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다음 날 나는 서대룡과 집행무인들을 데리고 서환진으로 향했다.
사전에 기별했기에 서환진에서는 우릴 안내할 귀술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여참(呂參)이라고 합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우리는 여참을 따라 걸었다.
한참을 걷다 화원에 들어서는 순간 난 발걸음을 멈췄다.
"잠깐. 귀기(鬼氣)가 느껴지는데?"
나는 수하들을 멈추게 하고 주위를 살폈다. 귀기는 화원에 심어진 귀화(鬼花)때문이었다.
"저 꽃들이 내뿜는 향 때문이군."
여참은 깜짝 놀랐다. 정말 예민한 감각을 지닌 고수가 아니라면 귀화의 귀기를 알아낼 수 없기 때문이리라.
"귀술사가 아닌 사람이 귀화의 귀기에 노출되면 한동안 내공 운용이 원활하지 않게 되고, 섭혼술에도 더 잘 걸리게 되지. 환영을 보는 부작용을 겪을 수도 있고, 운 나쁘면 심마(心魔)에 빠질 수도 있다. 나는 내 수하들에게 그런 꼴을 당하게 하고 싶지 않다."
당장에라도 검기를 날리려 흑마검을 치켜들자 여참이 소리쳤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아주 잠깐 귀화의 향을 억제할 수 있습니다."
그가 품에서 작은 원통을 꺼내더니 화원 가운데 세웠다. 통에서 연기가 피어올랐고, 주위에 있던 귀기가 그 연기에 몰려들었다.
"이때 어서 지나가시죠!"
나는 수하들과 함께 재빨리 그곳을 지났다.
"내가 말 안 했다면 우린 귀기에 노출된 채 들어갔겠군."
"죄송합니다."
내 질책에 여참이 고개를 숙였다. 그 역시 명령을 받는 처지임을 알기에 더는 추궁하지 않았다.
그때 서대룡이 내 뒤에서 나직이 말했다.
"저희들을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각주님."
돌아보니 서대룡뿐만 아니라 집행무인들도 고마워하고 있었다. 내가 아니었다면 모두 귀기에 영향을 받았을 테니까.
"다들 긴장 풀지 마라."
"네!"
곳곳의 석상이나 탑에서 귀기를 내뿜었다.
내가 알아차리기가 무섭게 여참이 알아서 귀기를 억제했다.
서대룡이 섭혼마존을 두려워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이건 뭐 만나러 가다 죽을 지경이었으니까.
그렇게 우린 서환진의 중심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그곳에 지어진 집들은 생김새가 특이했다. 대부분 달팽이 껍데기처럼 생긴 집들이었는데, 중복된 원들로 이뤄진, 그야말로 중원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건축물들이었다.
이곳이 처음인 서대룡은 처음에는 이국적인 모습에 감탄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속이 좋지 않다고 호소했다. 이곳 건물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어지러웠다.
나는 서대룡과 집행무인들에게 눈을 감고 걸으라고 했다. 그들은 눈을 감고 일렬로 어깨에 손을 짚은 채 내 뒤를 따라 걸었다.
기묘한 건물들 가운데 원뿔 모양의 건물이 있었다. 이곳이 바로 섭혼마존이 기거하는 곳이었다.
그의 방이야말로 어지러움의 극치였다. 벽과 바닥, 천장까지, 온통 빙글빙글 도는 문양들로 가득했다. 정말이지 이 방에 있는 것 자체가 괴로울 정도였다.
그 방의 중앙에 섭혼마존이 앉아 있었다.
섭혼마존 야소(夜素).
과거에도 느꼈지만, 그는 정말 평범하게 생겼다. 지금 당장 마가촌에 가면 비슷하게 생긴 사람 열 명은 데려올 수 있겠다 싶은 얼굴이었다. 이 어지러움 속에 저런 평범함이라니?
그는 사람을 현혹하는 인간은 다 이렇게 평범하다는 것을 상징처럼 보여주는 인물 같았다.
"마존을 뵙습니다."
내가 정중히 예를 차리며 인사했다.
회귀 전 그와는 별다른 인연이 없었다. 심지어 대법재료를 찾으러 다시 본교로 돌아왔을 적에도 그와는 별다른 접점이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팔마존 중 가장 오래 살아남았던 사람이 그였다.
"어서 오게, 이공자."
그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흩어져 들렸다. 왼쪽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했고 오른쪽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세상의 귀퉁이까지 어인 일인가?"
이번에는 등 뒤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들렸다.
이렇게 정신을 혼란스럽게 하니, 어떤 의미에서 이미 섭혼술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사건조사차 왔습니다."
그러자 섭혼마가 나를 뚫어질 듯 응시했다.
갑자기 눈동자의 검은자위가 커졌다. 온통 시커메진 그의 눈을 보고 있으니 정신이 몽롱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 함께 온 수하들은 지금 제정신이 아닐듯싶었다.
"제법인걸?"
마음속 생각인 양, 목소리가 동굴 속 메아리처럼 울렸다.
"심지가 굳다는 소릴 곧잘 듣습니다."
물론 그래서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는 천마호신공 덕분이었다. 천마호신공이 스스로 발동해 귀기가 정신과 마음에 침범하지 않도록 막았다. 물론 아직 성취가 깊지 않았기에, 섭혼마존이 전력을 다하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불필요한 기싸움으로 번지기 전에 나는 재빨리 오늘의 방문목적을 밝혔다.
"특이한 시체가 십여 구 발견되었는데, 그곳에서 귀술사의 물건이 나왔습니다."
"어떤 물건인가?"
내가 부채를 그에게 보여주었다.
귀선마다 제 주인이 있는 모양이었다. 귀선을 보자마자 섭혼마존이 한 사람을 불렀다.
"능휴(凌携)를 불러라."
보통이라면 물어야 할 질문이 생략되었다. 특이한 시체라고 일부러 강조했는데도 섭혼마는 뭐가 특이한지 묻지 않았다. 그 말인즉슨.
'어떤 시체인지 이미 알고 있다.'
제47회 공백은 네가 메워라.
잠시 후 능휴가 그곳으로 들어왔다.
"속하, 마존의 부르심을 받고 달려왔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그의 허리춤을 향했다. 과연 그곳에는 귀술사들이 차고 다니는 귀선이 없었다.
"귀선은 어디에 있느냐?"
"어제 잃어버렸습니다."
그러자 섭혼마가 들고 있던 귀선을 그에게 던졌다.
"제 것입니다. 이것이 어디서 났습니까?"
그는 감히 섭혼마존에게 묻지 못하고 내게 질문했다.
"어제 여러 구의 시체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함께 발견되었네."
내 대답을 들은 능휴는 흠칫 놀랐다. 자기 소지품이 사건 현장에서 발견되었다는 일반적인 놀람과는 다른 형태의 놀람이었다.
그리고 능휴 역시 시체가 어디에서 발견되었는지 또 사인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아, 이 능휴가 시체 처리를 맡은 자구나!'
섭혼마존이 심혼대법을 펼치고 있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같이 가서 조사를 받아야겠네."
능휴는 나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사람을 쳐다보며 처분을 바랐다.
섭혼마존은 말없이 그를 쳐다보기만 했는데, 그가 특이한 방식으로 전음을 보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곧이어 능휴가 내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함께 가시죠."
그는 무죄를 항변하거나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체포되었다.
나는 섭혼마존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뵙지요."
섭혼마존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은 더없이 평온했기에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 * *
돌아오자마자 능휴에 대한 조사를 지시했다.
특별조사관들이 돌아가며 조사했지만, 그는 부채를 잃어버렸다는 말만 할 뿐, 일체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입을 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서대룡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섭혼마존에 대한 충성심과 공포심이 너무 강해, 어떤 회유나 심문도 통하지 않을 상대였다.
"그들을 살해했다는 증거가 없어서, 오래 잡아둘 수 없을 겁니다."
"어차피 놈은 하수인에 불과해. 잡으려면 섭혼마존을 잡아야지."
내 눈빛에 담긴 기세를 읽었는지, 서대룡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조심하십시오, 상대는 섭혼마존입니다."
"혹시 내가 처음 부임해 왔을 때 자네들에게 했던 말 기억나나? 아버지가 잘못해도 잡으러 간다고."
"네."
"그럼 조심은 그자가 해야지. 가서 전해라. 조심하라고."
"제게 그럴 용기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날 내 집무실로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놀란 얼굴로 들어온 서대룡은 말까지 더듬었다.
"교, 교주님이 방문하셨습니다."
나도 깜짝 놀랐다. 아버지가 이곳을 찾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어서 모셔라."
서대룡이 나가고 곧이어 아버지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아버지? 이곳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지나가다 들렀다."
그럴 리가. 아버지는 내게 하실 말씀이 있으셔서 오신 것이다.
"차도 있고, 술도 있습니다."
"대낮부터 무슨 술이냐. 차나 한잔하자."
내가 직접 차를 타서 내왔다. 그동안 아버지는 내 자리 뒤쪽 창가에 서서 밖을 쳐다보고 계셨다.
"차 드십시오."
아버지는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아직 섭혼마존은 건드리면 안 된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말씀을 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내가 서환진에 가서 능휴를 체포해 온 사실을 알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 시체가 발견된 이상 내가 섭혼마존을 그냥 두지 않으려 한다는 것까지도.
"왜 안 됩니까?"
"네 무공으론 죽일 수 없으니까."
"방심하고 있을 때 베어버리면 되죠. 안 되면 등을 찔러서라도 죽일 겁니다."
"죽이는 것보다 그이의 등 뒤에 서는 것이 더 어려울 거다."
"섭혼마존이 그렇게나 강합니까?"
"가장 약하기도 하고, 가장 강하기도 하지."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그의 섭혼술을 넘어선다면, 그러니까 그의 사술이 통하지 않는 무공을 익히거나, 사술이 통하지 않는 무학의 경지에 이르면 그는 가장 쉬운 상대가 된다는 의미였다. 사술을 빼면 섭혼마존의 무공은 별것 아닐 테니까.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아버지에게 가장 약한 마존은 섭혼마존일 것이다. 섭혼마의 사술은 아버지에게 전혀 통하지 않을 테니까.
"제가 넘어서게 도와주시겠습니까?"
"단시일에는 불가능하다."
"지금까지 보셨다시피 제가 생각보다 배움이 빠르지 않습니까?"
"그걸로는 어림없다. 섭혼마의 섭혼술을 막을 방법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구화마공을 익히는 것이다. 익힌 자의 자질에 따라 막아낼 수 있는 정도가 다르겠지만, 너라면 오 성에만 도달해도 섭혼의 사술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 첫 번째로 막게 해주십시오."
후계자로 삼아달라는 내 부탁을 아버지는 못 들은 척 두 번째 방법을 말씀하셨다.
"아니면 천마호신공의 대성을 이루는 것이다. 둘 다 지금은 불가능하니 물러서라는 거다."
그때 내 마음에 떠오른 한 가지 해결책. 내가 회귀를 했기에 알고 있는 한 가지 방법이 있었다.
'아버지, 사실 세 번째 방법도 있습니다.'
첫 번째 두 번째보다 백 배는 더 쉬운 방법이죠.
문제는 사실 다른 데 있었다.
"섭혼마존이 본교에 꼭 필요한 존재입니까?"
아버지는 느끼셨을 거다. 내 차분한 질문에 담긴 살의(殺意)를.
"팔마존 중 정파인들이 가장 까다롭게 여기는 이가 섭혼이다."
돌려 말했지만, 꼭 필요하다는 말씀이었다.
"대법을 위해 살아 있는 채로 사람의 심장을 뽑고 있는데도요? 혹시 알고 계셨습니까?"
아버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이번에 알았다."
과연 아버지는 어떻게 처리하실까?
아버지라고 어디 산 채로 심장을 꺼내는 놈을 좋아하시겠는가?
다만 교를 이끄는 처지에서 무림맹을 상대할 때 본교에서 가장 강한 전력이 될 사람을 함부로 없앨 수도 없으실 거다. 이건 아버지에게 맡겨야 할 일이 아니라 내가 풀어야 할 문제다.
"마존을 죽이기 전에 미리 말씀드리라고 하셨죠?"
이안에게 비천검법 전수를 허락하면서 아버지가 걸었던 약속이었다.
"지금 말씀드립니다. 전 섭혼마존을 죽일 겁니다. 팔마존 중 제일 먼저 죽는 마존은 그자입니다."
회귀 전 세상에서 가장 오래 산 마존이 섭혼마존이었다. 그는 이제 정반대의 운명을 살게 될 것이다.
"이건 마음에 안 든다고 홧김에 사람을 죽이는 것과 다릅니다. 미친놈이 돌아다니면서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도 더 나쁩니다. 멀쩡한 정신으로 체계적이고 규칙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이니까요. 목적이나 거창하면 이해라도 하죠. 고작 저 조금 강해지려고 그 지랄 아닙니까? 이거 인간 아닙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팔마존들과의 입장이 있으니, 제게 맡겨주십시오. 칼자루 제게 쥐여 주셨으니, 끝까지 휘두르게 해주십시오."
내가 한 말을 아버지가 얼마나 공감할지 모르겠다. 아버지와는 같은 길을 가고 싶지만, 이번 일만큼은 이렇게 생각하려 한다.
긴 여행에서 이 길에서 저쪽 길까지, 때론 일행과 잠시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야 하는 경우도 있는 법이라고.
아버지는 한참 동안 말없이 나를 응시하더니 생각지도 못한 말을 남긴 후 방을 나갔다.
"네가 그 정도 실력이 된다면... 그이의 공백은 네가 메우게 될 테니, 큰 문제는 없겠지."
"!"
죽여도 좋다는 허락이었다. 실력이 되면 나서라는 충고와 그 공백을 내가 채우라는 압박까지 한 번에 다 하셨다.
내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미 가버리셨기에 감사 인사는 마음속에서 했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역시 아버지는 아버지십니다. 그래, 이런 일로 헤어질 여정은 아니었다. 아버지와 난 아직 같은 길을 가고 있다.
그럴 리는 없지만, 내가 이번 생에 아버지가 된다면... 조금 전 아버지가 느끼게 해준 그런 짜릿함을, 나도 아들에게 주고 싶다는 생각이 아주 잠깐 들었다.
물론 이번 생에도 혼자 살겠지만 말이다.
* * *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아이들이 있어요. 제가 죽으면 제 아이들은...."
남자는 애원하는 여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여인은 공포에 질려 남자를 쳐다보았다.
이 평범하게 생긴 남자의 눈빛은 너무나 무서웠다.
하지만 아이를 생각해서 용기를 냈다. 홀로 아이들을 키우는 그녀였다. 자신이 돌보지 않으면 어린 자식들은 겨울을 나지 못하고 죽게 될 것이다.
"제발 보내주세요.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제발 보내만 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여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때 여인은 남자의 눈동자가 검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그 검은 그림자 속에서 자식들의 모습을 보았다.
순간 반가움에 환하게 웃었지만 이내 그녀의 얼굴은 고통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배고픔에 시달렸고, 다른 거지들에게 두들겨 맞았으며, 미친놈에게 끌려가 고통을 겪었다.
"안 돼! 제발! 안 돼!"
남자의 눈동자는 잔인했다. 그녀의 모든 슬픔을 다 뽑아내겠다는 듯, 아이들의 마지막 순간까지 연출했다.
아이들은 추운 겨울 길바닥에 쓰러져 숨을 거두고 있었다. 아이들의 입에서 '엄마, 배고파'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아아아! 안돼!"
슬픔과 절망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자신의 마음까지 빼앗겼다.
남자의 손에서 그녀의 마음이 뛰고 있었다.
자신의 생명을 잃은 슬픔보다 자식을 더는 볼 수 없다는 슬픔이 피눈물이 되어 사방으로 튀었다.
그녀의 숨이 끊어졌고, 평범하게 생긴 남자의 내공은 아주 조금 늘어났다.
* * *
다음날 나는 조사실에 있던 능휴를 데리고 서환진으로 갔다.
난 섭혼마존을 죽이기 위해서 세 번째 방법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대략 두 달여의 시간이 필요하다. 정해진 날짜에 어딘가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벌 필요가 있다. 딱 두 달만.
이번에는 서대룡만 데리고 갔다. 무섭다고 안 가겠다는 것을 억지로 끌고 왔다. 데리고 다녀야 한다. 차기 황천각주에겐 여러 경험이 필요했으니까.
우리를 맞이하는 섭혼마존의 검은 눈자위는 기괴할 정도로 커져 있었다.
"능휴는 무죄로 판결 내렸습니다. 그들을 죽였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죠."
"그럼 능휴만 풀어주면 되지, 그대는 왜 온 건가?"
"드릴 말씀이 있어서입니다."
"말하게."
"주위를 물려주십시오."
나는 서대룡을 밖에 나가 있게 했다. 이제부터 하려는 말은 상대가 살인멸구로 반응할 수도 있는 중요한 말이었다.
둘만 남자 그에게 말했다.
"마존께서 심혼대법을 펼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심혼대법이 뭔가? 금시초문이네."
그는 눈빛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일로 마존의 자리까지 오른 그였으니, 감정동요는 일절 없었다.
"대법을 중단하십시오."
"이공자,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그의 말이 사방에서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만약 제 제안을 거부하면 죽습니다."
섭혼마존이 가소롭다는 듯 웃자 내가 한 말이 날 조롱하듯 메아리쳤다.
―거부하면 죽습니다, 거부하면 죽습니다....
죽는다는 말은 내가 아는 여러 사람의 목소리로 들렸다.
나는 천마호신공으로 마음을 다스리며 단호히 말했다.
"마존을 죽이는 것은 제가 아닙니다."
―제가 아닙니다, 제가 아닙니다....
다시 내 말이 여러 사람의 목소리로 반복되면서 나를 조롱했다.
"아버지를 설득할 겁니다."
아버지가 언급되자 메아리가 뚝 끊어졌다.
방안을 찾아온 정적.
그가 두려워하는 유일한 한 사람.
당분간이라도 그를 제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아버지밖에 없었다.
"아침마다 문안 인사 가서 부탁드릴 겁니다. 섭혼마존을 죽여주십시오. 다음날 가서 또 말씀드릴 겁니다. 산 사람의 심장을 빼는 자는 본교의 위상을 깎아내리는 자일 뿐입니다. 또 다음날 가서 말씀드릴 겁니다. 후계자 포기할 테니 죽여주십시오. 다음날에도 또 다음날에도 온갖 말로 설득할 겁니다. 그러다 마존께서 아버지께 큰 실수를 한 어느 날, 그러자 하실지도 모르겠지요."
내 말이 끝난 순간 섭혼마존의 검은 눈동자가 점처럼 작아졌다. 마치 눈동자가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며 점만 남는 것 같은 기괴한 모습이었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 강력한 귀기가 발출되었다.
키히히히히.
귀신 소리가 나면서 주위가 어두워졌다가 밝아졌다.
어느새 주변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제48회 혼자 사는데 뭐가 외로워.
주위 사물이 살아 있는 것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서탁도, 장식장도, 벽에 세워둔 검과 부채도 모두 흘러내렸다. 마치 뜨거운 열기에 녹아서 흐물거리는 것만 같았다.
바닥 역시 파도가 치는 것처럼 출렁거렸다. 걷기도 힘든 이곳에서 보법을 발휘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였다.
벽과 천장 역시 출렁거리고 있었고, 바둑판 같은 선들까지 생기면서 시야를 어지럽혔다.
섭혼마존의 목소리가 동굴 속 그것처럼 깊게 울려 퍼졌다.
"자네가 살았던 세상은 허상일 뿐이야. 지금 보고 있는 이곳이 진짜 세상이지."
자연스럽게 천마호신공이 발동했다. 만약 천마호신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이미 그에게 정신을 빼앗기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공격을 가해 위기를 벗어날 상황도 아니었다.
저 앞에 서 있는 섭혼마존이야말로 허상일 테니까.
아직은 가장 강력한 사술을 발휘한 것이 아니었기에 이 상황을 제어할 수 있었다. 나는 귀기를 다스리며 차분히 말했다.
"술값을 아낄 수 있는 세상이군요. 술을 마시지 않아도 이렇게 취한 것처럼 어지러우니."
이미 쓰러졌어야 할 내가 차분히 농담하는 것을 보자, 섭혼마존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음 순간 내 귀로 그의 속삭임이 들렸다. 여러 사람이 속닥속닥 소문을 나르는 그런 중첩된 목소리였다.
"소문이 사실이었군. 이공자가 잠룡이 되어 승천하기 시작했다더니."
어느새 그는 내 옆에 와 있었다.
내 옆에 선 그가 허상인지 진짜인지 알 수 없었다.
베어봐야 알 것 같은데, 과연 놈을 벨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부터 들었다. 검을 뽑기도 전에 이런 생각이 들었으니, 그와 싸움이 벌어진다면 정말 힘든 싸움이 될 것이다.
아버지가 왜 찾아와서 경고까지 해주셨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천마호신공이 발동된 상황인데도 이렇게 정신이 없는데, 이때 공격까지 해온다면 대체 섭혼마존을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는가?
나는 옆에 선 섭혼마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무나 평범했기에 오히려 비범해 보이는 그의 얼굴.
"저는 승천할 생각이 없습니다. 가늘고 길게, 이 세상에서 오랫동안 즐기고 싶습니다. 강해지려는 것도 그 때문이죠."
정확히는 섭혼마존이 추구하는 삶이었다. 그는 가늘고 길게 마지막까지 살아남았으니까. 그는 죽기 전에 여러 말들을 남겼는데 다음도 그가 자주 했던 말이었다.
―내가 강해지기 위해 평생 노력한 것은 그 누구에게도 죽지 않기 위해서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정말 소중하게 여기는 인물이었다. 심혼대법 역시 그런 자기애의 발로였고.
섭혼마존이 날 보며 히죽 웃었다.
"멋진 생각이군."
동시에 주위의 울렁거림이 멈췄다. 주위가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지자 어느새 주변이 바뀌어 있었다.
정신 나갈 것 같았던 공간은 사라지고 이번에는 드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광경이다.
섭혼마존은 저 멀리 들판 가운데 서 있었다.
나는 그를 향해 소리쳤다.
"정말 멋진 무공입니다."
원래 그의 심기를 뒤틀려면 무공이란 말 대신 사술이나 눈속임이라 말했겠지만, 지금은 굳이 그러지 않았다. 그의 세상에선 한 수 접어주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으니까.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펼칠 수 있는 무공이지."
그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풍천교주도 이와 똑같은 무공을 펼칠 수 있다. 과거 음뢰종을 구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두 사람이 배운 무공의 뿌리는 혈교 마공에 있었으니까.
"어떤가? 이런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아니한가?"
그는 멀리 서 있었지만 목소리는 바로 옆에서 들렸다.
"가르쳐 주시면 감사히 배우겠습니다."
그러자 다시 섭혼마존이 순식간에 내 앞에 나타났다.
"생각보다 음흉하군. 천하의 신공을 거저먹으려 들다니."
"덕분에 저를 얻으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그가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시커먼 눈동자가 점처럼 작아졌다.
"자네가 무슨 생각 하는지 훤히 다 보이는군. 혈천도마같은 머저리는 속여도 날 속일 수는 없지."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내 머리채를 흔들며 귀싸대기를 날리고 싶어 해. 내 뺨을 갈기면서 이렇게 말하는군. 이 병신아, 네까짓 게 뭔데 말을 안 들어?"
"비슷한데 틀렸습니다. 이 병신아, 네까짓 게 뭔데 사람을 죽여? 양심 없는 네 심장부터 꺼내 보자! 어떻습니까? 좀 다르죠?"
섭혼마존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나를 죽일 자신이 있었기에 강자의 여유를 발휘했다.
"교주 아들이니 죽기도 힘들지? 그래서 내 손에 죽고 싶은 거지?"
"그럴 리가요. 죽은 천하제일보다 살아 있는 삼류가 낫지 않겠습니까?"
이 말 역시 섭혼마존이 자주 했던 말이었다.
섭혼마존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는가 싶더니.
점처럼 작아졌던 그의 검은자위는 원래대로 돌아왔고, 귀기 역시 모두 거둬들였다.
주변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다시 우린 섭혼마존의 방에 마주 보고 있었다.
"방금 내가 보여준 것은 맛보기에 불과하다네. 마음만 먹으면 지옥 같은 곳을 열어서 평생 못 나오게 할 수도 있지. 이래도 내가 두렵지 않은가?"
"두렵죠, 두렵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를 설득하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잠시 멍하게 날 쳐다보던 섭혼마존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하."
웃음 하나조차 평범하지 않은 그였다. 웃음은 상대의 마음을 헤집는 괴소(怪笑)였다. 내부가 진탕하며 속이 울렁거렸다.
"이 정도면 인정해야겠어. 과연 도마가 줄을 대려고 설쳐댈 만했군."
역시 그는 나와 도마와의 관계를 주시하고 있었다. 하긴, 이 섭혼마존뿐만 아니라 나머지 마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보게, 이공자. 이만 돌아가시게."
"아버지 얼굴을 봐서라도 당분간은 자중하십시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아버지를 두고 한 협박이었기에 두세 달은 먹힐 것이다.
"나를 또 본다면 이 세상으론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거네."
나는 아무 대꾸 없이 걸어 나왔다. 그와 말로 하는 대화는 이제 끝났으니까.
* * *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서대룡이 내게 물었다.
"오셨던 일은 잘 처리되었습니까?"
"잘 되었다면 잘 되었고, 못 되었다면 못 되었고."
"각주님께서 저 무서운 섭혼마존을 이렇게 찾아오셔서 해결책을 찾으시려 한 것만 해도 잘하신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게 뭐든... 아무도 하지 않았던 일이니까요. 저는 거기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어둡고 삐딱한 녀석의 위로라니.
"화 많이 나셨지요?"
"그래 보여?"
"네."
"처음 시체를 봤을 때는 화가 많이 났었는데, 지금은 괜찮아.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렸거든."
잠시 날 쳐다보던 서대룡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어떤 결정인지 대답 안 듣고 가?"
"이미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항상 보여주신 눈빛이시잖아요. 불가능을 해내시기 전에 보여줬던 눈빛요."
나는 멋쩍게 웃었다.
"이래서 오른팔은 꼭 있어야 해."
"자꾸 절 오른팔이라고 하시는데 각주님 오른팔은 이 무인 아닙니까?"
"이안? 이안은 오른팔 아니지."
"그럼 제가 이 무인을 제치고 오른팔인 겁니까?"
살짝 기대하는 그였다.
"오른팔은 맞는데 이안을 제치지는 못하지."
"무슨 뜻입니까?"
"이안은 내 심장이지, 심장."
"이젠 오른팔이어도 섭섭한데요?"
나는 크게 웃었고 서대룡이 따라 웃었다.
"제가 오늘 술 한잔 사겠습니다."
"정말? 우리 드디어 최고급 기루 가는 건가?"
"풍류주점입니다."
나는 입을 삐죽 내밀었고, 서대룡이 박봉을 외쳤다.
"좋아, 그럼 우리 짠돌이 서 조사관이 오랜만에 사는 술이니 왼팔과 심장, 왼쪽 날개까지 다 불러서 마시자."
"왼팔은 마군주이실 테고 심장은 이 무인, 하면 왼쪽 날개는 누굽니까?"
"있어. 자, 가자고."
내가 성큼성큼 걸어갔다. 저만치 앞서가다 서대룡을 돌아보았다.
"안 가?"
원래 그 자리에서 서대룡이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없어서요. 마음 같아선...."
"마음 같아선?"
그가 섭혼마존의 거처를 쳐다보았다. 들어가서 섭혼마존 머리채 잡고 끌고 나오고 싶은 눈빛이었다. 자신이 강했다면, 그랬을 것이란 열기가 느껴졌다.
우리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나는 요즘 이 작고 우울한 사내에게 꽤 많이 의지하고 있다.
"마음만 받자."
"그래야죠!"
서환진을 나온 우리는 함께 풍류주점으로 향했다.
"비가 오려나 봅니다."
과연 먹구름이 잔뜩 낀 것이 곧 비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날 잘 잡았네. 비도 오고 오늘 술값 장난 아니겠는데?"
"풍류주점에서라면 괜찮습니다. 여자가 없으니 돈 쓸데도 없고."
"아... 너무 슬픈 이야기잖아? 안 되겠다. 술은 내가 사야겠다."
"이공자님도 여자 없잖습니까?"
"난 이안 있잖아?"
이안이 나올 줄은 몰랐는지 서대룡은 눈을 껌벅거렸다.
"호위잖습니까? 그렇게 따지면 저도...."
"그때 그 후배 있다고?"
서대룡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 후배는 아니라고요!"
우린 풍류객잔 이 층 제일 넓은 자리를 잡았다.
"어서 오십시오, 각주님."
요즘 주인장 조춘배에게 최고의 손님이 바로 나였다. 황천각 지부 덕분에 매상이 두 배는 올랐다는 그였으니까. 그뿐만 아니라 무인들의 횡포가 많이 사라져서 살맛 난다고 했다.
"오늘은 걱정 마시게. 탁자 부서질 일은 없으니까."
"하하, 또 부서지면 어떻습니까? 사람만 안 다치면 됩니다."
"기대하게. 여기 이 친구, 숨겨둔 쌈짓돈 나오는 날이니까."
"맛있게 해서 올리겠습니다."
조춘배가 본격적인 요리를 내오기 전에 술부터 가져왔다.
우린 잠시 아무런 대화를 하지 않고 조용히 술만 마셨다. 서대룡은 서대룡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 생각에 잠겼다.
섭혼마존이 떠올랐다.
그를 떠올리면 죽이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투심이 맹렬히 솟구친다.
예전의 나였다면, 오늘 같은 날 이렇게 술이나 마시고 있지 않았을 거다. 수련장으로 달려가서 쉴 새 없이 검을 휘둘러 댔을 거다.
젊은 시절의 난 좌절을 겪을 때, 모든 마음과 정신을 그 난관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소진했다. 사람이 절박하면 노력으로 도피할 수도 있음을 그때는 몰랐다.
하지만 이젠 그러지 않는다.
분노가 치밀수록 차분해지려고 애쓴다. 수련하는 것만큼이나 내 사람들과 술을 마시는 일도 나를 강하게 하는 일임을 이제는 알고 있으니까.
그때 서대룡이 말했다.
"근데 저 오늘따라 기분이 좀 이상합니다. 계속 심장이 두근두근하네요."
"예쁜 여자라도 봤어? 어디야?"
내가 장난스럽게 두리번거리자, 서대룡이 웃었다.
"여자 좋아하지도 않으시면서요?"
"누가 그래? 여자 싫다고."
"아닌가요? 전 각주님이 여자에는 관심이 없으시다고 봤는데."
여자라. 지난 삶은 평생 혼자 살아서 외롭기도 했고, 또 그래서 외롭지 않기도 했다.
"요즘 외로우십니까?"
"혼자 사는데 뭐가 외로워. 그냥 심심한 거지. 외로움은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느끼는 감정 아니냐?"
"오! 나중에 이 말씀 써먹어야겠습니다."
"네가 좋아하는 후배에게 써먹어."
"안 좋아한다니까요. 그리고 만날 일도 없습니다."
"같은 조로 묶어서 일 시켜줄까?"
"됐습니다. 인연이 자연스럽게 이뤄져야지요."
"봐, 좋아하잖아?"
"그게 아니라... 됐습니다. 어휴, 제가 말씀을 말아야지."
그가 술을 마셨다.
"아직도 계속 심장이 뛰어?"
"네."
"오늘 운명적인 일이라도 일어나려나 보다."
"설마요."
그러는 사이 조춘배가 요리를 가져왔다.
이 순간만 해도 서대룡은 알지 못했다. 술을 사겠다는 오늘의 결정이 그의 인생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게 될지.
"오늘 진탕 마시자고요!"
술도 잘 못 마시면서 말이다.
제49회 허락 안 하시면 바짓가랑이라도.
풍류주점에 첫 번째로 도착한 사람은 마군주 장호였다.
커다란 덩치와 얼굴의 상처는 주점 내 모두를 압도했다. 장호가 일 층을 가로질러 이 층으로 올라올 때까지 손님들의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다가 그가 우리 자리에 합류하자 비로소 멈췄던 시간이 흘러갔다.
"잘 지내셨습니까, 이공자님."
"나는 잘 지냈네. 괜히 바쁜 사람 부른 건 아닌지 모르겠군."
"만약 이 자리에 안 불러주셨으면, 많이 섭섭했을 겁니다."
"당연히 불러야지. 내 사람들과 다 같이 하는 첫 술자리인데. 자, 내 술부터 한 잔 받고."
장호에게 술을 가득 따라주었다.
"감사합니다."
서대룡과 장호도 인사를 나눴다. 지난번, 투서 사건으로 서로 안면은 있는 사이였다. 가뜩이나 체구가 작은 서대룡 옆에 장호가 앉으니 덩치가 세 배는 더 커 보였다.
술을 한 잔 마신 후 장호에게 물었다.
"많이 바빴지?"
"부임 초반에는 바빴는데 이제는 좀 괜찮아졌습니다."
"혹시라도 문제가 있거나 고민되는 일 있으면 언제든 찾아오게."
"그럼요. 제일 먼저 찾아뵙겠습니다."
언제봐도 듬직한 장호였다. 겉보기와는 달리 감정적이고 섬세했으며 사람 관계를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장호가 오자 술 마시는 속도가 빨라졌다. 장호는 큰 덩치만큼이나 술을 잘 마셨다.
술을 마시면서 서대룡은 장호를 힐끗힐끗 몰래 쳐다보았다.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부러움이 담긴 눈빛이었다.
"부러우냐?"
내가 정곡을 찌르자 서대룡은 흠칫 놀랐다.
"뭐가요?"
"장 군주 부러우냐고."
서대룡이 취기를 빌려 솔직히 대답했다.
"네, 솔직히 부럽습니다. 저도 한때는 군주님처럼 되고 싶었습니다. 비록 실패했지만요."
"아직 안 늦었다."
"전에 말씀하셨죠. 제가 이미 늦었다고 한탄하니까, 실망스럽다고요. 한데 늦은 걸 어찌합니까? 벌써 제 나이 서른둘인데요."
"그래도 안 늦었다."
순간 발끈하려던 서대룡이 앞에 놓인 술을 마셨다. 원래 다른 상대였다면 남 일이라고 그렇게 쉽게 말하지 말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술로 화를 삼켰지만 서대룡은 상기되어 있었다.
"정말 늦지 않았습니까?"
진심으로 묻고 있음을 알았기에 나도 진심으로 대답했다.
"늦긴 늦었지."
"어휴, 그럼 그렇지."
서대룡은 실망했다. 혹시나 정말 안 늦었나 하는 마음이 있었던 모양이다.
"대신 그래서 좋은 점도 있지."
"뭡니까, 그게?"
"더 진심으로 노력할 테니까. 검을 한 번 내질러도 남들보다 더 온 힘을 다해 내지를 테고, 걸음을 한 번 떼어도 남들보다 깊은 고민이 담길 테니까."
"그렇더래도 결국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게 현실이지 않습니까?"
"따라잡을 수 있어. 아, 마침 저기 좋은 본보기가 오네. 현실부정의 화신!"
내 시선을 따라 서대룡과 장호가 일 층을 쳐다보았다. 커다란 덩치의 이안이 모두의 시선을 잡아끌면서 이 층 우리들 자리로 허겁지겁 올라오고 있었다.
"자네보다 한발 먼저 그 길을 걸어간 사람, 요즘 연무장에서 먹고 사는 사람, 그래도 저렇게 밝은 사람, 저기 온다."
자리에 도착한 이안이 사과부터 했다.
"아, 정말 죄송해요, 씻고. 무복 갈아입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술 먹는 자린데 뭐가 그리 급해?"
"급해야죠, 귀한 분들과 함께하는 자린데요."
이안이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장 군주님. 서 조사관님."
밝게 인사한 그녀를 두 사람이 빤히 쳐다보았다. 늦어서 그런가 싶어 이안이 다시 사과했다.
"죄송해요, 제가 늦었죠?"
서대룡이 그녀를 빤히 본 것은 본보기란 말 때문이었고, 장호는 다른 이유에서였다. 장호가 정중히 그녀에게 말했다.
"뭔가 달라지셨어요, 이안 님."
"제가요?"
"네. 어딘지 느낌이 다릅니다."
마군을 이끄는 군주의 눈은 확실히 예사롭지 않았다.
그러자 이안이 나를 슬쩍 쳐다본 후, 웃으며 말했다.
"수련 지옥에 빠지니 살까지 빠지네요. 좀 달라졌죠?"
물론 그래서가 아님을 나도, 이안도 잘 알고 있다. 비천검법을 전수받은 후, 그녀의 기도가 바뀐 탓이다. 아직 비천검술에 대해서는 외부에는 절대 말해선 안 될 비밀.
장호 역시 그 때문만은 아님을 느꼈겠지만, 더는 변화에 관해 묻지 않았다.
"날씨도 우중충한 것이 저도 술 생각이 간절했었답니다. 저 술 주세요!"
이안이 잔을 내밀었고, 내가 술잔 가득 따라주었다.
"수련한다고 고생 많다, 이안."
"고생은요. 당연히 할 일이죠. 그리고 저보다 도련님이 훨씬 수련 많이 하시는 것 알아요. 잠까지 줄여가면서까지 하시잖아요."
그러자 서대룡이 깜짝 놀랐다.
"정말요?"
"모르셨어요?"
이안의 물음에 서대룡이 나를 쳐다보았다.
"누가 봐도 농땡이를 칠 것 같은 분이신데."
"그렇죠. 한데 저 게을러 보이는 껍데기 속에는 어마어마한 노력파 무인이 한 명 들어 있답니다."
서대룡이 나를 봤다가 장호를 봤다가 다시 이안을 봤다. 그리고 혼자 술을 마셨다.
"저만 패배자가 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일은 열심히 하시잖아요?"
이안의 위로에 서대룡이 고개를 푹 숙였다.
"오늘 일 내일로 미루고 술 마시러 왔어요."
"아아, 저런. 우리 서 조사관님 껍데기는 엄청 부지런해 보이시는데."
이안이 슬쩍 그를 놀렸다. 이럴 때 보면 이안은 깔깔웃음이 어울리는 영락없는 젊은 여자애다.
"자, 오늘의 패배자를 위해서 우리 한잔해요!"
이안이 잔을 들었고, 우리가 건배했다. 패배자 역시 기분 나빠하지 않고 제가 그 주인공입니다라며 마지막 건배에 동참했다.
"어때? 다들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너도 제대로 무공 배워볼래?"
"네? 각주님께요?"
"아니."
"그럼 누구에게요?"
서대룡이 자신도 모르게 장호를 쳐다보았다.
"거긴 왜 봐. 우리 중에 제일 바쁜 사람을."
"아, 전에 집행무인들 훈련해 주셔서 혹시나 했습니다."
"가르쳐 줄 사람 있으면 배울래? 정식 제자는 될 수 없겠지만, 네게 제대로 된 무공을 가르쳐 줄 수는 있을 거다."
"누군데요?"
나는 누군지 알려주는 대신 그에게 말했다.
"네 각오가 먼저야. 다시 태어난다는 다짐이 서면 말해. 누군지 알려줄 테니까."
나는 그를 차기 황천각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차기 각주가 되기에는 너무 젊었다. 그렇다고 사문이 좋거나 정치적인 인맥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각주가 되기 위해선 뭔가가 필요했다.
그러다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래서 어쩌면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를 한 사람이.
"일각 준다. 고민해봐."
"네? 여기서 당장 결정해요?"
"원래 이런 일은 오래 고민하면 결정 못 내려. 오늘 술자리 끝나면 다시 원점이야. 너도, 나도. 알잖아?"
그러자 서대룡은 진지한 고민에 빠졌고, 우린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밖을 보며 술을 마셨다. 서대룡을 위해서 조용히 술을 마셨다. 나도, 이안도, 장호도 요즘 생각이 많을 때였으니까.
우리가 술 한 병을 비웠을 때 서대룡이 결정을 내렸다.
"해보겠습니다."
"정말?"
"네."
"자네 인생이 바뀌는 일이야."
"각오 됐습니다. 인생 뭐 있습니까? 기회가 왔다 싶으면 잡는 거죠! 저 잘못돼서 죽으면 볕 잘 드는 곳에 묻어 주십시오!"
"예쁜 여자들 많이 다니는 길목에 묻어 주마."
"좋습니다."
서대룡이 앞에 놓인 술을 시원하게 비웠다.
"오! 축하드려요!"
이안이 힘차게 박수 쳤고 장호가 축하한다고 인사를 건넸다.
"다른 사람이 권했다면 어림없었을 겁니다. 한데 각주님이 권하시니까, 이상하게 귀가 얇아지면서… 이거 잡자. 기회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안이 웃으며 동조했다.
"우리 도련님 설득력은 고금제일이시죠."
장호도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대룡은 기분이 좋은지 술을 또 비웠다. 평소 잘 마시지 못하는 그가 과음하고 있었다.
"한데 아시다시피 조사관 일을 십 년을 했습니다. 특별조사관에 오르려고 밤도 많이 샜고요. 그걸 다 버리려니 마음이...."
"조사관을 왜 그만둬?"
"네?"
"그만둘 필요 없다고. 황천각에서 제일 필요한 사람이 자네인데, 그만두긴 뭘 그만둬? 일과 시간 이후에 무공 배우란 뜻이야."
서대룡은 내 말을 농담으로 들었다.
"피곤해 죽으라고요?"
"대신 못다 이룬 꿈은 이루겠지."
진지하게 대답하는 날 가만히 쳐다보더니 서대룡이 깜짝 놀랐다.
"설마? 진심이세요?"
"당연히 진심이지. 뒤늦게 배우면서 뭐가 그리 급해. 천천히 일 끝나고 배워."
"늦었으니까 급하죠. 그렇게 배워서 고수가 될 수 있을까요? 제 인생 모든 것을 걸고 도전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서대룡이 장호를 쳐다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지원을 바랐다. 하지만 장호는 호응 없이 내 말을 들으라는 듯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원군을 구하지 못한 서대룡이 다시 전장으로 돌아왔다.
나는 차분히 그에게 말했다.
"보통 그래서 다 실패하지. 생각에는 인생을 다 걸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게 잘 안 되거든. 오히려 아침부터 밤까지 시간이 남아돌면 더 힘들다. 이렇게 시간이 많은데 나는 왜 발전이 없나, 나는 대체 뭘 하고 있나, 자괴감에 패배감에. 그냥 내 일을 하면서 조금씩 귀한 시간 쪼개서 노력할 때가 훨씬 더 큰 성과를 낸다. 그건 일이 아니라 즐거움이 되기도 하니까."
당사자인 서대룡 말고 이안과 장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대룡은 심경이 복잡해 보였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 배우느냐다. 서로 합이 잘 맞는, 진짜 고수에게 배우면 수련 시간은 그다지 의미 없다. 그런 사람에겐 차 한잔 마실 시간만 배워도, 어설픈 놈이 평생 지껄인 소리보다 나을 거다."
"진짜 고수, 누구요?"
이안과 장호마저도 누굴 사부로 삼으려는지 궁금해했다.
"곧 올 거야."
"여길 온다고요?"
서대룡뿐만 아니라 이안과 장호도 깜짝 놀랐다.
"그럼 서 조사관님이 이런 결정을 내리실 줄 알고 계셨던 건가요?"
"점쟁이냐? 그걸 알게. 우발적으로 생각해 낸 거지."
"그럼 그분은 이 상황을 모르겠네요?"
"당연하지."
"맙소사!"
서대룡이 한 잔 더 마셨다. 벌써 평소 주량을 훨씬 넘긴 그는 술이 술을 부르는 단계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허락받느냐 마느냐가 최고 승부야. 안 되면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늘어져야지."
우린 꼭 허락을 받아내자며 다 같이 술을 마셨다.
이안은 서대룡에게 술잔에 입만 대라고 했지만, 중요한 일을 앞두고 그럴 수 없다며 술잔을 깨끗이 비웠다.
"누군지 모르지만, 꼭 허락받아내겠습니다. 허락 안 하시면 오른쪽 바짓가랑이는 제 것입니다. 각주님이 왼쪽을 맡아주십시오."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왔던 일이 이뤄진다고 생각해서인지, 서대룡은 한껏 상기되었다.
"도련님이 구해주신 사부님이면, 정말 훌륭하고 좋은 분이실 거에요."
하필 이안이 그 말을 하자마자.
번쩍! 우르릉! 꽝!
벼락이 치고 천둥소리가 들렸다.
"이제 본격적으로 쏟아지려나 봐요!"
바로 그때였다.
"아, 저기 오네."
내 말에 모두의 시선이 일 층을 향했다.
그곳으로 한 사람이 들어서고 있었다.
상대를 확인한 이안이 입을 틀어막으며 비명을 참았다.
장호 역시 흠칫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등을 돌리고 있던 서대룡이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서대룡이 실시간으로 놀라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눈을 크게 떴다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고, 벌떡 일어나려다가 술을 쏟는 모습까지.
쿵.
우리 자리에 도착한 사람이 커다란 도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의 작고 찢어진 눈에서 살벌한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건방지게 어디서 사람을 오라 가라야?"
도착한 사람은 바로 혈천도마였다.
쏴아아아아아!
기다렸다는 듯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제50회 비가 그치면 새들이 날아다닐 겁니다.
혈천도마가 자리한 사람들을 스윽 훑어보았다. 그 못마땅한 눈빛에 담긴 뜻은 이러했다.
'나더러 이런 떨거지들 사이에 앉으란 말이냐?'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내가 반갑게 그를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어르신. 자, 이리로 앉으십시오."
모두가 일어나서 정중히 인사하자 그가 못 이기는 척 자리에 앉았다.
"나는 왜 부른 거냐?"
예전에 검존이 오해했듯 내가 혼자 있을 줄 알았던 모양이다.
사실 혈천도마는 술자리에 누가 있느냐는 둘째 문제고, 그냥 이런 술자리 자체가 낯설고 부담스러운 사람이었다. 내가 생일선물을 줬을 때처럼, 그는 이런 사적인 분위기에 익숙하지 못하다.
"주점에 왜 불렀겠습니까? 같이 술 마시자고 불렀지요."
내가 그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떨떠름한 기색을 보이면서도 혈천도마는 술을 받았다.
"젊은 사람들하고 어울려야, 젊어지는 겁니다."
"젊어져서 뭐 하게."
"하루라도 젊어지면 좋은 거죠. 고수면 뭐하고, 권력을 가지면 뭐 하겠습니까? 세월 앞에선 다 무릎 꿇어야 하는데."
"새파랗게 젊으면서 뭔 세월 타령이냐?"
우리들의 대화를 다들 놀란 얼굴로 듣고 있었다. 혈천도마와 내가 이렇게 편하게 대화를 나눌 줄은 몰랐을 테니까.
"이 순간을 즐기면서 살자는 말씀이죠. 다들 죽으면서 뭘 후회하고 죽겠습니까? 무공 더 못 익힌 것? 내공 더 못 쌓은 것? 저쪽 어디에 사는 검귀 못 이긴 것? 다 아니라고 봅니다."
"그래서 다들 죽기 전에 이 난리를 떠는 거다. 그딴 병신 같은 후회나 하면서 죽지 않으려고."
"어르신은 다르실 겁니다."
"내가 뭐라고."
"어르신이야 연세에 비해 젊고 깨어있으시잖아요?"
자고로 칭찬이란 게 사람들 앞에서 해주는 칭찬이 최고 아니겠는가?
"흥!"
혈천도마는 코웃음을 치며 술을 마셨지만, 그리 싫지만은 않은 표정이었다.
서대룡은 그가 들어온 이후 정말 복잡한 얼굴이었다. 그의 만취한 눈빛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싫어요, 안 돼요! 아니죠? 장난이죠?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 그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맞았다. 나는 혈천도마를 서대룡의 사부로 삼으려 한다.
장호가 혈천도마에게 술을 올렸다.
"일전에 저를 추천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제야 인사드립니다."
"내 뜻이 아니라 여기 이공자 때문이었으니 인사는 저쪽에 하게."
"저는 충분히 받았으니, 어르신도 인사받으십시오. 사실 어르신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죠."
혈천도마가 장호를 쳐다보며 말했다.
"충분히 감당할 자리라 여겨서 추천했으니 신경 쓰지 말게."
"감사합니다."
마존에게 처음 듣는 칭찬에 장호의 표정이 밝아졌다.
사람의 본성은 쉽게 바뀌지 않겠지만, 태도는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다. 내가 처음 그를 만났을 때의 혈천도마와 지금 이 자리의 혈천도마는 정말 큰 차이가 있다. 내가 이런 제안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어르신께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뭐냐?"
나는 서대룡을 쳐다보았다. 그는 더는 술기운을 버티지 못하고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 친구, 무공 좀 가르쳐주십시오."
생각지 못한 말이었는지 혈천도마는 깜짝 놀랐다.
"이 쥐방울이 누군데?"
내가 그를 소개하려던 그때, 서대룡이 고개를 번쩍 들며 혀 꼬인 소리로 외쳤다.
"권력지향형의 비정한 성격이지만 한 여인만을 사랑하는 상남자이고, 다들 침묵할 때 홀로 손을 드는 반골이면서 평화주의자이자 각주님의 오른팔 서대룡입니다! 그리고 저 쥐방울 아닙니다!"
한바탕 쏟아내고는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우린 알 수 있었다. 서대룡이 완전히 취해버렸다는 것을.
"하하하."
나는 소리 내 웃었고 이안은 고개를 숙이며 웃음을 참았다. 장호는 피식 웃으며 술을 마셨다.
만취한 상황에서도 내가 했던 말을 정확히 기억하는 걸 보면 기억력에 있어선 천재였다.
"저 이상하게 미친놈은 뭐냐?"
"많이 취했으니 이해해 주십시오."
"무공은 무슨! 자네 얼굴 봐서 안 죽인 것만 해도 다행인 줄 알아라."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싫다."
"어르신!"
혈천도마가 나를 노려보듯 쳐다보았다.
"그런데 왜 나냐?"
"어르신께서 제일 실력이 좋으시니까요. 저 친구, 제일 실력 좋은 사람에게 배우게 하고 싶습니다."
"내 제자가 아닌데 어찌 무공을 전수하겠느냐?"
"그럼 제자로 삼으십시오."
"뭐?"
"현재 제자들 중 어르신의 자리를 물려줄 만한 사람 아무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나마 막내 제자가 착하지만, 그 성격으론 후계자가 되긴 힘들 테고요. 여기 이 친구 어떻습니까?"
"싫다!"
혈천도마는 일언지하 거절했다.
"평생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사셨을 것 아닙니까? 이제 싫은 일도 좀 하고 사십시오."
"싫다니깐."
"왜 싫습니까? 싫은 이유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냥 싫다. 싫은데 이유가 어딨나?"
바로 그때였다.
"저도 싫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말소리의 주인을 향했다. 목숨 건 취기의 주인공, 서대룡이었다.
"저라고 좋겠습니까?"
놀란 이안이 그를 말리려 했지만 이미 그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혈천도마에게 결투장을 날리고 있었다.
"도마 어르신!"
다행히 도마야 라고 부르지 않았다.
"저 분명히 싫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저 가르칠 생각 꿈도 꾸지 마십시오! 안! 됩! 니! 다!"
그가 안 된다는 말을 한 자씩 끊어 말했다.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혈천도마가 출수할까 봐 다들 긴장했다.
목청을 높이던 서대룡이 이번에는 나를 쳐다보았다. 이미 녀석의 눈은 완전히 풀려 있었다. 하긴 제정신이면 혈천도마에게 저러지 못했겠지. 아, 이건 회광반조(回光返照)다.
"우리 존경하는 각주님! 제가 뭐 하나 물어보겠습니다!"
"곧 자네가 살해당할 것 같으니, 내가 성심껏 대답해주지."
"왜 저를 저 비정하고 무정한 사람에게 내던지려고 하시는 겁니까? 어흐흐흑, 이러시면 저 서럽습니다."
혈천도마의 이마에 핏줄이 불끈 솟아올랐다. 나는 혈천도마에게 이해 좀 해달라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왜겠어? 무공 배우라고."
"그러니까 왜요?"
"자네 자존감을 올려주려고."
이 자리에서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를 차기 황천각주로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혈천도마에게 무공을 배우면, 누구보다 강력한 뒷배가 생기는 셈이니까.
"아아, 제가 자존감이 좀 낮긴 하지요."
그가 다시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연이 옆에서 그의 몸을 붙잡아주었다.
"많이 취하셨어요. 제가 모시고 먼저 가겠습니다."
부축해서 일어나려 하자 서대룡이 그녀의 손을 거부했다.
"저 안 취했어요, 우리 심장님."
"심장요?"
"네, 저는 팔. 이안님은 심장. 팔보다 더 소중한 우리 심장님. 팔은 잘려도 되지만 심장은 다치면 안 되죠."
이안은 서대룡이 취해서 헛소리를 지껄이는 줄 알 것이다.
질투쟁이 녀석, 머리는 좋아서 이 와중에도 기억할 건 다 기억하고 있구나.
난 다시 혈천도마에게 정중하게 부탁했다.
"일 마치고 반 시진만 가르쳐주십시오. 며칠도 좋고, 몇 년도 좋습니다. 이 친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하루만 가르치셔도 됩니다. 일단 기회를 주십시오."
"정말 저 주정뱅이를 믿는군."
"어르신을 믿는 거죠."
혈천도마와 서대룡은 어딘지 모르게 닮은 구석이 있었다. 주류에서 약간 비켜서 있으면서도, 주류의 누구보다 큰 열정이 있는 점에서.
혈천도마의 입에서 싫다는 말이 나오려는 그때.
"저 싫다고 했습니다!"
서대룡이 먼저 선수 쳤다.
혈천도마가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그때 보았다. 혈천도마의 눈빛에 담긴 감정을.
'정말 싫은 게 어떤 건지 알게 해줘? 개고생 한 번 시켜봐?'
그것도 모르고 서대룡이 눈을 거의 감은 채로 혈천도마 앞에서 입술을 삐죽 내밀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혀까지 내밀었으면 분명 잘렸을 거다.
다행히 혈천도마의 도가 날아들기 전에 서대룡이 탁자에 쿵 머리를 처박으며 잠들었다. 장렬한 전사였다. 지금까지는 물론이고 남은 인생까지 통틀어 가장 용감한 주사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인생을 바꾼 주사이기도 했다.
혈천도마가 내게 물었다.
"내가 저 망할 놈에게 무공을 가르치면 너는 무엇을 해줄 테냐?"
내 입에서 준비된 대답이 나왔다.
"오랫동안 묵은 감정을 풀어 드리겠습니다."
"!"
그게 어떤 의미인지 혈천도마는 알 것이다.
잠시 흐르는 침묵이 흘렀고 우린 다시 술을 마셨다. 더는 무공을 가르쳐달란 대화는 하지 않았다.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조용히 술을 마셨다.
술 두 병이 더 비었을 때 이안이 뻗었고, 장호가 끝까지 남아서 나와 혈천도마의 술 상대가 되어 주었다.
술을 마시다 중간에 잠시 주점 밖으로 나왔다.
잠시 바람을 쐬며 서 있는데 혈천도마가 옆에 와서 섰다.
"아까 그 말 농담 아니었지?"
"네. 어르신의 무공을 공짜로 배우게 할 수는 없죠."
혈천도마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과연 그는 일화검존과의 화해를 원하고 있을까?
길 건너를 쳐다보던 혈천도마가 불쑥 물었다.
"저기 저 지부는 효과가 있느냐?"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아니, 효과가 있냐고. 평판 올리는 데 도움이 되느냐는 말이다."
아마 내가 인기를 높이기 위해 세운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네. 도움 많이 되고 있습니다."
굳이 그에게 마가촌 주민들을 위해 세운 것이라 설득하지 않았다. 섭혼마존을 죽이는 것만큼이나 저들을 돕는 일도 중요하다는 것을 그는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서 조사관, 잘 부탁드립니다."
"정말 내가 별짓을 다 하는구나. 애송이를 맡겨두고, 넌 뭐 하려고?"
"전 바쁩니다."
"뭐가 그리 바쁘냐?"
"인간 같지 않은 것들 어떻게 죽일까 매일 궁리해야죠, 오른쪽 날개 구하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죠, 아버지께 아부해야죠."
그는 오른쪽 날개가 일화검존이란 것을 눈치챘다.
"그럼 혹시...왼쪽 날개가 나냐?"
"네. 오른쪽 하시고 싶으시면 바꿔드리겠습니다."
혈천도마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넌 정말 미친놈이다. 검존과 나를 한 날개로 묶을 생각을 하다니."
"처음에 저보고 그러셨죠. 제 광기라면 운명을 걸어볼 수 있을 것 같다고. 광기로 다 잡아먹자고요. 벌써 잊으셨습니까?"
"네가 이렇게까지 미친놈인지는 몰랐다."
"같이 미쳐보시죠. 살날 얼마나 남았다고 주저하십니까?"
"그게 어른에게 할 말이냐?"
"미친놈이니까요."
혈천도마가 옅게 웃었다.
"조만간 출교해서 두어 달 자리 비울 겁니다. 그사이 우리 애들 잘 좀 살펴주십시오."
"알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 알았다 이 한마디, 이 짧은 한마디 말이 너무나 든든하게 들렸다.
오늘의 술자리를 통해서도 그의 문이 조금 더 열렸음을 느낀다. 하지만 여전히 그 문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문을 활짝 열기 위해서는 다른 쪽 날개가 필요하다. 두 날개가 마주 보며 퍼덕거리며 다툴 때, 비로소 저 날개가 왜 저렇게 움직이는지를 알게 될 테니까.
"곧 비가 그치겠네요. 새들도 날아다닐 겁니다."
술자리를 마치고 이안과 돌아오는 길이었다.
"오늘도 또 실수했네요."
"실수는 무슨? 그렇게 마셨으면 잠드는 게 당연하지."
"잠드는 것도 주사예요."
"어차피 나 있는 자리 아니면 그렇게 안 마실 거잖아?"
"그건 그렇지만요."
"그럼 주사 아니다. 휴식이지."
내 말에 이안이 미소를 지었다.
"했던 질문 몇 번까지 가능하죠?"
"어떤 질문이냐에 따라 다르지."
"가령... 왜 이렇게 제게 잘해주세요?"
이 질문, 평생 받을 용의가 있다.
"한 다섯 번?"
"지금부터요?"
"응, 지금부터."
"왜 이렇게 제게 잘해주세요?"
"앞으로 평생 부려 먹으려고. 만날 듣는 똑같은 답이 왜 그리 궁금하냐?"
이안이 배시시 웃었다.
"또 물을 거예요."
"네 번 남았다."
그렇게 우린 은은한 달빛을 함께 걸었다.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이안이 물었다.
"근데 참 서 조사관은요? 아까 보니 많이 취했는데. 먼저 갔어요?"
"너 깨기 전에 그 녀석 사부가 데려갔다."
"사부요?"
이안이 놀란 눈을 크게 떴다.
"설마요! 같이 갔다고요?"
제51회 그게 전부다.
"으으으!"
서대룡이 온갖 인상을 다 쓰며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목말라, 물! 물!"
"옆에!"
누군가의 말에 서대룡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침상 옆 협탁에 놓인 물을 마셨다.
"으, 머리야. 앞으로 내가 술 마시면 개다, 개."
서대룡이 주전자 채로 물을 들이켰다.
갈증을 풀고 나서야 자신이 낯선 곳에서 깼음을 알아차렸다. 침상은 크고 푹신했으며 침구는 부드럽고 고급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방금 '옆에'라고 말한 사람이 누구였지?'
서대룡이 주위를 살폈다.
저 멀리 한 사람이 창가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햇살 때문에 그가 누군지 알아볼 수 없었다.
"누구?"
점차 눈이 빛에 익숙해지면서 서대룡의 눈에 들어오는 그의 형체.
"으악!"
서대룡이 비명을 질렀다. 책을 읽고 있던 남자는 바로 혈천도마였다.
"여, 여기가 어딥니까? 왜 마존께서 이곳에 계시는 겁니까?"
너무 놀란 서대룡은 말까지 더듬었다.
"내 방이니까."
"어이쿠! 제가 왜 여기에 있습니까?"
"기억 안 나느냐?"
"...네."
"주점에서 헤어지려고 할 때, 네가 벌떡 일어나더니 내가 업고 가야 한다고 고래고래 소릴 질렀다. 어떻게 제자를 버려두고 갈 수 있느냐고. 내 바짓가랑이까지 붙잡았지."
"제가요? 설마요?"
맙소사, 결국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말았구나라는 생각에 서대룡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발을 허용한 것이 몇십 년 만인지 모르겠군."
혈천도마가 서대룡을 스윽 쳐다보았다.
"죽고 싶은데 절벽에서 뛰어내릴 용기가 나지 않느냐?"
"...."
그때 서대룡의 마음에 드는 한 가지 의문.
"한데 왜 저를 어르신의 침상에 재운 겁니까?"
"물론 그것도 기억 안 나겠지?"
서대룡이 헉하며 긴장했다.
"데려와서 객방에 재우려니까, 제자를 이런 허접한 곳에 재운다고 날 인정머리 없는 사부라고 했지. 그리고는 바닥에 주저앉아서 자신은 이런 대접 받아도 싼 놈이라며 온갖 주접에 눈물까지 흘렸고."
"...."
"사는 게 힘드냐? 나도 힘들었다. 널 죽이고 싶은 것을 참느라."
서대룡이 후다닥 침상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술 끊겠습니다."
"그 좋은 술을 왜 끊나? 네 주사를 끊어야지."
"네, 다 끊겠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어제 너무 술을 많이 마셔서요."
아무리 자신이 소리치고 행패를 부렸어도 수혈을 짚어 객방이 아니라 마구간에 던져놓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이렇게 자기 방에, 그것도 침상에 재워줬다는 것이 너무 의외였다. 물론 검무극 때문이겠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침상에 재워줄 줄이야. 서대룡은 혈천도마의 새로운 면모를 보았다.
"가봐라."
"네."
겉옷은 침상 옆 탁자 위에 잘 개어져 있었다. 물론 시비가 개었겠지만, 뭔가 제대로 대접받고 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 와중에도 혈천도마는 책을 읽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낯설었다.
'내 앞에서 유식한 척하려는 건가?'
한데 이상하게도 책 읽는 모습이 어울리기도 했다. 방을 둘러보니 책장이 여러 개 있었고 책도 많이 꽂혀 있었다.
그때 그의 눈에 띄는 책이 있었다.
"어? 이 책은?"
서대룡이 무심코 책장에서 책을 뽑아 들었다. 한 소년이 절세고수 사부를 만나 영웅으로 성장하는 모험담으로, 어려서부터 몇 번을 읽었던 책이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책입니다. 혹시 읽으셨습니까?"
그가 신나서 혈천도마를 돌아보았다.
반면 혈천도마는 무섭게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난 내 물건 함부로 만지는 놈이 제일 싫다."
"헉!"
놀란 서대룡이 책을 떨어뜨렸고, 바닥에 안 떨어뜨리려고 발로 막았다. 발을 맞고 튕겨 나간 책이 바닥을 굴렀다.
정적이 흘렀다.
펼쳐진 채 구겨진 책을 보자, 서대룡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곧 자신의 신세도 저 책처럼 되겠지.
서대룡이 후다닥 달려가서 책을 들고 구겨진 부분을 손으로 폈다.
"죄송합니다. 아, 다행히 재미없는 부분이 구겨졌습...죄송합니다!"
다행히 혈천도마는 서대룡의 팔을 자르는 대신 자신이 읽던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 그는 용서의 화신이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소심하게 인사하고 방을 나서려는데 혈천도마가 불쑥 물었다.
"그 책은 왜 좋아하느냐?"
"아, 주인공이 저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가난하게 태어나 성격도 어둡고 주변 사람들이랑 잘 적응하지 못하고. 그런 녀석이 영웅이 되는 이야기라... 지금까지 스무 번은 읽었을 겁니다. 곁에 두고 잠이 안 올 때면 한 번씩 꺼내 읽는 책입니다."
잠시 서대룡을 응시하던 혈천도마는 뭐라 대꾸하지 않고 다시 자신이 읽던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재워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때 혈천도마가 다시 물었다.
"너는 이공자가 후계자가 될 것 같으냐?"
이 질문에 망설임은 필요 없었다.
"네."
"이유는?"
"훌륭한 분입니다. 제가 봤던 그 어떤 분들보다요. 그분 때문에 본교가 변할 거라 믿습니다. 물론 좋은 쪽으로요."
"그를 위해서 네 목숨을 바칠 수 있느냐?"
서대룡은 잠시 고민하다가 솔직히 대답했다.
"아뇨."
"이공자가 훌륭한 사람이라면서?"
"저는 아니거든요. 남을 위해 희생할 위인은 못됩니다."
여전히 시선은 책을 향하고 있었지만 혈천도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마당에서 기다려라."
"네!"
서대룡이 마당에 서서 혈천도마를 기다렸다.
'혹시 각주님을 위해 죽을 각오가 없다고 대답해서 그 핑계로 두들겨 패시려는 건가? 죽을 수 있다고 할 걸 그랬나?'
그렇게 불안해하고 있을 때 혈천도마가 뒤늦게 나오더니 커다란 도를 한 자루 던졌다.
푹!
가볍게 날아온 도가 서대룡의 발 앞에 꽂혔다. 멸천대도만큼 크진 않았지만, 일반적인 도보다 날도 넓고 길이도 긴 대도였다.
"들어라."
"네."
서대룡이 도를 뽑아 들었다. 그가 기존에 익힌 무공은 검술이었기 때문에, 도법을 연마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이렇게 들어본 적도 거의 없었다.
"어떠냐?"
질문의 의도가 뭔지 몰랐지만, 서대룡은 일단 먼저 드는 생각부터 말했다.
"무겁습니다."
혈천도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게 전부다."
"네?"
"그 무거움을 이해하는 것이 내가 전수하려는 도법의 처음이자 끝이다."
"!"
순간 서대룡의 마음에 뭔가가 와닿았다.
"심장이 찌릿했습니다."
도를 내려다보던 서대룡이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건 어제 술을 많이 마셔서 그렇고. 아님, 심장에 병이 있거나."
"아! 네."
혈천도마가 돌아섰다.
"이따 수련에 늦지 마라."
"네! 늦지 않겠습니다!"
서대룡이 마당 구석에 도를 내려놓고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도를 챙겨서 나왔다.
그곳을 걸어 나가면서도 방금까지 혈천도마와 대화를 한 것이 맞나, 정말 여기서 잔 것이 맞나 싶었다.
'아직 꿈속일지도....'
그는 그렇게 손에 든 도만큼이나 무겁게 온몸을 짓누르는 숙취를 느끼며 그곳을 걸어 나왔다.
* * *
내 집무실로 서대룡이 들어섰다.
그는 아직 술이 덜 깬 부스스한 모습이었는데 허리에 처음 보는 대도를 차고 있었다. 그 대도만 봐도 혈천도마와의 일이 잘 풀렸음을 알 수 있었다.
"오른팔 왔어?"
"사지로 보낸 오른팔이겠죠."
"다행히 안 잘리고 왔네."
"아니 어떻게 저를 혈천도마에게 딸려 보내실 수가 있습니까? 각주님이 챙겼어야죠!"
"어제 일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 모양이군."
그 말에 서대룡이 움찔했다.
"네가 죽어도 혈천도마와 가겠다고 우겼어. 심지어 나보고 뭐랬는지 아느냐?"
"제가 뭐랬는데요?"
"왜 사부와 제자를 갈라놓으려 하느냐고! 정말 한 오십 년 함께한 사제지간인 줄 알았지."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나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 잠들기 전까진 죽어도 무공 안 배우겠다더니, 갑자기 수제자가 되어서 벌떡 깼어. 정 의심스러우면 장 군주에게 물어봐. 장 군주가 자넬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라."
"으으으. 정말 제 속에서 그런 미친 주정뱅이가 살고 있다고요?"
서대룡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안타까워."
"뭐가요?"
"자넨 우울하고 음침할 때가 개성 있고 좋은데, 요즘 너무 밝아지고 있거든. 심지어 어제처럼 웃기기까지 해."
"걱정마십시오. 내일 되면 다시 어두워질 겁니다."
"무슨 뜻이야?"
"오늘 일과 후부터 첫 수련이니까요. 아마 절 반쯤 죽여놓으시겠지요. 아! 영원히 일이 안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아쉽네. 그 모습을 못 봐서."
"네?"
"오늘 출교할 거다. 두 달쯤 걸릴 예정이니 나 없는 사이에 황천각 잘 지키도록."
서대룡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혹시 그 일 때문에 나가시는 겁니까?"
"그 일이라니?"
그러자 서대룡이 손가락으로 자기 눈을 가리켰다. 그제야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어제 술 마시러 가기 전에 섭혼마존의 거처 앞에서 서대룡이 말했다. 내 눈을 보면서 불가능을 해내기 전에 보여줬던 눈빛이라고.
"맞다, 그 일이다."
"위험한 일이겠군요."
"다행히 이번 일은 그리 위험하지는 않을 거다. 예전에 저축해둔 위험을 쓸 작정이거든."
"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서대룡이었지만 더는 설명하지 않았다.
서대룡이 장난기가 사라진 얼굴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항상 이렇게 말로만 걱정해서 죄송합니다."
"나중에 한 수라도 거들려면 도마께 열심히 배워둬."
나오려는데 서대룡이 나를 불렀다.
"각주님."
"왜?"
"각주님이 아니었다면 평생 마존께 무공을 배울 기회는 없었을 겁니다."
"세상일은 모르는 거다. 나 아니었으면 우리 아버지에게 무공 배울 기회가 있었을지도. 그럼 수고."
"네! 여긴 걱정마시고 다녀오십시오."
그길로 이안을 찾아가서 앞으로 두 달 동안 해야 할 수련에 대해 알려준 후, 난 조용히 교를 나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