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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실루아가 단검을 휘둘러 실의 위치를 파악하더니 그중 하나를 단검으로 꾸욱 눌러 공간을 벌린다. 단검에 쩌적, 쩍 하고 금이 갔으나 아랑곳 않고 그 틈에 몸을 밀어 넣어 이 덫을 벗어난 그녀가 밖에서 이쪽을 보며 활짝 웃었다.

"이렇게 하면 되지 말입니다."

"...다음번에는 더 팽팽하게 설치해야겠네."

적을 가두고 베어 내기 위한 실이 조금이나마 늘어난다는 것이 말이 된단 말인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보던 드벨라니아가 제 군단원들을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찝찝한 몸 상태를 뒤늦게 파악한 내가 들러붙은 정체불명의 살점들을 떼어 내는데, 다시 들어와 피에 젖어 추레할 내 몰골을 눈을 반짝이며 보던 실루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 그런데 데몬 님. 뒤에 마물이…."

퍼억!!

후두둑.

"...?!"

"...있었는데 말입니다."

와아악! 이게 뭐야!!

어쩐지 실망한 듯한 실루아의 목소리는 제쳐 두고 급히 뒤를 돌아봤다.

왼쪽 뒤편에서 무언가 박살 나는 소리가 들리더니 무언가의 잔해가 쏟아져 내렸다! 몸에 들러붙은 붉은 살점들을 털어 낼 겨를도 없이 돌아보니 창백하게 질린 벤이 시야에 들어왔다.

도대체 뭐가 그리도 걸리는지 필사적으로 내 시선을 피하는 모습.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다 조금 시선을 내리자… 피 묻은 왕진 가방이 보였다.

저거 분명 기억상 깨끗했던 것 같은데….

'그래, 얘도 미친놈이었지.'

정황상 저 단단한 왕진 가방으로 마물의 머리를 후려쳐 박살 낸 듯싶다. 아마 날 위해 그런 것일 테지.

고맙긴 한데… 무섭다.

"죄, 죄송합니다. 데몬 님, 그게…."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다.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는데, 벤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내 눈치를 보며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더니 이내 입을 꾹 다문다. 다물린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기껏 지켜 줘 놓고 왜 사과하는 건데.'

의문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앞서 실루아가 그의 멱살을 잡아챘으니까.

세로로 찢어진 동공이 벤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잘못한 것을 알면 꿇어야지. 네까짓 게 감히 데몬 님을 무시해?"

"...."

"데몬 님께서 그것 하나 모르셨을 것 같아?"

갑자기 왜 화를 내고 그래. 무섭게.

그리고 무시라니. 무시 아닌데. 덕분에 난 살았는데.

'내 뒤에 마물이 있는 줄 알았다면 진즉에 몸을 날려 피했지, 멀뚱히 서 있었을 리가 없잖아.'

군단장답게 절로 몸이 움츠러드는 살벌한 기세였으나 벤 역시 만만치 않았다. 움찔한 것도 잠시, 그는 손을 들어 제 멱살을 틀어쥔 실루아의 손목을 움켜쥐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제가 사과한 대상은 데몬 님이시지 7군단장님이 아닙니다."

"...건방지군. 한때 마왕님의 주치의여서 그런가? 이러다 데몬 님한테도 건방지게 굴겠어."

"...그래서 무례를 사과드리고 있었습니다. 이 손 놓으시죠."

"끝까지 뻣뻣하네. 이러다 정말 내가 화나서 죽여 버리면 어쩌려고."

"제약을 어기시렵니까? 제 담당은 0군단장님이십니다. 저를 벌할 권리는 마왕님과 0군단장이신 데몬 님만이 가지고 있다는 뜻이죠."

기본적으로 주치의들은 맡은 바 임무를 제대로 수행 못 하지 않는 이상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는 제약이 있다. 역할 수행을 제대로 했는지 못 했는지, 못 했다면 그것이 죽어 마땅한 수준인지의 판단은 그로 인해 피해를 본 담당 환자의 몫.

이것이 바로 벤이 다른 군단장들에게 대거리를 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겠다.

담당 환자인 나는 그를 함부로 대할 만큼 간이 크지 않고, 타 군단장들은 제약 탓에 그를 죽일 수 없으니까.

'....'

저들의 기 싸움에 끼어들었다간 뼈도 못 추린다.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발끈해서 단검을 들어 올리던 실루아가 나를 힐긋 보더니 이내 손을 내리고 씨근덕거린다. 어떻게든 짜증을 삼키려는 것이 눈에 훤히 보이는데, 벤은 또 그걸 가만두지 않고 입을 나불댔다.

"애초에 당신이 화가 난 건 '데몬 님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데몬 님이 마물을 찢어 죽이는 것을 못 봐서' 그런 거잖습니까."

그, 그만해. 지금 마물들이 득실대는 곳에서 뭐 하자는 거야.

저 둘이 기 싸움을 벌이는 동안에도 드벨라니아와 2군단이 열심히 움직였지만 어째서인지 마물들의 기세가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그 사실을 드벨라니아도 느낀 모양이다. 동강 난 마물 조각을 냅다 둘 사이에 집어 던지며 짜증 섞인 음성을 뱉었다.

"작작하지이? 경계선은 어쩌고 이렇게 와서 한다는 것이 고작 기 싸움이야? 방해하러 왔어?"

"아, 드벨라니아도 있었습니까? 경계선은 부관에게 맡겨 놓고 왔습니다. 마왕님께서도 아마 괜찮을 거라 하셨지 말입니다. 제국은 여기를 공격할 겨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마왕님께서 보내셔서 왔다고?"

"네! 제가 최근 며칠 내내 마왕님께 통신을 걸어서 심심하다고 징징댔더니 이렇게 보내 주셨습니다."

마왕한테 징징댔….

그나저나 정말 이래도 괜찮을까. 그녀와 마찬가지로 경계선 담당인 9군단장도 내가 오기 전부터 마왕성에 와서는 그대로 눌러앉아 있다던데.

즉, 지금 인간계와의 경계선에는 군단장이 한 명도 없다는 뜻이다. 이러다 정말 '영웅'쯤 되는 인간이 공격이라도 해 오면 어쩌려고.

드벨라니아도 말문이 막혔는지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 한숨을 푹 내쉬고는 머리를 쓸어올렸다.

"어쨌거나 도울 거 아니면 다시 가지 그래?"

"당연히 도울 거지 말입니다! 아, 그 전에 데몬 님께서 마물 한 마리만 다져 놓으시는 걸 보고 돕겠습니다!"

"...네?"

갑자기 나는 왜…?

화들짝 놀라 반사적으로 실루아를 쳐다보자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나는 미칠 듯한 흥분으로 반짝이던 눈이 점차 탁하게 죽어 가는 것을 실시간으로 목격할 수 있었다.

삽시간에 생기를 잃고 축 처진 실루아가 잔뜩 실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데몬 님이 아니야…."

"...?"

88. 휴가 아닌 휴가(4)

"내가 바라는 데몬 님이 아니야…!"

"...."

"분명 조금 전까진 '그' 데몬 님이셨는데…! 왜? 어째서?"

...나야말로 왜, 어째서 네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모르겠다.

미친년 보는 듯한 내 시선이 느껴지지도 않는지 한참을 날뛰던 실루아가 대뜸 근처의 마물 하나를 낚아챘다. 그리고 이어진 행동에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코앞에 들이밀어진 마물. 잔뜩 충혈된 채 기대감인지 희망인지 모를 것들을 가득 담고 얼핏 광기까지 내비치는 눈.

"자, 데몬 님. 여기 마물이 있습니다! 어서 그 단검으로 죽음이라는 안식을 내려 주시지 말입니다!"

"...."

침묵, 이후에는 뒷걸음질이었다.

이번만큼은 그 행동을 이행함에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벤도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고, 드벨라니아는 진즉에 혐오 어린 표정을 짓고는 다시 마물을 처리하러 멀리 떨어졌으니까.

"데몬 님? 왜 피하십니까? 어서 '그' 모습을 다시 보여 주시지 말입니다!"

몰라 인마. 난 네가 뭘 바라는지도 모르고, 안다 해도 보여 주고 싶은 마음 없거든?

물론 그 생각을 노골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기대감에 절어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실루아의 시선을 필사적으로 외면하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떻게든 당장 이 미친 상황을 회피할 수 있는 말을.

"일단…."

"일단?"

"지금 이럴 상황이 아닌…."

"아! 주변이 시끄러워서 짜증이 나셨구나!"

그래서 흥이 깨지신 거였어!

명쾌한 해답을 얻은 듯 실루아의 얼굴이 밝아졌다.

손안에서 휘리릭 돌아간 두 단검이 검집에 꽂히고, 빈손이 가볍게 맞부딪쳤다.

짝.

─사방에서 그녀와 마찬가지로 단검을 든 이들이 튀어나왔다.

....

"...미쳤군, 미쳤어. 아무리 지원을 왔다 해도 그렇지, 경계선을 내팽개치고 오면 어떡합니까."

"내팽개치고 온 거 아니거든? 부관을 두고 왔다니까?"

"부관만 두고 오면 다인 줄 아십니까! 군단을 죄다 끌고 오셨잖습니까! 7군단장님의 부관이 안쓰러워지는군요. 지금쯤 얼마나 고생하고 있을지…."

"덕분에 확실한 지원이 됐잖아. 주치의는 담당 환자나 생각하시지? 데몬 님 표정 안 좋으신 거 안 보여?"

...그 와중에 내 표정까지 신경 써 주니 감사하다고 해야 할지.

갑자기 내게 날아온 화살에 당황한 것도 잠시, 나는 간신히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었다.

군단 하나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크긴 한 듯, 끝도 없을 것 같던 마물 떼는 실루아의 7군단이 합류하자 빠르게 정리되었다.

물론 고맙다.

'고마우니까 이제 좀 꺼져 줬으면.'

마물들을 정리하는 내내 실루아는 내게 무기를 쥐여 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틈만 나면 이 마물 저 마물 잡아 와서 죽여 달라 말했으니…

그나마 내 건강을 걱정한 벤이 데몬 님은 이제 쉬셔야 한다며 나서지 않았다면 정말 꼼짝없이 저 흉측한 마물 앞에 설 뻔했다.

아직 남은 몇몇 마물들이 정리되는 꼴을 지켜보다 비척비척 마차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일을 처리하면서도 내내 나를 살피던 실루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라, 들어가시는 겁니까? 저 마물들은 처리 안 하시고요? 데몬 님 드리려고 일부러 남겨 놓은 건데 말입니다…."

일부러였냐.

멈칫한 것도 잠시, 나는 못 들은 척 마차에 몸을 실었다. 드벨라니아가 선명한 웃음을 그리며 실루아에게 다가갔다.

"정리도 어느 정도 되었는데, 7군단장은 이만 가지 그래?"

"이렇게 이용해 먹고 바로 버리기입니까? 그렇게 안 봤는데 드벨라니아도 생각보다 매정하지 말입니다."

"무슨 섭섭한 소리를-. 우린 두 번째 도시로 갈 예정이거든. 7군단장도 지금 두 번째 도시를 누가 지키고 있는지 알지이?"

누군가 떠올린 듯 실루아의 얼굴이 팍 찌푸려졌다.

"...10군단장."

노골적인 경멸과 혐오.

그가 저와 같은 군단장이라는 것 자체가 불쾌하다는 듯 퉷- 침을 뱉은 실루아가 제 군단원들을 향해 손짓했다.

"확실히 그 군단장 같지도 않은 녀석과 만나느니 여기서 물러가는 게 낫겠지 말입니다. 나중에 뵙겠습니다."

"그래."

"...일도 끝난 것 같은데 이 실은 거둬 주시지 말입니다."

"어머, 미안. 미꾸라지처럼 잘만 들어오길래 나갈 때도 알아서 잘 나갈 줄 알았지."

"들어오고 나가는 건 어렵지 않지만, 굳이 불편하게 나가야 하나 하는 의문이 들어서 말입니다."

빠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를 악문 듯 턱에 힘이 들어간 미소를 지은 드벨라니아가 손을 내젓는다. 기다렸다는 듯 서로 얽혀 있던 실이 일제히 풀려 각 주인의 손에 돌아갔다.

중간에 엉키지 않을까 싶던 걱정이 무색하게도 깔끔한 마무리였다.

"고맙습니다. 그럼 이만."

"...."

좀 더 들러붙을 줄 알았는데 정말 담백하게 돌아선다.

10군단장이라면 가이시텔을 말하는 것일 텐데, 왜 그런 반응이지?

이런 내 의문은 그가 거주하고 있다는 두 번째 도시에 들어서고 풀렸다.

'와… 미친.'

그때 거의 대부분의 마물들이 몰려왔던 건지 그 이후로 그 정도 규모의 마물들이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덕분에 드벨라니아와 2군단원들, 미쳐 날뛰는 벤만으로도 충분히 해결이 가능했던 데다 마침 두 번째 도시에 도착하기도 해서 마음을 놓았는데─

'...이런 식으로 공격을 해 오다니.'

방심한 틈을 노린 건가. 훌륭한 심리전이었다, 10군단장.

두 번째 도시에 도착하고, 날 따라오지 않은 부관 에드를 대신해 벤이 챙겨 준 로브를 뒤집어쓰고 마차에서 내리자 마주한 것은 다름 아닌─

팔랑팔랑.

─밤하늘을 배경으로 떨어지는 색색의 야광 종이 가루였다.

"하다 하다 별…."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자니 옆에서 드벨라니아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찬다.

그녀를 돌아보려던 나는 이어진 북소리에 다시 시선을 정면에 고정했다.

마족들이 늘어서서 길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서 커다란 박쥐 날개를 가진 마족이 뒤에 가마를 대동하고 걸어온다.

그는 아직도 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 내 앞까지 오더니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데몬 님."

"아… 네."

"이리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준비해 봤는데 어떠십니까? 인간계의 문물에 대해 급히 조사해 본 것이라 상당히 미흡할 수도 있습니다만…."

어쩐지. 순간 마계에도 이런 게 있나 싶었네.

열심히 한 것 같지만, 솔직한 감상을 말해 주자면….

'쪽팔려.'

주변의 모든 마족들이 여기만 쳐다보잖아. 얼굴이 화끈거려서 차마 고개를 못 들겠다. 그나마 로브를 쓰고 있어서 이 정도인 거지, 민낯이었다면 수치사 하지 않았을까.

어설픈 데다 과하기까지 하니….

그제야 눈앞의 마족, 10군단장의 성격이 떠올랐다.

'얘… 좀 비굴한 성격이었지?'

살살 눈치를 살피는 것도 그렇고, 정말 실루아의 말대로 군단장답지 않은 군단장이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침묵에 잠겨버린 나를 대신해 입을 연 것은 드벨라니아였다.

"뒤의 그건 또 뭐야…?"

"아, 이건 가마라는 것입니다. 인간계에서 높은 신분을 가진 이들이 타고 다닌다 하더군요. 데몬 님은 인간이시니 그리우실 것 같아 준비해 보았습니다."

아니야. 나 그거 타 본 적도 없어. 그전에 어째서 내가 높은 신분일 거라 확신하고 있는 건데.

가마는 '남부'에서 사용하는 것이다. 심지어 요즘은 거의 사장되고 왕족들만 특정 행사 때 잠시 탄다고 들었다.

'보통 군단장쯤 되면 종종 몰래 인간계에 외출하고 그러지 않나…? 그렇다면 북부와 남부의 차이 정도는 알 수 있을 텐데.'

적어도 드벨라니아는 확실히 알고 있는 듯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알면 말 좀 해 주지.

나는 조용히 이마를 짚었다.

'...이걸 어떻게 수습하지.'

"데몬 님!"

"...?"

그때, 가만히 서 있던 벤이 마족들을 밀치고 후다닥 달려 나왔다.

졸지에 그 틈에 섞여 같이 밀쳐진 드벨라니아가 황당하다는 듯 쳐다봤으나 그는 신경도 쓰지 않고 내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연신 제 마력석 목걸이를 들여다보았다.

"데몬 님! 머리가 아프십니까?! 조금만 참으십시오, 제가 빨리 치료를… 젠장, 반응이 없잖아? 그렇다는 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그거 아닐걸.

이마를 짚은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이러다 일이 커지겠다 싶어 어떻게든 멀쩡하다는 해명을 하려던 찰나.

"허억! 머리가 아프신 겁니까? 마침 여기 가마가 있으니 어서 타시지요!"

틈을 놓치지 않은 10군단장 가이시텔이 냅다 가마를 대령했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가마를 마주한 나는 차마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조용히 눈을 돌렸다.

'...저걸 타면 머리가 더 아플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 나는 이 도시의 모든 마족들의 시선을 끌어모을 수 있었다.

그래, 탔다.

'로브를 써서 정말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

검은 로브를 쓴 채 화려한 가마에 앉은 남자는 그 무엇보다도 이질적이었다.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자칫 우스꽝스러웠을 가마는 그 남자를 태움으로써 오히려 그를 돋보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등받이에 기대앉은 여유로움. 팔걸이에 팔을 걸치고 무언가 거슬리는 듯 이마를 짚은 자세.

로브 후드를 푹 눌러써 얼굴이 보이지 않아 더욱 상상력을 가중시키는 그 모습은 0군단장의 방문 소식에 몰려들었던 도시 마족들의 시선을 다른 의미로 사로잡았다.

'마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인간은 확실한데….'

'인간이 저런 분위기를?'

'역시 0군단장이라는 건가.'

마족들 사이에서 숫자 0의 의미는 컸다.

끝에다 숫자를 보탠 것도 아닌, 없는 자리를 만들어 내 영입한 인간. 굳이 1군단장 제이카르의 위에 올려놓으면서까지 데려온─

자존심 강한 군단장들이 제가 지닌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지만 사실상 그들이 지닌 숫자는 그리 큰 의미가 없다. 3까지는 나름 존중을 하는 분위기이지만 실제로 의미가 있는 숫자를 뽑자면 마왕의 대리인을 맡을 자격이 있는 1군단장 정도뿐.

그렇기에 그보다 더 높은 숫자인 '0'은 마계의 모든 마족들의 이목을 끌어모았다.

마왕은 무슨 생각으로 그에게 그 자리를 준 건지.

다른 군단장들은 왜 그를 받아들인 건지.

그가 맡은 역할은 무엇이며─ 그의 능력은 얼마나 되는지.

──도대체 그에게 무슨 가치가 있는지.

영입 당시 그가 세웠던 공로는 군단장이 되기에 충분했지만 0군단장의 자리를 내주기에는 조금 의문이 들었다.

용사의 자폭을 저지하고 그 이전에 7군단장을 죽였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저 13번째 군단장 자리를 내주었어도 되었지 않나.

그래서 모여들었다. 그 유명한 0군단장의 얼굴도 한번 볼 겸, 의문을 풀고자.

'이젠 알겠군.'

'굳이 이유를 캐지 않아도 알 것 같아.'

결과적으로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의문은 풀렸다.

어째서 다른 군단장들이 별 불만 없이 그를 받아들였는지 알 것 같다.

분위기부터가 남다르다.

도시를 지키기 위해 온 10군단장 가이시텔과 비교하니 그 간극은 더욱 확연히 보였다.

가이시텔이 양아치라면 데몬 아루트는 암흑가의 우두머리 내지는 그 오른팔이다. 가이시텔보다 훨씬 묵직한 존재감을 가진 2군단장 드벨라니아와 비교해도 그 차이는 여전했다.

지금도 보라, 드벨라니아는 호위 겸 시중인 노릇을, 가이시텔은 옆에서 아부나 떨고 있지 않나. 나름 그들도 같은 '군단장'인데 말이다. 심지어 0군단장은 가이시텔의 아부에 이렇다 할 반응조차 없다.

그저 말없이 가마에 자리 잡고 앉아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그를 보며 마족들이 감탄을 하던 순간,

피곤한 듯, 혹은 머리 아프거나 짜증 나는 듯 이마를 짚고 있던 0군단장이 입을 열었다.

"...."

"예? 데몬 님, 뭐라 하셨습니까?"

역시나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가이시텔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냉큼 다가가 귀를 기울인다.

로브 안의 보이지 않는 시선이 그를 힐긋 향하는가 싶더니, 이내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모두가 귀를 기울이고, 가장 가까이에서 그의 말을 들은 가이시텔이 친절하게도 그의 목소리를 대신해 내용을 읊었다.

고요한 공간 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널리 퍼져 나갔다.

"...─."

"꺼?"

"…──."

"져. 꺼져. 네, '꺼져'라고…."

"...."

"...."

잠시 짧은 침묵이 스쳤다.

89. 휴가 아닌 휴가(5)

온 도시가 침묵에 가라앉은 가운데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가이시텔이었다.

잠시 얼이 나가 있던 그는 무례를 깨달은 듯 서둘러 제 뺨을 후려치고는 돌아서서 주변에 길을 만들며 가마에 맞춰 걷고 있던 제 군단원들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뭣들 하고 있어! 빨랑 꺼지시랍신다! 주변의 마족들이 거슬리시는 듯한데, 빨리 치워!"

군단원들의 표정이 순간 미묘하게 변했다.

'...0군단장님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아무리 봐도 저쪽보다는 가이시텔 님이 더 거슬리실 것 같은데요.'

옆에서 자꾸 얼쩡대면서 통하지도 않는 아부만 떨어 대고 있으니까.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아프셨던 것 같은데 옆에서 조잘거리기까지 하면….

물론 그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 상관에 그 부하라고, 괜히 확실하지도 않은 정보를 말해 상관에게 찍힐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군단원들은 그저 빠르게 대답하고는 양몰이를 하듯 주위의 마족들을 향해 다가갔다.

이미 가이시텔의 발언을 들은 마족들이 짜증 어린 표정을 지으며 눈치껏 물러난다. 눈으로 욕하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소문이 무성한 그 0군단장을 직접 본 것으로 만족해야 하나.'

대부분은 이렇게 생각하며 순순히 물러났지만,

'보아하니 며칠은 머물 것 같은데, 지내는 곳 근처에라도 얼쩡거려 볼까. 그럼 얼굴 정도는 볼 수 있을지도….'

몇몇은 이런 생각을 하며 멀찍이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화려한 가마를 지켜보았다.

이러한 시선들을 느낀 드벨라니아가 피식 웃었다.

"헬이 고생 좀 하겠네."

***

꺼져.

이 말은 결코 내가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이건 불가항력이다.

정말 그건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나도 모르게 우러나온 말이었다.

가마가 움직이고 왼쪽에선 벤이 틈틈이 아직도 머리가 아프시냐, 혹시 머리 말고 다른 편찮으신 덴 없냐 질문을 던져 대고,

오른쪽에선 가이시텔이 가마는 편안하시냐 혹 마음에 안 드는 곳은 없으시냐, 데몬 님께서 가마에 앉으시니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것 같다 등등 정신이 혼미해지는 아부를 떨어 대고 있으니 어찌 내가 미치지 않겠는가.

'제발 꺼져 이 새끼들아… 난 괜찮아, 괜찮다고….'

그래서 본의 아니게 신음 같은 속말이 튀어나왔다. 꺼지라고.

그게 이렇게까지 규모가 커질 줄은 몰랐지.

"뭣들 하고 있어! 빨랑 꺼지시랍신다! 주변의 마족들이 거슬리시는 듯한데, 빨리 치워!"

아니야.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온 도시 마족들을 내 적으로 만들 생각이야? 그냥 너만 꺼져 주면 돼, 너만!

따끔따끔한 시선들이 느껴진다. 슬쩍 눈을 굴리자 마족들의 일그러진 표정이 보였다.

아찔했다. 그들은 부조리한 10군단장의 명령에 눈으로 한껏 욕을 뱉으며 물러서고 있었다.

처음엔 자신들을 쫓아내는 10군단원들을, 그다음은 가이시텔을, 그리고 돌고 돌아 시선이 정착한 곳은 다름 아닌─ 나.

'...이 도시에서 마음 편히 지내긴 글렀군.'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하.

지금 이 상황은 누가 봐도 내가 명령을 내려 벌어진 꼴이다. 당연히 내게 짜증을 느꼈겠지. 이 도시에 계속 머무르고 있다간 언제 어디서 내 뒤통수를 노리는 놈들이 생길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내 숙소―가이시텔이 도시 관리자에게서 빼앗아 내어준 화려한 저택―에 틀어박혔다.

...뭐, 왜.

아, 그리고 가마는 다시 생각해 봐도 정말 최악이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지금 내 꼴을 보면 알 수 있을 정도로.

'...시발.'

방 안에 멍하니 누워 있다가 불쑥 떠오르는 기억에 조용히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고 이불을 매개체 삼아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치며 쪽팔림에서 벗어나고자 애썼다.

퍽, 퍽퍽!!

"윽, 시발!"

발목 삐었다.

이불을 차다가 발목을 삐다니, 이건 어디 가서 말도 못 한다.

끙끙거리며 발목을 쥐고 소리 없이 뒹구는데 쾅! 하고 문이 열렸다. 재빨리 자세를 바로 하고 고개를 돌린 나는 눈에 들어온 인물의 모습에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는 어마어마한 기운을 풍기는 주치의가 있었다.

눈을 형형히 빛내며 방 안을 한차례 둘러본 벤이 날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며 속사포로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데몬 님, 무슨 일이십니까! 머리가 또 아프십니까? 아니면 기습입니까? 아니지, 고작 기습 따위에 신음을 뱉으실 리는 없으니… 그렇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또 이상한 오해를 할까 재빨리 말을 끊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신뢰가 가지 않는지 벤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쳐다본다.

...얘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니 또 어제의 일이 떠오른다. 그래, 가마. 가마에 탔었지….

쪽팔려서 고개를 숙였더니 또 그거 가지고 역시 머리가 아프신 거냐, 얼마나 아프신 거냐, 후유증이냐 등등 호들갑을 떨어서 다시 고개를 들고 시선을 정면에 고정해야 했다.

어떻게 해야 내가 괜찮다는 것을 알아줄까 고민하던 때, 열린 문 너머 복도에서 드벨라니아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벤 너는 가만 보면 데몬 님을 너무 연약하게 보는 것 같더라?"

"...주치의니까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이, '그' 데몬 님이신데 말이야."

"...."

"뭐, 난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됐지만. 그보다 데몬 니임-."

가볍게 어깨를 으쓱한 그녀가 이쪽을 휙 돌아본다.

평소보다 더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불길해 흠칫 튀어 오르려는 몸을 억누르고 간신히 답했다. 기다렸다는 듯 나긋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바깥에 호기심 많은 쥐새끼들이 기웃거리고 있는데, 혹시 심기가 불편하진 않으세요오? 이를테면 거슬려서 옷을 사러 나가기 싫어졌다든가…."

"그건…."

굳이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옷을 사러 나가기 싫으시다 하셨습니까!"

넌 또 어디서 나온 거니.

천장에서 불쑥 등장해 저 좀 보라는 듯 등 뒤의 박쥐 날개를 촥 펼쳤다 접은 가이시텔이 밖을 향해 손뼉을 두 번 마주쳤다.

촤르르.

촤르르르.

"...."

"어머?"

"아마 귀찮으신 거겠죠! 그래서 제가 미리 디자이너들을 불러 놓았습니다! ...사실 이 도시에 2군단장과 함께 올 이유는 그것밖에 없기도 하고…."

다 들린다.

드벨라니아의 옷 구매는 여기서도 유명하구나.

어째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입꼬리를 파들파들 떨며 웃고 있는 디자이너들을 보다가 방 안을 둘러보았다. 분명 침대와 옷장, 테이블 외엔 텅 비어 있었는데 삽시간에 옷으로 가득 찼다.

첫 번째 도시가 '유흥의 도시'라면 두 번째 도시는 '쇼핑의 도시' 혹은 '무역의 도시'랬던가. 확실히 옷만 봐도 종류가 다양하다. 인간계의 북부식 복장부터 남부식까지 골고루 보이니.

'...그런데 묘하게 남부식이 더 많아 보이네.'

그러고 보니 이 도시에서 남부식 문물이 유독 눈에 들어왔던 것 같다.

마계에 막 도착했을 때 드벨라니아가 새로 건넸던 옷도 그렇고, 빌어먹을 가마에 더해 여기 걸린 옷들까지.

'뭐, 어디 남부와 연결된 통로라도 발견되었나?'

에이, 설마. 마왕은 내가 나설 일이 아닌 이상 굳이 나서서 알려 주지 않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만일 그렇다면 제국에서 이미 알고 조치를 취했을 테니 내게 소식이 들어오지 않을 리 없다.

'그냥 우연이겠지.'

***

제국이, 아니 황제가 미쳐 날뛰고 있다. 내정은 황태자에게 일임한 뒤 직접 전장에 나서 검을 휘두르고 있다고 한다.

그러한 상황 탓에 촉을 곤두세우고 있던 남부의 한 작은 왕국의 국왕은, 이어서 들려온 새로운 소식에 이마를 짚으며 탄식했다.

야속하게도 하늘이 우리 왕국에 시련을 주시려는 모양이다.

"마계와의 경계선이 발견되었다고?"

이곳, 우리 왕국에서?

"하필이면 이 시국에…."

평소였다면 제국에 이 사실을 알리고 함께 방안을 논의했을 것이다.

암묵적으로 제국은 마계와의 일을 전담하고 있고, 괜한 신경 낭비, 전력 낭비를 하고 싶지 않은 다른 왕국들은 이를 별다른 반발 없이 수긍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제국이 이유 없이 날뛰고 있는 상황에서 현재 상대하고 있는 왕국을 정복하면, 그다음 상대가 우리 왕국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 아닌가.

섣불리 이런 중요한 정보를 적이 될지도 모르는 나라에 넘길 수는 없다.

연신 한숨을 내쉬며 서류를 뒤적이던 국왕이 무언가 발견한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별다른 사고가 없다, 라?"

마족들이 넘어와 어설픈 로브를 쓰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별다른 사고가 없단다.

"예, 주로 시장이나 작은 축제가 열리는 곳에서 기웃거리는 모습이 목격되고 있으며 이따금 옷이나 물건 등을 훔치는 것 외에는 큰 사고를 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살인 등의 중범죄는 아직까진 없다?"

"예."

"후우, 그래. 우선은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일단 자체적으로 감시와 경계를 늘리고, 제국에 알리는 것은 보류해야겠다. 지금의 제국은 믿을 수 없으니.

그렇지 않아도 전쟁으로 불안할 왕국민들에게 불안을 더 얹어 줄 수는 없으니 이 사실은 극비에 부쳐야겠다고 생각하며 서류를 마저 훑어 내리던 국왕이 마족들의 복장에 대한 보고를 읽고는 그만 뒷목을 잡았다.

마족들은 한 명도 예외 없이 어디 한 군데는 인간과 다른 구석이 있다. 이를테면 뿔이라든가 꼬리라든가, 마왕을 예로 들면 '눈'이 되겠지.

그러니 인간계에 오려면 이를 잘 가려야 하는데, 이 어설픈 마족들이…!

'꼬리가 달렸으면 꼬리를 가려야지 왜 얼굴을 가리냐고!'

세상에, 꼬리가 달렸으면 꼬리 위주로 감춰야지 로브 후드에는 왜 그리 집착하는 것이며, 뿔 달린 놈이 사람과 대화할 때 왜 후드의 앞쪽을 푹 잡아당긴단 말인가. 뿔 모양이 두드러지지 않나!

그나마 그때가 축제여서 그저 소품으로 여겨져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이곳에 마족이 돌아다닌다고 널리 알릴 뻔했다.

'이놈들은 숨길 생각이 있긴 한가?'

신경 쓸 것이 더 늘었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피로가 쌓이는 듯했다.

***

"일단…."

방 안을 가득 채운 옷을 둘러보았다.

...음, 역시 부담스럽다.

"이것들부터 치우죠."

"예? 아, 혹시 마음에 드는 옷이 전혀 없으신 겁니까?"

놀란 듯 커진 가이시텔의 눈이 이내 매섭게 변해 디자이너들을 향한다.

짜기라도 한 듯 디자이너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렇지 않아도 창백했는데 거기서 더 하얘지니 이건 뭐 거의 밀가루 칠을 한 수준이다.

혹여나 그가 애꿎은 디자이너들을 괴롭힐까, 나는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아뇨,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

가이시텔의 되물음에도 말끝을 흐리던 나는 그냥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여기서 그냥 옷에 흥미가 없다고 어떻게 말해. 옆에서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대화를 듣고 있는 마족이 있는데.

힐긋 드벨라니아를 보자 기가 막히게도 눈이 딱 마주쳤다. 내 시선에서 무언가 읽은 건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고맙긴 하지만 데몬 님께서는 직접 가게를 돌며 옷을 구경하길 바라시는 것 같은데? 기왕 도시에 온 거,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맛도 있잖아."

"아… 제가 어리석었군요. 죄송합니다, 데몬 님."

"아, 네… 뭐…."

...나가기 싫은데. 그 난리를 쳐 놓고 나가자고…?

선뜻 나가자 말하지 못하고 뭉그적거리고만 있자 드벨라니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팔짱을 낀 채 연신 창밖과 나를 번갈아 보며 무언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는 이내 방 창문을 벌컥 열어 한 다리를 걸치며 싱긋 웃었다.

"그럼 일단 밖의 쥐새끼들부터 처리하고 오겠습니다아-."

"네? 아니, 잠깐!"

쥐새끼라면 근처에 얼쩡대는 마족들을 가리키는 거, 맞지?

또 괜한 원한 관계 만들까 급히 드벨라니아를 말리며 한숨을 삼켰다. 아무래도 얜 내가 뭉그적거리는 이유가 밖의 마족들에게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망할. 그래, 나갈게. 나간다고.

"굳이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냥 나가도록 하죠."

손짓으로 디자이너들을 물리고 벤의 손에 들린 로브를 받아 걸쳤다. 내가 무슨 어린애로 보이는지, 이런 날 가만두지 않고 벤이 자연스레 손을 뻗어 후드를 정리하고 로브의 매듭을 단단히 맨다. 상당히 능숙하고 자연스러운 손길이었다.

'...왜 이 녀석 손길에서 에드의 손길이 느껴지는 거지?'

에드야 할 일 없는 부관이니 이거라도 하겠다 나서서 그렇다 치더라도, 얘는 왜?

둘이 마주치는 일이 많다 보니 본의 아니게 닮아 간 건가?

에드나 벤, 둘 중 하나라도 들었다간 곧장 사투가 벌어질 법한 생각을 하며 멍하니 서 있는데 충격적인 말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아, 나가시려는 겁니까. 그럼 가마를 대령…."

"미친 꺼ㅈ… 아니, 필요 없… 음, 괜찮습니다."

척수에 새겨진 거부가 즉각 튀어나왔다. 대뜸 욕부터 나오려는 것을 유하게 돌려 표현하느라 잠시 버벅거리긴 했지만 가이시텔의 반응을 보니 괜찮은 것 같다.

화난 표정이 아니라 창백하게 질린 얼굴인 걸 보면.

"바, 방금 욕을…."

하하, 그럼 그렇지. 괜찮을 리가 있나.

90. 휴가 아닌 휴가(6)

어지간히도 충격받은 듯 몇 차례 입을 열었다 닫은 가이시텔이 이내 천천히 무릎을 꿇는다. 도대체 언제 생긴 건지 그의 목에는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붉은 실선이 자리해 있었다.

주룩- 실선을 따라 맺혔던 피가 고이고 고여 흘러내린다.

그제야 나는 가이시텔의 목에 닿아 있는 실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제가 무언가 심기를 거슬렀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드벨라니아아아아!! 지금 같은 군단장끼리 무슨 짓을!

심지어 어째서인지 가이시텔은 화를 내는 대신 사과를 하고 있다! 네가 왜 사과를 해!

그 와중에 가마가 원인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모습이 조금은 어이없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당황이 앞섰다.

가이시텔의 목에 실을 건 드벨라니아가 금방이라도 그것을 잡아당길 듯한 자세를 취하며─

"어떻게 할까요, 데몬 님?"

─웃고 있었으니까.

아니, 너희 같은 군단장 아니었어? 분명 군단장끼리의 살생은 자중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아니면 혹시──

'가이시텔의 취급이 이상하더라니, 설마.'

전력에 도움 되지 않는 존재로 판단된 건가? 차라리 갈아치우는 것이 나은 군단장으로?

마왕은 모든 마족들의 어버이 같은 존재. 그들이 마왕의 힘에서 탄생하는 이상 어지간해서는 마왕에게 해가 갈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중요한 전력인 '군단장'을 이리 대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터.

그게 아니면 모든 자식이 부모의 말을 잘 들으며 바르게 자라지 않듯이, 단순히 조금 엇나가는 마족이 있을 수도 있고, 그중 하나가 바로 드벨라니아라든가.

어느 쪽이 답이든 그 순간 내가 한 생각은 다름 아닌 '좆됐다'였다.

'그렇다는 건 나도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는 거잖아!'

조금은 적응이 되어 느슨해졌던 긴장감이 다시 팽팽해졌다.

그래도 조금은 안전장치가 있는 줄 알았는데, 맨몸이었다니 충격이다. 그야말로 낭떠러지에서 맨몸으로 외줄 타기를 하고 있었던 것 아닌가.

다시 한번 드벨라니아의 웃는 얼굴을 눈에 담았다. 수틀리면 저 표정 그대로 내 목도 자르겠지.

그 전에 미리 포섭해야 한다. 짧은 순간 머리가 팽팽 돌았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목이 잘릴 듯한 가이시텔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 답 나왔다.

"나가죠."

옷매무새를 만져 주던 벤의 손길이 떨어져 나간 것을 확인하고는 서둘러 문을 향해 걸음을 뗐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는지 드벨라니아가 실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며 되묻는다. 평소의 느슨하게 풀어진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잘 못 들었다는 듯 순진하게 깜빡이는 눈이 되레 소름 끼쳤다.

"...네?"

"같은 군단장을 죽여서야 되겠습니까. 가이시텔이 잘못한 것은 없으니 그 실 거두고 어서 나가죠."

드벨라니아의 나를 향한 호감을 올리는 방법, 그리고 가이시텔의 원한을 사지 않는 방법.

'옷 구매'를 핑계로 '나가는 것'.

고생은 좀 하겠지만 그걸로 더 나은 미래를 얻을 수 있다면 이 한 몸 희생해야지 어쩌겠나.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모두가 정지한 것도 잠시, 역시나 가장 먼저 행동한 이는 가이시텔이었다.

어디에서 갈고닦았는지 모를 처세술을 발휘해 드벨라니아의 실이 느슨해진 틈을 타 후다닥 달려가 문을 열고 대기한 것이다.

잠시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던 드벨라니아가 피식 웃으며 실을 거뒀다.

"데몬 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

"그보다 데몬 님은 역시 겸손하시네요. 스스로의 위치를 아시면서 '같은' 군단장이라니요-."

음, 사실 그보다 더 낮은 위치가 맞긴 하지. …음? 잠시만, '겸손'하다고? '오만'이 아니라?

난 인간이고, 기껏 얻은 '0군단장' 자리는 없는 자리를 만들어서 마련한 것이니 명예직일 게 분명하고, 그렇다고 무언가 제대로 맡은 역할도 없고….

그런 주제에 다른 군단장과 '같다'라고 말했는데 오만이 아니라 겸손?

"데몬 님의 지위는 암묵적으로 1군단장과 비슷한 위치에 속하잖아요."

"1군단장이 없어서 하는 말입니다만, 다들 1군단장보다 데몬 님을 대할 때 더 긴장하게 되니 사실상 데몬 님이 더 높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왕님도 1군단장보다는 데몬 님에게 더 조심스러우시고요."

몰랐다. 난 그냥 마왕이 직접 데려온 낙하산이라 다들 존중해 주는 줄 알았지.

그러니까 지금 내 위치가 아무리 낮게 잡아도….

마왕 > 1군단장 = 나 > 나머지 군단장들

이라는 거지? 미쳤군.

1군단장은 마왕의 대리인 역도 맡는 자리잖아. 그런 놈이랑 내가 비슷한 위치라고? 심지어 저게 가장 낮게 잡은 거란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가죠."

했던 말을 또 하는 수밖에.

....

옷 갈아입히는 인형이 된 기분은 끔찍했지만, 도시 구경은 제법 흥미로웠다.

무역의 도시답게 과일도 다양하고, 무기도 다양하다. 심지어는 시장에 널린 물고기의 종류조차 다양했다. 어째 그것들 중 남부의 것이 많이 보이지만 유행이려니 하고 넘기고.

나는 가이시텔이 내민 달짝지근한 과일을 하나 받아먹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데몬 님! 이번엔 저쪽으로 가 볼까요?"

"데몬 님, 여기 이 과일은 망고라고, 인간계 남부에서 자라는 과일인데 한번 드셔 보시겠습니까?"

데몬 님, 데몬 님, 데몬 님… 그놈의 데몬 님! 구경 좀 하고 싶은데 두 군단장이 날 가만두지 않는다.

만약 벤까지 그랬다면 정말 머리가 아팠을 테지만 다행히도 그는 내 상태를 눈치챈 듯 조용히 입 다문 채 있는 듯 없는 듯 소리 없이 따라오고 있었다.

아, 그리고 가이시텔의 회복은 빨랐다. 적어도 내가 떠날 때까지는 우울하게 처져 있거나 분노에 타오르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쌩쌩한 모습으로 손바닥을 싹싹 비비며 도시의 안내를 자처한 것이다.

그의 안내에 따라 돌고 돌아 성문 근처까지 온 나는 성문을 오가는 이들을 보며 무심코 중얼거렸다.

"마물들의 공격이 거세졌을 텐데 아직도 성문을 열어 두고 있네."

의문을 담기는 했지만 이건 명백한 혼잣말이었다.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와 대화 후, 익숙하게 밖으로 나가는 마족들의 모습이 현 상황과 어울리지 않아 그렇게 중얼거렸을 뿐인데.

"아, 사실 이 도시도 원래는 성문을 닫아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멀지 않은 곳에 인간계와의 경계선이 발견되어서… 헙!"

"...?!"

가이시텔이 예상치도 못한 답을 내놓았다.

설마….

줄곧 머리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가설이 기다렸다는 듯 존재감을 부풀렸다.

"인간계 남부?"

"그, 그걸 어떻게…! 가 아니라 아, 아아니, 그게 말입니다…."

진짜였어?!

가이시텔이 뒤늦게 아니라고 부정하지만, 들고 있던 남부의 과일을 후두둑 떨어뜨리고 손을 내젓는 모습이 썩 신빙성 있어 보이진 않는다.

이거 나만 몰랐던 거 아니지?

벤과 드벨라니아는 알고 있었나 싶어 돌아보자 이마를 짚은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는 드벨라니아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는 벤이 보였다.

적어도 벤은 몰랐던 모양이다.

'다행이다. 나만 몰랐던 건 아니었네.'

그때,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벤이 얼굴을 와락 찌푸리며 쏘아붙이듯 질문을 던졌다.

"이 사실을 마왕님께서는 알고 계신 겁니까?"

"당연히 보고를! ...하려고 했는데…."

"안 했다는 뜻이군요."

"...도시에 머물러야 하는 마족들이 언제 인간계에 가 보겠어. 마침 딱 근처에 경계선이 발견되었으니 조금만 즐기자 싶어서…."

나름 몰래 오가는 거라 서로 간의 규칙도 세워서 그곳에서 사고 치는 것을 금하고 그랬는데….

가이시텔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고개가 점차 숙어지고 등 뒤의 박쥐 날개가 몸통에 바짝 접혀 붙는다.

그리고 그 순간, 막 성문을 나섰던 이들이 다시 돌아왔다.

등 뒤로 먼지구름을 달고서 아주 다급하게.

"무, 문 닫아! 문 닫아 빨리!!"

"마물이다!!"

와, 세상에. 잘하면 나 이 도시에 갇히겠는데?

먼지에 가려 잘 보이진 않지만 먼지의 규모만 봐도 그 수가 장난 아니라는 것이 확 와 닿는다.

내심 흠칫한 나와 달리, 문지기들은 침착했다.

잠시 당황하긴 했지만 이내 능숙하게 통신석을 꺼내 어디론가 연락을 보낸다. 이어서 경보음이 울리고, 거대한 성문이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

'잠깐, 쟤네 못 들어올 것 같은데?'

성문이 거의 다 닫혀 가는데 달려오는 놈들과 성문의 거리는 아직 좀 남아 있다.

저래도 되나 싶어 자연히 시선이 가는데, 그때 둘이 땅을 박찼다. 그리고 이어진 슬라이딩!

들어왔다! 저 거리를 뛰어서 한 번에 들어왔어!

'그런데 갑자기 마물이 왜… 아.'

의식의 흐름대로 흘러가던 생각이 무언가에 도달하고 멈췄다. 동시에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주룩 흘러내렸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오던 도중 한바탕 일을 치른 이후 마주친 마물들은 죄다 경계선 안쪽으로 몰아냈었다. 사실 일부러 몰아내려고 한 것도 아니다. 어느 정도 죽이다 보면 생명의 위협을 느낀 놈들이 먼저 도망쳐 버렸기에 어쩔 수 없었을 뿐.

'하지만 또 그 짓을 하기엔 낭비가 너무 심했으니까….'

또 실을 설치하고 마물들을 끌어들여 상대하기엔 놈들의 수가 미달이라 효율적이지 못하다.

초반처럼 어마어마한 수도 아니고, 저 정도는 도망쳐도 큰 상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이 짧았다. 쫓겨난 마물들이 어디를 향하겠나. 근처에 생명체가 거주하는 곳이라고는 여기, 이 두 번째 도시뿐인데.

'이거… 누가 봐도 명백히 우리 탓이잖아.'

그런데 얘네는 찔리지도 않나?

한결같은 태도의 드벨라니아와 그저 내 상태에만 안중에 두고 있는 벤을 힐긋 돌아봤다.

내 시선을 놓치지 않은 드벨라니아가 살며시 고개를 까닥이더니 가이시텔을 불렀다.

"도시를 못 나가게 되면 곤란한데. 임무를 다해야 하지 않겠어, 10군단장님?"

"10군단은 언제나 도시를 지키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언제 준비를 끝냈는지 가이시텔이 검은 기류를 풀풀 흩날리는 마계 특유의 말을 끌고 나타났다.

마찬가지로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저마다 말의 고삐를 쥐고 그 뒤에 서 있는 10군단원들.

드벨라니아가 이끄는 2군단의 특기가 실을 이용한 공격 및 함정설치라면, 10군단은 '기마'다.

군단장이 날개를 달고 있는데 기마가 특기라니, 조금 미묘한 조합이긴 하지만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그들이 데리고 있는 저 마계의 말이 육식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는 무언가 말을 하는 대신 조용히 한 발짝 물러섰다.

그러자 벤이 대변하듯 앞으로 나섰다.

"하, 이렇게 추궁을 피하시는 겁니까."

"...주치의 주제에 끈질기군. 그쪽이 나설 일은 아니라 생각하는데."

"글쎄요, 이 자리에 없는 0군단장님의 부관에게 들은 말이 있어서 말입니다. 데몬 님은 평소 말수가 적으시니 한시도 시선을 떼지 말고 눈치를 살펴 그분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미리미리 알아차리라 했었죠."

...응? 나?

"그런 의미에서 데몬 님을 대신해 말하겠습니다. 상황이 상황이니 순순히 보내 드리지만 가이시텔 님이 어떻게 나오시든 경계선에 관한 일은 마왕님께 보고될 겁니다."

왜 나를 대신해 말하는 건데. 그냥 네가 말하는 거라고 하면 안 될까?

역시나 가이시텔의 매서운 시선이 벤을 향했다가 내게 닿는다. 나를 향한 시선이 노려보는 것보다는 눈치를 살피는 듯한 느낌에 가까운 것 같지만 당연히 착각이겠지.

고삐를 쥔 손에 힘을 꾹 쥔 그가 내게 허리를 한번 숙이더니 말에 올라탄다. 마찬가지로 말에 올라탄 10군단원들이 가이시텔의 뒤를 따라 성문 앞에 섰다.

이어서 힘이 바짝 들어간 목소리가 떨어졌다.

"문 열어."

10군단장의 임무는 도시를 지키는 것이다. 군말 없이 문이 열렸다.

마물들이 들어올 것을 대비해 반만 열린 문 틈새로 흑마를 탄 10군단이 출격했다.

두두두두두두!!

'오… 제법 멋있는데…?'

말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기류가 꼬리처럼 늘어졌다가 뒤늦게 흩어지는 장면을 멍하니 보던 나는 다시 닫히는 문을 스치듯 쳐다봤다.

그리고 눈을 의심했다.

마물이 들어와서가 아니다. 다행히도 마물은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두두두두두두!!

'얘네 뭐 하니….'

방금 나갔던 10군단이 돌아왔다.

아슬아슬하게 문이 닫히기 직전에 마지막 군단원이 들어오고, 쿵- 하고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저 너머에서 마물들의 괴성이 울려 퍼졌다.

희게 질린 얼굴로 숨을 몰아쉬던 가이시텔이 대뜸 드벨라니아의 멱살을 잡았다.

"너무 많잖아!"

91. 휴가 아닌 휴가(7)

"어머? 그런데 왜 내 멱살을 잡고 그러실까? 내 잘못도 아닌데."

"젠장, 젠장. 이건 안 돼. 우리 군단만으로는 무리야."

"저런, 제 일을 해내지 못하는 군단장이라니…."

"도와줄 수는…."

"내가 왜애?"

아무래도 내 예상이 맞은 모양이다. 이대로 이 도시에 갇히게 생겼다.

'...그건 끔찍한데.'

이 도시에서 이 녀석들과 같이 있어야 한다고? 벌써부터 마왕성의 내 방이 그립다. 마왕성에 위치해 있긴 해도 중요한 일이 있지 않은 한 아무도 들어오지 않아 제법 안락했는데.

암울하게 그려지는 미래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잠깐, 마물들이 여기까지 몰려왔다면 중간에 인간계로 새어 나간 놈들도 있지 않을까? 마침 근처에 인간계와의 경계선도 있댔고.

'...어떡하지.'

인간계 남부라면 제국은 아닐 테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되려나. 아니, 그래도 인간계인데?

제국의 영토가 넓어서일까, 지금까지 대부분의 경계선은 제국에서 발견되었다. 그래서 크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는데 왜 하필 엉뚱한 곳에 나타나서는.

'아니, 일단 정말 경계선이 남부와 연결된 게 맞는지, 있다면 어느 왕국의 어느 지역과 연결되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야. 그러기 위해서는 직접 확인을 해 봐야 하는데….'

"하아…."

"!"

참으려 했는데 절로 한숨이 나왔다.

저걸 어떻게 뚫어. 10군단도 포기했는데. 그냥 알아서 물러갈 때까지 이 도시에 콕 박혀 있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돌리던 참이었다. 내가 한숨을 쉴 때부터 흠칫하며 나를 살피던 드벨라니아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한 걸음 나섰다.

"데몬 님께서 원하시니 이번만 도와줄게."

"?"

"가시죠, 데몬 님."

벤이 왕진 가방을 붕붕 휘두르며 내 옆에 선다.

무엇을 근거로 이런 결론이 나온 건지 잘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바란 대로 이루어졌기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걸음을 뗐다.

성문이 열리고, 잠시 뒤.

이곳에 갓 도착했을 때와 별 차이 없는 분위기 속에서 나는 마물들의 사체를 밟고 밟아 경계선 부근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낮과 밤이 선명히 갈리는 곳에서 멍하니 서 있길 잠시, 지옥을 뚫느라 잠시 가출했던 넋이 돌아오기 무섭게 난 무언가 깨닫고 입을 떡 벌렸다.

분명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내가 여기 오고 싶어 했다는 건 어떻게 알고….

"데몬 님이시라면 보고를 위해서라도 한 번쯤 직접 가 보려 하셨을 테니 이렇게 나온 김에 들렀는데에… 혹시 제가 실수했나요…?"

"아…아뇨… 고맙습니다."

"고맙긴요."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나야 편하고 좋지.

경계선을 넘기에 앞서 내 옷차림새부터 살폈다. 저쪽이 제국의 영역이든 아니든 내 정체를 들키는 것은 곤란하다.

그사이, 나를 향해 눈을 휘어 보인 드벨라니아가 고개를 돌려 가이시텔을 쳐다봤다.

"이제 10군단은 돌아가지? 본인의 임무를 잊어서는 안 되지이."

틀린 것 하나 없는 말에 그의 안색이 살짝 죽었다.

"그래도 안내 정도는…."

"데몬 님 본인이 인간이신데 안내가 필요하시겠어? 뭐어… 굳이 안내가 필요하다면 너보다는 내가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고. 네게 이 너머가 '남부'라는 것을 알려 준 것도 나잖아?"

그러고 보니 드벨라니아는 임무 때문에라도 인간계에 많이 나갔지. 아마 나를 제외한 그 어떤 군단장보다도 인간계에 가장 빠삭하지 않을까 싶다.

'그나저나 새삼 생각하니 어이가 없네. 가이시텔은 그렇다 쳐도 드벨라니아까지 이곳의 존재에 대해 침묵하고 있었을 줄이야.'

벤도 황당한지 할 말 많아 보이는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으나 비슷한 말을 또 하고 싶지는 않은지 미간을 좁히는 것으로 대신했다.

논리에 밀린 가이시텔이 시무룩한 얼굴로 돌아선다. 드벨라니아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제 군단까지 돌려보내고 나서야 홀가분한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데몬 님, 준비는 다 되셨나요?"

"네, 뭐…."

얼굴을 가린 로브 후드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도 내 옷차림은 말끔했다. 여기 오는 내내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았으니 흐트러짐 없을 만도 했다. 심적으로는 말도 안 되게 너덜너덜해졌지만 그건 별개로 넘기고─

뭐랬더라. 여기 군단장이 둘이나 있는데 귀찮게 직접 나서지 않으셔도 된댔나?

"그럼 가실까요?"

"네…."

이때 나는 정신이 쏙 빠진 터라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말았다.

내 옷차림만 신경 쓸 것이 아니라 저들의 옷차림도 신경 써야 한다는 것을.

말끔한 나와 달리 저들은 마물의 피를 뒤집어쓴 상태라는 것을.

***

"피 칠갑을 하고 인간계로 넘어와?!"

이 미친 마족들이!

남부 한 작은 왕국의 국왕이 치솟는 혈압을 이기지 못하고 기어이 뒷목을 잡았다. 그의 몸이 뒤로 넘어가는 것을 본 기사가 급히 몸을 내던져 그를 받았다.

"저, 전하! 진정! 진정하십시오! 심호흡, 심호흡을…!"

"후욱, 후욱…."

이 망할 마족들을 어찌해야 할까. 도대체가 숨길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어디서 살인이라도 저지른 건가? 동족상잔? 아니지, 몬스터들을 처리하며 등장했댔으니 아마 그 피는 몬스터의 것일 터다.

거기까지 생각한 국왕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이건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의도야 어쨌건 그들은 왕국을 대신해 몬스터들을 처리해 주었다.

갑작스럽게 경계선 너머에서 몬스터들이 넘어오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얼마나 아찔했던지. 자칫하면 정말 큰 일로 번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들 중에 심상치 않은 마족이 보인다 했는데."

"아, 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이보게… 이곳에 넘어오는 마족들은 거의 다 로브를 쓰고 있어. 검은 로브의 비중은 그중 90%고."

"아… 하지만 그들 중 유일하게 피 하나 묻지 않은 말끔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합니다. 풍겨 나오는 기백도 남달랐고, 같이 온 다른 마족들이 그를 존중하고 모시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는데, 아무래도 지위가 높은 마족이 아닐까 추측됩니다."

설명이 이어질수록 점점 떠오르는 누군가의 이미지에 국왕이 점차 표정을 굳혔다.

검은 로브, 남다른 기백, 마계에서 높은 지위.

물론 아닐 가능성이 높다. 아니어야 한다. 전투 등의 중요한 일이 아닌 이상 어지간해서는 마왕성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그'가 왜 하필 이곳에 걸음 하겠나.

하지만.

"전하! 새로운 보고입니다! 인간계로 넘어온 마족들 중 한 명은 마왕군의 제2군단장 드벨라니아라 합니다! 얼굴을 가리고 있지 않아 파악이 쉬웠다고…."

"빌어먹을."

얼굴을 가리고 있지 않았단다. 그렇다면 적어도 '검은 로브'는 2군단장이 아니라는 뜻이 되겠지.

같이 온 마족들이 '검은 로브'를 존중하고 모시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는데, 무려 2군단장이 존중하고 모시는 상대가 몇이나 되겠는가.

점차 굳어지는 확신에 국왕의 얼굴에 해탈과 체념이 깃들었다.

"...0군단장."

"예?"

"검은 로브 말이다. 아마 0군단장일 것이다."

"그, 그런! 그가 어째서 이곳에…!"

"모르지. 새로운 경계선의 발견 소식에 정찰 왔을 수도 있고, 염탐일 수도 있고."

어느 쪽이건 좋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어떻게 터치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미쳐 날뛰는 제국의 행보에 신경을 곤두세우기도 바쁜데, 마계와도 트러블을 냈다간 이 왕국의 명운이 위태로워질 테니까.

"그들은 지금 어디에서 뭘 하고 있지?"

"그것이… 시장을 향하고 있다 합니다."

그 꼴로?!

시장에 가는 것에 대해 뭐라 할 생각도 없고, 뭐라 할 수도 없다지만 가기 전에 제발 본인들의 차림새부터 확인했으면 좋겠다.

이대로 그냥 둘 수는 없다. 자칫하면 왕국이 발칵 뒤집히고 제국의 시선이 이쪽에 닿게 될 터.

둘 다 바라지 않는 국왕으로서는 이마를 짚으며 내키지 않는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숨겨."

"예?"

"어떻게든 그들의 정체를 숨겨라. 방법은 상관없으나 최대한 소란을 피우지 않는 방향으로 진행하도록. 그래, 일단 깨끗한 로브부터 주는 게 좋겠군."

"예. 그런데 과연 그들이 순순히 받을지…."

"그건 네가 생각해야지."

"...예?"

몰라, 알아서 처리해. 난 더 신경 쓰고 싶지 않으니.

당황과 황당함이 가득 담긴 상대의 시선을 대놓고 못 본 척 무시하며 국왕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

모처럼의 인간계는 '해가 있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라고 말해 주기라도 하듯 화창했다.

덕분에 오랜만에 해를 마주한 나는 반사적으로 로브 후드를 잡아당겨 얼굴을 가린 뒤에야 천천히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무언가 규칙이라도 있는지 언제나 인적이 드문 곳에 존재하던 경계선은 이번에도 예외 없이 발길이 잘 닿지 않을 법한 산속과 연결되어 있었다.

드벨라니아가 싱긋 웃으며 옆으로 비켜서서 한쪽 팔을 펼쳤다.

"자아, 데몬 니임, 어디부터 가고 싶으신가요? 인간이 많은 번화가? 아니면 인적이 드문 곳?"

"...기왕이면 이곳 거주민들의 일상을 잘 알 수 있는 곳으로…."

"그렇다면 역시 시장이죠. 이곳은 초행이실 테니 제가 안내하겠습니다아."

"그런데."

이곳에 넘어왔을 때부터 무언가 거슬린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벤이 어딘가를 보며 입을 뗐다.

"쥐가 몇 마리 보이는데 모르셨을 리는 없을 테고, 그냥 이대로 두실 겁니까?"

"아, 맞다. 딱히 해를 끼치지 않는 종류의 놈들이라서. 해치우면 더 귀찮아질 것 같아서 그냥 뒀는데, 데몬 님께서 거슬리신다면야. 어떻게 할까요?"

이곳이 집도 아니고 그저 산에 쥐가 있는 것뿐인데 굳이 해를 끼치지도 않는 놈들을 시간 낭비해 가며 잡을 이유는 없다.

거슬리기는커녕, 있는 줄도 몰랐고.

아니, 사실 지금도 모르겠다. 이렇게 조용한데 쥐가 어디에 있다는 거야?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그냥 가죠."

"네에, 그럼 이쪽으로 오세요."

한두 번 와 본 것이 아닌 듯 드벨라니아는 능숙하게 숲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따라 발목 나가지 않게 조심해서 이동하길 한참, 이윽고 우리는 숲의 입구에서 인간을 마주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인간들이 '기사'라는 것이지만.

활동성 좋아 보이는 생소한 갑옷을 입고 완전무장한 기사 둘이 딱딱한 얼굴로 우리를 멈춰 세웠다.

잔뜩 긴장한 채 언제든 튈 준비를 하고 있자니, 그들이 나를 향해 말을 건넸다.

"당신들이 바로 그 용병들입니까. 이야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이곳으로 넘어온 몬스터들을 해치우셨다고요."

"...?"

"덕분에 큰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기사단을 대표해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아뇨, 뭐…."

뭔진 모르겠지만 이렇게 오해해 주니 다행이다. 자칫하면 무력 충돌까지 감안해야 하나 걱정했는데.

콕콕 찔리는 양심을 무시하고 떨떠름하게나마 답하자 둘 중 한 명이 챙겨 온 짐을 뒤적여 두 개의 로브와 돈주머니를 꺼내 내민다.

여전히 시선은 나를 향한 채였다.

"약소하지만 사례금과 로브입니다. 로브는 아무래도 몬스터를 해치우면서 피가 많이 튀었을 것 같아 준비했는데, 잘 준비한 것 같군요."

아. 그제야 나는 드벨라니아와 벤의 상태를 깨달았다.

내 상태만 신경 쓸 것이 아니었다.

경계선으로 오는 내내 전투를 치른 탓에 둘의 상태는 엉망이었으며, 늘 봐서 익숙해졌다지만 뱀 비늘이 얼굴의 일부를 덮은 벤의 외모는 누가 봐도 인간의 것이 아니다.

그런데 로브 하나 없이 그 꼴 그대로 인간계에 넘어온 것이다.

내가 미쳤지. 망할.

'...그런데 로브를 준다고? 체포하거나 즉시 처분하는 게 아니라?'

그러고 보니 대화를 나누는 내내 드벨라니아와 벤을 쳐다보지 않았더랬다.

나도 모르는 사이 둘이 투명 마족이라도 되었나 했지만 현실적으로 그건 말도 안 되고,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가설은 하나인데….

에이, 설마.

'일부러 모른 척한다고? 아니, 이건 모르는 척하는 것을 넘어 정체를 숨겨 주는 수준인데?'

92. 휴가 아닌 휴가(8)

어째서?

그들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일반적인 제국민들과는 달리 조금 어두운 피부색. 그리고 생소한 형태의 갑옷.

언제였더라, 그래, 8년 전쟁 당시 남부의 한 왕국과 충돌이 일었을 때 본 적이 있다.

'역시 이곳은 남부인 건가.'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곳이 남부라는 생각에 추가 기울자 나머지는 자연히 떠올랐다.

물론 떠오른 가설에 확신을 싣기 전에, 확인할 것이 있다.

어차피 눈앞의 이들은 어떤 이야기를 듣든 당장 뭐라 반응하지 못할 테니 나는 거리낄 것 없이 드벨라니아를 불렀다.

"드벨라니아."

"네에."

"이 경계선이 발견된 것은 분기가 바뀌기 전입니까, 바뀐 이후입니까?"

마족들이 내가 오고 가는 시기를 두고 '분기'라 표현하는 것을 알고 있다.

경계선이 발견된 것은 내가 마계에 오기 전인가, 오고 난 이후인가.

멈칫한 것도 잠시, 언제 그랬냐는 듯 속을 알 수 없는 미소와 함께 답이 돌아왔다.

"분기가 바뀌기 전이었죠."

참 오래도 숨겼다. 도대체 언제 보고할 생각이었던 거야?

아무튼 덕분에 답은 나왔다.

남부에 마계와의 경계선이 생겼다는 것을 모르는 제국. 반대로 기사가 이곳에 있는 것을 보아 확실히 경계선의 존재를 알고 있을 왕국.

즉, 이곳 왕국이 일부러 경계선의 존재를 숨긴 것이다.

그 이유는….

'요즘 제국 상황이 많이 심상치 않긴 했지?'

허구한 날 전쟁이나 벌이고.

상황이 상황이라 알리기 두려웠으리라.

그러니 지금 이렇게 우리의 존재를 숨기고자 로브에 돈까지 줘 가며 사고 치지 않길 바라는 거겠지.

어차피 사고 칠 강단도 없고, 조용히 구경만 하고 돌아갈 생각이니 별문제는 없다.

나는 드벨라니아와 벤이 로브를 주섬주섬 뒤집어쓰는 것을 지켜보다가 손에 들어온 돈주머니를 쳐다봤다.

'이득 봤네.'

"아, 그리고 호, 혹시 모르실까 봐 말씀드리는데."

"...?"

"물건은… 훔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주고 사…는 겁니다."

"...."

"...용병이라 모르실까 봐… 대륙을 많이 떠돌아다니는 존재이기도 하고… 정말, 정말 혹시나 해서…."

본인이 말하고도 영 아닌 것 같았는지 구구절절 읊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어째 필사적이기까지 한 말을 잠자코 듣던 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드벨라니아를 쳐다봤다.

너 이 새끼들….

도대체 뭘 얼마나 훔친 거야?

...돌아가자.

시장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온 결론이었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그래, 막 시장에 도착했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새로이 얻은 이 정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제국은 아직 모르는 중요한 정보. 이걸 당장 제국에 연락을 취해 알려야 하는가, 모르는 척 그냥 두어야 하는가.

깊어지는 고민과 별개로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지금 난 마계 소속이지.'

굳이 지금 제국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

마계에서는 마계만, 제국에서는 제국만 생각하면 돼.

그렇게 이미 내려진 결론을 다시 한번 매듭짓고 고개를 든 순간, 일이 터졌다.

시장이 어떤 곳인가. 사람이 붐비는 곳 아닌가. 걷다가 사람들끼리 부딪치기도 하고 그러는 곳이다.

다만 내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이 몸은 짜증 날 정도로 약하다는 것과, 내 주변엔 시한폭탄들이 존재한다는 것 정도겠지.

퍼억!

"윽-"

몸이 크게 휘청였다.

툭툭 부딪히는 것과 다르게 아주 제대로 부딪혀 뒤로 넘어가던 몸은 벤이 받쳐 준 덕분에 꼴사나운 모습은 피할 수 있었으나, 들어온 충격은 어찌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입 밖으로 토해 냈다.

시장 바닥에 피가 쏟아졌다.

"우욱, 콜록콜록-."

"데, 세상에! 괜찮으세요?"

"너 이 새끼!!"

잠깐, 둘의 역할이 바뀌었잖아. 왜 드벨라니아가 날 살피고 벤이 놈의 멱살을 잡고 있는 건데.

둘도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후다닥 자리를 바꿨다.

벤이 서둘러 피가 잘못 넘어가지 않도록 자세를 잡아 주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녀석의 멱살을 잡은 드벨라니아가 이걸 어떻게 요리해야 할지 고심하는 표정을 짓는다.

이러다 정말 살인죄로 추격전을 벌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을 때, 기사들이 나타났다.

"감히 시장 한복판에서 시비를 걸다니."

딱히 누군가 나서서 설명하지도 않았는데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온 듯 그들의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기사 둘이 녀석의 양팔을 잡는다.

"자, 잠… 이게 무슨…."

"끌고 가라."

"아니, 왜 왕- 커헉!"

"말이 많군."

"아니 왜 왕실 기사단이 여기에 있는 건데에에에에에!!"

경비대! 경비대를 불러 줘어어어어어…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지는 그들을 허망한 시선으로 쳐다보다가 애써 고개를 돌렸다.

시작부터 불길하긴 하지만 기분 탓이겠지. 그냥 우연일 뿐이야.

...는 무슨. 이게 시작이었다.

"겨, 경비대는 어디 가고 웬…!"

"가자."

"살려 주세요! 다시는 안그러겠습니다아아아아…."

소매치기를 당할 뻔했을 때도.

"아이고, 나리! 먹고살려고 그랬습니다!"

"가자."

"나리! 나리이이이이!!"

시장에서 직접 고른 과일을 질 나쁜 과일로 바꿔치기 당할 뻔했을 때도.

"콜록콜록-!"

"이게 무슨! 독인가!"

"독이라니. 끌고…."

"아니야!"

사레들린 거야, 이 미친 새끼들아!

상황이 이러니 어쩌겠나. 더 사고 치기 전에 돌아가야지.

보아하니 돌아갈 때까지 기사단이 계속 쫓아다닐 것 같은데, 녀석들 입장에서야 마족들이 사고 치기 전에 자신들 선에서 끝내려는 것이겠지만 나로서는 그게 더 일을 키우는 느낌이다.

그 와중에 건진 찻잎을 품에 꼭 끌어안으며 조용히 둘을 불렀다.

"이만 돌아가죠."

"아, 벌써요?"

"네, 필요한 정보는 전부 얻었습니다."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찻잎은 데우사 찻잎으로 제국에서는 물론 다른 왕국에서도 구하기 힘들어 아주 비싼 가격으로 귀족들 사이에서 도는 차다.

이게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시장에 나와 있었다. 그게 무슨 뜻이겠는가.

'남부의 왕국 중, 이 귀한 차를 시장에 풀 정도의 왕국.'

그런 왕국은 내가 알기로 단 하나밖에 없다.

작지만 찻잎을 수출해 먹고 사는 차의 왕국.

태혼국.

"저… 덴 상단에서 데우사 찻잎 유통에 관한 건으로 또 연락을…."

"악! 내가 안 한다고 했잖아! 그 새끼들은 왜 이렇게 끈질겨?!"

"생긴 지 얼마 안 된 상단이라 열정이 넘치는 모양입니다. 꼭 유통망을 트고 싶다네요."

"하, 그래, 뭐 하는 새끼들인지 어디 한번 얼굴이나 보자. 오라고 해."

확실하다. 데우사 찻잎으로 이런 상황을 빚어내는 왕국은 태혼국 뿐이다.

시끌시끌한 공간을 한번 둘러보고 드벨라니아를 쳐다봤다. 돌아가고 싶다는 내 마음을 용케 읽었는지 그녀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만족하셨다면야… 그럼 안내하겠습니다아."

"네."

어서 돌아가자.

나는 후드를 재차 잡아당기며 걸음을 재촉했다.

***

"...하여, 관찰해 본 결과 검은 로브의 마족은 0군단장이 아닌 것으로 판별이 났습니다."

"허어…."

국왕은 조용히 양 관자놀이를 짚었다.

검은 로브의 마족이 마왕 다음가는 위험인물―0군단장―이 아니라는 소식은 반가웠으나, 그럼에도 그는 차마 웃을 수 없었다.

별것도 아닌 것으로 피를 토했다니 그래, 확실히 0군단장은 아니겠지.

"그럼 그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것은 잘…."

2군단장이 모시는 몸이 약한 마족.

그런 마족이 도대체 누가 있단 말인가. 애당초 마계는 힘의 논리로 돌아가는 곳이니 명제부터가 말이 되지 않는다.

몸이 약하면 2군단장이 모실 리가 없다. 그런데 보고자는 분명 2군단장이 그를 '모시고' 있다고 말했다.

아무리 고민해 봤자 답이 나올 리가 없다. 결국 국왕은 신경이 곤두서 잔뜩 충혈된 눈 주위를 꾹꾹 누르며 해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고 치지 않고 돌아간 것에 만족해야 하나."

다신 넘어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최근 들어 머리카락이 빠지는 양이 늘어나고 있음을 실감하며 그는 그저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굿이라도 하든가 해야지 원…."

***

도시로 돌아온 나는 벤의 조심스러운 재촉에 못 이겨 곧장 마왕에게 통신을 취했다.

우려와 달리 마왕은 드벨라니아와 가이시텔이 경계선의 존재를 숨겼다는 것에 대해 어떠한 처벌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래?'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을 뿐.

너무 태평한 반응에 순간 나까지 벙쪘으나 이내 납득할 수 있었다.

마왕은 철저한 '결과주의'를 추구하니까.

무엇을 하든 결과만 좋으면 되는 거다.

경계선의 존재를 숨겼다지만 결과적으로 아직 어떠한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으니 처벌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경계선을 지키고 있어야 할 9군단장이 고작 심심하다는 이유로 마왕성에 귀환해 눌러앉아 있어도 별말이 없는 것이겠지.

'문제가 터지는 즉시 9군단장의 목부터 날아가겠지만.'

-아, 그리고 데몬. 돌아올 때도 외곽으로 돌아서 왔으면 하는데….

"...네…네?"

-걱정 마. 무리해서 돌아오라는 건 아니니까. 나도 그때 그 장면 아직 기억하고 있어. 예상 이상으로 수가 많았었지. 5군단을 마중 보낼 테니 중간에서 만나 같이 귀환하도록 해.

알겠다고 답하려던 순간 문득 느껴지는 위화감에 나는 멈칫 입을 닫았다.

'5군단…?'

5군단이면… 어… 설마, 그….

...무슨 이유로 그가 마왕성에 상주하는 그 많은 군단 중 하필 5군단을 보내는지 알 것 같다.

서둘러 다물었던 입을 재차 열었다.

다른 군단장을 보내 줄 수는 없느냐 물으려 했으나, 불행히도 마왕이 한 발 더 빨랐다.

-그럼 이만.

"...."

-이제 좀 조용히 지낼 수 있겠네.

뚝. 통신이 끊겼다.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던 나는 조용히 입을 틀어막았다.

왈칵, 피가 쏟아졌다.

"데, 데몬 님!!"

***

한창 전쟁 중인 제국은 매일같이 새로운 소식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를테면 왕국 몇이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동맹을 맺었다든가.

제국 동부에서 남진을 하던 도중 퍼진 전염병과 그런 환경 속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는 한 왕국군에 제국군의 발이 묶였고, 이를 두 번째 영웅인 스티그마 프리미로와 그의 부대가 철저히 격파했다든가.

아니면 제국 서부에서 네 번째 영웅인 크루엘 하르트가 적들에게 체크메이트를 선고했다든가.

제국 중앙에서 남진을 총괄하고 추진하는 첫 번째 영웅 네메세우스의 소식 등등….

그래, 이쯤에서 느꼈겠지만 현재 제국은 동시에 여러 왕국과 전쟁을 치르고 있다.

각 영웅들이 각 지역을 맡아 각 왕국과 땅따먹기를 한다. 참으로 미친 짓이 아닐 수 없지만, 안타깝게도 이건 현실이다.

황제는 진즉에 황태자와 거의 모든 인수인계를 끝마치고 검을 든 채 전쟁터에 나왔고, 그동안 모아두었던 용사의 파편을 지닌 자들, 영웅 후보들을 풀어놓았다.

그간 인재 수집에 열을 올렸던 것이 헛수고는 아닌지, 놀랍게도 제국은 동시에 여러 왕국들과 전쟁을 치른다는 말도 안 되는 상황 속에서도 순조롭게 영토를 넓혀 가고 있었다.

'두 달, 아니 한 달만 있어도 대륙의 절반을 먹게 될 것 같은데.'

말없이 읽던 보고서를 밀어 놓은 공작이 조용히 두 손을 깍지 껴 책상 위에 내려놓고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그때가 되면 판 자체가 뒤바뀐다. 이 게임 역시 땅따먹기가 아닌 다른 종목으로 바뀌겠지.

그때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패는.'

구원교와 황제를 향한 악화된 여론, 그리고 혁명군.

보라색 눈동자가 책상 위, 혁명군에 관한 정보가 적힌 종이를 향한다. 공작은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 들었다.

무심한 눈이 글자를 읽어 내려가는가 싶더니 이내 짜증을 담고 일그러진다.

이레온에 갔던 혁명군 수장 다니엘이 돌아왔다. 기어코 새 전력까지 데리고.

'그냥 얌전히 내 뜻대로 움직여 주면 좋을 것을.'

혁명군은 더 이상의 세력을 얻을 필요가 없다. 얻어서는 안 된다.

혁명군의 목표가 황제를 죽이는 것이라지만 공작이 그들에게 바라는 것은 오직 황제를 향한 지지도를 떨어뜨리는 것뿐.

그 이상의 일은 오히려 막고 싶은 입장이었다.

'세력을 얻었으니 혁명군은 움직이겠지. 그들 전체가 작정하고 다니엘의 지휘에 따라 움직인다면 정말 황제를 죽일지도 몰라.'

범상치 않았던 그들의 수장을 떠올린 공작이 표정을 굳혔다.

황제는 혁명군의 손에 죽어서는 안 된다.

혁명군의 세력을 줄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이어지던 생각이 멈췄다.

눈을 내리깔고 가능성을 검토하던 그가 깍지를 낀 손을 풀며 줄곧 한 쪽에 대기하고 있던 여인을 불렀다.

"사에린."

"네, 공작님."

"혁명군의 수를 줄여 놓으세요. 방법은 이간질이 좋겠군요. 황제를 활용해도 좋습니다."

93. 속고 속이고, 이용하고 이겨내고(1)

그녀라면 제가 무엇을 바라는지 눈치챘겠지.

아니나 다를까, 망설임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명확한 답이 돌아왔다.

"알겠습니다."

이 어찌나 유능한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눈에 담았다. 맹목적인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가 저를 좋아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공작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책상을 돌아 나와 사에린의 앞에 선 그가 살짝 허리를 숙여 부드러운 몸짓으로 그녀의 손을 받쳐 든다. 시선이 마주치고, 보라색 눈이 아름답게 휘어졌다.

이어서 그의 고개가 낮아지며 느슨하게 묶어 둔 보라색 머리칼이 그녀의 손등을 스치고 주위에 커튼을 만든다. 그 사이에서, 공작의 입술이 나붓이 손등에 내려앉았다.

귀족 영애를 향한 예법.

평민인 사에린의 눈이 커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차마 손을 빼지도 못하고 얼어붙은 채 눈만 굴리고 있자니 공작이 담백하게 고개를 든다.

그린 듯한 미소가 오롯이 그녀를 향했다.

"언제나 고맙습니다."

"...아뇨, 당연한 일인 것을요."

사에린이 서둘러 맡은 임무를 처리하기 위해 자리를 뜨고, 뒷모습을 지켜보던 공작이 조용히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사에린은 성공할 것이다. 혁명군 사이를 이간질해 그들 중 일부를 황제에게 보내겠지. 다니엘이라는 머리도, 압도적인 수도 없는 이상 그들은 황제의 먹잇감일 뿐이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것도 있으니 마냥 손 놓고 앉아 있을 수는 없겠지.

사에린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의심하는 쪽은 다름 아닌 황제.

'자칫 그들의 손에 죽기라도 하면 곤란해.'

황제는 언제나 죽지 못해 살고 있었으니.

관건은 황제의 생존 욕구다. 조금이라도 그가 살고 싶게 만들어야 한다.

'마침 얼마 전에 황제가 황궁에 돌아왔댔나.'

황제가 주야장천 황궁을 비우고 있을 수는 없다.

아무리 황태자가 일 처리를 잘하고 있다 해도 현 제국의 황제는 에도아르도 데세르트이기에 그는 간혹 조용히 황궁에 돌아와 일들이 어떻게 처리되고 있는지 확인하곤 했다.

그러니 지금 황궁에 가면 황제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지체할 것 없이 바로 마차를 준비하라 이른 공작이 집무실을 성큼 나섰다.

***

사에린은 굳이 따지자면 혁명군을 응원하는 쪽이었다.

공작을 향한 마음에 평민이라는 신분의 벽. 그런 상황에서 신분제 자체를 없애겠노라 주장하는 혁명군의 사상은 실로 매혹적이었으니.

그러나 그 사실이 외부로 표출되는 일은 없었다.

지금, 공작을 사랑하기에 혁명군을 지지한 그녀는.

공작을 사랑하기에 혁명군을 부수러 가는 중이었다.

사랑해 마지않는 그가 그것을 바라고 있으니까.

"안녕하세요, 아이덴 씨."

"아, 사에린 님."

"수장이 돌아왔다면서요? 그는 어디에 있죠?"

"뻔하죠. 어머니를 만나러 갔을 겁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말꼬리에 쯧- 하고 혀 차는 소리가 따라붙었다.

"상황이 상황인데 정신도 못 차리고 자리만 비우고 있으니."

"그러게요."

이건 이용해 먹을 수 있겠다. 사에린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럼 생각해 보자. 아이덴의 성격은 어땠지? 그는 욕심이 많은 인물이었나? 욕심이 많다면 재물과 권력 어느 쪽? 그는 어떤 목적으로 혁명군에 들어온 거지?

이용하기 쉬운 성격이고, 이용 가치가 충분한가?

"그는 도대체 언제 거사를 치를 생각일까요?"

"모릅니다. 언제까지 미룰 생각인지."

"이런. 공작님께서도 슬슬 혁명군이 움직이길 바라는 눈치시던데. 이건 아이덴 씨의 의견과는 상관없는 수장의 독단적인 선택인 거죠?"

"물론입니다. 저희도 답답해 미치겠다고요."

"거사를 미루는 이유에 대해서는 알고 계신가요?"

"이유야 늘상 같죠. 준비가 덜 되었다든지, 타이밍이 아니라든지."

"이건… 핑계에 가까운 것 같네요."

한쪽 뺨을 감싸 고개를 기울이며 의뭉스러운 어조로 중얼거리듯 질문을 던진다.

"아이덴 씨는 생각해 보셨어요? 왜 수장이 거사를 미루는지."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어서 모르겠군요."

대수롭지 않게 넘기던 의문을 친절히 짚어 주고.

"제가 생각을 해 봤는데요, 아무래도 수장은 지금의 자리를 잃기 아쉬워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어요."

"그런…."

"그렇잖아요? 수많은 왕국 출신들이 모인 거대한 하나의 연맹. 그 연맹의 수장. 황제를 처리하면 새로운 바람이 불어 흩어질지도 모르는 권력이니 아쉬울 만도 하죠."

독을 속살거린다.

아이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불만이라는 땔감에 불이 붙어 또 하나의 부정적인 감정을 탄생시킨다.

사에린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불이 꺼질세라 부채질을 서둘렀다.

아이덴에 대해서는 대화를 나누며 파악했고, 서류상에 기록된 내용 역시 기억해 냈다.

그는 재물, 권력 따지지 않고 통틀어 욕심이 많은 인물이다. 그가 혁명군이 된 이유는 황제를 죽이고 싶다는 이유와, 혁명군의 성공 가능성이 높아서.

혁명이 성공하면 참여했다는 것을 강조해 명성을 높이려는 것이다. 명성이 높아지면 뒤따라오는 것들도 많을 테니까.

휘두르기도 쉬운 인물이며, 혁명군에서 제법 큰 세력을 이끌고 있다는 점에서 이용 가치 역시 충분하다.

그럼 이제 움직여야 할 때다.

뭐를? 혀를.

"그래서 말인데요, 아이덴 씨가 황제를 처리하고 새 나라의 중심이 되는 것은 어떨까요?"

"혁명군은 모두가 평등한…."

"말은 좋죠. 하지만 그런 꿈같은 세상이 어디에 있겠어요. 애초에 황좌 자체를 없앤다는 건 터무니 없는 주장이었어요. 아니, 없애는 것이 가능하다 해도 결국 나라를 이끌 핵심 인력은 필요하죠."

'머리가 좋은' 사에린은 '평민'이다.

좋은 머리와 평민이라는 출신은 주어진 사상을 비틀어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닌 '악'은 고려하지 않은 '이상'에서 좀 더 인간의 욕망이 포함된 '현실'로 끌어내렸다.

이상은 어디까지나 이상이다.

이 사상을 누가 떠올렸는지 몰라도 아마 크게 고생 않고 자란 어딘가의 귀족 학자이거나 머릿속이 꽃밭인 긍정적인 사람이겠지.

평민이기에 길에서, 시장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들에서 인간의 크고 작은 악의를 느끼게 되는 사에린으로서는 그것이 의도대로 진행될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그것은 혁명을 일으키고 그에 동참한 이들조차 그러할 테니까.

"아이덴 씨의 세력을 이끌고 황제를 죽이세요. 그리고 그 공으로 혁명군의 중심이 되어 신분제를 없애는 대신 나라를 이끄는 수뇌부에 포함되는 거죠."

"...."

"조금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해 볼까요? 수뇌부만 빼고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거예요. 여기서 아이덴 씨가 '황제를 죽였다는 상황'을 잘 이용하면 그 수뇌부조차 아이덴 씨의 손으로 뽑을 수도 있겠죠."

이를테면 '제가 이 일을 성공하는데 큰 도움을 준 이들은…' 하고 언급한다든가. 황제를 주도하여 죽인 이의 말이니 아마 대체로 존중되리라.

놀랍게도 이 모든 것은 즉석에서 떠올린 것들이었다.

"공작님께서도 하루빨리 거사가 이루어지길 바라고 계셔요. 그러니 적극적으로 돕지는 못해도 황제의 일정 정도는 구해 주실 겁니다."

물론 아이덴이 황제를 죽일 가능성은─

"...확답이 필요합니다."

0%.

사에린은 생긋 웃었다.

"황제의 일정을 구해 드리겠습니다."

이거면 된 거다. 사에린은 조용히 제 손등을 매만졌다. 공작의 입술이 닿았던 그곳은 아직도 감촉이 선연해 온기가 남아 있는 듯했다.

공작은 지금도 충분히 그녀를 존중하고 있었다.

...공작은 그녀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만약 한번 쓰고 버릴 존재로 여겼으면 그녀의 마음을 눈치챈 즉시 침실로 끌어들였을 것이다. 그편이 훨씬 이용하기 편하니까.

실제로 그는 제게 마음이 있는 이들 중 쓰고 버릴 패로 여기는 이들은 남녀 구분 없이 침실로 끌어들이곤 했다.

때로는 그들이 괜히 부럽기도 했지만, 공작이 누구를 더 중히 여기는지는 확실히 알고 있기에.

사에린은 망설임 없이 짧게나마 꾸었던 꿈을 버렸다.

***

갑작스러운 알현 신청은 당연한 것처럼 빠르게 받아들여졌다.

황궁의 사용인들이 놀라는 반면, 공작은 황제가 필히 그러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기에 이를 당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시종의 안내에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야, 정적의 말을 듣지 않는 것보다는 어떤 헛소리일지라도 일단 들어 두는 것이 나을 테니까.

더 나아가 심리전에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상대의 속을 떠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고.

광오한 황제가 이를 피할 리 없었다.

"제국에 영광을. 신 스타베 일루스터가 현재의 제국을 뵙습니다."

"그래, 공작. 무슨 일이지?"

공작은 대답 대신 황제를 쳐다보았다. 정확하게는 얼굴 바로 아래까지만.

피곤한 듯 팔걸이에 팔을 걸치고 비스듬히 앉은 황제가 딱 최소한의 예의만 지킨 건방진 공작을 불쾌하다는 듯 내려다보고 있었으나 공작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황제의 매서운 눈빛보다 더 시선을 끄는 것이 있었다.

"손은 어쩌다 그리되셨습니까."

"공이 신경 쓸 것 없다."

팔걸이에 걸쳐져 있던 흰 붕대가 감긴 왼손이 지그시 주먹을 쥔다.

공작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모습을 살폈다.

'전쟁터에서 다친 건가. 도대체 얼마나 활개 치고 다녔길래.'

상처의 규모를 확인하기 위해 꼼꼼히 살폈으나, 그가 온다고 붕대를 새로 갈았는지 피 한 방울 내비치지 않은 깨끗한 흰 붕대는 부상의 정도를 철저히 감추고 있었다.

'...그래, 이렇게 쉽게 약점을 보일 리가 없지.'

공작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릴 때, 서늘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순순히 상처를 살피는 것을 두고 보지 않겠다는 듯, 시선을 붙드는 목소리.

"지금 짐의 상처를 보겠다고 온 것인가, 공작?"

"...아닙니다. 실례했습니다. 폐하."

그래, 이제 입을 놀릴 차례다.

황제가 혁명군의 손에 죽지 못하도록, 이 말을 하는 자신을 죽이지 못하도록─

지그시 감겼던 눈이 뜨였다. 바닥을 보던 자안이 천천히 올라가 황제의 가슴께에서 멈추는가 싶더니, 더 올라가 금안을 똑바로 마주한다.

맹수를 닮은 금안은 여전히 맹렬했으나 눈 밑의 그림자는 숨길 수 없는 피로를 담고 있었다.

황제는 그에게 제 얼굴을 허락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멋대로 고개를 들고 자신의 얼굴을 본 공작을 무어라 질책하지도 않았다.

다만 알현실 전체에 낮게 살기가 깔렸을 뿐.

검과는 거리가 먼 공작으로서는 버티기 힘들 법한 살기였으나, 그는 끝끝내 버티고 서서 깊숙이 묻어두었던 진실을 끄집어냈다.

"현 황태자 전하와 황녀 전하의 아버지이자 폐하의 형님이었던 전 1왕자의 죽음을 기억하십니까."

그 많은 형제들 중 유일하게 에도아르도 데세르트를 챙겨 주었던, 온화한 성격의 한 남자.

다행히 황제는 즉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도, 그렇다고 검을 빼 들지도 않았다.

그저 붕대를 감은 왼 손등을 툭툭 두드리며 인상을 찌푸리고는 나직이 주위에 물러가란 명을 내렸다.

"경들도 물러가도록."

"하오나 폐하. 장군님이…."

"네메세우스에겐 짐이 직접 말해 두지."

"...."

"일루스터 공이 짐을 죽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나?"

"...물러가겠습니다."

기어이 호위까지 물린 황제가 공작을 쳐다봤다. 더욱 낮아진 목소리가 침착하게 흘러나왔다.

"그라디스 공작이 죽였다고 알려졌으나 실은 공이 죽인, 그 사건을 말하는 것인가."

"잘 알고 계시는군요."

"미쳤군."

진실을 알았을 때, 황제는 이를 덮어야 했다.

이미 그라디스 공작가는 멸문했으니까. 그것도 1왕자 시해를 이유로 가문의 이름이 완전히 지워졌는데, 이제 와서 사실 아니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황제만이 타격을 입는 것이 아니라 공작 역시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눈앞에서 인정하다니.

"이제 와서 언급하다니 이해할 수가 없군. 대체 무슨 속셈이지?"

"제가 왜 그분을 죽였는지 연유가 궁금하지는 않으신지요."

"...."

"더 높은 곳에 올라가기 위해 그랬습니다."

공작의 자리로 만족할 줄 알았던가.

공작위에 올랐으면 황제의 자리를.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면 발밑에 일통한 대륙을.

스타베 일루스터는 그런 사람이었다.

94. 속고 속이고, 이용하고 이겨내고(2)

"당시 상황은 적통 장자인 1왕자가 황태자로 거의 확정되는 상황이었지요. 그러니 그를 죽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빈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다른 왕자와 왕녀들이 날뛰었겠지."

"네, 실제로도 그리되었지요. 그들 중 꼭두각시로 쓸 만한 이를 골라 왕의 자리에 앉힐 생각이었습니다만…."

노골적인 웃음소리가 들렸다.

과거를 회상하듯 눈을 내리깔고 있던 공작이 멈칫 시선을 들었다. 황제가 조소를 머금고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습군. 세상일이 생각처럼 쉽게 돌아갈 줄 알았더냐."

"...그렇습니다. 제 오만이었지요."

오만의 증거, 에도아르도 데세르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이내 미소를 머금었다.

"설마하니 존재감 없던 9왕자가 두각을 드러내리라고는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정확히 말하면 미쳐 날뛰었다.

9왕자 에도아르도는 1왕자의 죽음이 왕위 다툼 탓이라 생각하고 그간 왕위를 노렸던 제 형제들을 모조리 죽이고 스스로 그 자리에 올랐다.

자비는 없었다. 그들의 자식조차 죽여 반란의 씨앗을 없애 버렸으니.

공작은 이 모든 상황을 잠자코 지켜봤다.

왕위에 오른 에도아르도가 왕국의 이름을 '제국'이라 명명하고 1왕자의 자식들을 황태자와 황녀로 인정하는 것까지, 전부.

그리고 웃었다. 누구더러 누구를 지켜 달라는 거냐고.

"...이상하군. 오늘따라 왜 이리 공이 도발을 하는 건지."

머리가 아파 오는 듯 황제가 한 손을 들어 미간을 짚었다.

"1왕자를 함부로 언급하는 것 하며, 모르쇠로 일관하던 살인 혐의를 인정하고, 제 더러운 욕심을 드러내는 것까지."

"...."

"도대체 무슨 속셈일까."

그렇지 않아도 피곤한데 왜 굳이 찾아와 속을 득득 긁어 놓는지 모르겠다.

바쁜 삶으로 묻어 두었던 과거의 기억이 다시금 떠올라 황제가 팔걸이를 쥔 손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다녀올게. 얼마 걸리지 않을 거야.]

[그동안 엘피디우스와 알레테아를 부탁할게.]

그게 그의 마지막일 줄 알았다면 절대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불길함을 감지했을 때, 그를 붙잡았어야 했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검을 쥘 것이 아니라 조사를 했어야 했다.

그의 빈자리를 노리는 형제들이 아무리 역겹다 해도 쉬이 검을 겨눠서는 안 됐었다.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다른 형제들이 그를 죽였다는, 다소 신빙성 있는 소문에 쉽게 휘둘려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아.'

머리 아프다.

눈앞에 망령이 얼굴을 들이밀고 낄낄거린다. 아래로 내려가 공작의 주위를 한 바퀴 돌고는 그의 얼굴 위에 덧씌워진다.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그 목을 치고 싶었으나 황제는 섣불리 감정을 터트리는 대신 이를 악물었다.

그때와 똑같은 실수를 할 수는 없다.

"1왕자 시해 사건, 크루엘 하르트 대신 데온 하르트가 8년 전쟁에 참전하게 된 것, 구원교."

"...."

"언제나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공이 있었지. 공이 허튼소리를 할 리는 없으니, 이번에는 또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건지 경계심부터 드는군."

"당연한 겁니다. 생각하셔 봤자 당장은 알 수 없겠지만요."

황제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드물게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방금 공작은 그 말을 함으로써 두 가지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황제가 말한 모든 사건에 자신이 연관되어 있었다는 것, 이번에도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

그중에는 데온 하르트가 들었다면 세상이 뒤집힐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크루엘 하르트 대신 데온 하르트가 8년 전쟁에 참전하게 된 원흉이 공작이라는 것.]

8년 전쟁 당시 본래 하르트가에서는 크루엘 하르트가 참전하기로 되어 있었다. 중간에 서류가 바꿔치기 당하지만 않았더라도 필시 그랬을 테지.

황제도 서류가 바뀌었다는 사실은 전쟁이 끝나고 논공행상 때 알게 되었다.

정확하게는 데온 하르트가 가문의 멸문을 바랐을 때,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조사했다가 알게 되었더랬다.

──서류가 바뀌어 데온 하르트가 강제로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고, 그에 대해 하르트가에서는 초반에 정정 요청 서류를 몇 번이고 황궁에 제출했으며, 그 모든 서류가 중간에 누락되었다는 것을.

그 모든 진실을 알고도 모른 척 입 닫고 눈감은 채 데온 하르트의 청을 받아들인 자신 역시 쓰레기지만….

황제는 눈앞의 더 크고 진득한 쓰레기를 노려보았다.

"지금 그 모든 사실을 인정하는 것인가. 최소 사형일 터인데, 진정 공이 미친 모양이군."

1왕자를 죽였다는 사실을 제치고 다른 모든 굵직한 사건에 연관되어 있음을 시인한 것만 보아도 하나하나가 큰 죄다.

짙은 살기와 위협, 경계와 감추지 못한 의문이 담긴 목소리에 공작이 싱긋 웃었다.

"이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지요. 폐하께서는 저를 죽이지 못하신다고."

과장된 몸짓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황제가 모든 이들을 물렸음을 상기시켰다.

"증인도, 증거도 없습니다. 더 설명이 필요하십니까?"

"...."

1왕자 시해 사건은 이미 끝난 탓에 함부로 손을 댈 수 없고, 데온 하르트의 8년 전쟁 참전에 관한 서류 누락은 황궁에서 직접 서류를 빼돌렸다는 증거가 있지 않은 한 그에게 큰 타격이 되지 않는다. 공작이 백작가를 건든 것뿐이고, 그 백작가는 현재 힘을 잃었는데 이제 와 누가 뭐라 할 수 있을까.

게다가 구원교 역시 공작이 연관되었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으니 황제로서는 공작의 목을 칠 명분이 없는 것이다.

"물론 폐하께서는 증거가 없어도 이 목숨 하나쯤은 친히 끊어 놓으실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으실 겁니다. 아무런 명분도 없이 저를 죽여 버리면 제 명예는 그대로 남고, 폐하께서는 공작의 권력이 두려워서, 혹은 거슬려서 죽인 속 좁은 폭군이 되실 테니까요."

"잘도… 지껄이는군."

기어이 금으로 이루어진 팔걸이가 우그러졌다.

천천히 몸을 앞으로 기울여 공작을 내려다본 황제가 이를 드러내듯 웃었다.

"언제까지 모든 증거를 없애고 숨겨가며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이냐."

─그래,

"어디 한 번 끝까지 버텨 보거라. 빈틈이 드러나는 순간이 그대의 사형 날일 터이니."

또한 그대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이 나락으로 처박히는 날일 것이다.

매 순간 희미해지던 생의 의미가 다시금 선명해진다.

삶의 목적이 강하게 새겨지며 언제 죽어도 상관없을 것 같던 이 목숨에 일말의 미련이 생긴다.

공작, 스타베 일루스터가 쌓아 온 모든 것들을 무너뜨리고 처참히 죽이는 그 순간까지.

황제는 죽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리 없는 다니엘은 닫힌 문 앞에서 멈추어 서서 제 차림새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옷부터 갈아입은 덕에 막 돌아왔을 때의 너덜너덜한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곳의 전투에서 입었던 부상은 깔끔한 옷 밑에 감춰졌고, 미세하게 풍길 혈향 역시 향수로 가렸다.

완벽하다.

이레온에서 대기하고 있던 살인귀 기사단과의 난전이 떠올라 미세하게 얼굴을 구긴 것도 잠시, 다니엘은 얼른 표정을 가다듬었다.

어머니 앞에서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일 수는 없으니까.

-똑똑.

"어머니. 다니엘입니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여인이 웃으며 손을 뻗는 모습이었다.

아마 반기는 몸짓이었겠지만 다니엘은 성큼 다가가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그 손을 정중히 받쳐 들고 고개 숙여 제 이마를 댔다.

여인이 손을 빼는 대신 다른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나긋한 목소리가 물 흐르듯 들려왔다.

"다친 곳은 없나요?"

"예,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향수를 뿌렸네요."

"예."

"평소에는 향수를 사용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요."

"이번에 한번 사용해 봤습니다. 마음에 드십니까?"

"아들."

"...."

흠칫한 다니엘이 고개를 들었다.

그 틈을 타 자연스레 손을 거둔 여인이 그대로 그의 뺨을 감싸 고개를 들게 한다. 서로를 똑 닮은 눈동자가 허공에서 마주쳤다.

여인은 말의 허점을 더 파고들지도, 그를 질책하지도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바라볼 뿐.

짧지만 긴 침묵 끝에 결국 먼저 숙인 쪽은 다니엘이었다.

"...이레온에서 살인귀 기사단과 충돌이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약간의 부상을 입긴 했으나 상처가 그리 크지 않아 어머니께 말씀드릴 것까진 아니라 생각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래요, 내가 무슨 낯으로 아들을 질책하겠나요."

"아닙니…!"

한숨 섞인 말에 대한 반박은 채 끝을 맺지 못했다.

목에 둘린 포근한 천의 감촉에 다니엘이 멍하니 시선을 올렸다. 그의 목에 완성된 목도리를 둘러 준 여인이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겨울이 다 지나가고 있지만, 그래도 완성되었으니 주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이건…."

"아들이 어디서 무얼 하건 이 어미는 뭐라 하지 않겠습니다. 그럴 자격도 없으니까요. 다만, 부탁이라는 명분으로 한 가지 말을 하자면…."

봄이 왔음을 알리듯, 눈을 녹이는 따스한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감기 조심하세요, 아들."

어디 가서 다치지 말고, 아프지 말고, 죽는 것은 더더욱 안 되고.

몸조심하세요, 아들.

이 어미는 아직 아들이 준 선물을 간직하고 있으니.

***

"정녕 바로 가시려는 겁니까."

"그래."

"옷도 갈아입지 않으시고요."

"공작이 또 무슨 짓을 벌이려고 하더군. 짐에게 당당히 찾아와 말한 것을 보면 이제 와 조사해 봤자 손 쓰기에는 늦은 상태일 테니 일이 터지기 전에 서둘러 가는 편이 낫겠지."

옷은 도착해서 갈아입어도 된다.

거추장스러운 복장을 그대로 입은 채 황제가 넓은 보폭으로 복도를 가로지른다. 뒤따라오던 재상이 못내 걱정스러운 듯 말을 붙였다.

"호위는…."

"거슬릴 뿐이니 됐다."

"거추장스러운 복장을 한 채로, 호위도 없이 이동하신다고요. 게다가 목적지가 전쟁터지 않습니까. 정녕 제정신인 겁니까?"

"모르지. 그러다 콱 죽어 버리면 좋을 텐데."

"폐하!"

"농이다. 재상이나 되어서 진담과 농담을 구분하지 못하면 어떡하나."

명백한 웃음기 서린 목소리에 노골적인 한숨이 나왔다. 황제는 재상을 힐긋 보더니 다시 시선을 정면에 되돌리며 중얼거리듯 말을 뱉었다.

옅은 웃음을 머금고 있던 입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깟 왕의 자리가 무어라고. 형제들이 아버지께 잘 보이기 위해 알랑거리며 한 말이 있었지. 아직도 기억한다."

"...."

"한 누님은 왕국을 부유하게 만들고 싶다 하였고, 어떤 형님은 어느 왕국도 무시하지 못할 왕국, 즉 제국으로 만들고 싶노라 했다. 누구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대륙을 일통하고 싶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진 형제도 있었지."

"...."

"욕심들이 많아서 참 다행이야. 덕분에 짐이 이렇게 바삐 살고 있지 않은가."

건조한 웃음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웃음은 복도에 남겨 둔 채 막 건물을 벗어난 황제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잘 관리된 잔디를 거침없이 밟아 나아간다. 목소리가 이어졌다.

"짐은 마지막까지 장렬하게 타오를 생각이다. 그러니 자살 같은 허무한 죽음은 생각하지 않아도 돼."

그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불가피한 죽음이라면 모를까, 해야 할 일도 많고 책임져야 할 것도 많은 그가 자진해서 죽을 일은 절대 없다. 심지어 당장은 누구 덕분에 죽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으니.

어느덧 도착한 마구간에서 제 말의 콧잔등을 한 차례 쓸어내리던 황제가 문득 '아' 하고 탄성을 뱉었다.

"덕분에 잊고 있던 게 떠올랐군. 진작에 말해 두었어야 했는데."

"...?"

"짐은 혼이 떠난 육신에 어떠한 가치도 두지 않는다. 그러니 만일 짐이 죽는다면…."

"폐하."

불길함을 느낀 재상이 서둘러 그를 불렀다.

그의 말을 막고 싶었다. 이어질 말이 무엇일지 알 것 같았기에 더욱 그랬다.

그러나 그의 부름이 황제의 말을 멈추는 일은 없었다.

"그깟 고깃덩어리 하나 구하겠다고 병력을 낭비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폐하!"

95. 속고 속이고, 이용하고 이겨내고(3)

재상은 쉬이 말을 잇지 못했다.

몇 번이고 말을 꺼내려 입을 열었으나 다시 닫았고, 받은 충격을 삭히기 위해 제 얼굴을 연신 쓸어내렸다.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모르겠다. 죽음을 가정한 말을 지적해야 하는 걸까, 무려 황제의 육신을 '고깃덩어리'로 치부한 것을 지적해야 하는 것일까.

황제는 제 죽음이 결코 정상적이지 않을 것임을 상정하고 있었다. 아마 전쟁터에서 목이 떨어졌을 때의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겠지.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목구멍까지 치민 말은 많았다.

말이 너무 과격하십니다. 어찌하여 죽음을 염두에 두고 계신 겁니까. 본인이 곧 제국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등등.

그러나 침묵 끝에 간신히 입 밖에 나온 말은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최소한 망토는… 벗어 두고 가십시오. 전투용 망토가 아니지 않습니까. 시선을 끄는 데다 활동에 방해가 될 겁니다."

황제는 피식 웃었다. 제국의 문양이 새겨진 붉은 망토의 끝자락을 만지작거리던 그는 이내 말 위에 훌쩍 올라타며 흘리듯 말했다.

"황제로서의 몇 안 되는 증거를 그리 쉽게 벗어 던져서야 쓰나."

....

홀로 말을 타고 검 한 자루 찬 채 황궁을 빠져나와 능숙하게 숲을 달리던 황제가 힐긋 눈동자만 굴려 어느 한 곳을 쳐다봤다. 입가에 조소가 떠올랐다.

쥐고 있던 말 고삐를 천천히 잡아당겼다.

황제의 뜻을 읽은 말이 서서히 속도를 줄이더니 이내 자리에 멈춰 선다. 황제는 훌쩍 아래로 뛰어내려 말 등을 한차례 토닥이고는 쉬려는 듯 나무에 다가가 기대앉았다.

다리를 꼬고 몇 초간 하늘만 바라보길 잠시, 나무에 뒷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은 그의 입이 열렸다.

"망각을 경계하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

"과거를 망각한 사람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마련이지. 짐 역시 그리 긴 삶을 살진 않았기에 머리로만 이해하고 있었다만, 최근 들어 이 사실을 피부로 느끼게 되더군."

바닥에 핀 들꽃들을 손으로 살짝 쓸며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텅 빈 목소리가 나무 사이로 허무히 흩어졌다.

"참으로 놀랍더군. 8년 전쟁을 직접 겪은 이들이 아직 멀쩡히 살아 있을진대, 벌써 망각의 괴물에 먹힌 자들이 나타날 줄이야."

아직 세대교체도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말이지.

건방졌던 이레온 왕국을 예시로 들며 눈가를 꾹꾹 누르던 황제가 꼬았던 다리를 풀며 들고 있던 검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흰 붕대가 감긴 왼손이 풀이 자리 잡은 바닥에 놓이고, 오른손이 품에 들어갔다 비수를 쥐고 나온다.

너무 자연스러운 행동에 '그들'이 반응하지 못한 찰나의 순간, 일이 터졌다.

푸욱!

"...!"

침묵 속에 동요라는 감정이 섞여들었다.

자신들 중 누군가를 향한 것이 아닌 다름 아닌 황제 본인의 손등을 꿰뚫은 비수를 보는 이들의 눈에 혼란이 스민다.

적들의 감정 상태가 어떻건 황제는 그저 무표정으로 비수를 뽑아내며 낮게 중얼거렸다.

"...이제 좀 낫군."

기껏 깔끔하게 갈아 놓은 흰 붕대가 다시 붉게 물든다.

고통은 뒷전이었다.

내내 시야에서 걸리적거리던 검은 망령들이 사라졌음에 그의 얼굴에 표시 없는 만족감이 깃들었다.

비수를 다시 품에 집어넣은 그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왼손을 아무렇게나 방치한 채 오른손엔 검집을 쥐고 주위를 산책하듯 거닌다.

그의 걸음이 지나가는 곳마다 흔적을 남기듯 붉은 자국이 바닥에 피어났다.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그래, 망각의 위험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지. 그러니 이참에 묻지. ─그대들은 에도아르도 데세르트가 어떻게 왕위에 올랐는지 아는가."

걸음을 멈췄다. 피가 흐르는 손을 들어 나무에 핀 꽃을 매만졌다.

어여쁜 꽃잎에 피가 묻어나고,

질문이 이어졌다.

"8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장의 주역 중 하나가 누구인지 아는가."

용사의 파편을 지닌 또 하나의 이름 없는 영웅이 누구이며,

"짐이 어째서 비밀 호위를 두지 않는지─ 알고 있는가?"

보아라, 망각이란 이리도 두려운 것이다.

반역이 있었을 당시의 황제를 알고 있다면, 8년 전쟁 당시의 황제를 기억하고 있다면, 최소한 현재 전쟁터에서의 황제가 어떤지 조사라도 했다면.

그랬다면 저들은 감히 어설프게 황제를 노려 오지도 않았을 텐데.

피를 듬뿍 먹어 본연의 색을 잃은 꽃을 매만지며 황제가 낮게 웃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꽃잎을 만지던 손이 나무와 연결된 줄기로 내려간다.

이 꽃이 본래 무슨 색이었더라. 보라색이었다.

...그래, 보라색.

마치 누군가의 목을 따듯 거침없이 줄기를 뚝- 꺾어 들었다. 향기를 맡듯이 꽃에 코를 가져다 댔으나 느껴지는 것은 짙은 혈향뿐.

꽃향기를 맡듯 눈을 내리깔고 있던 황제가 그 자세 그대로 천천히 시선을 움직인다. 눈 밑 짙은 그늘과 달리 생생하게 번뜩이는 금안이 정면을 향하고, 정확히 어딘가에서 멈춘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나직이 흘러나왔다.

"─짐이 우습더냐."

툭. 꽃이 떨어지는 것을 신호로 전투가 시작됐다.

번개처럼 검을 뽑아 든 황제가 떨어진 꽃을 짓밟고 앞으로 나아간다. 빈 검집이 바닥을 나뒹굴고, 숲 어딘가에서 피가 솟구쳤다.

적들 중 한 명의 머리가 떨어졌다.

당황한 이들이 급히 쥐고 있던 무기를 들어 대응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죽음을 미루는 것에 불과했다.

피처럼 붉은 망토가 펄럭인다. 아니, 어쩌면 정말 피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시야에 붉은색이 일렁인 참이면 반드시 누군가의 머리가 떨어졌으니. 그러면 또다시 붉은색이 시야에 점철되고, 공포 어린 단말마가 터져 나왔다.

"자, 잠깐…."

"그 옷차림, 그 문양. 확실히 알고 있다. 혁명군이었지. 짐이 기억하기로 그곳의 수장은 이리 멍청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독단인가? 앞으로 혁명군은 걱정할 필요 없겠어."

서걱.

"아, 으아, 아아아…."

그제야 이들은 떠올리고 만다.

'황제'와 '폭군'이라는 칭호에 가려졌던 그의 재능을. 용사의 파편을 지닌 이들 중에서도 재능이 유독 뛰어났던 자의 이름을.

"아아…."

"사, 살려…."

그의 검술은 거침없고 맹렬했으며 한편으로는 호쾌했다.

한 손으로 장검을 쥐고 휘두르는 자유로움. 눈앞에 산이 있다 하더라도 그대로 베어 버릴 듯한 강렬한 기세.

검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누군가의 신체 어딘가가 깔끔하게 잘려나가며 허공에 피가 비산한다. 바람을 타듯 가볍게 움직이다가도 상대를 베어내기 위한 모든 움직임 하나하나에 강한 힘을 담아 단번에 휘둘러지는 검은 많은 이들을 베었음에도 피 한 방울 묻지 않고 깨끗한 은빛 검신을 자랑했다.

구경하는 입장이었다면 그 시원스러움에 되레 카타르시스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황제를 보고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그의 적이었다.

"어째서 공작이 오늘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군. 혁명군과도 연관이 있었던 것인가."

수장이 의도한 것이 아닌 듯한 계획. 그럼에도 저들의 손에 들어간 황제의 일정.

공작이다. 공작이 아니고서야 이 어설픈 이들이 황제의 일정을 손에 넣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이리 목숨 걸고 저를 도발한 이유라면….

'저들의 손에 짐이 죽지 않길 바랐기 때문이겠지.'

모순적인 행동임에도 황제는 어쩐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공작이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황제가 혁명군의 손에 죽어서는 안 될 테니까. 공작은 더 높은 자리와 권력을 노리는 것이지,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바라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 '혁명'은 절대 성공해서는 안 될 테고. 동시에 점점 커 가는 혁명군의 세력을 조절하기 위해서는….

헛웃음이 나왔다.

"...감히 짐을 이용해?"

하지만 이것 역시 물증은 없겠지.

사납게 웃은 그가 재차 검을 휘두른다. 거추장스러운 옷차림을 한 채 황제는 잘도 움직였다.

누군가 용기를 내 손을 뻗어 그의 망토를 잡아당겼으나 황제는 휘청거리거나 끌려가는 대신 도리어 역으로 상대를 끌고 온 뒤 검을 찔러 넣었다.

깊숙이 찔렀던 검을 뽑자 피가 튀며 그의 움직임에 맞춰 망토가 펄럭이며 떴다가 가라앉는다.

"배후는 필요 없다. 굳이 심문하지 않아도 알 것 같으니."

살려 두어야 할 이유가 없고, 살려 줄 생각도 없다. 도망친다 하여 놓쳐 줄 생각은 더더욱 없다.

그러니 그들이 살 수 있는 방법은 그를 죽이는 것, 하나뿐이다.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날, 혁명군의 전력 중 1/9이 증발했다.

뒤늦게 이 소식을 전달받은 수장 다니엘은 기껏 보충한 전력이 다시 원점이 되었음에 조용히 이마를 짚었다.

[녀석이 혼자 황제의 일정을 구했을 리가 없어. 그 정도의 능력이 없거든.]

[조사해 봐. 이 일을 벌이기 전에 녀석이 누구를 만났는지.]

[...사에린?]

심증은 있으나 결정적인 물증이 없다.

이 사건은 공작과의 연결고리에 대한 물증 하나 없이 다니엘 개인의 심증만 남긴 채 한 어리석은 간부의 독단적 행위로 막을 내렸다.

결과적으로 이는 공작의 바람대로 혁명군의 발을 묶어 둔 사건이 되었다.

***

"데몬 님, 이것 좀 보세요. 제가 여행 중에 얻은 건데, 인간계의 낚시 도구래요. 정말이에요?"

"네…."

"실이 이렇게 약해서 툭툭 끊어지는데 이걸로 물고기를 낚는다니, 이해가 안 되네요. 왜 굳이 이렇게 약한 실을 사용했대요?"

"마계에선 약한 실일지 몰라도, 인간계에선 나름 튼튼하고 질긴 편에 속합니다."

"왜요?"

"마계와 인간계는 다르니까요."

"어떻게 다른데요?"

"하…."

이래서 내가 5군단장과 마주치기 싫었단 말이지.

5군단장 오엘, 그녀는 물리적으로는 딱히 위협적이진 않지만 다른 방면으로 굉장히 위협적인 군단장이다.

지금 당장만 봐도 내 정신과 스트레스에 굉장한 타격을 가하고 있는데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오죽하면 마왕도 그녀를 '마계 전역 순찰'이라는 명목하에 마왕성 밖으로 내돌렸겠는가. 이게 다 그녀의 호기심을 감당하기 힘들어서다.

엄한 추측이 아니다. 내게 5군단장을 마중 보내겠다 했을 때, 마왕은 통신을 끊기 전 분명 이렇게 말했다.

[이제 좀 조용히 지낼 수 있겠네.]

...그럼 나는?!

"아, 그리고 데몬 님, 이것도 보세요. 인간계의 통신석인데 '통신기'라고 불리고 있대요."

"아…."

"아시고 계셨나 보네요. 신기하지 않아요? 이건 분명 마력석인데 인간계에서 사용된다니, 왜일까요?"

통신기, 통신기라… 그걸 또 어떻게 구했데?

마력석이 마계에서만 사용된다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황제가 괜히 별 소득도 없이 영웅 후보들을 마계로 보내는 줄 알았던가.

마력석은 인간계에서 주술의 제물이자 도구로서 최상급 취급을 받는다. 통신기는 바로 그 마력석을 이용한 인간계의 도구 중 하나고.

'마계의 통신석과 같다고 보면 되지. 물론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마계의 통신석은 아무 마력석이나 주워 마법을 걸면 끝이지만, 인간계의 통신기는 마력석 하나를 여러 개로 쪼개어 주술을 걸어야 사용이 가능하다.

마력석 하나를 두 조각으로 나눈 뒤 주술을 걸면 둘이서만 통신이 가능하고, 세 조각으로 나누면 셋이서만… 이런 식으로.

심지어 일정 크기 이하로 작아지면 주술 자체가 걸리지 않아 마구잡이로 쪼갰다간 기껏 들인 비용이 증발해 버릴 수도 있다.

마력석 자체가 구하기 힘든 데다 주술사도 찾기 힘든 상황에서 통신기는 비효율적이기까지 하니 인간계에서 통신기를 지닌 이들은 손에 꼽을 정도인데,

'저걸 손에 넣은 게 참 용하다….'

어느 고위 귀족 하나 죽이고 빼앗은 건 아니겠지? 의심을 담아 오엘을 쳐다봤다.

사실 나도 하나 갖고 있긴 하지만.

'난 출처가 확실하다고. 황제가 줬으니까.'

내 저택에 고이 모셔져 있을 통신기를 떠올리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내 표정을 다른 의미로 해석했는지, 줄곧 오엘의 뒤에 잠자코 서 있던 늑대 귀의 마족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엘 님, 그쯤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왜?"

"데몬 님께서 귀찮아하십니다."

"그래? 왜?"

"끊임없는 질문에 끊임없이 대답해야 하는 것도 누군가에겐 곤욕일 수 있습니다."

"어째서?"

부관이라는 자리 때문인지, 성격이 원래 그런 건지….

늑대 귀의 마족, 데르니반은 지긋지긋할 법도 한 오엘의 물음에 어떠한 내색도 없이 꼬박꼬박 답했다.

그러고 보니 둘이 사귄댔나?

처음 들었을 땐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는데, 이렇게 보니 묘하게 어울린다.

물론 그도 계속해서 답을 내놓기는 곤란했는지, 고개를 정면에 고정하고는 다른 말을 입에 올렸다.

"다 왔습니다."

96. 때가 되었다(1)

언제 도착했는지, 벌써 마왕성 성문이 코앞에 있었다.

드디어 해방이다…! 귀에서 피 나는 줄 알았네.

"데몬 님, 귀에서 피가…?!"

뭐야, 진짜 피 나고 있었어?

손가락으로 귓가를 스치듯 닦아 내자 피가 묻어난다. 옆에서 눈치를 살피던 벤이 걱정스럽게 나를 불렀다.

"내성까지 들어가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 치료를 위해서라도 일단 마차에 타셔야겠습니다."

"어, 그럼 저도!"

"...."

내가 할 말을 잃은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잠시나마 바깥바람을 쐬기 위해 내렸던 것이 무색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마차에 타야 했지만, 긍정적인 의미로도 부정적인 의미로도 내 기분이 특별히 바뀌는 일은 없었다.

밖에서도 옆에 붙어 종알거리던 5군단장이 마차 안으로도 따라왔거든. 장소만 바뀌었지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마차 안에는 나와 나를 진찰하기 위해 들어온 벤, 기어이 수다를 떨겠다고 쫓아 들어온 오엘과 그녀의 부관 데르니반이 앉아 있었다. 마차 자체가 매우 넓어 딱히 꽉 찬다든가 하는 느낌은 없지만 문제는 내 고막이다.

"있죠. 데몬 님, 인간들은 직접 배 속에서부터 아이를 만들어 낳는다고 들었어요. 이게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하면 일정 확률로 가능한 거라 들었는데…."

"...."

"…그렇게 만들어진 아이는 '축복'이래요. 저도 축복을 가져 보고 싶어서 데르니반에게…."

말이 안 끝나!

벤에게서 진찰 및 수습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건만, 또다시 귀에서 피가 흐를 징조가 보인다.

고막의 빠른 해방을 위해서라도 어서 마차가 멈추고 문이 열리길 기다리는데, 이게 웬걸?

우두둑.

"...!?"

마차가 멈추긴 했는데, 문이 열리는 대신 뜯겨 나갔다!

그리고 열린, 아니 뜯긴 입구로 웬 집채만 한 맹수가 뛰어 들어왔다.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빠르게 쳐들어온 맹수는 다행히 나를 노리진 않았으나, 삽시간에 데르니반을 덮쳤고….

"...?!"

"이게 무슨 짓입니까, 9군단장 님."

"대련하자!"

아, 맹수가 아니었구나. 잔상만 보여서 착각했다.

지금 마차에 뛰어든 이는 9군단장 트로버. 본인이 주장하길 '마법'이 주특기라지만, 실상은 육체를 극한으로 단련하여 사용하는 체술을 '마법'이라 주장하는… 아주 괴랄한 군단장이다.

'...시발.'

나는 슬금슬금 마차 구석으로 몸을 물렸다.

다행히 트로버는 내 존재조차 모르는 눈치였다. 아무렇지 않게 그의 주먹을 막아 낸 데르니반이 표정만큼이나 건조한 목소리로 말하기 전까지는.

"0군단장님께서 보고 계십니다. 행동을 삼가 주십시오."

"아?"

맹수… 아니 9군단장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그 순간 나는 그의 두 눈이 먹잇감을 발견한 짐승처럼 빛나는 것을 보고야 말았다.

아니, 잠깐만… 왜 굳이 날 걸고넘어지는….

"실례했습니다, 데몬 님. 역시 훌륭한 은신이군요. 존재감을 전혀 느낄 수 없었습니다."

"네? 아니, 딱히 은신을 한 적이…."

은신이라면 역시 2군단장이지.

5군단과 합류한 이후부터 오엘의 질문 공세에 괜히 휘말리고 싶지 않은지 홀로 마차 지붕에 앉아 있던 드벨라니아를 떠올리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 배신자 녀석.

'그러고 보니 트로버가 들어오기 전에 드벨라니아부터 봤을 텐데, 왜 걔는 안 건드리고 바로 안으로 들어온 거지?'

내 의문을 콕 짚어 주듯 때마침 트로버가 마차 내부를 기웃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밖에 배치된 병력 중에 2군단도 보이던데, 2군단장은 안 따라왔습니까?"

"...마차 지붕에 없었습니까?"

"예? 예."

"...."

"...?"

이 나아쁜… 나만 두고 어디로 튄 거야?

속으로 드벨라니아를 향해 온갖 욕을 뱉고 있는데, 마차 창틈으로 웬 쪽지가 스르륵 들어와 내 무릎 위에 안착했다.

[데몬 님, 전 갑자기 일이 생겨서 먼저 가 볼게요. 끝까지 모시지 못해 죄송합니다!]

"...시발, 세상에…."

진짜로 튀었어!

쪽지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며 조용히 경악하는데, 어째서인지 트로버가 주춤주춤 물러선다. 그러더니 조용히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먼 거리 이동을 하시느라 몸이 찌뿌둥하셨을 것 같아 대련을 신청하려 했는데, 역시 안 되겠지요…."

바빠 보이시고, 또 기분도 안 좋아 보이시고….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그보다 나는 앞서 들은 충격적인 내용에 집중했다.

대련? 대려언? 그것도 나랑?

"그야 당연히 안…!"

황급히 말을 멈췄다.

하마터면 생각 없이 떠오른 말을 입 밖에 낼 뻔했다. 이곳이 마계인 만큼 말을 하기 전에는 한번 검토를 해야 하는데, 조금 놀라서 흥분했어.

검고 손톱이 삐죽빼죽하여 흉악하기 그지없는 트로버의 왼손이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조용히 입을 다물자 옆에서 내 기색을 살피던 주치의 벤이 나를 대변하듯 나섰다.

"대답할 가치도 없군요."

아니, 잠깐.

"먼 거리 이동을 했으면 대련 이전에 상대가 피곤해할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모든 마족들이 9군단장님처럼 괴물 같은 체력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 데몬 님은 인간이시지만!"

"인간은 마족과 달라? 어떻게 다른데?"

"신체적으로는 인간이 더 약합니다. 물론 우리 데몬 님은 특별하지만!"

"데몬 님은 어떻게 특별한데?"

"오엘 님, 그 질문은 여기서 하기엔 적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

의미도 목적도 모를 환장할 만한 대화가 오간다.

그사이 잠시 입을 다물고 무언가 진지하게 고민하던 트로버가 고개를 치켜들고 벤을 보았다.

"그럼… 내일 대련하자 청하면 되는 건가?"

"여독을 완벽히 풀기 위해서는 일주일은 푹 쉬어야 할 겁니다. 특히 후유증이 남은 데몬 님의 신체 특성상…."

"좋아, 일주일!"

"...."

왜 내 대련 일정이 멋대로 잡히는 거지…?

당장 거절해야 함이 옳지만, 거절 의사를 표했다간 더한 사태가 벌어질 것 같다고 내 감이 경고하고 있다.

'괜히 거절했다가 괜한 오해가 겹쳐 일이 이상하게 흘러갈지도 몰라. 늘 그랬으니까.'

할 말을 잃고 거절도 못 한 채 입을 다문 날 뒤로 하고 트로버가 다시 데르니반을 향해 몸을 돌렸다. 데르니반은 시종일관 표정 없는 얼굴로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너는 괜찮겠지?"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제 특기는 체술이 아닌 활입니다."

"그래도 잘만 대련했잖아. 거절할 거야?"

거절하면 무슨 짓을 벌일 것만 같은 표정으로 묻다니. 사실상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

데르니반도 트로버의 표정에서 그 점을 읽어 낸 듯 잠시 침묵하더니 힐긋 오엘을 보고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대련하겠습니다."

"그럼…."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안 됩니다."

당장이라도 데르니반을 어디론가 끌고 가려던 트로버가 멈칫했다.

돌아보는 얼굴에서 불만이 고스란히 비친다. 군단장의 분노가 두렵지도 않은지 데르니반은 일말의 동요 없이 제 할 말을 늘어놓았다.

"오엘 님께서 챙겨 오신 잡동사니도 정리해야 하고, 몇 차례 전투를 치른 5군단 뒷정리도 해야 합니다."

"잡동사니라니! 언젠간 쓸모가 있을지도 몰라!"

"아무튼 말입니다."

"그럼 언제 가능한데? 너도 일주일?"

"일주일을 불러도 기다려 주시지 않을 것을 압니다."

겉옷을 벗어 마차 한쪽에 얌전히 개어놓은 데르니반이 답답할 정도로 끝까지 채워진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어 내리며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였다.

"두 시간만 기다려 주십시오."

....

2군단과 5군단은 각기 해산했다. 맡은 바 임무를 다한 벤은 제 방으로 돌아갔고, 출발 전 통신석으로 마왕에게 보고를 전부 끝냈던 나는 굳이 그를 만나러 갈 일도 없이 곧장 내 방에 처박혔다.

...처박혀 있으려 했다.

"자, 심판은 데몬 님께서 보시는 겁니다."

"...."

내가 왜 이곳에 있는 거지.

마련된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조용히 마른세수를 했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내가 트로버와 데르니반의 대련의 심판으로 이곳에 있는 것까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저 둘이 전부가 아니잖아. 왜 다들 이곳에 모여 있냐고.

"누가 이길까요?"

"글쎄, 보통은 군단장인 트로버의 승리를 점쳤겠지만… 알다시피 저 둘은 상황이 좀 달라서."

"하긴, 비어 있는 9군단장의 자리를 제의받았던 건 트로버보다 데르니반이 먼저였으니…."

"보통은 군단장 제의가 다음으로 넘어갈 일도 없이 다들 덥석덥석 받았을 텐데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거절을 많이 했지, 아마?"

"그렇죠. 가장 먼저 제의를 받았던 건 0군단장님의 부관 에드였고, 그다음이 데르니반, 그러고도 거절당하자 트로버에게 넘어갔죠."

"에드는 그렇다 치고, 데르니반은 왜 거절한 거지?"

11군단장 리리넬, 3군단장 아실드, 2군단장 드벨라니아, 4군단장 이델리아와 1군단장 제이카르.

지금 장난해? 마왕성에 상주하는 거의 모든 군단장들이 이곳에 모여 있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그렇게 할 일들이 없나.

'게다가 드벨라니아는 바쁘다고 도망갈 땐 언제고….'

슬그머니 연무장 한쪽에 자리 잡고 있는 마족을 슬쩍 째려봤다.

심장 쫄려서 못 있겠다. 그 와중에 제이카르가 '에드는 그렇다 치고'를 말하며 나를 쳐다봤으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쪽팔리게 대놓고 흠칫하는 일은 없었지만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다행히 그의 시선이 내게 오래 머무는 일은 없었다. 한껏 신이 난 기색의 리리넬이 곧장 대답을 해 왔으니까.

"앗, 아직도 모르고 있었어요? 오엘이랑 데르니반이랑 연인 사이잖아요."

"...데르니반이 연애를 한다고?"

그것도 오엘이랑?

미처 뱉지 못한 뒷말이 들려오는 듯했다.

의미 없는 되물음에 리리넬은 굳이 답하지 않았다. 그저 손가락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을 뿐.

그곳에는 데르니반에게 다가가는 오엘이 있었다.

"인간계의 연애 소설을 읽어 봤는데, 대련에 나가는 기사는 여주인공에게 승리를 바치겠다고 하더라."

"그렇습니까."

"응. 그러니까 데르니반, 이겨서 내게 승리를 바쳐."

"알겠습니다."

"그래, 이건 미리 주는 보답."

오엘이 데르니반의 목에 팔을 두르며 뒤꿈치를 든다. 제게 매달리다시피 기대 오는 그녀를 데르니반이 허리를 잡아 단단히 받쳐 주고, 이내 두 입술이 맞닿았다 떨어진다.

노골적인 마찰음이 울렸다.

-쪽.

그 장면을 본 군단장들의 표정이 괴상하게 변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매사에 무심한 데르니반과 자신만의 세상에 갇힌 오엘은 저들만의 대화를 이어 나갔다.

"어때, 데르니반? 심장이 뛰는 것 같아?"

"제 심장은 원래부터 뛰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런 거 말고. 좀 더 특별하게 뛰거나 그러는 건?"

"평소와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 그럼 곤란한데. 심장이 뛰어야 사랑이랬는데. 그래야 아기를 가진다고…."

기어이 나름의 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제이카르의 얼굴마저 무너졌다.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일그러진 표정을 한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드벨라니아가 멀찍이서 바닥을 구르며 웃고 있을 때 천천히 말을 꺼냈다.

"저 둘은… 마족이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모르나?"

"오엘은 그렇다 쳐도 데르니반은 알고 있을걸요. 뻔하죠. 데르니반이 오엘의 장단을 맞춰 주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설마 그 장단을 맞춰 준다는 게 '사랑'까지 가능할 줄은 몰랐지만."

이델리아가 접은 부채로 입가를 툭툭 두드리며 답했다.

마족은 마왕의 힘에서 탄생한다.

제아무리 저 둘이 인간들처럼 사랑을 하고 몸을 섞어도 그들 사이에서 마족 아이가 태어나는 일은 없다는 뜻이다.

'...아무래도 좋으니 빨리 시작했으면.'

내가 왜 이곳에 앉아서 저 둘의 연애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는지.

저 꼴을 더 보고 있자니 속이 뒤집히는 느낌이다. 질투 나서? 아니, 니글거려서.

오엘과 데르니반의 두 눈 뜨고 보기 힘든 기행은 기다리던 트로버가 시작 안 하냐며 버럭 소리치고 나서야 그칠 수 있었다.

간신히 정리된 상황 속에서 데르니반과 트로버가 마주 서고, 언제 소란스러웠냐는 듯 장내가 조용해진다.

그 속에서 나는 날 향한 수많은 시선들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래, 내가 심판이니 말을 꺼내야 한다는 건 아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인간계의 대련과 마계의 대련은 규칙이 같았던가?

97. 때가 되었다(2)

마족들의 대련은 인간들의 대련과는 다르다. 마법도 쓰고, 신체 변형도 하는데 규칙이 내가 아는 규칙과 같을 리가 있겠는가.

괜히 인간계의 규칙을 적용했다가 그들의 짜증을 한 몸에 받을 것 같아 입술만 달싹이며 머리를 굴리길 잠시.

'일단… 마계라 해도 대련인 중 하나가 군단장이니 역시 죽이는 행위는 안 되겠지?'

그래, 일단 뭐든 말하고 보자. 침묵이 점점 길어지고 있잖아.

어서 말을 꺼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에 나는 미처 말을 가공하지 못하고 날것 그대로 내뱉었다.

"...죽이는 것만큼은 안 됩니다."

기껏 본인들의 성격과 습성을 고려해 꺼낸 말이건만, 어째 분위기가 싸하다.

살짝 굳은 얼굴로 날 보는 군단장들, 그리고 들려오는 수군거림.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은 당연했다.

"죽이지만 않으면 된다니, 역시…."

"...무섭군. 독해."

"그럼 한쪽이 항복하거나 전투 불능이 되면 끝나는 건가."

"과연 데몬 님이 항복을 인정하실까…?"

내 귀에 들릴까 소리를 낮춘 데다, 동시에 여럿이 이야기를 하고 있어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내 이야기라는 것만은 알 것 같다.

'뭐야, 왜 그래. 설마 이거 사투였어? 그래서 그러는 거야?'

불안함에 지금이라도 말을 바꿔야 하나 고민하는 순간, 한쪽에서 쩌렁쩌렁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푸하하핫! 그래! 그 정도는 되어야 재밌지! 역시 데몬 님, 뭘 좀 아십니다! 어때, 데르니반. 그대로 할 거냐?"

"상관없습니다."

"좋아, 이거지! 대련은 원래 이랬어야 했어! 이참에 내가 연마한 마법들을 보여 줄 테니 잘 봐 두라고!"

영문 모를 소리를 늘어놓던 트로버가 웃는 얼굴 그대로 나를 쳐다본다.

번쩍번쩍 빛나는 눈이 무엇을 원하는지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어 나는 어렵지 않게 그가 원하는 답을 내놓을 수 있었다.

"시… 시작."

트로버가 기다렸다는 듯 발을 들었다가 바닥을 거칠게 내리찍는다. 괴상한 외침이 이어졌다.

"어스퀘이크(earthquake)!"

콰아앙!

그를 중심으로 연무장 바닥이 갈라지며 흔들림이 번져 나간다.

나는 나를 잡아 주는 손길에 의지해 중심을 잡다가 황당함을 못 이기고 헛숨을 내뱉었다.

'저게 무슨 마법이야! 그냥 무식하게 바닥을 내리친 거잖아!'

아니, 애초에 마족들은 마법을 쓸 때 마법 명 같은 건 말하지도 않는데 저 듣도 보도 못한 주문은 무슨…!

그나저나 날 잡아 준 마족은 누구지?

"괜찮으십니까?"

"아, 에드? 여긴 왜…."

"데몬 님께서 돌아오셨다는데 제가 찾아뵙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부관이니까. 아니, 다른 부관들도 그러나?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그저 어벙하게 그를 보다가 다시 슬그머니 연무장에 시선을 돌렸다.

그사이 손톱을 날카롭게 변형시킨 데르니반이 트로버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트로버 역시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검지와 중지를 세우더니 냅다 데르니반의 눈을 찌르려 든 것이다.

"블라인드(blind)!"

심지어 그 와중에도 마법 명을 외치는 건 잊지 않았다.

저, 저거 저래도 되는 거야?!

내 소리 없는 경악이 채 외부로 표출되기 전에 데르니반이 몸을 낮춰 그의 손가락을 이마로 받아내려 했다. 그 전에 손가락을 회수한 트로버가 주먹에 힘을 주며 외쳤다.

팔뚝의 근육이 불거졌다.

"육체 강화!"

"...그냥 몸에 힘준 거잖아."

힘을 잔뜩 실어 위협적인 주먹을 날리는 트로버나, 그걸 또 피하는 데르니반이나….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냥 생각 자체를 하지 말자. 포기하면 편해.'

허허로운 태도로 저들을 지켜보다가 문득 고개를 틀어 에드를 쳐다봤다.

혹여 전투의 여파가 나한테까지 미칠까 신경을 곤두세우고 서 있던 그가 시선을 느낀 듯 즉시 고개를 돌려 나를 마주한다.

경청의 준비가 된 모습에 나는 사양 않고 질문을 던졌다.

"에드는 트로버와 대련 안 합니까?"

"예? 명령이시라면 하겠지만… 제 능력은 대련과는 맞지 않아 되도록 대련은 지양하고 있습니다."

"...?"

"아무래도 죽지 않게 조절하기가 힘드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머쓱한 듯 뒷목을 쓸어내리는 행동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 모습만큼은 너무도 평범해서 더 그랬다.

그래, 쟤도 마족이었지. 겉모습은 말끔한 인간에 가까워 잠시 착각했다.

'...그냥 구석에 얌전히 처박혀 있자.'

조용히 자리에 앉아 몸을 말듯 두 무릎을 팔로 끌어당겨 안았다.

내 심정을 알 리 없는 에드는 내 뒤에 시립하려는 건지 반보 뒤로 물러서며 한창 대련을 이어가는 트로버와 데르니반을 향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거 아십니까. 9군단장은 처음부터 마법을 사용할 수 없을 만큼 마력이 적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럼?"

"그 밑도 끝도 없이 재미를 추구하는 성격이 문제였습니다. 마법에 소모된 마력은 회복되지 않으니 필요할 때 적절히 사용해야 하는데, 단순히 재미와 흥미를 위해 마법을 낭비했죠."

주술에는 제물이 필요하듯, 마법에는 마력이 필요하며.

주술에 사용된 제물이 재활용이 불가능하듯, 마법에 소모된 마력은 회복되지 않는다.

그것만으로도 마력을 아껴야 할 이유가 충분한데 트로버는 애초에 많은 양의 마력을 갖고 있지도 않았단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내가 떠올린 단어는 하나였다.

"미…."

"예, 미친놈이죠."

"...전 그런 말 안 했습니다."

말할 뻔했지만.

에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으나, 나는 괜히 찔리는 마음에 서둘러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럼 9군단장은 평생 마법을 못 쓰는 겁니까?"

다행히 에드는 순순히 던져진 질문에 집중했다.

"그건 아닙니다. 제아무리 마력이 없는 마족이라 해도 최후에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 있습니다."

"무슨…?"

"마족들의 탄생 근원이 무엇인지 알고 계실 겁니다."

알다마다.

"마왕의 힘."

"네, 이를 다른 관점에서 보면 마족들의 육체는 마왕님의 힘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됩니다."

마왕의 힘을 다른 말로 치환하면 마력이 된다.

그 어느 마족의 것보다도 강대하고 순수한 마력.

"바로 그 마력을 사용하는 겁니다."

"그럼… 죽지 않습니까?"

"네, 그래서 그때 사용하는 마법은 보통 마족의 생에서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마법이 됩니다. 목숨값이라고 보면 타당하죠."

그때였다. 시야 가장자리에서 데르니반과 치고받던 트로버가 연무장 가장자리에 놓여 있던 바위를 들어 올렸다.

흠칫해서 에드와의 대화도 멈추고 그를 보는데, 누가 미친놈 아니랄까 봐 설마 하는 마음을 사뿐히 즈려밟고 망설임 없이 그 흉악한 것을 냅다 집어 던졌다.

"으랴아아아! 메테오!"

어렴풋이 데르니반의 손톱이 더 날카로워지며 손등이 회색빛 털로 뒤덮이는 것이 보였다.

콰아앙!!

뿌연 먼지가 시야를 가리고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얼핏 바위가 박살 나는 걸 본 것 같은데. 데르니반은 살아 있나?

기관지를 괴롭히는 먼지에 콜록대며 기침을 뱉는데, 시야에 사람 머리통만 한 파편이 날아오는 것이 비쳤다. 매서운 속도를 보아하니 맞고 바로 골로 가는 내 미래가 자동으로 떠오른다.

'...시발.'

어서 피해야 하는데, 오래 앉아 있었더니 다리에 쥐가 나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기어이 목에 상처를 내고 피를 보이기 시작한 멈추지 않는 기침까지.

"콜록콜록… 우욱! 쿠, 쿨럭!"

먼지 때문에 시작된 기침이 기침 때문에 기침하게 되는 악순환의 굴레를 겪은 적이 있는가.

기침 때문에 나온 피가 구역질을 일으키고, 구역질이 또 피를 부르는 대참사는?

"데몬 님!"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게 만들었던 심상치 않은 크기의 파편을 파리 쫓듯 가볍게 쳐낸 에드가 다급히 날 살핀다.

새삼스럽지만 내 생명의 위기는 이놈들에겐 별것도 아니구나.

살짝 허무해지려던 찰나, 언제 달려온 건지 벤이 몸을 들이밀어 에드를 튕겨 냈다.

손을 휘저어 먼지를 날려 보낸 그가 젖은 손수건으로 내 코와 입을 막으며 왈칵 짜증을 터트린다. 다행히도 나를 향한 짜증은 아니었다.

"이 먼지 뭐야! 누가 데몬 님을 이 거지 같은 환경에 데려온 거야?! 이러니 피를 토하지! 미친 건가? 머리가 없나? 신종 암살 방법인가? 기도에다 모래를 쏟아부어도 모자랄 놈 같으니!"

저기… 이 자리의 대부분이 군단장인데….

아무래도 주치의인 그의 입장에선 흙먼지가 날리는 이곳 환경이 굉장히 마음에 안 든 모양이다. 아니, 이 정도면 그냥 혐오 수준이다.

분노가 고스란히 묻어나는 말에 트로버가 흠칫하며 목을 감싸고, 데르니반이 조용히 손을 원상태로 되돌린다.

심지어는 아무 상관 없는 3군단장 아실드가 괜히 제 목을 슬그머니 쓸어내리기도 했다.

조금 전까지 어마어마한 전투력을 뽐내던 둘을 침묵하게 만들고도 벤의 분노는 사그라들 줄 모르고 기어이 다른 희생양을 찾았다.

"에드 넌 도대체 뭐 한 건가! 이런 흙먼지 풀풀 날리는 곳에 데몬 님을 방치해 두다니! 부관이 맞긴 한가?"

"...."

에드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억울할 만도 했다. 솔직히 그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그가 한 행동이라고는 내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이곳으로 온 것밖에 없는데.

굳이 죄를 만들자면 이곳에서 바로 나를 데리고 빠져나오지 않은 것 정도? 하지만 그것도 내가 심판으로 자리하고 있었으니 한낱 부관인 그로서는 행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억울한 마음이 분노가 되어 나를 향하기 전에, 나는 서둘러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난 괜찮습니다. 에드의 잘못도 아니고요."

"하지만!"

"에드는 조금 전에 왔습니다."

"...일단 방으로 돌아가시죠. 이곳은 환경이 영 좋지 않습니다."

다행히 날 데리고 이 자리에서 멀어지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했는지 벤이 불퉁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한 걸음 물러섰다.

혹여 그가 또 애꿎은 마족을 잡기라도 할까 다리에 쥐가 났다는 사실도 잊고 서둘러 일어서던 나는 끔찍한 근육통에 이를 악물며 크게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넘어질 뻔한 나를 곧장 잡아 부축한 에드가 굳은 표정으로 내 다리를 내려다봤다.

"혹, 파편에 다리를 부딪히신 겁니까?"

"아닙…."

"제가! 목마를 태워 드리겠습니다!"

...뭐?

"제 잘못이기도 하니까요. 메테오는 전장에서나 사용해야 하는 거였는데…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

내가 귀를 의심하기도 전에, 곧장 손을 뻗어 온 트로버가 나를 번쩍 들어 제 어깨 위로 태웠다.

잠시 얼떨떨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상황을 파악하던 나는 지금 내가 무슨 꼴을 하고 있는지 깨닫고 표정을 굳혔다.

내려 줘, 이 미친놈아.

"내, 내 다리는 멀쩡합니다."

"거짓말인 거 다 압니다!"

"정말입니다!"

"굳이 저를 배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진짜라고!!"

이 새끼 어깨는 왜 이렇게 넓어?!

어떻게든 뛰어내리려 하는데 어깨가 넓어 여의치 않은 데다 트로버가 다리를 꽉 잡고 있어 옴짝달싹도 할 수 없다.

에드한테 구원의 눈빛을 보내는데, 그는 내 속도 모르고 엿 같은 말만 내뱉었다.

"반말을 하시는 것을 보니 부상이 제법 위험한 수준인 것 같군요. 9군단장님, 서둘러 주시겠습니까?"

"새삼스럽게 존댓말은. 그냥 하던 대로 해. 소름 돋으니까."

"군단장님께 한낱 부관인 제가 어떻게 반말을 하겠습니까."

"재미없게."

그가 툴툴거리면서도 걷는 속도를 높인다. 그 뒤로 에드와 벤이 따라붙고, 어떻게든 내려가려 낑낑대던 나는 마왕성 사용인들의 충격과 공포가 담긴 눈빛을 발견하고는 조용히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쪽팔려, 죽고 싶다.

"...아, 잠깐만."

문득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번쩍 들고 뒤를 돌아봤다. 연무장과의 거리가 제법 벌어지고 있음에도 군단장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화가 났겠지. 최소한 짜증은 났을 거다. 모처럼의 볼거리가 나 하나 때문에 망가졌으니.

이대로 자리를 뜨기 전에 어떻게든 저들을 달래 놓아야 한다는 생각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기대도 안했던 트로버가 눈치 좋게 멈춰 주었기에 내 목소리는 아슬아슬하게 저들에게 닿을 수 있었다.

"일단 오늘은 무승부로 해 두겠습니다. 이 뒤는 다음에 이어서 하는 걸로 하죠."

저들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확인한 나는 곧장 고개를 정면으로 되돌렸다.

현 상황을 대충 수습하자 떠오른 것은 또 다른 걱정이었다.

9군단장 트로버. 이 미친놈.

내가 피를 뱉는 것까지 봤는데, 설마 일주일 뒤에 대련을 하자 조르진 않겠지.

'...설마.'

등골을 훑고 지나가는 오싹함에 몸서리를 치느라 난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내 말을 들은 군단장들의 표정 변화가 썩 긍정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트로버가 내 다리를 잡고 있던 손을 움찔했다는 것을.

뒤에서 들려오는 수군거림을.

98. 때가 되었다(3)

"일단 오늘은 무승부로 해 두겠습니다. 이 뒤는 다음에 이어서 하는 걸로 하죠."

그 말을 듣는 순간, 군단장들은 표정 관리도 잊고 저도 모르게 질렸다는 표정을 드러냈다.

다행히 0군단장 데몬 아루트가 그들의 표정을 더 보지 않고 고개를 돌렸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본인의 실수를 자각한 군단장들이 얼어붙은 것도 잠시, 숨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조용하던 연무장의 정적은 데몬 아루트의 모습이 사라지기 무섭게 깨졌다.

먼저 말문을 연 이는 1군단장 제이카르였다.

"...기어이 둘 중 하나가 작살이 나는 것을 보고야 말겠다는 뜻인가."

"아무래도 잘못 걸린 것 같은데, 데르니반?"

"...."

드벨라니아의 이죽거림은 통하지 않았다. 데르니반은 대꾸 없이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 내고는 오엘의 뒤에 가서 섰다.

또다시 어색한 침묵이 찾아올 찰나, 우연인지 의도인지 오엘이 다른 화제를 입에 올렸다.

"데몬 님 분명 내려 달라 하지 않으셨어? 근데 왜 트로버가 살아 있는 거야? 정말 싫었다면 데몬 님의 말을 거역한 트로버는 죽었을 텐데. 아, 혹시 그건가? 입으론 싫다 해도 몸은…."

"오엘 님, 그 말은 여기서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거야?"

"예."

골 때리는 대화에 드벨라니아가 배를 잡고 뒹굴었다. 주변의 다른 군단장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보든 말든 개의치 않고 한참을 웃던 그녀는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서야 간신히 웃음을 멈추고 눈가를 훔쳤다.

웃음기 묻어나는 나른한 목소리가 한 박자 늦은 답을 꺼내 놓았다.

"평소의 데몬 님은 온건하시니까, 싫어도 죽일 정도까지는 아니었겠지. 아, 아니다. 싫었다면 애초에 트로버의 손에 잡히지도 않으셨을 테니 그냥 마음에 들었던 건가? 아무래도 오엘의 말이 맞는 것 같네. 입으론 싫다 해도 몸은…."

"그만. 드벨라니아 너까지 그러면 어쩌자는 거지?"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개성 넘치는 군단장들을 제어하는 것은 이번에도 1군단장의 몫이었다.

이례적이라 할 수 있는 0군단장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모든 군단장들의 인정을 받은 제이카르는 언제나 그랬듯 능숙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모여 있던 군단장들을 해산시켰다.

군단장들간의 만남이나 교류에 대한 규제는 딱히 없지만, 이들은 모이면 모일수록 사고만 일으키는 족속들이니 지금 당장만이라도 흩어놓는 편이 좋을 테니까.

***

일주일 뒤 트로버가 대련을 하자고 하면 어쩌나 싶었던 내 걱정은 다행히 현실이 되지 않았다.

딱 일주일이 되는 날, 마왕이 나를 부른 것이다.

"어서 와."

집무실에 도착한 나를 자리에서 일어나 반긴 그가 자연스럽게 자리로 이끈다. 실수인지 의도인지 목 언저리에 그의 손이 닿았다.

그냥 넘기기엔 미묘한 위화감이 느껴져 힐긋 눈을 굴려 집무실 한쪽 벽면의 거울을 보니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검은 낙인이 눈에 들어왔다.

"...?"

"아, 놀랐어?"

그야 당연히….

이걸 새긴다는 것이 제국에 보내겠다는 암묵적인 의사 표시임을 알고 있다. 슬슬 갈 때가 되었다는 것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고.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내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서 있는 사이, 다시 자리에 앉은 마왕이 따로 채색된 지도를 내 앞에 밀었다.

"설명하기 전에, 우선 이것부터 볼래?"

지도에는 제국을 비롯하여 주변 몇몇 왕국들이 같은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그 영역을 합치니 거의 대륙의 절반 수준….

'절반 수준?'

벌써?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줄곧 내 반응을 지켜보고 있었던 듯 마왕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처음 봤을 때부터 읽을 수 없었던 역안이 보란 듯이 눈웃음 짓는다. 마왕은 그대로 지도를 손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확실히 제국은 제국인 모양이더라. 곧 있으면 대륙의 절반을 먹을 기세야. 아니, 정말 그렇게 되겠지."

"...."

"지금 정복을 시도하고 있는 왕국은 에스페라네스. 이 지도상에 존재하는 왕국 중 가장 작은 왕국이지. 제국의 규모를 생각하면 얼마 못 가 성문을 열지 않을까 싶어."

"...."

"자, 그럼 문제. 제국이 여기서 만족하고 멈출까, 아니면 기세를 몰아 진격할까?"

이 자리에서 답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몸을 뒤로 물린 마왕이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깍지 낀 두 손은 책상 위에 차분히 올려놓고, 고개는 천장을 향해 젖힌다.

"난 그쪽 황제를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대략적인 성격은 알아. 아마 황제는 멈추지 않겠지. 그대로 각 왕국을 정복하고, 대륙을 통일하고, 갈 곳 잃은 검 끝을 마계로 돌릴 거야. 내가 그걸 가만히 두고 봐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

"이제 무슨 말이 나올지 알겠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우세한 판을 짜고 있던 제국의 게임에 난입하려는 것이다.

판을 뒤엎고, 게임 종목 자체를 바꿔서.

이전까지가 인간계 내에서의 영역 다툼이었다면, 이제는 인간계와 마계 간의 존속을 건 전쟁으로.

'황제가 상당히 분노하겠군.'

마왕은 제국의 정복 전쟁 방해를 예고했다.

이제 다시 제국의 편이 될 때가 왔다.

나를 향해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마왕이 싱긋 웃었다.

"다녀와. 이번엔 선물 같은 건 안 가져와도 돼. 가져오더라도 내 것만 갖고 오든가."

이를테면 '정보' 같은 것 말이지.

무거운 내용과 달리 무척이나 산뜻한 어조였다.

***

데온이 물러가고, 마왕이 몸을 늘어뜨리며 앉아 있던 의자를 빙글빙글 돌렸다.

마계가 움직인 이 상황은 황제에게 시비를 거는 것으로 느껴질 것이다. 시비를 피하지 않는 그의 성격상 아마 마계와의 전면전을 준비하겠지.

생각에 잠긴 눈이 천장을 하염없이 노려본다. 나직한 중얼거림이 적막한 집무실을 채웠다.

"이제 데온 하르트는 조심해서 사용해야겠네."

유용하지만 위험한 나의 패.

그에 대해 생각하고 있자니 문득 웃음이 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보내고 싶지 않지만….'

그를 제국에 보내서 받게 될 손익을 저울에 달아 보면 차라리 보내지 않는 편이 안전하고 좋다.

하지만 그래서는 규칙 위반이지.

이건 데온 하르트를 가운데에 둔 마왕과 황제의 심리전이자 자존심 싸움이다. 가야 할 그를 붙잡아 두거나 죽이는 쪽이 겁쟁이이자 패배자가 되는 것.

이 재밌는 게임이 너무 일찍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왕으로서는 데온 하르트를 마계에 묶어 둘 수 없었다.

"앞으로 많이 피곤해지겠어."

손을 들어 눈가를 꾹꾹 눌렀다. 가려진 눈과 달리 드러난 입은 명백히 웃고 있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던 의자가 책상 앞에서 우뚝 멈춘다. 눈에서 손을 뗀 마왕이 시선을 내려 지도를 눈에 담았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지도상에서 가장 작은 왕국이 존재해 있었다.

"뭐… 오래된 역사가 힘의 크기를 정하는 것은 아니니."

긴 역사와 전통이 새로운 힘에 부서지는 모습은 몇 번이고 봐 왔다.

그러니 제아무리 지도상에서 가장 오래된 왕국이라 할지라도 결국 제국 앞에 무너지게 되리라.

어쨌든 당장 집중해야 할 것은 제국이다. 손을 뻗어 통신석을 건드렸다.

-예, 마왕님. 트로버입니다!

"이제 경계선으로 돌아가."

-예? 아, 아니, 알겠습니다.

애초에 지루하고 따분하다는 이유로 임무를 내팽개치고 온 것이다. 아직까지 아무런 일도 터지지 않았기에 별다른 말이 없었을 뿐, 무슨 문제가 생겼다면 진즉에 목이 날아갔으리라는 것은 트로버도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마왕이 돌아가라 말하는데 어찌 감히 되묻겠는가.

평소 생각이 없는 듯 행동하던 9군단장 트로버도 이때만큼은 조용히 짐을 쌀 수밖에 없었다.

***

마왕이 황제의 판에 끼어들려 한다. 필시 충돌이 일겠지. 내 할 일이 늘어날 것은 안 봐도 뻔하다.

정보뿐만이 아니라 직접 무기를 들고 전투에 뛰어들게 되는 상황도 생기지 않을까.

'시발, 또 입에 천을 쑤셔 넣고 그 지랄을 떨어야 하는 건가.'

시도 때도 없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피는 약점이다.

특히 기댈 곳 하나 없던 8년 전쟁 때, 이를 감추기 위해 입 안에 천을 욱여넣고 복면으로 그 모습을 감췄었다. 그러다 숨 막혀 죽을 뻔한 적도 있지만.

'아니, 아니지. 지금은 만인이 내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아니까 별 상관은 없겠다.'

다들 알아서 잘 생각해 주겠지.

마왕의 저주라든가, 용사의 자폭을 막은 후유증이라든가.

"에드, 인간계에 갈 겁니다."

"아, 네. 이번에도 홀로 다녀오시는 겁니까?"

"네."

"준비하겠습니다."

곧장 일어선 에드가 척척 걸어가 방문을 열었다. 괴상한 식물을 품에 안고 있는 히엔과 마주쳤다.

"...."

"...."

슬슬 문이 닫힌다. 완전히 닫히기 전, 발이 문 안에 쓱 들어왔다.

"잘라 버리기 전에 빼라."

"자, 잠시 데몬 님을 좀…."

"나한테 말해."

"그럼 이것만이라도 데몬 님께 전해 주시면…."

긔에엑.

검붉은 색의 처음 보는 꽃이 수줍게 괴성을 뱉었다. 꾸물꾸물 움직이는 그것을 본 에드의 표정이 짜증스럽게 일그러졌다.

"그 괴상한 꽃은 뭐지? 지금 그딴 걸 데몬 님께 드리려는 건가?"

"데몬 님께서 주신 씨앗을 심어 키웠어요."

"아주 예쁜 꽃이군."

"...."

"...."

아니, 잠깐만. 내가 준 씨앗을 심어 키웠다고? 저게?

내가 준 건 장미 씨앗인데. 절대 키울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내가 혼란에 말을 잃은 사이, 힐긋 나를 살핀 에드가 다시 한번 꽃을 보더니 큼큼 헛기침을 하며 옆으로 비켜섰다.

"...들어와라."

히엔이 눈치를 살피며 조심조심 방에 발을 들였다.

못마땅한 눈초리로 그를 살피던 에드가 나를 향해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그럼 전 준비를 하러 다녀오겠습니다."

"...."

날 혼자 두지 마.

내 무언의 외침은 그에게 닿지 못했다. 에드가 방을 나가고, 히엔과 단둘이 된 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굴려 화분 속 식물을 살폈다.

잘 보니 장미와 얼추 비슷하게 생기긴 했다. 꽃잎이 장미 모양 같긴 하거든. 꾸물거리며 움직이는 건 못 본 걸로 하자.

도대체 이걸 어떻게 키운 거지?

"그건…."

"아, 역시 알아보시네요! 데몬 님께서 주신 씨앗을 드디어 피워 왔습니다! 보통 씨앗은 심으면 3일 내로 싹이 트는데, 데몬 님께서 주신 씨앗은 역시 뭔가 다르긴 한지 이건 일주일이 되어서야 간신히 싹이 나더라고요!"

그러니까 그게 싹이 날 수가 없다니까.

"사실 데몬 님께서 주신 씨앗을 헛되게 보낼 수 없어 살짝 마력을 주입했어요."

"아, 그래서 그런 괴생명체가…."

"네?"

"아닙니다. 그런데 마법은 사용 금지 아니었습니까?"

"마법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그냥 마력을 주입한 것뿐이에요. 다행히 잘 받아먹고 쑥쑥 크더라고요."

거기까지 말한 히엔이 눈을 빛내며 나를 쳐다봤다. 무언가 바라는 듯한 눈빛에 나는 약간의 침묵 후 확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수고했습니다."

"네!"

"...."

"아, 그리고 이건 가지세요! 귀한 씨앗을 키울 수 있게 해 주신 것에 대한 보답입니다!"

긔에에.

아니, 보답이면 좀 좋은 걸로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이런 걸 왜….

복잡한 눈으로 테이블에 놓인 꽃을 보다가 손을 뻗어 화분을 밀었다. 만에 하나 꽃에 손이 닿기라도 할까 손끝이 달달 떨렸다.

"괜…찮습니다."

"네? 어째서… 아, 걱정 마세요. 이 꽃이 데몬 님을 공격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제가 확실히 교육시켰거든요."

동물이냐.

"마침 인간계로 가신다던데, 귀찮은 녀석들을 아래 선에서 처리해 줄 호위가 필요하지 않으시겠어요?"

"...이건 뭘 먹습니까?"

"아, 그게… 사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먹기는 이것저것 다 먹는 것 같은데, 굳이 뭔가 먹지 않아도 상관없는 것 같아서…."

"이것저것이라니…."

"마물이나 인간, 마족 같은 것이요."

"역시 괜찮습니다."

인간을 먹는다잖아! 아무리 잘 교육시켰다고 해도 그렇지, 날 먹으려 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대번에 히엔이 시무룩해졌다. 그의 노력과 정성을 모르는 것은 아니라 조금 미안하기도 하지만 내 목숨이 더 소중하다.

필사적으로 그를 외면하는데, 마침 노크 소리가 들렸다.

"데몬 님, 에드입니다."

"들어오세요!"

에드가 들어오기 무섭게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아한 에드의 시선이 내게 닿는다.

그의 눈을 똑바로 보고 히엔을 눈으로 가리켰다. 요컨대 이런 뜻이다.

'우리 교대하자.'

난 잠시 도망… 아니, 자리를 비울 테니까 네가 얘 좀 어떻게 해 봐.

"전 잠시 화장실을 좀 다녀오겠습니다."

"예?"

"그럼."

서둘러 방에 딸린 화장실에 들어갔다.

등 뒤로 따라붙는 당혹스러운 시선은 무시한 채였다.

99. 때가 되었다(4)

인간계에서 흔히 쓰이는 형태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은 에드가 가만히 히엔을 노려보았다. 그의 머릿속은 상당히 복잡해져 있었다.

데몬 님께서 이 녀석을 어떻게 하라는 눈짓을 보내신 건 확실한데… 어떻게 하라는 거지?

'죽여?'

아니지, 죽일 거면 진즉에 데몬 님께서 죽이셨을 것이다.

눈빛 하나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다니, 부관 실격이다. 에드의 기분이 축 가라앉았다.

어쨌든 이렇게 시간 낭비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또 다른 가정을 머릿속에 띄웠다.

'보아하니 나눌 대화는 다 나눈 것 같던데, 그렇다면 밖으로 내보내라는 의미는 아니었을까.'

그렇지 않아도 챙겨야 할 짐이 더 있어 다시 자리를 비워야 하는데 잘 됐다. 데몬 님도 자리를 비운 방에 히엔 혼자 둘 수는 없지 않은가.

"이만 돌아가… 지금 뭐 하는 거지?"

"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으르렁거린다. 그에 겹쳐 고통 어린 신음이 울렸다.

히엔이 데몬 아루트의 가방에 그 괴상한 꽃을 넣고 있었다.

어차피 통하지도 않겠지만, 혹 데몬 님께 해를 끼치려는 의도는 아닐까. 절로 에드의 눈에 살기가 실렸다.

"설명해. 지금 이건 데몬 님께서 허락하신 행동인가?"

부러질 듯 잡힌 손목이 고통에 덜덜 떨린다.

히엔은 고통을 삭이려는 듯 잠깐 입을 다문 뒤, 천천히 말을 꺼냈다.

"호위 식물입니다. 데몬 님께서 주신 씨앗으로 핀 꽃이니 데몬 님을 위해 써야 할 것 같아서요. 데몬 님께도 말씀드렸습니다."

대답은 거절이었지만.

하지만 데몬 님께는 잔챙이들을 걸러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임무 자체가 기밀인 데다 그 '누군가'가 데몬 님의 이동을 편하게 해 줄 확률보다 짐이 될 확률이 크기에 데리고 다니지 않으셨을 뿐.

'비교적 크기가 작아 챙기고 다니기 쉬운 식물이라면 괜찮을 거야.'

주제넘다는 것은 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데몬 님께서 이 목을 친다 해도 할 말이 없다는 것도.

하지만 데몬 님께서는 인간계에 다녀오실 때면 언제나 눈 밑에 짙은 그늘을 달고 오셨다.

혼자서 기밀 임무를 수행하는 데다 오가는 동안 주제도 모르고 덤벼들 마물들을 상대하느라 그러신 것이 아닐까 추측하는 히엔으로서는 그의 피로를 덜어 주기 위한 무언가를 선물하고 싶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진위 여부를 살피던 에드가 이내 손아귀에 힘을 풀었다.

찡한 고통이 밀려와 손목을 매만지는 사이, 가방에 다가간 그가 화분에 손을 뻗는다. 설마 버리거나 부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과 달리 화분은 보다 더 안전한 상태로 가방에 실렸다.

"...화분이 있으니 뭔가 더 넣기에는 무리가 있군. 식량 주머니는 앞주머니에 넣어야겠어."

환영 마법이라도 걸어두어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마법 금지령이 아직도 거두어지지 않았다. 꼼꼼히 가방 입구를 닫은 것으로 만족한 에드가 고개를 돌렸다.

"이제 됐나? 됐으면 나가."

아예 히엔을 질질 끌고 밖으로 나간 에드가 문을 쿵 닫았다.

고요해진 공간 속,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인 가방이 움찔 흔들리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

또다시 늦봄이다. 눈 오는 것은커녕 겨울도 못 겪어 보고 이렇게 지나가다니.

심지어 앞으로 이런 평화는 힘들 것이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 사방에 점철되는 붉은색과 피비린내 등의 암울한 미래가 떠올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방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 가방.'

시발, 다시 생각해도 끔찍하네.

내가 가방을 연 것은 인간계에 넘어와서도 한참이 지난 뒤였다. 식량 주머니 등의 필수 물품이 들어간 마법 주머니는 가방 앞주머니에 들어 있어 따로 가방을 열 일이 없었는데, 그게 이렇게 큰 엿으로 돌아올 줄이야.

'어쩐지 기분이 찜찜하다 했어.'

에드가 매번 몸을 가볍게 하고 돌아가면 의심하는 자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며 간간이 이런 위장용 짐을 넣은 가방을 챙겨 주었기에 이번에도 그런 것이겠거니 하고 넘겼었다.

마물들이 득실거리는 마계를 벗어나 그리운 인간계에 발을 딛는 것이 우선인 내게 짐을 확인하는 것은 시간 낭비였으니까.

그런데 내게 이렇게 큰 엿을 줄 줄이야.

'아니지. 범인은 히엔인가.'

누가 넣어 놓았건 내게 큰 엿을 선사한 것은 바뀌지 않는다.

가방을 열자마자 끔찍한 꽃이 나를 향해 '긔엑' 하고 우는데, 그때의 소름이란….

당장 집어 던지고 싶어도 기본적으로 생명력이 끈질긴 마계 생명체의 특성상 이 꽃이 죽을지도 의문이고, 만약 죽지 않는다면 상당히 곤란해진다. 인간계에 이런 괴생명체를 풀어놓을 수는 없지 않은가.

다행히도 히엔의 말이 맞는지 꽃은 나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러니 어쩌겠어. 마계에 돌아갈 때까지 챙기고 다녀야지.'

죽이는 것은 포기했다.

혹시 몰라 단검으로 콕콕 찔렀는데 글쎄, 그 녀석이 줄기에 달린 잎으로 내 단검을 야무지게 잡아 비틀지 뭔가!

아주 강인한 식물이었다.

포기하지 않고 불태우려는 시도도 했으나, 근처에서 꺼내든 부싯돌은 채찍처럼 휘둘러진 놈의 줄기에 의해 저 멀리 날아갔고, 멀찍이서 불을 붙인 뒤 던져 넣으려는 방법은 녀석이 화분을 향해 뻗어진 내 손을 쳐 내며 무산되었다.

'이래서 눈치 빠른 식물은….'

죽이려는 의도 하나는 기가 막히게 읽는지 별생각 없이 화분을 집어 들 때는 가만히 있고, 처리하기 위해 손을 뻗을 때만 반응한다.

그래서 절벽에서 떨어뜨리려는 시도를 마지막으로 깔끔히 포기했다.

'챙기고 다닐 거니까 제발 조용히 해 주라.'

'긔엑.'

'....'

욱신거리는 손목을 주무르며 고개를 들었다. 백작저 입구가 시야 가득 들어왔다.

경비가 나를 수상한 눈초리로 살피는 것이 느껴진다. 푸스스 웃고는 그 앞에 걸어가 쓰고 있던 후드를 젖혔다.

정체를 알아본 녀석들이 허둥대든 말든 나는 저택을 올려다보며 배에 힘을 주었다. 우렁찬 외침이 백작저를 뒤흔들었다.

"레멤베르!!"

도대체 왜 내 가방에 씨앗을 넣은 겁니까! 물론 그걸 히엔에게 준 건 나지만! 그래도!

"왜애앩."

"배, 백작님!"

"정신 차리십시오!"

내 성대는 우렁찬 외침을 감당하지 못했다.

그대로 고개 숙여 피를 토하며 나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아, 엿 같다.

다행히 기절하지는 않았다. 말없이 차를 세팅하는 레멤베르를 보던 나는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그때만큼은 기절해서는 안 됐거든.

내게는 아직 괴생명체가 든 가방이 있다. 내가 기절한 사이 짐 정리를 해 주겠다고 누군가 가방을 열면 어떻게 되겠는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아, 레멤베르. 찻잎은 그거 말고 이걸로 써 보죠."

"그것은… 데우사 찻잎 아닙니까?"

"네, 잔은 두 개를 놓아주세요. 하나는 레멤베르의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집사의 도리 어쩌구 하면서 거절할 줄 알았더니, 의외로 순순히 따른다.

차는 별문제 없이 완성되었다. 차가 준비되는 과정에서 잠시 누군가 들어오긴 했지만….

[백작님, 단입니다.]

[들어와.]

[돌아오셨다는 소식을 들어 인사드리고자 왔습니다. 마침 차를 준비 중이셨군요. 제가…! 아….]

테이블 한쪽에 놓인 데우사 찻잎을 발견하고는 급격히 시무룩해져서 나갔다.

도대체 왜 온 거야?

그러고 보니 찻잎을 발견하기 무섭게 녀석이 등 뒤에 무언가를 감췄었다. 나갈 때 슬쩍 확인했는데….

'데우사 찻잎?'

여기서 그걸 어떻게 구했대.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아."

퍼뜩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에 앉아 조용히 차를 마시던 레멤베르가 나를 보고 있었다.

나를 보던 은청색 눈이 발밑으로 내려가더니 가늘어진다. 의문 서린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런데 그 가방은 왜 시종에게 맡기지 않으시고."

"레멤베르."

덕분에 생각났다.

발로 가방을 슥 밀어 놓으며 그의 눈을 마주했다.

"챙겨 준 짐에 도대체 왜 넣은 건지 의문인 것들이 많더군요."

"혹시 몰라 챙긴 것입니다."

"꽃씨가?"

"네."

"무슨 꽃씨였습니까?"

"장미입니다."

일부러 내게 괴상한 꽃씨를 준 것은 아닌 모양이군. 역시 히엔이 마력을 주입한 게 원인이었나.

하지만 여전히 꽃씨를 비롯한 쓸데없는 것들을 넣은 것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나는 미심쩍은 눈초리로 레멤베르를 살폈다.

"레멤베르, 도대체 정체가 뭡니까?"

"영웅 데온 하르트의 집사이지요."

"그거 말고요."

"그게 아니라면… 에스페라네스 출신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 에스페라네스… 에스페라네스?!"

[지금 정복을 시도하고 있는 왕국은 에스페라네스. 이 지도상에 존재하는 왕국 중 가장 작은 왕국이지. 제국의 규모를 생각하면 얼마 못 가 성문을 열지 않을까 싶어.]

마왕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레멤베르가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차분히 찻잔을 들어 입술을 축이는 그를 향해 나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괜…찮은 겁니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요?"

"제국이 모국을 공격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 괜찮습니다."

돌아온 대답은 태도만큼이나 태연했다.

"에스페라네스는 정복해서 얻는 것보다 정복 과정에서 잃는 것이 더 큽니다. 앞으로 더 많은 왕국을 집어삼켜야 하는데 폐하께서 이를 두고 보실 리 없지요. 아마 얼마 못 가 군대의 방향을 트실 겁니다."

"...."

"그리고 만일 정말 정복하게 된다면 제국은 밖에서 다른 세력과 검을 맞대고, 안에서는 에스페라네스를 상대해야 할 겁니다. 아주 귀찮게 되겠지요."

말에서 자국에 대한 믿음이 강하게 느껴진다.

내가 에스페라네스에 대해 아는 것이 뭐가 있었더라. 대륙 중앙에 위치한 작은 왕국. 사방이 산맥으로 둘러쳐진 천혜의 요새. 딱 그 정도.

내 호기심을 느낀 레멤베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은밀하게 속삭였다.

"이 늙은이가 그곳에 대해 설명해 드리렵니까?"

"...."

나는 홀린 듯 신비로운 작은 왕국에 관한 화제에 빠져들었다.

이게 아닌데 싶었던 것은 대화가 끝나고 방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이 능구렁이 집사가…!

쿵쾅거리며 레멤베르를 찾아갔지만 나를 맞이한 것은 황제가 하사한 통신기였다. 그것도 황제와 연결이 되어 있는!

"레멤…!"

-하르트 백작.

"폐하?!"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어서 연락했는데, 타이밍이 안 좋았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국에 영광을. 신 데온 하르트가…."

황급히 예를 차리는데,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영광을' 이라… 그래, 인사 한번 적절하군.

"혹, 제가 무슨 실수를…."

-아니, 말했지 않은가. 인사 한번 적절하다고.

비꼰 게 아니었나?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

-짐은 지금 황궁에 없다.

"아…."

-그래, 아쉽지만 면대면으로 직접 이야기를 주고받기는 힘들 것 같군. 대신 이렇게 보고를 받도록 하지.

'보고'를 언급하는 황제의 음성이 낮게 가라앉았다.

긴장해야 할 때가 왔다. 나는 허리를 곧게 폈다.

***

책상 위에 통신기를 올려 둔 황제는 조용히 왼손등을 매만졌다. 최근 들어 생긴 버릇으로, 붕대가 답답한 탓에 생긴 것이다.

주변인들은 상처가 덧난다며 말리지만, 황제가 언제 그런 것을 신경 썼던가. 붕대 위로 피가 배어 나오든 말든 손을 멈추지 않으며 통신기 너머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마왕이 움직였다는, 짧은 보고를 듣고 나온 말은 흐린 웃음기를 담고 있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

판이 뒤엎어졌다.

마계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인간계가 뭉쳐야 한다. 최소한 최전선에서 마계와 맞붙는 제국을 누군가 방해하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

타 왕국은 제국을 공격할 수 없게 되었고, 무엇이 더 중요한지 아는 황제는 이제 그들에게서 눈을 돌려 마계를 마주해야 한다.

땅따먹기는 이제 끝났다.

"보고해야 할 것이 더 있나?"

-'보고해야 할 것'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뭔가 있기는 있다는 거군."

-....

데온 하르트는 묻지 않은 것엔 답하지 않는다.

본래는 몇 가지 조건만 던지면 술술 답해 줄 정도로 기준이 느슨했지만, 마계와의 전쟁이 임박한 이상 빡빡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서로 간 보던 것은 끝났다.

'이제 이쪽으로도 제대로 맞붙게 되는군.'

심리전, 그리고 자존심 싸움.

황제, 에도아르도는 물러설 생각이 없다. 그가 생각하는 '황제'란 무언가를 마주하고 나아감에 있어 물러서지 않는 것이니까.

그러니 겁쟁이가 되는 쪽은 제가 아닌 마왕이 될 것이다.

왼손등을 툭툭 두드리는 것으로 잡념을 떨쳐낸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100. 사냥대회(1)

"무언가 있기는 한데, 순순히 말하지 않고 기준을 묻는 것을 보면 마왕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 테고."

-....

"그 보고가 마계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기는 한가?"

-'직접적인 연관'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되었다. 계속 '직접적인 연관'의 기준을 묻는 것을 보면 애매하다는 뜻이겠지."

마왕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고, 마계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보기에도 애매하며, 그럼에도 황제가 알아야 할 정도로 중요한 보고라….

데온 하르트가 머릿속에 담아 왔다는 점에서 그 정보가 중요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손등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이 거칠어진다. 기어이 붕대 위로 붉은 피가 비쳤다.

황제는 쉴 새 없이 머리를 굴리며 중얼거리듯 말을 던졌다.

"몬스터 문제인가?"

마계, 마왕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데도 황제가 알아야 한다는 점에서 이 문제는 인간계와 마계 양측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마계와 인간계의 공통적인 문제. 몬스터(마물).

-아닙니다.

"그럼 경계선 문제겠군."

-태혼국에 마계와 연결된 경계선이 발견되었습니다.

정답.

황제의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경계선이 마계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나?"

-현 시국에서 제가 판단한 '직접적인 연관'은 '전쟁과 관련된 정보' 혹은 '마족들과 관련된 정보'였습니다. 죄송합니다.

"됐다. 대충 파악은 하고 있었으니."

그렇기에 어렵지 않게 정답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태혼국이라면 남부의 왕국일 텐데, 남부에 경계선이라… 그들은 과연 알고 있을까.

'알았든 몰랐든 상관없지.'

알았다면 왜 제국에 알리지 않았는지 곧장 답이 나오고, 몰랐다면 그걸로 끝이다.

중요한 것은 '경계선의 존재'. 이전에도 중요했지만, 마계와의 전쟁이 다가온 현 상황에서는 두말할 것도 없는 아주 귀중한 정보다.

왼손등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옮겨 검 손잡이에 올리며 황제는 웃었다.

"수고했다."

***

언제나 그랬듯 중요한 보고는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짐이 그대와 직접 만나게 되는 것은 아마 사냥대회 때일 듯하군.

뭐야, 언제 보고가 끝났지? 눈 한번 깜빡했는데 이렇게 시간이 훅 지나가다니.

보고가 끝난 것은 확실하다. 황제의 말은 벌써 대화를 끝내기 전, 가볍게 나누는 대화로 접어들어 있었다.

아직 얼떨떨한 내가 미처 대답하지 못하자 통신기 너머로 의심이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사냥대회에 참가하지 않으려는 것은 아니겠지.

일단 황제의 말에 대답하는 것이 우선이다. 나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참가하겠습니다. 그 대회는 언제 열립니까?"

-일주일 뒤. 이미 저택에 초대장이 도착해 있을 거다.

"알겠습니다. 일주일 뒤에 뵙겠습니다."

-기대하지. 아, 저번처럼 흰옷을 붉게 물들여서 오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 짐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만, 심약한 귀족들의 눈에는 상당히 무섭게 비쳤던 모양이야.

아, 그때… 저도 무서웠습니다.

제국에 막 돌아와서 보고를 위해 황궁에 가는데 도중에 혁명군에게 습격당하고, 그것도 모자라 정신을 잃었다가 차려보니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채 황제의 앞에 있었단 말이지.

그때의 나보다 더 무서웠을까.

-정 피 칠갑을 하고 싶다면 피가 눈에 잘 띄지 않는 색상의 옷을 입고 오도록.

"네… 네?"

-그런 의미에서 짐이 옷을 하나 보냈다. 대회 날 입고 오면 좋겠군.

"네?"

-붉은색이니 마음껏 피를 묻혀도 된다.

아니,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

-싫은가?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권력이 깡패였다.

일주일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감히 나를 황제―와 연결된 통신기―앞에 던져 두고 간 레멤베르를 응징하려는 시도는 산더미 같은 서류 앞에 무너져 내렸다.

레멤베르를 부르며 기세 좋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지천에 깔린 서류를 보고 그대로 기세 좋게 돌아섰으나….

"이거… 안 놓습니까?"

"이러다 정말 늙은이도 패겠습니다. 책무를 다하셔야지요."

"매번 늙은이 늙은이 하는데, 레멤베르 솔직히 건강하잖습니까. 혁명군도 엎어 쳐 제압한 사람이…."

"말의 요지가 빗나가셨습니다. 백작님, 책무를 다하셔야지요."

"...살려 주세요."

"제가 어찌 감히 백작님을 해하려 들겠습니까. 누가 들을까 무섭습니다. 자자, 이리로 오시지요."

그렇게 장장 일주일을 붙잡혔다.

그리고 지금, 눈 밑을 가득 채운 시커먼 그림자를 매만지던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기 싫다…."

"큰일 날 소리를 하십니다. 이번 사냥대회의 주최자는 황태자 전하십니다. 명이 아깝다면 부디 말씀을 아끼시지요."

이번 사냥대회는 늘어난 몬스터도 처리할 겸, 제국은 전쟁을 치르면서도 이런 것을 할 만큼 여유가 넘친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다.

전쟁터를 바삐 오가는 황제를 대신하여 이를 진행한 사람은 다름 아닌 황태자.

황제는 아마 대회 중후반쯤에 온다고 들었다.

'황제가 오면 당연히 나와도 대화를 나누겠지.'

인정하기 싫지만 난 황제의 애검 중 하나니까.

그럼 대화 주제는 뭐가 될까? 당연히 마계와 관련된 것 아닐까. 이번 보고는 얼굴을 마주 보고 한 것이 아닌 통신기로 했으니 뭔가 더 덧붙여 말하거나 들으려 할지도 모른다.

"더 가기 싫… 읍."

"함부로 손을 대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러다 정말 백작님의 목이 떨어질 것 같아서요."

나는 뒤늦게 내 옷을 만져 주는 시녀들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차 싶어 입을 다물고 눈치를 살피자, 손짓으로 시녀들을 물린 레멤베르가 내게 다가왔다. 황제가 준 옷의 매무새를 다듬으며 한탄에 가까운 말을 늘어놓는다.

"요즘 들어 늙은이의 심장을 자주 철렁하게 만드십니다."

"...."

대꾸하지 않고 거울 속을 들여다보며 딴청을 피웠다.

제복에 가까운 디자인의 붉은 옷.

이러다 정말 가는 길에 피를 보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스쳤으나, 이내 의식의 흐름은 다른 곳으로 흘렀다.

붉은색, 피, 그리고… 전쟁.

그래, 전쟁.

"역시 사직을 해야겠습니다."

인간계와 마계의 전쟁. 그사이에 껴있는 내가 고생스러워질 것은 안 봐도 뻔했다.

지금까지는 서로 깔짝거리며 간만 보는 수준이었으니 버틸 수 있었다지만, 앞으로는….

"그러십니까. 자, 여기 마지막입니다. 이 망토를 걸치시지요."

"아, 네. 그보다 내 사직서는…."

"백작님의 사직서라면 아마 미리 써 둔 것은 없을 겁니다. 이 늙은이가 다 버렸으니까요. 복면도 붉은색으로 맞춰 드릴까요?"

"이상할 것 같은데요. 그냥 하던 대로 흰 복면으로 하죠. 그보다 사직서를 다 버렸다고요? 왜… 아니, 됐습니다. 새로 작성할 테니 당장 종이와 펜을…."

"셔츠가 흰색이라 흰 복면도 이상하진 않군요. 자, 준비 끝났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네… 가 아니라, 레멤베르!"

왜 자꾸 방해를!

"죄송합니다. 하지만 백작님의 목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

나도 안다. 사직하면 오히려 죽는다는 것을.

내가 괜히 틈날 때마다 그만두겠다 하면서도 거절당하면 바로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서 진심으로 사직하겠다고 우기면 상대가 나를 죽일 것을 알기에 그런 것이었다.

황제와 마왕은 나를 아끼는 것과 별개로 군주이며, 나는 내 위험성을 잘 안다.

요컨대 사직 이야기는 그저 희망 사항을 내비치는 말이라는 것이다. 투정에 가까운… 뭐, 그런 거.

'오히려 받아 주면 경계해야지.'

한숨이 나왔다. 어쨌든 출발은 해야 하니 가방을 들고 문을 향해 걸음을 떼는데, 처진 분위기를 완화하려는 듯 레멤베르가 문을 열어 주며 말을 붙였다.

"시간이 넉넉한데 가는 길에 단의 상단에 들러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단이… 상단을 차렸습니까?"

조금 전 데우사 찻잎을 들고 방문했다가 도로 나간 사내가 떠올랐다.

데우사 찻잎을 어디서 구했나 싶었는데, 설마 상단에서 다루는 물품 중 하나가 그거였나? 능력도 좋네.

"네, 이름은 덴 상단입니다."

"아니, 분명… 시작은 검술을 가르치는 것이었던 것 같은데 어째서 끝이…."

"원래 재능은 이것저것 해 보며 발굴하는 것이지요. 덕분에 백작저 재정이 아주 풍족합니다."

원래도 부족함은 없었지만.

어쩌다 보니 데려온 사람이 성공해서 내게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게 기분이 이상하다. 그와 나 사이에는 이렇다 할 유대감도 없는데.

그는 날 따라왔고, 나는 그를 백작저에 머물게 했다. 그게 전부였다.

'아, 어쩌다 보니 투자를 좀 하기도 했지.'

마차에 올라탔다. 안내를 위해 따라온 레멤베르가 마부에게 목적지를 말한 뒤 맞은편에 앉고, 출발하는 듯 진동이 느껴졌다.

"그런데 그 가방은 계속 직접 들고 다니실 겁니까?"

"네."

누가 봐도 인간계의 것이 아닌 생명체가 들어 있거든요.

나는 필사적으로 레멤베르의 시선을 외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상단은 아주 가관이었다.

좋게 말하면 격식이 없고, 나쁘게 말하면….

"손님, 우리 상단은 언제나 최상품 약초만을 취급합니다. 이렇게 우기시면 곤란합니다."

"이거 왜 이래? 나 아카데미 나온 여자야. 내가 약초 보는 눈 하나 없는 줄 알아?"

"손님, 이 약초가 정말 우리 상단의 것이라고 장담하실 수 있습니까? 손모가지 걸고?"

여기 도박판이냐…?

이 혼란의 중심에 단이 있었다.

"상단주님! 주쿤트 대교가 무너졌다고 합니다! 어떡하죠? 르웨체의 물품은 그 경로를 통해 들어오는데…."

"버겐느 대교는 무너졌습니까? 그곳으로 경로를 틀어요."

"상단주님, 이 진상… 아니, 손님 좀 어떻게 해 주십시오!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감봉입니다. 일단 안으로 들여요."

옆에서 레멤베르가 허허 웃는 것이 느껴진다.

잠시 말을 잃고 상황을 지켜보던 나는 단을 쫓아 슬금슬금 이동했다. 레멤베르 덕분인지 다들 나를 알아본 덕분에 이동은 수월했다.

'여긴가?'

슬쩍 문에 귀를 대고 집중했다.

"이것 보세요. 이 상단에서 산 것인데 전부 상태가 엉망입니다. 바꿔 주시든가, 돈 돌려주시죠."

"강황, 구기자, 민들레, 까망초… 전부 남부의 약초들이군요. 이것들을 한 번에 판매한 기록이 없습니다만."

"따로 구매했으니까요!"

일단 듣는 것엔 문제가 없다.

"글쎄요… 그렇다 해도 조금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서."

"하, 증거 있어? 내가 여기서 구매하지 않았다는 증거 있냐고."

"전 병신 머저리가 아닙니다. 그러고 보니 최근 급성장을 하고 있는 우리 상단을 경계하는 자들이 꽤 많았지요. 더 크기 전에 초장에 묻어 버리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 하하하하. 소설 쓰고 있네."

"좋습니다. 당신이 여기서 약초를 구매하지 않았다는 것에 제 손목을 걸겠습니다. 쫄리면 돌아가시든지."

목소리는 여유로웠다. 단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 돌아간다면 아무것도 묻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만약 계속해서 버텼다가 당신의 말이 거짓임이 확정된다면, 그때 당신이 돌아갈 곳은 집이 아니라 하늘이 될 겁니다."

쟤가 원래 저렇게 말을 잘했던가? 아니 그보다….

나는 다른 것에 집중했다. 더 이상 상대를 손님이라 부르지 않는다는 것.

단은 이미 확신을 내린 것이다.

"이 자식이 지금 어디서 약을 팔아?"

"기세등등하시던 분은 어디 가고 긴 혓바닥만 남으셨답니까. 후달리시는지요."

"후달려? 하하하하하핫! 좋아 난…."

"자, 잠깐, 잠깐!"

이러다 정말 누구 하나 큰일 나겠다. 서둘러 문을 열고 안에 난입했다.

나를 본 단이 화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뭔가 싶어 나를 돌아본 손님 역시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벌떡 일어섰다.

"백작님!"

"데, 데온 하르트 명예 백작…."

"미안하지만 밖에서 듣고 있었는데, 말로 해결할 수는 없었던 건가?"

"지금 말로 해결하는 중이었습니다."

"그게?"

그게 말로 해결하는 것이면, 행동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서 있는데, 문 쪽에서 레멤베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단, 손님이 나가시려는 것 같은데 보내 드려도 괜찮은가?"

언제 거기까지 갔는지 손님이 문을 막은 레멤베르의 앞에서 쩔쩔매고 있었다.

성격을 봐선 노인 하나쯤은 힘으로 밀치고 나갈 줄 알았는데, 의외네.

라고 생각한 순간 손님의 어깨가 보였다. 정확하게는 어깨를 짚어 누르고 있는 레멤베르의 손이.

"...."

"집사님도 계셨군요. 그냥 보내 주십시오. 요즘 저런 사람들이 많아서 말입니다. 그보다 백작님, 옷차림을 보니 이곳이 목적은 아닌 것 같은데 어디 가시는 길입니까?"

"사냥대회에 참여하려고."

"사냥대회라면…."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하던 단의 얼굴이 답을 내린 듯 밝아졌다.

"사냥대회에 보조도 데려갈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네, 그건 그렇지만…."

아무도 데려가지 않을 생각이다. 내겐 마계의 식물이 들어 있는 가방이 있거든.

내가 눈을 뗀 사이 사고가 터지지 않도록 대회 내내 몸에 달고 다닐 생각인데, 근처에 사람이 있어서야 되겠어?

"저를 보조로 데려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기대감 가득한 눈으로 내게 부탁을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101. 사냥대회(2)

데온 하르트가 돌아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의아할 정도로 데온 하르트를 경계하는 공작은 그 소식을 들은 이후부터 지금까지 데온 하르트의 행보를 일일이 보고받고 있었다.

사냥대회가 열리기 약 3시간 30분 전에 먼저 출발했으며, 중간에 덴 상단에 들러 한 사내를 데리고 다시 목적지로 향했다는 소식까지 전부.

'그런데 왜... 명령이 없는 거지?'

크루엘의 신경이 곤두섰다.

이쯤 되면 보통 명령이 내려졌어야 했다. 혁명군이든 암살자든 사람을 보내라는 명령이.

그럼에도 지나칠 정도로 조용해 되레 신경을 곤두세우고 공작의 표정 하나하나를 살피던 그가 결국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천천히 입을 뗐다.

"사람을... 보내지 않으시는 겁니까."

들고 있던 서신에서 눈을 뗀 공작이 물끄러미 크루엘을 쳐다봤다. 짧은 틈을 두고, 무표정하던 얼굴에 그린 듯한 미소가 퍼져 나갔다.

"네, 굳이 지금 사람을 보내야 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몇 시간만 더 있으면 훨씬 죽이기 쉽고, 죽음을 조작하기도 쉬운 상황이 오는데, 굳이 고생을 사서 해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사냥대회.

크루엘의 눈이 가라앉았다.

"차라리 그때까지 좀 더 준비를 시켜 보내는 편이 낫겠지요."

"...."

"그런 의미에서 다녀와 줬으면 하는 곳이 있습니다."

드디어 공작이 움직였음에도 곤두선 신경은 쉽게 누그러들지 않는다. 크루엘은 늘 그랬듯 눈을 내리깔고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

결국 같이 가기로 했다.

나는 마차 맞은편, 레멤베르의 옆에 앉은 단을 떨떠름한 눈으로 쳐다봤다. 예의 그 검은 눈이 빛을 내며 나를 마주 본다.

'...부담스러워....'

역시 거절했어야 했나. 하지만 레멤베르마저 단을 데려가길 종용하고 있었단 말이지. 그렇지 않아도 도착하자마자 보조에 관해 말씀드리려 했댔나 뭐래나.

물론 나 역시 순순히 넘어가지 않고 슬쩍 거절 의사를 피력하기도 했다.

[단은 검술이….]

[한 손 보탤 수 있는 수준까지는 배웠습니다!]

[그렇답니다, 백작님. 이참에 어느 수준까지 올랐는지 확인해 보는 것이 어떠신지요.]

[....]

젠장.

반사적으로 가방을 안은 손에 힘을 줬다. 그게 답답했는지 안에서 '긔엑'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를 보던 단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응…? 방금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까?"

"나, 난 모르겠는데."

"긔에에…."

쾅!

잽싸게 창문을 열었다. 깜짝 놀란 시선이 나를 향했다.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모양이야."

"아.... 그런 겁니까."

여전히 의문점이 남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단이 수긍했다.

다, 다행이다... 아니, 아직은 안심하기엔 이른가? 소리의 근원을 찾아 밖을 기웃거리고 있잖아!

이러다 한 번이라도 더 이 괴식물이 소리를 내는 일이 생기면 빼도박도 못하고 곧장 발각될 것이다. 서둘러 그를 불렀다.

"그으… 그보다 상단은 어떻게 이렇게까지 커질 수 있었던 거지? 도대체 뭘 했길래."

"아, 약초나 전쟁 물자를 중심으로 각종 물품을 유통했습니다."

"전쟁 물자는 제국에서 허락하지 않는 한 유통할 수 없을 텐데...."

"하르트 명예 백작님을 모시고 있다 했더니 행정 측에서 알아서 처리해 주더군요."

내 이름을 팔았던 거냐.

얘도 얘지만 일을 처리한 행정 측도 문제다.

"거짓말을 하는 거였으면 어쩌려고 그렇게 덥석…."

"아! 당연히 바로 처리해 준 것은 아닙니다. 진위 여부를 조사할 시간이 필요했는지 일주일 뒤에 다시 오라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마차가 멈췄다. 흐뭇한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던 레멤베르가 창밖을 확인하더니 문을 열고 말했다.

"도착했습니다."

레멤베르가 먼저 내리고 단이 그 뒤를 따라 내렸다. 가장 마지막으로 일어나 단이 내민 손을 잡고 내린 나는 기이하리만치 조용한 주변에 고개를 들었다. 모두가 놀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

뭐야, 왜 그래.

의아한 것도 잠시, 눈으로 그들의 시선을 좇은 나는 속으로 짧은 탄식을 뱉었다.

'...아.'

망했다.

여긴 마계가 아니었지.

슬그머니 단의 손을 놓고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자세를 바로 했다.

"...."

"...."

침묵이 흐른다. 덩달아 내 등 뒤에도 식은땀이 흘렀다.

이건... 날 위한 함정이었나. 일종의 유도 심문?

마계에서는 내밀어진 손을 잡기만 하면 하나부터 열까지 척척 다 해 주다 보니 습관이 되어 버렸다. 오히려 맞잡지 않을 경우 더 귀찮은 일이 벌어져서 거부할 수도 없었고.

단 얘는 왜 손을 내민 거야. 이게 모욕이라는 걸 모르나? 레멤베르는 이 상황을 수습하지 않고 뭐 하는….

'...아니, 레멤베르. 그 낭패한 표정은 뭡니까. 설마 다 가르쳐 놓고 그걸 빼먹은 거야?'

당장이라도 그에 대해 지적하고 싶었으나 상황이 상황이라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다잡았다.

"단."

"네, 백작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말간 얼굴.

그래, 일부러 그랬을 리가 없지. 고의도 아닌 일로 뭐라 할 수도 없어 최대한 부드러운 말을 찾았다.

방금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돌려서 설명할 그런 말을.

"...내가 그렇게 몸이 안 좋아 보였나?"

마차에서 내릴 때 잡아 주는 대상은 보통 어린아이와 거추장스러운 치마를 입은 여인들이다.

치마를 입지도 않았고 신체 어디가 불편하지도 않은 다 큰 성인을 잡아 준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모욕.

'넌 네 몸 하나 가누지 못할 정도로 허약해 보이는구나.' 정도의 뜻이다.

'허약한 것은 맞긴 한데....'

보통은 내게 대놓고 이러진 못하지. 어쨌거나 나는 제국의 '영웅'이니까.

"...네?"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단이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운다.

좀 더 직설적으로 설명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잠시, 주변의 시선이 아직도 쏠려 있음을 느낀 나는 그를 감싸는 쪽을 택했다.

"눈치가 빠르네. 그렇지 않아도 피곤해서 그런지 오늘 몸 상태가 조금 안 좋았는데."

잘못을 짚어 주는 것은 나중에 레멤베르가 해도 된다.

지금 우선으로 해야 할 것은 그의 손을 잡고 내린 내가 우스워지지 않도록 그를 감싸는 것.

상황이 정리되었음을 느낀 듯 저택에 돌아갈 채비를 하는 레멤베르를 향해 나중에 잘 가르치라는 눈짓을 보내고 고개를 들었다.

아닌 척 힐끔힐끔 와 닿던 시선들이 와르르 흩어졌다.

***

황태자의 명에 따라 이곳 사냥터에서 대기하고 있던 살인귀 기사단의 단장, 리엔 라이너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단이 큰 실수를 저질렀다. 아마 고의는 아니었겠지.

그가 남부인의 외모를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산골짜기 동떨어진 마을 출신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이쪽에 관해 몰라서 실수했다는 추측에 힘이 실린다.

교육을 받을 때도 평민이 누군가를 에스코트할 일은 없을 테니 이쪽에 관해선 겉핥기식으로 가르치고 배웠으리라.

어린아이, 치마를 입은 사람, 몸이 안 좋은 사람에게 손을 내민다. 뭐, 딱 그 정도?

'아마 주군이 저주 탓에 몸이 약해졌다는 것을 알고 손을 내민 것 같은데....'

배려는 좋았지만 상대는 '영웅'이다.

일반 남성이었어도 사람에 따라 모욕으로 여기고 불쾌하게 받아들일 판에, 영웅에게 손을 내밀다니.

이는 데온 하르트 당사자에 대한 모욕에 더해 그가 가진 '영웅'이라는 명예에 흠집을 내는 행위다.

'보통 무지는 죄가 아니라 하지만... 상황에 따라 다르지.'

그녀가 판단했을 때, 이건 죄다.

주군의 얼굴에 먹칠을 해도 유분수지, 남도 아닌 직접 데리고 온 아랫사람에게 모욕을 받은 것 아닌가.

그러나 데온이 순순히 단의 손을 잡고 내린 순간, 리엔은 감탄했다. 정확하게는 그 후 이어진 그의 말에.

"눈치가 빠르네. 그렇지 않아도 피곤해서 그런지 오늘 몸 상태가 조금 안 좋았는데."

단이 무안하지 않게 아무렇지 않은 척 손을 잡고 내리며 몸이 좋지 않다고 직접 언급함으로써 상황을 무마했다.

알게 모르게 굳어 있던 분위기가 풀어진다.

그냥 내밀어진 손을 쳐 내고 화를 내도 모두가 납득할 상황에서 이리 유하게 대처하시다니.

나직이 감탄하는 황실 기사단을 향해 리엔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저분이 바로 우리 주군이시다.'

그럼 이제 주인이 왔으니 맞이해야지.

고개를 돌려 천방지축 들개들을 확인했다. 얌전히 있으라는 말은 어디로 들은 건지, 놈들은 짓궂은 얼굴로 근처에 서 있는 황실 기사단원들에 슬금슬금 다가가고 있었다.

리엔의 목에 핏대가 섰다.

"당장 이리 안 와?!"

그리고, 리엔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조용히 데온을 바라보는 단이 있었다.

***

'니들이 왜 여기에 있냐...?'

처음 살인귀 기사단을 마주하자마자 목구멍까지 치민 말이었다.

어쩐지, 황궁에 갈 때면 항상 최소한의 준비를 시켜 보내던 레멤베르의 성향과 어울리지 않는 소박한 출발이다 싶었다.

마부나 중간에 단이 합류한 것은 그렇다 치고 호위도 몇 없는 조촐한 출발이라니. 그럴 리가 없지.

'죄다 여기 와 있어서 그랬던 거였어.'

살인귀 기사단이 보인다. 또 무슨 사고를 쳤는지 그들을 혼내고 있는 리엔도.

목에 핏대를 세우고 화내던 리엔이 뒤늦게 상황을 자각한 듯 고개를 든다. 어렵지 않게 나를 발견한 그녀의 얼굴이 밝아졌다.

"주군, 오셨습니까."

"네. 오랜만입니다, 리엔 경."

"먼 길 오시느라 피곤하셨을 텐데 몸은 괜찮으신지요. 아, 짐은 이리 주십시오."

"이 가방이라면 괜찮습니다. 제가 들겠습니다. 몸도 괜… 조금 피곤하지만 크게 나쁘진 않고요."

몸 상태는 여느 때와 같지만, 오늘만큼은 피곤한 것으로 하자.

"그런데...."

말끝을 흐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까부터 생각한 건데... 역시, 뭔가 이상하다.

왜 우리밖에 없는 것 같지? 오늘 사냥대회 아닌가? 황실 기사단이 있는 걸 보면 착각은 아닌 것 같고... 설마 이미 끝난 건가?

"다른 사람들은 없는 겁니까?"

"예? 모르셨습니까?"

"네?"

뭐지. 나 이 상황 겪어 본 적 있는 것 같아.

언제였더라… 아 그래, 지난번 마계에서 갓 돌아왔을 때, 아무것도 모른 채 연회가 열리는 황궁으로 향했던 때였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 알고 나만 모르는....'

내 표정이 미묘해지던 찰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부러 일찍 불렀네. 초대장에 적혀 있었을 텐데 몰랐던 건가?"

"화, 황태자 전하."

"오랜만이군 백작."

황태자가 웃으며 손을 흔든다. 나는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제국에 영광을. 신 데온 하르트가 미래의 제국을 뵙습니다."

그보다 초대장에 적혀 있었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읽어는 볼 걸 그랬다.

황제가 말한 걸로 충분할 줄 알았는데. 초대장이나 시간 같은 것은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레멤베르가 알아서 챙길 테니 굳이 귀찮게 읽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요 며칠 서류 작업으로 활자에 신물이 난 탓에 또 활자를 읽고 싶지 않았단 말이지.

"그래. 물어볼 것이 있어 일찍 불렀다만, 불쾌했다면 사과하지. 미안하네."

"아, 아닙니다. 조금 당황했을 뿐이니 사과하실 것 없습니다. 그보다 물어볼 것이라니, 어떤...?"

황태자가 기다렸다는 듯 표정을 정돈했다.

금안이 힐긋 살인귀 기사단을 향하더니 다시 나를 담는다. 무언가 가늠하듯 눈초리가 가늘어지고,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조금 있으면 열릴 사냥대회에서 무엇을 주로 사냥하는지 아나?"

"마, 몬스터라고 들었습니다."

마물이라고 말할 뻔했네.

"맞아. 하지만 그냥 사냥대회를 벌였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 않나. 그래서 안전을 위해 일차적으로 몬스터를 쓸어 버리고 남은 잔당으로 사냥대회를 진행하려 하는데...."

"훌륭한 생각이십니다."

"칭찬은 고맙게 받지. 아무튼 내가 물어볼 것은 이거네. 여기에 황실 기사단과 살인귀 기사단을 투입하려 하는데, 괜찮겠나?"

"...살인귀 기사단… 말씀이십니까?"

감당이 안 될 텐데.

102. 사냥대회(3)

"그래, 자네가 임무를 나간 사이, 저들이 또 건물을 부수었거든. 그 대가이네만, 그래도 주인의 허락은 받아야 할 것 같아서."

"...."

"물론 강제적인 것은 아니니 자네가 싫다 하면 황실 기사단만으로 일을 처리하겠네."

썩어들어 가는 내 표정을 다르게 해석한 듯 황태자의 태도가 조심스러워졌다.

그것 때문이 아니라... 이 새끼들이 또 사고를 쳤다고? 건물을 부숴?!

빌어먹을 놈들.

표정만큼 싸늘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마음껏 써먹으십시오."

"그래... 자네가 싫다면 어쩔 수 없… 음?"

"이것으로 녀석들의 만행을 다 갚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전하의 너그러움에 감사드리며 기쁜 마음으로 통솔권을 바칩니다. 얼마든지 사용하셔도 좋습니다."

아예 가져가 버려도 좋고.

황태자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는 검을 든 채 건들거리며 황실 기사단원들에게 시비를 걸다 리엔의 손에 끌려가는 미친개들을 돌아보더니 아무것도 못 본 척 다시 고개를 돌려 내게 웃어 보였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저들을 제어할 수 있는 자는 자네뿐이라는 것을 온 세상이 다 아는데. 농담 한번 거하게 하는군."

"예?"

"상당히 귀찮았을 텐데 이리 흔쾌히 함께하겠다 해 주어서 고맙네, 백작."

그러니까... 저 미친개들과 나는 한 묶음이다, 이거지?

젠장, 당했다.

....

말을 타고 이동하며 생각했다.

'아, 엉덩이 아파.'

이 광활한 숲을 생각하면 말을 타는 것이 당연하긴 한데, 허약한 몸은 그조차 쉽게 만들지 않는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내가 나설 일이 없었다는 것 정도일까.

'아니, 아니지. 나 다쳐야 하는데, 나설 일이 없으면 안 되잖아?'

다쳐서 집에 가야 하는데!

그게 미친개들과 하나로 묶여 끌려와야 했던 내가 내린 판단이었다.

피할 수는 없으니 다쳐서 빠진다!

지금처럼 1차로 몬스터를 쓸어 버리면 사냥대회가 열릴 것이다. 그럼 나 역시 참가해야겠지. 거기서 생고생하며 진을 빼고 나면 황제를 마주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럴 바엔 여기서 다쳐서 집에 가는 편이 낫다.

각혈을 한다면 복잡하게 돌아갈 필요가 없겠지만, 그건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

'다친다. 무조건 다친다!'

열의를 담고 눈이 번뜩 빛났다.

"야야, 백작님 눈 좀 봐."

"와... 좀 무서운데.... 화나신 건가?"

"몬스터에 칼 한번 못 대 봐서 그런 거 아니야?"

"좀 섬뜩하다.... 저러다 눈 뒤집히시는 거 아니냐?"

주위에서 무어라 수군거리는 것 같았지만 과도한 긴장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한순간인 육체적 고통과 지속적인 정신적 고통 중, 전자를 택하여 단단히 마음먹고 움직였는데....

'왜 벌써 끝이 보이는 거지?'

어느덧 토벌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마지막이 될 듯한 전투를 준비하는 기사들을 멍하니 보다가 눈을 깜빡였다.

"...리엔 경."

"예, 주군."

"왜 이렇게… 호위를 잘하십니까...."

"과찬이십니다."

아니 그러니까 적당히 하라고. 뿌듯해하지 마.

여기까지 오는 내내 리엔은 단 한 마리의 몬스터도 내게 도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아, 방금의 내 발언이 리엔을 불타오르게 한 모양이다. 그녀의 눈에 비장한 각오가 서렸다.

'하지 마. 뭔진 몰라도 그만둬.'

"이번 전투에서도 주군께서 직접 검을 뽑으실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아...."

"지켜봐 주십시오."

"아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저도 무기를 한번 써 봐야...."

"주군께서 보시기엔 제가 못 미더우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으니 믿어 주십시오."

"...."

시부레.

이쯤되니 오기가 생긴다. 그래, 반드시 나서서 다쳐 주마.

미친개들을 점검하기 위해 리엔 경이 내게서 멀어진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조급해진 마음으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어지간해서는 몬스터와 마주할 기회도 주지 않겠지. 지금 리엔 경의 상태를 보면 몬스터의 털끝 하나도 보기 힘들 것 같다.

"백작님."

"...정 안 되면 말 엉덩이를 꼬집어서라도 낙마를…."

"백작님?"

"으, 응? 단?"

"네, 백작님. 방금… 아니, 아닙니다."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보던 단이 서둘러 고개를 저으며 말을 돌렸다.

괜히 알았다간 피곤해질 것 같아서 일부러 외면하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이겠지.

할 말 있으면 빨리 하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까닥이자 본론에 들어가려는 듯 단이 표정을 바꿨다. 나를 힐끔거리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조금 전 제 행동이 심각한 무례라고 들었습니다."

"아."

마차에서 내릴 때 손 내민 거?

레멤베르가 잘 설명해 준 모양이다. 이제라도 알았으면 됐지.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이미 지나간 일로 무슨."

"하지만...."

의미를 알아 버린 이상, 마음 편하게 넘어가는 것이 가능할 리 없다.

단이 힐긋힐긋 내 얼굴을 살핀다. 눈치를 보듯,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화내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러니까 이미 지나간…."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려다 말고 멈칫했다. 눈이 가늘어졌다.

...어째 화내길 기대하는 듯한 태도로 느껴지는데, 내 착각일까.

느껴지는 위화감에 말없이 그를 쳐다봤다. 곧장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그가 움칠거리며 눈을 굴린다.

검은 눈동자가 내 눈을 들여다보고, 표정을 살피고, 다시 바닥을 향하는 것이 누가 보기에도 눈치를 살피는 꼴이었으나, 그마저도 무언가 재고 따지는 것 같아 나는 조금 더 시간을 둔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

"몬스터다!!"

이어진 발언은 한쪽에서 들려온 외침에 묻혔다.

내 귀가증! 지금 단이 중요한 게 아니다. 휙 소리가 나도록 고개를 돌려 외침이 들려온 곳을 보았다.

누구도 반박 못 할 완벽한 귀가증이 되어 줄 놈들이 하나, 둘, 셋… 아무튼 우르르 몰려오고 있었다.

'...좀 많긴 한데.'

뭐, 그래도 마계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

애초에 저들이 이쪽에 넘어온 이유도 수가 넘치고 넘치다 인간계까지 밀려 나온 것이다. 밀려 나온 놈들은 마물들 사이에서도 힘이 약해 쫓겨난 놈들일 테고.

지금까지 만난 몬스터 무리 중 가장 많을 뿐이지 위협적인 수준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러한 정보와 든든한 기사들을 믿고 슬쩍 단검을 빼 들었다. 적당히 하는 척하다가 적당히 다치고 빠져야지.

말을 몰아 한 걸음 나서는데, 바로 옆에서 우렁찬 외침이 고막을 뒤흔들었다.

"황실 기사단, 전투 준비! 전원 대열을 맞춘다!"

"!"

까, 깜짝이야. 반사적으로 놓칠 뻔한 단검을 꽉 움켜쥐었다.

단장의 외침에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일었다.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와, 멋있다. 이미 여기까지 오면서 몇 번이고 보긴 했지만 다시 봐도 멋있네. 우리 애들은 저런 거 못 하나?

"로프티 기사단은…."

"우와아아아!!"

"뿔 달린 놈 내 거!"

"...그래, 마음대로 해라."

해탈한 리엔의 목소리가 들렸다.

음, 역시 가능할 리 없지. 대열이고 나발이고 득달같이 달려드는 들개들을 보며 허허로이 웃었다. 내가 정말 헛된 기대를 했어.

'그럼 이제 나도....'

눈으로 상황을 훑다가 적당한 녀석을 하나 골라 노려보았다.

손에 쥔 단검이 빙글- 돌아가고, 엄지손가락이 손잡이를 쓸 듯 연신 펴졌다 접힌다.

습관이 된 수신호를 자각도 없이 하며 말을 움직이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밀란!!"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밀란을 향해 악을 쓰는 클레터가.

"백작님 말려!"

"...으응?!"

***

때론 그런 생각을 한다.

변변찮은 검술 하나 익히지 못한 빈민과 평민으로 이루어진 선봉대가 8년 전쟁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단순히 정신 놓고 날뛰는 것만으로 정말 충분했을까?

'그럴 리가.'

양이 아무리 날뛰어도 상대가 호랑이라면 그걸로 끝이다.

상대하기 귀찮고 껄끄러워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린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대로 죽게 되는, 날파리 같은 목숨.

전장에는 적지 않은 호랑이들이 존재했고, 피치 못하게 마주해야 하는 순간 역시 많았다. 그럴 때면, 그들은 대장인 데온 하르트의 손을 빌려 살아남아야 했다.

'정확하게는 희생…으로.'

거칠다 못해 베일 듯한 단어를 입 안에서 굴리며 살인귀 기사단원 클레터는 쓰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