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프티 기사단을 보내 놓도록.]
다른 이름으로는 살인귀 기사단.
이놈들을 굳이 보내 놓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는, 너무 많은 사고를 쳐서 수습하는 게 일이라는 것.
심심해서, 짜증 나서, 기뻐서… 별의별 이유를 다 대고 매일같이 사고를 쳐 대니 그렇지 않아도 심한 두통이 더 심해지는 기분이다. 멀쩡한 건물은 왜 부수고, 왜 굳이 철검으로 저글링하다가 멀쩡한 팔을 날려 먹을 뻔하는지. 심지어 그게 자기 팔도 아니고 지나가던 시종의 팔이다.
그리고 둘째로는….
'미친놈들을 상대할 만한 놈들이 달리 누가 있을까.'
살인귀 기사단은 자타공인 미친 집단이다. 그리고 혁명군은 그들과는 다른 의미로 돌아 있는 놈들이다.
미친놈은 미친놈이 상대해야 하지 않겠나.
82. 격동하는(2)
걱정은 하지 않았다.
적어도 살인귀 기사단이 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들은 8년 전쟁 당시 상대를 짓밟고 학살을 자행했던 선봉대였으니까.
'그렇게 사고를 쳐 댔으니 몸이 녹슬지도 않았을 테고.'
그래서 이전에 그랬듯 혁명군의 상대는 데온 하르트의 기사단에게 맡겼다. 더 이상 신경 쓸 필요 없이 후에 보고만 받으면 되겠지.
황제는 회의장 가장 상석에 앉아 손잡이에 팔꿈치를 기대고 느긋이 입가를 매만지며 토론을 이어 가는 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맹수의 것과 닮은 금안이 번뜩일 때마다 의견을 주고받던 귀족들이 흠칫거렸으나 누구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지금 신경 써야 할 것은 다름 아닌 조금 전 있었던 황제의 통보. 이것으로 전쟁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못 박듯, 툭 내던져진 의제니까.
[다음 정복 상대로 어느 왕국을 선택해야 하는가.]
이레온 왕국을 굴복시키고 그 정리가 완전히 끝나지도 않은 시점에서 나온 말이었다.
애초에 전쟁을 반대하는 이들이 많았음에도 이를 걸고넘어지는 이는 없었다.
그새 마음이 바뀌어서가 아니다. 단지 지금 황제의 심기가 굉장히 나쁘다는 것을 피부로도 느낄 수 있었기에.
목숨이 소중한 그들로서는 뭐라 말도 못 하고 그저 무의미한 토론을 이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서 한 귀족이 황제를 향해 감히 입을 열었다.
"폐하, 송구하오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전쟁은 힘들 것 같습니다."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 숨을 들이켜는 주변의 귀족들.
본인도 말해 놓고 죽었다 싶었는지 눈을 질끈 감았으나, 황제는 그를 곧장 벌하지 않았다.
아예 턱까지 괸 채 회의장의 상황을 지켜보던 맹수가 천천히 팔을 내리고 자세를 바로 한다.
무표정하던 입가에 웃음 비슷한 것이 그려졌다.
"이유는?"
"병력 문제가… 큽니다."
"병력 문제라…."
황제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곧바로 알아챘다.
무어라 말하는 대신 계속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닥이자 용기를 얻은 귀족이 천천히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정복한 왕국은 존재 자체가 변수입니다. 이들을 감시하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일정 수 이상의 병력이 필요하지요. 당장 제국 내의 혁명군만 해도 그 변수의 예가 됩니다."
"그리고 짐은 전쟁을 멈출 생각이 없으니 운용 가능한 병력은 계속해서 줄어들겠지."
"예, 그렇습니다. 정복한 왕국에서 흡수한 병력을 운용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으니 그 문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커질 겁니다."
전투는 사상자를 낳기 마련이다. 당장은 괜찮을지 몰라도 이대로 다음 전쟁, 또 다다음 전쟁을 치르면 치를수록 눈덩이를 굴리듯 빈자리의 여파가 크게 와 닿을 것이다.
심지어 한 왕국을 점령하면 그곳에도 일정량의 병력이 들어간다. 이를 생각하면 앞으로 운용 가능한 병력이 대폭 줄어들 것은 뻔했다.
'8년 전쟁 때처럼 점령한 왕가를 완전히 짓밟고, 모든 병력을 쥐어짜내다시피 끌어모으면 아예 버티지 못할 것은 아니지만….'
황제가 이레온 왕국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왕족들을 살려줬다는 것에서 상황은 이미 8년 전쟁과 달라졌다.
귀족은 힐긋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아직까진 괜찮은 모양이다.
"...물자는 정복을 통해 얻을 수 있지만 병사는 아닙니다. 제국군은 여타 왕국군과 달리 제국에 대한 긍지와 충성심이 강한 군대입니다. 정복을 통해 얻은 병사는 절대 그렇지 못할 테지요."
"이, 이보게. 그쯤 하게."
이러다 황제가 터질 것 같아 옆에 있던 다른 귀족이 조심스럽게 그를 말렸다.
그와 나름의 연이 있는 다른 귀족들도 눈앞에서 친분이 있는 이의 목이 날아가는 꼴은 보고 싶지 않기에 조용히 그를 불렀다.
"그래, 병력은 평민들을 징집하면 얼마든지 보충할 수 있잖소. 당장 빈민가의 빈민들만 쓸어 와도 충분할 거요. 제국민이 제국을 위해 싸우는 것인데 충성심은 당연할 테고…."
"헛소리! 전쟁에는 병사들의 의욕 또한 중요합니다! 강제로 끌려온 자가 의욕적이면 얼마나 의욕적이겠습니까!"
"살고 싶으면 알아서 검을 들고 싸우겠지."
"그걸 지금 말이라고…!"
"그쯤 하고 본래 의제에 집중하시오, 아미아블 변경백! 설령 의욕이 적다 해도 머릿수가 있는데 어찌 감히…."
"머릿수로 밀어붙이고, 지휘관의 계책에 따라 꼭두각시처럼 운용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니…!"
저도 모르게 흥분하여 언성을 높이던 변경백, 텐더 아미아블이 무심코 고개를 홱 돌려 황제를 보았다가 숨을 멈췄다. 덩달아 생각 없이 시선을 좇은 다른 귀족들 역시 황제를 보고 잠시 호흡을 멈추고 말았다.
황제의 금안이 금방이라도 터질듯한 살기를 담고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
"...."
정적 속에서 황제가 손을 들어 턱을 매만진다. 별거 아닌 행동에도 귀족들의 몸이 크게 움츠러들었다.
"경들에게 이런 재주가 있을 줄은 몰랐군. 어찌 이리도 잘 짖을 수 있는지."
"...."
"한데, 차마 그냥 넘길 수 없는 개소리가 들려서 말이야."
한겨울 산꼭대기의 한기를 그대로 가져온 듯 서늘한 음성이 떨어졌다.
"병력은 평민들을 징집하면 얼마든지 보충할 수 있다, 라고."
압도적인 살기가 회의장 전체에 쏟아져 내렸다.
무언가 잘못됐다. 목숨이 간당간당함을 느낀 귀족들이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굳은 표정으로 그들을 둘러본 황제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고 한 자 한 자 씹어뱉듯 말하기 시작했다.
"그대들은, 평민들이 세금을 내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는 있나?"
8년 전쟁 당시 백성들을 징집한 적이 있었다. 이는 스스로의 우선순위와 이기심을 똑바로 마주하게끔 만든 불쾌한 일로 가슴 한구석에 자리 잡았다.
병력이 부족해지자 최후의 최후의 수단으로 내놓았던 방안. 이를 명하면서도 얼마나 짜증이 났던가.
죄책감과 극심한 자기혐오에 빠지고, 악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게 만든 그 일을 아무렇지 않게 방안이랍시고 내놓다니.
"세금은 보호와 복지의 대가다."
세금을 거두는 대신 그들을 지켜주고 먹고살 수 있도록 돌보는 것이다.
그것이 영지를 가진 귀족의 의무이고, 황제의 의무일진대.
"그런데, 세금을 그렇게 받아먹으면서 병력이 부족하면 곧장 백성부터 징집하자고 한 건가, 방금?"
복지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도 아니고, 자신조차 행하지 못한 것이니.
하지만 못해도 보호는 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본인의 사병을 내놓겠다, 본인이 직접 전쟁에 나가겠다! 이런 말도 아니고 고민도 없이 백성의 징집을 말해!"
"...."
"그래 놓고 한다는 말이 제국민이 제국을 위해 싸우는 것인데 충성심은 당연한 것이다? 입으로 짖는 것에도 정도가 있지, 도대체 무엇을 착각하고 무슨 말을 내뱉는 것인가! 제국민이 제국을 지키는 것은 선택이고, 제국이 제국민을 지키는 것은 의무다! 제국민들은 제국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단 말이다!"
"어찌 평민이…."
"그럼! 제국이 제국민들을 제대로 대우하지 않는데 제국민들이 제국에 눌러앉아 지키고자 무기를 들 것 같더냐! 착각도 유분수지, 우습기 그지없구나. 그 알량한 자리가 돌아선 제국민들에 의해 무너져 내리고, 단두대 위에 그대들의 목이 걸쳐질 것이 벌써부터 눈에 훤해."
"폐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말이 지나쳐?"
자신이 이리도 화를 내는 이유를 저들은 정녕 모른단 말인가.
8년 전쟁 때, 병력이 부족해지자 황제는 가장 먼저 귀족들에게 참전을 명했다. 그러니 이러한 방법이 있음을 그들이 모르진 않았을 테지.
그저 그들에겐 제국민보다 제 안위와 재산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전쟁을 밀어붙인 내게 화를 낼 자격은 없지만….'
황제가 제정신이 아니면 그 아랫사람들이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것 아닌가. 같이 정신을 놓아버리면 어쩌자는 건지.
역겹다. 이들도, 자기 자신조차도. 그래서 주체할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옥좌에 기대 세워 놓았던 검 손잡이를 콱 움켜쥐었다.
그가 이러한 자신의 행동을 자각한 것은 재상의 헛기침 소리를 들었을 때였다.
"크흠."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조금 누그러진 분위기에 다른 이들도 정신 차렸는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귀족들이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신이 아둔했습니다."
"...그래, 아둔했지."
희게 질린 귀족들의 안색을 둘러본 황제가 검 손잡이를 놓고 얼굴을 쓸어내렸다. 시야 한쪽에 검은 망령이 어른거린다.
무엇 때문일지는 굳이 고민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말을 뱉었다.
"그것이 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위에 선 이가 아둔한 것은 죄가 된다. 그대들이 작성하는 서류 한 장, 내뱉는 말 한마디에 얼마나 많은 이들의 삶이 정해지는지 알고 있지 않나. 그대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듯하군."
"면목 없습니다."
"...아미아블 변경백에겐 미안하지만 짐은 전쟁을 미룰 생각도, 그만둘 생각도 없다. 그러니 이참에 확실히 말해 두지. 만일 병력이 부족해질 시, 짐은 가장 먼저 그대들에게 참전을 명할 것이다."
8년 전쟁 중 그랬던 것처럼.
"기준은 그때와 같다. 가문에 사내가 둘 이상인 경우 절반 이상의 사병과 함께 한 명은 무조건 참전, 그렇지 않을 시 2/3 이상의 사병을 내놓는 것으로."
"...."
"평민 징집은,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일 뿐이다."
"...."
침묵하는 귀족들을 잠시 말없이 보던 황제가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며 다리를 꼬았다.
한결 편해진 그의 자세에 귀족들의 분위기 역시 조금은 편해지고, 잠시 추스를 시간을 준 황제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다시 본 의제로 돌아가도록 하지."
다음 전쟁은 어느 왕국과 하는 것이 좋겠나?
....
회의를 파하고 곧장 집무실에 돌아온 황제는 검을 한쪽에 던져 두고 의자에 앉았다. 책상에 양 팔꿈치를 올리고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그가 무심코 책상 위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회의 전까지 살펴보던 도자기가 하나 놓여 있었다.
이레온 왕국의 전리품 중 하나.
왕실 도자기라 했던가.
공예품에는 문외한이라 이렇다 할 안목이 없음에도 대단하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정교하고 선이 고왔지.
그리고 그때 했던 생각이….
'이것을 팔아 전쟁 자금으로 바꿀 수는 없나.'
의식적으로 회의장에서의 불쾌한 일을 떠올리지 않으려 하며 눈앞의 물건에 집중했다.
그러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도자기를 이리저리 둘러보던 황제가 바닥도 확인하려 들어 올렸을 때, 무언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흰 도자기에 자리 잡은 검은 얼룩.
무언가 묻은 건가 싶어 엄지로 문질러 보지만 손에는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는다.
말끔한 제 엄지를 물끄러미 보던 황제가 다시 시선을 도자기로 옮겼다. 그의 시선이 닿자, 검은 얼룩이 움직였다.
꿈틀, 하고.
그리고 화아악─
종이에 잉크가 번지듯 도자기가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똑똑.
"폐하, 아르달입니…."
쨍그랑!
무언가 깨지는 소리에 문 앞에 서 있던 재상 아르달의 표정이 굳었다. 허락도 구하지 않고 급히 문을 열고 들어간 그의 두 눈이 집무실에 펼쳐진 참상을 목격하고 점점 커진다.
깨져 있었다.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귀한 왕실 도자기가.
"폐, 폐하… 지금 이게 무슨…."
입술이 덜덜 떨린다. 이어서 흘러나온 신음 같은 목소리에 '아' 하고 건조한 탄성을 뱉은 황제가 무심히 답했다.
"...도자기가 못생겼다. 불량품인 모양이더군."
"못…! 폐하께서는 도자기를 볼 줄 모르시잖습니까!"
재상의 외침은 언제나 그렇듯 외면당했다. 황제는 물끄러미 깨진 도자기 파편을 내려다보았다.
...환각이 심해졌다. 일상에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는데.
도자기를 집어삼켰던 그것은 분명 환각이었다. 현실에는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어디까지나 정신의 영역에 머무르는 존재.
고개를 들었다. 재상의 뒤에서 이쪽을 보며 낄낄거리는 검은 무언가와 눈이 마주쳤다.
'....'
하, 황제는 보란 듯이 웃었다.
사고를 쳐 놓고 지금 웃음이 나오시냐며 재상이 얼굴을 찌푸렸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회의실에서 기분이 저조했던 것 역시 이 때문이었다. 정무에 집중해야 하는데 자꾸만 방해하니 어찌 기분이 좋을 수 있을까.
어차피 천수를 누릴 생각도 없건만, 왜 이리 재촉인지.
'인내심도 없는 놈들이군.'
83. 격동하는(3)
황제가 조소를 짓는 사이, 척척 걸어가 쌓여 있는 서류를 뒤져 보고서 한 뭉치를 꺼낸 아르달이 종이를 몇 장 넘기더니 펜을 꺼내 그 자리에서 내역을 수정하며 보란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왕실 도자기 3개…."
왕실 도자기 개수에 두 줄을 찍찍 긋고 새로 3을 적어 놓은 그가 보고서를 제자리에 돌려놓으며 투덜거렸다.
회의실에서도 그렇고, 이젠 하다 하다 귀한 도자기까지 깨다니.
황제가 폭군을 자처하긴 하지만 그도 나름의 선을 정해 놓고 행동했었는데, 요즘은 좀 이상하다.
제가 아는 황제라면 하지 않았을 짓들이 연속해서 펼쳐짐에 품었던 의문들이 최근 들어 급격히 쌓인 불만과 뒤섞여 속속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폐하 요즘 이상하신 거 아십니까? 이 중요한 시기에 틈만 나면 멍하니 있고, 어쩔 땐 과하게 예민해지시고, 뭘 보고 있는 것 같아 확인해 보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나 보고 있고. 마치…."
우뚝, 아르달의 행동이 멈췄다.
기묘한 정적 속에서 그의 동공이 커지고, 허공에서 멈춘 손이 달달 떨린다.
고개를 돌려 황제를 쳐다봤다.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건지, 아니면 정답을 꼬집을 때까지 모르쇠로 일관하겠다는 건지, 황제는 침묵하고 있었다.
"...헛것이라도 보는 것처럼."
"...."
돌아오는 대답이 없음에 아르달은 도리어 확신했다. 그것이 어디에서 기인된 것인지도.
"의원은 부르지 않으셨겠군요."
책임의 탈을 쓴, 죄책감.
"그래."
"하…."
무례라는 것도 잊고 이마를 짚었다.
아르달은 황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에도아르도 데세르트는 그가 아는 모든 사람들 중 가장 설명하기 힘든 인간이었다.
그래, 인간.
전투와 서류작업, 심지어는 일상생활마저도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해내던 황제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곱씹다가 이내 쓰게 웃었다.
그도 결국은 인간인 것이다.
"적아는 구분 가능하십니까."
"아직까지는."
"예, 반드시 그러셔야 할 겁니다. 폐하께서 판별력을 잃고 아군에게 검을 휘두르는 순간, 황권은 교체가 될 테니."
자신이 직접 나서서 황제를 교체하는 데 앞장서겠다는 뜻이다.
황제는 그 말의 뜻을 명백히 알아들었음에도 뭐라 하지 않았다. 아르달에게 있어서 최우선은 '제국'이라는 것을 알기에.
욕심만 그득한 이들 사이에서, 이런 자가 하나 정도 있어도 나쁘지 않잖은가.
"황태자 전하와 황녀 전하는 알고 계십니까?"
"황태자는 안다."
"그렇다면 황녀 전하께서도 알고 계실 가능성이 크군요. 진찰을 받으라는 청은 없으셨습니까? …아니,"
당연히 있었겠지. 질문을 바꿔야겠다.
"폐하께서는 여전히 진찰을 받을 생각이 없으십니까?"
"없다. 그보다 재상,"
더 이상 그에 대해 대화 나누고 싶지 않다는 듯 황제가 단호히 화제를 바꿨다. 무어라 하려던 아르달이 이어진 말에 입을 다물었다.
정확하게는 지도의 어느 한 곳을 짚은 황제의 행동 때문에.
"그대도 회의에 참여해서 알겠지만, 다음 전쟁 상대는 스라한 왕국으로 정해졌다. 짐은 이 지역부터 공격해 들어갈 생각이니, 이 지역의 특징이 정리된 서류를…."
"진심이십니까."
아르달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말이 끊긴 황제가 고개를 든다. 침묵 속에서 눈이 마주쳤다.
맹수의 것과 같은 화려한 금안은 언제나 그렇듯 강한 의지를 담고 스스로의 영혼을 제물 삼아 강렬히 타오르고 있었다.
말없이 그를 보던 아르달이 천천히 입을 열어 침묵을 몰아냈다.
"상태도 좋지 않으시면서요."
"그건 정신의 영역이지 육체의 영역이 아니지 않은가."
"정신은 곧 육체에 영향을 끼치기 마련입니다."
여타 귀족들이 그러하듯 아르달 역시 이 전쟁이 달갑지 않았다.
이레온 왕국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굳이 다른 왕국들을 건드려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지 않은가. 물론 황제의 목적이 대륙 정복인 만큼 그런 것은 신경도 쓰지 않겠지만….
무엇보다 그는 황제가 대륙 정복을 목적으로 삼은 이유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황제의 상태가 좋지 않음을 확인했을 때, 계획을 취소하진 않더라도 최소한 전쟁을 미룰 것이라 생각하고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재상은, 이미 회의까지 한 계획을 뒤엎으라는 건가?"
"...하지만."
그것이 회의에 참여한 귀족들을 무시하는 처사가 된다는 건 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건 미친 짓입니다."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황제는 제국의 전력에서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한다.
괜히 제국의 암묵적인 첫 번째 영웅이 황제라는 이야기가 있겠는가. 황제는 용사의 파편을 지닌 이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자다.
지휘관으로서도, 한 명의 장수로서도 핵심 비중을 차지하는 그의 상태가 좋지 않은데 전쟁을 강행하겠다니.
전쟁이란 자칫 삐끗하기라도 하면 수많은 이들의 목숨이 단숨에 증발하는 위험한 것이다.
황제의 상태가 악화되어 사리 분별 못 하고 그릇된 명을 내리거나 적아 구분 없이 검을 휘두르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안다."
"한데도 왜…!"
"글쎄…."
생각에 잠기듯 금안이 조용히 내리깔렸다. 속눈썹이 길게 드리우며 음영을 자아낸다.
말없이 바닥의 깨진 도자기 파편을 눈에 담던 황제가 이내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재상을 쳐다봤다.
속을 알 수 없는 목소리가 가만가만 흘러나왔다.
"미친놈이 미친 짓을 하겠다는데, 이유가 필요한가?"
쾅!
이어진 소음에 느른하게 웃던 황제가 즉시 미소를 거뒀다. 황금색 눈동자가 아래로 내려가 책상을 내리친 손을 확인하더니 다시 올라가 그 주인을 담는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이를 악문 재상의 얼굴을 표정 없이 보던 황제가 나직이 물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재상?"
"미칠 거면 곱게 미치고 죽고 싶으면 애꿎은 제국민들 희생시키지 말고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 죽으십시오! 자학을 하고 싶으면 제국을 움직이지 말고 제 몸에 칼집을 내란 말입니다!!"
결국 터져 버렸다.
황제의 눈동자에 차가움이 돌았으나 아르달은 두렵지도 않은지 거침없이 분노를 터트리며 지금껏 참아 왔던 말을 쏟아 냈다.
황제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만큼, 또 누구보다 제국을 위하는 만큼, 화가 났다.
"전쟁에 희생되는 병사들 또한 제국민이라는 것을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겠지요. 그런데도 어찌하여 전쟁을 밀어붙이시는 겁니까! 죽은 뒤에 책임을 다하면 그게 전부랍니까! 어째서 아예 전쟁을 치르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배제해 두시는 겁니까! 왜 당신의 사적인 목적에 제국민들이 희생되어야 하고 제국이 이용당해야 하는 겁니까! 도대체 왜!!"
"재상."
"책임, 좋습니다. 인간이라면 무릇 짊어져야 마땅한 것이니까요. 그런데… 그런데 어째서,"
황제의 첫 번째가 '책임'인 줄 알았던가. 아니다. 황제는 책임을 우선시하지만 그것이 첫 번째인 건 아니었다.
만약 황제가 정말 책임을 최우선으로 여겼다면,
"당신에겐 제국민과 제국보다 다른 것에 대한 책임이 더 우선인 겁니까!"
죽은 형제자매에 대한 책임보다 제국과 제국민을 더 우선시했을 테니까.
그에게 있어 첫 번째는….
'죄책감.'
책임은 1등 없는 2등이라고 해야 할까. 애초에 '죄책감'은 목록에조차 들어갈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니.
황제는 책임이라는 이름을 붙인 죄책감을 최우선으로 여기고 있었다.
결국 그 역시 죄책감에 휘둘리는 한낱 나약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재상."
"...."
아르달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한없이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를 말 없이 보던 황제가 이내 한 자 한 자 곱씹듯 천천히 말을 뱉었다.
"짐이 곧 무어라 했지?"
"...하."
결국 이야기는 돌고 돌아 이렇게 결론이 난다.
저 말의 뜻이 '짐이 곧 제국이기에, 제국을 소홀히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걱정 마라'라는 의미인지, 아니면 그저 '짐이 곧 제국이니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해'라는 의미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건 결론은 하나였다.
황제의 뜻대로.
조용히 황제를 노려보던 아르달이 책장에 보관된 서류철을 뒤져 그중 하나를 꺼내 책상 위에 놓고 슥 밀었다.
"...이미 준비해 두었습니다. 폐하께서 말씀하신 그 지역의 특징."
"...."
"제가 폐하를 하루 이틀 본 줄 아십니까. 예상 정도는 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판단을 내릴지, 전쟁을 치른다면 어느 경로로 갈지. 전부.
[짐이 곧 제국.]
이 말을 '에도아르도 데세르트'가 아닌 다른 이가 했더라면 아르달은 상대가 자신을 거두어 준 사람이라 해도 가차 없이 떠났을 것이다.
보통 이 말을 하는 사람은 역사서에 길이길이 남을 답 없는 폭군이고, 그런 폭군이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수 있을 리 없으니까.
하지만 에도아르도 데세르트는….
"무얼 하든 폐하 마음대로 하십시오. 어차피 제게는 폐하를 말릴 깜냥도 되지 않거니와…."
제국을 버리지만 않는다면 어지간해서는 눈감아 드릴 테니까.
뒷말은 조용히 삼켰다. 서류를 넘기던 황제가 그의 생각을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한다.
'...그래.'
아시겠지.
당신이 제국을 손에서 놓아 버린다면, 그때의 당신은 황제가 아닐 테니.
나로서는 내 모든 역량을 동원해 당신의 목을 치고, 그 머리를 성벽에 걸어 둘 것이라는 걸.
아르달은 황제의 눈을 마주 보다 이내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날, 제국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또 하나의 왕국에 선전포고를 했고,
분명 상대가 크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자꾸만 전쟁을 하려는 제국의 행보를 의심스럽게 보던 몇몇 왕국은, 무언가 깨달은 듯 급히 전시체제에 돌입했다.
대륙에 피바람이 불 것을 예고하는 순간이었다.
***
현재 제국에는 네 명의 공식적인 영웅이 존재한다.
8년 전쟁을 배경으로 등장한 세 영웅, 그리고 그 후 추가적으로 공을 세워 영웅으로 인정받은 네 번째 영웅.
8년 전쟁의 세 영웅은 수없이 등장해 영웅이라 불리다 끝내 죽어 잊힌 이들 속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그 이름을 지켜 낸 이들이다.
그런 만큼 이들의 공로는 만만치 않았다.
첫 번째 영웅은 전쟁의 시작과 동시에 황제의 강력한 지지를 기반으로 총사령관의 자리에 올라 전투를 진두지휘했고,
두 번째 영웅은 전쟁 초반부터 두각을 드러내 거침없이 적들을 베어 넘겨 그 시신으로 산을 쌓아 명성을 떨쳤으며,
세 번째 영웅은 전쟁 초중반부터 선봉장으로 나서며 멀쩡한 시신 하나 남기지 않는 잔혹한 진가를 드러냈다.
스티그마 프리미로는 그중 두 번째 영웅이었다.
"이레온 왕국이 벌써 항복을?"
"예."
"그럴 거였으면 왜 도발했는지 모르겠구나. 버러지 같은 놈들."
제국식 복장에서 조금 거리가 먼 시원스러운 옷을 걸친 사내의 눈에 혐오가 스쳤다.
나약한 것들을 싫어하는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이미 후처리까지 끝난 패배자들에게 신경을 낭비하고 싶지 않은 듯 그가 꼬고 있던 다리를 내린다.
그는 대충 들고 있던 피 묻은 검을 거꾸로 세워 아래로 내리찍고는 그 위에 두 손을 얹고 턱을 괴었다. 나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서, 폐하께서 나는 왜 부르신 거니?"
"전쟁을 준비하라 하셨습니다."
"전쟁? 전쟁은 이미 끝나지 않았… 설마."
사내의 두 눈이 커졌다.
놀란 것도 잠시, 무언가 확신을 얻은 듯 그가 입술을 비틀었다.
"크핫."
"...."
"크하하하하하!!"
시원스러운 웃음소리가 하늘에 펴져 나간다.
그렇게 한참을 웃던 사내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역시 폐하시군."
드디어.
들릴 듯 말 듯 한 혼잣말을 뱉으며 스티그마가 몇 번 더 웃음을 토했다.
황제가 전쟁을 그렇게 끝내지 않을 거라 예상했다. 8년 전쟁 당시 그의 움직임은 마치 대륙 정복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았기에.
대륙 정복을 향한 황제의 움직임 자체가 기쁜 것이 아니다. 스티그마는 자신이 전쟁에 참전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공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이번에야말로.'
공에 대한 대가로 가문의 멸문을 청할 것이다.
그때 그 녀석처럼.
84. 격동하는(4)
제국의 세 번째 영웅, 데온 하르트.
그에 대한 호의를 숨김없이 드러내며 스티그마가 질문을 던졌다.
"그 전쟁에 내 후배님도 오시니?"
"데온 하르트 명예 백작이라면 아마 늦게라도 참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긴, 그 좋은 패를 황제가 아껴 둘 리 없으니.
"어서 만났으면 좋겠구나."
스티그마는 그가 좋았다.
전쟁 영웅들에게 공을 치하하는 상을 내릴 때, 순서는 두각을 드러낸 시기 순이었다.
그렇기에 스티그마는 무엇을 바라느냐는 황제의 물음에 앞서 대답한 네메세우스처럼 딱히 없다 답했고, 후작의 작위와 남부의 드넓은 영지, 상당량의 돈과 보석을 받았다.
당시엔 만족스러웠다.
딱 그다음, 황제와 독대를 청한 데온 하르트가 무엇을 청했는지 알게 되기 전까지만.
'제 손으로 가문을 멸문시키는 것을 허락해 달라 하다니.'
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았다. 어떻게 그런 발상을 할 수 있는지.
충격을 넘어 희열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동시에 대화 한번 나누지 않은 데온 하르트에게 호감이 생겼다.
물론 조금 아쉽기도 했다. 공에 대한 포상을 말하기 전에 그 방법이 있음을 알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런데 데온 하르트 명예 백작은 후작님의 후배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는 어릴 적부터 전쟁이 있기 전까지 저택에서만 지냈다고 들었습니다."
"같은 영웅이니까. 난 두 번째, 그 아이는 세 번째."
피식피식 웃으며 꽂혀 있는 검을 지지대 삼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울퉁불퉁한 땅을 밟고 서는데, 발밑에서 미약한 움직임이 전해진다. 스티그마의 눈동자가 힐긋 아래로 향했다.
"아, 이런."
아직 살아 있었군.
혹시 몰라 주위를 둘러보니 아직 숨이 붙어 있는 놈들이 간간이 보인다.
어쩐지 의자가 불편하더라니.
바닥에, 아니 누군가의 배에 박아 넣었던 검을 빼 들었다.
그대로 꿈틀거리는 놈의 목을 찌르며, 스티그마는 차갑게 명했다.
"숨이 붙어 있는 놈들이 있으니 확실히 찾아내서 죽이렴. 아니, 어차피 전염병 문제도 있고… 그냥 아예 불을 지르는 게 낫겠어."
"예."
그럼 모처럼의 전쟁이니 이만 준비를 하러 가 볼까. 어차피 일상이 전투이니 준비할 것도 별로 없겠지만.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늘어뜨린 채 스티그마가 걸어 나간다.
그의 뒤로는 시체의 산이 이루어져 있었다.
그가 앉았던 의자… 시신 더미에서 불길이 치솟는다. 이어서 여기저기서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스티그마 프리미로.
제국의 두 번째 영웅으로 후작위를 받은 자.
그가 받은 영지는 야만족이라 불리는 바르바이족과 매일같이 전쟁을 치르는 제국의 최남단이다.
황제가 그를 싫어해서 하사한 것이 아니다. 제국 남부 출신으로 야만족들에게 많은 유감을 갖고 있던 스티그마가 바란 것이었다.
황제의 암묵적인 학살 허용 아래, 습하고 험한 남부에서 전염병과 싸우고 야만족과 싸우며 악착같이 커간 그의 세력이 얼마나 강대하겠는가.
이미 남부에서 하나의 군벌을 이룬 스티그마가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기쁘게 전쟁 준비를 명했다.
***
어….
마차에서 눈을 휘며 어서 타라고 손짓하는 드벨라니아를 떨떠름한 얼굴로 보던 나는 배웅 나온 마왕을 돌아봤다.
언제나처럼 웃고 있는 얼굴이 어째서인지 마왕의… 아, 마왕 맞지.
"역시 무르는 건…."
"당연히 안 되지."
"사직은…."
"농담도."
젠장.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으로 땅에 박힌 듯 멈춰 있던 걸음을 억지로 뗐다.
순탄치 않은 미래를 알려 주기라도 하듯, 내 목에 걸린 마력석 목걸이가 존재감을 과시하며 달랑달랑 흔들리고 있었다.
....
내가 불길함을 느낀 것은 두 번째 도시로 출발하기 약 30분 전이었다.
에드가 부관의 역할에 충실하게 출발 전 마지막 점검을 하던 때.
"2군단장은 2군단을 대동하고 가겠다 합니다. 데몬 님께서는 여전히 0군단을 데리고 가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를 완전무장시키던 에드가 허벅지 부근의 단검집 매듭을 단단히 매며 입을 열었다.
"네, 2군단까지 같이 간다니 그걸로 충분합니다."
아니, 오히려 넘치지. 고작 옷 사러 가는 건데, 호위로 한 개의 군단이 나설 정도면….
더해서 드벨라니아가 날 죽이려 들 이유도 없으니 굳이 보기만 해도 정신력이 깎이는 0군단을 데려갈 필요도 없다.
이곳이 인간계였다면 절대 확신하지 않았겠지만, 이곳은 마계… 아니, 마왕성이다.
같은 군주 아래 있으면서도 군주를 따르는 자와 따르지 않는 자, 또 그 사이에서 서로 권력다툼을 하며 끊임없이 분열하는 인간들과 달리, 마족들, 특히 마왕성의 군단장들은 그런 것 없이 오로지 마왕만을 따른다.
그렇기에 같은 군단장을 죽여 마왕의 전력을 깎는 멍청한 짓은 알아서 자중한다는 것.
물론 화가 나면 죽이진 않아도 그 직전까지 만들어 놓기 때문에 내가 마음 편히 지내지 못하는 것이지만….
'어쩌다 우연히 군단장 간의 싸움을 봤는데, 그게 어찌나 살벌하던지.'
그런 식으로 날 공격하면 분명 난 죽는다.
그런 만큼 언제나 모든 행동에 있어 매사 조심해 왔으니 드벨라니아의 심기를 거스르지도 않았을 테고, 새삼 그런 일을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 특별히 걱정할 것은 없는데….
그런데 왜.
"그렇습니까… 역시 0군단은 데몬 님께 방해만 되는 모양이군요."
"...네?"
"차라리 데몬 님 혼자 가는 것이 편하실 정도라니…."
"...?"
"훈련 강도를 좀 더 높여야겠습니다."
에드의 반응이 이 모양인 거지…?
"물론 그것으로 데몬 님을 따라잡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발목은 잡지 않도록…."
"...."
이것이 내가 느낀 첫 번째 불길한 징조였다.
두 번째는 리리넬이었다.
한 손에 익숙한 모양의 목걸이를 쥔 채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방에 찾아온 그녀는 대뜸 들뜬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데몬 님, 또 마왕성을 나가신다면서요?"
"네, 두 번째 도시에 갈 예정입니다."
그런데 그게 왜…?
"왜 그것만 말씀하세요. 외곽으로 돌면서 가신다고 들었어요."
"네…."
그러니까 그게 왜…?
"데몬교의 교주 된 자로서 그런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죠! 그래서 이걸 준비했어요!"
눈앞에 익숙한 목걸이가 들이밀어졌다.
아니, 그 전에 뭔가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뭐, 무슨 교?
이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냥 지나쳤다간 분명 후회할 거야.
...라고 외치는 본능의 경고에 착실히 따르며 입을 여는데, 리리넬이 한 발 더 빨랐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단어에 백지가 된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둔 그 몇 초의 공백을 기다리지 않고, 그녀는 목걸이를 내 손에 쥐여 주며 자랑스레 말했다.
"저번이랑 마찬가지로 보호 마법이 새겨진 목걸이예요! 목숨을 위협할 만한 공격에 반응할 거고요, 거기에 더해 한번 착용하면 소유주를 자동 인식해 빼놓거나 잃어버려도 알아서 돌아오는 기능도 추가했어요!"
"고맙습니다. 그런데 방금…."
"아, 그리고 목걸이가 깨지면 저를 자동 소환하는 기능도 추가…."
와….
절대 착용하지 말아야지.
"…하려고 했지만 마법 낭비에 전력 낭비라고 마왕님께 혼나서 못했어요. 죄송해요…."
"다행…이 아니라, 이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고맙습니다."
"뭘요. 자 어서 착용해 보세요!"
순간 멈칫했지만 그건 잠시였다.
껄쩍지근한 기능도 다행히 넣지 않은 것 같고, 리리넬이 내게 해를 끼칠 이유도 없으니… 나는 곧장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소유주를 인식한 목걸이가 잠시 빛났다가 잠잠해진다. 그제야 말할 틈을 얻은 내가 또다시 선수를 빼앗기기 전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조금 전부터 머릿속을 맴돌던 리리넬의 발언.
이어진 대화에 짚을 타이밍을 놓치고 흘러가 버리긴 했지만 워낙 강렬했던 탓에 도저히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그보다, 그, 무슨… 교주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
"아, 데몬교요?"
"쿨럭."
세상에. 잘못 들은 게 아니었어! 데몬교라니, 이름부터가 나랑 연관 있다는 게 딱 느껴지잖아!
일단 침착하기 위해 리리넬이 서둘러 내민 물잔을 받아 들었다. 한 모금 넘기니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는 기분이다.
"괘, 괜찮으세요?! 주치의를 불러야…!"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그 데몬교라는 게…."
"데몬 님을 숭배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죠!"
"푸흡-"
어디까지나 잠시였지만.
조금 더 마실까 싶어 입에 머금었던 물이 고스란히 다시 튀어나왔다.
이런 젠장. 기도로 넘어갔잖아.
"커흡, 쿨럭쿨럭!"
"어, 어떡해! 역시 주치의를…!"
"아, 콜록, 아니, 됐… 쿨럭쿨럭!"
망할, 쉽사리 기침이 멈추지 않는다. 어서 진정해야 하는데….
기겁한 리리넬이 서둘러 주치의를 불러오겠다며 일어서는 것을 급히 손을 뻗어 붙잡아 두고, 몇 번을 더 기침하고 나서야 겨우 진정한 나는 고개를 들어 리리넬을 눈에 담았다.
그녀는 어째서인지 제 옷깃을 잡은 내 손을 감격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기분 탓이겠지?
"리리넬?"
"네? 아, 네! 이제는 좀 괜찮으세요?"
"네… 그건 그렇고,"
데몬교라… 그런 괴상망측한 이름과 목적을 가진 종교를 믿을 멍청한 놈은 얼마 없겠지만서도.
분명 얼마 못 가 사라질 것이라는 머리와 달리, 불길해하는 본능과 호기심을 무시하지 못한 나는 결국 슬쩍 입을 열었다.
"그… 데, 몬교를 믿는 이들의 수는 얼마나 됩니까?"
"일단 내성의 사용인들은 거의 전부가 믿고 있다고 보시면 되고요, 외성에도 1/3 정도는 믿고 있을 거예요."
생각보다 많잖아?! 근본 없는 종교가 마왕성을 잠식하고 있는데 마왕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사실 마왕님도 관심을 보이셨어요."
그야, 당연하지.
어느 군주가 사이비 종교가 세를 불리는 걸 그냥 보고만 있겠어?
역시 마왕. 마냥 가만히 있는 건 아니었….
"부교주 자리는 없냐고 하셨죠."
"이런 미친."
"네?"
"아닙니다."
확실히 가만히 보고만 있진 않았네. 미친 짓을 하셨어.
그래서 설마 지금 마왕이 부교주라는 건 아니겠지…?
이어질 충격에 대비하기 위해 들고 있던 물컵을 슬쩍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괜히 놓치거나 해서 또 괜한 소동을 벌일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마왕님께서 들어오시면 데몬교는 정치적 의미를 가진 공식적 단체가 될 테니 결국 포기하실 수밖에 없었죠. 굉장히 아쉬워하시더라고요."
음, 뭐….
각오했던 것 외로 충격은 없었지만….
'....'
난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리리넬이 왜 하필 외곽으로 간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목걸이를 준 건지 다시 한번 생각했어야 했다.
그리고 세 번째 불길한 징조를 느낀 것은 벤이 동행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였다.
정확하게는 마왕의 명령에 동행하기 위해 합류한 벤이 2군단장 드벨라니아와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에서.
시간이 다 되어 1층에 도착한 나는 마차 입구를 막아선 채 팔짱을 끼고 있는 드벨라니아와 삐딱한 태도로 그녀를 올려다보는 벤을 볼 수 있었다.
"난 데몬 님과 단둘이 가는 줄 알았는데-"
"마왕님의 명령이십니다. 그리고 단둘이 가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2군단은 뭐고요."
"아무튼 마차 안에 타는 건 단둘일 예정이었단 말이지이."
"그러십니까. 그것참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데몬 님의 건강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이상 제 동행은 당연합니다. 심지어 두 번째 도시로 곧장 가는 것도 아닌 '외곽으로' 돌아서 가지 않습니까."
또, 또 '외곽'이다.
외곽으로 좀 돌아서 가는 게 뭐가 문제라고 다들 언급하는 건지. 단지 시간이 좀 걸리는 게 전부 아닌가?
힐긋 시선을 내려 대충 걸친 로브 아래의 무장 상태를 확인했다.
전쟁터라도 보내는 것처럼 에드가 단단히 무장시킨 탓에 확실하게 착용된 여섯 개의 단검.
'뭔가 좀… 아닌 것 같은데?'
절대 옷만 사러 가는 게 아닌 것 같다. 지금이라도 안 가겠다고 물러야 하나?
85. 휴가 아닌 휴가(1)
뒤늦게 의심이 치밀어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이, 불쑥 누군가 옆에 나타났다.
그는 경계하며―사실은 흠칫 놀라서―한 걸음 물러선 이쪽엔 시선도 던지지 않고 끝도 없을 것 같던 저 둘의 신경전을 단박에 끊어 놓았다.
"그래 드벨라니아. 혹시 모를 사태는 대비해야지."
"...쳇."
드벨라니아가 혀를 차며 물러서고, 벤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숙인다.
마왕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나를 눈에 담았다. 눈이 마주치자 흰자와 검은자 색이 뒤바뀐 역안이 슬며시 휘어진다.
"0군단은 데려가지 않는다면서?"
"...네."
"역시 방해되어서 그래? 아니면 네 몫을 빼앗기기 싫다거나?"
"네?"
이전부터 슬며시 소리를 내고 있던 경종이 뒤늦게 마구잡이로 울리기 시작했다.
너무 늦은 본능의 경고에 나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뭐라 답하지도 못하고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옷 사러 간다는 건 핑계고, 아무리 봐도 싸우러 가는 느낌인데. 지금이라도 튀어야 하나.
그러나 그런 내 미미한 시도는 곧장 수포로 돌아갔다.
"그럼 어서 다녀와. 모든 준비는 다 되었으니 출발만 하면 돼."
우연인지 의도한 것인지, 검은 손톱이 인상적인 흰 손이 내 어깨에 얹어졌다. 나는 그 손을 물끄러미 보다가 표정 없는 얼굴로 마왕을 쳐다봤다.
그리고 내 존재를 눈치채고 어서 타라며 손을 흔드는 드벨라니아를 한 번, 다시 마왕 한 번.
"역시 무르는 건…."
"당연히 안 되지."
....
출발하고 처음 한동안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
단지 드벨라니아와 벤의 신경전에 하도 눈치를 보다 보니 상당히 피곤했을 뿐이지.
덜컹덜컹.
형편없이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나는 멀미와 두 마족의 기 싸움, 두 종류의 공격을 버티기에 여념이 없었다.
"주치의는 이제 그만 내려서 뛰어가지 그래?"
"죄송하지만 주치의는 담당 환자를 언제든 돌볼 수 있는 거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럼 지붕 위에라도 올라가 있든가. 위험한 일이 생기면 신호 줄 테니-"
"마차도 넓은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만."
신경 쓰지 말자.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신경 쓸 필요 없는 일이야. 그러니까 무시하… 우욱, 멀미가.
'신이시여.'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
참고로 난 무신론자다. 무신론자가 신을 부르짖게 만들다니, 이 악독한 놈들.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와중에 심기가 한껏 비틀린 드벨라니아가 팔짱을 낀 채 특유의 말꼬리를 늘인 말을 뱉었다.
"한때 마왕님의 주치의였다고 아주 콧대가 높구나아?"
"지금은 0군단장님의 주치의이지요. 제 콧대가 높은 것은 당연합니다."
"군단장은 즉결 처분권을 갖고 있는데, 그 대상이 네가 되고 싶지 않다면 정신 차리지 그래?"
"0군단장의 주치의를 감히 건들고도 무사할 자신이 있으시다면 어디 한번 해 보시지요. 주치의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알려 드리겠습니다."
아, 제발 가만히 있어 주면 안되나? 가뜩이나 속 울렁거리고 머리 아파 미치겠는데.
불길한 징조와 달리 아무 일도 터지지 않아서 처음엔 안심했는데… 이젠 제발 무슨 일이 터져 줬으면 싶다.
뭐든 좋으니 누가 날 이 분위기에서 꺼내줘. 제발.
-콰과광!!
"데몬 님, 드벨라니아 님! 마물입니다!"
이런 거 말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터지더라도 내가 감당이 가능한 일로 좀 터져 주면 안 되나?'
황급히 창문을 열고 밖을 확인했다.
새까맣게 몰려오는 마물의 파도. 다행히도 2군단원들이 쳐 놓은 실에 1차로 발목이 잘려 우르르 무너지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인 것이 한눈에 보인다.
이리저리 밖의 상황을 살피던 나는 바닥을 기고 있는 마물들 중 유독 덩치 큰 놈을 발견하고 조금 전 굉음의 정체를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저런 덩치가 넘어지는데, 그 정도의 굉음이 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지.'
저기서 싸우면 난 분명 죽을 텐데. 빠져나갈 구멍은… 없어 보이지?
어떡해야 하나 싶어 마차 내부를 돌아본 나는 잠시 표정을 굳히고 말았다.
느긋이 창밖을 보는 드벨라니아와 챙겨 온 가방을 뒤적이는 벤, 둘의 태도가 지금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너무 태연했다.
마치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아하.'
상황 판단은 빨랐다. 나는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외곽으로 돌아서 간다는 게 이런 의미였나. 빌어먹을 마왕 같으니.
어쩐지 출발할 때부터 반응들이 이상하다 했다. 조금만 더 의심하고 생각을 했으면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을 텐데.
'아니, 사실 아예 예상조차 못 한 건 아니야.'
아니길 바라는 마음에 '설마' 하며 모른 척 넘겨 버렸을 뿐.
마물들이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 제국에 다녀오기 전에도 그 수가 너무 많은 탓에 도시 방어전까지 벌였는데, 시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늘면 늘었지 줄어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명색이 0군단장이라 방 안에만 처박혀 있어도 꼬박꼬박 들려오던 소식들 중 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도시 방어전이 있었던 이후 아예 그곳에 군단장을 배치했댔지.'
그리고 마물들의 움직임이 달라졌다고 했다.
여전히 도시의 성벽을 두드리는 마물들도 있지만, 본능적으로 어려움을 느끼고 좀 더 손쉬운 먹잇감을 구하기 위해 자리를 옮겨 다른 이종족들의 영역을 침범하고 있다고. 그 탓에 각 이종족 수장들의 항의가 있었다고 한다.
마물은 마왕의 힘에서 탄생하는 오류 덩어리.
그러니 그 책임은 당연하게도 마왕에게 있다.
청소를 해야 했겠지. 마물들이 다른 종족들의 땅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마족의 영역 가장자리를 돌면서.
다른 이종족들의 영역과 맞닿은 경계선. 그게 바로 '마계의 외곽'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지금 나는 '마계'의 가장자리를 돌면서 이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물 청소를 위해!
'마왕의 외곽으로 돌아서 가라는 말은 가는 김에 마물 청소를 하면서 가 달라는 말이었고.'
순진한 나는 이를 덥석 수락해 버린 것이지. 제기랄.
'난 못 해.'
저것 좀 봐. 저건 거의 마물의 파도 수준이잖아. 검은 물결이 마구잡이로 이쪽으로 몰려오는데, 나보고 저걸 상대하라고?
절대 못 해. 아니, 안 해.
생각할 것도 없이 결론이 내려졌다.
'그냥 튀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조건 두 번째 도시를 향해 직진하면 충분히 생존 가능성이 있다. 인간계의 말이라면 모를까, 이곳의 말들은 말이 아니라 괴물에 가까우니까.
문제는 어떻게 해야 이 마차 안의 위험 덩어리들을 납득시키며 튈 수 있느냐인데….
내 의견을 어떻게 포장해 말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창밖을 보며 손안에서 투명한 실을 가지고 놀던 드벨라니아가 씩 웃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럼 전 먼저 나가서 상대하고 있을 테니까 데몬 님은 천천히 나오세요."
"...네?"
뭐? 아니, 잠깐…!
뭐라 말할 틈도 없이 마차 문이 열렸다 닫혔다.
나는 문을 향해 어정쩡하게 손을 뻗은 채 굳어 버렸다.
삐걱거리는 고개를 돌리니 창밖으로 무언가 반짝일 때마다 조각난 마물들이 후두둑 떨어지는 것이 보인다.
...그래, 2군단장의 주 무기는 마물 가죽에서 뽑아낸 실이었지. 멋있네. 멋있긴 한데… 젠장. 이로써 죄다 무시하고 도시로 질주하려던 내 계획은 무산되었군.
아직까지도 뻗고 있던 손을 거두고 마차 안에 남은 이를 돌아봤다. 눈이 마주치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
"...."
이 어색한 분위기를 먼저 깬 쪽은 벤이었다.
그는 자연스레 시선을 내려 가방을 다시 뒤적이며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데몬 님의 마음은 이해합니다."
"...."
아닐걸.
일단 이 상황에서 뜬금없는 말을 꺼낸 것부터가 확실히 아니야.
"모처럼의 전투이니 독식하고 싶으셨겠지요. 하지만 마물의 수는 충분하니 굳이 2군단장을 말릴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거봐, 아니잖아. 애초에 기대도 안 했지만.
그럼 그렇지- 하는 시선으로 벤이 하는 행동을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는데, 그가 원하던 것을 찾은 듯 가방에서 무언가 쑤욱 꺼내 들었다.
물건의 정체를 확인한 내 눈이 일순간 잘게 흔들렸다.
"물론 그로 인해 데몬 님의 흥이 깨진 것은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흥을 돋울 수 있도록 이것을 준비했습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다름 아닌 술.
나는 멍한 얼굴로 술과 왕진 가방을 번갈아 보았다.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한 말을 꾹꾹 눌러 삼키며.
그게 왜… 거기서 나와?
"어차피 술은 이게 전부이기도 하니 얼마큼 드시든 뭐라 하지 않겠습니다. 마음껏 드시고 기분 풀어 주기만 하시면 됩니다."
뭐…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이 빌어먹을 전투는 피할 수는 없을 것 같고, 그렇다면 술이라도 마셔서 긴장을 푸는 게 좋을 것 같긴 한데….
복잡한 눈으로 내 손 안에서 채워지는 잔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죽더라도 맨정신으로 죽는 건 영 아니지? 아플 거 아니야.
나는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
2군단장 드벨라니아와 둘이 가겠다는 이유로 부관까지 두고 출발한 데몬 아루트를, 주치의 벤은 악착같이 따라왔다.
마왕의 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표면적인 이유로는 언제 악화될지 모르는 그의 건강을 위해, 그리고 비밀리에 받은 명령은….
"데몬이 전투를 망설이는 기색을 보일 수도 있을 거야."
"...데몬 님이 말씀이십니까?"
"그래. 물론 위험할 것 같다 싶으면 알아서 돌변해 쓸어 버리지만 평소의 걔는 온건해도 너무 온건하거든. 솔직히 온건하다기보다는 차라리 온순… 아니지, 온순하다 못해 나약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지."
"그건…."
사실이다. 술을 마시거나 목숨이 경각에 달하는 등,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은 한 그분은 언제나 전투를 피했다.
아마 그분의 실체를 모르는 마족이 그분을 보게 된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제 밥으로 볼 게 뻔했다.
벤이 뭐라 답하지도 못하고 그저 입술만 달싹이자, 상석에 앉아 있던 마왕이 소리 없이 웃으며 손을 까닥였다.
줄곧 서 있던 시종이 조용히 걸어와 들고 있던 쟁반을 벤의 앞에 내려놓는다.
자연스레 그것을 따라 시선을 내리자, 술병이 시야에 들어왔다.
"싸움을 좋아하는 것은 확실한데, 평소에는 참을 이유가 없음에도 필요 이상으로 인내하지. 그래 놓고는 어느 순간 작은 것에도 폭발해서 필요 이상의 피를 보고."
그러니 풀 수 있을 때 확실히 풀게 해 주는 게 좋지 않겠어?
모순적이던 그의 행동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다. 마왕은 침묵하는 벤을 향해 나긋이 말했다.
"지난번 도시 수성전 때처럼 여유가 있다면 모를까, 스스로 움직일 때까지 기다리기엔 현재로선 시간이 너무 아까워. 그렇다고 일부러 위험에 빠트리고 싶지도 않고."
"...."
"그러니 네게 명령하지."
은은한 달빛이 비쳐 드는 어두운 공간에서, 마왕은 턱을 괸 채 검지로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리며 싱긋 웃었다.
달빛 아래 유일하게 드러난 입술이 완벽한 대칭을 이루며 올라간다.
"데몬에게서 전투를 망설이는 듯한 기색이 느껴지면, 술을 먹이도록 해."
아, 벤이 열었던 입을 다물었다.
결국 그도 마왕이었다.
활용할 수 있는 것은 한도 내에서 할 수 있는 한까지 활용해 내는, 마계의 군주.
속을 알 수 없는 매끈한 미소 앞에서, 벤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병을 챙길 뿐이었다.
'사실 조금 걱정하기는 했지만….'
자칫했다가 0군단장이 적아 구분 없이 날뛰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그의 술주정이 극에 달하면 재앙이 따로 없을 정도이니.
그러나 마왕은 그의 걱정을 예상한 듯, 정확한 기준까지 일러 주었다.
먹이더라도 딱 알코올 함량이 25%인 술을 기준으로 5병 이전까지만. 그걸 넘어가면 술주정이 시작된다고.
그리고 다시 지금.
"술이라…."
딱. 딱. 딱. 딱.
흰 손가락이 일정한 간격으로 마차 의자를 두드린다. 묘한 미소가 입가에 머물고, 평소와 다른 붉은 안광이 번뜩인다.
그가 마시던 잔은 어느 순간부턴가 마차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었다.
시선을 내리깐 채 술병을 빙글빙글 돌리던 데온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운 상태로 천천히 눈동자를 올려 벤을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고, 그 순간.
딱.
손가락이 멈췄다.
"...."
"...."
공기조차 옥죄는 듯 집요한 정적.
숨소리조차 쉬이 낼 수 없는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미동도 없이 벤을 보던 데온이 씩 웃었다.
그와 동시에 억눌려 있던 광기가 폭발하듯, 피처럼 새빨간 눈동자에서 온갖 꺼림칙한 감정이 범람하기 시작했다.
그가 말했다.
"머리 좀 썼네?"
86. 휴가 아닌 휴가(2)
데온 하르트의 주량은 알코올 함량이 25%인 술을 기준으로 다섯 병이다. 정확하게는 다섯 병의 마지막 잔을 마시며 기억이 끊긴다.
술기운이 어느 순간 확 올라오는 타입이기에 그전까지는 조금의 취한 기색도 없음은 물론, 정신도 멀쩡하곤 했다.
그것은 처음 술을 마셨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그렇다면 취하지도 않았는데 왜 성격이 바뀌느냐─
손에 들린 술병을 입에 가져가며 데온이 피식 웃었다.
'열쇠로 잠근 문에 다시 열쇠를 집어넣는데, 그럼 열릴 수밖에 없지.'
술과 약은 일종의 '열쇠'다.
전쟁터에서 데온 하르트는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극단적으로 나뉜 두 가지의 성격을 부여했다. 그 과정의 매개체는 다름 아닌 술과 약이었고.
술과 약으로 세운 벽이 술과 약에 약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그 탓에 데온 하르트는 술을 마시면 그 양이 소량이라 할지라도 제가 나누어 둔 두 성격이 벽을 넘어 범람하는 것을 제어할 수 없었다.
결국 '양'이 문제가 아니라 '술'이 문제였던 것이다.
딱히 숨기려 한 적도 없고, 숨길 수 있는 종류의 것도 아니니 다른 이들이 눈치채고 이용하려 드는 것도 이해가 되지만….
'이렇게 노골적일 줄이야.'
보나 마나 마왕이겠지.
왜 이렇게까지 한 것인지 굳이 생각하지 않았다. 뻔하니까.
시간이 아까웠으리라. 황제는 생각보다 더 빨리, 과감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용사의 탄생 시기는 가까워졌다. 거기에 더해 마물들은 점점 더 빠르게 늘어나고만 있으니….
그렇다고 마물들을 무시했다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 버리면 정작 움직여야 할 때 발목이 붙잡히게 될 것이다.
당장 지금도 다른 이종족들에게서 마물 좀 어떻게 해 보라는 항의가 들어오고 있는데 어쩌겠는가.
데온을 보내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 복귀시켜 대기 전력의 구멍을 최소화하는 수밖에.
그러니까 데온 하르트는.
'이용당한 거지.'
마왕에게 이용당한 것이다. 그것도 아주 불쾌한 방식으로.
기분이 더럽지만 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능숙히 그에 대한 생각을 뒤로 미뤄 둔 데온이 짐짓 눈을 내리깔았다.
'드벨라니아가 저렇게 움직인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야.'
이대로 문을 열고 나가 저 마물들을 처리하는 것.
그것이 바로 마왕이 바라는 것이고, 판은 이미 완벽하게 만들어졌으니까.
하지만 그 전에.
와장창!!
빈 술병을 마차 바닥에 내던지고 단검을 빼 들었다. 산산이 부서져 형편없이 튀어 오르는 날카로운 유리 조각들을 밟고 튀어 나가 벤의 몸을 마차 벽에 밀어붙였다.
왼팔로 벤의 가슴을 짓누른 채 오른손의 단검으로 목을 겨눈 데온이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으르렁거렸다.
"그간의 공도 있고, 노력이 가상하니 이번만은 봐주지. 다음은 없어."
"...."
"언제 나설지는 내가 정해."
미친놈 특유의 기운에 젖은 새빨간 눈동자가 노골적인 불쾌함을 담고 번들거린다.
차라리 자신이 휘두르면 휘둘렀지, 누군가 저를 휘두르게 둘 생각은 없다.
자의가 아닌 타의로 이리 드러나는 기분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더러웠기에, 데온의 눈은 얼핏 살의까지 담고 있었다.
잘못 건드렸다간 제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낀 벤이 눈동자를 덜덜 떤다. 그렇지 않아도 조금 전, 제 목에 단검을 들이댈 때 반응조차 하지 못해 바짝 굳은 몸에 힘이 더 들어갔다.
데온은 맹렬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다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천천히 물러났다.
"네가 누구의 주치의인지 잘 생각해."
마왕이 양도한 주치의라 할지라도 결국 현재 벤은 데온의 주치의다. 그렇지 않아도 몸이 약한 담당 환자에게 술을 권하는 주치의가 어디 있겠는가.
그는 지금, 자신이 보살펴야 할 담당 환자에게 오히려 해를 끼친 것이다.
뒤늦게 그 사실을 떠올린 듯 벤의 몸이 뻣뻣하게 굳는다. 부끄러움과 수치심에 굳어 가는 그의 표정을 같잖다는 듯 내려다보던 데온이 코웃음을 치며 물러섰다.
"뭐… 애초에 기대도 안 했지만."
벤의 눈이 충격으로 커졌으나 데온은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마차 문을 열고 나갔다.
넓은 평야에 어마어마한 수의 마물들이 밀물처럼 밀려오는 것이 시야에 들어온다. 2군단의 활약으로 수많은 마물들이 고깃덩어리가 되고 있지만, 그보다 더한 수가 밀려오는 모습.
그를 발견한 드벨라니아가 허공을 수놓았던 실을 거두며 목소리를 높였다.
"데몬 님, 계산 실수예요! 마물들이 생각보다 더 많아요! 어떡하죠?"
붉은 눈동자가 아래로 내려가 후두둑 떨어지는 마물의 잔해를 보고는 다시 올라간다.
그대로 드벨라니아를 한 번.
"일단 물러나야겠죠? 두 번째 도시가 가까우니 그곳으로 가는 것은 어때요? 이대로면 도망치는 것도 힘들 것 같긴 하지만…."
"...."
마물들을 한 번.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그러니까… 지금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가며 이 마물들을 뚫고 두 번째 도시로 가자고? 녀석들이 뒤에 쫓아오든 말든, 남은 마물들이 이종족의 영역을 넘든 말든 그냥 두고?"
"아, 제 말은 그게 아니라…."
그녀의 말대로 도망치면 피해는 피해대로 입고, 임무는 수행하지 못했으며, 타 도시에 같이 죽자고 폭탄을 달고 오게 되는 셈이다. 그러다 그 도시마저 위험해지면 그야말로 최악이고.
새빨간 눈동자를 마주한 드벨라니아가 희게 질린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두, 두 번째 도시에 군단장이 있어서! 아, 아니. 죄송해요, 데몬 님.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급한 마음에 그만…."
"도시에도 군단장을 배치했다는 건 들었지."
하지만 한 군단장이 두 개의 도시를 맡은 탓에 군단을 나눠서 배치했다고 했다. 제아무리 군단장이 있다 한들 이 많은 수를 상대로 반토막 난 군단이 도움이 되어 봤자 얼마나 될까.
"왜 굳이 해결책을 그쪽에서 찾는 거지?"
"네?"
"벤, 통신석 있지?"
"네? 아, 아아, 네!"
마차에서 내려 돌아가는 상황을 살피던 벤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에드가 데몬 님 잘 모시라는 협박 아닌 협박을 하며 눈앞에서 짐을 싸 준 탓에 확실히 기억한다. 그러니까 여기, 이쯤에 통신석이… 아, 찾았다.
"여기 있습니다!"
"이걸로 마왕님께 영상 통신을 걸 수 있나?"
"네? 가능은 하지만… 이건 매개체고 또 따로 마법을 사용해야 해서…."
"그게 왜?"
"마왕님께서 마법 금지령을 내리셨습니다."
아, 하는 짧은 탄성도 잠시, 데온의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지금은 위급한 상황인데도?"
"...걸겠습니다."
"전 가서 마물들을 상대하고 있을게요. 상황이 좀 힘들어 보여서…."
눈치를 보던 드벨라니아가 다시 난장판에 뛰어들고, 벤이 통신석에 마법을 건다. 이윽고 허공에 마왕의 얼굴이 나타났다.
-벤? 무슨 일이지? 네가 마법을 함부로 쓸 녀석은… 데몬?
"문제가 생겼습니다."
-문제라니?
"벤, 마왕님께 저쪽을 좀 비춰 드려."
벤은 순순히 각도를 틀었다. 끝도 없는 마물의 파도를 본 마왕이 입을 다물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수가 더 많습니다."
-그러게… 군단장 둘에 군단 한 개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어떻게 할까요?"
-저걸 그냥 둘 수도 없으니… 지원을 보낼게. 15분만 버텨. 할 수 있지?
"해 보겠습니다. 위치는…."
-됐어, 내가 알아서 할게.
통신이 끊겼다. 데온은 고개를 돌려 마물들을 봤다.
다시 봐도 징그러울 정도로 많다. 죽이거나 물리치기는커녕, 살아남는 것조차 요원할 수준의 수.
여기서 15분을 버텨야 한다니.
모처럼의 먹이의 등장에 흥분한 듯 죽여도 죽여도 광야를 가득 메우며 달려오는 마물들의 모습은 절망을 느끼고 주저앉기에 충분했지만, 데온은 되레 단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웃었다.
'이런 상황은 오랜만인데.'
고작 이 정도에 절망을 느끼고 포기할 것이었으면 8년 전쟁 때 살아남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보다 더 절망적인 전황 속에서도 데온은 끝끝내 살아남았다.
상대가 마물이라는 것 외에는 그때와 별다를 것 없는 상황이다. 아니, 오히려 마물은 인간보다도 더 쉬운 상대이니.
데온은 이번에도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다.
저벅.
한 치의 움츠러듦도 없이 태연히 걸음을 내디뎠다.
엄호하겠다는 듯, 드벨라니아가 휘둘렀던 실을 거두며 소리 없이 옆에 내려선다. 그러나 데온은 곧장 날뛰지 않았다.
'앞뒤 안 가리고 저 사이에 뛰어들었다가 고립이라도 되면, 난 분명 죽어.'
미친 것과 제 역량을 파악하는 것은 별개다.
자신은 살기 위해 미쳤지, 죽기 위해 미친 것이 아니었다.
'생각해.'
지금도 전선은 느리지만 착실히 밀리고 있다.
내 특기는 죽이는 것이 아닌 공포감을 조성하는 것. 본능에 충실한 마물들이라면 공포가 허기를 압도하는 즉시 도망칠 것이다.
'마물들이 도망치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일까?'
당장은 살 수 있으니 좋겠지만 후일을 생각하면 절대 좋지 않다.
새빨간 눈동자가 빠르게 전황을 훑어내린다. 머리가 팽팽 돌아가며 순식간에 계산을 세웠다.
지원이 올 때까지 버티며 마물들을 이곳에 묶어 두어야 한다.
양손에 단검을 꺼내 쥔 데온이 침착을 가장한 목소리로 드벨라니아를 불렀다.
"덫을 놓을 거야. 네 군단에게 전해."
....
물고기 덫이라고 있다. 출입구가 깔때기 형태로 생겨서 들어오기는 수월한데 나가기는 힘든, 심지어 물살의 방향조차 들어오는 물고기를 돕고 나가려는 물고기는 억눌러 포획하는 말 그대로의 덫.
마물들은 물고기인 동시에 물살이다.
"드벨라니아."
"시작해!"
2군단이 일제히 실을 펼쳤다. 각 실들이 엮이고 엮이며 거대한 형체를 이룬다.
닿으면 베이는 실이다 보니 멍청한 마물들이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저 특정 위치에 가면 몸이 조각나 죽는다는 것만 인지한 듯 자연히 실의 유도를 따라 유일한 입구로 들어온다.
조금 있으면 놈들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겠지. 하지만 그때가 되면 늦었다. 유일한 출구는 계속해서 밀고 들어오는 마물들로 막혔으니까.
덫의 가장 안쪽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데온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간다. 몇 발자국 걸었을까, 드벨라니아를 돌아본 그가 발로 바닥에 선을 직 그었다.
"이쯤에 무작위로 실을 설치해. 목적은 네가 서 있는 곳까지 마물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 우리도 안전한 공간은 있어야지."
이건 배수진이다. 마물들도 이 덫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우리 역시 나가지 못한다.
마물들을 잡아두기 위한 이 장소가 도리어 마물들에게 먹히기 위한 장소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정도는 해 두어야지.
"실이 부족해서 한 마리도 못 들어오게 하지는 못할 것 같아요…."
"굳이 촘촘하게 설치할 필요는 없어. 간격은 딱 우리가 드나들 정도면 충분해."
"네? 하지마안…."
이 안과 밖을 오가며 마물을 처리하겠다는 데온의 의도를 읽은 드벨라니아가 난색을 표했다.
"숙련된 자가 아닌 이상 설치된 실을 발견하기 쉽지 않을 텐데요… 아, 물론 데몬 님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고, 난전에서는 그런 것을 일일이 신경 쓰기 번거로울 테니까…."
"그건 내가 알아서 해."
"어어…."
어떻게?
막무가내인 것 같은 그녀도 실은 분위기를 보고 발을 뻗을 줄 안다. 무심코 던질 뻔한 질문을 꾹 삼킨 드벨라니아가 데리고 온 2군단에 명령을 전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함부로 되묻는 것은 자칫 죽음과도 연결될 수 있다.
제 무례를 꼬집히기 전에 서둘러 움직이려던 드벨라니아가 예상치 못하게 돌아온 대답에 멈칫했다.
"난 운이 좋거든."
"네…?"
얼빠진 되물음이었다. 데온은 대답 대신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씩 웃었다.
더 이상의 이성은 사치라는 듯 침착함이라는 막이 벗겨진 새빨간 눈동자에는 감출 수 없는 흥분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튕기듯 마물들을 향해 뛰쳐나갔다. 그새 2군단이 설치한 실 따위는 자연스럽게 스쳐 지나가며, 가장 만만한 녀석을 짚어내고 달려든다.
들고 있는 단검을 냅다 놈의 안면에 꽂아 버리며 데온이 입꼬리를 길게 늘여 웃었다. 정상이라고 할 수 없는 웃음소리가 절로 새어 나왔다.
보통의 이들이라면 실을 찾기 위해 극도의 집중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데온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것도 운이라면 운이겠지.'
선천적으로 빛과 열에 약한 그의 눈은 외부에의 노출을 자제한 터라 빛보단 오히려 어둠에 익숙했다.
빛에 익숙하지 않다는 말이 무슨 뜻이겠는가.
빛에 예민하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이들이라면 모르고 지나쳤을 2군단의 실이 달빛을 미세하게 반사하는 순간을 그는 예민하게 잡아챌 수 있었다.
87. 휴가 아닌 휴가(3)
실의 위치를 훤히 꿰고 있는 만큼 그의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오히려 실을 피하는 것을 넘어 설치된 실을 이용하기도 했다.
유연하게 실을 넘나들며 마물들이 잘려 나가기를 유도하기도, 직접 난도질을 하기도 하며 체력을 조절한다. 그것이 조금 익숙해지자 때로는 근처 2군단원들이 실을 휘두르는 순간에 맞춰 마물을 밀어 넣기도 했다.
왕진 가방을 꼭 끌어안은 채 상황을 지켜보던 벤의 표정이 점차 묘하게 변했다.
'흐름이 바뀌었다.'
앞뒤 가릴 것 없이 무작정 돌진하던 마물들의 행동이 소극적으로 변했다. 데몬 님의 특성상 그런 놈들의 태도는 더욱 날뛸 수 있는 판을 만들어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하지만 부족해.'
그럼에도 부족하다. 이렇게 많이 죽였음에도 마물의 수는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지원은 언제 오는 거지? 15분이 이렇게 길었던가?
"쿨럭!"
"데몬 님!"
"오지 마!"
황급히 달려오려는 벤을 저지하며 마물의 미간에 꽂은 단검을 밟아 더 깊숙히 밀어 넣은 데온이 그 반동을 이용해 뒤로 몸을 날려 실 안쪽으로 들어왔다.
달려오던 속도를 이기지 못한 마물이 실에 잘려 나가 후두둑 떨어진다. 쏟아지는 잔해 가운데에서 데온이 조용히 손등으로 입가를 훔쳤다. 마물의 피인지 제 피인지 모를 것이 흥건히 묻어났다.
"괘, 괜찮으십…."
"별거 아니야."
나름대로 정면충돌은 피한다고 피했는데, 결국 충격이 체내에 쌓이고 쌓여 이렇게 터진 모양이다.
쿨럭, 한 번 더 속에 고인 피를 뱉어낸 데온이 문득 머릿속을 스친 생각에 우뚝 움직임을 멈췄다. 제길. 절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되는 거였는데.'
간신히 끌고 온 분위기가 바뀌었다. 가장 강해 보이던 존재가 피를 보인 것이다. 주춤했던 마물의 공세가 다시… 아니, 처음보다 더 강하게 변했음에 데온이 이를 악물었다.
'15분, 거의 다 된 것 같은데.'
대충 몸을 추스르고 새 단검을 뽑아 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근처에 있던 마물을 잡고 화풀이를 하듯 마구잡이로 단검을 찔러 넣는다.
무작위로 난도질을 하는 듯하면서도 숨은 일부러 붙여 뒀다. 더, 더 잔인하게 굴어야 저들도 주춤할 테니까. 그래야 흐름을 다시 끌고 올 수 있다.
"하지만… 데몬 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십니다…!"
"...."
"진찰을 받을 정도의 시간이라면 2군단장님과 2군단으로도 충분히 벌 수 있을 테니 한 번 진찰을 받고 움직이시는 게…."
"...."
"데몬 님!"
데온이 거침없이 돌아서서 단검을 날렸다. 콱! 벤의 뺨을 스치고 지나간 단검이 마차 벽에 박혔다.
뺨에서 피가 주룩 흘러내리고, 벤이 급히 입을 다물었다.
단순히 단검 때문이 아니라, 저를 노려보는 붉은 눈이 음습하고 질척한 살기를 담고 빛나고 있어서.
"입 다물어. 방해되잖아."
"...."
"분명 별거 아니라고 말했을 텐데."
거리가 있음에도 으르렁거리듯 낮게 깔린 목소리가 선명히 고막을 건드린다.
마물의 피가 얼굴을 잔뜩 적셔 시야가 가리는 모양인 듯 가늘게 내려뜬 눈은 그 상태에서도 넘치는 광기를 감추지 못하고 선명히 그를 향하고 있었다.
"어차피 이걸 예상하고 벌인 짓 아니었어?"
"...!"
왕진 가방을 안은 팔이 움찔 떨렸다. 벤의 두 눈이 지진이라도 난 듯 크게 흔들린다.
차마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는 그를 싸늘한 표정으로 보던 데온이 조용조용 입을 뗐다.
분노보다는 화낼 가치도 없다는 듯 한심함에 가까운 감정이 목소리에 고스란히 묻어나왔다.
"똑바로 처신해."
어설프게 굴지 말고.
"...."
"...."
시끄러운 배경을 두고 짧은 침묵이 오간 것도 잠시, 데온이 먼저 시선을 거뒀다.
거슬리는 목소리가 사라진 것에 티 없는 만족스러움을 표하며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으나, 그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데몬 님!!"
이제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죽여 버리겠다는 듯 단검을 던질 자세를 취하며 돌아본 데온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뒤!! 뒤에!
벤이 비명을 지르듯 그를 부르짖으며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뭐가 그리도 급한지, 왕진 가방을 방패 삼아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 실을 쳐내고 파악해 가며 달려 나간 그가 데온에게 미처 도달하기 전에.
서걱-
피가 튀었다.
막 마물 하나를 걸레짝으로 만든 데온이 천천히 뒤를 돌아본다. 그곳에는 또 다른 마물이 급소에 단검을 찔린 채 멈춰 있었다.
마물의 손이 제 머리통을 향해 뻗어 있었음을 파악한 데온이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더니 이내 환하게 웃으며 한 걸음 물러선다. 이윽고, 마물의 몸 여기저기에 자상이 생기며 피가 튀기 시작했다.
"...하."
삽시간에 너덜너덜해진 마물.
명백히 그의 손속을 닮았지만 절대 그가 한 것이 아니었다. 누가 온 건지 알아차린 데온이 뜻 모를 미소를 입가에 걸치며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실루아."
"안녕하십니까, 데몬 님! 오랜만이지 말입니다!"
***
충격적인 광경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난 멍하니 처참한 마물 사체와 눈앞의 여자를 번갈아 보았다.
시원스럽게 짧게 친 단발머리. 양손에 든 단검. 그렇지 않아도 돌아 버린 듯한 정신을 돋보이게 해 주는 세로로 쭉 찢어진 동공에 더해, 이렇게 잔혹한 손속까지!
절대 저 마족과는 연을 터서는 안된다는 머리의 외침이 슬프게도 난 그녀와 이미 아는 사이였다.
7군단장 실루아.
단검을 사용하며 9군단장과 더불어 인간계와 마계의 경계선을 담당하는 군단장인데… 지금 여기에 있어도 되는 건지.
"데몬 님께서 이런 곳에서 홀로 파티를 즐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왔지 말입니다!"
"...그런 말은 어디서 듣고."
"마왕님께서 알려 주셨지 말입니다!"
"...."
나는 조용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특정한 모양을 이루고 공간을 형성한 실. 그 안으로 끝없이 밀려오는 마물 떼.
덫이다. 그것도 우리를 미끼로 한 덫.
술 때문에 잠시 기억이 날아갔다지만 이게 파티가 아니라는 것은 확신할 수 있겠다.
'마왕님…!'
남은 살기 위해 아등바등하는데 파티라뇨….
아니, 아니지. 그냥 실루아가 멋대로 파티라 받아들인 쪽이 더 가능성 있겠다.
저 미친 마족이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 화는커녕 한숨마저 꾹꾹 누르고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여긴 어떻게 들어온 겁니까…."
"아, 별거 아닙니다. 이렇게─"