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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 *

혈천도마는 매일 만나던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에서 우뚝 서 계시는 모습이 마치 저를 지켜주는 수호석(守護石) 같으십니다."

"날 돌대가리라고 놀리는 건가?"

"그럴 리가요?"

일화검존을 끌어들인 것 때문에 노발대발 화를 낼 것 같았는데, 그는 평소답지 않게 차분했다.

"장호를 마군주에 앉힌 것,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나는 그 어느 때 보다 긴장하고 있었다. 이 늙은이가 갑자기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몰랐으니까.

하지만 오늘의 혈천도마는 장호가 그랬던 것처럼 평소와 다른 의외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주 차분했다. 마치 이 혈천도마란 사람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이렇기에 사람의 한 단면만 보고 그 사람을 단정해선 안 되는 거다. 앞면에 속지 말아야 한다. 아직 나는 혈천도마의 뒷면이 어떤 모습인지 알지 못한다.

"어떻게 검존을 설득한 건가?"

"화내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면 솔직히 말씀드리죠."

"화 안 내겠네."

"어르신이 진정한 마존이라고 검존 선배의 자존심을 건드렸습니다. 어르신을 이용한 거죠."

혈천도마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렇다면 자네가 속은 거야. 그 잔머리가 자네의 얕은 수작을 몰랐을 리 없지."

그는 일화검존을 싫어했지만 적어도 과소평가하지는 않았다.

그건 검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이번 일에 끼어들었다는 것은, 도마의 사람 보는 눈을 믿는다는 의미기도 했으니까.

"그 여우는 분명 자네에게 수작을 부릴 거야. 자넬 도와줬다는 이유로 나와 못 만나게 하겠지. 그럼 어떻게 할 텐가?"

"저야 어르신이 우선입니다."

"장호를 도와준 것을 내세울 텐데?"

"그건 어르신이 먼저 도와주셨으니 괜찮습니다."

"과연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했을 때도 그럴까? 바로 이것처럼."

혈천도마가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서 내밀었다.

"약속은 약속이니."

나는 상자를 받아서 조심스럽게 열어보았다.

푸른 빛이 도는 한 알의 단약은 이 세상 것이 아닌 듯 영험한 영기(靈氣)를 발하고 있었다.

혈천도마가 실로 아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천외신단이다."

이 순간만큼은 놀라는 척 연기가 필요 없었다. 이렇게 흔쾌히 천외신단을 내놓는 모습에 정말 놀랐으니까. 영약을 구하려는데 괜찮은 것이 없다는 둥,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쉽게 내놓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었는데.

"오! 정말 천외신단입니까? 이걸 어떻게 구하신 겁니까?"

"오래전부터 보관해온 것이다. 나도 복용하지 않고 아껴둔 것이지."

"정말 절 주시는 겁니까?"

"다시 가져갈까?"

"그럴 리가요."

혈천도마는 속이 쓰린지 앞에 놓인 술을 마셨다.

술잔을 내려놓으며 그가 말했다.

"이공자, 자네에게 내 남은 인생을 걸어보겠네."

혈천도마는 자신이 지닌 가장 강력한 패를 내놓았다.

일전에 아버지에게 말했었다. 혈천도마는 소장 가치가 없다고.

이제 그 말은 정정해야겠다.

당신이 이렇게까지 화끈하게 나온다면, 나 역시 당신을 제대로 소장해 보겠다고.

형에게 갈 천외신단이 나에게 오면서 나와 혈천도마의 운명이 바뀌었다. 억지로 온 것이 아니라 '기꺼이'였기에 더욱 크게 바뀌었다.

"저를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정중히 그에게 포권한 후,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지금 여기서 신단을 복용할 테니 호법을 서주시겠습니까?"

그러자 혈천도마는 깜짝 놀랐다.

"내 앞에서 신단을 복용하겠다고?"

"네. 어르신이 주신 것이니, 어르신 앞에서 복용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운기조식을 할 때 호법을 서준다는 것, 이 행위는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무인에게 있어 믿음의 마지막 단계다.

"날 믿는다는 건가?"

"믿기 때문에 이 천외신단도 복용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기에 독을 탔다면, 저는 해독제를 얻기 위해서 어르신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할 테니까요."

혈천도마의 눈빛에 흥미로운 기색이 스쳤다.

"내가 독을 타지 않았다고 믿는 이유는?"

"그런 비열한 방식을 선택할 분은 아니시니까요."

"나는 내가 꽤 비열하다고 생각하는데?"

"비열함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요. 제 눈에 비친 어르신은 판까지 엎으면서 약속을 어기시는 분은 아니니까요."

"자네 예감이 틀렸다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겠습니다. 자, 그럼 잠시만 호법을 서 주십시오."

사실은 안전한 모험이었다. 왜냐하면 혈천도마는 독공이나 사술(邪術)이라면 치를 떨 정도로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망설이지 않고 천외신단을 복용했다.

혈천도마는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설마 진짜로 자신의 앞에서 영약을 복용할 줄 몰랐던 모양이다.

천외신단은 회귀 전 인생에서도 본 적이 없는 영약이었다.

'신단아, 부디 잘 녹아라.'

입안에서부터 녹아내린 천외신단의 약효가 목구멍을 넘어 온몸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앞서 소천동에서 복용했던 마정단보다 훨씬 더 큰 기운이었다.

천맥강화술로 강화된 혈맥은 이 엄청난 기운을 통로를 크게 열고 환영했다. 천리마처럼 내달리는 신단의 기운을 혈맥은 기꺼이 들판이 되어 받아주었다. 질풍처럼 내달린 영기가 온몸의 미세 혈맥으로 뻗어나갔다.

나는 이 거대한 기운을 완벽하게 내공으로 녹이기 위해 운기조식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렇게 여러 차례 정성스러운 운기조식이 끝나자, 나는 천외신단의 영험한 기운을 단전에 갈무리할 수 있었다.

눈을 뜨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팔짱을 낀 채 날 쳐다보고 있는 혈천도마의 모습이 보인다.

"신단 맛이 어땠나?"

"꿀맛입니다. 이렇게 맛있는 것은 평생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젠장! 빌어먹을!"

그는 자신이 먹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직접 드신 것보다 열 배는 더 값지게 소화되었다고 확신합니다."

이제 당장 눈앞의 혈천도마와 붙어도 내공 때문에 졌다는 소리는 듣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단전에서는 정순한 내력이 넘치고 있었다.

혈천도마가 내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주름이 많았다.

"이보게, 이공자."

"네, 어르신."

그가 내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자네 정체가 뭔가? 자네가 뭔데 내 마음을 뒤집어서 천외신단까지 뱉어내게 한 건가?"

나는 곧장 내공을 끌어올리며 마기를 발출했다. 폭발하는 화산이 용암을 분출하듯, 마기가 터져 나왔다. 지금까지 그에게 보였던 것과는 다른 차가우면서도 엄격한 기운이었다.

"장차 그대를 이끌 사람이오. 그때까지 그대가 살아있다면 말이오."

자신을 짓누르는 숨 막히는 기운 속에서 혈천도마의 표정에 여러 감정이 스쳤다. 적어도 화를 낼지언정 비웃지는 않았다.

내가 마기를 거둬들이자 얼어붙었던 주위 공기가 풀어졌다.

"배짱이 두둑한 것만은 인정하지."

"저도 하나만 묻겠습니다."

"묻게."

"어르신이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다 늙어서 원하는 것이 뭐가 있겠나? 그저 살아온 대로, 관성에 이끌려 계속 살아가는 거지."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열정적이시지 않습니까?"

"내가?"

"날 밀어붙일 때 보면, 젊은 사람 같거든요.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느껴집니다."

이 순간 나는 혈천도마의 눈에서 또다시 불길을 보았다. 여전히 혈천도마는 불길 속에 홀로 서 있다.

"그래 보이나?"

"네."

반면 그는 스스로에 대해 자신이 없는 듯 말했다.

"다행이군. 요즘 나는 내가 다 식어버린 줄 알았는데...."

나는 이것이 어떤 마음인지 짐작했다. 바구니에 아무리 많은 야망과 열망, 욕망을 담아도 세월이 무심하게 덜어내 버리는 것이 있다.

"술 주십시오."

"술을? 이번 내기에 내가 졌는데?"

"천외신단을 아끼지 않고 내주시는 순간, 내기에서 이기셨습니다. 어르신의 술, 받겠습니다."

"진심인가?"

"앞으로 저를 잘 이끌어 주십시오."

내가 상대하기에도 이렇게 까다로운데, 내 적들은 얼마나 힘들겠는가? 혈천도마를 진정한 내 사람으로 만들 생각이다.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감격한 혈천도마가 술을 가득 따라주었다.

"자, 받게."

나는 혈천도마가 준 술을 시원하게 마셨다.

"앞으로 잘해보세!"

"네, 개수작을 부려도 제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부려 주십시오."

잠시 흠칫하던 혈천도마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마존이 된 이후로, 자신에게 개수작이란 말을 면전에서 한 사람은 내가 처음일 것이다.

"한잔 더 하시죠."

"좋네!"

나는 안다. 지금 저렇게 활짝 웃고 있지만, 그는 아직 마음의 문을 다 열지 않았다. 혈천도마는 빼꼼히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것만으로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저 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나는 모른다.

사람 마음은 절대 알 수 없다는 아버지의 말씀대로 나는 혈천도마란 사람에 대해 예측하거나 단정 짓지 않을 작정이다. 딱 보이는 대로만 판단할 거다.

그리고 우리 관계는 저 문이 활짝 열리는 날 결정되겠지.

당신 불길에 내가 타죽든, 당신이 내 검에 찔려 죽든, 우리가 영원한 친구가 되든, 그날 결정이 나게 되리라.

제38회 바가지를 씌울 겁니다.

늦도록 수련장에서 무공수련을 했다.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수련이었다. 화무기에게 지는 순간, 내가 쌓아가는 이 모든 과정이 아무리 값지고 훌륭했다 하더라도 말짱 헛수고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수련이 너무 힘들 때면 이런 상상을 하곤 한다. 딱 일 각의 수련이 모자라서 화무기에게 죽는 상상. 물론 현실적으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그런 절망적인 상상은 게으름을 타파하는 데 제법 도움이 된다.

다행히 오늘의 수련은 회귀 이후 가장 기분 좋은 수련이었다.

단전에서 정순하면서도 웅혼한 공력이 휘몰아쳤다. 초식의 위력은 한층 더 강해졌고, 속도는 빨라졌다.

지금 내 내공은 마존들과 생사대전을 겨룰 수 있을 정도로 올라섰다. 내 나이에 비하면 그야말로 누구도 믿지 못할 공력이었다.

'아직 부족해.'

더 모아야 한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 내공이었으니까.

계속된 수련에 풍신사보는 상당한 진척이 있었다. 언젠가 벽을 만나는 순간이 오겠지만, 수련 초반인 지금은 한 번 펼칠 때마다 실력이 느는 기분이 들었다.

풍신사보를 펼치면 펼칠수록, 나는 싸우고 싶다는 열망에 휩싸였다. 풍신사보는 끊임없이 나의 투심을 자극했다.

―참아라, 널 마음껏 세상에 드러낼 순간도 올 테니까.

그렇게 한바탕 풍신사보의 초식을 마쳤을 때,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공력이 또 늘었구나."

깜짝 놀라 돌아보니 아버지가 서 계셨다.

"정말 귀신이십니다."

기척 없이 등 뒤에 와 있는 것도, 초식을 보는 것만으로 내 내공이 늘어난 것을 알아맞히는 것도.

나는 솔직히 말했다.

"혈천도마에게 천외신단을 얻었습니다."

사건이라면 대사건인데, 아버지는 별달리 놀라지 않았다.

"왜 안 놀라세요?"

"그에게서 얻을 것이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게 자그마치 천외신단이었다니까요?"

"도마 그이가 천외신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혈천도마는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알고 계셨죠?"

그러자 알고 있었다는 사실보다 더 충격적인 내용이 흘러나왔다.

"오래전에 내가 준 거니까."

"맙소사! 그걸 아버지가 준 거라고요?"

문득 혈천도마가 나보다 자신이 아버지와 더 친하다며 바닥에 줄을 긋던 모습이 떠올랐다. 한때 두 사람 사이가 굉장히 좋았다는 것은 이로써 확실해졌다.

"그와의 내기에서 너는 무엇을 걸었느냐?"

"저는 저를 걸었습니다."

"도마 그이가 단단히 손해 보는 장사를 했구나."

"제 장사는 이제부터입니다. 팔마존들을 상대로 바가지를 제대로 씌울 작정이니까요."

예전이라면 헛소리라며 한마디 하셨을 아버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듣고만 계십니까?"

"너라면 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이제야 제 진가를 알아봐 주시는군요."

"너는 왜 그리 마존들을 미워하느냐?"

"그들을 보고 있으면 이런 환청이 들립니다. 이봐, 너 천마가 되고 싶지? 한데 어쩌나? 우리가 밀어줘야 천마가 될 수 있는데. 내가 뒷배가 되어 줄까? 원해? 그럼 내게 잘 보여봐."

"피해의식 아니고?"

"그럴지도요. 어쨌든 싫습니다."

나는 혼자서 이 싸움을 할 생각이 아니다. 아버지와 함께 할 싸움이기에, 적어도 팔마존과 관련해서는 솔직한 심정을 전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몰라도 아버지와의 관계만큼은 꼬여선 안 된다.

"수련해라."

돌아서는 아버지에게 내가 고마움을 전했다.

"장호를 마군주에 앉혀주셔서 감사합니다."

"너 때문이 아니라 두 명의 마존이 추천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한번 더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

아버지는 돌아서지 않은 채 대답했다.

"왜 그러느냐?"

"저는 행복해질 겁니다."

순간 아버지의 등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의외의 말이었을 것이다.

"제가 행복해야 주위 사람도 행복하고 본교도 행복해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뭐라 말하기 전에 내가 선수를 쳤다.

"딱 죽기 좋은 싸구려 감성이죠?"

"알면 됐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아버지가 한마디 덧붙였다.

"이 길을 가려면 행복 따윈 생각도 마라."

아버지가 문을 닫기 전에 큰 소리로 말했다.

"싫습니다, 전 그 길을 가면서도 꼭 행복할 겁니다."

마치 어림없는 꿈이라고 말하는 듯 쿵 소릴 내며 문이 닫혔다.

행복이란 말에 거부감을 가지는 아버지를 이해한다. 아버지도 나도 행복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았으니까.

행복은 패배자들의 도피처로 여겼으니까.

하지만 아버지, 제가 살아보니 목표를 이루려고 애쓰는 것만큼이나 행복을 느끼며 사는 것이 어렵더라고요.

...아니, 어쩌면 성공을 위해 달리기만 하는 인생보다 그게 더 어려울지도요. 오히려 우린 성공으로 도피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버지.

* * *

확실히 일화검존은 혈천도마와 달랐다.

자신이 도와서 장호를 마군주로 만들었으니 당장 달려와서 생색을 낼 법도 한데 일화검존은 전혀 소식이 없었다.

'나보고 찾아오란 의미다.'

그녀가 체면과 명예를 중요시한다는 것이 이 하나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반면 혈천도마는 자신의 감정을 우선하는 사람이다. 성질나면 달려와서 버럭 해야 직성이 풀린다.

나는 좋은 술을 한 병 사서 일화검존을 찾아갔다.

일화검존은 모옥 마당에서 화원을 손질하고 있었다.

"꽃들이 참 예쁩니다."

"나이 들면 꽃이 예뻐진다는 말이 있어요. 우리 이공자께서는 아직 먼 이야기지만."

더 나이가 들면 그조차도 귀찮아진다는 것은 모를 거다.

"이번에 도움을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감사의 뜻으로 술을 사 왔습니다."

"선물은 고맙지만, 나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아요. 끊은 지 오래됐죠."

"아, 그러셨습니까?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사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일부러 술을 사 왔다. 너무 상대를 잘 파악하고 있다는 인상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한다. 사소한 것들이 모여서 관계를 만드는 법이니까.

"자고로 도움을 받았으면 갚아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원하시는 것이 있으신지요?"

그녀는 여전히 꽃을 손질하며 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도마와는 인연은 끊는 것이 좋을 겁니다."

역시 혈천도마의 예상대로 그녀는 이것을 대가로 내세웠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도마는 이공자가 추구하는 이상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니까요."

"외람된 질문이지만 제 이상이 뭔지 아십니까?"

"엄정한 질서와 규율을 가진 곳으로 본교를 바꾸겠다고 했다지요? 도마는 누구보다 규율에 속박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에요. 이공자와는 많은 충돌이 있을 겁니다."

아마도 일화검존은 자신의 설득이 통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에 대해 넘치는 자부심을 지녔으니까. 특히 도마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나은 사람이라 여겼고.

"죄송하지만 선배님의 말씀은 따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순간 그녀의 신형이 흠칫했다.

"왜죠?"

"도마 어르신께서 제게 너무나 큰 선물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원래라면 굳이 선물을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천외신단을 받은 것을 그녀에게 흘릴 작정이었다.

나는 혈천도마와 함께 일화검존도 내 사람으로 만들 작정이다.

두 사람은 서로 사이가 지독하게 나빴기에, 오히려 다루기가 더 편할 점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두 사람의 감정이 어떤 식으로든 터져 나올 것이기에,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더 빨리, 더 확실하게 알게 될 것이다.

혈천도마가 좌사(左使), 일화검존은 우사(右使).

무림 역사상 가장 강력한 좌사와 우사가 될 것이고 좌도우검(左刀右劍)이 될 것이다. 이 둘을 좌우에 세우고 나머지 팔마존들 머리채를 쥐고 흔들 생각이다.

"어떤 선물이죠?"

"개인적인 선물이라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

"우리 관계가 그 정도 대화는 나눌 정도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인가요?"

"아, 곤란한데요."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가, 이내 어쩔 수 없다는 투로 그녀에게 말했다.

"검존께서 이번에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니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르신께서 제게 천외신단을 주셨습니다."

"뭐라고요?"

그녀는 꽃을 손질하던 손길을 멈추고 내게로 돌아섰다. 조금 전까지의 여유와 고고함이 한순간에 깨졌다.

"정말 이공자에게 천외신단을 주었단 말인가요?"

일화검존은 혈천도마가 내게 천외신단을 준 것을 도저히 믿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녀는 더 놀랐다.

"그 신단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이미 제가 복용했습니다. 한데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도마는 본래 욕심이 많은 사람인데, 그 귀한 걸 이공자에게 줬다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어요?"

"제가 신단보다 더 귀하다고 판단하신 모양입니다."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일화검존은 웃지 않았다. 실제로 그러하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이번에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혹시라도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기별 주십시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렇게 정중히 인사하고 떠나려는데, 검존이 나직이 나를 불렀다.

"이공자."

그녀를 돌아보자 일화검존이 말했다.

"이공자가 본 도마는 어떤 사람인가요?"

"괴팍하고, 폭력적이고, 제 멋대로이고. 처음에는 싫었는데, 만날수록 괜찮아졌습니다."

"천외신단을 줘서가 아니고요?"

"부정할 수는 없겠네요. 누군들 좋지 않겠습니까? 천외신단인데."

"한낱 영약일 뿐이에요."

"그 한낱 영약이 제겐 꼭 필요해서요."

그녀는 어떻게든 도마와 나의 관계를 끊으려고 애썼다.

"앞으로도 내 도움을 받고 싶다면 도마와 연을 끊으세요. 도마는 아니에요."

"그럼 증명하십시오."

"뭘 말이죠?"

나는 잠시 그녀를 응시하다가 말했다.

"선배께서 도마 어르신보다 더 제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란 것을요."

일화검존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본교의 기강을 잡고 정의를 세우겠다는 것은 헛소리였나요?"

"도마 어르신은 제게 천외신단을 주셨습니다. 관계를 끊으려면 제게도 명분이 있어야겠지요."

"명분은 본교를 위하는 이상으로 충분하지 않나요?"

난 보란 듯이 피식 웃었다.

"꿈이니, 이상이니, 충성이니... 그런 것들로 수하나 후배들의 마음을 공짜로 얻으려는 사람들, 저는 경멸합니다."

그 순간 검존은 분노했고 나는 그녀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차갑게 내려앉으면서 드러난 삭막한 눈빛.

그녀의 눈동자는 마치 황량한 사막처럼 느껴졌다.

혈천도마의 눈동자에서 이글거리는 불길을 보았다면, 일화검존에게서는 지독한 목마름을 느꼈다. 온화한 모습에서의 변화였기에 이 삭막함이 더욱 강렬하게 전해져 왔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이제 나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화무기에게 봉문 당한 이후, 왜 그녀가 가장 먼저 움직였는지. 그녀의 야망이 왜 다른 팔마존보다 성급했는지. 저 삭막함을 무엇으로라도 채워야 했을 테니까.

원래라면 휘두른 채찍은 벽에 걸어두고 당근을 깎았겠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선배님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대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할 거고, 많은 결정을 내려야겠지요. 그때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정확히 판단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그러면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도마 어르신이 주신 천외신단보다 귀한 것을 이 손에 올려주십시오."

도마는 아니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반드시 혈천도마여야 한다. 그렇기에 당신이 이렇게 흔들리고 있으니까. 그렇기에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니까.

"이공자, 원하는 것이 뭔가요?"

그녀에게 내민 손바닥을 다시 접었다. 나는 그녀에게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아뇨, 지금은 없습니다."

그녀에게는 이렇게 들릴 것이다.

제겐 이미 도마가 있으니 괜찮습니다.

원하는 것이 없다고 했기에 그녀는 더욱 조급해질 것이다. 차라리 뭘 내놔라, 했으면 이성적으로 대응했겠지만.

"그럼 다음에 또 뵙지요. 이번에 도와주신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정중히 인사를 한 후 모옥을 나섰다.

한참을 걸어가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녀는 그 자리에 서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이글거리는 눈빛을 향해 나는 다시 한번 꾸벅 고개를 숙인 후 걸음을 옮겼다.

그래, 그렇게 부글부글 끓어올라라.

물이 끓어야 요리는 시작되니까.

제39회 이럴 땐 이렇게 하는 겁니다.

일화검존을 만나고 돌아오는데, 항상 기다리던 길목에서 혈천도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여우가 뭐라고 하던가?"

그는 일화검존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어르신과 연을 끊으라고 하더군요."

"역시! 내가 뭐라고 했나? 그럴 거라고 했지? 이유도 말하든가?"

"혈천도마님과 저는 이상이 다르다고 하더군요. 어르신께서 너무 자유분방하셔서...."

"지랄하네."

그의 몸에서 차가운 마기가 휘몰아쳐 나왔다.

"그래서 어떻게 할 텐가?"

"저야 당연히 더 좋은 조건을 제안하는 쪽과 손잡아야죠."

"뭐?"

난 혈천도마를 의도적으로 자극했다.

"저울질할 수 있을 때, 해야죠. 어르신이라면 안 하실까요?"

혈천도마는 화를 내지 못했다. 자신이라도 그렇게 했을 테니까.

"아직은 어르신이 우세한 상황입니다. 설마 천외신단보다 더 좋은 것을 제시하겠습니까?"

"할 수도 있지. 나를 망치는 일이라면 뭐라도 할 사람이다."

"대체 일화검존 선배와는 왜 사이가 나빠진 겁니까?"

잠시 사이를 두고 혈천도마가 말했다.

"사람 미운 데 이유 있나?"

나는 이유를 알고 있다.

세상 누구도 믿지 못할 이유를 가진 두 사람이다. 악인들이라면 악인들이고, 권력욕 역시 둘째라면 서러운 그들인데.

"한잔하시겠습니까? 이대로 돌아가시면 괜히 마음만 복잡하고 씁쓸해하실 것 아닙니까?"

"나를 어떻게 보고?"

"냉철함? 그거 미덕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속상할 때는 속상해하고, 기분 나쁠 때는 떠들면서 풀고. 자, 가시죠. 오늘은 제가 한잔 사겠습니다."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혈천도마가 홱 몸을 날리며 말했다.

"마가촌에서 기다리지."

순식간에 저 멀리 사라지는 그였다.

늙은이 성질머리하고는.

하지만 처음 내게 와서 옆구리를 쿡쿡 찔러대던 때와는 분명 달라졌다.

혈천도마는 조춘배가 운영하는 풍류주점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루에 가 계실 줄 알았습니다."

"여자들 나오는 곳 싫어하네."

"뜻밖인데요?"

"뜻밖? 왜? 내가 여자를 밝히는 것처럼 보이나?"

"아뇨,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죽은 동생분이 기루를 좋아하셔서."

"술맛 떨어지게. 그놈 이야기는 집어치워라."

"네."

사실 일부러 꺼냈다. 마음의 상처가 그의 속에서 곪지 않게 하려고. 혈천도마에게는 그다지 필요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풍류주점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물었다.

"왜 하필 이 주점을 선택하셨습니까?"

"건너편에 황천각 지부를 열었더군."

지나가다 그걸 보고 여기 멈춰선 모양이다.

"조심하십시오. 괜히 길 가다 사람 때리면 어르신도 제게 붙잡혀 옵니다."

내 농담에 혈천도마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조춘배가 반갑게 우릴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각주님."

"오랜만입니다."

"이렇게 다시 찾아주셔서 영광입니다."

"술과 안주 맛이 좋아서 오는 겁니다."

주문을 받은 조춘배가 주방 쪽으로 사라지자 혈천도마가 입을 열었다.

"자넨 쓸데없이 친절해."

"친절해서 나쁠 것 있습니까?"

"인정에 끌리면 반드시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생기지. 방금 저 주인장을 예로 들어보자고. 자네가 이렇게 친절할 때 요리가 잘 나올까. 아님, 맛없으면 죽인다고 할 때 더 잘 나올까? 그런 점에서 대공자가 자네보단 유리하지."

"확실히 비정한 쪽이 세상 살기는 편하죠."

"아직 늦지 않았어."

"그렇다고 해도 그 비정 마차에는 올라타지 않을 겁니다."

"이유는?"

"지금 나오는 저 요리가 두려움에 떨며 만들어진 것보단 휘파람을 불며 즐겁게 만든 것이 더 맛있을 거라 믿기 때문이죠."

"언젠가 저자는 자네의 친절을 이용해서 더 큰 것을 부탁하고 요구할 거야. 들어주지 않는다면 비난하고 욕하겠지. 그게 인간이거든."

"언젠가 저 사람은 제가 베푼 이 작은 친절 때문에 더 큰 것을 돌려줄 겁니다. 어쩌면 그 덕분에 제 목숨을 구할 수도 있겠지요. 그게 또 인간이거든요."

"어디 두고 보자고."

우린 함께 술을 마셨다.

"사실 전 어르신이 저보다 더 감정적인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눈깔로 내 도는 어찌 막았누? 사람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어."

나는 잘 봤다고 생각한다. 나와 얽혀드는 이 모든 과정에서 그는 많은 감정 소모를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인생에서는 없었던 대화를 나누며 쏟고 있고.

"말이 나온 김에 한 말씀만 드리자면, 이제부터는 도귀들과 제자분들 관리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면 계속 황천각과 충돌하게 될 테니까요."

혈천도마가 스윽 고개를 들어 차갑게 나를 쳐다보았다.

"점점 기고만장해지는구나."

"기고만장한 것은 어르신이죠."

"뭐?"

"본교나 아버지를 우습게 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나니까, 내가 혈천도마인데. 내 제자가 어떻든 무슨 상관이야? 아닙니까?"

꽝!

탁자가 부서졌고 술병과 안주가 담겨 있던 그릇이 떨어져서 깨어졌다.

"너는 너무 건방지다. 가끔은 정말 죽이도록 패버리고 싶어."

날 노려보던 혈천도마가 애꿎은 조춘배에게 소리쳤다.

"뭘 그렇게 보고 서 있는 게냐? 여기 탁자 가져오고 새 술과 안주 내와라!"

"이럴 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는 겁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옆자리로 옮겼다.

그리고 탁자에 돈을 올렸다.

"미안하오. 이 돈이면 부서진 것들 하고, 오늘 손해 본 매상으로 충분할 거요."

조춘배가 돈을 받지 않겠다며 손사래를 쳤다.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소. 가져가시고, 여기 다시 술상 봐주시오. 상다리 부러지게."

"네!"

돈을 받아든 조춘배가 후다닥 주방으로 달려갔다.

혈천도마가 한껏 인상을 썼다.

"나보고 그따위 짓을 하라고?"

"하기 싫으면 때려 부수면 안 되죠."

"마존을 데리고 지금 선행을 가르치려는 거냐?"

"제가 세우려는 마도는 기분 나쁘다고 객잔을 때려 부수지 않습니다."

"너는 대체!"

"소리 그만 지르시고 이리와 앉으세요."

결국 혈천도마가 내가 옮겨 앉은 탁자에 앉았다.

"건방진 놈. 넌 정말 미친놈이 확실하다!"

나를 노려보다가 차갑게 말했다.

"날 배신하면 죽여버릴 거다."

새로 술을 가져오던 조춘배가 흠칫 놀랐다가 이내 못 들은 척 술과 잔을 놓고 주방으로 돌아갔다.

나는 새 잔에 술을 가득 따라서 혈천도마에게 주었다.

"조금 전 그 말씀 진심이십니까?"

"그래, 진심이다."

"그럼 진심으로 제게 충성하십시오. 아까 그 협박, 그럴 때 할 수 있는 협박입니다. 진심으로 충성했는데 배신하고 버릴 때, 그때 주인의 심장에 검을 박아넣을 수 있는 겁니다."

혈천도마는 반박하진 못했다.

나는 내 잔에 술을 가득 따른 후 건배하자고 내밀었다.

혈천도마는 코웃음을 치며 혼자 술을 마셨다. 비록 잔을 부딪치진 않았지만, 내 마음에서는 잔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 * *

일화검존의 모옥으로 한 사람이 들어섰다.

그는 그녀의 오른팔인 사우종이었다.

"이공자는 지금 혈천도마를 만나 술을 마시고 있습니다."

등을 돌린 채 서 있던 일화검존은 아무 말도 없었다.

"건방진 놈입니다."

그러자 비로소 일화검존이 몸을 돌려 싸늘히 사우종을 노려보았다. 사우종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말조심해. 사람 뒤에서 말 함부로 하는 것만큼 천박한 짓 없어."

"앞으로 명심하겠습니다."

사우종은 검존이 화를 낼 줄 알면서도 일부러 검무극을 욕했다. 그녀가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감정을 자신이 대신해준다고 믿었으니까.

사우종은 자신이 검존에게 특별한 존재라고 믿었다. 문지기에게도 존대하는 그녀지만, 오직 자신에게만은 편하게 하대했으니까. 자신은 특별했다.

"내가 알던 이공자가 아니야."

비무 대회 이후 불과 몇 달도 안 된 사이 검무극이 일으킨 폭풍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래봤자 찻잔 속의 태풍입니다."

사우종은 검무극을 과소평가했지만 일화검존의 생각은 달랐다.

"그 찻잔이 무림을 다 담을 크기라면? 그 욕심 많은 늙은이가 천외신단을 바쳤어. 자신의 전부를 바친 것이나 마찬가지야. 도마는 이공자에게서 후계자가 될 가능성을 본 것이 틀림없다."

"검존께서도 이공자에게서 가능성을 보셨습니까?"

검무극은 확실히 예상 밖의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천외신단과 같은 영약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짜증이 난다. 자신은 보지 못한 어떤 것을 혈천도마가 본 것이 아닐까 하고. 그 빌어먹을 늙은이가 본 것을 자신이 보지 못한다? 그녀는 자존심이 상했고 짜증이 났다.

"오늘은 이만 쉬시지요. 새 사람으로 준비해뒀습니다."

일화검존이 차갑게 사우종을 쳐다보더니 뭐라 말을 하려 했다. 하지만 달싹거리려던 입술은 끝내 말을 뱉지 않았다.

홱 돌아선 그녀가 모옥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사우종의 표정은 더없이 복잡했지만, 그 눈빛만큼은 뜨거웠다.

모옥 안에 들어선 그녀가 비밀장치를 조작하자, 바닥이 열리며 비밀통로가 나왔다.

그녀가 통로로 내려갔다. 내려갈수록 칠흑같이 어두웠지만, 그녀는 한두 번 내려간 것이 아닌지 익숙하게 내려갔다.

지하에는 긴 복도가 있었다. 그녀는 걸음을 옮겨 복도 마지막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은 화려하게 꾸며진 침실이었다.

커다란 침상에 한 청년이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일화검존은 천천히 걸어가서 커다란 동경이 붙어 있는 화장대에 앉았다. 거울 속에 비친 청년의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일화검존이 거울 속 청년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괜찮아요, 옷부터 벗으세요."

* * *

혈천도마와의 술자리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이안의 수련장에 들렀다.

내부에서 느껴지는 후끈한 기운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열심히 수련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육중한 몸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수련장을 누볐다. 한계를 넘나드는 힘든 훈련이었지만, 한 동작 한 동작 헛된 것이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이제 새로운 무공을 전수해야 할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아! 오셨어요? 도련님?"

"요즘 수련 열심히 하나 보네."

"어떻게 아셨죠?"

"살이 좀 빠진 것 같아서."

"정말요?"

아닌 줄 알면서도 이안이 활짝 웃었다. 살 이야기가 나와서인지, 그녀가 아껴뒀던 질문을 했다.

"도련님. 전에 말씀하신 것 진짜인가요? 제 부작용 고칠 수 있다는 것요."

이안 성격에 이 질문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이 고민했을까? 혹시라도 내가 '농담이었는데?'라고 대답했을 때 어떻게 반응할지 그녀는 고민하고 또 고민했을 것이다.

전신석화공을 전수해 준 사람이 절대 부작용은 없앨 수 없다고 말해줬더라도, 그래도 이 질문을 안 할 수가 없었으리라.

"정말 고칠 수 있어요?"

그녀가 이렇게 긴장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고칠 수 있어."

"정말요?"

이제 그녀에게 진실을 말해줄 때가 되었다.

"난 전신석화공의 부작용을 없앨 수 있는 시술법을 알고 있다."

대법 재료를 찾는 과정에서 전 중원을 헤매 찾아낸 방법이었다. 회귀하면 반드시 원래 그녀의 몸으로 되돌리겠다는 일념으로 말이다. 생각해 보니 지난 내 인생이 오직 복수만을 위한 황량한 길만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어떤 시술이죠?"

"신독정화술(身毒淨化術)이라는 대법이다."

"...신독정화술?"

그녀는 몇 번이나 그 말을 되뇌더니 다시 물었다.

"이걸 어떻게 배우셨어요?"

"그건 비밀이야. 알지? 무공과 관련해서는 지켜야 할 비밀이 많은 것."

"네. 알죠. 알아요."

대화하는 내내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지금 시술할 수도 있겠네요."

"있어."

"한데 왜 안 해주시는 거죠?"

"너무 위험하고 어려운 시술이야. 또 시술 중에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모르고. 그래서 내 무공실력이 지금보다 훨씬 더 올라갔을 때 시술할 거다."

"아! 정말 치료법이 있었군요!"

그녀의 얼굴에 기쁨이 가득 차올랐다.

"넌 목숨을 걸어야 해. 시술 중에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몰라서. 그래도 할 수 있겠어?"

"네!"

그녀의 대답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거 실망인데."

"네? 제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요?"

"난 네가 이렇게 말할 줄 알았어. 혹시라도 제가 죽으면 도련님을 지켜드릴 수 없으니 시술은 받지 않겠습니다, 라고."

그럴 가능성을 미리 막은 내 농담이었는데.

"제 삶을 살라면서요? 아니었나요?"

그러면서 그녀가 장난이었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나는 이제 안다. 조금 전의 저 모습이 원래 그녀의 모습임을.

충성심이나 책임감에 짓눌려서 잠들어 있던 그녀의 본래 마음을, 사람이라면 가지는 저 당연한 마음을, 나는 저 마음을 찾아주고 싶은 거다.

"이안아."

"네, 도련님."

"중원에 가보고 싶은 곳 있느냐?"

"아뇨, 없습니다."

평생 나만 쳐다보고 있었으니, 어딜 가더라도 제대로 구경한 곳이 없었으리라.

"나중에 나랑 중원 유람가자."

"정말요?"

"그래. 명소란 명소는 다 가고, 절경이란 절경은 다 구경하자. 유명한 요리, 내가 다 맛보게 해주마. 내가 아는 곳이 좀 많다."

"약속하신 거예요?"

"너도 약속해."

"뭘요?"

"그때 나 버리면 안 돼."

"제가 도련님을 버리다니요? 천지가 개벽해도 그런 일은 없어요."

천하제일미가 되어 세상 모든 남자가 너를 추앙해도 그런 말을 하는지.

"어디 두고 보자고."

제40회 강해져라, 이안!

다음 날 일찍 천마전으로 아버지를 찾아갔다.

아버지는 대전에 계시지 않고 개인 수련장에 계셨다.

밖에서 수련을 마치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데.

"들어오너라."

내 방문을 보고받은 아버지가 나를 수련장으로 들어오게 했다. 안으로 들어서는데 내심 떨렸다. 아버지의 개인수련장은 처음 들어와 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서던 그 순간.

연무장 가운데 계시던 아버지가 나를 향해 쇄도했다.

아버지가 발휘한 초식은 명왕보였다.

거기에 날아든 검은 천마검.

천마가 천마검을 들고 명왕보를 발휘해서 누군가를 공격한다?

상대가 그 누구든 살아남을 수 없는 공격이었다.

번쩍하는 순간 상황은 끝이 나 있었다.

천마검이 허공에 멈춰 있었다.

나는 천마검 바로 옆에 서 있었다. 검날에 입김이 서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난 아버지의 공격을 점멸보로 피했다.

명왕보와 점멸보의 싸움에서 점멸보가 이긴 거냐고? 물론 아니다.

애초에 내가 가까스로 피할 수 있을 정도의 공격이었다.

"이 잘생긴 얼굴을 자꾸 노리시는군요."

"바깥에서 널 노리는 자는 나처럼 자비롭지 않을 거다."

"감사합니다, 살려주셔서."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버지 수련장을 구경했다.

"특별한 것이 있을 줄 알았는데, 없네요."

정말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 벽에 몇 개의 검과 도, 창 등이 세워져 있을 뿐이었다,

"하다 못해서 수련용 인형 하나 세워져 있지 않네요."

"필요 없는 것을 뭐하러 두느냐?"

하긴 나도 가상의 적을 상상하며 수련하니까. 아버지라고 다르겠는가?

그때 벽에 붙은 철판이 눈에 띄었다.

한 뼘 두께의 그것에는 주먹이 움푹움푹 들어가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 재질은 만년한철이었다.

"맙소사! 도대체 주먹이 얼마나 강하시면. 이건 만년한철 학대입니다."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이리 와봐라."

아버지가 나를 수련장으로 들인 이유가 있었다.

"풍신사보를 펼쳐보아라."

"네."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을 기회는 많지 않았기에, 나는 최선을 다해 풍신사보를 펼쳤다.

풍신사보는 크게 네 개의 초식으로 이뤄져 있지만, 그 초식에는 총 구백 개가 넘는 변화를 담고 있었다. 해석에 따라 그 변화는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했다.

그 변화를 어떻게 해석하고 운용하느냐에 따라 움직임이 조금씩 달라졌고, 종국에는 풍신사보의 위력이 달라지는 것이다. 같은 무공이라도 사용하는 이에 따라서 느낌이나 위력이 다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초식을 마쳤을 때, 아버지는 상기되어 계셨다. 아마 생각하셨던 것보다 내 성취가 높았기 때문이리라.

아버지와 함께 내가 펼쳤던 초식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에는 단순히 발에 힘을 더 주느냐, 빼느냐. 허리를 틀 때 속도를 더 빨리하느냐 마느냐에 관한 토론이었다.

나는 내 생각을 있는 그대로 전했다. 어떤 부분은 아버지의 의견에 반하기도 했었는데, 놀랍게도 아버지는 굉장히 유연한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

내가 말한 대로 그 자리에서 초식을 발휘하신 것이다.

"네 말대로 오른발에 힘을 더 주는 것이 올바른 해석 같구나."

무공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이 순간만큼은 아버지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자유로웠고 너그러웠으며 합리적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아버지와 풍신사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얼마나 대화에 푹 빠졌는지, 배가 고프다는 것을 느꼈을 때야 무학에 대한 논의가 끝났다.

대화가 끝났을 때, 나는 풍신사보의 경지가 한층 성장했음을 느꼈다.

"크나큰 가르침을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화무기를 죽이는 것으로 갚겠습니다.

"나중에 돈으로 다 갚겠습니다."

내 너스레에 아버지가 불쑥 말했다.

"밥 먹고 가라."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왜 그리 놀라냐?"

"아버지께 처음 들었거든요. 밥 같이 먹자는 말씀."

"별게 다 놀랄 일이다."

아버지가 먼저 수련장을 나갔다. 아버지 말마따나 별게 다 감동이다 싶었지만, 솔직히 마음이 울컥했다.

아버지와 식사를 했다.

진수성찬을 차려 드실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음식 가짓수가 많지 않았다. 정말 정갈한 상이었다.

"밥은 더 있으니, 많이 들거라."

"네."

너스레를 떨지 않고 밥을 먹었다. 자주 오는 기회가 아닐 테니, 나는 이 순간을 잘 기억해두려고 노력했다.

조용히 식사만 하는 나에게 이상하다는 눈빛을 한 번 보내시고는, 아버지는 묵묵히 식사만 하셨다.

하긴,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는 일부러라도 더 장난치고, 농담하고 너스레 떨곤 했었으니까.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회귀 직전의 나와 아버지가 식사하고 있었다. 나이든 남자 대 남자로, 무인 대 무인으로. 그럼에도 아버지와 아들로.

'아버지... 이런 순간이 그리웠습니다.'

예전에는 그리워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막상 이 순간이 되고서야 알 수 있었다.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이 자리를 그리워하고 있었음을.

그렇게 아버지와의 역사적인 첫 식사를 마쳤다. 말 한마디 없었던 이 첫 식사는 앞으로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식사를 마친 아버지가 내게 물었다.

"찬은 입에 맞았느냐?"

이제 평소의 나로 돌아올 때다.

"저랑 숙수 바꾸시렵니까?"

임 숙수 섭섭해 마. 농담이니까.

"일없다."

"하하."

아버지와 반주로 나온 술을 마셨다.

"도마와 마가촌에서 술을 마셨다고?"

"네."

과연 아버지는 교내에서의 내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고 계신다.

"그를 얼마나 믿느냐?"

"믿지 않습니다."

"왜?"

"그에 대해서 알지 못하니까요. 아무리 투명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을 안다고 자만해선 안 되니까요."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대답하자 아버지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라도 도마를 믿다가 등을 찔릴까 걱정하시는 거다.

"오늘 왜 나를 찾아온 거냐?"

아버지를 찾아온 지 네 시진도 더 지나서야 이 질문을 받는다.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말해라."

"제게 가족 하나 늘려주십시오."

아버지가 그 무슨 황당한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혼인하고 싶다는 뜻이냐?"

"아닙니다."

"그럼?"

"비천검술을 수신호위인 이안에게 전수하고 싶습니다."

나는 이안에게 내가 대성을 이룬 비천검술을 전수할 작정이었다. 비천검술은 되어야 귀영대주 자리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비천검술은 천마의 혈육에게만 전수되는 무공이었다.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전수할 수 없었다.

"진짜 혈육은 뒤에서 까내리더니, 수신호위는 가족으로 삼겠다는 거냐?"

"네. 혈육보다 소중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큰일을 해낼 사람이기도 하고요."

"비천검술은 네 독문무공인데 괜찮겠냐?"

"제 독문무공은 구화마공이 될 겁니다."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을 거두려고 하고, 장호를 마군주에 앉히고, 새로운 마도를 세우려는 이 모든 과정은 내가 후계자가 되지 못하면 다 헛수고가 된다.

결국 이 모든 일들은 궁극적으로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다. 후계자가 되어 구화마공을 전수받아야 화무기를 상대할 수 있을 테니까.

"자신만만하구나."

"충분히 전수해 줄 가치가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점에서?"

"저보다 훌륭한 사람입니다."

생각지 못한 대답이었는지 아버지는 잠시 말씀이 없으셨다.

술을 한잔 드신 후에 아버지가 물었다.

"그 아이를 네 사조직의 수장으로 삼을 작정이냐?"

"네, 맞습니다. 앞으로 제게 제거되는 마존들이 생길 수도 있을 겁니다. 그 공백은 제 사조직으로 채우겠습니다. 그러니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자 아버지의 흔쾌한 한 마디.

"좋다."

처음에 나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이렇게 쉽게 허락해 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정말 이안에게 비천검술을 전수해줘도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다시 한번 확인했지만 아버지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조건을 걸고 임무를 완수해야 허락을 해주실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쉽게 허락을 해주신 거지?

"대신 한 가지는 약속해라."

"하명하십시오."

"다음에 마존을 죽이겠다고 마음먹으면 반드시 내게 말을 해야 한다. 어떤 마존이라도."

어렵지 않은 약속이었다. 아니, 약속하지 않아도 그러려고 했다. 아버지 허락도 받지 않고 마존들을 해치울 생각은 아니었으니까.

"네, 반드시 그러겠습니다."

* * *

"부르셨어요?"

아버지께 허락을 받은 나는 곧장 이안을 내 개인수련장으로 불렀다.

"왜 불렀는지 알아?"

"네, 대충 짐작 가는 일은 있어요."

"뭔데?"

"지금까지 수련한 것, 시험하시려는 것 아닌가요?"

수련장으로 불렀으니 당연한 짐작이었다.

"어떻게? 준비됐어?"

"최선을 다해 수련하긴 했어요."

"그거 말고."

"네?"

"새로운 무공을 전수받을 준비가 되었느냐고."

순간 이안은 깜짝 놀랐다. 이내 놀람은 설렘으로 바뀌었다. 상승의 무공을 익히는 것, 무인에게 이보다 더 기분 좋고 설레는 순간이 또 있을까?

"귀영대주 이안."

"네."

"지금부터 그대에게 비천검술을 전수하겠다."

잠시 멍하게 있던 이안이 비명까지 지르며 경악했다.

"으악!"

그녀를 만난 이래 가장 놀라는 순간이었다.

"안 돼요! 비천검술은 천마의 혈육에게만 전수되는 무공이잖아요? 제게 무공을 전수하시면, 교주님이 저를 일장에 쳐 죽이실 거예요. 도련님도 크게 혼이 날 테고요. 혹시 몰래 전수하겠다는 의도이시면 포기하세요.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이에요. 설령 비밀이 지켜진다 하더라도, 저는 배울 수 없습니다."

그녀가 한바탕 말을 쏟아내자 내가 웃으며 물었다.

"할 말 다 끝났어?"

"더 있지만 딱 이 말씀만 드릴게요. 안 돼요! 절대 안 된다고요!"

나는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아버지께 허락받았다."

"네?"

이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이안이 놀라는 모습을 보며 그녀의 표정이 정말 다양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놀람에 여러 표정이 있는데, 지금 이 놀람은 또 처음 보는 것이었다.

"정말요?"

"그래."

"그럴 리가 없어요."

"의심스러우면 나랑 같이 가서 확인해 보든지."

아버지를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이안이 손사래를 치며 뒷걸음질 쳤다.

"차라리 절 죽이세요."

"이런 일로 거짓말할 정도로 널 미워하지 않아. 결정적으로 내 말이 사실인 이유를 말해줄까?"

"뭐죠?"

"네 말이 맞아. 허락 없이 전수했다간 넌 죽어. 내가 널 그런 위험에 빠뜨릴 리 없지."

이안도 내게 그 정도 믿음은 있었나 보다.

"정말 허락받으셨군요?"

"그래."

이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비천검술은 도련님의 독문무공인데. 왜 제게 전수해주시려는 거죠?"

"그야 귀영대주가 되려면 이 정도 무공은 익혀야 하니까. 그리고... 너는 내 혈육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러니까 배워도 돼."

순간 이안이 울컥했다.

"도련님."

"널 위해서가 아니라 날 위해서야. 앞으로 확실히 부려 먹으려고. 그러니 너무 좋아하지 마."

"그래도 감히 어떻게 도련님의 무공을 익혀요?"

"내 독문무공은 구화마공이 될 거다. 그러니 부담 없이 익혀도 된다."

결국 이안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누군가가 이렇게까지 절... 귀하게 여겨준 적은...."

말을 잇지 못하는 이안의 등을 가볍게 토닥여주었다. 이안은 대성통곡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 쌓여 있던 어떤 것이 툭 하고 터져 나온 모양이다. 실컷 울도록 그대로 놔두었다.

한바탕 울고 난 그녀가 마음을 다스리자 나는 그녀에게 비천검술을 전수했다.

무공전수는 전음으로 진행되었다.

―비천검술은 하늘의 변화와 기운을 담은 여덟 개의 초식으로 이뤄져 있다. 단전이 하늘이라 생각하고, 최대한 넓혀라. 진기는 바람처럼 흘러야 하고, 때론 봄바람처럼, 때론 태풍이 지나가는 것처럼 강력해야 한다. 내력의 시작은....

총명한 이안은 다섯 번을 반복해서 불러주었을 때, 비천검법의 구결을 완벽하게 외웠다.

"구결은 자다가도 옆구리 찌르면 바로 대답할 수 있어야 해.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이안은 죽도록 노력할 테고, 내가 틈틈이 가르친다면 이안의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할 거다.

"그리고 이거."

내가 품에서 작은 목곽을 꺼내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죠?"

"열어봐."

그녀가 연 목곽 안에는 피독주가 하나 들어있었다. 황금장주의 비밀금고에서 가져온 피독주 중의 하나였다.

"뭐죠?"

"피독주다."

"네? 그 귀하다는 피독주요?"

"그래. 앞으로 중독의 위험이 있거나 독공을 쓰는 자를 만나면 입에 물고 싸워라."

"이걸 왜 제게?"

"비천검술을 정식으로 익히게 된 것을 축하하는 의미의 선물이다."

"안 돼요! 무공도 전수받았는데 이렇게 귀한 것까지 받을 수 없어요!"

"꼭 받아야 해."

"왜요?"

"너보다 안 친한 사람에게도 줄 것이거든. 네게도 안 준 걸 다른 사람에게 줄 수는 없으니까."

"이상한 논리잖아요?"

"자, 그럼 나중에 배운 것 시험 치러 온다. 수련 게을리 마."

다시 이곳이 울음바다가 되기 전에 나는 황급히 그곳을 나섰다.

등 뒤에서 감동과 고마움을 넘어선 어떤 열기가 느껴졌다.

나는 저 뜨거움이 만들어낸 미래가 기대되었다. 적어도 날 위해 몸을 던지는 뜨거움이 되게 하진 않을 거다. 그러니....

강해져라, 이안!

제41회 세련되면서도 무서운.

그날 이후 한동안은 이안을 가르치는 것과 황천각 일, 그리고 내 수련에만 집중했다.

이안은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순식간에 비천검술을 익혀나갔다. 그녀는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무공에 재능이 있었다. 거기다 피나는 노력까지 더해지니 그녀의 성취는 놀랄 정도로 빨랐다.

이안을 가르치면서 새삼 깨닫는 한 가지.

가르치는 일은 동시에 배우는 일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기존에 알고 있던 것을 설명하면서 나를 객관화했다.

'아, 내가 이 초식을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을 다시 생각할 기회를 얻었다.

가르침이란 단지 고여 있는 물을 퍼내는 일이 아니다. 진심으로 가르치지 않고 어설프게 가르치면 물이 마르고 소진되겠지만, 깊은 사고와 함께 정성껏 가르치면 우물의 크기를 키우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랬기에 나는 이안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배우고 있었다. 지난 삶에서 단 한 번도 누구를 가르쳐본 적이 없었기에, 이 과정은 내게 굉장한 경험이 되었다.

수련 중간에 잠시 쉬는데 그녀가 진지하게 물었다.

"도련님. 정말 귀영대를 만드실 거죠?"

"응."

"그럼 무복은 제가 만들어도 될까요? 칙칙한 흑의 무복 말고 세련된 무복으로 만들고 싶어요. 색과 모양을 다르게 해서 교내에서 입는 옷과 작전용을 따로 만들고요."

순간 나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귀영대를 만들겠다고 마음먹은 이후, 단 한 번도 무복의 색이나 모양을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살면서 입었던 모든 무복 역시 마찬가지였다.

"얼굴을 가리는 복면도 작전 난이도에 따라 나누고 싶어요. 복면에 새길 귀신은 세련되면서도 무시무시하게 그려서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리게끔... 왜 웃으세요?"

"세련되면서도 무서운 귀신은 어떻게 생긴 귀신인가 해서."

"제가 그림도 좀 그리거든요. 나중에 보여드릴게요."

"앞으로 귀영대에 들어올 녀석들은 멋진 옷을 입겠구나."

"놀리지 마세요."

이안은 참으로 섬세한 사람이다. 나에게 집중되었던 마음이 다른 이들에게로 향한다면, 모두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훌륭한 대주가 될 것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네 실력이다. 귀영대는 무림에서 가장 위험한 임무를 수행할 거야. 작전에 성공하고, 수하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도 모두 네 실력에 달렸어."

"네, 명심할게요."

"그리고 한 가지 더. 실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게 뭐죠?"

"수하를 잃을 각오. 수하를 잃어도 상처받지 않을 꿋꿋한 마음."

이안이 빤히 나를 쳐다보았다.

"도련님은 제가 애처럼 보이시죠. 만날 도련님 옆에만 이렇게 있으니."

"아니냐?"

"아니에요. 애도 아니고, 도련님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순진하고 착하지도 않아요. 수하를 잃는다고 죽을 만큼 마음 아파하고 그러지 않아요. 나중에 저한테 실망하실까 봐 오히려 걱정돼요. 얘가 이렇게 냉정한 녀석이었나, 하고요."

"그런 일로 실망 안 한다. 그럼 됐어."

기왕 말이 나왔다고 생각했는지 이안이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도련님이 비천검술을 전수해주시겠다고 했을 때, 저는 비로소 땅바닥에 발을 디딘 기분이 들었어요."

"무슨 뜻이야?"

"솔직히 그전까지는 허공에 붕 떠 있는 기분이었거든요. 귀영대? 정말 그런 조직이 만들어지기나 할까? 내가 대주라고? 정말? 도련님은 지금 어떤 열기에 휩쓸려서 이러시는구나. 이런 생각들이 들었거든요. 한데 비천검술의 구결을 외우면서 이게 현실임을 느꼈어요. 제가 이 모든 일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아, 죄송해요. 아, 이런 자신감 없는 질문은 이제 안 하려고 했는데."

"해도 돼. 아니, 해야지. 수많은 사람의 운명을 바꿀 길을 걸어가면서 어찌 이런 질문을 하지 않고 갈 수 있겠어? 오늘도 하고, 내일도 하고. 십 년 후에도 해야지. 계속 물으면서 가야 하는 길이다. 나도 계속 잔소리할 거다. 우린 계속 서로에게 물어야 한다."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팔마존과 같은 사람들이다.

남보다 자신이 더 뛰어나다는 생각에 자신의 결정이 옳다고 믿는다. 그들에게는 타인에 대한 걱정이나 공감이 없다. 그들은 묻지 않는다.

"네, 도련님. 이게 맞나 헷갈릴 때마다 물을게요. 도련님에게도 묻고, 또 저 스스로에게도 물을게요."

나는 이안의 머리를 쓱 한 번 쓰다듬어 주었다.

"장하다."

이안은 살짝 얼굴이 붉어지며 배시시 웃었다.

"자, 다시 수련 시작!"

"네!"

수련을 마칠 때쯤 그녀에게 조직관리와 용병술, 그리고 수장의 수신에 관한 책을 가져다주었다.

"쉴 때 틈틈이 읽어라."

"네."

요즘 수련의 연속이라, 황천각 일을 배우는 것에 소홀한 그녀다. 이렇게 책을 통해서라도, 조직을 운영하는 법에 대해서 배워야 한다.

* * *

며칠 후, 나는 혈천도마를 만나러 남도종으로 갔다.

내가 남도종에 들어서자 도귀들이 몰려나와 나를 구경했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인지라, 어떤 놈은 쓰레기고 또 어떤 놈은 괜찮고. 이런저런 자들이 모여 살고 있다.

기본적으로는 이들에게 나쁜 감정은 없다. 이들 덕분에 천맥강화술을 훌륭하게 완성할 수 있었으니까.

도귀들 역시 혈천도마와 좋은 관계로 지내는 내게 호감을 보였다. 또한 천맥강화술을 펼칠 때, 내 용기와 기세에 감탄한 자들이 많았기에, 어떤 자들은 존경의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몇몇 도귀들은 내게 와서 정중히 인사를 건넸고 멀리서 박수치며 환호하는 자도 있었다. 주인을 닮아서인가? 도귀들은 귀엽게 미친놈들 같다.

나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난 도귀의 안내를 받아서 혈천도마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내 방문에 놀란 사람은 혈천도마였다.

"날 붙잡아갈 일이라도 생겼나?"

"그사이 죄를 지으셨습니까?"

"나야 죄 많은 인생이니."

"다행히 오늘은 아닙니다."

"그럼 뭐 때문에 왔나?"

"이걸 드리려고 왔습니다."

내가 들고 온 것을 혈천도마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가? 열면 맹독이 뿜어져 나오는 상자인가?"

"그런 상자는 대체 어디서 살 수 있습니까? 몇 개 사고 싶은데."

"뭐냐니까."

"열어보십시오."

그가 상자를 열자 그 안에 든 것은 피독주였다. 공교롭게도 그의 농담과 정반대되는 물건이었다.

"최상품 피독주입니다."

"봐서 안다. 한데 이걸 왜?"

"선물입니다."

"선물? 이 비싼 걸 갑자기 왜?"

"생신 선물입니다."

순간 혈천도마가 깜짝 놀라며 얼어붙었다.

"뭐?"

"생신 축하드립니다. 오늘 생신이시죠?"

"오늘이 내 생일인가?"

정말 생각도 못 했다는 듯 혈천도마의 목소리가 떨렸다.

"모르셨습니까?"

"생일 따윈 잊고 산 지 오래지. 한데 자넨 어떻게 알았나?"

"제가 누굽니까? 황천각에 없는 자료 없습니다. 어르신 속옷이 몇 벌인지도 알고 있습니다."

"몇 벌인데?"

"그건 과장이었고요. 암튼 축하드립니다."

명백히 의도된 호의였고 그를 진짜 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다.

난 그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정말 선물만 주려고 온 건가?"

"네. 그냥 순수하게 생신 선물로 드리는 것이니 전혀 부담 갖지 마십시오."

"이대로 그냥 간다고?"

"저 바쁜 몸입니다. 이따 밤에 풍류주점에서 한잔하시죠. 기다리겠습니다. 아, 오늘은 때려 부술 생각 마시고요."

나는 아직도 멍하게 서 있는 그를 두고 집무실을 나섰다.

문을 닫기 전에 안을 쳐다보았다. 피독주를 내려다보는 혈천도마는 처음 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표정 중에 감격이 있는 줄 처음 알았다.

* * *

"그나저나 정말이십니까?"

함께 복도를 걸어가던 서대룡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뭐가?"

"도마에게 생일선물을 줬다는 것요."

"어떻게 알았어?"

"맙소사. 정말이었군요."

"어떻게 알았냐고."

"어떻게 알긴요, 소문이 도니까 알죠. 전 당연히 헛소문인 줄 알았습니다."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둘만 있는 자리에서 준 것이 퍼져나갔다면, 도마가 선물 받은 것을 도귀들에게 자랑했다는 거다. 정말 안 그럴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말 많다.

"왜 주신 겁니까?"

"생일이니까 줬다."

"저는 참 두 분 관계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럴 것이다. 원수가 되어도 몇 번은 될만한 사건들이 벌어졌는데, 도마와 나는 점점 더 친해지고 있으니.

"서로 좋은 말만 주고받는다고 친해지는 건 아니니까."

나는 서대룡과 함께 복도 끝에 있는 대청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황천각 조사관들과 집행무인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이렇게 한자리에 다 모인 것 오랜만이지?"

"네."

우렁찬 대답이 들렸다. 훈련 이후 집행무인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조사관들 역시 백도귀 사건을 잘 처리하면서 다들 용기백배였고.

"오늘 여러분들의 불타는 사기에 기름을 좀 부어주려고 왔다."

다들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준비해온 봉투들을 서대룡에게 건넸다. 봉투는 황천각 무인들 숫자에 맞췄다.

봉투 안을 확인한 서대룡은 깜짝 놀랐다.

"무슨 돈입니까?"

안에 든 것은 천 냥짜리 전표였다.

"모두에게 한 장씩 돌려라."

"네."

서대룡이 안에 든 것을 모두에게 나눠주었다.

"이 돈은 내가 그대들에게 주는 특별선물이다."

선물이란 말에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감사합니다, 각주님!"

내가 모두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우리 황천각은 그 어떤 외압도 허용하지 않는 조직이 되어야 해서 주는 돈이다. 한마디로 뇌물 받지 말란 말이다. 갑자기 돈 필요한 일 있으면 날 찾아와라. 월봉 당겨준다. 월봉으로 안 되면 내 사비로라도 빌려줄 거다."

"네!"

생각지도 못한 돈이 생기자 다들 표정이 밝았다.

기분 좋을 때 하는 잔소리는 힘들게 딴 점수만 깎아 먹는 짓이니.

"해산."

그렇게 대청을 나오는데 서대룡이 따라붙었다.

"각주님. 어떻게 아셨습니까?"

"뭐가?"

"익호가 돈 필요한 것요. 동생이 혼인한다고 요즘 돈 구하러 다녔거든요. 부모님 생전에는 병수발 한다고 돈 다 쓰고. 이젠 동생들 뒷바라지한다고 주머니가 찰 날이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알아? 몰랐어."

"거짓말 마십시오."

사실 알았다. 우연히 알게 되어 익호만 주려다가, 이렇게 된 김에 다 주자가 된 것이다.

"그리 감격할 것 없다. 다 나를 위한 투자니까."

"공자님을 위한 투자라고요?"

"돈 팍팍 쓰는 게 소문나면, 은근히 기대할 것 아냐? 천마가 되면 더 많이 쓰겠지 하고. 그럼 다들 내가 천마가 되길 바라겠지. 내가 이렇게나 얄팍한 사람이다."

"정말 거기까지 생각하신 겁니까?"

"아니. 네가 물으니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 남들은 그런 생각도 할 수 있겠구나 싶네."

"역시 익호에 대해서 아신 거죠."

"겸사겸사 주는 거다. 다들 고생 많이 했으니까. 그게 그렇게 중요해?"

"중요하죠, 충성심이 그냥 생기겠습니까?"

"이런 것에 속지 말라고!"

서대룡이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이런 속임수조차 부리지 않으면서 사람만 부려 먹는 세상이니까요."

그리곤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한 후 제 갈 길을 걸어갔다.

제42회 불운과도 잘 부딪쳤으니.

거처로 돌아오는데,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혈천도마가 기다리고 있던 그 자리에 일화검존이 앉아 있었다.

놀랍게도 술상까지 차려놓고서 말이다.

"이공자, 오늘 하루도 고생했으니 한잔하고 가세요."

"좋습니다, 선배님."

나는 일화검존 앞에 앉았다. 혈천도마를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편하게 미소지었지만 내심 긴장했다.

"술은 드시지 않는다고 하셨잖습니까?"

"이 술은 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이공자를 위한 술이에요."

"감사합니다."

그녀가 술을 따라주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술을 마셨다.

"그 술에 독이라도 들었으면 어쩌려고 확인도 하지 않고 마시죠?"

"확인은 안 했지만 대비는 했습니다."

"어떻게요?"

나는 입속에서 피독주를 뱉어냈다. 독연을 막아주기도 하지만, 이렇게 입에 물고 술을 마시면 입안에서 독을 중화시키기도 한다.

"언제 이걸?"

"아까 인사드리면서 슬쩍 물었지요."

"피독주를 물었는데도 어찌 표가 나지 않았죠?"

"최상급 피독주라 워낙 작기도 하고, 입에 넣고도 발음이 새지 않게 훈련도 했습니다."

일화검존의 표정에 감탄이 스쳤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선배께서 제게 좋은 감정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덥석 주시는 술을 마실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피독주를 물고 있었다는 것을 솔직히 말했기에 그녀는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이것만은 확인했다.

"도마가 주는 술도 피독주를 물고 마셨나요?"

"그건 아닙니다."

순간 일화검존의 표정이 굳어졌다.

"도마는 믿고 나는 믿지 않는다?"

"도마 어르신과는 그 첫술을 마실 때까지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요."

"우리도 있었잖아요?"

"아뇨, 없었습니다."

단호한 대답에 일화검존이 항변했다.

"장호를 중복해서 추천한 것은 저였어요."

"장호를 추천해주셨지만, 그건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도마 어르신과 인연을 맺지 말라는 강요를 위해서였죠. 그게 저를 위한 선택이었습니까?"

난 대답이 아쉬운 일화검존을 몰아붙이기만 하진 않았다.

"저는 선배님과 많은 일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래서 피독주 없이 주시는 술도 마시고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 마세요."

"왜 마음에 없겠습니까?"

"그 마음에는 이미 도마가 있잖아요?"

"선배님이 저라면, 누가 마음에 있기를 바라겠습니까?"

그게 바로 당신이라는 듯 나는 피독주 없이 술을 마셨다. 그녀를 믿는다는 내 행동에 일화검존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녀는 도마와 비교되는 것조차 거부하는 사람이다. 둘 중 하나라면 당연히 자신을 선택하리란 자부심이 있는 사람이기도 했고. 독 같은 것, 당연히 타는 사람 아니고.

"이공자."

"네."

"원하는 것을 말하세요."

"제가 후계자가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대신 도마 어르신과 절연하라는 조건 없이 도와주십시오. 제가 원하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이공자, 세상에 조건 없는 도움은 부모에게나 바라야 하는 법이에요."

거절의 뜻을 밝힌 일화검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가려던 그녀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도마에게 생일선물을 줬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문득 생각난 것처럼 물었지만, 사실은 이것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뭘 줬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내가 술상에 올려둔 피독주를 들었다.

"이걸 드렸습니다."

"귀한 것을 줬군요."

"귀한 것을 받았으니까요."

일화검존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잠깐 고민하는 듯 보였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풍류주점에서 한잔할 겁니다. 생각나시면 오십시오."

일화검존은 대답 없이 떠나갔다.

* * *

옷을 갈아입기 위해 내 거처로 돌아왔을 때, 또 다른 손님이 있었다.

놀랍게도 아버지가 내 거처의 마당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두 마존에 이어 아버지까지. 오늘 하루에 제목을 붙이라면 거물들과의 만남이라고 해야겠다.

"이 누추한 곳에 어쩐 일이십니까?"

"어찌 사나 보러 왔다."

내 거처에 아버지가 온 것은 처음이었다. 사냥도 처음, 함께 밥 먹은 것도 처음, 거처를 찾아온 것도 처음. 아버지와는 이렇게 처음인 것이 많다.

"들어가시죠?"

"사내놈 혼자 사는 냄새나는 방에 뭐하러."

"그럼 의자라도 내오겠습니다."

"됐다. 오늘도 충분히 앉아 있었다."

"하긴. 예전에 마의가 그러더군요. 오래 앉아 있는 것이 건강에 제일 나쁘다고요. 앉아 있는 시간만큼 단명한답니다. 태사의에 너무 오래 앉아 계시지 마십시오."

나는 아버지 옆에 가서 나란히 섰다.

"오래 살고 싶으냐?"

"그럼요. 아직 안 해본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다 해보고 죽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아버지는요? 천마 말고 해보고 싶은 것 없으십니까?"

"없다."

너무 단호한 대답이라서, 나는 오히려 '너무 많아서 대답할 수가 없다'라고 들렸다.

"언젠가 아버지와 같이 중원에 나가보고 싶습니다."

아버지가 힐끗 나를 쳐다보았다.

"뭐, 무림맹 치러 가자는 말씀은 아니고요."

이 농담만은 우스웠는지 아버지가 피식 웃었다.

"그냥 여기저기 사람 사는 곳 둘러보자고요. 어떻습니까? 나중에 저와 세상 구경 한 번 하시는 것은요? 설산(雪山)이 여름에 가면 그렇게 시원하다던데."

아버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우린 잠시 저 멀리 석양 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오는 길에 일화검존을 만났습니다. 도마와 관계를 끊으면, 자신이 뒷배가 되어주겠답니다."

있는 그대로 아버지에게 말했다.

"너는 누구와 손을 잡고 싶으냐?"

"다루기는 검존이 편할 것 같은데. 도마가 귀여운 구석이 있어서요."

"그렇게 방심하다 죽는 거다."

"확실히 늙은이가 사람을 방심시키는 재주가 있습니다."

도마에 대해선 아버지가 더 잘 알고 있겠지.

"도마에게 천외신단을 왜 주신 겁니까?"

"예전에 한 가지 일을 맡겼다."

아버지는 무슨 일인지는 말해주시지 않았다. 아버지도, 도마도 젊은 시절에 있었던 일이 분명했다.

"어떻게 할 작정이냐?"

"두 사람 다 가지고 싶습니다. 좌도우검, 좌사우사로요."

아버지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괜한 욕심이 아닙니다. 제 본능이 이렇게 말합니다. 앙숙 같은 저 둘을 같이 데려가면 훨씬 결과가 좋을 거라고요. 처음에는 힘들겠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편할 거야. 자꾸 이렇게 속삭입니다."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냐?"

"아버지가 핏속에 물려주신 자신감 아닐까요?"

이제 노을은 절정을 이루며 아버지와 내 얼굴을 붉혔다.

아버지가 불쑥 말했다.

"검존은 상처가 많은 사람이다."

아버지를 돌아봤지만, 그 말만 하시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점을 이용하라는 것인지, 아니면 그러니 봐주라는 말씀인지.

"처음 혈천도마를 만났을 때, 그가 그러더군요. 자기는 평생 불운과 함께 살아와서 자주 안 보는 게 좋다고요. 그런데 요즘 아버지를 뵙는 것만큼이나 그 사람 자주 보고 있습니다."

난 두 사람을 데려가려는 의지를 다시 한번 밝혔다.

"불운과도 잘 맞부딪쳤으니, 상처와도 부딪쳐 보겠습니다."

* * *

그날 저녁, 풍류주점에서 술을 마셨다.

혈천도마에게도 오라고 했고, 일화검존에게도 오라고 했다. 누가 올지, 혹은 둘 다 안 올지 알 수 없었다.

"이것 좀 드셔보십시오."

주인장 조춘배가 요리를 하나 가져와서 내밀었다. 특별히 나 먹으라고 만든 모양이다.

"고맙소. 앉아서 같이 한잔하시오."

"어휴, 제가 어딜 감히 앉겠습니까?"

"나랑 술 마시기 싫으신가 보오."

"그럴 리가요."

조춘배가 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조춘배는 어이쿠, 어이쿠를 연신 내뱉으며 내 술을 받았다.

"그렇게까지 예를 갖출 것 없소."

"아닙니다. 갖춰야지요. 각주님 덕분에 우리가 얼마나 편해졌는데요?"

"좀 편해지셨소?"

"아무렴요. 이 골목에 황천각 지부가 생긴 이후에는 무인들이 술 마시고 행패 부리는 일이 확 줄었습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갚지도 않을 외상 남기는 일도 많이 줄었지요."

"다행이오."

"이게 다 이공자님 덕분입니다."

"앞으로도 잘 살펴보다가 이건 내게 알려야겠다는 일이 생기면 꼭 말씀해주시오."

"알겠습니다."

조춘배가 내가 준 술을 시원하게 마신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또 다른 사람이 와서 꾸벅 인사를 하고 갔다.

"감사합니다, 이공자님."

무슨 일 때문에 감사한지 말하지 않았다. 아마 그 역시 황천각 도움을 받은 모양이다.

그가 인사만 하고 후다닥 제자리로 갔을 때, 누가 내 쪽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인기 많군."

커다란 도를 등에 매고 걸어온 사람은 바로 혈천도마였다. 그의 등장에 장내가 얼어붙었다. 지난번 도마와 술을 마셨을 때는 이른 시간이라 손님이 없었는데, 오늘은 손님이 많았다.

그들에게 마존과 같은 곳에서 술을 마시는 일이 어디 편한 일이겠는가?

내가 일어나서 모두에게 말했다.

"마존께서는 더 없이 인품이 높으신 분입니다. 그러니 걱정마시고 술 드십시오. 이쪽에 와서 술주정만 안 하면 됩니다."

농담까지 곁들이자 긴장이 풀렸다.

내가 자리에 앉자 혈천도마가 불퉁한 얼굴로 말했다.

"거짓말은 왜 하나?"

"착한 거짓말이죠. 돈 내고 술 마시러 왔는데, 눈치 보면서 마실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 꼴 보기 싫음 가면 되지."

"그 말씀 하시려면 저 사람들에게 돈부터 나눠주세요. 이 돈 가지고 딴 곳에 가서 먹어라. 주인장에게도 손해 본 만큼 돈 주고요."

"또 착한 척은."

"착한 척이 아니라 이게 기본인 겁니다."

"이게 마인이냐?"

"마인은 뭐 사람 아니랍니까?"

"이보게, 이공자. 이럴 때면 자네가 본교 사람인지 무림맹 사람인지 헷갈린다네."

나도 내 정체성의 바탕이 마교라 생각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난 삶에서 젊은 시절 본교를 떠나 평생 중원을 떠돌았다.

그때 많은 사람을 만났다. 낭인시절은 물론이고 대법재료를 구하는 과정에서 온갖 인간군상들을 겪었다. 상처도 받았고, 분노도 느꼈으며, 진정한 인간애가 어떤 것인지도 알았다.

내 삶의 가치관은 그때 다 만들어졌으니, 어떤 의미에서 나는 마도, 정도, 사도 아닌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절대악을 없애고 새로운 마도를 세우려는 것 역시 그런 경험적 배경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들뜬 목소리로 술잔을 높이 들었다.

"자, 생신 축하드립니다. 아직 자정이 지나지 않았으니, 축하는 유효하네요."

"그 목소리 좀 낮추게."

뭐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그였지만, 생일잔치만큼은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정말이지 만난 이후 이렇게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하긴 누가 있어 이렇게 축하를 해줬겠는가? 물론 형식적인 축하선물은 수도 없이 받아봤겠지만, 오늘 이 자리와는 의미가 달랐을 테니까.

"앞으론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나이 드는 것이 뭐 좋은 일이라고 축하까지 하나?"

"핑계 삼아 이렇게 술 마시고 노는 거죠."

"이공자도 보기보다 술을 좋아해."

"맞습니다. 저도 몸속에 주충(酒蟲) 몇 마리는 키우고 있습니다. 비 올 때 고개 드는 놈도 있고, 우울하거나 괴로울 때 고개 드는 놈도 있죠. 어르신은 술 좋아하십니까?"

"예전에는 좋아했는데... 요즘은 많이 줄였지."

바로 그때였다.

뒤에서 누군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끊지는 않았군."

고개를 돌려보니 조금 떨어진 곳에 일화검존이 서 있었다.

제43회 내 검은 눈보다 빠르다.

그녀의 등장에 혈천도마는 깜짝 놀랐다. 오늘 검존이 이곳에 온다는 이야기를 그에게 하지 않았으니까.

"어서 오십시오, 선배님. 이리 앉으세요."

일화검존 역시 이 자리에 혈천도마가 있을 줄은 몰랐는지 표정이 굳은 채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돌아설 것 같은 그녀에게 차분히 말했다.

"오늘 도마 어르신 생신입니다.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도 생일 정도는 축하해 주는 거라 배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는지, 일화검존이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합류하자 분위기는 썰렁해졌다.

"나는 왜 오라고 한 건가요?"

나중에 풍류주점에서 술 마시자고 한 것을, 나와 단둘이서 마시자는 것으로 들었던 모양이다.

"오늘 좋은 날이니 함께 축하하자고 불렀습니다."

"다음에는 혼자 있을 때 부르세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 혈천도마가 한 마디 툭 내뱉었다.

"대체 뭐가 그리 불만인가?"

정말 오랫동안 참아왔던 불만이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일화검존 역시 발끈하며 쏘아붙였다.

"뭐라고요? 뭐가 불만이냐고요? 그걸 몰라서 지금 묻는 건가요?"

감정의 검은 그녀의 검보다 더 빨리 뽑혀 나왔다.

"그래, 몰라서 묻는다. 대체 뭐 때문에 그리 화가 나 있는데?"

"당신! 바로 당신!"

"내가 뭐?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때...."

"닥쳐요! 닥치라고요!"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이 나올까 봐 그녀는 긴장했다. 그녀의 분노와 긴장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당신은 이기적인 머저리야."

"뭐라고?"

혈천도마도 벌떡 일어났다.

"당신 닮은 그 무식한 도 휘두르려고? 그래, 한 번 해보시지. 또 술 취해서 마음대로 지껄여보라고!"

도마의 손에 들린 멸천대도가 부르르 떨렸다.

나는 그들을 말리지 않았다.

어차피 싸우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에.

마존들끼리는 절대 싸우지 않는다는 철칙이 있었다. 말싸움도 하고, 뒷이야기도 하고, 온갖 내분은 있을지언정 생사대결은 펼치지 않았다.

이건 아주 오랫동안 지켜온 생존원칙 같은 것으로, 팔마존이 지금까지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기도 했다.

"아직 자정이 되려면 좀 남았으니까, 잠시 고정하시지요."

그러자 일화검존이 카랑카랑한 어조로 목청을 높였다.

"이공자! 대체 뭐 하는 짓이야! 날 얼마나 업신여겼으면 이딴 수작이냐고?"

항상 예를 갖추던 그녀의 평정심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고정하십시오."

"고정 못 하겠네."

"검존님을 모신 이유를 말씀드리지요. 솔직히 저는 검존 선배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서 두 분이 화해하시기를 바랐습니다. 대체 무슨 일로 이렇게 서로를 미워하시는지 모르겠지만요."

그러자 일화검존이 긴 한숨을 내쉬며 평소의 모습을 애써 찾았다.

"술 한잔 마셔서 화해할 수 있었다면, 지금까지 왜 사이가 나빴겠어요?"

"풀릴 때까지 만나고 또 만나는 거죠. 욕도 하고, 머리도 잡아 뜯고. 풀릴 때까지 계속 만나서 싸우는 거죠."

"이공자, 욕심이 너무 과해요. 내가 첫날 분명히 말했어요. 도마와는 함께 갈 수 없다고."

"그럼 선배님께선 혼자서 저를 후계자로 만들어주실 자신 있으신가요?"

"자신 있어요."

"저는 믿을 수 없습니다. 두 분이 사이가 나쁜 것이 공적인 이유라면 저도 알고 있었겠지요. 하나 본교의 누구도 모릅니다. 아마도 지극히 사적인 이유이기 때문이겠죠. 대업을 위해 사적인 감정을 털어내지 못하는 선배님을 믿고 어떻게 제 인생을 걸겠습니까?"

일화검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뭐라 말을 쏟아내려던 그녀가 나와 도마를 무섭게 노려보고는 홱 돌아서 그곳을 떠나갔다.

혈천도마는 자신의 술잔을 비운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축하는 잘 받았다. 망할 놈아!"

꽝!

오늘도 결국 탁자를 부순 후 혈천도마도 그대로 나가버렸다.

나는 다시 탁자값을 옆 탁자에 올려두며 주방 앞에 선 조춘배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때려 부수는 버릇부터 고쳐야겠죠?"

조춘배가 어색하게 웃으며 한마디 농담을 던졌다.

"요즘 같아선 목수가 되면 돈을 더 많이 벌 것 같습니다."

나도 웃으며 객잔을 나섰다.

두 사람이 만나면 이렇게 될 줄 예상했다.

이들을 자꾸 끌어내야 한다. 묻어둔 감정이 끌어내서 서로 부딪치고 욕하고 싸우고. 그러다 보면, 스스로를 잡아먹은 케케묵은 원망이, 막상 돌이켜보면 별 게 아니었구나를 깨닫게 만들어야 한다.

가능한 일이라 생각한다. 두 사람은 이미 살아온 세월이 훨씬 많았으니까.

그들의 화해는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는데, 일화검존은 단 하루도 기다려주지 않았다.

* * *

그날 밤, 잠을 자다가 눈을 떴다.

나를 깨운 것은 천마호신공이었다. 외부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나는 침상에서 일어나 흑마검을 차고 밖으로 나갔다.

나를 깨운 사람이 마당 가운데 서 있었다.

그녀는 바로 일화검존이었다.

"역시. 보통 실력이 아니군요."

별다른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내가 깬 것이 놀라운 모양이었다.

"제가 잠을 깊이 못 자서요."

"이공자."

"네, 선배님."

등을 돌린 채 그녀가 말했다.

"이공자 때문에 고요한 호수에 파문이 일고 있어요."

그 호수는 본교를 의미하는 것일까? 그녀 자신의 마음을 의미하는 것일까?

"저는 아직 젊어서 고요한 호수보단 폭풍이 치는 바다를 동경한답니다."

"예전에 내게 이런 말을 했지요? 꿈이나 이상 따위로 수하의 마음을 공짜로 얻으려는 사람을 경멸한다고."

"네."

"나도 경멸하는 사람이 있어요."

"어떤 사람입니까?"

"말만 번드르르하고 실력이 따르지 않는 사람이죠."

"제가 그런 사람인가요?"

"그런지 아닌지 어디 한번 확인해 볼까요?"

일화검존이 등을 돌린 채 천천히 검을 뽑았다. 완벽한 발검이었다. 뒤돌아 서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어떤 허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일화검존에게 차갑게 말했다.

"제가 싫어하는 사람이 또 있습니다."

"누구죠?"

그녀는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강한데 배려가 없는 사람입니다. 힘으로 찍어눌러서 관계를 유리하게 이끄는 사람을 경멸합니다. 그 빈곤한 상상력으로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는 꼴을 보기 싫습니다."

검존의 몸에서 마기가 폭발했다.

"닥치세요! 잘한다 잘한다 해줬더니 건방이 도가 지나칩니다."

그녀가 내게 돌아섰다. 그녀의 눈에서는 서릿발처럼 강력한 마기가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만약 제가 이기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갈등이 생기자마자 곧장 나를 찾아온 그녀를 보면서, 그녀를 내 사람으로 만들 유일한 방법은 오직 실력으로 누르는 것임을 깨달았다.

백 번 정치보다 한 번의 실력행사가 더 효과적인 상황, 도마와의 관계는 나중 문제였다.

순간 검존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이긴다고 말했나요?"

"네."

"만약 이공자가 나를 이기면, 이공자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어요. 죽으라면 죽겠어요."

그녀가 자기 목숨을 걸었다. 절대 지지 않을 자신감이었다.

"좋습니다."

"만약 이공자가 지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저 역시 선배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죠."

"제가 원하는 것은 간단해요. 도마를 이공자의 삶에서 쳐내세요."

그녀의 자신감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버지 다음으로 무공이 강하다고 자부하고 있는 그녀였으니까.

"제가 원하는 것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전혀 궁금하지 않아요. 영원히 들을 일 없는 이야기에요."

난 천천히 흑마검을 뽑았다.

"그럼 오늘 제가 원하는 것에 대해 알게 되겠군요."

검을 뽑아 든 우리는 서로를 말없이 응시했다.

마존급 고수가 얼마나 빠른지 나는 잘 안다. 공격을 보고 막을 수 없다. 수련으로 다져진 본능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 죽는 거다.

내 공격을 하수들이 막지 못하고 죽는 것도 마찬가지다. 내 검은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다.

휘이잉.

어디선가 불어온 한 줄기 바람에 검존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녀가 늘어뜨린 검 끝을 살짝 비틀었다. 그것만으로도 기세가 달라졌다.

이런 긴장감, 오랜만이었다.

"이공자, 비록 그대를 죽이지는 않겠지만 조심해야 할 거예요. 내상을 입을 수도 있을 터."

이 대결이 꼭 죽여야 하는 적과의 생사대전이었다면 나는 '조심해야'라는 말을 꺼냈을 때 상대의 호흡을 끊고 출수했을 것이다. 상대를 무시하는 자만에서 비롯된 말이니, 출수의 기회는 그때다.

물론 지금 이 싸움은 생사대전이 아니었으니, 우린 차분히 대화를 나눌 여유가 있었다.

"네, 조심하겠습니다. 한데 제 검이 흑마검이라서 선배님의 검이 상할 수 있을 겁니다."

그녀는 내 걱정은 무시했고, 오히려 한술 더 떴다.

"이공자에게 세 수를 양보하겠어요."

과거 선배들이 후배들을 상대할 때 세 수를 양보했다. 옛사람들이나 그러했고, 요즘은 후배들에게 양보하는 선배를 찾아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검존은 낭만이 있는 사람이다.

"양보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자, 그럼 후배 가겠습니다."

나는 결코 자만하지 않았지만, 대신 한 가지 실력만은 감췄다.

풍신사보는 사용하지 않고 상대하려는 것이다. 비장의 한 수는 언제나 감춰야 하는 법. 그건 일화검존 역시 마찬가지일 테니까.

내 작전은 이것이었다.

'양보한 삼 초식 안에 끝낸다.'

나는 탐색전은 생략하고 곧장 대성을 이룬 비천검술을 발휘했다.

제일식 균천식(均天式)이 펼쳐졌다.

쉬이이이익!

한 줄기 검광이 그녀를 가로로 양단하는가 싶었는데.

챙애애애애앵!

그녀의 가슴 앞에서 검과 검이 부딪쳤다. 그녀의 놀람이 검을 타고 전해진다. 내 공격에 담긴 내공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을 테니, 진짜 숙적을 만났을 때의 위기감이 그녀의 온몸 털을 곤두세우고 있을 것이다

연속해서 두 번째 공격이 펼쳐졌다.

제이식 변천식(變天式)이 화려한 검광을 흩뿌렸다. 검은 그녀의 눈앞에서 열두 번 변화를 일으켰고, 검존은 뒤로 물러나며 일일이 공격을 튕겨냈다.

하지만 아홉 번째 변화에서 그녀는 약속을 어겼다.

쉬이익!

챙.

그녀의 검이 내 가슴으로 날아들었고, 몸을 비틀며 흑마검으로 공격을 쳐냈다.

일화검존은 세 수를 양보한다는 약속을 어기고 공격을 감행했다. 그녀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변천식의 계속된 변화를 단지 수비만으로 막아낼 수 없었고 결국 공격을 통해서 방어를 대신한 것이다.

"이런."

낭패한 그녀가 뭐라 변명을 하려던 그때.

나는 세 번째 공격을 날리고 있었다. 이때가 기회였다. 심기가 크게 흔들린 상태에서 심지어 말까지 하려고 했으니.

제삼식 현천식(玄天式)이 날아들었다.

쇄애애애애액!

카앙!

검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동시에 들려온 한 마디 외침, 절대 검존의 입에서 나와서는 안 될 말이 터져 나왔다.

"얼굴은 안돼!"

그리고 이어진 정적.

내 검은 일화검존의 얼굴 앞에 멈춰 있었다. 사실 그녀의 외침보다 검은 먼저 멈췄다. 내 검은 그녀의 눈보다 빨랐으니까.

반면 손을 벗어난 그녀의 일화검은 허공에 떠 있었다.

우리의 시선이 함께 일화검을 향했다. 검은 포물선을 그리며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일화검존은 영원히 그것이 바닥에 떨어지지 않기를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푹.

일화검이 바닥에 꽂혔다. 파르르 떨리는 검, 새하얀 검손잡이 때문에 마치 백기가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모습을 멍하게 지켜보던 일화검존의 시선이 천천히 나를 향했다. 그녀는 이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 눈빛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바랐다.

그녀의 첫마디가 쌍욕이 되기를.

그녀가 굳건히 쌓아 올린 고고함의 둑에서 돌 하나가 빠져나오기를. 그 구멍으로 그녀의 상처를 엿볼 수 있기를....

제44회 첫날보다 편한 얼굴로.

아쉽게도 내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공자,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일화검존의 목소리가 떨렸지만, 그녀는 차분함을 유지했다.

원래 그녀의 계획은 이랬을 것이다. 첫 세 수를 가볍게 양보하고, 한 이삼십 수정도 나를 가지고 놀다가 이기려 했을 텐데. 오히려 그녀 자신이 단 세 수만에 패한 것이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흑마검이니 조심하시라고요."

나는 흑마검 덕분에 이긴 듯 말했지만, 그녀는 핑계로 자신의 패배를 덮을 만큼 나약한 사람은 아니었다.

"흑마검이 아니라 천마검이었다 해도, 내가 져서는 안 되는 싸움이었어요."

검 때문이 아니라 실력 때문에 졌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비밀을 알려드리죠. 전 이미 비천검법의 대성을 이뤘습니다."

순간 그녀는 깜짝 놀랐다.

"벌써 대성을 이뤘다고? 믿을 수 없어요."

비천검법의 무공 수준은 마존들이 익힌 무공과 비슷했다.

그런 상승의 무공을 내가 벌써 대성을 이뤘다고 하니 그녀의 불신은 당연했다.

"우리 아버지를 모르십니까? 그냥 아들이라고 황천각주 자리에 앉히겠습니까?"

"설령 이공자가 비천검법의 대성을 이뤘다 하더라도...."

"내공이 부족했을 거라고요? 전 천외신단을 복용하지 않았습니까?"

"아!"

굳이 소천동에서 마정단을 얻은 것까지 이야기하진 않았다.

"이번 비무는 제가 이겼습니다. 인정하십니까?"

"...."

그녀는 인정하지 못했다.

"이공자의 실력이 이 정도인 줄 알았다면 내가 그렇게 방심하진 않았을 거예요."

내 실력을 몰랐고, 선공 삼수를 양보한 상태에서 벌어진 일이다. 게다가 말을 하려는 순간 당한 공격에 검이 날아갔던 것이고. 그녀에게는 여러 악재가 겹쳤다.

"그래서 인정 못 하신다는 겁니까? 만약 검존께서 약속을 어긴 것이 알려지면, 평생 비겁자 꼬리표가 선배님을 괴롭힐 겁니다."

"닥쳐요! 그딴 불필요한 말로 나를 자극할 필요 없어요. 나는 약속을 지킵니다. 이공자, 뭘 원하죠?"

"지면 목숨까지 내주신다고 했으니."

"이 대결은!"

뭐라 변명하려던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방심해서 졌든, 무공이 약해서 졌든, 진 것은 진 것이었다. 세 수를 양보하겠다고 자만했던 것도 자신이었고.

"원하는 것이 내 목숨인가요?"

"그럴 리가요. 도마 어르신께 미친놈이란 소릴 여러 번 들었지만, 그 정도로 미친놈은 아닙니다."

"그럼 원하는 것이 뭐죠?"

"제 사과를 받아주십시오."

순간 검존은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검존께 무례하게 대한 점, 사과드립니다. 진심으로 드리는 사과니,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를 희롱하는 건가요?"

"아뇨, 오늘 선배께 무례했습니다. 그 자리에 선배를 부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겼으면서도 내게 사과하는 이유가 뭐죠?"

"솔직히 말씀드릴까요?"

"당연히!"

"이렇게 사과드리고 선배님의 환심을 사고 싶습니다. 그래서 선배님이 저를 진심으로 지지하게 하고 싶습니다."

"진심? 후계싸움에서 진심을 말하는 건가요? 그딴 것이 통하는 바닥이라고 여겼다면 실망이군요. 이공자가 이렇게 순진한지는 몰랐어요."

"상대에 따라 다르겠죠. 저는 상대가 흙을 뿌리면 진흙탕에 밀어버리고, 물을 끼얹으면 똥물로 대응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선배님께는 순진함으로 승부하고 싶습니다."

"왜죠? 내가 순진해 보여서요?"

"아뇨. 고고하신 성품이시니까요. 팔마존 중 누구보다 존경받을만한 분이시니까요."

이후의 그녀 삶을 생각하면 지금 한 말은 전부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 일들은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이다. 나와의 만남을 분기점으로 그녀의 운명이 바뀐다면, 피바람을 일으켰던 미래는 사라지고 새로운 인생이 펼쳐지지 않을까? 그녀 눈동자 속에서 보았던 삭막한 황무지에 꽃을 피울 수 있지 않을까?

"정말 제가 그렇다고 생각해요?"

"네, 고상하시고 기품이 있으십니다."

그녀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그 칭찬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뭔가 마음이 복잡한 모습이었다.

나는 걸어가서 바닥에 꽂힌 일화검을 뽑아서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정중히 인사를 한 후 거처로 들어갔다.

들어가서는 그대로 잠을 잤기 때문에 그녀가 얼마나 오래 그곳에 서 있다가 돌아갔는지는 알지 못했다.

* * *

다음 날 밤, 일화검존이 다시 나를 찾아왔다.

그녀는 밤새 잠을 자지 못했는지 눈과 얼굴이 부어 있었다.

"이공자의 사과는 받아들이겠어요."

"감사합니다."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뭡니까?"

"어제 대결은 내가 졌어요. 인정하죠. 대신 오늘 다시 붙어요."

나는 단번에 거절했다.

"싫습니다."

"왜 싫죠?"

"이제는 두 번 다시 이길 수 없을 테니까요. 검존께서 방심하지 않았다면, 선공을 양보하지 않았다면 전 결코 이기지 못했을 겁니다."

"이공자는 비천검법의 대성을 이뤘잖아요? 공력도 충분하고요. 다시 싸워도 이길 수 있어요."

"못 이깁니다."

"왜 그렇게 확신하죠?"

"인생에서 한두 번 찾아오는 행운이었습니다. 전 그걸 실력이라 자만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이겼을 때의 조건은 걸지 않겠어요. 대신 졌을 때는 이공자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어요."

그야말로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것이다.

그녀가 왜 교주가 되어 피바람만 일으키다 무너졌는지 알 것 같았다.

그깟 자존심이 뭐라고. 내가 뭘 요구할 줄 알고. 참으로 어리석고, 순진하다.

"선배님, 어제 승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굳이 저를 이기려 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어차피 어제 일은 아무도 모를 겁니다."

"사람 일은 알 수 없죠. 술기운에 내뱉어 버릴 수도 있고."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나는 서두르지 않았다. 주도권을 내가 쥔 이상, 천천히 그녀를 내 쪽으로 끌어들이면 되는 것이다.

"오늘은 푹 주무십시오. 얼굴이 상해 보입니다."

그렇게 돌아서 들어가는데 그녀가 불쑥 말했다.

"수치스러웠어요."

내 발걸음을 멈추는 말이었다.

다시 그녀에게 돌아섰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가 이긴 것은 순전히 운이었다고요."

"단지 비무에 졌기 때문만은 아니에요."

그 수치심의 원인은 전혀 생각지 못했던 곳에 있었다.

"얼굴은 안된다는 그 말, 생각하면 할수록 너무 수치스러웠어요."

검이 날아들었을 때, 그녀가 외쳤던 말이다.

얼굴은 안 돼!

"그럴 수 있죠. 얼굴인데. 남자인 저도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죠. 하지만 검존은 그럴 수 없어요. 차라리 얼굴을 찔리고 말지."

그녀는 그 말을 내뱉은 게 너무 자존심 상하고 수치스러웠던 모양이다.

물론 나는 그 말을 뱉은 그녀를 이해한다. 그녀는 자신의 명예나 검존이라는 자부심만큼이나 외모에 대한 자부심도 강했다. 잘 싸운다는 말보다 예쁘고 젊어 보인다는 말을 더 듣고 싶어 하는 그녀였으니까.

"이제 내가 다시 온 이유를 알겠나요?"

"네."

"그럼 나와 싸워주겠어요?"

그녀는 절실함이 가득했지만 내 대답은 그에 부응하지 않았다.

"싫습니다."

내가 돌아서자 뒤에서 그녀의 외침이 들렸다.

"이공자!"

"그냥 이 한 번의 행운을 만끽하게 해주시면 안 됩니까?"

그러자 검존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약속했어요. 절대 지지 않기로."

"누구와요?"

"그분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지지 않기로."

그분? 검존이 그분이라 칭하는 사람이라면?

"설마?"

순간 내 머릿속을 스친 사람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교주님과 약속했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버지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검존은 상처가 많은 사람이다.

아버지와 검존 사이에 어떤 깊은 유대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언제 하신 약속입니까?"

검존은 대답 대신 아버지에 대한 존경을 드러냈다.

"내가 존경하는 사람은 오직 교주님뿐이에요."

그녀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아버지를 존경하는 사람이, 교주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그렇게 피바람을 불러일으켰단 말인가? 대체 왜?

"교주님과의 약속을 어기기 싫어요."

그녀는 내가 불손한 오해라도 할까 봐 재빨리 덧붙였다.

"혹시라도 지금 불경한 생각을 한다면 내 분명히 말하겠어요. 교주님을 향한 내 순수한 존경심을 욕보이지 말라고요."

"아뇨,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다면 다행이군요."

"아버지가 왜 그리 존경스럽습니까?"

검존은 옅게 웃을 뿐, 자세한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다.

아버지와의 일을 꺼냈다면 그녀로서 마지막 수를 사용한 것. 더는 거절할 수 없었다.

"좋습니다. 아버지와 하신 약속은 지켜야죠."

일화검존이 기뻐했다. 지금까지 보였던 미소나 웃음을 전부 가식으로 만드는, 진짜 기뻐서 웃는 웃음이었다.

"그렇게 좋습니까?"

"좋아요."

"저는 이번에도 최선을 다할 겁니다."

"제가 원하는 바에요."

두 번째 승부도 최선을 다해 싸웠다.

오히려 첫 비무보다 더 흥분되었다. 일화검존은 방심하지 않았고, 눈빛에는 숨길 수 없는 격정이 가득했다.

물론 이 싸움은 죽이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오직 승부를 겨루는 비무였다.

탐색을 위한 십여 수가 지났고, 몸이 풀린 백여 수를 거쳐, 화려한 초식들을 쏟아내며 삼백여 수가 지났다.

비무가 계속되면 될수록 우린 점점 승부를 떠났다.

순수하게 무공을 겨루는 재미에 빠져든 것이다. 누가 이기느냐는 나중 문제였다.

불가능해 보이는 초식이 연계되는 것에 놀라기도 했고, 내 허점을 재빨리 파악하는 감각에는 더욱 놀랐다.

'아! 정말 대단하다! 이 사람은 정말 검에 尊을 붙일 자격이 있다.'

원래라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틈도 없겠지만, 우린 약속이나 한 것처럼 쉬어야 할 순간에 물러나서 쉬었다.

온전히 무공을 겨룬다는 사실에만 빠져들었기에, 우린 우리가 겨뤘던 여러 초식들을 되새김질했다.

순수하게 무공을 겨루는 이 순간이 지난날 그 어떤 생사의 갈림이 줬던 괘감보다 더 큰 즐거움을 주고 있었다.

아버지나 이안에게 느꼈듯 나는 그녀에 대해서도 오해한 부분이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녀의 명예욕과 자존심은 황량한 그녀의 정신을 채우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었다. 그 근원은 무공에 대한 자부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적어도 검술에 있어서 그녀는 세상 누구보다 진지했고, 진심이었으며 진짜였다. 검술을 대하는 자세만큼은 아버지가 무공을 대하는 모습을 연상시킬 정도였으니까.

평생을 오직 검술만 배웠던 우리 두 사람은 그렇게 검으로 하는 대화에 깊이 빠져들었다.

승부는 무승부였다. 필살의 의지가 없는 싸움에서 우린 박빙의 실력이었다.

"필살의 한 수를 사용하지 않으셨을 테니, 이 승부는 제가 졌습니다."

"마찬가지 아닌가요?"

"아뇨, 저는 이게 제 실력 전부입니다."

가만히 나를 응시하던 일화검존이 불쑥 말했다.

"이공자, 고마워요."

그녀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 돌아섰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첫날보다 편한 얼굴로 돌아갔다는 점이다.

앞으로 그녀가 어떻게 나올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아버지에게 지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내일 다시 찾아올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오늘의 비무가 영영 끝일 수도 있고.

그녀와의 비무는 내 감정을 움직였다. 그녀에게는 어떤 의미였을까? 그녀의 삭막한 황무지 같은 정서를 적시기에 충분했는지는 나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그녀에 대한 투자는 지금부터다. 내 사람 하나 만들기가 이렇게 어렵다.

제45회 습관이 무섭다.

일화검존은 다음 날 밤에도 나를 찾아왔다.

"원래 삼세번이란 말도 있잖아요. 오늘 마지막으로 싸워요."

그녀의 방문이 아버지와의 약속을 중요시해서인지, 아니면 어제 비무의 즐거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좋습니다."

나는 흔쾌히 세 번째 비무를 받아들였다.

"어제 비무에서 비기고 돌아가서 온종일 잠만 잤어요. 첫날 졌을 때는 한숨도 자지 못했는데, 비기고 돌아온 날은 정신없이 잠을 잤죠. 내가 이렇게 잘 잔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요."

"평소 잠을 잘 못 주무셨군요."

"맞아요, 한 번도 깊이 잠든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무슨 생각까지 했는지 아세요?"

"무슨 생각이죠?"

"잠을 푹 자려면 매일 가서 비무라도 해야 하나?"

내가 웃었고 일화검존도 미소를 지으며 검을 뽑아 들었다.

한 차례의 싸움이 끝나고 우린 잠시 떨어져 쉬었다.

그리고 우린 의문이 드는 점이 있으면 그때그때 물었다.

"아까 스물세 번째 공격 때, 왼쪽으로 피하셨는데, 왜 왼쪽이었죠? 오른쪽이 더 빠르지 않았습니까?"

"오른쪽으로 빠진 것은 이공자의 수를 줄이기 위해서였어요. 만약 내가 오른쪽으로 피했다면, 이공자에게는 선택권이 세 가지가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왼쪽으로 피하면 두 가지였죠."

"제 무게 중심 때문이군요."

"그렇죠."

나와 검존 정도의 고수가 되면, 수백 수를 나누더라도 바둑에서처럼 그 싸움을 복기할 수 있다.

내가 질문하면 검존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알려주었다.

들어보면 안다. 이 사람이 정말 진심으로 내게 말해주는지, 아닌지. 아버지가 들으면 사람 속을 어찌 아느냐고 야단치시겠지만, 적어도 검존은 진심으로 답해주었다.

그녀 또한 의문이 생기면 내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내 생각을 그대로 대답해주었다. 내가 그녀에게서 진정성을 느끼듯, 그녀 역시 내 대답에 헛됨이 없음을 느낄 것이다. 가르쳐 준다고 손해가 아니다. 이안을 가르칠 때도 마찬가지지만, 가르쳐주면서 배우는 것이 더 많은 법이니까.

"언제였는지 모르겠네요. 이렇게 순수하게 무공에 빠져들었던 적이. 어쩌면 처음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녀의 나이나 위치로 볼 때, 처음이라는 말은 쉽게 나올 말이 아니었다.

"저는 오죽하겠습니까?"

"자, 다시 시작할까요?"

"좋습니다!"

이번에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허공으로 날아올라서 싸웠다. 이번 싸움은 말 그대로 공중전이었다.

땅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발을 디뎌 도약할 수 있는 공격을 해줌으로써 상대를 띄워주었다. 그 과정에서는 절대 기습은 하지 않았다. 서로 도와서 계속 날아다니며 검을 나눴다.

화려한 검광이 밤하늘을 수놓았고, 우린 그렇게 모든 공력을 다 쓸 때까지 날아다니다가 연무장으로 내려섰다.

연무장에는 나와 그녀의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비무 첫날이었다면 누가 먼저 숨을 가다듬느냐로 승부의 결과를 따졌을 텐데, 우린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술 있나요?"

술을 마시지 않는 그녀가 술을 찾았다.

"네, 있습니다."

나는 집으로 들어가서 술을 가져 나왔다.

"좋은 술이네요."

"술에 대해서 잘 아시는군요?"

"안 마신다고 모르는 것은 아니죠. 그러고 예전에는 마시기도 했고."

그녀와 둘이 술을 마셨다. 검존과 비무를 나누고 마시는 술은 특별한 정취가 있었다. 오래전에 술을 끊었다는 그녀는 곧잘 술을 마셨다. 혼자서 몰래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이공자,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네, 선배님."

"갑자기 이렇게 변한 이유가 뭐죠? 원래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요? 내가 이공자를 주의 깊게 관찰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대충은 어떤 사람인지는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변한 것은 아니고, 오랫동안 준비해왔습니다."

"본모습을 감추고 살았다?"

"비슷하죠. 너무 어려서 본색을 드러내면, 형에게 죽었을 테니까요. 제 한 몸을 지킬 때까지 몸을 웅크렸습니다."

"이공자는 정말 무서운 사람이군요."

주거니 받거니 나눠마신 술병이 비었을 때, 그녀가 말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하세."

나는 깜짝 놀랐다. 일화검존의 말투가 바뀐 것이다.

항상 존칭을 쓰던 그녀가 자연스럽게 하대하기 시작했다.

"이상한 말이겠지만, 이공자와 함께 있으면 친구와 함께 있는 기분이 드네."

어쩌면 그녀는 내 지난 삶의 단면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나 이안 앞에서는 지난날의 어둠과 고생과 세월을 끌고 오지 않으려고 부단히 더 까불고 장난치고 했지만, 그녀 앞에서는 그러지 않았으니까. 특히 비무를 하는 동안에는 누구보다 진지했다.

우린 고수에게 배우고, 하수에게도 배운다. 그 낙차가 주는 깨달음이 워낙 강해서, 동수에게서의 배움을 소홀히 여길 때가 많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말로 가치를 폄하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나는 오늘 그 나물에 그 밥이 최고의 만찬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싸웠고, 배우면서 싸웠으며 깨달으면서 싸웠다. 이제 술잔을 내려놓고 싸웠다. 난 감히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싸움은 우아했다고. 우리에겐 상대를 해치려는 살의가 아니라 비무를 즐기겠다는 고상함만이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도 나는 혈천도마에 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녀를 내 편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조차 잊었다.

그렇게 우린 강력하게 충돌해서 화려하게 터져나간 마지막 초식을 교환했다.

"불경한 말씀이지만, 선배님과 검으로 우정을 나눈 느낌이 들었습니다."

내 소감에 그녀가 동감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떤 관계가 될지 모르지만, 이공자와 나눈 오늘의 비무는 영원히 기억에 남을 거네."

일화검존 역시 이 비무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겼다.

"네, 평생 못 잊을 겁니다. 큰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과연 내가 가르침을 내렸을까?"

어쩌면 본인이 받은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확신하건대 내가 배운 것이 더 많다. 그녀는 몇 가지 가르침을 배운 정도지만, 나는 아예 다 빨아들였으니까.

지난 사흘의 비무를 통해 비천검술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했고, 굳건히 이룬 대성의 체계가 흔들렸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십성 대성의 벽이 무너졌고 이제 내 경지는 십이성 대성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음을. 오랜만에 찾아온 새로운 변화에 내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작별인사는 우리가 하지 않았다.

일화검존이 일화검을 뽑아서 앞으로 내밀었고 나는 흑마검으로 답했다.

챙!

검과 검이 부딪치는 맑은 작별을 끝으로, 우리의 비무는 끝났다.

* * *

거처로 돌아온 일화검존은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검무극과의 비무가 끝나자 여러 감정이 들었다.

뭔가에 홀린 듯한 삼 일이 지나갔다.

비무에서 진 첫날이 생각났다.

그날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복면을 쓰고 돌아가서 검무극을 죽일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날의 자신과 오늘의 자신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같은 사람이지만, 적어도 검무극과의 관계만큼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때 모옥 밖에서 사우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종입니다."

안으로 들어온 그의 손에는 안주가 될 요리가 들려 있었다. 안주를 탁자에 내려놓으며 사우종이 물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자신이 그녀를 가까이서 모신 이래, 그녀가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한데 오늘 갑자기 술을 마시는 것이다.

'나쁜 징조다.'

사우종은 이 상황을 이렇게 판단했다.

일화검존이 워낙 은밀히 움직였기에, 사우종은 지난 사흘간의 비무에 대해 알지 못했다.

일화검존은 그의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럴 때면 심한 자괴감이 드는 사우종이다. 그녀는 지금껏 자신에게 단 한 번도 허심탄회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으니까. 감정이 메마른 사람이라 그렇겠거니 했었는데, 왜 갑자기 술을 마시는 걸까?

"혹시 이공자와 관련된 일입니까?"

일화검존이 힐끗 사우종을 쳐다보았다. 괜한 소리 말라는 그 눈빛은 차가웠다.

"아무 일도 없다."

사우종이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괜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녀가 기분 나쁠 때, 맞춤 처방전을 사우종은 가지고 있었다.

"참, 새로운 녀석을 데려왔습니다. 밀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이제 그만!"

"네?"

"이제 남자는... 그만 데려오세요."

"!"

순간 사우종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남자를 그만 데려오라고 해서 놀란 것이 아니다. 검존이 자신에게 존대한 것이다. 그는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뭐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오직 자신에게만 하대하는 그 특별함에서 자부심을 가졌던 그였다.

잘못 들었는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일화검존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작 그만뒀어야 했을 일이었어요. 아니, 애초에 시작해선 안 될 일이었지요."

처음 사우종이 젊은 남자를 데려왔을 때, 그 순간의 욕정에 진 것이 화근이었다.

딱 한 번만! 그래, 딱 한 번만. 남자와 잔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는데. 딱 한 번만 즐기자!

하지만 상자를 열어버린 욕정에 딱 한 번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은 세 번이 되었다.

남자들이 원해서 하는 일이고, 큰돈까지 주니 오히려 그들을 돕는 일이라는 사우종의 말에,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솔직히 나중에는 죄책감조차 느끼지 못했다.

욕정은 습관이 되었다.

욕정보다 습관이 더 무서웠다. 그리 즐겁지도 않은데 끊지를 못했으니까.

하지만 이제 그만둘 때가 되었다. 검무극과의 비무를 끝내자 새롭게 뭔가를 시작해야 할 때가 되었음을 느낀 것이다. 검무극과 함께든 아니든.

"그럼 오늘은 돌려보내겠습니다. 언제든 말씀만 하시면...."

"이제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알겠어요?"

차가운 눈빛에 사우종이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물러가세요. 그리고 비밀을 지킨답시고 청년들을 손대면 내 손에 죽습니다."

지금까지 청년들은 확실히 챙겼다. 돈을 제대로 주는지, 그들을 살려 보내는지. 사우종이 비밀을 지키려고 죽여버리지 못하게 말이다.

"그럴 일은 없습니다."

황급히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사우종이 돌아섰다.

그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남자들을 이용해서 환심을 샀고, 이 은밀한 비밀이 완벽한 이인자의 자리를 굳혀주었다고 믿었다.

한데 저 낯선 차가움은 뭐지? 저 당당함은 대체 뭐지?

차기 검존은 당연히 자신이 될 거라 확신했었는데.

검존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 자신에게서 돌아서고 있었다.

이유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최근 그녀를 뒤흔들었던 한 사람.

'검무극!'

* * *

그날 밤 사우종의 거처에,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여인의 이름은 청선(靑仙).

섭혼마존의 다섯 제자 중 하나로 그녀는 귀술사였다.

청선은 방에 들어선 사우종의 품에 달려가서 안겼다. 두 사람이 사귄 지 이제 일 년, 한창 뜨거울 때였다.

사우종 품에 안긴 채 청선이 살짝 불평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저 그림을 떼버리면 안 돼?"

그녀의 시선은 벽에 붙어 있는 그림을 향해 있었다. 그림 속 여인은 일화검존이었다.

"그림에게도 질투하나?"

"질투는 아니고. 당신 충성심은 잘 알지만, 방에 저 여자 그림까지 붙여둘 필요가 있느냐는 거지."

"북천검가의 이인자가 그냥 된 것이 아니야."

"알아. 알지만 볼 때마다 기분이 나빠."

청선이 사우종을 침상으로 이끌었다.

"그거 알아? 당신이 먼저 날 보자고 부른 것 오늘이 처음이야. 항상 내가 찾았지."

"그랬나?"

"무뚝뚝하기로는 본교 제일이지."

"그동안 바빴어."

"검존 그 할망구 때문이지."

"말조심해."

"미안."

청선은 그에게 파고들었고, 사우종은 언제나처럼 격렬하게 그녀를 안았다.

하지만 사우종의 시선은 벽에 걸린 그림을 향하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 담긴 뜨거운 열기는 충성심이 아니었다.

청선은 알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에 자신의 남자가 다른 여자를 떠올리고 있다는 것을. 그것도 자기보다 훨씬 나이 많은 여자를.

열락(悅樂)의 신음이 잦아들었을 때, 사우종의 입에서 그들의 운명을 바꿀 말이 흘러나왔다. 모든 관계에서 종말의 시작점인 바로 그 말이.

"...부탁이 있어."

제46회 사람을 현혹하는 인간은.

난 수련장 가운데 눈을 감고 서 있었다.

검존과의 비무로 비천검법은 십 성 대성의 벽을 넘어 새로운 경지에 들어섰다.

이전까지는 비천검법을 떠올리면 처음부터 끝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꽉 짜여 있었는데, 지금은 조여져 있던 것이 느슨하게 풀어진 느낌이다. 완벽했던 초식에 의문이 생기면서 확신이 사라졌다.

나는 천천히 흑마검을 뽑아 들고 비천 검법의 초식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기존 실력이 사라졌거나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화려한 검광이 연무장을 가득 채웠다. 이 화려한 무공이 십이 성 대성을 이루면 과연 어떤 모습을 보일까?

결정적으로 나는 구화마공 십이 성 대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랬기에 이번 비천검법의 십이 성 대성을 이루는 경험이 후일 구화마공의 십이 성 대성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렇게 한차례 수련을 끝마쳤을 때, 서대룡이 황급히 와서 보고했다.

"사건이 터졌습니다."

"무슨 사건?"

"각주님께서 직접 가서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서대룡이 안내한 곳은 인근의 산이었다.

그곳은 이미 집행무인들이 나와서 주위를 통제하고 있었다.

현장에 먼저 와 있던 특별조사관 곡명이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했다.

"매장한 지 얼마 안 된 시체가 십여 구나 발견되었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평범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시신들의 심장이 모두 사라지고 없습니다."

심장이 사라졌다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한 가지 대법을 떠올렸다.

심혼대법(心魂大法).

사람의 심장에서 생기(生氣)를 흡수하는 대법으로 그 진행 과정이 실로 잔혹하다고 알려졌다. 살아 있는 사람의 심장을 뽑아내는 대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본교에서 그 대법을 사용할만한 사람은 한 사람이었다.

섭혼마존.

내가 비마혼을 구하러 다시 돌아왔을 때, 섭혼마존이 심혼대법을 이용해서 귀기를 모은다는 소문이 잠깐 돌았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소문이었고, 그에 대한 진실은 밝혀지진 않았다. 나 역시 오직 비마혼을 향해 달려가던 시기였기에, 그에 대해서 파볼 여유가 없었고.

'설마 그 소문이 사실이었나?'

살아 있는 사람의 심장을 꺼내는 장면을 상상하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정작 나를 화나게 한 원인은 다른 곳에 있었다.

서대룡이 조심스럽게 보고했다.

"한데 시체를 살펴보니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이들 같습니다."

"일반인들이라고?"

"네. 남녀 구분 없이 섞여 있는데...."

서대룡이 한숨을 내쉬며 덧붙여 말했다.

"시체 중에는... 어린애도 있습니다."

순간 내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일이다.

무인이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을 건드는 것, 심지어 아이들까지. 이건 너무나 불합리한 일방적인 폭력이다.

무인들끼리야 기습을 하든 떼로 몰려오든, 어차피 비정강호를 각오하고 뛰어든 사람들의 난장판이고.

사실 알고 보면 나는 그렇게까지 정의로운 사람이 아닌데, 이런 지점에서는 이상하게 참을 수가 없다.

정말 이 시체들이 심혼대법의 희생자라면?

내가 비마혼을 찾기 위해 본교로 돌아왔을 때, 섭혼마존이 심혼대법을 한다는 소문을 들었으니 수십 년에 걸쳐 이 대법을 자행했다는 의미다. 수천 명, 혹은 그 이상의 희생자가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런 거라면... 문득 날 돌려 보내준 노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복수도 좋고, 내 인생도 중요하지만.

'알겠소. 다른 건 몰라도 이건 먼저 막겠소.'

그때 다른 조사관이 와서 보고했다.

"이것 보십시오."

그가 가져온 것은 부채였다. 부채를 펼쳐보니 알아볼 수 없는 언어와 기괴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귀술사들이 사용하는 귀선(鬼扇)입니다."

섭혼마존의 제자들이 사술에 사용하는 부채였다.

"어디서 발견되었나?"

"시체와 함께 있었습니다."

섭혼마존의 소행임이 더욱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의심이 들었다.

시체를 처리하는 일을 맡은 자가 부채를 떨어뜨리고 갔다고?

"시체를 발견했다는 약초꾼은 지금 어디에 있나?"

"저쪽에 대기시켜뒀습니다."

"가자."

하지만 약초꾼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무서워서 달아난 모양입니다. 당장 찾아보겠습니다."

나는 그를 찾지 못할 거란 예감이 들었다.

어딘지 이번 일은 자연스럽지 않다.

아무리 본교지만, 살아 있는 사람의 몸에서 심장을 파내는 대법을 공공연히 진행할 수는 없다. 따라서 섭혼마존은 대법과 관련된 일은 정말 철저하게 처리했을 텐데?

그런데 시체가 약초꾼에게 발견되고 부채까지 떨어져 있다고? 그럴 리가. 누군가 시체를 매장한 곳을 알아내서 발견되게끔 한 것이다.

"증거가 발견된 이상, 서환진으로 가서 이 부채의 주인을 조사해야겠지요?"

서대룡은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두렵나?"

"네. 저는 본교에서 섭혼마존이 제일 무섭습니다."

"왜?"

"귀술사들에게 당하면 제 영혼을 빼앗기니까요. 강시처럼 조종당하다가 비참하게 죽느니, 차라리 깔끔하게 칼 맞고 죽는 게 낫죠."

"어쩌나? 내일 나와 서환진으로 가야 할 텐데."

"저 오늘부로 황천각 그만두겠습니다. 아아, 정말 가기 싫습니다."

"걱정 마라. 집행무인들도 데려갈 테니까. 무공 강한 이들로 몇 명 추려."

서대룡이 소리쳤다.

"그 사람들이 미쳐서 절 죽인다니까요!"

누군가 의도적인 조작까지 해가며 섭혼마존이 심혼대법을 하고 있다고 내게 알려왔다. 사실인지는 확인해 봐야겠지만, 나는 이 조작의 배후로 한 사람을 떠올렸다.

'사우종.'

일화검존의 오른팔인 사우종.

내가 그라고 추측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사우종을 처음 봤을 때도 떠올렸던 그의 인상적인 최후 때문이다.

놀랍게도 그는 섭혼술에 당한 채로 일화검존을 죽이려다가 역으로 죽었다. 가장 충성스러운 수하가 섭혼술에 걸려 주인을 죽이려 한 사건을 내가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가 죽고 난 후 밝혀졌다. 그가 검존을 여인으로 좋아했었다는 것이. 그리고 누가 섭혼술을 걸었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치정에 얽힌 비극이겠거니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다 잊혔다.

사우종이라 생각하는 또 다른 이유.

공교롭게도 최근에 일화검존과 사흘간의 비무를 가졌다. 그 일이 뭔가 사우종을 자극한 것이 틀림없다.

'내가 섭혼마존과 싸우다 죽거나, 그를 상대하느라 검존에게 관심을 가지지 못하게 하려는 수작이다.'

어떻게 시체처리장소를 알아냈고, 부채를 빼돌렸는지는 몰라도 제대로 나를 섭혼마존에게 밀어 넣었다. 이번 사건은 황천각주인 내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사우종은 모를 것이다.

섭혼마존을 떠밀면서 자신도 함께 무대에 들어섰다는 것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