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1

절대회귀

"나를 과거로 보내주시오." 복수를 위한 첫걸음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장영훈

제1회 과거로 보내주시오.

귀령자(鬼靈子)는 심야의 방문자를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귀문(鬼門)의 주인으로 도산검림(刀山劍林)을 헤쳐온 그는 여러 차례 침입자를 경험했다.

그들은 여러 부류였다. 기세 좋은 놈, 치밀한 놈, 잘 싸우는 놈, 간계에 능한 놈, 가끔은 기세도 좋고 치밀하면서 잘 싸우고 간계에 능한 놈도 있었다. 물론 그조차도 살아서 이 장원을 나가지 못했다.

한데 눈앞의 사내는 지금까지의 침입자들과는 달랐다.

인생의 맵고 쓴맛을 다 맛본 저 고단한 눈을 보고 있자니 드는 생각은 한 가지뿐이었다.

'젠장, 오늘이 내 제삿날인가?'

귀령자는 불안함을 애써 감추며 침착하게 물었다.

"우리가 구면이던가?"

"아니오."

남자의 목소리는 나직하면서도 참으로 듣기 좋았다.

"하면 이 밤에 어떤 일로 찾아온 것인가?"

부디 저 좋은 목소리로 '죽기 좋은 날이다, 이 귀신 나부랭이야.'란 말이 나오지 않기를!

"부탁이 있어서 왔소."

스스로 떠밀려 지옥문 앞까지 다녀온 귀령자가 내심 안도하며 물었다.

"말해 보게."

그러자 정말이지 평생 들었던 그 어떤 말보다 놀라운 부탁이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를 과거로 보내주시오."

순간 침묵이 흘렀다.

미묘한 눈빛으로 상대를 응시하던 귀령자가 나직이 물었다.

"인간이 어찌 시간을 거스를 수 있단 말인가?"

"나야 모르지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회귀대법(回歸大法)을 펼칠 수 있는 당신이 알려주셔야지요."

귀령자는 그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내가 그것을 펼칠 수 있단 것을 어찌 알았는가?"

회귀대법은 오직 자신의 가문에만 비밀리에 전해지는 비법이었다.

"서진(徐眞)."

그리운 이름에 귀령자는 격정에 휩싸였다.

"내 동생을 어찌 아는가?"

"낭인 시절 동료였소."

"지금 어디에 있는가?"

"죽었소."

"아아!"

귀령자가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회귀대법은 수백 년에 걸쳐 그의 가문에서 연구되어 내려오고 있었다. 아버지 대에서도 미완이었기에 자신과 여동생은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도와 회귀대법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했었다.

그리고 십 년 전, 동생은 더는 못 견디겠다며 야반도주하다시피 가문을 떠났다. 귀령자는 동생을 이해했다. 가문의 대업이라는 미명에 그녀는 꽃다운 이십 대를 모두 연구에 바쳤으니까.

"진이는 어떻게 죽었나?"

"복수는 내가 했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되오. 그녀가 죽기 전에 당신에게 이 말을 꼭 전해달라고 했소. 자신은 원 없는 인생을 살다 간다고. 부디 오라버니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대법만 연구하는 인생을 살지 말고 부디 자신의 인생을 살라더이다."

귀령자는 깊은 회한에 빠졌다.

남자는 그가 감정을 추스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오늘의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대법은 완성시켰소?"

귀령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내 대에서 드디어 대법을 완성시켰네."

순간 남자의 얼굴에 기쁨이 스쳤다. 그가 환한 표정을 짓자 남자가 꽤 호감형의 미남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언제로 돌아갈 수 있소?"

"그건 정할 수 없네. 십 년 전으로 갈 수도 있고, 삼십 년 전으로 갈 수도 있지. 아기 때로 갈 수도 있고 운 나쁘면 어제로 돌아갈 수도 있네."

"나는 운이 좋은 편이니 걱정하지 않을 거요."

"자넨 당장이라도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군."

귀령자의 얼굴에 씁쓸함이 스쳤다.

"대법은 불가능하네. 가능했다면 이미 내가 돌아갔겠지."

"대법을 완성했다 하지 않았소?"

"대법에 필요한 재료를 다 구하지 못했다네."

"재료는 내가 구해오겠소."

"불가능하다니까."

"말씀해 보시오."

"대법에 필요한 아흔아홉 가지 재료 중에서 끝내 구하지 못한 다섯 개의 재료가 있네. 그 첫 번째만 해도 절대 구할 수 없지. 자네 음뢰종(音雷鐘)이라고 들어봤나?"

"풍천교(風天敎)의 신물?"

"맞네. 바로 그것이지."

풍천교는 혈교(血敎)의 후신으로 새외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곳이었다.

"회귀대법을 시행하려면 음뢰종이 울려 퍼질 때 나오는 음파가 필요하다네. 한데 그 음뢰종은 풍천교의 보물로 교주의 권좌 뒤쪽에 놓여 있지. 이래도 구해올 수 있다는 것인가?"

귀령자는 음뢰종을 빌려달라는 부탁조차 못 했다. 그랬다간 그 성질 더러운 풍천교주의 손에 가문이 멸문당할 테니까.

"구해오겠소."

단호한 대답과 함께 남자는 말릴 틈도 없이 그대로 돌아서 그곳을 떠났다.

"미친놈인가?"

당시의 귀령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동생에 대해 더 묻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면서.

남자가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수년이 지난 후였다.

불면증에 시달려 잠 못 이루던 어느 밤, 한여름 밤의 꿈처럼 사라졌던 그는 다시 귀령자 앞에 나타났다.

그는 커다란 음뢰종을 등에 짊어지고 있었다. 종에 조각된 악귀들은 새외에서 이곳까지 먼 길을 온 것에 화가 난 듯, 더욱 흉측해 보였다.

"한번 쳐 보겠소?"

귀령자는 눈을 부릅뜬 채 음뢰종을 살피고 또 살폈다.

"이럴 수가! 으아! 이럴 수가!"

믿기 어려웠지만, 이것은 혈교의 혈기(血氣)가 은은히 흐르는 진품 음뢰종이었다.

"이런 미친! 대체 이것을 어떻게 구해온 것인가?"

"나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오. 다음 재료는 어떤 것이오?"

남자의 담백하면서도 자신에 찬 눈빛은 방금의 호언이 결코 허풍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

하지만 이내 귀령자는 탄식했다.

"자네가 운 좋게 풍천교의 신물을 가져왔다고는 하나, 다음 재료는 구할 수 없을 것이야."

"무엇이오?"

"신룡가의 신물인 신오향로(神奧香爐)라네. 대법에는 신오향로에서 피어나온 향이 필요하다네."

신룡가(新龍家).

무림맹 봉문(封門) 이후 새롭게 부상한 정파의 상징이자 가장 강대한 힘을 지닌 가문이었다. 풍천교보다 강하다고 알려진 세력.

"알겠소. 세 번째 재료는 향로를 가져온 다음에 듣겠소."

"음뢰종을 내게 맡기고 간단 말인가? 내가 이것을 들고 달아나 버리면 어떻게 하려고?"

"풍천교에 알릴 거요. 당신이 종을 들고 튀었다고."

해볼 테면 해보라는 말을 남긴 후 남자는 바삐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다시 세월이 흘러갔다.

―과연 올해는 구해올까?

해가 바뀔 때마다 드는 의구심. 그 의구심이 대여섯 차례 반복되던 어느 해 가을, 남자는 신오향로를 가지고 돌아왔다.

"정말 가져왔구나!"

귀령자는 신오향로를 직접 보면서도 믿지 못했다.

"대체 어떻게 가져올 수 있었나?"

"구구절절 책으로 쓰면 대여섯 권은 써야 할 거요."

"말해주게. 열 권이라도 읽겠네. 궁금해!"

"그럴 시간 없소."

대체 무엇이 이 남자로 하여금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게 하는 것일까? 이 능력이라면 이번 생에서도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나 돌아가려 한다면?

"자네가 돌아가려는 이유가 복수 때문인가?"

"그렇소."

"자네 실력이라면 이번 생에서도 복수가 가능할 텐데?"

"불가능하오."

"대체 원수가 누구길래?"

남자의 입에서 한 사람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화무기."

"으허헉!"

귀령자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오게 한 그 이름.

화무기(華武技).

그에게는 두 개의 별호가 있다. 첫 번째는 삼봉이다. 학문이나 기예에 능통한 식견 높은 노학자에게나 어울릴 법한 별호. 하지만 그의 삼봉은 봉오리 봉(峰)자가 아니다. 받들 봉(奉)도 아니다. 화무기의 봉은 봉인할 봉(封)이다.

정도무림맹(正道武林盟) 봉문

사도연맹(邪道聯盟) 봉문

천마신교(天魔神敎) 봉문

무림을 지탱하는 가장 강한 세 세력의 수장이 모두 그의 손에 죽었다. 무림맹주가 죽었고, 사도맹주가 죽었으며, 천마가 죽었다. 그들의 가족과 항복하지 않았던 고수들도 모두 죽었다.

그래서 그의 두 번째 별호는 고금제일(古今第一)이다.

고금제일인 화무기.

이 시대의 절대자.

화무기는 세 곳을 봉문시킨 후 자신의 집을 천하제일맹으로 선포했고, 그를 신봉하는 수천 명의 고수가 그에게로 모여들었다. 무림일통을 이뤄낸 그를 사람들은 불사무신(不死武神)이라 불렀다.

"맙소사! 회귀해도 못 이길 상대야!"

"반드시 그자를 죽일 거요."

"대체 어떻게? 그는 무림이 생긴 이래 역대 최고의 무공천재야."

"천재 소린 나도 듣고 자랐소."

"그는 하늘이 내린 천무지체(天武之體)라고!"

"나도 천무지체요."

"뭐? 자네 대체 누군가?"

"놈에게 죽은 천마가 우리 아버지요."

"!"

남자의 말에 귀령자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가 죽은 천마의 아들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이제야 앞서 그가 해낸 일들이 이해되었다. 보통 사람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 신분일 줄이야.

"하면 자네는 어떻게 살아남았나?"

그러자 남자는 옷자락을 풀어 헤쳤다. 가슴에 남겨진 상처는 귀령자가 '어이쿠, 자네 귀신 아닌가?'라고 소리칠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눈을 떴을 때, 시쳇더미 속에 있었소. 생매장되기 직전에 그곳에서 기어 나왔지."

"그랬었군."

"내가 화무기를 용서할 수 없는 이유는 나를 죽이려 해서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를 죽여서도 아니고 간사하기 짝이 없는 내 형을 죽여서도 아니오. 마(魔)가 붙은 인생을 살면서 누군가에게 죽는 것이 뭐 그리 대수겠소?"

"하면?"

"그날 화무기는 무공을 모르는 시비들과 숙수(熟手)들, 어린아이들까지 다 죽였소. 심지어 키우던 개와 고양이까지 다 죽였지. 눈앞에 보이는 모든 생명을 말살했소."

"거짓말! 믿을 수 없네."

"당신이 믿고 안 믿고는 내 알 바 아니오."

귀령자는 남자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껏 봐온 남자는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이제 중요치 않소. 실제로는 정말 큰 뜻을 지닌 대협일지도 모르지. 누군가에게는 마교를 발본색원(拔本塞源)했다며 박수를 받을지도 모르겠소. 하지만 내게 화무기는 가족을 죽인 원수이자 일말의 자비심조차 없는 냉혈한(冷血漢)일 뿐이오. 아무리 따지고 계산해봐도, 이 시대에는 그를 죽일 수 없으니 돌아가서라도 죽여야겠소. 죽이기 전에 물어봐야겠소. 이렇게까지 강한 네가 그렇게 아이들까지 다 죽여야 했느냐고."

귀령자는 넋이 나간 얼굴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에게 이런 사연이 있을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남자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그날 내 호위는 날 지키려다 여기에 구멍이 뚫려 죽었소. 혼인은커녕 친구 한 번 제대로 사귀어본 적 없는 친구요. 밤낮으로 날 지키느라 말이오. 자, 그러니 내 소중한 시간을 더 뺏지 말고 말해주시오. 세 번째 재료는 뭐요?"

"자넨 정말이지...."

"바쁜 사람이오. 그러니 다음 재료!"

귀령자는 남자를 만난 이래 가장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자네라도 이번만큼은 구해올 수 없을 것이네."

"무엇이오?"

"만년화리(萬年火鯉)의 내단이네. 만년화리가 마지막으로 발견되었다고 기록된 것이 삼백 년 전이네. 어쩌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어."

"정말 빌어먹을 대법이군. 당신, 이 자리에서 확 그냥 베어버릴까?"

"제발 참아주시게."

"참아야지.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기다리시오. 이번에는 꽤 시간이 걸릴 수도 있겠소."

"이보게! 만년화리가 낚싯대를 드리우면 그냥 올라오는 줄 아는가?"

"만년화리도 결국 잉어잖소? 이 세상 어딘가 물속에 있겠지. 기다리시오. 꼭 구해올 테니."

불가능을 향해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귀령자는 동생에 관한 이야기나 아직도 알지 못하는 그의 이름 따윈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2회 당신이 나 떠밀었소?

무정한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여전히 세상은 화무기의 것이었다. 소문으로 듣기에 화무기는 더욱 강해졌다고 한다. 그는 끝없는 수련으로 무학의 극의(極意)를 향해 걸어갔다.

천하맹을 다스리는 것은 그의 추종자 중 열두 명의 절대고수였다. 세상은 그들을 십이지왕(十二支王)이라 불렀다.

절대자가 무림을 통일했지만, 세상살이는 좋아지지 않았다. 십이지왕과 관련해서 온갖 불의가 판을 쳤다. 그들에게 잘 보이면 명성을 얻었고, 거역하면 목숨을 잃었다. 오히려 정사마로 갈라졌던 시절보다 삶은 더 팍팍해졌다.

한편 무림맹과 사도맹, 마교는 여전히 봉문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다들 화무기가 죽지 않는 한, 결코 봉문을 풀지 못할 것이라 말했다.

어느 이름 모를 골짜기에서 죽었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쯤, 남자는 다시 돌아왔다.

처음 만났을 때 남자는 한창 젊었었는데, 지금은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한 장년이 되어 있었다. 남자는 그때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원숙한 기도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달라져 있었다. 온 세상을 다 돌았다는 듯 얼굴과 몸은 검게 탔고, 못 보던 흉터도 여러 군데 생겨 있었다. 그는 무섭게 변해 있었지만, 차가우면서도 맑고 담백하면서도 깊은 눈빛만은 처음 자신을 찾아왔던 그때와 똑같았다.

"자, 여기 만년화리의 내단이오."

그가 내민 상자 속에 정말 만년화리의 내단이 들어 있었다.

"정말 있었구나!"

귀령자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대체 어떻게 구한 것인가?"

"있을 만한 곳을 다 뒤졌소. 자부하건대 산타기, 수영, 잠수, 야영은 내가 절대 고수요. 눈 감고도 중원의 지도를 그려낼 수 있을 거요."

"정말 대단하구먼."

"구한 것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안 미친 것이 대단한 거겠지."

귀령자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것은 만년화리의 내단이 아니라 이 사내의 의지일지도 모른다는. 뭉클뭉클 남자의 몸에서 하늘색 푸른 의지가 흘러나와 내단이 만들어지는 이상한 상상을 하고 있을 때, 남자가 다시 재촉했다.

"자, 다음 재료는?"

"자넨 자랑하고 싶지 않나?"

앞서 구한 재료들을 구하는데 얼마나 대단한 모험담이 있었겠는가? 자신이라면 이 성공담을 누구에게라도 자랑하고 싶어서 참지 못했을 것이다.

"자랑은 나중에 놈을 죽이고 그 시체에다 실컷 할 거요. 한 말 또 하고 또 하고, 목내이(木乃伊 : 미라)로 만들어두고 평생 할 거요. 네가 널 죽이기 위해서 말이야...."

"자네가 그런 농담을 하니 이상하구먼."

귀령자는 이 남자와 웃고 떠들면서 무림과 인생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남자는 언제나처럼 바빴다.

"자, 네 번째 재료가 뭐요?"

"돈이네."

뜻밖의 대답에 남자가 물었다.

"얼마나 필요하오?"

"오백만 냥."

상상을 초월하는 큰돈이었지만 남자는 한결같은 반응이었다.

"다녀오겠소."

일억 냥이라고 해도, 십억 냥이라고 해도 저 남자는 다녀오겠다며 벌떡 일어설 사람임을 귀령자는 안다.

한 마디쯤 자신을 보며 농담처럼 덧붙이겠지. 콱 죽여버리고 다 때려치울까?

하지만 그는 묵묵히 목적을 향해 나아갈 사람이다. 귀령자는 사람이 제대로 빡치면 얼마나 무서운 의지를 발휘하는지, 그 극한의 예를 보고 있었다.

"잠시만 기다리게."

"왜 그러시오?"

"돈은 내가 대겠네. 이 대법을 위해 우리 가문은 누대에 걸쳐 돈을 모아왔었네. 그 돈을 쓰겠네."

"이유는?"

"대법을 성공시키는 일은 나와 우리 가문의 숙원이기도 하니까."

"좋소. 고맙군, 정말 고맙소. 시간을 많이 아낄 수 있겠군."

남자는 정말 기뻐했다.

"그러니 오늘 하루는 나와 한잔하겠나?"

"한 잔만 마시고 떠나겠소."

"야속한 친구로군."

술을 가져와서 마당의 바위에 나란히 앉아 큰 잔에 부어 마셨다. 두 사람은 천천히 술을 음미하며 마셨다.

"처음 봤을 때, 자네나 나나 팔팔했었는데."

"내 몸은 늙어가고 있지만 마음은 그대로요. 젊게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소."

"왜 그런 노력을 하나?"

"나는 젊은 시절의 나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오. 오십에 돌아가든, 육십에 돌아가든, 백 살에 돌아가든 나는 당신을 찾아왔던 그때 그 사람이오. 나의 시간은 그날 멈췄소."

처음 만났을 때 이 말을 들었다면 역시 '노력은 가상하다만, 그게 가당키나 하겠냐?'란 생각을 했겠지만, 이젠 남자의 의지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정말 대법이 성공해서, 그래서 자네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내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나?"

"말씀하시오."

"과거로 돌아가게 된다면, 나를 꼭 찾아와주게."

"가서는?"

귀령자가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 혼인을 말려주게."

생각지도 못한 부탁에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만난 이래 처음으로 남자가 웃었다.

"농담 아니네. 부디 꼭 말려주게."

"그게 오백만 냥보다 더 중요한 일이오?"

"내겐 더 중요하네. 그냥 평생 혼자 살라고. 꼭 그렇게 해주게."

"알겠소."

귀령자는 자신이 어느 해 혼인하는지 알려주고는 다시 당부했다.

"약속하게. 꼭 말려주겠다고."

"약속하겠소."

두 사람이 남은 술을 다 비웠다.

"마지막 재료는 무엇이오?"

"자네도 아는 것이네."

"무엇이오?"

"비마혼(秘魔魂)."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기에 남자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돌아가신 자네 부친의 신물이네."

"알고 있소. 아버지는 한순간도 그걸 몸에서 놓지 않으셨소."

"자네가 가지고 있나?"

남자가 고개를 내저었다.

"어디 있는지 아나?"

"모르오."

"만에 하나라도 그것을 화무기가 가지고 있다면?"

"그럼 지난 세월 헛고생만 한 셈이 되겠지. 다행히 그것이 본교에 남아 있다 하더라도, 구하기가 쉽진 않을 거요."

현재 마교는 봉문된 채로 새로운 교주가 이끌고 있었다.

비록 화무기의 기세에 봉문을 풀지 못하고 있지만, 마교는 지난 세월 힘을 기르며 내실을 다지고 있었다.

전대 교주의 아들인 자신이 돌아간다고 환영해줄 리 없었다. 오히려 죽은 줄 알았던 자신의 등장에 새 교주는 자신을 죽이려 들 것이다.

"그래도 그것이 본교에 있기를 바랍시다."

"너무 오래 걸리지는 말게. 나도 이제 늙었네."

"내가 돌아오기 전까지 절대 죽지 마시오. 술, 고마웠소."

마지막 술을 털어 넣고 그렇게 남자는 떠났다.

귀령자는 아주 오랫동안 그곳에 서서 남자가 멀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그렇게 떠난 남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마교에 변고가 생겼다는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래도 항상 귀를 기울였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이제 귀령자도 나이를 먹어서 얼굴에는 저승꽃이 활짝 피었다.

오늘도 멍하게 마루에 앉아서 항상 남자가 서 있던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던 귀령자가 헛것을 본 양 눈을 비볐다.

누군가 이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바로 그 남자였다.

마지막 재료를 구하러 떠난 남자가 돌아온 것이다.

그는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얼굴이 심하게 훼손되어 딴 사람처럼 보였고, 오른쪽 눈과 왼쪽 팔을 잃은 상태였다. 옷을 벗겨보면 온통 상처가 가득할 것만 같은 몸은 피에 젖어 있었다.

그 모습에 귀령자는 할 말을 잃었다.

비마혼을 건넨 후 남자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네... 대체 어떻게 비마혼을 구해온 것인가?"

"... 대법을 펼칠 수 있는 곳으로 갑시다."

대답할 기력조차 없는 그였다.

귀령자는 그를 부축하고서 대법을 펼칠 공간으로 갔다.

그곳에 모든 준비가 마쳐 있었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마지막 재료.

귀령자는 비마혼을 가져가서 가운데에 놓았다. 그러자 화룡점정(畵龍點睛)이 된 비마혼이 밝게 빛나며 주위에 온갖 괴이한 그림과 문자들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귀령자가 그 앞에 서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푸르고 붉은빛이 주위를 감싸기 시작했다. 음뢰종이 울렸고 신오향로에서 향이 피어올랐다.

귀령자의 주문이 극에 달하는 순간, 주요 재료들이 합쳐지며 하나가 되더니 그곳에 일렁이는 빛무리가 생겨났다. 그것은 마치 어딘가로 통하는 입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해냈다!"

귀령자의 얼굴에 감격이 넘쳐흘렀다. 수백 년을 걸쳐 내려온 가문의 숙원을 이뤄내는 순간이었다.

귀령자가 기둥에 기대 앉은 남자에게 다가갔다. 피를 많이 흘려서였을까?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그를 깨워서 부축하는 대신, 귀령자가 나직이 말했다.

"... 미안하네."

자신이 과거로 돌아가려고 마음을 먹은 것이다.

"정말 미안하네."

이 남자가 얼마나 힘들게 재료를 구해왔는지 잘 알았기에 더욱 미안했다. 하지만 이 재료는 두 번 다시 구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내 반드시 자네를 찾아가서 앞으로 닥칠 화근을 알려주겠네. 약속하네."

귀령자가 일어나서 빛무리 쪽으로 돌아섰다.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우리 가문의 평생의 숙원이었네. 내 숙원이기도 했고."

그가 빛무리를 향해 걸어가려던 그때.

"윽."

귀령자가 흠칫하더니 제자리에 멈췄다.

어느새 마혈(魔穴)이 제압당한 상태였다. 대체 언제 제압당한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뒤에서 들려오는 나른한 목소리.

"당신이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정신을 잃었다고 생각했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보게."

귀령자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비틀거리며 걸어온 남자가 귀령자 앞에 멈춰 섰다.

"다른 사람도 아닌 당신이...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남자가 귀령자의 목을 움켜쥐었다. 늙고 노쇠한 귀령자의 목은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았다.

"... 내가 정신이 나갔었나 보네. 어흐흐흑, 미안하네. 정말 미안해."

귀령자는 남자가 자신을 죽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은 그랬으면 안 됐다. 남자가 얼마나 힘들게 이 대법 재료를 준비했는지 오직 자신만이 알고 있었으니까.

그때 남자가 귀령자의 목을 움켜쥔 손을 풀었다.

"나도 이기적인 사람이야. 나밖에 모르는 사람이니까 그 재료를 다 모을 수 있었겠지. 그러니 괜찮아. 딴 놈이었다면 일장에 쳐 죽였겠지만, 당신만은 이해해."

남자는 귀령자를 질책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심 어린 눈빛으로 따스하게 말해주었다.

"한평생 나를 기다려줘서 고마웠소."

남자의 진심 어린 말에 귀령자는 눈물을 글썽였다. 미안함과 아쉬움이 뒤섞였다. 더 멋진 이별을 할 수 있었는데. 정말 그랬는데.

귀령자의 눈물이 뚝 떨어지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거짓말처럼 세상이 멈추었다.

"어?"

남자는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날아가던 나비는 허공에 그림처럼 떠 있었고, 바람에 흔들리던 풀잎도 몸을 누인 채 일어나지 않았다.

앞에 서 있던 귀령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흘린 눈물 역시 허공에 떠 있었다.

남자는 혹시 자신이 피를 많이 흘러서 헛것을 보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바로 그때였다. 남자를 제외하고 시간이 멈춰버린 그곳에 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넨 모든 시험을 통과했네."

노인의 말에 남자가 놀라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자네를 과거로 보내줄 수 있는 사람."

"!"

"어찌 인간의 힘으로 천리(天理)를 거스를 수 있을까? 한낱 영물과 기보 따위가 그것을 가능하게 해줄 것으로 생각했나?"

노인이 손을 들자 그의 주위로 남자가 평생 모았던 다섯 가지 기물들이 다시 생겨나며 떠올랐다. 앞서 대법과 함께 사라졌던 재료들이었다.

그 순간 남자는 알 수 있었다. 노인은 인간을 넘어선 존재라는 것을.

"이 대법의 진짜 재료는 이 기물들이 아니라 이것을 모으기 위해 자네가 바쳤던 노력이라네."

노인이 손을 휘젓자 기물들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자넨 시험을 통과했네. 평생 자신을 희생하며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살았지. 그리고 저 귀령자를 용서하는 일이 마지막 시험이었다네. 사실 가장 어려운 시험이었는데, 자넨 가장 쉽게 통과했지."

남자는 온몸이 떨렸다. 평생 하늘이 무심하다고 여겼는데, 그래서 하늘 따위는 없다고 여겼는데. 하늘이라 여겨지는 존재가 눈앞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내 놀람은 분노로 이어졌다.

"당신은 이렇게까지 노력해야만 응답하는 존재였소? 그렇게 잘난 존재요?"

"너무 노여워 말게. 사람들은 자네보단 쉽게 날 볼 수 있다네. 매일 나를 만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하나 자네의 염원만큼은 쉽게 허락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나?"

그 말만큼은 남자도 수긍했다. 부자가 되는 일도 아니고, 미녀와 혼인하는 일도 아니다. 자신의 염원은 과거로 돌아가는 일이다.

"나를 돌아가게 해주시오."

"가서는?"

"죽여야 할 놈을 죽이고 죽지 말아야 할 사람을 살릴 거요."

화무기를 죽이고 모두를 살리는 일이 첫 번째.

그리고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 있다.

"그리고... 내 인생을 제대로 살아보고 싶소. 어쩌면 이렇게 간절히 돌아가고 싶은 이유에는 화무기에 대한 분노만큼이나 내 삶이 후회스럽기 때문일 거요."

"뭐가 그리 후회스럽나?"

"전부 다요. 태어나서 지금까지 내 삶은 내가 주도한 삶이 아니라 뭔가에 떠밀렸던 삶이었소. 이리 떠밀리고 저리 떠밀리고 그렇게 밀려다니다 끝나버렸지... 당신이오? 나 떠민 사람이?"

노인이 멋쩍게 웃으며 물었다.

"복수를 마친 후에는 어떤 인생을 살고 싶나?"

"나도 모르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천마가 될지, 조용히 세상을 등지고 살지, 세상의 미녀들을 다 차지하는 호색한이 될지, 교를 떠나 쓰레기 같은 놈들을 두들겨 패는 삶을 살지, 아니면 내가 쓰레기가 될지... 나는 아무것도 정한 것이 없소."

"자네가 어떤 인생을 살지 나도 궁금하군. 그 새로운 삶을 기대하네."

"고맙소."

"다음에 만났을 때는 술 한잔하세."

그 말을 끝으로 노인이 사라졌다.

'다음에?'

언젠가 노인이 다시 한번 자신 앞에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받았다.

그와 동시에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흘렀다. 멈췄던 나비가 날갯짓하며 하늘을 날았고, 바람에 풀이 흔들렸으며 허공에 멈춰 있던 귀령자의 눈물이 바닥에 떨어졌다.

"미안하네. 정말."

남자는 사죄의 눈물을 흘리는 귀령자를 말없이 응시했다. 그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그의 대법이 하늘의 뜻과 닿아 있는 위대한 대법이란 것을. 마지막 결정은 하늘이 하는 것이겠지만, 적어도 귀령자의 대법은 그 하늘과 이어주는 매개체임은 틀림없었다.

귀령자가 애타는 얼굴로 부탁했다.

"아!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나와 한 약속은 잊지 말게! 내 혼인 막아줘야 해!"

남자는 피식 웃었다. 이렇게 늙어서 죽음을 앞둔 나이가 되었음에도 그는 같은 부탁을 하고 있었다.

"아직도 지옥이오?"

"더 뜨거운 지옥이라네. 면목 없지만, 그래도 부탁하네. 끝까지 말 안 들으면 내 하물을 뜯어버리게."

"그 정도요?"

"그 이상이네."

"잘됐소. 그렇다면 날 배신하려 했던 벌로 충분할 테니 다시 한번 그 지옥 겪으시오."

"아아! 이보게! 제발!"

남자는 울부짖는 귀령자를 뒤로한 채 빛무리를 향해 걸어갔다.

그를 품고 찬란하게 흩어지기 시작하는 빛무리를 보며 귀령자는 격정에 휩싸였지만,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었다.

"나도 가고 싶어! 으아아아아아아! 내가 가고 싶다고!"

제3회 소원이 뭐냐?

눈을 떴다.

평생 수도 없이 눈을 떴다가 감았지만, 이번만큼 간절했던 때는 없었다.

부디 그 모든 일을 되돌이킬 수 있는 때로 돌아가기를.

제발!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것은 회귀 전에 겪었던 그 모든 고난을 보상하는 광경이었다.

나는 광장처럼 너른 비무대 위에 서 있었다.

관객석을 꽉 채운 수천 명의 군웅 너머로 거대한 악귀상들이 보였다. 붉고 푸르고 누런 삼색의 악귀상들은 연무장을 중심으로 서로 격돌하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것들의 거대한 검과 도와 주먹이 비무장의 지붕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 저 멀리 더욱 거대한 조각상이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팔짱을 낀 채 도도하게 세상을 내려다보는 검은 악귀상은 바로 천마신교(天魔神敎)의 상징이었다.

'과거로 돌아왔다!'

심장이 터질 듯 뛰기 시작했다.

"와아아아아!"

마치 나의 회귀를 축하라도 하듯 사방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천마신교의 마인들이 연무장 주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그때 건너편에서 한 남자가 비무대 위로 올라왔다.

'신마쟁투(新魔爭鬪) 날이구나.'

이 무렵 아버지는 차기 교주를 자신의 혈육으로 한정 짓지 않는다고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그 발표에 교내가 들썩였다. 이제 실력만 있으면 천마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자신의 발표에 힘을 싣겠다는 듯, 교내 후기지수들을 대상으로 비무대회를 열었다. 그것이 바로 신마쟁투다.

그리고 신마쟁투 우승자에게 당신의 두 아들 중 한 명에게 도전할 기회를 줬다.

우승자와 아들 중 누가 이기든 천마는 그에게 소원 한 가지를 들어준다고 했다.

그러니 신마쟁투의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겠는가? 교내의 젊은 후기지수들이 대거 참가해서 자웅을 겨뤘다.

열흘에 걸친 치열한 대결 끝에 대회의 우승자가 나왔고 그가 지목한 상대가 바로 나였다.

"검무극(劍無極)! 검무극!"

군웅들이 내 이름을 연호했다. 귀령자가 그토록 알고 싶어 하던 바로 그 이름. 천마의 두 아들 중 막내인 검무극이 바로 나다.

군웅들이 검무극을 응원하자 대회 우승자인 비무 상대는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흥! 이 시합이 끝나면 외치는 이름이 달라질 거요. 아무리 그대라도 봐주지 않을 테니."

당시의 나는 그가 나를 선택한 것에 기분이 나빴다. 형보다 나를 더 만만하게 봤다는 의미였으니까.

하지만 지나고 보니 놈이 나를 선택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지금이라도 기권하는 것이 어떻소?"

놈은 이미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실제로도 나는 이 비무에서 졌다.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바로 상대의 치졸한 계략 때문이었다. 상대는 내 주방 숙수를 포섭해서 내공을 일시적으로 사용할 수 없게 만드는 산공독(散功毒)을 밥에다가 하독했던 것이다.

일반적인 산공독이 아니었다. 그냥 있을 때는 전혀 이상이 없다가, 비무와 같이 격렬한 상황이 되었을 때 내공을 흩어버리는 그런 특별한 산공독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다. 이것은 사도맹이 개발해서 시중에 은밀히 유통하고 있던 흑비(黑妃)라는 이름의 산공독이란 것을.

어쨌든 이 날 비무에 지고 나서 그 사실을 아버지에게 고했지만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다. 오히려 그깟 계략에 속았느냐는 질책이 담긴 눈빛을 보내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후에 나는 오늘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여러 무리수를 잇달아 던졌다.

그때의 적은 형이나 다른 후계자 후보들이 아니었다. 내 적은 조급함이었고, 상처 입은 자존심이었다. 눈만 감으면 날 한심하게 바라보던 아버지의 눈빛이 떠올랐다.

잇따른 실수와 실패들, 그렇게 나는 제 발에 걸려 넘어지며 후계자 다툼에서 멀어졌다.

모든 게 오늘의 패배에서 시작된 일이다.

그 운명의 분기점에 선 내 첫마디는 이것이었다.

"네 이름이 뭐였더라?"

순간 주위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고 상대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자신을 희롱하는 것이라 여겼겠지만 나는 정말 그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나 구평호(具坪浩)를 무시하는 것은 사부님을 모독하는 것과 같소!"

"아, 맞아. 구평호였지."

팔마존(八魔尊) 중 일인인 혈천도마(血天刀魔) 구천파(具天波)의 일곱 제자 중 다섯째인 구평호. 아마도 모르긴 해도 신마쟁투에서도 온갖 비겁한 수작을 부려서 우승했을 것이다.

"이 봐, 말은 똑바로 해야지. 널 무시하는 거지, 네 사부님은 왜 끌어들이나?"

순간 군웅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혈천도마와 사이가 좋지 않은 일화검존(一花劍尊) 쪽 마인들의 웃음이었다.

"이 공자! 이렇게 내 심기를 건드는 것을 보니, 실력에 자신이 있는 모양이오."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며 저 멀리 상석에 앉아 계신 천마를 쳐다보았다.

수천 명의 마인이 있는 곳에서도 '나 여기 있다'는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계셨다.

아버지를 모르는 사람을 데려와서 여기서 천마를 찾아내라고 하면, 그는 반드시 아버지를 찾아낼 것이다. 아버지의 존재감은 흑백의 그림 속에 피처럼 붉은색 원을 보는 것 같았으니까.

아버지의 양옆으론 본교를 대표하는 여덟 고수 팔마존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옆에 있기에 스스로를 낮추고 있을 뿐, 그들 역시 강력한 존재감을 지닌 이들이었다.

아버지와 시선이 마주쳤다. 나를 향한 아버지의 눈빛에서 이런 마음을 읽었다.

과연 넌 이 난관을 어떻게 벗어날 테냐?

당시에는 결코 느끼지 못했던 눈빛이었다.

'아! 아버지는 이미 내가 산공독에 당한 것을 알고 계셨구나.'

무심한 척, 후계 다툼은 모른 척하고 계셨지만 다 파악하고 계셨을 줄이야.

과거와 같은 사건이 벌어지고 있지만, 전혀 다른 상황임을 알 수 있었다.

'다 알고 계셨단 말이지? 그렇다면....'

예전처럼 당하고 나서 일러바치는 것은 하책(下策).

산공독에 당했으니 승부를 미루자는 것은 중책(中策).

내공 없이도 이기는 것이 상책(上策).

당연히 상책을 발휘해야 한다. 나는 그때의 더벅머리 애송이가 아니었으니까. 아버지보다도 훨씬 더 긴 인생을 살아보았으니까.

사실 구평호 정도야 내공 없이 싸워도 일초지적(一招之敵)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많은 마인들이 보고 있는 상황에서 내 실력을 드러낼 수는 없었으니.

내가 손을 높이 들어서 모두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그리고는 최대한 큰 소리로 말했다.

"본교의 영웅들이 모인 이 자리에서 당당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내공을 사용하지 않고 구평호를 상대하겠습니다! 내공을 사용하지 않아도 이길 자신 있습니다!"

내 선포에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이내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아아!"

반면 구평호의 얼굴은 표가 나게 일그러졌다. 내가 이렇게 나올 줄 생각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묻고 싶겠지.

―산공독에 당한 것을 어떻게 알았지? 싸움이 벌어져야 발휘되는 산공독인데.

정말 미치도록 궁금하지?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 혼자만 내공을 사용하면 비겁자가 될 것이다.

당혹감에 휩싸인 구평호는 시뻘게진 얼굴로 소리쳤다.

"이 공자가 그렇게 나온다면 저 역시 내공을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내 예상대로 반응했다.

그의 추종자 몇몇이 박수쳤지만, 함성은 나오지 않았다. 그 선택은 내공이 있는 자와 없는 자와의 박진감 넘치는 싸움을 내공 없는 자들의 심심한 싸움으로 만들어 버렸으니까. 맥 빠지는 한숨 소리까지 들렸다.

구평호는 당황했고, 그 당혹감은 나를 향한 분노로 이어졌다.

"이 공자! 비록 내공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내 칼에는 눈이 달려 있지 않으니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나는 놈의 경고를 흘려들으며 내 몸을 살피고 있었다. 젊은 몸이라는 낯선 이질감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당시 사용하던 검은 마치 장난감처럼 가볍게만 느껴졌다.

'이 몸이 과연 내 생각대로 따라 줄까?'

구평호가 기세 좋게 도를 뽑았지만 나는 반대로 검을 풀어서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검을 쓰면 내 실력이 드러날 확률이 더 높았으니까.

그러자 다시 함성이 터졌다. 철저히 상대를 무시하고 조롱할 때 환호하는 것이 마인들의 본성 아니던가?

당연히 구평호의 분노가 폭발했다.

"교주님의 혈육이니 차마 죽이지는 않겠지만, 그 팔 하나는 거둬주마!"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구평호는 내 쪽으로 성큼 뛰어 거리를 좁히더니 어깨를 노리며 도를 내리찍었다.

쇄애애액!

나는 날아드는 도를 끝까지 쳐다보다가 마지막 순간 신형을 비틀어 피했다.

'좋다, 좋아!'

내 뜻대로 몸이 움직여 줄까는 기우였다. 몸은 즉각 반응했고, 예상보다 빠르고 팔팔했다. 몸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잊었어? 이게 젊은 시절의 너잖아?

달리면 온종일 달릴 수 있을 것 같았고 움켜쥔 주먹은 뭐든 다 부숴버릴 것 같았던 시절.

'이 나이 때는 심장이 이렇게 펄떡펄떡 힘차게 뛰었구나!'

절로 웃음이 나왔다. 너무 기뻐서 환호성을 내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 미소를 본 구평호가 더욱 미쳐 날뛰었다.

"이 미친 새끼가 웃어?"

눈이 뒤집힌 구평호는 노골적으로 급소를 노리며 도를 휘둘렀다. 이러다 내공을 써서 도기를 발출할 수도 있는 놈이라서 더는 시간을 끌지 않았다.

집요하게 팔을 자르려 날아드는 도를 피하며 놈의 가슴으로 쇄도해 들어갔다.

구평호는 다급한 헛숨을 내쉬며 방어했지만 이미 내 팔꿈치는 놈의 명치에 박히고 있었다.

퍽!

뒤로 튕기는 구평호를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내 주먹이 연속해서 박혔다. 빠른 첫 방에 놈의 코뼈가 내려앉았고, 묵직한 두 번째 주먹에 늑골이 부러졌다. 아무리 내공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우린 어려서부터 무공을 익힌 무인들이다. 맨주먹으로 소도 때려잡는데, 놈의 몸이 버틸 리 없었다.

난 이 정도로 끝내지 않았다.

비명과 함께 주저앉는 놈의 손목을 낚아채 잡았다.

"독은 어느 손으로 풀었냐? 이 손이냐?"

나는 놈의 팔을 잡은 채 훌쩍 뛰어올랐다가 진각(震脚)을 내려쳤다.

꽝.

발바닥부터 전신을 타고 올라온 힘으로 내 무릎을 지렛대 삼아 놈의 팔을 꺾었다.

꽈드드드드드득!

해일처럼 밀려간 충격파에 팔목과 팔꿈치, 어깨가 완전히 으스러졌다.

"으아아아아악!"

참혹한 비명이 아니더라도 다들 알 수 있었다. 도를 쓰는 쪽 팔과 어깨가 완전히 으스러졌으니 이제 재기불능임을.

사방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아아!"

어설픈 승부가 아니라 볼거리가 확실한 승리였기에 모두를 만족시킨 것이다.

혈천도마 쪽 마인들이 야유를 보냈지만, 멈출 줄 모르는 함성에 묻혀버렸다.

좌중에 앉아 있는 혈천도마는 제자가 박살났음에도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고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렇게 열기와 함성, 고통의 신음이 가라앉자, 비로소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의 새하얀 곤룡포에 수놓아진 붉은 용은 금방이라도 승천할 것만 같았다.

함께 있던 팔마존이 일제히 함께 일어났다.

촤아아아아아악.

마치 물결이 이어지듯 장내의 모든 마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절대자에게 예를 갖췄다.

천마 검우진(劍宇珍).

이 시대의 최강자.

...아직까진.

아버지가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몸을 꿰뚫을 것처럼 강력한 시선이었다.

당시의 나는 아버지가 너무나 무서웠다. 특히 사람을 깔보는 것 같은 저 강렬한 눈빛을 제대로 마주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랬으니 어디 대화라도 제대로 나눠봤겠는가?

결국 아버지에 대한 나의 인식은 추측과 선입견, 그리고 소문으로 이뤄져 있었다.

과거의 나에게 이 말을 해주고 싶다.

사람 관계만큼은 혼자 상상하지 마라. 똑바로 보고, 제대로 들어라. 해답은 네 속에 없다. 상대는 저기에 있으니까.

나는 아버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저 표정 어디가 그렇게 무섭다고.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숱한 도전과 간계 속에서 만마(萬魔)를 다스리는 권위를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한 인간이 있을 뿐인데. 그래서 비롯된 무정함이고 무뚝뚝함일 뿐인데. 그때 보지 못한 것들이 이제는 보인다.

"소원이 뭐냐?"

아버지의 묵직한 저음은 내공이 실리지 않아도 모두에게 들렸고, 듣는 이를 위축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다들 내 대답에 귀를 기울였다. 특히 옆의 팔마존들은 내가 어떤 대답을 할지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제 소원은...."

오늘로 돌아올 줄은 예상 못 했기에, 나는 본능에 따랐다.

"아버지와 사냥 가고 싶습니다."

생각지 못한 말이었는지 아버지가 흠칫 놀랐다. 지켜보던 마인들 역시 웅성거렸다. 설마 이런 소원을 말하리라곤 생각지 못한 것이다. 후계자가 되고 싶다는 소원까지는 들어주지 않을 테니, 적어도 보검이나, 무공비급을 원할 것이라 예상했으리라.

"나와 사냥을?"

"네. 아버지와 단둘이서요. 아버지께서 젊은 시절 사냥을 즐기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사냥을 배우고 싶습니다."

잠시 말없이 나를 응시하던 아버지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출발은 내일 새벽이다."

말을 마친 아버지가 걸음을 옮겼다.

흑백의 그림 속에서 홀로 붉은 천마가 걸음을 옮겼고, 모든 마인들은 고개를 숙였다. 수천 명이 모인 그곳에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천마와 팔마존이 그곳을 떠나자 비로소 들려오는 표독스러운 말소리.

"병신이. 고작 그딴 소원을 빌려고...."

돌아보니 구평호가 팔을 축 늘어뜨린 채 사형제들에게 업혀 옮겨지고 있었다.

난 머리를 긁적이며 놈에게 말했다.

"미안. 너 이름이 뭐였더라?"

마지막까지 무시당한 구평호가 악을 썼다.

"으아아아악! 저놈 죽여! 사형! 제발 죽여달라고!"

하지만 비무가 끝난 상황에서 내게 덤비는 자는 없었다. 그저 그들은 날 차갑게 노려보다가 구평호를 데리고 그곳을 떠났다.

'이제 내가 돌아왔으니 막 나가던 너희들 인생이 더는 재미있지 않을 거야.'

인생의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시점으로 보내준 하늘에게 감사했다. 비록 배신하려 했지만, 대법을 완성 시킨 귀령자에게도 고마웠다.

'정말 고맙소.'

난 내 나이처럼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제4회 몇십 년 만에 먹는 계사면인가?

거처로 돌아온 난 동경(銅鏡) 앞에 섰다.

젊은 시절의 내 모습은 파릇했고 생기가 넘쳤다. 온종일 거울만 보고 있으라 해도 좋을 것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젊어진 모습을 즐기다가, 문득 화무기를 떠올렸다.

놈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디선가 강해지기 위해 지옥 훈련을 받고 있을까?

놈이 더 강해지기 전에 찾아내서 죽일 수만 있다면 간단히 해결인데. 문제는 화무기를 찾는 일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놈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무림에 등장했고, 삼봉을 이룬 후에는 무림을 떠나 칩거해 버렸기 때문에 화무기에 대한 정보는 알려진 것이 전무했다. 그렇다고 전 중원에 사람을 풀어 화무기란 이름의 사람을 찾는 것도, 화무기의 돌발행동을 유발할 위험한 시도이다.

결국 내가 화무기보다 강해지는 것이 최선이다.

다행히 하늘은 내게 충분히 준비할 시간을 주었다. 시간을 내 편으로 삼아서 강해질 것이다.

화무기를 떠올려서였을까? 단전의 내공이 꿈틀거리며 반응했다.

산공독은 애초에 하독된 적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버린 후였다. 비무가 끝난 후에는 이렇게 중독된 흔적이 없으니, 구평호는 제대로 독을 구해온 셈이다.

하긴 그러니 감히 천마의 혈육에게 산공독을 탈 생각을 했겠지.

잠시 그렇게 상념에 잠겨 있다가, 내 인생에서 가장 고마운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이안(李安)."

내 부름에 문밖에서 들려오는 반가운 목소리.

"네, 도련님."

"들어와."

그러자 문이 열리며 한 젊은 여인이 들어왔다. 무복이 터질 것 같은 그녀는 뚱뚱함을 넘어서 비대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여인이었다.

수신호위(守身護衛), 이안.

이때는 몰랐다. 그녀가 이렇게 거대한 것이 그녀가 익힌 무공 때문이란 것을. 아니, 나 때문이란 것을.

전신석화공(全身石化功).

살을 일시적으로 돌처럼 단단하게 만드는 무공으로 그녀에게만 은밀히 전해진 비인부전(非人不傳)의 비기였다. 몸이 거대해지는 것은 이 무공의 치명적인 부작용.

난 거울을 통해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나 어때?"

거울 속에서 그녀가 시원하게 대답했다.

"강호에서 제일 잘 생기셨습니다."

이안의 목소리가 이렇게 좋았구나.

중원에서 목소리 좋은 사람을 뽑는 대회에 나간다면 반드시 우승할 것이라 장담할 수 있을 정도로.

"재미없다."

"월봉 주는 사람의 질문은 언제나 답이 정해져 있는 법이죠."

목소리만 좋은 것이 아니라 넌 이렇게 유쾌한 성격이었구나.

거울을 통해 눈이 마주친 이안이 내게 물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그날 내가 살아난 것은 이안 덕분이었다.

화무기가 날 죽이기 위해 날린 검기를 그녀가 몸을 던져 막았다.

화무기의 검기는 그녀의 전신석화공을 꿰뚫었지만, 그 과정에서 미세하게 방향을 틀었다. 그랬기에 내 심장을 아슬아슬하게 빗나간 것이다.

화무기는 내 죽음을 확인하지 않았다. 자신의 공격이 빗나갔을 것이라 여기지 않았을 테니까. 이안의 희생과 그의 자만이 나를 살린 것이다.

'고맙다, 이안아.'

날 위해 목숨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는 그녀였는데, 이 당시의 난 그저 일개 호위로만 여겼다. 그녀의 존재를 당연하게 여겼다. 평소에 공기가 얼마나 고마운 줄 모르고 살아가는 것처럼.

"오늘 비무는 잘하셨어요. 정말 끝내줬어요."

난 그녀에게 돌아섰다. 거울 속이 아니라 실제 그녀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기억 속의 그녀와 실제 그녀는 차이가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더 컸구나.'

난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며 어린 시절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서글서글한 눈매에 오뚝한 코, 웃을 때 너무나 예뻤던 인형 같은 모습을. 다들 그녀에게 이대로 크면 천하제일미(天下第一美)가 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 예뻤던 소녀가 어느 날 뚱뚱해져서 나타났다. 너무 살이 쪘기에 그녀가 얼마나 울었고, 얼마나 눈이 부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 어린 소녀는 그때도 오늘의 이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도련님은 제가 지켜드릴 거예요.

대체 그 소녀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녀의 죄라고는 마교에서 태어나고, 호위무인으로 자란 것뿐인데. 그녀가 치러야 할 대가는 너무나 컸다.

천하제일미가 될 외모를 포기했는데, 나는 그녀의 마음을 보듬어주었을까? 어쩌면 뚱뚱해진 이후 점차 그녀를 냉담하게 대하지는 않았을까? 그녀와의 추억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반면 그녀는 약속을 지켰다. 저 큰 몸을 던져서 검기를 막았고 덕분에 나는 살았다.

나는 이안을 살리는 것 만으로도 이 회귀는 충분히 보람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이안아, 나도 약속 하나 하마. 전신석화공의 부작용은 내가 꼭 없애 줄게.'

내가 불쑥 그녀에게 말했다.

"우린 친해지면 안 돼."

그녀가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네? 왜죠?"

"다른 무인도 아니고 호위 무인에게 정 쌓는 것은 나 대신 죽어달라고 점수 쌓는 거잖아? 야비한 짓이야."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제가 도련님을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당연한 희생이 어딨어? 언제나 자신이 우선, 그다음이 가족, 그다음이 호위 대상. 난 그런 합리적인 사람이 날 지켜줬으면 좋겠어."

이안은 일말의 고민도 하지 않았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전 도련님이 일 번, 이 번도 도련님입니다. 그리고 저, 가족 없습니다."

이 고집 센 여자가 나를 생각하는 충성심의 크기를 감히 측정하지 못한다.

"오늘따라 이상하세요."

"더 이상한 것 보여줄까? 가자."

"어디로요?"

내가 성큼성큼 걸어 나가며 말했다.

"밥상 엎으러."

그 길로 난 곧장 주방으로 갔다.

그리고는 책임 숙수인 임 숙수를 비롯해서 주방 식구들을 모두 불러세웠다.

늘어선 이들 중에서 내가 불러낸 사람은 이곳에서 일한 지 삼 년 된 보조 숙수였다.

"왜 그랬어?"

"네? 무슨 말씀이신지요?"

"왜 내 밥에 산공독을 탔냐고."

그 말에 모두 깜짝 놀랐다.

"아닙니다, 전 아닙니다!"

회귀하니 좋은 점은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 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이 녀석이 왜 산공독을 탔는지도 난 이미 알고 있다. 도박에 빠져 큰 빚을 진 그였다. 부모 돈도 탕진하고, 친우들 돈까지 모두 탕진한 그는 천마 혈육의 밥에 산공독을 타는 간 큰 짓까지 저지른 것이다. 노름이 이렇게 무섭다.

"받은 삼천 냥으로 또 노름하러 갔지?"

순간 녀석이 움찔하더니 그 자리에서 넙죽 엎드렸다.

"살려주십시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돈에 눈이 어두워서 큰 죄를 지었습니다."

"구평호가 직접 찾아와서 돈을 줬나?"

"네."

놈이 시인하는 순간 나는 단칼에 녀석의 목을 베었다.

서걱!

회귀 후 첫 살인이었지만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악이라 생각했던 자들은 가차 없이 죽이며 살아왔던 삶이었으니까. 그나마 고통 없이 죽여준 것이 놈에게 베푼 마지막 자비였다.

회귀 전 인생에서도 놈은 오늘 죽었다. 비무대회가 열린 그날 밤, 노름방에서 칼을 맞고 죽은 것이다. 아마도 살인멸구(殺人滅口)를 위해 구평호가 보낸 자객의 칼이었으리라.

어쨌든 먹는 음식에 독을 타는 일은 절대 용서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한 번의 용서가 또 다른 시도로 이어질 테니까.

"다른 자도 아니고 숙수란 놈이 밥에 독이라니!"

내 말에 참담한 표정을 짓던 임 숙수가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왜 이래? 무릎도 안 좋으면서?"

"모든 것은 제 책임입니다."

"이게 왜 임 숙수 책임이야? 독 탄 놈 책임이지."

"주방에서 일어난 일은 모두 제 책임이니까요."

내가 그를 일으켜 세웠다.

"임 숙수. 본교에서 불의한 일이 일어나면 우리 아버지 책임인가?"

"네?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그런데 왜 임 숙수는 자기 책임이라고 해? 괜한 소리 말고 저녁에는 계사면(鷄絲麵) 부탁해! 오랜만에 먹고 싶어."

대체 몇십 년 만에 먹는 것인가?

"엊그제도 드셨는데요?"

"임 숙수, 나 아직 칼 들고 있어. 피가 뚝뚝 떨어지는."

"맛있게 해서 올리겠습니다."

주방을 나오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안이 다급히 물었다.

"죄송합니다. 호위 책임자인 제 탓입니다."

"왜들 이렇게 책임 못 져 안달이야? 책임병이라도 걸렸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됐고. 이번 일 교내에 소문이나 쫙 내. 구평호가 사주했고, 독 탄 숙수 놈은 내가 베었다고."

"혈천도마 쪽에서 부인할 겁니다."

"그래봤자야. 여기 보고 들은 눈과 귀가 많아서."

주방 식구들이 모두 보았으니, 부인해 봤자 소용없을 것이다.

"더러운 짓 했으면 나쁜 소문이 나야지. 쫙 소문내! 교내의 개들도 '산공, 산공' 짖게 해!"

"알겠습니다."

"가자."

뒤따라오던 이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 정말 오늘 뭔가 달라지신 것 같습니다."

가장 가까이서 나를 보필하던 그녀였기에, 내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

"안 하시던 농담도 하시고. 행동이나 말씀도 달라지신 것 같고."

"오늘부터 달라진 인생을 살기로 했다."

"갑자기요?"

"응, 갑자기. 난 사람이 매일 조금씩 바뀐다고 생각지 않아. 어떤 계기가 있을 때, 확 바뀌는 거지. 그게 어렵고, 자주 있는 일이 아니라서 다들 사람 안 변한다고 말하는 거 아니겠어? 가자."

난 그녀가 어떤 계기인지 물어볼 틈도 주지 않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 * *

"이게 다 필요한 겁니까?"

이안은 내가 아버지와의 사냥을 위해 준비한 물건들을 보며 깜짝 놀랐다.

나는 커다란 혁낭(革囊)에 준비한 물건들을 차곡차곡 담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해."

"도련님이 야영에 일가견이 있으신 줄 몰랐습니다."

이안아, 본교에 있는 어떤 사람도 나만큼 야영을 많이 해본 사람은 없을 거야.

"아버지와 함께니까 준비 많이 해야지."

"부디 좋은 시간 되셨으면 좋겠어요."

"그게 되려나?"

괜한 엄살이 아니었다. 다른 것들은 자신 있었는데, 아버지와의 관계만큼은 자신이 없었다. 심지어 아버지 나이보다 더 살아본 나였기에... 오히려 더 자신이 없다.

"되게 하셔야죠. 될 겁니다."

이안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오늘은 좋은 꿈 꾸세요."

하지만 그날 잘 자지 못했다.

제대로 악몽을 꾸었다. 꿈속의 나는 여전히 회귀대법의 재료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원래 있던 곳에 재료가 없어 온갖 곳을 헤매다니는 꿈이었다.

그때 들려오는 이안의 목소리.

"도련님, 괜찮으세요?"

아마도 꿈꾸면서 비명이라도 지른 모양이다.

"안 괜찮아. 더러운 꿈이었어."

"무슨 꿈을 꾸셨길래요."

"네 경우로 비유하자면 다시 최하급 무인부터 시작하는 꿈?"

"아아! 차라리 절 죽여주세요."

난 침상에 앉은 채로 벽에 세워진 동경을 쳐다보았다. 꿈은 꿈일 뿐이라는 듯, 젊은 시절의 내 모습이 보였다.

젊어진 내 모습에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이렇게 젊은 시절의 아침을 다시 맞이할 수 있다면, 매일 악몽을 꾼다 해도 괜찮다.

"긴장하신 것 같아요."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사람과의 동행이잖아."

"저라면 숨도 제대로 못 쉴 거예요."

"나 씻으러 간다. 새 무복으로 준비해줘."

"네."

지난 삶에서 힘이 들 때면 회귀하면 뭘 할까를 상상했었다. 정말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았고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많은 상상 어디에도 회귀 이튿날 아버지와의 사냥은 없었다. 내 본능적인 선택이 옳았는지는 사냥이 끝나는 순간, 알게 될 것이다.

모든 준비를 다 마친 난 커다란 혁낭을 매고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신 천마전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제5회 맹수는 발톱을 숨기지 않는다.

사냥터는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본교 뒷산은 험하기로 유명했고 곳곳에 방어진과 기관진식이 설치되어 있어서 애초에 아무도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었다. 인적이 끊어진 이곳에 사람이라곤 오직 아버지와 나, 둘 뿐이었다.

'아, 셋이겠구나.'

아버지의 수신호위(守身護衛) 휘(輝)가 어디선가 은신한 채 따라오고 있을 테니까.

난 그를 휘 아저씨라고 불렀다. 어려서는 자주 봤는데, 클수록 볼 기회가 없었다. 아버지가 절대적으로 믿는 수신호위인 휘. 내게 이안이 있다면 아버지에게는 휘가 있는 셈이다.

기를 끌어올려 주위를 살폈지만, 휘의 기척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과연 은신술에 있어서는 최고 경지에 오른 실력자답다. 물론 이런 휘도... 그날 화무기에게 죽었다.

이날 아버지가 내게 한 첫마디는 이것이었다.

"그 정신 사나운 짐은 다 무엇이냐?"

나는 내 몸만큼이나 큰 혁낭을 짊어지고 있었다.

"며칠 동안 필요한 것들입니다."

"며칠? 하루만 있다가 내려올 작정이다."

"혹시 모르잖습니까? 저와 하는 사냥이 재미있으셔서 며칠 더 하고 싶으실지요."

아버지는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이겠냐는 속마음을 노골적으로 표정에 드러냈다.

"꿈도 야무지구나."

아버지와 함께한 지 채 반 시진도 되지 않았지만 나는 한 가지 몰랐던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에 대한 내 기억이 상당히 왜곡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나는 아버지가 거의 말이 없던 분이라고 기억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생각보다 제법이더구나."

비무에서 구평호를 상대하는 모습을 평가하는 말씀이었다. 내공 없는 움직임이었지만, 회귀 전 인생에서 쌓은 실력이 묻어났을 터, 나는 아버지를 굳이 속이려 들지 않았다.

"실력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그래 보였다."

분위기를 타고 덧붙인 농담 한마디.

"저는 하악질하는 고양이가 아니라 발톱을 숨긴 맹수입니다."

아버지가 발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맹수인데 발톱은 왜 숨기느냐?"

"아, 그런 관점은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만."

"그래서 넌 고양이다."

돌아서려던 아버지가 불쑥 물었다.

"비천검법(飛天劍法)은 몇 성에 이르렀느냐?"

비천검법은 천마의 혈육에게 전수되는 무공이다. 오직 천마에게만 전수되는 구화마공(九禍魔功)에는 비할 수 없지만, 마존들이 익힌 무공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평가되는 극상승의 무공이다.

물론 상위의 무공을 익혔다고 무조건 더 강한 것은 아니다. 누가 펼치느냐에 따라, 약한 무공으로도 얼마든지 강한 무공을 지닌 사람을 죽일 수 있었으니까.

아버지를 속일 수 없다고 판단했기에 솔직히 대답했다.

"대성을 이뤘습니다."

그 순간!

피잉!

아버지의 손가락 끝에서 발출된 한 줄기 지풍(指風)이 내 볼을 스쳐 지나갔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돌려서 피하지 않았으면 볼에 구멍이 뚫렸을 것이다.

아버지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정말 대성을 이루었구나!"

나는 지풍의 기세에 화끈한 볼을 매만지며 소리치듯 물었다.

"맙소사! 믿지도 않으시면서 지풍을 날리신 거군요. 제가 못 피했으면 어쩌려고요?"

"거짓말한 대가를 치르는 거지. 대성을 이뤘다면 피할 수 있을 테고."

"아버지를 닮은 이 잘생긴 얼굴에 흉터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한차례 코웃음을 친 후 아버지는 걸음을 옮겼다.

'당시의 내가 무서워할 만했구나.'

세상에 어느 아버지가 자식을 향해 망설임 없이 지풍을 날리겠는가? 그것도 얼굴에! 죽진 않았겠지만 못 피했다면 큰 상처를 입었을 공격이었다.

앞서 걸어가시던 아버지가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네 나이에 대성은... 대단하다."

지난 삶에서도 삼십 대가 훌쩍 지나서야 대성을 이뤘으니, 아버지가 놀라는 것도 당연하다. 어쨌든 무공에 관해서는 진심인 아버지였기에, 저 칭찬은 극찬이었다.

"감사합니다."

이후에 우린 한참 동안 아무 대화를 나누지 않고 산을 탔다.

한 방에서 이렇게 아무런 대화가 없다면 숨이 막혔을 것이다. 하지만 산을 오르는 행위는 달랐다. 묵묵히 걸음을 옮기는 것만으로도 무언의 대화를 나누는 느낌이 들었다.

한참의 침묵을 깬 것은 나였다.

"사냥은 누구에게 배우셨습니까?"

잠시 사이를 두고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형에게 배웠다."

"제게 큰아버지도 계셨습니까?"

"죽었다. 너만 한 나이에 내 손에 죽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난 예의를 갖춘 위로의 말 대신, 솔직한 생각을 말했다.

"잘하셨습니다."

아버지가 발걸음을 멈추고 매서운 눈빛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아니었다면 저는 태어나지도 못했을 테니까요."

잠시 나를 차갑게 응시하던 아버지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아버지라고 어디 골육상쟁(骨肉相爭)이 남긴 마음의 상처가 없겠는가? 지난 삶에서 많이 보았다. 겉으로 강한 것처럼 보인 사람일수록 마음의 상처가 깊은 경우를.

그래서 이렇게 고름을 짜듯 툭 내뱉었던 거다.

지난 삶에서 내가 배운 교훈이 있다.

시체는 묻어도 마음의 상처는 묻지 마라.

그랬기에 아버지에게서 이런 말을 들을 수도 있는 것일 테고.

"당시의 나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형을 죽이지 않고 후계자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을 찾지 못한 거다.

내 대답은 단호했다.

"제게도 기대하지 마십시오."

아버지가 힐끗 나를 돌아보았다. 아까보다도 눈빛이 차가웠지만 내 할 말은 했다.

"아버지가 못해 내신 일, 저도 못 합니다. 그리고 고민할 가치라도 있는 형을 주시고 그런 말씀을 하셔야죠. 아시잖습니까? 형이 얼마나 비열하고 잔인한지."

"뒤에서 잘도 욕하는구나."

"욕 들어도 쌉니다."

사실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앞으로 형이 후계자가 되기 위해 저지른 짓들을 생각하면.

"변방에서 고생 중인데 너는 편한 곳에서 욕이나 하고 있구나."

"천마신교 대공자쯤 되면 변방이 아니라 지하뇌옥 맨 끝방에 갇혀도 고생 안 합니다."

형은 지금 아버지의 명령을 받아 활동 중이었다. 이 당시의 형은 아직 본색을 드러내기 전이었고, 나름 능력도 출중했기에 아버지는 형을 나보다 더 믿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교내의 많은 마인들이 형의 줄을 잡기 위해 노력했고.

"형은 절대 후계자 자리를 양보 안 할 겁니다. 형을 살리면서 후계자가 되겠다는 것은 어리석은 자만입니다."

나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표정에는 '네가 이런 아이였더냐?'라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내 눈빛이 꿋꿋이 대답했다. '네!'

다시 아버지가 걸음을 옮기셨다.

나는 지난 생에 혼인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식이란 존재가 남자에게 어떤 감정으로 다가오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래서 궁금하다.

아버지에게 나는 어떤 존재인지.

그렇게 얼마나 산을 올랐을까?

"쉿."

아버지의 신호에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가 손가락으로 저 멀리 정면을 가리키고 있었다.

"보이느냐?"

눈을 크게 떴지만 울창한 숲만 보일 뿐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안 보입니다."

"나는 보인다."

"저기에 뭐가 있습니까?"

"저녁거리."

"그럼 잡아야지요."

내가 혁낭에 걸어둔 활부터 꺼내자 아버지는 나의 성급함을 제지했다.

"보이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잡겠다는 거냐? 우선 눈을 감고 주위를 느껴라."

"네."

고수들은 상대를 파악할 때, 주위 공기의 파동으로 파악한다. 흔히 말하는 상대의 기도가 바로 이것이다.

주위에 느껴지는 기도는 단 하나, 아버지의 기도다. 잔잔하다. 그래서 두렵다. 이 기도가 화가 나면 얼마나 사나워지는지 누구보다 잘 아니까. 저 평화로운 바닷속에는 세상을 뒤집을 태풍이 잠들어 있다.

"이젠 한 줄기 기운을 내보내라. 딱 한 줄기다."

나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한줄기 기운을 발출했다.

"천천히 기운을 끊지 말고. 네 몸이 실타래라 생각하고 실을 뽑듯이 천천히 발출해라."

회귀 전 삶에서 이렇게 실처럼 가는 기운을 앞으로 내보낸 적은 없었다. 기운을 발출하는 데에는 명확한 이유가 있다. 내 기도로 상대의 기세를 누르기 위해서. 한데 지금은 전혀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기를 발출하고 있었다.

"더 가늘게. 끊어지면 안 된다!"

몸에서 발출된 기운이 이렇게 길게 나아갈 수 있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더, 더, 더."

옆에서 독려하는 아버지가 없었더라면 결코 이렇게까지 길게 기운을 내뿜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내 기운이 뭔가에 닿았다.

"닿았느냐?"

아버지는 나만큼이나 빨리 내 기운이 무엇인가에 닿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네. 느껴집니다."

"무엇인 것 같으냐?"

"나무인 것 같습니다."

놀랍게도 그것이 무엇인지 느낌이 왔다. 정말 느낌이라서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분명 나무였다.

"그 주위를 살펴보거라. 천천히."

실타래에 묶인 실이 다 풀어져서 금방이라도 실이 흘러 내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더욱 길게 기운을 늘어뜨려 주위를 탐색했다. 그러다 나무 아래에서 하나의 살아있는 기운을 발견했다.

"혹시 멧돼지입니까?"

아버지가 아무 대답도 없자 나는 슬며시 눈을 떴다. 아버지는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계셨다.

"아니면 곰입니까? 털이 빳빳하고 몸통이 길쭉한 것이 멧돼지 같았는데."

"멧돼지 맞다."

나는 내 기운이 도달한 곳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저 먼 곳 숲에 있는 멧돼지를 알아낸 것이다.

"이 거리에서 한 번에 맞추기는 쉽지 않은데."

아버지는 직접 겪고서도 믿기 어려운 눈치였다.

생각해 보니 조금 전의 수법은 그저 사냥에 필요한 잡기(雜技)가 아니었다. 무공으로 적용시킬 수 있는 굉장한 비기.

"원래는 저 실패하는 것 보면서 놀리시려고 했군요."

"당연히 실패했어야 하니까."

"저 아버지 아들입니다."

"나도 처음에는 한 번에 못 맞췄다."

"저는 천무지체 아닙니까?"

천무지체가 언급되자 아버지의 눈빛이 살짝 달라졌다.

당시의 나는 천무지체와 관련해서 아버지에게 이런 섭섭함을 가지고 있었다.

―강함을 그렇게나 추구하는 분이, 강한 후계자를 찾기 위해 비무대회까지 열어서 자식을 깨부술 인재를 찾으시는 분이, 천무지체인 저를 왜 그렇게 방치한 겁니까? 왜 저를 밀어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심지어는 아버지가 나를 질투하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도 했다. 그래, 당신의 나는 그렇게 옹졸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세상일이 내 바람대로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천무지체인 나를 특별대우해주세요가 아니라, 천무지체인 신체를 잘 활용해서 스스로 특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 특별함에 모두의 기대와 열망이 실렸을 때, 비로소 천무지체는 하늘이 내린 축복이 된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뭐 하고 있느냐? 저녁 굶을 작정이냐?"

난 기운이 느껴졌던 곳을 향해 힘차게 활을 쏘았다.

피잉.

어둠 속에서 모닥불이 피어오르고 있었고 그 위에는 잘 손질된 멧돼지 고기가 익어가고 있었다.

"짐승 손질은 언제 배웠느냐?"

"책 보고 배웠습니다."

"그런 것 치곤 꽤 익숙하던데?"

아버지, 제가 잡아먹은 멧돼지만 해도 수백 마리는 될 겁니다.

나는 슬쩍 화제를 돌렸다.

"깔고 계신 그것은 아부용으로 준비한 겁니다. 끙끙대며 짊어질 가치가 있었죠."

아버지는 내가 혁낭에 넣어온 호랑이 모피를 깔고 앉아 계셨다.

내 생색에 아버지의 입술이 살짝 말려 올라갔다. 사람 얼굴에 비웃음이 저렇게 잘 어울리기도 어려운데, 아버지는 그 어려운 것을 잘도 해내신다.

"나와 사냥을 하고 싶다고 한 것은 내게 잘 보여서 후계자가 되고 싶어서냐?"

"아뇨. 그래봤자 아버지에게 안 통한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안다니 다행이구나."

"후계자로 선택되는 것은 아버지 도움이 없어도 해낼 수 있습니다."

"자신만만하구나."

"물론 욕심 많고, 잔인하고, 성격 더러운 형이 저를 방해하겠지만요."

"또 뒤에서 까는구나."

"까야죠. 점수를 매기는 심판 앞에서 대놓고 깔 기회가 어디 흔하겠습니까?"

아버지, 진짜 가족 간의 평화로운 형제애를 원하셨다면, 처음부터 정해주셨어야죠. 후계자는 누구다, 허튼 생각 마라. 그렇게 정해둬도 싸우고 죽이고 생난리가 나는 것이 후계 다툼 아닙니까?

"왜 나와 사냥을 하고 싶다고 했냐?"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뭐라도 하나 배워서 강해지려고요. 첫 번째는 성공한 것 같습니다."

"강해져서는?"

내 자리를 노릴 테냐는 아버지의 도발적인 눈빛에 내가 재빨리 대답했다.

"강해지고 싶은 이유가 천마가 되고 싶어서는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아직 정정하신데 천마 타령하다 청춘을 날리고 싶지 않습니다. 후계자가 되고 천마의 무공을 배울 수만 있다면 저는 만족합니다."

나이로 볼 때 아직 아버지의 눈에는 형이나 내가 후계자가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일 것이다. 실제로도 아버지는 지금부터 십 년쯤 후에 형을 후계자를 정했다.

지금 나로선 십 년이나 기다릴 수는 없다. 낭중지추(囊中之錐)로는 부족하다. 주머니에서 송곳을 꺼내 여기저기 푹푹 찔러대야 할 때다.

그래서 최대한 빨리 구화마공을 전수받아 대성을 이뤄야 한다. 아니, 그 이상의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 십성대성을 이룬 아버지도 화무기에겐 패했으니까, 나는 십이성대성을 이뤄야 한다.

"가끔 한 번쯤 상상해 봅니다. 살다가 정말 패 죽이고 싶은 놈이 생겼는데, 못 죽이면 얼마나 속이 터질까. 그 꼴 당하기 싫어서라도 강해지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표정 변화가 없었기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두 번째 이유는?"

"아버지와 단둘이 지내보고 싶었습니다. 처음이잖아요?"

다시 아버지의 입가에 조소가 짙어졌다.

"딱 죽기 좋은 싸구려 감성이군."

"천하제일인과 함께 하는데 어찌 싸구려겠습니까? 노래를 부르면 천하제일명곡이고, 술을 마시면 천하제일명주일 겁니다. 똥을 싸도...."

"거기까지."

"네! 한 시진 동안 입 꾹 닫겠습니다."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고 난 기분 좋게 웃었다. 아마 아버지 앞에서 처음 웃는 웃음일 것이다. 아버지는 냉정하게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지만 말이다.

'아버지를 떠올렸을 때, 추억이랄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무서웠던 기억이 추억은 아니잖아요? 이번 생에서는 제 추억을 그렇게 황량하게 만들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다고 좋아하진 마십시오. 아버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절 위해서니까요.'

제6회 내가 천마가 된다면.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짐을 다 챙긴 후 아버지에게 말했다.

"돌아가셔야지요."

"가긴 어딜 가느냐? 명색이 천마와 사냥을 나왔는데 호랑이 한 마리는 잡고 가야지."

어디 그래서겠는가? 나와 함께 한 시간이 나쁘지 않았다는 의미다.

"다행입니다."

"뭐가?"

"둘째 날을 위한 준비도 했거든요."

"헛소리 말고 앞장서거라."

"네."

아버지와 나는 더욱 깊은 숲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아버지가 다시 내게 말씀하셨다.

"다시 눈을 감아라."

"네."

"목표는 우현 백 장 밖."

지난번보다 더 멀다.

"이번에는 바람을 느껴라."

"느껴집니다."

이번에도 내 모든 삶을 통틀어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씀을 하셨다.

"네 기운을 바람에 실어라."

나는 무공을 배운 이래 단 한 번도 내 기도를 바람에 실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누구도 그런 말을 해준 사람이 없었으니까. 어떤 무공서에도 그런 말은 적혀 있지 않았으니까.

새로운 배움이 주는 전율이 짜릿하게 몸을 타고 올라왔다.

물론 아는 것과 그것을 실행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지만.

"우선 기운을 발출해라."

어제 멧돼지를 찾을 때처럼 조심스럽게 기운을 내뿜었다.

"이렇게 늦고 조심스러우면 잡기술 밖에 안 된다. 실전에서 쓰려면 최대한 빨리 네 기운을 저 끝까지 뻗어내야 한다."

하지만 기운을 바람에 싣기가 쉽지 않았다. 바람도 느껴지고, 기운도 느껴지는데. 각각 따로 노는 이것들을 어떻게 합쳐야 하나?

게다가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바람은 쌩쌩 부는 바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 주변 공기의 흐름을 바람이라 표현하고 있었다. 여러 흐름 중에서 정면으로 흐르는 공기를 찾아내 기운을 실어야 했다.

한참을 헤매어도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해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빨리하라고 재촉하지도 않았다. 그저 뒷짐을 진 채 먼 산을 바라볼 뿐이었다.

왜 사람은 누군가의 등에서 그 사람의 인생을 보는 걸까? 아버지의 등에서는 절대자의 강함을 느껴야 했는데, 외로움과 쓸쓸함이 느껴졌다.

"제법이구나."

"네?"

순간 내가 발출한 기운이 백 장 밖 우현에서 뚝 끊어졌다.

'헛! 언제 내 기운이 저기까지?'

아버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무심결에 내 기운을 바람에 실어서 날려 보낸 모양이다. 회귀 전 삶에서 얻은 심득(心得)이 적지 않다 보니, 어렵다고 여겨지는 일도 손쉽게 이뤄진다.

"저도 모르게 됐습니다."

아버지는 다소 격앙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우연이든, 운이든. 그렇게 쉽게 되는 일이 아닐 테니까.

이내 아버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씀하셨다.

"상관없다. 어차피 그놈은 멀리 달아났다."

해가 뉘엿뉘엿 땅거미를 만들어갈 때, 우린 아까 놓친 놈을 다시 만났다.

"아까 그놈이다!"

아버지 말씀이니 그런가 보다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내 눈에는 보이지도 않았으니까. 저 멀리 있는 것의 크기와 기운까지 정확히 파악한 아버지가 놀라울 따름이다.

"백오십 장 밖이다. 바람에 실어서 찾아라."

다시 기운을 발출하며 바람에 실으려고 노력했다.

아까 무심코 성공한 것으로 봐서, 내 수준이라면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결국 마음의 문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봤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바람에 기운을 얹으려고만 했다. 그것이 문제였다. 의도적으로 얹으려는 행위.

기운을 바람길을 따라 같이 보냈다. 마치 친구와 나란히 걸어가듯, 바람과 함께 뒤엉켜 논다는 기분으로 기운을 내보냈다.

그렇게 별개의 기운으로 날아가다가 어느새 바람과 내 기운은 두 마리의 용이 서로를 휘감으며 날아가는 것처럼 함께 어울리기 시작했다.

'아! 이거다!'

바람에 싣는다는 것이 사람이 말에 올라타는 느낌이 아니라, 이렇게 서로 뒤엉키게 만드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스스스스스슷.

바람을 타고 간 내 기운이 순식간에 백오십 장 밖까지 도착했다.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순간, 저 멀리서 우렁찬 호랑이의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내가 흠칫 놀랐고, 길게 뻗어나갔던 기운이 뚝 끊어졌다.

"정말 호랑이였군요!"

나는 호랑이에 놀랐고, 아버지는 내게 놀랐다. 아마도 내가 이렇게 빨리 아버지의 가르침을 체득할지 몰랐던 모양이다.

아버지, 이제 시작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유유자적 호숫가를 거닐고 싶지만, 우린 물살을 타야 합니다. 급물살을 타고 폭포 아래로 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은 어쩌면 지금 이 순간, 머나먼 바다 한가운데서 홀로 태풍을 헤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아버지, 저를 바다로 보내주십시오.

"기운을 발출하는 수련을 게을리 마라. 그 개수가 늘어난 만큼 네 수명도 늘어날 거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보다 더 많은 숫자를 만들 겁니다. 저는 반드시 그래야 하니까요.

"이번에는 눈을 감고 내 기운을 느껴봐라."

나는 눈을 감고 기도를 발출해서 아버지의 기도를 느꼈다.

내 기도가 호랑이를 찾았듯, 아버지의 기도를 느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아버지 주위에 펼쳐진 기운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살폈다.

내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아버지? 대체 이게 뭡니까?"

아버지는 거미줄 가운데 서 계셨다. 수십 가닥의 선들이 아버지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어나가 있었다. 내가 탐색할 수도 없이 멀리 뻗어진 기운들.

누군가 아버지에게 몰래 다가오려면 저 거미줄을 피해서 와야 할 것이고, 그건 절대 불가능했다.

이런 경지에 이른 아버지를 화무기 그놈이 이겼다고? 대체 어떻게?

정말 그러고 싶지 않지만, 다시 한번 놈에게 경탄(驚歎)을 금치 못했다.

* * *

그날 밤.

"제 비장의 한 수는 바로 이것입니다."

혁낭에서 꺼낸 것은 술이었다. 그것도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 술이었다.

잘 포장해온 깨끗한 잔을 꺼내서 술을 채웠다.

"좋구나."

"제겐 너무 독합니다."

사실 난 술을 좋아하고 잘 마셨다. 평생을 대법 재료를 찾으면서 힘들 때마다 한 잔씩 홀짝이던 것이 어느새 많이 늘었다. 굳이 아버지에게 주량 자랑할 생각은 없어서 독하다고 했을 뿐. 밤새 퍼마시면 아버지가 먼저 쓰러지실 거다.

"술 독하다고 엄살 부리는 마인은 없는 법이다."

"술 좀 못 마시면 어떻습니까? 독주(毒酒)보단 독심(毒心)이죠."

"독심?"

독심이란 말에 아버지가 비웃으며 물었다.

"네가 살기 위해 날 죽일 수 있느냐?"

잠시 사이를 두고 내가 대답했다.

"아뇨. 어찌 자식이 부모를 죽일 수 있겠습니까?"

솔직히 이것도 거짓말이다. 죽여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면, 아버지를 죽일 수 있다. 제대로 대화를 나눠본 게 오늘이 처음인데, 어찌 내 목숨보다 소중할 수 있겠는가?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아버지는 절 죽일 수 있으십니까?"

"이게 고민거리가 된다면, 독심이란 말을 함부로 입에 담아선 안 되겠지."

아버지의 눈빛에서 느꼈다. 단 한 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나를 죽일 수 있음을.

"그럼 전 독주나 배워야겠습니다."

술을 마신 후 독하다고 인상 쓰는 나를 아버지는 묘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날 밤, 나는 홀로 앉아서 아버지가 알려주신 기발출을 연습하고 있었다.

'이거 재미있네.'

이제는 제법 빠르게 기를 바람에 실어서 저 멀리 보낼 수 있었다.

칠흑의 어둠 속을 내 기운이 탐색하며 돌아다녔다. 이 행위는 너무나 신나는 일이었다.

'이건 나무고, 그 아래 바위가 있고....'

그곳을 기어 다니는 작은 벌레의 움직임도 느껴졌다.

다시 기운을 다른 곳으로 보냈다. 수련하면 할수록 기가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졌다.

빠르게 주위를 탐색하던 기가 흠칫 멈췄다. 뭔가 이질적인 느낌을 통과한 것이다.

'뭐지?'

기를 다시 뒤로 뺐다가 다시 그곳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앞서 그 이질적인 기운은 사라지고 없었다.

난 눈을 뜨며 그곳을 응시했다. 어둠 속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체 뭐였지? 분명 저기 뭔가가 있었는데.'

그때 누워 있던 아버지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안 주무셨습니까?"

"거긴 왜 쳐다보고 있었느냐?"

"저쪽에 뭔가 느껴지는 것이 있었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아버지는 흠칫 놀란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반대쪽으로 돌아누웠다.

"이만 자자."

"네."

나는 아버지와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누웠다.

'그게 뭐였을까?'

아버지의 반응으로 볼 때, 분명 뭔가 아는 눈치셨는....

"!"

순간 나는 알 수 있었다.

'휘! 휘 아저씨다!'

아버지 수신호위의 은신을 느낀 것이다. 두 번째로 다시 느끼려 할 때는, 그가 몸을 피해버린 것이고.

그렇다고 생각하니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이틀 전만 해도 절대 알 수 없었던 그의 기척을 내가 알아낸 것이다. 물론 휘가 필사적으로 몸을 숨기려던 상황은 아니었지만, 기본 은신을 알아차린 것만 해도 대단한 발전이었다.

만약 수련을 계속해서 아버지처럼 수십 가닥의 기운을 동시에 발출할 수 있다면, 그 어떤 은신술도 무력화될 것이다. 찾는 과정이 생략되고 그냥 여기, 저기, 거기. 단지 발견될 뿐일 테니까.

어설피 술을 마셔서일까, 그날 밤 나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대법 재료를 찾다가 지치면 술을 마셨고, 그럴 때면 자주 밤하늘의 별을 쳐다보았다. 내 외로움을 함께 했던 그 날의 별들이, 오늘도 변함없이 빛나고 있었다.

잠들지 못하는 것은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속마음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습자지에 물을 빨아들이듯 무공을 받아들이는 내 재능에 격정을 느끼고 계시지 않을까?

"아버지는 마존들 중에서 누굴 제일 믿습니까?"

꼭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는데, 아버지는 반응을 해주셨다.

"그건 왜 묻는 게냐?"

우리 가문이 멸문하던 그 날.

화무기는 천마전을 유린했다.

천마전.

세 개의 기문진과 여섯 개의 기관진식, 그리고 가려 뽑은 마인들이 철통처럼 지키는 곳.

다시 천마전을 중심으로 각기 여덟 방향으로 팔마존과 그들의 수하들이 천마를 수호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일화검존이 이끄는 북천검가(北天劍家)의 마검(魔劍)들이.

남쪽으로는 혈천도마가 이끄는 남도종(南刀宗)의 도귀(刀鬼)들이.

동쪽으로는 불패권마(不敗拳魔)가 이끄는 동권문(東拳門)의 철권(鐵拳)들이.

서쪽으로는 섭혼마(攝魂魔)가 이끄는 서환진(西幻陳)의 귀술사(鬼術士)들이.

북동쪽에는 극악소마(極惡笑魔)를 닮고 싶은 무면객(無面客)들이.

남동쪽에는 대취마(大醉魔)와 함께 취해있는 주객(酒客)들이.

남서쪽에는 독왕(毒王)과 함께 온갖 독을 연구하는 독아(毒牙)들이.

북서쪽에는 마불(魔佛)의 혹세무민(惑世誣民)에 열광하는 광승(狂僧)들이.

당시에 난 외부에서 적이 뚫고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중에 보니 그날 외부는 뚫린 적이 없었다. 팔마존 중 누군가 화무기를 천마전이 있는 내전으로 들인 것이 확실했다.

배신자는 하나일 수도, 혹은 그 이상일 수도 있다. 배신자가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만큼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게 누구든 상관없다.

난 팔마존들 모두를 배신자라 여기고 있으니까.

아버지의 죽음 이후 팔마존의 선택은 복수가 아니라 봉문이었다. 누구 하나 나서서 복수하려 하지 않았다. 여덟 명 중 하나라도 나섰다면 이렇게 배신감을 느끼진 않았을 거다.

그래, 이해한다. 천마의 시체를 밟고 선 화무기의 압도적인 무위에 감히 복수할 마음이 들지 않았겠지.

당신들도 인간인데 이해한다, 이해해.

그러니 당신들도 이해해라.

앞으로 내가 당신들을 마음껏 이용하더라도, 쓰고 버리는 소모품 취급해도, 당신들도 이해하길 바란다. 그게 공평하지 않겠나?

"만약 제가 천마가 된다면 팔마존을 휘어잡고 그들의 목줄을 틀어쥘 겁니다."

"뭣이?"

아버지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기세에 주위의 누운 풀들이 일제히 몸을 세웠다. 나도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이유는?"

아버지가 생각하시는 것보다 그들은 훨씬 더 멀리 있으니까요. 아버진 백 장 밖에 숨은 호랑이는 정확히 아시지만, 눈앞에서 웃고 있는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멀리 있는지는 알지 못하니까요.

차마 이렇게 말할 수는 없었기에 다른 이유를 들었다.

"그들과 관련해서 부정부패가 심합니다. 당사자는 물론이고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자들 역시 마찬가집니다."

아버지는 말없이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기에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물론 교를 원만히 운영하기 위해서 그들의 권위를 인정해 줘야 하겠지요. 하지만 그들은 선을 넘었습니다."

이 당시만 해도 팔마존과 관련해서 여러 사건 사고가 있었다.

"제대로 기강 한 번 잡아야 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아버지는 가타부타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나는 그 태도에서 아버지의 속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버지 역시 공감하는 바가 있다고. 팔마존에 대한 불만이 분명 있으신 거다. 그렇지 않았다면 마존들 기강을 잡아야 한다는 말에 이미 건방지다며 불호령이 떨어졌을 테니까.

"괜한 욕심을 부렸다간 가랑이가 찢어지고 배가 터져 죽는 법이다."

"하하, 앞날이 구만리인데 그럴 수는 없죠. 천천히 걷고 적게 먹겠습니다."

헛소리나 망언이 아니라 욕심이라 표현했다.

나는 아버지의 속마음을 짐작했다. 아직 뽑지 않은 아버지의 칼날 역시 나와 방향이 같다는 것을.

걱정마십시오, 아버지. 저는 그들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요.

마지막 재료인 비마혼을 구하기 위해 본교로 돌아와 긴 세월을 보냈다. 지금부터 먼 미래의 일이었기에 나는 팔마존에 대해서 모두 다 알고 있다. 그들이 어떤 인생을 살았고,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

'제가 줄 제대로 세우겠습니다.'

그렇게 저 밤하늘의 별들만큼이나 여러 생각이 드는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제7회 네가 죽는 이유는.

사냥에서 돌아온 후에는 수련장에 들어가서 아버지가 가르쳐주신 비기를 연마했다.

바람에 기운을 싣는 연습부터, 여러 개의 기운을 동시에 발출하는 것까지.

밥 먹는 시간이 아까워 대충 육포로 때웠고, 잠은 운기조식으로 대신했다. 연마하면 할수록 이 기술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할 수 있었다. 암습하려는 적을 먼저 찾아낸다는 것은 목숨을 여벌로 챙기는 것이다.

수련 내내 열심히 했다.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은 뛰어야 하는 것이 인생임을 나는 숱하게 경험했으니까.

그렇게 며칠 동안 수련에만 빠져 있다가 수련장을 나왔다. 이제 자유롭게 바람에 기운을 실을 수 있게 되었고, 그 개수 또한 서너 개까지 늘렸다.

수련장 입구에 이안이 기다리고 있었다.

"도련님, 이제 쉬시고 제대로 식사하셔야죠."

"네 볼일 보라니까 왜 여기 있어?"

"도련님을 지키는 것이 제 일입니다."

수련하던 내내 수련장 앞을 지킨 모양이다.

이 고집 센 녀석을 마음을 바꾸려면 충격요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문 앞을 지키는 것이 정말 날 위한 일일까?"

"무슨 말씀이시죠?"

"누군가 날 기습하면 넌 어떻게 할 거야?"

"몸을 던져서 막을 겁니다."

"날 지킨다고 나 대신 칼 맞고 죽으면, 내 기분은 어떨까? 살아남았다고 기분 좋을까? 연무장 가운데서 춤이라도 출까?"

"그렇진 않으시겠지만... 죽는 것보단 낫겠죠. 그리고 춤도 잘 못 추시잖아요."

"네 감정만 소중한 이기적인 희생이야."

그녀의 숭고한 희생정신에 이기적이란 말 따위를 붙이고 싶진 않다. 하지만 그녀에겐 이렇게 충격요법을 발휘해야 한다. 안 통해서 문제지.

"네네. 앞으로 제 감정만 챙기는 이기적인 년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이안아, 정말 날 지켜주고 싶어?"

"네."

"그럼 지금부터 무공수련 해. 그래서 정말 날 지켜줘야 할 순간에 수동적으로 막지 말고 상대를 죽여!"

그래서 강해진다면 그 강함은 고스란히 그녀의 행복을 위한 포석이 될 것이다.

그 말은 농담으로 반응하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때 저 멀리 누군가가 소리쳤다.

"어이, 비곗덩어리!"

돌아보니 세 사람이 이곳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혈천도마의 제자들이었다.

"오늘도 이 공자는 안 나왔어?"

꼴을 보아하니 내가 수련하는 동안 여러 차례 찾아왔던 모양이다.

한데, 뭐? 비곗덩어리? 저 새끼들이 돌았나?

이안의 큰 몸에 가려 내가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이 지랄을 몇 번이나 당한 거야?"

"저는 괜찮습니다. 별일 아닙니다."

"이게 별일 아니면 세상에 뭐가 별일이야? 원수에게 가족이 몰살당해야 별일인가?"

"도련님! 저는 괜찮습니다."

이안은 행여 내가 사고라도 칠까 걱정하고 있었다. 내가 다쳐도 문제고, 저들이 다쳐도 문제라 걱정할 테니까.

"이안. 너무 걱정 안 해도 된다. 너 때문에 내 인생을 망칠 정도로 미쳐 날뛰지 않아. 세상 사람들도 다 그래. 다 자기는 알아서 잘 챙겨."

그러는 사이 그들이 가까이 다가왔고, 이안이 빠르게 말했다.

"도련님, 좋은 뜻으로 온 것이 아닌 듯 하니 잠시 피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암, 피해야지. 말벌도 피하고 개똥도 피하고, 아버지 날벼락도 피하고. 한데 저것들은 아니야."

그러는 사이 세 놈이 내 앞에 섰다.

"어? 이 공자도 계셨구려."

앞서 이안에게 이죽거린 자는 혈천도마의 둘째 제자인 양포(梁棟)였다.

양포가 어떤 놈인지 잘 알고 있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산공독을 탄 구평호와는 다른 의미의 쓰레기였다.

이놈은 사람 무시하고 인격적으로 괴롭히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그래, 저 아이.

내 시선이 양포와 함께 온 제자 중 잘생긴 쪽을 쳐다보았다.

아마 막내였지? 혈천도마의 제자 중 제일 정 많고 착한 성격이었는데, 양포의 지랄 같은 괴롭힘에 결국 자결하고 만다. 얼마나 징글맞게 괴롭혔으면 무인이 자결을 하겠는가?

지금도 막내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아마 오늘 이 자리도 억지로 끌려온 것이겠지.

함께 온 또 다른 녀석은 넷째 제자로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그다지 좋은 녀석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내 시선은 다시 양포를 향했다.

"내 호위를 무시하는 건 날 무시하는 건데?"

"미안하오, 이 공자를 못 봤소. 덩치가 좀 커야지."

"내가 있고 없고는 상관없는 일이잖아?"

"이 공자가 함께 있는 걸 못 봤다니까."

이 무식한 놈은 대화의 핵심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이놈이 이렇게 나올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아버지 책임이라 볼 수 있다. 교내에 누구나 후계자가 될 수 있다고 발표한 이후, 천마 아들이란 특별함은 많이 퇴색되었다.

결국 이런 기회를 틈타 '천마 아들에게도 꿀리지 않는'이란 호칭을 얻어내려는 거고.

"날 여러 번 찾아왔다고?"

"그랬소."

"왜?"

"그걸 몰라서 묻는 거요? 구 사제는 더는 무공을 익힐 수 없는 몸이 되었소."

"그래서 어쩌라고? 병간호라도 해줘? 이안아, 가서 걸레 가져와라. 그놈 땀 닦아주러 가자."

"이 공자! 내가 지금 장난치는 것으로 보이시오?"

"우리가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사이는 아니니까."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는지 양포의 기세가 사나워졌다. 상대를 죽음으로 내몰 정도로 괴롭히는 놈이 몇 마디 조롱에 이렇게 기분 나빠하니 가소로울 뿐이다.

"사람을 폐인으로 만들었으면 책임을 져야지!"

"당신 사제가 산공독 탔다는 것은 들었고?"

"흥! 그건 당신네가 꾸민 일이겠지."

"오호, 그렇게 우기시겠다?"

"딴말은 필요 없고. 공식적으로 사과를 하시오."

나는 놈이 왜 나를 찾아와서 사과를 요구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혈천도마는 수제자를 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제자들은 어떻게든 혈천도마에게 잘 보이려고 애썼다. 양포는 내게서 공식적인 사과를 받아 내서 혈천도마의 체면을 살렸다는 공을 세우려는 것이다.

"왜 그리 보시오?"

"이렇게 한다고 그대 사부가 과연 그대를 수제자로 삼을지 모르겠군."

"무슨 소리! 내가 이 공자를 찾아온 것은 사제를 위해서요. 사제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서! 알겠소?"

"뭐가 억울한데?"

"비록 사제의 공격이 과하긴 했지만, 당신은 의도적으로 사제의 팔을 으스러뜨렸소."

딴에는 따질 만하다고 생각해서 찾아온 것이겠지만, 부처님 손바닥에서의 재롱이었다.

"그럼 아버지나 팔마존 어르신들이 잘못했네?"

"무슨 헛소리요?"

갑자기 아버지와 팔마존이 언급되자 양포는 깜짝 놀랐다.

"그렇잖아? 아버지는 내 승리를 인정하고 소원이 뭐냐고 물었어. 당신 사부도 그 과정에서 한마디도 항의하지 않았고. 그럼 뭐야? 교주님이나 당신 사부는 그대도 하는 사리분별을 못했다는 건가?"

양포가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었다.

"그, 그 무슨 궤변이오? 그렇지 않소!"

"그렇잖아? 네 말은 교주께서 혈육의 잘못을 모른 척 덮었다는 거잖아?"

양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오!"

말로 어찌 나를 당하겠는가?

"아님 노망이라도 들었다고 생각해? 그런 거야?"

"닥치시오! 무엄하게 감히!"

양포가 사형제들을 돌아보았지만 그들 역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까닥 잘못했다간 천마를 비난한 죄를 뒤집어쓰게 생겼으니, 양포는 못이기는 척 물러났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지만, 이번 일은 끝난 게 아니오."

"잠깐! 사과는 하고 가야지."

"무슨 사과?"

"내 수하에게 막말한 것 사과하라고."

그제야 놈들의 시선이 이안에게 향했다. 애초에 놈들에게 이 공자의 뚱뚱한 수하는 안중에도 없었다.

물론 이안은 이대로 일이 마무리되길 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도련님."

"내가 안 괜찮아. 자, 감히 내 수하에게 주둥이를 함부로 놀렸으니 무릎 꿇고 사죄해. 어차피 사과해봤자 진심 아닐 테니, 행동이라도 보여. 무릎 꿇었다는 소문이라도 나게."

양포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저 돼지 년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하셨소?"

"응, 이마까지 박으면 더 좋고."

"이 공자, 당신 미쳤어?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절대 못 꿇어."

내가 원했던 대답이 금방 나왔다.

"차라리 죽겠다? 남자답군. 좋아, 소원대로 해주지."

차앙.

내가 검을 뽑아 들자 양포는 깜짝 놀랐다.

"정말 미쳤군."

"이대로 가면 본교에 소문이 날 거야."

양포가 누가 보는 사람이 있는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기 말고 요기."

나는 입을 얄밉게 쭉 내밀었다.

"요 입이 소문을 다 낼 거거든. 혈천도마의 둘째 제자가 이 공자에게 겁먹고 달아났다고. 모르긴 해도 너희 사부가 그리 좋아하진 않을 거다. 넌 평생 비겁자 꼬리표를 달고 살 테고."

양포의 표정이 굳어졌다. 사부에게 잘 보이려고 왔다가 사부에게 찍히게 생긴 것이다.

"무릎 꿇고 사과하거나, 나와 붙거나. 선택은 네가 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요?"

"나를 찾아올 수 있어. 사제 살려내라 할 수도 있어. 떼로 몰려와서 복수하겠다고 해도 돼. 다 이해해. 한데 내 수하를 왜 갈궈? 비곗덩어리가 왜 나와? 평소에 밥이라도 한 끼 사줬어? 그래?"

반성은커녕 양포는 더욱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저 뚱땡이를 위해서 날 죽이겠다는 뜻이군."

"정답."

양포의 눈이 사납게 찢어지며 내 예상대로 움직였다.

"대체 날 어떻게 보고!"

"내 수하가 너보단 백 배는 더 귀한 사람이다. 아니지, 천 배, 아냐...."

만 배가 되기 전에 양포가 도를 뽑아 들었다.

차앙.

"사형, 안 됩니다!"

뒤에 있던 넷째가 황급히 그를 말렸지만 이미 양포는 눈이 돌아간 상태였다.

"이 공자, 구 사제를 이겼다고 기고만장하겠지만 곧 후회하게 될 거요. 교주님 자식이니 죽이진 못해도 팔 하나는 잘라서 사제의 복수를 해주겠소."

양포는 나를 이길 수 있을 거라 자신하고 있었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이 무렵의 내 실력이 혈천도마 제자들과 비슷비슷했던 모양이다. 이게 다 형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천무지체인 나를 어찌나 괴롭히고 견제했는지, 제대로 무공을 키워나갈 수 없었다.

"산공독이 없어서 어쩌나?"

"웃기지 마라! 나는 구 사제와 다르다!"

양포가 선공을 펼치며 나를 몰아붙였다.

지난 삶에서 무인의 인성과 무공실력은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차례 경험했다.

양포 역시 마찬가지였다. 놈은 쓰레기 같은 인성과는 비교할 수 없이 훌륭한 도법을 펼쳤다. 당시의 나와 싸워서 충분히 승부를 겨뤄볼 만한 실력이었다.

물론 지금의 나에게는 구평호와 마찬가지로 일초지적이었지만.

하지만 나는 내 실력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막상막하로 놈을 상대했다.

양포가 나를 몰아세울 때마다 지켜보던 놈의 사제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반대로 이안은 그때마다 외마디 비명을 내뱉었다. 서로 합의를 본 비무였기에 뛰어들지 못했지, 아니었다면 몇 번이나 뛰어들 상황이 펼쳐졌었다.

그렇게 인내의 이십여 수가 지났고, 나는 작정한 살수를 펼쳤다.

지금까진 상대의 움직임에 맞춰줬다면, 이제 비천검술의 정수를 발휘할 때.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버들잎처럼, 내 검이 가볍게 흔들렸다.

휘릭!

푸우욱!

흩뿌리듯 터져나가는 붉은 피.

내 검은 놈의 입을 뚫고 뒤통수로 나와 있었다.

똑, 똑.

모두가 얼어붙은 침묵 속에서 검 끝의 핏물만 떨어졌다.

생기를 잃어가는 녀석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넌 그 입 때문에 죽는 거다. 그 입으로 내 수하를 모욕했고, 사과하지 않은 것도 그 입이니까."

그 입으로 저 착한 네 사제를 죽였고, 앞으로 많은 이들을 죽일 입이니, 넌 여기까지.

검을 뽑자 입에서 피를 뿜어내며 양포가 앞으로 꼬꾸라졌다.

"사형!"

사제들이 달려와 양포를 살폈지만, 그는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경악했다. 설마 내가 양포를 죽여버릴 줄 몰랐을 테니. 물론 이안은 더 놀란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넷째가 따지듯 소리쳤다.

"사형을 죽이다니? 이 공자, 당신 정말...."

"그럼 뭘 기대했나?"

"이 뒷감당을 할 수 있겠소?"

놈을 보며 내가 차갑게 말했다.

"네 입도 사형을 닮았네."

입 때문에 죽었다는 앞서 말이 떠올랐는지 놈은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있는 그대로 전해. 한 마디라도 없는 말 덧붙이면 밤에 너희를 찾아갈 거다."

그들이 양포의 시체를 안고 그곳을 빠져나갔다. 그때 나는 보았다. 막내가 안도하는 모습을. 오죽했으면 사람이 죽었는데, 기쁨을 감추지 못할까?

원래라면 양포에게 괴롭힘당하다가 죽었을 그는 이제 살았다. 밥에 산공독을 탄 숙수 놈은 원래대로 죽었지만, 원래 죽었어야 할 혈천도마의 막내 제자는 이제 살았다. 운명은 그대로이기도 하고, 바뀌기도 한다.

'착한 막내 제자야, 잘 버텨서 나중에 네가 도마의 수제자가 되어라!'

그게 내 바람이었지만, 거기까진 그의 의지와 노력으로 이룰 일이었다.

한편 이안은 세상을 다 잃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들 자기는 알아서 챙긴다면서요? 걱정하지 말라면서요?"

"너 때문 아니니까 표정 풀어!"

"...저 때문이잖아요?"

"아니니까 착각 마."

"그럼 뭐 때문에 이런 대형 사고를 치신 거죠?"

"이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그냥 죽어 마땅한 놈을 죽였을 뿐이야."

"혈천도마 어르신이 그냥 있지 않을 거예요."

"그냥 있을 거야. 나서봤자 아무 이득도 되지 않으니까."

"정말 그럴까요?"

"생각해 봐. 이 싸움의 발단은 자기 제자가 이 공자의 호위를 모욕해서야. 사과하면 그만인 일을 뻗대다가 죽은 거지. 혈천도마가 이 일에 나서서 무슨 이득을 얻겠어? 제자를 잘못 키웠다는 욕만 듣겠지."

"자존심 상할 수도 있잖아요?"

"혈천도마에게 그런 류의 자존심은 없다."

"어떻게 아세요."

"알아. 네 잘생긴 도련님은 다 안다."

내 여유에 이안은 그제야 좀 긴장이 풀리는 모양이다.

"그럼 다행이지만요."

"반대로 내가 양포를 죽인 것은 내게 이득이 되지. 모두가 날 주목할 거고. 후계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점수가 있다면 거기에 일 점을 보탠 셈이지."

비무에서 구평호를 박살 냈고, 이제 양포까지 죽였으니 교내의 모든 이목이 쏠릴 것이다.

"설마 거기까지 다 생각하셨어요?"

"당연하지. 혈천도마의 제자를 죽이는 일인데. 그냥 기분 나쁘다고 죽였겠어?"

사냥에서 아버지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 기세를 계속 몰아야 한다.

"이안아, 널 모욕하는 것은 날 모욕하는 거야. 그러니, 아까 같은 상황에서 괜찮다는 말은 하지 마."

"제 생각이 짧았어요."

"우린 앞으로 훨씬 중요한 문제들을 고민할 거야. 쓰레기를 치웠다고 그 쓰레기 주인이 화내지 않을까? 이런 하찮고 쓸모없는 고민은 오늘까지다."

나를 향한 이안의 두 눈에 격정이 스쳤다.

"진심이시군요. 도련님... 정말 변하셨어요."

"네가 달라져야 할 이유기도 하지."

요 며칠간 있었던 나의 변화는 그녀의 변화를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변할게요. 강해지겠습니다!"

말처럼 쉽지 않을 거다. 몇 번이고 고민하고 돌아보고 힘들어하겠지. 한 사람의 인생이 변한다는 것은 절대 쉽지 않은 법이니까. 손쉬워 보이는 내 변화도 지난 한평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도련님, 오늘 감사했습니다. 아까 제 편 들어주셨을 때, 너무 기뻤어요. 진심으로요."

"당연히 감사해야지. 평생 오늘 일 잊지 마!"

그녀가 웃었다. 그냥 웃음이 아니라 두 눈이 살 속으로 완전히 파묻히는 함박웃음이었다.

그래, 그렇게 웃어라. 내가 회귀했으니, 이제 그렇게 웃고 살아라.

제8회 칼날이 달빛에 반짝일 때.

혈천도마의 제자가 내 손에 죽었다는 소문이 교내에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 파급만큼 이안의 걱정도 커졌다.

"난리도 아니에요. 만나는 사람마다 다 도련님과 양포 이야기만 해요."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제 이야기도요."

싸움의 원인이 된 그녀였으니 당연히 이런저런 말들이 많을 것이다.

"유명해지면 좋지. 유명해지려고 온갖 미친 짓을 다 하는 것이 우리 무림인들이잖아?"

"저는 싫어요."

"앞으로 더 유명해질 텐데, 어쩌나?"

이안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표정이 어둡지는 않았다. 이 난리의 중심에 변화라는 긍정적인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명예를 중요시하는 혈천도마님이라 걱정이에요. 제발 그냥 넘어가셔야 하는데."

"누가 그래? 혈천도마가 명예를 중요시한다고?"

"네? 아닌가요?"

"명예를 중요시하는 사람이 제자들의 쓰레기 짓을 방치하고 용인해?"

"모르시는 것 아닐까요?"

"그건 우리 혈천도마님의 섬세함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거고."

"전에도 그렇고. 자꾸 혈천도마님에 대해서 잘 아는 것처럼 말씀하세요."

"혈천도마뿐만 아니라 다른 마존들에 대해서도 알만큼은 알아. 명색이 천마 아들인데, 그쯤은 조사해 둬야지."

이안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쳐다보았다. 나에 대해서 뭐든 알고 있다고 생각할 테니, 대체 자기 몰래 언제 그런 조사를 했을까 궁금하겠지.

"그럼 왜 혈천도마께서는 제자들의 파행을 그냥 두는 거죠?"

"그건...."

확실한 이유가 있지만 이안에게 설명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이안이 납득할만한 다른 이유를 들었다.

"그게 편하니까."

"네?"

"행실 바른 제자보다 욕심 많고 이기적인 놈들을 다루기가 더 쉽거든. 혈천도마는 오랫동안 수제자를 정하지 않고 제자들을 경쟁시키고 있어. 왜냐? 그래야 소모품으로 쓰기 쉬우니까. 두고 봐, 양포의 빈자리도 며칠 내로 채워질 테니까."

"무서운 분이셨네요, 도마님."

"난 제자들이 더 무섭다. 뻔히 사부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도 달려드는 그 녀석들이."

"전 도련님을 모실 수 있어서 기뻐요."

"당연하지. 어따 비교를 해? 이안아, 간만에 술 한잔할래?"

그녀가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놀라?"

"간만이 아니라 처음이니까요."

"처음이야?"

"네."

지금까지 너와 술 한잔 안 했다고? 너는 대체 무슨 동력으로 날 위해 몸을 던진 거냐?

"가자. 오늘 마시고 죽자!"

이안과 함께 마가촌(魔家村)으로 갔다.

마가촌은 본교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처음에는 마인들 가족들이 사는 작은 마을로 시작한 그곳이 이제는 큰 도시가 되었다.

난 그녀를 데리고 마가촌에서 제일 비싸고 좋은 주점으로 들어갔다.

"역사적인 날인데 좋은 곳에서 마시자."

"저는 작고 허름한 곳도 좋습니다."

그녀는 사람 많은 곳을 부담스러워했다. 어딜 가도 일단은 그녀에게 시선이 몰리니, 아무래도 싫겠지.

그녀를 배려해서 따로 마련된 주점의 특실로 들어갔다.

"주량이 얼마나 돼?"

"많이는 못 마십니다."

"오늘 주량이 얼마인지 확인해 보자. 걱정 마, 취하면 내가 업고 간다."

"저... 무거워요."

"괜찮아. 이 팔뚝 봐라."

"제 팔뚝의 반이네요."

"내가 아직 힘을 안 줘서 그래!"

그녀와 첫 술자리이니만큼 좋은 술과 요리를 잔뜩 시켰다.

"처음 먹어보는 요리에요. 이것도, 저것도."

"다 먹어보고, 맛있는 것은 더 시키자."

"뱃속이 놀라겠어요."

"호위한다고 바빠서 대충 때우지? 앞으론 신경 써서 먹어."

"보세요, 이 몸이면 대충 먹어도 괜찮답니다."

그녀가 두툼한 팔뚝을 들어 보이며 씩 웃었다.

"대충 먹으면 더 살찐다. 내가 뭘 먹나, 이건 어떤 재료로 만들어지나. 먹는 데 신경 쓰면 쓸수록 살이 덜 찌지. 살 빼려면 미식가가 되어야 해."

"아! 전 몰랐어요! 앞으로 그럴게요."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어떤 음식을 먹어도, 매일 굶어도 그녀의 살은 빠지지 않는다는 것을. 저 살은 음식으로 찐 살이 아니기 때문에.

물론 그녀도 잘 알고 있다. 내가 부작용을 모른다 생각해서, 저렇게 말하는 것일 뿐. 부작용을 밝히고 한 마디 원망 섞인 농담이라도 할 법한데... 너무 어려서부터 어른이 된 그녀다.

"앞으로 나랑 맛있는 것 먹으면서 배워."

이안이 날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제게 비법 좀 알려주세요."

"무슨 비법? 요리?"

"아뇨. 어떻게 하면 사람이 이렇게 바뀔 수 있는지요."

나는 그녀를 보며 옅게 웃었다.

"왜? 너도 바뀌고 싶어?"

"그건 아니지만...."

그녀가 술잔을 비웠다. 어찌 변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녀의 마음속에는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이 영원히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힘들 때면 그날을 떠올릴 거고, 그래서 더 힘들어질 테고.

'원래의 네 모습을 되찾으면 그런 비법 따윈 필요 없을 거다. 세상 사람들이 다 너를 추앙할 테니까.'

내가 따라주는 술을 공손히 받으며 이안이 물었다.

"도련님, 후계자는 어떻게 되실 작정이세요?"

지금껏 묻지 않았던 질문을 하는 것은 내게서 그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리라.

내가 술잔을 들며 나직이 말했다.

"아부만이 살길!"

이안이 웃으며 자신의 잔을 들어 살짝 부딪쳤다.

"교주님 마음을 꼭 녹이세요!"

그녀와 함께 술을 비웠다.

술을 잘 못 마신다더니 이안은 술을 곧잘 마셨다.

물론 그녀를 취하게 만든 대가를 치러야 했다. 만취한 그녀를 업고 돌아와야 했으니까.

돌아오는 내내 그녀는 등에 업혀서 소리쳤다.

"걱정마세요! 제가 도련님을 꼭 지켜드릴 거예요. 저만 믿으세요!"

"걱정 하나도 안 했는데, 네 말을 자꾸 들으니까 걱정된다."

"걱정마시라니까요! 제가 지켜드립니다!"

"그래, 걱정 안 해."

"하셔야죠. 걱정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걱정마세요! 제가 지켜드리니까요!"

"하하하."

그때 건물 창이 열리며 누군가 소리쳤다.

"어떤 얼빠진 년이 한 소릴 자꾸 해대냐?"

창으로 얼굴을 내민 남자를 보며 내가 말했다.

"날 봐서 좀 봐주게."

"너 누군데?"

"천마신교 이 공자라네."

잠시 멍하게 나를 쳐다보더니 빛처럼 빠른 사과가 날아들었다.

"어이쿠, 죄송합니다. 공자님!"

동시에 열렸던 속도보다 더 빠르게 창문이 닫혔다.

이안은 등에 업힌 채 쌔근쌔근 잠들어 있었다.

'이렇게 늦게 업어줘서 미안하다.'

거처로 돌아온 나는 그녀를 침상에 눕혀 두고 밖으로 나왔다.

마당에 다리를 뻗고 앉아서 달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와 생각하면 멸문 이후 도피 생활을 하며 난 깊은 패배감에 빠져 있었다. 회귀라는 목적을 향해 달려가지 않으면 삶을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우울감이었다.

그 무렵 서진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래서 회귀대법에 대해 알지 못했다면? 결국... 자결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화무기를 찾아가서, 정작 그는 만나지도 못한 채 그를 따르던 추종자들의 손에 비참하게 죽었겠지. 그래, 그랬을 거다.

그렇게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있을 그때.

바로 옆에서 무엇인가 번쩍 달빛에 반사되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을 때, 커다란 칼날이 얼굴 옆에 있었다.

무식하게 큰 대도(大刀)의 날에 긴장한 내 얼굴이 비쳤다.

칼날이 서서히 눕혀지며 그 뒤에 칼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칼을 쥔 거칠고 깡마른 손등의 주름은 지난 세월이 호락호락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연륜의 골이었다. 그 골짜기 너머 날카로운 눈빛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바로 혈천도마였다.

이렇게 갑자기 날 찾아올 줄은 몰랐기에 나는 내심 놀랐다.

내 목을 자를 듯 겨누고 있는 칼은 그의 독문무기인 멸천대도(滅天大刀)였다. 무림십대병기에 이름을 올린 멸천대도는 어지간한 병기는 부딪치는 순간 박살을 내 버려서 병기파괴자(兵器破壞者)라는 별칭이 붙어 있었다.

멸천대도가 뿜어내는 차가운 마기가 온통 주위를 휘감았다. 숨이 멎을 것 같은 서늘한 한기에 온몸의 솜털이 일제히 섰다.

'저 칼이 내 목을 치러 날아들면 피할 수 있을까?'

쉽게 답을 내리지 못했다.

회귀 전의 삶에서 얻은 심득이 아무리 깊어도, 지금은 내공이 압도적으로 딸렸으니까.

긴장감이 고조되던 그 순간, 주위를 휘감던 차디찬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혈천도마가 싱긋 웃으며 멸천대도의 손잡이 끝으로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왜 그랬대?"

왜 자기 제자를 죽였느냐는 뜻.

방금까지만 해도 날 죽이러 온 살수 같은 기도였는데, 이제는 친근한 이웃집 노인네처럼 싱글거리며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고 있다.

"머저리처럼 굴어서 그랬죠."

무덤덤한 대답에 혈천도마가 빤히 나를 쳐다보았다. 아버지와 비슷하지만 다른 눈빛이다.

아버지의 눈빛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면, 혈천도마의 눈빛은 명확했다.

적의(敵意).

나는 그의 눈동자에서 이글거리는 불길을 보았다.

"세상에 어떤 머저리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교주의 막내아들에게 시비를 걸러 온답니까?"

휘릭!

혈천도마의 무릎에 놓여 있던 도가 튕겨 올라오며 다시 내 목을 겨눴다.

"이 머리통을 잘라 가서 교주님 눈에 넣어보라고 할까? 아픈지 안 아픈지?"

칼날 위를 흐르는 서슬 퍼런 살기는 '농담처럼 들렸겠지만, 아니야'라는 주인의 의지를 담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 그 무섭게 찢어진 눈에 제 머리통은 안 들어갈 것 같은데요?"

내가 한발 물러나자 칼날 위를 흐르던 기운이 순식간에 손잡이 쪽으로 사라졌다. 대단하다. 깡마른 저 몸으로 이런 강대한 기운을 이리 자유자재로 다루다니.

혈천도마가 이번에는 멸천대도로 우리가 앉아 있는 앞쪽 바닥에 긴 선을 쭉 그었다. 그리고 왼쪽 끝부분 한 뼘쯤 되는 곳에 세로줄을 그었다.

"여기서 여기까지가 우리 이 공자, 여기서 저 끝까지는 나."

구 대 일의 비율로 선이 구분되었다.

"이게 뭡니까?"

"교주님이 아끼는 정도라네."

혈천도마 자신이 구, 내가 일이었다.

내가 손가락으로 삼분지 이쯤 되는 곳에 선을 새롭게 그었다.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아들인데. 이쪽이 저, 저쪽이 어르신이겠죠."

이번에는 내가 칠, 혈천도마가 삼이었다.

혈천도마가 능글맞게 웃었다.

"시험해 보면 되겠네. 내가 이 공자 머리통을 들고 가면 교주께서 과연 날 죽일까, 살릴까?"

"천마의 부성애를 너무 과소평가하시는 것은 아니신지."

"그러니까 시험해 보자고."

멸천대도가 다시 천천히 나를 향해 움직였다.

나는 도의 옆면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누르며 내 목으로 다가오는 것을 막았다. 도는 차가웠다. 아무리 혈천도마가 환하게 웃고 있어도, 이 차가움이 혈천도마의 본질이다. 그걸 잊으면 죽는 거다.

"시험은 안 해도 되겠네요. 아들은 둘이고, 어르신은 하나니."

혈천도마가 히죽 웃었다.

"이 공자는 내 제자처럼 머저리가 아니네."

"제자분이 어르신을 닮았다면 아직 살아 있었을 텐데요."

혈천도마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탁탁 두드렸다.

"이 공자, 이 늙은이는 평생 불운(不運)과 함께 살아왔네. 그러니 자주 안 보는 것이 좋아."

말을 마친 혈천도마가 사라졌다. 내 옆에서 휙 하고 솟구친 몸이 저 멀리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그렇게 혈천도마가 사라지자 나는 옆구리부터 살폈다. 아까 혈천도마가 도의 손잡이로 쿡 찌른 곳에 시퍼런 피멍이 들어 있었다. 장난스럽게 '쿡쿡' 찌른 것처럼 보였지만, 내게 온 충격은 '쾅쾅'이었다. 마지막에 어깨를 두드린 것도 마찬가지였다.

"젠장, 망할 늙은이."

그를 대하는 내내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회귀한 사실과는 별개로 변수가 만들어내는 위험성은 항상 조심해야 했으니까.

내 머리통을 들고 아버지를 찾아가겠다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해서 했다는 것은, 정말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있다는 거다.

얼핏 보면 제멋대로처럼 보이지만 그는 제멋대로인 사람이 아니다. 언제나 철저히 계산하고 또 계산하는 사람이다. 제멋대로라고 느껴진다면 그 역시 계산된 제멋대로다. 그래서 상대하기가 까다로운 인물이었고.

그에 대해 여러 정보를 알고 있었지만, 잘 안다고 해서 잘 다룰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정보는 정보일 뿐, 이 유리함을 뒤집을 변수는 언제든 생길 수 있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왜 나를 찾아왔을까?'

제자를 죽인 것에 대한 경고일까?

아니다. 이안에게 말했듯 그는 평판을 중요시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나를 보러 온 것이다. 비무대 위에서 보여준 모습이 인상적이었을 거고, 사냥을 소원으로 빈 것도 특별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거기에 자신의 제자까지 베어버렸으니 나를 시험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내게서 단맛이 나는지, 똥맛이 나는지 직접 맛보려고 온 거다. 내가 후계자가 될 수 있는지를 보려고.

'어떤 맛이었소?'

내게 그는 매운맛이었다. 고작 혀 한 번 대었지만, 화끈했다. 대신 맛있게 매운맛이었다.

'내 첫 상대가 혈천도마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필이면 혈천도마의 제자와 비무를 하는 날로 돌려보냈으니까.

'아마도 당신의 그 큰 칼이 하늘의 눈에 유독 잘 띄었나 보오.'

제9회 내가 생각하는 마도는.

다음 날, 이안이 당황한 얼굴로 날 찾았다.

"저 어제 어떻게 돌아왔죠?"

"네가 날 업고 돌아왔어. 난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이 안 나."

그러자 이안의 볼이 붉어졌다.

"거짓말 마세요. 저, 그 정도로 취하진 않았어요. 많이 무거웠죠? 죄송해요, 도련님."

"가벼웠다면 거짓말이고. 죄송할 정도로 무겁진 않았어. 이 팔뚝 보라니까!"

"어휴, 안 그래도 가는 팔뚝이 더 가늘어지셨네."

"울퉁불퉁한 근육을 똑바로 보라고!"

그렇게 농담을 주고받은 후에 이안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했어요, 도련님."

"다음에 또 마시자."

"네, 도련님."

돌아서려던 그녀가 다시 물었다.

"저 혹시라도 말실수라도 했다면,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세요. 솔직히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나서요."

"실수 안 했으니까 걱정 마. 아, 혹시 다음에라도 실수하면 사면권(赦免權)을 써."

"사면권요? 그게 뭐죠?"

"내게 실수나 잘못을 해도 용서받는 권리야."

"저 주셨어요? 안 받았는데요?"

내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

이안이 커다란 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

"자, 지금 발급했어."

"기왕 주시는 것 통 크게 열 장은 안 되나요? 평생 도련님 따라다닐 텐데, 한 장으로 부족하지 않겠어요?"

"안 돼! 딱 한 장이야. 그러니 아껴 써!"

"네! 도련님!"

활짝 웃는 그녀의 눈이 살집 속에 파묻혀 사라졌다.

'살면서 용서받을 사람이 나면 나지, 어디 너겠느냐? 사면권은 네가 내게 한 오십 장 발급해줘야 하는데....'

* * *

그날 밤, 홀로 앉아서 기 발출 수련을 하고 있었다.

동시에 세 곳을 탐지하던 중 좌측으로 날아가던 기운이 한 사람을 감지했다.

나는 요즘 기를 통해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기를 보내다가 사람을 발견하면 우선 상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는 것으로 시작한다. 키는 얼마나 크며, 무기는 뭘 쓰고, 무공 수위는 어느 정도 되는지.

이번 역시 상대를 살펴보려던 바로 그때.

상대가 슬쩍 옆으로 피했다.

우연이겠지 싶어 그를 향해 기운을 내보냈다. 하지만 상대는 다시 반대쪽으로 몸을 움직여서 내 기운을 피했다.

'설마 알고 피하는 것은 아니겠지?'

이 실처럼 얇고 은밀한 기운은 상대가 결코 알아낼 수 없는 것이었다.

한데 상대는 마치 내 기운을 느끼기라도 하듯, 요리조리 피하기 시작했다.

대체 누구지?

상대가 궁금했다. 나는 계속 기를 발출하면서 방에서 나갔다.

움직이면서도 기를 발출하는 연습을 한다. 물론 가만히 있으면서 발출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큰 심력 소모를 해야 했지만, 실전에서는 움직이면서 기를 발출할 일이 더 많을 것이다.

상대가 뒤로 물러나는 것이 느껴졌다. 잡힐 듯 말 듯 달아나는 그를 뒤쫓았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내전의 정자였다.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을 확인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

내 기운을 이끌고 이곳까지 온 사람은 바로 아버지였다.

"그럼 그렇지. 다른 누군가 제 기운을 감지한 줄 알고 긴장했습니다."

"뭐 대단한 기운이라고. 저기 담장 아래에서 졸고 있던 개도 알아차릴 거다."

"개야 원래 감이 좋은 녀석들 아닙니까? 한데 제 거처에는 어떤 일이십니까?"

"지나는 길이었다."

말은 그렇게 하셨지만 분명 나를 찾아왔던 것이 틀림없었다.

"이렇게 우연히라도 뵙게 되는 것을 보니 과연 우린 운명적인 관계가 틀림없습니다."

"주접은 거기까지."

"네!"

나는 입을 닫고 조용히 아버지가 바라보는 밤하늘에 시선을 보탰다.

잠시 후에 내가 물었다.

"후계자는 언제 정하실 겁니까?"

"백 년 후에. 너희들은 아직 멀었다."

"백 일 후로 하시죠. 저는 다 온 것 같습니다만."

"그랬다면 혈천도마가 널 찾아가지 않았겠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둘만의 만남이었는데 아버지는 알고 계신다. 다시 말해서 나를 주시하고 계신다는 의미. 하긴, 내가 산공독에 당한 것도 알고 계셨으니까.

"널 만나고 곧장 혈천도마가 날 찾아왔다."

"뭐라고 하던가요?"

"네게 벌을 내리길 바랐다."

"네?"

생각지 못한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설마 혈천도마가 그 길로 아버지를 찾아가서 벌을 내려달라고 했다고?

"뜻밖이었지. 제자가 죽은 정도로 날 찾아와서 그런 요구를 할 사람이 아닌데."

"대체 왜 그랬을까요?"

모른 척했지만 나는 혈천도마의 속마음을 짐작했다. 나와 아버지의 관계를 시험하려는 거다. 아버지가 정말 벌을 내릴지, 벌을 내린다면 어떤 벌을 내릴지. 아버지가 나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아보려는 거다.

"그래서 벌을 내릴 생각이다."

"제게 벌을 내릴 명분은 없습니다. 그 제자 놈은 죽어 마땅한 놈입니다."

"명분은 만들면 그뿐이다."

나는 검을 뽑아서 바닥에 선을 길게 그었다.

그리고 십분 지 일쯤 되는 곳을 그으며 말했다.

"혈천도마가 제게 말했습니다. 이쪽 긴 쪽이 아버지가 자신을 생각하는 크기라고요. 혹시 그 명분은 이 길이에서 나왔습니까?"

아버지는 대답 대신 사냥터에서 내가 질문했던 내용을 되물었다.

"마존들 중에 누굴 가장 믿느냐고 물었더냐?"

"네."

아버지는 그에 대한 답을 지금 하셨다.

"아무도 믿지 않는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대답으로 혈천도마가 그은 선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도 동시에 대답했음을.

"너는 어느 쪽이냐? 사람을 믿는 쪽이냐, 믿지 않는 쪽이냐?"

"상대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어떤 사람인지 네가 어떻게 알 수 있지?"

"지내다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멍청한 생각이다. 절대 알 수 없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 아무리 투명해 보이는 사람이 네 옆에 있을지라도, 절대 그 사람을 안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문득 이안이 떠올랐다. 그녀에 대해 잘 안다 생각했는데, 자꾸 새로운 면을 발견하는 것과 같은 이치.

"명심하겠습니다."

"본교의 기강을 잡아야 한다고 했느냐?"

"네."

"부정부패를 잡아야 한다는 헛소리 집어치우고. 솔직한 네 생각을 말해봐라."

"정말 솔직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언제는 거짓으로 고했느냐?"

"그렇진 않습니다만. 이번 대답만큼은 무례한 대답이 될 것 같아서요."

"말해라."

"언젠가부터 우린... 마도(魔道)를 잃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눈 아래가 파르르 떨렸다. 적어도 아버지 앞에서는 할 말이 아니었으니까.

"네가 생각하는 마도는 무엇이냐?"

"제가 생각하는 마도는...."

잠시 사이를 두고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생각을 밝혔다.

"절대악을 때려잡는 본교만의 신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지 못한 대답이었는지 아버지는 눈을 크게 뜬 채 나를 돌아보았다.

"...절대악을 때려잡는 본교의 신념이라?"

"전 우리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 정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무엇이냐?"

"절대악입니다."

분명 지금부터 하는 말은 아버지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담담히 내 생각을 아버지에게 전했다.

"세상에는 인간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비겁하고 악랄하며 지독한 악이 존재합니다. 악마조차 혀를 차며 돌아앉을 절대악말입니다. 전 정파가 내세우는 정의와 협이 작은 악을 제압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 절대악을 감당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파는 태생적으로 근간에 용서를 품고 있기 때문이죠. 인간을 아끼는 마음을 품는 한, 인간임을 포기한 채 미쳐 날뛰는 악을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아버지는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내 말에 이렇게 집중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어쩌면 아버지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이런 생각을 하고 계실지 모르겠다.

―그 절대악이 우리 아니었더냐?

―아닙니다, 아버지. 제 세상의 천마신교는 절대악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아니게 할 겁니다.

내 말은 계속 이어졌다.

"비열하고 악랄한 악을 더 비열하고 더 악랄하게 없애버릴 수 있는 무림의 유일한 존재, 전 여기서 우리의 존재 이유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선인지 악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때론 선의 얼굴로, 때론 악의 얼굴로. 정파가 감당하지 못한 대악(大惡)이 우리 앞에 무릎 꿇고 벌벌 떨 때, 저는 비로소 진정한 마도가 세워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무림은 본교의 위엄 앞에 진정 고개를 숙일 겁니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때 우리에게 도움을 청할 겁니다. 오직 천마신교만이 무림을 구할 수 있다면서요.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마도입니다."

단언하건대 아버지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해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으셨을 것이다.

이 생각은 본교에서 배웠거나 깨달은 것이 아니었으니까. 평생 중원을 헤매면서 나 스스로 느낀 것이다.

"마도를 제대로 세우지 못하면 우린 오래 가지 못할 겁니다. 우리가 살기 위해... 우린 우릴 벌해야 합니다."

감정을 감추는 데 능숙한 아버지조차 지금, 이 순간의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거짓말을 확인하기 위해 얼굴에 지풍을 날리는 아버지다. 하지만 이 순간 아버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지풍이 날아와도 열 번은 더 날아왔을 이야기가 펼쳐졌음에도.

아버지는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아버지보다 긴 인생을 살아보았지만, 지금 아버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느낀다.

회귀한 지 고작 며칠이 지났을 뿐이지만 아버지도, 나도 운명이 바뀌고 있음을. 우리는 다른 미래를 향해 방향을 틀기 시작했음을.

이윽고 아버지가 긴 침묵을 깼다.

"더 떨 건방이 남았느냐?"

"아뇨, 오늘은 없습니다."

난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혈천도마가 왜 나를 찾아와서 너를 벌주라고 했는지 알 것 같다."

"왜입니까?"

확신에 찬 아버지의 두 눈이 강렬하게 빛났다.

"네게서 뭔가를 읽었다. 그래서 나를 통해서 너를 시험하려는 거다."

"후계자가 될 가능성을 읽었나 보네요."

"본교를 말아먹을 위험일지도 모르지."

"그게 어느 쪽이든... 해골바가지 같은 늙은이가 눈치는 있네요."

잠시 나를 응시하던 아버지는 뭔가 결심이 섰다는 듯 성큼성큼 정자를 걸어 나갔다.

"따라오너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