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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명예 백작이 된 그들의 대장은 놀라울 정도로 본인의 몸 상태를 정확히 파악할 줄 안다. 제 몸의 육체적 '한계'를 정확하게 파악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제 몸 상태도 파악하지 못해 망가질 때까지 굴리거나, 한계에 미치지도 못한 상태에서 포기해 버리는 것을 생각하면 이 또한 어마어마한 재능임은 틀림없었다.

데온 하르트는 이 재능을 조금 비틀어진 방향으로 응용했다.

'제 육체적 한계를 안다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그 선을 넘을 수도 있다는 거지.'

압도적인 적을 죽이기 위한 숨겨 둔 단 한 방으로.

상대가 방심한 틈을 타 단숨에 죽이기 위해 순간적으로 다리가 낼 수 있는 속도를 뛰어넘고, 팔이 낼 수 있는 힘의 한계를 넘어 버린다. 그러고 나면 뼈와 근육이 손상되어 적지 않은 회복 기간이 필요했다.

클레터는 그것이 마치 꿀벌의 공격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한 번 온 힘을 다한 공격을 하고 나면 철저한 무방비 상태가 되어 버리는 것이.

'물론 시간이 지나면 회복된다는 것은 다르지만.'

아, 독기로 아무렇지 않은 척 버틸 수 있는 것도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당연히 공격이나 방어는 전혀 불가능하지만.

'그런데 그것을!'

고작 몬스터 토벌하는 데 사용하려고 해?!

"하."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안 나온다.

그 와중에 눈치 없는 밀란은 생각 없이 곧장 복창하려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백작님 말… 응? '챙겨'가 아니라?"

"닥치고 말려!"

물론 데온 하르트가 한 수신호의 의미는 '챙겨 달라'는 것이었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건 아니다.

위급한 상황도 아닌 일에 백작님의 몸이 망가져서야 쓰나.

"뭐… 그렇다면야.... 백작님 말려!"

"백작님 말려!"

"백작님 말려!"

밀란의 목소리를 들은 이들이 복창하며 움직이고, 그 목소리를 들은 다른 이들이 또 복창한다. 명령이 단원들 모두에게 전해진 것은 삽시간이었다.

"뭐, 뭐야 이 자식들...!"

"백작님 안 됩니다!"

"뭔진 몰라도 안 돼요!"

"놔 이 새끼들아! 난 집에 갈 거야!"

단원들에게 붙잡혀 버둥대는 데온을 보던 클레터는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게도, 저에게도, 수신호가 습관이 되어 다행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지금쯤 난리 났겠지.

데온 하르트는 전장에서 주로 수신호를 사용한다. 그 탓에 가장 침착한 클레터가 그의 수신호를 살피고 알리는 역할을 맡았다.

조금 전 그 수신호는 '그걸 사용할 테니 무방비 상태가 될 나를 챙겨 달라'는 의미.

"지금 이게 무슨...."

"하하...."

어리둥절한 표정의 리엔을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인 클레터는 난장판인 장면과 별개로 큰 문제 없이 마무리되어 가는 토벌을 돌아보다가 흠칫했다.

분노와 짜증으로 일그러진 단의 얼굴이 매섭게 소란을 향해 있었다.

***

1차적인 토벌이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사냥대회.

한 것도 없는데 진이 다 빠졌다. 나는 지친 얼굴로 야외 사교장을 가로질렀다. 내가 지나갈 때마다 귀부인과 영애들이 부채로 입을 가리며 소근거렸으나 굳이 신경 쓰고 싶지 않아 무시했다.

지친다. 잠시만이라도 천막에 들어가 있어야지.

"주군, 들어가시려는 겁니까?"

"네, 리엔 경. 적당히 수습하고 저놈들 사고 안 치게 잘 묶어 두고 계세요."

"알겠습니다. 황태자 전하의 개막 연설이 있을 때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단은...."

"예."

"사냥대회 전까진 자유니까 마음대로 해. ...날 따라오진 말고."

"...예...."

단이 내 뒤를 따르던 걸음을 멈췄다. 조금 시무룩해진 얼굴이 보였으나 대충 손을 휘저어 보내고 안에 들어왔다.

무겁고 귀찮은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아무도 들이지 말라 밖에 명령한 뒤, 조심스럽게 화분을 꺼냈다. 꾸물거리는 그것을 마주하자 한숨부터 나왔다.

"이걸 진짜 어떻게 처리하냐...."

이대로 마계에 돌아갈 때까지 계속 챙기고 다녀야 하는 건가.

하지만 이대로 사냥대회에 참가하게 되면 단과 같이 다녀야 하는데.... 들키진 않을까?

"집에 가고 싶다...."

꼬여 버린 상황에 한탄을 하며 손가락으로 괴생명체를 콕콕 찔렀다. 그게 마음에 안 들었던지 녀석이 잎사귀로 내 손가락을 말아 쥐고 그대로 꺾었다.

"윽, 이 미친 새끼가...! 놔. 안 놔?!"

"백작님? 무슨 일이십니까!"

"들어오지 마!"

103. 사냥대회(4)

간신히 손가락을 빼내고 금방이라도 들어올 듯한 움직임을 막았다. 욱신거리는 손가락을 조심히 감쌌다.

빌어먹을. 손가락 발갛게 부어오른 것 좀 봐라. 저런 위험한 식물을 나한테 넘겼단 말이지. 히엔 이 망할 놈이...!

그 와중에 뭐가 그리 자랑스러운지 내 부은 손가락을 줄기로 가리킨 녀석이 잎사귀를 말아 치켜올린다. 마치 엄지를 치켜올린 듯한 모습에 혈압이 솟구쳤다.

"뭘 잘했다고...!"

"긔엑."

"소리 내지… 응? 이걸 핑계로 빠지라고?"

"궭."

한층 소리 죽인 답이 돌아왔다. 내 표정이 미묘해졌다.

아니... 마음은 고마운데, 아무리 그래도 영웅의 체면이 있지. 고작 손가락 부상으로 집에 가는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그보다, 정말 날 생각해서 그런 거 맞아? 그냥 내가 자꾸 콕콕 찔러서 짜증 난 게 아니고?

밖이 분주하다 싶더니 결국 안의 소란을 무시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리엔을 데리고 온 듯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군! 무슨 문제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자, 잠깐! 안 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

빌어먹을. 들어오지 말라니까 왜 리엔을 데려오고 있어.

허둥지둥 화분을 가방에 쑤셔 넣었다.

예상했던 답이 아니었는지 침묵한 것도 잠시, 내가 잘 잠기지 않는 가방 문과 씨름하고 있을 때쯤, 비장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역시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 맞군요. 들어가겠습니다."

"!"

가, 가방 아직 다 못 잠갔는데!

...그냥 구석에 밀어 놓자. 서둘러 발로 가방을 주욱 밀었다. 입구를 가린 천이 치워진 것은 그와 거의 동시였다.

검까지 빼 든 채 성큼성큼 들어온 리엔이 눈을 날카롭게 뜨고 내부를 둘러본다.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그녀의 눈이 어색하게 가방을 가리고 선 내게 닿았다.

"괜찮으십니까?"

"네, 네...."

"주군께서는 항상 그렇게 대답하시곤 했죠. 믿지 않겠습니다."

그럴거면 왜 물어봤냐.

누그러지지 않은 눈빛이 나를 샅샅이 훑는다. 머리카락 한 올까지 뜯어볼 기세로 나를 살피던 시선은 기어이 살짝 부은 손가락에 도달했다.

그녀의 표정이 험악하게 변했다.

"역시 암살 시도가!"

"이게 왜 암살 시도와 연관이 되는 겁니까! 그냥 삔 겁니다!"

"별것도 아닌 일이었으면 들어오려는 보초나 저를 다급히 막으셨을 리 없지 않습니까! 분명 암살자가 있었겠지요!"

"...."

뭐라 할 말이 없다....

숨길 것이 있어 그랬다고 말할 수도 없어 조용히 입을 다물자 긍정으로 받아들인 듯 확신에 찬 목소리가 이어졌다.

"조용히 해결하고자 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애초에 보초와 저는 주군을 지키기 위해 존재합니다. 자꾸 이렇게 숨기려 드시면 곤란합니다."

"...."

"암살의 종류 중 바늘에 독을 묻혀 찌르는 방법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당장 의사를 부르겠습니다."

"아니, 잠깐… 잠깐만...!"

"말리지 마십시오! 벌써 손가락이 이렇게 빨갛게 부어오르지 않았습니까! 독이 더 퍼지기 전에 치료해야 합니다!"

얘 뭐야, 무서워. 마치 폭주한 마차 같잖아!

쪽팔려서라도 절대 의사를 부르게 둘 수는 없다. 당장이라도 나갈 듯한 리엔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과는 전혀 다른, 마디 굵은 웬 남자의 큼직한 손이 잡혔다.

...응?

"독이라 하셨습니까?!"

넌 언제 들어왔니. 아니, 그 전에 이 손 좀 놔줄래?

밖에서 리엔의 외침을 들은 듯 클레터가 난입했다. 졸지에 손과 어깨를 잡혀 그가 움직이는대로 힘없이 팔랑팔랑 흔들리던 나는 뒤늦게 정신 차리고 썩은 동태 눈을 했다.

"허락도 없이 들어오면 어떡…."

"어딥니까! 어디에 독을 당하신 겁니까? 설마 음독?!"

"아니야...."

"그럼 어딘데요!"

"아무 데도...."

"클레터. 네 무례는 나중에 벌하도록 하지. 당장 의사를 불러와라."

"알겠습니다!"

아니라고! 당장 멈춰!

당장이라도 뛰쳐나가려는 클레터를 서둘러 붙잡았다. 그런데 이 새끼가 그냥 움직이네? 참고로 난 아직 그를 붙잡은 상태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몸이 주욱 늘어져 바닥에 엎어질 듯하자 당황한 클레터가 나가려던 것도 잊고 급히 나를 부축했다.

"왜, 왜 말리시는 겁니까?"

"독 아니라고. 그냥 리엔 경이 오해한 거야."

눈을 깜빡이던 그가 이내 안심한 듯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얽! 덩달아 나도 엎어졌다.

너 이 새끼.... 코를 문지르며 고개를 드는데 여전히 의심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손가락은 왜 부은 겁니까?"

팔짱을 끼고 선 리엔이 미심쩍은 눈초리로 나를 보고 있었다.

"삐었다니까요."

"그러니까 제 말은, 어쩌다가 그렇게 되신 겁니까?"

"...그것까지 말해야 합니까?"

고작 손가락 삔 건데?

식물에 당했다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 못 한다. 위험해서? 아니, 쪽팔려서.

리엔도 그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독이 아니라니 다행이군요."

"네... 아, 리엔 경."

"예?"

의문을 담은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이건 그냥 그녀를 본 김에 생각나서 던져 보는 거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뱉었다.

"저 집에 가고 싶습니다."

"아, 서류 작업이 밀려 피곤하실 것이라는 이야기는 집사님께 들었습니다. 안 됩니다."

"...?"

역시 단호하네.

아니, 그보다 말의 앞뒤가 이상하지 않냐.

"폐하께서도 오신다는데 먼저 돌아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사냥대회에 참여하기 싫은 것이 이유라면 무리하여 몬스터를 잡지 않으셔도 되니 자리만 지켜 주시면...."

무심코 고개를 든 그녀의 눈이 나와 딱 마주쳤다.

멈칫한 그녀가 팔짱을 풀며 자세를 바로한다. 조금 풀어졌던 표정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굳어 있었다.

"주군, 고개를 들어 보시겠습니까?"

"?"

"클레터. 주군의 고개 좀 들어 봐. 내게 잘 보이게."

"이... 이렇게 말입니까?"

클레터가 내 턱을 잡고 리엔을 향해 들어 올렸다.

"주군, 손을 치워 주시겠습니까?"

"...."

"클레터."

"예."

젠장. 클레터가 하관을 가리고 있던 내 손을 잡아 내렸다.

코 밑으로 흐르던 뜨뜻한 액체가 턱까지 흘러내려 맺히더니, 바닥에 뚝 떨어졌다.

"코피가 나잖습니까!"

"아... 코피였습니까?"

난 또. 콧물인 줄 알고 필사적으로 숨겼네.

...아니, 잠깐. 코피?! 하필 이 타이밍에?

덜덜 떨리는 눈을 들어 리엔을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눈에 불이 붙어 있었다.

"역시 독에...!"

"아닙니다! 이건 아까 이 새끼 때문에 엎어져서...!"

"제가 언제… 아, 아아?!"

반사적으로 펄쩍 뛰던 클레터가 무언가 생각난 듯 동작을 멈췄다. 눈동자가 덜덜 떨리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래, 나를 부축하던 도중에 안심했답시고 그대로 앉아 버렸지. 덕분에 나 역시 엎어졌고.

끌고 갈까요? 눈빛으로 묻는 리엔경에게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그를 불렀다. 손수건으로 코를 막은 탓에 약간의 코맹맹이 소리가 나왔다.

"클레터."

"예… 백작님...."

"왜 온 거야?"

이유는 듣고 끌어내야지.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미친개들과 함께 시시덕거리고 있어야 할 녀석이 우연히 이 천막 앞까지 왔을 리가 없다.

클레터도 뒤늦게 제 방문 목적을 떠올린 듯 '아' 하는 짧은 탄성과 함께 자세를 바로 했다. 진지해진 눈빛에 내가 비쳤다.

"사냥대회 보조로 단을 데려간다고 들었습니다."

"그랬지."

"최소한 한 명을 더 데려가시면 안 되겠습니까? 단둘은 조금 불안합니다."

"굳이...?"

사냥대회에 데려갈 수 있는 보조의 수는 최대 네 명이다. 아, 네 명은 황족들만이 가능하니 정확하겐 세 명이라고 봐야겠지.

난 딱히 열정적으로 몬스터를 잡을 생각도 없으니 그 이상의 보조는 사치인데.... 처음엔 단도 없이 혼자 참가할 생각이었고.

별로 동하지 않는 기색이 표정에도 드러난 듯 클레터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단의 눈빛이 조금 수상합니다."

"뭐?"

"조금 전 토벌 때… 백작님을 보는 눈빛이...."

"...?"

"...음…그러니까... 열렬한 짜증? 기어 나오는 의심? 불타는 분노?"

무슨 주문 외우냐.

"아무튼 굉장히 수상했습니다."

"그래…그랬구나.... 그럼, 리엔 경."

끌어내세요.

가만히 서 있던 리엔이 성큼 걸어나와 클레터의 팔을 잡았다.

잡기만 했다.

"배, 백작님?"

"...리엔 경? 어서 끌어내지 않고 뭐 하는...."

"다른 것은 모르겠으나, 보조를 하나 더 데려가야 한다는 의견에는 찬성합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굳건한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날 걱정해 주는 마음은 고맙지만... 이 이상은 안 된다.

이런 식으로 휘둘리는 것도 한두 번이지. 나도 나름 학습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부담스러운 눈빛을 피해 눈을 굴렸다.

"안 됩니다."

가방의 괴생명체 때문에라도 안 돼.

무엇보다 걸리는 것은 그녀의 성격이다. 단은 몰라도 그녀에게 들키는 순간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상황이 펼쳐질 것 같달까.

코피가 멎은 것을 확인한 뒤, 손수건을 접어 주머니에 넣고 슬그머니 가방을 챙겨 들었다.

"나가세요. 저도 나갈 겁니다."

"주군?"

"안 됩니다. 아무튼 안 돼요."

"백작님?"

"싫어. 내 맘이야."

"백작님이 어린앱니까? 왜 타당한 이유도 없이 떼를 쓰고 그러세요."

아 몰라. 안 돼. 안 된다고. 원래는 나 혼자 가려 했었어.

여기서 이렇게 압박을 받을 바에는 그냥 밖에 나가 있는 편이 낫겠다. 두 인간의 등을 떠밀며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후회했다.

"어째서 명예 백작 따위가 '백작'이라 불리는지... 쯧."

내 운은 어떻게 되어 먹은 걸까.

나오자마자 시비가 걸리다니. 약간의 감탄을 담아 시비를 건 상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당당하게 '백작'이라는 지위까지 들먹여 가며 거들먹거리는 것을 보면 아마 작위를 가진 사람일 텐데. 최근에 가주가 되었나? 굉장히 젊은데.

그런데 굉장히 비열하게 생겼다. 빛나는 인성을 외형으로 표현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듯한 얼굴을 멀뚱히 보는 사이, 침묵이 길어졌는지 보다 못한 클레터가 나섰다.

"실례지만 누구신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비켜라. 너 따위가 감히 말을 걸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와.

주인이 재수 없으면 수행인도 재수 없구나.

클레터가 입을 딱 다물더니 싱긋 웃었다.

'야…야, 검에서 손 떼. 빨리.'

아무리 짜증 나도 그렇지, 검에 손을 올리면 어떡하냐. 내가 감싸지 못할 지위의 귀족이면 어떡하려고.

질린 눈으로 그를 보다가 리엔을 찾았다. 얘는 클레터가 검에 손을 올리는 걸 보고 있었을 텐데 말리지 않고 뭐….

'어… 그래... 같이 검 뽑으려 했구나....'

그러고 보니 저 인간의 언행이 '주군'과 관련된 그녀의 '기사도'를 건드리긴 했지.

그래도 검을 뽑아서는 안 된다. 상대가 누군지 알고.

손짓으로 두 사람을 막고 거들먹거리는 남자를 조용히 쳐다봤다.

아까 뭐라 했더라. 아, 그래. '어째서 명예 백작 따위가 '백작'이라 불리는지'라고 했었지. 솔직히 나도 딱히 할 말은 없다.

'틀린 말도 아닌데, 뭐.'

'명예 백작'인 나의 공식 명칭은 '하르트 명예 백작'이다. 괜한 혼돈을 막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부르는 것이 맞긴 하지.

그런데.

"누구신지...?"

누구시길래 이렇게 시비를 걸고 그러세요.

나와 눈이 마주친 남자가 몸을 흠칫 떨더니 언성을 높여 답한다. 거들먹거린다기보다는 두려움을 감추기 위한 것에 가까운 외침이 돌아왔다.

"'진짜' 하르트 백작이시다! 너 같은 가짜와는 다르단 말이지!"

응?

"...."

"...."

정적이 내려앉았다.

조용해진 공간 속에서, 나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내가 방금 무슨 말을 들었지? 다시 생각해 보자.

음... 다시.

다시. 다시. 다시.

....

"...아하."

그 순간 내가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눈앞의 남자가 희게 질려 주춤 물러섰다.

104. 사냥대회(5)

크루엘이 그렇게 백작위를 거절했다더니, 결국 저런 듣도 보도 못한 방계의 잡것에게 자리가 넘어갔구나.

'방계가 있긴 했구나. 직계인 내가 몰랐을 정도면 거의 남이나 다름없을 텐데.'

용케도 가주가 되셨네.

뭐, 아예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다. 말로는 하르트가가 '멸문'했다 하지만, 일단 하르트의 성을 단 직계들이 둘이나 살아 있으니 귀족 계보에서 빠질 일도 없고, '그때' 모든 가신들이 죽은 것도 아닌 탓에 재기하려면 얼마든지 재기 가능한 상태였으니.

...아니, 이걸 과연 '재기'라 할 수 있을까?

웃음이 나왔다. 아마 지금 내 표정은 한쪽 입꼬리가 한껏 올라간 상태겠지. 지금 네가 감히 나를 비웃는 것이냐며 더듬더듬 자존심을 세우는 방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나는 그대로 눈을 접어 웃으며 진심이 담긴 말을 꺼냈다.

"그것참."

"...."

"축하드립니다."

굳이 작위가 없더라도 제국의 공식 영웅들은 기본적으로 존중받는다. 아예 영역이 달라 특정 작위에 빗댈 수는 없지만 황제가 관심을 가지고 아끼며 주기적으로 품위유지비까지 내릴 정도면 말은 다 한 셈이다.

그런 영웅을 대놓고 함부로 대한다? 두말할 것도 없는 멍청이다.

이 멍청이가 스스로의 힘으로 가주 자리에 앉았을 리는 없을 테고, 아마 욕심에 먹힌 하르트가의 가신들이 손에 넣고 굴리기 편한 멍청이를 부러 앉힌 거겠지.

그래서 웃었다.

하르트가가 이렇게 무너진다는 것이.

너무 기뻤다.

***

"어째서 명예 백작 따위가 '백작'이라 불리는지... 쯧."

그 말이 들렸을 때, 귀족들은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왜 굳이 그에게 시비를 거는 건지 모르겠다. 저 남자는 지금 본인이 화를 자초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나 할까.

'하르트 명예 백작'이 왜 '하르트 백작'이라 불리겠는가. 존중의 의미가 아니던가.

'명예 백작'이라는 호칭이 길어서 그런 것은 두 번째다.

데온 하르트는 제국의 영웅이며 황제의 애검이고, 국경선에 맞닿은 영지를 가진 변경백이다. 이유는 그것이면 충분했다.

굳이 꾸역꾸역 '명예 백작'이라 불러 각종 무시무시한 이명을 가진 사내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은 귀족들은 별다른 불만 없이 데온 하르트를 '백작'이라 불렀다.

"저 남자는 누구죠?"

"요즘 사교계에서 자주 보이던 남자인데... 관심이 없어서 잘 모르겠네요."

"하긴... 하는 행동을 보니 천박해서 굳이 관심 갖고 싶진 않군요. 먼 지방의 귀족일까요?"

"글쎄요. 누군진 몰라도 멍청하네요. 굳이 피를 보고 싶을까."

상대는 살인귀들의 주인, 뱀파이어 백작인데.

아닌 척 귀족들의 이목이 작은 소란에 쏠렸다.

갑작스러운 시비에도 흔들리지 않고 거들먹거리는 남자를 조용히 쳐다보던 데온 하르트가 나직이 질문을 던진다. 정체를 묻는 질문에 누구도 관심 없던 남자의 신분이 밝혀졌다.

['진짜' 하르트 백작.]

그제야 귀족들은 돌아가는 상황을 알 수 있었다.

하르트 백작가의 직계인 크루엘 하르트와 데온 하르트가 가문에 관심이 없으니 방계가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저런....'

'저 어리석은 남자가 가주가 되었다는 것은 가신들 역시 한통속이라는 거겠죠.'

'알량한 자리를 믿고 날뛰는 저 남자가 짜증 나 자리를 회수하고 싶다 하더라도 이제 와서 그러기엔....'

상당한 고생길이 되리라.

그들의 눈에 흥미가 돌았다.

저 잔혹한 영웅은 어떻게 반응할까? 화를 내려나? 아니면 더 나아가 고생길을 자처하고 그 자리를 빼앗으려 할까. 그도 아니면 검을 빼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데온 하르트는 화내지 않았다. 그는 그저 가소롭다는 듯 눈까지 접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것참."

"...."

"축하드립니다."

대놓고 무시하는 것이 훤히 드러나는 태도였다.

'진짜' 하르트 백작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다. 금방이라도 분노를 터뜨릴 듯 성큼성큼 다가가던 그는 이내 무언가를 보고 희게 질리더니 주춤 물러섰다.

"너… 그...."

"...?"

상황을 지켜보던 귀족들이 의아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아직 데온 하르트는 아무 짓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를 가리킨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린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어리석은 귀족의 기세가 죽었다. 그는 하염없이 눈동자를 달달 떨더니, 데온 하르트가 한 걸음 다가서는 순간 아예 몸을 돌려 후다닥 사라졌다.

썰렁한 침묵이 흘렀다.

"...뭐죠?"

"하르트 명예 백작이 무언가 한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그는 아무 짓도 안 했는데요."

"혹시... 기세에 눌린 것이 아닐까요? 전장을 휘젓던 영웅의 기백이라는 것이 있잖아요."

"아, 그게 맞는 것 같네요. 기세만으로 상대를 쫓아내다니, 역시...."

저들만의 추측에 빠져드느라 데온 하르트를 시야 밖에 밀어 둔 그들은 미처 보지 못했다.

데온 하르트가 어깨에 붙어 있던 벌레를 툭 털어 내는 것을. 그리고 몸서리를 치며 무언가 중얼거리는 것을.

***

"으으, 징그러워. 무슨 벌레가 이렇게 커?"

전쟁 경험 덕분에 벌레에 면역이 있지만, 그래도 어깨에 이런 걸 달고 다닐 정도로 비위가 좋진 않다.

속으로 시비를 걸던 녀석에게 감사를 표하며 다시 한번 어깨를 털었다.

'그나저나 걔도 사냥대회에 참가하려던 것 같던데... 가능할까?'

그 정신머리로?

벌레 하나에 사색이 되던 얼굴이 떠올랐다.

어지간히 곱게 자란 것 같던데, 그런 녀석이 몬스터를 사냥하겠다고?

1차적으로 청소를 한 데다 마계에서 인간계까지 밀려날 정도로 약한 몬스터들이라지만 그래도 몬스터다. 저딴 녀석이 손쉽게 잡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뭐, 내가 신경 쓸 필요는 없지. 죽으면 죽는 거고.'

생각은 거기서 끊겼다. 황태자 전하의 말씀이 있다는 외침에 고개를 단상에 고정했다.

귀족들이 고개를 숙이는 가운데, 황태자가 우아하게 걸어 단상 위에 올라간다. 이윽고, 고개를 들라는 말이 떨어졌다.

....

대회 시작 빨리 안 하냐....

썩은 동태 눈으로 눈앞에 펼쳐진 장면을 훑었다. 핑크빛의 열렬한 분위기가 사방에서 풍겨 오고 있었다.

"리엔 경."

"예, 주군."

"주군이 대회에 나가는데 손수건 하나 없는 겁니까?"

"예. 주군께서는 그런 것 하나 없어도 우승하실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어, 그래....

'그런 것 하나 없어도'라는 말이 내 가슴을 푹 찌르지만... 그래도 고맙다....

"미친개… 아니, 기사단 놈들은?"

"저희에게 그런 게 있겠습니까?"

"있어도 못 드리죠. 쓸데없는 오해 사고 싶지 않습니다."

젠장. 다 꺼져.

기사단원들에게 가라는 손짓을 하고 시선이 닿지 않는 구석진 벽에 기댔다. 대회 시작까지 앞으로 8분 남았나. 세상에서 제일 긴 8분이 될 것 같다.

으레 권력자들이 그러하듯 긴 연설이 될 것 같았던 황태자의 말은 짧게 끝났다. 큰 부상 없이 즐기다 가길 바란다 뭐 그런 느낌의 말이었던 것 같은데.

'젊어서 그런가 센스가 좋네. 연설은 짧을수록 좋지.'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제 연인이나 가족, 혹은 친한 친구에게 리본이나 손수건을 주는 시간 10분!

종달새가 지저귀듯 높은 음색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짧은 입맞춤이 오가는 소리도 들린다. 얼씨구? 저쪽은 아예 키스를 하고 자빠졌네?

'시발.'

연인으로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리본을, 그러한 감정 없이 담백하게 무사 귀환을 비는 사람에게는 손수건을.

상대가 폭군 황제의 밑에서 단련된 제국의 귀족들이라 그렇지, 본래 몬스터 사냥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것이다. 그렇기에 사냥대회임에도 전쟁터에 나갈 때와 동일하게 손수건이 오가도 위화감 하나 없었다.

물론 남들은 다 받는 손수건, 난 못 받았지만.

"집에 가고 싶다...."

"안 됩니다."

알아 알아. 충분히 들었어. 폐하께서 오신다는데 중간에 빠질 수는 없다, 그거잖아. 그래서 집에 가려는 거지만.

황제와의 만남. 거기에 따라오는 면담. 그리고 감도는 전운.

'....'

데굴 눈을 굴렸다.

나와 직접 마주하게 된 황제가 무슨 말을 할지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다. 그것이 나를 곤란하게 하는 명령이 될 것이라는 것도.

다른 왕국과의 전쟁도 아닌 인간계… 아니, 제국과 마계의 전쟁이다.

'전부 알면서.'

낮게 혀를 찼다.

"역시 사직을…."

"예?! 손수건을 못 받아서 사직하시겠다는 겁니까?!"

"아닙니다. 그런 거 아니니까 좀 작게 말해요."

전쟁이 싫다. 참전하고 싶지도 않다. 특히 이번 전쟁은 마계와의 전쟁인 만큼 더더욱.

...아니, '특히'와 '더더욱'이란 말은 빼자.

'고래 싸움에 등 터질까 봐 싫은 것은 핑계일 뿐이니.'

난 그냥 전쟁의 악몽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을 뿐이다.

어깨에 둘러메고 있던 가방의 무게가 새삼 의식된다. 바닥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들어 리엔과 마주했다.

"리엔 경."

"예, 주군."

"경은... 8년 전쟁에 참전했었습니까?"

"예?"

뜬금없는 질문이었는지 의아한 목소리가 돌아온 것도 잠시,

"아니요. 8년 전쟁에는 저희 오라버니가 참전하였습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또 큰 전쟁이 일어날 경우, 그때도 리엔 경의 오라버니가 참전하게 되는 겁니까?"

기사인 리엔 경은 리엔 경대로 따로 참전하고?

황제가 아주 좋아하겠….

"아니요. 절대로."

"?"

그렇게 말하는 리엔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때 당시의 저는 기사가 아니었으니 어쩔 수 없었지만, 이젠 아닙니다."

"...."

"저의 오라버니가 전쟁터에 나갈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겁니다."

"무슨...."

무슨 사정이라도 있느냐 물으려던 것을 급히 멈췄다. 이런 상황은 처음이다.

내가 리엔 라이너에게 업무 외의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던가?

내게 있어서 그녀는 황제가 직접 보낸 유능한 낙하산이자 미친개들의 조련사이며, 유연하지 못하고 빳빳하여 정석에 가까운 기사도 정신을 가진 기사다.

생각은 빨랐다.

'질문하지 말자.'

어쩌다 보니 주군과 기사의 관계로 맺어지긴 했지만 나 하나 챙기기도 버거운 와중에 남에게 관심을 기울일 여유는 없다.

굳이 질문해서 그녀의 사적인 영역까지 알 필요는....

"제 오라버니는 몸이 약합니다."

"어...."

말하지 않아도 되는데.

"본래 8년 전쟁에도 제가 나가고 싶었는데, 부모님께서 저를 너무 아끼신 나머지 오라버니가 대신 참전하게 되었죠. 제가 검도 더 잘 쓰고 체력도 더 좋은데 굳이 몸이 약한 오라버니를...."

"...."

"그래서 기사가 되었습니다. 기사가 된다면 부모님도 반대하지 못하실 테니까요."

반대의 이유로 내세웠던 것들이 조각날 테니까.

"그러니 오라버니는 전쟁에 참전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있으니까요."

"...제가 아는 누구의 이야기와 아주 비슷하네요."

결말은 달랐지만.

고개를 홱 돌렸다. 제 무기를 단단히 점검하고 말에 올라타는 사람들이 보인다. 나 역시 단이 끌고 온 말에 올라탔다.

달달한 시간은 끝났다. 이제 사냥대회의 시간이었다.

105. 사냥대회(6)

[데온 하르트는 사람이 많은 곳을 싫어합니다.]

[아마 사냥대회에서도 사람이 적고 인적 드문 장소로 이동하겠지요.]

[석궁을 설치할 겁니다. 그곳에 데온 하르트를 몰아넣을 거예요.]

[이제 그 질긴 목숨, 끝낼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따각. 딱.

체스 말이 오간다. 시원스럽게 뻗은 뼈마디 굵은 손가락이 양측의 말을 잡고 번갈아 옮겼다.

공작이 적극적으로 나선 이상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는 일이다. 신경 쓰지 말자. 지금 그걸 생각할 때가 아니기도 하니.

'그보다, 혁명군 수장의 어머니의 각혈 빈도가 늘었다고 했었나.'

딱.

흑의 킹이 호위 몇만 둔 채 적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수장은 그 사실을 아직도 모르는 상태고.'

따각.

백의 진영이 검은 왕을 주목했다.

'조만간 알게 되겠군. 감시를 더 촘촘히 하라고 해야 하나.'

딱. 그사이, 흑의 진영에서 은밀한 움직임이 일었다.

'그보다, 각혈. 각혈이라....'

내 동생, 데온 하르트도 각혈을 종종 했지.

말을 옮기던 손이 우뚝 멈췄다. 영 집중이 되지 않는 듯, 손가락 사이에 검은 비숍을 낀 크루엘이 생각에 잠기듯 녹안을 내리깔았다.

'공작은 데온 하르트를 잘 안다.'

잘 알고, 철저히 준비하여 사냥의 준비를 마쳤다.

'반면에 데온 하르트는 공작을 모른다.'

공작이 자신을 노린다는 것조차 모른 채 아무런 준비도 없이 사냥대회에 나섰다.

철저한 준비를 마친 사냥꾼과, 아무것도 모르는 사냥감.

결과는 자연스레 떠올랐다.

[저주에 걸려 약해진 사람 하나 어찌하지 못해 이렇게까지 하나?]

감독한다는 명목으로 나와 석궁을 설치하는 자들에게 빈정대기도 했지만 그저 미간만 꿈틀할 뿐, 숙련된 암살자답게 그들은 동요 없이 석궁을 설치했다.

그것들에 맞게 된다면 그야말로 고슴도치가 되겠지.

천막에 앉아 사냥대회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크루엘이 조용히 손가락을 까닥였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낀 체스 말이 일정 간격으로 책상에 부딪혀 충돌음을 낸다. 녹안이 짙게 가라앉았다.

'사냥대회에는 공작의 사람이 많다. 그들을 이용한다면 그 아이의 동선 하나쯤은 손쉽게 유도할 수 있겠지.'

암살자들의 실력도 만만치 않다. 굳이 석궁이 아니더라도 그들의 손에 죽을 수도 있으며, 설령 데온이 거기서 살아남더라도 그들의 유도에 이끌려 석궁까지 도달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딱. 손가락이 멈췄다.

'....'

데구르르. 체스 말이 형편없이 책상 위를 구른다.

크루엘은 검을 쥐고 일어나 로브를 걸쳤다. 줄곧 그를 지켜보던 수하 센제르가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사냥대회. 내 가치는 내가 증명해야지."

"...."

"공작님께 승리를 바칠 테니, 넌 가서 내가 참가한다는 소식을 전하도록."

***

말에서 내려 부러 인적 드문 곳을 걸었다. 내 나름의 배려였다.

나와 마주친 사람들이 하나같이 헛숨을 들이켜고 힐긋힐긋 쳐다보는데 그게 어찌나 불편하던지. 어차피 사냥에 열을 올릴 생각도 아니라 서로 마음 편하도록 친절하게 자리를 피해 주었다.

그리고 시발 습격을 당했다.

"백작님!"

"아... 미친."

단의 품에서 꾸물꾸물 몸을 일으켰다.

엿 같네.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었더라. 아, 그래. '진짜' 하르트 백작을 만났다. 그 새끼가 시비를 털었고, 친절하게 자리를 피해 주는 날 끈질기게 쫓아왔고, 그리고....

단을 밀치고 반대편으로 굴렀다. 내가 있던 자리에 단검이 꽂혀 부르르 떨렸다.

"헉."

단이 놀라 숨을 멈추든 말든 눈을 굴려 주위를 훑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건 다 내가 손수건 한 장 못 받아서 그런 거야. 아무도 내 무사 귀환을 빌어 주지 않았잖아?

"...빌어먹을."

시야 한쪽에 놓친 가방이 나뒹굴고 있는 것이 보였다.

화분 깨진 건 아니겠지...? 적어도 흙은 쏟아졌을 것 같은데, 죽었으려나? 아니지, 그렇게 쉽게 죽었으면 내가 이곳까지 갖고 올 생각도 안 했다.

'가방이 들썩이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일단 상황이 상황이니 무시하도록 하자.

억지로 가방에서 시선을 떼어 내며 왼쪽으로 한 걸음 옮겼다. 또다시 날붙이가 소리 없이 바닥에 꽂혔다.

그보다....

"넌 왜 나한테 붙어 있습니까?"

"마, 말투가 건방지다!"

내 옆구리에 '진짜' 하르트 백작이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않는다.

무섭다고 신호탄을 쏘아 올렸으면 지원이 올 때까지 얌전히 구석에 처박혀 있을 것이지 왜 나한테 붙어서는.

아, 짜증 나.

"제 한 몸 지키지 못할 거였으면 사냥대회에 참가하지 말았어야지요."

"이건 사냥이 아니잖아!"

"벌레 따위에 사색이 되는 주제에."

"너…너...!"

어쨌든 너 때문에 나까지 죽을 위기잖아! 책임지고 나를 지켜라! 녀석이 꽥꽥 소리쳤다.

한심한 눈초리로 그를 내려다보다가 목덜미를 잡아 밀치듯 던지며 두어 걸음 더 이동했다. 이거 뭔가 좀 이상한데?

'마치 몰이사냥을 당하는 듯한....'

우욱.

상황 파악을 끝내기도 전에, 팽팽하게 돌아가야 할 머리가 하얗게 굳었다.

"우웨엑... 콜록...!"

처음 단에 의해 바닥을 굴렀을 때의 여파가 솟구쳤다.

어떻게든 눌러 삼키려는 주인의 의지를 배반하고 목구멍을 역류하여 입 밖으로 나온다. 붉은 액체가 뚝뚝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얼핏 초라하게 나뒹굴고 있던 가방의 꿈틀거림이 심해지는 것 같았다.

물론 그쪽에 잠깐 닿았던 내 시선은 다시 거둬졌다. 빌어먹을 습격자들이 아예 모습을 드러내고 몰아붙이기 시작했으니까.

검격이 정신없이 오갔다. 아니, 일방적으로 나를 향했다.

누가 사람 죽이는 놈들 아니랄까 봐, 하나같이 공격이 급소만을 노린다. 살기 위해서는 막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치사하게도 공격할 틈을 주지 않는다. 들어오는 공격 하나를 쳐 낼 때마다 목숨이 간당간당했음을 실감한다.

'시발 살려 줘.'

졸라 무섭다.

목으로 짓쳐 들어오는 암기를 기겁하며 쳐 내고 다시 두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달칵─

작은 소음이 들렸다.

"!"

"끝이군."

일순간 세상이 느려졌다.

소음이 들린 곳에서 수많은 화살이 쇄도하는 것이 보인다. 다시 눈을 굴리자 암살자가 아래서부터 턱 밑을 노리고 검을 찔러 올리는 것이 보였다.

피하기엔 늦었다. 어느 한쪽을 피하기 위해서는 다른 한쪽을 포기해야 한다. 어느쪽을 포기하든 그 끝은 내 죽음일 테지.

턱 밑에서부터 뇌까지 한 번에 뚫려 꼬챙이가 되느냐, 고슴도치가 되느냐.

쉬이 내릴 수 없는 결정에 잠시 망설이던 그때.

푸욱!

"...!?"

"...."

"으, 으으… 콜록, 아니 잠깐만...."

시발 이게 뭔일이래.

또다시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을 구르며 상황 파악을 위해 핑핑 도는 시야를 다잡으려 애썼다.

절체절명의 그 순간, 암살자의 가슴을 뚫고 웬 식물 줄기가 튀어나왔다. 그것에 경악하기도 전에, 누군가 내 몸을 낚아채고 바닥을 굴러 화살의 범위로부터 벗어났다.

식물은... 뭐, 그래. 일단 아닐 거라고 믿고. 날 구해 준 이 사람은 누구지? 단인가?

'좀 전엔 거칠게 굴러서 내 속을 진탕으로 만들어 놓더니, 이번엔 꽤 세심하게 충격 없이 낚아챘…?!'

단이 아니다.

고개를 들자 로브 밑, 녹안과 눈이 마주쳤다. 숨긴답시고 곧장 고개를 돌렸지만 그 잠깐을 그냥 넘길 내가 아니었다.

피가 싸하게 식는 기분이다.

"너."

"...."

"무슨 꿍꿍이야."

말없이 나를 놓고 물러가려는 놈의 멱살을 잡아챘다.

얼굴을 바싹 붙이고, 한껏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내가 그딴 같잖은 로브 하나 썼다고 못 알아볼 줄 알아?"

크루엘 하르트.

네가 왜 여기에 있는지, 설명해.

"...."

"...."

침묵이 흘렀다. 꿋꿋이 입을 다문 크루엘이 하염없이 나를 내려다본다.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에 나 역시 지지 않고 그를 노려보았다.

영원할 것 같던 침묵은 재차 들려오는 파육음과 멀리서 들려오는 급박한 발소리에 깨졌다.

"위험 신호를 받고 왔습니다! 무사하십니히이이이익! 저게 뭐야?!"

"몬스터? 몬스터인가?! 식물형 몬스터는 처음 보는데?!"

식물형… 몬스터...?

등골을 스치는 불길함에 급히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말한 식물형 몬스터를 찾았다. 그리고 경악했다.

'저게 뭐야아?!'

저거 히엔이 준 그 식물 맞지? 뿌리로도 걸어다닐 수 있었어?!

검은 장미를 닮은 생명체가 뿌리를 꾸물거리며 땅 위를 걸어다닌다! 줄기는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으며 그 끝에는 습격자들이 꿰여 있었다.

피를 먹어서인지 녀석은 무시무시하게 커져 있었다.

'쟤가 습격자들을 다 처리했구나... 응… 고마운데....'

목숨이 위험한 상황은 끝난게 맞는데... 왜 다른 의미로 위험해진 것 같을까.

제발 나랑 아는 척하지 말아 주라. 속으로 빌며 고개를 돌렸다. 다시 크루엘을 추궁하려 했는데....

'없네?'

그새 튀었다! 빌어먹을 놈!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짜증 나는데, 내 혈압을 더 솟구치게 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저 몬스터는 데온 하르트의 것이다! 내가 봤어! 저 괴물이 데온 하르트의 가방에서 나오는 것을!"

"...."

나는 조용히 뒷목을 잡았다.

의심스러운 시선들이 나를 향한다. 그래, 그렇겠지. 이해한다. 나는 '살인귀들의 주인'이니까.

사실 난 정상인이고 밑에 있는 놈들이 미친놈들인 거지만, 외부에서 보기엔 주인인 나도 똑같은 놈으로 보이겠지.

"저 괴물이 습격자들로부터 데온 하르트를 구했다고! 데온 하르트가 조종한 것이 분명해!"

그런데 이 병신 새끼는 뭘 믿고 나대는 거지.

내가 무섭지도 않나. 진실이 어떻든 겉으로 드러난 명성은 무시무시할 텐데.

상상을 뛰어넘는 등신스러운 모습에 할 말을 잃은 것도 잠시, 빠르게 현실을 자각했다.

어찌 되었건 현재 분위기는 내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는 무언가 해야 하는데....

'저 괴물을 죽여야 하나.'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죽인다 해도 꼬리 자르기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어떡하지...?

적절한 방법을 찾지 못해 끙끙거리던 그때, 녀석이 움직였다.

'왜... 왜 다가오는 건데.'

오지 마!

뿌리를 꾸물거리며 녀석이 다가온다. 주춤 물러서려는 내 발목을 줄기로 감아 저지하더니 그 탓에 넘어질 뻔한 등을 슬쩍 잡아 주고는 그대로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극심한 공포가 나를 덮쳤다.

'히이익 시발.'

살려 주세요 히이익 무서워 히이이익!

이래서 머리 검은 식물은 데려오면 안 되는 거였는데.

생존본능을 한껏 담아 손에 쥐고 있던 단검을 휘둘렀다. 가볍게 제압당했다. 아 제발.

"긔에에엑."

어…어어 그래... 착하지? 제발 나 좀 놓아줄래? 아니 목은 잡지 말고… 히이익!

줄기가 목을 감았다. 금방이라도 숨통을 조여 죽일 것 같은 모양새였으나 목적은 고정하는 것에 있는 듯 다행히 힘을 가하진 않았다. 아니… '다행'이 아닌가?

"커흑!"

복부에서 둔탁한 충격이 느껴졌다.

아프다. 뭐지? 나도 습격자들처럼 배가 뚫린 건가? 하지만 그런 느낌의 고통이 아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마치 누군가 주먹으로 한 대 친 듯한....

그 순간 또 다른 줄기가 턱을 살짝 눌러 내렸다. 의문이 머릿속을 채울 때, 배 속에서 피비린내가 솟구쳤다.

"쿨럭."

시이발… 붉은 옷을 보내 준 황제의 선견지명에 감탄을 표한다. 입 밖으로 피를 줄줄 흘리며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생각하고 보니 나 조금 전에 한 번 각혈했었지. 그렇지 않아도 한 차례 피를 토해 쓰린 속에 충격이 가해지니 이 꼴이 안 날 수가 있나.

속에서 다시 뜨거운 게 솟구쳤다. 이번엔 피가 아니다.

이… 이....

"이 새끼가!!"

서걱!

"...어?"

분노에 차 제압당한 상태라는 것도 잊고 되는대로 손을 휘둘렀던 것 같다. 그런데 왜 얘가 무너지는 걸까. 내 손은 언제 풀린 거고?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잠시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죽어 가는 듯 괴식물이 서서히 무너지며 잎사귀를 말아 치켜올린다. 사람으로 따지면 엄지를 치켜올리는 행동에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의도했다 이거지.'

내가 곤란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나를 위해서.

일부러 목까지 감아 쥐어 가며 공격하는 척했다. 복부에 충격을 주어 피를 토하게 만들어 보는 이들의 눈을 속였다. 약한 내 몸뚱이는 작은 충격에도 피를 뱉어 내니 어렵지 않았겠지.

그리하여 생존 본능에 의해서든 분노해서든, 내가 되는 대로 팔을 휘두르는 순간 손을 풀어 주고 제 급소를 갖다 댔다.

그리고 죽었다.

"하...."

"괘…괜찮으십니까?"

"...."

"하르트 백… 며, 명예 백작님?"

"...."

머리는 좋네.

어쩐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106. 사냥대회(7)

단은 재앙을 따르려 한다.

추정하기로, 데온 하르트는 재앙이다.

그래서 단은 데온 하르트를 따른다.

'만약 데온 하르트가 재앙이 아니라면?'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데온 하르트가 임무를 위해 멀리 나가 있는 동안, 단은 그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호칭을 마스터에서 백작님으로 바꾸었다. 자신은 '하르트 명예 백작'이 아닌 '재앙'을 따르는 것임에도 '백작님'이라 불러야 한다는 집사님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제약 없이 그의 곁에 붙어 있기 위해 검을 배웠다. 누군가를 호위할 수 있는 수준은 되었다.

백작저의 자금과 별개의 돈을 마련하기 위해 상단을 차렸다. 당연했다.

'그가 재앙으로서 활동하기 시작한다면, 백작저에 쌓아 둔 자금은 사용하기 힘들어질 테니까.'

백작저의 사용인 거의 전부가 황제의 사람임을 단은 알고 있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해냈다. 그런데 당신은?

'난 이렇게까지 했는데, 당신은 무엇을 했지? 정말 재앙이 맞긴 한가?'

노망난 주술사가 당신을 그리 칭했다는 것만으로는 이제 부족하다. 다시 한번 증명이 필요할 때다.

하여, 모욕을 했다.

제가 정말 몰라서 마차에서 내릴 때 에스코트를 한 줄 알았던가. 단은 그의 분노가 보고 싶었다.

'재앙에 걸맞은 분노를.'

...도리어 그의 다정한 배려를 받고 말았지만.

합리적인 의심이 고개를 들었다.

'당신은, 아니 너는.'

정말 재앙이 맞는가.

그리고 지금, 그 의심은 사라졌다.

어느 인간이 몬스터를 부릴 수 있을까. 이건 재앙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하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식물 형태의 몬스터가 움직였다. 습격자를 꿰뚫고, 피를 마셔 덩치를 키웠다. 그리고 뿌리를 이용해 걸어다니며 자유롭게 움직이는 줄기로 나머지 습격자들을 처리했다.

화살은 데온 하르트가 스스로 처리한 것이 아닌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나서서 구해 주었다는 것이 조금 아쉽지만....

'지금... 손을 떨고 있는 건가?'

새끼 잃을 뻔한 짐승처럼 데온 하르트를 품에 넣은 상대의 손끝이 가늘게 떨린다.

데온 하르트를 저렇게 아끼는 사람이 있었던가. 내가 알기로 그의 인간관계는 지극히 협소하고 건조했던 것 같은데.

'...뭐,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무심한 눈으로 정체불명의 상대와 데온 하르트를 번갈아 보던 단이 이내 시선을 돌려 괴생명체를 확인하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 장면을 보기 위해 부러 그의 위험을 모른 척했다는 것은 조금 미안하지만, 그래도 증명을 보았으니 됐다.

'일처리 다 끝나고 돌아가면....'

그를 충실히 따라야지.

앞으로 단이 데온 하르트를 의심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일단 이것까지만 지켜보고.'

흥미진진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았다.

지원이 오고, 정체불명의 로브가 몸을 숨긴다. 기가 살아난 자칭 '진짜' 하르트 백작이 데온 하르트를 겨냥하고, 식물이 움직였다.

발목을 감아 움직임을 봉쇄하고, 손을 잡아 공격하지 못하게 제압한다. 목을 휘감아 금방이라도 죽일 것처럼 굴고, 끝내 데온 하르트의 입에서 피가 왈칵 나왔을 때─ 그의 손에 죽었다.

단은 감탄했다.

'이런 식으로 의심을 벗어나다니!'

저를 공격하는 것처럼 만들고 죽인다. 깔끔한 꼬리 자르기였다.

"아니 글쎄! 저 괴물을 데온 하르트가 조종하는 거라니까?!"

"말씀하신 괴물이 하르트 명예 백작님을 공격했습니다."

"자작극이라고!"

"그렇다고 하기엔 피까지 토했습니다."

의심은 풀렸다.

군더더기 없는 몸짓으로 깔끔하게 단검을 집어넣은 데온 하르트가 느긋하게 걸어 단에게 다가간다. 눈이 마주치고, 단은 얼어붙었다.

새빨간 눈동자, 비웃듯 올라간 입꼬리. 높은 곳에서 상대를 내려다보는 듯한 눈빛이 자비를 품고 묻고 있었다.

"만족하나?"

"...."

알고 있었구나. 하하. 단은 웃었다.

만족했냐고? 그야.

"당연히, 마스터."

***

데온은 고개를 돌려 멍청하고 짜증 나는 방계를 눈에 담았다.

살기는 없다. 피에 절어 버린 광기도 없다. 그러나 명백히 평소와 다른 눈빛에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느낀 방계가 주춤주춤 물러서자 그는 쯧- 하고 혀를 차고는 성큼 다가가 어깨를 짚었다.

맹수에게 물린 듯 녀석이 퍼드득 몸을 떨었다.

"하르트가의 가주라면, 하르트 백작저에서 지내고 계시겠군요."

경어.

반말할 것 같은 분위기에서 툭 튀어나온 친절한 존댓말에 놀라 고개를 든 것도 잠시, 방계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름지기 가주라면 유구한 역사를 가진 백작저에서 지내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 어차피 크루엘 하르트와 데온 하르트는 그곳에 얼씬도 하지 않고.

이제 와 빼앗으려는 것일까. 경계 어린 눈빛이 데온을 향했다.

데온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활짝 웃었다. 넋을 빼앗길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였다.

"용케 제대로 청소를 해 둔 모양입니다."

"어…어, 뭐?"

"아주 못 쓰게 피 칠을 해 두었는데, 그걸 치우다니."

"...!"

"밤에 한 많은 혼이 복도를 돌아다니지는 않던지요?"

소문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방계 가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정말 데온 하르트가 하르트가의 사람들을 죄다 죽였던 것이다! 그것도 지금 내가 지내고 있는 저택에서!

하얗게 탈색되어 넋이 나가 버린 그를 본 데온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낮게 깔린 것도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언제 웃었냐는 듯 무표정한 데온이 그를 보고 있었다.

"적당히 까부는 게 좋을거야."

죽고 싶지 않으면.

***

[나… 나 다른 저택에서 살래. 근처에 다른 별장 없어?]

[네? 아니, 백작님 그게 무슨… 하르트 백작저는 가주의 상징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하르트가의 핵심인 '하르트 영지'가 없어 불안정한 상태인데, 다른 저택에서 지내시겠다니요.]

[몰라... 내가 무섭고 찝찝해서 못 살겠다는데 지금 그게 뭐가 중요해....]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잘 못 들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튼 다른 저택에서 지낼 테니까 알아서 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다른 곳에서 지낼 거야!]

[백작님, 백작님?!]

멀찍이서 들려오는 방계와 가신들 사이의 대화를 대충 흘려들으며 피식 웃었다.

공포에 질린 꼴을 보고 있자니 속이 다 시원하다. 난 별말 안 한 것 같은데 왜 저렇게 겁에 질린 건지는 조금 의문이지만.

"하르트 명예 백작이 식물형 몬스터를 조종했대요."

아, 이건 전혀 달갑지 않아. 망할 방계 녀석.

겁을 먹었으면 입을 다물든가 해야지. 입은 또 어찌나 가벼운지, 녀석은 기어이 제가 본 것을 날조하여 사실인 양 떠벌렸다.

솔직히 한심하다. 마족들조차 다루지 못하는 것이 바로 마물, 즉 몬스터다. 물론 그건 식물형 몬스터가 아니라 그냥 식물이었지만, 아무튼 다른 사람들은 '몬스터'라 알고 있으니 어느 누가 그 말을 믿....

"하르트 명예 백작이라면 그럴 만하죠."

"뱀파이어라는 소문이 사실인가 봐요."

믿네?

"사냥대회에서 우승하기 위해 식물형 몬스터를 불러들여 잡았다네요."

"그 몬스터를 이용해 거슬리는 자들을 제거한 적도 있대요."

"아주 오래전부터 뒤에서 몰래 식물형 몬스터를 다뤘다는데, 사실일까요?"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아니,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이걸 대체 왜 믿는 거지? 심지어 소문이 말도 안 되게 부풀려졌어!

새어 나오려는 헛웃음을 삼키며 아닌 척 저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데, 거대한 기척이 훅 끼쳐 왔다.

"아...."

반사적으로 흠칫 어깨를 떨었다.

강렬한 존재감. 묵직하고 날카로운 분위기. 사람을 짓누르는 이 기척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굳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뻔했다.

시야에 얼핏 붉은 망토가 비친다. 사나운 금안과 눈이 마주치기 전에 서둘러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뒤늦게 그를 발견한 귀족들이 하나, 둘 무릎을 꿇는 것이 느껴졌다.

"제국에 영광을."

"일어나라."

이래저래 할 일이 많았던 듯 오랜만에 본 황제는 상당히 수척해져 있었다. 수척함이 안타까움보다는 인상을 한층 더 날카롭게 만들었다는 것은 문제일까 다행일까.

황제 입장에서는 우습게 보이지 않아 다행이라 할 수 있겠지만, 내게 있어서는 문제다.

'더 무서워졌잖아...!'

그렇지 않아도 무서웠는데!

피곤에 찌든 형형한 금안이 귀족들을 훑는다. 전보다 배는 더 사나워진 눈빛에 그의 시선이 닿은 이들마다 놀란 달팽이처럼 몸을 움츠렸다.

짧은 침묵 끝에 황제가 정적을 깨트렸다.

"...그래...."

짙은 피곤이 고스란히 담긴 한숨같은 목소리였다.

"짐이 바빠 참여하지 못했다만, 일은 제대로 진행된 모양이군. 황태자가 수고한 모양이야."

"황공합니다."

"이제부턴 짐이 맡도록 하지."

물 흐르듯 황태자로부터 바통을 넘겨받은 황제가 장갑 낀 손을 들어 자꾸만 일그러지는 미간을 꾹꾹 눌렀다.

"어서 결과 발표하고 마무리 짓도록 하지. 결과표를 주도록."

그의 손에 마물의 형태와 크기, 수가 정리된 종이가 넘어갔다.

난 몇 등이려나. '영웅'이란 칭호 탓에 빈 손으로 돌아갈 수 없어 오던 길에 대충 보인 몬스터 두 마리 정도 잡아왔으니 딱 평균이지 않을까. 귀족들의 몬스터 사냥 수는 평균 두 마리였던 것 같으니.

주목받을 생각은 없으니 영웅의 이름값에 흠집을 내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한다.

황제의 기분이 상당히 안 좋아 보였는데 이대로 조용히 존재감 없이 있다가 사라져야지. 현 상황에서 괜히 눈에 띄었다간 내 목이 남아나지 않을 수도 있다.

"3위. 크루엘 하르트."

"?"

시발 얘는 언제 참여했대?

그가 사냥한 결과물이 모두가 보는 앞에 우르르 쌓인다.

모든 사냥 결과물을 한곳에 두기엔 너저분하고 자리가 부족한 탓에 사냥대회에서는 순위 조작 의혹을 막기 위한 1~3위의 결과물만 중앙에 둔다. 요컨대 이만큼 잡지 못했으면 불평하지 마라, 이거지.

그런 의미에서 크루엘의 순위는 짜증 나게도 납득 가능했다. 몬스터 네 마리라. 확실히 일반인 기준으론 제법 많이 잡았지. 용사의 파편을 가진 영웅인 것을 생각하면 대충한거지만. 재수없어.

순위 발표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2위. 엘피디우스 데세르트."

"...?"

다른 의미로 놀랐다. 아니, 황태자가 참여했는데 1위를 양보하지 않고 아득바득 차지한 인간이 있다고? 어떤 미친 놈이야?

몬스터 다섯 마리. 굳이 양보를 의도하지 않아도 저것보다 더 많이 잡기는 힘들 텐데. 황태자야 좋은 보조를 넷이나 둬서 가능했다지만, 용사의 파편도 없는 일반인이 저걸 뛰어넘는 게 쉬울 리 없다.

이건 정말 이 악물고 했다는 건데, 누군지 정말 궁금….

"1위. 데온 하르트."

나구나.

그 이 악물고 한 미친놈이 나였어.

"...?!"

아니 왜? 어째서?! 난 몬스터 두 마리밖에 잡지 않….

혼란스러운 내 앞에 세 마리의 몬스터가 쌓였다. 두 마리가 아닌 세 마리가. 그중 익숙한 외형의 몬스터를 발견한 내 표정이 형언할 수 없는 형태로 무너졌다.

"식물형 몬스터를 잡았더군. 아예 처음 보는 유형이라 상당히 까다로웠을 텐데 수고했다."

"아…닙니다...."

간신히 답을 내었다. 전혀 까다롭지 않았다. 이 녀석은 내게 죽어 주었으니까. 양심에 찔려서라도 일부러 그냥 두고 온 건데.

어떤 놈이 이 녀석을 챙겨 온 거야?

누그러진 금안이 나를 한번 보더니 이내 다시 단단하게 굳어 정면을 향한다. 그 한 발짝 뒤에서 그와 닮은 또다른 금안이 나를 보고 살풋 웃었다.

'황태자....'

왜 웃는 거지? 일단 보기엔 칭찬의 의미인 것 같은데.

하지만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진 않겠다! 사교계는 웃음이란 가면을 쓰고 말이라는 칼을 주고받는 곳이라 배웠으니까.

그러니 저 웃음은 경고의 의미일 테지. 이를테면 '감히 나를 이겨? 네 앞으로가 많이 피곤해질 거다.' 라던가.

'황태자에게 밉보인다라....'

...정말 밉보인 거라면 마계로 영영 튀어야지. 제국은, 아니 인간계는 글렀어.

"그럼 사냥대회는 여기서 끝인 것으로 하고, 알릴 것이 있다."

황제가 다시 이목을 모았다.

날파리라도 있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허공에 손을 한번 휘저은 그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이내 옅은 한숨과 함께 뜬다. 눈 밑 짙은 그늘 탓에 더욱 매서워진 눈이 정확히 나를 향했다.

"마계와 전쟁을 치르게 될 것 같다."

"!"

107. 사실 그들은 알고 있었다(1)

"마왕이 선전포고를 했지. 전쟁은 불가피하다."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방법 따윈 없다. 탁 트인 공간이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이해한다. 이미 타 왕국과 충돌을 빚고 있는 와중에 마계와의 전쟁이라니. 잃은 병력은 어떻게 보충하고 자금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연이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병사들의 정신력은 또 어떻고.

'게다가 마계와의 전쟁에서 용케 이긴다 해도 더 이상 전쟁을 치를 여력이 없는 제국을 타 왕국들이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지.'

이미 타 왕국과의 관계가 최악까지 치달은 이상, 제국의 몰락은 예정된 셈이다.

몰락의 길임을 알면서도 걸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황제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마계에 집중해야 하니 인간계 내 전쟁은 전면 중지한다."

"실례지만 폐하, 전쟁 중이던 왕국들이 순순히 받아들일까요?"

"그럴 수밖에 없지. 인간계에서 마계를 상대할 수 있는 나라는 이 제국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황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말은 거기서 멈췄지만 난 그가 뒤에 무슨 말을 덧붙이려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오히려 제국을 지원해야 할 거다.'

제국이 망한다 하여 마계가 과연 거기서 멈출까?

그럴 리가. 제국이 망하면 곧 인간계가 망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른 왕국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불만 표현은 아마 제국을 지원하지 않는 것 정도겠지. 그마저도 상황이 위태로워지면 적극 지원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초반부터 굳이 지원이 부족한 상태로 전쟁을 치를 필요는 없으니. 저 말을 삼킨 것일 테고.'

현 상황에서 괜히 타 왕국의 기분을 상하게 할 필요는 없다.

황제는 그렇게 판단했으리라.

'하지만....'

그의 의견은 한 가지 가정을 전제로 한다.

마계의 편에 붙는 왕국이 나오지 않는다는 가정.

절로 고개가 기울었다. 인간의 욕심과 이기심은 전쟁을 겪으며 많이 보아 왔다. 잃을 게 많은 권력자가 제 안위를 위해 마계의 편에 붙을 확률이 정말 없을까?

'마왕은 인간인 나도 받아들였어.'

인간에 대한 특별한 적개심도, 편견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그라면 거절 대신 순순히 받아들이는 쪽을 택할 터.

한 번이 쉽지 그다음은 눈치 싸움이다. 권력자들은 앞다투어 제국을 배신하고 마왕에게 제 나라를 바치겠지. 종족이 뭐가 중요한가. 중요한 것은 제 안위인데.

'뭐, 확실하지도 않은 걸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지.'

아직은 먼 미래다. 묻지도 않은 것을 말해 미움 사고 싶지도 않고.

몰라. 난 그런 생각 떠올린 적 없어. 떠오른 생각들을 모른 척 묻어 두고 태연한 얼굴로 황제를 보았다. 그는 다시 한번 이야기에 못을 박고 있었다.

"그러니 알아 두도록. 앞으로는...."

"!"

비릿한 혈향이 코끝을 스쳤다.

잡은 지 시간이 좀 된 몬스터에게서 풍기는 혈향과는 차원이 다른 생생한 피비린내.

빌어먹을.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순간 굳은 내가 미처 돌아보기도 전에, 바로 뒤에서 정갈한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타이밍을 잘못 맞춘 모양입니다."

잠시 비켜 주겠니?

어, 어어? 귀족적인 어투의 표본이라 해도 될 만한 목소리의 주인이 나를 부드럽게 밀어내고 지나간다. 진득한 피비린내가 그 뒤를 따라 자취를 남겼다.

한 손에 피가 스민 나무 상자를 들고 절제된 걸음걸이로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나아간 그가 황제의 앞에 멈춘다. 한 치의 수그림 없이 곧게 들어 올린 고개가 황제와 시선을 맞췄다.

"...."

"...."

영원과도 같았던 정적 끝에, 그가 천천히 한쪽 무릎을 굽힌다. 붉게 얼룩진 나무 상자는 옆에 내려놓고 고개를 조아렸다.

녹색 머리카락이 그의 움직임에 따라 스르륵 흘러내리고, 예의 그 정갈한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제국에 영광을. 신 스티그마 프리미로가 현재의 제국을 뵙습니다."

스티그마 프리미로. 제국의 두 번째 영웅.

아무리 영웅이어도 그렇지, 저렇게 진한 피비린내를 풍기면서 들어오다니 너무하잖아. 주변 귀족들 얼어붙은 거 안 보이나?

...옷차림은 기이할 정도로 깔끔하지만.

'그보다 묘하게 데자뷔가 느껴지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주연과 장소만 다른 비슷한 상황을 겪었던 것 같지만 기분 탓일 것이다. 무시하자.

"일어나라. 그 옆의 상자는 무엇이지?"

"사정상 사냥대회에 참가할 수 없어 송구한 마음에 준비한 것입니다만... 타이밍이 좋지 않은 탓에 차마 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내용을 말하라."

"적장의 머리입니다."

오... 인간계 내 전쟁 중지 선언을 하자마자 적장의 머리를 들고 오다니.

하지만 스티그마의 잘못은 아니다. 몰랐는데 어쩌겠어. 황제의 말은 오늘 이후로 알려지게 될 테니 지금의 그로서는 그저 제 임무를 성실히 수행한 것밖에 없다.

황제가 잠시 침묵하더니 근처의 시종을 향해 손을 까닥였다. 스티그마가 순순히 다가온 시종에게 상자를 넘기고, 시종에게서 상자를 받은 그가 뚜껑을 연다.

바람에 실려 오는 혈향이 더 짙어졌다.

"...수고했다."

영웅을 아끼는 황제의 대답은 예상 그대로였다.

스티그마 역시 예상했는지 가볍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다. 상자를 다시 시종에게 건넨 황제가 한 걸음 걸어 나왔다.

"곧 명령이 전해질 것이다. 인간계 내 전쟁은 멈추고 마계와의 전쟁을 준비하게 될 터이니 미리 준비해 두도록."

조용히 물러간 스티그마가 주변의 귀족에게 사냥대회 1위는 누구가 차지했느냐 묻는다. 와들와들 떨어대던 것과 별개로 대답은 착실히 했는지 그가 눈을 살짝 키우더니 이내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그렇게 공식 몬스터 사냥 1위는 데온 하르트, 비공식 인간 사냥 1위는 스티그마 프리미로로 샤냥대회는 막을 내렸다.

...면 좋았을 텐데.

사냥대회는 끝났지만 끝나지 않았다. 무슨 뜻이냐고? 내가 시발 집에 가지 못하고 있단 뜻이지.

본래 황궁에서 주최하는 사냥대회가 끝나면 뒤풀이를 겸한 사교의 장이 열린다. 차라리 그 연회에 참석하느라 집에 못 가는 거였으면 나았을 텐데.

"일이 있었다 들었다. 몸은 괜찮은가?"

"괜찮습니다."

괜찮으니까 이제 그만 보내 줬으면.

황제는 사냥대회의 끝을 고함과 동시에 나를 붙잡고 조용한 숲으로 끌고 갔다.

사실 끌고 간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내겐 끌고 간 것이나 마찬가지다.

[짐과 산책을 좀 하지 않겠나.]

무려 황제가 이렇게 제안하는데 누가 감히 거절할까.

참담한 심정으로 그를 따라나서길 한참, 시간이 지나도 좀체 열리지 않던 그의 입이 열리고 나온 말은 사냥대회에서 일어난 소란과 내 몸에 대한 안부였다.

"괜찮다니 다행이지만 황실에서 개최한 대회에서 문제가 일어났으니 짐이 책임을 져야겠지. 그대의 저택에 보낼 상금에 액수를 더 얹어 보내도록 하겠다."

은근슬쩍 돈으로 때우고 넘어가려는 것이 느껴졌지만 순순히 넘어갔다.

어차피 바라는 것을 말하라 해도 진짜 바라는 것은 들어줄 리 없고, 그 외에는 딱히 바라는 것도 없으니까.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대가 잡은 식물형 몬스터는."

여기서 잠시 흠칫했다.

설마 황제도 그 터무니없는 소문을 들은 건 아니겠지. 퍼지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황제도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듣지 못했을 거란 희망을 좀 가져 보고 싶은데.

하지만 그럴 리가 있나. 황제의 정보력을 잘 알고 있기에 미약한 희망은 곧장 내팽개쳤다.

'의심하려나.'

황제라면 의심할지도 모른다.

근데 정말 내가 조종한 게 아닌데. ...어쩌다 보니 데려오긴 했지만.

"조만간 사람을 보낼 테니 공격 방식과 대응 방식 등의 기록을 남기는 데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만족스러운 듯 나른한 한숨을 내쉰 그가 제 왼 손등을 만지작거린다. 장갑을 낀 손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황제는 보통 장갑을 안 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검을 쥐고 움직이는데 손끝의 감각이 무뎌진다고 싫어하지 않았나?

내심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때, 황제가 나직이 내 이름을 불렀다.

***

"데온 하르트."

중요한 이야기로 넘어가려는 것을 느낀 듯 녀석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붉디붉은 눈이 묵직한 기세를 드러내며 조용히 저를 쳐다본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어느 쪽'이 들어야 할 이야기인지 판단하는 능력 하나는 정말 수준급이다.

'아니, 지금의 경우는 일단 듣고 기억할 것을 나눈다고 봐야 하나.'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렇게 지낼 수는 없을 텐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니 상관없지만. 데온 하르트의 눈을 마주하던 황제가 급할 것 없이 느긋하게 입을 뗐다.

"이번 전쟁에는 그대 역시 참전하게 될 거다."

인간계 내에서의 전쟁은 마왕의 옆에 보내 두었지만, 이번엔 아니다.

데온 하르트는 검을 들고 마왕군을 처리해야 한다. 어쩌면 마왕 측 진영에 서서 제국군을 베어 내게 될지도 모르지.

"그러니 이제 슬슬 확실히 정해야 할 것 같은데."

한 걸음. 얼마 남지도 않은 거리를 더 좁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모두가 암묵적인 동의하에 모른 척 외면했던 것을 직면해야 할 순간이 왔다.

황제는.

데온 하르트가 중립임을 알고 있다.

마왕 또한 이를 알고 있으리라. 그렇기에 데온 하르트가 지금까지 멀쩡히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이겠지.

마왕과 황제의 데온 하르트를 가운데에 둔 신경전. 거기서 암묵적으로 형성된 규칙은 참으로 기묘했다.

[데온 하르트를 억압하지 말 것.]

정보가 빠져나가는 것이 걱정되어 실력 이하의 지위에 머무르게 하지 말 것.

마찬가지의 이유로 상대의 진영에 넘어가려는 데온 하르트를 억류시키지 말 것.

데온 하르트를 그만한 지위에 앉혀 두고서 그에게 기밀 정보를 노출시키지 않는 것 또한 군주의 역량이다. 더군다나 그는 묻는 것엔 거짓 없이 답하니 고문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규칙하에 진행된 게임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누가 더 데온 하르트를 유용히 사용하는가.]

[누가 먼저 데온 하르트를 끌어들이는가.]

[만약 데온 하르트가 진영을 정했다면, 상대는 얼마나 빠르게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 손을 쓰는가.]

세 번째의 경우에는 데온 하르트 또한 이 게임에 적극 참여하는 셈이 되겠지. 판돈은 본인의 목숨이 될 터.

그러니 필사적으로 중립을 유지하려는 것 역시 이해는 한다만.

"그대는 인간이다."

상황이 이렇게 치달은 이상 더 기다려 줄 수는 없다.

"이곳에서 나고 자랐고, 그 모든 발판 또한 이곳에 있지. 태양 아래에서 태어났다면 필시 이유가 있을 텐데 태양 빛에 약하다는 이유만으로 평생을 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

"이곳에 있어라."

저주 따위는 마왕을 죽이면 없어지겠지.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생각 외로 부드러웠다.

이 모든 상황을 초래한 장본인은 그저 알 수 없는 붉은 눈으로 물끄러미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데온 하르트는.

제가 중립이기에 황제와 마왕이 죽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일부러 의도했다. 살기 위해서였다.

마왕군이 되라는 마왕의 말을 거부하면 죽는다. 그렇다고 황제를 배신하고 마왕의 편에 설 수도 없었다. 그에겐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철저한 중립이 되었다.

누군가 검을 들고 사람을 다치게 하면 검을 쥔 '누군가'를 원망하지 '검'을 원망하진 않는다. 마찬가지로 상대가 제 검을 빼앗아 저를 베는 상황에서 '검이 나를 배신했다'라며 분노하는 머저리는 없다.

데온은 '검'이 되었다.

'검의 주인이 달리 있나. 손에 쥔 자가 주인이지.'

처음엔 이러한 속셈을 알 길이 없었던 두 군주는 데온이 한 번 더 양측 진영을 오가자 기민하게 상황을 알아차렸다.

뚜렷한 물증은 없지만 확신한다. 그때 마왕이 흥미로운 눈초리로 저를 보다가 싱긋 눈을 휘어 웃었고, 황제가 묘한 눈초리로 저를 보다가 가소롭다는 듯 웃었으니까.

괘씸했으리라. 그러나 죽이기엔 아깝다.

제 편이 아니지만 상대의 편도 아니다. 묻지 않은 것은 굳이 먼저 말하지 않지만 묻는 정보엔 순순히 답한다. 먼저 나서는 일은 없지만 명령하면 충실히 따른다. 거기다 살짝 오해가 있긴 하지만 실력 또한 훌륭하다.

끌어들이기만 하면, 유용한 패가 된다.

그렇게 두 군주의 암묵적인 동의하에, 데온 하르트는 저를 상품으로 내건 게임을 주관할 수 있었다.

'참가자는 마왕과 황제.'

'진행자는 데온 하르트.'

'상품도 데온 하르트.'

'예비 참가자 역시 데온 하르트.'

108. 사실 그들은 알고 있었다(2)

살기 위해 벌인 판에 걸린 판돈이 제 목숨이라니. 이 무슨 희극인지.

그래도 결국 계산대로 되었으니 만족한다. ─만족했었다.

황제가 간신히 이루어 놓은 균형을 무너뜨리려 하기 전까지만.

'그래, 오래 버티긴 했지. 슬슬 이 상황이 올 때가 되었다는 건 알고 있었어. 하지만....'

이렇게 바로 부딪쳐 올 줄이야.

곧바로 대답할 수 없는 문제다. 황제도 그 사실을 아는 듯 어깨에 얹었던 손을 놓고 한 걸음 물러서며 너그러운 척 말했다.

"갑작스러울 테니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 잘 생각해서 답해 주길 바라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래. 이번엔 오래 머물지 않고 가겠군."

그래야 공평할 테니.

이러한 행동을 마왕에게 알리든 알리지 않든 상관없다. 데온 하르트가 굳이 먼저 입을 열지 않아도 지금까지 알아본 마왕이라면 곧장 알아차릴 테지.

아마 승부수를 던졌다는 것에 불쾌함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마찬가지로 데온 하르트를 재촉하고 유혹할 것이다.

마왕이 그에게 줬고, 줄 수 있는 것에는 무엇이 있으며, 제가 그에게 줄 수 있는 더 나은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중에서도 당장 줄 수 있는 것은....

"...그간의 노고를 인정하여 그대의 지위를 명예 후작으로 승격시키도록 하지. 아마 내일쯤이면 모든 서류가 처리되어 있을 거다."

"...."

갑작스럽다느니, 귀족들의 반대가 거셀 텐데 현 시국에 괜찮으시겠냐느니 하는 질문은 없었다. 심지어 감사하다는 인사조차도 없었으나 황제는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당연했다. 속셈이 훤히 보이는 행동에 감사를 할 리도, 바랄 수도 없으니까. 그는 그저 덧붙일 뿐이었다.

"다시 한번 말해 두지. 그대는 인간이다."

황제가 물러가라는 뜻을 담아 손을 내저었다. 아예 돌아서는 그의 등을 보던 데온이 조용히 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멈칫.

"...에스페라네스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천혜의 요새라더니 그 말이 과언이 아니더군."

실패했구나. 레멤베르는 허언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으며 데온은 멈췄던 걸음을 옮겼다.

***

실수했다. 황녀는 잘 손질된 손톱을 딱딱 물어뜯었다.

데온 하르트를 좋아한다고 알려진 상황인 만큼 사냥대회 출발 전에 그에게 리본을 건넸어야 했다. 최소한 손수건이라도 주었어야 했다.

'하필 이 중요한 순간에.'

그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다니.

황제, 숙부님이 그를 데리고 자리를 옮겼다. 모든 것을 알진 못해도 상상을 초월하는 그녀의 '감'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리고 있었다.

어디에도 정착하지 않고 홀로 부유하는 듯하던 그를 확실하게 이곳에 묶어 두려는 것이다. 아마 숙부님의 성격상 부드럽게 회유하기는 힘들겠지. 부드러운 척하더라도 금세 단단하고 날카로운 본질이 드러날 것이다.

'도움이 될 수 있었는데.'

숙부님은 성군보다는 폭군에, 그보다는 패왕에 더 가깝다. 친근하고 부드러운 군주가 아닌 엄격하고 카리스마 있는 군주.

그런 자의 회유나 설득은 극단적인 결과를 낳는다. 받아들인다면 숙부님을 충실히 주군으로 모시겠지만, 거절한다면 철저한 적이 되겠지.

평화적으로 그를 잡아 두는 방법은 결혼이다. 고리타분하지만 현재까지 사용될 정도로 효과가 좋은 방법이니 가장 시도해 볼 만한 방법이 될 터였는데....

뒤늦게 도착한 야외 연회장에서 황녀는 타는 목을 축이기 위해 와인잔을 집어 들었다.

'의미 없는 가정은 그만두자.'

지나간 것을 돌아볼 시간에 수습할 생각을 하라고 배웠다.

전쟁 때문에, 숙부님 걱정 때문에, 내정 때문에, 오라버니 걱정 때문에… 변명거리는 많았지만 이제와 그런 것이 무슨 상관인가.

가능한 숙부님께 타격이 없게, 유한 방법으로 데온 하르트를 붙잡아야 한다.

'지금까지 깔아 둔 밑밥도 있으니까....'

밀어붙인다면 이번 일에 관한 의혹은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겠지.

한쪽 나무 사이로 걸어오는 데온을 발견하고 후다닥 달려갔다.

"백작님!"

"황녀 전하."

"세상에 백작님, 사냥대회에서 일이 있으셨다면서요? 다친 곳은 없으세요? 제가…."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걱정되는 마음에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자리를 옮겨도 괜찮으시겠습니까?"

"...?"

의도한 건가? 공개적으로 마음을 드러내기 전에 절묘하게 말을 끊었다.

하지만 이 정도에 순순히 넘어갈 정도로 호락호락하게 보였다면 큰 오산이다. 황녀는 부러 활짝 웃으며 큰 목소리로 답했다.

"단둘이라면 어디든 기꺼이요!"

"...흔쾌히 수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구두 때문에 발이 아플 것을 배려하는 척 말을 꺼냈으니 이제 와 무를 수도 없다.

한 방 먹였다. 한순간이지만 얼굴에 스치는 낭패한 표정이 그가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아 그녀는 기분 좋게 웃으며 발을 뗐다.

──그녀는 눈앞의 데온 하르트가 평소의 데온 하르트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간혹 풀숲에서 들려오는 낯 뜨거운 신음을 피해 걷고 걸어 도착한 곳은 꽃이 활짝 피어 있어 운치 좋은 정원이었다.

벤치에 살포시 앉은 황녀가 고개를 들어 데온 하르트를 보았다. 그는 무례를 피하기 위해서인 듯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서 몸을 비스듬히 틀고 서 있었다.

곧장 입을 열지 않고 잠자코 기다리다가 그의 시선이 힐긋 닿는 순간을 노려 환히 웃었다.

"단둘이 보니까 더 좋네요.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저는 황녀 전하의 말씀을 더 잘 듣기 위해 자리를 옮겼습니다."

"아, 그랬죠! 어디까지 말했더라?"

"사냥대회에서 제가…."

"아 맞아! 다친 곳은 없으신 거죠? 리본을 못 드려서 마음에 걸렸었는데 습격당하셨다니, 얼마나 놀랐던지...!"

"저는 괜찮습니다."

"그래도 제 마음이 영 불편하네요. 마땅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실수로 까먹었던 터라...."

"다시 말씀드리지만 괜찮습니다. 까먹을 만도 하죠."

그저 황녀의 머리 빈 해맑음을 표현하기 위해 한 말이었는데, 무엇을 짚었는지 데온 하르트가 한쪽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그의 웃음을 마주한 황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소름이라는 이름의 벌레가 저 아래서부터 몸을 타고 기어 올라오는 기분이다.

저 웃음의 의미는 무엇이지? 질투? 서운함?

'그럴 리가.'

새어 나오려는 헛웃음을 집어삼켰다. 저 웃음을 보고 연애와 관련된 감정을 떠올릴 정도로 머리가 비진 않았다.

그것은 명백한 비웃음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까먹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가 웃는다. 이번엔 양쪽 입꼬리를 올린 정상적인 웃음.

─아니, 저걸 정상적인 웃음이라고 할 수 있나?

깨끗한 느낌의 순수한 웃음이 아니다. 그는 웃음으로 제 말의 의미를 전하고 있었다. 전하께서는 똑똑하시잖습니까. 그러니 이 또한 능히 읽어 내시겠지요.

[까먹는 것이 당연합니다.]

황녀는 의미를 해석하기에 앞서 제 가면이 견고한지 확인부터 해야 했다.

[전하께서는.]

[저를.]

[좋아하지 않으시니.]

'...알고 있었구나.'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그것은 잠시였다.

감정을 숨기고 뻔뻔함으로 대응하는 것은 능구렁이 같은 귀족들을 상대해야 하는 황족의 기본 소양이다. 그러니까.

'아무렴 어때.'

당당해지자.

어차피 황녀가 데온 하르트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진 탓에 그의 혼삿길은 황녀를 제외하곤 단단히 막혀 버렸다.

그러니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밀어붙이자. 수작이 통하지 않는다면 정면 돌파로.

"데온 하르트 명예 백작."

"...."

"나와 혼인하는 것은 어…."

"황녀 전하."

아.

그의 입에서 저를 부르는 단어가 튀어나온 순간, 황녀는 실패를 직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듯 입을 꾹 다문 그녀에게 정중하지만 명백한 거절의 뜻을 담은 말이 떨어졌다.

"저 따위에게 고귀한 삶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하나뿐인 인생이지 않습니까.

....

황녀는 데온 하르트가 등을 돌려 사라질 때까지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지막 제안이었다는 것은 그 역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리도 단호한 거절이라니.

너무도 깔끔하고 단호해서 더 질척일 생각도 들지 않는다. 가족 간의 사이가 돈독한 현 황실에서 황녀의 청혼을 거절했으니 평생 혼자 살 생각이라 보면 되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여자 관계가 지나칠 정도로 담백했지.'

설마.

한 가지, 예상하지 못했던 가정이 떠올라 황녀의 얼굴이 굳어졌다.

평생 여자 없이 혼자 살 각오. 지나칠 정도로 담백한 여자 관계. 어쩌면, 애초에 '황녀'가 그를 꾀어내려 했던 것부터가 잘못된 것이 아니었을까.

"...남자를 좋아하나?"

황녀는 상당히 열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

용케 살아서 연회장에 돌아왔다! 이건 기적이야!

하도 긴장하고 정신이 없던 탓에 모든 걸 기억하진 못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확실히 기억한다.

황제가....

'이걸 꼭 떠올려야 하나?'

...내게 시간을 더 줬다. 아마 온 지 얼마 안 되었음에도 마계에 다녀오는 것을 허락했던 것 같은데.

다른 건 몰라도 곧 다시 마계에 가 봐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겠다. 앞으로는 마계든 인간계든 머무는 시간이 극도로 짧아질 것 같다는 것도.

그 이외의 대화 내용이나 겪은 일들은 뭐...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으니 기억 저편에 묻어 두기로 하자.

'그런데 왜 자꾸 날 쳐다보는 거지?'

예전에 겪었던 연회에서 힐긋힐긋 보던 시선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뭐라 숙덕이는 것 같기도 하고....

"연달아 황족과 개인적인 대화를...."

"황녀 전하와의 대화는 무슨 이야기인지 알 것 같...."

"...살인귀지만 역시 영웅이라는...."

"그보다 외모가 잘생겼...."

"...폐하와는 대체 무슨 이야기를...."

황녀 전하? 황녀 전하 이야기가 왜 날 보면서 나와?

뭔진 모르겠지만 날 향한 시선들이 따갑다. 집에 가도 되는지 확신할 수 없으니 일단 자리라도 피해 있는 게 좋겠어.

다행히 실내 연회를 열 때와 별반 다를 것 없이 건물은 일부 개방되어 있었다. 아니, 실제로 실내에도 작지만 있을 건 다 있는 연회가 열려 있었다.

시끌시끌한 밖이 부담스러운 귀족들이 들어와 쉬거나 업무와 관련된 대화를 나누기 위해 들어오는 듯했다.

'밖에 비해 수가 적어서 시선도 줄긴 했는데... 음....'

그만큼 더 강렬해져서 별 의미가 없달까.

실내에 들어서자마자 순식간에 쏠리는 시선들에 잠시 멈칫한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음식들을 주워 담고 슬금슬금 테라스로 대피했다.

커튼까지 꼼꼼하게 치고 나서야 긴장이 탁 풀려 근처에 놓인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제야 눈치를 보듯 슬금슬금 속이 비었음을 알리던 위가 배고픔을 호소한다. 들고 온 음식을 집어 입에 넣으며 멍하니 넋을 놓았다.

'피곤해.'

돌아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다시 짙어지기 시작한 눈 밑을 매만지며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고 마왕이고 일단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 나도 좀 쉬어야지.

그렇게 생각 없이 과자만 와작와작 집어먹길 한참, 큰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지금 다 죽이자는 겁니까!"

아씨 깜짝이야! 튕기듯 놓쳤던 쿠키가 바닥에 닿기 전에 황급히 잡아챘다.

도대체 누구야? 왜 싸우는 건데. 잡은 쿠키를 입 안에 밀어 넣고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테라스 밖, 야외 정원 어딘가 가까운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109. 사실 그들은 알고 있었다(3)

"그들도 인간입니다! 마계와의 전쟁이 코앞인 지금 힘을 합쳐도 모자를 판에 굳이 같은 인간을 죽여 적을 늘려야겠습니까!"

정정한다. 가까운 곳이 아니라 바로 내 밑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아니, 왜 여기서 싸우는 건데.... 난간 밖으로 살짝 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보았다. 테라스 그늘 아래에서 언쟁을 하고 있는지 한 남자의 뒤통수가 간신히 보였다.

차분하게 듣고 있던 뒤통수의 주인이 이 상황과 관계 없다는 듯 느긋하게 입을 뗀다. 찬물을 끼얹듯 정갈하고 우아한 말투가 조곤조곤 상대를 짓밟았다.

"목소리가 크구나. 너무 흥분해 있어. 푸른 피라면 머리를 차갑게 해야지."

귀족답지 않아.

"하, 머리만 차가워서 되겠습니까. 가슴은요. 머리만 차가워서는 반쪽짜리 귀족일 뿐입니다. 아니, 애초에 저는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푸른 피이니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겠지요."

전 타고나길 귀족으로 태어났습니다.

"...넌 네가 변경백이라는 것에 감사해야겠구나.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내 앞에서 살아 있지 못했을 테니."

"제 힘으로 얻은 자리에 감사가 웬 말입니까. 그리고 지금 협박하시는 겁니까? 죽었을 거라니, 그냥 어디 한번 죽여 보시지요. 현 상황에서 유능한 변경백을 죽인다면 제아무리 영웅이라 해도 폐하께서 가만두지 않으실 겁니다."

"죽이지 않는단다. 말했잖니."

씨발 무서워! 이 기 싸움 도대체 뭐야!

...하지만 호기심이 생긴다. 영웅이라니, 저 뒤통수의 주인이 영웅이라고? 네메세우스 장군님이나 크루엘은 아닐 테고, 그럼 스티그마 프리미로? 후작이잖아. 무려 후작인 영웅과 싸우는 상대는 누구지?

테라스 아래를 확인하기 위해 난간을 짚고 고개를 숙였다. 프리미로 후작의 뒷모습이 더 온전하게 보이고, 맞은편에 상대로 추측되는 이의 신발이 보였다.

"이러다 의미 없는 논쟁만 계속하겠구나. 본론으로 돌아가지."

"...후작께서 뭐라 하시든 제 의견은 변함 없습니다. 바르바이족은 인간입니다. 힘을 합칠 수 있는 상대를 죽인다는 것은 말도 안 되고, 마계와의 전쟁을 앞둔 상태에서 그들을 죽이겠다고 병력을 낭비할 수는 없습니다. 설득하고 구슬려서 도움되는 아군으로 쓰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들은 야만족이지. 언제나 내 영지를 침범해 사람을 죽이고 무기와 식량을 약탈해 갔어. 그 땅에서 나고 자란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 그래 왔지. 그런 자들이 이제와 달라질 수 있다고 믿니? 대화로 해결이 가능했다면 진작에 해결되었겠지. 그들을 그냥 둔 채로 마계와 전쟁을 치른다는 것은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자를 등 뒤에 두고 싸운다는 것이나 다름없단다. 모조리 죽이는 수밖에 없어."

"너무 폭력적인 대안입니다!"

"너는 너무 무르지."

조금만 더 고개를 숙이면 상대의 얼굴이 보일 것 같은데.

하지만 그러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뻘쭘한 상황이 벌어질 것 같다. 순순히 포기하고 고개를 드는데, ─삐끗.

'?!'

손을 놓쳤다.

자, 여기서 문제. 상체를 난간 밖으로 한껏 숙인 상태에서 손을 놓치면 어떻게 될까?

'떠, 떨어진다아!'

몸이 난간을 중심으로 한 바퀴 빙글 돌며 떨어진다.

어떻게든 한 손으로라도 난간을 붙잡으려 했지만 허접한 내 힘으로 뭘 어쩌겠는가. 난간에 매달리기는커녕 손톱이 부러지는 느낌과 함께 그대로 추락했다.

체념은 빨랐다.

'다행히 그리 높지도 않고, 머리부터 떨어지는 상황도 면했으니 죽지는 않겠지.'

낙법을 하면 그럭저럭 괜찮지 않을까.

눈을 감고 대충 타이밍을 세는데, 터억. 딱딱한 바닥 대신 단단한 무언가에 안정적으로 걸쳐지는 느낌이 들었다.

"...?"

"그럼 이렇게 하지."

"?!"

"이 아이에게 결정을 맡기는 거야."

뭐야 시발 내려 줘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피하지 않고 시선을 마주한 프리미로 후작이 이내 부드럽게 눈을 접어 웃는다. 위에서 갑자기 사람이 떨어졌음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은 태도였다.

"안녕, 후배님?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구나. 눈이 아주 마음에 들어."

네? 뭐가 마음에 든다고요?

멍하니 눈만 깜빡이다 작동을 멈춘 뇌를 부추겨 가동시키며 고개를 홱 틀었다. 조금 떨어진 곳, 황당한 표정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내려 주세요."

"얼마든지."

"아니, 후작님. 이게 무슨...."

하, 하는 한숨과 함께 그가 얼굴을 문지른다. 연거푸 마른세수를 하던 것도 잠시, 내 정체를 알아차린 듯 짜증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하르트 명예 백작이 아닙니까. 후배님이라니, 그건 또 무슨...."

"두 번째 영웅이 세 번째 영웅에게 붙인 친근한 호칭이지."

"그럼 네 번째 영웅인 크루엘 하르트에게도 후배님이라 하실 겁니까?"

"아니. 난 데온 하르트 명예 백작만 마음에 들어서."

"...그럼 첫 번째 영웅인 네메세우스 장군은 선배님이라 부르시고요?"

"내가 왜 그를 그렇게 불러야 하니?"

"...."

절대 지지 않고 맞서 언성을 높일 것 같던 입이 다물렸다. 말문이 막힌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언제 봤다고 나를 마음에 드네 마네 하시는지...?

'왜 혼자 친해지고 그러세요. 부담스럽게.'

그사이, 어이없음에 몇 번 입을 열었다 닫은 남자가 뒷목이 뻐근해지는 듯 손을 들어 주무른다. 짙은 한숨 섞인 질문이 툭 던져졌다.

"...의도하신 겁니까?"

"그럴 리가. 우연이란다."

"후배님이라 하셨지요. 그렇다면 친분이 있는 것 아닙니까. 그에게 판단을 맡기는 것은 불공정합니다."

"내가 그에게 건넨 첫인사를 벌써 잊은 거니? 난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에서 보는 것이 처음이란다. 대화 역시 이번이 처음이지."

"...하, 좋습니다. 좋아요. 어디 한번 물어보도록 하죠."

남자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이글거리는 눈빛에 흠칫해서 물러서기도 전에, 인사가 이어졌다.

"일단 처음 뵙겠습니다. 텐더 아미아블입니다. 제국의 남부 변경에서 백작을 맡고 있지요. 이렇게 뵙게 되어 유감입니다."

"이런, 생각하고 보니 아직 통성명도 안 했구나. 난 스티그마 프리미로란다. 후작이지. 조금 전엔 실례했어."

"아... 괜찮습니다. 데온 하르트입니다."

"이런 예민한 문제에 휘말리시게 해서 죄…."

"시간도 없고, 통성명도 끝냈으니 전부 건너뛰고 바로 본론에 들어가도록 하자. 후배님은 우리의 대화를 들었지?"

"!"

반사적으로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다행히 움직이고 있던 것도 아니고, 흠칫한 것도 아니라 눈치채지는 못했…긴 개뿔. 후작이 웃고 있었다.

그래, '영웅'을 상대로 뭘 숨기겠어. 아마 머리 위 테라스에 내가 있다는 것까지 전부 알고 있었겠지.

그래도 긍정을 하기엔 눈치가 보여 눈만 데굴데굴 굴리는데, 더 파고들 것 같던 그가 고개를 돌리며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건너뛰었다.

"적어도 마지막 서로의 의견을 정리한 것 정도는 들었겠지. '본론으로 돌아가지.' 이후."

그보다 훨씬 전부터 듣고 있었으니 당연히 들었다.

"우리의 논쟁 원인은 아주 간단해. 제국 최남부 지역과 맞닿은 곳에 사는 야만족."

"바르바이족입니다."

"이름이 너무 길어 입이 아프구나. 양해를 부탁하지."

"...."

싸, 싸우지 마....

내 앞에서 싸울까 겁난다. 난 용사의 파편을 지니지 못한 이름뿐인 반쪽 영웅이란 말이야. 너희 둘의 싸움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다고.

"아무튼 그 야만족이 오래전부터 아주 골칫거리였단다. 나라가 아닌 부족이라 세부 지도가 아닌 이상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는 놈들인데, 툭하면 영지에 쳐들어와 식량을 빼앗고 사람을 죽이니...."

"판단을 흐리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이건 판단을 흐리는 말이 아니라 사실이지."

얼굴 위에 우아한 미소를 덧씌운 후작이 몇 걸음 걸어 나가더니 돌아서며 부드럽게 양팔을 펼친다. 웃음기 하나 없는 갈색 눈동자가 나를 직시했다.

"그래서 내가 폐하께 말씀드렸단다. 마계와 전쟁을 치르시겠다면 그 전에 야만족은 정리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그들은 왕국이 아닌 부족이니 인간계 내 '전쟁'이라 치기에도 애매하잖니? 폐하의 지원은 바라지 않으니 내가 손수 쓸어 버리겠다 했지."

그렇다면 황제의 입장에서 크게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스티그마 프리미로의 병력이 조금 아깝긴 하지만 괜히 억지로 막아서 가장 중요한 스티그마 자체를 잃을 수도 없을 테고.

"그런데 제가 반대했습니다."

"어리석었지."

"판단에 영향을 주는 말은…."

"아무튼, 폐하께서는 야만족과 맞닿은 곳에 영지를 둔 아미아블 변경백과 나, 둘이서 조율을 통해 내놓은 방안에 따르겠다 하셨단다. 기한은 3일."

아미아블 변경백의 눈빛이 흉흉하다. 이러다 정말 둘이 싸우는 거 아니야...?

일이 터지기 전에 서둘러 손을 들고 후작의 말을 받았다. 결론은 그거잖아.

"두 분의 의견이 좁혀지지 않아 제게 선택을 맡기시려는 겁니까? 포섭이냐 박멸이냐?"

마계와의 전쟁에 전면 돌입하기 전에 바르바이족을 박멸하여 후환을 없애는가, 포섭하여 마계를 상대할 또 하나의 아군으로 만드는가.

후작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정확해. 똑똑하구나."

"그런데...."

두 사람의 언쟁은 확실하게 들었고, 기억한다. 그렇기에 나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제 착각이라면 죄송하지만, 아미아블 변경백은 그들이 마계의 편에 서지 않으리라 확신하는 것 같습니다."

"같은 인간이잖습니까. 제국을 적대한다 해도 최소한 마계의 편에 서지는 않겠지요."

"정말 그럴까요?"

"...."

높은 신분이라 그런가? 황제도 그렇더니 아미아블 백작도 참 생각이 순수하다.

'아니지, 보통 높은 신분일수록 더 썩기 마련이지.'

이건 그냥 본인들이 책략가보다는 우직한 장수에 가까워서 그런 모양이다. 상대가 황제도 아니고, 내게 의견을 물은 상황이니 모르겠다면 알려 줘야지.

부러 그의 눈을 똑바로 보고 또박또박 말을 뱉었다.

"같은 인간이라 하여 무조건 인간의 편일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

아미아블 변경백이 입을 딱 다문다. 후작은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지. 아미아블 변경백, 너는 너무 세상을 이상적으로 보고 있어. 누군가의 판단을 좌우하는 것은 압도적인 무력과 증오란다. 만약 마계가 압도적으로 강하다면 '사람'들은 순식간에 그쪽에 붙을 거야. 마찬가지로 증오하는 상대를 조지기 위해서라면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이 또한 존재하겠지. 영혼도 팔 수 있는데 마왕의 편에 붙는 것 정도를 못할까. '종족'은 중요하지 않아."

조지다니. 고상한 말투로 그런 말을 잘도 한다. 아니, 본인도 실수한 것 같은데. 한순간이지만 그 단어를 뱉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던 것을 보면.

좀 더 유심히 그의 얼굴을 살피려 했으나 동요 없는 목소리가 날 불렀다.

"알다시피 야만족은 우리와 사이가 나쁘지. 마계의 편이 될 가능성을 생각해서라도 박멸하는 것이 좋아. 그렇지 않니, 후배님?"

"네...?"

"탁월한 대답이야. 후배님이 이쪽의 손을 들어 주었으니 야만족과 관련한 것은 내 의견에 따라 진행하도록 하지. 폐하께는 내가 보고할 테니 변경백은 이만 물러가렴."

난 분명히 말끝을 올렸을 텐데.

차마 뭐라 하지도 못하고 그저 황당하단 시선을 보냈으나 후작은 상상 이상으로 뻔뻔했다.

당당하게 가라는 시선을 보내는 그를 향해 무슨 그런 억지가 다 있냐는 표정을 짓던 변경백은 더 이상 입씨름해 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아는 듯 흐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두 분은...."

"난 후배님과 좀 더 대화를 나눌까 해서."

"?"

나, 난 왜?

"예, 알겠습니다."

"아니, 잠…."

110. 사실 그들은 알고 있었다(4)

갔다! 돌아보지도 않고 갔어!

썰렁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나는 조용히 눈을 굴리며 후작의 눈치를 살폈다.

도대체 나와 무슨 대화를 나눌 게 있다고 그러는지. 혹여 안 좋은 일과 관련된 대화일까 차마 돌아보지 못하고 얼어 있자 등 뒤에서 정갈한 목소리가 고막을 두드렸다.

"내가 멋대로 굴어서 화났니?"

"...?"

"화난 모양이구나. 하지만 분노든 대화든 사람의 얼굴을 보아야 하는 것이 예의란다. 눈이 마주치면 나를 죽이고 싶어질 것 같다 해도 말이지."

농담인가? 농담이겠지?! 죽이긴 누가 누굴 죽여?!

애초에 내가 '진짜 영웅'을 죽일 수 있을 리도 없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눈이 마주친 후작이 살벌한 말을 뱉은 것답지 않게 태연하게 웃는다.

"일단 좀 걷겠니? 아니면 가고 싶은 곳이라도?"

"...야외 연회장은... 어떠십니까?"

설마 일이 수틀려도 사람 많은 곳에서 날 죽이려 들진 않겠지. 보아하니 그럴 것 같진 않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다.

...목이 바짝바짝 타고 있어서 마실 게 절실하기도 하고.

"연회장이라... 뭐, 좋아. 후배님이 원하다면야."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기엔 썩 좋지 않은 장소일 텐데도 상관없다는 듯 그가 앞장선다.

흐트러짐은 물론 소리 하나 없는 걸음걸이를 쫓아 생각 없이 졸졸 따라가길 잠시, 마침내 불이 환하게 밝혀진 공간에 도착했다.

─야외 연회장. 그래, 야외 연회장이 맞긴 한데....

'...망할.'

그곳에서 나를 반긴 것은 불빛만이 아니었다. 일제히 쏟아지는 시선을 실감하며 속으로 내 머리를 후려쳤다.

'내가 이걸 피해서 자리를 옮긴 거였지...!'

난 붕어 대가리인가.

귀족들이 함께 있는 두 영웅을 주목한다. 힐긋힐긋 시선을 주며 저들끼리 수근거리더니 무슨 사이인지,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관심을 품고 슬금슬금 근처에 접근한다. 대놓고 대화에 끼어든 것도 아니라 지적하기에도 애매했다.

이러한 행동들은 스티그마가 나서며 해결되었다. 특별히 무언가 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눈동자만 굴려 나를 힐긋 보더니 한 걸음 앞으로 뚜벅, 소리 내어 나선다. 치켜든 고개가 오만할 정도로 당당하지만 숨 쉬듯 어울리는 모습으로, 그는 말없이 귀족들을 훑었다. 빛 아래 드러난 갈색 눈동자가 어울리지 않게 서늘한 빛을 품었다.

썰물이 밀려가듯 귀족들이 멀어졌다.

"와...."

"왜 그러니?"

"아뇨, 아무것도. 갈색 눈이셨군요."

마지막 말은 아무 생각 없이 튀어나온 것이었다.

녹색 머리에 갈색 눈. 어쩐지 나무가 떠오르는 색이네,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래, 아주 흔하고 천박한 색이지."

"...?"

"와인이라도 한잔하겠니?"

얼떨결에 내밀어진 잔을 받아 들면서도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혼란이 밀려왔다.

뭐지? 말투가 아주 여상스러워서 넘어갈 뻔했는데, 저거 그거지? 말에 칼을 담는다는 사교계의 어법! 흔하고 천박한 색이라니. 내가 갈색 눈을 언급해서 그런가? 왜... 아.

잣됐다.

'스티그마 프리미로는 사생아였지.'

하녀의 배에서 나왔다고 들었다. 갈색 눈은 하녀인 어머니의 것이었나.

...일단 수습하자. 시발 수습이 될진 모르겠는데, 수습해 보는 거야.

"후작님."

"스티그마라 부르렴."

이 와중에 이름을 허락한다고? 화난 게 아닌가?

와인잔 안에 담긴 액체가 불안하게 출렁인다. 안정되지 못한 마음을 두 눈으로 확인시켜 주는 작태에 슬그머니 근처 테이블에 내려놓고 그를 마주했다. 불안을 담고 들쑤시던 감정은 여전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확신을 얻은 것이다.

'화난 게 아니구나.'

애초에 나의 실언을 사과해야 할까, 모른 척 화제를 돌려야 할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상황은 그 스스로 정리했으니까. 와인이라도 한잔하겠냐며 말을 돌린 그의 의도에 따라 모른 척 넘어가 주면 되는 것이다.

예상외의 배려였다.

다시 와인잔을 집어 들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잔을 빙글 돌리며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그럼... 스티그마 선배님."

"...."

"...?"

왜 대답이 없지?

살짝 고개를 들자 이쪽을 빤히 보고 있는 스티그마와 눈이 마주쳤다. 왜, 왜?

"내가 먼저 후배님이라 불렀다지만, 설마 정말 그렇게 부를 줄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보듯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나직이 중얼거린다. 혼잣말인 것 같았는데, 다 들렸다.

...네가 먼저 후배님이라 했잖아. 거기에 장단 맞춰 줬는데 그러기냐? 어이가 없네.

한껏 식은 눈으로 그를 보는데, 그새 무언가 정리를 끝냈는지 그가 고개를 바로 하며 기분 좋은 미소를 걸쳤다.

"...인생에 후배 한 명 정도는 있어도 괜찮겠지."

"...?"

"살인귀까지는 아니어도 그와 비견되게 냉혹한 자일 줄 알았는데, 이런 순진한 면도 있을 줄이야.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는군."

"다 들립니다."

"이런, 그래서 나를 부른 이유가 무엇이니?"

말 돌리는 것도 다 압니다....

하지만 먼저 실례한 것도 있으니 그냥 넘어가야지. 이래서 사람은 생각 없이 말을 뱉으면 안 돼.

새삼 무지 역시 죄라는 것을 깨달으며 나는 순순히 말을 꺼냈다.

"폐하께서 전쟁 중지 선언을 하신게 바로 오늘인데, 바르바이족에 관한 건은 언제 폐하께 건의하셨습니까?"

"후배님이 폐하와 개인적인 대면을 하고 나서 바로 찾아뵙고 말씀드렸지. 사실 고집부린 것에 가까웠지만.... 어쨌거나 결과가 좋으니 됐지. 안 그러니?"

"고집이라니...."

그 황제에게?

"...대단하십니다."

황제가 인재를 아낀다지만 그걸 믿고 고집부리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지?

순수한 감탄에 스티그마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대단하긴. 후배님도 알다시피 폐하께서는 본인을 닮은 자를 특히나 아끼시잖니. 이 정도는 폐하께 있어서 봐줄 만한 수준이란다."

"네...?"

"왜 놀라니? 후배님은 그 '아끼는 자'들 중에서도 특별한 쪽에 속하면서. 추측하건대 후배님이라면 선을 넘지 않는 한 어느 정도의 건방짐은 용인해 주실 것 같구나."

"네?"

"...설마 몰랐니?"

"네?"

"이런... 그럼 이 참에 설명을 해 둘까. 알아 두렴. 폐하께서는 인재들 중에서도 본인을 닮은 자를 유독 아끼신단다."

'인재'라는 전제조건은 필수지만.

그의 중얼거림은 흘려 넘겼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

그러니까, 그의 말은, 내가 황제를 닮았다는 것 아닌가! 도대체 어디가! 이거 잘못하면 황실 모독죄로 끌려가는 거 아니야?!

"저는… 금발이 아닙니다만.... 금안도 아니고, 하물며...."

"그런 문제가 아니란다. 이해하기 편하게 우리 영웅들을 기준으로 이야기해 볼까? 페하께서는 공식적인 네 영웅 중 세 영웅을 유독 아끼시지."

세 영웅이라... 일단 네메세우스 장군님과 스티그마는 포함될 테고, 나머지는 그의 말대로라면 내가 되는데....

솔직히 말해서 믿기지 않는다. 난 정신적 괴롭힘을 당한 기억밖에 없단 말이지. 저번에 봤을 때 크루엘을 싫어하시는 것 같았으니 크루엘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히 알겠다만... 그냥 두 영웅을 아끼시는 걸 세 영웅으로 착각한 거 아니야?

의심을 품고 있는 나를 알 턱이 없는 스티그마가 세 손가락을 펼쳐들었다. 그대로 하나씩 접으며 설명한다.

"저 아래에서부터 실력으로 올라온 자."

네메세우스 장군 이야기인가.

"스스로가 본인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아 그것을 증명하는 것에 집착하는 자."

잘은 모르겠지만 정황상 이건 스티그마 본인의 이야기 같고.

그런데 황제가 스스로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던가? 의문을 갖던 찰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제 손으로 가족들을 죽인 자."

"...."

손에 든 와인잔을 빙글 돌렸다.

표정이 변화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뚫어져라 보는 갈색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잔을 입가에 댔다.

"폐하께서는 후배님을 가장 아끼시지. 후배님이 마음에 드는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란다. 어떻게 그런 발상을 할 수 있는지."

알코올이 목구멍 너머로 흘러가고.

"이에 대해 나와 이야기를 나눠 보지 않겠니?"

기억이 끊겼다.

***

황제는 장갑 낀 손을 들어 눈가를 신경질적으로 꾹꾹 눌렀다. 언제나 일상이 스트레스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고 생각한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는 현재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데온 하르트는 제가 먼저 불렀으니 그렇다 치자. 스티그마 프리미로까지도 이해한다. 하지만 이젠 스타베 일루스터라니. 오랜만에 돌아왔다 해도 이건 너무한 것 아닌가.

하지만 들이닥친 상황을 마냥 외면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 그는 손을 옮겨 미간을 꾹 누르며 짜증스러운 상대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그래.... 그대는 무슨 일로 짐을 찾았나, 일루스터 공?"

"폐하께 여쭐 것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만...."

대답은 곧장 나오지 않았다.

힐긋, 말끝을 흐리며 황제의 장갑을 본 공작이 이내 자연스러운 미소를 걸치며 다시 황제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손은 괜찮으신지요."

한순간, 황제의 손끝이 미세하게 움츠러들었다.

"...그걸 물으러 온 것이 아닐 텐데."

"그저 궁금해서 말입니다. 용사의 파편을 지닌 자는 회복력 또한 평균을 웃돈다고 알고 있는지라."

"공작."

경고가 서린 음성에 공작이 어깨를 으쓱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예, 그럼 본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

"그리 무거운 질문도 아니니 긴장 푸시지요. 최근 너무 날이 서 있는 듯한데, 피곤하지도 않으십니까?"

"계속 그런 식으로 쓸데없는 말을 할 거면…."

"슬슬 그 자리를 넘겨주실 때가 된 듯하여."

노골적으로 드러난 욕망에 황제가 으르렁거리던 것도 잊고 공작을 보았다.

표정을 짓는 것도 잊은 듯, 형용할 수 없는 얼굴. 아연한 황제의 눈을 마주하며 공작은 소리 없이 웃었다.

"땅따먹기는 충분히 즐기셨잖습니까. 마계와의 전쟁은 인간계 내의 전쟁과 궤를 달리합니다. 그러니 더 힘겨워지기 전에 이쯤에서 유연하게 양보해 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오늘따라 유독 뜸을 들인다 했더니 이런 말을 하려고 했던 건가."

말하는 투만 보면 주변에 암살자라도 대기시켜 놓은 듯한 모양새군.

하지만 공작이 그럴 리가 없다. 황제는 위태로운 대화를 나누면서도 주위에 제게 해를 끼칠 만한 것이 없음을 과감히 확신했다.

그야, 공작은.

"저는 평화롭게 일을 해결하고 싶습니다. 폐하께서도 아시잖습니까."

단 한 번도.

"제가 많은 것을 봐주고 있다는 사실을."

황제를 '확실히' 죽이거나 끌어내릴 만한 일을 한 적이 없었으니까. 기껏해 봤자 황관을 내놓으라는 압박과 시위 정도일 뿐.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공작은 분명 많은 것을 할 수 있었다. 그는 귀족파의 수장이며, 구원교를 통해 제국민들을 선동하기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고, 혁명군과도 연이 있다. 제국의 넷밖에 되지 않는 영웅 중 하나를 밑에 둔 것은 덤.

그럼에도 황태자와 황녀를 끌어들이려는 귀족들의 행동이 선을 넘지 않도록 억제한다. 제국민들에 대한 선동은 공작의 이미지를 올리고 황제의 이미지를 깎아내릴 뿐,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하게 조정한다. 심지어는 혁명군이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발을 묶어 두었다.

황제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111. 사실 그들은 알고 있었다(5)

"...이 자리를 탐내는 것은 맞는가?"

"당연히."

"그렇다면 어찌하여 이 자리를 탐내는 거지?"

"에도아르도 데세르트는 황제의 자리에 걸맞는 인물이 아니기에."

공작은 아주 오랜 시간, 진득하게 황제를 관찰해 왔다.

그렇기에 보았다. 보일 수밖에 없었다. 황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짓눌려 죽어 가는 한 아이가. 수명을 대가로 기를 쓰며 황관의 무게를 버티고 있는 모습이 너무 선연해서, 공작은 그가 황제감이 아님을 쉽게 확신할 수 있었다.

고작 머리에 황관을 얹고 있는 것만으로도 제 목숨까지 깎아야 하는 인간을 어찌 황제라 인정하겠는가.

"쉽게 죄책감을 갖고, 그것에 쉽게 무너지지요. 황제란 무릇 앞을 보고 나아가야 하는데, 지나간 것들, 잃은 것들에만 시선을 두고 있으니 이를 어찌 황제라 부르겠습니까."

환각을 보시지요? 속삭이듯 물었다.

황제의 입에서 무언가 다른 말이 튀어나오기 전에, 공작이 다시 말을 이었다.

"부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미 확신하고 있으니까. 물론 어떻게 알았냐고도 묻지 마십시오."

"...."

"눈가를 반복하여 매만지고, 눈을 꾹 감았다 뜨는 행위를 자주 하시지요. 눈의 초점이 뚜렷하지 않거나 마치 무언가를 보듯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맞춰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드러내 놓고 상태를 보이시는데, 모르려 해도 모를 수가 없지요."

환각은 죄책감의 방증. 서류에 도장을 한번 잘못 찍으면 수많은 이들의 목숨이 사라진다. 차라리 전쟁터에 나가 직접 검을 휘두르는 것이 더 나을 정도로 많은 목숨이─

사람을 죽였다. 환각이 늘었다. 도장을 찍었다. 더 많은 환각이 보였다.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 명단을 확인하고 나면, 악의에 가득찬 환각들로 시야가 새까맣게 물들었다.

"...아니, 그게 아니지."

황제는 오른손 엄지로 왼 손등을 꾹 눌렀다.

공작의 말은 유려했으나 겨우 그 정도에 쉽게 흔들릴 만큼 어설픈 각오로 황제를 한 것이 아니었다.

고로, 다시 말한다.

"교묘하게 말을 돌리지 마라. 짐은 분명 어찌하여 이 자리를 탐내는가에 대해 물었다. 짐이 황제의 자리에 걸맞지 않는다는 것은 이유가 되지 않아."

이번엔 공작이 입을 다물었다. 침묵은 그리 길지 않았다.

"...권력을 탐하는 것에 이유가 필요합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만, 그 이유가 전부일 것 같지는 않더군. 정녕 그게 전부인가?"

상황이 역전되었다. 이번에는 황제가 공작을 몰아붙였다.

썩 유쾌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한결같은 표정을 고수하던 공작은 금방이라도 답할 듯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더니, 이내 멈칫- 시선을 올려 황제의 눈을 보았다. 황금안과 마주친 보라색 눈동자가 감기듯 휘어진 눈꺼풀 아래로 숨어들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누구보다 강한 권력이 필요하지요."

"...공 같은 사람에게도 지킬 것이 있나?"

"글쎄요. 어쨌건 황제는 그 권력의 정점입니다. 탐내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기에 공작은 다시 한번 다짐한다.

상대가 누구든, 심지어 에도아르도라 할지라도, 기필코 그 자리를 차지하겠노라고.

"이유는 대충 알겠다만, 공도 잘 알고 있겠지. 짐이 고작 그 말 몇 마디에 이 자리를 내놓을 리 없다는 것을."

"...."

"왜 의미 없는 수고를 들여 가며 의미 없는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차라리 잘린 머리에서 황관을 거두어 가지 그러나."

"─무슨 그런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까. 신은 정당하게 그 자리를 양도받을 생각입니다."

그 과정에서 약간의 압박은 불가피한 일이겠지만.

우아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어쨌거나 폐하의 뜻은 잘 알았으니 오늘은 이만 물러가도록 하지요."

폐하께서 전쟁놀이를 더 즐기고 싶으시다는데 별수 있나. 여기서 더 뭐라 말을 보태거나 손을 쓸 수도 없는 노릇, 황제 놀이 좀 더 즐기시게 내버려 두어야지.

보라색 뱀이 눈을 접어 웃었다.

***

황제가 놓친 것이 있다. 데온 하르트가 눈치채고 스티그마가 동의했으며, 아미아블 변경백조차 반박하지 못한 불편한 진실.

'타 왕국이 마계의 편에 설 가능성.'

'더 나아가 제국의 귀족이 황제를 배신하고 마계의 편에 붙을 가능성.'

공작은 황제가 마계와의 전쟁을 선언한 순간부터 이미 그 가능성을 점치고 있었다.

그리고 황제를 만나, 대화를 나누고, 확신했다.

황제는 그 가능성을 배제해 두고 있다.

'폐하께서는 참으로 순진하기도 하시지.'

마음 같아서는 그냥 방치해 두고 흘러가는 상황을 지켜보고만 싶지만, 그럴 수는 없다.

"'나의 제국'을 그리 허무하게 잃을 수는 없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의식적으로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튕겼다. 연회장과 동떨어진 사람이 없는 공간 어디선가 검은 옷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에린에게 전하세요. '그들'을 이용하여 마족들에 대한 악소문을 퍼트리라고."

"정확히 어떤 종류의 소문을 말씀하시는지...."

"무엇이든 좋습니다. 배신을 밥 먹듯이 하고, 거짓을 숨 쉬듯 행한다는 소문도 좋고,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소문도 좋아요. 현실적인 것이든 허황된 것이든, 사람들이 마족을 믿지 못하게 만들기만 하면 됩니다."

빈민가에서 퍼진 소문은 곧 제국민들 전체에 퍼지고, 제국민들에게 퍼진 소문은 사용인들을 통해 귀족들에게 전달된다. 귀족들의 소문은 곧 황제에게 전달되니, 이를 제국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타 왕국들이 놓칠 리 없다.

그렇게 되면 감히 마계에 붙을 생각하는 인간도 없겠지. 구원교를 어떻게든 남겨 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거였다.

사내로부터 긍정의 답을 들은 공작이 흡족한 미소를 띠며 멈췄던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이내 멈칫.

"...아, 혹시."

"말씀하십시오."

"용사의 파편을 가진 자가 그 힘을 잃거나, 특정 상황 혹은 부분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례가 있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명하신다면 조사해 보겠습니다."

"아마 없을거라 생각되긴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사해 보세요."

"예."

고개를 숙인 사내가 사라지든 말든, 공작은 고개를 숙인 채 턱에 손을 대고 중얼거렸다.

"그렇다는 건... 지속적인 자해로군요."

공작은 황제가 장갑을 끼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언제였을까, 황제와의 대화에서 그의 손에 감긴 붕대를 언급한 적이 있었다. 황제는 경계하며 말을 돌렸지. 그리고 오늘, 그는 장갑을 끼고 왔다. 답은 뻔했다.

[상처가 낫지 않았다.]

회복되지 않은 것인가, 지속적인 자해인가.

황제는 '영웅'이다. 용사의 파편은 인간의 모든 한계를 뛰어넘게 하는 것. 수명조차 거기에 포함되는 판국에 회복력이 포함되지 않을 리 없다.

그러니 답은 다시 두 개로 갈린다.

[용사의 파편이 힘을 잃은 것인가, 지속적인 자해인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쟁터를 한바탕 휘젓고 있던 황제가 이제 와 힘을 잃었을 리 없다. 시기상으로도 맞지 않으니 이 가정은 폐기.

그렇다면 용사의 파편이 '회복력'에 한해서 힘을 잃은 것인가? 공작은 더 세부적으로 파고들고 분석하려는 의식을 여기서 차단했다.

굳이 가능성 낮은 것들에 연연할 필요가 있나. 가장 눈에 띄는 답이 바로 여기 있는데.

'자해… 자해라.... 그러고 보니 특정 상황에서 손등을 눌렀었지.'

정확하겐 손끝을 세워 뭉근히 비틀듯 눌렀다. 필시 상처를 헤집은 것일 터.

'어떤 상황이었지?'

─스트레스가 심해질 때, 눈의 초점이 어긋날 때, '죽은 자'가 떠오를 만한 상황에서.

...하.

"지독한 인간."

환각을 그렇게 무식한 방법으로 버티고 있었다니.

***

야외 연회장에 돌아온 황제가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다름 아닌 한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칼부림이었다.

뒷걸음질 치다 테이블에 막힌 녹색 머리칼의 사내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인다. 그 위를 가로지른 단검이 테이블 위를 장식하고 있던 촛대를 부쉈다. 와장창! 커다란 소음이 울려 퍼지고, 곳곳에서 숨죽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 소란의 중심에서 시원스럽게 흩날리는 흰 머리칼을 본 황제는 조용히 손을 들어 얼굴을 덮었다.

"이건 또 무슨...."

***

때는 불과 15분 전, 스티그마는 말없이 잔을 들이켜는 데온 하르트를 보고 있었다.

술을 한 모금 넘길 때마다 붉은 눈동자가 꺼림칙한 기운을 담고 가라앉고, 또 한 모금 넘기자 본래도 표정이 적던 얼굴에서 감정이 빠져나간다.

이 모든 과정을 코앞에서 지켜본 그는 나직이 웃었다.

'그럼 그렇지. 황제를 상대로 그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한 자가 정상일 턱이 있나.'

미묘하게 정상적이다 했더니, 이런 본성을 숨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생각지 못했던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크게 신경 쓰진 않는다. 애초에 데온 하르트가 마음에 든 이유는 성격 따위가 아닌 '제 가문을 멸했다'라는 행동 때문이었으니까.

아마 데온 하르트가 지금보다 더 미친놈이거나 조금 전보다 더 정상적인 인물이었어도 그를 향한 호감은 여전했을 것이다.

'오히려 본성이 드러났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얌전해서 의외이기도 하고.'

그보다 이쯤이면 슬슬 입을 열 때도 되었는데, 영 답이 없다.

결국 기다리다 못한 스티그마가 데온을 불렀다.

"후배님?"

"전 모르는 일입니다."

"...뭐?"

또렷한 붉은 눈동자가 이쪽을 직시한다. 저 태도도, 말도 이해되지 않아 스티그마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취한 건 아닌데, 뭐지? 무언가 위화감이 느껴진다. 아직 본성이 전부 드러난 것이 아닌가?

"그 말은, 8년 전쟁 이후 논공행상에서 후배님이 청했던…."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이와 관련된 질문은 받지도, 답하지도 않을 테니 하지 말라는 명백한 신호.

"...그래, 모르는 일이구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맨 정신의 데온 하르트는 이 주제에 관해 대화 나누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신을 흐리게 만들면 되겠지.

근처에 서 있던 기사에게 손짓해 맡겨 두었던 술을 돌려받았다.

"한잔하지 않겠니? 마침 부하들에게서 빼앗은 술이 있단다."

"...그래도 되는 겁니까?"

"내 부하들인데 무슨 문제가 되겠니. 게다가 이건 내가 금지한 종류의 술이거든."

지나가는 시종에게 손짓해 깨끗한 빈 잔을 받아 후배님의 손에 쥐여 주었다.

북부에서 힘들게 구해 온 술이랬던가. 스티그마가 담당한 지역은 최남부이니 확실히 구하기 힘들었으리라.

부하 A의 피눈물이 담긴 술을 아무렇지 않게 잔에 따르며 피식 웃었다. 적잖이 불안했는지 미심쩍은 눈으로 잔을 살피던 데온이 슬쩍 질문을 던졌다.

"금지한 술이라면… 마약이라도 들어 있는 겁니까?"

"뭐, 그런 것도 금지 목록에 포함되지만 이건 아니니 걱정 마렴. 그냥 조금 독할 뿐이란다. 설마 내가 후배님께 마약을 먹일까."

독한 술, 좋아하지?

스티그마가 유혹하듯 눈웃음 지었다. 그를 물끄러미 보던 데온은 잔을 한번 살피고는 망설임 없이 곧장 들이켰다.

...그걸 몇 번 더 마시게 했을 뿐인데.

고개를 꺾었다. 단검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내며 얼굴이 있던 자리를 찌르고 들어왔다. 이를 명백히 인지한 스티그마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방금 분명 쉭- 소리가 났었다. 정말 나를 죽이려 했구나.

"음... 후배님, 이쯤에서 그만두지 않으련? 이러다 연회장이 완전히 엉망이 되겠구나."

"너어어… 적이라며어...."

"사실 거짓말이었단다. 적이 아니야."

"적이라며어... 적이라며어어어!"

이런.

한 걸음 물러서며 나직이 혀를 찼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런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112. 사실 그들은 알고 있었다(6)

별거 아니었다. 연회가 있을 때면 으레 그러하듯 누군가 과음을 하고 취했을 뿐인, 아주 흔하고 사소한 일 중 하나였다.

잔뜩 취해 헤실대며 비비적거리던 후배님이 늘어진 목소리로 적이냐 묻기 전까지는.

짓궂은 호기심이 고개를 들었다. 솔직히 취한 사람에게 이런 질문을 받으면 한 번쯤 긍정해 보고픈 생각이 들지 않는가. 스티그마는 그저 실행력이 뛰어났을 뿐이다.

그래서 답했다.

[그렇단다.]

후배님의 반응은 예상외였다.

웃었다. 정말 미친 듯이 웃었다. 저러다 숨이 넘어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웃더니─

──예고없이 공격을 해 왔다.

처음에야 조금 당황했지만 결국 용사의 파편을 갖지 못한 자의 공격이요, 취객의 난동이다. 제아무리 같은 제국의 공식 영웅이라 해도 이러한 격차가 존재하는 한, 데온 하르트가 스티그마를 죽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다못해 취하지만 않았어도 이야기가 달라졌겠지만.'

어쨌든 일은 터졌고, 언제까지고 이 상태를 유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최대한 평화적으로 일을 해결해 보려 했지만, 도무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별 수 있나.

'제압한다.'

양손에 단검을 들고 미친 듯이 날뛰는 꼴을 보아하니 맨손으로 제압할 자신이 없어 검을 빼 들었다.

그저 단검만 쳐 낼 생각으로 휘둘렀는데... 데온 하르트가 사라졌다!

잔상을 좇아 시선을 드니 조금 떨어진 곳에 크루엘 하르트가 데온 하르트를 품에 안고 있는 것이 보였다. 황제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와 거의 동시였다.

"죽이지 마라, 프리미로 후작."

***

동생은 태어날 때 색소를 빼앗긴 채 태어났다. 뭐가 그리 급한지 태어나기도 일찍 태어났었지. 독특한 피부색과 머리카락에 놀라기도 전에, 간신히 미숙아를 면해 온 가족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던 것을 어린 나이였음에도 확실히 기억한다.

물론 그 이후 아이가 눈을 떴을 때 보인 색상에 경악했지만.

하늘은 동생에게서 색을 앗아 가고도 부족했던지 건강마저 앗아 갔다. 그러면서 스스로도 양심에 찔린 듯 단 하나를 남겨 두었는데, 크루엘은 아직도 그때 의사가 한 말을 기억한다.

[몸 전체에 고루 퍼져 있어야 할 모든 건강이 간에만 몰리신 것 같습니다!]

많은 시간이 지났다지만 이 말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모든 것을 앗아간 하늘이 거둬 가지 않은 유일한 것인데.

내 동생, 데온 하르트에게 남은 유일한 건강.

'...그런데.'

감히, 그것을, 망치려 들고도 모자라.

'내 동생에게 검을 휘둘러?'

너무도 소중해서 끝내 미워하지 못한 아이다. 그런 아이에게. 네가.

'감히.'

분노로 속이 들끓는다. 언제나처럼 억누르려 애를 쓰지만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감정이 새어 나와 아이를 안은 손이 덜덜 떨렸다.

크루엘은 조용히 데온 하르트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스티그마를 찢어 죽일 듯 노려봤다. 당연히 스티그마로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무어라 해명하기도 전에, 고개를 들고 저를 품에 안은 이를 확인한 데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너어는...."

"...."

적이냐고 물을 생각일까.

'아니'라는 답을 준비하고 뒷말이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눈이 마주친 데온이 흠칫하는가 싶더니 움직였다.

"적이구나!"

묻지도 않는군.

크루엘은 급히 몸을 뒤틀어 휘둘러오는 단검을 피했다. 치명상은 면했으나 대놓고 급소를 노출하고 있었던 데다 방심한 탓에 목에 생채기가 생기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은 데온이 이어서 무기를 휘두른다. 상대가 죽지 않는 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집요한 공격이 대상을 달리해 쏟아졌다. 스티그마는 뒷전으로 밀려난 지 오래였다.

이 자세로는 회피도 방어도 힘들어 급히 데온을 내려놓고 물러서려던 순간, 황제가 움직였다.

"물러나라."

크루엘이 빠지고 곧장 황제가 들어왔다. 상대가 바뀌었다는 인식을 하기도 전에 크루엘을 노리던 단검의 옆면을 손날로 누르며 미끄러지듯 내려가 손목을 쥐어 제압한다.

뒤늦게 새로운 인물을 인식한 데온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너느은… 적이야아?"

"데온 하르트."

"적이야아아?"

"정신 차려라."

"적?"

"...."

"...적이구나."

마지막 말에서 무언가 섬뜩함을 느낀 찰나, 쥐고 있던 손목이 훅 무거워지며 뚝- 하는 소리가 들렸다. 손아귀 밑에서 불쾌한 진동을 느낀 황제가 급히 손을 놓았다.

손목에 시선이 닿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 다른 손이 단검을 쥐고 수직으로 쳐올린다. 고개를 젖혀 간신히 그것을 피한 황제가 헛웃음을 흘렸다.

'...체중을 실어 손목 뼈를 분리했군.'

순수한 힘으로는 잡힌 손목을 빼내기 힘들다 판단해 이를 미끼로 사용했다.

용사의 파편을 지녔다면 사람 하나 정도의 체중은 여유롭게 버틸 테니 제아무리 체중을 싣는다 한들 그의 손아귀가 데온의 손목을 놓치거나 따라 내려오지 않으리란 확신을 했고, 이를 이용해 손목 뼈를 분리한 것이다.

황제의 목적이 데온 하르트를 부상입히지 않고 제압하는 것이니 당연히 손목을 놓으리라 예상했을 테고. 그가 당황한 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을 가했다.

취중에 나온 행동이니 무의식이 한 계산이라 봐도 무방했다.

'적이라 판단한 주제에, 상대가 저를 어떻게 대하는지까지 계산하다니.'

적이 저를 해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을 어느 누가 하겠는가. 결국 무의식은 상대가 적이 아님을 확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발칙하지. 의식과 무의식을 저 좋을 대로 이용하기나 하고.

'어쨌든 손목까지 저 모양이 되었으니, 시간을 더 지체해서는 안 되겠군.'

이번엔 진심을 다한 덕분에 날뛰는 데온 하르트를 큰 피해 없이 테이블 위에 눌러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황제는 무릎으로 그의 멀쩡한 손과 등을 함께 누른 채 빠져서 덜렁거리는 손목을 잡았다. 취한 와중에도 고통은 선명히 느끼는 듯 아래에 깔린 몸이 흠칫 떨렸다.

아픈 게 당연하다. 그러게 누가 그런 짓을 하랬나. 고통을 표하는 반응을 무시하고 잡은 손목을 살살 돌려 위치를 가늠하며 재차 그의 이름을 불렀다.

"데온 하르트."

"...으...."

"─이제 현실에 돌아올 시간이다."

뿌득. 단번에 뼈를 맞춰 넣었다.

"!"

비명이라도 내지르려는 듯 데온의 입이 벌어졌다. 그러나 나오는 소리는 없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황제가 몸을 짓누르고 있던 무릎을 치우며 한마디 뱉었다.

"숨 쉬어."

"─허억!"

가쁜 숨이 터져 나왔다. 간헐적으로 기침을 뱉으며 숨을 몰아쉬던 그가 천천히 눈을 깜빡이더니 꾸물꾸물 몸을 일으킨다. 아까보다 조금은 개인 듯한 붉은 눈이 잠자코 지켜보던 금안과 마주쳤다.

"정신이 드나?"

"폐하아...."

"그래."

"저… 사직하고 싶...."

"아직 완전히 깨진 않았군."

슬슬 술이 깰 때가 되었을 텐데. 무의식 중에 그런 계산까지 했던 것을 보면 이미 깨고 있는 중일 테고.

데온 하르트는 술에 강한 만큼 깨는 것도 빨리 깼다.

"정신 차리도록. 이곳은 전쟁터가 아니다."

"아...."

"아무나 찬물을 내와라."

그 말에 가장 빨리 반응한 사람은 크루엘이었다.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다 쳐도 데온 하르트가 크루엘 하르트의 행동에 흔들릴 만한 일이 이 이상 생겨선 안 된다. 황제는 데온에게 다가가려던 크루엘의 손에서 물잔을 낚아챘다.

...그러고 보니 크루엘 하르트는 공작의 사람이었지.

언제 들어왔는지 한쪽에서 흥미진진한 얼굴로 이쪽을 보는 공작과 눈이 마주쳤다. 황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쯧."

곧장 잔을 넘기지 않고 한 모금 마신 뒤 데온에게 내밀었다. 순순히 받아 들고 홀짝거리는 그를 보다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한 남자를 불렀다.

"스티그마 프리미로."

"...예, 폐하."

"애초에 짐은 하르트 명예 백작이 취할 수 있을 만한 술은 연회장에 배치하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하라."

"부하들에게서 압수한 술이 있었습니다. 제 영지의 위치 특성상 많은 사람을 죽여야 하다 보니 간혹 술과 약에 의지하려는 나약한 놈들이 있더군요."

"...."

한순간, 물을 마시던 데온이 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 모습을 본 사람은 황제가 유일했다.

그나마 정신이 들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다시 스티그마가 조금 전 공격의 타깃이 되었으리라.

대답 없는 황제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스티그마가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되었다."

이미 터졌고, 수습까지 끝낸 일을 굳이 크게 키울 필요는 없다. 특히 그 사건의 원인이 황제가 아끼는 인물들이라면 더더욱.

사실 그것 때문에 침묵한 것이 아니었지만.

제 휘하의 병력을 어떻게 다루는가는 장수의 몫이다. 황제는 그것에 대해서도 무어라 왈가왈부할 생각이 없기에 대신 데온 하르트를 불렀다.

"이제 정신이 좀 드나?"

***

"이제 정신이 좀 드나?"

네, 엄청.

이제부터 조금 전까지의 기억을 모조리 소거할 생각인데, 이참에 다른 사람들도 같이 잊어 줬으면 좋겠다.

"하르트 백작?"

"...죄송합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손목이 욱신거리고 자꾸만 기침이 터져 나올 것 같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은 안 나.

'연회장이 반파되었지만 나와는 관련 없는 일이겠지.'

응, 그럴 거야.

안개가 낀 듯 흐릿한 기억 속에서 무언가 떠오르는 장면이 있지만, 후회할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 굳이 집중해서 떠올리진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황제의 눈치를 살피며 물을 한 모금 넘겼다. 그리고 크루엘과 눈이 마주쳤다.

"큭, 우픅, 콜록콜록! 켁! 우욱!"

"...궁의!"

사레들린 것뿐인데 왜 궁의를... 아.

속이 쓰리다. 목이 타는 듯이 아팠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고통은 늘 그렇듯 금세 인식의 범위 밖으로 밀려났다.

손바닥에 묻어난 피를 멍하니 보다가 옷에 슥슥 문질러 닦았다. 붉은색이라 닦아도 티가 잘 나지 않는다는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오늘 황제가 준 옷이 제 역할을 톡톡히 하는구만.

줄곧 가만히 서 있던 스티그마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독입니까?"

"아니, 독은 아니다. 적어도 물 잔은 아니야. 짐이 직접 확인했다."

이제야 독이라는 가정을 제외하는구나. 매번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독인가?!'를 외치더니.

추측하건대 이건 그냥 스트레스에 이런저런 일이 겹쳐서 나온 거다. 솔직히 그럴 만했어. 오늘 엄청 고생했잖아.

'게다가 기억은 없지만 몸 곳곳이 욱신거리는 걸 보면 충격을 받았던 것 같고.'

저쪽에서 궁의가 헐레벌떡 달려온다. 이번엔 괜찮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안 괜찮거든.

나는 불쑥 궁의에게 손목을 내밀었다.

"손목이 아프다."

"네?"

"손목을 봐줬으면 하는데."

"입에서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만...."

"아직 술에 취한 여파가 남아 있는 듯하군. 무시하고 진료해라."

황제면 다야?! 손목이 아프다니까?

하지만 내가 아무리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한들 황제의 명이 우선이다. 궁의는 내가 내민 손목 따윈 무시하고 입 안에 남은 피를 채취해 각종 막대기에 떨어트려 놓더니 이내 배 곳곳을 누르기 시작했다.

"아프신 곳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

없어 이 인간아. 애초에 그런 거 아니었....

"윽!"

"여깁니까?"

"헉, 잠깐...!"

맞아, 맞다고! 맞으니까 그만 눌러! 아프잖아!

급히 궁의의 손목을 붙잡고 그만둬 달라는 필사적인 눈빛을 보냈다. 다행히 제대로 들어 먹힌 건지 그가 움찔하고는 슬그머니 손을 뗐다.

마지막으로 막대기의 색 변화를 확인한 궁의가 다 끝났다는 듯 내게서 슬금슬금 멀어져 황제에게 허리를 숙였다.

"다행히도 독은 아닙니다만, 복부가 무언가에 강하게 눌렸던 탓에 멍이 들었습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피를 토할 수준은 아니지만...."

"마왕의 저주라면 가능하겠지."

황제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얼굴이 아닌 조금 아래, 비껴간 곳.

그의 시선을 따라 목 언저리를 더듬거리자 마왕이 새겨 놓았을 위치 추적 낙인의 위치에 손이 닿았다.

'아니, 잠깐. 이게 보이고 만져진다는 것은....'

113. 사실 그들은 알고 있었다(7)

화들짝 놀라 옷깃을 여몄다.

감히 황제 앞에서 흐트러진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니. 물론 이제와서 그런걸 따지기엔 피범벅이 된 적도 있었고, 너무 멀리 와 버린 것 같지만.... 그래도 신경 쓰는 시늉을 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은 차이가 크다.

...이 와중에 단추는 어디로 도망간 거야. 단추가 사라진 목 근처의 옷깃을 몇 번 여며 보다가 포기하고 슬쩍 고개를 들어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그는 민망한 내 심정을 이해한 듯 모른 척 말을 돌렸다.

"손목도 확인하라. 뼈가 빠졌었다. 짐이 다시 끼워 넣었지만 혹시 모를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지."

***

마왕의 저주는 몸을 쇠약하게 만든다. 각혈의 빈도가 늘어난 것도 그 탓. 그것이 크루엘이 알고 있는 저주에 대한 정보였다.

그럼에도 이전과 다름없이 멀쩡히 움직이는 것은 정보가 잘못되었기 때문일까, 약점을 보이지 않기 위한 독기 어린 노력 때문일까.

크루엘은, 아니 크루엘을 비롯한 이 자리의 모든 사람들은 급히 낙인을 가리려 애쓰는 데온 하르트를 보며 후자를 확신했다.

'각혈을 했음에도 그것에 대한 언급 하나 없이 손목이 아프다며 내밀었지.'

손에 묻어난 피는 대수롭지 않게 옷자락에 문질러 닦기도 했다.

진짜 약점인 각혈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넘겨 감추고 중요도가 약한 약점을 대신 내놓은 것이다. 이미 처치가 끝나 알아도 큰 쓸모가 없는 약점을.

취한 것도 아니고 쓸데없는 엄살도 아니었다. 황제도 그것을 눈치챈 듯 못 본 척 고개를 돌려 궁의에게 손목의 진료를 명했다.

"뼈는 이미 끼워 넣었기에 따로 할 처치는 없습니다. 붕대를 감아드릴 테니 당분간 손목의 사용을 자제하십시오. 그리고...."

뒷말은 없었다. 무언가 더 말할 것 같던 궁의는 입을 다물고 데온을 눈물 어린 얼굴로 쳐다봤다. 그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은 모습에서 그를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래서는 곤란하다. 기껏 서로가 숨기고 모른 척한 것을 다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그만두게 해야 한다. 그러나 크루엘은 움직일 수 없었다. 공작이 보고 있었다. 그는 이미 의심받을 만한 일을 넘치도록 했기에 앞으로의 일을 위해서라도 이 이상 움직이는 것은 위험했다.

대신 황제를 돌아봤다. 다행히 그 역시 같은 생각을 한 듯 조용히 궁의를 불렀다.

"수고했으니 물러가라. 그리고 하르트 명예 백작, 그대는 이만 돌아가서 쉬는 것이 좋겠군."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데온이 등을 돌렸다. 본인이 멀쩡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듯 부축해 드리겠다며 조심스럽게 말을 붙이는 전속 기사까지 거절하고 제 발로 당당히 이 공간을 벗어났다.

마침 들어오던 수하 센제르가 힐긋 그를 보더니 크루엘에게 시선을 던졌다. 시선은 이쪽에 둔 채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펴는 행동에 크루엘이 멈칫했다.

'...몸 상태가 안 좋은 상황인데.'

꼭 해야 하나.

직접 짠 계획이다. 사람을 시켜 내내 주시하고 있었고, 드디어 기회가 왔다. 둘도 없는 기회임은 굳이 겪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계획을 이행하느냐, 미루느냐.

...고민은 짧았다. 크루엘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가는 상황을 둘러보고는 센제르에게 다가갔다. 공작이 이쪽을 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가서 데온에게 전해. 오늘만큼은 괜히 거리를 돌아다니지 말고 바로 집에 가라고."

그는.

이것이 둘도 없는 기회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데온 하르트가 황제의 손에 제압되고, 연회장을 빠져나가기까지.

이 모든 것을 조용히 지켜보던 원인 제공자 스티그마 프리미로는 스륵 눈을 내리깔며 생각에 잠겼다.

상황이 진정되고 여유가 생기니 보이는 것이 있다.

후배님, 데온 하르트의 술주정이.

'익숙해.'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다.

저런 과격한 술주정은 드물 텐데. 도대체 왜 이렇게 익숙함을 느끼는 건지.

그냥 넘길 수도 있었으나 기묘하게 거슬린 탓에 스티그마는 답지 않게 조금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조금 전의 상황을 복기하고, 머릿속에서 다시 시간을 되돌려 하나하나 뜯어 살핀다.

──황제의 대사 중 걸리는 것이 있었다.

[이제 현실에 돌아올 시간이다.]

[이곳은 전쟁터가 아니다.]

...아아.

적을 찾는 술주정. 그를 제압한 황제가 정신 차리라며 내뱉은 발언.

스티그마는 남부에서 많은 전투를 겪었다. 아마 현 공식 영웅 중에서도 가장 많은 전투를 겪었고, 현재진행형으로 겪고 있는 영웅이겠지. 그만큼 그는 이 증상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건 단순한 술주정이 아니야.'

전쟁을 겪고, 다치고, 사람을 죽이고, 사람이 죽은 것을 본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겪는 증상이 있다.

증상의 영역이 아주 넓고 다양해 다 말할 수는 없지만 일부만 추리자면 환각과 환청, 사람 많은 곳을 극도로 기피하는 증상, 극도로 공격적이거나 우울해지고 무기력해지는 증상 등이 있겠지.

그중 공격적으로 변하는 증상 같은 경우, 눈에 보이는 사람 전부가 적으로 보이거나─

──오로지 '적'만을 찾아 헤매게 되는 증상이 있다.

스티그마는 이를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줄여서 PTSD라 명명했다.

'그렇지. 그 어린 나이에 전쟁터에 나왔는데, 멀쩡한 것이 이상하지.'

육체적인 충격과 달리 정신적인 충격은 손을 댈 수 없는 영역이다. 심지어 본인조차 그 진행 정도와 심각성을 모르니 다루기 까다롭고, 사람에 따라 그때의 충격이 영원히 남아 일상생활에 강한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종종 발생했다.

데온 하르트는 14살 때 전쟁터에 나왔다고 들었다. 아직 정신이 단단히 여물지 못한 나이.

'결국 너도 인간이었구나.'

실망은 없다. 오히려 감탄이 나왔다.

술로 인해 정신력이 약화되었을 때만 이러한 증상을 보인다는 것은, 달리 해석하면 맨 정신일 때는 놀라울 정도의 정신력으로 그것을 억누르고 있다는 뜻 아닌가.

알면 알수록 흥미로운 후배님이다.

데온 하르트에 대한 호감이 더 오르는 것을 느끼며 스티그마는 보일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었다.

***

도망치듯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리엔이 부축해 드리겠다 했지만 거절했다. 오히려 다른 명령을 내렸지.

[아뇨, 괜찮습니다. 그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쫓아오지 못하도록 막아 주셨으면 합니다. 이를테면 우리 기사단원이라든가, 저기 오고 있는 단이라든가... 응? 단? 네가 왜 여기에 있… 아, 내가 데려왔구나.]

[백작님...?]

[명을 따릅니다.]

[리엔 경? 아니, 잠시만요. 백작님! 로브를 두고 가셨습니다!'

[...리엔 경, 보내 주세요.]

[예.]

잊고 있었던 단의 등장에 대충 이런 상황이 펼쳐졌다.

순순히 단을 내 앞에 보내 준 리엔이 냄새를 맡고 슬금슬금 몰려드는 우리 측 기사단원들을 붙잡아 놓겠다며 물러간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 기어이 따라가겠다며 우기다 한 대 얻어맞는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볼 수 없었다.

단과 눈이 마주쳤거든. 윽, 그 서운한 눈빛 좀 치워 줄래?

"...술 때문에 그래. 일부러 그런게 아니라 술 때문에 잠시 깜빡한 거야."

"그러셨군요."

"...미안."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어서 로브나 입으시지요."

옷시중을 들겠다는 듯 그가 로브를 입기 편하게 들어 보인다.

그 모습에서 익숙한 누군가의 모습이 비쳐 잠시 말을 잃었다. ...기분 탓이겠지?

"그... 괜찮으니까 내가 입을게."

"아닙니다. 도와 드리겠습니다."

"...에드?"

"그건 누구입니까?"

낯선… 아니, 친하지 않은 남자에게서 익숙한 남자의 냄새가 난다.

마계의 부관 에드를 떠올리며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그런 내 표정은 본 단이 흠칫하는가 싶더니 이내 양보할 수 없다는 듯 표정을 단단히 굳혔다.

제발 그런 굳건한 의지는 다른 곳에서나 내세웠으면 좋겠다.

"사죄의 의미이니 부담스러워 하실 필요 없습니다."

"사죄...?"

"제가 감히 마스터를 시험했잖습니까."

"...?"

몰라. 모른다고. 시험이라니 그게 무슨 개소리야. 도대체 언제 그런 건데?

아무튼 대충 분위기를 보아하니 절대 양보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럼 그냥 안 입으면 되겠지, 뭐.

"생각하고 보니 로브는 안 입어도 될 것 같은데. 어차피 지금은 밤이라서...."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가슴팍을 그렇게 다 까고 다니실 겁니까?"

아, 반사적으로 풀어 헤쳐진 옷깃 사이를 매만졌다. 이쯤에 마왕의 낙인이 있었지.

그것을 손끝으로 쓸고 있는데 아직 끝나지 않은 듯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눈에 띄는 외모는요? 백발과 붉은 눈은 거의 상징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줘. 입을게."

"입혀 드리겠습니다."

"...."

내 옷에 꿀이라도 발라놓았나.

어쨌든 더 거부할 수도 없어 순순히 겉옷 시중을 받았다. 사용인도 아니고, 그렇게 친하지도 않은 데다, 어쩐지 에드가 떠오르게 하는 인간에게 시중을 받다니, 기분이 이상했지만 어쨌든 이걸로 저 끈질긴 놈을 쫓아낼 수 있었으니 만족한다.

이제야 간신히 혼자가 되었네.

'처음엔 쪽팔려서 혼자 있고 싶었는데....'

엉망이 된 내 옷차림과 연회장 꼴을 보면 내가 취했을 때 무슨 짓을 한 것이 분명하다.

세상에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나고, 그 베일을 들춰 볼 용기도 없지만 알게 모르게 눈에 보이는 정황이 나를 정신적으로 두들겨 패고 있었다.

분명 그랬는데....

'지금은 정신적으로 피곤해서 혼자 있고 싶네...?'

단 너 이 자식.

내 정신을 쏙 빼서 쪽팔림을 상쇄시킬 계획이었다면 아주 성공적이었다고 말해 주고 싶다.

단을 떠올리니 머리가 다 지끈거린다. 그러니 다른 생각을 해 보자. 연회장에서 내가 취했을 때....

'이런 거 말고!'

잊고 있었던 쪽팔림이 다시 밀려온다. 빨리 다른 생각을...!

...그래, 궁의. 나를 진찰했던 궁의를 떠올리자. 그 사람이 진찰만 한게 아니라 좀 특이한 행동을 하더라.

'처음엔 내 손을 잡길래 뭔가 했는데.'

손가락으로 손바닥에 글을 썼다. 해석하고는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제가 제발 건강하시라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느낌표까지 아주 분명하게 썼었다.

어… 그래.... 그러면서 보약도 챙겨 줬었지....

황당함에 그를 보자 울망한 눈으로 시선을 마주해 오는데, 내가 다 소름이 돋았다. 나이도 드실 만큼 드신 분께서 왜 이러세요....

적절한 타이밍에 황제가 제지해 주어서 망정이지, 조금만 시간을 더 지체했다면 주먹을 날렸을지도 모른다.

'아, 젠장.'

진정은 커녕, 마음이 더 어지러워졌다. 떠올릴 생각을 잘못 선택했어.

소름이 돋은 팔을 쓸어내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어서 집에 돌아가 쉬어야지.

"하르트 명예 백작님?"

"...?"

뭐야, 피곤한데 누구야?

"안녕하십니까, 저는 크루엘 하르트 님을 모시고 있는 센제르라 합니다. 크루엘 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왔습니다."

"...."

리엔은 이런 놈을 막지 않고 뭐 했대?

...아, 내가 미친개들을 막으라 시켰구나. 몸이 여러 개도 아니고, 이런 놈 하나 정도는 놓칠 만도 하다.

크루엘의 전언이라... 무슨 개소리를 하려는 건지. 일단 해 보라는 뜻을 담아 고개를 까닥였다.

"오늘만큼은 괜히 거리를 돌아다니지 말고 바로 집에 가라 하셨습니다."

"...뭐?"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뭐야, 지가 내 보호자라도 돼? 도대체 무슨 속셈이야?

무언가 좀 더 설명을 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 그를 봤지만 녀석은 내 반문엔 답도 주지 않고 사라졌다. 상관을 닮아서 재수 없기가 하늘을 찌르네. 퉤.

'...일단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

침착하고, 생각을 해 보는 거야.

114. 사실 그들은 알고 있었다(8)

그 말은 진심을 담은 충고일까, 내 행동을 유도하기 위한 미끼일까.

내가 그의 말을 순순히 따르지 않을 것이란 걸 크루엘 역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유도인가?

'어렸을 때, 크루엘과 체스를 자주 두었었지.'

몸이 약해 저택 밖으로 나가지 못했기에 크루엘과는 여러 보드 게임을 했었다. 그중 제일은 체스였고.

게임판 안에서는 체스 말을 이용한 미끼를, 판 밖에서는 말을 이용한 심리전을.

'나라면 그쪽으로 가지 않을 거다.', '과연 그게 정말 좋은 선택일까?', '이건 좀 놀랐는데.', '탁월한 선택이야.'

어느 것이 진심이고 어느 것이 거짓일까. 내 앞에 놓인 저 말은 진정 미끼일까, 허수일까.

수없이 체스를 두며 승패를 반복했기에 이런 쪽에서 서로의 생각은 어느 정도 꿰고 있었다. 그런 크루엘이 내가 '유도'라는 가능성을 떠올리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을 리 없다. 그럼 진심이 담긴 충고인가?

'...그럼 뭐해. 걱정이어도 기분이 나쁘고, 미끼여도 기분이 나쁜데.'

그러니 내 선택은 정해졌다.

'크루엘의 말대로 따를 바엔 미끼라 해도 움직이는게 낫지.'

덕분에 피로는 잊었다. 고통은 무시한 지 오래였으니, 거리로 나간다.

나는 들고 있던 로브를 걸치며 저택으로 가려던 걸음을 과감히 돌려 가까운 거리로 향했다.

***

시끄럽다.

"도대체 언제까지 거사를 미룰 생각입니까!"

"거사를 치를 생각은 있는 겁니까?"

정말 시끄럽다.

한 치 앞도 못 보고 욕망에 찌들어 꽥꽥대는 부류들. 이런 인간들이 수뇌부라니, 머리가 아파 오는 것 같아 다니엘은 조용히 인상을 찌푸렸다가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폈다.

이 상황에서 같이 언성을 높여 봤자 감정 싸움밖에 되지 않는다. 설득을 목적으로 한 목소리가 차분히 흘러나왔다.

"시기가 좋지 않습니다. 곧 마계와 인간계의 전쟁이 터질 것 같은데, 인간계의 가장 큰 전력을 차지하는 제국을 무너트려서는...."

"혁명군의 수장이라는 작자가 지금 황제의 편을 드는 겁니까?!"

"곧 할 거다, 황제의 목을 칠 준비를 하라 할 때는 언제고, 이젠 다시 시기가 안 좋다는 말만 반복하시니…! 도대체 뭡니까! 혹시 의도적으로 거사를 미루고 있는 것 아닙니까?"

콰앙!

정적이 찾아왔다. 테이블을 거칠게 내려쳐 저들의 입을 닥치게 한 다니엘은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머리끝까지 치솟던 스트레스와 짜증이 숨을 쉴 때마다 천천히 가라앉는다. 그렇게 몇 번 호흡을 고르길 잠시, 그가 정적을 깨고 말문을 열었다.

"...이전에 멋대로 황제를 죽이겠노라 뛰쳐나간 자들이 있었지요."

호기롭게 달려든 것이 우스울 정도로 황제의 손에 의해 깔끔히 몰살된 어리석은 작자들.

"그들 때문에 기껏 보충한 전력이 원점으로 돌아갔습니다."

"...."

"제국군만 제치면 전부라 생각했습니까? 만일 정말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있다면 수뇌부 자리를 내려놓길 권하고 싶군요."

찔린 듯 몇몇이 움찔했다.

"제국군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황제 본인부터가 강합니다. 아주 강해요! 아니, 그의 무력을 논하기 이전에 정당하게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황궁의 정문을 통해 들어가야 합니다!"

이전의 그자들은 방법부터가 잘못되었다.

비겁하게 황제가 혼자 있을 때를 노려 공격한 것을 어찌 혁명이라 할 수 있을까. 그건 그냥 암살이고, 황제 시해 미수이며, 반동분자들의 반역이다.

제아무리 황제를 죽이기 위해 모인 자들이 많다 한들, 결국 이들이 내세운 대의는 신분제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혁명'이다. 그것에 어긋나는 행동은 용납할 수 없었다.

"꼭... 정면으로 들어가야 합니까?"

"당연한 걸 물으시는군요. 쥐새끼처럼 행동해 봤자 얻는 것은 그에 걸맞은 나쁜 이미지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