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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만 내려가시죠."

이안의 말에 술을 마저 비웠다.

이 층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사람은 바로 나였다. 피해자의 부친인 곽수를 만나러 왔다가 생각지 못한 월척을 낚는 순간이었다.

내가 훌쩍 이 층에서 아래층으로 뛰어내렸다. 이안도 따라 뛰어내렸다. 뚱뚱한 몸이었지만 경신법으로 가볍게 내려섰다.

우리의 움직임을 보고 양호가 흠칫 놀랐다. 삼류 무인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움직임이 너무 날렵한 것이다.

난 쓰러져 있던 곽수를 일으켜 세워서 자리에 앉혔다.

"미리 개입하지 않아서 미안하오. 저놈 입이 방정을 떨 것 같아서 좀 기다렸소. 덕분에 자백을 받아냈소."

"이 공자님?"

"오, 나를 알아보시는군요."

"사실은 호위 분을 알아봤습니다. 교내에서는 워낙 유명하신 분이라."

내가 이안을 보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이게 말이 돼? 나보다 네가 더 유명하다니!"

"그게 어디 유명해서겠어요? 제 덩치가 너무 커서 금방 알아본 거죠. 쳇!"

우리의 대화에 양호의 안색이 핼쑥해졌다.

"당신이... 이 공자라고?"

"긴장 풀어. 오늘은 황천각주로 온 거니까. 아니구나, 그럼 더 긴장해야겠구나."

온 세상이 제 것인 양 까불며 큰소리치던 양호의 목소리가 잦아들며 정중히 말했다.

"본교의 귀하신 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아직 어려 무례를 범했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하는 짓 보니 하나도 안 어리던데?"

"아닙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놈입니다."

양호가 머리를 바짝 조아렸다. 어린놈이 어찌나 영악한지 고개 숙여야 할 때를 귀신처럼 알고 있다.

"저는 이만 가봐도 될까요?"

"기다려. 네게 볼일이 있어 찾아왔으니까."

"무슨 일이시죠?"

"이번에 네가 저지른 폭행 사건을 조사하러 나왔다."

"이미 황천각에서 무죄 판결이 내려졌는데요?"

"이번 사건은 전면 재조사다."

화들짝 놀란 양호에 반해 곽수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옆에 있던 조춘배가 움찔했는데 만세를 부르려다 흠칫 멈춘 것이다.

내가 양호의 죄명을 하나하나 짚었다.

"매일 돈을 뺏었으니 상습 갈취에, 돈 훔쳐 오라고 강요했으니 절도 사주, 폭행으로 친구를 사지에 빠뜨렸으니 살인미수, 그것도 모자라 피해자 아버지까지 찾아와서 폭행. 넌 죄질이 나빠도 너무 나쁘다. 뇌옥에 최소 이십 년은 들어가 있어야 할 거야."

"이십 년이라고요?"

이십 년은 고사하고 이틀도 감당 못 할 그였기에 양호는 새하얗게 질렸다.

"아닙니다, 그냥 비무를 하다가 그렇게 된 거라고요!"

"늦었어. 넌 황천각주 앞에서 직접 자백했다."

궁지에 몰린 양호가 지금껏 온갖 악행의 방패막이가 되어 준 사람을 내세웠다.

"우리 아버지가 누군지 아십니까?"

"안다. 백도귀인거."

"내게 누명을 씌우면 우리 아버지가 그냥 있지 않으실 겁니다."

"누명 같은 소리 하네. 정말 누명 한 번 씌워봐?"

내 기세에 놈이 움찔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네 아버지는 바빠서 널 돌볼 틈이 없을 거야. 네 아버지도 황천각 조사관 외압 혐의로 체포할 생각이거든."

지금 이 상황의 압박감을 십대의 양호는 견디지 못했다.

"우리 아버지가 당신 그냥 두지 않을 거야. 뇌옥에서 나와서 당신에게 복수할 거라고. 아니, 뇌옥 안에서도 당신 죽일 수 있어! 그러니 잘 생각해야...."

퍼억!

말이 끝나기 전에 내 주먹이 사정없이 놈의 배에 박혔다.

배를 부여잡으며 바닥에 주저앉은 양호에게 날벼락이 더해졌다.

"황천각주 협박죄까지 추가하면 삼십 년인데."

양호가 공포에 질려 고개를 들었다.

"... 안 돼요, 살려주세요!"

"인심 썼다. 그건 까준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좋아, 널 용서해줘야 할 이유를 한 가지만 대봐. 네 아버지 타령은 그만하고."

"그게...."

"사람 살린 적 있어? 누굴 도운 적은? 없어? 그럼 착한 일 비슷한 것이라도 말해 봐. 억지로 지어내기라도 해봐."

"...."

"지어낼 수도 없지? 해본 적이 없는 일이니 갑자기 지어내기가 어렵지. 이런 널 왜 용서해야 하지?"

"앞, 앞으로 착하게 살겠습니다!"

"그래, 뇌옥에서 죗값 치르고 나와서 그렇게 살아."

휘이이익, 퍼억!

내가 놈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턱이 돌아가며 그대로 정신을 잃으며 쓰러졌다.

"각으로 이송해."

여기서 반쯤 죽여줄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 놈에게 진짜 지옥은 뇌옥에 이십 년간 갇혀 지내는 것이 될 테니까. 그냥 한 협박이 아니었다. 정말 형량을 이십 년 때려서 처넣을 작정이다.

본교의 뇌옥은 인권은 철저히 무시되는 지옥 같은 곳이었으니까. 장담하건대 이놈은 채 한 달도 못 버티고 자결하고 말 거다.

'개과천선? 그럴 놈이었다면 애초에 이런 악독한 짓을 하지도 않았겠지.'

입구에 있던 두 놈이 달아나려고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입구를 막아서는 무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서대룡과 황천각의 집행무인들이었다. 마군이나 되니까 개기지 본교의 그 어떤 무인들보다 무섭다고 알려진 그들이었다.

두 녀석이 오줌을 지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저희는 시키는 대로만 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벌도 벌이지만 우선 녀석들이 해줘야 할 역할이 있다.

"있는 그대로 불지 않으면 너희가 전부 뒤집어쓴다."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치 증언하면 용서할 것 같은 어조로 말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증언을 받으면 이놈들 역시 뇌옥행이다. 악행을 주도한 양호보다야 형량이 적겠지만, 최소 오 년은 때려서 처넣을 작정이다.

이놈들을 본보기로 삼으면 앞으로 무관이나 학관에서 감히 동기를 괴롭히는 놈이 나오겠는가?

"취조실로 데려가서 진술받아!"

"네!"

집행무인들이 세 사람의 혈도를 제압한 후 교로 이송했다.

지켜보고 있던 손님 중 하나가 참지 못하고 박수를 쳤다.

짝짝짝!

그러자 나머지들도 일제히 환호했다. 조춘배가 하지 못한 만세를 불렀다.

아마도 내가 아니었다면 이런 반응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난 천마의 아들 아닌가? 환호를 질러도 괜찮은 상황이었다.

내가 그들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억울한 일 있으면 황천각으로 고하시오. 내가 황천각주로 있는 한, 어떤 외압도 통하지 않을 겁니다."

박수가 더욱 크게 터졌다. 마존을 겁내지 않으니, 다른 어떤 외압이 통한다고 생각하겠는가?

마무리는 농담으로 했다.

"아까 그놈처럼 누가 아버지 불러온다고 겁주면, 나도 우리 아버지 부르겠소!"

사방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때 수하 하나가 와서 내게 뭔가를 전했다. 그 기쁜 소식을 곧장 곽수에게 전했다.

"이곳에 오기 전에 마의께서 아드님을 치료했습니다."

"정말이십니까? 그 귀하신 분께서 제 아들 치료를요?"

"제겐 아드님이 더 귀합니다. 그리고 지금 막 깨어났다고 하니, 어서 가보시지요."

"으아아아!"

너무 놀란 곽수가 비명을 질렀다.

"아! 동아, 동아! 살았구나! 우리 아들이 살았어!"

주점 주인 조춘배가 그를 부둥켜안았다.

"잘됐네, 잘됐어."

두 사람을 아는 사람들이 몰려와서 축하해 주었다.

곽수는 감격의 눈물을 쏟았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큰절을 올리려는 그를 제지했다.

"그대는 평생 본교를 위해 헌신하지 않았소? 당연히 본교가 그대를 지켜줘야지요."

평생 묵묵히 본교 어디선가 헌신해준 이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본교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거다. 지금의 본교는 이런 당연한 고마움이 사라지고 없다.

"본교가 그대에게 감사하오."

내가 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내 마음이 진심임을 느낀 곽수가 눈물을 떨어뜨렸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어서 아들 보러 가셔야지요."

"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가 서둘러 아들을 보러 달려갔다. 주점 주인장 조춘배가 내게 말했다.

"언제든 오시면 술과 안주는 그냥 내어드리겠습니다."

"고맙네. 다음에 와서 자네 술 한잔 얻어먹겠네."

"그래 주시면 제가 영광입니다."

조춘배가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함께 있던 손님들도 모두 허리를 굽혔다. 그들에게 오늘처럼 통쾌한 일은 처음일 것이다.

그들마저 인사를 하고 물러나자 뒤에 서 있던 이안과 서대룡이 내게 걸어왔다.

서대룡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데... 정말 괜찮겠습니까?"

양호뿐만 아니라 그의 부친인 백도귀까지 체포할 테니, 다시 혈천도마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리게 될 것이다.

"괜찮겠냐? 또 난리 나겠지."

"걱정됩니다."

"이건 네가 가져온 사건이잖아? 도마의 큰 칼에 나를 묻으려고."

"그렇긴 하지만요."

서대룡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사건은 내놓지 말 걸 그랬나, 후회가 표정에 드러났다.

간절히 변화를 꿈꾸는 서대룡에게, 여전히 변화를 두려워하는 이안에게 난 힘차게 말했다.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도 안 했다. 그러니 마음 흔들리지 말고 정신줄 꽉 잡아!"

제29회 우리가 겁내야 할 것은.

당연히 혈천도마나 도귀들부터 찾아올 줄 알았다.

하지만 양호를 체포한 일에 대한 첫 반발은 내부에서부터 일어났다.

삼십여 명에 달하는 황천각 조사관이 대청에 모여서 나를 부른 것이다.

이번 일을 주도한 사람은 최고참 특별조사관 곡명(曲銘)이었다.

"직접 집무실로 찾아봬야 하는데, 인원이 너무 많아서 이렇게 무례를 범했습니다."

"할 말이 있는 게 아니라 싸우자고 찾아온 것 같은데?"

"절대 아닙니다, 오해 마시길."

그들은 하나의 마음으로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눈빛만 봐도 대충 알 수 있었다. 불만이 있어서 찾아온 사람과 마지못해 함께 움직인 사람이 누군지를.

곡명이 모두를 대표해서 나섰다.

"본각에서 이미 무죄로 종결한 사건을 재조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랬지."

"그건 본각 조사관들의 사기와 권위를 무너뜨리는 행동입니다."

내가 곡명 뒤에 선 조사관들에게 물었다.

"자네들도 그렇게 생각하나?"

"네, 그렇습니다."

그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내 생각은 좀 다른데? 오히려 이번 양호 사건이 본 각의 권위를 무너뜨렸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아주 심각하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런 상식적인 일을 굳이 설명해야 알 정도인가? 이거 실망이군."

그러자 곡명이 표정을 굳히며 반박했다.

"비상식적인 일은 이미 각주님께서 하셨습니다."

"이번에 내가 양호를 체포할 때, 놈이 사람들 앞에서 다 자백했다는 소리 들었나?"

"들었습니다."

"근데 뭐야? 대체 왜 몰려온 거야?"

"저희가 드리는 말씀은 이미 종결한 사건의 재조사에 대한 것입니다."

"원칙의 문제다?"

"그렇습니다. 전례에 없던 일이기도 하고요."

"곡 조사관. 죄 없는 아이가 맞아서 죽을 뻔했고, 죄를 지은 놈은 붙잡아서 자백까지 받았어. 당연히 재조사해야 하지 않겠어? 이 상황에서 원칙을 내세우는 자네가 어떻게 보일 것 같나?"

"구태의연하다고 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조직에 있어 원칙은 그만큼 중요하니까요."

고지식한 것인지, 아니면 나를 압박하려는 것인지. 그는 한 발도 물러나려 하지 않았다.

"좋아, 그럼 각자의 생각을 알아보지. 재조사가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쪽으로!"

단체행동을 하러 왔으니, 지금 움직이는 사람이 있겠는가 싶지만.

한 사람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그는 절대적인 나의 지지자 서대룡이었다. 그가 나와 친분이 깊다는 것을 모두 알았기에, 파급되는 동요는 없었다.

"나의 충신이자 일당백 서 조사관이군."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개인적인 친분으로 움직인 것이 되잖습니까?"

"아니었나?"

"아닙니다. 각주님에 대한 충성심과는 별개로 이번 사건은 재조사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조사가 미흡했습니다."

곡명을 비롯한 몇몇 조사관들이 노골적으로 인상을 굳혔지만, 서대룡은 차분히 본인의 생각을 밝혔다.

"외압이 있었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고요."

"좋아. 이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

내가 이번에도 손을 번쩍 들며 조사관들을 쳐다보았다.

설마 있을까 싶은 상황에서 한 사람이 나섰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는 지난 마군 조사 때 고당에게 다쳤던 무인이었다. 나는 그의 복수를 해줬을 뿐만 아니라, 마의에게 부탁해 최고의 치료를 받게 해주었다.

"익호(翼虎)입니다. 그때는 제대로 인사드리지 못했습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다친 몸은 어때?"

"괜찮습니다."

"다행이군."

익호 이외에 다른 조사관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곡명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하긴, 나를 본 것은 불과 며칠이지만, 곡명과는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십수 년을 함께 해왔을 테니까.

그때 한 사람이 더 움직였다.

"양군(梁君)입니다. 익호와 동기입니다. 익호의 복수를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양군이 나서주는 바람에 몇 사람이 용기를 내서 내 쪽으로 옮겨왔다. 그들은 개인적인 친분 때문에 옮긴 것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생각해도 이번 조사는 잘못되었다고 여기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곡명 쪽에 서 있는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내가 그들 중 한 사람을 불러냈다. 그는 바로 오늘 일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었다.

"종화(從華) 조사관!"

"네."

종화가 바로 이번 사건을 담당했던 조사관이었다. 백도귀 아들을 무죄로 만든 바로 그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저는 사건을 제대로 조사했습니다."

종화에게 다가가서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자네 혹시 도귀에게 뇌물 받았나?"

순간 종화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를 대신해 화를 낸 사람은 곡명이었다.

"그게 무슨 망발이십니까?"

난 차가운 기도를 드러내며 곡명에게 물었다.

"그럼 자네가 받았나?"

"아닙니다."

"한데 자네가 왜 나서지? 상관에게 망발이란 망발까지 하면서?"

"제 수하 일이니까요."

"내 수하기도 해. 아닌가?"

순간 곡명은 자신이 말실수했음을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허락 없이 나서지 말도록."

"네."

그의 입을 단속한 후 다시 종화에게 말했다.

"백도귀에게 돈 받았나?"

"아닙니다."

"맹세하나?"

"목숨 걸고 맹세합니다."

그는 결백하다는 듯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못 믿으시겠다면 조사해 보십시오."

"이미 조사했다. 정말 돈은 받지 않았더군."

내 말에 모두 깜짝 놀랐다. 이미 조사했다는 뜻은 내사(內査)를 끝냈다는 의미.

나서지 말라고 했지만 곡명은 참지 못했다.

"우리 조사관들은 특별조사가 아니면 내사할 수 없습니다."

"특별조사로 진행했네. 교주님 직속 명령까지 받아와서 외부 조사로."

흠칫 놀라는 곡명에게 차갑게 물었다.

"교주님이 나를 이곳 각주로 임명했을 때, 이 정도도 밀어주지 않을 거로 생각했나?"

"아닙니다."

내가 모두를 돌아보며 차분히 말했다.

"궁금하더군. 돈도 받지 않았는데 왜 사건을 이렇게 덮었을까?"

"저는 사건을 덮지 않았습니다. 제 조사에 의하면...."

내가 종화의 말을 끊었다.

"놈이 자네 여동생을 죽이겠다고 해서?"

순간 종화가 얼어붙었다. 그의 표정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걸 아셨습니까?

"자네를 조사한 결과, 자네는 보기 드물게 청렴한 사람이더군. 나는 믿지 않았어. 더 뒤져보라고 했어. 세상에 돈 싫어하는 사람 없다고. 한데 놀랍게도 자넨 정말로 청렴한 사람이었어. 그럼 이렇게 청렴한 사람이 왜 사건을 대충 무마하고 넘어갔을까? 자네에게 한 가지 큰 약점이 있더군. 유일한 가족인 어린 여동생이."

종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놀란 곡명이 그에게 물었다.

"정말 놈에게 협박받았나?"

종화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놈아, 말해! 정말 협박받았냐고!"

곡명이 닦달했지만, 종화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왜 곡명이 이번 일에 앞장서 나섰는지도 알고 있다. 종화는 곡명이 가장 아끼는 후배였다. 이번 일로 종화에게 불이익이 가지 않도록 도우려고 나선 것이다.

내가 종화에게 말했다.

"여동생을 걱정하는 거라면 괜찮아. 이미 집행무인들을 보내서 안가(安家)에서 지키고 있으니까. 이번 사건이 완전히 해결될 때까지 동생은 안전할 거다."

그 말에 비로소 종화의 얼굴에 안도감이 피어올랐다. 이내 그가 모든 것을 인정한다는 듯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본 곡명이 탄식했다.

"아아."

오랫동안 함께 일했으니 종화가 여동생을 얼마나 끔찍이 아끼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이 있었는지 그도 몰랐던 모양이다.

난 고개를 푹 숙인 종화에게 말했다.

"협박을 받았더라도 이러면 안 된다는 것 알지?"

"네, 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지켜보는 조사관들의 표정은 저마다 달랐지만 다들 분노하고 있었다. 이번 일은 남 일이 아니었다. 언제 자신이 겪을지 모를 일.

"일어나라."

"네."

종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약 내가 각주가 된 이후에 일어난 일이었다면 자넬 용서하지 않았을 거야. 하나 이번 일은 내가 오기 전의 일이니까 특별히 용서한다."

"정말 저를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내가 용서하는 게 아니라 자네의 청렴했던 지난 삶이 자넬 용서한 거야. 이제 청렴했던 자네의 지난 삶은 이번 일로 다 사라졌다. 처음부터 다시 쌓아나가도록."

자신을 용서할지 몰랐기에 종화는 크게 감동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정작 그를 감동하게 한 것은 다음 말이었다.

"내가 각주로 온 이상 그대들의 가족은 내 가족과 같다. 가족 건든 새끼는 내가 다 작살낸다. 왜? 안 믿기나? 난 마군주도 베었다. 도귀라고 무서워할 것 같나?"

나를 향하는 시선이 점점 뜨거워짐을 느꼈다.

"이제부터 본각은 그 어떤 외압도 허용하지 않는다. 이 순간부터 단돈 한 푼이라도 받아 챙기면 중죄에 처한다. 너희가 처넣은 죄수들과 같은 뇌옥에 갇힐 각오를 해야 할 거다. 못 지킬 것 같으면 본 각에서 나가도록."

다양한 반응이 나왔다. 그들의 얼굴에서 피어오르는 기쁨과 흥분, 반감, 불신....

"대신 이번처럼 너희들을 건드는 놈 역시 그냥 두지 않을 거다. 협박을 받았을 때 내게 말하면 반드시 가족을 지켜줄 거다. 이미 납치되었다 해도 반드시 구해줄 거다. 날 믿어도 좋다. 내가 안 미더우면 교주님을 믿어라. 아버지께 구해달라고 간청드려서라도 꼭 구해낼 테니까. 그러니 외압이 들어오면 반드시 내게 보고하도록."

나는 진심을 말하고 있었다. 나와 내 가족이 안전하다는 확신이 있을 때, 황천각은 제대로 작동할 것이다.

"나는 상대가 누구든 악행을 저질렀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설령 천마전에서 잘못을 저질렀어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다. 교주님이 죄를 지으면 교주님도 체포할 거다!"

순간 모두 숨을 멈췄다. 천마를 체포하겠다는 말은, 지금 당장 천마에게 죽어도 이상한 것이 없는 말이었다.

"내가 겁내는 것은 교주님도, 팔마존도 아니다. 내가 겁나는 것은 우리가 병신이 되는 거다. 지켜야 할 사람을 못 지켜주고, 벌을 받아야 할 놈이 히죽대며 빠져나가는 것을 막지 못하는 거다. 어제 그놈 붙잡으니까 객잔에 있던 사람들이 얼마나 좋았으면 손뼉을 다 치더라. 나는 주목받는 것을 좋아하는 놈이라서 앞으로 계속 박수받을 거다."

내 진심이 전해지면서 조사관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특히 협박을 받았던 종화는 눈시울이 붉어져서는 어쩔 줄을 몰랐다.

그때 곡명 뒤쪽에 서 있던 조사관이 내 쪽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그녀는 바로 서대룡이 좋아하는 조향이었다.

"저도 각주님과 함께 박수받고 싶어요."

그게 시작이었다. 하나둘씩 조사관들이 내 쪽으로 걸어왔다. 어떤 이들은 진심이었고, 또 어떤 이들은 분위기상 마지못해 건너왔다. 상관없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들 모두가 한 방향으로 움직였다는 점이니까.

이제 마지막 남은 사람들은 곡명이었다.

"내가 세운 새로운 원칙이 마음에 들지 않나?"

"아닙니다."

"한데 왜 거기에 서 있나?"

"...."

"자존심이 상해서인가?"

"아뇨. 각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진심인지 모르겠습니다."

천만에. 그는 지금 자존심이 상했다. 후배를 위하는 좋은 의도로 왔지만, 함께 온 명분도 기세도 모두 사라졌고 앞서 나섰다가 무안을 당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이 몇 걸음이 그에게 너무 힘든 거다.

나는 저 상처 입은 자존심을 어루만져 줘야 한다. 그게 수장의 역할이니까. 분열보다는 단합이 필요한 시기였고 그는 고지식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사실 종화를 뒤질 때, 그도 싹 뒤졌다.

"앞서 했던 말은 모두 진심이네. 내 진심을 현실로 만들려면 자네의 경험과 도움이 꼭 필요하네."

내가 먼저 곡명에게 손을 내밀었다.

"날 도와주게."

"감사합니다, 각주님."

곡명이 내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이 일은 곡명을 달래는 일 이상의 가치가 있다. 이 모습을 지켜보는 조사관들 때문이다.

나는 바로 서대룡에게 명령을 내렸다.

"서 조사관."

"네."

"지금 당장 집행무인들과 함께 가서 양호의 부친인 백도귀 양태(梁泰)를 체포하라. 죄명은 특수협박죄다."

그때 곡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순순히 체포에 응하지 않을 겁니다."

난 모두가 들으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라고 해, 그랬다간 도귀 전체를 날려버릴 테니까."

대체 뭘 믿고 이러느냐는 생각들이겠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내 앞에 선 황천각 조사관들은 입각한 이래 단 한 번도 도귀 전체를 날려버린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들은 흥분하고 있었다. 벌써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 열기가 느껴진다.

이 뜨거움으로 확신할 수 있겠다. 오늘은 황천각이 생긴 이래 사기가 가장 높은 날이다.

제30회 칼이 우는 이유는.

집행무인들을 거느리고 나간 서대룡이 허탕을 치고 돌아왔다.

"양태가 체포에 불응했습니다. 남도종 영역에서는 도귀들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웠습니다. 억지로 끌고 오려 했는데 놈의 수하들이 나서는 바람에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백도귀이니 직속 수하만 백 명이었다. 그가 불응한다면, 체포가 쉽지 않은 상황.

사기가 오를 대로 오른 조사관들은 흥분했다.

"우릴 무시하는 짓입니다."

"집행무인 전부를 데려가서라도 강제로 체포해야 합니다."

곡명은 젊은 조사관들의 흥분을 가라앉히며 신중론을 펼쳤다.

"신중히 처리하셔야 합니다. 도귀와 충돌이 일어난다면 집행무인들이 많이 다칠 겁니다."

"그렇다고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조사관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오가는 와중에 난 서류 한 장을 그들에게 내밀었다.

"자, 이걸 놈에게 보내."

"헉!"

내가 보여준 것은 소환장이었는데, 모두가 놀란 이유는 내가 거기에 적은 죄명 때문이었다.

반란죄.

"체포에 불응했다고 반란죄가 적용됩니까?"

고참인 곡명조차 알지 못하는 내용이었다.

"돼. 우린 교주님이 직접 임명한 직이고, 백도귀는 혈천도마가 임명한 직이다. 우리 명령과 혈천도마의 명령은 상충할 수 없다. 결국 놈은 교주님의 명령을 거역한 것과 같아. 직접 갈 것도 없다. 인편으로 소환장 보내면 제 발로 달려올 거다."

그는 올 것이다. 까닥 잘못했다가 도귀 전체에 반란죄의 불똥이 튀면, 그는 도귀들 손에 죽을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소환장을 받아든 서대룡이 곧장 달려나갔다.

과연 소환장이 전해지고 채 반 시진이 지나지 않아서 양태가 직접 황천각에 출두했다.

'반란죄'라는 말은 아무리 성질이 더러운 상대라도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마법의 단어였다.

하지만 그를 여기까지 오게 할 수는 있었지만, 자백하게 할 수는 없었다.

조사관들이 심문을 시작한 지 한 시진이 지나도록 놈은 종화의 여동생을 죽이겠다고 협박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예상했던 바였기에 내가 직접 조사실로 들어갔다.

양태는 내공이 제압당한 채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내가 들어가자 움찔 놀랐다. 아무리 백도귀의 기세가 좋다지만, 마군주를 벤 요즘의 내 기세에 견줄 수는 없었다.

"이공자님."

"이공자가 아니라 황천각주라 부르셔야지요."

"제가 결례했습니다. 각주님. 소환장에 반란죄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대체 그 무슨 말씀이신지요?"

"이래야 우리 양 무인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내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하자, 양태도 부드럽게 대응했다.

"체포에 불응한 것은 사죄드리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조직에 있다 보면 이래저래 눈치를 봐야 할 일들이 많지 않습니까? 수하들 보기에 체면도 있고."

"이해하오."

"애초에 이렇게 일이 커질 사안이 아니었습니다. 얘들 장난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없잖아 그런 면이 있습니다."

어떻게 나오나 싶어 내가 순순히 말을 받아주자 양태는 옳다구나 싶었는지 나를 회유하기 시작했다.

"말이 통하는 분일 줄 알았습니다. 좋게 해결할 수 있겠네요."

"어떻게요?"

"각주님께서는 처음으로 중책을 맡으시지 않으셨습니까? 앞으로 황천각을 운영하다 보면 외부 도움이 많이 필요할 겁니다. 돈도 많이 들 테고요."

돌려 말하고 있지만 결국 뇌물을 주겠다는 의미였다.

"어디 그뿐입니까? 나중에 정식으로 후계자가 되시려면 우리 쪽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겁니다. 아무래도 지금은 다들 대공자 쪽에 줄들을 대고 있으니...."

"도움 주신다면 저야 좋지요. 많이 도와주시오."

그러자 양태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역시 호탕한 분이시군요. 앞으로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조만간에 좋은 자리 한 번 만들지요."

그가 내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시게요?"

"이야기 끝난 것 아니었습니까?"

"나중에 뇌옥에서 나오면 날 도와주겠다는 뜻 아니었소?"

뇌옥이란 말에 양태의 표정이 굳어졌다.

"무슨 농담을 이리 섭섭하게 하십니까?"

난 그를 올려다보며 차가운 기도를 드러냈다.

"이게 농담처럼 들리시오? 황천각 조사관의 가족을 죽이겠다는 협박죄에 관한 이야긴데."

"그런 협박, 한 적 없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당신 진술은 상관없소. 이미 협박당한 조사관의 진술이 받아들여졌으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본교에는 이런 교칙이 있소. 황천각 무인들의 진술은 그 어떤 상반되는 진술에 우선한다. 교칙을 집행하는 황천각의 조사관들의 권위를 지켜주기 위해서 만들어진 조항이오. 몰랐을 거요. 나도 이런 법이 있다는 것을 이번에 알았으니까. 이게 다 당신 같은 사람들 때문이오. 우기면 다 되는 줄 아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거든."

당황한 양태는 뭐라 말을 못 했다. 처음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해도 이런 상황이 펼쳐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거기에 청천벽력이 더해졌다.

"순순히 자백하면 십 년 형으로 줄여주겠소. 부인하면 이십 년 형이오. 더 이상 협상은 없소."

"뭐, 뭐라고? 십 년?"

너무 놀란 나머지 양태는 말까지 더듬었다.

"선택하시오."

"당신 미쳤어?"

양태의 참았던 본성이 나오면서 말이 거칠어졌다.

"미쳐야 한다면 기꺼이. 제정신으로는 당신 같은 사람들 상대하기 어려울 것 같긴 해. 자, 고민할 시간 반 각 주겠소."

결국 양태의 평정심이 깨어졌다. 그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말했다.

"웃기지 마시오. 십 년은 고사하고 난 단 하루도 뇌옥에 들어갈 생각이 없으니까."

더는 대화할 가치가 없었기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판은 며칠 내로 열릴 거요."

"누구 마음대로?"

"내 마음대로. 당신도 당신 마음대로 살잖아?"

놈의 다급한 말이 돌아서는 나를 붙잡았다.

"잠깐! 이공자님! 각주님!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몰라서 묻나? 네 아들이 친구를 폭행해서 죽일 뻔했어. 단순히 한 번 싸우다 다친 게 아니라 몇 년을 매일같이 괴롭혔지. 한데 부모란 자는 사건을 묻기 위해서 조사관에게 가족을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고. 한데 왜 이러다니?"

"창고나 지키는 놈과 우리가 같소? 적어도 상급자 대우는 해줘야 할 것 아니오? 지금까지 이 정도는 눈감고 넘어가 줬잖소?"

서글픈 말이었고, 동시에 무서운 말이었다. 나를 나아가게 하는 동력이 되는 말이기도 했다.

"이제부터는 아니오."

"날 건들면 마존께서 그냥 계시지 않을 거외다."

"그냥 있을 거요. 마군주를 베었을 때도 그냥 있었는데, 당신이 뭐라고?"

드디어 양태는 폭발했다. 자기가 좋게 나가서 이런 꼴을 당한다는 잘못된 결론을 내린 것이다.

꽝!

책상을 내리친 양태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이보시오, 황천각주! 나는 목숨을 나눈 친구가 많은 사람이오!"

"장담하건대 아무도 당신을 위해 나서진 않을 거야. 누가 당신 같은 자를 진심으로 좋아해서 목숨을 걸겠어?"

부들거리는 그에게 던진 한마디.

"왜? 우리 가족도 죽인다고 해보지?"

양태는 흥분한 상태였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를 악물며 분노를 삼키는 놈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무너진 것은 화무기 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일개 백도귀 따위가 황천각 조사관을 협박하고, 나에게까지 은근히 협박할 정도로 기강이 무너져 있었으니.

"순순히 자백하시오."

차분히 말하고 그곳에서 나왔다. 문이 닫히자 애꿎은 책상 내리치는 소리만 들려왔다.

* * *

그날 바로 혈천도마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내 거처 앞마당에서 자신의 큰 칼을 바닥에 꽂아둔 채 그 앞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어서 오게, 이공자. 아니, 이젠 황천각주라 불러야 하나?"

"편하신 대로 부르십시오."

"나는 이공자가 편하니 이공자라 부르겠네."

"그러시지요."

"이리 와서 한잔하세."

나는 순순히 그의 앞에 마주 앉았다. 같이 마시자면서 내게 술을 따라주진 않았다.

"분명 경고했을 텐데. 날 자주 봐서 좋을 것 없다고."

"절 찾아오는 것은 언제나 어르신입니다."

잠시 나를 쳐다보던 혈천도마가 불쑥 지난 일을 꺼냈다.

"최근에 자네에 대해 새롭게 느꼈던 순간이 있었어. 비무에서 이기고 교주님께 소원을 빌 때, 난 속으로 이렇게 외쳤네. 그래, 저거지. 똑똑한 놈이라면 저런 소원을 빌어야지."

"제가 생각해도 참 괜찮은 소원이었습니다."

"그래, 그날부터 시작이었지."

혈천도마가 자신의 잔을 비우고는 다시 술을 채웠다. 아직 내게 술잔을 내주지 않고 있었다. 그가 다시 술을 자작했다.

혈천도마는 등 뒤에 꽂아둔 멸천대도를 벽처럼 기대앉았는데 깡마른 그에 비해 압도적인 크기의 대도는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정말 멋진 칼입니다."

"자넨 저 칼이 두렵지 않은가?"

"제가 왜 두려워해야 합니까?"

"자넨 내 칼을 울게 하거든."

나는 뚫어질 듯 날아드는 혈천도마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칼이 우는 것이 어디 저 때문이겠습니까?"

"그럼 뭣 때문에 우는가?"

"한탄스러워서 우는 거죠."

"뭐가?"

"제자분은 비무대회에서 제게 산공독을 탔고, 또 다른 제자는 저를 찾아와서 제 수하를 욕보였습니다. 동생분은 마군을 이용해서 사리사욕을 채웠고 수하는 황천각 조사관을 죽이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칼이 우는 것은 주인의 주변이 주인의 인품에 못 미치는 것을 보며 한탄해서 우는 겁니다."

혈천도마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말솜씨가 청산유수로군."

"사실을 읊었을 뿐인데 달변가가 되는군요."

"자네 말은 틀렸네."

"가르침을 주십시오."

"우선 자네는 주변이 내 인품에 못 미친다고 했는데, 아니네. 그들은 딱 내 인품에 어울린다네. 나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지."

역시 만만치 않은 늙은이다. 자존심이나 명예욕이 높은 자가 오히려 상대하기 쉬운 법인데.

"그리고 엄밀히 따지자면 그 사람들 잘못이 아니라네. 자네 탓이지."

"저 때문이라고요?"

"용이 승천할 때는 비바람을 몰고 오는 법이거든."

"누가 용인가요?"

"누구긴, 자네지. 그 비바람에 내 사람들이 휩쓸려 날아가고 있지 않나?"

"승천은 무슨 승천입니까? 미꾸라지가 흙탕물에서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거죠."

"미꾸라지가 뱀 되고, 뱀이 용 되는 거지."

다시 혈천도마가 술잔을 비웠다. 여전히 그는 혼자만 술을 마셨다.

"젠장! 다 좋은데 왜 하필 내 사람이 휩쓸리는 거지?"

한탄과 함께 술잔을 내려놓은 혈천도마가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이 찾아온 목적을 밝혔다.

"갇혀 있는 백도귀를 풀어주게. 자네 때문에 요즘 우리 남도종 사기가 바닥이야."

"조사해서 죄가 없으면 풀려날 겁니다."

혈천도마가 마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앞서도 이 마기의 강렬함을 느꼈듯, 아버지가 아직은 내가 혈천도마를 감당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확실히 마존의 무공은 격이 다르다.

"자네에게 충고 하나 하지."

"하지 마십시오."

"뭐?"

혈천도마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지만 나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부탁하러 왔으면 부탁만 하십시오. 부탁도 하고, 충고도 하고. 그러지 마십시오. 요즘 젊은 사람들은 그런 사람 비호감으로 여깁니다."

버럭 화를 낼 만한 상황이었는데, 늙은 생강이 맵긴 매웠다. 그는 오히려 쏟아내던 마기를 거두었다.

"맞는 말이야. 이젠 이런 직언을 해주는 사람이 드물지."

"경계하셔야 합니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니까요."

"누군들 고이고 싶어 고이겠는가? 몸을 담그고 있다 보면 정도 들고, 흘려보내야 할 기회를 놓치기도 하는 게지."

"그렇다고 우리가 썩은 물에 몸을 담그진 않잖습니까? 이번 기회에 썩은 물은 흘려보내시지요. 지켜줄 만한 가치가 없는 자입니다."

혈천도마가 들고 있던 잔을 비웠다. 시원하게 잔을 비운 후 그 잔을 내게 내밀었다.

"내 술 한잔 받을 텐가?"

함께 자리한 후 처음으로 권하는 술이었다. 나는 순순히 술잔을 받아들었다.

술을 따르며 혈천도마가 말했다.

"좋아, 썩은 물은 흘려버리겠네."

"과연 현명하십니다."

내가 잔을 비우려던 바로 그 순간, 혈천도마가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대신 앞으로 이공자가 내 물이 되어주게."

제31회 미친놈은 너다.

입으로 향하던 내 술잔이 허공에서 딱 멈췄다.

자신의 물이 되어달라고? 설마?

"무슨 뜻인지요?"

"내 사람이 되어 달라는 거네."

도마가 이렇게 나올 줄은 예상치 못했다. 그는 형을 지지하는 것으로 공공연히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형을 버리고 나를 선택한다고? 정말이지 혈천도마를 만난 이래 가장 의외의 순간이었다.

"이 공자."

"네."

"천마가 되고 싶은가?"

"되고 싶습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럼 그 술을 마시게. 내가 자네의 뒷배가 되어 주겠네."

"어르신께서는 형을 지지하시잖습니까?"

"자네가 이런 미친놈이었다는 것을 몰랐을 때의 선택이지."

"용도 되었다 미친놈도 되었다 제가 바쁘군요."

미친놈은 너다.

난 그의 동생을 죽였고, 제자를 폐인으로 만들었으며, 수하를 가둬둔 상황이었다. 한데도 이 늙은이는 내 뒷배가 되어 주겠다는 제안을 하고 있다. 이 늙은이는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라면 뭐든 팔아치울 인간이다.

"저는 어르신의 동생을 죽였습니다."

"부모 품 떠나면 남이지. 혈육이 죽었다고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느낀다고? 웃기지 말라고 하게. 인간이란 게 제 손톱 아래 박힌 가시가 더 아픈 법이라네."

이 늙은이, 지금 뱉는 말들은 다 진심이다.

"어차피 대공자와는 정식으로 손을 잡은 것도 아니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마음이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거지."

"어르신을 얻는다면 천군만마를 얻는 일이 될 겁니다. 한데...."

"뭘 망설이는 건가?"

"제가 어르신을 믿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형을 버리는 것처럼, 저를 버리실 수도 있을 테니까요."

"버릴 상황이 되면 버려야지. 나라고 자넬 믿어서 이러겠나? 지금까지 난 누굴 믿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네."

"하면 왜 저를 선택하신 겁니까?"

"이렇게 겁 없이 밀어붙이는 자네의 광기라면 내 운명을 걸어볼 수 있겠다 싶어서."

"결국 미친놈이라서 선택했다는 뜻이군요."

"그 광기로 싹 다 잡아 먹어버리는 거야."

만약 내가 이 나이 때의 청년이었다면, 선택받았다는 우쭐함에 혈천도마의 말을 전적으로 믿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늙은이들이 젊은이들을 이용해 먹을 때 사용하는 치사한 수법을 잘 안다.

천마가 되고 싶은가?

앞서 했던 질문이 그러하다. 마치 그의 손을 잡으면 천마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이 들게 하는 말이다.

지금 던지는 이런 질문도 같은 속셈이 깃들어 있다.

"만약 천마가 된다면 어떤 천마가 될 텐가?"

"적어도 제가 다스리는 본교는 마존이 나서서 황천각주에게 외압을 넣지는 못할 겁니다."

"하하하. 역시 내 눈은 정확했군."

기분이 더러워도 절대 내색하지 않는 저 능구렁이 같은 태도도.

모두가 이 순간의 내 결정을 현혹하는 저 늙은이의 고단수다.

일단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인간관계의 밀고 당김에 있어, 당긴다고 끌려가면 매력 없는 먹잇감이 되는 법.

"저를 높이 평가해주시는 것은 감사한 일이나, 지금은 제 맡은 일을 해야 할 때 같습니다. 아버지가 뭐라 생각하시겠습니까? 중책을 맡겼더니 일은 안 하고 정치질이나 한다지 않겠습니까?"

"교주님을 앞세워 숨는다. 과연 현명한 선택일까?"

"무슨 뜻입니까?"

"황천각주? 만약 자네가 그 일을 잘 해낸다면 어떻게 될까? 교주님이 자넬 계속 황천각주 자리에 앉혀둔다면? 평생 황천각주로 썩을 생각인가? 지금 그 일은 과정에 불과해. 자네가 선택해야 하는 길은 언제나 하나라네. 후계자가 되느냐 마느냐의 갈림길 중 하나지. 그걸 헷갈리는 순간, 길을 잃고 황천각이라는 허울 좋은 숲속을 헤매게 되겠지."

그는 아버지를 끌어들여서 설득을 마무리 지었다.

"오히려 교주님은 나와 손잡는 모습을 주목하실 거네. 내가 선택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자네의 몸집은 커질 테고 모두의 눈에 띄게 되는 거지."

하지만 혈천도마가 간과하는 바가 하나 있다.

본교의 기강을 잡고자 하는 의지 말이다. 여기에는 내 의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도 함께 깃들어 있다.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이 술은 결정을 내리면 마시겠습니다."

내가 들고 있던 술잔을 도로 내려놓았다.

결정을 미뤘음에도 혈천도마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당연히 그래야지. 머저리처럼 마시란다고 마시면 안 되지."

혈천도마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뒤에 박아둔 멸천대도를 뽑아 들었다.

땅에서 도를 뽑아 들던 그 기세로 나를 향해 휘둘렀다.

나는 피하지 않고 날아드는 공격을 흑마검을 뽑아 막았다.

카앙!

쇳소리 섞인 폭음이 터져 나왔다. 교차한 검과 도 너머에서 혈천도마가 말했다.

"대답은 내일 듣겠네."

"오 일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서로를 노려보던 팽팽한 기 싸움도 잠시.

"사흘 후에 보세."

혈천도마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획 하늘로 솟구치더니 담장 너머로 사라졌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빠르고 대단한 신법이었다.

흑마검을 검집에 넣은 후 손목을 돌렸다.

"망할 늙은이, 아파죽겠네."

최선을 다한 공격은 아니었지만 날아든 도에 실린 공력이 보통이 아니었기에 손목이 욱신거렸다.

'이 늙은이. 은근히 상대에게 고통 주는 것을 즐기고 있어.'

자신의 무공이 우위에 있다는 것을 주지시키는 거다. 그저 늙은이의 자존심이나 악취미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혈천도마의 이런 행동에 명백한 의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혈천도마는 쿡쿡 옆구리를 찔러대서 피멍이 들게 하거나, 오늘처럼 팔이 얼얼해서 며칠 동안 고생해야 할 고통을 준다.

이 고통은 상대에게 무의식적인 두려움을 심는다. 그리고 이 물리적 폭력은 상대를 자기 뜻대로 조종하는 데 상당히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겪으면 겪을수록 만만한 늙은이가 아니라는 것을 느낀다. 동시에 아버지가 왜 나를 내세워서 칼춤을 추게 하는지도.

혈천도마와 같은 존재가 하나가 아니라 여덟이나 있었으니. 이들이 팔마존이란 이름으로 똘똘 뭉쳐 있다면, 아버지라도 상대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자기들끼리는 험담에, 뒷말에, 지지고 볶고 싸워대지만, 천마전을 상대할 때만큼은 한마음이 되는 그들이니까.

게다가 그들은 본교의 주력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없애버린다면 당장 무림맹이나 사도맹이 쳐들어올 것이다.

'내가 미친놈이라서 좋다고? 그건 내가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지 모를 때나 하는 말이지.'

거처로 들어가기 전에 이안의 개인 수련장에 잠시 들렀다.

이안은 내가 왔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수련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내가 말한 대로 기초체력 훈련 중이었다.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면서도 이안은 꾹 참으며 수련에 매진했다.

'왜 너냐고?'

내 명령이라면 미련곰탱이가 되니까. 넌 원래 미련곰탱이가 아닌데, 날 위해 기꺼이 이런 사람이 되어 주니까.

잠시 그녀가 수련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왔다.

술을 챙겨와 창가에 앉아 여유를 가졌다.

화무기를 생각하면 단 일각조차 쉴 수 없지만 그렇다고 앞만 보고 내달리기만 하진 않을 것이다. 주위를 돌아볼 여유를 잃으면 반드시 놓치는 것이 생길 테니까.

그렇게 휘영청 밝은 달을 안주 삼아 오랜만에 몇 잔의 술을 마셨다.

아버지를 생각했고, 혈천도마를 생각했으며, 또 다른 마존들을 생각했다. 화무기를 죽이고 난 뒤의 내 삶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 * *

다음 날이 되어서도 양태는 기가 꺾이지 않았다.

"흥! 황천 각주, 당신 사람 잘못 건드렸소. 날 건드는 것은 남도종 전체를 건드는 것과 같다는 것을 모르시오?"

이렇게 혈천도마를 앞세워 협박하다가.

"나를 풀어주기만 하면 없었던 일로 하겠소. 마존의 분노도 내가 직접 말씀드려서 각주에게는 아무런 해가 가지 않게 하겠소."

또 이렇게 회유도 했다.

그는 살면서 이런 절박한 상황을 겪은 적이 없었다. 기록을 보니 도귀로 시작해서 십도귀를 거쳐 백도귀가 되기까지 승승장구한 인생이었다. 고생한 적도 없었고 누구 하나 자신의 인생에 시비를 건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이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진심으로 사죄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껏 세상을 살아온 방식대로 회유와 협박을 할 뿐이었다.

나는 어제와는 달리 차분히 양태를 대했다.

"양 무인. 앉아보시오. 오늘 남도종에서 이번 사건에 유감을 표한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소."

그러자 양태가 뛸 듯이 기뻐했다.

"내가 말했잖소. 마존께서는 결코 나를 버리지 않으실 거라고. 자, 이제 날 풀어주시오."

이제 곧 풀려날 것이란 생각에 양태의 표정이 온화해졌다.

"우리 지난날은 다 잊읍시다."

마치 나를 용서해주기라도 하겠다는 그의 태도에 나는 차분히 물었다.

"왜 내가 지금 당신을 정중히 대하는 줄 아시오?"

"그야 좋게 마무리 짓자는 것 아니오?"

"아니오. 당신을 마지막으로 보는 날이기 때문이오."

"그 말이 그 말이잖소? 내가 나가고 나면 우리가 다시 볼 일은 없을 거요."

양태의 얼굴에 기쁨이 가득했다. 이제 저 얼굴이 지어야 할 진짜 표정을 찾아주어야 할 때다.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소."

"착각?"

"남도종은 우리에게 유감을 표한 게 아니라, 당신에게 표했소. 남도종의 명예를 실추시킨 당신에게 유감이라고."

"...뭐요?"

"그리고 이런 불미스러운 사건을 남도종 무인이 일으킨 점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사과했소. 피해자에게도 사과하고 보상도 약속했소.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도 했고."

"그 무슨... 개소리요? 지금껏 남도종은 이런 일로 공식적으로 사과한 적이 없소. 그 어떤 사건이 터져도."

양태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영광이겠소. 그런 남도종을 변하게 해서."

"거짓말 마시오!"

"자, 그러면 즐거운 뇌옥 생활 되시길 바라겠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늦게 양태가 고함을 지르며 난동을 피웠다. 그냥 놔두라고 했다. 저 지랄도 오늘로 마지막이었으니까.

대신 마지막까지 단 한 번도 진심 어린 반성이 없었던 행동에 대한 책임은 져야 할 것이다.

나는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서대룡에게 지시했다.

"뇌옥에 연락해서 제일 힘든 곳으로 보내."

"네."

본교의 뇌옥은 편한 구역을 가도 지옥이다. 뇌옥에 갈 바엔 참형을 당하는 것이 낫다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저 성격으론 뇌옥에서 견디지 못할 것이다. 아들 역시 마찬가지고.

나는 그들을 동정하지 않았다.

내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평생 떵떵거리며 살았을 거고, 피해자인 곽수 일가족은 비참한 인생을 살았을 테니까. 내가 모르는 곽수가 이전에도 있었을 테고, 앞으로 또 다른 곽수들이 계속 생겨났을 거다.

협박을 받았던 조사관 종화 역시 앞으로의 삶이 완전히 망가졌을 테고.

그래서 일말의 동정이나 후회도 없다.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뭐가?"

"남도종에서 왜 사과 성명을 발표한 겁니까? 지금까지 전례가 없던 일입니다."

"가서 물어봐. 왜 그랬는지."

"할 수 있으면 그랬죠. 아마 지금 분위기에 남도종을 찾아갔다간 걸어서 못 나올 겁니다."

"아니. 지금이야말로 남도종 연무장에서 춤을 춰도 무사히 걸어서 나올 수 있을 거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서대룡을 두고 난 성큼성큼 복도를 걸어가며 덧붙였다.

"앞으로 이틀 후까지는."

제32회 안주가 필요합니다.

다음 날, 마가촌에 황천각 지부를 열었다.

위치는 풍류주점 건너편에 마련되었다. 정말 소규모 지부라 그곳에는 신입조사관 하나와 집행무인 한 명만 배치되었다.

필요한 집기들이 들어가고, 현판이 붙는 모습을 지켜보던 풍류주점 주인장 조춘배가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각주님, 왜 지부를 여기 둔 겁니까?"

"만약 그대가 본교 무인들에게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칩시다. 하면 지금까지는 어떻게 했소?"

"...어떻게 하다니요?"

조춘배의 질문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어떻게 하긴. 그냥 억울하고 말았지.

"본교 무인들이 관련된 일이라면 황천각에 와서 고하면 되오. 주위에 그래 본 사람 있소?"

"아뇨,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없을 수밖에 없다. 황천각까지 오기 위해서는 본교 정문에서부터 무슨 목적으로 방문하는지 보고해야 하고, 신분 확인은 물론이고 몸수색까지 거쳐야 한다. 심지어 그런 과정을 여러 번 거쳐야 황천각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니 누가 가서 고발하겠는가? 결국 황천각은 마가촌 주민들은 버려둔 것이나 다름없었다.

"주인장께서 소문 좀 내주시오. 마가촌 주민들이 본교 무인들에게 피해를 보면 이곳 지부에 와서 고발하면 된다고."

"한데... 보복이 두려워서 다들 망설일 겁니다."

"그렇겠지요. 그래서 조만간 발표할 겁니다. 황천각 조사와 관련해서 고발자에게 보복할 시에는 참형에 처할 거라고."

"참형이라고요? 아, 정말 우리를 위해서 지부를 여시는 거군요."

조춘배는 크게 감격했다.

원래라면 그는 형식적인 일 처리라며 믿지 않았을 것이다. 저러다 결국 유명무실해지겠지 하고.

하지만 이번에 내가 백도귀 양태 부자를 처리하는 것을 직접 보고 들었기에 조춘배는 신이 났다.

"이보게들, 여기 와서 들어보게."

그가 저잣거리 사람들에게 지부의 존재를 알리기 시작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신의 억울함을 고할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숫자가 얼마가 되든 이 시도는 본교의 기강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다. 이렇게 손쉽게 고발할 수 있게 된 이상, 함부로 약자를 괴롭히는 일은 줄어들 것이다.

지부 정리가 끝나고 돌아오는 데 서대룡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진작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정말 잘하셨습니다."

"무게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지."

"무슨 뜻입니까?"

"지금까지 황천각은 무게 중심이 머리에 있었다. 팔마존의 눈치를 보며 교내 여러 조직의 문제를 해결해 왔지. 원래의 창설목적에서 벗어나서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거다. 난 이제부터 황천각의 중심을 다리에 둘 거다. 이곳 마가촌의 주민들, 하급 무인들, 상대적으로 약해서 억울함을 당하는 이들을 지켜주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단 하나의 원칙만 잊지 않으면 돼."

"그게 뭡니까?"

"목숨의 무게는 똑같다는 것. 하급 무인도, 마존도 목숨의 무게는 똑같다. 그렇기에 우린 똑같은 기준으로 일을 처리한다."

서대룡의 얼굴에 격정이 스쳤다.

"다른 사람이 이 말을 했다면, 전 개소리라 여겼을 겁니다. 현실을 무시한 한심한 이상론에 불과하다고요. 하지만 각주님이시라면 믿습니다."

"욕이야, 칭찬이야? 방금 나 욕한 거지?"

"더 무섭게 다가서시면 첫 고발자는 제가 될 겁니다."

후다닥 걸어가는 녀석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녀석에게 말한 황천각의 박력을 유지하기 위해선 한 가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 * *

나는 집행무인들을 모두 소집했다.

"각주님을 뵙습니다!"

그들이 목청을 높여 인사했다. 이번에 백도귀까지 뇌옥에 가두면서 처음 부임했을 때보다도 내 인기는 더 높아져 있었다.

인기뿐만 아니라 권위도 높아졌다. 후계 구도에서 형에게 밀렸다고 생각해서 나를 은근히 무시했던 자들의 태도도 달라졌다. 걸어가다 마주치면 눈부터 내리깔았다.

"지금까지 본각을 위해 헌신해준 그대들에게 감사한다."

내가 단상 옆으로 나와 그들에게 포권하며 고마움을 전했다. 집행무인들 역시 일제히 포권하며 내 인사를 받았다.

"조사관들 없이 우리끼리 모인 적은 처음이지?"

"네!"

"오늘같이 좋은 날에는 좋은 이야기를 해야겠지만, 나는 오늘 그대들에게 조금 불편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내 말에 집행무인들이 긴장했다.

"그대들도 알다시피 본교에는 본 각의 권위에 불복하고 도전하는 자들이 존재한다. 마군이 그랬고, 도귀들이 그랬지. 이유는 단순하다. 그들이 자네들보다 강하다고 여겨서다."

자존심이 상할 이야기였지만 나는 돌려 말하지 않았다. 조사관에게 할 말이 있고, 집행무인에게 할 말이 있다. 이들에겐 돌려 말하는 것보다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이 더 효과가 클 것이다.

"팔마존 중 어디라도 좋다. 내 명령서를 가져가서 백도귀급 수뇌부를 체포해 올 수 있겠나?"

아무도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했다. 이게 현실이었다.

"왜 안 되느냐? 본 각의 법보다 자기들의 주먹이 더 강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걸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간단해. 그대들의 주먹이 그들보다 더 강해지면 된다. 그대들이 무서우면 감히 개길 생각조차 못 하겠지."

모두의 표정이 상기되었다. 자신들의 권위가 통하지 않는 일들을 한 번쯤은 겪었을 테니까.

"나는 그대들이 지금보다 더 강해지길 원한다."

물론 지금의 집행무인들도 강하다. 하지만 정예조직의 무인들을 압도할 정도로 강하지는 않다. 비슷하거나 오히려 조금 낮은 정도.

"그래서 오늘부터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특별훈련에 들어간다."

특별훈련이란 말에 다양한 반응이 나왔다. 기뻐하는 사람도 있었고, 인상을 굳힌 이들도 있었다.

"이런 변화가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지금 그만두는 것이 좋을 거다. 다른 부서에 보내줄 테니, 앞으로 나오도록."

잠시 망설이다가 두 명이 걸어 나왔다. 그들은 다른 부서로 가고 싶다고 솔직히 말했다.

나는 그 두 사람을 각자 원하는 부서로 발령 내주기로 약속하고 돌려보냈다.

"눈치 보지 마라. 모두가 황천각에서 싸울 필요 없다. 각자 어울리는 자리에서 본교를 지탱해 나가면 되는 법. 또 없나?"

더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좋아."

난 저 멀리서 대기하고 있던 사람을 손짓해 불렀다.

그는 바로 마군 삼대주 장호였다. 마군의 대주 중에서 가장 강한 사나이.

지난번 내가 마군주를 죽여 친구의 원한을 갚아준 이후, 그는 나에게 큰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오늘부터 그대들에게 특별훈련을 해줄 분이다."

아직 새 마군주가 정해지지 않았기에 마군은 모두 대기상태였다. 그래서 이런 부탁이 가능했다.

장호가 그들 앞에 나섰다. 커다란 덩치에 얼굴의 칼자국까지. 그는 집행무인들을 압도했다.

"당분간 그대들의 훈련을 맡은 장호다. 개인적으로 여기 계신 각주님을 존경해서 이번 일을 맡게 됐다. 훈련은 혹독할 거다. 대신 한 가지는 약속한다. 견뎌낸 사람은 분명 이전보다 더 강해져 있을 거다. 알겠나?"

"네!"

집행무인들이 큰소리로 대답했다.

"훈련은 반 시진 후부터다. 모두 준비하고 다시 모이도록. 해산."

집행무인들이 모두 흩어지고, 장호와 둘만 남았다.

"요즘 마군 분위기는 어떤가?"

"뒤숭숭합니다. 어서 차기 마군주가 결정되어야 안정되겠지요."

나도 차기 마군주에 대해 여러 소문을 들었다. 워낙 중요한 요직이라 아버지와 사마명이 임명에 고심한다는 소식도 들었고, 마존들이 자기 줄을 대려고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소문도 들었다.

"이럴 때 도움을 청해 미안하네."

"아닙니다.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이 공자님, 아니 각주님 명령이시면 언제든지 달려오겠습니다."

"고맙네."

장호마저 떠나가고 돌아서려는데, 어디선가 들려오는 말소리.

"이제 이틀 남았네."

고개를 돌려보니 뒤쪽 담장 위에 혈천도마가 걸터앉아 있었다.

"할 일이 참 없으십니다."

"마존쯤 되면 넘쳐나는 것이 시간일세."

"제가 교주가 되면 마존들이 해야 할 일이 넘쳐날 겁니다."

"그러려면 내 손을 잡게."

혈천도마는 어떻게든 자기 뜻을 관철하려고 압박을 가하는 중이다.

"이러시는 거 형이 알면 섭섭해할 겁니다."

"이해하겠지. 더 잘하는 쪽과 함께 가려는 것이 인지상정 아닌가? 내가 왜 정파 놈들을 싫어하는지 아나? 이런 마음을 너무 포장해. 그냥 저놈이 돈 많아서 좋다, 저놈이 더 강해서 좋다 하면 될 것을 협의가 어쩌고 도의가 저쩌고. 솔직하면 주화입마라도 걸리는 줄 알지."

"저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뭐가?"

"더 잘하는 쪽과 함께 가려는 그 인지상정요. 다른 마존이 저와 손을 잡고 싶어 할 수도 있잖습니까? 그중에는 어르신보다 더 잘하는 분도 계실 수 있고요."

대답이 궁색할 법도 했는데 혈천도마는 여유롭게 대처했다.

"이보게, 이 공자. 자네는 자네의 능력과 가능성을 믿나?"

"네."

"천마가 될 자신도 있고."

"있습니다."

"그걸 제일 먼저 알아봐 준 사람이 바로 나야. 누군가의 진가를 파악하는 능력만 봐도, 누가 제일 잘할지는 나와 있지 않나?"

"달변가인 저도 어르신은 못 당하겠군요."

"하하하하. 이틀 후에 보세."

크게 웃음을 터뜨린 혈천도마가 훌쩍 몸을 날려 사라졌다.

'늙은이가 어찌나 말을 그럴듯하게 잘하는지.'

얼핏 들으면 다 맞는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억지에 가깝다.

내가 교내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모두 내 변화를 주목하고 있을 것이다.

단지 혈천도마는 나와 얽히면서 먼저 나섰을 뿐이다. 침 좀 튀겼다고 자기 것이라 주장하는 셈.

혈천도마와 손을 잡는다? 말이 안 되는 일은 아니다. 그가 진정 내 편이 된다면, 분명 큰 힘이 될 테니까.

하지만 이대로 그와 손을 잡는 것은 안 된다. 아직 주도권은 혈천도마가 쥐고 있으니까.

* * *

다음 날, 나는 수련장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집행무인들이 훈련받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장호는 혹독했다. 그야말로 피와 뼈를 깎는 훈련인데, 집행무인들은 이를 악물고 훈련에 임하고 있었다.

장호는 시작 전 단 한 마디로 모두를 자극했다.

―우리 마군이 하는 훈련이다.

이 한마디면 충분했다. 마군이 하는 훈련을 견뎌내지 못하면, 그들이 황천각을 우습게 보는 것을 인정해 버리는 셈이 되는 것이다.

나는 장호가 참으로 영리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무인에게 자존심을 자극하는 것만큼 효과가 좋은 것은 없었으니까.

멀리서 장호의 외침이 들렸다.

"버텨라! 마누라도, 자식도, 친구도, 누구라도 배신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흘리는 이 땀만큼은 너흴 배신하지 않을 거다!"

나는 장호의 고함을 들으며 피식 웃었다. 혼인도 안 해본 장호가 마누라랑 자식을 언급하는 게 우스웠다.

'그나저나 제대로 임자 만났구나.'

장호 같은 무인을 거느리면 정말 든든하겠다는 생각이 스치던 그 순간.

'아!'

혈천도마와 관련해서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 * *

사흘째 되던 날, 혈천도마는 처음 손을 잡기를 제안했던 그 장소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처럼 멸천대도를 땅바닥에 꽂아둔 채, 칼날에 기대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제 내 술을 마실 준비가 되었나?"

나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준비되었습니다."

혈천도마가 흡족한 얼굴로 크게 웃으며 술을 따라 주었다.

건배까진 힘차게 했지만, 술을 마시지는 않았다.

"왜 안 마시고 내려놓나?"

"안주가 필요합니다."

"안주? 사내대장부가 무슨 안주 타령인가?"

혈천도마의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이 떠올랐다. 내가 말한 안주가 실제 안주가 아니라, 어떤 요구 조건이란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어떤 안주가 필요한가?"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내가 대답했다.

"마군."

생각지도 못한 말에 혈천도마가 두 눈을 부릅떴다.

"마군을 제 입에 넣어 주십시오."

제33회 새로 나온 호신갑입니까?

"입에 넣어 주면 소화는 시킬 수 있고?"

혈천도마가 도발적으로 물었다.

"꼭꼭 씹어서 삼키겠습니다."

"이보게, 이 공자. 세상일에는 순리가 있다네."

"술 마시면서 안주를 함께 먹는 것도 순리 아니겠습니까?"

혈천도마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양쪽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그러다 분노를 터뜨리며 벌떡 일어났다.

"도저히 못 참겠군. 사흘이나 기다려줬는데 이딴 말 같지도 않은 조건을 건다고?"

그가 땅에 박혀 있던 멸천대도를 뽑아 들었다.

"그 머리통 들고 천마전으로 가겠다!"

쇄애애애애액!

혈천도마가 멸천대도를 휘둘렀다. 정말 나를 죽이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분노가 제대로 담긴 신경질적인 공격이었다.

카앙!

흑마검으로 받아치자 날카로운 쇳소리가 터져 나왔다.

"제법이군! 제법이야!"

혈천도마가 감탄했다. 상당한 공력을 실은 공격이었는데 이렇게 쉽게 막아낼 줄 몰랐던 모양이다.

"그래, 그 귀한 머리통 떼기가 쉽지는 않겠지?"

혈천도마가 다시 멸천대도를 휘둘렀다. 앞선 공격보다 더 빠르고 강한 공격이었다.

나는 바람을 찢으며 수직으로 날아드는 멸천대도를 이번 역시 흑마검으로 쳐냈다.

카아아앙!

앞선 공격보다 더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병기파괴자란 별칭이 붙은 멸천대도였지만, 흑마검을 손상하지는 못했다. 나는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

―자꾸 까부는데 우리가 콱 부러뜨려 버릴까? 파괴된 병기파괴자! 내일 아침을 장식할 소문으로 훌륭하잖아?

검에게 농담하듯 떠올린 생각이었는데, 그런 마음을 품어서였을까? 풍신사보를 쓰고 싶은 욕망이 치밀어 올랐다.

과연 혈천도마는 내가 펼치는 명왕보를 막아낼 수 있을까?

이것은 나의 투심(鬪心)이 만들어낸 유혹이었다. 강적을 만났을 때, 풍신사보와 같은 극상승의 무공이 반응하는 것이다. 싸우자고. 그래서 이기자고.

'안 돼! 아직은.'

시간이 내 편인데, 굳이 부족한 내공으로 위험한 싸움을 벌일 이유가 없다.

세 번째 공격이 날아들기 전, 나는 손목이 아프다는 시늉을 하며 뒤로 훌쩍 물러났다. 물론 그렇다고 내 뜻까지 물리진 않았다.

"마군을 제게 주십시오."

혈천도마가 도를 거두며 물었다.

"대체 누굴 마군주 자리에 앉혀 달라는 건가? 설마 자넨가?"

"물론 아닙니다."

"그럼 누군가?"

"삼대주 장호를 앉혀주십시오."

"장호를?"

장호가 마군주가 된다면 마군을 내 우호 조직으로 만들 수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교내의 입지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튼튼해진다.

비단 내게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장호와 같은 무인이 마군주가 된다면 본교에도 큰 도움이 될 일이었다.

"장호를 마군주에 앉히는 일은 나로서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마군 내부에서 대주를 뽑는다면 장호는 유력한 후보지만, 마군과 같은 정예조직의 경우 수장은 외부 인사에서 뽑았다. 천마전과 팔마존이 신경전을 벌이며 각자의 사람을 앉히려고 애쓴다.

"이 공자! 욕심이 과하면 배가 터지는 법이야."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배가 터지도록 먹어 치워야 하는 길 아닙니까?"

"우리?"

"광기로 싹 다 잡아먹자고 하신 게 어르신입니다. 저와 손잡자고 한 것도 어르신입니다. 미친놈들이 가는 길이 어디 평범한 길이겠습니까?"

"놈들이라니!"

"그럼 아닙니까?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미치지 않고서 어떻게 어르신이 저와 손잡습니까?"

혈천도마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그의 야망이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해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것을 세상에 밝히기 전에 죽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팔마존 중 제일 먼저 죽은 사람이 혈천도마다. 이 깐깐하고 영악스러운 도마가 말이다.

"흥! 당장에라도 천마가 된 것 같군."

"제게 바람을 넣으신 분이 어르신 아닙니까? 대체 절 데리고 뭘 하시려는 겁니까? 번드르르한 말만 앞세워서 젊은 놈 이용이나 하려는 겁니까? 어르신 제자들처럼요?"

내 말에 정곡이 찔렸는지 혈천도마가 버럭 소리쳤다.

"네 욕심이 술상 엎었다!"

꽝.

실제로도 발로 차서 술상을 엎어버린 후, 그는 그대로 홱 하고 날아갔다.

저 멀리 사라져버린 그를 바라보며 오히려 나는 옅게 웃었다. 혈천도마의 여유가 처음으로 깨진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내 제안을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내게는 그의 술상 말고도 일곱 개의 술상이 더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기에.

* * *

개인 수련장에서 무공수련에 몰두했다.

회귀한 후 수련하면서 항상 느끼는 바지만, 정말이지 지치지 않는 젊음이 좋았다. 이건 내공의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었다.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몸은 가볍고 활기찼다.

잃어봐야 소중함을 느낀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는 이 청춘에 가장 강력하게 적용되리라.

그래, 이때에는 알지 못했다. 얼마나 귀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는지를. 나중이 되면 이 순간이 얼마나 그리워지는지를.

무공? 돈? 권력? 그것을 얻기 위해 바치는 것이 청춘이라는 사실이... 우습고도 슬프다. 회귀까지 해서도 또 내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 내 현실이지만.

그래도 알고 하는 실수다. 그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발 한걸음 옮기는 것도 신중하게 온 힘을 다해 수련했다.

풍신사보로 가상의 적들 사이를 누볐다.

처음에는 서너 명의 적들이었는데, 수련을 거듭할수록 적들의 수는 많아졌다. 다섯이 일곱이 되고, 일곱은 열이 되었다.

처음에는 허수아비처럼 서 있는 적들이었지만, 이제 내 상상 속의 적들은 움직였고 대화를 나눴으며 내게 욕을 하기도 했다. 수련을 거듭할수록 그들의 무공 수위도 높아지고 있었다. 내 무공적 상상력만큼 수련의 수준이 결정되었다.

수련의 칠 할을 풍신사보에 할애했다면, 나머지 시간은 아버지가 가르쳐준 기 수련과 천마호신공을 연마했다.

한바탕 수련이 끝나고 나는 연무장 바닥에 누워 숨을 골랐다. 온몸이 축축하게 젖을 정도로 땀을 흘렸지만, 수련을 마친 이 순간만큼 기분 좋은 때가 없다.

창 너머 붉게 노을 진 구름이 흘러가는 것이 보였다.

이 젊은 몸으로 중원유람을 다니면 얼마나 좋을까? 대법 재료를 구하면서 바라보던 석양과 화무기를 죽인 후 천하제일인이 되어 보는 석양은 완전히 다를 텐데....

회귀 전에는 회귀한 이 순간만을 상상하며 그 고생을 감수했다. 이제는 화무기를 죽인 이후의 미래를 기대하며 참고 있다.

오늘의 나만 생각해선 안 된다. 수련이 부족해서 상대에게 비참하게 죽는 내일의 나도 나다. 그래, 참자.

내가 다시 일어나자, 가상의 적들도 다시 몸을 일으켰다.

* * *

이틀 후 새로운 소식이 들려왔다.

혈천도마가 마군주 후보로 삼대주 장호를 추천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렇게 신경질을 내고 사라진 혈천도마였지만, 결국 내 뜻을 받아들인 것이다. 애초에 그가 엎을 수 없는 술상이었다.

이 소식에 가장 놀란 사람은 당사자인 장호였다.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나를 찾아와서 묻는 것만으로도 그는 총명하고 눈치도 있는 사람이다.

만약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이 일이 갑작스럽게 찾아온 행운이라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장호는 세상에 그런 행운은 없다는 것쯤은 깨우친 사람이었다.

"이공자께서 만드신 일이지요?"

"맞네. 내가 혈천도마께 부탁했네."

"저를 높이 사주시는 것은 감사할 일이지만,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겸손할 필요 없네. 내게 죽은 마군주도 차지했던 자리야."

"그건 다른 경우지요."

"삼 대처럼만 이끌게. 그럼 역대 마군주들 중에서 최고의 마군주가 될 거라 확신해."

특히 그는 대주 중에서 가장 무공이 강한 사람이었다. 삼대 무인들의 적극적인 지지도 받았고. 내부에서 뽑는다면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이공자께서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겁니다."

"자네가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것일 수도 있고. 어쨌든 다른 후보들도 언급되는 상황이니, 좀 더 지켜보자고."

장호는 당황한 와중에도 동시에 기뻐하고 있었다. 마군 대주들의 꿈이 무엇이겠는가?

"자, 우리 할 일은 다 했으니 결과는 하늘의 뜻에 맡기자고."

* * *

장호에게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했지만, 저 무심한 하늘이 잘도 응답하겠다. 내가 부지런히 움직여서 일을 만들어내야지.

그날 밤, 나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천마전에는 아버지의 숙소가 따로 있었는데,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숙소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에 선 아버지의 낯선 모습에 나는 헛것이라도 본 듯, 눈을 껌벅였다.

"새로 나온 호신갑입니까?"

"아니, 내 잠옷이다."

"...."

"...."

"꽃문양 잠옷이네요. 마귀나 악귀가 아니라...."

"잠은 편히 자야 한다는 주의라서."

잠옷을 입은 아버지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화사한 꽃문양 잠옷도 충격적이지만, 이 모습을 이렇게 보여주신 것이 더 놀라웠다. 기다리라고 한 후에 다른 옷으로 갈아입으셨어도 됐을 텐데.

"야밤에 무슨 일이냐?"

"야밤이라니요? 초저녁이죠. 이렇게 일찍 주무시는 줄 몰랐습니다. 이거 특급기밀 아닙니까? 무림맹이 알면 당장 쳐들어오겠습니다. 천마가 일찍 잠든다더라, 심야에 기습하자!"

"용건만!"

"네."

너스레는 거기까지 떨고 나는 오늘 찾아온 이유를 밝혔다.

"혈천도마를 제 칼로 쓰려고 합니다."

"언제는 죽이겠다더니?"

"죽이기는 아까워서요."

아버지에게 새 소식은 아닐 것이다. 혈천도마가 장호를 추천했을 때, 이미 혈천도마와 내가 손을 잡았다는 것을 눈치채셨을 테니까.

아버지뿐만 아니라, 교내 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다들 주목하고 있다. 나와 혈천도마의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지. 나중에 형은 어떻게 반응할 거며, 다른 마존들은 각기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아버지가 화제를 돌렸다.

"새 검은 어떠하냐?"

"마음에 듭니다."

"어디 보자."

나는 흑마검을 검집째 아버지에게 드렸다.

아버지는 천천히 흑마검을 뽑아보더니 이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길을 잘 들였다."

"잡아만 봐도 아시는 겁니까?"

"잡아보면 알아야지, 찔리고 나서 알 테냐?"

아버지가 다시 흑마검을 돌려주며 말했다.

"혈천도마는 이렇게 쉽게 길들지 않을 거다."

"길들일 생각 없습니다. 부러질 때까지 쓰다 버릴 겁니다. 아직까진 소장 가치 없습니다."

"그러다 네가 베이면?"

"그럼 베여야죠. 대신 혈천도마와 전 다른 점이 있을 겁니다. 늙은 혈천도마는 한 번 부러지면 그대로 끝이지만, 저는 베이면 베일수록 더 강해질 겁니다. 약 바르고 붕대 감고, 계속 나아갈 겁니다."

"말이야 쉽지. 한데 왜 내게 보고하는 거냐?"

"이제 아버지가 주시는 녹봉을 받는데, 당연히 보고드려야죠."

아버지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혈천도마의 추천을 받아달라고 부탁하러 온 것은 아니고?"

참으로 눈치가 빠르신 분이지만, 이번만큼은 틀렸다.

"아뇨, 반대입니다. 절대 혈천도마의 뜻대로 허락해 주지 마십시오."

"허락해 주지 말라고? 이유는?"

"이참에 혈천도마의 기를 꺾어버리려고요. 제 앞에서 어찌나 기세등등한지. 어떤 때 보면 아버지보다 더 잘난 척을 합니다. 그 기를 꺾어버릴 작정입니다."

"헛소리 말고. 네 진짜 속마음을 말해라."

"왜 진심이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마군을 얻을 기회인데, 고작 혈천도마의 기를 꺾는다고 마군을 포기해? 너 그런 아이 아니지 않으냐?"

역시 예리하신 아버지시다.

"네, 잘 보셨습니다."

"뭘 노리는 거냐?"

"혈천도마에게 얻어낼 것이 있어서입니다. 그러려면 이번 일이 혈천도마 뜻대로 되면 안 됩니다."

"마군보다 중요한 것이냐?"

"어떤 면에서는요. 아, 그리고 마군도 제 것으로 만들 겁니다. 전부 다 제 것으로 만들 겁니다."

나를 응시하던 아버지가 그대로 돌아섰다.

"그만 웃기고 가라."

말은 그러했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가 내 부탁을 들어주실 것을.

아버지의 등에 활짝 핀 꽃을 보며 피식 웃었다.

'아버지. 적어도 오늘 밤, 그 잠옷보다 더 웃긴 건 없을 겁니다.'

제34회 호랑이 한 마리를 상대하는 것보다

천마전으로 혈천도마가 들어섰다.

피의 길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긴 그가 융단 끝에 멈춰 섰다.

"잘 지내셨습니까?"

혈천도마는 정중히 예를 갖춰 검우진에게 인사했다.

"덕분에 잘 지냈네. 자넨 어땠나?"

"자제분 덕분에 요즘 좀 바빴습니다."

검우진은 옅게 미소를 지었다.

"자식놈 머리가 크니, 내 마음대로 안 되더군."

"하하하. 교주님께서도 안 되는 일이 있으셨습니까?"

"인생사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하늘이 안배한 존재가 자식이라지 않던가? 자네도 자식을 낳아봐야 알 텐데."

"어디선가 제 자식이 크고 있을지도 모르죠."

검우진이 웃었다. 그는 검무극을 대할 때보다 부드러웠고 친근했다. 검무극이 봤다면 '자식에게 이렇게 좀 활짝 웃으세요!'란 말을 틀림없이 했을 것이다.

그렇게 가볍게 인사를 나눈 후 혈천도마가 넌지시 검무극을 언급했다.

"교주님 뜻대로는 안 될지 몰라도, 요즘 이 공자가 교내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자네 작품 아닌가?"

사실 그렇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혈천도마와 얽히면서 검무극이 인기를 얻었으니까.

"이 공자는 교주님 작품이죠. 이렇게 멋진 작품인 줄 이번에야 알았습니다."

검우진은 부정하지 않았다. 아들의 활약 이면에 자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어떤 의미로든 나쁘지 않았으니까.

"아직 철부지라네."

"저는 가끔 이 공자 나이 때를 떠올려보곤 합니다. 지금 이 공자가 철부지면, 저는 버러지라 불러야 할 겁니다."

"철부지를 너무 과대평가하는군."

"과대평가야 교주님께서 먼저 하셨지요."

검무극에게 황천각주를 맡긴 일을 두고 한 말이었다. 어떤 이유를 대든 파격적인 인사였으니까.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제가 이 공자를 더 좋은 작품으로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자네가 나선다면 둘째 놈에게는 기연이라 할 수 있겠지."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알아서 하시게."

"감사합니다."

이야기 끝에 혈천도마의 방문 목적이 조심스럽게 나왔다.

"기왕 허락해 주시는 것, 제대로 밀어주시겠습니까?"

"무슨 뜻인가?"

"이번 마군주 건, 제 뜻대로 진행하게끔 해주시죠."

자신의 추천대로 장호를 마군주로 삼아 달라는 부탁이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무런 감정 기복 없이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먼저 침묵을 깬 사람은 검우진이었다.

"마군주 건은 어렵네."

"이번 건은 이 공자가 원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자네도 말했듯이 둘째는 충분히 밀어줬네. 첫째 생각도 해줘야지."

"제가 제자들을 키우면서 느낀 점이 하나 있습니다. 누군가를 밀어줄 때는 한 녀석만 확실히 밀어줘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지 못해서 제가 욕을 많이 먹고 있지요."

"나는 괜찮을 거네. 너그러운 자네와 달리 날 욕하는 자는 다 죽여버리니까."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 얽혔다. 그들에게는 눈빛만 봐도 상대의 뜻을 알 수 있는 세월이 함께한다. 그 세월이 길면 길수록 이 순간의 정적은 서먹해지는 법.

"더 할 말이 있는가?"

천마의 축객령(逐客令)에 혈천도마는 더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한번 결정하면 쉽게 결정을 바꾸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다음에 또 뵙지요."

"그러세."

혈천도마가 돌아서 나왔다. 피의 길을 걸어 나오는 내내 그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대체 이 무슨 뒤늦은 저울질이오? 한 번 밀었으면 끝까지 밀어야지. 쯧!'

* * *

"교주께선 자네보단 대공자를 더 생각하고 있더군."

혈천도마는 나를 보자마자 아버지와 나 사이를 이간질하기 시작했다.

"대공자를 후계자로 생각하시는 것 같았네."

자기에게 약점이 있을 때 오히려 먼저 상대를 흔들어댄다. 정말 이 늙은이의 정치질은 얄미울 정도다.

"우린 잘못된 만남 같습니다."

"무슨 뜻인가?"

"제가 형에게 밀리면, 어르신이라도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셔야 하는데...."

"내가 부족하다는 뜻인가?"

"다소 아쉽다는 뜻이죠."

혈천도마는 화를 내는 대신 나를 달랬다.

"이보게, 이 공자. 장호를 마군주로 세우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했어."

"벌써 포기하신 겁니까?"

"안 되는 일에 매달릴 필요는 없지."

"이 정도도 못 해내면서 그렇게 잘난 척한 겁니까?"

"이 정도? 잘난 척?"

발끈한 혈천도마를 더욱 약 올리기 시작했다.

"제 뒷배가 되겠다고 제안한 것은 어르신이었습니다."

"안 되는 일을 애처럼 해달라고 졸라댄 것은 자네였고."

"그럼 그때 거절하셨어야지요. 다음 날 장호를 추천하지 말았어야죠. 어르신께서는 혹시나 하신 것 아닙니까?"

난 혈천도마의 발아래 기다란 선을 그었다.

"예전에 그러셨죠. 여기까지가 교주님이 어르신을 생각하는 마음이라고요. 이 선을 믿었는데...."

나는 반보다도 못한 곳에 선을 다시 그었다.

"실제 아버지와 어르신의 선은 여기였던 것 아닙니까?"

혈천도마는 반박하지 못했다. 만약 내가 아버지를 찾아가서 따로 부탁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과연 아버지는 혈천도마의 부탁을 들어주었을까?

"아버지가 거절했다면 더 부탁했어야지요. 만약 저였다면 반드시 해냈을 겁니다."

"그럼 한 번 해보게."

"네?"

"이 정도도 못 한다고 나를 조롱하지 않았나? 그럼 자넨 쉽게 할 수 있겠지."

"제가 아버지에게 부탁드려서 손쉽게 이뤄내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해보시든지. 아마 역효과만 날걸?"

자신의 부탁을 거절했기에 아들의 부탁은 절대 들어줄 리 없다고 확신하는 듯했다. 이럴 때 보면 혈천도마는 아버지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내기를 하자는 말씀입니까?"

"내기? 좋지. 하자고. 만약 자네도 못 해낸다면, 그때부턴 군말 말고 내 물이 되어 주게. 안주 타령도 그만일세."

"만약 제가 해낸다면요?"

"자네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무엇을 원하더라도요?"

"원하는 것이 있나?"

잠시 고민한 후 그에게 말했다.

"영약을 구해주십시오. 적어도 마정단보다 더 좋은 영약으로요."

순간 혈천도마가 흠칫 놀랐다. 나는 이 놀람의 성격을 정확히 알고 있다.

"마정단보다 더 좋은 영약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하는 말인가?"

"아니까 조건으로 걸겠죠. 한배를 타기로 한 이상 제가 강해지는 것은 어르신이 강해진 것과 같지 않습니까?"

내가 혈천도마에게 영약을 요구한 이유가 있었다.

그에게 영약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마정단보다 더 많은 내공을 얻을 수 있는 희대의 영약 천외신단(天外神丹)이 그에게 있다.

과거 혈천도마는 본격적으로 형과 손을 잡으며 천외신단을 선물했다. 그가 오랜 세월 천외신단을 복용하지 않고 보관했다는 것도 그때 밝혀졌다.

내기를 유도한 목적은 바로 이 천외신단 때문이다.

"장호를 마군주로 만드는 것도 못 하겠다, 영약도 구해주지 못하겠다, 제가 어르신과 손을 잡아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좋아, 자네가 장호를 마군주에 앉힌다면, 내 영약을 구해주겠네."

"약속하시는 겁니다."

나는 흑마검을 뽑아서 앞으로 내밀었다. 혈천도마가 멸천대도로 내 검을 튕기듯 때렸다.

쨍!

맑은 이 소리가 우리의 약속이었다. 독문병기로 하는 이 약속은 말보다 훨씬 강력한 구속력을 지닌다.

혈천도마는 언제나 그렇듯 홱 하고 솟구친 후 저 멀리 사라졌다.

내기에서 이기면 그는 약속을 지킬 것이다. 천외신단은 그가 후계자를 위해 준비해둔 것이었으니까.

앞서 복용한 마정단에 이어 천외신단까지 복용할 수만 있다면, 마존과의 싸움에서 내공이 부족해서 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내기를 이기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 * *

내가 찾아간 곳은 대군사 사마명의 집무실이었다.

그가 머무르는 이곳 통천각은 본교의 머리 역할을 하는 곳이다. 무림의 모든 정보가 이곳에 모여서 분류된다. 그중 사마명을 거쳐 아버지에게까지 전달되는 정보는 극소수.

모르긴 해도 요즘 통천각에서 천마전으로 전해지는 정보의 상당 부분을 내가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통천각 입구부터 사마명의 집무실까지 엄중한 경계가 펼쳐져 있었는데, 천마전보다 더한 경계였다. 그만큼 통천각이 본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의미기도 했고, 머리 쓰는 군사들이 모여 있는 곳이니 더 철저히 지켜줘야 했다.

총군사의 집무실에 들어섰을 때, 사마명은 서류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었다. 책상에 쌓인 서류가 어찌나 많은지 그의 얼굴을 가릴 정도였다.

아버지 옆에서 몇 마디 조언이나 하면 그만일 것 같지만, 실제 총군사의 일은 문서와의 싸움이다. 하루에도 수백 통씩 중원 각지에서 날아드는 전서(傳書)를 읽고 또 읽고, 그래서 버려야 할 정보와 살려야 할 정보를 구분하는 일로 하루를 다 보내는 것이다.

그것을 잘 알기에 황천각주는 해도, 통천각주는 못 할 일이다.

책상에서 일어난 사마명이 반갑게 나를 맞이했다.

"어쩐 일이십니까? 자, 이리로 앉으시지요."

그와 탁자에 마주 앉았다. 곧이어 기다렸다는 듯 수하가 차를 가져왔다.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여긴 차가 한 종류밖에 없어서."

"향이 아주 좋습니다."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본교 최고의 지성이 일하는 곳답게 사방에는 온갖 종류의 책들이 꽂혀 있었다.

"요즘 본교 무인들이 모이면 전부 황천각 이야기만 한다더군요."

"욕하느라 정신없는 것 아닙니까?"

"그럴 리가요. 칭찬 일색이라 들었습니다."

황천각에 대한 여론은 내가 더 잘 안다. 공정하게 법을 집행하겠다는 것에 대해 열광하는 이들만큼이나 반발하는 이들도 생겼나고 있었다.

지금껏 마음껏 살아왔기에 괜한 불안감이 들 것이다. 혹시나 나도 잡혀가면 어쩌나? 이런 걱정이겠지. 이런 분위기가 확대되기 전에 확실히 기강을 잡아야 한다.

"한데 어쩐 일이십니까?"

"군사님께 여쭤볼 말이 있습니다."

"하시지요."

"장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좋은 무인이라 생각합니다. 훌륭하게 마군을 이끌어 갈 재목입니다."

사마명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이번 추천의 배후에 내가 있다는 것을. 내가 장호를 마군주의 자리에 앉히려 한다는 것을.

"그럼 장호가 마군주에 오를 가능성은 얼마나 됩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채 일 할도 되지 않습니다."

"도마께서 장호를 추천했다 하더라도요?"

"그 추천은 교주님께서 거절하셨습니다."

그래서 일 할이라는 수치가 나온 것이리라. 원래는 불가능이란 답이었는데 예의상 일 할이 된 것이다.

"아버지가 마음을 바꾸신다면요?"

"그럼 당연히 가능하지요. 한데 쉽지는 않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교주님께서는 한 번 내린 결정을 아무런 명분 없이 바꾸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건 잘 알고 있습니다."

애초에 내 부탁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그런 아버지에게 명분도 없이 다시 결정을 바꿔 달라고 할 생각은 전혀 없다.

결정을 바꿀만한 명분을 만들어 드려야지. 내가 준비한 것은 이것이었다.

"혹시 이건 어떻습니까? 혈천도마에 이어서 다른 마존의 추천을 또 받는다면요?"

"동시에 두 명의 마존이 한 사람을 추천한다?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만...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충분히 장호가 마군주가 될 가능성이 있겠지요. 교주님도 마음을 바꿀 명분이 생기는 거니까요. 한데 가능하겠습니까?"

혈천도마가 나선 상황에서 다른 마존이 나서서 장호를 추천하게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 번 해봐야죠. 때론 호랑이 한 마리를 상대하는 것보다 두 마리를 동시에 상대하는 것이 더 쉬울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저는 더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그래서 이 전제 조건이 있어야 한다. 동시에 팔다리가 뜯기는 불상사를 막으려면.

"그 두 마리 호랑이가 서로 지독히도 사이가 나쁘다면요?"

제35회 차라리 잊지 마라.

"억울합니다. 제가 한 일이 아니라고요!"

황천각 취조실에서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는 사람은 일화검존이 이끄는 북천검가의 무인 배종탁(裵宗鐸)이었다.

그는 검가의 어린 시비를 겁탈한 혐의로 고발되어 붙잡혀 와 있었다. 예전이라면 사건화되지도 않았을 일인데, 이번에는 고발이 들어온 다음 날, 즉시 배종탁이 체포되었다.

"그 시비가 절 모함하는 겁니다! 그 애와 대질시켜 주십시오! 저는 억울합니다."

"시비가 왜 그대를 모함하겠나?"

"그야 모르죠.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거나, 아니면 제가 그 아이에게 어떤 실수를 했을지도요. 하지만 적어도 저는 그 아이를 겁탈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말 억울한 듯 보였다.

"좋아, 대질시켜 주지."

"당장 데려와 주세요."

내가 신호를 보내자 밖에서 대기하던 서대룡이 열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애를 데리고 들어왔다. 아이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야! 너 대체 내게 왜 이러는 거야!"

배종탁이 버럭 아이에게 소리를 질렀다.

내가 손을 들어 그의 흥분을 가라앉혔다.

"조용! 한 번만 더 소릴 지르면 대질 신문은 없다."

"네. 억울해서 그럽니다."

내가 여자아이에게 물었다.

"널 겁탈한 사람이 저자가 맞냐?"

여자아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보십시오! 제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끄덕였습니다."

"아는 사람인데 얼굴을 자세히 볼 필요가 있나?"

"죄책감에 절 쳐다보지 못하는 겁니다."

"정말 그대 짓이 아닌가?"

"아닙니다, 하늘에 맹세코 아닙니다. 이렇게 아이 말만 믿고 저를 처벌하면 저는 너무 억울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여자가 그리웠으면 기루를 찾아가면 되는데, 왜 저런 어린애를 건드리겠습니까?"

"나야 모르지. 네가 말해봐. 어린애를 보면 흥분되나?"

"저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배종탁이 아이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무고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지? 용서할 테니까 솔직히 말해. 아니라고 말해!"

아이가 겁에 질린 듯 몸을 움츠렸다.

"저 보세요! 덜덜 떨잖아요?"

"그건 겁이 나서 그렇고. 겁탈한 것을 발설하면 고향에 있는 가족들까지 찾아가서 죽이겠다고 했다면서?"

이번 사건은 이 소녀가 고발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가 다른 시비에게 말했고, 그 시비가 친구 대신 풍류주점 건너편에 마련된 황천각 지부를 찾아가서 고발한 것이다.

"왜 저 아이 말만 믿는 겁니까?"

"저 아이를 믿으니까."

"너무 편파적이지 않습니까?"

"네가 겁탈한 게 확실하니까."

"그러니까 확실한 증거를 대라고요! 저 아이 말만 믿지 마시고요."

내가 서대룡을 쳐다보자 그가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다시 두 명의 아이를 데리고 들어왔다. 앞서 들어왔던 아이보다는 조금 더 큰 여자아이들이었다.

그 아이들을 보는 순간, 배종탁이 흠칫 놀랐다.

"기억하지? 이전에 네 시비로 일했던 아이들이다."

"알고 있습니다. 많이 컸구나!"

배종탁이 그녀들에게 반갑게 인사했지만 아이들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이 증언을 듣는데 갑자기 궁금해졌어. 이번에 저질렀는데, 이전에는 안 저질렀을까?"

그렇게 이전 시비를 찾아 조사한 결과, 그녀들 역시 겁탈당했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이미 모든 증언을 마쳤다. 아이들을 겁탈했던 방식이 똑같더군. 협박도 똑같고. 그렇게 이삼 년 농락하다가 다른 아이로 갈아치우고."

더는 발뺌이 불가능해졌음을 깨닫자 배종탁의 표정이 바뀌었다. 억울함을 호소하던 자는 사라지고, 원래 본성을 드러냈다.

"술 먹고 실수한 겁니다. 한 번만 봐주십시오."

갑자기 차분해진 놈의 모습은 조금 전까지 억울함을 호소하던 모습과 너무 달라서 저잣거리의 연희단 패거리의 연기를 보는 것만 같았다.

놈이 아이들에게 차분하게 말했다.

"솔직히 너희들도 좋았잖아? 끝날 때마다 돈도 줬잖아?"

그러자 제일 어린 시비가 품에서 동전을 꺼내 바닥에 던졌다. 와르르 쏟아지는 동전들. 그녀는 한 푼도 쓰지 않고 가지고 있다가 오늘 가져온 것이다.

배종탁은 그 모습을 못 본 척 고개를 돌리며 내게 간청했다.

"황천각 역사상 시비를 건드려서 뇌옥에 들어간 예는 없다고 들었습니다."

"미리 공부도 했네. 맞아."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하늘에 맹세하겠습니다. 각서를 쓰라면 쓰고요. 아니, 아예 여자 시비는 두지 않겠습니다."

"넌 뇌옥에 안 갈 거다."

내 말에 아이들이 고개를 들었다. 전부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놈이 히죽 웃으며 아이들을 쳐다보았고, 아이들은 모두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대신 다른 곳에는 가야 한다."

"어딥니까?"

"여기."

쉬익! 푸욱!

내 검이 단칼에 놈의 목을 베었다. 놈은 비명 한 마디 내지르지 못하고 절명한 채 의자와 함께 뒤로 쓰러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아이들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바닥에 떨어진 동전으로 놈의 피가 흘렀다.

난 곧장 아이들에게 돌아섰다.

"너희들을 괴롭혔던 자는 이제 죽었다. 너희들 가족이 죽을 일도 없다. 그러니 앞으로는 걱정하지 말고 살아라."

아이들은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너희들이 당한 일, 죽을 때까지 못 잊을 거다. 어차피 잊지 못한다면 차라리 오늘 일을 잊지 마라. 이놈이 죗값을 치르는 이 순간으로 너희들이 당한 일을 덮어버려라. 저자의 모습은 이 마지막 최후만 기억해라."

이것이 내가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아이들은 시체를 쳐다보았다가 서로를 돌아보았다.

잠시 후 그들 중 제일 나이 든 아이가 나서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복수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다른 아이들도 함께 고개 숙였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어흐흑."

제일 어린 시비가 울음을 터뜨렸고, 다른 아이가 그녀를 안아주었다. 안아주던 아이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시비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사는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과거의 나 역시 그러했고.

"내게 감사할 필요 없다. 저놈을 벌줄 수 있었던 것은 너희들이 용감하게 증언해 준 덕분이다. 너희들이 해낸 응징이다. 그러니 앞으로도 용감하게 잘 살아라."

"네."

"그리고 혹시라도 이자의 친구나 가족에게 보복당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다. 앞으론 황천각이 너희들을 지켜줄 테니까."

이제 제일 나이 많은 소녀까지 눈물을 쏟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버지, 우리가 강자존이라는 미명에 빠져 이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한다면, 우린 아버지가 그토록 싫어하시는 정파 놈들에게 목이 잘리게 될 겁니다. 아니, 잘려야 됩니다. 목이 잘려도 할 말 없어야죠.

조사관들이 들어와서 아이들을 데리고 나갔다. 앞으로도 특별히 이 아이들을 신경을 써주라고 했으니, 아이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이 일 또한 교내에 소문이 날 테니, 함부로 시비를 건드는 놈들도 줄어들 것이고. 마인이기에 이런 일쯤은 당연하다는 생각, 그 그릇된 생각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조사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이안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까 저놈 잡아떼는 모습을 볼 때만 해도 정말 억울한 일을 당한 줄 알았습니다. 정말 무섭네요."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게 인간이다."

"한데 저자는 북천검가 소속입니다. 일화검존께서 그냥 계실까요?"

"자기 수하가 어린 시비들을 지속적으로 겁탈했어. 그런 자를 죽였다고 이걸 문제 삼는다? 안 그러는 게 좋을걸?"

"도련님은 겁 안 나세요?"

"겁나지. 이런 쓰레기들을 다 못 치우고 죽을까 봐."

"도련님이 황천각주가 되신 이후에 본교가 점점 착해지고 있어요. 이러다 무림맹보다 더 선한 사람들로 가득 차면 어쩌죠?"

난 곧장 그녀의 농담을 바로잡았다.

"시비를 겁탈하지 않는 것, 이건 착한 일 아니잖아? 당연한 일이지."

"아, 그렇죠."

"우린 지금껏 그 당연한 일도 못 하고 있었던 거고."

그때 서대룡이 다시 돌아왔다.

"각주님, 왜 그러신 겁니까?"

"뭘?"

"의도적으로 놈을 죽이셨죠? 저런 놈일수록 뇌옥에 가둬서 고생시켜야 한다는 것이 각주님의 지론이시잖습니까?"

본교의 뇌옥만큼은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곳이었으니까.

"그렇지."

"한데 왜 죽여버리신 겁니까?"

역시 서대룡은 똑똑한 녀석이다. 나는 일부러 일화검존과 관련된 사건을 직접 처리했고, 그의 말처럼 의도적으로 놈을 죽였다.

"이렇게 죽여야 일화검존을 만나러 갈 공식적인 명분이 생길 테니까."

서대룡은 깜짝 놀랐다.

"혈천도마 문제만 해도 골치 아픈데 일화검존은 왜 만나시려고요?"

"두 번째 호랑이가 필요해서."

"네?"

영문을 모르겠다는 서대룡을 보며 명령을 내렸다.

"지금 당장 검존에게 기별해. 취조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내가 직접 만나서 해명한다고."

* * *

한 시진 후, 나는 서대룡을 데리고 북천검가로 향했다.

"꼭 저를 데려가셔야 합니까?"

"공식적인 방문인데, 각주 혼자 갈 수가 있나? 오른팔이 따라가야지."

"제가 언제 오른팔이 되었습니까?"

"권력지향형의 비정한 성격이지만 한 여인만을 사랑하는 상남자, 다들 침묵할 때 홀로 손을 드는 반골, 내 오른팔로 충분하지."

"맙소사!"

"어떤 표현이 마음에 들어?"

"다 마음에 안 든다고요!"

이윽고 우린 북천검가의 입구에 도착했다.

혈천도마의 남도종이 본교의 남쪽을 차지한다면 일화검존의 북천검가는 북쪽을 장악하고 있었다.

"저는 북천검가는 처음입니다. 지금껏 제가 맡은 사건에는 북천검가와 관련된 사건이 없었거든요. 혈천도마와는 달리 일화검존께서 수하들 관리를 잘해오고 있었습니다. 검가의 마검들 역시 명예를 중요시했고요."

"그런가?"

내가 시큰둥하게 반응하자 서대룡이 물었다.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볼 때는 마검이나 도귀나 거기서 거기인 것 같아서. 명예를 중요시하는 자들의 눈빛이 저래서 되겠어?"

입구를 지키는 마검들의 눈빛이 곱지 않았다.

이미 배종탁의 죽음에 대해 알려진 모양인데, 죄를 지었으니 죽었지 하는 반응보단, '고작 시비 좀 건드렸다고 우리 북천검가 무인을 죽이셨소?'라는 감정에 가까웠다. 물론 요즘 같은 때 감히 날 도발할 수 없었기에, 곧 모두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서대룡이 나직이 내게 말했다.

"평화주의자인 제가 요즘 들어 자주 보는 눈빛이네요. 누구랑 같이 있으면 자꾸 보게 되네요."

"자네를 꾸미는 수식에 평화주의자도 추가해주지."

"아...."

우릴 안내할 무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존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는 사우종(沙佑鐘)입니다."

사우종이야말로 일화검존의 오른팔로 알려진 사내였다. 북천검가 내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로 과연 그 기세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난 이 남자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개인적인 인연이나 친분 때문이 아니라, 그의 최후가 꽤 인상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반갑네."

"저를 따라오시죠."

사우종이 우릴 데리고 계속 안으로 들어갔다. 마검들이 기거하는 건물들을 지나서 가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작은 모옥(茅屋)이 있었다.

아담하게 잘 꾸며진 이곳이 바로 일화검존의 거처다.

"황천각주께서 오셨습니다."

사우종의 기별에 모옥 문이 열리며 백의를 입은 여인이 걸어 나왔다.

"어서 오세요, 검 각주."

나긋한 목소리의 그녀가 바로 일화검존 소연랑(昭蓮郞)이었다.

제36회 이미 충성하고 있습니다

일화검존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겉으로는 이십 대로 보이지만, 실제 두 배는 더 나이가 많았다. 그래서 본교에는 이런 말이 있다.

세상은 변해도 검존은 변하지 않는다.

심지어 해가 갈수록 더 젊어지고 있는 그녀다.

그렇다고 하늘하늘한 저 외모에 속아서 헛짓거리했다간 그대로 혀가 잘리고 차디찬 철검이 심장에 박힐 것이다. 그녀의 독문병기인 일화검(一花劍)의 검집에 새겨진 붉은 동백꽃이 피처럼 강렬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르신."

"어르신이란 말은 언제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네요. 선배라 부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녀는 정중히 나를 대했다. 나뿐만 아니라 하급 무인에게도 항상 존대하며 예를 잃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그녀였다.

"어르신과의 배분을 생각하면 그럴 수 없습니다."

"나이가 많으니 존경해야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존경은 존경할만한 사람에게 하면 됩니다. 나이가 어려도 존경받을만하면 존경해야 하듯이요."

"좋습니다. 선배님의 뜻을 따르지요. 대신에 저도 편하게 이 공자라 불러주십시오."

"그러지요."

내가 서대룡을 그에게 소개했다.

"여기는 이번 사건을 조사한 특별조사관입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려드리려 데려왔습니다."

서대룡이 일화검존에게 정중히 포권했다.

"특별조사관 서대룡입니다. 이번 사건을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일화검존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됐어요. 황천각에서 죄를 지었다고 판결이 났으면 죄를 지은 거겠지요. 어린 시비를 겁탈한 자라면 죽어 마땅한 자니 본 검가에서는 이번 사건의 조사과정에서 일어난 일은 문제 삼지 않겠어요."

내가 서대룡에게 물러나라고 눈짓했다. 서대룡이 조용히 모옥 밖으로 나갔다.

일화검존이 나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내가 찾아온 이유가 다른 데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요즘 이 공자의 노고로 본교에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다고 들었어요."

"천방지축 날뛰고 있습니다."

"본교가 발전할 수 있다면, 그게 어디 천방지축이겠어요?"

일화검존은 팔마존 중 가장 마교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었다. 당장 이 허름한 모옥만 봐도 그렇다. 명문정파 노고수가 은거한 곳처럼 단아하게 꾸며져 있다.

"훌륭한 일을 하고 계십니다."

"선배님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시니 가능한 일입니다."

일화검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쭈글쭈글한 얼굴에 괜한 금칠은 마세요."

이 말은 명백히 의도된 말이다. 이 말을 유도하기 위한.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선배께서는 지금도 이십 대처럼 보이십니다."

"이십 대라니요! 가당치도 않은 소립니다!"

손사래를 치는 그녀 얼굴에 감출 수 없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 사람은 뒷전에 물러나 무학의 이치를 깨닫는 것으로 충분한 사람이랍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말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화무기의 손에 아버지가 죽고 본교가 봉문을 당한 이후, 내부에서는 본격적인 권력다툼이 벌어졌다. 팔마존은 물론이고, 본교의 이름난 고수들이 저마다 교주 자리를 놓고 다퉜다.

그래서 첫 번째 교주가 누구일까?

놀랍게도 눈앞에 있는 이 여인, 바로 일화검존이다. 지금의 이 나긋한 미소와 차분함을 생각하면 믿기 어렵겠지만, 그녀는 가장 먼저 움직여서 교주 자리를 차지했다.

그 과정에서 피바람이 불었다. 그녀는 가차 없었다. 짧았던 교주 생활 내내 피바람이 불었다. 그래서 정치라도 잘했으면 좋았겠지만, 일화검존의 통치력은 욕심을 따르지 못했다.

무능력한 자가 욕심이 많으면 벌어지는 모든 비극을 일으켰고 채 삼 년을 채우지 못하고 차기 교주에게 목숨을 잃었다. 그렇기에 그녀에 대한 내 평가는 박할 수밖에 없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번 사건이 터졌을 때, 많이 부담스러웠습니다."

"왜 부담스러웠나요?"

"들으셨겠지만 근래 남도종과 충돌이 많았습니다."

나는 슬쩍 혈천도마의 남도종을 언급했다. 팔마존 중 서로 가장 사이가 안 좋다고 알려진 두 사람이다. 그런 이유로 도귀들과 마검들 역시 견원지간(犬猿之間)이었고.

"혈천도마 어르신께서는 저를 심하게 압박하셨거든요. 한데 또 이번에는 검가와 갈등이 생겼으니...."

"나는 도마와는 엄연히 다른 사람입니다!"

혈천도마와 함께 언급되는 것조차 불쾌한지, 일화검존의 목청이 높아졌다.

"그럼요, 당연히 다르시죠."

"말이 나와서 묻습니다만, 이번에 도마가 남도종에서 장호란 자를 마군주로 추천했다고 들었어요. 어떻게 된 일이죠?"

모옥에서 홀로 수련만 하고 있을 것 같지만, 그녀는 교내의 사건들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미래의 권력 쟁취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장호는 능력도 출중하고 충성스러운 자입니다."

"내가 묻는 것은 도마가 왜 그자를 마군주로 삼으려 했느냐는 거예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장호는 제 사람입니다."

이미 알고 있었는지 일화검존은 놀라지 않았다. 그녀가 궁금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어떻게 도마를 설득했나요?"

"어르신의 자존심을 자극했습니다. 명색이 마존인데 교를 위한 선택을 해야 하지 않느냐고요. 친분이나 정치 권력 때문이 아니라 진짜 능력이 있는 자를 추천해야 한다고요."

"도마는 그딴 이유로 설득되지 않아요."

"맞습니다. 아마 저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일 겁니다. 어쨌든 도마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교를 위한 마음은 팔마존 중 자신이 제일이라고요."

가당치도 않은 말이라 생각했는지 일화검존의 표정이 잔뜩 찌푸려졌지만 나는 모른 척 계속 말을 이어갔다.

"하나 어르신조차도 장호를 마군주로 앉히기는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총군사께서 방법을 제시했지만, 그 역시 쉽지 않아서."

"군사께서 무슨 방법을 말씀하셨나요?"

"다른 마존께서 함께 추천하면 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만, 문제는 그 일을 함께하실 마존이 안 계신다는 점이죠."

"왜 없다고 생각하죠?"

"네?"

"교를 위한 마존이 도마밖에 없다고 생각하세요?"

"그건 아닙니다만."

일화검존이 차가운 눈빛으로 내게 물었다.

"오늘 나를 찾아온 목적이 내 자존심까지 건드려서 도마 선배와 함께 장호를 추천해 달라는 것 아닌가요?"

이제는 솔직함을 보여야 할 때다. 술수와 진실이 뒤섞여서 대체 이 계략의 재료가 뭔지 알 수 없을 때, 비로소 그 계략은 맛을 내는 법이니까.

"눈치채셨습니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뭔가요?"

"마군을 제 손에 넣기 위해서입니다. 그 영향력으로 한시라도 빨리 후계자가 되고 싶습니다."

일화검존은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혈천도마 그 깐깐한 늙은이가 왜 나를 선택했을까? 형을 버리는 강수까지 쓰면서. 그녀는 분명 이런 의구심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교주님이 왜 이 공자를 황천각주에 앉혔는지 이제 확실히 이해가 가는군요."

"왜죠? 저는 아직도 아버지의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녀가 가까이 다가와서 내 눈을 들여다보듯 응시했다.

"이 공자는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요."

마치 자신감에 넘치는 사람만이 이렇게 허심탄회한 감정을 드러낼 수 있다는 듯, 그녀는 지금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잠시 숙고하던 그녀가 이윽고 결정을 내렸다.

"좋아요, 저도 장호를 추천해주겠어요."

"정말이십니까?"

나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내심 그녀가 추천해주리라 어느 정도 예상했었다. 바로 도마와의 특수한 관계 때문에.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교를 위한 마존이 도마만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해두죠."

그녀가 돌아섰다. 무언의 축객령임을 알았기에 그녀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도와주신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 이유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번 일에 나서는 것은 전적으로 혈천도마 때문이다.

혹시라도 내가 후계자가 될 인재이고, 그것을 도마가 먼저 알아봤을까 봐. 만약 그렇다면 도마가 나를 독차지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다. 도마에게는 길가에 떨어진 말똥도 주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고?

그녀는 정말 끔찍하게 도마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교주가 되었을 때, 맨 처음 죽인 사람이 바로 혈천도마였다.

* * *

다음 날 일화검존이 장호를 마군주에 추천했다.

이 전격적인 소식에 교내가 들썩였다. 마군의 대주가 후보로 나온 적도 없었고, 두 명의 마존이 뜻을 모아 한 사람을 추천한 적도 없었다.

특히 그 두 마존이 사이가 좋지 않은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이었으니 오죽하겠는가? 자연스럽게 장호가 화제의 중심에 올랐다.

천마전에서도 교주 검우진과 총군사 사마명이 이 일에 관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설마 이 공자가 검존을 끌어들일 줄은 몰랐습니다."

"두 사람의 불화를 이용했겠지."

"모두가 그들의 불화를 알고 있지만, 누구도 이번 일을 이렇게 쉽게 해낼 수는 없을 겁니다."

혈천도마도 일화검존도 모두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었으니까. 모두가 뻔히 아는 불화를 이용하려 했다간, 역효과만 날 것이다.

"장호란 자는 어떤가? 마군을 맡겨도 되겠는가?"

"능력 자체는 출중한 자입니다. 다만 순수 무인에 가까워서 정치적인 입지가 약합니다. 그런 장 대주를 선택한 것부터 아주 영리한 선택이었습니다."

"애초부터 장호를 발굴한 것은 아니었을 거네."

"그 말씀은?"

"감정적인 선택이었겠지. 생각보다 감정적인 아이라네."

사마명은 검우진의 말이 낯설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자식에 대한 평가를 자신에게 말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장점이자 단점이군요."

사마명의 말에 검우진은 단호히 말했다.

"단점이지."

사마명은 옅은 미소로 말을 아꼈다. 최근 교주가 검무극에게 마음을 열고 있다는 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누구나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교주가 검무극을 후계자로 삼을 것으로 생각지 않았다. 검우진은 드러나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결정을 내리곤 했기 때문이다. 아직은 모를 일이다.

"마군주 문제는 어떻게 마무리 지을까요?"

"둘이 추천했다면 받아들여야지. 그 사람들 체면도 있는데."

검우진은 기다렸다는 듯 명령을 내렸다.

"장호를 마군주에 앉히게."

* * *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마군주가 되었다는 소식에 장호가 가장 먼저 나를 찾아왔다. 그는 마군주가 되었다는 사실에 기쁨과 걱정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장 대주 성격으로 볼 때 아마 은혜는 못 갚을 거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내가 장 대주를 마군주에 앉힌 이유는 두 가지네. 첫 번째는 그 자리에 가장 걸맞은 사람이라 생각해서지. 장 대주나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마군과 본교를 위해서 장 대주가 적임자라 여겼네."

"과분하게 여겨주셔서 몸들 바를 모르겠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마군이 내 힘이 되어 주기를 바라서지. 한데 첫 번째 이유와 두 번째 이유가 상충하지 않나? 강직한 장 대주께서 사적인 관계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을 거네. 아, 그리고 미리 말하지만 난 그대에게 친분을 강요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걱정 말게."

그러자 장호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저를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저는 제 친구의 죽음 때문에 투서를 넣었습니다. 복수하기 위해서였죠. 제 목숨도 거기에 걸었고요. 보시다시피 저는 사람과의 관계를 인생에서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감정적인 사람입니다. 조직을 위해서 사적인 관계를 버리는 사람으로 보셨다면, 저를 잘못 보신 겁니다. 그때 공자님께서 오지 않았다면, 아마 저는 그때 죽었을 겁니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내가 가지 않았다면 그는 그 사건으로 죽었다.

"저는 공자님께 충성하고 싶습니다. 아니, 이미 충성하고 있습니다. 물론 교주님과 교에 충성하고, 마군을 위해서 노력하겠지만, 가장 충성하는 것은 공자님이십니다."

그는 진심을 말하고 있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사람을 수하로 얻었다는 것을.

"저도 공자님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데?"

"함께 있으면 어떤 어려운 일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분이십니다."

"이 정도 아부면, 정치를 못 해 불이익을 받을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군."

"하하, 저 그렇게 깨끗한 놈 아닙니다."

"앞으로 잘 부탁하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의 커다란 손을 굳게 맞잡았다. 난 이 크고 거친 사내의 의외성이 마음에 든다.

제37회 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훈련은 오늘로 끝이다."

장호의 말에 집행무인들이 아쉬움을 드러냈다. 욕을 얼마나 했는지 셀 수 없을 정도로 힘든 훈련이었지만, 얻은 것이 많았다.

무공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진 않았지만, 해이해져 있던 정신만큼은 바짝 당겨졌다.

집행무인쯤 되는 고수들에게 정신력의 차이는 실력 차이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장호는 틈틈이 집행무인들의 무공을 봐주면서 잘못된 자세나 버릇을 교정시켜주었다. 덕분에 무공실력이 실질적으로 향상된 이도 여럿이었다.

장호는 마지막까지 집행무인들 하나 하나에게 자세를 어떻게 고치고 앞으로 어떤 훈련을 해야 하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정말이지 지옥 훈련을 받았던 집행무인들이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을 거다.

"훈련을 조금 더 해주시면 안 됩니까?"

그때 옆에서 지켜보던 내가 나섰다.

"그건 힘들게 됐다. 장 대주가 이번에 마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마군주란 말에 모두 깜짝 놀랐다. 훈련장에만 있어서 외부 소식을 듣지 못한 탓이다.

"축하드립니다."

누군가의 축하에 함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장호가 그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그대들과 함께 한 시간을 잊지 못할 거네. 그럼 다음에 보세. 아니지, 내 입장에서 자네들을 보면 큰일 난거지. 우리 평생 보지 말자고!"

그렇게 농담까지 곁들인 마지막 인사를 한 후 장호는 그곳을 떠났다.

장호가 서 있던 단상에 내가 섰다. 집행무인들은 훈련 첫날의 눈빛과는 사뭇 다른 눈빛이었다.

"이보게들, 마군주에게 훈련받은 최초이자 마지막 무인들!"

내 말에 몇몇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우리 아버지를 체포해 오라고 명령해도 겁 없이 갈 수 있겠지?"

다시 여기저기서 웃음을 터져 나왔다.

그렇게 분위기를 풀어준 후, 나는 그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전했다.

"무공도 중요하고, 잘 싸우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집행무인이란 이름이 붙은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부심이라 생각한다. 본교의 규율을 지키고 체제를 수호한다는 자부심, 우린 우리 길을 가는 거다. 알겠나?"

"네!"

"훈련받느라 고생했다. 연회를 준비해뒀으니 오늘은 실컷 마시고 쉬도록!"

앞서 우렁찬 대답보다 더 큰 기쁨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