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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아버지는 나를 천마전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데려가셨다. 그곳은 나도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는 곳이었다.

석동(石洞) 위에 자그맣게 걸린 현판.

소천동(小天洞).

나는 깜짝 놀라 아버지에게 소리쳤다.

"설마 이곳에 들어가라는 말씀은 아니시죠?"

이곳은 천마가 될 후기지수들을 위한 곳으로 일종의 수련동이다.

보통 천마의 제자나 자식들이 시험에 들 때 들어간다.

수련동이라고 결코 무시해선 안 된다.

들어갈 때는 마음대로 갈 수 있지만, 나오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관문을 뚫지 못하면 영원히 그곳에서 나오지 못한다고 들었다. 성공률은 절반. 실제로 이곳에 들어갔던 천마의 혈육 중 절반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은 것이다.

그랬기에 그 야망 넘치는 형도 이곳에 들어가겠다는 말을 스스로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천마가 되기 위해선 한 번은 통과해야 할 곳이기도 했다. 천마가 된 사람들은 모두 이곳을 통과했으니까. 이렇게 보면 천마도 극한직업 중 하나다.

"나도 네 나이 때 이곳에 들어갔었다."

"그래서 얼마 후에 나오셨습니까?"

"두 달."

"맙소사. 제 빛나는 청춘 두 달을 이 어둡고 습한 곳에서 보내라고요?"

"착각하지 마라. 나라서 두 달이지 평균 돌파 시간은 삼 년이다."

아버지는 역대 천마 중에서 최고의 무재를 지녔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다. 천무지체도 이런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았기에 가능했던 것일 테고.

"아버지, 제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아까 말하지 않았느냐? 널 벌 줄 생각이라고."

"너무 가혹한 벌이지 않습니까?"

"네가 죽인 양포는 영원히 땅속에서 보낼 거다."

"그가 괴롭혔던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를 받으면서요."

하지만 아버지는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아버지. 정말 죽을 수도 있는 곳에 절 보내시는 겁니까? 혈천도마 그 늙은이가 벌주라고 했다고요?

문득 아버지가 사냥에서 말씀하신 독심이 떠올랐다.

'아들쯤은 죽어도 상관없으신 겁니까? 아니면, 제가 더 강해져서 나오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살아나오지 못하면 벌이지만, 살아나오면 상이 될 수도 있는 곳이었으니까.

'아니면 송곳처럼 주머니에서 삐져나온 저를 혈천도마로부터 지켜주려 하시는 겁니까?'

전혀 마음을 드러내지 않은 아버지였기에, 무슨 의도인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가 석굴 옆에 붙어 있는 석판에 손을 대고 고유의 내력을 주입하자 석문이 열렸다.

드르릉.

잔소리 말고 들어가라는 아버지의 눈빛에 나는 더는 거부하지 않았다.

"좋습니다. 전 아버지보다 더 빨리 나올 겁니다."

드르르릉.

닫히는 석문 사이로 무정하면서도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아버지가 말했다.

"행여나. 죽지나 마라."

제10회 열 내면 지는 거다.

천천히 석굴의 통로를 따라 들어갔다.

내부는 공기가 잘 통하고 있었고 군데군데 석굴 상단에서 들어오는 빛 때문에 실내는 어둡지 않았다. 정교한 설계와 만듦새로 볼 때 정말 솜씨 좋은 장인이 만든 곳임을 알 수 있었다.

천천히 석굴을 따라 걸어가는데, 어느 지점을 통과하자 주위가 미세하게 일렁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스스스스슷.

순간 알 수 있었다. 예민한 감각을 지닌 고수만이 눈치챌 수 있는 최상위진법이 발동했음을.

생각해 보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곳에서 죽은 이들은 왜 빠져나오지 못했겠는가? 관문이 어려우면 포기하고 나와버리면 되는데. 바로 이 진법을 빠져나오지 못해 죽은 것이다. 들어갈 때는 편히 걸어 들어갔지만, 관문을 돌파하지 못하면 결코 나갈 수 없는 지옥의 진법으로 돌변하는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걸어갔을까?

제법 큰 광장이 나왔다.

그 광장의 입구에 제일 관문을 설명하는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一, 검기와 검강을 사용하지 않고 적을 모두 베어라.

二, 시간 내 성공하지 못하면 열흘 후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

三, 준비된 자는 붉은 원에 서라.

'열흘 후? 그때까지 먹을 것은?'

주위를 찾아보니 벽에 벽곡단(辟穀丹)이 가득 든 항아리가 있었다.

'이 맛없는 걸 열흘이나 먹었다간 미쳐버리고 말지.'

나는 망설이지 않고 광장 가운데 그려진 붉은 원 가운데에 섰다.

잠시 후 철컹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서 사람 모양의 나무 인형 수십 개가 사방에서 솟아올랐다. 베어야 할 부분이 붉게 칠해져 있었다. 어떤 인형은 목을, 어떤 인형은 팔을, 또 어떤 것은 다리를.

반사적으로 몸이 반응했다.

그것들이 올라오는 순간 몸을 날렸고, 본능적으로 어떤 초식으로 무엇을 먼저 벨지를 결정했다.

쉭. 쉭. 쉭.

나무 인형이 잘려 나갔다.

인형들은 한자리에만 고정된 것이 아니었다. 바닥의 판이 움직이며 위치를 바꾸기 시작했다.

그 혼잡한 상황에서 몇몇 인형들이 다시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안 돼!'

나는 알 수 있었다. 아래로 내려가는 저 인형을 놓치면 두 번 다시 올라오지 않을 것이고, 그 순간 도전 실패가 될 것이라고.

그랬기에 내려가는 인형부터 베었다.

과연 다른 인형들이 빠르게 움직이며 그것을 베려는 내 진로를 방해했다.

훌쩍 뛰어넘으며 검을 휘둘렀다.

서걱!

놓칠 뻔한 인형이 잘려 나갔다.

갈수록 인형들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처음에는 보법을 시험하는 관문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이 관문은 판단력을 시험하는 관문이었다.

무엇을 먼저 벨 것인가?

빠르고 정확한 판단력이 우선이고, 보법은 그다음이다.

관문은 복잡하고 어려웠지만, 내 본능과 실력을 앞지를 정도로 정교하진 않았다.

그렇게 모든 인형을 베었고 무사히 첫 번째 관문을 통과했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만약 회귀 전 실력이었다면 이 첫 번째 관문을 절대 넘기지 못했다. 뛰고, 구르고, 날고 생난리를 쳤어도 실패했을 거다.

왜 열흘 후에 다시 시험이 재개되는지 알 수 있었다.

많은 도전자가 이 첫 번째 도전에 실패했을 것이고, 적어도 열흘은 곰곰이 연구하고 연습해야만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도 인형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어떤 인형이 언제 바닥으로 내려갔는지 정확히 기억한 사람만이 대책을 세울 수 있었을 테고. 머리가 둔한 도전자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도전해야 했겠지.

첫 관문을 보니 소천동의 돌파 시간이 평균 삼 년이라는 것도 이해가 간다.

드르르르릉.

첫 관문을 통과하자 동시에 두 번째 관문으로 향하는 석문이 열렸다.

나는 천천히 두 번째 관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제일 관문을 벗어나기 전, 벽에 글이 새겨진 것을 발견했다. 출구 쪽 벽에 먼저 왔던 고인들의 글이 남겨져 있었다.

―아홉 번 만에 성공했다. 으하하하하.

―난 열여섯 번.

―이건 미친 짓이다!

―장장 서른일곱 번 만에 성공하다. 긴 고생에 눈물이 앞을 가린다.

―나는 이곳에서 죽게 되는 것일까? 도저히 풀 수가 없다. 아버지가 원망스럽다.

―젠장! 되돌아가려고 했지만 돌아가는 길은 없었다.

―여섯 번만의 성공, 감히 최고라 자부한다.

그중에 맨 아래 낯익은 필체가 보였다.

―병신들.

나에 앞서 이 관문을 통과했을, 바로 아버지였다.

"하하하."

참지 못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마도 아버지는 한번 만에 통과하신 모양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엄밀히 따지면 조상님들인데 과감하게 욕부터 박아 넣어 주시는구나.

"아버지, 저도 한 번에 통과했습니다! 하하하!"

그렇게 걸음을 옮겨서 두 번째 관문이 있는 공간에 도착했다.

두 번째 광장에도 어김없이 비석이 서 있었다.

一, 벽에 걸린 검을 이용해서 한 시진 안에 돌을 양단하라. 검기나 검강을 사용할 수도 있다.

二, 시간 내 성공하지 못하면 이십 일 후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

三, 준비된 자는 붉은 원에 서라.

이번에는 재도전이 이십일 후다.

쉽게 계산해서 첫 번째 관문보다 두 배는 더 어렵다는 의미.

'벽곡단으로 이십 일을 견디라고? 차라리 죽고 말지.'

나는 성공하겠다는 각오를 다진 채 광장 가운데 있는 붉은 원에 섰다.

철컹.

바닥에서 석탁(石卓)이 올라왔다. 석탁 위에는 어른 머리통만 한 쇠공이 놓여 있었다.

'이 쇠공을 자르라는 건데.'

주어진 시간은 한 시진.

쇠공 하나를 베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다.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라 여기고 천천히 쇠공을 살폈다.

겉면이 매끈한 것이 일반적인 쇠가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돌이었다.

당연히 무쇠보다 더 강한 재질이겠지? 들어보니 내공을 발휘하지 않고는 들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웠다.

벽에는 시험에 사용할 검이 수백 자루나 걸려 있었다. 종류도 여러 종류가 있었다. 길이가 긴 장검도 있었고, 짧은 단검도 있었다. 무거운 중검(重劍)도 있었고, 가벼운 검도 있었다. 심지어는 허리에 차는 연검(軟劍)도 있었다. 그야말로 온갖 종류의 검이 있었다.

쉽지 않은 도전이니 잘 선택해서 여러 번 도전하라는 뜻.

천천히 걸어가서 벽에 걸린 검을 한 자루 꺼내 들었다. 잘 만들어진 일반 철검이었다.

나는 구체 앞에 서서 마음을 다스린 후 힘차게 검을 내리쳤다.

쨍강, 경쾌한 소리와 함께 검이 부러져 날아갔다. 반면 구체는 흠집조차 남기지 않았다. 정말 강한 금속이었다.

나는 다시 구체를 살폈다. 눈으로 봐선 별다른 것 없는 쇠공.

다시 검을 가져와서 이번에는 종으로 휘둘렀다.

이번 역시 검만 부러졌을 뿐, 구체는 멀쩡했다.

"역시 그냥은 안 되는구나."

새 검을 가져와서 내력을 주입했다.

우우웅.

곧바로 검에서 푸른 빛이 일렁거렸다. 검강을 일으킨 것이다.

회귀 전 이 나이 때는 검기는 사용할 수 있었지만 검강은 일으키지 못했다. 검강의 묘리를 깨친 것은 삼십 대가 되어서였다.

"회귀한 후 첫 검강이구나."

무인마다 검강의 색이 다른데, 같은 심법을 익혔더라도 사람에 따라 그 색이 조금씩 달랐다. 나는 그것이 항상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 검강이 풍겨내는 이 색을 좋아한다. 어떨 때는 바다 같기도 하고, 어떤 때 보면 하늘 같기도 한, 이 기분 좋은 푸른색을 말이다.

검강으로 천천히 구체를 자르려던 그 순간.

불현듯 엄습한 위화감에 재빨리 내력을 회수했다. 그러자 검에 서린 검강이 사라졌다.

'이건 너무 쉽잖아?'

얼핏 생각에 철검으로는 잘리지 않기에 도전자들이 검강을 사용할 수 있는지를 보는 시험이라 생각했다. 검기로는 어려울 것 같고. 그래서 검강을 깨우칠 때까지 벗어날 수 없는 시험이라고.

한데 검강을 사용할 수 있는 후기지수라면 슥슥 자르고 통과할 것이다.

이렇게 단순한 관문이라고?

반대로 검강을 일으키지 못하는 사람이 검강을 일으킬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한쪽은 너무 쉽고, 다른 한쪽은 너무 어렵고. 뭔가 균형이 맞지 않았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선배들이 벽에 남긴 글을 보러 갔다.

―검강으로 일수에 양단하다.

―검강을 사용하지 않고 자르려고 여든아홉 번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결국 검강으로 잘랐다.

―난 검강을 사용하지 않고 잘랐다.

―대체 어떻게? 믿을 수가 없다.

―젠장! 내 검기로는 잘리지 않는다. 나는 검강을 발출할 수 없는데, 어쩌지?

―검강을 연구한 지 이백 일째. 벽곡단은 냄새만 맡아도 토할 것 같다.

―저 위에 검강을 사용하지 않고 잘랐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거짓말에 한 표 보탠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은 아버지가 남긴 글귀였다.

역시 마지막에 남겨진 아버지의 글귀.

―지랄 났네.

하하하. 조상님들에게 지랄 났다니요. 이런 분이 근엄한 척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시다.

근데 이번에는 그 옆에 한 마디를 덧붙여 두셨다.

―열 내면 지는 거다.

'열 내면 진다? 왜 이런 말을 덧붙이셨지? 아버지라면 첫 관문처럼 욕 한마디하고 마셨을 텐데.'

열 내면? 열 내면? 혹시?

나는 재빨리 처음의 석판으로 갔다.

一, 한 시진 안에 돌을 양단하라. 검기나 검강을 사용할 수도 있다.

내 눈에 들어온 글귀.

검기나 검강을 사용할 수도 있다?

'사용해서'가 아니라 '사용할 수도 있다'였다. 다시 말해서 그냥 자르다가 정 안 되면 사용하라는 뜻 아닌가?

생각해 보니 주어진 시간도 너무 길다. 한 시진이면 저런 돌 수백 개는 자르고도 남을 시간이다. 끝으로 벽에 걸린 검의 숫자 역시 과하게 많고.

'아! 이번 관문은 반드시 검기나 검강을 사용하지 않고 잘라야 한다.'

아버지가 열 내면 진다는 말씀은 검강을 쓰지 말라는 어떤 경고 같은 것이었다. 검강을 일으키면 검에서 뜨거운 열이 나니까.

그 추측에 힘을 보태주는 사실이 있다.

재도전 기간이 이십 일이란 것은 제일관문보다 더 까다롭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이건 그냥 베어야 한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어쨌든 검강을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면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나는 다시 구체 앞으로 갔다.

반드시 검강을 사용하지 않고 잘라야 한다고 생각하니 구체는 달라 보였다.

'대체 어떻게 베면 이것을 자를 수 있을까? 세로로? 가로로? 횡으로? 비스듬히? 아니면 쾌검(快劍)으로? 중검으로?'

준비된 검으로 다양하게 시도해보았다. 하지만 애꿎은 검만 부러질 뿐, 구체는 잘리지 않았다.

삼십여 차례 실패를 거듭한 후, 나는 반쯤 포기한 채 벽에 기대앉았다.

'분명 방법이 있을 텐데.'

야속한 시간은 자꾸 흘러 이제 시간은 채 일각도 남지 않았다.

'이십 일 후에 다시 도전해야 하나?'

나는 반쯤 자포자기 상태였다.

'검강으로 잘라버리고 통과해버려?'

하지만 아버지가 일부러 글까지 남겨뒀는데, 쉬운 방법을 선택할 수는 없었다.

'어렵구나, 어려워.'

그렇게 자포자기한 채 앉아 있다가 무심코 기를 발출했다. 산에서 아버지에게 배운 기발출 연습이었다.

내 몸에서 뻗어나간 한 줄기 기운이 구체에 닿았다.

'네가 멧돼지면 좋겠다. 그럼 단칼에 잘려질 텐데.'

기운이 구체를 감싸며 천천히 표면을 느꼈다.

순간 눈을 번쩍 떴다.

"어?"

구체 표면에 미세한 선이 있었다. 눈이나 보거나 손으로 만졌을 때는 느껴지지 않았던 선이다.

온 정신을 집중해서 그것을 느꼈다. 내 기운은 새가 알을 품듯 그것을 감싸기 시작했고, 구체와 하나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선은 구체를 따라 쭉 이어지다가 다시 시작점에서 만났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그것을 향해 다가갔다. 여전히 나와 구체 사이에는 내 기운으로 이어져 있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기운으로만 구체를 느끼며 정확히 그 선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쉭.

강하게 내리치지 않았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구체에 나 있는 선을 내리치는 데 집중했다.

다음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쩍.

구체가 반으로 갈라졌다. 그 선이 바로 구체를 정확하게 가를 수 있는 일종의 급소였던 것이다.

그리고 더 놀라운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르르.

잘린 구체의 빈 곳에서 한 알의 단약이 굴러 나왔다.

제11회 하루면 충분.

잘린 쇠공에서 나온 단약이 무엇인지 확인한 나는 깜짝 놀랐다.

마정단(魔精丹)!

마정단은 본교에서 십 년에 딱 한 알씩 연단(鍊丹)하는 영약으로, 마공을 익힌 마인이 복용하면 상당한 양의 공력을 얻을 수 있는 신단이었다. 얻을 수 있는 내공의 양은 복용자의 체질과 그가 익힌 심법에 따라 달라진다.

나는 진정으로 감탄했다. 마정단도 마정단이지만 그보다 더 놀란 것은 구체의 절묘함 때문이었다.

만약 구체를 검강으로 자르면 그 열로 인해서 단약이 숨겨진 통로가 막혀 버려서 마정단이 나오지 않게 만들어 둔 것이다.

오직 검강이 아닌 검으로 자른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보상.

현재 내가 가장 부족한 것이 내공인 상황에서 마정단은 정말이지 하늘이 내린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다.

"반갑다, 마정단아! 감사합니다, 아버지!"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서 곧장 마정단을 복용했다.

마정단은 알싸한 향을 내며 입 안에서 녹은 후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강대한 기운이 전신 혈맥을 타고 돌았다. 나는 심법에 몰두하면서 모든 기운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회귀 전 인생에서 여러 차례 영약을 복용한 적이 있었기에 영약을 녹여 흡수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천무지체의 신체적 특성 때문에 보통 사람들보다 더 많은 기운을 흡수할 수도 있었고.

그렇게 난 무아지경에 빠져 운기조식을 했고, 두 시진이 지나고 나서야 눈을 떴다.

마정단의 영기는 가뭄 끝에 내린 단비처럼 온몸의 혈맥으로 흡수되었고, 여러 번의 정성이 깃든 운기조식을 통해 정순한 내공으로 단전에 갈무리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진기를 끌어올렸다.

쇄애애액! 퍼엉!

내질러진 주먹에서 나는 소리부터가 달랐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는 더 경쾌했고, 터뜨리는 타격음은 귀청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한 위력에 날아갈 듯한 기쁨을 느꼈다.

"하하하하하!"

감출 수 없는 기쁨의 웃음소리가 쩌렁쩌렁 석굴에 울려 퍼졌다.

'아, 어쩌면?'

사냥에서 기발출을 알려주신 것이 이곳에서 쇠공에 난 절단선을 파악하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아버지도 같은 방법으로 잘라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하지만 이내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아버지가 특별하더라도, 혈천도마로 인해 내가 소천동에 들어갈 것까지 예상하진 못했을 테니까. 아니지, 나중에라도 갈 것을 생각하시고....

내가 마정단을 얻기를 바라서든, 혈천도마의 체면을 챙겨주기 위해서든, 어쨌든 아버지 덕분에 큰 기연을 얻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진기를 일주천해서 몸과 마음을 다스린 후 다음 단계를 향해 걸어갔다.

그렇게 세 번째 관문에 도착했다.

一, 생사(生死)를 구분하라.

二, 성공하지 못하면 오 일 후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

三, 준비된 자는 붉은 원에 서라.

생사를 구분하라고? 대체 무슨 관문일까?

그리고 재도전 기일이 오 일로 줄었다. 왠지 좋아할 일이 아니란 느낌이 들었다.

붉은 원에 서자 바닥에서 탁자가 올라왔다.

탁자에 놓인 것을 보는 순간 내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곳에는 열 개의 약초가 놓여 있었다. 이번 관문은 약초와 독초를 구분해 내는 관문이었다.

무림에서 조심해야 할 것이 노인과 아이와 여인이란 말이 있지만, 실제로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은 독이다. 남이 주는 술과 음식은 함부로 먹어선 안 되며, 어쩔 수 없이 먹게 되면 반드시 은침으로 독을 확인해야 한다.

그래서 다들 독에 대한 경각심은 있었지만, 독초 구분법을 공부한 적이 있었을까? 공부한 사람은 쾌재를 불렀을 것이고 아닌 도전자들은 모두 난감해했을 것이다.

나는 전자에 속했다. 회귀 전에 귀령자에게 했던 말이 있다.

―자부하건대 산타기, 수영, 잠수, 야영은 내가 절대 고수요. 눈 감고도 중원의 지도를 그려낼 수 있을 거요.

만년화리를 찾아 중원 방방곡곡을 돌아다닌 나다. 어디 수영, 잠수만 능숙하겠는가? 온갖 종류의 약초와 독초를 구분할 줄도 알았고 그 효능까지 자세히 알고 있었다. 어지간한 약초꾼이 내게 이름을 내밀면 저리 가서 도라지나 캐시오 해도 될 정도다.

그랬기에 아버지가 남긴 글은 지금 볼 필요가 없었다.

나는 자신 있게 그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열 개의 독초 중 유일하게 독초가 아닌 약초였다.

그러자 탁자가 아래로 내려가더니 다시 새로운 약초가 놓인 탁자가 올라왔다.

이번에도 열 개의 약초가 놓여 있었는데 앞서 올려진 약초와 다른 약초들이었다.

"아!"

운 좋게 뽑아서 관문을 통과하는 것을 막으려고 두 번을 연속해서 맞춰야 했다.

나는 이번 시험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상상이 갔다.

생각해 보라.

두 번 다 정확히 맞춰야 하는데, 그 숫자가 각각 열 개나 된다. 과연 두 번 연속해서 맞출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냥 이것과 저것, 대충 감으로 때려 맞추려다간 운 나쁘면 평생 독초나 고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이 시험은 먹어서 알아내야 한다.'

그것이 정답이라는 듯 독초의 양은 죽지 않을 정도만 놓여 있었다. 물론 독에 중독되면 며칠간 끙끙 앓았을 거다.

그래도 이 방법이 최선이다. 운이 좋아 약초를 빨리 찾으면 빨리 나갔을 테고, 운이 나쁘면 시간이 오래 걸렸겠지.

난 두 번째 약초 중에서 독초가 아닌 것을 뽑았다. 혹시나 세 번째 약초들이 나올까 살짝 기대했는데, 그렇게까지 가혹하지는 않았다.

두 번째도 정확히 약초를 골라내자 다음 단계로 가는 문이 열렸다.

나처럼 단번에 독초가 아닌 것을 연속해서 찾아낸 사람이 있었을까? 독공을 좋아하는 도전자라면 한 번에 찾았겠지만, 대부분은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고생했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남긴 글이 궁금해서 도전자들이 글을 남긴 벽으로 가보았다.

―젠장! 이러다 독인(毒人)이 되고 말겠다.

―어떤 멍청이가 이런 시험을 생각해낸 것일까? 평소 우리가 이런 독초를 얼마나 접한다고.

―분명 약초를 찾아낼 단서가 있을 거다. 그것을 연구해야 한다.

―몇 번이나 실패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차라리 저 독을 다 먹고 죽어버릴까? 이제 벽곡단이 독초처럼 느껴진다.

―처음부터 잘 계산했어야 했는데. 내 감을 믿은 것이 원망스럽다.

―아흔여섯 번 만에 성공이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독을 너무 먹어서 머리털이 많이 빠졌다.

맨 아래 아버지가 남긴 글이 있었다.

―멍청이들! 운 따윈 믿지 마라.

나는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첫 시도부터 하나씩 하나씩 기억해가며 독초를 복용했다는 것을. 운에 맡겨서 뽑는 것은 결국 시간 낭비라는 것을 단번에 파악하셨던 거다.

아버진 두 달 만에 나오셨다고 했으니.

운을 믿지 말라고 하셨어도, 이번 관문에서 아버지는 상당히 운이 좋으셨던 것 같다. 아니면 평소 독초에 관한 지식이 있으셔서 몇 가지 약초는 제외했을 수도 있고.

"다행히 우리 부자, 머리털은 지켜냈네요."

* * *

네 번째 관문이 마지막 관문이었다. 비석에 최종관문이라고 적혀 있었다.

一, 생사환영진(生死幻影陣)에서 살아남아라.

二, 진법에서 죽으면 실제로도 죽는다.

二, 준비된 자는 붉은 원에 서라.

놀랍게도 실패하면 죽는 관문이 나온 것이다.

생사환영진.

진법 내에서 죽으면 진짜 죽는 진법.

이번에 조상들이 남긴 글귀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글이었다.

―정말 너무 힘든 싸움이었다. 언젠가 천마가 되면 생사환영진을 만든 자를 찾아내서 죽여버릴 거다.

―너무 두렵고 힘들었다.

―빌어먹을! 대체 누가 이딴 진법을 만든 거냐?

―앞으로 살면서 두 번 다시 생사환영진에 발을 딛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곳 역시 아버지의 글이 있었다. 이번에는 욕은 없었고 한마디 충고만 남겨두었다.

―쉬지 마라.

당연히 이번 관문의 실마리로 남겨주신 말씀이었지만, 앞으로 내 인생을 두고 해주신 말씀처럼 느껴졌다. 마지막 관문이어서 그럴 것이다.

'네, 쉬지 않고 쭉쭉 나아가겠습니다.'

차분히 운기를 해서 내공을 가득 채운 후 붉은 원을 향해 걸어갔다.

원 안에 서자 생사환영진이 발동하면서 주위의 경관이 바뀌기 시작했다.

잠시 후 나는 황무지에 서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도, 마른 잎 앙상한 나무도, 바위에 붙은 벌레도 모두 진짜였다. 아니, 진짜처럼 느껴졌다.

"최상위 진법은 정말 대단하구나."

신비함을 넘어서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실감 나는 현실을 구현할 수 있을까? 정말이지 세상에는 진짜 천재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실감한다.

그때였다.

모래를 실어 오는 바람과 함께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에 눈코입이 없는 그들은 진법이 만들어낸 환영이었다.

숫자는 모두 삼십.

환영은 환영인데 실체가 있는 환영이었다. 조금 전에 만져봤던 바위처럼, 그들의 검도 진짜일 것이다.

환영이 내 주위를 둘러싸며 살기를 내뿜었다. 상승의 무공을 익힌 자라도 실전 경험이 부족하면, 지금 이 순간 몸을 움츠리게 된다. 등이 찔릴지도 모를 불안감, 다수의 적이 주는 압박감은 생각보다 크다.

물론 나야 더 많은 상대와 싸워본 경험이 있다. 게다가 상대가 인간이 아니었기에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난 획하고 몸을 날려서 그들 사이로 빠르게 내려섰다.

푹! 푹!

좌측과 우측 환영의 가슴을 연속해서 찌르는 것을 시작으로, 싸움은 시작되었다.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그들의 목과 배를 찔렀고, 팔을 부러뜨렸으며, 머리통을 박살 냈다. 어차피 인간이 아니었기에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공격을 피하기도 했고, 맞받아치기도 했다. 하나의 초식을 내력을 사용하지 않고 공격하기도 했고, 내력을 실어서 하기도 했다. 상대는 지치지 않았기에 여러 시험을 해볼 수 있었다.

그것들이 죽을 때면 펑, 소리를 내며 터졌는데,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속이 시원해졌다.

첫 번째 등장한 삼십 명을 모두 쓰러뜨리자 잠시 시간이 주어졌다.

재빨리 운기조식을 하려던 그때, 나는 아버지가 남긴 글귀를 떠올렸다.

쉬지 마라.

'아, 이거였구나.'

중간에 이렇게 운기할 시간을 주는데 내공을 채우지 말고 싸우라는 아버지의 조언이었다. 가진 내공을 잘 활용해서 실전처럼 싸워보라는 조언.

원래 실전이라면 이렇게 내공을 채우고 있을 여유는 없을 테니까. 이건 실전에서 내공 조절을 해볼 수 있는 다시 없을 기회였다.

'아무리 그래도 말이죠,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생사환영진인데. 쉬지 말라니요? 정말 아버지다운 조언이십니다.'

나는 아버지의 뜻대로 내공을 회복하지 않고 기다렸다.

진기를 일주천할 시간이 지나자 다음 환영이 등장했다.

이번에는 이십 명이었는데, 숫자는 줄었지만 앞서보다 훨씬 강한 놈들이었다. 움직임은 더 빨랐고, 사용하는 무공 역시 상위 것이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다양한 병장기를 사용했는데 도검은 물론이고 멀리서 활을 쏘기도 했으며, 암기를 사용하기도 했다.

까닥하다간 목숨을 잃을 위험한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신이 났다. 회귀한 후 처음으로 실전다운 실전을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늦어! 더 빨리 와라!'

놈들의 어깨를 밟고 넘어 다녔고, 날아드는 수십 개의 암기를 허공에서 다 쳐내기도 했다. 환영을 제압해 방패 삼아 싸우기도 했고, 눈을 감고 놈들을 상대하기도 했다.

그렇게 두 번째 싸움이 끝나고 나서도 나는 운기조식을 하지 않았다. 몇 단계까지 있을지 모르겠지만 남은 내공의 반만 사용하겠다는 마음으로 싸웠다.

세 번째 환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는 열 명.

나는 그들이 마지막일 것이라 확신했다. 이번에 등장한 환영의 기세로 볼 때, 여기까지가 도전자들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였다.

여기서 많은 도전자가 죽었으리라.

과연 이번에 등장한 적들은 앞서 두 번의 그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고 빨랐다.

반대로 나는 아쉬웠다.

'벌써 끝이구나!'

더 싸우고 싶었는데.

난 환영들의 공격을 피하는 연습을 하며 그들 사이를 누볐다.

그리고 이만 끝을 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화끈하게 끝냈다.

어차피 마지막 싸움이라 확신했기에 공력을 모두 쏟아부었다.

내 검은 현란한 검선을 만들어냈다. 지난 경험상 비천검술은 상대에 따라 평가가 달라졌다. 결국 무공도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었기에 상대가 하수일수록 겉만 화려한 검법이란 야박한 평가가 내려졌고, 고수일수록 그 현란함을 구성하는 일곱 가지 검식(劍式)이 무궁무진한 변화와 깊이를 지닌 검법임을 알아차리고 경악했다.

비천검술의 절기들이 연이어 펼쳐지자, 열 개의 환영들이 잇달아 휩쓸렸다. 진법에서 가장 강한 환영들이었는데, 가장 빠르고 화끈하게 소멸되었다. 펑, 펑 터져나가는 적들의 모습은 마치 불꽃놀이처럼 보였다.

그렇게 마지막 환영이 사라지면서 생사환영진이 깨어졌다.

내 경지가 너무 높아서 아버지가 원한 급박한 상황은 연출되지 않았다. 하지만 속이 후련해지는 싸움이었고 가슴속에 맺혀 있던 화가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그래, 이것으로도 내겐 충분한 의미가 있다.

생사환영진이 사라지자 밖으로 나가는 문이 열리고 그 옆에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一, 나가려면 이 비석을 옆으로 밀어라.

二, 무사히 관문을 통과한 것을 축하한다. 그대의 힘을 천마신교의 발전과 부흥을 위해 쓰길 바란다.

이렇게 소천동의 관문이 끝났다.

놀랍게도 나는 단 하루 만에 이곳 소천동의 관문을 통과한 것이다.

이 소식이 전해지면 아마 본교가 난리가 날 것이다. 아버지가 두 달 걸렸는데, 단 하루 만에 나왔다? 찬사보다는 불신이 가득할 거다.

나와 비무를 했던 구평호는 꼼수를 써서 조작했을 거라고 입에 거품을 물겠지. 아버지나 팔마존 역시 내가 어떻게 하루 만에 나올 수 있었는지 어떻게든 밝히려 들 테고. 여러 골치 아픈 일들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결국 나는 나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수련하자.

여기서 수련하는 거다. 아버지 체면도 살려드려야 하니, 딱 백 일만 채우고 나가자.

다행히 해야 할 수련은 많고 징글징글한 벽곡단은 더 많이 쌓여 있었으니까.

수련하자! 고독도 씹고 벽곡단도 씹으면서.

제12회 칼춤 한 번 추겠습니다.

대성을 이룬 비천검법을 연마하고 또 연마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연마했던 무공인데, 젊어진 몸으로 펼치는 비천검법은 또 다른 느낌을 주었다. 이래서 무공은 평생 정진해도 그 끝을 볼 수 없다고 하는 것이리라.

비천검법을 수련하면서 동시에 아버지가 알려준 기발출 수련도 했다. 또 이번에 마정단으로 늘어난 내공과 외공이 균형을 이루도록 노력했다.

그렇게 수련에 수련을 거듭한 결과.

이곳에 들어온 지 구십칠 일이 되었을 때, 나는 늘어난 공력을 완벽하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기발출 역시 더욱 능숙하게, 더 많은 수의 기를 발출할 수 있게 되었다. 거미줄까진 아니지만, 벌써 열 개 이상의 기를 동시에 발출할 수 있었다.

"됐다. 여기까지."

남은 삼 일은 조용히 마음을 다스리고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정리했다.

이곳에 들어온 지 백 일째 되던 날, 나는 비석을 옆으로 밀었다.

그러자 밖으로 나가는 문이 열렸다.

"으아, 이 맑은 공기! 벽곡단아, 이젠 안녕이다!"

크게 기지개를 켜며 그곳을 걸어 나왔다.

소천동 출구에 천마전의 무인이 한 명 기다리고 있었다.

"어이쿠! 공자님!"

그는 깜짝 놀라서 나를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놀라시오?"

"이 공자님이 나오면 곧장 천마전으로 모셔오라고 하셔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데 이렇게 일찍 나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적어도 오늘부터 백일은 기다려야 한다고 하셔서."

"언제부터 기다린 겁니까?"

"오늘부터 나왔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백 일에서 이 백일 사이에 나올 거로 예상하신 거였다. 아버지가 바라보는 나의 재능이다.

이 정도면 꽤 높이 봐주셨는데?

거기에 또 하나, 적어도 내가 죽을 것으로 생각지는 않으셨구나.

어쩌면 나를 소천동에 넣으신 것이 벌이 아니라 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무인을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 * *

천마전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혼자 계셨다.

아버지가 앉아 계신 태사의를 향해 붉은 융단을 천천히 걸었다.

이 융단을 사람들은 '피의 길'이라 부른다. 얼마나 많이 피를 흘려야 저곳에 도착할 수 있을까? 아버지는 얼마나 많은 피를 보고서야 저곳에 앉으실 수 있었던 걸까? 저 자리를 지키려면 또 얼마나 많은 피가 흘러야 할까?

"딱 백 일 걸렸구나."

아버지의 말씀에 입이 근질거렸다. 관문은 하루 만에 깨버렸다고. 그게 지금 당신 아들이라고. 정말 뒷산 대나무숲이라도 찾아가야 할까 보다.

"발버둥을 쳤지만, 아버지 기록은 깨지 못했습니다."

"구체는 제대로 잘랐느냐?"

"열 내지 않고 잘 잘랐습니다. 그렇게까지 실마리를 남겨주셨는데, 당연히 잘 잘라야죠. 마지막 환영진에서는 쉬지 않았고요."

그때 나는 보았다. 아버지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지금까지 보았던 그 비웃음이 아니었다. 진짜 기뻐서 짓는 미소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미소는 지어지자마자 사라졌다. 아버지에게 미소는 신기루 같은 거다.

"아주 멍청이는 아니구나."

"그럼요, 누구 아들인데요."

회귀 전에 내가 인식했던 아버지는 자식들의 목숨을 건 후계자 다툼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자식의 죽음도 교의 미래를 위해 감내하는 사람이지, 적어도 다툼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한데 저를 왜 부르셨습니까?"

내게 용무를 말하기에 앞서 아버지는 한 사람을 그곳으로 불렀다.

그는 바로 본교에서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권력을 지닌 총군사(總軍師)인 사마명(司馬明)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사마 군사님."

"단지 백 일 만에 소천동을 통과하다니. 대단하십니다, 이 공자."

그는 총군사이자 본교의 머리를 담당하고 있는 통천각(通天閣)의 각주이기도 했다. 중원의 모든 정보를 손에 쥐고 있는 실권자로 아버지의 신뢰를 한 몸에 받는 인물이었다.

"백 일간이나 받은 벌이지요."

"벌입니까? 상입니까?"

사마명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벌을 내리시려다가 실패하신 거겠죠?"

"하하하."

사마명이 웃었고, 나도 함께 웃었다.

그렇게 인사가 끝나자 사마명이 본론을 꺼냈다.

"오늘 이 공자님을 뵙자고 한 것은 한 가지 교내의 일을 상의하기 위해서입니다."

교내의 일을 처리하는데 형이 아니라 나를 불렀다? 그것도 소천동을 나오자마자 이렇게? 확실히 과거와는 다른 상황이다. 보통의 경우 교내의 일은 형에게 맡겼으니까. 외부에 나가 있더라도 서찰을 보내서 맡겼을 테고.

내 시선이 사마명 너머 태사의에 앉아 계신 아버지에게로 향했다. 결국 이번 결정은 아버지의 뜻이 개입된 일이다.

"말씀하시지요."

"얼마 전 투서(投書)가 날아들었습니다. 마군(魔軍) 내부에서 비리가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마군은 본교의 무력 조직 중 하나로 소속 마인들의 성정이 거칠기로 유명했다.

'아!'

내심 탄식한 이유는 마군의 수장이 바로 혈천도마의 친동생이었기 때문이었다. 또다시 혈천도마가 얽히는 순간이었다.

"지난해에도 투서가 날아들어 황천각(黃泉閣)에서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황천각은 반역과 비리, 부정부패를 조사하는 기관이었다. 조직의 성격상 모두가 싫어하지만, 그 모두에 우선하는 힘 있는 조직.

"하지만 당시 조사는 실패했습니다. 아무도 관련된 증언을 하지 않았고, 파견되었던 특별조사관이 살해당했습니다. 그를 살해한 마군은 자결했고요."

워낙 큰 사건이라 나도 기억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마군 내부에서 사건조사를 방해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 증거를 찾지 못했다. 결국 사건은 흐지부지 덮이고 말았고.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다시 투서가 날아든 것이다.

"이 공자께서 특별조사관이 되어서 이번 일을 처리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왜요? 라는 말은 필요치 않았다.

시작하기도 전에 위험한 냄새가 펄펄 풍겨오는 이 일은 아버지의 시험이었으니까.

마군과 같은 정예조직에서 비리 사건에 연루되면 참형이다. 결국 비리를 저지른 누군가는 어떻게든 자신의 죄를 감추려 할 테고, 조사관이 천마의 자식이라고 봐주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혈천도마가 내게 경고까지 한 상황에서 그의 동생이 수장으로 있는 조직을 건드린다?

"저를 사지로 내모시는군요."

사마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맞습니다. 이번 임무는 목숨을 걸어야 할 겁니다."

나는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무뚝뚝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계시던 아버지가 불쑥 생각지도 못한 말씀을 하셨다.

"그들을 휘어잡고 목줄을 틀어쥘 거라면서?"

사냥터에서 아버지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야 천마가 되었을 때의 일이죠."

"그래서 지금은 무서워서 못 하겠다?"

"아니, 말씀을 또 그렇게 하시면 제가 안 할 수 없는데...."

아버지는 나를 소천동에 넣으면서 혈천도마의 체면을 살려주었고, 이번 시험으로는 혈천도마를 견제하려 하고 있다. 대체 아버지의 속마음은 어떤 것일까?

문득 사냥하던 날 밤에 했던 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아버지를 위해 절 죽일 수 있으십니까?

―이게 고민거리가 된다면, 독심이란 말을 함부로 입에 담아선 안 되겠지.

내 시선이 아버지와 허공에서 마주쳤다.

무뚝뚝한 눈빛은 사냥 갈 때와도 똑같았고, 나를 소천동에 넣을 때와도 똑같았다.

달리 생각하면 이건 아버지의 결정이 아니다.

내가 달라진 모습으로 아버지를 대했고, 그 결과로 나온 아버지의 선택이니까. 결국 내가 선택한 길이기도 하다.

"그 멋진 별들을 보면서 뱉은 말인데, 책임져야죠. 제가 맡겠습니다."

흔쾌한 수락에 아버지가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 계획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칼춤 한번 시원하게 춰드리겠습니다.'

반면 사마명은 내 수락이 뜻밖인 모양이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말씀드렸다시피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본교의 곳간을 털어먹고 있는 놈들을 그냥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뭡니까?"

"조사권뿐만 아니라 즉결처분권(卽決處分權)도 주십시오."

즉결처분권.

조사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대상을 죽여도 그 책임을 지지 않는 특권을 의미했다.

전례에 없는 일이었기에 사마명이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좋습니다. 대신 되도록 명확한 증거가 있을 때만 즉결처분권을 행사해 주십시오."

"물론입니다."

"어려운 일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여 제가 죽거들랑 무극은 용감했었노라고 비석에 새겨 주십시오."

사마명이 피식 웃었다.

"내일 이 공자를 보좌할 황천각 조사관을 보내겠습니다."

"기왕이면 아름다운 미녀로 보내주십시오."

"하하하. 요즘 이 공자께서 새로운 면모를 보이신다고 들었는데, 정말 많이 달라지셨군요."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데, 술이라도 한잔해야죠."

정중히 포권한 후에 그곳을 나가려다 힐끗 아버지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버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아들과 같이 한잔...."

아버진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도 않으시고 벌떡 일어나서 나가버렸다.

내가 사마명을 보며 씩 웃으며 말했다.

"겉으론 까칠하시지만, 은근히 잘해주신다고요."

"전혀 그래 보이진 않습니다만."

미소와 함께 한마디를 남긴 후 사마명도 그곳을 나갔다.

나는 그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군사님도 점점 아버지 닮아가십니다."

사마명 역시 뒤돌아보지 않았다.

두 사람 앞에서는 나는 농담도 하고 장난도 치려 했다. 그들에게 나는 파릇파릇한 청년이었으니까. 항상 마음속에 되뇐다. 과거의 어둠을 이 삶에 끌고 오지 말자고. 나는 새로 태어났다고.

천마전 앞에서 크게 기지개를 켰다.

이 시험을 잘 통과해서 후계자 자리로 한 걸음 더 다가가는 거다.

* * *

다음 날 아침, 이안이 황천각 조사관이 찾아왔다고 알려왔다.

"도련님, 저도 따라가서 돕겠습니다."

마군을 조사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녀도 잘 알았다.

허락 대신 물었다.

"예뻐?"

"네?"

"밖에서 기다리는 조사관 예쁘냐고."

"네?"

"괜히 오붓한 시간 방해하지 마! 질투 금지!"

그때 이안이 대체 무슨 소릴 하냐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조사관 남잔데요?"

"뭐라고?"

잠시 후 이안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온 사람은 눈에 띄게 작은 키에 우울해 보이는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남자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황천각 특별조사관 서대룡(徐大龍)입니다."

이름은 대룡인데 몸집은 정반대였다. 심지어 목소리도 작았다.

"왜 자네가 왔어? 총군사께 황천각에서 제일 미녀로 보내달라고 했는데."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짓던 서대룡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분 눈에는 제가 제일 미녀로 보였나 보죠."

서대룡의 농담에 옆에 서 있던 이안이 풋 하고 웃었다.

"웃어? 이 비극적인 상황에서?"

이안이 재빨리 표정 관리를 했다.

"아닙니다."

"아, 오랜만에 미녀와 오붓한 시간 좀 가지려 했더니."

내가 짐짓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일이나 하자. 마군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 봐. 버벅대기만 해. 미녀를 대신한 비극적 운명이 어떤 건지 보여줄 테니까."

내 농담 섞인 말에 서대룡이 기다렸다는 듯 설명했다.

"마군은 마군주 휘하 총 육 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교주님의 직속 명령만 수행하는 조직으로 각 대는 삼십 명, 마군주까지 총 일백팔십일 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부군주는 없고, 일 대주가 그 역할을 대신하는데, 마군주의 심복입니다."

"잘 외워왔네."

"여기 마군들에 관한 자료입니다."

그가 두툼한 서류를 내게 건넸다. 마군들의 인상파기와 이력들이 모두 적혀 있는 서류였다.

나는 그중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한 장을 꺼냈다.

"종표에 대해 말해봐."

이건 못 외우겠지? 하는 마음이었는데 그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마군 일대에 속한 자로 올해로 칠 년 차입니다. 독문무공은 구혼장(求魂掌)이라는 장법(掌法)이고 성격이 아주 잔혹합니다. 술과 도박을 좋아해서 몇 번이나 사고를 쳤지만 마군 측에서 무마했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뭐야? 어떻게 알아? 친구야? 원수야?"

"아닙니다."

나는 다른 서류를 한 장 꺼내서 물었다. 이번에도 정확히 그 사람에 대해 알고 있었다.

"설마 여기 백팔십 명 다 외웠어?"

"네. 정확히는 백팔십일 명이죠."

"천재잖아?"

"오랫동안 조사해온 일입니다."

"아냐, 아냐. 이걸 다 외웠다면 천재야, 천재."

"노력으로 인정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 겸손하기까지. 이제 좀 달리 보인다."

작은 키에 좀 우울해 보이는 인상이었는데, 그 우울한 분위기가 천재의 까칠함처럼 느껴졌다.

"절 보낸 이유가 미녀인 이유 말고도 있지 않겠습니까?"

"오, 겸손하기만 하면 재미없으니까, 잘난 척도 좀 해주고. 자네, 황천각에 수석으로 들어갔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거지! 이안, 들었지? 수석이었냐는 질문에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런 대답쯤은 나와줘야지. 멋있다, 멋있어. 그렇지만 아쉽게도 사귀는 여잔 없을 테고."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집에 거울 없어?"

"분하지만 없습니다."

"뭐가? 거울이? 여자가?"

"아뇨, 무례한 상관에게 저항할 용기가요."

"하하하."

나는 기분 좋게 웃었다. 왠지 마음에 드는 녀석이다.

자, 그러면 얼마나 일을 잘하는지 볼까?

"그럼 마군주는 어떤 자지?"

제13회 내 성질은 더 더럽다.

"마군주. 이름 구천양(具天壤). 혈천도마 구천파의 동생입니다. 마군주에 오른 지는 올해로 팔 년이 되었고, 각종 위험한 임무를 수행해 내면서 마군을 명실공히 모두가 인정하는 정예조직의 자리에 올렸습니다."

서대룡은 마군주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일은 잘했다는 거네."

"그렇습니다."

"이번에 날아들었다는 투서를 볼 수 있을까?"

"네, 여기 있습니다."

그가 투서를 보여주었다.

필체를 속이려는 듯 삐뚤삐뚤 쓰인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마군 내 심각한 비리 발생. 조사 요망.

한참 동안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자 서대룡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한번 상상해 보자고. 황천각 내에 비리가 있어. 그걸 자네가 알게 되었어."

서대룡을 바라보며 내가 물었다.

"그럼 자넨 투서를 보낼 건가?"

"저라면 안 보냅니다."

서대룡의 대답은 망설임이 없었다.

"그렇지? 너와 상관없는 일인데."

"아뇨, 그래서가 아닙니다."

"그럼?"

"투서를 보내봐야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무심히 툭 내뱉어진 그의 대답에서 어떤 패배주의가 느껴졌다.

"본교를 바꾸려고 자네의 황천각이 존재하는 거잖아?"

"정확히 저희는 본교를 바꾸려는 분들이 사용하는 칼이죠. 주체는 아니고."

"윗대가리들이 바뀌지 않으면 본교는 바뀌지 않는다?"

"그런 말씀은 드린 적 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그렇지 않습니까?'였다. 원래도 우울한 분위기를 풍겼기에 이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생각은 그와 잘 어울렸다.

"어쨌든 이 사람은 투서를 보냈어. 이 일이 걸리면 죽는다고 생각하고 있어. 이렇게 자기 필체를 속인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한데 이 사람은 왜 투서를 보냈을까? 자네 말처럼 이런다고 바뀌는 것도 없는데."

대답 없는 서대룡 대신 이안이 슬쩍 나서서 대답했다.

"정의로워서 보냈을 리는 없을 테니... 비리를 저지른 자와 원한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일리 있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투서를 서대룡에게 돌려주었다.

"암튼 우린 이 사람을 반드시 찾아야 해. 우리가 만만해 보이면 그는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거야."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때? 할 수 있겠어?"

"해야죠. 이미 명령을 받고 이렇게 왔는데."

"내 말은 정말 위험한 일이라고. 마군주가 개입되어 있을 수도 있어. 겁 안나?"

"네."

"지난번 조사관 죽은 것 알지?"

"압니다. 그때 죽은 조사관이 제 직속 선배였습니다."

"아, 그랬군."

"저를 가르쳐줬던 사수셨죠."

담담한 말속에 어떤 비애가 느껴졌다. 어쩌면 그가 마군에 속한 모든 마인들의 정보를 외우고 있는 것이 죽은 선배의 복수를 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그를 생각하면 슬픈가?"

"너무 허망하게 돌아가셨죠."

"허망한 죽음은 아니야. 그 죽음이 자네와 나를 이곳까지 불러들였으니까. 그리고 겁은 내야 해. 놈들은 황천각 조사관을 죽이고, 동료까지 살인멸구한 자야. 한 마디로 뒤가 없는 놈들이지."

"그런 더러운 놈들에게 겁내고 싶지 않습니다."

이 말에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는 선배의 복수를 하고 싶어 했다. 저 작은 몸집에 큰 분노가 잠들어 있다.

"자, 그럼 조사하러 가볼까?"

서대룡과 함께 거처를 나오려는데, 이안이 따라붙었다.

"도련님! 저도 데려가 주세요."

그녀는 마군을 조사하는 일이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안 돼, 공적인 임무니까. 이때다 하고 좀 쉬라고."

그녀는 나에게서 멀어질 필요가 있다.

멀어져가는 우릴 걱정스럽게 쳐다보던 이안이 갑자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내가 뒤쪽으로 기를 내보내 그녀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던 것이다.

걱정하지 마라, 이안. 이런 날들을 위해 나는 아주 먼 길을 걸어왔었으니까.

* * *

마군들이 기거하는 마룡원(魔龍院)은 본교 외전 서쪽 지구에 위치했다.

정예조직답게 건물 규모도 컸고, 시설도 매우 좋았다.

내가 서대룡을 데리고 마룡원 입구에 도착했을 때 마인 둘이 막아섰다. 큰 덩치를 자랑하는 마군들답게, 이 문지기들도 보통 사람의 두 배는 됨직한 덩치들이었다.

"어디서 오셨소?"

"황천각 특별조사관 서대룡이다. 비켜!"

서대룡은 작은 몸집이지만 강단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박력에도 두 마인은 전혀 긴장하거나 겁을 먹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조롱했다.

"특별조사관? 전혀 특별해 보이지 않는데?"

그중 한 놈이 혼잣말처럼 나직이 말했지만, 들으라고 한 말이었기에 똑똑히 들렸다.

나나 서대룡이 뭐라 하기 전에 다른 놈이 얼른 나섰다.

"상부의 출입 허가 없이는 들어갈 수 없소."

서대룡이 이번 사건에 대한 조사명령서를 내밀었다.

"상부는 여기야. 자, 명령서다."

"잠시 기다리시오. 상부에 보고할 테니까."

"너희 상관은 우리가 직접 만날 거다. 비켜."

나는 서대룡이 어떻게 이 일을 처리하나 뒤에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허가 없이는 못 들어간다니까."

"이 명령서가 허가서다!"

서로 언성이 높아졌다.

"뭔 개소리요? 이곳에 왔으면 우리 법을 따라야지."

"개소리?"

서대룡은 망설이지 않고 앞을 막아선 놈의 정강이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빡.

"으윽!"

정강이를 부여잡던 놈이 번쩍 주먹을 들었다.

"이 새끼가!"

서대룡은 제 자리에 선 채 놈을 노려보았다.

"황천각 조사관을 치려고?"

놈은 감히 서대룡을 치지 못했다. 아무리 기세등등한 마군이라지만, 황천각 특별조사관을 폭행했다가는 그 즉시 뇌옥행이었으니까.

"어휴, 이 쥐방울만 한 것 패버리고 맷값 물어?"

이게 딱 마군의 수준이었다.

하긴, 어디 마군 뿐이겠는가? 본교의 수많은 마인이 앞뒤 가리지 않고 제 성질대로 살아가고 있었다.

우리에겐 마도가 없다.

언젠가는 있었겠지만, 현재에 이르러서는 마도를 잃어버렸다.

본교가 무림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며, 앞으로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없다.

포악하고 강한 것이 정의고 진리라는 그릇된 편견으로 뭉친 악인들의 집합체. 누군가 본교를 이렇게 욕한다면 나는 그에 대해서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으리라.

서대룡이 목청을 높였다.

"비켜!"

"상관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니까!"

놈들은 비키지 않았다.

이런 현실이기에 서대룡이 이 말을 했을 것이다.

―투서를 보내봐야 바뀌는 것이 없으니까요.

저 작은 몸집으로 하는 지금의 실랑이가 본교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한참을 지켜보다가 이윽고 내가 나섰다.

"내가 누군지는 아나?"

내가 나섰음에도 두 놈의 기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알고 있습니다."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나인 줄 알면서도 이랬다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사정없이 놈의 하물을 걷어찼다. 정강이를 차서는 해결이 안 되는 것 같으니, 더 중요한 것을 찬 것이다.

퍽!

"으아아아아악!"

놈은 아랫도리를 움켜쥐고 데굴데굴 굴렀다.

"내가 보고 있는데 맷값 타령을 해?"

당황한 다른 놈의 얼굴에는 내 주먹이 박혔다.

꽝!

그 큰 덩치가 한 방에 나가떨어졌다.

서대룡이 놀란 얼굴로 쳐다보았다. 설마 마군을 이렇게 대놓고 패버릴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뭐해? 앞장서야지."

"네, 가시죠."

서대룡 앞장섰고 내가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어느새 소식이 전해졌는지 본관 건물에 들어서기 전에 일단의 마인들이 우르르 그 앞을 막아섰다.

"비켜!"

아무도 비켜서지 않자 서대룡은 명령서를 내밀며 큰 소리로 말했다.

"이거 안 보여? 너희들은 지금 정식으로 내려온 조사를 방해하는 거다. 전부 뇌옥에서 썩고 싶어?"

아무리 목청을 높여도 코웃음을 칠 뿐 누구 하나 겁먹은 기색이 없었다. 더구나 서대룡의 몸집이 작아서 더욱 얕잡아봤다.

그들 사이가 갈라지더니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대체 어떤 새끼들이 와서 행패를 부린다더냐?"

"특별조사관 서대룡이다. 그대는 신분을 밝혀라."

"마군 일대주 고당(高黨)이다. 됐냐, 이 새끼야?"

그때 서대룡이 재빨리 내게 전음을 보냈다.

―이 자가 실질적인 서열 이 위인 자입니다. 마군들 중에서도 가장 악질이라 알려진 자입니다.

그가 전음을 보내느라 입술을 달싹거리는 것을 고당이 본 모양이다.

"이놈이 죽고 싶어 환장했나? 감히 사람을 앞에 두고 전음질을 해?"

정문에 있던 놈들이나 이놈들이나 그야말로 안하무인이었다. 이들이 나를 무시하는 이유는 마군 자체가 형을 지지하는 조직이기 때문이었다. 마군주의 형인 혈천도마 역시 형의 뒷배로 알려진 사람이고. 그러니 이렇게 대놓고 나를 무시하는 것이다.

"고 대주, 나는 엄연히 공식적인 명령을 받고 내려온 황천각의 특별조사관이오. 말조심하시오!"

서대룡은 고당 앞에서도 당당했다.

'마음에 드네.'

쓰레기 같은 혈천도마 제자들이나 안하무인인 마군을 보다가 서대룡을 보니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 들었다.

서대룡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고당이 눈알을 부라렸다.

"말조심? 안 하면 어쩔 건데?"

"황천각 조사 방해죄 및 조사관 모독죄로 전원 체포하겠소."

"체포? 으하하하하."

그가 크게 웃자 주위에 있던 수하들도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할 수 있으면 해봐!"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집행 무인들이 함께 왔어도 이렇게 나왔을 자들이었다.

서대룡이 더는 어쩌지 못하고 나를 돌아보았다.

다시 내가 나서야 할 때다.

"고 대주, 오랜만입니다."

난 성큼성큼 고당에게 걸어가서 반가운 얼굴로 악수하듯 그의 손을 잡았다.

"우리가 언제 마지막 봤죠? 지난 연회에서였나요? 이렇게 뵈니 반갑습니다."

반가워하는 나에 반해 고당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마군주를 급히 좀 뵈어야 할 것 같으니 텃세는 여기까지만 하시고 길을 열어주시죠."

그러면서 그와 함께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길이 열렸고 서대룡과 나는 여전히 손을 맞잡은 채 함께 들어갔다.

처음의 기세에 비해 너무 손쉽게 길을 열어주는 고당의 모습에 그의 수하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복도를 걸어가 계단 앞에서 고당과 작별했다.

"다음에 제가 한잔 사겠습니다."

너무나 쉽게 길을 열고 계단을 올라왔기에 서대룡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고당과 아는 사이였습니까?"

"아니. 오늘 처음 봤다."

"한데 어떻게?"

"저놈 한동안 왼손으로 밥 먹어야 할 거야. 아까 악수할 때 놈의 손을 부러뜨렸거든."

"뭐라고요?"

너무 놀라 서대룡이 소리를 질렀다.

마군 대주의 손을, 그것도 아무런 표도 내지 않고 부러뜨렸다고 하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그런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한데 왜 놈은 수하들을 시켜 공격하지 않았죠?"

"그럼 자신이 당한 것이 밝혀지잖아? 악수하다가 손이 부러졌다? 수하들 앞에서 쪽팔려서라도 표 못 내지."

물론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손이 부러진 고당이 반격하려 할 때, 난 재빨리 전음을 보냈다.

―까불면 영원히 이 손 못쓴다.

부러진 손을 완전히 으스러뜨릴 듯 꽉 잡았다. 앞서 혈천도마 제자의 팔을 재기불능으로 으스러뜨린 전례가 있었기에, 고당은 겁을 먹은 것이다.

"저 성질 더러운 고당이 그냥 있지 않을 겁니다."

"그냥 안 있으면?"

"어떤 해코지라도 하겠죠."

"그랬다간 대가리 터져서 죽게 될 거야. 이건 예언이야."

서대룡이 새삼스럽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존경스럽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성격이...."

"왜 말을 하다 말아? 더럽다고?"

"...."

"거짓말은 못 하시는 성격이다?"

"그래서 미움을 많이 받습니다."

"누군가에게 미움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호감이 될 수도 있지."

잠시 말없이 나를 응시하던 서대룡이 화제를 돌렸다.

"마군주 집무실은 칠 층입니다. 가시죠."

"쓸데없이 높네. 가자."

그렇게 우린 칠 층까지 걸어서 올라갔다.

제14회 요즘은 유식한 놈이 더 용감하다.

마군주의 집무실 앞에서도 막아서는 이들이 있었다.

"사전 약속 없이는 뵐 수 없습니다."

"공식 조사를 나온 거다. 비켜라."

"그럴 수 없습니다."

서대룡과 마군 사이의 반복되는 실랑이를 더는 보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서대룡이 들고 있던 명령서를 마인들 앞에 내밀었다.

"이 명령서에 어떤 문양이 그려져 있는지 보이나?"

공문서이니 배경에 천마의 상징이 새겨져 있었다.

"이 명령서를 막는 건 우릴 막는 것이 아니야. 교주님을 막는 거지."

천마가 언급되자 마인들은 흠칫 놀랐다. 아마 공문서 배경을 보여주며 천마를 언급한 사람은 내가 처음일 거다.

"우린 우습게 봐도 되지만 이건 우습게 보면 안 되지? 안 그래? 왜? 교주님도 우습게 볼 거야? 그렇게 보고할까?"

"아,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그러자 안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으로 모셔라."

마인들이 안도하며 문을 열었다.

서대룡은 느꼈을 것이다. 앞서 문지기들에게도 이렇게 했어야 했다고. 감히 아버지를 입에 담기 어려웠겠지만,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 천마의 권위임을 알아야 한다.

"이 공자, 어서 오시게."

마군주 구천양은 평범한 체구지만 덩치 큰 마군들을 압도할만한 기세를 지닌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형 혈천도마에 비해서는 손색이 있었다. 닮은 얼굴, 닮은 눈빛이지만 혈천도마의 눈동자에서 본 불길은 보이지 않았다.

"어찌 뵙기가 우리 아버지 뵙기보다 더 어렵습니다."

"우리 애들이 무례를 범한 모양이네. 원체 무식한 놈들이니 자네가 이해해 주게."

"우르르 몰려나와 시비나 거는 걸 보니 할 일이 없어 보이던데 책이라도 좀 읽히시지요."

"무식해야 용감하지 않겠나?"

"옛말이죠. 요즘은 유식한 놈들이 더 용감합니다. 작전도 잘 짜고, 뭘 해야 할지도 잘 알고요."

"내가 나이를 먹다 보니 세태에 뒤처지나 보네."

짧은 대화가 오가는 중에도 우린 기싸움을 하고 있었다. 교내 정치에 닳고 닳은 마군주는 감정동요 없이 내 말을 받았다.

"한데 이 공자께서 어떤 일로 이번 조사의 책임을 맡은 건가?"

"아버지께서 제게 벌을 주시려는 모양입니다."

"벌이라니?"

"사냥 갔을 때 제가 실수를 좀 했습니다."

"아!"

마군주는 이제야 이해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를 조사관으로 보낸다는 소식에 무슨 속셈인지 온갖 생각을 다 했을 것이다.

"하면 황천각의 이번 조사는 왜 시작된 건가? 혹 이전처럼 투서라도 날아든 건가?"

대수롭지 않은 척 굴었지만, 마군주는 내심 긴장하고 있을 것이다. 다른 조직이라면 모를까, 황천각만큼은 대충 뭉개서 넘길 수 있는 곳이 아니었으니까. 죄가 밝혀지면 정해진 법대로 집행까지 해버리는 곳이 황천각이었으니까.

"수사와 관련된 내용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 사이에 그 정도는 말해줘도 되지 않겠나?"

우리 사이란 말을 이렇게 천연덕스럽게 쓰다니. 정말 이 정도 뻔뻔함은 있어야 교내 파벌 싸움의 중심이 되는 거다.

"군주님께는 솔직히 말씀드리죠. 맞습니다, 투서가 날아들었습니다."

"역시 그랬군."

솔직히 말하자 옆자리에 있던 서대룡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이 말했다. 이렇게 다 말한다고요? 내 눈빛이 말했다. 괜찮아, 다 말해도 돼.

이렇게 주고받는 눈빛에 마군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의 눈에는 이런 행동들이 어설퍼 보일 테니까, 오히려 내게는 유리한 상황이다.

"투서가 날아들면, 황천각에서는 무조건 조사관을 파견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만."

마군주는 당연히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마군 같은 무식하고 거친 자들을 이끄는 자리에 있다 보면 온갖 음해에 시달리게 된다네."

"저는 오히려 그런 일이 없을 줄 알았습니다. 음해도 머리를 굴려야 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말씀하신 대로 무식한 자들이라면 투서를 넣을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무식한 놈들이 욕심이 보통이 아니거든. 아무리 자네라도 조심해야 할 거야. 무식과 욕심이 합쳐지면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도 벌어지거든."

은근한 협박에도 나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최대한 빨리 조사를 마칠 테니 불편하시더라도 이해 좀 부탁드립니다."

살짝 굳었던 마군주의 표정이 풀어졌다.

"불편하다니? 우리가 그런 사인가? 이거 섭섭하구먼."

"혈천도마께서 제 형님을 지지한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그야 그렇다지만, 형님은 형님이고 나는 나 아닌가? 나는 우리 이 공자를 지지하고 있네."

대놓고 하는 거짓말에 나는 활짝 웃어주었다.

"하하. 말씀만으로도 든든합니다. 자, 그럼 앞으로 며칠만 잘 부탁드립니다."

"나가면 자네들이 지낼 곳을 내어 줄 거네."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가려는데, 마군주가 사족을 붙였다.

"조심하게. 정말 자네가 걱정돼서 하는 말이라네."

"가령 지난번처럼 조사관이 살해당한 일처럼요?"

"설마 교주님께서 우리 이 공자 죽으라고 여길 보냈겠나? 내 신경 씀세."

"하하, 말씀만 들어도 든든합니다. 그럼 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서대룡과 함께 집무실을 나섰다. 뒤통수가 뜨거운 것을 보니 아마도 그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을 것이다.

'그럼 당신이 조심해야겠네. 아버지가 날 보낸 것이 아무래도 나나 당신이나 둘 중 하나는 죽으라는 것 같으니까 말이야.'

* * *

총군사 사마명은 천마 검우진이 검을 손질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흑마검(黑魔劍)을 오랜만에 꺼내셨습니다."

천마신교의 사대보검 중 하나가 바로 이 흑마검이었다.

천마가 차고 있는 천마검(天魔劍)이 제일 좋은 검이고 그다음이 이 흑마검이다. 세 번째가 사령검(邪靈劍), 마지막이 백화검(白花劍)이었다.

보검들은 고유의 성질을 지녔는데, 흑마검은 거칠고 파괴적이었고, 사령검은 어둡고 악한 기운을, 백화검은 부드럽고 고결한 성격을 지닌 검이었다.

"혹 이 공자에게 주려고 꺼내신 겁니까?"

순간 검우진의 손길이 잠시 멈췄다가 다시 이어졌다.

"제 놈이 복이 있으면 받아 갈 테고."

사마명은 짐작할 수 있었다. 이 공자가 이번 일을 제대로 처리한다면 이 검을 선물로 내리려 한다는 것을.

"이 공자가 마군주를 상대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사마명은 교주의 이번 결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최근 검무극의 행보가 예상을 벗어난 모습을 보여줬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마군을 상대할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여겨서다.

"벌써 마군들과 충돌이 있었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어쩌면 소천동을 통과한 것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자신감 때문에 오히려 일을 그르칠 수도 있었다. 아직 젊다. 젊어도 너무 젊어서 그 닳고 닳은 마군주를 상대하기는 쉽지 않을 거다. 그렇기에 사마명은 이 흑마검은 다시 보물창고의 깊숙한 곳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 확신했다.

"이번 일은 제가 직접 나서서 처리했어야 했습니다."

지난번 황천각 조사관이 살해당한 사건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마군주가 황천각주를 포섭했거나 약점을 틀어쥐었음을. 황천각주는 수하의 죽음을 제대로 재조사하지 않고 덮었다. 따라서 황천각에 맡기지 않고, 자신이 이끄는 통천각에서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자 검우진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그 녀석이 그러더군. 우린 마도를 잃어버렸다고."

순간 사마명이 흠칫 놀랐다. 그 말은 천마뿐만 아니라 교의 총군사를 담당하는 사마명에게도 실례가 되는 말이었다.

사마명은 불쾌한 마음보다 불안한 마음이 앞섰다.

"그래서 보내신 겁니까?"

이 말은 다시 말해서 '그래서 죽이시려는 겁니까?'란 말과 다르지 않았다. 아직 사마명은 검무극의 변화를 직접적으로 접하고 느끼지 못했기에, 이런 생각은 당연했다.

"그 정도 큰소리를 쳤으면 행동으로 보여줘야지."

이 말 역시 사마명에게는 이렇게 들렸다.

'건방을 떨었으면 책임을 져야지.'

사마명은 잠시 침묵하며 신중히 검날을 닦는 검우진의 손을 지켜보았다. 혈육을 사지로 보냈음에도 검우진은 일말의 동요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잃어버린 마도는... 직접 찾겠답니까?"

"그럴 모양이지."

"최근에 이 공자가 보여준 행보라면 한 번 기대할 만하겠습니다."

검우진은 말없이 검 손질에만 집중했다. 잠시 자리에 서서 검손질을 지켜보던 사마명이 작별을 고했다.

"그럼 전 일이 있어서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사마명이 정중히 인사한 후 그곳을 나섰다. 붉은 융단을 걸어 나오다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검우진은 검무극의 생사에 관심이 없어 보였지만, 검을 손질하는 손길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정성을 담고 있었다.

'설마? 이 공자가 마군주를 처리하리라 믿으시는 건가?'

평소에도 쉽게 마음을 내비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더욱더 교주가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사마명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붉은 융단이 끝나는 곳에 도착했을 때, 사마명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역시... 흑마검은 다시 보물창고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 * *

마군들이 안내한 방에서 우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거 너무 하네요."

그들이 내어준 방은 전혀 청소되어 있지 않았다. 곳곳에 먼지가 가득했고, 심지어 천장에는 거미줄까지 있었다.

"이해가 안 됩니다. 아무리 마군주가 대공자를 추종한다지만, 그래도 이 공자께서 직접 오셨는데."

"저들 눈에 나는 어차피 후계싸움에서 밀려 사라질 사람이거든. 다른 싸움도 아니고, 후계싸움에서 밀린다는 것이 어떤 의미겠어? 죽는다는 거잖아. 어디 그뿐인가? 나와 친하게 지냈다간 함께 숙청당할 위험도 있으니까."

내가 서대룡을 손가락으로 지목했다가 손날로 목을 슥 그었다. 나와 친하게 지냈다간 너도 스윽이야였는데 서대룡은 그다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교주님을 봐서도 이렇게는 못 할 것 같습니다만?"

"아는 거지. 아버지가 이런 점은 신경 쓰지 않으신다는 것을. 오히려 흥미롭게 지켜보시잖아? 그리고 이 방은 마군주 작품이 아니라 고당 놈 지시일 거다."

"속 좁은 놈이 원한을 품었으니...."

"제 명줄만 줄이는 짓이야. 내 예언을 잊지 마."

"암튼 저는 청소 좀 하겠습니다. 나가 계세요."

"같이 하자."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안 되는 게 어딨나?"

서대룡과 함께 그곳을 깨끗이 청소했다. 내가 직접 청소하는 것이 이상했는지 그는 몇 번이나 나를 쳐다보았다. 회귀 전 인생에서 내가 얼마나 고생하고 살아왔는지 알면, 내게 있어 이깟 청소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될 텐데.

그와 함께 청소를 마친 후에 서대룡이 가서 깨끗한 이불을 챙겨왔다.

"정말 여기서 주무실 겁니까?"

"응."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우린 투서를 보낸 사람을 찾아야 해. 최대한 이곳에 있어야 우리에게 접근할 기회가 생기겠지."

"그렇다면 제가 있겠습니다. 이 공자님은 거처로 돌아가셔서 주무십시오."

"너 혼자 잤다간 밤에 변태 같은 놈이 침입할 수도 있어. 몸집 작은 남자를 보면 환장하는 변태라도 들어오면 어쩔 건데?"

나는 농담처럼 말했는데, 서대룡은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같이 주무시죠."

"내가 그런 변태면 어쩌려고?"

"저도 숨겨둔 마음을 꺼내겠습니다."

칙칙한 녀석이 이런 농담을 하니 그와 나 사이에 찬바람이 휭 하고 부는 것 같았다.

"배고프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방을 나선 우리가 건물을 나왔을 때, 입구에서 일대주 고당이 기다리고 있었다. 부러진 손에는 붕대를 감고 있었다.

나는 모른 척 반갑게 인사했다.

"고 대주, 식사하셨소? 안 하셨으면 함께 갑시다. 헛, 손을 다쳤구려. 어쩌다가 다친 거요?"

고당은 화난 맹수처럼 나를 노려보았다. 철천지원수라도 이렇게 무섭게 쳐다보진 않을 것이다. 원래는 차갑게 경고하려 했나 본데, 얄미운 내 반응에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 공자, 그대의 비겁한 짓은 잊지 않을 거요."

그는 내가 기습을 해서 손이 부러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기습이 아니더라도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앞으로 내게 하려는 모든 수작은 죽음 위에서 하는 위태로운 외줄 타기가 될 거다.

"무슨 말씀이시오?"

내가 모른 척 딱 잡아떼자 놈이 이를 바드득 갈았다.

"가끔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더이다. 귀한 신분은 배에 칼이 들어가지 않을 거라고."

"그 손으로 칼을 들 수나 있겠소?"

"어디 두고 봅시다. 칼을 떨구는지, 창자를 떨구는지."

선을 넘는 악담이었음에도 나는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고, 그는 씩씩거리며 그곳을 떠났다.

"너무 자극하시는 것 아닙니까?"

"저놈이 날 자극한 거지."

"네?"

"날 협박하려고 기다린 것도 저놈이고, 배에 칼을 쑤시겠다고 한 것도 저놈이잖아?"

"그러고 보니 그렇긴 하네요."

"악당이니까, 원래 저런 놈이니까, 우린 이런저런 이유로 악인을 이해하는데 말이야. 난 그거 못난 짓이라고 생각해. 우리가 왜 악인을 이해해? 더 엄격한 잣대를 대야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더 가혹하게. 고개를 숙이고 다녀도 모자랄 판에 이 악당 새끼가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하고."

완전히 공감한다는 듯 서대룡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밥맛 떨어지는 놈 봤으니, 제일 비싸고 맛있는 거로 사 먹자."

"네."

"돈 쓰겠다는데 좀 격렬한 반응 못 해줘?"

"죄송합니다. 제가 먹는 것을 즐기지 않아서요."

"뭔들 즐기시겠어? 가서 넌 국수나 먹어."

"네."

정말 서대룡은 입이 짧았다.

그 비싼 요리를 반이나 남기는 것 보고, 다음에는 정말 국수나 사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식사하고 돌아왔을 때, 우린 잠시 멍하게 침상을 쳐다보았다.

침상 위에는 죽은 까마귀 한 쌍이 던져져 있었다.

서대룡은 그러잖아도 우울한 눈빛인데 더욱 우울해졌다.

"이불 다시 구해와야겠네요."

"그 전에 그거 들고 따라와."

"이건 왜요?"

내가 성큼성큼 방을 나서며 말했다.

"우리도 산 까마귀보다 죽은 까마귀가 필요하거든."

제15회 다 비슷하게 못 생겨서.

서대룡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죽은 까마귀를 들고 나를 따라 나왔다.

"저기 매달아."

진심이냐는 서대룡의 눈빛에 나는 단호히 말했다.

"잘 보이게 가운데 매달아."

나는 서대룡을 시켜 죽은 까마귀를 마군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복도 가운데 매달았다.

소식을 듣고 마군들이 몰려왔다. 몇몇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지만, 대부분은 인상을 쓰며 욕설을 내질렀다.

"젠장! 저거 뭐야?"

"재수 없게 죽은 까마귀를 왜 걸고 지랄인가?"

"조사관이면 단가?"

"재수 없는 황천각 놈들."

"퉤퉤, 오늘 꿈자리가 더럽더니."

"저긴 갈기갈기 찢어서 시체 걸기 딱 좋은 자린데?"

그들의 가슴에는 각 대를 상징하는 숫자가 적힌 무복을 입고 있었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앞서 입구에서 한 번 충돌할 뻔한 일대의 마군들이 가장 욕을 많이 하는 것을.

물론 대놓고 나를 언급하진 않았지만, 어차피 황천각 욕이 내 욕이었다.

분위기가 한껏 험악해졌을 때, 한 사람이 참지 못하고 나섰다.

"이거 너무 한 것 아니오?"

그의 목소리가 복도를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누가 말했나? 여긴 다 비슷하게 못 생겨서."

모두 인상을 구기는 가운데 한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마군 삼 대주 장호(張虎)요."

장호는 마군들 중에서 제일 덩치가 컸다. 무복이 터져나갈 것 같은 근육질에 얼굴을 가르는 기다란 검상은 보는 사람을 섬뜩하게 했다.

서대룡의 전음이 빠르게 날아들었다.

―삼대주 장호가 대주들 중 무공이 가장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격도 보통이 아니고요.

과연 장호가 드러내는 존재감은 그곳에 있는 자 중에서 압도적이었다.

"우리 장 대주께선 뭐가 불만이신가?"

"그걸 꼭 말해야 아시오? 사람 다니는 길에 이런 불길한 것을 걸어두면 어쩌자는 거요?"

"침상에 던져둔 것보단 낫지 않나?"

"괜한 사람 기분 잡치지 말고 그런 짓 한 자를 잡아서 벌하시오."

나는 장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가 내뿜은 강력한 마기가 나와 서대룡을 압박해왔다. 일순간 숨이 꽉 막혀오는 것이 과연 마대주들 중 가장 강하다는 평가를 받을만했다.

"자네 말도 일리가 있군. 서 조사관, 그거 다시 내려."

"네."

서대룡이 매달아둔 까마귀를 내렸다. 지켜보던 마군들이 대놓고 비웃었다.

"겁은 많아서."

"하여튼 매를 들어야 말을 듣지."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설쳐."

노골적으로 욕을 하고 비웃는 그들을 뒤로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서대룡이 물었다.

"대체 까마귀 시체는 왜 내 건 겁니까? 이렇게 쉽게 내릴 것 같았으면."

자존심이 상했는지 그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누가 투서를 보냈는지 알아내려고."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그가 물었다.

"그래서 알아내셨습니까?"

"응."

"네?"

생각지 못한 대답이었는지 서대룡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떻게요?"

난 까마귀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 녀석들 덕분에. 그러니 나가서 잘 묻어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