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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다음 날부터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되었다.

나는 마군 삼 대부터 한자리에 모았다. 어제 까마귀 사건 때 나선 사람이 삼대의 대주 장호였으니, 그의 불만은 당연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오?"

"뭐 하는 짓이라니? 내가 조사하러 왔다는 소식 못 들었나?"

"그럼 일대부터 조사하지 않고 왜 우리 삼 대부터 조사하는 거요?"

"그건 내 마음이지."

"어제 일로 앙심을 품은 것 아니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나?"

장호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나를 노려보았다.

"자네들은 모든 기록을 제출해야 할 거네. 최근 행적은 물론이고 전장(錢場) 기록까지 모두 조사할 거야."

그러자 삼대 마군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평범한 사람도 의도적으로 털면 먼지가 한 줌인데, 여긴 마군이다. 농담 좀 보태면 여기서 제일 착한 사람이 저기 어느 고을 흑도 두목쯤 될 거다.

장호가 버럭 소리쳤다.

"아무리 당신들이라도 그럴 수는 없소."

"있어."

꽝!

장호가 내 앞에 놓인 책상을 때려 부쉈다.

"이봐, 흥분은 자유지만 반란죄는 중죄라는 것 잊지 마."

반란죄란 말에 삼대 마인 몇몇이 달려와서 장호를 말렸다.

"참으십시오, 대주님."

"좋게 상종할 상대가 아닙니다."

나는 장호를 더욱 자극했다.

"대주인 자네부터 조사할 거네."

"좋소! 나와 담판을 지읍시다! 너희들은 나가 있어!"

장호의 주위로 마기가 휘몰아쳤다.

그러자 수하들이 장호를 진정시켰다.

"대주님! 흥분하시면 안 됩니다."

"걱정 말고 나가 있어."

"네."

수하들이 무서운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더니 이내 밖으로 나갔다. 수하들이 진심으로 그를 따른다는 것이 느껴졌다.

수하들이 모두 나가자 장호는 차갑게 말했다.

"날 이렇게 대한 것, 후회하게 될 거요."

얼굴을 가르는 상처가 더욱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나는 가만히 장호를 응시하다가 목소리를 낮춰서 나직이 물었다.

"언제까지 날 시험할 텐가?"

순간 장호가 흠칫 놀랐다.

"무슨 소리요?"

"투서 보낸 것이 자네지?"

순간 장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무슨 말을 하는 거요?"

하지만 그는 거짓말에 소질이 없는 사람이었다. 눈동자에 이어 목소리마저 떨리자, 이내 장호는 순순히 사실을 인정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흥분하던 그가 나직하게 말하자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어제 자넨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될 상황에 나섰지. 그건 마군주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맞습니다."

"또한 자네의 삼대 무인들이 가장 기강이 잘 서 있더군. 까마귀를 달 때 오직 자네 수하들만이 아무도 욕설을 하거나 비웃지 않았지. 조금 전에 나서서 자네를 걱정하는 마음도 그렇고.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이렇게 조직을 운영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조직 내 부정부패를 그냥 넘기기 힘들었겠지."

사실 그래서 알아맞힌 것이 아니었다.

내가 장호가 투서를 보낸 사람임을 알아차린 것은 장호가 처음 등장했을 때, 서대룡이 보낸 전음 덕분이었다.

―삼대주 장호가 대주들 중 무공이 가장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격도 보통이 아니고요.

그 전음을 듣는 순간, 나는 회귀 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이 시기에 마군 대주가 죽었던 사건이 있었다. 유난히 더 기억이 나는 이유는, 당시 죽은 대주가 마군 대주들 중 제일 강하다는 말을 들어서였다. 그렇게 무공이 강한데 왜 죽었을까? 그런 의문을 가졌던 기억이 났다.

난 죽은 사람이 장호였음을 확신했다. 투서를 넣고 마군 문제를 해결하려다가 결국 마군 내 누군가의 손에 죽은 것이 틀림없었다.

과연 내 예상대로 투서를 넣은 사람은 장호였다.

"투서가 제대로 작용할지 몰라 자세한 내용을 적지 못했습니다."

황천각 역시 혈천도마의 영향력 아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한 것이다.

"한데 이 공자께서 조사를 나오실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내가 나온다는 소식 듣고 어땠나?"

"외람된 말씀이지만, 망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서대룡을 돌아보며 말했다.

"요즘 젊은 사람들 사이에 솔직함이 유행인가?"

"이 공자께선 우리보다 더 젊으십니다만."

"아, 그렇지."

히죽 웃은 후 장호에게 물었다.

"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

"마군주가 마군을 사적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장호가 말해준 이번 일의 내막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돈을 받고 수하들을 암살 청부에 투입하고 있습니다."

"뭐?"

어지간한 일에는 놀랄 일이 없는 나조차도 깜짝 놀랐다. 어디 지역 문파에게서 뇌물이나 받아먹나보다 생각했는데.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마군 같은 고수들이 움직이니, 어디 한두 푼으로 움직이겠는가?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고 있을 것이다.

서대룡이 놀라 물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죠?"

"휴가를 이용하기도 하고, 특별훈련을 빌미로 보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데."

서대룡과는 달리 나는 그것이 가능한 한 가지 경우를 알아차렸다.

"일대 전체가 가담했군."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가 단번에 알아맞히자 장호는 깜짝 놀랐다.

"제일 먼저 우릴 막아선 것이 그들이었다. 까마귀 시체를 보고 욕을 가장 많이 한 것도 그들이었고. 일이 벌어지면 일사천리로 함께 움직이더군. 아까 말했잖나?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일 대주만 봐도 알 수 있고. 하면 자넨 이 사실은 어떻게 알아냈나?"

"이전 조사에서 조사관을 살해하고 자결한 무인이 제 친구입니다. 투서를 넣은 사람도 그 친구였죠."

"자결한 것이 아니라 자결당한 것이군."

"맞습니다. 그 친구가 죽기 며칠 전에 투서를 넣은 사실을 제게 알려줬었습니다."

회귀 전 삶에서는 나는 이 사건을 알지 못한다. 그저 장호의 죽음만 있었을 뿐. 결국 이 사건 역시 밝혀지지 않고 그대로 묻혔다는 뜻이다.

"얼마나 친한 친구였나?"

"입교 동기였습니다. 가족 같았고요."

"왜 그때 밝히지 않고?"

"당시 놈들이 제 친구와 조사관을 살해한 후, 무서울 정도로 엄격하게 내부를 감시했습니다.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였죠."

"누가 죽였나?"

"마군주가 지시하고, 일대주 고당이 직접 움직였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장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번 일은 마군주와 마군일대 전체가 개입한 초대형 부정부패 사건이었다. 거기에 조사관 살해까지. 그야말로 본교 역사상 최대 규모의 범죄.

과연 아버지나 사마명이 몰랐을까?

분명 어느 정도 눈치채셨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를 보내셨을 거고.

과연 내가 마군주와 맞짱 떠서 이번 일을 처리할 수 있는지를 시험하려고 보내신 거다. 상대가 마군주니 죽을 수도 있는데도... 생각해 보니 너무하시네.

아버지, 맹수가 새끼를 절벽에 떨어뜨려 강하게 키운다는 말, 사실이 아니랍니다. 새끼가 떨어지면 그 빠른 발로 뛰어 내려가서 물고 올라온답니다!

내가 장호를 쳐다보며 말했다.

"좋은 친구를 뒀군."

"그 친구가 좋은 친구였습니다. 제가 좋은 친구였다면 그 친구가 죽었을 때, 나섰겠지요."

"그건 어리석은 친구고."

마군이라고 다 쓰레기 같은 자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켜보던 서대룡도 마음이 울컥한 모양이다. 이전 조사에서 죽은 조사관 역시 그가 존경했던 선배였으니까.

두 사람 모두 그 사건으로 친한 사람을 잃은 동병상련의 아픔을 겪고 있었다.

나는 이들 두 사람을 보며 '잃어버린 마도'에 희망이 있음을 느꼈다. 내가 원하는 천마신교는 이런 이들이 중책을 맡는 곳이다.

"용기를 내줘서 고맙네."

"한 번에 저를 알아내신 것을 보고, 이 공자님을 믿기로 했습니다."

"좋은 선택이었어. 참, 자네 전장 기록을 털어도 문제 될 것 있나?"

"없습니다. 탈탈 털어도 먼지 하나 나오지 않을 겁니다."

"먼지는 누구에게나 있어. 자네가 먼지라 생각지 않은 것도 먼지로 만들어 버릴 수 있으니까. 하나 걱정 말게. 그 정도로 털지는 않을 거야."

나는 문을 열고 나갔다. 저 멀리 삼대 수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장 대주가 그대들을 대신해 모든 기록을 내놓기로 했다. 그러니 자네들은 모두 돌아가도 돼."

장호가 버럭 소리치며 내 연기에 맞장구를 쳤다.

"두고 봅시다! 만약 내가 죄가 없으면 그냥 있지 않을 것이오."

그의 눈빛에 고마움이 담겨 있었다. 수하들을 대신해서 조사를 받는다는 말을 해줘서, 수하들이 더욱 자신을 신뢰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회귀 전의 장호는 죽었지만, 지금의 장호는 죽지 않을 것이다.

죽지 말아야 할 사람을 살리는 것, 그것이 내 회귀의 목적이니까.

문을 닫자 서대룡이 내게 말했다.

"이 공자님은 소문으로 듣던 것과는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소문은 어떤데?"

"그냥...."

"그냥 솔직히 말해. 소문을 전하는 거잖아? 네 생각이 아니고."

"천마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들이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아. 어쩌면 칭찬일 수도 있잖아?"

"네?"

"천마에 어울린다가 칭찬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난 공포정치로 본교를 다스리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본교도 변해야 하지 않겠어?"

변화를 이야기하자 서대룡의 눈빛에 이채가 스쳤다. 하지만 이내 다소 침울한 어조로 말했다.

"변화가 말처럼 쉽지는 않지요."

"맞다. 쉽지 않지."

"천마가 되면 본교를 바꾸시려고 노력하실 겁니까?"

당연히.

바뀌지 않는다면 우리 가족은 멸문이고, 본교는 봉문이라는 결과만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속마음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사실 천마가 되는 것보단 중원이나 유람하면서 놀고 싶다."

사실 이 말도 어느 정도는 진심이었다. 화무기만 죽이고 나면 중원을 유람하며 실컷 놀 작정이니까.

"다들 천마가 되려고 영혼까지 팔려는데...."

"이 무슨 배부른 소리냐 이 말이지?"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그건 네가 권력지향형 인간이라 그렇고."

"제가요?"

억울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는 그에게 불쑥 물었다.

"누군가를 도울 때 행복해?"

"...아뇨."

"진급하면 행복해?"

"...네."

이내 서대룡은 한숨을 내쉬며 자학했다.

"아, 전 권력지향형 인간이었군요?"

"다들 행복의 조건이 다르지. 어떤 사람은 돈이고, 권력이고. 어떤 사람은 조용히 사는 거고. 또 어떤 사람은 협의(俠義)고."

"협의를 실천해서 행복하다는 것, 가능할까요?"

"가식 같아?"

"네."

지난 삶에서 그런 사람을 경험한 적이 있다. 너무나 이기적이라서,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협의의 탈을 쓴 사람. 그래서 종국에는 자신까지 속이는 사람. 그는 선하지 않았는데, 끝까지 자신이 협의 길을 걷는다고 믿었다.

그런 사람을 볼 때면 야망을 솔직하게 드러낸 사람보다 불편했지만, 그렇다고 그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 역시 살아가는 방식일 뿐일 테니까.

"이 무림에는 진짜 협의를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 너나 나의 이 간장 종지 크기의 마음으로 헤아리기에는 너무 큰 사람들이 있지."

잠시 나를 응시하던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권력지향형 인간이라서... 잘 모르겠습니다."

서대룡을 보며 피식 웃었다. 동년배들에게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겐 이런 모습이 귀여워 보인다.

"어울리지 않는 자기반성은 그만하고. 가서 장호에 대한 기록이나 털어와. 아까 말했듯이 적당히 털어. 그리고 황천각 조사관들도 더 데려와. 이제부터 대대적인 조사가 들어간다는 분위기를 잡는다."

"알겠습니다."

나는 창가에 서서 밖을 쳐다보았다. 때마침 건너편 건물에서 마군주가 창가에 서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지만 나는 모른 척했다.

내가 바라보는 것은 하찮은 그가 아니라, 그 너머 저 멀리 보이는 천마전이었으니까.

제16회 대답은 이미 들었다.

오후에는 서대룡이 황천각 조사관들을 십여 명이나 데려왔다.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되는 것처럼 보이자 마군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장호를 필두로 모든 마군을 샅샅이 턴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리고 그날 저녁 사고가 터졌다.

방에서 쉬고 있는데 황천각 조사관 하나가 달려왔다.

"큰일 났습니다. 어서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가서 보니 조사실 앞 복도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마군과 조사관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동작 그만!"

나는 대치 중인 마군과 조사관들 사이를 헤집고 들어가서 싸움을 말렸다.

조사관 하나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그냥 얻어터진 정도가 아니었다. 찢어진 얼굴에선 피가 철철 흘러내렸고, 늑골까지 부러진 상태였다.

화가 난 서대룡이 나섰지만, 마군들을 당해내지 못하고 그 역시 얻어맞은 상태였다.

"많이 다쳤나?"

"저는 괜찮습니다만 동료가 크게 다쳤습니다."

"어서 의방으로 데려가도록."

다른 조사관들이 쓰러진 그를 데리고 나갔다.

이 일의 주동자인 일 대주 고당은 뻔뻔하게도 그곳에 있었다.

"그대가 이랬소?"

"그렇소."

주위에 서 있는 마인들은 모두 마군 일대의 마군들이었다. 그래서인지 고당은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고, 주위의 수하들 역시 금방이라도 킥킥댈 것 같은 얼굴이었다.

"왠지 예언이 이뤄질 것 같은 날이군."

내 말에 그 예언이 무엇인지 아는 서대룡은 침을 꿀꺽 삼켰다.

"갑자기 무슨 예언 타령이오?"

고당의 물음에 서대룡이 그의 머리통을 빤히 쳐다보며 대신 대답했다.

"고 대주, 당신은 절대 알고 싶지 않은 예언일 거요."

"그럼 나도 이 공자 그대에게 예언 하나 하겠소. 우리 이 공자께서는 후계자 다툼에서 밀려난 후 본교에서 쫓겨나 무림맹 정파 놈들에게 빌붙어 먹으며 살게 될 거요."

듣고 있던 일대의 마군들이 껄껄대며 웃었다.

나는 화를 내는 대신 오히려 기뻐했다.

"오, 멋진 예언이오!"

"멋지다니?"

"후계자 다툼에서 밀려났는데도 살아남았잖소? 게다 평생 일 안 하고 빌붙어 살 수 있다니! 무위도식(無爲徒食)은 우리 모두의 꿈 아니겠소? 예언 정말 고맙소! 내 거기서 제이의 인생을 살아보리다."

역으로 조롱을 당한 고당은 한껏 인상을 굳혔다.

"황천각 무인은 왜 다치게 했소?"

"복도에서 나와 어깨가 부딪쳤소. 사과 없이 가길래, 손을 봐줬을 뿐이오."

"어깨야 그대가 부딪쳤을 테고. 그이가 사과했어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겠지."

고당은 부정하지 않은 채 웃고 있었다. 주위의 마군들도 함께 웃었다.

"독이야."

내 말에 고당이 의아하게 물었다.

"독이라니?"

"그대의 수하들, 당신에게는 독이라고."

"무슨 헛소리요?"

수하들이 보고 있는 한, 그는 자존심 때문에 물러서지 않을 것이고 결국 내가 계획한 파멸로 치닫게 될 것이다.

"고당, 그대는 작년에도 이런 식으로 본교 무인을 죽이지 않았소? 재작년에는 주점에서 시비가 붙어 셋이나 죽였고."

상대들은 모두 하급 무인들이었고, 사건화되기 전에 마군 쪽에서 덮어버렸다.

"선배에 대한 존경심이 없는 병신들은 천지에 널려 있으니까."

'바로 너 같은 놈'이라는 눈빛이 날 향해 날아들었다.

"당신 그건 알고 있소? 내가 내려오면서 뭘 하나 받아왔는데."

"그게 뭐요?"

"즉결처분권."

즉결처분권이라는 말에 순간 주위가 조용해졌다.

하지만 고당은 오히려 코웃음을 쳤다.

"권한이 있으면 뭐 하겠소? 처분할 능력이 없는데?"

그 말에 다시 수하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말한 독이 이것이다. 어리석은 자가 주위 시선을 의식하면 이렇게 되는 것이다.

원래라면 바짝 긴장할 상황이지만, 수하들 앞에서 허세를 떨고 있다. 자신이 서 있는 무대가 어떤 무대인지 저만 모른다.

내가 한 걸음 다가서자 고당 주위에 있던 일대 마인들이 우르르 앞으로 튀어나왔다.

"우릴 건드는 것은 마군 전체를 건드는 것인데. 과연 이 공자에게 그런 용기가 있는지 모르겠소."

"적어도 난 수하 뒤에 숨지는 않지."

그가 붕대 감은 오른손을 들었다.

"난 어떤 비겁한 인간 때문에 다친 상태요."

그때 내가 오른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나도 오른손을 사용하지 않겠소."

"!"

이렇게 나올 줄 몰랐는지 고당은 흠칫 놀랐다.

하지만 그는 이 무대의 주인공이 자신이라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다치면 교주님께 가서 이를 거요?"

그의 수하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이 웃을 때마다 무대는 더욱 뜨겁게 달궈졌다.

"다치는 것은 물론이고 죽어도 책임을 묻지 않겠소."

"맹세한 거요?"

내가 검을 두 번 두드리며 맹세했다.

그제야 놈이 내 승부를 받아들였다.

"좋소. 어디 붙어봅시다."

고당이 검을 뽑아서 왼손에 들었다. 그가 자신 있게 나선 것은 왼손 역시 오른손만큼이나 능숙하게 검을 다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나는 오른손잡이였고.

나는 뒷짐을 지듯 오른손을 허리 뒤로한 채,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다급하다고 그 손 사용하면?"

고당은 내가 오른손을 사용할까 두려운 모양이었다.

"수하들에게 합공해서 나를 죽이라고 하시오."

"흥! 자신만만하군. 최근에 남도종의 철부지들과 재롱잔치를 열었다는 것은 들었소. 거기서 자신감을 얻었나 본데."

"사실 재롱은 그대 재롱이 더 재밌는데."

"닥쳐라!"

고당이 검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나는 이번 대결 역시 수련의 일부라 생각했다. 수련에서 중요한 것은 역시나 실전 수련, 마군 대주와의 실전은 돈 주고도 못 살 경험이다.

고당은 적당히가 없었다. 어떻게든 내게 상처를 입히려고 온 힘을 다했다.

검이 빗나갈 때마다 아깝다는 탄식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그들이 보기에는 금방이라도 검에 찔릴 것같이 아슬아슬하겠지만 내 마음은 호수처럼 고요했다.

그와 싸워보니 확실히 알겠다. 지금 나의 경지는 고당쯤은 왼손으로도 손쉽게 상대할 수 있음을.

이 싸움의 결과에 대해 모두의 관심은 '몇 수만에?'가 될 것이다.

내가 정한 수는 사십 수였다. 이 싸움이 끝나면 이렇게 소문이 날 것이다.

이 공자, 사십 수만에 마군 일 대주 격살.

혈천도마의 제자인 양포를 이십 여수만에 이겼으니, 고당을 사십 수만에 이기면 그럭저럭 균형이 맞다고 볼 수 있으리라.

사십 수가 되었을 때, 보법에 변화를 주며 놈에게 파고들었다.

내가 검을 든 팔목을 붙잡는 순간, 고당이 거칠게 뿌리치며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그게 가능했다면, 애초에 팔을 붙잡히지도 않았으리라.

팔을 잡은 채 내 몸이 한 바퀴 홱 돌자.

으드드드득!

고당의 팔이 빨랫감처럼 비틀리며 팔목에서 뼈가 튀어나왔다.

"으아아아아아악!"

비명을 내지르는 놈의 얼굴에 다시 주먹이 날아가 박혔다.

퍽, 하는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고당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난 쓰러진 놈의 몸에 올라타서 주먹을 내리꽂았다. 내공을 실었으면 즉사했겠지만, 내공을 싣지 않고 충격을 가했다.

퍽! 퍼억! 퍽!

지켜보던 일대의 마인 하나가 달려들었다.

난 고당의 배 위에 앉은 채로 검을 휘둘렀다.

달려들던 놈의 아랫배가 갈라지며 앞으로 꼬꾸라졌다.

내가 단칼에 놈을 베어버릴 줄 몰랐기에 마군들은 물론이고 서대룡과 황천각 조사관들도 크게 놀랐다.

"미친!"

"죽여!"

고당의 수족 둘이 검을 뽑으며 달려들었다.

다급한 상황에서 휘두른 공격은 그들의 살아생전 마지막 한 수가 되었다.

내가 벌떡 일어나서 연속해서 검을 내지른 것이다. 그들의 검은 내 몸을 스쳤지만 내 검은 정확히 목표한 곳에 박혔다.

푹! 푸욱!

목을 관통당한 둘은 사방으로 피분수를 내뿜으며 쓰러졌다.

그곳은 순식간에 피바다가 되었다. 동료 셋이 시체가 되자 마군들은 달려들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망설였다.

내가 박력 있게 소리쳤다.

"방금 죽은 놈들의 죄명은 반역죄다."

반역이란 말에 그들이 얼어붙었다.

그렇게 놈들을 꼼짝 못 하게 해둔 후 나는 쓰러져 있던 고당에게 걸어갔다.

"너희 대주도 마찬가지다. 교주령으로 온 사람을 때려서 중상을 입혔으니 명백한 반역죄다."

그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네가 작년에 주점에서 시비를 걸어 죽인 사람들 가족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나? 모르지? 신경도 안 썼을 테니. 아버지를 잃고, 자식을 잃고, 남편을 잃고. 그 사람들 제대로 살아가고 있을까? 네까짓 게 뭔데 사람을 때려? 네까짓 게 뭔데 우리 교도들을 죽이냐고?"

"...살려주시오."

피떡이 된 얼굴이었지만, 살고자 하는 열망이 가득했다.

"내가 왜?"

"...회개하겠소."

놈의 입에서 핏물이 울컥 흘러나왔다.

"거짓말. 앞으로도 그럴 거잖아?"

"아니오. 절대 아니오."

"네가 말했잖아?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 내가 언제?"

"네 지난 삶이 다 말했다."

나는 발을 번쩍 치켜들어서 그대로 고당의 머리통을 진각으로 내리찍었다.

슈욱!

꽈직.

놈의 머리통이 수박 깨지듯 터지며 즉사했다.

순간 그곳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마군주가 총애하는 고당을 머리통을 깨뜨려 죽여버릴 줄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으리라.

고당을 격살한 후 난 일대 마인들에게 소리쳤다.

"반역죄는 즉결처분이다. 뒈지고 싶어? 아직도 검을 쳐들고 있게."

그러자 일대의 마인들이 일제히 검을 내려놓았다. 이미 대주는 죽었고, 괜히 나섰다간 목이 날아갈 상황. 그들은 단칼에 자신들을 베는 내 무공에 압도당한 상황이었다.

"마군 일대는 특별한 명령이 있을 때까지 물러나서 근신한다! 이 시간 이후 각자 방에서 나오면 반역죄로 처벌할 테니 그리 알도록!"

내가 다 나가라고 손짓하자 그들은 감히 거부하지 못하고 모두 밖으로 나갔다.

지켜보던 황천각 조사관들은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놀람에 섞인 감정은 분명 기쁨과 감격이었다.

서대룡이 내게 말했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하셨군요."

"어떻게 생각했는데?"

"그게... 마군 일대주를 이길 줄은 몰랐습니다."

"우리에겐 예언이 있었잖아."

웃으라고 한 말이었지만 서대룡은 웃지 않았다. 그는 긴장한 얼굴로 주위에 널린 시체를 둘러보았다.

"아무리 이 공자님이시라 해도... 이래도 될까요?"

겁먹은 그에게 단호히 말했다.

"겨우 서너 명 죽은 것 가지고 호들갑 떨지 마라. 나는 마군 절반을 벨 각오로 왔으니까."

"!"

평소 서대룡이 얼마나 눈을 작게 뜨고 다니는지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날 저녁, 마군주가 나를 찾았다.

그는 자신의 집무실이 아닌 마가촌의 기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마가촌에는 대략 십여 개의 기루가 있었는데 누가 정해놓은 것은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게 직위에 따라가는 곳이 정해졌다. 마군주가 기다리고 있던 기루는 최고급 기루였다.

"자네와 오랜만에 한잔하려고 이곳으로 불렀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나를 대했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은근하고 부드러웠다.

"여기 와 본 적 있나?"

"처음입니다."

"여기 좋아."

과연 차려진 요리나 술도 최고급이었고, 기녀들 역시 대단한 미인들이었다. 악사들의 연주실력 또한 일품이었다.

"비싸 보이네요."

"마가촌에서 제일 비싼 곳이라네. 오늘 자네를 위해 특별히 준비했지."

그는 이런 사치와 유흥을 자랑스러워하는 인물이었다.

"언제 죽을지 모를 인생, 실컷 즐기다가 가야지. 안 그런가?"

"옳은 말씀이십니다."

"자, 마시세."

그와 함께 술을 마셨다. 얼마나 자주 왔는지 마군주는 제집처럼 놀았다. 술을 마시다 노래도 부르고, 벌떡 일어나 기녀와 춤도 추기도 했다. 분명 고당이 죽은 일로 나를 불렀음에도, 그에 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난 지난 삶에서 유흥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적당히 흥만 맞춰주었다.

한바탕 신나게 놀고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비로소 마군주는 기녀들을 물렸다.

"우리 애들과 작은 사고가 있었다고?"

'작은 사고'란 말에는 그가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되어 있었다.

"네. 뜻하지 않게 충돌이 있었습니다."

마군의 대주가 죽은 사건이었다. 본교를 발칵 뒤집을 사건이었지만 마군주는 이것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으려 들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이쯤 해서 정리하는 것은 어떤가? 어쩔 수 없이 쓰기는 했지만 일 대주 그 인간 여러모로 구린 구석이 많은 친구였거든."

모든 것을 죽은 일 대주에게 뒤집어씌우고 끝내자는 의미였다.

'이야, 너도 참 대단한 쓰레기다.'

아무리 그래도 심복이던 수하였는데. 복수는 고사하고 죄인으로 만들려고 하다니. 이래서 죽은 놈만 불쌍한 법이다.

"아무리 사건조사 때문이라지만, 자네가 마군 대주를 죽인 것도 문제 삼으면 큰 문제가 될 일 아닌가?"

"그 점은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어떤가? 이쯤 해서 마무리 짓는 것은? 대주 하나에 수하 셋이면 충분하지 않나?"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좋게 처리하고 싶습니다만, 한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어떤 문제?"

"증거가 없습니다. 공식적인 조사를 나왔는데 상부에 보고하려면 증거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증거야 적당히 가져다 붙이면 되지."

"그게 곤란합니다. 이번에 날아든 투서에 일대에서 사적으로 외부 청부를 받았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거든요. 은근슬쩍 뭉개고 넘어갈 사안이 아닙니다."

장호에게 들은 이야기였지만, 투서에 적혀 있었다고 말했다.

내가 그 사실까지 알고 있을 줄 몰랐기에, 마군주는 놀란 마음을 감추느라 애썼다.

"이번 사건을 끝내려면 증거가 꼭 필요합니다."

그에게 증거를 내어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알아들었을 것이다.

―당신이 증거를 내어놓아야 이번 일이 끝난다.

짧은 밀담이 끝나고 마군주는 다시 기녀들을 들여서 술을 마시고 놀았다.

마군주는 아까보다 더 신나게 즐기려 했지만, 술자리 내내 그의 고민이 느껴졌다. 춤사위가 아까처럼 날렵하지 않았다.

제17회 악인은 흥분하지 않는다.

마군주와 헤어지고 의방으로 갔다.

그곳에 먼저 와 있던 서대룡이 깜짝 놀랐다.

"어? 이 공자님이 여길 어떻게?"

내가 그곳에 온 것이 의외인 모양이었다.

"왜 그렇게 놀라나?"

"아닙니다. 이 공자님이 의방까지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나는 자네가 와 있는 것이 더 놀라운데?"

"네?"

"동료들에게 미움받는다면서?"

"그래서 만회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말과는 달리 함께 있던 동료들과 크게 위화감이 느껴지진 않았다.

"다친 친구 상태는?"

"지금 마의(魔醫)께서 치료 중이십니다. 마의 어르신을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불러야지. 임시로 맡은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함께 일하는 동료인데."

별 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데, 서대룡도, 그 옆에 있던 황천각 조사관들도 살짝 감격한 기색이었다.

잠시 후 마의가 치료실을 나왔다.

본교에서 의술이 가장 뛰어난 신의(神醫)인 그를 정파에서는 마의라 불렀다. 신의는 자신이 그렇게 불리는 것을 좋아해서 우린 그를 마의라 불렀다.

"상태는 어떻습니까?"

"다행히 목숨에는 지장이 없네. 대신 한동안은 요양해야만 복귀할 수 있을 거네."

"최고로 좋은 약을 써주십시오."

"그러지."

우리의 대화를 들은 황천각 조사관들이 내게 와서 고마움을 전했다. 임무 중에 다치더라도 이렇게 마의에게 직접 치료를 받을 기회는 없었으니까.

거처로 돌아오면서 서대룡이 물었다.

"마군주가 뭐라던가요?"

"이쯤하고 돌아가 주기를 바라더군."

"일 대주가 죽은 것에 대해서는요?"

"이번 일의 배후를 그놈으로 하자네."

서대룡은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가장 아끼던 수하가 죽었는데요?"

"가장 아끼는 수하가 아니라 제일 잘 이용하던 수하겠지. 곧 다른 이가 그 공백을 채울 거고. 대체 마군주에게 뭘 기대한 거야?"

"전 그가 수하의 복수를 위해 미쳐 날뛸 줄 알았습니다."

"착각이다. 악인들이 더 잘 흥분할 것 같지?"

"아닙니까?"

"그건 파락호 놈들이나 그렇고. 진짜 악인들은 쉽게 흥분하지 않아. 오히려 순수하고 착한 사람들이 쉽게 흥분하지. 금세 감정이 북받치고."

물론 마군주는 내게 큰 악의를 품었을 것이다. 언제라도 기회가 되면 내 심장에 검을 박아넣으며 오늘의 치욕을 되새기려 하겠지.

"이제 어떻게 하시려고요?"

"미끼를 던져놨으니 어떻게 나오는지 한번 보자고."

"미끼요?"

"물면 말해줄게."

사건을 덮으려면 증거가 필요하다고 했으니, 마군주가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봐야 할 때다.

"그럼 저는 이제 뭘 하면 됩니까?"

"나랑 술이나 마시자."

그러자 서대룡이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어디가?"

"술 사러요. 좋아하시는 술 있습니까?"

"자네 마시고 싶은 거로 사. 자, 여기 돈."

내가 돈을 꺼내주려 하자 서대룡이 성큼성큼 걸어갔다.

"오늘 술은 제가 사겠습니다."

대낮부터 서대룡과 술을 마셨다.

그가 사 온 술은 달아서 마시기는 좋았는데, 과음으로 이어지기 쉽다는 단점이 있었다.

"제가 단 술을 좋아해서요."

"먹는 것 별로 안 좋아한다면서?"

"가끔 술은 마십니다."

술이 몇 잔 들어가자 서대룡이 속마음을 드러냈다.

"일전에 절 보고 권력지향형 인간이라고 하셨지요?"

"끝에 인간이란 말을 붙이니까 너무 매정해 보인다. 그냥 권력지향 성향이 있다고 하자."

"그게 그거죠."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무기력한 것보단 낫잖아?"

침울해 보이는 것과 별개로 서대룡은 큰 꿈을 가지고 있었다. 꿈이 없는 사람이 '변화'를 이야기하진 않을 테니까.

"솔직히 저 출세하고 싶습니다. 거창하게 본교의 부정부패를 막아서 정의를 구현하고 싶은 마음, 요만큼도 없습니다. 저 하나 먹고 살기도 벅찬걸요."

이 자리에 이안을 데려왔어야 했다. 이안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 마음이다.

"자신을 위해 열심히 살고 있다고 말하면서 왜 주눅이 들어? 고개 들어!"

서대룡이 고개를 들었다.

"몇 살이지?"

"서른둘입니다."

"와! 보기보다 나이 많네."

나는 깜짝 놀랐다. 스물서너 살쯤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하긴, 아무리 똑똑해도 특별조사관이 되려면 입각하고 십 년 이상은 경험을 쌓아야 했겠지.

"왜 조사관이 된 거야?"

"솔직히 말씀드리면, 무공으로 성공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절정 고수가 될 수 있는 무공을 배운 것도 아니고, 키가 작아서 무공에 적합한 체형도 아니고...."

황천각은 조직 성격상 전투를 위한 곳이 아니었다. 절대적인 권위로, 교내의 규율을 지키는 곳.

따라서 황천각 조사관은 무공이 강한 사람보다는 똑똑하고 판단력이 뛰어나며 조사 대상을 잘 다룰 수 있는 사람을 뽑았다.

"한심하게 들리시겠지만, 무공으론 자신이 없어서 조사관을 선택했죠."

"자꾸 그걸 강조하는 걸 보니, 무공에 미련이 남는가 보네."

"누군들 아니겠어요? 무림에 뛰어든 사람이라면."

"지금도 안 늦었어."

"늦었습니다."

"이건 좀 한심하게 들리네."

서대룡이 내려다보던 술잔에서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늦어서 안 된다고? 네가 익힌 무공이 약해서 못 한다고? 키가 작아서라고 했나? 정말 그래서라고 생각해?"

아무런 변명도 못 하고 서대룡은 들고 있던 술을 마셨다.

"오랜만에 진실로 두들겨 맞으니 뼈가 아픕니다."

"나중에는 가만있어도 뼈가 쑤실 거다. 늙기 전에 움직여야지."

"저보다도 어리시면서 잘도 그런 말씀을 하시네요."

난 웃으며 술잔을 비웠다.

그때 황천각 조사관이 와서 뭔가를 전해주었다.

"마군 측에서 이걸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한 권의 책자와 수천 냥에 달하는 전표들이었다.

"미끼를 물었네."

책자는 살인청부록(殺人請負錄)이었다. 일대의 마군들을 동원해서 사람을 죽이고 돈을 받은 청부 장부.

"이것을 일 대주 고당의 집에서 발견했다고 합니다."

장부에는 일대 무인 중 누가 청부에 동원되었는지, 얼마를 받고 누굴 죽였는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 공교롭게도 청부록에 적힌 마군들은 아까 내 손에 죽은 자들이었다.

청부록에서 그들이 활동한 부분만 뽑아서 새 청부록을 만든 모양이다. 이미 죽은 자들을 이용해서 이번 일을 마무리하려는 의도. 게다가 건수도 서너 건 정도로 축소해서, 고당과 몇몇 마군들의 일탈 정도로 처리했다. 마군주 자신의 책임은 최소화한 것이다.

내가 책자를 서대룡에게 건넸다.

"찬물에 얼굴 담그고 술 깨!"

"네. 전표부터 조사하겠습니다."

"소용없어. 추적 불가능한 전표일 테니까. 그보단 다른 것을 조사해줘."

"말씀하십시오."

"일 대 마군 중에 제일 똑똑한 놈이 누군지 알아봐. 분명 어울리지 않게 학식도 높고 똑똑한 놈이 하나 박혀 있을 거야."

"알겠습니다."

"나는 마군주를 다시 만나고 와야겠다."

"그는 왜요?"

"시간을 좀 벌어야 하거든."

서둘러 방을 나선 우린 각자의 일을 위해 움직였다.

다시 만난 마군주는 한결 마음이 편한 표정이었다.

"일대주 고당의 집에서 증거가 나왔습니다."

"오, 잘 되었구먼."

"이로써 한숨 돌렸습니다."

"하하, 이거 축하주 마셔야겠구먼. 예약해 둘 테니 이따가 어제 그곳에서 보세."

"한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또? 이번에는 뭔가?"

"이걸 마군 측에서 가져왔습니다. 저희 쪽에서 찾아냈어야 했는데."

그의 얼굴에 짜증이 스쳤다. 뭘 그리 시시콜콜 따지냐는 거다.

"출처가 그리 중요한가?"

"중요합니다. 총군사가 어디 보통 사람입니까? 마군 측에서 받은 정보라고 밝혀지면, 대번에 이번 조사과정과 결과를 의심할 겁니다. 나중에 밝혀지면 저까지 위험합니다."

"하면 어쩌자고?"

"잠깐 조사하는 척이라도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딱 하루만 대대적인 조사를 할 테니, 협조 부탁드립니다. 저라고 계속 있고 싶겠습니까?"

그를 설득할 결정적인 한 가지.

"기밀 서류는 뒤지지 않겠습니다. 그냥 일반적인 문건으로 충분합니다. 어차피 형식적인 조사니까요."

그 말에야 비로소 마군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다.

"좋네. 수하들에게 협조하라고 말해두겠네."

마군주의 허락하에 대대적인 압수수색이 시작되었다.

마군의 장부들과 문건들이 조사실로 옮겨졌고, 조사가 시작되었다.

마군주가 난처해할 기밀 서류는 요구하지 않았다.

어차피 필요 없었다. 내가 필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으니까. 내가 찾은 것은 그들이 처음 마군을 지원했을 때 써냈던 지원서와 위험한 임무를 가기 전에 남긴 유서들이었다.

나는 은밀히 교내에서 제일 실력 좋은 필적 전문가를 불러왔다.

그리고 가져온 자료를 통해 청부록을 기록한 자가 누구인지를 밝혀내도록 했다.

조사를 끝낸 서대룡이 돌아왔을 때, 난 점쟁이 흉내를 냈다.

"일대 무인 중에서 누가 제일 똑똑한 자인지 맞혀볼까?"

설마 하는 그에게 한 사람의 이름을 댔다.

"양구(梁九)지?"

"헛, 어떻게 아셨습니까?"

필적 대조 결과 청부록을 작성한 자가 바로 양구였던 것이다.

이제 누가 마군주의 살림을 담당하고 있었는지 알아냈다. 거기에 필체 대조를 통해 확실한 증거까지 확보했고.

"이제 어쩌죠?"

"어쩌긴.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지. 딴 사람들 모르게 양구를 마가촌 주점으로 데려와. 할 수 있겠어?"

"한 번 머리를 써보겠습니다."

"믿어, 수석입각!"

한 시진 후, 서대룡은 훌륭하게 자신의 임무를 완수했다.

양구를 약속 장소로 정한 마가촌의 한 주점으로 데려온 것이다.

그를 데려온 것은 황천각 소속의 미녀 조사관 조향(曺響)이었다.

"여기 음식이 제 입맛에 맞더라고요."

"나도 이곳 요리 좋아하오."

양구는 어쩌면 오늘 이 여인과 황홀한 잠자리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감에 빠져 있었다.

"왜 이렇게 손님이 없지? 평소에 손님이 많은 곳인데."

양구가 의아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붓하고 좋잖아요?"

"하늘도 우리의 첫 식사를 환영해주는가 보오."

거창하게 하늘까지 들먹이는 그를 조향은 웃으면서 맞춰주었다.

"첫눈에 반하는 인연도 있다는 것을 저는 처음 알았어요."

"분위기도 좋은데 우리 한잔합시다."

"좋아요."

양구가 주방 쪽을 향해 소리쳤다.

"여기 제일 좋은 술과 요리를 내와라."

그러자 주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나와 서대룡이 밖으로 나왔다.

"아쉽지만 술은 다음에 마셔야 할 것 같다."

나의 등장에 양구는 깜짝 놀랐다.

"이 공자?"

대체 무슨 상황인가 눈알을 굴리던 그가 무섭게 조향을 노려보았다.

"망할 년! 나를 속였구나!"

빡.

다음 순간 양구의 턱이 돌아가며 바닥을 뒹굴었다. 서대룡이 벼락처럼 그에게 쇄도해 한 방 날린 것이다.

"너 따위에게 욕 들을 사람이 아니다."

서대룡이 내 흉내를 냈다. 그는 놈의 얼굴에 발바닥을 보이며 무섭게 말했다.

"너도 너희 대주처럼 대갈통을 터뜨려 주랴?"

양구가 미친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서대룡은 자기 덩치의 두 배는 되는 양구를 전혀 겁내지 않았다. 나를 믿어서라기보단, 다른 이유가 있었다.

대기하고 있던 다른 조사관들이 와서 양구를 제압해 뒷문으로 데리고 나가는 사이, 서대룡은 조향에게 다가갔다.

"고생했어."

"저야 조언해 주신대로만 했어요. 마군에서 제일 똑똑하다고 소문나신 분이라서 같이 식사하고 싶다고 했죠. 이렇게 쉽게 따라나설 줄은 몰랐지만요."

"너라면 째려보면서 밥 먹자 했어도 왔을 거야."

순간 조향이 야릇하게 웃었다.

"칭찬이시죠?"

서대룡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조향이 나와 서대룡에게 인사를 한 후, 그곳을 나갔다.

둘만 남자 내가 서대룡에게 말했다.

"남자네, 아주 상남자여."

"네?"

"아까 그 친구 좋아하지?"

"아닙니다."

"아니라고 하기에는 너무 박력 넘쳤는데?"

내 앞에선 칙칙하던 녀석이 조향 앞에서는 빛이 났다.

"그냥 후뱁니다."

서대룡이 붉어진 얼굴로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슬슬 마무리 지어야지. 그러니 조사관이랑 집행무인들, 동원할 수 있는 만큼 모두 동원해."

"네!"

"아까 그 좋아하는 후배도 불러!"

"아니라고 했습니다!"

괜히 목청을 높이며 서대룡이 후다닥 그곳을 나갔다.

"이렇게 표가 나서야...."

나는 주방으로 가서 술을 한 병 가져와서 주점 난간에 걸터앉았다.

"이리 나와!"

그러자 건물 옆에서 이안이 고개를 푹 숙인 채 걸어 나왔다.

"미련곰탱아, 혼자 노는 것이 그렇게 안 돼?"

"그냥 잘 계시나 궁금해서요."

"이리 와. 기왕 왔으니 한잔하자."

"제가 잔 가져오겠습니다."

"됐어."

내가 병 채로 술을 마신 후, 술병을 그녀에게 건넸다.

"마시고 줘."

"감히 어떻게요?"

"왜? 내가 마신 거라 더러워?"

"아뇨, 그럴 리가요. 감히 제 입을 대기가 송구해서 그렇죠. 마십니다, 마셔요."

그녀가 술을 마셨다. 최대한 입을 대지 않고 마시려다 왈칵 쏟아서 옷을 버렸다.

"죄송해요, 도련님."

"이안아."

"네."

"안 그래도 된다."

"...네."

"세상 사람들은 다 그래도 넌 안 그래도 돼."

다시 그녀에게 술병을 받아서 술을 마셨다.

"그래도 며칠 못 봤다고 반갑고 좋네."

이안이 배시시 웃었고 그녀의 눈은 살에 파묻혔다. 정말 기뻐서 웃을 때는 표가 난다.

"무공수련은 잘하고 있어?"

"네, 최선을 다하고는 있습니다만."

"그 이상이 필요해. 최선은 악인들도 다하니까."

"이렇게 말씀해주시면 저도 모르게 힘이 나요. 도련님 충고는 중독성이 있어요."

"자꾸 들으면 싫을걸?"

"그렇지 않을 거예요."

그녀에게 술병을 건넸다.

"내 걱정은 그 술이랑 마셔버리고, 돌아가서 기다려."

그리고 이안에게 끝내주는 안주를 덧붙여주었다.

"이쪽 일은 오늘 마무리된다."

제18회 모두가 복수하는 삶을 살진 않는다.

의자에 잠들어 있던 양구를 깨웠다.

잠결에 주위를 둘러보던 양구는 뒤늦게 자신이 붙잡혀 왔음을 깨달았다.

"맞은 곳은 괜찮나?"

"네? 아, 네."

내가 부드럽게 대하자 양구는 당황했다.

"솔직히 난 자네처럼 머리 좋은 사람 좋아해. 단순 무식해서 말도 안 통하고 고집불통을 무슨 신념인 양 밀어붙이는 인간들 보면 가슴이 답답해지거든. 자넨 안 그러잖아?"

"왜 저를 잡아 오신 겁니까?"

"그건 자네가 더 잘 알 거로 생각하는데? 솔직히 자넬 고문하고 싶진 않아.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쪽 고문이 좀 심한가? 멀쩡한 사람 폐인 만들어서 내다 버리잖아?"

"협박하셔도 소용없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알아. 자네가 뭘 알 거라 생각 안 해. 그냥 명령받은 대로 했겠지. 그냥 그것만 솔직히 말하면 돼."

"모릅니다. 명령받은 것 없습니다."

"그럼 자네 말고 또 다른 자네와 대화를 나눠야겠군."

"또 다른 저라니요?"

"자네보다 자네를 더 아끼는 자네 말이야."

내가 신호하자 밖에서 노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한평생을 고문만 하고 살아온 분이시다. 자백 성공률이 얼마라고?"

작달막한 노인이었지만, 그가 풍겨내는 기운은 정말 무서운 것이었다.

"구 할입죠."

"이 정도면 심문 장인이시지."

"그렇지도 않습니다요. 그 구할 중 오 할이 자백한 후 죽어버렸으니까요."

"나머지 오 할은?"

"폐인이 된 채 구걸로 연명하고 있습죠."

노인이 지닌 원색적인 살기가 워낙 짙어, 양구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내가 양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며 말했다.

"자넨 이만 들어가게. 자네보단 덜 용감하고, 불필요한 고통은 피하고 싶어 하는 또 다른 자네를 불러내서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네. 그 사람이 충성심이나 신념은 자네보다 떨어질지 몰라도, 적어도 자넬 더 사랑할 거야. 그러니 자넨 그만 물러가게."

그 사이 노인은 화로에 불을 피우고 그 위에 갖가지 굵기의 쇠꼬챙이를 달구기 시작했다. 콧노래조차 흥얼거리지 않는 사무적인 모습이 공포감을 더욱 조성했다.

기겁한 양구가 애원하듯 말했다.

"말했다간 저 죽습니다."

"말 안 해도 마군주에게 죽어. 생각해 봐. 자네가 내게 잡혀 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마군주가 어떻게 나올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넬 제거하려 들 거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나보다 더 잘 알잖아?"

흔들리는 눈동자 속에서 양구의 동요와 공포심이 요동쳤다.

"알잖아? 자넬 어디에 숨겨놔도 결국 찾아내서 죽여버릴 거라는 것을. 자네가 살길은 하나야."

"뭡니까?"

양구의 얼굴에 내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댔다. 공포에 질린 그의 눈을 응시하며 악마처럼 속삭였다.

"당하기 전에 먼저 쳐. 물론 자넨 본교를 떠나야 할 거야. 그래도 자네 정도의 무공이라면 어디서든 잘 살 수 있겠지."

이 순간 나는 진짜 악마였다. 그를 유혹하면서 동시에 거짓말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그를 풀어줄 생각이 없었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

"고민할 시간 없어. 지금쯤이면 자네가 우리 손에 넘어왔다는 것이 알려졌을 테니까."

사실 아직 마군주는 그의 실종을 알지 못했다. 잠들었다 깨어난 양구는 시간개념이 없었지만, 그가 붙잡힌 지 고작 한 시진이 지난 상태였다.

"아니면 자네의 의지력을 시험해 보든지."

난 놈이 머리 굴릴 시간을 주지 않으려고 바로 돌아섰다.

그때 뒤에서 양구의 말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황천각 조사관들이 들어오면 있었던 모든 사실을 진술하면 돼."

"그러고 나서는요?"

"우린 마군주를 잡아들일 거고. 자네는 새로운 신분으로 본교를 떠나게 될 거다."

양구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좋습니다. 하겠습니다."

나는 곧장 방을 나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황천각 조사관들을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고문을 하러 온 노인에게 옆에서 계속 쇠꼬챙이를 달구라고 시켰다.

잠시 후, 서대룡이 와서 양구가 자백한 내용을 보고했다.

과연 장호의 추측대로 황천각 조사관과 장호의 동기를 죽이라고 명령한 것이 마군주였다. 그것을 실행한 인물은 이미 죽은 고당이었고. 그 외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악행이 있었다.

"이래저래 정말 많이 죽였습니다."

그랬기에 서대룡은 걱정했다.

"마군주는 순순히 체포당하지 않을 겁니다. 붙잡히면 참형 당한다는 것을 알 테니까요."

"체포 안 할 거야."

"네?"

"죽일 거다."

서대룡은 너무 놀라서 헉, 하고 소리를 냈다. 그의 열린 입이 닫히지 않았다.

"마군주가 체포되면 반드시 혈천도마가 움직일 거야. 친동생이 참형 당하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을 테니까. 그렇게 되면 상황은 골치 아파진다."

모든 사람 앞에서 죄를 까발리고 정식 재판을 통해 놈을 처리하면 좋겠지만, 그건 이상에 불과하다. 놈이 배후에 없다는 조작된 증거가 쏟아져 나올 테고, 그의 죄를 뒤집어쓸 희생양에, 나에 대한 음해와 온갖 음모론까지 나돌 것이다.

"한데 체포 과정에서 마군주가 죽어버리면 사정은 달라지지. 남는 것은 죄를 증명할 증거뿐이니까."

"혈천도마가 복수하려 들 겁니다."

"가족이 죽었다고 모두가 복수하는 삶을 살지 않아. 특히 혈천도마는 복수에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지 않을 거야."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알고 있으니까.

"확신은 못 하지. 다만 복수하더라도 당장 움직이지는 못할 거야. 내가 다치거나 죽으면 누가 봐도 자신이 한 짓이 될 테니까. 오히려 오해받지 않으려면 날 지켜야 할걸?"

"나중에는요?"

"그땐 내가 더 강해져 있을 테니 걱정할 필요 없고."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뭐라 해야 하나, 그런 표정으로 멍하게 서 있는 서대룡을 두고 방을 나섰다. 복도를 걸어가는데 뒤늦게 서대룡이 방문을 열고 뛰쳐나왔다.

"어디 가십니까? 설마... 아니죠?"

"맞으면? 같이 갈래?"

서대룡이 움찔했다.

"술 사러 간다. 걱정 말고 기다려."

* * *

그 설마가 맞았다. 술을 산 것도 맞고.

나를 반긴 마군주는 홀가분한 얼굴이었다.

"조사가 다 끝났다고?"

"네, 덕분에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이공자와 헤어질 생각을 하니 섭섭하군."

마음에도 없는 소리에 나도 마음에도 없는 대답을 했다.

"나중에 제가 후계자가 되면 반드시 이번에 베풀어 주신 호의에 답하겠습니다."

"내가 할 소리네. 이번에 좋게 넘어가 준 호의는 반드시 잊지 않을 거야."

그래, 그는 절대 이번 일을 잊지 않을 것이다. 탐욕스러운 그는 막대한 손해를 봤다. 수족인 일대주 고당을 잃었고, 제 손으로 증거를 갖다 바쳤다. 아마도 조사관이 내가 아니었다면, 죽어도 몇 번은 죽었을 거다.

"그런 의미에서 한잔하시죠?"

내가 사 들고 온 술을 구석 탁자에 준비되어 있던 잔에 따랐다.

"자, 마시세."

그와 건배한 후 술을 마셨다. 그는 축하주였고, 난 이별주였다.

"왜 그러셨습니까?"

"뭐가?"

"늙어 죽을 때까지 써도 다 못 쓰고 죽을 돈이 있을 텐데. 무슨 욕심이 그리 많아 마군을 청부업자로 쓰셨냐는 말씀입니다."

순간 마군주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건 죽은 일대주에게 물었어야지."

"꼭두각시가 뭘 알겠습니까?"

"뭔 소릴 하는 건가?"

"우리 군주님 심보가 궁금해서요."

"심보? 방금 심보라고 했나?"

"하긴. 그 시커먼 속에 뭐가 있겠습니까? 더 갖고 싶은 욕심만 가득하겠지요."

"이놈이 보자 보자 하니까...."

흥분한 마군주가 버럭 소리를 내지르던 바로 그 순간, 기회를 노리던 내 검이 뽑혔다.

쉬이이익!

푸욱!

번쩍 한 줄기 검광이 뿌려지며 내 검은 마군주의 가슴을 꿰뚫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상대의 호흡을 잡아먹고 들어간 데다, 출수가 너무나 빨라 마군주는 피할 수 없었다.

비천검법 제오식(第五式) 창천식(蒼天式).

비천검법의 여덟 검식 중 쾌검식이 펼쳐진 것이다.

심장을 찔렸는데도 그는 즉사하지 않았다.

그는 검이 관통된 채로 천천히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마치 어떻게 된 일인지 상황 파악을 못 하는 것처럼 멍한 얼굴이었다. 그러다 생기 없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심장에 박힌 저 검을 뽑으면 그는 죽게 될 것이다.

나는 담담한 어조로 나직하게 말했다.

"마군주 구천양, 그대를 마군의 사적 유용 및 이십여 차례에 걸친 살인과 살인 교사 혐의로 체포한다."

그제야 마군주의 시선이 자신의 가슴에 박힌 검을 향했다.

"…이건 체포가… 아니잖아?"

"어차피 참형인데, 남은 이들을 위해서 이렇게 가주시오. 기습은 미안했소."

나는 검을 뽑았고, 마군주는 그대로 절명했다.

격렬한 싸움 끝에 죽인 것으로 처리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차라리 행운으로 일 수에 죽였으리라 생각하게끔 하는 것이 더 나을 테니까.

나는 마군들과 황천각 조사관들을 모두 그곳으로 불렀다. 근신 중이던 마군 일대를 제외하고 모두가 모였다.

"대죄를 지은 마군주는 체포 과정에서 불응하다 죽었다."

쩌렁쩌렁한 내 말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모두 경악한 얼굴로 나와 마군주의 시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설마 내게 마군주가 죽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놀란 이들 중에는 삼대주 장호도 있었다. 마군주의 시체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 희열이 스쳤다. 친구의 죽음에 대한 복수가 이뤄진 순간이었다.

서대룡 역시 마찬가지였다. 선배의 복수를 위해, 마군들의 신상을 모두 외웠던 그 노력이 드디어 끝을 맺는 순간이었다.

나는 즉시 서대룡에게 명령했다.

"그대는 마군 일대 전원을 체포해 뇌옥에 가두고, 이번 사건을 정식으로 조사한다."

"네!"

다음으론 장호에게 명령을 내렸다.

"삼대주 장호, 그대의 지휘하에 일대를 제외한 모든 마군은 황천각 조사관들을 도와 마군 일대의 체포를 돕는다! 즉결처분권을 받아왔기에 이 명령은 교주령과 같은 효력을 발휘한다. 즉각 시행하도록."

"네, 알겠습니다."

장호가 마군을 이끌고 서대룡을 따라나섰다.

마군주가 살아서 이놈 잡아 와라, 저놈 죽여라, 열을 올릴 때가 문제지 이미 그는 차갑게 식은 후였다. 공포로 유지되던 충성심은 수장의 죽음과 함께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법.

돌아서 나가던 장호가 나를 돌아보았다.

우린 옅은 미소로 이 순간의 감정을 나눴다.

'감사합니다.'

'자네 덕분이네.'

마군 일대의 체포까지 끝나고 서대룡이 우리가 묵었던 거처로 돌아왔다.

"마군 일대 전원을 체포한 후, 내공을 제압해서 뇌옥에 가뒀습니다. 그 과정에서 일대 무인 여섯이 다쳤지만, 죽은 자는 없습니다."

"잘했다."

일이 다 끝났음에도 서대룡은 걱정스러운 모양이다.

"정말 마군주를 죽이셨군요."

"살려두면 여러 사람이 살인멸구 될 테니까. 투서를 보낸 장호도 결국은 죽게 될 거고. 그를 지키려던 삼대 무인들도 여럿 희생되겠지. 자네도 예외는 아니고."

"아, 거기까지 생각하셨군요."

서대룡은 치밀어 오르는 격정을 감추지 못했다.

"공자님은 정말 정의로우신 분입니다."

"정의는 무슨! 난 내가 물려받을 것에 분탕질 치는 것이 화가 났을 뿐이야. 난 그렇게 이기적인 사람이다. 그러니 오해는 마."

말없이 나를 응시하던 서대룡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자네도 고생했다."

돌아서 나가던 서대룡이 불쑥 말했다.

"그래도 저는... 이공자께서 후계자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저 말은 서대룡이란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극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서대룡은 곧장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를 따라나서려던 나는 뭔가가 눈에 띄어 잠시 침상에 걸터앉았다. 까마귀시체가 놓여 있던 침상의 이불은 깨끗한 새것으로 교체되어 있었다. 그 바쁜 와중에도 서대룡이 갈아둔 모양이다.

일어나 창밖을 보니 건물을 나선 서대룡이 연무장을 가로질러 걸어가고 있었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소리쳤다.

"아까 그런 말은 내 눈 보고 제대로 해주면 안 되나?"

입구를 향한 걸음이 더 빨라지는 서대룡이었다.

그의 뒷모습 너머로, 내가 가야 할 곳이 보였다. 이번 일로 몇 걸음 정도는 가까워진 것 같아서였을까? 평소보다 천마전은 더 웅장해 보였다.

제19회 올여름 우린.

내가 마군주를 죽였다는 소식에 이안은 펄쩍 뛰었다. 어떻게 죽일 수 있었느냐는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대체 어쩌자고 그런 위험한 짓을 하신 겁니까?"

그녀의 말에 '짓'이란 단어까지 포함되었으니 정말 화가 많이 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짓이라고 말한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동생이 죽었는데 혈천도마 어르신이 그냥 있겠어요?"

"그러니까 네가 열심히 수련해서 날 못 건들게 해줘."

"삼십 년을 폐관수련해도 못 막는다고요!"

"그럼 이기지. 늙어 죽었을 테니까."

태평한 내 반응에 이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도련님이 변하신 그 시점부터... 제 삶이 두 배는 더 힘들어졌어요."

"하하. 그럼 살 빠지고 좋지."

"도련님!"

이안뿐만 아니라 교내도 한바탕 난리가 났다.

앞서 혈천도마의 제자가 내 손에 죽었다는 소식과는 그 파급력 자체가 달랐다.

아버지의 부름에 천마전으로 가는 길에서도 그 변화를 느꼈다.

나를 보는 눈빛들이 달라져 있었다.

많은 이가 후계자는 형이 될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이제 달라지기 시작했다.

비무에서 내가 승리했을 때 사람들은 열광했고, 소원으로 사냥을 빌어서 화제가 되었다. 혈천도마의 제자를 죽였을 때는 나의 용기에 놀랐다.

그리고 이제 마군주를 죽였다.

이안 말로는 다들 만나면 내 이야기만 한다고 했다. 안하무인 격으로 여러 문제를 일으켰던 마군을 다들 싫어했기에 내 인기가 순식간에 치솟은 것이다.

심지어 내게 다가와서 인사하는 무인들도 있었다.

물론 '멋지다'라거나 '잘했다'라는 말을 직접 하는 이는 없었다. 혈천도마의 후환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저 말없이 다가와서 포권하고 존경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정도였다. 그 눈빛에서 나에 대한 지지를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다가와서 인사하는 이들은 내가 후계자가 되기를 바라는 이들이었다.

나는 일일이 그들의 인사를 다 받아주며 천마전으로 향했다.

천마전에는 아버지와 총군사 사마명, 그리고 혈천도마 구천파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와 사마명에게 먼저 인사를 올린 다음 혈천도마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르신."

"잘 지내셨는가, 이공자."

동생의 죽음이라는 사태의 심각성에 비해 혈천도마는 침착했다.

혈천도마가 일전에 나를 찾아왔을 때 보였던 그만의 괴팍하면서도 독특한 기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감히 아버지 앞에서는 그러한 기도를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리라.

"이번 일은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보고서에 모두 적었습니다."

"이공자에게 직접 듣고 싶네."

아버지 앞이었지만 혈천도마는 침착하게 자기 할 말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나 사마명은 그 정도는 혈천도마의 권리라 여겼는지 참견하지 않고 그가 하는 대로 두고 보았다.

"조사를 통해 동생분의 중죄를 밝혀냈습니다. 체포하는 과정에서 저를 죽이려 하는 바람에... 어르신께는 죄송합니다."

"괜찮네, 동생에게 죄가 있다면 마땅히 벌을 받아야지. 한데 내가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내 동생이 비록 한심한 놈이라고 해도, 죄가 명백히 밝혀진 상황에서 이공자를 공격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다는 점이네."

순순히 잡혀간 후 형인 자신에게 도움을 청했으리라 추측하는 것이다.

나는 그 사태를 미연에 방지한 것이고.

"왜 그러셨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어린 제게 붙잡힌다는 것이 스스로 용납 안 되셨을지도요."

잠시 나를 응시하던 혈천도마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시신을 보고 왔네. 일격에 찔렀던데?"

"네."

나는 싸움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불리한 상황에서 말이 길어지면 실수나 허점이 나오게 되는 법, 지금은 도마의 상상력에 맡기는 것이 오히려 최선이다.

그는 아버지가 지켜보고 있는 이곳에서 싸움에 관해 꼬치꼬치 캐묻지 못했다. 등을 찔려 죽든, 발바닥을 찔려 죽든, 죽은 놈이 하수고 병신이란 생각이 본교 마인들의 밑바닥에 깔려 있었으니까.

"이공자의 무공실력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출중했군."

"아무래도 제가 아버지 덕을 본 모양입니다. 흥분한 상태였지만 마군주께서 제게 전력을 다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요."

"그랬나 보군."

혈천도마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게 고마움을 표했다.

"솔직히 말해줘서 고맙네. 덕분에 마음이 편해졌네."

"별말씀을요."

제자가 죽고 동생까지 죽었으니 그의 분노는 극에 달했을 것이다. 그야말로 우린 철천지원수가 되었지만, 혈천도마는 아주 작은 분노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얼마나 자기감정을 잘 조절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천마전을 떠나기 전 혈천도마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가 처음 날 찾아왔을 때 두 번이나 내 머리통을 들고 아버지를 찾아오겠다고 말했다. 그만큼 아버지와의 관계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는데.

그렇다면 이 순간 혈천도마는 이런 말을 해야 하지 않을까?

―교주, 내게 이러실 수 있소? 동생을 잡을 거면 날 먼저 불러서 해결했어야지요. 섭섭하외다, 정말 섭섭하외다!

하지만 혈천도마의 눈빛 어디에도 섭섭함은 보이지 않았다. 그를 향한 아버지의 눈빛 역시 평소와 마찬가지였다.

"장례 준비를 해야 할 테니 가서 쉬게."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주님."

혈천도마가 정중히 인사한 후 돌아섰다. 그는 붉은 융단을 걸어가면서 내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가 물러나자 사마명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공자가 모은 증거가 확실해서, 아무런 문제 없이 사건을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걱정해 주신 덕분에 괜찮습니다."

사마명 역시 이 뜻밖의 결과에 궁금한 점이 많을 텐데, 내게 묻지 않았다. 이번 사건조사를 맡긴 것이 아버지였을 테니, 결국 아버지와 나와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겠지.

"큰 공을 세운 이공자에게 교주님께서 상을 내리셨습니다."

천마전 마인 하나가 기다란 목곽을 가져왔다. 조심스러운 걸음걸이에 그 안에 든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단아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문양이 새겨진 뚜껑을 열자, 안에는 검이 한 자루 들어 있었다.

그것이 흑마검임을 확인한 나는 깜짝 놀랐다. 천마검 다음으로 귀한 검을 하사하는 것이다.

"교주님께서 이공자께 흑마검을 하사하셨습니다."

너무 기뻐서 환한 웃음이 지어졌다. 감추려야 감출 수 없는 기쁨에 괜히 너스레를 떨었다.

"주시려면 제 성정에 어울리는 고고한 백화검을 주셔야죠."

그럴 리가 하는 표정으로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네게 어울리는 검은 흑마검이다."

"아들을 너무 모르시네요. 검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느냐?"

나는 천천히 흑마검을 뽑았다.

검에서 뻗쳐나간 차가운 한기가 장내를 장악했다. 아무런 내력도 주입하지 않았으니 순수하게 검에서 나온 기운이었다.

검을 딱 뽑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이 검이 내 검이라는, 내게 너무나 잘 어울리는 검이라는 것을.

"너무 과분한 상 아닙니까?"

내 겸손에 사마명이 아버지를 대변했다.

"과하지 않습니다. 마군주 문제는 본교에서 가장 까다로운 문제였거든요."

"그 골칫거리를 제게 떠넘긴 거군요."

"이공자께서 이렇게 깔끔하게 처리할 줄은 몰랐지만요."

사마명은 다시 한번 감탄하며 아버지에게 물었다.

"교주님께서는 이렇게 될 줄 예상하셨습니까?"

아버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까불다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라 여겼네."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나를 믿었기에 보냈을 것이다. 비천검법의 대성을 이룬 것도 아셨고, 소천동에서 마정단까지 복용했으니 쉽게 당하지는 않으리란 믿음이 있으셨겠지. 물론 마군주의 죽음이라는 결과까지는 예상치 못했겠지만.

그리고 난 아버지가 왜 검을 내려주셨는지도 안다. 혈천도마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내가 공을 인정하니 적어도 이번 일로는 내 아들을 건들지 마라.

무언의 경고인 셈이다. 눈치 빠른 혈천도마가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할 리 없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검을 받쳐 들고 제대로 감사의 예를 올린 후에 천마전을 나왔다.

거처로 돌아오는 길에 누군가 나를 불렀다.

"이공자, 볕도 좋은데 잠깐 쉬었다 가게."

혈천도마가 화원 앞 공터에 앉아 있었다.

그래, 이 늙은이가 그냥 갈 리가 없지.

난 천천히 걸어가서 그의 앞에 마주 앉았다. 그의 시선이 내 허리에 찬 흑마검을 향했다. 그가 어금니를 꽉 깨무는 것이 느껴졌다. 원한이 깊겠지만, 감히 나를 어쩌지 못할 것이다.

"올여름은 유난히 더울 것 같습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혈천도마가 버럭 소리쳤다.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 새끼가! 감히 내 동생을 기습해서 죽여? 오늘 네 놈을 오체분시(五體分屍)해서 내 동생의 무덤에 뿌려줄 테다."

혈천도마가 뿜어낸 마기가 주위를 휩쓸었다. 화원의 꽃들이 순식간에 시들었다. 깡마른 저 몸 어디에 이런 기운을 감추고 있었을까?

내공을 끌어올려 마기에 대항하면서도 나는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다음 순간, 거짓말처럼 마기가 사라졌고 혈천도마가 씩 웃으며 말했다.

"원래라면 이렇게 말했어야지?"

그는 멸천대도 손잡이 끝으로 또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파고드는 손잡이를 손바닥으로 슬쩍 막으며 나도 소리쳤다.

"나이를 똥구멍으로 처먹은 빌어먹을 늙은이야! 네까짓 것들이 뭐라고 감히 본교의 기강을 무너뜨리고 사리사욕을 채우는 거냐? 그깟 부패한 동생을 위한답시고 나선다면, 깡마른 네 몸을 수수깡 부러뜨리듯 다 부러뜨려줄 테다!"

나 역시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그랬다면 저도 이렇게 말했겠지요?"

잠시 어안이 벙벙하던 혈천도마가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하!"

쩌렁쩌렁 울리는 그의 웃음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저 멀리 경계를 서던 마인들이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혈천도마가 갑자기 웃음을 뚝 그쳤다. 언제 웃었냐는 듯 무뚝뚝한 얼굴, 그야말로 그는 감정변화가 변화무쌍했다.

"그래도 내 얼굴을 봐서 좀 봐주지 그랬나?"

"어지간하면 좋게 처리했을 겁니다. 직위에서 물러나는 정도로 마무리 지으려 했죠. 한데 선을 넘어도 한참을 넘었더군요. 아니, 선 자체가 아예 없는 상태였습니다."

혈천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 일인데 어찌 그 사정을 모르고 있었겠는가? 교내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아니고.

"마군 내 부정을 알고 계셨죠?"

"알고 있었네."

"왜 그냥 두셨습니까?"

"내 말을 듣지 않았네. 뭐, 알고 보면 나도 그리 깨끗한 사람은 아니고."

나는 혈천도마가 동생과의 관계에 대해 솔직히 말해주는 것에 놀랐다.

'이럴 때 조심해야 한다.'

혈천도마는 분명 감정적인 사람이다. 그리고 그 감정을 이용할 줄도 아는 사람이다.

"동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솔직히 안도했지. 이제 저놈이 내 앞길을 막지는 않겠구나."

"그 심정, 저는 이해합니다."

혈천도마가 그 작고 찢어진 눈을 크게 뜨자 '정말? 네가 어떻게?'라고 묻는 것만 같았다.

"제 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 것과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내 손으로 처리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저도 안도할 겁니다."

그와 나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다시 그의 눈동자에서 불길이 보였다.

그가 보는 내 눈동자에는 뭐가 있을까? 당신은 나에게서 무엇을 보고 있소?

혈천도마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말한 안도감과는 별개로, 어쨌든 형제를 죽인 원수니 나를 죽일 궁리를 하고 있을 수도 있다. 혹은 지난 일은 저 구름에 실어 멀리 흘려보냈을 수도 있고.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팔마존 당신들과의 싸움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면, 내가 고작 그 정도에 불과하다면, 어차피 화무기에게 죽을 테니까. 난 당신들 정도는 사뿐히 즈려밟고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산다.

혈천도마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맨 처음 내가 건넸던 인사를 이제서야 받았다.

"그래, 올해는 덥겠구먼."

혈천도마는 벌써 덥다며 멸천대도의 큰 날로 살랑살랑 부채질했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올여름 우리가 뜨거워지는 이유가 단지 저 태양 때문만은 아닐 거라는 것.

난 이마에 손 그늘을 만들며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다행히 저는 더위를 안 탄답니다."

제20회 우리가 마귀인데.

새 검을 받았을 때는 처음이 중요하다.

검은 무인과 교감하는데, 흑마검과 같은 절세보검은 교감의 깊이가 다른 검과는 비교할 수 없다.

검이 무인을 거부하는 경우는 없지만, 교감이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검이 지닌 위력을 최고로 끌어내지 못한다.

검의 성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극음(極陰)의 기운을 지닌 병기를 극양(極陽)의 내공을 지닌 사람이 사용한다거나, 불문(佛門)의 무기를 사공(邪功)을 지닌 이가 사용한다거나.

더불어 검을 다루는 방식도 중요하다. 이 흑마검처럼 거친 성질을 지닌 검을 부드럽게 다룬다거나, 부드러운 백화검을 거칠게 다룬다거나. 이런 경우도 검이 지닌 위력을 십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회귀 전 삶에서 나는 검이 주인과 동화되어 스스로 우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고, 나도 저런 검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 검과 그렇게 동화될 수 있을까?'

운기조식으로 마음을 다스린 후, 흑마검을 뽑아 들었다.

진기를 주입하지 않았는데도 검 자체의 예기(銳氣)에 주위가 서늘해졌다.

―반갑다, 내가 앞으로 네 주인이다.

천천히 흑마검에 내력을 주입했다. 내 내공과 흑마검이 처음 만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서리기 시작한 검강.

하늘을 닮은 푸른색 물결이 검날을 타고 일렁였다.

'확실히 다르구나!'

지금까지의 검강 색과 달랐다. 흑마검이기에 더 짙고 어두워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밝으면서도 환한 느낌을 주는 푸른색이었다. 사소한 것에 더 감격할 때가 있는 것처럼, 검강의 색이 바뀐 것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너 마음에 든다.'

나는 내 감정이 그대로 흑마검에 전해지기를 바랐다.

검강을 회수한 후 이번에는 비천검법의 초식을 발휘했다.

흑마검은 부드러운 검이 아니다. 검의 성질에 맞게 최대한 강력하고 거친 기세를 담아 초식을 운용해야 한다.

흑마검으로 펼치는 비천검법은 기존에 펼쳤던 것과는 다른 느낌을 주었다.

한차례 초식을 마친 후 마음속으로 검에게 말했다.

―당분간 우린 이 검법으로 살아남을 거다. 나중에 정말 끝내주는 무공을 알려줄 거야. 그때까지 잘 버티자. 알겠지?

나는 흑마검과 교감하기 위해 노력했다.

마음만 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흑마검이 손에 익을 때까지 수련하고 또 수련했다.

밥 먹고 수련하고, 눈뜨자마자 수련하고. 때론 밥도 먹지 않고 수련했다. 잘 때도 손에 쥐고 잤다. 꿈속에서도 수련했다.

그렇게 한동안 수련에만 매진했다.

오늘도 수련장을 가려고 집을 나서던 나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깜짝 놀랐다.

수백 명의 마인들이 집 앞 큰 공터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혈천도마의 수하들인 도귀들이었다. 혈천도마가 시켜서 온 것인지, 혹은 자발적으로 온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나를 향한 감정이 적대적인 것은 확실했다.

차가운 눈빛과 함께 그들이 내뿜는 마기가 내게 쏟아졌다.

나도 모르게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회귀 전의 그 긴 인생에서도 이렇게 많은 사람의 기운을 한꺼번에 받아본 적은 없었다. 좋은 기운이라도 질릴 판인데, 이건 명백한 살의였다.

더 버티면 내상을 입을 상황!

그럼에도 물러나지 않자 그들의 마기가 더욱 강해졌다. 정말이지 마기가 소나기처럼 투두둑 몸에 박혔다. 온몸이 찢어질 듯 아플 때, 불현듯 떠오른 한 가지 비술.

난 마기를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한 가지 구결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천맥강화술(千脈强化術).

회귀 전 인생에서 배워뒀던 몇 가지 비술 중 하나로, 혈맥을 강화할 수 있는 비술이었다.

진기의 통로인 혈맥은 무인에게 가장 중요한 부위지만, 무인의 몸 중에서도 강하게 만들기가 가장 어려운 곳이기도 하다.

천맥강화술은 여러 무인이 동시에 내기를 발출해서 대상의 전신을 두드려서 혈맥을 강화하는 비술로, 그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효과가 좋았다.

이렇게 많은 마기를 한꺼번에 받을 기회는 흔치 않았기에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천맥강화술을 발휘한 것이다.

언젠가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랐는데, 그게 오늘이 될 줄이야.

내가 눈을 감으며 짐짓 고통스럽다는 표정을 짓자, 옳다구나 신이 난 놈들이 더욱 강한 마기를 쏟아냈다.

'더, 더, 더!'

나는 기쁜 만큼 인상을 찌푸렸다.

놈들은 내가 물러서기를 바랐을 것이다. 마기를 피해 집 안으로 숨기를 바랐을 것이다. 이렇게 며칠이고 이곳에서 압박해 나를 집 밖으로도 못 나오는 겁쟁이로 만들고 싶었으리라.

나는 천맥강화술을 펼치며 앞으로 한걸음 씩 나아갔다.

그러자 마기는 더욱 강하게 쏟아졌다.

온몸의 혈맥이 경련했고, 진기는 무서운 속도로 혈맥강화술의 구결을 따라 온몸을 휘돌았다.

이제 천맥강화술의 경지는 이단을 거쳐 삼단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더, 더, 더!'

앞으로 한 걸음씩 옮길수록 놈들의 마기는 발작했다. 기세 싸움이자, 자존심 싸움이었다.

그렇게 몇 걸음을 걸어 나간 것일까?

천맥강화술은 어느새 사단을 거쳐 마지막 단계인 오단을 향하고 있었다.

원래는 이렇게 빠른 성취는 불가능했다. 천맥강화술에서 가장 어려운 점이 시전자의 마음이 일치하여 하나의 기운을 만드는 것이다.

지금 내게 날아드는 마기에 실린 감정은 하나, 적의였다.

그렇게 끝도 없이 쏟아질 것만 같았던 마기도 점차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도귀들이 마기를 쏟아내는 데에도 내력의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마기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 나는 눈을 떴다. 천맥강화술은 마지막 오단을 완성한 후였다. 덕분에 내 혈맥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나를 쳐다보는 도귀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모두 경악하고 질린 얼굴이었다. 설마 내가 끝까지 마기를 버텨낼 줄은 몰랐겠지.

이렇게 개떼처럼 몰려와서 다짜고짜 마기를 쏟아내는 것은 비열하고 치사한 짓이지만, 오늘만큼은 용서해 주리라 생각했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수백이 모였음에도 그곳은 내 발소리만 났다.

누군가 이때 '죽여!'라고 소리치면 순식간에 장내가 피바다가 될 것 같은 긴장감이 흘렀다.

그리고 이 기 싸움의 승자는 나였다. 앞서 날아들었던 마기를 견뎌낸 것으로, 이미 도귀들의 기세를 꺾어버렸으니까.

선두에 있던 도귀가 옆으로 피해 길을 내어주는 것을 필두로, 마치 일렬로 서 있던 조각들이 연속해서 쓰러지는 것처럼, 뒤에 서 있던 도귀들도 옆으로 비켜섰다. 나는 인파가 만들어낸 길 사이로 걸었다.

도귀들의 표정은 다양했다. 어떤 놈은 놀랐고, 어떤 놈은 질렸고, 어떤 놈은 감탄했으며 또 어떤 놈은 화가 나 있었다.

하지만 나와 눈이 마주친 그 누구도 도발적인 행동을 하지 못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세 싸움에서는 이겼지만, 괜히 자존심을 건들면 도귀들을 미쳐 날뛸 것을 알았기에.

그렇게 나는 조용히 그곳을 걸어 나왔다.

마지막 걸음을 옮길 즈음, 나는 도귀들의 감정이 바뀌었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마기를 이겨낸 것과 그들 사이를 걸어 나간 배짱에 존경심을 표하고 있었다.

마인들은 단순하다. 약한 놈을 보면 짓밟고 강한 자를 보면 숭배한다. 비겁한 속성이라기보다는 본성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렇게 그곳을 완전히 빠져나왔을 때, 비로소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단 한마디도 그들과 주고받지 않았지만, 한바탕 큰 전쟁을 벌인 느낌이었다.

나는 그 길로 한 사람을 만나러 갔다.

붉은 융단을 걸어서 빈 태사의 앞까지 걸어갔다.

감히 계단을 올라가서 앉아볼 수는 없었지만, 저 자리에 앉아 이곳을 내려다보면 어떤 기분이 들지 궁금했다.

그때 뒤에서 들리는 묵직한 목소리.

"앉고 싶으냐?"

목소리의 주인은 아버지였다.

나는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아뇨, 저는 저 의자에 갇히고 싶지 않습니다."

"또 궤변을 늘어놓으려는구나."

내가 웃으며 돌아서서 아버지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아버지는 나를 지나쳐 태사의를 향해 걸어 올라갔다.

"이리 올라오너라."

태사의 옆에서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나는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서 아버지 옆에 섰다.

"앉아라."

괜한 객쩍은 소리 한마디 할 순간이었지만 나는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한번은 앉아보고 싶었던 자리였다.

"어떠냐?"

나는 태사의에서 보이는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붉은 융단을 중심으로 좌우의 기둥들과 벽에 새겨진 악귀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화려하고 웅장한 장식들로 꾸며져 있었지만, 이곳에서 바라보는 장내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황량했다.

"굉장히 흥분될 줄 알았는데, 아무런 감흥이 없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나도 그랬다."

고개를 돌려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그 무뚝뚝한 눈빛에 지난 세월의 회한이 스칠 법도 했지만,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아까 도귀들이 몰려왔습니다. 혈천도마가 시킨 건지, 저희끼리 작당해서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가 내 말을 끊었다.

"저희들끼리 간 거다."

"알고 계셨군요."

역시 아버지는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 나도, 팔마존도, 모두 아버지의 감시하에 있다.

"그들은 제게 노골적인 적의를 보였습니다. 저는 기세에 눌리지 않으려고 버텼고요. 막상 버틸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그곳을 벗어나자 떨렸습니다."

"그들이 두려웠더냐?"

"아뇨, 도귀들이 아니라 제 판단이 틀렸을까 봐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만약 누군가 흥분해서 달려들어 싸움이 벌어졌다면, 전 그곳에서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설령 살아남는다고 해도 도귀들을 학살한 제가 후계자가 될 수는 없겠지요. 그래서 두려웠나 봅니다. 모든 것이 걸린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또 올 수도 있다는 사실에...."

솔직한 심정을 그대로 전했다.

누군가에게 이 마음을 전하고 싶었고, 그건 이안이 아니라 아버지였다. 왜일까? 정서적으로는 이안이 더 가까운 사람인데.

"그런 생각이 들자 아버지가 뵙고 싶었습니다."

아버지는 무심히 툭 내뱉었다.

"마인은 돌아보는 사람이 아니다. 앞만 보고 가는 사람이지."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가는 인생이라... 그 인생이 어떤 인생인지 누구보다 나는 잘 안다.

'아버지 말씀대로 돌아보지도 않겠지만, 그렇다고 앞만 보지도 않을 겁니다.'

우린 그렇게 태사의에서 보이는 광경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여기서 보이는 풍경이 너무 황량합니다. 굳이 저런 악귀상을 세워둘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마귀란 것을 잊으면 안 되니까."

그 말에 이질감이 드는 것을 보니 마귀로 살 팔자는 아닌가 싶다.

"차라리 미녀상 어떻습니까? 그 유명한 중원사화(中原四花)로 말입니다. 귀퉁이마다 한 명씩 세워두는 겁니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아버지가 한심하다는 듯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헛소리가 나오는 걸 보니 일어날 때가 됐나 봅니다. 앉으십시오, 아버지."

태사의에서 일어나서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아래에서 돌아서니 아버지는 여전히 태사의 옆에 서 계셨다.

나를 내려다보는 그 눈빛을 마주 보며 차분히 물었다.

"혈천도마를 죽여도 됩니까?"

제21회 네 걸음이면 충분하다.

"하하하하하!"

아버지의 웃음소리가 대청을 쩌렁쩌렁 울렸다.

"사람 죽이겠다는 말이 이렇게 웃으실 일입니까?"

웃음을 뚝 그친 아버지가 단정하듯 말했다.

"마군주는 죽일 수 있어도, 혈천도마는 어림없다."

아직은 못 죽인다는 말씀.

"그럼 왜 저를 혈천도마와 충돌하게 만드셨습니까? 책임지십시오!"

"오냐, 책임지마."

시원한 대답만큼이나 책임도 시원하게 지셨다.

"네게 황천각주를 맡기겠다."

난 깜짝 놀랐다. 설마 나를 황천각주에 임명할 줄은 정말 꿈에도 예상 못 했으니까.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물론 천마의 의지에 불가능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일개 조사관이 마군주를 죽인 것은 가능한 일이더냐?"

일이 이렇게 흘러가자, 어쩌면 아버지는 애초에 나를 황천각주로 임명하는 일까지 염두에 두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강 한 번 제대로 잡고 싶다면서?"

나는 저 말이 이렇게 들렸다.

칼을 쥐여줄 테니, 한번 날뛰어 봐라.

좀 더 나쁘게 말하자면 네가 방패가 되고 칼받이 노릇을 해라.

아버지가 직접 나서기에는 이래저래 걸리는 일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천방지축 날뛰는 천마의 막내아들이라면?

'혹 저를 이용해서 아버지가 미뤄두셨던 일들을 처리하시려는 겁니까? 제가 죽든 말든 상관없이요.'

비정한 부정(父情)인지, 아니면 나를 후계자로 삼으려는 결정에서 나온 선택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래, 이 문제를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말자.

일전에 아버지가 해준 말씀이 옳다.

―절대 알 수 없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

마음을 읽으려 하지 말고, 보고 들은 대로 판단하면 된다. 상대의 마음을 읽어서가 아니라 펼쳐지는 상황으로 판단하는 거다.

아버지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 벽에 자식을 위해 글귀를 남기는 사람이기도 하고, 이용 가치가 있다면 이렇게 자식을 위험한 일에 내던져버리는 사람이기도 한 것이다.

오히려 이런 아버지라서 편하다. 아버지가 원하는 것을 해드리고, 내가 필요한 것을 얻으면 되니까.

"소를 잡으라고 내보내시면 칼 한 자루는 쥐여주셔야죠."

"원하는 게 있느냐?"

회귀한 후 반드시 가야 할 곳 중 한 곳의 이름이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저를 천마서각(天魔書閣)에 넣어 주십시오."

천마서각은 온갖 귀중한 무림비급을 모아둔 곳으로 천마를 비롯한 극소수의 허가된 사람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천마서각은 왜?"

아버지의 표정에 절로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곳에 들어간다고 절세신공을 익힐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비급 제목만 보다 끝날 거다."

그만큼 많은 비급이 있었다. 설령 운 좋게 최상의 무공을 찾는다고 해도 내가 익힌 비천검법과 비슷한 수준.

아버지의 눈빛에 '그걸 네가 모를 리 없을 텐데?'라는 의구심과 질책이 담겼다.

"제 운을 시험해 보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궁금하실 거다. 이놈이 대체 무슨 의도로 이러는가 하고.

잠시 나를 응시하던 아버지가 결정을 내렸다.

"네게 어떤 야비한 의도가 있는지 모르겠다만."

굳이 안 붙여도 좋았을 말씀을 하신 후에야 아버지는 허락하셨다.

"칠 일간 천마서각 출입을 허락한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칠 일, 아직 후계자가 아닌 나에게는 그야말로 파격적인 시간이었다. 그만큼 황천각주를 맡기는 일이 중요한 일이란 뜻이기도 했다.

"본교의 기강은 딱 칠 일만 기다리라고 하십시오!"

* * *

내가 천마서각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사실에 이안은 몹시 흥분했다.

"도련님, 천마서각에 들어가시면 한 가지 무공을 집중적으로 외워서 나오셔야 해요. 욕심내시면 아무것도 얻지 못해요. 참, 밥은 꼭 챙겨 드세요. 괜히 시간 아낀다고 식사를 거르시면 기억력이 떨어져서 오히려 손해니까요. 아, 그리고 거기가 너무 넓어서 길을 잃을 수 있으니...."

쉬지 않고 떠들어대는 이안을 보며 난 다시 한번 반성했다.

내 기억 속의 이안은 정말 과묵한 사람이었다.

이렇게나 수다쟁이인 그녀인데.

그때의 난 그랬나 보다. 그저 후계자가 되고 싶은 열망만 가득한 채 천마전 지붕만 쳐다보았던 모양이다. 정작 내 꿈을 이루게 도와줄 사람들은 바로 눈앞에 이렇게 서 있는데.

그래서 이안은 과묵해졌으리라. 이 말 많고 유쾌한 여인을 과묵하게 만든 것은 나다.

"제 말씀 들으셨습니까?"

"들었어. 한 가지에 집중하고, 밥 잘 챙겨 먹어라."

"잘 주무시고요. 그럼 꼭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랄게요. 잊지 마세요. 후계자가 아닌데 천마서각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하늘이 내린 기회에요."

"어휴, 귀에서 피 나겠다. 으윽, 이미 나고 있을지도."

"앗, 죄송해요. 앞으론 말수 줄이겠습니다."

"아냐. 우울증 걸린 수신호위는 더 끔찍해."

"그럼 제 말 꼭 명심하시고, 아 또 생각하셔야 할 것이 비급을 찾으실 때는...."

"제발!"

사실 이안은 그렇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 넓은 천마서각에서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으니까.

내가 천마서각에 들어오려는 이유를 설명하자면, 회귀대법의 마지막 재료인 비마혼을 찾을 때로 돌아가야 한다.

난 비마혼을 구하려고 봉문 이후의 천마신교로 돌아갔었다.

얼굴에 깊은 상처를 내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이미 죽은 사람이었고, 교를 떠난 지 수십 년이 지난 데에다 얼굴까지 훼손한 나를 그들은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일반 무인에서 새로운 교주와 독대할 수 있을 정도의 자리까지 오직 내 힘으로 올라갔다.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비마혼을 구했던 그 마지막 해, 나는 한 무공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풍신사보(風神四步).

풍신사보를 얻은 사람은 바로 당시 봉문마교의 교주였던 주백도(周栢道)였다. 봉문 이후 수십 년 세월 사이에 교주가 여섯 번이나 바뀌었으니, 본교가 얼마나 혼란했을지 상상할 수 있으리라.

난 그가 술자리에서 내게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한다.

"...실전된 풍신사보를 찾는 바람에 교주 자리에 오를 수 있었지."

풍신사보.

단 네 개의 초식으로 이뤄진 명실공히 최고의 보법.

한때 천마의 무공을 보좌하기도 했다는데 어느 대에선가 실전되면서 더는 전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한데 주백도가 그 풍신사보를 얻은 것이다.

"...전대 교주와 그 혈육들이 갑자기 참변을 당하는 바람에 천마의 독문무공인 구화마공이 실전되었다네. 그나마 다행은 천마전만 쓸렸기 때문에 본교의 전력을 보존한 채 봉문할 수 있었다는 점이지. 이후 본교는 교주 자리를 두고 혼란의 연속이었지. 만약 내가 풍신사보를 얻지 못했다면 본교는 혼란이 계속되다 자중지란(自中之亂)으로 무너졌을 것이네."

자신의 무공에 보법을 더한 것만으로 교주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으니, 풍신사보가 얼마나 뛰어난 무공인지 알 수 있었다.

"풍신사보는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천마서각에서. 당시 난 천마서각의 관리 책임을 맡고 있었지."

"그곳에 비급이 있었다면 왜 실전되었다고 알려졌습니까?"

"책장에 꽂혀 있었던 것이 아니었으니까."

"...!"

그날 그와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그날 그가 기분이 좋지 않았다면, 그날 그가 취기에 올라 무용담을 자랑하지 않았다면, 나는 풍신사보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천마서각은 내가 살면서 본 서고 중에서 가장 넓었다.

아흔아홉 개의 거대한 책장이 서고를 꽉 채우고 있었는데, 무공에 관한 온갖 비급들이 꽂혀 있었다. 곳곳에 보는 사람의 심장을 뛰게 하는 절세 무공들도 있었는데 본교가 오랜 세월을 거쳐 모아온 비급들이었다.

나는 천천히 오래된 책 냄새를 음미하며 책장 사이를 걸었다. 끝도 없는 책장들, 그 책장에 꽉 채워진 무공비급들, 정말 제목만 읽어도 칠 일이란 시간이 모자랄 것 같았다.

물론 나는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를 할 필요가 없다.

"여기구나."

내가 멈춰 선 곳은 열아홉 번째 책장 앞이었다.

이곳에는 음공(音功)에 관한 비급들이 꽂혀 있었다. 물론 내 새 인생을 음악과 함께 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꽂혀 있는 비급들이 아니라 책장 아래를 보았다. 책 무게에 한쪽이 내려앉은 책장의 높이를 맞추기 위해 책이 한 권 받쳐져 있었다.

내공을 사용해서 책장을 살짝 들었고, 아래에 받쳐져 있던 책을 꺼냈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낡은 비급 표지에 적힌 네 글자.

風神四步.

"정말 여기 있었구나!"

나는 뛸 듯이 기뻐했다.

다시 과거 주백도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풍신사보는 책장에 꽂혀 있었던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럼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 귀한 비급이 열아홉 번째 책장의 받침대로 쓰이고 있었네."

그가 이것을 발견한 것은 강박증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는 젓가락을 놓아도 똑바로 놓아야 하고, 옷을 개어도 반듯하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개어야 하는 성격이었다. 탁자 귀퉁이에 물잔이 올려져 있으면 그것이 떨어질까 신경 쓰여 밥을 먹지 못한다고 했다.

천마서각에서도 책장 아래 받쳐진 그것이 삐뚤어진 것을 보고 똑바로 맞추려는 과정에서 그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 귀한 비급이 왜 책장 받침이 되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무공을 발견한 주백도 역시 알지 못했다.

과거에 어떤 비화가 있었겠거니 한다.

천하제일의 보법을 이곳에 숨겨야 하는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것이다. 후계 다툼의 과정일 수도 있고, 어느 대 천마의 잘못된 사랑의 결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누군가의 그릇된 야망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덕분에 나는 풍신사보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비급의 첫 장을 열었다.

본격적인 구결에 앞서 도도하게 적힌 한 줄의 글귀가 내 가슴을 벅차오르게 했다.

―천하를 걷기에 네 걸음이면 충분하다.

그래, 이거지! 천하제일을 다투는 무공인데 이 정도 도도함은 있어야지.

풍신사보는 크게 네 초식으로 이뤄져 있었다.

암영보(暗影步)

점멸보(點滅步)

명왕보(冥王步)

쾌속보(快速步)

첫 번째 걸음인 암영보는 어딘가 잠입할 때의 보법이었다.

처음에는 한 사람의 눈을 피하는 정도지만, 경지가 오를수록 피할 수 있는 숫자가 늘어난다. 암영보가 대성을 이루면 수십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서도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수 있다고 설명되어 있었다.

두 번째 걸음인 점멸보는 방어를 위한 보법으로 피할 수 없는 공격이 날아들었을 때, 반드시 살길을 찾아내는 회피법이었다.

세 번째 걸음인 명왕보는 상대를 향해 파고드는 보법이었는데 어떤 방어나 회피도 무력화할 수 있다고 설명되어 있었다.

마치 명왕보는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내가 열어줄 테니, 목은 네가 따라.

따라서 명왕보와 점멸보는 그야말로 모순적이었다. 반드시 피하는 보법과 반드시 파고드는 보법, 두 초식이 충돌한다면 무공을 펼치는 무인의 자질에 따라 창이 부러지든, 방패가 뚫리든 할 것이다.

마지막 걸음인 쾌속보는 빠름의 끝이 어디인지를 보여주는 경공술이었다. 쾌속보의 경지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중원은 좁아질 것이다. 대성을 이룬 쾌속보라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이동을 보여줄 것이라 확신했다.

결국 풍신사보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스며들고, 피하고, 공격하고, 달리고.

누군가를 상대함에 있어 이 완벽한 네 발걸음이면 충분하지 않느냐고.

나는 천마서각 구석에 앉아 조용히 구결을 외워나갔다.

이안의 조언은 충실히 받아들였다. 챙겨온 육포로 끼니마다 잘 챙겨 먹었고, 잘 시간이 되면 푹 잤다. 대신 맑은 정신으로 남은 모든 시간을 풍신사보에 집중했다.

구결의 깊이는 바다처럼 깊었고, 담긴 뜻은 하늘처럼 넓었다.

하나의 훌륭한 초식을 바탕으로 상황에 맞게 변형시켜서 사용하라고 만든 무공이었다. 그래서 수십 개의 초식으로 빈틈없이 꽉 짜인 무공보다 이해하기가 훨씬 어려웠다. 회귀 전의 인생이 없었다면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깊이였다.

그래서였을까? 한 번 읽을 때가 다르고, 두 번 읽을 때가 다르고, 열 번째 읽을 때가 달랐다.

그렇게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결에 빠져들었다.

천마서각에 들어온 지 칠 일 후, 나는 풍신사보의 구결을 완벽하게 외웠고 그것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겨우 일 성의 경지였고, 앞으로 계속된 수련으로 경지를 높여갈 일만 남았다.

나는 비급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뜯어내서 삼켜버리고 나머지를 책장 아래에 받쳐두었다. 풍신사보는 천하제일보법에서 책장 받침으로 역할이 바뀌었다.

나는 다른 운 좋은 사람이 나타나서 풍신사보를 배우기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내 욕망에 솔직하고자 한다.

그러고 나서 나는 천마서각 밖으로 첫걸음을 옮겼다.

제22회 몰래 가르쳐주면 되죠.

천마서각에서 나온 나는 천마전부터 찾아갔다.

"다녀왔습니다."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시던 아버지가 앞으로 다가오게 했다.

"더 가까이 오너라."

나는 다섯 걸음 앞으로 걸어 나갔다.

"조금 더."

이번에는 세 걸음.

"더."

계단 바로 앞까지 걸어갔다.

아버지는 나를 탐색하고 있었다. 무슨 무공을 익혔는지 궁금하셨겠지만, 나는 풍신사보를 사용하지 않고 걸었기에 내 움직임으로 뭔가를 알 수는 없었다.

"천마서각에서 무슨 무공을 익혔느냐?"

"비밀입니다."

당연히 내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아버지는 망설이지 않고 마기를 발출했다.

"두 번 묻지 않겠다."

날아든 마기는 앞서 도귀들이 보낸 마기와는 차원이 달랐다. 따끔거리고 아픈 것이 아니라, 어두운 심연(深淵)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몸이 차가워졌고 진기의 흐름이 절로 느려졌다.

애초에 아버지에게 숨길 생각이 없었기에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보법을 익혔습니다."

"어떤 보법?"

"풍신사보입니다."

이건 놀람이 만들어낸 정적이다.

이내 잠시 거두어졌던 마기가 다시 나를 덮쳤다.

"헛소리는 집어치워라."

"정말입니다."

마기는 나를 더 깊은 심연으로 끌어들였다. 마기가 목까지 차오르고, 얼굴까지 빠져드는 와중에도 아버지를 향한 내 눈빛은 숨기는 것이 없었다.

나는 늪과 같은 심연으로 한없이 빠져들었다. 숨이 막혀왔다. 설마 나를 죽이기야 하겠느냐는 마음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질식의 공포가 나를 엄습해왔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거대한 뭔가가 나를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

그것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를 짓누르던 것들이 사라졌고 나는 천마전의 붉은 융단 끝자락에 서 있었다.

마기를 거둬들인 아버지가 명령하듯 말했다.

"네가 배웠다는 무공을 펼쳐봐라."

아직도 아버지는 그것이 풍신사보임을 믿지 않았다.

"그 대가로 뭘 주실 겁니까?"

아버지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의 인생에서 누군가 조건을 걸며 뭔가를 요구한 적은 한 번도 없었을 테니까.

"살려는 주마."

나는 옅게 웃으며 뒤로 물러나 대청 가운데 섰다.

그리고 풍신사보를 천천히 펼쳐 보였다.

암영보가 펼쳐지자 아버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첫걸음부터 다른 무공과 다름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렇게 풍신사보의 초식을 모두 마쳤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아버지였지만 지금은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실전된 무공이었기에 아버지도 풍신사보를 오늘 처음 보았겠지만, 이 무공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정확히 알아보신 것이다.

"풍신사보를 어디서 익힌 것이냐?"

이제 아버지는 이 보법이 풍신사보임을 믿었다.

"천마서각에서 익혔습니다."

휘익.

순식간에 공간을 가로질러 내 앞까지 온 아버지가 내 목을 움켜쥐며 차갑게 물었다.

"감히 내게 거짓을 고하는 것이냐?"

당장에라도 내 목을 부러뜨리려 했다. 처음으로 아버지가 내 몸에 손을 대는 순간이었고, 그 감정은 분노였다.

하지만 나는 화가 나지 않았다. 무공엔 진심인 아버지다. 그랬기에 저 자리에 있는 것이고, 이렇게 강한 것이겠지. 나는 이런 아버지를 이해한다.

"천마서각에는 풍신사보가 없었다."

온몸의 피가 얼어붙을 것 같은 차가운 기운이 아버지의 손끝을 통해 전해져왔다. 앞서 심연에 잠겨 드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저는 분명 그곳에서 익혔습니다."

"거짓말이다!"

"그 많은 비급을 다 보셨다고 장담하실 수 있습니까? 보법이 꽂힌 책장이 아니라 다른 책장에 꽂혀 있었을 수도 있지요."

"그렇다면 넌 풍신사보가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구나!"

"몰랐습니다."

"거짓말!"

"정말 몰랐습니다. 다른 무공을 익히려다가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이 부분만큼은 딱 잡아뗐다.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아버지는 믿지 않으시겠지만.

아버지가 목을 움켜쥐고 있던 손을 거두며 다시 물었다.

"어디에 있었더냐?"

"책장 아래 받침대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한데 네가 어떻게 발견한 것이냐?"

"삐뚤게 받쳐져 있는 것을 바로 하려다가 발견했습니다."

이 말을 믿어야 할지 고민하던 아버지가 수하를 불러 그것을 가져오게 하려다 말았다.

"이미 비급의 중요 부분은 없애버렸겠군."

"어떻게 아셨습니까?"

"나라도 그렇게 했을 테니까."

잠시 나를 노려보던 아버지는 내게 날아올 때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태사의로 돌아갔다.

"구결을 불러라."

역시! 이래야 우리 아버지지.

내 목적은 아버지를 꺾고 천마 자리에 오르는 것이 아니다. 지난번과 똑같은 상황으로 화무기 놈을 기다릴 생각도 아니다.

놈을 죽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회귀의 목적은 아버지와 천마전 식솔들을 살리는 것이었으니까.

복수가 이번 회귀의 전부가 되게 하지 않을 것이다. 복수는 회귀의 이유고, 회귀의 목적은 이번 생을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화무기를 죽인 후, 아버지가 자리를 물려주실 때까진 교에 묶이지 않고 천하를 떠돌며 즐겁게 살아갈 작정이다.

그때부터가 진짜 내 인생이다. 이 젊은 몸으로 거칠 것 없는 삶을 살 것이다. 내 자서전의 제목은 '인생은 검무극처럼'이다.

그런고로 아버지에게 보법을 가르쳐주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론 공짜로는 안 되지.

"싫습니다."

화가 난 아버지가 다시 내게로 날아오는 수고를 덜어드리기 위해 나는 재빨리 말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죠."

"사냥터에서 내가 가르쳐준 비기는 공짜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건 사냥터에서 드신 술값이지요."

뻔뻔한 내 말에 아버지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체 지금까지 어떻게 참았더냐? 이렇게 뻔뻔한 놈이."

"커야 개기죠. 이제 키는 아버지보다 제가 큽니다. 이렇게 클 때까지 이 악물고 꾹 참았습니다."

나는 아버지에게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아버지. 저 못 이깁니다. 제가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지 모르실 겁니다.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는데요.

"원하는 것이 있느냐?"

"드릴 것이 무공구결이니 무공구결로 받는 것이 공평하겠지요. 마음 같아선 구화마공을 전수받으면 좋겠지만 그건 어려울 듯하니, 아쉬운 대로 천마호신공(天魔護身功)을 원합니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천마호신공은 말 그대로 몸을 보호하는 호신공으로, 오직 천마에게만 전수되는 천마의 독문무공이었다.

"불가(不可)!"

"이쪽은 풍신사보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제가 손해 보는 장사입니다."

"천마호신공은 오직 천마와 그 후계자만이 익힐 수 있다."

"몰래 가르쳐주시면 되죠. 어차피 천마호신공은 절대 표나지 않게 발동하는 무공이니, 남들은 결코 알지 못할 겁니다."

외부에 알려질 일은 없는 무공이었다.

아버지의 고민이 느껴졌다. 정색해서 화를 내고, 강하게 압박하면 결국 나는 알려드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러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버지였다.

어쨌든 내 처지에서는 반드시 얻어야 하는 무공이었다. 천마호신공을 익히면 목숨 하나가 더 생기는 셈이니까.

"생각해 보시고 기별 주십시오."

정중히 인사하고 돌아서려는데,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신 풍신사보가 먼저다."

놀랍게도 아버지는 천마호신공의 전수를 결정하신 것이다.

정말 천마호신공을 알려주신다고?

어쩌면 아버지는 내가 후계자가 되기를 바라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어차피 팔마존들을 상대하다 죽을 놈이니, 신경 쓰지 않는 것일까?

"좋습니다."

"왜 흔쾌히 받아들이는 거냐? 내가 풍신사보만 받고 알려주지 않을 수도 있는데."

"적어도 아들 앞에서 쪽팔린 짓을 하실 분은 아니시니까요."

아버지의 입가에 비웃음이 스쳤다. 쪽팔린다는 표현까지 쓴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최강수를 쓴 거다. 아버지가 어찌 내 속을 모르겠는가?

'죄송합니다, 아버지. 그렇지만 풍신사보를 그냥 넘겨드릴 수는 없잖아요?'

다행히 아버지의 반응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어리숙하게 무공구결을 바치는 것보다, 이렇게 대가를 챙기는 것을 더 높이 평가하실 분이니까.

"좋다. 구결을 알려다오."

"네."

풍신사보의 구결을 아버지에게 알려주었다.

아버지는 조용히 눈을 감고 구결을 되새겼다.

세 시진이 지났을 때, 아버지는 풍신사보를 펼쳐내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지켜보았다.

아버지가 펼쳐내는 풍신사보는 내가 펼쳤던 것과 같으면서도 달랐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만 같았다.

나는 이 무공을 이렇게 해석한다.

난 아버지가 펼치는 풍신사보를 단 한 동작도 빠지지 않고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이대로 흉내 내겠다는 것이 아니다. 어떤 부분이 나와 다르고, 왜 다른지. 그 미세한 차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무학의 경지가 결정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초식을 다 펼친 후 아버지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나 역시 방금 아버지가 펼친 풍신사보와 내가 펼친 풍신사보를 비교하며 깊은 명상에 빠져들었다.

나는 배워야 한다.

무공을 대하는 아버지의 자세를. 최고가 생각하는 방식과 해석의 깊이를.

이윽고 아버지가 명상에서 깨어났다.

"정말 좋은 무공이구나."

아버지에게서 좋은 무공이란 말이 나왔다면 이건 극찬이었다.

"양심의 가책 때문에라도 꿀꺽하실 수 없죠?"

아버지는 코웃음을 치셨지만, 이번만큼은 만족스러움이 함께 깃들어 있었다.

이제 회귀 후 가장 큰 변수를 만들었다.

과연 화무기는 풍신사보까지 익힌 아버지를 이길 수 있을까?

물론 화무기는 내가 때려잡을 생각이긴 하지만, 이렇게 아버지에게 풍신사보를 전한 것은 일종의 대비책이었다.

아버지는 약속을 지켰다.

"지금부터 천마호신공을 전수하겠다. 딱 한 번만 말할 테니 잘 외워라."

구결을 듣기 전에 나는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아버지는 정말 딱 한 번만 말해주실 거기 때문에 머리로 외울 것이 아니라 직접 구결을 운용해서 몸으로 외우려는 것이다. 나 정도 되는 고수가 아니라면 시도해선 안 될 일이다.

아버지가 천마호신공의 구결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명문혈에서 신유, 지실, 위유로 부드럽게 내기를 움직여라. 이때의 진기는 풀잎에 내려앉는 눈처럼 가벼워야 한다. 비유, 간유, 격유까지 속도가 중요하다. 걷다, 뛰다, 가볍게 비상하듯 속도를 올리고 신주, 풍문, 곡원에 이르러서는 폭포가 내리치듯 힘차게 쏟아내라...."

구결은 처음부터 대놓고 어려웠다. 그야말로 난이도는 극상. 구결대로 진기를 움직이면서도 정말 심장이 철렁철렁했다. 이렇게 어려운 구결인 것을 알면서도 직접 구결을 운용하는 것을 말리지 않은 아버지가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당연하게도 몇 번의 위기가 닥쳐왔다. 작은 위기들은 잘 넘겼는데, 막바지에 이르러 큰 위기를 맞았다.

순식간에 진기가 역류하면서 혈맥이 터질 듯 폭주했다. 팽팽해진 혈맥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일전에 천맥강화술로 혈맥을 강하게 만들지 않았다면, 분명 큰 내상을 입었을 것이다.

'천맥강화술을 익힌 것은 바로 오늘을 위한 안배였구나. 그렇다면 나는 오늘 죽지 않을 거다!'

떨어지면 주화입마와 내상,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절벽 끝자락에서 나는 긍정의 화신이 되어 맞서 싸웠다.

또 나는 믿었다.

아버지에게 무공을 배우다 죽을 운명은 아니라고.

내 믿음이 통한 것일까?

야생마처럼 날뛰던 진기가 가라앉았다. 내력은 원래 가야 할 혈맥을 따라 흘렀고, 고비를 넘긴 나는 천마호신공의 마지막 구결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후우우우."

긴 호흡으로 일주천을 갈무리하며 천천히 눈을 떴다.

아버지는 천마전의 커다란 창에 서서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내게 이렇게 큰 위기가 오간 것을 알고 계셨을까?

내가 주화입마에라도 빠졌다면 과연 도와주셨을까?

아버지의 입에서 '이제부터 네가 차기 천마다'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는 없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버지는 창밖을 쳐다보면서 천마호신공의 위대함에 대해 말했다.

"목숨이 경각에 이르면, 천마호신공은 스스로 발동한다. 후일 천마호신공이 대성을 이룬다면 너는 절대 죽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에 떠오른 한 가지 의문.

'그런데 아버지는 왜 돌아가셨습니까?'

제23회 잘만 살아가더라.

'분명 아버지는 대성을 이루셨을 텐데, 왜 천마호신공이 발동하지 않은 겁니까? 혹시 천마호신공이 발동하고도 당하신 겁니까? 아니면 천마호신공이 발동할 내공조차 남지 않을 격렬한 싸움을 하신 겁니까?'

아버지가 얼마나 대단한 무위를 지녔는지 알면 알수록, 아버지의 죽음에 의문이 간다. 정말 화무기는 이런 아버지를 이겼단 말인가?

나는 아버지께 묻고 싶다.

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하지만 여쭤볼 수 없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난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그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내가 싱긋 웃으며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와 저 사이에 비밀이 하나 생겼네요. 천마호신공을 익힌 것 보다 그 점이 더 기쁩니다."

비밀이란 단어가 거슬렸는지 아버지가 표정을 찌푸렸다. 내가 재빨리 덧붙이고 돌아섰다.

"짜증 나셔도 절 어쩌지 못할 겁니다. 아직 풍신사보는 제가 더 익숙하거든요."

쾌속보를 발휘해서 순식간에 그곳을 달려 나왔다.

내 신형이 붉은 융단의 끝부분까지 도착했을 바로 그때였다.

쉬이이잉!

시원한 바람 소리와 함께 무엇인가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다음 순간, 나는 쾌속보를 멈췄다.

어느새 아버지가 내 앞을 막고 계셨다.

딱!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사정없이 튕겼다. 피할 상황도 아니었고, 피하려고 했어도 피할 수 없을 정도로 아버지의 움직임은 빨랐다.

"아얏!"

나는 이마를 감싸 쥐었다. 엄살이 아니었다. 어찌나 아픈지 눈앞에 별이 몇 개 스쳐 지나갔다.

"잘난 척하길래 나보다 빠른 줄 알았지."

다음 순간, 아버지가 사라졌다.

암영보를 이용해서 내 시야에서 사라졌고, 곧이어 쾌속보를 이용해서 앉아 계시던 태사의로 돌아갔다. 그 움직임을 볼 때 확실히 무공에 대한 해석이 나와 다르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내가 얄미워 이마를 때리기 위해 온 것이 아님을.

아버지는 의도적으로 보여주고 계신다. 내가 해석한 풍신사보는 이런 것이라고.

"돌아가신 보법은 풍신사보인데. 처음에 날아오신 그 경공술은 대체 뭡니까?"

"천마비행술(天魔飛行術)이다."

천마비행술은 아버지의 독문 경공술.

"쾌속보보다 빠른 겁니까?"

"지금은 당연히 빠르지. 풍신사보가 대성을 이루면 어찌 될지는 모르겠다."

"제가 대성을 이루는 날, 결판을 짓죠."

"내가 먼저 대성을 이룰 테니, 이미 난 결과를 알고 있겠지."

"그건 모를 일입니다. 제가 더 빨리 대성을 이룰 수도 있죠. 아무래도 젊은 머리가 팽팽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그 똑똑한 머리에서 피난다."

딱밤을 맞은 내 이마에서 피가 찔끔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아아! 차라리 금강불괴신공(金剛不壞神功)을 가르쳐달라고 할 걸 그랬습니다."

영광의 상처를 이마에 매단 채 천마전을 나섰다.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상처다.

아버지와 다시 한 걸음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물론 이런 생각이 들 때, 조심해야 한다.

인간관계에서 실수는 언제나 친하다고 방심할 때 저지르는 법이니까.

어쨌든 이번 무공 교환으로 아버지도 나도 한 걸음 나아갔다. 화무기가 온다는 미래는 정해져 있지만, 현재는 계속 바뀌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