기도 전에 이런 녀석과 조우라니 당황스럽다.

소년이 이번에는 날 자세히 보면서 말을 이었다.

"또 가지고 싶은 거 있어."

"뭐냐?"

"당신. 널 가지고 싶어!"

당황스러웠다.

"아니, 돈이 급하진 않아서. 이만가 주지 그러나?"

- 짤그랑!

나는 예메라의 신전에서 가지고 온금화 주머니를 슬쩍 만지작거렸다.

"헤에. 하긴, 까마귀한테도 보석잔뜩 달아 놨으니까. 그래도 갖고싶다. 내가 아는 누나한테. 너를 가져다주면 참 어울릴 텐데."

"이보세요! 그게 무슨 소리죠?"

루비아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으윽. 엄청 약한 인간인데 살기가 느껴졌어. 하지만 이 해골도, 최고의 네크로멘서에게 부려지는 게 좋지 않을까? 그 누나도 좋아할 거야."

소년은 내 정체를 단번에 꿰뚫어봤다.

통찰력이나 짐작 따위는 아니다.

그냥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설마 수도에는 이런 녀석을 심심치않게 만날 수 있는 건 아니겠지.

그나저나.

〈최고의 네크로멘서〉라니.

머리에 딱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

"우린 부리는 관계 따위 아니에요.

초면에 이거 팔아라, 저거 내놔라.

정말 실례예요."

소년이 머리를 긁적였다.

〈잘한다! 재보고 싸우라고 해라! 〉

'뭔 헛소리지.'

투기關氣를 발산하지는 않았지만, 루비아가 뭐라고 소년을 비난하건그녀에게 전투력 따위는 전혀 없다.

〈낮에도 정령광음精靈光陰에 의해정신이 보호되는 녀석이다. 〉

'?"그래서?'

〈늑대는 고위 혈통에 가까울수록여성 개체가 극히 부족하지. 강한 녀석일수록. 여자에 쩔쩔맨다. 〉그렇다고 루비아에게 맡겨 둔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머릿속에 떠오른 이름을 소년에게 물었다.

"혹시 네가 말하는 네크로멘서가 기스-제-라이인가."

"어?"

소년이 눈이 살짝 풀린 듯 웃으며, 은근히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역시 기스 누나 유명하네- 그치.

네크로멘서라고 불리려면 사실 누나정도는 되어야지."

그녀를 말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기스-제-라이와 아는 사이면서, 내 뒤에 몰래 다가올 정도라면.

상대의 정체는 좁혀진다.

"너는. 레드 플레이크냐?"

소년이 그제야 깜짝 놀라서 입을 벌린다.

놀라서 크게 뜬 눈을 깜빡거리며 날 바라봤다.

"어. 어떻게 알았지?"

아이작도, 루비아도 모두 나에게 놀란 기색이다.

〈기스-제-라이가 레드 플레이크의 일원이었다니. 이야, 넌 보면 볼수록신기하단 말이야. 그런 것도 알고. 〉아이작도 그 사실까지는 몰랐지만, 방금 벌어진 상황을 보고 확신한 듯하다.

암살교단 레드 플레이크의 멤버에 관한 정보다.

극비로 취급되는 게 당연하겠지.

"정체를 들키면 곤란한데.

소년의 몸에서 희미한 기운이 뿜어나는 게 느껴졌다.

붉은 머리칼이 끝에서부터 조금씩 푸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주위의 온도가 어느새인가 서서히 낮아지고 있었다.

〈아, 재밌는 걸 알아낸 건 좋은데 상황 참 골 때리게 돼 버렸네. 이거어떡하냐? 〉아이작은 이미 내 패배를 점치고 있는 것 같았다.

히히덕거리듯 말했지만, 재미있는 장난감을 여기서 잃어버린다는 데대한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소년의 머리카락이 올올이 서고, 커다란 눈에 푸른빛이 아래부터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했다.

몸에서 발산되는 투기가 마치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백백한 투기에 밀려서 뚫고 들어갈틈 자체를 찾기가 힘들었다.

승산도 희박해 보였지만, 그보다도 루비아가 휘말린다면 곧 죽어 버릴것이다.

회귀의 지식으로 인해 내가 '만든'상황이다.

다른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여기서는 내가 해결해야 한다.

"나랑 잠깐 얘기 좀 하지."

"응? 필요 없어. 우리 정체를 알면 죽여야 해."

"네 친구들에 대한 비밀 이야기다.

듣지 않아도 괜찮겠어?"

"음. 그럼 조금만 듣고 죽일게."

나는 소년을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작게 말했다.

"날 죽이면 기스가 책망할 텐데.

그래도 괜찮겠나?"

"응? 너 같은 기사를 일으켰다는 말은 들어 본 적 없는걸. 아는 척하려는 거야?"

"길라우트. 오웨인. 안드레이."

"어 엇?"

"펜리르. 하멜라인. 그녀가 데리고 있는 다섯 듀라한이지."

"맞아!"

"그리고 내가 있다. 그녀가 어디도 공개하지 않은 비밀병기지."

"그렇구나????"

!"

소년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나는 기스-제-라이와 그녀의 다섯듀라한을 거리낌 없이 팔아먹었다.

눈앞의 늑대 소년을 딱히 등쳐 먹을 의사는 없다.

귀찮게 달라붙으니 그냥 떨어지게 할 생각이다.

설사 기스-제-라이에게 이 사실이 알려지더라도, 그때 가서 해명하면 충분하겠지.

하지만 소년은 아직도 묘한 얼굴을하고 있었다.

"독립 행동이라니. 왜 옆에서 기스누나를 돕지 않는 거야? 중요한 일하고 있는 거 아니야?"

눈앞의 소년이 레드 플레이크라면.

한 가지 더 팔아먹을 사실이 있다.

"이것까지 내가 말해야 하나? 별빛청여우가 언제든지 조력자로 뛰어들상태로 입회 중이다. 사실 이대로도 전력은 충분해."

"우와앗.! 정말이구나.!"

여우 가면을 쓴 수녀까지 언급하자, 소년은 크게 감탄을 내지르며 숫제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몇 차례 절레절레 흔들던 녀석은 의심을 완전히 버린 태도로 날 보며 물었다.

"수도는 왜 온 거야? 그 임무랑관련 있는 걸까?"

"뭐, 넓게 보면 그렇지. T&T 측과 접촉해서 할 일이 있다."

"헤에. 나도 그런 거 하고 싶은데 섬세함이 부족하다고 안 된대."

소년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아까의 기세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도. 다들 재밌으니까 같이 있는 거지만. 기스 누나 만날 때 꼭전달해 줘. 나도 수도에서 비밀 임무하고 싶다고."

"그녀는 정식 회원도 아니잖나."

소년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맞아! 맞아. 그런 것까지 말하다니 당신은 기스 누나에게 정말 특별한 존재구나. 하지만 다들 누나 눈치를 제일 많이 보거든. 헤헤."

"꼭 전해 주지."

"응! 그럼 고마우니까 수도는 내가 안내해 줄게."

"괜찮다. 도움은 필요 없어."

안 그래도 신경 쓸 게 많은데 이변수까지 끼어들면 신경이 지나치게 복잡해진다.

나는 정중하게 손을 내저었다.

녀석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나는 루멘이야. 루멘발도프. 기억해 줘. 이건 뇌물이야!"

- 짤그랑!

소년은 주머니를 탈탈 털더니 은화네 개를 내 손에 올려 두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루멘이 라.

레드 플레이크 일원 중에 확실히 그런 이름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발도프를 어디서 들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별로 중요한 건 아니겠지.

나를 기다리는 일행에게 돌아갔다.

잠시 구석에서 쑥덕거리고 소년을 쫓아낸 데다, 손에 4로티까지 쥐고 온 나를 보고 다들 놀란 기색이다.

〈. 애한테서 그 돈은 대체 왜 뜯어온 거냐? 〉

아니, 이건 좀 다른 의미인가.

나는 4로티를 적당히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어떻게 하신 거예요? 절대 순순히 안 물러날 것처럼 보였는데. 정말 그 소년이 전설의 암살교단인가요?"

〈나랑 같이 여행까지 다니면서 뭘저런 거에 일일이 놀라고 그러느냐?

힘만 회복하면 저런 건 그냥 확.)

"상극이라고 하지 않았나?"

〈말이 그렇다는 거지. 순수한 힘의 총량으로 누르면 그만이다. 〉

"좋게 말하니까 순순히 가 주던데.

그건 그렇고. 아이작, 물어볼 게 있는데."

〈뭐냐. 〉

"웨어울프의 후각은 어느 정도지?"

〈그야 활성화 정도에 따라 다르지.

그래도 늑대의 열 배에서 스무 배정도는 될 거다. 이제 우리 냄새를 확실히 기억하겠지. 〉잘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다.

난 기스-제-라이의 두개골 일부를 이식 받았다.

〈정수 흡수〉를 얻은 과정이다.

그런데 소년이 그 두개골 냄새를 못 맡았다는 말인가?

말이 되지 않는다.

'루멘'이 웨어울프라면.

아이작이 주술을 부리는 걸 보고 접근한 게 아니라, 기스-제-라이의 냄새를 맡고 내게 접근했어야 한다.

하지만 루멘은 내 바로 옆에 서서, 그에 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아까 그 녀석, 분명히 웨어울프맞지?"

〈당연하지. 〉

"제가 느끼기에도. 확실히 늑대느낌이 나는 소년이었어요."

유추할 수 있는 결론은 하나다.

'정수 흡수' 스킬은 그대로 남지만, 기스-제-라이의 '흔적'은 나에게서 완전하게 사라진 것이다.

조금 씁쓸하고, 미안한 느낌이다.

회귀에 따라오는 물질이 '루-륨'뿐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한다.

말파스의 인장이 몸에 남은 이유는 역시 그것 때문이고.

긴 성문 터널을 빠져나오자 빛의 평야가 그림처럼 펼쳐졌다.

대리석이 끝도 없이 깔린, 드넓은 백색의 공간.

"여기가 하얀 광장이군요.

〈황실의 연병장이기도 하지. 오랜만에 봐도 반들반들 잘 닦여 있군. 〉정오였다.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이리저리빛이 반사되어 시선을 어지럽혔다.

한 번의 구경이라면 몰라도, 평소걸어 다니는 데는 역시 불편할지도 모른다.

"방문객의 기를 죽이는 광장인가?

별로 기능적이지 못한 것 같은데."

아이작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에 있는 다른 귀족들의 기를 죽이는 용도다. 하얀 광장을 눈부심 없이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하거든. 빈틈없이 군대로 꽉채우면 돼. 그렇게 못 하면 개기지 말라는 거지. 〉잠시 햇빛에 묻혀 걸었다.

"그런데. 보석 상점에 가야 하지 않을까요?"

루비아의 말이 솔깃하다.

"동감이다."

당장 돈이 급한 건 아니지만.

신전 지하에서 가지고 온 보석이 어느 정도 가치인지 궁금했다.

회계 Lv. 1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보석을 감정할 능력까진 없다.

"제일 큰 데로 가 보자고. 아이작, 넌 어떻게 생각하냐?"

〈나도 양보단 질이다. 주운 거가 취향에 안 맞는 것도 많아서. 다팔고 예쁜 거 있으면 하나 사야지. 〉물어물어 간 가장 커다란 보석상.

긴 꽃길을 걸어가게 되어 있는데, 꽃길에 접어드는 관문 입장부터가 쉬워 보이지 않는다.

알아서 꺼지라는 듯, 긴 할버드를 교차해서 입구를 가로막은 대머리두 명이 눈에 보인다.

예약 따위를 꼭 해야 된다고 들은 적은 없는데.

거리가 가까워지자, 놈들이 이쪽을 보며 눈에 힘을 준다.

슬쩍 입도 여는 거 같은데.

"꺼.

여기서 크게 뭘 할 생각은 없다.

[공포 Lv. 1을 발동합니다!]

본인이나, 주위에서 너무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정도로만 살짝 발동.

공포는 참 편리한 스킬이다.

놈들이 세 걸음이나 뒤로 물러나며 할버드가 멀찌감치 치워진다.

자연스럽게 루비아가 가드 사이로 걸어간다.

"친절한 분들이네요."

"뭐, 그럭저럭."

곧 오 층 전체가 보석 상점으로 된 건물이 눈앞에 보였다.

"어머! 고객님! 어서 오십.

여기서도 그다지 반갑게 맞아 주지 않는다.

앞에서 인사하는 여자가 루비아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곧 말꼬리를 얼버무린다.

"으흠.

"밖에서 왜 통과시킨 거죠?"

귓속말로 하는 거 같은데 당연히 전부 다 들린다.

아니, 아예 들리라는 듯한 태도.

검은색 가죽옷을 입은 남자 둘이 슬쩍 우리 눈치를 보면서 뒤로 바짝따라붙는다.

밖으로 얼른 모시겠다는 걸까.

슬쩍 공포 스킬을 쓰자, 가드들도안색이 질린 채로 연달아 헛기침을하며 물러난다.

최대로 약하게 쓴 건데.

그동안 밖에서 험하게 살긴 한 것같다.

"뭐 해요?"

"그게. 어.

보석을 안내하는 점원에게는 공포스킬을 쓰지 않았다.

가드들의 기분은 당연히 전혀 이해할수 없을 거다. 루비아가 천천히 진열대를 둘러봤다.

그때 였다.

tt저, 이런 건 밖에 두고 오셔야죠."

드디어 점원이 이마를 찌푸린 채, 내 어깨에 앉은 아이작을 가리킨다.

뭘 어쩌라는 걸까?

공포를 쓰기도 애매하다.

가드들도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런 가날픈 인간에게 잘못 쓰면 곧바로 시체 하나 치우지 않을까?

최소한 기절은 할 텐데.

너무 시선을 끈다.

'아이작, 너 놓고 오라는데?'

〈흐흐. 칼 말하는 거다. 이미 나는 재네한테 안 보이게 해 놨거든. 〉어느새 그런 짓을.

"그건 좀 곤란한데."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다른 녀석들도 허리에 칼을 찬 채 잘만 안을 돌아다니고 있다.

상점을 지키는 녀석뿐만 아니라, 화려하게 꾸민 여자들에게는 간간이 호위 기사들이 하나씩 붙어 있다.

칼이 커서 그런가.

점원이 한숨을 푹 쉰다.

"어휴, 가드들 진짜 뭐 하는 거야.

월급 괜히 준다니까.

"내가 소개제로 하라고 했지? 완전소개제로 하라고 했잖아."

호위를 네 명이나 붙인 한 여자가, 루비아를 아래위로 쓱 훌어보고는 부채로 바람을 휘휘 일으킨다.

"아무 손때나 타는 거 싫은데.

드레스를 입은 다른 여자도 눈을 가늘게 뜨며 작게 한숨을 쉰다.

"플레이트 갑옷만 입으면 아무나기사인 줄 아나. 메이커도 아닌 걸 가지고.

"막 상경한 시골 아씨겠죠. 사지도 않을 거면서 보여 주고 만지게 하고 그러면. 결국은 다른 손님들한테 폐를 끼치는 거라니까."

다들 뭘 하는 걸까.

"여기가 가장 큰 상점 맞죠?"

루비아가 웃으며 말했다.

"아, 네. 어머, 아가씨. 이거 보시는구나! 안목 있으시다."

점원은 루비아에게는 홀려 가듯답변하고, 말도 안 건 다른 손님에게 달려가듯 다가가 곁에 붙는다.

이 정도면 쫓아내자는 거다.

혹시 옷차림 때문일까?

루비아가 입은 건, 무려 두 시간에 걸쳐 고른 옷인데.

여행 중에 모래바람에 낡아서 그런건가?

그렇다고 보석 상점에서 확 뒤집어엎을 수도 없다.

후작은 다른 데 갔다고 치더라도, 검주가 셋이나 주둔하는 도시다.

게다가 아쥬라의 마법사들까지.

"저.

루비아가 진열장 앞으로 다가갔다.

"다 구경했어요? 이제 가셔야죠?"

점원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차갑게 내뱉는다.

그때 였다.

- 픽!

〈께핵! 〉

루비아의 손이 뒤통수를 강타했다.

아이작의 뒤통수를.

- 좌르르!

상황을 보면서 키득거리기만 하던 아이작의 부리에서 온갖 보석이 다쏟아졌다.

유리 진열대 위로.

223화 생매장 (3)

***************************************************

〈야! 너, 뭐 하냐? 왜 나를. 야! 〉

루비아한테 맞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건가.

무방비로 당한 아이작은 얼이 빠진 기색이다.

얼이 빠지긴 주위의 다른 인간들도마찬가지.

"으에엑?"

"흐익?"

허공에서 쏟아진 보석비에 주변의 시선이 전부 쏠렸다.

가장 얼이 빠진 것은 점원.

"저, 죄, 히끅! 죄송합니다!"

루비아를 무시하던 점원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

허공에서 쏟아져 나온 보석들.

마법사라고 생각한 탓에 저러는 것 같지는 않다.

점원의 관심사는 그보다, 대놓고 무시하던 손님에게서 딱 봐도 값진 보석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온 사실이겠지.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루비아는 점원이 대체 왜 그러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이다.

"죄송하긴요."

루비아는 투명한 유리 진열대 위에 뿌린 보석을 쑥 바라보곤 말을 계속이어갔다.

"이 정도도 거래해 주는 거 맞죠?"

"네, 물론입니다! 아니. 네! 손님!

죄송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저게 뭐야.?"

"세상에.

무시하던 다른 인간들도, 쏟아진 보석을 보고 뭐라 할 말을 잃은 채 눈만 깜빡거렸다.

"홈.

보석 상점 안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이마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점원이 안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곧 밖으로 은색의 모노클을 쓴 50대 여자가 걸어 나왔다.

"저는 '가넷 윙'의 점장인 바레시블랙베리라고 합니다. 저희 점원이 있을 수 없는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일단은.

백발의 여자는 진열대 위의 보석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안으로 모시게 해 주십시오."

점장은 두꺼운 문을 열었다.

긴 통로를 지났다.

바깥과 달리 은은한 조명의 밀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의외로 보석은 드러나게 진열되어 있지 않았다. 대신 벽 한쪽의 원목보관대에 도자기 수십 점이 진열돼있었고, 투명한 원형 액자에 검은색자개 같은 것들이 그림처럼 끼워져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무엇보다도.

내부는 밀실密室이라고 말하기에 지나치게 넓었다.

열 명 가까운 인간이 돌아다니고, 보석이 빼곡하게 진열된 바깥보다우리만 있는 안이 더 넓었다.

"부디 느긋하게 계셔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귀빈실은 하루에 한 손님밖에 받지 않습니다."

- 쪼르륵.

딱 적당하게 데워진 물이 루비아앞에 놓인 작은 잔에 따라졌다.

망고 과육이 듬록 들어간 케이크와 큼직하게 갈린 딸기 푸딩, 매끄러운 표면 옆으로 존득한 크림이 살며시튀어나온 마카롱이 곧이어 루비아앞에 내어졌다.

나는 소파에 앉은 루비아의 뒤에 별말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점장 블랙베리가 나를 묘한 눈으로 바라봤다.

"한 점 흐트러짐도 없으시군요.

분명히 명망 높은 기사분이시리라생각됩니다."

"글쎄."

뭐에 감탄한 건지 알기 어려웠다.

남이 주는 음식은 먹거나 마시지 않는다는 것?

어차피 그럴 수도 없는 처지다.

"다시 한 번 무례를 사죄드립니다."

"블랙베리 씨, 저는.

루비아가 뭐라고 말을 떼기도 전에 블랙베리가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빠르게 대화를 선점했다.

"저희 점원이 저지른, 그야말로 〈가넷 윙〉의 본점에서 일어날 수 없었던 일에 제가 모든 책임을 지고 사죄드립니다. 바레시 블랙베리의 이름을 걸고 오늘 거래의 수수료를 9할 1푼 공제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나요?"

"네. 그러니. 제발 여기서 거래를 마쳐 주시지 않겠습니까, 손님?"

어마어마한 거래 수수료 할인.

어차피 여기가 제일 큰 보석 상점이라는 걸 고려하면, 여자의 제안을 받아들여 나쁠 일은 전혀 없다.

다만 문제는 그 제안이 거짓말이 아니냐는 건데.

"정말 훌륭한 물건들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블랙베리는 커다란 돋보기를 들고 루비아가 내놓은 보석들을 이 각도 저 각도에서 살펴보고 있었다.

"세공이 조금 오래된 풍이긴 합니다만, 어차피 유행이란 돌고 도는 것이니.

와들루스의 꼬리에 의해 그 입구가 막혀 있었다면, 오래된 보석인 건 당연한 일.

보석을 모른다고 후려치려는 인간같지는 않았다.

'속이려는 기색은 없나?' 〈장사 하루 이틀 하고 접을 것도 아니고, 수도에서 이렇게 큰 건물짓고 대대로 하는데 물건을 가지고 장난칠 확률은 조금 낮지. 수수료야 상당히 비쌀 테지만 말이다. 〉 그런 건가.

"일단 현금화를 원하시는 겁니까?"

"이만큼은, 다른 거 하나로 바꿔주실 수 있나요? 예쁜 보석으로요."

아이작을 위한 주문이다.

점장 블랙베리는 잠시 고민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이 전부를 하나로.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 끼긱. 끼기긱.

점장은 약지에 낀 반지를 옆으로 살살 돌렸다.

세 겹으로 된 반지가 각각 다른 정도로 미묘하게 돌아가며, 돌출된부분이 튀어나왔다.

〈열쇠 반지로군. 고전적인데? 〉

한쪽 벽이 마치 서랍처럼 밖으로 튀어나왔다.

딱 루비아가 아래로 내려 보기 편할정도의 높이.

"혹시 이 녀석들은. 어떠십니까?"

단순히 아름다움뿐 아니라, 은은한 파장이 느껴지는 묘한 보석들.

〈흐응. 마법석이군. 가게 입장에서는 쉬운 선택이지. 하나 이 몸의 수준에서는 별로 의미는 없다. 그냥예쁜 거 달라고 해. 제일 예쁜 거. 〉

'기능적인 게 좋은 거 아니냐?'

〈마력이 한 번 깃든 건 순수성이 떨어진다. 새로 내가 주입하는 게낫지. 그리고. 〉

'뭔데.'

〈너는 보석을 기능 때문에 사냐? 〉

대화를 전해 들은 루비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마법석은 괜찮아요. 그냥예쁜 걸로 부탁드려요."

"으음.

잠깐 고민하던 점장은 다시 열쇠를 조절하곤 다른 벽을 열었다.

"순수한 보석이라면 이것밖에 생각나지 않는군요. 다른 것들은 가격이 조금씩 맞지 않습니다. 하나만 드리기에는.

열린 벽에는.

자주색으로 빛나는 보석이 진열대안에 홀로 자리 잡고 있었다.

〈크, 이거 괜찮은데? 순도 봐라.

흐으옷.! 〉

"머스라트입니다. 현재까지 표본이 여덟 개밖에 없는 보석이지요. 워낙단단해서. 표면에 붙은 돌만 살짝벗겨 낸 표본입니다."

과연 그 말대로였다.

세공된 단면에 대칭성이나 규칙은 보이지 않았지만, 일정치 않게 비틀비틀 깎인 보석은 그저 가만히 보는 것만으로도 언뜻언뜻 묘한 영감을 주는 데가 있었다.

"그럼 이걸로 할게요."

〈왜 그리 빨리 결정하느냐? 좋은 보석은 죄다 꺼내 보라고 하지. 〉

'보석 볼 때마다 까마귀가 이상한 소리 내는 게 싫어서가 아닐까?'

아이작이 내놓은 보석들은 자주색머스라트로 바꾸고, 나머지는 일단금화로 바꿨다.

아이작의 말에 따르면 가격은 꽤나후하게 쳐준 것 같았다.

보석을 팔며 아이작이 하는 말들을 슬쩍슬쩍 던지자 점장은 나를 점점존경의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1정말 대단한 안목이시군요.!"

"배경이 궁금해집니다!"

"저의 견식 없음에 다시 통탄하게 되는군요. 이런 분에 대해서 그동안 전혀 들은 바가 없었다니!"

"아, 뭐.

어차피 내 지식이 아니라 뭐라고 답변하기도 껄끄러웠다.

무시에 가까운 대답에도 점장 블랙베리는 더욱 사근사근하게 굴었다.

거래를 전부 마친 뒤에도 적극적인 제안이 이어졌다.

"수도가 처음이시라면, 혹시 묵을 숙소는 생각해 두셨습니까?"

"그렇지는 않아요."

루비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저희 쪽에서 숙소 소개를 해 드려도 될까요?"

해당 숙소에서 대가를 받고 소개해주기라도 하는 걸까.

블랙베리가 나와 루비아를 번갈아바라봤다.

그다지 내키지 않는데, 아이작이 말을 걸었다.

〈얌전히 소개받아라. 〉

'왜? 숙소를 뭘 소개까지 받아?'

〈수도의 좋은 숙소들은 대부분이 완전 소개제다. 그때마다 다 겁줘서 어거지로 들어갈 생각은 아니겠지?

그런 모양 떨어지는 짓 하지 말고 순순히 받아들여라. 〉

'완전. 소개제?'

〈그렇다. '덴 메쵸 페라스(모르는 손님은 거절한다).'라는 오랜 원칙이 남아 있지. 하여튼 수도 것들이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블랙베리의 제안에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하지."

"그럼 제가 곧바로 모시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점장이 잠깐 안쪽으로 간 사이에 말을 이었다.

"기괴한 관습이군. 손님이라는 건, 애초에 처음 오는 건데 모르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가게의 손님도 격에 관계되니까.

모르는 것들과 같은 공간에서 먹고 자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지. 〉

"외상으로 다니고, 달의 마지막에 한 번에 지불하는 문화가 있는 탓이 크다고 해요. 모르는 손님은 외상을 달 수 없으니까요."

루비아도 알던 관습인 모양이다.

그때 다시 점장이 나와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기다려 주셔서 무척 감사합니다.

실례합니다만, 이 카드 한 장 받아주시겠습니까?"

진한 보라색 위에 새하얀 글자가 음각된 명함이었다.

[보석을 맡겨 주세요.]

[바네시 블랙베리]

[가넷 윙, 수도 본점. 하얀 광장 옆11번 골목.]

문득 기시감이 느껴졌다.

아래에 까만 카드 한 장이 겹쳐 있는 게 보였다.

"상인 연합인가?"

"역시 아시는군요!"

블랙베리가 한층 더 깊은 미소를 지었다.

여러 의미가 섞인 표정이었다.

이걸로 상인 연합의 카드가 수중에 세 장 들어왔다.

한 장은 유블람 경비대장의 비밀창고에서.

다른 한 장은 진네이 유베, 그리고 이번에는 수도의 보석 상점이다.

역시, 획득 자체는 어렵지 않다.

일단 만나서 능력을 보이면 상대가 알아서 손에 쥐어 준다.

다시 죽고 살아나더라도 세 장은 곧바로 얻을 수 있는 셈.

회원 자격을 얻으려면.

앞으로 두 장 남았다.

녀석들이, 얼마나 쓸모 있을지는 경험해 봐야 알겠지만.

두꺼운 귀빈실 문을 열고 나오자 바깥에 있던 귀족 영애들의 눈길이 일제히 루비아를 향해 쏟아졌다.

"누가 저기 가는 거 처음 봤어.

"설마 블랙베리 님이 직접 거래해주신 거야? 대체 누군데?"

"블랙베리 님 눈썰미로 보석 하나옷 하나 맞추는 게 소원인 사람들이 많은데.

상점을 막 나갈 때였다.

"저. 저기!"

루비아보다 서너 살 어려 보이는 곱슬곱슬한 금발 여자아이가 루비아에게 접근했다.

키는 루비아보다 머리 하나 이상작았고, 큰 용기를 낸 듯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아가씨.!"

양산을 든 누군가가 황급히 아이를 쫓아오려고 했지만 아이는 손을 내저었다.

저지할까 싶었지만, 몸에 무기도 없었고 허약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작은 여자아이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괜한 움직임은 상대 쪽의 호위를 자극할 염려가 있다.

"저, 저기.! 영애.!"

"어라? 저요?"

루비아가 아이에게 다가갔다.

금발의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어느새 루비아의 옷깃을 살며시 잡고 있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전. 이보트 세나 에렌가에데라고해요. 세나라고 불러 주세요."

옆에서 블랙베리가 작게 '이보트후작 영애입니다.'라고 속삭인다.

"네, 세나 아가씨."

루비아가 방긋 웃자 아이의 긴장한 표정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혹시 수도에 계속 계실 거라면.

제가 여는 티. 티 파티에 와 주실 수 있을까요?"

뭔가 억압받고 주눅 든 말투였다.

후작 가문이라면, 눈치 볼 상대는 얼마 없을 터인데.

타고난 성격인지도 모른다.

"와아. 티 파티에, 저를요?"

아는 사이인가 싶었지만, 루비아도 의아해하고 있다. 애초에 에라스트에만 있었던 루비아가 수도에 아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하다.

"아까. 너무 멋있다고 생각해서.

저. 친구가 되고 싶어서.

말을 더듬거렸지만, 진지한 뜻은 충분히 전해졌다.

루비아의 행동이 이 아이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모양이다.

"저는 수도 풍속도 잘 모르니까, 자칫 누를 끼칠 것 같은데요."

루비아는 싱긋 웃으며 부드럽게 거절했다. 하지만 금발 곱슬머리의 소녀는 무척 적극적이었다.

"그. 그래도! 상관없어요! 생각이라도 한 번 해 주세요, 꼭이요!"

억지로 초대장을 건네주고는 도망치듯 상점 바깥의 마차에 올라탔다.

그 뒤를 시녀와 호위가 허겁지겁따라 나갔다.

〈이봐, 해골. 경쟁자가 등장해서 어떡하냐? 저런 귀여운 애가 상대니승패가 너무 뻔한데? 〉

'쓸데없는 소리.'

블랙베리가 미소를 지었다.

"이보트 가문의 티 파티 초대장이 라니, 귀한 걸 얻으셨군요."

"네, 갑자기 이런 걸 받아서 조금놀랐지만 기쁘네요."

"영애께서 낯을 가리시는 편인데, 손님이 무척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축하드립니다. 보는 저도 마음이 참훈훈하군요. 그럼. 숙소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번화가 중심지에 있는 숙소는 무척쾌적했다.

루비아는 블랙베리가 나가자마자 가볍게 탄성을 지르며 객실 안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책이 만 권은 들어갈 것 같아요!"

"그런 것부터 생각나나."

"다른 것도 다 굉장히 멋지네요."

한참 여기저기를 구경하던 그녀는 객실 창문에서 섰다.

2층이라서 그런지, 곧바로 아래의 넓은 정원이 내려다보였다.

"산 히코리, 파라비치, 재채기 꽃에 유카까지 피어 있네요. 나무들도 다너무 관리를 잘했어요.

나도 느긋한 기분이 되어 한쪽에 기댔다.

끊임없이 달린 여정.

즐거워하는 루비아를 보고 있으니 작은 쉼표 하나를 찍는 기분이었다.

무려 네 시간에 걸친 목욕을 마친루비아는 어딘가 멍한 표정이다.

그녀는 흐적흐적 풀린 표정이 되어 벽 한쪽에 기대어 있었다.

어디 아픈 건가?

하지만 탐지 스킬을 써도 맥박은 정상이다.

〈??? 야. 〉

아이작이 부리로 나를 쿡 찔렀다.

'뭔데.' 〈얼른 티 파티 가라고 해야지. 〉

'티 파티.?'

〈왜 이렇게 눈치가 없냐? 재, 저거아까부터 계속 그 생각 하는 거 안보였어? 어? 〉

"ㅇ "

■o*.

잊고 있었지만, 그녀도 나름대로 백작 영애다.

아무리 원했다지만 사막을 달리며 힘겹게 모래바람을 뒤집어쓰고, 모든 연고와 단절된 채 살아온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아무래도 마음 기댈 곳이 필요하지 않을까.

게다가 영애들의 티 파티라니.

책에서만 잔뜩 봤을 거고, 머리로 상상만 해 봤겠지.

"티 파티에 가고 싶은가?"

"아니요! 전 괜찮아요. 괜히 걱정끼쳐 드렸나 보네요."

'괜찮다는데?' - 깡!

아이작이 등을 부리로 찍었다.

〈괜찮다는 건 굉장히 안 괜찮다는 뜻이다, 멍청아. 〉

'그게 뭔 소리야.'

〈하아. 괜찮다고 하는 거 자체가 엄청나게 가고 싶다는 뜻이잖아. 〉

"가지 그래. 사막에서 막 돌아온참이니 기분 전환이 될 거 같은데."

루비아는 곤란한 표정으로 슬며시눈을 깔았다.

"그렇지만. 저는 여기서 신분도 밝힐 수 없고.

잊고 있었다.

에라스트는 지금 루비아의 삼촌이 차지하고 있다.

레이 백작의 영애이자 정당한 작위계승자로 밝히면 여러모로 곤란해지는게 아닐까?

"그건 내가 해결해 보지."

어차피 레나와 접촉할 참이다.

그 과정에서 수도에서 쓸 신분을 얻게 될 확률이 높다.

T&T 본부장이라면 위조 신분은

넓게 골라잡을 수 있겠지.

티 파티에 참가할 영애 정도가 뭐가 어려울까. 하지만 루비아의 안색은 여전히 밝지 않다.

"또 무슨 문제지?"

"어, 그게.

루비아가 내 눈치를 살폈다.

〈애 옷이 없잖아. 어? 딱 내가 사주겠다, 이래야 될 거 아니야. 〉지금 입은 것도 괜찮은데.

하지만 아이작의 말이 옳다.

티 파티에 오는 영애들은 죄다

보석 상점에서 봤던 것 같은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겠지.

아이작의 의외의 쓸모를 발견했다.

보석에 집착하더니, 은근히 이런쪽에 밝은 녀석이다.

"혹시 옷이 걱정이라면.

막 말을 이을 때였다.

- 똑똑.

"손님, 옷 배달 왔습니다."

"옷. 이요?"

그런 거 시킨 적 없는데.

어색한 분위기에서 도피하듯 먼저문을 열고 나갔다.

방문을 열자 유니폼을 입은 직원두 명이 서 있었다. 각각 평상복과 주황색 드레스를 손에 든 채였다.

직원이 작은 엽서 한 장을 건넸다.

[즐거운 티 파티 되세요!]

[바네시 블랙베리]

"열홀분 숙소 대금은 저희 쪽에서 결제 완료했습니다. 그럼 부디 편안한 시간 되십시오."

둘은 방 안에 옷을 곱게 걸어 주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대단한 호의다.

이번 보석 거래로 그런 큰 이득을 얻었다는 걸까.

아니면 빚을 지워 두고 싶은 걸까.

"우와.

가만히 드레스를 보더니, 갑자기 루비아의 눈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루비아의 호감도가 3 올랐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딱 맞춰서

[루비아의 호감도가 2 올랐습니다!]

"보기만 해도 저한테 딱 맞을 거같아요.

[루비아의 호감도가 5 올랐습니다!]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아래로 뚝뚝떨어졌다.

'??? 해골님은 참 다정하시네요."

[호감도 상한 붕괴!]

[루비아의 호감도 상한이 60으로 상승했습니다!]

[호감도가 2 올랐습니다!]

이게 무슨 일이지?

〈하아. 너, 방금 이번 생의 운을 다 쓴 거 아니냐? 〉

224화 생매장 (4)

***************************************************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루비아는 내가 원래부터 모든 걸 준비해 놓은 것처럼 착각한 거다.

놀라운 타이밍이다.

〈모르는 척해라. 모르는 척. 〉

블랙베리가 준 거라고 사실대로 고백할까.

하지만 감동으로 눈물을 흘리는 루비아의 모습을 보자니, 오히려 그게 더 못 할 짓인 것 같다.

제 마음 편하자고, 그녀가 느끼는 기쁨을 희석시키는 거다.

속았다고 원망받아도 감당하면

그만이다.

여기선 적당히 얼버무리자.

"아, 뭐.

무슨 말을 할까.

쉽게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옷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군."

빈말은 아니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눈여겨봤는지, 블랙베리가 골라 준 주황 드레스는 루비아의 몸에 딱 맞았다.

맞춤 제작할 시간은 없었다.

블랙베리의 드레스 컬렉션이 대단하리라는 건 쉬운 짐작이다.

"정말. 저한테 잘 어울려요?"

얼굴이 붉어진 그녀는 기쁜 둣, 부끄러운 듯 미묘한 표정이다.

"매우."

드레스도 루비아에게 입혀져 한껏아름다움이 살아났다.

새하얀 진주 구슬이 꽃 모양 허리장식에 올올이 박혀, 시선을 집중시키며 몸매에 자연스레 눈이 가게 만들었다.

저런 진한 색이 이렇게 잘 어울릴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고운피부와 드레스의 진한 색이 오히려서로를 확 살리는 효과가 있었다.

"촉감이 정말 부드러워요."

루비아는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만지작거리며 감탄했다.

- 사록. 사르록.

두 겹 실크 허리띠를 손가락으로 비비며 헤실헤실한 그녀를 보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그때 였다.

안쪽 주머니에 세 겹으로 겹쳐진 검은 카드의 존재가 떠올랐다.

두 손가락으로 카드 뭉치를 잡고 가볍게 움직여 보았다.

- 끼기긱.

부드러운 소리는 나지 않는다.

블랙베리가 전해 준 검은 카드와, 유베가 주었던 카드가 비벼져 작은 마찰음을 냈다.

- 끼긱.

묘한 위화감이 일어난다.

지금껏 만난 '상인 연합'의 멤버는 유베와 블랙베리 두 명.

처음에 피혁상 유베를 만날 때는 그가 특이한 경우라고 생각했다.

유별난 호의와 관심.

무력이나 기계공학 따위의 능력을 보일 때 반짝이던 유베의 눈빛이 떠오른다.

그는 이번 생에서 내게 아무것도 받은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대가도 없이 루비아를 보호해 주고, 캐빈 애슈턴의 책까지 기꺼이 구해 줬다.

보석상 블랙베리는 어떤가.

가게 점원이 손님에게 큰 무례를 범했으니, 진심 어린 사죄 차원에서 수수료를 깎아 준다.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9할 1푼을 깎아 주는 건 과도하다.

게다가 방금 받은 호의는, 진네이 유베보다 결코 덜하지 않은 섬세한 마음 깊은 호의다.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저 강하다고 해서 이런 호의를 베푸는 게 자연스러운 일인가?

상인 연합이라.

두 번이 우연일 수는 없다.

- 깡!

아이작이 정강이를 쪼았다.

〈뭘 그렇게 멍하게 있냐? 〉

루비아를 앞에 두고 혼자 생각에 빠져 버렸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아아. 티 파티는 언제지?"

"이틀 후예요! 혹시 옷에 먼지가 묻으면 안 되니까. 이제는 벗고 다시 입어야겠어요. 준비해 주신.

평상복으로요!"

루비아는 다시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말할 것 없이 이 옷도 블랙베리가 준비해 준 옷이었지만, 루비아는 세심하게 챙겨 준다며 몇 번이고 깊은 감사를 표했다.

"이런 것까지 생각해 주실 줄은 정말 몰랐어요."

"으음. 뭐.

"완전 최고예요!"

상기된 얼굴로 그녀가 입술을 꾹다물며 외쳤다.

"그런가.

얼른 화제를 돌리고 싶어서 괜히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아, 티 파티라는 건 어떤 거지?"

"그게. 일단! 찻자리와 다찬회가 있는데요.

신난 그녀에 의해 티 파티에 대한 여러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옷에 대한 감사를 듣는 것보다는 훨씬 마음이 편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들었다.

찻잔을 모으는 유행이 시작된 건 누구누구 공작부인 때부터라든지.

티 파티는 남자는 참가하지 못하는 여자들만의 세상이라 온갖 소문을 다 들을 수 있다든지.

수도의 티 파티는 주로 소규모로 마음 맞는 사람만 부르고, 테이블위의 꽃 장식과 디저트 세공에 힘을 주기로 유명하다든지.

결코 쓸 일이 없을 듯한 정보를 잔뜩 습득했다.

"그래서 꼭 가 보고 싶었는데.

갑자기 말이 끊겼다.

"루비아.?"

루비아는 어느새 소파에 기대어 잠이 들어 있었다.

긴 여행 끝에 체력이 소진되었을 테니 어쩌면 당연한 일.

티 파티 때문에 흥분하느라 겨우깨어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잠들었나."

뱉은 혼잣말이 그녀가 새근대는 숨결에 섞여 들었다.

잠깐 그녀를 지켜본 뒤에, 살짝들어서 커다란 침대 위로 옮겼다.

푹신한 침대 안으로 그녀의 몸이 폭 파묻혔다.

무척 편안함을 느끼는지 그녀의 눈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지금까지 고생만 잔뜩 시켰는데.

간만에 긴장이 풀린 모습을 보자, 약간의 뿌듯함과 안도감을 느꼈다.

"아이작."

〈왜. 또 뭐. 자고 있는데 방해하지 마라. 〉

아이작은 뒤로 벌렁 드러누운 채 발만 까딱 움직이며 대답했다.

방 안의 침대는 무려 넷.

그중 아이작은 가장 넓고 훌륭한 침대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다.

인간 셋이 누워도 될 만큼 넓은 침대에 까마귀가 뒤로 자빠져 있는 모습은.

좋게 말해 우스꽝스러웠다.

"인형이 잘 리가 없잖아."

〈쿨. 쿨. 음냐. 음냐. 〉

극도로 어설픈 자는 척이다.

잠을 자지 않는 내 입장에서조차 어색해 보일 정도.

오랫동안 자는 걸 안 해서 흉내도 제대로 못 내고 있는 것 같다.

어이가 없어서 가만히 보고 있다, 왼쪽 발에 쥐고 있는 보석에 슬쩍손을 가져다 댔다.

〈도둑이야! 〉

- 파드드득!

녀석은 몸을 뒤로 강하게 돌리며 날개를 괘쳐 일어났다.

푹신한 침대 위에서 몇 번을 발로 껑껑거리더니 매서운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곤, 다시 넓은 침대 위를 이리저리 걸어갔다.

〈또 얼마나 쓸데없는 소릴 하려고 하느냐? 너랑 말을 섞느니 자는 걸 연습하는 게 낫다. 〉

"대체 자는 연습을 왜 하는데?"

말도 안 되는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아이작은 의외로 진지한 어조로 대답했다.

〈나중에 인간의 몸에 들어가려면 미리 연습해 둬야 하지 않겠느냐?

나는 인간의 몸으로 세계를 지배할것이니라. 〉

"인간의 몸? 지금 같은 기계장치에 들어가 있는 게 효율적이지 않나.

루-륨 용량을 키우고 싶으면 그냥더 큰 장치에.

아이작은 내 말을 잘랐다.

〈아니. 나는 효율적인 거 싫어해.

효율적인 걸 좋아하면 그냥 죽으면되지. 그게 최고 효율적이야. 〉아이작이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뱉는 말은 농담 같은 소리였지만 짙게 깔린 진심이 느껴졌다.

〈더럽고, 구질구질하고, 추악하고.

그게 사람이고. 난 그게 좋아. 〉

〈아무튼 너 때문에 잠 다 깼잖아.

그래서 뭐가 궁금한데. 〉

"상인 연합의 목적은 뭘까? 과한 호의를 계속 받다 보니 불안하군."

- 파드득!

녀석이 내 무릎에 날아와 앉으며 킥킥 웃었다.

〈크크. 웬일로 네 녀석이 이면을 다 읽어 내려는 거냐. 평소 같으면 넙죽 호의나 받고 좋아했을 텐데. 〉

"혹시 나한테만 이러는 거냐?"

아이작이 부리를 살짝 흔들었다.

〈너에게 특별 대우를 해 주는 건.

네가 그만큼 유능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너'라서 특별히 다르게 한 건 없다. 〉그렇다면, 푸르손의 추종자들이 나를 섭외하려 한 것과는 성격이 조금다르다.

나는 다음 질문을 이어 갔다.

"그라스미어 영주도 회원이었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다. 너 외에도. 어느 정도 세력이나 재주가 있는 자들에게는 꽤 파격적인 호의를 베풀고 끌어들이려고 하지. 다만. 〉

"다만?"

〈능력만 보는 건 아닌 것 같더군.

세상에 잘 알려지거나 제대로 자리잡은 자들보다는 새로운 인물을 더좋아하지. 으음. 그들의 목적을 알고 싶다면, 다시 그라스미어로 돌아가서 기다려 봐라. 〉

"기다려. 보라고?"

〈그래. 영주가 작위를 아들놈에게 물려줄 때까지. 〉

틀림없다.

챈들러 형빈을 말하고 있다.

내가 검술을 약간 지도해 줬으며, 크리스티나를 호위로 뒀던 인간.

터무니없는 계약을 지킨다고 내게 우겨 댔고, 결국에는 황실이 키우는 애벌레에게 잡아먹혀 버린 남자.

꿈틀대는 애벌레의 등에 나타났던 복사된 얼굴이 떠오른다.

여기서 왜 그가 나오는 거지?

나는 미동도 하지 않고 아이작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현 영주도 일단 회원권은 갖고 있었지만. 내게 생명이 빨려 늙어죽어 가던 처지였다. 〉

"그렇지."

이 아이작이 어떤 녀석인지 다시 한 번 상기된다.

제 악행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 아이작이 말을 이었다.

〈영주가 상인 연합과 한창 거래실적을 왕성하게 쌓아 갈 때였지.

그때 상인들 측에서 어떤 제안을 건네려다 멈칫한 적이 있었다. 〉서떤 제안이지?"

〈말도 안 했다. 슬쩍 눈치로 보면 무척 예민하고 정치적인 사안인 것 같은데. 그때 영주는 듣고 싶지 않다고 했다. 자신의 작위와, 회원권과 함께 그 '제안'은 다음 대代로 넘기 겠다고 했지. 〉

"아들에게 귀찮고 골치 아픈 건 다떠넘기겠다는 건가.

〈그래. 다음 첸들러가 영주로 등극하면, 상인 연합은 '그 제안'을 금세들려줄 거다. 저들의 좀 더 내밀한 속마음 말이지. 〉챈들러 형빈이 살해당한 게 혹시상인 연합과 관련된 게 아닐까?

그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었냐고 물어본다면 순순히 알려 줄까?

"머리가 복잡해지는군."

〈뭐. 별거 있겠냐? 일단 호의를즐겨. 받을 거 다 받고, 누릴 거 다누려. 뽑아 먹을 거 다 뽑아 먹고!

나중에 뭐 부탁하면 그냥 거절해.

간단하지. 〉

〈게다가 넌 아직 회원도 아닌데 뭐가 고민이야? 일단 다섯 개 다모으고 생각하라고. 〉그건 맞는 이야기다.

상인 연합이 무슨 의도건, 지금걱정하기는 이르다.

게다가 당장은 집중해야 할 일이 따로 있었다.

"일단 알겠다, 아이작."

'루비아를 잠시 부탁한다."

〈뭐야. 이 야밤에 어딜 가려고?

수도 밤 문화를 즐기기엔 네가 좀부족한 게 많잖아. 〉

"T&T 쪽에 들러 봐야지. 애초에 수도에 온 목적이니까."

아직 레나의 계획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루-륨 탈취에 관한 일이라면 극히 위험하겠지.

루비아와는 되도록 엮이지 않게하는 게 최선이다.

블랙베리가 소개한 고급 숙소니, 잠시 나갔다 올 동안 크게 위험한 일은 생기지 않겠지.

그래도 만약을 대비해 아이작에게 말해 두는 거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놈도 의외로 루비아에게 정이 든 것 같으니까.

아이작이라면 웬만한 위기는 쉽게 막아 줄 것이다.

다만, 그가 직접 레나의 이야기를 들어야겠다고 할까 봐 걱정이었다.

〈. 좋아. 〉

하지만 아이작은 의외로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얘랑 여기에 있을 테니까잘 듣고 와. 〉

"괜찮겠지?"

〈그럼. 황실의 함정이라면 아마 첫만남부터 체크당하고 있을 텐데, 거기 끼어들기 싫다. 〉 그런 거였나.

〈네가 뒈지면. 나는 이 녀석을 이용해 볼 생각이니까. 얘기나 잘듣고 와. 〉의외로 순순히 보내 주긴 하는 게 다행이다.

아침까지 기다릴까도 싶었지만, 밤이 레나를 만나기에 적합한 시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만나야 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다.

[질주 Lv. 7을 발동합니다!]

[500%의 속도를 낼 수 있습니다.]

[남은 시간 24:59]

- 파앗!

[은신 Lv. 6을 활성화합니다!]

[특전: 자취말소(C+) 적용]

수도의 밤을 달렸다.

바람 한 점 없었지만, 내가 워낙빠르게 달리는 탓에 공기는 비명을 질러 대며 갑옷 이음새 사이사이를 날카롭게 베어 왔다.

- 쌔애앵!

속도 자체에 고양된 몸이 점점 더빠르게 옥상과 옥상 위를 달린다.

100에 가까운 힘으로 발이 지면을 박차면 한 번에 서너 개의 건물을 뛰어넘기도 한다.

수십 킬로그램에 달하는 물체가 갑자기 바닥에 떨어지면 굉음으로 경비병의 주의를 사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역시 100에 가까운 높은 민첩으로 착지하는 데다, 희귀 등급은신 스킬 덕분에 별다른 소음은 나지 않는다.

- 팟!

근방에서 가장 높은 탑 위에 올라가만히 아래를 내려다봤다.

시야에 들어오는 구역이 있었다.

저 즈음에서.

캐빈 애슈턴의 신문을 봤던 것

같은데.

그리고 레나가 일했던 샤루니안의 가게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탐지 Lv. 7을 발동합니다!]

이동하며 신경 써서 지붕과 지붕, 바닥을 세심히 뒤져 봤지만 역시 신문 따위는 나타나지 않았다.

시기가 전혀 다르긴 하다.

그때는 지금으로부터 수개월 뒤.

레안드로 후작이 살해당한 뒤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발행되는 신문인지도 모른다.

황실에 점점 가까워지는지, 신문대신 골목 곳곳을 오가는 경비들의 기척만 느껴질 뿐이다.

'하나 죽일까?'

공권력 파괴 퀘스트를 진행해 볼까싶기도 했지만, 굳이 하고 싶다면 수도를 떠날 때 해도 충분.

일을 끝낼 때까지 최대한 조용히 있는 게 낫다.

저쪽 즈음이었나.

갔던 곳을 찾는 데에는 생각보다시간이 약간 더 걸렸다.

전반적으로 수도는 지난번에 왔던 때와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내가 찾고 있던 건물이 완전히

변해 버린 게 문제였다.

위치를 몇 번이나 돌며 확인했다.

처음에 왔을 때는 거친 자들이

드나드는 선술집.

레나의 손이 닿은 후에는 아가씨들이 드나드는 고양이 까페.

이번엔 그 어느 쪽과도 비슷하지 않았다.

일부러 정체를 감춘 듯한 검은 벽.

문까지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고, 창문도 없다.

이런 게 길거리에 떡하니 있다니.

오히려 눈에 띄고 싶은 게 아닐까싶을 정도다.

게다가 딱 봐도 고급스러운 마차들이 가문 문장을 가린 채 차례로 문 앞에섰다.

'주인이 바뀐 건 아니겠지.'

T&T 지부인 이곳은 나냐우의

비밀 통로와 연결되어 있다.

비밀 통로가 변경되지 않는 한

T&T가 소유권을 유지하고 있을 건 분명하다.

마차에서 내린 자는 초대장 같은것을 내밀었다.

고급스러운 옷차림을 한 채 얼굴을 반쯤 가리는 가면을 하고 있었다.

가드는 꼼꼼하게 초대장을 확인한 다음에야 문을 열어 손님을 들여보냈다.

'대체 뭐 하는 곳이지?'

당연히 초대장은 없다.

펜던트를 내민다면 들여보내 주겠지만, 일단 뭐 하는 장소인지부터 확인하고 싶었다.

꽤 실력 있어 보이는 가드였지만, 당연히 내 은신을 꿰뚫고 알아볼정도는 아니다.

가볍게 문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감탄하며 주위를 이리저리돌아보았다.

건물 안은 바깥과 놀라운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여러 층이었던 건물을 넓게 터서 천장이 무척 높았고, 테이블보다 큰상들리에가 공간 전체를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지금이 밤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곳곳을 메운 조각상과 예술품들은 그저 공간 장식이 목적이라기보다실제로 대단히 높은 가치를 가진 물품들 같았다.

'테이블이 셋.

가운데에 사람이 들어갈 공간이 있는 독특한 형태의 테이블이었다.

화려한 가면을 쓴 인간들이 테이블을 둘러싸고 금화를 산처럼 쌓아 두고 있었다.

'저건.

그들이 돈을 걸고 있는 건 내가 아는 유일한 게임이었다.

〈너클 본〉.

손가락 마디 뼈 다섯 개를 공중에 던진 뒤, 가장 많이 잡는 사람이 이긴다.

저들은 마디 뼈를 본 딴 나무조각으로 게임을 하고 있다.

하지만〈납골당〉을 지키던 시절, 인간들은 나와 다른 해골들의 뼈를 갖고〈너클 본〉을 하곤 했다.

이 던전은 너무도 시시했다면서, 선술집에서 살 독주 따위를 걸고 내기를 했던 것이다.

'그런 시절이 있었지.'

어진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마스커레이드.'

투구를 벗고 자연스럽게 빈자리에 끼어들었다.

은신을 해제하자 게임을 주최하던 도박장 직원이 깜짝 놀라며 눈을 깜빡였다.

"새 손님이 오신 걸 못 봤군요.

마침 다음 게임을 시작하려던 참입니다. 얼마까지 거시겠습니까?"

- 툭.

"일단 이걸로 시작할까."

품에서 펜던트를 꺼내어 테이블 위에 슬쩍 던졌다.

여기가 레나의 구역이라면 반드시반응이 있을 것이다.

아니라면 빠지면 되는 일이다.

"흐읍.

직원이 눈을 크게 뜨며 숨을 들이켰다. 잘 정돈된 눈썹이 미묘하게 움찔거렸다.

"예약하신 분이셨군요.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직원은 주위의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나를 지하 회전문으로 안내했다.

회전문을 지나자 갑자기 풍경이 익숙해졌다.

청소 도구와 비품이 쌓인 커다란방이 나타났다.

- 드르륵!

문을 열자 레나와 헤어져서 혼자 올라왔던 계단이 보였다.

'안쪽부터는, 기존의 건물을 남겨둔 건가.'

"본부장님! 그분입니다."

직원이 계단 안쪽을 향해 말했다.

외관이 전혀 달라져 의아했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틀림없다.

"저는 여기까지입니다. 그럼."

안내하던 직원은 계단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깊이 숙인 뒤 돌아나갔다.

'마스커레이드 해제.'

레나에게는 이쪽이 익숙하겠지.

- 저벅. 저벅.

괜히 계단을 하나하나 소리 내어밟으며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 끼익.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나냐우 파의 T&T 고위 간부들이 회의하던 석실.

넓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인영이 보인다.

수없이 본 익숙한 형태다.

루-륨 확보라는 분명한 목적을 갖고 온 것이지만, 어쩔 수 없이 반가움이 몰려왔다.

레나가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슬며시 올라온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한 순간.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건, 내가 상상도 못 한 한 마디였다.

"스승님."

225화 생매장 (5)

***************************************************

나는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 철컥.

몇 걸음이나 가 버렸는지, 차가운석벽이 등에 닿았다.

스승님이 라니.

그 호칭에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설마 기억이 완전히 돌아온 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멈춰 선 채 상대의 표정을 살폈다.

"역시 그랬구나."

미묘하게 변해 가던 레나의 표정이 확신을 두른다.

그제야 뒤늦게 깨닫는다.

시험해 본 거다.

그녀는 그 사실을, 숨기려고조차 하지 않는다.

"우리. 분명히 그렇게 만났었네."

스승님이라고 불린, 나도 모르게 잠깐 멈칫한 그 순간 다 읽혔다.

"이 장소도 기억하나 보지? 다른 곳에서 헤매지도 않고 곧바로 와서 펜던트를 내민 걸 보면."

레나가 한숨을 쉬었다.

따듯하게 데워진 피가 느껴진다.

그녀가 가진 날카로운 모서리들이 어딘가로 숨겨진 것 같았다.

"주술에 걸렸다고 생각한 거 아닌가?"

"틀려. 나한테 이런 감정을 갖는 주술을 걸었다면.

레나는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살짝저었다.

"적극적으로 이용하려고 해야겠지.

하지만 당신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있으니까. 꿈은. 진짜겠지.?"

나는 침묵했다.

레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과거는 변경되었다.

꿈의 형태로 발현되는 옛 기억이.

그녀의 삶 어딘가에 들어갈 만한 자리는 없다.

당연하게도, 회귀를 짐작하는 것 같지는 않고.

바로 답하는 대신 그녀의 상태창을 열었다.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있다면.

조금이라도 더 얻어 내는 게 좋다.

[이미 완료한 시나리오.]

[??? 반영되었습니다.]

[이름: 레나]

[호감도: 31]

변했다.

이번 생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레나의 호감도는 분명히 20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이번 생에는 당연히 그녀와의 첫만남이었는데도 20이라는 꽤 높은 호감도로 시작했다.

레나 입장에서라면, 알지도 못하는 녀석이 이상하게 계속 신경 쓰이는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더 심해졌다.

올랐다는 별도의 메시지조차 뜬 적없었는데, 당연하다는 듯 31이라는 한층 더 높은 호감도를 보여 준다.

물론 능력치는 잔뜩 올라간 능력치그대로.

쉬운 추측이 떠오른다.

나와 접촉할수록 호감도가 점점 더높이 올라가 버리고, 그에 따라서 기억도 선명해진다는 것.

그렇다면.

어느 순간.

발렘할 수 없을 때가 온다.

예전 같은 관계가 되어 버리겠지.

그게 내가 원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잘 살고 있는 레나의 삶에 난입할생각은 없다.

"나는 일 이야기를 들으러 왔다.

루-륨을 한 번에 크게 얻을 계획이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말을 돌렸다.

일부러 단호하게 잘랐다.

'이번 삶'에서 나는 레나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았다.

바뀐 과거로 살아온 그녀의 삶을 착취할 생각은 없다.

"하아."

긴 한숨에 담긴 온기가 허공으로 방울방울 사라졌다.

레나는 잠시 머리를 짚더니 결국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런 걸 원하면 거기 맞춰 드려야지."

그녀의 시선이 나를 얽었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에 대해 알아내기를 멈추진 않겠지만."

뭘 얼마나 더 어떻게 알아내려고.

이 석실 어딘가에, 내 동선 따위를 세세하게 정리해 놓은 비밀 석판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쩐지 몸이 뻣뻣하게 굳어지는 기분이다.

"탈취 계획을 알고 싶다."

말을 돌리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정말 알고 싶다.

T&T가 세운, 아이작조차도 꽤나궁금해한 계획이 궁금하다.

대체 어떻게 침입하겠다는 걸까?

레안드로 후작마저 시체로 발견된그 비역^!.

아이작은 하늘, 땅, 지하가 전부 막혀 있다고 했는데.

레나도 계획 이야기가 나오자 조심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그건, 일단 여기에 서약해야 알려줄 수 있어서.

- 스르륵.

레나가 서랍에서 얇은 가죽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램프 불빛 아래 비친 종이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다.

완연한 백지.

"내용은 나중에 쓸 건가?"

"에이, 아무리 음지에서 살아도 그런 짓은 안 해."

레나가 품에서 유리병을 꺼냈다.

뚜껑을 열고 기울이자 짙은 녹색이 아래로 쏟아졌다.

- 화르르!

가죽 종이에 바로 불이 붙었다.

불은 얇은 종이를 제물로 삼아

비명처럼 타올랐다.

하지만 넓은 석실을 데울 정도로 사납게 타오르던 불은 누르스름한 종이를 아예 그을리지조차 못했다.

대신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던

텅 빈 종이에서 서서히 글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음 사항을 준수.]

[??? 공개하거나 누설.]

[ 관한 사항.]

[2. .에.]

특수한 액체를 부어야만, 숨겨진 글자가 나타나는 종이.

이야기는 들어 본 적 있었다.

종이도, 잉크도, 액체도 모두 딱딱맞아떨어져야만 한다.

레나는 서랍에서 텅 빈 종이 한 장을 더 꺼냈다.

같은 방식으로 불이 붙으며 글자가 떠올랐다.

내용은 같다.

다만 그 아래, 레나의 글씨체로 〈서약한다. 〉라고 적혀 있는 것만이 달랐다.

적힌 내용은 간단했다.

계획을 누설하지 않는다는 내용.

"누설할 경우는 어떻게 되지?"

레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예 누설할 수 없게 되어 있어.

참가자들 자신의 혼이 양분이 되어, 그 총량으로 서로를 구속하는 강한 서약이니까."

"심지어 고문을 당해도 말하는 게 불가능해."

"저항할 수 없다는 건가?"

"제약이 한정될수록 주술은 강해."

레나가 말을 이었다.

"금제는〈이 계획에 대해 알리지 않는다. 〉하나뿐이니까. 구체적이지.

강한 세뇌라도 걸려, 억지로 말하게 될 경우는 생명이 끊어지게 되고."

그나마 다행이다.

죽음 후에는 끊어지는 제약이라는건가.

그래도 이번 생에서는 루비아나, 아이작에게 계획을 못 말해 주는 게 조금 걸리적거리지만.

"내가 서약을 안 한다면?"

"아쉽지만 당신을 점찍은 역할에 딴 참가자를 섭외해야겠지. 아무리봐도 당신이 최적이지만."

내가 최적이라.

어떤 역할인지 더욱 궁금해진다.

어쨌거나, 상황은 분명하다.

서약을 하지 않으면 레나는 내게 계획을 말해 주고 싶어도 못 한다.

일단 빈손으로 돌아가는 게 좋은 선택은 아니다.

황실의 힘의 원천.

내가 이동시키면, 그 위치가 묘한 방식으로 변하는 물질.

'전직'에 필요하다고 했던 액체다.

수도까지 왔는데 여기서 무르는 건 말도 되지 않는다.

펜을 들었다.

양피지 위에 서약한다는 말을 적어넣는 순간, 묘한 구속력이 보이지 않는 정신 어딘가에 단단하게 자리잡은 듯했다.

"이런 스크롤은 어디서 구했지?"

"시조가 모험을 다니며 유적 같은 데서 하나둘 모아 놨지. 애지중지 아끼던 물건인데, 워낙 큰 작전이니이것저것 잔뜩 내어놓은 거야."

유적이 라.

내가 갔던 것 같은 캐빈 애슈턴의 유적이라도 털었나.

어딜 가면 이런 터무니없는 물건이 나오는 건지 묻고 싶어진다.

"나냐우도 참가하는 건가?"

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체적인 조율자로서. 혹시라도 어디 구멍이 생기면 거길 나냐우가 메우게 될 거야. 물론, 잘해 주면 볼일 없고."

나냐우의 힘은 알고 있다.

T&T 최강의 전력이 백업으로서

준비된 것이다.

서약서라고 준비한 종이만 보아도, T&T에서 얼마나 이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느껴진다.

"이후 빼돌린 루-륨을 조율하는 역할이기도 하고."

"조율?"

"참가자들이 전부 루-륨 자체를 원하는 건 아니거든. 황금을 원하는 자도 있고, 다른 것도 있고."

"참가자는 얼마나 되지?"

"당신까지 포함해서 열 명. 하나씩 소개받을 생각은 없지?"

"그래."

알려 주지 않는 편이 안심이다.

아무리 같은 참가자라고 해도, 쉽게 그 면면을 발설할 정도면 내 정보도마찬가지다.

"이해 고마워. 그럼, 먼저., 레나가 특이하게 생긴 열쇠로 석실한구석을 '끌어'당겼다.

- 쿠구궁.!

테이블 오른쪽에 놓인 석판이 위로 살짝 들리더니 천천히 움직였다.

"내려와."

레나가 먼저 구멍 안으로 조금씩 다리를 집어넣었다.

아래로 향하는 사다리를 디딘 것 같았다.

"직접 작전을 실행할 곳에서 설명하는 게 좋겠지? 사전 탐사라고."

- 철컥.

자연스럽게 사다리를 잡고 레나를 따라 내려갔다.

익숙한 장소다.

수도에 들어올 때도.

나갈 때에도 이 통로를 통했다.

나냐우에게 설명만 듣고서, 직접먼 거리를 이동한 적도 있다.

그 태도가 전해진 탓일까.

"익숙하네. 역시 아는 장소구나."

"글쎄."

레나가 나를 보고 다시 물었다.

"여기가 황실 비역과 연결된 것도 알고 있었던 거야?"

- 달그락!

나는 경악으로 걸음을 멈췄다.

"지금 무슨 소리를.!"

황실과 이 통로가 연결되었다고?

"어라? 그건 몰랐던 거야?"

먼저 바닥에 내려온 레나가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나는 천천히 다시 움직여 아래로 내려갔다.

어차피 숨기지 못할 경악이다.

굳이 억누를 필요도 없다.

"정말인가?"

"하핫. 재미있네. 너무 잘 들여다보여서 좋은걸. 역시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야."

좋아하는 타입?

장난하자는 건가 싶었을 때.

레나는 한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벽 한쪽을

칼집으로 꾹 눌렀다.

- 드르륵!

벽에 아래위로 두 장의 지도가 걸린 큰 보드가 튀어나왔다.

위는 평범한 수도 전도全圖.

아래는 한눈에 봐도 지하 비밀

통로를 표시한 지도다.

첫 번째도 두 번째도 모두 본 적있는 물건.

한데 두 번째 지도가, 분명 어딘가 예전과 다르다.

묘한 위화감이 든다.

오래지 않아 명확한 차이점을 짚어낼 수 있었다.

'더. 넓어졌어?'

수도를 빠져나가기 전.

트로핀 나냐우는 지도를 보여 주며 구석구석을 짚어, 나가는 법을 무척자세히 설명했다.

〈여기서 네가 지날 통로는. 〉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레나가 지금 보여 주는 비밀지도에는, 나냐우가 보여 준 것에는 없던 통로들이 새롭게 그려져 있다.

"여긴 어디지?"

나는 새로 그려진 부분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레나의 얼굴에 감탄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정확하게 짚었네. 거기가 바로 이작전을 짠 계기가 된 곳이야. 새로 발견한 구역이거든."

새로 발견한 구역.

설마 루-륨을 레나에게 남기고 간사실이 새 비밀 통로 개척에 영향을 끼친 걸까?

혹은 시나리오 클리어로 인해 바뀐상황일지도.

어쨌거나, 이 새로운 상황에 내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명백하다.

루-륨 탈취 계획이라니.

책임감이 목 위로 걸터앉는다.

내가 변경시킨 과거.

새롭게 탄생된 계획을 성공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지도를 가리키는 막대가 움직였다.

"이 통로, 수도 전체에 걸쳐 있어.

하지만 정말 지독한 미로라서, 무려시조마저도 새 부분을 발견하는 데엄청난 시간이 걸렸지."

트로핀 나냐우가 새로 발견했다는 부분을 바라봤다.

"아직 좀 먼 것 같은데."

붉은 동그라미가 크게 그려진 황궁영역과는 겹쳐지지 않았다.

"괜찮아."

"괜찮. 다고?"

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새로 발견된 부분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황실이 전쟁 준비를 위해, 여기로 루-륨을 가지고 지나갈 거거든."

전쟁 준비와 루-륨.

"둘이 무슨 상관이지?"

아이작은 나에게 루-륨이 황실이 가진 힘의 원천이라고 했다.

하지만 정확히 왜 그런지는 전혀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루-륨은 기본적으로 기계장치의 동력원이다. 첫 번째로 추측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

자유 연합의 철인鐵人을 빼앗아서, 자신들이 움직이는 데 쓰려는 것.

내 추측에 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다른 식으로 쓰려고 하는 것 같아. 기사와 병사들을, 루-륨에 중독시키고 있는것 같거든."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그게. 그런 식으로도 사용되는 액체인가?"

"시조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했어.

그녀는 피의 형태로 루-륨을 사용했지만, 엠버는 기계장치의 원동력으로 사용하고 있잖아?"

생각해 보면, 그 둘은 전혀 다르다.

"폭발적인 힘을 내게 하는, 마약의 형태로 개발하지 못할 것도 없다고했어.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루-륨은 무엇이든지 될 수 있다.

저번 생에 이런 정보를 접한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이 액체의 성격 자체가, 내 전생에 따라 달라진다는 가정은 무리수.

원래 그런 물질이라고 봐야 한다.

일반적인 인간에게 '주입'해 높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면.

기술력이 높은 연합을 침공하려는 황실의 자신감도 이해가 간다.

"어쨌거나 일회성 수송이 아니야.

이쪽으로 마차가 다니면서, 수송이 없을 때는 수색대가 다른 길을 찾고있어."

그녀의 말투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뭘 걱정하는 건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너희가 이 통로를 쓰는 걸 황실이 모르나?"

"아직은. 하지만 머지않아 우리 쪽으로 침범해 버릴 가능성이 높아."

T&T의 비밀 루트를 황실이 점거하는 건, 그저 내키지 않는 정도로 끝날 일은 아니다.

맞부딪칠 경우 힘에서 어느 쪽이 우월할지는 굳이 대보지 않더라도 명백한 일.

"그냥 루-륨을 탈취하기 위해서 벌이는 일은 아니야. 우리는 새로 발견한. 이 지역을 아예 무너뜨릴필요가 있어. 깜깜한 암흑 속에 다묻어 버리는 거지."

226화 생매장 (6)

***************************************************

T&T는 단순히 루-륨을 탐내서

이 작전을 실행하는 게 아니다.

길드의 존망이 걸린 '통로 폐쇄'.

황실이 본진 깊숙이 들어오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야 하니까.

나냐우만 봐도 알 수 있다.

참가자의 면면은 만만치 않다.

"여기서부터 '미로'야."

레나의 안내를 따라 한참을 걷고, 또 걸었을 때.

그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천으로 눈을 가린 남자가 거미줄에 걸려 있다.

전면 벽에 양각으로 새겨진 그림.

꽤 세밀한 그림이다.

슬쩍 올라가 있는 남자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느껴진다.

"좁아지니까 조심해. 발밑도 울퉁불퉁하고."

빈말이 아니었다.

마차 두 대가 나란히 지나도 넉넉할것 같던 통로는, 그 직경이 1/10정도로 급격히 좁아졌다.

고작 인간 서넛 정도가 그럭저럭지나갈 정도였다.

바닥도 고르지 못했다.

"구멍도 있다고."

입을 쩍 벌린 공간이 많다.

아래로 떨어지면 어디로 가게 될지 알 수 없다.

빛은 한 점도 없다.

그저 레나가 손에 든 작은 횃불에 간간이 벽이 비칠 뿐.

"악어가 많지?"

벽에 새겨진 악어들은 눈을 가늘게 뜨고 움직인다.

실제 악어보다 훨씬 더 크다.

벽은 좁고.

그런 까닭에,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통로와 천장에 걸쳐 새겨진 모습이 무척 기괴하다.

"물이라곤 전혀 없는 지하 아닌가?

그런 곳에 악어 조각이라니.

"에이, 그렇지도 않아."

그렇지 않다고?

의문을 표하기도 전.

레나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여기야."

횃불이 눈물 두 방울을 막 흘리는 악어를 비추고 있다.

- 끼긱.

그림 눈 밑으로 날카롭고 긴 칼이 들어갔다.

그녀는 눈을 파내듯이 칼을 그대로 들어 올렸다.

- 끼기긱. 쿠구구.!

- 쿠구궁.!

악어가 새겨진 벽이 천천히 아래로 움직였다.

양쪽에, 눈먼 독사들이 입을 벌린 벽이 새롭게 나타난다.

늪을 모티브로 한 미로인가.

- 쿠구구. 쿵.

움직임이 멎고.

앞에는 샛노란 팔찌를 손목에 찬조각상이 움푹 파인 눈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샛노란 황금 팔찌.

하지만 손댈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거대한 팔찌에 몇 번이고 거듭해서 응축된 전기의 힘이 느껴진다.

"저거. 지금은 못 가져가."

레나가 포기한 황금이다.

눈독 들여서 좋을 게 없다.

맞는 순간 뼈가 가루가 될 정도의 전격이 뿜어져 나올 거다.

"그냥 지나가지는 못하겠는데."

아래를 보자 묘한 문양이 빼곡히 그려져 있었다.

탐지 스킬을 발동한다.

결과는 놀라웠다.

이 무슨.

앞쪽 전체가 함정이다.

"길이. 있기는 한가?"

"첫 번째는 몸으로 감당해야 해."

- 터벅.

말릴 사이도 없이, 레나가 앞으로 한 걸음을 디뎠다.

바닥에서 솟아난 가벼운 전격이 레나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후우."

그녀가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살짝훔쳤다.

피와 살을 가진 몸으로 이런 걸 앞장서서 받아 내다니.

"말을 하지 그랬나. 내가 했을텐데."

"아니야. 내가 안내자인걸. 이제앞, 왼쪽, 다시 앞으로.

조각상을 코너에 두고 함정 영역을 지난 순간이었다.

- 파지지지지직!

황금색 팔찌에 걸린 빛이 사방으로 강렬하게 방전됐다.

원래 보이던 것보다 수십 배는 더환한 빛에 휩싸이며, 벽을 따라서 전격이 퍼졌다.

어둡고 좁은 통로를 번개가 깨물며 환하게 밝혀냈다.

- 치직.! 파지지직.!

번개가 친 길을 따라 통로 벽은 이미 쩍쩍 금이 가고 깨져 있다.

팔찌가 빛을 잃었다.

조심스럽게 앞을 바라본다.

앞쪽에는 까맣게 그을리고 부서진 해골들이 널려 있었다.

제대로 스템을 못 밟았으면, 빛이 그대로 우리에게 퍼부어졌으리라는 사실은 명백해 보였다.

나는 주위를 살폈다.

하나하나를 그대로 기억에 담으려애썼다.

번개가 터지는 길까지.

처음 보는 미로다.

지금은 레나의 안내를 따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다음'에 왔을 때는 혼자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빼놓지 않고 모두 살펴보았다.

높은 지혜 스탯을 가진 덕분일까.

한 걸음, 한 걸음.

머릿속에 빠지지 않고 길이 담기고 있었다.

한참을 가다 보니 쓰러지고 부서진 조각상들이 놓인 광장이 나타났다.

목 주위에 무성하게 털이 난 쥐와, 늑대의 몸을 한 올빼미의 조각상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갔다.

'발레포르. 아몬.?' 고위 마왕의 상징이 왜 이런 곳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조각상들은 대부분 여기저기가 뻥뚫리고 날아가 있었다.

지금까지 보아 온, 잘 정비된 비밀통로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공간.

광장은 세 방향으로 적막하게 뚫려있다.

탐지 스킬은 아까부터 계속 쓰고 있었지만, 어디를 선택해야 좋을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이 미로는 나냐우가 뚫은 건가?"

"그렇지. 쉽지 않았다고 했지만."

"나냐우가 쉽지 않을 정도라면.

황실에게 뚫릴 걱정은 조금 덜 해도 되는 거 아닐까?"

레나가 고개를 저었다.

"시조는 탑주塔主급 마법사라면 큰위험 없이 돌파할 거라고 예상했어."

"황실이 그런 마법사를 섭외하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고."

이런 미로를 발견한 이상 황실이 그대로 놓아둘 거라는 건 지나치게 안이한 생각이라고 말을 이으면서, 레나는 순서대로 아래를 밟았다.

- 펑!

올빼미의 부리에서 시커먼 독연이 터졌다. 연기는 여기까지 닿지 않고 벽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었다.

- 치이익

벽이 부식되고 있다.

트랩 없이 미로만으로도 어디가 어딘지 도저히 모를 수준인데, 저런지독한 함정까지 도처에 깔리다니.

고대에 만들어진 '미로'는 다 이런수준일까?

차라리 여기에 살면 어떨까 싶은 생각도 든다.

아무도 모르는 지하 미로 깊숙이.

확실히 방해받지 않기에는 좋을 것 같기는 한데.

통로를 만들었다는 고대인에 대한 궁금증이 조금씩 더 솟아오를 때.

- 치이이익.

연기가 전부 빠졌다.

이제 보니 벽이 너덜너덜하다.

"이제 가자."

레나가 내 팔을 잡았다.

그리고 뻥 뚫린 올빼미 조각상의 눈을 지나서 천천히 걸어갔다.

같은 악어 문양이 새겨져서 어디가 어딘지 구별되지 않았다.

모든 벽이 미로인 곳에서 그녀는 망설임 없이 발을 디뎠다.

- 파각!

- 피비비빗!

독침이 쏟아지고.

냉기가 땅에서 솟아난다.

자잘한 함정이 레나의 손에 하나씩 무력화되고 있다.

한두 번 걷는 길은 아닌 것 같다.

귀찮다고 다 부수고 갈 수 있는 통로는 아니다.

이 많은 트랩들을 그냥 맨몸으로 받아 내기는, 심지어 레안드로 녀석정도라도 확실히 무리겠지.

길은 계속 좁아진다.

- 데구르르.!

발에 차인 작은 돌 하나가 아래로 굴러갔다.

경사가 있다.

"높은 곳으로 가는 건가?"

"그렇지."

곧 길인지도 뭔지도 알 수 없는, 녹아내린 바위들이 사방에서 잔뜩우리를 맞이했다.

둘이 몸을 붙여야 할 정도로 길이 좁은데, 기묘하게도 높이는 갑자기 꽤 높아진다.

"여기야."

레나가 지도를 꺼내어 가리켰다.

"새로 발견했다는 지역인가."

"응. 비밀 통로치고는 좀. 좁지?

환풍구야. 터널에는 꼭 환풍구가 있어야 하거든."

레나의 설명이 이어졌다.

황실이 루-륨을 옮기는 것은 바로 이 아래의 통로.

계획은 이러했다.

수송대가 지날 때, 환풍구를 통해 아래로 수면 가스를 배출한다.

- 철컥.

그녀가 바닥을 눌렀다.

- 지이잉!

바닥에 은은한 불빛에 들어오며, 작은 소리와 함께 자동으로 아래로 툭 열렸다.

슬쩍 들여다본 아래쪽에서 비밀통로의 야광주 빛이 새어 나왔다.

처음 들어오면서 봤던, 넓은 비밀통로의 모습이다.

"저 위에도 이런 구멍들이 있어."

레나가 위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두 번째 폭탄은.

이 환풍구에서 터트린다.

"감응하기 쉬울 정도로만."

"감응이라고?"

"응. 대부분의 폭탄은. 여기에서 터트릴 거야."

레나가 수도 전도를 폈다.

"여기가 바로 통로 이 지점이고.

수도 전도 쪽에는 작은 산이 하나놓여 있다.

검은 장갑을 낀 손가락이 그 산의 꼭대기를 가리켰다.

"우리는 산사태를 일으킬 거거든.

준비는 완료됐어. 전문가가 완벽히 계산을 끝내 놨지."

"폭탄으로 산사태를 일으킨다고?

그게 말이 되나?"

"나야 세부 사항은 들어도 모르지.

어쨌건 기술적으로는 믿을 수 있는 녀석이니까."

그 말대로라면, 인공적으로 일어난 '산사태'가 터널의 한 지점으로 쏟아진다.

'코끼리도 재울 만한' 수면 가스와 함께 이런 걸 당하면 꼼짝없이 묻힐수밖에 없으리라.

그야말로.

하늘이 쏟아져 내리는 기분이겠지.

"여기서 당신 역할이. 중요해."

나는 긴장했다.

"내부자가 활약하겠지만, 완벽하게 타이밍을 맞추려면 현장에서 누군가 길을 가로막아야 할 필요가 있어."

"그게 나인 거로군."

레나가 고개를 끄덕인다.

"당신이라면, 토사와 수면 가스에 매장당해도 죽을 위험은 없으니까."

"루-륨은?"

유리병 안에 들어 있다면 산사태에 온전할 리가 없다.

"단단한 금괴 안에서 운반될 거야.

손상 걱정은 없어."

하지만 흙 속에 묻힌, 어느 정도 크기인지도 모를 금괴를 내가 꺼내갈 수 있을까.

마치 내 걱정을 읽은 듯이 레나가 아래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여기서. 곧바로 2차 폭파가 있을거야."

"바닥을 터트린다고?"

"응. 이 아래쪽은 거대한 지하수의 맥이 흘러. 어마어마한 양이지."

설명이 이어졌다.

시체들과 루-륨 금고.

그 모두가, 격렬한 지하수에 쓸려준비된 장소로 나오는 계획.

토사와 물에 모두 쓸려 나올 테니대기조는 그물만 쳐서 잡는다.

"산 채로 나오는 것들은, 거기에서 다 죽일 거고."

놀라운 준비다.

"당신은 뒤쪽 통풍구로 올라오면 되지만, 그냥 지하수에 몸을 맡겨도 괜찮아."

레나가 내 옆으로 몸을 붙였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두 팔이 옆에서 허리를 감았다.

몰아붙여지는 기분이었다.

- 끼긱.

그녀가 단검을 들어, 기습적으로 내 갑옷에 작은 표식을 새겼다.

갑작스럽게 몸을 붙여 온 탓에 뭐라제지할 틈도 없었다.

강철을 어렵지 않게 긁을 정도로 날카로운 칠흑의 단검이 루비아가 사 줬던 갑옷을 긁어 냈다.

"당신이 떠내려와도, 대기조에게 공격당하지 않는 표식이야."

표식과 그녀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그러니까, 내가 할 일은 유사시에 잠깐 버티는 것밖에 없다는 건가.

"나 혼자만 간단한 역할을 맡은 것 같은데."

각도를 계산해서, 무려 산사태를 일으키는 역할라든지.

떠내려오는 호위들과 싸우게 될 대기조에 비하면, 내 역할은 있으나없으나 별 차이도 없는 게 아닌가.

"글쎄?"

레나가 픽 웃고는 말을 돌렸다.

"호위대가 지날 때, 바닥을 밟으면 자동으로 가스가 뿌려질 거야. 그게 뿌려지지 않으면 뭔가 잘못된 거니환풍구를 통해 뒤로 빠져. 시조가 나와서 일을 처리할 거야."

게다가.

'정말 일이 잘못되었을' 경우에는 아예 트로핀 나냐우가 나타난다.

지나치게 쉽고, 간단하다.

"호위는 어떤 자들이지?"

레나가 품에서 목록을 꺼냈다.

스무 명 정도.

붉은 동그라미가 쳐진 이름 셋이 눈에 띄었다.

"먼저, 마법사 알로히스. 셋 가운데 가장 주의해야 할 녀석이야. 하지만 화염 마법에 특화되어 있지."

"화염이라면.

"그래. 선택이 잘못됐어. 터널에서 불 질러 봐야 자기들만 손해지."

좁고 긴 공간에서 불이 이동하며 같은 편을 다 구워 버릴 거다.

"안 그래도 산소가 무척 부족한데, 불까지 지르면 질식해 죽자는 거지.

그러니. 전투 마법사 알로히스는 정작 이 터널 안에서는 무력해."

확 불 질러 주면 우리야 편하지만, 이라고 말하며 레나는 다음 이름을 가리켰다.

"통찰의 브헤가스. '등록된' 특정한 존재들을 인식할 수 있지."

"등록?"

"황실은 주의할 만한 인간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등록'하게 만들었어.

가면을 쓰거나, 마법으로 위장하고 있어도 소용없어."

"등록된 녀석들은 브헤가스 앞에서 모두 간단히 정체가 인식되어 버려.

아는 녀석이 수상한 짓을 했다간 곧황실도 알아차리는 거지."

"나는 상관없겠군."

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참가자들 가운데 오로지 당신만이 '등록'되지 않은 상태야.

그리고 제정신인 녀석들 앞에 서는 유일한 역할이지."

나는 납득했다.

T&T가 루-륨 탈취의 흑막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버리더라도.

발각이 느리면 느릴수록 좋은 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유령들이 따라올 거야."

"뭐라고!"

나는 깜짝 놀랐다.

유령들이라고?

이 세계선의 T&T.

레나가 처음부터 본부장인 T&T는 황실 유령의 존재마저 아는 건가.

"어라?"

그녀는 몸을 떨어트리지 않은 채 나를 똑바로 보며 물었다.

"설마 유령에 대해서도 알아?"

"아니, 그냥. 유령이 따라온다는 말이 신기해서다."

"로랑스 공작 직속의 무리들이지."

"로랑스. 공작?"

놈이 그런 이름이었나.

"로랑스 폰 타르티에. 로라라고 불러 달라는 미친놈이지. 그런 걸 원하면 아래쪽을 자르면 될 텐데, 그건 또 싫다나."

"양쪽의 쾌감을 빠짐없이 꼭 누려야 한다고 하더군. 수도 돼지들은 놈을 욕심쟁이라고 부른다."

정말로, 그런 걸 알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데.

어쨌거나.

유령의 수장.

그 공작이라면, 내가 봤던 녀석이 틀림없다.

설마 녀석을 상대해야 되는 건가?

흙 정도를 못 뚫고 나올 상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내가 잠깐이라도 막을 수 있을지도 의심스러웠다.

"그 공작이 따라오는 거냐?"

"놈이 개입했다면 이 계획은 아예시작하지도 않았지. 전혀 다른 곳에 있는 건 확인됐어."

레나가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살짝미소를 지었다.

"오히려 유령들이 비밀 통로에 붙어서 다행이야. 이들이 아니면.

3검주가 대신 지하에서부터 따라붙었을 테니까."

"3 검주?"

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의 이름은 말해 주지도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유령들이 타르티에 공작의 명만 받는 게 불쾌하다며, 3검주는 루-륨이 나오는 외부 통로에서 기다리고 있을 예정이야. 거기서부터 동부까지는 그 녀석이 담당할 거고. 직접 싸우게 되면 일이 너무 커지고. 그러니 탈취는 반드시 이 지하 통로에서 이루어져야 해."

레나의 설명은 끝났다.

잘 짜인 계획이다.

어차피.

비밀 통로의 구조나 다른 참가자의 면면도 모르는 내가 허점을 찾는 게 어불성설.

그냥 레나를 믿고 가는 거다.

이 계획은 성공할까?

나는 손에 쥔 펜던트를 바라봤다.

'판단 시행.'

[현재 설정:〈사망 및 그에 준하는 위기 시 자동 발동〉]

[설정을 변경하시겠습니까?]

[발동 후 7일 동안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사용되는 능력:〈위기회피(B)〉]

[설정을 변경하시겠.]

'변경하지 않는다.' 실패할 계획이라면.

펜던트는 진작 경고를 보냈을 터.

하지만 아무런 메시지도 없다.

역시 완벽한 계획인가.

비로소 안심이 됐다.

227화 생매장 (7)

***************************************************

"아, 신분증 필요하지?"

레나가 손을 내밀었다.

횃불에 비친 팔 그림자가 천천히 흔들린다.

그 끝에는 두 장의 신분 증명패가 쥐어져 있었다.

마치 당연한 걸 가져왔다는 듯한 태도에 내 쪽이 말문을 잃고 패를 바라봤다.

검은색 상아에 붉은 글씨가 새겨진 신분증이다.

그곳에 새겨진 '내' 정보를 보면서 생각했다.

언제 이런 걸 준비했을까?

"받아. 작전 이전까지는 일단 이신분으로 생활하고 있어."

"하나가 아니군."

"그 아가씨와 같이 왔을 테니까, 당연히 두 개가 있어야지."

티 파티의 건도 있다.

루비아가 임시로 쓸 신분증 제작을 레나에게 부탁하려고 했다.

그런데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제공해 준 거다.

새삼 놀랍다.

내가 온다고 확실히 알 수 있었던 상황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준비해 놓고 있었다는 이야기인가.

"뭐야, 갑자기 왜 말이 없어?"

"네 준비성에 놀랐다."

"이런 건 기본이지. 딱히 일부러당신을 위해서 제작한 건 아니니까착각하지 마."

"그렇다면?"

"우리는 정보 길드잖아. 언제든지 쓸 수 있게 갖춰 놓은 여분일 수도 있고. 너무 감동할 건 없다고."

뭔가 화법이 좀 이상하다.

그렇다고 해도 어떤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미리 준비해 준 데에서, 레나의 세심함과 배려가 느껴진다.

능력치나 신분은 바뀌더라도.

존재가 가지고 있는 어떤 본질은 그대로라는 걸까.

나는 다른 신분증 하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라티아. 백작 영애?"

그런 정보가 새겨져 있다.

"응."

레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신분이랑 딱 맞잖아?"

놀랍다.

어느새 루비아에 대한 조사까지 끝내 놓은 건가.

황야의 먼지를 아무렇지 않게 뒤집어쓰며 달려온 탓에 나도 가끔 깜빡하지만.

레이 루비아는 엄연히 백작 작위계승권을 가진 귀족이다.

흠칫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말투로 또 다른 패를 읽었다.

"기사 아메리타트라."

"이름 특이하지? 내가 지었어."

"그라티아는? 그것도?"

레나가 고개를 저었다.

"실제 있는 백작가야. 동부 산맥변두리에서 광산을 운영하고 있는 가문인데, 우리들의 손안에 있는 녀석들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런가."

"내가 지어 준 이름이니 잘 기억해두라고, '아메리타트' 씨."

"정말 고맙다."

이거라면 루비아도 쉽게 티 파티에 참석할 수 있겠지.

"근데, 생각보다 많이 좋아하네?

뭐가 그렇게 기뻐?"

그녀는 또다시 내 감정을 금방 읽어낸다.

기쁘달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같이 왔던 인간이 티 파티에 가고 싶어 했었다."

나는 '그라티아 백작 영애'라고 새겨진 가짜 신분증을 슬쩍 들어보이며 말했다.

"이거라면 되겠구나 싶어서."

물끄러미 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고마움을 표했는데, 어찐지 몹시미묘한 표정이다.

"?"

그래서 좋아했구나."

어조도 무척 미묘하다.

대답을 잘못한 걸까?

"티 파티 좋지."

차갑다.

그늘이 느껴진다.

이건 위험하다.

좋아했던 이유를 밝히면 절대 안됐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 뚜두둑.

가볍게 뼈 꺾는 소리.

내가 내는 건 아닌데.

어떻게든. 수습이 필요하다.

"고마워. 티 파티가 아니라도. 요긴히 쓸 수 있는 이런 증명서를 준비해줘서 정말 기쁘군. 지어 준 이름도마음에 든다."

"TT"

고.

레나는 새침하게 웃었다.

"노력은 해서 좋지만."

그녀가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시선의 끝이 나를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콕콕 찔러 온다.

"아, 이걸 말해 줘야지. 작전에서 당신 몫은 10%야."

레나가 입에 뜻 모를 미소를 엷게 머금고 말을 이었다.

"열 명이 참가하거든. 각자 몫을 나눠 가지는 거지. 500리터 정도가 금고 하나에서 이송되니까, 당신 몫은 50 리터."

50리터.

정말 어마어마한 양이다.

10%라는 배분에도.

총량에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생각해 보면 이건 거저먹는 일에깝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맡을 역할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일이다.

정보 입수부터 계획 수립.

산사태를 일으키는 폭파 따위의 주요실행과, 내부자 제어나 최후 물품회수 같은 어려운 일에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10%.

레나가 아니었더라면 이 작전에 참가할 수 있었을까.

당연히 그럴 리가 없다.

존재조차 몰랐겠지.

결국 회귀 전 그녀의 '시나리오'를 클리어한 데 이어, 루-륨 몇 병을 남긴 게 이런 변화를 만들었다.

50리터라.

다시 생각해도 짜릿하다.

그라스미어 지하에서, 골렘들을 쓰러트리고 얻었던 루-륨의 무려수십 배나 되는 양.

루-륨을 찾아다녔던 날의 보람이 진하게 느껴진다.

과거가 얼마나 변한 걸까.

아니.

구체적으로, 내가 남긴 루-륨이.

〈시나리오 클리어〉가.

레나라는 인간에게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쳤을까.

더 자세히 확인하고 싶어졌다.

좋은 질문이 떠오른다.

"혹시.

"응?"

"이런 슬라임을 알고 있나?"

나를 빤히 바라보는 레나를 향해물었다.

칼끝으로 바닥에 적당히 슬라임의 생김새를 묘사했다.

T&T 견습 단원이었던, 레나가

접촉할 수 있던 유일한 정식 단원.

보육원장 슬라임.

믿을 만하다고 했던 녀석.

불신의 상징 같은 레나가, 자신의 아끼는 동생마저 맡겼던 상대다.

하지만 이미 본부장에서 시작하는 시점이라면.

둘의 관계가 어떻게 되어 있을지 짐작하기 어렵다.

너무 툭 던지는 질문인가 싶기도 했는데, 레나가 입을 열었다.

"알지. 당신, 대단하네. 그자도 알고 있고?"

그자라.

첫 번째로 만났을 때의 레나와, 아무래도 '보육원장' 슬라임에 대한 태도가 많이 달라진 것 같다.

그녀의 말투에서, 예전과 같은

신뢰와 존경은 느껴지지 않는다.

"상당히 까다로운 녀석이야."

뭐랄까.

인정하고 있는 적.

그런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의 느낌만이 있을 뿐.

"강한 용해 능력에다, 웬만한 곳은 자유자재로 스며들 수 있어서 큰골칫거리인.

나는 조용히 이야기를 들었다.

결과의 변경으로.

그에 따르는 과거까지 완연하게 바뀌어 버린 것이다.

T&T 본부장 레나가 있을 수 있게 만드는 완전한 별개의 '세계선'.

그게 여실히 느껴진다.

게다가, T&T 자체도 '예전'만큼푸르손의 영향하에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나나우파의 세력이 더 커진 것도 명확해 보였다.

"그럼 길드에는 어떻게 들어오게 된 거지?"

보육원을 통한 게 아니라면.

"굶주리던 나와 동생을, 시조가 어릴 때 발견하고 길드에 들어오게 해 줬어. 그렇게 쭉 키워진 거지."

은혜를 입은 것처럼 말하고 있다.

하지만 레나의 수완으로 T&T가

입은 혜택이 컸겠지.

달리아크에서 나를 태연히 납치할만큼 녀석들의 영향력이 커진 데는 분명 레나의 활약이 있었을 거다.

그녀 한 명의 삶에 이어, 주위의 세계까지 꽤나 바뀌어 버린 셈.

만약 이런 회귀를 반복하다 보면.

이상적으로 여기는 세계에 가까워질 수 있을까?

세계의 변혁을.

아니,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말자.

일단은.

"동생은 잘 지내나?"

"의외로 자세하게 묻잖아? 나한테 관심 가져 주니 좋네. 별로 없는 줄 알고 걱정했잖아."

동생도 별문제 없이 잘 자라는 것같다.

"그렇게 좀 물어봐. 가족 관계나, 취미 활동 같은 거. 어떤 색깔이나 날씨를 좋아하냐고 물어도 되고."

으음.

레나가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사실 묻고 싶은 건 다른 것.

"혹시.

"또 뭐야? 얼마든지 물어."

"어렸을 때 루-륨이 든 병 따위를 접한 적은 없나?"

내가 레나에게 전해 주고 간 액체.

그게 어떤 식으로 '회귀' 이후에 전달되었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레나는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슬쩍 고개만 저을 뿐.

"응? 루-륨 병? 전혀 없는걸."

숨기는 기색은 없다.

여기까지 와서 레나가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할 리는 없다.

"사실 살면서 뭘 찾아낸 건 별로 없어. 내 주요 업무는, 던전 탐사가 아니라 운영이랑 기획 쪽이거든."

다들 그게 엉망이야, 라며 레나가 쓴웃음을 지었다.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렇다면 내가 레나에게 건넸던 아홉 병의 루-륨은.

레나의 미래를 바꾸는 값으로 이세계선에서 사라졌다.

예전 생에서 아이작이 해 준 말이 떠올랐다.

〈원래리면 발휘할수 없는 함을 루-륨을 사용해서 발휘한다. 〉〈변혁의 질료로 쓰일 때 비로소 기화하는 거다. 가만히 보존되어 있는데 그 양이 변하진 않아. 〉아이작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세계 변혁의 질료로 사용되면서 사라졌다는 걸까.

레나 '시나리오 클리어'의 결과를 한층 더 극적으로 변경하면서.

"하핫. 곤란하게 할 생각은 없어."

그녀가 내 팔을 옆에서 다시 꼭잡으며 말했다.

"며칠 뒤에, 나랑 답사 한 번 더하자. 괜찮지? 한 번으로 끝내면 쓸쓸하잖아."

"좋아."

"내가 접촉할게. 정확한 날짜와 시간도 그때 알려 줄 거고."

이의는 전혀 없다.

레나가 확신하는 계획이다.

어련히 잘 준비했겠지.

"슬슬 밖으로 나가 볼까?"

레나가 높은 천장을 가리킨다.

어느새 긴 밧줄이 하나 늘어져 있다.

비밀 통로가 아니라 환풍구 위로?

"조금 위험하지 않나."

"여기가 바로 무너뜨리는 그 산위야. 외곽이라 사람도 없어."

잠시 머뭇거렸지만.

레나는 이미 내 팔에 밧줄을 감고 있었다.

이 무슨.

"가자. 수도의 밤을 보여 줄께."

이미 봤지만.

- 파르록.

뭔가를 조작한 걸까.

팔을 묶은 밧줄이 위로 느릿하게 올라가고 있었다.

레나는 옆에 내려와 있는 또 다른 밧줄을 잡은 채로 상승.

중간 지점의 도르래가 보였다.

- 철컹.

밧줄이 천장 부근까지 올라가자 자동으로 동그란 문이 열렸다.

저 작은 틈으로 어떻게 이 많은 달빛이 쏟아지는지 신기할 만큼, 환풍구가 환하게 밝아졌다.

먼저 올라간 레나가 내 손을 잡아위로 끌어올린다. 달은 부서지거나 이지러지지 않았다.

"만월이네."

하얀 달빛이 갑옷 틈 사이사이로 차곡차곡 내려앉았다.

"이런 날은 웨어울프들이 부러워.

제대로 달에 취할 테니까."

단순히 물빛 달을 아름답게 여길뿐만 아니라, 만월 시기에 그들은 실제로 전투력이 수직 상승한다.

물론 레나도 알고 있을 터다.

잠자코 그녀를 따라서 달을 올려봤다.

"이 산을 무너뜨릴 거야."

레나가 가까이 있는 이산을 손을 들어 가리켰다.

달빛의 질량은 높이 쌓인 흙보다무거운 건지, 자꾸 흙 사이로 숨고 흙 아래로 흘러내렸다.

나무 하나 없는 야산의 흙과 돌을 바라봤다.

"산사태 나기 딱 좋다더라."

레나는 이리저리 나를 안내했다.

작전이 실행되는 비밀 통로와.

그 위쪽 지상이 점차 입체적으로 와 닿고 있었다.

조금씩 새벽빛이 밝아 올 때 즈음.

"내가 또 연락할게!"

레나는 안내를 마치고 수도 쪽 골목으로 혼자 걸어갔다.

그녀가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소실점 같았다. 있는 줄도 몰랐던 추위가 느껴졌다.

텅 빈 거리에서 멈칫거리다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 드르륵!

안쪽에서 날 보고 있던 아이작이 창문을 열었다.

무심코 거기로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창문을 확 열면 루비아가 깨는 거 아니냐.

〈실컷 놀고 이제 와서 뭘 그렇게 걱정하는 척? 〉

내가 뭘 어쨌다고.

일하고 온 것뿐인데.

〈근데 뭐 이런 제약을 달고 왔어?

자율규제라. 뭔 수상한 각서 같은 거라도 썼냐? 〉

"역시 알아차리는 거냐."

〈어. 그리고 흙 묻었다. 〉

- 까강!

아이작이 갑옷 정강이 부분을 콱부리로 찍었다.

혼자 들으러 갔다고 삐진 건가.

묘하게 공격적이다.

〈갑옷에 슬쩍 표식까지 새기고.

야, 너네 땅굴 팠냐? 이제 와서 파는건 아닐 거고, 이미 있는 걸 쓰나본데. 〉몸이 이완됐다.

반응이 침식되고 있었다.

그렇다, 혹은 아니다, 라는 어떤 반응도 할 수 없었다.

〈흐흐. 굳이 무리 안 해도 된다.

밖으로 나올 때 빼앗는 거네. 언제어디인지도 아나 본데. 나나우가 그사이 많이 컸네. 수완이라고는 없는 녀석인데 정보력이 대단해. 〉이게. 이렇게 알기 쉬운 건가?

228화 생매장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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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느끼고 있지만, 이 녀석은 정말 대단하다.

눈치가 이 정도로 빨라도 되나.

한때 제국 남부 전체를 지배한

녀석다웠다.

저 눈치에 힘까지 모두 회복하면, 정말 어마어마한 녀석이 되겠지.

확실히 여신의 저주를 받는 건, 정말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

아무것도 말 못 하는 상황 때문에 조금 걱정스러웠는데, 이 정도면 뭘말할 필요도 없다.

트로핀 나냐우가 구해 왔다는 주술서약서도 대단하다.

아이작의 날카로운 예측에 아예 '반응'자체가 불가능하다.

흠칫거리는 것조차도.

그저 침묵과 무반응만 나타낼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상태에서도 아이작은 이미확신을 얻은 것 같다.

- 딱딱!

녀석이 아래위로 부리를 두 번

세게 부딪쳤다.

그리고 조금 뜬금없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너희의 계획을 믿을 수 없다. 〉

아니, 단순히 짐작만 하고 있는 단계잖아?

그런데 저런 말을 하는 건가.

하지만 주술에 의해 구속된 탓에, 가타부타 뭐라고 말을 할 수조차 없었다.

다행인지.

반응할 것도 없었다.

〈내가 들여다볼 수 없으니까. 〉

녀석이 말을 이었다.

〈내가 들여다볼 수 없는 계획은 믿지 않아. 내가 알 수 없는 것은 믿지 않는다. 〉

"항상 의심하면서 산다는 거냐?"

〈그렇달까. 〉

놈이 미묘하게 부리를 저었다.

〈그냥 안 돼. 뭔가 할 수가 없어.

뭐라고 해야 되나. 남들도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흔쾌하게 잘받아들여지지가 않아. 〉세상에 생각이라고는 자기 혼자 할 줄 안다고 믿다니.

중증의 심리 장애다.

〈그리고 이건 한층 더 거부감이 느껴져. 내가 들여다볼 수 없을 정도의 결계를 친 황실이, 그대로 사도의 피를 간단하게 펫겨 줄까?

뭔가 있을 거야. 〉

하지만 펜던트는 경고를 보내지 않았다.

로랑스라고 했나?

기괴한 '소녀' 공작이 찾아왔을 때 펜던트가 터졌던 것을 생각하면, 펜던트의 능력을 뛰어넘는 위협이라고 생각하기도 어렵다.

〈뭐. 그래도 한번 잘해 봐라.

성공하면 얼마나 좋아. 난 그동안 수도 관광이나 하련다. 〉

"수도 관광?"

〈어. 그 짓을 지금 당장 하는 건 아니지? 나한테 또 애 보기 맡기려들지 말고. 〉- 파드득!

〈데려왔으면 네가 잘 책임져라! 이뼈다귀 새끼야! 〉

뭐라고 반박할 사이도 없었다.

아이작은 저 멀리 날아갔다.

그때 였다.

창문을 통해 흑 끼친 차가운 새벽바람 탓일까.

"으응.

루비아가 천천히 실눈을 떴다.

하얀 비단 이불에 몸을 비비면서 몸을 꼼지락거리던 루비아가 눈을 몇 번 깜빡이며 나를 바라봤다.

무슨 꿈을 꿨는지, 그녀의 양쪽 볼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게다가 눈가에는 작은 물방울까지 맺힌 상태.

"홋. 흐어엇.?"

막 잠에서 깬 맑고 커다란 눈에 내가 비춰진다.

- 드르륵!

다시 창문을 닫았다.

"일어났나?"

"네.!"

"이건 신분증."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그라티아 백작 영애'의 신분증을 건넸다.

이렇게 금방 만들어 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느니, 너무 고맙고 어쩌고 한 반응에서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민망했으니까.

완벽한 위장을 위해서, 그라티아백작가에 대해 전부 공부하겠다는 루비아의 각오가 대단했다.

이걸로 티 파티도 그럭저럭 안심.

"그런데 해골님은 어떤 신분으로 활동하시나요?"

'기사 아메리타트'라고 새겨진 신분증을 꺼내어 보여 줬다.

"적당히 호위 기사 흉내를 내면 될 거 같다."

"제 호위 기사요? 기뻐요! 그런 역할로 다니신다고 생각하니 무척설레네요."

사실 지금도 지켜 주시고 있지만, 이라 말하며 루비아는 잠깐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 떠올린 듯한 그녀가 달뜬느낌으로 입술을 열었다.

"그런데.

"뭔가 문제가 있나?"

"아니요, 그냥 이름에 담긴 뜻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메리타트.

레나가 지은 이름이다.

무슨 뜻이 있다고?

괜한 말실수를 하는 대신 잠자코기다리는 편이 낫겠지.

"좋아하는 꽃이거든요. 까만 잎을 가졌는데도 정말 예뻐요."

그런 게 있었나.

"꽃말이. 당신과 함께 첫눈을, 이잖아요. 아직 봄이니까. 저랑그때까지는 같이 있어 주신다는 말로 해석해도 되겠죠?"

루비아의 뺨이 다시 붉어졌다.

그런 뜻이었나.

당연히 알 리는 없다.

"아, 뭐. 그냥 어감이 좋잖아."

레나에게 받은 거라고 말하기는 역시 곤란하다.

여러모로, 곤혹스러운 상황들에 계속끼어 있다.

차라리 작전이라도 빨리 실행되면 좋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앗. 네! 들어오세요!"

다행히 루비아가 내 가명에 대한 질문을 멈췄다.

내가 나가서 문을 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앞에 서 있던 인간 한 명이 꾸벅고개를 숙인다.

조식이라도 올려 주나 싶었는데, 식탁을 들고 있지는 않다.

옷을 전해 줬던 인간 중 하나.

블랙베리의 수하다.

"뭐지?"

"이보트 후작 영애께서 다시 연락하셨습니다."

그 조그마한 곱슬머리 여자아이 말인가.

"티 파티에 참석하실 건지 다시 확인하고 싶다고. 꼭 와 주셨으면 좋겠다는 말씀과 함께 이 편지를 전하셨습니다."

성의가 있다.

루비아는 티 파티에 아직 한 번도 참석해 본 적 없는 입장.

처음 가는 거라면, 당연히 이런환대를 받으면서 가는 게 좋겠지.

근데 티 파티가 뭘까?

루비아에게 슬쩍 듣기는 했지만, 가서 정확히 뭘 하는 건지는 사실잘 모르겠다.

기뻐하는 루비아가 편지를 뜯게 둔채 곰곰이 생각했다.

티 파티.

가서 종류별로 차를 마시는 건가.

죽 늘어놓고?

차만 마시면 심심할 텐데.

잘 이해가 안 된다.

레나의 가게에서처럼 게임이라도하는 걸까.

도박이나 마약 같은 걸 은밀히?

혹시 문제가 될지도.

루비아가 펜을 든다.

편지에 답장 쓰는 소리가 가볍게 방에 울려 퍼진다.

역시.

혼자 보낼 생각은 없다.

티 파티 날 아침.

루비아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바네시 블랙베리는 첫날 드레스를 보낸 데 그치지 않았다.

"이보트 후작 집안도 저희 가게 특별 고객입니다. 그런 분이 초청하셨는데 제가 허술하게 해서 보내드릴 수는 없지요. 제 이익 때문에하는 일입니다."

드레스 보는 눈이 수도에서 최고라는 블랙베리는, 아예 메이크업과 머리담당 직원까지 따로 불렀다.

새벽부터 셋이 합을 맞춰서 함께 루비아를 꾸미기 시작했다.

저러다 쓰러지지 싶었는데, 대체뭘로 버티는 건지 루비아는 피곤한 기색이라곤 한 톨도 비치지 않고 있었다.

다른 세 명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이렇게 화장이 잘 먹는 피부는 처음 봐요! 좋은 걸 바르는 보람이 정말 팍팍 느껴져요!"

화장을 담당하는 여자가 감탄을 거듭한다.

"다 됐습니다!"

블랙베리가 드레스를 마지막으로 손보며 말했다.

루비아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놀라웠다.

물론 루비아를 미녀가 아니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까지 아우라를 뿜을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이런 매력을 감추고 있었나?

잠시 동안,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저, 너무 이상하지는. 않지요?"

거울이 있었어도 저런 반응일까.

조금 멍한 듯한 표정이 재미있다.

"무도회였다면 수도가 뒤집어졌을 텐데, 남자들이 없는 티 파티라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블랙베리가 작품을 완성했다는 듯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재밌게 놀다 오십시오."

블랙베리는 바깥에 마차를 대기시켜 놓고 물러갔다.

"이제. 이제 다녀올게요! 정말 감사해요!"

나한테 고마울 건 없는데.

루비아가 문밖으로 나갔다.

당연히 안 따라오는 거라고 생각했겠지.

티 파티는 남자는 못 들어간다고 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안 들어갈 생각은 전혀 없다.

- 스스스숙

[은신 Lv. 6을 활성화합니다!]

기척을 지워 버리고 공기 속으로 스며들었다.

최근 며칠이야 최고급 숙소에서 잘먹고 잘 살고 있지만, 루비아가 그동안 겪은 끔찍한 일들은 그녀자신보다도 내가 더 잘 안다.

혼자 보내는 미친 짓을 할 이유는 없다.

따라간다고 미리 말하면, 성격상폐를 끼치기 싫다며 만류했겠지.

- 팟!

지붕과 지붕 사이를 뛰어 마차의 경로를 추적했다.

바퀴에 두껍게 고무를 씌운 데다, 도로의 정비 상태도 무척 좋았다.

마차는 조금도 덜컹거리지 않고 부드럽게 목적지를 향했다.

저긴가. 나는 조금 먼저 목적지를 살피기로 했다.

커다란 저택 외관은 언뜻 보기에 낡아 있었지만, 활짝 열린 문으로 들어가며 점점 더 '진짜 귀족 저택'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정원은 물론이고 건물 외벽 하나하나에 꼼꼼한 손길이 있었다.

숙성된 우아함이 느껴졌다.

조금이라도 불결하거나 부실하게 관리되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무수히 깔린 경비들을 스쳐 지나내부 정원 쪽으로 바로 들어갔다.

'후작가인데. 너무 쉽군.'

건물 안은 어떨지 몰라도.

오늘 당장이라도, 밖에 모여 있는 인간의 많은 귀족 영애들을 모조리학살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문제는 이 저택이 아니라 내가 너무 강한 거겠지만.

정원에 먼저 도착한 다른 인간의 면면을 살폈다.

"어머, 이보트가의 장미 정원에 초대받아서 정말 영광이어요!"

눈가에 작은 점이 있는 흑발 여자 아이였다. 웃을 때 살며시 덧니가 드러났다.

인간들은 크게 두 부류다.

흑발 아이처럼 무해함을 보이려고 애쓰는 부류.

그런 부류들은 대체로 '남작'가의 영애들이 다.

다른 하나는, 자신은 쉽게 보이지 않겠다는 듯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입가에 살짝 건조한 웃음을 머금고 있는 여자들이었다.

'다들 영 어색하군.'

아직 여물지 않은 무리들이다.

이런저런 대화와 소개가 오갔다.

그 커다란 테이블에서 한발 비켜서서, 마지막까지 비스듬한 태도로 사람들을 보고 있던 붉은 머리칼의 여자가 입을 열었다.

"반가워요. 시셀 리드바렌입니다.

리드바렌 백작이 제 아버님이죠."

한순간 그 여자에게 모든 시선이 집중됐다.

"아, '진실의 르노' 님!"

"그래요."

여자가 건조하게 슬쩍 웃었다.

마치 여기 있는 너희들은 모두 내아래라는 듯한 모습이다.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테이블정중앙에 놓인 주최자 자리 바로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다른 여자들이 아직 서서 환담을 나누는 것과 대비되는 태도였다.

꽤나 권세 있는 가문인 모양이다.

또 다른 백작가의 여식 한 명이 메이드를 향해 물었다.

"자리 배치는 언제 확정되지?"

"그게, 막판에 바뀌어. 시녀장이 스콘을 가져오면서 곧바로 안내해드릴 겁니다. 아, 이보트 영애께서 오십니다!"

혼자 앉아 있던 시셀 리드바텐도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보석점에서 봤던, 금발 곱슬머리소녀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정원을 가로질러 다가오고 있었다.

언제 만났는지는 몰라도 소녀의 곁에는 루비아가 있었다.

그런데.

원래 저런 적극적인 성격이었나?

조금 쑥스러워하는 루비아의 팔을, 금발 소녀가 옆에서 두 손으로 꼭잡고 걸어오고 있다.

팔짱이라도 낀 느낌이다.

모두들 멍한 표정으로 루비아를 바라보며 쑥덕거렸다.

"저분이 영애께서 초대했다는.?"

색색의 장미를 지나며 걸어오는 루비아의 아름다음은 몇몇 소녀들마저아찔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물론 적의와 경계를 띠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지방〉에서 올라온 웬 아가씨도 초대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들어 보지도 못한 가문이긴 하죠.

공기 좋고 물 좋은 데서 태어나서 스트레스를 안 받았나? 예쁘기는.

하네요."

걸어오는 이보트 영애의 곁에서 시녀장이 뭔가를 물었고, 이보트영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녀장의 손짓과 함께.

메이드들이 조금씩 걸음을 빠르게 해서, 인원에 딱 맞춰 다기 세트를 준비했다.

의자 앞 테이블마다 이름이 쓰인팻말이 하나씩 놓였다.

영애들은 자연스럽게 제 펫말이 놓인테이블 위치로 이동했다.

- 달각.

어중간한 자리들이 빠르게 채워져갔다.

남은 자리는 서넛.

- 달그락.

주최자의 왼쪽 자리.

'리드바렌 백작 영애'가 느슨히 서 있는 자리와, 식탁 끝이 살짝 깨진 끝자리 둘만 남기고 펫말이 모두 놓였다.

깨진 자리 옆은 장미도 피어 있지 않고 가시덩굴만 무성했다.

심지어 햇빛을 가리는 나무조차 없었다.

"실례합니다만.

주최자 자리 앞에 선 금발 곱슬의 여자아이가 산뜻한 미소를 지으며, 시셀 리드바렌 앞에서 치마를 살짝들고 인사한 뒤 말했다.

"여긴 예약석이네요."

보석 상점 앞에서 말 더듬던 때와 같은 사람이라고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른 모습이었다.

- 달각.

메이드가 금발 여자아이의 자리 옆에 부드럽게 펫말을 놓았다.

싸늘하다.

뭔가. 잘못됐다.

꾹 주먹 쥐는 소리가 부담스러울정도로 선명히 들린다.

이건 나나 루비아가 생각했던

티 파티가 아닌 것 같다.

229화 생매장 (9)

***************************************************

평화로운 티 파티.

그런 걸 생각했는데.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소심하고 순진해 보이던 아이가 일부러 좌석 하나를 이상한 곳에 배치했다.

상석을 차지하고 느긋하게 있던 소녀하나를 차서 쫓아내고, 루비아를 앉혔다.

심상치 않은 느낌이지만.

월 어떻게 끼어들어야 하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루비아를 위협하는 녀석이 있다면 공포 스킬이라도 써 볼까 싶었지만, 이런 경우는 누구에게 써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 파르르.

귀족 영애들의 눈썹이 긴장으로 떨린다.

-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민망할 정도로 생생하게 들린다.

억지로 양쪽 입꼬리를 올린 시셀리드바텐의 얼굴에서 경련이 인다.

당장이라도 엉엉 울면서 밖으로 뛰쳐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

이건 위험하지 않나.

어린 귀족들 사이의 싸움에 너무휘말려 드는 것 같은데.

시셀 리드바텐은 저렇게 지독한 취급을 받으면서도, 꿋꿋이 자리에 남아 있다.

이보트 후작 영애에게 어마어마한 앙심을 품을 건 당연하다.

그리고 그 앙심의 상당 부분은.

이보트 영애 곁의 루비아에게도 돌아가겠지.

머리가 지끈 울리는 시점.

루비아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약속하세요."

귓속말이 다.

금발 곱슬 아이가 흠칫하며 작게 내뱉었다.

"네?"

탐지 스킬을 최대로 발휘한 탓에, 루비아의 귓속말이 바로 내 곁에서 크게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이 상황은 제가 기꺼이 장단을 맞춰 드릴 테니, 이보트 가문의 장서를 개방해 주세요."

이보트 가문의 장서?

루비아는 책을 좋아하니까.

상태창에 보이는 직업에도 엄연히 사서가 보이고 있다.

소녀와 어울리는 대가로 재미있는 책이라도 찾아보려는 걸까.

"그. 그게.

금발 곱슬 아이는 홀린 것 같은 눈으로,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할께요."

왜 루비아가 이 상황을 통제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

티 파티는 처음 와 봤다면서.

- 탁.

가명으로 안내된 루비아가 자리에 앉았다.

금발 곱슬 소녀는 루비아의 귓속말에 잠깐 표정이 흐트러졌지만, 곧 다시 수줍게 웃으며 페이스를 회복했다.

티 파티에서 자리 배치의 엄청난중요성과 민감함은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다.

루비아를 이용해서 이보트 후작영애는 지독한 공격을 한 것이다.

일단 알 수 있는 수준에서 생각해보자면.

알려지지 않은 시골 영애를 평소밟고 싶었던 녀석의 자리에 턱하니 배치해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는 전략이랄까.

시셀 리드바텐이 목청을 슬며시가다듬었다.

도저히 여기서 순순히 물러나지는 못하겠다는 듯, 한 마디를 날린다.

"이보트 후작 영애께서 실수하실까 봐걱정되는군요."

실수.

이 정도 단어 사용이면, 눈앞에다결투장을 던진 셈이다.

여자들의 이목이 단번에 쏠렸다.

"어머, 실수요?"

"세심한 자리 배치야말로 귀족의 꼼꼼함을 반영하는 것이지요. 명성높은 이보트 후작가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알려질까 두렵네요."

아직 어린아이라서일까.

침착하지 못하다.

좋은 선택은 아니다.

주최자에 이어, 옆의 루비아까지 푹 찌른 셈.

이보트 세나 에렌가에데가 수줍게 웃으며 답변했다.

"어머.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다들 먼 거리를 와 주셔서 너무감사해요. 오시느라 힘드셨을 텐데 어서 앉아 주셔요."

탐지 스킬을 키고 있는 탓일까.

모두의 미묘한 표정과 움직임이 대부분 다 읽혔다.

이보트 후작 영애는 '먼 거리'를 강조함으로서 멀리서 온 '지방의'귀족이 상석에 앉아야 할 이유를 만들었다.

여기서, 레나가 일부러 먼 곳에서 이름을 따온 그라티아 가문보다 더멀리 사는 귀족은 없을 테니까.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의 눈짓을 보니.

시셀 리드바텐이라는 여자는 아마이 저택에서 제일 가까이에 사는 모양이다.

"하지만.!"

리드바렌 영애는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다들 표정이 좋지 않다.

구질구질하다.

그런 표정을 짓는 모두의 얼굴이 보인다.

이제 여기서 그녀의 편은 없었다.

다들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몇 번의 대화가 오고 간 뒤, 같이 있던 소녀들은 이보트 후작 영애와 곁에 선 신인에게 완전히 줄을 선상태였다.

"와아. 그라티아 가문의 영지에선 보석이 잔뜩 난다고 하더라고요."

"블랙베리 님이 드레스를 골라주셨다는 소문이 있으니, 역시 정말 대단한 영향력을 가지고 계신 게 분명해요!"

"너무 부러워요!"

진행을 쭉 보니 느껴진다.

이보트 후작 영애에게 처음부터 호의적인 쪽도, 처음으로 티 파티를 연다고 하니 어떤 아이인지 염탐해보려는 쪽도 있는 듯했다.

하지만 참석한 소녀들은 이제 다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외적인 발육은 좀 부족해 보이는 이 곱슬머리 금발 소녀가.

절대 만만하지는 않구나.

"정말 꿈같은 맛이네요."

"크림이 정말 진하네요-"

.! 장미 향이나요. 마치 꿈꾸고 있는 것 같은걸요."

"초콜릿이 달지 않으면서도 이리맛있다니.

루비아에게도 관심이 집중되었다.

소녀들이 앞다뤄 루비아 앞에서 정말로요? 하며 눈을 반짝이거나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간간이 손뼉을 치며 호들갑스럽게 맞장구치는 녀석들도 있었다.

"그라티아 영애께서는, 혹시 어떤 사람이 취향이세요? 호호호! 너무쑥스러운 걸 물었나?"

이건 나도 좀 궁금한데.

"저는.

짧은 침묵 뒤.

루비아가 눈동자가 언뜻 파르르빛났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람, 이 아니라도 괜찮아요."

묘한 대답이었다.

주위의 여자들도 갸웃했다.

"와앗! 사람이 아니라면. 천사님같은 게 취향이신 걸까요?"

루비아가 희미하게 웃었다.

눈빛이 흐릿하게 젖어 갔다.

"이거 분명 누군가 상대가 있네.

그렇지요?"

"너무 캐물어도 실례겠지만 저도 궁금해지는걸요."

"어떤 분인지만 듣고 싶어요."

루비아가 입을 열었다.

"그냥, 안 보이면 어쩐지 초조하고, 뭔가 저와 이어져 있다는 느낌이 드는 분이에요. 절 지켜 주시고.

"역시! 수호천사 같은 건가요?"

"글쎄요. 그런 이미지와는 조금거리가 있을지 모르지만. 수도도 그분덕분에 온 거예요."

루비아의 얼굴에 살며시 흥조가 떠올랐다.

덕분에 수도를 온 거라면.

설마 내 이야기인가?

막 민망해지려고 할 때였다.

- 쨍그랑.

끝자리에 있던 시셀 리드바렌이 소리 나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애써 그녀를 없는 사람 취급하던 모두의 시선이 어쩔 수 없이 집중됐다.

깨진 찻잔이 시셀의 왼쪽 손등을 엷게 베어 냈다.

베인 피부에서 피가 새어 나왔다.

피가 흐르는 손등을 가만히 보던 시셀이 씹어뱉듯이 말했다.

"사람이 아니고, 천사도 아니면 악마라도 만나고 계신 건가."

"어머.

"어떻게 저런 소리를.!"

하지만 더 이상의 소요는 없었다.

시셀 리드바렌은 뒤돌아 그대로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인사조차 없이.

루비아를 슬쩍 살폈지만 별다른 표정의 변화는 없다.

악마라.

루비아가 만약 내 이야기를 했던

거라면,

찻잔을 깨고 나간 저 여자아이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항상 부질없이 부서지긴 했지만, 마왕군의 선봉에 서긴 했으니까.

지금도 마왕들이 강림한다면 인간편에 서진 않겠지.

분위기는 곧 수습되었고, 아무 일없었다는 듯 찻잔이 치워졌다.

"그건 태워 주세요."

세나는 곱슬거리는 금발을 손으로 살짝 꼬며 다소곳이 말했다.

파티가 성황리에 끝난 뒤.

대부분의 소녀들은 돌아갔다.

"그라티아 영애께서는 잠시 이쪽으로?"

나는 은신을 풀지 않은 채, 저택안에 들어가는 루비아를 쫓았다.

슬슬 말해 줘도 좋을까?

그녀를 계속 몰래 지켜보는 게, 썩좋은 기분은 아니니까.

= 루비아.

〈으앗! 어? 어디 계세요? 어디??.

이거 생각보다 훨씬 당황하는데.

= 모른 척해라.

"크흠! 흠!"

"그라티아 영애. T

"아니에요. 앞으로 가요."

〈어, 언제부터 계셨던 거죠? 〉

= 방금. 걱정되어서 왔다.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당황하겠지.

아까 들은 대화가. 내 이야기일가능성도 있고.

〈죄송해요! 제가 너무 늦었죠. 〉

= 티 파티는 즐거웠나? 당황스런 일은 없었고?

짐짓 떠보듯이 물어보았다.

〈작은 사건들이 있기는 했는데.

예상했던 범위였어요. 그래도 전부 재밌었어요! 제가 참가할 수 있게 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예상했던 범위라.

루비아가 조금 더 무서워진다.

= 혹시 도와줄 건 없나.

〈아니요! 여긴. 그냥 제게 맡겨주세요. 〉

루비아의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호화로운 응접실.

사슴뿔로 장식되어 있는 테이블에 둘을 안내한 뒤, 세나가 루비아를 보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아시겠지만, 영애를.

이용했어요."

그녀가 안절부절못하고, 굉장히 미안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깐다.

세나와 대조적으로 루비아는 무척평온해 보이는 모습이다.

내가 근처에 있다는 걸 알고 더평정을 찾은 것 같다.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절 미워하시기 전에 먼저 제 사정부터 들어주세요."

소녀가 말을 이었다.

"저희는 개국공신 가문이에요. 명망 높은 마법사나 검주는 그리 배출하지 못했지만, 이리저리 줄을 잘타며 지금껏 살아남았죠."

개국공신이라.

확실히 후작이라는 작위를 카드로 따지는 않았을 거다.

그런데.

개국공신.

뭔가 익숙한 단어다.

어디서 들었는지 가만히 생각해보니, 곧 떠오르는 게 있었다.

슬라임이 해 준 이야기였다.

〈캐빈 애슈턴. 개국공신인 대공가문의 직계 장자이자, 아쥬라의 최고위 실력자였죠. 〉캐빈 애슈턴과도 조금쯤 관련이 있으리라는 건.

무리한 추측일까.

루비아에게 그자의 책도 찾아봐달라고 부탁해야겠다 싶었다.

이보트 영애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런 만큼, 이랄까. 저희 가문은 최근의 전쟁 추진에 계속해서 반대해 왔어요."

"좋은 일이네요."

루비아의 표정이 누그러진다.

그녀의 아버지도 전쟁을 반대하다살해당한 처지다.

남 일 같지는 않겠지.

"어른들은 희생될 수많은 목숨을 걱정하는 척하지만. 실은, 수도에서 손꼽히는 명문으로 잘살고 있으니까, 전쟁 따위 불안한 짓을 해 봐야 득이 없다는 거죠."

가문이 전쟁을 반대한다는 말을 듣고 루비아의 표정이 확 누그러진 탓일까.

덕분인지 세나의 말이 길어진다.

"리드바렌 가문은 대표적 주전파예요.

시셀의 부친은 유명한 종교재판관이죠,"

종교재판관이라.

그런 녀석들이 있었던 것 같기도하다.

어차피 나는 모든 인간에게 있어이단이므로, 종교재판관이나 보통인간이나 다를 것은 없었다.

"엠버와 연합에 제국의 종교를 퍼트린다고 난리도 아니지요."

결국, 주화파 주전파 대표 가문의 갈등이 작은 정원 안에서 벌어진 셈인가.

"제가 내몰지 않았으면 시셀이 분명히 무슨 짓인가 했을 거예요!

제 첫 번째 티 파티를 망쳐 놨을게 확실하다고요!"

애는 애다.

귀족은 귀족이다.

정세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결국두려워하는 것은 이런 거다.

밖에서는 수많은 인간들이 지금도 굶어 죽어 가고 있는데, 작은 세계안에서 보호되고 길러진 귀족들은 이런 걸 걱정하고 있다.

루비아가 쓴웃음을 지었다.

"전 영애께서 약속만 지켜 주시면 됩니다."

"그럼 절 미워하시진 않을 거죠?"

금발의 소녀는 울상이 되었다.

루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 관계는 미워하니 어쩌니 할 사이는 아니지요."

루비아의 말을 들은 금발 소녀는 울상을 한 번에 거둬들였다.

역시 이것까지도 연기였던 건가.

"그런데. 처음부터 제가 이렇게 접근한 걸 알고 계셨던 거예요?"

"그냥저냥 짐작만 했지요."

루비아의 이런 모습이 새로웠다.

무덤에서는 정말 어설픈 사령술사로만 보였는데.

통찰력이나 정치력이라고 말할

것마저 보이고 있었다.

어쩌면 나와 함께 다니며 성장했는 지도 모른다.

사막을 횡단하고, 거대한 괴수들이나 인간들이 수없이 죽어 나가는 모습을 본 경험을 한 '영애'들은 별로 없을 테니까.

"아.

자신의 가면을 한 번에 꿰뚫어 본루비아를, 이보트 영애는 흠칫한 눈으로 바라보며 감탄했다.

"이쪽이에요. 도서관으로 안내해드릴게요."

두 여자의 또각거리는 발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특별히 찾으시는 책이 있나요?"

내가 애슈턴의 이름을 꺼내 볼까고민하기도 전에.

"캐빈 애슈턴이라는 작가의 책을 찾고 있어요."

이건 놀랐다.

=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이보트 가문은 개국공신이에요.

그리고 무武보다는 문文에 훨씬 더치중한 가문이죠. 저택 서재에 어마어마한 장서를 가지고 있다고 들었어요. 〉 그런 이야기는 언제 다.

= 그렇다고 캐빈 애슈턴이라니.

〈그 사람 책을 찾고 계시잖아요?

몰래 딱 가져다드리려고 했는데.

깜짝 선물은 아쉽게 실패네요. 〉

설마, 그녀는 처음부터 이 상황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던 건가?

카펫이 깔린 복도를 지나 서재에 도착했을 때였다.

"어? 문이 열려 있네요."

안쪽에 앉아 있는 인간 한 명의 기척이 느껴졌다.

별다른 위협은 될 것 같지 않은 초로의 남자였다.

"들어왔느냐."

낮고 따듯한 목소리였다.

"어, 아버지? 혼자 계세요?"

"시간이 늦었으니까. 다들 퇴근시켰다. 옆에 계신 분은?"

"헤햇. 이번에 친해진 그라티아백작가의 영애예요."

"후작 각하를 뵙습니다."

루비아는 양손으로 치맛자락을 들고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허헛. 딸 친구인데 그런 예를 취할필요까지는 없다네."

열은 금발 남자가 실없이 웃었다.

세나 이보트는 살짝 들뜬 듯이, 두사람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마침 잘됐어요! 어떤 사서보다저희 아버지가 최고예요."

"세나, 괜한 금칠은 관두려무나.

가진 재주가 없으니 방에 들어앉아책이나 읽는 게지."

"에이! 판본에 따른 미세한 차이점까지 알고 계신 분이면서.

"그야 자랑할 만한 것도 아니지."

"아무튼, 여기 그라티아 영애께서 찾으시는 책이 있대요. 아버지가 도와주실래요?"

"오? 그래? 하긴, 딱 보아도 무척독서가 깊을 것 같은 영애분인걸.

우리 세나는 삽화가 들어간 책만 좋아해서 말이야. 이거 반갑구려."

마른 남자의 웃음이 한층 더 깊어제국 수도에서 어떻게 후작이라는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울정도로 유약해 보이는 남자였다.

경계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무슨 작가의 책이지?"

"캐빈 애슈턴이라는 작가의 책을 찾고 있습니다."

"맞아, 그런 이름이었어!"

"아버지?"

서재에 앉아 있던 남자의 얼굴이 차갑게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